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스크랩] 韓景職牧師說敎全集(5)

새벽지기1 2017. 1. 28. 18:17
韓景職牧師說敎全集(5)



우리 교회에서는 창립 二十五주년을 맞아 그 기념 사업의 하나로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 전집을 엮어서 세상에 내어놓기로 하였다.
비록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가 주로 영락교회라는 개교회의 강단에서 외쳐진 것이기는 하지만, 구리는 결코 그것이 개교회의 교인들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그의 설교가 영락교회의 강단을 통하여서 우리 교계는 물론 나아가서는 사회와 국가에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때로는 맑고 줄기찬 샘물이 되어서 혼탁한 이 사회를 밝히기도 했고, 때로는 굳건한 반석이 되어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부드러운 손길이 되어서 상처받은 영혼들의 위로와 구원이 되기도 했고, 또 때로는 하늘을 향하는 울부짖음이 되어서 겨레의 아픔과 슬픔을 하나님께 호소하기도 했다.
교회가 세워지고 四 반세기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겨레 위에는 수난과 좌절의 역사가 광폭한 해일(海溢)처럼 덮치고 또 물러가고 물러갔다 다시 덮치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한 목사님의 설교는 폭풍 가운데 서 있는 거목처럼, 사나운 짐승들이 포효하는 광야의 선한 목사처럼 우리 교인들에게 희망과 안도를 안겨 주었고 나아가서는 겨레의 나아갈 길을 밝혀 주시곤 하였다.
이에 영락의 교인들은 그의 생애에 걸친 목회의 노고를 위로하고 은공을 기리는 한편, 이 땅에 오고 오는 세대들에게 넘겨줄 빛나는 유산으로서 이 설교 전집을 내어놓기로 한 것이다.
전집이라고는 하지만 한 목사님께서 이북에서 목회 하실 때의 설교는 전연 그 자료를 구할 수가 없어서 수록하지 못하였으며, 또 이남에 오셔서 하신 설교도 초기의 것은 그 자료가 많이 일실 되었고 더러는 수록되었다 하더라도 교우들이 필기한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서 충실을 기하지 못했음을 매우 유감 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설교 집을 위하여 편집을 맡아서 수고하여 주신 홍현설 박사, 김정준 박사, 한태동 박사, 이종성 박사, 이창로 박사와 직접 실무를 맡아서 수고하신 허영진, 김창걸, 두 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一九七一년 十월 일
영락교회 창립 二十五주년 기념 사업 위원회
출판위원장 김 정 순

머리말

모든 종교는 진리를 말하고 신(神)을 믿는다. 그들의 진리가 다른 모든 진리보다 더 참되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믿는 신은 모든 다른 신보다 더 권능이 있고 지혜가 있고 강하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과 신념에서 모든 종교는 자기들의 진리와 신을 타인에게 알리고 설득하고 때로는 강요한다. 여기에 변증 학이 필요하고, 설교가 필요하고 전도가 필요하게 된다.
종교에 따라 그들의 진리와 신을 취급하는 태도가 다르다. 어떤 종교는 그들의 진리와 신을 묵상하고 영적으로 체험해 보려고 한다. 인도교나 불교나 철학적 신비 종교가 그렇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종교는 그들의 진리와 신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설득시켜서 자기들의 회원이 되도록 노력한다. 이러한 종교에 회회교와 기독교가 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전파하는 종교였다. 세례 요한은 처음부터『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막 一·四)했다. 예수 님은 갈릴리에서『하나님의 복음을 전파』(막 一·十四)했다. 바울도 그의 활동의 처음부터『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장에서 전했다』(행 十三·五). 이와 같이 기독교는 처음부터 신언(神言)을「선포」하고 전하고 설교하는 데 중점을 둔 종교이다. 이러한 전통을 받아 교회는 유능한 설교자를 많이 배출했다. 五세기초에 밀라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하게 한 암브로시우스나, 十八세기에 존 웨슬리와 함께 영국에서 부흥 운동을 하다가 미국에 건너가서 일대 부흥 운동을 전개한 조오지 휘크필드나, 또는 기관포 설교자라고 하는 빌리 그래햄 같은 이는 교회가 낳은 가장 유명한 설교가 이다. 이러한 설교 가는 어떤 웅변가나 수사학자(修辭學者)보다 뛰어난 화술(話術)을 가진 달변 자들이었다.
한국에는 세계를 향하여 자랑할 만한 설교가가 없을까? 한국의 암브로시우스, 한국의 조나단 에드워드, 한국의 필립스 브룩스는 없을까? 그러한 설교자가 있다면 누구일까?
우리 편집인 몇 사람은 이 물음에 대하여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러한 분으로서 한경직 목사님을 택했다. 그가 훌륭한 목회자인 동시에 훌륭한 선교자임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대 설교자를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설교를 직접 듣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이 때까지 하신 수많은 설교 중 약 五00 편을 뽑아 출판하여 우리의 기쁨을 다른 독자들에게까지 나누고자 하여 설교 집을 출간하기로 했다.
내용에 대한 평가는 독자 여러분이 내려주시기를 바란다. 내용 배열에 있어서는 편의상 설교를 한 연대에 따라 열 권으로 나누었다.
바라기는 이 설교 집을 통하여 한경직 목사님과 같은 설교자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나와 주었으면 한다. 이것이 이 설교 집을 출판하는 목적이기 때문에다.
一九七一년 十월 二十七일
편집위원 이 종 성

目 次
刊行辭................................................................................................................ 三
................................................................................................................ 五

Ⅴ- 1 .................................................................................................... 一一
Ⅴ- 2...................................................................................... 二三
Ⅴ- 3 .................................................................................................. 三二
Ⅴ- 4 ..................................................................................... 四一
Ⅴ- 5 .................................................................................................... 五0
Ⅴ- 6 .................................................................................................. 六一
Ⅴ- 7 ............................................................................... 七二
Ⅴ- 8 ..................................................................................................... 八三
Ⅴ- 9 ..................................................................................... 九六
Ⅴ-10 ......................................................................................................一0二
Ⅴ-11 ..............................................................................一一一
Ⅴ-12 ..............................................................................................一二二
Ⅴ-13 ...................................................................................................一三四
Ⅴ-14 ......................................................................................................一四四
Ⅴ-15 ....................................................................................一五五
Ⅴ-16 .......................................................................................................一六六
Ⅴ-17 ......................................................................................................一七七
Ⅴ-18 ....................................................................................一八七
Ⅴ-19 .........................................................................................................一九九
Ⅴ-20 ...............................................................................................二一一
Ⅴ-21 ..............................................................................................................二一九
Ⅴ-22 ........................................................................................二二九
Ⅴ-23 ..................................................................................二四二
Ⅴ-24 ............................................................................................二五六
Ⅴ-25 ..................................................................................................二六七
Ⅴ-26 ...............................................................................................................二七七
Ⅴ-27 ............................................................................................................二八八
Ⅴ-28 ...................................................................................二九九
Ⅴ-29 ........................................................................................................三一0
Ⅴ-30 ....................................................................................................三一九
Ⅴ-31 ............................................................................................................三三0
Ⅴ-32 ..................................................................................................三三七
Ⅴ-33 .....................................................................................................三四六
Ⅴ-34 .....................................................................................................三五七
Ⅴ-35 ............................................................................................................三六七
Ⅴ-36....................................................................................................三七七
Ⅴ-37 ...................................................................................................三八九
Ⅴ-38 .............................................................................................三九구
Ⅴ-39 .........................................................................................................三九三
Ⅴ-40 ...................................................................................................四一七
Ⅴ-41 .............................................................................................................四二六


Ⅴ- 1 기도를 배우자 (누가복음 十一장 一-十三절)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十一·一)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이와 같이 제자들이 예수 님께 간구 하였습니다. 매우 적절한 간구(懇求)인 줄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에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은 거듭 말할 필요가 없는 줄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숨쉬지 아니하고 우리가 살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는 신앙생활의 청우계(晴雨計)라고 말하였습니다. 기도로 보아서 그 사람의 신앙생활을 헤아릴 수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접촉하고 하나님과 교통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앙망(仰望)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시를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며 위로부터 내려오는 새로운 능력을 받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위로를 받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격려를 받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장성하며 열매를 맺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 성도들은 은혜의 보좌 앞에서 피차가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오직 성도들만이 가질 수 있는 거룩한 교제를 가질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는 모든 축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 님과 사도들과 온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 이 시간, 기도의 교훈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우리가 주님의 교훈과 성경을 상고하여 보면 기도를 하기는 하지마는 응답되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다. 소용없는 기도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六장 五절 이하의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장과 큰 구리 어구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이것은 외식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로서 하나님께서 응답할 리가 없습니다.
또 누가복음 十八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선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하나님이시여, 내가 감사하옵기는 나는 토색(討索)을 하지 아니하고 불의도 하지 아니하고 저기 선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합니다. 나는 금식도 하며 십일조도 드립니다.』이런 교만한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아니하신다고 우리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둘째로, 죄를 회개하지 않고 드리는 기도는 쓸데없는 기도입니다. 이사야 一장 十五절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죄가 많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기도할지라도 죄 있는 손을 들어 기도할 때에 듣지 아니하시겠다고……. 시편 六十六편 十八절에『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 기도, 죄를 회개하지 않고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셋째로,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를 응답 지 아니하십니다. 야고보 四장 三절에서 야고보 장로는 우리에게 경고합니다.『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한 번은 요한 과 야곱이 예수 님께 나와서『주님, 주님께서 이제 영광으로 오실 때 우리 하나는 주님 우편에 앉게 해 주시고 하나는 주님 좌편에 앉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하였습니다. 바로 그 기도입니다. 예수 님은『너희가 구할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은 예수 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실 때 사마리아 사람이 영접 지 아니하였습니다. 여기에 분개한 어느 제자는『선생님, 이 사람들이 이렇게 선생님을 영접 지 아니하니 하나님께 기도해서 불을 내리어 이 사람들을 멸망하게 합시다.』하였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할 이치가 없습니다.
넷째로, 의심으로 하는 기도는 쓸데없는 기도올시다. 야고보 장로는 야고보 一장 六절에 이렇게 경고합니다.『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의심하면서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아니하십니다. 이것은 몇 가지 실례를 든 것뿐입니다. 그 밖에도 성경을 상고하면 어떤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 안 하신다고 하는 말씀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러면 어떤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까? 여기에 대해서도 분명히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죄를 회개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역대 하 七장 十四절에 하나님께서『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五·十六). 회개 있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둘째는 믿음으로 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마가복음 十一장 二十四절에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그러므로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을 받을 줄로 믿으나.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어떤 사람이 혹 병 낫기를 구하니까 예수 님이 반문하시기를『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 네가 믿느냐?』물어 보셨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이 하는 말이『주여, 믿습니다.』라고 하자 예수 님은『네 믿는 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대로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신 후에 항상 주님께서는『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구하는 기도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그 다음에 셋째로는 진심으로 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예레미야 二十장 十三절에『너희가 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진심이라고 하는 말은 온 마음, 중심의 욕망으로 기도할 때에야 그 기도를 이루어 주신다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 기도를 하기는 하지마는 마음속으로 중심으로 원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겸손케 해 달라고 기도를 하기는 하지만 마음에 교만을 사랑합니다. 죄를 떠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긴 하지마는 실상은 죄를 사랑합니다. 어거스틴의 자서전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채 회개하기 전에 기도하는데『오! 하나님, 나를 이 음란한 죄에서 떠나게 하여 주옵소서!』입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속으로『그러나 지금은 마소서!』하는 것입니다. 음란한 죄를 지으면서 떠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지만 실상 중심으로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심으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전심으로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넷째는 감사함으로 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빌립보 四장에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라.』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 기도는 하지마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보면 항상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여호와께 사례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심이로다.』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기도를 하여야 됩니다.
다섯째는 생활에 따르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요한 일서 三장 二十二절에 사도 요한 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기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사람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요한 복음 十五장 七절에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다 이루어 주시리라.』하셨습니다.
한 가지만 더 지적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요한 복음 十六장 二十二절과 二十四절에서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여야 그 기도를 응답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예수의 이름으로 늘 기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뜻을 잊어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간단히 생각하면 거기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 죄 있는 사람이 오직 예수를 통하여야만 하나님께 올 수 있는 까닭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많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수에 우리의 중보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중보로 해서야 하나님께 와서 구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로, 이렇게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은 예수와 연합해서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우리도 예수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 딸로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와서 기도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빈다고 하는 말은 나도 예수 님과 같이 당신의 아들로서 내 아버지께 와서 아들의 권세를 가지고 기도한다는 그 뜻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으로 기도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내 먹은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범적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주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데 제일 먼저 기도한 것이 무엇입니까?『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 님의 기도는 자기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능치 못하는 것이 없으십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나에게서 떠나게 하여 주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게 기도하는 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기도는 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기도합니다. 이교도도 기도합니다. 불교 믿는 사람도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가 다릅니다. 그들의 기도는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자기의 소욕(所欲)으로 기도합니다. 우리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내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합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이렇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우리의 기도가 응답됩니다. 이와 같은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 줍니다.
어떤 때는 꼭 우리의 말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하나 그 이상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육체에 있는 가시를 없이해 달라고 간절히 세 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권능을 약한 데서 오히려 완전케 되느니라.』였습니다. 더 큰 은혜를 바울에게 주었습니다. 바울이 원하는 그것보다 더 크게 응답이 되었습니다. 전에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어거스틴이 회개하기 전에 간절히 회개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十五년 동안이나 하였습니다. 그 기도가 응답이 안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그 다음에는 저 칼타고를 떠나서 이태리로 가겠다고 합니다. 이태리에 가면 로마가 있고 밀란 이 있고 큰 도회가 있는데 여기에 가게 되면 큰 죄악에 빠질 터인데 여기 가려는 것을 안타깝게 붙잡으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가지 못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동안 몰래 어거스틴은 배를 타고 달아났습니다. 원하는 대로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후에 보면 이태리에 감으로 말미암아 어거스틴이 회개하였습니다. 말보다도 그 이상으로 더 크게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는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이렇게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 혹은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 여기 앉은 어떤 학생 가운데서 이런 생각이 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우주는 다 자연법칙에 의지해서 꼭 그 법칙대로 되는 것인데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그러나 이 몇 가지만 생각하세요. 자연법칙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연계에 나타나는 것은 자연법칙이라고 합니다. 사람도 자연법칙을 이용해서 내 뜻을 이룰 수 있거든 하물며 자연법칙을 내신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을 이용해서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까? 물론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람도 원자의 핵의 구조를 분열시켜서 전에 알지 못하던 새로운 능력을 나타내게 해서 그것을 이용하거든 하물며 본래 핵의 구조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혹 어떤 물질의 핵의 구조를 잠깐 바꾸어서 이적을 행할 수 없습니까? 물론 행할 수 있지요.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을 크게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현대 과학을 통해서 오히려 이 우주가 얼마나 신기한 우주인지 이것을 우리에게 점점 계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과 같이 나타나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마는 전파라고 하는 것, 일렉트릭 웨이브(electric wave)는 항상 우리 가운데 지나가고 있습니다. 눈에는 안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실 꼭 이 전파사이클에 맞게 통신기를 만들고 수신기를 만들 수 있으면 내가 지금 하는 말을 세계 어떤 사람이든지 금방 다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만 들을 수 있습니까? 여기 이런 텔레비전이나 텔레스터를 통해서 제 얼굴까지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봅니까? 신기합니다. 보이지 않는 전파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리로 경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은 어디나 계십니다. 무소 부재합니다. 이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과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준비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모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지시를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준비가 되면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볼 수 없겠습니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기억하세요. 성경이 얼마나 우리 믿는 사람에게 기도에 힘쓰라고 하셨습니까?『항상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성령으로 무시로 기도하라. 깨어서 기도하라.』고.
예수 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로되 그 자신이 얼마나 기도에 힘썼습니까? 모든 사도들이 얼마나 기도에 힘썼습니까? 다니엘이 얼마나 기도에 힘썼습니까? 엘리야가 얼마나 기도를 간절히 하였습니까? 왜 이렇게 기도에 힘쓰라고 하고, 왜 이렇게 기도에 힘썼습니까?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올시다. 숨쉬는 것이올시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죽은 믿음이올시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예수 믿는다고 하는 까닭으로 오고 가는 유혹에 잡히고 오고 가는 시험에 다 들고, 믿기는 믿지마는 항상 근심과 염려에 싸여 있고, 믿기를 믿지마는 항상 시기와 질투를 버리지 못하고, 믿기를 믿지마는 능력은 없고 교회를 봉사할 수도 없고 전도할 수도 없습니다. 왜? 기도하지 아니한 까닭입니다. 그 믿음이 죽은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말하기를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내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지 아니하면 이것이 내 죄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오늘날 삼천만 민족이 이렇게 큰 죄악의 구덩이로 무리째 들어가는 이런 때를 당해서 이 민족을 구원할 마음이 없고 이 민족을 위해 기도할 마음이 없으면 그 무슨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죄입니다. 三八 이북에 우리 민족이 문자 그대로 붉은 용의 이빨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이 때를 당해서 이북 동포를 위해서 간절한 기도가 없다면 이런 죄가 어디 있습니까? 기도하지 아니하고 믿는 것은 죄를 지으면서 예수를 믿는 것과 같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마는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영락교회의 약점은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입니다. 모든 모임 가운데 삼일 저녁에 제일 적게 나옵니다. 기도를 게을리 합니다. 이 인근에도 많은 교우들이 있지만 새벽 기도회에 제일 조금 모입니다. 대구 영락교회에 가보니까 다 멀리 흩어져 있지만 그 여러 제직(諸職)들이 먼 곳에서도 새벽 기도는 반드시 나옵니다. 우리 교회는 가까운데 있는 이들도 새벽 기도회에 안 나옵니다. 기도를 게을리 합니다. 가정 기도회 보는 집도 적습니다. 구역 기도회 보는 구역도 적습니다. 기도를 게을리 합니다. 우리가 사는 때가 어떠한 때이고 우리의 책임이 어떠한데 우리가 이렇게 기도를 게을리 합니까? 우리 믿는 사람이면 적어도 아침에 자고 깨서 기도를 하고 저녁에 잘 때에도 반드시 기도를 하여야 되겠습니다. 보통 우리가 세례문답이나 학습문답 할 때 물어보면 기도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런 이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일어나서 기도하였습니까, 기도 안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대답하십시오. 가족 기도회를 봅니까, 안 봅니까? 하나님 앞에서 대답하십시오, 새벽 기도회에 나가려고 힘써 보았습니까, 힘쓰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대답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그랬습니다. 항상 기도하라 하였습니다. 깨어 기도하라고 우리 주님께서 그르치십니다. 성령으로 수시로 어느 때나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락교회로 하여금 기도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요한 계시록을 읽어보았습니까? 요한 은 네 장로가 큰 대접에 향을 가득히 받아서는 하나님 보좌에 바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물으니까 이것은 땅에서 드리는 성도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우리 영락교회에서 바치는 이 기도가 향과 같이 하나님의 보좌에 매일 올라갑니까?
(一九六二년 八월 十九일)


Ⅴ-2 너희 믿음대로 되라 (마태복음 九장 十八-三十一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마 九·二十九)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올시다. 예수 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고치신 후에 그 집에서 나오셔서 다른 곳으로 걸어가실 때에 두 소경이 따라오면서 소리를 지릅니다.『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이렇게 따라오며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니까 이 두 소경에게 아주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또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까 예수를 메시야로 아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에 보면 메시야가 와서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눈먼 자를 보게 하겠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경들이 자기의 눈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는 가운데서 예수 님을 따라오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얼른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 님께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더 도와주시기 위해서 고의로 그런 태도를 취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대답도 않으시고 다른 집에 들어오시니까 그 소경들은 그냥 그 집에까지 따라 들어왔습니다. 이 때에도 예수 님께서 그들의 소원을 이내 응답해 주시는 것보다는 한 가지 질문을 먼저 하십니다.『내가 능히 이일을 할 줄을 너희가 믿느냐?』
여러분, 오늘도 주님께 무슨 소원을 가지고 나오는 모든 사람을 향해서 주님께서 이 질문을 하실 줄 압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수 있는지 네가 믿느냐? 과거에 네가 어떤 생활을 했느냐? 무슨 죄를 지은 일이 업느냐? 이런 것을 물어보시지 않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예수 님 앞에 나와서는 과거의 죄가 문제 아닙니다. 믿느냐가 문제입니다. 그것은 잘 믿으면 과거의 죄를 다 사함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네 눈을 고치기 위해서 과거에 어떤 의사에게 갔던 일이 잇느냐, 어떤 약을 써본 일이 잇느냐 하는 것을 물어보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의사에게 갔든지 소경 그대로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문제는 요컨대 믿느냐 안 믿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지금도 예수 님 앞에 나오는 이에게 대해서 예수 님께서는 과거의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과거의 생활을 묻지 않습니다. 과거의 어떤 수양을 묻지 않습니다. 예수 님 앞에 나와서 제일 중요한 것은 믿느냐가 문제입니다.
왜 믿음을 물어 보셨습니까? 우리가 오해해서는 아니 됩니다. 믿는 자체에 무슨 마술적인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말하자면 물을 길으려고 할 때 바케츠가 필요한 것처럼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고 할 때 두레박이 필요한 것처럼, 믿음이 있어야 구원의 우물에서 생명의 물을 길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혹은 믿음을 전선(電線)에 비유할 수고 있습니다. 발전소에 아무리 많은 전기가 발전되어서 축적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전선이 없으면 이렇게 끌어서 불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전선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발전소에 하늘 나라의 큰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줄이 없으면 그 능력이 우리 심령 속에 오지를 못합니다.
혹은 비유해서 이 믿음은 수도관과 비슷합니다. 저수지에 아무리 물이 많이 고여 있다고 하더라도 수도관의 연락이 없으면 그 물은 우리 주방으로, 목욕탕으로 인도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생명의 저수지에 아무리 생명수가 많다고 하더라도 믿음의 줄이 없으면 그 생명수가 우리 심령 속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 여기 물으십니다.『네가 믿느냐?』
자, 이것을 특별히 주의해 보세요.『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수 있는 줄 네가 믿느냐?』이와 같이 물어보셨습니다. 곧 예수 님께서 능히 이 일을 할 수 있는가 물어보셨습니다. 믿는 것이 이렇게 귀하지마는 제일 중요한 것은 누구를 믿느냐 하는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 가운데도 옳은 믿음, 정신(正信)이 있고 그릇된 믿음, 미신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귀신 붙은 나무를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상을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은 조상을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살아 있는 어떤 사람을 믿습니다. 믿음이 이렇게 귀하지만 잘못된 것을 믿으면 그것은 오히려 안 믿는 것만도 못합니다.『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수 있는 줄 믿느냐?』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렇게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하나님께서 보내신 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생명의 구주로 믿습니까? 예수께서 마르다 에게 말씀하시기를『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물어보았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습니까? 예수는 과연 부활과 생명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를 믿으면 죽어도 살 줄을 우리가 믿습니까?『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서 구원하려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무리 죄인일지라도 이 예수 앞에 나와서 그를 믿을 때에 죄 사함을 받을 줄 내가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똑 같이 나의 구주가 되는 줄을 믿습니까?
또 보세요.『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수 있는 줄 네가 믿느냐?』이것을 물어보셨습니다. 이 소경들이 눈을 밝게 해 달라고 하니까『내가 능히 네 눈을 밝힐 수 있는 줄 네가 사실 믿느냐?』이것을 물어보셨습니다.
오늘날 여기 오신 여러분들은 눈은 대부분 다 뜬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신령한 눈이 어두운 분들은 상당히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과연 여러분께서 예수 님 앞에 나오면 예수 님께서 여러분의 어두운 눈을 밝혀주셔서 신령한 진리의 길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까?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나왔든지 다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줄 믿습니까?
혹은 여러분 가운데 여기 나왔지만 무거운 짐을 마음 가운데 지고 오신 이가 계신지도 모릅니다. 큰 염려, 큰 근심, 이런 짐을 가지시고 이 자리에 예배하려 나온 분도 아마 계신 줄 압니다. 예수 님이 말씀하시기를『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하셨습니다. 과연 예수 님께서 여러분의 짐을 다 덜어주시고 여러분이 어떤 심령을 가지고 들어왔든지 이 자리에서 평안한 심령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는 줄, 주님께서 그와 같은 은혜를 여러분에게 주실 수 있는 줄 여러분이 믿습니까? 남은 모르지만 우리 가운데 마음속에 사실은 무거운 죄의 짐이 어떠한 짐이든지 온전히 여러분의 짐을 벗겨주시고 죄 사함을 주시고 가벼운 심령을 주실 줄 여러분이 사실 믿습니까?
혹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은 큰 문제를 당해서 이렇게 해야 될지 저렇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고 인간적으로 볼 때에 참 캄캄한 문제를 가지고 오신 분이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예수 님께서 그런 문제까지도 온전히 해결해 주실 권능이 있는 줄 믿습니까?
혹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은 큰 절망의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 이가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어떤 청년에게 편지를 받았는데 그 글귀 가운데 이런 글귀가 적혀 있어요.『어떻게 이 뿌리 깊은 위선 속에서 헤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나 같은 자도 속죄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혹 우리 가운데 그와 같은 심정으로 이 자리에 나온 이가 계십니까? 예수 님께서 그와 같은 이도 그런 자리에 있는 이도 능히 구원해 낼 수 있는 줄 여러분이 사실 믿습니까? 오늘 주님 앞에 나온 여러 사람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오늘 이 질문을 우리에게 물어보십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수 있는 줄 네가 믿느냐?』 이 질문을 들을 때 이 소경들은 이내 서슴지 않고『주여, 그러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 님은 무슨 대답을 하셨습니까?『너희 믿음대로 되라.』예수의 이 말씀은 단순한 말씀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권능이 움직입니다. 그 자리에서 소경이 보게 되었습니다.『너희 믿음대로 되라!』우리가 과연 온전히 믿을 수만 있다고 하면, 믿는 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을 하여 주시는 것이올시다.
복음서에 나오는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은 그 당시에 다른 사람에게 탐관오리로서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을 여러분이 아십니다. 매국노로서 다른 사람에게 다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이가 예수 님 앞에 나와서『나 같은 사람이라도 주님께서 구원하실 줄 꼭 믿습니다.』할 때에 믿는 그대로 되었습니다. 삭개오 같은 사람도 변해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재주는 많고 글은 잘 썼지마는 아주 음란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나가면 주님께서는 자기를 변화시켜서 새 사람이 될 수 있게 하시리라 믿었습니다. 예수 님께서 그 믿는 대로 되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어거스틴을 말할 때에 성 어거스틴이라고 합니다. 성자로 특별히 교회에서 추대를 하였습니다.
기억하세요. 믿는 대로됩니다. 믿는 그대로 됩니다. 크게 믿으면 크게 되고 작게 믿으면 작게 됩니다. 크게 믿으면 크게 이루어 주시고 작게 믿으면 작게 이루어 주시고, 믿음이 아주 없으면 아무 것도 못 받습니다. 큰 믿음이 있으면 큰복을 받고, 작은 믿음이 있으면 작은 복을 박고, 아무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 받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믿는 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어떤 이는 十년을 예배당에 다니기는 다니지만 좋지 못한 악한 습관, 혹 거짓말하는 습관이라고 한다든지, 술 먹는 습관이 있다든지, 좋지 못한 습관을 고치지 못하고 그냥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믿지 않는 까닭입니다. 예수 님께서 그것까지 고쳐 주실 수 있는 능력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의 능력을 받지 못합니다. 가만히 보니까 어떤 이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를 十년 동안 믿을지라도 전도 한 번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왜? 믿지 아니하는 까닭입니다. 벙어리까지 고쳐 주시는 예수 님께서 말하는 벙어리의 입을 벌려서 전도하게 못하겠습니까? 예수 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 권능을 믿지 않습니까? 믿지 않는 까닭으로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모든 방면에 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청년들이 많이 앉아 있습니다. 여러 청년들 가운데 그 두 가지의 청년들이 있는 줄 압니다. 한 가지 종류의 청년은 내가 여러 가지 부족한 것 많지마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청년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어떤 청년은『나야 뭐 이것도 부족하고 저것도 부족하고 암만 할래 야 뭐 다른 사람처럼 살수도 없고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나는 뭐 소망이 없어.』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마 혹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장래도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얼마나 믿느냐 하는 데 달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시기를『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하고 외쳤습니다. 여러분께서, 나는 부족하지마는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치면 주께서는 이 부족한 나를 가지고도 어떤 사람이라고 만들 수 있으리라는 이 권능을 믿습니까? 믿는 것만큼 여러분이 될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희년(禧年)을 당해서 교인 배가 운동을 하자고 그럽니다. 교인 수만 배가 운동이 아닙니다. 전도 사업, 교육 사업, 봉사 사업, 각 방면으로 배가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컨대 과연 이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배가의 은혜를 주실 수 있는가, 이것을 우리가 믿는가, 아니 믿는가 하는 데 달렸습니다. 우리가 소경과 같이 과연『우리가 믿습니다.』대답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믿는 대로 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 퍽 비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종자가 아주 틀렸어! 거짓말만 하고 그저 도둑질만 하고 시기만 하고 싸움질만 하고. 한국 사람이 모여서 싸움 안 하는 데 어디 있나? 틀렸지, 틀려먹었어!』그렇게만 꼭 믿고 그렇게만 늘 우리 민족을 보면 그 이상 더 못됩니다. 아무리 우리 민족이 결함이 있다고 하지마는 우리가 이 민족을 주님의 제단 앞에 갖다 놓고 주님께 호소할 때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부족한 민족이라도 변하여 새로운 민족이 되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권능을 믿습니까?『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수 있는 줄 믿느냐?』예수 님께서 과연 우리 민족을 구원해 낼 수 있는 줄 우리가 믿습니까? 믿으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 (一九六二년 九월 二일)


Ⅴ-3 예수와 인간고 (요한 복음 九장 一-十二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九·三)

이제 다른 곳의 성경 말씀을 한 절 더 읽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올시다.『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잇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오늘 이 두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 두 번째 읽은 성경 말씀은 누가복음 十三장 四전과 五절이올시다. 예수 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어떤 소경이 길 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모양을 보셨습니다. 눈멀고 가난하고 또 사고무친(四顧無親)해서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그 소경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인간고(人間苦)의 상징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인생행로에는 이러한 불쌍한 이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예수 님의 제자들은 나면서 소경 된 이 걸인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이 사람이 이렇게 나면서부터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혹은 자기 자신의 죄입니까?』 이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제자들의 생각에는 이 소경이 나면서부터 저렇게 불쌍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필연 어떤 죄의 값이라고 단정한 듯싶습니다. 사실 이것은 보통 그 때 유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공통한 사상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상은 우리 사회에서도 종종 볼 수가 있고 특별히 인도교나 불교 같은 종교에서는 소위 칼마의 법칙이라고 해서 인과응보의 법칙에 의지해서 전생에 죄를 지은 사람은 큰 고난을 받는다고 분명히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상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올시다. 또 이 제자들은 이 소경을 보고 이론적으로 그 이유를 좀 더 분명히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해서 이것이 죄 값은 죄 값인데 자기의 죄일까 부모의 죄일까, 즉 누구의 죄인지 이것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자들의 생각이나 태도에 소경을 불쌍히 여기거나 동정하는 태도를 발견할 수 없고, 인생 문제를 연구하는 한 자료로서 본 것처럼 생각할 때에 유감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예수 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으며 예수 님은 어떠한 태도를 가졌으며 예수 님의 하신 일이 무엇인가 잠깐 생각하기 원합니다.
제일 먼저 예수 님께서는 제자들의 그릇된 견해를 시정하여 주셨습니다.『이 사람이나 이 사람의 부모가 죄는 범한 것이 아니다.』즉 무슨 특수한 죄의 값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이 그릇된 견해를 시정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물론 예수 님의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죄의 결과가 결국은 고통과 사망을 가져온다고 하는 원리를 부인하시는 뜻은 아닌 줄 압니다. 예수 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 원리를 분명히 그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만 어떤 사람이 특수한 고난을 받을 때에 그것은 꼭 그 사람의 특수한 죄로 말미암아 오는 결과라고 하는 이것을 예수 님께서 시정하십니다. 또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어떤 때에 어떤 개인에게 있어서는 직접 죄의 결과로 고난을 받는 사람을 혹 우리가 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음란한 사람이 어떤 성병으로 고난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은 직접 죄의 결과인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이 세상에서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재난도 같이 당하고 고난도 공동으로 받는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고난을 특수하게 당할 때에 꼭 그 사람은 배후에 특수한 죄가 있다고 일률적으로 단정하는 것은 우리가 잘못하는 실수입니다.
그리고 예수 님께서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이 의미가 깊습니다.『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이것이 자기 죄도 아니고 자기 부모의 죄도 아니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다시 말하면, 이 불쌍한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신다고……. 주의해 보세요. 예수 님께서 이론적 견지에서보다도 실제적 견지에서 인간고를 보셨습니다. 인간의 견지보다도 하나님의 견지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견지에서 인간고를 보셨습니다. 과거의 어떤 원인을 찾는 운명적인 견지에서보다도 현재 무슨 일을 할 수 잇느냐 하는 사명 적 견지에서 인간고를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고를 통해서 그의 자비를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리해서 고를 낙으로 바꾸어 주시고, 암흑을 광명으로 변케 해 주시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시고, 인간의 재난도 축복으로 전환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고를 통해서 인간의 가장 귀한 영혼까지 구원하여 주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명이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사명인 것을 예수 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해서 예수 님께서는 다만 그 소경을 고쳐 주셨습니다. 암흑 속에 있는 그 소경에게 광명을 주셨습니다. 절망에 빠진 이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자기의 메시야인 것을 나타내어 그의 영혼까지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비참한 고난을 이와 같은 사명 적인 견지에서, 하나님의 견지에서, 실제적 견지에서 보시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어 그 사람을 구원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에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불쌍한 문둥이를 도와주기 위해서 나환자 병원이 일어나게 되고, 불쌍한 고아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혹은 고아원, 불쌍한 노인들을 돕기 위해서 혹은 양로원, 불쌍한 외로운 여인들을 돕기 위해서 혹은 모자원, 여러 자선 사업 단체, 이와 같은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은 우연한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 님의 이 실제적인, 사명 적인 봉사 적 견해에서 인간고를 보시는 거기에 원인이 있는 것을 살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 인간고와 재난을 만날 때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기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인간고를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게 내가 당할 수 있는가 하는 면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이것은 고통이 나 자신에게 올 때에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혹 질병의 고난을 받게 되었습니까? 내가 혹 사업 실패의 쓴잔을 마시게 되었습니까? 내가 슬픔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이 되었습니까? 내가 이와 같은 고난을 받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는 내게도 이 고난을 통해서 하실 일이 있다고 인식하고 이 일이 무엇일까 를 우리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눈물 가운데도 사명이 있고, 질병 가운데도 사명이 있고, 슬픔의 쓴 잔 가운데도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회개를 재촉하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신앙의 연단을 재촉하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이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으로 쓰시기를 원하시는 경륜이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고를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먼저 기억하십시다.
둘째로는 누가복음 十三장에 있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가장 심각한 인간고인 재난, 천재나 지변을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미치는 고난에 대해서 잠깐 주님의 교훈을 생각하십시다. 이 재난이라고 하는 것도, 불의의 사고라고 하는 것도 언제나 있습니다. 옛날에도 있었고 오늘에도 있습니다.
예수 님 당시에도 그 때 실로암 못 가의 탑이 갑자기 무너져서 열 여덟 사람이 일시에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님께 와서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본 모양입니다. 예수 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너희들 생각에 이렇게 이 탑이 무너지는 사고로 말미암아 열 여덟 사람이 갑자기 몰사를 하였는데 이렇게 됐다고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은 줄 아느냐? 그런 것이 아니다.』그러면서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은『그러나 내가 분명히 너희들에게 말하는 것은, 너희가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너희도 다 이와 같이 망할 때가 있으리라』하셨습니다.
자, 여러분! 여기에 있어서도 우리 주님은 그 재난의 원인을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설명해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실제적 견지에서 우리가 마땅히 배울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너희가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여러분! 재난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도 재난을 만나고 선한 사람도 불의의 사고를 만날 수 있습니다. 또 이 재난이라고 하는 것은 갑자기 옵니다. 예고 없이 바람이 붑니다. 예고 없이 홍수가 납니다. 재난이라고 하는 것은 갑자기 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건을 볼 때에,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권면(勸勉) 하시는 말씀은 그런 까닭으로『너희가 죄를 회개하고 언제든지 준비하고 살아라』하는 말씀이올시다.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또 이것은 누구에게나 옵니다.『언제든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살아라.』그러면 언제 회개하란 말입니까? 이제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예배를 마치고 길을 건너가다가도 무슨 일을 당할 지 모릅니다.
전에 미국의 유명한 무디 선생이 시카고 교회에서 어떤 주일 저녁 설교를 하는데「회개하라」는 문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다가『자, 이것으로 오늘 저녁 시간이 다 가서 마칠 수가 없는데 내가 이 문제를 다음 주일에 마저 마칠 터이니 다음 주일 저녁에 다 나오시오』하고 말하면서 설교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부르는데 갑자기 밖에서 소방차 소리가 나더니 사방에 화광(火光)이 충천해져서 그 때 그 굉장히 유명했던 튼 화재가 일어나서 시카고 전역이 거의 다 불탔습니다. 그 날 저녁에 무디 선생의 설교를 들은 사람 가운데도 불에 타서 죽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경험을 당하고 무디 선생이 한탄하면서『내가 왜 그 날 저녁에 회개하라고 말하지 않고 오는 주일 저녁에 다시 오라고 했었던가!』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는 지금이올시다. 지금이 구원의 날이요. 지금이 회개할 때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회개하고 언제든지 무슨 일을 당할지라도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살아야 됩니다. 예수 님의 이 경고를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이렇게 두 가지로만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셋째로 예수 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모든 고난, 육체적, 정신적 모든 고난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이사야 五十三장 四절 이하에『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疾苦)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간고를 통해서 사명을 행하라고 우리에게 권면 만 하지 않았습니다. 재난을 당할 때에 회개하라고 경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히 자기가 인간고에 참여해서 그 고난을 자기가 당하시고 모든 고난과 죄악가운데서 전 인류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언제든지 이 십자가의 정신을 가지고 수난자의 고난에 같이 참여하면서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도와주기를 힘써야 될 것입니다. 리빙스톤이 평안한 자기의 나라를 버리고 암흑의 아프리카 대륙에 제일 먼저 자기의 몸을 던지며 간 것도 십자가의 정신에 의지해서 나아간 것입니다. 성 다미엔 같은 사람이 문둥병 자들만 살고 있는 하와이의 한 섬 몰록카이 섬에 자원해서 일생토록 문둥이와 같이 살며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마지막에는 자기까지 감염이 되어서 죽은 것도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대 잇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일을 한 것입니다. 수난자와 같이 수난을 나누며 그들의 육신과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이올시다.
우리가 오늘날 특별히 순천의 수재민을 위해서 특별헌금을 하려고 하지마는, 이 수재민을 위해서 헌금하는 것도 우리가 이 정신을 가지고 고난을 받는 우리 동포와 나도 같이 참여하겠다고 하는 이런 정신을 가지고 헌금을 해야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헌금하는 사람이 될 것이올시다. 해방 후 六·二五를 비롯해서 이 한국의 땅에 여러 가지 재난이 임했습니다. 특별히 금년 여름은 참 재난의 여름 같습니다. 태풍으로 말미암아서 많은 우리의 어부들이 난을 당하고 큰 홍수로 말미암아서 순천에 있는 많은 동포들이 회생되었고 또 며칠 전에 한강에서 나룻배가 뒤집혀서 많은 동포들이 불쌍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이 재난은 한국만 당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신문지상에서 보는 대로 이란이라고 하는 나라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서 수만 명의 생명이 희생이 되었고 홍콩 같은 데도 얼마 전에 큰 태풍이 불어서 수백 명의 인명이 사상을 입었다고 하는 외보에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 있어서의 재난이 특별히 마음 아프게 생각되는 것은, 우리 사람들이 조금 더 잘 했으면 피할 수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많은 까닭입니다. 순천의 사건만 할지라도 조금 더 그 뚝 을 잘 막았다면 이것을 피할 수 있지 않았겠나, 이번 나룻배 사건 같은 것도 발동선의 고장이 좀 안 생기게 모든 것을 바로 정비하고 삭도(索 )가 늘어지는 것도 미리 준비를 했다면 이런 사고는 피할 수 있지 않았겠나, 이런 생각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재난은 사람이 아무리 바로 하느라고 할지라도 언제든지 또 생깁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 인간고의 모든 의미를 다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깨닫고 그 이상은 모릅니다. 이마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드셨는지도 모르겠어요. 마치 사람이 죽는 줄을 알지마는 언제 죽는 것을 우리 사람의 눈에 가리워 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님께서 오신다고는 분명히 말씀했지마는 언제 오실 는 지는 우리 사람의 눈에 가리웠어요. 아마 이 고난의 문제가 이것과 비슷할 것 같아요.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이 문제를 이론적 견지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실제적 견지에서 예수 님의 교훈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고나 재난을 만날 때에 사명 적 견지에서, 우리가 이와 같은 때를 당해서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나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의의 재난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에 내가 먼저 회개하고 내 생활에 준비가 있어야 될 것을 각오해야 되겠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가지고 수난자와 같이 소고를 하며 이들이 육신을 건지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애를 쓰지 아니하면 안 될 것입니다.
(一九六二년 九월 九일)


