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
사도 바울은『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이 제 1세기에 수리아 안디옥을 비롯해서 구브로와 소아시아와 마게도니야와 아갸야와 그 밖에 여러 지방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그 생활은 그 당시에 사는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혹 미치지나 아니했나, 지금 말로 정신이 좀 돌지나 않았나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거기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고 그는 대답한 것입니다. 그들의 생활, 매일 매일 계속하며 간 곳마다 핍박을 받으며, 유대 사람에게도 핍박받고, 이방 사람들에게도 핍박받고 어떤 때는 매를 맞고 기절하는 상태에 이르렀으나 정신 차리면 다시 일어나서 또 다른 도회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어떤 때는 잡혀서 태장(笞杖)으로 맞고 어떤 때는 감옥에 수감이 되어 말할 수 없는 비난과 악평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파한 사도 바울과 디모데와 실라, 즉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생활, 어떤 역경이 있을지라도 어떤 환난의 있을지라도 굽히지 아니하고 간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고 모든 것을 희생하는 그들의 생활은 그 당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동기는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의 생활 동기나 목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흔히 돈이 그 사람의 전 생활과 행동을 움직이는 근본 봉기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정욕이 그 사람의 행동을 움직이는 동기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명예, 지식, 좀더 고귀한 사람은 그 밖에 어떤 목적을 위해서 생활해 갑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이나 당시의 시도들의 일행과 그 밖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보통사람으로서는 이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그 많은 고난과 환난을 이겨 가면서 왜 그 같은 생활을 계속하며,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밤에도 자지 않고 낮에도 항상 고생을 당하면서 밤낮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고 일생을 봉사와 헌신과 희생의 생활을 계속하게 하는가? 알 수 없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4절에 사도 바울이 그 비결을 알려 줍니다.『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대들 보기에는 어떤 때는 미친 것 같고 정신없는 것 같고 당신 네 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지마는 우리가 이와 같은 생활을 매일 매일 계속하게 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강권이란 말은 아마도 좀더 원어에 비슷하게 번역하면 제어(制御)라고도 할 수 있고 혹은 구사(驅使)라고 하는 말, 마부가 말을 몰 듯이 구사하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매일매일 이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제어하고 우리를 몰고 우리를 강권(强勸)해서 이와 같은 생활을 하지 않을래 야 않을 수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활의 비결, 우리 생활의 근본 동기는 그리스도의 사랑밖에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우리에게 대답하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간 생활의 경험에서도 사랑에는 이와 같은 제어하고 구사하고 강권하는 힘이 있는 것을 체험합니다. 가령 여기 어떤 젊은 사람이 있어 유혹에 빠져들고, 좋지 못한 친구를 사귀어서 잘못된 길로 갈 위험에 있다가도 그 청년이 좋은 어머니가 있어서 극진한 사랑을 깨달으면 또 그 청년이 좋은 아버지가 있어서 그 아버지가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기억하게 되면 그 청년이 잘못된 길로 갈까 하다가도 그 길에서 돌이킵니다. 만일 우리 어머니께서 내가 이런 길로 가는 것을 아시게 되면 그 마음이 얼마나 상할까? 내 아버지가 나를 극진히 사랑해서 이때까지 길러 주셨는데 오직 그의 유일한 소망이 되는 내가 잘못된 길로 간다고 한다면 내 아버지의 마음 어떠하실까?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은 그 청년을 억제해서 죄악의 길에서 돌아서 바른 길로 가게 합니다. 많은 청년들이 부모의 사람에 의지해서 바른 길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히 불량소년, 소녀 가운데는 부모의 사랑을 못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모를 일찍이 여이고 그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는 경우, 부모가 있다고 하여도 어떤 형편 아래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 있는 그런 소년과 소녀는 유혹을 당하여 잘못된 길로 갈 때도 그들을 사상으로 이끌어 줄만한 뜨거운 사랑이 배후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혹과 시험에 빠지는 불량 소년과 소녀는 흔히 사랑 못 받는 불쌍한 소년 소녀들인 것을 우리가 기억하게 됩니다.
이것은 부모의 사랑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부의 사랑도 그런 것입니다. 여기 어떤 남자가 있어서 혹 세상에 나가서 살 때에 혹은 잘못된 길로 갈까 하다가도 가의 가정에서 그를 참으로 사랑하고 언제든지 그를 참으로 생각하는 자기 아내의 참된 사랑을 기억하는 남편이라 할 것이면 그런 자리에도 아내의 사랑의 제어력(制御力)에 의해서 그 자리를 떠나게 됩니다. 아내도 역시 그러합니다. 사랑에는 사람을 이끌고 억제해서 잘못된 길로 나가려고 하면 막고 옳은 길로 내 모는 힘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소개하는 말은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어서 그 사랑이 우리를 구사하고 우리를 제어해서 우리가 이와 같은 생활을 하지 않을래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생활의 비결이라고 여기 말씀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길을 가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길을 가다가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서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메시야이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이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 보좌를 내 놓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의 형상을 입으시고, 이 죄악 세상에서 우리와 한가지로 살면서 모든 사람을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밤과 낮으로 교훈을 주시고 병난 자를 고치시고 사귀(邪鬼)들린 자에게서 사귀를 내어쫓아 주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슬픈자를 위로해 주시고 3년 동안 오직 우리 사람들과 같이 동고동락하시는 이런 생활하시다가 마지막에 만민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자기가 십자가의 길까지 가셔서 친히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나아가시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뜨거운 피를 점점(點點)히 그 몸에서 흘리시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종일토록 인류의 모든 죄악의 짐을 자기 혼자 기시고 고통을 받으시고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하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가 사람을 깨닫게 된 다음부터는 언제든지 사도 바울의 마음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알기에는 사도 바울도 역시 인간이올시다. 우리와 같이 연약해질 때도 있을 줄 압니다. 그렇지마는 자기가 연약해질 때에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형상을 바라볼 때, 만민의 죄를 대속해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 흘리시는 그 얼굴을 바라 볼 때에는 자기의 고생아 아무리 많다고 하지마는 그 공생이 아닌 것을 깨닫고 새로운 용기를 얻었을 것으로 압니다.
