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景職牧師說敎全集(3)
刊 行 辭
우리 교회에서는 창립 二十五주년을 맞아 그 기념 사업의 하나로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 전집을 엮어서 세상에 내어놓기로 하였다.
비록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가 주로 영락교회라는 개교회의 강단에서 외쳐진 것이기는 하지만, 구리는 결코 그것이 개교회의 교인들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그의 설교가 영락교회의 강단을 통하여서 우리 교계는 물론 나아가서는 사회와 국가에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때로는 맑고 줄기찬 샘물이 되어서 혼탁한 이 사회를 밝히기도 했고, 때로는 굳건한 반석이 되어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부드러운 손길이 되어서 상처받은 영혼들의 위로와 구원이 되기도 했고, 또 때로는 하늘을 향하는 울부짖음이 되어서 겨레의 아픔과 슬픔을 하나님께 호소하기도 했다.
교회가 세워지고 四 반세기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겨레 위에는 수난과 좌절의 역사가 광폭한 해일(海溢)처럼 덮치고 또 물러가고 물러갔다 다시 덮치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한 목사님의 설교는 폭풍 가운데 서 있는 거목처럼, 사나운 짐승들이 포효하는 광야의 선한 목사처럼 우리 교인들에게 희망과 안도를 안겨 주었고 나아가서는 겨레의 나아갈 길을 밝혀 주시곤 하였다.
이에 영락의 교인들은 그의 생애에 걸친 목회의 노고를 위로하고 은공을 기리는 한편, 이 땅에 오고 오는 세대들에게 넘겨줄 빛나는 유산으로서 이 설교 전집을 내어놓기로 한 것이다.
전집이라고는 하지만 한 목사님께서 이북에서 목회 하실 때의 설교는 전연 그 자료를 구할 수가 없어서 수록하지 못하였으며, 또 이남에 오셔서 하신 설교도 초기의 것은 그 자료가 많이 일실 되었고 더러는 수록되었다 하더라도 교우들이 필기한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서 충실을 기하지 못했음을 매우 유감 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설교 집을 위하여 편집을 맡아서 수고하여 주신 홍현설 박사, 김정준 박사, 한태동 박사, 이종성 박사, 이창로 박사와 직접 실무를 맡아서 수고하신 허영진, 김창걸, 두 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一九七一년 十월 일
영락교회 창립 二十五주년 기념 사업 위원회
출판위원장 김 정 순
머리말
모든 종교는 진리를 말하고 신(神)을 믿는다. 그들의 진리가 다른 모든 진리보다 더 참되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믿는 신은 모든 다른 신보다 더 권능이 있고 지혜가 있고 강하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과 신념에서 모든 종교는 자기들의 진리와 신을 타인에게 알리고 설득하고 때로는 강요한다. 여기에 변증 학이 필요하고, 설교가 필요하고 전도가 필요하게 된다.
종교에 따라 그들의 진리와 신을 취급하는 태도가 다르다. 어떤 종교는 그들의 진리와 신을 묵상하고 영적으로 체험해 보려고 한다. 인도교나 불교나 철학적 신비 종교가 그렇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종교는 그들의 진리와 신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설득시켜서 자기들의 회원이 되도록 노력한다. 이러한 종교에 회회교와 기독교가 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전파하는 종교였다. 세례 요한은 처음부터『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막 一·四)했다. 예수 님은 갈릴리에서『하나님의 복음을 전파』(막 一·十四)했다. 바울도 그의 활동의 처음부터『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장에서 전했다』(행 十三·五). 이와 같이 기독교는 처음부터 신언(神言)을「선포」하고 전하고 설교하는 데 중점을 둔 종교이다. 이러한 전통을 받아 교회는 유능한 설교자를 많이 배출했다. 五세기초에 밀라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하게 한 암브로시우스나, 十八세기에 존 웨슬리와 함께 영국에서 부흥 운동을 하다가 미국에 건너가서 일대 부흥 운동을 전개한 조오지 휘크필드나, 또는 기관 포 설교자라고 하는 빌리 그래햄 같은 이는 교회가 낳은 가장 유명한 설교가 이다. 이러한 설교 가는 어떤 웅변가나 수사학자(修辭學者)보다 뛰어난 화술(話術)을 가진 달변 자들이었다.
한국에는 세계를 향하여 자랑할 만한 설교가가 없을까? 한국의 암브로시우스, 한국의 조나단 에드워드, 한국의 필립스 브룩스는 없을까? 그러한 설교자가 있다면 누구일까?
우리 편집인 몇 사람은 이 물음에 대하여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러한 분으로서 한경직 목사님을 택했다. 그가 훌륭한 목회자인 동시에 훌륭한 선교자임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대 설교자를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설교를 직접 듣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이 때까지 하신 수많은 설교 중 약 五00 편을 뽑아 출판하여 우리의 기쁨을 다른 독자들에게까지 나누고자 하여 설교 집을 출간하기로 했다.
내용에 대한 평가는 독자 여러분이 내려주시기를 바란다. 내용 배열에 있어서는 편의상 설교를 한 연대에 따라 열 권으로 나누었다.
바라기는 이 설교 집을 통하여 한경직 목사님과 같은 설교자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나와 주었으면 한다. 이것이 이 설교 집을 출판하는 목적이기 때문에다.
一九七一년 十월 二十七일
편집위원 이 종 성
目 次
刊行辭................................................................................................................ 三
머리말................................................................................................................ 五
Ⅲ- 1 .................................................................................................... 一一
Ⅲ- 2 .................................................................................................... 二一
Ⅲ- 3 .......................................................................................... 二七
Ⅲ- 4 .......................................................................................................... 三七
Ⅲ- 5 ............................................................................... 四八
Ⅲ- 6 .................................................................................................... 五八
Ⅲ- 7 ................................................................................. 六七
Ⅲ- 8 ................................................................................................ 七七
Ⅲ- 9 ........................................................................................................... 八七
Ⅲ-10 ......................................................................................... 九八
Ⅲ-11......................................................................................................一0八
Ⅲ-12 ...........................................................................................................一一八
Ⅲ-13 .................................................................................................一二九
Ⅲ-14 ..........................................................................................一四一
Ⅲ-15 ......................................................................................................一五一
Ⅲ-16 ................................................................................................................一六一
Ⅲ-17 ..........................................................................................................一七三
Ⅲ-18 .............................................................................................一八三
Ⅲ-19 ...................................................................................................一九三
Ⅲ-20 .....................................................................................................二0三
Ⅲ-21 ..........................................................................................................二一二
Ⅲ-22 ....................................................................................................二二三
Ⅲ-23 ..........................................................................二三四
Ⅲ-24 ............................................................................................................二四五
Ⅲ-25 ...............................................................................................二五六
Ⅲ-26 ........................................................................................二六八
Ⅲ-27 ........................................................................................................二七八
Ⅲ-28 ...........................................................................................................二八九
Ⅲ-29 ......................................................................................................三00
Ⅲ-30 ........................................................................................................三0八
Ⅲ-31 ...........................................................................................................三一七
Ⅲ-32.........................................................................................................三二八
Ⅲ-33 ............................................................................三三八
Ⅲ-34 ........................................................................................................三四七
Ⅲ-35 .......................................................................................................三五五
Ⅲ-36 ...................................................................................三六六
Ⅲ-37 .............................................................................................三七七
Ⅲ-38 .............................................................................................三八四
Ⅲ-39 ...............................................................................................................三九三
Ⅲ-40 .......................................................................................................四0四
Ⅲ-41 ......................................................................................................四一一
Ⅲ-42 ................................................................................................四一九
Ⅲ-43 ..........................................................................................四三一
Ⅲ-44 ..................................................................................................四四一
Ⅲ-45 ................................................................................................四五一
Ⅲ-46 .........................................................................................................四六三
Ⅲ-47 .....................................................................................................四七三
Ⅲ-1 의인을 대망 함 (창세기 十八장 二十二-三十三절)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十인을 찾으시면 어찌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十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창 十八·三十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나타나셔서 두 가지 비밀을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리 우는 아브라함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는 아들 이삭을 장차 주시겠다고 하는 언약의 말씀이요, 또 하나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킬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킬 수밖에 없다고 하는 말을 들은 아브라함이, 소돔 성을 향하여 가시는 여호와 옆에 서서, 간절히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기도한 말씀이 창세기 十八장 하반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사를 읽을 때에 아브라함이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였고, 겸손히 기도하였고, 계속적으로 기도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도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음의 사람인 것을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이와 같이 간절히 기도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여기 기도에 그 말은 없지마는 제일 먼저 생각되는 것은 소돔 성에는 자기의 조카 롯이 당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거니와, 본래 벧엘 지방에 아브라함과 롯이 살았습니다. 점점 가산이 넉넉하여짐에 따라서 가축이 많아지고 또 목자들이 불화 하는 모양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높은 산에 올라서 사방을 바라보면서『이 지경이 넓지 아니하냐? 네가 동으로 가면 나는 서로 가겠고, 네가 서로 가면 나는 동으로 가겠으니, 우리가 피차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친족간이 불화 하는 것을 면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그래서 롯은 그 때에 동편을 향해서 요단 들을 바라보니 풀이 푸르렀고 땅이 윤택함으로 그곳을 택하게 되었는데, 그 요단 들에는 소돔과 고모라 성과 그 밖에 세 성이 즐비하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소돔에는 자기의 조카 롯이 살게 되었습니다.
또 그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이와 같이 간절히 기도한 그 배후에는 아브라함의 도덕적 의식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소돔 성에도 상당한 의인의 수가 있을 터인데 이 의인들을 악인과 같이 멸망시키는 것이 어찌 공의의 주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인가? 의인들을 기억하고 간절히 기도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만도 아닌 줄 압니다. 아브라함은 물론 죄를 미워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마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어서 아무리 죄를 지었지마는 그들이 멸망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에 마음속에 일어나는 긍휼 함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어떻게 구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 가운데서 간절히 기도한 줄 생각합니다.
기도의 내용은 여러분께서 이미 들으셨습니다.『의인과 악인을 같이 대우하고 균등히 하는 것이 어찌 합당하겠습니까? 아무리 소돔과 고모라 가 악하다고 하지마는 만일 그 가운데 의인 五十명이 있다고 하면, 의인 五十명을 악인과 같이 멸망하게 하시는 것이 어찌 여호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까? 만 유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공의를 행하시지 아니하시겠습니까?』이와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에 대답하는 말씀이『만일 소돔 성에 의인 五十명이 있다고 하면, 그들로 말미암아 온 지경을 용서하여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용서할 뜻은 계시지만 그 성에 의인 五十명이 없는 사실이 또한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좀 더 가까이 나아가며 다시 아뢰었습니다.
『저는 티 끝과 죄에 불과한 더러운 죄인이지마는 다시 한번 아룁니다. 만일 五十명 가운데 五인이 부족하다 할 것 같으면 다섯 사람이 부족한 것으로 말미암아 온 지경을 멸망시키겠습니까?』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시 대답하시는 말씀이『만일 소돔에 의인 四十五명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위하여 온 성을 용서하여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보니까 四十五인도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시 송구한 것은 말할 수 없지만 아뢰었습니다.『만일 四十五인 가운데 五인이 부족해서 四十인만 있다고 하면, 四十五인 중에 五인이 부족하다고 해서 온 성을 멸망시키겠습니까?』다시 여호와 하나님이 대답하는 말씀이『四十인만 있을지라도 내가 그 성을 용서하리라』하셨습니다.
四十인도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三十五인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三十인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일 二十명만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二十인도 되지 못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이 한번 더 구했습니다.『만일 소돔 성에 의인 열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성을 어떻게 하오리까?』여호와께서 말하셨습니다.『만일 네 말대로 의인 열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 열 사람으로 인해서 그 온 성을 용서하여 주리라.』
그 후에는 아브라함이 감히 입을 더 열 수가 없어서 자기의 장막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여호와 하나님은 소돔 성을 향해서 나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아브라함은 높은 산에 올라서서 소돔과 고모라 성이 있는 동방의 들을 향해서 보매 온 성에서 연기가 옹기점 같이 올라왔습니다. 결국 소동 성은 의인 열 사람이 부족해서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제가 몇 달 전에 이탈리아 나폴리에 갔다가 거기서 가까운 폼페이 성의 폐허를 가서 구경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이 폼페이 성은 일찍이 주전 三, 二, 一세기, 주후 一세기까지 번영하던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一세기 말엽에 갑자기 그 옆에 있던 비스비어스 화산이 폭발되면서 말할 수 없이 많은 화산 용암과 재가 하루아침에 二十자 이상 덮임으로 몇 사람 도망해 나온 이외에는 사람이나 가축이나 할 것 없이 전부 재로 변해 버린 비참한 도시입니다. 너무 깊이 묻혀 있었기 때문에 발굴할 생각을 하지 못했지마는 몇십 년 전에 비로소 그곳을 발굴했습니다. 지금은 근 二천년 동안이나 땅 속에 있던 그 폐허가 다시 나타나서 누구나 옛날 폼페이의 시가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가는 비록 좁지마는 돌로 깔았고 물론 위에 있던 것도 다 없어졌지마는 돌로 쌓았던 담들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 때에 사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 당시 얼마나 술을 많이 먹었다고 하는 것도 술집이 즐비하게 있는 것을 보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음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고 하는 것도 아직 남아 있는 벽화와 그림들을 보고 그 사람들이 남겨준 조각을 보아서 능히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사람들이 얼마나 우상을 섬겼다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주피터의 부러진 목이 그대로 남아 있고, 주피터의 신당에 올라가는 돌로 쌓은 계단이 반반하게 닳은 것을 보아서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습니다. 당대에는 호화스러웠지만 지금은 황폐된 그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면서 마음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 가운데 하나는, 이 성에도 결국은 의인 열 사람이 없었던가, 그런 생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어떤 국가나 어떤 민족이나 혹은 어떤 문화의 강약 혹은 우열 혹은 흥망성쇠를 물리적 조건에 의지해서 수나 양의 세계에서 판단하기 쉽습니다. 어떠한 나라가 강한 나라이냐? 면적이 얼마나 넓으냐? 인구가 얼마나 많으냐? 그 나라에 공장이 얼마나 많으냐? 그 나라에 비행기가 얼마나 많으냐? 군함이 얼마나 많으냐? 오늘날로 말하면 원자탄이나 유도탄이 얼마나 많으냐? 흔히 이런 것으로써 민족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아니해야 될 것은 이보다 더 중요한 민족이나 국가나 문화의 흥망성쇠의 요소가 되는 것은 정신적 요소란 것입니다. 그 나라, 그 민족의 민족적 정기가 어떠하냐? 민족적 사기가 어떠하냐? 그 민족의 도덕적 분위기와 수준이 어떠하냐? 그 민족이 얼마나 깨끗이 살며, 얼마나 옳게 살며, 그 나라와 그 민족에게 얼마나 공의가 행하여지느냐? 다시 말해서 성경의 말씀대로 말하면,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힘이 그 민족과 그 국가 안에 의인이 얼마나 잇느냐? 요컨대 그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문화의 흥망성쇠를 마지막으로 결론지어 버린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의인 五十이 있을지라도 의인 五十을 위해서 온 지경을 용서하여 주리라.』
유명한 선지자 엘리사가 나이 많아서 임종할 때에,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요아스 왕이 병석에 누운 엘리사 옆에 꿇어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외쳤습니다.『아버지시여, 아버지시여, 당신은 우리 나라의 마병(馬兵)과 병거(兵車)가 되시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께서 가시면 우리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눈물과 같이 탄식했습니다. 말 타고 전장에 나아가거나 병거를 타고 전장에 나간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에 있어서 엘리사라고 하는 의인의 존재는 그만큼 그 나라를 힘있게 만든 것입니다. 감히 원수들이 경히 볼 수 없으리 만큼 힘을 준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 말씀에『의인은 사자보다 강하니라』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의인은 사자보다 강합니다. 무엇보다 강합니다. 의인이 있어야 나라가 바로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이유가 있습니다. 의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 감화력이 사회에 미치는 것입니다. 의인에게는 의인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 향기가 사회에 퍼지게 됩니다. 이 사회를 망하게 하는 것은 결국 부패하게 하는 세력입니다. 그 부패하게 하는 세력과 싸워서 새롭게 하는 힘은 의인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프랑스 나라에서는 과격한 정치 파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신문을 통해서 압니다. 十八세기에는 프랑스 대 혁명이라는 큰 혁명이 일어나서, 왕을 잡아 단두대의 이슬로 만들고, 귀족들을 잡아죽이고, 서로 민족끼리 싸워서 많은 사람이 희생을 당하고, 그 후에야 프랑스 민족이 자유의 정부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十八세기에 영국에서는 피 흘림이 없이, 비극이 없이, 재산의 희생이 없이 옛 체제에서 변해서 좀 더 새로운 자유와 평화가 있는 나라로 변천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역사가들이 하는 말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를 열거할 수 있지마는, 무엇보다도 더 큰 힘은 영국에는 요한 웨슬레라는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영국에도 당시에 부패한 것이 많았습니다.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것 중 숙청할 것이 많았습니다. 평민 가운데 불평이 많았습니다. 여러 가지고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한 웨슬레라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사방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평민이 회개하고, 귀족이 회개하고, 국회의원도 회개하고, 공장의 직공도 회개하고, 각계 각층 사람이 변해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피 흘리는 혁명의 필요는 없어졌습니다. 자연히 국회가 아름다워졌습니다. 정부가 좀 더 깨끗해졌습니다. 공장도 더 일할만하게 되었습니다. 사회 정의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각 방면으로 사회의 모든 형편이 아름다워지고, 자연히 그리스도의 이상과 사랑에 의지해서 변천된 새로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十九세기에 와서 전 세계의 최강의 나라로 발전되었습니다.
국가의 흥망과 성쇠도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우리 인간이 죽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병이 나서 죽습니다. 병은 왜 납니까? 흔히 하는 대로 말하면 우리 육체 속에 악한 균이 들어옵니다. 균이 들어와서 우리의 육체를 썩힙니다. 그러면 우리 육체 속에 있는 백혈구가 총 동원이 됩니다. 그래서 열이 오릅니다. 우리 원수인 썩히는 세력이 들어와서 우리의 피와 살을 썩힙니다. 이 균들을 잡아죽이려는 백혈구와 여러 균 사이에 전쟁이 몸 속에 일어납니다.
한편에서는 육신을 자꾸 썩히려고 합니다. 다른 한 편에 있는 백혈구는 자꾸 새롭게 하려고 합니다. 이 둘이 싸우다가 마지막에 어느 편이 이기느냐? 균이 이기면 마지막에는 사람이 죽습니다. 그러기에 거의 세상을 떠나가는 사람 옆에 가 앉으면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 편이 이기면 죽습니다. 새롭게 하는 백혈구의 편이 이기면 죽지 않고 삽니다.
우리 사회도 민족도 그와 비슷합니다. 우리 사회에도 우리 민족 사이에도 이 두 가지 세력이 싸웁니다. 하나는 썩히려고 하는 세력입니다. 그러나 하나는 새롭게 하려고 하는 세력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이「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입니다. 소금은 무엇 하는데 씁니까? 썩는 것을 방지하고 새롭게 하는데 씁니다.
여기 생선이 있는데 생선을 그냥 두면 썩히는 미균(黴菌) 때문에 못 견디어 썩어집니다. 그러나 소금을 많이 처서 소금의 세력이 강하면 균을 죽여서 썩지 않게 방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이 썩히는 세력이 있는 우리 사회에 둔 것은 썩어져 가는 세력을 막기 위해서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해방 이후에 더욱이 六·二五이후에 우방 나라에서 우리 한국의 재건을 위해서 여러 가지 방면으로 도와줍니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각 방면으로 도와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든지 기억하여야 될 것은 외국 사람들이 아무리 우리를 도와준다고 하지마는 우리가 이 내부에서 썩어지는 세력을 우리 자신이 막지 못하면, 외국의 도움만 가지고는 한국이 재건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썩어지는 것을 막는 세력이 되는 의인들이 많이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국회에도 좀 더 올바른 사람, 관청에도 좀 더 올바른 사람, 각 방면에 옳은 길을 가는 사람이 많아야 우리 나라를 재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의인은 어디서 찾을 수 잇느냐? 의인에 대한 성서적 관념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서적 견지에서, 의인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올시다. 둘째로,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도덕적으로 양심대로 하는 사람이올시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셋째로, 하나님 앞에서까지 옳은 사람입니다. 이런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이 견지에서 볼 때에 사실 이 세상에는 의인이 없나니, 곧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절대의 견지에서 보면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의인이 없는 세상에 의인을 만들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것입니다. 로마서 三장 二十三-二十四절을 읽습니다.『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잇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죄를 범한 사람이라도 예수를 믿고 십자가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고 과거에 그릇된 길을 걸었지마는 옳은 길로 돌려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의인을 만들기 위해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써 의인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시편 제 一편을 보십시오. 복 있는 자의 가는 길과 악한 자의 가는 길, 두 길이 있습니다. 의의 길과 불의의 길, 두 길이 있습니다. 내가 어떠한 길을 확실히 택하였는가? 어떤 이들은 오래 예배당에 다니지마는 학습도 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례도 못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인의 길을 가기는 원하지마는 확실히 작정이 없는 사람들이올시다.
어떻게 생각하면 온 세계가 소돔과 고모라의 전날 밤이 아닌가. 폼페이의 전날 잠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이 세계를 구원할 요소는 오직 죄를 회개하고 의로운 길을 걷는 사람이 많아지는 그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의인을 대망하고, 우리 사회가 의인을 대망하고, 우리 민족과 국가가 의인을 대망하고, 온 세계가 의인을 대망 합니다.
(一九五八년 十월 十二일)
Ⅲ-2 입교의 깊은 뜻 (요한 복음 十五장 一-十二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十五·五)
오늘 성례 주일을 당해서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많은 교우들이 오늘 학습도 서게 되고, 또 다음 예배에는 세례도 받게 되고, 아기 세례를 받은 분으로서 신앙을 고백하고 입교도 하게 되는 사실이올시다. 오늘 이 시간, 입교의 깊은 뜻을 잠깐 동안 생각하고자 합니다.
입교라고 하는 말은 문자 그대로 교회에 들어온다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에는 항상 교회는 보이는 부분이 있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실 보이는 부분은 적습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은 얼마나 더 큰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바다의 빙산이 물위에 보이는 부분은 적지마는 물 속에 잠긴 보이지 않는 부분은 심히 큰 것과 같이 우리 교회가 역시 그러한 것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자연히 한 곳에 다 모일 수 없으니까 지(支)교회로 여러 곳에 나누어 모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여러 가지 형편에 의지해서 교파로 또한 갈라진 것이 사실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자연히 여러 지방, 여러 나라에 흩어져 모이는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보이지 아니하는 부분은 오직 하나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부분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과 이미 간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아니하는 참 교회는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도 하나이시고, 주님도 하나이시오, 세례도 하나이시오, 소망도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인 교회에 들어오는 경로는 보이는 이 지 교회를 통해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인 교회에 들어오는 길은 오직 시간적이오, 공간적인 이 지 교회를 통해서만 들어오게 되는 것이 역시 사실인 것입니다. 이제 성경을 보면 이 큰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상징과 비유로서 우리에게 그 뜻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가령 오늘 읽은 이 말씀, 요한 복음 十五장 一절에서 十절까지에는 큰 포도나무에 비유했습니다. 이 우주에 큰 포도나무 하나가 있습니다. 그 나무에는 가지가 많이 있는데, 이 가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온 우주에 사무치리 만큼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이 나무는 곧 그리스도요, 모든 가지는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교우들이올시다.
가지가 많은 목적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는 비결은 이 나무에 꼭 연결되어서 본 나무가 내어보내는 생명의 즙을 받는데 있는 것입니다.
입교라고 하는 것은 이 신령한 포도나무인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나무의 한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열매를 맺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성경에 보면 에베소 二장 二十절, 베드로 전서 二장 五절, 그 밖에 성경에서 보면 이 교회를 큰 성전에 비교했습니다. 이 우주에 큰 성전에 점점 지어지고 있습니다. 이 성전의 모퉁이 돌은 그리스도입니다. 이 성전에 열두 기초석이 있는데, 곧 열두 사도입니다. 그 뒤에 수많은 돌들이 첩 놓이고 우주에 가득히 차리 만큼 웅장한 성전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 성전을 이루어 가는 여러 돌들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신자올시다. 그래서 우리 하나 하나는 이 큰 성전에 일부분을 이루는 산 돌입니다.
성전을 짖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계시기 위해서 집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지으십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거룩합니다. 그러므로 산 돌이 된 우리 믿는 사람도 거룩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이 예배가 항상 우리 심령 가운데 있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몸이라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성경, 가령 고린도 전서 十二장 二十절을 보면, 교회를 큰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해서 가르쳤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큰 몸이 있습니다. 이 몸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이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지체마다 기능이 다릅니다. 지체마다 자기의 책임이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 하나가 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성신을 받지마는 은사는 다릅니다. 은사에 따라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책임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가르치고, 어떤 사람은 심방하고, 어떤 사람은 권면하고, 여러 가지 다른 은사에 따라서 자기의 책임을 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몸 가운데 어떤 지체가 병들면, 온 몸이 아픕니다. 몸 가운데 어떤 지체가 마비되면, 온 몸의 활동에 지장이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 하나가 그리스도의 산몸의 지체가 되었은즉 병들지 아니해야 되겠고, 마비되지 아니해야 되겠고 각각 하나님께로 받은 바 은혜에 의지해서 내 책임을 다 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 二장 十九절과 요한 一서 三장 一절을 읽으면, 교회는 하나님의 큰 권속이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큰 가족이 됩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인생을 다 지었으니까 다 하나님의 자녀라, 인류가 다 자녀라, 이런 사상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또 한번 읽어보면, 그런 사상 이외에 이 세상 가운데는 두 가지 가족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믿지 아니하고 죄악에 사는 사람은 악한 마귀의 자녀라고 기록했습니다.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 자녀라고 기록했습니다.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든 특권과 기업과 모든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자녀 된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효도할 책임이 있고, 자녀 된 사람은 아버지의 사업을 계승할 책임이 있은 즉,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보 三장 二十절을 읽어보면, 우리의 시민권도 하늘에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교회를 큰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시간과 공단을 초월하는 금 생과 내세에 뻗친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는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이 나라의 왕은 오직 한 분되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모든 믿는 사람은 이 나라의 시민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입교함을 통해서 이 신령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특권이 있습니다. 아울러 의무도 있습니다.
나라에 의무가 많지마는 한 마디로 말하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병역의 의무와 또 하나는 납세의 의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도 복음을 전파할 의무가 있고, 우리 교회를 섬길 모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 아닙니다. 디모데 후서 二장 三절을 읽어보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정병이 되라고 하는 권면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큰 군대로 비유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군대입니다. 군대가 있습니다. 십자군이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는 것은 이 십자군에 입대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이 십자군은 진리의 군대요, 의의 군대로서, 이 세상에 준동(蠢動)하는 악마의 세력과 싸워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해 내는 것이 십자군의 사명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십자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이 십자군의 사령관은 우리 주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입대한 것인즉 우리 주님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고, 악한 세력, 악한 유혹과 대항해서 싸워 이기고 인간의 영혼을 구원해서 인간을 해방하는 중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기억하세요. 요한 계시록 二十장 十五절에 보면, 생명 책에 기록된 사람만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 갈 수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七十 문도(門徒)가 나아가 전도하고 돌아 와서 예수 님께 보고하면서 그저 주님의 이름으로라면 사귀(邪鬼)도 굴복을 하더라고 기쁨으로 말하였습니다. 예수 님께서 그 말씀을 들으시고 사귀가 너희에게 굴복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보다 이렇게 함으로써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므로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보이는 교회에서 입교를 통해서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생명 책에 기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새 예루살렘의 온전한 구원을 얻는 확증이 되는 것입니다. 입교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열매 맺는 가지가 되어야겠습니다. 선전의 산 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십자군이 된 것입니다. 생명 책에 녹명(錄名)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一九五八년 十월 十九일)
Ⅲ-3 종교개혁의 근본원리 (로마서 一장 八-十七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一·十七)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은 종교개혁의 표어가 되는 구절이올시다. 오늘 十월 마지막 주일은 흔히 종교개혁 기념주일로 지킵니다. 그것은 주후 一五一七년 十월 三十一일에 비로소 유명한 十六세기 종교 개혁이 시작하게 된 까닭입니다. 물론 마틴 루터 이전에도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다가 희생을 당한 사람이 많지마는, 종교 개혁은 실상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 까닭으로 흔히 종교 개혁을 생각할 때는 우리가 먼저 그를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마틴 루터는 독일의 자그마한 어떤 지방, 가난한 광부, 혹 어떤 때는 농사를 짓는 그런 가정에서 난 사람이올시다. 부모가 빈한했지마는 신앙은 독실해서 어렸을 적부터 마틴 루터에게 그 당시에 행하던 신앙 생활을 하는 법대로, 마리아도 열심히 숭배하고, 여러 성자도 열심히 숭배하는 법을 어렸을 적부터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 후에 대학에 가서 다닐 때에 점점 나이고 많아짐에 따라서 인생 문제에 대한 깊은 사색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자기가 한 번 중상을 당해서 거의 죽을 번한 경험도 있었고, 중병을 입어서 심히 고통을 받은 경험도 있었고, 또는 자기 가까운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그와 같은 고통을 통해서 더욱 인생 문제에 대한 번민(煩悶)을 대학 시절에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큰 폭풍우가 있는 어느 날, 어떤 곳을 지나 가다가 바로 자기 옆에서 낙뢰가 되는 그러한 위험한 일을 당하게 될 때에, 이 청년은 큰 공포에 싸여서 그 자리에 꿇어앉아서『성 안나 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제가 수도사가 되겠습니다.』이런 부르짖음을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광업을 하던 사람들은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가 된다고 하는 성 안나를 수호 성자로 섬기던 때이어서 루터도 성 안나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청년으로서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 곳에 들어가서도 자그마한 독방 생활을 하면서 적은 문 하나 밖에 없는데 그 문을 열어 놓으면 공동묘지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기도를 하며, 묵상을 하며, 공부를 하며, 연구를 하며, 어떻든지 자기의 구원을 완성하길 애썼습니다.
그렇지마는 더욱 자기의 고통은 점점 더해졌습니다. 그 까닭은 성경을 연구해 보매 성경의 교훈과 그 당시 교회에서 가르치던 교훈과 행하는 일에 많은 차이를 발견하게 되어서, 거기에 대한 고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둘째로는, 자기가 그 때에 가르치는 대로 어떻든지 착한 일을 하고 어떻든지 공덕을 많이 쌓아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고 죄 사함을 받으려고 아무리 힘을 쓰고 정성껏 모든 것을 다 한다고 하지마는 도저히 양심의 평안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세수 물을 떠다 놓고 손을 씻으면서『아무리 씻고 또 씻어도 내 몸은 그냥 더러우니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스스로 탄식하는 말까지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경을 더 연구하며 또한 성경을 그 때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시편을 가르치고, 갈라디아를 가르치고, 로마서를 가르치게 되어서 이런 책들을 연구하는 가운데 그 때 교회에서 가르치던 교훈이 근본적으로 성경에 가르치는 교훈에서 떠났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람이 율법을 행해서, 선을 행해서, 누가 덕을 쌓아서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 진리를 분명히 깨닫는 동시에 지금 읽은 이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써 하나님에게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께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진리를 분명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어떤 행실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으려고 힘쓰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의인을 믿음으로 산다고 하였는데 오직 이 믿음으로써 십자가의 공로 위에 온전히 자기 몸을 바치게 된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온전히 믿고 십자가를 믿는 가운데서 비로소 자기의 죄가 십자가의 공로로 다 용서된 것을 깨닫게 되고, 그 다음부터 자기가 구원받은 것을 확실히 알게 되고, 따라서 그 다음부터 구원의 참된 기쁨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서도 이 성경을 대학에서도 가르치고 자기가 주일마다 설교하는 교회에서도 이 진리를 가르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로마에서는 그 때에 레오 十세라고 하는 교황이 있었는데 그 전 교황 때에 굉장한 예배당을 짓게 되니까 재정이 대단히 궁핍해서 그 때에 흔히 하는 법대로 속죄 표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에도 테텔(Tetel)이라는 교황 사절을 보내서 속죄 표를 사방에서 팔았습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고 이 속죄 표를 샀습니다.
루터는 자기가 깨달은 그 진리대로 설교도 하고 가르치던 그 때인지라 이런 광경을 볼 때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一五一七년 十월 三十一일, 자기가 설교하는 켓슬 교회 문밖에, 속죄 표를 파는 것이 그릇된 것이며, 참으로 죄 사함을 얻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고 하는 그런 조항에 대한 九十五개조를 내걸고, 누구든지 내가 주장하는 여기에 대하여 반대하는 의견을 가졌으면 내가 공중으로 변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九十五개조가 바람에 날리듯 유럽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사방에서 이 루터의 九十五개조를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종교 개혁의 三대 원리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율법을 행함으로나, 선행(善行)함으로나, 공덕(功德)에 의지해서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義)를 믿음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이 원리입니다.
둘째로는, 당시 교회의 모든 형편을 보면 성경을 권위로 삼기보다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여러 가지 교회의 전통에 더 치중해서, 성경의 진리가 가리어지니까 이 앞으로는 성경만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고 교회에 내려오는 전통은 성경에 의지해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는 원리를 주장했습니다.
셋째로는, 그 당시에 보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성경에 보면 중보는 오직 예수 님 한 분밖에 없는데)반드시 신부를 통해서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이런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없는 진리이니까, 누구든지 제사장의 자격이 있어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그리스도만을 중보로 삼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기도도 하고 하나님께 직접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다시 말하면,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 三대 원리가 요원의 불과 같이 전 유럽에 퍼지게 되어서 사방에서 다른 종교개혁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가령 스위스 같은 데서 쥬리히 라고 하는 곳에서 쯔윙글리 같은 사람이 종교개혁의 봉화를 들게 되었고, 프랑스에서는 존 칼빈(John Calvin), 그 후에 제네바로 갔지마는, 칼빈 같은 사람이 역시 종교개혁의 불을 들게 되었고, 스코트란드 같은 데서는 존 녹스 같은 사람이 역시 이에 호응하게 되어 종교 개혁의 불길이 온 유럽 천지에 차게 되었습니다. 교황은 물론 루터를 파면하고 여러 가지로 탄압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무력으로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구교를 치중해 믿고 교황을 후원하려는 이런 나라를 동원해서 신교 믿는 사람들을 무력으로 탄압하기 시작하니까 결국은 신교도들도 역시 무력으로 항쟁하기 시작해서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十六세기 중엽부터 十七세기까지 근 한 세기 동안 종교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비참(悲慘) 가열한 三十년 전쟁도 그 때 있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一六四八년 웨스트팔리아(Westphalia) 협약에 의지해서야 비로소 구교 나라에서 신교 믿는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교의 자유가 많은 희생을 통해서 획득하게 된 것을 우리가 잊지 아니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신교와 구교의 차이가 대체 무엇이냐? 구교 혹은 천주교 혹은 카톨릭교와 우리 신교, 장로교니 감리교니 하는, 이 신교의 차이가 대체 무엇이냐? 대체로 구교는 중세 시대 기독교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가령 이렇게 몇 가지로 대조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 신앙에 대해서 지금도 말했지마는 우리 신교에서는 성경만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습니다. 구교에서는 성경 뿐 아니고 교회의 전통을 지금까지도 중요시해서 전통 대로하려고 합니다. 우리 신교에서는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일 한, 참으로 무오(無誤)한 법칙인줄 믿고 그렇게 행하려고 합니다.
구교에서는 성경 이외에 교회 전통 뿐 아니라 특별히 교황이 있어서 교황 무오설(敎皇無誤說)을 믿습니다. 교황이 신앙 문제나 행위 문제에 대해서 확정하는 것은 그릇될 수 없다고 하는,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임을 믿습니다. 우리 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만 믿습니다. 그들은 성모 마리아를 믿고 또 여러 성자도 많이 믿는 모양입니다.
우리 신교에서는 죽어서 천당에 가지 아니하면 지옥에 가는 것이라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 믿습니다. 구교에서는 성경에도 없는 연옥이라고 하는 딴 곳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밖에도 많지만 이런 몇 가지가 특별히 다른 것입니다.
예배는 어떠냐? 우리 신교에서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단순히 성경의 교훈과 같이 신령과 진리로써 예배합니다. 구교 예배는 의식을 존중히 해서 그 신부나 감독의 의복이 화려하고 찬란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예배당에 들어가 보면 성모 마리아와 여러 성자들의 성상들과 그리스도의 성상들과 이런 우상과 비슷한 것이 많이 나열되었고, 많은 성도들이 그 성상 앞에 가서 기도하는 것을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신교에서는 예배 순서가 간단합니다. 찬송과 기도와 설교, 그저 이 몇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밖에 미사 제를 드립니다. 미사 제라는 것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어디서 왔는고 하니, 예수 님께서 성찬 예식을 행하실 때에 말씀하시기를『이것은 내 몸이니, 이것은 내 피니…』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떡과 포도즙이 사실상 예수 님 피로 변해서, 그러니까 예수 님 몸과 피를 다시 제사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이런 전통이 생겼습니다.
이 교훈은 성경의 교훈과 정반대 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 님께서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제사를 지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이것과 반대로 합니다. 신부가 그 십자가의 제사를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반복해서 미사 제를 지냅니다. 우리 신약에는 전혀 없는 풍속입니다. 성례(聖禮)하면 선교에서는 단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즉 세례와, 성찬, 신약에 있는 대로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구교에 보면 거기에 다섯 가지 더 있습니다. 가령 견신례(堅信禮)라 하여서 세례 받은 다음에는 감독이 안수하는 풍속이 있고, 종유례(終油禮)라 하여서 사람이 죽기 전에 기름 바르는 풍속이 있고, 참회례(懺悔禮)라 해서 죄지은 다음에 신부에게 가서 자복(自服)하고 용서받는 그런 예사 있고, 결혼식도 성례로 간주하고 또 무슨 임직식(任職式)도 성례로 간주해서 성례를 일곱 가지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정치는 어떠하냐? 우리가 신약을 보면 초대 교회에서 집사를 택할 때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일곱 집사를 투표해서 선정했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천주 교회서는 그 풍속이 다 없어진지 오랬습니다. 구교는 교황이 있어서 교황이 그 아래 기관을 임명하고, 대 감독과 감독을 임명하고, 감독이 각 교회 신부를 임명하는 교황 전제 정치입니다.
지금까지도 천주교에 모호한 점이 있습니다. 천주교회가 사실 국가냐? 혹은 교회냐? 로마에 가 보면 교황과 성 베드로 예배당이 있는 그 자그마한 구역을 바티칸(Vatican)이라고 해요. 교황은 전 세계에 있는 로마 교회의 주권자인 동시에 바티칸 나라의 왕입니다.
그러면 이 로마 교회에 입교한 사람들이 어떠한 의미에서 로마 교황에게 충성을 하느냐? 이것을 나라로 간주하는 나라에는 교황청에서 사자를 보냅니다. 우리 나라에도 사실 교황청의 사자가 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그곳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황청의 사자를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말 나라이냐, 이것이 교회이냐 에는 모호한 점이 지금까지도 있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이 된지 벌써 四백여 년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그 결과가 어떻게 된 것을 지금은 대강 엿볼 수가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영국, 독일 그리고 북부 유럽은 대체로 다 신교입니다. 남부 유럽 국인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지방은 대체로 구교입니다. 또 남북 아메리카는 보면 북 아메리카인 미국과 가나다는 대체로 신교입니다. 남아메리카는 대체로 구교입니다.
이 두 지방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문화적인 면에서, 구교를 주로 믿는 나라가 더 앞섰느냐? 신교를 믿는 나라가 더 앞섰느냐? 더구나 민주주의적 견지에서 보아, 민주 정치가 주로 구교를 믿는 나라에서 더 발전되었느냐, 신교를 믿는 나라에서 더 발전되었느냐?, 그것은 여러분의 판단에 맡깁니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한 가지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신교가 많고 구교가 적은 나라에는 신교 자유 문제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자유를 줍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구교가 많고 신교가 적은 나라 가운데는 구교도가 신교를 많이 핍박합니다. 콜롬비아 같은 나라에서는 지금도 많은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스페인에서도 작년에 신교 신학교 하나 있던 것마저 강제로 폐문(閉門)시키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이북에서 오신 분이 많은데 압록강이 본래 백두산 꼭대기 맑고 맑은 천지에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물이 점점 흘러 내려와 여러 곳을 지나서 신의주쯤 와서 보면 물이 대단히 흐립니다. 왜 흐립니까? 오래 흘려 내려오는 동안에 거기에 섞이지 않아야 할 것이 많이 섞였습니다. 기독교가 맨 처음에 갈보리 산상과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맑은 물이 흘러 내려오는 동안, 여러 역사적 과정을 지나오는 가운데, 로마 헬라 시대를 지내오고 암흑중세 시대를 지내오는 중, 여러 가지 섞이지 않아야 좋을 것이 섞인 것입니다. 우리 신교는 본래 근원지인 성경에 돌아가서 맑은 물을 마시는 이러할 신앙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기도하십시다. (一九五八년 十월 二十六일)
Ⅲ-4 감사의 종교 -감사 주일- (데살로니가 전서 五장 十二-二十四절)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五·十八)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恩澤)을 잊지 말지어다』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성경에는 감사 찬송 또는 할렐루야라는 말로 가득히 차 있습니다. 예배의 동기도 감사에 있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 시요 모든 신위에 크신 왕이 시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 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여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우리가 매 주일 이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이와 같이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시요, 우리의 구속자시 요. 우리의 보호자시요, 우리의 목자 시요.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질병을 고쳐주셨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여 주셨고, 우리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셨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특별한 절기도 잘 믿는 사람들이 지켰습니다. 특별한 절기를 지키는 것도 그 깊은 동기는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입니다. 옛날 율법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득한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속하신 그 크신 은총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 절기를 지킨 것입니다.
유월절이 지난 후 五十일이 지나서는 오순절 혹은 맥추절(麥秋節)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매년 특별한 절기로 이스라엘 백성이 지킨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곡식을 통하여 주시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모든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절기를 또 두었는데 그것을 장막 절이라 하여 그 후에 늦은 가을에 지켰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올 때, 먹을 것이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만나는 주셨고, 마실 것이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반석을 통하여 생수를 주셔서, 풍성하신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또한 추수를 다 걷어들인 후에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지금 은혜 시대에 내려와서도 우리가 부활절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상에서 우리의 죄를 속량(贖亮)해 주시고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므로, 그 구속과 구원을 감사하여 그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신 까닭으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이와 같은 절기를 또한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와 같이 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일년 동안 하나님께 받은 바 은혜, 즉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 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또한 특별히 우리 한국 교회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일찍이 七十년 전에 선교사를 보내서 우리 땅에 기쁜 복음을 전파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특별한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물을 드렸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에 특별히 예물을 드리게 됩니다. 그 동시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사람들이 열매 가운데서도 첫 열매를 드렸고, 十一조를 드려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한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성막(聖幕)을 지을 때에 강제로 어떤 물건을 걷어서 성막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노예에서 해방을 받은 것을 감사해서 모든 사람들이 즐겁게 은혜의 보답으로 드리는 물건을 가지고 성막을 지은 것입니다
솔로몬이 첫 성전을 지은 것도 솔로몬의 마음가운데, 모든 백성들의 마음가운데 북 바쳐 올라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써 드리는 물질을 가지고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 후에 제二 성전을 지을 때에도 바벨론 에서 해방을 받아 돌아온 무리가 여러 가지로 궁핍이 많지마는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축복을 감사해서 즐겁게 드리는 그 물질을 가지고 제二 성전을 마친 것을 우리가 다 잘 기억하는 것입니다.
먼 옛날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하는 예배당도 우리가 대부분 피난민으로 왔지마는 이미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시고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것을 가사해서 감격에 넘치는 가운데 드리는 물질을 가지고 이와 같이 큰 예배당을 이룩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예배당만 아닙니다. 세계 도처에 어떤 예배당이든지 그 예배당은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보답하기 위해서 드린 물질을 가지고 다 이루어 놓은 것을 우리가 압니다. 주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 일생을 봉사 생활에 바치는 사람들, 혹은 우리가 전도를 하고, 심지어 외국에까지 복음 전도를 힘쓰는 이 모든 헌신과 봉사와 선교와 사업도 그 동기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하면 보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하면 감사를 드릴까 하는 데에서 나온 것을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아프리카 대륙과 같은 밀림 지대에도 웬만큼 사람이 모여 사는 도회에 가면 반드시 두 세 사람일지라도 거기 선교사들이 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누가 이 사람들로 그런 자기의 고향과 고국을 떠나서 멀리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야수로 아직도 충만한 아프리카 밀림지대로 가게 말들었습니까? 누구든지 강권하여 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각자가 하나님의 받은 바 은혜를 감사해서 어떻게 하면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에서입니다.
내 몸과 마음을 바쳐서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그런 지성 가운데서, 혹은 북빙양(北氷洋) 가까운 추운 곳에, 혹은 남태평양 뜨거운 곳에 밀림 지대에도 다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온 세계 가지를 통해서 자기의 고국과 고향을 떠나서 복음 선교에 종사하는 사람이 여러 만 명에 달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람은 누가 강권해 보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 하나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이와 같은 헌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세계 각처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 수많은 병원, 수많은 학교, 고아원, 여러 가지 자선 사업 기관이 어떻게 되어서, 어떠한 물질을 가지고, 이와 같이 건설되었습니까? 어떠한 임금, 어떠한 대통령이 세납(稅納)을 거두어서 이와 같이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이 은혜에 감격해서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겠다고 하는 생각 가운데서 자원해서 즐겁게 하나님께 바치는 이 물질을 가지고 이와 같이 위대한 사업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늘날도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부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마는 로마서 一장 二十一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고 또한 감사하지도 아니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예수 비유 가운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기억하실 줄 압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어떤 해에 곡식이 잘 되어서 풍년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큰 풍년이 들었지마는 이 부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한 가지 근심만 있었는데 그것은 이렇게 많은 곡식을 어디다 간직할까? 그래서 곡간을 다시 넓게 짓고 그 곡간에 가득히 채워 넣은 다음에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단순히 자기 스스로『내 영혼아 이제는 즐거워하고 이제는 마음놓고 즐거워하고 먹고 마셔라. 여러 해 동안 쓸 것을 내 곡간에 지금은 간직하여 두었다.』라고 뇌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불렸습니다.
예수께서 성전 뜰에 있는 연보 궤에 앉아 계실 때에 어떠한 가난한 과부는 그 가난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격해서 자기의 연명할 것을 하나님 앞에 모두 그렸다고 했습니다. 역기에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너희들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이와 같이 권면했습니다.
우리 신자는 어떻게 감사를 드리는가? 믿는 사람들은 특별히 세 가지 진리를 깨닫습니다.
첫째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 곧 일월성신, 산천초목, 금수(禽獸)어별(魚鼈), 오곡백화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우리 인생에게 그저 준 것을 깨달아 압니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인생의 생명 자체도 생명에 속하는 어떠한 지혜가 있으면, 지혜, 어떠한 재능, 어떠한 지식, 나에게 속하는 재산, 심지어 나에게 속하는 자손까지도 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저 주신 것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본래 이 세상에 왔지마는 오늘까지 목서 입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나에게 그저 준 그 은총이 아닌가? 이 진리를 깨닫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이 진리를 모릅니다
둘째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죄를 많이 지은 것을 깨닫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 죽을죄를 짓는 것을 깨닫습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죄 가운데서 구속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 예수께서는 내 죄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려서 내 죄는 속죄해 주셨습니다. 나는 단순히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 것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그래서 금생(今生)과 내생의 영원한 축복과 생명을 얻게 된 것을 깨달을 때에 우리는 이 구속의 은혜를 언제든지 감사와 감격으로 생각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이 진리를 모릅니다.
한 걸은 나아가서 셋째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로마서 八장 二十八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우리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합동해서 유익함을 이루는 진리를 우리는 깨닫습니다. 요셉은 비록 형제에 의해 팔리어 갔습니다. 종살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외국에서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감옥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합동하여서 마지막에 선을 이룬 것을 우리가 압니다.
사도 바울의 육신 가운데 있던 가시가 찌르고 아팠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를 통해서 오히려 더 큰 능력을 받은 것을 우리는 압니다. 민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이 진리를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범사에 감사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순경에서 감사하는 것뿐 아니고 역경에서도 감사합니다. 평안할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환난 중에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전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나오면서 주를 위해서 매맞을 자격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기뻐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앉아서도 기뻐서 하나님 앞에 찬송을 부른 것입니다. 다니엘 같은 사람은 사자 굴에 꼭 들어가게 되었지마는 그런 가운데서도 감사의 기도를 한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유명한 태양의 노래를 지을 때에 하나님께서 태양을 지어주신 것을 감사하고, 산천초목의 모든 축복을 다 감사하다가, 마지막에는 죽음을 위해서도 감사했습니다.
순교자들이 형장에 나아가면서 감사의 찬송을 부르면서 나아갔습니다.
제가 들으니 전에 어떤 성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땅 위에서 믿는 사람들이 드리는 감사는 하늘에 올라가서 천사들이 그 감사를 받을 때에는 아름다운 장미꽃으로 변한다고. 그래서 천사들이 성도가 드리는 아름다운 장미꽃을 많이 받아서는 하나님 나라 천당의 거리를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영락교회 성도들이 드리는 이 감사가 하늘의 거리를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천당 구경을 한 번 갔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천당간 꿈을 더러 꾼 이들이 계실 줄 알아요. 어떤 분이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아, 그래서 가보니까 어떻게 아름답고 화려한지 알 수 없습니다. 한 곳에 가보니까 넓은 뜰인데, 여러 사람이 모여서 크게 이야기를 하면서 떠드는데 얼른 보니까 싸움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천당 구경간 사람이 이거 천당세도 싸움이 있나 하며 무슨 일인 가고 생각했어요. 그래서는 가까이 가서 구경을 했다고 합니다.
구경을 하니까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어떤 험상스럽게 생긴 사람,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이 주먹을 들면서『여러분, 내 말씀 좀 들어보세요. 제가 먼저 할 말이 꼭 있어요. 들어봐요.』이렇게 떠들어댑니다. 저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나 하고 가만히 보니까, 이 사람 하는 말이『난 본래 여러분이 보는 것처럼 이렇게 험(險)스럽게 생긴 사람이요. 난 본래 어렸을 적부터 나쁜 장난 많이 하고 학생 시대엔 깡패에 들어서 깡패 노릇하고, 그 다음에는 젊어서 허랑방탕(虛浪放蕩)하고 일생 동안 세상 사람이 짓는 죄란 안 지어본 죄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살인이요, 강도요, 별의 별 죄 다 짓다가 아, 그러다가 죽을병이 들었습니다. 아 그래서 죽게 되었습니다.』
『아, 그때 저의 집에는 예수를 잘 믿고 회개한 그런 좋은 아내가 있습니다. 우리 아내가 교회에 가서 교역자를 청했는데 목사와 권사 한 분이 와서 자기에게 권면하는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제도 회개하고 천당에 가라는 이런 전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처럼 일생 동안 이런 죄 많이 진 사람이 어떻게 회개할 수 있느냐고 물었죠. 그러니까 하는 말이 예수와 함께 못 박혔던 살인 강도도 십자가 위에 달려서 회개하고도 천당에 갔는데 나라고 이제 와서 회개할 기회가 없겠느냐고 합디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더군요. 그래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었는데 죽은 다음에 와 보니까 이렇게 화려한 천당에 왔으니 나보다 더 감사할 사람이 어디 있겠소.』이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이요.
그러더니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그거 하나님 은혜 감사하외다. 마는 내 이야기 좀 들어보세요. 나는 이래서 감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난 본래 우리 부모가 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나자마자 곧 세례를 받았어요. 난 물론 몰랐지마는 그 다음에 점점 커서는 주일학교를 늘 다녔습니다. 그리고 또 의례히 十八세 나서는 입교 문답을 하고 이어 교회에 입교했습니다. 그리고 믿는 중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믿는 대학엘 다녔어요. 그리고서는 곧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사업에 취직해서 거저 일 잘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교회에서는 주일학교도 가르치게 되고, 성가대로 노래도 부르게 되고, 얼마 있다가는 집사 직분을 맡으라고 해서 집사 일도 하고, 또 얼마 있으니 장로 직분 맡으라고 해서 장로의 직분을 맡고, 물론 여러 가지 죄야 많이 지었지요. 그 자그마한 죄, 그런 죄를 많이 지었지마는 무슨 큰 죄는 별로 지어보지 못하고 그저 온 집안이 항상 평안한 가운데서, 그저 평화스러운 가운데서 일생을 살다가 내가 지금 천당에 왔으니 나처럼 더 은혜 받은 사람이 어디 있소. 내 생각은 제가 제일 감사를 드려야 될 줄 압니다.』한 사람은 그런 단 말이요.
일 말이 끝나자 어떤 무리의 사람 말이 갑자기 우레 소리처럼 들리면서『우리들의 말을 들어보시오. 우리가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의 말을 들어 보시요.』말하는 것입니다. 다름이 아닙니다. 무리 가운데 보니까 한 사람은 나이 많아도 보이고, 어떤 사람은 젊어도 보이는데, 무리가운데는 일찍이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오래 믿은 사람도 있고, 오래 못 믿은 사람도 있고, 나이가 많아서 믿은 사람도 있는데, 그들이 다 세상에서 살 때에 다만 보통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동안에 큰 핍박이 왔습니다. 큰 핍박이 와서 그들 믿는 사람을 학살하는 그런 경위를 당했는데 그들이 그 때 이상스럽게 한 곳에 모이게 되었고, 한 가지로 꼭 죽을 때를 당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도 믿음을 배반한 사람 없이 믿음을 지키고, 그들이 생명을 바쳤으니 그들의 믿음이 부족하지마는 여기 와서 이렇게 순교자의 면류관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처럼 감사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순교자의 면류관을 보이는데 참 황금빛보다 더 아름다운 면류관을 보입니다. 꿈에 천당 구경을 갔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서야,『아 이거 천당에도 싸움이 있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싸움이 아니고 감사 싸움이구먼,』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영락교회에서는 싸움을 할 바에는 감사의 싸움을 합시다. 오늘 누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참으로 깨달아서, 우리가 다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제일 큰 감사를 드리는가 우리 보십시다. (一九五八년 十一월 十六일)
Ⅲ-5 한 소년의 헌신과 그 결과 (요한 복음 六장 一-十五절)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니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 六·九)
오늘 읽은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예수 님께서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 천명을 먹인 그 유명한 이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적과 과학 문제라든가 또 이적의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문제라든가 이런 문제를 중심해서 생각하기를 원하지 아니합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본래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로 믿을진대, 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과 같이 계신 그 말씀으로써 도성인신(道成人身)하셔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절대이신 줄 우기가 받을진대 그런 문제도 다 구름과 같이 해소될 줄로 생각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이 크신 이적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 각 사람에게 중요한 교훈을 찾아보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이 이적은 뱃세다 들에서 행하여졌습니다. 그 들은 광야입니다. 예수 님의 교훈과 그의 이적을 따라서 많은 무리가 집 없는 광야로 모였습니다. 어른들만 五 천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빈들에서 굶주린 이 백성들을 보시면서 예수 님께서 빌립에게 하신 말씀이『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는가?』빌립이 잠깐 생각하고 대답하는 말이 이 사람들을 조금씩이라도 무엇을 먹이려고 하면 적어도 二백 데나리온 상당의 떡을 사올지라도 오히려 부족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 돈으로 말하면 四, 五 만 환의 떡을 사온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후 조금 있다가 시몬 베드로의 동생 되는 안드레가 어떤 작은아이를 데리고 오면서 하는 말이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왔음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먹일는지 의아해 하면서 여쭈었습니다. 여기 어린아이가 하나 있어서, 아마 자기 어머니가 집을 떠날 때 점심하라고 싸주었던 한 사람 분의 점심인 것 같습니다. 이 아이가 있어서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이렇게 가져다가 주님 앞에 바치는데, 그렇지만 이 조그만 걸 가지고 이 많은 무리에 대해서 무슨 도움이 될까요?
예수 님께서는 그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명해서 그 많은 무리들을 풀밭에 더러는 五十명씩, 더러는 백 명씩 떼를 나누어 앉히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떡을 가져서 축사하시고 그 떡을 때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줄 때에 하나님의 큰 이적이 나타나서 아마 떼일수록 그만큼 많고 그만큼 불어서 五 천명을 먹이고도 오히려 남은 부스러기를 주운 것이 열두 광주리에 달하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이적을 가만히 생각할 때에 몇 가지 진리를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이처럼 굶주린 대중을 먹이는 큰 이적이 먼저 한 아이가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옴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입니다. 먼저 한 소년이 자기의 가졌던 것이 아무리 미약하지만 그것을 먼저 주님께 가져옴으로 이 큰 이적이 실현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계역사를 뒤져보면 역사적으로 모든 위대한 운동,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모든 위대한 운동이 처음에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十六세기의 유럽 역사를 볼 때에 온 유럽을 그야말로 뒤집어 놓은 종교 개혁이라고 하는 큰 운동이 한 수도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十八세기 말엽에 영국에서 노예를 해방하고 노예 매매를 금지하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서 마지막에는 온전히 노예 제도를 없이 하는 그 위대한 인도를 위한 운동이 맨 처음에 윌버소스(Wilbersorce)라고 하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오늘날까지 세계 농촌의 모범 농촌이 된다고 세계적으로 이름을 가진 덴마크의 농촌 개량 운동, 농민 향상 운동이 한 사람, 한 목사 그런드빅이라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회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사람이 많다고 하지만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이렇게 개인들이 모여서 백 명도 되고, 천 명도 되고, 천만도 되고, 삼천만도 되는 것입니다. 태산이 아무리 높다고 하지마는 티 끝이 모여서 태산을 이룹니다. 아무리 태평양 바다에 물이 많다고 하지만 한 방울, 두 방울의 물이 모일 때 태평양의 물결을 이룹니다.
따라서 대륙을 움직이고 이 사회를 개혁하고 이 사회를 옳게 만드는 모든 운동도 결국은 한 사람이 깨닫고 먼저 시작하고, 또 한 사람이 그 사람을 따르고, 개인 개인이 움직이는 가운데 마지막에는 큰 운동을 일으켜서 위대한 일이 이 세계 역사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특별히 이 본문을 보고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항간에서 보통 서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 이거 큰일 났다고 하며, 정치니, 경제니, 문화니, 관청이니, 군(軍)이니, 학교니, 할 것 없이 각계 각층이 속속들이 썩어 들어가는데 이것을 어떻게 할 수가 있나? 이것을 나 혼자 어떻게 할 수가 있나? 이것을 몇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있나?
썩어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알면서, 이것을 막아야 되고 이것을 고쳐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될 줄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그 날 그날 유유 도일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五 천명을 먹이는 이 위대한 기적이 한 어린아이가 먼저 있는 것을 바침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우리 사회에 사람이 많지만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이렇게 모여서 우리의 사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이것을 먼저 깨닫고 자기부터 먼저 옳은 생활을 하고 각기 그 직장에서 싸워 나간다 하면 위대한 이적이 오늘날 二十세기에 대한민국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둘째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한 어린아이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참 무사기한 마음으로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갖다 바칠 때, 이것을 축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하나님께서도 한 개인의 헌신을 축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가 비록 적지만 온전히 헌신해서 그리스도의 손안에 들어갈 때에 그것은 불고 불어서 초(草) 천명을 먹일 수 있는 이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아무리 한 개인일지라도 그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의를 위해서 싸울 때에는 온 우주가 그의 배후에서 그를 후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동양의 옛 성인도『덕불고(德不孤)라 필유인(必有隣)이라.』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덕이라고 하는 것은 외롭지 않다고, 맨 처음에는 외로운 소리로 홀로 부르짖기 쉽습니다. 그러나 덕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외롭지 않아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의를 위해서 싸울 때에, 전 민족 전체의 복리를 위해서 싸울 때에, 진리를 위해서 싸울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축복해 주신다고 하는 이 사실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할빈 역두(驛頭)에서 일본의 정치가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저격할 때에 선언서를 미리 인쇄했다가 뿌렸다고 합니다. 그 선언서 한 절 가운데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나는 절대로 일본의 정치가 한 사람을 암살하는 한 자객으로 알지 말라, 나는 대한민국 독립군의 한 사람으로서 전 일본제국을 향하여 싸우노라.』모든 사람이 다 어찌할꼬 하고 손들고 있을 때에 독립군의 한 사람으로서 전 일본 제국을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일을 하나님께서 축복해서 마지막에 우리 민족에게 다시 독립과 자유의 축복을 허락하여 준 것입니다.
여러분 다니엘을 읽어보시면 거기에 느부갓네살 왕의 유명한 꿈이 몇 있습니다. 한 번은 느부갓네살이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그만 깨어나서는 잊어버렸습니다. 이상한 꿈을 꾸어서 알기는 알아야겠는데……. 그래서 바벨론의 유명한 술객(術客)을 다 모아 놓고 하는 말이『내가 어제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이 꿈을 해몽해 주길 바라노라.』그러니까 술객들이 하는 말이『무슨 꿈을 꾸었습니까?』『그 꿈을 잊어버렸다. 그 꿈까지 생각해 내라.』 이 술객들이『꿈을 말씀하면 해몽하겠지만 그 잊어버린 꿈을 누가 해몽할 수 있습니까?』했습니다. 이거야 속수무책이란 말이오. 그래서 다니엘을 청해왔다고 그러치 않았습니까? 다니엘을 청해서 그 이야기를 하니까 하나님은 특별히 다니엘을 택해서 세운 종인 까닭으로 다니엘에게 그 꿈의 비밀을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 꿈은 다른 꿈이 아니고 꿈에 보니 큰 우상, 하늘에 닿는 우상을 보았습니다. 그 얼굴을 금으로 만들어서 번쩍번쩍 빛이 납니다. 그 가슴과 팔은 전부 은으로 만들어서 역시 광채가 납니다. 그 아래는 동으로 만들어서 역시 광채가 납니다. 그 아래는 쇠로 만들어서 든든히 섰습니다. 하늘에 닿을 듯 한 큰 우상을 보았는데 그 위엄이 어떻게 큰지 감히 사람의 얼굴로 우러러 볼 수 없으리 만큼 위엄이 굉장합니다. 그런데 문득 보니까 저 하늘꼭대기에서 조그마한 돌이 하나 내려옵니다. 그 돌이 내려오더니 조금(많이는 아닙니다) 우상에게 부딪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큰 우상이 와르릉 하면서 넘어질뿐더러 어디에 갔는지 흔적도 없어지고 찾을 수도 없이 되었단 말이요. 그러더니 조그마한 돌이 점점 커지는데 얼마나 커지는고 하니, 온 세계에 가득 차게 커졌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그 돌이 무슨 뜻인지 다 짐작하실 줄 압니다. 다른 말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허위의 우상이 있습니다. 불의의 우상이 있습니다. 악의 우상이 있습니다. 힘이 있어 보입니다. 모든 금, 은, 동, 철은 다 가졌습니다. 우상이 굉장합니다. 그러나 우상이 아무리 크지마는 작은 진리의 돌이 한 번 내려올 때에 진리의 돌에 부딪치게 되면 아무리 큰 우상이라고 하루아침에 일시에 다 부서져 만하여 없어지고 오직 진리만 크고 커서 그 진리가 온 세계를 점령한다고 하는 그 뜻입니다. 장차 이 세상의 모든 불의의 우상, 모든 허위의 우상, 모든 죄악의 우상이 아무리 큰 것 같지만 결국 진리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산산이 부서지고 그리스도께서 최후 승리를 얻는다고 하는 끗입니다.
오늘날 어떤 우상은 굉장히 큽니다. 금, 은, 동, 철이 많습니다. 원자탄도 준비했습니다. 인구가 제일 많습니다. 토지가 굉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허위의 우상이 아무리 커 보이고 든든해 보인다고 하지만 진리의 돌에 부닥칠 때에는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한 개인일지라도 자기가 전적으로 온전히 진리를 위해서, 참 민족을 중심으로 해서, 의를 위해서 가지의 있는 것을 온전히 바치고 나선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축복해서 그를 통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이 점을 생각합니다. 이 소년이 주님께 바친 것은 무슨 별 것을 바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기가 가졌던 것을 바쳤습니다. 자기 어머니가 싸준 그것, 가졌던 것을 바쳤습니다.. 그것을 바쳤더니 주님께서 이와 같이 위대한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슨 별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에게 있는 것을 바치기를 요구합니다. 내게 있는 시간, 내게 있는 힘, 내게 있는 재주, 내게 있는 지식, 내게 있는 돈, 내게 있는 무엇, 그저 내게 있는 것 바치는 것입니다. 다섯 냥쭝 은혜 받았으면 닷 냥쭝 어치, 두 냥쭝 은혜 받았으면 두 냥쭝 어치, 한 냥쭝 어치 받았으면 그저 한 냥쭝 처치 바쳐도 족합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든 것 다 할 수 있지마는 특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가령 우리 사회가 썩어 들어가는, 도의가 부패한 모든 것을 우리가 하루아침에 나가서 다 깨끗하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우선 내 속에 썩어지는 것이 있다고 하면, 이것이야 우선 바로 잡지 못하겠습니까? 이것이야 우선 방지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문필가 칼라일 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우선 네 자신부터 정직한 사람이 되라, 그러면 좌우간 이 세상에 정직하지 못한 사람의 구가 하나는 줄이 않을 것이냐?』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령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데, 二천명 가까운 사람이라 합시다. 만일 여기 앉은 우리가 다 나아가 우리 정계나 관청이나 각 방면에 가서 새로운 어떤 운동을 전개하지 못한다고 하지마는 우선 내 자신 하나만이라도 온전히 바로 잡아서 내가 참된 사람이 되고 내가 정직한 사람이 되어, 내가 바로 한다고 하면, 우선 우리 서울 장안에 二천명 가까운 사람이 옳은 사람이 될 것이 아닙니까? 그만큼 나쁜 사람의 수가 줄 것이 아닙니까?
이 소년이 다른 것을 주님께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드렸습니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해야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 자신에서 시작하고, 그 다음에 내 가정에서 하고, 그 다음에 내 직장에서 하고,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六장을 보면, 이사야가 청년 시대에 성전에 가서 기도 드립니다. 때는 바로 웃시야 왕이 죽던 해입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국제 정국이 험악한 그런 때입니다. 그 때 청년 이사야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문득 이상한 환상이 그 신령한 눈앞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높고 높은 하나님께서 보좌에 않으신 것과 그 앞에 스랍들이 날아다니면서『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그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도다.』계속해서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광경을 볼 때에 이사야는 양심에 질려서 곧 하는 말이『아! 큰 화로다, 내가 죄 많은 사람이, 내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하였구나.』이렇게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에 한 스랍이 제단에서 펄펄 붙는 숯불을 집게로 집어다가 이사야의 입을 지져주면서『이제부터 네 입술이 끼끗하여 졌느니라.』깨끗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있노라니 까 이상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우리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하나님께서 일군을 찾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소리를 들고 이사 야는『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어 주소서』자기가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여러분, 세계 정세가 어지러울수록, 국내 정세가 어지러워 갈수록, 이 때야말로 이 세 가지를 기억할 때입니다.
이런 때에야말로 우리가 신령한 눈을 열어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셔서 아무리 사람들이 떠들고 세상 사람들이 떠들지마는 결국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다스린다고 하는 이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둘째로는, 이와 같은 하나님 앞에 사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내 자신을 깨끗 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내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내 자신이 먼저 새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될 것입니다.
셋째로는, 이런 때 이런 시국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깨끗한 사람을 찾습니다.『우리가 누구를 보낼꼬,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하시며 사람을 찾습니다. 이런 때에 내 사명이 무엇인가, 사명을 깨달아야 됩니다. 기도합시다. (一九五八년 十一월 三十일)
Ⅲ-6 새해의 새 출발 (요한 복음 三장 一-十五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三·三)
오늘 아침, 새벽 첫 주일 예배로 이와 같이 모였습니다. 우리가 다 새해에 새로운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새벽에 대한 염원(念願)도 많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민족적으로 남북의 통일, 민주 대한의 확립, 경제 재건, 생화개선, 문화향상 등 여러 가지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또한 세계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도 세계 평화의 자유, 세계의 승리와 확립, 원자력의 평화(平和)전용(轉用) 또한 우주에 대한 계속 탐구와 정복 등 여러 가지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혹은 가정적으로, 각 방면으로 새로운 염원과 이 염원에 의한 여러 새로운 계획을 세워 출발하는 것이 사실인 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출발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 사람 그대로 아무리 무엇을 계획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새롭게 이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 우리가 새로운 계획 혹은 새로운 출발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새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새 사람은 오직 중생(重生)해서 새롭게 나는 것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금년 새 출발을 중생해서 시작하길 원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친히 말씀하시기를『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내려가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온 것도 출생(出生)을 통해서입니다. 마찬가지고 새로이 나는 길을 통해서만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출석, 새로운 결심, 새로운 노력이 있는 것으로써만 만족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면, 새롭게 나지 아니하면 들어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주님께서 분명히 여기에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 있는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관헌 가운데 하나이며 七十인 공회원(公會員) 중에 하나로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에 대하여도 주님께서 분명히 선언하신 것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거듭나야 새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새로운 계획을 한다고 하지마는 옛 사람 그대로 있어서 무엇을 새롭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는 오직 옛 일의 반복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가정을 생각할 때도 그렇고, 새로운 사회를 생각할 때도 그렇고, 새로운 국가를 생각할 때도 또한 같은 결론을 우리가 얻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중생의 진리는 신비해서 얼른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중생은 우리가 체험할 수는 있지마는 어떠하다고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운 진리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는 신비한 것이 너무 많아서 우리가 일일이 이해할 수 없지마는, 사실로서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자연계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도 우리가 그 현상을 체험하기는 하지마는,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어제도 뜻밖에 많은 눈이 내려서 이 대지(大地)를 덮었습니다. 우리는 경험에 의지해서 물이라는 것이 평상(平常)온도에 있어서는 액체로 있고, 좀더 뜨거운 온도에 있어서는 기체로 화하고, 낮은 온도에 있어서는 어름이 되고 눈이 되는 줄 알지마는, 어떻게 되어서 그렇게 눈이 아름다운 모양으로 승화되는지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생명 세계에 들어와 보면 모든 것이 신비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체험하듯이, 우리가 다 언제든지 음식을 먹지마는, 어떻게 이 음식이 변화해서 윌 속에 들어가면, 어떤 것은 뼈가 되고, 어떤 것이 살이 되고, 어떤 것이 머리칼이 되는지 우리가 분명히 다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같은 음식인데도, 동양 사람이 먹으면 머리칼이 새까맣게 나고, 서양 사람이 먹으면 샛노랗게 나는지 우리가 다 설명할 깃이 없습니다. 우리 한 사람이 먹을지라도 젊었을 때는 머리칼이 항상 새까맣게 나지마는, 五十이 지나면 꼭 같은 음식을 먹을지라도 흰 머리칼이 되어서 나옵니다. 그런 비근한 것도 우리가 체험을 하지만 어떻다고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나는 것도 마찬가지일 줄 압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태 속에 배어서 열 달이 된 다음에 분만합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그 배속에서 체험을 합니다. 하지마는 어떻게 태아가 배속에서 형성되고, 그것이 어떻게 자라고, 어떻게 귀여운 아기로 열 달 후에 나타나는지 그것은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큰 이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사실 육체의 아기가 나는 것도 신비합니다. 하물며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신령한 아기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되어서 중생이 되는지 다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읽어보아도 바람이 불되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성령으로 다시 나는 것도 다 이와 같으니라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사실 바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사실 만질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실 잡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있는 것을 우리가 체험합니다. 바람이 불면 춥습니다. 바람이 불면 나무 가지가 흔들립니다. 바람이 불면 물결이 요동합니다. 바람이 부는 징조를 보아서 바람이 있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마찬가지고 성신을 통해서 역사 하심으로 말미암아 중생 하는 것도 그 결과를 보아서 아는 것뿐이지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혹 어떤 경우에 이와 같은 비유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중생 하는 것도 어린아이가 이 세상에 오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어린 아기가 어두운 모태에서 광명(光明)한 이 세계에 나오는 것과 같이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어두운 세계에서 광명한 세계에로 나오는 것이라고 비유해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마치 유충(幼 )이 변해서 성충(成 )으로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유충이 변해서 성충이 다 된 후에는 고치를 뚫고 광명한 세계로 나옵니다. 속박에서 자유로 나옵니다. 죄의 구속 가운데서 영적 자유를 얻는 곳으로 나오는 것이 곧 중생이라고 비유해서 말하는 사람이 혹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있습니다. 중생은 신비해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중생의 표적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내가 중생 하였는지 하지 못하였는지 스스로 알 수는 있는 줄 압니다.
중생의 표적이 무엇인가? 간단하게 몇 가지로 지적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첫째는 거듭나게 되면 보는 것이 있습니다.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깨닫게 됩니다. 신령한 눈이 열립니다. 중생하기 전에는 하늘과 땅, 산과 바다를 볼 때에 단순히 하늘만 보고 땅만 보고 산만 보고 바다만 봅니다. 그러나 거듭난 심령이 하늘을 보고 대지를 보고 이 대자연계를 볼 때에는 물질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운데 조물주 대 주재의 권능과 그 영광과 그 지혜아 이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를 능히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연만 새롭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물을 보는 방면이 변합니다. 사람도 단순히 전에 보던 대로 보지 않게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를 사람 가운데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과 어떠한 주위에 살든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이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다 한 번은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최후인 죽음을 볼 때에도 그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단순히 암흑과 절망과 공포로만 보였지만 중생한 사람의 눈은 죽음 가운데서도 영원한 소망의 문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달라집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둘째로는, 과연 거듭난 사람은 그 마음속에 전에 없던 기쁨, 전에 없던 화평(和平), 전에 없던 든든한 그런 기분이 있는 것입니다. 유충이 변해서 성충이 된 이후에는 다 노래를 부릅니다. 매미가 노래를 부릅니다. 모든 벌레가 가을에 노래를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과연 거듭난 심령은 그 심령 속에 새로운 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주안에서 즐거워하라. 이런 말이 자연히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나의 평안을 네게 주노라.』그리스도께서 주는 평안을 그 마음 가운데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셋째로는, 비록 좁게 시장이 되지마는 새로운 성품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기가 모태 속에 있을 때에는 그런 것을 깨닫지 못했지마는 이 세상에 나온 지 얼마 후가 되면 곧 젖을 찾게 됩니다. 중생 한 영혼은 전에 사모해 보지 않던 것을 새롭게 사모하게 됩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게 됩니다. 예수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히 기도할 마음이 많이 생기고, 성경을 볼 마음이 많이 생기고, 자연히 주일을 당하면 예배당에 갈 마음이 생기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바로 제가 지난주간에 우리 교회에 잘 출석하는 어떤 자매 님이 기록한 일기를 누가 가져왔기에 보니까, 그 일기 가운데 마음의 영적 체험을 기록하였는데 얼마나 주를 사랑하고 주를 사모하고, 어떻게든지 주님을 뜻대로 해보려고 간절히 원하는 그 소원이 페이지 페이지마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와 같은 심령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중생 한 이후에야 이렇게 새롭게 사모하는 것이 있습니다. 위에 있는 것은 공경하는 그런 새로운 성품이 생기게 됩니다.
전에 제가 미국에서 학교에 다닐 때에 어느 여름 방학에 어떤 미국 부자 집 별장에 가서 일한 경험이 한 번 있습니다. 높은 산 위에 아름다운 호수 가에 좋은 별장을 지었는데 여름에만 와서 삽니다. 거기 가서 한 해 여름 일을 했는데 저 뿐이 아니고 일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흔히 저녁이 되면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놀기도 하고 춤도 추는 그런 곳이 있어요.
어떤 날 저녁에 저 보고도 자꾸 춤추는 곳에, 댄스 홀에 가자고 그런 단 말이오. 그래서 나는 춤도 출 줄 모르고 그런 곳에 도무지 갈 마음이 없노라고, 이렇게 거절하니까, 그 젊은 사람들이 다 간 다음에 그 집주인 부인이 제게 웃으면서 하는 말이『네게는 벌써 네 옆구리에 천사의 날개가 나기를 시작했구나.』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대단히 미안합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 과연 거듭나면 신령한 날개가 나기 시작합니다. 높은 곳을 향해서 올라가려고 하는 마음! 높은 곳을 사모하는 마음! 보다 더 깨끗한 것을 간절히 원하는 성품! 이것이 생깁니다. 벌레가 벌레대로 있을 때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본성입니다. 그러나 그 놈이 변해서 나비가 되든지 벌이된다고 하면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본성입니다.
오해하지 맙시다. 온전히 완성되었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처음 시작이지마는 아무리 적게라고 이 높은 곳을 향해서, 보다 더 깨끗한 곳을 향해서 올라가려고 하는 새로운 성품이 생기는 것입니다. 음악 가운데도 사람을 아래로 내려가게 만드는 음악이 있습니다. 반면에 사람의 심령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음악이 있습니다. 반면에, 심지어 친구간에도 나를 끌어내리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 반면에 나를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요소와 친구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성품이 생기를 것입니다.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대체로 중생 한 사람의 그 특색을 간단히 세 가지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순결, 둘째는 겸손, 셋째는 사랑. 그런데 이 중생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본래 이 난다(生)고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실 때에도 내가 이 세상에 오겠다. 이렇게 생각해서 나오신 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 마음대로 못합니다. 그저 이 세상에 왔으니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중생도 내가 중생 하려고 해서 중생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온전히 성신의 역사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인 까닭으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언제든지 중생이 있을 때에는 두 가지 조건이 따라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 복음 一장 十二-十三절에 기록한 바와 같이『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 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서 난 자들이니라.』언제든지 중생이 있는 곳에는 먼저 그 심령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믿고 영접하는 그 사람에게 중생이 따르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또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도『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먼저 예수를 내 구주로 온전히 믿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그러한 심령에게 하나님께서 성신을 통해서 중생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는 것도 회개하는 것도 내 힘만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신을 주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믿기를 원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게 합니다. 다만 내가 성신의 역사를 거스르지만 아니하면 내가 주를 영접할 수 있고, 내가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 줄 생각합니다. 새해에 새 출발을 바르게 하려고 하면 오직 중생으로 새 사람이 되어서 이 새해를 새로 시작해야 되겠습니다. 이 중생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인데 예수를 중심에 영접하고 죄를 회개하는 그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인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의 생명을 스스로 돌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알지 못하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또 여러분 자신도 어느 정도까지 짐작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이 새해 아침에 우리 하나 하나가 마음속의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온전히 거듭 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一九五九년 一월 四일)
Ⅲ-7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생활 (마태복음 十二장 一-八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十二·六)
당시 유대 사람들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크게 생각한 것이 셋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전, 도 하나는 안식일, 그리고 율법, 사실 이 세 가지는 다 위대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올시다. 여기에 하나님께 제사하는 제단이 있고, 성소가 있고, 지성소가 있고, 본래 하나님의 법 궤까지 하나님의 성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 이후로부터 여러 백년 동안 성전이야말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신적 중심지가 되어 내려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이 멀리 바벨론에 포로로 갔다 돌아온 후에도 제일 먼저 재건한 것이 성전이요, 애 헤롯이 정권을 얻은 이수에 유대 사람들의 인심을 사기 위해서 제일 먼저 착수한 사업이 이 성전을 신축한 일입니다. 성전은 사실 큽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보다 더 크시다 는 것입니다. 성전은 한 상징이올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실체입니다. 선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어서 하나님께 속하는 점이올시다.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계셔서 삼위일체의 한 분이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입니다. 성전도 크지마는 그리스도는 더 큽니다.
안식일도 역시 그렇습니다. 안식일은 심히 중한 규례(規例) 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가운데 축복을 받고, 안식일을 지키는 가운데 신앙 생활이 유지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역시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보다 더 크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안식일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뜻대로 지켜야 하고 단순히 노는 것으로만 지키지 말고 하나님과 인류를 봉사하는 것으로 지켜야 될 것입니다.
율법은 더욱 그렇습니다. 율법이 얼마나 위대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주셨고 이 율법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천여 년 동안을 살아왔고 이 율법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고 믿는 사람들의 생활 규범이 그 속에 또한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는 율법보다 더 크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고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지극히 높은 지상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장 四十一-四十二절에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요나 보다 더 크신 이가 여기 있느니라.』요나 나 어떤 선지자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는 크십니다. 세례 요한도 그의 신 들매 풀기를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가 여기 계십니다. 솔로몬이 아무리 큰 영광으로 갖은 영화를 다 누렸다고 하지마는 솔로몬보다 그리스도는 더 크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지상의 주이십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이 큰 것들과 지극히 큰이를 분별할 줄 아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입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들은 이 점을 분별할 줄을 몰랐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이것을 분명히 분별할 줄을 알아야 우리의 신앙 생활을 바로 하여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오늘날 생각해 보면 여러 교파로 갈려 있습니다. 이 교파들이 다 중요합니다. 장로교회나, 감리교회나, 성결교회나, 루터교회나, 침례교회나, 이 교파들이 다 중요하고 큽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그리스도가 큰 이 모든 교파보다 더 크신 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교파를 위하여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교파는 다 각각 신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로교는 웨스트민스터 신조, 감리교는 알메니안 신조, 그 밖에 다른 교파는 또 그들의 여러 가지 조금씩 다른 신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신조를 다 귀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신조보다도 더 크십니다. 이 모든 신조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노력의 결정밖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 모든 교파에 여러 가지 전통이 있습니다. 장로교는 장로교의 전통, 루터 교는 루터 교의 전통 등, 이 모든 전통을 다 귀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또한 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그리스도는 이 모든 전통보다 더 크십니다.
여러 가지 신학 사조가 있습니다. 칼빈 신학, 루터 신학, 자유 신학, 보수 신학, 요사이 신정통 신학 등, 이 모든 신학은 다 중합니다. 우리 교회에 신학이 부흥되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이 어떤 신학보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크시다 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가 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이 성경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더 귀하고 큰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성경보다도 더 크십니다. 성경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기록된 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신앙의 중심은 언제든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석가의 교훈을 믿고 그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회회교는 마호멧의 교훈을 믿고 그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유교는 공자나 맹자의 교훈을 믿고, 그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믿지마는, 그리스도의 교훈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자신을 믿고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신조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신학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럼으로써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인도하는데 한 방편이 되는 것이고 우리 신앙의 절대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 이 요한 복음을 다 쓴 후에 二十장 마지막 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이렇게 요한 복음을 기록한 것은 목적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이 이 책을 통해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또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복음이 처음 전파될 때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도신경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경도 없었습니다. 다만『주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이렇게 전도한 것뿐입니다.
주님 자신이 이 진리를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아니하면 아버지에게로 올 사람이 없으리라.』그리스도 자신이 길입니다. 하늘가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입니다.『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자기 자신이 곧 생명의 양식이며 이 생명의 양식을 먹는 사람이라야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주님 자신이 생명수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내가 세상의 빛이로다.』그리스도 자신이 빛입니다.
교훈만이 빛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빛입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니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그리스도 자신이 포도나무입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으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 있을 곳을 가서 예배하리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으로 영접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하여 명한 것을 그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그리스도 자신이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 신앙의 대상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꼭 그리스도만을 중심 하여야만 됩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하여 여러 사도들이 어떻게 신앙으로 응답하였는가 들어보세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주의 영생의 말씀이 주께 계시매 우리가 뉘께로 가리이까』도마가 대답하여 말하기를『나의 주시면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도마가 친히 손으로 주님의 옆구리를 만져보고 예수의 상한 손을 만져 본 후에 예수의 부활하신 것을 확실히 믿게 될 때에 이와 같이 고백했습니다.『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여러 편지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기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혓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나니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능력 주시는 자는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나의 의뢰하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것을 확신하노라.』사도 요한 이 하는 말이『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나니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나니라.』
우리의 신앙이 어떠합니까? 우리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입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이 그리스도를 믿고, 이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이 그리스도를 순종하고, 이 그리스도와 같이 살며, 이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이 그리스도 교 신앙 생활입니다.
이렇게 우리 신앙이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면 자연히 곁길에 나갈 염려가 없습니다. 무슨 이상한 것이 있다고 따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무슨 주의나 사상이 나타난다고 따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무슨 이상한 이야기를 따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이상한 의복을 입고 다닌다고 따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꼭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이에게는 곁길로 갈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 전에 어떤 잡지를 보니 문명하다는 미국 같은 나라에도 어떤 사람이 예수 님 입던 그 의복 비슷이 만들어 입고 다녔습니다. 수염을 깎더라도 그림에 나타난 예수 님 수염 모양으로 깎고 머리도 그 비슷한 모양으로 깎고 돌아다니며 자기가 메시야 라고 선전을 하며 다니니까 참 메시야가 왔다고 여자와 잠자들 가운데서도 따라 다니는 사람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 제자들이라 하는 몇 사람을 정해서 제자들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기는 지혜와 지식과 진리와 생명의 근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말은 대단히 좋습니다. 얼마쯤 따라다니다 보니까 이 사람이 공수표도 더러 써냈습니다. 더욱이 남녀 관계가 깨끗하지 못한 것이 사살로 나중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제자 가운데 두 사람이 분해서 이렇게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놈은 처벌해 달라고 검사국에 고소를 했지마는 검사국에서 미처 처리를 하지 아니하니까 이 사람들이 참지 못해서 마지막에 다이너마이트를 四十八개나 가지고 가서 그 사람이 있는 데를 폭발시켜서 메시야라 하는 사람과 따라다닌 사람 할 것 없이 모조리 폭사해 죽였다는 잡지의 기사였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우리가 중심해서 살면 곁길로 나갈 염려가 없습니다. 또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면 믿는 사람들끼리 더욱 가까워 질 것이요 더욱 화평하게 지낼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오면 올수록 믿는 사람들끼리 화평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은 신앙 생활 뿐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중심을 잃지 아니하여야 됩니다. 공부하는 데도 중심을 잃지 아니하여야 됩니다. 오래지 않아서 입학 기가 오겠지만 해마다 입학 기에 신문지상에 나는 것은 어떤 학생은 시험을 치다 낙제를 해서 음독을 했다. 어떤 학생은 시험에 합격했는데 등록할 돈이 없어서 등록금을 내려고 강도질을 했다고 합니다. 살려고 공부합니까, 공부하려고 삽니까? 무엇 하려고 공부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중심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다 염려하는 경제를 가만히 볼지라도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중심을 잃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당이 큽니까, 나라가 큽니까? 정당이 국가를 위해서 있습니까. 국가가 정당을 위해서 있습니까? 중심을 바로 찾고 정치를 해야 나라가 바로 잡힐 겁니다. 속담에 쥐잡으려 하다가 독 깨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아가다가는 우리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될는지 염려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범사에 중심을 잃지 아니하여야만 됩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더욱이 중심 되는 그리스도를 언제든지 바라보고 언제든지 그리스도만을 향해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들으니 저 알프스 산 올라가는 어떤 길에는 조금 올라가면 어떤 선지자의 석상이 있다고 합니다. 혹 아모스, 혹 이사야, 혹은 예레미야 그런데 석상마다 어디를 가리키는고 하니 위에를 가리킵니다. 조금 올라가면 또한 다른 선지자의 석상이 있는데 그 선지자도 역시 우에를 가리킵니다. 그 다음에 조금 더 올라가면 또 다른 선지자의 석상이 있는데 그 선지자도 역시 손가락을 위로 가리킵니다. 그래서 여러 선지자의 지도하는 그 길대로 끝까지 올라가면, 마지막에, 하나 높은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그 높은 봉우리 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석상이 있다고 합니다.
과거의 모든 선지자의 손가락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모든 천군 천사가 어린양을 향해서 숭배하고 찬송을 드리는 것이올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신앙의 목표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서 금년에 신앙 생활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큰 축복을 받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一九五九년 一월 十八일)
Ⅲ-8 그리스도의 마음 (마태복음 十一장 二十五-三十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도 내게 배우라.』(마 十一·二十八-二十九)
이 말씀은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부르짖는 말씀이올시다. 이 말씀 가운데서 오늘 아침에는 다만 한 구절만 생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생을 아프리카 대륙을 위하여 바친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밀림 지대에서 홀로 기도하다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소식이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영국 조야(朝野)의 여론이 이와 같은 인물을 아프리카에 그냥 묻어 둘 수가 없으니 아무래도 그 유해를 영국 본국으로 운반하여 다가 영국의 모든 귀한 사람들이 묻히는 웨스트민스터 예배당 안에 묻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정부에서는 특별히 사람을 파송해서 리빙스턴의 유해를 운반하려고 할 때에 그냥 전부 다 가져온 것이 아니고 그 유해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서 그 심장만은 그이가 일생 동안 제일 사랑한 아프리카 대륙에 묻은 것입니다.
사람에게 제일 귀한 것은 그 마음이올시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떠하였는가? 사람의 생각으로 다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단순히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그대로 오늘 아침에 잠깐 동안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하시기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하셨습니다. 온유(溫柔)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그 뜻을 잘 압니다. 아마 따스하고 부드럽다고 하는 뜻인 것 같습니다. 예수 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위에 올라오실 때에 성신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그 머리 위에 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둘기 모양으로 임한 것은 순결한 뜻도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역시 온유한 성품의 표시도 그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속에는 온유한 성신이 충만히 계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 님을 향해서 증거 하는 말이『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대속의 깊은 뜻이 있지마는 특별히 어린양이라고 하는 그 모습 가운데는 온유한 모습, 온유한 마음이 또한 포함되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이사야 五十三장에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보면 양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입을 열지 아니함과 같이 잠잠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마음의 표현인 줄 생각합니다.
또한 어떤 곳에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한다는 말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심정을 기록한 말씀인 줄 생각합니다.
옛날 믿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장사해둔 지하 묘지에 남아 있는 옛날 초대 시대의 기독교 예술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그릴 때에는 흔히 목자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 목자는 어린양을 자기 가슴에 안고 혹은 어린양을 자기 어깨에 메인 모습을 그린 그림이 제일 많습니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 얼마나 온유하였나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실이올시다.
그래서 제자들의 생각에는 어린아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이 시끄럽게 보였지마는 예수 님께서는 그런 때에, 어린아이들이 예수에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하시며 대기 천국에 있는 자들이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어린아이들을 영접해서 친히 안으시고 그 머리에 안수하시고 축복을 하여 주신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문둥이들이 와서 예수 님에게 구하는 말이 그를 불쌍히 여겨서 어루만져 주시오 하는 요청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도 예수 님께서는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친히 손을 내 밀어서 더러운 문둥병 자를 어루만져서 고치어 주신 것입니다.
또한 한 번은 주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두 소경이 멀리서 소문을 듣고 주님께 와서『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부르짖은 일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같이 따라가고 분주한 때인지라 제자들은 잠잠 하라고 오히려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그들을 오라고 하여 그들의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주여, 보게 하여 줍소 서.』하고 간구 할 때에 그들의 눈을 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대중을 보실 때에 목자를 잃어 유리하여 흩어지는 양과 같이 보시고 민망히 여기셔서 탄식하시는 말씀이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기도하여 일군을 더 많이 보내게 해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도 그리스도의 온유한 심정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우는 양을 보시고, 예수 님께서도 같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 님께서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보시고『예루살렘아!』감탄하시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린 일 등 모든 것을 우리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심정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 님께서 붙잡히실 때에 베드로는 용감히 칼을 빼어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그 칼을 그의 칼집에 도로 넣으라고 명령하시면서, 대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경계하고, 조용히 그가 체포를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법정에 끌려 다니면서 많은 곤욕을 보셨지마는, 베드로가 친히 베드로 전서에 기록한 대로 그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무한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말씀은 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온유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온유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강하고 담대하였습니다. 이것은 죄를 용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모든 가련한 민중들을 긍휼히 여기시던 오직 그의 온유한 마음과 성품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편지할 때에 그리스도의 온 유와 관용으로써 너희를 권하노니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온유는 성신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산상보훈을 가르치실 때에,『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할 것이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온유한 이가 마지막에는 이깁니다. 온유한 자가 마지막에 이 땅을 차지합니다. 마음이 온유한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온 세상을 차지하실 것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될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순복(順服)합니다. 온유한 자는 모든 것을 다 잘 참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줍니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악을 선으로 갚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도 향기롭게 한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온유한 사람은 자기에게 손해를 입히는 사람에게도 여전히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여러 가지 작품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추운 날 예배당 근처에서 떨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자기의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이 사람은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이 분을 도와주기 위해서 데려왔지마는 그 부인은 성가시니까 이 분을 친절하게 대하지 아니하고 냉하게 보고 불친절하게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데려온 사람은 어른이었는데 이상스럽게 점점 줄어지고 쪼그라져서 그 사람이 적어졌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주인이 민망해서 부인에게 잘 말해서 다시 친절히 그이를 애하고, 좋은 말을 하고, 좋은 음식을 대접하니까 적어졌던 사람이 점점 다시 커지고 아름다워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천사였다고 합니다. 천사는 항상 온유한 기분과 사랑이 충만한 하늘에 있던 분이 되어서 그렇게 냉정하고 조폭한 분위기 가운데에서는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온유와 사랑의 분위기 가운데 있게 될 때에 다시 크고 아름다워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의 심령이 그렇습니다. 온유하고 사랑의 분위기 가운데서 심령이 바로 자랍니다. 아이들도 심령의 분위기가운데서만 그 심령이 원만히 자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유한 마음을 배웁시다.
그 다음에는 「겸손하니」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또한 겸손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일생을 가만히 돌이켜 생각하면서 그의 생활 가운데 조금이라도 교만하다 던 지 또는 자기 것을 나타내 보인다 던 지 하신 일이 있었는가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마는 이사야 五十三장에 이 메시야에 대한 시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니』아마 자세히 알 수 없지마는 그 얼굴 생김과 풍채도 그다지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예수 님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하나도 교만한 자취가 없습니다.
우선 나실 때에는 마구간에서 나셨습니다. 그것보다 더 겸손할 수 있습니까? 나셔서 처음 누운 보금자리가 말구유올시다. 거기에서 더 낮아질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마는 예수 님이 나신 그 자리에 주후 四세기에 세운 굉장히 큰 예배당이 지금까지 내려오는데, 그 예배당의 특색은 안에 들어가면 큰 예배당이지마는 처음에 들어가는 문은 아주 좁고 낮습니다. 아마 넉 자 밖에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허리를 굽히고야 그 예배당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인도하는 사람에게 왜 문을 그렇게 좁고 낮게 만들었느냐고 물으니까 대답하는 말이, 거기 들어오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오라고 그렇게 낮게 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나셨습니다.
그는 일생을 목수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은 보통 예수 님을 목수의 아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는 말을 주님께서는 들으셨습니다. 그는 친히 목수의 일을 했습니다. 아무개의 아들 목수라고 하는 이름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주후 四세기 이후에 온 로마 제국이 기독교 화된 다음에 줄리안이라는 사람이 황제가 된 이후에는 기독교를 반대하고 핍박까지 했습니다. 한 번은 전장에 나가서 바사에서 전쟁을 하면서 어떤 예수를 잘 믿는 장군에게, 기독교를 비웃으면서 하는 말이『그 당신이 공경하는 주라고 하는 목수는 요즈음 무엇을 하는고?』하는 비웃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때 그 기독교인인 장군이 공손히 대답하기를,『자세히는 알 수 없지마는 우리 목수 님께서 아마 대왕을 위해서 관을 짜시는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안 되어서 그 왕이 전장에서 부상을 입어 죽었습니다. 과연 관을 짜던 중인가 봅니다.
예수 님이 젊어서 한 생활 가운데 자랑할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는 친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님처럼 가난한 생활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일생 동안에 사귀신 사람들을 보면 어부와 농부 등 보통 무식한 사람들하고 사귀셨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요즈음 어떤 사람처럼 교제하기 위해 세력 있는 사람이나 어떤 사람에게 찾아 다녔다는 말은 없습니다. 항상 예수 님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예수 님을 비웃었습니다. 그러한 비웃음을 받으셨지마는 또한 그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행동을 좀 달리 하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일입니다. 그 때에는 제자들이 앞뒤로 따라 가면서 종려나무를 들고 호산나를 부르며 들어갔으니까 좀 보이게 들어가시지 않았습니까? 제일 조그만 유대 나라 나귀였습니다. 그 나라 나귀는 우리 나라 나귀보다 더 적습니다. 그런 나귀 가운데서도 보통 나귀가 아니고 나귀 새끼였습니다. 어쩌면 발이 땅에 닿았는지도 모릅니다. 겨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였던 것입니다. 겸손한 와이올시다.
그러다가 마지막 저녁을 잡수실 때에 제자들은 누가 크냐 하는 토론이 나서 서로 발을 안 씻어 줄 때에 예수 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만찬 후에는 많은 멸시와 형벌을 받으시고, 가장 추한 죄인이 받는 악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 님은 겸손하신 분이올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二장 五절 이하에『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이와 같이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겸손한 분이올시다. 항상 겸손하라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리새인이 가서 기도할 때에는 자기의 자랑만 했습니다. 그러나 세리가 가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서 겸손히 기도할 때에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五十七장 十五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고 무시무정한 곳으로 거처를 잡으셨지마는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같이 계셔서 겸손한 심령을 부흥하게 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사람아, 주께서 너희에게 선한 것을 보인 것이 아니냐? 곧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냐?』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 장로는『주 앞에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가운데 얼굴이 빛났다고 하는 분이 세 분 있습니다. 모세와 예수와 스데반이올시다. 이 세 사람이 모두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기록하기를, 그리스도인이 구할 덕은 첫째로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도 나는 배우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온유하고 겸손하시므로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과거에 죄를 많이 지었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나올 수 있고, 무식한 사람도 나올 수 있고 어떠한 허물이 있는 사람도 다 나올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 번 아프리카에서 한 회회교 예배당에 가 보니까 거기서 하는 말이, 그 예배당에는 남자만 들어 올 수 있지 여자는 들어 올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 님의 교회는 여자들도 다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을 잘 배워야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가만히 보십시오. 그저 학생들이 운동하느라고 모였다가 싸움하고 헤어집니다. 길거리에서 학생들이 칼부림을 하고 싸우고 심지어는 학생간에도 살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요 며칠 전에 신물을 보니까 심지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손에 좀 스쳤다고 그것 때문에 말다툼이 일어나서 나중에는 그 사람을 때려서 죽였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위협하고 실험 기를 깨뜨려 버리는가 하면 선생들은 학생들을 고소합니다. 오늘날 신문에 나는 성명서니 해명서니 하는 것들을 보면 모든 강퍅한 표현의 말로 쭉 납니다. 무도하고 무법하고 무례하고 아주 강퍅하고 포학(暴虐)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 충만한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우리 민족이 배워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에 사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느 사회에 가나, 어떤 자리에 가나, 아무리 강포(强暴)와 포학이 많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한 마음과 정신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 채워야 되겠습니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一九五九년 一월 二十五일)
Ⅲ-9 생의 황금율 (마태복음 七장 一-十二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七·十二)
이 말씀을 문자대로 다시 번역해서 읽으면 이렇게도 읽을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무엇에든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하기를 원하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하여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올시다. 우리 생의 황금 율법이라고 이와 같이 흔히 말합니다.
전에 유대교에 힐렐이라고 하는 유명한 랍비 선생이 있었는데, 이 선생에게 어떤 젊은 사람이 와서,『선생님, 제가 외발로 서서 있는 동안에 율법과 선지자가 가르치는 모든 교훈을 간단히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이런 요구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에 이 힐렐이라고 하는 선생이 조금 생각하더니 한 마디로 하는 말이『네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서 하지 말라. 이것이 선지자의 율법의 교훈의 총 대지니라.』이와 같이 말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헬라 철학자 가운데 플라톤과 같은 사람도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간단한 원칙을 말한다면 이와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동양의 성현으로 우리가 다 존경하는 공자 님께서도 거의 꼭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기소불욕을 물시여인』(己所不欲勿施與人)이라고, 내가 하고자 아니하는 바를 사람에게 베풀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회회교의 교훈 가운데도 이와 비슷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이 교훈은 지금 모든 교훈보다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선생들은 흔히 소극적으로 가르쳤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 다시 말하면 내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이와 같이 소극적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진리를 가르치실 때에 적극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기를 원하는 대로 그대로 먼저 다른 사람에게 행하라고, 즉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무엇에든지 남을 먼저 대접하라고 적극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원칙은 옳은 생활의 본질은 악을 제거하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을 행하는 데 있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소극적 권면대로 하면 이 세상에 악한 일이 물론 적어질 터이니까 대단히 좋습니다. 그러나 선한 행실에 대해서는 별로 권면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황금률은 적극적으로 선행을 하라고 이와 같이 권면한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것은 주님께서 전에 알지 못하던 진리를 새롭게 가르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율법과 선지가가 이미 가르쳐준 말씀이올시다. 사실 이 교훈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대로 특별 계시에 속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 진리는 특별 계시 이외에 보통으로 자연 계시라고, 일반인간의 양심을 통해서 나타내어 주신 도덕적 원리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뿐입니다.
이 황금률이야말로 인륜과 도덕의 진수올시다. 따라서 인간 생활의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의 실제 행동의 원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간단한 말씀을 감간 동안 묵상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이 뜻을 좀 더 잘 깨달으려고 힘쓰려면 먼저 이 말씀에 대한 오해와 역용을 피하여야 되겠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고 예수 님께서 교훈 하시니까, 가령 여기에 어떤 아편 중독자가 있어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아편으로 대접하는 것이 제일 좋으니까, 다른 사람에게도 아편을 많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전혀 잘못된 오해올시다.
또 어떤 술 잘 먹는 사람이 가만히 있다가 자기는 술대접 받는 것이 제일 좋으니 나도 누구든지 만나면 술대접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어떤 놀음 좋아하는 사람이 이 말씀을 보다가 누구를 만나든지 놀음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데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한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을 향해서 하는 말인고 아니 적어도 자기가 자기를 무엇으로 대접하여야 될는지를 바로 아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양심이 있는 사람을 향하여, 양심이 마비되지 아니한 사람을 향해서 하는 말씀이올시다.
자기가 아편을 좋아하는 것은 자기 자신도 자기를 바로 대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귀한 몸에다 알코올을 부어 넣어서 술독을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자신을 바로 대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이 황금률을 이대로 실행하려고 하고 이 이치를 깨닫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내가 먼저 신앙적, 양심적 인물이 되어서 선악을 바로 분간해야 합니다. 내가 내게 대접을 바로 할 줄 아는 고결한 인격의 소요자가 되지 아니하면 이 황금률을 우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와서 아첨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첨하는 것이 듣기 좋거든요. 그러기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이놈이 아첨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듣기 싫지 않거든.』아첨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늘 아첨하여야 하겠습니까?
이 황금률을 이해하려고 하고 이것을 실행하려고 하는 사람은 적어도 양심적 인물로서 자기 자신이 어떠한 대접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이 황금률대로 살려고 하면 내 자신을 먼저 수양해서 내 자신을 바로 대접할 줄 아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가 이렇게 양심적 생활을 하고 자기가 수양을 해서 고상한 인격 생활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도 자기가 대접을 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할 수 있는 생활을 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둘째 단계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또한 다른 사람의 사정에 대한 이해와 동정심이 필요합니다. 내가 내 자리에서 무슨 대접받기를 원하는 것보다도 내가 그 자리에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그 자리에서 무슨 대접받기를 원할지를 생각해서 다른 사람에게 대할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구약에 여러 선지자들이 있지만 특별히 에스겔은 자기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 포로 사이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 아주 역경에 처해 있던 선지자입니다. 포로로 멀리 바벨론의 그발하수가에 잡혀가서 그 불행한 가운데 있는 자기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에, 이 에스겔은 먼저 그들과 같이 그발하수가에 가서 그 포로들과 같이 이래 동안을 있었습니다. 같이 생활하며 그들의 고독을 같이 체험하고 또한 그들의 사정을 이해한 연후에야 하나님의 더 큰 역사를 포로 가운데서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의 자리에 같이 앉아서, 그러한 처지에서 생각되는 모든 것과 그 처지에서 요구되는 모든 것을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에게 받은 귀한 말씀을 힘있게 그들에게 가르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이론적으로 내가 남에게 대접을 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야겠다고 말하기는 쉽지마는, 실상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것은 내가 그 사람의 자리에 있으면 그 자라에서 내가 무엇이 필요할지를 능히 상상력으로 생각할 수 있고 따라서 그들의 정지를 이해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젊었을 때에 뉴 올리안즈라고 하는 노예시장에 가서 구경한 일이 한 번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미국에서 흑노(黑奴)를 그냥 노예로 사용할 때이었음으로 노예시장이 있어서 흑노들을 다른 상품처럼 흥정해서 팔고 사고하는데 이 광경을 링컨이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한 가족인데 아버지는 딴 집으로 팔려가고, 어머니는 또 딴 집으로 팔려가고, 또 큰딸을 다른 집으로 종으로 팔려 가는 비참한 광경을 그가 보았던 것입니다.
비록 얼굴은 까맣고 공부는 하지 못했지마는 인정이야 다르겠습니까? 서로 갈라 저 따로 갈 때에 목을 껴안고 울며 떨어지지 아니하려고 하나, 애통 가운데 할 수 없이 온 가족이 분산되는 광경을 링컨은 친히 목도했습니다. 누구나 그런 광경을 볼 때에 동정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동정을 더 할 수 잇느냐 하면,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하면 내가 어떤 느낌을 가지며,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하면 어떤 대접받기를 원하겠는지를 생각해 보는 사람일 것입니다.
링컨은 젊은 시절에 이러한 광경을 보고 언제든지 그 광경이 자기의 머리에서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내가 저 자리에 있으면 어떤 대접을 받기 원하겠는가? 그 대접을 이 흑노 들에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그와 같이 하려고 하면 부득이 저 사람들도 나와 같이 자유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고 하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처지에서 어떤 대접받기를 원하겠는지 그 대접을 생각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대접할 수 있는 그러한 동정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도 八十노령에 저 아프리카의 커메른 지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슈바이처 박사가 본래 독일에서 대학교 교수의 자리를 내어놓고, 자기가 다시 의학을 공부하고 자기 아내로 하여금 간호원 공부를 하게 해서 직접 자기들이 아프리카로 일하려 간 그 깊은 동기 가운데도 이와 같은 생각이 그 머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어떤 날, 우연히 거리에서 조그마하게 만들어 놓은 흑인 동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흑인 동상을 통해서 그의 눈에는 아프리카에 수없이 많은 흑인들을 연상할 수가 있었습니다. 벌써 수 백년 동안 아프리카 발견된 이후에 우리 백인들이 저 흑인에게 어떤 대접을 하였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얼마나 많은 학대를 했고, 얼마나 많은 압박을 하였고, 얼마나 많이 상품처럼 이용을 하였고, 착취를 했는지, 백인의 한 사람으로써 얼마나 가슴이 무거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라도 저 흑인들이 받기 원하는 대접을 하여 보겠다는 결심 가운데서, 좋은 자리를 다 내어놓고 직접 그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 사람들의 상처를 만져 주고, 병을 고쳐 주는 그 사업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기 원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여라 하는 이 주님의 명령을 순복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런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잘 아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생각할 때도 역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불한당을 만났습니다. 인사 불성이 되었습니다. 레위 사람과 제사장이 그를 보고 그냥 지나갔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지나가다가 차마 그냥 지나가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레위 사람과 제사장과 사마리아 사람의 차이를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어느 모로 보든지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이 먼저 이 사람을 구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보다 오히려 사마리아 사람이 이 사람을 구해 주었습니다.
아마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지마는, 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사마리아 사람은 좀더 외로운 사람이올시다. 유대 사람 사이에서 외로운 사람이올시다. 외로운 사람인 까닭으로, 저렇게 어떤 사람이 외롭게 불한당을 만나서 넘어져 있게 되었는데, 만일 자기가 그렇게 혼자 다니다가 그런 형편을 당했다고 하면, 자기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대해서 무엇을 해주기를 바랐겠는가 하는 점이 있어서 이 사마리아 사람이 레위 사람이나 제사장보다 더 크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다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의 정지를 동정하는 것이 어떤 누구보다 더 강했던 모양입니다. 이것이 이 사마리아 사람으로 하여금 사마리아 사람이 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 황금률을 실행하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앉아서 그 사람의 정지를 상상해 보고 그 사람의 성질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마음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일생을 통해서 이 원리대로 사신 오직 한 분인 줄 생각합니다. 그는 사람의 정지를 알기 위해서 자기가 친히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자기가 친히 고생을 당하셨습니다. 자기가 친히 주림을 당하여 보셨습니다. 자기가 친히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그 때 사람들과 꼭 같이 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이와 같은 죄인의 자리에 앉아 이 죄인들을 구원하는 길을 오직 십자가밖에 없는 까닭으로 자기가 십자가를 사양하지 않고 강도와 같이 십자가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황금률을 실행하려고 하면, 둘째로는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정지를 내가 친히 살펴서 그 자리에서 남의 요구를 깨달아 아는 그 마음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내가 양심적 생활을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분간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자리에 앉아서 그 사람의 정지를 이해할 줄 아는 그러한 사람은 자연히 이 황금률에 가르치는 이대로 누구보다 더 가까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단계로 이와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의 특색은 무엇이겠는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마는, 그저 간단하게 네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첫째로 이런 생활을 하게 되는 사람은 아마 누구보다도 공의와 공평을 힘쓸 것입니다. 공의라고 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마땅히 줄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명예에 대해서나, 그 사람의 지위에 대해서나, 그 사람의 물질에 대해서나, 절대로 차별이 없고 무리한 것이 없이 공평과 공의를 힘쓸 것입니다.
둘째는 누구나 실수하는 것을 우리가 다 압니다. 나도 실수하고 다른 사람도 실수합니다. 내가 실수하고 내가 죄를 지을 때에 우리는 자연히 다른 사람이 내게 대하여 자비로 대해 주고, 인내로 대해 주고, 관용으로 대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럼으로써 이런 사람의 생활은 자연히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특별히 실수하는 사람, 죄를 짓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든지 그 실수를 고치고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자비한 태도와 인내의 태도와 관용의 태도를 가지도록 힘써야 될 줄 생각합니다.
또한 셋째로는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같이 사랑의 생활을 실천하도록 힘쓸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좀더 친절히, 할 수 있는 대로 좀더 협조해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것을 협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힘을 쓸 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황금률을 가만히 생각해 볼 때에, 만일 이런 모든 방면을 실천하게 되다고 하면, 우리의 생활이 어떻게 되겠는가 생각하여 보십시오. 가령 부부간에, 고부(姑婦)간에, 친척과 친척 사이에, 친구와 친구 사이에, 고용주와 직공간에, 주인과 점원간에, 주모와 식모간에, 공무원과 국민 사이에, 정당과 정당 사이에, 민족과 민족 사이에, 또한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이 원칙을 어떻든지 우리가 실행한다고 하면 우리의 사회가 어떻게 될까요? 아마 이 원칙을 우리가 실행한다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윌 사회에 싸움이 좀 적어질 줄 압니다. 따라서 좀더 명랑하여질 줄 압니다. 따라서 모든 건설과 발전이 빨라질 줄 압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왜 이와 같이 싸움이 많으며, 왜 이와 같이 명랑하지 못한 가운데서 우리가 살게 됩니까? 다 내 자신만 생각하고, 내 대접만 생각하고 내가 받기 원하는 대접을 남에게 먼저 대접할 줄 모르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현 세계는 자연 과학이 상당히 발전되었습니다. 그렇지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과학 혹은 정치, 경제, 사회학 같은 것은 아직까지 유치하고 곤란한 시대입니다. 더욱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도덕 사상, 윤리 사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그야말로 정글 지대의 그 사상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생존경쟁이니, 우승열패니, 약육강식이니, 이와 같은 도덕 사상을 가지고 살므로 말미암아 오늘날 이 세계가 이 모양이 된 것이 아닙니까?
이 우주는 법의 우주입니다. 우리가 사는 자연계는 일정한 법률에 의지해서 움직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일정한 도덕률에 의지해서 움직입니다.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어기면 우리 자신이 해를 받을 것밖에 없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는데 이 법칙을 내가 어기면 내 자신이 손해를 받을 것밖에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황금률은 무슨 새로운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신 이후에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것이 진리인 것을 우리에게 지적하여 주시는 것뿐입니다.
예수 님께서 이 황금률을 가르치실 때에, 기도를 가르치시다가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의미가 심장 한 줄 압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생활을 하려고 할지라도 사실 우리의 힘만으로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정신으로써 사시고, 이 정신의 화신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마음가운데 오실 때에, 우리가 구하고, 우리가 찾고, 우리가 문을 두드리고, 성신을 충만히 받아서 그리스도의 신으로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게 되고 충만하게 될 때에만 이 황금률을 어느 정도까지 실행할 수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귀한 교훈을 한 번 더 생각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충만히 받아서 우리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국가에서나, 조금 더 이 황금률을 실행해서 좀더 축복을 받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一九五九년 二월 八일)
Ⅲ-10 심령이 기갈한 자에게 (요한 복음 七장 三十七-四十四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를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七·三十七-三十八)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이 말씀은 우리가 지금 읽은 대로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명절이라고 하는 절기는 장막 절을 가리킨 것입니다. 장막 절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 전에 四十년 동안 광야에서 해 매이던 생활을 기억하기 위해서 지키는 절기인 것입니다.
여러 가지 경험 가운데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지 못하는 경험 중 하나는 이렇게 많은 무리가 르비딤이라고 하는 곳에 도착되어서 장막을 치고 거기 머물 때에 아무리 사방을 더듬어 보지마는 물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세와 다투기를 시작했습니다. 애굽에 그냥 있었으면 이렇게 목말라 죽는 것은 면할 수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그들을 그 곳으로 인도해서 그 곳에서 기갈에 넘어지게 하는가 고 모세에게 반박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고 또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가졌던 지팡이로 한 반석을 칠 때에 반석 가운데서 생수가 솟아나서 많은 기갈 한 백성들과 가축이 그 물을 마시고 사경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얻게 된 사실이올시다.
이 위대한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장막 절을 지키는 한 주간 동안에는 매일 아침 흰 예복을 입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행렬을 지었습니다. 선두에는 레위 사람들로 조직된 성가대가 찬송을 부르며 성전 뜰에서 거리 가운데로 행진해서 남쪽 문을 나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그 행렬이 도착된 다음에는 준비하여 가지고 갔던 물병에다 실로암의 맑은 물을 할 병씩 담아 가집니다. 다시 성가대를 선두로 해서 행렬을 지어서 성전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 부르는 노래의 뜻은 특별히 이사야 十二장 三절에 있는 말씀으로써『우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기르리로다.』 이 의미의 찬송을 부르며 성전 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차례 차례로 성전 뜰에 있는 제단 옆에 그 물을 부으면서 많은 사람과 같이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풍속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주일 동안을 계속하고 마지막 날은 이 식을 폐하는 날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여러 무리와 같이 예루살렘 성전 뜰에 서서 그 의식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의식이 다 끝난 이후에 예수께서 크게 외치는 말씀이『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리라.』옛날 반석을 생각하고 옛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생각하는 그 순간에 과연 참 반석이 여기 있고 참 생수의 강이 여기 있다고 하는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자연히 옛날 시내 광야가 연상이 됩니다. 오랜 四十년간이라는 세월을 황막한 광야에서 배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한 연상이 됩니다. 목말라서 사람과 가축이 아울러 죽을 수밖에 없을 때에 반석이 갈라지면서 생수가 쏟아져 나온 그 현상도 다시 연상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기갈이 심하던 모든 사람들과 짐승들이 아울러서 생수를 마시고 새로운 생명을 얻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광경을 또한 연상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시내 광야를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고, 거기 배회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이와 같은 세상에 방황하는 모든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가 있고, 생수를 내어 주는 반석을 통해서 이와 같은 인간들에게 지금도 생수를 강같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또한 상상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연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 광야와 같습니다. 광야는 물이 바른 곳입니다. 광야는 매 마른 곳입니다.
저는 일찍이 미국의 서 남방 뉴멕시코와 애리조나 지경에 있기도 하고 혹은 여행을 해 보면서 광야가 어떻게 처참한 곳이라고 하는 것을 친히 목격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전번 성지를 순례할 때에 유다 광야를 친히 보고 또한 그곳을 걸어 보았습니다. 광야는 사막은 아니지마는 역시 매 마른 곳으로 쓸쓸한 곳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적막한 세상입니다. 광야에는 화초가 적습니다. 혹 풀과 나무가 더러 있다 지 마는 어떻게 입사귀가 깔깔하고 가시가 많은지, 광야의 풀이나 나무에 그만 잘못해서 우리의 손과 다리가 닿기만 하면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그런 가시나무가 많은 곳이 광야입니다. 그것은 물이 없는 곳에 나는 식물이니까 자연히 이와 같은 식물이 되는 모양입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식물만 살수가 있는 모양입니다.
비슷하게도 이 세상은 우리가 살아 나아갈 때에, 우리 육신에 상처를 주고 우리 심령에 상처를 주는 요소, 이와 같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는 광야 같은 세상 길을 우리는 걸어 갈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광야에 때때로 폭풍이 붑니다. 모진 사나운 바람이 붑니다. 흔히 다른 곳에 바람이 불 때는 비가 내리든지 혹은 눈이 내리지마는 광야에는 바람은 불지마는 내리는 것은 없고, 오직 모래와 흙이 바람에 불려서 지나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앞을 볼 수 없으리 만큼 모래와 흙이 온 공중에 차서, 숨을 거의 쉴 수 없으리 만큼 질식 상태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흔히 폭풍 사라고 합니다. 폭풍우라고 하는 대신에 폭풍 사라고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때때로 천재가 있고 지변이 일어나며, 전쟁이 발발하고 재난들이 계속해서 쓸쓸한 광야와 같은 세상을 지나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앞을 볼 수가 없게 하고 질식 상태에 있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는 이러한 세상입니다. 이와 같은 광야에서 四十년 동안이나 이 곳 저곳으로 헤매 이 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상할 때, 또한 옛날이나 오늘이나 이와 같은 세상 가운데서 방황하며 갈래 길을 대부분 잃고 사는 모든 인간의 모습을 우리가 또한 상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시내 광야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의 특색은 갈 곳을 자기 못하고,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목표를 잃은 이 백성이 이 곳 저곳 에 방황하는 것이 한 특색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이라 저리로 방황하는 가련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육신 생활도 방황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우리 이 가운데는 문자 그대로 과거 일생을 돌아다 볼 때에 다 내 일생이 비록 짧지마는 이 때까지 얼마나 여러 곳으로 방황했는가, 스스로 감탄하는 이들도 없지 않아 계실 줄 믿습니다.
한국에서 본래 나기는 났지마는 일제 시대에도 한국에 살 수 없어서 멀리 만주로 떠는 분들도 이 가운데 계실 줄 믿습니다. 그 후에 간도 토벌이니 그 같은 어려운 일이 생겨서 또 다시 그곳에서 도피를 해서 혹은 북경을 가고 혹은 천진(天津)을 가고 혹은 남경, 상해, 등지로 방황하신 분들도 많이 계실 줄 압니다. 그러다가 광복이 된 이후에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또 다시 六·二五 사변이 생기고 그래서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대구로, 부산으로, 저 제주도까지 밀리고 밀려서 방황하다가 마지막에 다시 이 곳까지 돌아와 사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 줄 압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의 육신도 방황하는 배회하는, 생활을 하시는 이들이 많이 계신 줄 압니다.
육신 생활만 그런 것 아닙니다. 이와 같은 세상에 사는 그 심령들의 생활을 보면 더 방황하고 더욱 갈 길을 잃고 헤매 이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은 이와 같은 사상, 내일은 저와 같은 사상, 오늘은 이와 같은 무리, 내일은 저와 같은 무리, 오늘은 유교에 가 보고, 내일은 천도교에 가 보고, 모래는 불교에 가 보고, 방황하는 심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방황하고 배회하는 것이 인간의 심령 생활에 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목표, 영혼의 안전 지를 찾지 못한 심령들은 아직까지도 이렇게 광야에서 배회하는 가련한 심령들이올시다.
이렇게 육 적으로, 영적으로 방황하고 배회하니까 자연히 그 심령들이 곤비(困憊)해집니다. 육신도 피곤하여집니다. 기갈이 심하여집니다. 평화를 구하지마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참된 평화를 찾지 못합니다. 안전을 구하지마는 이 세상에서 안전 보장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구하지마는 냉랭한 이 세상에서 참된 사랑을 찾지 못합니다. 만족을 구하되 만족을 얻을 수 없고 행복을 찾아서 다니지마는 참된 행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 결과는 마음속에 불평이 일어나고 불안이 가득해지고 불만과 불평이 가득히 찬 인간들이 모인 사회인지라 그 사회에는 도처에 분쟁과 분열이 접종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를 심리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이 사실을 여실히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광야에 헤 매이는 인간들은 불행한 인간들이올시다. 그려는 동안에 어느덧 청춘은 살지고, 기력은 쇠퇴해지고, 머리카락에는 어느덧 서릿발이 잡히기 시작할 때에 인간의 환멸과 탄식 속에 계속할 수 없는 생애를 계속하는 것밖에 다른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배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방랑의 생활을 하는 가련한 인간의 심령의 모습을 우리가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광야에 반석이 있었습니다. 반석을 칠 때에 갈라지면서 그 가운데서 생수가 솟아났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황막한 세상에, 기갈이 심한 심령들이 방화하는 이와 같은 세상에 반석이 임했습니다. 이 반석이 갈라지면서 생수가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반석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이상하게도 제가 정지에 가보니 물들이 흔히 반석에서 납니다. 이제도 말했지마는 실로암 샘물은 예루살렘 반석 가운데 굴이 있고 그 굴속에서 맑은 샘물이 강 같이 흘러나옵니다.
여기 양덕(陽德) 온천에 가보신 이가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양덕 온천에 가 보면 굴속에서, 반석 속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납니다. 실로암 못에는 찬물이 솟아납니다. 여리고 에 가보면 엘리사의 우물 역시 반석 가운데서 생수가 콸콸 솟아나서 강 같이 흘러 내려갑니다. 그래서 여리고 가 되었습니다. 제주도에 가면 이런 샘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쓸쓸한 광야 같은 세상에 반석으로써 임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수가 이 광야에 흐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의 주시는 은혜, 예수의 진리, 예수의 주시는 생명, 그리스도의 주시는 성신의 축복은 이 생수와 같습니다. 생수라고 하는 것은 웅덩이의 물과 다릅니다. 웅덩이 물은 냄새가 납니다. 생수는 새롭고 맑고 한 번 마시면 사람의 심령을 상쾌하게 합니다. 곤비하여진 기갈이 심하여진 심령들이 웅덩이 물 같은 세상의 오락, 세상의 향락, 세상의 무엇가운데서 그 기갈을 멈추려고 하지마는 실망하고 맙니다. 오직 생수와 같은 그리스도의 진리에 접촉해서 새로운 생명을 받을 때에 그 심령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주신 물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내리는 물인 까닭으로 새로운 물입니다. 웅덩이 물은 죽은 물입니다. 가만히 있습니다. 곰팡이가 낍니다. 생수는 움직입니다. 그럼으로써 누구든지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참으로 은혜 받고 성신을 충만히 받은 그 심령 속에는 새로운 움직임이 있습니다. 양심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지력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체력에도 움직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내 재능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여러 가지 운동이 일어나고, 여러 가지 사업이 일어나고,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에 은혜 받은 사람은 기쁨으로서 협력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 생수는 솟아오르는 물입니다. 물의 근본 성질을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내려간다고 합니다. 사실 물은 내려갑니다. 이 생수는 솟아오르는 물입니다. 물이 얼마나 올라가는고 하니 수평선까지 올라갑니다. 자기 본래 있었던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이 원리를 이용해서 우리가 수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이 샘물은 본래 하나님 보좌 옆에서 흘러내리는 까닭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이 생수는 높이 하늘 나라까지 그러므로 영원하도록 솟아납니다. 이 생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내 광야에서 목말라 헤 매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석에서 나는 생수를 마시면서 새로운 활기를 얻은 모습을 우리가 상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주님 앞에 나와서 이 생수를 마시고 은혜 받은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올시다. 예수께서 여기 말씀하시기를 그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그 속에 생수가 있는 반석이 있습니다. 속에 생명의 강이 흐릅니다.
이제도 말했지만 여리고 근방에는 다 황막한 광야입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에만 들어가면 거기는 종려나무 가지가 푸르고, 아름다운 감람나무가 무성했고, 채소가 있고, 높은 뽕 나무가 있고, 모든 생명이 약동하는 아름다운 동산이 되어 있습니다. 그 까닭은 여리고 성안에는 엘리사의 우물과 같은 생수가 있는 까닭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솔로몬의 동산 있는 곳을 가보니, 어떻게 그 곳에 솔로몬의 동산을 만들었느냐 하면 그 곳에도 땅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가 있습니다. 이 생수를 근원으로 해서 솔로몬의 동산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심령은 물 대인 동산 같습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물 대인 동산 같습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생명수가 있습니다. 시편에 보면 믿는 사람의 심령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다 광야로 흘러내리지마는 요단강 근처에는 아름다운 나무 속 무성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까닭은 그 속에 요단강이 있는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의 속에는 말하자면 이 요단강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의 생활에는 생명이 있고, 장성이 있고, 아름다운 꽃이 피고, 복스러운 열매를 맺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의 심령에는 기쁨과 만족과 영원한 노래가 다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을 떠났지마는 전에 볼티모어에 있는, 존 홉킨스 대학의 외가 의사요 교수로서, 또 특별히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전도에 열중하던 켈리 박사라고 하는 유명한 분이 계셨습니다. 저도 친히 그의 말씀을 한 번 들어보았습니다. 켈리 박사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그이가 언제든지 그의 양복 옷에다 좋은 장미꽃을 늘 꽂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교수가 꽂고 다니는 장미는 도무지 시들지를 아니하고 그저 금방 꺾어서 꽂은 장미와 같은 꽃을 늘 꽂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꽃은 어떻게 그렇게 도무지 시들지 않는데 무슨 비법이 있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러니까 웃으면서 그 비법은 별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양복 앞섶을 뒤집어 보였습니다. 그 속에 보니까 조그맣게 옆집을 달고는 그 속에 물병을 넣었단 말이요. 그래서 실상 그 꽃이 물 속에 꽂히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시들지 아니하고 언제나 청청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 때 이 켈리 박사가 하는 말이 우리가 이 세상에 다니면서 언제나 신선하고 아름답고 항상 향기를 나타내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되려고 하면 우리 생활 속에 뿌리가 이와 같이 물 속에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생명수 속에 있어야 된다고 그 진리를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 와서 마시라.』예수 그리스도는 생수를 주시는 반석이올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이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내 전 생명을 바칠 수 있습니다. 그 진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생명의 강이 흘러서 언제든지 풍부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一九五九년 二월 二十二일)
Ⅲ-11 유혹을 삼가라 (잠언 一장 一-十六절)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잠 一·十)
왜 하와가 죄에 빠졌습니까? 꾀임에 들어서 죄에 빠졌습니다. 왜 아담이 또한 죄에 빠졌습니까? 역시 꾀임에 들어서 죄에 빠졌습니다. 인생의 가는 길에는 유혹이 많습니다. 시험이 많습니다. 올무가 많습니다. 남자에게도 그렇고, 여자에게도 그렇고, 청년에게도 그렇고, 장년에게도 그렇습니다.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부한 사람이나 물론하고, 누구에게든지 이 유혹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 행로를 살펴보면 이 유혹으로 말미암아 넘어진 자도 많고, 죽은 자도 많고, 죽고 썩어 냄새나는 시체도 많고, 많은 비극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며칠 전, 신물을 보니 작년 일년동안에 법망에 걸린 소년 범죄 수만도 九,四0六건이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예년의 배가되는 수라고 그럽니다. 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이유를 한 마디로 썼습니다. 유혹입니다. 유혹을 삼가야 됩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유혹에 들지 아니하는 비결을 우리들로 하여금 분명히 깨달아서 우리가 과거는 어떠하였든지 이 앞으로는 시험에 빠지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누구에게든지 시험하는 자가 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四장과 누가복음 四장을 읽어보면, 시험하는 자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왔습니다. 광야에서 금식 기도하실 때에 시험하는 자가 와서 세 가지로 시험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하와에게도 왔고 아담에게도 왔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모든 선지자들, 모든 사도들, 모든 성도들, 오늘 믿는 모든 우리들에게도 누구나 할 것 없이 반드시 이 시험하는 자가 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단순히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환경이나 본능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이 우주에 악한 영이 있어서 사탄이 있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엄히 경계하시기를『조심하라 삼가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들과 같이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느니라.』이와 같이 경계를 한 것입니다. 이 악한 마귀는 기쁠 때는 기쁨을 통해서 유혹합니다. 슬플 대는 슬픔을 통해서 유혹합니다 분주할 때는 분주할 때, 편안할 때는 편안할 때, 괴로울 때는 괴로울 때를 이용하여 우리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잠시라도 방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스스로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이 시험하는 자가 언제든지 온다고 하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됩니다.
둘째로, 시험하는 자가 밖에서 찾아오는 것 같이 또 우리 속에서 시험이 일어나는 것도 우리가 깨달아야 됩니다. 야고보 一장 十四절과 十五절에 읽으면『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는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내 속에서 일어나는 욕심에 미혹되어서 시험에 드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푸른 풀과 물욕에 유혹되어서 소돔과 고모라 성으로 살려 갔다가 큰 화를 입은 것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기업을 팔았다고 하는 사실도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식욕에 미혹되어서 시험에 든 것입니다.
어떻게 다윗이 정욕에 미혹을 방아서 밧세바와 죄를 범하였다는 사실도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욕에 미혹을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유다 가 三十 냥쭝에 미혹되어서 자기의 선생이요 주를 팔았다고 하는 기사도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사실이올시다.
어떻게 데마라고 하는 청년은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의 허영에 유혹되어서 자기의 은사를 배반하고 세상으로 나간 사실도 우리가 기억하는 것입니다. 요한 과 야고보는 지위 욕에 미혹되어서 예수께 나와서 구하지 아니할 좌편과 우편에 앉을 자리를 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말씀과 같이 육신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사람들이 시험에 빠집니다. 욕심을 경계해야 됩니다. 속담 중 사람의 욕심이 땅보다 더 두텁다는 말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여러분, 디모데 전서 六장 七절 이하를 읽을 때에 듣기만 하시기를 바랍니다.『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할 줄로 알 것이니라. 부 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沈淪)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욕심을 경계하여야 됩니다.
셋째로, 이렇게 밖으로 시험하는 자가 우리를 공격하고 안으로 욕심으로 말미암아 시험이 일어나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모든 시험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十장 十三절에 읽으면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렇게 많은 미혹과 시험이 들어오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험을 관리하십니다. 우리가 받을 시험을 사람과 형편에 따라서 통제하여 주십니다. 그럼으로써 어떠한 시험이든지 누가 당하면 그는 그 시험을 견딜 수 있겠기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어떠한 시험이 오든지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됩니다.
또한 로마서 八장 二十六절을 보면『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懇求)하시느니라.』성령께서 간구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험을 통제해 주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시험을 이기어서 모범을 보여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우리도 시험 당할 때에 감당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온전히 이길 수 있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빠지면 내가 힘쓰지 않아서 빠지는 것입니다. 옛날 모든 성도들도 시험은 우리와 같이 받았지마는 이겼습니다. 욥이 이기고 요셉도 이겼습니다. 어떤 시험을 당하든지 성령의 은혜로써 이길 수도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우리가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지지마는 그렇지만 유혹이나 시험을 가까이 할 것은 아닙니다. 시험을 멀리 하는 것이 좋습니다. 유혹에 구역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서울 시 하면 지리적으로 볼 때에도 어떤 거리는 위험한 유혹의 거리올시다. 저는 다는 못 다녀 보았지만 종로 뒷거리 같은데 특별히 유혹이 많다고 합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유혹의 구역이 있습니다. 어떤 지방이든지 술집이나. 댄스홀이 있는데는 다 유혹의 구역이올시다. 우리 믿는 사람이 그런 데 가까이 갈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사교계에도 유혹의 구역이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시키는 악한 동무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남녀간의 교제 가운데도 우리를 유혹으로 이끄는 이성이 있습니다. 유혹의 구역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독서 계에도 유혹이 있습니다. 음란한 소설, 잡지, 등등 소위 에로 문학 같은 것들은 사람을 유혹합니다. 유혹의 구역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술계에도 유혹의 구역이 있습니다. 좋지 못한 음악, 좋지 못한 그림, 좋지 못한 모든 오락에 관한 것들과 같은 구역들을 가까이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아 나아갈 때에 이와 같은 구역이 있습니다. 이런 구역에 가까이 할 필요가 도무지 없습니다. 뱅뱅 가까이 도는 사람은 마지막에 시험에 빠지고야 맙니다.
다섯째는, 이렇게 유혹의 구역을 멀리 하지마는 악한 마귀는 언제든지 어느 때든지 갑자기 우리를 시험합니다. 갑자기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됩니까?
여기 전쟁의 술어를 쓴다고 하면, 첫째는 소위 전격 전을 써야 됩니다. 곧 물리쳐야 됩니다. 예수께서도 악한 마귀가 와서 예수를 높은 산 위에서 천하 만국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고, 넌지시 사탄이 하는 말이 자기에게 절만 하면 이 모든 영광을 예수에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는 말씀이『사탄아 물러가라. 오직 주 너희 하나님만 공경하고 그에게 절할 것이니라.』이와 같은 말로 대답한 것입니다. 죄와 협상하지 맙시다.
조금이라도 그것이 나를 죄로 인도하는 것이 분명하면 곧 그 때에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인도사람의 속담가운데『코끼리는 코가 들어오면 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코끼리가 방 안에 들어오려고 할 때에 우선 코부터 못 들어오게 해야지, 그 놈이 어떻게 코만 조그만 구멍이이라도 있어서 들어오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못 견딘다고 합니다. 다 들어오고야 말지요.
시험이 꼭 그렇습니다. 처음에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릴 때에, 악한 유혹이 우리 마음에 엄습할 때에 마음에서부터 아예 물리쳐 버려야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일 사랑하는 자지 금방 반석이라고 부른 베드로를 향해서도『사탄아 물러가라.』사탄이라고 물리쳤습니다. 사람의 뜻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아니하고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라는 권면을 할 때, 이와 같이 강경히 물리친 것입니다. 죄와 협상하지 맙시다. 타협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섯째는, 물론 이 시험을 다 이기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미리 문지 태세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전쟁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준비를 잘 확충해서 육 해 공 각 방면에 군비를 해 두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올시다. 병을 예방하는 방법은 그저 평소에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위생을 조심해서 우리의 건강을 튼튼히 기키는 것입니다. 건강이 약해지면 백병(百病)이 침입합니다.
모든 시험을 이기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가 우리의 신앙 생활을 철저히 해서 우리의 심령이 튼튼하고 우리의 믿음이 건전한 생활을 하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우리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성신이 충만한 생활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유혹이 들어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악하고 죄악이 많은 세상 가운데 나아가서 하루 동안 사는 것은, 아치 군인이 전장에 나가서 하루 동안 격전을 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형편이올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의 일을 준비하는 아침시간에 반드시 간절한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을 튼튼히 무장하고 그 후에 세상에 나아가서 살아야 될 것입니다. 튼튼한 준비 태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째는, 이것이 제일 좋은 방법인줄 압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제가 인용하겠습니다.『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열심을 품어 주는 섬기는 것입니다. 분주하게 주를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미국의 유명한 발명가 에디슨에게 가서 조용히 묻기를『선생님도 전에 혹 시험에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고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 때는 노인일 적인데 눈을 크게 뜨면서『시험? 시험에 못 들어 봤다. 왜 그런고 하니 시험에 들 사이가 있어야지.』너무 연구하기에 바빠서 시험에 들 시간이 없었단 말입니다. 분주하면 시험에 들 기회가 사실 없습니다.
한가한 사람들이 시험에 잘 듭니다. 한가하니까 공상이 일어납니다. 한가하니까 놀이터에 가게 됩니다. 분주히 공부하지 않고 한가히 학교에 아니는 학생이 시험에 빠집니다. 여자들 가운데도 분주한 여자들보다도 소위 유한 마담이라고 한가한 여자들이 시험에 빠집니다.
분주하게 일하는 사람은 시험에 들 사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분주히 일하는 사람, 내 책임을 충성되게 분주하게 잘 감당하는 사람,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는 사람들에게 시험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놀며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시험이 많습니다.
전에 어떤 나라에 젊은 재상이 지혜 있는 나이 많은 왕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아직도 젊은 몸인데 유혹에 들지 않는 좋은 무슨 교훈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다는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왕이 가만히 잠깐 생각하시더니 그 옆에 있는 신하를 불러서 얼른 안에 들어가서 금 잔에 기름을 가득 부은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젊은 재상에게 주면서『자 이 금 잔에 기름이 가득하지 아니하냐? 이 가득한 기름을 가지고 이 궁궐에서 나가서 아무 거리, 아무 모퉁이, 다 돌아오되 한 시간 이내로 다 돌아 오라. 돌아올 때 한 방울이라고 흘리면 안 된다. 한 방울이라고 그 기름이 흘려 내리게 될 것이면 곧 자네 목을 베겠노라. 그런 줄 알고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곧 다녀 오라.』그러면서 그 뒤에는 군인 한 명에게 칼을 뽑아 가지고 뒤를 쫓아가게 했습니다.
한 방울을 흘리면 목을 자르라고 하니까 이 젊은 재상이 금 잔에다 기름을 가득 담아 가지고서는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한 시간 안에 돌아오라고 하니까 빨리 서둘러 땀을 뻘뻘 흘려 가면서 그 모퉁이를 돌아서 어느 거리를 돌아서 겨우 한 시간만에 가시 가지고 왔습니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아니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이 차서 가지고 돌아왔단 말입니다.『한 방울도 안 흘렸는가?』『네 안 흘렸습니다.』 그 때 왕이 묻기를『그 아무 거리에서 아무 상점들을 보았나? 거리에 가다가 아무개를 보았나? 어디쯤 가면 누구 가 있는데 보았나?』 물어 보았습니다,『그만 못 보았습니다.』『아니 못 보다니, 지나오면서 못 봐.』『이 기름 잔만 보려고 다른 것을 볼 사이가 있어야지요.』 그 때 노 왕이 웃으시며 하시는 말이『그러면 자네 유혹에 들지 않는 비결을 배웠나?』우리가 다 배웠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는 비결 가운데 그 제일 좋은 비결은 우리가 열심을 품어 하나님이 내게 맡긴 사명을 부지런히 하고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나, 내 직장에 있어서는 내가 맡은 책임을 충성되게 부지런히 전 정력을 다해서 하는 가운데 자연 유혹이나 시험에 들 사이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공격이 언제든지 최선의 방비라는 전법이 있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옛날 자기네들끼리 살 때 이런 미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추장끼리 싸우는 일이 많았는데 그 때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죽이면, 그 죽인 사람의 힘이 다 자기에게로 와서 그 사람의 힘이 더 강해진다는 미신이 있었다 합니다. 이것은 물론 미신이지만 어떤 면에 보면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유혹 받고 시험받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유혹이 오고 시험이 올 때에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써 온전히 이기고 정복한다고 하면 그것은 내게 유익이 됩니다. 사실 우리가 유혹과 시험도 이김으로 말미암아서 영적 경험을 얻고, 우리의 심령이 연단을 받고, 연단을 통해서 인내를 얻게 되고, 인내는 통해서 더욱 새로운 힘을 우리가 얻데 됩니다.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서 우리가 이 죄 많은 세상을 살아 나아갈 때에 모든 유혹을 이기고 승리해서 오히려 이것을 승리함으로 새로운 능력을 좀더 열심히 하나님을 봉사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一九五九년 三월 八일)
Ⅲ-12 십자가의 도 (고린도 전서 一장 十八-二十五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一·十八)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말씀은 원서대로 말하면 말씀이라고 하는 말이올시다. 요한 복음 一장 一절에『태초에「말씀」이 있으니』하는 말 가운데 말씀이라는 말은 도라는 말과 꼭 같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곧 그리스도의 복음이올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최고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는 십자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네 복음서를 읽어보면 이 복음들은 다 그리스도의 생활에 대한 전기인데 보통 세상 사람들이 어떤 세상 사람들에 대한 전기를 기록한 것과는 다릅니다. 보통 전기로 말하면 그 사람이 난 것과 장성한 것과 그의 사업 같은 것들을 길게 기록합니다. 그 사람의 죽은데 대해서는 별로 기록하는 사람이 적고 혹 기록한다고 할지라도 간단히 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 네 복음을 보면 복음에 적어도 三분지 二이상은 그리스도의 마지막 며칠 동안에 된 일, 곧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말씀은 곧 복음이올시다. 우리 기독교의 복음이올시다. 우리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요. 십자가는 우리 기독교 복음의 진수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말씀, 이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하여 주는 그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여러 사람이 여러 가지로 설명하였지마는 그저 간단히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대략 네 가지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제일 먼저,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를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죄를 벌하십니다. 여기에 다시 말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와 심판과 형벌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안입니다. 둘째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때에 죄 가운데 묻힌 만민들을 멸망을 받을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친히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나님께서는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셋째로, 이 십자가는 대속의 제사를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한갓 애국자의 죽음이 아닙니다. 다만 순교자의 죽음도 아닙니다. 어떤 진리에 대한 희생을 당하신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리스도 자신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주님께서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자기 목숨을 주려 오신 것입니다. 이 대속의 제사로 말미암아 만민의 죄 사함이 있을 수 있게 되었고, 멸망가운데서 생명의 길이 비로소 열리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대속의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넷째는, 이 십자가는 누구든지 이 십자가의 진리를 믿는 사람은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진리를 말씀하여 주십니다. 누구든지 선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의를 행함으로가 아니라, 법률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대속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람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진리를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도가『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니라.』이와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인데 이 십자가의 도를 받는 사람들은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가지 종류는 멸망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종류는 구원을 얻는 자들입니다. 여기 본문대로 좀더 분명히 번역하면 멸망하는 자들이 아니고 멸망하는 중에 있는 자들입니다. 현재 진행으로 썼습니다. 또 구원 얻은 우리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마는 좀더 분명하게 번역하면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우리라고 현재 진행 사를 여기에 썼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많지마는 이 모든 사람들을 간단히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멸망 중에 있는 자들과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성경에 보면 구원에 대하여 과거, 현재, 미래, 이 세 가지 방면으로 기록한 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곳에 보면「구원을 얻었다」고 과거로 기록한 데가 있습니다. 어떤 데 보면「구원을 얻는다」고 현재로 기록한 데가 있습니다. 어떤 데 보면「구원을 얻겠다」고 미래로 기록한 데가 있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 말을 깊이 생각하면 다 옳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올시다. 그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그 득의(得意)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는 예수 님을 확실히 믿는 그 때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우리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다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화의 견지에서 보면 점점 거룩한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고, 성화의 교리의 견지에서 보면 우리는 다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들이올시다. 매일 매일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아 나가는 생활이 우리 신자들의 생활이올시다. 이런 의미에서는 우리는 구원을 얻고 있는 현재의 사람들이올시다.
그러나 미래의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는 온전히 구원을 얻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육신의 온전한 구원의 견지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아직도 미래에 있습니다. 구원을 얻어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언제나 온전히 완전한 자리에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육체까지 부활해서 신령한 몸을 얻어야 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는 우리의 구원은 아직까지도 미래에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 기록한 대로 보통 우리는 구원을 얻으려는 중에 있다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묘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아시거니와 구원이라고 하는 뜻은, 본래 뜻대로 말하면,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고친다고 하는 뜻입니다. 치료를 받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병난 사람이 치료를 받아서 점점 나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신령한 뜻으로 생각해 보면 여기 병은 육신의 병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죄를 가르치십니다. 죄는 전염병 같습니다. 죄는 문둥병 같습니다. 이런 무서운 병을 다 우리가 들었는데 그 병 가운데서 점점 치료를 받아서 온전한 자리에 나아가는 중에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죄 가운데서 고침을 받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또 둘째로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건진다고 하는 뜻입니다. 위태한 자리에 있다가 점점 안전한 자리로 옮겨진다는 뜻이 있습니다. 가령 물에 빠져서 물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어떤 사람이 그를 건져내서 점점 물이 옅은 안전한 곳으로 옮긴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도 신령한 의미로 생각하면 우리는 다 죄로 말미암아서 위태한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벗어나서 점점 안전한 곳으로 옮겨온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들은 아치 어떤 사람이 중병에 걸렸다가 매일 매일 조금씩 조금씩 나아서 건강하여지는 중에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또는 어떤 사람이 위태한 물 가운데 빠졌다가 헤엄 잘 치는 어떤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점점 물 속에서 이끌려 나와서 안전한 자리로 옮겨가는 중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 앉은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한 구원을 얻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한 대로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들과 정반대의 형편입니다. 병이 점점 중하여 가는 환자와 같습니다. 오늘 좀더 열이 오르고, 내일은 좀더 열이 오르고, 모래는 좀더 열이 오르고, 점점 중해 가는 환자와 같습니다. 점점 죽음을 향해서 가는 환자와 같습니다. 제가 전에도 한 번 말하였지마는 방콕에 가서 아편굴에 들어가 보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참혹한 형편에 있는지 마치 중병 환자가 점점 죽음에로 나아가는 그 현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혹 문둥병자 수용 병원에 가보면 문둥병 환자들 가운데 그 병의 경중을 따라서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멘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만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좀더 중한 환자를 보면 손이 다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좀더 중한 화자를 보면 팔목이 다 없어지고 심지어는 발이 다 없어지고 다만 두부 덩어리처럼 된 문둥병 화자까지 여러분이 볼 수가 있습니다. 점점 병이 중하여지는 그런 가운데 있는 사람이올시다.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형편이 이와 같은 자리에 있다는 말입니다. 또는 점점 물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과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배로 말하면 점점 가라앉고, 조금 가라앉고 한 시간 후에는 좀더 가라앉고, 며칠 후에는 좀더 가라앉는, 점점 가라앉은 배와 같은 형편 가운데 있는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다. 멸망 중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그 영혼의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영적 견지에서 본다고 하면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점점 고침을 받아서 위로 올라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점점 중한 병이 더해서 아래로 내러 가든지 우리의 심령은 그 두 가지 형편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멸망하는 중에 내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날마다 구원을 얻어서 독수리와 같이 날개를 치며 그 심령이 올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가운데 어떤 종류에 속합니까? 내 심령상태가 하루하루 거룩한 자리로 올라갑니까? 그렇지 아니하고 내 심령 상태가 불의한 자리, 더러운 자리, 멸망의 자리로 내려가는 가운데 있습니까?