Ⅴ-4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 (고린도 전서 十장 二十三-三十三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十·三十一)

지난주일 둘째 예배를 필한 후에 제가 정문밖에 서서 여러 교우들과 인사한 후에 여자 대학생이 저를 좀 보고자 하기에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니까, 『사람이 자기에 대해서 무엇을 먼저 구하여야 됩니까?』이런 문제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래서 잠깐 생각되는 대로 말을 한 후에 어떤 남자 대학생이 기다리다가 저를 보고자 하기에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니까 이 학생 역시 아마 법과대학 학생인 모양인데 단도직입으로 제게 묻는 말이『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죽어야 됩니까?』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두 학생의 질문을 제가 들은 다음에 제 마음 가운데 들어오는 생각은 이와 같은 의문은 다만 이 두 학생 뿐 아니고 여러 다른 학생들도 또 특별히 청년들도 이와 같은 의문이 마음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리해서 이와 같은 형편을 생각하면서 이 시간에 특별히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자 하는 설교의 제목을「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이 문제를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분명한 해답을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우리 주를 믿는 사람들 특별히 장로교인 들로서 곧 대답할 만한 문제인 줄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따금 늘 보이는 성경 요리문답이 있는데 이 성경 요리문답의 제일 첫째 문제가 이 문제입니다.『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아마 대답을 기억하시는 분이 많을 줄 압니다마는, 혹 잊어버린 이가 있으면 제가 다시 한 번 읽을 때에 분명히 들으시기를 바랍니다.『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라.』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교훈에 의지해서 대답한 말입니다. 로마서 十一장 三十六절에는『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고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읽은 대로『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여라.』고린도 전서 六장 二十절에는『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일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것이 우리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본분이올시다. 우리는 인간이므로 당연한 이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피조물이올시다.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사람 누구 하나나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만든 사람은 없습니다. 자존자(自存者)는 우리가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지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생각하십니까? 모든 피조물은 그 존재의 제일 되는 목적이 자신에 있지 아니하고 그를 지으신 자의 뜻에 있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다 보시는 이 강대상(講臺床)은 피조물이올시다.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이 강대상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강대상은 만든 사람의 뜻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강대상 존재의 의미요 제일 되는 목적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지으신 바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영혼을 지으시고 육신을 지으시고 지적 생활, 영적 생활, 의지적 생활이 가능하게 지으시고 마음속에 양심을 주시고 또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그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생활로서 우리 인간을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존재의 의미는 우리를 지은 그 목적에 의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만이 아닙니다. 만물의 존재의 목적이 역시 그렇습니다. 온 우주, 일월성신, 삼라만상이 무엇 하려고 있습니까? 존재 의미가 무엇입니까? 조물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조물주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이것은 인간의 인간 된 본분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함으로써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 행동의 최고 목적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를 토론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대답이 있지마는 모든 대답을 대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대답은「자아를 실현하는 데 있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내재적 능력을 온전히 실행시키는 데 있다. 또 둘째 종류의 대답은「쾌락에 있다」 혹은 「행복을 구하는 데 우리 인간 행동의 최고 목표가 있다.」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 두 가지 대답이 다 일리가 있습니다.
먼저 그 첫째 대답을 보면 우리 인간 행동의 목표가 자아를 실현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자, 가령 여기 지금 아름다운 꽃이 있습니다. 코스모스가 있습니다. 가령 코스모스가 자아를 온전히 실현하려고 할 것이면 이 코스모스 존재의 이유는 이 코스모스가 잘 성장하여 충분히 발육이 되고 흠이 없는 꽃이 되는 데에 코스모스의 최고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한 꽃이 되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자기 실현이 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꽃이 자기를 잘 실현해서 온전한 꽃이 되려고 할 것이면 어떤 요소가 필요합니까? 적당한 흙이 필요합니다. 적당한 햇빛이 필요합니다. 적당한 온도가 필요합니다. 적당한 물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온전히 자기를 실현해서 완전한 꽃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인간으로서 온전한 인간이 되려고 하는 데에도 거기에 필요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거기에 필요한 요서가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경건한 신앙 생활이 사람으로서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제일 좋은 분위기가 되고 제일 좋은 요소를 구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여기 성경을 보면, 이와 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시편 一편에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를 하였습니다.『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사는 경건한 사람의 그 모습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또 시편 九十二편에는 이런 사람들을 이런 말로 묘사하였습니다.『종려나무가 번성함 같으며 레바논의 백향목(柏香木)과 같이 발육하리로다. 늙어도 결실 하여 진액(津液)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靑靑)하여 여호와의 정직함을 나타내리로다.』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그를 항상 즐거워하는 이의 모습을 래바논의 백향목과 같이, 종려나무와 같이 비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도 하나님을 믿는 제자들을 향해서『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穩全)하라』고 하셨습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는 길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사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 四장 十三절에『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대까지 이르리니…』이와 같이 기록한 것입니다. 참 자아 실현의 비결은, 온전한 사람이 되는 비결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경건한 신앙생활에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여기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생활에 참된 행복이 따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구합니다. 그러나 구하지마는 얻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잘못 구하는 탓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솔로몬이 자기의 경험에 의지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습니다. 젊어서부터 지혜를 얻기를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당대에 누구보다 제일 지혜 있는 사람이 되었고 제일 지식이 많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경험을 통해서 솔로몬이 하는 말은『이것도 바람을 잡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한 걸음 나아가서『지혜가 많으면 번뇌가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도 더하느니라』하는 의미심장한 말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가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는 자로다.』 이 결론은 二十세기에 사는 현재 사람에게 아주 적절한 말일 줄 생각합니다. 二十세기에 사는 현대 사람이야말로 과거 어떤 시대에 살던 사람보다도 지식이 제일 많습니다. 원자의 비밀을 지금은 압니다. 전자의 비밀을 압니다. 우주의 비밀을 탐색하는 중에 있습니다. 어떤 시대 사람보다 지식이 제일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二十세기에 사는 현대인은 과거 어떤 시대에 살던 사람보다도 제일 번뇌가 많습니다. 제일 공포가 많습니다. 제일 불만 중에 삽니다. 그들의 지식의 결과인 원자탄, 유도탄은 현대인에게 큰 번뇌를 가져옵니다.
지식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전도서 二장을 읽어보면, 솔로몬이 자기의 경험에 의지해서 세상의 향락을 통하여 행복을 구해 보기를 힘썼습니다. 굉장한 집을 지었습니다. 아름다운 동산을 만들었습니다. 많은 노비로 일을 시켰습니다. 아름다운 처첩을 많이 두었습니다. 많은 술도 준비하였습니다. 세상의 향락을 통해서 많은 행복을 얻어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이것도 바람을 잡는 것이라고, 여기에 행복이 없다고 한탄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권세만 잡으면 행복이 될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단종애사(端宗哀史)를 읽어보세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권세를 얻기 위해서 자기의 조카 단종을 죽이고 충신 사육신(死六臣)을 죽이고 마지막에는 왕이 되기는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왕위에 앉고 보니 여러 가지 번뇌가 머리에 들어와서 밤에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몸은 점점 약해졌습니다. 번뇌를 좀 이길까 해서 지금의 파고다 공원 자리에 굉장히 큰절을 지었어도 번뇌는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겨우 十三년 동안 살고 쉰 두 살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권세가 반드시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는 사람이 명예를 얻고 인기를 얻으면 행복이 될 줄 압니다. 여러분, 며칠 전 신문지상에서 미국에 제일 인기 있던 여가 배우가 자살했다고 하는 보도를 우리가 다 읽었을 것입니다. 인기가, 명예가 반드시 행복을 가져오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들은 다 물거품 같아서 겉으로 볼 때에 그 속에 무엇이 있는 것 같지마는, 정작 손으로 잡아보면 아무 것도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바람을 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부산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항상 즐거워하는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게 되면 행복은 자연히 따라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물론 지식도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물질도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사실 권세도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없어도 이와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있거나 없거나가 문제가 아닙니다. 자연히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니.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힘써야 되겠습니다. 나 자신이 내 가정에서, 내 교회에서, 내 사회에서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힘쓸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힘쓸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이 말씀으로 우리 일생의 목표를 삼아야 합니다.『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죽어야 하는가?』청년으로서 마땅히 물어야 할 문제입니다.
전에 나치스 청년들은 민족이란 제단에 피를 붓고 많이 죽었습니다. 저에 파시스트 청년들 혹은 일본의 군국주의자 청년들은 국가라는 제단에 피를 많이 부었습니다. 공산당들은 전에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물질이라고 하는 제단에 피를 붓고 죽는 중에 있습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지식이라고 하는 제단에 피를 붓습니다. 모두 다 제단이 없는 생활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우리의 생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생명을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제단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곧 하나님의 제단이올시다. 진리의 제단이올시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생명을 이 제단에 바치고 그 후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나라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고 민족을 위해서 줄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있는 모든 것은 결국은 우상의 제단입니다. 인간은 불멸의 존재로서 지음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의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불멸의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제단에 그 생명을 바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올시다.
(一九六二년 十월 七일)


Ⅴ-5 감격의 신앙 (디모데 전서 一장 十二-二十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一·十五)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여러분의 기도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 동안 三 주일 간 여행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가운데 평안히 본 교회로 돌아와서 다시 여러분과 같이 하나님께 예배하게 될 때에 더욱 감사를 드릴 수박에 없습니다.
이번에 저는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선교 정책을 다시 연구하기 위해서 그 연구회를 개최하였는데 거기에 참여하고 돌아왔습니다. 남장로교회에서 우리 한국에 선교사를 보낸 지가 꼭 七十년입니다. 一八九二년에 개척 선교사 일곱 사람을 한국에 파견하였던 것입니다. 한국뿐만 아니고 세계 각처에 보내는데 이번에 세계 각처에 있던 선교사들과 또 그 지방 대표들과 또 미국의 유수한 교파에서 외국에 선교하는 대표들과 또 남장로교 안에 있는 신학교 교장들과 그 유력한 교수들을 합해서 약 一백 四, 五십 명쯤 아마 모인 것 같습니다.
몬트리트라고 하는 곳은 그 남장로교회에서 특별히 여름에 수양하기 위해서 건설한 아주 아름다운 휴양처올시다. 약 四백 명이 평안히 유할 수 있는 기숙자가 있고 모든 집회를 가지기에 매우 편리한 곳이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선교사 세 사람, 또 우리 한국 교회를 대표해서 네 사람이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 종교 교육부 총무 되시는 안광국 목사, 또 순천에 계신 김형모 목사, 기독교장로회 대표로 조승제 목사, 이 사람, 이렇게 네 사람이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안광국 목사님과 같이 워싱턴과 뉴욕과 피츠버어크와 로스엔젤리스 등 몇 곳을 다니면서 특별히 워싱턴과 로스엔젤리스에서는 주일을 지내면서 여러 교포들을 만날 수 있었고 또 영락교회 여러 교우들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평안히 계시고 또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시기를 부탁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잠깐 읽은 성경 말씀을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十二절부터 제가 몇 절을 다시 읽을 때에 여러분 자세히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주시는 말씀 가운데 몇 절이올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 자요 포행(暴行) 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矜恤)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 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자기의 흉금을 털어놓으면서 감사하다고 하는 말씀을 합니다. 자기가 본래는 훼방 자요 핍박 자요 본래는 포행 자이었는데, 그 사실이올시다. 사실 그는 교회를 핍박하고 여러 가지로 교회를 잔해 한 그런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풍성해서 모든 죄인을 구원하여 주실 때에 죄인의 괴수가 되는 자기까지도 구원해 주신 것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 없다고, 그 뿐더러 자기와 같이 훼방 자이었고 핍박 자이었지마는 긍휼 하심을 더 베풀어서 귀한 직분까지 맡겨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것을 생각할 때에 그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심정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 감격이 지극한 정을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사와 감격의 정은 여기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에도 역시 나타납니다. 그리해서 고린도 전서 十五장 八-九절을 읽어보면 예수 님께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 여러 사도들에게 나타난 이야기를 적다가 八절에는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맨 나중에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여기에도 이렇게 자기가 포악하고 훼방하고 핍박하던 이런 자인데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뿐더러 이렇게 귀한 직분을 맡겨 주셨으니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가 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우리가 살필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도 역시 이런 글귀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五장 八절에『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하는 말은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깊이 생각한 것을 나타내 줍니다.『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五장 十절에 보면『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하는 말을 썼습니다. 이 글귀를 쓸 때에도 역시 자기 자신을 많이 생각한 줄 압니다. 내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는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화목의 길을 열어 주셨으니 이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의미입니다.
일생을 주님께 몸 바쳐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봉사한 사도 바울의 깊은 심령 속에는 이 감격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격의 심정이 있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감격의 신앙은 그로 하여금 복음 전파 자로 만들었습니다.『내가 복음을 전파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함이로다.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심지어 이런 말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큰 은혜를 받고서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깊은 감격의 신앙은 그로 하여금 교회를 봉사하며 만인을 봉사하는 봉사자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였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로 함께 우는 자를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과부들을 극력(極力) 구제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게끔 만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깊은 속의 그 감격의 신앙은 그로 하여금 큰 수난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산의 위험함과 물의 위험함과 길의 위험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는 곳마다 유대 사람의 핍박을 받고 이방 사람의 비난을 받으며 혹은 매를 맞고 혹은 감옥에 갇히며 갖은 고난을 당하는 수난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깊은 감격의 신앙은 이런 가운데서도 항상 그로 하여금 승리의 생활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항상 즐거워하였습니다. 항상 찬송을 불렀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였습니다.『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러한 깊은 감격의 신앙은 그가 마지막으로 로마 들 밖에서 붉은 피를 뿌려 최후로 자기 신앙을 순교로써 간증한 것입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격의 신앙이올시다. 우리 다 같이 기억하십시다. 참 신앙 생활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이 감격의 신앙 가운데서 만 분의 일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려는 노력에 불과한 것이올시다.
베드로의 신앙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베드로 전서 一장 十八절에 보면 이런 말을 기록하였습니다.『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흠 없고 점 없는 그리스도의 피로 너희들이 구속을 받았으니 너희들이 어떻게 살아야 마땅하겠느냐 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무한한 감격의 심정을 우리가 이 말씀 가운데서 살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역시 사도 요한 의 신앙이올시다.
그는 요한 일서 三장 十六절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그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주금 내려가서 四장 十九절에는『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사랑의 감격, 그리스도의 은혜의 감격이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도를 만든 것입니다.
이 감격의 신앙을 우리가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신앙만이 아닙니다. 모든 교우들과 모든 선지자들과 모든 참된 성도들의 공통한 신앙의 특색이었습니다. 어거스틴도 일단 회개한 다음에는 그 일생을 통해서 이 감격이 마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내가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인데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이렇게 구원하여 주셨으니 내가 무엇으로 이 은혜를 보답할까 하는 마음입니다.
十七세기에 피난민의 적은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우리 신교도 가운데 세계적 선교 운동을 일으킨 진젠도르프의 신앙의 특색이 또한 이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음 가운데는 언제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그 사랑의 감격이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감격의 신앙이 그로 하여금 그와 같은 봉사와 사업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지금 독립된 인도네시아라고 하는 나라가 있지마는, 그 인도네시아란 나라에 가면「바탁 교회」(Batak Church)라고 (그 이름이 좀 별 하지마는) 아주 인도네시아 사람으로 조직된, 어느 다른 선교 부의 도움을 별러 안 받는 독립된 큰 교파가 하나 있습니다. 아마 세례 교인 수 약 五十만 되는 큰 교파입니다. 그런데 이 교파는 유럽에서 온 어떤 청년 한 사람이 처음에 복음을 전파해서 세웠다고 합니다. 유럽 북부에 있는 어떤 청년이 소년 시절에 중한 다리의 병을 만나서 그 때 의사들 생각에 이 아이의 생명을 구하려고 하면 이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겠다고 하는 그런 결론을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해서 자기 부모도 깊이 생각하고 이 아이도 깊이 생각하고 결국 이 두 다리를 자를 것이냐, 어떻게 할 것이냐 하고 많이 생각하는 가운데 이 아이가 한 번 하는 말이『아, 어머니, 성경을 보면 예수 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고칠 수 없는 병도 다 고쳐 주셨는데 내 다리도 예수 님의 능력이면 고칠 수 있지 않겠어요? 아, 이것 어떻게 고칠 수 없고 내 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습니까?』그러면서 하는 말이『나는 그저 예수 님께 다리를 자르지 않고 이 다리를 꼭 맡기고 나는 예수 님께 기도를 하겠습니다.』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와 그 아이가 함께 간절히 그 다리가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다리가 나았습니다. 그리하여『내가 어떻게 하면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나라, 복음을 듣지 못한 나라, 다른 사람이 가보지 못한 지방, 이런 곳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겠다.』이렇게 작정을 하고 오래 전에 인도네시아에 혈혈단신으로 나와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해서 그런 큰 교회가 섰다고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건강에 감격한 심정 가운데서 일생을 하나님께 바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바친 신령한 제자를 축복하여 주신 것입니다.
왜 우리가 다 같이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부모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때가 많으며 우리가 다 같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이 부족할 때가 많습니까?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줄 알지마는, 그저 보통 쉽게 말하면 그저 사람이니까 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으로 우리가 은혜를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은혜를 종종 깨닫는다고 할지라도 곧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늘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면서「만족의 근원 하나님」이라는 찬송을 부르지마는 우리가 그 은혜를 깨닫고 부를 때가 많지 못합니다.「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하면서 이 십자가라고 하는 말을 입으로 부르면서 노래하지마는 사실 십자가를 통해서 오는 은혜가 너무 클 때에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대체로 은혜가 너무 클 때에 그 은혜를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아마 갑자기 우리 한국 같은 데서 해가 한 열흘이나 보름 뜨지 않다가 처음으로 해가 뜬다고 할 것이면 아마 대단히 감사하다고 할 것입니다. 사실 북극 지대에 가면 그런 지방이 있습니다. 어떤 데는 몇 달 후에 해가 한번 뜹니다. 그런 지방에서는 해가 한 번 뜨게 되면 크게 축하를 하고 감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같은 데는 뭐 그저 매일 해가 뜨니까 별로 그걸 가지고 감사한 생각이 나지 아니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그 은혜 가운데 살게 되어서 물고기가 물의 은혜를 모르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어려운 때가 많습니다. 공기도 너무 많으니까 공기 귀한 줄 모릅니다. 물도 너무 많으니까 물 귀한 줄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이 우주, 하나님의 주신 하늘 나라, 하나님의 주신 땅, 하나님의 주신 건강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으로 살지마는 그 은혜를 잊어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때 잠깐 깨닫기는 깨닫지마는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기에 우리 한국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에『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에 새겨서 그 며칠을 가겠습니까?『열 번 주다가도 한 번 안 주면 열 번 준 것은 잊어버리고 한 번 안 준 것은 기억한다.』그것이 우리 타락한 인간의 성품이올시다.
토리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그 미시간 호라는 호수에 한 번은 큰배가 파선을 당해서 많은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그 가운데 헤엄 잘 치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혼자서 열 일곱 사람을 건져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굉장히 보도가 되고 여러 사람이 그 사람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로스앤젤리스에서 토리 박사라고(여기 한국에 나왔던 그이의 바로 아버지가 되겠습니다)그 때는 그가 지금 유명한 빌리 그래함과 같이 유명한 목사이었는데, 그이가 로스엔젤리스에서 한 번은 설교를 하면서 그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참 이렇게 용감한 것을 우리가 배워야 된다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도 힘을 써야 된다고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 설교를 하고 나니 그 설교를 듣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뜻으로 손을 드느냐고 하니까『제가 바로 그 사람이올시다』하였습니다. 열 일곱 사람이나 구원한 그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 와서 토리 박사의 설교를 들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토리 박사가 너무 감사해서 강단으로 좀 올라오라고 해서 울려다 세워놓고 이 분을 소개하면서 아주 참 용감한 일을 했다고 칭찬을 하고 마지막에 묻기를 이와 같이 좋은 일을 했는데 그 일을 한 후에 특별히 혹 무슨 느낀 바가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조금 생각하더니『뭐 별로 특별히 느낀 바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내가 그 때 열 일곱 사람을 구해 주기는 주었는데 그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나한데 와서 고맙다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보통 인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이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고, 우리가 어떤 때에 은혜를 깨듣는다고 할지라도 이 은혜를 항상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깨닫고 기억할 수 있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전에 어쩐 성자는 이렇게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오, 주님이시여, 모든 은혜를 내게 풍성히 주셨으니 이제 한 가지 은혜를 더 주셔서 감격의 마음을 주시옵소서!』 이 은혜까지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을 볼 때에도 감격한 마음으로 볼 줄 알고, 들을 바라볼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한 마음으로 곡식으로 덮인 들을 바라볼 줄 알고, 가을에 단풍을 바라볼 때에도 감격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길을 가다가 예배당을 볼 때에도 감격한 마음으로 그 예배당을 바라보고, 높이 솟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으로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특별히 독립된 울이 한국의 태극기를 바라볼 때마다 감격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내 사랑하는 부모, 내 사랑하는 처자, 내 사랑하는 친구들, 모든 다른 동포들을 바라볼 때에도 감격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 감격의 신앙,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모든 것을 바라볼 때에 감격에 넘치는 심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가 더 받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이 앞으로 한 주간 감사 주일을 지내는 동안에 우리 하나 하나가 한 가지 은혜를 더 받아서 이 감격의 믿음을 받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감격의 신앙이 있는 이에게는 불평이 없습니다. 이런 이는 아무리 수고를 하고도 대우를 생각지 아니합니다. 이런 이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원한을 품지 아니합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이는 남의 죄를 용서합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이는 범사에 감사합니다. 감격의 은혜를 우리가 받아야 되겠습니다.
(一九六二년 十一월 四일)


Ⅴ-6 인생항로와 파선 (디모데 전서 一장 十二절-二十절)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一·十九)

오늘 봉독(奉讀)한 말씀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항해의 경험이 많이 있는 분이올시다. 바다 여행을 많이 하신 분이올시다. 그러는 동안에 파선하는 것도 많이 보았고 파선을 친히 체험한 일도 종종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선의 비극을 잘 알고 있는 분입니다. 고린도 후서 十一장에 보면 그가 세 번 파선을 당하였는데 一주야를 깊은 가운데서 지냈다고 하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 전서를 쓸 때까지 당한 경험이올시다. 그 후에도 이 비슷한 경험을 계속해서 당한 줄 생각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사도행전 二十七장에 기록된, 사도 바울이 로마를 향하여 갈 때에 그레데 섬 근방에서 큰 폭풍우를 만나서 그의 탔던 배가 열 나흘 동안이나 지중해에 표류하다가 마지막 밀레 도 앞 바다에서 파선이 되고 겨우 인명만 구조된 그런 기록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옛날 뿐 아니고 오늘날에도 계속하여 일어나는 사건이올시다. 기금은 과학이 발전되었다고 하지마는 이와 같은 비극은 아직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금년만 할지라도 우리 해안에서 큰 태풍으로 말미암아 파선된 어선, 침몰된 어선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바로 우리 나라 배 한 척이 멀리 사이판 섬에서 태풍을 만나서 침몰되었다고 하는 보도를 읽었습니다. 파선으로 말미암아 오는 생명과 재산의 손해는 얼마나 많은지 이루 다 헤아려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바다 밑은 이 파선의 잔물(殘物)로서 덮였다고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대에는 바다 위에도 이 파선의 잔해가 떠다니는 까닭에 오히려 배들의 항해를 곤란케 할 때가 할 때가 없지 않아 있다고 합니다. 바다에는 이 파선의 비극이 종종 있습니다.
옛날부터 우리 인간의 생활을 항해와 같이 본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해서 인생항로란 말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 세상을 바다로 본 이가 많습니다. 흔히 괴로움이 많다고 해서 고해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한 작은 배로, 일엽편주로 본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 하나 하나는 말하자면 일엽편주를 타고 한 잎 작은 조각배를 타고 이 망망한 대해를 건너가는 나그네로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행선(行船)에는 물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 언덕 피안을 향하여 갑니다. 곧 하늘의 항구를 향하여 우리는 다 배를 탔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다는 거울 같이 잔잔할 때도 있지마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바다는 위험을 내포합니다. 때로는 큰 풍랑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경험한 바와 같이 우라굴로 같은 폭풍우가 인생의 바다에도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혹은 지금 우리가 흔히 신문 보도를 통하여 아는 대로「사라」호니 무슨 호니 하는 태풍이 불 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아마 배 여행을 하다가 이과 같은 경험을 한 이들이 우리 가운데도 더러 계실 줄로 생각합니다. 저도 배 여행을 많이 하지는 아니했지만, 두어 번 이런 경험을 당해 보았습니다. 한 번은 제가 평양에서 숭실대학에 다닐 때에 어떤 여름에 진남포에서 배를 타고 구미포를 향하여 가던 도중이었습니다. 처음에 떠날 대에는 바다 가 잔잔하였지마는 해가 질 무렵에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고, 특별히 황해도 장산곶이라고 하면 물결이 거세기로 유명한 곳인데 그 곳을 지나갈 때에 어떻게 배가 흔들렸는지 아마 그 때 선원과 아이들 외에는 전부 멀미가 나서 정신을 잃은 광경을 복도하고 또한 체험해 보았습니다. 제가 배로도 태평양을 아마 너 댓 번 건넜습니다. 마지막에 배로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 번 태풍을 만나서 산 같은 물결이 배 위를 덮치는 그런 위험한 항로를 항해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렇게 바다에는 때로는 풍랑이 일어납니다. 또는 바다에는 때때로 안개가 낍니다. 운무가 앞을 가려서 지척을 문간하기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레이더 장치가 있어서 안개가 있을지라도 어느 정도까지 앞을 내가 볼 수 있는 기계가 있지마는, 옛날에는 물론 그런 기계도 없을 때입니다. 그 뿐더러 바다는 위에서 보기에는 물밖에 없지마는, 어떤 때는 속에 암초가 있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저 북극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빙산이 있어서 불시에 배가 위험한 일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유명한「타이타닉」호의 파선의 비극은 빙산에 부딪쳐서 그 당시는 제일 크게 만들었던 배가 조각 조각으로 파선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의 바다에도 종종 위험이 있습니다. 큰 풍파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세계전쟁이 일어납니다. 六·二五 사변이 일어납니다. 전쟁과 기근과 환난이 엄습할 때가 있습니다. 개인 생활에 있어서도 사업에 실패할 때가 있고 실직이 될 때가 있고 중병에 누울 때가 있고 큰 슬픔을 당할 때가 있고 유혹의 풍파가 휩쓸 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안개가 바다 위에 끼는 것처럼 모든 일이 혼돈하고 복잡해서 전도 난측(難測)으로 앞길을 헤아려 내다보기 어려운 때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시대에 우리가 매일 매일 생활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의심의 안개와 근심의 구름이 우리의 앞길을 가리울 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마는 갑자기 닥치는 시험이 있습니다. 악한 마귀의 올무가 있습니다. 영적 암초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바대에서도 파선의 비극을 우리는 종종 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좋은 아름다운 배를 창해에 띄워 순풍에 돛을 달고 떠났지마는, 얼마 못 가서 거슬리는 바람과 노한 물결에 휩쓸려서 파선을 당하는 청년 남자들도 있고 청년 여자들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문자 그대로 그야말로 안전고투로 四十년 혹은 五十평생을 거친 바다를 건넜지만, 항구를 지호간에 두고 어떤 큰 유혹과 시험의 암초에 걸려 파선이 되어 전공이 가석하게 되는 중년 남자와 여자들도 적지 않게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신생의 바다에는 그 밑에 분자 그대로 인간 파멸의 파편이 깔렸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거친 물결 위에 이 인간 파편의 흉악한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볼 수밖에 없는 이런 세계에, 이런 바다에 우리는 항해를 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한 번밖에 갈 수 없는 인생의 항로를 안전히 가서 무사히 마칠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 하나 하나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인생항로에 가장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기에 경험이 많은 사도 바울은 이미 제가 본문에 읽은 대로 이렇게 권면 합니다.『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먼저 믿음을 가지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배가 거친 파도를 헤치며 전진하여 나가려고 할 것이면 무엇보다도 힘이 필요합니다. 물론 작은 강은 사람의 힘으로 노를 저어서 건너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큰 바다는 우리의 힘으로 건널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사람들은 다른 힘을 빌었습니다. 풍력을 빌었습니다. 바람의 힘을 빌었습니다. 바람의 힘을 빌기 위해서 돛을 달았습니다. 머 대양을 건너가는 배는 여러 돛을 달아서 돛을 통해서 바람의 힘을 빌어 대양을 건너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좀 더 문화가 발전되어서 바람의 힘보다는 다른 힘을 씁니다. 혹은 화력을 빕니다. 석탄을 피워서 물을 끓이고 증기의 힘을 빌어서 프로펠러를 돌려서 배를 나아가게 합니다. 혹은 전력을 빌어서 배를 움직입니다. 최근에 와서는 여러분께서 보시는 대로 원자력을 빌어서 배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의 힘만으로는 바다를 건너갈 힘이 부족합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바다를 건너는 데도 우리 사람의 힘만은 부족합니다. 우리 사람의 의지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보다 더 굳센 힘이 필요합니다. 이 힘, 이 능력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와 같이 험난한 인생의 바다를 향해서 나아갈 때에 자기의 힘으로 항해해 간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친히 증거한 대로『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히 못한 것이 없느니라.』자기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그 능력 주시는 자의 능력으로써 모든 것을 이기고 나아간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은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물질적 능력을 이 우주에 준비하신 하나님은 우리 인생으로 바른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 신령한 능력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 능력은 오직 믿는 이에게만 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튼튼히 의지하는 그 믿음이 있어야 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이 능력을 통해서야 아무리 물결이 거칠다고 할지라도 이 바다를 능히 건너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환난이나 유혹의 파도가 높다고 할지라도 돌파하여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이 믿음이 있는 이에게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약속까지 주셨습니다. 이사야 四十三장을 볼 것이면『물을 건널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물이 너는 침몰치 못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항해를 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은 먼저『믿음을 가지라』고 권면 합니다. 믿음을 가져야 인생항로를 바로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착한 양심이라고 하는 말은 뜻이 있습니다. 부끄러움이 있는 양심이 아닙니다. 왜곡된 양심이 아닙니다. 화인 맞은, 마비된 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본래 주신 그대로 순결한 착한 양심입니다. 여러분, 항해에 가장 필요한 작은 기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침반(羅針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은 지남 침(指南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지남 침 있어야 아무리 운무(雲霧)가 앞을 가리운다고 할지라도 배가 옳은 방향으로 그냥 계속해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이 속에 지남 침 하나를 주셨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것이 곧 양심이올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작은 배, 우리 손에 지남 침을 주셨는데 이것은 곧 양심입니다. 부끄럽지 아니한 착한 양심입니다. 양심은 영혼의 지성소올시다. 양심은 마음속의 촛불이올시다. 밝힙니다. 양심은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올시다. 양심은 속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올시다.『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 하십니다. 이 양심이 우리의 생활의 방향을 지시하여 줍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여 줍니다. 시비를 판단하여 줍니다. 갈 길과 안 갈 길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양심은 우리를 격려하기도 하고 혹은 책망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옳은 길을 갈 때에 우리를 칭찬하고 우리의 마음을 평안케 해서 우리를 격려해 주고, 안 된 길을 가려고 할 때에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가책을 주어서 우리를 책망하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항로를 바로 가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양심 그대로 양심을 지니고 저버리지 마십시다. 양심의 음성을 거역하지 마십시다. 양심의 음성을 무시하지 마십시다. 아무리 어려워도 양심의 음성에 순종하십시다. 아무리 손해가 나도 양심의 명령에 순복 하십시다. 아무리 부끄러워도 양심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빅토르 유고의 유명한「쟝발쟝」의 이야기를 여러분은 기억하시지요. 그 사람은 여러 가지 죄는 많이 지었습니다. 그리고 몰래 도망했습니다. 먼 곳으로 갔습니다. 변 성명 했습니다. 그 곳에 가서 정계(政界)에 투신했습니다. 성공을 해서 그 곳의 시장이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더러운 죄를 많이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도회에 가서 변 성명하고 새 사람으로 시장의 자리에까지 올라가서 평안히 삽니다. 그러나 한 번은 신문을 보니까 자기가 살던 그 도회에서 어떤 죄인이 하나 붙잡혔는데 도적질을 하다가 붙잡혀서 그 당국자는 이 사람이 곧 전에 악한 짓을 많이 하던 쟝발쟝이라고 인정을 하고 고문까지 해서 자백을 아마 받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중형을 내린다고 하는 신문의 보도를 보았습니다. 자기는 지금 평안한 시장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문을 보고 그 날 저녁에 잠을 못 잤습니다.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그 곳으로 마차를 타고 달려가서 그 재판장에게 자기가 실상 쟝발쟝이니 이 사람을 놓아주라고 말했습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많이 손해 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명령에 순복 하였습니다. 이리해서 인생 길을 마지막에 바로 갔습니다. 우리가 인생항로를 바로 마치려고 하면 양심의 명령에 순복 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어떤 사람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이 양심을 버리게 되면 그 사람의 신앙생활, 그 사람의 인격, 그 사람의 전 생활은 파선하고 마는 것입니다. 양심의 명령에 순복 하십시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런 말씀이 없지마는, 한두 가지 더 말하지요. 항해를 잘하는 데 필요한 것은 항해도(航海圖)입니다. 바다에 대한 지도입니다. 자세한 바다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어느 곳이 섬이 있고 어느 곳에 물이 얼마나 깊고 어느 곳에는 암초가 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다에는 다 배 다니는 길이 있습니다. 그저 물위라고 함부로 가다가는 암초에 걸립니다. 자세한 지도가 필요합니다. 이 지도를 보고 옳은 길을 찾아가야 우리가 행선을 바로 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항로에 있어서 자세히 모든 것을 가르쳐 주는 지도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기 있는 이 신구약 성경이올시다. 이 신구약 성경은 옛날로부터 예수 님 오실 때까지의 여러 사람의 생활을 기록해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며 어느 곳에 암초가 있고 어느 곳에 물이 얼마나 깊다는 것을, 즉 인생항로의 모든 경험을 우리에게 자세히 보여줍니다. 어느 길이 생명의 길이요. 어느 길이 멸망의 길인 것을 가르쳐 줍니다. 어느 길이 축복의 길이요 어느 길이 저주의 길인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인생항로를 바로 가려고 하십니까? 이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서 이 성경이 가라고 하는 길만 가면 틀림이 없습니다. 파선될 염려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예기할까요? 여러분, 예수 님의 제자들이 어떤 날 밤에(예수 님은 다른 곳에서 기도하실 때에)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밤은 캄캄한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큰 걱정이 생겼습니다. 물이 배로 들어옵니다. 제자들이 어찌할 줄 모를 대에 멀리 보니까 어떤 이가 바다 위로 걸어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슨 유령이 아닌가 해서 겁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보니까 예수 님이 풍랑 위로 걸어오십니다. 예수 님께서 그 배 위에 올라오시니까 거친 파도가 잔잔해지고 아무 염려 없이 무사히 제자들이 그 배를 타고 저 언덕까지 평안히 건너갔습니다. 물론 항해를 잘하려고 하면 숙련된 선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배를 무사히 저어서 저 언덕까지, 하늘의 항구가지 무사히 가기를 원합니까? 내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숙련된 선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가운데 영접해서 그리스도께서 내 작은 배의 선장이 되게 하십시다. 그러면 바로 갈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배를 어떠한 형편에 있습니까? 혹 여러분의 배가 파선의 위기를 당면한 이는 없습니까? 여러분이 탄 배가 지금 옳은 길을 가고 있습니까? 내가 탄 배가 지금 어떠한 형편에 있습니까? 살펴보십시다. 튼튼한 믿음을 가져야만 이 뱃길을 바로 갈 수 있습니다. 항상 성경을 읽을 때에 이 길을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해서 주님께서 내 작은 배를 인도할 때에 우리는 틀림없이 이 길을 바로 갑니다.
배를 타고 미국에 가노라면 흔히 샌프란시스코에 닿게 됩니다. 그 샌프란시스코 항구는 대단히 넓고 좋은데 그 넓은 항구가 있기 전에 좀 작은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을 영어로「골든 게이트」(Golden Gate)라고 합니다. 황금 문이라는 말이지요 그 문이 참 좋아요. 골든 게이트라고 하는 가 만전에 문이 있습니다. 좌우 편에 육지가 나오고 좁은 목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 위로 다리를 놓았습니다.「골든 게이트 브리지」(Golden Gate Bridge)라는 다리를 놓았는데 좌우 옆에 아주 높은 탑을 세우고 다리를 매달아 놓아서 아주 높고 그 가운데는 아무 받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큰배라도 다 그 다리 아래로 지나갑니다. 사실 문자 그대로 황금 문을 들어가는 기분이올시다. 우리가 다 이 인생의 바다를 많은 수고를 하면서 행선을 하다가 마지막에 우리가 다 황금 문, 하늘의 황금 문으로 들어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를 인도하시고 축복해서 다 무사히 하늘의 황금 문에 도달할 수 있는 이런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一九六二년 十一월 二十五일)