사도 바울도 사람인지라 어떤 때에는 심히 피곤하여지고 어떤 때는 낙심가운데 들어갈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그 때에도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자기를 구원해 줬고 자기를 도와주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모습을 생각할 때에는 사도 바울은 그냥 낙심한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을 줄 압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해서 자기를 위해서 자기 몸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힘을 받아서 자기가 그와 같은 생활을 하지 않을래 야 않을 수 없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체험을 단순히 사도 바울만 한 것은 아닌 줄 압니다. 모든 과거 성도들의 생활이 그러하고 모든 순교자들의 생활이 그러하고 사실 모든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체험이 그러한 줄 압니다. 아마 독일의 유명한 화가 수턴벅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들었을 줄 믿습니다. 그 대 보통 유명한 화가면 성화를 한 장 그려야 화가로서의 명망(名望)을 얻는데 스턴벅도 그런 생각 가운데서 한 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습을 그릴 결심을 했습니다. 그 결심을 하고 자기가 아는 대로 자기가 듣는 대로 또 성경에 있는 대로 모든 배경을 연구하고 그 때 있던 사람들을 성경에서 자세히 읽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절반쯤 그린 후에 한 번은 거리에 나가 다니다가 어떤 얌전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 여자를 보는 순간 그 여자를 그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여자를 따라가서 내가 당신을 꼭 그리고 싶은데 당신이 내 모델이 되어 줄 수 있겠느냐? 고 했습니다. 그는 쾌히 승낙해서 그를 자기 방에 데리고 와서 그 여자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한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리다가 그리지 못하고 그대로 있고 한편에서는 그 여자의 얼굴을 그리는 중입니다. 이 여자는 전혀 그리스도의 종교에 대해서는 모르는 집시 여자인데 가만히 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림을 보더니 이 여자가『저 사람은 저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보니까 필경 죄를 많이 지은 모양이군요』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 사람이 깜짝 놀라서『그런 것이 아니고 이분은 죄가 없는 사람이올시다. 사실 이분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못 박힌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여자가 듣더니『정말 그렇다면 그분이 당신의 죄를 위해서도 죽으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지금까지는 만민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었지만 사실 예수 님께서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 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에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 질문이 자꾸 그의 마음 가운데 들어왔습니다.『그가 과연 내 죄는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나?』고 생각하면서 성경을 자꾸 읽고 예배당에 나가 설교도 들었습니다.『과연 그가 내 죄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나』를 생각하는 가운데 성신의 크신 은혜를 받아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만민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힐뿐더러 자기의 죄를 위해서, 자기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깨닫고 그 다음부터는 그 여자를 그리던 것을 가만 두고 채 마치지 못한 그림 앞에서 그 그림을 그릴 때마다 먼저 그림 앞에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어떻든지 내 죄를 대속한 우리 주님의 얼굴을 바로 그리게 하여 주소서』하고 간구하며 눈물로써 그 그림을 마쳤습니다.
그 이후 그 그림이 어떤 박물관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그림 저런 그림을 구경하려 옵니다. 그 때 독일의 젊은 백작 중 한 사람이 이런 그림 저런 그림을 보다가 어떤 구석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그림을 보았습니다. 전에는 무심히 성화를 많이 보았지만 그 날은 이상하게 무심하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말하자면 그 젊은 사람의 마음을 붙잡아서 물려 갈래야 물러 갈 수가 없어서 오래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나는 너를 위하여 이 일을 하였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하는 글자를 썼는데 그 글자가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에게 말하는 것과 같이 생각되어 그 자리에 앉아서『오 주님이시여!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서 고생을 당하시고 죽으셨는데 나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겠습니까?』하고 온전히 그 몸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이 분이 우리가 잘 기억하는 모라비야 교회의 진젠돌프라는 사람이올시다. 18세기에 많은 피난민을 모아 가지고 그 사람들과 같이 기도하며 그 사람들과 같이 교회를 조직하여 몇 사람 안되지마는 온 천하에 선교 운동과 경건 운동을 일으킴 유명한 백작 진젠돌프르는 사람이올시다.
진젠돌프만이 아니올시다. 어떤 순교자의 생활이나 순교자까지의 영광을 받지 못했지마는 참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가만히 더듬어 보세요. 그 가슴속에 그 사람의 생활의 깊은 동기가 어디서 우려 나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올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 몸을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모든 사람을 권면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죄를 회개하라」고 권면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은 이 세상에서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달리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그냥 두고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입으로만 십자가를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먼저 우리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라고 권면 하십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 앞에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가 형제끼리 사랑할 줄 모르고 용서할 줄 모르고 담을 쌓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른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모욕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로「서로 사랑하라」고 권면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모든 것을 바치라」고 권면 하십니다.『내가 너를 위해서 내 생명을 주었으니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겠느냐? 이것이 네 금전이냐? 지식이냐? 재주냐? 시간이냐? 생명이냐?』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의 생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십니다.』라고 사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해서 우리도 이 십자가의 사랑의 권면을 듣고 우리가 온전히 죄를 떠나고 피차에 온전히 사랑하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님을 위하여 바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1956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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