그런데 십자가의 말씀은 하나이지마는 이 두 종류의 사람 중 종류를 따라서 십자가의 도에 대한 반영이 다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다르게 들립니다. 십자가가 다르게 보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마 금강산에 있는 만물상을 구경하신 분이 여러 분 계실 줄 압니다. 그 만물상은 돌입니다. 돌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생겨서 참 만물처럼 보인다고 만물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기쁜 사람이 보면 그 만물상이 무엇처럼 보이는고 하니 그야말로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또 마음이 슬픈 사람이 그 만물상을 보면 그저 상제들이 곡하는 모양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같은 만물상이올시다. 같은 바위올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다르게 보입니다.
그것과 비슷하게 같은 십자가입니다, 같은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렇지만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에게와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각각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여기 하는 말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중에 있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련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멸망 중으로 점점 내려가는 사람은 십자가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들립니다. 우선 십자가 자체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옛날 로마에서 노예든지 식민지 백성을 극형에 처형할 때 쓰는 형 구올시다. 가장 천하고 가장 더럽고 가정 무서운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가장 천한 사람들만 못 박히는, 이런 데 처형을 받은 어떤 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 미련하게 들리지 않겠습니까? 미련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옛날 헬라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들렸습니다. 로마 사람들도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미련하게 들었습니다. 알 수가 없고 미련하게만 들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는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너무 단순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는데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너무나 단순한 교리입니다. 거기에 무슨 철학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말합니다.『기독교는 깊은 맛이 없다. 차라리 불교는 깊은 맛이 있는데, 그리고 옛날 노자가 가르친 도덕경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깊은 맛이 있지. 기독교야 깊은 맛이 있어야지. 그저 애들과 부인들이 믿기를 좋지.』나같이 학식이 많은 사람이야 믿을 것이 못 되는 미련한 것으로 보입니다.
옛날 철학을 많이 숭상하던 헬라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들렸습니다.『믿음으로 구원을 얻다니 내가 선을 행하고, 내가 덕을 닦고, 그야말로 도고덕부(道高德富, 도가 높고 덕이 부)하여 내가 구원을 얻는 것이지, 무엇 어떤 진리를 믿어서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무슨 말이야. 그 덕이 없는 사람들, 그 천한 사람들이나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이야 덕을 행했으면 얻지.』라고 말하며 비웃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또 더욱이 대속한다는 진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들립니다. 누구든지 정직한 사람이나 정정당당한 사람이야 자기의 책임을 자기가 지는 것이지, 남의 덕에 구원을 얻겠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하며 자기는 자기 덕으로 구원을 얻겠다고 합니다. 물론 인류의 깊은 연대성과 자기의 성품이 얼마나 죄악으로 말미암아 부패하여졌다고 하는 보다 더 깊은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여러분 자세히 들으세요. 누구든지 십자가의 도가 이렇게 모이면 그것은 그 사람의 영혼에 멸망의 상태가 이만큼 중태로 빠졌다고 하는 것을 증거 하는 것뿐입니다.
사실은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은 아닙니다. 미련하게 보입니다.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철학을 연구한 사람들, 많은 학문을 연구한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맑은 날 대낮에 해를 쳐다보면서 어떻게 해가 밝지 못하고 어둡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단순히 눈 병신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인다고 하면 그만큼 그 사람의 심령이 부패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지혜도 됩니다. 그렇지만 지혜라고 하는 것보다 더 구원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이 십자가의 말씀에 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게 하는 능력은 십자가밖에 다른 데에는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하게 해서 더러운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불의한 마음을 의롭게 하고 부정직한 마음을 정직하게 하는, 즉 사람의 마음을 변화하게 하는 능력은 오직 십자가의 도밖에는 다른 데서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악 가운데 빠지고 죄악에 얽매여서 죄의 종이 되었던 사람에게 그로 하여금 죄의 쇠사슬을 끊고 해방을 받아서 자유스러운 사람을 만드는 능력은 십자가의 말씀밖에는 다른 데는 없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과 기쁨과 화평을 주는 능력이 십자가의 도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제 한 주일 동안, 우리가 수난 주간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 수난 주간을 통해서 십자가를 바라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 더욱 가까이 나오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서 내 자신을 스스로 반성하는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십자가를 전파하는 기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과 같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그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一九五九년 三월 二十二일·저녁예배)
Ⅲ-13 성령 안에서 하나 (에베소서 四장 一-十六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四·三)
지난 부활 주일에 새로 학습 선 교우들도 여러 분 계시고, 또 새로 세례를 받고 혹은 입교 문답으로 입교한 교우들도 여러 분 계십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교회의 온전한 교인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한 온전한 지체가 된 이후에 제일 먼저 사모할 은혜가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우리가 자연히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이 세례 받은 분만 아니고 이미 오래 믿는 우리들도 우리가 교회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제일 먼저 받을 은혜와 또 우리가 특별히 힘쓸 면이 있으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이따금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 줄 아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를 보면 사도 바울이 다른 서신에도 보통 그런 방법을 쓰지마는 여기 一장에서부터 三장까지에는 우리 기독교의 진리를 간단히 설명합니다. 그리고 四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그와 같은 진리 안에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생활을 하여야 되겠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도덕적인 면, 도덕적 생활 면을 특별히 교훈해서 가르치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四장 一절에 보면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사도 바울이 서신을 쓸 때에 로마 감옥에 있었습니다. 주안에서 갇힌 나라고 기록했습니다. 아마 그 뜻은 주를 위해서 주님과 같이 있어서「주님 안에 있는 나」라고 하는 의미도 있는 줄 압니다. 하여간 이런 말씀을 쓰는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감옥에 있다고 하는 것을 자랑하는 것보다는 그가 권하는 이 말씀이 실상은 주께서 그의 마음속에 같이 계셔서, 그가 주안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권한다고 하는 깊은 뜻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권면하는 말씀이『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一장에서부터 三장까지 우리 믿는 사람들이 본래 세상에 속하였고 죄악 가운데 죽었지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서, 영적으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해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되어서,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거룩하신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고 하는 설명을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부르심을 입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은즉 이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야 되겠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권면하는 말씀이『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줄로 성령이 하나이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그러면서 이 같은 뜻을 十六절까지 내려가면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一절에서 十六절까지에 제일 중요한 절은 三절이올시다.『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그리스도의 도리를 믿어서,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의 지체가 된 모든 교인들을 향해서 제일 먼저 가장 중요하게 권면한 말씀은 다른 말씀이 아니고『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여기 평안이라고 하는 말은 화평이라고 하는 말과 똑 같습니다. 화평의 매는 줄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 연결이 되었습니다. 이 화평의 줄을 끊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는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 한 성령을 받아서 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을 어떻게든지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여기 힘쓴다고 하는 말은 그 원어를 보면 불타는 열심을 가지고 어떻게든지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 사이에 화평의 줄을 끊지 말고 하나 된 것을 어떻게든지 뜨거운 열심을 가지고 지키도록 힘을 쓰라고 이와 같이 권면했습니다.
여기 一절에서 十六절까지 보면 특별히 세 가지 대지로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여기 二절 말씀 가운데에는 이렇게 하나는 유지하려고 하면,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어떠한 은혜를 받아야 되겠는가를 말씀하셨고, 四절에서 六절까지는 우리 믿는 사람이 하나가 된 근본 기초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七절 이하에는 우리 믿는 사람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 그 의미는 어떤 것이며, 그 성품 질은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좀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먼저 성령의 하나가 된 것을 굳게 지키려고 하면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어떤 은혜를 먼저 받아야 되겠느냐?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먼저 어떤 것을 배워야 하겠는가?
여기 몇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모든 겸손이라고 했습니다.『먼저 주님께로부터 겸손을 배우라.』는 이 말을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겸손은 교만의 반대입니다. 내 부족한 것을 스스로 깨달아서 항상 자기를 낮춥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이 겸손 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는 여러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 말씀에『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시나 겸손한 자와 같이 계셔서 겸손한 자를 부흥하게 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욱이 이와 같은 겸손의 덕이 공동 생활하는데, 즉 가정에서와 또한 대중생활을 하는 교회 안에서 화평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여러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먼저 하나 하나가 겸손의 은혜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둘째로는, 온유 하라고 했습니다. 온유의 은혜를 받으라고 권유했습니다. 온유는 글자 뜻대로 부드럽다고 하는 뜻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이 없이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경륜에 대하여 불평을 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온유하지 아니한 까닭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는 모든 일에 불만을 가지지 아니하고 순복하고 이해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도 역시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유순한 대답이 격노를 그치게 한다.』고 하는 잠언의 말씀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예수께서는 산상보훈(山上寶訓)에서『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온유한 자가 천국을 얻습니다. 이 온유의 덕이 우리 단체생활, 교회생활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도 우리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줄 생각합니다.
셋째로는,「오래 참음으로」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인내의 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너희가 인내로써만 내 영혼을 보전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참는 그 성품, 분할 때에도 참는 그 성품, 자기가 상처를 입어도 아픈 것을 참는 그러한 아름다운 덕은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오래 참는 이것이 우리 공동 생활하는데 얼마나 필요하다고 하는 것도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너희들은 인내로써 달음박질 마당에 달리라.』고 친히 성경에 교훈 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는,『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로 했습니다. 좀 다른 점이 있을지라도 너그럽게 생각하고 누가 실수가 있을지라도 좀 용납해 주고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사랑 가운데서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의 줄로 설령의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려고 하면, 우리 믿는 사람 하나 나가 이와 같은 은혜를 먼저 받아야만 되겠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고 사랑으로 용납할 줄 아는 사람이 모인 그 교회는 언제가 화평한 교회일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교만하고 거칠고 조급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적어서 피차에 용납하지 않고 용서하지 아니하는 이런 교회는 언제나 불평이 많습니다.
여기 기독교 도덕을 가르칠 때에 로마서에서 보거나 에배소에서 보든지 제일 먼저 겸손의 덕을 그르쳤습니다. 사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특색입니다. 그래서 옛날 니이체 같은 사람은 기독교 도덕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이 도덕적 요소 하나 하나가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성품이올시다. 이 요소 하나 하나가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이올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태도로 대하여 주십니다. 먼저 이와 같은 겸손의 덕이 교회의 화평을 유지하는데 필요하다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가 됨에 근본적인 기초를 우리에게 지적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왜 우리 믿는 사람이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화평의 줄을 끓지 아나하여야 되겠는가?
일곱 가지를 가르쳤는데 첫째는,「몸도 하나이요」여기 몸이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르쳤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하나입니다. 지금도 신령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 뿐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여러 교회로 나누어졌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아니하는 신령한 참된 교회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교회의 머리를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이 한 교회에 속하였습니다.
둘째는,「성령도 하나」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보내신 보혜사(保惠師)는 한 분뿐입니다. 오순절(五旬節)에 모든 교우들이 받은 그 성신은 오늘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십니다. 옛날 사람이 받은 성신이나, 오늘날 믿는 사람이 받는 성신이나, 한 성신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받은 성신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이 받은 성신이나 우리 한국 사람이 받는 성신이나 성신은 한 분입니다. 성신에 두 분이 없습니다. 한 성신을 우리가 다 받아서 진리를 깨닫고 주를 믿습니다.
셋째는「소망도 하나」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없는 불멸의 영원한 썩지 아니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다 한 아버지의 집에 갈 것입니다.
유감스러운 일은, 구리가 다 사람들인 까닭으로 어떤 때에는 한 교회에서 잘 모여서 예배를 보다가도 서로 불화해서 따로 갈려 나가, 따로 예배를 보는 경우가 혹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다 인간인 까닭으로 생기는 줄 압니다.
그런 일에 대하여 들을 때마다 어떤 때는 무슨 생각이 들어오는고 하니, 세상에서는 저렇게 따로 모여서 예배도 보고 그러치마는 그런 정신으로 그냥 가다가 이 다음에 천당에만 가면 함께 모일 수밖에 없겠는데 그러면 그 때는 어떻게 될까? 혹 그런 생각이 마음가운데에 일어납니다.
우리 ale는 사람들이 언제나 기억할 것은 우리의 소망도 하나님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서 화평한 가운데 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고 하면 이 세상에도 어느 정도까지나마 화평한 가운데 한 하나님을 섬기어야만 될 것입니다.
넷째는,「주도하나이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 하신 구주는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를 저장하시는 통치자는 한 분밖에, 곧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한 주님께 속했습니다.
다섯째는「믿음도 하나」라고 말씀했습니다. 물론 신조는 교파를 따라서 각각 조금씩 다릅니다. 예배하는 의식도 교파를 따라서 조금씩 다르고 또한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변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하나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누구든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하나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여섯째는「세례도 하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어떤 교파에 가서 세례를 받든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세례가 아닙니다. 세례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한 믿음을 기초로 한, 한 구주를 기초로 한 세례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똑 같은 세례로 죄 씻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곱째는「하나님도 하나」이십니다. 만 유의 아버지 시이요 만 유를 통일하시고 만 유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은 이 우주가운데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다 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한 하나님을 공경하는 족속들이올시다.
이렇게 일곱 가지 기초 위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화평의 줄을 끊지 말고 이 줄을 있도록 힘써 지키라고 간절히 권면한 것입니다. 그리고 七절 이하에는 그러면 어떠한 의미에서 우리가 주안에서 하나가 되었는가? 하나라고 하는 의미는 그럼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주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말은 우리 사람의 얼굴과 성품과 모든 것이 똑같이 하나가 되었다는 말인가?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고린도 전서 十二장을 읽어보면 이 원리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거기 우리 몸에 배유해서 그르치셨습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몸에 붙은 지체를 여러 가진데 이 지체는 각각 다릅니다. 따라서 각각 맡은 바 직무도 다릅니다. 그러나 다 이 지체가 연합해서 하나가 되어 몸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몸과 같이 하나입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교인들은 다 각각 조금씩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다르게 내셨습니다. 지력이 다르고, 체력이 다르고, 그 모든 것이 조금씩 다릅니다. 또 하나님께서 같은 성신을 주시기를 주셨지만 성신을 통해서 주시는 은사 선물은 다 각각 조금씩 다릅니다. 이 다른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을 하는데 유익하게 하게 위해서 이와 같이 만든 것입니다.
여기 우리 한국말로 꼭 표현하기 어려워서 영어의 글자를 그대로 표현한다고 하면 영어에 무슨 말이 있는고 하니「유니티 인 다이버시티 」(unity in diversity)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유니티(unity)라고 하는 말은 하나가 된다고 하는 뜻입니다.「다이버시티」(diversity)라고 하는 말은 여러 가지 모양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모양가운데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다양성 가운데 일치 적 성질을 보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꼭 무슨 교회와 교파 관계를 생각하면 모든 교파를 다 없이 하고 꼭 한 교파를 만든다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포도나무에 원 줄기는 하나입니다. 근간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에 여러 가지가 붙었습니다. 꼭 포도나무는 한 가지만 만들자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 하나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어 각각 다르나 다른 가운데서 서로 연결해서 화평과 협조하는 그런 사람의 줄을 끊지 말고 주안에서 화평한 생활을 하라고 하는 듯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성품이 조금씩 다르고, 우리의 맡은 바 책임도 다르고, 하는 일도 조금씩 다르고, 사실 우리 믿는 것도 조금씩 다르지마는 다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화평하고, 어떻든지 단결하여 주를 위하여 협력하여야 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에 고린도 교회에 당파가 있었습니다. 그런 사정 아래서 권면을 하실 때에 이런 말씀을 썼습니다.『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그리스도는 하나인데 너희가 하나된 그리스도를 나누고자 하느냐?』단단히 책망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계의 현상을 살펴보면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을 너무 등한히 생각합니다. 주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끊는 것을 너무 경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파당과 분열과 교파끼리 싸움을 하며, 혹은 예배당을 중심하고 쟁탈전을 하며, 혹은 재판소에 나가서 믿는 사람들이 싸움을 하는 이와 같은 일들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하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몸에 피가 흐르게 하는 일인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만 되겠습니다.『화평의 줄로 성령의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 믿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이 교훈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민족은, 우리끼리 있으니 말이지, 사살 약점 가운데 하나가 서로 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상해에서 시애틀로 비행기를 타고 가 시애틀에 내려서 버스를 탓느데 바로 내 옆에 동양 사람 하나가 와 앉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얼른 보고 일본 사람인지 중국사람인지 모르겠기에 어디서 왔는가 고 말을 해 보니까 일본 사람이었습니다. 하와이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하와이에 우리 한국 사람이 많은데 하와이에서 오래(교사 일 보는 학교에서)있었으면 한국 사람을 더러 만나서 아는 사람이 있겠다고 내가 물었습니다. 자기는 여러 사람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누구누구라고 이름을 말했어요. 그러면서 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은 즉 왜 하와이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자꾸 싸움만 하는가 고 묻습니다.
여러분, 하와이에서 온 분에 계시면 용서하십시오. 이것이 사실이니까 말하는 것입니다. 또 사실 저도 하와이의 과거 사정을 좀 아는데 상당히 싸움이 많습니다. 다른 교포들은 서로 협조하면서 화평한 가운데 삽니다. 우리 겨레가 이렇게 교포간에 서로 싸움이 잦은 것은, 우리 민족의 한 약점인, 합하지 못하는 것 때문인 줄 압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화평의 그리스도를 우리 주로 섬긴다고 하면서 우리 믿는 사람들끼리 하나가 되는데 본을 보여 주지 못하고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그냥 싸움하고 파당을 일으키고 분열한다고 하면 중생의 의의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기독교도들을 가르치실 때 먼저 말씀하신 이 교훈을 언제든지 명심하여야 되겠습니다.
바로 지난주간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나토(NATO)이사회에서 연설하면서 단결이야말로 우리 나토의 생명이라고 고조를 했습니다. 과연 이 시대야말로 우리 기독교들이 어느 시대보다도 협조하고 단결하여야 할 때입니다. 문자 그대로 공산주의, 유물주의, 무신론적 사상, 세속주의 등 온갖 부패한 세력이 한국을 휩쓸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든지 이 때에 화평하고 단결해서 우리 민족을 이 죄악 가운데서, 악한 사상 가운데서, 건져내는 데 총 진군해야 될 때입니다. 그런데 보면 너무 우리 믿는 사람들끼리 자체의 분쟁 때문에 정력을 소비해서 복음을 전파할 힘을 가지지 못하는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 잡히기 전 날밤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간곡한 말씀을 하실 때에『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했습니다. 열 가지 계명 외에 새 계명을 그들에게 준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새 계명이 무엇입니까?『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우리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을 세상 사람들이 알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기 전에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실 때에 제일 중요하게 기도한 제목이 무엇입니까?『저희들로 하여금 다 하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된 것과 같이 저희들을 다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신 것입니다.
산상보훈에『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제일 먼저 우리 믿는 사람들이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에 매는 줄로 성형의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은혜를 받읍시다.
(一九五九년 四월 五일)
Ⅲ-14 신앙생활과 내 자신(마태복음 二十六장 三十-三十五, 六十九-七十五절)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마 二十六·六十九)
오늘 아침 읽은 성경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올시다. 예수 님께서 마지막 날 저녁에 예루살렘 다락방을 떠나셔서 감란산으로 가던 중에 주님과 제자들 사이의 대화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오늘밤에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 하는 그 말씀이 응할 것이니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시몬 베드로가 하는 말이『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아니하겠나이다.』장담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말씀을 계속해서『네가 나를 버리지 않겠느냐? 오늘 저녁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하리라.』하신 것입니다. 이 때에 시몬 베드로 하는 말이『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든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똑같은 음성으로 같은 말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때에 자기의 사신을 믿었습니다. 예수 님의 말씀보다도 오히려 자기를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몇 시간이 지났습니다. 예수께서 과연 악한 사람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대제사장 앞으로 끌리어 갔습니다. 여러 제자들은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하회가 어떻게 되는가 보기 위해서 멀 찌기 따라 가 마지막에 대 제사장의 집 앞뜰에서 예수 님께서 심문 받으시는 광경을 멀리서 보았던 것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피곤했을 줄 믿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는 환멸이라고 할까, 자기가 상상하지 못하는 모든 일이 전개될 때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연약한 심리 상태에 있은 줄 생각합니다.
그런 때를 타서 어떤 비자가 나와서『너도 갈리리 사람이 아니냐?』고 말할 때에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사실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만 아니고 두 번째 또 모른다고 했고, 두 번만 아니고 세 번째는 절대로 관계가 없다고 맹세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의 시선과 자기의 시선이 마주치게 되고 닭이 우는소리를 들을 때에야 예수 님께서 하시던 말씀이 다시 생각나서 곧 그곳에서 나아가서 크게 통곡하였다고 하는 기록을 우리가 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실수는 베드로만 하지 않은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 베드로와 같이 우리 자신을 믿을 때가 있습니다. 보통 사도 베드로와 같이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경고하는 음성보다도 내 자신을 믿다가 실수하는 때가 많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오늘 신앙 생활과 내 자신이라고 하는 문제 아래에서 잠깐 동안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각 사람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우리의 자신을 아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을 옛날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의 교훈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항상 젊은 사람들을 만나서 권면하는 말이『네 자신을 알라.』고 권면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연약하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면 내 자신만으로는 옳은 길을 찾아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높임을 받은 아브라함의 생활을 볼 때에 그의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을 우리가 물론 인정합니다. 어떻게 그이가 갈대아 울에서 부름을 받아서 자기의 고향과 친척을 다 버리고, 알지 못할 땅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만 순종하고 나아간 그 믿음이야말로 오고 오는 세대에 항상 사표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그이가 난을 지나고 가나안에 들어와서 여러 곳으로 배회하면서도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위해서 제단을 어떻게 쌓았다고 하는 것도 우리가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브라함 같은 이도 마침 가나안에 흉년이 들고 애굽 땅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애굽 땅으로 지나가게 될 때에 자기 아내 사라보고 하는 말이『우리가 듣건대 이 애굽 사람들은 대단히 악한 사람들이요. 또 내가 보매 당신은 아름다운 여자인데 당신 때문에 이 애굽사람들이 나는 죽일는지 알 수가 없으니 내가 당신을 누이라고 할 터인데 우리 그와 같이 말을 하고서 여기서 지나갑시다.』아브라함 같은 이도 그렇게 부끄러운 죄를 애굽에 가서 짓다가 마지막에는 애굽 사람에게도 책망을 받고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그곳에서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을 생각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만 정직하게 살았다면 오히려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안전히 살 수 있었을 줄 생각합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연약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생활을 잠깐 돌이켜 생각할 때에 또한 꼭 같은 인상을 우리가 얻습니다. 이 다윗이야말로 얼마나 젊어서부터 좋은 사람입니까? 어릴 적부터 자기 부모에게 효도한 사람이올시다. 자기 아버지를 도와서 베들레헴 들에 나가서 양을 치던 사람이올시다. 알지 못하거니와 불멸의 시라고 하는 시편 二十三편을 젊었을 때에 자기가 양을 치면서 이와 같은 시를 지었다고 대체로 추측이 되는 것입니다.
용감한 사람이올시다.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의 큰 원수인 불레셋 사람 골리앗 같은 사람을 차돌 몇을 가지고 온전히 격파한 용감 담대한 용사가 곧 다윗이올시다. 그 후에 한 동안 다윗이 사울 왕의 핍박을 받았지마는 그런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중 낙심하지 아니하고 언제든지 사울 왕에게 대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이로서 존경할 대로 존경하면서 자기의 처신을 한 것을 보면 모든 일과 모든 사람에게 얼마나 모범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고, 일년 후에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왕이 되고, 온 사방을 다 평정하고 그 때야말로 다윗 왕이 능히 도전할 사람이 아무 데도 없는 그런 때를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연히 어떤 날 오후에 자기 지붕에 올라가서 아름답게 건설되는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다가 어떤 여자를 보게 되었고, 그 순간에 큰 정욕이 일어나서 그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자기의 충복의 아내를 겁탈하며, 마지막에는 자기의 충복까지도 죽이는 무서운 간음과 살인의 죄를 다윗이 진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이라고 하는 것이 이와 같이 연약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오늘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도 언제, 어느 때에,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 어떠한 무서운 죄에 들어갈는지 누가 납니까? 내 자신의 연약한 것을 내가 미리 알아서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신약을 읽을 때에 가룟 유다 같은 청년은 아주 약한 사람인 줄 압니다. 그렇지 아니 합니다. 사실은 이 가룟 유다도 처음에는 높은 이상과 좋은 포부를 품고 자기의 민족을 위해서 염려하고 메시야를 대망(待望)하던 귀한 청년들 가운데 하나이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새로운 선지자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멀리 유다 지방에서 예수 님께 따라온 줄 압니다.
어떻게 모든 것을 열심히 잘 하던지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뽑히었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도 돈주머니를 맡는 회계의 책임을 맡은 걸 보아 무슨 일이든지 똑똑히 하고 분명히 하고 책임감이 있던 청년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귀한 청년이 그만 예수를 三년 동안 따라다녀 보니 자기의 기대하고는 꼭 맞지를 아니합니다. 암만 살펴보아도 예수 그리스도는 결국은 그때 세력을 잡은 사람에게 무참히 희생을 당할 것이 뻔히 보입니다. 이런 예수를 더 따라 다녀야 쓸데없다는 그런 생각이 점점 마음가운데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바에야 아예 돈도 받고 내 안전한 자리로 옮겨 앉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시험에 들었습니다. 결국은 자기자신을 믿던 그 육신이 시험에 들고 만 것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어떤 교육자가 자기 친구와 같이 길을 가다가 길거리에 술이 잔득 취해서 넘어져서 정신 없이 자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교육자가 그 친구에게 하는 말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도 저 사람과 같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부르시는 그 거룩하신 손의 도움이 아니면, 내가 내 자신과 나만 의지하고 살다가는 어떠한 환경, 어떠한 처지 가운데서 어떤 무서운 죄를 지을 는 지 우리가 모릅니다.
우리가 신문지상을 통해서 어떤 청년이 무슨 살인을 했다, 강도를 했다, 무슨 택시 강도가 되었다. 은행에 들어가서 돈을 빼앗았다는 이런 기사를 많이 읽습니다. 그 후에 그 사람들이 법정에 나와 진술하는 것을 읽어봅니다. 다 이구동성으로 진술하는 말이 자기가 어떻게 그런 죄를 범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 죄를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저 그 때 어떻게 되어 죄를 지었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사실인 줄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까 八十된 노인이 담배 대로써 자기의 아내를 쳐서 살인을 했다고 합니다. 그 노인도 그 일을 저질은 후에 스스로 놀랐을 줄 압니다. 八十까지 살다가 더욱이 자기하고 같이 살던 여자를 때려죽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자기도 놀랐을 줄 압니다.
우리 사람의 육신이라고 하는 것, 내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 지 알 수 없습니다. 유혹이 올 때에 어떠한 시험에 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하여 줍니다.『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우리가 우리의 자신을 믿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그런고로 잠언의 저자는 젊은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내 아들아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明哲)을 의지하지 말라.』내 명철을 의지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스스로 속지 말라고 경고를 하여 주십니다. 베드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속았습니다. 다윗 왕도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속았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속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물론 내 자신을 자랑하지 말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오직 주를 자랑할 것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시험에 들기 쉽다고 하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미리 조심해서 모든 유혹을 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나 자신을 부인하라 혹은 이기라는 말씀으로 권면했습니다. 마태복은 十六장 二十四절에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내 자신을 온전히 부정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뜻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삼으라고 하시는 말씀인 줄 생각합니다.
또한 어떤 데 보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말로 가르치셨습니다. 갈라디아 五장 二十四절에는『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육신과 그 자신과 함께 거기 붙은 정과 모든 욕심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서 온전히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경험을 스스로 말씀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였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체험을 영적으로 자기가 당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친히 목 박여 죽었습니다. 대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속에 계셔서 같이 사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우리 자신 가운데는 옛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신 가운데는 죄를 향하는 그 성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깊은 진리를 모르는 우리 동양의 왕양명(汪洋明) 같은 사람도 산중에 있는 도적은 잡아 없애기 쉽지마는 마음가운데 있는 도적은 잡아 없애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마음가운데는 도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문호 가운데 스티븐슨 같은 사람은 우리 사람의 속에 하이드 맨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숨은 사람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지킬 박사와 같이 점잖지마는 그 속에 숨은 사람은 악하다고 더럽고 추합니다. 이 숨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는 일을 성경은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권모 술수와 원수 맺음과, 분쟁과 시기와 화남과, 당파를 짓는 것과 분리하는 것과, 이간과 투기와, 술 취하는 것과 방탕한 것과, 또 이 모든 것을 주장하는 속에 있는 옛 사람입니다.
이 죄의 법을 죽이고 우리의 신앙 생활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어 그 몸이 죽은 것과 같이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처럼 못 박혀서 온전히 죽어야 합니다.
三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서 영적으로 부활한 생활을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올시다. 이 십자가와 부활의 체험이 우리 심령 속에 있을 때에만 우리가 옳은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로마서 十二장 一-二절을 읽으면『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사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 자신을 산 제사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립시다. 나 자신을 온전히 맡겨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 자신을 주장하도록 합시다. 나 자신을 내 마음대로 인도하려고 하지 말고 내 심령에 인도하는 그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께 맡깁시다. 그리스도로 하여금 내 마음의 배의 선장으로 삼읍시다. 그리스도로 하여금 내 심령의 대상으로 삼읍시다. 내가 내 생활을 스스로 하려고 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께서 내 마음속에 계셔서 내 생활을 주장하게 합시다.
그래서 사도 바울 선생과 같이 나는 할 수 없지마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우리의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생활을 우리가 합시다. 몇 가지를 성경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과 신앙 생활에 있어서 특별히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 약점이 무엇이고 내가 항상 연약한 방면이 어디 있는지 미리 알아서 이것을 조심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내 속의 죄의 법을, 옛 사람을 온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같이 못 박아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서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一八六一년 二월 十一일 아침이올시다. 아브라함 링컨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택을 받아서 취임하기 위해서 자기가 二十년 동안 살던 그린필드를 떠나는 아침이었습니다. 그 때에 미국은 큰 시련기를 당하였습니다. 노예 문제로 말미암아 또한 그 밖에 여러 복잡한 문제로 말미암아 남북 전쟁이 일어날 큰 위기, 즉 미국이 분열이 되느냐, 파괴가 되느냐 하는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큰 국가적 위기에 이 링컨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링컨을 전송하기 위해서 역에 나왔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링컨이 고맙다는 말을 하고 맨 마지막으로 이 말을 했습니다.『일찍이 워싱턴의 어깨에 놓였던 짐보다 더 큰 책임을 진 나는 언제 이곳에 돌아올는지 사실 다시 돌아올 수가 있을는지 알지 못하면서 이 곳을 떠납니다. 그(워싱턴)를 도와주신 하나님이 또 나를 이 때까지 인도하시고 내 전 운명을 주장하시는 이의 도움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의 도움이 있을 때에는 나는 실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七, 八년이라고 하는 오랜 남북 전쟁을 통해서 미국 유사 이래에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서의 자기의 책임을 완수했습니다. 내 자신을 압시다. 이 세상의 물결은 높습니다. 악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으려 다닙니다. 내 자신을 믿지 맙시다. 우리의 운명을 총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십시다. 내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마는 하나님의 도움이 있을 때에는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성공합니다.
(一九五九년 四월 十二일)
Ⅲ-15 여호와의 기쁨 (느헤미야 八장 一-十二절)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八·十)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에 된 일입니다. 여러 해를 지나면서 겨우 성전을 재건하고, 또한 여러 해를 지난 후에 느헤미야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을 수축한 후에 七월 一일 성일(聖日)을 당해서 모든 사람이 예루살렘 광장에 모였습니다. 이 때 학사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 책을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며 그 읽은 말씀을 해석해 줄 때, 모든 백성들은 그야말로 오래간만에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게 되어 너무 감격해서 울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여러 무리들을 향해서 외치는 말이『오늘은 여호와의 성일 인데 너희가 우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 우는 것을 그치고 기뻐하여라.』
그러면서 계속해 하는 말씀이『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조금 더 간단히 번역하면 여호와의 기쁨이 우리의 힘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여호와의 기쁨이 너희의 힘이니라.』여호와에 기쁨이 있습니다. 참 신앙에는 기쁨이 따릅니다. 이 기쁨은 여호와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의 근원은 여호와입니다. 이 기쁨은 여호와께 속합니다. 기쁨의 대상도 역시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一00편도 여러분이 잘 기억하는 줄 믿습니다.『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유를 설명하는 말씀이『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인 줄 너희는 알지어다.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곧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 무소 불능하시고, 무소 부재하시며,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공의와 자비와 긍휼(矜恤)이 풍성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올시다. 우리는 그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양입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 시요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믿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 은 요한一서에 이와 같이 외쳤습니다.『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그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면 우리도 그와 같을 것을 아노라.』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달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권속입니다. 그의 권속임으로 그의 유산을 이을 수 있는 후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가만히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시편 一0三편을 잘 기억할 줄 믿습니다.『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恩澤)을 잊지 말지어다.』그러면서 계속해서 하는 말씀이『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그리고 조금 내려가서『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여기에서 우리는 사죄의 기쁨을 발견합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아니하고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기쁨과 화평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사죄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八장 一절에『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定罪)함이 없나니』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도 찬송에 부르는 대로『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化)하도다.』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시편 二十三편을 다 기억하실 줄 믿습니다.『여호와는 나의 목자(牧者) 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 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뿐더러 우리와 동행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여 주십니다. 여기에 주님의 동행과 인도와 보호의 기쁨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목자로서, 친구로서, 우리에게 보혜사를 보냄으로써 성신으로 우리와 같이 게시고 도와주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에녹의 기쁨을 맛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발 앞에서 그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기쁨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의 품에 안기어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사도 요한 의 즐거움과 기쁨을 맛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과 동행하고 교통하는 기쁨이 참으로 신앙이 있는 이들에게는 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난 금요일 저녁, 로드 부장의 말씀을 들은 이가 계실 줄 압니다. 그는 한국 구세군에 오래 있다가 불행히 六·二五 때에 이북에 납치를 당해서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다시 영국에 돌아와 계시다가, 이번에 잠깐 한국에 와서, 이북에서 자기가 지내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 날 저녁에 거기에 참여한 사람은 다 많은 은혜를 받은 줄 생각합니다.
그의 경험 가운데 한 가지는, 자기가 한 번은 너무 피곤하고 마음도 약해지고 믿음도 약해졌답니다. 어떻게 피곤한지 촌 보를 걸을 수 없을 만큼 사방이 캄캄해지는 듯 하는 경험을 한번 당할 때에, 돌연히 시편 二十三편에 있는『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 앞에 상을 베풀어주시니.』 이 말씀이 자기의 머리 가운데 번개 같이 나타났답니다. 그는 새로 힘을 얻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도와주신다고 하는 것을 체험했다고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그와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동해서 선을 이루는 확신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소망의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합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이 시간을 초월해서, 이 세계를 초원해서 영원한 소망의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기쁨이 있습니다. 사죄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통하며 보호함을 받는 기쁨이 있습니다. 영원한 소망의 기쁨이 우리 믿는 자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여러분, 이 여호와의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기쁨은 육의 기쁨이올시다. 여호와의 기쁨은 영의 기쁨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육감적입니다.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생의 자랑, 이런 것들에 대한 만족이 있을 때에 세상의 기쁨은 현세적이요 추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기쁨은 영적 기쁨이올시다. 성신의 열매올시다. 생명의 기쁨이올시다. 양심의 기쁨이올시다. 진리의 기쁨이올시다. 우리 심령의 깊은 기갈에 만족을 주는 생명수를 마시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쁨은 거룩하고 경건한 기쁨이올시다.
세사의 기쁨은 외적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기쁨은 내적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그 기쁨의 기초를 외적 원인에 두었습니다. 환경에 두었습니다. 맑은 날은 기쁘다가 흐린 날은 그 기쁨이 없어집니다. 순경에는 기쁨이 있으나 역경에는 당하면 그 기쁨은 없어집니다. 건강할 때는 기뻐하나 병날 때는 그 기쁨이 없어집니다. 젊을 때는 기쁘나 낡을 때는 그 기쁨이 없어집니다. 살 때는 세상에 기쁨이 있으나 죽을 때는 세상의 기쁨은 없어집니다.
그렇지만 그와 반대로 여호와의 기쁨은 내적인 까닭에 환경을 초월합니다. 맑은 날에도 있고 흐린 날에도 있습니다. 순경에도 있고 역경에도 있습니다. 약할 때에도 있고 강할 때에도 있습니다. 살 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기쁨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일시적입니다. 아침 안개와 같습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집니다. 이 여호와의 기쁨은 영원합니다. 하늘의 별과 같습니다. 항상 있습니다.
세상의 기쁨은 마치 지는 해와 같습니다. 점점 적어져 없어집니다. 늙어갈수록 적어지다가 마지막에 죽으면 아주 없어집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가지는 여호와의 기쁨은 아침에 돋는 해와 같습니다. 점점 커갑니다. 점점 밝아집니다. 영원히 하늘 나라에까지 우리의 기쁨이 더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옛날 우리 동양사람 가운데도 군자의 낙(樂)과 소인의 낙이 다르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과연 우리 믿는 사람들의 즐거움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즐거움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여호와의 기쁨이 너희의 힘이니라.』우리 믿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이 기쁨이 우리의 능력이올시다. 슬픈 마음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곧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줍니다. 기쁨이야말로 능력 있는 생활의 비결입니다. 기쁨으로 하는 일은 힘드는 줄을 모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미국에 가서 이 곳 저곳 구경하는 가운데 어떤 큰 목장을 구경했습니다. 큰 젖소가 백여 두 되는 큰 목장입니다. 젖을 짜는 방이 아주 넓은 방들인데 그들은 전부 소젖을 짜되 기계로 짭니다. 어떻게 여러 소에서 젖이 많이 내려 흐르는지 수돗물 내려오듯 합니다.
그렇게 많이 젖을 짜는데 제가 한 가지 이상하게 여긴 것은 그 젖 짜는 방에다 라디오를 놓았습니다. 소만 있는 그 젖 짜는 방에 라디오를 놓고 늘 좋은 음악을 보내주지 않겠어요? 저는 웃으면서 소만 있는데 라디오는 무엇 하려 놓았는가 고 물으니까 웃으면서 소도 라디오 음악 소리를 좋아한다고 대답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미국의 소들은 우리 농촌의 동포들보다 퍽 낫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사실 소도 마음이 기뻐야 젖이 잘 나온다고 합니다. 아마 아기 어머니들도 그럴 것 같습니다. 마음이 기뻐야 젖도 잘 날 줄 압니다.
여호와의 기쁨이 우리 믿는 사람의 능력이 됩니다. 이렇게 환난이 많고 죄악이 많은 세상에 사는 우리가 여호와의 기쁨이 있어야 이 기쁨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역경을 돌파하고 곤란을 이기고 어려운 것을 참아 견딜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줍니다. 여호와의 기쁨은 우리로 하여금 봉사의 힘을 줍니다. 우리가 약한 사람을 도와주려고 애쓰는 이 봉사 생활에는 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데도 이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 능력이 어디서 오는가? 믿음으로서 내가 받은 내 마음속에 기쁨이 우리에게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여호와의 기쁨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여러분, 빈집에 도적이 든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어째서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면서 예배당에 오기도 하지만 때때로 시험이 빠집니까? 아직도 예배당에 다니기는 다니지만 참된 신앙에 들어가지 못해서 마음속에 신앙으로 말미암아 오는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이 기쁨이 없으니 혹 세상의 기쁨을 좀 얻어 볼까 하고, 세상 사람에게 기웃기웃합니다. 극장에도 가보고 나쁜 동무도 찾아가는 등 속이 비었습니다. 참된 신앙을 얻어서 그 마음속에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세상의 기쁨과 더러운 기쁨을 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옛날 호머라는 헬라 시인이 말한 옛날 이야기를 들으신 분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헬라 나라는 우리 한국의 남방과 같이 조그만 섬이 많은 나라입니다. 옛날에는 그 섬 가운데 문화가 크게 발전했습니다.
옛날 그 여러 섬 가운데 사이렌이라는 아주 요만한 여자들만 사는 섬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들은 특별히 노래를 잘 부릅니다. 아주 미혹 적인, 사람의 마음을 유혹시키는 이런 노래를 잘 불러서 섬 앞으로 지나가는 선부(船夫)들과 그 여객들이 좋은 노래를 좀더 듣기 위해서 섬 옆으로 가까이 가다가는 그 여자들에게 꾀어 간답니다.
그 섬에 들어가서는 돈 있는 것은 다 빼앗기고 아주 망하고 돌아오곤 한답니다. 그래서 이 헬라 사람들은 누구든지 배를 타고 갈 때에 조심하느라고 결심하고 가지만 막상 옆으로 지나가는 동안 그 노래 소리가 들리면 조금 더 듣자고 가까이 가다가는 쑥 들어가곤 했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체이슨이라고 하는 아주 지혜가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분이 그 섬 옆으로 부득이 그의 많은 제자들을 데리고 지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제자들을 한 사람도 유혹에 끌리지 아니하고 내가 섬을 잘 지나갈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에 헬라에 유명한 음악가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거문고를 아주 잘 타는 올시어드라는 사람으로 그 때 헬라에 가장 유명한 제금가(提琴家)였습니다.
이 올시어드를 청해 같이 배를 타고 갔습니다. 배가 그 섬 가까이 갈 때에 올시어드를 보고『여보 당신이 잘 하는 음악 소리를 들려 주시요.』그러니까 유혹의 섬 가까이 가서 올시어드가 거문고를 내서 좋은 음악을 탑니다. 그러니까 이 배 가운데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좋은 음악에 도취해서 그 섬 가까이 다다라서 여자들이 나와서 노래도 하고 떠들었지만 그 노래는 아주 듣지도 않습니다. 이 올시어드의 거문고 소리를 듣다가 이 노래 소리를 들으니 그것은 돼지 소리만도 못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저 올시어드의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평안히 그 섬을 지나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가운데는 우리가 배울 진리가 있는 줄 압니다. 내 심령 속에, 내 마음속에 기쁜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참된 영적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세상의 더러운 죄악이 침노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인 줄 압니까? 과연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아들 되시는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것을 분명히 내가 체험했습니까? 과연 주님께서 나와 같이 동행합니까? 주님께서 과연 내 생활의 목자입니까? 내가 과연 주님과 교통하는 생활을 합니까?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의 기쁨이 있습니까? 이 참된 여호와의 기쁨, 이 기쁨은 우리의 힘이 됩니다. 이 기쁨을 다 받기를 바랍니다. (一九五九년 四월 十九일)
Ⅲ-16 사대은혜 (느헤미야 九장 一-十절)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느 九·五)
주일 저녁은 흔히 구약을 중심해서 생각하였지마는 오늘 저녁은 구약의 인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경회 예배로 볼 마음이 있어서 다른 제목을 택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역시 오늘 낮 예배시간에도 읽은 바 있는 느헤미야 가운데서 읽었습니다,. 낮에도 생각하였지마는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이스라엘 민족이 민족적으로 또한 종교적으로 부흥하는 역사적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지위를 점령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사를 상고해 보면, 이 중요한 역사적 단계에 있어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부흥이 없었던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택한 민족으로서 역사적 사명을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 역사에 있어서 이들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에서 일어나 종교적 부흥은 심히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읽은 말씀을 여러분께서 들었습니다. 이 때에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큰 부흥의 축복을 받았는가? 먼저 그 때 사람들이 한 것은 네 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먼저 부흥의 축복을 받은 네 가지 요소를 생각하고 또한 나아가서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 개인적으로 받아야 할 네 가지 은혜를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이와 같이 시작합니다.『그 들 二十四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이런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이 달은 아마 七월을 가리킨 것 같습니다. 七월 二十四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모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다 모인 것입니다. 먼저 이 때 사람들이 영 적의 큰 부흥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개인 하나씩 흩어져 산 것이 아니고 다 한 곳에 모였습니다. 먼저 모이는 가운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개인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물론 개인 개인의 기도와 성경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일정한 기회에 다 같이 모이는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바와 같이 오순절의 큰 축복도 먼저 一二十명인 당시에 예수의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열흘 동안이나 집회를 하는 가운데, 마지막 오순절 아침에 큰 성신의 세례가 내린 것입니다. 사실 이 오순절 집회 이후에 교회의 부흥의 역사를 상고해 보면, 어떤 부흥이든지 먼저 모이기를 힘쓰고 이 모임 가운데서 집단적으로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저자의 말과 같이 우리가 모이기를 경히 여기지 아니하고 더욱 힘써 모이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또한 둘째로 여기 기록한 것을 보면『낮 四분지 一은 그 처소에서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낭독하고』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낮 四분지 一을 특별히 정해서 이 시간은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奉讀)하고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봉독할 뿐더러 다른 곳에 보면 해석도 하였다고 말씀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였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큰 영적 부흥의 축복의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고 생각하고 공부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인들의 실정을 보면 이 성경에 대해 무식해서 큰 걱정입니다. 학습 문답이나 세례 문답을 해 보면 아주 쉬운 말, 우리가 상식적으로 다 알만한 이런 것을 물을지라도 대답하는 사람이 매우 적습니다. 특별히 자라나는 학생들인 중학교에 다니고 고등학교에 다니고 혹은 대학에 다니고 대학을 졸업하였다고 하지마는 다른 학문들은 아마 상당히 배운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 말씀에 대해서는 상식적인 문제를 물어 볼지라도 대답하는 사람이 매우 적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믿는 부모라 할지라도 우리 자녀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쳐 주는 것을 게을리 하는 까닭입니다. 단순히 한 주일, 주일학교에 와서 잠깐 예배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듣는 시간은 二十분에 불과합니다. 그렇게만 아이들이 배워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중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복 있는 자는 악한 자의 의논대로 하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율법을 묵상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중에 부흥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여기 말씀을 보면『낮 四분지 一은 죄를 자복(自服)하면서』하나님께 경배하는데, 또한 다른 곳을 보면 금식하며 굵은 배를 입고 티 끝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烈祖)의 허물을 자복했다고 그 때 모였던 모양을 서술한 것입니다. 셋째 요소는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읽고 듣게 되면, 먼저 내가 죄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전에 잊어버렸던 죄악을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물론 두었던 죄악이 마음 가운데 생각납니다.
이 때 사람들이 한 것은 모든 죄를 원통히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철저히 회개를 한 것은 금식을 하였고 굵은 배로써 옷을 입고 티 끝을 머리에 부었고 이방사람과 절교하는 것은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과 온전히 관계를 끊고 자기의 죄뿐만 아니고 자기 열조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셋째 요소입니다.
다 우리도 이번 사경(査經)회를 당하여 은혜를 받으려고 한다면 우선 모여야 되겠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여야 되겠고 또한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자복하면서 간절히 기도하여야 은혜를 받겠습니다. 아는 죄, 모르는 죄, 현재의 죄, 과거의 죄, 덮어두었던 죄를 이번 기회에 자복하고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즉 찬송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눈물로 죄를 회개할뿐더러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소리를 높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해야 합니다. 넷째로는 목소리를 합해서 하나님께 찬송을 올렸습니다.
찬송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찬송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찬송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전파합니다. 또한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의 심령을 순화하여 줍니다. 우리의 감정을 정화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심령을 깨끗하게 하고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넷째로는 이들이 찬송을 하였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상경회를 할 때에 특별히 여러분께 부탁하는 것은 열심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찬송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저녁 예배 七시 三十부에 예배를 시작하지마는 七시에 오셔서 반시간 동안 찬송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사경회를 하는 가운데 각 개인의 받은 은혜의 목표가 분명해야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네 가지 큰 은혜를 받아야 될 줄 압니다.
이번 이 사경회를 계기로 해서 우리 교우 한 사람 한사람이 네 가지 은혜를 꼭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잘 아시는 것이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중생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저녁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하신 그 귀중한 말씀 기억하시지 않습니까?『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느니라.』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성신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다 세상에 올 때에 나서 세상에 왔습니다. 부모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 출생함으로 이 세상에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도 거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 나라에 영적으로 출생하여야 들어갑니다. 우리가 처음 한번 육으로 낳으니까 다음에는 영으로 낳아야 되는 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거듭 난다고 하거나 혹은 중생이라고 합니다. 새로 낳는다고 합니다. 이 중생의 은혜는 내가 힘쓸 것이 있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있는데 이 둘이 합할 때에 중생의 은혜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할 것은 온전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따금 세수를 하지마는 세수만 하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목욕이 필요합니다. 온 몸 전체를 온전히 씻어 버리는 목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우리 집 안에서 아침저녁으로 방을 쓸지마는 그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이따금 대청소가 필요합니다.
온전히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올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신을 부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거듭 나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영적으로 거듭나는 새로운 생명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중생의 은혜를 받은 자도 많이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중생의 은혜가 아직 미치지 못한 이들도 많이 계실 줄 압니다. 이번 이 기회에 어떠한 때이든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심령 위에 이 중생의 축복을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한 둘째로는 우리가 늘 듣는 말이지만 한번 더 생각해 봅시다.「헌신의 은혜」입니다.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은혜올시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재주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시간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많으나 적으나 물질을 주셨습니다. 내게 주신 이 몸을 중심으로 해서 내게 주신 재주, 내게 주신 이 물질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이 축복을 우리 믿는 사람들이 꼭 받아야 합니다.
이 헌신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한 가지 분명히 깨달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 있는 모든 것이 온전히 하나님께 속하고 나는 다만 이것을 받아 가지고 있는 청지기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단순히 청지기인 까닭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 마지막 날 이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였는지 못하였는지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 받을 때가 있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 헌신의 은혜를 우리가 받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기회에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 각 사람에게 허락하여 주시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는 이것도 물론 따르는 것이지만 제목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도의 은혜를 우리가 받아야 되겠습니다. 제가 관찰하지 못하는지 모르지마는 가만히 보면 어떤 이들은 일생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전도는 한 사람도 못하고 죽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래 믿으면서 다른 것은 다 하지마는 전도는 못합니다. 다른 말은 다 잘 하지마는 전도에 가서는 입이 딱 붙어서 벙어리가 됩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내가 참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한다면 이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받아야 되겠습니다.
오순절에 一二十명이 성신을 충만히 받은 다음에는 베드로 한 사람만이 오순절에 설교를 했지마는 다음에 기록을 보면 一二十명이 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우리가 받아야 과연 참된 하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 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 아마 전에 들으신 줄 압니다. 어떤 회사의 사장이 예수를 잘 믿는 분이올시다. 꼭 자기는 주일날이면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예배당에 가서 예배보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인데 도무지 전도는 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예수 믿으란 말을 한 마디도 못합니다. 가지의 회사의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마는 다른 이야기를 늘 하지마는 한 번도 예배당에 가자는 전도를 못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주일날은 예배당에 가서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의 온 잘못한 것을 깨달아서 내가 이제는 꼭 전도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자기 회사 사무실에 나가서 사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때 결심이 그저 누구든지 나한테 제일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전도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앉았습니다.
조금 앉아 있자니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자기 비서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 비서가 예수를 믿는지를 알 수도 없고 또 한번도 이 비서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첫 마디로 그가 예배당에 다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이 비서가 눈이 둥글 해지면서 그것을 왜 갑자기 물으시냐고 반문했습니다.『그래, 예배당에 가는가?』『저는 예배당에 가지 않습니다.』『그럼 예배당에 가야지, 예수를 믿어야 해.』이렇게 이 비서한테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서가 하는 말이『아 사장님 참 감사합니다. 사장님을 제가 十五년을 모셨는데 저한테 예배당에 가자고 하는 말씀은 한 마디도 안 해서 저는 제 생각에 나 같은 놈은 아주 못 되어서 예수를 못 믿는 놈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오늘 저한테 이렇게 전도를 해 주시니 이것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는 주일부터 꼭 가겠습니다.』그런 대답을 했더랍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과 오래 사귀고 장사 거래도 하고 아침저녁으로 늘 만나고 그런 이들을 만나서 세상 정치 이야기고 하고 경제 이야기도 하고 세계 소식 이야기도 하고 모든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전도하는 말은 한 번도 안한 그런 청년은 없습니까? 아마 여기 앉으신 여러분 친구 가운데도 이 비서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 친구들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보면 예배당에 항상 가기를 하는데 자기한테 한 번도 교회에 가자는 말 한 마디 안 하니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여러분의 친구가 있을 지 모릅니다.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우리가 받아야 됩니다.
내가 전도할 수 있는 은혜를 받으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먼저 내 성품 가운데, 내 생활 가운데 고칠 것이 더러 있을 줄 압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내가 왜 그 말을 못했나 생각해보면 내 마음 가운데 꺼리는 것이 있어서 말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받아야겠습니다. 전도할 수 있는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올시다. 여러분, 이번 기회에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받기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리고 넷째로는 마지막으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늘 하는 말이지만 우리 믿는 사람끼리 화평할 줄 아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 화평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전도까지 하는 사람들로 화평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이따금 봅니다. 우리 믿는 사람끼리 피차에 죄를 용서해 주고 용납해 주고 피차에 잘못을 알려 주고, 이해해 주어서 혹 어떤 때에 피차에 감정이 소원해 진다고 하지만, 그것을 피차에 삼가서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끼리 화평해서 살 줄 아는 은혜를 우리가 꼭 받아야 되겠습니다.
그저 예수를 믿는 이 가운데도 어떤 때는 예배당에 오다가 저쪽에서 어떤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 그 사람과 만나기를 꺼리면 그가 오는 편과 반대편 문으로 예배당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말도 오래 안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떻든지 피차에 화목해서 화평한 은혜까지 받아야 되겠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여러분이 기억하시지요?『너희가 예물을 제단에 올리려갔다가 네 마음 가운데 네 아는 사람 가운데 원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예물을 거기에 놓고 먼저 가서 그 사람과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라.』우리가 알 것은 형제 사이에 멀어지면 그리스도와도 멀어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가까이 가면 형제 사이도 서로 가까워집니다. 어떻든지 우리 믿는 사람은 서로 화평하고 화목할 줄 알아야만 됩니다.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이북에 잡혀갔다 돌아와서 말씀하시던 구세군 로드 부장의 이야기 가운데 자기가 이 경험을 통해서 특별히 한 가지 깨달은 것은 비록 신조가 다르고 교파가 다르지마는 믿는 사람들이 다 한 주를 섬기고 한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가 피차 도와주고 피차에 사랑하여야 되겠다 하는 것을 더욱 깨달았다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이번에 잡혀가 보니까 거기 다른 교파의, 선교사들이 다 잡혀 가 있었습니다. 혹 그 가운데는 천주교 신부, 성공회 감독, 감리교 선교사, 그밖에 여러 교파 선교사들이 다 한꺼번에 잡혀갔습니다. 다 한 방에 있고 함께 먹습니다. 흔히 말하면 천주고 신부와 성공회 강독과 사이가 좋을 리가 없습니다. 신교 교파 선교사들과 천주교 신부들과 그렇게 사이가 가까울 이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같이 고생하고 같이 눈물 흘리며 같이 고통 하는 가운데서 비록 교파가 제각기 조금씩 다르지마는 그것은 적은 문제요 그것은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고, 우리는 다 한 하나님을 공경하고 한 주를 믿고 다 같은 천당을 향하여 간다고 하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달았답니다.
조금도 다른 것 때문에 감정상 무엇에 소격(疏隔)된 것이 없이 한 형제와 한 자매가 되어서 피차에 눈물을 같이 흘리고 어떻든지 피차에 도와주도록 서로 서두는 그런 광경을 볼 때에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 간증을 제가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 한 교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에 속하는 교인들끼리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가서 감리교나 성결교나 구세군이나 다른 교파에 이르기까지도 우리가 믿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지마는 다른 것보다도 같은 것이 더 많다고 하는 것을 항상 기억하여 서로 사랑하고 서로 협조하고 공동 보조를 취할 줄 아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이런 정신은 요즘에는 성경에 있는 원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에큐메니칼 정신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처음 듣게 되니까 이것을 오해해서 여기에 큰 이단이나 있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혹 있습니다. 그것은 순전한 오해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끼리 피차에 협조하고 사랑하고 공동보조를 취할 경우에 세계적으로 무신론과 싸우는 이러한 때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대동단결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 넷째 은혜 즉 화목의 은혜까지 우리는 꼭 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 저녁에 우리가 교회 부흥의 네 가지 비결을 생각했습니다. 제일 먼저 열심히 모여야 되겠고, 둘째로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여야 되겠고, 셋째로는 전도해야 되겠고, 넷째로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려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경 회를 하는 동안에 우리 개인 개인 하나 하나가 이 네 가지 은혜를 꼭 받도록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다.
제일 먼저는 중생의 은혜, 둘째로 헌신의 은혜, 셋째는 전도할 수 있는 은혜, 간증의 은혜, 넷째는 형제 화목의 은혜로 오늘 저녁 우리 이 사경 회에 큰 부흥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개인 개인이 이와 같은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이제 다 공동으로 한 五분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다. (一九五구(九)년 四월 十九일·저녁 예배)
Ⅲ-17 첫 꽃 주일 (마가복음 九장 三十三-三十七절, 十장 十三-十六절)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十·十四)
오늘은 유월 둘째 주일, 세계적으로 어린이 주일 혹은 꽃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아마 자연계에서 꽃이 제일 아름답고,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어린이들이 제일 아름다우므로 이 어린이 주일을 꽃 주일이라고 부르게 된 듯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꽃을 사랑하시고 또 어린이들을 사랑하십니다.
오늘 아침설교 제목을 첫 꽃 주일이라고 정하였습니다. 그것이 꼭 합당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것을 꽃 주일이 시작된 첫 날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꼭 그 날이 주일이었는지 물론 확실히 모를 것입니다. 꽃 주일은 예수 님에게 부모님들을 데리고 옴으로부터 말하자면 그 날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이 읽은 성경 말씀, 마가복음 十장 十三-十六절까지에 기록된 그리스도 생활에 있어서 한 작은 일화, 부모들이 주님께서 만져 주시기를 원해서 주님 앞에 데리고 오니 제자들이 그들을 보고 꾸짖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오히려 분히 여기면서 어린아이들이 예수께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아이들을 환영하면서 그 아이들을 친히 안으시고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 축복하여 주신 일입니다.
이 간단한 일화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것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는 줄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지나 갈수록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이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와 어린이에 대한 그 교훈의 뜻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十八세기는 민중을 발견한 세기요, 十九세기는 여자를 발견한 세기요, 그러나 二十세기는 어린이들을 발견한 세기라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근래에 심리학이 점점 발전됨에 따라서, 더욱 일생을 통해서 이 아동 시기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라고 하는 것을 제 인식하게끔 되는 것입니다. 구세군은 처음으로 설립한 바아드(Baath)대장은, 우리는 마귀보다 손을 먼저 써서 어린이들에게 죄악을 배우기 전에 선을 배워줘야 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 말하자면 첫 꽃 주일에 된 사실을 다시 한번 추억해서 우리가 피차에 은혜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읽은 대로 이 첫 꽃 주일은 부모들이 어린이들을 예수 님께 데리고 옴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부모들이 혼자 오지 아니했습니다. 어린이들을 데리고 예수 님께 온 것입니다. 여기에 꽃 주일에 부모들의 의무를 우리가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부모들은 어린아이들을 주님께 데리고 올 의무가 있습니다.
한나는 어린 사무엘을 데리고 성막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결례의 날이 찰 때에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으로 간 것입니다. 엘리사베드도 역시 아기 요한 을 데리고 성전으로 간 것입니다. 구약 시대 모든 경건한 부모들은 어린 아기들을 데리고 성전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이 원리는 지금 우리에게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어른들만 교회에 나오는 것은 부복합니다. 우리 어린이들도 데리고 같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모가 다 세례를 받은 경우에는 우리 가정의 귀한 선물 아기가 올 때에 먼저 하나님께 데리고 와서 아기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六개원 전에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에는 결례의 날 四十일이 지나면 어린 아기를 성전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아이들을 영아 부에 데리고 와서 영아 부에 같이 참여시키는 것을 의미하고, 그 다음에 유년부, 그 다음에 초등부, 그 다음에 중등부, 그 다음에 고등부, 주일학교 각 부에 어떻든지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꼭 출석하게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와 같이 사방에서 모여오는 경우에 있어서는 어떤 가정은 교회가 너무 멀어서 어린아이들을 본 교회로 데리고 오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사실 유년 부나 초등부 시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모의 의무를 바로 한다고 하면 적어도 중학시대부터는 본 교회에 보모와 함께 참석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습관을 꼭 양성시켜 주어야 될 것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교회에 나가서 찬송을 배우고 기도를 배우고 성경 말씀을 듣고 교회에 출석하는 습관을 양성해 주는 것은 그 아이들의 일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아이들을 예배당에 데리고 오는 것만이 의무를 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모들이 중심으로 어린아이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교회에 데리고는 나오지마는 중심으로 아이들을 바치지 않는 가정이 많은 줄 생각합니다. 한나는 중심으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중심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모든 어진 부모가 그러했습니다.
중심으로 바친다고 하는 것은 아이들을 기를 때에 온전히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교육을 하는 것이나 학교를 작정하는 것이나 모든 일에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중심해서 아이들을 인도한다고 하는 뜻입니다.『네 아들이 어디 잇느냐?』주님께서 우리에게 종종 묻습니다. 부모들은 이 자리에 나와 앉았지마는 여러분의 아들과 딸들은 이 시간 어디 있습니까? 부모들은 신앙가운데서 천국에 들어왔지마는 여러분의 아들과 딸들은 이 시간 영적으로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각각 대답하시고 깊이 자성(自省)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영락교회 교정의 제일 아름다운 광경은 여러분께서 모시려고 하면 아침에 일찍이 예배당에 나와 보세요, 어린이들이 주를 찾아 나오며 특별히 혹은 할머니 혹은 어머니가 아이의 손을 잡고 업고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오는 그 광경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목사로서 한 가지 제일 큰 낙이 있다고 하면, 아마 그 경경을 보는 즐거움일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질이올시다. 아마 그보다 더 큰 낙이 있다고 하면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뺨이 석류 반 조각 같이 붉은 어린 아기를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일일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을 주님께 데리고 오는 것을 우리가 입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의 신앙 생활을 바로 지도하려고 하면 할 수 있는 대로 온 가족이 특별히 중학생 이후에는 한 교회에 나오도록 우리가 인도하고 그 아이들의 예배당에 나가서 가지는 태도와 사귀는 동무들까지 부모가 자세히 감시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 첫 꽃 주일에 제자들이 이렇게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고 꾸짖었다고 그랬습니다. 물론 이 실수는 고의로 한 실수는 아닙니다. 사실은 제자들이 예수 님을 사랑해서 분주한데 아이들까지 데리고 오니까 예수 님을 위해서 이 부모들과 아이들을 꾸짖은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을 사랑이되 지식이 없는 사랑입니다. 열심은 열심인데 지식이 없는 열심입니다. 이해가 없는 열심입니다. 또 아이들도 예수께 와야 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그릇된 생각입니다. 또 보통으로 어른들보다 아이들을 경시(輕視)하는 것이 그 때 일반 사람들이 가지는 태도 가운데 하나였든 듯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태도를 실상은 아이를 데리고 오는 어머니에게도 잘못이요, 어머니와 같이 나오는 아이들에게도 잘못이요, 그 아이를 영접하려고 하는 예수 님의 대해서도 실수입니다. 이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배치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에 위배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격과 그 일상 생활에 반대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 분히 여기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어린아이들이 예수께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금하지 말라고 하는 말은 좀더 원어에 가깝게 번역한다고 하면 방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장해하지 말라, 어린아이들이 내게 올 때에 장해물을 두어서 장해하기 말아라 하는 그 뜻입니다.
자, 먼저 이 제자들의 실수를 생각하고 특별히 교회의 제직 자들이나 주일학교 선생들은 이 말씀을 자세히 들을 필요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조금 잘못하면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하는 것 같지마는 그만 어린아이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떤 가정에 심방 가서 우리교회에 새로 나오는 어떤 청년들 만났는데, 그 청년의 신앙 경험을 물어보니 일찍이 이북에 있을 때에 주일하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주일 학교에 다니다가 그만 두고 오해 동안 예배당에 안 나오다가 다시 나오는데 어떻게 되어서 그 때 그가 그만 둔 사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청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옛날 일제 말기 우리교회가 일제 탄압 아래에 있을 때에, 열두 시가 되어서 사이렌만 마면 묵도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에는 이렇게 설교하다가도 열두 시만 되면 설교하다 말고 다 묵도할 수밖에 없는 그런 때를 우리가 지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그 때 예배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주일학교에서 아마 무슨 집회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열두 시가 되니까 다 묵도하라고 해서 묵도하는데, 이 학생이 묵도를 안 했다고 합니다. 또 하기야 정성 있게 묵도한 사람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그 아이가 묵도를 안 했다고 주일학교 선생이 와서 그 아이를 때렸다고 합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 자세히 들으시오, 주일 학교에서 아이들을 때리면 안 됩니다. 무심하게 아마 질서를 유지하노라고 선생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맞는 아이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섭섭했습니다. 그 청년은 오랫동안 교회에 안 나가다가 그 후에 장성해서 아무래도 자기가 예수를 믿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답니다. 이런 각오를 가지고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주일학교에 나오다가 어떻게 우리 교회의 직분 맡은 분이나 목사가 실수를 함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안 나오는 학생은 이 사람만이 아닌 줄 생각합니다. 방해하지 아니하도록 우리가 조심해야 될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걸음 더 깊이 생각할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의 불건전한 신앙생활, 곧 모든 경건하지 못한 언행들은 근본적으로 아이들이 주님께 나오는 것을 방해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언제든지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가 사를 것도 혼자 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활은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는 특별히 우리 가정에 있는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믿는다 하면서 우리가 생활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좋은 모범을 주지 못한다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나오는데 큰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도 그 생활을 봅니다. 그래서 어른들의 생활을 통해서 말하자면 요사이 말로 그들에게 시청각 교육을 줍니다. 여러분은 다 아이들이 구경하는 활동사진의 배우인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이라고, 백 마디의 말보다도 한 가지의 행동으로서 반대의 행동을 보여 주면 아이들은 그것을 본받습니다.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여러분 부모들은 신앙생활을 잘 하는 가운데 있다고 하지마는 자녀들 가운데 아직 신앙 생활에 들어오지 못한 가정이 있다고 하면 깊이 반성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과연 우리 가정에서 하는 일 내 사회에서 하는 일이 명실공히 신행(信行)이 일치해서 나의 제일 가까운 자녀들에게 참된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는가 그렇지 아니하고 단순히 외형으로 예배당에만 출석했는가? 우리의 생활이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나오는데 장해가 되지 아니해야 되겠습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것은 제일 큰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나는 믿는 소자 하나를 범죄 하게 하는 자는 차라리 큰 맷돌을 그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으리라.』어른들이 아이들은 죄게 빠뜨리는 일, 선생이 학생을 유혹하는 일, 장성한 사람들이 철없는 아이들을 죄에 빠뜨리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흉악하고 용서 못할 죄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그리고 셋째로, 꽃 주일의 축복이 있습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예수 님께 데리고 올 때에는 그저 좀 만져나 줄까 하고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여기 기록을 보니 주님께서는 그 아이를 친히 팔로 안으시고, 복을 비시고, 손을 그 머리에 얹어 주셨다고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의 넘치는 부모의 기대에 넘치는 복을 주셨습니다. 부모들이 상상하던 그 이상의 축복을 어린이들에게 예수 님께서 더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누구든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중심으로 주님께 바치는 아기 위에는 부모가 상상하고 기대하는 그 이상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한나가 어린 사무엘을 데리고 와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많은 기대가 있은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에 사무엘의 머리 위에 한나가 상상하던 그 이상의 축복을 더하여 주신 것입니다. 엘리사베드가 아기 요한 을 데리고 하나님께 바칠 때에 큰 기대가 있은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요게벳이 어린 모세를 하나님께 바칠 때에 큰 기대가 있은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 사실을 보면 어머니가 상상하던 몇 십 배, 몇 백 배의 그 이상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중심으로 하나님께 아이들을 바치는 그 가정에 기대 이상의 주님의 크신 축복이 임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할 때에 세상에 있어서 제일 큰복은 자손의 복이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사실 자손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려고 하면 그 자손의 머리 위에 하나님의 축복의 손이 있어야 그 가정의 축복이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오히려 화가 미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을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은과 금은 우리에게 없지마는 주님의 축복을 유산으로써 우리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넷째로 꽃 주일의 교훈을 잠깐 생각하세요.『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이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편견이 없습니다. 선입 주견(主見)이 없습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진실합니다. 그 천진성(天眞性)을 우리가 배워야 되겠습니다. 둘째로, 어린이들은 의심이 없습니다. 부모의 말이나 어른의 말이면 털끝만치도 의심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믿습니다. 그 절대의 신뢰성, 전적으로 믿는 그 믿음을 우리가 배워야 되겠습니다. 셋째로는, 어린아이들은 무슨 지식이나 무슨 문벌이나, 무슨 지위나, 무슨 물질에 대한 교만이 없습니다. 겸손합니다. 그 겸허성(謙虛性)을 우리가 배워야 되겠습니다. 진실 되고 참으로 믿고 겸손히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은 나이는 많지마는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하늘 나라의 귀한 어린 자녀입니다.
주님께서 그와 같은 심령을 하늘 나라고 영접하시고 그 위에 축복을 더하여 주십니다. 오늘 꽃 주일을 당해서 부모들의 의무를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제자들이 한 실수를 우리가 경계해야 되겠습니다. 주님의 축복은 우리 기대 이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어린이에게 배워서 겸손하고 참되고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一九五九년 六월 十四일)
Ⅲ-18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가복음 四장 一-九절)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十·十二)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렘 四·三)
『너희 묵은 땅을 기경(起耕)하라.』『너희 묵은 땅을 갈라.』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 아침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께서 이미 들으신 대로 예수 님께서 갈리리 바닷가에서 여러 가지 진리를 가르치실 때에 제일 먼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려 들에 나갔습니다. 더러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얼마 안 되어서 새가 와서 그 씨를 주워 먹었습니다. 더러는 돌작밭에 떨어졌습니다. 곧 싹이 나서 자라기는 했지만 뿌리가 없음으로 햇빛이 쪼일 때, 곧 말라죽은 것입니다.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습니다. 싹이 나고 자라기는 하였지만 그만 가시 때문에 숨이 막혀서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더러는 옥토에 떨어졌습니다. 결실을 맺는데 혹은 三十배 혹은 六十배 혹은 백 배나 맺혔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사람의 마음을 비유해서 가르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 밭을 의미한 것입니다. 길가와 같이 굳고 많은 사람이 내왕하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돌작밭과 같이 겉은 부드러운 흙이 있으나 속에는 돌이 많은 옅은 마음이 있습니다. 가시덤불이 덮인 흙과 같이 여러 가지 세상의 염려와 자기의 욕심으로 쌓인 험한 마음이 또한 있습니다. 옥토와 같이 부드러운, 돌도 없고 가시밭도 없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 마음 이외에 한 가지 종류의 땅, 한 가지 종류의 마음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묵은 땅, 묵은 밭과 같은 마음입니다.『너희 묵은 땅을 기결하라.』묵은 땅은 어떠한 땅입니까? 제가 짐작하기에는 본래는 좋고 부드러운 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 돌보지 아니했습니다. 쟁기로 갈지도 아니하고, 호미를 대서 김도 매지 아니하고, 그냥 오래 내버려두어서 땅이 굳어지고 잡초가 성한 밭입니다.
우리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배당밖에 나가면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종류의 마음 밭을 다 발견할 수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예배당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이 네 가지 종류 밭 이외에 묵은 밭과 같은 마음의 밭도 또한 발견할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묵은 땅의 모습이 어떠한지 잠깐 생각하여 보세요. 농촌에서 자란 분이 있다면 묵은 땅의 모습이 잘 상상될 줄 믿습니다. 저는 본래 농촌에서 나고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 묵은 밭의 모습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묵은 밭은 본래는 부드러운 흙이 있었지마는 다시 굳어집니다. 오래 쟁기로 갈지도 아니하고 오래 호미 맛도 보지 못하니까 자연 굳어졌습니다. 비가 오고 해가 쪼일 때, 점점 더 세월이 갈수록 걷어만 갑니다. 이 묵은 밭에는 곡식은 별로 보이지 아니합니다. 여러 가지 보기 싫은 잡초만 무성해집니다. 어떤 때에는 가시 같은 것도 납니다. 곡식으로 덮인 옥토는 얼마나 보기 아름다운지 알 수가 없지마는 묵은 밭은 보기도 싫습니다.
물론 묵은 밭에는 열매가 있을 리 없습니다. 혹 곡식 씨앗을 뿌려서 싹이 난다고 할지라도 무성한 잡초 때문에 숨이 막혀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 땅은 온전히 쓸데 없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햇빛을 매일 받고, 하나님이 저녁마다 주시는 이슬을 받고, 때때로 적서 주시는 좋은 비를 받지마는 묵은 땅은 거기에 대한 보답이 없습니다. 햇빛도 그저 받고 비도 그저 받고 이슬도 그저 받기만 하는 쓸데없는 땅입니다.
쓸데없는 것만 아니고 한 걸음 나아가서 장해되는 땅입니다. 옆에 밭이 있을 경우 그 옆에 오래 묵은 땅이 있으면 거기서 돋아나는 김의 씨들과 잡초의 씨들이 가을에 나라와서 좋은 옥토에 떨어져서 옥토 위에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잡초를 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쓸데없을뿐더러 좋은 옥토, 많은 곡식을 내는 밭을 오히려 더럽히고 방해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이런 묵은 밭이 오래 되면 마귀를 위해서는 열매를 맺습니다.
이 묵은 밭과 같은 마음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본래는 옥토였습니다. 그러나 오래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는 가운데서 그 마음이 굳어집니다. 좋지 못한 습관이 하나 뿐이 아니고 많이 생깁니다. 그 습관이 점점 뿌리가 깊어집니다. 완고하여지고 고집만 세게 됩니다. 여러 가지 잡초, 즉 세상의 생각과 사상, 육신의 정용과 안목, 이생의 자랑과 교만한 마음, 비열한 것, 모든 잡초가 마음속에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와 같이 묵은 밭과 같은 마음은 하나님의 햇빛이 쓸데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슬과 비도 쓸데가 없습니다. 성경을 듣고 읽거나 설교를 듣거나 도덕의 교훈을 듣는대야 모두 쓸데가 없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마음속이나 그 생활에 아름다운 열매가 열릴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습니다.
열매 없는 것만 아닙니다. 이런 묵은 밭 같은 마음이 오래 되면 좋지 못한 지식, 좋지 못한 씨를 오히려 옆에 있는 옥토와 같은 마음에 펴 쳐서 좋은 곡식을 내는 옥토까지 더럽히는 쓸데없고 방해하는 묵은 밭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마음을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너의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아라. 먼저 묵은 땅을 갈아라.』무엇을 심기 전에 이와 같은 묵은 밭
은 먼저 예리한 보습을 넣어서 갈아 굳은 흙을 깨뜨리고 뒤집어엎고 갈아야 됩니다. 잡초를 뽑아 버려야 됩니다. 가시덤불을 베어서 불에 던져야 됩니다. 열게 갈면 안 됩니다. 깊이 갈아서 속에 있는 뿌리까지 뽑아서 얼른 불 살아 버리고 혹은 묻어서 온전히 썩혀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습을 대서 성신의 보습으로써 묵은 밭과 같은 마음을 깊이 갈아서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속에 있는 음란과, 시기와, 방탕과, 모든 불결한 쓴 뿌리까지 버려서 새로운 옥토로 회복한 후에야 좋은 씨를 뿌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묵은 밭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굳어서 처음에는 힘듭니다. 힘들어도 갈아야 됩니다. 아픕니다. 굳은 마을을 깨뜨리는 것이 아픕니다. 오래 사랑하던 죄악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이 아픕니다. 아파도 뽑아 버려야 됩니다.
묵은 밭을 기경하기 전에 어떤 씨도 뿌릴 수가 없습니다. 무슨 기독교 도덕을 배워 줄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묵은 밭을 갈아야 됩니다. 이것을 회기하고 하고 중생이라고 합니다. 성신의 보습으로써 내 마음을 온전히 깨뜨려서 아프지마는 모든 굳은 것을 고치고 잡초를 제거해 버려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의 마음 밭을 보시고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라도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온 자가 있으면 성신의 보습으로 이 시간에 갈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후에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 제일 먼저 부르짖은 말씀이『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먼저 회개해야 됩니다. 근본적으로 마음이 변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도 요단강 가에 나타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에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는 복음도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을 볼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어찌하여 전에는 열매를 맺던 사람들이 오늘날 몇 해 동안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묵은 밭에 씨를 뿌려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성경의 말씀을 아무리 듣고 설교를 아무리 들은들 묵은 밭에 떨어질 때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먼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읍시다. 그런 까닭으로 예수 님께서 오시기 전에 먼저 세례 요한이 와서 회개로써 마음 밭을 준비한 것입니다.『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너희 묵은 밭을 갈라.』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십니다.
아무리 묵은 밭일지라도 갈면 온전히 깨뜨리고 부드러운 마음이 되면 잡초를 제거해 버리면, 그 다음에는 옥토가 다시 되어서 씨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三十배도 되고, 六十배도 되고, 백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옛날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 가운데 요나 선지자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본래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입니다.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마음이 옥토였습니다. 그러나 어찌하다 그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자기의 편협한 생각과 편견과 고집이 마음 가운데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할 때에 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강퍅해졌습니다. 굳어졌습니다. 그 밭이 묵은 밭처럼 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반대 방향으로 배를 타고는 다시스로 향해서 가는 묵은 밭, 쓸데없는 밭과 같은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다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큰 풍랑이 있는데도 자기는 배속에 들어가서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러나 제비 뽑는 가운데서 그만 뽑혀서 마지막에는 바다 속으로 던 지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큰 고기 배속에 들어가 그 어둡고 그 민망한 곳에 들어가서야 자기의 굳은 마음이 깨어지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고기 뱃속에 들어가서야 묵은 땅을 갈기 시작했습니다.『오, 주님이시여,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한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라도 기회를 주시면 아버지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그 깊은 속에서야 묵은 땅을 기경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두 번째 기회를 주어서, 다시 그 옥토에 씨를 뿌려서,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로 가서 큰 권세와 지혜로 선포하여 몇 일만에 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온 성이 회개하는 큰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묵은 땅이라도 다시 기경해서 곡식을 심게 되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약의 여러 인물을 공부하는 가운데 마가 요한 을 생각합니다. 이 청년은 본래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환경 가운데서 장성한 모양입니다. 바나바의 생질로서 많은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젊은 사람들 가운데도 특별히 택함을 받아서 제일 먼저 바나바와 바울이 첫 번 전도 여행을 떠나갈 때에 사도들을 도와주는 특권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옥토입니다.
그러나 마가의 마음 가운데 점점 잡초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생각만 주장하게 되고 사도들을 도와줄 마음이 적게 되었습니다. 아무 재미가 도무지 없는 것 같이만 생각되었습니다. 마음이 점점 걷어져서 마지막에는 위대한 사도를 배반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쓸데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둘째 여행을 떠날 때에 바나바는 용서하고 다시 데리고 가자고 했지마는 바울은 아예 저버렸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청년을 바울은 데려갈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그와 같은 거절을 받은 후에 마가 요한 이 자기 마음 가운데 크게 깨달음이 있은 줄 압니다. 자기의 묵은 밭을 다시 갈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자복(自服)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보면 이 묵은 밭을 다시 갈아서 알렉산드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큰 교회를 세운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을 뿐더러 마가복음을 기록해서 공을 세웠고, 그 다음에 바울도 편지 가운데도 마가는 그에게 심히 필요하니 꼭 데리고 오라고 하는 열매 맺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묵은 밭이라도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래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성신으로 하여금 내 마음 밭을 갈게 하면 다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타임 잡지에도 세 사람의 회개한 사람의 이야기가 났습니다. 한 달 전쯤 미국 장로교회에서 발행하는「프레스바이터리안」(Presbyterian)이라고 하는 잡지에 그의 신앙 고백 문이 길게 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본래 중국에서 난 사람으로서, 오래 미국과 유럽에 여행도 하고, 영어로 책도 많이 쓰고, 중국말로도 책을 많이 쓴 임어당(林語堂)박사입니다.
그 사람은 본래 목사의 아들입니다. 상해에서 기독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북경에 가서 교수로 있을 때에 점점 딴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세상의 철학을 기독교 철학보다 더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고백하는 대로 점점 거기로 기울어졌습니다. 사람은 이성대로 살면 그뿐 아니냐? 사람은 자기 힘으로 무엇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자기자신(自己自身)을 자신(自信)하게 하는 인본주의사상(人本主義思想)이 점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온전한 유물주의자(唯物主義者)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를 다 부인하고 이 세상에 실재는 물질밖에 없다는 이런 사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부인을 따라서 한 번은 뉴욕에 있는 매디슨 장로 교회에 예배보려 같이 갔다가 그 목사의 감화를 받게 되어 한번 가고 또 가고 여러 번 가서 온전히 그 마음이 변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약 일년 번에 그 교회에서 온전히 과거를 청산하고 그 교회에 입교해서 교인으로 일년 동안 조용히 있다가, 일년 후에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고 온 세계에 자기는 다시 기독교로 돌아 왔다고 하는 것을 증언하게 된 것입니다.
오래 그 밭이 묵어 있었고 잡초가 났습니다. 좋지 못한 풀도 많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다시 묵은 밭을 갈았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다시 그 땅 속에 들어갔습니다. 이 앞으로 임 박사는 온 기독교회는 물론 온 인류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줄 확실히 압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묵은 땅을 기경해야 되겠습니다. 묵은 땅을 그냥 두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신 것은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인데 그저 주시는 햇빛을 받고, 그저 주시는 이슬을 받고, 때때로 내리는 단비를 받으면서, 아무 열매도 맺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열매 없이 이 세상에 산다고 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묵은 땅이라도 다시 갈면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농사해 본 사람은 다 잘 알 것입니다. 묵은 땅을 갈고 곡식을 심으면 그 후에 특별히 잘 됩니다. 묵은 땅이 다시 은혜를 받게 되면 특별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 읽은 성경 말씀도 우리가 묵은 땅을 기경하기만 하면 여호와께서 임 하사 의를 비처럼 충만히 내리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스스로 내 자신을 살필 때에 묵은 땅이 있습니까?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이 시간에 지체 말고 온전히 그 땅을 기경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三八이북에 있을 때에는 많은 열매를 맺었지마는 이남에 넘어 온 다음에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묵은 땅이 있습니까? 그런 땅도 오늘 아침에 기경합시다.
여러분, 혹 다른 촌에 있을 때에 열매를 맺었지마는 서울에 온 이후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묵은 땅이 있습니까? 이 시간부터 그 땅도 다시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여러분, 내가 확실히 믿는 것은 만일 우리 영락교회에 있는 六천 명 교우만도 온전히 묵은 땅을 갈아서 열매를 맺는다고 하면, 온 서울은 물론 온 한국에 큰 열매를 맺힐 수 있는 줄 압니다.『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一九五九년 六월 二十一일)
Ⅲ-19 그리스도의 약속 (요한 복음 六장 二十七-四十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오는 자는 내가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六·三十七)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약속은 이 말씀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중요한 약속 가운데 하나인 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요한 복음 六장 三十七절을 통해서 우리 믿는 자의 구원에 대하여 세 가지 중요한 진리 혹은 원리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먼저는,『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내게로 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자가 있습니다. 곧 아버지의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내게 오는 자는」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우리 인간의 책임이 우리 인간의 하는 일을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와야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렇게『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그리스도의 하신 일과 그리스도의 약속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아침, 그리스도께서 친히 주신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먼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는 먼저 아버지께서 주시는 자가 되어야 우리가 주님께 올 수가 있습니다. 이 뜻은 곧 알아듣기 어렵지마는 성경을 상고하여 보면 이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가령 에베소서 一장 三절부터 五절까지 제갈 읽을 때에 조용히 들으시기를 바랍니다.『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創世)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택(擇)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거기 보면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로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서 八장 二十九절과 三十절을 읽으면, 역시 같은 뜻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미리 정하셨으니」하는 예정입니다.『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미리 그들을 부르시고, 그를 의롭다 하시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 전서 一장 하 반절에는 역시 같은 뜻을 다른 말로 가르치십니다.『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에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거기에 택한다고 하는 말이 세 번 거듭 나옵니다.
예수 님께서도 가이사라 빌립보 지경에 아셔서 제자들을 향해서 물으시기를『세상 사람들이 나는 누구라고 하드냐?』제자들이 더러는 엘리야라 하고,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 하고, 혹은 선지자라고 부르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 님이 다시 묻기를『그러나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시몬 베드로가 그 때에 곧 대답하는 말이『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때 예수 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시니라.』하나님께서 먼저 그 진리를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입니다. 이 예정 문제는 신앙적 여러 가지 의문을 가져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임이 틀림없고 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백성들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택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특별히 택하여서 선지자로 세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크신 경륜 가운데서 세상 사람 가운데 특별한 사람들을 택하여 구원하여 주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진리는 모든 선지자들이 가르쳤고, 모든 사도들이 가르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셨고, 온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본 사람은 우리의 생활을 돌이켜 볼 때 우리의 경험이 또한 이 진리를 우리에게 확증해 주는 줄 압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하신 여러분, 잠깐 돌아다보세요. 여러분이 예수를 믿게 되고 여러 가지 시험과 재난이 많은 이 세상 가운데서 지금까지 믿음을 보존하게 된 것이 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인가, 혹은 내 의지로서 내가 남보다 나아서 내 힘으로서 이 때까지 신앙을 보존해 오는가? 아마 누구든지 이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모든 환경과 모든 주위 사정과 내 가정 형편과 여러 가지를 도와주시는 가운데서 나를 이와 같이 도와주셨다 하는 것을 느낄 줄 생각합니다. 이 예정을 믿는 사람은 언제든지 그 마음 가운데로부터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북 바쳐 올라옵니다. 하나님께서 나같이 말할 수 없이 죄 많고 불(不)스러운 것을 불쌍히 여겨 택하시고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한 마음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언제든지 겸손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나 된 것이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 고로,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 대하여서는 겸손한 마을을 가지게 됩니다. 내 힘으로 구원을 얻고 내 힘으로 무엇을 했다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 대해서 감사한 마음이 적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겸손한 마음이 적을 것입니다.
이 진리를 우리의 이성(理性)으로 다 깨달아 알기 어렵습니다. 특별히 이 진리와 인간의 자유문제를 어떻게 조화시킬는지 누구나 확실히 말할 사람은 없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예정의 사실이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예수 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가 예수를 택한 것이 아니오 예수께서 우리는 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한 것입니다.
둘째로, 성경은 그 진리만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내게 오는 자를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않겠다고 그랬습니다. 주께 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할 일이요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오는 것은 내 책임입니다. 예정의 진리는 인간의 자유 행동을 묵인하고 인간을 한 기계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탕자가 먼 나라에 가서 죄 가운데 있었지마는 그 가운데서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과 같이 내가 주님 앞에 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보면 구약으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오라고 하는 말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무릇 목마른 자는 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려 내리리라.』하나님께서 옛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오 진흥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과 같게 하리라.』
예수 님의 유명하신 혼인 잔치의 비유를 보면, 자기의 아들을 위해서 혼인 잔치에 모든 물건을 다 배설하여 놓고 종들을 사방에 보내어 외치는 말이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누구든지 다 오셔서 참여하기를 바란다면서 외치는 것입니다.
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책임인 것입니다. 여기 온다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 님 당시에도 예수 님을 보기 위해서 온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적으로 올 사람은 적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을 구경하기 위해서 온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꼭 그대로 믿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적었습니다.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다 이렇게 하나님의 집으로 오기는 왔지마는 사실 내 심령이 주님 앞에 왔습니까? 여기 온다고 하는 말은 단순히 육신만 온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육신은 이 자리에 있지마는 여러분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의 말씀은 중심으로 온다고 하는 뜻입니다.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삼고 믿어 그에게 내 전 생명을 바치고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말입니다.『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주에게 오는 자! 오는 자라야 예수 님께서 영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께 온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중심으로 주님 앞에 와서 주님을 내 마음가운데 받아들일뿐더러 내가 이 구원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 편제에 이런 말을 기록했습니다.』너희가 힘을 써서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敬虔)을 더하고, 경건에 형제 화목을 더하고, 형제 화목에 사랑을 더하라.』그러면서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이렇게 더욱 힘써서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미 부름을 받아서 주님께 나와 믿는 줄 안다. 그렇지만 너희가 특별히 힘을 써서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이것은 인간의 책임입니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님 앞에 와서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여야 됩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서 주를 섬기라고 그랬습니다. 깨어 기도하여 시험에 들지 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밤은 깊고 낮은 가까웠으니 그런고로 어두운 일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병이 되어서 주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이기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먼저 예수 님께 와야 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이에게 대하여 예수 님의 약조가 여기에 있습니다.『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이것은 그리스도의 약속이오,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입니다. 여기에「결코」라는 말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강하게 부인하는 뜻입니다. 주께 오는 사람은 주께서 반드시 영접할 것이오, 결단코 절대로 이런 사람을 주께서 물리치지 아니하십니다. 주께 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반드시 영접해서 그를 구원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주께 오는 사람은 그의 죄가 얼마나 많든지 간에 죄를 사하여 주시겠고, 그에게 중생을 주시고, 성신을 주시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반드시 주실 것이며, 주께서 결코 하는 나라에서 내어쫓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여기 조건은 단순히 하나 뿐입니다. 주께 오는 것이 바로 조건입니다. 그 사람의 과거에 생활을 묻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현재의 생활도 묻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품성이 어떠한 지도 묻지 아니합니다. 어떤 생활을 과거에 했던지 주께 오면 주께 오는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절대로 그 사람을 배척하지 않고 그를 영접해서 그에게 구원을 허락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과거에 아무리 더러운 생활을 한 여자라고 할지라도, 삭개오와 같이 아무리 호색하고 불의 한 재물로 산 좋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심지어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와 같이 살인 강도의 행위를 감행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께 오기만 하면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고 영접해서 그 영혼을 구원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많이 오는 줄 압니다. 이따금 보면 부인들이 핸드백이 기도하는 동안에 없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필경 소매치기도 예배당에 들어옵니다. 또 이렇게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 북한에서 밀파한 간첩이 우리 가운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간첩이 들어와 앉으려고 하면 들어와 앉을 수도 있습니다. 등록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 예배당에 들어 올 때에는 어떠한 동기로 왔던지 하나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기회를 주시는 이 시각에 온전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면 과거에 어떠한 죄를 범했던지 예수 님께서는 그 심령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내어
쫓지 아니하시고, 영접해서 그에게도 중생의 축복을 주시고, 그에게도 성신을 주시고, 그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가운데 이따금 내가 지금까지 예수를 믿기 는 믿었지만 과연 애가 구원을 얻었나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까? 그렇게 의심날 때가 있으면, 이 요한 복음 六장 三十七절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가운데 제가 처음에도 말씀 드렸지만 예정 문제를 고민하면서 내가 예정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의심하는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심이 나는 분일지라도 이 요한 복음 六장 三十七절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 오는 자를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시겠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약속했습니다. 그의 약속은 참이오 그의 약속은 진실입니다.
전에 영국 국교에 버틀러 라고 하는 유명한 감독이 있었습니다. 그 감독이 임종시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병이 중해서 꼭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때에 자기의 가까운 친구가 되던 목사가 가까이 그 옆에 와서 앉아 있습니다. 이 감독이 자기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을 스스로 알면서 그 옆에 있는 친구에게『내가 일생토록 죄를 멀리하고 어떻든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가진 애를 써왔지만 나는 원래 약한 인간이니까 지금 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생각하니 내 마음가운데 두려운 마음이 들어온다.』고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 그 옆에 앉아 있던 목사가 하는 말이『아, 감독님,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다 속량해 주신 구주가 아닙니까?』그 감독이『그렇지, 예수 님께서 참 구주가 되시지. 그러나 꼭 내 구주가 되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나?』의심스러워 반문했습니다. 그 때, 옆에 앉았던 그 목사가 다시 하는 말이『감독님, 예수 님의 일 말씀을 잊어버리셨습니까?「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그 말을 들을 때에 이 감독이 얼굴에 기쁨이 충만해지면서『과연 그렇다 내가 성경을 수천 번 보았지마는 그 구절의 뜻을 이제야 분명히 알았구나. 나는 평안한 마음으로 가는구나.』그 말씀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네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내 과거의 생활로 말미암아서 염려할 것 없습니다. 내가 과연 주님 앞에 온전히 왔습니까? 내가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습니까? 내 주님 앞에 왔으면 조금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주님께서 결코 우리를 물리치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一九五九년 六월 二十八일)
Ⅲ-20 먼저 중생으로 (요한 복음 三장 一-十五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三·三)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여러분께서 많이 기도해 주시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 가운데 그 동안 네 나라를 다녀왔습니다. 말레이시아, 미얀마, 태국, 필리핀을 다녀왔습니다. 필리핀에서는 교역자 수양회를 두 곳, 북방에서 한 곳, 남방에서 한 곳에서 했습니다. 그렇게 다섯 교역자 수양회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번 교역자 수양회에 가기 한 달 전에, 기독교 선명회(宣明會)에서 저에게 이번 교역자 수양회에 가서 가르칠 과목을 지정해 왔는데 설교 학에 대해서 가르쳐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갑자기 받게 되어서 당황(唐慌)은 했지마는 아무래도 각각 나누어서 말할 수밖에 없는데 협력하는 의미에서 그 제목을 제가 맡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기 대한 생각도 좀 하고 또 서적도 좀 읽고 준비를 하는데 여러 저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그저 설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대언 하는 것인데 단순히 무슨 웅변이나 학식만에 관계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그 설교자가 은혜를 받아야 되고 설교자의 생활이 결국은 그 설교에 권위를 주는 것이라는 말로 강조되었습니다.
특별히 지난 十九세기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로서 차알즈 스펄전이라고 하는 이의 저서를 읽었습니다. 그이가 그 때 목사들과 여러 신학생들 한데 설교에 대한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일 첫째 되는 주제를「목사의 자성」이라고 하는 그런 내용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무엇보다도 설교자가 되려고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이 자기 자신이 구원을 얻어야 되고, 또 거듭나야 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이 거듭나지 못한 설교자는 아무리 다른 것을 잘 한다고 할지라도 그 설교를 통해서 은혜가 없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말을 읽고 저도 이제 여러 목사와 전도사들 한데 이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소개하고 난 다음, 토의하는 시간에 서로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모든 교역자들이 다 이구동성으로 그 말이 과연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 이 스펄전 자신이 十九세기 영국 교계에 있어서 여러 교역자들에게 강연할 때에, 교역자로서 제일 중요한 것이 자기 자신이 먼저 구원을 얻고 거듭나야 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그 때의 교역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시대나, 어떤 나라나, 어떤 교회의 교역자들에게도 그 말이 가장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그 말은 교역자에게만 필요한 말이 아닙니다. 장로에게도 필요하고, 집사에게도 필요하고, 권찰(勸察)들에게도 필요하고, 주일학교 각부 반사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성가대원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사실 누구든지 믿는 사람에게는 제일 중요한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먼저 구원을 얻어야 거듭나야 됩니다.
여러분, 이 시간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마는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느니라.』거듭나야 되겠다고 하는 것을 결코 기이 히 여기지 말아야 됩니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오늘 이 말씀을 간단히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 심령 위에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물론 거듭 난다고 하는, 중생이라고 하는 체험은 영적 체험으로서 신비한 사실이올시다. 우리가 다 깨닫기 어렵습니다. 깨닫기 어렵다고 사실 아닌 것이 아닙니다. 신비하다고 사실 아닌 것이 아닙니다. 신비한 사실입니다. 이 우주는 모든 신비한 사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다 전기를 이용하지마는 전기가 무엇인지 우리다 다 깨닫습니까?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전기가 있다고 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전파가 있다고 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예수 님 말씀과 같이 바람이 임의로 불지마는,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가를 다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기상학이 발달되었다고 하지마는 아직까지 분명히 모릅니다. 신비한 것이 있습니다. 바람은 우선 눈에 보이지 않으나 느낄 수 있습니다. 바람 분 다음에 그 형적(形迹)이 나타납니다.
이 영적 체험은 신비하지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체험이 아니고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필수적인 반드시 있어야 될 만한 사실이올시다. 이것은 예수 님께서 친히 너희가 반드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문맥을 보면「반드시」라고 하는 말이 우리 한국 번역에는 없지만 그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 난 것은 육이오 영으로 난 것은 영인데 아무래도 육신의 생을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난 것처럼 영적 생을 통해서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또 이것은 어떠한 사람에게만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누구나 다」거듭 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처음에 누구에게 하셨는고 하니, 니고데모에게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유대 관원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보통 외식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선입관이 있지만, 그 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인고 하니, 물론 좋지 못한 사람도 많지마는, 실상은 양심적으로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기를 힘쓴 사람들입니다. 십일조를 꼭 드렸습니다. 안식일을 꼭 지켰습니다. 박하나 근채(芹菜)처럼 적은 것까지 십일조를 꼭 드렸습니다. 속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또 이 니고데모로 말하면 유대 관원이올시다. 七十인 공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올시다. 덕망이 높은 사람이 보통 공회원이 되었습니다. 또 이 사람이 예수를 찾아 온 것을 보면 비록 밤에 찾아왔지만 진리를 탐구하는 좋은 성품이 있는 겸손한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니고데모를 향해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니고데모가 여러 가지로 율법도 많이 알고, 잘 기키고, 여러 가지로 덕행도 좋고 다 있지마는,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노골적으로 말했습니다.
요사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흔히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 예수 믿는 것은 예배당에 가고, 찬송도 배우고, 성경 말씀도 듣고, 그리고 열 가지 계명도 배우고 그리고 산상보훈도 좀 배우고, 어떻든지 좋은 도덕적 교훈을 많이 배워서 좋은 교훈대로 힘써서 하나씩 둘씩 좀 고쳐나가고 이렇게 수양을 잘 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 생활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기독교인의 신앙 생활이라 하면 기독교는 유교 도덕 사상에서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유교 사상이 그것입니다. 좋은 도덕적 교훈을 얻어서 그대로 실행하면 되지 않느냐? 우리 기독교는 사람을 그보다 더 깊이 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그 성품이 죄악으로 부패해서 죽은 영혼입니다. 기독교의 요구는 근본적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새 사람이 되지 않으면, 다시 나는 것과 같이 변혁이 있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 정신입니다.
먼저 나무가 좋아져야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나무를 그냥 두고 열매만 아무리 개량하려고 애써도 쓸데가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나무의 성품이 변해야 됩니다. 근본적으로 부패한 인간 성품이 변하는 것을 중생(重生)이라고 합니다. 다시 나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께서 이 사람의 간증하는 말씀을 들었지마는 동남아 여러 지방으로 다니기는 세 분이 같이 다녔습니다. 한 분은 의사요, 한 분은 사업가였는데 그 분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이 분은 본래 어렸을 적에, 믿는 가정에서 나서 주일학교도 다녔고, 또 교회에도 그렇게 열심히는 못나왔지만 교회에 나왔고,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입니다.
한 번은 어떤 친구의 초청을 받아서 저녁을 같이 먹고 이야기했습니다. 마침 그 때에 영국에서 온 잘 믿는 사람이 있어서 같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는데 무슨 말을 묻는고 하니,『당신 거듭났습니까?』『중생 했습니까?』이것을 솔직히 물어보았답니다. 지금까지 믿어오긴 왔지마는 그렇게 갑자기 자기를 대놓고서 이런 질문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란 말입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가는 예배당에 잘 다녔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더랍니다.『그 동안 다니는 건 좋지만 성경 말씀에 보면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거듭났습니까?』또 물어봅니다. 그래서 할말이 없어 어물어물하면서 대답하는 말이『난 연보도 상당히 하는 사람인데…』『아 연보도 늘 가는 것은 대단히 좋습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에 보면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거듭났습니까?』또 물어본단 말입니다. 이렇게 자꾸 물어 보는데 대답할 말이 없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솔직히『난 거듭났는지 안 났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해야 거듭납니까?』되물어 보았습니다.
그이는 어떻게 해야 거듭난다고 하는 말을 그 때 그 분에게 해 주었습니다. 그 말대로 이 분이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거듭나는 체험을 얻었습니다. 그 후에는 사업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신앙을 간증하면서 다른 여러 사람을 많이 주께로 인도하고, 자비로 동남아까지 같이 와서 주의 일을 하려고 많이 애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 묻습니다. 여러분 하나 하나가 다 거듭 났습니까? 스스로 물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와서『당신 거듭났습니까?』이렇게 분명히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글세 자세히 모르겠는데요.』이렇게 대답할 사람은 없습니까? 사실 이 중생의 체험이 어떤 분에게 갑자기 되고, 어떤 분에게는 시일을 요구해서 천천히 거듭나서 자기 자신도 혹 모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중생 한 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스스로가 몽롱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와 같은 분들과 아직까지 근본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제가 간단하게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는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그 깨달음이 없이 중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스스로 검토해서 감히 서지 못할 추악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보통으로 생각합니다. 보통『다른 사람하고 비교하면 내가 괜찮은데, 무사할 뿐 아니라 나는 의인인데…』『예수 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는데』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중생을 주겠습니까?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사람 앞에서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적나라하게 내 자신을 검토해 보는 그 때에만 내가 얼마나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는 짓고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다.』는 것을 그 때야 깨닫게 됩니다.
둘째 단계는 내가 죄인인 줄 깨달았으면 그 죄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그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회개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을 깨닫고 아프게 뉘우쳐야 됩니다. 그걸 통회라고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 그 죄를 자복해야 됩니다.『나는 이런 죄인이올시다.』하고 고백해야 됩니다. 셋째는 그 죄를 떠나야 됩니다.『죄인들아 죄에서 멀리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떠나야 됩니다. 참 회개하는데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통회, 고백, 떠나는 것,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중심에 영접해서 내 생활에 중심으로 삼아야 되겠습니다. 먼저 번 간증한 이가 특별히 요한 계시록 三장 二十절에 있는 말씀을 증언했습니다.『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소리를 듣고 문을 여는 이에게는 내가 들어가서 내가 그와 같이 먹고 가는 나와 같이 먹으리라.』
그리스도를 내 중심에 영접해서 내 자신을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하지만 사실 생활의 중심이 그리스도인가, 혹은 그 밖에 무엇인가, 내 자신인가, 내 자신의 무엇인가. 세상의 무엇인가? 내 마음속에 사실 그리스도께서 계셔서 언제든지 그리스도와 무슨 일을 의논하고 그리스도의 지도대로 내 생활의 문이 돌아가는가, 그렇지 않고 아직 내 자신인가? 자신의 야심(野心), 욕심, 정욕, 세상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죄를 깨닫고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내 중심에 영접하면 그 밖의 일은 성신의 역사입니다. 성신께서 거듭나는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더 길게 말하기는 원하지 아니합니다. 이 시간, 중심에 스스로 물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과연 거듭났는가, 거듭난 것이 분명한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우리 다 무리 숙여 기도합시다. (一九五九년 八월 九일)
Ⅲ-21 기갈한 심령에게 (이사야 五十五장 一-九절)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五十五·一)
옛날이나 오늘이나 물이 귀한 가나안 지방 거리에는 대대로 물 장사하는 사람들이 물을 지고 다니면서『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이와 비슷한말로 외친다고 합니다. 여기에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기갈을 느끼는 모든 인류를 향해서 외친 말씀이올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먼저 여기 목마른 자들은 어떤 이들을 가리킨 것입니까? 둘째는, 여기 물이란 말이 있고 포도주란 말이 있고 젖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또한 셋째로, 돈 없이 값없이 와서 사 먹으라고 말씀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말씀을 통해 은혜 주시는 가운데 한 가지씩 생각하시기를 원합니다.
『먼저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목마른 자들을 불렀습니다.「목마르다」하는 말은 흔히 간절한 마음의 욕망 혹은 욕구를 가리켜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인간은 사교적 욕망이 있습니다. 대부분 고독을 싫어합니다. 친구를 사귀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를 원합니다. 사랑을 주기를 원하고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혹 사랑에 목마르다고 하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인간은 지적 욕망이 있습니다. 무엇을 좀더 알고자 하고 좀더 배우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향학열 혹은 지적 기갈이라고 하는 말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술적 욕망이 있습니다. 할 수 있으면 모든 것을 좀더 아름답게 하기를 원합니다. 말도 좀더 아름답게, 글도 좀더 아름답게 쓰기를 힘씁니다.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소리, 좋은 음악,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기를 원합니다. 집을 지어도 좀더 아름답게, 거리를 말들어도 좀더 아름답게 만들기를 원합니다. 이와 같은 것을 우리가 예술적 기갈이라고 일컬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의 깊은 심령 속에는 창조적 욕망이 있습니다. 새 것을 만들려는 간절한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것을 찾아보려고 힘쓰고, 새 것을 만들어 보려고, 발명하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욕망 혹은 연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여러 방면으로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좀더 잘 살고, 좀더 아름답고 좀더 선하게 살며, 좀더 문화적으로 살려고 하는 욕망 혹은 갈망이 그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와 같은 모든 욕망이 인간에게 다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우리 인간은 여기에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가령 어떤 분이 좋은 집을 가졌고 좋은 가정을 이루고 좋은 사업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모든 것이 뜻대로 잘되어 나아갑니다. 그렇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마음속에 참된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정녕 인간은 이런 욕망들 이외에 이름 모를 다른 욕망이 또 있습니다. 비록 모든 것이 다 있다고 할지라도 어딘가 빈 것을 느끼는 것이 우리 인간의 체험인 것입니다.
몇 주일 전에, 미국의 한 실업가가 여기 와서 간단히 간증도 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좋은 가정과 집과 사업과 좋은 차를 가져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을 만한 생활을 하였지마는 어딘가 모르게 자기 속 깊은 어느 곳에 빈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인간이 인간 된 소외입니다. 이것을 영적 기갈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四十二편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나니.』우리 인간의 심령 깊은 곳에는 이 여러 가지 세속적 욕망 이외에 이와 같은 깊은 영적 욕망, 영적 기갈이 잠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잠재」라고 하는 말을 쓰는 까닭은 어떤 분은 이와 같은 기갈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시인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갈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갈은 여러 가지 다른 변태적인 욕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다른 욕망만 가득히 채우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알지 못하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좀더 육신에 관한 모든 향락을 탐구하거나, 육신의 온갖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충만히 채워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만족은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물질적 방면에 심혈을 기울여서 물질을 좀더 축적하고, 좀더 얻고, 어떤 분들은 세상의 지위나 권세의 방면에 머리를 좀더 기울여서 좀더 높은 자리, 좀더 힘있는 권세를 얻기를 힘씁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었다고 해서 거기서 만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좀더 지적 방면에 마음을 기울입니다. 좀더 나은 지식과 좀더 나은 지혜를 탐구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많은 곳에 근심이 많아지고 쓸데없는 교만만 많아져서, 전도서에 있는 말과 마찬가지로 거기에서 참된 만족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치 파선한 수부가 바다 위에 표류하면서 심히 목이 마르니까 기갈을 멈추기 위해 짠 바닷물을 마십니다. 바닷물은 마실수록 기갈이 더 심해서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이 이 영적 욕구를 알지 못하고 이 기갈을 채우려고 다른 방면에서 구하면 구할수록 영적 기갈은 더욱 심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있는 체험을 보면『오, 하나님이시여, 주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 우리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내가 주님 안에 돌아와 안정을 얻을 때까지 내 심령 속에는 안심이 없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지 못한 이들은 이 기갈 한 심령을 멈출 길이 없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자기를 위해서 지으신 까닭으로 우리 인간이란 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아 그 품속에 돌아와서 그 영혼이 안기기 전까지는 그 심령의 깊은 속에 있는 답답한 마음, 갑갑한 마음, 즉 영적 기갈을 멈출 길이 없습니다.『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나오기 전에는 이 영적 기갈을 멈출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것은 다만 인간이 인간 된 까닭입니다.
둘째로,「물로 나오라」혹은「포도주를 사라」「젖을 사라」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한 것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모든 영적 은혜를 통괄해서 이와 같은 상징으로 우리에게 깊은 영적 진리를 표현하여 주신 것입니다. 에스겔 四十七장을 읽어보면, 선지자가 이상(理想)한 가운데 보니 하나님의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생수가 흘러나오기를 시작합니다. 흘러내릴수록 그 생명의 강이 점점 커집니다. 내려 갈수록 더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마침내 그 강물 속에는 여러 가지 어족이 성합니다. 그 강 죄 우편에는 아름다운 나무로 무성하게 됩니다. 가 나무는 달마다 열두 종류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인간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에스겔의 이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후로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압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오셔서 일찍이 부르짖으시기를『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다 네게로 와서 마시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생명 샘이 되어 영생토록 솟아나리라.』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영적 은혜를 물에 비교해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물이 있는 곳이라야 어떤 형태의 생명이든지 생명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물은 새롭게 합니다. 물은 깨끗하게 합니다. 물은 새로운 힘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 심령에 미치는 영향은 물이 지구 위에 주는 것과 같은 영향을 줍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은 죽은 가운데서 살아서 생명을 얻습니다. 더럽던 심령이 새로워집니다. 깨끗하여 집니다. 연약하고 피로하였던 심령이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여기 포도주란 말을 썼습니다.『포도주를 사서 마시라.』고 이것은 의미가 심장(深長)합니다.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실 때에 제일 먼저 가나 혼인 잔치에 참여하셔서 물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기독교는 포도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새로운 복음의 종교는 심령을 즐겁게 하려는, 인간에게 참된 만족, 참된 행복, 영에 배부른 것, 흡족한 은혜를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가장 행복 된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올시다. 오는 세상에서도 가장 축복을 받을 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올시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만족한 축복이라는 의미에서 포도주라고 하는 말로 상징을 삼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젖을 사라고 하는 말을 역시 사용했습니다. 젖이야말로 모든 음료 중에 가장 영양이 많은 음료입니다. 사실 한 가지 음료만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라 이 젖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기들이 젖만 먹고삽니다. 젖만 먹고 큽니다. 사실 어른들도 다른 음식 다 없어도 우유만 계속해서 먹고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이 젖 가운데는 우리 육체에 필요한 모든 영약의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전분도 있고, 지방질도 있고, 단백질도 있고, 뼈와 이를 만드는 칼슘도 있고, 피를 맑게 하고 더 힘있게 하는 여러 가지 광물질도 있고, 사람을 자라게 하는 비타민도 많은, 말하자면 이 한 가지 음료, 즉 젖 가운데는 우리 육신에 필요한 모든 영양의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는 이 같은 복음 한 가지 밖에 없지마는, 이 복음 가운데는 우리 영적 영양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 가운데 인간의 가장 높은 지력을 만족시킬 만한 모든 아름다움이 여기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는 영적 생활에 필요한 영양소가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목마른 자들은 물에 나와서 물을 마시고 포도주와 젖을 사서 마시라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을 향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한 가지 더 말씀 드리는 것은 여기 이상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기는 사라고 하면서도 돈 없이 값없이 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돈 없는 자도 오라는 것입니다.『돈 없이 값없이 와서 젖과 포도주를 사서 마시라.』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도 조금만 생각하면 과히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는 이 큰 축복은 돈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세상에 살 때에 돈만 있으면 무엇이나 살 줄 그렇게 압니다.
그러나 사실 깊이 생각해 보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많습니다. 특별히 살 수 없는 것은 이 신령한 축복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은과 금이 필요가 없습니다. 또 사람의 지혜나 지식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의 머리 속에 있는 그 지혜, 그 지식 얼마나 귀합니까? 말하자면 심리적 금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축복을 사지는 못합니다. 사실 이 축복은 세상의 어떤 높은 지위를 가지고도 살 수 없고, 아무리 권세가 많을지라도 그 권세를 가지고도 살수가 없습니다.
또 무슨 공덕, 선행, 우리의 행실을 착하게 하고, 우리가 무슨 좋은 사업을 많이 해서 이런 공덕과 선행을 가지고 이 축복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사람 보기에 선해서 성자란 말을 듣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볼 때에는 다 더러운 옷 밖에는 입을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어떤 선한 일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을 다 했지만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것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선행으로나 사람의 공덕으로도 이 축복을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이가 있어서『나는 지식이 있으니, 나는 돈이 있으니, 나는 이와 같은 선행이 있으니, 나는 공덕이 있으니, 내가 이 축복을 살 수 있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이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이올시다.
값없이 사라는 말은 온전히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없고, 내 무엇으로 조금도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깨닫고, 온전히 빈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겸손히 이 은혜를 그냥 받는 그 사람에게는 이 은혜를 돈으로 어떤 값을 주고도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값없이 사라고 했는데 사실 그것도 뜻이 있습니다. 사실 이 은혜는 값이 없습니다. 사실 웬만한 것, 작은 것에는 값을 매길 수 있지만 아주 엄청난 것에 값을 매길 수 있습니까? 여러분!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서울에 땅 한 평에 어떤 비싼 곳에는 七十만 환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작은 땅값은 매길 수 있어요. 그러나 큰 것을 값 매겨본 사람이 있습니까? 이 지구덩이 값 내본 사람이 있습니까? 저 태양 값이 얼마나 가는지, 그 값 내본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늘 마시고 사는 이 공기를 어느 누구 값 매겨본 사람이 있습니까? 여름마다 하나님께서 풍족히 주시는 이 비를 어디 누구 값 매겨본 사람이 있습니까? 모든 하나님의 크신 축복은 값이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의 심령을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는 십자가의 공로를 값 매길 수 있습니까? 누가 감히 평가할 수 있습니까? 값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돈 없이 값없이『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죄인이올시다. 그러나 나는 목이 마릅니다. 주님 앞에 나아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내 기갈 한 것을 깨닫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에게는 그냥 주십니다. 값없이 돈 없이 그저 신령한 이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냥 준다면서 또 왜 산다는 말을 썼습니까? 그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냥 주면 그냥 준다고 하지, 왜 산다고 하는 말을 썼습니까? 조금 생각해보면, 아마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산 것은 자기 것처럼 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그것은 내가 샀으니 내 것이야. 남이 그냥 준 것은 아니지.』이것은 내 것이 꼭 되었는지 분명하지 못한 생각이 더러 들어 올 때도 있지만 내가 산 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내가 샀으니 이것은 내 집이야. 이 밭도 내가 샀으니 내 것이지.』하고 샀다고 하는 관념이 들어가는 데는 내 것이라고 하는 관념이 있습니다. 아마 그 뜻이 여기 포함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냥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지마는 실상은 하나님께서 알기를 원하는 것은『네가 산 줄로 생각해라, 이것이 꼭 네 것으로 알아라.』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은혜를 받는 사람은 내 것으로 압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여호와는 나의 방패(防牌)시오, 여호와는 나의 피란처(避亂處)시오, 여호와는 나의 산성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救主)시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시오, 하늘의 나라는 내 아버지의 집이오, 내 집입니다. 누구든지 온전히 자기의 영적 기갈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겸손히 이 은혜를 받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아주 주어서 그 사람의 것으로 만듭니다. 내 구주가 됩니다. 내 하나님이 됩니다. 내 천당이 됩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빛이오, 나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축복을 다 받으셨습니까?『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이와 같은 생명 강이 흐르는데 아직까지도 기갈 한 심령, 그대로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얼마나 가련합니까? 얼마나 불쌍합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어떤 사람 하나라도 기갈 한 심령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없이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근심하며 걱정하며 염려하며 민방하고 답답한 가운데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왜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로 비극이 생기고, 여러 가지로 참혹한 뉴스가 나타나고, 매일 자살하는 사람이 몇 건이나 생기고, 여러 가지로 추악한 범죄가 일어납니까? 요컨대, 그 심령 속에 기갈이 있습니다. 이 기갈에 만족을 받지 못했습니다. 생명수를 찾지 못했습니다. 생명수를 찾아서 원만한 생활, 만족한 생활, 흡족한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입니다.
우리 가운데 오늘 아침 한 분이라도 기갈 한 심령을 품고 나온 이가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이 시간에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하나님이시여, 내 심령은 목마릅니다. 나는 아무 무슨 구할 공로가 없습니다. 그저 빈 손 들고 아버지 앞에 나왔으니 생명수로써 나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와 같은 심령 위에 새로운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기도하십시다. (一九五九년 八월 二十三일)
Ⅲ-22 마른손의 회복 (마가복음 三장 一-六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의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막 三·四-五)
예수께서 일찍 회당에 가셨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언제든지 안식일을 당하면 예배당에 가시는 것입니다. 거기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 편 손 마른 사람도 역시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안식일에 예수 님께서 이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시는가, 안 고쳐 주시는가, 엿보고 책잡기 위해서 온 바리새교인 들도 몇 사람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 예수 님께서 들어 가셔서 손 마른 사람을 향해 하시는 말씀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분부한 대로 그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무리를 향해서 물어보았습니다. 모든 무리는 대답도 없이 잠잠히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그 때에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매우 완악(頑惡)한 것을 근심하셔서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손 마른 사람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 그의 손을 내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자기의 마른손을 그냥은 내밀 수 없었습니다. 예수 님의 명령만 듣고 내밀 때에 말랐던 손이 회복되어서 새로운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본 많은 무리들은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린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더욱 분이 가득해서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어떻게 죽일 까 하고 모의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날 안식일에 예수 님께서 회당에 오셔서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신앙을 시정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서 온전히 성한 손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주님께서 같이 참여하신 줄 믿습니다. 땅 끝까지 우리와 같이 계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일지라도 내가 너희 가운데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 이 예배당 안에서 모인 우리에게 역시 두 가지 일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이 바리새인에 대한 그릇된 신앙을 시정하셨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얼핏 생각할 때에 이 사람들은 아주 악한 사람이고 나쁜 사람이라는 희미한 관념만을 가지고 있는 이도 많이 있습니다. 꼭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 이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열심히 읽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데 보통 사람이상으로 열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되 문자 그대로 모든 계명을 엄격히 지키기를 힘쓴 것입니다. 가령 안식일을 지킬 때에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넷째 계명을 그대로 꼭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그 날은 일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남종이나 여종이나 막론하고 일을 시키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심지어 문에 유하는 객이라도 일을 시키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되 문자 그대로 절대 무슨 일을 하지 않고 지키기를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고 안식일을 지키고 있을 때에 예수 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걸어가다가 시장하니까 밀 이상을 비벼 먹었습니다. 다른 사람 밭의 밀이라도 이삭을 비벼서 먹은 것만은 율법이 허락해 주니까 죄로 인정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문자주의자(文字主義者)인 바리새인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삭을 비비는 것은 곧 타작을 하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아니냐? 어찌해서 예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면서 안식일을 바로 지키지 않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들의 이론이었습니다.
문자의 뜻만 알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그 근본 원리는 물론 깨달아 알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문자주의 적인 이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 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불쌍히 여겨 병을 고치는 것도 율법을 범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날도 많은 사람 가운데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왔으니까 오늘도 예수가 과연 안식일을 범해서 저 사람의 병을 고쳐주나 보자고 했습니다. 고쳐 주면, 이야말로 안식일 규칙을 범한 것이니까 그들이 정죄할 수밖에 없는 이단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와 같은 선입주견(先入主見)을 가지고 예수의 하시는 일을 자세히 주목하여 본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을 읽되 문자에 표현된 그 뜻만 깨닫고 그 뒤에 있는 율법의 정신을 잊어버리는 그 주의를 보통으로 문자주의라는 말을 씁니다. 문자 적으로 일하지 말하고 하는 그 말 하나만 깨달았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일하지 말라고 하며, 무슨 까닭으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해 주셨으며,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할 만한 일이란 무엇인지를, 못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모든 계명 배후에 있는 보다 더 깊은 원리와 근본 정신을 이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여기에 바리새인들이 잘못되기 시작한 점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문자 적으로만 해석해 가면서 누구든지 그대로 쫓지 아니하고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다 잘못된 사람인 이단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우리의 의견이 꼭 옳고 우리의 생각이 꼭 옳고 우리의 해석은 절대로 틀림이 없는데….』이런 사상적 경향을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독선주의(獨善主義)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self-righteousness라고, 나만 옳다고 하는 생각, 자기의 의견이 꼭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독선주의를 가지고 결국은 예수 님의 하는 일도 이단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이 바리새인들도 안식일을 지키는 근본 정신을 잊어버렸을 뿐더러,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 그 불쌍한 사람의 병을 고쳐준 것에 대해 기쁘다는 생각은 하나도 없고, 안식일에 일했다는 그 생각에만 사로 잡혀서 예수를 정죄한 것입니다.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곧 그 자리에서 나가서 헤롯당과 의논을 했습니다. 해롯당은 근본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대부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무슨 의논을 했는고 하니, 예수를 죽일 모함을 했습니다. 바로 안식일에 그런 의논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 이런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안식일에 했습니다.
이렇게 조그마한 일로 이런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안식일에 이런 의논을 하였습니다. 더욱이 율법을 믿지도 아니하는 헤롯당과 공모해서 죽이기를 의논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안식일을 범하는 큰 죄악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문자주의는 독선주의를 낳았고, 독선주의는 맹목적 신앙을 낳아서 그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 하여졌습니다. 결국 그들의 신앙은 도덕까지도 무시하여 사람을 죽이려고 음모하는 신앙 생활을 하게끔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처음 시작한 말씀을 기억하세요. 바리새인들이 처음에는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서 열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열심의 방향이 잘못 정하게 되어서 문자주의로 화하고, 문자주의가 독선주의로 화하고, 독선주의가 맹목적 신앙주의로 화해서, 심지어 도덕까지 무시하는 신앙으로 들어가게 될 때, 그 인자하신 주님도 그런 사람을 근심해서 노하심으로 보셨습니다.
네 복음을 보면 가장 철저히 책망하고 공박한 대상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 이와 같이 외곡(猥谷)되고 잘못된 길로 나아가면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망칠뿐더러 그런 사람이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민족과 교회를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 바리새인의 누룩을 삼가라고 말씀했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 님께서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 주셨습니다. 신약 외경(外經)가운데 히브리인의 복음이 있습니다. 이 복음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이 손 마른 사람은 본래 석수 쟁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른 손이 말라 버렸습니다. 신경이 죽고 혈액이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는 석수(石手)일을 할 수 없으니까 빌어먹을 수밖에 없는 불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 님께서 회당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 오른 손을 고치기 위해 회당에 들어왔다고, 좀 더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그 내용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예수 님께서 안식일에 손을 가지고도 쓰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사람의 손을 고쳐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주님께서 회당에 오셔서는 언제든지 이와 같은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체가 보배롭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마는 특별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손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이 손 없이는 거의 아무 것도 못할 지경입니다. 농사하는 사람은 손으로 밭을 갈고, 손으로 씨를 뿌리고, 손으로 김을 매고, 손으로 추수를 합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손으로 물건을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합니다. 주산을 놓고 문부(文簿)를 하는 것도 손으로 합니다. 공인(工人)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손으로 벽돌을 쌓고, 손으로 담을 바르고, 손으로 나무를 깎아야 합니다. 의사는 손으로 수술을 합니다. 간호원은 손으로 붕대를 싸맵니다. 미술가는 손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음악가는 손으로 악기를 연주합니다. 손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손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석공의 손이 하나 말라버렸습니다. 쓸 수가 없습니다. 보기에는 괜찮지만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만 이 사람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에는 얻어먹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님께서 이 사람을 불쌍히 여겨『네 손을 내 앞에 내 밀어라.』명령할 때에 그 명령을 순종하고, 순종할 때에 그 손이 새 힘을 얻어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 아마 제 생각에 여러분 가운데 실제로 손이 마른 이는 계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견지에서 내 손이 마르지 아니하였는가, 늘 스스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이『아들아, 오늘 포도 원에 가서 일하라.』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님께서 다른 데 비유하실 때에는 우리를 다 포도 원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포도 원과 같습니다. 이 하나님의 교회에 들락날락하는 사람은 다 포도 원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 원에서 일하는데 쓸만한 손을 가졌습니까? 손은 있지만 일할 수 없는 보기에 마른손과 같은 이런 손을 가졌습니까? 과연 신령한 의미에서 내 손이 주의 일을 하며, 다른 사람을 봉사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까? 신령한 일을 위해서 내 손이 마른손입니까, 힘있는 손입니까? 내가 주를 위해서 힘있게 일하는 손을 가졌습니까, 힘없는 손을 가졌습니까?
주를 위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 주를 위해서 교회를 받드는 일,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일, 성가대를 돕는 일, 주를 위해서 심방 하는 일,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며 병자를 방문하는 일을 내 손이 능히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까? 영적으로 마른손을 가진 분은 없습니까?
손은 일과 봉사의 상징인데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내 손이 어떤 일과 어떤 봉사를 합니까? 어떤 분은 해방 전에는 튼튼한 손을 가지고 일을 잘했지마는 해방 후에 그 손이 말라버린 이는 없습니까? 어떤 이는 청년 시대에 그 손을 가지고 주의 일을 잘했지마는 장년 시대가 되고 사업이 커지자 그만 그 손이 말라버린 이는 없습니까? 몇 해 전까지는 주의 일을 잘했지마는 금년에 와서는 그만 손이 말라빠진 이는 없습니까?
마른손을 회복하는 오늘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자리에 계셔서 여러분의 손을 보십니다. 여러분의 손이 말랐는지, 주의 일을 하여 튼튼한지 여러분의 손을 보십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마른손을 가지고 이 자리에 온 이가 있으면『네 손을 내밀라.』하십니다. 마른손을 주님 앞에 내어 밉시다. 그래서 주님의 새로운 은혜와 새로운 능력을 받아서 일할 수 있는 손, 봉사할 수 있는 손을 회복해 가지고 이 자리에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또, 손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기도하는데 많이 사용했습니다.『내가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부르짖나이다.』이런 말씀이 시편에 종종 나옵니다.『주의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부르짖나이다.』그 뜻은 옛날 사람들은 기도할 때에 손을 들고 했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인도해 나올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싸웠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군대를 거느리고 아말렉과 싸울 그 때에 모세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두 손을 들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너무 손이 피곤해서 손을 내리니까, 아말랙 사람이 이기고 이스라엘 사람이 쫓겨오게 되었습니다. 다시 손을 들어 기도하면 여호수아의 군대가 이기고 아말렉 사람이 쫓겨갔습니다. 마지막에 손이 너무 피곤하게 되니까 아론과 홀이 그 옆에 가서 모세의 두 손을 부축해서 계속해서 손을 들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에 이스라엘 군대가 완전한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기도할 때에 합장해서 기도합니다. 손은 기도의 상징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기도를 위해서 항상 손을 들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혹시 마르지 아니했습니까? 여러분이 기도를 위해서 여러분의 손을 항상 드십니까? 지금이야말로 모세가 두 손을 내릴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오늘날 한국의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글자 그대로 두 손을 내릴 수 없습니다. 왜? 우리도 전쟁 가운데 있습니다. 아말렉과 싸우는 중에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정전하였다고 하지마는 공산당과 지금도 싸우는 중에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냉전 가운데 있습니다. 무신론과 싸우고 유물론과 싸우고 남한에 있는 여러 가지 죄악의 세력과 싸우는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손을 내릴 수가 없을 때입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하나님 보좌를 향해서 올라갑니까? 새벽에 일어나서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하나님을 향해서 올라갑니까? 삼일 기도회 시간에 여러분의 손이 하나님을 향해 올라갑니까? 가정 기도회로서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올라갑니까? 구역 기도회에서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하나님을 향해서 올라갑니까?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어떻습니까? 기도의 손이 마르신 분은 없습니까? 전에는 기도회가 힘이 있어서 바로 손이 올라갔지마는 지금은 다 맥이 빠져서 말라빠진 그런 기도의 손은 없습니까? 여러분은 아십니다. 우리 주님은 보시고 아십니다. 그런 손을 향해서도 예수 님께서 오늘 아침에도『네 손을 내밀라』하셨습니다. 주님 앞에 그 손을 내미십시오. 그리고 새 힘을 얻으십시오. 지금은 졸 때가 아니고 기도할 때입니다. 깨어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의 마른손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손은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데 씁니다. 갈라디아 二장 九절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자들과 같이 의논할 때에 그 경험을 기록하면서 이런 말씀으로 기록했습니다.『예루살렘에 있는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 들이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전의 번역에는 오른 손을 주어서 교제를 하였다고 되었고, 새 번역에는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제의 악수, 성도들이 서로 가까이 사귈 때에 그 표로써 서로 악수를 합니다. 손에 손을 잡고 악수를 합니다. 이 손은 성도의 가까운 교제의 상징입니다.
예수 님께서 다락방에서 기도하실 때에 간절히 기도한 제목 가운데 하나는 주를 믿는 사람이 다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분열되지 말고 싸우지 말고 주를 믿는 사람이 다 아버지와 주 예수께서 하나가 된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四장에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했습니다. 주도하나요, 교회도 하나요, 아버지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우리의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성령이 하나 되게 할 것을 굳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언제든지 손에 손을 잡고 주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교제의 손이 마른 분은 없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과는 다 악수는 하면서도『아무개는 보기도 싫어, 말도 안 할 테야.』라고 교제의 손이 마른 분은 없습니까? 오늘날 심히 섭섭한 것은 어떤 이들 가운데는 이 성도가 서로 주안에서 하나 된 것을 잊어버리고 이 성도의 교제를 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염려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한 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주안에서 손에 손을 잡고 하나가 될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비록 교파는 다르지마는 다른 교파라고 세계 어느 곳에 있든지 참으로 주를 믿는 성도들과 서로 연락하고 교제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이 교제의 손을 끊는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이 아닙니다. 교제의 손이 마른 분은 없습니까? 저는 모릅니다. 여러분은 아시고 주님께서는 이 자리에서 다 보시고 아십니다.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성도의 교제의 손이 마른 분이 있으면 그 손을 이제 주님 앞에 내 미시기를 바랍니다. 상한 영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멀어진 우리를 가깝게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제의 마른손을 회복하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손은 일과 봉사의 상징입니다. 이 방에 마른손이 있으면 곧 주님 앞에 나아와서『주님이시오, 내 손을 내 밉니다. 내 손에 새로운 힘을 주어서 주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내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시다. 내 기도의 손이 그 동안 말랐었습니다. 이제 이 시간부터 주를 항해서 들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합시다.『성도와 교제를 끊는 이가 있습니다. 이제 이 마른손을 내미오니 이 마른손에 힘을 주시어 모든 성도들과 주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주시옵소서.』우리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一九五九년 八월 三十일)
Ⅲ-23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갈라디아 六장 一-十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六·九)
디모데 후서 三장 十三절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오늘,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선이라고 하는 말은 꼭 자선이라고 하는 뜻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좋은 일을 가리켰습니다. 성신으로 심는 일, 그러니까 착한 행실, 복음전도, 교회봉사, 일반사회에 대한 봉사, 이와 같은 모든 착한 행실과 일들을 가리켰습니다. 이와 같이『좋은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여기 낙심이라고 하는 말은 좀 너무 뜻이 과하게 번역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아마 피곤해지지 말라, 혹은 맥이 풀리지 말라는 뜻이 좀더 원문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을 하다가 맥이 풀리지 말라는 뜻입니다.『그리고 피곤하지 아니하면』이란 말은 사실 낙심하지 아니하면 하는 그 뜻이 좀더 있겠습니다.『낙심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두리라.』하는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성신으로 심는 생활, 선한 씨를 뿌리는 생활인데 선한 씨를 뿌리다가 맥이 풀이지 말라 하는 그 말입니다. 맥이 풀리지 아니하고 그냥 계속해서 낙심하지 않고 뿌리면 반드시 때가 올 터이고, 때가 오면 거둘 것이라 하는 그 교훈을 여기에 거듭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 二장 十절에는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우리는 하나님의 만드신 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사 선한 일을 하려 하셨으니…』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새로 지으신, 말하자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영적 작품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 사람으로 지으신 것은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신의 씨를 뿌리는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작품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참된 신앙에 들어와서 성신으로 심기를 시작한 사람들, 선한 사람들, 선한 씨를 뿌리기를 시작한 사람들, 선한 씨를 몇 해 동안 혹은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뿌리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런 사람들로 중심해서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직까지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온전한 새 사람이 되지 못하였으면, 물론 그런 이들의 첫째 할 의무는 온전히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새 사람으로 하나님의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런 자리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하면 그이의 생활은 지금도 육신만을 심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의 씨를 뿌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생활은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이 씨를 뿌리는 생활인데 성신으로 선한 씨를 뿌리지 못하면 마음으로나 말로나 행실로나 육신의 씨, 곧 악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이와 같은 새로운 성신의 씨를 뿌리는 생활에 들어오지 못한 이는 그 첫 단계가 우선 이와 같은 생활에 들어오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러한 생활에 들어와서 성신으로 여러 해 동안 심고 선한 씨를 뿌리는 사람을 향해서 여기 특별히 권면하는 말씀은 그렇게 선한 씨를 뿌리는 생활을 하다가 맥이 나지 말라 하는 그 말입니다. 선한 씨를 뿌리다가 맥이 나서 낙심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이와 같은 이들을 중심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면하십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선한 씨를 뿌리다가 낙심하게 되는 원인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큰 환난을 만나게 될 때에, 갈수록 산악이 중첩되는 것과 같이 역경과 난관을 겹쳐서 당하게 되면 그만 맥이 나서 낙심하는 자리에 이르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 나서 성신으로 심는 사람이 되었거나, 선한 씨를 매일 뿌린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는 환난이 아주 떠났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같은 약조는 성경에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도 환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건강의 실패가 오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사업의 실패를 당하기도 하고 가정에 우환과 질고(疾苦)가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눈물의 사자가 그런 가정을 방문할 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 가운데『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받으나……』환난 받지 않는다는 약조는 없습니다. 환난 받겠다고 그랬습니다.『환난을 받으나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시고 우리에게 미리 경고하여 주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선한 씨를 뿌리다가 낙심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 욥의 경우를 잠깐 회상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욥의 생활에 그렇게 난데없는 환난과 재난이 겸해서 이르게 될 때에, 만일 욥이 맥이 풀리고 낙심이 났으면, 어떻게 오늘날 우리가 아는 욥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환난 가운데서도 맥이 나지 아니하도록 우리가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또 어떤 때에는 도덕적 우주에 대한 회의심에서 맥이 풀릴 때가 없지 않아 있을 수 있습니다. 시편 七十三편을 한 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의 저자는 이 우주를 도덕적 견지에서 살펴 볼 때에 큰 의심이 마음가운데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가만히 잠깐 살펴보니 악한 자들이 하는 일들이 다 형통하여 보입니다. 그들로 말하면 교만으로써 눈이 솟아 나왔고 강포(强暴)로써 옷을 입듯이 그런 생활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은 권세가 더 많아지고 몸도 오히려 건강하고 더욱 재산까지도 늘어가니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바른 생활을 하고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는 데 내 하는 일은 이렇게 잘 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이 불행한 가운데 빠지게 되었고 이렇게 곤궁한 자리에 있게 되었으니 이래서야 어떻게 하나님을 계속해서 공경하며 일할 수 있습니까? 이 시인이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내가 하마 트면 미끄러질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이 이 시인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고요히 묵상할 때에 갑자기 깨닫게 되었습니다. 악한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 성하는 것 같지마는 아침에 풀이 자라다가 갑자기 베임을 당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 사람들에게 내리는 그 원리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이런 의심 가운데서 일으켜 주신 것을 감사한 노래가 시편 七十三편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단편적으로 볼 때, 그와 같은 의심 가운데서 맥이 풀리기 쉽습니다. 나 혼자 선한 씨를 뿌려서 무엇하나, 아무리 이렇게 살아야 무엇하나, 별 것이 있나 하면 맥이 풀리기 쉽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면 옛날 요셉도 이와 같은 시험을 받았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에 청년으로서 이기기 힘든 시험까지 담대히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칭찬과 상을 받지 못할망정 오리려 벌을 받아서 깊은 형무소에까지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보통 청년 같으면 그런 자리에서 맥이 풀려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아니했습니다. 성신으로 심는 생활, 선한 씨를 뿌리는 생활을 그냥 계속해서 감옥 가운데서도 살았습니다. 그 결과는 자기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큰 축복을 마지막에 받은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도덕적으로 일어나는 회의심 가운데서 낙심하면 아니 됩니다.
또한 셋째로는, 냉정한 사회에 직면하게 될 때에, 나의 하는 일에 대하여 동정과 격려가 도무지 없이 스스로 고독을 느끼게 될 때에, 잘못하면 낙심하기 쉬운 것입니다. 나는 아무리 이렇게 애쓰되 눈 한번 거들떠보는 사람 있나? 나는 아무리 애써서 수고하고 좋은 일을 하느라고 힘쓰지마는 세상에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 있나? 이런 생각이 들어 올 수 있습니다.『나는 아무리 교회 봉사를 잘하고 심방도 열심히 잘하고 하지만, 교역자나 장로가 누구 하나 칭찬하는 때가 어디 있나?』『나는 아무리 양심적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애쓰고 빈궁과 다투면서 내 자리를 지키지마는, 내 이 사정 알아주는 상관 누구 있나? 그저 빽이 있어야 윗자리로 올라가지.』이와 같은 고독을 느낄 때에 맥이 풀리기 쉬운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힘써 나오던 사람 가운데도 오히려 이와 같은 시험에 빠져서 낙심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와 같은 시험이 마음가운데 들어올 때에 고요히 생각해야 됩니다. 사실 우리가 남의 얼굴이나 보고 선을 행해서야 그것이 무슨 선입니까? 남의 칭찬하는 말이나 듣고 그 말에 격려를 받아서 우리의 선한 씨를 뿌리는 생활을 계속해서야 그것이 무슨 참된 선한 씨의 파종자(播種者)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옛날부터 내려오는 성현의 말씀가운데도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란 말이 있습니다.『덕은 외롭지 않은지라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장차 때가 되면 세상 사람도 알아줄 때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알든지 모르든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는 아시는 것입니다.
컬럼버스를 생각해 보십시오. 컬럼버스가 제일먼저, 그냥 서 편으로 항해해 가면 직선으로 인도 곧 동양에 갈 수 있다고 하는,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경영할 때에 도와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마지막 선반아 왕족의 후원을 받아서 배를 지어 가지고 출항하여 서편을 향해 갔지마는 아무리 가도 육지가 보이지 아니할 때에 심지어 같이 가던 선 부들도 반항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컬럼버스의 뜻을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컬럼버스는 계속해서 낙심하지 아니하고 그냥 노를 저으라고 하여 끝까지 나아갈 때에 인도까지 오지는 못했지만, 인도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아서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노를 젓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예기 이상의 큰 축복으로 우리에게 마지막날 주는 것입니다.
넷째로, 세상 사람들이 몰라줄뿐더러 옳게 하고 바른 씨를 뿌린다고 해서 세상이 나를 비난하고 나를 오해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핍박하고 배은망덕의 생동을 나에게 감행하고 오히려 내가 기른 개가 내 발꿈치를 무는 격으로 이와 같은 일을 당할 때도 세상에는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때 잘못하면 우리의 맥이 풀리고 낙심하기 매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 우리가 낙심하면 아니 됩니다.
모세의 생활을 보십시오, 그이의 신앙이 얼마나 크고, 그이가 얼마나 참된 애국자며, 그이가 얼마나 위대한 지도자였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四十년 동안 광야를 지나서 나오는 동안에 얼마나 모세를 비난했으며, 얼마나 모세를 오해했으며, 마지막에는 반기를 드는 일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의 형 아론과 누이까지도 비난할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낙심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한 후에는 새로운 힘을 얻어서 그냥 나간 것입니다. 비난과 오해와 핍박이 있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생활을 생각해 봅시다. 얼마나 많은 비난과 오해와 핍박을 받았습니까? 예수 님께서 친히 또한 말씀하시기를『너희도 내 이름으로 핍박을 받고, 욕을 먹도 악하다고 하는 거짓말을 들으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그랬습니다. 옛날 선지자들도 그와 같은 일을 당하였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아무리 애써도 무슨 성과가 되어지지 않을 때에 조금 잘못하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선한 씨를 뿌려도 무슨 특별한 열매 맺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아니합니다. 이럴 때에 그만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이 말을 첨가했습니다.『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때가 이르겠다고 그랬습니다.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두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거둔다고 해서 봄에 뿌려서 그 이튿날 곧 거둡니까? 기다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옛날 맹자의 말 가운데 있는, 제 나라 어느 사람처럼 곡식을 심어 놓고 빨리 크지 않으니까 너무 급해서 얼른 커서 열매를 맺으라고 하루아침에는 나가서 전부 고개를 뽑아 놓았답니다. 너무 그렇게 급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때는 사람의 때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때가 올 때에는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어떤 것은 내가 심고 거둡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둡니다. 어떤 경우는 이 세대에 심은 것을 이 세대에 거둡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이 대에 심은 것을 다음 세대에 가서야 거둡니다. 어떤 것은 이 세상에서 심어서 이 세상에서 거둡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이 세상에서 심은 모든 것을 하늘 나라에서 거둘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거둘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곧 무슨 성과가 나지 아니한다고 조급한 마음으로 낙심해서 안 될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떡을 물위에 던지면 오랜 후에 그 떡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때가 있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제가 지난주간 잠깐 시간 있어서 그 주 타임 잡지를 펼쳐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일본 북해도 어느 해변에서 된 일인데 그 해변가에 아이들 네 형제가 함께 사는 집이 있습니다. 제일 큰 아이가 열 네 살, 그 다음이 열 두 살, 그 다음이 열 살, 아홉 살 된 남자 네 형제가 그 해변가에서 살았습니다.
어부의 아들이니까 몰론 헤엄도 잘 칠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날이 밝아 헤엄치려 가자고 하면서 제일 큰애가 먼저 헤엄을 쳐서 한 五十야드밖에 있는 바위를 향해서 헤엄쳐 갑니다. 그러니 또 둘째 놈이 따라가고, 셋째 놈이 따라가, 넷째 놈까지 연달아 따라 헤엄쳐 갔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제일 큰 애가 보니까, 저 편에서 큰 상어 한 마리가 마주 옵니다. 상어를 사람까지 잡아먹는 놈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얼른 돌아서면서,『야 상오 오는데 빨리 도망하자.』소리 질렸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일제히 돌아서서 언덕으로 헤엄쳐 돌아갔습니다. 조그만 아이들은 언덕에서 조금 갔었으니 까 곧 언덕으로 올라 왔습니다. 그러나 큰애는 미쳐 올라오지 못했습니다. 그 상어가 거의 가까워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어가 사람을 물때에는 가까이 와서 뒷다리를 무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와서는 오히려 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올라오면서 배를 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보니까 이 놈이 따라오다가 물 속으로 들어가더랍니다. 경험 있는 아이였기 때문에 얼른 향해서 가다가 뒤로 돌아섰습니다. 돌아서 보니까 상어란 놈이 자기 앞에 와서 공중으로 입을 벌리고 헛 물고서는 옆으로 나가 자빠졌습니다.
그 때 이 아이는 얼른 가서 상어 옆을 붙잡았습니다. 상어를 잡아 탄 것입니다. 타고서는 이것을 놓으면 죽겠는데 놓겠습니까? 꼭 붙어 안고는 상어하고 싸웁니다. 그것을 세 아이가 보다가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전부 물 속으로 따라 들어가서는 넷이 모두 상어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바다가운데서 싸웁니다. 그런데 계속 그대로 싸웠으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침 큰물결이 바다에서 밀려오면서 상어나 상어를 붙잡은 아이들이나 전부 물 얕은 곳으로 내밀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전부 다 물이 한길밖에 안 되는 얕은 곳에 밀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어란 놈이 물이 얕은 곳에서는 옴짝달싹 못합니다.