Ⅴ-7 하나님의 각양 은혜와 봉사 (베드로 전서 四장 七-十九절)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四·十)
오늘 아침 본 영락교회가 과거 十七년간의 하나님의 은총을 추억하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 함이 허사로다.』하는 시편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十七년 전에 혼란한 이 땅 위에 세워 주시고 지켜 주시고 길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신 것을 돌이켜 생각할 때에 우리는 만 입이 있어도 다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그 동안 六·二五사변이 있었고 一·四후퇴가 있었는데 이러한 모든 민족적인 비극을 돌이켜 생각할 때에 우리는 더욱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일찍이 본 교회를 같이 봉사하다가 순교한 장로님도 계시고 또는 이미 하늘 나라에 계신 장로님들, 권사 님들, 집사 님들, 여러 성도들의 봉사와 희생을 우리는 또한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함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十여 성상을 하루 같이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며 교회를 봉사하는 여러 성도들에게 또한 감사함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감사와 감격의 아침, 하나님께서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오늘 아침 특별히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 베드로 전서 四장 十절이올시다. 제가 한 번 다시 읽을 때에 자세히 들으시기 바랍니다.『각각 이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여기 네 마디가 있습니다.「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하는 말씀대로 우리가 각각 받았습니다.「하나님의 은혜」는 각양각색입니다. 여러 가지입니다.「선한 청지기 같이」착한 청지기로서「서로 봉사하라.」하나님께서 오늘 아침 창립 十七 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모든 사도 가운데 첫째가 되는 베드로 사도의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은사라고 하는 말은 은혜의 선물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이 은사를 받았습니다.
고린도 전서 四장 十七절에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네게 있는 것들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우리에게 있는 것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다 받았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야고보서 一장 十七절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오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는 하나님께로 옵니다. 우리의 자녀, 건강, 재산(적든지 많든지), 지혜, 모든 재능, 기술, 모든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또 특별히 대부분 우리들은 피난민으로서 이북에서 이남으로 쫓겨와서 지금까지 살면서 과거 十여 성상을 고요히 돌이켜 생각해 볼 때에 더욱 하나님의 은사를 우리가 깨달을 수밖에 없고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사를 기억하십시다. 각각 은사를 받은 것을 먼저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우리 교회로서도 받은 바 모든 은혜를 먼저 기억하십니다.
그 다음에는『하나님의 각양 은사를 맡은……』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은혜는 여러 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은혜는 사람을 따라서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연적 은사를 돌이켜 볼 때에도 각각 다릅니다. 우리의 얼굴이 다른 것과 같이 우리가 받은 은사도 각각 다릅니다.
여기 학생들을 교육시켜 보면 어떤 학생은 어학을 잘합니다. 그러나 어떤 학생은 수학을 잘합니다. 어떤 학생은 물리를 잘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학생은 동식물을 잘합니다. 어떤 학생은 음악에 장기가 있습니다. 어떤 학생은 그림을 잘 그립니다. 어떤 학생은 손재주가 있어서 공예품을 잘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장성한 이들도 각각 받은 바 은사가 다릅니다. 어떤 이는 장사를 잘하고 어떤 이는 노예를 잘하고 어떤 이는 공업을 잘하고, 어떤 이는 건축 방면에 기술이 있고 어떤 분은 사교를 잘하고 어떤 분은 행정을 잘하고, 각각 받은 바 그 특기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이 영적 은사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十二장 四절 이하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職任)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이런 말로 시작해서,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특별히 담대한 믿음을 가리킨 줄 생각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병 고치는 은사를, 이렇게 여러 가지 다른 은사를 열거하였습니다. 이렇게 같은 성령, 한 하나님이지마는 각 사람에게 주시는 자연적 은사와 또한 영적 은사는 각각 다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전체, 우리 교회 전체를 위해서 각각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十二장에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는 다 한 몸이고 우리는 한 몸에 속한 지체인데 다 눈만 되었다고 하면 어떻게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 귀가되었다고 하면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몸은 하나이지마는 여러 지체가 있고 여러 지체가 각각 다른 일을 할 수 있음으로써 몸 전체가 온전한 몸이 될 수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 생활도 그렇고 우리 교회 생활도 꼭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농사할 줄 아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장사할 줄 아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무엇을 만들 줄 아는 실업가도 있어야 되고 철학자도 필요하고 과학자도 필요하고 정치가도 필요하고 군인도 필요한 것입니다. 각각 다른 은사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회 전체 생활을 위해서 또는 교회 전체 생활을 위해서 우리에게 각각 다른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은사는 다르지마는 꼭 같이 필요하고 꼭 같이 귀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은사를 받았든지 그 받은 은사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함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고린도 교회 사람들처럼 어떤 은사를 특별히 받았다고 교만한 마음을 품고 자랑할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시비할 것도 아닙니다. 나는 다른 사람 보기에 별로 나타나지 아니하는 은사를 받았다고 마음에 불평을 가질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 가운데서 우리 교회 선체를 위해서, 우리 민족 전체를 위해서, 세계의 전 인류를 위해서, 전 세계가 발전하고 전 사회가 발전하고 전 교회가 발전하기 위해서 각각 다른 은사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 받은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것뿐입니다. 내가 눈이 되지 못하였다고 불평할 것 없습니다. 내가 귀가 되지 못하였다고 불평할 것 없습니다. 내가 발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내가 발 노릇만 잘하면 그 뿐입니다. 어떤 은사를 받았든지 우리는 감사할 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선한 청지기서 봉사하라. 이 모든 은사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이라』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아주 준 것이 아니고 맡긴 것뿐입니다. 청지기라고 하는 말은 요새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별로 쓰지 아니합니다. 청지기란 사람은 다른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대신 맡아서 처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전에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이었지마는 청지기의 책임을 맡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맡겨서 우리는 다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었은즉 권면하는 말씀이 있습니다.『이것을 맡긴 목적이 있다. 그러니 너희가 이 선물을 맡아 가지고 선한 청지기로서 이 은사를 바로 써서 서로 봉사하여라.』이것이 베드로 사도가 우리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이올시다.
우리가 이 은사를 받고도 쓰지 않는다고 하면, 그 사람은 달란트 비유의 한 달란트를 받은 게으른 종과 같은 사람이올시다. 마태복음 二十五장에 옛날로 말하면 금 닷 량중(兩重), 두 량중을 맡았던 종들이 있지 아니합니까? 주인이 멀리 갔다 돌아오는 사이에 이것을 가지고 장사하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닷 량중 받은 사람이 이것으로 장사를 잘해서 닷 량중을 더 남겼습니다. 두 량중 받았던 사람도 꼭 같이 장사를 해서 두 량중을 더 남겼습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에 주인은『착하고 진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니 내가 큰 것으로 맡기겠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 량중 박은 사람은 이것을 가지고 장사하지 아니하고 그냥 땅에 묻었습니다. 한 량중 그대로 주인 앞에 내놓았습니다. 주인은 크게 노했습니다.『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네가 이 돈을 은행에라도 맡겨서 이자라도 가져와야 될 것이 아니나?』하면서 한 량중 있는 것을 빼앗아서 열 량중 가진 종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악하고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 내쫓으라』하고 말했습니다. 영원한 지옥 불에 던지라고 하는 뜻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적으나 많으나 이런 종류나 저런 종류나 은사를 다 주었는데 이 은사를 쓰지 아니하고 묻어두는 사람은 이 악하고 게으른 종과 같은 사람이올시다. 또 우리가 이 은사를 쓰되 하나님의 뜻대로 쓰고 봉사하는 데 쓰라고 했는데 이대로 쓰지 아니하고 사리사욕을 위해서 이것들을 쓴다고 하면, 이 사람은 예수 님의 비유대로 불의 한 청지기올시다.
어떤 사람이 청지기를 두었더니 이 청지기는 주인 몰래 자기 마음대로 재산을 허비했습니다. 그 청지기를 내쫓았습니다. 맡겼던 것도 도로 다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우리 모든 믿는 사람에게 간절히 권면합니다.『너희들이 이와 같이 각각 여러 가지 은사를 받았은즉,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서로 봉사하여라.』
여러분, 저는 이따금 교회를 생각할 때에 이렇게 상상을 해 봅니다. 교회는 백화가 만개한 옛날의 에덴 동산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납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의 에덴 동산은 심히 아름다웠습니다. 거기 백화가 만발했습니다. 작은 꽃, 큰 꽃, 붉은 꽃, 노란 꽃, 향기도 가지각색, 모양도 가지각색의, 천차만별의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꽃이 핀 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다 아름다웠습니다. 큰 꽃이 크게 파나, 작은 꽃이 작게 피나, 붉은 꽃이 붉게 피나, 흰 꽃이 희게 피나, 이런 모양으로 피나 저런 모양으로 피나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종류로 은사를 주었든지 그 은사대로 아름다운 꽃이 피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에덴 동산이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 하나가 이 영락의 동산의 꽃나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은사대로 믿음의 꽃이 피어야 합니다. 그러하면 이 황막한 사막 같은 삼천리 강산에 하늘의 아름다움과 그리스도의 향기로써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백화가 만발한 에덴 동산이 되십시다.
또한 이렇게 상상해 봅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백과가 무르익은 큰 과원에 비교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과원에는 여러 가지 과실나무가 있습니다. 사과나무, 배나무, 복숭아나무, 밤나무, 포도, 대추, 혹은 열대 지방에 있는 나무들…….아마 에덴 동산은 이와 같은 과실나무로 가득 찬 줄 생각합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의 에덴 동산은 이렇게 과실로써 이 열매로써 차 있어서 종류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고 빛깔도 다르고 향취가 다릅니다. 그러나 각가지 과일이 충만한 에덴 동산이었던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언제단지 조금도 염려 없이 아무 수고하는 것도 없이 에덴 동산에서 이 과실을 넉넉히 먹고 평안히 살 수가 있은 줄로 생각합니다. 이 모든 과일들이 이렇게 모양도 다르고 빛깔도 다르고 향취도 달랐지마는 다 맛있는 과실이었습니다. 먹을 만한 과실이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우리 여기 앉은 하나 하나는 이 영락의 과실 동산에 심겨진 과실나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은사 받은 대로 열매를 맺으면 이 삼천만의 주린 생명을 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큰 배나무가 되지 못했다고 불평할 것 없습니다. 내가 어떠한 나무가 되었든지 어떠한 은사를 받았든지 그 은사로써 열매를 맺으면 그 뿐입니다.
저는 어떤 때는 우리 교회를 큰 악대(樂隊)에 배해서 혹 생각해 본 적도 있습니다. 각색 악기로 조직된 악대로도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큰 오케스트라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있습니다. 작은 나팔도 있고 큰 나팔도 있으며, 작은 플롯도 있고 큰 오보도 있으며 큰북도 있고 작은북도 있으며, 무슨 바이올린, 첼로, 큰 오케스트라에는 비파, 제금(提琴) 같은 여러 가지 악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악기의 종류가 모두 다릅니다. 이 악기의 모양도 다릅니다. 이 악기가 내는 소리도 다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악기들은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서 일시에 소리를 발하게 될 때에는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멜로디를 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우 하나 하나는 이 큰 하나님의 악대에서 말하자면 각각 다른 악기를 받은 대원과 비슷합니다. 우리의 받은 악기가 각각 다릅니다. 우리가 말하는 소리가 조금씩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맡은 악기를 일시에 그 지휘를 따라서 사용할
때에는 그야말로 이 불안과 공포와 사망의 그늘에서 헤매는 전 인류에게 하늘의 멜로디를 들려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영락교회가 이와 같은 악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악기를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니까? 여러분이 그 악기를 가지고 여러분이 낼 수 있는 소리를 내십니까? 이 창립 十七주년 기념 주일을 당해서 각각 다섯 가지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첫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내가 과연 이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되었나? 그것을 물어보세요. 내가 사실 죄를 회개하고 예수 님을 내 주로 믿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내가 사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나? 내가 사살 이 큰 악대의 대원이 되었나? 여러분이 각각 대답해 보세요.
둘째, 내가 만일 사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고 할 것이면 내가 받은 은사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내게 특별히 주신 은사가 무엇인가? 이것을 찾아보세요.
셋째, 내가 받은 은사를 쓰는가, 묻어 두었는가? 이것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받은 이 은사를 가지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봉사하는가, 봉사하지 않는가? 이것을 물어보세요.
넷째, 내가 받은 이 은사를 쓴다고 하면 어떻게 쓰는가? 사리사욕을 위해서 쓰는가,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쓰는가? 어떻게 쓰는가?
다섯째, 내가 이제부터 이 은사를 쓴다고 하면 언제부터 바로 쓰기를 시작하겠나? 이제부터 시작하십시다. 영락의 꽃동산에 모든 꽃이 다 피기를 바랍니다. 영락의 과실나무가 다 각각 자기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락의 악대가 일시에 다 소리를 발해서 이 악한 여리고 성 같은 악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옛날 성현에게 나가가 잘되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얼른 대답하는 말이『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니라』하였습니다. 임금은 임금 노릇 잘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 잘하고,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 잘하고, 아들은 아들 노릇 잘하고, 각각 임금에서 국민에 이르기까지 책임을 다하는 말입니다.
몸이 건강 하려고 하면 이 몸에 붙은 지체 하나 하나가 건강해서 자기 일을 해야 몸 전체가 건강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창립 十七주년 기념일을 당하여 간절히 저 자신이 기도하는 것이 있습니다.『이 영락교회를 백 퍼센트 기도하는 교회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도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 없고 이 동산에 심어진 나무는 작으나 크나 은사 주신대로 열매 맺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우리가 어떤 재능을 받았든지 그 재능을 가지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봉사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시간이 있으면 시간을 가지고 몸 된 교회를 봉사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많이 받았든 적게 받았든, 재능을 가지고 충성을 다해서 교회를 봉사해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는 二十주년 기념 사업을 지금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을 완성하려고 하면 큰 재정의 부담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각각 은사 받은 대로 내 충성을 다하면 이것도 가능할 줄 생각합니다. 또 희년을 당해서 五개년 계획으로 교회의 교인 수를 배가하고 五백 교회를 더 세울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영락교회에서 솔선해서 전도 회에 들뿐더러 금년 안으로 개인 개인이 전도를 해서 한 사람씩 구원하는 이 일을 해야 되겠습니다. 十二월은 창립 기념 주일이 있는 달이요 크리스마스가 있는 달인데, 금년에는 우리가 한 사람씩 다 전도하기를 작정하고서 아직 이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분은 十二월 안으로 실행하도록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창립 十七주년 기념 주일을 당해서 베드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기억하십시다.『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와 같이 서로 봉사하라.』
(一九六二년 十二월 二일·창립 十七주년 기념설교)


Ⅴ-8 사람과 그 생각 (골로새서 三장 一-十七절)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三·二)

이제 골로새 二장 十二절과 그 다음에 三장 一절과 二절을 계속해 봉독(奉讀)하겠습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실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
오늘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축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三장 一절에『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하는 말씀을 볼 때 여기 살리심을 받았다고 하는 말은 영적 부활을 의미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 옛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같이 영적으로 부활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행할 바를 특별히 여기 두 가지로 권면(勸勉)했습니다.
첫째는『위엣 것을 찾으라』권면했고, 둘째는『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그 둘째 권면을 중심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골로새 三장 二절을 제가 다시 읽습니다.『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사람과 그의 생각의 중요성을 먼저 기억하십시다. 시편 三十九편 三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묵상할 때에, 깊이 생각할 때에 화가 발하니, 즉 불이 붙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무슨 생각이나 깊이 또한 오래 하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말하자면 가슴에 불이 납니다. 그리해서 결국은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것은 좋은 생각도 그렇고 나쁜 생각도 그렇습니다.
옛날로부터 오늘날까지 과연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고 인류의 사도가 된 이들은 다 좋은 생각을 깊이 한 분들이올시다. 모든 위대한 종교가가 그러합니다. 모세는 시내 광양에서 깊이 하나님과 자기 민족에 대한 문제를 생각한 분이올시다. 엘리야도 호렙산에서 깊이 하나님과 자기 민족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생각한 분이올시다. 세례 요산도 광야에서 오랫동안 묵상한 불이올시다. 사도 바울도 아라비아에서 三년 동안 묵상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졌고, 말하자면 그들의 마음속에 불이 나서, 불이 타서 큰 구원의 역사를 이룩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종교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철학자도 역시 그렇습니다. 혹은 소크라테스니 디오게네스니 플라톤이니 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인생 문제, 우주 문제에 대한 깊은 사생을 한 분들입니다.
철학자만이 아닙니다. 역시 과학자도 그렇습니다. 이들도 깊이 생각하고 자연을 관찰하고는 그것을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서 새로운 사실과 원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알키메데스 같은 사람은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면서도, 어찌해서 사람의 몸이 물 속에서는 가벼워질까 하고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서 저 유명한「알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하고『내가 찾았다. 내가 발견하였다!』하면서 뛰어나왔다고 하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뉴우톤이 사과 알이 떨어질 때 그것을 보고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서 지구의 인력과 만유인력의 그 사실을 발견했다고 하는 것도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다 좋은 생각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그 반면에 악한 생각도 깊이 하게 되면 크게 악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우리 사회 가운데서도 큰 흉악한 범죄를 한 사람들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한 것이 아닙니다. 깊이 생각해 가지고 그 결과가 결국은 그들로 하여금 매우 흉악한 사람을 만들었고, 매우 흉악한 일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항상 자기의 생각을 살펴서 조심해야 됩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사람은 흔히 생각하는 대로됩니다. 생각하는 일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생각은 알(卵)과 같다』하였습니다. 비둘기 알과 같이 좋은 알을 품으면 마지막에 아름다운 비둘기를 까는 것입니다. 독사 알과 같이 악한 생각을 오래 품으면 마지막에 독사 새끼를 깝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알아서 우리의 생각을 항상 조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 가운데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니 간단히 두 가지 생각을 지적하면서 권면했습니다.『위엣 것을 생각하라.』『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위에 속하는 생각이 있고 땅에 속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 두 가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특히 믿는 사람들에게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땅에 속하는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선 땅에 속하는 것, 생각 안 할 것부터 몇 가지 생각해 봅시다. 안 할 몇 가지 꼭 있어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지마는, 그 가운데 세 가지만 지적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분한 생각, 원한, 남을 미워하는 생각, 이런 생각을 우리가 오래 가지면 안 됩니다. 물론 무슨 중상을 받을 때, 혹은 재정적으로 손해를 받을 때에 섭섭한 마음이 들어오는 것은 사실이올시다. 분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오래 품으면, 원한이 되면, 미운 생각을 그냥 오래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나 스스로 내가 손해를 받습니다.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고 성만찬을 베푸는 유명한 그림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고 하는 유명한 화가가 있지 않아요? 그가 이 성만찬 그림을 처음 그릴 때에 한 사람 두 사람 드려 가는데 마침 어떤 다른 예술가와 무슨 사소한 일로 크게 싸움을 했습니다. 싸움을 하고 그 사람 미운 생각이 마음 가운데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 성만찬 그림을 그리다가 유다를 그릴 참인데 어떤 얼굴을 그릴까 마음 가운데 생각하다가『옳지! 그놈, 그놈의 얼굴을 그리자!』하고는 자기와 싸운 그 예술가의 얼굴을 그려 놓았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예수 님의 얼굴을 어떻게 그릴까 묵상하고 이렇게도 그려보고 저렇게도 그려보고 해야 예수 님의 얼굴을 바로 그릴 재간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 님의 얼굴을 바로 그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몇 번 실패하고 실패하다가 마지막에 자기가 자신을 스스로 반성해 보았습니다.『내가 어째서 예수 님의 얼굴을 그릴 수 없을까?』그 다음에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옳지, 내가 이렇게 다른 예술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을 가지고 내가 예수 님의 얼굴을 바로 구상할 수가 있나!』그래서는 곧 그 자리에서 반성을 하고 처음에 그렸던 그 유다 얼굴을 지워버리고 다른 얼굴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서야 예수 님의 얼굴을 바로 그려서 지금까지 유명한 그 그림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미운 마음을 가지고는 내가 내 생활에서 예수 님의 얼굴을 그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 님의 생활과 같은 생활을 내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일로 나에게 분한 마음이 일어났든지 간에, 그런 마음을 오래 품으면 안 됩니다. 성경에 보면,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고 권면을 한 것입니다.
둘째로, 꼭 땅에 속하는 악한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시기하는 생각이올시다. 남을 시기하는, 남 잘되는 시기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옛날부터 승기자염이라고 나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하는 그런 감정인데, 이것은 실상 나 자신의 교만, 나 자신의 이기주의, 나 자신의 열등감, 나 자신의 부족한 가운데서 오는 합당치 않은 감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래 품으면 결국은 나 자신이 타락됩니다. 더 타락됩니다.
여러분, 유명한 사울 왕의 비참한 말로를 여러분께서 다 구약을 읽고 기억하시지요? 사울 왕이 젊어서 시작할 때에 아주 위대한 인물로서 시작했습니다. 키도 남보다 훨씬 더 크고 기력이 강하고, 그 용맹이 다른 사람보다 크게 뛰어나고 지략이 아주 탁월하고, 믿음도 있고, 초기의 그 혼란한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거두어서 나라를 처음으로 형성한 사람이 사울 왕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물이 어떻게 점점 타락하였습니까? 다윗 왕이 나타날 때에 자기와 가까운 사이지마는 그를 시기하는 마음이 들어갔습니다. 그 시기하는 마음이 일어난 다음부터는, 성경에 보니까, 사울 왕의 마음이 악령에게 붙잡혔다고 했습니다. 악령에게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미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타락하고 실패한 그 말로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시기는 암(癌)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 암과 같이 시기가 점점 오래 그면 전신에 퍼져서, 암이 전신을 썩히는 것처럼, 시기라고 하는 것도 사람의 영혼을 썩혀 버립니다. 고린도 전서 十三장에『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워서 나보다 나은 사람을 더 사랑하고 더 도와주고 그 사람이 세상에 난 것을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불결한 생각이올시다. 불결한 생각, 정욕의 생각…….인간은 성적 본능이 있어서 누구나 일시적 성적 충동, 혹은 유혹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결한 생각을 계속해서 품는 것은 각각 자기의 책임입니다. 품을 이유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가 어떤 산골길을 지나갈 때 새가 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왜 그 새가 머리 위에 앉아서 둥지를 틀기까지 가만히 두느냐 그 말입니다. 잠깐 동안 유혹을 받을 수 있으나, 그런 생각을 마음 가운데 오래 품어서 둥지를 틀기까지 하면 마지막에는 더러운 음란의 죄를 짓고야 맙니다. 불결한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올 때에 이것을 깨끗이 지워 버려야지 그냥 오래 주는 것은 우리를 결국은 크게 타락하는 데로 이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지키기 위해서는 주의할 것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몇 가지만 말하면, 소위 대중잡지, 무슨 소설, 좋지 못한 활동사진, 서적 같은 것을 특별히 삼가서, 무엇을 읽으며 무엇을 보며 어디를 가며, 이런 것을 특별히 삼가서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지키도록 우리가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엄히 경계합니다.『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이런 것들이 마음 가운데 들어올 때 곧 죽어버리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 땅에 있는 것 몇 가지를 생각했으면 이제 위엣 것을 생각하여야겠습니다. 적극적으로 위엣 것을 생각하십시다. 사실 땅엣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유일(唯一)의 길은 위엣 것을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병 속에 들어 있는 공기를 내보내려고 하면, 맑은 물을 넣으면 자연히 공기는 쫓겨 나갑니다. 이것을『불가입성(不可入性)의 월리』라고 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면 땅엣 것은 자연히 소멸되고 들어올래 야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위에는 누가 계십니까?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항상 생각하고 하늘 나라를 항상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항상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일월성신과 대 우주를 볼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산천초목을 볼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오곡백과를 볼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볼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해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인 것을 항상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어린애 들를 볼 때에도 애들이 다 사랑스럽고 귀엽지마는, 이 애들을 볼 때에 하나님을 사랑해서 이 애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이요 천국에 있는 애들이 이와 같지 아니한가 하는 생각으로 애들을 볼 때에 어린애들이 얼마나 귀한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사귈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자매와 사귈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언제든지 사교 생활에도 하나님을 생각해서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로서 사교를 하라는 말입니다. 밥상을 가져다 놓고도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음식물을 본래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장사를 할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벌란 말입니다. 사업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천국 사업을 돕기 위해서 하라는 말입니다. 약을 먹고 건강을 보존하려고 하는 것도 이 몸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먹으라는 말입니다. 병을 치료할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위엣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멀리 사방을 바라볼 때에 언제든지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곳에 천국이 임할 것입니다.
또 그 다음으로, 위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라는 말은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그 말입니다. 그의 겸손한 마음을 생각하세요. 그의 온유한 성품을 생각하세요. 그의 진리의, 교훈을 생각하세요. 그의 깨끗한 생활을 생각하세요. 그의 만민을 대속(代贖)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고난을 생각하세요. 그의 부활의 능력을 생각하세요. 그의 승천을 생각하세요.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빛나는 얼굴을 생각해 보세요. 곧 그의 사랑과 가의 인내 그의 자비와 그의 긍휼(矜恤)과 그의 능력과 그의 성결(聖潔)을 묵상하자는 말입니다. 분한 생각이 들어올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기도한 말씀을 생각하세요.『오! 하나님, 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이들이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스데반은 순교를 당할 때에 그리스도를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기도를 생각했어요. 그래서 자기도 죽을 때에 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를 하면서 죽었단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하늘을 볼 때에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살 때에도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죽을 때에도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하였습니다.
성 프란시스는 그리스도를 얼마나 간절히 생각했던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얼마나 간절히 생각했던지, 두 손바닥에 그 못 자국 흔적이 생겼다고 하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성 프란시스의 성품과 모든 것이 그렇게 그리스도와 비슷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한다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모든 고결한, 모든 고상한 생각을 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빌리보 四장 八절에 이렇게 권면했습니다.『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무엇들을 생각해요?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무엇에든지, 어떤 기회든지, 무엇을 할 때든지, 친구간에도, 사교할 때에도, 공부할 때에도, 독서를 할 때에도, 언제든지 진선미(眞善美), 가장 고결하고 고상한 생각은 그리스도에 속하는 것인데, 이런 생각으로 책을 읽고, 이런 생각으로 사교를 하고, 이런 생각으로 장사를 하고, 모든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고결하고 고상한 생각을 하라는 그 말씀이올시다.
또 하늘에는 하나님 나라 곧 천당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당에 가리니……』우리가 지금은 다 장막 집을 쓰고 이 세상에 나그네처럼 삽니다. 그러나 오래지 아니해서 우리가 화려한 천당에 갈 것이니까 예루살렘 금성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새 예루살렘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
『예루살렘 금성아 복 가득하도다. 내 너를 생각할 때에 이 마음 기쁘다.
비할 데 없는 복과 영화론 광채와 나 받은 모든 기쁨 측량 못할려라.
시온산 성전 안에 천사와 성인들 주 찬송하는 소리 그치지 않도다.
주께서 계심으로 그 빛이 명랑코 저 방초동산들은 푸른 빛 띠었데.』
하늘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천사들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먼저 간 성도들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아름다운 봄 동산을 볼 때에 천당을 생각해서 『아, 천당은 저 동산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좋은 성가대의 음악을 들을 때에『아, 이 음악이 얼마나 귀한가. 그러나 하늘 나라의 천군 천사의 노래는 그보다 얼마나 더 귀하겠는가!』하고 하늘 나라의 음악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좋은 사람을 만날 때에『아, 그 사람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 그러나 하늘 나라에 있는 성도의 얼굴은 얼마나 빛나고 얼마나 더 좋겠나!』하고 하늘 나라에 있는 성도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보나 위엣 것을 생각하라는 그 말씀이올시다. 자,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항상 위엣 것으로 채우는 실제적 방법 하나를 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성경을 매일 보고 매일 읽고 매일 묵상하는 길은 우리의 가슴을 위엣 것으로 충만히 채우는 유일의 방법이올시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것으로 찹니다. 그리스도의 것으로 찹니다. 하늘의 것으로 자연히 찹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읽었지마는, 시편 제一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북상하는 자로다.』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할 수 있습니까? 주의 말씀을 따라서 삼가면 청년들이 아름다운 생활을 할 수가 있어요.『내가 주께 범죄 치 아니하려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매일 아침저녁에 성경을 읽으세요. 보통으로 읽고 잊어버리지 말고 할 수 있는 대로 따로 외우세요. 할 수만 있으면 좋은 성경 절을 따로 외워서 아침마다 저녁마다 마음에 따로 외우고 잠깐 기도하고 자면 자연히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케 됩니다. 가령 시편 二十三편, 시편 二十七편, 혹은 이사야 四十장 三十一절, 四十一장 十절, 혹은 신약의 마태복음 七장 七절, 여러분 다 기억하시겠습니까?
시편 二十三편에는『여호와는 나의 목자(牧者)시니』, 시편 二十七편에는『여호와는 내 빛이시니』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四十장 三十一절에는『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어서 독수리 같이 날아 올라간다』는 말씀이 있어요 四十一장 十절에는『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의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七장 七절에는『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어주시리라』하는 말씀이 있고 五장 四十八절에는『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하는 말씀이 있어요. 마가복음 九장 二十三절에는『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것이 없느니라』하는 주님의 말씀이 있어요. 데살로니가 전서 五장 十六, 十七, 十八절에『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빌립보 四장 十三절에『내가 네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한 것이 없느니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 이와 같은 생명이 풍부한 성경 말씀을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외우고 길 갈 때에도 외우고 항상 우리 마음 가운데 두면 자연히 우리의 마음은 위엣 것으로 충만해집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에는 주님의 평강(平康)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같이 합니다.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어요.
오늘은 성서 주일이올시다. 성경책을 집에 사다 놓은 것은 물로 좋습니다. 그러나 두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읽는 것이 목적입니다. 가족들과 매일 한 번씩 같이 읽고 시도하세요. 가족 기도회 볼 때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하세요.
『위엣 것을 생각하라.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
(一九六二년 十二월 九일 선서주일)


Ⅴ-9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 (누가복음 二장 八-二十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二·十四)

이 말씀은 주님께서 탄생하시는 새벽에 들려온 천군 천사의 노래의 일절 입니다.
오늘 아침 천군 천사의 이 찬송의 내용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찬송은 간단히 말하면 두 절이올시다.『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요』,그리고『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 이 크리스마스 아침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에게 가장 큰 영광을 돌릴 줄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이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돌릴 줄 생각합니다. 백두산 위의 흰 눈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금강산의 一만 二천 봉도 언제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봄 동산의 꽃과 여름의 녹음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백설이 역시 하나님께 영광을 도립니다. 심지어 흐르는 시내와 울리는 파도도 역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줄 압니다. 더 나아가서 우뢰(雨雷)나 번개까지도 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일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린 일은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탄강(誕降)하신 일입니다.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먼저 이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가장 큰 희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신 것은 가장 큰 희생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상에서 바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희생하셨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이 주님의 탄강은 가장 큰 겸손을 의미합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종의 형상을 입으시고 인간 세상에 오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가장 천한 마구간에 나시고 첫 보금자리가 구유였습니다. 가장 큰 겸손을 의미합니다. 이 일은 가장 큰사랑을 의미합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사랑이 나타났습니다. 독생자를 보내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실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탄강! 이 일은 가장 큰사랑을 의미합니다. 한 걸음 나아가서 이 일은 가장 큰 능력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전능하신 이가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 사이에 강림하실 수 있는지 우리는 다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직 신비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움직임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야말로 가장 큰 일을 이룩한 것입니다. 이 우주에 가장 일이 무엇인가를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죄인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온 지구보다 더 귀중합니다. 그러므로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에 하늘에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을 구원하는 가장 큰 일을 이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리기를 원합니까? 죄인을 구원해야 되겠습니다. 죄인을 구원함으로 지극히 높은 곳(하늘)에는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은『땅에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로다』입니다. 간단히 말하면『땅에는 평화로다』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이 땅 위에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평화 혹은 평안은 하나님의 모든 축복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행복의 총량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큰 행복이 무엇이겠습니까? 평화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평화입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마음이 불편하면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단종 애사」를 읽어 보셨지요?「세종대왕」을 다 읽어 보셨지요? 수양대군이 자리를 탐내서 사육신을 죽이고 조카 되는 단종을 역시 죽이고 높은 자리를 점령했지만 항상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항상 번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불행한 세월을 살다가 가고 만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불편하면 산해진미가 상위에 진설 되었다고 할지라도 맛이 없습니다. 아무리 침대가 따뜻하다고 할지라도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혹 잠을 이루어도 꿈자리가 사납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불편하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편지 한 장을 바로 쓰지 못합니다. 그릇 하나를 바로 부시지 못합니다. 보통 깨뜨리기 쉽습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속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이「평화」올시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술을 먹어보는 일이 있습니다. 술을 먹은 다음에는 마음이 더 비감해져서 보통으로는 통곡으로 마칩니다. 예수께서는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모든 번민(煩悶)과 고통과 슬픔과 근심에 쌓인 가슴마다 이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 가정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여러 가지 있을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아무리 고루거각(高樓巨閣)을 지어 놓고 호의호식한다고 할지라도 그 가정에 평화가 없으면 그 가정은 불행한 가정입니다. 부부간의 싸움이 그치지를 않고……이런 가정에 아무리 풍부한 물질이 있다고 할지라도 행복은 없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기록한 대로『일단식 일포음하고 곡굉이침지라도 낙역재기중』(一單食 一瓢飮 曲肱而沈之 樂亦在其中)이란 말이 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당지께에다 밥을 담아 먹고 바가지로 물을 마시고 베개가 없어서 팔을 구부리고 잔다고 할지라도 마음만 편안하면 또한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역시 나물을 먹으면서 화목 하는 것이 살찐 송아지를 잡아먹으면서 싸우는 집안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 가정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이「평화」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 가정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있어야 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평화입니다. 四·一九 학생혁명이 부패한 정부를 전도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것을 전복해버린 것은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국 학생혁명 이후에 온 사회가 어지러워졌습니다. 도처에 데모와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회에 평화가 없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선생과 학교에서 싸우고, 노동자들은 자본주들과 공장에서 싸우고, 상점에서도 싸우고, 정당끼리 싸우고, 국회에서 싸우고, 도처에 싸움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군사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에 일반 민중이 군사혁명을 환영하게 되었던 것도 우리가 기억합니다.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치안입니다.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이 세계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역시 평화입니다. 과학이 발달되어 새로운 지식을 많이 얻었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많이 습득했습니다. 대량으로 물자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교통이 편리하여졌습니다. 통신이 편리하여졌습니다. 라디오를 쓰고 텔레비전을 보고들을 수 있습니다. 제트기로 여행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전보다 편리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인류가 평화롭게 살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은 세계가 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 이 세계의 모든 인류가 오직 불안과 공포 가운데 떨고 있습니까? 오직 한 가지가 없습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둘째에는 한 가지 조건이 붙은 것을 기억하세요.『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로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온 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만 이 평화가 자연히 임하게 됩니다.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는 말은 주를 영접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주께서 마음 문을 두드리실 때에 문을 열어놓고 주를 영접하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주를 영접하는 자들 사이에만 자연히 평화가 임합니다. 전에 사람들이 쓴 글 가운데『태양이 아무리 밝지마는 덮어놓은 항아리 속은 비출 수 없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평화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더라도 덮어놓은 우리 항아리 속게 평화를 억지로 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은 덮어놓은 항아리처럼 주님의 빛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평화를 가지고 오셨지마는 그 마음이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그 나라가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면 자연히 평화는 전국적으로 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평화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 중에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직까지 마음에 평화가 없는 이가 있습니까? 주님을 영접하세요. 여러분의 마음이 덮어놓은 항아리 같다고 하면 결코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마음을 바로 놓으세요. 그리고 주님을 영접하세요. 여러분의 가정에 평화가 없습니까? 여러분의 온 가정이 주를 향해서 문을 열었습니까? 영접했습니까? 우리 사회는 어떠합니까? 우리 사회가 전적으로 주를 향하여 문을 엽니까? 오, 한국의 민족이여! 문을 열고 평화의 주를 영접해야 되겠습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땅에는 평화가 임한 날이올시다.
우리 하나 하나의 가슴속에, 가정 안에, 온 사회와 민족 안에, 온 세계에 평화가 속히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一九六二년 성탄절 낮 예배)


Ⅴ-10 알파와 오메가
(요한계시록 一장 一-八절, 二十一장 一-八절, 二十二장 十三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二十二·十三)

