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죽도록 충성하라 (요한 계시록2:8-11)

새벽지기1 2017. 4. 10. 06:41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서 서머나 교회와 그 사자에게 보내신 계시의 말씀이올시다. 서머나 교회는 여기 기록한 대로 핍박과 궁핍의 교회, 환난과 궁핍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 곳에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지마는 실상은 사탄의 회가 있어서 교회를 훼방했다고 그랬습니다. 그 때만 환난이 있을 것이 아니라 십일간 계속되겠다고 하였습니다.『그런고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했습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서 생명을 얻는 길은 죽도록 충성하는 데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모든 점은 우리 한국 교회를 연상케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세계 어느 교회보다 환난과 궁핍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줄 압니다. 38선이 가로 막혔고6·25 사변을 우리가 지냈고 지금도 38선이 그냥 있어서 북한은 문자 그대로 질식 상태에 놓였고 남한의 교회도 대부분 피난 생활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서머나에 사탄의 회가 있는 것과 같이 우리 한국에도 사탄의 회라고 볼 수밖에 없는 공산당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38선 가운데 사는 우리는 장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다소 지금은 휴전 아래 평화를 누린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국제 정세에 따라서 언제 무슨 일이 돌발할는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의 생활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는 생명이 어디 있느냐고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사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했습니다. 일찍이 주님께서 이 말씀을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누구든지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생명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했습니다. 충성이란 말은 우리 한국말로는 가운데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옆의 마음이 아니고 중심으로 무엇을 하는 것을 충성이라고 합니다. 중심은 곧 진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충성이란 말의 근본 뜻은 믿음이란 말과 같으며 미쁘다라는 말입니다. 미쁘다는 것도 역시 진실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이라고 기록했습니다.『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그가 이루시리라.』『하나님은 미쁘시니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아니하리라』고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미쁜 것과 충성은 하나님의 근본 성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믿는 자의 성품 가운데 기본적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5장 22절에 성신의 열매를 열거하는 가운데 이 충성도 한 요소로 들어간 것입니다.


사람은 재주와 능력이 각각 다릅니다. 그렇지마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 충성의 성품은 다 있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재주와 능력은 어떻든지 받은 재주 그대로, 배운 학식 그대로, 얻은 능력 그대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그 자리에서 충성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충성된 사람을 등용하셨습니다.
요셉은 충성된 사람이라고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모세도, 갈랩도, 다니엘도 충성된 사람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충성은 우리 믿는 사람의 성품 가운데 도덕적인 기본 요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간사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요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충성되어야 합니다. 충성에 대해서 전에도 한번 말했지만 충성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세 가지 시금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양(量)의 시금석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적은 일에 충성하는 이가 큰 일에도 충성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양을 칠 때 충성된 목자였습니다. 그 후에 예루살렘 와이 되었을 때 그 백성을 충성되게 다스렸던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사환으로 있을 때에 충성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가 애굽에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에도 충성된 대신이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의 금을 받은 사람들이 장사를 해서 주인이 다시 돌아왔을 때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두 달란트 더 가지고 왔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받을 때 다섯 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두 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꼭 같이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더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고 칭찬했습니다. 만일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충성해서 한 달란트 남겨 왔던들 주인에게 꼭 같은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충성된 사람이 되려면 먼저 작은 일에 충성하여야 되겠습니다.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데도 먼저 작은 일에 충성하여야 되겠습니다. 저녁에 잘 때 아침에 깰 때 기도하는 것은 작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꼭 지키는 것이 충성된 사람이올시다. 주일날 예배당에 나오고 삼일 기도회에 나올 때에 시간을 기키는 것 같은 것은 작을 일이올시다. 그러나 이런 작은 일에 충성된 사람이 큰 일에 충성된 사람입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시험을 칠 때 옆에 있는 사람의 것을 보는 것, 작은 일이나 이런 일에도 진실 된 사람이 이 다음에 큰 일을 맡아도 진실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한 구역을 맡는다든지 혹은 반사일 혹은 성가대원이 되는 것은 작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맡아 가지고 충성되게 감당하는 사람이 큰 일을 맡아도 충성됩니다. 작은 제서부터 시작합시다.