네 아이가 그 옆에 있는 돌멩이를 들고 돌멩이로 때려잡았습니다. 그 이야기 제목을「자이언트 킬러스」(giant killers)즉, 거물을 죽이는 사람들이라고 붙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가만히 읽어보니 이 아이들이 자기의 힘에 넘치는 악한 상어와 지금 싸우는 중입니다. 단단히 붙잡았기에 자기들이 죽지 않았지, 놓았으면 죽을 뻔했습니다. 단단히 붙잡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단단히 붙잡고 싸운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아마 이기지는 못했겠지요. 결국은 큰 물결이 와서 전부 얕은 곳으로 밀어내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작은아이들이 일곱 자나 되고 백 팔십 파운드나 되는 큰 상어를 잡았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에 어떤 때에는 악의 세력이 너무 커서 이 어린아이들이 상어를 붙잡고 싸우는 것과 같은 이런 느낌이 우리 마음 가운데도 들어올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악의 세력을 붙잡고 싸울 때에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붙잡고 싸우면 하나님의 큰 권능의 물결이 우리를 도와줍니다. 그래서 악의 세력을 온전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말합니다. 남한에 악의 세력이 얼마나 많은가, 북한에 공산당이라고 하는 악의 세력이 얼마나 많은가.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는가.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악의 세력이 커 보이지마는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아니하고 계속해 싸우면, 하나님의 큰 권능의 물결인 역사의 파도가 반드시 우리를 도와 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 한데 편지할 때에 이런 말씀을 기록했습니다.『전에와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尊貴)되게 하려 하노니……』「전에와 같이 이제도……」전에 젊었을 때와 같이 바울이 비록 나이 많았어도 시종 여일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바울의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아니했습니다. 낙심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一九五九년 九월 六일)
Ⅲ-24 소극적 죄 (마태복음 二十五장 十四-三十절)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二十五·三十)
이 말씀은 집주인이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에게 내린 벌입니다. 이 달란트 비유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압니다. 어떤 부잣집 주인이 먼 곳에 여행을 가려고 할 때에, 종들을 불러서 각각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주고, 또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주면서 주인의 명령하신 말씀은 그가 떠나 있는 동안에 이것을 가지고 너희들이 장사하라고 한 것입니다. 금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장사를 잘해서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꼭 그와 같이 해서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활용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땅 속에 묻어 두었었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회계를 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다 두 배 이익을 남겨서 주인에게 바칠 때에 주인이 대단히 기뻐서 잘하였다고 칭찬하면서『착하고 진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이와 같이 충성되니 내가 이 앞으로 큰 일로 맡기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땅에 묻어 두었던 그대로 한 달란트를 주인에게 가지고 와서 바치면서『내가 알기에 주인은 대단히 굳은 사람인데 헤치지 않는 데서도 거두고 뿌리지 않은 곳에서 모으는 분인데 내가 이것을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냥 가지고 왔으니 본전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주인이 들을 때에 대단히 노해서『악하고 게으른 종아 네가 만일 내가 뿌리지 않는 데서도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도 거두는 줄 이렇게 알았다고 하면 어찌해서 이것을 은행에라도 갔다 두어서 이자라도 같이 가져오지 아니 했느냐?』그러면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고, 다시 하시는 말씀이『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이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에게 대한 형벌이 너무 과하지 아니한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그 본전마저 낭비했다고 하면 모르지마는 그대로 본전은 그냥 가지고 왔는데 본전을 빼앗았을 뿐더러 마지막에는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쫓으라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내렸으니 너무 과하지 아니한가 라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공정히 심판할 줄 아시는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죄 가운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적극적 죄입니다.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는 죄입니다. 도둑질을 하는 것, 협잡을 하는 것, 간음을 하는 것, 도박을 하는 것, 술에 취하는 것, 악한 짓을 적극적으로 하는 죄악입니다. 이런 것을 적극적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소극적 범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할 것을 하지 않는 것, 주인의 명령을 받았는데 명령대로 하지 않는 것, 의무를 실행하지 않는 것, 선을 행하라고 하였는데 행하지 않는 것, 등은 소극적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물론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때에 적극적인 죄를 먼저 회개합니다. 도둑질하던 자가 도둑질을 금합니다. 술 취하던 자가 술을 금합니다. 거짓말을 하던 자가 거짓말을 하지 아니합니다. 물론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 믿을 때에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던 것을 중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적극적으로 죄악을 짓지 않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과거의 죄를 청산한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가며 그리스도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하는 것, 그리스도의 명하는 모든 선을 행하는 것,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적극적으로 다른 죄악은 짓지 않지만, 소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한 걸음 나아가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소극적으로 그리스도 앞에 죄는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 원리를 깊이 깨닫지 못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을 전에 하던 일, 나쁜 일만 안 하면 그 다음에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절반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을 삼으신 것은 우리들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 하실 일이 있어서 우리를 불려서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명령을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는 소극적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예수 님의 교훈과 성경의 교훈을 보면, 이 소극적으로 죄를 지은 자에 대해서도 얼마나 중한 벌이 내렸는지 우리가 잠깐만 생각해 보드라도 분명히 깨달아 알 수가 있습니다. 우선 이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을 보십시오. 돈을 때어 먹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쫓으라고 엄히 명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모압 평지에 왔을 때, 그 때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들이 모세에게 와서 부탁하는 말이 자기들은 가축이 많이 있는데 이 지방에 보니까 초장(草場)이 많이 있으므로 요단강을 건너갈 것 없이 이 길르앗 지방에서 살게 해주셨으면 고맙겠다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모세가 곧 대답하는 말은 이렇습니다.『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나아가거늘 너희들은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너희 형제는 이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복지를 전취(戰取)하기 위해서 싸우러 나가려 준비하는 중에 있는데 너희는 이미 이 자리에 왔다고 가만히 이 자리에 앉아 있겠느냐?』『너희도 무장하고 같이 나아가서 요단강을 건너 같이 싸워서 다른 형제들도 다 분 깃을 얻은 다음에 그 다음에 돌아와서 너희 원하는 이 곳을 차지하라. 그러나 이제 그런 말하는 것은 큰 죄가 될 터이니 너희가 만일 그런 죄를 지었다가는 이 다음에는 그 죄가 너를 찾아 만날 때가 있겠으니 그리 알라.』엄히 경계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소극적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경고입니다.
사사기(士師記) 五장을 읽어보면, 거기 유명한 드보라의 승전의 노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거니와 드보라는 이스라엘 가운데 유명한 여 선지자요 또 사사였습니다. 그 때 가나안 왕 야빈과 그 군대 장관인 시스라가 큰 군대를 동원해서 이스라엘 경내로 침노해 들어왔습니다. 이 때, 여 선지자 드보라가 바락과 같이 다볼산에 모든 이스라엘 청년들을 모아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야빈과 시스라를 요격해서 다볼산에서 내려오면서 무찔러서 이 강한 군대를 헤쳐 버리고 야빈과 시스라를 다 쫓아버려 죽게 했습니다. 그래서 크게 승리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의 승리의 노래는 불렀는데 그 노래 가운데 二十三절에 내려가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 거듭 그 거민(居民)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다 칭찬하며 감사하다고 노래 불러 내려가다가 무슨 말이 있는고 하니『여호와의 사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메로스를 너희들은 저주하라, 너희들이 메로스에 사는 사람들을 거듭 거듭 저주할 것은 그 사람들은 여호와를 도와서 강한 자를 치러 오지 않은 까닭이니라.』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이 원수를 맞아 싸우려고 나왔는데 메로스 동네에 있는 사람만은 나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협력을 안 했습니다.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하나님의 사자의 말씀이 이 사람들을 저주하고는 것입니다. 이 메로스 사람들이 저쪽에 붙어서 간첩 행위를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단순히 남이 다 나아가 싸울 때에 싸우지 아니하고 가만히 자기 동네에 있었습니다. 그 까닭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또 이 저주한 말대로 된 모양입니다. 왜냐 하면 메로스 동네에 대한 기록은 이 곳밖에는 성경에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아주 멸망하고 만 모양입니다.
이런 교훈은 구약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二十五장 마지막에 유명한 양과 염소의 비유에도 이 교훈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 다음에 인자가 오셔서 모든 사람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다 갈라놓으십니다.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 즉 의인을 향해서 그 인자가 칭찬을 합니다.『너희는 만세 전부터 준비해 저었던 축복에 들어와서 복을 받으라.』그러면서 계속해서 하는 말이『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여러 가지 좋은 일 한 것을 쭉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그들이 언제 주님에게 그렇게 했었느냐고 물을 때에『내 형제 가운데 지극히 적은 이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보세요. 왼 편에 있는 염소와 같은 그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이 이렇습니다.『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를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지 아니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들이 마실 것은 주지 아니했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너희가 입을 것을 주지 아니했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너희가 와 보지 아니했고, 내가 병났을 때에 너희가 찾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그들도 하는 말이『언제 주님께서 주리를 것을 우리가 보았고, 언제 주님께서 헐벗은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까?』 인자가 대답하는 말이『네 형제 중 지극히 적은 이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
자, 여러분, 이 염소 편에서 저주를 받은 사람의 죄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들이 무슨 도둑질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간음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허랑 방탕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이 사람들의 죄가 무엇입니까? 하지 않은 죄입니다. 적은 자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한 것이 소극적 죄입니다.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아니한 것이 소극적 죄입니다.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아니한 것이 소극적 죄입니다. 병났을 때에 와서 보지 아니한 것이 소극적 죄입니다. 감옥에 있을 때에 와서 심방 하지 아니한 것이 소극적 죄입니다. 할 일을 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는 불에 들어가라고 예수 님께서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또 예수 님께서 이렇게 교훈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행 하셨습니다. 한번은 베다니에서 예수 님께서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에 주리셨습니다. 먼 곳을 보니까 잎이 성한 큰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혹 무화과가 열렸을까 하고 예수 님께서 가 보았습니다. 정작 가보니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었습니다. 예수 님께서 그 때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습니다.『이 앞으로 네 나무에서 열매를 다시 먹을 자가 없으리라.』얼마 후에 와보니 뿌리부터 가지까지 온전히 말랐다고 그랬습니다. 그 무화과나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지은 죄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무화과나무를 거기 심은 것은 열매를 맺으라고 심었는데 열매를 맺지 아니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소극적 죄를 지은 까닭으로 무화과에 벌을 주었습니다.
두려운 교훈입니다. 이렇게 소극적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주지 않는 생활을 하면서도 자기가 죄짓는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심판대 앞에 가서야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마땅히 해야될 의무를 하니 않으면서도 이것이 죄라고 하는 것을 깨eke습니까? 깨닫지 못합니까?
두려운 교훈입니다. 이 교훈을 가만히 생각할 대에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떨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교훈을 여러분에게 솔직히 말할 때에 많이 주저하다가 이 말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왜 소극적 죄를 적극적 죄와 같이 엄하게 형벌 하십니까? 그 원인은 적극적 죄악이나 소극적 죄악이나 비슷합니다. 가령 왜 이와 같이 할 것을 하지 않게 되느냐?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첫째는 이기심(利己心)입니다. 이 이기심에 의지해서 우리가 할 것을 하지 못할 때 많이 있습니다. 그 때 르우벤과 갓 자손이 요단강에 건너 갈 것이 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 앉아 있겠다고 한 것도 평안하다는 이기심입니다. 또 의뢰심(依賴心)입니다. 왜 메로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은 다 전쟁에 나갔는데 같이 나가지 않았습니까? 다 나아가 싸우는 동안에 자기는 가만있다가 남의 덕에 좀 잘 살아 보자는 의뢰심입니다. 속담에 있는 말대로 굿 구경이나 하다가 덕이나 먹자는 의뢰심입니다.
어떤 때에는 거짓 겸손으로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안 할 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겸손은 우리 기독교의 가장 아름다운 덕입니다. 나를 부족하게 생각하고 다루는 태도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나를 낮추며 부족한 줄 알면서도 내가 할 의무에 들어가서는 내가 이렇게 부족하니까 온 정성을 다해서 내 의무를 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나서는 사람이 참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거짓으로 겸손한 사람이란『나는 이렇게 부족하고 나는 이렇게 모든 일에 다 능하지 못하니 나야 어떻게 할 수 있나? 난 아무 것도 못해.』하고 뒤로 물러섭니다. 그것은 겸손 이 아니고 비겁(卑怯)입니다. 아마 메로스 사람들도 그랬는가 봅니다.『우리야 뭐 싸울 줄 알아야지, 뒤로 물러앉아야지.』그것은 겸손 이 아니고 비겁 입니다.
어떤 때는 공포심으로 할 일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 이 메로스 사람들이 전쟁에 나가지 못한 것은 무서워서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주인이 무서워서 그것을 땅에 파묻어 두었다고 그랬습니다. 공포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두려워 말라고 성경에 거듭해서 우리에게 권면해 줍니다.『내가 너와 같이 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내가 네 하나님이니 무서워하지 말라.』『내가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어 줄 터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믿는 사람이 두려운 마음으로 의무에서 물러가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무를 다 못하는 이유는 태만과 게으른 마음 때문입니다. 아마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묻어 둔 것은 다른 이유보다도 게으른 탓입니다. 그러기에 주인이 책망할 때에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이 메로스 사람들도 아나 게을러서 전쟁에 참가 못했는데 알 수 없습니다. 남도 다 전쟁에 나온다고 했는데 우리도 나가야지. 내일쯤 나갈까? 모래쯤 나갈까? 모래 가서는 또 글피쯤 나갈까 하는 동안에 전쟁은 다 끝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게을러서 어떤 이들은 일을 하기는 해야 되겠는데 명년에나 해보지, 그 다음 명년 가서는 또 명년에나 해보겠다고 합니다. 전도도 한다. 전도 회에도 든다, 십일조도 한다 하면서 그저 세월이 다 지나가고 맙니다. 게을러서 의무를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 아마 적극적으로 악한 죄를 짓는 사람은 매우 드물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은 그대로 하지 못함으로 짓는 이 소극적 의미에 죄는 누구나 다 지을 줄 압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죄를 짓지 아니하고 적극적으로 내 책임을 감당 할 수가 있겠느냐? 오늘, 여러분께서 들은 이 달란트의 비유를 우리가 마음가운데 깊이 기억하면 될 줄 압니다. 우리는 하나 하나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장사하라고 하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앞으로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서 회계할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지식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가 물질이 많든지 적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이렇게 받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장사해서 이익을 남기라고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적극적으로 악한 죄를 짓지 아니할뿐더러 소극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의무에서 물러가게 되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실제로 만일 우리가 이 죄를 짓지 아니하고 예수 님의 본래 뜻하신 대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아마 우선 우리가 어디 있든지 주님을 일을 해야 될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교회에 나오면, 교회의 여러 기관도 많고, 여러 단체도 많아서, 어떻든지 협력해서 내가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여전도 회는 참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서 회원도 많고 일이 잘 됩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우리 교회의 하나의 부끄러움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남 전도 회는 특별히 약한 모양입니다. 이건 특별히 우리 한국 교회의 부끄러움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문과 잡지에서 보는 대로 여러 미국교회 같은 데서는 특별히 과거 十년 동안에 남자 교우들 가운데 평신도 운동이라고 해서 전도하는 운동이 굉장히 일어납니다. 남자들 가운데 가령 호별 방문 전도 단을 조직해서 일주일에 한 번이든 두 번이든 같이 교회에 모여서 기도하고 두 집으로부터 혹은 다섯 집까지 방문할 만한 집을 택해서는 꼭 방문합니다. 남자들이 저녁 시간을 제공해서 전도하므로 교회가 크게 부흥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 한국교회에서 남자들 가운데 이런 호별 방문 전도 단이 조직되었다고 하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만일 우리 하나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본 받아서 좋은 청지기가 되어 우리의 책임을 다 감당한다고 하면, 우리 한국교회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교회마다 일군이 적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마다 예산이 부족하지 아니합니다. 오늘날 우리교회서 전도 인을 파송 한다는 것이 절대로 자랑이 아닐 것입니다.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특별히 가을은 추수하는 때입니다. 영적으로 많은 추수를 해서 하나님의 곡간에 들이기 위해서 일군을 부르는 때입니다. 기도합시다. (一九五九년 九월 十三일)
Ⅲ-25 다윗의 죄와 그 벌 (사무엘 하 十二장 一-十五상반절)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삼하 十二·十三-十四)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실 때에 한 소경이 앉아서 구걸하다가 예수 님이 지나가신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부르짖으며『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분입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난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모든 제왕 가운데 가장 유명한 왕입니다. 다윗이 사방에 둘러 있는 모든 원수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국가의 기초를 확립한 것입니다. 또한 다윗이 예루살렘을 국가의 수도로 정하고 법궤(法櫃)를 그리고 가져다가 장차 성전의 기지를 정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정의와 인도의 통치자로서 또는 이상적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어떠한 왕보다도 많은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오늘 저녁에 다윗의 생활을 잠깐 회고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문자 그대로 다방면에 천재적 인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어려서는 목사로서 나타났습니다. 또한 수금(竪琴)을 잘 탈 수 있는 음악가로서도 나타났습니다. 많은 시를 친히 지은 시인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읽는 시편 가운데 七十三편이 다윗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는 천병만마(千兵萬馬)를 능히 호령해서 적진을 물리칠 수 있는 위대한 군인이었습니다. 또한 일 국의 모든 정치를 어거(馭車)해 나갈 수 있는 큰 정치가로서, 또한 역사상에 나나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먼저 그의 생활을 간략히 소개하면 그는 베들레헴에서 났습니다. 그 때부터 베들레헴은 다윗 성으로 불리우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도 역시 베들레헴에서 나시게 된 것입니다. 이새라고 하는 사람의 여덟째아들로서, 말하자면 막내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도와서 베들레헴들에서 양을 쳤습니다. 이렇게 아직도 어릴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준비로서 그 머리에 기름을 부음을 받은 것입니다.
점점 자람에 따라서 음악가로서 사울의 조정에 나아가 사울 에게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소년 시절에,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큰 원수인 불레셋 사람의 대장인 골리앗을 물 맷돌 하나로써 격멸(擊滅)하므로 말미암아, 갑자기 다윗의 이름이 온 천하에 떨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때부터 사울 왕조에 있으면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가까운 친구가 되게 되었고 또한 사울 왕의 딸 미갈과 결혼해서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마는 다윗의 이름이 점점 높아감에 따라, 또한 사울 왕의 시기를 받아서 마지막에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도모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다윗은 부득이 왕조를 떠날 수바께 없었고, 멀리 산지로 도망해서 오랜 동안의 피난 기간이 있게 된 것입니다. 혹은 엔게디 굴속에 살며, 혹은 하길라 산맥가운데 숨어서 살며, 혹은 불레셋 사람에게로 도망 가서 살며, 이 곳 저곳 유리하면서 사는 동안에, 혹은 남의 빚을 진 사람들, 혹은 무슨 불평을 가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다윗에게로 모이기 시작해서 처음에는 四백 명이 되었고, 그 다음에는 六백 명이 되었고, 점점 그 무리가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그려는 동안에 다시 불레셋과 사울 왕조에는 큰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불행히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이 같이 길보아 산이라고 하는 유명한 산상에서 전쟁하다가 그만 다 죽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후에 유다 지파(支派)의 두목들이 다윗을 헤브론에서 왕으로 옹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七년 동안 역시 사울 왕가에서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까닭으로 다윗의 집과 사울의 집 사이에 끊임없는 충돌, 간단없는 전쟁이 계속된 것입니다.
그려는 동안에 다윗의 집은 점점 강성(强盛)하게 되었고, 사울의 집은 점점 쇠미(衰微)하게 되어서 마지막에는 이스보셋이 죽은 후에는 다윗 왕이 온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후원을 받아서 왕으로 등극(登極)하게 되었습니다. 민족 전체의 왕이 된 후에는 예루살렘으로 국도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三十三년이란 긴 세월동안 왕으로 온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다윗의 업적은 실로 위대한 것이 많습니다. 사방의 모든 원수를 다 격멸해서 국가의 기초를 확립하고 국가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게 한 이가 역시 다윗인 것이 사실입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에로 옮겨옴으로 말미암아, 이미 말한 대로, 장차 예루살렘 성전의 기지를 자연히 정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성전 지을 모든 자료를 다 준비해 놓은 것도 역시 다윗이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다윗의 신앙과 그 성격은 어떠하냐? 성경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는 문귀(文句)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시켜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때에 친히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른데 사람은 외모로 보지마는 하나님은 중심을 본다고 말하셨습니다. 이새의 아들 일곱 형제를 다 물리치고, 아직까지 저 산에서 양 치느라고 오지도 아니한 어린 다윗을 불러다가 그 머리 위에 기름 부은 것을 보면,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경건한 참된 신앙을 가졌던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편 二十三편을 비롯해서 다윗이 지은 허다한 시를 읽을 때에 다윗의 신앙이 얼마나 진지하였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이와 같이 독실한 신앙을 시작한 다윗의 성격은 고귀(高貴)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어떤 사람보다도 용감하고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양을 칠 때에는 혹은 사자, 혹은 이리가 와서 양을 움켜 가지고 가면 따라가서 맨 손으로 사자와 싸워 이기고, 범과 싸워 이기고, 이리와 싸워 이기면서, 양을 찾아오고 보호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소년일 때에 담대히 골리앗과 겨루어서 골리앗을 격파한, 한가지 사실만 모아도 다윗이 얼마나 담대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무용(武勇)에만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다윗은 역시 덕이 높고 의지가 깊은 그러한 위인입니다. 우리가 다윗의 생활을 읽을 때에 여러분은 그와 같은 성격의 표시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멀리 엔게디 굴에 숨어 살 때에 사울은 다윗을 잡아죽이려고 三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다윗을 찾아갔습니다. 그 때 깊은 굴속에 있는데 사울은 다윗과 그 쫓는 자가 그 굴속에 있는 줄도 알지 못하고 혼자 그 굴속에 들어간 일도 있습니다. 그 때 다윗이 사울을 죽이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다윗이 사울 에게 손대지 아니했습니다. 다만 옷 가를 칼로 베어들고, 그 후에 내가 당신을 죽이려고 했으면 죽일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을 사울 에게 알릴 때에, 사울이 많은 부끄러움 가운데서 다윗에게 자기 죄를 자복한 일도 있습니다.
또는 하길라 산맥 속에 숨어 있을 때에도 사울은 역시 같은 경험을 당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잡아죽이려고 군인을 거느리고 갔습니다. 어떤 곳에 가서 막을 치고 밤에 잘 때에 다 잡니다. 그 때에 다윗과 그를 쫓는 몇 사람이 가서 사울의 물병과 창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해하지는 아니했습니다. 그 부하가 사울을 해할 마음이 있었지마는 다윗이 절대로 금한 것입니다. 이만큼 다윗은 덕이 높은 사람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이에게, 본래 자기가 덕을 입은 이에게 절대로 손댈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죄를 용서해 준 이가 곧 다윗입니다.
사울가(家)가 다 망하고 마지막에 다윗이 온 열두 지파의 왕이 되어서 예루살렘에서 다스릴 때에, 모든 형편이 대략 평안하여진 다음에 다윗이 한번은 사울의 집과 요나단의 집에 누구 남은 자가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분이 과연 한 사람 있음을 밝혔습니다. 요나단의 아들이 있는데 이름은 므비보셋이요. 그이는 두 발이 다 상해서 절름발이입니다. 그 절름발이 므비보셋 하나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에 다윗이 사람을 보내서 므비보셋을 자기 궁중으로 청했습니다. 그래서 전에 사울이 있을 때에 가졌던 모든 토지를 다 므비보셋에게 돌려주고, 한 편 므비보셋을 왕자의 하나로서, 대접을 해서 궁중에서 언제든지 자기와 같이 한 상에서 먹을 수 있도록 요나단을 생각해서 므비보셋을 우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 왕은 의리가 깊은 사람입니다. 좀 있다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줄 알지만 다윗이 그만 말년에 불행히 자기 아들 압살놈의 난을 만나서 갑자기 자기를 따르는 사람 몇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에 사울의 먼 친척 가운데 하나인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윗이 그만 자기 아들에게 쫓겨서 형편없는 가운데 도망치는 그 광경을 보고서 옆에 서서 비웃었습니다.『피 흘린 자여, 어서 가거라.』그러면서 다윗을 저주하고 먼지를 날리면서 다윗을 모욕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을 따라가던 무사 하나가 그 개와 같은 어떤 사람이 대왕을 모욕하니 자기가 당장 가서 그놈의 목을 배어 오리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이 아예 그런 일 하지 말라고 금했습니다.『이것은 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에게 이와 같은 책망을 하는 것이야. 내 몸에서 난 내 아들도 나를 이렇게 대접하는데 하물며 사울의 친척이 나는 대접하는 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할 것이 무엇이냐?』다윗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가만히 자기의 당하는 모든 모욕이 결국은 다 하나님께서 오는 줄 생각하고 겸손히 그 치욕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압살놈이 물론 망하고 다윗 왕이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 때 물론 시므이를 형벌 하려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때에도 시므이를 다 용서해 주고 벌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만큼 다윗은 마음이 너그럽고 덕이 높은, 참 남의 죄를 용서할 수 있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러한 위대한 고귀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신앙과 성품이 결국은 다윗으로 하여금 다윗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다윗에게도 특별히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고귀한 성품을 가진 다윗에게도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은 정욕에 많이 끌린 사람입니다. 그 때 물론 제왕들이 다 이와 같은 일을 했지마는 역시 다윗도 이방의 다른 제왕과 다름없는 많은 처첩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그 가정에 계속해서 불상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고 다윗의 이 약점인 정욕을 통해서 큰 시험이 들어 왔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말 그대로 여호와의 원수에게 큰 훼방거리가 되는 무서운 범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일이 아니고 우리가 다 잘 기억하는 다윗이 침대에 일어나서 왕궁 지붕 위에 올라가 온 예루살렘을 살펴봅니다. 자기가 건설한 예루살렘! 아마 마음 가운데 교만한 생각을 가지고 자부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던 것 같습니다. 그런 때에 우연히 어떤 여자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불같은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그 여자를 궁(宮)으로 데려오라고 해서는 욕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 여자는 다른 여자가 아니고 자기의 가장 충실된 신하, 충복 가운데 하나인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이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밧세바가 에기를 배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죄를 어떻게든 감출 생각을 가지고 그 때에 자기의 충복 우리아는 암몬 사람과 싸우기 위해서 전장에 나가 있을 때인데 속히 우리아를 불러오라고 그랬습니다.
우리아를 불러다가 그가 그 동안 전장에 나가 싸우기에 수고를 많이 하였으니 오늘 저녁에는 그의 집에 돌아가서 편안히 자라고 분부했습니다. 그러나 이 우리아는 얼마나 충성된 사람인지,『지금 내 모든 상관들과 내 모든 전우들이 들판 천막 가운데서 밤잠을 자지 못하고 대적과 싸우고 있는데 제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예루살렘에 왕명으로 돌아오기는 왔지만 내 집에 돌아가서 편안히 잘 수가 있습니까? 저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미 돌아왔으니 왕궁 어떤 모퉁이 방에서 오늘 저녁을 지내고 가겠습니다.』종래 우리아가 왕의 명이라도 자기 집에 가서 자라고 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결국 다윗의 계교(計較)가 맞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지은 죄를 감추려고 하는 한 가지 생각 가운데서 오리려 더 죄 지을 생각이 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군대를 지휘하던 요압 대장에게 우리아를 통해서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우리아로 하여금 요다음 날 암몬 사람과 싸울 때에 최전선에 내보내서 암몬 사람에게 죽게 만들라고 하는 이런 음모의 편지를 써서 자기의 충복인 우리아의 손에 주어서 그것을 요압에게 보냈습니다. 이 충복 우리아는 자기를 죽이려는 편지인 줄을 알지도 못하고 그저 충성되게 그 편지를 요압에게 전했습니다. 요압이 그대로 했습니다. 그 이튿날 억울하게 우리아는 암몬 사람에게 죽게 된 것입니다. 죽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그 얼마 후에 그 아내 밧세바를 불러서 자기의 처로 삼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저녁 읽은 성경 말씀 구절이 나단이 다윗을 만나서 이야기한 그 말씀입니다. 나단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서 다윗에게 와서 이야기할 때에 먼저 유명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어떤 동리에 큰 부자 한 사람이 살고 가난한 사람이 삽니다. 그 부자는 집에는 소도 많고, 염소도 많고, 많은 재산이 있는 부자입니다. 이 가난한 집에는 아무 것도 없고 그저 조그마한 암 양 새끼 하나 밖에 없는데, 이 가난한 사람이 암 양 새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저 한 상에서 먹고 한 자리에서 자고 거의 한 자녀와 같이 이 암 양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자 집에 어떤 손님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가 자기 집의 많은 양, 많은 소를 아깝다고 그냥 두고 이 가난한 사람이 기르는 암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그 암 양을 잡아서 자기의 손임을 대접했습니다.
이 말을 듣던 다윗은 그 근본 뜻은 알지도 못하고 본래 정의감은 강한 사람이라 정의감에 흥분되어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고 맹서(盟誓)하노니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양은 모세의 율법에 의지해서 네 배나 갚아 주어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때에 나단이 다윗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당신을 베들레헴 목동으로 일으켜서 온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높은 지위에 올려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부귀를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처첩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화를 주었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더 원하면 더 주었을 겁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해서 당신의 가장 충복 중에 하나인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서 당신의 아내로 삼았나이까? 당신께서 이와 같은 죄를 지었음으로 말미암아 이 앞으로 당신 집에 칼이 영영(永永)토록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당신은 은밀한 가운데 다른 여자를 모욕했지마는 당신의 처첩은 백주에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죽을 것입니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며,『아, 과연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고 나단에게 죄를 자복했습니다. 사실 다윗이 그 때에 참으로 회개한 것은 시편 五十一편을 읽어보면 얼마나 통회하면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였나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참으로 죄를 회개하는 것을 보고서 나단이 하는 말이『당신이 이렇게 죄를 회개하니 죽을 것을 하나님께서 면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벌을 그냥 당신의 집에 올 것입니다.』그 후에 보면 꼭 그대로 되었습니다. 다윗이 죽을 것은 면했습니다. 그 죄는 으레 히 죽을죄이지마는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 가정에서 된 모든 일을 보면 나단이 예언한 꼭 그대로 되었습니다.
다윗의 아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암논이라고 하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딸도 많은데 그 가운데 다말이라고 하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는 다릅니다. 이 암논이라고 하는 젊은 사람이 자기 이복 여동생 되는 다말이라고 하는 여자에 대해서 짐승 같은 마음을 품고 결국 그 누이를 모욕했습니다. 가정에 이와 같이 패륜의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말이라고 하는 여자는 누군 고 하니 다윗의 다른 아들 압살놈과 동복 동생 되는 누이입니다. 압살놈이 자기 누이가 그와 같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볼 때에 마음가운데 독한 마음을 품고 있다가 얼마 후에 무슨 잔치를 한다고 해서 여러 왕자들과 이런 사람들을 청해서 대접을 하는 체하다가 무사를 시켜서 암논을 쳐죽였습니다. 한 아들이 한 딸에 대하여 패륜의 일을 감당했고 한 아들이 또 다른 아들을 쳐죽였습니다. 다윗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압살놈은 암논을 죽인 후에 멀리 도망쳤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용서함을 받아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는 압살놈이 또한 딴 계획을 했습니다. 정병(精兵)五十명을 자기 집에서 치기 시작했고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이스라엘 사람의 민심을 도득(盜得)하기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자기가 왕이 되어서 왕으로 선포하게 되고, 자기의 무리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자기 아버지를 치려고 쫓아옵니다. 그래서 이미 한 말대로 다윗이 예루살렘을 급히 떠나서 멀리 도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 날 후에 물론 압살놈이 죽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돌아오기는 왔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여호와의 원수들에게 큰 훼방거리가 된 것이 사실입니다.
다윗같이 신앙이 어려서부터 독실했고 그처럼 고귀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파렴치의 죄를 지을 수가 있겠는가? 얼른 생각해 보면 참 생각조차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약한 것은 인간입니다. 약한 것은 육신입니다. 그런고로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경고하여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하고, 아무리 고귀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하지마는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한 면에 약점이 있는 것입니다. 조심하지 아니하면 언제든지 악한 사탄은 약점을 통해서 그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그랬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약점이 무엇인가? 내 생활 면과 내 성격에 있어서 특별히 약점이 어디에 있는가? 스스로 살펴서 거기에 조심하지 아니하면 누구나 큰 죄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약점을 스스로 깨닫고 조심하지 아니하면, 누구나 다윗의 전철을 또 밟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에 이와 같은 범죄는 젊었을 때에 많지마는 중년이 지나고 노년기가 가까워 오면 별로 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 죄는 청년 시대에 지은 죄는 아닙니다. 중년을 훨씬 넘어서 아마 노년기에 거의 가까워서 이런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청년기가 지났다고 방심할 것은 아닙니다. 또 다윗이 원수와 싸우면서 사방에 일이 너무 분주해서 동분서주할 때에 이와 같은 시험이 오지 아니했습니다. 대체로 원수를 다 정복하고 이제는 다윗 자신이 전장에 나갈 필요가 없고 자기의 부하가 모든 일을 잘 합니다. 암몬 사람과 싸우지마는 요압이 대신 잘 싸워 줍니다. 자기는 예루살렘 성에서 한가하게 낮잠 자고, 침대에서 저녁 때 일어납니다. 한가한 대에 시험이 들어왔습니다. 한가한 때를 우리가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가 다윗의 신앙과 그의 의리 심과 그 높은 덕과 그 용감한 것을 배우는 동시에 다윗의 이 범죄와 형벌 받은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알아서 우리 실생활에 전감(前鑑)을 삼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다윗 같은 이도 이와 같은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도 조심하지 아니하면, 언제, 어느 때에, 어떤 범죄를 할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다윗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우리 생활의 전감을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一九五九년 九월 十三일·저녁예배)
Ⅲ-26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_간증주일_ (이사야 六十장 一-三, 十九-二十절)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제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六十·一)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옛날 시온을 향하여 외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세기를 통하여 신령한 시온이 되는, 곧 그의 교회를 향하여 같은 말씀을 외치십니다. 간증 주일로 모인 우리에게 이 아침,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친히 우리 심령 속에 말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일어나라」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성경에 보면, 세 가지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일어나라고 외친 것입니다. 첫째는 죽은 사람들, 둘째는 병든 사람들, 셋째는 자는 사람들입니다. 죽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향해서 예수께서『청년아 일어나라.』부르짖을 때에 죽은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향해서『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고 외칠 때에 죽은 어린 소녀가 일어나 앉은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죽음, 또 하나는 영의 죽음입니다. 육신이 죽었으나 영이 살수도 있고, 육신은 비록 살았으나 영이 또한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 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죽은 육신을 살리신 예는 세 번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적을 예수 님께서 특별히 몇 번 행하신 것은 예수 님은 생명으로서 죽은 육신도 살릴 수 있는 권능이 계신 것을 나타내실 뿐더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죽은 심령을 살릴 수 있는 권능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이와 같은 특수한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근본적인 사명은 죽은 영을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은 죽은 영혼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본이 되시는 까닭으로 하나님을 떠난 그 영혼에게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이와 같은 죽은 심령을 향해서 일어나라고 지금도 외치는 것입니다.『죽은 자여 일어나라. 주께서 네게 비치시리라.』
우리가 에스겔 선지자가 본 해골 골자기에 대한 이상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큰 골짜기에 해골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어떻게 뼈가 말랐든지 희게 되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렇지마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서 이 해골을 향해서 일어나라고 외칠 때에 이 마른 뼈들이 서로 연결이 되고 힘줄이 생기고 피부가 생기고 일어나서 새로운 생명이 될뿐더러 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큰 군대가 되는 이상을 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으로 말미암아 해골과 같이 죽은 심령이 새로운 생명을 얻어서 부활하고 소생하겠다고 하는 사실의 예언인 것입니다. 죽은 심령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심령을 향해서 일어나라고 예수 님께서는 외칩니다. 예수의 이 음성을 듣고 사실 그 음성에 순복하는 심령은 새로이 부활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병든 자를 향해서 일어나라고 외쳤습니다. 베데스다 못 가에서 三十八년 된 환자를 주님께서 보시고 일어나라고 부르짖을 때에 그 환자가 일어났습니다. 가버나움에 계실 때에 네 사람이 메고 온 반신불수를 향해서 일어나 그 상을 가지고 가라고 외칠 떼에 반신불수가 일어나서 자기가 누웠던 상을 가지고 걸어간 것입니다. 병든 자들을 예수 님께서 일으켜 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눅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단순히 육신의 어떤 곳에 병이 남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도 고통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민망한 생활을 계속하던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영혼도 병든 영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주 떠나지는 아니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명이 아주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마는 그 심령 속 어떤 자리에 병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탐심의 병이 들었습니다. 교만의 병이 들었습니다. 시기의 병이 들었습니다. 혹은 원한의 병독(病毒)이 있습니다. 혹은 허영심, 혹은 좋지 못한 악한 습관, 혹은 혈기, 사람을 따라서 어떠한 특수한 약점과 그 심령 속에 속을 썩이는 병 때문에 일할 수 없고, 일어날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서 무용의 장물이 되는 영혼이 없지 않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 님께서 일어나라고 외치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음성에 순복해서 일어나면, 예수 님께서는 그 병을 고쳐주시고 주를 위해서 활동하는 쓸데 있는 자녀로 삼을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자는 자들을 일어나라고 성경에는 기록했습니다. 전에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사명을 거역하고 멀리 다시스로 방향을 바꾸어 가면서 배 밑에서 깊은 잠이 들은 것입니다. 그 때에 마침 그 바다에는 큰 풍랑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황겁(惶怯)해서 자기의 신을 향해서 외칩니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배 밑에서 그냥 잠자는 것을 선장이 발견했습니다. 요나의 옆에 와서 부르짖는 말이『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 네 신께 구하라.』자는 요나를 깨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한번은 예수 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를 하시건만 제자들은 피곤한 가운데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잠자는 제자들에게 와서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외치는 말씀이『일어나라, 함께 가자.』자는 제자들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람들의 영혼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병이 든 것도 아닙니다. 다만 자고 있습니다. 자는 사람들은 자기의 주위에, 자기의 환경에 어떠한 변동이 일어나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는 사람들은 자기의 의무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환경도 모르고 자기의 의무도 모르고, 죽지도 않고, 병도 안 들었지만, 자는 심령이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심령을 향해서 예수 님께서 부르짖습니다.『자는 자여, 일어나라.』오늘날 우리 가운데 그 영혼이 아주 죽지는 아니했지만, 혹은 그 영혼이 어떠한 병도 없지만, 단순히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헤아릴 줄 모르고 자기의 의무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자는 가운데 혼수 상태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영혼이 있습니까? 오늘 아침, 주님의 이 음성을 듣고 일어나는 심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시온을 향해서 외치는 말씀은 이 말씀입니다.『빛을 발하라, 일어나라.』고 하는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달은 본래 발광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태양의 빛을 받아서 그 빛을 반사합니다. 우리도 사실 우리 자신에는 빛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서 우리도 빛을 반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도 빛을 발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빛이니…」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빛이 있습니다. 내게는 본래 빛이 없으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빛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진리의 빛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곧 영적 지식의 빛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공부를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 보기에는 무식한 사람 같을지라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영적 지식의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크게 공부는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우주의 근본 뜻을 깨닫고 삽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인생의 깊은 뜻을 파악하고 삽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내세의 빛을 엿보고 삽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크게 다른 공부가 없다고 할지라도 이 우주에 살아 계신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신 것을 압니다. 그 아버지는 사람의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구주임을 압니다. 또한 우리는 성신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감화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성신의 능력을 또한 압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이렇게 속죄의 진리의 빛을 받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이 진리의 빛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이 진리의 빛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의 빛을 받았습니다. 참 생명은 어떤 것이냐? 참 생명은 어떻게 표현되느냐? 인생의 참으로 갈 길이 어떤 길이냐? 도덕의 참된 빛을 우리는 역시 받은 것입니다. 이것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보여 주시는 참된 생명을 통해서 참 인생의 길이라고, 진신의 길, 순결의 길, 봉사의 생의 길, 다시 말하면 사랑의 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 믿는 사람은 다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 뿐 아니라 생명의 빛을 받은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믿는 사람들만 특별히 생명의 빛을 받았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절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타락하고 또 썩은 자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에게 나오면 중생해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역경을 당하고 아무리 여러 가지 환난과 재난이 우리 앞에 올지라도 하나님과 같이 할 때에 이 모든 것도 변화해서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아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육신이 다 늙어져서 우리의 육신이 땅 속에 묻힐 때에도 영원한 소망의 빛이 우리 머리 위에 떠올라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진리의 빛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는, 썩어지지 아니하는 생명의 빛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여기, 둘째 절에 기록한 바와 같이 이 세상은 어두움에 덮였습니다. 캄캄함이 온 골짜기를 덮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시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형편을 살펴보세요. 무엇보다도 진리의 빛이 없으니까 무지의 암흑한 구름이 그들을 덮고 있습니다. 물론 과학적 지식이 있지요. 여러 가지 철학적으로 사상하는 지식도 많이 있지요. 그렇지마는 이와 같은 많은 지식으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은 사람은 참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참 하나님을 찾지 못한 그 결과는 조물주를 숭배하는 것보다도 피조물을 숭배합니다. 나무를 숭배합니다. 돌을 숭배합니다. 물질을 숭배합니다. 사람을 숭배합니다. 뱀을 하나님으로 숭배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사람의 심령을 덮은 어두운 구름을 헤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무지의 캄캄한 구름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욱 암흑한 죄의 구름으로 화하고 맙니다. 사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를 때에, 창조주보다도 피조물인 것을 인간 생활의 절대의 대상으로 알고, 그것을 숭배하고 그것을 탐구할 때에도 그 가운데는 여러 가지 다른 죄악이 나타납니다. 욕심과 탐심으로 모든 싸움이 일어납니다. 음란과, 방탕과, 살인과, 강도와, 자살과, 온갖 죄악의 어두운 구름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심령을 덮고 말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사람에게도 결국은 소망은 없습니다. 슬픔과 절망의 구름이 그들의 심령을 덮고 있습니다. 역경을 당할 때에 역경을 돌파할 힘이 없습니다. 타락한 사람들이 소생할 길은 찾지 못합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악한 사람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집니다.
절망의 암흑한 구름이 온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상에서 진리의 빛을 받은 사람들, 생명의 빛을 받은 사람들, 소망의 빛을 받은 사람들을 향해서『너희는 그들에게 빛을 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빛을 발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등불과 같이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방 안에 켜놓은 작은 등불은 그 빛이 그렇게 밝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방안은 환하게 밝게 비칩니다. 우리의 빛이 그렇게 크지 못해서 밖에까지는 나가지 못하지만 내 방 안에서, 내 가족에게 참 빛을 비칠 수 있고, 내 친척에게 그 빛을 비칠 수 있고, 내 이웃에게 이 진리의 빛과 생명의 빛과 소망의 빛을 비칠 수 있으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과 같이 천사같이 말 목하고 바울 같이 못하나 내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물론 부족합니다. 등대와 같이 빛을 비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바다 옆에 있는 산 위에 세워진 높은 등대에서는 빛을 멀리 투사(投射)합니다. 그래서 캄캄한 밤 노한 물결에 갈 길을 잃은 여러 배들에게 갈 길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이와 같은 등대와 같이 불을 비취는 것이 또한 귀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가 노방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문서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방송전도를 해야겠습니다. 전도 인도 사방에 파송해서 전도도 해야 되겠습니다.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기로 해야 되겠습니다. 등대와 같이 우리가 빛을 비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 보다도 더 귀한 것은 무지개와 같이 빛을 비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여름 하늘에 캄캄한 구름 위에 나타나는 무지개야말로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신비스럽고 얼마나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무지개가 무지개 되는 원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별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구름 사이에 있는 작은 물방울, 그 작은 결정체가 햇빛을 받아서 빛을 분석해 줍니다. 분석해서 혹은 청색, 혹은 녹색, 혹은 적색 여러 가지 다른 빛깔로 분석해서 우리에게 찬란한 광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가 과연 내 심령이 온전히 신앙의 결정체라고 한다면 내 심령 위에 그리스도의 빛이 미칠 때에 그리스도의 빛을 분석해서 반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은 곧 성신의 빛입니다. 성신의 빛이 어떻게 분석되어서 반사하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과연 내 몸이 온전한 신앙의 결정체라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빛을 내 신앙이 분석해서 혹은 사람으로 나타나고, 혹은 희락으로 나타나고, 혹은 화평으로 나타나고, 혹은 인내로 나타나고, 혹은 자비로 나타나고, 혹은 양선, 혹은 충성, 혹은 온유, 혹은 절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전 생활이 신앙의 결정체가 되다고 하면 그리스도의 빛이 내 몸에 비칠 때에 반드시 이와 같은 분석으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기는 여기 앉으신 여러분 하나 하나가 신앙의 결정체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서 무지개와 같이 찬란히 반사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 걸은 더 나아가서 별과 같이 빛을 비쳐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별은 멀리 있습니다. 먼 밤하늘에 은은히 비치는 별 빛은 그 자체가 얼마나 신비하고, 얼마나 숭고하고, 얼마나 감화력이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별은 우리에게 말을 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언의 큰 감화를 우리 인간의 심령에게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신앙을 기초로 한 인격이 높고 또 높고 우리의 신앙을 기초로 한 생활이 깨끗하고 더 깨끗해져서 하늘의 별과 같이 우리의 인격을 통하여, 우리의 생활을 통하여 무언의 설교를 할 수가 있고 무언의 전도를 할 수가 있으면 이에서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전에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오래 하나님과 대면하다가 내려올 때에 그 얼굴이 빛이 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감히 그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는 출애굽기의 기사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과 통행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서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생활이 그만큼 고상한 자리에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빛을 사방으로 비칠 수가 있으면, 이에서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죽은 영혼도 일어나십시다. 병든 영혼도 일어나십시다. 잠자는 심령도 일어나십시다. 그래서 들불이 되고, 등대가 되고. 무지개가 되고, 밤하늘의 별이 되어서 이 캄캄한 세상을 빛으로 화하는 축복이 여기 앉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一九五九년 九월 二十일)
Ⅲ-27 주를 따르라 (요한 복음 二十一장 十五-二十三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二十一·二十二)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디베랴바다 근처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요한 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물어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사실을 기억할 때에 다른 말을 물어보았으면 어려웠겠지마는 아무리 실수한 베드로도 자기 중심을 더듬어 볼 때에 예수를 사랑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주여 제가 주를 사랑합니다. 주께서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십니다.』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세 번 묻고 세 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베드로가 젊었을 때에는 임의로 그가 자기 띠를 띠고 그가 가고싶은 곳을 갔지마는, 베드로가 나이 많아서 늙어질 때에는 이미 그가 자기 띠를 띨 수 없고, 사람들이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겠다고, 다시 말하면 마지막에 순교로써 믿음을 증거 할 사실을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면서 시몬 베드로에게 주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그 옆에 있는 요한 을 보면서 그에 대한 장래는 어떻게 될까 하는 호기심 가운데서 묻기를『주여 이 제자는 어떻게 될 것입니까?』그 때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그는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세상에 혹 남겨둔다고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 잇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다른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을 상관할 것 없이 주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주를 따르라고 하는 말씀을 이번 처음 들은 말씀은 아닙니다. 약 삼 년 전 역시 갈릴리 바다에서 동생 안드레와 같이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을 때에 예수 님께서 바닷가에 나타나셔서『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시몬과 안드레가 배와 그물을 그냥 자리에 버려 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것입니다.
그 후에도 따르라고 하는 말씀을 들은 기억이 있을 줄 생각합니다. 그것은 가이사라 빌립보 지경에서 베드로가 과연 예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오 그리스도라고 한 고백을 한 후에 장차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하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을 미리 말씀하시면서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밖에도 종종 따르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령 요한 복음 八장 十二절에 보면『나는 세상의 빛이니「나를 따르는 자는」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 복음 十장 二十七절에『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주의 양은 자기를 따른다고 말씀했습니다. 요한 복음 十二장 二十六절에 보면『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주를 따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 님께서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가장 자주 하신 말씀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주를 따르는 생활」입니다.「나를 따르라」고 하는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할 때에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어떠한 지도자시며 어떠한 구주이신가 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선생과 같이 이런 길은 옳은 길이고 저런 길은 그른 길이니까, 그른 길을 버리고 저 길이 옳으니 옳은 길을 가라고, 단순히 옳은 길을 가르치는 선생만은 아닙니다. 자기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제자들에게 선악을 분간해서 지시하는 교사만은 아닙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앉아서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고 먼저 앞서 가면서, 주가 먼저 이 길을 가면서 이 길이 옳은 길이므로 주가 이 길을 가니 우리들에게 주를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그리스도는 보통 지도자가 아니라, 선구자요, 개척자요, 실제적 지도자인 것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친히 오셨습니다. 오시되 마구간에서 나셨습니다. 한 살이 되자마자 멀리 애굽까지 갈 수밖에 없는 피난 생활의 쓴맛을 부모와 같이 당하신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나사렛 목수의 가정에서 자라나면서 이마에 땀을 흘림U 수고하고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수고와 빈궁의 괴로움과 육체 노동의 모든 어려움도 친히 당하신 분입니다. 자기가 많은 사람과 같이 친히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 가서 四十일 주야를 금식하면서, 그 굶주림의 괴로움과 악한 마귀의 모든 시험을 친히 당하시고 그 시험을 승리하신 것입니다. 친히 사방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주린 자를 먹여주시고, 슬픈 자를 위로하여 주신 것입니다. 자기를 중상하고 자기에게 대하여 모략하고 여러 가지로 시험하고 갖은 괴로움을 준 바리새인, 사두개인, 헤롯당의 모든 괴로움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면서 친히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친히 골고다의 언덕길을 올라가셨습니다. 마지막에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친히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고 사망의 고통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장사한 바 되어서 음부에 들어갔습니다. 마지막에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 부활하셨습니다. 승천까지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영원히 살아 계시면서 내가 인생의 모든 길, 쓴 길, 단 길, 모든 길은『내가 친히 걸어가고 내가 친히 체험 했은즉, 이제는 너희들은 나를 따라오너라.』예수께서 외치는 것입니다. 자기가 친히 가보신 길을, 자기가 친히 승리하신 길을, 자기가 걸으신 길을 앞서 가시면서 오늘날 모든 믿는 사람을 향해서『너희들은 나를 따라오너라. 이것이 진리의 길이오, 이것이 선의 길이오, 이것이 승리의 길이오, 이것이 영원의 길이다.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따라온다고 하는 말, 따라간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처음에 시몬과 안드레가 주를 따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를 때에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배를 버렸습니다. 고기 잡던 그물을 다 버렸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떠나서 예수를 따라가기를 시작했습니다. 따라가려고 하면 먼저 있던 곳을 떠나야 됩니다.
엘리사가 소 열두 겨리로 밭을 갈다가 엘리야의 부음을 받고 소를 모두 내어버리고, 소 한 겨리는 잡아서 연장을 불사라서 고기를 삶아서 다른 백성들에게 나누어 먹이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따라갔습니다. 따라가려고 하면 있던 곳을 먼저 떠나야됩니다.
전에 룻이라고 하는 젊은 여자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갈 때에 모압 땅을 떠났습니다. 기독교가 전도자의 부름을 듣고 천성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 장망성을 떠났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도를 따를 때에 애굽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에 갈대아 우르와 하란과 친척과 고향과 친지가 있는 곳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려고 하면 내가 본래 있던 그곳을 떠나는 것이 첫 걸음이올시다. 다시 말하면 죄악의 자리에서 떠나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첫 걸음이올시다.
죄악의 사상, 죄악의 언행, 죄악의 생활, 죄악의 습관, 죄악의 친구, 죄악의 직업(직업이 악하면) 죄악의 오락에서 먼저 떠나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죄악의 자리에 그냥 앉아서 예수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이것을 성별(聖別)이라고 합니다. 거룩하니 구별되어야 될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첫 걸음은 있던 자리를 떠나야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따른다고 하는 말은 동행을 의미합니다. 같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거를 의미합니다. 동거동락(同居同樂)을 의미합니다. 함께 고통을 받고, 함께 즐거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께서 갈 때에 같이 가고, 설 때에 같이 서며, 산을 넘으면 같이 넘고, 물을 건너면 같이 물을 건너는 것을 의미합니다.
룻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했거니와 나오미가 모압 땅을 떠나서 자기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기 시작할 때에 며느리 둘이 따라갔습니다. 하나는 오르바요 하나는 룻입니다. 다 나오미를 따랐지마는 나오미가 강권해서 돌아가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오르바라고 하는 며느리는 돌아서서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 말을 종내 듣지 않고 나오미에게 말했습니다. 여기 성경에 있는 그대로 읽을 터인데 여러분 들어보세요.『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는 곳이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입니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이것이 진정으로 따른 자의 심정입니다. 진정으로 따르는 자의 마음의 태도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를 때에도 이렇게 따랐습니다. 엘리야가 길갈에 가니 길갈에 좇아갔습니다. 벧엘에 가니 벧엘에 좇아갔습니다. 이제는 집으로 가라고 아무리 강권하지마는 그냥 따라갔습니다. 여리고로 가니 여리고로 따라옵니다. 요단을 건너니 요단을 따라옵니다. 그냥 따라옵니다. 강이 있어도 강을 건너서 그냥 따라옵니다. 그 결과는 엘리야가 승천할 때에 내어버린 엘리야의 겉옷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따르는 자의 태도입니다.
예수 님 제자들도 이렇게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 님이 가버나옴에 갈 때에 가버나옴에 갔습니다. 나사렛에 갈 때에 나사렛에 갔습니다. 여리고에 갈 때에 여리고에 갔습니다. 예루살렘에 갈 때에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가실 때에 겟세마네 동산에 갔습니다. 골고다에도 멀리 따라갔습니다. 이것이 진전으로 따르는 생활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은 어떠한 생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하지 아니하시는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 끝날 때까지 주가 우리와 같이 하겠다고 말씀했습니다.『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는 내 안에 있으라, 내가 너희 안에 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생활은 예수와 같이 우리의 심령이 항상 같이 동거하는 동거동락(同居同樂) 하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집에 있을 때에도 주님과 같이 있고, 거리에 나갈 때에도 주님과 같이 길을 걷고, 사업을 할 때에도 주님과 같이 하고, 음식을 먹을 때에도 주님과 같이 음식을 먹고, 친구와 놀 때에도 주님과 같이 놀고, 저녁에 잘 때에도 주님과 같이 영적으로 동행하는 그 생활이 예수를 따르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따른다고 하는 것은 학습을 의미합니다. 배우고 본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르려고 나오미의 믿음을 배웠습니다. 나오미의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나오미의 일을 배웠습니다. 그저 따른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면서 엘리야의 믿음을 배웠습니다. 엘리야의 열심을 배웠습니다. 엘리야의 참된 헌신을 배웠습니다. 그냥 따른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면서 엘리야를 배웠습니다.
제자들도 주임을 따르면서 그저 따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배웠습니다. 예수의 사상을 배웠습니다. 예수의 성품을 배웠습니다. 예수의 생활을 배웠습니다. 모든 옳은 진리를 배웠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시나 또한 강하시고 담대하신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을 듣던 요한 이 사랑의 사도로서 변한 것을 우리는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하시고 깨끗하시고 봉사의 희생의 생활을 배웠습니다.
오순절 후에 제사장들이 요한 과 베드로를 데려다가 책망하면서 예수를 다시 전하지 말라고 위협할 때에 베드로 요한 이 담대히 하는 말이『우리가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어떠한 도리가 없으니까 책망하고 내어 보내면서 자기네끼리 하는 말이『아, 이 사람들이 본래 불학 무식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어디서 이런 지혜와 이런 담대한 것을 배웠느냐.』그들은 그후에 과연 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감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크게 놀랐다고 하는 사도행전의 기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예수를 배우게 됩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꽃은 점점 아름다워집니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또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넷째로 동역(同役)을 의미합니다. 같이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함께 행하면 함께 일합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만 다닌 것이 아닙니다. 나오미와 같이 일했습니다. 같이 밥도 짓고, 바느질도 하고, 이삭도 줍고 일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그냥 따라다니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일할 때에 같이 일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를 본받아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도 하고, 예수 님과 같이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 님의 하신 일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간단히 생각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전도의 사업입니다.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둘째는 교육 사업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항상 가르쳤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깊은 종교의 진리와 도덕의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로 가르쳤습니다. 셋째는 봉사의 사업입니다.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가난한 자를 도와주시고, 모든 불쌍한 사람들을 붙들어 주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 사업은 오늘날도 주님께서 살아 계셔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하여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지금도 교육 사업을 하십니다. 지금도 봉사 사업을 해서 여러 가지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십니다.
여러분,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은 예수와 같이 일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따라간다고 말만 하면서 전도하지 아니하고, 가르치지 아니하고, 주일 학교도 돕지 아니하고, 기독교 교육 사업도 돕지 아니합니다. 예수를 따라 간다 하면서도 불쌍한 사람 도와주지 아니하고, 의료 사업이나, 고아 사업이나, 양로 사업이나, 모자원 사업이나, 피난민을 구조하는 것이나, 이런데 실지로 협력하지 아니합니다. 그냥 있는 사람이면 말만 따라가는 것이지 실상은 따라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라 간다고 하는 말은 예수와 같이 일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특별히 가을을 당해서 주일학교에서도 배가 운동을 하는 중입니다. 남녀 전도 회와 면려회(勉勵會)에서도 배가 운동을 하는 중입니다. 이런 모든 일에 함께 손을 잡고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이 실상 예수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를 따라 간다고 하는 것은 이 네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있던 죄악의 곳을 떠나는 것을 의미하고, 둘째는 행동하면서 동거동락 하는 것을 의미하고,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배우는 것을 의미하고, 넷째는 그리스도와 같이 사업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아침에 깊이 스스로 반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과연 예수를 따르는가? 겉으로만 예수를 따르고 속마음으로는 세상을 따르는가? 따르는 것에 조심하세요. 二十여 년 전에 독일에는 히틀러가 나타나고, 이탈리아에는 무솔리니가 나타나서 눈을 부릅뜨고 호령을 하니까 여기에 영웅이 나타났고,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나타나서 눈을 부릅뜨고 호령을 하니까 여기에 영웅이 나타났다, 여기에 호걸이 났다. 여기에 지도자가 났다고 합니다. 많은 독일 사람이 히틀러를 따라 가고, 이탈리아 사람이 무솔리니를 따라가더니 마지막에 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칼 마르크스를 따라가며, 스탈린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래지 아니해서 망할 것입니다. 누구를 따릅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가 누구입니까? 누구를 따르렵니까?
『너는 나를 따르라.』여기에서「너는」하는 말을 분명히 들으세요. 예수 님께서 여러분 하나 하나에게 하시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따르기는 따르겠는데, 내 친구는 어떻게 되겠는가, 나의 그 '아무개는 어떻게 되겠느냐'며 다른 사람을 걱정합니다.『다른 사람은 이렇게 안 하는데…』남 생각할 것 없습니다.『너는 나를 따르라.』
여러분, 자신이 예수 님을 따릅니까? 여러분, 찬으로 예수 님을 따르려면 끝까지 따르세요. 겟세마네까지, 골고다까지, 부활의 아침까지, 아니 심판대까지, 하늘 나라에까지, 끝까지 따릅시다. 할 수 있는 대로 일찍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어려서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 특별히 청소년들, 아직까지 따르기 시작하지 아니했으면 오늘 아침 이 신간부터 따르세요.
두 주일 후에 성례 주일로서 학습을 세우고 세례를 베풀겠습니다. 학습을 서고 세례를 베푸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너는 나를 따르라.』기도하십시다. (一九五九년 十월 四일)
Ⅲ-28 진리와 자유 (요한 복음 八장 三十一-四十四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요 八·三十二)
『그런고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하게 하면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八·三十六)
이 성경 구절을 보면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가장 위대한 말 중에 두 말이 적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자유라고 하는 말이고 또 하나는 진리라고 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진리를 탐구합니다. 인간은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마는 이 두 말처럼 남용(濫用)되고 오용(誤用)되고 그릇되게 사용된 말이 별로 없는 줄 생각합니다. 진리 아닌 진리의 미명(美名)아래서 무고한 사람을 전죄하고 핍박한 예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유 아닌 자유의 미명 아래에서 온갖 불의와 불법이 감행된 실례가 인간 역사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또한 그 반면에 인간의 가장 고귀한 노력과 희생이 이 두 말들 아래에서 바쳐진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당한 영혼들이 많습니까? 고귀한 자유를 위해서, 자유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귀한 청년들이 피를 흘리며 이 땅에 쓰러졌습니까? 여기에 이 두 말, 자유와 진리, 이 두 가지 말이 같이 적히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 줄 생각합니다. 참된 진리는 참된 자유를 가져옵니다. 참된 자유는 오직 진리에서만 오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진리는 무엇입니까? 진리라고 하는 말을 흔히 쓰지마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정의하려고 한다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문 글자로 말하면 참된 이치, 혹은 참된 원리라고 설명(說明)할 수 있습니다. 그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헬라 말을 그대로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진리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알아듣기 쉽게「참」이라고「참된 것」이라고 번역할 수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럼「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우리가 대조해서 생각하면 뜻이 더 분명할 줄 압니다. 가령 참이라고 하는 것은 그림자와 대조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산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림자는 산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림자가 산은 아닙니다. 산은 실체(實體)요 그림자는 반영뿐입니다. 여기 사람이 있으면 사람과 비슷한 사진이 있습니다. 그 사진은 사람의 모습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사진이 사람은 아닙니다. 사람이 실체인 참이요, 사진은 그 반영된 그림자뿐입니다. 참은 실체를 항상 의미합니다. 또한 그 다음에 참은 거짓과 정 반대되는 것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누렇다고 다 금이 아닙니다. 가금(假金)과 정금(正金)이 있습니다. 번들번들 한다고 다 비단이 아닙니다. 진견(眞絹)과 인조견(人造絹)이 있습니다. 참은 모든 허위, 가면, 가짜, 외식의 정 반대되는 진실을 의미합니다. 이리가 양의 가죽을 쓴다고 양이 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리는 이리요 양은 양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진리의 세계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살펴보면, 세 가지가 섞이어 돌아갑니다. 여기 참이 있습니다. 그것과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과 정 반대나 참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지마는 참 말이 있고, 비슷하나 참 말이 미처 아닌 외 곡된 말이 있고, 아주 참 말처럼 하지마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종교계에도 참된 종교가 있습니다. 그림자와 같이 참된 종교와 비슷해서 일시적으로 있지마는 참 종교가 나타날 때에 없어질 것밖에 없는 그림자와 같은 종교가 있습니다. 아주 거짓된 허위의 종교 사상과 종교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학이나 예술이나 과학이나 사상이나 각 부면(部面)에서 이 세 가지 섞이어 돌아가는 것을 우리가 바로 분간해서 참 말을 믿고, 참 말을 의지하고, 참 말대로 행할 때에, 우리 인간에게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무지, 온갖 미신, 오해, 기만, 허위, 이런 모든 것 가운데서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각 방면의 진리밖에는 없습니다.
여기 예수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너희가 내 교훈에 항상 있을 것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 하게 하리라.』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이 진리는 어떤 방면의 진리를 가르친 것이냐?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이 진리는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우주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존 칼빈(John Calvin, 1509-64, 제네바의 종교 개혁가)선생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기독교 강요」의 첫 페이지 첫 구절에 보면, 우리 인간이 마땅히 배워야 할, 알아야 할 지식이 허다하지마는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 밖에 없는데,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요, 또 하나는 사람에 대한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진리를 알고, 인간에 대하여 그 깊은 진리를 알진댄 그 밖에 모든 문제는 다 여기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하여 꼭 우리가 알아야 할 진리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동양사람들은 옛날도 그렇고,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마는 하나님을 상제(上帝)라고 많이 생각해 왔습니다. 사실 아직도 적당한 말이 별로 없어서 여기 중국사람들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을 상제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뜻은 위에 계신 임금이라는 것입니다. 그 위에 계신 임금이라 하는 말은 물론 하나님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전체를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한 그림자아 같은 하나님에 대한 사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하나님은 이 우주의 이성(理性)이라 이런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거기도 일면이 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하나님은 이 우주 안에 있는 대양심(大良心)이라는 말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 일면을 보여줍니다. 그림자와 같습니다. 온전히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씀으로 가르쳤지마는 특별히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두 가지 말씀입니다. 첫째는『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리로 그를 예배할 것이라.』둘째는『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시라.』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아버지라고 하는 뜻은 인격적 신을 의미합니다. 우리 사람과 같이 생각을 하시고, 느낄 수 있고, 의지가 계시고, 무엇을 결정하시는 인격적 신을 가리킨 것입니다. 또 아버지라고 하는 말
씀은 하나님은 곧 사랑이라고 하는 뜻을 가리킵니다. 이 인격적인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이 우주와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이시라고 예수 님께서 이와 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많은 미신, 나무를 숭배하고, 돌을 숭배하고, 뱀을 숭배하고, 사람을 숭배하고, 온갖 우상을 숭배하는 미신의 구속에서 자유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서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이 진리를 인간이 알 수 없는 우주에 나서 사는 동안에 항상 마음 가운데 있는 여러 가지 공포심, 두려운 마음, 이 공포 가운데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님께서 우리 사람에 대해서 분명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인내천(人乃天)이라고 하는 사상이 있습니다. 그 뜻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는 그런 뜻인 줄 생각합니다. 이것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다 있는 범신론적 사상입니다. 사람이 곧 신이라 혹 신의 일부분이라 신과 같다는 이 사상의 근본적 문제는 죄악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이 아닌 것을 분명히 압니다. 일본 천황이 신이라 하는 이름을 가지고 오래 자기 국민을 속여왔지마는 맥아더에게 항복한 다음에는 자신은 신이 아니라고 그렇게 다시 조서를 내렸습니다. 그 말이 옳습니다. 사람은 신이 아닙니다.
반면에 사람들 가운데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사람은 별 것이 아니고, 하는 모양을 보면 사람은 그저 짐승이라. 조금 진화된 원숭이야, 조금 진화된 동물이야, 사람과 다른 하등 동물과의 차이는 사람은 좀 더 복잡한 동물이오, 아메바 같은 것 단세포 동물이야.』라고 이렇게 사람을 한 짐승으로 보는 이런 사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에 대하여 분명히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니라 라고 그 뜻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서 사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우주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떠난 탕자로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먼 죄악의 세상에서 살므로 그 행동이 짐승의 행동과 같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타락된 까닭입니다. 그 탕자라고 돌아만 오면 다시 하나님의 모습으로 회복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일시적으로 있다가 짐승처럼 죽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는 불멸의 영혼이 있어서 영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이 앞으로 무한히 향상될 가능성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님의 교훈이요 인간을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보고 비록 타락은 하였지마는 회복되면 무한히 발전하고 향상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이 사상은 결국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왔습니다.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사상을 가져옵니다. 따라서 정치적 자유가 결국은 그리스도의 인간에 대한 이 진리의 근본적인 기초를 주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는 그렇게 그 입술로써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뿐만 아니고「그리스도」가 곧 진리입니다. 요한 복음 十四장 六절에 보면 예수 님은 곧 진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뜻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는 이렇게 참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을 뿐더러 그리스도 자신이 이 우주에 근본 되시는 하나님이오 하나님의 말씀이오, 그 말씀이 육신을 입어서 진리가 곧 몸을 입어서 진리의 화신으로서 세상에 일하신 이가 곧 그리스도께서 진리로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진리의 화신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친히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얼굴을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활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의 진리를 가르쳐 줄뿐더러 자기 자신이 참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 하나님의 아들은 이렇다 하는 것을 진리로서 참으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참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얼굴을 통해서 참 사람의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성품을 통해서 참으로 변화된 온전한 사람의 성품을 볼 수가 있어요. 주님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인간의 생활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진리의 화신으로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목적이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이 진리로서 인간을 여러 가지 구속 가운데서 해방해서 자유를 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었지마는 죄악에 침노되어서, 여러 가지에 얽매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지적으로 미신과 무지와 죄악에 결박을 당했습니다. 결박당한 인간들을 풀어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진리이신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자유는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자유는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많이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마음대로 거리에 나가 놉니다. 그것까지는 괜찮습니다. 그 결과는 한 두어 시간 후에 보면 집을 잃어버립니다. 학생들이 마음대로 거리에 나가 놀고 싸우고 뛰어 다닙니다. 그렇게 얼마 하다가는 깡패가 되고 맙니다. 청년들이 마음대로 거리에 나가 놉니다.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마시고, 마음대로 허랑 방탕합니다. 자유 없었다고 하는 그 결과는 얼마 가지 못해서 불량자가 되고 맙니다.
물 속에 있는 물고기가,『이거 원, 나는 물 속에만 이렇게 있겠느뇨. 자유를 얻어야지.』하며 물 밖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그 때는 괜찮습니다. 좀 있다가 말라죽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가 자기는 왜 공중에서만 살까, 물고기처럼 물 속에서도 좀 살아봐야지, 하고 물 속으로 뛰어 들어 갔습니다. 그것까지는 괜찮습니다. 숨이 막혀 죽고 말았습니다. 기차가 자기는 왜 요렇게 꼭 궤도 위로만 다니게 될까, 마음대로 자동차처럼 나도 신작로로 다녀보겠다 하며 신작로로 뛰어 나왔습니다. 조금 가다가 전복되었습니다.
이것이 참 자유입니까? 단순히 마음대로만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방종입니다. 어디에 참 자유가 있습니까? 어린아이들은 어머님의 품속에 있을 때만 참 자유가 있습니다. 학생들은 선생의 지도 아래에 있을 때만 참 자유가 있습니다. 청년들은 오직 국가의 법률과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양심의 도덕적 법칙 아래에서 살 때에만 참 자유가 있습니다. 새는 공기 가운데서만, 물고기는 물 속에서만, 기차는 궤도 위에서만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하나님의 법칙대로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성취할 수 있는 최대의 기회를 가질 때에 그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는 최선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최선의 일을 할 수 있는 최대의 이 기회를 가진 사람이 참 자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 기회가 크게 제한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결박의 줄이 인간을 얽매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정치적인 결박입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경제적인 결박의 줄입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사회적인 결박입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종교적인 결박입니다. 어떤 때에는 이것이 지적(知的)인 결박입니다. 여러 가지 구속의 줄이 인간을 얽어매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최선의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이 모든 인간을 결박하는 줄이 많은데 그 가운데서도 제일 굵은 줄은 인간의 속에 있습니다. 이 줄을 죄의 줄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욕의 종이 되었습니다. 음란과 방탕의 자리를 떠날래 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소가 갈고리에 코가 꿰어서 원하지 않지만 도살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처럼 자기가 원하지 않지마는 자기의 영혼과 자기의 육체가 멸망 받을 줄 알면서도 이 저녁거리 서울 구석구석에 어두운 곳을 찾아서, 코가 갈고리에 꿰어서, 정욕의 종이 되어서, 멸망할 곳으로 찾아 들어가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탐심의 종이 되었습니다. 돈의 종이 되었습니다. 탐심의 갈고리에 코가 꿰었습니다. 그래서 돈은 위해서는 거짓말도 하고, 돈을 위해서는 배신도 하고, 돈을 위해서는 도적질도 하고, 돈을 위해서는 사람도 죽입니다. 탐심의 갈고리에 꿰어서 자기는 원하지 아니하지마는 종이 되어서 이런 짓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악한 죄의 습관에 종이 되었습니다. 술에 종이 되었습니다. 아편에 종이 되었습니다. 화투에 종이 되었습니다. 혹은 투전에 종이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악한 죄악의 습관에 종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갈고리에 코가 꿰어서 원하지 않지마는 그저 하자는 대로 습관대로 부득이 따라갑니다. 종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로 결박의 줄로 말미암아서 인간이 하나님이 본래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최선의 일을 하지 못하고, 멸망하고 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와 같은 죄악의 결박의 줄에 얽매인 사람들은 진리로서 풀어놓아 주어서, 하나님이 본래 뜻하신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이 본래 원하시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죄를 사해 주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의 결박을 끓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만 죄악의 갈고리를 꺾을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만 다시 죄악의 갈고리에 꿰이지 않도록 보호할 능력이 있습니다. 진리만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임으로 우리들을 모든 속박에서 자유를 줍니다. 우리가 이 자유를 먼저 얻으면 그 밖에 정치적 자유, 지적 자유, 사회적 자유, 모든 자유는 다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 이 자유를 얻었습니까? 여러분,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여러분입니까? 내가 원하지마는 내 속의 죄악의 세력 때문에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지금도 합니까? 죄에서 자유를 얻었습니까? 질리는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서 그리스도에게 여러분의 심령을 온전히 바치고,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맡기고, 그를 믿고, 그를 의지해서 주님의 능력이 여러분의 심중에 움직일 때, 여러분은 그 줄을 끊어 버릴 수 있습니다.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해방이 될 수 있습니다. 기쁨과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최선의 사람이 되고 최선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 자유입니다. (一九五九년 十월 十一일)
Ⅲ-29 미쁘신 하나님 (고린도 전서 一장 一-九절)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一·九)
여기에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해서 말씀하십니다. 먼저는 너희를 불러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라는 그 사실을 지적했고, 또 그 다음에는 이와 같으신 하나님은 미쁘시다 하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오늘 이 시간, 학습을 선 학생들과 여러 청년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나오게 되고, 교회에 나와서 학습을 서기도 하고, 세례를 받기도 하는 것이, 한편 생각하면 우리 사람이 하는 것이고, 내가 힘쓰는 것이고, 내가 교회에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편 사실만 보는 견해입니다. 사실 우리가 교회에 나오게 되고, 믿음을 얻게 되고, 이와 같이 학습을 서고, 세례를 받는 것을 내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를 부른 이가 계십니다. 우리를 이 죄악의 세상 가운데서 불러서 죄를 회개하게 하고, 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이가 계십니다. 그이는 곧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끌지 아니하면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우리 주를 믿고 사실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으신 하나님은 미쁘시다 라고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미쁘시다」하는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믿을 만하다. 혹은 신실하다, 그러니까 의지 할만 하다. 그저 쉽게 말하면, 신용할 수 있는 이다 하는 그 뜻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미쁘신 하나님입니다.
디모데 후서 二장 十三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一向)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사람은 미쁨이 늘 부족합니다. 우리 사람은 사실 미쁨이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주는 일향 미쁘시니 언제든지 미쁘시니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가 없다고 이와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우리 사람은 사실 내 자신을 꼭 믿기 어렵습니다. 그 까닭은 내 자신이 하루에도 몇 번 변하는지 모릅니다. 내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때에는 분열되기도 합니다.
여기 스티븐슨의 유명한 소설에 나오는 인물처럼, 내 자신 속에는 지킬 박사와 같은 점잖은 이가 있지마는 반면에 아주 고약한 하이드 맨과 같은 사람이 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때에, 어떠한 환경에, 어떠한 자신이 나타날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내 자신을 믿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미쁘십니다. 하나님 자신은 하나 뿐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분열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변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자신이 미쁘십니다. 믿을 만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나 자신을 믿기 어렵지마는 하나님은 우리가 믿을 수 있습니다.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또한 미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뜻은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합니다. 인심은 조석변이라 아침과 저녁으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뜻은 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연 하에 움직일 때에 그것을 자연 법칙이라고 합니다. 자연 법칙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변하지 아니합니다. 이 자연의 법칙은 먼저 별 가운데 운행되는 법칙이나 우리 지구 안에서 운행되는 법칙이나 똑 같이 변하지 아니하는 자연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인간 생활에 움직일 때에 우리는 흔히 그것을 도덕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도덕의 법칙 자체는 변함이 없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의 양심을 움직이던 그 법칙이나 오늘날 우리의 양심을 움직이는 그 법칙이나 같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미쁩니다. 믿을 만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도 또한 미쁩니다. 하나님의 공의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이 제한되어서 공의를 볼 때에 한 편만 보기 쉽습니다. 그래서 같은 법률을 가지고 같은 사건을 공판할 때에도 재판장에 따라서 공판이 달라지는 때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것은 재판장이 부정하게 재판해서 그렇게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에도 공정히 하느라고 하지마는 우리 인간이 보는 그 견해와 우리 인간의 이성은 제한되어서 한 면만 보는 까닭으로 언제든지 꼭 공의롭게 재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체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언제나 변하지 아니하시고 따라서 미쁘십니다. 믿을 만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릇되는 법이 없습니다. 역사적 심판이나, 내세의 심판이나, 그 심판은 온전히 미쁜 심판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미쁘신 사랑입니다.『내가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옛날도 그 사랑, 오늘날도 그 사랑, 백인종에게도 그 사랑, 황인종에게도 그 사랑, 흑인종에게도 그 사랑, 부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변함이 없는 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미쁘십니다. 사람의 사랑은 사랑의 대상에 의해서 항상 변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대상 여하를 불문하고 그저 우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믿을 만한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항상 변해서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원수가 되는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그런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믿을 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미쁘십니다. 믿을 만 합니다. 신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로 우리 인생을 향해서 언약한 말씀이 계십니다. 약조한 말씀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택하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하였습니다. 그이들에게 열 가지 계명을 주시며 그이들에게 율법은 주면서 그들이 이 계명을 지키고 이 율법을 지키면 대대손손이 수천 대까지 이르도록 축복하여 주시겠다고 확실히 언약하셨습니다. 그 언약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언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켰습니다.
우리가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더 크신 계시를 우리에게 주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이제부터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죄를 회개하는 자는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 영혼을 구원해서 금 생과 내생에 영원한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약조가 기록된 성경을 신약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언약의 책입니다.
그 밖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약조한 말씀이 많습니다. 기도할 때에 응답하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영적으로 육 적으로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언약했습니다. 하나님의 이 모든 언약은 미쁘신 언약입니다. 믿을 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생활을 해나갈 때에 결론적으로 분명히 기억하시기를 바라는 것은 나를 믿으면 아니 됩니다. 미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고 우리의 신앙 생활을 하여 나아가야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결심했지마는 그 결심이 몇 날 갈 지 모릅니다. 변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미쁘심을 우리가 의지해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시험을 당하게 하지만 이 기도를 도와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十장 十三절에 보면『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물론 믿어 나갈 때,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을 당합니다. 그때에 나를 믿지 마십시오. 내 결심을 믿지 마십시오. 오직 미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내 결심을 믿지 마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 시험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도 믿어 나아가다 죄를 범하기 쉽고 혹 실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 사하여 주시겠다고 여기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요한 一서 一장 九절에는『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 우 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오.』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사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그대로 사해주십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이는 구해주시겠다고 약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에 의지해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또 데살로니가 후서 三장 三절에는 이런 말씀으로 우리를 격려해 주셨습니다.『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우리 주님은 미쁘셔서 우리의 신앙을 굳게 하시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을 더 튼튼한 토대 위에 놓아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미쁘신 하나님을 의지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五장 二十三-二十四절에는 이런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평강(平康)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여러분을 불러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인 까닭으로 여러분의 몸을 온전히 지켜서 우리 주님의 날까지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미쁘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다. 이 미쁘신 하나님께 우리의 전 생명을 바칩시다. 내 지혜를 의지하지 마십시오, 내 의지를 의지하지 마십시오. 내 지식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오직 미쁘신, 전능하신, 사랑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세요. 또 이와 같이 미쁘신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도 미쁘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학습 설 때에 하나님과 약조했습니다. 그 약조를 하나님은 꼭 지키실 터이요. 여러분도 꼭 지키십시오. 또 이와 같이 미쁜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미쁘게 살아야 됩니다.
아프리카에 제일 먼저 가서 일생토록 그 암흑 대륙을 탐험하며 처음으로 흑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23-1873)혼자 백인으로 흑인 사이에 가서 개척 전도를 할 때에 종종 위험한 일을 얼마나 만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위험한 일을 만날 때마다, 언제든지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또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같이 있으리라.』리빙스턴은 이 성경 구절을 기억할 때에『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보다도 가장 미쁘신 주시야, 그리스도께서 거짓말 할 수 없어, 그리스도는 참 말만 하시는 이야, 누구의 말보다도 그리스도의 말은 믿을 수 있는 말이야,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 때까지 나와 같이 있으시겠다고 약조하였으니까.』하고 같이 계시는 것을 꼭 믿었습니다. 그 믿음 가지고 미쁘신 주님을 의지하고 어떤 위험한 일을 당하든지, 어떤 급한 일을 당하든지,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주를 의지하고 담대히 일한 것입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이 미쁘신 하나님을 튼튼히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一九五九년 十월 十八일)
Ⅲ-30 신앙과 행위 (야고보서 二장 十四-二十六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二·二十六)
지난주일「신앙의 정로(正路)」라고 하는 문제로 우리가 신앙 생활을 바르게 하려면 신앙의 바른 노선을 찾아야 된다고 하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그 말이 다 사실이지마는 오늘 아침 계속해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신앙의 노선을 찾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행함이 따르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또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우리에게 경고를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얼핏 들으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가르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과 오직 믿음으로만 외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그 진리와 모순되는 듯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신학적 견지에서, 이 세상에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행위 곧 자기의 있는 의(義)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唯一)의 길은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고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믿음으로 받아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진리를 확실히 가르친 것이며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에 대해서 절대로 반대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 진리가 꼭 사실입니다. 그런데 실제 견지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 이 믿음은 참 믿음이어야 되겠고, 이 믿음은 산 믿음이어야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참 믿음은 무엇으로 알 수 잇느냐? 반드시 행함이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머리로써 믿을뿐더러 입으로써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실지로 행위에 나타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져야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그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권면은 옛날도 필요해서 이와 같이 야고보 장로가 말씀하신 줄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권면은 언제나 필요하고 오늘날도 우리에게도 또한 필요한 줄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은 믿음과 행위, 이 문제를 가지고 성신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잠깐 생각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행위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진리는 뿌리요 행위는 열매입니다. 참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나타납니다. 나무가 있으면 반드시 열매가 열립니다. 나무와 열매는 나누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정치 六대 원리(政治六大原理)가운데 진리와 행위에 대한 원리가 그 원리입니다. 나무와 열매는 나누일 수 없습니다. 진리와 행위는 나눌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외치기를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참 믿음과 회개가 있습니까? 그러면 반드시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삭개오가 과연 예수를 믿고 회개하였습니까? 무엇을 보고 압니까?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토색(討索) 하였던 것을 네 배나 도로 갚아 주었습니다. 있는 것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에, 어떤 청년이 예수를 믿고 회개한 후, 몇 해 전에 가져갔던 자기가 가져서는 안 될 재봉틀을 돌려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믿음이 있습니까? 반드시 열매도 따를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참 믿음으로 인정합니까? 어째서 인정합니까? 행위도 따랐습니다. 고향과 친척을 다 이별하고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보이시는 나라로 가라고 할 때에, 순복해서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간 곳마다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모리야산에서 자기의 독생자까지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렸습니다. 마음으로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기생 나합이 과연 믿음을 가진 것으로 인정합니까? 왜 인정합니까?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정탐 군들을 잘 숨겨주고 피할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반드시 행위가 따를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로 믿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로 믿을진대, 우리가 과연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분명히 알진대, 이와 같은 믿음이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성품과 우리의 생활에 반드시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선 온유와 겸손과 사랑의 생활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님의 인격과 예수 님의 성품과 예수 님의 생활의 특징이올시다. 그런데 그렇지 아니하고 그와 반대로 믿기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을수록 마음은 더 교만해지고, 욕심은 더 많아지고, 돈을 더 사랑만 하게 된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그 믿음이 우리 생활에 있어서 성결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이와 같은 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이 불결하고 깨끗하지 아니한, 죄를 죄인 줄 알면서도 끊어버리지 아니하고 그냥 계속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참 믿음입니까? 믿음은 열매로 나타납니다.
예수는 진리이십니다. 예수에게 허위가 없습니다. 우리가 과연 이와 같은 주를 내 주로 섬기면 아무래도 우리 생활과 우리의 성격 가운데도 이 진실이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거짓 증거를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성경이 그르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믿기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 그냥 거짓말을 반복하면서 허위를 선전하고 모략을 하고, 죄 없는 사람을 중상하면, 이것이 믿음입니까? 믿음은 반드시 행위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대체로 우리 그리스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생활에 있어서 양심적인 생활로 반드시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사업을 할 때에든지, 금전거래를 할 때에든지, 사교적 생활을 할 때에든지 모든 방면에 다른 사람보다 양심적인 방면으로 반드시 우리의 생활이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믿기는 믿는다고 입으로 말하지만, 오래 믿었다고 하며 햇수도 길었다고 하면서, 비양심적인 태도와 비양심적인 생활을 그냥 계속해 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까? 행위는 믿음의 필수적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분명히 마음 가운데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둘째로, 행위는 믿음의 시금석입니다. 그것은 첫 대지에 따르는 진리입니다. 행위가 믿음의 열매인 까닭으로 우리는 그 반대로 행위를 보아서 믿음을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행위는 결국 믿음의 진가를 판단하는 표준이 됩니다. 참 믿음이냐? 거짓 믿음이냐? 바른 믿음이냐? 그릇된 믿음이냐? 결국은 무엇으로 판단하겠느냐? 예수 님의 말씀과 같이 나무는 열매를 보아서 알게 됩니다. 열매인 행위를 보아서 우리가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산상보훈을 여러분은 아십니다.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행위를 보고 열매를 보아서 판단하라고 몇 번이나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경고를 했습니다. 나무는 종류를 따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가 사과면 그 나무는 사과나무요, 열매가 배면 그 나무는 배나무요, 은행이 열리면 그 나무는 은행나무입니다.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압니다. 마찬가지로 행위를 보아서 믿음을 판단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줄 생각합니다.
혹 어떤 이가 말하기를 아무개는 신앙은 정통인데 행위는 이단이더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전연 모순되는 말입니다. 신앙이 사실 정통이면, 참 신앙이면, 그 행위도 정통입니다. 사실 그 행위가, 이단적이요 비 기독교적이면, 신앙도 옳은 신앙은 못 될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입으로만 떠들고 사실은 믿지 아니하던가, 그릇 믿던가, 혹은 시험에 들어서 병든 믿음일 것입니다.
여러분, 야고보에 있는 말씀을 지금 다 들었습니다. 야고보 장로가 여기 분명히 그와 같은 열매 없는 믿음은, 말로만 하는 믿음은, 일용할 양식 없는 이에게 평안히 가서 잘 먹고 잘 있으라고 말하듯 말만 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송장과 같은 믿음이올시다. 썩어진 믿음이란 말입니다. 백합화가 매우 아름답습니다. 가러나 백합화가 썩어지면 냄새는 제일 고약하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렇게 귀한 신앙이라고 죽게 되면 냄새가 날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그보다 더 격렬한 말씀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十九절 읽는 것을 다 들으셨을 줄 압니다.『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말만하고 행위가 없는 믿음은 귀신의 마음이란 말입니다. 귀신이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봅니다. 우리보다 더 잘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은 순종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습니다. 영광을 돌리지 않고 예배하지 아니합니다. 말만하고 실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 귀신이 가진, 마귀가 가진 믿음과 같다고 우리에게 경고해 준 두려운 말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바른 신앙의 노선을 찾아서 바르게 믿는다고 하지마는『서자서 아자아』(書自書 我自我)격으로 행함이 없으면 아무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복음과 우리의 복음 적 믿음을 위해서는 어떠한 행위를 해도 관계하지 않다 든 가, 또는 우리가 어떤 진리를 위하여서는 어떠한 비 신앙적 행동을 감행하여도 관계하지 않다고 하는 사상처럼 비 성서적이요, 위험한 사상이 우리 신앙 생활에 없는 것입니다. 행위를 보아서 믿음을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신앙을 가진 이는 자연히 마지막에는 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히 위선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이런 이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훼방을 받고 전도의 문이 막히고 믿음이 어린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 때문에 걸려서 넘어집니다. 행위는 믿음의 시금석(試金石)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분명히 깨닫고 내 행위로서 내 신앙을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셋째로, 행위는 최후 심판의 표준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맙시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결국은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최후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다 행위로서 판단한다고 성경에 말하였습니다.
산상보훈 마지막에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주께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요한 이 요한 一서 二장 十七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행위가 심판의 표준이 됩니다.
여러분께서 유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면양과 산양의 비유를 기억하십니다. 오른 편에 있는, 면양 편에 있는 의인을 향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 영원 전부터 내 아버지께 축복을 받은 이들아, 너를 위하여 준비한 복을 나와서 받으라.』『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가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너희가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너희가 찾아와 보았고 내가 병 가운데 있을 때에 너희가 와서 위문하였느니라.』고 하셨을 때 의인들이 하는 말이『주여 언제 주님께서 목말라서 우리가 마실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려서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언제 옷을 드렸으며, 언제 방문했으며, 언제 찾아가 보았나이까?』그 때에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우리 형제 중 지극히 적은 이에게 행한 것이 곧 주께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행위가 심판의 표준입니다.
예수께서 역시 유명한 달란트 비유 가운데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다 칭찬과 상을 주신 후에, 마지막에 한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 두고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한 그 종보고 뭐라고 하셨습니까?『저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하셨습니다. 행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아니했습니다. 행위가 심판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에『이제 도끼를 나무 뿌리에 놓았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다 찍어 불에 던지리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다 찍어 불에 던지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
씀을 문자 그대로 실행하셔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습니다. 발라 버렸습니다. 영원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말만하고 열매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던 바리새인들의 지도를 받고 따라가던 유대 민족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따르지 아니하고 마침내 주후 七十년에 송두리째 멸망을 당한 것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행위가 최후 심판의 표준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베드로는 소망을 강조해 가르쳤습니다. 사도 요한 은 사랑을 강조해 가르쳤습니다. 야고보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의 세 가지 큰 덕으로, 이 세 지가 합해서 아름다운 행실로 나타나야 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믿음도 선행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소망도 선행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사랑도 선행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죽은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님께서 산산보훈을 말씀하시다가 우리의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 말대로 한다고 하면 오늘날 한국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불교도나 유교도보다도 그 행위가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다고 한 말씀과 꼭 같은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어느 사람이 예배당에 다니는 거나 안 다니는 거나 그것이 뭐 신앙의 표준이 됩니까 라고. 이런 말을 들을 때처럼 기막힌 때는 없습니다.
야고보의 말씀을 하나 더 인용하고 그만 두겠습니다. 야고보 一장 二十二절에 친히 말씀하시기를『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 듣기만 해서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듣기만 하면 저절로 구원 얻는 줄도 알지 말라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고 도를 행하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바른 노선을 찾을뿐더러 산 신앙을 우리가 얻어서 우리의 행위로 나타나는 참된 신앙 생활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一九五九년 十一월 一일)
Ⅲ-31 지성의 감사 (출애굽기 三十五장 四-十九절)
『너희가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취하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출 三十五·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여러 가지 계명과 율법을 받는 중에 성막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에 대하여 하나님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서 이제 어떠 어떠한 모양으로 성막을 지을 터인데,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지을 터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금도 필요하고, 은도 필요하고, 놋 도 필요하고, 실과 천도 필요하고, 나무도 필요하고, 보석도 필요하다고 여러 무리에게 말씀하였습니다. 계속해서 누구든지 성막을 위해서 드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원해서 이 모든 물품을 가져 오기를 바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해서 즐거이 모세의 앞으로 가져온 물품의 목록이 여러분께서 오늘 아침 읽은 그 성경 말씀 가운데 기록되었습니다. 가령 가슴에 꽂던 핀, 귀고리, 지환, 목걸이, 그 밖에 여러 가지 금품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들은 다 여자들의 몸을 장식하는 것들인데 광야에서는 도무지 다시 마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귀하게 가지고 나온 것들을 이렇게 하나님 앞에 바친 것입니다. 그 외에 실과 털실과 털과 물들인 숫양의 가죽, 해달의 가죽, 은과 놋과 또한 제사장의 예복을 위해서 필요한 보석과 또한 조각 목과 이런 것들을 다 가져온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물품을 자원해서 가져왔을 뿐더러 이들은 역시 자기의 시간과 재주를 하나님께 바쳐서 실을 만들 줄 아는 여인들은 털로 실을 만들고, 그 실로 천을 짤 줄 아는 여자들은 천을 짜기도 하고, 혹은 금과 은을 가지고 조각을 하며, 천에 수를 놓으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 받은 대로 재주 받은 대로 그 재주를 드려서 성막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계속해서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옴으로 마지막에는 너무 많아서 더 필요가 없는 까닭으로, 모세가 모든 사람을 향해서 하는 말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 넉넉하니 그만 두라고 무리들에게 간청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첫 번으로 하나님의 집을 위한 성막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자원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가 가장 귀하에 간직한 것을 하나님께 바쳤는가?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오랫동안 애굽 사람의 종의 멍에를 메고 말할 수 없이 눌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기적과 기사로서 특별한 사자를 보내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광야로 나와서 이제는 자유민이 되게 하시고 자기의 율법을 스스로 따로 가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성막을 짓게 될 때에 사람들의 마음가운데는 오직 은혜의 감격이 사무쳐서 온 정성을 다 바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첫 성막은 지성과 감사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첫 번 성막뿐이 아닙니다. 그 후에 이 지구 위에 나타난 모든 성막, 모든 성전, 모든 교회, 신령한 하나님의 집은 어제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성남 성녀의 지극한 정성의 감사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옛날부터 내려오는 동양의 말 가운데 지성은 감천(至誠感天)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움직인다고 하는 뜻입니다. 신앙 생활은 간단히 말하면 지성감천의 생활입니다. 지극한 정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감동을 줄 만한 생활을 하는 것이 참된 신앙 생활입니다. 정성이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참된 신앙에는 정성이 어울리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에는 참된 감격과 감사가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기도를 합니다. 기도에도 지성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단순한 묵상이 아닙니다. 단순한 명상이 아닙니다. 단순한 자기 반성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금 향로에 향을 가득히 담아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드리는 광경이 보입니다. 이 향로에 가득히 담은 향은 곧 성도의 기도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성도가 정성껏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하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때에, 이 땅 위에 큰 움직임이 있다고 하는 뜻인 줄 생각합니다. 어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어떤 기도가 상달되지 못합니까? 지성이 따르는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고 정성이 없는 입술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합니다.
예수 님께서 기도의 비유를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를 드립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이 사람은 기도하기를『하나님이시여 감사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감사합니다. 나는 토색을 하지도 아니하고, 무리한 일을 하지도 아니하고 음란한 일도 하지 아니하고, 저기에 있는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하니 감사하다.』고 기도했습니다.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이 세리는 감히 하나님 제단 앞에 가까이 나오지도 못하고 멀리서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오! 하나님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어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 님 말씀이 하나님께서 세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바리새인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에 지성이 같이 할 때에 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지성 없는 기도는 시간의 낭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들은 기도할 때에 외인들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하나님께서 들으실 줄로 아느니라.』『너희들이 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너희 구할 것을 다 아시는 줄을 너희들이 모르느냐?』한 마디를 드리되 정성을 기울여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 님께서 언제든지 정성 것 자기에게 와서 간구 하는 것을 물리친 일이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경에 잠깐 여행하실 때에 거기 가나안 여자 수로보니게 여자가 자기의 딸이 않는데 예수 님께서 큰 권능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예수 님 앞에 나와서 자리를 불쌍히 여겨서 자기의 딸을 고쳐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그 말을 들은 척 만 척 하고 처음에는 대답도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도 민망해서 제자들이 나와서 하는 말이『선생님 저 여자가 저렇게 간절히 부르짖는데 어떻게 해서 돌려보내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 님께서는 아들에게 줄 떡을 개에게 던지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냉정히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가 그 말을 듣고 주를 부르면 하는 말이『옳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간구 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 님께서 하시는 말씀이『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돌아가라. 네 딸이 나으리라.』말씀했습니다. 간절한 지성의 연인의 간구를 예수 님께서 물리치지 아니하십니다.
가버나움에서 가르치실 때에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어떻게 문간에 사람이 많이 섰는지 사람이 도무지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그 때에 어떤 네 사람이 반신불수 들린 사람을 데리고 먼 곳에서 메고 왔는데 막상 와서 보니 문이라고는 사람들이 가득 서서 도저히 예수 님 앞에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갔다고 그렇지 않았습니까? 유대 사람의 지붕은 평평합니다.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줄을 매서 네 사람이 그 반신불수를 예수 님 앞에 드리워 내리 우지 않았습니까? 성경에 보니 예수 님께서 그 네 사람의 정성 있는 믿음을 보시고 그 반신불수를 고쳐주었다고 그랬습니다. 정성껏 드리는 기도를 주님께서 항상 응답하셨습니다.
예수 님의 유명하신 불의 한 법관의 비유를 여러분은 다 기억하시지요. 어떤 곳이 불의 한 법관이 있는데 이 법관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성에 어떤 불쌍한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이 법관에게 와서 신원 해 주기를 간청합니다. 불의 한 법관인지라 불쌍한 과부가 청하는 것까지 일일이 뭐 눈떠볼 이치가 있습니까? 본 체 만 체, 들은 체 만 체 그냥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가 하루 가서 안되면 그 이튿날 또 가고, 또 그 다음날 또 가고, 그냥 계속해서 정성껏 이 불의 한 법관에게 간청했습니다.
마침내 이 불의 한 법관이 하는 말이『내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지마는 이 여자가 자기를 괴롭게 구니 이거야 견딜 수 있나?』하며 아무래도 그 원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 원을 풀어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요긴한 뜻은 이 여자의 그 간절한 정성이 마지막에는 불의 한 법과까지도 자기의 책임을 행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밤낮 귀한 목적을 위해서 간구 할 때에 이 정성을 하나님께서 몰라 볼 이치가 잇느냐?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기도에 정성이 필요합니다. 十년, 二十년, 자기의 아들을 회개하게 해 달라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정성에 정성을 기울여서 기도한 어거스틴의 어머니인 모니카와 같은 이런 정성이 필요합니다. 내 나라를 구원해 주시지 않을진대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는 존 녹스 같은 사람의 정성어린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기도를 우리는 우리 교회를 위해서, 우리 민족을 위해서, 三八선이 열리기 위해서, 북한의 동포를 위해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기도에 정성이 필요합니다.
또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할뿐더러 또 헌금도 합니다. 헌금은 물론 교회의 경상비로도 쓰고, 교회의 여러 가지 사업비로도 쓰고, 교역자의 봉급도 주고, 여러 사무 직원의 봉급도 주는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교회의 헌금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헌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사람에게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이것을 잊어버릴 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전에 제가 이북에 있을 때에, 어떤 분규 난 교회의 어떤 직분 맡은이가 저에게 와서 말하기를 자기 교회의 목사는 아무리 교인들이 환영하지 않아도 나가지 않고 그냥 있어서 이젠 부득이 경제전(經濟戰)으로 들어가야겠다고 합니다. 즉 연보 안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북에 있을 때에 들은 말이지만 이북의 어떤 사람은 예배당에 갈 때에 한편 주머니에는 돈 일 원 짜리를 넣고-그 때 일 원 짜리면 지금 천 환 가치는 있습니다-한 편 주머니에는 돈 십 전 짜리를 넣고 갔다가 설교를 들어보고 설교를 잘 하면 일 원 짜리를 넣고 설교를 잘못하면 이건 십 전 짜리 밖에 못되니 십 전 짜리를 넣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헌금은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헌금은 물질 자체를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헌금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우리의 몸을 드립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시간에 헌금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을 드리는 그 정신으로 그 상징으로서 우리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질의 일부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에 정성이 따르지 아니하면 헌금의 의의를 잊어버립니다.
어떠한 헌금이 하나님께 가합이 되고 어떠한 헌금이 하나님께 가합이 되지 아니하느냐? 같은 헌금이지마는 그 배후에 정성이 따를 때에 그 헌금이 하나님께 가합이 됩니다. 그러기에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바칠 때에, 곡식을 바치면 첫 이삭을 바쳤습니다. 처음 거둔 것을 바쳤습니다. 나무의 열매이면 첫 열매를 바쳤습니다. 자녀이면 맏아들을 바쳤습니다. 짐승의 새끼면 첫 새끼를 바쳤습니다. 양을 제물로 바칠 때에도 함부로 아무거나 바치지 않았습니다. 흠 없는 순결한 양을 택해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정성으로 드립니다.
그렇지마는 우리가 말라기의 예언서를 보면 그 때에 모든 사람의 믿음이 타락해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 가져오는 양을 보니까 눈먼 놈, 다리 저는 놈, 여러 가지 병든 놈, 쓸데없는 그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 제사하기 위해서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을 책망했습니다.』너희들이 이런 것을 세상 관헌에게도 가져가지 아니하거든 이것들을 나에게 가져오느냐?』책망한 것입니다. 헌금에도 정성이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예수 님께서 한 번은 성전에 계실 때에 연보 궤에 서서 여러 사람들이 연보 궤에 연보 하는 것을 자세히 보셨습니다. 우리가 연보 할 때에 지금도 예수 님께서 보시는 것입니다. 넉넉하고 돈 많은 사람들이 와서 많은 연보를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번 보니까 어떤 가난한 과부가 그 때 돈 동전 두 닢을 연보 궤에 넣고 조용히 물러갔습니다. 예수 님께서 그 광경을 보시고 다른 곳에 있는 제자를 향해 오라고 해서 하시는 말씀이『너 보았느냐? 이 과부가 다른 사람들보다 연보를 제일 많이 하나님께 드렸다.』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쓰다 남은 것을 드렸지마는 이 과부는 자기의 연명할 것,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이 연보에 드렸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연보의 양을 보시지 아니하시고 연보 가운데 들어 있는 정성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저울에는 이 정성의 무게가 갑니다. 양이 많고 적은 것은 사람의 가세 형편에 의지해서 다를 것입니다. 요컨대 그 연보 가운데 얼마나 정성이 들었느냐?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 에서 예수 님을 위해서 잔치를 베푼 이가 있지 않습니까? 마르다가 여러 가지로 와서 일을 보고, 나사로도 청함을 받아서 가 있고 제자들과 예수 님께서 가실 때에 그 때에 마리아는 무엇을 했습니까? 값진 향기로운 기름이 든 옥함을 가져다가 옥함을 깨뜨려서 예수 님 머리에 향유를 붓고 발에는 향기로운 기름을 붓고 머리털로 예수 님의 발을 씻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본 이해타산이 밝은 유다 가 하는 말이 왜 그 여자가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는가 고 말하며, 저것을 팔면 三백 데나리온이나 받겠는데 그 것을 가졌으면 많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겠는데, 왜 저렇게 귀한 향기로운 기름을 허비하는가 고 원망했습니다.
예수 님께서 그 때에 무어라고 말했습니까?『이 여자를 가만히 두어라. 두렵게 하지 말아라. 이 여자가 내게 착한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사람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같이 있을 수 없다. 이 여자가 내 장사를 이미 준비하였느니라. 이 앞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어디단지 이 여자에 대한 이야기도 또한 말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했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그 향유를 받았습니다. 왜? 그 향유 가운데는 마리아의 정성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사랑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믿음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생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는 정성껏 드리는 것을 귀하게 받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옛날 어떤 임금이 자기 이웃 나라의 한 임금이 경사로운 일이 있어서 자기 사위를 축하 사절로 보냅니다. 그래서 사위에게 금과 은도 달아 좋은 말도 택해 주고 좋은 수레도 택해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이웃 나라에 가서 어떻든지 축하를 잘 하고 돌아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물을 다 받은 사위가 껄껄 웃습니다. 그러니까 왕의 눈이 동그래지면서『너 어찌해서 웃느냐? 이 예물이 변변치 않단 말이냐?』그러니까 그 사위가 하는 말이『폐하 황송하옵니다. 제가 예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오늘 아침에 부름을 받아서 여기 오는 길에 길가에서 본 것이 생각나서 웃습니다.』『길가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길가에 오다가 어느 농사하는 집을 지나 왔는데 그 집 옆에 조그마한 신당이 하나 있어요. 그 신당 앞에서 농부가 제사를 드리는데 그 우상 앞에다 돼지 발족 하나를 갔다 놓고 그 다음에는 술 한잔을 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농부가 복을 달라고 비는데,「오! 신이여, 그저 금년에 나에게 복을 주어서 금년에는 우리 소는 새끼를 꼭 쌍둥이를 낳게 해 주시고, 또 우리 돼지는 새끼를 낳되 한 배에 열 놈씩 여러 배를 낳게 해 주시고, 그 다음에는 또 곡식이 잘 되어서 우리의 뒤 곡간도 가득히 차게 해 주시고, 우리 앞 곡간에도 곡식이 가득하게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이렇게 축원을 합니다. 돼지 발족 하나 놓고 그렇게 복을 많이 받겠다고 하는 욕심이 그렇게 복을 많이 받겠다고 하는 욕심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천하에 처음 보았기에 그럽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드릴 때에 예수 님께서만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도 봅니다. 우리가 드리는 것을 혹 사탄이 보고 웃을 경우는 없습니까? 내 들으니까 아직까지도 연보 할 때에 일 환 짜리 가 들어온다고 합니다.
정성이 필요합니다. 헌금뿐이 아닙니다. 모든 주의 일이 그렇습니다. 교역자만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도 주의 일을 합니다. 권사도 주의 일을 합니다. 집사도 주의 일을 합니다. 구역장도 주의 일을 합니다. 성가대원이나 주일학교 반사나 우리 평신도라도 주를 위해서 우리가 심방을 하고, 누구를 도와주고, 우리가 전도를 하고, 무엇이든지 하는 것은 다 주의 일입니다. 이 주의 일에 정성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정성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합니까? 금년 일년이 거의 지나갔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직분을 맡은 여러분, 얼마나 정성을 가지고 주님 앞에 그 책임을 감당했습니까? 평신도 여러분! 여러분이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금년 일년 동안 얼마나 정성을 가지고 주를 섬겼습니까? 하나님께서 사탄을 향해서 하는 말이『너, 내 종 욥을 보았느냐? 저렇게 정직하고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내 종 욥을 보았느냐?』
하나님께서 사탄 앞에 여러분을 그 만큼 자랑할 만한 그런 생활을 당신은 했습니까? 모든 일에 정성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직장에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지성의 인물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이 감사 주일을 당해서 지성의 감사를 드립시다. 중심의 감사, 참된 지성의 찬송, 참된 지성의 기도와 예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성껏 감사의 생활을 합시다.
(一九五九년 十一월 十五일)
Ⅲ-32 구원의 우물 (이사야 十二장 一-六절)
『보라 하나님은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 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十二·二-三)
오늘 아침, 본 교회 창립 제 十四주년을 맞이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기쁘고 감사한 날에, 좀 전에 읽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성지는 대체로 건조한 지대여서 우물이 대단히 귀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어느 동리든지 우물을 중심해서 이루어진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에는 유명한 엘리사의 우물이 있고, 수가성 근처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고, 나사렛에는 마리아의 우물이 있고, 베들레헴도 성밖에 좋은 우물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렇게 우물이 귀한 까닭으로 우물 때문에 싸움한 적도 종종 있습니다. 이삭과 불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가지고 여러 번 다툰 이야기를 우리는 창세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전시에는 보통 이 우물들을 먼저 점령하기를 애쓰고 또한 부득이 후퇴할 때에는 흔히 이 우물을 메우고 후퇴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성지를 순회할 때에 여리고에 가보니 그곳은 매우 낮은 지대로 예루살렘보다 덥고 사방은 광야입니다. 건조해서 무엇이 자랄 곳이 못 됩니다. 하지만 여리고 근처만은 좋은 엘리사의 우물이 있어서 그 근처에 가보니 남자 여자 아이들 할 것 없이 기쁨으로 그 샘에 와서 물을 길어 가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여자들은 물을 길어서 물병을 어깨네 메고 가고, 아이들은 적은 물병에 물을 길어 가고, 남자들은 가죽 부대에 물을 넣어서 나귀에 싣고 갑니다. 필연 먼 곳에서 물 길러온 모양입니다.
이러한 나라인데 이사야의 예언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앞으로 구원의 우물들에게 너희가 기쁨으로 물을 기를 때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영적 기갈을 풀 수 있는 생명수의 우물이 있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의미에서 예언이 이루어졌습니까? 아마 세 가지 의미에서 이 예언이 이루어진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밀어주는 성경을 통해서 이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서 이 예언이 이루어진 줄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첫째 구원의 우물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성경 말씀도 넓은 의미에서 구원의 우물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도 또한 넓은 의미에서 구원의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이 첫째 의미를 생각하면 이사야의 예언의 배후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서 광야 길을 사흘째 걸어갔지마는 물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곳에 와서 보니 물이 조금 있기는 있지마는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가 나무 가지를 그 물에 던져서 물맛이 달아져서 조금 먹었지마는 만족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좀더 가서 엘림이라고 하는 곳에 가 보니 그 곳에는 좋은 샘물 열 둘이 있었습니다. 또한 큰 종려나무 七十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열두 우물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어 먹고 종려나무 아래에서 더운 햇빛을 피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광야 길을 헤매 일 때에 므리바라고 하는 곳이 가서는 전혀 물을 찾을 수 없어서 많은 백성들이 모세를 향하여 불편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반석을 치니까 갈라지면서 그 곳에서 생수가 나옴으로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한번 문자 그대로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은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사야가 예언하기를 우물이 있어서 누구든지 기쁨으로 물을 기를 때가 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은 이처럼 이사야가 말씀하신 지 약 七五0년 후 초막 절 마지막 날에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거니와 유대 명절 중에 초막 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생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켰습니다. 그래서 흔히 광야에 나가서 종려나무 가지로 초막을 짓고 온 가족이 일주일 동안 초막에서 지내는 풍속이 있습니다. 그리고 초막 절 마지막에는 예루살렘 선전 앞뜰에 모여 그 때의 모든 제사장들은 흰 예복을 입고 모든 악사들은 악기를 가지고서 노래를 부릅니다. 제사장들은 물병을 들고 열을 지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노래를 부르면서 실로암 못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실로암 못에서는 하나씩 하나씩 물병을 채워 가지고 그 물병을 메고 여러 제사장들은 역시 열을 지어서 찬송을 하면서 성전 앞뜰에 모입니다. 그리고서는 한 사람씩 그 물병을 성전 제단 앞에 부어서 옛날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수를 주어서 우리 민족을 구원하여 주었다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한 것입니다.
일 세기경에 예루살렘 성전 바로 앞뜰에서 어떤 초막 절 마지막 날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七장 三十七-三十八절에 기록한 대로 읽습니다.『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예수 님께서 초막 절 끝날 문자 그대로 그 성전 뜰에 서서 무릇 목마른 자는 다 주께 와서 마시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문자 그대로 구원의 우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나와서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인간 심령의 깊은 욕구에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올 때만 이 우주에 오직 한 분밖에 없으신 참 하나님, 살아 계신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올 때만 이 아버지가 살아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 앞에 나올 때만 모든 더러운 죄를 씻어서 깨끗한 심령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나올 때만 참된 안심과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나올 때만 세상을 이기고 자기를 이기고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큰 권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과연 구원의 우물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당시 사람들을 책망해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들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을 버린 것이오, 또 하나는 그 대신에 웅덩이를 판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향락,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인간적인 모든 오락, 인간에 속하는 모든 것은 일시적 만족을 주는데 그치는 웅덩이 물밖에 되지 아니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 나올 때에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미 말씀드린 대로 넓은 의미에서 성경은 구원의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도 너희가 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그 가운데 영생이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 중에 생수가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모든 책들 중에 성경이 제일 많은 방언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일 천여 방언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제일 많이 출판되는 책이 성경이요, 제일 많이 판매되는 책이 성경이요, 오늘날까지 제일 많이 읽는 책이 성경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성경 가운데 생명수가 있는 까닭입니다.
당시에 모든 철학과 문학과 문학을 아무리 통달하였지마는 영적 고민을 면하지 못하던 청년 학자 어거스틴이 어디서 생수를 발견하였습니까? 이 성경 말씀 가운데서 발견하였습니다.『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과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이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되게 한 것입니다.
자기의 노력으로써 옳은 생활을 하여 보려고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의를 얻지 못하던 청년 신부 마틴 루터가 어디서 생수를 발견하였습니까? 이 성경 가운데서 생수를 발견하였습니다.『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 가운데서 생수를 발견한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읽은 책이지마는 지금도 기억하는 작은 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二十二년 동안이나 여러 가지 죄를 지음으로 감옥 생활을 하던 어떤 청년이 감옥에서 성경책을 만나게 되어 그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성경책을 읽는 가운데『성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난 사람에게 쓸데 있는데 인자도 세상에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하는 이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갖은 죄악을 지은 이 청년이 이 말씀을 읽을 때는 세상에 자기 같은 죄인이 어디 있으랴, 예수 님께서 오신 것은 자기 같은 죄인도 구하려 오신 것이 아니냐? 그 자리에서 일 말씀을 읽고 또 읽는 가운데서 은혜를 받아서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해서 적은 자서전을 쓴 것을 읽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물론 율법도 있고, 역사도 있고, 예언도 있고, 여러 문학도 있고, 서신도 있지마는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읽을 때에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 계신 이광혁 장로님께서 신약 성경을 한 장에 다 써서 그린 그림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 그림을 보면 신약전서를 전부 썼지마는 싱상 나타나는 그림은 두 팔을 벌리고 모든 죄인들을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성경 가운데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 성경이야말로 구원의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을 통해서 생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넓은 의미에서 그 예언이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교회가 구원의 우물입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 비유로 표시됩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기록한 곳도 있습니다. 인간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장막이라고 말한 곳도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새 예루살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곱 금 촛대 혹은 진리의 등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 이렇게 성경에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교회의 역할을 생각하면서 교회는 영적 도피성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 심령의 질병을 고치는 영적 병원이라고 지적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교회는 구원의 방주라고 말합니다. 또한 최근에 와서는 교회야말로 진리의 방송국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비유가 교회의 역할, 교회의 성격의 어떤 면을 우리에게 모여줍니다. 그렇지마는 아마 성경 가운데 제일 많은 이름으로 교회를 부르기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는 이 말씀인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예수 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그 육신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했습니다. 그 신령한 몸이 四十일 동안 제자들과 같이 있다가 마지막에는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이 신령한 몸이 하늘로 승천한 후에는 이 땅 위에 보이는 몸을 대신 세웠습니다. 그 몸이 곧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통해서 생명수를 그리스도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수를 주는 구원의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일세기에도 많은 목마른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생명수를 마시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二세기에도 그러했고, 三세기에도 그러했고, 오늘날 二十세기에 와서도 또한 그러합니다.
어거스틴이 성경만 읽은 것이 아닙니다. 주일날마다 진실 되게 근실하게 밀라노 교회에 나가서 여러 성도들과 같이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 때 로마 제국 일원에서 제일 유명하다고 하는 성 암부로스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더욱 깊은 자리에 들어갔고 풍성한 생명수를 마신 것입니다. 이 교회야말로 이 광야같이 매 마른, 아니 사하라 사막같이 쓸쓸한 세상에서 영적 오아시스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대로 구원의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일찍이 어떤 잡지를 보니 옛날에는 바사라고 불렀던 저 이란 나라 유브라데강 근방에는 물론 물이 있어서 풍성하지마는 대체로 비가 적게 오는 지방이어서 어떤 지방에는 일년에 몇 번밖에는 비가 안 오고 전혀 우물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지방 사람들은 비가 올 때와 소나기가 올 때에 그 물이 고인 웅덩이를 파서 거기에 받아 두었다가 여러 달 비 안 올 때에 그 물을 마시고, 그 물로 밥 짓고, 그 물로 매 마른 곡식에 주고, 이렇게 전부 그 웅덩이 물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 어떤 선교사가 선교하러 가서 보니 그 웅덩이 물이 오래 되니까 더러워지고, 여러 가지 벌레도 생기고, 위생적으로 도무지 먹을 수 없는 물이 되고 마는데도 하도 물이 없으니까 그냥 그 물을 먹고삽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가 어떻게 하면 여기서도 생수를 먹고살게 할 수 없을까 하고 연구했습니다. 그러다 미국에서 보니 몇 백 척 되는 깊은 곳을 뚫어서 그 땅 속에 있는 원유를 뽑아 휘발유를 공급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겉으로는 매 마르고 몇 십자 파서는 물이 안 나지마는, 깊은 속에는 물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서 특별히 미국에 기계를 주문해서 여러 백 척을 뚫어 보았습니다. 뚫고 보니까 약 二백 척 이하에는 물이 풍성해서 그 다음에는 그 지대에서 물이 솟아 나왔습니다. 그래서 첫 번으로 깊은 곳에서 생수를 얻어 그 다음부터 그 근방에서는 맑은 물을 마시게 되었고, 다른 곳에 가서 그런 우물을 파주고, 또 다른 곳이 가서 그런 우물을 파주고 해서, 그 일대의 쓸쓸한 광야가 변해서 문자 그대로 풍성한 꽃동산으로 변했다 하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돌아보건대 十四년 전에 이곳에 큰 구원의 우물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우물을 통하여 고향을 떠나고 재산을 잃고 허둥지둥 三八선을 넘어 온 모든 피난민에게 생명수를 마시게 하였습니다. 해방 이후 복잡한 시대에 시달려서 피곤하고 말할 수 없이 곤비한 심령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생수를 주셨습니다. 죄악에 물들어서 사망의 길을 걷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창립 十四주년 기념 주일을 당해서 먼저 이 구원의 우물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이 물가에 서서 외치십니다. 무릇 목마른 자에게 물로 나오라고 하십니다. 돈 없는 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도 와서 마시라고 하십니다. 이 샘물을 마시고 그 심령이 편히 쉬 임을 얻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도 나올 굿입니다. 이 샘물을 통해서 그야말로 천국의 부를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도 나오십시오. 이 샘물을 통해서 그 심령이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심령이 더러워진 자도 이 시간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이 샘에 그 몸을 씻으면 깨끗한 심령이 될 것입니다. 눈먼 자도 나오십시오, 이 물에 씻으면 그 마음 눈이 밝아질 것입니다. 피곤한 자, 병든 자, 약한 자도 나오셔서 이 우물의 구원의 물을 길어서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께서 새 힘을 얻어서 독수리 같이 날개 펴고 올라갈 수 있는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성령과 성부가 말씀하십니다. 성령과 성부가 말씀하시기를『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오,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마시라 하시더라.』오늘,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우물을 주서서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이 구원의 우물에 가까이 나와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수를 풍부히 마시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一九五九년 十二월 六일)
Ⅲ-33 크리스마스와 하나님의 사랑 (요한복음 三장 十六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 三·十六)
이 말씀은 아마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 모르는 분이 한 분도 없을 줄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 이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우주에 사무쳐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여 그 길이와 그 넓이와 그 높음과 그 깊음을 유한한 사람의 지역으로서 다 이해할 수 없는 줄 생각합니다. 다만 성경의 교훈에 의지해서 또한 이 시간, 성신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따라서 잠깐 동안 하나님의 사랑의 그 일면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셨는가? 몰론 그 지으신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도 어느 정도 나타났습니다.
모리슨이라고 하는 사람의 쓴 책 가운데「인간은 홀로 서 있지 않는다」는 적은 책자가 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과학자의 견지에서 이 우주를 살펴보고 우리 지구를 조사하여 보고 해와 지구와의 거리, 지구의 경도, 기울어진 도수, 지구를 싸고 있는 대기와 공기, 지구의 대부분의 표면을 점령하고 있는 물, 또한 지구를 구성한 여러 가지 화학적 요소, 이런 모든 것을 살펴보고 맺어보는 결론은, 과연 하나님께서 이 우주와 이 세계를 지으실 때에 인간을 위해서 지으셨고, 인간이 살 수 있으리 만큼 모든 조건이 준비된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사랑은 그 만드신 우주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나타나는 줄 생각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우주에 질서가 유지되고 이 세계의 모든 인류와 금수와 만물이 그 생명을 얻었고 또한 유지하여 가는 것이 사실인 줄 생각합니다.
그것이 사실인 동시에 우리가 또한 성경을 상고해 보면, 특별히 이밖에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난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요한 一서 四장 九절에 사도 요한 은 친히 증언하여『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특별히 그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나타난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으신 말씀도 역시 그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줍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나님의 사랑이 그 독생자를 주신 사실로 무엇보다도 분명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또한 이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류에게 하나님에 대한 비밀을 계시하실 적에 하나님의 지혜나 하나님의 능력이나 모든 영광도 계시하셨지마는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 의 말과 같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우리가 만일 사도 요한 을 향해서 어떻게 당신이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을 아느냐고 반문한다고 하면, 아마 제 생각은 대략 이런 말로 대답할 줄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은 사랑인 줄 분명히 압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친히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품이 친히 안겨 보았습니다. 나는 三년 동안 그리스도와 같이 자고 먹고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의 성품, 그의 말씀, 그의 생활, 그의 행동,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나가는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 위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면서 만민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 얼굴, 다 이루었다 하는 말씀과 같이 운명하시는 그 엄숙한 사실을 보았습니다. 三일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는 그 빛나는 부활하신 주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이제 다시 한번 추억할 때에 과연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나는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추한 사랑도 많이 있습니다. 불결한 사랑도 많습니다. 천한 사랑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맑은 사랑입니다. 흠 없는, 티없는, 백옥과 같이, 수정과 같이 맑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러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 그의 온 인류에 대한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었습니다.
뿐만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은 의로운 사랑입니다 인간에는 불의 한 사랑도 많이 있습니다. 불법한 동기의 사랑도 많습니다. 죄를 용납하는 사랑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은 사랑하지마는 죄를 용납하지는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을 때에 사랑의 채찍을 또한 내리신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그렇게 사랑의 화신이지마는 외식하고 죄를 회개할 줄 모르는 서기관과 바리새 교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의가 있는 사랑이올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된 사랑입니다. 인간 사회에는 거짓된 사랑도 많습니다. 허위의 사랑, 입술의 사랑, 여기에 속아서 일생을 그르치는 여자들도 많고 혹 남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된 사랑이올시다 중심의 사랑이올시다. 사실 이 세상에 오직 참된 사랑은 하나님의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이와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여 주십니다. 따라서 그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인심은 조석변이로 인간의 사랑은 시시로 변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원수로 변할 수도 있고, 오늘 뜨거운 사랑으로써 부부로 결혼하였지마는 몇 해가 못 가서 미움으로 서로 헤어지는 부부들도 없이 않아 있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올시다. 무궁한 사랑이올시다. 천지가 변할지언정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이와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흔히 조건이 있습니다. 꽃은 구우니까 사랑합니다. 두꺼비는 보기 싫으니까 미워합니다. 사람은 그 사랑의 대상물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좋으면 사랑하고, 좋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물 여하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 사랑을 받을만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속에 사랑이 있으므로 사랑합니다. 곧 하나님은 사랑인 까닭으로 사랑합니다.
여기에 어머니의 사랑과 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자식에 있는 것보다도 자기 속에 있습니다. 남 보기에는 못 생긴 것 같아도 어머니에게는 다 잘 생겨 보입니다. 그 사랑이 어머니 속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자신이 사랑이므로 사랑이 그 속에 있습니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도 사랑하고 악한 사람과 죄인도 사랑합니다. 다만 선한 사람은 기쁨으로 사랑하고 악한 사람은 상한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평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편파적으로 나가기 쉽습니다. 느브가는 좋은 어머니인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더 사랑하고 에서는 덜 사랑했습니다. 이삭도 좋은 아버지인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 반대로 에서를 더 사랑하고 야곱을 덜 사랑했습니다. 흔히 가정의 불행은 부모라도 이렇게 편벽 된 사랑을 할 때 종종 오는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흔히 편벽 되게 사랑하기 쉽습니다.
내 그룹은 더 사랑하고 내 당은 더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공평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남녀 노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습니다. 민족이나 국가적 구별이 없습니다. 다같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밭에 햇빛을 비추이듯이 공평하게 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놀랄 만한 사실은 하나님은 이렇게 전 인류를 사랑하는 동시에 그러나 그 사랑은 개인적인 사랑입니다. 개인 개인을 사랑합니다 마치 목자가 양 하나 하나를 불러서 저녁에 우리로 인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간 하나 하나의 영혼을 따로 불러서 그 영혼을 구원하여 주십니다. 예수 님께서 이 진리를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서 헤 매이는 목자의 모습이 곧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한 것입니다. 은전 열 닢 가운데 한 닢을 잃어 버렸어도 이 한 닢을 찾으려고 방을 쓸고 불을 켜고 애타하는 그 여자의 모습이, 하나님의 개인적인 사랑의 상징인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과 다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제한되어서 이러한 사랑의 능력이 없지마는 하나님은 하나 하나를 사랑하십니다. 여기 이렇게 여러 천 명이 모였지마는 하나님의 사랑은 한꺼번에 사랑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 하나를 사랑하여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을 이끌어서 구원하여 주십니다. 내 영혼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의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친히 말하기를『그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몸을 버리신 지라.』우리 하나 하나가 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그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몸을 버리신 지라.』마치 태양은 하나이지만 그 광선과 그 따뜻한 양기가 높은 산 위에 있는 소나무의 꼭대기도 비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깊은 골짜기의 어떤 풀잎에 머무는 작은 이슬방울에도 비칠 수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히 크지마는 그러나 개인의 심령을 사랑하시고 하나 하나를 이끌어서 구원하십니다.
이와 같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 사랑입니다. 모든 참된 사랑에는 희생이 내포됩니다. 우리 하나 하나를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보고 그 사랑을 압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외아들을 하나님께 드린 것을 보아서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했는지 그 증거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세상에 보내시고 세상에 보내실 뿐더러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에게 주신 이 사실을 볼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五장 八절에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자기의 사랑을 확증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의 대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온 세상 다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하는 그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곧 크리스마스의 뜻입니다. 크리스마스는 다른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날입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애통과 눈물과 죽음이 가득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빛이 비추이기 시작한 날입니다. 이 쓸쓸하고 냉랭한 세상에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나타나서 이 냉랭한 세계를 따뜻하게 만들기 시작한 날입니다.
오늘날도 전쟁의 공포와 원자탄의 위협 아래서 떨고 있는 이 세계를 향해서 크리스마스란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비취어 주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떤 외지를 보니까, 미국에서 청음으로 만든 원자 잠수함이 온 세계를 물 속으로 돌아다니는데 심지어 북빙양 바다를 횡단하고 또 북극 밑을 횡단해서 이 잠수함이 저편으로 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복빙양과 북극 근방에 어름이 그렇게 많이 쌓였지마는 아마 그 속에는 얼지 않은 물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잠수함이 통과했습니다. 사실 지구 속으로 갈수록 뜨겁다고 합니다. 지구 속에는 아직도 불이 있다고 합니다.
이 우주의 중심에는 이러한 영원한 무궁한 불변의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와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였으니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와 같이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또한 그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여 줍니다.『너희는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 합해서 먼저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그랬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엔 반역자가 되지 맙시다. 세상을 사랑하지 맙시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이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보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으니 우리 믿는 사람들끼리 피차에 더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 말미암아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리라.』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느 때 믿는 사람들끼리 사랑하지 아니하리 오 마는, 더욱 이러한 때에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되겠습니다. 피차에 용서합시다. 어떤 사람이 네게 허물이 있을지라도, 나에게 죄를 지었을지라도, 나를 손해 입혔을지라도 용서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용서합시다.
어느 때에 우리가 피차에 상부상조하지 아니하고 피차에 돕지 아니하리 오 마는, 특별히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에, 그 귀한 날을 기념하는 이런 계절에, 우리 가운데 환난을 환난이, 병 가운데 신음하는 이들, 불행한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이들, 고독한 이들, 이와 같은 이들을 피차에 돕고 피차에 붙들어 주도록 힘써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와 같이 사랑하셔서 이 사랑을 우리가 마음 가운데 사실 깨닫는다고 하면, 이와 같은 큰 하나님의 사랑을, 좀더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하고 북극 같은 냉랭한 세상에 사는, 갈 길 잃은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합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一九五九년 十월 二十五일·새벽)
Ⅲ-34 무상한 인생 (야고보서 四장 七-十七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四·十四)
이 해도 거의 다 저물어서 어느덧 一九五九년 마지막 성일을 당하였습니다. 세월이 빠른 것은 우리가 언제 잊으리 오 마는 이렇게 연말을 당할 때에 이런 면을 더 느끼게 되고 따라서 이런 때에 더 한층 인생의 엄숙한 면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세의 기도로 알려진 시편 九十편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모세의 눈에 비친 인생의 일면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인생은 한 티끌이라고「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란 구절이 거기 있습니다. 또는「저희는 잠자는 것 같으며」하루 밤 자고 깨는 것 같으며 혹은 아침에 돋는 풀과 같아서『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한 순간에 다 하였나이다 라고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인생은 무상하고 잠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다른 곳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루 밤 잠자는 것 같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 내려오는 말 그대로 사용하면 인생은 일장춘몽이라고 합니다. 한 마당의 봄꿈과 같다고 생각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시편 九十三편에 보면,『나의 날이 손 넓이만 하게 하였나이다.』이런 말이 있습니다. 손 넓이는 그렇게 넓지는 못합니다. 여기 우리가 읽은 말씀과 같이 나의 생명이 무엇인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아침의 안개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우리 한국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 초로인생(草露人生)이란 말이 있습니다. 풀에 맺힌 이슬과 같은 인생입니다. 아침 이슬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이렇게 인생이란 순간적일뿐더러 사실 인생이란 우리가 이 대 우주에 비교해 보면 지극히 작은 존재입니다.
시편 八편에는『주의 손가락으로 만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대 우주를 보고 우리 인생이란 것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적은 존재인 것을 옛 사람도 느꼈습니다. 하물며 이 우주 시대를 당해서 천문학이 발전되어서 이 우주가 얼마나 광대(廣大)무변(無邊) 하다고 하는 것을 아는 우리 二十세기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이런 느낌이 더욱 커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옛날 글에 있는 말과 같이 문자 그대로 인생은 창해일속(滄海一粟)이라고, 푸른 바다의 조 알 하나처럼 이렇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뿐 아니고 우리 인생은 얼마나 연약한지 역대기 상 二十九장 十五절에 보면 인생은 그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림자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존재입니다. 여기에는 안개와 같다고 했는데 안개도 거의 실체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약한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천재지변이 있습니다. 태풍이 불고, 해일이 있고, 지진이 있고, 홍수가 넘치고, 열병도 충만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뿐입니까? 인생은 사실 내일 일을 모르고 삽니다.『너희가 내일 일을 모르는 도다.』내일이 아니고 다음 시간의 일을 모르고 삽니다.
전에 제가 미국서 잘 알던 어떤 미국 부인이 한 분 계신대 대단히 어진 부인입니다. 이 부인이 四十五세에 비로소 결혼하였습니다. 결혼한 지 九일만에 그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생이란 내일 일을 모릅니다. 아마 미리 알았다면 결혼을 안 했을 줄로 압니다. 여기 독신으로 나오신 동포들 가운데 三八성이 이렇게 오래 막힐 줄 알았다면, 어떻게 하든지 아마 가족을 등반하고 나왔을 겁니다. 우리가 내일 일을 모릅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그 해 곡식이 잘 되니 곡간에 가득히 채워 넣고 이제는 여러 해 먹을 양식이 넉넉하니『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고 그럽니다. 그러나 그 날 저녁에 그 영혼을 불러갈 줄을 인생은 모릅니다.
인생이란 이렇게 생각할 때에 사실 잠간이오, 또한 무상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와 같은 인생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냐? 여기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과 견해가 다르지마는 대체로 생각해 보면, 세 가지 견해와 태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속주의 적, 향락주의적 견해의 태도입니다. 둘째는 염세주의 적, 도피주의적 태도입니다. 셋째는 기독교의 견해와 그 태도입니다.
먼저, 세속주의 적, 향락주의적 그런 태도를 보면 대체로 이렇습니다. 옛날 헬라 문화가 전성할 시대에 그 시대를 지배하던 사상의 학파가 몇 있는데 그 학파 가운데 에피큐리안 학파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인가의 최상의 목표는 쾌락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표어가운데 하나가 성경에도 그 말 그대로 나타나지마는『먹고 마시자, 내일 죽으리라.』내일 죽을 터이니 살아 있을 때에 먹고 마시자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옛날 에피큐리안 학파에서만 가진 것이 아니고 어떤 시대나 어떤 사회에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사회에도 이런 사상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서도에서 오신 분도 많은데 서도에서 많이 부르는 수심가를 아마 기억하실 줄 압니다. 그 수심가를 잘 알지는 못하지마는 아이 때에 늘 부르는 소리를 좀 들었는데 무슨 내용인가 하면『노세 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이런 노래입니다. 그러니 젊어서 잘 먹고 잘 쓰며 거드럭거리고 놀자 입니다. 그것이 수심가에 나타나는 인생 철학입니다. 인생이 이렇게 무상하고 이렇게 잠깐 되니 그저 젊었을 때에 늙어지기 전에 잘 먹고 잘 쓰고 잘 놀자 인 것입니다. 세속주의 적, 향락주의적 견해와 태도입니다.
옛날 중국에 양주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양주의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인간이 오래 산대야 백년에 불과해 그런데 사실 백년을 사는 사람은 천 명에 하나도 드물다. 그런데 설사 여기 어떤 사람이 있어서 백년을 산다고 하자, 그렇지마는 가만히 보면, 아무 것도 모르고 알지 못하고 사는 유년기와 노년기가 그 절반을 차지한다. 또 밤에 잠자는 시간과 깨어서도 헛되이 지나는 시간을 합해 보면 그것이 또 나머지의 절반은 차지한다 또 그 다음에 환난을 당하고, 질고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시간, 이것 다 몰아 놓으면, 또 그 나머지의 절반을 더 차지해, 그러니 암으로 생을 즐길 수 있는 햇수는 백년을 살아도 十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중에 결론은 그러므로 살았을 때에 마음껏 향락을 누리고 사망이라는 것을 과히 생각지도 말고, 잊어 버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사람 주장은 그저 귀로 듣고 싶은 말을 다 듣고,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을 다 보고, 코로 냄새 맡고 싶은 것을 다 냄새 맡고, 입으로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고, 또 입으로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육신으로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날 양주라고 하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세속주의 적, 현세주의 적, 향락주의적 견해와 태도요 철학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유물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생각밖에 다른 생각이 날 수가 없습니다.『향락을 누릴 수 있을 때에 누려 보자. 인생은 허무하다.』그런데 이런 태도에 대해서 한가지 생각할 것은 향락이라고 하는 것은 향락 자체를 인간의 최고 목표로 탐구하게 되면 탐구한 그 즉시로 그 향락이 환멸과 고통으로 변합니다. 결국은 멸망을 초래하고 맙니다.
그래서 아편을 먹는 사람이 향락을 위해서 아편 대를 빱니다. 빠는 그 즉시로 환멸을 느끼고 그 까닭으로 고통이 오고 마지막에는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의 운명, 정욕을 따르는 사람의 모든 운명, 향락 자체를 인간의 최고 목표로 하는 사람의 결말은 다 멸망으로 마치고 맙니다.
그 다음에는 염세주의 적 도피주의 적 그런 태도가 있습니다. 옛날 헬라 시대에 그 에피큐리안 학파와 반대되는 사상을 가진 학파가 있었습니다. 스토익 학파가 그것입니다. 이 스토익 학파의 사상 가운데는 이 염세주의 적인 사상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이란 이렇게 잠깐이오, 또 무상하니 결국은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결국은 인간 생활이란 절망이야 마지막에는 죽을 뿐이야. 그러니 근본적으로 생을 구하지 말라. 생을 부정하라. 생이라고 하는 것을 사랑하지 말아라.』그러면 적어도 생에 대해서 스스로 속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을 부정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사상은 우리 동양의 불교에 많이 있습니다. 불교의 근본적인 사상은 이 염세적인 사상, 생을 부정하는 사상입니다.『생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고통을 의미해. 산다고 하는 것이 곧 고통이야. 그래서 인생의 여러 가지 고통이 많은 중 네 가지 고통이 있어. 생로병사(生老病死)즉 나는 것이 고통이고, 늙는 것이 고통이오, 병나는 것이 고통이오, 죽는 것이 고통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무슨 향락을 누리려 하지 않고 생을 도피하라. 생을 피하라, 부정하라. 가정이 쓸데없어, 집에서 나가라, 입산해라, 그저 깊은 산 속에 가서 혼자 살라.』이것이 염세주의 적인 도피주의 적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상에 대해서 한 가지 생각되는 것은 이 생이라고 하는 것은 피해지지 않습니다. 산에 들어간다고 인생고가 없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암만 피한다고 해도 결국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셋째로 우리 성경이 가르쳐 주는 기독교적 견해는 어떠하냐? 지금 여러분께서 들으시고 읽으신 바와 같이 사실 성경도 인생이란 무상하고 생이란 순간적이란 것을 인정하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인생의 이와 같은 무상한 면이 있지마는 인생을 좀더 깊이 통찰하도록 권면합니다. 생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무상하고 이렇게 순간 성이 있지마는 그러나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보이는 면뿐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보이는 면뿐이 아니고 조이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이 보이는 육신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이 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보이는 육신은 잠간이라고 할지라도,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은 영원의 불멸의 존재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인생을 좀더 깊이 통찰하도록 우리에게 지시합니다. 그리고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인생의 육신생활이 이렇게 잠간이라고 하지마는 이 시기는 매우 중대한 시기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 까닭은 이 시기에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작정됩니다. 잠깐 되는 이 삶을 가진 이 시간에, 우리가 과연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느냐? 인간 일생의 영원한 운명이 육신을 쓰고 사는 이 시대에 작정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기를, 육신을 쓰고 사는 동안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어서,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우리에게 외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인간의 육신 생활이 비록 잠간이라고 하지마는 이 잠깐 사는 생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 하나를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잠깐 동안 세상에 살게 하지마는 이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명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잠깐 동안 사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경륜을 발견하고, 따라서 내 사명을 발견해서,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다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나의 사는 날이 많지 못하니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광음을 아껴서 열심히 나의 맡은 바 사명을 다하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잠깐 되는 세상이니 세상을 위해서 살면 안 됩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세상을 살되 봉사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과 국가에 봉사해야 됩니다. 그 자체를 위해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나의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밤이 오기 전에, 겨울이 오기 전에 네 사명을 다하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 선생이 고린도 전서 十五장 五十八절에 권면한 말씀을 읽을 때에 자세히 들으시기를 바랍니다.『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우리의 인생 생활이 비록 무상하고 잠간이라고 하지마는 주안에서 수고하고 주안에서 하는 일은 절대로 헛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이와 같이 잠깐 되는 까닭으로 더욱 우리의 생활을 바로 하고,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의 사명을 다 해야 되겠습니다. (一九五九년 十二월 二十七일)
Ⅲ-35 자연과 십자가 (요한 복은 十二장 二十-三十三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十二·二十四)
지금은 사순절 기간이올시다. 우리가 어느 때에 우리 주님의 수난을 잊으리 오 마는 특별히 이러한 때에는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는 때입니다. 오늘 읽은 이 말씀은 예수 님의 지상 생활에 있어서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에서 된 사실이올시다. 헬라 사람 몇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과 또는 안드레를 통해서 예수를 보기를 원하였습니다. 비록 이 헬라 사람들의 수가 적지마는 이들은 장차 주께 나올 각 나라, 각 종족, 각 방언, 곧 수많은 이방 사람들의 선구자요, 또한 대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통해서 장차 이 수많은 이방 사람들을 그의 신령한 눈으로 미리 보신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있기 전에 그는 먼저 반드시 마셔야 할 잔이 또한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곧 십자가의 고난이올시다. 이 두 가지 현실을 미리 보시면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였습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여기에서 그는 자연과 십자가를 연결하십니다. 아니 그것보다도 자연계에서 십자가의 원리를 발견하시고 이 원리를 우리에게 분명히 설명하여 주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대로 있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올시다. 언제나 한 알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일년 후에도 그대로 있겠고, 이년 후에도 그냥 있겠고, 십 년 후에도 그냥 한 알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 알의 밀이라도 땅에 떨어져 묻혀 죽으면, 이상하게도 땅에 묻힌 썩는 듯한 그 밀 알 가운데서 싹이 나고 잎이 피고 줄기가 자라고, 마지막에 이삭이 나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많은 결실의 비결은 땅에 떨어지는 데 있습니다. 땅에 묻히는 데 있습니다. 죽는 데 있습니다. 떨어지는 것이나 묻히는 것이나 죽고 썩는 것이 좋게 보인다고 생각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한 알의 밀 알이 많은 결실을 맺는 비결인 것을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은 밀에만 한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곡식이든지 그러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벼가 그러하고 콩이 그러하고 팥이 그러합니다. 곡식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열매 맺는 나무가 역시 그렇습니다. 사과나무가 그렇고, 포도나무가 역시 그렇습니다. 모든 식물계에 적용되는 한 가지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을 날 들에 나가 황금의 물결치듯 곡식이 무르익은 것을 볼 때에, 우리는 그 결실만 볼 줄 알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와 같은 결실이 있기 위해서 먼저 몇 달 전에 땅에 떨어져 죽은 종자 혹은 밀 한 알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죽은 종자의 묘지 위에서만 많은 열매가 맺힌다고 하는 이 진리를 우리는 분명히 마음 가운데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예수 님께서 물론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도 여러 가지 위대한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위대한 교훈을 주셨고, 위대한 모범을 보여 주셨고, 위대한 이적을 행하셨고, 위대한 인격적 감화를 주셨습니다. 그렇지마는 그 범위는 그와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한정되어 있었고, 대체로 지리적으로는 유대 지방에 한정되어 있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한번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그 시체를 땅 속 바위 속이 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의 움직임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그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신 그 후에 오순절이 되었고, 오순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수가 하루에 삼천 명이 더하게 되었고, 그 후에 오 천 명으로 증가되었습니다. 예루살렘만 복음이 전파된 것이 아니고, 유대에만 복음이 전파된 것이 아니고, 사마리아에도 전파되었고, 수리아, 안디옥에도 전파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단순히 유대 사람에게만 아니고, 헬라 사람들, 로마 사람들 혹은 온 세계 종족에게 로마제국에 몇 해가 되지 못해서 복음이 전파되게 된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아는 바입니다
사실 세기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 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각 나라, 각 족속, 각 방언,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서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밀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 그대로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예언의 말씀이올시다. 예수 님은 문자 그대로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이올시다. 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생명이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 이 원리, 희생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 이 원리가 곧 십자가의 진리요, 십자가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이 십자가의 원리는 자연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에만 적용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다른 사람에게도 모든 다른 방면에도 비록 범위는 적다고 할지라도 이 진리가 응용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됩니다.
가령 여기 어떠한 가정이 있습니다. 이 가정에 좋은 아들과 딸이 나서 장성해서 귀한 사람들이 되어서 혹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봉사하고 혹은 사회와 국가에 크게 봉사하는 열매 맺는 가정이 있다고 합시다. 그것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만일 그와 같은 열매 맺는 가정이 있다고 하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배후에 땅에 떨어져 죽는 정신을 가지고 그 가정을 봉사한 한 알의 밀과 같은 이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이 땅에 떨어지는 한 알의 밀이 어머니가 됩니다. 그러나 어떤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됩니다. 혹은 형님이올시다. 혹은 누나올시다. 자녀들을 바로 입히고 먹이고 가르치고 옳은 학교에 보내고 기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 모르는 눈물과 남 모르는 기도와 남 모르는 수고와 남 모르는 고통과 남 모르는 희생이 반드시 있습니다. 땅에 떨어져 묵히는 그 밭 위에만 많은 열매를 맺히는 것입니다.
학교도 그러합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학교라고 하면 먼저 건물부터 생각합니다. 학생의 수로부터 먼저 생각하는 폐단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참 학교의 표준은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오, 학생의 수효가 많은데 있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요컨대 얼마나 참된 인격을 그 학교에서 배양해 내며 바른 지식을 넣어 주는가? 얼마나 참으로 그 학교가 우리 사회를 위하여 열매를 맺는가? 거기에 있습니다.
어떤 잡지를 보니까 통계적으로 미국에서 연구한 결과를 보면, 미국의 모든 큰 인물들은 오히려 학생 수가 많은 큰 학교보다도 적은 대학에서 많이 나왔다고 하는 사실을 누가 지적하였습니다. 참 열매 맺는 학교의 배후에는 그 건물보다도, 학생의 수효보다도, 그 배후에 참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옳게 그르치고 옳게 배워주겠다고 하는, 땅에 떨어지려고 하는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진 그와 같은 교장, 그와 같은 교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땅에 떨어지고자 하는, 장래에 우리 국민들을 위해서 자기의 일생을 모든 것을 바치려고 하는 참된 교육가가 없이는 열매 맺는 학교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의 무덤 위에서만 열매맺는 학교도 건설될 수 있습니다.
교회도 물론 그렇습니다. 어떤 교회가 많은 열매를 맺느냐? 어떤 교회가 과연 많은 열매를 맺어서 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든 사람에게 덕을 세우며 우리 사회와 국가에 참으로 봉사하며 많은 생명을 구원하느냐? 그 대답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 교회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땅에 던지려고 하는 결심이 있는 교역자, 이와 같은 장로, 그와 같은 집사, 그와 같은 교인, 숨은 일꾼, 숨은 봉사자가 있어야 합니다. 남은 알든지 모르든지 심방을 하고, 위문을 하고, 전도를 하고, 시간을 바치고, 재능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며, 교회를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하며, 자기의 집과 같이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서, 주님의 몸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땅에 던지고, 묻히려고 하는 이런 결심을 가진 이런 제직(諸職)과 이런 교우들이 있는 교회는 자연히 많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부 가운데 터툴이안이라고 하는 이는 옛날에 벌써」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종자」라고 하는 유명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사실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종자입니다. 그런데 순교라고 하는 것은 한번 피를 흘려서 죽는 것만 순교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에 그가 매일 죽노라 라는 말을 기록했습니다. 과연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매일 땅에 떨어져서 죽는 이와 같은 신자, 이와 같은 제직이 있는 그 교회는 자연히 많은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열매 맺는 교회는 오직 이와 같은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의 묘지 위에서만 건설된다고 하는 이 진리를 우리는 몽매간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라도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가 내일 모래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특히 우리가 국가에 대한 관심이 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좋은 나라로 만들 수 있을까? 살 만한 나라, 참된 자유와 평화가 있는 나라, 모든 다른 사람에게도 모범이 될 수 있는 나라, 자연히 三八선이 터져 없어져서 이북 사람들이 내려와 볼 수 있는 이런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대답도 한 마디로 말하면,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국회 의원이든지, 일반 공무원이든지, 국민에게 이르기까지 오로지 내 나라를 위해서 나라고 하는 것을 땅에 던져서 묻히겠다고 하는 희생의 정신으로 국가에 봉사할 때에만 이와 같은 나라를 이룩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나라 일을 생각할 때마다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진 이들을 요구하는 방면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정신을 가지는 사람들을 부르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제 눈앞에 전개되는 것은 농촌과 어촌이올시다. 우리는 지금 다 도회에 살거니와 우리 도회는 그래도 외국의 원조도 있고, 여러 가지 활동으로 말미암아 공장도 재건되고, 부흥 주택도 꽤 건축되었고, 또한 고층 건물도, 이 곳 저 곳에서 점점 건설이 되어서 재건되어 가는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여러분이 아십니다. 농촌에 가 보십시오. 농촌이야말로 피폐할 대로 그냥 피폐해 있고, 거기는 외국의 원조가 미치는지 아니하는지, 보통 사람은 도무지 알 수 없는 형편입니다.
사실 농촌에서 살 수 없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무계획적으로 도시로 집중되는 까닭에 우리 도회는 더욱 혼란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농촌과 어촌이야말로 사실 그들을 위해서 내 생명 전체를 바치려고 하는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진 일꾼을 부르고 있습니다.
교역자이면서 알사스에서 일한 오벌린 같은 목사, 덴마크로 말하면 구룬드비 같은 목사. 과연 농촌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치겠다고 하는 일꾼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을 전도하고 이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이들의 권익을 보호해 주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생명을 구할 사람을 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제 안계(眼界)에 또한 떠올라 오는 방면은 근로 대중이올시다. 바로 우리가 며칠 전에 제二회 노동절을 지켰습니다. 제가 보는 대로 해방의 혜택을 가장 적게 받은 우리 사회에 어떠한 특별한 층이 있다고 한다면 아마 이 근로 대중인 것 같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생산하지마는 생산하는 것을 자기들은 입지 못합니다. 이들은 좋은 건물을 짓지마는 자기들은 그 건물 속에 살지 못합니다.