오늘 아침에 생각할 말씀은 알파와 오메가올시다. 이 알파, 오메가라고 하는 말씀은 요한계시록에 세 번 나타납니다.
먼저 一장 八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하신 자라 하시더라.』
두 번째로 二十一장 六절에 있습니다.『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세 번째에는 그 다음 장인 二十二장 十三절에 있습니다.『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본래 헬라의 알파베트 二十四자 가운데「알파」라고 하는 말은 처음 글자 이름이요,「오메가」라고 하는 말은 마지막 글자 이름이올시다. 가령 우리 한글로 말한다고 하면「가」에서부터「하」까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一장에 있는 말씀과 또 二十一장에 있는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셨고, 마지막 장인 二十二장 十三절에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서 또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알파와 오메가의 뜻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그 무슨 뜻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영원 무한의 존재라고 하는 뜻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도 되시고 나중도 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시고 영원 후까지 계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생각할 때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님은 시작과 끝입니다. 무한에서 무한에 미치기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와 같으신 하나님이라고 여러 곳에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시편 九十편 二절에는『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하박국 一장 十二절에는『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며,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만세 전부터 만세 후까지 계십니다. 영원 무궁토록 계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시편 一三九편은『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하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신, 무한에서 무한에까지 계시는 하나님이올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요, 하나님은 안 계실 때가 없으시고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 十三장에『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하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항상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제가 없고 내일이 없고 항상 오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가 없고 현재가 없고 미래가 없고 항상 현재에 계시는 하나님이올시다. 하나님께는 먼데가 없고 가까운 데가 없고 동이 없고 서가 없고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인간들이올시다.
둘째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만물의 시작과 끝이 되신다는 말이올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우주에 알파도 되시고 오메가도 되십니다. 우주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고 우주의 종국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창세기 一장 一절의『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는 말씀대로 맨 처음에 하나님이 이 천지를 창조하심으로 이 우주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계시록 二十장 十一절을 보면『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가 없더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우주의 종국도 결국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인생을 지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이 인생을 불러 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九十편 三절의『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하는 말씀대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인간 역사의 시작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요. 결국 인간 역사의 종국도 마지막 페이지도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 온 세계의 최후 페이지도 결국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구원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우리가 구원 얻은 것도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十二장 二절에는『그리스도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택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요, 독생자를 보내시는 이도 하나님이요, 죄를 사하여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요, 영생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요, 우리의 영원한 집을 준비하시는 이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우리 구원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것이올시다. 이렇게『나는 알파와 오메가라』하시는 말씀은 둘째로는 만물의 기원과 종국이 되신다고 하는 뜻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시종이 여일 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처음과 끝이 다름이 없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는 알파가 있는 것과 같이 오메가도 반드시 있습니다. 그리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알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메가까지 있는 사랑입니다. 첫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끝까지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은 알파는 있지마는 오메가가 없는 사랑이 종종 있습니다. 친구간의 사랑을 보아도 처음에는 피차에 서로 사랑하고 가까이 하지마는 마지막에는 점점 멀어져서 오메가가 없는 우정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심지어 부부간의 사랑을 보더라도 알파의 사랑은 끔찍합니다. 그러나 어떤 가정을 보면 사랑이 식어가서 오메가의 사랑이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심지어 서로 헤어지는 가정의 비극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알파와 오메가의 사랑입니다. 처음과 나중이 같은 사랑입니다. 시작과 끝이 같은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예레미야 三十一장 三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引導)하였도다.』하나님의 사랑은 무궁한 사랑입니다. 요한 복음 十三장 첫 절에 예수 님께서도『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알파의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메가의 사랑으로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八장 三十五절에 보면『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困苦)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赤身)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것이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끓을 수가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알파와 오메가의 사랑인 까닭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의도 다 그러합니다. 시편 一四五편 十七절에 보면『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라고 말했습니다. 혹은 시편 十一편 五절에 보면『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强暴)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옛날이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기초를 둔 자연 법칙은 옛날 아브라함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알파와 오메가의 공의올시다. 하나님의 공의에 기초를 둔 도덕 법칙은 옛날 모세 때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때나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의 법률은 조변석개(朝變夕改)올시다. 아침에 변하고 저녁에 고칩니다.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제 마음대로 뜯어고칩니다. 이것이 인간의 공의를 기초로 한 인간 사회의 법률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알파와 오메가의 공의로서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도 악인은 벌하시고 오늘에 와서도 악인은 벌하십니다. 옛날에도 죄를 참으로 회개할 때에 그는 미쁘고 의 로우사 죄를 용서해 주셨고, 오늘날도 죄를 참으로 회개할 때에 미쁘고 의 로우 사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변치 아니하시므로 언약을 하였으면 옛날도 지켰고 오늘도 지켰습니다. 사람처럼 언약해 놓고 이렇고 이렇게 변하고 저렇게 변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알파와 오메가의 공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선을 주시며 옛날에도 주셨고 오늘날에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알파와 오메가의 공의올시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인 까닭으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마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五장 二十四절에『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야 우르에서 불러내어서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시기를 시작한 후에는 끝까지 인도해서 가나안 복지에 도달하게 하실 뿐더러 아브라함의 일생을 주장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모세를 통하여 건져서 홍해를 일단 건너게 하신 후에 오래 광야에 머무르게 했지마는 그냥 내버려두시지 아니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여호수아를 계대(繼代)하게 해서 그 백성을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시고야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으로 우리의 구원을 성취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실 역사를 시작하셨으면 그 일을 마치게 하시는 하나님이올시다. 내 손에 준 자를 빼앗기지 아니하시겠다고 예수 님께서 말씀했습니다.
이와 같은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알파와 오메가의 신앙을 요구합니다. 시종이 여일 한 신앙을 요구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신으로 마치고자 하느냐? 너희가 전에는 달음박질을 잘하더니 오늘날 어떻게 이 모양이 되었느냐?』하나님께서는 알파와 오메가의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처음과 나중이 같은 신앙을 요구합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十년 전에는 달음박질을 잘하던 사람이 오늘날 쉬는 사람은 없습니까? 이북에서는 주를 잘 봉사하던 사람이 이남에 와서 쉬는 사람은 없습니까? 알파는 크게 기록했지마는 오메가는 쓸 줄 모르는 신앙은 없습니까? 우리 동양의 속담에도 용두사미(龍頭蛇尾)란 말이 있지요. 용의 머리에 뱀의 꼬리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까? 잘 시작했지만 세례도 못 받은 사람은 없습니까? 마라톤 선수가 달릴 때에 어느 때에 달음박질을 잘하지 아니 하리요 마는, 제일 마지막 시간에 달음박질을 잘해야 그 경주에 승리를 합니다. 그러기에 승리는 최후의 五분간이란 말이 있지 아니합니까?
젊었을 때에는 오히려 주의 일을 열심으로 하고 모든 일을 잘하다가 나의 많은 가운데서 오히려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주를 위해서 더 봉사할 수 있으련마는 쓰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파와 오메가의 사상을 요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내가 너희에게 책망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너희가 처음 사랑을 버린 일이다. 처음에는 주님을 끔찍이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였지마는 그 사랑이 점점 식어져 버렸다』고 책망했습니다. 알파의 사랑은 있지마는 오메가의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알파의 사랑을 귀하게 여기시지만 오메가의 사랑을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끝까지 우리가 주를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데마 처럼 세상을 사랑해서 데살로니가로 가는 사람은 없습니까? 알파와 오메가의 사랑을 요구합니다.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시므온과 같이, 안나와 같이, 일생토록 마지막 끝까지 주를 만나고 주를 찬송하는 이와 같은 사랑을 요구합니다.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시 알파와 오메가의 봉사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몇 해 전에 주를 잘 봉사했습니까? 교회를 잘 봉사했습니까?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메가의 봉사를 요구하십니다. 처음에 직분을 맡을 때에 우리가 열심으로 잘 보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몇 해 지나서 오늘날 어떻습니까? 오메가의 봉사가 있습니까? 알파와 오메가의 봉사를 요구하십니다.
一년의 첫 주일을 알파의 주일이라고 하면 그 해 마지막 주일은 오메가의 주일이올시다. 이 오메가의 주일을 당해서 내가 과연 알파와 오메가의 신앙을 가지는가, 봉사를 가지는가를 깊이 생각할 날인 줄 압니다. 우리가 세상에 난 날, 생일이 알파의 날이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언제든지 오메가의 날이 온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메가의 날에 대한 나의 준비가 어떤가를 기억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구원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때에는 우리는 아무 때나 염려가 없습니다.
우리가 一년을 지내고 마지막 주일을 당할 때 우리는 자연히 一년 동안에 벌써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 나라로 간 성도들을 기억합니다. 우리 하나 하나의 오메가의 날도 결국은 올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중심에 영접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날 우리 하나 하나에게 이 알파와 오메가의 신앙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一九六二년 十二월 三十일)


Ⅴ-11 시온아, 이 소식을 전파하라 (이사야서 四十장 一-十一절)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시온이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이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 四十·九)

一九六三년 새해 첫 주일 아침에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시온이여…』여기 시온 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을 먼저 분명히 파악해야 하겠습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우리 한국과 비슷하게 흔히 성을 산상에다 쌓습니다. 우리 한국의 북한산성, 남한산성들처럼 예루살렘 성도 산 위에 건축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을 건축한 그 산이 시온 산입니다. 따라서 어떤 때에는 시온 산상에 있는 건축된 예루살렘 성을 시온 성이라고도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온 이라고 하는 말은 사의 이름이요, 지리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이와 같은 의미로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둘째의 의미가 있습니다. 시온성을 말하게 되니까 자연히 시온성에 사는 사람들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을 시온 이라고 부른 적도 있게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시온 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하늘에 있는 하늘 나라를 「시온」이라고 기록한 데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온 이라고 하는 말은 본래를 지리적인 의미만 있었지만 성경에서는 이와 같은 신령한 의미가 첨가되어 사용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의미가 내포된 이런 말을 무슨 장사라는 목적으로 시온 다방이라고 한다든 가, 시오 캬라멜이라고 한다든 가, 무슨 시온 빵이라고 한다든 가, 이렇게 사용되는 것은 거룩한 말을 모독하는 일이요, 무지한 사람들의 소치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또『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시온이여』그랬는데 이「아름다운 소식」이란 말은 좋은 소식, 기쁜 소식, 간단히 말하면「복음」이란 뜻이 되겠습니다. 이「아름다운 소식」이란 말도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먼저 이사야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에서 오래 포로 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받게 되는 소식을 전하게 되었는데, 이 소식이야말로 그 포로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소식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사야 四十장 이하를 읽을 때에 포로들에게 해방의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소식을 의미하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반드시 그런 의미 뿐 아니라, 둘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만민을 죄악의 쇠사슬 가운데서 해방하는 아름다운 소식의 의미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二장에 예수 님께서 탄생하실 때에 천사가 나타나서 목자들에게 전해 주는 말『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리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한 아름다운 소식의 의미도 있습니다. 만민을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 주실 이가 오셨다고 하는 기쁜 소식,「복음」이라고 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사야 四十장 九절을 읽을 때에 이와 같은 깊은 의미로서 읽어야 그 뜻을 바로 깨닫게 됩니다.『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시온이여, 교회여』하는 뜻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이여』예루살렘도 역시「교회」라는 뜻과「하늘 나라」라고 하는 의미도 있습니다.『예루살렘이여, 교회여, 높은 산에 오르라. 네 소리를 높이라,』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할 때에 제일 먼저 우리 마음속에 깊이 느껴지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시온(곧 거룩하신 하나님의 교회)의 특권과 영광은 곧 아름다운 소식을 소유했다고 하는 이 사실입니다. 시온에 특수한 영광이 있는데 그것은 이 아름다운 소식, 복음을 소유한 그것입니다. 이 복음은 교회의 특수한 소유올시다. 이 세상 어느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떤 다른 단체, 어떤 다른 기관, 아무리 그 단체 기관이 크다고 해도 거기서는 복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국가가 힘이 세고 크다고 하지만 어떤 국가든지 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는 복음을 소요한 그런 국가는 없습니다. 이 복음은 오직 교회가, 하나님의 시온이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참된 영광과 자랑도 이 복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 여러 가지로 자랑할 것이 있는 줄 압니다. 우리는 그 유구한 역사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과거 二천년간에 많은 민족과 나라들이 성하였다 쇠하였고, 흥하였다 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지금까지 역사의 험한 파도를 헤치고 내려오는 귀한 역사를 볼 수가 있습니다. 혹은 우리 교회가 가는 곳마다 문화가 발흥이 되고 학문이 발달되어서,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 문화라고 하는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이것이 자랑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의 참된 자랑은 아닙니다.
복음을 소유한 것이 참된 자랑입니다. 혹은 교회가 가는 곳마다 병원이 건축되었고, 고아원이 건축되었고, 혹은 양로원, 모자원, 여러 자선사업 기관이 건립되었고, 봉사 운동이 전개된 것을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참된 영광은 거기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혹은 교회가 있는 곳에 위대한 예술이 나타난 것도 봅니다. 교회는 항상 위대한 예술의 모체가 된 것입니다. 위대한 음악, 위대한 그림, 위대한 조각이 다 교회라고 하는 모체의 품에서 발전된 것을 우리가 잘 알고, 그것이 또한 영광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의 영광은 이「복음」을 소유한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이 우주에 하나님이 계시니라. 그 하나님은 사랑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렇게 사랑하셔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생명도 바치셨느니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는 죄 사함을 얻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는 이 복음이야말로 교회만이 소유한 가장 귀한 보배요, 우리 교회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추운 아침, 이 자리에 모인 곳도 이 교회에 가장 귀한 보배, 이 복음,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까닭이올시다.
또한 둘째로는 이와 같은 시온의 영광이 복음이라고 하면 이 시온의 지상의 사명은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모든 소유는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굶어 죽는 삶이 많은 곳에 어떤 사람이 쌀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쌀을 굶어 죽는 사람에게 나누어 줄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곳에 큰 전염병이 돌아서 사람이 수천 수백 명 쓰러진단 고 하는데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이 있어서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좋은 약을 소유했다고 하면, 그 사람은 그 약을 모든 앓는 사람에게 나누어 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중에 어떤 사람이 촛불을 많이 가졌다고 하면 그것을 어두움에 헤매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불을 켜게 해서 밝게 해 줄 책임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죄로 말미암아서 고통과 절망과 사망에 헤매는 자가 많은 이러한 세상에 이들을 구할 복음을 이 교회가 가졌다고 하면, 이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여 나누어 줄 책임이 이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 존재의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에서 교육사업도 하고 자선 사업도 하고 문화사업도 하고 사회 개량 운동도 일으키지만, 이것은 근본적인 사업들은 아닙니다 다 부대 사업이올시다. 우리 교회의 첫째 사업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 우에 이 교회를 세워주신 목적이 이 복음을 간직하고 이 복음을 영적으로 주린 사람들에게 전파해 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여 주는 것은 이 시온의 제一의 사명이요 지상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인식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아름다운 소식을 어떻게 전파하라고 했습니까? 여기 보니『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는 말이 있습니다.『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하는 말도 있습니다.『너는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저희 하나님을 보라고 외쳐라.』이렇게 분부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소식을 가진 시온이 어떻게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것입니까?
『높은 산에 오르라』고 했습니다. 왜? 높은 산에 올라야 이 소식을 널리 전파할 수 있습니다.『힘써 소리를 높이라』고 했습니다. 왜? 소리를 높여야 그 소리가 멀리 갈 수 있는 것입니다.『두려워 말고 힘써 소리를 높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원수들이 있을지라도 이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제가 여렸을 때에 시골에서 자라나면서 보니까, 이런 겨울 날 해가 대단히 짧을 때 그 촌에서는 멀리 닷새에 한 번씩 시장에 갑니다. 장을 보려 갔다가 저녁에는 돌아오곤 하는데 해가 짧으니까 어떤 때는 어두워져도 미처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三十여 호 되는 동리에서 장에 간 사람 중 한 두 사람이 밤이 퍽 깊어도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온 동리 사람이 수선거리며 아무개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우리가 마중 가야 되겠다고 해서 여러 젊은 사람들이 마중을 가는 것을 더러 보았습니다. 마중을 나가서는 자정쯤 되었을 때인데 얼마쯤 가다가는 높은 고개에 올라가 서서 참 고요한 밤에 높이 소리를 외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부릅니다. 부르고서는 무슨 소기가 저 편에서 오는가 고요히 들어봅니다. 들어보면 어떤 때는 늦게 돌아오다가 자기 이름 부르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저 편에서『내가 지금 옵니다.』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고요히 또 들러옵니다.
확성기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을 때에는 그렇게 하는 것 외에는 멀리 소식을 전하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성경은 옛날에 씌어진 책입니다. 그러니까 높은 산에 오르라고, 힘써 소리를 높여서 외치라고, 멀리 가고, 널리 가고, 누구나 들을 수 있게, 분명히 들을 수 있게, 이 아름다운 복음의 소식을 펼치라고, 다시 말하면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제가 들으니 이 혁명 정부가 생긴 이후에 새 술어가 더러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 새 술어가운데「고차적」이라고 하는 말을 많이 쓴다고 합니다. 무엇을 할 때「고차적」으로 해야겠다고, 전에는 별로 안 쓰던 말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잘하자는 그런 뜻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전파할 때에도 온 정력을 기울여서, 온 정성을 기울여서, 있는 재주를 다 바쳐서, 모든 좋은 방법을 다 써서 이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입니다.『너희에게 지식이 잇느냐? 그 지식을 다 바쳐서 복음을 전파하라. 너희에게 재주가 잇느냐? 그 재주를 다 바쳐서 복음을 전파하라, 너희에게 재물이 잇느냐? 그 재물을 다 바쳐서 복음을 전파하라. 너희에게 시간이 잇느냐? 그 시간을 다 바쳐서 복음을 전파하라. 널리 들리게, 언제나, 어떠한 환경에서나 복음을 전파하라.』
예수 님께서 여러 동리에 다니시면서 전도를 하셨습니다. 왜?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 어떤 때에는 촌에서 전파하시고, 어떤 대에는 바닷가에서 전파하시고, 어떤 때에는 배를 타시고도 전파하셨습니다. 왜? 여러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활을 볼 것이면, 여러 큰 도회지로 먼저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넓은 세계에 복음을 널리 빨리 전파하기 위해서 어떤 때에는 가정에서 전파했고, 어떤 때에는 저자에서 전파했고, 가는 곳마다 전파했으며, 빌립 같은 이는 길을 가면서도 전파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환경에서든지, 어떤 때든지, 어떤 곳에서든지, 학교에서나, 상점에서나, 관청에서나, 군대에서나, 산에서나, 들에서나,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파하라. 또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파하라. 청년에게도 전파하고, 노인들에게도 전파하고, 농사하는 사람에게도 전파하고, 장사하는 사람에게도 전파하며, 남녀 노소, 빈부 귀천, 유식 무식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높은 산에 오르며 소리를 높이라고 하는 말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혹은 개인으로 접촉해서 전파하며, 사람을 모아 놓을 수 있으면 강연을 통해서 전파하며, 글로 문서를 통해서 전파하며, 교육을 통해서 전파하며, 병원을 통해서 전파하며, 자선사업을 통해서 전파하며, 방송이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전파하며, 전도사를 보내고 선교사를 보내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두려워 말고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복음의 원수가 있습니다. 유물론자가 있습니다.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공산당이 있습니다. 세속주의자가 있습니다. 세상 향락을 즐기는 자들이 많습니다. 미신에 빠진 자들이 많습니다. 사교에 빠진 자가 많습니다. 원수들이 많으나, 원수들이 많은 까닭으로 더욱 복음을 널리 전파할 것입니다.『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꽃을 마르고 풀은 시들 때가 있지마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永永)히 서리라.』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서 반드시 이길 때가 있으니 아무리 반대자가 있을지라도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씀을 특별히 보세요.『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외 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에 충만하시건마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穹蒼)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나타내지마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습니다.『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이르지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가 아직도 많습니다. 인간의 가슴 가슴마다 이 양심 속에 속삭이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건마는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많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발자취가 역력히 보이지마는 아직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가 많습니다. 왜?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예수 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입니다.』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니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죄악이 신령한 눈을 가리웠습니다. 이렇게 영적 맹목이 되었으니, 영적 안목이 어두웠으니 하나님을 볼 수가 없고, 하나님을 볼 수가 없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을 모르니 죄에 죄를 더하고, 악에 악을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전 인류가 절망과 파멸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류를 죄악과 사망에서 구속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민의 죄를 대속 하시기 위해서 친히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만민의 구주를 보라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죄악과 사망에 허덕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인의 소망이 되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분명하게 외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잊지 말고 깨달을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복음만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해서 영생을 얻게 합니다. 둘째는 이 복음만이 참으로 인간을 개조해서 새 사람을 만듭니다. 셋째는 이 복음만이 사상전에 있어서 최후 승리를 거두게 할 것입니다. 넷째는 이 복음만이 이 부패한 도덕적으로 재건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는 이 복음만이 참된 자유와 평화와 번영이 있는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소식을 우리 시온, 이 교회에 맡겼습니다.『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시온이요, 높은 산에 너는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이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외치라.』
一九六三년 새해를 당해서 우리 교회의 첫째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작년에 희년(禧年)을 맞은 우리 한국교회가 이 二十세기 중엽 이 땅에서 해야 할 제일 첫째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적어도 五년 이내에 五백 교회를 더 신설하자고 하는 것이요, 그러므로 이 사명을 다하고자 하면 적어도 금년에 전국적으로 백 교회 이상을 설립해야 할 것이요, 이 일을 우리가 성취하려고 하면 우리 영락교회에서 적어도 금년에 새로 개척교회 열 곳 이상을 세워야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 하나 하나가 높은 산에 오르고, 힘써서 우리의 소리를 높여야겠습니다. 특별히 교회 없는 곳에 세워달라고 하는 청원이 많지마는 지금 우리가 재정이 부족해서 보낼 수가 없는 곳이 수다한데 이 곳에 전도 목사를 보내려면 우리 하나 하나가 남자면 남 전도 회에, 여자면 여전도회에 다 가입해서 우리의 힘을 모으면 금년 안에 우리 교회에서 열 사람 이상을 능히 보낼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이 새해 첫 주일 아침에 이 첫째 되는 사명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가운데 이미 전도 회에 가입해서 이 파송(派送)전도에 협력하는 분이 많이 계신 줄 압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전도 회에 가입하지 못하고 이 파송 전도에도 협력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이 계실 줄 압니다. 어떻든지 금년부터는 다 남녀 전도 회에 각각 가입해서 내가 적든지 많든지 이 교회의 첫째 되는 사명에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一九六三년 一월 六일)


Ⅴ-12 하나님을 앙망하라 (이사야서 四十장 十八-三十一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四十·三十一)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본래 멀리 바벨론에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올시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五十년, 六十년, 거의 七十년이 흘렀지마는 아직 그들이 해방의 희망이 보이지 않게 될 때에 자연히 그들 가운데는 낙심하는 사람, 실망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선지자는 하나님을 앙망 하라고 그들에게 권면합니다.
『너희들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들은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며 명철(明哲)이 한이 없으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는 힘을 더한다』고 외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하나님을 앙망 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困憊)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특별히 이 구절을 중심해서 우리가 이 뜻을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오직 여호와를 앙망 하는 자는…』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앙망 한다」고 하는 말은 바라본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가운데는「기다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의지한다고 하는 뜻도 있습니다. 모신다고 하는 뜻도 있습니다. 종이 상전을 모시는 것처럼 모신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를 앙망 한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을『믿고 의지하고 기다린다』고 하는 뜻입니다. 나를 의지하지 말고, 나의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나의 지식을 믿거나 의지하지 말고, 나의 힘을 믿거나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고, 사람을 믿고 의지하지 말고, 사람의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사람의 지혜나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혹 어떤 사람이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잠깐 있다가 없어질 돈을 의지하지 말고, 혹 어떤 이가 일시적으로 좋은 환경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변할 수 있는 환경을 의지하지 말고, 청춘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또 여호와를 앙망 한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을 앙망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다 기억하시지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요리문답에서 우리는 배웠습니다.
사람을 앙망의 대상자로 삼지 말고 세상에 있는 무엇이든지 세상에 있는 향락이나, 세상에 있는 영광이든 가, 세상에 있는 무슨 지위나, 세상에 있는 무슨 돈이나, 이런 것들을 우리 선망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우리의 앙망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마치 봄 동산의 꽃이 위를 향해서 언제나 자라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의 실명이 하나님을 향해서 언제든지 자라 올라가고, 몸 동산의 꽃이 언제든지 햇빛을 향해 피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이 언제든지 하나님을 향해서 꽃 피우는 심령이 되라고, 불길이 언제든지 위를 향해서 타오르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 속에 언제든지 하나님을 향해서 타오르는 불길이 위로 올라가는 생활을 하라고, 언제든지 영혼의 방향을 위로 향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묵상하여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가운데서 살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앙망 하는 자의 생활이올시다. 여기 꽃 가운데 해바라기라고 하는 꽃은 언제든지 해를 따라다니지 아니합니까? 그것처럼 우리의 심령이 언제든지 영혼의 해가 되는 하나님을 향해서 따라가면서 살라고 하는 말입니다. 자연히 이것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죄를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사정을 아뢰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 신약에 있는 말로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앙망 한다고 하는 말은 윌 주님을 앙망 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를 묵상하며, 그를 항상 앙망 하면서, 꼭 그와 교통하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는 말씀이올시다.
이와 같이 여호와를 앙망 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어서 어떤 환경에서든지 모든 것을 이기는 생활을 할 수가 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새 힘을 얻으리니…』전에 없던 새로운 영적 능력을 얻겠다고 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힘은 항상 제한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체력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힘 많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제한이 있습니다. 인간의 머리, 지력도 제한이 있습니다. 지혜와 지적 힘도 제한이 있습니다. 인간의 인내력도 제한이 있습니다. 상상력도 제한이 있습니다. 인간의 권세라고 하는 것도 제한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앙망 하는 사람은 이 제한된 힘 위에 하나님의 능력을 더하여 주시겠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 특별히 보면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앙망 하는 사람은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 같겠다고 하심 같이 위로 올라가는 힘을 더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달음박질을 할지라도 곤비하지 아니하는 힘을 주시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 하나가 의미가 있는 줄 압니다.
먼저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가는 힘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마 요새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제트기가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은 힘을 주리라고 말했을 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다 보신 줄 알지만, 보통 비행기보다도 제트기는 공중으로 올라갈 때 더 빨리 三十도 혹은 四十도, 또 어떤 때는 거의 四十五도 각도로 올라갈 수 있는 비행기인 것입니다. 사실 비행기와 로케트가 발명되기 전에는 사람은 항상 발을 땅에 붙이고야 살았습니다. 공중에 올라가 보지를 못했습니다. 사실 이 二十세기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공중에 날아 보지를 못했습니다. 비행기가 생긴 이후에야 비로소 사람이 공중에 날아 보기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지금은 비행기 시대가 와서 우리가 육신으로 공중에 올라갈 수 있지마는, 아직도 대체의 사람의 심령은 이 땅을, 이 세상을 초월하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근심과 염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시기와 질투, 모든 고통과 번민(煩悶), 슬픔, 이런 모든 땅에 속하는 것에 그냥 매어서 사는 사람들이 인류의 대부분인 것을 우리는 보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 심령은 땅을 떠나 보지를 못합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하나님을 앙망 하는 자는 새 힘을 얻어서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은 이와 같은 땅에 속하는 모든 것을 초월해서 마치 공중에 날아가며 사는 것과 같은 생활을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의미가 포함된 줄 압니다.
또한 우리가 비행기를 타 본 사람은 다 알고, 높은 건물에 오라가 본 사람은 다 알지마는, 우리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시야가 넓어집니다. 보는 들이 넓어집니다. 또 우리가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보는 각도도 사실 달라집니다. 그러기에 비행기가 없을 대는 새의 눈으로 본다는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영어로는「버어즈 아이 뷰우」(birds eye view)하고, 새의 눈으로 본다고 하는 것은 땅에서 보지 않고 공중에 올라가서 모든 것을 살펴본다고 하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높은 공중에 올라가 땅에서 무엇을 보는 것보다 달리 보입니다. 거리에 지나가면서 어떤 건물을 볼 때에 그 건물이 굉장히 높다고 하지만 높이 비행기 위에서 내려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땅에서 어떤 산을 보면 그것 참 굉장히 높다 하고 생각이 되지만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보면 한국의 대관령 같은 산도 문제가 안 됩니다.
유럽의 제일 높다고 하는 알프스 산도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땅에서 볼 때에는 굉장히 높아 보이지만 실상 높이 올라가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르게 보입니다. 모양도 달라 보입니다. 사실은 사람도 다르게 보입니다. 제가 처음에 미국에 가서 어떤 여관에 들었는데, 二十층이 채 못되는 여관이었지만 거기서 아래 거리를 내려다보면 모자만 보입니다. 모자에 다리만 둘 달렸단 말입니다. 걸어가는 다리 위에 모자가 얹어져서 꼭 모자가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말하자면 무슨 흉측한 벌레처럼 보였습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보는 것일 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앙망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심령이 높이 올라가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견지에서 이 세상 만사를 살피게 됩니다. 그러면 땅에서 보는 것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향락, 세상의 영광, 세상의 권세, 이런 모든 것이 세상 사람의 견지에서 볼 때에는 굉장한 것 같지마는 우리가 하나님을 앙망 하는 신앙의 견지에서 볼 때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다음부터는 전에 귀하게 여기고 전에 사모하던 것을 다 분토(糞土)와 같이 여겼다.』달라 보입니다. 세상의 이런 것뿐만 아닙니다.
그 반면에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슬픔이나 고통이나 죽음까지도 달라 보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四장 十八절 이하에 이런 말씀을 기록했습니다.『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아니하는 것은 영원함이니라.』우리가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환난을 받는다고 하지마는 그 환난은 잠깐밖에 되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그 환난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영원한 하늘의 영광을 더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잠시 받는 환난 때문에 과히 번민하고 고통은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가 높은 신앙의 지위에 올라갈수록 세상 만사를 다르게 보게 됩니다.
그 뿐 아닙니다. 우리가 독수리와 같이 올라가는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 높이 위로 올라가면 구름이 없습니다. 비행기 타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제트기 같은 것은 보통 한 三만 척까지 올라갑니다. 혹은 四만 척까지 높이 올라가면 거기는 구름이 하나도 없습니다. 구름은 다 아래 있습니다. 또 아래 있어서 땅에서 보는 것처럼 어둡고 답답하게 보이는 구름이 아닙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전부 햇빛을 받아서 마치 피어오르는 솜처럼 보기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위에는 광명 한 햇빛이 있습니다. 높이 올라가면 거기는 구름이 없어요. 거기는 안개가 없습니다. 언제나 광명 한 햇빛이 비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역기 그런 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앙망 하는 참된 신앙생활을 해서 우리의 심령이 높은 곳에 산다고 할 것이면, 거기서는 언제든지 우리의 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소망의 시간」에 늘 부르는 찬송『하늘에 영광, 하늘의 영광』하는 찬송이 있지 않습니까? 본래 영어로는 헤븐리 선샤인(heavenly sunshine)이라고 해서 하늘의 햇빛이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햇빛, 하늘의 햇빛, 언제든지 우리가 신앙의 높은 곳에 올라가면 하늘의 햇빛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喜樂)과 화평(和平)이라.』언제든지 우리의 심령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넘칠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을 앙망 하는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이만 맛볼 수 있는 행복인 것입니다.
그 다음,『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그것은 어떤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 인간 생활에는 달음박질을 할 수밖에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왜? 첫째는 인간 생활은 생존경쟁을 의미합니다. 혼신의 분투와 노력이 필요한 때가 많이 있습니다. 또는 인간 생활에는 종종 위기가 닥치게 되는 것입니다. 천재와 지변이 있습니다. 전쟁이 있습니다. 기근이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혁명이 일어납니다. 경제 공황이 생깁니다. 큰 사고가 납니다. 질병에 눕게 됩니다. 또는 사람이 우리 앞을 막을 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승리하고 극복하여야 우리가 옳은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앙망 하는 자에게는 새로운 권능을 주어서 이런 것들을 극복하게 한다고 하는 뜻입니다.「인생행로」라고 하는 말을 하지만 우리 인생의 일생을 길가는 것으로 비유한다고 하면, 우리의 길은 항상 평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말한 대로 태산준령을 넘을 수밖에 없는 때가 있고, 강강 대하를 건널 수밖에 없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 때에 신앙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인생의 항로」라고 하는 말이 있지마는, 우리가 건너가는 고해 바다는 항상 잔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풍랑이 일고 폭풍우가 있고, 올무가 우리 앞을 막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앙망 하는 자에게는 새 힘을 주어서 이사야 四十三당 二절 이하에 있는 말씀과 같이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침몰치 못하게 하여 주시고 불을 건널 때에도 불꽃이 탈 수 없게 만드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앙망 하고 참으로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시편 二十七편을 지은 사람과 같이『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하고 위치는 것입니다. 혹은 다윗과 같이『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 하시도다.』조금 내려가서『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이와 같이 외치는 것입니다. 달음박질할 때에도 힘을 주어서 곤비하지 않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통해서만 올 수 있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는『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이것은 어떤 경험을 말씀한 것입니까? 인간 생활에는 걸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 있습니다. 타박타박 내 발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단조무미 하지만 부득이 할 수밖에 없는 매일 매일의 우리 각자의 의무가 있습니다.
제가 몇 해 전에 미국 디트로이트라고 하는 곳에 가서 거기 있는 포드 자동차 공장을 한 번 구경했습니다. 굉장히 큰 공장이었는데 그것을 다 볼 수는 없어서 몇 군데만 보고 마지막에는 자동차를 조립하는 공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가운데는 긴 레일이 두 개 슬슬 움직여 갑니다.
한 편에서 들어와서는 다른 편으로 나가는데 멘 처음 그 레일 위에 자동차 차체의 구조가 되는 엉성한 뼈대가 놓여서 들어옵니다. 그러면 직공들이 좌우에 수백 명 나열해 서서 그것이 서서히 지나갈 때에 어떤 사람은 의자를 갖다 놓고 어떤 사람은 날개를 갖다 붙이고 어떤 사람은 나사못을 죄고 합니다. 한 사람이 꼭 한 가지 일만 합니다. 죽 서서는 각각 한 가지씩만 맡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못 하나만 박아주고 다음 사람은 그 못을 죄어주고 그 다음 사람은 또 한 번 죄어주고 세 번째 사람은 또 세 번째 죄어주고, 그렇게 수백 명이 서서 한 가지 일만 합니다. 또 뒤에는 부속품들이 서서히 들어옵니다. 날개도 바퀴도 매달려서 슬슬 오면 그 바퀴를 집어다 넣는 사람이 있고 그 바퀴에 못을 주고, 이렇게 꼭 한 사람이 한 가지씩만 맡아서 합니다. 수백 명이 서서 마지막에 저 쪽에 나갈 대는 온전한 자동차가 되어서 나갑니다. 四초나 五초에 자동차 한 대씩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직공들이 종일 서서 한 가지만 한단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갖다 붙이기만 하고, 어떤 이는 나사만 조이고, 그러나 쉴 새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 잘못하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되는 까닭입니다. 그렇게 단조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종일 한 가지 일만 하는 그건 사람이 아니라 기계란 말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등포에 있는 공장에 가서 직공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그들은 말하자면 기계의 종처럼 한 가지 일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문화가, 기계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욱 이런 단조 무미한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공장에서 되는 일이지만 우리 가정에서 주부들의 하는 일을 보면 그것도 참 단조 무미한 일들인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연탄불을 손보아야 하고, 그 다음에 또 물을 데워서 쌀을 일어야 되고, 밥을 해야 되고, 밥이 되면 그릇에 담아 주어야 되고, 아이들 도시락을 싸야 되고, 조반 먹고는 설거지를 해야 하고, 이렇게 해서 열 한 시쯤 되면 또 청소해야 되고, 금방 점심시간이 또 되고, 밥을 하고, 밥 담고 먹이고, 그릇 씻고, 이것이 끝나면 비로써 자는 시간, 이런 것을 매일 되풀이해야 하고, 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방앗간에 말 돌아가는 것과 비슷해요. 눈을 가리우고 뱅뱅 돌아가는 말이 하는 일과 꼭 같은 것이 우리들의 인생살이인 것입니다. 이렇게 뱅뱅 돌아가는 동안에 어느 새 검은머리는 희어져 백발이 됩니다. 단조 무미하지마는 그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다고 하는 말은 이렇게 단조 무미한 의무를 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앙망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가운데서 의무를 잘 감당할 수 있게 새 힘을 준다고 하는 말입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는 오래 참는 것입니다. 인내력을 줍니다. 참고 견디는 힘을 줍니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닙니다. 참으로 신앙이 있는 사람은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찬송을 부릅니다. 문자 그대로 그런 단조 무미한 일을 매일 매일 하지만 사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밥을 지을 때도 찬송을 하고 뜰을 쓸 대도 찬송을 하고 무엇을 할 때든지 항상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찬송을 하면서 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새 힘을 주는 것은 하나님을 앙망 하는 데서 오는 신앙 이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어떤 환경 가운데서라도 이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앙망 하는 데서 오는 신앙의 힘밖에는 다른 없는 것입니다.
앙망 한다고 하는 성경구절을 이사야서에서 두 절 더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는 이사야서 四十五장 二十二절이올시다.『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 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이것은 영국의 유명한 스펄존 목사를 회개시킨 성경 구절이올시다. 한 절 더 소개합니다. 이사야서 四十九장 二十三절 하 반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올시다.『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하나님을 앙망 하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합니다. 전에 키토 박사라고 하는 사람이 어려서 가난하고 병신이요, 말할 수 없이 한심한 가운데서 이 성경구절을 배우고 이 성경구절 그대로 하나님을 앙망 했습니다. 마지막에『나는 수치를 과연 당하지 아니하였다』고 간증을 한 것입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할 때,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살 때나 죽을 때나 하나님을 앙망 합니다.
(一九六三년 一월 十三일)


Ⅴ-13 은혜, 믿음, 구원 (요한계시록 三장 十四-二十二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애가 그에게 들어가 가와 더불어 먹고 가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三·二十)

