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바울의 의분 (사도행전17:16=37)

새벽지기1 2017. 4. 7. 12:43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행17:16)

여기 특별히「마음에 분하여」란 구절이 있습니다. 그 뜻은 보통 분한 것이 아니고 격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속에 격분했다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보통으로 분을 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혹 분을 내는 기회가 있을지라도 오래 품지 말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1장 19절과 20절을 읽어보면 이렇게 권면(勸勉)하였습니다.『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또 에배소 4장 26절에는 사도 바울 자신이 이런 말로 권면 했습니다.『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지도록 분을 품지 말며』그렇지마는 여기 보면 사도 바울은 「마음에 분하여」라 했습니다. 바울이 분을 내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장을 읽으면 이런 장면의 기사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안식일 아침에 어떤 회당에 예배하려고 들어갔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손 마른 사람이 와서 참석했습니다. 그 회당에 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날이 안식일인데 예수께서 안식일인데도 불구하고 저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시나 안 고쳐 주시나 보자. 만일 고쳐 주시면 안식일을 범한다고 예수를 책잡으려고 주목하여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장면을 기록하여 내려가다가 마가복음 3장 5절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저희 마음의 완악(頑惡) 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려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 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했습니다.


여기 보면 예수께서 노하여 그 때에 모였던 무리들을 둘러보셨다고 기록했습니다. 분 가운데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종류는 사사로운 분이올시다. 사사로운 일로 분을 내는 일입니다. 사사로운 이해 문제가 나와 대립되는 개인 문제든지 혹은 어떤 감정 문제를 가지고 싸우고 노하는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분노에 대해서는 성경은 말할 것 없이 이런 분을 내지 말며 이런 분을 내어도 더디 하며, 혹은 내었다 할지라도 오래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희에게 누가 잘못했을지라도 분을 곧 풀고 용서해 주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한 걸은 더 나가서 너희를 괴롭게 하는 원수일지라도 사랑하라고 이렇게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분노 가운데는 둘째 종류의 분노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적인 분, 공공연한 분노입니다. 혹은 보통 말로 의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회에서 불의와 죄악을 볼 때 의로운 마음이 있는 사람 가운데는 거기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사로운 분노, 개인 감정이 아닙니다. 의를 위해서 분을 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죄악에 대한 증오로 일어나는 감정인데 이런 감정은 악을 제거하기 위한 봉사와 희생의 활동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예수 님께서 노하심으로 무리를 둘러 보셨다』고 하는데 그 분노는 손 마른 사람의 불쌍한 것을 긍휼히 보셔서 그 가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발하신 분은 의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도 분노가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신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종종 하나님의 진노란 말리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8절에는『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써 진리를 막는 사람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모든 위대한 생활과 사업의 배후에는 이런 의분이 있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여기 사도 바울의 분을 다시 생각해 보세요. 사도 바울이 전도를 할 때 아덴으로 갔습니다. 아덴으로 말하면 고대 문화의 중심지요 과학과 철학의 본원 지인데 실지로 바울이 아덴에 가서 다녀 보니 보이는 것은 조처에 우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영적 견지에서 볼 때 아덴 사람들이 이렇게 우둔한 것을 통분(痛憤)히 여겼습니다. 이와 같이 철학을 배우고 과학을 안다는 사람들이 아직도 참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우상 숭배하고 미신에 젖은 것을 볼 때 사도 바울의 마음은 격분을 이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여기에 기록한 대로 열심히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파해서 시장에서 거리에서, 유대 사람에게든지 헬라 사람에게든지 도처에 그의 격분은 정열적 복음 전도로 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전도 생활의 이면에는 이와 같은 의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 위대한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 가운데 특히 엘리야 같은 선지자를 우리가 기억합니다. 엘리야는 북편 나라인 이스라엘에 산 사람이올시다. 그 때 이스라엘 왕은 아합 왕으로서 유능한 왕이지만 악한 왕입니다.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은 아름다운 여자이지만 간악한 여자입니다. 우상 숭배에 열중한 여자입니다. 이세벨을 통해서 온 이스라엘은 바알 을 섬기는 우상의 나라로 화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선지자는 감옥에 가두고 혹은 내어쫓고 혹은 죽이고 거의 다 전멸을 당하고 오직 바알 을 섬기는 선지자들만이 이세벨의 총애를 받으며 많은 특권을 가지고 세력을 잡고 있던 그 때올시다.