이들의 권익을 옹호해 주고, 이들의 사상을 선도해 주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이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 초급 한 문제 가운데 초급 하다고 생각합니다.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진 일꾼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앞으로 우리 한국 교회에서도 더욱이 근로 대중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아니하면 아니 될 줄 압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들을 도와주고 이들의 노동 운동도 같이 협력하지 않으면 아니 될 줄 생각합니다. 이 앞으로 이들의 사상 동향이 어떻게 되느냐고 하는 것은 우리 국가 장래에 막대한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한 제 안계에 떠올라 오는 방면은 윤락 여성들이올시다. 전쟁 미망인으로 할 수 없이 타락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일신상 불행으로 말미암아 타락되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농촌에서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 도회에 왔다가 악한 사람들의 유혹을 받아서 일생을 망쳐버리고 윤락(淪落)에 빠진 여성들도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와 같은 전쟁과 혼란 가운데서 이 희생된 여성들의 운명이야말로 얼마나 불쌍한지 알 수 없습니다. 이들 자신이 불쌍할뿐더러 이들의 존재는 마치 암과 같아서 우리 사회를 각 방면으로 썩히고 있습니다. 우리 서울의 거리를 더럽히고 도회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지고 이들을 구호하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이들을 선도할 만한 특별한 일꾼들을 우리 사회는 부르고 있습니다. 경찰들이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경찰의 능력으로만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부의 힘으로만 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특별한 사명감을 받아서 밀 한 알이 되어서 이들을 위하여 희생하겠다는 정신이 있는 인물이 없이는 이런 사업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땅에 떨어지려는 밀 한 알을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그 다음에 제 눈에 떠오르는 장면은 - 다른 말이 없어 이런 말을 씁니다 - 윤락 된 거리의 동포들이올시다. 이 가운데는 十대의 소년 소녀를 비롯해서 六十대 七十대에 이르는 말하자면 결식을 업으로 하는 동포들이올시다. 전쟁과 혼란한 시대에 물론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마는 오늘날처럼 이렇게 수가 많은 때는 아마 저의 경험으로는 처음 같습니다. 이런 수가 얼마가 많아지는지 어떤 때에는 혼례식을 하고 잔치를 하려면, 손님보다 이런 사람들이 거의 배는 많아지는 모양입니다. 그저 얻어먹으려 오는 사람, 여러분도 물론 경험하지마는 예배당에 오려면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이 가로막아서 예배당 대문을 지나올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런 문제도 단순히 우리가 정부만 바라 모아서는 아니 됩니다. 특별히 우리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국민들이 자각을 해서 이들을 구호하고, 이들을 도와주기로 하고, 이들을 위해서 내 생명을 바치겠다고 하는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 다음에 제 안전에 떠 올라오는 이들은 나병 환자와 정신병 환자들이올시다. 소록도가 있고 몇 곳에 나병 환자를 위한 병원이 있지만 아직도 많은 수가 구호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정신병자를 구호할 병원은 제가 신문에 보니까 우리 정부에서 두 곳을 만든다는 말만 들었지 아직 만들었다는 말도 못 들었습니다. 이런 나병 환자들과 정신병 환자들은 국가에서도 구호하지 못하고, 교회에서도 구호하지 못하니까, 거리로 사방으로 돌아다닙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고 심지어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방면에도 요컨대 이런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내 생명을 온전히 바치려고 하는 밀 한 알의 일군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면수 보호 문제(免囚保護問題)도 큰 문제입니다. 절도를 하고 강도를 하여 한번 형무소에 갔다 온 사람입니다. 아무리 개준을 하고 나왔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동정하는 사람이 없고 동정하는 기관이 없으니까 다시 죄를 짓고 맙니다. 장발장처럼 한번 죄 짓고, 또 두 번 죄 짓고, 세 번 죄 짓고, 일생을 형무소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와 같은 문제도 오직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이들을 위해서 생명까지도 바치려고 하는 밀 한 알의 전신이 있는 일군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번에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는 졸업생들이 많이 있는 줄 압니다. 물론 오늘날 정당한 취직을 하려면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실 생각하면 한국처럼 일할 데가 많은 곳도 없습니다. 분명히 기억할 것은 내가 그냥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고 그냥 있으면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어떠한 방면이든지 내가 그 방면에 들어가서 내 일생을 온전히 바치면 생명까지 희생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방면에 있든지 우리가 두 가지 정신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냥 한 알 그대로 있는 정신, 나 중심, 자기 중심, 이기주의, 나만 사를 정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방면에 들어가든지 그 방면에 들어가서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의 정신으로 살수도 있습니다. (一九六0년 三월 十三일)
Ⅲ-36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 (로마서 五장 一-十一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五·八)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불리 우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 은 단적으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우리에게 선언하여 주시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어떠한 속성은 우리가 깨닫기 쉽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 또는 하나님의 권능 같은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우주를 통해서 자연계를 통해서 우리가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마는 어떠한 속성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것은 그렇게 쉽게 얼른 알아 보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그가 지으신 이 자연계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따뜻한 아침 햇빛 혹은 아름다운 저녁 노을, 밤에 은연(隱然)한 달빛 혹은 영원히 빛나는 별빛을 바라 볼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그 가운데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혹은 봄 동산에 피는 꽃이든지, 여름에 성하는 녹음방초(綠陰芳草) 든 지, 가을에 무르익은 곡식과 실과를 바라 볼 때에 혹은 노래하는 새의 노래를 듣고, 들에 달리는 짐승을 바라볼 때에도 우리는 이와 같은 때 자연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까지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마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분명하게 보여준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은 이 자연계는 어떤 사람들이 기록한 바와 같이 열러 가지 모순이 있어서 피에 물들인 이빨과 발톱을 볼 수가 있고, 약육강식의 참상을 또한 볼 수 있으며, 천재지변도 적지 아니한 것을 우리는 목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사랑은 그가 지으신 바 자연계를 통해서 곧 알아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을 만큼 분명히 나타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우리 인간에게 보내어 주셨습니다. 모세를 보내 주셨습니다. 호세아를 보내 주셨습니다. 혹은 이사야를 보내 주시고 예레미야를 보내 주셨습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호소하는 소리를 친히 들으시고 그 백성을 애굽의 폭정 가운데에서 구원해 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四十년 동안 광야를 통해서 그들을 인도해 주시고, 마지막에 가나안 복지를 허락하여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 위에 여러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을 영원하신 사랑의 줄로써 이끌기를 힘쓴 역사를 우리는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이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도 오리려 만족할 것은 되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게 되었습니다. 요한 복음 三장 十六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마지막에는 독생자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사람의 모습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의 사랑의 얼굴을 통해서, 사랑의 음성을 통해서, 사랑의 성품을 통해서, 사랑의 입을 열어서, 여러 가지 사랑의 교훈을 통하여, 사랑의 손을 펴서, 여러 가지 사랑의 일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혹은 죽은 자를 고쳐 주심으로, 혹은 주린 자를 먹이심으로, 혹은 슬픈 자를 위로하여 주심으로, 혹은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시다 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셨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내서 보일 수 있도록 하셨습니까?
오늘 읽은 이 본문은 그 진리를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을 확실히 증명하여 주셨습니다. 대 자연계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까지 나타낸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까지 계시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생활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신 것은 곧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죽음이올시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십니까? 이미 읽은 바와 같이『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그가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면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으리라.』길이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그가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친히 아버지께서 그 안에 계셔서 우리들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요한 복음 一장 一절에 기록한 바와 같이『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독 하나님이시니라.』곧 하나님이시오, 말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실히 증명하여 주신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까? 여기 보니까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우리」는 여기 앉은 여러분과 저만 가리킨 것뿐만 아니고 인류 전체를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 시오, 길이요, 질리요, 생명이시오, 아버지께서 친히 계셔서 그 모습으로 보여 주시는 주시오, 말씀이시오, 하나님이신 그는 인류 전체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어떤 순교자가 어떠한 진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순교도 얼마나 고귀한 죽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떠한 애국자가 자기의 민족과 자기의 나라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초개같이 버릴 때, 이와 같이 순국자의 죽음도 얼마나 거룩한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떤 진리만을 위한 순교만이 아닙니다. 어떠한 민족 어떠한 나라만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인류를 위해서, 인류 전체를 위해서, 그들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그들을 굽어살피기 위해서, 죽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미국 남북전쟁이 있을 때에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고 합니다. 북군에서 전쟁에 나갈 군인을 징발할 때에 전쟁이 자갈 만한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그 사람들 가운데서 제비를 뽑아서 다 나갈 필요는 없으니까 나갈 사람을 먼저 뽑아서 내 보낸 일이 있다고 합니다. 어떠한 동리에서 몇 사람이 모여서 제비를 뽑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어떤 사람이 제비를 뽑혔는고 하니, 가족도 많고 부모도 계시고 전쟁에 나가면 그 가족도 전혀 부양할 사람이 없는, 그런 사람이 그만 제비에 뽑혀서 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광경을 보고 그 친구 가운데 부모도 안 계시고 그는 아직도 결혼도 하니 아니했는데 그 경지를 보고서 대신 자원해서 전쟁에서 싸우겠다고 이와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그 징발하는 책임자에게 말하니까 그도 감격해서 대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에 나가도록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전쟁에 나가서 자기의 나라를 위해서 싸움하고 있습니다. 자기 동네에서 자기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이 사람은 자기 대신 나간 사람이 그에 대한 감격이 얼마나 깊은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신물을 보면 얼른 전쟁 뉴스부터 먼저 보고 특별히 어떤 곳에 격전이 있다고 하면 거기 혹 자기 친구가 들지 않았는가 해서 먼저 그것부터 살펴보고 또 이따금 죽은 사람의 명단이 나게 되어도 행여 자기 친구가 전사하지 않았나 제일 먼저 그것만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 한번은 큰 격전이 있게 되었는데 그만 자기 친구가 그 격전 가운데서 싸울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에 신문에 나는 것을 보니까 죽은 사람의 명단 가운데, 그 사람의 이름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런 신문을 보고 이 사람이 앞이 아득했습니다. 곧 그 싸움터에 나가서 자기 대신 죽은 그 시체를 자기가 친히 모셔다가 자기 가족 공동 묘지에 그 시체를 묻고 그의 이름을 쓰고 그 아래는 간단히『그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다.』라고 묘비를 새겼다고 합니다.『그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있을 때에 그가 죽으셨습니까? 로마서 五장에 보면, 우리 인류의 형편을 네 가지로 설명하였습니다. 五장 六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리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경건하지 않은 때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거룩하지 못하고, 선을 행하지 못하지만,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서 예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읽는 이 八절에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죽는 자가 쉽지 않습니다. 의인보다 오히려 선한 사람,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을 위해서 혹 죽는 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마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많은 죄 짐을 지고 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을 그런 때에, 구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十절에 내려가서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뿐더러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과 사실 원수가 되어 있을 그 때에 하나님께서 사랑의 손을 내미실 뿐더러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를 보내셔서 원수 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속량 해 주심으로 그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증명하신 것입니다.
언약할 때에 죽으셨습니다. 경건하지 아니할 때에 죽으셨습니다. 죄인 되었을 때에 죽으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원수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제가 어떤 책을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 아마 옛날 같습니다 - 깊은 산림 지대를 마차에 타고 가족과 동반해서 지나가던 중이었습니다. 마차부는 오래 동안 그 주인을 위해서 봉사한 충성된 분입니다. 또 이런 산림 지대는 여러 번 다녀 보아서 경험도 많은 그런 좋은 마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쯤 깊은 산림지대를 지나갈 때에, 말 네 필이 그 마차를 끌렀는데 말 두 필이 갑자기 놀라면서 앞으로 달음질하기 시작하니 다른 말들도 같이 네 굽을 안고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마차부가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뒤에 짐승들이 여러 마리 따라옵니다. 그 마차부는 거기에 이따금 나오는 이리떼인 것을 곧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마차부도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해서 동리가 과히 멀지 않으니까 동리로 달립니다. 그렇지만 이리처럼 빨리 달릴 수는 없습니다. 얼마쯤 있다 보니까 그 이리의 무리가 몇 마리가 아니고 여러 수십 마리가 따라 오는데 가만 보니까 그 이리한테 잡히면 말과 사람이 다 희생될 것 같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마차부가 생각다 못해 말 가운데 두 필을 말고삐를 찍어서 채찍으로 때려서 다른 방향으로 달음질시켰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 이리들이 그 말을 쫓아서 그 방향으로 전부 달아납니다. 그래서 두 말로 마차를 몰면서 그 마부는 이제는 생명을 구했다고 생각하면서 달려갈 길을 빨리 갑니다. 얼마쯤 있다 보니까, 이 이리들이 벌써 그 말들을 따라가서 다 잡아 먹은 모양입니다. 그리고서 오히려 힘을 더 얻어서 더 빨리 따라옵니다. 그러니까 빨리 가면 어떤 동리에 들어가게 되는데 아무리 두 말을 몰아서 빨리 가지마는 또 다시 이리가 가까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다른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주인보고 하는 말이『주인께서 이 말을 몰아서 빨리 동리로 들어가세요. 나는 필경 저놈들과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그리고서는 하나 밖에 없는 총을 메고 마차를 내렸습니다. 내려서 마차는 빨리 보내고 이리를 향해서 그저 총알 있는 대로 이 이리와 싸웁니다. 이 주인은 얼른 동리에 들어가서 여러 사람에게 청병(請兵)해서 총을 많이 가지고 많은 사람이 빨리 구원하러 왔습니다.
왔지마는 그만 불행히 그 마차부는 총탄이 다 없어지고 이리에게 희생된 뒤였습니다. 이렇게 이 마차부는 자기의 주인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은 그 마차부를 위해서 특별히 기념비를 세워 주어서 영원히 그 마차부의 충성을 표상 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마차부가 자기 주인과 자기 주인의 가족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까지 희생한 것, 얼마나 고귀한 충성이요, 얼마나 고귀한 희생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예수 님의 십자가의 희생은 이보다도 더 귀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 마차부는 그래도 자기의 주인을 위해서 자기의 친구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원수들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올시다. 이것이 십자가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올시다.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반대하는 원수들을 위해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주시고 그 사랑하는 아들을 월수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침으로 주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얼마나 거룩합니까?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 그 높음과 그 깊음과 그 넓이를 감히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죄 짓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영원히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 죽을 것밖에 없고,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지마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의 한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를 다 속량 해 주시고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무심히 보시지 맙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오, 섬기려 하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함이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생명을 대신 바쳐서 우리의 죄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것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인류에게 십자가상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랜트(사순절)기간을 통해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좀더 깨달을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속에 돌아 와서 모든 죄를 회개하고, 내가 먼저 구원을 얻으며, 이 사랑의 소식을 온 세상에, 이 쓸쓸하고 냉랭한 세상에 사람의 복음을 전파하여야 되겠습니다. (一九六0년 三월 二十일)
Ⅲ-37 인간의 죄와 십자가 (이사야 五十三장 一-九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사 五十三·五)
오늘 아침, 인간의 죄와 십자가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찌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는가?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이와 같은 말씀으로 예언하였습니다.『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여호와께서는 우리 머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말씀으로 로마서 五장 六절에 기록하였습니다.『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二장 二十四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설명하였습니다.『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세례 요한 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리 문답에 있는 말씀과 같이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에 그 모든 후손들은 그의 죄와 그의 부패한 성품을 계대(繼代)하였고, 또한 자기 자신들이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다고 하는 이와 같은 비참한 상태에 모든 인간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죄에는 값이 있습니다. 죄에는 삯이 있습니다. 죄의 값은 여러 가지 비참한 것이 많지마는 한마디로 말하면 죄의 값은 사망이올시다. 육신과 영혼의 영원한 죽음이올시다. 하나님과 멀리 떠나서 원수가 되고, 항상 하나님의 주주 아래에 있게 되고, 영원한 멸망 곧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어떻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면 그저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면 그 뿐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신이올시다. 그와 같이 되면 하나님의 공의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또한 그와 같이 되면 이 우주의 도덕적 질서가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도 죄 사함을 얻는 길은 오직 어린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자기의 죄를 고백한 후에 그 양을 잡아 피를 흘리고 제사를 드림으로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 죄 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능히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있겠는가?
첫째로, 이런 분은 사람 가운데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를 지은 까닭으로 자기의 죄를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까지 대속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반면에 둘째로 생각해 보면, 이런 사람은 아무래도 사람이어야 하겠고 또한 모든 인류를 대표할 만한 자격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말씀이 육신을 입는 - 신학상의 술어로 수육(受肉)이라고 합니다 - 수육의 비의(秘意)가 있는 것입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육신을 입으셔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둘째 아담, 곧 전 인류의 대표로 어린양이 되어서 십자가의 희생의 제단을 드림으로 만민의 죄를 속량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시었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첫째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시고, 둘째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셋째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셔서 구원의 길을 열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뜻입니다.
오늘 아침, 이렇게 뜻 깊은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마음 눈을 열어서 골고다를 바라 모시기를 바랍니다. 골고다 산 위에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은 십자가가 높이 서 있습니다. 먼저 주의 얼굴을 보십시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가시에 찔린 그 이마에서는 피가 점점이 흐릅니다. 머리가로도 피 흘린 흔적이 보입니다. 그리고 또한 두 손을 보십시오. 오른 손과 또한 왼손을 보시기 바랍니다. 두 손 다 높이 십자가에 못이 박혔습니다. 손바닥을 꿰뚫어 큰못이 예수 님의 부드러운 상을 찌고 뼈 사이에로 뚫려서 나무에 깊이 박혔습니다. 못 박힌 자리에서 피가 점점이 흐릅니다. 몸이 늘어질수록 살이 점점 찢어지고 따라서 피가 더 많이 흐릅니다.
두 발을 바라보세요. 두 발들은 역시 큰못으로 꿰 뚫렸고 그 못은 나무에까지 깊이 박혔습니다. 못 자국으로 선형이 줄줄이 흐릅니다. 그리고 그 옆구리를 바라보십시오. 무지한 군인은 날선 창끝을 가지고 우리 주님의 부드러운 가슴을 창으로 찌릅니다. 그 창끝이 나오자마자 뜨거운 선혈이 물과 같이 쏟아집니다. 주님의 얼굴은 점점 창백하여집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런 고통은 한 시간만 계속된 것이 아닙니다. 두 시간만 계속된 것이 아닙니다. 세 시간만 계속된 것이 아닙니다. 네 시간, 다섯 시간, 여섯 시간, 우리가 성경에 있는 대로 계수 해 보면, 적어도 여섯 시간을 십자가 위에서 끝까지 이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고통은 참형보다 더 심하고 교수형보다 더 심합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친히 맛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육신의 고통을 당하든지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그 고통을 당하시었고 우리를 동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자가의 고통은 단순히 육신의 고통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정신적 고통은 이보다 더 심하였습니다. 원수들은 조롱을 하였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곳에서 내려와서 그들로 하여금 믿게 하라고 비웃었습니다. 심지어 지나가는 사람들도 자기의 머리를 흔들면서『아,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짓는다고 하는 자여, 네가 그 자리에서 내려와서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라.』고 조소를 거듭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적은 고통이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께서도 우리 주님을 버리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가 그의 어깨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주님께로부터 그 얼굴을 돌리셨습니다.『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부르짖음은 예수 님께서 인간의 죄를 홀로 담당하시고 친히 죄가 되어서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는 그 시간에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말씀이올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죽기까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마지막에 죽으셨습니다. 사망의 쓴잔을 찌꺼기까지 다 마시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만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시고 마침내 죽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주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낳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다시 우리가 십자가를 바로 봅시다.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그 어깨에 짊어지셨던 우리의 죄도 같이 죽었습니다. 내 죄가 거기 달려서 주님이 죽을 때에 같이 죽었습니다. 죽은 예수와 같이 우리의 죄도 죽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죄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다 끝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모든 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때부터 우리는 죄에 죽고 의에 대하여 살기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온 인류에게 구원과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렇게 죄에 대한 책임뿐만 아닙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죄의 권세도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죄에 속아서 죄의 마력에 끌려갔습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죄가 이렇게 흉악하고 죄가 우리 주님까지 죽게 한 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죄라고 하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마력이 온전히 없어졌습니다.
제가 듣건대 전에 어떤 거짓 선지자가 자기는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외치면서 자기의 말을 들으라고 부르짖으면서 그의 이마에는 언제든지 은으로 만든 둥글 한 것으로 가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왜 가리우고 아니냐고 물어 보면, 만일 그것을 때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빛이 나타나서 그 빛을 보는 사람이 눈이 어두워서 소경이 되는 까닭으로, 부득이 그곳에 은으로 붙였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잘 때에 그를 따라 가던 사람이 그것을 한번 뜯어보았습니다. 몰래 뜯어보니까 그 이마에는 다른 것이 아니고 문둥이 흔적이 있더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지 못할 때에는 죄가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죄에 속았습니다. 죄의 마력에 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 우리는 죄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추악하고 우리 주님까지 이와 같은 고통을 받게 하였다는 죄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죄의 다스리는 권세가 역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다시 한번 바라볼 때에,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의 그 고난받으신 것으로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 즉 자기의 살을 찢고 자기의 피를 흘려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 볼 때에는, 우리는 죄에는 죽었지마는 의에는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예배당 뜰에 나가서 서울 사방을 돌아보면 여러 가지 것이 보입니다. 삼각산이 보이고, 인왕산이 보이고, 여러 가지 고층 건물이 많이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밖에 나가서 그것을 먼저 보지 말고 오늘 같이 해가 잘 비칠 때에 해를 한참 쳐다보세요. 그러다가 그 다음에 사방을 둘러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해를 본 눈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에서 비치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자기는 십자가에 못 박고 원수 된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하는 그 기도의 음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그 다음에 세상 것을 바라보십시오. 세상 것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전에는 향락이 귀해 보였지마는 향락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전에는 물질이 그렇게 귀해 보였지마는 물질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전에는 세상의 지위나 권세 같은 것들이 그렇게 귀해 보였지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참 바라보다가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에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아서 오직 십자가를 바라 본 사람의 눈에는 오직 십자가만이 밝은 빛으로 그 심령을 채우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 오직 하나님의 의, 오직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인가의 죄와 십자가의 관계를 오늘 생각했습니다. 그 말씀은 이사야 五十三장 五절에 이미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이제 제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께서 저와 같이 이 절을 한번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절을 읽을 때에「우리」라고 하는 말을 넣어서 한번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도다.』
여러분, 이 말씀을 다 이대로 믿습니까? 이대로 믿는 이는 이대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주로 영접하는 이는 과거에 어떠한 허물과 어떠한 죄가 있던지 다 용서함을 받고, 죄에는 죽고 온전히 의에는 사는 새 생활이 이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성신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속에 이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一九六0년 三월 二十七)
Ⅲ-38 강도의 회개와 구원 (누가복음 二十三장 二十六-四十三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二十三·四十三)
오늘 아침, 다시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서 십자가를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갈보리 산 위에는 십자가가 셋이 서 있었습니다. 중앙에는 그리스도께서 달리셨고 좌우에는 행악자(行惡者), 혹은 전의 번역대로, 강도가 달려 있었습니다. 일 점의 흠이 없고 죄가 없는 그리스도께서 두 강도 사이에 같이 달려서 죽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 사람의 생각에는 곧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을까? 이런 역리(逆理)가 어디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천리(天理)에 어그러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됩니다.
그렇지마는 이것도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우연한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예언의 성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五十三장 十二절에 보면, 그는 범죄자 중 하나로 재앙을 받겠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내가 세상에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오 죄인을 불러 구원하려 왔노라.』고 말씀하신 사명에도 부합되는 것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일찍이 바리새인들이 비난하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그대로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낸 말입니다. 십자가상에도 그 말대로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셨을 뿐더러 죄인과 같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이렇게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육신 생활의 최후 순간에도 죄인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죄인은 보통 죄인이 아닙니다. 행악자 입니다. 다시 말하면 살인 강도의 죄인입니다.
보십시오. 죄인을 위하여 최대의 희생을 드리시는 주님, 최후 순간에도 죄인을 구원하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 죄인에 대한 그의 간절한 기도, 우리 주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그의 피의 마지막 점까지 흘리셨습니다. 그의 생활의 최후 순간까지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죄인에 대한 이과 같은 사랑을 깨닫습니까? 우리가 죄인에 대한 그의 이와 같은 지성을 얼마나 알고 십자가를 바라봅니까? 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으소서. 이 위대한 주님의 십자가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주님의 우편에도 강도가 달렸고 주님의 좌편에도 강도가 달렸습니다. 이 두 강도는 얼핏 볼 때에 같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얼굴이 비슷한 줄 압니다. 보기에 흉악합니다. 그 성질이 악합니다. 같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같이 체포되었습니다. 같은 재판정에서 재판도 받았습니다. 같이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같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올라왔습니다. 같이 십자가에 박히어 높이 매달렸습니다. 처음에는 다 같이 예수를 비방까지 한 모양입니다. 어떤 복음서에는 강도들도 비방했다고 기록한 데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십자가위에서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구원을 얻어 낙원에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육신과 영혼이 아울러 영원한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어깨동무로서 같은 인생 길을 걸어가다가도 갈리는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주님의 하신 말씀과 같이 두 여인이 맷돌을 가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그냥 두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들에서 밭을 가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그냥 두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는 회개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죄는 같습니다. 악하기도 같습니다. 같은 범죄를 하였습니다. 같은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회개하고 하나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회개한 강도의 모습을 보십시오. 다른 하나는 비방을 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해서『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러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이와 같은 말로 같이 십자가에 달려서 비난을 하였습니다. 이 때에 한 강도가 대답한 말을 보십시오. 그는 다른 강도를 책망했습니다.『네가 동일한 정 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그 강도를 책망했습니다. 이것을 보니까 이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회개한 증거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회개한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하니 하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합니다. 이 회개한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이 회개하지 아니한 강도를 엄히 책망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계속해서 하는 말이『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벌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자기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자기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報應)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고 하며 자기의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을 깨닫고, 거기는 사형이 마땅한 것을 깨닫고 이대로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도 고백을 하고, 예수 님 앞에도 고백하고, 그 때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많은 공중 앞에서, 말하자면 공중 고백을 하였습니다. 회개한 사람의 둘째 특징은 자기의 죄를 깨닫고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아닙니다. 이 사람이 계속해서 하는 말이 예수 님을 가르치면서『이 사람이 행한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나니라.』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하였습니다.『우리는 이와 같이 죄를 범해서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마는 여기 가운데의 이 분으로 말하면 이 분이 행한 것은 무엇이든지 옳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느니라.』예수 그리스도의 결백하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무흠(無欠) 하신 것을 변호하고 증거 하였습니다.
이 때에 예수 님을 변호한 사람은 이 강도뿐이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다 달아났습니다. 여자들이 몰래 와서 멀리 섰지마는 무서워서 감히 입도 열지 못했습니다. 많은 바리새인들과 군인들이 돌아서서 예수를 힐난하고 예수를 모욕하던 때입니다. 그러한 때에 오직 이 회개한 강도 한 사람만이 이 예수 님의 행한 것은 옳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증거 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 님께 향하여 얼굴을 돌리면서 그가 하는 말이『예수여 당신의 나라로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기도했습니다. 당신의 나라로 임하실 때에 자기를 생각하여 달라고 한 것을 보니 이 강도는 예수께서 과연 그리스도요, 메시야인 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분명히 믿고 이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로 강림하실 때에 자기 같은 죄인이라고 생각하여 주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회개한 사람의 또 한 가지 특색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길로 가다가 예수를 만나 회개한 다음에, 제일 먼저 한 것이『주여,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 강도도 기도하였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어서 이렇게 회개를 했겠습니까? 좀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선 이 강도가 십자가 위에서 회개할 때에 우선 다른 사람의 권면을 들었다든지 설교한 것을 듣고 회개한 것은 아닙니다. 그 때에 이 강도에게 권면 하였다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강도에게 설교한 이, 누가 있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강도는 이런 권면 한 마디 안 듣고도 회개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어렸을 적부터 주일학교에 다니고 커서 이따금 예배당에 나와서 설교를 줄곧 들으면서도 아직까지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 한 사람이라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알 것은 이 다음에 심판대 앞에 가서 이 회개한 강도가 그 사람을 정죄 할겁니다.『나는 설교를 한번도 안 듣고, 권면을 한번도 은 듣고 십자가상에서 회개했는데 너는 어떻게 되어서 주일학교에 다니고 교회에 가서 설교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느냐?』
자, 보십시오. 이 강도가 회개한 것은 남이 다 회개하니 자기도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혹 부흥회 할 때에, 회개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다 나가서 회개하고 예수 믿겠다고 하니까 같이 덩달아서『나도 회개하겠습니다.』이렇게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이 때에 강도는 혼자 회개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하나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분위기가 아닙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 군인들, 전부 예수를 미워하고, 모욕하고, 능욕하고, 핍박하던 아주 냉혹한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떻게 이 강도는 회개했습니까?
여러분, 이 강도는 그런 분위기 가운데서도 회개했는데,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영락교회에 출석하면서, 이렇게 수천 명이 같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설교를 들으며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도,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이 사람도 역시 이 다음에 심판대 앞에 가서 이 회개한 강도에게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정죄 받기 전에 회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무엇이 이 강도로 하여금 회개하게 했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을 지킵니다. 분명히 알 서 없습니다. 그러나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추측은 거의 확실하다고 봅니다. 이 강도가 회개하게 된 동기는 이 강도도 같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올 때에 예수 님과 같이 올라왔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같이 못 박혔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에도 몇 시간 같이 달려 있었습니다. 이 몇 시간 동안에 이 강도는 예수 님의 얼굴을 모았고 이따금 말씀하시는 예수 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올 때에 이 행 악 자들은 아마 욕을 하며 저주하면서 그 얼굴을 찡그리고 말할 수 없는 불평을 가지고 그 십자가를 지고 올라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의 얼굴을 보면, 같이 십자가를 지고 올라오지마는 조금도 악의가 보이지 아니하고, 조금도 불평이 보이지 아니하고, 조금도 흉악한 빛이 보이지 아니하고, 예수 님의 얼굴은 천사 같은 얼굴입니다. 많은 여인들이 예수 님을 보고 우니까 오히려 하시는 말씀이『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는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집을 위하여 울라.』고 하였습니다. 골고다 위에 올라온 후에 십자가를 먼저 놓고 그 위에 뉘어 놓고서 손바닥에 못을 탕탕 박을 때에 이 행악자 들은 아마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저주를 하고 별의별 말을 다 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중앙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한 마디 말씀도 없습니다. 그 얼굴빛이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에 높이 달려서도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오,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이런 죄를 짓습니다.』라고 말하실 뿐입니다. 아마 예수 님 머리 위에 쓴 그 명패를 본 줄 압니다.「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 사람도 유대 사람이니까 역시 그도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람 가운데 하나인 줄 압니다. 따라서 구약의 메시야에 대한 여러 가지 예언 가운데서 들은 일이 있는 줄 압니다.
혹은 이 강도의 마음속에 이사야 五十三장에 있는 말씀, 어떻게 메시야가 와선 만백성의 죄와 온 세상 만민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신다고 하는 이런 기억이 마음 가운데 솟아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렸지마는, 주님의 얼굴을 보고, 주님의 태도를 보고, 주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친히 하시는 말씀을 보고, 성경 말씀을 기억하는 가운데서, 이 강도가 회개한 줄 압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바로 바라보면 회개하지 않을 죄인이 없는 줄 압니다.
우리 신약 가운데 네 복음이 있지만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활의 전기입니다. 이상한 것은 다른 전기들은 그 사람의 행한 것을 마지막에 죽었다는 기록은 간단히 쓰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 님의 전기를 쓴 이 네 복음을 보면 어떤 복음이든지 거의 삼분지 이는 예수 님이 십자가 위에서 어떻게 죽으셨다고 하는 죽은데 해한 기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가 바로 바라만 보면 자연히 내 죄를 깨닫고 회개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회개한 종의 축복을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 회개한 강도는 그저 기도하기는『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기도했습니다. 이 다음에 나라에 임할 때에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을 보면『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오늘날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이 강도는 회개한 그 날로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 날로 온전히 구원을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강도는 참으로 복 받은 강도라고 말을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아침에는 마귀하고 조반을 먹었는데 저녁에는 예수 님하고 저녁을 먹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날 밤은 지옥에서 잤는데 그 날 밤은 천당에서 잤다고도 말합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이 분은 그야말로 제트기 타고 천당에 간 모양입니다. 회개하는 그 날로 즉시 구원을 얻었습니다.
또 그것만 아닙니다. 이 강도는 예수 님의 육신 생활에 있어서 최후의 친구가 되어서 십자가의 최후 고난을 받으시는 예수 님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예수 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 사망의 고통을 당하실 때에 최후 순간에 주님의 마음을 위로해 준 이가 어디 있습니까? 제자들입니까? 여자들입니까? 아닙니다. 이 회개한 강도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예수 님께서 그 날 낙원에 들어 가셨는데, 예수 님께서 낙원에 들어가실 때에는 이 강도가 예수 님의 첫 동무가 되어서 예수 님과 같이 그 날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아마 예수 님께서 낙원에 들어가실 때에 천군 천사들이 할렐루야 찬송을 부른 줄 압니다. 예수 님께서 그렇게 고통을 당하시더니 저렇게 악한 살인 강도를 구원해 가지고 낙원에 들어옴으로써 하나님께 큰 영광과 찬송을 드린 줄 압니다.
여러분, 그뿐만 아닙니다. 이 강도의 회개야말로 모든 죄인에게 소망을 줍니다. 이와 같은 강도도 회개하여 구원을 얻었거늘 우리가 어떠한 자리에 있든지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실수를 하였든지 온전히 바로 회개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소망을 온 천하 만민에게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하면 여기 앉은 우리도 강도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 님 편으로 보면, 우리도 마음으로는 살인한 사람이요, 우리도 마음으로는 간음한 사람이요, 우리도 마음으로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도적한 사람입니다. 심각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도 이 강도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 강도를 구원하신 것은 모든 죄진 우리에게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실수를 하였든지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우리에게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하나님께서 기회 주시는 이 시간에, 온전히 주님의 십자가를 믿고 회개하고, 온전히 주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이 시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一九六0년 四월 三일)
Ⅲ-39 평화의 왕 (누가복음 十九장 二十八-四十절)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 十九·三十八)
이 말씀은 예수 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제자들과 모든 옹위(擁衛)한 무리들이 노래를 부른 찬송이올시다.
오늘은 부활절 전 주일이올시다. 옛날부터 흔히 오늘을 종려 주일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지키는 풍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을 기념하는 날로 특별히 지키기를 원하는 까닭입니다. 예수 님께서 갈릴리에서 여리고로 오셨겠고, 여리고에서 다시 험한 산골짜기 길을 거슬러 올라가서 베다니라고 하는 작은 마음에 이르게 되었겠고, 그 다음에 벳바게라고 하는 마을에 가기 전에 예수 님께서 두 제자들을 특별히 보내서 맞은 편 마을에서 나귀 새끼를 구하여 오도록 한 것이올시다. 그래서 이 벳바게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예수 님께서 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유월절이 가까워 온 까닭으로 예수 님 제자들뿐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대입니다. 아마 예수 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을 다 넘으셔서 겟세마네 동산 기슭으로 내려가며 기드론 시내쯤에 가게 된 다음에는 무리의 수가 더욱 많아진 모양이올시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 다시 시온산 언덕으로 올라가시면서 그리고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나가시게 될 때에 대동한 여러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혹은 나무 가지를 땅에 펴며 어린이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호산나로다 다윗의 자손이여』혹은『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는 왕이여』라고 노래를 계속하여 부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게 되니 성경에 기록한 대로 온 성이 소동하면서 이가 누구냐 라고 물어 보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때에 제자들과 여러 사람들은 이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오신 선지자 예수라고 대답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지금도 매년 이 종려 주일에는 이 벳바게라고 하는 작은 마음에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 곳에서부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의 찬송을 부르면서 감람산을 넘고 기드론 시내를 넘어서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예수 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가 있는 곳, 예수 님의 시체를 주었던 곳에 세운 기념 예배당까지 가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풍속이 있습니다.
독일에 한 작은 도시 오베라멀규라 하는 곳이 있는데 이 도시는 작은 도시이지마는 예로부터 벌써 매 십 년마다 예수 님께서 고난 받으신 것을 연극으로 실연을 해서 세계의 주목을 끌게 되었습니다. 바로 금년도 一九六o년으로서 이 작은 도회지에서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예수 님께서 어떻게 고난을 받으시고, 어떻게 장사되시고, 어떻게 부활하신 것을 실연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구경시키게 되는데 이 성극(聖劇)이 아주 유명하게 되어서,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관람객이 이 때에 이 작은 도회로 모인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수난극도 역시 오늘인 종려 주일 예수 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으로 시작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론 부활 주일 아침으로 그 극을 마칠 줄 생각합니다.
이 종려주일에 특별히 주목되는 것 한 가지는 예수 님의 태도입니다. 이 때까지는 예수 님의 가지는 태도는 항상 자기를 숨기려고 하는 태도였습니다. 별로히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태도가 보이지 안았습니다. 가령 병을 고치신 후에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예 이 소문을 내지 말라고 심심 부탁을 해서 보낸 적이 허다합니다. 어떤 때에는 많은 무리가 와서 예수를 보기를 원하고 예수의 교훈을 듣기 원하는 까닭으로 제자들이 조용히 기도하시는 예수 님께 나와서 무리가 찾는데 어서 돌아 가시자고 하는 부탁을 하였지마는, 예수 님께서는 그대로 하지 아니하시고 주가 다음 동리에도 가서 전도를 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다음 동리로 피하여 간 사실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보통 예수 님은 자기에 대하여 이와 같은 태도이었습니다.
이 종려주일에 대한 기록을 제 복음서에 있는 대로 자세히 읽어보면, 이 날의 예수 님의 태도를 그와는 정반대의 태도인 것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 님께서 베다니와 벳바게 마을에 가까이 와서는 자기가 제자들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면서, 어떤 곳에 가면 아직 한번도 타보지 못한 나귀 새끼가 있을 터인데 그 나귀 새끼를 끌어 가지고 오라고 친히 명령하셨습니다. 나귀를 가져온 후에 제자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등에 얹으매 자기가 친히 그 나귀에 타셨습니다. 그리고서 많은 무리들이 혹은 앞에 서고 혹은 뒤에 서며 혹은 좌우에 서서,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여럿이 환호하는 가운데, 조금도 사양하시지 아니하시고 그 모든 찬송을 받으시면서, 자기가 나귀를 타고 당당한 태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실입니다.
그뿐만 아니고 이렇게 제자들이『찬송하리로다 왕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말로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어떤 사람은 도에 넘치는 찬송인 줄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수 님을 향해서 하는 말이 그 제자들을 책망하시기를 바란다고 하며, 잠잠하게 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될 때에, 예수 님의 대답하신 말씀은『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그 사람들이 이렇게 찬송하는 것을 그치라고 하면 예루살렘 성곽에 있는 돌과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모든 돌들이 일시에 소리를 지를 것이라는 말씀으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주님의 태도에 대하여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예수 님께서 하나님께 대한 진리를 그의 교훈과 이적을 통하여 계시하셔서, 말하자면 예언자로서의 메시야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렇지마는 이제는 예수 님께서 마지막으로 입성한 이 때에는 왕으로서의 메시야를 예수 님께서 친히 나타내신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님께서 나귀를 타시게 되었습니다.
『시온의 딸에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탓도다.』기록한 이 말씀대로 나귀를 타시게 되었습니다.『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왕으로서의 찬송과 영접을 친히 받으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예수 님께서 이렇게 입성하셔서 한 주일 동안 성전을 중심하고 나흘 동안 가르치시다가 마지막에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 될 때에 빌라도가 심문하는 가운데 이런 말로서 심문하였습니다.『네가 그러면 왕이야?』이렇게 단적으로 물을 때에 예수 님께서 조용히 그러나 엄숙히 대답한 말씀은『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면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려 함이로다.』예수 님께서 분명히 자기가 왕이라고 하는 것을 빌라도와 다른 듣는 사람 앞에서 선포하셨습니다.
무지한 군인들은 예수를 모욕하고 조롱하기 위하여 홍포(紅袍)를 입혔습니다. 그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그 손에는 갈대를 잡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홍포, 이 가시 면류관, 이 갈대는 절대로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왕 되시는 메시야는 이 세상에 오셔서는 나귀새끼는 타셨고 홍포를 입으셨지마는 그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신 왕이올시다. 예수 님은 왕이 되십니다.
예수 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선지자만은 아닙니다. 예수 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어린양이오, 대 제사장만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셔서 모든 천국 백성을 다스리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분명히 메시야에 대한 이 진리를 가르쳐 준 것을 우리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九장 六절에는『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奇妙者)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기록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二十三장 五절에『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라는 말씀으로 기록이 된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예수를 메시야만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왕으로서의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예수를 만날 때에 예수 님께서『내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이미 너를 보았다.』고 하는 그런 말씀을 하실 때에 나다나엘이 과연 예수께서 메시야인 것을 믿고 곧 고백했습니다.『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그 때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가 왕으로 오실 것을 믿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十五장 二十五절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불가불 왕 노릇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님은 어떤 의미의 왕이 되시는가?
첫째는 신령한 의미에서 예수 님께서는 천국을 세우시고 천국을 다스리는 왕이올시다.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시기 직전에 예수 님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네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분부한 것을 다 가르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크신 권세를 가지시고 하나님 나라 건설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보이는 부분이 되는 이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어디든지 하나님 나라가 미치는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셔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천국이 건설 될 때에는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신령한 영적 통치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뜻만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곧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서 온 우주와 인류의 역사까지 다스리는 주님이올시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해서 온 우주를 다스리고 인간의 역사까지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벌할 자를 벌하시기도 하고, 축복할 자를 축복하시기도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며, 택한 자를 불러 구원하시고, 교회를 보호하여 주는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의 통치자가 되는 것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세상 끝 날에는 그리스도의 이 왕권을 온전히 세워서 요한 계시록 十一장 十五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세상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할 수 있는 그러한 때는 반드시 오게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천국을 완성하시고 이 천국을 영원히 통치하시는 왕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 十七장 十四절에 이런 말로 기록되었습니다.『어린양은 만 유의 주시오 만 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저희」는 악한 세력을 가리켰습니다.「악한 세력을 이기실 터이요.」또한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하신 그 말씀과 같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고 최후에 영원하신 통치자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만 왕의 왕이올시다. 비록 세상에 오실 때에 가장 가난한 가정에 나시고, 가장 보잘것없는 도회에 나시고, 세상에 잠깐 동안 계실 때에 갖은 고난을 당하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셨지마는,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이 십자가를 통해서 만 왕의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지 종려주일은 이와 같은 만 왕의 왕 되시는 예수를 영접하는 날이올시다. 예수 님은 옛날 멜기세덱과 같이 의의 왕이요. 또한 평강의 왕이올시다.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실 때에는 먼저 의가 있습니다. 먼저 죄를 없이 하여 주시고, 깨끗케 해서 의롭게 하시는 통치를 하십니다. 먼저 깨끗케 하신 후에 참된 평강을 주시는 평강의 왕이 되십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우리가 이 만 왕의 왕이 되시고, 평강의 왕이 되시는 예수를 영접합시다. 이와 같으신 주님은 우리의 마음 문 밖에 서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고요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과연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왕으로서 영접하셨습니까?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아직까지 이와 같은 주님을 내 마음 문 밖에 세워놓고, 그냥 내 마음속에 나 혼자 있어서 내 마음의 나라를 주장하는 분은 없습니까?
우리 가운데 예수 님을 조금 영접하기는 했지마는 마음의 중심 되는 왕 되신 예수 님을 보좌에 모시지 아니하고 아직까지 마음 한 옆 구석에 예수를 세워 둔 분은 없습니까? 마음의 중심인 그 보좌를 지금 누가 다스리고 계십니까? 과연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고 계십니까? 아직도 여러분의 욕심과 정욕과 온갖 죄악이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고 계십니까?
종려주일은 만 왕의 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날이올시다. 오늘, 우리가 마음 문을 넓게 열어 놓고 이 주님을 우리 중심에 영접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두 가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의 마음에 의가 있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깨끗케 하여 줍니다. 그 다음에는, 여러분의 마음에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참된 평화를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 문을 넓게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셔서 내 마음을 다스리게 하는 이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가정은 어떠합니까? 우리 가정에서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정의 왕으로 영접하였습니까? 과연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어서 우리를 다스립니까? 제가 작년에 마닐라에 가서 어떤 교회에서 설교하고 그 교회 장로요, 또 유명한 변호사 가운데 한 분인 어떤 분의 집에 초대받아 갔습니다. 그 집안에,『예수는 우리 짐의 주인이라.』하는 말을 영어로 아름답게 새긴 패를 붙인 것을 제가 보고 왔습니다.
과연 예수 님께서 우리 가정의 왕으로서 우리 가정의 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리십니까? 예수 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의 왕으로서 여러분의 가정의 보좌에 앉아 계십니까? 오늘 이 종려주일에 우리 교회의 가정마다 온전히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가정의 왕이 되시고 주인이 되셔서 우리 가정을 다스리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가정에 대해서도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옵니다.
먼저, 우리 가정을 의롭게 하십니다. 죄를 소멸해서 깨끗케 합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 가정에 참된 화평과 평강을 자져옵니다.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화평하지 못한 가정이 있습니까? 항상 불평이 충만하고 항상 불만이 있는 그런 가정이 있습니까? 아마 예수 님께서 그런 분의 가정에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온전히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게 하시고 왕이 되게 하셔서 우리 가정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면 의와 평강이 우리 가정에 항상 있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예수 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만일 예수 님께서 오늘 이 종려주일에, 이 서울에 들어와서 우리 서울의 이 백만 동포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성의 왕이 되시고 주인이 되셔서 이 성을 다스린다고 하면, 이 서울이 어떠한 서울이 되겠습니까? 지금은 이 서울은 그저 범죄와 불안과 공포와 온갖 추악한 죄악으로 가득한 도회라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의 이 서울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한다고 하면, 이 서울에 대해서도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첫째는 의로운 성이 될 것이요, 죄가 없어질 것입니다. 깨끗한 서울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참된 화평과 평강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 민족 전체, 우리 온 나라가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나라의 진정한 왕이 되시고 우리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면, 우리 국가 전체에 의와 평강의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종려주일은 그리스도를 우리 왕으로 영접하는 주일입니다.
제일 먼저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세상을 떠난 리빙스턴이 바로 세상을 떠나기 전날 아침, 아니면, 그 날 아침에 마지막 일기를 남긴 것이 있는데, 거기에 적혀 있는 간단한 기도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 것이 있습니다.『오! 내 주여, 내 왕이여.』이런 말로 기도를 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요, 자기의 왕으로 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충성을 다 하셨습니다.
오늘 이 의의 깊은 종려주일, 우리 하나 하나가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하고, 우리 온 나라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해서,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다 하는 축복이 같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一九六0년 四월 十일)
Ⅲ-40 부활한 생활 (마가복음 十六장 一-十一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三·一-二)
부활주일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사실,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올시다.
둘째는 미래에 있어서는 모든 인간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예표(豫表)와 확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날입니다.
그러나 셋째는 현재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적 부활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날입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은 특별히 현재 우리 믿는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는 영적 부활에 대해서 잠깐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 생활은 이 영적 부활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못박아 죽이고 같이 묻히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변화하여 새 사람으로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우리 신앙생활은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본래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에는 지금처럼 간단하게 세례를 베풀지 아니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을 여러분이 기억합니다. 그 때에는 세례 받는 사람이 물 속에 온전히 그 몸을 담그고 그 후에 물 속으로부터 다시 올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의미가 있습니다. 옛 사람은 물 속에 온전히 장사하고 새 사람으로 올라오는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사람은 옛 사람을 온전히 물 속에 장사하고 새 사람으로 부활하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밀 한 알에 대한 비유도 또한 여기에 적용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밀 한 알이 먼저 땅에 떨어져 묻히고 썩은 후에 그 속에서 새 싹이 변화되어서 땅 위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 생활이란 옛 사람은 떨어지는 밀 알과 같이 땅에 떨어져서 먼저 죽어야 하고 그 뒤에 새로운 생명이 새 싹과 같이 올라와야 우리의 신앙 생활이 온전히 시작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우리 믿는 사람들은 먼저 우리 육신에 속하는 모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그 다음에 새 사람으로 살아날 때에 참된 신앙 생활이 시작된다고 하는 뜻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간절히 권면합니다.『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치욕과 안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곧 우상 숭배니라.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들이니라.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온전히 벗어 버리라.』이와 같이 우리에게 간절히 권면하여 줍니다. 우리 신자의 생활은 온전히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못박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영적으로 부활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다음 마지막에 육신의 부활을 기다릴 것 없이 우리의 영혼이 먼저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말씀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한 은혜를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권면했습니다.
새 생명은 새 법칙 아래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밀 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고 변화해서 새 싹으로 나온 후에는 언제든지 위를 향해서 올라가는 것이 새 생명의 원칙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향상하는 것이 새 생명의 원리입니다. 여기, 벌레의 생활을 볼지라도 진흙 속에 있던 것으로 보기가 아주 험악하게 생긴 유충이 한번 변해서 날개도 나고 성충이 된 후에는 옛날과 같이 진흙 속에 그냥 묻혀서 살수는 없습니다. 나비가 되고 벌이 된 후에는, 맴이 된 후에는 진흙 속에서 더 계속해서 살수가 없고 맑은 공기 가운데서 살수밖에 없으며 다른 많은 꽃들과 아름다운 나뭇잎 사이로 날아다니면서 깃을 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생활을 하였든지, 아무리 부패한 가운데 빠졌었든지, 아무리 우리 심령이 죄악 가운데서 죽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사함을 받고 죽은 가운데서 그 영혼이 다시 부활하였다고 하면, 죽은 시체가 있던 어두움 속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죽은 송장이 입었던 수의를 그냥 입고 이 세상에 나와 다닐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두운 환경을 벗어날 것입니다. 수의와 같이 죽었을 때에 행하던 온갖 불의와 악독(惡毒)과 음란과 부정과 협잡과 모든 이 악한 행위는 온전히 벗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위에 있는 것을 찾아서 날마다 향상의 생활을 하는 것이 부활한 생활의 새로운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간절히 권면합니다. 우리가 과연 우리 영혼이 부활했으면 이젠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하며, 아래를 보고 땅에 있는 것을 찾지 말고, 항상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권명합니다. 음악 가운데도 위에 속하는 음악이 있고, 땅에 속하는 음악이 있습니다. 그림 가운데도 위에 속하는 그림이 있고, 땅에 속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문학 가운데도 위에 속하는 문학이 있고, 아래에 속하는 문학이 있습니다. 실업계에도 위에 속하게 실업을 할 수도 있고, 땅에 속하는 실업을 할 수 있습니다. 공무원이 되어서도 위에 속하는 공무원이 될 수가 있고, 땅에 속하는 공무원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떠한 방면에 살든지 우리의 심령이 과연 부활하였다고 하면, 내가 어떠한 방면에서 어떠한 곳에서 살며 활동하든지 그 속에서 위에 있는 것을 찾을 것입니다. 그 곳에서 거룩한 생활을 할 것이요, 그 속에서 참된 생활을 할 것이요, 그 속에서 화평한 생활을 할 것이요, 어디서나 진리를 찾고, 어디서나 아름다움을 찾을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과연 부활하였으면, 땅에 있는 것을 찾지 말고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이 앉아 계시 나니라.』이런 말씀으로 권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삶으실 뿐더러 四十일만에 승천해서 하나님 우편이 앉아 계십니다. 여기 특별히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하는 이유는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까닭입니다. 다시 말하면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하는 말은, 단적으로 말하면, 언제든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생의 최고 목표를 삼으라고 하는 그 말입니다.
물론 학생들에게 그가 이 다음에 커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어 보면, 여러 가지 대답을 합니다.『나는 커서 과학자가 되겠습니다.』『나는 예술가가 되기를 원합니다.』『나는 정치가가 되기를 원합니다.』『나는 의사가 되기를 원합니다.』『나는 종교가가 되기를 원합니다.』여러 가지 방면에 대한 포부를 가집니다. 이것이 다 귀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어떠한 사람이 되겠느냐? 어떠한 사람이 되어서 정치가가 되겠느냐? 어떠한 사람이 되어서 과학자가 되겠느냐?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인격의 목표를 삼으라고 하는 그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으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서, 그리스도의 생활로서 내 태도의 규범을 삼아서 항상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를 원하여 그리스도의 신명과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고, 내가 정치가도 되고, 실업가도 되고, 공무원도 되고, 과학자도 되고, 예술가도 되라는 그 말이올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의 최고 목표로 삼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권면하는 말씀이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이 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생의 최고 목표로 삼았으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잇느냐? 여기에 특별한 방법을 한 가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볼 때에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사도행전에 기록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접촉하고 내려온 후에 그 얼굴이 빛나서 감히 다른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을 바라 볼 수 없으므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었다고 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꽃이 어떻게 아름다워집니까? 항상 태양을 바라보는 가운데 혹은 붉어지고 혹은 노랗게 되고 혹은 보라 빛으로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입니다. 풀이 어떻게 자라고, 나무가 어떻게 자라고, 곡식이 어떻게 자랍니까? 항상 위를 향해서 태양을 보는 가운데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고, 곡식이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전에 다니엘이 비록 멀리 바벨론에 가서 종노릇을 하기는 하지마는 언제든지 예루살렘으로 향한 문을 열어 놓고 하루에 세 때씩 기도하듯이 우리 믿는 사람들도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위를 향해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생각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성품과 생각과 우리의 모든 생활이 점점 변화해서 그리스도를 최고 목표로 하는 그 이상에까지 도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려고 하면, 제가 항상 하는 말과 같이 특별히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묵상과 기도입니다.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신령한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연한 감화를 우리가 받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교훈을 직접 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직접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 심령 속에 전하여 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서 점점 이와 같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심령이 다 죽은 가운데서 과연 부활하였습니까? 여러분이 부활한 생활을 하십니까?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아직까지 옛 사람이 온전히 죽지 못하고 아직까지 옛 육신에 속하는 이가 있으면, 이 시간 먼저 십자가에 못박고 이 기쁘고 즐거운 부활주일 아침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이 여러분의 심령이 부활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생명이 부활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본래의 양심이 부활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그 내재의 모든 능력이 부활해야 됩니다. 그리고 부활하였습니까? 항상 위에 있는 것을 찾으며, 위에 있는 것을 바라보며,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며, 묵상과 기도로서 우리의 최고 목표를 향해서 매일 매일 발걸음을 앞으로 내어 디디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쁜 부활주일 아침에 우리 하나 하나의 심령이 부활의 축복을 받고 위를 향해서 한번 더 올라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一九六0년 四월 十七일)
Ⅲ-41 조국을 위하여 (느헤미야 一장 一-十一절)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一·四-五)
오늘 아침, 느헤미야 一장을 읽었습니다. 모든 선지자가 다 애국자이지마는 특별히 느헤미야는 직접 조국 건설에 헌신한 애국 선지자입니다. 본래 바사 수산궁에서 높이 등용되어 있었지마는 한번은 자기의 형제 중 하나인 두어 사람들이 자기의 조국 예루살렘을 다녀와서 그 곳 사정을 전하여 준 것입니다. 그 곳에 있는 동포들이 큰 환난에 빠졌고 모든 사람들에게 능욕을 받으며 성은 훼파(毁破)되고 성문은 소화되었고 하는 비참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느혜미야가 이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한 것은 친히 一장 四절에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혜미야는 이와 같은 비참한 소식을 듣고 세 가지를 하였습니다.
첫째는 조국을 위하여 울었습니다. 둘째는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셋째는 느혜미야 二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조국을 위하여 자기가 할 일을 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 세 가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국을 위하여 울라. 둘째는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라. 셋째는 조국을 위하여 내가 할 일을 다 하라.
먼저 그는 이와 같은 소식을 들을 때에 울었습니다. 수일 동안 슬퍼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눈물이 있습니다. 눈물은 급격한 감정에 휩쓸릴 때에 흔히 납니다. 그런고로 슬플 때에, 반면에 너무 기쁠 때에 눈물을 흘릴 수가 있습니다. 눈물은 누구나 때때로 흘리지마는 눈물은 인격의 척도가 또한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때에 눈물을 흘리는가? 장부비무루(丈夫非無漏)나 불새이별간(不새離別間)이란 옛 글이 있습니다.『장부가 눈물이 없음이 아니지마는 이별하는 사이에는 흘리지 않는다.』이런 말이 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가? 누구나 자기를 위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누구나 자기 가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민족 전체를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아니 인류 전체를 위하여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가? 느혜미야의 눈물은 나를 위한 눈물은 아닙니다. 자기의 가족을 위한 눈물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민족 전체와 조국을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눈물의 예언자란 이름을 가진 예레미야의 눈물도 자기 자신을 위한 울음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조국을 위한 울음이었습니다. 예수 님께서 감람산을 넘어 오시다가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오,『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부르짖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눈물도 역시 조국을 위한 눈물입니다.
예수 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올라가실 때에 많은 여인들과 여러 사람들이 같이 좇아오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집을 위하여 울라.』조국을 위하여 울라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였습니다. 생각하면 과연 조국을 위하여 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국 민족이 근 四十년 동안이나 일본 민족의 탄압 아래에서 많은 애국자들이 피를 이 땅에서 흘린 것입니다. 一九四五년 해방을 갖는 기쁨을 가졌지마는 천만 뜻밖에 국토는 양단 되어서 많은 이북 사람들이 여러 대를 이어 살던 고향과 산천을 떠나서 피난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一九五0년에는 六·二五사변이 일어나서 악독한 공산당의 남침으로 말미암아 수백만에 달하는 아까운 젊은 생명들이 이 땅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휴전된 지 七년 되는 금년에 이 땅에 또한 이와 같은 참변이 일어나서 꽃 같은 어린 학생들이 백여 명이나 이 땅에서 쓰러지고, 여러 백 명이 부상을 당하고, 이 젊은 사람의 피가 또 한번 우리 땅을 적시게 될 때에, 생각하면 얼마나 비통하고 참혹한 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너와 네 집을 위하여 울라.」울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감정에 휩쓸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울라고 하는 말은 얼마나 아픈가를 깨달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일이 얼마나 큰 것을 깨달아서 이런 일이 다시 이 땅에 일어나지 않도록 맹세를 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울라고 하는 말은 조국을 극진히 사랑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눈물이 없습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찌 이런 때에 피눈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느혜미야는 조국을 위하여 울었습니다. 그러나 우는 것만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읽어보니 느혜미야는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느례미야만 조국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도 단순히 조국을 위하여 운 것만 아닙니다.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다니엘도 조국을 위하여 망국의 설음을 표시하기 위해서 울은 것만 아닙니다.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선지자 다니엘은 자기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것은 큰 범죄로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조국을 위하여 기도합니까? 우리가 오늘 아침에 다 우리 조국을 위하여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절감한 마음으로 이 민족과 이 겨레를 위해서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다른 민족과 같이 살 수 있는 민족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까? 기도를 하면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두 사람이 기도하려 성전에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세인이요,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별로 기도한 것이 없습니다. 그 엄숙한 자리에 가서도 자기를 자랑한 것밖에 별로 없습니다. 오직 세리만이 자기의 가슴을 두드리며 자기의 죄를 자복 하였습니다.
느혜미야의 기도를 一장에서 읽어보았습니다. 여기 보니 느혜미야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와 나의 아비의 집이 범죄를 행하였습니다. 우리가 다 같이 심히 악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우리는 다 계명과 율례(律例)와 규례(規例)를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이 죄는 자복 합니다.』회개와 참회와 자복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니엘도 예루살렘을 향하는 문을 열어 놓고 기도할 때에 다니엘 九장 五절에 이런 말로 기록하였습니다.『우리는 이미 범죄 하여 패 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아오며』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죄를 회개할뿐더러 자기 민족 전체의 죄를 대신 회개하면서 민족 전체를 대표해서, 말하자면 민족의 대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민족의 죄를 잡고하며 용서하여 주기를 호소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립니까? 여기 특별히 무슨 죄를 자복하였습니까? 주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않은 것을 자복하였습니다. 주의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않은 것을 자복하였습니다. 주의 계명과 율례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을 통하여 주신 도덕의 법과 하나님께서 그 시대 그 시대에 적당하게 주시는 국가의 법률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신 도덕의 법도 지키지 못하고 국가의 법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법을 지키지 않고 범한 것을 여기에 자복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경이 죄는 무엇이라고 정의하여 주시는지 아십니까? 요한 一서 三장 四절에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곧 불법이라.』죄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불법한 일을 하는 것이 모든 죄입니다. 불법이 많은 곳에 불평과 불만이 생기고, 불평과 불만이 쌓이는 곳에 울분한 마음과 원한이 생기고, 울분한 마음과 원한이 터질 때에 여러 가지 불상사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법과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해야 됩니다.
우리 민족은 이와 같은 비통한 사실을 앞에 놓고 위정자를 비롯해서 일반 국민에게 이르기까지 나의 불법한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깨끗한 민족이 되는 이런 계기가 되어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어린 생명들의 피 흘림이 결코 헛된 데 돌아가지 아니하고 이 흘린 피야말로 민족의 죄를 대신 속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깨끗한 희생의 제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불법의 죄를 회개하면서 우리가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더욱 중한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이 때에 반성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이 세상에 두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금으로 이 사회에 두셨지마는, 과연 우리 믿는 사람들이 정계에 갔으면 정계에서, 관청에 갔으면 관청에서, 사업장에 있으면 사업장에서, 교육계에 있으면 교육계에서, 그 자리에서 과연 빛과 소금의 직책을 하였습니까? 깊이 반성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특별히 우리 교직자들, 목사들이나 장로들도 특별히 반성하고 회개하여야 되겠습니다.
이상합니다. 一九五0년에 대구에서 총회가 모였을 때에 목사와 장로들이 크게 싸움을 하면서 그 후에 교회가 분열되더니 그 해로 六·二五참변이 생겨서 우리 민족에 큰 화를 끼쳤습니다. 작년에도 대전서 모여서 여러 가지로 쓸데없는 문제를 가지고 싸우며 분쟁을 하더니 결국은 도처에서 교회를 분열시키며, 이런 일이 있더니 이상스럽게 금년에 들어서 서울역의 큰 변을 비롯하여 오늘날 이런 참변이 우리 민족에게 미쳤습니다. 이것이 결코 우연하게 보이지를 아니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 민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우리 민족의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자복하는 민족의 대 제사장의 직분이 있는데 이런 사명을 지닌 우리 믿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이 민족의 살 길이 어디 있습니까? 깊이 반성하면서 우리가 회개의 기도를 들여야 되겠습니다.
셋째로『조국을 위하여 네가 할 일을 하라.』사도 바울이 다메섹에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 님을 만나 회개한 다음에 제일 먼저 드린 기도가『주여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란 그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가지고 얼마 전 게스와인 목사께서 본 교회에 오셔서 설교도 하였습니다. 회개한 사람이 드릴 기도는『주여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과연 내 죄를 회개했다고 하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 드릴 기도는,『내가 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입니다.
이 대답은 성경에 분명히 해 주었습니다. 미가서 六장 八절을 보면『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사는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은 예수 님 말씀과 꼭 같습니다. 예수 님 말씀에 마태복음 二十三장 二十三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화 있을찐져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며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의는 공의요, 인은 인자요, 신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공의를 행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회개한 사람에게는 이 앞으로는 온전히 정의대로 공의대로 할 것입니다. 상계에도 공의가 있어야 됩니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도 공의가 있어야 됩니다. 정치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선거에도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공의가 이 앞으로는 있어야 되겠습니다. 인자를 사랑하라고 그랬습니다. 죄인에게는 용서로 인자가 나타납니다. 불행한 사람에게는 긍휼로 나타납니다. 피차 평신도간에는 친절과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민족이 좀더 공의를 행하고 좀더 피차에 인자하였던들 이런 일이 설마 있었을까 생각이 됩니다. 겸손히 주와 동행하라고 그랬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며 하나님과 의논해서 무엇을 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겸손히 순복해서 살라고 우리에게 말씀했습니다.
조국을 위해서 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조국을 위하여 내 죄를 회개하며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조국을 위하여 내가 할 일을 다 해야 되겠습니다. (一九六0년 四월 二十四)
Ⅲ-42 회개와 새로운 날 (사도행전 三장 十一-十六절)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三·十九)
먼저 하나님께 감사함을 드립니다. 또한 여러분께도 감사함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는 가운데서 또한 여러분께서, 많이 기도하여 주시는 가운데서, 이 부족한 사람이 그 동안 먼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지난 수요일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먼저 서인도 제도 가운데 하나인 발베이도스(Barbados)라고 하는 섬에서, 그 곳 온 섬으로부터 온 목사들을 중심해서 수양회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남미로 내려가서 컬럼비아라고 하는 나라 베델린(Medellin)이라고 하는 곳에서, 컬럼비아에서 온 교역자들과 또한 남미 열 한 나라에서 온 교역자들이 합해서 수양회를 마치고, 본인은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보고는 오늘 저녁에 잠깐 드리려고 생각합니다.
또 이 자리에 설 때에 하나님 앞에 더욱 감사함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동안 우리 국내 정국을 크게 새롭게 하여 주신 이 사실이올시다.
그 동안 제가 외국에 있으면서 우리 국내 정세가 국제적으로 반영되어 가는 형편을 잠깐 동안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젊은 학도들의 애국심, 그들의 정의감, 그들의 희생의 정신은 세계 만방에 빛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혁명을 통해서 우리 한국민족은 오래 동안 불법과 불의에 그냥 있을 수는 없고 언제든지 자유와 독립을 성취할 수 있는 민족이라고 하는 것을 또한 세계에 나타내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하였습니다. 더욱이 이번의 의거와 민주 혁명은 오직 해방된 이후에 교육을 받고 일어난 새 세대의 젊은 사람들의 공헌으로 이루어진 사실로서, 우리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 보다 더욱 더 튼튼한 촉망을 각자가 가지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마는 우리가 이러한 때에 우리 국빈으로써 또한 믿는 사람으로서 항상 기억할 것은 몇 가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국제 정세는 바야 호로 더욱 중대한 위기를 당하고 있는 이러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아직까지도 분단이 되었고 자유를 유린하고 자기의 야심을 채우려고 하는 악한 공산당들은 언제든지 호시탐탐해서 우리 남한을 엿보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우리는 국제적으로 새 나라를 건설할 수밖에 없는 중대한 과제에 당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때에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지 아니하리 오 마는 더욱 이러한 때에 깨어 기도해야 되겠고, 범사에 근신해야 되겠고, 지혜는 뱀과 같이 하고 순하기는 비둘기와 같이 하며 모든 질서 회복과 새 나라 건설에 적극 협력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입니다.
이제 잠깐 인사의 말씀을 드리고 오늘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사도 행전 三장 十九절을 다시 봉독 하고자 합니다.『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이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후에, 모인 사람들을 향하여 외친 설교 가운데 한 부분이올시다.
여기에 간단히 세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우선「회개하고 돌이키라」고 하는 말씀, 둘째는 이렇게 해서「죄 사람을 받으라」하는 말씀, 셋째는 이렇게 하면「유쾌하게 되는 날」혹은 상쾌하게 되는 날 혹은 좀더 알아듣기 쉽게 새로운 날이 주님께로부터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장쾌하게 되는 날, 새로운 날이 이를 것인가? 회개하고 돌이켜서 죄 없이 함을 받을 때에 이와 같은 날이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회개는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에 문자 그대로 천국의 문이올시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요단 강가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외친 말씀이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또한 일을 시작하실 때에 역시 같은 말씀으로 외치셨습니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기약이 이르렀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회개의 좁은 문을 들어가지 아니하고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이 회개는 교회 부흥의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 요한 에게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말씀하실 때에 열심을 내어서 회개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온 교회가 열심히 죄를 회개할 때에만 새로운 부흥의 은혜가 미칠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에 회개야말로 국가 부흥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보면 옛날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번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에스겔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이스라엘 족속아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혹은 다른 선지자를 통해서『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며 회개하라.』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회개는 교회 부흥의 근본이 될뿐더러 일반적으로 민족 부흥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무슨 뜻입니까? 물론 우리가 이 뜻을 다 알지마는 어떤 때에는 우리가 회개의 근본 뜻을 잊어버릴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다음에는 누구든지 후회를 합니다. 내가 그 죄를 짓지 아니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뉘우칩니다. 죄 지은 데 대해서 섭섭한 감정이 일어납니다. 이 후회는 물로 회개의 첫 걸음이 될 수도 있지마는 이렇게 후회하는 그 자체가 회개를 아닙니다.
술 먹고 주정을 하고 나쁜 일을 한 사람도 그 후에 물론 후회는 합니다. 그러나 후회만이 회개는 아닙니다. 다른 기회가 있을 때 또 먹습니다. 음란방탕한 사람도 그와 같은 일을 한 후에 물론 안 했으면 좋을 번하였다고 그것을 후회합니다. 그렇지만은 후회만은 회개가 아닙니다. 심한 살인 강도도 악한 일을 저지른 후에 후회는 다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신물을 볼지라도 살인 강도들이 마지막에는 다 안 했으면 좋을 번하였다고 후회하는 말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후회만은 온전한 회개는 아닌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를 은 三十냥에 팔은 후에 후회는 하였습니다. 얼마나 후회하고 섭섭하게 생각하였든지 스스로 목매어 자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후회가 유다를 구원하지 못하였습니다. 후회는 회개는 아닙니다.
단순히 후회에만 그치는 것은 후회가 심하면 자기 육신을 줄일 수 있고, 그 후회가 심하지 아니하고 한번 후회하고 그 다음에 기회 있을 때 또 죄짓고 후회하고, 그러나 그 다음에 기회 있으면 또 죄짓게 되어 그와 같은 후회는 점점 약해져서 마지막에는 암만 죄를 지어도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감각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영혼이 죽게 됩니다. 후회가 회개의 첫 발걸음이 될 수는 있지만 거기에서 멎으면 아무 쓸데없습니다.
회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죄를 지은 다음에 죄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이 들어옵니다. 죄를 지은 다음에는 공포심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죄를 지은 다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무서워하였습니다. 무서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나타날 때에 숨었습니다. 다른 데로 피하였습니다. 죄 지은 다음에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 두려움 마음도 회개의 한 걸음이 될 수는 있지마는 두려운 마음 자체가 회개는 아닙니다.
전에 애굽 왕 바로가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릴 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회개는 하지 아니하고 그의 마음은 더욱 강퍅하여졌다고 말하였습니다. 죄는 지은 다음에 두려운 생각이 나게 하는 것도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그런 생각이 나게 하건마는 단순히 두려운 마음에 그쳐서 그 다음에 다른 기회가 있으면 죄를 짓는 이와 같은 두려움은 아무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공포심만은 회개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회개란 어떤 것입니까? 자기가 죄를 지은 다음에 그것이 온전히 죄인 줄 알아서 후회할뿐더러 죄는 반드시 값이 있는 줄 알아서 죄를 무서워할뿐더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죄는 이와 같은 것이니 내가 이 죄에서 떠나겠다는 태도로 온전히 마음을 고치고 마음을 변경해서 돌아서는 것이 온전한 회개입니다. 참 회개는 회심이라고 합니다. 혹은 요즘 말로 자기가 가던 길을 백 팔십 도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탕자의 비유를 기억합니다. 이 탕자가 많은 분 깃을 가지고 자기 아버지와 집을 등지고 멀리 떠나서 다른 나라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허랑 방탕하면서 모든 소유를 허비합니다. 그렇게 한 후에 갑자기 그곳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 탕자가 후회하였을 줄 압니다.
『내가 우리 아버지 집에 있었다면 좋을 것을, 그만 이렇게 나와서 재산 다 없어지고 흉년 들어서 먹을 것 없으니, 이거 어떻게 하면 좋겠나.』마음 가운데 후회한 줄 압니다. 그러나 후회만은 온전히 회개는 아니었습니다. 할 수 없어서 마지막에는 어떤 돼지 먹이는 집에 가서 돼지를 쳐주었습니다. 흉년이 되어서 먹을 것이 넉넉지 못하니 돼지 먹는 것을 함께 먹지만 배는 고팠습니다. 이럴 때에 더욱 후회하는 생각이 나고 이렇게 되다가는 굶어 죽지 않겠나 하는 두려운 생각도 마음 가운데 일어난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직 회개는 아닙니다.
이와 같은 환경을 당해서 자기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아, 우리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고, 우리 아버지 집에는 품꾼이 많고, 우리 아버지 집에 있는 품꾼도 배를 곯지 아니하는데, 나는 여기 있어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자기가 감히 아들로서 돌아갈 수 없지마는 이제라도 돌아가서 품꾼으로라도 써 달라고 간청하겠다고 하는 결심을 하고 돌아서서 아버지 계신 곳을 향해서, 부모 계신 곳을 향해서 아버지 집으로 올 때에 그것이 온전한 회개입니다. 회개는 후회만이 아닙니다. 죄를 두려워하는 것만 아닙니다. 온전히 죄가 어떤 것인지 깨달아서 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 서서 옳은 길로 가는 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우리 인생의 생활이 길을 가는 것과 같지 아니합니까? 그래서 인생여로란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나그네의 길을 가는 것과 같지 아니합니까? 우리가 다 어떠한 방향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향해서 가는 내 가는 내 생활의 길이 옳은 길이냐, 옳지 아니한 길이냐? 이 길이 생명의 길이냐, 이 사망의 길이냐? 이 길이 천당으로 인도하는 길이냐, 지옥으로 인도하는 길이냐? 잠깐 멈추어 서서 내 길을 살펴보아야 되겠습니다. 가만히 살펴 볼 때에, 내 가는 길이 비록 지금은 평안하고, 지금은 세력도 있어 보이고, 지금은 영광도 있어 보이고, 지금은 모든 것이 평안해 보이지마는, 결국은 사망이요, 지옥이요, 파멸인 것을 만일 깨닫게 되었을 때 더 지체할 것이 있습니까? 그 길에서 동아서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길에서 돌아서서 방향을 변화해서 생명의 딴 길을 가는 것이 바로 온전한 회개입니다. 이 길을 스스로 가신 이는 이 시간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가는 길이 과연 생명의 길이냐? 내가 가는 길이 과연 의의 길이냐? 내 길을 바로 살펴서 내 현재의 가는 길이 옳지 못한 길이면 그 자리에서 돌아서는 이것이 참 회개입니다.
이와 같이 온전히 가던 길을 돌이켜서 생명의 길로 돌아서는 그런 사람에게는 여기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죄 사함이 있습니다. 탕자가 멀리 가서 많은 죄를 지었지마는 아버지 앞에 돌아와서 그 죄를 고백하고 아버지의 품에 안긴 다음에는 다시 전에 지은 죄를 아버지가 묻지 아니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죄 대신 져 주셨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죄 사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다. 참 회개가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옛날 유대 사람의 역사를 보면 구약 시대에는 어떤 사람이든지 죄를 지으면 온전히 죄를 회개하고 돌아 설 수 있도록 과거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있은 후에는 제사를 다시 드릴 필요는 없지마는 주님의 십자가가 나타나기 그 전에는 제사를 드리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유대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온전히 회개하지 아니하고, 제사만 드리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이 점점 머리 속에 이런 오해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는 않으면서, 죄는 온전히 회개하지 아니하면서 죄는 그냥 지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많은 제물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굉장히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향을 보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어떻게 책망하셨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돌아가셔서 이사야 一장을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 하뇨?』『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참 회개가 없는 제물은 헛된 제물입니다. 참 회개가 없는 예배는 헛된 예배입니다. 참 회개가 없는 교회 출석은 헛된 출석입니다.
요사이 어떤 사람들은 어떤 정통적 신조를 바로 깨달아서 그대로만 꼭 믿으면 죄 사함을 얻는 줄 압니다. 모여서 어떤 신조를 바로 깨닫는다고 죄를 사함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온전히 회개가 없으면 정통 신앙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며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惡業)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며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내가 가는 길이 옳지 못한 것을 깨달으면 거기서 온전히 변해서 새 길을 따릅시다. 참된 개회가 있는 곳에만 죄 사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우리의 생활을 스스로 자성하지 아니하리 오 마는 특별히 이와 같은 때에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며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내 생활을 스스로 반성하고 마땅히 내가 옳은 길을 걸어 왔는가, 그른 길을 걸어왔는가? 내가 교회에 물론 이름은 두었고 내가 교회에 이따금 출석은 하였지마는 과연 내가 바로 죄를 회개하면서 교인 생활을 하였는가? 스스로 반성할 때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과거 부패한 정권 아래 살면서 부패한 사회 가운데 참으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불법과 불의에 대하여 강하게 싸우기 못한 죄도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강하게 싸우지 못할뿐더러 이런 죄를 묵인하고 동참한 모든 죄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모든 한국 민족이 평화를 원하고 통일을 원하는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독선주의와 교만과 당파심과 비방심(誹謗心)과 완고(頑固)와 고집으로써 분쟁과 분열을 일삼는 모든 우리 교회 안의 죄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먼저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 죄악 많은 세상, 부패한 세상 가운데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고 우리를 두었는데 우리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 죄를 누구나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남의 죄를 보려고 하지 말고 먼저 내 죄를 각각 보아야 되겠습니다. 남의 죄를 보려고 하지 말고 먼저 내 죄를 각각 보아야 되겠습니다. 남의 눈의 티를 뽑으려고 애쓰지 말고 내 눈의 들보를 빼기 위해서 먼저 애써야 되겠습니다.『내 형제들아,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님께로부터 이르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과연 과거에 어떠한 길을 걸었든지, 어떠한 잘못을 하였든지, 온전히 과거를 청산하고 그릇된 길을 바로 가는, 참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의 속죄가 우리 마음속에 임할 것이요,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을 때에는 우리 마음속에 주님께서 임하시고 성신께서 임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속에는 새로운 기쁨과 새로운 평화와 새로운 축복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날이 우리 마음속에 임할 것입니다. 또한 윌 교회도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과거에 어떠한 길을 걸어 왔던지 우리가 이제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과거의 모든 잘못한 것을 회개하고 온전히 돌이켜서 바른 길을 걷는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과거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 한국 교회에 새로운 부흥과 새로운 날을 반드시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 주님께서 임재(臨在) 하시고 성신께서 임재 하실 때에 한국교회는 새로운 전기(轉機)를 이룰 것입니다.
여러분, 온 세계는 한국 교회가 은혜 받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 교회는 과거에 많은 핍박을 받아 왔습니다. 한국 교회는 과거에 많은 희생을 하여 왔습니다. 이와 같은 교회가 가장 빛나는 증거를 요구하는 이 때에, 은혜 받기 위해서, 온 세계 교회가 가는 곳마다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여러분, 이 회개 운동이 우리 한국교회에서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개인으로도 그렇고, 가정으로도 그렇고, 교회로도 그렇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간구 할 때에, 하나님의 새로운 날이 한국교회에 임할 줄 믿습니다.
사실 우리 한국 전체를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되었다고 반드시 새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딴 사람이 정부에 들어갔다고 반드시 새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기구가 변했다고 그것이 새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남미에 다녀왔지만 남미와 중미에는 민주주의 나라가 큰 자라와 작은 나라를 합해서 스무 나라가 있습니다. 이 스무 나라 가운데 언제든지 한 나라에서는 혁명이 늘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혁명이 끝 날쯤에는 저 나라에 혁명이 있고, 또 다른 나라에서 혁명이 있고 여러 나라에서 혁명이 계속 일어납니다. 한 나라에 三, 四년 있다가, 어떤 때는 五, 六년 있다가 혁명이 또 한번씩 일어납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 아십니까? 어떤 사람이 들어가서 정권을 잡습니다. 처음에는 잘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며칠이 안 가서 부패해지고 맙니다. 그러면 또 혁명이 일어납니다. 딴 사람이 들어갑니다. 몇 해 있습니다. 또 부패해집니다. 또 혁명이 일어납니다. 결국 도덕 수준이 높고 민족 전체가 좋은 사람이 되어서 대다수가 선한 사람이 되어야 그 나라가 바른 나라가 됩니다.
결국은 우리 민족이 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축복을 받겠느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온전히 회개하고 새 민족이 되기 전에는, 항구적 평화가 있는 나라를 건설할 수 없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회개하여야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도 새로운 날이 올 것입니다. 이 회개는 먼저 나로부터 시작해야 되겠습니다. 내 가는 길이 옳은 길이냐, 내 생각이 옳은 방향이냐? 이것이 주님께로 가는 길이냐? 나로부터 회개해서 내 마음속에 새로운 축복이 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一九六0년 五월 二十二일)
Ⅲ-43 영원히 거하는 생활 (요한一서 二장 十二-十七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二·十七)
다른 곳에 있는 성경 중 몇 곳을 보겠습니다.『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오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린도 후서 四장 十八절이올시다.『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베드로 전서 一장 二十四-二十五절인데 본래 이사야 四十장 八절의 인용이올시다.
이 세 성경 구절 가운데서 우리는「영원」이라고 하는 말 또는「세세토록」이라는 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같은 말씀이올시다. 잠간이라고 하는 말과 영원이라고 하는 말, 마르고 혹은 떨어진다고 하는 말과 세세토록 있다고 하는 말, 지나간다고 하는 말과 영원이라고 하는 말이 대조되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잠깐 되는 것도 있는 반면에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마르고 떨어지는 것이 있는 반면에 세세토록 있는 것도 있습니다. 지나가는 것이 있는 반면에 영원히 있는 것도 또한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 선생이 고린도 후서 四장 十八절에서 교훈 한 말씀을 생각해보면『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오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이 우주에는 보이는 존재가 있고 보이지 아니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해는 볼 수 있습니다. 밤에 달도 볼 수 있습니다. 무수한 별들도 볼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대 자연계는 볼 수 있습니다. 산도 볼 수 있고 바다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볼 수 있는 것만 우리가 볼 줄 알면 아니 됩니다. 이 볼 수 있는 것 배후에 볼 수 없는 이가 계십니다. 곧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물질 세계와 하나님을 비교해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물질 세계보다도 먼저 계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는 시작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셔서 무시무종(無始無終)하신 하나님이올시다. 이 물질 세계는 끝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끝이 없습니다. 무종 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올시다.
세상 나라와 그 권세와 그 영광은 사람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나라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영원한 무궁한, 시간에 비하면 잠깐 있다 없어지는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있습니다.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 보이는 부분이 있고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입은 옷은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사람의 그 속에 있는 영혼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한 아는 것은 보이는 육신은 잠간이요,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은 영원히 불멸한다고 하는 것도 우리는 잊지 아니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거하는 생활을 하려면 보이는 것만 돌아보아서는 되지 않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돌아 볼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찾을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성경은 하나님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나 온 우주에 충만하시고도 남으시는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우리가 과학만 공부할 것이 아닙니다. 종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바라 볼 줄 알아야 영원히 거하는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주님께서는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영원히 있는 하나님의 나라, 영원히 있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한 것입니다.
영적 생활을 돌아 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육신 생활에 필요한 의식주(衣食住)만 볼 줄 알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의 심령의 생활에 필요한 소망, 사랑도 있어야 할 것을 우리가 알고, 반드시 영적 생활을 위해서 없으면 아니 될 이 세 가지를 북돋우기 위해서 각별한 노력을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실재를 찾고 실재를 구하려고 노력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 또한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거듭 주시는 이 말씀,『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나니라.』우리가 이 교훈도 반드시 받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옛날 애굽의 권세와 영광을 읽은 바 있습니다. 그 모든 찬란한 문화와 영광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보면 그 찬란한 문화와 그 굉장한 권세도 지금은 다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페이지를 통해서 옛날 바벨론의 권세와 문화와 찬란한 영광을 또한 읽는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와서 보면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는 고적 몇을 내어놓고는 다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떨어진 것을 우리는 목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옛날 로마의 권세와 그 문화와 그 영광을 또한 읽고 기억하는 바입니다. 그렇지마는 오늘날 보면 역시 다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외국 역사를 살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한국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고구려의 권세와 그 문화와 영광의 시대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백제의 권세와 그 문화와 영광의 시대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통일한 신라의 그 권세와 문화와 영광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고려조의 찬란한 문화를 또한 기억합니다. 우리는 이조의 권세와 문화와 영광도 다 기억합니다. 그렇지마는 오늘날 와서 보면 거의 다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떨어진 것을 우리는 목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주님 말씀은 세세토록 또한 있는 것을 우리는 목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산 것을 우리는 목도합니다. 공의는 나라를 흥하게 하고 죄는 나라의 수치가 됩니다.『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스스로 속이지 말고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심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거두리라.』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흥망성쇠의 인간 역사 위에 무지개와 같이 옛날이나 오늘이나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니라.』『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니라.』『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잊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이 천년 전이나 천 년 전이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고 죄 있는 인간에게 밝은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이 아닙니까? 과연 육신에 속하는 모든 것은 풀과 같이 마르고 육체에 속하는 모든 영광은 꽃과 같이 떨어지지마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주님의 말씀은 시대가 변하였지마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지나가지마는 지나가는 바가 없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변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진리의 빛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히 거하는 생활을 하려고 하면 꽃과 같이 떨어지는 이 세상에 근거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히 서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생활의 근거를 두어야 될 것입니다. 일시 일시 변하는 인간의 명상이나 인간의 사상에 두지 말고 변하지 아니하는 우주의 지표 적 진리가 되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생활의 근거를 두고 살아야 될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북경 구경을 한번 했습니다. 고궁을 구경하고 별궁도 여러 곳에 가서 구경하는데, 한 곳에 아니까, 그 안내자가 하는 말이 아름다운 궁궐 가운데 어떤 한 방을 가리키면서 그 방이야말로 청조 말기에 가장 사치하고 호화롭고 세도를 부리던 서태후(西太后)가 살던 방이라고 합니다. 그 방에 들어가 보니, 아무 것도 없고 낡은 침대 하나 있고 그 위에 베개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안내자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렇게 호화롭고 그렇게 사치하고 그렇게 세도하던 서태후가 마지막에 남기고 간 것은 그 베개 하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갑니다. 세상의 권세도 지나갑니다. 세상의 영광도 지나갑니다.
제가 이번에 미국에 가서 三十여 년 전에 제가 졸업한 대학을 한번 더 방문하는 혜택을 가졌습니다. 집은 여전합니다. 캠퍼스도 여전합니다. 오히려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집도 여러 개를 더 지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가운데 한 가지 섭섭한 것은 三十여 전에 저를 가르쳐 주던 은사는 볼 수 없고, 다만 이 도회에 아직까지 살아 남아 있는 은사는 八十노인 벤더벨드 박사라고 하는 한 분뿐이었습니다. 여러 은사들은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은 지나가는 세상입니다.
제가 이번에 석 주일 남짓하게 한국을 떠나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잠깐 다녀온 셈입니다. 돌아와서 서울을 들어오게 될 때에 한 가지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상은 삼각산은 여전합니다. 한강도 여전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정계를 보면 완전히 변했습니다. 옛 정부는 지나갔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지나가는 것입니다.
정권뿐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와 같이 자나갑니다. 권세도 지나가고, 일대의 문화도 지나가고, 예술도 지나가고, 주의와 사상도 지나가고, 모든 유행도 지나갑니다. 너무 유행만 따르지 맙시다. 시국도 지나갑니다. 너무 시국에 들떠서 부화뇌동하지 맙시다. 어떤 이들은 요즘 데모만능인 줄 생각합니다. 청춘도 지나갑니다. 청춘을 자랑하지 맙시다.
제가 六·二五때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한 두 곧 따라갔습니다. 저는 서성리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라고 그래서 서성리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며 설교를 했습니다. 옛날 이야기니까 이런 말해도 괜찮을 줄 압니다. 예배를 다 보고 여러분을 인사하는데 좀 알 분도 있고 모를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캄캄하고 자그마한 어떤 할머니가 저한테 인사를 하면서 목사님 절 알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를 좀 많이 당합니다. 암만 생각해야 생각이 안 납니다. 그래서 미안하지마는 저는 정신이 없어서 미쳐 생각이 안 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하는 말이『저를 모르겠어요? 저는 저 남산 모루, 전에 목사님이 남산 모루에 와 계시지 않았습니까? 거기 있을 때 그 교회에 다니던 아무개올시다.』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 四十년 전에 그 남산 모루에서 알던 그 아무개는 얼굴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얼굴을 한 잘 생긴 여자 가운데 하나로 저는 생각했었습니다. 그랬는데 三, 四十년 후에 보니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청춘도 지나갑니다. 세상만 지나가는 것이 아입니다. 정욕도 지나갑니다. 우리 속에 있는 욕망도 연령을 따라서 지나갑니다. 어릴 적에 있던 욕망이 좀 크면 사라집니다. 청년 시대의 욕망이 노년이 되면 지나가고 맙니다. 우리의 정욕도 환경의 변함에 따라고 또한 변합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세상에서 지나가는 욕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나가지 아니하는 것을 여기에 한 가지 말씀했습니다.『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인간 역사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개인 생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옛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가운데도 창천이 유의 생남자(蒼天이 有意 生男子)란 말이 있습니다. 푸른 하늘이 뜻이 있어서 남자를 내었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우리를 이 땅에 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뜻을 찾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경륜대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서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고 거하겠다고 여기에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전에 제가 평양에서 학교에 다닐 때에 흔히 대동강변 그 청루벽 아래와 모란봉과 을밀대와 그런 곳이 자주 산보하였습니다. 산보를 할 때에는 가끔 이런 생각이 납니다. 대동강의 물결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또 항상 끊임없이 아래로 흘러갑니다. 그렇지마는 한편에 높이 속은 모란봉이나 을밀대 청루벽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냥 우뚝 서서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물결과 같이 흘러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이 만세 반석 위에 생의 근거를 둔 사람은 영원히 거하는 것이올시다.
그래서 영원히 거하는 생활의 비결은 첫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바라 볼 줄 알아야 됩니다. 둘째는 영원한 주의 말씀에 근거를 두어야 되겠습니다. 셋째는 영원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야 되겠습니다.
제가 벌써 二十세기 초엽에 나서 거의 반세기 이상을 살았습니다. 시대의 변천도 무수히 제 눈으로 목도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물론 일본 시대에도 살았습니다. 해방된 다음에 잠깐 동안이나마 공산당 시대에 북한에서 살았습니다. 그 다음에 남한에 내려와서 군정 시대에 살았습니다. 또 이승만 박사 정권 시대에 살았습니다. 지금, 이 과도 정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일본 시대에 살면서 보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 시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할 수 있는 대로 일본 사람처럼 살려고 하고, 말도 일본말만 자꾸 하고, 풍속도 일본 풍속을 따르고, 의복도 일본 의복을 자주 입고, 이렇게 살던 사람들을 상당히 많이 보았습니다. 일본 시대가 지나갈 때에 일본시대와 같이 그런 사람도 다 지나갔습니다. 몰락되었습니다.
이북에는 아직까지도 공산당 시대입니다. 공산당 하는 대로 살아야 하겠다고 거기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을 따라가고 그들에 아부하며 그들의 뜻대로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는 줄 압니다. 분명히 알 것은 공산당 시대도 반드시 지나갈 터인데 그 때에 그들도 지나갈 것뿐입니다.
군정시대에 더러 보았습니다. 군정시대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 대단히 분주하게 다니던 사람을 보았습니다. 군정 시대가 지나갈 때에 그런 사람도 함께 지나갔습니다. 이승만 씨 정권 시대에 또한 보았습니다. 그 때에 세상을 바라보고 어떻든지 여기 맞기 위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살던 사람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이 시대가 지나갈 때에 그들도 방금 지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 앞에 무슨 시대가 오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알 것은 하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이 세상에 있어서, 그 시대에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그 세상과 그 시대가 지나갈 때에 함께 지나갈 것입니다. 어떤 시대에 살던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생활을 해야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지 지나가지 않습니다. 또 우리 육신 시대가 다 지나가고 하늘 나라의 시대가 올 때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된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세세토록 있느리라.』
(一九六o년 五월 二十九일)
Ⅲ-44 교회부흥의 비결 (사도행전 一장 十二-十四절, 二장 一-十三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四·六)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스룹바벨에게 주신 말씀이올시다. 스룹바벨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할 때에 정치적 지도자이었습니다. 대 제사장 여호수아와 같이 민족의 부흥과 재건을 위해서 노력하던 분이올시다. 그 때에 그들의 앞에는 허다한 문제와 난관이 가로 놓여 있었습니다. 실제 생활 문제, 의식주에 관한 문제도 새로이 돌아온 피난 생활로서 재건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미약한 힘으로 큰 열심을 가지고 성전 재건을 시작하였는데 여러 가지 부족한 것도 많지마는 원수들이 또한 많이 방해함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성전 공사도 임시 중시할 수밖에 없는 형편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스룹바벨은 자연히 마음 가운데 번민(煩悶)이 일어나고 상심 가운데 있을 줄 생각합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때의 선지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스가랴에게 한 환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눈앞에는 큰 등대가 보였습니다. 그 등대 위에는 일곱 등잔이 있었습니다. 일곱 등잔에는 물론 일곱 불이 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곱 등잔에 기름을 공급하여 주는 주발이 있었고 또한 그 주발은 죄 우에 선 생생한 두 감람나무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두 감람나무에서 쉴새 없이 흘러내리는 기름은 등대 위 주발에 모여들어 갔고, 그 주발에서는 일곱 등잔으로 기름이 내려가서, 일곱 등잔의 불빛은 꺼지지 아니하고 기리 성전 안을 빛나게 비취인 것입니다. 이 환상은 별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줄 생각합니다.
여기 보인 등대는 하나님의 신령한 교회를 상징한 것입니다. 그 등대 위에 서 있는 일곱 등불은 교회를 중심해서 나타나는 빛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이 진리의 빛이 끊임없이 빛나는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주신 사자들을 통해서 그 잔 위에 기름이 간단없이 성신의 역사가 있는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하나님의 일은 힘으로 죄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내 신으로 되느니라.』 이 말씀을 환상을 통하여 여러 가지 상징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줄 생각합니다. 여기 힘이라고 하는 말은 다 인간에 속하는 힘과 인간에 속하는 능을 가리킨 것입니다. 인간에 속하는 육체의 무슨 힘, 완력, 혹은 군사의 힘, 혹은 기억의 힘, 혹은 정치적인 권세, 혹은 경제적인 힘, 인간에 속하는 어떠한 힘이라도 교회의 빛을 밝힐 수는 없고 오직 교회를 부흥시켜서 교회를 통하여 진리의 등대에서 밝은 빛이 어두운 세상에 비취게 하는 그 유일의 힘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내려오신 성신의 능력이라고 하는 말씀이올시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이처럼 많이 모인 것은 보통 주일로만 아니고 특별히 오순절 주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 날은 특별히 예수 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五十일째 되던 첫 오순절에 성신께서 제자들과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강림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첫 오순절에 성신께서 강림하신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배후에 있었고 인간의 협력과 순복이 또한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다 기억하시는 바와 같이 예수 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모든 말씀으로 위로도 하고 부탁도 하실 때에 한 가지 약속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장차 그들을 떠나지마는 그들로 하여금 고아와 같이 외롭게 두지 아니할 터이며, 예수가 가면 반드시 보혜사 성신을 그들에게 보낼 터이오, 이 보혜사는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계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 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三일만에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도 열 한 제자를 따로 청하여 놓고 분부한 말씀이 계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성신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얻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리라.』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 님의 약속을 그냥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님이 분부한 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어떠한 다락방에 같이 모였습니다. 계속해서 열흘 동안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열흘만에 오순절 아침을 당하였는데 갑자기 이상한 급하고 강산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습니다. 또한 혀와 같은 불이 모든 사람 위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상한 자연의 현상과 같이 그 당시에 모였던 모든 사람 마음 가운데는 성신의 임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열 한 사도만 아닙니다. 모든 평신도까지 꼭 같은 성신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여자도 꼭 같은 성신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기 보면 성신께서 임재 하실 때에 특별히 성신의 성격을 분명히 가르치기 위해서 몇 가지 상징을 보여 주신 것이 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바람이라고 하는 말은 숨결이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사람에게는 숨결이 있을 때 생명이 있습니다. 성신은 하나님의 숨결이올시다. 성신은 하나님의 생명이올시다. 성신을 우리가 받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직접 받는 것입니다.
또한 바람은 능력과 감화력을 의미합니다. 부드러운 봄바람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강한 바람은 나무를 꺾고 산을 옮기고 바다 물결을 움직입니다. 강한 능력을 의미합니다. 성신은 능력을 의미합니다. 성신이 임할 때에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성신이 임할 때에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힘이 임재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불의 혀 같은 것이 보였다고 말씀했습니다. 전 성경을 보면 불은 언제든지 세 가지 뜻을 의미합니다. 불은 빛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빛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줍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더욱 분명히 나타내어 주셨고, 십자가의 구속의 오묘한 진리를 사도들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또한 불은 언제든지 열을 의미합니다. 성신이 우리의 마음속에 임재 할 때에 우리들의 심령은 새로운 열을 체험합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불은 언제든지 정결(淨潔)을 의미합니다. 더러운 것은 태워서 깨끗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성신께서 우리 심령에 임재하실 때에 온갖 더러운 생각을 불살라 없이 하여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정화해서 거룩하고 깨끗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불이 나타날 때에 혀로서 나타나고 그 때에 모였던 사람은 이방의 말을 능히 할 수 있는 일시적이지마는 기적이 나타난 것을 우리가 또한 볼 수 있습니다.
혀는 언제든지 말을 의미합니다. 혀가 풀리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성신을 받기 전에는 혀가 있었지마는 말을 못하였습니다. 성신을 받은 후에 베드로의 입이 열렸습니다. 혀가 풀려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각국 방언에 대한 이적은 장차 요한 계시록에 계시된 것과 같이 복음이 온 세계에 확보되어서 모든 나라, 모든 족속, 모든 방언 가운데서 택한 자를 구원해 낼 예표(豫表)가 된 줄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성신의 역사가 一二0명에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생명이 임했고, 그들에게 능력이 임했고, 그들에게 진리의 빛이 되었고, 그들에게 정결을 의미했고, 그들의 마음이 정결해졌고, 그들의 입이 열렸고, 혀가 풀렸고, 그들의 방언을 통해서 온 세계에 복음 전도는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여러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베드로가 한번 입을 벌릴 때에 三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오순절은 밀을 하나님께 드리는 맥추절이라고 하는데 이 날 문자 그대로 신령한 곡식을 많이 거두어서 하늘의 곡간에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성신의 역사가 있었음으로 말미암아 그들 마음 가운데는 기쁨이 가정에서도 떡을 때어서 기쁨으로 먹으며 언제든지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즉 오순절에 된 일입니다. 이것이 성신을 받은 교회의 모습이올시다. 이 날로서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이 날로서 신약의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날로서 성신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성신께서 이 날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교회와 항상 같이 계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성신의 검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의 육체마다 성신의 전이었습니다. 성신은 교회와 같이 교회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항상 동재(同在)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실 뿐더러 교회를 지도하여 주셨습니다. 일곱 집사를 택한 것도 성령의 지도로 택하였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택하였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 전도한 것도 성령이 지도한 바입니다. 구수내시(內侍)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도 성령의 지도로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유대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의 집에 담대히 들어가서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것, 다시 말하면 로마 사람 백부장 고넬료에게 담대히 들어가 전도한 것도 성신의 지도에 의지해서 이 일을 함으로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의 장벽을 철폐하였습니다.
또한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떼어놓아서 그 머리 위에 안수하고 기도한 후에 외지의 선교사로 파송(派送)하게 된 것도 온전히 성령의 지도에 의지해서 외지 선교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세우실 뿐더러 교회 안에 계시고 교회 안에 계시고 믿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계속해 계셔서 교회를 지도해 주시고 믿는 사람의 사랑의 사생활도 지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령은 어떤 때에는 교회를 깨끗케도 하였습니다.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그 현상이 매우 아름다웠지마는 이와 같이 아름다운 일을 통해서 어떤 사람에게는 시험이 들어왔습니다. 아나니아라고 하는 부부는 다른 사람을 모방해서 자기의 토지를 팔기는 팔았지마는 탐심을 억제하지 못해서 베드로의 앞에 와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내려다보면서 어찌하여 성령을 속이느냐고 책망을 할 때에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 엎드려져 혼이 떠났다고 말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그 아내 삽비라가 들어와서 같은 거짓말을 하다가 역시 꼭 같은 형벌을 받았습니다.
초대 교회를 지도하시던 이 성령께서는 초대 교회를 또한 깨끗케 하였습니다. 더러운 죄악이 들어오려고 할 때에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교회를 계속해서 확보되게 하시고 도처에 교회가 설립되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에게 능력을 주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을 뿐더러 이적과 기사를 행하게 했으며, 스테반도 성령이 충만해서 담대히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을 뿐만 아니고 천사의 얼굴과 같은 얼굴로서 주를 위하여 순교의 면류관을 받게 하셨으며, 또한 이 순교가 있은 후에 모든 교인들로 하여금 사방으로 퍼지게 하여서 요원의 불과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계에 퍼지도록 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가운데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사도행전을 사도행전이라 말하지 않고 차라리 성령의 행전(行傳) 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는 초대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二세기 교회도 그러했고, 三세기 교회도 그러했고, 세기를 내려오면서 언제든지 참으로 교회의 부흥 운동이 있을 때에는 오로지 성령이 같이 한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적은 책자를 하나 보냈는데 받아 보니 일찍이 중국에 초대 선교사로 가서 오래 선교하던 요나단 고크드라고 하는 박사가 지은 작은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보니 표지에 영어로 된 작은 책인데「성령의 불이 한국을 휩쓸 때에」이런 제목의 책자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흥미를 가지고 제가 그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이 책 가운데는 一九0五년과 一九0六년, 一九0八년 그 동안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축복해서 큰 성신의 역사가 있어서 한국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하던 그 일을 - 제가 어릴 적에 되던 그런 일을 - 자세히 기록한 책이었습니다. 그 때에 나온 선교사들, 장로교 선교사들이나 감리교 선교사들이 꼭 한국에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기 위해서 교파를 초월해서 때때로 모여서 기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기도의 준비가 일년 이년이 거의 되었습니다. 또한 한국 교역자 가운데도 기도를 하는 분이 점점 많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평양 장대재 교회에 어떤 알 저녁에 큰 성신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해서 그 때에 길선주 장로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통회 자복하고 그 때부터 전부 일어나서 온 한국 장로교나 감리교를 불구하고 온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어서 여러 곳에 교회가 설립되었다고 하는 기록이었습니다. 아마 나이 많으신 분들은 이 현상을 친히 체험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교회가 이만큼 발전하고 축복을 받은 것도 오로지 성신의 역사의 결과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재주로 되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어떤 권력으로 되지 아니합니다. 하물며 사람의 어떤 권모(權謀)나 술수로 되지 아니합니다. 어떤 사람이 모여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결의 서를 발표한다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부흥은 오직 성신의 역사로만 되는 것입니다.『울어도 못하고 눈물로도 못하되 오직 내 신으로 되느니라.』하나님의 성신의 능력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오순절 주일을 당해서 이 사실을 다시 생각할 때에 특별히 몇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의 일에 대하여 성신의 역사를 잊어버리면 안 되겠습니다. 성신을 무시하지 맙시다. 성신을 멸시하지 맙시다. 성신을 위해 주고 내 재주와 내 생각으로 하나님의 교회 일을 하려고 하지 맙시다. 성신의 지도가 분명한데 그 지도대로 하지 않고 내 고집과 내 편견과 내 신앙심과 내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 일을 하려고 하지 맙시다. 성신을 근심하게 하지 맙시다. 교회도 성신을 근심하게 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성신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성신의 지도가 분명한데 내 정욕과 내 욕심을 그냥 따라 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신을 소멸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성신의 지도가 계속해서 있지마는 우리가 그 지도를 계속해서 거부할 때에는 마지막에는 지도를 그치게 되겠습니다. 그것은 성신의 소멸이라는 것 같습니다. 전에 사울 왕이 젊어서는 성신의 능력을 받아서 모든 나라 일을 바로 하더니 점점 나이 많아 가면서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고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게 되니, 마지막에는 성령이 아주 사울 왕에게서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 말로가 어떻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신을 떠난 신자의 말로가 어떻게 될 겁니까? 성신의 지도를 소멸하는 교회의 말로가 어떻게 될 것입니까? 한국교회는 이 이상 더 성신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성신을 소멸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언제든지 성신께 순복 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오순절 주일을 당해서 특별히 할 일이 몇 가지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우리 하나 하나가 내 자신을 스스로 살피면서 내 생활 가운데 성신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없는가 살펴 볼 것입니다. 내 생활 가운데 내 가정에서 하는 일 가운데 성신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내 교회서 하는 일 가운데 성신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없습니까? 스스로 살펴서 근심하게 하는 것이 있으면 그 죄를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죄를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성신의 역사가 다시 우리 마음 가운데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언제든지 성신의 지도에 순복 할 수 있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내 편견대로 하지 말고, 내 고집대로 하지 말고, 성신의 지도에 순복 하도록 은혜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나 개인뿐만 아니라 또 우리 영락교회뿐만 아니라 온 한국교회가 새롭게 성신의 충만하심을 받기 위해서 오늘 오순절 주일에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성신을 받은 증거가 어디 이상한 데 있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항상 갈라디아서 五장 二十二-二十三절을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성신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喜樂)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良善)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올시다. 성신 받은 교회는 다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신 받은 교회는 온전히 한 성신의 감화로서 하나가 되어서 화평한 교회입니다. 성신 받은 교회는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입니다. 성신 받은 교회는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을 봉사하고 우리 사회를 봉사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이 오순절 주일에 우리 각자가 성신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우리 가정이 이와 같은 은혜를 받고, 온 한국교회가 이와 같은 은혜를 받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一九六0년 六월 五일)
Ⅲ-45 주의 교양과 훈계 (마태복은 十八장 一-十四절)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六·四)
오늘은 세계적으로 어린이 주일 혹은 꽃 주일로 기독교회가 지키는 주일이올시다. 오늘 어린이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어린이들에게 배울 것을 배우며,『천국에 있는 이가 이와 같으니라.』란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린이들에 대한 부모의 의무를 생각하면서 예배하는 날이올시다. 가정에 있어서도 어린이가 제일 귀합니다. 교회에도 역시 어린이가 제일 귀합니다. 국가에 있어서도 또한 어린이가 제일 귀합니다. 따라서 가정에 있어서는 가정 교육 문제가 필요하고, 교회에 있어서도 종교교육 문제가 또한 중대하며, 국가에 있어서도 일반 교육 문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사기 十三장 十二절에는 이와 같은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마노아가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까』마노아는 삼손의 아버지올시다. 마노아에게 장차 아들이 나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사자의 말씀을 듣고 마노아가 감사해서 그대로 되기를 바란다고 말씀드리면서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여쭈었습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하오리까? 이 문제는 옛날이나 오늘이나 꼭 같이 부모가 당면하는 문제입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를까? 요사이 신문이나 어떤 잡지를 보면 인구 폭발이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二차 대전 이후에 세계의 인구가 매우 많이 증가된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도 이렇게 귀한 자녀를 보내 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나 여기에 따르는 중대한 문제는 우리가 이 아이들을 어떻게 기르느냐는 것입니다. 꽃과 같이 어 여뿐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꽃과 같이 그 마음도 아름답고 깨끗하게 기를 수가 있을까?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든 아이들을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바로 길러서 건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양성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물론 기독교 교육 문제에 대한 큰 과제이지마는 오늘 이 어린이 주일을 당해서 성경에 있는 말씀 가운데 몇 절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 부모들로서 반드시 기억해야 될 사실을 몇 가지 생각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에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의 교양과 훈계로서 우리 어린이들을 양육할 수 있을까? 이 어린이 교육은 언제부터 시작해야 되는가?
조금 전 마노아가 하나님의 사자에게 어떻게 이 아이를 기르오리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사자의 답변을 제가 읽습니다.『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려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서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이 말씀은 아이가 나기 전에 부모에게 하는 말씀이올시다. 포도나무 소산을 멎지 말라. 포도주는 마시지 말라. 독주를 마시지 말라.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내가 네게 명한 모든 것을 그대로 지킬지니라. 아이 부모 될 사람에게 이와 같은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자가 분부하셨습니다. 부모가 되려고 하면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고 부정한 것도 먹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이 되라고 하나님의 사자가 권고하십니다.
옛날 우리 동양에도 이른 바 태교라고 해서 특별히 아이가 있는 여자가 어떻게 생활을 단정히 할 것이라고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부정한 것을 보지도 말고, 부정한 곳에 앉지도 말고, 부정한 것을 먹지도 말라고 여러 가지 말씀으로 권고한 옛날 성현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육 적으로 건전한 부모에게서 건전한 자녀가 출생합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을 바로 기르는데 대한 준비를 그 부모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먼저 경건한 아버지와 경건한 어머니가 될 만한 신앙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여기 미국교회 가운데 웬만큼 큰 교회에 가보면 성경 공부, 예배 시간에 특별히 신혼 부부만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는 반이 있습니다. 그런 반에서는 성경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가정 생활을 이끌어 가는데 대한 교훈도 하고 또한 어린아이가 출생되려고 할 때에, 어린아이가 출생한 후에 부모로서 알고 행해야 될 지식도 가르쳐 주는 그런 과정이 있습니다. 경건한 가정과 경건한 부모로부터 경건한 자녀가 나는 것은 원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이 점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구약의 여러 경건한 어머니 가운데 우리가 잘 기억하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한 일을 또한 기억하는 것이 유익할 줄 압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성막에 데리고 와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대 제사장에게 이 아이를 드렸습니다.『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무엘을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도로서 받은 아기를 온전히 그 평생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모 마리아도 결례의 날이 다 할 때에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바친 기록을 누가 복음 二장에서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에 있는 말씀과 같이 다시금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입니다.
모든 자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업이올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업 가운데 가장 귀한 기업이 우리 가정에 주시는 이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귀하게 주신 자녀를 온전히 하나님께 다시 바쳐서 내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이 아이를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는 것은 모든 신앙 있는 경건한 부모의 의무인 것입니다. 아기 세례의 깊은 뜻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를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며 이 아이를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기로 약조하고 내가 부모로서 이 책임을 다 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부모와 그 어린이들을 반드시 축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아버지가 사업을 잘 해서 좋은 집도 짓고 어린아이가 쓸 만한 의복, 먹을 만한 음식, 학교에 갈 때에 모든 학비는 담당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마는 아버지의 책임이 거기에만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있어서는 그 아버지가 그 어린이들의 심령을 바로 길러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을 의무가 아버지에게 있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도 역시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살림을 잘 하고 어린아이를 깨끗이 잘 기르고 의복도 바로 입히고 먹을 음식도 바로 먹게 하고, 잘 때 자게 하고 깰 대 깨게 하며, 학교에 갈 때에 학교에 가게 하는 모든 것을 잘 하는 것이 심히 중요합니다. 하지마는 어머니의 책임이 거기에만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귀한 어린이들을 귀한 신앙의 소유자로서 길러서 장차 우리의 교회를 계대하게 하며 그 가정에서 믿음의 유산을 이을 만한 경건한 자녀를 기르는 것이 어머니의 책임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다른 책임을 다했다고 하지마는 이 책임에 실패하면 그리스도인의 부모로서는 제일 큰 실패를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우리에게 부탁합니다.『주의 교양과 훈계로서 양육하라.』우리의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서 양육해야 되겠습니다.
세상의 과학만 가르치는 것은 부족합니다. 세상의 인문과학만 가르치는 것도 부족합니다. 무슨 기술만 가르치는 것도 부족합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써 양육해야 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물론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마는 기억하기 쉽게 간단히 세 가지를 제가 여러분에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주의 교양과 훈계로써 어린아이들의 심령이 바로 자라나게 하려고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이 가정의 영적 분위기입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영적 영양입니다. 그 다음에 셋째로 중요한 것이 영적 운동입니다.
먼저 어린이들이 영적으로 좋은 환경 가운데서 자라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린이들을 꽃이라고 부르지마는 우리가 꽃을 잘 기르는데도 주의할 것은 햇빛도 잘 비칠 수 있고 바람도 잘 통하는 좋은 환경에다 좋은 비옥한 땅을 택해서 꽃을 심어야 꽃이 잘 자라고 붉게 혹은 노랗게 피지 아니합니까? 마찬가지로 어린 심령이 잘 장성하기 위해서는 영적 분위기가 좋아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가정의 신앙적 분위기가 아름답고 화평하고, 말하자면 화창한 봄날과 같은 그런 분위기가 있어야 어린아이들이 바로 길러질 수 있는 것입니다.
고요히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가정의 신앙의 분위기가 어떠한가? 겨울날 찬바람 부는 것과 같이 냉랭하지는 아니한가? 우리 가정이 문자 그대로 성신의 열매로 충만해서 사랑이 가득하고 기쁨이 언제나 가득하고 화평이 충만하여, 아버지나 어머니나 항상 어려운 일이 있어도 참을 줄 알고, 항상 불쌍히 여길 줄 알며, 항상 선하게 행동하며, 맡은 일을 충성되게 하고, 온유하고, 친절하며, 모든 일에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온실 가운데 화초와 같이 그 속에서 자라나는 어린 심령이 화평한 가운데서, 평안한 자유로운 가운데서, 길러질 수 있는 신앙의 분위기 가운데 우리 가정이 있는가? 이런 가정에서는 부모가 이런 것을 해라, 저런 것을 해라, 잔말 하지 아니할지라도 자연히 어린이들의 심령이 봄 동산의 풀과 같이 무럭무럭 바로 자라납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여기 어떤 가정이 있어서 그 가정에 사랑이 없습니다. 냉정합니다. 서로 부부간에도 의심합니다. 서로 가정에서도 속입니다. 불친절합니다. 예의가 없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있습니다. 이따금 싸움까지 합니다. 이와 같은 가정에서 아직도 어린 심령이 자란다고 한다면 그 심령이 어떻게 원만히 바로 자랄 수가 있겠습니까? 심령이 이지러집니다. 심령이 쭈그러집니다. 찬 서리맞은 풀과 같이 힘이 없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심령이 원만히, 인격이 원만하게 자랄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제일 귀한 것은 우리 가정의 신앙의 분위기가 마땅한 분위기라야 되는 것입니다. 가정 예배를 우리 가정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이유가 많지마는, 그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역시 이 가정의 신앙의 분위기를 바로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와 할아버지, 형과 아우, 다 합께 모여서 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고, 한 마음으로 성경을 보고, 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혹 그 가족 중 어떤 이 마음 가운데 불만과 불평이 있었지마는 그 불만과 불평이 사라집니다. 혹 마음 가운데 성나는 일이 좀 있었다고 하지마는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그 성난 마음이 사라집니다. 가정의 분위기가 깨뜨려 질 가 하는 그런 위기에 있었지만 한 마음으로 가정 예배를 보는 가운데서 그 위기를 면하고 좋은 가정의 분위기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심령이 바로 자라기 위해서 이 가정의 신앙 분위기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항상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정 예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직까지도 가정예배를 보지 못하는 분이 이 가운데 많이 계신 줄 압니다. 그런 가정에서는 다른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도 없고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서도 반드시 가정 기도회를 오늘부터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어린아이들은 귀로 들어서 무엇을 배우는 것보다도 눈으로 보아서 배웁니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행동하며, 어머니가 어떻게 행동하며, 어떻게 사는 것은, 다 어린이의 눈 속으로 들어가서 그 어린 심령 속에 사진과 같이 깊이 박힙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하는 행동, 여러분이 가정에서 하는 말, 여러분이 가정에서 하는 그 생활이 여러분의 가정에서 길러지는 자녀의 마음속이 이 앞으로 어떠한 사진을 남기시기를 원하십니까?
어린아이들이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행동은 근본적으로 부모가 하지 않아야 됩니다. 자기는 담배 피우면서 아이들한테만 담배를 피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는 술잔 들면서 아이들 보고는 술 먹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자기는 화투하면서 아이들 보로만 화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아무리 교육해야 쓸데없습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아이들은 우리의 말을 듣는 것보다도 우리의 행동을 본받아 그대로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가정의 영적 분위기는 결국은 부모의 신앙 여하에 달렸습니다. 산 꽃이라야 향기가 있습니다. 죽은 꽃에 무슨 향기가 있습니까? 그 믿음이 살아야 향기가 그 가정을 채울 수 있습니다. 죽은 믿음이면 무슨 향기가 있겠습니까? 산 나무라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죽은 나무에 무슨 열매가 있겠습니까? 성신의 열매는 믿음의 산 나무에만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의 영적 분위기를 어린 심령이 자라날 수 있으리 만큼 만들기 위해서 오로지 아버지와 어머니 된 사람의 참된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가운데 한 분이라도 믿음의 불길이 희미한 분이 계십니까? 자녀들을 위해서도 믿음의 불을 돋우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이 미약합니까? 여러분의 오고 오는 자녀들을 위해서도 새로운 생명을 찾기를 원합니다. 먼저 분위기가 매우 중합니다.
둘째로 몇 마디만 하겠습니다. 영적 영양이 필요합니다. 어진 어머니는 어린아이를 기를 때에 음식에 조심합니다. 잘 장성할 수 있는 음식, 그 연령에 소화가 잘 될 수 있는 음식, 또 음식을 바로 요리해서 아이들에게 반드시 먹이도록 힘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진 부모는 어린아이들의 심령을 위해서 어렸을 때에 바른 음식을 먹이도록 힘쓸 것입니다.
우리가 디모데 편지를 읽을 때에 이런 구절을 읽습니다. 디모데에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본래 네 믿음이 내 외조모에게 있었고 네 어머니에게 있더니 그 믿음이 네게 있는 줄 나는 확실히 안다.』라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고서『네가 어렸을 적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곧…』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믿음 있는 외조모, 믿음 있는 어머니가 어린 디모데에게 성경을 잘 가르쳐 준 것이 불명합니다.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흰 종이와 같습니다. 다른 글씨 쓰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어린애들의 마음 밭은 이른 봄 밭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잡초가 떨어지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어지면 얼마나 좋습니까?
학자들의 조사와 연구에 의지하건 데 아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책, 그림, 이야기, 노래입니다. 어떤 책을 많이 읽느냐? 어떤 그림을 많이 보느냐? 어떤 이야기를 많이 듣느냐? 어떤 노래를 많이 들으며 많이 부르느냐? 이것이 결국은 그 아이의 장래를 거의 작정한다고 합니다. 어떤 책을 아이가 읽는지 부모가 조심해야 됩니다. 어떤 그림을 아이들이 많이 보는지 좋은 그림을 보여 주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아이들이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를 많이 듣는지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어떤 노래를 입으로 부르고 있는가? 항상 조심해야 됩니다.
또 셋째로는 영적 운동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운동을 통해서 몸도 튼튼해지고 장성하기도 하고 또 새 것을 배웁니다. 꼭 마찬가지로 어린 심령도 실지로 자기가 무엇을 함으로 말미암아 심령도 튼튼해지고 심령이 반성도 하고 새 것을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읽어 주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자기가 읽도록 해야 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자기가 기도를 하도록 가르쳐야 됩니다. 그저 아이들을 주일학교로 보내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자기 발로 나가게 하고, 자기 혼자 나오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인도해서 같이 나오게 해야 됩니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대로 자기 손으로 하고, 자기 발로 어디 가고 어떻든지 좋은 일을, 어렸을 적부터 신앙의 좋은 습관을 양성해 주도록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기르는 일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양육하는 일은 가장 큰 일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은 사실 부모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과 아이 자신과 부모와 교회와 국가가 긴밀한 협동을 할 때에만 이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 된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 아이를 위해서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내 생활을 바로 해서 아이들에게 좋은 모범을 가르쳐 주며 어떻든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기를 노력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장성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새 사람으로 길러 주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내 부모 된 책임을 다 할 것뿐입니다. (一九六0년 六월 十二일)
Ⅲ-46 성도와 그 옷 (로마서 十三장 八-十四절)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十三·十四)
우리 육신생활에 꼭 없어서는 아니 될 것을 간단히 세 가지로 말합니다. 의, 식, 주, 즉 옷과 밥과 집이올시다. 그 가운데도 옷은 제일 먼저 꼽는 것을 보니까 아마 옷이 제일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사실 옷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흔히 오늘날도 그렇지마는 특별히 옛날에 있어서는 옷을 보고 그 사람이 어느 민족에 속하는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중국 사람의 옷과 우리 나라의 옷이 다릅니다. 뿐만 아니고 옛날에는 옷을 보고 그 사람의 지위나 계급이나 모든 형편도 불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들이 입던 옷과 대신들이 입던 옷이 달랐습니다. 또 평민들이 입던 옷도 달랐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넓은 의미에서 옷은 그 사람의 성품을 나타냅니다. 그 사람이 단정한 사람인지, 규모가 있는 사람인지 규모가 없는 사람인지, 그저 유행 따라 입은 사람인지 그렇지 아니한 사람인지, 그 옷 입은 것을 보면 대체로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박한 사람, 허영심이 가득한 사람, 이런 사람은 그 옷을 입은 것을 보면 그저 틀림없이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옷은 그 사람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을 상고해 보면 이 옷 입는데 대한 교훈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신명기(申命記) 二十二장 五절에 보면 이와 같은 교훈이 있습니다.『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이것을 보니 옛날에 남자들의 옷을 입고 다닌 여자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또 여자 옷을 입고 다니는 그런 남자들이 있은 모양입니다. 이것은 옛날 뿐 아니고 오늘날도 신문에 보면 어떤 남자가 여자의 옷을 입고 무슨 노릇을 했다는 이런 이야기도 나고, 또 요즘 가만히 보면 여자들 옷 가운데 어떤 것은 점점 남자 옷과 비슷해 가는 모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와 남자를 구별 있게 창조하셨는데 그 옷이 분별 있는 것이 좋을 줄 생각합니다.
저 미얀마 같은 나라에 가보면 남자나 여자나 다 같이 치마를 입고 사는데 얼른 보면 분별이 없는 것 같지마는 자세히 보면 그 치마 앞을 매는 법이 그릅니다. 조금 다른 것이 있습니다. 남양군도나 아프리카에 가 보면 이 양반들은 그렇게 옷을 많이 입지는 않지마는 그래도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 같아서는 지금도 남자는 남자의 옷을 입고 여자는 여자의 옷을 입으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교훈인 줄 생각합니다.
또 전도서 九장 八절을 읽어보면『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이러한 권면이 또한 이 말씀은 옷을 깨끗이 입으로는 것입니다. 더럽게 입지 말고 옷을 깨끗이 휘게 빨아서 입으로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교훈뿐만 아니고 성경을 보면 옛날 유대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에 병난 사람의 집에 갔다 오든지, 사람의 시체가 있는 집게 갔다 왔으면, 그 옷을 잘 빨라고 하는 교훈이 있고, 어떤 경우는 옷을 불살라 부리라고 하는 교훈도 있습니다. 옷을 깨끗이 단정히 빨아서 입으라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사치하게 입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치한 것과 깨끗한 것은 다릅니다. 검소한 의복이라고 깨끗이 입을 수 있습니다. 사치하게 입으면서도 더럽게 입을 수 있습니다. 옷은 깨끗이 입으라고 여기에 가르쳤습니다.
신약에 와서 보면 사도 바울 선생이 디모데 전서 二장 九-十절에 특별히 그 때 여자들에게 이런 권면을 하였습니다.『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닿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너무 머리를 땋거나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단장하려고 하지 말고 선행으로 단장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거의 같은 말로 권면하였습니다. 베드로 전서 三장 三-四절을 읽으면『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여러분, 이사야 三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 때에 예루살렘에 살던 그 여자들이 옷단장을 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책망한 구절이 있습니다.『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그러므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香盒)과 호신부(護身符)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 주머니와 손거울과 세마포(細麻布)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숫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
그 때 여자들이 어떻게 단장을 하고 다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단장한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교훈을 종합해 보면 옷은 단정히 입고 깨끗이 입을 것이나 사치하지 말며 옷으로 단장하려고 하지 말고 아름다운 심령과 선행으로 단장을 하라는 권면이올시다.
오늘 우리 사회를 좀 살펴보고 신문지상에도 이따금 나는 것을 보면 우리 한국에서 이와 같은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옷차림 하는 것을 보면 너무 사치하다는 그런 평판이 많이 있습니다. 또 그런 가운데 예수 믿는 여자들이 사치하다 하는 그런 말도 더러 돌아가는 모양입니다. 그 까닭은 주일날 예배당에 올 때에는 할 수 있는 대로 깨끗한 옷을 입고 오니까 아마 특별히 그런 말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언제든지 옷을 단정히 입고 깨끗이 입을 것이지마는 사치한 데 흘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자로서 단장도 도무지 없을 수 없지마는 도에 지나치면 안 됩니다.
사실 심리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너무 사치하게 옷을 입거나 너무도 지나치게 단장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열등감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나는 좀 모자란다, 나는 좀 남만 못하다, 그러니까 이 모자라는 것을 보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옷에만 치중해서 보충하려고 합니다. 사실은 열등감에 이렇게 도에 넘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어떤 이가 너무 옷을 화려하게 입고 다닌다든지 무슨 단장이나 화장을 도에 지나치게 하는 것은『나는 모자랍니다. 나는 못 생겼습니다.』이런 광고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먼저 번에도 서인도 제도에 가서 일 주일 있었지마는 거기는 거의 다 흑인들이 사는데 미국에도 많이 있지마는 그 흑인 여자들이 옷 입고 다니는 것이나 화장한 것을 보면 참 대단히 민망합니다. 그 얼굴에다 아무리 흰 분을 발라야 새까만 얼굴이 희어질 리가 있습니까? 또 흑인들은 대체로(이거 미안한 말입니다. 용서하십시오,)입술이 두텁습니다. 그 두터운 입술에 새빨간 칠을 하니, 아름답다고 하는 것보다 무섭게 모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을 동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 사실은 마음속에 열등감이 있어서 도에 지나치는 일을 합니다. 내게 대해서 자신 있게 사는 사람, 내 생활에 대하여 자신 있는 사람은 이렇게 도에 지나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나라 같은데서 이와 같은 때에 도에 지나치는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참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옷은 간단하게 말하면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추울 때에는 추운 것을 막기 위해서 옷을 입습니다. 그러면 더울 때는 뭐 하려고 입습니까? 더운 때에는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몸을 가리우기 위해서 옷을 입습니다. 그런데 해방된 이후로 서양 풍속이 이 한국에도 많이 들어오면서 점점 여름옷은 몸을 많이 내놓는 경향으로 나가는 것이 분명히 보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한 이야기지마는, 몇 해 전에 로마에 가서 성 베드로 교회를 보려 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구경하려 오는데(그 때는 여름입니다.) 남녀노소가 줄을 지어서 예배당을 구경하려 들어옵니다. 그러나 들어올 때 좌우 옆에 꼭 두 사람이 서서 소매 없는 옷을 입고 온 여자들은 전부 못 들어가게 합니다. 그런 옷을 입고는 들어오지 못한다 하며 가서 다른 옷을 입고 오라고 충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좋은 풍속인 줄 생각해서 우리 영락교회에도 그런 풍속을 꼭 내겠다고 그 때 마음속에 작정하고 우기는 왔습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의 사는 형편을 보면 원조의 덕택으로 많은 사업이 재건되어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을 거의 다 생산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때에 어떻든지 우리는 국산을 애용하고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을 입을 것이지 이런 시기에도 불구하고 외국산을 좋아한다든지 일부러 외국 것을 더듬는다든지 하는 이와 같은 일은 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산상보훈에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합니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맙시다. 사람의 사는 것이 옷을 잘 입는 것이 아닙니다. 옷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띠 하나만 띠고도 일생을 산 모양입니다. 성 안토니오라는 성자는 일생토록 가죽 저고리와 가죽 바지만을 입고 살았다고 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인도의 간디 옹 같은 분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 이도 간단히 아래 의복과 위에는 솔을 하나 걸치고 영국 황제에게까지 가서 면회했습니다.
사람의 사는 것이 옷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옷을 잘 못 입었다고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옷을 다른 사람처럼 못 입었다고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알아야 됩니다. 이와 같은 시대, 이와 같은 사회에서 옷을 너무 잘 입고 다니는 것은 그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무슨 증거인가 하면『나는 내 민족도 모르고 국내 경제도 모르고 나만 아는 사람이오.』하는 광고판을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예수 님께서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도 읽었지마는 성경을 보면 우리가 밖에 입는 옷 외에 꼭 속에 입을 옷 몇 가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첫째로는 예복을 꼭 입으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이나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꼭 예복을 입고야 들어갔습니다.
보통 옷 입고를 못 들어갔습니다. 여러분께서 예수 님의 혼인 잔치의 비유를 아시거니와 많은 사람을 청해서 혼인 잔치에 손이 가득한데 얼마 후에 임금이 들어와서 여러 손님을 돌아보다가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하는 말이『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이곳에 들어 왔느냐?』그 사람은 유구무언으로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고 그랬습니다. 그 임금은 종들을 명해서 이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사람을 바깥 어두운데 내어쫓으라고 그랬습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늘 나라의 어린양의 잔치에 들어가려고 하면 예복을 입고야 들어갑니다. 요한 계시록 七장 九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 보좌를 둘러싸고 각 나라, 각 족속, 각 방언으로 많은 사람들이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는데 그 사람들은 전부 몸에는 흰옷을 입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려고 하는 사람은 흰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이 흰 예복은 무엇을 가리켰습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어서 회개와 믿음으로 오는 그리스도로부터 죄 사함을 받은 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의 예복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이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은 흰 예복을 입지 아니하고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여기 있는 말씀과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고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서 三장 二十七절에는『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실 죄를 회개하고 참된 마음으로 세례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그리스도로 우리의 온 몸을 둘러싸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우리의 인격을 삼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우리의 성품을 삼고 그리스도의 생활로 우리의 생활을 삼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정결과 온유와 자비와 긍휼과 청렴(淸廉)과 담대(膽大)와 관용과 용서와 인내와 사랑을 우리의 것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이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으리 만큼 그리스도로 옷 입듯이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살라고 하는 그 뜻입니다.
여기에 이북에서 오신 분이 많이 있을 터이니까, 오랜 옛날 피현 교회에서 일 보신 최명준 목사님을 아마 기억하실 분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이 목사님을 믿는 사람들은 최 목사님이라고 불렀지마는 제가 들으니 안 믿는 사람들은 최 예수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 그저 그 최 목사님은 최 예수로 나타난 모양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예수 님으로 우리의 옷을 삼아야 되겠습니다. 또 이 옷은 언제나 입어야 됩니다.
아마 여기에 우리도 그런 분 많이 계실 줄 알지마는 보통 서양 사람들은 주일날 입는 옷이 특별히 있어서 주일날은 깨끗한 옷을 입고 왔다가, 그 다음에는 보통 일할 때 입는 옷을 갈아입는 그런 사람 사람들이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보통 옷은 이렇게 입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 님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입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아닌게 아니라 주일날 올 때에만 예수 님 옷을 입고 오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는 모양입지다. 주일날 올 때에는 아주 거룩해 보이고 깨끗해 보이고 화평해 보이고 다 좋습니다. 그러나 다른 날 되면 예수 님을 벗어 놓습니다. 시기와 질투와 여러 가지 다른 옷으로 바꾸어 입습니다. 그렇게 입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 예수 님을 입는 것은 언제든지 우리가 입어야 되겠습니다. 또 이 옷은 어떤 환경에서나 어떤 데서든지 항상 입어야 되겠습니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건강할 때나 병날 때나, 우리가 사업에 실패할 때나 사업에 성공할 때나, 우리가 살 때에도 이 옷을 입어야 되고 죽을 때에도 이 옷을 입어서 우리의 생활이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셋째로는 성경에 보면 특별히 갑옷을 입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六장 十一절을 보면『마귀의 궤계(詭計)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胄)를 입으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공중에 권세 잡은 자들과 안한 영과 씨름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우리 믿는 사람은 여러 가지 악마의 세력과 부득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되겠습니다. 지리로써 허리띠는 띠고 의의 흉대(胸帶)를 붙이고 화평의 복음으로서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깨어 있어서 전신갑주를 입고 모든 악한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여야 되겠습니다.
바로 어제 우리가 六·二五 十주년을 기념했습니다. 지금은 공산 침략은 휴전 중에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이 앞으로 절대로 힘이 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계속해서 깨어 있지 아니하면 안 될 것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적 견지에서 이 세상을 살펴 볼 때에는 六·二五는 휴전된 것은 아닙니다. 三八선은 그냥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쟁은 그냥 계속됩니다. 악한 마귀는 삼킬 자를 언제든지 찾아다니는 이러한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보존하고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려고 하면, 흰옷을 입고 그리스도를 일상생활에서 옷 입듯 하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전신갑주를 입어야 되겠습니다. (一九六0년 六월 二十六일)
Ⅲ-47 주 너를 지키리 (시편 一二一편 一-八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고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一二一·一)
오늘 아침에 읽은 시편은 一二一편은 제一편이나 제二十三편과 같이 사람들이 특별히 애송하는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설에 의하건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받아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올 때에 어떤 무명 시인이 이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올라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一二一편은 여행의 노래라 하는 부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길을 따나기 전에 이 시를 읽고 기도하는 풍속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도 홀로 자기의 고향을 떠나서 흑암(黑暗) 대륙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 가족과 같이 이 시편을 읽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먼 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 시편 一二一편은 우리 한국에서도 찬송가 二十一장에 편곡되어 자주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매우 단순합니다. 이 시인이 눈을 들어 산을 봅니다. 산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산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천지를 지으시고 온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켜주시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은 실족하지 않게 하신다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특별히 길을 갈 때에(옛날은 거의 다 걸어 다녔는데)실족하지 않게 하는 것은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으신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항상 택한 백성을 돌보아 주시는 것을 찬송하였습니다. 또한 이와 같으신 하나님은 우편 그늘이 되셔서 낮에 해가 아무리 뜨거울지라도 길가는 사람을 좋은 그늘로 덮어주는 것처럼 그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여러 위험한 지대를 지나올 때에도 모든 환난 가운데서 건져 주었습니다.
육신만 지켜 주신 것이 아니고 영혼도 보호하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여호와께서 너희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이와 같은 승리 적 말로서 이 노래를 마친 것입니다.「너희 출입」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인간 생활의 전체를 가리켰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활은 아침에는 집을 나가고 저녁에는 집에 다시 들어오는 것입니다. 농부는 밭으로 나갑니다. 학생들은 학교로 나갑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상점으로 나갑니다. 직공들은 공장으로 나갑니다. 나가서 일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그 뿐만 아니고 또한 들어오는 것도 지켜주십니다. 저녁이 되면 다 집을 향해 돌아옵니다. 가정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지켜 주십니다. 밤에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어서 평안히 쉴 수 있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일상생활 전체를 향상시켜 주시는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 시편 가운데 특별히 여러 번 반복되어서 나온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너희를 지키시는 자시니라.』『너희의 출입을 지키시리로다.』 이「지킨다」로 하는 말이 거의 일곱 번이나 반복되어 이 시편에 나오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을 지키어줍니다.
이런 시편을 읽을 때에 어떤 분 가운데 이런 생각이 나실 분이 간혹 계실지 모르겠습니다.『아! 이 시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귀한 노래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마는 사실 인간생활이라는 것이 어디 다 이럴 수가 있겠는가? 이 세상에는 얼마나 천재지변이 많고 질병과 고통이 많은가?』이런 생각이 한편 염두에 들어오는 이도 없지 않아 있을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기 대해서 한 두 가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밤과 낮으로 지키어주시겠다고 약조하신 것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 뜻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의 백성과 그의 기르시는 양에게 대하여 특별히 이와 같은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택함을 받은 그의 국민에 대하여 이와 같은 언약을 주었습니다. 시편 九十一편에는 이와 같은 사상의 노래가 있는데 거기는 첫 절에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라야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살수가 있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자와 은밀한 교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택함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의 보호의 그늘이 항상 같이 있겠다고 하는 말씀을 분명히 기록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와 같은 시를 읽을 때에 우리 믿는 사람도 또한 환난을 당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도 들어옵니다. 우리 믿는 사람도 여러 가지 질고와 여러 가지 염려에 싸이게 되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것도 역시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한 두 가지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는 견지와 사람의 보는 견지가 다른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언제든지 육신을 먼저 보고 육신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참 사람이 되는 우리의 영혼을 먼저 보시고 우리의 영혼의 구원을 먼저 생각합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더욱 더 축복하시기 위해서 우리 육신에게 재난을 더하실 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 같은 이에게도 그 육신의 가시가 허락되었습니다. 성 프랜시스 같은 이도 중병을 당하지 안았던들, 우리가 오늘날 아는 성 프랜시스가 되었을는지 의문인 것입니다. 파스칼 같은 사람도 그이가 말을 타고 다리를 건너 가다가 말이 갑자기 뛰면서 다리에 떨어지고 강에까지 떨어져서 중상을 입는 체험을 가지지 아니했던들, 오늘날 우리가 읽는 파스칼의 명상록을 남겨 놓을 수가 있었을는지 의문인 것입니다. 사실 밀턴이 실명하지 아니하였던들 그이가 실낙원이란, 성경 다음에 간다고 하는 책을 우리에게 남겼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사람은 언제든지 육신 편을 먼저 복 그 편을 생각하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의 편을 먼저 봅니다. 그런 까닭에 사실 우리가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볼 때에는 로마서 八장 二十八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모든 일들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택함을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람의 눈에 재난으로 보이는 것도 심령의 축복인 것을 우리가 차차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사람은 항상 현재를 보고 미래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재와 미래를 같이 보십니다. 우리 사람은 항상 현세를 보고 내세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현세와 내세를 같이 보십니다. 전에 요셉이 형들에게 억울하게 팔려서, 약관으로서 멀리 애굽으로까지 종으로 팔려 갈 때에,『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요샙을 이렇게 지키시는가!』불평한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었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 된 일을 보면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갈 때에도 하나님께서 꼭 같이 지며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아기 모세가 난 지 석 달이 되자마자 갈대 상자에 넣음이 되어서 나일 강변 갈대밭 속에 버림을 받을 때에 혹 그 광경만 보고『아 하나님께서 어떻게 택한 백성을 이렇게 지키시는가!』낙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우리가 된 일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때에도 모세를 지킨 것이 분명합니다.
다니엘이 양심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기로 애쓰다가 사자 굴로 끌려갈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니엘을 이렇게 지키시는가 의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보면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지키신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골고다를 향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올라가시고 마지막에 골고다 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실 때에 하나님께서 그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를 어떻게 이렇게 버려 두시는가, 왜 지키시지 아니하시는가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마는 우리가 끝까지 보면,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그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을 지키신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사람들을 언제든지 지키십니다. 평안할 때에도 지키시고, 곤란할 때에도 지키시고, 순경에서도 지키시고, 역경 중에서도 여전히 지키십니다.
혹 어떤 분이 생각하기를『그거야 하나님께서 큰 사람들, 위대한 사람들은 물로 그렇게 지키실 것이지마는 나 같이 작은 사람이야 하나님께서 지키실 리가 있나?』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나 같이 미미한 사람, 창해일속과 같은 사람, 이런 사람도 하나님께서 지키실 까? 이 의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말씀했습니다.『너희들이 참새 다섯 마리가 엽전 두 푼에 팔리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그러나 이 참새 한 마리도 내 아버지께서 잊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너희는 참새보다 얼마나 귀하냐? 너희의 머리털까지도 내 아버지께서 다 헤 시나니 그런고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염려하지 말라고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는 큰 자가 없습니다. 작은 자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그 자녀이면 누구든지 귀하고 누구든지 위대하고 누구든지 보배롭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지키십니다.
이 지키신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선 지키는 사람은 자세히 봅니다. 지키는 사람은 살핍니다. 지키는 사람은 그 대상을 언제나 잊어버리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택한 백성을 지키시는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언제든지 그 택한 백성을 돌보시고 잘 살피시고 잊지 아니하신다고 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암탉이 병아리를 항상 품듯이 어머니가 아기를 항상 지키듯이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을 지키십니다.
우리 찬송가에『온 세상 다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온 세상 사람이 나를 버리고 나를 잊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께서는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나를 잊어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슬픈 가운데 있을 때에도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가 괴로운 가운데 있을 때에도 우리를 잊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의 고독과 우리의 유혹과 우리의 투쟁과 우리의 당면하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잊지 아니하시고 살피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이런 때에 더욱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지키신다고 하는 말은 둘째로 인도하신다는 뜻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시편 二十三편을 읽었지마는『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 하시는 도다.』목자가 양을 지킬 때에 그냥 보기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살피기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는 그 양의 길을 인도합니다. 어디에 좋은 풀이 있는가? 어디에 맑은 시내가 있는가? 어떤 곳에 위험한 일이 있는가? 어떤 곳이 이리가 오는가? 모든 것을 살펴서 그 양을 인도하여 줍니다. 어떤 때에는 캄캄한 골짜기 같은 데를 지나가게 인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잡혀갈 때에도 하나님의 인도가 있었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아기 때에 나일 강변에 버림을 받은 것도 이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잡혀간 것도 하나님의 인도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것도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의 갈 길을 항상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키신다고 하는 말씀은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다.『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같이 계심이라. 주의 막대기와 그 지팡이가 나는 안위하시나이다.』목자가 양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양을 보호합니다. 원수가 올 때에 물리치십니다. 사자가 가까이 오려고 할 때에 사자를 쳐서 물리칩니다.
지킨다고 하는 것은 방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보존하여 준다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을 보호하시고 보존한다는 뜻을 여러 가지 상징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니…』그 말도 보호한다는 뜻입니다.『여호와는 나의 피난처니…』그 말도 보호한다는 말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 여호와는 나의 방패, 여호와는 나의 구원의 불, 여호와는 우편 그늘, 여호와는 날개, 이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여 주신다는 뜻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뿐입니다.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지킨다고 하는 것도 우리를 보호하여 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킨다고 하는 것은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신다고 하는 뜻입니다. 무엇 하러 양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합니까? 양은 푸른 풀을 먹어야 살이 찝니다. 무엇 하러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합니까? 양은 물을 마셔야 잘 길러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굶주릴 때에 만나를 주시듯이 광야에서 목마를 때에 반석을 쳐서 샘물을 주십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겨서 멀리 광야로 도망갈 때에, 심히 피곤하여 로뎀 나무 아래에서 기진맥진하여 누워 자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떡과 물을 주셨습니다. 이렇듯 우리 믿는 사람들이 괴로운 광야 같은 인생 길을 걸어갈 때에 어떤 때는 우리의 심령이 기갈 하여지고 기진맥진하여 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때에도 그 택한 백성들에게 생명의 양식과 생명수를 마실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에 四장 十九절에 이런 말씀으로 기록하였습니다.『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나의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풍성하신 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시겠다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을 지키어 주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경의 교훈만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성도들의 경험이 이와 같습니다. 가령 아브라함에게 물어 보십시오,『아브라함이여, 과연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생을 지키어 주었습니까?』그렇게 물어 보면 제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은『아멘, 과연 그렇습니다. 내가 나의 일생을 돌아 볼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셨습니다.』이렇게 곧 대답할 줄 생각합니다. 이삭에게 그 질문을 해 보십시오, 야곱에게 물어보십시오, 혹은 요셉에게 물어보십시오, 혹은 모세에게 물어보십시오, 혹은 다윗에게 물어보십시오, 엘리야, 엘이사, 이사야, 예래미야, 모든 선지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이구동성으로『과연 그렇습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과연 내 일생을 지켜 주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만 그렇게 대답할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모든 성도들도 꼭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베드로 혹은 야곱, 요한 사도 바울 등 모두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들도 모두 꼭 같이『과연 하나님께서 내 일생을 지켜 주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 성도들뿐만 아닙니다. 온 교회의 二천 년 역사를 통해서 과연 참된 신앙 생활을 한 모든 성도들에게 물어보십시오, 혹은 어거스틴에게 물어보십시오, 혹은 루터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혹은 다마스 에콰이너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혹은 칼빈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구동성으로『과연 내 생활을 지금까지 일생토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습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역사적 인물에게까지 갈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우리 가운데 과연 오래 참된 신앙 생활을 한 성도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이들도 역시 꼭 같이『과연 내 일생을 돌아보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은혜로 지나옵니다.』이구동성으로 대답할 줄 생각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들을 지켜 주십니다.
어머니가 어느 때 아이들 잘 지키지 않으리 오 마는 아이가 위험한 곳에서 놀든지 아이가 무슨 병이 나게 되면 더 가까이 지켜 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위험한 때에 살거나 우리도 무슨 병이 나게 되면, 하나님께서 더욱 가까이 지켜 주시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지켜 주시는데 우리는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근심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을 하나 하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켜 주신다고 하면, 무슨 까닭으로 염려하겠습니까?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여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과연 이 세상은 위험한 세상입니다. 과연 이 세상에는 불안과 공포가 가득히 쌓여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라도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태할 때일수록 하나님께서 그 선민을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내가 이렇게 젊었을 때는 하나님께서 잘 지켜 주시고 잘 믿을 수 있지마는 이 다음에 늙어지면 어떻게 될까? 늙은 다음을 염려하는 양반들이 없이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사야 四十六장 四절을 읽을 때에 잘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염려가 없기를 바랍니다.『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백발이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우리가 죽을 때에도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이 있으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가서 너희 있을 곳을 예비하면 내가 와서 너희를 영접해서 나 있는 곳에 있게 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더 기억하십시다.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이 되었는가? 과연 우리가 그의 백성이 되었는가? 과연 우리가 그의 흰옷을 입었는가? 이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과연 그의 양이 되었으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과연 그의 흰옷을 입었으면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오순절에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베드로에게 와서 하는 말이『아! 우리가 어찌할꼬?』이렇게 물어 볼 때에 베드로의 대답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그 대답입니다.『우리가 어찌할꼬?』우리가 어찌하면 이와 같은 생활 가운데 들어갈 수 있을까? 대답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다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는 것, 이것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서 학습도 세우고 세례도 베풉니다.
그러므로 항상 회개하고 온전히 죄에서 떠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여 주십니다.『여호와의 은밀한 곳이 거하는 자는 그의 그늘 아래 영원히 거할 것이니라.』여호와는 우리의 출입을 영원토록 지키시는 하나님이올시다. (一九六0년 七월 三일)
(한경직 목사 설교집 제3권 끝)
刊 行 辭
우리 교회에서는 창립 二十五주년을 맞아 그 기념 사업의 하나로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 전집을 엮어서 세상에 내어놓기로 하였다.