둘째는 시간이 시금석입니다. 얼마나 오래 충성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속담에 작심삼일이란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엇이나 맡아서 충성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 이 얼마나 오래 가느냐가 문제입니다. 제 생각에 가룟 유다 같은 사람도 처음에 예수를 따를 때 한 이년쯤은 열심으로 충성스럽게 일을 했기에 회계의 책임을 맡은 줄 압니다. 그러나 삼 년 때 되는 해에 예수를 배반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노년에 쓴 편지 가운데 여러 가지 우리에게 인상 깊은 말이 많지마는 디모데에게「너는 속히 내게 오라」고 하면서 데마는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기록했습니다. 데마 같은 사람은 처음에는 열심히 도와주고 따라다닌 줄 압니다. 그래서 충성된 제자인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마는 얼마 후에 노 선생을 버리고 다른 데로 다라 났습니다.


충성에는 시간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요컨대 얼마나 오래 충성하느냐 그것입니다. 제가 들으니 스코틀랜드에 에딘바라라고 하는 어떤 교회 묘지에는 개의 무덤이 있고 그 개의 무덤 앞에는 충견 비, 즉 충성된 개의 비가 섰다고 합니다. 거기에 어떤 사실이 기록되었나 하면 어떤 사람이 좋은 개를 길렀는데 그 주인이 죽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상여에다 그 시체를 메어다가 묘지에 장사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돌아왔지만 이 개는 그 주인의 무덤에서 절대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끌고 오려고 해도 이 개는 그 주인의 무덤에서 절대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까 하는 수 없이 그 다음에는 먹을 것을 날라다 주었다고 합니다. 이 개는 그 때부터 십 사 년 동안을 즉 죽을 때까지 주인의 무덤을 지키다가 죽었습니다. 이런 개는 우리 사람보다 낫습니다.