이 때에 엘리야만 거의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와 같은 형편을 볼 때에 마음가운데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자기 나라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담대히 이스라엘 나라에 3년 6개월간 비가 오지 않겠다고 예언한 것입니다. 과연 그대로 되었습니다. 매우 가물어서 곤란이 절정에 달했을 때 엘리야는 담대히 아합에게 나타났습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보자마자『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여기 있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가 대답하는 말이『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고 아합과 네 집이 아니냐? 제 집이 우상을 숭배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는 까닭으로 이와 같은 형벌이 이 땅에 오는 것이 아니냐』고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이제 이 시간에 갈멜산상에 바알을 숭배하는 선지자들을 다 모아 달라 여호와를 숭배하는 선지자는 나 하나밖에 없다 그렇지마는 과연 누가 참 신인지 가멜산상에서 작정하자』라고 말하고 담대하게 싸운 기록을 우리는 열왕기를 통해서 봅니다. 우리가 엘리야를 불의 선지자라고 하는데 물론 갈멜산에서 불이 내리게 했다고 불의 선지자라고 하지만 또 다른 편으로는 의분에 불타는 선지자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이와 같이 의분에 이기지 못하여 주의 일을 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수도원 제도의 원조가 된다는 성 안토니의 전기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돈 많은 부자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또 지위도 상당한 가정에 태어났는데 소년 때에 한 번은 성경을 펴서 읽어 내러가다가 마태복음 19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 님께서『네가 십계명을 알지 않느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이런 모든 계명을 말하시면서『네가 이 모든 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 것이 아니냐』말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그는『그 계명은 내가 어릴 때부터 다 지켰습니다.』이에 대해 예수 님께서 하시는 말씀이『그러면 좋다. 내가 이제 한가지 할 것이 있는데 가서 네 있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라. 그리고 나를 따라 오라』고 예수께서 사랑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이 청년이 예수 님의 이 말씀을 듣고 돈이 많은 까닭에 성경에 기록한 대로「근심하고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안토니는 이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하시는 말씀이 곧 자기에게 하는 말씀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읽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 부자처럼 돈이 많은 까닭에 그대로 하지 못하고 나도 근심하여 물러가야 되겠느냐?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그의 마음속에 격분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그 부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을 하지 못하였지마는 오늘 나는 이대로 순종하겠다. 그래서 성경을 덮어놓고 자기 집에 갔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자기 누이동생에게 먹을 것을 좀 주고 자기는 아무 것도 없이 혈혈단신이 되어서 온전히 주님 앞에 몸바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안토니의 그 생활도 말하자면 의로운 분노 가운데서 그런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지난 10월 31일 삼일 기도회 저녁에 제가 말하기를 10월 31일은 우리 종교개혁의 기념일인 것을 말했습니다. 마틴 루터의 생활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이가 많이 공부도 하고 그 다음에 수도원에 들어갔고 신부로 안수를 받은 후에 학교에서 일년 가르치면서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때 천주교에서 하는 일이 성경의 교훈과 성경의 모든 원리와 틀리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루터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 천주교회에서 하는 일이 성경의 교훈과 틀리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틀린 것을 깨달은 것만이 루터로 하여금 종교개혁자가 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언제부터 종교개혁의 봉화를 들게 되었나 하면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그 때 교황이 특히 돈을 쓸 일이 있어 그 때 전 기독교 세계에 속죄표를 팔면서 속죄표를 사면 누구든지 죄를 용서함 받는다고 하며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은 비싼 속죄표를 사야되고 적은 죄를 지은 사람은 싼 속죄 표를 사도 좋다고 속죄 표를 파는 데 산 사람의 죄만 용서받기 위해 속죄 표를 파는 것이 아니고 죽은 사람의 죄까지 위해 속죄 표를 팔았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연옥이라는 것을 믿어서 믿음이 좀 약한 사람은 죽으면 낙원에는 가지 못하고 연옥에 가 있는데 연옥에 가 있는 사람을 빨리 낙원으로 올려 보내는 방법은 이 속죄 표를 사면 낙원으로 갈 수 있다고 선전하면서 속죄 표를 팔았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마는 선전하는 사람은 어떻게 선전했는가 하면『그저 당신 네들 믿음이 별로 없는 부모나 세상 떠난 사람이 있으면 이 속죄표만 한 장 사면 그 돈이 연보궤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연옥에 있던 부모의 혼이 빨리 낙원으로 올라갑니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속죄 표를 사기만 하면 된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본 루터는 전부터 깨달아 알던 진리가 분노로 변했습니다. 그는 격분했습니다. 이런 수가 있겠느냐? 하나님의 진리가 이렇게도 변할 수가 있겠느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1517년 10월 39일 비텐베르그 예배당에다 95개 조항의 문제를 내걸고 항쟁을 했습니다. 의분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이런 의분이 민족적으로 폭발합니다. 이것이 3·1운동이요 광주 학생 사건이요 신의주 학생 사건입니다. 오늘날 화란이나 헝가리에서 일어나는 반란 운동은 말하자면 이런 민족적 의분의 폭발이올시다. 여러분 주를 위해서 이렇게 의분에 불타는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 만일 오늘날 우리 한국에 와서 한국의 실정을 본다고 하면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살며 무슨 일을 하겠는가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매일 매일 우리가 신문을 통해서 우리 한국의 사회상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우리 국가 안에 죄악과 부패야말로 우리 믿는 사람들 우리 십자군에 대해서 일대 도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오늘날에 이 사회에 매일매일 일어나는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죄악을 보고도 그냥 앉아 있다고 하는 것은 요컨대 우리 기독교 양심에 아직까지 의분이 부족한 탓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죄악이 더욱 커감으로써 복음으로 이 죄악을 경멸하기 위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과 같이 회당에서나 거리에서나 개인 전도로, 문서 전도로 그리고 각 방면으로 헌신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이렇게 사교와 미신이 많으므로 우리는 성경을 좀더 읽고 연구하고 기도를 좀 더 힘써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믿기는 믿는다고 하지마는 미지근하게 믿는 사람이 너무 많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많으므로 우리는 좀더 철저히 신앙 생활을 힘써야 되겠습니다. 책임을 맡고도 감당치 않는 사람이 너무 많으므로 우리는 충성스럽게 우리의 책임을 감당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거룩한 의분이 필요합니다. 거짓과 외식의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좀더 참된 생활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모략과 중상의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공명정대히 생활하여야 되겠습니다. 사치와 부호의 사회인 까닭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좀더 검소하고 근엄한 생활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주사청류의 썩은 청년들이 너무 많은 까닭에 우리 기독 청년들은 좀 더 철저한 절제 생활이 필요합니다. 음란과 방탕으로 가득한 이런 부패한 사회인 까닭에 좀더 우리 믿는 사람들은 청결(淸潔) 무구한 생활이 필요합니다. 이기주의 자기 중심주의의 생활이 너무 많은 까닭에 우리 믿는 사람은 좀더 봉사와 희생의 생활이 필요합니다.
주를 위하여 좀더 의분을 냅시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의문을 다해, 아니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의분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1956년 1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