비록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가 주로 영락교회라는 개교회의 강단에서 외쳐진 것이기는 하지만, 구리는 결코 그것이 개교회의 교인들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그의 설교가 영락교회의 강단을 통하여서 우리 교계는 물론 나아가서는 사회와 국가에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때로는 맑고 줄기찬 샘물이 되어서 혼탁한 이 사회를 밝히기도 했고, 때로는 굳건한 반석이 되어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부드러운 손길이 되어서 상처받은 영혼들의 위로와 구원이 되기도 했고, 또 때로는 하늘을 향하는 울부짖음이 되어서 겨레의 아픔과 슬픔을 하나님께 호소하기도 했다.
교회가 세워지고 四 반세기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겨레 위에는 수난과 좌절의 역사가 광폭한 해일(海溢)처럼 덮치고 또 물러가고 물러갔다 다시 덮치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한 목사님의 설교는 폭풍 가운데 서 있는 거목처럼, 사나운 짐승들이 포효하는 광야의 선한 목사처럼 우리 교인들에게 희망과 안도를 안겨 주었고 나아가서는 겨레의 나아갈 길을 밝혀 주시곤 하였다.
이에 영락의 교인들은 그의 생애에 걸친 목회의 노고를 위로하고 은공을 기리는 한편, 이 땅에 오고 오는 세대들에게 넘겨줄 빛나는 유산으로서 이 설교 전집을 내어놓기로 한 것이다.
전집이라고는 하지만 한 목사님께서 이북에서 목회 하실 때의 설교는 전연 그 자료를 구할 수가 없어서 수록하지 못하였으며, 또 이남에 오셔서 하신 설교도 초기의 것은 그 자료가 많이 일실 되었고 더러는 수록되었다 하더라도 교우들이 필기한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서 충실을 기하지 못했음을 매우 유감 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설교 집을 위하여 편집을 맡아서 수고하여 주신 홍현설 박사, 김정준 박사, 한태동 박사, 이종성 박사, 이창로 박사와 직접 실무를 맡아서 수고하신 허영진, 김창걸, 두 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一九七一년 十월 일
영락교회 창립 二十五주년 기념 사업 위원회
출판위원장 김 정 순
머리말
모든 종교는 진리를 말하고 신(神)을 믿는다. 그들의 진리가 다른 모든 진리보다 더 참되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믿는 신은 모든 다른 신보다 더 권능이 있고 지혜가 있고 강하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과 신념에서 모든 종교는 자기들의 진리와 신을 타인에게 알리고 설득하고 때로는 강요한다. 여기에 변증 학이 필요하고, 설교가 필요하고 전도가 필요하게 된다.
종교에 따라 그들의 진리와 신을 취급하는 태도가 다르다. 어떤 종교는 그들의 진리와 신을 묵상하고 영적으로 체험해 보려고 한다. 인도교나 불교나 철학적 신비 종교가 그렇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종교는 그들의 진리와 신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설득시켜서 자기들의 회원이 되도록 노력한다. 이러한 종교에 회회교와 기독교가 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전파하는 종교였다. 세례 요한은 처음부터『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막 一·四)했다. 예수 님은 갈릴리에서『하나님의 복음을 전파』(막 一·十四)했다. 바울도 그의 활동의 처음부터『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장에서 전했다』(행 十三·五). 이와 같이 기독교는 처음부터 신언(神言)을「선포」하고 전하고 설교하는 데 중점을 둔 종교이다. 이러한 전통을 받아 교회는 유능한 설교자를 많이 배출했다. 五세기초에 밀라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하게 한 암브로시우스나, 十八세기에 존 웨슬리와 함께 영국에서 부흥 운동을 하다가 미국에 건너가서 일대 부흥 운동을 전개한 조오지 휘크필드나, 또는 기관 포 설교자라고 하는 빌리 그래햄 같은 이는 교회가 낳은 가장 유명한 설교가 이다. 이러한 설교 가는 어떤 웅변가나 수사학자(修辭學者)보다 뛰어난 화술(話術)을 가진 달변 자들이었다.
한국에는 세계를 향하여 자랑할 만한 설교가가 없을까? 한국의 암브로시우스, 한국의 조나단 에드워드, 한국의 필립스 브룩스는 없을까? 그러한 설교자가 있다면 누구일까?
우리 편집인 몇 사람은 이 물음에 대하여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러한 분으로서 한경직 목사님을 택했다. 그가 훌륭한 목회자인 동시에 훌륭한 선교자임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대 설교자를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설교를 직접 듣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이 때까지 하신 수많은 설교 중 약 五00 편을 뽑아 출판하여 우리의 기쁨을 다른 독자들에게까지 나누고자 하여 설교 집을 출간하기로 했다.
내용에 대한 평가는 독자 여러분이 내려주시기를 바란다. 내용 배열에 있어서는 편의상 설교를 한 연대에 따라 열 권으로 나누었다.
바라기는 이 설교 집을 통하여 한경직 목사님과 같은 설교자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나와 주었으면 한다. 이것이 이 설교 집을 출판하는 목적이기 때문에다.
一九七一년 十월 二十七일
편집위원 이 종 성
目 次
刊行辭................................................................................................................ 三
머리말................................................................................................................ 五
Ⅲ- 1 .................................................................................................... 一一
Ⅲ- 2 .................................................................................................... 二一
Ⅲ- 3 .......................................................................................... 二七
Ⅲ- 4 .......................................................................................................... 三七
Ⅲ- 5 ............................................................................... 四八
Ⅲ- 6 .................................................................................................... 五八
Ⅲ- 7 ................................................................................. 六七
Ⅲ- 8 ................................................................................................ 七七
Ⅲ- 9 ........................................................................................................... 八七
Ⅲ-10 ......................................................................................... 九八
Ⅲ-11......................................................................................................一0八
Ⅲ-12 ...........................................................................................................一一八
Ⅲ-13 .................................................................................................一二九
Ⅲ-14 ..........................................................................................一四一
Ⅲ-15 ......................................................................................................一五一
Ⅲ-16 ................................................................................................................一六一
Ⅲ-17 ..........................................................................................................一七三
Ⅲ-18 .............................................................................................一八三
Ⅲ-19 ...................................................................................................一九三
Ⅲ-20 .....................................................................................................二0三
Ⅲ-21 ..........................................................................................................二一二
Ⅲ-22 ....................................................................................................二二三
Ⅲ-23 ..........................................................................二三四
Ⅲ-24 ............................................................................................................二四五
Ⅲ-25 ...............................................................................................二五六
Ⅲ-26 ........................................................................................二六八
Ⅲ-27 ........................................................................................................二七八
Ⅲ-28 ...........................................................................................................二八九
Ⅲ-29 ......................................................................................................三00
Ⅲ-30 ........................................................................................................三0八
Ⅲ-31 ...........................................................................................................三一七
Ⅲ-32.........................................................................................................三二八
Ⅲ-33 ............................................................................三三八
Ⅲ-34 ........................................................................................................三四七
Ⅲ-35 .......................................................................................................三五五
Ⅲ-36 ...................................................................................三六六
Ⅲ-37 .............................................................................................三七七
Ⅲ-38 .............................................................................................三八四
Ⅲ-39 ...............................................................................................................三九三
Ⅲ-40 .......................................................................................................四0四
Ⅲ-41 ......................................................................................................四一一
Ⅲ-42 ................................................................................................四一九
Ⅲ-43 ..........................................................................................四三一
Ⅲ-44 ..................................................................................................四四一
Ⅲ-45 ................................................................................................四五一
Ⅲ-46 .........................................................................................................四六三
Ⅲ-47 .....................................................................................................四七三
Ⅲ-1 의인을 대망 함 (창세기 十八장 二十二-三十三절)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十인을 찾으시면 어찌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十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창 十八·三十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나타나셔서 두 가지 비밀을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리 우는 아브라함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는 아들 이삭을 장차 주시겠다고 하는 언약의 말씀이요, 또 하나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킬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킬 수밖에 없다고 하는 말을 들은 아브라함이, 소돔 성을 향하여 가시는 여호와 옆에 서서, 간절히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기도한 말씀이 창세기 十八장 하반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사를 읽을 때에 아브라함이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였고, 겸손히 기도하였고, 계속적으로 기도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도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음의 사람인 것을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이와 같이 간절히 기도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여기 기도에 그 말은 없지마는 제일 먼저 생각되는 것은 소돔 성에는 자기의 조카 롯이 당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거니와, 본래 벧엘 지방에 아브라함과 롯이 살았습니다. 점점 가산이 넉넉하여짐에 따라서 가축이 많아지고 또 목자들이 불화 하는 모양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높은 산에 올라서 사방을 바라보면서『이 지경이 넓지 아니하냐? 네가 동으로 가면 나는 서로 가겠고, 네가 서로 가면 나는 동으로 가겠으니, 우리가 피차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친족간이 불화 하는 것을 면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그래서 롯은 그 때에 동편을 향해서 요단 들을 바라보니 풀이 푸르렀고 땅이 윤택함으로 그곳을 택하게 되었는데, 그 요단 들에는 소돔과 고모라 성과 그 밖에 세 성이 즐비하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소돔에는 자기의 조카 롯이 살게 되었습니다.
또 그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이와 같이 간절히 기도한 그 배후에는 아브라함의 도덕적 의식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소돔 성에도 상당한 의인의 수가 있을 터인데 이 의인들을 악인과 같이 멸망시키는 것이 어찌 공의의 주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인가? 의인들을 기억하고 간절히 기도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만도 아닌 줄 압니다. 아브라함은 물론 죄를 미워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마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어서 아무리 죄를 지었지마는 그들이 멸망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에 마음속에 일어나는 긍휼 함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어떻게 구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 가운데서 간절히 기도한 줄 생각합니다.
기도의 내용은 여러분께서 이미 들으셨습니다.『의인과 악인을 같이 대우하고 균등히 하는 것이 어찌 합당하겠습니까? 아무리 소돔과 고모라 가 악하다고 하지마는 만일 그 가운데 의인 五十명이 있다고 하면, 의인 五十명을 악인과 같이 멸망하게 하시는 것이 어찌 여호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까? 만 유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공의를 행하시지 아니하시겠습니까?』이와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에 대답하는 말씀이『만일 소돔 성에 의인 五十명이 있다고 하면, 그들로 말미암아 온 지경을 용서하여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용서할 뜻은 계시지만 그 성에 의인 五十명이 없는 사실이 또한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좀 더 가까이 나아가며 다시 아뢰었습니다.
『저는 티 끝과 죄에 불과한 더러운 죄인이지마는 다시 한번 아룁니다. 만일 五十명 가운데 五인이 부족하다 할 것 같으면 다섯 사람이 부족한 것으로 말미암아 온 지경을 멸망시키겠습니까?』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시 대답하시는 말씀이『만일 소돔에 의인 四十五명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위하여 온 성을 용서하여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보니까 四十五인도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시 송구한 것은 말할 수 없지만 아뢰었습니다.『만일 四十五인 가운데 五인이 부족해서 四十인만 있다고 하면, 四十五인 중에 五인이 부족하다고 해서 온 성을 멸망시키겠습니까?』다시 여호와 하나님이 대답하는 말씀이『四十인만 있을지라도 내가 그 성을 용서하리라』하셨습니다.
四十인도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三十五인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三十인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일 二十명만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二十인도 되지 못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이 한번 더 구했습니다.『만일 소돔 성에 의인 열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성을 어떻게 하오리까?』여호와께서 말하셨습니다.『만일 네 말대로 의인 열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 열 사람으로 인해서 그 온 성을 용서하여 주리라.』
그 후에는 아브라함이 감히 입을 더 열 수가 없어서 자기의 장막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여호와 하나님은 소돔 성을 향해서 나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아브라함은 높은 산에 올라서서 소돔과 고모라 성이 있는 동방의 들을 향해서 보매 온 성에서 연기가 옹기점 같이 올라왔습니다. 결국 소동 성은 의인 열 사람이 부족해서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제가 몇 달 전에 이탈리아 나폴리에 갔다가 거기서 가까운 폼페이 성의 폐허를 가서 구경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이 폼페이 성은 일찍이 주전 三, 二, 一세기, 주후 一세기까지 번영하던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一세기 말엽에 갑자기 그 옆에 있던 비스비어스 화산이 폭발되면서 말할 수 없이 많은 화산 용암과 재가 하루아침에 二十자 이상 덮임으로 몇 사람 도망해 나온 이외에는 사람이나 가축이나 할 것 없이 전부 재로 변해 버린 비참한 도시입니다. 너무 깊이 묻혀 있었기 때문에 발굴할 생각을 하지 못했지마는 몇십 년 전에 비로소 그곳을 발굴했습니다. 지금은 근 二천년 동안이나 땅 속에 있던 그 폐허가 다시 나타나서 누구나 옛날 폼페이의 시가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가는 비록 좁지마는 돌로 깔았고 물론 위에 있던 것도 다 없어졌지마는 돌로 쌓았던 담들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 때에 사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 당시 얼마나 술을 많이 먹었다고 하는 것도 술집이 즐비하게 있는 것을 보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음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고 하는 것도 아직 남아 있는 벽화와 그림들을 보고 그 사람들이 남겨준 조각을 보아서 능히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사람들이 얼마나 우상을 섬겼다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주피터의 부러진 목이 그대로 남아 있고, 주피터의 신당에 올라가는 돌로 쌓은 계단이 반반하게 닳은 것을 보아서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습니다. 당대에는 호화스러웠지만 지금은 황폐된 그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면서 마음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 가운데 하나는, 이 성에도 결국은 의인 열 사람이 없었던가, 그런 생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어떤 국가나 어떤 민족이나 혹은 어떤 문화의 강약 혹은 우열 혹은 흥망성쇠를 물리적 조건에 의지해서 수나 양의 세계에서 판단하기 쉽습니다. 어떠한 나라가 강한 나라이냐? 면적이 얼마나 넓으냐? 인구가 얼마나 많으냐? 그 나라에 공장이 얼마나 많으냐? 그 나라에 비행기가 얼마나 많으냐? 군함이 얼마나 많으냐? 오늘날로 말하면 원자탄이나 유도탄이 얼마나 많으냐? 흔히 이런 것으로써 민족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아니해야 될 것은 이보다 더 중요한 민족이나 국가나 문화의 흥망성쇠의 요소가 되는 것은 정신적 요소란 것입니다. 그 나라, 그 민족의 민족적 정기가 어떠하냐? 민족적 사기가 어떠하냐? 그 민족의 도덕적 분위기와 수준이 어떠하냐? 그 민족이 얼마나 깨끗이 살며, 얼마나 옳게 살며, 그 나라와 그 민족에게 얼마나 공의가 행하여지느냐? 다시 말해서 성경의 말씀대로 말하면,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힘이 그 민족과 그 국가 안에 의인이 얼마나 잇느냐? 요컨대 그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문화의 흥망성쇠를 마지막으로 결론지어 버린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의인 五十이 있을지라도 의인 五十을 위해서 온 지경을 용서하여 주리라.』
유명한 선지자 엘리사가 나이 많아서 임종할 때에,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요아스 왕이 병석에 누운 엘리사 옆에 꿇어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외쳤습니다.『아버지시여, 아버지시여, 당신은 우리 나라의 마병(馬兵)과 병거(兵車)가 되시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께서 가시면 우리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눈물과 같이 탄식했습니다. 말 타고 전장에 나아가거나 병거를 타고 전장에 나간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에 있어서 엘리사라고 하는 의인의 존재는 그만큼 그 나라를 힘있게 만든 것입니다. 감히 원수들이 경히 볼 수 없으리 만큼 힘을 준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 말씀에『의인은 사자보다 강하니라』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의인은 사자보다 강합니다. 무엇보다 강합니다. 의인이 있어야 나라가 바로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이유가 있습니다. 의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 감화력이 사회에 미치는 것입니다. 의인에게는 의인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 향기가 사회에 퍼지게 됩니다. 이 사회를 망하게 하는 것은 결국 부패하게 하는 세력입니다. 그 부패하게 하는 세력과 싸워서 새롭게 하는 힘은 의인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프랑스 나라에서는 과격한 정치 파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신문을 통해서 압니다. 十八세기에는 프랑스 대 혁명이라는 큰 혁명이 일어나서, 왕을 잡아 단두대의 이슬로 만들고, 귀족들을 잡아죽이고, 서로 민족끼리 싸워서 많은 사람이 희생을 당하고, 그 후에야 프랑스 민족이 자유의 정부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十八세기에 영국에서는 피 흘림이 없이, 비극이 없이, 재산의 희생이 없이 옛 체제에서 변해서 좀 더 새로운 자유와 평화가 있는 나라로 변천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역사가들이 하는 말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를 열거할 수 있지마는, 무엇보다도 더 큰 힘은 영국에는 요한 웨슬레라는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영국에도 당시에 부패한 것이 많았습니다.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것 중 숙청할 것이 많았습니다. 평민 가운데 불평이 많았습니다. 여러 가지고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한 웨슬레라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사방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평민이 회개하고, 귀족이 회개하고, 국회의원도 회개하고, 공장의 직공도 회개하고, 각계 각층 사람이 변해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피 흘리는 혁명의 필요는 없어졌습니다. 자연히 국회가 아름다워졌습니다. 정부가 좀 더 깨끗해졌습니다. 공장도 더 일할만하게 되었습니다. 사회 정의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각 방면으로 사회의 모든 형편이 아름다워지고, 자연히 그리스도의 이상과 사랑에 의지해서 변천된 새로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十九세기에 와서 전 세계의 최강의 나라로 발전되었습니다.
국가의 흥망과 성쇠도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우리 인간이 죽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병이 나서 죽습니다. 병은 왜 납니까? 흔히 하는 대로 말하면 우리 육체 속에 악한 균이 들어옵니다. 균이 들어와서 우리의 육체를 썩힙니다. 그러면 우리 육체 속에 있는 백혈구가 총 동원이 됩니다. 그래서 열이 오릅니다. 우리 원수인 썩히는 세력이 들어와서 우리의 피와 살을 썩힙니다. 이 균들을 잡아죽이려는 백혈구와 여러 균 사이에 전쟁이 몸 속에 일어납니다.
한편에서는 육신을 자꾸 썩히려고 합니다. 다른 한 편에 있는 백혈구는 자꾸 새롭게 하려고 합니다. 이 둘이 싸우다가 마지막에 어느 편이 이기느냐? 균이 이기면 마지막에는 사람이 죽습니다. 그러기에 거의 세상을 떠나가는 사람 옆에 가 앉으면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 편이 이기면 죽습니다. 새롭게 하는 백혈구의 편이 이기면 죽지 않고 삽니다.
우리 사회도 민족도 그와 비슷합니다. 우리 사회에도 우리 민족 사이에도 이 두 가지 세력이 싸웁니다. 하나는 썩히려고 하는 세력입니다. 그러나 하나는 새롭게 하려고 하는 세력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이「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입니다. 소금은 무엇 하는데 씁니까? 썩는 것을 방지하고 새롭게 하는데 씁니다.
여기 생선이 있는데 생선을 그냥 두면 썩히는 미균(黴菌) 때문에 못 견디어 썩어집니다. 그러나 소금을 많이 처서 소금의 세력이 강하면 균을 죽여서 썩지 않게 방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이 썩히는 세력이 있는 우리 사회에 둔 것은 썩어져 가는 세력을 막기 위해서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해방 이후에 더욱이 六·二五이후에 우방 나라에서 우리 한국의 재건을 위해서 여러 가지 방면으로 도와줍니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각 방면으로 도와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든지 기억하여야 될 것은 외국 사람들이 아무리 우리를 도와준다고 하지마는 우리가 이 내부에서 썩어지는 세력을 우리 자신이 막지 못하면, 외국의 도움만 가지고는 한국이 재건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썩어지는 것을 막는 세력이 되는 의인들이 많이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국회에도 좀 더 올바른 사람, 관청에도 좀 더 올바른 사람, 각 방면에 옳은 길을 가는 사람이 많아야 우리 나라를 재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의인은 어디서 찾을 수 잇느냐? 의인에 대한 성서적 관념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서적 견지에서, 의인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올시다. 둘째로,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도덕적으로 양심대로 하는 사람이올시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셋째로, 하나님 앞에서까지 옳은 사람입니다. 이런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이 견지에서 볼 때에 사실 이 세상에는 의인이 없나니, 곧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절대의 견지에서 보면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의인이 없는 세상에 의인을 만들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것입니다. 로마서 三장 二十三-二十四절을 읽습니다.『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잇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죄를 범한 사람이라도 예수를 믿고 십자가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고 과거에 그릇된 길을 걸었지마는 옳은 길로 돌려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의인을 만들기 위해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써 의인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시편 제 一편을 보십시오. 복 있는 자의 가는 길과 악한 자의 가는 길, 두 길이 있습니다. 의의 길과 불의의 길, 두 길이 있습니다. 내가 어떠한 길을 확실히 택하였는가? 어떤 이들은 오래 예배당에 다니지마는 학습도 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례도 못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인의 길을 가기는 원하지마는 확실히 작정이 없는 사람들이올시다.
어떻게 생각하면 온 세계가 소돔과 고모라의 전날 밤이 아닌가. 폼페이의 전날 잠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이 세계를 구원할 요소는 오직 죄를 회개하고 의로운 길을 걷는 사람이 많아지는 그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의인을 대망하고, 우리 사회가 의인을 대망하고, 우리 민족과 국가가 의인을 대망하고, 온 세계가 의인을 대망 합니다.
(一九五八년 十월 十二일)
Ⅲ-2 입교의 깊은 뜻 (요한 복음 十五장 一-十二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十五·五)
오늘 성례 주일을 당해서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많은 교우들이 오늘 학습도 서게 되고, 또 다음 예배에는 세례도 받게 되고, 아기 세례를 받은 분으로서 신앙을 고백하고 입교도 하게 되는 사실이올시다. 오늘 이 시간, 입교의 깊은 뜻을 잠깐 동안 생각하고자 합니다.
입교라고 하는 말은 문자 그대로 교회에 들어온다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에는 항상 교회는 보이는 부분이 있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실 보이는 부분은 적습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은 얼마나 더 큰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바다의 빙산이 물위에 보이는 부분은 적지마는 물 속에 잠긴 보이지 않는 부분은 심히 큰 것과 같이 우리 교회가 역시 그러한 것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자연히 한 곳에 다 모일 수 없으니까 지(支)교회로 여러 곳에 나누어 모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여러 가지 형편에 의지해서 교파로 또한 갈라진 것이 사실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자연히 여러 지방, 여러 나라에 흩어져 모이는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보이지 아니하는 부분은 오직 하나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부분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과 이미 간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아니하는 참 교회는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도 하나이시고, 주님도 하나이시오, 세례도 하나이시오, 소망도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인 교회에 들어오는 경로는 보이는 이 지 교회를 통해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인 교회에 들어오는 길은 오직 시간적이오, 공간적인 이 지 교회를 통해서만 들어오게 되는 것이 역시 사실인 것입니다. 이제 성경을 보면 이 큰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상징과 비유로서 우리에게 그 뜻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가령 오늘 읽은 이 말씀, 요한 복음 十五장 一절에서 十절까지에는 큰 포도나무에 비유했습니다. 이 우주에 큰 포도나무 하나가 있습니다. 그 나무에는 가지가 많이 있는데, 이 가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온 우주에 사무치리 만큼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이 나무는 곧 그리스도요, 모든 가지는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교우들이올시다.
가지가 많은 목적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는 비결은 이 나무에 꼭 연결되어서 본 나무가 내어보내는 생명의 즙을 받는데 있는 것입니다.
입교라고 하는 것은 이 신령한 포도나무인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나무의 한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열매를 맺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성경에 보면 에베소 二장 二十절, 베드로 전서 二장 五절, 그 밖에 성경에서 보면 이 교회를 큰 성전에 비교했습니다. 이 우주에 큰 성전에 점점 지어지고 있습니다. 이 성전의 모퉁이 돌은 그리스도입니다. 이 성전에 열두 기초석이 있는데, 곧 열두 사도입니다. 그 뒤에 수많은 돌들이 첩 놓이고 우주에 가득히 차리 만큼 웅장한 성전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 성전을 이루어 가는 여러 돌들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신자올시다. 그래서 우리 하나 하나는 이 큰 성전에 일부분을 이루는 산 돌입니다.
성전을 짖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계시기 위해서 집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지으십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거룩합니다. 그러므로 산 돌이 된 우리 믿는 사람도 거룩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이 예배가 항상 우리 심령 가운데 있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몸이라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성경, 가령 고린도 전서 十二장 二十절을 보면, 교회를 큰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해서 가르쳤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큰 몸이 있습니다. 이 몸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이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지체마다 기능이 다릅니다. 지체마다 자기의 책임이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 하나가 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성신을 받지마는 은사는 다릅니다. 은사에 따라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책임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가르치고, 어떤 사람은 심방하고, 어떤 사람은 권면하고, 여러 가지 다른 은사에 따라서 자기의 책임을 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몸 가운데 어떤 지체가 병들면, 온 몸이 아픕니다. 몸 가운데 어떤 지체가 마비되면, 온 몸의 활동에 지장이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 하나가 그리스도의 산몸의 지체가 되었은즉 병들지 아니해야 되겠고, 마비되지 아니해야 되겠고 각각 하나님께로 받은 바 은혜에 의지해서 내 책임을 다 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 二장 十九절과 요한 一서 三장 一절을 읽으면, 교회는 하나님의 큰 권속이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큰 가족이 됩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인생을 다 지었으니까 다 하나님의 자녀라, 인류가 다 자녀라, 이런 사상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또 한번 읽어보면, 그런 사상 이외에 이 세상 가운데는 두 가지 가족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믿지 아니하고 죄악에 사는 사람은 악한 마귀의 자녀라고 기록했습니다.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 자녀라고 기록했습니다.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든 특권과 기업과 모든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자녀 된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효도할 책임이 있고, 자녀 된 사람은 아버지의 사업을 계승할 책임이 있은 즉,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보 三장 二十절을 읽어보면, 우리의 시민권도 하늘에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교회를 큰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시간과 공단을 초월하는 금 생과 내세에 뻗친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는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이 나라의 왕은 오직 한 분되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모든 믿는 사람은 이 나라의 시민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입교함을 통해서 이 신령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특권이 있습니다. 아울러 의무도 있습니다.
나라에 의무가 많지마는 한 마디로 말하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병역의 의무와 또 하나는 납세의 의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도 복음을 전파할 의무가 있고, 우리 교회를 섬길 모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 아닙니다. 디모데 후서 二장 三절을 읽어보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정병이 되라고 하는 권면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큰 군대로 비유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군대입니다. 군대가 있습니다. 십자군이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는 것은 이 십자군에 입대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이 십자군은 진리의 군대요, 의의 군대로서, 이 세상에 준동(蠢動)하는 악마의 세력과 싸워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해 내는 것이 십자군의 사명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십자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이 십자군의 사령관은 우리 주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입대한 것인즉 우리 주님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고, 악한 세력, 악한 유혹과 대항해서 싸워 이기고 인간의 영혼을 구원해서 인간을 해방하는 중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기억하세요. 요한 계시록 二十장 十五절에 보면, 생명 책에 기록된 사람만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 갈 수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七十 문도(門徒)가 나아가 전도하고 돌아 와서 예수 님께 보고하면서 그저 주님의 이름으로라면 사귀(邪鬼)도 굴복을 하더라고 기쁨으로 말하였습니다. 예수 님께서 그 말씀을 들으시고 사귀가 너희에게 굴복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보다 이렇게 함으로써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므로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보이는 교회에서 입교를 통해서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생명 책에 기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새 예루살렘의 온전한 구원을 얻는 확증이 되는 것입니다. 입교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열매 맺는 가지가 되어야겠습니다. 선전의 산 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십자군이 된 것입니다. 생명 책에 녹명(錄名)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一九五八년 十월 十九일)
Ⅲ-3 종교개혁의 근본원리 (로마서 一장 八-十七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一·十七)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은 종교개혁의 표어가 되는 구절이올시다. 오늘 十월 마지막 주일은 흔히 종교개혁 기념주일로 지킵니다. 그것은 주후 一五一七년 十월 三十一일에 비로소 유명한 十六세기 종교 개혁이 시작하게 된 까닭입니다. 물론 마틴 루터 이전에도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다가 희생을 당한 사람이 많지마는, 종교 개혁은 실상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 까닭으로 흔히 종교 개혁을 생각할 때는 우리가 먼저 그를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마틴 루터는 독일의 자그마한 어떤 지방, 가난한 광부, 혹 어떤 때는 농사를 짓는 그런 가정에서 난 사람이올시다. 부모가 빈한했지마는 신앙은 독실해서 어렸을 적부터 마틴 루터에게 그 당시에 행하던 신앙 생활을 하는 법대로, 마리아도 열심히 숭배하고, 여러 성자도 열심히 숭배하는 법을 어렸을 적부터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 후에 대학에 가서 다닐 때에 점점 나이고 많아짐에 따라서 인생 문제에 대한 깊은 사색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자기가 한 번 중상을 당해서 거의 죽을 번한 경험도 있었고, 중병을 입어서 심히 고통을 받은 경험도 있었고, 또는 자기 가까운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그와 같은 고통을 통해서 더욱 인생 문제에 대한 번민(煩悶)을 대학 시절에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큰 폭풍우가 있는 어느 날, 어떤 곳을 지나 가다가 바로 자기 옆에서 낙뢰가 되는 그러한 위험한 일을 당하게 될 때에, 이 청년은 큰 공포에 싸여서 그 자리에 꿇어앉아서『성 안나 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제가 수도사가 되겠습니다.』이런 부르짖음을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광업을 하던 사람들은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가 된다고 하는 성 안나를 수호 성자로 섬기던 때이어서 루터도 성 안나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청년으로서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 곳에 들어가서도 자그마한 독방 생활을 하면서 적은 문 하나 밖에 없는데 그 문을 열어 놓으면 공동묘지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기도를 하며, 묵상을 하며, 공부를 하며, 연구를 하며, 어떻든지 자기의 구원을 완성하길 애썼습니다.
그렇지마는 더욱 자기의 고통은 점점 더해졌습니다. 그 까닭은 성경을 연구해 보매 성경의 교훈과 그 당시 교회에서 가르치던 교훈과 행하는 일에 많은 차이를 발견하게 되어서, 거기에 대한 고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둘째로는, 자기가 그 때에 가르치는 대로 어떻든지 착한 일을 하고 어떻든지 공덕을 많이 쌓아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고 죄 사함을 받으려고 아무리 힘을 쓰고 정성껏 모든 것을 다 한다고 하지마는 도저히 양심의 평안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세수 물을 떠다 놓고 손을 씻으면서『아무리 씻고 또 씻어도 내 몸은 그냥 더러우니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스스로 탄식하는 말까지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경을 더 연구하며 또한 성경을 그 때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시편을 가르치고, 갈라디아를 가르치고, 로마서를 가르치게 되어서 이런 책들을 연구하는 가운데 그 때 교회에서 가르치던 교훈이 근본적으로 성경에 가르치는 교훈에서 떠났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람이 율법을 행해서, 선을 행해서, 누가 덕을 쌓아서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 진리를 분명히 깨닫는 동시에 지금 읽은 이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써 하나님에게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께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진리를 분명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어떤 행실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으려고 힘쓰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의인을 믿음으로 산다고 하였는데 오직 이 믿음으로써 십자가의 공로 위에 온전히 자기 몸을 바치게 된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온전히 믿고 십자가를 믿는 가운데서 비로소 자기의 죄가 십자가의 공로로 다 용서된 것을 깨닫게 되고, 그 다음부터 자기가 구원받은 것을 확실히 알게 되고, 따라서 그 다음부터 구원의 참된 기쁨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서도 이 성경을 대학에서도 가르치고 자기가 주일마다 설교하는 교회에서도 이 진리를 가르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로마에서는 그 때에 레오 十세라고 하는 교황이 있었는데 그 전 교황 때에 굉장한 예배당을 짓게 되니까 재정이 대단히 궁핍해서 그 때에 흔히 하는 법대로 속죄 표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에도 테텔(Tetel)이라는 교황 사절을 보내서 속죄 표를 사방에서 팔았습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고 이 속죄 표를 샀습니다.
루터는 자기가 깨달은 그 진리대로 설교도 하고 가르치던 그 때인지라 이런 광경을 볼 때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一五一七년 十월 三十一일, 자기가 설교하는 켓슬 교회 문밖에, 속죄 표를 파는 것이 그릇된 것이며, 참으로 죄 사함을 얻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고 하는 그런 조항에 대한 九十五개조를 내걸고, 누구든지 내가 주장하는 여기에 대하여 반대하는 의견을 가졌으면 내가 공중으로 변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九十五개조가 바람에 날리듯 유럽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사방에서 이 루터의 九十五개조를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종교 개혁의 三대 원리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율법을 행함으로나, 선행(善行)함으로나, 공덕(功德)에 의지해서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義)를 믿음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이 원리입니다.
둘째로는, 당시 교회의 모든 형편을 보면 성경을 권위로 삼기보다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여러 가지 교회의 전통에 더 치중해서, 성경의 진리가 가리어지니까 이 앞으로는 성경만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고 교회에 내려오는 전통은 성경에 의지해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는 원리를 주장했습니다.
셋째로는, 그 당시에 보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성경에 보면 중보는 오직 예수 님 한 분밖에 없는데)반드시 신부를 통해서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이런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없는 진리이니까, 누구든지 제사장의 자격이 있어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그리스도만을 중보로 삼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기도도 하고 하나님께 직접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다시 말하면,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 三대 원리가 요원의 불과 같이 전 유럽에 퍼지게 되어서 사방에서 다른 종교개혁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가령 스위스 같은 데서 쥬리히 라고 하는 곳에서 쯔윙글리 같은 사람이 종교개혁의 봉화를 들게 되었고, 프랑스에서는 존 칼빈(John Calvin), 그 후에 제네바로 갔지마는, 칼빈 같은 사람이 역시 종교개혁의 불을 들게 되었고, 스코트란드 같은 데서는 존 녹스 같은 사람이 역시 이에 호응하게 되어 종교 개혁의 불길이 온 유럽 천지에 차게 되었습니다. 교황은 물론 루터를 파면하고 여러 가지로 탄압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무력으로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구교를 치중해 믿고 교황을 후원하려는 이런 나라를 동원해서 신교 믿는 사람들을 무력으로 탄압하기 시작하니까 결국은 신교도들도 역시 무력으로 항쟁하기 시작해서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十六세기 중엽부터 十七세기까지 근 한 세기 동안 종교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비참(悲慘) 가열한 三十년 전쟁도 그 때 있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一六四八년 웨스트팔리아(Westphalia) 협약에 의지해서야 비로소 구교 나라에서 신교 믿는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교의 자유가 많은 희생을 통해서 획득하게 된 것을 우리가 잊지 아니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신교와 구교의 차이가 대체 무엇이냐? 구교 혹은 천주교 혹은 카톨릭교와 우리 신교, 장로교니 감리교니 하는, 이 신교의 차이가 대체 무엇이냐? 대체로 구교는 중세 시대 기독교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가령 이렇게 몇 가지로 대조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 신앙에 대해서 지금도 말했지마는 우리 신교에서는 성경만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습니다. 구교에서는 성경 뿐 아니고 교회의 전통을 지금까지도 중요시해서 전통 대로하려고 합니다. 우리 신교에서는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일 한, 참으로 무오(無誤)한 법칙인줄 믿고 그렇게 행하려고 합니다.
구교에서는 성경 이외에 교회 전통 뿐 아니라 특별히 교황이 있어서 교황 무오설(敎皇無誤說)을 믿습니다. 교황이 신앙 문제나 행위 문제에 대해서 확정하는 것은 그릇될 수 없다고 하는,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임을 믿습니다. 우리 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만 믿습니다. 그들은 성모 마리아를 믿고 또 여러 성자도 많이 믿는 모양입니다.
우리 신교에서는 죽어서 천당에 가지 아니하면 지옥에 가는 것이라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 믿습니다. 구교에서는 성경에도 없는 연옥이라고 하는 딴 곳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밖에도 많지만 이런 몇 가지가 특별히 다른 것입니다.
예배는 어떠냐? 우리 신교에서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단순히 성경의 교훈과 같이 신령과 진리로써 예배합니다. 구교 예배는 의식을 존중히 해서 그 신부나 감독의 의복이 화려하고 찬란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예배당에 들어가 보면 성모 마리아와 여러 성자들의 성상들과 그리스도의 성상들과 이런 우상과 비슷한 것이 많이 나열되었고, 많은 성도들이 그 성상 앞에 가서 기도하는 것을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신교에서는 예배 순서가 간단합니다. 찬송과 기도와 설교, 그저 이 몇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밖에 미사 제를 드립니다. 미사 제라는 것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어디서 왔는고 하니, 예수 님께서 성찬 예식을 행하실 때에 말씀하시기를『이것은 내 몸이니, 이것은 내 피니…』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떡과 포도즙이 사실상 예수 님 피로 변해서, 그러니까 예수 님 몸과 피를 다시 제사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이런 전통이 생겼습니다.
이 교훈은 성경의 교훈과 정반대 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 님께서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제사를 지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이것과 반대로 합니다. 신부가 그 십자가의 제사를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반복해서 미사 제를 지냅니다. 우리 신약에는 전혀 없는 풍속입니다. 성례(聖禮)하면 선교에서는 단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즉 세례와, 성찬, 신약에 있는 대로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구교에 보면 거기에 다섯 가지 더 있습니다. 가령 견신례(堅信禮)라 하여서 세례 받은 다음에는 감독이 안수하는 풍속이 있고, 종유례(終油禮)라 하여서 사람이 죽기 전에 기름 바르는 풍속이 있고, 참회례(懺悔禮)라 해서 죄지은 다음에 신부에게 가서 자복(自服)하고 용서받는 그런 예사 있고, 결혼식도 성례로 간주하고 또 무슨 임직식(任職式)도 성례로 간주해서 성례를 일곱 가지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정치는 어떠하냐? 우리가 신약을 보면 초대 교회에서 집사를 택할 때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일곱 집사를 투표해서 선정했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천주 교회서는 그 풍속이 다 없어진지 오랬습니다. 구교는 교황이 있어서 교황이 그 아래 기관을 임명하고, 대 감독과 감독을 임명하고, 감독이 각 교회 신부를 임명하는 교황 전제 정치입니다.
지금까지도 천주교에 모호한 점이 있습니다. 천주교회가 사실 국가냐? 혹은 교회냐? 로마에 가 보면 교황과 성 베드로 예배당이 있는 그 자그마한 구역을 바티칸(Vatican)이라고 해요. 교황은 전 세계에 있는 로마 교회의 주권자인 동시에 바티칸 나라의 왕입니다.
그러면 이 로마 교회에 입교한 사람들이 어떠한 의미에서 로마 교황에게 충성을 하느냐? 이것을 나라로 간주하는 나라에는 교황청에서 사자를 보냅니다. 우리 나라에도 사실 교황청의 사자가 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그곳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황청의 사자를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말 나라이냐, 이것이 교회이냐 에는 모호한 점이 지금까지도 있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이 된지 벌써 四백여 년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그 결과가 어떻게 된 것을 지금은 대강 엿볼 수가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영국, 독일 그리고 북부 유럽은 대체로 다 신교입니다. 남부 유럽 국인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지방은 대체로 구교입니다. 또 남북 아메리카는 보면 북 아메리카인 미국과 가나다는 대체로 신교입니다. 남아메리카는 대체로 구교입니다.
이 두 지방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문화적인 면에서, 구교를 주로 믿는 나라가 더 앞섰느냐? 신교를 믿는 나라가 더 앞섰느냐? 더구나 민주주의적 견지에서 보아, 민주 정치가 주로 구교를 믿는 나라에서 더 발전되었느냐, 신교를 믿는 나라에서 더 발전되었느냐?, 그것은 여러분의 판단에 맡깁니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한 가지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신교가 많고 구교가 적은 나라에는 신교 자유 문제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자유를 줍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구교가 많고 신교가 적은 나라 가운데는 구교도가 신교를 많이 핍박합니다. 콜롬비아 같은 나라에서는 지금도 많은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스페인에서도 작년에 신교 신학교 하나 있던 것마저 강제로 폐문(閉門)시키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이북에서 오신 분이 많은데 압록강이 본래 백두산 꼭대기 맑고 맑은 천지에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물이 점점 흘러 내려와 여러 곳을 지나서 신의주쯤 와서 보면 물이 대단히 흐립니다. 왜 흐립니까? 오래 흘려 내려오는 동안에 거기에 섞이지 않아야 할 것이 많이 섞였습니다. 기독교가 맨 처음에 갈보리 산상과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맑은 물이 흘러 내려오는 동안, 여러 역사적 과정을 지나오는 가운데, 로마 헬라 시대를 지내오고 암흑중세 시대를 지내오는 중, 여러 가지 섞이지 않아야 좋을 것이 섞인 것입니다. 우리 신교는 본래 근원지인 성경에 돌아가서 맑은 물을 마시는 이러할 신앙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기도하십시다. (一九五八년 十월 二十六일)
Ⅲ-4 감사의 종교 -감사 주일- (데살로니가 전서 五장 十二-二十四절)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五·十八)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恩澤)을 잊지 말지어다』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성경에는 감사 찬송 또는 할렐루야라는 말로 가득히 차 있습니다. 예배의 동기도 감사에 있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 시요 모든 신위에 크신 왕이 시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 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여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우리가 매 주일 이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이와 같이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시요, 우리의 구속자시 요. 우리의 보호자시요, 우리의 목자 시요.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질병을 고쳐주셨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여 주셨고, 우리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셨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특별한 절기도 잘 믿는 사람들이 지켰습니다. 특별한 절기를 지키는 것도 그 깊은 동기는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입니다. 옛날 율법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득한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속하신 그 크신 은총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 절기를 지킨 것입니다.
유월절이 지난 후 五十일이 지나서는 오순절 혹은 맥추절(麥秋節)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매년 특별한 절기로 이스라엘 백성이 지킨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곡식을 통하여 주시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모든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절기를 또 두었는데 그것을 장막 절이라 하여 그 후에 늦은 가을에 지켰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올 때, 먹을 것이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만나는 주셨고, 마실 것이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반석을 통하여 생수를 주셔서, 풍성하신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또한 추수를 다 걷어들인 후에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지금 은혜 시대에 내려와서도 우리가 부활절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상에서 우리의 죄를 속량(贖亮)해 주시고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므로, 그 구속과 구원을 감사하여 그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신 까닭으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이와 같은 절기를 또한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와 같이 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일년 동안 하나님께 받은 바 은혜, 즉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 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또한 특별히 우리 한국 교회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일찍이 七十년 전에 선교사를 보내서 우리 땅에 기쁜 복음을 전파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특별한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물을 드렸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에 특별히 예물을 드리게 됩니다. 그 동시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사람들이 열매 가운데서도 첫 열매를 드렸고, 十一조를 드려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한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성막(聖幕)을 지을 때에 강제로 어떤 물건을 걷어서 성막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노예에서 해방을 받은 것을 감사해서 모든 사람들이 즐겁게 은혜의 보답으로 드리는 물건을 가지고 성막을 지은 것입니다
솔로몬이 첫 성전을 지은 것도 솔로몬의 마음가운데, 모든 백성들의 마음가운데 북 바쳐 올라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써 드리는 물질을 가지고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 후에 제二 성전을 지을 때에도 바벨론 에서 해방을 받아 돌아온 무리가 여러 가지로 궁핍이 많지마는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축복을 감사해서 즐겁게 드리는 그 물질을 가지고 제二 성전을 마친 것을 우리가 다 잘 기억하는 것입니다.
먼 옛날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하는 예배당도 우리가 대부분 피난민으로 왔지마는 이미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시고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것을 가사해서 감격에 넘치는 가운데 드리는 물질을 가지고 이와 같이 큰 예배당을 이룩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예배당만 아닙니다. 세계 도처에 어떤 예배당이든지 그 예배당은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보답하기 위해서 드린 물질을 가지고 다 이루어 놓은 것을 우리가 압니다. 주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 일생을 봉사 생활에 바치는 사람들, 혹은 우리가 전도를 하고, 심지어 외국에까지 복음 전도를 힘쓰는 이 모든 헌신과 봉사와 선교와 사업도 그 동기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하면 보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하면 감사를 드릴까 하는 데에서 나온 것을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아프리카 대륙과 같은 밀림 지대에도 웬만큼 사람이 모여 사는 도회에 가면 반드시 두 세 사람일지라도 거기 선교사들이 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누가 이 사람들로 그런 자기의 고향과 고국을 떠나서 멀리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야수로 아직도 충만한 아프리카 밀림지대로 가게 말들었습니까? 누구든지 강권하여 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각자가 하나님의 받은 바 은혜를 감사해서 어떻게 하면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에서입니다.
내 몸과 마음을 바쳐서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그런 지성 가운데서, 혹은 북빙양(北氷洋) 가까운 추운 곳에, 혹은 남태평양 뜨거운 곳에 밀림 지대에도 다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온 세계 가지를 통해서 자기의 고국과 고향을 떠나서 복음 선교에 종사하는 사람이 여러 만 명에 달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람은 누가 강권해 보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 하나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이와 같은 헌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세계 각처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 수많은 병원, 수많은 학교, 고아원, 여러 가지 자선 사업 기관이 어떻게 되어서, 어떠한 물질을 가지고, 이와 같이 건설되었습니까? 어떠한 임금, 어떠한 대통령이 세납(稅納)을 거두어서 이와 같이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이 은혜에 감격해서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겠다고 하는 생각 가운데서 자원해서 즐겁게 하나님께 바치는 이 물질을 가지고 이와 같이 위대한 사업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늘날도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부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마는 로마서 一장 二十一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고 또한 감사하지도 아니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예수 비유 가운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기억하실 줄 압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어떤 해에 곡식이 잘 되어서 풍년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큰 풍년이 들었지마는 이 부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한 가지 근심만 있었는데 그것은 이렇게 많은 곡식을 어디다 간직할까? 그래서 곡간을 다시 넓게 짓고 그 곡간에 가득히 채워 넣은 다음에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단순히 자기 스스로『내 영혼아 이제는 즐거워하고 이제는 마음놓고 즐거워하고 먹고 마셔라. 여러 해 동안 쓸 것을 내 곡간에 지금은 간직하여 두었다.』라고 뇌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불렸습니다.
예수께서 성전 뜰에 있는 연보 궤에 앉아 계실 때에 어떠한 가난한 과부는 그 가난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격해서 자기의 연명할 것을 하나님 앞에 모두 그렸다고 했습니다. 역기에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너희들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이와 같이 권면했습니다.
우리 신자는 어떻게 감사를 드리는가? 믿는 사람들은 특별히 세 가지 진리를 깨닫습니다.
첫째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 곧 일월성신, 산천초목, 금수(禽獸)어별(魚鼈), 오곡백화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우리 인생에게 그저 준 것을 깨달아 압니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인생의 생명 자체도 생명에 속하는 어떠한 지혜가 있으면, 지혜, 어떠한 재능, 어떠한 지식, 나에게 속하는 재산, 심지어 나에게 속하는 자손까지도 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저 주신 것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본래 이 세상에 왔지마는 오늘까지 목서 입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나에게 그저 준 그 은총이 아닌가? 이 진리를 깨닫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이 진리를 모릅니다
둘째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죄를 많이 지은 것을 깨닫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 죽을죄를 짓는 것을 깨닫습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죄 가운데서 구속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 예수께서는 내 죄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려서 내 죄는 속죄해 주셨습니다. 나는 단순히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 것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그래서 금생(今生)과 내생의 영원한 축복과 생명을 얻게 된 것을 깨달을 때에 우리는 이 구속의 은혜를 언제든지 감사와 감격으로 생각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이 진리를 모릅니다.
한 걸은 나아가서 셋째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로마서 八장 二十八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우리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합동해서 유익함을 이루는 진리를 우리는 깨닫습니다. 요셉은 비록 형제에 의해 팔리어 갔습니다. 종살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외국에서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감옥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합동하여서 마지막에 선을 이룬 것을 우리가 압니다.
사도 바울의 육신 가운데 있던 가시가 찌르고 아팠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를 통해서 오히려 더 큰 능력을 받은 것을 우리는 압니다. 민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이 진리를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범사에 감사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순경에서 감사하는 것뿐 아니고 역경에서도 감사합니다. 평안할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환난 중에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전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나오면서 주를 위해서 매맞을 자격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기뻐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앉아서도 기뻐서 하나님 앞에 찬송을 부른 것입니다. 다니엘 같은 사람은 사자 굴에 꼭 들어가게 되었지마는 그런 가운데서도 감사의 기도를 한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유명한 태양의 노래를 지을 때에 하나님께서 태양을 지어주신 것을 감사하고, 산천초목의 모든 축복을 다 감사하다가, 마지막에는 죽음을 위해서도 감사했습니다.
순교자들이 형장에 나아가면서 감사의 찬송을 부르면서 나아갔습니다.
제가 들으니 전에 어떤 성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땅 위에서 믿는 사람들이 드리는 감사는 하늘에 올라가서 천사들이 그 감사를 받을 때에는 아름다운 장미꽃으로 변한다고. 그래서 천사들이 성도가 드리는 아름다운 장미꽃을 많이 받아서는 하나님 나라 천당의 거리를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영락교회 성도들이 드리는 이 감사가 하늘의 거리를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천당 구경을 한 번 갔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천당간 꿈을 더러 꾼 이들이 계실 줄 알아요. 어떤 분이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아, 그래서 가보니까 어떻게 아름답고 화려한지 알 수 없습니다. 한 곳에 가보니까 넓은 뜰인데, 여러 사람이 모여서 크게 이야기를 하면서 떠드는데 얼른 보니까 싸움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천당 구경간 사람이 이거 천당세도 싸움이 있나 하며 무슨 일인 가고 생각했어요. 그래서는 가까이 가서 구경을 했다고 합니다.
구경을 하니까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어떤 험상스럽게 생긴 사람,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이 주먹을 들면서『여러분, 내 말씀 좀 들어보세요. 제가 먼저 할 말이 꼭 있어요. 들어봐요.』이렇게 떠들어댑니다. 저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나 하고 가만히 보니까, 이 사람 하는 말이『난 본래 여러분이 보는 것처럼 이렇게 험(險)스럽게 생긴 사람이요. 난 본래 어렸을 적부터 나쁜 장난 많이 하고 학생 시대엔 깡패에 들어서 깡패 노릇하고, 그 다음에는 젊어서 허랑방탕(虛浪放蕩)하고 일생 동안 세상 사람이 짓는 죄란 안 지어본 죄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살인이요, 강도요, 별의 별 죄 다 짓다가 아, 그러다가 죽을병이 들었습니다. 아 그래서 죽게 되었습니다.』
『아, 그때 저의 집에는 예수를 잘 믿고 회개한 그런 좋은 아내가 있습니다. 우리 아내가 교회에 가서 교역자를 청했는데 목사와 권사 한 분이 와서 자기에게 권면하는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제도 회개하고 천당에 가라는 이런 전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처럼 일생 동안 이런 죄 많이 진 사람이 어떻게 회개할 수 있느냐고 물었죠. 그러니까 하는 말이 예수와 함께 못 박혔던 살인 강도도 십자가 위에 달려서 회개하고도 천당에 갔는데 나라고 이제 와서 회개할 기회가 없겠느냐고 합디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더군요. 그래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었는데 죽은 다음에 와 보니까 이렇게 화려한 천당에 왔으니 나보다 더 감사할 사람이 어디 있겠소.』이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이요.
그러더니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그거 하나님 은혜 감사하외다. 마는 내 이야기 좀 들어보세요. 나는 이래서 감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난 본래 우리 부모가 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나자마자 곧 세례를 받았어요. 난 물론 몰랐지마는 그 다음에 점점 커서는 주일학교를 늘 다녔습니다. 그리고 또 의례히 十八세 나서는 입교 문답을 하고 이어 교회에 입교했습니다. 그리고 믿는 중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믿는 대학엘 다녔어요. 그리고서는 곧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사업에 취직해서 거저 일 잘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교회에서는 주일학교도 가르치게 되고, 성가대로 노래도 부르게 되고, 얼마 있다가는 집사 직분을 맡으라고 해서 집사 일도 하고, 또 얼마 있으니 장로 직분 맡으라고 해서 장로의 직분을 맡고, 물론 여러 가지 죄야 많이 지었지요. 그 자그마한 죄, 그런 죄를 많이 지었지마는 무슨 큰 죄는 별로 지어보지 못하고 그저 온 집안이 항상 평안한 가운데서, 그저 평화스러운 가운데서 일생을 살다가 내가 지금 천당에 왔으니 나처럼 더 은혜 받은 사람이 어디 있소. 내 생각은 제가 제일 감사를 드려야 될 줄 압니다.』한 사람은 그런 단 말이요.
일 말이 끝나자 어떤 무리의 사람 말이 갑자기 우레 소리처럼 들리면서『우리들의 말을 들어보시오. 우리가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의 말을 들어 보시요.』말하는 것입니다. 다름이 아닙니다. 무리 가운데 보니까 한 사람은 나이 많아도 보이고, 어떤 사람은 젊어도 보이는데, 무리가운데는 일찍이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오래 믿은 사람도 있고, 오래 못 믿은 사람도 있고, 나이가 많아서 믿은 사람도 있는데, 그들이 다 세상에서 살 때에 다만 보통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동안에 큰 핍박이 왔습니다. 큰 핍박이 와서 그들 믿는 사람을 학살하는 그런 경위를 당했는데 그들이 그 때 이상스럽게 한 곳에 모이게 되었고, 한 가지로 꼭 죽을 때를 당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도 믿음을 배반한 사람 없이 믿음을 지키고, 그들이 생명을 바쳤으니 그들의 믿음이 부족하지마는 여기 와서 이렇게 순교자의 면류관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처럼 감사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순교자의 면류관을 보이는데 참 황금빛보다 더 아름다운 면류관을 보입니다. 꿈에 천당 구경을 갔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서야,『아 이거 천당에도 싸움이 있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싸움이 아니고 감사 싸움이구먼,』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영락교회에서는 싸움을 할 바에는 감사의 싸움을 합시다. 오늘 누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참으로 깨달아서, 우리가 다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제일 큰 감사를 드리는가 우리 보십시다. (一九五八년 十一월 十六일)
Ⅲ-5 한 소년의 헌신과 그 결과 (요한 복음 六장 一-十五절)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니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 六·九)
오늘 읽은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예수 님께서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 천명을 먹인 그 유명한 이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적과 과학 문제라든가 또 이적의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문제라든가 이런 문제를 중심해서 생각하기를 원하지 아니합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본래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로 믿을진대, 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과 같이 계신 그 말씀으로써 도성인신(道成人身)하셔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절대이신 줄 우기가 받을진대 그런 문제도 다 구름과 같이 해소될 줄로 생각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이 크신 이적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 각 사람에게 중요한 교훈을 찾아보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이 이적은 뱃세다 들에서 행하여졌습니다. 그 들은 광야입니다. 예수 님의 교훈과 그의 이적을 따라서 많은 무리가 집 없는 광야로 모였습니다. 어른들만 五 천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빈들에서 굶주린 이 백성들을 보시면서 예수 님께서 빌립에게 하신 말씀이『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는가?』빌립이 잠깐 생각하고 대답하는 말이 이 사람들을 조금씩이라도 무엇을 먹이려고 하면 적어도 二백 데나리온 상당의 떡을 사올지라도 오히려 부족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 돈으로 말하면 四, 五 만 환의 떡을 사온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후 조금 있다가 시몬 베드로의 동생 되는 안드레가 어떤 작은아이를 데리고 오면서 하는 말이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왔음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먹일는지 의아해 하면서 여쭈었습니다. 여기 어린아이가 하나 있어서, 아마 자기 어머니가 집을 떠날 때 점심하라고 싸주었던 한 사람 분의 점심인 것 같습니다. 이 아이가 있어서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이렇게 가져다가 주님 앞에 바치는데, 그렇지만 이 조그만 걸 가지고 이 많은 무리에 대해서 무슨 도움이 될까요?
예수 님께서는 그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명해서 그 많은 무리들을 풀밭에 더러는 五十명씩, 더러는 백 명씩 떼를 나누어 앉히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떡을 가져서 축사하시고 그 떡을 때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줄 때에 하나님의 큰 이적이 나타나서 아마 떼일수록 그만큼 많고 그만큼 불어서 五 천명을 먹이고도 오히려 남은 부스러기를 주운 것이 열두 광주리에 달하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이적을 가만히 생각할 때에 몇 가지 진리를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이처럼 굶주린 대중을 먹이는 큰 이적이 먼저 한 아이가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옴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입니다. 먼저 한 소년이 자기의 가졌던 것이 아무리 미약하지만 그것을 먼저 주님께 가져옴으로 이 큰 이적이 실현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계역사를 뒤져보면 역사적으로 모든 위대한 운동,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모든 위대한 운동이 처음에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十六세기의 유럽 역사를 볼 때에 온 유럽을 그야말로 뒤집어 놓은 종교 개혁이라고 하는 큰 운동이 한 수도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十八세기 말엽에 영국에서 노예를 해방하고 노예 매매를 금지하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서 마지막에는 온전히 노예 제도를 없이 하는 그 위대한 인도를 위한 운동이 맨 처음에 윌버소스(Wilbersorce)라고 하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오늘날까지 세계 농촌의 모범 농촌이 된다고 세계적으로 이름을 가진 덴마크의 농촌 개량 운동, 농민 향상 운동이 한 사람, 한 목사 그런드빅이라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회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사람이 많다고 하지만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이렇게 개인들이 모여서 백 명도 되고, 천 명도 되고, 천만도 되고, 삼천만도 되는 것입니다. 태산이 아무리 높다고 하지마는 티 끝이 모여서 태산을 이룹니다. 아무리 태평양 바다에 물이 많다고 하지만 한 방울, 두 방울의 물이 모일 때 태평양의 물결을 이룹니다.
따라서 대륙을 움직이고 이 사회를 개혁하고 이 사회를 옳게 만드는 모든 운동도 결국은 한 사람이 깨닫고 먼저 시작하고, 또 한 사람이 그 사람을 따르고, 개인 개인이 움직이는 가운데 마지막에는 큰 운동을 일으켜서 위대한 일이 이 세계 역사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특별히 이 본문을 보고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항간에서 보통 서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 이거 큰일 났다고 하며, 정치니, 경제니, 문화니, 관청이니, 군(軍)이니, 학교니, 할 것 없이 각계 각층이 속속들이 썩어 들어가는데 이것을 어떻게 할 수가 있나? 이것을 나 혼자 어떻게 할 수가 있나? 이것을 몇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있나?
썩어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알면서, 이것을 막아야 되고 이것을 고쳐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될 줄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그 날 그날 유유 도일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五 천명을 먹이는 이 위대한 기적이 한 어린아이가 먼저 있는 것을 바침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우리 사회에 사람이 많지만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이렇게 모여서 우리의 사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이것을 먼저 깨닫고 자기부터 먼저 옳은 생활을 하고 각기 그 직장에서 싸워 나간다 하면 위대한 이적이 오늘날 二十세기에 대한민국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둘째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한 어린아이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참 무사기한 마음으로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갖다 바칠 때, 이것을 축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하나님께서도 한 개인의 헌신을 축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가 비록 적지만 온전히 헌신해서 그리스도의 손안에 들어갈 때에 그것은 불고 불어서 초(草) 천명을 먹일 수 있는 이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아무리 한 개인일지라도 그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의를 위해서 싸울 때에는 온 우주가 그의 배후에서 그를 후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동양의 옛 성인도『덕불고(德不孤)라 필유인(必有隣)이라.』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덕이라고 하는 것은 외롭지 않다고, 맨 처음에는 외로운 소리로 홀로 부르짖기 쉽습니다. 그러나 덕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외롭지 않아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의를 위해서 싸울 때에, 전 민족 전체의 복리를 위해서 싸울 때에, 진리를 위해서 싸울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축복해 주신다고 하는 이 사실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할빈 역두(驛頭)에서 일본의 정치가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저격할 때에 선언서를 미리 인쇄했다가 뿌렸다고 합니다. 그 선언서 한 절 가운데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나는 절대로 일본의 정치가 한 사람을 암살하는 한 자객으로 알지 말라, 나는 대한민국 독립군의 한 사람으로서 전 일본제국을 향하여 싸우노라.』모든 사람이 다 어찌할꼬 하고 손들고 있을 때에 독립군의 한 사람으로서 전 일본 제국을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일을 하나님께서 축복해서 마지막에 우리 민족에게 다시 독립과 자유의 축복을 허락하여 준 것입니다.
여러분 다니엘을 읽어보시면 거기에 느부갓네살 왕의 유명한 꿈이 몇 있습니다. 한 번은 느부갓네살이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그만 깨어나서는 잊어버렸습니다. 이상한 꿈을 꾸어서 알기는 알아야겠는데……. 그래서 바벨론의 유명한 술객(術客)을 다 모아 놓고 하는 말이『내가 어제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이 꿈을 해몽해 주길 바라노라.』그러니까 술객들이 하는 말이『무슨 꿈을 꾸었습니까?』『그 꿈을 잊어버렸다. 그 꿈까지 생각해 내라.』 이 술객들이『꿈을 말씀하면 해몽하겠지만 그 잊어버린 꿈을 누가 해몽할 수 있습니까?』했습니다. 이거야 속수무책이란 말이오. 그래서 다니엘을 청해왔다고 그러치 않았습니까? 다니엘을 청해서 그 이야기를 하니까 하나님은 특별히 다니엘을 택해서 세운 종인 까닭으로 다니엘에게 그 꿈의 비밀을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 꿈은 다른 꿈이 아니고 꿈에 보니 큰 우상, 하늘에 닿는 우상을 보았습니다. 그 얼굴을 금으로 만들어서 번쩍번쩍 빛이 납니다. 그 가슴과 팔은 전부 은으로 만들어서 역시 광채가 납니다. 그 아래는 동으로 만들어서 역시 광채가 납니다. 그 아래는 쇠로 만들어서 든든히 섰습니다. 하늘에 닿을 듯 한 큰 우상을 보았는데 그 위엄이 어떻게 큰지 감히 사람의 얼굴로 우러러 볼 수 없으리 만큼 위엄이 굉장합니다. 그런데 문득 보니까 저 하늘꼭대기에서 조그마한 돌이 하나 내려옵니다. 그 돌이 내려오더니 조금(많이는 아닙니다) 우상에게 부딪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큰 우상이 와르릉 하면서 넘어질뿐더러 어디에 갔는지 흔적도 없어지고 찾을 수도 없이 되었단 말이요. 그러더니 조그마한 돌이 점점 커지는데 얼마나 커지는고 하니, 온 세계에 가득 차게 커졌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그 돌이 무슨 뜻인지 다 짐작하실 줄 압니다. 다른 말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허위의 우상이 있습니다. 불의의 우상이 있습니다. 악의 우상이 있습니다. 힘이 있어 보입니다. 모든 금, 은, 동, 철은 다 가졌습니다. 우상이 굉장합니다. 그러나 우상이 아무리 크지마는 작은 진리의 돌이 한 번 내려올 때에 진리의 돌에 부딪치게 되면 아무리 큰 우상이라고 하루아침에 일시에 다 부서져 만하여 없어지고 오직 진리만 크고 커서 그 진리가 온 세계를 점령한다고 하는 그 뜻입니다. 장차 이 세상의 모든 불의의 우상, 모든 허위의 우상, 모든 죄악의 우상이 아무리 큰 것 같지만 결국 진리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산산이 부서지고 그리스도께서 최후 승리를 얻는다고 하는 끗입니다.
오늘날 어떤 우상은 굉장히 큽니다. 금, 은, 동, 철이 많습니다. 원자탄도 준비했습니다. 인구가 제일 많습니다. 토지가 굉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허위의 우상이 아무리 커 보이고 든든해 보인다고 하지만 진리의 돌에 부닥칠 때에는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한 개인일지라도 자기가 전적으로 온전히 진리를 위해서, 참 민족을 중심으로 해서, 의를 위해서 가지의 있는 것을 온전히 바치고 나선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축복해서 그를 통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이 점을 생각합니다. 이 소년이 주님께 바친 것은 무슨 별 것을 바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기가 가졌던 것을 바쳤습니다. 자기 어머니가 싸준 그것, 가졌던 것을 바쳤습니다.. 그것을 바쳤더니 주님께서 이와 같이 위대한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슨 별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에게 있는 것을 바치기를 요구합니다. 내게 있는 시간, 내게 있는 힘, 내게 있는 재주, 내게 있는 지식, 내게 있는 돈, 내게 있는 무엇, 그저 내게 있는 것 바치는 것입니다. 다섯 냥쭝 은혜 받았으면 닷 냥쭝 어치, 두 냥쭝 은혜 받았으면 두 냥쭝 어치, 한 냥쭝 어치 받았으면 그저 한 냥쭝 처치 바쳐도 족합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든 것 다 할 수 있지마는 특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가령 우리 사회가 썩어 들어가는, 도의가 부패한 모든 것을 우리가 하루아침에 나가서 다 깨끗하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우선 내 속에 썩어지는 것이 있다고 하면, 이것이야 우선 바로 잡지 못하겠습니까? 이것이야 우선 방지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문필가 칼라일 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우선 네 자신부터 정직한 사람이 되라, 그러면 좌우간 이 세상에 정직하지 못한 사람의 구가 하나는 줄이 않을 것이냐?』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령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데, 二천명 가까운 사람이라 합시다. 만일 여기 앉은 우리가 다 나아가 우리 정계나 관청이나 각 방면에 가서 새로운 어떤 운동을 전개하지 못한다고 하지마는 우선 내 자신 하나만이라도 온전히 바로 잡아서 내가 참된 사람이 되고 내가 정직한 사람이 되어, 내가 바로 한다고 하면, 우선 우리 서울 장안에 二천명 가까운 사람이 옳은 사람이 될 것이 아닙니까? 그만큼 나쁜 사람의 수가 줄 것이 아닙니까?
이 소년이 다른 것을 주님께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드렸습니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해야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 자신에서 시작하고, 그 다음에 내 가정에서 하고, 그 다음에 내 직장에서 하고,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六장을 보면, 이사야가 청년 시대에 성전에 가서 기도 드립니다. 때는 바로 웃시야 왕이 죽던 해입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국제 정국이 험악한 그런 때입니다. 그 때 청년 이사야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문득 이상한 환상이 그 신령한 눈앞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높고 높은 하나님께서 보좌에 않으신 것과 그 앞에 스랍들이 날아다니면서『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그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도다.』계속해서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광경을 볼 때에 이사야는 양심에 질려서 곧 하는 말이『아! 큰 화로다, 내가 죄 많은 사람이, 내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하였구나.』이렇게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에 한 스랍이 제단에서 펄펄 붙는 숯불을 집게로 집어다가 이사야의 입을 지져주면서『이제부터 네 입술이 끼끗하여 졌느니라.』깨끗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있노라니 까 이상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우리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하나님께서 일군을 찾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소리를 들고 이사 야는『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어 주소서』자기가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여러분, 세계 정세가 어지러울수록, 국내 정세가 어지러워 갈수록, 이 때야말로 이 세 가지를 기억할 때입니다.
이런 때에야말로 우리가 신령한 눈을 열어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셔서 아무리 사람들이 떠들고 세상 사람들이 떠들지마는 결국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다스린다고 하는 이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둘째로는, 이와 같은 하나님 앞에 사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내 자신을 깨끗 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내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내 자신이 먼저 새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될 것입니다.
셋째로는, 이런 때 이런 시국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깨끗한 사람을 찾습니다.『우리가 누구를 보낼꼬,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하시며 사람을 찾습니다. 이런 때에 내 사명이 무엇인가, 사명을 깨달아야 됩니다. 기도합시다. (一九五八년 十一월 三十일)
Ⅲ-6 새해의 새 출발 (요한 복음 三장 一-十五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三·三)
오늘 아침, 새벽 첫 주일 예배로 이와 같이 모였습니다. 우리가 다 새해에 새로운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새벽에 대한 염원(念願)도 많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민족적으로 남북의 통일, 민주 대한의 확립, 경제 재건, 생화개선, 문화향상 등 여러 가지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또한 세계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도 세계 평화의 자유, 세계의 승리와 확립, 원자력의 평화(平和)전용(轉用) 또한 우주에 대한 계속 탐구와 정복 등 여러 가지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혹은 가정적으로, 각 방면으로 새로운 염원과 이 염원에 의한 여러 새로운 계획을 세워 출발하는 것이 사실인 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출발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 사람 그대로 아무리 무엇을 계획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새롭게 이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 우리가 새로운 계획 혹은 새로운 출발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새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새 사람은 오직 중생(重生)해서 새롭게 나는 것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금년 새 출발을 중생해서 시작하길 원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친히 말씀하시기를『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내려가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온 것도 출생(出生)을 통해서입니다. 마찬가지고 새로이 나는 길을 통해서만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출석, 새로운 결심, 새로운 노력이 있는 것으로써만 만족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면, 새롭게 나지 아니하면 들어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주님께서 분명히 여기에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 있는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관헌 가운데 하나이며 七十인 공회원(公會員) 중에 하나로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에 대하여도 주님께서 분명히 선언하신 것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거듭나야 새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새로운 계획을 한다고 하지마는 옛 사람 그대로 있어서 무엇을 새롭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는 오직 옛 일의 반복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가정을 생각할 때도 그렇고, 새로운 사회를 생각할 때도 그렇고, 새로운 국가를 생각할 때도 또한 같은 결론을 우리가 얻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중생의 진리는 신비해서 얼른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중생은 우리가 체험할 수는 있지마는 어떠하다고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운 진리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는 신비한 것이 너무 많아서 우리가 일일이 이해할 수 없지마는, 사실로서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자연계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도 우리가 그 현상을 체험하기는 하지마는,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어제도 뜻밖에 많은 눈이 내려서 이 대지(大地)를 덮었습니다. 우리는 경험에 의지해서 물이라는 것이 평상(平常)온도에 있어서는 액체로 있고, 좀더 뜨거운 온도에 있어서는 기체로 화하고, 낮은 온도에 있어서는 어름이 되고 눈이 되는 줄 알지마는, 어떻게 되어서 그렇게 눈이 아름다운 모양으로 승화되는지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생명 세계에 들어와 보면 모든 것이 신비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체험하듯이, 우리가 다 언제든지 음식을 먹지마는, 어떻게 이 음식이 변화해서 윌 속에 들어가면, 어떤 것은 뼈가 되고, 어떤 것이 살이 되고, 어떤 것이 머리칼이 되는지 우리가 분명히 다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같은 음식인데도, 동양 사람이 먹으면 머리칼이 새까맣게 나고, 서양 사람이 먹으면 샛노랗게 나는지 우리가 다 설명할 깃이 없습니다. 우리 한 사람이 먹을지라도 젊었을 때는 머리칼이 항상 새까맣게 나지마는, 五十이 지나면 꼭 같은 음식을 먹을지라도 흰 머리칼이 되어서 나옵니다. 그런 비근한 것도 우리가 체험을 하지만 어떻다고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나는 것도 마찬가지일 줄 압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태 속에 배어서 열 달이 된 다음에 분만합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그 배속에서 체험을 합니다. 하지마는 어떻게 태아가 배속에서 형성되고, 그것이 어떻게 자라고, 어떻게 귀여운 아기로 열 달 후에 나타나는지 그것은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큰 이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사실 육체의 아기가 나는 것도 신비합니다. 하물며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신령한 아기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되어서 중생이 되는지 다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읽어보아도 바람이 불되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성령으로 다시 나는 것도 다 이와 같으니라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사실 바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사실 만질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실 잡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있는 것을 우리가 체험합니다. 바람이 불면 춥습니다. 바람이 불면 나무 가지가 흔들립니다. 바람이 불면 물결이 요동합니다. 바람이 부는 징조를 보아서 바람이 있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마찬가지고 성신을 통해서 역사 하심으로 말미암아 중생 하는 것도 그 결과를 보아서 아는 것뿐이지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혹 어떤 경우에 이와 같은 비유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중생 하는 것도 어린아이가 이 세상에 오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어린 아기가 어두운 모태에서 광명(光明)한 이 세계에 나오는 것과 같이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어두운 세계에서 광명한 세계에로 나오는 것이라고 비유해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마치 유충(幼 )이 변해서 성충(成 )으로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유충이 변해서 성충이 다 된 후에는 고치를 뚫고 광명한 세계로 나옵니다. 속박에서 자유로 나옵니다. 죄의 구속 가운데서 영적 자유를 얻는 곳으로 나오는 것이 곧 중생이라고 비유해서 말하는 사람이 혹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있습니다. 중생은 신비해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중생의 표적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내가 중생 하였는지 하지 못하였는지 스스로 알 수는 있는 줄 압니다.
중생의 표적이 무엇인가? 간단하게 몇 가지로 지적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첫째는 거듭나게 되면 보는 것이 있습니다.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깨닫게 됩니다. 신령한 눈이 열립니다. 중생하기 전에는 하늘과 땅, 산과 바다를 볼 때에 단순히 하늘만 보고 땅만 보고 산만 보고 바다만 봅니다. 그러나 거듭난 심령이 하늘을 보고 대지를 보고 이 대자연계를 볼 때에는 물질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운데 조물주 대 주재의 권능과 그 영광과 그 지혜아 이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를 능히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연만 새롭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물을 보는 방면이 변합니다. 사람도 단순히 전에 보던 대로 보지 않게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를 사람 가운데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과 어떠한 주위에 살든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이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다 한 번은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최후인 죽음을 볼 때에도 그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단순히 암흑과 절망과 공포로만 보였지만 중생한 사람의 눈은 죽음 가운데서도 영원한 소망의 문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달라집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둘째로는, 과연 거듭난 사람은 그 마음속에 전에 없던 기쁨, 전에 없던 화평(和平), 전에 없던 든든한 그런 기분이 있는 것입니다. 유충이 변해서 성충이 된 이후에는 다 노래를 부릅니다. 매미가 노래를 부릅니다. 모든 벌레가 가을에 노래를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과연 거듭난 심령은 그 심령 속에 새로운 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주안에서 즐거워하라. 이런 말이 자연히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나의 평안을 네게 주노라.』그리스도께서 주는 평안을 그 마음 가운데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셋째로는, 비록 좁게 시장이 되지마는 새로운 성품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기가 모태 속에 있을 때에는 그런 것을 깨닫지 못했지마는 이 세상에 나온 지 얼마 후가 되면 곧 젖을 찾게 됩니다. 중생 한 영혼은 전에 사모해 보지 않던 것을 새롭게 사모하게 됩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게 됩니다. 예수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히 기도할 마음이 많이 생기고, 성경을 볼 마음이 많이 생기고, 자연히 주일을 당하면 예배당에 갈 마음이 생기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바로 제가 지난주간에 우리 교회에 잘 출석하는 어떤 자매 님이 기록한 일기를 누가 가져왔기에 보니까, 그 일기 가운데 마음의 영적 체험을 기록하였는데 얼마나 주를 사랑하고 주를 사모하고, 어떻게든지 주님을 뜻대로 해보려고 간절히 원하는 그 소원이 페이지 페이지마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와 같은 심령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중생 한 이후에야 이렇게 새롭게 사모하는 것이 있습니다. 위에 있는 것은 공경하는 그런 새로운 성품이 생기게 됩니다.
전에 제가 미국에서 학교에 다닐 때에 어느 여름 방학에 어떤 미국 부자 집 별장에 가서 일한 경험이 한 번 있습니다. 높은 산 위에 아름다운 호수 가에 좋은 별장을 지었는데 여름에만 와서 삽니다. 거기 가서 한 해 여름 일을 했는데 저 뿐이 아니고 일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흔히 저녁이 되면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놀기도 하고 춤도 추는 그런 곳이 있어요.
어떤 날 저녁에 저 보고도 자꾸 춤추는 곳에, 댄스 홀에 가자고 그런 단 말이오. 그래서 나는 춤도 출 줄 모르고 그런 곳에 도무지 갈 마음이 없노라고, 이렇게 거절하니까, 그 젊은 사람들이 다 간 다음에 그 집주인 부인이 제게 웃으면서 하는 말이『네게는 벌써 네 옆구리에 천사의 날개가 나기를 시작했구나.』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대단히 미안합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 과연 거듭나면 신령한 날개가 나기 시작합니다. 높은 곳을 향해서 올라가려고 하는 마음! 높은 곳을 사모하는 마음! 보다 더 깨끗한 것을 간절히 원하는 성품! 이것이 생깁니다. 벌레가 벌레대로 있을 때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본성입니다. 그러나 그 놈이 변해서 나비가 되든지 벌이된다고 하면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본성입니다.
오해하지 맙시다. 온전히 완성되었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처음 시작이지마는 아무리 적게라고 이 높은 곳을 향해서, 보다 더 깨끗한 곳을 향해서 올라가려고 하는 새로운 성품이 생기는 것입니다. 음악 가운데도 사람을 아래로 내려가게 만드는 음악이 있습니다. 반면에 사람의 심령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음악이 있습니다. 반면에, 심지어 친구간에도 나를 끌어내리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 반면에 나를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요소와 친구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성품이 생기를 것입니다.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대체로 중생 한 사람의 그 특색을 간단히 세 가지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순결, 둘째는 겸손, 셋째는 사랑. 그런데 이 중생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본래 이 난다(生)고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실 때에도 내가 이 세상에 오겠다. 이렇게 생각해서 나오신 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 마음대로 못합니다. 그저 이 세상에 왔으니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중생도 내가 중생 하려고 해서 중생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온전히 성신의 역사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인 까닭으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언제든지 중생이 있을 때에는 두 가지 조건이 따라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 복음 一장 十二-十三절에 기록한 바와 같이『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 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서 난 자들이니라.』언제든지 중생이 있는 곳에는 먼저 그 심령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믿고 영접하는 그 사람에게 중생이 따르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또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도『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먼저 예수를 내 구주로 온전히 믿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그러한 심령에게 하나님께서 성신을 통해서 중생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는 것도 회개하는 것도 내 힘만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신을 주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믿기를 원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게 합니다. 다만 내가 성신의 역사를 거스르지만 아니하면 내가 주를 영접할 수 있고, 내가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 줄 생각합니다. 새해에 새 출발을 바르게 하려고 하면 오직 중생으로 새 사람이 되어서 이 새해를 새로 시작해야 되겠습니다. 이 중생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인데 예수를 중심에 영접하고 죄를 회개하는 그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인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의 생명을 스스로 돌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알지 못하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또 여러분 자신도 어느 정도까지 짐작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이 새해 아침에 우리 하나 하나가 마음속의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온전히 거듭 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一九五九년 一월 四일)
Ⅲ-7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생활 (마태복음 十二장 一-八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十二·六)
당시 유대 사람들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크게 생각한 것이 셋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전, 도 하나는 안식일, 그리고 율법, 사실 이 세 가지는 다 위대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올시다. 여기에 하나님께 제사하는 제단이 있고, 성소가 있고, 지성소가 있고, 본래 하나님의 법 궤까지 하나님의 성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 이후로부터 여러 백년 동안 성전이야말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신적 중심지가 되어 내려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이 멀리 바벨론에 포로로 갔다 돌아온 후에도 제일 먼저 재건한 것이 성전이요, 애 헤롯이 정권을 얻은 이수에 유대 사람들의 인심을 사기 위해서 제일 먼저 착수한 사업이 이 성전을 신축한 일입니다. 성전은 사실 큽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보다 더 크시다 는 것입니다. 성전은 한 상징이올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실체입니다. 선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어서 하나님께 속하는 점이올시다.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계셔서 삼위일체의 한 분이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입니다. 성전도 크지마는 그리스도는 더 큽니다.
안식일도 역시 그렇습니다. 안식일은 심히 중한 규례(規例) 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가운데 축복을 받고, 안식일을 지키는 가운데 신앙 생활이 유지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역시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보다 더 크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안식일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뜻대로 지켜야 하고 단순히 노는 것으로만 지키지 말고 하나님과 인류를 봉사하는 것으로 지켜야 될 것입니다.
율법은 더욱 그렇습니다. 율법이 얼마나 위대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주셨고 이 율법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천여 년 동안을 살아왔고 이 율법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고 믿는 사람들의 생활 규범이 그 속에 또한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는 율법보다 더 크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고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지극히 높은 지상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장 四十一-四十二절에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요나 보다 더 크신 이가 여기 있느니라.』요나 나 어떤 선지자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는 크십니다. 세례 요한도 그의 신 들매 풀기를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가 여기 계십니다. 솔로몬이 아무리 큰 영광으로 갖은 영화를 다 누렸다고 하지마는 솔로몬보다 그리스도는 더 크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지상의 주이십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이 큰 것들과 지극히 큰이를 분별할 줄 아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입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들은 이 점을 분별할 줄을 몰랐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이것을 분명히 분별할 줄을 알아야 우리의 신앙 생활을 바로 하여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오늘날 생각해 보면 여러 교파로 갈려 있습니다. 이 교파들이 다 중요합니다. 장로교회나, 감리교회나, 성결교회나, 루터교회나, 침례교회나, 이 교파들이 다 중요하고 큽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그리스도가 큰 이 모든 교파보다 더 크신 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교파를 위하여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교파는 다 각각 신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로교는 웨스트민스터 신조, 감리교는 알메니안 신조, 그 밖에 다른 교파는 또 그들의 여러 가지 조금씩 다른 신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신조를 다 귀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신조보다도 더 크십니다. 이 모든 신조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노력의 결정밖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 모든 교파에 여러 가지 전통이 있습니다. 장로교는 장로교의 전통, 루터 교는 루터 교의 전통 등, 이 모든 전통을 다 귀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또한 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그리스도는 이 모든 전통보다 더 크십니다.
여러 가지 신학 사조가 있습니다. 칼빈 신학, 루터 신학, 자유 신학, 보수 신학, 요사이 신정통 신학 등, 이 모든 신학은 다 중합니다. 우리 교회에 신학이 부흥되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이 어떤 신학보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크시다 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가 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이 성경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더 귀하고 큰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성경보다도 더 크십니다. 성경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기록된 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신앙의 중심은 언제든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석가의 교훈을 믿고 그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회회교는 마호멧의 교훈을 믿고 그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유교는 공자나 맹자의 교훈을 믿고, 그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믿지마는, 그리스도의 교훈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자신을 믿고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신조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신학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럼으로써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인도하는데 한 방편이 되는 것이고 우리 신앙의 절대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 이 요한 복음을 다 쓴 후에 二十장 마지막 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이렇게 요한 복음을 기록한 것은 목적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이 이 책을 통해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또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복음이 처음 전파될 때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도신경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경도 없었습니다. 다만『주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이렇게 전도한 것뿐입니다.
주님 자신이 이 진리를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아니하면 아버지에게로 올 사람이 없으리라.』그리스도 자신이 길입니다. 하늘가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입니다.『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자기 자신이 곧 생명의 양식이며 이 생명의 양식을 먹는 사람이라야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주님 자신이 생명수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내가 세상의 빛이로다.』그리스도 자신이 빛입니다.
교훈만이 빛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빛입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니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그리스도 자신이 포도나무입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으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 있을 곳을 가서 예배하리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으로 영접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하여 명한 것을 그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그리스도 자신이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 신앙의 대상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꼭 그리스도만을 중심 하여야만 됩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하여 여러 사도들이 어떻게 신앙으로 응답하였는가 들어보세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주의 영생의 말씀이 주께 계시매 우리가 뉘께로 가리이까』도마가 대답하여 말하기를『나의 주시면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도마가 친히 손으로 주님의 옆구리를 만져보고 예수의 상한 손을 만져 본 후에 예수의 부활하신 것을 확실히 믿게 될 때에 이와 같이 고백했습니다.『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여러 편지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기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혓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나니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능력 주시는 자는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나의 의뢰하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것을 확신하노라.』사도 요한 이 하는 말이『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나니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나니라.』
우리의 신앙이 어떠합니까? 우리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입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이 그리스도를 믿고, 이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이 그리스도를 순종하고, 이 그리스도와 같이 살며, 이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이 그리스도 교 신앙 생활입니다.
이렇게 우리 신앙이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면 자연히 곁길에 나갈 염려가 없습니다. 무슨 이상한 것이 있다고 따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무슨 주의나 사상이 나타난다고 따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무슨 이상한 이야기를 따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이상한 의복을 입고 다닌다고 따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꼭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이에게는 곁길로 갈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 전에 어떤 잡지를 보니 문명하다는 미국 같은 나라에도 어떤 사람이 예수 님 입던 그 의복 비슷이 만들어 입고 다녔습니다. 수염을 깎더라도 그림에 나타난 예수 님 수염 모양으로 깎고 머리도 그 비슷한 모양으로 깎고 돌아다니며 자기가 메시야 라고 선전을 하며 다니니까 참 메시야가 왔다고 여자와 잠자들 가운데서도 따라 다니는 사람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 제자들이라 하는 몇 사람을 정해서 제자들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기는 지혜와 지식과 진리와 생명의 근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말은 대단히 좋습니다. 얼마쯤 따라다니다 보니까 이 사람이 공수표도 더러 써냈습니다. 더욱이 남녀 관계가 깨끗하지 못한 것이 사살로 나중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제자 가운데 두 사람이 분해서 이렇게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놈은 처벌해 달라고 검사국에 고소를 했지마는 검사국에서 미처 처리를 하지 아니하니까 이 사람들이 참지 못해서 마지막에 다이너마이트를 四十八개나 가지고 가서 그 사람이 있는 데를 폭발시켜서 메시야라 하는 사람과 따라다닌 사람 할 것 없이 모조리 폭사해 죽였다는 잡지의 기사였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우리가 중심해서 살면 곁길로 나갈 염려가 없습니다. 또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면 믿는 사람들끼리 더욱 가까워 질 것이요 더욱 화평하게 지낼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오면 올수록 믿는 사람들끼리 화평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은 신앙 생활 뿐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중심을 잃지 아니하여야 됩니다. 공부하는 데도 중심을 잃지 아니하여야 됩니다. 오래지 않아서 입학 기가 오겠지만 해마다 입학 기에 신문지상에 나는 것은 어떤 학생은 시험을 치다 낙제를 해서 음독을 했다. 어떤 학생은 시험에 합격했는데 등록할 돈이 없어서 등록금을 내려고 강도질을 했다고 합니다. 살려고 공부합니까, 공부하려고 삽니까? 무엇 하려고 공부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중심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다 염려하는 경제를 가만히 볼지라도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중심을 잃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당이 큽니까, 나라가 큽니까? 정당이 국가를 위해서 있습니까. 국가가 정당을 위해서 있습니까? 중심을 바로 찾고 정치를 해야 나라가 바로 잡힐 겁니다. 속담에 쥐잡으려 하다가 독 깨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아가다가는 우리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될는지 염려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범사에 중심을 잃지 아니하여야만 됩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더욱이 중심 되는 그리스도를 언제든지 바라보고 언제든지 그리스도만을 향해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들으니 저 알프스 산 올라가는 어떤 길에는 조금 올라가면 어떤 선지자의 석상이 있다고 합니다. 혹 아모스, 혹 이사야, 혹은 예레미야 그런데 석상마다 어디를 가리키는고 하니 위에를 가리킵니다. 조금 올라가면 또한 다른 선지자의 석상이 있는데 그 선지자도 역시 우에를 가리킵니다. 그 다음에 조금 더 올라가면 또 다른 선지자의 석상이 있는데 그 선지자도 역시 손가락을 위로 가리킵니다. 그래서 여러 선지자의 지도하는 그 길대로 끝까지 올라가면, 마지막에, 하나 높은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그 높은 봉우리 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석상이 있다고 합니다.
과거의 모든 선지자의 손가락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모든 천군 천사가 어린양을 향해서 숭배하고 찬송을 드리는 것이올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신앙의 목표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서 금년에 신앙 생활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큰 축복을 받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一九五九년 一월 十八일)
Ⅲ-8 그리스도의 마음 (마태복음 十一장 二十五-三十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도 내게 배우라.』(마 十一·二十八-二十九)
이 말씀은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부르짖는 말씀이올시다. 이 말씀 가운데서 오늘 아침에는 다만 한 구절만 생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생을 아프리카 대륙을 위하여 바친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밀림 지대에서 홀로 기도하다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소식이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영국 조야(朝野)의 여론이 이와 같은 인물을 아프리카에 그냥 묻어 둘 수가 없으니 아무래도 그 유해를 영국 본국으로 운반하여 다가 영국의 모든 귀한 사람들이 묻히는 웨스트민스터 예배당 안에 묻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정부에서는 특별히 사람을 파송해서 리빙스턴의 유해를 운반하려고 할 때에 그냥 전부 다 가져온 것이 아니고 그 유해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서 그 심장만은 그이가 일생 동안 제일 사랑한 아프리카 대륙에 묻은 것입니다.
사람에게 제일 귀한 것은 그 마음이올시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떠하였는가? 사람의 생각으로 다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단순히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그대로 오늘 아침에 잠깐 동안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하시기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하셨습니다. 온유(溫柔)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그 뜻을 잘 압니다. 아마 따스하고 부드럽다고 하는 뜻인 것 같습니다. 예수 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위에 올라오실 때에 성신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그 머리 위에 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둘기 모양으로 임한 것은 순결한 뜻도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역시 온유한 성품의 표시도 그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속에는 온유한 성신이 충만히 계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 님을 향해서 증거 하는 말이『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대속의 깊은 뜻이 있지마는 특별히 어린양이라고 하는 그 모습 가운데는 온유한 모습, 온유한 마음이 또한 포함되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이사야 五十三장에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보면 양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입을 열지 아니함과 같이 잠잠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마음의 표현인 줄 생각합니다.
또한 어떤 곳에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한다는 말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심정을 기록한 말씀인 줄 생각합니다.
옛날 믿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장사해둔 지하 묘지에 남아 있는 옛날 초대 시대의 기독교 예술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그릴 때에는 흔히 목자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 목자는 어린양을 자기 가슴에 안고 혹은 어린양을 자기 어깨에 메인 모습을 그린 그림이 제일 많습니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 얼마나 온유하였나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실이올시다.
그래서 제자들의 생각에는 어린아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이 시끄럽게 보였지마는 예수 님께서는 그런 때에, 어린아이들이 예수에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하시며 대기 천국에 있는 자들이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어린아이들을 영접해서 친히 안으시고 그 머리에 안수하시고 축복을 하여 주신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문둥이들이 와서 예수 님에게 구하는 말이 그를 불쌍히 여겨서 어루만져 주시오 하는 요청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도 예수 님께서는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친히 손을 내 밀어서 더러운 문둥병 자를 어루만져서 고치어 주신 것입니다.
또한 한 번은 주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두 소경이 멀리서 소문을 듣고 주님께 와서『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부르짖은 일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같이 따라가고 분주한 때인지라 제자들은 잠잠 하라고 오히려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그들을 오라고 하여 그들의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주여, 보게 하여 줍소 서.』하고 간구 할 때에 그들의 눈을 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대중을 보실 때에 목자를 잃어 유리하여 흩어지는 양과 같이 보시고 민망히 여기셔서 탄식하시는 말씀이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기도하여 일군을 더 많이 보내게 해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도 그리스도의 온유한 심정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우는 양을 보시고, 예수 님께서도 같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 님께서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보시고『예루살렘아!』감탄하시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린 일 등 모든 것을 우리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심정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 님께서 붙잡히실 때에 베드로는 용감히 칼을 빼어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그 칼을 그의 칼집에 도로 넣으라고 명령하시면서, 대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경계하고, 조용히 그가 체포를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법정에 끌려 다니면서 많은 곤욕을 보셨지마는, 베드로가 친히 베드로 전서에 기록한 대로 그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무한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말씀은 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온유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온유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강하고 담대하였습니다. 이것은 죄를 용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모든 가련한 민중들을 긍휼히 여기시던 오직 그의 온유한 마음과 성품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편지할 때에 그리스도의 온 유와 관용으로써 너희를 권하노니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온유는 성신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산상보훈을 가르치실 때에,『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할 것이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온유한 이가 마지막에는 이깁니다. 온유한 자가 마지막에 이 땅을 차지합니다. 마음이 온유한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온 세상을 차지하실 것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될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순복(順服)합니다. 온유한 자는 모든 것을 다 잘 참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줍니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악을 선으로 갚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도 향기롭게 한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온유한 사람은 자기에게 손해를 입히는 사람에게도 여전히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여러 가지 작품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추운 날 예배당 근처에서 떨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자기의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이 사람은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이 분을 도와주기 위해서 데려왔지마는 그 부인은 성가시니까 이 분을 친절하게 대하지 아니하고 냉하게 보고 불친절하게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데려온 사람은 어른이었는데 이상스럽게 점점 줄어지고 쪼그라져서 그 사람이 적어졌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주인이 민망해서 부인에게 잘 말해서 다시 친절히 그이를 애하고, 좋은 말을 하고, 좋은 음식을 대접하니까 적어졌던 사람이 점점 다시 커지고 아름다워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천사였다고 합니다. 천사는 항상 온유한 기분과 사랑이 충만한 하늘에 있던 분이 되어서 그렇게 냉정하고 조폭한 분위기 가운데에서는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온유와 사랑의 분위기 가운데 있게 될 때에 다시 크고 아름다워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의 심령이 그렇습니다. 온유하고 사랑의 분위기 가운데서 심령이 바로 자랍니다. 아이들도 심령의 분위기가운데서만 그 심령이 원만히 자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유한 마음을 배웁시다.
그 다음에는 「겸손하니」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또한 겸손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일생을 가만히 돌이켜 생각하면서 그의 생활 가운데 조금이라도 교만하다 던 지 또는 자기 것을 나타내 보인다 던 지 하신 일이 있었는가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마는 이사야 五十三장에 이 메시야에 대한 시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니』아마 자세히 알 수 없지마는 그 얼굴 생김과 풍채도 그다지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예수 님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하나도 교만한 자취가 없습니다.
우선 나실 때에는 마구간에서 나셨습니다. 그것보다 더 겸손할 수 있습니까? 나셔서 처음 누운 보금자리가 말구유올시다. 거기에서 더 낮아질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마는 예수 님이 나신 그 자리에 주후 四세기에 세운 굉장히 큰 예배당이 지금까지 내려오는데, 그 예배당의 특색은 안에 들어가면 큰 예배당이지마는 처음에 들어가는 문은 아주 좁고 낮습니다. 아마 넉 자 밖에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허리를 굽히고야 그 예배당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인도하는 사람에게 왜 문을 그렇게 좁고 낮게 만들었느냐고 물으니까 대답하는 말이, 거기 들어오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오라고 그렇게 낮게 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나셨습니다.
그는 일생을 목수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은 보통 예수 님을 목수의 아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는 말을 주님께서는 들으셨습니다. 그는 친히 목수의 일을 했습니다. 아무개의 아들 목수라고 하는 이름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주후 四세기 이후에 온 로마 제국이 기독교 화된 다음에 줄리안이라는 사람이 황제가 된 이후에는 기독교를 반대하고 핍박까지 했습니다. 한 번은 전장에 나가서 바사에서 전쟁을 하면서 어떤 예수를 잘 믿는 장군에게, 기독교를 비웃으면서 하는 말이『그 당신이 공경하는 주라고 하는 목수는 요즈음 무엇을 하는고?』하는 비웃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때 그 기독교인인 장군이 공손히 대답하기를,『자세히는 알 수 없지마는 우리 목수 님께서 아마 대왕을 위해서 관을 짜시는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안 되어서 그 왕이 전장에서 부상을 입어 죽었습니다. 과연 관을 짜던 중인가 봅니다.
예수 님이 젊어서 한 생활 가운데 자랑할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는 친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님처럼 가난한 생활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일생 동안에 사귀신 사람들을 보면 어부와 농부 등 보통 무식한 사람들하고 사귀셨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요즈음 어떤 사람처럼 교제하기 위해 세력 있는 사람이나 어떤 사람에게 찾아 다녔다는 말은 없습니다. 항상 예수 님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예수 님을 비웃었습니다. 그러한 비웃음을 받으셨지마는 또한 그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행동을 좀 달리 하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일입니다. 그 때에는 제자들이 앞뒤로 따라 가면서 종려나무를 들고 호산나를 부르며 들어갔으니까 좀 보이게 들어가시지 않았습니까? 제일 조그만 유대 나라 나귀였습니다. 그 나라 나귀는 우리 나라 나귀보다 더 적습니다. 그런 나귀 가운데서도 보통 나귀가 아니고 나귀 새끼였습니다. 어쩌면 발이 땅에 닿았는지도 모릅니다. 겨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였던 것입니다. 겸손한 와이올시다.
그러다가 마지막 저녁을 잡수실 때에 제자들은 누가 크냐 하는 토론이 나서 서로 발을 안 씻어 줄 때에 예수 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만찬 후에는 많은 멸시와 형벌을 받으시고, 가장 추한 죄인이 받는 악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 님은 겸손하신 분이올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二장 五절 이하에『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이와 같이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겸손한 분이올시다. 항상 겸손하라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리새인이 가서 기도할 때에는 자기의 자랑만 했습니다. 그러나 세리가 가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서 겸손히 기도할 때에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五十七장 十五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고 무시무정한 곳으로 거처를 잡으셨지마는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같이 계셔서 겸손한 심령을 부흥하게 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사람아, 주께서 너희에게 선한 것을 보인 것이 아니냐? 곧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냐?』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 장로는『주 앞에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가운데 얼굴이 빛났다고 하는 분이 세 분 있습니다. 모세와 예수와 스데반이올시다. 이 세 사람이 모두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기록하기를, 그리스도인이 구할 덕은 첫째로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도 나는 배우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온유하고 겸손하시므로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과거에 죄를 많이 지었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나올 수 있고, 무식한 사람도 나올 수 있고 어떠한 허물이 있는 사람도 다 나올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 번 아프리카에서 한 회회교 예배당에 가 보니까 거기서 하는 말이, 그 예배당에는 남자만 들어 올 수 있지 여자는 들어 올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 님의 교회는 여자들도 다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을 잘 배워야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가만히 보십시오. 그저 학생들이 운동하느라고 모였다가 싸움하고 헤어집니다. 길거리에서 학생들이 칼부림을 하고 싸우고 심지어는 학생간에도 살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요 며칠 전에 신물을 보니까 심지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손에 좀 스쳤다고 그것 때문에 말다툼이 일어나서 나중에는 그 사람을 때려서 죽였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위협하고 실험 기를 깨뜨려 버리는가 하면 선생들은 학생들을 고소합니다. 오늘날 신문에 나는 성명서니 해명서니 하는 것들을 보면 모든 강퍅한 표현의 말로 쭉 납니다. 무도하고 무법하고 무례하고 아주 강퍅하고 포학(暴虐)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 충만한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우리 민족이 배워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에 사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느 사회에 가나, 어떤 자리에 가나, 아무리 강포(强暴)와 포학이 많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한 마음과 정신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 채워야 되겠습니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一九五九년 一월 二十五일)
Ⅲ-9 생의 황금율 (마태복음 七장 一-十二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七·十二)
이 말씀을 문자대로 다시 번역해서 읽으면 이렇게도 읽을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무엇에든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하기를 원하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하여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올시다. 우리 생의 황금 율법이라고 이와 같이 흔히 말합니다.
전에 유대교에 힐렐이라고 하는 유명한 랍비 선생이 있었는데, 이 선생에게 어떤 젊은 사람이 와서,『선생님, 제가 외발로 서서 있는 동안에 율법과 선지자가 가르치는 모든 교훈을 간단히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이런 요구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에 이 힐렐이라고 하는 선생이 조금 생각하더니 한 마디로 하는 말이『네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서 하지 말라. 이것이 선지자의 율법의 교훈의 총 대지니라.』이와 같이 말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헬라 철학자 가운데 플라톤과 같은 사람도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간단한 원칙을 말한다면 이와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동양의 성현으로 우리가 다 존경하는 공자 님께서도 거의 꼭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기소불욕을 물시여인』(己所不欲勿施與人)이라고, 내가 하고자 아니하는 바를 사람에게 베풀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회회교의 교훈 가운데도 이와 비슷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이 교훈은 지금 모든 교훈보다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선생들은 흔히 소극적으로 가르쳤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 다시 말하면 내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이와 같이 소극적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진리를 가르치실 때에 적극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기를 원하는 대로 그대로 먼저 다른 사람에게 행하라고, 즉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무엇에든지 남을 먼저 대접하라고 적극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원칙은 옳은 생활의 본질은 악을 제거하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을 행하는 데 있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소극적 권면대로 하면 이 세상에 악한 일이 물론 적어질 터이니까 대단히 좋습니다. 그러나 선한 행실에 대해서는 별로 권면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황금률은 적극적으로 선행을 하라고 이와 같이 권면한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것은 주님께서 전에 알지 못하던 진리를 새롭게 가르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율법과 선지가가 이미 가르쳐준 말씀이올시다. 사실 이 교훈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대로 특별 계시에 속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 진리는 특별 계시 이외에 보통으로 자연 계시라고, 일반인간의 양심을 통해서 나타내어 주신 도덕적 원리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뿐입니다.
이 황금률이야말로 인륜과 도덕의 진수올시다. 따라서 인간 생활의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의 실제 행동의 원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간단한 말씀을 감간 동안 묵상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이 뜻을 좀 더 잘 깨달으려고 힘쓰려면 먼저 이 말씀에 대한 오해와 역용을 피하여야 되겠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고 예수 님께서 교훈 하시니까, 가령 여기에 어떤 아편 중독자가 있어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아편으로 대접하는 것이 제일 좋으니까, 다른 사람에게도 아편을 많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전혀 잘못된 오해올시다.
또 어떤 술 잘 먹는 사람이 가만히 있다가 자기는 술대접 받는 것이 제일 좋으니 나도 누구든지 만나면 술대접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어떤 놀음 좋아하는 사람이 이 말씀을 보다가 누구를 만나든지 놀음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데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한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을 향해서 하는 말인고 아니 적어도 자기가 자기를 무엇으로 대접하여야 될는지를 바로 아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양심이 있는 사람을 향하여, 양심이 마비되지 아니한 사람을 향해서 하는 말씀이올시다.
자기가 아편을 좋아하는 것은 자기 자신도 자기를 바로 대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귀한 몸에다 알코올을 부어 넣어서 술독을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자신을 바로 대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이 황금률을 이대로 실행하려고 하고 이 이치를 깨닫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내가 먼저 신앙적, 양심적 인물이 되어서 선악을 바로 분간해야 합니다. 내가 내게 대접을 바로 할 줄 아는 고결한 인격의 소요자가 되지 아니하면 이 황금률을 우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와서 아첨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첨하는 것이 듣기 좋거든요. 그러기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이놈이 아첨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듣기 싫지 않거든.』아첨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늘 아첨하여야 하겠습니까?
이 황금률을 이해하려고 하고 이것을 실행하려고 하는 사람은 적어도 양심적 인물로서 자기 자신이 어떠한 대접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이 황금률대로 살려고 하면 내 자신을 먼저 수양해서 내 자신을 바로 대접할 줄 아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가 이렇게 양심적 생활을 하고 자기가 수양을 해서 고상한 인격 생활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도 자기가 대접을 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할 수 있는 생활을 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둘째 단계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또한 다른 사람의 사정에 대한 이해와 동정심이 필요합니다. 내가 내 자리에서 무슨 대접받기를 원하는 것보다도 내가 그 자리에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그 자리에서 무슨 대접받기를 원할지를 생각해서 다른 사람에게 대할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구약에 여러 선지자들이 있지만 특별히 에스겔은 자기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 포로 사이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 아주 역경에 처해 있던 선지자입니다. 포로로 멀리 바벨론의 그발하수가에 잡혀가서 그 불행한 가운데 있는 자기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에, 이 에스겔은 먼저 그들과 같이 그발하수가에 가서 그 포로들과 같이 이래 동안을 있었습니다. 같이 생활하며 그들의 고독을 같이 체험하고 또한 그들의 사정을 이해한 연후에야 하나님의 더 큰 역사를 포로 가운데서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의 자리에 같이 앉아서, 그러한 처지에서 생각되는 모든 것과 그 처지에서 요구되는 모든 것을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에게 받은 귀한 말씀을 힘있게 그들에게 가르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이론적으로 내가 남에게 대접을 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야겠다고 말하기는 쉽지마는, 실상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것은 내가 그 사람의 자리에 있으면 그 자라에서 내가 무엇이 필요할지를 능히 상상력으로 생각할 수 있고 따라서 그들의 정지를 이해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젊었을 때에 뉴 올리안즈라고 하는 노예시장에 가서 구경한 일이 한 번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미국에서 흑노(黑奴)를 그냥 노예로 사용할 때이었음으로 노예시장이 있어서 흑노들을 다른 상품처럼 흥정해서 팔고 사고하는데 이 광경을 링컨이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한 가족인데 아버지는 딴 집으로 팔려가고, 어머니는 또 딴 집으로 팔려가고, 또 큰딸을 다른 집으로 종으로 팔려 가는 비참한 광경을 그가 보았던 것입니다.
비록 얼굴은 까맣고 공부는 하지 못했지마는 인정이야 다르겠습니까? 서로 갈라 저 따로 갈 때에 목을 껴안고 울며 떨어지지 아니하려고 하나, 애통 가운데 할 수 없이 온 가족이 분산되는 광경을 링컨은 친히 목도했습니다. 누구나 그런 광경을 볼 때에 동정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동정을 더 할 수 잇느냐 하면,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하면 내가 어떤 느낌을 가지며,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하면 어떤 대접받기를 원하겠는지를 생각해 보는 사람일 것입니다.
링컨은 젊은 시절에 이러한 광경을 보고 언제든지 그 광경이 자기의 머리에서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내가 저 자리에 있으면 어떤 대접을 받기 원하겠는가? 그 대접을 이 흑노 들에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그와 같이 하려고 하면 부득이 저 사람들도 나와 같이 자유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고 하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처지에서 어떤 대접받기를 원하겠는지 그 대접을 생각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대접할 수 있는 그러한 동정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도 八十노령에 저 아프리카의 커메른 지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슈바이처 박사가 본래 독일에서 대학교 교수의 자리를 내어놓고, 자기가 다시 의학을 공부하고 자기 아내로 하여금 간호원 공부를 하게 해서 직접 자기들이 아프리카로 일하려 간 그 깊은 동기 가운데도 이와 같은 생각이 그 머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어떤 날, 우연히 거리에서 조그마하게 만들어 놓은 흑인 동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흑인 동상을 통해서 그의 눈에는 아프리카에 수없이 많은 흑인들을 연상할 수가 있었습니다. 벌써 수 백년 동안 아프리카 발견된 이후에 우리 백인들이 저 흑인에게 어떤 대접을 하였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얼마나 많은 학대를 했고, 얼마나 많은 압박을 하였고, 얼마나 많이 상품처럼 이용을 하였고, 착취를 했는지, 백인의 한 사람으로써 얼마나 가슴이 무거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라도 저 흑인들이 받기 원하는 대접을 하여 보겠다는 결심 가운데서, 좋은 자리를 다 내어놓고 직접 그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 사람들의 상처를 만져 주고, 병을 고쳐 주는 그 사업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기 원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여라 하는 이 주님의 명령을 순복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런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잘 아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생각할 때도 역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불한당을 만났습니다. 인사 불성이 되었습니다. 레위 사람과 제사장이 그를 보고 그냥 지나갔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지나가다가 차마 그냥 지나가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레위 사람과 제사장과 사마리아 사람의 차이를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어느 모로 보든지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이 먼저 이 사람을 구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보다 오히려 사마리아 사람이 이 사람을 구해 주었습니다.
아마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지마는, 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사마리아 사람은 좀더 외로운 사람이올시다. 유대 사람 사이에서 외로운 사람이올시다. 외로운 사람인 까닭으로, 저렇게 어떤 사람이 외롭게 불한당을 만나서 넘어져 있게 되었는데, 만일 자기가 그렇게 혼자 다니다가 그런 형편을 당했다고 하면, 자기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대해서 무엇을 해주기를 바랐겠는가 하는 점이 있어서 이 사마리아 사람이 레위 사람이나 제사장보다 더 크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다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의 정지를 동정하는 것이 어떤 누구보다 더 강했던 모양입니다. 이것이 이 사마리아 사람으로 하여금 사마리아 사람이 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 황금률을 실행하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앉아서 그 사람의 정지를 상상해 보고 그 사람의 성질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마음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일생을 통해서 이 원리대로 사신 오직 한 분인 줄 생각합니다. 그는 사람의 정지를 알기 위해서 자기가 친히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자기가 친히 고생을 당하셨습니다. 자기가 친히 주림을 당하여 보셨습니다. 자기가 친히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그 때 사람들과 꼭 같이 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이와 같은 죄인의 자리에 앉아 이 죄인들을 구원하는 길을 오직 십자가밖에 없는 까닭으로 자기가 십자가를 사양하지 않고 강도와 같이 십자가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황금률을 실행하려고 하면, 둘째로는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정지를 내가 친히 살펴서 그 자리에서 남의 요구를 깨달아 아는 그 마음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내가 양심적 생활을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분간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자리에 앉아서 그 사람의 정지를 이해할 줄 아는 그러한 사람은 자연히 이 황금률에 가르치는 이대로 누구보다 더 가까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단계로 이와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의 특색은 무엇이겠는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마는, 그저 간단하게 네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첫째로 이런 생활을 하게 되는 사람은 아마 누구보다도 공의와 공평을 힘쓸 것입니다. 공의라고 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마땅히 줄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명예에 대해서나, 그 사람의 지위에 대해서나, 그 사람의 물질에 대해서나, 절대로 차별이 없고 무리한 것이 없이 공평과 공의를 힘쓸 것입니다.
둘째는 누구나 실수하는 것을 우리가 다 압니다. 나도 실수하고 다른 사람도 실수합니다. 내가 실수하고 내가 죄를 지을 때에 우리는 자연히 다른 사람이 내게 대하여 자비로 대해 주고, 인내로 대해 주고, 관용으로 대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럼으로써 이런 사람의 생활은 자연히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특별히 실수하는 사람, 죄를 짓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든지 그 실수를 고치고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자비한 태도와 인내의 태도와 관용의 태도를 가지도록 힘써야 될 줄 생각합니다.
또한 셋째로는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같이 사랑의 생활을 실천하도록 힘쓸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좀더 친절히, 할 수 있는 대로 좀더 협조해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것을 협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힘을 쓸 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황금률을 가만히 생각해 볼 때에, 만일 이런 모든 방면을 실천하게 되다고 하면, 우리의 생활이 어떻게 되겠는가 생각하여 보십시오. 가령 부부간에, 고부(姑婦)간에, 친척과 친척 사이에, 친구와 친구 사이에, 고용주와 직공간에, 주인과 점원간에, 주모와 식모간에, 공무원과 국민 사이에, 정당과 정당 사이에, 민족과 민족 사이에, 또한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이 원칙을 어떻든지 우리가 실행한다고 하면 우리의 사회가 어떻게 될까요? 아마 이 원칙을 우리가 실행한다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윌 사회에 싸움이 좀 적어질 줄 압니다. 따라서 좀더 명랑하여질 줄 압니다. 따라서 모든 건설과 발전이 빨라질 줄 압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왜 이와 같이 싸움이 많으며, 왜 이와 같이 명랑하지 못한 가운데서 우리가 살게 됩니까? 다 내 자신만 생각하고, 내 대접만 생각하고 내가 받기 원하는 대접을 남에게 먼저 대접할 줄 모르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현 세계는 자연 과학이 상당히 발전되었습니다. 그렇지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과학 혹은 정치, 경제, 사회학 같은 것은 아직까지 유치하고 곤란한 시대입니다. 더욱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도덕 사상, 윤리 사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그야말로 정글 지대의 그 사상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생존경쟁이니, 우승열패니, 약육강식이니, 이와 같은 도덕 사상을 가지고 살므로 말미암아 오늘날 이 세계가 이 모양이 된 것이 아닙니까?
이 우주는 법의 우주입니다. 우리가 사는 자연계는 일정한 법률에 의지해서 움직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일정한 도덕률에 의지해서 움직입니다.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어기면 우리 자신이 해를 받을 것밖에 없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는데 이 법칙을 내가 어기면 내 자신이 손해를 받을 것밖에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황금률은 무슨 새로운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신 이후에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것이 진리인 것을 우리에게 지적하여 주시는 것뿐입니다.
예수 님께서 이 황금률을 가르치실 때에, 기도를 가르치시다가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의미가 심장 한 줄 압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생활을 하려고 할지라도 사실 우리의 힘만으로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정신으로써 사시고, 이 정신의 화신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마음가운데 오실 때에, 우리가 구하고, 우리가 찾고, 우리가 문을 두드리고, 성신을 충만히 받아서 그리스도의 신으로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게 되고 충만하게 될 때에만 이 황금률을 어느 정도까지 실행할 수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귀한 교훈을 한 번 더 생각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충만히 받아서 우리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국가에서나, 조금 더 이 황금률을 실행해서 좀더 축복을 받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一九五九년 二월 八일)
Ⅲ-10 심령이 기갈한 자에게 (요한 복음 七장 三十七-四十四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를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七·三十七-三十八)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이 말씀은 우리가 지금 읽은 대로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명절이라고 하는 절기는 장막 절을 가리킨 것입니다. 장막 절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 전에 四十년 동안 광야에서 해 매이던 생활을 기억하기 위해서 지키는 절기인 것입니다.
여러 가지 경험 가운데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지 못하는 경험 중 하나는 이렇게 많은 무리가 르비딤이라고 하는 곳에 도착되어서 장막을 치고 거기 머물 때에 아무리 사방을 더듬어 보지마는 물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세와 다투기를 시작했습니다. 애굽에 그냥 있었으면 이렇게 목말라 죽는 것은 면할 수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그들을 그 곳으로 인도해서 그 곳에서 기갈에 넘어지게 하는가 고 모세에게 반박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고 또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가졌던 지팡이로 한 반석을 칠 때에 반석 가운데서 생수가 솟아나서 많은 기갈 한 백성들과 가축이 그 물을 마시고 사경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얻게 된 사실이올시다.
이 위대한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장막 절을 지키는 한 주간 동안에는 매일 아침 흰 예복을 입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행렬을 지었습니다. 선두에는 레위 사람들로 조직된 성가대가 찬송을 부르며 성전 뜰에서 거리 가운데로 행진해서 남쪽 문을 나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그 행렬이 도착된 다음에는 준비하여 가지고 갔던 물병에다 실로암의 맑은 물을 할 병씩 담아 가집니다. 다시 성가대를 선두로 해서 행렬을 지어서 성전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 부르는 노래의 뜻은 특별히 이사야 十二장 三절에 있는 말씀으로써『우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기르리로다.』 이 의미의 찬송을 부르며 성전 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차례 차례로 성전 뜰에 있는 제단 옆에 그 물을 부으면서 많은 사람과 같이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풍속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주일 동안을 계속하고 마지막 날은 이 식을 폐하는 날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여러 무리와 같이 예루살렘 성전 뜰에 서서 그 의식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의식이 다 끝난 이후에 예수께서 크게 외치는 말씀이『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리라.』옛날 반석을 생각하고 옛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생각하는 그 순간에 과연 참 반석이 여기 있고 참 생수의 강이 여기 있다고 하는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자연히 옛날 시내 광야가 연상이 됩니다. 오랜 四十년간이라는 세월을 황막한 광야에서 배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한 연상이 됩니다. 목말라서 사람과 가축이 아울러 죽을 수밖에 없을 때에 반석이 갈라지면서 생수가 쏟아져 나온 그 현상도 다시 연상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기갈이 심하던 모든 사람들과 짐승들이 아울러서 생수를 마시고 새로운 생명을 얻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광경을 또한 연상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시내 광야를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고, 거기 배회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이와 같은 세상에 방황하는 모든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가 있고, 생수를 내어 주는 반석을 통해서 이와 같은 인간들에게 지금도 생수를 강같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또한 상상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연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 광야와 같습니다. 광야는 물이 바른 곳입니다. 광야는 매 마른 곳입니다.
저는 일찍이 미국의 서 남방 뉴멕시코와 애리조나 지경에 있기도 하고 혹은 여행을 해 보면서 광야가 어떻게 처참한 곳이라고 하는 것을 친히 목격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전번 성지를 순례할 때에 유다 광야를 친히 보고 또한 그곳을 걸어 보았습니다. 광야는 사막은 아니지마는 역시 매 마른 곳으로 쓸쓸한 곳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적막한 세상입니다. 광야에는 화초가 적습니다. 혹 풀과 나무가 더러 있다 지 마는 어떻게 입사귀가 깔깔하고 가시가 많은지, 광야의 풀이나 나무에 그만 잘못해서 우리의 손과 다리가 닿기만 하면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그런 가시나무가 많은 곳이 광야입니다. 그것은 물이 없는 곳에 나는 식물이니까 자연히 이와 같은 식물이 되는 모양입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식물만 살수가 있는 모양입니다.
비슷하게도 이 세상은 우리가 살아 나아갈 때에, 우리 육신에 상처를 주고 우리 심령에 상처를 주는 요소, 이와 같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는 광야 같은 세상 길을 우리는 걸어 갈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광야에 때때로 폭풍이 붑니다. 모진 사나운 바람이 붑니다. 흔히 다른 곳에 바람이 불 때는 비가 내리든지 혹은 눈이 내리지마는 광야에는 바람은 불지마는 내리는 것은 없고, 오직 모래와 흙이 바람에 불려서 지나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앞을 볼 수 없으리 만큼 모래와 흙이 온 공중에 차서, 숨을 거의 쉴 수 없으리 만큼 질식 상태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흔히 폭풍 사라고 합니다. 폭풍우라고 하는 대신에 폭풍 사라고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때때로 천재가 있고 지변이 일어나며, 전쟁이 발발하고 재난들이 계속해서 쓸쓸한 광야와 같은 세상을 지나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앞을 볼 수가 없게 하고 질식 상태에 있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는 이러한 세상입니다. 이와 같은 광야에서 四十년 동안이나 이 곳 저곳으로 헤매 이 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상할 때, 또한 옛날이나 오늘이나 이와 같은 세상 가운데서 방황하며 갈래 길을 대부분 잃고 사는 모든 인간의 모습을 우리가 또한 상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시내 광야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의 특색은 갈 곳을 자기 못하고,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목표를 잃은 이 백성이 이 곳 저곳 에 방황하는 것이 한 특색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이라 저리로 방황하는 가련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육신 생활도 방황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우리 이 가운데는 문자 그대로 과거 일생을 돌아다 볼 때에 다 내 일생이 비록 짧지마는 이 때까지 얼마나 여러 곳으로 방황했는가, 스스로 감탄하는 이들도 없지 않아 계실 줄 믿습니다.
한국에서 본래 나기는 났지마는 일제 시대에도 한국에 살 수 없어서 멀리 만주로 떠는 분들도 이 가운데 계실 줄 믿습니다. 그 후에 간도 토벌이니 그 같은 어려운 일이 생겨서 또 다시 그곳에서 도피를 해서 혹은 북경을 가고 혹은 천진(天津)을 가고 혹은 남경, 상해, 등지로 방황하신 분들도 많이 계실 줄 압니다. 그러다가 광복이 된 이후에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또 다시 六·二五 사변이 생기고 그래서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대구로, 부산으로, 저 제주도까지 밀리고 밀려서 방황하다가 마지막에 다시 이 곳까지 돌아와 사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 줄 압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의 육신도 방황하는 배회하는, 생활을 하시는 이들이 많이 계신 줄 압니다.
육신 생활만 그런 것 아닙니다. 이와 같은 세상에 사는 그 심령들의 생활을 보면 더 방황하고 더욱 갈 길을 잃고 헤매 이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은 이와 같은 사상, 내일은 저와 같은 사상, 오늘은 이와 같은 무리, 내일은 저와 같은 무리, 오늘은 유교에 가 보고, 내일은 천도교에 가 보고, 모래는 불교에 가 보고, 방황하는 심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방황하고 배회하는 것이 인간의 심령 생활에 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목표, 영혼의 안전 지를 찾지 못한 심령들은 아직까지도 이렇게 광야에서 배회하는 가련한 심령들이올시다.
이렇게 육 적으로, 영적으로 방황하고 배회하니까 자연히 그 심령들이 곤비(困憊)해집니다. 육신도 피곤하여집니다. 기갈이 심하여집니다. 평화를 구하지마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참된 평화를 찾지 못합니다. 안전을 구하지마는 이 세상에서 안전 보장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구하지마는 냉랭한 이 세상에서 참된 사랑을 찾지 못합니다. 만족을 구하되 만족을 얻을 수 없고 행복을 찾아서 다니지마는 참된 행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 결과는 마음속에 불평이 일어나고 불안이 가득해지고 불만과 불평이 가득히 찬 인간들이 모인 사회인지라 그 사회에는 도처에 분쟁과 분열이 접종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를 심리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이 사실을 여실히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광야에 헤 매이는 인간들은 불행한 인간들이올시다. 그려는 동안에 어느덧 청춘은 살지고, 기력은 쇠퇴해지고, 머리카락에는 어느덧 서릿발이 잡히기 시작할 때에 인간의 환멸과 탄식 속에 계속할 수 없는 생애를 계속하는 것밖에 다른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배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방랑의 생활을 하는 가련한 인간의 심령의 모습을 우리가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광야에 반석이 있었습니다. 반석을 칠 때에 갈라지면서 그 가운데서 생수가 솟아났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황막한 세상에, 기갈이 심한 심령들이 방화하는 이와 같은 세상에 반석이 임했습니다. 이 반석이 갈라지면서 생수가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반석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이상하게도 제가 정지에 가보니 물들이 흔히 반석에서 납니다. 이제도 말했지마는 실로암 샘물은 예루살렘 반석 가운데 굴이 있고 그 굴속에서 맑은 샘물이 강 같이 흘러나옵니다.
여기 양덕(陽德) 온천에 가보신 이가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양덕 온천에 가 보면 굴속에서, 반석 속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납니다. 실로암 못에는 찬물이 솟아납니다. 여리고 에 가보면 엘리사의 우물 역시 반석 가운데서 생수가 콸콸 솟아나서 강 같이 흘러 내려갑니다. 그래서 여리고 가 되었습니다. 제주도에 가면 이런 샘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쓸쓸한 광야 같은 세상에 반석으로써 임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수가 이 광야에 흐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의 주시는 은혜, 예수의 진리, 예수의 주시는 생명, 그리스도의 주시는 성신의 축복은 이 생수와 같습니다. 생수라고 하는 것은 웅덩이의 물과 다릅니다. 웅덩이 물은 냄새가 납니다. 생수는 새롭고 맑고 한 번 마시면 사람의 심령을 상쾌하게 합니다. 곤비하여진 기갈이 심하여진 심령들이 웅덩이 물 같은 세상의 오락, 세상의 향락, 세상의 무엇가운데서 그 기갈을 멈추려고 하지마는 실망하고 맙니다. 오직 생수와 같은 그리스도의 진리에 접촉해서 새로운 생명을 받을 때에 그 심령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주신 물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내리는 물인 까닭으로 새로운 물입니다. 웅덩이 물은 죽은 물입니다. 가만히 있습니다. 곰팡이가 낍니다. 생수는 움직입니다. 그럼으로써 누구든지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참으로 은혜 받고 성신을 충만히 받은 그 심령 속에는 새로운 움직임이 있습니다. 양심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지력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체력에도 움직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내 재능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여러 가지 운동이 일어나고, 여러 가지 사업이 일어나고,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에 은혜 받은 사람은 기쁨으로서 협력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 생수는 솟아오르는 물입니다. 물의 근본 성질을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내려간다고 합니다. 사실 물은 내려갑니다. 이 생수는 솟아오르는 물입니다. 물이 얼마나 올라가는고 하니 수평선까지 올라갑니다. 자기 본래 있었던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이 원리를 이용해서 우리가 수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이 샘물은 본래 하나님 보좌 옆에서 흘러내리는 까닭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이 생수는 높이 하늘 나라까지 그러므로 영원하도록 솟아납니다. 이 생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내 광야에서 목말라 헤 매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석에서 나는 생수를 마시면서 새로운 활기를 얻은 모습을 우리가 상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주님 앞에 나와서 이 생수를 마시고 은혜 받은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올시다. 예수께서 여기 말씀하시기를 그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그 속에 생수가 있는 반석이 있습니다. 속에 생명의 강이 흐릅니다.
이제도 말했지만 여리고 근방에는 다 황막한 광야입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에만 들어가면 거기는 종려나무 가지가 푸르고, 아름다운 감람나무가 무성했고, 채소가 있고, 높은 뽕 나무가 있고, 모든 생명이 약동하는 아름다운 동산이 되어 있습니다. 그 까닭은 여리고 성안에는 엘리사의 우물과 같은 생수가 있는 까닭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솔로몬의 동산 있는 곳을 가보니, 어떻게 그 곳에 솔로몬의 동산을 만들었느냐 하면 그 곳에도 땅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가 있습니다. 이 생수를 근원으로 해서 솔로몬의 동산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심령은 물 대인 동산 같습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물 대인 동산 같습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생명수가 있습니다. 시편에 보면 믿는 사람의 심령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다 광야로 흘러내리지마는 요단강 근처에는 아름다운 나무 속 무성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까닭은 그 속에 요단강이 있는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의 속에는 말하자면 이 요단강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의 생활에는 생명이 있고, 장성이 있고, 아름다운 꽃이 피고, 복스러운 열매를 맺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의 심령에는 기쁨과 만족과 영원한 노래가 다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을 떠났지마는 전에 볼티모어에 있는, 존 홉킨스 대학의 외가 의사요 교수로서, 또 특별히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전도에 열중하던 켈리 박사라고 하는 유명한 분이 계셨습니다. 저도 친히 그의 말씀을 한 번 들어보았습니다. 켈리 박사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그이가 언제든지 그의 양복 옷에다 좋은 장미꽃을 늘 꽂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교수가 꽂고 다니는 장미는 도무지 시들지를 아니하고 그저 금방 꺾어서 꽂은 장미와 같은 꽃을 늘 꽂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꽃은 어떻게 그렇게 도무지 시들지 않는데 무슨 비법이 있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러니까 웃으면서 그 비법은 별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양복 앞섶을 뒤집어 보였습니다. 그 속에 보니까 조그맣게 옆집을 달고는 그 속에 물병을 넣었단 말이요. 그래서 실상 그 꽃이 물 속에 꽂히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시들지 아니하고 언제나 청청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 때 이 켈리 박사가 하는 말이 우리가 이 세상에 다니면서 언제나 신선하고 아름답고 항상 향기를 나타내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되려고 하면 우리 생활 속에 뿌리가 이와 같이 물 속에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생명수 속에 있어야 된다고 그 진리를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 와서 마시라.』예수 그리스도는 생수를 주시는 반석이올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이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내 전 생명을 바칠 수 있습니다. 그 진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생명의 강이 흘러서 언제든지 풍부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一九五九년 二월 二十二일)
Ⅲ-11 유혹을 삼가라 (잠언 一장 一-十六절)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잠 一·十)
왜 하와가 죄에 빠졌습니까? 꾀임에 들어서 죄에 빠졌습니다. 왜 아담이 또한 죄에 빠졌습니까? 역시 꾀임에 들어서 죄에 빠졌습니다. 인생의 가는 길에는 유혹이 많습니다. 시험이 많습니다. 올무가 많습니다. 남자에게도 그렇고, 여자에게도 그렇고, 청년에게도 그렇고, 장년에게도 그렇습니다.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부한 사람이나 물론하고, 누구에게든지 이 유혹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 행로를 살펴보면 이 유혹으로 말미암아 넘어진 자도 많고, 죽은 자도 많고, 죽고 썩어 냄새나는 시체도 많고, 많은 비극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며칠 전, 신물을 보니 작년 일년동안에 법망에 걸린 소년 범죄 수만도 九,四0六건이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예년의 배가되는 수라고 그럽니다. 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이유를 한 마디로 썼습니다. 유혹입니다. 유혹을 삼가야 됩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유혹에 들지 아니하는 비결을 우리들로 하여금 분명히 깨달아서 우리가 과거는 어떠하였든지 이 앞으로는 시험에 빠지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누구에게든지 시험하는 자가 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四장과 누가복음 四장을 읽어보면, 시험하는 자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왔습니다. 광야에서 금식 기도하실 때에 시험하는 자가 와서 세 가지로 시험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하와에게도 왔고 아담에게도 왔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모든 선지자들, 모든 사도들, 모든 성도들, 오늘 믿는 모든 우리들에게도 누구나 할 것 없이 반드시 이 시험하는 자가 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단순히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환경이나 본능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이 우주에 악한 영이 있어서 사탄이 있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엄히 경계하시기를『조심하라 삼가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들과 같이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느니라.』이와 같이 경계를 한 것입니다. 이 악한 마귀는 기쁠 때는 기쁨을 통해서 유혹합니다. 슬플 대는 슬픔을 통해서 유혹합니다 분주할 때는 분주할 때, 편안할 때는 편안할 때, 괴로울 때는 괴로울 때를 이용하여 우리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잠시라도 방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스스로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이 시험하는 자가 언제든지 온다고 하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됩니다.
둘째로, 시험하는 자가 밖에서 찾아오는 것 같이 또 우리 속에서 시험이 일어나는 것도 우리가 깨달아야 됩니다. 야고보 一장 十四절과 十五절에 읽으면『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는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내 속에서 일어나는 욕심에 미혹되어서 시험에 드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푸른 풀과 물욕에 유혹되어서 소돔과 고모라 성으로 살려 갔다가 큰 화를 입은 것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기업을 팔았다고 하는 사실도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식욕에 미혹되어서 시험에 든 것입니다.
어떻게 다윗이 정욕에 미혹을 방아서 밧세바와 죄를 범하였다는 사실도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욕에 미혹을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유다 가 三十 냥쭝에 미혹되어서 자기의 선생이요 주를 팔았다고 하는 기사도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사실이올시다.
어떻게 데마라고 하는 청년은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의 허영에 유혹되어서 자기의 은사를 배반하고 세상으로 나간 사실도 우리가 기억하는 것입니다. 요한 과 야고보는 지위 욕에 미혹되어서 예수께 나와서 구하지 아니할 좌편과 우편에 앉을 자리를 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말씀과 같이 육신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사람들이 시험에 빠집니다. 욕심을 경계해야 됩니다. 속담 중 사람의 욕심이 땅보다 더 두텁다는 말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여러분, 디모데 전서 六장 七절 이하를 읽을 때에 듣기만 하시기를 바랍니다.『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할 줄로 알 것이니라. 부 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沈淪)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욕심을 경계하여야 됩니다.
셋째로, 이렇게 밖으로 시험하는 자가 우리를 공격하고 안으로 욕심으로 말미암아 시험이 일어나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모든 시험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十장 十三절에 읽으면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렇게 많은 미혹과 시험이 들어오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험을 관리하십니다. 우리가 받을 시험을 사람과 형편에 따라서 통제하여 주십니다. 그럼으로써 어떠한 시험이든지 누가 당하면 그는 그 시험을 견딜 수 있겠기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어떠한 시험이 오든지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됩니다.
또한 로마서 八장 二十六절을 보면『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懇求)하시느니라.』성령께서 간구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험을 통제해 주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시험을 이기어서 모범을 보여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우리도 시험 당할 때에 감당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온전히 이길 수 있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빠지면 내가 힘쓰지 않아서 빠지는 것입니다. 옛날 모든 성도들도 시험은 우리와 같이 받았지마는 이겼습니다. 욥이 이기고 요셉도 이겼습니다. 어떤 시험을 당하든지 성령의 은혜로써 이길 수도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우리가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지지마는 그렇지만 유혹이나 시험을 가까이 할 것은 아닙니다. 시험을 멀리 하는 것이 좋습니다. 유혹에 구역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서울 시 하면 지리적으로 볼 때에도 어떤 거리는 위험한 유혹의 거리올시다. 저는 다는 못 다녀 보았지만 종로 뒷거리 같은데 특별히 유혹이 많다고 합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유혹의 구역이 있습니다. 어떤 지방이든지 술집이나. 댄스홀이 있는데는 다 유혹의 구역이올시다. 우리 믿는 사람이 그런 데 가까이 갈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사교계에도 유혹의 구역이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시키는 악한 동무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남녀간의 교제 가운데도 우리를 유혹으로 이끄는 이성이 있습니다. 유혹의 구역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독서 계에도 유혹이 있습니다. 음란한 소설, 잡지, 등등 소위 에로 문학 같은 것들은 사람을 유혹합니다. 유혹의 구역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술계에도 유혹의 구역이 있습니다. 좋지 못한 음악, 좋지 못한 그림, 좋지 못한 모든 오락에 관한 것들과 같은 구역들을 가까이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아 나아갈 때에 이와 같은 구역이 있습니다. 이런 구역에 가까이 할 필요가 도무지 없습니다. 뱅뱅 가까이 도는 사람은 마지막에 시험에 빠지고야 맙니다.
다섯째는, 이렇게 유혹의 구역을 멀리 하지마는 악한 마귀는 언제든지 어느 때든지 갑자기 우리를 시험합니다. 갑자기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됩니까?
여기 전쟁의 술어를 쓴다고 하면, 첫째는 소위 전격 전을 써야 됩니다. 곧 물리쳐야 됩니다. 예수께서도 악한 마귀가 와서 예수를 높은 산 위에서 천하 만국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고, 넌지시 사탄이 하는 말이 자기에게 절만 하면 이 모든 영광을 예수에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는 말씀이『사탄아 물러가라. 오직 주 너희 하나님만 공경하고 그에게 절할 것이니라.』이와 같은 말로 대답한 것입니다. 죄와 협상하지 맙시다.
조금이라도 그것이 나를 죄로 인도하는 것이 분명하면 곧 그 때에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인도사람의 속담가운데『코끼리는 코가 들어오면 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코끼리가 방 안에 들어오려고 할 때에 우선 코부터 못 들어오게 해야지, 그 놈이 어떻게 코만 조그만 구멍이이라도 있어서 들어오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못 견딘다고 합니다. 다 들어오고야 말지요.
시험이 꼭 그렇습니다. 처음에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릴 때에, 악한 유혹이 우리 마음에 엄습할 때에 마음에서부터 아예 물리쳐 버려야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일 사랑하는 자지 금방 반석이라고 부른 베드로를 향해서도『사탄아 물러가라.』사탄이라고 물리쳤습니다. 사람의 뜻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아니하고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라는 권면을 할 때, 이와 같이 강경히 물리친 것입니다. 죄와 협상하지 맙시다. 타협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섯째는, 물론 이 시험을 다 이기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미리 문지 태세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전쟁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준비를 잘 확충해서 육 해 공 각 방면에 군비를 해 두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올시다. 병을 예방하는 방법은 그저 평소에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위생을 조심해서 우리의 건강을 튼튼히 기키는 것입니다. 건강이 약해지면 백병(百病)이 침입합니다.
모든 시험을 이기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가 우리의 신앙 생활을 철저히 해서 우리의 심령이 튼튼하고 우리의 믿음이 건전한 생활을 하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우리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성신이 충만한 생활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유혹이 들어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악하고 죄악이 많은 세상 가운데 나아가서 하루 동안 사는 것은, 아치 군인이 전장에 나가서 하루 동안 격전을 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형편이올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의 일을 준비하는 아침시간에 반드시 간절한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을 튼튼히 무장하고 그 후에 세상에 나아가서 살아야 될 것입니다. 튼튼한 준비 태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째는, 이것이 제일 좋은 방법인줄 압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제가 인용하겠습니다.『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열심을 품어 주는 섬기는 것입니다. 분주하게 주를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미국의 유명한 발명가 에디슨에게 가서 조용히 묻기를『선생님도 전에 혹 시험에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고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 때는 노인일 적인데 눈을 크게 뜨면서『시험? 시험에 못 들어 봤다. 왜 그런고 하니 시험에 들 사이가 있어야지.』너무 연구하기에 바빠서 시험에 들 시간이 없었단 말입니다. 분주하면 시험에 들 기회가 사실 없습니다.
한가한 사람들이 시험에 잘 듭니다. 한가하니까 공상이 일어납니다. 한가하니까 놀이터에 가게 됩니다. 분주히 공부하지 않고 한가히 학교에 아니는 학생이 시험에 빠집니다. 여자들 가운데도 분주한 여자들보다도 소위 유한 마담이라고 한가한 여자들이 시험에 빠집니다.
분주하게 일하는 사람은 시험에 들 사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분주히 일하는 사람, 내 책임을 충성되게 분주하게 잘 감당하는 사람,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는 사람들에게 시험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놀며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시험이 많습니다.
전에 어떤 나라에 젊은 재상이 지혜 있는 나이 많은 왕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아직도 젊은 몸인데 유혹에 들지 않는 좋은 무슨 교훈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다는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왕이 가만히 잠깐 생각하시더니 그 옆에 있는 신하를 불러서 얼른 안에 들어가서 금 잔에 기름을 가득 부은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젊은 재상에게 주면서『자 이 금 잔에 기름이 가득하지 아니하냐? 이 가득한 기름을 가지고 이 궁궐에서 나가서 아무 거리, 아무 모퉁이, 다 돌아오되 한 시간 이내로 다 돌아 오라. 돌아올 때 한 방울이라고 흘리면 안 된다. 한 방울이라고 그 기름이 흘려 내리게 될 것이면 곧 자네 목을 베겠노라. 그런 줄 알고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곧 다녀 오라.』그러면서 그 뒤에는 군인 한 명에게 칼을 뽑아 가지고 뒤를 쫓아가게 했습니다.
한 방울을 흘리면 목을 자르라고 하니까 이 젊은 재상이 금 잔에다 기름을 가득 담아 가지고서는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한 시간 안에 돌아오라고 하니까 빨리 서둘러 땀을 뻘뻘 흘려 가면서 그 모퉁이를 돌아서 어느 거리를 돌아서 겨우 한 시간만에 가시 가지고 왔습니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아니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이 차서 가지고 돌아왔단 말입니다.『한 방울도 안 흘렸는가?』『네 안 흘렸습니다.』 그 때 왕이 묻기를『그 아무 거리에서 아무 상점들을 보았나? 거리에 가다가 아무개를 보았나? 어디쯤 가면 누구 가 있는데 보았나?』 물어 보았습니다,『그만 못 보았습니다.』『아니 못 보다니, 지나오면서 못 봐.』『이 기름 잔만 보려고 다른 것을 볼 사이가 있어야지요.』 그 때 노 왕이 웃으시며 하시는 말이『그러면 자네 유혹에 들지 않는 비결을 배웠나?』우리가 다 배웠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는 비결 가운데 그 제일 좋은 비결은 우리가 열심을 품어 하나님이 내게 맡긴 사명을 부지런히 하고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나, 내 직장에 있어서는 내가 맡은 책임을 충성되게 부지런히 전 정력을 다해서 하는 가운데 자연 유혹이나 시험에 들 사이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공격이 언제든지 최선의 방비라는 전법이 있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옛날 자기네들끼리 살 때 이런 미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추장끼리 싸우는 일이 많았는데 그 때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죽이면, 그 죽인 사람의 힘이 다 자기에게로 와서 그 사람의 힘이 더 강해진다는 미신이 있었다 합니다. 이것은 물론 미신이지만 어떤 면에 보면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유혹 받고 시험받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유혹이 오고 시험이 올 때에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써 온전히 이기고 정복한다고 하면 그것은 내게 유익이 됩니다. 사실 우리가 유혹과 시험도 이김으로 말미암아서 영적 경험을 얻고, 우리의 심령이 연단을 받고, 연단을 통해서 인내를 얻게 되고, 인내는 통해서 더욱 새로운 힘을 우리가 얻데 됩니다.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서 우리가 이 죄 많은 세상을 살아 나아갈 때에 모든 유혹을 이기고 승리해서 오히려 이것을 승리함으로 새로운 능력을 좀더 열심히 하나님을 봉사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一九五九년 三월 八일)
Ⅲ-12 십자가의 도 (고린도 전서 一장 十八-二十五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一·十八)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말씀은 원서대로 말하면 말씀이라고 하는 말이올시다. 요한 복음 一장 一절에『태초에「말씀」이 있으니』하는 말 가운데 말씀이라는 말은 도라는 말과 꼭 같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곧 그리스도의 복음이올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최고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는 십자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네 복음서를 읽어보면 이 복음들은 다 그리스도의 생활에 대한 전기인데 보통 세상 사람들이 어떤 세상 사람들에 대한 전기를 기록한 것과는 다릅니다. 보통 전기로 말하면 그 사람이 난 것과 장성한 것과 그의 사업 같은 것들을 길게 기록합니다. 그 사람의 죽은데 대해서는 별로 기록하는 사람이 적고 혹 기록한다고 할지라도 간단히 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 네 복음을 보면 복음에 적어도 三분지 二이상은 그리스도의 마지막 며칠 동안에 된 일, 곧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말씀은 곧 복음이올시다. 우리 기독교의 복음이올시다. 우리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요. 십자가는 우리 기독교 복음의 진수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말씀, 이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하여 주는 그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여러 사람이 여러 가지로 설명하였지마는 그저 간단히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대략 네 가지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제일 먼저,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를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죄를 벌하십니다. 여기에 다시 말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와 심판과 형벌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안입니다. 둘째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때에 죄 가운데 묻힌 만민들을 멸망을 받을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친히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나님께서는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셋째로, 이 십자가는 대속의 제사를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한갓 애국자의 죽음이 아닙니다. 다만 순교자의 죽음도 아닙니다. 어떤 진리에 대한 희생을 당하신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리스도 자신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주님께서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자기 목숨을 주려 오신 것입니다. 이 대속의 제사로 말미암아 만민의 죄 사함이 있을 수 있게 되었고, 멸망가운데서 생명의 길이 비로소 열리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대속의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넷째는, 이 십자가는 누구든지 이 십자가의 진리를 믿는 사람은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진리를 말씀하여 주십니다. 누구든지 선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의를 행함으로가 아니라, 법률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대속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람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진리를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도가『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니라.』이와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인데 이 십자가의 도를 받는 사람들은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가지 종류는 멸망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종류는 구원을 얻는 자들입니다. 여기 본문대로 좀더 분명히 번역하면 멸망하는 자들이 아니고 멸망하는 중에 있는 자들입니다. 현재 진행으로 썼습니다. 또 구원 얻은 우리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마는 좀더 분명하게 번역하면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우리라고 현재 진행 사를 여기에 썼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많지마는 이 모든 사람들을 간단히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멸망 중에 있는 자들과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성경에 보면 구원에 대하여 과거, 현재, 미래, 이 세 가지 방면으로 기록한 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곳에 보면「구원을 얻었다」고 과거로 기록한 데가 있습니다. 어떤 데 보면「구원을 얻는다」고 현재로 기록한 데가 있습니다. 어떤 데 보면「구원을 얻겠다」고 미래로 기록한 데가 있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 말을 깊이 생각하면 다 옳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올시다. 그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그 득의(得意)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는 예수 님을 확실히 믿는 그 때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우리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다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화의 견지에서 보면 점점 거룩한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고, 성화의 교리의 견지에서 보면 우리는 다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들이올시다. 매일 매일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아 나가는 생활이 우리 신자들의 생활이올시다. 이런 의미에서는 우리는 구원을 얻고 있는 현재의 사람들이올시다.
그러나 미래의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는 온전히 구원을 얻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육신의 온전한 구원의 견지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아직도 미래에 있습니다. 구원을 얻어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언제나 온전히 완전한 자리에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육체까지 부활해서 신령한 몸을 얻어야 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는 우리의 구원은 아직까지도 미래에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 기록한 대로 보통 우리는 구원을 얻으려는 중에 있다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묘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아시거니와 구원이라고 하는 뜻은, 본래 뜻대로 말하면,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고친다고 하는 뜻입니다. 치료를 받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병난 사람이 치료를 받아서 점점 나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신령한 뜻으로 생각해 보면 여기 병은 육신의 병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죄를 가르치십니다. 죄는 전염병 같습니다. 죄는 문둥병 같습니다. 이런 무서운 병을 다 우리가 들었는데 그 병 가운데서 점점 치료를 받아서 온전한 자리에 나아가는 중에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죄 가운데서 고침을 받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또 둘째로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건진다고 하는 뜻입니다. 위태한 자리에 있다가 점점 안전한 자리로 옮겨진다는 뜻이 있습니다. 가령 물에 빠져서 물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어떤 사람이 그를 건져내서 점점 물이 옅은 안전한 곳으로 옮긴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도 신령한 의미로 생각하면 우리는 다 죄로 말미암아서 위태한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벗어나서 점점 안전한 곳으로 옮겨온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들은 아치 어떤 사람이 중병에 걸렸다가 매일 매일 조금씩 조금씩 나아서 건강하여지는 중에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또는 어떤 사람이 위태한 물 가운데 빠졌다가 헤엄 잘 치는 어떤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점점 물 속에서 이끌려 나와서 안전한 자리로 옮겨가는 중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 앉은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한 구원을 얻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한 대로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들과 정반대의 형편입니다. 병이 점점 중하여 가는 환자와 같습니다. 오늘 좀더 열이 오르고, 내일은 좀더 열이 오르고, 모래는 좀더 열이 오르고, 점점 중해 가는 환자와 같습니다. 점점 죽음을 향해서 가는 환자와 같습니다. 제가 전에도 한 번 말하였지마는 방콕에 가서 아편굴에 들어가 보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참혹한 형편에 있는지 마치 중병 환자가 점점 죽음에로 나아가는 그 현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혹 문둥병자 수용 병원에 가보면 문둥병 환자들 가운데 그 병의 경중을 따라서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멘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만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좀더 중한 환자를 보면 손이 다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좀더 중한 화자를 보면 팔목이 다 없어지고 심지어는 발이 다 없어지고 다만 두부 덩어리처럼 된 문둥병 화자까지 여러분이 볼 수가 있습니다. 점점 병이 중하여지는 그런 가운데 있는 사람이올시다.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형편이 이와 같은 자리에 있다는 말입니다. 또는 점점 물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과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배로 말하면 점점 가라앉고, 조금 가라앉고 한 시간 후에는 좀더 가라앉고, 며칠 후에는 좀더 가라앉는, 점점 가라앉은 배와 같은 형편 가운데 있는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다. 멸망 중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그 영혼의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영적 견지에서 본다고 하면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점점 고침을 받아서 위로 올라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점점 중한 병이 더해서 아래로 내러 가든지 우리의 심령은 그 두 가지 형편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멸망하는 중에 내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날마다 구원을 얻어서 독수리와 같이 날개를 치며 그 심령이 올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가운데 어떤 종류에 속합니까? 내 심령상태가 하루하루 거룩한 자리로 올라갑니까? 그렇지 아니하고 내 심령 상태가 불의한 자리, 더러운 자리, 멸망의 자리로 내려가는 가운데 있습니까?