방금 우리 주님께서 소아시아 여러 교회 가운데서 특별히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거기 보면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책망한 것 몇 가지 있습니다.
제일 먼저는 그들의 신앙이 차지도 덥지도 아니하고 미지근하다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또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은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우리는 부요 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마는 신상은 들여다보면 헐벗고 굶주리고 참혹한 형편에 있는 그 상태를 보시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권면이 있습니다. 열심히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二十절에 이와 같이 간절히 권면한 것을 볼 때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예수를 믿기 는 하지마는 실상은 예수 님을 자기 문 밖에 세워두기만 한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二장 八절에『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이렇게 기록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은혜로 인해서,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은혜, 믿음, 그 다음에 구원이 옵니다.
이제 예수 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에게 하신 말씀인 요한 계시록 三장 二十절에는 은혜란 말이 물론 없습니다. 거기에 믿음이란 말도, 구원이란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가운데서 은혜와 구원과 믿음의 뜻이 무엇인지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여기에 세 마디가 있는데 첫 번 말씀은『불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했습니다. 여기 문은 우리 인간의 마음 문을 가리켰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 문 밖에 예수 님께서 오셔서 우리 인간의 마음 문을 두드리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인간을 찾는 보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그 하나님, 전능하신 그 하나님, 영원하신 그 하나님, 그의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가까이 오셔서 인간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이것이 은혜올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 곧 축복이올시다. 우리 기독교가 세상에 있는 모든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여러 가지 있지마는 특별히 이 점이 다릅니다. 세상의 모든 다른 종교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으려 애쓰는 종교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찾아서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그것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이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의 특색입니다. 그리하여 묵상을 통해서, 혹은 고행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혹은 독경, 경전을 읽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세상에 있는 여러 종교들의 특색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런 모든 종교들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그런 진리를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인간을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기 위해서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 주십니다. 사람이 자기를 스스로 구원할 수가 없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의 진리를「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말은「기쁜 소식」이란 뜻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간을 찾으시고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신다고 하는 이 기쁜 소식이올시다. 온 성경이 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창세기 三장을 보시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들이 범죄 한 후부터는 하나님이 무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오셔서『아담아, 네가 어디 잇느냐?』하고 찾으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찾은 것은 아닙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을 다시 찾으셨습니다. 이 진리는 신구약 전 성경구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올시다.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먼저 찾으시고 아브라함을 불러내어서 네 친척과 고향을 떠나서 내가 장차 보일 나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았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찾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먼저 찾아 불러서, 그 민족을 구원하는 큰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사실 전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빠진 그 백성을 구속해 내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만방의 죄인을 구속하시려고 힘쓰신 것이 신약의 기록이올시다. 예수 님께서 오셔서 이 진리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든 교훈이 그러하지마는 특별히 누가복음 十五장에 있는 유명한 비유 셋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잃은 양을 찾는 비유, 여자가 잃은 돈을 찾는 비유, 아버지가 탕자를 환영하는 비유입니다. 잃은 양이 목자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아흔 아홉을 우리 에 두고 나가서 산과 들을 헤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잃은 죄인을 찾으시는 모습이올시다. 잃어버린 돈이 여자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여자가 잃은 돈을 찾기 위해서 불을 켜고 방을 쓸고 많은 애를 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을 찾으려고 애쓰시는 모습이올시다. 탕자가 멀리 나타날 때에 벌써 아버지께서 보시고 버선발로 뛰어 나가서 탕자를 영접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죄인을 영접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옛날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면으로 우리를 찾으십니다. 혹은 양심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감화시켜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어떤 때는 사랑하는 친구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하나님을 찾게도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이성, 사고력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찾게도 하십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당하는 환경, 경험, 혹은 질병과 슬픔을 통해서, 혹은 실패와 성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간단없이 우리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우리를 찾아서 구원하시기를 애쓰십니다.
우리가 알 것은, 누구든지 자기의 마음으로 내가 하나님을 공경해야 되겠다, 내가 예수를 믿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성령께서 벌써 우리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우리의 마음속에 그러한 생각이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셔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는 까닭으로 이와 같은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올시다..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서 오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 주십니다.
다음에 하신 말씀『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입니다. 내가 이렇게 너희 마음 문밖에 와서 마음 문을 두드리는데 누구든지 이 음성을 듣고 양심을 통해서 혹은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 그 말씀을 듣고 문을 연 다음에 우리의 할 책임이 있습니다. 문을 여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올시다. 물론 무소 불능하신 하나님께서 억지로 문을 열려면 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억지로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올시다.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을 지으실 때에 인간을 기계로 만들지 아니하고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인격이 있다고 하는 말은 자유가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기계는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 법칙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기계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기계가 아닙니다. 인격자입니다.
또 사람은 짐승과도 다르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짐승은 일정한 본능을 주어서 그 본능대로 살면 됩니다. 사실 이런 의미에서 짐승에게는 도덕이 없습니다. 짐승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본능대로 사는 것뿐입니다.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능과 함께 양심을 주었고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이 자유를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러나 이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여는 것은 나의 할 일입니다. 이 문을 여는 것을 성경의 말로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속에서 문을 열고 주를 영접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요, 이것이 곧 믿음이올시다.
그러므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인간의「예」라고 하는 대답이올시다.「예」라고 대답하고 문을 여는 것이 믿음이올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고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어로「이터어널 예스」(eternal yes)라고 하는 말을 씁니다.「영원한 예」라고 하는 대답,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향해서 문을 두드릴 때에『예, 제가 문을 엽니다. 나는 주님을 영접합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스스로 이「영원한 예」라고 하는 긍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믿음이올시다. 내가 이 대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부름을 듣고 내가 문을 엽니다. 문을 여는 것은 내가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올시다.
어떤 분은 혹「서렌더」(surrender)라고 하는 말을 씁니다.「서렌더」를 번역하면「항복한다 」는 뜻입니다. 이 말은 젊은 사람들에게 별로 그렇게 달갑게 들리지 않을 줄 압니다. 특별히 군인들에게는「항복」이라고 하는 말이 제일 나쁘고, 듣기 싫은 말인 줄 압니다.
물론 우리가 적에게 항복하면 안 되지요. 우리가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는 내 심령이 앞에서 항복을 해야 됩니다. 내 의지를 굴복시켜서 하나님의 의지에 순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은 인가의 최대 자유를 뜻합니다. 하나님께 항복한 사람은 인간 누구에게도 구속을 받지 아니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영원한 예」라는 대답과 마음 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을 영접하여 나의 의지를 영원히 그 앞에 항복하고 그의 뜻대로 사는 것이 믿음이올시다.
이와 같이 주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영접하게 된다면 자연히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귀한 손님을 우리가 영접할 때 우리의 방을 깨끗하게 합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영접할 때 자연히 죄를 다 고백했습니다. 절반을 팔아서 가난할 사람을 구제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 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게 될 때에 그 속에 있던 일곱 귀신이 나갔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죄악이 다 나가고 말았습니다.
어거스틴이 예수를 영접하게 될 때에 자연히 그 생활 속에 허랑 방탕하고 음란한 모든 것이 다 봄 동산에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영원한 예」라는 대답을 하고 주님을 내 마음속에 영접한다고 하는 것은 죄를 회개한다는 의미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이렇게 동시에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이올시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나의 믿음의 대답이 있을 때에 오는 것이 구원이올시다.
그런데 그 후에 예수 님께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문을 열라. 내가 그에게고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가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이렇게 문을 열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잡수시겠고 우리는 그와 더불어 먹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동고동락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계시겠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구원 얻은 생활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원 얻은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예수 님을 온전히 우리 마음 가운데 영접해서 예수 님과 매일 매일 같이 사는 것, 같이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요한 복음 十五장에『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는 내 안에 있으라. 내가 너희 안에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제자들에게 최후로 말씀하실 때에『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시면서『세상 끝날 때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같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임마누엘」이라고 하는 말씀이올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신다고 하는 말씀이올시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주님과 같이 있으면서 자연히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마지막에 승천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 하나 하나도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과 끝까지 동행하면 물론 하나님 계신 데로 갑니다. 그것은 천당밖에는 다른 데가 몰론 없습니다.
또 이것은 하나님과 동사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얻은 생활은 무엇을 하든지 나 혼자 하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하는 생활입니다. 참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살림을 해도, 장사를 해도, 가르쳐도, 하나님과 같이 합니다.
요새 정치 붐이 일어난 것 같지마는, 정치를 해도 하나님과 같이 해야 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떤 대학 교수와 만나서 이야기할 때에『대학교수와 대학생간의 관계가 어떠합니까?』고 물으니 그 교수가 얼른『그거야 간단하지요. 그저 지금 대학교수들은 다 글 장사지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글 장사, 글을 가르쳐 주고 돈 받고, 학생들은 돈 내고 글 사고, 이렇게 대학교육이 된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큰일입니다. 이제도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지마는 소위 정상배(政商輩)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를 장사하듯 한다고 하는 말인지, 정치를 이익을 내려고 한다는 말인지, 그 뜻을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정치를 하면 참으로 큰일입니다.『내 지위가 어떻게 될까? 내 권리가 어떻게 될까?』이런 것을 먼저 앞에 두고 정치를 한다고 하면 한국의 장래가 참으로 암담합니다. 어떻게 하면 자유와 평화와 번영이 있는 나라를 건설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정치를 하되 하나님과 동사하지 아니하고 나 혼자, 나를 중심으로 피차에 정치를 한다고 하면 이에서 더 큰일이 없습니다. 구원 얻은 사람은, 즉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동사합니다.
바로 어제 저녁에 어떤 분이 공장을 차려 놓았는데『나의 이 공장이 지금 다 돌아가는 중인데 아예 여기서 나오는 것은 온전히 십일조를 내놓고 전도를 하려고 합니다.』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같이 있으면서 하나님과 동거하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이올시다.
그리고 이것 보세요. 특별히『그는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잔치를 의미합니다. 사실 구원을 받아서 주님을 마음 가운데 영접하고 사는 사람은, 매일 매일의 심령 상태가 곧 연회를 하는 사람의 형편과 같다고 하는 말입니다.
항상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이 충만하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시편 二十三편에『원수 앞에서도 상을 베푸시고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성경에 보면『항상 즐거워하라. 주안에서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를 영접해서 주와 동고동락하는 생활은 언제든지 잔치를 베푼 생활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먼저 은혜로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으로 주를 영접하여야 됩니다. 주를 영접해서 우리 마음 가운데 주를 모시고 동거하며 동행하며 동락(同樂)하는 것이 참된 신앙 생활이올시다.
여러분! 교회에 나온다고 다 이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 줄 압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줄 아나 그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주를 문 밖에 세워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 앉은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를 우리 마음 가운데 영접합시다.「영원한 예」라고 대답을 하십시다. 이와 같은 축복을 우리가 받아야 되겠습니다.
(一九六三년 一월 二十七일)


Ⅴ-14 창조의 하나님 (창세기 一장 一-十九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一·一)

여러분은 성경에 제일 첫 책 첫 절에 무슨 말씀이 있는지 아십니까?『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청년들은 별로 배우기 못했을 줄 알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누구나 서당에 가면 먼저 천자문이라고 하는 것을 배웁니다. 또 웬만한 가정에서는 서당에 가기 전에 천자를 다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무식한 사람을 흉볼 때에는 무슨 알을 하는고 하니『저 사람은 천자문의 첫 줄도 모른다』고 합니다. 하늘 천(天) 따지(地) 감을 현(玄) 누루 황(黃)…그 첫줄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 첫 책의 첫 장 첫 줄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다 아는 줄 짐작되지만 한 부이라고 이 절을 모르는 분이 계시면 오늘 아침에 분명히 외우시기를 바랍니다. 이 천자문도 천지로 시작되는데 이상스럽게 - 이상할 것도 없지요 - 성경 창세기 一잘 一절도 천지 창조로 시작합니다. 또 이 말씀은 사실 우리 신조 가운데 첫 신조올시다.
오늘 아침에 여러분이 사도신경을 다 외운 줄 알지마는, 무슨 말로 시작합니까?『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첫 신조입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은 우리의 첫 신조올시다. 여기「천지」라고 하는 말은 하늘과 땅이라 고 하는 말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다 포함했습니다.
지금은 한 마디로 흔히 우주라고 하는 말을 씁니다.「천지」라고 하는 말은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여기「창조」라고 하는 말은 처음으로 지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있는 것을 가지고 새 것을 지은 것이 아니고 없는 가운데서 처음으로 지었다는 뜻입니다. 혹 우리가 말할 때에 우리 사람도 창조한다고 하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있는 자료를 가지고 새 가치를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 이「창조」는 하나님께 대해서만 쓰는 글자인데 하나님만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올시다. 하나님은 조물주 하나님이올시다.
자, 이제 하나님께서 이 천지를 언제 지었으며, 어떻게 지었으며, 얼마나 오묘하게 지었는가 하는 점을 잠깐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보니『태초에……』그랬습니다. 이「태초」하고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맨 처음에」입니다. 그 맨 처음은 언제입니까? 영원 전이란 말은 아닙니다. 일정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오래 전에 지었지마는 영원 전부터 이 우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지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과학 서적들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이 지구의 연령을 계산합니다. 얼마나 꼭 들어맞는지는 모르지마는 대체로 계산을 합니다. 그 계산 방법이 여러 가지 있지마는 보통 쓰는 방법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금속원소(金屬元素)가운데 우라늄(U)이라고 하는 아주 신기한 원소를 이용해서 원자탄도 만들고 그 외의 여러 가지를 만듭니다. 이 원소는 이상스럽게도 그 자체가 방사를 합니다. 그래서 이 우라늄이라고 하는 원소가 방사를 하면서 변하다가 맨 마지막에는 무엇이 되는가 하면 납(鉛)이 됩니다. 여러 과학자들이 조사한 결과를 보면 약 一천만 년마다 이 우라늄의 六0三분의 一이 납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알아 가지고서 지구 가운데 가장 오랜 지층 바위 속에 함축되어 있는 우라늄을 혹 발견합니다. 발견해서 그 가운데 몇 분의 몇이 납으로 변했는가를 조사해서 가장 오래 된 지층이 몇 해 전에 형성됐나를 짐작으로 계산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계산에 의하면 제일 오랜 지층이 약 二十五억만 년 전에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조사를 해서 홈즈 박사라고 하는 이는 지구의 연령이 즉 지구가 생긴지가, 창조를 받은 지가 약 三十三억 五천만 년이라고 합니다. 영원은 아니요, 시작한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태양계의 연령은 약 三十八억만 년으로 계산을 합니다. 한 걸은 나아가서 이 우주의 연령, 즉 우주의 창조, 시작 연대를 약 一00억만 년으로 추산을 합니다. 자, 이렇게 우주가 창조 받은 것을, 영원 전은 아니지만 매우 오래 전에 태초에 지음을 받은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어떤 순서로 우리가 사는 이 우주를 지으셨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一잘 一절에는『천지를 창조하시다』말씀했습니다. 그 다음에 창세기 一장 二절과 또 이하에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 대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一장 二절에 보면『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여 흑암(黑暗)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처음 지음 받은 후의 지구의 모습이올시다. 처음에 지구가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후의 첫 모습이 혼돈하고 가스 덩어리였던 모양입니다. 그 때는 아직 물이 채 되지 못하고 수증기로 있을 때니까 수증기가 빙 둘러싸여서 지구 안이 캄캄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기록한 말씀을 보면 三절에『빛이 있으라』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다 하였습니다. 그 지구가 점점 냉각해짐에 따라서 이 수증기 가운데 대부분이 점점 물이 될 때에 태양 빛이 비치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그리고는 지구가 온전히 좀 굳어져 가지고서는 자전을 시작한 모양입니다. 자전하기 시작하니까 으레 밤과 낮이 생겼고 그렇게 되니까 자연히 아침과 저녁이 생긴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보면『궁창(穹蒼)이 있어서 물과 물로 나뉘게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궁창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궁창 이라는 말은 푸른 하늘이란 말입니다. 이 푸른 하늘은 공기입니다. 대기가 있기에 푸른 하늘이 보입니다. 대기가 없으면 캄캄하다고 합니다. 우주를 운행하는 사람들이 대기 없는 공기밖에 나가면 캄캄하다고 합니다. 햇빛 이외에는 빛을 보지 않으면 캄캄하다고 합니다. 대기가 있기에 파란 하늘로 보이게 됩니다. 그 때에는 수증기가 물이 되고 그 다음에는 공기가 완전히 갈려서 푸른 하늘이 나타나기 시작한 그런 시대를 가리킨 모양입니다. 또한 그 다음에 보니『바다와 물이 갈라지고』했습니다. 아마 처음에 물이 고르게 지구를 덮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떤 부분이 돌출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히말라야 산이 되고 그것이 알프스 산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대륙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어떤 곳은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땅에는 제일 먼저 무엇이 있게 되었는가 하면 식물이 있게 되었습니다. 풀과 씨 있는 나무가 있게 되었습니다. 지질 역사를 연구해 보아도 이 지구상에서 제일 먼저 나타난 생물은 동물이 아닙니다. 작은 풀과 나무, 이런 것들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좀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과히 이상하지도 않지요.
넷째 날에 하나님께서 광명을 짓고 별을 지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도 그 때쯤 되어서야 지구의 구름이 거의 다 없어져서 온전히 물로 변하고 그 때 그 시대부터야 해가 분명히 나타나고 밤에는 별이 나타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날 즉 흔히 하루를 한 시대로 보아 그 다음 시대에 물 가운데서 먼저 샘물이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자, 이것도 꼭 지질학적으로 화성을 연구하는 대로 꼭 같은 결과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물 가운데서 동물의 생명이 먼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육지에 역시 생물이 나타났습니다.
여섯째 되는 날 육지에 여러 짐승들과 척추동물과 이런 큰 동물들이 나타나게 되고 일곱째 되는 맨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순서는 지금 보통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그 순서와 다름이 없습니다. 옛날 지질학을 모르고 전연 과학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없었던 이러한 때에 어떻게 지구의 역사를 이와 같이 기록할 수 있었겠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영감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이런 책이 세상에 나타날 수가 없었노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지으셨는데 이 우주를 어떤 규모로 지으셨나, 이 우주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특별히 이 二十세기에 사는 우리로서 궁금히 생각하는 바입니다. 지금 이 새대는 우주를 탐색하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우주를 탐색하게 될 떼에는 자연히 이 우주가 얼마나 큰가, 이런 데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옛날에도 우주가 얼마나 큰 것은 대강 짐작했지마는, 특별히 이것도 二十세기에 와서야 사람이 좀 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二十세기에 와서야 미국의 마운트 윌슨(Mount Wilson)천문대에 있는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크던 一백 인치 태양 관측용 망원경을 사용해서 이 우주를 살펴보게 되었고 또 바로 二十여 년 전에 마운트 팔로마(Mount Palomar)에 있는 천문대에서는 지금 세계에서 제일 큰 만원경인 二백 인치의 헤일(Hale)망원경을 통해서 우주를 좀 더 자세히 내다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 우선 우리가 늘 보는 태양은 얼마나 큽니까? 멀리서 보면 태양이 작게 보이지마는, 과학자들이 조사한 결과를 우리가 들어보면 태양 자체가 얼마나 큰고 하니 우리가 사는 이 지구 같은 것이 一백만 개나 들어갈 수 있으리만큼 크다고 합니다. 태양 자체의 그 주량이 얼마나 무거운고 하니 태양계에 속하는 모든 위성을 다 합한 것의 七五0배나 더 무겁다고 합니다.
또 우주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피차에 먼가 생각해 봅시다. 광선의 속도가 아주 빠른데 一초 동안에 十八만 六천 말일 갑니다. 一초 동안에 十八만 六천 마일 가는 이 광선의 속도로 재어보아도 지구에서 태양까지 가는 데 八분 十九초가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지구에서 제일 가까운 다른 별인 항성 알파센타워라고 하는 별에 가려고 하면 이 태양 관선의 속도로 측량을 해서 四년 三개월, 다시 말하면 四광년 三개월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하늘을 살펴보면 이 항성들이 모여 있는 소위「갤럭시」(Galaxy)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밤에 나가 보면 하늘에 은가루를 뿌린 것처럼 보이는 것, 그것을 우리가 은하라고 합니다. 그 은하수를 망원경으로 보면 그것이 전부 큰 별입니다. 별이 많이 있어서 멀리서 보게 될 때에 이렇게 강처럼, 은하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태양계에 속하는 그 은하계가 얼마나 먼가 하면 十만 광년이라고 합니다.
우리 태양은 이 은하 중심에서 약 三만 三천 광년 되는 거리에 있는데 매초에 二백 마일 속도로 이 은하계의 중심을 돌고 있습니다. 태양도 돌고 있습니다. 태양도 돕니다. 태양계를 도는 데 二억만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이 하늘에 별이 얼마나 될까요? 천문학자의 말에 의하여 이 은하계 하나에는 약 一천억의 별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一천억의 별이 있는 은하계가 대략 몇이나 됩니까? 지금 발견된 것만 해도 약 一억이 있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박사의 계산에 의하면 그 별의 수가 얼마인고 하니 十의 二十八자승한 수만 하다고 합니다. 영국의 천문학자 제임스 진스(James Jins)는 보통 사람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했습니다. 하늘의 별이 얼마나 많은지 알려면 이 지구의 모든 해변에 있는 모래알을 전부 모아 세어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우주가 그만큼 큽니다. 그것을 보니 하나님의 살림살이가 굉장합니다. 큰 데만 놀랄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이 우주를 살펴보면 과연 오묘하게 지었습니다. 이렇게 대우주이지만 꼭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유성이 항성을 돌고, 항성이 모든 유성을 또 돌고,「갤럭시」가 또 되고, 그렇게 꼭 조직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정한 속도가 있고 일정한 궤도가 있어서 꼭 법칙에 의지해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별이 하늘에 그렇게 많아도 하늘에 교통 사고 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아주 오묘합니다. 또 이렇게 많은 별들이 멀리 있다고 하지마는 법칙이 꼭 통일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구의 움직이는 자연 법칙이 다른 별에도 꼭 같이 통용된다고 합니다. 여기에 우주 탐색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볼 때에 그렇지마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계를 좀 더 자세히 보면 그 가운데에도 참 오묘한 것이 많습니다. 금년 겨울에는 눈이 굉장히 많이 와서 우리가 다 놀랍니다. 여러분께서는 그 눈을 좀 자세히 살펴보셨습니까?
그것을 현미경으로 보면 굉장히 아름답다고 합니다. 얼은 보기에는 그저 흰 것이 내려오는 것 같지마는, 자세히 살펴보면 결정체들입니다. 어떤 것은 여덟 모가 나고 어떤 것은 열 두 모가 나고 어떤 것은 열 여섯 보가 나고, 꼭 각이 있는 여러 가지 결정체입니다. 그러나 그 결정체가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과학자가 조사해 보니까 약 九백 가지의 다른 결정체가 있다고 합니다.
그 눈송이 하나도 일정한 고안이 있고, 어떻게 아름답게 만들었는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님이 말씀하시기를『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아라』하셨지마는, 백합화 한 송이를 가만히 볼지라도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게 고안을 했습니까? 또 꽃이 하나 하나 다 다릅니다. 잎사귀 하나 하나를 볼지라도 어떻게 그렇게 고안을 잘했는지 모릅니다.
요사이 한국에도 방직업이 발달되어서 영등포에서도 양단을 많이 짜는 모양입니다. 그 양단을 보면 고안을 굉장히 아름답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고안들이 어디서 왔는지 압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고안한 것을 빌어다 쓰는 것밖에 다른 것 없습니다. 그 꽃, 기 잎사귀, 새니 뭐니 다 하나님의 고안을 거저 빌어다 쓰는 것밖에 다른 것 없습니다. 어떻게 아름답게 고안을 했는지 모릅니다. 나비 한 마리, 새 한 마리를 불지라도 어떻게 아름답게 고안이 잘됐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 자연계에 생물도 많고 동물도 많고 식물도 많지마는 피차에 어떻게 조화되어서 살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꽃 우에 나비가 흔히 떠다니지요. 아주 묘합니다. 꽃은 아름답게 만들고 속에는 꿀을 넣어 놓았습니다. 나비의 입은 뾰족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 날개는 부드럽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나비는 꽃에 와서 그 꿀을 빨아먹습니다. 그 대신 거저 꿀을 주지 아니합니다. 이 나비는 그 꽃의 화분을 그 날개에 묻혀다가 웅(雄)에서 자(雌)에게 서로 매개를 해서 열매를 맺게 만듭니다. 이상하게 조화가 되었습니다.
나무는 산소가 아니라 탄소가 필요합니다. 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보냅니다. 동물은 산소가 필요하고 탄소를 내보냅니다. 이상하게 동물과 식물이 서로 조화해서 살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이 우주를 보면 꼭 사람이 살 수 있으리만큼 만들었어요. 지금도 지구가 자전한다는 이야기를 했지마는, 지구가 스물 네 시간에 한 번씩 뺑 돌아갑니다. 그러기에 밤과 낮이 생기지요. 그런데 한 시간에 약 一천 마일의 속도라고 합니다.
자, 그런데 가령 이 속도가 一천 마일 돌아가지 아니하고 백 마일쯤 돌아간다고 하면 하루가 얼마나 길겠는고 하니 지금 열흘만큼 길겠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고 하면 낮이 한 닷새만큼 길고 밤이 한 닷새만큼 길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어서 여름에 닷새 동안 해가 쨍쨍 비치면 곡식은 다 타서 죽고 말 것입니다. 또 닷새 동안이나 햇빛이 안 비치고 그냥 어둡기만 하면 곡식이 밤에는 다 얼어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아니하고 꼭 알맞게 一천 마일씩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또 반면에 더 빨리 돌아가서 만 마일씩 돌아간다, 十배를 빨리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하루가 몇 시간 되겠는고 하니 두 시간 四十분밖에 안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낮이 한 시간 二十분, 그렇게 되면 그저 자려다가 일어나고 일어났다가는 또 자게 되니 이렇게 되면 아무 것도 못하겠단 말입니다.
꼭 하나님께서 적당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태양열이 화씨로 一만 二천 도 높다고 합니다. 뜨거운 불덩어리입니다. 그런데 지구와 태양의 거리를 보면 꼭 알맞게 거리를 두었습니다. 좀 더 가까이 가면 사람이 타서 죽을 것이요, 좀 더 멀었다면 다 얼어죽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 가운데는 한 쪽만 많이 비치지 않고 남극과 북극을 고루 비치게 二十三도쯤 경사 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춘하추동의 사계가 됩니다. 지금 겨울에 우리는 춥다고 하지마는 남반구는 따뜻하게 비치는 때이고 이제 또 여름이 되면 또 바뀌게 됩니다.
이런 얘기를 하려면 한정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니 과연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이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올시다. 우주의 통일성을 보니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지혜가 많고 능력이 많고 사랑이 충만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주를 지으시고 우주를 자연 법칙에 맡겨서 그냥 내버려둘 이치가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주를 다스리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으로 가장 귀하게 만든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다 죽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냥 버려 둘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기의 자녀들을 그냥 버려 둘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보호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고 의심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십시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십시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방에 전파해야 되겠습니다. (一九六三년 二월 三일)


Ⅴ-15 나와 내 민족이 사는 길 (역대 하 七장 十一-二十二절)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 七·十四)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주신 말씀이올시다. 또 여러분 가운데 기억하시는 분이 계시는지 모르지만, 일찍이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첫 번으로 취임할 때에 이 성경구절 위에 자기 손을 얹고 선서를 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에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이 구절을 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정치를 하기로 맹세한 것입니다.
이 구절의 내용을 다시 설명하면,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완성하고 자기의 궁궐도 온전히 이룬 다음, 많은 희생물을 드려서 하나님께 예배를 들리고 성전 봉헌식을 거행할 때 유명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밤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시는 가운데 이 구절의 말씀도 같이 하신 것입니다.『내가 네 기도를 들어서 이 곳으로 나를 예배하는 곳을 삼았노라, 그러나 혹 이후에 내가 하늘 문을 닫아서 비가 내리지 아니하든지 메뚜기로 하여금 토산을 먹게 하든지 혹은 염병이 유행해서 많은 생명의 손상을 보게 되든지, 곧 천재지변(天災地變)혹은 재난이 있게 되면 이것은 내가 너와 네 백성을 책망하는 것인 줄 알고 그런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백성이 악한 길에서 떠나고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고 내 얼굴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민족적 재난과 환난 가운데서 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간단하게 네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너희 온 백성들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라.
둘째는 스스로 겸비하라.
셋째는 기도하여라.
넷째는 범사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그러면 내가 모든 죄를 사해 주겠고 너희 사는 땅을 고쳐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우리가 생각하는 가운데서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 뜻을 나타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그 악할 길에서 떠나라. 민족적으로도 모든 악한 길에서 떠나라.「떠나라」고 하는 말은「돌이 키라」고 하는 뜻입니다. 악한 길에서 돌이 키라, 회개하라.
제가 얼마 전 좀 조용한 시간을 얻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 재 자신을 좀 더 알기 위해서 우리 나라 역사를 다시 한 번 통독하였습니다. 옛날 삼국시대에는 북으로 흑룡강(黑龍江), 서로 송화강(松花江)까지, 남북만주(南北滿洲) 전체와 또 우리 한반도가 우리 민족의 무대였습니다. 그런데 고려 말엽 이후로는, 특별히 이조 五백 년을 통해서 우리 민족이 점점 쇠잔하여져서 마지막에는 이 모양이 되어 지금 세계 약소민족 가운데 하나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대체로 지적하는 공통한 원인 몇 가지를 우리가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말합니다. 삼국(三國)가운데 제일 크고 강한 나라는 고구려(高句麗)였습니다. 고구려가 어떻게 멸망하였습니까?
물론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으로 인하여 패망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원인은 아닙니다. 고구려 말기의 영웅이었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임종시에 자기 아들 四형제를 불러다 놓고서 간절히 권면 하기를『내가 죽은 다음에도 너희들이 꼭 협력해서 나라를 잘 받들어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버지가 죽은지 얼마 후에 그 아들 남생(南生)이라고 하는 사람과 남건(南建)이라고 하는 사람이 서로 싸웠습니다. 남생이 국내에서 패하게 되자 당나라로 도망을 갔습니다. 신라가 와서 당병(唐兵)을 청하기 전에 이 남생이 당나라에 먼저 가서 군대를 빨리 평양(平壤)으로 보내서 고구려를 멸망시킬 음모를 하였습니다. 사실 당나라 군대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평양으로 진군하여 올 때에 그 길을 향도한 사람이 바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 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가 망했습니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 한반도를 통일한 것은 물론 위대한 역사적 사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이런 생가도 해 봅니다. 어찌해서 같은 민족이 백제와 고구려와 연합해서 그 때에 당나라를 쳐서 중원을 점령하지 못하고 오히려 외국군인 당병(唐兵)을 청해서 이웃 동족인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는가? 그리해서 결국은 일시 만주에서 발해(渤海)가 일어나긴 했지만 그 이후로 우리 민족은 남북만주 넓은 들을 영원히 잃게 만들었을까?
여기에도 골육상쟁이 큰 원인이었습니다. 이조시대(李朝時代)이후의 모든 골육상쟁(骨肉相爭)에 대한 일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둘째는 당파와 파쟁(派爭)을 흔히 원인으로 듭니다. 특별히 선조조(宣祖祖)이후에는 동인(東人)이니 서인(西人)이니 남인(南人)이니 북인(北人)이니, 노론(老論), 소론(小論), 해 가지고 당파로 갈리어서 온갖 음모와 술수와 모든 수단으로써 정권 쟁탈전을 계속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의 눈에는 민족도 보이지 아니했고 국가도 별로 보이니 않았습니다. 다만 자기 당파의 정권과 세도를 생각하였습니다.
셋째는 공의(公義)가 없는 정치를 하였습니다. 특별히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불의 하게 사육신(死六臣)을 죽이고, 단종(端宗)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조정(朝廷)이나 사회에 고의라고 하는 것이 땅에 떨어져서 다만 폭력과 세도로써만 정치를 행하였습니다.
이 여러 당파들은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법도 없고 동의도 없고 갖은 아부와 수단을 썼고, 그리해서 한 번 정권을 잡은 다음에는 자기의 정적(政敵)인 그들을 역적으로 몰아서 씨도 없이 삼족을 멸해 부리고 한 번 정권을 잡은 다음에는 그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서 역시 공의나 법이 없이 갖은 수단과 모략으로 정권 연장을 힘썼고, 이렇게 세도를 잡은 사람들은 다만 자기 당파, 자기 안일만을 생각하고, 대중이나 국민에 대해서는 가렴주구(苛斂誅求)의 학정을 감행했고 공의와 법이 없는 정치를 했습니다. 그 밖에도 많은 예를 들기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알 것은, 여기에 선 저나 여기 앉은 여러분이나, 이 이조 五백 년의 더러워진 죄악의 피가 우리의 혈관에도 흐르고 있습니다. 해방 후 한국의 정계를 생각해 보세요. 방금 되어가고 있는 일을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특별히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역사가 하는 말을 주의해 들을 점이 있습니다.
이조 五백 년 동안의 정신적 기초가 된 종교는 유교(儒敎)입니다. 이태조(李太祖)가 등극해서 정권을 잡은 다음에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국교로 삼았습니다. 서울에 성균관(成均館)을 지었고, 각 도시와 읍에 향교(鄕校)를 지었고, 대 성전을 지어서 공자(孔子)를 숭배하였습니다. 그런데 五백 년 동안에 유교의 지도자들의 일이 무엇입니까?
대체로 네 가지로 지적을 합니다.
첫째, 허문(虛文)과 허례(虛禮)만 숭상하고 삼강오륜(三綱五倫)과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유교의 근본 도덕을 실천하는 데는 게을렀습니다.
둘째로, 유교에도 철학이 있습니다. 우주기원(宇宙起源)에 대한 철학, 소위 이기론(理氣論), 이(理)로 되었다, 기(氣)로 되었다 하는 이기론을 중심으로 해서 실제 생활과는 상관없는 공리 공론으로 파쟁만 일삼고 싸움만 하였습니다.
셋째로는 대체로 이 사람들의 사상이 고루하고 편협해서 새로운 문화나 새로운 사상을 맹목적으로 배척을 하였습니다.
넷째로는 이 사람들은 소위 사대주의(事大主義), 큰 나라를 섬겨야 된다, 소위 모화(慕華)사상(思想)이라고 중화(中華)를 사모하는 사상, 중화가 아름답다고 사모하는 이 모화 사상에 중독이 되어서 민족은 얼을 잊어버리고, 민족의 정기를 저상(沮喪) 시켰습니다. 대체로 이런 몇 가지를 지적하였습니다.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는 벌써 二백 년이 넘었습니다. 우리 신교가 들어온 지도 七十 년이 지났습니다. 해방 후, 특별히 교계에 되어진 여러 가지 사정을 볼 때에, 오늘날 우리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힘있고 생명이 있다고 하면 기독교뿐인데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를 믿었습니까? 우리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희생적 정신을 중심으로 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실천 생활인데 이 생활보다도 오히려 생활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작은 신학적 문제로 싸움만 거듭해서 사분오열(四分五裂)되지 않았습니까?
우리 지도자들 가운데는 너무 편협해서, 무엇이나 새 것이라고 하면 전혀 이단시하는 경향은 없었습니까? 유교 지도자들이 과거 五백 년 동안 믿어오던 그 태도, 그 정신, 그 사람의 혈관에 있던 그 피가 오늘날 여기 서는 저나 여러분의 혈관 속에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를 바로 믿어야 합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사회에 있어서 소금의 직책을 하여야 될 터인데 믿는 사람자체가 이 죄악에서 떠나지 못하면 무엇이 우리 민족을 깨끗케 할 수 있습니까?『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죄악에서 떠나라』고, 회개하라고, 먼저 그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지은 죄 뿐 아니고 열조(烈祖)의 죄를 회개하라고.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은『스스로 겸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겸비」,「겸손」은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람은 흔히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할 때에 내게 대해서는 제일 장점을 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제일 단점을 봅니다. 나의 제일 잘한 장점과 다른 사람의 제일 잘못한 단점과 비교하니까 아무래도 내가 낫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마다 저 잘난 재미에 산다는 알이 나오지요. 여기 이남에도 그런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어렸을 때에 북도에서 들으니까「민충이」라고 - 여기서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하는 벌레가 있습니다. 민충이가 쑥대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면서「천하가 작구나」그런 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해 보는 사람은 흔히 자기가 잘난 줄 압니다. 교만해집니다. 참된 겸비가 어디서 오느냐?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바라볼 때에 생깁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비판해 볼 때에 내가 얼마나 더럽고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미련하고 얼마나 비겁하고 말할 수 없이 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연히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자연히 겸손해 집니다.
그러기에 참된 겸손은 참된 믿음에서 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일수록 교만합니다. 여기 한문 가운데「당랑거철」(螳螂拒轍) 이란 말이 있지요. 이것 좀 미안한 말씀이지요. 쉽게 말하면 소똥벌레가 길로 굴러오는 수레를 항거하며 싸우겠다고. 요사이 하나님과 싸우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소똥벌레가 수레와 싸우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자연히 미련하고 교만합니다. 사람이 무엇이나 할 것 같이 생각됩니다. 천하가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바로 보는 사람이면 자연히 겸손해 집니다. 잠언 十六장 十八절에『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꼭 이대로 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올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제가 오래 살지는 못하였지만 二十세기에 와서 된 일을 볼지라도 교만하던 모든 독재자들, 독재의 꿈을 꾸던 사람은 대부분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지금 몇 사람 남아 있다고 해야 오래 못 갈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여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기도하며…』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연히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살펴보고, 나의 모든 부족과 나의 모든 죄악을 깨닫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회개의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내가 이것을 잘못했습니다. 내가 그릇된 길을 갔습니다. 내가 이렇게 더럽습니다.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부족하고, 내가 이렇게 약하고, 내가 이렇게 미련하니까 하나님을 향해서『오, 하나님이여, 내게 지혜도 능력도 용기도 주시고, 나의 모든 필요한 것을 주시옵소서.』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되니 이웃을 위해서, 동포를 위해서, 이 민족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과 같습니다. 숨쉬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우리의 영혼이 질식되지 아니하고 사는 것입니다. 오직 기도만이 하늘의 권세를 움직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납니다. 엘리야가 한 번 기도할 때에 하늘이 삼 년 육삭(六朔)동안 닫혔고 또 한 번 기도할 때에 축복의 소나기가 내린 것입니다. 오직 기도만이 하나님의 중심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전에 사무엘은『내가 어찌 내 동족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음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할 수가 있겠는가』고 말하였습니다.
어느 때에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리요 마는,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우리 민족과 국가와 나와 내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죄올시다.『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성경에 가르쳤습니다.
넷째로는『내 얼굴을 구하라』하였습니다. 적극적 실행 면을 가르친 것입니다. 악에서 떠날 뿐만 아니라 내 얼굴을 구하라고. 사람의 얼굴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고. 사람의 뜻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고. 사람의 길을 찾지 말고 하나님의 길을 찾으라고. 모르면 모르지만 알면 꼭 하나님의 뜻대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상인들이 저자에서 장사를 할 때나, 선생들이 학교에서 가르칠 때나, 공무원들이 관청에서 사무를 볼 때나, 정치인들이 국사를 의논할 때나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를 힘쓰라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여기에 언약해 주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죄를 사하여 주시겠다고. 너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네 죄과 네 열조(烈祖)의 죄를 사하여 주시겠다고. 네게 복을 주실 뿐더러 땅을 고쳐 주시겠다고. 황폐한 강산에 축복을 하여 주시겠다고. 천재지변도 거두어 주시겠다고. 우리 한국의 견지에서 보면 남북 통일도 이루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과거 근 一세기에 우리 민족에게 미친 온갖 재난을 잠깐만 돌이켜 생각해도 진저리가 납니다. 이조 말기의 모든 재난, 결국 망국의 슬픔, 三十六 년간의 일제의 압박, 많은 희생과 눈물을 기억합니까? 해방된 후에도 국토는 양단 되었습니다. 六·二五의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도 부족해서 거듭되는 혁명을 겪었습니다. 지금은 방금 제三공화국을 건설하는 준비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설화(雪禍)가 호남과 제주도에까지 미쳤습니다. 목포와 인천 앞 바다에서 기선이 침몰되어서 수백 명을 잃었습니다. 원인은 없다고 하는데 물가는 계속해 올라만 갑니다. 작년에 흉년이 들었고 아직까지도 보리 고개를 멀었는데 벌써 절량(絶糧) 동포들이 싸전마다 장사진을 치게 됩니다.
그런데 민정 이양을 앞둔 정계의 현상은 어떠합니까? 파벌과 파쟁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한 편에서는 무엇을 사전에「했다」,한 편에서는 「하지 않았다」,한 편에서는「공약을 지켜라」,한 편에서는「공약을 안 지킨다,」「했다」, 「안 했다」,「지킨다」,「안 지킨다」하는 다툼이 국민학교 학생들 사이에 일어난다고 하면 그것은 용혹무괴(容或無怪)올시다. 그것쯤 뭐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적어도 불의와 구악(舊惡)을 일소하고 제三 공화국을 건설하고 남한 二천 五백만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다스리려고 나선 정당의 대표자들의 입에서 나올 때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사실 기가 막힙니다. 눈물을 흘리려면 한정이 없습니다.
나와 내 민족의 살 길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일찍이 솔로몬 왕에게 간단한 이 몇 가지 말씀으로 우리에게 전파하여 주셨습니다. 열조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구악을 문자 그대로 떠나야 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바로 살펴서 겸손하게 누구든지 내 허물을 먼저 고하고 남의 허물을 보려고 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되겠습니다. 어떻든지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그대로 시행하여야 되겠습니다. 수원숙우(誰怨熟尤)할 것이 없습니다. 먼저 우리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허물과 죄를 고쳐야 되겠습니다.
(一九六三년 二월 十일)


