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사랑과 그 반응 (요한 1서 7-21)

새벽지기1 2017. 4. 13. 14:0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1서 4:7-8)

오늘 아침 우리가 중점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1서 4장 19절의 말씀이올시다. 그것은『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는 말씀입니다. 아마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기 위해서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문체로 순하게 바꾼다면 그 두 글귀를 바꿔서『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으로 우리가 사랑하느니라.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므로 우리도 사랑하는 생활을 하느니라』이렇게 번역하여야 되는 줄 압니다. 간단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도 사랑하는 생활을 하여야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알면 더 큰복이 없는 줄 압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참으로 깨달아서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아래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고 하면 모세와 선지자의 대 강령『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는 종교와 도덕의 완전한 생활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생활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데서 옵니다.


옛 날부터 오늘까지 세상에 많은 지혜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 혹은 철학자, 종교가들이 우주의 배후에는 어떤 지력이 있으며 어떤 법칙이 있다. 대 양심이 있으며 대 능력의 소유자가 그리고 대 의지가 있다는 등 여러 가지로 우주의 배후의 존재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합니다. 성신의 감화를 받은 사도 요한 은『우주의 배후에는 사랑이 있다. 우주의 깊은 속에는 사랑이 계시다. 이 사랑이 곧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은 곧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본체는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시다』이와 같이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과연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합니다. 그 사랑이 우주에 차고도 넘칩니다. 사람의 사랑은 제한이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합니다. 그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시편 기자가 노래한 것같이『그 자비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너희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자비하심이 영원함이로다』했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잠깐 있다가 식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의 본체이시므로 그 사랑은 영원하고 변치 아니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습니다. 사람의 사랑이나 인심은 조석 변으로, 즉 아침저녁으로 사랑도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발적인 사랑이올시다. 누구나 시키는 피동적 사랑이 아닙니다. 자의적 사랑이올시다. 스스로 뜻하는 사랑이올시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사람은 조건이 있게 사랑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나에게 좋게 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에게 싫게 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꽃은 고운 고로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아름다우니까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그런 까닭에 죄인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원수 된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죄를 미워하시지마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올시다. 이 사랑이 역사적으로 인간 사회의 인간 역사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피 창조물을 통해서도 좀 나타났습니다. 태양의 양기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수 있습니다. 뚜렷한 달빛 가운데서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사랑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산천 초목이나 오곡백과나 산 해 어물이나 자라는 풀, 웃는 꽃 가운데서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사랑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랑 이외에 하나님의 특별하긴 그 사랑 하나님의 본체이신 이 사랑,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시고 무조건적이고 자발적 자의적인 사랑이 인간 역사를 뚫고 나타났습니다. 사도 요한 이 요한1서 4장 9절에 선언하기를『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인간 역사에 특별히 나타나서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 역사를 뚫고 나타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 죽을 인생을 살리기 위해서 독생자를 주시는 그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올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어떻게 압니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 죄를 대속(代贖)하신 독생자를 보고서 압니다. 그리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우리가 아직 되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했습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에는『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날뿐더러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배소서 1장 4절에서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크신 사랑으로써 창세(創世)전에 우리고 하여금 흠 없는 아들딸이 되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기 전에 먼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먼저 우리를 찾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했습니다.


여러분 각각 여러분의 개인 생활을 살펴보세요. 여러분께서 여러분이 되신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서 금생과 내생에 영원한 복을 받고 이만한 자리에 있게 된 것은 누구의 은혜입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여러분을 사랑하신 탓입니다. 몇 해 전에 서울대학 학생회에서 집회를 가지며 특히 나의 신앙 체험을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제가 제 과거의 생활을 돌이켜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어느 때 그것을 깨닫지 아니 했으리오마는 과연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을 특별히 깨달았습니다. 우선 세상에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 부모로 하여금 내가 세상에 떨어지자마자 어머님의 부드러운 손이 나를 안아주었습니다. 내가 한두 살 때, 세상을 전혀 모를 때, 우리 부모의 손이 나를 길러주었습니다. 그 사상이 어디서 왔는지 모릅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점점 커서 걸어다니면서 교회에 나가게 될 때 하나님께서 먼저 미국에서 선교사를 보내서 마 목사라고 하는 이가 내가 세상에 나기 몇 해 전에 벌써 우리 동네에 와서 작은 교회를 세워 주셨습니다. 내가 좀더 장성해서 학교에 나가게 될 때 벌써 하나님께서 마 목사와 교회를 통해서 작은 교회학교를 세워주어서 내가 그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내가 세운 학교는 아닙니다. 그렇게 소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중학교를 가야 하는데 벌써 하나님께서 남가 이승훈 선생을 부르시고 그를 구원해 주시고 이 이 장로를 통해서 정주 오산에 좋은 애국적인 기독교학교를 이미 세워 놓았습니다. 내가 세우고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준비하셨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려고 생각하니까 벌써 하나님께서 멀리서 선교사 배의랑 박사와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이미 평양에 숭실대학(崇實大學)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신앙의 체험을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먼저 하나님께서 내게 역사 하셨으므로 내가 신앙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작은 반응밖에 못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도 가만히 돌이켜 보세요. 어떤 목사가 추운 겨울에 어떤 곳을 가는 도중에 눈 위에 어떤 주정뱅이가 취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자기 옆에 같이 가던 사람에게 하는 말이『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더라면 나도 오늘 저 사람처럼 될 뻔하였습니다』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다 깨달았습니까? 이 사랑을 깨달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역시 우리 마음을 통하여 반응이 될 것입니다.
광선은 반사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서 반사가 됩니다. 여러분 달로 말하면 아무 광선이 없습니다. 그저 딱딱한 바위 덩이로 된 돌뿐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밤에 아름다운 달빛을 비추는지 아십니까? 태양 광선이 달을 비추어서 그 태양 광선을 달이 우리에게 반사해 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마음이 어둡고 캄캄합니다. 냉정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근본 사랑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만 생각하고 이기주의요 자기 욕심으로 가득한 것이 인생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어둔 마음을 비추게 될 때 그 마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비추게 됩니다. 그 반사는 두 가지 방면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 것을 깨닫게 될 때 그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하나님께 대하여 반사가 됩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했으니 나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겠다는 이런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했으니 나도 내 주님을 사랑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북받쳐 올라오게 됩니다.