그런데 십자가의 말씀은 하나이지마는 이 두 종류의 사람 중 종류를 따라서 십자가의 도에 대한 반영이 다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다르게 들립니다. 십자가가 다르게 보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마 금강산에 있는 만물상을 구경하신 분이 여러 분 계실 줄 압니다. 그 만물상은 돌입니다. 돌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생겨서 참 만물처럼 보인다고 만물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기쁜 사람이 보면 그 만물상이 무엇처럼 보이는고 하니 그야말로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또 마음이 슬픈 사람이 그 만물상을 보면 그저 상제들이 곡하는 모양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같은 만물상이올시다. 같은 바위올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다르게 보입니다.
그것과 비슷하게 같은 십자가입니다, 같은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렇지만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에게와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각각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여기 하는 말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중에 있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련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멸망 중으로 점점 내려가는 사람은 십자가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들립니다. 우선 십자가 자체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옛날 로마에서 노예든지 식민지 백성을 극형에 처형할 때 쓰는 형 구올시다. 가장 천하고 가장 더럽고 가정 무서운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가장 천한 사람들만 못 박히는, 이런 데 처형을 받은 어떤 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 미련하게 들리지 않겠습니까? 미련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옛날 헬라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들렸습니다. 로마 사람들도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미련하게 들었습니다. 알 수가 없고 미련하게만 들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는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너무 단순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는데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너무나 단순한 교리입니다. 거기에 무슨 철학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말합니다.『기독교는 깊은 맛이 없다. 차라리 불교는 깊은 맛이 있는데, 그리고 옛날 노자가 가르친 도덕경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깊은 맛이 있지. 기독교야 깊은 맛이 있어야지. 그저 애들과 부인들이 믿기를 좋지.』나같이 학식이 많은 사람이야 믿을 것이 못 되는 미련한 것으로 보입니다.
옛날 철학을 많이 숭상하던 헬라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들렸습니다.『믿음으로 구원을 얻다니 내가 선을 행하고, 내가 덕을 닦고, 그야말로 도고덕부(道高德富, 도가 높고 덕이 부)하여 내가 구원을 얻는 것이지, 무엇 어떤 진리를 믿어서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무슨 말이야. 그 덕이 없는 사람들, 그 천한 사람들이나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이야 덕을 행했으면 얻지.』라고 말하며 비웃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또 더욱이 대속한다는 진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들립니다. 누구든지 정직한 사람이나 정정당당한 사람이야 자기의 책임을 자기가 지는 것이지, 남의 덕에 구원을 얻겠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하며 자기는 자기 덕으로 구원을 얻겠다고 합니다. 물론 인류의 깊은 연대성과 자기의 성품이 얼마나 죄악으로 말미암아 부패하여졌다고 하는 보다 더 깊은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여러분 자세히 들으세요. 누구든지 십자가의 도가 이렇게 모이면 그것은 그 사람의 영혼에 멸망의 상태가 이만큼 중태로 빠졌다고 하는 것을 증거 하는 것뿐입니다.
사실은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은 아닙니다. 미련하게 보입니다.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철학을 연구한 사람들, 많은 학문을 연구한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맑은 날 대낮에 해를 쳐다보면서 어떻게 해가 밝지 못하고 어둡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단순히 눈 병신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인다고 하면 그만큼 그 사람의 심령이 부패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지혜도 됩니다. 그렇지만 지혜라고 하는 것보다 더 구원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이 십자가의 말씀에 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게 하는 능력은 십자가밖에 다른 데에는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하게 해서 더러운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불의한 마음을 의롭게 하고 부정직한 마음을 정직하게 하는, 즉 사람의 마음을 변화하게 하는 능력은 오직 십자가의 도밖에는 다른 데서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악 가운데 빠지고 죄악에 얽매여서 죄의 종이 되었던 사람에게 그로 하여금 죄의 쇠사슬을 끊고 해방을 받아서 자유스러운 사람을 만드는 능력은 십자가의 말씀밖에는 다른 데는 없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과 기쁨과 화평을 주는 능력이 십자가의 도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제 한 주일 동안, 우리가 수난 주간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 수난 주간을 통해서 십자가를 바라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 더욱 가까이 나오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서 내 자신을 스스로 반성하는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십자가를 전파하는 기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과 같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그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一九五九년 三월 二十二일·저녁예배)
Ⅲ-13 성령 안에서 하나 (에베소서 四장 一-十六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四·三)
지난 부활 주일에 새로 학습 선 교우들도 여러 분 계시고, 또 새로 세례를 받고 혹은 입교 문답으로 입교한 교우들도 여러 분 계십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교회의 온전한 교인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한 온전한 지체가 된 이후에 제일 먼저 사모할 은혜가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우리가 자연히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이 세례 받은 분만 아니고 이미 오래 믿는 우리들도 우리가 교회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제일 먼저 받을 은혜와 또 우리가 특별히 힘쓸 면이 있으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이따금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 줄 아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를 보면 사도 바울이 다른 서신에도 보통 그런 방법을 쓰지마는 여기 一장에서부터 三장까지에는 우리 기독교의 진리를 간단히 설명합니다. 그리고 四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그와 같은 진리 안에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생활을 하여야 되겠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도덕적인 면, 도덕적 생활 면을 특별히 교훈해서 가르치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四장 一절에 보면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사도 바울이 서신을 쓸 때에 로마 감옥에 있었습니다. 주안에서 갇힌 나라고 기록했습니다. 아마 그 뜻은 주를 위해서 주님과 같이 있어서「주님 안에 있는 나」라고 하는 의미도 있는 줄 압니다. 하여간 이런 말씀을 쓰는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감옥에 있다고 하는 것을 자랑하는 것보다는 그가 권하는 이 말씀이 실상은 주께서 그의 마음속에 같이 계셔서, 그가 주안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권한다고 하는 깊은 뜻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권면하는 말씀이『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一장에서부터 三장까지 우리 믿는 사람들이 본래 세상에 속하였고 죄악 가운데 죽었지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서, 영적으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해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되어서,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거룩하신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고 하는 설명을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부르심을 입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은즉 이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야 되겠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권면하는 말씀이『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줄로 성령이 하나이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그러면서 이 같은 뜻을 十六절까지 내려가면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一절에서 十六절까지에 제일 중요한 절은 三절이올시다.『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그리스도의 도리를 믿어서,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의 지체가 된 모든 교인들을 향해서 제일 먼저 가장 중요하게 권면한 말씀은 다른 말씀이 아니고『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여기 평안이라고 하는 말은 화평이라고 하는 말과 똑 같습니다. 화평의 매는 줄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 연결이 되었습니다. 이 화평의 줄을 끊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는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 한 성령을 받아서 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을 어떻게든지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여기 힘쓴다고 하는 말은 그 원어를 보면 불타는 열심을 가지고 어떻게든지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 사이에 화평의 줄을 끊지 말고 하나 된 것을 어떻게든지 뜨거운 열심을 가지고 지키도록 힘을 쓰라고 이와 같이 권면했습니다.
여기 一절에서 十六절까지 보면 특별히 세 가지 대지로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여기 二절 말씀 가운데에는 이렇게 하나는 유지하려고 하면,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어떠한 은혜를 받아야 되겠는가를 말씀하셨고, 四절에서 六절까지는 우리 믿는 사람이 하나가 된 근본 기초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七절 이하에는 우리 믿는 사람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 그 의미는 어떤 것이며, 그 성품 질은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좀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먼저 성령의 하나가 된 것을 굳게 지키려고 하면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어떤 은혜를 먼저 받아야 되겠느냐?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먼저 어떤 것을 배워야 하겠는가?
여기 몇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모든 겸손이라고 했습니다.『먼저 주님께로부터 겸손을 배우라.』는 이 말을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겸손은 교만의 반대입니다. 내 부족한 것을 스스로 깨달아서 항상 자기를 낮춥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이 겸손 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는 여러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 말씀에『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시나 겸손한 자와 같이 계셔서 겸손한 자를 부흥하게 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욱이 이와 같은 겸손의 덕이 공동 생활하는데, 즉 가정에서와 또한 대중생활을 하는 교회 안에서 화평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여러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먼저 하나 하나가 겸손의 은혜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둘째로는, 온유 하라고 했습니다. 온유의 은혜를 받으라고 권유했습니다. 온유는 글자 뜻대로 부드럽다고 하는 뜻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이 없이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경륜에 대하여 불평을 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온유하지 아니한 까닭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는 모든 일에 불만을 가지지 아니하고 순복하고 이해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도 역시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유순한 대답이 격노를 그치게 한다.』고 하는 잠언의 말씀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예수께서는 산상보훈(山上寶訓)에서『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온유한 자가 천국을 얻습니다. 이 온유의 덕이 우리 단체생활, 교회생활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도 우리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줄 생각합니다.
셋째로는,「오래 참음으로」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인내의 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너희가 인내로써만 내 영혼을 보전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참는 그 성품, 분할 때에도 참는 그 성품, 자기가 상처를 입어도 아픈 것을 참는 그러한 아름다운 덕은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오래 참는 이것이 우리 공동 생활하는데 얼마나 필요하다고 하는 것도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너희들은 인내로써 달음박질 마당에 달리라.』고 친히 성경에 교훈 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는,『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로 했습니다. 좀 다른 점이 있을지라도 너그럽게 생각하고 누가 실수가 있을지라도 좀 용납해 주고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사랑 가운데서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의 줄로 설령의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려고 하면, 우리 믿는 사람 하나 나가 이와 같은 은혜를 먼저 받아야만 되겠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고 사랑으로 용납할 줄 아는 사람이 모인 그 교회는 언제가 화평한 교회일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교만하고 거칠고 조급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적어서 피차에 용납하지 않고 용서하지 아니하는 이런 교회는 언제나 불평이 많습니다.
여기 기독교 도덕을 가르칠 때에 로마서에서 보거나 에배소에서 보든지 제일 먼저 겸손의 덕을 그르쳤습니다. 사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특색입니다. 그래서 옛날 니이체 같은 사람은 기독교 도덕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이 도덕적 요소 하나 하나가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성품이올시다. 이 요소 하나 하나가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이올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태도로 대하여 주십니다. 먼저 이와 같은 겸손의 덕이 교회의 화평을 유지하는데 필요하다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가 됨에 근본적인 기초를 우리에게 지적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왜 우리 믿는 사람이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화평의 줄을 끓지 아나하여야 되겠는가?
일곱 가지를 가르쳤는데 첫째는,「몸도 하나이요」여기 몸이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르쳤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하나입니다. 지금도 신령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 뿐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여러 교회로 나누어졌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아니하는 신령한 참된 교회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교회의 머리를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이 한 교회에 속하였습니다.
둘째는,「성령도 하나」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보내신 보혜사(保惠師)는 한 분뿐입니다. 오순절(五旬節)에 모든 교우들이 받은 그 성신은 오늘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십니다. 옛날 사람이 받은 성신이나, 오늘날 믿는 사람이 받는 성신이나, 한 성신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받은 성신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이 받은 성신이나 우리 한국 사람이 받는 성신이나 성신은 한 분입니다. 성신에 두 분이 없습니다. 한 성신을 우리가 다 받아서 진리를 깨닫고 주를 믿습니다.
셋째는「소망도 하나」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없는 불멸의 영원한 썩지 아니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다 한 아버지의 집에 갈 것입니다.
유감스러운 일은, 구리가 다 사람들인 까닭으로 어떤 때에는 한 교회에서 잘 모여서 예배를 보다가도 서로 불화해서 따로 갈려 나가, 따로 예배를 보는 경우가 혹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다 인간인 까닭으로 생기는 줄 압니다.
그런 일에 대하여 들을 때마다 어떤 때는 무슨 생각이 들어오는고 하니, 세상에서는 저렇게 따로 모여서 예배도 보고 그러치마는 그런 정신으로 그냥 가다가 이 다음에 천당에만 가면 함께 모일 수밖에 없겠는데 그러면 그 때는 어떻게 될까? 혹 그런 생각이 마음가운데에 일어납니다.
우리 ale는 사람들이 언제나 기억할 것은 우리의 소망도 하나님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서 화평한 가운데 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고 하면 이 세상에도 어느 정도까지나마 화평한 가운데 한 하나님을 섬기어야만 될 것입니다.
넷째는,「주도하나이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 하신 구주는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를 저장하시는 통치자는 한 분밖에, 곧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한 주님께 속했습니다.
다섯째는「믿음도 하나」라고 말씀했습니다. 물론 신조는 교파를 따라서 각각 조금씩 다릅니다. 예배하는 의식도 교파를 따라서 조금씩 다르고 또한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변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하나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누구든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하나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여섯째는「세례도 하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어떤 교파에 가서 세례를 받든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세례가 아닙니다. 세례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한 믿음을 기초로 한, 한 구주를 기초로 한 세례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똑 같은 세례로 죄 씻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곱째는「하나님도 하나」이십니다. 만 유의 아버지 시이요 만 유를 통일하시고 만 유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은 이 우주가운데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다 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한 하나님을 공경하는 족속들이올시다.
이렇게 일곱 가지 기초 위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화평의 줄을 끊지 말고 이 줄을 있도록 힘써 지키라고 간절히 권면한 것입니다. 그리고 七절 이하에는 그러면 어떠한 의미에서 우리가 주안에서 하나가 되었는가? 하나라고 하는 의미는 그럼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주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말은 우리 사람의 얼굴과 성품과 모든 것이 똑같이 하나가 되었다는 말인가?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고린도 전서 十二장을 읽어보면 이 원리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거기 우리 몸에 배유해서 그르치셨습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몸에 붙은 지체를 여러 가진데 이 지체는 각각 다릅니다. 따라서 각각 맡은 바 직무도 다릅니다. 그러나 다 이 지체가 연합해서 하나가 되어 몸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몸과 같이 하나입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교인들은 다 각각 조금씩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다르게 내셨습니다. 지력이 다르고, 체력이 다르고, 그 모든 것이 조금씩 다릅니다. 또 하나님께서 같은 성신을 주시기를 주셨지만 성신을 통해서 주시는 은사 선물은 다 각각 조금씩 다릅니다. 이 다른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을 하는데 유익하게 하게 위해서 이와 같이 만든 것입니다.
여기 우리 한국말로 꼭 표현하기 어려워서 영어의 글자를 그대로 표현한다고 하면 영어에 무슨 말이 있는고 하니「유니티 인 다이버시티 」(unity in diversity)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유니티(unity)라고 하는 말은 하나가 된다고 하는 뜻입니다.「다이버시티」(diversity)라고 하는 말은 여러 가지 모양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모양가운데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다양성 가운데 일치 적 성질을 보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꼭 무슨 교회와 교파 관계를 생각하면 모든 교파를 다 없이 하고 꼭 한 교파를 만든다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포도나무에 원 줄기는 하나입니다. 근간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에 여러 가지가 붙었습니다. 꼭 포도나무는 한 가지만 만들자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 하나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어 각각 다르나 다른 가운데서 서로 연결해서 화평과 협조하는 그런 사람의 줄을 끊지 말고 주안에서 화평한 생활을 하라고 하는 듯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성품이 조금씩 다르고, 우리의 맡은 바 책임도 다르고, 하는 일도 조금씩 다르고, 사실 우리 믿는 것도 조금씩 다르지마는 다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화평하고, 어떻든지 단결하여 주를 위하여 협력하여야 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에 고린도 교회에 당파가 있었습니다. 그런 사정 아래서 권면을 하실 때에 이런 말씀을 썼습니다.『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그리스도는 하나인데 너희가 하나된 그리스도를 나누고자 하느냐?』단단히 책망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계의 현상을 살펴보면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을 너무 등한히 생각합니다. 주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끊는 것을 너무 경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파당과 분열과 교파끼리 싸움을 하며, 혹은 예배당을 중심하고 쟁탈전을 하며, 혹은 재판소에 나가서 믿는 사람들이 싸움을 하는 이와 같은 일들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하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몸에 피가 흐르게 하는 일인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만 되겠습니다.『화평의 줄로 성령의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 믿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이 교훈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민족은, 우리끼리 있으니 말이지, 사살 약점 가운데 하나가 서로 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상해에서 시애틀로 비행기를 타고 가 시애틀에 내려서 버스를 탓느데 바로 내 옆에 동양 사람 하나가 와 앉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얼른 보고 일본 사람인지 중국사람인지 모르겠기에 어디서 왔는가 고 말을 해 보니까 일본 사람이었습니다. 하와이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하와이에 우리 한국 사람이 많은데 하와이에서 오래(교사 일 보는 학교에서)있었으면 한국 사람을 더러 만나서 아는 사람이 있겠다고 내가 물었습니다. 자기는 여러 사람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누구누구라고 이름을 말했어요. 그러면서 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은 즉 왜 하와이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자꾸 싸움만 하는가 고 묻습니다.
여러분, 하와이에서 온 분에 계시면 용서하십시오. 이것이 사실이니까 말하는 것입니다. 또 사실 저도 하와이의 과거 사정을 좀 아는데 상당히 싸움이 많습니다. 다른 교포들은 서로 협조하면서 화평한 가운데 삽니다. 우리 겨레가 이렇게 교포간에 서로 싸움이 잦은 것은, 우리 민족의 한 약점인, 합하지 못하는 것 때문인 줄 압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화평의 그리스도를 우리 주로 섬긴다고 하면서 우리 믿는 사람들끼리 하나가 되는데 본을 보여 주지 못하고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그냥 싸움하고 파당을 일으키고 분열한다고 하면 중생의 의의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기독교도들을 가르치실 때 먼저 말씀하신 이 교훈을 언제든지 명심하여야 되겠습니다.
바로 지난주간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나토(NATO)이사회에서 연설하면서 단결이야말로 우리 나토의 생명이라고 고조를 했습니다. 과연 이 시대야말로 우리 기독교들이 어느 시대보다도 협조하고 단결하여야 할 때입니다. 문자 그대로 공산주의, 유물주의, 무신론적 사상, 세속주의 등 온갖 부패한 세력이 한국을 휩쓸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든지 이 때에 화평하고 단결해서 우리 민족을 이 죄악 가운데서, 악한 사상 가운데서, 건져내는 데 총 진군해야 될 때입니다. 그런데 보면 너무 우리 믿는 사람들끼리 자체의 분쟁 때문에 정력을 소비해서 복음을 전파할 힘을 가지지 못하는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 잡히기 전 날밤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간곡한 말씀을 하실 때에『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했습니다. 열 가지 계명 외에 새 계명을 그들에게 준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새 계명이 무엇입니까?『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우리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을 세상 사람들이 알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기 전에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실 때에 제일 중요하게 기도한 제목이 무엇입니까?『저희들로 하여금 다 하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된 것과 같이 저희들을 다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신 것입니다.
산상보훈에『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제일 먼저 우리 믿는 사람들이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에 매는 줄로 성형의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은혜를 받읍시다.
(一九五九년 四월 五일)
Ⅲ-14 신앙생활과 내 자신(마태복음 二十六장 三十-三十五, 六十九-七十五절)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마 二十六·六十九)
오늘 아침 읽은 성경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올시다. 예수 님께서 마지막 날 저녁에 예루살렘 다락방을 떠나셔서 감란산으로 가던 중에 주님과 제자들 사이의 대화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오늘밤에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 하는 그 말씀이 응할 것이니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시몬 베드로가 하는 말이『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아니하겠나이다.』장담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말씀을 계속해서『네가 나를 버리지 않겠느냐? 오늘 저녁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하리라.』하신 것입니다. 이 때에 시몬 베드로 하는 말이『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든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똑같은 음성으로 같은 말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때에 자기의 사신을 믿었습니다. 예수 님의 말씀보다도 오히려 자기를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몇 시간이 지났습니다. 예수께서 과연 악한 사람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대제사장 앞으로 끌리어 갔습니다. 여러 제자들은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하회가 어떻게 되는가 보기 위해서 멀 찌기 따라 가 마지막에 대 제사장의 집 앞뜰에서 예수 님께서 심문 받으시는 광경을 멀리서 보았던 것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피곤했을 줄 믿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는 환멸이라고 할까, 자기가 상상하지 못하는 모든 일이 전개될 때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연약한 심리 상태에 있은 줄 생각합니다.
그런 때를 타서 어떤 비자가 나와서『너도 갈리리 사람이 아니냐?』고 말할 때에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사실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만 아니고 두 번째 또 모른다고 했고, 두 번만 아니고 세 번째는 절대로 관계가 없다고 맹세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의 시선과 자기의 시선이 마주치게 되고 닭이 우는소리를 들을 때에야 예수 님께서 하시던 말씀이 다시 생각나서 곧 그곳에서 나아가서 크게 통곡하였다고 하는 기록을 우리가 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실수는 베드로만 하지 않은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 베드로와 같이 우리 자신을 믿을 때가 있습니다. 보통 사도 베드로와 같이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경고하는 음성보다도 내 자신을 믿다가 실수하는 때가 많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오늘 신앙 생활과 내 자신이라고 하는 문제 아래에서 잠깐 동안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각 사람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우리의 자신을 아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을 옛날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의 교훈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항상 젊은 사람들을 만나서 권면하는 말이『네 자신을 알라.』고 권면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연약하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면 내 자신만으로는 옳은 길을 찾아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높임을 받은 아브라함의 생활을 볼 때에 그의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을 우리가 물론 인정합니다. 어떻게 그이가 갈대아 울에서 부름을 받아서 자기의 고향과 친척을 다 버리고, 알지 못할 땅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만 순종하고 나아간 그 믿음이야말로 오고 오는 세대에 항상 사표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그이가 난을 지나고 가나안에 들어와서 여러 곳으로 배회하면서도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위해서 제단을 어떻게 쌓았다고 하는 것도 우리가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브라함 같은 이도 마침 가나안에 흉년이 들고 애굽 땅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애굽 땅으로 지나가게 될 때에 자기 아내 사라보고 하는 말이『우리가 듣건대 이 애굽 사람들은 대단히 악한 사람들이요. 또 내가 보매 당신은 아름다운 여자인데 당신 때문에 이 애굽사람들이 나는 죽일는지 알 수가 없으니 내가 당신을 누이라고 할 터인데 우리 그와 같이 말을 하고서 여기서 지나갑시다.』아브라함 같은 이도 그렇게 부끄러운 죄를 애굽에 가서 짓다가 마지막에는 애굽 사람에게도 책망을 받고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그곳에서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을 생각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만 정직하게 살았다면 오히려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안전히 살 수 있었을 줄 생각합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연약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생활을 잠깐 돌이켜 생각할 때에 또한 꼭 같은 인상을 우리가 얻습니다. 이 다윗이야말로 얼마나 젊어서부터 좋은 사람입니까? 어릴 적부터 자기 부모에게 효도한 사람이올시다. 자기 아버지를 도와서 베들레헴 들에 나가서 양을 치던 사람이올시다. 알지 못하거니와 불멸의 시라고 하는 시편 二十三편을 젊었을 때에 자기가 양을 치면서 이와 같은 시를 지었다고 대체로 추측이 되는 것입니다.
용감한 사람이올시다.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의 큰 원수인 불레셋 사람 골리앗 같은 사람을 차돌 몇을 가지고 온전히 격파한 용감 담대한 용사가 곧 다윗이올시다. 그 후에 한 동안 다윗이 사울 왕의 핍박을 받았지마는 그런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중 낙심하지 아니하고 언제든지 사울 왕에게 대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이로서 존경할 대로 존경하면서 자기의 처신을 한 것을 보면 모든 일과 모든 사람에게 얼마나 모범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고, 일년 후에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왕이 되고, 온 사방을 다 평정하고 그 때야말로 다윗 왕이 능히 도전할 사람이 아무 데도 없는 그런 때를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연히 어떤 날 오후에 자기 지붕에 올라가서 아름답게 건설되는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다가 어떤 여자를 보게 되었고, 그 순간에 큰 정욕이 일어나서 그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자기의 충복의 아내를 겁탈하며, 마지막에는 자기의 충복까지도 죽이는 무서운 간음과 살인의 죄를 다윗이 진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이라고 하는 것이 이와 같이 연약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오늘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도 언제, 어느 때에,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 어떠한 무서운 죄에 들어갈는지 누가 납니까? 내 자신의 연약한 것을 내가 미리 알아서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신약을 읽을 때에 가룟 유다 같은 청년은 아주 약한 사람인 줄 압니다. 그렇지 아니 합니다. 사실은 이 가룟 유다도 처음에는 높은 이상과 좋은 포부를 품고 자기의 민족을 위해서 염려하고 메시야를 대망(待望)하던 귀한 청년들 가운데 하나이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새로운 선지자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멀리 유다 지방에서 예수 님께 따라온 줄 압니다.
어떻게 모든 것을 열심히 잘 하던지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뽑히었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도 돈주머니를 맡는 회계의 책임을 맡은 걸 보아 무슨 일이든지 똑똑히 하고 분명히 하고 책임감이 있던 청년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귀한 청년이 그만 예수를 三년 동안 따라다녀 보니 자기의 기대하고는 꼭 맞지를 아니합니다. 암만 살펴보아도 예수 그리스도는 결국은 그때 세력을 잡은 사람에게 무참히 희생을 당할 것이 뻔히 보입니다. 이런 예수를 더 따라 다녀야 쓸데없다는 그런 생각이 점점 마음가운데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바에야 아예 돈도 받고 내 안전한 자리로 옮겨 앉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시험에 들었습니다. 결국은 자기자신을 믿던 그 육신이 시험에 들고 만 것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어떤 교육자가 자기 친구와 같이 길을 가다가 길거리에 술이 잔득 취해서 넘어져서 정신 없이 자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교육자가 그 친구에게 하는 말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도 저 사람과 같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부르시는 그 거룩하신 손의 도움이 아니면, 내가 내 자신과 나만 의지하고 살다가는 어떠한 환경, 어떠한 처지 가운데서 어떤 무서운 죄를 지을 는 지 우리가 모릅니다.
우리가 신문지상을 통해서 어떤 청년이 무슨 살인을 했다, 강도를 했다, 무슨 택시 강도가 되었다. 은행에 들어가서 돈을 빼앗았다는 이런 기사를 많이 읽습니다. 그 후에 그 사람들이 법정에 나와 진술하는 것을 읽어봅니다. 다 이구동성으로 진술하는 말이 자기가 어떻게 그런 죄를 범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 죄를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저 그 때 어떻게 되어 죄를 지었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사실인 줄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까 八十된 노인이 담배 대로써 자기의 아내를 쳐서 살인을 했다고 합니다. 그 노인도 그 일을 저질은 후에 스스로 놀랐을 줄 압니다. 八十까지 살다가 더욱이 자기하고 같이 살던 여자를 때려죽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자기도 놀랐을 줄 압니다.
우리 사람의 육신이라고 하는 것, 내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 지 알 수 없습니다. 유혹이 올 때에 어떠한 시험에 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하여 줍니다.『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우리가 우리의 자신을 믿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그런고로 잠언의 저자는 젊은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내 아들아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明哲)을 의지하지 말라.』내 명철을 의지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스스로 속지 말라고 경고를 하여 주십니다. 베드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속았습니다. 다윗 왕도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속았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속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물론 내 자신을 자랑하지 말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오직 주를 자랑할 것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시험에 들기 쉽다고 하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미리 조심해서 모든 유혹을 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나 자신을 부인하라 혹은 이기라는 말씀으로 권면했습니다. 마태복은 十六장 二十四절에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내 자신을 온전히 부정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뜻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삼으라고 하시는 말씀인 줄 생각합니다.
또한 어떤 데 보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말로 가르치셨습니다. 갈라디아 五장 二十四절에는『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육신과 그 자신과 함께 거기 붙은 정과 모든 욕심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서 온전히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경험을 스스로 말씀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였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체험을 영적으로 자기가 당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친히 목 박여 죽었습니다. 대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속에 계셔서 같이 사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우리 자신 가운데는 옛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신 가운데는 죄를 향하는 그 성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깊은 진리를 모르는 우리 동양의 왕양명(汪洋明) 같은 사람도 산중에 있는 도적은 잡아 없애기 쉽지마는 마음가운데 있는 도적은 잡아 없애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마음가운데는 도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문호 가운데 스티븐슨 같은 사람은 우리 사람의 속에 하이드 맨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숨은 사람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지킬 박사와 같이 점잖지마는 그 속에 숨은 사람은 악하다고 더럽고 추합니다. 이 숨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는 일을 성경은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권모 술수와 원수 맺음과, 분쟁과 시기와 화남과, 당파를 짓는 것과 분리하는 것과, 이간과 투기와, 술 취하는 것과 방탕한 것과, 또 이 모든 것을 주장하는 속에 있는 옛 사람입니다.
이 죄의 법을 죽이고 우리의 신앙 생활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어 그 몸이 죽은 것과 같이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처럼 못 박혀서 온전히 죽어야 합니다.
三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서 영적으로 부활한 생활을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올시다. 이 십자가와 부활의 체험이 우리 심령 속에 있을 때에만 우리가 옳은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로마서 十二장 一-二절을 읽으면『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사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 자신을 산 제사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립시다. 나 자신을 온전히 맡겨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 자신을 주장하도록 합시다. 나 자신을 내 마음대로 인도하려고 하지 말고 내 심령에 인도하는 그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께 맡깁시다. 그리스도로 하여금 내 마음의 배의 선장으로 삼읍시다. 그리스도로 하여금 내 심령의 대상으로 삼읍시다. 내가 내 생활을 스스로 하려고 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께서 내 마음속에 계셔서 내 생활을 주장하게 합시다.
그래서 사도 바울 선생과 같이 나는 할 수 없지마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우리의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생활을 우리가 합시다. 몇 가지를 성경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과 신앙 생활에 있어서 특별히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 약점이 무엇이고 내가 항상 연약한 방면이 어디 있는지 미리 알아서 이것을 조심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내 속의 죄의 법을, 옛 사람을 온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같이 못 박아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서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一八六一년 二월 十一일 아침이올시다. 아브라함 링컨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택을 받아서 취임하기 위해서 자기가 二十년 동안 살던 그린필드를 떠나는 아침이었습니다. 그 때에 미국은 큰 시련기를 당하였습니다. 노예 문제로 말미암아 또한 그 밖에 여러 복잡한 문제로 말미암아 남북 전쟁이 일어날 큰 위기, 즉 미국이 분열이 되느냐, 파괴가 되느냐 하는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큰 국가적 위기에 이 링컨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링컨을 전송하기 위해서 역에 나왔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링컨이 고맙다는 말을 하고 맨 마지막으로 이 말을 했습니다.『일찍이 워싱턴의 어깨에 놓였던 짐보다 더 큰 책임을 진 나는 언제 이곳에 돌아올는지 사실 다시 돌아올 수가 있을는지 알지 못하면서 이 곳을 떠납니다. 그(워싱턴)를 도와주신 하나님이 또 나를 이 때까지 인도하시고 내 전 운명을 주장하시는 이의 도움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의 도움이 있을 때에는 나는 실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七, 八년이라고 하는 오랜 남북 전쟁을 통해서 미국 유사 이래에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서의 자기의 책임을 완수했습니다. 내 자신을 압시다. 이 세상의 물결은 높습니다. 악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으려 다닙니다. 내 자신을 믿지 맙시다. 우리의 운명을 총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십시다. 내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마는 하나님의 도움이 있을 때에는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성공합니다.
(一九五九년 四월 十二일)
Ⅲ-15 여호와의 기쁨 (느헤미야 八장 一-十二절)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八·十)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에 된 일입니다. 여러 해를 지나면서 겨우 성전을 재건하고, 또한 여러 해를 지난 후에 느헤미야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을 수축한 후에 七월 一일 성일(聖日)을 당해서 모든 사람이 예루살렘 광장에 모였습니다. 이 때 학사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 책을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며 그 읽은 말씀을 해석해 줄 때, 모든 백성들은 그야말로 오래간만에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게 되어 너무 감격해서 울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여러 무리들을 향해서 외치는 말이『오늘은 여호와의 성일 인데 너희가 우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 우는 것을 그치고 기뻐하여라.』
그러면서 계속해 하는 말씀이『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조금 더 간단히 번역하면 여호와의 기쁨이 우리의 힘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여호와의 기쁨이 너희의 힘이니라.』여호와에 기쁨이 있습니다. 참 신앙에는 기쁨이 따릅니다. 이 기쁨은 여호와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의 근원은 여호와입니다. 이 기쁨은 여호와께 속합니다. 기쁨의 대상도 역시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一00편도 여러분이 잘 기억하는 줄 믿습니다.『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유를 설명하는 말씀이『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인 줄 너희는 알지어다.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곧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 무소 불능하시고, 무소 부재하시며,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공의와 자비와 긍휼(矜恤)이 풍성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올시다. 우리는 그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양입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 시요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믿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 은 요한一서에 이와 같이 외쳤습니다.『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그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면 우리도 그와 같을 것을 아노라.』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달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권속입니다. 그의 권속임으로 그의 유산을 이을 수 있는 후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가만히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시편 一0三편을 잘 기억할 줄 믿습니다.『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恩澤)을 잊지 말지어다.』그러면서 계속해서 하는 말씀이『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그리고 조금 내려가서『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여기에서 우리는 사죄의 기쁨을 발견합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아니하고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기쁨과 화평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사죄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八장 一절에『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定罪)함이 없나니』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도 찬송에 부르는 대로『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化)하도다.』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시편 二十三편을 다 기억하실 줄 믿습니다.『여호와는 나의 목자(牧者) 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 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뿐더러 우리와 동행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여 주십니다. 여기에 주님의 동행과 인도와 보호의 기쁨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목자로서, 친구로서, 우리에게 보혜사를 보냄으로써 성신으로 우리와 같이 게시고 도와주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에녹의 기쁨을 맛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발 앞에서 그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기쁨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의 품에 안기어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사도 요한 의 즐거움과 기쁨을 맛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과 동행하고 교통하는 기쁨이 참으로 신앙이 있는 이들에게는 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난 금요일 저녁, 로드 부장의 말씀을 들은 이가 계실 줄 압니다. 그는 한국 구세군에 오래 있다가 불행히 六·二五 때에 이북에 납치를 당해서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다시 영국에 돌아와 계시다가, 이번에 잠깐 한국에 와서, 이북에서 자기가 지내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 날 저녁에 거기에 참여한 사람은 다 많은 은혜를 받은 줄 생각합니다.
그의 경험 가운데 한 가지는, 자기가 한 번은 너무 피곤하고 마음도 약해지고 믿음도 약해졌답니다. 어떻게 피곤한지 촌 보를 걸을 수 없을 만큼 사방이 캄캄해지는 듯 하는 경험을 한번 당할 때에, 돌연히 시편 二十三편에 있는『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 앞에 상을 베풀어주시니.』 이 말씀이 자기의 머리 가운데 번개 같이 나타났답니다. 그는 새로 힘을 얻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도와주신다고 하는 것을 체험했다고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그와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동해서 선을 이루는 확신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소망의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합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이 시간을 초월해서, 이 세계를 초원해서 영원한 소망의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기쁨이 있습니다. 사죄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통하며 보호함을 받는 기쁨이 있습니다. 영원한 소망의 기쁨이 우리 믿는 자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여러분, 이 여호와의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기쁨은 육의 기쁨이올시다. 여호와의 기쁨은 영의 기쁨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육감적입니다.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생의 자랑, 이런 것들에 대한 만족이 있을 때에 세상의 기쁨은 현세적이요 추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기쁨은 영적 기쁨이올시다. 성신의 열매올시다. 생명의 기쁨이올시다. 양심의 기쁨이올시다. 진리의 기쁨이올시다. 우리 심령의 깊은 기갈에 만족을 주는 생명수를 마시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쁨은 거룩하고 경건한 기쁨이올시다.
세사의 기쁨은 외적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기쁨은 내적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그 기쁨의 기초를 외적 원인에 두었습니다. 환경에 두었습니다. 맑은 날은 기쁘다가 흐린 날은 그 기쁨이 없어집니다. 순경에는 기쁨이 있으나 역경에는 당하면 그 기쁨은 없어집니다. 건강할 때는 기뻐하나 병날 때는 그 기쁨이 없어집니다. 젊을 때는 기쁘나 낡을 때는 그 기쁨이 없어집니다. 살 때는 세상에 기쁨이 있으나 죽을 때는 세상의 기쁨은 없어집니다.
그렇지만 그와 반대로 여호와의 기쁨은 내적인 까닭에 환경을 초월합니다. 맑은 날에도 있고 흐린 날에도 있습니다. 순경에도 있고 역경에도 있습니다. 약할 때에도 있고 강할 때에도 있습니다. 살 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기쁨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일시적입니다. 아침 안개와 같습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집니다. 이 여호와의 기쁨은 영원합니다. 하늘의 별과 같습니다. 항상 있습니다.
세상의 기쁨은 마치 지는 해와 같습니다. 점점 적어져 없어집니다. 늙어갈수록 적어지다가 마지막에 죽으면 아주 없어집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가지는 여호와의 기쁨은 아침에 돋는 해와 같습니다. 점점 커갑니다. 점점 밝아집니다. 영원히 하늘 나라에까지 우리의 기쁨이 더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옛날 우리 동양사람 가운데도 군자의 낙(樂)과 소인의 낙이 다르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과연 우리 믿는 사람들의 즐거움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즐거움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여호와의 기쁨이 너희의 힘이니라.』우리 믿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이 기쁨이 우리의 능력이올시다. 슬픈 마음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곧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줍니다. 기쁨이야말로 능력 있는 생활의 비결입니다. 기쁨으로 하는 일은 힘드는 줄을 모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미국에 가서 이 곳 저곳 구경하는 가운데 어떤 큰 목장을 구경했습니다. 큰 젖소가 백여 두 되는 큰 목장입니다. 젖을 짜는 방이 아주 넓은 방들인데 그들은 전부 소젖을 짜되 기계로 짭니다. 어떻게 여러 소에서 젖이 많이 내려 흐르는지 수돗물 내려오듯 합니다.
그렇게 많이 젖을 짜는데 제가 한 가지 이상하게 여긴 것은 그 젖 짜는 방에다 라디오를 놓았습니다. 소만 있는 그 젖 짜는 방에 라디오를 놓고 늘 좋은 음악을 보내주지 않겠어요? 저는 웃으면서 소만 있는데 라디오는 무엇 하려 놓았는가 고 물으니까 웃으면서 소도 라디오 음악 소리를 좋아한다고 대답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미국의 소들은 우리 농촌의 동포들보다 퍽 낫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사실 소도 마음이 기뻐야 젖이 잘 나온다고 합니다. 아마 아기 어머니들도 그럴 것 같습니다. 마음이 기뻐야 젖도 잘 날 줄 압니다.
여호와의 기쁨이 우리 믿는 사람의 능력이 됩니다. 이렇게 환난이 많고 죄악이 많은 세상에 사는 우리가 여호와의 기쁨이 있어야 이 기쁨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역경을 돌파하고 곤란을 이기고 어려운 것을 참아 견딜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줍니다. 여호와의 기쁨은 우리로 하여금 봉사의 힘을 줍니다. 우리가 약한 사람을 도와주려고 애쓰는 이 봉사 생활에는 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데도 이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 능력이 어디서 오는가? 믿음으로서 내가 받은 내 마음속에 기쁨이 우리에게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여호와의 기쁨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여러분, 빈집에 도적이 든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어째서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면서 예배당에 오기도 하지만 때때로 시험이 빠집니까? 아직도 예배당에 다니기는 다니지만 참된 신앙에 들어가지 못해서 마음속에 신앙으로 말미암아 오는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이 기쁨이 없으니 혹 세상의 기쁨을 좀 얻어 볼까 하고, 세상 사람에게 기웃기웃합니다. 극장에도 가보고 나쁜 동무도 찾아가는 등 속이 비었습니다. 참된 신앙을 얻어서 그 마음속에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세상의 기쁨과 더러운 기쁨을 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옛날 호머라는 헬라 시인이 말한 옛날 이야기를 들으신 분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헬라 나라는 우리 한국의 남방과 같이 조그만 섬이 많은 나라입니다. 옛날에는 그 섬 가운데 문화가 크게 발전했습니다.
옛날 그 여러 섬 가운데 사이렌이라는 아주 요만한 여자들만 사는 섬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들은 특별히 노래를 잘 부릅니다. 아주 미혹 적인, 사람의 마음을 유혹시키는 이런 노래를 잘 불러서 섬 앞으로 지나가는 선부(船夫)들과 그 여객들이 좋은 노래를 좀더 듣기 위해서 섬 옆으로 가까이 가다가는 그 여자들에게 꾀어 간답니다.
그 섬에 들어가서는 돈 있는 것은 다 빼앗기고 아주 망하고 돌아오곤 한답니다. 그래서 이 헬라 사람들은 누구든지 배를 타고 갈 때에 조심하느라고 결심하고 가지만 막상 옆으로 지나가는 동안 그 노래 소리가 들리면 조금 더 듣자고 가까이 가다가는 쑥 들어가곤 했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체이슨이라고 하는 아주 지혜가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분이 그 섬 옆으로 부득이 그의 많은 제자들을 데리고 지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제자들을 한 사람도 유혹에 끌리지 아니하고 내가 섬을 잘 지나갈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에 헬라에 유명한 음악가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거문고를 아주 잘 타는 올시어드라는 사람으로 그 때 헬라에 가장 유명한 제금가(提琴家)였습니다.
이 올시어드를 청해 같이 배를 타고 갔습니다. 배가 그 섬 가까이 갈 때에 올시어드를 보고『여보 당신이 잘 하는 음악 소리를 들려 주시요.』그러니까 유혹의 섬 가까이 가서 올시어드가 거문고를 내서 좋은 음악을 탑니다. 그러니까 이 배 가운데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좋은 음악에 도취해서 그 섬 가까이 다다라서 여자들이 나와서 노래도 하고 떠들었지만 그 노래는 아주 듣지도 않습니다. 이 올시어드의 거문고 소리를 듣다가 이 노래 소리를 들으니 그것은 돼지 소리만도 못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저 올시어드의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평안히 그 섬을 지나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가운데는 우리가 배울 진리가 있는 줄 압니다. 내 심령 속에, 내 마음속에 기쁜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참된 영적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세상의 더러운 죄악이 침노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인 줄 압니까? 과연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아들 되시는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것을 분명히 내가 체험했습니까? 과연 주님께서 나와 같이 동행합니까? 주님께서 과연 내 생활의 목자입니까? 내가 과연 주님과 교통하는 생활을 합니까?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의 기쁨이 있습니까? 이 참된 여호와의 기쁨, 이 기쁨은 우리의 힘이 됩니다. 이 기쁨을 다 받기를 바랍니다. (一九五九년 四월 十九일)
Ⅲ-16 사대은혜 (느헤미야 九장 一-十절)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느 九·五)
주일 저녁은 흔히 구약을 중심해서 생각하였지마는 오늘 저녁은 구약의 인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경회 예배로 볼 마음이 있어서 다른 제목을 택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역시 오늘 낮 예배시간에도 읽은 바 있는 느헤미야 가운데서 읽었습니다,. 낮에도 생각하였지마는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이스라엘 민족이 민족적으로 또한 종교적으로 부흥하는 역사적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지위를 점령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사를 상고해 보면, 이 중요한 역사적 단계에 있어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부흥이 없었던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택한 민족으로서 역사적 사명을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 역사에 있어서 이들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에서 일어나 종교적 부흥은 심히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읽은 말씀을 여러분께서 들었습니다. 이 때에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큰 부흥의 축복을 받았는가? 먼저 그 때 사람들이 한 것은 네 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먼저 부흥의 축복을 받은 네 가지 요소를 생각하고 또한 나아가서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 개인적으로 받아야 할 네 가지 은혜를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이와 같이 시작합니다.『그 들 二十四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이런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이 달은 아마 七월을 가리킨 것 같습니다. 七월 二十四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모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다 모인 것입니다. 먼저 이 때 사람들이 영 적의 큰 부흥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개인 하나씩 흩어져 산 것이 아니고 다 한 곳에 모였습니다. 먼저 모이는 가운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개인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물론 개인 개인의 기도와 성경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일정한 기회에 다 같이 모이는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바와 같이 오순절의 큰 축복도 먼저 一二十명인 당시에 예수의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열흘 동안이나 집회를 하는 가운데, 마지막 오순절 아침에 큰 성신의 세례가 내린 것입니다. 사실 이 오순절 집회 이후에 교회의 부흥의 역사를 상고해 보면, 어떤 부흥이든지 먼저 모이기를 힘쓰고 이 모임 가운데서 집단적으로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저자의 말과 같이 우리가 모이기를 경히 여기지 아니하고 더욱 힘써 모이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또한 둘째로 여기 기록한 것을 보면『낮 四분지 一은 그 처소에서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낭독하고』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낮 四분지 一을 특별히 정해서 이 시간은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奉讀)하고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봉독할 뿐더러 다른 곳에 보면 해석도 하였다고 말씀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였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큰 영적 부흥의 축복의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고 생각하고 공부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인들의 실정을 보면 이 성경에 대해 무식해서 큰 걱정입니다. 학습 문답이나 세례 문답을 해 보면 아주 쉬운 말, 우리가 상식적으로 다 알만한 이런 것을 물을지라도 대답하는 사람이 매우 적습니다. 특별히 자라나는 학생들인 중학교에 다니고 고등학교에 다니고 혹은 대학에 다니고 대학을 졸업하였다고 하지마는 다른 학문들은 아마 상당히 배운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 말씀에 대해서는 상식적인 문제를 물어 볼지라도 대답하는 사람이 매우 적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믿는 부모라 할지라도 우리 자녀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쳐 주는 것을 게을리 하는 까닭입니다. 단순히 한 주일, 주일학교에 와서 잠깐 예배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듣는 시간은 二十분에 불과합니다. 그렇게만 아이들이 배워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중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복 있는 자는 악한 자의 의논대로 하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율법을 묵상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중에 부흥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여기 말씀을 보면『낮 四분지 一은 죄를 자복(自服)하면서』하나님께 경배하는데, 또한 다른 곳을 보면 금식하며 굵은 배를 입고 티 끝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烈祖)의 허물을 자복했다고 그 때 모였던 모양을 서술한 것입니다. 셋째 요소는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읽고 듣게 되면, 먼저 내가 죄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전에 잊어버렸던 죄악을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물론 두었던 죄악이 마음 가운데 생각납니다.
이 때 사람들이 한 것은 모든 죄를 원통히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철저히 회개를 한 것은 금식을 하였고 굵은 배로써 옷을 입고 티 끝을 머리에 부었고 이방사람과 절교하는 것은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과 온전히 관계를 끊고 자기의 죄뿐만 아니고 자기 열조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셋째 요소입니다.
다 우리도 이번 사경(査經)회를 당하여 은혜를 받으려고 한다면 우선 모여야 되겠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여야 되겠고 또한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자복하면서 간절히 기도하여야 은혜를 받겠습니다. 아는 죄, 모르는 죄, 현재의 죄, 과거의 죄, 덮어두었던 죄를 이번 기회에 자복하고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즉 찬송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눈물로 죄를 회개할뿐더러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소리를 높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해야 합니다. 넷째로는 목소리를 합해서 하나님께 찬송을 올렸습니다.
찬송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찬송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찬송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전파합니다. 또한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의 심령을 순화하여 줍니다. 우리의 감정을 정화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심령을 깨끗하게 하고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넷째로는 이들이 찬송을 하였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상경회를 할 때에 특별히 여러분께 부탁하는 것은 열심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찬송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저녁 예배 七시 三十부에 예배를 시작하지마는 七시에 오셔서 반시간 동안 찬송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사경회를 하는 가운데 각 개인의 받은 은혜의 목표가 분명해야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네 가지 큰 은혜를 받아야 될 줄 압니다.
이번 이 사경회를 계기로 해서 우리 교우 한 사람 한사람이 네 가지 은혜를 꼭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잘 아시는 것이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중생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저녁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하신 그 귀중한 말씀 기억하시지 않습니까?『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느니라.』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성신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다 세상에 올 때에 나서 세상에 왔습니다. 부모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 출생함으로 이 세상에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도 거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 나라에 영적으로 출생하여야 들어갑니다. 우리가 처음 한번 육으로 낳으니까 다음에는 영으로 낳아야 되는 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거듭 난다고 하거나 혹은 중생이라고 합니다. 새로 낳는다고 합니다. 이 중생의 은혜는 내가 힘쓸 것이 있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있는데 이 둘이 합할 때에 중생의 은혜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할 것은 온전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따금 세수를 하지마는 세수만 하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목욕이 필요합니다. 온 몸 전체를 온전히 씻어 버리는 목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우리 집 안에서 아침저녁으로 방을 쓸지마는 그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이따금 대청소가 필요합니다.
온전히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올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신을 부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거듭 나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영적으로 거듭나는 새로운 생명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중생의 은혜를 받은 자도 많이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중생의 은혜가 아직 미치지 못한 이들도 많이 계실 줄 압니다. 이번 이 기회에 어떠한 때이든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심령 위에 이 중생의 축복을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한 둘째로는 우리가 늘 듣는 말이지만 한번 더 생각해 봅시다.「헌신의 은혜」입니다.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은혜올시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재주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시간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많으나 적으나 물질을 주셨습니다. 내게 주신 이 몸을 중심으로 해서 내게 주신 재주, 내게 주신 이 물질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이 축복을 우리 믿는 사람들이 꼭 받아야 합니다.
이 헌신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한 가지 분명히 깨달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 있는 모든 것이 온전히 하나님께 속하고 나는 다만 이것을 받아 가지고 있는 청지기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단순히 청지기인 까닭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 마지막 날 이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였는지 못하였는지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 받을 때가 있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 헌신의 은혜를 우리가 받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기회에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 각 사람에게 허락하여 주시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는 이것도 물론 따르는 것이지만 제목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도의 은혜를 우리가 받아야 되겠습니다. 제가 관찰하지 못하는지 모르지마는 가만히 보면 어떤 이들은 일생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전도는 한 사람도 못하고 죽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래 믿으면서 다른 것은 다 하지마는 전도는 못합니다. 다른 말은 다 잘 하지마는 전도에 가서는 입이 딱 붙어서 벙어리가 됩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내가 참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한다면 이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받아야 되겠습니다.
오순절에 一二十명이 성신을 충만히 받은 다음에는 베드로 한 사람만이 오순절에 설교를 했지마는 다음에 기록을 보면 一二十명이 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우리가 받아야 과연 참된 하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 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 아마 전에 들으신 줄 압니다. 어떤 회사의 사장이 예수를 잘 믿는 분이올시다. 꼭 자기는 주일날이면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예배당에 가서 예배보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인데 도무지 전도는 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예수 믿으란 말을 한 마디도 못합니다. 가지의 회사의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마는 다른 이야기를 늘 하지마는 한 번도 예배당에 가자는 전도를 못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주일날은 예배당에 가서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의 온 잘못한 것을 깨달아서 내가 이제는 꼭 전도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자기 회사 사무실에 나가서 사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때 결심이 그저 누구든지 나한테 제일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전도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앉았습니다.
조금 앉아 있자니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자기 비서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 비서가 예수를 믿는지를 알 수도 없고 또 한번도 이 비서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첫 마디로 그가 예배당에 다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이 비서가 눈이 둥글 해지면서 그것을 왜 갑자기 물으시냐고 반문했습니다.『그래, 예배당에 가는가?』『저는 예배당에 가지 않습니다.』『그럼 예배당에 가야지, 예수를 믿어야 해.』이렇게 이 비서한테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서가 하는 말이『아 사장님 참 감사합니다. 사장님을 제가 十五년을 모셨는데 저한테 예배당에 가자고 하는 말씀은 한 마디도 안 해서 저는 제 생각에 나 같은 놈은 아주 못 되어서 예수를 못 믿는 놈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오늘 저한테 이렇게 전도를 해 주시니 이것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는 주일부터 꼭 가겠습니다.』그런 대답을 했더랍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과 오래 사귀고 장사 거래도 하고 아침저녁으로 늘 만나고 그런 이들을 만나서 세상 정치 이야기고 하고 경제 이야기도 하고 세계 소식 이야기도 하고 모든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전도하는 말은 한 번도 안한 그런 청년은 없습니까? 아마 여기 앉으신 여러분 친구 가운데도 이 비서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 친구들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보면 예배당에 항상 가기를 하는데 자기한테 한 번도 교회에 가자는 말 한 마디 안 하니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여러분의 친구가 있을 지 모릅니다.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우리가 받아야 됩니다.
내가 전도할 수 있는 은혜를 받으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먼저 내 성품 가운데, 내 생활 가운데 고칠 것이 더러 있을 줄 압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내가 왜 그 말을 못했나 생각해보면 내 마음 가운데 꺼리는 것이 있어서 말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받아야겠습니다. 전도할 수 있는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올시다. 여러분, 이번 기회에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받기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리고 넷째로는 마지막으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늘 하는 말이지만 우리 믿는 사람끼리 화평할 줄 아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 화평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전도까지 하는 사람들로 화평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이따금 봅니다. 우리 믿는 사람끼리 피차에 죄를 용서해 주고 용납해 주고 피차에 잘못을 알려 주고, 이해해 주어서 혹 어떤 때에 피차에 감정이 소원해 진다고 하지만, 그것을 피차에 삼가서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끼리 화평해서 살 줄 아는 은혜를 우리가 꼭 받아야 되겠습니다.
그저 예수를 믿는 이 가운데도 어떤 때는 예배당에 오다가 저쪽에서 어떤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 그 사람과 만나기를 꺼리면 그가 오는 편과 반대편 문으로 예배당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말도 오래 안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떻든지 피차에 화목해서 화평한 은혜까지 받아야 되겠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여러분이 기억하시지요?『너희가 예물을 제단에 올리려갔다가 네 마음 가운데 네 아는 사람 가운데 원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예물을 거기에 놓고 먼저 가서 그 사람과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라.』우리가 알 것은 형제 사이에 멀어지면 그리스도와도 멀어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가까이 가면 형제 사이도 서로 가까워집니다. 어떻든지 우리 믿는 사람은 서로 화평하고 화목할 줄 알아야만 됩니다.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이북에 잡혀갔다 돌아와서 말씀하시던 구세군 로드 부장의 이야기 가운데 자기가 이 경험을 통해서 특별히 한 가지 깨달은 것은 비록 신조가 다르고 교파가 다르지마는 믿는 사람들이 다 한 주를 섬기고 한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가 피차 도와주고 피차에 사랑하여야 되겠다 하는 것을 더욱 깨달았다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이번에 잡혀가 보니까 거기 다른 교파의, 선교사들이 다 잡혀 가 있었습니다. 혹 그 가운데는 천주교 신부, 성공회 감독, 감리교 선교사, 그밖에 여러 교파 선교사들이 다 한꺼번에 잡혀갔습니다. 다 한 방에 있고 함께 먹습니다. 흔히 말하면 천주고 신부와 성공회 강독과 사이가 좋을 리가 없습니다. 신교 교파 선교사들과 천주교 신부들과 그렇게 사이가 가까울 이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같이 고생하고 같이 눈물 흘리며 같이 고통 하는 가운데서 비록 교파가 제각기 조금씩 다르지마는 그것은 적은 문제요 그것은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고, 우리는 다 한 하나님을 공경하고 한 주를 믿고 다 같은 천당을 향하여 간다고 하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달았답니다.
조금도 다른 것 때문에 감정상 무엇에 소격(疏隔)된 것이 없이 한 형제와 한 자매가 되어서 피차에 눈물을 같이 흘리고 어떻든지 피차에 도와주도록 서로 서두는 그런 광경을 볼 때에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 간증을 제가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 한 교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에 속하는 교인들끼리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가서 감리교나 성결교나 구세군이나 다른 교파에 이르기까지도 우리가 믿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지마는 다른 것보다도 같은 것이 더 많다고 하는 것을 항상 기억하여 서로 사랑하고 서로 협조하고 공동 보조를 취할 줄 아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이런 정신은 요즘에는 성경에 있는 원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에큐메니칼 정신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처음 듣게 되니까 이것을 오해해서 여기에 큰 이단이나 있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혹 있습니다. 그것은 순전한 오해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끼리 피차에 협조하고 사랑하고 공동보조를 취할 경우에 세계적으로 무신론과 싸우는 이러한 때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대동단결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 넷째 은혜 즉 화목의 은혜까지 우리는 꼭 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 저녁에 우리가 교회 부흥의 네 가지 비결을 생각했습니다. 제일 먼저 열심히 모여야 되겠고, 둘째로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여야 되겠고, 셋째로는 전도해야 되겠고, 넷째로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려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경 회를 하는 동안에 우리 개인 개인 하나 하나가 이 네 가지 은혜를 꼭 받도록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다.
제일 먼저는 중생의 은혜, 둘째로 헌신의 은혜, 셋째는 전도할 수 있는 은혜, 간증의 은혜, 넷째는 형제 화목의 은혜로 오늘 저녁 우리 이 사경 회에 큰 부흥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개인 개인이 이와 같은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이제 다 공동으로 한 五분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다. (一九五구(九)년 四월 十九일·저녁 예배)
Ⅲ-17 첫 꽃 주일 (마가복음 九장 三十三-三十七절, 十장 十三-十六절)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十·十四)
오늘은 유월 둘째 주일, 세계적으로 어린이 주일 혹은 꽃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아마 자연계에서 꽃이 제일 아름답고,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어린이들이 제일 아름다우므로 이 어린이 주일을 꽃 주일이라고 부르게 된 듯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꽃을 사랑하시고 또 어린이들을 사랑하십니다.
오늘 아침설교 제목을 첫 꽃 주일이라고 정하였습니다. 그것이 꼭 합당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것을 꽃 주일이 시작된 첫 날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꼭 그 날이 주일이었는지 물론 확실히 모를 것입니다. 꽃 주일은 예수 님에게 부모님들을 데리고 옴으로부터 말하자면 그 날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이 읽은 성경 말씀, 마가복음 十장 十三-十六절까지에 기록된 그리스도 생활에 있어서 한 작은 일화, 부모들이 주님께서 만져 주시기를 원해서 주님 앞에 데리고 오니 제자들이 그들을 보고 꾸짖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오히려 분히 여기면서 어린아이들이 예수께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아이들을 환영하면서 그 아이들을 친히 안으시고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 축복하여 주신 일입니다.
이 간단한 일화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것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는 줄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지나 갈수록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이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와 어린이에 대한 그 교훈의 뜻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十八세기는 민중을 발견한 세기요, 十九세기는 여자를 발견한 세기요, 그러나 二十세기는 어린이들을 발견한 세기라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근래에 심리학이 점점 발전됨에 따라서, 더욱 일생을 통해서 이 아동 시기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라고 하는 것을 제 인식하게끔 되는 것입니다. 구세군은 처음으로 설립한 바아드(Baath)대장은, 우리는 마귀보다 손을 먼저 써서 어린이들에게 죄악을 배우기 전에 선을 배워줘야 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 말하자면 첫 꽃 주일에 된 사실을 다시 한번 추억해서 우리가 피차에 은혜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읽은 대로 이 첫 꽃 주일은 부모들이 어린이들을 예수 님께 데리고 옴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부모들이 혼자 오지 아니했습니다. 어린이들을 데리고 예수 님께 온 것입니다. 여기에 꽃 주일에 부모들의 의무를 우리가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부모들은 어린아이들을 주님께 데리고 올 의무가 있습니다.
한나는 어린 사무엘을 데리고 성막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결례의 날이 찰 때에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으로 간 것입니다. 엘리사베드도 역시 아기 요한 을 데리고 성전으로 간 것입니다. 구약 시대 모든 경건한 부모들은 어린 아기들을 데리고 성전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이 원리는 지금 우리에게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어른들만 교회에 나오는 것은 부복합니다. 우리 어린이들도 데리고 같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모가 다 세례를 받은 경우에는 우리 가정의 귀한 선물 아기가 올 때에 먼저 하나님께 데리고 와서 아기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六개원 전에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에는 결례의 날 四十일이 지나면 어린 아기를 성전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아이들을 영아 부에 데리고 와서 영아 부에 같이 참여시키는 것을 의미하고, 그 다음에 유년부, 그 다음에 초등부, 그 다음에 중등부, 그 다음에 고등부, 주일학교 각 부에 어떻든지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꼭 출석하게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와 같이 사방에서 모여오는 경우에 있어서는 어떤 가정은 교회가 너무 멀어서 어린아이들을 본 교회로 데리고 오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사실 유년 부나 초등부 시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모의 의무를 바로 한다고 하면 적어도 중학시대부터는 본 교회에 보모와 함께 참석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습관을 꼭 양성시켜 주어야 될 것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교회에 나가서 찬송을 배우고 기도를 배우고 성경 말씀을 듣고 교회에 출석하는 습관을 양성해 주는 것은 그 아이들의 일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아이들을 예배당에 데리고 오는 것만이 의무를 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모들이 중심으로 어린아이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교회에 데리고는 나오지마는 중심으로 아이들을 바치지 않는 가정이 많은 줄 생각합니다. 한나는 중심으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중심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모든 어진 부모가 그러했습니다.
중심으로 바친다고 하는 것은 아이들을 기를 때에 온전히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교육을 하는 것이나 학교를 작정하는 것이나 모든 일에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중심해서 아이들을 인도한다고 하는 뜻입니다.『네 아들이 어디 잇느냐?』주님께서 우리에게 종종 묻습니다. 부모들은 이 자리에 나와 앉았지마는 여러분의 아들과 딸들은 이 시간 어디 있습니까? 부모들은 신앙가운데서 천국에 들어왔지마는 여러분의 아들과 딸들은 이 시간 영적으로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각각 대답하시고 깊이 자성(自省)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영락교회 교정의 제일 아름다운 광경은 여러분께서 모시려고 하면 아침에 일찍이 예배당에 나와 보세요, 어린이들이 주를 찾아 나오며 특별히 혹은 할머니 혹은 어머니가 아이의 손을 잡고 업고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오는 그 광경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목사로서 한 가지 제일 큰 낙이 있다고 하면, 아마 그 경경을 보는 즐거움일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질이올시다. 아마 그보다 더 큰 낙이 있다고 하면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뺨이 석류 반 조각 같이 붉은 어린 아기를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일일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을 주님께 데리고 오는 것을 우리가 입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의 신앙 생활을 바로 지도하려고 하면 할 수 있는 대로 온 가족이 특별히 중학생 이후에는 한 교회에 나오도록 우리가 인도하고 그 아이들의 예배당에 나가서 가지는 태도와 사귀는 동무들까지 부모가 자세히 감시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 첫 꽃 주일에 제자들이 이렇게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고 꾸짖었다고 그랬습니다. 물론 이 실수는 고의로 한 실수는 아닙니다. 사실은 제자들이 예수 님을 사랑해서 분주한데 아이들까지 데리고 오니까 예수 님을 위해서 이 부모들과 아이들을 꾸짖은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을 사랑이되 지식이 없는 사랑입니다. 열심은 열심인데 지식이 없는 열심입니다. 이해가 없는 열심입니다. 또 아이들도 예수께 와야 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그릇된 생각입니다. 또 보통으로 어른들보다 아이들을 경시(輕視)하는 것이 그 때 일반 사람들이 가지는 태도 가운데 하나였든 듯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태도를 실상은 아이를 데리고 오는 어머니에게도 잘못이요, 어머니와 같이 나오는 아이들에게도 잘못이요, 그 아이를 영접하려고 하는 예수 님의 대해서도 실수입니다. 이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배치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에 위배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격과 그 일상 생활에 반대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 분히 여기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어린아이들이 예수께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금하지 말라고 하는 말은 좀더 원어에 가깝게 번역한다고 하면 방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장해하지 말라, 어린아이들이 내게 올 때에 장해물을 두어서 장해하기 말아라 하는 그 뜻입니다.
자, 먼저 이 제자들의 실수를 생각하고 특별히 교회의 제직 자들이나 주일학교 선생들은 이 말씀을 자세히 들을 필요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조금 잘못하면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하는 것 같지마는 그만 어린아이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떤 가정에 심방 가서 우리교회에 새로 나오는 어떤 청년들 만났는데, 그 청년의 신앙 경험을 물어보니 일찍이 이북에 있을 때에 주일하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주일 학교에 다니다가 그만 두고 오해 동안 예배당에 안 나오다가 다시 나오는데 어떻게 되어서 그 때 그가 그만 둔 사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청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옛날 일제 말기 우리교회가 일제 탄압 아래에 있을 때에, 열두 시가 되어서 사이렌만 마면 묵도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에는 이렇게 설교하다가도 열두 시만 되면 설교하다 말고 다 묵도할 수밖에 없는 그런 때를 우리가 지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그 때 예배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주일학교에서 아마 무슨 집회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열두 시가 되니까 다 묵도하라고 해서 묵도하는데, 이 학생이 묵도를 안 했다고 합니다. 또 하기야 정성 있게 묵도한 사람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그 아이가 묵도를 안 했다고 주일학교 선생이 와서 그 아이를 때렸다고 합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 자세히 들으시오, 주일 학교에서 아이들을 때리면 안 됩니다. 무심하게 아마 질서를 유지하노라고 선생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맞는 아이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섭섭했습니다. 그 청년은 오랫동안 교회에 안 나가다가 그 후에 장성해서 아무래도 자기가 예수를 믿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답니다. 이런 각오를 가지고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주일학교에 나오다가 어떻게 우리 교회의 직분 맡은 분이나 목사가 실수를 함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안 나오는 학생은 이 사람만이 아닌 줄 생각합니다. 방해하지 아니하도록 우리가 조심해야 될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걸음 더 깊이 생각할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의 불건전한 신앙생활, 곧 모든 경건하지 못한 언행들은 근본적으로 아이들이 주님께 나오는 것을 방해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언제든지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가 사를 것도 혼자 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활은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는 특별히 우리 가정에 있는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믿는다 하면서 우리가 생활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좋은 모범을 주지 못한다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나오는데 큰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도 그 생활을 봅니다. 그래서 어른들의 생활을 통해서 말하자면 요사이 말로 그들에게 시청각 교육을 줍니다. 여러분은 다 아이들이 구경하는 활동사진의 배우인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이라고, 백 마디의 말보다도 한 가지의 행동으로서 반대의 행동을 보여 주면 아이들은 그것을 본받습니다.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여러분 부모들은 신앙생활을 잘 하는 가운데 있다고 하지마는 자녀들 가운데 아직 신앙 생활에 들어오지 못한 가정이 있다고 하면 깊이 반성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과연 우리 가정에서 하는 일 내 사회에서 하는 일이 명실공히 신행(信行)이 일치해서 나의 제일 가까운 자녀들에게 참된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는가 그렇지 아니하고 단순히 외형으로 예배당에만 출석했는가? 우리의 생활이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나오는데 장해가 되지 아니해야 되겠습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것은 제일 큰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나는 믿는 소자 하나를 범죄 하게 하는 자는 차라리 큰 맷돌을 그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으리라.』어른들이 아이들은 죄게 빠뜨리는 일, 선생이 학생을 유혹하는 일, 장성한 사람들이 철없는 아이들을 죄에 빠뜨리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흉악하고 용서 못할 죄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그리고 셋째로, 꽃 주일의 축복이 있습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예수 님께 데리고 올 때에는 그저 좀 만져나 줄까 하고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여기 기록을 보니 주님께서는 그 아이를 친히 팔로 안으시고, 복을 비시고, 손을 그 머리에 얹어 주셨다고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의 넘치는 부모의 기대에 넘치는 복을 주셨습니다. 부모들이 상상하던 그 이상의 축복을 어린이들에게 예수 님께서 더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누구든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중심으로 주님께 바치는 아기 위에는 부모가 상상하고 기대하는 그 이상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한나가 어린 사무엘을 데리고 와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많은 기대가 있은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에 사무엘의 머리 위에 한나가 상상하던 그 이상의 축복을 더하여 주신 것입니다. 엘리사베드가 아기 요한 을 데리고 하나님께 바칠 때에 큰 기대가 있은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요게벳이 어린 모세를 하나님께 바칠 때에 큰 기대가 있은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 사실을 보면 어머니가 상상하던 몇 십 배, 몇 백 배의 그 이상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중심으로 하나님께 아이들을 바치는 그 가정에 기대 이상의 주님의 크신 축복이 임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할 때에 세상에 있어서 제일 큰복은 자손의 복이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사실 자손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려고 하면 그 자손의 머리 위에 하나님의 축복의 손이 있어야 그 가정의 축복이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오히려 화가 미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을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은과 금은 우리에게 없지마는 주님의 축복을 유산으로써 우리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넷째로 꽃 주일의 교훈을 잠깐 생각하세요.『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이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편견이 없습니다. 선입 주견(主見)이 없습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진실합니다. 그 천진성(天眞性)을 우리가 배워야 되겠습니다. 둘째로, 어린이들은 의심이 없습니다. 부모의 말이나 어른의 말이면 털끝만치도 의심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믿습니다. 그 절대의 신뢰성, 전적으로 믿는 그 믿음을 우리가 배워야 되겠습니다. 셋째로는, 어린아이들은 무슨 지식이나 무슨 문벌이나, 무슨 지위나, 무슨 물질에 대한 교만이 없습니다. 겸손합니다. 그 겸허성(謙虛性)을 우리가 배워야 되겠습니다. 진실 되고 참으로 믿고 겸손히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은 나이는 많지마는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하늘 나라의 귀한 어린 자녀입니다.
주님께서 그와 같은 심령을 하늘 나라고 영접하시고 그 위에 축복을 더하여 주십니다. 오늘 꽃 주일을 당해서 부모들의 의무를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제자들이 한 실수를 우리가 경계해야 되겠습니다. 주님의 축복은 우리 기대 이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어린이에게 배워서 겸손하고 참되고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一九五九년 六월 十四일)
Ⅲ-18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가복음 四장 一-九절)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十·十二)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렘 四·三)
『너희 묵은 땅을 기경(起耕)하라.』『너희 묵은 땅을 갈라.』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 아침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께서 이미 들으신 대로 예수 님께서 갈리리 바닷가에서 여러 가지 진리를 가르치실 때에 제일 먼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려 들에 나갔습니다. 더러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얼마 안 되어서 새가 와서 그 씨를 주워 먹었습니다. 더러는 돌작밭에 떨어졌습니다. 곧 싹이 나서 자라기는 했지만 뿌리가 없음으로 햇빛이 쪼일 때, 곧 말라죽은 것입니다.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습니다. 싹이 나고 자라기는 하였지만 그만 가시 때문에 숨이 막혀서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더러는 옥토에 떨어졌습니다. 결실을 맺는데 혹은 三十배 혹은 六十배 혹은 백 배나 맺혔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사람의 마음을 비유해서 가르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 밭을 의미한 것입니다. 길가와 같이 굳고 많은 사람이 내왕하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돌작밭과 같이 겉은 부드러운 흙이 있으나 속에는 돌이 많은 옅은 마음이 있습니다. 가시덤불이 덮인 흙과 같이 여러 가지 세상의 염려와 자기의 욕심으로 쌓인 험한 마음이 또한 있습니다. 옥토와 같이 부드러운, 돌도 없고 가시밭도 없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 마음 이외에 한 가지 종류의 땅, 한 가지 종류의 마음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묵은 땅, 묵은 밭과 같은 마음입니다.『너희 묵은 땅을 기결하라.』묵은 땅은 어떠한 땅입니까? 제가 짐작하기에는 본래는 좋고 부드러운 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 돌보지 아니했습니다. 쟁기로 갈지도 아니하고, 호미를 대서 김도 매지 아니하고, 그냥 오래 내버려두어서 땅이 굳어지고 잡초가 성한 밭입니다.
우리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배당밖에 나가면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종류의 마음 밭을 다 발견할 수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예배당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이 네 가지 종류 밭 이외에 묵은 밭과 같은 마음의 밭도 또한 발견할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묵은 땅의 모습이 어떠한지 잠깐 생각하여 보세요. 농촌에서 자란 분이 있다면 묵은 땅의 모습이 잘 상상될 줄 믿습니다. 저는 본래 농촌에서 나고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 묵은 밭의 모습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묵은 밭은 본래는 부드러운 흙이 있었지마는 다시 굳어집니다. 오래 쟁기로 갈지도 아니하고 오래 호미 맛도 보지 못하니까 자연 굳어졌습니다. 비가 오고 해가 쪼일 때, 점점 더 세월이 갈수록 걷어만 갑니다. 이 묵은 밭에는 곡식은 별로 보이지 아니합니다. 여러 가지 보기 싫은 잡초만 무성해집니다. 어떤 때에는 가시 같은 것도 납니다. 곡식으로 덮인 옥토는 얼마나 보기 아름다운지 알 수가 없지마는 묵은 밭은 보기도 싫습니다.
물론 묵은 밭에는 열매가 있을 리 없습니다. 혹 곡식 씨앗을 뿌려서 싹이 난다고 할지라도 무성한 잡초 때문에 숨이 막혀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 땅은 온전히 쓸데 없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햇빛을 매일 받고, 하나님이 저녁마다 주시는 이슬을 받고, 때때로 적서 주시는 좋은 비를 받지마는 묵은 땅은 거기에 대한 보답이 없습니다. 햇빛도 그저 받고 비도 그저 받고 이슬도 그저 받기만 하는 쓸데없는 땅입니다.
쓸데없는 것만 아니고 한 걸음 나아가서 장해되는 땅입니다. 옆에 밭이 있을 경우 그 옆에 오래 묵은 땅이 있으면 거기서 돋아나는 김의 씨들과 잡초의 씨들이 가을에 나라와서 좋은 옥토에 떨어져서 옥토 위에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잡초를 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쓸데없을뿐더러 좋은 옥토, 많은 곡식을 내는 밭을 오히려 더럽히고 방해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이런 묵은 밭이 오래 되면 마귀를 위해서는 열매를 맺습니다.
이 묵은 밭과 같은 마음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본래는 옥토였습니다. 그러나 오래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는 가운데서 그 마음이 굳어집니다. 좋지 못한 습관이 하나 뿐이 아니고 많이 생깁니다. 그 습관이 점점 뿌리가 깊어집니다. 완고하여지고 고집만 세게 됩니다. 여러 가지 잡초, 즉 세상의 생각과 사상, 육신의 정용과 안목, 이생의 자랑과 교만한 마음, 비열한 것, 모든 잡초가 마음속에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와 같이 묵은 밭과 같은 마음은 하나님의 햇빛이 쓸데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슬과 비도 쓸데가 없습니다. 성경을 듣고 읽거나 설교를 듣거나 도덕의 교훈을 듣는대야 모두 쓸데가 없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마음속이나 그 생활에 아름다운 열매가 열릴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습니다.
열매 없는 것만 아닙니다. 이런 묵은 밭 같은 마음이 오래 되면 좋지 못한 지식, 좋지 못한 씨를 오히려 옆에 있는 옥토와 같은 마음에 펴 쳐서 좋은 곡식을 내는 옥토까지 더럽히는 쓸데없고 방해하는 묵은 밭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마음을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너의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아라. 먼저 묵은 땅을 갈아라.』무엇을 심기 전에 이와 같은 묵은 밭
은 먼저 예리한 보습을 넣어서 갈아 굳은 흙을 깨뜨리고 뒤집어엎고 갈아야 됩니다. 잡초를 뽑아 버려야 됩니다. 가시덤불을 베어서 불에 던져야 됩니다. 열게 갈면 안 됩니다. 깊이 갈아서 속에 있는 뿌리까지 뽑아서 얼른 불 살아 버리고 혹은 묻어서 온전히 썩혀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습을 대서 성신의 보습으로써 묵은 밭과 같은 마음을 깊이 갈아서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속에 있는 음란과, 시기와, 방탕과, 모든 불결한 쓴 뿌리까지 버려서 새로운 옥토로 회복한 후에야 좋은 씨를 뿌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묵은 밭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굳어서 처음에는 힘듭니다. 힘들어도 갈아야 됩니다. 아픕니다. 굳은 마을을 깨뜨리는 것이 아픕니다. 오래 사랑하던 죄악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이 아픕니다. 아파도 뽑아 버려야 됩니다.
묵은 밭을 기경하기 전에 어떤 씨도 뿌릴 수가 없습니다. 무슨 기독교 도덕을 배워 줄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묵은 밭을 갈아야 됩니다. 이것을 회기하고 하고 중생이라고 합니다. 성신의 보습으로써 내 마음을 온전히 깨뜨려서 아프지마는 모든 굳은 것을 고치고 잡초를 제거해 버려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의 마음 밭을 보시고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라도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온 자가 있으면 성신의 보습으로 이 시간에 갈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후에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 제일 먼저 부르짖은 말씀이『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먼저 회개해야 됩니다. 근본적으로 마음이 변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도 요단강 가에 나타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에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는 복음도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을 볼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어찌하여 전에는 열매를 맺던 사람들이 오늘날 몇 해 동안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묵은 밭에 씨를 뿌려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성경의 말씀을 아무리 듣고 설교를 아무리 들은들 묵은 밭에 떨어질 때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먼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읍시다. 그런 까닭으로 예수 님께서 오시기 전에 먼저 세례 요한이 와서 회개로써 마음 밭을 준비한 것입니다.『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너희 묵은 밭을 갈라.』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십니다.
아무리 묵은 밭일지라도 갈면 온전히 깨뜨리고 부드러운 마음이 되면 잡초를 제거해 버리면, 그 다음에는 옥토가 다시 되어서 씨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三十배도 되고, 六十배도 되고, 백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옛날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 가운데 요나 선지자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본래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입니다.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마음이 옥토였습니다. 그러나 어찌하다 그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자기의 편협한 생각과 편견과 고집이 마음 가운데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할 때에 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강퍅해졌습니다. 굳어졌습니다. 그 밭이 묵은 밭처럼 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반대 방향으로 배를 타고는 다시스로 향해서 가는 묵은 밭, 쓸데없는 밭과 같은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다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큰 풍랑이 있는데도 자기는 배속에 들어가서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러나 제비 뽑는 가운데서 그만 뽑혀서 마지막에는 바다 속으로 던 지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큰 고기 배속에 들어가 그 어둡고 그 민망한 곳에 들어가서야 자기의 굳은 마음이 깨어지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고기 뱃속에 들어가서야 묵은 땅을 갈기 시작했습니다.『오, 주님이시여,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한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라도 기회를 주시면 아버지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그 깊은 속에서야 묵은 땅을 기경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두 번째 기회를 주어서, 다시 그 옥토에 씨를 뿌려서,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로 가서 큰 권세와 지혜로 선포하여 몇 일만에 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온 성이 회개하는 큰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묵은 땅이라도 다시 기경해서 곡식을 심게 되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약의 여러 인물을 공부하는 가운데 마가 요한 을 생각합니다. 이 청년은 본래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환경 가운데서 장성한 모양입니다. 바나바의 생질로서 많은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젊은 사람들 가운데도 특별히 택함을 받아서 제일 먼저 바나바와 바울이 첫 번 전도 여행을 떠나갈 때에 사도들을 도와주는 특권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옥토입니다.
그러나 마가의 마음 가운데 점점 잡초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생각만 주장하게 되고 사도들을 도와줄 마음이 적게 되었습니다. 아무 재미가 도무지 없는 것 같이만 생각되었습니다. 마음이 점점 걷어져서 마지막에는 위대한 사도를 배반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쓸데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둘째 여행을 떠날 때에 바나바는 용서하고 다시 데리고 가자고 했지마는 바울은 아예 저버렸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청년을 바울은 데려갈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그와 같은 거절을 받은 후에 마가 요한 이 자기 마음 가운데 크게 깨달음이 있은 줄 압니다. 자기의 묵은 밭을 다시 갈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자복(自服)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보면 이 묵은 밭을 다시 갈아서 알렉산드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큰 교회를 세운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을 뿐더러 마가복음을 기록해서 공을 세웠고, 그 다음에 바울도 편지 가운데도 마가는 그에게 심히 필요하니 꼭 데리고 오라고 하는 열매 맺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묵은 밭이라도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래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성신으로 하여금 내 마음 밭을 갈게 하면 다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타임 잡지에도 세 사람의 회개한 사람의 이야기가 났습니다. 한 달 전쯤 미국 장로교회에서 발행하는「프레스바이터리안」(Presbyterian)이라고 하는 잡지에 그의 신앙 고백 문이 길게 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본래 중국에서 난 사람으로서, 오래 미국과 유럽에 여행도 하고, 영어로 책도 많이 쓰고, 중국말로도 책을 많이 쓴 임어당(林語堂)박사입니다.
그 사람은 본래 목사의 아들입니다. 상해에서 기독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북경에 가서 교수로 있을 때에 점점 딴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세상의 철학을 기독교 철학보다 더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고백하는 대로 점점 거기로 기울어졌습니다. 사람은 이성대로 살면 그뿐 아니냐? 사람은 자기 힘으로 무엇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자기자신(自己自身)을 자신(自信)하게 하는 인본주의사상(人本主義思想)이 점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온전한 유물주의자(唯物主義者)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를 다 부인하고 이 세상에 실재는 물질밖에 없다는 이런 사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부인을 따라서 한 번은 뉴욕에 있는 매디슨 장로 교회에 예배보려 같이 갔다가 그 목사의 감화를 받게 되어 한번 가고 또 가고 여러 번 가서 온전히 그 마음이 변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약 일년 번에 그 교회에서 온전히 과거를 청산하고 그 교회에 입교해서 교인으로 일년 동안 조용히 있다가, 일년 후에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고 온 세계에 자기는 다시 기독교로 돌아 왔다고 하는 것을 증언하게 된 것입니다.
오래 그 밭이 묵어 있었고 잡초가 났습니다. 좋지 못한 풀도 많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다시 묵은 밭을 갈았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다시 그 땅 속에 들어갔습니다. 이 앞으로 임 박사는 온 기독교회는 물론 온 인류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줄 확실히 압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묵은 땅을 기경해야 되겠습니다. 묵은 땅을 그냥 두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신 것은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인데 그저 주시는 햇빛을 받고, 그저 주시는 이슬을 받고, 때때로 내리는 단비를 받으면서, 아무 열매도 맺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열매 없이 이 세상에 산다고 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묵은 땅이라도 다시 갈면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농사해 본 사람은 다 잘 알 것입니다. 묵은 땅을 갈고 곡식을 심으면 그 후에 특별히 잘 됩니다. 묵은 땅이 다시 은혜를 받게 되면 특별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 읽은 성경 말씀도 우리가 묵은 땅을 기경하기만 하면 여호와께서 임 하사 의를 비처럼 충만히 내리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스스로 내 자신을 살필 때에 묵은 땅이 있습니까?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이 시간에 지체 말고 온전히 그 땅을 기경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三八이북에 있을 때에는 많은 열매를 맺었지마는 이남에 넘어 온 다음에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묵은 땅이 있습니까? 그런 땅도 오늘 아침에 기경합시다.
여러분, 혹 다른 촌에 있을 때에 열매를 맺었지마는 서울에 온 이후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묵은 땅이 있습니까? 이 시간부터 그 땅도 다시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여러분, 내가 확실히 믿는 것은 만일 우리 영락교회에 있는 六천 명 교우만도 온전히 묵은 땅을 갈아서 열매를 맺는다고 하면, 온 서울은 물론 온 한국에 큰 열매를 맺힐 수 있는 줄 압니다.『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一九五九년 六월 二十一일)
Ⅲ-19 그리스도의 약속 (요한 복음 六장 二十七-四十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오는 자는 내가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六·三十七)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약속은 이 말씀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중요한 약속 가운데 하나인 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요한 복음 六장 三十七절을 통해서 우리 믿는 자의 구원에 대하여 세 가지 중요한 진리 혹은 원리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먼저는,『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내게로 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자가 있습니다. 곧 아버지의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내게 오는 자는」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우리 인간의 책임이 우리 인간의 하는 일을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와야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렇게『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그리스도의 하신 일과 그리스도의 약속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아침, 그리스도께서 친히 주신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먼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는 먼저 아버지께서 주시는 자가 되어야 우리가 주님께 올 수가 있습니다. 이 뜻은 곧 알아듣기 어렵지마는 성경을 상고하여 보면 이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가령 에베소서 一장 三절부터 五절까지 제갈 읽을 때에 조용히 들으시기를 바랍니다.『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創世)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택(擇)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거기 보면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로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서 八장 二十九절과 三十절을 읽으면, 역시 같은 뜻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미리 정하셨으니」하는 예정입니다.『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미리 그들을 부르시고, 그를 의롭다 하시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 전서 一장 하 반절에는 역시 같은 뜻을 다른 말로 가르치십니다.『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에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거기에 택한다고 하는 말이 세 번 거듭 나옵니다.
예수 님께서도 가이사라 빌립보 지경에 아셔서 제자들을 향해서 물으시기를『세상 사람들이 나는 누구라고 하드냐?』제자들이 더러는 엘리야라 하고,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 하고, 혹은 선지자라고 부르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 님이 다시 묻기를『그러나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시몬 베드로가 그 때에 곧 대답하는 말이『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때 예수 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시니라.』하나님께서 먼저 그 진리를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입니다. 이 예정 문제는 신앙적 여러 가지 의문을 가져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임이 틀림없고 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백성들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택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특별히 택하여서 선지자로 세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크신 경륜 가운데서 세상 사람 가운데 특별한 사람들을 택하여 구원하여 주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진리는 모든 선지자들이 가르쳤고, 모든 사도들이 가르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셨고, 온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본 사람은 우리의 생활을 돌이켜 볼 때 우리의 경험이 또한 이 진리를 우리에게 확증해 주는 줄 압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하신 여러분, 잠깐 돌아다보세요. 여러분이 예수를 믿게 되고 여러 가지 시험과 재난이 많은 이 세상 가운데서 지금까지 믿음을 보존하게 된 것이 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인가, 혹은 내 의지로서 내가 남보다 나아서 내 힘으로서 이 때까지 신앙을 보존해 오는가? 아마 누구든지 이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모든 환경과 모든 주위 사정과 내 가정 형편과 여러 가지를 도와주시는 가운데서 나를 이와 같이 도와주셨다 하는 것을 느낄 줄 생각합니다. 이 예정을 믿는 사람은 언제든지 그 마음 가운데로부터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북 바쳐 올라옵니다. 하나님께서 나같이 말할 수 없이 죄 많고 불(不)스러운 것을 불쌍히 여겨 택하시고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한 마음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언제든지 겸손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나 된 것이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 고로,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 대하여서는 겸손한 마을을 가지게 됩니다. 내 힘으로 구원을 얻고 내 힘으로 무엇을 했다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 대해서 감사한 마음이 적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겸손한 마음이 적을 것입니다.
이 진리를 우리의 이성(理性)으로 다 깨달아 알기 어렵습니다. 특별히 이 진리와 인간의 자유문제를 어떻게 조화시킬는지 누구나 확실히 말할 사람은 없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예정의 사실이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예수 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가 예수를 택한 것이 아니오 예수께서 우리는 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한 것입니다.
둘째로, 성경은 그 진리만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내게 오는 자를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않겠다고 그랬습니다. 주께 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할 일이요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오는 것은 내 책임입니다. 예정의 진리는 인간의 자유 행동을 묵인하고 인간을 한 기계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탕자가 먼 나라에 가서 죄 가운데 있었지마는 그 가운데서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과 같이 내가 주님 앞에 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보면 구약으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오라고 하는 말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무릇 목마른 자는 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려 내리리라.』하나님께서 옛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오 진흥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과 같게 하리라.』
예수 님의 유명하신 혼인 잔치의 비유를 보면, 자기의 아들을 위해서 혼인 잔치에 모든 물건을 다 배설하여 놓고 종들을 사방에 보내어 외치는 말이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누구든지 다 오셔서 참여하기를 바란다면서 외치는 것입니다.
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책임인 것입니다. 여기 온다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 님 당시에도 예수 님을 보기 위해서 온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적으로 올 사람은 적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을 구경하기 위해서 온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꼭 그대로 믿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적었습니다.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다 이렇게 하나님의 집으로 오기는 왔지마는 사실 내 심령이 주님 앞에 왔습니까? 여기 온다고 하는 말은 단순히 육신만 온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육신은 이 자리에 있지마는 여러분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의 말씀은 중심으로 온다고 하는 뜻입니다.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삼고 믿어 그에게 내 전 생명을 바치고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말입니다.『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주에게 오는 자! 오는 자라야 예수 님께서 영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께 온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중심으로 주님 앞에 와서 주님을 내 마음가운데 받아들일뿐더러 내가 이 구원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 편제에 이런 말을 기록했습니다.』너희가 힘을 써서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敬虔)을 더하고, 경건에 형제 화목을 더하고, 형제 화목에 사랑을 더하라.』그러면서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이렇게 더욱 힘써서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미 부름을 받아서 주님께 나와 믿는 줄 안다. 그렇지만 너희가 특별히 힘을 써서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이것은 인간의 책임입니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님 앞에 와서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여야 됩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서 주를 섬기라고 그랬습니다. 깨어 기도하여 시험에 들지 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밤은 깊고 낮은 가까웠으니 그런고로 어두운 일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병이 되어서 주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이기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먼저 예수 님께 와야 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이에게 대하여 예수 님의 약조가 여기에 있습니다.『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이것은 그리스도의 약속이오,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입니다. 여기에「결코」라는 말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강하게 부인하는 뜻입니다. 주께 오는 사람은 주께서 반드시 영접할 것이오, 결단코 절대로 이런 사람을 주께서 물리치지 아니하십니다. 주께 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반드시 영접해서 그를 구원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주께 오는 사람은 그의 죄가 얼마나 많든지 간에 죄를 사하여 주시겠고, 그에게 중생을 주시고, 성신을 주시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반드시 주실 것이며, 주께서 결코 하는 나라에서 내어쫓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여기 조건은 단순히 하나 뿐입니다. 주께 오는 것이 바로 조건입니다. 그 사람의 과거에 생활을 묻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현재의 생활도 묻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품성이 어떠한 지도 묻지 아니합니다. 어떤 생활을 과거에 했던지 주께 오면 주께 오는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절대로 그 사람을 배척하지 않고 그를 영접해서 그에게 구원을 허락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과거에 아무리 더러운 생활을 한 여자라고 할지라도, 삭개오와 같이 아무리 호색하고 불의 한 재물로 산 좋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심지어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와 같이 살인 강도의 행위를 감행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께 오기만 하면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고 영접해서 그 영혼을 구원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많이 오는 줄 압니다. 이따금 보면 부인들이 핸드백이 기도하는 동안에 없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필경 소매치기도 예배당에 들어옵니다. 또 이렇게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 북한에서 밀파한 간첩이 우리 가운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간첩이 들어와 앉으려고 하면 들어와 앉을 수도 있습니다. 등록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 예배당에 들어 올 때에는 어떠한 동기로 왔던지 하나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기회를 주시는 이 시각에 온전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면 과거에 어떠한 죄를 범했던지 예수 님께서는 그 심령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내어
쫓지 아니하시고, 영접해서 그에게도 중생의 축복을 주시고, 그에게도 성신을 주시고, 그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가운데 이따금 내가 지금까지 예수를 믿기 는 믿었지만 과연 애가 구원을 얻었나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까? 그렇게 의심날 때가 있으면, 이 요한 복음 六장 三十七절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가운데 제가 처음에도 말씀 드렸지만 예정 문제를 고민하면서 내가 예정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의심하는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심이 나는 분일지라도 이 요한 복음 六장 三十七절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 오는 자를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시겠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약속했습니다. 그의 약속은 참이오 그의 약속은 진실입니다.
전에 영국 국교에 버틀러 라고 하는 유명한 감독이 있었습니다. 그 감독이 임종시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병이 중해서 꼭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때에 자기의 가까운 친구가 되던 목사가 가까이 그 옆에 와서 앉아 있습니다. 이 감독이 자기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을 스스로 알면서 그 옆에 있는 친구에게『내가 일생토록 죄를 멀리하고 어떻든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가진 애를 써왔지만 나는 원래 약한 인간이니까 지금 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생각하니 내 마음가운데 두려운 마음이 들어온다.』고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 그 옆에 앉아 있던 목사가 하는 말이『아, 감독님,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다 속량해 주신 구주가 아닙니까?』그 감독이『그렇지, 예수 님께서 참 구주가 되시지. 그러나 꼭 내 구주가 되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나?』의심스러워 반문했습니다. 그 때, 옆에 앉았던 그 목사가 다시 하는 말이『감독님, 예수 님의 일 말씀을 잊어버리셨습니까?「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그 말을 들을 때에 이 감독이 얼굴에 기쁨이 충만해지면서『과연 그렇다 내가 성경을 수천 번 보았지마는 그 구절의 뜻을 이제야 분명히 알았구나. 나는 평안한 마음으로 가는구나.』그 말씀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네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내 과거의 생활로 말미암아서 염려할 것 없습니다. 내가 과연 주님 앞에 온전히 왔습니까? 내가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습니까? 내 주님 앞에 왔으면 조금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주님께서 결코 우리를 물리치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一九五九년 六월 二十八일)
Ⅲ-20 먼저 중생으로 (요한 복음 三장 一-十五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三·三)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여러분께서 많이 기도해 주시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 가운데 그 동안 네 나라를 다녀왔습니다. 말레이시아, 미얀마, 태국, 필리핀을 다녀왔습니다. 필리핀에서는 교역자 수양회를 두 곳, 북방에서 한 곳, 남방에서 한 곳에서 했습니다. 그렇게 다섯 교역자 수양회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번 교역자 수양회에 가기 한 달 전에, 기독교 선명회(宣明會)에서 저에게 이번 교역자 수양회에 가서 가르칠 과목을 지정해 왔는데 설교 학에 대해서 가르쳐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갑자기 받게 되어서 당황(唐慌)은 했지마는 아무래도 각각 나누어서 말할 수밖에 없는데 협력하는 의미에서 그 제목을 제가 맡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기 대한 생각도 좀 하고 또 서적도 좀 읽고 준비를 하는데 여러 저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그저 설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대언 하는 것인데 단순히 무슨 웅변이나 학식만에 관계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그 설교자가 은혜를 받아야 되고 설교자의 생활이 결국은 그 설교에 권위를 주는 것이라는 말로 강조되었습니다.
특별히 지난 十九세기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로서 차알즈 스펄전이라고 하는 이의 저서를 읽었습니다. 그이가 그 때 목사들과 여러 신학생들 한데 설교에 대한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일 첫째 되는 주제를「목사의 자성」이라고 하는 그런 내용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무엇보다도 설교자가 되려고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이 자기 자신이 구원을 얻어야 되고, 또 거듭나야 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이 거듭나지 못한 설교자는 아무리 다른 것을 잘 한다고 할지라도 그 설교를 통해서 은혜가 없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말을 읽고 저도 이제 여러 목사와 전도사들 한데 이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소개하고 난 다음, 토의하는 시간에 서로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모든 교역자들이 다 이구동성으로 그 말이 과연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 이 스펄전 자신이 十九세기 영국 교계에 있어서 여러 교역자들에게 강연할 때에, 교역자로서 제일 중요한 것이 자기 자신이 먼저 구원을 얻고 거듭나야 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그 때의 교역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시대나, 어떤 나라나, 어떤 교회의 교역자들에게도 그 말이 가장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그 말은 교역자에게만 필요한 말이 아닙니다. 장로에게도 필요하고, 집사에게도 필요하고, 권찰(勸察)들에게도 필요하고, 주일학교 각부 반사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성가대원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사실 누구든지 믿는 사람에게는 제일 중요한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먼저 구원을 얻어야 거듭나야 됩니다.
여러분, 이 시간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마는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느니라.』거듭나야 되겠다고 하는 것을 결코 기이 히 여기지 말아야 됩니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오늘 이 말씀을 간단히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 심령 위에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물론 거듭 난다고 하는, 중생이라고 하는 체험은 영적 체험으로서 신비한 사실이올시다. 우리가 다 깨닫기 어렵습니다. 깨닫기 어렵다고 사실 아닌 것이 아닙니다. 신비하다고 사실 아닌 것이 아닙니다. 신비한 사실입니다. 이 우주는 모든 신비한 사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다 전기를 이용하지마는 전기가 무엇인지 우리다 다 깨닫습니까?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전기가 있다고 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전파가 있다고 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예수 님 말씀과 같이 바람이 임의로 불지마는,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가를 다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기상학이 발달되었다고 하지마는 아직까지 분명히 모릅니다. 신비한 것이 있습니다. 바람은 우선 눈에 보이지 않으나 느낄 수 있습니다. 바람 분 다음에 그 형적(形迹)이 나타납니다.
이 영적 체험은 신비하지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체험이 아니고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필수적인 반드시 있어야 될 만한 사실이올시다. 이것은 예수 님께서 친히 너희가 반드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문맥을 보면「반드시」라고 하는 말이 우리 한국 번역에는 없지만 그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 난 것은 육이오 영으로 난 것은 영인데 아무래도 육신의 생을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난 것처럼 영적 생을 통해서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또 이것은 어떠한 사람에게만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누구나 다」거듭 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처음에 누구에게 하셨는고 하니, 니고데모에게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유대 관원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보통 외식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선입관이 있지만, 그 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인고 하니, 물론 좋지 못한 사람도 많지마는, 실상은 양심적으로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기를 힘쓴 사람들입니다. 십일조를 꼭 드렸습니다. 안식일을 꼭 지켰습니다. 박하나 근채(芹菜)처럼 적은 것까지 십일조를 꼭 드렸습니다. 속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또 이 니고데모로 말하면 유대 관원이올시다. 七十인 공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올시다. 덕망이 높은 사람이 보통 공회원이 되었습니다. 또 이 사람이 예수를 찾아 온 것을 보면 비록 밤에 찾아왔지만 진리를 탐구하는 좋은 성품이 있는 겸손한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니고데모를 향해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니고데모가 여러 가지로 율법도 많이 알고, 잘 기키고, 여러 가지로 덕행도 좋고 다 있지마는,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노골적으로 말했습니다.
요사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흔히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 예수 믿는 것은 예배당에 가고, 찬송도 배우고, 성경 말씀도 듣고, 그리고 열 가지 계명도 배우고 그리고 산상보훈도 좀 배우고, 어떻든지 좋은 도덕적 교훈을 많이 배워서 좋은 교훈대로 힘써서 하나씩 둘씩 좀 고쳐나가고 이렇게 수양을 잘 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 생활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기독교인의 신앙 생활이라 하면 기독교는 유교 도덕 사상에서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유교 사상이 그것입니다. 좋은 도덕적 교훈을 얻어서 그대로 실행하면 되지 않느냐? 우리 기독교는 사람을 그보다 더 깊이 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그 성품이 죄악으로 부패해서 죽은 영혼입니다. 기독교의 요구는 근본적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새 사람이 되지 않으면, 다시 나는 것과 같이 변혁이 있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 정신입니다.
먼저 나무가 좋아져야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나무를 그냥 두고 열매만 아무리 개량하려고 애써도 쓸데가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나무의 성품이 변해야 됩니다. 근본적으로 부패한 인간 성품이 변하는 것을 중생(重生)이라고 합니다. 다시 나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께서 이 사람의 간증하는 말씀을 들었지마는 동남아 여러 지방으로 다니기는 세 분이 같이 다녔습니다. 한 분은 의사요, 한 분은 사업가였는데 그 분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이 분은 본래 어렸을 적에, 믿는 가정에서 나서 주일학교도 다녔고, 또 교회에도 그렇게 열심히는 못나왔지만 교회에 나왔고,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입니다.
한 번은 어떤 친구의 초청을 받아서 저녁을 같이 먹고 이야기했습니다. 마침 그 때에 영국에서 온 잘 믿는 사람이 있어서 같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는데 무슨 말을 묻는고 하니,『당신 거듭났습니까?』『중생 했습니까?』이것을 솔직히 물어보았답니다. 지금까지 믿어오긴 왔지마는 그렇게 갑자기 자기를 대놓고서 이런 질문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란 말입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가는 예배당에 잘 다녔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더랍니다.『그 동안 다니는 건 좋지만 성경 말씀에 보면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거듭났습니까?』또 물어봅니다. 그래서 할말이 없어 어물어물하면서 대답하는 말이『난 연보도 상당히 하는 사람인데…』『아 연보도 늘 가는 것은 대단히 좋습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에 보면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거듭났습니까?』또 물어본단 말입니다. 이렇게 자꾸 물어 보는데 대답할 말이 없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솔직히『난 거듭났는지 안 났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해야 거듭납니까?』되물어 보았습니다.
그이는 어떻게 해야 거듭난다고 하는 말을 그 때 그 분에게 해 주었습니다. 그 말대로 이 분이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거듭나는 체험을 얻었습니다. 그 후에는 사업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신앙을 간증하면서 다른 여러 사람을 많이 주께로 인도하고, 자비로 동남아까지 같이 와서 주의 일을 하려고 많이 애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 묻습니다. 여러분 하나 하나가 다 거듭 났습니까? 스스로 물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와서『당신 거듭났습니까?』이렇게 분명히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글세 자세히 모르겠는데요.』이렇게 대답할 사람은 없습니까? 사실 이 중생의 체험이 어떤 분에게 갑자기 되고, 어떤 분에게는 시일을 요구해서 천천히 거듭나서 자기 자신도 혹 모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중생 한 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스스로가 몽롱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와 같은 분들과 아직까지 근본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제가 간단하게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는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그 깨달음이 없이 중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스스로 검토해서 감히 서지 못할 추악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보통으로 생각합니다. 보통『다른 사람하고 비교하면 내가 괜찮은데, 무사할 뿐 아니라 나는 의인인데…』『예수 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는데』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중생을 주겠습니까?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사람 앞에서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적나라하게 내 자신을 검토해 보는 그 때에만 내가 얼마나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는 짓고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다.』는 것을 그 때야 깨닫게 됩니다.
둘째 단계는 내가 죄인인 줄 깨달았으면 그 죄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그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회개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을 깨닫고 아프게 뉘우쳐야 됩니다. 그걸 통회라고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 그 죄를 자복해야 됩니다.『나는 이런 죄인이올시다.』하고 고백해야 됩니다. 셋째는 그 죄를 떠나야 됩니다.『죄인들아 죄에서 멀리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떠나야 됩니다. 참 회개하는데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통회, 고백, 떠나는 것,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중심에 영접해서 내 생활에 중심으로 삼아야 되겠습니다. 먼저 번 간증한 이가 특별히 요한 계시록 三장 二十절에 있는 말씀을 증언했습니다.『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소리를 듣고 문을 여는 이에게는 내가 들어가서 내가 그와 같이 먹고 가는 나와 같이 먹으리라.』
그리스도를 내 중심에 영접해서 내 자신을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하지만 사실 생활의 중심이 그리스도인가, 혹은 그 밖에 무엇인가, 내 자신인가, 내 자신의 무엇인가. 세상의 무엇인가? 내 마음속에 사실 그리스도께서 계셔서 언제든지 그리스도와 무슨 일을 의논하고 그리스도의 지도대로 내 생활의 문이 돌아가는가, 그렇지 않고 아직 내 자신인가? 자신의 야심(野心), 욕심, 정욕, 세상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죄를 깨닫고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내 중심에 영접하면 그 밖의 일은 성신의 역사입니다. 성신께서 거듭나는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더 길게 말하기는 원하지 아니합니다. 이 시간, 중심에 스스로 물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과연 거듭났는가, 거듭난 것이 분명한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우리 다 무리 숙여 기도합시다. (一九五九년 八월 九일)
Ⅲ-21 기갈한 심령에게 (이사야 五十五장 一-九절)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五十五·一)
옛날이나 오늘이나 물이 귀한 가나안 지방 거리에는 대대로 물 장사하는 사람들이 물을 지고 다니면서『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이와 비슷한말로 외친다고 합니다. 여기에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기갈을 느끼는 모든 인류를 향해서 외친 말씀이올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먼저 여기 목마른 자들은 어떤 이들을 가리킨 것입니까? 둘째는, 여기 물이란 말이 있고 포도주란 말이 있고 젖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또한 셋째로, 돈 없이 값없이 와서 사 먹으라고 말씀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말씀을 통해 은혜 주시는 가운데 한 가지씩 생각하시기를 원합니다.
『먼저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목마른 자들을 불렀습니다.「목마르다」하는 말은 흔히 간절한 마음의 욕망 혹은 욕구를 가리켜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인간은 사교적 욕망이 있습니다. 대부분 고독을 싫어합니다. 친구를 사귀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를 원합니다. 사랑을 주기를 원하고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혹 사랑에 목마르다고 하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인간은 지적 욕망이 있습니다. 무엇을 좀더 알고자 하고 좀더 배우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향학열 혹은 지적 기갈이라고 하는 말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술적 욕망이 있습니다. 할 수 있으면 모든 것을 좀더 아름답게 하기를 원합니다. 말도 좀더 아름답게, 글도 좀더 아름답게 쓰기를 힘씁니다.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소리, 좋은 음악,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기를 원합니다. 집을 지어도 좀더 아름답게, 거리를 말들어도 좀더 아름답게 만들기를 원합니다. 이와 같은 것을 우리가 예술적 기갈이라고 일컬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의 깊은 심령 속에는 창조적 욕망이 있습니다. 새 것을 만들려는 간절한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것을 찾아보려고 힘쓰고, 새 것을 만들어 보려고, 발명하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욕망 혹은 연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여러 방면으로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좀더 잘 살고, 좀더 아름답고 좀더 선하게 살며, 좀더 문화적으로 살려고 하는 욕망 혹은 갈망이 그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와 같은 모든 욕망이 인간에게 다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우리 인간은 여기에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가령 어떤 분이 좋은 집을 가졌고 좋은 가정을 이루고 좋은 사업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모든 것이 뜻대로 잘되어 나아갑니다. 그렇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마음속에 참된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정녕 인간은 이런 욕망들 이외에 이름 모를 다른 욕망이 또 있습니다. 비록 모든 것이 다 있다고 할지라도 어딘가 빈 것을 느끼는 것이 우리 인간의 체험인 것입니다.
몇 주일 전에, 미국의 한 실업가가 여기 와서 간단히 간증도 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좋은 가정과 집과 사업과 좋은 차를 가져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을 만한 생활을 하였지마는 어딘가 모르게 자기 속 깊은 어느 곳에 빈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인간이 인간 된 소외입니다. 이것을 영적 기갈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四十二편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나니.』우리 인간의 심령 깊은 곳에는 이 여러 가지 세속적 욕망 이외에 이와 같은 깊은 영적 욕망, 영적 기갈이 잠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잠재」라고 하는 말을 쓰는 까닭은 어떤 분은 이와 같은 기갈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시인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갈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갈은 여러 가지 다른 변태적인 욕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다른 욕망만 가득히 채우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알지 못하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좀더 육신에 관한 모든 향락을 탐구하거나, 육신의 온갖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충만히 채워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만족은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물질적 방면에 심혈을 기울여서 물질을 좀더 축적하고, 좀더 얻고, 어떤 분들은 세상의 지위나 권세의 방면에 머리를 좀더 기울여서 좀더 높은 자리, 좀더 힘있는 권세를 얻기를 힘씁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었다고 해서 거기서 만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좀더 지적 방면에 마음을 기울입니다. 좀더 나은 지식과 좀더 나은 지혜를 탐구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많은 곳에 근심이 많아지고 쓸데없는 교만만 많아져서, 전도서에 있는 말과 마찬가지로 거기에서 참된 만족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치 파선한 수부가 바다 위에 표류하면서 심히 목이 마르니까 기갈을 멈추기 위해 짠 바닷물을 마십니다. 바닷물은 마실수록 기갈이 더 심해서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이 이 영적 욕구를 알지 못하고 이 기갈을 채우려고 다른 방면에서 구하면 구할수록 영적 기갈은 더욱 심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있는 체험을 보면『오, 하나님이시여, 주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 우리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내가 주님 안에 돌아와 안정을 얻을 때까지 내 심령 속에는 안심이 없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지 못한 이들은 이 기갈 한 심령을 멈출 길이 없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자기를 위해서 지으신 까닭으로 우리 인간이란 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아 그 품속에 돌아와서 그 영혼이 안기기 전까지는 그 심령의 깊은 속에 있는 답답한 마음, 갑갑한 마음, 즉 영적 기갈을 멈출 길이 없습니다.『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나오기 전에는 이 영적 기갈을 멈출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것은 다만 인간이 인간 된 까닭입니다.
둘째로,「물로 나오라」혹은「포도주를 사라」「젖을 사라」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한 것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모든 영적 은혜를 통괄해서 이와 같은 상징으로 우리에게 깊은 영적 진리를 표현하여 주신 것입니다. 에스겔 四十七장을 읽어보면, 선지자가 이상(理想)한 가운데 보니 하나님의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생수가 흘러나오기를 시작합니다. 흘러내릴수록 그 생명의 강이 점점 커집니다. 내려 갈수록 더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마침내 그 강물 속에는 여러 가지 어족이 성합니다. 그 강 죄 우편에는 아름다운 나무로 무성하게 됩니다. 가 나무는 달마다 열두 종류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인간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에스겔의 이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후로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압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오셔서 일찍이 부르짖으시기를『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다 네게로 와서 마시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생명 샘이 되어 영생토록 솟아나리라.』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영적 은혜를 물에 비교해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물이 있는 곳이라야 어떤 형태의 생명이든지 생명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물은 새롭게 합니다. 물은 깨끗하게 합니다. 물은 새로운 힘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 심령에 미치는 영향은 물이 지구 위에 주는 것과 같은 영향을 줍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은 죽은 가운데서 살아서 생명을 얻습니다. 더럽던 심령이 새로워집니다. 깨끗하여 집니다. 연약하고 피로하였던 심령이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여기 포도주란 말을 썼습니다.『포도주를 사서 마시라.』고 이것은 의미가 심장(深長)합니다.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실 때에 제일 먼저 가나 혼인 잔치에 참여하셔서 물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기독교는 포도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새로운 복음의 종교는 심령을 즐겁게 하려는, 인간에게 참된 만족, 참된 행복, 영에 배부른 것, 흡족한 은혜를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가장 행복 된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올시다. 오는 세상에서도 가장 축복을 받을 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올시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만족한 축복이라는 의미에서 포도주라고 하는 말로 상징을 삼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젖을 사라고 하는 말을 역시 사용했습니다. 젖이야말로 모든 음료 중에 가장 영양이 많은 음료입니다. 사실 한 가지 음료만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라 이 젖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기들이 젖만 먹고삽니다. 젖만 먹고 큽니다. 사실 어른들도 다른 음식 다 없어도 우유만 계속해서 먹고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이 젖 가운데는 우리 육체에 필요한 모든 영약의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전분도 있고, 지방질도 있고, 단백질도 있고, 뼈와 이를 만드는 칼슘도 있고, 피를 맑게 하고 더 힘있게 하는 여러 가지 광물질도 있고, 사람을 자라게 하는 비타민도 많은, 말하자면 이 한 가지 음료, 즉 젖 가운데는 우리 육신에 필요한 모든 영양의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는 이 같은 복음 한 가지 밖에 없지마는, 이 복음 가운데는 우리 영적 영양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 가운데 인간의 가장 높은 지력을 만족시킬 만한 모든 아름다움이 여기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는 영적 생활에 필요한 영양소가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목마른 자들은 물에 나와서 물을 마시고 포도주와 젖을 사서 마시라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을 향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한 가지 더 말씀 드리는 것은 여기 이상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기는 사라고 하면서도 돈 없이 값없이 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돈 없는 자도 오라는 것입니다.『돈 없이 값없이 와서 젖과 포도주를 사서 마시라.』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도 조금만 생각하면 과히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는 이 큰 축복은 돈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세상에 살 때에 돈만 있으면 무엇이나 살 줄 그렇게 압니다.
그러나 사실 깊이 생각해 보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많습니다. 특별히 살 수 없는 것은 이 신령한 축복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은과 금이 필요가 없습니다. 또 사람의 지혜나 지식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의 머리 속에 있는 그 지혜, 그 지식 얼마나 귀합니까? 말하자면 심리적 금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축복을 사지는 못합니다. 사실 이 축복은 세상의 어떤 높은 지위를 가지고도 살 수 없고, 아무리 권세가 많을지라도 그 권세를 가지고도 살수가 없습니다.
또 무슨 공덕, 선행, 우리의 행실을 착하게 하고, 우리가 무슨 좋은 사업을 많이 해서 이런 공덕과 선행을 가지고 이 축복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사람 보기에 선해서 성자란 말을 듣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볼 때에는 다 더러운 옷 밖에는 입을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어떤 선한 일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을 다 했지만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것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선행으로나 사람의 공덕으로도 이 축복을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이가 있어서『나는 지식이 있으니, 나는 돈이 있으니, 나는 이와 같은 선행이 있으니, 나는 공덕이 있으니, 내가 이 축복을 살 수 있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이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이올시다.
값없이 사라는 말은 온전히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없고, 내 무엇으로 조금도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깨닫고, 온전히 빈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겸손히 이 은혜를 그냥 받는 그 사람에게는 이 은혜를 돈으로 어떤 값을 주고도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값없이 사라고 했는데 사실 그것도 뜻이 있습니다. 사실 이 은혜는 값이 없습니다. 사실 웬만한 것, 작은 것에는 값을 매길 수 있지만 아주 엄청난 것에 값을 매길 수 있습니까? 여러분!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서울에 땅 한 평에 어떤 비싼 곳에는 七十만 환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작은 땅값은 매길 수 있어요. 그러나 큰 것을 값 매겨본 사람이 있습니까? 이 지구덩이 값 내본 사람이 있습니까? 저 태양 값이 얼마나 가는지, 그 값 내본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늘 마시고 사는 이 공기를 어느 누구 값 매겨본 사람이 있습니까? 여름마다 하나님께서 풍족히 주시는 이 비를 어디 누구 값 매겨본 사람이 있습니까? 모든 하나님의 크신 축복은 값이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의 심령을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는 십자가의 공로를 값 매길 수 있습니까? 누가 감히 평가할 수 있습니까? 값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돈 없이 값없이『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죄인이올시다. 그러나 나는 목이 마릅니다. 주님 앞에 나아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내 기갈 한 것을 깨닫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에게는 그냥 주십니다. 값없이 돈 없이 그저 신령한 이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냥 준다면서 또 왜 산다는 말을 썼습니까? 그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냥 주면 그냥 준다고 하지, 왜 산다고 하는 말을 썼습니까? 조금 생각해보면, 아마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산 것은 자기 것처럼 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그것은 내가 샀으니 내 것이야. 남이 그냥 준 것은 아니지.』이것은 내 것이 꼭 되었는지 분명하지 못한 생각이 더러 들어 올 때도 있지만 내가 산 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내가 샀으니 이것은 내 집이야. 이 밭도 내가 샀으니 내 것이지.』하고 샀다고 하는 관념이 들어가는 데는 내 것이라고 하는 관념이 있습니다. 아마 그 뜻이 여기 포함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냥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지마는 실상은 하나님께서 알기를 원하는 것은『네가 산 줄로 생각해라, 이것이 꼭 네 것으로 알아라.』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은혜를 받는 사람은 내 것으로 압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여호와는 나의 방패(防牌)시오, 여호와는 나의 피란처(避亂處)시오, 여호와는 나의 산성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救主)시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시오, 하늘의 나라는 내 아버지의 집이오, 내 집입니다. 누구든지 온전히 자기의 영적 기갈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겸손히 이 은혜를 받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아주 주어서 그 사람의 것으로 만듭니다. 내 구주가 됩니다. 내 하나님이 됩니다. 내 천당이 됩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빛이오, 나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축복을 다 받으셨습니까?『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이와 같은 생명 강이 흐르는데 아직까지도 기갈 한 심령, 그대로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얼마나 가련합니까? 얼마나 불쌍합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어떤 사람 하나라도 기갈 한 심령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없이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근심하며 걱정하며 염려하며 민방하고 답답한 가운데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왜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로 비극이 생기고, 여러 가지로 참혹한 뉴스가 나타나고, 매일 자살하는 사람이 몇 건이나 생기고, 여러 가지로 추악한 범죄가 일어납니까? 요컨대, 그 심령 속에 기갈이 있습니다. 이 기갈에 만족을 받지 못했습니다. 생명수를 찾지 못했습니다. 생명수를 찾아서 원만한 생활, 만족한 생활, 흡족한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입니다.
우리 가운데 오늘 아침 한 분이라도 기갈 한 심령을 품고 나온 이가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이 시간에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하나님이시여, 내 심령은 목마릅니다. 나는 아무 무슨 구할 공로가 없습니다. 그저 빈 손 들고 아버지 앞에 나왔으니 생명수로써 나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와 같은 심령 위에 새로운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기도하십시다. (一九五九년 八월 二十三일)
Ⅲ-22 마른손의 회복 (마가복음 三장 一-六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의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막 三·四-五)
예수께서 일찍 회당에 가셨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언제든지 안식일을 당하면 예배당에 가시는 것입니다. 거기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 편 손 마른 사람도 역시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안식일에 예수 님께서 이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시는가, 안 고쳐 주시는가, 엿보고 책잡기 위해서 온 바리새교인 들도 몇 사람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 예수 님께서 들어 가셔서 손 마른 사람을 향해 하시는 말씀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분부한 대로 그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무리를 향해서 물어보았습니다. 모든 무리는 대답도 없이 잠잠히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그 때에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매우 완악(頑惡)한 것을 근심하셔서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손 마른 사람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 그의 손을 내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자기의 마른손을 그냥은 내밀 수 없었습니다. 예수 님의 명령만 듣고 내밀 때에 말랐던 손이 회복되어서 새로운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본 많은 무리들은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린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더욱 분이 가득해서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어떻게 죽일 까 하고 모의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날 안식일에 예수 님께서 회당에 오셔서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신앙을 시정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서 온전히 성한 손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주님께서 같이 참여하신 줄 믿습니다. 땅 끝까지 우리와 같이 계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일지라도 내가 너희 가운데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 이 예배당 안에서 모인 우리에게 역시 두 가지 일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이 바리새인에 대한 그릇된 신앙을 시정하셨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얼핏 생각할 때에 이 사람들은 아주 악한 사람이고 나쁜 사람이라는 희미한 관념만을 가지고 있는 이도 많이 있습니다. 꼭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 이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열심히 읽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데 보통 사람이상으로 열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되 문자 그대로 모든 계명을 엄격히 지키기를 힘쓴 것입니다. 가령 안식일을 지킬 때에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넷째 계명을 그대로 꼭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그 날은 일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남종이나 여종이나 막론하고 일을 시키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심지어 문에 유하는 객이라도 일을 시키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되 문자 그대로 절대 무슨 일을 하지 않고 지키기를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고 안식일을 지키고 있을 때에 예수 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걸어가다가 시장하니까 밀 이상을 비벼 먹었습니다. 다른 사람 밭의 밀이라도 이삭을 비벼서 먹은 것만은 율법이 허락해 주니까 죄로 인정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문자주의자(文字主義者)인 바리새인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삭을 비비는 것은 곧 타작을 하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아니냐? 어찌해서 예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면서 안식일을 바로 지키지 않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들의 이론이었습니다.
문자의 뜻만 알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그 근본 원리는 물론 깨달아 알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문자주의 적인 이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 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불쌍히 여겨 병을 고치는 것도 율법을 범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날도 많은 사람 가운데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왔으니까 오늘도 예수가 과연 안식일을 범해서 저 사람의 병을 고쳐주나 보자고 했습니다. 고쳐 주면, 이야말로 안식일 규칙을 범한 것이니까 그들이 정죄할 수밖에 없는 이단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와 같은 선입주견(先入主見)을 가지고 예수의 하시는 일을 자세히 주목하여 본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을 읽되 문자에 표현된 그 뜻만 깨닫고 그 뒤에 있는 율법의 정신을 잊어버리는 그 주의를 보통으로 문자주의라는 말을 씁니다. 문자 적으로 일하지 말하고 하는 그 말 하나만 깨달았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일하지 말라고 하며, 무슨 까닭으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해 주셨으며,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할 만한 일이란 무엇인지를, 못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모든 계명 배후에 있는 보다 더 깊은 원리와 근본 정신을 이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여기에 바리새인들이 잘못되기 시작한 점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문자 적으로만 해석해 가면서 누구든지 그대로 쫓지 아니하고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다 잘못된 사람인 이단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우리의 의견이 꼭 옳고 우리의 생각이 꼭 옳고 우리의 해석은 절대로 틀림이 없는데….』이런 사상적 경향을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독선주의(獨善主義)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self-righteousness라고, 나만 옳다고 하는 생각, 자기의 의견이 꼭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독선주의를 가지고 결국은 예수 님의 하는 일도 이단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이 바리새인들도 안식일을 지키는 근본 정신을 잊어버렸을 뿐더러,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 그 불쌍한 사람의 병을 고쳐준 것에 대해 기쁘다는 생각은 하나도 없고, 안식일에 일했다는 그 생각에만 사로 잡혀서 예수를 정죄한 것입니다.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곧 그 자리에서 나가서 헤롯당과 의논을 했습니다. 해롯당은 근본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대부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무슨 의논을 했는고 하니, 예수를 죽일 모함을 했습니다. 바로 안식일에 그런 의논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 이런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안식일에 했습니다.
이렇게 조그마한 일로 이런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안식일에 이런 의논을 하였습니다. 더욱이 율법을 믿지도 아니하는 헤롯당과 공모해서 죽이기를 의논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안식일을 범하는 큰 죄악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문자주의는 독선주의를 낳았고, 독선주의는 맹목적 신앙을 낳아서 그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 하여졌습니다. 결국 그들의 신앙은 도덕까지도 무시하여 사람을 죽이려고 음모하는 신앙 생활을 하게끔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처음 시작한 말씀을 기억하세요. 바리새인들이 처음에는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서 열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열심의 방향이 잘못 정하게 되어서 문자주의로 화하고, 문자주의가 독선주의로 화하고, 독선주의가 맹목적 신앙주의로 화해서, 심지어 도덕까지 무시하는 신앙으로 들어가게 될 때, 그 인자하신 주님도 그런 사람을 근심해서 노하심으로 보셨습니다.
네 복음을 보면 가장 철저히 책망하고 공박한 대상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 이와 같이 외곡(猥谷)되고 잘못된 길로 나아가면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망칠뿐더러 그런 사람이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민족과 교회를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 바리새인의 누룩을 삼가라고 말씀했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 님께서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 주셨습니다. 신약 외경(外經)가운데 히브리인의 복음이 있습니다. 이 복음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이 손 마른 사람은 본래 석수 쟁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른 손이 말라 버렸습니다. 신경이 죽고 혈액이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는 석수(石手)일을 할 수 없으니까 빌어먹을 수밖에 없는 불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 님께서 회당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 오른 손을 고치기 위해 회당에 들어왔다고, 좀 더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그 내용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예수 님께서 안식일에 손을 가지고도 쓰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사람의 손을 고쳐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주님께서 회당에 오셔서는 언제든지 이와 같은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체가 보배롭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마는 특별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손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이 손 없이는 거의 아무 것도 못할 지경입니다. 농사하는 사람은 손으로 밭을 갈고, 손으로 씨를 뿌리고, 손으로 김을 매고, 손으로 추수를 합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손으로 물건을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합니다. 주산을 놓고 문부(文簿)를 하는 것도 손으로 합니다. 공인(工人)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손으로 벽돌을 쌓고, 손으로 담을 바르고, 손으로 나무를 깎아야 합니다. 의사는 손으로 수술을 합니다. 간호원은 손으로 붕대를 싸맵니다. 미술가는 손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음악가는 손으로 악기를 연주합니다. 손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손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석공의 손이 하나 말라버렸습니다. 쓸 수가 없습니다. 보기에는 괜찮지만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만 이 사람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에는 얻어먹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님께서 이 사람을 불쌍히 여겨『네 손을 내 앞에 내 밀어라.』명령할 때에 그 명령을 순종하고, 순종할 때에 그 손이 새 힘을 얻어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 아마 제 생각에 여러분 가운데 실제로 손이 마른 이는 계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견지에서 내 손이 마르지 아니하였는가, 늘 스스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이『아들아, 오늘 포도 원에 가서 일하라.』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님께서 다른 데 비유하실 때에는 우리를 다 포도 원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포도 원과 같습니다. 이 하나님의 교회에 들락날락하는 사람은 다 포도 원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 원에서 일하는데 쓸만한 손을 가졌습니까? 손은 있지만 일할 수 없는 보기에 마른손과 같은 이런 손을 가졌습니까? 과연 신령한 의미에서 내 손이 주의 일을 하며, 다른 사람을 봉사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까? 신령한 일을 위해서 내 손이 마른손입니까, 힘있는 손입니까? 내가 주를 위해서 힘있게 일하는 손을 가졌습니까, 힘없는 손을 가졌습니까?
주를 위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 주를 위해서 교회를 받드는 일,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일, 성가대를 돕는 일, 주를 위해서 심방 하는 일,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며 병자를 방문하는 일을 내 손이 능히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까? 영적으로 마른손을 가진 분은 없습니까?
손은 일과 봉사의 상징인데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내 손이 어떤 일과 어떤 봉사를 합니까? 어떤 분은 해방 전에는 튼튼한 손을 가지고 일을 잘했지마는 해방 후에 그 손이 말라버린 이는 없습니까? 어떤 이는 청년 시대에 그 손을 가지고 주의 일을 잘했지마는 장년 시대가 되고 사업이 커지자 그만 그 손이 말라버린 이는 없습니까? 몇 해 전까지는 주의 일을 잘했지마는 금년에 와서는 그만 손이 말라빠진 이는 없습니까?
마른손을 회복하는 오늘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자리에 계셔서 여러분의 손을 보십니다. 여러분의 손이 말랐는지, 주의 일을 하여 튼튼한지 여러분의 손을 보십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마른손을 가지고 이 자리에 온 이가 있으면『네 손을 내밀라.』하십니다. 마른손을 주님 앞에 내어 밉시다. 그래서 주님의 새로운 은혜와 새로운 능력을 받아서 일할 수 있는 손, 봉사할 수 있는 손을 회복해 가지고 이 자리에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또, 손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기도하는데 많이 사용했습니다.『내가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부르짖나이다.』이런 말씀이 시편에 종종 나옵니다.『주의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부르짖나이다.』그 뜻은 옛날 사람들은 기도할 때에 손을 들고 했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인도해 나올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싸웠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군대를 거느리고 아말렉과 싸울 그 때에 모세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두 손을 들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너무 손이 피곤해서 손을 내리니까, 아말랙 사람이 이기고 이스라엘 사람이 쫓겨오게 되었습니다. 다시 손을 들어 기도하면 여호수아의 군대가 이기고 아말렉 사람이 쫓겨갔습니다. 마지막에 손이 너무 피곤하게 되니까 아론과 홀이 그 옆에 가서 모세의 두 손을 부축해서 계속해서 손을 들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에 이스라엘 군대가 완전한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기도할 때에 합장해서 기도합니다. 손은 기도의 상징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기도를 위해서 항상 손을 들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혹시 마르지 아니했습니까? 여러분이 기도를 위해서 여러분의 손을 항상 드십니까? 지금이야말로 모세가 두 손을 내릴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오늘날 한국의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글자 그대로 두 손을 내릴 수 없습니다. 왜? 우리도 전쟁 가운데 있습니다. 아말렉과 싸우는 중에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정전하였다고 하지마는 공산당과 지금도 싸우는 중에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냉전 가운데 있습니다. 무신론과 싸우고 유물론과 싸우고 남한에 있는 여러 가지 죄악의 세력과 싸우는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손을 내릴 수가 없을 때입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하나님 보좌를 향해서 올라갑니까? 새벽에 일어나서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하나님을 향해서 올라갑니까? 삼일 기도회 시간에 여러분의 손이 하나님을 향해 올라갑니까? 가정 기도회로서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올라갑니까? 구역 기도회에서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하나님을 향해서 올라갑니까?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어떻습니까? 기도의 손이 마르신 분은 없습니까? 전에는 기도회가 힘이 있어서 바로 손이 올라갔지마는 지금은 다 맥이 빠져서 말라빠진 그런 기도의 손은 없습니까? 여러분은 아십니다. 우리 주님은 보시고 아십니다. 그런 손을 향해서도 예수 님께서 오늘 아침에도『네 손을 내밀라』하셨습니다. 주님 앞에 그 손을 내미십시오. 그리고 새 힘을 얻으십시오. 지금은 졸 때가 아니고 기도할 때입니다. 깨어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의 마른손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손은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데 씁니다. 갈라디아 二장 九절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자들과 같이 의논할 때에 그 경험을 기록하면서 이런 말씀으로 기록했습니다.『예루살렘에 있는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 들이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전의 번역에는 오른 손을 주어서 교제를 하였다고 되었고, 새 번역에는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제의 악수, 성도들이 서로 가까이 사귈 때에 그 표로써 서로 악수를 합니다. 손에 손을 잡고 악수를 합니다. 이 손은 성도의 가까운 교제의 상징입니다.
예수 님께서 다락방에서 기도하실 때에 간절히 기도한 제목 가운데 하나는 주를 믿는 사람이 다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분열되지 말고 싸우지 말고 주를 믿는 사람이 다 아버지와 주 예수께서 하나가 된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四장에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했습니다. 주도하나요, 교회도 하나요, 아버지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우리의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성령이 하나 되게 할 것을 굳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언제든지 손에 손을 잡고 주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교제의 손이 마른 분은 없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과는 다 악수는 하면서도『아무개는 보기도 싫어, 말도 안 할 테야.』라고 교제의 손이 마른 분은 없습니까? 오늘날 심히 섭섭한 것은 어떤 이들 가운데는 이 성도가 서로 주안에서 하나 된 것을 잊어버리고 이 성도의 교제를 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염려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한 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주안에서 손에 손을 잡고 하나가 될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비록 교파는 다르지마는 다른 교파라고 세계 어느 곳에 있든지 참으로 주를 믿는 성도들과 서로 연락하고 교제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이 교제의 손을 끊는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이 아닙니다. 교제의 손이 마른 분은 없습니까? 저는 모릅니다. 여러분은 아시고 주님께서는 이 자리에서 다 보시고 아십니다.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성도의 교제의 손이 마른 분이 있으면 그 손을 이제 주님 앞에 내 미시기를 바랍니다. 상한 영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멀어진 우리를 가깝게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제의 마른손을 회복하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손은 일과 봉사의 상징입니다. 이 방에 마른손이 있으면 곧 주님 앞에 나아와서『주님이시오, 내 손을 내 밉니다. 내 손에 새로운 힘을 주어서 주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내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시다. 내 기도의 손이 그 동안 말랐었습니다. 이제 이 시간부터 주를 항해서 들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합시다.『성도와 교제를 끊는 이가 있습니다. 이제 이 마른손을 내미오니 이 마른손에 힘을 주시어 모든 성도들과 주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주시옵소서.』우리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一九五九년 八월 三十일)
Ⅲ-23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갈라디아 六장 一-十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六·九)
디모데 후서 三장 十三절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오늘,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선이라고 하는 말은 꼭 자선이라고 하는 뜻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좋은 일을 가리켰습니다. 성신으로 심는 일, 그러니까 착한 행실, 복음전도, 교회봉사, 일반사회에 대한 봉사, 이와 같은 모든 착한 행실과 일들을 가리켰습니다. 이와 같이『좋은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여기 낙심이라고 하는 말은 좀 너무 뜻이 과하게 번역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아마 피곤해지지 말라, 혹은 맥이 풀리지 말라는 뜻이 좀더 원문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을 하다가 맥이 풀리지 말라는 뜻입니다.『그리고 피곤하지 아니하면』이란 말은 사실 낙심하지 아니하면 하는 그 뜻이 좀더 있겠습니다.『낙심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두리라.』하는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성신으로 심는 생활, 선한 씨를 뿌리는 생활인데 선한 씨를 뿌리다가 맥이 풀이지 말라 하는 그 말입니다. 맥이 풀리지 아니하고 그냥 계속해서 낙심하지 않고 뿌리면 반드시 때가 올 터이고, 때가 오면 거둘 것이라 하는 그 교훈을 여기에 거듭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 二장 十절에는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우리는 하나님의 만드신 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사 선한 일을 하려 하셨으니…』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새로 지으신, 말하자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영적 작품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 사람으로 지으신 것은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신의 씨를 뿌리는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작품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참된 신앙에 들어와서 성신으로 심기를 시작한 사람들, 선한 사람들, 선한 씨를 뿌리기를 시작한 사람들, 선한 씨를 몇 해 동안 혹은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뿌리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런 사람들로 중심해서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직까지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온전한 새 사람이 되지 못하였으면, 물론 그런 이들의 첫째 할 의무는 온전히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새 사람으로 하나님의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런 자리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하면 그이의 생활은 지금도 육신만을 심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의 씨를 뿌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생활은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이 씨를 뿌리는 생활인데 성신으로 선한 씨를 뿌리지 못하면 마음으로나 말로나 행실로나 육신의 씨, 곧 악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이와 같은 새로운 성신의 씨를 뿌리는 생활에 들어오지 못한 이는 그 첫 단계가 우선 이와 같은 생활에 들어오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러한 생활에 들어와서 성신으로 여러 해 동안 심고 선한 씨를 뿌리는 사람을 향해서 여기 특별히 권면하는 말씀은 그렇게 선한 씨를 뿌리는 생활을 하다가 맥이 나지 말라 하는 그 말입니다. 선한 씨를 뿌리다가 맥이 나서 낙심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이와 같은 이들을 중심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면하십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선한 씨를 뿌리다가 낙심하게 되는 원인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큰 환난을 만나게 될 때에, 갈수록 산악이 중첩되는 것과 같이 역경과 난관을 겹쳐서 당하게 되면 그만 맥이 나서 낙심하는 자리에 이르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 나서 성신으로 심는 사람이 되었거나, 선한 씨를 매일 뿌린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는 환난이 아주 떠났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같은 약조는 성경에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도 환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건강의 실패가 오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사업의 실패를 당하기도 하고 가정에 우환과 질고(疾苦)가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눈물의 사자가 그런 가정을 방문할 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 가운데『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받으나……』환난 받지 않는다는 약조는 없습니다. 환난 받겠다고 그랬습니다.『환난을 받으나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시고 우리에게 미리 경고하여 주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선한 씨를 뿌리다가 낙심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 욥의 경우를 잠깐 회상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욥의 생활에 그렇게 난데없는 환난과 재난이 겸해서 이르게 될 때에, 만일 욥이 맥이 풀리고 낙심이 났으면, 어떻게 오늘날 우리가 아는 욥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환난 가운데서도 맥이 나지 아니하도록 우리가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또 어떤 때에는 도덕적 우주에 대한 회의심에서 맥이 풀릴 때가 없지 않아 있을 수 있습니다. 시편 七十三편을 한 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의 저자는 이 우주를 도덕적 견지에서 살펴 볼 때에 큰 의심이 마음가운데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가만히 잠깐 살펴보니 악한 자들이 하는 일들이 다 형통하여 보입니다. 그들로 말하면 교만으로써 눈이 솟아 나왔고 강포(强暴)로써 옷을 입듯이 그런 생활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은 권세가 더 많아지고 몸도 오히려 건강하고 더욱 재산까지도 늘어가니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바른 생활을 하고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는 데 내 하는 일은 이렇게 잘 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이 불행한 가운데 빠지게 되었고 이렇게 곤궁한 자리에 있게 되었으니 이래서야 어떻게 하나님을 계속해서 공경하며 일할 수 있습니까? 이 시인이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내가 하마 트면 미끄러질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이 이 시인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고요히 묵상할 때에 갑자기 깨닫게 되었습니다. 악한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 성하는 것 같지마는 아침에 풀이 자라다가 갑자기 베임을 당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 사람들에게 내리는 그 원리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이런 의심 가운데서 일으켜 주신 것을 감사한 노래가 시편 七十三편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단편적으로 볼 때, 그와 같은 의심 가운데서 맥이 풀리기 쉽습니다. 나 혼자 선한 씨를 뿌려서 무엇하나, 아무리 이렇게 살아야 무엇하나, 별 것이 있나 하면 맥이 풀리기 쉽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면 옛날 요셉도 이와 같은 시험을 받았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에 청년으로서 이기기 힘든 시험까지 담대히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칭찬과 상을 받지 못할망정 오리려 벌을 받아서 깊은 형무소에까지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보통 청년 같으면 그런 자리에서 맥이 풀려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아니했습니다. 성신으로 심는 생활, 선한 씨를 뿌리는 생활을 그냥 계속해서 감옥 가운데서도 살았습니다. 그 결과는 자기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큰 축복을 마지막에 받은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도덕적으로 일어나는 회의심 가운데서 낙심하면 아니 됩니다.
또한 셋째로는, 냉정한 사회에 직면하게 될 때에, 나의 하는 일에 대하여 동정과 격려가 도무지 없이 스스로 고독을 느끼게 될 때에, 잘못하면 낙심하기 쉬운 것입니다. 나는 아무리 이렇게 애쓰되 눈 한번 거들떠보는 사람 있나? 나는 아무리 애써서 수고하고 좋은 일을 하느라고 힘쓰지마는 세상에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 있나? 이런 생각이 들어 올 수 있습니다.『나는 아무리 교회 봉사를 잘하고 심방도 열심히 잘하고 하지만, 교역자나 장로가 누구 하나 칭찬하는 때가 어디 있나?』『나는 아무리 양심적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애쓰고 빈궁과 다투면서 내 자리를 지키지마는, 내 이 사정 알아주는 상관 누구 있나? 그저 빽이 있어야 윗자리로 올라가지.』이와 같은 고독을 느낄 때에 맥이 풀리기 쉬운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힘써 나오던 사람 가운데도 오히려 이와 같은 시험에 빠져서 낙심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와 같은 시험이 마음가운데 들어올 때에 고요히 생각해야 됩니다. 사실 우리가 남의 얼굴이나 보고 선을 행해서야 그것이 무슨 선입니까? 남의 칭찬하는 말이나 듣고 그 말에 격려를 받아서 우리의 선한 씨를 뿌리는 생활을 계속해서야 그것이 무슨 참된 선한 씨의 파종자(播種者)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옛날부터 내려오는 성현의 말씀가운데도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란 말이 있습니다.『덕은 외롭지 않은지라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장차 때가 되면 세상 사람도 알아줄 때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알든지 모르든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는 아시는 것입니다.
컬럼버스를 생각해 보십시오. 컬럼버스가 제일먼저, 그냥 서 편으로 항해해 가면 직선으로 인도 곧 동양에 갈 수 있다고 하는,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경영할 때에 도와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마지막 선반아 왕족의 후원을 받아서 배를 지어 가지고 출항하여 서편을 향해 갔지마는 아무리 가도 육지가 보이지 아니할 때에 심지어 같이 가던 선 부들도 반항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컬럼버스의 뜻을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컬럼버스는 계속해서 낙심하지 아니하고 그냥 노를 저으라고 하여 끝까지 나아갈 때에 인도까지 오지는 못했지만, 인도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아서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노를 젓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예기 이상의 큰 축복으로 우리에게 마지막날 주는 것입니다.
넷째로, 세상 사람들이 몰라줄뿐더러 옳게 하고 바른 씨를 뿌린다고 해서 세상이 나를 비난하고 나를 오해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핍박하고 배은망덕의 생동을 나에게 감행하고 오히려 내가 기른 개가 내 발꿈치를 무는 격으로 이와 같은 일을 당할 때도 세상에는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때 잘못하면 우리의 맥이 풀리고 낙심하기 매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 우리가 낙심하면 아니 됩니다.
모세의 생활을 보십시오, 그이의 신앙이 얼마나 크고, 그이가 얼마나 참된 애국자며, 그이가 얼마나 위대한 지도자였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四十년 동안 광야를 지나서 나오는 동안에 얼마나 모세를 비난했으며, 얼마나 모세를 오해했으며, 마지막에는 반기를 드는 일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의 형 아론과 누이까지도 비난할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낙심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한 후에는 새로운 힘을 얻어서 그냥 나간 것입니다. 비난과 오해와 핍박이 있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생활을 생각해 봅시다. 얼마나 많은 비난과 오해와 핍박을 받았습니까? 예수 님께서 친히 또한 말씀하시기를『너희도 내 이름으로 핍박을 받고, 욕을 먹도 악하다고 하는 거짓말을 들으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그랬습니다. 옛날 선지자들도 그와 같은 일을 당하였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아무리 애써도 무슨 성과가 되어지지 않을 때에 조금 잘못하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선한 씨를 뿌려도 무슨 특별한 열매 맺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아니합니다. 이럴 때에 그만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이 말을 첨가했습니다.『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때가 이르겠다고 그랬습니다.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두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거둔다고 해서 봄에 뿌려서 그 이튿날 곧 거둡니까? 기다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옛날 맹자의 말 가운데 있는, 제 나라 어느 사람처럼 곡식을 심어 놓고 빨리 크지 않으니까 너무 급해서 얼른 커서 열매를 맺으라고 하루아침에는 나가서 전부 고개를 뽑아 놓았답니다. 너무 그렇게 급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때는 사람의 때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때가 올 때에는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어떤 것은 내가 심고 거둡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둡니다. 어떤 경우는 이 세대에 심은 것을 이 세대에 거둡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이 대에 심은 것을 다음 세대에 가서야 거둡니다. 어떤 것은 이 세상에서 심어서 이 세상에서 거둡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이 세상에서 심은 모든 것을 하늘 나라에서 거둘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거둘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곧 무슨 성과가 나지 아니한다고 조급한 마음으로 낙심해서 안 될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떡을 물위에 던지면 오랜 후에 그 떡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때가 있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제가 지난주간 잠깐 시간 있어서 그 주 타임 잡지를 펼쳐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일본 북해도 어느 해변에서 된 일인데 그 해변가에 아이들 네 형제가 함께 사는 집이 있습니다. 제일 큰 아이가 열 네 살, 그 다음이 열 두 살, 그 다음이 열 살, 아홉 살 된 남자 네 형제가 그 해변가에서 살았습니다.
어부의 아들이니까 몰론 헤엄도 잘 칠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날이 밝아 헤엄치려 가자고 하면서 제일 큰애가 먼저 헤엄을 쳐서 한 五十야드밖에 있는 바위를 향해서 헤엄쳐 갑니다. 그러니 또 둘째 놈이 따라가고, 셋째 놈이 따라가, 넷째 놈까지 연달아 따라 헤엄쳐 갔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제일 큰 애가 보니까, 저 편에서 큰 상어 한 마리가 마주 옵니다. 상어를 사람까지 잡아먹는 놈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얼른 돌아서면서,『야 상오 오는데 빨리 도망하자.』소리 질렸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일제히 돌아서서 언덕으로 헤엄쳐 돌아갔습니다. 조그만 아이들은 언덕에서 조금 갔었으니 까 곧 언덕으로 올라 왔습니다. 그러나 큰애는 미쳐 올라오지 못했습니다. 그 상어가 거의 가까워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어가 사람을 물때에는 가까이 와서 뒷다리를 무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와서는 오히려 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올라오면서 배를 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보니까 이 놈이 따라오다가 물 속으로 들어가더랍니다. 경험 있는 아이였기 때문에 얼른 향해서 가다가 뒤로 돌아섰습니다. 돌아서 보니까 상어란 놈이 자기 앞에 와서 공중으로 입을 벌리고 헛 물고서는 옆으로 나가 자빠졌습니다.
그 때 이 아이는 얼른 가서 상어 옆을 붙잡았습니다. 상어를 잡아 탄 것입니다. 타고서는 이것을 놓으면 죽겠는데 놓겠습니까? 꼭 붙어 안고는 상어하고 싸웁니다. 그것을 세 아이가 보다가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전부 물 속으로 따라 들어가서는 넷이 모두 상어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바다가운데서 싸웁니다. 그런데 계속 그대로 싸웠으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침 큰물결이 바다에서 밀려오면서 상어나 상어를 붙잡은 아이들이나 전부 물 얕은 곳으로 내밀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전부 다 물이 한길밖에 안 되는 얕은 곳에 밀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어란 놈이 물이 얕은 곳에서는 옴짝달싹 못합니다.