Ⅴ-16 하나님의 섭리(攝理) (사도행전 十七장 十六-三十一절)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十七·二十八)

오늘 아침은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설교한 내용을 우리가 봉독(奉讀)하였습니다. 아덴은 고대 헬라문화의 중심지로서 예술의 도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적으로 보면 매우 유치해서 우상을 섬기고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해서 단을 쌓고 숭배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아레오바고(Areopagus-귀신 산)산상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 참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시고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시고 인류의 연대와 국경을 초월해서 모든 것을 주장하시며, 또 이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같이 계셔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고 기동하고 있다고 하는 진리를 말씀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참 하나님을 전파할 때에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요, 또 하나님은 그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그들에게 나타내었습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섭리」라고 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요리문답 十一문을 기억하시는 분은 그 뜻을 다 아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지극히 거룩함과 지혜의 권능으로서 모든 창조물과 그 모든 행동을 보존하시며 치리 하시는 일이니라.』곧 다스리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실 뿐더러 창조하신 그 우주를 계속해서 보존하시고 다스린다는 교훈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마는, 섭리는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자연신교론」을 믿는 이들의 신앙이올시다. 그들의 말에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지으시고, 모든 것을 다 조직해 놓으시고, 그 가운데 운동하는 힘을 준 다음에는 우주 자체는 스스로 운행해 나가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다 만들어 놓고 거기다 가솔린을 넣고 발동까지 시켰습니다. 그 다음에는 저 혼자 가게 한다 그 말입니다.
성경의 교훈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동차를 다 만들었을 뿐더러, 가솔린까지 넣었을 뿐더러, 발동을 했을 뿐더러, 자기가 앉아서 운전까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올시다. 신구약 성경이 이 진리를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시편 一0三편 十九절에『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 유를 통치하시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느헤미야 九장 六절에『오직 주는 여호와 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보존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느니라.』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큰 것만 섭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 우리의 무리털 같은 세밀한 데까지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민족과 국가의 흥망성쇠나 인류의 역사만을 섭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개인 하나 하나의 일생도 섭리하신다고 하는 말씀이올시다. 그런 까닭으로 시편 一三九편 十六절에는『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고 했습니다. 산상보훈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햇빛과 비를 주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공중에 나는 새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들에 피는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기르시고 꽃피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생각할 때에 꼭 기억할 것은 이 세상에는 사실 우연이란 것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옛날의 에피큐리안 학파에서는 세상에서 되는 모든 일이 그저 우연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도 모든 것이 우연히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혹 계실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잠언 十六장 三十三절에『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비 뽑는 것도 작정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의 생활을 잠깐 회고해 보십시오. 그 요셉이 형들을 만나러 갔다가 형에게 미움을 받아서 어떤 물 없는 우물에 들어 갇혔습니다. 마침 그 때에 애굽으로 장사를 가는 이스마엘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팔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그 때 이스마엘 사람들이 지나간 것은 우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애굽에 가서 여러 사람에게 팔려갈 수 있지마는 보디발의 집에 팔려 갔습니다. 그것도 혹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내놓고 보면 우연이 아닙니다. 거기 있다가 큰 정욕의 시험을 이기기는 이겼지마는, 오히려 감옥에 들어 갇히게 되었습니다.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연이 아닙니다.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애굽 정부의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이 어떤 죄를 범하고 이상스럽게 요셉과 한 감방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우연 같습니다. 그러나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감옥에 얼마 있다가 이상스럽게 꿈을 꾸었습니다. 우연히 꿈꾸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내놓고 보면 우연이 아닙니다. 애굽 왕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혹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얼른 생각하면 우연한 것 같지마는, 이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 결국은 하나님의 뜻하시는 목적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의 총리대신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요셉 뿐 아니고 야곱의 일족을 기근 가운데서 구원해 내야되겠습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택한 백성을 그 때에 가장 문명이 발달된 애굽에 보내서 애굽의 문명을 배우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다 모여서 결국은 요셉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된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생활을 고요히 한 번 회고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우연히 되었다, 내가 그 곳이 우연히 가게 되었다, 내가 그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감으로 말미암아, 그 친구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애에 큰 변동이 있는 그런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고요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때에는 우연한 것 같지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도 그렇지만 이 하나님의 섭리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백성을 구속하고 특별히 그들을 보호해서 영생을 얻도록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런 까닭으로 그 택한 백성을 특별히 보호해 주십니다. 시편 五편 十二절에『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 하시리이다.』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잘 부르는 찬송가 二十一장과 시편 一二一편에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을 밤과 낮으로 보호하시고 졸거나 쉬지 아니하신다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一二五편에『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 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에『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하신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四十三장 二절에는 이사야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약속하시는 말씀이『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갈 것이다.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하고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생활을 생각해 볼 때에, 이삭의 생활을 생각할 때에, 야곱의 생활을 생각해 볼 때에, 요셉의 생활을 생각해 볼 때에, 모세의 생활을 생각해 볼 때에, 이 모든 생활을 생각해 볼 때에, 얼른 보면 계획이 없고 우연한 것 같지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된 것입니다.
모세가 어린 아기로서 저 나일 강변에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 어린 생명이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에는 이상스럽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상할 것 없이 애굽의 공주가 목욕을 하려 나왔습니다. 마침 이 어린 아기가 버려진 곳에 가까이 와서 목욕하게 되었습니다. 우연 같습니다. 그러나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된 것입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 자기 혈기로써 자기 동족을 도와주려고 하다가 화난 김에 애굽 사람을 쳐죽였습니다. 그리고는 멀리 도망쳤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그것은 우연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가서 四十년 동안이나 있으면서 광야의 모든 사정을 다 배웠습니다.
그 후에 자기 민족을 광야를 통해 인도키 위해서는 광야의 지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연히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 가운데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에스더서를 읽어 보셨지요. 파사의 아하수에로 왕 때에 총리대신으로 있던 하만 이라고 하는 사람이 유대 사람 모르도게가 자기에게 겸손치 않다고 진노해서 모르도게를 모함해 죽이기로 해 놓고 五十척 기둥을 자기 집에 세워 놓았지요. 그리고는 유대의 전 백성을 모함해서 이 백성은 왕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백성인데 이 백성을 그냥 두었다가는 파사 제국이 위험하겠으니 다 진멸(殄滅)을 하자고 왕에게 말해서 조서에 어인(御印)을 치고 이 조서를 각 도에 배부하고 내일 아침이면 그것을 실행할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서를 보면 이상스럽게 그 날 저녁에 아하수에로 왕이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자려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연한 것 같지요. 그러나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잠이 오지 않으니까 책이나 좀 보아야 되겠다고 하면서 그 역대 일기를 가져다 읽으려고 하였습니다. 역대 일기를 읽는 가운데 이상스럽게 두 내시가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고 하는 것을 모르도개라고 하는 사람이 알고 고발을 해서 왕의 생명이 보존되었다고 하는 그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우연한 것 같지요. 우연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어서 하만의 모든 계획이 뒤집혀서 오히려 자기가 五十척 되는 그 기둥에 매달려 죽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택한 백성을 구원해 주는 것입니다.
아마 이 가운데 四十되신 분들 가운데 지금까지 사시는 동안에 몇 번은 죽을 뻔한 경험을 당한 분이 여러분 계실 줄 압니다. 이북에서 내려오신 분들은 三八선을 넘어올 때에 한 번씩은 다 죽을 뻔했고, 또 六·二五를 겪어 보신 불들은 아마 몇 번씩이나 죽을 뻔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살아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붙들어서 이렇게 온 것입니다. 저도 일전에 가만히 내 일생을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참 지금까지 살아서 이 시간에도 여러분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십리의 손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신앙적 견지에서 돌아볼 것이면, 아무리 잘 믿는 사람이라고 하지마는 때때로 무서운 시험이 들어오고 유혹이 들어옵니다. 이와 같은 때에 하나님의 섭리의 손이 우리를 붙들어 주지 않았던들 우리의 신앙을 지키기가 대단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이 우리를 보호하여 주심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생각할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을 끝까지 배반하는 악한 사람들에게는 전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 전서 三장 十二절에『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낮은 악행 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주의 낮이 악해 하는 자들에게 향하게 될 때에는 형벌을 의미하게 됩니다. 주의 눈이 의인을 향하게 될 때에는 보호를 의미하게 됩니다.
시편 七편 十二절에 보면『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였도다.』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十一편 六절에는『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섭리가, 일월성신 천지만물이 그들을 벌하고 결국은 그들을 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이 우주에 악한 사람들이 영원히 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거스르지 아니하는가 종종 살펴야 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나님의 길을 거스르려는 분이 있습니까? 이 시간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전 우주의 창조물이 악한 사람에게 대해서는 형벌을 주기 위하여 협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옛날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순천지자는 흥하고 역천지자는 망한다』(順天之者興, 逆天之者亡)고 하는 말이 거기서 나온 말입니다. 또 섭리와 관련해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이 섭리가 그렇게 그 자녀들을 보호하고 사랑하는데 어찌해서 하나님의 백성도 고난을 당할 때가 있나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 믿는 이들도 환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이요 선을 이루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미 말씀했지마는, 요셉이 애굽에 내려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까? 그러나 그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당한 고난이요, 오히려 그 고난이 마지막에는 협동해서 선을 우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만민이 대속 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도들과 성도들이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온 천하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의인에게 수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다 협동해서 결국은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은 그 크신 사랑과 지혜와 능력으로 만물과 그 행동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십니다. 곧 섭리가 있습니다. 그 섭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일생에 당하는 모든 경험은 우연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스토아 학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맹목적인 운명에서 오는 것도 아입니다. 혹은 우리 동양사람들이 흔히 믿는 대로 사주팔자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생년월일시,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마는,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 섭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자녀를 구속하시고 영생을 주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섭리를 믿습니까? 우리가 여기에 해한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의심이 없습니까?
우리가 이런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 우리는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할지라도 그 폭풍우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중병을 다스릴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환난이 내 앞에 온다고 할지라도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되는 일입니다.『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힘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이시니 내가 무엇을 무서워하리요.』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또는 우리가 이 하나님의 섭리를 든든히 믿는다고 하면, 어떠한 환경을 당하든지 과히 염려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 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최대의 노력을 할 것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우리가 섭리에 대한 확실한 신앙이 있다고 하면, 아무리 슬픈 일을 당할지라도 과히 슬퍼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하는데 더구나 인생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성도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귀중히 보신다고 하였습니다. 죽음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되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화초를 재배하는 사람이 어떤 주인을 위해서 꽃밭을 잘 재배하였습니다. 장미를 잘 심어서 장미꽃이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는 나가 보니까 가장 아름답던 꽃이 없어졌습니다. 아주 성이 났습니다.『누가 이것을 없앴나?』그 다음에 알아보니까 그 꽃밭의 주인이 전날 저녁에 와서 그 꽃을 구경하다가 제일 좋은 꽃을 꺾어다가 는 자기 방의 제일 좋은 곳에, 좋은 화병에다가 꽂아서 온 방안이 환하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때 우리가 장미처럼 귀하게 기르던 귀한 이가 먼저 우리와 이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영혼을 하나님의 집으로 옮긴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든든히 믿는다고 하면 과히 슬퍼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을 뿐더러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이올시다. (一九六三년 二월 十七일)


Ⅴ-17 인생의 갈림길 (마태복음 七장 一-十四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七·十三-十四)

인생은 한 길 가는 나그네올시다. 누구나 매일 매일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고 모래도 갑니다. 한 사람도 그냥 앉아 있는 이는 없습니다. 이 인생의 길에서 쉬는 이는 없습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앞에도 구름 같이 많은 무리가 인생행로를 걸어가고, 우리 뒤에도 수 없는 젊은이들이 따라오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길을 걷는 이들의 제일 중요한 문제는 내가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래미야 二十一장 八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우리는 생명의 길을 걷습니까, 사망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신명기(申命記) 三十장 十九절에도『내가 오늘날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길, 사망의 길, 축복의 길, 저주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도 여기『좁은 일로 들어가라』고 권면 하셨습니다. 우리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이 두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좁은 길이냐, 넓은 길이냐? 생명의 길이냐, 사망의 길이냐? 오늘 아침 이 시간,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갈림길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이 두 길의 시작은 어떻게 되며, 어찌하여 하나는 좁은 길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넓은 길이라고 하셨으며,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은 어떠하며, 이 두 실의 종국(終局)이 어떠합니까?
먼저 이 두 길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이 두 길의 관문은 하나는 좁고 하나는 넓다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좁은 길로 들어가야 생명의 길로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베들레헴에 가면 그 곳에 예수 님께서 나신 곳을 기념해서 주후 四세기에 큰 예배당을 지은 것이 지금까지 있습니다. 돌로 튼튼히 잘 지었고, 그 안에 들어가 보면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성화를 그렸고, 강단 밑에는 바로 예수 님께서 나신 곳이라고 대리석에 별표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배당의 특색은 들어가는 문이 하나밖에 없고 그것도 매우 낮으며 작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내자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니까,『이 예배당에 들어오는 사람은 겸손해야 하는 까닭으로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낮고 작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겸손해야 될 줄 압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우선 등에 진 큰짐을 벗어놓고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는 여러 사람이 다 함께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씩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길로 들어가는 길을 왜「좁은 문」이라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셨습니까?
거기에는 다음 네 가지 뜻이 내포된 줄 압니다. 이 말씀은 산상보훈 가운데서 하신 말씀인데 여덟 가지 목을 받을 사람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제일 먼저『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으로 시작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사람의 제일 첫째 자격은 마음이 가난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부족을 깨닫고 나의 죄악을 깨달아서, 내가 가진 것이 없는 고로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아와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가난한 심령이라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제일 먼저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야 이 좁은 문을 통과해서 생명의 길로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로『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겸손할뿐더러 마음속에 애통하는 사람, 자기의 허물과 죄를 원통히 아파하면서 고치는 사람, 마음속에 있는 교만, 탐욕, 허영의 죄, 모든 부정한 정욕을 온전히 회개하고 죄의 짐을 벗어놓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이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데는 다른 사람의 덕을 입어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부모의 신앙이 독실하다고 해서 자녀까지 부모를 따라 거저 들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좁은 문은 장차 우리가 거쳐야 할 죽음의 문과 같아서 한 사람씩밖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생명의 길에 들어가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 좁은 문은「회개의 문」이올시다. 그러기에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제일 먼저 외친 말씀이『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회개가 없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에도 제일 먼저『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의 문은 좁습니다. 겸손해야 들어갑니다. 죄를 애통해야 들어갑니다. 내가 나 자신의 허물을 깨달을 때에 나 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회개의 문을 통과하여야 생명의 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옛날의 열 두 사도도 이 회개의 문을 통과해서 생명의 길을 걸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성남성녀, 성도들이 이 회개의 문을 통과해서야 생명의 길에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어렸을 적부터 부모의 교훈을 받고 주일학교에 나와서 성경을 배웠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장성하는 동안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서 나와 하나님과 홀로 직면해서 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온전히 회개함이 없이는 생명의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회개의 문은 하나씩 하나씩밖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길로 들어가려고 하면 이 좁은 회개의 문을 통과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인도하는 그 넓은 길에도 큰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너무 넓고 터서 사실 이 문은 있으나 마나 합니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머리를 숙일 필요도 허리를 굽힐 필요도 없습니다. 짐을 벗어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나 짐 진 그대로 무난히 통과할 수 있는 넓은 문이올시다.
여러 나라를 여행해 보면 제일 통과하게 쉬운 세관이 홍콩 세관입니다. 어떤 나라에 가면 짐짝을 보는 척이라도 하지만 홍콩에서는 아예 보지도 않습니다. 아마도 홍콩은 문자 그대로 자유항으로서 수출과 수입에 별로 구애를 받지 않는 모양입니다. 이 넓은 문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자연해 넓은 문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왜 이 생명의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고, 사망으로 이르는 길을 넓은 길이라고 하였습니까
첫째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 생활은 일정한 목표가 있는 생활이올시다. 빌립보 三장 十三절과 十四절에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좇아가노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일정한 목표를 향해서 달음질하는 생활입니다. 그 목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소유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내 성품으로 소유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내 인격으로 소유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영원 불멸의 생명을 내 생명으로 소유하기 위해서 간단 없이 이 일정한 목표를 향해서 달음질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좁아 보입니다. 이와 같은 일정한 목표가 없는 생활이므로 자연히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절제를 의미합니다. 이 목표를 향해서 달음질하는 데 필요한 일은 하지만 필요치 않은 일은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먹고 마시는 데 이르기까지 필요를 따라서 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일정한 목표를 향해서 내 생활을 절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비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이와 같은 목표도, 절제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극기를 의미합니다. 나를 이기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는 간단없는 유혹과 시험이 샘솟듯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탐심도 일어나고 정욕도 일어나고, 허영심도 일어나고 시기도 미움도 이기심도 일어나서 옛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그 시험이 간단없이 우리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것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이기는 극기의 생활, 자기와 싸워 이기는 극기의 생활을 의미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세상과 싸워 이기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안에서 유혹이 솟아나는 것만 아닙니다. 밖의 세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오는 유혹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세상의 허영을 통해서 들어오는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욕정, 여러 가지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통해서 들어오는 여러 가지 유혹이 밖으로부터 우리를 엄습해 들어옵니다.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은 많은 세력과 싸워서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 보기에는 좁아 보입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자기를 이기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꼭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십자가를 질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남을 구원하고 남을 도와주려고 할 대에는 십자가를 질 희생과 봉사의 정신이 없이는 목표를 향해서 달음질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 보기에는 좁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길이야말로 생명의 길이올시다.
그런데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목표가 없습니다. 여기 믿는 사람을 붙잡고『당신이 무엇을 위하여 사느냐?』고 물으면 신앙이 좀 있는 사람은『나는 주를 따라가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삽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면 무엇을 위해 사는 지도 잘 모르고 그저 사는 것을 위해 산다고 대답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법대에 다니는 학생이 제게 와서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법과에 입학할 때의 목표는 법학을 잘 연구해서 대통령이 꼭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우리 교회에 나와서 여러 가지 말씀을 들으면서부터 그 목표를 부득이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신앙 생활을 하지 아니하는 사람도 여러 가지 목표는 있습니다. 가령 정치가, 실업가, 예술가, 음악가, 교육자 등의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목표는 일시적 목표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정치가, 실업가, 예술가가 되기 전에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떤 인격을 이루느냐?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 님 말씀대로『너희가 온 천하를 얻고도 너희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불멸의 생명을 얻느냐, 못 얻느냐?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생의 목표가 없습니다. 생의 목표가 없으니 자연히 그들은「절제」라는 말은 쓰지만 절제의 생활을 하지 아니합니다. 자연히 그들은「극기의 생활」도 별로 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싸우기는커녕 세상과 야합해서 삽니다. 세상의 풍조를 따라갑니다.
또 넓은 길로 가는 것은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갑니다. 새벽 기도에 가기 위해서 일찍 일어나려고 힘써야 일어납니다. 날이 밝아도 눈을 감고 일어나려고 하지 않으면 안 일어나지는 것입니다.
참말을 할 수 있으려면 내가 꼭 참말을 하겠다고 결심해야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결심이 없으면 형편에 따라서 거짓말이 잘 나옵니다. 해방 후에 학교를 많이 생겼지만,「절도 전문학교」가 생겼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우리 한국 사회에 보면 절도 전문가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저절로 됩니다. 넓은 길은 저절로 갑니다. 내가 좁은 길로 가느냐, 넓은 길로 가느냐?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적고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은 많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임 당시에도 그랬고, 一세기에도, 二세기에도, 三세기에도, 二十세기에 와서도 그랬고, 유대 나라와 어느 나라에 와서도 그랬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국이라는 나라가 있지만 실상 그 나라에 가보면 사실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은 적은 줄 압니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그들의 영향력이 적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제一세기, 제二세기에 보면 신자의 수는 적었지만 장래 로마 제국, 아니 수천 년을 내러오면서 유럽의 역사를 변하게 하고 움직인 이들은 그들이었습니다. 소수였으나 역사를 움직였습니다.
촛불이 아무리 작지만 꺼지지만 않았으면 넓은 방을 비출 수가 있습니다.
소금이 비록 작지만 맛만 잃지 않았다면 많은 식품을 짜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에도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나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비록 소수이지만 생명의 길을 가고 빛과 소금이 된다고 하면 금후 한국의 역사를 우리가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 종국은 하나는 생명이요, 하나는 사망이올시다. 단순히 천당과 지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참된 성공과 실패를 의미합니다. 불멸의 생명과 영원한 파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앞에는 이 두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날 입학 기가 되어서 학생들과 부모님들이 학교에 입학하느냐 못하느냐, 이런 문제로 신경을 날카롭게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청소년 시기에 어떠한 문으로 들어가서 어떠한 길을 걷게 되느냐,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결국 그 청소년들의 일생의 운명을 좌우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중년을 지난 분들이 있는데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갈 길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꼭 올바른 길을 택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우리 하나 하나가 인생의 갈림길에서 그르치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 생명의 길을 걸어야 되겠습니다. (一九六三년 二월 二十四일)


Ⅴ-18 민족국가의 정신적 기초 (마태복음 七장 十五-二十九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七·二十四-二十七)

산상보훈(山上寶訓)의 결론으로서, 두 집 짓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두 집이 비슷하였습니다. 다른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창수(漲水)가 날 때에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든든히 그냥 서 있었지마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그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주님 말씀이 내 교훈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우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언제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관심이 없으리요 마는, 지금 이때는 더욱이 우리 국민들이 제三공화국을 세우기를 준비하는 때입니다.
국가는 문자 그대로 한 집이올시다. 집을 짓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그 기초입니다. 민주국가의 정신적인 기초가 무엇일까? 우익 독재도 아니고 좌익 독재도 아닌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정신적 기초가 무엇일까? 이 점을 성경을 통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민주국가가 잘 건설되려고 하면, 다음의 몇 가지 요소가 꼭 있어야 될 줄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들이 첫째는 개인 존중 관념이 철저해야 되겠고, 둘째는 정당한 평등의 관념, 셋째는 정당한 자유의 관념, 넷째는 질서와 법의 존중 사상이 철저해야 되겠고, 다섯째는 자유를 바로 쓸 수 있는 국민의 도덕적 품격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한가지씩 간단히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로「개인 존중 관념」이 철저해야 될 것입니다. 국민 하나 하나의 생명, 그 재산, 그 인격, 그 의견, 그 양심을 존중하는 관념이올시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사상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민주국가의 정부는 링컨(Abraham Lincoln)이 말한 대로 우리는 이 나라가 하나님의 뜻으로 자유의 새 삶을 갖도록 하여야 할 것이며, 그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가 이 땅에서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목숨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국가가 개인을 위하여 있고, 개인이 국가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사상이 철저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독재국가의 사상과는 정반대 되는 사상이올시다. 국가를 위해서는 국민 혹은 개인을 얼마든지 희생해도 관계없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주국가에서는 그와 정반대로 국민 하나 하니, 그 개인 인격에 대한 존엄 사상이 철저하여야 건전한 민주국가로 발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깊이 고려해야 될 것은 이런 관념이 본래 어디서 왔는가, 이런 사상의 원천이 어디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국민 하나 하나를 정밀히 관찰하는 가운데서 이런 사상이 왔는가?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 국민 하나 하나를 따져보면 선한 사람도 그렇게 많지 못하고 지혜로운 사람도 사실 적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관념은 어디서 왔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늘 읽는 성경에서 왔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지으실 때에는 그의 형상으로 지으셨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짐승들과 육체적으로 비슷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만이 아닙니다. 인격과 양심의 소유자로 창조를 했고 하나님과 능히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서 창조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하였습니다.『이 작은 자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양 백 마리 가운데 하나를 찾기 위해서 애쓰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 하나를 사랑하셔서 그 하나 하나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개인 하나 하나의 생명을 구속하게 위해서 십자가에까지 희생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우리 하나 하나의 생명이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인간이 존엄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닫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국민 하나 하나를 존중한다고 하는 이와 같은 관념은 본래 기독교 신앙을 기초로 한 인간관계에서, 즉 인간 철학에서 온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신앙이 없는 사람은 이 같은 관념이 철저하지 못합니다.
가령 유물론적 사상을 가지고 인간을 본다고 하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물질 세포의 우연한 집합체로밖에는 볼 것이 못됩니다. 한 짐승이나 사람이나 별로 다른 것이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인간관을 가진 사람이 인간의 존엄성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관념을 철저히 가지는 데는 먼저 기독교 신앙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정당한「평등 관념」(平等觀念)이 필요합니다.「평등」혹은「만인동등」이라고 하는 말은 만인이 동일하다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람은 얼굴이 다르고 빛깔이 다르고 지력이 다르고 체력이 다르고 재능이 다릅니다. 그러나 누구나 인간으로서 동등한 인권이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같은 천부의 인권을 받았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민주국가에 있어서는,
① 누구나 평등한 기회를 줄 수 있도록 정치를 해야 될 것입니다. 누구나 같이 배울 수 있는 기회, 활동 할 수 있는 기회, 살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정치를 하는 것이 민주국가의 요체일 것입니다.
② 누구나 범 아래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될 것입니다. 정의에 입각한 대우를 받아야 될 것입니다. 여기에 빈부나 귀천의 차이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고, 직업으로 말미암아 차이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고, 군경과 민간의 차이가 있어서도 아니 될 것이고, 공무원과 평민의 차이가 있어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③ 그 다름은 평등한 권리와 의무인 것입니다. 똑같은 선거권, 피선거권, 똑같은 병역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그 밖의 의무를 꼭 평등하게 질 수 있도록 민주국가에서는 모든 정치를 행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이론적으로는 말하기 쉽고 생각하기는 쉽지마는 실제로 이대로 행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관념이 철저하고 정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평등 관념의 원천이 어디 있는가? 사실 인류의 역사와 사회사를 연구해 보면 오래 내려오는 동안 어떤 사회나 계급이 있었고 차별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 평등 관념이 본래 어디서 싹터서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는가? 여기에 있어서도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말과 같이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창조함을 받았다고 하는 성경의 교훈에 그 기초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으로 창조함을 받은 까닭으로, 다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까닭으로, 인간 사이에 차별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사상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二장에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권면 하였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고,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여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갈라디아 三장 二十八절에『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다 같이 하나님의 자녀인 까닭으로, 한 구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밖에 없는 인간인 까닭으로 모든 인간은 평등의 기회와 평등의 대우와 평등의 권리와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하는 이념인 것입니다.
셋째로, 정당한「자유관념」(自由觀念)이 필요합니다.
자유는 우리 민주국가의 한 표어처럼 되었습니다.「자유 진영」이란 말을 씁니다.「자유 사회」란 말을 씁니다. 이 관념도 결국은 개인을 존중하는 사상에서 오게 된 것입니다. 전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四대 자유가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첫째는 신앙의 자유(信仰)
둘째는 언론의 자유(言論, 出版까지)
셋째는 공포에서의 자유(恐怖가 없는 世界)
넷째는 궁핍에서의 자유(窮乏 없는 世界)
미국의 트루블러드(Elton Trueblood)라고 하는 분은 민주주의 사상에 대해서 많은 글을 썼는데, 그는「자유의 선언」이란 저서 가운데서 여섯 가지 자유를 주장하였습니다.
첫째는 학문(學問)의 자유
둘째는 변론(辯論)의 자유
셋째는 신교(信敎)의 자유
넷째는 노동(勞動)의 자유
다섯째는 생존(生存)의 자유
여섯째는 봉사(奉仕)의 자유.
민주사회는 반드시 이 여섯 가지 자유가 있어야 되겠다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이 모든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 사회일 것입니다. 국민 하나 하나의 이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민주국가의 지상의 의무인 것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정당한 자유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가진 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흔히 자유는 그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방종이지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행하여야 할대로 행하는 그것이 자유인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 자유의 관념이 원천이 어디 있는가? 이것은 역시 근본을 더듬어 볼 것 같으면 성경에서 왔습니다.
예수 님께서 자기가 자라난 나사렛 회장에 가서 그 안식일에 회장에 들어가시게 될 때에 회당 장이 책을 올렸습니다. 예수 님께서 이사야 六十一장 一절을 찾아서 이 말씀을 읽으셨습니다.『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 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 유케 하고 주의 복된 해를 전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읽으시고 하시는 말씀이『오늘날 이 말씀이 응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영적 자유와 거기 따르는 모든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三장 十七절에『주의 영이 계신 곳이 자유 함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갈라디아 五장에『주께서 너희에게 자유를 주셨은즉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자유의 정당한 관념을 옳게 가지라고 계속해 말씀하시기를『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히려 피차에 봉사하라』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자유에 대한 올바른 관념을 가지고 또한 그 원천이 어디 있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때에 우리가 이 자유에 대한 모든 행동을 바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질서와 법」에 대한 존중 사상이 꼭 민주주의 사회에서 필요합니다. 옛날 군주 시대에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 임금에 대한 충성을 같이 보았습니다. 동일시했습니다. 그러기에 항상 유교에서 가르쳐 주기를 임금에게 충성하라, 부모에게 효도하라 했고 임금에 대한 충성은 곧 국가에의 충성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민주국가에 있어서는 그 이론이 다릅니다. 민주 사회에서는 질서와 법에 충성을 하는 것이 곧 국가에 대한 충성이올시다. 무슨 대통령이라고 하는 개인에게 충성할 것이 아닙니다. 법과 질서를 존중히 여기고, 이것을 엄수하고, 여기에 충성하는 것이 곧 국가에 충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월리를 바로 이해해야 때때로 정권이 교체되는 민주국가에 있어서 공무원 노릇도 바로 하고, 군인 노릇도 바로 하고, 국민 노릇도 바로 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질서와 법을 존중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 자유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법 아래에서의 자유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고, 법을 자진해서 지키도록 힘써야 민주 질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의 사회를 보면 일반적으로 준법 정신이 박약합니다. 이것은 국민만 그런 것이 아니고 법을 만드는 사람, 법을 잡는 사람 가운데 오히려 이런 정신이 부족하지 아니한가 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질서와 법을 존중히 여기는 이 사상이 철저하지 못하면 자유 있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이 질서와 법을 존중하는 전통이 박약합니다. 유럽의 역사를 보면 로마 시대에 콘스탄틴 황제가 회개하고 주를 믿게 된 이후부터는 양대 질서가 확립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영적 관계를 관할하는 교회가 있고, 그 밖의 모든 세속의 일을 관할하는 국가 행정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교회의 법이 있고, 국가에는 국가의 법이 있어서 그 사람들은 수천 년 내려오면서 으레 내가 교회에 입교를 안 했으면 모르지만 입교한 다음에는 교회의 법을 존중하고 법을 꼭 지킨다고 하는 이런 정신이 함양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와 같은 과거의 전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체로 준법 사상이 약합니다. 또 이 준법 관념의 원천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근본이 기독교 신앙에서 발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온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자연 질서를 창조하셨습니다. 자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가운데 법칙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자연 법칙이올시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자유가 있는, 양심이 있는, 양심과 자유를 겸한 인간을 창조해 주셨습니다. 이 인간들이 옳게 살기 위해서 도덕의 법을 주셨습니다.
물질 세계에는 자연의 법칙, 인간 세계에는 도덕의 법칙을 주셨습니다. 이 법칙은 영원불변합니다. 자연계의 자연 법칙이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계의 도덕의 법칙이 변하지 아니합니다. 영원불변의 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내가 가령 국회의원이 되어서 법을 제정하는 데 참여할 때 법을 바로 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국가의 법률도 어떻든지 하나님께서 본래 세운 도덕의 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헌정사를 잠깐 보면 정권이 한 번 바뀌면 헌법을 뜯어고칩니다. 이것은 단적으로 무엇을 설명하는 고 하니 헌법을 고치는 사람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법칙이 무엇인가 하는 이것을 찾아 그것과 같이 만들겠다고 하는 것보다도 자기 정권에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뜯어고친다는 생각을 말합니다. 또 반면에 어떤 영향을 가져오는고 하니 일반 국민에게는 헌법에 대한 존엄 사상이 적어집니다. 매일 고치기만 하니 그 무슨 놈의 헌법이냐고!
이 영원한 하나님의 법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법을 순종하는 정신도 많아질 것입니다. 결국 준법 정신도 하나님을 믿고 그 영원한 법을 믿느냐 안 믿느냐, 거기에 근본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서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자유를 바로 쓸 수 있는 국민의 도덕적 품격이 이 민주 사회에서 절대로 필요합니다. 자유가 참 귀하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지요. 그러나 신상 자유라고 하는 것은 위험한 물건입니다. 어린애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습니까? 정신병자에게 온전히 자유를 줄 수 있습니까? 상습 절도범에게 온전히 자유를 줄 수 있습니까? 사실 어떤 사람들은 온전히 자유를 줄 수 없는 까닭으로 부득이 교도소에 감금해 둘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유가 이렇게 귀하지마는 이 자유를 바로 쓸 수 있는 국민이 많을수록 자유가 많은 민주 사회가 건설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람이 적을수록 자유가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외부에서 강제로 질서와 법을 유지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한국에서 국민 개개인의 참 자유가 있는 평화로운 질서를 유지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우리 하나 하나가 하나님이 주신 자유, 국가의 법률이 보장하는 자유를 꼭 법대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국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대부분이 되면 자연히 그 사회는 자유가 많습니다. 결국 이런 품격이 어디서 왔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소위 인간 개조의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인간 개조를 어떻게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 성경에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됩니다. 고린도 후서 五장 十七절에『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변하게 해서 새 사람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어디 잇느냐? 그리스도에게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이와 같은 사람을 만드는 곳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민주국가의 정신적 기초는 기독교 신앙입니다.
주님의 말씀이올시다. 예수 님께서 산상보훈에 말씀하신 대로『너희가 내 말을 듣고 이대로 행하면 집을 반석 위에 지을 수가 있다. 너희 한국 사람들아, 너희가 내 이 말을 듣고 이대로 믿고 이대로 행하면 너희 큰 집, 국가라고 하는 것을 진리의 반석 위에 세울 수 있다. 그렇지 아니하면 아무리 다른 방면에 애쓴다 할지라도 결국은 모래 위에 세우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다 요사이 신물을 보면서 정당의 움직임에 주의를 많이 합니다. 가러나, 아침에 모였다가 저녁에 흩어져 버리는 정당에 눈을 파는 것보다도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 이 때에 꼭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 민중에게 이 진리를 전파하고, 이 민중이 이 진리를 깨닫고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돌아와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이 운동이 근본적으로 애국 운동이요, 우리 믿는 사람의 지상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一九六三년 三월 三일)


Ⅴ-19 기독교 노동관 (데살로니가 후서 三장 六-十八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三·十二)