충성은 시간의 요소가 있어야 됩니다. 얼마동안 지나 보아야 충성된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일을 보는 것도 몇 달 몇 해 동안은 열심히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20년, 30년, 40년 꾸준히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는데는 시간의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2년 전쯤 제가 어떤 잡지를 보니까 어떤 고등학교의 건물을 짓는데 그 건물의 이름을 그 학교이사장이나 교장의 이름으로 짓지 않고 그 학교 사찰의 이름을 붙여서 짓는다고 합니다. 그 내용을 읽어보니까 그 사찰은 30년간 그 학교에서 하루같이 충성되게 일을 해서 그 사람의 이름으로 집을 짓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충성하려고 하면 우리가 처음에 먹은 그 마음을 꾸준히 끝까지 지켜 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 이창훈이라는 학생이 마라톤 경주에서 제4위를 얻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다 기뻐하신 줄 압니다. 지난번에 1등을 한 인간 기관차라는 이름까지 들은 짜도백을 이기고 넷째가 되었습니다. 그보다도 더 통쾌한 것은 이창훈군이 마지막100미터 전에서 자기에 앞섰던 일본 선수 가와시마 선수를 이기고 4위가 되었다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전쟁에는 최후의 오 분간이 필요합니다. 설사 아무 실수 없이 잘해 올지라도 마지막에 가서 실패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참된 충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충성은 환경의 시금석을 지나서 이겨야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녹음방초(綠陰芳草) 승화 시에는 우리가 송죽의 절개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찬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게 될 때 송죽의 참 절개를 압니다. 옛 글에도 나라가 어지러워 질 때 양상(良相)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집안이 가난할 때에 어진 아내를 안다고 하였습니다. 충성이 언제 나타나느냐 하면 어지러운 환난이 있을 때 핍박이 올 때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어떤 환경을 당하든지 꾸준히 자기의 책임을 지켜 나가는 것이 충성인 것입니다.
영국 런던 워커 미술관에 미술가 콘트러라는 사람의 충성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옛날 폼페이라는 로마의 도시가 베스비어스 화산이 폭발되어서 화산재로써 전부 묻혀 전멸을 당하는 그런 비참한 사실이 있는데, 그 때의 광경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올시다. 화산재와 불이 그냥 눈과 같이 서리 와 같이 폼페이 성안에 내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얻으려고 성문으로 그냥 조수와 같이 밀려 나갑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문을 지키는 수문(守門)의 책임을 맡은 군인이 한 사람 서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로마 사람이올시다. 그 성문을 지키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내려오는 재를 피해 성문을 빠져 자꾸만 나가지마는 이 군인만은 자기의 창을 잡고 아무리 눈과 같이 재가 내리고 불이 내려도 꼼짝하지 않고 그냥 서서 죽음을 기다립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이 서마나 교회에 이 묵시를 보낼 때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마는 그 교회 목사는 폴리캅이라는 목사인 것 같습니다. 폴리캅이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교회를 봉사하면서 86세까지 살았는데 그 때 로마 정부로부터 기독교를 탄압하라는 명령이 내려 탄압을 받을 때 86세의 노인을 관리가 끌어다 놓고서 이제라도 네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살려주겠지마는 그냥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하면 죽일 수밖에 없다고 위협했습니다. 그 때에 조용히 폴리캅 노 목사가 말하기를『86이란 긴 세월을 내가 우리 주님을 섬겼는데 주님께서는 한번도 나에게 잘못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내 왕을 훼방할 수가 있겠는가?』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순교해 나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충성은 작을 일로 시작됩니다. 충성은 끝까지 자기의 의무를 하는 것입니다. 충성은 부득이한 경우에는 자기의 생명까지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민족은 충성이 결코 결여된 민족은 아닙니다.
이것은 한국의 역사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삼국사기를 읽어 볼 때는 자연히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백제의 계백 장군을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고려 역사를 읽을 때는 포은 정몽주의 절개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이조에 들어와 불지라도 단종 시절의 성삼문 이하 사육신의 그 굳은 절개, 임진란을 통해서 이순신 장군의 충의 혹은 한말에 와서 민충정, 혹은 이준 혹은 안중근 선생 같은 충성의 역사가 우리 한말의 역사를 빛나게 단장해 줍니다. 우리 한국교회 역사도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교회 역사가 비록 역사는 오래지 않지만 일본제정 시대에 핍박을 비롯해서 38선 6·25로 말미암아서 그야말로 유명, 무명의 말할 수 없이 수많은 순교자들이 자기의 생명을 기쁘게 바쳐서 우리 한국교회 역사를 세계적으로 찬란하게 빛내는 것을 봅니다.


오늘날 우리 남은 민족은 이 위대한 민족과 위대한 한국교회의 충성을 기대하여야 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창립 11주년을 당했습니다. 의미 있는 이 날을 당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영락교회를 향해서 부르짖는 말이 무엇입니까?『너희는 충성하라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노라.』한국교회는 충성을 요구합니다. 충성된 목사가 필요합니다. 충성된 장로, 충성된 집사, 충성된 권찰, 반사, 성가대원 하나 하나가 교우개인 전체가 충성되기를 요구합니다.
교회도 충성해야 되겠고 개인 개인으로도 충성해야 되겠습니다. 교회뿐 아닙니다. 우리 나라가 충성된 인물을 요구합니다. 충성된 군인, 충성된 정치가, 공무원, 충성된 국회의원, 충성된 교육가, 실업가, 충성된 국민을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우리의 재주는 다 다릅니다. 우리의 능력도 학식도 다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자녀 된 사람은 이 충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충성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십니다.
(1956년 12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