좋은 말씀/이재철목사

새벽묵상 (창세기 19장1절-11절)

새벽지기1 2017. 5. 6. 07:54


<묵상>


1. 아브라함을 떠난 두 천사가 이번에는 소돔에 있는 롯을 찾아갔습니다(1-3절). 두 천사를 맞는 롯의 모습은 18장이 전해주는 아브라함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두 천사를 보는 즉시 달려 나가 영접하였지만, 롯은 자기 자리에서 천사들을 맞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물을 가져올 테니 발을 씻으시라고 권했지만, 롯은 당신 스스로 발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쉬시기를 간청했지만, 롯은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차라리 길거리에서 밤을 새우는 편이 낫겠다는 천사의 말에 롯의 간청이 이어졌지만, 그것이 롯의 진심이 아니었음은 이내 밝혀졌습니다. 아브라함이 고운가루 세 스아의 떡에 가장 좋은 송아지 고기로 대접한데 반해, 롯이 만들어온 것이라곤 고작 누룩도 넣지 않은 무교병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는 이렇듯 천양지차였습니다. 그 이유가 대체 어디에 기인하고 있을까요? 당시 아브라함은 ‘헤브론 마므레’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어 ‘헤브론’은 ‘교제의 자리’, ‘마므레’는 ‘활발한’의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과 활발한 교제의 자리에 있던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극진하고도 공손하였습니다. 그 반면에 타락의 도시 소돔에 거하던 롯의 태도는 우리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형식적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어떤 자리를 지키느냐에 따라 오늘하루 우리의 삶 역시 이처럼 판이하게 구별될 것입니다.

2. 소돔에 있는 남자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롯의 집에 임한 천사들을 상관하기 위해 롯의 집을 에워쌌습니다. 상관하겠다는 것은 성적관계를 갖겠다는 것입니다(4-5절). 천사들을 남자로 생각한 그들이 공공연히 동성연애를 하겠다고 몰려든 것이었습니다. 소돔은 그 정도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롯이 용감하게 문을 열고 나가 소돔사람들을 만류하고 나섰습니다(6-7절). 언뜻 롯이 대단히 의로운 사람처럼 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어보면 아연실색하게 됩니다. 천사들에게 손을 대지 않는 대신 자신의 두 딸을 마음대로 농락하라는 것이었습니다(8절). 소돔사람들의 그릇된 음욕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 음욕의 대상을 흥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리를 고수하지 않을 경우, 무서운 것은, 이처럼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가 타락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죄를 근절하려기보다는 죄의 경중을 흥정하려 하는 것이지요. 무거워 보이는 죄를 가볍게 여겨지는 죄와 대체하는 것으로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자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다 같은 죄일 뿐입니다.

3. 소돔사람들이 롯의 흥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롯에게 위해를 가하려하자 천사들이 롯을 구해내는 대신, 그곳에 몰려든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해 버렸습니다(9-11절). 이렇듯 소돔의 진면목을 적나라하게 경험하였음에도 롯은 소돔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다가 결국 더 큰 화를 입고 맙니다. 롯이 이와 같은 멸망의 도시 소돔을 그의 삶의 자리로 택한 것은 그의 중심이 소돔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리인 헤브론에 거하였음은 그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었음의 반증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중심의 방향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헤브론을 지향하느냐, 아니면 소돔에 집착하느냐에 따라 오늘 하루를 의미 없이 허망하게 날려버릴 수도 있고, 영원으로 건져 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중심, 즉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잠4:23).

<오늘의 기도>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리를 고수하는 하루가 되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오늘하루 우리의 삶이 헤브론의 아브라함과 같게 하시되,

어떤 경우에도 소돔을 택한 어리석은 롯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