예수 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또는『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三월 둘째 주일은 우리 총회에서「노동 주일」로 정해서 기키는 날입니다. 이 날은 우리가 특별히 근로 대중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을 복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모든 사업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어떻든지 우리 나라에 사회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오늘 이 노동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우리가 상고해서 그 교훈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상고해 보니 첫째로 일(노동)은 인간의 천직(天職)이올시다. 날 때부터 일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一장 二十七절, 二十八절을 읽으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에 고기와 공중에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 리라.』하셨습니다.
거기 땅을 정복하라, 모든 움직이는 것들을 다스 리라 하는 말은 일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창세기 二장 十五절에『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 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하였습니다. 보통으로 에덴 동산에서는 아무 것도 안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니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다스리며 지키는 것은 일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후에 일을 맡기셨습니다.「일하라」「일하고 먹으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올시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사람이 범죄하기 전에 이 일을 맡겼습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에는 물론 일이 더 수고롭게 되었습니다. 땅이 저주를 받아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서 더 수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해서『너는 종신(終身)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일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도 우리 사람에게 맡긴 것입니다. 일은 우리 인간의 천직이올시다. 하나님께서 일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일은 우리 인간의 천부의 의무입니다. 따라서 일이 우리 생의 원칙이올시다. 일은 우리 육체의 발육과 건강에도 유익합니다. 일하니 아니하면 육체가 잘 발육될 수 없고 건강이 증진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은 심리적 건강에도 유익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심리가 건전합니다. 심지어 어떤 앓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일을 시키는, 즉 직업 요법도 있는 것입니다. 일을 하여야 사람의 마음이 건전해집니다. 일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병들기 쉽고, 일하지 아니하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의심이 들어오고 근심이 들어오고 여러 가지 고통이 들어오기 쉽습니다.
꼭 정당한 해석일는지 모르지만, 세례 요한 같은 이도 요단강에서 모든 사람에게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며 그 때 예수 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메시야를 증거 했습니다. 그 때는 일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만 세례 요한이 헤롯왕에게 붙잡혀서 감옥에 들어가서 오래 일하지 아니하고 감금되어 있을 때에 그만 예수 님께 대한 확신이 떨어져서 의심이 났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서『오시겠다고 하시던 분이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되겠습니까?』물었습니다. 아마 일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이런 의심이 생기지 않았는가 생각이 됩니다.
일은 도덕적 생활에 있어서도 유익합니다. 일하는 사람이 건전한 도덕적 생활을 합니다. 일하지 아니하는 사람들 가운데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할 것 없으니까 극장에도 하고 화투도 하게 되고 댄스홀에도 가게 되고 말 장이 노릇도 합니다. 너무 분주한 사람은 딴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한가한 소위 유한 마담들 가운데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지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일은 도덕적 생활에도 필요합니다.
제가 몇 해 전에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에 있는 카리브 바다의 발베이도스라고 하는 섬에 가서 그 지역 여러 섬에 있는 교역자들이 모여 목사 수양회를 하는 자리에 참석했던 일이 있습니다. 발베이도스에 가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조그마한 섬인데 아마 한국 이수로 길이가 약 三十리, 넓이가 약 二十리로 비행기 타고 높이 올라가면 다 뵙니다. 이 섬은 참 좋습니다. 언제나 이른 여름 같습니다. 과히 덥지도 아니하고 물론 춥지도 아니하고 언제나 꽃 피고 정치 아름답고 아주 바닷물이 맑고 참 피서하기 좋은 아름다운 곳입니다.
어떤 이가 여기 꽃도 많고 하니까 여기 꿀벌을 갖다 좋으면 많을 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꿀벌 통을 이 섬에다 갔다 놓았다고 합니다. 갖다 놓으니까 처음에 몇 달은 이 꿀벌들이 꿀을 잘 만들어 옵니다. 그러더니 그 다음부터는 꿀을 만들어 오지 않는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저 사방에 꽃이요 언제나 벌들이 청밀(淸蜜)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꿀을 갖다 모아 놓을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꿀벌들이 할 것이 없어서 그저 꽃에서 꿀을 먹고는 악착스럽게 다른 사람을 만나는 대로 쏘아주어서 큰 변이 났었다고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일없는 사람은 이런 꿀벌 비슷해서 공연히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만 해칩니다. 일은 도덕적 생활에도 필요합니다. 일하는 가운데 만족을 얻고 천재가 다시 되고 내재의 능력이 다시 될 수가 있습니다. 일하는 가운데 향상이 있고 발전이 있고 새 문화가 창조됩니다.
오늘날 우주를 탐색하는 과학자들이 얼마나 밤과 낮을 쉬지 아니하고 일하는지 압니까? 일은 인간의 천직이올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하게 만들었습니다. 일하고 살고 일하고 먹데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둘째로, 성경을 상고해 보니『모든 일은 신성하니라.』즉 꼭 같이 어떤 경우의 일이든지 필요한 일은 다 신성하니 존중해야 된다는 이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일은 대체(大體)로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신적 노동, 하나는 육체적 노동. 사실은 이 두 가지 종류를 꼭 분간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아무리 정신적 노동이라고 할지라도 육체가 또 노력해야 됩니다. 또 아무리 육체적 노동이라고 할지라도 머리를 쓰면서 일을 해야 일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능률이 납니다. 그러나 보통으로 우리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어떤 시대에서든지 정신적 노동은 존경했지마는 육체적 노동은 천시를 했습니다. 우리 동양 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서양 문명 사회에서도 그 사회 내용을 볼 때에 일은 천시를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렇게 지혜가 많다고 하는 플라톤(Pluton)같은 유명한 철학자, 로마의 유명한 학자 시세로(Cicero)같은 사람도 노동이라고 하는 것은 노예들이나 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육체 노동도 전신 노동과 꼭 같이 신성하고 귀하다는 사상이 어디서 왔습니까? 그것은 성경에서 왔습니다. 다른 사회, 다른 철학자의 문헌, 다른 어떤 사상가의 문헌 가운데서 별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펼쳐서 읽어보면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께서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六장 二절에 보면 이런 말이 기록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 님의 교훈을 듣고 놀라 가로되,『이 사람이 목수가 아니냐!』예수는 나사렛 목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께서 육체 노동인 목수 일을 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요한 복음 十二장에 보니 예수께서 온 권세를 다 자기에게 맡기신 줄로 스스로 의식하면서도 실지 한 일은 옷을 동이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일이었습니다. 노예가 하는 노동을 한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부른 제자 대부분이 어부요, 농부였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사도 바울 선생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에 전서 四장 十一절에는 이런 말로 교훈 했습니다.『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특별히 육체 노동을 하라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에베소 장로들을 청해 다가 여러 가지로 권면할 때에 마지막으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자기 손)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들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범을 보였나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二十·三十四-三十五). 내 손으로 일했다고 하는 것을 자랑삼아 모든 장로들에게 부탁하면서 너희들도 이대로 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신약에만 이와 같은 사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구약에도 역시 이와 같은 사상이 있습니다. 잠언 三十一장에 보면 그 때에 히브리 사람들의 이름으로 진주보다 귀한 현숙한 여인에 대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거기 가장 어진 여인이 어떠한 여인이냐를 기록할 때에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으며……』가장 현숙한 여인들은 집안에서 길쌈을 하고 실지로 일하는 부인이라는 말입니다.
중고시대의 수도원 제도를 보면 수도사들이 깊은 산에 들어가서 그저 성경만 보고 기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밭을 갈고 농사를 짓고 옷감을 짜고 자기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자작자급 했습니다. 기도하며 노동했습니다. 사실 모든 노동은 꼭 신성하다 하는 그 사상은 기독교의 유산이올시다.
그러기에 마르틴 루터(Martine Luther)는『다른 정직한 일은 성역(聖役)과 같이 거룩하다』고 말했습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일, 혹은 거리를 쓰는 일, 모든 필요한 정직한 일은 성역과 꼭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꼭 같이 거룩하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그르쳐 주는 사상이올시다.
셋째로는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고 정의의 대우를 요구했습니다. 모든 근로 대중의 권리를 인정하고 정의의 대우를 요구했습니다. 누가복음 十장 七절에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일꾼이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일꾼은 정당한 임금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권리가 있다 그 말입니다. 받을 권리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도『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짐승을 위한 말이 아닙니다. 짐승도 일하는 짐승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거늘 하물며 일하는 사람에게 생활비를 보장해야 되지 않겠느냐? 일꾼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정의의 대우를 요구한 것입니다.
말라기 三장 五절에 보면『내가 심판하기 위하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 하리라.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품꾼의 삯에 대해서 억울하게 하여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지 아니하는 고용주들에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지불할 대로 마땅히 지불하라고 권면 했습니다. 신명기 二十四장 十五절에『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하였습니다. 품삯을 정당하게 주되 줄 그 때에 꼭 주라고, 연기하지 말라고, 끌지 말라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겠다고 경고를 한 것입니다. 모든 일 시키는 사람들이 분명히 들을 말이올시다.
그러므로 야고보 五장 四절에 그 당시 옳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이와 같이 경고의 말을 하였습니다.『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소리가 만 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사회의 불의 한 이 모든 일이 불의 한 사회제도 아래에서 불의 한 대우를 받는 이 모든 억울한 사람들의 호소하는 음성이 하나님께 들렸다고,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고 하는 뜻이올시다.
그러므로 모든 근대 종로의 권리는 확실히 인정하고 정의의 대우를 하라고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품삯을 주리만큼 주어야 하고 줄 때에 주라고. 만일 세계 각국에 있는 모든 자본주들이 이 성경의 교훈을 좀 더 일찍이 깨닫고 실행하였던들, 근로 대중에게 사회주의를 실현하며 그들의 생활을 보장해 주었던들 오늘과 같이 노동자들의 불평과, 불만을 이용하는 공산주의 운동이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새 나라를 건설하는 우리 나라에서 이 근로 대중의 권리에 대한 보장, 사회정의의 실현은 시급한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여야 될 것입니다.
넷째는 모든 일을 하나님과 동사(同事)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과 동사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 전서 三장 九절에 사도 바울은『우리는 하나님의 동역 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라 일할 때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가 되라.』 사도 바울이 골로새 사람들에게 편지할 때(三장 二十二절 이하)에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종들아(육체 노동하는 사람들은 종들이었습니다.)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그때에 믿는 사람들에게, 믿는 사람으로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부탁한 말씀인데 간단히 말하면 세 가지로 부탁했습니다.
첫째는 눈가림만 하지 말고 주를 두려워해서 성실한 마음으로 너희 맡은 일을 하라. 무슨 일이든지 눈가림으로 하지 말하고, 진실히 하라고.
둘째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러니까 공장에서 말들 든 지, 집안에서 뜰을 쓸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게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위해서 하는 자와 꼭 같이 하라고.
셋째로는 상을 주께 받으리니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니라. 네 맡은 일에 이와 같이 잘하는 것은 단순히 네 생활만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 네 주인을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 실상은 네 맡은 일을 옳게, 성실하게, 부지런하게, 바로 하는 것은 곧 주님을 섬기는 일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가정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공장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상점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거기서 꼴 옳게 하고 바르게 하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예배당을 짓는 공사장에서 여러 사람들이 돌을 깎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서 그 중 한 석수(石手)를 붙잡고『당신은 뭘 합니까?』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 석수가 얼른『나는 그저 하루에 백원 벌이합니다.』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다른 석수에게『당신은 뭘 합니까?』하니까,『나는 돌을 깎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다른 석수에게『당신은 뭘 합니까?』 이 사람은『나는 만류 주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습니다.』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보세요, 꼭 같이 돌 일을 하지요. 그러나 그 정신이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가 꼭 같이 무슨 일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정신을 가지고 그 일을 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과 동사하는 것, 이것이 곧 기독교 노동 관이올시다.
우리 믿는 사람은 일을 이렇게 봅니다. 무슨 일을 맡았든지 하나님과 의논하고, 하나님의 힘을 입고, 하나님과 같이 일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사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일한다는 이 신념, 이 사상이 곧 우리 믿는 사람이 노동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사상인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우리가 일할 때는 그 일이 참 기도요, 그 일이 참 예배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밀레(Millet, Jean Francois) 의 유명한 그림 가운데「만종」(晩鐘)이라는 그림을 다 아시지요. 어떤 젊은 부부가 밭에 나가 종일 일을 하다가 황혼이 될 때에 멀리 예배당에서 저녁 종을 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두 부부가 일하던 기구를 다 모아놓고 꼭 같이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는 그림이올시다.
하나님과 같이 일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일하는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의 일에 대한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문제를 생각할 때에 꼭 기억할 것 몇 가지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각자 내 생활을 위한 직업이 물론 있습니다.
이 모든 직업을 이제 말한 이 정신에 의지해서 꼭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은 공통으로 내 직업 이외에 그보다 더 큰 일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주의 일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봉사하며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이 나의 생활을 위해서 일하는 어떤 일보다 첫째 되는 일이요 더욱 귀한 일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오늘 노동 주일을 당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기 근로 대중에게 먼저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예수 님을 보면 갈릴리 바다에서 일하는 어부들에게 그 일하는 직장에 가서 하나 하나 만나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일꾼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우리가 또 한 가지 기억해야 될 것은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일에는 기회가 있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우리가 주의 일을 해야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밤이 오게 되면 아무도 일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옵니다. 환난의 밤이 오고, 질병의 밤이 오고, 노약(老弱)의 밤이 오고, 다시 말하면 죽음의 밤이 올 것입니다.
밤이 오게 되면 아무리 일하려고 애를 써도 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할 기회를 주실 때에 주를 위해서 우리가 일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한국에 실업자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과 동역 하는 꼭 이와 같은 생각을 하지고 일할 일꾼을 찾으려고 하면 사실 드뭅니다. 이 황폐한 강산, 죄악으로 가득 찬 온 한국이 이와 같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일꾼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꾼이 되겠습니까? (一九六三년 三월 十일)


Ⅴ-20 십자가를 바라보자 (누가복음 二十三장 三十三-四十九절)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눅 二十三·四十九)

오늘 아침은 사도 누가가 기록한 대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고난받으신 사실을 우리가 읽었습니다. 四十九절에 보니『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이 멀리 서서 주님의 수난을 바라보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언제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하지 아니 하리요 마는, 특별히 이 때와 같은 사순절 절기에는 십자가를 마땅히 바라보고 묵상하여야 되겠습니다.
제가 몇 해 전에 태국의 방콕이라고 하는 곳이 가서 어떤 보석상을 하는 상점에 들어가니 그 주인이 한 보석을 제게 보이는데, 면(面)을 따라서 각각 다른 빛이 보였습니다. 한 면을 보면 푸른빛이 나타나고, 다른 면을 보면 분홍빛이 나타나고, 이렇게 보는 면을 따라서 다른 보석을 구경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여러 가지 면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또 면을 따라서 다른 빛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오늘 아침 세 가지 다른 면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면을 바라보십시다. 이런 면으로 바라볼 때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마음의 상처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비유를 통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어진 어머니가 한 분 계십니다. 그에게 귀한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이 어머니는 그 아들을 극진히 사랑합니다. 장래에 대하여 큰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이 아들이 천만 뜻밖에 꿈에도 생각 못한 큰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죄의 결과로 제일 먼저 상처를 입는 이는 누구입니까? 어머니입니다. 왜? 어머니는 그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 어떤 어진 부인이 있습니다. 자기의 남편을 극진히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범사에 그를 믿습니다. 그랬는데 알고 보니 그 남편은 큰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런 소식이 들릴 때에 제일 먼저 그 남편의 죄로 말미암아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이는 주구입니까? 그 아내올시다. 왜? 그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그에게 죄가 들어올 때에는 그 죄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이 먼저 마음의 상처를 입고 고통을 받습니다. 이 상처와 고통은 사랑에 정비례합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그 상처는 깊고 사랑이 뜨거울수록 그 고통은 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의 사랑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와 같은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와 같은 사랑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범죄를 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중심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가슴속에 고통의 십자가가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갈보리산 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사항의 하나님의 가슴속에 세워진 그 고통의 십자가의 역사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의 성품과 그의 교훈과 생활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의 생활의 절정인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깊이 상한 그 상처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내가 짓는 죄는 하나님의 가슴속에 십자가를 세워 주는 것입니다. 내가 한 가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십자가 속에 못을 하나 더 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죄를 멀리 해야 됩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또 다른 그리스도의 면으로 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그렇게 바라볼 때에 십자가는 속죄의 제사입니다. 대속의 희생입니다. 신약성서 전체가 이 진리를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 님께서 광야에 나타나실 때에,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말씀이『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님 자신도『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하고 내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왔노라』
사도 요한 은 말씀하기를『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으로 볼 때, 이 십자가는 만민의 죄를 대속 하기 위한 희생의 제사입니다. 아담이 범죄(犯罪)한 후에 모든 사람이 같이 범죄 했습니다. 이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원죄 이외에 모든 사람들은 각각 자기가 짓는 죄가 많습니다. 그 결과는 성경대로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은 없으니, 곧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죄에는 값이, 삯이 있습니다. 그 값은 사망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니, 결국은 멸망을 받을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신 까닭으로 멸망 받는 이들을 그 자리에 그냥 둘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그저 얼른 쉽게 생각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그저 용서해 주면 그 뿐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렇게 용서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올시다. 공의가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우주를 다스릴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 우주의 도덕적 질서가 무너지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기억하신 바와 같이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은 다음에 사함을 받기 위해서 어린양을 대신 죽여서 그 피를 흘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림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 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도를 영원히 반복할 수도 또한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능히 만민의 죄를 대속할 수가 있겠는가? 이런 분은 우리 인간 중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왜?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은 까닭입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인간 아닌 어떤 다른 영적 존재가 인간의 죄를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가령 천사가 인간의 죄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는 인간이 아닙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 해서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은 인간이면서 죄가 없는 사람이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수육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사람이 되신 문이지만, 그러나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 그리해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만민의 죄를 대신해서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하나님 앞에 단번에 희생의 제사를 드림으로 누구든지 지금 이후로 그를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얻는 길을 열어 놓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대속의 제사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 공의를 세우시고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범죄한 인간의 사죄와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친히 말씀하신 대로『그가 찔림을 받은 것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을 입은 것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그 말씀 대로입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몸 버리시고 십자가에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가 생명을 끊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명이 이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우리는 무엇으로써 주님의 이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 길을 묵상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셋째로 또 다른 면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인간적인 면에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이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생의 원리를 우리에게 보여 주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밀 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주님께서는 자기가 친히 하신 그 말씀대로 밀 알 하나가 되어서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승리를 하시고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내가 들리 우면 많은 사람을 내게로 이끌리라.』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 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십자가에 높이 못 박혀서 들리웠습니다. 죽으셨습니다. 이 들린 이는 죽음을 통해서 많은 사람을 이끌어 내어 구원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사중구생(死中求生)의 원리,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 원리를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자기가 이 생활 원리에 사시고 우리 모든 믿는 사람을 향해서 이대로 살라고 권면 했습니다.『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이기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외쳤습니다.『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잃으면 찾으리라.』잃으면 찾을 것입니다.
사중구생의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면서 너희들도 그 원리에 의지해서 살라고 권면 했습니다. 예수 님께서 우리를 향해서『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너희의 빛을 비추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희생이 없이 빛을 비출 수 있습니까? 촛불이 빛을 비추려면 초 자신이 타서 없어지지 아니하고 빛을 낼 수 있습니까? 전기 자체가 소모되지 아니하고 전깃불이 빛을 낼 수 있습니까? 희생을 통해서만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소금이거든 맛을 잃지 말라고 우리에게 권면 했습니다. 소금인 자기 자신이 녹아서 없어지지 아니하면 어떻게 맛을 낼 수 있습니까? 희생을 통해서만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꽃은 떨어져야 열매가 열립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이 이 원리에 의지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모든 믿는 사람을 향해서『너희들도 이 원리에 의지해서 살고 나를 따라오라』고 외치십니다.『죽음을 통하여 생명을 얻으라.』『희생을 통해서 승리하라.』 이 역설적 원리를 우리에게 십자가는 보여 줍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났다 한 번 죽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와 자유를 위해서 죽을 결심을 가지고 그대로 살면 그는 금생(今生)과 내생에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생활 원리입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지금까지 말합니다. 스데반도 죽었으나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모든 순교자들도 죽었으나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 생활원리를 따라서 살라고 말씀했습니다.
제가 보건대 우리 한국 민족은 또 다른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자유냐, 노예냐? 대한민국의 국시인 자유 민주주의가 이 땅에서 보존이 되느냐, 못되느냐? 국민의 주권이 회복되느냐, 못되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간의 기본권이 이 땅에서 인정이 되느냐, 못되느냐? 이런 모든 문제는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우리 국민 하나 하나가 십자가의 원리를 의지해서 살기만 하면 무난히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십자가는 나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슴속에 깊은 상처를 보여줍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십자가는 내 대신에 주님께서 죽으시고 내 생명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십자가의 사랑을 보답하는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 영원불멸의 생활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이대로 살아야 되겠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一九六三년 三월 二十四일)


Ⅴ-21 승리의 주 (요한복음 十六장 二十五-三十三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十六·三十二)

이 말씀은 마지막 날 저녁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여러 가지 권면을 제자들에게 주시고 결론으로 하신 말씀이올시다. 그 날 저녁 주님께서는 친히 발을 씻겨 겸손의 덕을 보여 주시고『내가 너희를 사랑하듯 너희가 피차에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새 계명을 주시고『내 집에 있을 곳이 많다』하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려주시고『너희는 내 안에 있으라. 내가 너희 안에 있으리니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지 아니하면 절로 열매를 맺힐 수 없다』고 열매를 맺는 비결을 가르쳐 주시고, 또는 보혜사(保惠師) 성령을 보내주실 약속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여러 가지 깊은 말씀을 하신 후에 결론으로 이렇게 마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우리가 이 결론의 말씀을 잠깐 이 시간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먼저「내 안에」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예수 님 안에도 있고 또 세상에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구 세계에서 삽니다. 두 차원에서 삽니다. 우리의 심령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는 이 세상에서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물질로 된 까닭으로 물론 물질 세계에서 살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을 입고 물질을 먹으며 물질로 지은 집에서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삽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 나라의 국민이 되는 동시에 하늘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회의 일원인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요, 성도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이 세상 나라의 주권 아래 있지마는 실상은 그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많이 하듯이 천국의 사업을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 발을 디디고 걸어다니지마는, 우리의 심령은 실상은 하늘나라에 두고 하늘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세상에서 우리가 한 나그네로 산다는 사실입니다. 또는 우리가 이 세상에 나그네로 사는 동안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잠깐 뿐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은 언제든지 한 번은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은 두 차원에서 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삽니다. 동시에 이 세상에서 삽니다. 물론 세상에서 사는 것은 우리가 물어볼 것도 없고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질 것은 우리가 주안에서 또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할 때에『주안에서 갇힌 내가…』이런 말을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몸은 감옥에 갇혔지마는 실상 그의 심령은 주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주안에서 갇힌 내가…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주안에서 항상 즐거워하라…내가 네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한 것이 없느니라.』
여러분, 다「주 안에서」삽니까?
둘째로 생각할 것은, 이렇게 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우리가 두 차원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 경험은 온전히 다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경험은 그야말로 평강(平康)입니다. 평안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바로 전에 요한 복음 十四장 二十七절에 말씀하셨습니다.『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우리가 주안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주님의 평안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주안에서 얻는 경험이올시다. 주안에서 기쁨이 있을 뿐입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 사도들의 모든 행적을 볼 때에 주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으면서도 항상 기뻐했습니다. 실라와 바울이 빌립보에서 억울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서도 깊은 밤에 찬송을 부른 것입니다. 환난의 밤에도 찬송을 불렀습니다. 순교를 하면서도 감사를 드린 순교자의 역사를 우리는 종종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안에서 얻는 경험은 오직 우리 심령의 평안이올시다. 즐거움이올시다. 감사올시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어떠합니까? 여기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이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은 본래 환난이 많은 곳입니다. 천재지변이 있고 생로병사의 인생 사고(四苦)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라고,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이 모든 환난이 우리에게는 아주 오직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같이 이 환난을 종종 당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렇게 보통으로 당하는 환난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하는 말씀은 이 환난은 너희가 나를 믿음으로, 너희가 내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당할 환난이 있다고 하는 그 말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도 요한 이 요한 一서를 기록할 때에 이런 말씀으로 기록했습니다.『너희는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 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로 좇아오지 아니하고 이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 많이 있습니다. 곧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좋은 씨를 뿌렸지마는 원수가 가라 지를 도처에 뿌렸습니다.
이 가라지 들이 성하였습니다. 이 악마의 세력은 각계각층에 침투하여 있습니다. 이들의 세상생활의 원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는 생활의 원리와는 정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충돌이 있습니다. 여기에 반대가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의 충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의 충돌이 있습니다. 의와 불의의 충돌이 있습니다. 선과 악의 충돌이 있습니다.『너희 나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은 부득이 이 충돌로 말미암아 오는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미리 주님께서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악이 많은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를 따라서 진리와 사랑과 성결(聖潔)의 생활을 하려고 하면 자연히 여기에 충돌이 있습니다. 세상의 비난이 있습니다. 세상의 중상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순교를 당할 수밖에 없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또 세상의 악한 마귀는 일변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가 유혹에 들지 아니할 때에는 핍박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너희가 장차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으나 담대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의 성경에는「안심하여라」혹은「용기를 내어라」하였습니다. 왜? 내가 이 세상을 이미 이겼으므로 너희는 내 안에 있어 내가 세상을 이길 때 너희도 같이 세상을 이겨서 내가 세상을 이김으로 너희도 세상을 이길 터이라고, 그러므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살라고 우리에게 권면 하여 주십니다.
과연 예수 님의 일생을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잠깐 생각하면 그의 일생은 싸움의 일생이었습니다. 악한 마귀와의 대결이었습니다. 악의 세력과의 충돌이었습니다. 어느 때가 그렇지 아니 하리요 마는, 복음서를 가만히 읽어볼 때 예수 님께서 악의 세력과 대결해서 싸운 싸움터가 한 서너 곳 특별히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싸운 곳은 주님께서 광야에서 홀로 四十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기도할 때에 그의 심령 깊은 곳에서 큰 싸움이 벌어집니다. 모든 큰 싸움은 사람의 심령 속에서 먼저 벌어집니다. 예수 님께서 오래 금식하실 때에 매우 주렸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와서 하는 말이『네가 심히 주린 모양인데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하였습니다.
배고플 때에 시험이 들어옵니다. 빈궁할 때에 경제의 시험이 들어옵니다. 경제를 통해서, 먹을 것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배고플 때에 돌로라도 떡을 만들어 먹어라, 수단을 가질 새가 잇느냐, 먹어야 되지 않느냐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겼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 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니라.』주림을 이기면서 악한 마귀의 유혹을 또한 이긴 것입니다.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을 높은 성전 꼭대기에 데리고 가서는『뛰어 내리라. 그러면 선지자 노릇을, 메시야 노릇을 쉽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인기와 명예에 대한 시험인 줄 생각합니다. 특별히 청년 시대에 이런 시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좀 빨리 성공을 해야지…좀 빨리 명성을 얻어야지…그렇게 하려면 남 안 하는 일을 뭘 좀 해 봐야지…이것도 해야지…』예수 님께서는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물리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또한 예수 님의 심령을 이끌고 높은 산에 올라 천하 만국의 영광을 다 보이면서『이것은 내게 속하는 것이요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것인데 거저 나에게 절만 한 번 한다면 곧 주리라』고 했습니다. 권세와 지위와 영광과 허영에 대한 유혹이올시다. 이런 시험을 받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그저 이런 것을 얻으려면 마귀에게 절을 해야 돼. 악한 수단이라도 사양치 않아야 돼. 권모술수도 좋고, 무엇이든 가리지 말고….』심령 깊은 속에, 청년들의 마음 가운데 이런 싸움이 얼마나 벌어지는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때에도 예수 님께서는 오직 주 하나님만 경배할 것이라고 하는 말씀으로 물리친 것입니다. 그는 먼저 고요한 가운데, 깊은 심령 속에서 홀로 이 악한 마귀의 유혹을 이겼습니다.
모든 시험이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 온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마음속에서, 심령 속에서, 악마의 유혹을 우리가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주안에 있을 때에만 이 승리를 얻을 수 이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 님의 큰 대결은 역시 그의 실제 생활 면에서도 있는 것을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큰 권세로 가르치십니다. 많은 병을 고쳤습니다. 사람이 구름 같이 모입니다. 인기가 대단히 높아졌습니다. 그런 때에 무슨 시험이 들어오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순전히 인간적 견지에서 말합니다. 교만의 시험이 들어오기 쉽습니다. 어떤 여인이 예수 님께 와서『당신을 밴 태와 당신에게 젖을 먹인 그 젖이 복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그 때에 예수 님께서 이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그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여서 예수께서 그 때에 정치적 구주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를 높여서 왕을 삼자고 하는 그런 운동을 하였습니다. 예수 님께서 그 광경을 보고는 이어 다른 곳으로 피했다고 하였습니다.
악한 마귀가 실패할 땡 이런 면으로 전술을 바꾸어서 그 다음에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마음에 시기를 일으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비난과 공격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한다. 성전을 훼방했다. 여러 가지로 비난을 하고 중상을 하고, 그가 무슨 이적을 행하는 것은 실상은 바알세불의 악한 마귀의 힘을 빌어서 행한다고 중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우리가 복음을 읽어보면, 주님께서 어떠한 때에 의분을 발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자기를 중상하거나 자기에 대한 무엇일 있을 때에 분노한 것을 우리가 찾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는 언제든지 욕을 욕으로 갚지 아니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익을 선으로 갚으면서 이긴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악한 마귀가 모든 세력을 동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조소가 있습니다. 희롱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망의 고통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서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이겼습니다. 정복했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겼습니다. 이 악한 마귀의 세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승리한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고, 만민의 죄를 대속 하게 되었고, 실상은 악마의 한 일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준 것뿐입니다. 결국은 십자가에서 악마는 온전히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의와 불의의 대결을 보면 항상 그렇습니다. 어떤 때에는 불의한 사람들이 이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지나 보면 실상은 그 사람들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그를 사랑하고 택함을 입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모든 일에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시고 승리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그를 무덤 가운데 장사하고 바위로 덮었지마는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까지 이기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모든 유혹과 모든 비난과 모든 중상과 사망의 권세까지도 이기신 승리의 주님이올시다. 이미도 말했지마는, 우리 주님의 승리는 우리 믿는 자의 승리올시다. 그는 우리는 대표해서 이 승리를 얻으셨고 우리는 그 가운데 살고 있으므로 그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가 먼저 세상을 이기었으므로 우리도 그와 같이 세상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당 뜰 안에서, 제가 사는 집(사택)안에서, 아주 오랜 은행나무를 보시지요. 아마 여러 백 년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 그 은행나무의 전체를 보십니까?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은 그 은행나무를 절반만 봅니다. 땅 위에 있는 부분 절반만 보는 것입니다. 실상은 그 절반은 어디 있는지 압니까? 깊이 땅 속에 있습니다. 그 뿌리가 그만큼 땅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가지는 흔들이지마는 결코 넘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왜? 그 속에 깊은 뿌리가 박힌 까닭입니다.
참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떤지 압니까? 그 은행나무와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삽니다. 우리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우리의 뿌리를 그리스도 안에 깊이 두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환난이 옵니다. 세상에는 유혹의 바람이 옵니다. 세상에는 시험의 바람이 옵니다. 혹 어떤 때 다소 흔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넘어지지 아니합니다. 왜? 우리 인격의 깊은 뿌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八장 三十七절에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말씀하였습니다.『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사도 요한 은 요한 一서 五장 四절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대저 하나님께로 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우리가 비록 약하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우리가 온전히 죄를 회개하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고, 우리의 생활이 주안에서 사는 생활입니까? 그러면 우리도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一九六三 四월 十二일)