네 아이가 그 옆에 있는 돌멩이를 들고 돌멩이로 때려잡았습니다. 그 이야기 제목을「자이언트 킬러스」(giant killers)즉, 거물을 죽이는 사람들이라고 붙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가만히 읽어보니 이 아이들이 자기의 힘에 넘치는 악한 상어와 지금 싸우는 중입니다. 단단히 붙잡았기에 자기들이 죽지 않았지, 놓았으면 죽을 뻔했습니다. 단단히 붙잡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단단히 붙잡고 싸운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아마 이기지는 못했겠지요. 결국은 큰 물결이 와서 전부 얕은 곳으로 밀어내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작은아이들이 일곱 자나 되고 백 팔십 파운드나 되는 큰 상어를 잡았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에 어떤 때에는 악의 세력이 너무 커서 이 어린아이들이 상어를 붙잡고 싸우는 것과 같은 이런 느낌이 우리 마음 가운데도 들어올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악의 세력을 붙잡고 싸울 때에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붙잡고 싸우면 하나님의 큰 권능의 물결이 우리를 도와줍니다. 그래서 악의 세력을 온전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말합니다. 남한에 악의 세력이 얼마나 많은가, 북한에 공산당이라고 하는 악의 세력이 얼마나 많은가.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는가.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악의 세력이 커 보이지마는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아니하고 계속해 싸우면, 하나님의 큰 권능의 물결인 역사의 파도가 반드시 우리를 도와 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 한데 편지할 때에 이런 말씀을 기록했습니다.『전에와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尊貴)되게 하려 하노니……』「전에와 같이 이제도……」전에 젊었을 때와 같이 바울이 비록 나이 많았어도 시종 여일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바울의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아니했습니다. 낙심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一九五九년 九월 六일)
Ⅲ-24 소극적 죄 (마태복음 二十五장 十四-三十절)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二十五·三十)
이 말씀은 집주인이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에게 내린 벌입니다. 이 달란트 비유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압니다. 어떤 부잣집 주인이 먼 곳에 여행을 가려고 할 때에, 종들을 불러서 각각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주고, 또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주면서 주인의 명령하신 말씀은 그가 떠나 있는 동안에 이것을 가지고 너희들이 장사하라고 한 것입니다. 금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장사를 잘해서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꼭 그와 같이 해서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활용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땅 속에 묻어 두었었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회계를 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다 두 배 이익을 남겨서 주인에게 바칠 때에 주인이 대단히 기뻐서 잘하였다고 칭찬하면서『착하고 진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이와 같이 충성되니 내가 이 앞으로 큰 일로 맡기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땅에 묻어 두었던 그대로 한 달란트를 주인에게 가지고 와서 바치면서『내가 알기에 주인은 대단히 굳은 사람인데 헤치지 않는 데서도 거두고 뿌리지 않은 곳에서 모으는 분인데 내가 이것을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냥 가지고 왔으니 본전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주인이 들을 때에 대단히 노해서『악하고 게으른 종아 네가 만일 내가 뿌리지 않는 데서도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도 거두는 줄 이렇게 알았다고 하면 어찌해서 이것을 은행에라도 갔다 두어서 이자라도 같이 가져오지 아니 했느냐?』그러면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고, 다시 하시는 말씀이『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이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에게 대한 형벌이 너무 과하지 아니한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그 본전마저 낭비했다고 하면 모르지마는 그대로 본전은 그냥 가지고 왔는데 본전을 빼앗았을 뿐더러 마지막에는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쫓으라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내렸으니 너무 과하지 아니한가 라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공정히 심판할 줄 아시는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죄 가운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적극적 죄입니다.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는 죄입니다. 도둑질을 하는 것, 협잡을 하는 것, 간음을 하는 것, 도박을 하는 것, 술에 취하는 것, 악한 짓을 적극적으로 하는 죄악입니다. 이런 것을 적극적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소극적 범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할 것을 하지 않는 것, 주인의 명령을 받았는데 명령대로 하지 않는 것, 의무를 실행하지 않는 것, 선을 행하라고 하였는데 행하지 않는 것, 등은 소극적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물론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때에 적극적인 죄를 먼저 회개합니다. 도둑질하던 자가 도둑질을 금합니다. 술 취하던 자가 술을 금합니다. 거짓말을 하던 자가 거짓말을 하지 아니합니다. 물론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 믿을 때에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던 것을 중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적극적으로 죄악을 짓지 않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과거의 죄를 청산한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가며 그리스도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하는 것, 그리스도의 명하는 모든 선을 행하는 것,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적극적으로 다른 죄악은 짓지 않지만, 소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한 걸음 나아가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소극적으로 그리스도 앞에 죄는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 원리를 깊이 깨닫지 못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을 전에 하던 일, 나쁜 일만 안 하면 그 다음에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절반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을 삼으신 것은 우리들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 하실 일이 있어서 우리를 불려서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명령을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는 소극적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예수 님의 교훈과 성경의 교훈을 보면, 이 소극적으로 죄를 지은 자에 대해서도 얼마나 중한 벌이 내렸는지 우리가 잠깐만 생각해 보드라도 분명히 깨달아 알 수가 있습니다. 우선 이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을 보십시오. 돈을 때어 먹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쫓으라고 엄히 명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모압 평지에 왔을 때, 그 때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들이 모세에게 와서 부탁하는 말이 자기들은 가축이 많이 있는데 이 지방에 보니까 초장(草場)이 많이 있으므로 요단강을 건너갈 것 없이 이 길르앗 지방에서 살게 해주셨으면 고맙겠다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모세가 곧 대답하는 말은 이렇습니다.『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나아가거늘 너희들은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너희 형제는 이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복지를 전취(戰取)하기 위해서 싸우러 나가려 준비하는 중에 있는데 너희는 이미 이 자리에 왔다고 가만히 이 자리에 앉아 있겠느냐?』『너희도 무장하고 같이 나아가서 요단강을 건너 같이 싸워서 다른 형제들도 다 분 깃을 얻은 다음에 그 다음에 돌아와서 너희 원하는 이 곳을 차지하라. 그러나 이제 그런 말하는 것은 큰 죄가 될 터이니 너희가 만일 그런 죄를 지었다가는 이 다음에는 그 죄가 너를 찾아 만날 때가 있겠으니 그리 알라.』엄히 경계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소극적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경고입니다.
사사기(士師記) 五장을 읽어보면, 거기 유명한 드보라의 승전의 노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거니와 드보라는 이스라엘 가운데 유명한 여 선지자요 또 사사였습니다. 그 때 가나안 왕 야빈과 그 군대 장관인 시스라가 큰 군대를 동원해서 이스라엘 경내로 침노해 들어왔습니다. 이 때, 여 선지자 드보라가 바락과 같이 다볼산에 모든 이스라엘 청년들을 모아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야빈과 시스라를 요격해서 다볼산에서 내려오면서 무찔러서 이 강한 군대를 헤쳐 버리고 야빈과 시스라를 다 쫓아버려 죽게 했습니다. 그래서 크게 승리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의 승리의 노래는 불렀는데 그 노래 가운데 二十三절에 내려가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 거듭 그 거민(居民)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다 칭찬하며 감사하다고 노래 불러 내려가다가 무슨 말이 있는고 하니『여호와의 사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메로스를 너희들은 저주하라, 너희들이 메로스에 사는 사람들을 거듭 거듭 저주할 것은 그 사람들은 여호와를 도와서 강한 자를 치러 오지 않은 까닭이니라.』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이 원수를 맞아 싸우려고 나왔는데 메로스 동네에 있는 사람만은 나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협력을 안 했습니다.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하나님의 사자의 말씀이 이 사람들을 저주하고는 것입니다. 이 메로스 사람들이 저쪽에 붙어서 간첩 행위를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단순히 남이 다 나아가 싸울 때에 싸우지 아니하고 가만히 자기 동네에 있었습니다. 그 까닭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또 이 저주한 말대로 된 모양입니다. 왜냐 하면 메로스 동네에 대한 기록은 이 곳밖에는 성경에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아주 멸망하고 만 모양입니다.
이런 교훈은 구약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二十五장 마지막에 유명한 양과 염소의 비유에도 이 교훈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 다음에 인자가 오셔서 모든 사람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다 갈라놓으십니다.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 즉 의인을 향해서 그 인자가 칭찬을 합니다.『너희는 만세 전부터 준비해 저었던 축복에 들어와서 복을 받으라.』그러면서 계속해서 하는 말이『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여러 가지 좋은 일 한 것을 쭉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그들이 언제 주님에게 그렇게 했었느냐고 물을 때에『내 형제 가운데 지극히 적은 이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보세요. 왼 편에 있는 염소와 같은 그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이 이렇습니다.『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를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지 아니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들이 마실 것은 주지 아니했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너희가 입을 것을 주지 아니했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너희가 와 보지 아니했고, 내가 병났을 때에 너희가 찾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그들도 하는 말이『언제 주님께서 주리를 것을 우리가 보았고, 언제 주님께서 헐벗은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까?』 인자가 대답하는 말이『네 형제 중 지극히 적은 이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
자, 여러분, 이 염소 편에서 저주를 받은 사람의 죄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들이 무슨 도둑질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간음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허랑 방탕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이 사람들의 죄가 무엇입니까? 하지 않은 죄입니다. 적은 자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한 것이 소극적 죄입니다.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아니한 것이 소극적 죄입니다.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아니한 것이 소극적 죄입니다. 병났을 때에 와서 보지 아니한 것이 소극적 죄입니다. 감옥에 있을 때에 와서 심방 하지 아니한 것이 소극적 죄입니다. 할 일을 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는 불에 들어가라고 예수 님께서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또 예수 님께서 이렇게 교훈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행 하셨습니다. 한번은 베다니에서 예수 님께서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에 주리셨습니다. 먼 곳을 보니까 잎이 성한 큰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혹 무화과가 열렸을까 하고 예수 님께서 가 보았습니다. 정작 가보니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었습니다. 예수 님께서 그 때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습니다.『이 앞으로 네 나무에서 열매를 다시 먹을 자가 없으리라.』얼마 후에 와보니 뿌리부터 가지까지 온전히 말랐다고 그랬습니다. 그 무화과나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지은 죄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무화과나무를 거기 심은 것은 열매를 맺으라고 심었는데 열매를 맺지 아니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소극적 죄를 지은 까닭으로 무화과에 벌을 주었습니다.
두려운 교훈입니다. 이렇게 소극적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주지 않는 생활을 하면서도 자기가 죄짓는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심판대 앞에 가서야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마땅히 해야될 의무를 하니 않으면서도 이것이 죄라고 하는 것을 깨eke습니까? 깨닫지 못합니까?
두려운 교훈입니다. 이 교훈을 가만히 생각할 대에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떨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교훈을 여러분에게 솔직히 말할 때에 많이 주저하다가 이 말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왜 소극적 죄를 적극적 죄와 같이 엄하게 형벌 하십니까? 그 원인은 적극적 죄악이나 소극적 죄악이나 비슷합니다. 가령 왜 이와 같이 할 것을 하지 않게 되느냐?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첫째는 이기심(利己心)입니다. 이 이기심에 의지해서 우리가 할 것을 하지 못할 때 많이 있습니다. 그 때 르우벤과 갓 자손이 요단강에 건너 갈 것이 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 앉아 있겠다고 한 것도 평안하다는 이기심입니다. 또 의뢰심(依賴心)입니다. 왜 메로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은 다 전쟁에 나갔는데 같이 나가지 않았습니까? 다 나아가 싸우는 동안에 자기는 가만있다가 남의 덕에 좀 잘 살아 보자는 의뢰심입니다. 속담에 있는 말대로 굿 구경이나 하다가 덕이나 먹자는 의뢰심입니다.
어떤 때에는 거짓 겸손으로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안 할 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겸손은 우리 기독교의 가장 아름다운 덕입니다. 나를 부족하게 생각하고 다루는 태도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나를 낮추며 부족한 줄 알면서도 내가 할 의무에 들어가서는 내가 이렇게 부족하니까 온 정성을 다해서 내 의무를 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나서는 사람이 참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거짓으로 겸손한 사람이란『나는 이렇게 부족하고 나는 이렇게 모든 일에 다 능하지 못하니 나야 어떻게 할 수 있나? 난 아무 것도 못해.』하고 뒤로 물러섭니다. 그것은 겸손 이 아니고 비겁(卑怯)입니다. 아마 메로스 사람들도 그랬는가 봅니다.『우리야 뭐 싸울 줄 알아야지, 뒤로 물러앉아야지.』그것은 겸손 이 아니고 비겁 입니다.
어떤 때는 공포심으로 할 일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 이 메로스 사람들이 전쟁에 나가지 못한 것은 무서워서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주인이 무서워서 그것을 땅에 파묻어 두었다고 그랬습니다. 공포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두려워 말라고 성경에 거듭해서 우리에게 권면해 줍니다.『내가 너와 같이 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내가 네 하나님이니 무서워하지 말라.』『내가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어 줄 터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믿는 사람이 두려운 마음으로 의무에서 물러가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무를 다 못하는 이유는 태만과 게으른 마음 때문입니다. 아마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묻어 둔 것은 다른 이유보다도 게으른 탓입니다. 그러기에 주인이 책망할 때에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이 메로스 사람들도 아나 게을러서 전쟁에 참가 못했는데 알 수 없습니다. 남도 다 전쟁에 나온다고 했는데 우리도 나가야지. 내일쯤 나갈까? 모래쯤 나갈까? 모래 가서는 또 글피쯤 나갈까 하는 동안에 전쟁은 다 끝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게을러서 어떤 이들은 일을 하기는 해야 되겠는데 명년에나 해보지, 그 다음 명년 가서는 또 명년에나 해보겠다고 합니다. 전도도 한다. 전도 회에도 든다, 십일조도 한다 하면서 그저 세월이 다 지나가고 맙니다. 게을러서 의무를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 아마 적극적으로 악한 죄를 짓는 사람은 매우 드물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은 그대로 하지 못함으로 짓는 이 소극적 의미에 죄는 누구나 다 지을 줄 압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죄를 짓지 아니하고 적극적으로 내 책임을 감당 할 수가 있겠느냐? 오늘, 여러분께서 들은 이 달란트의 비유를 우리가 마음가운데 깊이 기억하면 될 줄 압니다. 우리는 하나 하나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장사하라고 하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앞으로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서 회계할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지식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가 물질이 많든지 적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이렇게 받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장사해서 이익을 남기라고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적극적으로 악한 죄를 짓지 아니할뿐더러 소극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의무에서 물러가게 되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실제로 만일 우리가 이 죄를 짓지 아니하고 예수 님의 본래 뜻하신 대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아마 우선 우리가 어디 있든지 주님을 일을 해야 될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교회에 나오면, 교회의 여러 기관도 많고, 여러 단체도 많아서, 어떻든지 협력해서 내가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여전도 회는 참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서 회원도 많고 일이 잘 됩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우리 교회의 하나의 부끄러움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남 전도 회는 특별히 약한 모양입니다. 이건 특별히 우리 한국 교회의 부끄러움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문과 잡지에서 보는 대로 여러 미국교회 같은 데서는 특별히 과거 十년 동안에 남자 교우들 가운데 평신도 운동이라고 해서 전도하는 운동이 굉장히 일어납니다. 남자들 가운데 가령 호별 방문 전도 단을 조직해서 일주일에 한 번이든 두 번이든 같이 교회에 모여서 기도하고 두 집으로부터 혹은 다섯 집까지 방문할 만한 집을 택해서는 꼭 방문합니다. 남자들이 저녁 시간을 제공해서 전도하므로 교회가 크게 부흥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 한국교회에서 남자들 가운데 이런 호별 방문 전도 단이 조직되었다고 하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만일 우리 하나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본 받아서 좋은 청지기가 되어 우리의 책임을 다 감당한다고 하면, 우리 한국교회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교회마다 일군이 적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마다 예산이 부족하지 아니합니다. 오늘날 우리교회서 전도 인을 파송 한다는 것이 절대로 자랑이 아닐 것입니다.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특별히 가을은 추수하는 때입니다. 영적으로 많은 추수를 해서 하나님의 곡간에 들이기 위해서 일군을 부르는 때입니다. 기도합시다. (一九五九년 九월 十三일)
Ⅲ-25 다윗의 죄와 그 벌 (사무엘 하 十二장 一-十五상반절)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삼하 十二·十三-十四)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실 때에 한 소경이 앉아서 구걸하다가 예수 님이 지나가신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부르짖으며『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분입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난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모든 제왕 가운데 가장 유명한 왕입니다. 다윗이 사방에 둘러 있는 모든 원수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국가의 기초를 확립한 것입니다. 또한 다윗이 예루살렘을 국가의 수도로 정하고 법궤(法櫃)를 그리고 가져다가 장차 성전의 기지를 정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정의와 인도의 통치자로서 또는 이상적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어떠한 왕보다도 많은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오늘 저녁에 다윗의 생활을 잠깐 회고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문자 그대로 다방면에 천재적 인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어려서는 목사로서 나타났습니다. 또한 수금(竪琴)을 잘 탈 수 있는 음악가로서도 나타났습니다. 많은 시를 친히 지은 시인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읽는 시편 가운데 七十三편이 다윗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는 천병만마(千兵萬馬)를 능히 호령해서 적진을 물리칠 수 있는 위대한 군인이었습니다. 또한 일 국의 모든 정치를 어거(馭車)해 나갈 수 있는 큰 정치가로서, 또한 역사상에 나나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먼저 그의 생활을 간략히 소개하면 그는 베들레헴에서 났습니다. 그 때부터 베들레헴은 다윗 성으로 불리우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도 역시 베들레헴에서 나시게 된 것입니다. 이새라고 하는 사람의 여덟째아들로서, 말하자면 막내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도와서 베들레헴들에서 양을 쳤습니다. 이렇게 아직도 어릴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준비로서 그 머리에 기름을 부음을 받은 것입니다.
점점 자람에 따라서 음악가로서 사울의 조정에 나아가 사울 에게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소년 시절에,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큰 원수인 불레셋 사람의 대장인 골리앗을 물 맷돌 하나로써 격멸(擊滅)하므로 말미암아, 갑자기 다윗의 이름이 온 천하에 떨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때부터 사울 왕조에 있으면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가까운 친구가 되게 되었고 또한 사울 왕의 딸 미갈과 결혼해서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마는 다윗의 이름이 점점 높아감에 따라, 또한 사울 왕의 시기를 받아서 마지막에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도모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다윗은 부득이 왕조를 떠날 수바께 없었고, 멀리 산지로 도망해서 오랜 동안의 피난 기간이 있게 된 것입니다. 혹은 엔게디 굴속에 살며, 혹은 하길라 산맥가운데 숨어서 살며, 혹은 불레셋 사람에게로 도망 가서 살며, 이 곳 저곳 유리하면서 사는 동안에, 혹은 남의 빚을 진 사람들, 혹은 무슨 불평을 가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다윗에게로 모이기 시작해서 처음에는 四백 명이 되었고, 그 다음에는 六백 명이 되었고, 점점 그 무리가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그려는 동안에 다시 불레셋과 사울 왕조에는 큰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불행히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이 같이 길보아 산이라고 하는 유명한 산상에서 전쟁하다가 그만 다 죽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후에 유다 지파(支派)의 두목들이 다윗을 헤브론에서 왕으로 옹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七년 동안 역시 사울 왕가에서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까닭으로 다윗의 집과 사울의 집 사이에 끊임없는 충돌, 간단없는 전쟁이 계속된 것입니다.
그려는 동안에 다윗의 집은 점점 강성(强盛)하게 되었고, 사울의 집은 점점 쇠미(衰微)하게 되어서 마지막에는 이스보셋이 죽은 후에는 다윗 왕이 온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후원을 받아서 왕으로 등극(登極)하게 되었습니다. 민족 전체의 왕이 된 후에는 예루살렘으로 국도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三十三년이란 긴 세월동안 왕으로 온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다윗의 업적은 실로 위대한 것이 많습니다. 사방의 모든 원수를 다 격멸해서 국가의 기초를 확립하고 국가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게 한 이가 역시 다윗인 것이 사실입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에로 옮겨옴으로 말미암아, 이미 말한 대로, 장차 예루살렘 성전의 기지를 자연히 정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성전 지을 모든 자료를 다 준비해 놓은 것도 역시 다윗이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다윗의 신앙과 그 성격은 어떠하냐? 성경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는 문귀(文句)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시켜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때에 친히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른데 사람은 외모로 보지마는 하나님은 중심을 본다고 말하셨습니다. 이새의 아들 일곱 형제를 다 물리치고, 아직까지 저 산에서 양 치느라고 오지도 아니한 어린 다윗을 불러다가 그 머리 위에 기름 부은 것을 보면,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경건한 참된 신앙을 가졌던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편 二十三편을 비롯해서 다윗이 지은 허다한 시를 읽을 때에 다윗의 신앙이 얼마나 진지하였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이와 같이 독실한 신앙을 시작한 다윗의 성격은 고귀(高貴)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어떤 사람보다도 용감하고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양을 칠 때에는 혹은 사자, 혹은 이리가 와서 양을 움켜 가지고 가면 따라가서 맨 손으로 사자와 싸워 이기고, 범과 싸워 이기고, 이리와 싸워 이기면서, 양을 찾아오고 보호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소년일 때에 담대히 골리앗과 겨루어서 골리앗을 격파한, 한가지 사실만 모아도 다윗이 얼마나 담대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무용(武勇)에만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다윗은 역시 덕이 높고 의지가 깊은 그러한 위인입니다. 우리가 다윗의 생활을 읽을 때에 여러분은 그와 같은 성격의 표시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멀리 엔게디 굴에 숨어 살 때에 사울은 다윗을 잡아죽이려고 三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다윗을 찾아갔습니다. 그 때 깊은 굴속에 있는데 사울은 다윗과 그 쫓는 자가 그 굴속에 있는 줄도 알지 못하고 혼자 그 굴속에 들어간 일도 있습니다. 그 때 다윗이 사울을 죽이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다윗이 사울 에게 손대지 아니했습니다. 다만 옷 가를 칼로 베어들고, 그 후에 내가 당신을 죽이려고 했으면 죽일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을 사울 에게 알릴 때에, 사울이 많은 부끄러움 가운데서 다윗에게 자기 죄를 자복한 일도 있습니다.
또는 하길라 산맥 속에 숨어 있을 때에도 사울은 역시 같은 경험을 당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잡아죽이려고 군인을 거느리고 갔습니다. 어떤 곳에 가서 막을 치고 밤에 잘 때에 다 잡니다. 그 때에 다윗과 그를 쫓는 몇 사람이 가서 사울의 물병과 창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해하지는 아니했습니다. 그 부하가 사울을 해할 마음이 있었지마는 다윗이 절대로 금한 것입니다. 이만큼 다윗은 덕이 높은 사람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이에게, 본래 자기가 덕을 입은 이에게 절대로 손댈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죄를 용서해 준 이가 곧 다윗입니다.
사울가(家)가 다 망하고 마지막에 다윗이 온 열두 지파의 왕이 되어서 예루살렘에서 다스릴 때에, 모든 형편이 대략 평안하여진 다음에 다윗이 한번은 사울의 집과 요나단의 집에 누구 남은 자가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분이 과연 한 사람 있음을 밝혔습니다. 요나단의 아들이 있는데 이름은 므비보셋이요. 그이는 두 발이 다 상해서 절름발이입니다. 그 절름발이 므비보셋 하나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에 다윗이 사람을 보내서 므비보셋을 자기 궁중으로 청했습니다. 그래서 전에 사울이 있을 때에 가졌던 모든 토지를 다 므비보셋에게 돌려주고, 한 편 므비보셋을 왕자의 하나로서, 대접을 해서 궁중에서 언제든지 자기와 같이 한 상에서 먹을 수 있도록 요나단을 생각해서 므비보셋을 우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 왕은 의리가 깊은 사람입니다. 좀 있다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줄 알지만 다윗이 그만 말년에 불행히 자기 아들 압살놈의 난을 만나서 갑자기 자기를 따르는 사람 몇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에 사울의 먼 친척 가운데 하나인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윗이 그만 자기 아들에게 쫓겨서 형편없는 가운데 도망치는 그 광경을 보고서 옆에 서서 비웃었습니다.『피 흘린 자여, 어서 가거라.』그러면서 다윗을 저주하고 먼지를 날리면서 다윗을 모욕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을 따라가던 무사 하나가 그 개와 같은 어떤 사람이 대왕을 모욕하니 자기가 당장 가서 그놈의 목을 배어 오리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이 아예 그런 일 하지 말라고 금했습니다.『이것은 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에게 이와 같은 책망을 하는 것이야. 내 몸에서 난 내 아들도 나를 이렇게 대접하는데 하물며 사울의 친척이 나는 대접하는 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할 것이 무엇이냐?』다윗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가만히 자기의 당하는 모든 모욕이 결국은 다 하나님께서 오는 줄 생각하고 겸손히 그 치욕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압살놈이 물론 망하고 다윗 왕이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 때 물론 시므이를 형벌 하려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때에도 시므이를 다 용서해 주고 벌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만큼 다윗은 마음이 너그럽고 덕이 높은, 참 남의 죄를 용서할 수 있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러한 위대한 고귀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신앙과 성품이 결국은 다윗으로 하여금 다윗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다윗에게도 특별히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고귀한 성품을 가진 다윗에게도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은 정욕에 많이 끌린 사람입니다. 그 때 물론 제왕들이 다 이와 같은 일을 했지마는 역시 다윗도 이방의 다른 제왕과 다름없는 많은 처첩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그 가정에 계속해서 불상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고 다윗의 이 약점인 정욕을 통해서 큰 시험이 들어 왔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말 그대로 여호와의 원수에게 큰 훼방거리가 되는 무서운 범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일이 아니고 우리가 다 잘 기억하는 다윗이 침대에 일어나서 왕궁 지붕 위에 올라가 온 예루살렘을 살펴봅니다. 자기가 건설한 예루살렘! 아마 마음 가운데 교만한 생각을 가지고 자부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던 것 같습니다. 그런 때에 우연히 어떤 여자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불같은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그 여자를 궁(宮)으로 데려오라고 해서는 욕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 여자는 다른 여자가 아니고 자기의 가장 충실된 신하, 충복 가운데 하나인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이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밧세바가 에기를 배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죄를 어떻게든 감출 생각을 가지고 그 때에 자기의 충복 우리아는 암몬 사람과 싸우기 위해서 전장에 나가 있을 때인데 속히 우리아를 불러오라고 그랬습니다.
우리아를 불러다가 그가 그 동안 전장에 나가 싸우기에 수고를 많이 하였으니 오늘 저녁에는 그의 집에 돌아가서 편안히 자라고 분부했습니다. 그러나 이 우리아는 얼마나 충성된 사람인지,『지금 내 모든 상관들과 내 모든 전우들이 들판 천막 가운데서 밤잠을 자지 못하고 대적과 싸우고 있는데 제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예루살렘에 왕명으로 돌아오기는 왔지만 내 집에 돌아가서 편안히 잘 수가 있습니까? 저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미 돌아왔으니 왕궁 어떤 모퉁이 방에서 오늘 저녁을 지내고 가겠습니다.』종래 우리아가 왕의 명이라도 자기 집에 가서 자라고 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결국 다윗의 계교(計較)가 맞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지은 죄를 감추려고 하는 한 가지 생각 가운데서 오리려 더 죄 지을 생각이 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군대를 지휘하던 요압 대장에게 우리아를 통해서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우리아로 하여금 요다음 날 암몬 사람과 싸울 때에 최전선에 내보내서 암몬 사람에게 죽게 만들라고 하는 이런 음모의 편지를 써서 자기의 충복인 우리아의 손에 주어서 그것을 요압에게 보냈습니다. 이 충복 우리아는 자기를 죽이려는 편지인 줄을 알지도 못하고 그저 충성되게 그 편지를 요압에게 전했습니다. 요압이 그대로 했습니다. 그 이튿날 억울하게 우리아는 암몬 사람에게 죽게 된 것입니다. 죽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그 얼마 후에 그 아내 밧세바를 불러서 자기의 처로 삼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저녁 읽은 성경 말씀 구절이 나단이 다윗을 만나서 이야기한 그 말씀입니다. 나단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서 다윗에게 와서 이야기할 때에 먼저 유명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어떤 동리에 큰 부자 한 사람이 살고 가난한 사람이 삽니다. 그 부자는 집에는 소도 많고, 염소도 많고, 많은 재산이 있는 부자입니다. 이 가난한 집에는 아무 것도 없고 그저 조그마한 암 양 새끼 하나 밖에 없는데, 이 가난한 사람이 암 양 새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저 한 상에서 먹고 한 자리에서 자고 거의 한 자녀와 같이 이 암 양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자 집에 어떤 손님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가 자기 집의 많은 양, 많은 소를 아깝다고 그냥 두고 이 가난한 사람이 기르는 암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그 암 양을 잡아서 자기의 손임을 대접했습니다.
이 말을 듣던 다윗은 그 근본 뜻은 알지도 못하고 본래 정의감은 강한 사람이라 정의감에 흥분되어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고 맹서(盟誓)하노니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양은 모세의 율법에 의지해서 네 배나 갚아 주어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때에 나단이 다윗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당신을 베들레헴 목동으로 일으켜서 온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높은 지위에 올려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부귀를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처첩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화를 주었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더 원하면 더 주었을 겁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해서 당신의 가장 충복 중에 하나인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서 당신의 아내로 삼았나이까? 당신께서 이와 같은 죄를 지었음으로 말미암아 이 앞으로 당신 집에 칼이 영영(永永)토록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당신은 은밀한 가운데 다른 여자를 모욕했지마는 당신의 처첩은 백주에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죽을 것입니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며,『아, 과연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고 나단에게 죄를 자복했습니다. 사실 다윗이 그 때에 참으로 회개한 것은 시편 五十一편을 읽어보면 얼마나 통회하면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였나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참으로 죄를 회개하는 것을 보고서 나단이 하는 말이『당신이 이렇게 죄를 회개하니 죽을 것을 하나님께서 면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벌을 그냥 당신의 집에 올 것입니다.』그 후에 보면 꼭 그대로 되었습니다. 다윗이 죽을 것은 면했습니다. 그 죄는 으레 히 죽을죄이지마는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 가정에서 된 모든 일을 보면 나단이 예언한 꼭 그대로 되었습니다.
다윗의 아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암논이라고 하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딸도 많은데 그 가운데 다말이라고 하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는 다릅니다. 이 암논이라고 하는 젊은 사람이 자기 이복 여동생 되는 다말이라고 하는 여자에 대해서 짐승 같은 마음을 품고 결국 그 누이를 모욕했습니다. 가정에 이와 같이 패륜의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말이라고 하는 여자는 누군 고 하니 다윗의 다른 아들 압살놈과 동복 동생 되는 누이입니다. 압살놈이 자기 누이가 그와 같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볼 때에 마음가운데 독한 마음을 품고 있다가 얼마 후에 무슨 잔치를 한다고 해서 여러 왕자들과 이런 사람들을 청해서 대접을 하는 체하다가 무사를 시켜서 암논을 쳐죽였습니다. 한 아들이 한 딸에 대하여 패륜의 일을 감당했고 한 아들이 또 다른 아들을 쳐죽였습니다. 다윗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압살놈은 암논을 죽인 후에 멀리 도망쳤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용서함을 받아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는 압살놈이 또한 딴 계획을 했습니다. 정병(精兵)五十명을 자기 집에서 치기 시작했고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이스라엘 사람의 민심을 도득(盜得)하기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자기가 왕이 되어서 왕으로 선포하게 되고, 자기의 무리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자기 아버지를 치려고 쫓아옵니다. 그래서 이미 한 말대로 다윗이 예루살렘을 급히 떠나서 멀리 도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 날 후에 물론 압살놈이 죽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돌아오기는 왔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여호와의 원수들에게 큰 훼방거리가 된 것이 사실입니다.
다윗같이 신앙이 어려서부터 독실했고 그처럼 고귀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파렴치의 죄를 지을 수가 있겠는가? 얼른 생각해 보면 참 생각조차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약한 것은 인간입니다. 약한 것은 육신입니다. 그런고로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경고하여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하고, 아무리 고귀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하지마는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한 면에 약점이 있는 것입니다. 조심하지 아니하면 언제든지 악한 사탄은 약점을 통해서 그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그랬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약점이 무엇인가? 내 생활 면과 내 성격에 있어서 특별히 약점이 어디에 있는가? 스스로 살펴서 거기에 조심하지 아니하면 누구나 큰 죄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약점을 스스로 깨닫고 조심하지 아니하면, 누구나 다윗의 전철을 또 밟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에 이와 같은 범죄는 젊었을 때에 많지마는 중년이 지나고 노년기가 가까워 오면 별로 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 죄는 청년 시대에 지은 죄는 아닙니다. 중년을 훨씬 넘어서 아마 노년기에 거의 가까워서 이런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청년기가 지났다고 방심할 것은 아닙니다. 또 다윗이 원수와 싸우면서 사방에 일이 너무 분주해서 동분서주할 때에 이와 같은 시험이 오지 아니했습니다. 대체로 원수를 다 정복하고 이제는 다윗 자신이 전장에 나갈 필요가 없고 자기의 부하가 모든 일을 잘 합니다. 암몬 사람과 싸우지마는 요압이 대신 잘 싸워 줍니다. 자기는 예루살렘 성에서 한가하게 낮잠 자고, 침대에서 저녁 때 일어납니다. 한가한 대에 시험이 들어왔습니다. 한가한 때를 우리가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가 다윗의 신앙과 그의 의리 심과 그 높은 덕과 그 용감한 것을 배우는 동시에 다윗의 이 범죄와 형벌 받은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알아서 우리 실생활에 전감(前鑑)을 삼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다윗 같은 이도 이와 같은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도 조심하지 아니하면, 언제, 어느 때에, 어떤 범죄를 할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다윗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우리 생활의 전감을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一九五九년 九월 十三일·저녁예배)
Ⅲ-26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_간증주일_ (이사야 六十장 一-三, 十九-二十절)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제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六十·一)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옛날 시온을 향하여 외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세기를 통하여 신령한 시온이 되는, 곧 그의 교회를 향하여 같은 말씀을 외치십니다. 간증 주일로 모인 우리에게 이 아침,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친히 우리 심령 속에 말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일어나라」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성경에 보면, 세 가지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일어나라고 외친 것입니다. 첫째는 죽은 사람들, 둘째는 병든 사람들, 셋째는 자는 사람들입니다. 죽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향해서 예수께서『청년아 일어나라.』부르짖을 때에 죽은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향해서『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고 외칠 때에 죽은 어린 소녀가 일어나 앉은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죽음, 또 하나는 영의 죽음입니다. 육신이 죽었으나 영이 살수도 있고, 육신은 비록 살았으나 영이 또한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 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죽은 육신을 살리신 예는 세 번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적을 예수 님께서 특별히 몇 번 행하신 것은 예수 님은 생명으로서 죽은 육신도 살릴 수 있는 권능이 계신 것을 나타내실 뿐더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죽은 심령을 살릴 수 있는 권능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이와 같은 특수한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근본적인 사명은 죽은 영을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은 죽은 영혼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본이 되시는 까닭으로 하나님을 떠난 그 영혼에게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이와 같은 죽은 심령을 향해서 일어나라고 지금도 외치는 것입니다.『죽은 자여 일어나라. 주께서 네게 비치시리라.』
우리가 에스겔 선지자가 본 해골 골자기에 대한 이상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큰 골짜기에 해골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어떻게 뼈가 말랐든지 희게 되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렇지마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서 이 해골을 향해서 일어나라고 외칠 때에 이 마른 뼈들이 서로 연결이 되고 힘줄이 생기고 피부가 생기고 일어나서 새로운 생명이 될뿐더러 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큰 군대가 되는 이상을 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으로 말미암아 해골과 같이 죽은 심령이 새로운 생명을 얻어서 부활하고 소생하겠다고 하는 사실의 예언인 것입니다. 죽은 심령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심령을 향해서 일어나라고 예수 님께서는 외칩니다. 예수의 이 음성을 듣고 사실 그 음성에 순복하는 심령은 새로이 부활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병든 자를 향해서 일어나라고 외쳤습니다. 베데스다 못 가에서 三十八년 된 환자를 주님께서 보시고 일어나라고 부르짖을 때에 그 환자가 일어났습니다. 가버나움에 계실 때에 네 사람이 메고 온 반신불수를 향해서 일어나 그 상을 가지고 가라고 외칠 떼에 반신불수가 일어나서 자기가 누웠던 상을 가지고 걸어간 것입니다. 병든 자들을 예수 님께서 일으켜 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눅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단순히 육신의 어떤 곳에 병이 남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도 고통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민망한 생활을 계속하던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영혼도 병든 영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주 떠나지는 아니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명이 아주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마는 그 심령 속 어떤 자리에 병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탐심의 병이 들었습니다. 교만의 병이 들었습니다. 시기의 병이 들었습니다. 혹은 원한의 병독(病毒)이 있습니다. 혹은 허영심, 혹은 좋지 못한 악한 습관, 혹은 혈기, 사람을 따라서 어떠한 특수한 약점과 그 심령 속에 속을 썩이는 병 때문에 일할 수 없고, 일어날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서 무용의 장물이 되는 영혼이 없지 않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 님께서 일어나라고 외치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음성에 순복해서 일어나면, 예수 님께서는 그 병을 고쳐주시고 주를 위해서 활동하는 쓸데 있는 자녀로 삼을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자는 자들을 일어나라고 성경에는 기록했습니다. 전에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사명을 거역하고 멀리 다시스로 방향을 바꾸어 가면서 배 밑에서 깊은 잠이 들은 것입니다. 그 때에 마침 그 바다에는 큰 풍랑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황겁(惶怯)해서 자기의 신을 향해서 외칩니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배 밑에서 그냥 잠자는 것을 선장이 발견했습니다. 요나의 옆에 와서 부르짖는 말이『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 네 신께 구하라.』자는 요나를 깨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한번은 예수 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를 하시건만 제자들은 피곤한 가운데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잠자는 제자들에게 와서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외치는 말씀이『일어나라, 함께 가자.』자는 제자들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람들의 영혼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병이 든 것도 아닙니다. 다만 자고 있습니다. 자는 사람들은 자기의 주위에, 자기의 환경에 어떠한 변동이 일어나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는 사람들은 자기의 의무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환경도 모르고 자기의 의무도 모르고, 죽지도 않고, 병도 안 들었지만, 자는 심령이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심령을 향해서 예수 님께서 부르짖습니다.『자는 자여, 일어나라.』오늘날 우리 가운데 그 영혼이 아주 죽지는 아니했지만, 혹은 그 영혼이 어떠한 병도 없지만, 단순히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헤아릴 줄 모르고 자기의 의무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자는 가운데 혼수 상태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영혼이 있습니까? 오늘 아침, 주님의 이 음성을 듣고 일어나는 심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시온을 향해서 외치는 말씀은 이 말씀입니다.『빛을 발하라, 일어나라.』고 하는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달은 본래 발광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태양의 빛을 받아서 그 빛을 반사합니다. 우리도 사실 우리 자신에는 빛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서 우리도 빛을 반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도 빛을 발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빛이니…」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빛이 있습니다. 내게는 본래 빛이 없으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빛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진리의 빛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곧 영적 지식의 빛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공부를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 보기에는 무식한 사람 같을지라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영적 지식의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크게 공부는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우주의 근본 뜻을 깨닫고 삽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인생의 깊은 뜻을 파악하고 삽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내세의 빛을 엿보고 삽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크게 다른 공부가 없다고 할지라도 이 우주에 살아 계신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신 것을 압니다. 그 아버지는 사람의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구주임을 압니다. 또한 우리는 성신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감화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성신의 능력을 또한 압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이렇게 속죄의 진리의 빛을 받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이 진리의 빛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이 진리의 빛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의 빛을 받았습니다. 참 생명은 어떤 것이냐? 참 생명은 어떻게 표현되느냐? 인생의 참으로 갈 길이 어떤 길이냐? 도덕의 참된 빛을 우리는 역시 받은 것입니다. 이것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보여 주시는 참된 생명을 통해서 참 인생의 길이라고, 진신의 길, 순결의 길, 봉사의 생의 길, 다시 말하면 사랑의 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 믿는 사람은 다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 뿐 아니라 생명의 빛을 받은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믿는 사람들만 특별히 생명의 빛을 받았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절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타락하고 또 썩은 자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에게 나오면 중생해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역경을 당하고 아무리 여러 가지 환난과 재난이 우리 앞에 올지라도 하나님과 같이 할 때에 이 모든 것도 변화해서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아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육신이 다 늙어져서 우리의 육신이 땅 속에 묻힐 때에도 영원한 소망의 빛이 우리 머리 위에 떠올라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진리의 빛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는, 썩어지지 아니하는 생명의 빛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여기, 둘째 절에 기록한 바와 같이 이 세상은 어두움에 덮였습니다. 캄캄함이 온 골짜기를 덮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시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형편을 살펴보세요. 무엇보다도 진리의 빛이 없으니까 무지의 암흑한 구름이 그들을 덮고 있습니다. 물론 과학적 지식이 있지요. 여러 가지 철학적으로 사상하는 지식도 많이 있지요. 그렇지마는 이와 같은 많은 지식으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은 사람은 참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참 하나님을 찾지 못한 그 결과는 조물주를 숭배하는 것보다도 피조물을 숭배합니다. 나무를 숭배합니다. 돌을 숭배합니다. 물질을 숭배합니다. 사람을 숭배합니다. 뱀을 하나님으로 숭배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사람의 심령을 덮은 어두운 구름을 헤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무지의 캄캄한 구름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욱 암흑한 죄의 구름으로 화하고 맙니다. 사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를 때에, 창조주보다도 피조물인 것을 인간 생활의 절대의 대상으로 알고, 그것을 숭배하고 그것을 탐구할 때에도 그 가운데는 여러 가지 다른 죄악이 나타납니다. 욕심과 탐심으로 모든 싸움이 일어납니다. 음란과, 방탕과, 살인과, 강도와, 자살과, 온갖 죄악의 어두운 구름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심령을 덮고 말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사람에게도 결국은 소망은 없습니다. 슬픔과 절망의 구름이 그들의 심령을 덮고 있습니다. 역경을 당할 때에 역경을 돌파할 힘이 없습니다. 타락한 사람들이 소생할 길은 찾지 못합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악한 사람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집니다.
절망의 암흑한 구름이 온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상에서 진리의 빛을 받은 사람들, 생명의 빛을 받은 사람들, 소망의 빛을 받은 사람들을 향해서『너희는 그들에게 빛을 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빛을 발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등불과 같이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방 안에 켜놓은 작은 등불은 그 빛이 그렇게 밝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방안은 환하게 밝게 비칩니다. 우리의 빛이 그렇게 크지 못해서 밖에까지는 나가지 못하지만 내 방 안에서, 내 가족에게 참 빛을 비칠 수 있고, 내 친척에게 그 빛을 비칠 수 있고, 내 이웃에게 이 진리의 빛과 생명의 빛과 소망의 빛을 비칠 수 있으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과 같이 천사같이 말 목하고 바울 같이 못하나 내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물론 부족합니다. 등대와 같이 빛을 비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바다 옆에 있는 산 위에 세워진 높은 등대에서는 빛을 멀리 투사(投射)합니다. 그래서 캄캄한 밤 노한 물결에 갈 길을 잃은 여러 배들에게 갈 길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이와 같은 등대와 같이 불을 비취는 것이 또한 귀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가 노방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문서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방송전도를 해야겠습니다. 전도 인도 사방에 파송해서 전도도 해야 되겠습니다.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기로 해야 되겠습니다. 등대와 같이 우리가 빛을 비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 보다도 더 귀한 것은 무지개와 같이 빛을 비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여름 하늘에 캄캄한 구름 위에 나타나는 무지개야말로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신비스럽고 얼마나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무지개가 무지개 되는 원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별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구름 사이에 있는 작은 물방울, 그 작은 결정체가 햇빛을 받아서 빛을 분석해 줍니다. 분석해서 혹은 청색, 혹은 녹색, 혹은 적색 여러 가지 다른 빛깔로 분석해서 우리에게 찬란한 광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가 과연 내 심령이 온전히 신앙의 결정체라고 한다면 내 심령 위에 그리스도의 빛이 미칠 때에 그리스도의 빛을 분석해서 반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은 곧 성신의 빛입니다. 성신의 빛이 어떻게 분석되어서 반사하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과연 내 몸이 온전한 신앙의 결정체라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빛을 내 신앙이 분석해서 혹은 사람으로 나타나고, 혹은 희락으로 나타나고, 혹은 화평으로 나타나고, 혹은 인내로 나타나고, 혹은 자비로 나타나고, 혹은 양선, 혹은 충성, 혹은 온유, 혹은 절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전 생활이 신앙의 결정체가 되다고 하면 그리스도의 빛이 내 몸에 비칠 때에 반드시 이와 같은 분석으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기는 여기 앉으신 여러분 하나 하나가 신앙의 결정체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서 무지개와 같이 찬란히 반사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 걸은 더 나아가서 별과 같이 빛을 비쳐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별은 멀리 있습니다. 먼 밤하늘에 은은히 비치는 별 빛은 그 자체가 얼마나 신비하고, 얼마나 숭고하고, 얼마나 감화력이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별은 우리에게 말을 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언의 큰 감화를 우리 인간의 심령에게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신앙을 기초로 한 인격이 높고 또 높고 우리의 신앙을 기초로 한 생활이 깨끗하고 더 깨끗해져서 하늘의 별과 같이 우리의 인격을 통하여, 우리의 생활을 통하여 무언의 설교를 할 수가 있고 무언의 전도를 할 수가 있으면 이에서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전에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오래 하나님과 대면하다가 내려올 때에 그 얼굴이 빛이 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감히 그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는 출애굽기의 기사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과 통행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서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생활이 그만큼 고상한 자리에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빛을 사방으로 비칠 수가 있으면, 이에서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죽은 영혼도 일어나십시다. 병든 영혼도 일어나십시다. 잠자는 심령도 일어나십시다. 그래서 들불이 되고, 등대가 되고. 무지개가 되고, 밤하늘의 별이 되어서 이 캄캄한 세상을 빛으로 화하는 축복이 여기 앉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一九五九년 九월 二十일)
Ⅲ-27 주를 따르라 (요한 복음 二十一장 十五-二十三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二十一·二十二)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디베랴바다 근처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요한 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물어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사실을 기억할 때에 다른 말을 물어보았으면 어려웠겠지마는 아무리 실수한 베드로도 자기 중심을 더듬어 볼 때에 예수를 사랑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주여 제가 주를 사랑합니다. 주께서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십니다.』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세 번 묻고 세 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베드로가 젊었을 때에는 임의로 그가 자기 띠를 띠고 그가 가고싶은 곳을 갔지마는, 베드로가 나이 많아서 늙어질 때에는 이미 그가 자기 띠를 띨 수 없고, 사람들이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겠다고, 다시 말하면 마지막에 순교로써 믿음을 증거 할 사실을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면서 시몬 베드로에게 주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그 옆에 있는 요한 을 보면서 그에 대한 장래는 어떻게 될까 하는 호기심 가운데서 묻기를『주여 이 제자는 어떻게 될 것입니까?』그 때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그는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세상에 혹 남겨둔다고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 잇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다른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을 상관할 것 없이 주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주를 따르라고 하는 말씀을 이번 처음 들은 말씀은 아닙니다. 약 삼 년 전 역시 갈릴리 바다에서 동생 안드레와 같이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을 때에 예수 님께서 바닷가에 나타나셔서『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시몬과 안드레가 배와 그물을 그냥 자리에 버려 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것입니다.
그 후에도 따르라고 하는 말씀을 들은 기억이 있을 줄 생각합니다. 그것은 가이사라 빌립보 지경에서 베드로가 과연 예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오 그리스도라고 한 고백을 한 후에 장차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하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을 미리 말씀하시면서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밖에도 종종 따르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령 요한 복음 八장 十二절에 보면『나는 세상의 빛이니「나를 따르는 자는」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 복음 十장 二十七절에『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주의 양은 자기를 따른다고 말씀했습니다. 요한 복음 十二장 二十六절에 보면『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주를 따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 님께서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가장 자주 하신 말씀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주를 따르는 생활」입니다.「나를 따르라」고 하는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할 때에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어떠한 지도자시며 어떠한 구주이신가 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선생과 같이 이런 길은 옳은 길이고 저런 길은 그른 길이니까, 그른 길을 버리고 저 길이 옳으니 옳은 길을 가라고, 단순히 옳은 길을 가르치는 선생만은 아닙니다. 자기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제자들에게 선악을 분간해서 지시하는 교사만은 아닙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앉아서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고 먼저 앞서 가면서, 주가 먼저 이 길을 가면서 이 길이 옳은 길이므로 주가 이 길을 가니 우리들에게 주를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그리스도는 보통 지도자가 아니라, 선구자요, 개척자요, 실제적 지도자인 것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친히 오셨습니다. 오시되 마구간에서 나셨습니다. 한 살이 되자마자 멀리 애굽까지 갈 수밖에 없는 피난 생활의 쓴맛을 부모와 같이 당하신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나사렛 목수의 가정에서 자라나면서 이마에 땀을 흘림U 수고하고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수고와 빈궁의 괴로움과 육체 노동의 모든 어려움도 친히 당하신 분입니다. 자기가 많은 사람과 같이 친히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 가서 四十일 주야를 금식하면서, 그 굶주림의 괴로움과 악한 마귀의 모든 시험을 친히 당하시고 그 시험을 승리하신 것입니다. 친히 사방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주린 자를 먹여주시고, 슬픈 자를 위로하여 주신 것입니다. 자기를 중상하고 자기에게 대하여 모략하고 여러 가지로 시험하고 갖은 괴로움을 준 바리새인, 사두개인, 헤롯당의 모든 괴로움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면서 친히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친히 골고다의 언덕길을 올라가셨습니다. 마지막에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친히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고 사망의 고통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장사한 바 되어서 음부에 들어갔습니다. 마지막에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 부활하셨습니다. 승천까지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영원히 살아 계시면서 내가 인생의 모든 길, 쓴 길, 단 길, 모든 길은『내가 친히 걸어가고 내가 친히 체험 했은즉, 이제는 너희들은 나를 따라오너라.』예수께서 외치는 것입니다. 자기가 친히 가보신 길을, 자기가 친히 승리하신 길을, 자기가 걸으신 길을 앞서 가시면서 오늘날 모든 믿는 사람을 향해서『너희들은 나를 따라오너라. 이것이 진리의 길이오, 이것이 선의 길이오, 이것이 승리의 길이오, 이것이 영원의 길이다.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따라온다고 하는 말, 따라간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처음에 시몬과 안드레가 주를 따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를 때에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배를 버렸습니다. 고기 잡던 그물을 다 버렸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떠나서 예수를 따라가기를 시작했습니다. 따라가려고 하면 먼저 있던 곳을 떠나야 됩니다.
엘리사가 소 열두 겨리로 밭을 갈다가 엘리야의 부음을 받고 소를 모두 내어버리고, 소 한 겨리는 잡아서 연장을 불사라서 고기를 삶아서 다른 백성들에게 나누어 먹이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따라갔습니다. 따라가려고 하면 있던 곳을 먼저 떠나야됩니다.
전에 룻이라고 하는 젊은 여자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갈 때에 모압 땅을 떠났습니다. 기독교가 전도자의 부름을 듣고 천성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 장망성을 떠났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도를 따를 때에 애굽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에 갈대아 우르와 하란과 친척과 고향과 친지가 있는 곳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려고 하면 내가 본래 있던 그곳을 떠나는 것이 첫 걸음이올시다. 다시 말하면 죄악의 자리에서 떠나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첫 걸음이올시다.
죄악의 사상, 죄악의 언행, 죄악의 생활, 죄악의 습관, 죄악의 친구, 죄악의 직업(직업이 악하면) 죄악의 오락에서 먼저 떠나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죄악의 자리에 그냥 앉아서 예수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이것을 성별(聖別)이라고 합니다. 거룩하니 구별되어야 될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첫 걸음은 있던 자리를 떠나야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따른다고 하는 말은 동행을 의미합니다. 같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거를 의미합니다. 동거동락(同居同樂)을 의미합니다. 함께 고통을 받고, 함께 즐거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께서 갈 때에 같이 가고, 설 때에 같이 서며, 산을 넘으면 같이 넘고, 물을 건너면 같이 물을 건너는 것을 의미합니다.
룻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했거니와 나오미가 모압 땅을 떠나서 자기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기 시작할 때에 며느리 둘이 따라갔습니다. 하나는 오르바요 하나는 룻입니다. 다 나오미를 따랐지마는 나오미가 강권해서 돌아가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오르바라고 하는 며느리는 돌아서서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 말을 종내 듣지 않고 나오미에게 말했습니다. 여기 성경에 있는 그대로 읽을 터인데 여러분 들어보세요.『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는 곳이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입니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이것이 진정으로 따른 자의 심정입니다. 진정으로 따르는 자의 마음의 태도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를 때에도 이렇게 따랐습니다. 엘리야가 길갈에 가니 길갈에 좇아갔습니다. 벧엘에 가니 벧엘에 좇아갔습니다. 이제는 집으로 가라고 아무리 강권하지마는 그냥 따라갔습니다. 여리고로 가니 여리고로 따라옵니다. 요단을 건너니 요단을 따라옵니다. 그냥 따라옵니다. 강이 있어도 강을 건너서 그냥 따라옵니다. 그 결과는 엘리야가 승천할 때에 내어버린 엘리야의 겉옷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따르는 자의 태도입니다.
예수 님 제자들도 이렇게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 님이 가버나옴에 갈 때에 가버나옴에 갔습니다. 나사렛에 갈 때에 나사렛에 갔습니다. 여리고에 갈 때에 여리고에 갔습니다. 예루살렘에 갈 때에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가실 때에 겟세마네 동산에 갔습니다. 골고다에도 멀리 따라갔습니다. 이것이 진전으로 따르는 생활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은 어떠한 생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하지 아니하시는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 끝날 때까지 주가 우리와 같이 하겠다고 말씀했습니다.『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는 내 안에 있으라, 내가 너희 안에 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생활은 예수와 같이 우리의 심령이 항상 같이 동거하는 동거동락(同居同樂) 하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집에 있을 때에도 주님과 같이 있고, 거리에 나갈 때에도 주님과 같이 길을 걷고, 사업을 할 때에도 주님과 같이 하고, 음식을 먹을 때에도 주님과 같이 음식을 먹고, 친구와 놀 때에도 주님과 같이 놀고, 저녁에 잘 때에도 주님과 같이 영적으로 동행하는 그 생활이 예수를 따르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따른다고 하는 것은 학습을 의미합니다. 배우고 본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르려고 나오미의 믿음을 배웠습니다. 나오미의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나오미의 일을 배웠습니다. 그저 따른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면서 엘리야의 믿음을 배웠습니다. 엘리야의 열심을 배웠습니다. 엘리야의 참된 헌신을 배웠습니다. 그냥 따른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면서 엘리야를 배웠습니다.
제자들도 주임을 따르면서 그저 따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배웠습니다. 예수의 사상을 배웠습니다. 예수의 성품을 배웠습니다. 예수의 생활을 배웠습니다. 모든 옳은 진리를 배웠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시나 또한 강하시고 담대하신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을 듣던 요한 이 사랑의 사도로서 변한 것을 우리는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하시고 깨끗하시고 봉사의 희생의 생활을 배웠습니다.
오순절 후에 제사장들이 요한 과 베드로를 데려다가 책망하면서 예수를 다시 전하지 말라고 위협할 때에 베드로 요한 이 담대히 하는 말이『우리가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어떠한 도리가 없으니까 책망하고 내어 보내면서 자기네끼리 하는 말이『아, 이 사람들이 본래 불학 무식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어디서 이런 지혜와 이런 담대한 것을 배웠느냐.』그들은 그후에 과연 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감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크게 놀랐다고 하는 사도행전의 기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예수를 배우게 됩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꽃은 점점 아름다워집니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또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넷째로 동역(同役)을 의미합니다. 같이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함께 행하면 함께 일합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만 다닌 것이 아닙니다. 나오미와 같이 일했습니다. 같이 밥도 짓고, 바느질도 하고, 이삭도 줍고 일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그냥 따라다니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일할 때에 같이 일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를 본받아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도 하고, 예수 님과 같이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 님의 하신 일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간단히 생각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전도의 사업입니다.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둘째는 교육 사업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항상 가르쳤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깊은 종교의 진리와 도덕의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로 가르쳤습니다. 셋째는 봉사의 사업입니다.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가난한 자를 도와주시고, 모든 불쌍한 사람들을 붙들어 주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 사업은 오늘날도 주님께서 살아 계셔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하여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지금도 교육 사업을 하십니다. 지금도 봉사 사업을 해서 여러 가지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십니다.
여러분,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은 예수와 같이 일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따라간다고 말만 하면서 전도하지 아니하고, 가르치지 아니하고, 주일 학교도 돕지 아니하고, 기독교 교육 사업도 돕지 아니합니다. 예수를 따라 간다 하면서도 불쌍한 사람 도와주지 아니하고, 의료 사업이나, 고아 사업이나, 양로 사업이나, 모자원 사업이나, 피난민을 구조하는 것이나, 이런데 실지로 협력하지 아니합니다. 그냥 있는 사람이면 말만 따라가는 것이지 실상은 따라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라 간다고 하는 말은 예수와 같이 일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특별히 가을을 당해서 주일학교에서도 배가 운동을 하는 중입니다. 남녀 전도 회와 면려회(勉勵會)에서도 배가 운동을 하는 중입니다. 이런 모든 일에 함께 손을 잡고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이 실상 예수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를 따라 간다고 하는 것은 이 네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있던 죄악의 곳을 떠나는 것을 의미하고, 둘째는 행동하면서 동거동락 하는 것을 의미하고,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배우는 것을 의미하고, 넷째는 그리스도와 같이 사업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아침에 깊이 스스로 반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과연 예수를 따르는가? 겉으로만 예수를 따르고 속마음으로는 세상을 따르는가? 따르는 것에 조심하세요. 二十여 년 전에 독일에는 히틀러가 나타나고, 이탈리아에는 무솔리니가 나타나서 눈을 부릅뜨고 호령을 하니까 여기에 영웅이 나타났고,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나타나서 눈을 부릅뜨고 호령을 하니까 여기에 영웅이 나타났다, 여기에 호걸이 났다. 여기에 지도자가 났다고 합니다. 많은 독일 사람이 히틀러를 따라 가고, 이탈리아 사람이 무솔리니를 따라가더니 마지막에 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칼 마르크스를 따라가며, 스탈린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래지 아니해서 망할 것입니다. 누구를 따릅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가 누구입니까? 누구를 따르렵니까?
『너는 나를 따르라.』여기에서「너는」하는 말을 분명히 들으세요. 예수 님께서 여러분 하나 하나에게 하시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따르기는 따르겠는데, 내 친구는 어떻게 되겠는가, 나의 그 '아무개는 어떻게 되겠느냐'며 다른 사람을 걱정합니다.『다른 사람은 이렇게 안 하는데…』남 생각할 것 없습니다.『너는 나를 따르라.』
여러분, 자신이 예수 님을 따릅니까? 여러분, 찬으로 예수 님을 따르려면 끝까지 따르세요. 겟세마네까지, 골고다까지, 부활의 아침까지, 아니 심판대까지, 하늘 나라에까지, 끝까지 따릅시다. 할 수 있는 대로 일찍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어려서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 특별히 청소년들, 아직까지 따르기 시작하지 아니했으면 오늘 아침 이 신간부터 따르세요.
두 주일 후에 성례 주일로서 학습을 세우고 세례를 베풀겠습니다. 학습을 서고 세례를 베푸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너는 나를 따르라.』기도하십시다. (一九五九년 十월 四일)
Ⅲ-28 진리와 자유 (요한 복음 八장 三十一-四十四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요 八·三十二)
『그런고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하게 하면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八·三十六)
이 성경 구절을 보면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가장 위대한 말 중에 두 말이 적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자유라고 하는 말이고 또 하나는 진리라고 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진리를 탐구합니다. 인간은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마는 이 두 말처럼 남용(濫用)되고 오용(誤用)되고 그릇되게 사용된 말이 별로 없는 줄 생각합니다. 진리 아닌 진리의 미명(美名)아래서 무고한 사람을 전죄하고 핍박한 예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유 아닌 자유의 미명 아래에서 온갖 불의와 불법이 감행된 실례가 인간 역사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또한 그 반면에 인간의 가장 고귀한 노력과 희생이 이 두 말들 아래에서 바쳐진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당한 영혼들이 많습니까? 고귀한 자유를 위해서, 자유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귀한 청년들이 피를 흘리며 이 땅에 쓰러졌습니까? 여기에 이 두 말, 자유와 진리, 이 두 가지 말이 같이 적히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 줄 생각합니다. 참된 진리는 참된 자유를 가져옵니다. 참된 자유는 오직 진리에서만 오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진리는 무엇입니까? 진리라고 하는 말을 흔히 쓰지마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정의하려고 한다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문 글자로 말하면 참된 이치, 혹은 참된 원리라고 설명(說明)할 수 있습니다. 그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헬라 말을 그대로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진리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알아듣기 쉽게「참」이라고「참된 것」이라고 번역할 수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럼「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우리가 대조해서 생각하면 뜻이 더 분명할 줄 압니다. 가령 참이라고 하는 것은 그림자와 대조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산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림자는 산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림자가 산은 아닙니다. 산은 실체(實體)요 그림자는 반영뿐입니다. 여기 사람이 있으면 사람과 비슷한 사진이 있습니다. 그 사진은 사람의 모습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사진이 사람은 아닙니다. 사람이 실체인 참이요, 사진은 그 반영된 그림자뿐입니다. 참은 실체를 항상 의미합니다. 또한 그 다음에 참은 거짓과 정 반대되는 것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누렇다고 다 금이 아닙니다. 가금(假金)과 정금(正金)이 있습니다. 번들번들 한다고 다 비단이 아닙니다. 진견(眞絹)과 인조견(人造絹)이 있습니다. 참은 모든 허위, 가면, 가짜, 외식의 정 반대되는 진실을 의미합니다. 이리가 양의 가죽을 쓴다고 양이 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리는 이리요 양은 양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진리의 세계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살펴보면, 세 가지가 섞이어 돌아갑니다. 여기 참이 있습니다. 그것과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과 정 반대나 참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지마는 참 말이 있고, 비슷하나 참 말이 미처 아닌 외 곡된 말이 있고, 아주 참 말처럼 하지마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종교계에도 참된 종교가 있습니다. 그림자와 같이 참된 종교와 비슷해서 일시적으로 있지마는 참 종교가 나타날 때에 없어질 것밖에 없는 그림자와 같은 종교가 있습니다. 아주 거짓된 허위의 종교 사상과 종교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학이나 예술이나 과학이나 사상이나 각 부면(部面)에서 이 세 가지 섞이어 돌아가는 것을 우리가 바로 분간해서 참 말을 믿고, 참 말을 의지하고, 참 말대로 행할 때에, 우리 인간에게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무지, 온갖 미신, 오해, 기만, 허위, 이런 모든 것 가운데서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각 방면의 진리밖에는 없습니다.
여기 예수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너희가 내 교훈에 항상 있을 것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 하게 하리라.』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이 진리는 어떤 방면의 진리를 가르친 것이냐?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이 진리는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우주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존 칼빈(John Calvin, 1509-64, 제네바의 종교 개혁가)선생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기독교 강요」의 첫 페이지 첫 구절에 보면, 우리 인간이 마땅히 배워야 할, 알아야 할 지식이 허다하지마는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 밖에 없는데,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요, 또 하나는 사람에 대한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진리를 알고, 인간에 대하여 그 깊은 진리를 알진댄 그 밖에 모든 문제는 다 여기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하여 꼭 우리가 알아야 할 진리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동양사람들은 옛날도 그렇고,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마는 하나님을 상제(上帝)라고 많이 생각해 왔습니다. 사실 아직도 적당한 말이 별로 없어서 여기 중국사람들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을 상제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뜻은 위에 계신 임금이라는 것입니다. 그 위에 계신 임금이라 하는 말은 물론 하나님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전체를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한 그림자아 같은 하나님에 대한 사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하나님은 이 우주의 이성(理性)이라 이런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거기도 일면이 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하나님은 이 우주 안에 있는 대양심(大良心)이라는 말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 일면을 보여줍니다. 그림자와 같습니다. 온전히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씀으로 가르쳤지마는 특별히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두 가지 말씀입니다. 첫째는『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리로 그를 예배할 것이라.』둘째는『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시라.』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아버지라고 하는 뜻은 인격적 신을 의미합니다. 우리 사람과 같이 생각을 하시고, 느낄 수 있고, 의지가 계시고, 무엇을 결정하시는 인격적 신을 가리킨 것입니다. 또 아버지라고 하는 말
씀은 하나님은 곧 사랑이라고 하는 뜻을 가리킵니다. 이 인격적인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이 우주와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이시라고 예수 님께서 이와 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많은 미신, 나무를 숭배하고, 돌을 숭배하고, 뱀을 숭배하고, 사람을 숭배하고, 온갖 우상을 숭배하는 미신의 구속에서 자유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서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이 진리를 인간이 알 수 없는 우주에 나서 사는 동안에 항상 마음 가운데 있는 여러 가지 공포심, 두려운 마음, 이 공포 가운데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님께서 우리 사람에 대해서 분명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인내천(人乃天)이라고 하는 사상이 있습니다. 그 뜻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는 그런 뜻인 줄 생각합니다. 이것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다 있는 범신론적 사상입니다. 사람이 곧 신이라 혹 신의 일부분이라 신과 같다는 이 사상의 근본적 문제는 죄악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이 아닌 것을 분명히 압니다. 일본 천황이 신이라 하는 이름을 가지고 오래 자기 국민을 속여왔지마는 맥아더에게 항복한 다음에는 자신은 신이 아니라고 그렇게 다시 조서를 내렸습니다. 그 말이 옳습니다. 사람은 신이 아닙니다.
반면에 사람들 가운데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사람은 별 것이 아니고, 하는 모양을 보면 사람은 그저 짐승이라. 조금 진화된 원숭이야, 조금 진화된 동물이야, 사람과 다른 하등 동물과의 차이는 사람은 좀 더 복잡한 동물이오, 아메바 같은 것 단세포 동물이야.』라고 이렇게 사람을 한 짐승으로 보는 이런 사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에 대하여 분명히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니라 라고 그 뜻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서 사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우주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떠난 탕자로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먼 죄악의 세상에서 살므로 그 행동이 짐승의 행동과 같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타락된 까닭입니다. 그 탕자라고 돌아만 오면 다시 하나님의 모습으로 회복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일시적으로 있다가 짐승처럼 죽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는 불멸의 영혼이 있어서 영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이 앞으로 무한히 향상될 가능성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님의 교훈이요 인간을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보고 비록 타락은 하였지마는 회복되면 무한히 발전하고 향상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이 사상은 결국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왔습니다.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사상을 가져옵니다. 따라서 정치적 자유가 결국은 그리스도의 인간에 대한 이 진리의 근본적인 기초를 주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는 그렇게 그 입술로써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뿐만 아니고「그리스도」가 곧 진리입니다. 요한 복음 十四장 六절에 보면 예수 님은 곧 진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뜻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는 이렇게 참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을 뿐더러 그리스도 자신이 이 우주에 근본 되시는 하나님이오 하나님의 말씀이오, 그 말씀이 육신을 입어서 진리가 곧 몸을 입어서 진리의 화신으로서 세상에 일하신 이가 곧 그리스도께서 진리로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진리의 화신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친히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얼굴을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활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의 진리를 가르쳐 줄뿐더러 자기 자신이 참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 하나님의 아들은 이렇다 하는 것을 진리로서 참으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참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얼굴을 통해서 참 사람의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성품을 통해서 참으로 변화된 온전한 사람의 성품을 볼 수가 있어요. 주님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인간의 생활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진리의 화신으로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목적이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이 진리로서 인간을 여러 가지 구속 가운데서 해방해서 자유를 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었지마는 죄악에 침노되어서, 여러 가지에 얽매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지적으로 미신과 무지와 죄악에 결박을 당했습니다. 결박당한 인간들을 풀어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진리이신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자유는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자유는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많이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마음대로 거리에 나가 놉니다. 그것까지는 괜찮습니다. 그 결과는 한 두어 시간 후에 보면 집을 잃어버립니다. 학생들이 마음대로 거리에 나가 놀고 싸우고 뛰어 다닙니다. 그렇게 얼마 하다가는 깡패가 되고 맙니다. 청년들이 마음대로 거리에 나가 놉니다.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마시고, 마음대로 허랑 방탕합니다. 자유 없었다고 하는 그 결과는 얼마 가지 못해서 불량자가 되고 맙니다.
물 속에 있는 물고기가,『이거 원, 나는 물 속에만 이렇게 있겠느뇨. 자유를 얻어야지.』하며 물 밖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그 때는 괜찮습니다. 좀 있다가 말라죽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가 자기는 왜 공중에서만 살까, 물고기처럼 물 속에서도 좀 살아봐야지, 하고 물 속으로 뛰어 들어 갔습니다. 그것까지는 괜찮습니다. 숨이 막혀 죽고 말았습니다. 기차가 자기는 왜 요렇게 꼭 궤도 위로만 다니게 될까, 마음대로 자동차처럼 나도 신작로로 다녀보겠다 하며 신작로로 뛰어 나왔습니다. 조금 가다가 전복되었습니다.
이것이 참 자유입니까? 단순히 마음대로만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방종입니다. 어디에 참 자유가 있습니까? 어린아이들은 어머님의 품속에 있을 때만 참 자유가 있습니다. 학생들은 선생의 지도 아래에 있을 때만 참 자유가 있습니다. 청년들은 오직 국가의 법률과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양심의 도덕적 법칙 아래에서 살 때에만 참 자유가 있습니다. 새는 공기 가운데서만, 물고기는 물 속에서만, 기차는 궤도 위에서만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하나님의 법칙대로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성취할 수 있는 최대의 기회를 가질 때에 그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는 최선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최선의 일을 할 수 있는 최대의 이 기회를 가진 사람이 참 자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 기회가 크게 제한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결박의 줄이 인간을 얽매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정치적인 결박입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경제적인 결박의 줄입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사회적인 결박입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종교적인 결박입니다. 어떤 때에는 이것이 지적(知的)인 결박입니다. 여러 가지 구속의 줄이 인간을 얽어매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최선의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이 모든 인간을 결박하는 줄이 많은데 그 가운데서도 제일 굵은 줄은 인간의 속에 있습니다. 이 줄을 죄의 줄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욕의 종이 되었습니다. 음란과 방탕의 자리를 떠날래 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소가 갈고리에 코가 꿰어서 원하지 않지만 도살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처럼 자기가 원하지 않지마는 자기의 영혼과 자기의 육체가 멸망 받을 줄 알면서도 이 저녁거리 서울 구석구석에 어두운 곳을 찾아서, 코가 갈고리에 꿰어서, 정욕의 종이 되어서, 멸망할 곳으로 찾아 들어가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탐심의 종이 되었습니다. 돈의 종이 되었습니다. 탐심의 갈고리에 코가 꿰었습니다. 그래서 돈은 위해서는 거짓말도 하고, 돈을 위해서는 배신도 하고, 돈을 위해서는 도적질도 하고, 돈을 위해서는 사람도 죽입니다. 탐심의 갈고리에 꿰어서 자기는 원하지 아니하지마는 종이 되어서 이런 짓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악한 죄의 습관에 종이 되었습니다. 술에 종이 되었습니다. 아편에 종이 되었습니다. 화투에 종이 되었습니다. 혹은 투전에 종이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악한 죄악의 습관에 종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갈고리에 코가 꿰어서 원하지 않지마는 그저 하자는 대로 습관대로 부득이 따라갑니다. 종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로 결박의 줄로 말미암아서 인간이 하나님이 본래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최선의 일을 하지 못하고, 멸망하고 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와 같은 죄악의 결박의 줄에 얽매인 사람들은 진리로서 풀어놓아 주어서, 하나님이 본래 뜻하신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이 본래 원하시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죄를 사해 주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의 결박을 끓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만 죄악의 갈고리를 꺾을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만 다시 죄악의 갈고리에 꿰이지 않도록 보호할 능력이 있습니다. 진리만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임으로 우리들을 모든 속박에서 자유를 줍니다. 우리가 이 자유를 먼저 얻으면 그 밖에 정치적 자유, 지적 자유, 사회적 자유, 모든 자유는 다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 이 자유를 얻었습니까? 여러분,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여러분입니까? 내가 원하지마는 내 속의 죄악의 세력 때문에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지금도 합니까? 죄에서 자유를 얻었습니까? 질리는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서 그리스도에게 여러분의 심령을 온전히 바치고,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맡기고, 그를 믿고, 그를 의지해서 주님의 능력이 여러분의 심중에 움직일 때, 여러분은 그 줄을 끊어 버릴 수 있습니다.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해방이 될 수 있습니다. 기쁨과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최선의 사람이 되고 최선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 자유입니다. (一九五九년 十월 十一일)
Ⅲ-29 미쁘신 하나님 (고린도 전서 一장 一-九절)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一·九)
여기에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해서 말씀하십니다. 먼저는 너희를 불러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라는 그 사실을 지적했고, 또 그 다음에는 이와 같으신 하나님은 미쁘시다 하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오늘 이 시간, 학습을 선 학생들과 여러 청년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나오게 되고, 교회에 나와서 학습을 서기도 하고, 세례를 받기도 하는 것이, 한편 생각하면 우리 사람이 하는 것이고, 내가 힘쓰는 것이고, 내가 교회에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편 사실만 보는 견해입니다. 사실 우리가 교회에 나오게 되고, 믿음을 얻게 되고, 이와 같이 학습을 서고, 세례를 받는 것을 내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를 부른 이가 계십니다. 우리를 이 죄악의 세상 가운데서 불러서 죄를 회개하게 하고, 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이가 계십니다. 그이는 곧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끌지 아니하면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우리 주를 믿고 사실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으신 하나님은 미쁘시다 라고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미쁘시다」하는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믿을 만하다. 혹은 신실하다, 그러니까 의지 할만 하다. 그저 쉽게 말하면, 신용할 수 있는 이다 하는 그 뜻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미쁘신 하나님입니다.
디모데 후서 二장 十三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一向)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사람은 미쁨이 늘 부족합니다. 우리 사람은 사실 미쁨이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주는 일향 미쁘시니 언제든지 미쁘시니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가 없다고 이와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우리 사람은 사실 내 자신을 꼭 믿기 어렵습니다. 그 까닭은 내 자신이 하루에도 몇 번 변하는지 모릅니다. 내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때에는 분열되기도 합니다.
여기 스티븐슨의 유명한 소설에 나오는 인물처럼, 내 자신 속에는 지킬 박사와 같은 점잖은 이가 있지마는 반면에 아주 고약한 하이드 맨과 같은 사람이 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때에, 어떠한 환경에, 어떠한 자신이 나타날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내 자신을 믿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미쁘십니다. 하나님 자신은 하나 뿐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분열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변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자신이 미쁘십니다. 믿을 만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나 자신을 믿기 어렵지마는 하나님은 우리가 믿을 수 있습니다.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또한 미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뜻은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합니다. 인심은 조석변이라 아침과 저녁으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뜻은 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연 하에 움직일 때에 그것을 자연 법칙이라고 합니다. 자연 법칙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변하지 아니합니다. 이 자연의 법칙은 먼저 별 가운데 운행되는 법칙이나 우리 지구 안에서 운행되는 법칙이나 똑 같이 변하지 아니하는 자연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인간 생활에 움직일 때에 우리는 흔히 그것을 도덕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도덕의 법칙 자체는 변함이 없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의 양심을 움직이던 그 법칙이나 오늘날 우리의 양심을 움직이는 그 법칙이나 같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미쁩니다. 믿을 만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도 또한 미쁩니다. 하나님의 공의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이 제한되어서 공의를 볼 때에 한 편만 보기 쉽습니다. 그래서 같은 법률을 가지고 같은 사건을 공판할 때에도 재판장에 따라서 공판이 달라지는 때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것은 재판장이 부정하게 재판해서 그렇게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에도 공정히 하느라고 하지마는 우리 인간이 보는 그 견해와 우리 인간의 이성은 제한되어서 한 면만 보는 까닭으로 언제든지 꼭 공의롭게 재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체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언제나 변하지 아니하시고 따라서 미쁘십니다. 믿을 만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릇되는 법이 없습니다. 역사적 심판이나, 내세의 심판이나, 그 심판은 온전히 미쁜 심판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미쁘신 사랑입니다.『내가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옛날도 그 사랑, 오늘날도 그 사랑, 백인종에게도 그 사랑, 황인종에게도 그 사랑, 흑인종에게도 그 사랑, 부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변함이 없는 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미쁘십니다. 사람의 사랑은 사랑의 대상에 의해서 항상 변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대상 여하를 불문하고 그저 우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믿을 만한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항상 변해서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원수가 되는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그런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믿을 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미쁘십니다. 믿을 만 합니다. 신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로 우리 인생을 향해서 언약한 말씀이 계십니다. 약조한 말씀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택하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하였습니다. 그이들에게 열 가지 계명을 주시며 그이들에게 율법은 주면서 그들이 이 계명을 지키고 이 율법을 지키면 대대손손이 수천 대까지 이르도록 축복하여 주시겠다고 확실히 언약하셨습니다. 그 언약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언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켰습니다.
우리가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더 크신 계시를 우리에게 주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이제부터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죄를 회개하는 자는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 영혼을 구원해서 금 생과 내생에 영원한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약조가 기록된 성경을 신약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언약의 책입니다.
그 밖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약조한 말씀이 많습니다. 기도할 때에 응답하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영적으로 육 적으로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언약했습니다. 하나님의 이 모든 언약은 미쁘신 언약입니다. 믿을 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생활을 해나갈 때에 결론적으로 분명히 기억하시기를 바라는 것은 나를 믿으면 아니 됩니다. 미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고 우리의 신앙 생활을 하여 나아가야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결심했지마는 그 결심이 몇 날 갈 지 모릅니다. 변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미쁘심을 우리가 의지해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시험을 당하게 하지만 이 기도를 도와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十장 十三절에 보면『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물론 믿어 나갈 때,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을 당합니다. 그때에 나를 믿지 마십시오. 내 결심을 믿지 마십시오. 오직 미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내 결심을 믿지 마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 시험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도 믿어 나아가다 죄를 범하기 쉽고 혹 실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 사하여 주시겠다고 여기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요한 一서 一장 九절에는『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 우 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오.』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사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그대로 사해주십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이는 구해주시겠다고 약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에 의지해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또 데살로니가 후서 三장 三절에는 이런 말씀으로 우리를 격려해 주셨습니다.『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우리 주님은 미쁘셔서 우리의 신앙을 굳게 하시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을 더 튼튼한 토대 위에 놓아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미쁘신 하나님을 의지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五장 二十三-二十四절에는 이런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평강(平康)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여러분을 불러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인 까닭으로 여러분의 몸을 온전히 지켜서 우리 주님의 날까지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미쁘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다. 이 미쁘신 하나님께 우리의 전 생명을 바칩시다. 내 지혜를 의지하지 마십시오, 내 의지를 의지하지 마십시오. 내 지식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오직 미쁘신, 전능하신, 사랑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세요. 또 이와 같이 미쁘신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도 미쁘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학습 설 때에 하나님과 약조했습니다. 그 약조를 하나님은 꼭 지키실 터이요. 여러분도 꼭 지키십시오. 또 이와 같이 미쁜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미쁘게 살아야 됩니다.
아프리카에 제일 먼저 가서 일생토록 그 암흑 대륙을 탐험하며 처음으로 흑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23-1873)혼자 백인으로 흑인 사이에 가서 개척 전도를 할 때에 종종 위험한 일을 얼마나 만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위험한 일을 만날 때마다, 언제든지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또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같이 있으리라.』리빙스턴은 이 성경 구절을 기억할 때에『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보다도 가장 미쁘신 주시야, 그리스도께서 거짓말 할 수 없어, 그리스도는 참 말만 하시는 이야, 누구의 말보다도 그리스도의 말은 믿을 수 있는 말이야,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 때까지 나와 같이 있으시겠다고 약조하였으니까.』하고 같이 계시는 것을 꼭 믿었습니다. 그 믿음 가지고 미쁘신 주님을 의지하고 어떤 위험한 일을 당하든지, 어떤 급한 일을 당하든지,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주를 의지하고 담대히 일한 것입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이 미쁘신 하나님을 튼튼히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一九五九년 十월 十八일)
Ⅲ-30 신앙과 행위 (야고보서 二장 十四-二十六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二·二十六)
지난주일「신앙의 정로(正路)」라고 하는 문제로 우리가 신앙 생활을 바르게 하려면 신앙의 바른 노선을 찾아야 된다고 하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그 말이 다 사실이지마는 오늘 아침 계속해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신앙의 노선을 찾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행함이 따르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또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우리에게 경고를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얼핏 들으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가르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과 오직 믿음으로만 외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그 진리와 모순되는 듯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신학적 견지에서, 이 세상에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행위 곧 자기의 있는 의(義)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唯一)의 길은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고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믿음으로 받아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진리를 확실히 가르친 것이며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에 대해서 절대로 반대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 진리가 꼭 사실입니다. 그런데 실제 견지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 이 믿음은 참 믿음이어야 되겠고, 이 믿음은 산 믿음이어야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참 믿음은 무엇으로 알 수 잇느냐? 반드시 행함이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머리로써 믿을뿐더러 입으로써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실지로 행위에 나타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져야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그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권면은 옛날도 필요해서 이와 같이 야고보 장로가 말씀하신 줄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권면은 언제나 필요하고 오늘날도 우리에게도 또한 필요한 줄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은 믿음과 행위, 이 문제를 가지고 성신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잠깐 생각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행위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진리는 뿌리요 행위는 열매입니다. 참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나타납니다. 나무가 있으면 반드시 열매가 열립니다. 나무와 열매는 나누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정치 六대 원리(政治六大原理)가운데 진리와 행위에 대한 원리가 그 원리입니다. 나무와 열매는 나누일 수 없습니다. 진리와 행위는 나눌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외치기를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참 믿음과 회개가 있습니까? 그러면 반드시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삭개오가 과연 예수를 믿고 회개하였습니까? 무엇을 보고 압니까?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토색(討索) 하였던 것을 네 배나 도로 갚아 주었습니다. 있는 것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에, 어떤 청년이 예수를 믿고 회개한 후, 몇 해 전에 가져갔던 자기가 가져서는 안 될 재봉틀을 돌려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믿음이 있습니까? 반드시 열매도 따를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참 믿음으로 인정합니까? 어째서 인정합니까? 행위도 따랐습니다. 고향과 친척을 다 이별하고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보이시는 나라로 가라고 할 때에, 순복해서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간 곳마다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모리야산에서 자기의 독생자까지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렸습니다. 마음으로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기생 나합이 과연 믿음을 가진 것으로 인정합니까? 왜 인정합니까?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정탐 군들을 잘 숨겨주고 피할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반드시 행위가 따를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로 믿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로 믿을진대, 우리가 과연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분명히 알진대, 이와 같은 믿음이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성품과 우리의 생활에 반드시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선 온유와 겸손과 사랑의 생활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님의 인격과 예수 님의 성품과 예수 님의 생활의 특징이올시다. 그런데 그렇지 아니하고 그와 반대로 믿기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을수록 마음은 더 교만해지고, 욕심은 더 많아지고, 돈을 더 사랑만 하게 된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그 믿음이 우리 생활에 있어서 성결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이와 같은 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이 불결하고 깨끗하지 아니한, 죄를 죄인 줄 알면서도 끊어버리지 아니하고 그냥 계속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참 믿음입니까? 믿음은 열매로 나타납니다.
예수는 진리이십니다. 예수에게 허위가 없습니다. 우리가 과연 이와 같은 주를 내 주로 섬기면 아무래도 우리 생활과 우리의 성격 가운데도 이 진실이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거짓 증거를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성경이 그르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믿기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 그냥 거짓말을 반복하면서 허위를 선전하고 모략을 하고, 죄 없는 사람을 중상하면, 이것이 믿음입니까? 믿음은 반드시 행위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대체로 우리 그리스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생활에 있어서 양심적인 생활로 반드시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사업을 할 때에든지, 금전거래를 할 때에든지, 사교적 생활을 할 때에든지 모든 방면에 다른 사람보다 양심적인 방면으로 반드시 우리의 생활이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믿기는 믿는다고 입으로 말하지만, 오래 믿었다고 하며 햇수도 길었다고 하면서, 비양심적인 태도와 비양심적인 생활을 그냥 계속해 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까? 행위는 믿음의 필수적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분명히 마음 가운데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둘째로, 행위는 믿음의 시금석입니다. 그것은 첫 대지에 따르는 진리입니다. 행위가 믿음의 열매인 까닭으로 우리는 그 반대로 행위를 보아서 믿음을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행위는 결국 믿음의 진가를 판단하는 표준이 됩니다. 참 믿음이냐? 거짓 믿음이냐? 바른 믿음이냐? 그릇된 믿음이냐? 결국은 무엇으로 판단하겠느냐? 예수 님의 말씀과 같이 나무는 열매를 보아서 알게 됩니다. 열매인 행위를 보아서 우리가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산상보훈을 여러분은 아십니다.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행위를 보고 열매를 보아서 판단하라고 몇 번이나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경고를 했습니다. 나무는 종류를 따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가 사과면 그 나무는 사과나무요, 열매가 배면 그 나무는 배나무요, 은행이 열리면 그 나무는 은행나무입니다.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압니다. 마찬가지로 행위를 보아서 믿음을 판단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줄 생각합니다.
혹 어떤 이가 말하기를 아무개는 신앙은 정통인데 행위는 이단이더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전연 모순되는 말입니다. 신앙이 사실 정통이면, 참 신앙이면, 그 행위도 정통입니다. 사실 그 행위가, 이단적이요 비 기독교적이면, 신앙도 옳은 신앙은 못 될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입으로만 떠들고 사실은 믿지 아니하던가, 그릇 믿던가, 혹은 시험에 들어서 병든 믿음일 것입니다.
여러분, 야고보에 있는 말씀을 지금 다 들었습니다. 야고보 장로가 여기 분명히 그와 같은 열매 없는 믿음은, 말로만 하는 믿음은, 일용할 양식 없는 이에게 평안히 가서 잘 먹고 잘 있으라고 말하듯 말만 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송장과 같은 믿음이올시다. 썩어진 믿음이란 말입니다. 백합화가 매우 아름답습니다. 가러나 백합화가 썩어지면 냄새는 제일 고약하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렇게 귀한 신앙이라고 죽게 되면 냄새가 날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그보다 더 격렬한 말씀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十九절 읽는 것을 다 들으셨을 줄 압니다.『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말만하고 행위가 없는 믿음은 귀신의 마음이란 말입니다. 귀신이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봅니다. 우리보다 더 잘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은 순종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습니다. 영광을 돌리지 않고 예배하지 아니합니다. 말만하고 실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 귀신이 가진, 마귀가 가진 믿음과 같다고 우리에게 경고해 준 두려운 말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바른 신앙의 노선을 찾아서 바르게 믿는다고 하지마는『서자서 아자아』(書自書 我自我)격으로 행함이 없으면 아무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복음과 우리의 복음 적 믿음을 위해서는 어떠한 행위를 해도 관계하지 않다 든 가, 또는 우리가 어떤 진리를 위하여서는 어떠한 비 신앙적 행동을 감행하여도 관계하지 않다고 하는 사상처럼 비 성서적이요, 위험한 사상이 우리 신앙 생활에 없는 것입니다. 행위를 보아서 믿음을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신앙을 가진 이는 자연히 마지막에는 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히 위선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이런 이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훼방을 받고 전도의 문이 막히고 믿음이 어린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 때문에 걸려서 넘어집니다. 행위는 믿음의 시금석(試金石)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분명히 깨닫고 내 행위로서 내 신앙을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셋째로, 행위는 최후 심판의 표준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맙시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결국은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최후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다 행위로서 판단한다고 성경에 말하였습니다.
산상보훈 마지막에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주께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요한 이 요한 一서 二장 十七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행위가 심판의 표준이 됩니다.
여러분께서 유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면양과 산양의 비유를 기억하십니다. 오른 편에 있는, 면양 편에 있는 의인을 향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 영원 전부터 내 아버지께 축복을 받은 이들아, 너를 위하여 준비한 복을 나와서 받으라.』『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가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너희가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너희가 찾아와 보았고 내가 병 가운데 있을 때에 너희가 와서 위문하였느니라.』고 하셨을 때 의인들이 하는 말이『주여 언제 주님께서 목말라서 우리가 마실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려서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언제 옷을 드렸으며, 언제 방문했으며, 언제 찾아가 보았나이까?』그 때에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우리 형제 중 지극히 적은 이에게 행한 것이 곧 주께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행위가 심판의 표준입니다.
예수께서 역시 유명한 달란트 비유 가운데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다 칭찬과 상을 주신 후에, 마지막에 한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 두고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한 그 종보고 뭐라고 하셨습니까?『저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하셨습니다. 행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아니했습니다. 행위가 심판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에『이제 도끼를 나무 뿌리에 놓았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다 찍어 불에 던지리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다 찍어 불에 던지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
씀을 문자 그대로 실행하셔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습니다. 발라 버렸습니다. 영원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말만하고 열매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던 바리새인들의 지도를 받고 따라가던 유대 민족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따르지 아니하고 마침내 주후 七十년에 송두리째 멸망을 당한 것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행위가 최후 심판의 표준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베드로는 소망을 강조해 가르쳤습니다. 사도 요한 은 사랑을 강조해 가르쳤습니다. 야고보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의 세 가지 큰 덕으로, 이 세 지가 합해서 아름다운 행실로 나타나야 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믿음도 선행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소망도 선행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사랑도 선행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죽은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님께서 산산보훈을 말씀하시다가 우리의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 말대로 한다고 하면 오늘날 한국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불교도나 유교도보다도 그 행위가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다고 한 말씀과 꼭 같은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어느 사람이 예배당에 다니는 거나 안 다니는 거나 그것이 뭐 신앙의 표준이 됩니까 라고. 이런 말을 들을 때처럼 기막힌 때는 없습니다.
야고보의 말씀을 하나 더 인용하고 그만 두겠습니다. 야고보 一장 二十二절에 친히 말씀하시기를『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 듣기만 해서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듣기만 하면 저절로 구원 얻는 줄도 알지 말라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고 도를 행하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바른 노선을 찾을뿐더러 산 신앙을 우리가 얻어서 우리의 행위로 나타나는 참된 신앙 생활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一九五九년 十一월 一일)
Ⅲ-31 지성의 감사 (출애굽기 三十五장 四-十九절)
『너희가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취하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출 三十五·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여러 가지 계명과 율법을 받는 중에 성막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에 대하여 하나님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서 이제 어떠 어떠한 모양으로 성막을 지을 터인데,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지을 터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금도 필요하고, 은도 필요하고, 놋 도 필요하고, 실과 천도 필요하고, 나무도 필요하고, 보석도 필요하다고 여러 무리에게 말씀하였습니다. 계속해서 누구든지 성막을 위해서 드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원해서 이 모든 물품을 가져 오기를 바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해서 즐거이 모세의 앞으로 가져온 물품의 목록이 여러분께서 오늘 아침 읽은 그 성경 말씀 가운데 기록되었습니다. 가령 가슴에 꽂던 핀, 귀고리, 지환, 목걸이, 그 밖에 여러 가지 금품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들은 다 여자들의 몸을 장식하는 것들인데 광야에서는 도무지 다시 마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귀하게 가지고 나온 것들을 이렇게 하나님 앞에 바친 것입니다. 그 외에 실과 털실과 털과 물들인 숫양의 가죽, 해달의 가죽, 은과 놋과 또한 제사장의 예복을 위해서 필요한 보석과 또한 조각 목과 이런 것들을 다 가져온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물품을 자원해서 가져왔을 뿐더러 이들은 역시 자기의 시간과 재주를 하나님께 바쳐서 실을 만들 줄 아는 여인들은 털로 실을 만들고, 그 실로 천을 짤 줄 아는 여자들은 천을 짜기도 하고, 혹은 금과 은을 가지고 조각을 하며, 천에 수를 놓으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 받은 대로 재주 받은 대로 그 재주를 드려서 성막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계속해서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옴으로 마지막에는 너무 많아서 더 필요가 없는 까닭으로, 모세가 모든 사람을 향해서 하는 말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 넉넉하니 그만 두라고 무리들에게 간청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첫 번으로 하나님의 집을 위한 성막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자원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가 가장 귀하에 간직한 것을 하나님께 바쳤는가?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오랫동안 애굽 사람의 종의 멍에를 메고 말할 수 없이 눌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기적과 기사로서 특별한 사자를 보내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광야로 나와서 이제는 자유민이 되게 하시고 자기의 율법을 스스로 따로 가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성막을 짓게 될 때에 사람들의 마음가운데는 오직 은혜의 감격이 사무쳐서 온 정성을 다 바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첫 성막은 지성과 감사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첫 번 성막뿐이 아닙니다. 그 후에 이 지구 위에 나타난 모든 성막, 모든 성전, 모든 교회, 신령한 하나님의 집은 어제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성남 성녀의 지극한 정성의 감사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옛날부터 내려오는 동양의 말 가운데 지성은 감천(至誠感天)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움직인다고 하는 뜻입니다. 신앙 생활은 간단히 말하면 지성감천의 생활입니다. 지극한 정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감동을 줄 만한 생활을 하는 것이 참된 신앙 생활입니다. 정성이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참된 신앙에는 정성이 어울리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에는 참된 감격과 감사가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기도를 합니다. 기도에도 지성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단순한 묵상이 아닙니다. 단순한 명상이 아닙니다. 단순한 자기 반성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금 향로에 향을 가득히 담아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드리는 광경이 보입니다. 이 향로에 가득히 담은 향은 곧 성도의 기도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성도가 정성껏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하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때에, 이 땅 위에 큰 움직임이 있다고 하는 뜻인 줄 생각합니다. 어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어떤 기도가 상달되지 못합니까? 지성이 따르는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고 정성이 없는 입술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합니다.
예수 님께서 기도의 비유를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를 드립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이 사람은 기도하기를『하나님이시여 감사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감사합니다. 나는 토색을 하지도 아니하고, 무리한 일을 하지도 아니하고 음란한 일도 하지 아니하고, 저기에 있는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하니 감사하다.』고 기도했습니다.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이 세리는 감히 하나님 제단 앞에 가까이 나오지도 못하고 멀리서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오! 하나님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어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 님 말씀이 하나님께서 세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바리새인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에 지성이 같이 할 때에 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지성 없는 기도는 시간의 낭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들은 기도할 때에 외인들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하나님께서 들으실 줄로 아느니라.』『너희들이 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너희 구할 것을 다 아시는 줄을 너희들이 모르느냐?』한 마디를 드리되 정성을 기울여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 님께서 언제든지 정성 것 자기에게 와서 간구 하는 것을 물리친 일이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경에 잠깐 여행하실 때에 거기 가나안 여자 수로보니게 여자가 자기의 딸이 않는데 예수 님께서 큰 권능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예수 님 앞에 나와서 자리를 불쌍히 여겨서 자기의 딸을 고쳐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그 말을 들은 척 만 척 하고 처음에는 대답도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도 민망해서 제자들이 나와서 하는 말이『선생님 저 여자가 저렇게 간절히 부르짖는데 어떻게 해서 돌려보내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 님께서는 아들에게 줄 떡을 개에게 던지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냉정히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가 그 말을 듣고 주를 부르면 하는 말이『옳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간구 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 님께서 하시는 말씀이『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돌아가라. 네 딸이 나으리라.』말씀했습니다. 간절한 지성의 연인의 간구를 예수 님께서 물리치지 아니하십니다.
가버나움에서 가르치실 때에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어떻게 문간에 사람이 많이 섰는지 사람이 도무지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그 때에 어떤 네 사람이 반신불수 들린 사람을 데리고 먼 곳에서 메고 왔는데 막상 와서 보니 문이라고는 사람들이 가득 서서 도저히 예수 님 앞에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갔다고 그렇지 않았습니까? 유대 사람의 지붕은 평평합니다.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줄을 매서 네 사람이 그 반신불수를 예수 님 앞에 드리워 내리 우지 않았습니까? 성경에 보니 예수 님께서 그 네 사람의 정성 있는 믿음을 보시고 그 반신불수를 고쳐주었다고 그랬습니다. 정성껏 드리는 기도를 주님께서 항상 응답하셨습니다.
예수 님의 유명하신 불의 한 법관의 비유를 여러분은 다 기억하시지요. 어떤 곳이 불의 한 법관이 있는데 이 법관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성에 어떤 불쌍한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이 법관에게 와서 신원 해 주기를 간청합니다. 불의 한 법관인지라 불쌍한 과부가 청하는 것까지 일일이 뭐 눈떠볼 이치가 있습니까? 본 체 만 체, 들은 체 만 체 그냥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가 하루 가서 안되면 그 이튿날 또 가고, 또 그 다음날 또 가고, 그냥 계속해서 정성껏 이 불의 한 법관에게 간청했습니다.
마침내 이 불의 한 법관이 하는 말이『내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지마는 이 여자가 자기를 괴롭게 구니 이거야 견딜 수 있나?』하며 아무래도 그 원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 원을 풀어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요긴한 뜻은 이 여자의 그 간절한 정성이 마지막에는 불의 한 법과까지도 자기의 책임을 행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밤낮 귀한 목적을 위해서 간구 할 때에 이 정성을 하나님께서 몰라 볼 이치가 잇느냐?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기도에 정성이 필요합니다. 十년, 二十년, 자기의 아들을 회개하게 해 달라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정성에 정성을 기울여서 기도한 어거스틴의 어머니인 모니카와 같은 이런 정성이 필요합니다. 내 나라를 구원해 주시지 않을진대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는 존 녹스 같은 사람의 정성어린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기도를 우리는 우리 교회를 위해서, 우리 민족을 위해서, 三八선이 열리기 위해서, 북한의 동포를 위해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기도에 정성이 필요합니다.
또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할뿐더러 또 헌금도 합니다. 헌금은 물론 교회의 경상비로도 쓰고, 교회의 여러 가지 사업비로도 쓰고, 교역자의 봉급도 주고, 여러 사무 직원의 봉급도 주는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교회의 헌금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헌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사람에게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이것을 잊어버릴 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전에 제가 이북에 있을 때에, 어떤 분규 난 교회의 어떤 직분 맡은이가 저에게 와서 말하기를 자기 교회의 목사는 아무리 교인들이 환영하지 않아도 나가지 않고 그냥 있어서 이젠 부득이 경제전(經濟戰)으로 들어가야겠다고 합니다. 즉 연보 안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북에 있을 때에 들은 말이지만 이북의 어떤 사람은 예배당에 갈 때에 한편 주머니에는 돈 일 원 짜리를 넣고-그 때 일 원 짜리면 지금 천 환 가치는 있습니다-한 편 주머니에는 돈 십 전 짜리를 넣고 갔다가 설교를 들어보고 설교를 잘 하면 일 원 짜리를 넣고 설교를 잘못하면 이건 십 전 짜리 밖에 못되니 십 전 짜리를 넣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헌금은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헌금은 물질 자체를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헌금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우리의 몸을 드립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시간에 헌금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을 드리는 그 정신으로 그 상징으로서 우리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질의 일부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에 정성이 따르지 아니하면 헌금의 의의를 잊어버립니다.
어떠한 헌금이 하나님께 가합이 되고 어떠한 헌금이 하나님께 가합이 되지 아니하느냐? 같은 헌금이지마는 그 배후에 정성이 따를 때에 그 헌금이 하나님께 가합이 됩니다. 그러기에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바칠 때에, 곡식을 바치면 첫 이삭을 바쳤습니다. 처음 거둔 것을 바쳤습니다. 나무의 열매이면 첫 열매를 바쳤습니다. 자녀이면 맏아들을 바쳤습니다. 짐승의 새끼면 첫 새끼를 바쳤습니다. 양을 제물로 바칠 때에도 함부로 아무거나 바치지 않았습니다. 흠 없는 순결한 양을 택해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정성으로 드립니다.
그렇지마는 우리가 말라기의 예언서를 보면 그 때에 모든 사람의 믿음이 타락해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 가져오는 양을 보니까 눈먼 놈, 다리 저는 놈, 여러 가지 병든 놈, 쓸데없는 그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 제사하기 위해서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을 책망했습니다.』너희들이 이런 것을 세상 관헌에게도 가져가지 아니하거든 이것들을 나에게 가져오느냐?』책망한 것입니다. 헌금에도 정성이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예수 님께서 한 번은 성전에 계실 때에 연보 궤에 서서 여러 사람들이 연보 궤에 연보 하는 것을 자세히 보셨습니다. 우리가 연보 할 때에 지금도 예수 님께서 보시는 것입니다. 넉넉하고 돈 많은 사람들이 와서 많은 연보를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번 보니까 어떤 가난한 과부가 그 때 돈 동전 두 닢을 연보 궤에 넣고 조용히 물러갔습니다. 예수 님께서 그 광경을 보시고 다른 곳에 있는 제자를 향해 오라고 해서 하시는 말씀이『너 보았느냐? 이 과부가 다른 사람들보다 연보를 제일 많이 하나님께 드렸다.』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쓰다 남은 것을 드렸지마는 이 과부는 자기의 연명할 것,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이 연보에 드렸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연보의 양을 보시지 아니하시고 연보 가운데 들어 있는 정성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저울에는 이 정성의 무게가 갑니다. 양이 많고 적은 것은 사람의 가세 형편에 의지해서 다를 것입니다. 요컨대 그 연보 가운데 얼마나 정성이 들었느냐?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 에서 예수 님을 위해서 잔치를 베푼 이가 있지 않습니까? 마르다가 여러 가지로 와서 일을 보고, 나사로도 청함을 받아서 가 있고 제자들과 예수 님께서 가실 때에 그 때에 마리아는 무엇을 했습니까? 값진 향기로운 기름이 든 옥함을 가져다가 옥함을 깨뜨려서 예수 님 머리에 향유를 붓고 발에는 향기로운 기름을 붓고 머리털로 예수 님의 발을 씻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본 이해타산이 밝은 유다 가 하는 말이 왜 그 여자가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는가 고 말하며, 저것을 팔면 三백 데나리온이나 받겠는데 그 것을 가졌으면 많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겠는데, 왜 저렇게 귀한 향기로운 기름을 허비하는가 고 원망했습니다.
예수 님께서 그 때에 무어라고 말했습니까?『이 여자를 가만히 두어라. 두렵게 하지 말아라. 이 여자가 내게 착한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사람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같이 있을 수 없다. 이 여자가 내 장사를 이미 준비하였느니라. 이 앞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어디단지 이 여자에 대한 이야기도 또한 말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했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그 향유를 받았습니다. 왜? 그 향유 가운데는 마리아의 정성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사랑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믿음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생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는 정성껏 드리는 것을 귀하게 받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옛날 어떤 임금이 자기 이웃 나라의 한 임금이 경사로운 일이 있어서 자기 사위를 축하 사절로 보냅니다. 그래서 사위에게 금과 은도 달아 좋은 말도 택해 주고 좋은 수레도 택해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이웃 나라에 가서 어떻든지 축하를 잘 하고 돌아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물을 다 받은 사위가 껄껄 웃습니다. 그러니까 왕의 눈이 동그래지면서『너 어찌해서 웃느냐? 이 예물이 변변치 않단 말이냐?』그러니까 그 사위가 하는 말이『폐하 황송하옵니다. 제가 예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오늘 아침에 부름을 받아서 여기 오는 길에 길가에서 본 것이 생각나서 웃습니다.』『길가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길가에 오다가 어느 농사하는 집을 지나 왔는데 그 집 옆에 조그마한 신당이 하나 있어요. 그 신당 앞에서 농부가 제사를 드리는데 그 우상 앞에다 돼지 발족 하나를 갔다 놓고 그 다음에는 술 한잔을 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농부가 복을 달라고 비는데,「오! 신이여, 그저 금년에 나에게 복을 주어서 금년에는 우리 소는 새끼를 꼭 쌍둥이를 낳게 해 주시고, 또 우리 돼지는 새끼를 낳되 한 배에 열 놈씩 여러 배를 낳게 해 주시고, 그 다음에는 또 곡식이 잘 되어서 우리의 뒤 곡간도 가득히 차게 해 주시고, 우리 앞 곡간에도 곡식이 가득하게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이렇게 축원을 합니다. 돼지 발족 하나 놓고 그렇게 복을 많이 받겠다고 하는 욕심이 그렇게 복을 많이 받겠다고 하는 욕심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천하에 처음 보았기에 그럽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드릴 때에 예수 님께서만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도 봅니다. 우리가 드리는 것을 혹 사탄이 보고 웃을 경우는 없습니까? 내 들으니까 아직까지도 연보 할 때에 일 환 짜리 가 들어온다고 합니다.
정성이 필요합니다. 헌금뿐이 아닙니다. 모든 주의 일이 그렇습니다. 교역자만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도 주의 일을 합니다. 권사도 주의 일을 합니다. 집사도 주의 일을 합니다. 구역장도 주의 일을 합니다. 성가대원이나 주일학교 반사나 우리 평신도라도 주를 위해서 우리가 심방을 하고, 누구를 도와주고, 우리가 전도를 하고, 무엇이든지 하는 것은 다 주의 일입니다. 이 주의 일에 정성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정성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합니까? 금년 일년이 거의 지나갔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직분을 맡은 여러분, 얼마나 정성을 가지고 주님 앞에 그 책임을 감당했습니까? 평신도 여러분! 여러분이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금년 일년 동안 얼마나 정성을 가지고 주를 섬겼습니까? 하나님께서 사탄을 향해서 하는 말이『너, 내 종 욥을 보았느냐? 저렇게 정직하고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내 종 욥을 보았느냐?』
하나님께서 사탄 앞에 여러분을 그 만큼 자랑할 만한 그런 생활을 당신은 했습니까? 모든 일에 정성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직장에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지성의 인물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이 감사 주일을 당해서 지성의 감사를 드립시다. 중심의 감사, 참된 지성의 찬송, 참된 지성의 기도와 예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성껏 감사의 생활을 합시다.
(一九五九년 十一월 十五일)
Ⅲ-32 구원의 우물 (이사야 十二장 一-六절)
『보라 하나님은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 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十二·二-三)
오늘 아침, 본 교회 창립 제 十四주년을 맞이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기쁘고 감사한 날에, 좀 전에 읽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성지는 대체로 건조한 지대여서 우물이 대단히 귀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어느 동리든지 우물을 중심해서 이루어진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에는 유명한 엘리사의 우물이 있고, 수가성 근처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고, 나사렛에는 마리아의 우물이 있고, 베들레헴도 성밖에 좋은 우물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렇게 우물이 귀한 까닭으로 우물 때문에 싸움한 적도 종종 있습니다. 이삭과 불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가지고 여러 번 다툰 이야기를 우리는 창세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전시에는 보통 이 우물들을 먼저 점령하기를 애쓰고 또한 부득이 후퇴할 때에는 흔히 이 우물을 메우고 후퇴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성지를 순회할 때에 여리고에 가보니 그곳은 매우 낮은 지대로 예루살렘보다 덥고 사방은 광야입니다. 건조해서 무엇이 자랄 곳이 못 됩니다. 하지만 여리고 근처만은 좋은 엘리사의 우물이 있어서 그 근처에 가보니 남자 여자 아이들 할 것 없이 기쁨으로 그 샘에 와서 물을 길어 가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여자들은 물을 길어서 물병을 어깨네 메고 가고, 아이들은 적은 물병에 물을 길어 가고, 남자들은 가죽 부대에 물을 넣어서 나귀에 싣고 갑니다. 필연 먼 곳에서 물 길러온 모양입니다.
이러한 나라인데 이사야의 예언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앞으로 구원의 우물들에게 너희가 기쁨으로 물을 기를 때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영적 기갈을 풀 수 있는 생명수의 우물이 있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의미에서 예언이 이루어졌습니까? 아마 세 가지 의미에서 이 예언이 이루어진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밀어주는 성경을 통해서 이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서 이 예언이 이루어진 줄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첫째 구원의 우물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성경 말씀도 넓은 의미에서 구원의 우물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도 또한 넓은 의미에서 구원의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이 첫째 의미를 생각하면 이사야의 예언의 배후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서 광야 길을 사흘째 걸어갔지마는 물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곳에 와서 보니 물이 조금 있기는 있지마는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가 나무 가지를 그 물에 던져서 물맛이 달아져서 조금 먹었지마는 만족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좀더 가서 엘림이라고 하는 곳에 가 보니 그 곳에는 좋은 샘물 열 둘이 있었습니다. 또한 큰 종려나무 七十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열두 우물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어 먹고 종려나무 아래에서 더운 햇빛을 피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광야 길을 헤매 일 때에 므리바라고 하는 곳이 가서는 전혀 물을 찾을 수 없어서 많은 백성들이 모세를 향하여 불편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반석을 치니까 갈라지면서 그 곳에서 생수가 나옴으로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한번 문자 그대로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은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사야가 예언하기를 우물이 있어서 누구든지 기쁨으로 물을 기를 때가 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은 이처럼 이사야가 말씀하신 지 약 七五0년 후 초막 절 마지막 날에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거니와 유대 명절 중에 초막 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생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켰습니다. 그래서 흔히 광야에 나가서 종려나무 가지로 초막을 짓고 온 가족이 일주일 동안 초막에서 지내는 풍속이 있습니다. 그리고 초막 절 마지막에는 예루살렘 선전 앞뜰에 모여 그 때의 모든 제사장들은 흰 예복을 입고 모든 악사들은 악기를 가지고서 노래를 부릅니다. 제사장들은 물병을 들고 열을 지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노래를 부르면서 실로암 못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실로암 못에서는 하나씩 하나씩 물병을 채워 가지고 그 물병을 메고 여러 제사장들은 역시 열을 지어서 찬송을 하면서 성전 앞뜰에 모입니다. 그리고서는 한 사람씩 그 물병을 성전 제단 앞에 부어서 옛날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수를 주어서 우리 민족을 구원하여 주었다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한 것입니다.
일 세기경에 예루살렘 성전 바로 앞뜰에서 어떤 초막 절 마지막 날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七장 三十七-三十八절에 기록한 대로 읽습니다.『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예수 님께서 초막 절 끝날 문자 그대로 그 성전 뜰에 서서 무릇 목마른 자는 다 주께 와서 마시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문자 그대로 구원의 우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나와서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인간 심령의 깊은 욕구에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올 때만 이 우주에 오직 한 분밖에 없으신 참 하나님, 살아 계신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올 때만 이 아버지가 살아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 앞에 나올 때만 모든 더러운 죄를 씻어서 깨끗한 심령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나올 때만 참된 안심과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나올 때만 세상을 이기고 자기를 이기고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큰 권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과연 구원의 우물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당시 사람들을 책망해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들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을 버린 것이오, 또 하나는 그 대신에 웅덩이를 판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향락,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인간적인 모든 오락, 인간에 속하는 모든 것은 일시적 만족을 주는데 그치는 웅덩이 물밖에 되지 아니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 나올 때에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미 말씀드린 대로 넓은 의미에서 성경은 구원의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도 너희가 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그 가운데 영생이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 중에 생수가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모든 책들 중에 성경이 제일 많은 방언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일 천여 방언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제일 많이 출판되는 책이 성경이요, 제일 많이 판매되는 책이 성경이요, 오늘날까지 제일 많이 읽는 책이 성경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성경 가운데 생명수가 있는 까닭입니다.
당시에 모든 철학과 문학과 문학을 아무리 통달하였지마는 영적 고민을 면하지 못하던 청년 학자 어거스틴이 어디서 생수를 발견하였습니까? 이 성경 말씀 가운데서 발견하였습니다.『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과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이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되게 한 것입니다.
자기의 노력으로써 옳은 생활을 하여 보려고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의를 얻지 못하던 청년 신부 마틴 루터가 어디서 생수를 발견하였습니까? 이 성경 가운데서 생수를 발견하였습니다.『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 가운데서 생수를 발견한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읽은 책이지마는 지금도 기억하는 작은 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二十二년 동안이나 여러 가지 죄를 지음으로 감옥 생활을 하던 어떤 청년이 감옥에서 성경책을 만나게 되어 그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성경책을 읽는 가운데『성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난 사람에게 쓸데 있는데 인자도 세상에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하는 이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갖은 죄악을 지은 이 청년이 이 말씀을 읽을 때는 세상에 자기 같은 죄인이 어디 있으랴, 예수 님께서 오신 것은 자기 같은 죄인도 구하려 오신 것이 아니냐? 그 자리에서 일 말씀을 읽고 또 읽는 가운데서 은혜를 받아서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해서 적은 자서전을 쓴 것을 읽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물론 율법도 있고, 역사도 있고, 예언도 있고, 여러 문학도 있고, 서신도 있지마는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읽을 때에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 계신 이광혁 장로님께서 신약 성경을 한 장에 다 써서 그린 그림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 그림을 보면 신약전서를 전부 썼지마는 싱상 나타나는 그림은 두 팔을 벌리고 모든 죄인들을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성경 가운데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 성경이야말로 구원의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을 통해서 생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넓은 의미에서 그 예언이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교회가 구원의 우물입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 비유로 표시됩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기록한 곳도 있습니다. 인간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장막이라고 말한 곳도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새 예루살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곱 금 촛대 혹은 진리의 등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 이렇게 성경에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교회의 역할을 생각하면서 교회는 영적 도피성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 심령의 질병을 고치는 영적 병원이라고 지적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교회는 구원의 방주라고 말합니다. 또한 최근에 와서는 교회야말로 진리의 방송국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비유가 교회의 역할, 교회의 성격의 어떤 면을 우리에게 모여줍니다. 그렇지마는 아마 성경 가운데 제일 많은 이름으로 교회를 부르기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는 이 말씀인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예수 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그 육신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했습니다. 그 신령한 몸이 四十일 동안 제자들과 같이 있다가 마지막에는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이 신령한 몸이 하늘로 승천한 후에는 이 땅 위에 보이는 몸을 대신 세웠습니다. 그 몸이 곧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통해서 생명수를 그리스도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수를 주는 구원의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일세기에도 많은 목마른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생명수를 마시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二세기에도 그러했고, 三세기에도 그러했고, 오늘날 二十세기에 와서도 또한 그러합니다.
어거스틴이 성경만 읽은 것이 아닙니다. 주일날마다 진실 되게 근실하게 밀라노 교회에 나가서 여러 성도들과 같이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 때 로마 제국 일원에서 제일 유명하다고 하는 성 암부로스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더욱 깊은 자리에 들어갔고 풍성한 생명수를 마신 것입니다. 이 교회야말로 이 광야같이 매 마른, 아니 사하라 사막같이 쓸쓸한 세상에서 영적 오아시스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대로 구원의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일찍이 어떤 잡지를 보니 옛날에는 바사라고 불렀던 저 이란 나라 유브라데강 근방에는 물론 물이 있어서 풍성하지마는 대체로 비가 적게 오는 지방이어서 어떤 지방에는 일년에 몇 번밖에는 비가 안 오고 전혀 우물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지방 사람들은 비가 올 때와 소나기가 올 때에 그 물이 고인 웅덩이를 파서 거기에 받아 두었다가 여러 달 비 안 올 때에 그 물을 마시고, 그 물로 밥 짓고, 그 물로 매 마른 곡식에 주고, 이렇게 전부 그 웅덩이 물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 어떤 선교사가 선교하러 가서 보니 그 웅덩이 물이 오래 되니까 더러워지고, 여러 가지 벌레도 생기고, 위생적으로 도무지 먹을 수 없는 물이 되고 마는데도 하도 물이 없으니까 그냥 그 물을 먹고삽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가 어떻게 하면 여기서도 생수를 먹고살게 할 수 없을까 하고 연구했습니다. 그러다 미국에서 보니 몇 백 척 되는 깊은 곳을 뚫어서 그 땅 속에 있는 원유를 뽑아 휘발유를 공급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겉으로는 매 마르고 몇 십자 파서는 물이 안 나지마는, 깊은 속에는 물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서 특별히 미국에 기계를 주문해서 여러 백 척을 뚫어 보았습니다. 뚫고 보니까 약 二백 척 이하에는 물이 풍성해서 그 다음에는 그 지대에서 물이 솟아 나왔습니다. 그래서 첫 번으로 깊은 곳에서 생수를 얻어 그 다음부터 그 근방에서는 맑은 물을 마시게 되었고, 다른 곳에 가서 그런 우물을 파주고, 또 다른 곳이 가서 그런 우물을 파주고 해서, 그 일대의 쓸쓸한 광야가 변해서 문자 그대로 풍성한 꽃동산으로 변했다 하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돌아보건대 十四년 전에 이곳에 큰 구원의 우물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우물을 통하여 고향을 떠나고 재산을 잃고 허둥지둥 三八선을 넘어 온 모든 피난민에게 생명수를 마시게 하였습니다. 해방 이후 복잡한 시대에 시달려서 피곤하고 말할 수 없이 곤비한 심령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생수를 주셨습니다. 죄악에 물들어서 사망의 길을 걷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창립 十四주년 기념 주일을 당해서 먼저 이 구원의 우물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이 물가에 서서 외치십니다. 무릇 목마른 자에게 물로 나오라고 하십니다. 돈 없는 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도 와서 마시라고 하십니다. 이 샘물을 마시고 그 심령이 편히 쉬 임을 얻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도 나올 굿입니다. 이 샘물을 통해서 그야말로 천국의 부를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도 나오십시오. 이 샘물을 통해서 그 심령이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심령이 더러워진 자도 이 시간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이 샘에 그 몸을 씻으면 깨끗한 심령이 될 것입니다. 눈먼 자도 나오십시오, 이 물에 씻으면 그 마음 눈이 밝아질 것입니다. 피곤한 자, 병든 자, 약한 자도 나오셔서 이 우물의 구원의 물을 길어서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께서 새 힘을 얻어서 독수리 같이 날개 펴고 올라갈 수 있는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성령과 성부가 말씀하십니다. 성령과 성부가 말씀하시기를『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오,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마시라 하시더라.』오늘,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우물을 주서서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이 구원의 우물에 가까이 나와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수를 풍부히 마시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一九五九년 十二월 六일)
Ⅲ-33 크리스마스와 하나님의 사랑 (요한복음 三장 十六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 三·十六)
이 말씀은 아마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 모르는 분이 한 분도 없을 줄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 이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우주에 사무쳐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여 그 길이와 그 넓이와 그 높음과 그 깊음을 유한한 사람의 지역으로서 다 이해할 수 없는 줄 생각합니다. 다만 성경의 교훈에 의지해서 또한 이 시간, 성신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따라서 잠깐 동안 하나님의 사랑의 그 일면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셨는가? 몰론 그 지으신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도 어느 정도 나타났습니다.
모리슨이라고 하는 사람의 쓴 책 가운데「인간은 홀로 서 있지 않는다」는 적은 책자가 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과학자의 견지에서 이 우주를 살펴보고 우리 지구를 조사하여 보고 해와 지구와의 거리, 지구의 경도, 기울어진 도수, 지구를 싸고 있는 대기와 공기, 지구의 대부분의 표면을 점령하고 있는 물, 또한 지구를 구성한 여러 가지 화학적 요소, 이런 모든 것을 살펴보고 맺어보는 결론은, 과연 하나님께서 이 우주와 이 세계를 지으실 때에 인간을 위해서 지으셨고, 인간이 살 수 있으리 만큼 모든 조건이 준비된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사랑은 그 만드신 우주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나타나는 줄 생각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우주에 질서가 유지되고 이 세계의 모든 인류와 금수와 만물이 그 생명을 얻었고 또한 유지하여 가는 것이 사실인 줄 생각합니다.
그것이 사실인 동시에 우리가 또한 성경을 상고해 보면, 특별히 이밖에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난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요한 一서 四장 九절에 사도 요한 은 친히 증언하여『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특별히 그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나타난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으신 말씀도 역시 그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줍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나님의 사랑이 그 독생자를 주신 사실로 무엇보다도 분명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또한 이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류에게 하나님에 대한 비밀을 계시하실 적에 하나님의 지혜나 하나님의 능력이나 모든 영광도 계시하셨지마는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 의 말과 같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우리가 만일 사도 요한 을 향해서 어떻게 당신이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을 아느냐고 반문한다고 하면, 아마 제 생각은 대략 이런 말로 대답할 줄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은 사랑인 줄 분명히 압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친히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품이 친히 안겨 보았습니다. 나는 三년 동안 그리스도와 같이 자고 먹고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의 성품, 그의 말씀, 그의 생활, 그의 행동,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나가는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 위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면서 만민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 얼굴, 다 이루었다 하는 말씀과 같이 운명하시는 그 엄숙한 사실을 보았습니다. 三일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는 그 빛나는 부활하신 주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이제 다시 한번 추억할 때에 과연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나는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추한 사랑도 많이 있습니다. 불결한 사랑도 많습니다. 천한 사랑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맑은 사랑입니다. 흠 없는, 티없는, 백옥과 같이, 수정과 같이 맑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러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 그의 온 인류에 대한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었습니다.
뿐만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은 의로운 사랑입니다 인간에는 불의 한 사랑도 많이 있습니다. 불법한 동기의 사랑도 많습니다. 죄를 용납하는 사랑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은 사랑하지마는 죄를 용납하지는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을 때에 사랑의 채찍을 또한 내리신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그렇게 사랑의 화신이지마는 외식하고 죄를 회개할 줄 모르는 서기관과 바리새 교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의가 있는 사랑이올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된 사랑입니다. 인간 사회에는 거짓된 사랑도 많습니다. 허위의 사랑, 입술의 사랑, 여기에 속아서 일생을 그르치는 여자들도 많고 혹 남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된 사랑이올시다 중심의 사랑이올시다. 사실 이 세상에 오직 참된 사랑은 하나님의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이와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여 주십니다. 따라서 그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인심은 조석변이로 인간의 사랑은 시시로 변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원수로 변할 수도 있고, 오늘 뜨거운 사랑으로써 부부로 결혼하였지마는 몇 해가 못 가서 미움으로 서로 헤어지는 부부들도 없이 않아 있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올시다. 무궁한 사랑이올시다. 천지가 변할지언정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이와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흔히 조건이 있습니다. 꽃은 구우니까 사랑합니다. 두꺼비는 보기 싫으니까 미워합니다. 사람은 그 사랑의 대상물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좋으면 사랑하고, 좋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물 여하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 사랑을 받을만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속에 사랑이 있으므로 사랑합니다. 곧 하나님은 사랑인 까닭으로 사랑합니다.
여기에 어머니의 사랑과 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자식에 있는 것보다도 자기 속에 있습니다. 남 보기에는 못 생긴 것 같아도 어머니에게는 다 잘 생겨 보입니다. 그 사랑이 어머니 속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자신이 사랑이므로 사랑이 그 속에 있습니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도 사랑하고 악한 사람과 죄인도 사랑합니다. 다만 선한 사람은 기쁨으로 사랑하고 악한 사람은 상한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평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편파적으로 나가기 쉽습니다. 느브가는 좋은 어머니인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더 사랑하고 에서는 덜 사랑했습니다. 이삭도 좋은 아버지인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 반대로 에서를 더 사랑하고 야곱을 덜 사랑했습니다. 흔히 가정의 불행은 부모라도 이렇게 편벽 된 사랑을 할 때 종종 오는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흔히 편벽 되게 사랑하기 쉽습니다.
내 그룹은 더 사랑하고 내 당은 더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공평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남녀 노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습니다. 민족이나 국가적 구별이 없습니다. 다같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밭에 햇빛을 비추이듯이 공평하게 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놀랄 만한 사실은 하나님은 이렇게 전 인류를 사랑하는 동시에 그러나 그 사랑은 개인적인 사랑입니다. 개인 개인을 사랑합니다 마치 목자가 양 하나 하나를 불러서 저녁에 우리로 인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간 하나 하나의 영혼을 따로 불러서 그 영혼을 구원하여 주십니다. 예수 님께서 이 진리를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서 헤 매이는 목자의 모습이 곧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한 것입니다. 은전 열 닢 가운데 한 닢을 잃어 버렸어도 이 한 닢을 찾으려고 방을 쓸고 불을 켜고 애타하는 그 여자의 모습이, 하나님의 개인적인 사랑의 상징인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과 다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제한되어서 이러한 사랑의 능력이 없지마는 하나님은 하나 하나를 사랑하십니다. 여기 이렇게 여러 천 명이 모였지마는 하나님의 사랑은 한꺼번에 사랑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 하나를 사랑하여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을 이끌어서 구원하여 주십니다. 내 영혼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의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친히 말하기를『그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몸을 버리신 지라.』우리 하나 하나가 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그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몸을 버리신 지라.』마치 태양은 하나이지만 그 광선과 그 따뜻한 양기가 높은 산 위에 있는 소나무의 꼭대기도 비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깊은 골짜기의 어떤 풀잎에 머무는 작은 이슬방울에도 비칠 수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히 크지마는 그러나 개인의 심령을 사랑하시고 하나 하나를 이끌어서 구원하십니다.
이와 같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 사랑입니다. 모든 참된 사랑에는 희생이 내포됩니다. 우리 하나 하나를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보고 그 사랑을 압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외아들을 하나님께 드린 것을 보아서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했는지 그 증거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세상에 보내시고 세상에 보내실 뿐더러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에게 주신 이 사실을 볼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五장 八절에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자기의 사랑을 확증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의 대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온 세상 다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하는 그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곧 크리스마스의 뜻입니다. 크리스마스는 다른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날입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애통과 눈물과 죽음이 가득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빛이 비추이기 시작한 날입니다. 이 쓸쓸하고 냉랭한 세상에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나타나서 이 냉랭한 세계를 따뜻하게 만들기 시작한 날입니다.
오늘날도 전쟁의 공포와 원자탄의 위협 아래서 떨고 있는 이 세계를 향해서 크리스마스란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비취어 주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떤 외지를 보니까, 미국에서 청음으로 만든 원자 잠수함이 온 세계를 물 속으로 돌아다니는데 심지어 북빙양 바다를 횡단하고 또 북극 밑을 횡단해서 이 잠수함이 저편으로 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복빙양과 북극 근방에 어름이 그렇게 많이 쌓였지마는 아마 그 속에는 얼지 않은 물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잠수함이 통과했습니다. 사실 지구 속으로 갈수록 뜨겁다고 합니다. 지구 속에는 아직도 불이 있다고 합니다.
이 우주의 중심에는 이러한 영원한 무궁한 불변의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와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였으니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와 같이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또한 그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여 줍니다.『너희는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 합해서 먼저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그랬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엔 반역자가 되지 맙시다. 세상을 사랑하지 맙시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이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보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으니 우리 믿는 사람들끼리 피차에 더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 말미암아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리라.』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느 때 믿는 사람들끼리 사랑하지 아니하리 오 마는, 더욱 이러한 때에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되겠습니다. 피차에 용서합시다. 어떤 사람이 네게 허물이 있을지라도, 나에게 죄를 지었을지라도, 나를 손해 입혔을지라도 용서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용서합시다.
어느 때에 우리가 피차에 상부상조하지 아니하고 피차에 돕지 아니하리 오 마는, 특별히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에, 그 귀한 날을 기념하는 이런 계절에, 우리 가운데 환난을 환난이, 병 가운데 신음하는 이들, 불행한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이들, 고독한 이들, 이와 같은 이들을 피차에 돕고 피차에 붙들어 주도록 힘써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와 같이 사랑하셔서 이 사랑을 우리가 마음 가운데 사실 깨닫는다고 하면, 이와 같은 큰 하나님의 사랑을, 좀더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하고 북극 같은 냉랭한 세상에 사는, 갈 길 잃은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합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一九五九년 十월 二十五일·새벽)
Ⅲ-34 무상한 인생 (야고보서 四장 七-十七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四·十四)
이 해도 거의 다 저물어서 어느덧 一九五九년 마지막 성일을 당하였습니다. 세월이 빠른 것은 우리가 언제 잊으리 오 마는 이렇게 연말을 당할 때에 이런 면을 더 느끼게 되고 따라서 이런 때에 더 한층 인생의 엄숙한 면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세의 기도로 알려진 시편 九十편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모세의 눈에 비친 인생의 일면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인생은 한 티끌이라고「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란 구절이 거기 있습니다. 또는「저희는 잠자는 것 같으며」하루 밤 자고 깨는 것 같으며 혹은 아침에 돋는 풀과 같아서『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한 순간에 다 하였나이다 라고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인생은 무상하고 잠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다른 곳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루 밤 잠자는 것 같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 내려오는 말 그대로 사용하면 인생은 일장춘몽이라고 합니다. 한 마당의 봄꿈과 같다고 생각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시편 九十三편에 보면,『나의 날이 손 넓이만 하게 하였나이다.』이런 말이 있습니다. 손 넓이는 그렇게 넓지는 못합니다. 여기 우리가 읽은 말씀과 같이 나의 생명이 무엇인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아침의 안개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우리 한국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 초로인생(草露人生)이란 말이 있습니다. 풀에 맺힌 이슬과 같은 인생입니다. 아침 이슬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이렇게 인생이란 순간적일뿐더러 사실 인생이란 우리가 이 대 우주에 비교해 보면 지극히 작은 존재입니다.
시편 八편에는『주의 손가락으로 만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대 우주를 보고 우리 인생이란 것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적은 존재인 것을 옛 사람도 느꼈습니다. 하물며 이 우주 시대를 당해서 천문학이 발전되어서 이 우주가 얼마나 광대(廣大)무변(無邊) 하다고 하는 것을 아는 우리 二十세기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이런 느낌이 더욱 커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옛날 글에 있는 말과 같이 문자 그대로 인생은 창해일속(滄海一粟)이라고, 푸른 바다의 조 알 하나처럼 이렇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뿐 아니고 우리 인생은 얼마나 연약한지 역대기 상 二十九장 十五절에 보면 인생은 그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림자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존재입니다. 여기에는 안개와 같다고 했는데 안개도 거의 실체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약한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천재지변이 있습니다. 태풍이 불고, 해일이 있고, 지진이 있고, 홍수가 넘치고, 열병도 충만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뿐입니까? 인생은 사실 내일 일을 모르고 삽니다.『너희가 내일 일을 모르는 도다.』내일이 아니고 다음 시간의 일을 모르고 삽니다.
전에 제가 미국서 잘 알던 어떤 미국 부인이 한 분 계신대 대단히 어진 부인입니다. 이 부인이 四十五세에 비로소 결혼하였습니다. 결혼한 지 九일만에 그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생이란 내일 일을 모릅니다. 아마 미리 알았다면 결혼을 안 했을 줄로 압니다. 여기 독신으로 나오신 동포들 가운데 三八성이 이렇게 오래 막힐 줄 알았다면, 어떻게 하든지 아마 가족을 등반하고 나왔을 겁니다. 우리가 내일 일을 모릅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그 해 곡식이 잘 되니 곡간에 가득히 채워 넣고 이제는 여러 해 먹을 양식이 넉넉하니『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고 그럽니다. 그러나 그 날 저녁에 그 영혼을 불러갈 줄을 인생은 모릅니다.
인생이란 이렇게 생각할 때에 사실 잠간이오, 또한 무상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와 같은 인생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냐? 여기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과 견해가 다르지마는 대체로 생각해 보면, 세 가지 견해와 태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속주의 적, 향락주의적 견해의 태도입니다. 둘째는 염세주의 적, 도피주의적 태도입니다. 셋째는 기독교의 견해와 그 태도입니다.
먼저, 세속주의 적, 향락주의적 그런 태도를 보면 대체로 이렇습니다. 옛날 헬라 문화가 전성할 시대에 그 시대를 지배하던 사상의 학파가 몇 있는데 그 학파 가운데 에피큐리안 학파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인가의 최상의 목표는 쾌락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표어가운데 하나가 성경에도 그 말 그대로 나타나지마는『먹고 마시자, 내일 죽으리라.』내일 죽을 터이니 살아 있을 때에 먹고 마시자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옛날 에피큐리안 학파에서만 가진 것이 아니고 어떤 시대나 어떤 사회에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사회에도 이런 사상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서도에서 오신 분도 많은데 서도에서 많이 부르는 수심가를 아마 기억하실 줄 압니다. 그 수심가를 잘 알지는 못하지마는 아이 때에 늘 부르는 소리를 좀 들었는데 무슨 내용인가 하면『노세 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이런 노래입니다. 그러니 젊어서 잘 먹고 잘 쓰며 거드럭거리고 놀자 입니다. 그것이 수심가에 나타나는 인생 철학입니다. 인생이 이렇게 무상하고 이렇게 잠깐 되니 그저 젊었을 때에 늙어지기 전에 잘 먹고 잘 쓰고 잘 놀자 인 것입니다. 세속주의 적, 향락주의적 견해와 태도입니다.
옛날 중국에 양주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양주의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인간이 오래 산대야 백년에 불과해 그런데 사실 백년을 사는 사람은 천 명에 하나도 드물다. 그런데 설사 여기 어떤 사람이 있어서 백년을 산다고 하자, 그렇지마는 가만히 보면, 아무 것도 모르고 알지 못하고 사는 유년기와 노년기가 그 절반을 차지한다. 또 밤에 잠자는 시간과 깨어서도 헛되이 지나는 시간을 합해 보면 그것이 또 나머지의 절반은 차지한다 또 그 다음에 환난을 당하고, 질고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시간, 이것 다 몰아 놓으면, 또 그 나머지의 절반을 더 차지해, 그러니 암으로 생을 즐길 수 있는 햇수는 백년을 살아도 十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중에 결론은 그러므로 살았을 때에 마음껏 향락을 누리고 사망이라는 것을 과히 생각지도 말고, 잊어 버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사람 주장은 그저 귀로 듣고 싶은 말을 다 듣고,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을 다 보고, 코로 냄새 맡고 싶은 것을 다 냄새 맡고, 입으로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고, 또 입으로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육신으로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날 양주라고 하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세속주의 적, 현세주의 적, 향락주의적 견해와 태도요 철학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유물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생각밖에 다른 생각이 날 수가 없습니다.『향락을 누릴 수 있을 때에 누려 보자. 인생은 허무하다.』그런데 이런 태도에 대해서 한가지 생각할 것은 향락이라고 하는 것은 향락 자체를 인간의 최고 목표로 탐구하게 되면 탐구한 그 즉시로 그 향락이 환멸과 고통으로 변합니다. 결국은 멸망을 초래하고 맙니다.
그래서 아편을 먹는 사람이 향락을 위해서 아편 대를 빱니다. 빠는 그 즉시로 환멸을 느끼고 그 까닭으로 고통이 오고 마지막에는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의 운명, 정욕을 따르는 사람의 모든 운명, 향락 자체를 인간의 최고 목표로 하는 사람의 결말은 다 멸망으로 마치고 맙니다.
그 다음에는 염세주의 적 도피주의 적 그런 태도가 있습니다. 옛날 헬라 시대에 그 에피큐리안 학파와 반대되는 사상을 가진 학파가 있었습니다. 스토익 학파가 그것입니다. 이 스토익 학파의 사상 가운데는 이 염세주의 적인 사상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이란 이렇게 잠깐이오, 또 무상하니 결국은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결국은 인간 생활이란 절망이야 마지막에는 죽을 뿐이야. 그러니 근본적으로 생을 구하지 말라. 생을 부정하라. 생이라고 하는 것을 사랑하지 말아라.』그러면 적어도 생에 대해서 스스로 속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을 부정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사상은 우리 동양의 불교에 많이 있습니다. 불교의 근본적인 사상은 이 염세적인 사상, 생을 부정하는 사상입니다.『생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고통을 의미해. 산다고 하는 것이 곧 고통이야. 그래서 인생의 여러 가지 고통이 많은 중 네 가지 고통이 있어. 생로병사(生老病死)즉 나는 것이 고통이고, 늙는 것이 고통이오, 병나는 것이 고통이오, 죽는 것이 고통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무슨 향락을 누리려 하지 않고 생을 도피하라. 생을 피하라, 부정하라. 가정이 쓸데없어, 집에서 나가라, 입산해라, 그저 깊은 산 속에 가서 혼자 살라.』이것이 염세주의 적인 도피주의 적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상에 대해서 한 가지 생각되는 것은 이 생이라고 하는 것은 피해지지 않습니다. 산에 들어간다고 인생고가 없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암만 피한다고 해도 결국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셋째로 우리 성경이 가르쳐 주는 기독교적 견해는 어떠하냐? 지금 여러분께서 들으시고 읽으신 바와 같이 사실 성경도 인생이란 무상하고 생이란 순간적이란 것을 인정하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인생의 이와 같은 무상한 면이 있지마는 인생을 좀더 깊이 통찰하도록 권면합니다. 생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무상하고 이렇게 순간 성이 있지마는 그러나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보이는 면뿐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보이는 면뿐이 아니고 조이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이 보이는 육신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이 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보이는 육신은 잠간이라고 할지라도,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은 영원의 불멸의 존재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인생을 좀더 깊이 통찰하도록 우리에게 지시합니다. 그리고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인생의 육신생활이 이렇게 잠간이라고 하지마는 이 시기는 매우 중대한 시기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 까닭은 이 시기에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작정됩니다. 잠깐 되는 이 삶을 가진 이 시간에, 우리가 과연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느냐? 인간 일생의 영원한 운명이 육신을 쓰고 사는 이 시대에 작정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기를, 육신을 쓰고 사는 동안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어서,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우리에게 외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인간의 육신 생활이 비록 잠간이라고 하지마는 이 잠깐 사는 생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 하나를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잠깐 동안 세상에 살게 하지마는 이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명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잠깐 동안 사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경륜을 발견하고, 따라서 내 사명을 발견해서,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다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나의 사는 날이 많지 못하니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광음을 아껴서 열심히 나의 맡은 바 사명을 다하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잠깐 되는 세상이니 세상을 위해서 살면 안 됩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세상을 살되 봉사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과 국가에 봉사해야 됩니다. 그 자체를 위해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나의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밤이 오기 전에, 겨울이 오기 전에 네 사명을 다하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 선생이 고린도 전서 十五장 五十八절에 권면한 말씀을 읽을 때에 자세히 들으시기를 바랍니다.『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우리의 인생 생활이 비록 무상하고 잠간이라고 하지마는 주안에서 수고하고 주안에서 하는 일은 절대로 헛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이와 같이 잠깐 되는 까닭으로 더욱 우리의 생활을 바로 하고,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의 사명을 다 해야 되겠습니다. (一九五九년 十二월 二十七일)
Ⅲ-35 자연과 십자가 (요한 복은 十二장 二十-三十三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十二·二十四)
지금은 사순절 기간이올시다. 우리가 어느 때에 우리 주님의 수난을 잊으리 오 마는 특별히 이러한 때에는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는 때입니다. 오늘 읽은 이 말씀은 예수 님의 지상 생활에 있어서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에서 된 사실이올시다. 헬라 사람 몇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과 또는 안드레를 통해서 예수를 보기를 원하였습니다. 비록 이 헬라 사람들의 수가 적지마는 이들은 장차 주께 나올 각 나라, 각 종족, 각 방언, 곧 수많은 이방 사람들의 선구자요, 또한 대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통해서 장차 이 수많은 이방 사람들을 그의 신령한 눈으로 미리 보신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있기 전에 그는 먼저 반드시 마셔야 할 잔이 또한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곧 십자가의 고난이올시다. 이 두 가지 현실을 미리 보시면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였습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여기에서 그는 자연과 십자가를 연결하십니다. 아니 그것보다도 자연계에서 십자가의 원리를 발견하시고 이 원리를 우리에게 분명히 설명하여 주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대로 있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올시다. 언제나 한 알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일년 후에도 그대로 있겠고, 이년 후에도 그냥 있겠고, 십 년 후에도 그냥 한 알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 알의 밀이라도 땅에 떨어져 묻혀 죽으면, 이상하게도 땅에 묻힌 썩는 듯한 그 밀 알 가운데서 싹이 나고 잎이 피고 줄기가 자라고, 마지막에 이삭이 나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많은 결실의 비결은 땅에 떨어지는 데 있습니다. 땅에 묻히는 데 있습니다. 죽는 데 있습니다. 떨어지는 것이나 묻히는 것이나 죽고 썩는 것이 좋게 보인다고 생각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한 알의 밀 알이 많은 결실을 맺는 비결인 것을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은 밀에만 한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곡식이든지 그러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벼가 그러하고 콩이 그러하고 팥이 그러합니다. 곡식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열매 맺는 나무가 역시 그렇습니다. 사과나무가 그렇고, 포도나무가 역시 그렇습니다. 모든 식물계에 적용되는 한 가지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을 날 들에 나가 황금의 물결치듯 곡식이 무르익은 것을 볼 때에, 우리는 그 결실만 볼 줄 알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와 같은 결실이 있기 위해서 먼저 몇 달 전에 땅에 떨어져 죽은 종자 혹은 밀 한 알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죽은 종자의 묘지 위에서만 많은 열매가 맺힌다고 하는 이 진리를 우리는 분명히 마음 가운데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예수 님께서 물론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도 여러 가지 위대한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위대한 교훈을 주셨고, 위대한 모범을 보여 주셨고, 위대한 이적을 행하셨고, 위대한 인격적 감화를 주셨습니다. 그렇지마는 그 범위는 그와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한정되어 있었고, 대체로 지리적으로는 유대 지방에 한정되어 있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한번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그 시체를 땅 속 바위 속이 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의 움직임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그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신 그 후에 오순절이 되었고, 오순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수가 하루에 삼천 명이 더하게 되었고, 그 후에 오 천 명으로 증가되었습니다. 예루살렘만 복음이 전파된 것이 아니고, 유대에만 복음이 전파된 것이 아니고, 사마리아에도 전파되었고, 수리아, 안디옥에도 전파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단순히 유대 사람에게만 아니고, 헬라 사람들, 로마 사람들 혹은 온 세계 종족에게 로마제국에 몇 해가 되지 못해서 복음이 전파되게 된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아는 바입니다
사실 세기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 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각 나라, 각 족속, 각 방언,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서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밀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 그대로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예언의 말씀이올시다. 예수 님은 문자 그대로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이올시다. 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생명이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 이 원리, 희생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 이 원리가 곧 십자가의 진리요, 십자가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이 십자가의 원리는 자연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에만 적용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다른 사람에게도 모든 다른 방면에도 비록 범위는 적다고 할지라도 이 진리가 응용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됩니다.
가령 여기 어떠한 가정이 있습니다. 이 가정에 좋은 아들과 딸이 나서 장성해서 귀한 사람들이 되어서 혹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봉사하고 혹은 사회와 국가에 크게 봉사하는 열매 맺는 가정이 있다고 합시다. 그것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만일 그와 같은 열매 맺는 가정이 있다고 하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배후에 땅에 떨어져 죽는 정신을 가지고 그 가정을 봉사한 한 알의 밀과 같은 이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이 땅에 떨어지는 한 알의 밀이 어머니가 됩니다. 그러나 어떤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됩니다. 혹은 형님이올시다. 혹은 누나올시다. 자녀들을 바로 입히고 먹이고 가르치고 옳은 학교에 보내고 기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 모르는 눈물과 남 모르는 기도와 남 모르는 수고와 남 모르는 고통과 남 모르는 희생이 반드시 있습니다. 땅에 떨어져 묵히는 그 밭 위에만 많은 열매를 맺히는 것입니다.
학교도 그러합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학교라고 하면 먼저 건물부터 생각합니다. 학생의 수로부터 먼저 생각하는 폐단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참 학교의 표준은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오, 학생의 수효가 많은데 있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요컨대 얼마나 참된 인격을 그 학교에서 배양해 내며 바른 지식을 넣어 주는가? 얼마나 참으로 그 학교가 우리 사회를 위하여 열매를 맺는가? 거기에 있습니다.
어떤 잡지를 보니까 통계적으로 미국에서 연구한 결과를 보면, 미국의 모든 큰 인물들은 오히려 학생 수가 많은 큰 학교보다도 적은 대학에서 많이 나왔다고 하는 사실을 누가 지적하였습니다. 참 열매 맺는 학교의 배후에는 그 건물보다도, 학생의 수효보다도, 그 배후에 참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옳게 그르치고 옳게 배워주겠다고 하는, 땅에 떨어지려고 하는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진 그와 같은 교장, 그와 같은 교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땅에 떨어지고자 하는, 장래에 우리 국민들을 위해서 자기의 일생을 모든 것을 바치려고 하는 참된 교육가가 없이는 열매 맺는 학교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의 무덤 위에서만 열매맺는 학교도 건설될 수 있습니다.
교회도 물론 그렇습니다. 어떤 교회가 많은 열매를 맺느냐? 어떤 교회가 과연 많은 열매를 맺어서 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든 사람에게 덕을 세우며 우리 사회와 국가에 참으로 봉사하며 많은 생명을 구원하느냐? 그 대답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 교회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땅에 던지려고 하는 결심이 있는 교역자, 이와 같은 장로, 그와 같은 집사, 그와 같은 교인, 숨은 일꾼, 숨은 봉사자가 있어야 합니다. 남은 알든지 모르든지 심방을 하고, 위문을 하고, 전도를 하고, 시간을 바치고, 재능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며, 교회를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하며, 자기의 집과 같이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서, 주님의 몸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땅에 던지고, 묻히려고 하는 이런 결심을 가진 이런 제직(諸職)과 이런 교우들이 있는 교회는 자연히 많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부 가운데 터툴이안이라고 하는 이는 옛날에 벌써」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종자」라고 하는 유명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사실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종자입니다. 그런데 순교라고 하는 것은 한번 피를 흘려서 죽는 것만 순교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에 그가 매일 죽노라 라는 말을 기록했습니다. 과연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매일 땅에 떨어져서 죽는 이와 같은 신자, 이와 같은 제직이 있는 그 교회는 자연히 많은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열매 맺는 교회는 오직 이와 같은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의 묘지 위에서만 건설된다고 하는 이 진리를 우리는 몽매간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라도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가 내일 모래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특히 우리가 국가에 대한 관심이 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좋은 나라로 만들 수 있을까? 살 만한 나라, 참된 자유와 평화가 있는 나라, 모든 다른 사람에게도 모범이 될 수 있는 나라, 자연히 三八선이 터져 없어져서 이북 사람들이 내려와 볼 수 있는 이런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대답도 한 마디로 말하면,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국회 의원이든지, 일반 공무원이든지, 국민에게 이르기까지 오로지 내 나라를 위해서 나라고 하는 것을 땅에 던져서 묻히겠다고 하는 희생의 정신으로 국가에 봉사할 때에만 이와 같은 나라를 이룩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나라 일을 생각할 때마다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진 이들을 요구하는 방면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정신을 가지는 사람들을 부르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제 눈앞에 전개되는 것은 농촌과 어촌이올시다. 우리는 지금 다 도회에 살거니와 우리 도회는 그래도 외국의 원조도 있고, 여러 가지 활동으로 말미암아 공장도 재건되고, 부흥 주택도 꽤 건축되었고, 또한 고층 건물도, 이 곳 저 곳에서 점점 건설이 되어서 재건되어 가는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여러분이 아십니다. 농촌에 가 보십시오. 농촌이야말로 피폐할 대로 그냥 피폐해 있고, 거기는 외국의 원조가 미치는지 아니하는지, 보통 사람은 도무지 알 수 없는 형편입니다.
사실 농촌에서 살 수 없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무계획적으로 도시로 집중되는 까닭에 우리 도회는 더욱 혼란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농촌과 어촌이야말로 사실 그들을 위해서 내 생명 전체를 바치려고 하는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진 일꾼을 부르고 있습니다.
교역자이면서 알사스에서 일한 오벌린 같은 목사, 덴마크로 말하면 구룬드비 같은 목사. 과연 농촌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치겠다고 하는 일꾼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을 전도하고 이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이들의 권익을 보호해 주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생명을 구할 사람을 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제 안계(眼界)에 또한 떠올라 오는 방면은 근로 대중이올시다. 바로 우리가 며칠 전에 제二회 노동절을 지켰습니다. 제가 보는 대로 해방의 혜택을 가장 적게 받은 우리 사회에 어떠한 특별한 층이 있다고 한다면 아마 이 근로 대중인 것 같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생산하지마는 생산하는 것을 자기들은 입지 못합니다. 이들은 좋은 건물을 짓지마는 자기들은 그 건물 속에 살지 못합니다.