본래 사도 바울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하지 않았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따라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후에 사도 바울이 많이 변했습니다.『전에와 같이 지금도 내가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살던지 죽던지 몸으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기를 원한다』했습니다. 왜 그런 마음으로 변했습니까? 갈라디아 2장 20절을 읽어보세요.『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했습니다. 왜 그런 마음으로 변했습니까?『그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몸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 자기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는 마음이 온전히 변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반사로써 그리스도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떤 때에는 이런 의심이 들어오지 않습니까.『과연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내가 과연 구원을 얻었는가 내가 과연 이 시간에 죽는다고 해도 곧 천당으로 갈 것인가?』하는 의심이 들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 다른 생각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은 그 말씀을 들어보세요.『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내게 여러 가지 허물과 부족한 것 많고 무엇 하나 옮은 것이 없고 아무리 부족하지마는『요한 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가운데 있습니까? 그 사랑이 있으면 여러분은 아무리 부족해도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우리 사람의 마음가운데 일어나지 않습니다.


둘째로 이 하나님의 사랑이 이웃에게 반사가 됩니다. 여기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겠느냐?』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우리가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은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람으로 반사됩니다. 어떤 나라에 가서 있는 선교사일지라도 고국과 친척을 떠나서 일생을 외국에 가 있다는 것은 큰 희생입니다. 보통사람으로 못할 일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최찬영 선교사를 외국에 보냈지마는 일생을 친척과 고국을 떠나서 딴 나라에 가서 몸을 주님께 바쳐서 그 나라의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도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특별히 제가 아프리카에 가서 그 기후가 나쁘고 전부가 정글인 문자 그대로 원시적 사회 야만적 사회, 가운데 가서 일생을 몸 바치는 선교사의 모습을 가만히 옆에서 볼 때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특히 카메룬 어떤 지방에 가니까 미국에서 온 여자 의사인데 나이가 한 오십 가량 된 여자 혼자서 흑인 가운데 가서 병원을 설립해 놓고 흑인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접촉하면서 병을 치료해 주고 상처를 씻어 주고 여러 가지 병을 고쳐줍니다. 그 환자 가운데 추장이 한 사람 있는데 그 사람은 아내가 127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 여의사의 아버지가 그 곳에 왔다가 열병으로 죽었고 그의 어머니가 또 죽었습니다. 그리고 형제가 둘 있었는데 둘 다 죽고 그 여자 혼자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는『나 혼자라도 내 아버지의 일을 계속하겠다』고 결심하고 의학을 연구하고 나와서 일생을 바친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 흑인들을 보면 사랑할 마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혹 여자를 새까만 얼굴에 분까지 발랐습니다. 그러나 곱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일생을 거기 가서 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삽니다. 그 사랑이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랑이 왔습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으로 우리가 또한 흑인이라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반사올시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을 기념하는 날이올시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 냉정하고 이 각박하고 쓸쓸하기 사하라 사막 같은 세상, 냉정하기 북극 같은 이런 사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시다.
우리가 무엇으로써 크리스마스를 바로 지킬 수 있겠습니까? 나보다 좀 더 불쌍한 사람, 나보다 좀더 가난한 사람, 외로운 사람, 내 이웃에 있는 사람, 내 친척 누구든지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반사해 주는 기회가 되어야겠습니다. 다르게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요즈음 날씨가 몹시 추운데 왜 그렇게 추운지 그 이유를 설명하려는 사람이 혹 신문에 있습니다. 겨울은 으레 그렇게 추운 것입니다. 그런데 왜 겨울은 추운지 아십니까? 문제는 하나입니다. 저 아프리카는 겨울에도 덥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촛불을 켜놓으면 너무 더워서 초가 굽어진다고 합니다. 왜 겨울이 추운지 아십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온대 지방에는 겨울에 해가 멀어집니다. 해가 멀어지니까 추워집니다. 이유는 그것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왜 냉냉해지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에게서 우리 마음이 멀어지면 우리 마음이 냉 냉해집니다.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녹이려면 하나님과 가까이 해야 합니다.『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1956년 12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