이들의 권익을 옹호해 주고, 이들의 사상을 선도해 주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이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 초급 한 문제 가운데 초급 하다고 생각합니다.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진 일꾼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앞으로 우리 한국 교회에서도 더욱이 근로 대중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아니하면 아니 될 줄 압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들을 도와주고 이들의 노동 운동도 같이 협력하지 않으면 아니 될 줄 생각합니다. 이 앞으로 이들의 사상 동향이 어떻게 되느냐고 하는 것은 우리 국가 장래에 막대한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한 제 안계에 떠올라 오는 방면은 윤락 여성들이올시다. 전쟁 미망인으로 할 수 없이 타락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일신상 불행으로 말미암아 타락되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농촌에서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 도회에 왔다가 악한 사람들의 유혹을 받아서 일생을 망쳐버리고 윤락(淪落)에 빠진 여성들도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와 같은 전쟁과 혼란 가운데서 이 희생된 여성들의 운명이야말로 얼마나 불쌍한지 알 수 없습니다. 이들 자신이 불쌍할뿐더러 이들의 존재는 마치 암과 같아서 우리 사회를 각 방면으로 썩히고 있습니다. 우리 서울의 거리를 더럽히고 도회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지고 이들을 구호하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이들을 선도할 만한 특별한 일꾼들을 우리 사회는 부르고 있습니다. 경찰들이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경찰의 능력으로만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부의 힘으로만 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특별한 사명감을 받아서 밀 한 알이 되어서 이들을 위하여 희생하겠다는 정신이 있는 인물이 없이는 이런 사업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땅에 떨어지려는 밀 한 알을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그 다음에 제 눈에 떠오르는 장면은 - 다른 말이 없어 이런 말을 씁니다 - 윤락 된 거리의 동포들이올시다. 이 가운데는 十대의 소년 소녀를 비롯해서 六十대 七十대에 이르는 말하자면 결식을 업으로 하는 동포들이올시다. 전쟁과 혼란한 시대에 물론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마는 오늘날처럼 이렇게 수가 많은 때는 아마 저의 경험으로는 처음 같습니다. 이런 수가 얼마가 많아지는지 어떤 때에는 혼례식을 하고 잔치를 하려면, 손님보다 이런 사람들이 거의 배는 많아지는 모양입니다. 그저 얻어먹으려 오는 사람, 여러분도 물론 경험하지마는 예배당에 오려면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이 가로막아서 예배당 대문을 지나올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런 문제도 단순히 우리가 정부만 바라 모아서는 아니 됩니다. 특별히 우리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국민들이 자각을 해서 이들을 구호하고, 이들을 도와주기로 하고, 이들을 위해서 내 생명을 바치겠다고 하는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 다음에 제 안전에 떠 올라오는 이들은 나병 환자와 정신병 환자들이올시다. 소록도가 있고 몇 곳에 나병 환자를 위한 병원이 있지만 아직도 많은 수가 구호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정신병자를 구호할 병원은 제가 신문에 보니까 우리 정부에서 두 곳을 만든다는 말만 들었지 아직 만들었다는 말도 못 들었습니다. 이런 나병 환자들과 정신병 환자들은 국가에서도 구호하지 못하고, 교회에서도 구호하지 못하니까, 거리로 사방으로 돌아다닙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고 심지어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방면에도 요컨대 이런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내 생명을 온전히 바치려고 하는 밀 한 알의 일군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면수 보호 문제(免囚保護問題)도 큰 문제입니다. 절도를 하고 강도를 하여 한번 형무소에 갔다 온 사람입니다. 아무리 개준을 하고 나왔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동정하는 사람이 없고 동정하는 기관이 없으니까 다시 죄를 짓고 맙니다. 장발장처럼 한번 죄 짓고, 또 두 번 죄 짓고, 세 번 죄 짓고, 일생을 형무소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와 같은 문제도 오직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이들을 위해서 생명까지도 바치려고 하는 밀 한 알의 전신이 있는 일군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번에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는 졸업생들이 많이 있는 줄 압니다. 물론 오늘날 정당한 취직을 하려면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실 생각하면 한국처럼 일할 데가 많은 곳도 없습니다. 분명히 기억할 것은 내가 그냥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고 그냥 있으면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어떠한 방면이든지 내가 그 방면에 들어가서 내 일생을 온전히 바치면 생명까지 희생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방면에 있든지 우리가 두 가지 정신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냥 한 알 그대로 있는 정신, 나 중심, 자기 중심, 이기주의, 나만 사를 정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방면에 들어가든지 그 방면에 들어가서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의 정신으로 살수도 있습니다. (一九六0년 三월 十三일)
Ⅲ-36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 (로마서 五장 一-十一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五·八)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불리 우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 은 단적으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우리에게 선언하여 주시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어떠한 속성은 우리가 깨닫기 쉽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 또는 하나님의 권능 같은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우주를 통해서 자연계를 통해서 우리가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마는 어떠한 속성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것은 그렇게 쉽게 얼른 알아 보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그가 지으신 이 자연계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따뜻한 아침 햇빛 혹은 아름다운 저녁 노을, 밤에 은연(隱然)한 달빛 혹은 영원히 빛나는 별빛을 바라 볼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그 가운데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혹은 봄 동산에 피는 꽃이든지, 여름에 성하는 녹음방초(綠陰芳草) 든 지, 가을에 무르익은 곡식과 실과를 바라 볼 때에 혹은 노래하는 새의 노래를 듣고, 들에 달리는 짐승을 바라볼 때에도 우리는 이와 같은 때 자연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까지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마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분명하게 보여준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은 이 자연계는 어떤 사람들이 기록한 바와 같이 열러 가지 모순이 있어서 피에 물들인 이빨과 발톱을 볼 수가 있고, 약육강식의 참상을 또한 볼 수 있으며, 천재지변도 적지 아니한 것을 우리는 목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사랑은 그가 지으신 바 자연계를 통해서 곧 알아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을 만큼 분명히 나타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우리 인간에게 보내어 주셨습니다. 모세를 보내 주셨습니다. 호세아를 보내 주셨습니다. 혹은 이사야를 보내 주시고 예레미야를 보내 주셨습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호소하는 소리를 친히 들으시고 그 백성을 애굽의 폭정 가운데에서 구원해 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四十년 동안 광야를 통해서 그들을 인도해 주시고, 마지막에 가나안 복지를 허락하여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 위에 여러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을 영원하신 사랑의 줄로써 이끌기를 힘쓴 역사를 우리는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이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도 오리려 만족할 것은 되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게 되었습니다. 요한 복음 三장 十六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마지막에는 독생자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사람의 모습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의 사랑의 얼굴을 통해서, 사랑의 음성을 통해서, 사랑의 성품을 통해서, 사랑의 입을 열어서, 여러 가지 사랑의 교훈을 통하여, 사랑의 손을 펴서, 여러 가지 사랑의 일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혹은 죽은 자를 고쳐 주심으로, 혹은 주린 자를 먹이심으로, 혹은 슬픈 자를 위로하여 주심으로, 혹은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시다 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셨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내서 보일 수 있도록 하셨습니까?
오늘 읽은 이 본문은 그 진리를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을 확실히 증명하여 주셨습니다. 대 자연계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까지 나타낸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까지 계시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생활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신 것은 곧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죽음이올시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십니까? 이미 읽은 바와 같이『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그가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면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으리라.』길이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그가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친히 아버지께서 그 안에 계셔서 우리들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요한 복음 一장 一절에 기록한 바와 같이『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독 하나님이시니라.』곧 하나님이시오, 말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실히 증명하여 주신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까? 여기 보니까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우리」는 여기 앉은 여러분과 저만 가리킨 것뿐만 아니고 인류 전체를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 시오, 길이요, 질리요, 생명이시오, 아버지께서 친히 계셔서 그 모습으로 보여 주시는 주시오, 말씀이시오, 하나님이신 그는 인류 전체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어떤 순교자가 어떠한 진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순교도 얼마나 고귀한 죽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떠한 애국자가 자기의 민족과 자기의 나라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초개같이 버릴 때, 이와 같이 순국자의 죽음도 얼마나 거룩한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떤 진리만을 위한 순교만이 아닙니다. 어떠한 민족 어떠한 나라만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인류를 위해서, 인류 전체를 위해서, 그들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그들을 굽어살피기 위해서, 죽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미국 남북전쟁이 있을 때에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고 합니다. 북군에서 전쟁에 나갈 군인을 징발할 때에 전쟁이 자갈 만한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그 사람들 가운데서 제비를 뽑아서 다 나갈 필요는 없으니까 나갈 사람을 먼저 뽑아서 내 보낸 일이 있다고 합니다. 어떠한 동리에서 몇 사람이 모여서 제비를 뽑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어떤 사람이 제비를 뽑혔는고 하니, 가족도 많고 부모도 계시고 전쟁에 나가면 그 가족도 전혀 부양할 사람이 없는, 그런 사람이 그만 제비에 뽑혀서 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광경을 보고 그 친구 가운데 부모도 안 계시고 그는 아직도 결혼도 하니 아니했는데 그 경지를 보고서 대신 자원해서 전쟁에서 싸우겠다고 이와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그 징발하는 책임자에게 말하니까 그도 감격해서 대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에 나가도록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전쟁에 나가서 자기의 나라를 위해서 싸움하고 있습니다. 자기 동네에서 자기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이 사람은 자기 대신 나간 사람이 그에 대한 감격이 얼마나 깊은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신물을 보면 얼른 전쟁 뉴스부터 먼저 보고 특별히 어떤 곳에 격전이 있다고 하면 거기 혹 자기 친구가 들지 않았는가 해서 먼저 그것부터 살펴보고 또 이따금 죽은 사람의 명단이 나게 되어도 행여 자기 친구가 전사하지 않았나 제일 먼저 그것만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 한번은 큰 격전이 있게 되었는데 그만 자기 친구가 그 격전 가운데서 싸울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에 신문에 나는 것을 보니까 죽은 사람의 명단 가운데, 그 사람의 이름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런 신문을 보고 이 사람이 앞이 아득했습니다. 곧 그 싸움터에 나가서 자기 대신 죽은 그 시체를 자기가 친히 모셔다가 자기 가족 공동 묘지에 그 시체를 묻고 그의 이름을 쓰고 그 아래는 간단히『그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다.』라고 묘비를 새겼다고 합니다.『그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있을 때에 그가 죽으셨습니까? 로마서 五장에 보면, 우리 인류의 형편을 네 가지로 설명하였습니다. 五장 六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리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경건하지 않은 때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거룩하지 못하고, 선을 행하지 못하지만,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서 예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읽는 이 八절에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죽는 자가 쉽지 않습니다. 의인보다 오히려 선한 사람,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을 위해서 혹 죽는 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마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많은 죄 짐을 지고 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을 그런 때에, 구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十절에 내려가서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뿐더러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과 사실 원수가 되어 있을 그 때에 하나님께서 사랑의 손을 내미실 뿐더러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를 보내셔서 원수 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속량 해 주심으로 그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증명하신 것입니다.
언약할 때에 죽으셨습니다. 경건하지 아니할 때에 죽으셨습니다. 죄인 되었을 때에 죽으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원수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제가 어떤 책을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 아마 옛날 같습니다 - 깊은 산림 지대를 마차에 타고 가족과 동반해서 지나가던 중이었습니다. 마차부는 오래 동안 그 주인을 위해서 봉사한 충성된 분입니다. 또 이런 산림 지대는 여러 번 다녀 보아서 경험도 많은 그런 좋은 마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쯤 깊은 산림지대를 지나갈 때에, 말 네 필이 그 마차를 끌렀는데 말 두 필이 갑자기 놀라면서 앞으로 달음질하기 시작하니 다른 말들도 같이 네 굽을 안고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마차부가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뒤에 짐승들이 여러 마리 따라옵니다. 그 마차부는 거기에 이따금 나오는 이리떼인 것을 곧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마차부도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해서 동리가 과히 멀지 않으니까 동리로 달립니다. 그렇지만 이리처럼 빨리 달릴 수는 없습니다. 얼마쯤 있다 보니까 그 이리의 무리가 몇 마리가 아니고 여러 수십 마리가 따라 오는데 가만 보니까 그 이리한테 잡히면 말과 사람이 다 희생될 것 같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마차부가 생각다 못해 말 가운데 두 필을 말고삐를 찍어서 채찍으로 때려서 다른 방향으로 달음질시켰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 이리들이 그 말을 쫓아서 그 방향으로 전부 달아납니다. 그래서 두 말로 마차를 몰면서 그 마부는 이제는 생명을 구했다고 생각하면서 달려갈 길을 빨리 갑니다. 얼마쯤 있다 보니까, 이 이리들이 벌써 그 말들을 따라가서 다 잡아 먹은 모양입니다. 그리고서 오히려 힘을 더 얻어서 더 빨리 따라옵니다. 그러니까 빨리 가면 어떤 동리에 들어가게 되는데 아무리 두 말을 몰아서 빨리 가지마는 또 다시 이리가 가까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다른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주인보고 하는 말이『주인께서 이 말을 몰아서 빨리 동리로 들어가세요. 나는 필경 저놈들과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그리고서는 하나 밖에 없는 총을 메고 마차를 내렸습니다. 내려서 마차는 빨리 보내고 이리를 향해서 그저 총알 있는 대로 이 이리와 싸웁니다. 이 주인은 얼른 동리에 들어가서 여러 사람에게 청병(請兵)해서 총을 많이 가지고 많은 사람이 빨리 구원하러 왔습니다.
왔지마는 그만 불행히 그 마차부는 총탄이 다 없어지고 이리에게 희생된 뒤였습니다. 이렇게 이 마차부는 자기의 주인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은 그 마차부를 위해서 특별히 기념비를 세워 주어서 영원히 그 마차부의 충성을 표상 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마차부가 자기 주인과 자기 주인의 가족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까지 희생한 것, 얼마나 고귀한 충성이요, 얼마나 고귀한 희생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예수 님의 십자가의 희생은 이보다도 더 귀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 마차부는 그래도 자기의 주인을 위해서 자기의 친구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원수들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올시다. 이것이 십자가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올시다.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반대하는 원수들을 위해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주시고 그 사랑하는 아들을 월수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침으로 주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얼마나 거룩합니까?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 그 높음과 그 깊음과 그 넓이를 감히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죄 짓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영원히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 죽을 것밖에 없고,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지마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의 한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를 다 속량 해 주시고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무심히 보시지 맙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오, 섬기려 하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함이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생명을 대신 바쳐서 우리의 죄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것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인류에게 십자가상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랜트(사순절)기간을 통해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좀더 깨달을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속에 돌아 와서 모든 죄를 회개하고, 내가 먼저 구원을 얻으며, 이 사랑의 소식을 온 세상에, 이 쓸쓸하고 냉랭한 세상에 사람의 복음을 전파하여야 되겠습니다. (一九六0년 三월 二十일)
Ⅲ-37 인간의 죄와 십자가 (이사야 五十三장 一-九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사 五十三·五)
오늘 아침, 인간의 죄와 십자가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찌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는가?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이와 같은 말씀으로 예언하였습니다.『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여호와께서는 우리 머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말씀으로 로마서 五장 六절에 기록하였습니다.『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二장 二十四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설명하였습니다.『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세례 요한 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리 문답에 있는 말씀과 같이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에 그 모든 후손들은 그의 죄와 그의 부패한 성품을 계대(繼代)하였고, 또한 자기 자신들이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다고 하는 이와 같은 비참한 상태에 모든 인간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죄에는 값이 있습니다. 죄에는 삯이 있습니다. 죄의 값은 여러 가지 비참한 것이 많지마는 한마디로 말하면 죄의 값은 사망이올시다. 육신과 영혼의 영원한 죽음이올시다. 하나님과 멀리 떠나서 원수가 되고, 항상 하나님의 주주 아래에 있게 되고, 영원한 멸망 곧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어떻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면 그저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면 그 뿐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신이올시다. 그와 같이 되면 하나님의 공의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또한 그와 같이 되면 이 우주의 도덕적 질서가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도 죄 사함을 얻는 길은 오직 어린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자기의 죄를 고백한 후에 그 양을 잡아 피를 흘리고 제사를 드림으로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 죄 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능히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있겠는가?
첫째로, 이런 분은 사람 가운데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를 지은 까닭으로 자기의 죄를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까지 대속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반면에 둘째로 생각해 보면, 이런 사람은 아무래도 사람이어야 하겠고 또한 모든 인류를 대표할 만한 자격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말씀이 육신을 입는 - 신학상의 술어로 수육(受肉)이라고 합니다 - 수육의 비의(秘意)가 있는 것입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육신을 입으셔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둘째 아담, 곧 전 인류의 대표로 어린양이 되어서 십자가의 희생의 제단을 드림으로 만민의 죄를 속량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시었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첫째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시고, 둘째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셋째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셔서 구원의 길을 열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뜻입니다.
오늘 아침, 이렇게 뜻 깊은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마음 눈을 열어서 골고다를 바라 모시기를 바랍니다. 골고다 산 위에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은 십자가가 높이 서 있습니다. 먼저 주의 얼굴을 보십시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가시에 찔린 그 이마에서는 피가 점점이 흐릅니다. 머리가로도 피 흘린 흔적이 보입니다. 그리고 또한 두 손을 보십시오. 오른 손과 또한 왼손을 보시기 바랍니다. 두 손 다 높이 십자가에 못이 박혔습니다. 손바닥을 꿰뚫어 큰못이 예수 님의 부드러운 상을 찌고 뼈 사이에로 뚫려서 나무에 깊이 박혔습니다. 못 박힌 자리에서 피가 점점이 흐릅니다. 몸이 늘어질수록 살이 점점 찢어지고 따라서 피가 더 많이 흐릅니다.
두 발을 바라보세요. 두 발들은 역시 큰못으로 꿰 뚫렸고 그 못은 나무에까지 깊이 박혔습니다. 못 자국으로 선형이 줄줄이 흐릅니다. 그리고 그 옆구리를 바라보십시오. 무지한 군인은 날선 창끝을 가지고 우리 주님의 부드러운 가슴을 창으로 찌릅니다. 그 창끝이 나오자마자 뜨거운 선혈이 물과 같이 쏟아집니다. 주님의 얼굴은 점점 창백하여집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런 고통은 한 시간만 계속된 것이 아닙니다. 두 시간만 계속된 것이 아닙니다. 세 시간만 계속된 것이 아닙니다. 네 시간, 다섯 시간, 여섯 시간, 우리가 성경에 있는 대로 계수 해 보면, 적어도 여섯 시간을 십자가 위에서 끝까지 이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고통은 참형보다 더 심하고 교수형보다 더 심합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친히 맛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육신의 고통을 당하든지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그 고통을 당하시었고 우리를 동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자가의 고통은 단순히 육신의 고통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정신적 고통은 이보다 더 심하였습니다. 원수들은 조롱을 하였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곳에서 내려와서 그들로 하여금 믿게 하라고 비웃었습니다. 심지어 지나가는 사람들도 자기의 머리를 흔들면서『아,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짓는다고 하는 자여, 네가 그 자리에서 내려와서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라.』고 조소를 거듭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적은 고통이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께서도 우리 주님을 버리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가 그의 어깨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주님께로부터 그 얼굴을 돌리셨습니다.『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부르짖음은 예수 님께서 인간의 죄를 홀로 담당하시고 친히 죄가 되어서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는 그 시간에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말씀이올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죽기까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마지막에 죽으셨습니다. 사망의 쓴잔을 찌꺼기까지 다 마시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만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시고 마침내 죽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주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낳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다시 우리가 십자가를 바로 봅시다.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그 어깨에 짊어지셨던 우리의 죄도 같이 죽었습니다. 내 죄가 거기 달려서 주님이 죽을 때에 같이 죽었습니다. 죽은 예수와 같이 우리의 죄도 죽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죄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다 끝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모든 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때부터 우리는 죄에 죽고 의에 대하여 살기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온 인류에게 구원과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렇게 죄에 대한 책임뿐만 아닙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죄의 권세도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죄에 속아서 죄의 마력에 끌려갔습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죄가 이렇게 흉악하고 죄가 우리 주님까지 죽게 한 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죄라고 하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마력이 온전히 없어졌습니다.
제가 듣건대 전에 어떤 거짓 선지자가 자기는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외치면서 자기의 말을 들으라고 부르짖으면서 그의 이마에는 언제든지 은으로 만든 둥글 한 것으로 가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왜 가리우고 아니냐고 물어 보면, 만일 그것을 때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빛이 나타나서 그 빛을 보는 사람이 눈이 어두워서 소경이 되는 까닭으로, 부득이 그곳에 은으로 붙였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잘 때에 그를 따라 가던 사람이 그것을 한번 뜯어보았습니다. 몰래 뜯어보니까 그 이마에는 다른 것이 아니고 문둥이 흔적이 있더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지 못할 때에는 죄가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죄에 속았습니다. 죄의 마력에 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 우리는 죄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추악하고 우리 주님까지 이와 같은 고통을 받게 하였다는 죄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죄의 다스리는 권세가 역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다시 한번 바라볼 때에,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의 그 고난받으신 것으로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 즉 자기의 살을 찢고 자기의 피를 흘려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 볼 때에는, 우리는 죄에는 죽었지마는 의에는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예배당 뜰에 나가서 서울 사방을 돌아보면 여러 가지 것이 보입니다. 삼각산이 보이고, 인왕산이 보이고, 여러 가지 고층 건물이 많이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밖에 나가서 그것을 먼저 보지 말고 오늘 같이 해가 잘 비칠 때에 해를 한참 쳐다보세요. 그러다가 그 다음에 사방을 둘러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해를 본 눈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에서 비치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자기는 십자가에 못 박고 원수 된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하는 그 기도의 음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그 다음에 세상 것을 바라보십시오. 세상 것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전에는 향락이 귀해 보였지마는 향락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전에는 물질이 그렇게 귀해 보였지마는 물질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전에는 세상의 지위나 권세 같은 것들이 그렇게 귀해 보였지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참 바라보다가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에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아서 오직 십자가를 바라 본 사람의 눈에는 오직 십자가만이 밝은 빛으로 그 심령을 채우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 오직 하나님의 의, 오직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인가의 죄와 십자가의 관계를 오늘 생각했습니다. 그 말씀은 이사야 五十三장 五절에 이미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이제 제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께서 저와 같이 이 절을 한번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절을 읽을 때에「우리」라고 하는 말을 넣어서 한번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도다.』
여러분, 이 말씀을 다 이대로 믿습니까? 이대로 믿는 이는 이대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주로 영접하는 이는 과거에 어떠한 허물과 어떠한 죄가 있던지 다 용서함을 받고, 죄에는 죽고 온전히 의에는 사는 새 생활이 이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성신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속에 이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一九六0년 三월 二十七)
Ⅲ-38 강도의 회개와 구원 (누가복음 二十三장 二十六-四十三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二十三·四十三)
오늘 아침, 다시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서 십자가를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갈보리 산 위에는 십자가가 셋이 서 있었습니다. 중앙에는 그리스도께서 달리셨고 좌우에는 행악자(行惡者), 혹은 전의 번역대로, 강도가 달려 있었습니다. 일 점의 흠이 없고 죄가 없는 그리스도께서 두 강도 사이에 같이 달려서 죽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 사람의 생각에는 곧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을까? 이런 역리(逆理)가 어디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천리(天理)에 어그러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됩니다.
그렇지마는 이것도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우연한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예언의 성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五十三장 十二절에 보면, 그는 범죄자 중 하나로 재앙을 받겠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내가 세상에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오 죄인을 불러 구원하려 왔노라.』고 말씀하신 사명에도 부합되는 것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일찍이 바리새인들이 비난하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그대로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낸 말입니다. 십자가상에도 그 말대로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셨을 뿐더러 죄인과 같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이렇게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육신 생활의 최후 순간에도 죄인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죄인은 보통 죄인이 아닙니다. 행악자 입니다. 다시 말하면 살인 강도의 죄인입니다.
보십시오. 죄인을 위하여 최대의 희생을 드리시는 주님, 최후 순간에도 죄인을 구원하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 죄인에 대한 그의 간절한 기도, 우리 주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그의 피의 마지막 점까지 흘리셨습니다. 그의 생활의 최후 순간까지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죄인에 대한 이과 같은 사랑을 깨닫습니까? 우리가 죄인에 대한 그의 이와 같은 지성을 얼마나 알고 십자가를 바라봅니까? 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으소서. 이 위대한 주님의 십자가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주님의 우편에도 강도가 달렸고 주님의 좌편에도 강도가 달렸습니다. 이 두 강도는 얼핏 볼 때에 같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얼굴이 비슷한 줄 압니다. 보기에 흉악합니다. 그 성질이 악합니다. 같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같이 체포되었습니다. 같은 재판정에서 재판도 받았습니다. 같이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같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올라왔습니다. 같이 십자가에 박히어 높이 매달렸습니다. 처음에는 다 같이 예수를 비방까지 한 모양입니다. 어떤 복음서에는 강도들도 비방했다고 기록한 데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십자가위에서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구원을 얻어 낙원에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육신과 영혼이 아울러 영원한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어깨동무로서 같은 인생 길을 걸어가다가도 갈리는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주님의 하신 말씀과 같이 두 여인이 맷돌을 가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그냥 두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들에서 밭을 가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그냥 두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는 회개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죄는 같습니다. 악하기도 같습니다. 같은 범죄를 하였습니다. 같은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회개하고 하나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회개한 강도의 모습을 보십시오. 다른 하나는 비방을 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해서『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러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이와 같은 말로 같이 십자가에 달려서 비난을 하였습니다. 이 때에 한 강도가 대답한 말을 보십시오. 그는 다른 강도를 책망했습니다.『네가 동일한 정 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그 강도를 책망했습니다. 이것을 보니까 이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회개한 증거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회개한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하니 하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합니다. 이 회개한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이 회개하지 아니한 강도를 엄히 책망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계속해서 하는 말이『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벌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자기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자기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報應)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고 하며 자기의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을 깨닫고, 거기는 사형이 마땅한 것을 깨닫고 이대로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도 고백을 하고, 예수 님 앞에도 고백하고, 그 때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많은 공중 앞에서, 말하자면 공중 고백을 하였습니다. 회개한 사람의 둘째 특징은 자기의 죄를 깨닫고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아닙니다. 이 사람이 계속해서 하는 말이 예수 님을 가르치면서『이 사람이 행한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나니라.』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하였습니다.『우리는 이와 같이 죄를 범해서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마는 여기 가운데의 이 분으로 말하면 이 분이 행한 것은 무엇이든지 옳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느니라.』예수 그리스도의 결백하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무흠(無欠) 하신 것을 변호하고 증거 하였습니다.
이 때에 예수 님을 변호한 사람은 이 강도뿐이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다 달아났습니다. 여자들이 몰래 와서 멀리 섰지마는 무서워서 감히 입도 열지 못했습니다. 많은 바리새인들과 군인들이 돌아서서 예수를 힐난하고 예수를 모욕하던 때입니다. 그러한 때에 오직 이 회개한 강도 한 사람만이 이 예수 님의 행한 것은 옳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증거 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 님께 향하여 얼굴을 돌리면서 그가 하는 말이『예수여 당신의 나라로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기도했습니다. 당신의 나라로 임하실 때에 자기를 생각하여 달라고 한 것을 보니 이 강도는 예수께서 과연 그리스도요, 메시야인 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분명히 믿고 이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로 강림하실 때에 자기 같은 죄인이라고 생각하여 주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회개한 사람의 또 한 가지 특색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길로 가다가 예수를 만나 회개한 다음에, 제일 먼저 한 것이『주여,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 강도도 기도하였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어서 이렇게 회개를 했겠습니까? 좀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선 이 강도가 십자가 위에서 회개할 때에 우선 다른 사람의 권면을 들었다든지 설교한 것을 듣고 회개한 것은 아닙니다. 그 때에 이 강도에게 권면 하였다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강도에게 설교한 이, 누가 있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강도는 이런 권면 한 마디 안 듣고도 회개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어렸을 적부터 주일학교에 다니고 커서 이따금 예배당에 나와서 설교를 줄곧 들으면서도 아직까지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 한 사람이라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알 것은 이 다음에 심판대 앞에 가서 이 회개한 강도가 그 사람을 정죄 할겁니다.『나는 설교를 한번도 안 듣고, 권면을 한번도 은 듣고 십자가상에서 회개했는데 너는 어떻게 되어서 주일학교에 다니고 교회에 가서 설교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느냐?』
자, 보십시오. 이 강도가 회개한 것은 남이 다 회개하니 자기도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혹 부흥회 할 때에, 회개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다 나가서 회개하고 예수 믿겠다고 하니까 같이 덩달아서『나도 회개하겠습니다.』이렇게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이 때에 강도는 혼자 회개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하나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분위기가 아닙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 군인들, 전부 예수를 미워하고, 모욕하고, 능욕하고, 핍박하던 아주 냉혹한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떻게 이 강도는 회개했습니까?
여러분, 이 강도는 그런 분위기 가운데서도 회개했는데,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영락교회에 출석하면서, 이렇게 수천 명이 같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설교를 들으며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도,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이 사람도 역시 이 다음에 심판대 앞에 가서 이 회개한 강도에게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정죄 받기 전에 회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무엇이 이 강도로 하여금 회개하게 했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을 지킵니다. 분명히 알 서 없습니다. 그러나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추측은 거의 확실하다고 봅니다. 이 강도가 회개하게 된 동기는 이 강도도 같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올 때에 예수 님과 같이 올라왔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같이 못 박혔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에도 몇 시간 같이 달려 있었습니다. 이 몇 시간 동안에 이 강도는 예수 님의 얼굴을 모았고 이따금 말씀하시는 예수 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올 때에 이 행 악 자들은 아마 욕을 하며 저주하면서 그 얼굴을 찡그리고 말할 수 없는 불평을 가지고 그 십자가를 지고 올라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의 얼굴을 보면, 같이 십자가를 지고 올라오지마는 조금도 악의가 보이지 아니하고, 조금도 불평이 보이지 아니하고, 조금도 흉악한 빛이 보이지 아니하고, 예수 님의 얼굴은 천사 같은 얼굴입니다. 많은 여인들이 예수 님을 보고 우니까 오히려 하시는 말씀이『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는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집을 위하여 울라.』고 하였습니다. 골고다 위에 올라온 후에 십자가를 먼저 놓고 그 위에 뉘어 놓고서 손바닥에 못을 탕탕 박을 때에 이 행악자 들은 아마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저주를 하고 별의별 말을 다 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중앙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한 마디 말씀도 없습니다. 그 얼굴빛이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에 높이 달려서도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오,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이런 죄를 짓습니다.』라고 말하실 뿐입니다. 아마 예수 님 머리 위에 쓴 그 명패를 본 줄 압니다.「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 사람도 유대 사람이니까 역시 그도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람 가운데 하나인 줄 압니다. 따라서 구약의 메시야에 대한 여러 가지 예언 가운데서 들은 일이 있는 줄 압니다.
혹은 이 강도의 마음속에 이사야 五十三장에 있는 말씀, 어떻게 메시야가 와선 만백성의 죄와 온 세상 만민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신다고 하는 이런 기억이 마음 가운데 솟아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렸지마는, 주님의 얼굴을 보고, 주님의 태도를 보고, 주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친히 하시는 말씀을 보고, 성경 말씀을 기억하는 가운데서, 이 강도가 회개한 줄 압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바로 바라보면 회개하지 않을 죄인이 없는 줄 압니다.
우리 신약 가운데 네 복음이 있지만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활의 전기입니다. 이상한 것은 다른 전기들은 그 사람의 행한 것을 마지막에 죽었다는 기록은 간단히 쓰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 님의 전기를 쓴 이 네 복음을 보면 어떤 복음이든지 거의 삼분지 이는 예수 님이 십자가 위에서 어떻게 죽으셨다고 하는 죽은데 해한 기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가 바로 바라만 보면 자연히 내 죄를 깨닫고 회개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회개한 종의 축복을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 회개한 강도는 그저 기도하기는『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기도했습니다. 이 다음에 나라에 임할 때에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을 보면『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오늘날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이 강도는 회개한 그 날로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 날로 온전히 구원을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강도는 참으로 복 받은 강도라고 말을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아침에는 마귀하고 조반을 먹었는데 저녁에는 예수 님하고 저녁을 먹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날 밤은 지옥에서 잤는데 그 날 밤은 천당에서 잤다고도 말합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이 분은 그야말로 제트기 타고 천당에 간 모양입니다. 회개하는 그 날로 즉시 구원을 얻었습니다.
또 그것만 아닙니다. 이 강도는 예수 님의 육신 생활에 있어서 최후의 친구가 되어서 십자가의 최후 고난을 받으시는 예수 님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예수 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 사망의 고통을 당하실 때에 최후 순간에 주님의 마음을 위로해 준 이가 어디 있습니까? 제자들입니까? 여자들입니까? 아닙니다. 이 회개한 강도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예수 님께서 그 날 낙원에 들어 가셨는데, 예수 님께서 낙원에 들어가실 때에는 이 강도가 예수 님의 첫 동무가 되어서 예수 님과 같이 그 날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아마 예수 님께서 낙원에 들어가실 때에 천군 천사들이 할렐루야 찬송을 부른 줄 압니다. 예수 님께서 그렇게 고통을 당하시더니 저렇게 악한 살인 강도를 구원해 가지고 낙원에 들어옴으로써 하나님께 큰 영광과 찬송을 드린 줄 압니다.
여러분, 그뿐만 아닙니다. 이 강도의 회개야말로 모든 죄인에게 소망을 줍니다. 이와 같은 강도도 회개하여 구원을 얻었거늘 우리가 어떠한 자리에 있든지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실수를 하였든지 온전히 바로 회개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소망을 온 천하 만민에게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하면 여기 앉은 우리도 강도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 님 편으로 보면, 우리도 마음으로는 살인한 사람이요, 우리도 마음으로는 간음한 사람이요, 우리도 마음으로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도적한 사람입니다. 심각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도 이 강도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 강도를 구원하신 것은 모든 죄진 우리에게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실수를 하였든지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우리에게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하나님께서 기회 주시는 이 시간에, 온전히 주님의 십자가를 믿고 회개하고, 온전히 주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이 시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一九六0년 四월 三일)
Ⅲ-39 평화의 왕 (누가복음 十九장 二十八-四十절)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 十九·三十八)
이 말씀은 예수 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제자들과 모든 옹위(擁衛)한 무리들이 노래를 부른 찬송이올시다.
오늘은 부활절 전 주일이올시다. 옛날부터 흔히 오늘을 종려 주일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지키는 풍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을 기념하는 날로 특별히 지키기를 원하는 까닭입니다. 예수 님께서 갈릴리에서 여리고로 오셨겠고, 여리고에서 다시 험한 산골짜기 길을 거슬러 올라가서 베다니라고 하는 작은 마음에 이르게 되었겠고, 그 다음에 벳바게라고 하는 마을에 가기 전에 예수 님께서 두 제자들을 특별히 보내서 맞은 편 마을에서 나귀 새끼를 구하여 오도록 한 것이올시다. 그래서 이 벳바게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예수 님께서 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유월절이 가까워 온 까닭으로 예수 님 제자들뿐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대입니다. 아마 예수 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을 다 넘으셔서 겟세마네 동산 기슭으로 내려가며 기드론 시내쯤에 가게 된 다음에는 무리의 수가 더욱 많아진 모양이올시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 다시 시온산 언덕으로 올라가시면서 그리고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나가시게 될 때에 대동한 여러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혹은 나무 가지를 땅에 펴며 어린이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호산나로다 다윗의 자손이여』혹은『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는 왕이여』라고 노래를 계속하여 부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게 되니 성경에 기록한 대로 온 성이 소동하면서 이가 누구냐 라고 물어 보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때에 제자들과 여러 사람들은 이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오신 선지자 예수라고 대답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지금도 매년 이 종려 주일에는 이 벳바게라고 하는 작은 마음에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 곳에서부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의 찬송을 부르면서 감람산을 넘고 기드론 시내를 넘어서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예수 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가 있는 곳, 예수 님의 시체를 주었던 곳에 세운 기념 예배당까지 가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풍속이 있습니다.
독일에 한 작은 도시 오베라멀규라 하는 곳이 있는데 이 도시는 작은 도시이지마는 예로부터 벌써 매 십 년마다 예수 님께서 고난 받으신 것을 연극으로 실연을 해서 세계의 주목을 끌게 되었습니다. 바로 금년도 一九六o년으로서 이 작은 도회지에서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예수 님께서 어떻게 고난을 받으시고, 어떻게 장사되시고, 어떻게 부활하신 것을 실연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구경시키게 되는데 이 성극(聖劇)이 아주 유명하게 되어서,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관람객이 이 때에 이 작은 도회로 모인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수난극도 역시 오늘인 종려 주일 예수 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으로 시작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론 부활 주일 아침으로 그 극을 마칠 줄 생각합니다.
이 종려주일에 특별히 주목되는 것 한 가지는 예수 님의 태도입니다. 이 때까지는 예수 님의 가지는 태도는 항상 자기를 숨기려고 하는 태도였습니다. 별로히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태도가 보이지 안았습니다. 가령 병을 고치신 후에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예 이 소문을 내지 말라고 심심 부탁을 해서 보낸 적이 허다합니다. 어떤 때에는 많은 무리가 와서 예수를 보기를 원하고 예수의 교훈을 듣기 원하는 까닭으로 제자들이 조용히 기도하시는 예수 님께 나와서 무리가 찾는데 어서 돌아 가시자고 하는 부탁을 하였지마는, 예수 님께서는 그대로 하지 아니하시고 주가 다음 동리에도 가서 전도를 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다음 동리로 피하여 간 사실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보통 예수 님은 자기에 대하여 이와 같은 태도이었습니다.
이 종려주일에 대한 기록을 제 복음서에 있는 대로 자세히 읽어보면, 이 날의 예수 님의 태도를 그와는 정반대의 태도인 것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 님께서 베다니와 벳바게 마을에 가까이 와서는 자기가 제자들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면서, 어떤 곳에 가면 아직 한번도 타보지 못한 나귀 새끼가 있을 터인데 그 나귀 새끼를 끌어 가지고 오라고 친히 명령하셨습니다. 나귀를 가져온 후에 제자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등에 얹으매 자기가 친히 그 나귀에 타셨습니다. 그리고서 많은 무리들이 혹은 앞에 서고 혹은 뒤에 서며 혹은 좌우에 서서,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여럿이 환호하는 가운데, 조금도 사양하시지 아니하시고 그 모든 찬송을 받으시면서, 자기가 나귀를 타고 당당한 태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실입니다.
그뿐만 아니고 이렇게 제자들이『찬송하리로다 왕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말로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어떤 사람은 도에 넘치는 찬송인 줄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수 님을 향해서 하는 말이 그 제자들을 책망하시기를 바란다고 하며, 잠잠하게 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될 때에, 예수 님의 대답하신 말씀은『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그 사람들이 이렇게 찬송하는 것을 그치라고 하면 예루살렘 성곽에 있는 돌과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모든 돌들이 일시에 소리를 지를 것이라는 말씀으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주님의 태도에 대하여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예수 님께서 하나님께 대한 진리를 그의 교훈과 이적을 통하여 계시하셔서, 말하자면 예언자로서의 메시야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렇지마는 이제는 예수 님께서 마지막으로 입성한 이 때에는 왕으로서의 메시야를 예수 님께서 친히 나타내신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님께서 나귀를 타시게 되었습니다.
『시온의 딸에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탓도다.』기록한 이 말씀대로 나귀를 타시게 되었습니다.『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왕으로서의 찬송과 영접을 친히 받으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예수 님께서 이렇게 입성하셔서 한 주일 동안 성전을 중심하고 나흘 동안 가르치시다가 마지막에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 될 때에 빌라도가 심문하는 가운데 이런 말로서 심문하였습니다.『네가 그러면 왕이야?』이렇게 단적으로 물을 때에 예수 님께서 조용히 그러나 엄숙히 대답한 말씀은『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면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려 함이로다.』예수 님께서 분명히 자기가 왕이라고 하는 것을 빌라도와 다른 듣는 사람 앞에서 선포하셨습니다.
무지한 군인들은 예수를 모욕하고 조롱하기 위하여 홍포(紅袍)를 입혔습니다. 그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그 손에는 갈대를 잡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홍포, 이 가시 면류관, 이 갈대는 절대로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왕 되시는 메시야는 이 세상에 오셔서는 나귀새끼는 타셨고 홍포를 입으셨지마는 그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신 왕이올시다. 예수 님은 왕이 되십니다.
예수 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선지자만은 아닙니다. 예수 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어린양이오, 대 제사장만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셔서 모든 천국 백성을 다스리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분명히 메시야에 대한 이 진리를 가르쳐 준 것을 우리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九장 六절에는『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奇妙者)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기록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二十三장 五절에『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라는 말씀으로 기록이 된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예수를 메시야만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왕으로서의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예수를 만날 때에 예수 님께서『내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이미 너를 보았다.』고 하는 그런 말씀을 하실 때에 나다나엘이 과연 예수께서 메시야인 것을 믿고 곧 고백했습니다.『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그 때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가 왕으로 오실 것을 믿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十五장 二十五절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불가불 왕 노릇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님은 어떤 의미의 왕이 되시는가?
첫째는 신령한 의미에서 예수 님께서는 천국을 세우시고 천국을 다스리는 왕이올시다.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시기 직전에 예수 님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네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분부한 것을 다 가르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크신 권세를 가지시고 하나님 나라 건설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보이는 부분이 되는 이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어디든지 하나님 나라가 미치는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셔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천국이 건설 될 때에는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신령한 영적 통치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뜻만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곧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서 온 우주와 인류의 역사까지 다스리는 주님이올시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해서 온 우주를 다스리고 인간의 역사까지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벌할 자를 벌하시기도 하고, 축복할 자를 축복하시기도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며, 택한 자를 불러 구원하시고, 교회를 보호하여 주는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의 통치자가 되는 것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세상 끝 날에는 그리스도의 이 왕권을 온전히 세워서 요한 계시록 十一장 十五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세상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할 수 있는 그러한 때는 반드시 오게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천국을 완성하시고 이 천국을 영원히 통치하시는 왕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 十七장 十四절에 이런 말로 기록되었습니다.『어린양은 만 유의 주시오 만 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저희」는 악한 세력을 가리켰습니다.「악한 세력을 이기실 터이요.」또한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하신 그 말씀과 같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고 최후에 영원하신 통치자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만 왕의 왕이올시다. 비록 세상에 오실 때에 가장 가난한 가정에 나시고, 가장 보잘것없는 도회에 나시고, 세상에 잠깐 동안 계실 때에 갖은 고난을 당하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셨지마는,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이 십자가를 통해서 만 왕의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지 종려주일은 이와 같은 만 왕의 왕 되시는 예수를 영접하는 날이올시다. 예수 님은 옛날 멜기세덱과 같이 의의 왕이요. 또한 평강의 왕이올시다.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실 때에는 먼저 의가 있습니다. 먼저 죄를 없이 하여 주시고, 깨끗케 해서 의롭게 하시는 통치를 하십니다. 먼저 깨끗케 하신 후에 참된 평강을 주시는 평강의 왕이 되십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우리가 이 만 왕의 왕이 되시고, 평강의 왕이 되시는 예수를 영접합시다. 이와 같으신 주님은 우리의 마음 문 밖에 서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고요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과연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왕으로서 영접하셨습니까?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아직까지 이와 같은 주님을 내 마음 문 밖에 세워놓고, 그냥 내 마음속에 나 혼자 있어서 내 마음의 나라를 주장하는 분은 없습니까?
우리 가운데 예수 님을 조금 영접하기는 했지마는 마음의 중심 되는 왕 되신 예수 님을 보좌에 모시지 아니하고 아직까지 마음 한 옆 구석에 예수를 세워 둔 분은 없습니까? 마음의 중심인 그 보좌를 지금 누가 다스리고 계십니까? 과연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고 계십니까? 아직도 여러분의 욕심과 정욕과 온갖 죄악이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고 계십니까?
종려주일은 만 왕의 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날이올시다. 오늘, 우리가 마음 문을 넓게 열어 놓고 이 주님을 우리 중심에 영접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두 가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의 마음에 의가 있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깨끗케 하여 줍니다. 그 다음에는, 여러분의 마음에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참된 평화를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 문을 넓게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셔서 내 마음을 다스리게 하는 이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가정은 어떠합니까? 우리 가정에서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정의 왕으로 영접하였습니까? 과연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어서 우리를 다스립니까? 제가 작년에 마닐라에 가서 어떤 교회에서 설교하고 그 교회 장로요, 또 유명한 변호사 가운데 한 분인 어떤 분의 집에 초대받아 갔습니다. 그 집안에,『예수는 우리 짐의 주인이라.』하는 말을 영어로 아름답게 새긴 패를 붙인 것을 제가 보고 왔습니다.
과연 예수 님께서 우리 가정의 왕으로서 우리 가정의 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리십니까? 예수 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의 왕으로서 여러분의 가정의 보좌에 앉아 계십니까? 오늘 이 종려주일에 우리 교회의 가정마다 온전히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가정의 왕이 되시고 주인이 되셔서 우리 가정을 다스리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가정에 대해서도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옵니다.
먼저, 우리 가정을 의롭게 하십니다. 죄를 소멸해서 깨끗케 합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 가정에 참된 화평과 평강을 자져옵니다.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화평하지 못한 가정이 있습니까? 항상 불평이 충만하고 항상 불만이 있는 그런 가정이 있습니까? 아마 예수 님께서 그런 분의 가정에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온전히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게 하시고 왕이 되게 하셔서 우리 가정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면 의와 평강이 우리 가정에 항상 있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예수 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만일 예수 님께서 오늘 이 종려주일에, 이 서울에 들어와서 우리 서울의 이 백만 동포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성의 왕이 되시고 주인이 되셔서 이 성을 다스린다고 하면, 이 서울이 어떠한 서울이 되겠습니까? 지금은 이 서울은 그저 범죄와 불안과 공포와 온갖 추악한 죄악으로 가득한 도회라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의 이 서울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한다고 하면, 이 서울에 대해서도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첫째는 의로운 성이 될 것이요, 죄가 없어질 것입니다. 깨끗한 서울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참된 화평과 평강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 민족 전체, 우리 온 나라가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나라의 진정한 왕이 되시고 우리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면, 우리 국가 전체에 의와 평강의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종려주일은 그리스도를 우리 왕으로 영접하는 주일입니다.
제일 먼저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세상을 떠난 리빙스턴이 바로 세상을 떠나기 전날 아침, 아니면, 그 날 아침에 마지막 일기를 남긴 것이 있는데, 거기에 적혀 있는 간단한 기도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 것이 있습니다.『오! 내 주여, 내 왕이여.』이런 말로 기도를 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요, 자기의 왕으로 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충성을 다 하셨습니다.
오늘 이 의의 깊은 종려주일, 우리 하나 하나가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하고, 우리 온 나라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해서,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다 하는 축복이 같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一九六0년 四월 十일)
Ⅲ-40 부활한 생활 (마가복음 十六장 一-十一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三·一-二)
부활주일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사실,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올시다.
둘째는 미래에 있어서는 모든 인간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예표(豫表)와 확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날입니다.
그러나 셋째는 현재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적 부활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날입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은 특별히 현재 우리 믿는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는 영적 부활에 대해서 잠깐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 생활은 이 영적 부활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못박아 죽이고 같이 묻히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변화하여 새 사람으로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우리 신앙생활은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본래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에는 지금처럼 간단하게 세례를 베풀지 아니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을 여러분이 기억합니다. 그 때에는 세례 받는 사람이 물 속에 온전히 그 몸을 담그고 그 후에 물 속으로부터 다시 올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의미가 있습니다. 옛 사람은 물 속에 온전히 장사하고 새 사람으로 올라오는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사람은 옛 사람을 온전히 물 속에 장사하고 새 사람으로 부활하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밀 한 알에 대한 비유도 또한 여기에 적용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밀 한 알이 먼저 땅에 떨어져 묻히고 썩은 후에 그 속에서 새 싹이 변화되어서 땅 위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 생활이란 옛 사람은 떨어지는 밀 알과 같이 땅에 떨어져서 먼저 죽어야 하고 그 뒤에 새로운 생명이 새 싹과 같이 올라와야 우리의 신앙 생활이 온전히 시작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우리 믿는 사람들은 먼저 우리 육신에 속하는 모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그 다음에 새 사람으로 살아날 때에 참된 신앙 생활이 시작된다고 하는 뜻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간절히 권면합니다.『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치욕과 안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곧 우상 숭배니라.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들이니라.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온전히 벗어 버리라.』이와 같이 우리에게 간절히 권면하여 줍니다. 우리 신자의 생활은 온전히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못박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영적으로 부활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다음 마지막에 육신의 부활을 기다릴 것 없이 우리의 영혼이 먼저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말씀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한 은혜를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권면했습니다.
새 생명은 새 법칙 아래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밀 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고 변화해서 새 싹으로 나온 후에는 언제든지 위를 향해서 올라가는 것이 새 생명의 원칙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향상하는 것이 새 생명의 원리입니다. 여기, 벌레의 생활을 볼지라도 진흙 속에 있던 것으로 보기가 아주 험악하게 생긴 유충이 한번 변해서 날개도 나고 성충이 된 후에는 옛날과 같이 진흙 속에 그냥 묻혀서 살수는 없습니다. 나비가 되고 벌이 된 후에는, 맴이 된 후에는 진흙 속에서 더 계속해서 살수가 없고 맑은 공기 가운데서 살수밖에 없으며 다른 많은 꽃들과 아름다운 나뭇잎 사이로 날아다니면서 깃을 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생활을 하였든지, 아무리 부패한 가운데 빠졌었든지, 아무리 우리 심령이 죄악 가운데서 죽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사함을 받고 죽은 가운데서 그 영혼이 다시 부활하였다고 하면, 죽은 시체가 있던 어두움 속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죽은 송장이 입었던 수의를 그냥 입고 이 세상에 나와 다닐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두운 환경을 벗어날 것입니다. 수의와 같이 죽었을 때에 행하던 온갖 불의와 악독(惡毒)과 음란과 부정과 협잡과 모든 이 악한 행위는 온전히 벗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위에 있는 것을 찾아서 날마다 향상의 생활을 하는 것이 부활한 생활의 새로운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간절히 권면합니다. 우리가 과연 우리 영혼이 부활했으면 이젠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하며, 아래를 보고 땅에 있는 것을 찾지 말고, 항상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권명합니다. 음악 가운데도 위에 속하는 음악이 있고, 땅에 속하는 음악이 있습니다. 그림 가운데도 위에 속하는 그림이 있고, 땅에 속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문학 가운데도 위에 속하는 문학이 있고, 아래에 속하는 문학이 있습니다. 실업계에도 위에 속하게 실업을 할 수도 있고, 땅에 속하는 실업을 할 수 있습니다. 공무원이 되어서도 위에 속하는 공무원이 될 수가 있고, 땅에 속하는 공무원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떠한 방면에 살든지 우리의 심령이 과연 부활하였다고 하면, 내가 어떠한 방면에서 어떠한 곳에서 살며 활동하든지 그 속에서 위에 있는 것을 찾을 것입니다. 그 곳에서 거룩한 생활을 할 것이요, 그 속에서 참된 생활을 할 것이요, 그 속에서 화평한 생활을 할 것이요, 어디서나 진리를 찾고, 어디서나 아름다움을 찾을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과연 부활하였으면, 땅에 있는 것을 찾지 말고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이 앉아 계시 나니라.』이런 말씀으로 권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삶으실 뿐더러 四十일만에 승천해서 하나님 우편이 앉아 계십니다. 여기 특별히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하는 이유는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까닭입니다. 다시 말하면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하는 말은, 단적으로 말하면, 언제든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생의 최고 목표를 삼으라고 하는 그 말입니다.
물론 학생들에게 그가 이 다음에 커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어 보면, 여러 가지 대답을 합니다.『나는 커서 과학자가 되겠습니다.』『나는 예술가가 되기를 원합니다.』『나는 정치가가 되기를 원합니다.』『나는 의사가 되기를 원합니다.』『나는 종교가가 되기를 원합니다.』여러 가지 방면에 대한 포부를 가집니다. 이것이 다 귀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어떠한 사람이 되겠느냐? 어떠한 사람이 되어서 정치가가 되겠느냐? 어떠한 사람이 되어서 과학자가 되겠느냐?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인격의 목표를 삼으라고 하는 그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으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서, 그리스도의 생활로서 내 태도의 규범을 삼아서 항상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를 원하여 그리스도의 신명과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고, 내가 정치가도 되고, 실업가도 되고, 공무원도 되고, 과학자도 되고, 예술가도 되라는 그 말이올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의 최고 목표로 삼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권면하는 말씀이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이 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생의 최고 목표로 삼았으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잇느냐? 여기에 특별한 방법을 한 가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볼 때에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사도행전에 기록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접촉하고 내려온 후에 그 얼굴이 빛나서 감히 다른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을 바라 볼 수 없으므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었다고 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꽃이 어떻게 아름다워집니까? 항상 태양을 바라보는 가운데 혹은 붉어지고 혹은 노랗게 되고 혹은 보라 빛으로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입니다. 풀이 어떻게 자라고, 나무가 어떻게 자라고, 곡식이 어떻게 자랍니까? 항상 위를 향해서 태양을 보는 가운데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고, 곡식이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전에 다니엘이 비록 멀리 바벨론에 가서 종노릇을 하기는 하지마는 언제든지 예루살렘으로 향한 문을 열어 놓고 하루에 세 때씩 기도하듯이 우리 믿는 사람들도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위를 향해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생각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성품과 생각과 우리의 모든 생활이 점점 변화해서 그리스도를 최고 목표로 하는 그 이상에까지 도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려고 하면, 제가 항상 하는 말과 같이 특별히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묵상과 기도입니다.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신령한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연한 감화를 우리가 받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교훈을 직접 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직접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 심령 속에 전하여 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서 점점 이와 같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심령이 다 죽은 가운데서 과연 부활하였습니까? 여러분이 부활한 생활을 하십니까?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아직까지 옛 사람이 온전히 죽지 못하고 아직까지 옛 육신에 속하는 이가 있으면, 이 시간 먼저 십자가에 못박고 이 기쁘고 즐거운 부활주일 아침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이 여러분의 심령이 부활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생명이 부활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본래의 양심이 부활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그 내재의 모든 능력이 부활해야 됩니다. 그리고 부활하였습니까? 항상 위에 있는 것을 찾으며, 위에 있는 것을 바라보며,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며, 묵상과 기도로서 우리의 최고 목표를 향해서 매일 매일 발걸음을 앞으로 내어 디디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쁜 부활주일 아침에 우리 하나 하나의 심령이 부활의 축복을 받고 위를 향해서 한번 더 올라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一九六0년 四월 十七일)
Ⅲ-41 조국을 위하여 (느헤미야 一장 一-十一절)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一·四-五)
오늘 아침, 느헤미야 一장을 읽었습니다. 모든 선지자가 다 애국자이지마는 특별히 느헤미야는 직접 조국 건설에 헌신한 애국 선지자입니다. 본래 바사 수산궁에서 높이 등용되어 있었지마는 한번은 자기의 형제 중 하나인 두어 사람들이 자기의 조국 예루살렘을 다녀와서 그 곳 사정을 전하여 준 것입니다. 그 곳에 있는 동포들이 큰 환난에 빠졌고 모든 사람들에게 능욕을 받으며 성은 훼파(毁破)되고 성문은 소화되었고 하는 비참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느혜미야가 이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한 것은 친히 一장 四절에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혜미야는 이와 같은 비참한 소식을 듣고 세 가지를 하였습니다.
첫째는 조국을 위하여 울었습니다. 둘째는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셋째는 느혜미야 二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조국을 위하여 자기가 할 일을 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 세 가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국을 위하여 울라. 둘째는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라. 셋째는 조국을 위하여 내가 할 일을 다 하라.
먼저 그는 이와 같은 소식을 들을 때에 울었습니다. 수일 동안 슬퍼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눈물이 있습니다. 눈물은 급격한 감정에 휩쓸릴 때에 흔히 납니다. 그런고로 슬플 때에, 반면에 너무 기쁠 때에 눈물을 흘릴 수가 있습니다. 눈물은 누구나 때때로 흘리지마는 눈물은 인격의 척도가 또한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때에 눈물을 흘리는가? 장부비무루(丈夫非無漏)나 불새이별간(不새離別間)이란 옛 글이 있습니다.『장부가 눈물이 없음이 아니지마는 이별하는 사이에는 흘리지 않는다.』이런 말이 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가? 누구나 자기를 위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누구나 자기 가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민족 전체를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아니 인류 전체를 위하여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가? 느혜미야의 눈물은 나를 위한 눈물은 아닙니다. 자기의 가족을 위한 눈물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민족 전체와 조국을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눈물의 예언자란 이름을 가진 예레미야의 눈물도 자기 자신을 위한 울음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조국을 위한 울음이었습니다. 예수 님께서 감람산을 넘어 오시다가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오,『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부르짖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눈물도 역시 조국을 위한 눈물입니다.
예수 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올라가실 때에 많은 여인들과 여러 사람들이 같이 좇아오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집을 위하여 울라.』조국을 위하여 울라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였습니다. 생각하면 과연 조국을 위하여 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국 민족이 근 四十년 동안이나 일본 민족의 탄압 아래에서 많은 애국자들이 피를 이 땅에서 흘린 것입니다. 一九四五년 해방을 갖는 기쁨을 가졌지마는 천만 뜻밖에 국토는 양단 되어서 많은 이북 사람들이 여러 대를 이어 살던 고향과 산천을 떠나서 피난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一九五0년에는 六·二五사변이 일어나서 악독한 공산당의 남침으로 말미암아 수백만에 달하는 아까운 젊은 생명들이 이 땅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휴전된 지 七년 되는 금년에 이 땅에 또한 이와 같은 참변이 일어나서 꽃 같은 어린 학생들이 백여 명이나 이 땅에서 쓰러지고, 여러 백 명이 부상을 당하고, 이 젊은 사람의 피가 또 한번 우리 땅을 적시게 될 때에, 생각하면 얼마나 비통하고 참혹한 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너와 네 집을 위하여 울라.」울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감정에 휩쓸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울라고 하는 말은 얼마나 아픈가를 깨달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일이 얼마나 큰 것을 깨달아서 이런 일이 다시 이 땅에 일어나지 않도록 맹세를 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울라고 하는 말은 조국을 극진히 사랑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눈물이 없습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찌 이런 때에 피눈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느혜미야는 조국을 위하여 울었습니다. 그러나 우는 것만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읽어보니 느혜미야는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느례미야만 조국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도 단순히 조국을 위하여 운 것만 아닙니다.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다니엘도 조국을 위하여 망국의 설음을 표시하기 위해서 울은 것만 아닙니다.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선지자 다니엘은 자기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것은 큰 범죄로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조국을 위하여 기도합니까? 우리가 오늘 아침에 다 우리 조국을 위하여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절감한 마음으로 이 민족과 이 겨레를 위해서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다른 민족과 같이 살 수 있는 민족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까? 기도를 하면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두 사람이 기도하려 성전에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세인이요,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별로 기도한 것이 없습니다. 그 엄숙한 자리에 가서도 자기를 자랑한 것밖에 별로 없습니다. 오직 세리만이 자기의 가슴을 두드리며 자기의 죄를 자복 하였습니다.
느혜미야의 기도를 一장에서 읽어보았습니다. 여기 보니 느혜미야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와 나의 아비의 집이 범죄를 행하였습니다. 우리가 다 같이 심히 악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우리는 다 계명과 율례(律例)와 규례(規例)를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이 죄는 자복 합니다.』회개와 참회와 자복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니엘도 예루살렘을 향하는 문을 열어 놓고 기도할 때에 다니엘 九장 五절에 이런 말로 기록하였습니다.『우리는 이미 범죄 하여 패 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아오며』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죄를 회개할뿐더러 자기 민족 전체의 죄를 대신 회개하면서 민족 전체를 대표해서, 말하자면 민족의 대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민족의 죄를 잡고하며 용서하여 주기를 호소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립니까? 여기 특별히 무슨 죄를 자복하였습니까? 주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않은 것을 자복하였습니다. 주의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않은 것을 자복하였습니다. 주의 계명과 율례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을 통하여 주신 도덕의 법과 하나님께서 그 시대 그 시대에 적당하게 주시는 국가의 법률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신 도덕의 법도 지키지 못하고 국가의 법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법을 지키지 않고 범한 것을 여기에 자복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경이 죄는 무엇이라고 정의하여 주시는지 아십니까? 요한 一서 三장 四절에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곧 불법이라.』죄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불법한 일을 하는 것이 모든 죄입니다. 불법이 많은 곳에 불평과 불만이 생기고, 불평과 불만이 쌓이는 곳에 울분한 마음과 원한이 생기고, 울분한 마음과 원한이 터질 때에 여러 가지 불상사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법과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해야 됩니다.
우리 민족은 이와 같은 비통한 사실을 앞에 놓고 위정자를 비롯해서 일반 국민에게 이르기까지 나의 불법한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깨끗한 민족이 되는 이런 계기가 되어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어린 생명들의 피 흘림이 결코 헛된 데 돌아가지 아니하고 이 흘린 피야말로 민족의 죄를 대신 속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깨끗한 희생의 제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불법의 죄를 회개하면서 우리가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더욱 중한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이 때에 반성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이 세상에 두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금으로 이 사회에 두셨지마는, 과연 우리 믿는 사람들이 정계에 갔으면 정계에서, 관청에 갔으면 관청에서, 사업장에 있으면 사업장에서, 교육계에 있으면 교육계에서, 그 자리에서 과연 빛과 소금의 직책을 하였습니까? 깊이 반성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특별히 우리 교직자들, 목사들이나 장로들도 특별히 반성하고 회개하여야 되겠습니다.
이상합니다. 一九五0년에 대구에서 총회가 모였을 때에 목사와 장로들이 크게 싸움을 하면서 그 후에 교회가 분열되더니 그 해로 六·二五참변이 생겨서 우리 민족에 큰 화를 끼쳤습니다. 작년에도 대전서 모여서 여러 가지로 쓸데없는 문제를 가지고 싸우며 분쟁을 하더니 결국은 도처에서 교회를 분열시키며, 이런 일이 있더니 이상스럽게 금년에 들어서 서울역의 큰 변을 비롯하여 오늘날 이런 참변이 우리 민족에게 미쳤습니다. 이것이 결코 우연하게 보이지를 아니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 민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우리 민족의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자복하는 민족의 대 제사장의 직분이 있는데 이런 사명을 지닌 우리 믿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이 민족의 살 길이 어디 있습니까? 깊이 반성하면서 우리가 회개의 기도를 들여야 되겠습니다.
셋째로『조국을 위하여 네가 할 일을 하라.』사도 바울이 다메섹에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 님을 만나 회개한 다음에 제일 먼저 드린 기도가『주여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란 그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가지고 얼마 전 게스와인 목사께서 본 교회에 오셔서 설교도 하였습니다. 회개한 사람이 드릴 기도는『주여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과연 내 죄를 회개했다고 하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 드릴 기도는,『내가 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입니다.
이 대답은 성경에 분명히 해 주었습니다. 미가서 六장 八절을 보면『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사는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은 예수 님 말씀과 꼭 같습니다. 예수 님 말씀에 마태복음 二十三장 二十三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화 있을찐져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며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의는 공의요, 인은 인자요, 신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공의를 행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회개한 사람에게는 이 앞으로는 온전히 정의대로 공의대로 할 것입니다. 상계에도 공의가 있어야 됩니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도 공의가 있어야 됩니다. 정치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선거에도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공의가 이 앞으로는 있어야 되겠습니다. 인자를 사랑하라고 그랬습니다. 죄인에게는 용서로 인자가 나타납니다. 불행한 사람에게는 긍휼로 나타납니다. 피차 평신도간에는 친절과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민족이 좀더 공의를 행하고 좀더 피차에 인자하였던들 이런 일이 설마 있었을까 생각이 됩니다. 겸손히 주와 동행하라고 그랬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며 하나님과 의논해서 무엇을 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겸손히 순복해서 살라고 우리에게 말씀했습니다.
조국을 위해서 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조국을 위하여 내 죄를 회개하며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조국을 위하여 내가 할 일을 다 해야 되겠습니다. (一九六0년 四월 二十四)
Ⅲ-42 회개와 새로운 날 (사도행전 三장 十一-十六절)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三·十九)
먼저 하나님께 감사함을 드립니다. 또한 여러분께도 감사함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는 가운데서 또한 여러분께서, 많이 기도하여 주시는 가운데서, 이 부족한 사람이 그 동안 먼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지난 수요일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먼저 서인도 제도 가운데 하나인 발베이도스(Barbados)라고 하는 섬에서, 그 곳 온 섬으로부터 온 목사들을 중심해서 수양회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남미로 내려가서 컬럼비아라고 하는 나라 베델린(Medellin)이라고 하는 곳에서, 컬럼비아에서 온 교역자들과 또한 남미 열 한 나라에서 온 교역자들이 합해서 수양회를 마치고, 본인은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보고는 오늘 저녁에 잠깐 드리려고 생각합니다.
또 이 자리에 설 때에 하나님 앞에 더욱 감사함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동안 우리 국내 정국을 크게 새롭게 하여 주신 이 사실이올시다.
그 동안 제가 외국에 있으면서 우리 국내 정세가 국제적으로 반영되어 가는 형편을 잠깐 동안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젊은 학도들의 애국심, 그들의 정의감, 그들의 희생의 정신은 세계 만방에 빛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혁명을 통해서 우리 한국민족은 오래 동안 불법과 불의에 그냥 있을 수는 없고 언제든지 자유와 독립을 성취할 수 있는 민족이라고 하는 것을 또한 세계에 나타내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하였습니다. 더욱이 이번의 의거와 민주 혁명은 오직 해방된 이후에 교육을 받고 일어난 새 세대의 젊은 사람들의 공헌으로 이루어진 사실로서, 우리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 보다 더욱 더 튼튼한 촉망을 각자가 가지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마는 우리가 이러한 때에 우리 국빈으로써 또한 믿는 사람으로서 항상 기억할 것은 몇 가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국제 정세는 바야 호로 더욱 중대한 위기를 당하고 있는 이러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아직까지도 분단이 되었고 자유를 유린하고 자기의 야심을 채우려고 하는 악한 공산당들은 언제든지 호시탐탐해서 우리 남한을 엿보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우리는 국제적으로 새 나라를 건설할 수밖에 없는 중대한 과제에 당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때에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지 아니하리 오 마는 더욱 이러한 때에 깨어 기도해야 되겠고, 범사에 근신해야 되겠고, 지혜는 뱀과 같이 하고 순하기는 비둘기와 같이 하며 모든 질서 회복과 새 나라 건설에 적극 협력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입니다.
이제 잠깐 인사의 말씀을 드리고 오늘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사도 행전 三장 十九절을 다시 봉독 하고자 합니다.『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이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후에, 모인 사람들을 향하여 외친 설교 가운데 한 부분이올시다.
여기에 간단히 세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우선「회개하고 돌이키라」고 하는 말씀, 둘째는 이렇게 해서「죄 사람을 받으라」하는 말씀, 셋째는 이렇게 하면「유쾌하게 되는 날」혹은 상쾌하게 되는 날 혹은 좀더 알아듣기 쉽게 새로운 날이 주님께로부터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장쾌하게 되는 날, 새로운 날이 이를 것인가? 회개하고 돌이켜서 죄 없이 함을 받을 때에 이와 같은 날이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회개는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에 문자 그대로 천국의 문이올시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요단 강가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외친 말씀이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또한 일을 시작하실 때에 역시 같은 말씀으로 외치셨습니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기약이 이르렀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회개의 좁은 문을 들어가지 아니하고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이 회개는 교회 부흥의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 요한 에게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말씀하실 때에 열심을 내어서 회개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온 교회가 열심히 죄를 회개할 때에만 새로운 부흥의 은혜가 미칠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에 회개야말로 국가 부흥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보면 옛날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번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에스겔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이스라엘 족속아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혹은 다른 선지자를 통해서『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며 회개하라.』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회개는 교회 부흥의 근본이 될뿐더러 일반적으로 민족 부흥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무슨 뜻입니까? 물론 우리가 이 뜻을 다 알지마는 어떤 때에는 우리가 회개의 근본 뜻을 잊어버릴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다음에는 누구든지 후회를 합니다. 내가 그 죄를 짓지 아니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뉘우칩니다. 죄 지은 데 대해서 섭섭한 감정이 일어납니다. 이 후회는 물로 회개의 첫 걸음이 될 수도 있지마는 이렇게 후회하는 그 자체가 회개를 아닙니다.
술 먹고 주정을 하고 나쁜 일을 한 사람도 그 후에 물론 후회는 합니다. 그러나 후회만이 회개는 아닙니다. 다른 기회가 있을 때 또 먹습니다. 음란방탕한 사람도 그와 같은 일을 한 후에 물론 안 했으면 좋을 번하였다고 그것을 후회합니다. 그렇지만은 후회만은 회개가 아닙니다. 심한 살인 강도도 악한 일을 저지른 후에 후회는 다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신물을 볼지라도 살인 강도들이 마지막에는 다 안 했으면 좋을 번하였다고 후회하는 말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후회만은 온전한 회개는 아닌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를 은 三十냥에 팔은 후에 후회는 하였습니다. 얼마나 후회하고 섭섭하게 생각하였든지 스스로 목매어 자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후회가 유다를 구원하지 못하였습니다. 후회는 회개는 아닙니다.
단순히 후회에만 그치는 것은 후회가 심하면 자기 육신을 줄일 수 있고, 그 후회가 심하지 아니하고 한번 후회하고 그 다음에 기회 있을 때 또 죄짓고 후회하고, 그러나 그 다음에 기회 있으면 또 죄짓게 되어 그와 같은 후회는 점점 약해져서 마지막에는 암만 죄를 지어도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감각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영혼이 죽게 됩니다. 후회가 회개의 첫 발걸음이 될 수는 있지만 거기에서 멎으면 아무 쓸데없습니다.
회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죄를 지은 다음에 죄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이 들어옵니다. 죄를 지은 다음에는 공포심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죄를 지은 다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무서워하였습니다. 무서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나타날 때에 숨었습니다. 다른 데로 피하였습니다. 죄 지은 다음에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 두려움 마음도 회개의 한 걸음이 될 수는 있지마는 두려운 마음 자체가 회개는 아닙니다.
전에 애굽 왕 바로가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릴 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회개는 하지 아니하고 그의 마음은 더욱 강퍅하여졌다고 말하였습니다. 죄는 지은 다음에 두려운 생각이 나게 하는 것도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그런 생각이 나게 하건마는 단순히 두려운 마음에 그쳐서 그 다음에 다른 기회가 있으면 죄를 짓는 이와 같은 두려움은 아무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공포심만은 회개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회개란 어떤 것입니까? 자기가 죄를 지은 다음에 그것이 온전히 죄인 줄 알아서 후회할뿐더러 죄는 반드시 값이 있는 줄 알아서 죄를 무서워할뿐더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죄는 이와 같은 것이니 내가 이 죄에서 떠나겠다는 태도로 온전히 마음을 고치고 마음을 변경해서 돌아서는 것이 온전한 회개입니다. 참 회개는 회심이라고 합니다. 혹은 요즘 말로 자기가 가던 길을 백 팔십 도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탕자의 비유를 기억합니다. 이 탕자가 많은 분 깃을 가지고 자기 아버지와 집을 등지고 멀리 떠나서 다른 나라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허랑 방탕하면서 모든 소유를 허비합니다. 그렇게 한 후에 갑자기 그곳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 탕자가 후회하였을 줄 압니다.
『내가 우리 아버지 집에 있었다면 좋을 것을, 그만 이렇게 나와서 재산 다 없어지고 흉년 들어서 먹을 것 없으니, 이거 어떻게 하면 좋겠나.』마음 가운데 후회한 줄 압니다. 그러나 후회만은 온전히 회개는 아니었습니다. 할 수 없어서 마지막에는 어떤 돼지 먹이는 집에 가서 돼지를 쳐주었습니다. 흉년이 되어서 먹을 것이 넉넉지 못하니 돼지 먹는 것을 함께 먹지만 배는 고팠습니다. 이럴 때에 더욱 후회하는 생각이 나고 이렇게 되다가는 굶어 죽지 않겠나 하는 두려운 생각도 마음 가운데 일어난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직 회개는 아닙니다.
이와 같은 환경을 당해서 자기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아, 우리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고, 우리 아버지 집에는 품꾼이 많고, 우리 아버지 집에 있는 품꾼도 배를 곯지 아니하는데, 나는 여기 있어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자기가 감히 아들로서 돌아갈 수 없지마는 이제라도 돌아가서 품꾼으로라도 써 달라고 간청하겠다고 하는 결심을 하고 돌아서서 아버지 계신 곳을 향해서, 부모 계신 곳을 향해서 아버지 집으로 올 때에 그것이 온전한 회개입니다. 회개는 후회만이 아닙니다. 죄를 두려워하는 것만 아닙니다. 온전히 죄가 어떤 것인지 깨달아서 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 서서 옳은 길로 가는 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우리 인생의 생활이 길을 가는 것과 같지 아니합니까? 그래서 인생여로란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나그네의 길을 가는 것과 같지 아니합니까? 우리가 다 어떠한 방향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향해서 가는 내 가는 내 생활의 길이 옳은 길이냐, 옳지 아니한 길이냐? 이 길이 생명의 길이냐, 이 사망의 길이냐? 이 길이 천당으로 인도하는 길이냐, 지옥으로 인도하는 길이냐? 잠깐 멈추어 서서 내 길을 살펴보아야 되겠습니다. 가만히 살펴 볼 때에, 내 가는 길이 비록 지금은 평안하고, 지금은 세력도 있어 보이고, 지금은 영광도 있어 보이고, 지금은 모든 것이 평안해 보이지마는, 결국은 사망이요, 지옥이요, 파멸인 것을 만일 깨닫게 되었을 때 더 지체할 것이 있습니까? 그 길에서 동아서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길에서 돌아서서 방향을 변화해서 생명의 딴 길을 가는 것이 바로 온전한 회개입니다. 이 길을 스스로 가신 이는 이 시간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가는 길이 과연 생명의 길이냐? 내가 가는 길이 과연 의의 길이냐? 내 길을 바로 살펴서 내 현재의 가는 길이 옳지 못한 길이면 그 자리에서 돌아서는 이것이 참 회개입니다.
이와 같이 온전히 가던 길을 돌이켜서 생명의 길로 돌아서는 그런 사람에게는 여기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죄 사함이 있습니다. 탕자가 멀리 가서 많은 죄를 지었지마는 아버지 앞에 돌아와서 그 죄를 고백하고 아버지의 품에 안긴 다음에는 다시 전에 지은 죄를 아버지가 묻지 아니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죄 대신 져 주셨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죄 사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다. 참 회개가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옛날 유대 사람의 역사를 보면 구약 시대에는 어떤 사람이든지 죄를 지으면 온전히 죄를 회개하고 돌아 설 수 있도록 과거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있은 후에는 제사를 다시 드릴 필요는 없지마는 주님의 십자가가 나타나기 그 전에는 제사를 드리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유대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온전히 회개하지 아니하고, 제사만 드리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이 점점 머리 속에 이런 오해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는 않으면서, 죄는 온전히 회개하지 아니하면서 죄는 그냥 지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많은 제물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굉장히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향을 보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어떻게 책망하셨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돌아가셔서 이사야 一장을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 하뇨?』『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참 회개가 없는 제물은 헛된 제물입니다. 참 회개가 없는 예배는 헛된 예배입니다. 참 회개가 없는 교회 출석은 헛된 출석입니다.
요사이 어떤 사람들은 어떤 정통적 신조를 바로 깨달아서 그대로만 꼭 믿으면 죄 사함을 얻는 줄 압니다. 모여서 어떤 신조를 바로 깨닫는다고 죄를 사함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온전히 회개가 없으면 정통 신앙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며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惡業)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며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내가 가는 길이 옳지 못한 것을 깨달으면 거기서 온전히 변해서 새 길을 따릅시다. 참된 개회가 있는 곳에만 죄 사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우리의 생활을 스스로 자성하지 아니하리 오 마는 특별히 이와 같은 때에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며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내 생활을 스스로 반성하고 마땅히 내가 옳은 길을 걸어 왔는가, 그른 길을 걸어왔는가? 내가 교회에 물론 이름은 두었고 내가 교회에 이따금 출석은 하였지마는 과연 내가 바로 죄를 회개하면서 교인 생활을 하였는가? 스스로 반성할 때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과거 부패한 정권 아래 살면서 부패한 사회 가운데 참으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불법과 불의에 대하여 강하게 싸우기 못한 죄도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강하게 싸우지 못할뿐더러 이런 죄를 묵인하고 동참한 모든 죄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모든 한국 민족이 평화를 원하고 통일을 원하는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독선주의와 교만과 당파심과 비방심(誹謗心)과 완고(頑固)와 고집으로써 분쟁과 분열을 일삼는 모든 우리 교회 안의 죄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먼저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 죄악 많은 세상, 부패한 세상 가운데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고 우리를 두었는데 우리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 죄를 누구나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남의 죄를 보려고 하지 말고 먼저 내 죄를 각각 보아야 되겠습니다. 남의 죄를 보려고 하지 말고 먼저 내 죄를 각각 보아야 되겠습니다. 남의 눈의 티를 뽑으려고 애쓰지 말고 내 눈의 들보를 빼기 위해서 먼저 애써야 되겠습니다.『내 형제들아,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님께로부터 이르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과연 과거에 어떠한 길을 걸었든지, 어떠한 잘못을 하였든지, 온전히 과거를 청산하고 그릇된 길을 바로 가는, 참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의 속죄가 우리 마음속에 임할 것이요,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을 때에는 우리 마음속에 주님께서 임하시고 성신께서 임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속에는 새로운 기쁨과 새로운 평화와 새로운 축복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날이 우리 마음속에 임할 것입니다. 또한 윌 교회도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과거에 어떠한 길을 걸어 왔던지 우리가 이제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과거의 모든 잘못한 것을 회개하고 온전히 돌이켜서 바른 길을 걷는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과거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 한국 교회에 새로운 부흥과 새로운 날을 반드시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 주님께서 임재(臨在) 하시고 성신께서 임재 하실 때에 한국교회는 새로운 전기(轉機)를 이룰 것입니다.
여러분, 온 세계는 한국 교회가 은혜 받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 교회는 과거에 많은 핍박을 받아 왔습니다. 한국 교회는 과거에 많은 희생을 하여 왔습니다. 이와 같은 교회가 가장 빛나는 증거를 요구하는 이 때에, 은혜 받기 위해서, 온 세계 교회가 가는 곳마다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여러분, 이 회개 운동이 우리 한국교회에서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개인으로도 그렇고, 가정으로도 그렇고, 교회로도 그렇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간구 할 때에, 하나님의 새로운 날이 한국교회에 임할 줄 믿습니다.
사실 우리 한국 전체를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되었다고 반드시 새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딴 사람이 정부에 들어갔다고 반드시 새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기구가 변했다고 그것이 새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남미에 다녀왔지만 남미와 중미에는 민주주의 나라가 큰 자라와 작은 나라를 합해서 스무 나라가 있습니다. 이 스무 나라 가운데 언제든지 한 나라에서는 혁명이 늘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혁명이 끝 날쯤에는 저 나라에 혁명이 있고, 또 다른 나라에서 혁명이 있고 여러 나라에서 혁명이 계속 일어납니다. 한 나라에 三, 四년 있다가, 어떤 때는 五, 六년 있다가 혁명이 또 한번씩 일어납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 아십니까? 어떤 사람이 들어가서 정권을 잡습니다. 처음에는 잘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며칠이 안 가서 부패해지고 맙니다. 그러면 또 혁명이 일어납니다. 딴 사람이 들어갑니다. 몇 해 있습니다. 또 부패해집니다. 또 혁명이 일어납니다. 결국 도덕 수준이 높고 민족 전체가 좋은 사람이 되어서 대다수가 선한 사람이 되어야 그 나라가 바른 나라가 됩니다.
결국은 우리 민족이 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축복을 받겠느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온전히 회개하고 새 민족이 되기 전에는, 항구적 평화가 있는 나라를 건설할 수 없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회개하여야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도 새로운 날이 올 것입니다. 이 회개는 먼저 나로부터 시작해야 되겠습니다. 내 가는 길이 옳은 길이냐, 내 생각이 옳은 방향이냐? 이것이 주님께로 가는 길이냐? 나로부터 회개해서 내 마음속에 새로운 축복이 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一九六0년 五월 二十二일)
Ⅲ-43 영원히 거하는 생활 (요한一서 二장 十二-十七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二·十七)
다른 곳에 있는 성경 중 몇 곳을 보겠습니다.『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오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린도 후서 四장 十八절이올시다.『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베드로 전서 一장 二十四-二十五절인데 본래 이사야 四十장 八절의 인용이올시다.
이 세 성경 구절 가운데서 우리는「영원」이라고 하는 말 또는「세세토록」이라는 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같은 말씀이올시다. 잠간이라고 하는 말과 영원이라고 하는 말, 마르고 혹은 떨어진다고 하는 말과 세세토록 있다고 하는 말, 지나간다고 하는 말과 영원이라고 하는 말이 대조되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잠깐 되는 것도 있는 반면에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마르고 떨어지는 것이 있는 반면에 세세토록 있는 것도 있습니다. 지나가는 것이 있는 반면에 영원히 있는 것도 또한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 선생이 고린도 후서 四장 十八절에서 교훈 한 말씀을 생각해보면『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오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이 우주에는 보이는 존재가 있고 보이지 아니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해는 볼 수 있습니다. 밤에 달도 볼 수 있습니다. 무수한 별들도 볼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대 자연계는 볼 수 있습니다. 산도 볼 수 있고 바다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볼 수 있는 것만 우리가 볼 줄 알면 아니 됩니다. 이 볼 수 있는 것 배후에 볼 수 없는 이가 계십니다. 곧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물질 세계와 하나님을 비교해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물질 세계보다도 먼저 계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는 시작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셔서 무시무종(無始無終)하신 하나님이올시다. 이 물질 세계는 끝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끝이 없습니다. 무종 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올시다.
세상 나라와 그 권세와 그 영광은 사람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나라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영원한 무궁한, 시간에 비하면 잠깐 있다 없어지는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있습니다.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 보이는 부분이 있고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입은 옷은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사람의 그 속에 있는 영혼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한 아는 것은 보이는 육신은 잠간이요,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은 영원히 불멸한다고 하는 것도 우리는 잊지 아니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거하는 생활을 하려면 보이는 것만 돌아보아서는 되지 않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돌아 볼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찾을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성경은 하나님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나 온 우주에 충만하시고도 남으시는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우리가 과학만 공부할 것이 아닙니다. 종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바라 볼 줄 알아야 영원히 거하는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주님께서는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영원히 있는 하나님의 나라, 영원히 있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한 것입니다.
영적 생활을 돌아 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육신 생활에 필요한 의식주(衣食住)만 볼 줄 알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의 심령의 생활에 필요한 소망, 사랑도 있어야 할 것을 우리가 알고, 반드시 영적 생활을 위해서 없으면 아니 될 이 세 가지를 북돋우기 위해서 각별한 노력을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실재를 찾고 실재를 구하려고 노력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 또한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거듭 주시는 이 말씀,『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나니라.』우리가 이 교훈도 반드시 받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옛날 애굽의 권세와 영광을 읽은 바 있습니다. 그 모든 찬란한 문화와 영광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보면 그 찬란한 문화와 그 굉장한 권세도 지금은 다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페이지를 통해서 옛날 바벨론의 권세와 문화와 찬란한 영광을 또한 읽는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와서 보면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는 고적 몇을 내어놓고는 다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떨어진 것을 우리는 목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옛날 로마의 권세와 그 문화와 그 영광을 또한 읽고 기억하는 바입니다. 그렇지마는 오늘날 보면 역시 다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외국 역사를 살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한국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고구려의 권세와 그 문화와 영광의 시대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백제의 권세와 그 문화와 영광의 시대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통일한 신라의 그 권세와 문화와 영광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고려조의 찬란한 문화를 또한 기억합니다. 우리는 이조의 권세와 문화와 영광도 다 기억합니다. 그렇지마는 오늘날 와서 보면 거의 다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떨어진 것을 우리는 목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주님 말씀은 세세토록 또한 있는 것을 우리는 목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산 것을 우리는 목도합니다. 공의는 나라를 흥하게 하고 죄는 나라의 수치가 됩니다.『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스스로 속이지 말고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심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거두리라.』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흥망성쇠의 인간 역사 위에 무지개와 같이 옛날이나 오늘이나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니라.』『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니라.』『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잊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이 천년 전이나 천 년 전이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고 죄 있는 인간에게 밝은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이 아닙니까? 과연 육신에 속하는 모든 것은 풀과 같이 마르고 육체에 속하는 모든 영광은 꽃과 같이 떨어지지마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주님의 말씀은 시대가 변하였지마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지나가지마는 지나가는 바가 없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변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진리의 빛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히 거하는 생활을 하려고 하면 꽃과 같이 떨어지는 이 세상에 근거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히 서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생활의 근거를 두어야 될 것입니다. 일시 일시 변하는 인간의 명상이나 인간의 사상에 두지 말고 변하지 아니하는 우주의 지표 적 진리가 되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생활의 근거를 두고 살아야 될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북경 구경을 한번 했습니다. 고궁을 구경하고 별궁도 여러 곳에 가서 구경하는데, 한 곳에 아니까, 그 안내자가 하는 말이 아름다운 궁궐 가운데 어떤 한 방을 가리키면서 그 방이야말로 청조 말기에 가장 사치하고 호화롭고 세도를 부리던 서태후(西太后)가 살던 방이라고 합니다. 그 방에 들어가 보니, 아무 것도 없고 낡은 침대 하나 있고 그 위에 베개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안내자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렇게 호화롭고 그렇게 사치하고 그렇게 세도하던 서태후가 마지막에 남기고 간 것은 그 베개 하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갑니다. 세상의 권세도 지나갑니다. 세상의 영광도 지나갑니다.
제가 이번에 미국에 가서 三十여 년 전에 제가 졸업한 대학을 한번 더 방문하는 혜택을 가졌습니다. 집은 여전합니다. 캠퍼스도 여전합니다. 오히려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집도 여러 개를 더 지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가운데 한 가지 섭섭한 것은 三十여 전에 저를 가르쳐 주던 은사는 볼 수 없고, 다만 이 도회에 아직까지 살아 남아 있는 은사는 八十노인 벤더벨드 박사라고 하는 한 분뿐이었습니다. 여러 은사들은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은 지나가는 세상입니다.
제가 이번에 석 주일 남짓하게 한국을 떠나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잠깐 다녀온 셈입니다. 돌아와서 서울을 들어오게 될 때에 한 가지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상은 삼각산은 여전합니다. 한강도 여전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정계를 보면 완전히 변했습니다. 옛 정부는 지나갔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지나가는 것입니다.
정권뿐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와 같이 자나갑니다. 권세도 지나가고, 일대의 문화도 지나가고, 예술도 지나가고, 주의와 사상도 지나가고, 모든 유행도 지나갑니다. 너무 유행만 따르지 맙시다. 시국도 지나갑니다. 너무 시국에 들떠서 부화뇌동하지 맙시다. 어떤 이들은 요즘 데모만능인 줄 생각합니다. 청춘도 지나갑니다. 청춘을 자랑하지 맙시다.
제가 六·二五때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한 두 곧 따라갔습니다. 저는 서성리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라고 그래서 서성리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며 설교를 했습니다. 옛날 이야기니까 이런 말해도 괜찮을 줄 압니다. 예배를 다 보고 여러분을 인사하는데 좀 알 분도 있고 모를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캄캄하고 자그마한 어떤 할머니가 저한테 인사를 하면서 목사님 절 알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를 좀 많이 당합니다. 암만 생각해야 생각이 안 납니다. 그래서 미안하지마는 저는 정신이 없어서 미쳐 생각이 안 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하는 말이『저를 모르겠어요? 저는 저 남산 모루, 전에 목사님이 남산 모루에 와 계시지 않았습니까? 거기 있을 때 그 교회에 다니던 아무개올시다.』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 四十년 전에 그 남산 모루에서 알던 그 아무개는 얼굴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얼굴을 한 잘 생긴 여자 가운데 하나로 저는 생각했었습니다. 그랬는데 三, 四十년 후에 보니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청춘도 지나갑니다. 세상만 지나가는 것이 아입니다. 정욕도 지나갑니다. 우리 속에 있는 욕망도 연령을 따라서 지나갑니다. 어릴 적에 있던 욕망이 좀 크면 사라집니다. 청년 시대의 욕망이 노년이 되면 지나가고 맙니다. 우리의 정욕도 환경의 변함에 따라고 또한 변합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세상에서 지나가는 욕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나가지 아니하는 것을 여기에 한 가지 말씀했습니다.『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인간 역사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개인 생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옛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가운데도 창천이 유의 생남자(蒼天이 有意 生男子)란 말이 있습니다. 푸른 하늘이 뜻이 있어서 남자를 내었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우리를 이 땅에 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뜻을 찾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경륜대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서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고 거하겠다고 여기에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전에 제가 평양에서 학교에 다닐 때에 흔히 대동강변 그 청루벽 아래와 모란봉과 을밀대와 그런 곳이 자주 산보하였습니다. 산보를 할 때에는 가끔 이런 생각이 납니다. 대동강의 물결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또 항상 끊임없이 아래로 흘러갑니다. 그렇지마는 한편에 높이 속은 모란봉이나 을밀대 청루벽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냥 우뚝 서서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물결과 같이 흘러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이 만세 반석 위에 생의 근거를 둔 사람은 영원히 거하는 것이올시다.
그래서 영원히 거하는 생활의 비결은 첫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바라 볼 줄 알아야 됩니다. 둘째는 영원한 주의 말씀에 근거를 두어야 되겠습니다. 셋째는 영원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야 되겠습니다.
제가 벌써 二十세기 초엽에 나서 거의 반세기 이상을 살았습니다. 시대의 변천도 무수히 제 눈으로 목도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물론 일본 시대에도 살았습니다. 해방된 다음에 잠깐 동안이나마 공산당 시대에 북한에서 살았습니다. 그 다음에 남한에 내려와서 군정 시대에 살았습니다. 또 이승만 박사 정권 시대에 살았습니다. 지금, 이 과도 정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일본 시대에 살면서 보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 시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할 수 있는 대로 일본 사람처럼 살려고 하고, 말도 일본말만 자꾸 하고, 풍속도 일본 풍속을 따르고, 의복도 일본 의복을 자주 입고, 이렇게 살던 사람들을 상당히 많이 보았습니다. 일본 시대가 지나갈 때에 일본시대와 같이 그런 사람도 다 지나갔습니다. 몰락되었습니다.
이북에는 아직까지도 공산당 시대입니다. 공산당 하는 대로 살아야 하겠다고 거기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을 따라가고 그들에 아부하며 그들의 뜻대로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는 줄 압니다. 분명히 알 것은 공산당 시대도 반드시 지나갈 터인데 그 때에 그들도 지나갈 것뿐입니다.
군정시대에 더러 보았습니다. 군정시대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 대단히 분주하게 다니던 사람을 보았습니다. 군정 시대가 지나갈 때에 그런 사람도 함께 지나갔습니다. 이승만 씨 정권 시대에 또한 보았습니다. 그 때에 세상을 바라보고 어떻든지 여기 맞기 위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살던 사람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이 시대가 지나갈 때에 그들도 방금 지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 앞에 무슨 시대가 오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알 것은 하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이 세상에 있어서, 그 시대에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그 세상과 그 시대가 지나갈 때에 함께 지나갈 것입니다. 어떤 시대에 살던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생활을 해야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지 지나가지 않습니다. 또 우리 육신 시대가 다 지나가고 하늘 나라의 시대가 올 때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된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세세토록 있느리라.』
(一九六o년 五월 二十九일)
Ⅲ-44 교회부흥의 비결 (사도행전 一장 十二-十四절, 二장 一-十三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四·六)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스룹바벨에게 주신 말씀이올시다. 스룹바벨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할 때에 정치적 지도자이었습니다. 대 제사장 여호수아와 같이 민족의 부흥과 재건을 위해서 노력하던 분이올시다. 그 때에 그들의 앞에는 허다한 문제와 난관이 가로 놓여 있었습니다. 실제 생활 문제, 의식주에 관한 문제도 새로이 돌아온 피난 생활로서 재건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미약한 힘으로 큰 열심을 가지고 성전 재건을 시작하였는데 여러 가지 부족한 것도 많지마는 원수들이 또한 많이 방해함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성전 공사도 임시 중시할 수밖에 없는 형편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스룹바벨은 자연히 마음 가운데 번민(煩悶)이 일어나고 상심 가운데 있을 줄 생각합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때의 선지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스가랴에게 한 환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눈앞에는 큰 등대가 보였습니다. 그 등대 위에는 일곱 등잔이 있었습니다. 일곱 등잔에는 물론 일곱 불이 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곱 등잔에 기름을 공급하여 주는 주발이 있었고 또한 그 주발은 죄 우에 선 생생한 두 감람나무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두 감람나무에서 쉴새 없이 흘러내리는 기름은 등대 위 주발에 모여들어 갔고, 그 주발에서는 일곱 등잔으로 기름이 내려가서, 일곱 등잔의 불빛은 꺼지지 아니하고 기리 성전 안을 빛나게 비취인 것입니다. 이 환상은 별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줄 생각합니다.
여기 보인 등대는 하나님의 신령한 교회를 상징한 것입니다. 그 등대 위에 서 있는 일곱 등불은 교회를 중심해서 나타나는 빛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이 진리의 빛이 끊임없이 빛나는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주신 사자들을 통해서 그 잔 위에 기름이 간단없이 성신의 역사가 있는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하나님의 일은 힘으로 죄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내 신으로 되느니라.』 이 말씀을 환상을 통하여 여러 가지 상징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줄 생각합니다. 여기 힘이라고 하는 말은 다 인간에 속하는 힘과 인간에 속하는 능을 가리킨 것입니다. 인간에 속하는 육체의 무슨 힘, 완력, 혹은 군사의 힘, 혹은 기억의 힘, 혹은 정치적인 권세, 혹은 경제적인 힘, 인간에 속하는 어떠한 힘이라도 교회의 빛을 밝힐 수는 없고 오직 교회를 부흥시켜서 교회를 통하여 진리의 등대에서 밝은 빛이 어두운 세상에 비취게 하는 그 유일의 힘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내려오신 성신의 능력이라고 하는 말씀이올시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이처럼 많이 모인 것은 보통 주일로만 아니고 특별히 오순절 주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 날은 특별히 예수 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五十일째 되던 첫 오순절에 성신께서 제자들과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강림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첫 오순절에 성신께서 강림하신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배후에 있었고 인간의 협력과 순복이 또한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다 기억하시는 바와 같이 예수 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모든 말씀으로 위로도 하고 부탁도 하실 때에 한 가지 약속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장차 그들을 떠나지마는 그들로 하여금 고아와 같이 외롭게 두지 아니할 터이며, 예수가 가면 반드시 보혜사 성신을 그들에게 보낼 터이오, 이 보혜사는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계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 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三일만에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도 열 한 제자를 따로 청하여 놓고 분부한 말씀이 계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성신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얻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리라.』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 님의 약속을 그냥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님이 분부한 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어떠한 다락방에 같이 모였습니다. 계속해서 열흘 동안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열흘만에 오순절 아침을 당하였는데 갑자기 이상한 급하고 강산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습니다. 또한 혀와 같은 불이 모든 사람 위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상한 자연의 현상과 같이 그 당시에 모였던 모든 사람 마음 가운데는 성신의 임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열 한 사도만 아닙니다. 모든 평신도까지 꼭 같은 성신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여자도 꼭 같은 성신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기 보면 성신께서 임재 하실 때에 특별히 성신의 성격을 분명히 가르치기 위해서 몇 가지 상징을 보여 주신 것이 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바람이라고 하는 말은 숨결이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사람에게는 숨결이 있을 때 생명이 있습니다. 성신은 하나님의 숨결이올시다. 성신은 하나님의 생명이올시다. 성신을 우리가 받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직접 받는 것입니다.
또한 바람은 능력과 감화력을 의미합니다. 부드러운 봄바람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강한 바람은 나무를 꺾고 산을 옮기고 바다 물결을 움직입니다. 강한 능력을 의미합니다. 성신은 능력을 의미합니다. 성신이 임할 때에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성신이 임할 때에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힘이 임재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불의 혀 같은 것이 보였다고 말씀했습니다. 전 성경을 보면 불은 언제든지 세 가지 뜻을 의미합니다. 불은 빛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빛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줍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더욱 분명히 나타내어 주셨고, 십자가의 구속의 오묘한 진리를 사도들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또한 불은 언제든지 열을 의미합니다. 성신이 우리의 마음속에 임재 할 때에 우리들의 심령은 새로운 열을 체험합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불은 언제든지 정결(淨潔)을 의미합니다. 더러운 것은 태워서 깨끗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성신께서 우리 심령에 임재하실 때에 온갖 더러운 생각을 불살라 없이 하여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정화해서 거룩하고 깨끗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불이 나타날 때에 혀로서 나타나고 그 때에 모였던 사람은 이방의 말을 능히 할 수 있는 일시적이지마는 기적이 나타난 것을 우리가 또한 볼 수 있습니다.
혀는 언제든지 말을 의미합니다. 혀가 풀리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성신을 받기 전에는 혀가 있었지마는 말을 못하였습니다. 성신을 받은 후에 베드로의 입이 열렸습니다. 혀가 풀려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각국 방언에 대한 이적은 장차 요한 계시록에 계시된 것과 같이 복음이 온 세계에 확보되어서 모든 나라, 모든 족속, 모든 방언 가운데서 택한 자를 구원해 낼 예표(豫表)가 된 줄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성신의 역사가 一二0명에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생명이 임했고, 그들에게 능력이 임했고, 그들에게 진리의 빛이 되었고, 그들에게 정결을 의미했고, 그들의 마음이 정결해졌고, 그들의 입이 열렸고, 혀가 풀렸고, 그들의 방언을 통해서 온 세계에 복음 전도는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여러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베드로가 한번 입을 벌릴 때에 三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오순절은 밀을 하나님께 드리는 맥추절이라고 하는데 이 날 문자 그대로 신령한 곡식을 많이 거두어서 하늘의 곡간에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성신의 역사가 있었음으로 말미암아 그들 마음 가운데는 기쁨이 가정에서도 떡을 때어서 기쁨으로 먹으며 언제든지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즉 오순절에 된 일입니다. 이것이 성신을 받은 교회의 모습이올시다. 이 날로서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이 날로서 신약의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날로서 성신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성신께서 이 날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교회와 항상 같이 계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성신의 검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의 육체마다 성신의 전이었습니다. 성신은 교회와 같이 교회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항상 동재(同在)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실 뿐더러 교회를 지도하여 주셨습니다. 일곱 집사를 택한 것도 성령의 지도로 택하였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택하였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 전도한 것도 성령이 지도한 바입니다. 구수내시(內侍)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도 성령의 지도로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유대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의 집에 담대히 들어가서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것, 다시 말하면 로마 사람 백부장 고넬료에게 담대히 들어가 전도한 것도 성신의 지도에 의지해서 이 일을 함으로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의 장벽을 철폐하였습니다.
또한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떼어놓아서 그 머리 위에 안수하고 기도한 후에 외지의 선교사로 파송(派送)하게 된 것도 온전히 성령의 지도에 의지해서 외지 선교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세우실 뿐더러 교회 안에 계시고 교회 안에 계시고 믿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계속해 계셔서 교회를 지도해 주시고 믿는 사람의 사랑의 사생활도 지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령은 어떤 때에는 교회를 깨끗케도 하였습니다.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그 현상이 매우 아름다웠지마는 이와 같이 아름다운 일을 통해서 어떤 사람에게는 시험이 들어왔습니다. 아나니아라고 하는 부부는 다른 사람을 모방해서 자기의 토지를 팔기는 팔았지마는 탐심을 억제하지 못해서 베드로의 앞에 와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내려다보면서 어찌하여 성령을 속이느냐고 책망을 할 때에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 엎드려져 혼이 떠났다고 말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그 아내 삽비라가 들어와서 같은 거짓말을 하다가 역시 꼭 같은 형벌을 받았습니다.
초대 교회를 지도하시던 이 성령께서는 초대 교회를 또한 깨끗케 하였습니다. 더러운 죄악이 들어오려고 할 때에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교회를 계속해서 확보되게 하시고 도처에 교회가 설립되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에게 능력을 주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을 뿐더러 이적과 기사를 행하게 했으며, 스테반도 성령이 충만해서 담대히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을 뿐만 아니고 천사의 얼굴과 같은 얼굴로서 주를 위하여 순교의 면류관을 받게 하셨으며, 또한 이 순교가 있은 후에 모든 교인들로 하여금 사방으로 퍼지게 하여서 요원의 불과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계에 퍼지도록 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가운데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사도행전을 사도행전이라 말하지 않고 차라리 성령의 행전(行傳) 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는 초대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二세기 교회도 그러했고, 三세기 교회도 그러했고, 세기를 내려오면서 언제든지 참으로 교회의 부흥 운동이 있을 때에는 오로지 성령이 같이 한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적은 책자를 하나 보냈는데 받아 보니 일찍이 중국에 초대 선교사로 가서 오래 선교하던 요나단 고크드라고 하는 박사가 지은 작은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보니 표지에 영어로 된 작은 책인데「성령의 불이 한국을 휩쓸 때에」이런 제목의 책자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흥미를 가지고 제가 그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이 책 가운데는 一九0五년과 一九0六년, 一九0八년 그 동안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축복해서 큰 성신의 역사가 있어서 한국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하던 그 일을 - 제가 어릴 적에 되던 그런 일을 - 자세히 기록한 책이었습니다. 그 때에 나온 선교사들, 장로교 선교사들이나 감리교 선교사들이 꼭 한국에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기 위해서 교파를 초월해서 때때로 모여서 기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기도의 준비가 일년 이년이 거의 되었습니다. 또한 한국 교역자 가운데도 기도를 하는 분이 점점 많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평양 장대재 교회에 어떤 알 저녁에 큰 성신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해서 그 때에 길선주 장로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통회 자복하고 그 때부터 전부 일어나서 온 한국 장로교나 감리교를 불구하고 온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어서 여러 곳에 교회가 설립되었다고 하는 기록이었습니다. 아마 나이 많으신 분들은 이 현상을 친히 체험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교회가 이만큼 발전하고 축복을 받은 것도 오로지 성신의 역사의 결과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재주로 되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어떤 권력으로 되지 아니합니다. 하물며 사람의 어떤 권모(權謀)나 술수로 되지 아니합니다. 어떤 사람이 모여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결의 서를 발표한다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부흥은 오직 성신의 역사로만 되는 것입니다.『울어도 못하고 눈물로도 못하되 오직 내 신으로 되느니라.』하나님의 성신의 능력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오순절 주일을 당해서 이 사실을 다시 생각할 때에 특별히 몇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의 일에 대하여 성신의 역사를 잊어버리면 안 되겠습니다. 성신을 무시하지 맙시다. 성신을 멸시하지 맙시다. 성신을 위해 주고 내 재주와 내 생각으로 하나님의 교회 일을 하려고 하지 맙시다. 성신의 지도가 분명한데 그 지도대로 하지 않고 내 고집과 내 편견과 내 신앙심과 내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 일을 하려고 하지 맙시다. 성신을 근심하게 하지 맙시다. 교회도 성신을 근심하게 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성신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성신의 지도가 분명한데 내 정욕과 내 욕심을 그냥 따라 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신을 소멸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성신의 지도가 계속해서 있지마는 우리가 그 지도를 계속해서 거부할 때에는 마지막에는 지도를 그치게 되겠습니다. 그것은 성신의 소멸이라는 것 같습니다. 전에 사울 왕이 젊어서는 성신의 능력을 받아서 모든 나라 일을 바로 하더니 점점 나이 많아 가면서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고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게 되니, 마지막에는 성령이 아주 사울 왕에게서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 말로가 어떻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신을 떠난 신자의 말로가 어떻게 될 겁니까? 성신의 지도를 소멸하는 교회의 말로가 어떻게 될 것입니까? 한국교회는 이 이상 더 성신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성신을 소멸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언제든지 성신께 순복 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오순절 주일을 당해서 특별히 할 일이 몇 가지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우리 하나 하나가 내 자신을 스스로 살피면서 내 생활 가운데 성신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없는가 살펴 볼 것입니다. 내 생활 가운데 내 가정에서 하는 일 가운데 성신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내 교회서 하는 일 가운데 성신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없습니까? 스스로 살펴서 근심하게 하는 것이 있으면 그 죄를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죄를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성신의 역사가 다시 우리 마음 가운데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언제든지 성신의 지도에 순복 할 수 있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내 편견대로 하지 말고, 내 고집대로 하지 말고, 성신의 지도에 순복 하도록 은혜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나 개인뿐만 아니라 또 우리 영락교회뿐만 아니라 온 한국교회가 새롭게 성신의 충만하심을 받기 위해서 오늘 오순절 주일에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성신을 받은 증거가 어디 이상한 데 있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항상 갈라디아서 五장 二十二-二十三절을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성신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喜樂)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良善)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올시다. 성신 받은 교회는 다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신 받은 교회는 온전히 한 성신의 감화로서 하나가 되어서 화평한 교회입니다. 성신 받은 교회는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입니다. 성신 받은 교회는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을 봉사하고 우리 사회를 봉사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이 오순절 주일에 우리 각자가 성신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우리 가정이 이와 같은 은혜를 받고, 온 한국교회가 이와 같은 은혜를 받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一九六0년 六월 五일)
Ⅲ-45 주의 교양과 훈계 (마태복은 十八장 一-十四절)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六·四)
오늘은 세계적으로 어린이 주일 혹은 꽃 주일로 기독교회가 지키는 주일이올시다. 오늘 어린이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어린이들에게 배울 것을 배우며,『천국에 있는 이가 이와 같으니라.』란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린이들에 대한 부모의 의무를 생각하면서 예배하는 날이올시다. 가정에 있어서도 어린이가 제일 귀합니다. 교회에도 역시 어린이가 제일 귀합니다. 국가에 있어서도 또한 어린이가 제일 귀합니다. 따라서 가정에 있어서는 가정 교육 문제가 필요하고, 교회에 있어서도 종교교육 문제가 또한 중대하며, 국가에 있어서도 일반 교육 문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사기 十三장 十二절에는 이와 같은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마노아가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까』마노아는 삼손의 아버지올시다. 마노아에게 장차 아들이 나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사자의 말씀을 듣고 마노아가 감사해서 그대로 되기를 바란다고 말씀드리면서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여쭈었습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하오리까? 이 문제는 옛날이나 오늘이나 꼭 같이 부모가 당면하는 문제입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를까? 요사이 신문이나 어떤 잡지를 보면 인구 폭발이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二차 대전 이후에 세계의 인구가 매우 많이 증가된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도 이렇게 귀한 자녀를 보내 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나 여기에 따르는 중대한 문제는 우리가 이 아이들을 어떻게 기르느냐는 것입니다. 꽃과 같이 어 여뿐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꽃과 같이 그 마음도 아름답고 깨끗하게 기를 수가 있을까?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든 아이들을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바로 길러서 건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양성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물론 기독교 교육 문제에 대한 큰 과제이지마는 오늘 이 어린이 주일을 당해서 성경에 있는 말씀 가운데 몇 절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 부모들로서 반드시 기억해야 될 사실을 몇 가지 생각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에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의 교양과 훈계로서 우리 어린이들을 양육할 수 있을까? 이 어린이 교육은 언제부터 시작해야 되는가?
조금 전 마노아가 하나님의 사자에게 어떻게 이 아이를 기르오리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사자의 답변을 제가 읽습니다.『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려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서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이 말씀은 아이가 나기 전에 부모에게 하는 말씀이올시다. 포도나무 소산을 멎지 말라. 포도주는 마시지 말라. 독주를 마시지 말라.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내가 네게 명한 모든 것을 그대로 지킬지니라. 아이 부모 될 사람에게 이와 같은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자가 분부하셨습니다. 부모가 되려고 하면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고 부정한 것도 먹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이 되라고 하나님의 사자가 권고하십니다.
옛날 우리 동양에도 이른 바 태교라고 해서 특별히 아이가 있는 여자가 어떻게 생활을 단정히 할 것이라고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부정한 것을 보지도 말고, 부정한 곳에 앉지도 말고, 부정한 것을 먹지도 말라고 여러 가지 말씀으로 권고한 옛날 성현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육 적으로 건전한 부모에게서 건전한 자녀가 출생합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을 바로 기르는데 대한 준비를 그 부모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먼저 경건한 아버지와 경건한 어머니가 될 만한 신앙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여기 미국교회 가운데 웬만큼 큰 교회에 가보면 성경 공부, 예배 시간에 특별히 신혼 부부만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는 반이 있습니다. 그런 반에서는 성경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가정 생활을 이끌어 가는데 대한 교훈도 하고 또한 어린아이가 출생되려고 할 때에, 어린아이가 출생한 후에 부모로서 알고 행해야 될 지식도 가르쳐 주는 그런 과정이 있습니다. 경건한 가정과 경건한 부모로부터 경건한 자녀가 나는 것은 원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이 점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구약의 여러 경건한 어머니 가운데 우리가 잘 기억하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한 일을 또한 기억하는 것이 유익할 줄 압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성막에 데리고 와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대 제사장에게 이 아이를 드렸습니다.『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무엘을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도로서 받은 아기를 온전히 그 평생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모 마리아도 결례의 날이 다 할 때에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바친 기록을 누가 복음 二장에서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에 있는 말씀과 같이 다시금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입니다.
모든 자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업이올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업 가운데 가장 귀한 기업이 우리 가정에 주시는 이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귀하게 주신 자녀를 온전히 하나님께 다시 바쳐서 내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이 아이를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는 것은 모든 신앙 있는 경건한 부모의 의무인 것입니다. 아기 세례의 깊은 뜻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를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며 이 아이를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기로 약조하고 내가 부모로서 이 책임을 다 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부모와 그 어린이들을 반드시 축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아버지가 사업을 잘 해서 좋은 집도 짓고 어린아이가 쓸 만한 의복, 먹을 만한 음식, 학교에 갈 때에 모든 학비는 담당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마는 아버지의 책임이 거기에만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있어서는 그 아버지가 그 어린이들의 심령을 바로 길러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을 의무가 아버지에게 있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도 역시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살림을 잘 하고 어린아이를 깨끗이 잘 기르고 의복도 바로 입히고 먹을 음식도 바로 먹게 하고, 잘 때 자게 하고 깰 대 깨게 하며, 학교에 갈 때에 학교에 가게 하는 모든 것을 잘 하는 것이 심히 중요합니다. 하지마는 어머니의 책임이 거기에만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귀한 어린이들을 귀한 신앙의 소유자로서 길러서 장차 우리의 교회를 계대하게 하며 그 가정에서 믿음의 유산을 이을 만한 경건한 자녀를 기르는 것이 어머니의 책임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다른 책임을 다했다고 하지마는 이 책임에 실패하면 그리스도인의 부모로서는 제일 큰 실패를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우리에게 부탁합니다.『주의 교양과 훈계로서 양육하라.』우리의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서 양육해야 되겠습니다.
세상의 과학만 가르치는 것은 부족합니다. 세상의 인문과학만 가르치는 것도 부족합니다. 무슨 기술만 가르치는 것도 부족합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써 양육해야 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물론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마는 기억하기 쉽게 간단히 세 가지를 제가 여러분에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주의 교양과 훈계로써 어린아이들의 심령이 바로 자라나게 하려고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이 가정의 영적 분위기입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영적 영양입니다. 그 다음에 셋째로 중요한 것이 영적 운동입니다.
먼저 어린이들이 영적으로 좋은 환경 가운데서 자라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린이들을 꽃이라고 부르지마는 우리가 꽃을 잘 기르는데도 주의할 것은 햇빛도 잘 비칠 수 있고 바람도 잘 통하는 좋은 환경에다 좋은 비옥한 땅을 택해서 꽃을 심어야 꽃이 잘 자라고 붉게 혹은 노랗게 피지 아니합니까? 마찬가지로 어린 심령이 잘 장성하기 위해서는 영적 분위기가 좋아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가정의 신앙적 분위기가 아름답고 화평하고, 말하자면 화창한 봄날과 같은 그런 분위기가 있어야 어린아이들이 바로 길러질 수 있는 것입니다.
고요히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가정의 신앙의 분위기가 어떠한가? 겨울날 찬바람 부는 것과 같이 냉랭하지는 아니한가? 우리 가정이 문자 그대로 성신의 열매로 충만해서 사랑이 가득하고 기쁨이 언제나 가득하고 화평이 충만하여, 아버지나 어머니나 항상 어려운 일이 있어도 참을 줄 알고, 항상 불쌍히 여길 줄 알며, 항상 선하게 행동하며, 맡은 일을 충성되게 하고, 온유하고, 친절하며, 모든 일에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온실 가운데 화초와 같이 그 속에서 자라나는 어린 심령이 화평한 가운데서, 평안한 자유로운 가운데서, 길러질 수 있는 신앙의 분위기 가운데 우리 가정이 있는가? 이런 가정에서는 부모가 이런 것을 해라, 저런 것을 해라, 잔말 하지 아니할지라도 자연히 어린이들의 심령이 봄 동산의 풀과 같이 무럭무럭 바로 자라납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여기 어떤 가정이 있어서 그 가정에 사랑이 없습니다. 냉정합니다. 서로 부부간에도 의심합니다. 서로 가정에서도 속입니다. 불친절합니다. 예의가 없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있습니다. 이따금 싸움까지 합니다. 이와 같은 가정에서 아직도 어린 심령이 자란다고 한다면 그 심령이 어떻게 원만히 바로 자랄 수가 있겠습니까? 심령이 이지러집니다. 심령이 쭈그러집니다. 찬 서리맞은 풀과 같이 힘이 없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심령이 원만히, 인격이 원만하게 자랄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제일 귀한 것은 우리 가정의 신앙의 분위기가 마땅한 분위기라야 되는 것입니다. 가정 예배를 우리 가정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이유가 많지마는, 그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역시 이 가정의 신앙의 분위기를 바로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와 할아버지, 형과 아우, 다 합께 모여서 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고, 한 마음으로 성경을 보고, 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혹 그 가족 중 어떤 이 마음 가운데 불만과 불평이 있었지마는 그 불만과 불평이 사라집니다. 혹 마음 가운데 성나는 일이 좀 있었다고 하지마는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그 성난 마음이 사라집니다. 가정의 분위기가 깨뜨려 질 가 하는 그런 위기에 있었지만 한 마음으로 가정 예배를 보는 가운데서 그 위기를 면하고 좋은 가정의 분위기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심령이 바로 자라기 위해서 이 가정의 신앙 분위기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항상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정 예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직까지도 가정예배를 보지 못하는 분이 이 가운데 많이 계신 줄 압니다. 그런 가정에서는 다른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도 없고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서도 반드시 가정 기도회를 오늘부터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어린아이들은 귀로 들어서 무엇을 배우는 것보다도 눈으로 보아서 배웁니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행동하며, 어머니가 어떻게 행동하며, 어떻게 사는 것은, 다 어린이의 눈 속으로 들어가서 그 어린 심령 속에 사진과 같이 깊이 박힙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하는 행동, 여러분이 가정에서 하는 말, 여러분이 가정에서 하는 그 생활이 여러분의 가정에서 길러지는 자녀의 마음속이 이 앞으로 어떠한 사진을 남기시기를 원하십니까?
어린아이들이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행동은 근본적으로 부모가 하지 않아야 됩니다. 자기는 담배 피우면서 아이들한테만 담배를 피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는 술잔 들면서 아이들 보고는 술 먹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자기는 화투하면서 아이들 보로만 화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아무리 교육해야 쓸데없습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아이들은 우리의 말을 듣는 것보다도 우리의 행동을 본받아 그대로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가정의 영적 분위기는 결국은 부모의 신앙 여하에 달렸습니다. 산 꽃이라야 향기가 있습니다. 죽은 꽃에 무슨 향기가 있습니까? 그 믿음이 살아야 향기가 그 가정을 채울 수 있습니다. 죽은 믿음이면 무슨 향기가 있겠습니까? 산 나무라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죽은 나무에 무슨 열매가 있겠습니까? 성신의 열매는 믿음의 산 나무에만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의 영적 분위기를 어린 심령이 자라날 수 있으리 만큼 만들기 위해서 오로지 아버지와 어머니 된 사람의 참된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가운데 한 분이라도 믿음의 불길이 희미한 분이 계십니까? 자녀들을 위해서도 믿음의 불을 돋우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이 미약합니까? 여러분의 오고 오는 자녀들을 위해서도 새로운 생명을 찾기를 원합니다. 먼저 분위기가 매우 중합니다.
둘째로 몇 마디만 하겠습니다. 영적 영양이 필요합니다. 어진 어머니는 어린아이를 기를 때에 음식에 조심합니다. 잘 장성할 수 있는 음식, 그 연령에 소화가 잘 될 수 있는 음식, 또 음식을 바로 요리해서 아이들에게 반드시 먹이도록 힘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진 부모는 어린아이들의 심령을 위해서 어렸을 때에 바른 음식을 먹이도록 힘쓸 것입니다.
우리가 디모데 편지를 읽을 때에 이런 구절을 읽습니다. 디모데에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본래 네 믿음이 내 외조모에게 있었고 네 어머니에게 있더니 그 믿음이 네게 있는 줄 나는 확실히 안다.』라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고서『네가 어렸을 적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곧…』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믿음 있는 외조모, 믿음 있는 어머니가 어린 디모데에게 성경을 잘 가르쳐 준 것이 불명합니다.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흰 종이와 같습니다. 다른 글씨 쓰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어린애들의 마음 밭은 이른 봄 밭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잡초가 떨어지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어지면 얼마나 좋습니까?
학자들의 조사와 연구에 의지하건 데 아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책, 그림, 이야기, 노래입니다. 어떤 책을 많이 읽느냐? 어떤 그림을 많이 보느냐? 어떤 이야기를 많이 듣느냐? 어떤 노래를 많이 들으며 많이 부르느냐? 이것이 결국은 그 아이의 장래를 거의 작정한다고 합니다. 어떤 책을 아이가 읽는지 부모가 조심해야 됩니다. 어떤 그림을 아이들이 많이 보는지 좋은 그림을 보여 주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아이들이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를 많이 듣는지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어떤 노래를 입으로 부르고 있는가? 항상 조심해야 됩니다.
또 셋째로는 영적 운동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운동을 통해서 몸도 튼튼해지고 장성하기도 하고 또 새 것을 배웁니다. 꼭 마찬가지로 어린 심령도 실지로 자기가 무엇을 함으로 말미암아 심령도 튼튼해지고 심령이 반성도 하고 새 것을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읽어 주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자기가 읽도록 해야 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자기가 기도를 하도록 가르쳐야 됩니다. 그저 아이들을 주일학교로 보내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자기 발로 나가게 하고, 자기 혼자 나오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인도해서 같이 나오게 해야 됩니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대로 자기 손으로 하고, 자기 발로 어디 가고 어떻든지 좋은 일을, 어렸을 적부터 신앙의 좋은 습관을 양성해 주도록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기르는 일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양육하는 일은 가장 큰 일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은 사실 부모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과 아이 자신과 부모와 교회와 국가가 긴밀한 협동을 할 때에만 이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 된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 아이를 위해서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내 생활을 바로 해서 아이들에게 좋은 모범을 가르쳐 주며 어떻든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기를 노력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장성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새 사람으로 길러 주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내 부모 된 책임을 다 할 것뿐입니다. (一九六0년 六월 十二일)
Ⅲ-46 성도와 그 옷 (로마서 十三장 八-十四절)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十三·十四)
우리 육신생활에 꼭 없어서는 아니 될 것을 간단히 세 가지로 말합니다. 의, 식, 주, 즉 옷과 밥과 집이올시다. 그 가운데도 옷은 제일 먼저 꼽는 것을 보니까 아마 옷이 제일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사실 옷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흔히 오늘날도 그렇지마는 특별히 옛날에 있어서는 옷을 보고 그 사람이 어느 민족에 속하는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중국 사람의 옷과 우리 나라의 옷이 다릅니다. 뿐만 아니고 옛날에는 옷을 보고 그 사람의 지위나 계급이나 모든 형편도 불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들이 입던 옷과 대신들이 입던 옷이 달랐습니다. 또 평민들이 입던 옷도 달랐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넓은 의미에서 옷은 그 사람의 성품을 나타냅니다. 그 사람이 단정한 사람인지, 규모가 있는 사람인지 규모가 없는 사람인지, 그저 유행 따라 입은 사람인지 그렇지 아니한 사람인지, 그 옷 입은 것을 보면 대체로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박한 사람, 허영심이 가득한 사람, 이런 사람은 그 옷을 입은 것을 보면 그저 틀림없이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옷은 그 사람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을 상고해 보면 이 옷 입는데 대한 교훈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신명기(申命記) 二十二장 五절에 보면 이와 같은 교훈이 있습니다.『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이것을 보니 옛날에 남자들의 옷을 입고 다닌 여자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또 여자 옷을 입고 다니는 그런 남자들이 있은 모양입니다. 이것은 옛날 뿐 아니고 오늘날도 신문에 보면 어떤 남자가 여자의 옷을 입고 무슨 노릇을 했다는 이런 이야기도 나고, 또 요즘 가만히 보면 여자들 옷 가운데 어떤 것은 점점 남자 옷과 비슷해 가는 모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와 남자를 구별 있게 창조하셨는데 그 옷이 분별 있는 것이 좋을 줄 생각합니다.
저 미얀마 같은 나라에 가보면 남자나 여자나 다 같이 치마를 입고 사는데 얼른 보면 분별이 없는 것 같지마는 자세히 보면 그 치마 앞을 매는 법이 그릅니다. 조금 다른 것이 있습니다. 남양군도나 아프리카에 가 보면 이 양반들은 그렇게 옷을 많이 입지는 않지마는 그래도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 같아서는 지금도 남자는 남자의 옷을 입고 여자는 여자의 옷을 입으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교훈인 줄 생각합니다.
또 전도서 九장 八절을 읽어보면『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이러한 권면이 또한 이 말씀은 옷을 깨끗이 입으로는 것입니다. 더럽게 입지 말고 옷을 깨끗이 휘게 빨아서 입으로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교훈뿐만 아니고 성경을 보면 옛날 유대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에 병난 사람의 집에 갔다 오든지, 사람의 시체가 있는 집게 갔다 왔으면, 그 옷을 잘 빨라고 하는 교훈이 있고, 어떤 경우는 옷을 불살라 부리라고 하는 교훈도 있습니다. 옷을 깨끗이 단정히 빨아서 입으라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사치하게 입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치한 것과 깨끗한 것은 다릅니다. 검소한 의복이라고 깨끗이 입을 수 있습니다. 사치하게 입으면서도 더럽게 입을 수 있습니다. 옷은 깨끗이 입으라고 여기에 가르쳤습니다.
신약에 와서 보면 사도 바울 선생이 디모데 전서 二장 九-十절에 특별히 그 때 여자들에게 이런 권면을 하였습니다.『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닿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너무 머리를 땋거나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단장하려고 하지 말고 선행으로 단장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거의 같은 말로 권면하였습니다. 베드로 전서 三장 三-四절을 읽으면『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여러분, 이사야 三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 때에 예루살렘에 살던 그 여자들이 옷단장을 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책망한 구절이 있습니다.『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그러므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香盒)과 호신부(護身符)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 주머니와 손거울과 세마포(細麻布)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숫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
그 때 여자들이 어떻게 단장을 하고 다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단장한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교훈을 종합해 보면 옷은 단정히 입고 깨끗이 입을 것이나 사치하지 말며 옷으로 단장하려고 하지 말고 아름다운 심령과 선행으로 단장을 하라는 권면이올시다.
오늘 우리 사회를 좀 살펴보고 신문지상에도 이따금 나는 것을 보면 우리 한국에서 이와 같은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옷차림 하는 것을 보면 너무 사치하다는 그런 평판이 많이 있습니다. 또 그런 가운데 예수 믿는 여자들이 사치하다 하는 그런 말도 더러 돌아가는 모양입니다. 그 까닭은 주일날 예배당에 올 때에는 할 수 있는 대로 깨끗한 옷을 입고 오니까 아마 특별히 그런 말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언제든지 옷을 단정히 입고 깨끗이 입을 것이지마는 사치한 데 흘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자로서 단장도 도무지 없을 수 없지마는 도에 지나치면 안 됩니다.
사실 심리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너무 사치하게 옷을 입거나 너무도 지나치게 단장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열등감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나는 좀 모자란다, 나는 좀 남만 못하다, 그러니까 이 모자라는 것을 보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옷에만 치중해서 보충하려고 합니다. 사실은 열등감에 이렇게 도에 넘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어떤 이가 너무 옷을 화려하게 입고 다닌다든지 무슨 단장이나 화장을 도에 지나치게 하는 것은『나는 모자랍니다. 나는 못 생겼습니다.』이런 광고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먼저 번에도 서인도 제도에 가서 일 주일 있었지마는 거기는 거의 다 흑인들이 사는데 미국에도 많이 있지마는 그 흑인 여자들이 옷 입고 다니는 것이나 화장한 것을 보면 참 대단히 민망합니다. 그 얼굴에다 아무리 흰 분을 발라야 새까만 얼굴이 희어질 리가 있습니까? 또 흑인들은 대체로(이거 미안한 말입니다. 용서하십시오,)입술이 두텁습니다. 그 두터운 입술에 새빨간 칠을 하니, 아름답다고 하는 것보다 무섭게 모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을 동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 사실은 마음속에 열등감이 있어서 도에 지나치는 일을 합니다. 내게 대해서 자신 있게 사는 사람, 내 생활에 대하여 자신 있는 사람은 이렇게 도에 지나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나라 같은데서 이와 같은 때에 도에 지나치는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참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옷은 간단하게 말하면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추울 때에는 추운 것을 막기 위해서 옷을 입습니다. 그러면 더울 때는 뭐 하려고 입습니까? 더운 때에는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몸을 가리우기 위해서 옷을 입습니다. 그런데 해방된 이후로 서양 풍속이 이 한국에도 많이 들어오면서 점점 여름옷은 몸을 많이 내놓는 경향으로 나가는 것이 분명히 보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한 이야기지마는, 몇 해 전에 로마에 가서 성 베드로 교회를 보려 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구경하려 오는데(그 때는 여름입니다.) 남녀노소가 줄을 지어서 예배당을 구경하려 들어옵니다. 그러나 들어올 때 좌우 옆에 꼭 두 사람이 서서 소매 없는 옷을 입고 온 여자들은 전부 못 들어가게 합니다. 그런 옷을 입고는 들어오지 못한다 하며 가서 다른 옷을 입고 오라고 충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좋은 풍속인 줄 생각해서 우리 영락교회에도 그런 풍속을 꼭 내겠다고 그 때 마음속에 작정하고 우기는 왔습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의 사는 형편을 보면 원조의 덕택으로 많은 사업이 재건되어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을 거의 다 생산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때에 어떻든지 우리는 국산을 애용하고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을 입을 것이지 이런 시기에도 불구하고 외국산을 좋아한다든지 일부러 외국 것을 더듬는다든지 하는 이와 같은 일은 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산상보훈에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합니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맙시다. 사람의 사는 것이 옷을 잘 입는 것이 아닙니다. 옷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띠 하나만 띠고도 일생을 산 모양입니다. 성 안토니오라는 성자는 일생토록 가죽 저고리와 가죽 바지만을 입고 살았다고 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인도의 간디 옹 같은 분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 이도 간단히 아래 의복과 위에는 솔을 하나 걸치고 영국 황제에게까지 가서 면회했습니다.
사람의 사는 것이 옷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옷을 잘 못 입었다고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옷을 다른 사람처럼 못 입었다고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알아야 됩니다. 이와 같은 시대, 이와 같은 사회에서 옷을 너무 잘 입고 다니는 것은 그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무슨 증거인가 하면『나는 내 민족도 모르고 국내 경제도 모르고 나만 아는 사람이오.』하는 광고판을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예수 님께서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도 읽었지마는 성경을 보면 우리가 밖에 입는 옷 외에 꼭 속에 입을 옷 몇 가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첫째로는 예복을 꼭 입으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이나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꼭 예복을 입고야 들어갔습니다.
보통 옷 입고를 못 들어갔습니다. 여러분께서 예수 님의 혼인 잔치의 비유를 아시거니와 많은 사람을 청해서 혼인 잔치에 손이 가득한데 얼마 후에 임금이 들어와서 여러 손님을 돌아보다가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하는 말이『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이곳에 들어 왔느냐?』그 사람은 유구무언으로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고 그랬습니다. 그 임금은 종들을 명해서 이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사람을 바깥 어두운데 내어쫓으라고 그랬습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늘 나라의 어린양의 잔치에 들어가려고 하면 예복을 입고야 들어갑니다. 요한 계시록 七장 九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 보좌를 둘러싸고 각 나라, 각 족속, 각 방언으로 많은 사람들이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는데 그 사람들은 전부 몸에는 흰옷을 입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려고 하는 사람은 흰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이 흰 예복은 무엇을 가리켰습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어서 회개와 믿음으로 오는 그리스도로부터 죄 사함을 받은 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의 예복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이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은 흰 예복을 입지 아니하고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여기 있는 말씀과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고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서 三장 二十七절에는『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실 죄를 회개하고 참된 마음으로 세례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그리스도로 우리의 온 몸을 둘러싸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우리의 인격을 삼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우리의 성품을 삼고 그리스도의 생활로 우리의 생활을 삼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정결과 온유와 자비와 긍휼과 청렴(淸廉)과 담대(膽大)와 관용과 용서와 인내와 사랑을 우리의 것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이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으리 만큼 그리스도로 옷 입듯이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살라고 하는 그 뜻입니다.
여기에 이북에서 오신 분이 많이 있을 터이니까, 오랜 옛날 피현 교회에서 일 보신 최명준 목사님을 아마 기억하실 분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이 목사님을 믿는 사람들은 최 목사님이라고 불렀지마는 제가 들으니 안 믿는 사람들은 최 예수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 그저 그 최 목사님은 최 예수로 나타난 모양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예수 님으로 우리의 옷을 삼아야 되겠습니다. 또 이 옷은 언제나 입어야 됩니다.
아마 여기에 우리도 그런 분 많이 계실 줄 알지마는 보통 서양 사람들은 주일날 입는 옷이 특별히 있어서 주일날은 깨끗한 옷을 입고 왔다가, 그 다음에는 보통 일할 때 입는 옷을 갈아입는 그런 사람 사람들이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보통 옷은 이렇게 입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 님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입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아닌게 아니라 주일날 올 때에만 예수 님 옷을 입고 오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는 모양입지다. 주일날 올 때에는 아주 거룩해 보이고 깨끗해 보이고 화평해 보이고 다 좋습니다. 그러나 다른 날 되면 예수 님을 벗어 놓습니다. 시기와 질투와 여러 가지 다른 옷으로 바꾸어 입습니다. 그렇게 입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 예수 님을 입는 것은 언제든지 우리가 입어야 되겠습니다. 또 이 옷은 어떤 환경에서나 어떤 데서든지 항상 입어야 되겠습니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건강할 때나 병날 때나, 우리가 사업에 실패할 때나 사업에 성공할 때나, 우리가 살 때에도 이 옷을 입어야 되고 죽을 때에도 이 옷을 입어서 우리의 생활이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셋째로는 성경에 보면 특별히 갑옷을 입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六장 十一절을 보면『마귀의 궤계(詭計)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胄)를 입으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공중에 권세 잡은 자들과 안한 영과 씨름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우리 믿는 사람은 여러 가지 악마의 세력과 부득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되겠습니다. 지리로써 허리띠는 띠고 의의 흉대(胸帶)를 붙이고 화평의 복음으로서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깨어 있어서 전신갑주를 입고 모든 악한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여야 되겠습니다.
바로 어제 우리가 六·二五 十주년을 기념했습니다. 지금은 공산 침략은 휴전 중에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이 앞으로 절대로 힘이 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계속해서 깨어 있지 아니하면 안 될 것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적 견지에서 이 세상을 살펴 볼 때에는 六·二五는 휴전된 것은 아닙니다. 三八선은 그냥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쟁은 그냥 계속됩니다. 악한 마귀는 삼킬 자를 언제든지 찾아다니는 이러한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보존하고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려고 하면, 흰옷을 입고 그리스도를 일상생활에서 옷 입듯 하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전신갑주를 입어야 되겠습니다. (一九六0년 六월 二十六일)
Ⅲ-47 주 너를 지키리 (시편 一二一편 一-八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고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一二一·一)
오늘 아침에 읽은 시편은 一二一편은 제一편이나 제二十三편과 같이 사람들이 특별히 애송하는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설에 의하건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받아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올 때에 어떤 무명 시인이 이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올라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一二一편은 여행의 노래라 하는 부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길을 따나기 전에 이 시를 읽고 기도하는 풍속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도 홀로 자기의 고향을 떠나서 흑암(黑暗) 대륙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 가족과 같이 이 시편을 읽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먼 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 시편 一二一편은 우리 한국에서도 찬송가 二十一장에 편곡되어 자주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매우 단순합니다. 이 시인이 눈을 들어 산을 봅니다. 산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산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천지를 지으시고 온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켜주시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은 실족하지 않게 하신다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특별히 길을 갈 때에(옛날은 거의 다 걸어 다녔는데)실족하지 않게 하는 것은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으신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항상 택한 백성을 돌보아 주시는 것을 찬송하였습니다. 또한 이와 같으신 하나님은 우편 그늘이 되셔서 낮에 해가 아무리 뜨거울지라도 길가는 사람을 좋은 그늘로 덮어주는 것처럼 그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여러 위험한 지대를 지나올 때에도 모든 환난 가운데서 건져 주었습니다.
육신만 지켜 주신 것이 아니고 영혼도 보호하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여호와께서 너희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이와 같은 승리 적 말로서 이 노래를 마친 것입니다.「너희 출입」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인간 생활의 전체를 가리켰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활은 아침에는 집을 나가고 저녁에는 집에 다시 들어오는 것입니다. 농부는 밭으로 나갑니다. 학생들은 학교로 나갑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상점으로 나갑니다. 직공들은 공장으로 나갑니다. 나가서 일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그 뿐만 아니고 또한 들어오는 것도 지켜주십니다. 저녁이 되면 다 집을 향해 돌아옵니다. 가정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지켜 주십니다. 밤에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어서 평안히 쉴 수 있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일상생활 전체를 향상시켜 주시는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 시편 가운데 특별히 여러 번 반복되어서 나온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너희를 지키시는 자시니라.』『너희의 출입을 지키시리로다.』 이「지킨다」로 하는 말이 거의 일곱 번이나 반복되어 이 시편에 나오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을 지키어줍니다.
이런 시편을 읽을 때에 어떤 분 가운데 이런 생각이 나실 분이 간혹 계실지 모르겠습니다.『아! 이 시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귀한 노래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마는 사실 인간생활이라는 것이 어디 다 이럴 수가 있겠는가? 이 세상에는 얼마나 천재지변이 많고 질병과 고통이 많은가?』이런 생각이 한편 염두에 들어오는 이도 없지 않아 있을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기 대해서 한 두 가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밤과 낮으로 지키어주시겠다고 약조하신 것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 뜻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의 백성과 그의 기르시는 양에게 대하여 특별히 이와 같은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택함을 받은 그의 국민에 대하여 이와 같은 언약을 주었습니다. 시편 九十一편에는 이와 같은 사상의 노래가 있는데 거기는 첫 절에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라야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살수가 있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자와 은밀한 교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택함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의 보호의 그늘이 항상 같이 있겠다고 하는 말씀을 분명히 기록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와 같은 시를 읽을 때에 우리 믿는 사람도 또한 환난을 당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도 들어옵니다. 우리 믿는 사람도 여러 가지 질고와 여러 가지 염려에 싸이게 되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것도 역시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한 두 가지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는 견지와 사람의 보는 견지가 다른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언제든지 육신을 먼저 보고 육신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참 사람이 되는 우리의 영혼을 먼저 보시고 우리의 영혼의 구원을 먼저 생각합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더욱 더 축복하시기 위해서 우리 육신에게 재난을 더하실 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 같은 이에게도 그 육신의 가시가 허락되었습니다. 성 프랜시스 같은 이도 중병을 당하지 안았던들, 우리가 오늘날 아는 성 프랜시스가 되었을는지 의문인 것입니다. 파스칼 같은 사람도 그이가 말을 타고 다리를 건너 가다가 말이 갑자기 뛰면서 다리에 떨어지고 강에까지 떨어져서 중상을 입는 체험을 가지지 아니했던들, 오늘날 우리가 읽는 파스칼의 명상록을 남겨 놓을 수가 있었을는지 의문인 것입니다. 사실 밀턴이 실명하지 아니하였던들 그이가 실낙원이란, 성경 다음에 간다고 하는 책을 우리에게 남겼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사람은 언제든지 육신 편을 먼저 복 그 편을 생각하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의 편을 먼저 봅니다. 그런 까닭에 사실 우리가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볼 때에는 로마서 八장 二十八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모든 일들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택함을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람의 눈에 재난으로 보이는 것도 심령의 축복인 것을 우리가 차차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사람은 항상 현재를 보고 미래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재와 미래를 같이 보십니다. 우리 사람은 항상 현세를 보고 내세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현세와 내세를 같이 보십니다. 전에 요셉이 형들에게 억울하게 팔려서, 약관으로서 멀리 애굽으로까지 종으로 팔려 갈 때에,『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요샙을 이렇게 지키시는가!』불평한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었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 된 일을 보면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갈 때에도 하나님께서 꼭 같이 지며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아기 모세가 난 지 석 달이 되자마자 갈대 상자에 넣음이 되어서 나일 강변 갈대밭 속에 버림을 받을 때에 혹 그 광경만 보고『아 하나님께서 어떻게 택한 백성을 이렇게 지키시는가!』낙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우리가 된 일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때에도 모세를 지킨 것이 분명합니다.
다니엘이 양심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기로 애쓰다가 사자 굴로 끌려갈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니엘을 이렇게 지키시는가 의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보면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지키신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골고다를 향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올라가시고 마지막에 골고다 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실 때에 하나님께서 그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를 어떻게 이렇게 버려 두시는가, 왜 지키시지 아니하시는가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마는 우리가 끝까지 보면,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그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을 지키신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사람들을 언제든지 지키십니다. 평안할 때에도 지키시고, 곤란할 때에도 지키시고, 순경에서도 지키시고, 역경 중에서도 여전히 지키십니다.
혹 어떤 분이 생각하기를『그거야 하나님께서 큰 사람들, 위대한 사람들은 물로 그렇게 지키실 것이지마는 나 같이 작은 사람이야 하나님께서 지키실 리가 있나?』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나 같이 미미한 사람, 창해일속과 같은 사람, 이런 사람도 하나님께서 지키실 까? 이 의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말씀했습니다.『너희들이 참새 다섯 마리가 엽전 두 푼에 팔리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그러나 이 참새 한 마리도 내 아버지께서 잊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너희는 참새보다 얼마나 귀하냐? 너희의 머리털까지도 내 아버지께서 다 헤 시나니 그런고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염려하지 말라고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는 큰 자가 없습니다. 작은 자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그 자녀이면 누구든지 귀하고 누구든지 위대하고 누구든지 보배롭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지키십니다.
이 지키신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선 지키는 사람은 자세히 봅니다. 지키는 사람은 살핍니다. 지키는 사람은 그 대상을 언제나 잊어버리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택한 백성을 지키시는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언제든지 그 택한 백성을 돌보시고 잘 살피시고 잊지 아니하신다고 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암탉이 병아리를 항상 품듯이 어머니가 아기를 항상 지키듯이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을 지키십니다.
우리 찬송가에『온 세상 다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온 세상 사람이 나를 버리고 나를 잊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께서는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나를 잊어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슬픈 가운데 있을 때에도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가 괴로운 가운데 있을 때에도 우리를 잊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의 고독과 우리의 유혹과 우리의 투쟁과 우리의 당면하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잊지 아니하시고 살피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이런 때에 더욱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지키신다고 하는 말은 둘째로 인도하신다는 뜻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시편 二十三편을 읽었지마는『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 하시는 도다.』목자가 양을 지킬 때에 그냥 보기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살피기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는 그 양의 길을 인도합니다. 어디에 좋은 풀이 있는가? 어디에 맑은 시내가 있는가? 어떤 곳에 위험한 일이 있는가? 어떤 곳이 이리가 오는가? 모든 것을 살펴서 그 양을 인도하여 줍니다. 어떤 때에는 캄캄한 골짜기 같은 데를 지나가게 인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잡혀갈 때에도 하나님의 인도가 있었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아기 때에 나일 강변에 버림을 받은 것도 이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잡혀간 것도 하나님의 인도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것도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의 갈 길을 항상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키신다고 하는 말씀은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다.『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같이 계심이라. 주의 막대기와 그 지팡이가 나는 안위하시나이다.』목자가 양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양을 보호합니다. 원수가 올 때에 물리치십니다. 사자가 가까이 오려고 할 때에 사자를 쳐서 물리칩니다.
지킨다고 하는 것은 방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보존하여 준다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을 보호하시고 보존한다는 뜻을 여러 가지 상징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니…』그 말도 보호한다는 뜻입니다.『여호와는 나의 피난처니…』그 말도 보호한다는 말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 여호와는 나의 방패, 여호와는 나의 구원의 불, 여호와는 우편 그늘, 여호와는 날개, 이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여 주신다는 뜻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뿐입니다.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지킨다고 하는 것도 우리를 보호하여 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킨다고 하는 것은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신다고 하는 뜻입니다. 무엇 하러 양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합니까? 양은 푸른 풀을 먹어야 살이 찝니다. 무엇 하러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합니까? 양은 물을 마셔야 잘 길러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굶주릴 때에 만나를 주시듯이 광야에서 목마를 때에 반석을 쳐서 샘물을 주십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겨서 멀리 광야로 도망갈 때에, 심히 피곤하여 로뎀 나무 아래에서 기진맥진하여 누워 자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떡과 물을 주셨습니다. 이렇듯 우리 믿는 사람들이 괴로운 광야 같은 인생 길을 걸어갈 때에 어떤 때는 우리의 심령이 기갈 하여지고 기진맥진하여 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때에도 그 택한 백성들에게 생명의 양식과 생명수를 마실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에 四장 十九절에 이런 말씀으로 기록하였습니다.『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나의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풍성하신 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시겠다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을 지키어 주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경의 교훈만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성도들의 경험이 이와 같습니다. 가령 아브라함에게 물어 보십시오,『아브라함이여, 과연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생을 지키어 주었습니까?』그렇게 물어 보면 제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은『아멘, 과연 그렇습니다. 내가 나의 일생을 돌아 볼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셨습니다.』이렇게 곧 대답할 줄 생각합니다. 이삭에게 그 질문을 해 보십시오, 야곱에게 물어보십시오, 혹은 요셉에게 물어보십시오, 혹은 모세에게 물어보십시오, 혹은 다윗에게 물어보십시오, 엘리야, 엘이사, 이사야, 예래미야, 모든 선지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이구동성으로『과연 그렇습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과연 내 일생을 지켜 주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만 그렇게 대답할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모든 성도들도 꼭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베드로 혹은 야곱, 요한 사도 바울 등 모두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들도 모두 꼭 같이『과연 하나님께서 내 일생을 지켜 주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 성도들뿐만 아닙니다. 온 교회의 二천 년 역사를 통해서 과연 참된 신앙 생활을 한 모든 성도들에게 물어보십시오, 혹은 어거스틴에게 물어보십시오, 혹은 루터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혹은 다마스 에콰이너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혹은 칼빈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구동성으로『과연 내 생활을 지금까지 일생토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습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역사적 인물에게까지 갈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우리 가운데 과연 오래 참된 신앙 생활을 한 성도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이들도 역시 꼭 같이『과연 내 일생을 돌아보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은혜로 지나옵니다.』이구동성으로 대답할 줄 생각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들을 지켜 주십니다.
어머니가 어느 때 아이들 잘 지키지 않으리 오 마는 아이가 위험한 곳에서 놀든지 아이가 무슨 병이 나게 되면 더 가까이 지켜 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위험한 때에 살거나 우리도 무슨 병이 나게 되면, 하나님께서 더욱 가까이 지켜 주시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지켜 주시는데 우리는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근심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을 하나 하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켜 주신다고 하면, 무슨 까닭으로 염려하겠습니까?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여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과연 이 세상은 위험한 세상입니다. 과연 이 세상에는 불안과 공포가 가득히 쌓여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라도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태할 때일수록 하나님께서 그 선민을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내가 이렇게 젊었을 때는 하나님께서 잘 지켜 주시고 잘 믿을 수 있지마는 이 다음에 늙어지면 어떻게 될까? 늙은 다음을 염려하는 양반들이 없이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사야 四十六장 四절을 읽을 때에 잘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염려가 없기를 바랍니다.『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백발이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우리가 죽을 때에도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이 있으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가서 너희 있을 곳을 예비하면 내가 와서 너희를 영접해서 나 있는 곳에 있게 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더 기억하십시다.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이 되었는가? 과연 우리가 그의 백성이 되었는가? 과연 우리가 그의 흰옷을 입었는가? 이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과연 그의 양이 되었으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과연 그의 흰옷을 입었으면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오순절에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베드로에게 와서 하는 말이『아! 우리가 어찌할꼬?』이렇게 물어 볼 때에 베드로의 대답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그 대답입니다.『우리가 어찌할꼬?』우리가 어찌하면 이와 같은 생활 가운데 들어갈 수 있을까? 대답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다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는 것, 이것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서 학습도 세우고 세례도 베풉니다.
그러므로 항상 회개하고 온전히 죄에서 떠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여 주십니다.『여호와의 은밀한 곳이 거하는 자는 그의 그늘 아래 영원히 거할 것이니라.』여호와는 우리의 출입을 영원토록 지키시는 하나님이올시다. (一九六0년 七월 三일)
(한경직 목사 설교집 제3권 끝)
출처 : 그리스도의 제자들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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