Ⅴ-22 잊을 수 없는 세 말씀 (마태복음 一장 十八-二十四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一·二十三)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여러분께서 많이 기도해 주시는 가운데 이렇게 잘 다녀오게 되었으니,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부화주일이 지난 지 이틀 되는 四월 十六일에 고국을 떠나서 어제 五월 四일에 돌아왔으니 꼭 十八일만에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비록 十八일이긴 하지만, 비행기로 잠깐 들렸다 떠난 나라를 제외하고도 내려서 일을 본 나가가 네 자나나 됩니다.
제일 먼저는 남미에 있는 콜롬비아의 수도인 산티아고에 내려서, 거기서 약 三十마일 되는 해안에 엘타보라고 하는 아름다운 피서지가 있는데, 그 곳에서 목사 수양회가 열려서 四일 동안 같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칠레라고 하는 나라는 남미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어서 우리 나라와 정반대입니다. 가령 우리 나라 서울은 북위 三十八도선 근방이지만 그 산티아고 근방은 남위 三十五도선 근방이 됩니다. 그래서 봄이지만 거기 가 보면 가을입니다. 나뭇잎이 다 노랗게 변해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또 여기는 지금 해가 길어지고 밤이 짧아지고 있지만, 거기는 반대로 해가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또 여기는 집을 지을 때에 남향으로 지어야 볕이 잘 들지만, 거기는 북향으로 지어야 햇볕이 잘 듭니다.
거기서 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씩 설교를 하고 그 다음에는 그 곳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브라질의 상파울로로 갔습니다. 그 날이 토요일인데 우리 교회에서 가신 최준덕 집사 님과 또 그와 같이 계신 분들이 비행장에 환영을 나왔어요. 그 다음 날리 바로 주일인데 우리 이민 수용소에 교우들이 계시다고 해서 거기서 같이 예배를 보았습니다.
그 분들은 다 평안히 계시니 친척 되시는 분들은 염려를 놓으시기 바랍니다. 또 오래지 않아서 자리 정할 곳을 찾아서 나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구기서 제가 일찍이 잘 알던 브라질 장로교 총회 장으로 계시는 볼제스 목사가, 저녁 예배에는 꼭 자기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해달라고 해서 거기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곳을 떠나서 콜롬비아로 갔습니다. 콜롬비아는 남미의 북편에 있는 나라인데 그 곳에서 목사 수양회를 마치고 그 다음에는 미국을 거쳐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할 수만 있는 대로 빨리 우리 교회에 돌아오기 위해서 뉴욕에도 들르지 못했고 피츠버그에는 우리 아이가 있기 때문에 부득이 들렸어요.
지난 토요일에 갑자기 거기 들렸는데, 그 다음 주일날 아침에, 그 애 말이 여기서 三十마일쯤 떨어진 촌에 자기가 가서 설교를 하기로 되어 있으니 같이 나가자고 그래요. 그래서 같이 나갔는데 그 아이 말이『아버지가 오셨는데 제가 무슨 설교를 하겠어요. 아버지가 설교를 해 주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八十명 모이는 조그만 교회인데 그래서 우리 아이는 사회를 보고 저는 설교를 했어요. 교인들은 전부 미국 사람들뿐이고 강대(講臺)에는 한국인 두 사람만이 앉았지요. 그러고 보니 미국에 선교사로 온 기분이 생겨요. 그렇게 예배를 보고, 이튿날 그 곳을 떠나서 콜롬보 시라고 하는 곳에 잠깐 들렸다가 일찍이 평양 숭실대학에서 수고하시던 마우리 박사가 지금도 살아 계시는데, 그 댁에 들려서 하룻밤 묵으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 다음에 알바돌피라는 곳에 제가 일찍이 이태 동안 병으로 수고를 끼친 병원이 있는데 여러 분 과문(寡聞)불입(不入)이 되어 너무 미안해서 이번 기회에 하루 저녁만 들르겠다고 작정하고 들렸다가, 그 다음 날인 수요일에 로스엔젤리스에 와서 피얼스 박사의 선명회 본부에서 아침 예배를 같이 보고 오후 세 시 동경을 향해서 떠났습니다.
그 곳에서는 목요일 날 떠났는데 동경에 오니까 토요일 아침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어제 무사하게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여행이 四, 五년 저만해도 불가능합니다. 보통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는 이렇게 빨리 못 달립니다. 지금 제트 비행기 시대니까 이만큼 넓은 지역을 발리 다니면서 볼일을 볼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이번 여행은 좀 빨리 다니느라고 미처 여행권 사증도 내지 못하고 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가운데 모든 일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게 된 것을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일생을 통해서도 그렇지만, 특별히 이번 여행을 통해서 어려운 일을 종종 당하면서 언제든지 제 마음가운데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이 말씀을 여러분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말씀은 본래는 이사야 七장 十四절에 있는 말씀인데, 마태복음 一장 二十三절에도 인용되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첫째는「임마누엘」이라 하는 알인데『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미 여러분들은 알고 계시겠지만, 자세히 알지 못하시는 분은 이 기회에 분명히 이 말씀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시내산 기슭에서 불붙는 가시덤불 옆에 서서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을 때『너는 애굽으로 돌아가서 내 백성을 구해 내라』고 하는 말씀을 듣고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대답했습니다.『저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저는 담대하지 못합니다. 제가 어떻게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이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임마누엘」이라고 하는 말입니다.「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이 말씀을 듣고 담대한 마음으로 애굽으로 돌아갔습니다. 모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여호수아가 자기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정복해야 하는 큰 사명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이 여호수아의 마음도 떨렸습니다. 어떻게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겁이 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때에도 역시『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하셨습니다.「임마누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계셨습니다.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에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내가 모태로부터 너를 택하였다. 너는 일어나서 내가 네 입에 주는 모든 말을 너는 네 백성에게 전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에 예레미야도『나는 아직 나이 어립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하셨습니다.」임마누엘」이라는 말씀이올시다. 여기 천사가 마리아에게 장차 예수 님이 탄생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제 그 이름을「예수」라고 하겠고, 또한 이 성경구절을 인용하시면서 그 이름을「임마누엘」이라고 하겠는데 그것은『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하는 뜻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모세와 함께 계시고 여호수아와 함께 계시고 예래미야와 함께 계시던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가 같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실이올시다. 이렇게 신약에 와서 보면 우리 주님은「임마누엘」의 주님이올시다.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 믿는 사람들과 제자들을 향해서 항상 말씀하시기를『내가 너희와 있겠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온 하늘과 온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는 나가서 복음을 천하에 전파하라. 보라,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항상 있으리라.』
「임마누엘」의 주님이올시다. 살아 계신 주님께서는 그를 믿는 사람들과 항상 같이 계십니다. 또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남겨두지 아니할 터이다. 내가 너희에게 보혜사를 보낼 터인데 보혜사가 너희와 항상 같이 계시리라.』
성부, 성자, 성신, 이 하나님은 우리 믿는 사람과 항상 같이 계십니다. 그것이「임마누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임마누엘」은 우리가 약할 때에 힘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에 우리에게 새 힘이 생깁니다.「임마누엘」이라고 하는 뜻은 우리가 어떠한 일을 당하더라도 안전을 의미합니다.「임마누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불안한 일을 당할 때에도 안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계실 때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임마누엘」이라고 하는 뜻은 우리가 길을 잃을 때에도 우리에게 옳은 지도자가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병날 때에도 주님께서 같이 계시면 새 힘과 건강이 솟나나는 것입니다.「임마누엘」은 우리가 죽을 때에도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올시다. 우리가 철학적으로 하나님이 계시리라고 믿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계시는 하나님이올시다.「임마누엘」의 하나님이올시다.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 것이올시다. 특별히 제가 이번 여행을 통해서 항상 이 말씀이 제 마음 가운데 계셔서 도와 주셨습니다.
둘째는 사무엘 상 七장 十二절에 이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한국 발음은「에벤에셀」이라고 하는 말입니다.「에벤에실」이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 대제사장이 죽고 사무엘이 청년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게 될 때 부패하고 말할 수 없이 퇴폐 한 그 민족을 부흥시키기 위해서 젊은 사무엘이 모든 백성을 향해서 지금까지 섬기던 우상을 다 버리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와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만 섬기자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미스바라고 하는 곳에 모든 백성을 모아놓고 같이 죄를 회개하며 금식하며 기도하며 하나님께 속죄하기 위해서 번제(燔祭)의 제사를 드리며 큰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그렇다는 말을 듣고 그 때 이스라엘의 숙적이던 블레셋 사람들이 군데를 동원해 하지고 침노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백성들은 매우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런 때를 당해서 꼭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자고 부르짖으면서 일견 대적을 막기 위해서 군대를 정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에 마침 하나님께서 큰 폭풍우가 일어나게 하고 큰 뇌성병력이 일어나게 하여서 블레셋 사람들의 대오가 혼란하게 될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습격을 해서 많은 대적을 물리치고 쫓겨가는 대적을 멀리 국경 밖까지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그 쳐 물리친 곳에다 비석을 세우고 그 비석 이름을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예벤에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와주셨다』하는 그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와주심으로 원수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것이「에벤에셀」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육신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육신의 생명에도 원수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육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여러 가지 미균(黴菌) 들이 있습니다. 더구나 한국 같은 곳에는 三八선이 있습니다. 큰 전쟁도 있었습니다.
또 말할 수 없이 갑자기 일어나는 천재와 지변도 많습니다. 사고도 많이 일어납니다. 이런 정황 가운데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육신의 생명이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것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까닭입니다.「에벤에셀」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도와주셨습니다. 우리가 죽지 않고 이런 정황 속에서 살아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 까닭입니다. 육신의 생명은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의 영적 생명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을 해하려고 하는 원수가 많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이 있습니다. 이생의 자랑이 있습니다. 모든 유혹과 허영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를 죄에 빠뜨리려고 하는 세력이 많이 있습니다.『악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것을 찾으려 다니는』이러한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옵니까? 그러면 이것도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도와주신 까닭입니다.「에벤에셀」, 하나님이 도와주심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내 영적 생명을 유지해 내려옵니다.
혹 우리가운데 어떤 방면으로 특별히 은혜를 받아서 성공을 한 분이 있습니까? 혹은 특별히 무슨 뜻한 일이 성취된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심으로 그만큼 성공을 한 것입니다.「에벨에셀」이올시다.
우리는「에벤에셀」의 비석을 세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으로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에벤에셀」의 비석을 세울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조금 잘못하면 큰 시험에 빠집니다.『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내 재주로 살아왔다. 내가 성공한 것도 내 힘으로 했다.』이와 같은 교만한 시험에 빠져 그만 지금까지 얻은 것을 잃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고, 신앙을 유지해오고, 무슨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이 내 힘이 아니올시다 실상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도와주신 까닭입니다. 우리는「에벤에셀」의 이 비석을 세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도와주셨으니 이 앞으로도 도와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창세기 二十二장 十四절에 나오는 말씀인데「여호와 이레」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창세기 二十二장을 읽어보면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사 드린 얘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인 이삭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라고 할 때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야 산으로 올라갑니다. 번제에 쓸 나무를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에는 불을 들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한참 올라가다가 이삭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아버지, 번제에 쓸 나무와 불은 있지만,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다.』그 때 아브라함은 단순히『아들아, 하나님께서 아마 그것을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리라.』그리고는 올라가서 단을 쌓고 문자 그대로 이삭을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큰 소리가 났습니다.『이삭을 해하지 말라. 저기 양이 있으니 그 양을 잡아서 번제를 드리라.』그 곳에 가 보니 과연 수양의 불이 수풀에 걸려 있었어요. 그 양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번제를 그렸습니다. 그래서 가 곳을「여호와 이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하는 뜻입니다.
어떻게 준비할는지는 모르지만 올라가 보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다. 우리는 장래를 모릅니다. 내일을 모르는 까닭으로 자연히 장래가 염려됩니다. 걱정이 됩니다.
여기 이 말씀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모르나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십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는『너희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공중에 나는 새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길가에 피는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입히시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모든 다른 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시리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이래」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이 철저하지 못하면 여러 가지 내 재주를 가지고 장래를 준비하려고 수고하다가 큰 시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십니다. 과히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합시다.
제가 좀 어려운 경험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우선 여기서 떠나던 날 비가 많이 와서 아침에 공경에서 와야 할 비행기가 저녁에 늦게 도착해서 오후 다섯 시가 지나서야 서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동경에서 꼭 七시 二十五분에 떠나는「카나디안」비행기를 타야 수요일에 칠레에 가서 그 수양회 일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비행기를 못 타면 큰 걱정이란 말일예요. 한데 비행기가 늦어져서 동경에 도착하니 四十五분이나 연착했어요. 자, 그 때에 만일 내가 이 비행기를 타지 못하면 모든 일이 다 허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일로 마음이 초조했지만 그 때에 들어온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임마누엘」하나님이 나와 같이 하신다.「에벤에셀」하나님이 동경까지 오게 하셨으니,「여호와 이래」하나님께서 준비하시리라. 그리고서 내렸더니 그 비행기가 저를 위해서 四十五분 늦추어서 떠났습니다. 그래 그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또 한 번은 브라질에 가서 곤란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칠리 목사 수양회를 마치고 콜롬비아 목사 수양회를 시작할 때까지 한 주간의 기간이 있는 줄로 본래 알았어요. 그런데 가보니 그렇지 아니하고 그 다음 주일 화요일 아침부터 곧 시작하거든요. 그러나 저는 상파울로에 가기로 약속이 다 되어 있어서 부득이 상파울로에 다녀서 가겠다고 하고 그냥 토요일에 피얼스 박사나 다른 강사는 다 콜롬비아로 보내고 나만 브라질의 상파울로에 가서 내렸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콜롬비아로 가는 비자는, 전에도 한 번 가본 적이 있고 해서, 내기가 쉽다고 듣고서 아무 염려도 안하고 거기서 주일을 기키고 월요일 아침에 일찍 콜롬비아 영사관에 가서 비자를 달라고 하니까, 이 사람 하는 말이『한국과 우리 나라는 정식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아서 내가 정식 입국 허가를 할 수가 없소.』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하고 물어보았더니『우리 본국 정부에 물어보아서 정부에서 허가가 나와야 된다』고 해요. 그런데 그 수속이 한 열흘이나 걸린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열흘이나 지나서 콜롬비아에 가서 무엇을 합니까?』하고 간절히 사정을 했지만, 이 젊은 사람은 아주 딱딱하게 굴면서 도저히 할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래 부득이 돌아와서 리오 데 자네이로에 있는 우리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서 이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대사관에서 놀라면서 하는 말이『그 사람이 정신없는 사람이지, 우리 나라가 콜롬비아와 외교 관계가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런 다』고 하면서 전화로 얘기해 주겠다고 해서 그 다음에 말한 줄로 알고 애가 직접 가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그 곳 선교 부에서 일하는 사람을 대신 보냈더니만 자기를 본국 정부에서 외교 관계가 있다는 말을 통고 받지 못하고 딴 사람 말을 듣고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면서 역시 거절을 합니다. 그래서 일견으로는 콜롬비아에 그 사정을 전보로 연락하고 우리 대사관에 연락을 했더니 그 곳 리오 데 자이네로로 오면 우리 대사관 영사가 있으니 거기서 비자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서 비행기를 타고 리오 데 자이네로로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오후 二시쯤 되었는데 우리 대사관은 一시까지만 일을 보고 문을 닫는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래서 또 못 얻었어요. 이렇게 되고 보니 목사 수양회를 다 마친 다음에야 가게 될 것 같아서 퍽 많이 걱정을 했습니다. 그랬는데 오후에 와서 보니까 내가 콜롬비아로 전보를 친 것이 회보가 와서 본국에서 훈령을 받은 그 곳 영사가 비자를 내주면서 대단히 미안하다고 나에게 사화를 해요. 그래서 그것을 받아 가지고 마지막 이틀만 제가 참여를 했어요. 비록 마지막에 참여를 했으나, 그러나 제가 할 말은 다 하고 왔습니다. 하루에 두 시간씩 네 시간을 맡아서 그렇게 참여를 했어요.
그리고 제가 어제 여기 오다가도 좀 경험을 했어요. 여기 어제 아침에 안개가 많이 끼어서 우리 한국 공군 비행기가 착륙하지 못해서 공중에서 三十분이나 돌았습니다. 그래서 이 주일에 꼭 우리 교회에 와서 참여하여야 할 텐데 비행기가 내리지 못하고 동경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하나 하고 또 걱정을 했어요. 아닌게 아니라 어제 저녁 신물을 보니까 우리 비행기 조금 뒤에 왔던「노드 웨스트」비행기는 왔다가 안개가 너무 많아서 도로 복강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저는 먼저 온 탓으로 무사히 내렸던 것이지요. 이런 초조한 모든 경험을 통해서 항상 제 마음가운데 있는 이 말씀은『하나님께서 같이 하시느니라』『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너를 도우셨느니라』『하나님께서 준비하시리라』하는 이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십시다 (一九六三년 五월 五일)


Ⅴ-23 어머님의 믿음과 그 감화 (디모데 후서 一장 一-十四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一·五)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주신 디모데 후서 一장 五절이올시다. 디모데의 아음 속 깊은 곳에는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청년의 마음속에 이렇듯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 늘 보고 싶어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와 같은 믿음의 배후에는 말하자면 깊은 뿌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본래 외조모 로이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디모데에게도 있게 된 것입니다. 먼저 로이스 마음속에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딸 되는 유니게의 마음속에 그런 믿음이 있게 된 것입니다. 또 그랬더니 유니게의 아들 되는 디모데의 마음속에도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여기에서 三대에 미치는 신앙의 계승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머님의 믿음의 감화력이 얼마나 위대하다고 하는 것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어머니 주일」을 당해서「어머니의 믿음과 그 감화」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인간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이는 어머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주는 요소를 흔히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하나는 유전, 또 하나는 교육이올시다. 흔히 이 두 가지가 거의 지배합니다. 유전의 견지에서 볼 때에, 자녀들은 문자 그대로 어머니의 혈육을 받아서 납니다. 어머니의 피와 살을 받아서 납니다. 문자 그대로 살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유전의 영향은 말할 것도 없고, 둘째로 교육의 견지에서 볼 때에도 역시 그렇습니다. 교육이라 하면 가정 교육, 교회 교육, 학교 교육, 사회 교육, 대략 이와 같은 네 가지 종류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중에도 제일 큰 영향을 인격에게 주는 것은 가정 교육입니다. 그 이유는 가정 교육이란 가장 어렸을 때부터 받는 교육인 까닭입니다. 그런데 이 가정 교육은 주로 어머니가 책임을 지게 됩니다. 어머니는 항상 아이들과 같이 있게 되는 까닭으로, 아버지는 아무리 힘쓴다고 할지라도 그런 기회가 적습니다. 따라서 가정 교육의 대부분의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전의 견지에서 볼 때, 교육의 견지에서 불 때, 어머니의 영향이 자녀들에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장 큰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어머니의 존재를 우리가 발견합니다. 우리가 한국 역사를 읽을 때에도, 신라조의 김유신 장군을 생각할 때에는 자연히 그 어머니를 우리가 또한 기억합니다. 고려조의 일대의 충신이었던 정포은 선생을 생각할 때에도 그 어머니를 또한 기억합니다.
이조의 석학으로서 유명한 율곡 선생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도 역시 그 어머니를 기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한국 뿐 아니고 어떤 나라도 그렇습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 같은 이도 일찍이 말하기를『내가 나 된 것의 전부, 그리고 장차 되기를 바라는 것이 전부는 오직 천사와 같은 내 어머니의 덕입니다.』하는 말을 남겼습니다. 일찍이 헬라의 유명한 알렉산더 대제가 파사에 가서 고관과 귀족들을 다 초청하면서 큰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그 연회 소에 나갈 때에는 오래 입던 군복을 벗어버리고 일찍이 자기 고향에서 어머니가 친히 짜고 친히 바느질해서 지어준 옷을 입고 나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깊이 우리가 생각해 볼 때에 누구든지 어머니가 지어준 옷을 입고 다닙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고 하니 누구든지 자기 어머니의 그 유전, 그 교육, 그 감화로 이루어진 성격, 인격, 생활로 일생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만큼 어머니의 영향이 큽니다. 그러므로 어떤 분은『어머니들은 작은 요람을 통해서 온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영적 방면에서 볼 때에 더욱 그렇습니다.
어머님의 믿음은 자녀의 신앙에 큰 영향을 줍니다. 감화를 줍니다. 우리가 출애굽기 二장을 읽어보면 거기 모세가 나고 자라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기에 단순히 기록하기를『레위 족속에 속한 어떤 사람이 레위 족속에게 속하는 어떤 여자에게 장가들어서 아들을 낳으니……』이런 말로 기록이 되어서 사실 모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머니가 누구인지 출애굽기 二장만 읽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좀 더 읽어 내려가서 출애굽기 六장에 보면 거기에는 모세의 족보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모세의 아버지는 레위 사람으로서 아므람이라고 하는 이요, 어머니는 역시 레위 족속의 요게벳이라고 하는 여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
또 출애굽기 二장의 기록이 너무 간단해서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간단한 기사를 통해서도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라고 하는 여자가 얼마나 슬기롭고 지혜 있는 여자라고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때에 법이 엄한 가운데서 석 달을 숨겨서 길렀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더 집안에서는 기를 수 없으니까 물이 새지 않는 바구니를 만들어 아기를 그 속에다 넣고는 나일강 변 어떤 갈대밭에 가져다가 놓았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아마 많이 생각해서 꼭 적당한 곳에 가져다 놓을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서는 그냥 내버리고 오지 않고 자기의 어린 딸 미리암을 시켜서 하회가 어떻게 되는지 잘 엿보라고 부탁하고 왔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그 가운데 어머니의 사려 깊은 모습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참 하나님의 섭리와 그 어머니의 모든 지혜를 축복해서 그 아기를 유모의 이름으로 자기가 기르게 되었습니다. 긴 얘기 할 것 없이, 모시가 장성해서, 히브리 十一장에 모세의 믿음을 기록한 것처럼, 애굽에 있는 모든 영광과 모든 능력을 다 자기가 그냥 누리기를 원치 아니하고 차라리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고생 당하는 것을 원해서 고생 당하기로 작정을 했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청년 모세의 불타는 이 민족적 의식, 민족적 양심의 근원이 어디서 일어났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다른 데서 찾을 길이 없는 줄 압니다. 모세가 어려서 자기 어머니 품속에서 길러 졌을 뿐더러 궁전에 가서도 유모인 까닭으로 접촉할 기회가 있은 줄 압니다. 기회가 있을 적마다 이 요게벳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여 주었고, 이삭의 이야기를 하여 주었고, 야곱의 이야기를 하여 주었고, 요셉의 이야기를 하여 주었고,『네가 이와 같이 궁중에서 아름답게 자라지만 실상은 이스라엘의 택한 백성 가운데 하나이라』고 하는 것을 가정 교육으로 일러준 줄 생각합니다.
그렇게 볼 때에 모세가 역사상에 나타나는 위대한 인물이 된 것도 그 배후에 요게벳이라고 하는 여자의 그 믿음과 그 지혜와 그 애국심에 원천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머니의 믿음이 그 자녀에게 미치는 감화는 무엇으로 다 형언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는 한나를 잘 기억합니다. 그이가 기도를 간절히 하여 아기를 받은 다음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그 아기를 드린 일이며, 계속해서 그 아이를 위해서 기도한 일이며, 이 모든 것이 사무엘이라고 하는 위대한 사사의 배후에 있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기독교 역사를 생각할 때에 제일 유명한 믿음의 어머니로서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를 우리가 다 기억합니다. 어거스틴의 고향은 아프리카 북방의 한 작은 동리였습니다. 그 때에는 이 곳도 다 로마의 영지였습니다. 어거스틴은 본래부터 총명했습니다. 재주가 있었습니다. 글공부도 잘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문명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감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방탕한 길로 나갔습니다. 그 때의 세상 청년들이 걷던 세속의 길로 나갔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믿음의 어머니 모니카는 항상 이것이 고통이었습니다. 어떻든지 회개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十여 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응답은 되지 아니했습니다. 十여 년이나 기도했지마는 그 다음에 된 일을 보면 이 청년 어거스틴이 아프리카 북방을 떠나서 로마로 가고자 합니다. 로마는 물론 정치의 중심이요 문화의 중심이지마는 또한 음란한 곳이요, 말할 수 없이 부패한 곳입니다. 어머니 모기카는 이 젊은 청년 어거스틴이 로마에 가게 되면 얼마나 더 죄악 가운데 빠질까 염려해서 어떻든지 못 가도록 간절히 권면도 하고 기도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기도하는 동안에 몰래 배를 타고서 지중해를 건너서 로마로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기도했습니다. 도무지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자기도 그 후에 배를 타고서 로마로 쫓아갔습니다. 그 후에 로마에 가서 머무른 것은 아니고, 얼마 동안 머물다가는 다시 이태리 북방 밀란 이라고 하는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 가서 우연히 그 밀란 교회의 유명한 목사 암브로우스 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의 감화를 통해서 점점 신앙으로 들어와서 온전히 회개한 이야기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十五, 六년을 계속해서 기도한 후에 결국은 그 아들이 회개를 했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그 다음에는 모자가 같이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작정을 하고 두 사람이 같이 기쁨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채 같이 고향으로 돌아오지는 못하고 티벨 강 저 끝에 있는 작은 오스티아라고 하는 동네에 와서 여관에서 묵다가 그만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이 아들이 二천 년의 기독교 사상을 거의 지배했다고 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교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배후에 어머니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어거스틴 자신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하나님이시여,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고 하면 이것은 오직 아버지께서 나에게 이런 어머니를 주신 까닭입니다.』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믿음의 어머니에게 믿음이 같이 따라 갑니다.
그리고 물론 우리 교회 역사상에 있어서 유명한 믿음의 어머니를 아마 우리가 생각하자고 하면, 감리교를 설립한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부인은 참 아들을 잘 기를뿐더러 자녀를 많이 길렀습니다. 자녀를 열 아홉을 낳아서 길렀습니다. 이 요한 웨슬레는 열 다섯째로 낳은 아들입니다. 자기 남편은 성공회 목사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목사로서 뭐 봉급이 많을 이치가 없습니다. 박봉입니다. 자녀들이 이렇게 많으니까 항상 생활이 구차했습니다. 그 구차한 살림에 이 많은 자녀는 가지고, 또 전기에 나오는 대로 읽어보면, 국민학교 교육은 四, 五학년까지 거의 가정에서 가르쳤습니다. 다섯 살 되었을 때 벌써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글을 해독하자마자 창세기 一장부터 성경을 가르쳤고, 또 규칙적으로 이 많은 자녀들을 잘 길렀으니 그 가운데 요한 웨슬레는 온 영국 뿐 아니고 온 세계에 큰 공헌을 한 종교가가 되었고, 차알스 웨슬레는 많은 찬송가를 작곡해서 위대한 음악가가 되었고, 그 밖의 자녀들도 하나 하나가 다 좋은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어머니가 있는 곳에 믿음의 자녀들이 일어납니다.
제가 이번에 로스엔젤리스에 잠깐 둘려서 기독교 선명회 본부에서 같이 예배를 보고 비행장으로 자동차를 타고 나오는데 피얼스 박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기 어머님이 지금 八十이 퍽 넘었고 심히 약해서 사실 사람 보기에는 얼마나 더 오래 세상에 계실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병원에 입원해 계신데 매일 한 번씩 꼭 가서 어머니를 뵙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내가 사실 단점도 많고 성격상 결함도 많은 사람인데 참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서 일을 시키고 지금까지 무난히 해 온다고 하는 것이 그저 다 내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항상 기도해 주시는 그 덕택이며 내가 은혜 가운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이의 배후에도 이와 같은 기도의 어머니가 있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믿음의 어머니의 감화가 얼마나 위대하고 그 어머니의 공헌이 교회와 사회와 국가에 주는 공헌이 얼마나 크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다 헤아려서 말로 할 수가 없는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 주일을 당해서 우리가 자녀 된 사람으로서 꼭 기억할 것 몇 가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는 우리가 이와 같은 믿음의 어머니를 위해서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에 아버지나 어머님을 위해서 항상 감사를 드립니까? 다른 축복을 위해서 감사를 드리는 것처럼 아버지나 어머니를 위해서 감사를 드려 보았습니까? 옛날 유대 사람 가운데 내려오는 속담에『하나님께서 어디나 계실 수가 없어서 가정에 어머니를 보내셨다』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사랑이올시다. 어머님을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 실지라도 이런 어머니를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하물며 이런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고 하면 더욱 감사를 드려야 되겠고, 감사를 드릴뿐더러 이런 어머니를 공경해야 되겠습니다.
열 가지 계명 가운데 인륜에 대한 첫째 되는 계명은『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계명입니다. 유교에서만 효도를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효도를 더 이상 강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다음에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너희의 의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낫지 아니하면 너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리라』고, 우리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청년 자녀들의 부모에 대한 효도가 옛날 유교 도들의 부모에게 드린 효도보다 낫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줄로 생각합니다. 어머님을 위해서 감사하고 어머님께 효도를 다하고 어머니를 공경할 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시대가 변한다고 해서 천륜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부모는 부모요, 자녀는 자녀입니다. 아무리 분주해도 부모를 잊지 마십시다 一년에 한번씩「어머니 날」이나「어머니 주일」을 택해서 이렇게 지키는 것도 자녀들로 하여금 어머니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합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 꽃을 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잊지 마십시다. 어머님의 희생을 잊지 마십시다.
어머님의 믿음을 잊지 마십시다. 어머니께서 내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기대를 잊지 마십시다 어머니의 기도를 우리가 잊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십자가에서도 자기 어머니를 기억하시고 요한 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또 그리고 내 어머니가 과연 믿음의 어머니라고 할 것이면 이에서 더 감사한 일이 없는데 이 믿음을 계승하도록 우리가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어머니는 과연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건만 아직까지 참된 믿음에 들어오지 못한 청년 남녀가 있습니까? 너무 오리 어머니의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마십시다.『네 아비를 공경하고 네 어머니의 법도를 버리지 말라.』잠언의 말씀을 우리가 명심해야 될 것입니다.
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어머니 주일에 어머니가 꼭 기억할 것 몇 가지가 있는 줄 압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참 믿음의 어머니가 되십시다. 다 학식이 많은 어머니가 되기는 힘든 줄 압니다.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것이야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구나 가 다 예쁜 어머니가 되기는 힘든 줄 압니다. 그렇게 생겨났어야 하지, 어디 내 마음대로 됩니까? 그러나 누구나 다 믿음의 어머니는 될 수 있습니다.
十九세시 보스톤에 성공회 감독으로 아주 유명한 목사가 한 분 있습니다. 필립스 브룩스라고 하는 목사입니다. 이 목사가 자기 어머니가 세상 떠난 다음에 비석을 해 세우면서 그 묘비에 자기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성경구절을 새겼는데 마태복음 十五장 二十八절을 새겼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十五장 二十八절에는 무슨 말씀이 있는지 아십니까? 예수 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한 말씀이 거기 있습니다.『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자녀들이 어머니를 장사하고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만들려고 할 때에, 자기의 어머니를 생각할 때에, 무엇보다도 과연 우리 어머니는 믿음이 크신 어머니였다. 하는 생각이 날 만큼 믿음의 어머니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우리 가정에서 누가 예수를 잘 믿는지 안 믿는지는 아이들이 어 잘 압니다. 내가 들으니까, 어떤 가정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 가정에서 누가 예수를 잘 믿나 투표를 해 보았다고 합니다. 어떤 자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십니까?『우리 어머니는 예배당에 가긴 가도 믿음은 별로 없어.』아이들은 못 속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 혹 남편까지 속일 수 있지요. 하지만 그 자녀들은 못 속입니다. 항상 붙어 있으니까, 항상 따라 다니니까.
자녀들이 보기에 자기 어머니의 일생을 회고할 때에 과연 우리 어머니는 믿음이 크신 어머니였다 하고 자녀들이 생각하리만큼 믿음의 어머니가 됩시다. 그런 은혜를 받으세요. 우리가 다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를 원합니다. 좋은 집을 지어서 남겨 주기도 원하고, 돈을 많이 모아서 남겨 주기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그와 같은 유산은 며칠 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남겨줄 불멸의 유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해가 가고 갈수록 없어지지 아니하고 더욱 축복의 근원이 될 불멸의 유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부모의 믿음이올시다. 우리가 이 불멸의 믿음의 유산을 우리 자손에게 남겨주면 이 유산은 우리의 가정과 대대손손이 같이 하면서 우리의 후손을 축복할 것입니다.
또 이 어머니 주일을 당해서 꼭 어머니들이 기억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받은 선물 가운데 제일 귀한 것은 우리 자녀인데 이 자녀를 꼭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설교까지 하였지만 여러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인도의 그 말토마 교회라고 하는 큰 교회 있지 않아요? 거기서 감독 넷이 있는데 그 네 감독 가운데 하나인 디아필로스 감독이 목사 수양회 때 와서 우리 교회에서 수양회 때에도 말씀하시고, 교인들에게도 설교를 했습니다. 그 설교를 할 때에 그 말씀을 했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저는 그 말을 직접 들었는데, 그의 말이 자기 어머니가 본래 딸을 다섯이나 낳았다고 합니다. 그 곳 인도에도 우리 한국과 사상이 좀 비슷해서 딸만 너무 많이 낳으면 큰 걱정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섯째로 또 아기를 뱄단 말입니다. 그런데 한 번은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보는데 자녀를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고 하는 뜻으로 어떤 목사가 설교를 합니다. 그 설교를 듣고는 자기 어머니가 기도하기를『아버지시여! 만일 내 여섯째로 밴 아이가 아들이 된다고 하면, 내가 꼭 하나님께 바쳐서 목사가 되게 해주길 바랍니다.』기도를 하고 아예 태 가운데 있을 때에 바쳤다고 합니다. 그 목사 말이, 자기가 목사가 된 것은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라고 합니다. 말토마 교회의 네 감독 가운데 한 분이 되었습니다. 귀한 하나님의 사자가 되었습니다.
한 一년 전쯤에 우리 교회의 어떤 자매가 강원도 어디에 가서 세상을 떠나면서 그 남편에게 유언한 말 가운데『십일조를 드려 달라』『전도 비를 내달라』『내 유해는 영락 묘지에 좀 묻어 달라』그러면서 하는 말이『우리 자녀가 일곱인데 하나가 아들인즉 그 아들은 내가 본래 하나님께 꼭 바쳐서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니 이 아들은 어떻든지 공부를 잘 시켜서 목사가 되게 해 주길 바랍니다.』하는 유언을 하고 세상을 떠난 자매가 있습니다. 다 보통 어머니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다 목사가 꼭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꼭 우리가 자녀를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자녀가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도록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자녀를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는 것은 어머니의 특권과 천직이올시다. 이것이 어머니의 제일의 사명이올시다. 자녀가 없으면 모르지만 자녀를 받은 여인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첫째 사명은 이 자녀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는 것입니다. 다란 일이 아무리 분주할지라도 이 일을 내놓고 할 일은 없습니다. 어머니로서는 자녀들을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의 뜻대로 꼭 기도를 하고 성경을 가르쳐 주고 시간을 드려서 어떻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문학가 리스키나 라는 사람이 자기의 어렸을 적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는 자기 어머니와 같이 성경을 다섯 번 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어떤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바로 기르기 위해서 힘을 썼습니다.
우리가 어머니 주일을 당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 경고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의 심장부는 가정입니다. 가정의 심장부의 위치를 점령하는 이는 어머니입니다. 그러므로 이 어머니가 경건하고 이 어머니가 믿음이 충만하면 온 가정이 경건해지고, 그런 어머니, 그런 가정이 많은 사회는 경건해지고 깨끗해집니다. 그러나 만일 이런 위치에 있는 모성이 타락하면 그 가정은 건질 길이 없습니다. 그 사회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국내 국외의 소식을 볼 때에 실로 염려가 많이 됩니다. 한국 신문에도 굉장히 난 것을 여러분도 다 보셨을 테니 말입니다. 미국의 뉴욕 주지사로 있는 록펠러라고 하는 사람이 멀피 라는 여자와 결혼을 했다고 굉장히 신문에 납니다. 여러분이 그 배후를 달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전에 아내가 있던 사람이요, 남편이 있던 사람이지요. 자녀가 수두룩한 사람이 이혼을 하고 결혼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사회를 위해서 한심한 일입니다.
그런데 미국뿐이 아니지요. 거의 같은 날에 아마 이런 신문기사를 읽은 것 같아요. 한국에서도 어떤 차관의 부인이 춤바람이 나서 이혼을 했다고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실로 자유 진영의 사회를 위해서 통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가 점점 이와 같이 되어 가느니 만큼, 이렇게 가정이 타락하고 모성까지도 타락하는 현상이 종종 생기느니 만큼 우리 기독교회 안에 있는 여성들은 과연 믿음의 어머니가 되어야 되겠고,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자녀들은 믿음의 자녀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믿는 어머니들은 성경에 있는 대로 로이스가 되어야 되겠고, 유니게가 되어야 하고, 젊은 사람들은 디모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어머니가 있는 곳이 믿음의 아들이 일어납니다. 아가서 六장 四절을 읽을 때에 들으세요.』아침 별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嚴威)한 여자가 누구인가.』아침 별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엄위한 모성이 요구됩니다.
잠언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을 제가 읽을 때에 여러분 명심해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三十一장 二十八절 이하를 읽습니다.『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덕행이 풍부한 어머니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디모데와 같은 믿음의 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一九六三년 五월 十二일)


Ⅴ-24 여호와를 만날 기회 (이사야 五十五장 六-十三절)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五十五·六)

이것은 선지자 이사야가 전 인간을 향하여 부르짖는 말씀이올시다.『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를 부르라. 만날 만한 때에 그를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간절히 권면 하였습니다.
우리는 거의 매일 같이 신문지상을 통해서 자녀를 잃은 부모가 잃은 아이를 찾는 광고, 혹은 부모를 잃은 자녀가 잃은 부모를 찾는 광고를 보게 됩니다.
몇 해 전 어떤 신문지상에「삭풍에 부치노라」한 난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지 모르지만, 그 난을 읽어보면 三八선을 넘을 때에, 혹은 六·二五 사변을 당할 때 자녀를 잃은 부모가 잃은 자녀에게 보내는 편지, 혹은 부모를 잃은 자녀가 부모에게 보내는 애끓는 편지들이 많이 연재되어 있는 것을 읽으면서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민망했습니까? 부모를 잃은 자녀의 할 일이 많지마는, 그 첫째 의무는 잃은 부모를 찾는 일일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일찍이 말하기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인간은 우주의 한 고아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영혼의 아버지를 찾는 일은 인간으로서 첫째로 할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여호와를 찾으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찾기 위하여 간단없이 활동하고 노력합니다. 얼마 전 브라질의 상파울로 중심 거리에 나가 보니 어떻게 많은 사람이 다니는지, 우리 서울 거리도 상당히 복잡하지마는 아마 더 복잡한 듯하고, 또 한 가지 다른 것은 서울 거리는 거의 우리 낯익은 한국 사람들의 얼굴이지만 그 나라에는 백인종의 얼굴, 황인종의 얼굴, 흑인종의 얼굴, 혼 잡종들의 얼굴, 그야말로 인종 전람회 마냥 그저 가지각색의 얼굴을 가진 분들이 분주하게 거리를 다니는 것을 목도할 때 한갓 마음 가운데 생각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찾기 위해서, 이렇게 분주히 다니는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혹은 빵을 구하기 위해서, 혹은 돈을 찾기 위해서, 혹은 사람을 찾기 위해서, 혹은 향락이나 권세를 찾기 위해서, 사람마다 다르겠지마는 하여간 무엇을 찾기 위해서 분주히 돌아다닙니다.
인간은 이렇게 무엇을 찾기 위해서 시간과 머리와 정력을 허비합니다. 거리에 다니고 촌에 다니고 산과 들을 헤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깊이 생각할 것은, 내가 찾는 그것이 사실 나에게 참된 만족과 행복을 가져올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사야 五十五장 二절에는 그 선지자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우리가 양식 아닌 것을 위해서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해서 수고하는 자는 아닙니까? 금번 五·一六 혁명 기념일을 통해서 많은 죄수가 특사와 감형으로 출옥하게 된 것을 우리는 다 같이 기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아직도 전국 교도소에는 이번에 나온 수보다 몇 배나 더 많은 동포의 수가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따금 이 교도소에 예배하기 위해서 갈 때에 이런 생각이 들어옵니다.『이들이 다 무엇을 찾다가 이 곳에 왔는가?』물론 억울하게 혹 들어온 이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대개는 무엇을 찾다가 결국은 그 곳에 오게 된 줄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계속 생각되는 것은, 만일 이것들을 찾는 열심의 절반을 가지고라도 하나님을 찾았던들 얼마나 더 큰 축복을 받았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인간 일생에 죄 사람을 받고, 그의 자녀가 되고, 그와 동행하며, 그를 즐거워하며, 아니 그와 같이 영원히 사는 것은 인간이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찾을 본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사는 첫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五장 四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참되게 살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혹은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우리가 찾는 것이 많고 구할 것이 많지마는 제일 먼저 찾을 이는 하나님이올시다. 제일 먼저 구할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올시다.
그런데 여기 거기에 대한 간절한 권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꼭 부르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십니다. 어디나 계십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십니다. 언제나 계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가까이 계십니다. 어떤 시인의 말과 같이, 우리의 숨결보다 더 가깝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설교할 때에 하신 말씀과 같이 그는 우리와 멀리 계시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우리 경험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써 우리에게 특별히 가까이 오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는 특별히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가 있습니다.
첫째로, 인간의 일생을 통해서 보면 청년 시대가 특별히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입니다. 우리 인생을 흔히 四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년시대, 청년시대, 중년시대, 노년시대로 나누는데 유년시대에는 너무 어려서 종교적 뜻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중년시대는 세상일에 너무 바빠서, 세상의 염려, 세상의 할 일에 너무 관련이 되어서, 말하자면 주님의 말씀 그대로 세상의 염려와 재리(財利)의 욕심 때문에, 혹은 권세욕 때문에, 가시덤불이 너무 성해서, 그 마음 밭이 컴컴합니다. 노년시대에 이르면 옛날의 그 사상과 그 습관과 인습이 너무 굳어져서 그 마음 밭이 한길과 같이 되기 쉽고 돌짝밭처럼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보아서 청년시대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비교적 이 시대는 양심이 맑습니다. 이상이 높습니다. 뜻을 푸른 하늘에 둡니다. 인생의 깊은 뜻을 탐구하기를 힘씁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정이 마음 가운데 솟나나는 때입니다.
우리가 종교 체험의 역사를 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 청년시대에 하나님을 찾아서 만났습니다. 이사야도 청년시대에 성전에 홀로 들어가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레미야도 청년시대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의 경험이 그렇습니다. 예수 님 당시에도 예수를 따른 여러 제자들, 야고보니 요한 이니 베드로니 안드레니 다 청년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일한 이들을 볼지라도 디모데니 디도니 누가니 하는 사람들이 다 젊었을 때에 하나님을 만나고, 죄 사함을 받고, 그에게 몸을 드려서 일생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많은 열매를 맺은 것을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청년 시대에 처한 분이 많이 계신 줄 압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 한 분이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이가 있으면 여러분이 지내는 시대야말로 하나님을 만날 시대인 것을 깨닫고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 특별히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가 있습니다. 가령 병중에 있을 때 그렇습니다. 물론 질병은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질병의 고통이 축복의 문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언제 멀리 하리요 마는 특별히 병으로 앓게 되면 더 가까이 돌보아 줍니다. 우리 영혼의 부모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약할 때 특별히 가까이 하십니다.
병들어 눕게 되면 자연히 나만 믿던 교만한 생각이 없어집니다. 인간의 약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얼마나 그 체력과 지력과 모든 것이 제한되었다고 하는 것도 좀 저 절실히 알게 됩니다. 나 자신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없다고 하는 인간의 무능도 스스로 알게 됩니다. 특별히 병이 위중해서 사망의 사자가 내 앞에 어른거리게 될 때에는 더욱 인생의 더 깊은 뜻을 탐색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동양에서 내려오는 말 가운데『새가 장차 죽을 때에 울음이 슬프고, 사람이 장차 죽으려고 할 때에 그 말이 선하다』고 하는 말은 심리 상태를 묘사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종교 체험을 볼 때에 많은 사람들이 이 고통인 질병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성 프랜시스의 체험이 바로 그렇습니다. 혹은 로욜라의 체험이 그렇습니다. 혹은 파스칼의 체험이 그렇습니다.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이 이 질병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서 중생의 축복을 받고 일생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옛날도 그렇고,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질병을 통해서 은혜 받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나보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전에 프랜시스가 문둥병 자들을 도와줄 때에 어떤 문둥병 자는 성질이 고약하고 믿음은 없고 해서 성 프랜시스는 극진히 그 사람을 도와주고 수종을 들고 헌데를 씻어주고 간호를 하지마는 감사한 줄은 알지도 못하고 불평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찌해서 나에게 이런 병을 주었는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니까 프랜시스가 그 말을 듣다못해 고요히 하는 말이『형제여,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우리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 육신을 괴롭게 하는 때가 있습니다.』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육신을 괴롭게 하는 이 질병을 통하여 은혜를 받아서 육신과 영혼이 아울러 구원을 얻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 병을 원치 아니합니다. 병을 예방하도록 애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어떤 병에 걸렸다고 하면 우리가 알 것은 이것도 과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문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아니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중병으로 앓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하면 그것처럼 슬픈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그리고 우리 인간의 체험에 있어서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특별히 슬픔을 당하는 때입니다. 물론 슬픔도 고통이올시다. 누가 슬픔을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슬픔의 체험도 축복의 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가정에나 눈물의 사자가 찾아옵니다. 죽음이란 외모로 사람을 보지 아니합니다. 어떤 가슴에나 눈물이 깃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한 번 난 자는 반드시 한 번 죽을 때가 있습니다. 큰 슬픔이 우리 가슴에 깃들일 때에는 아무리 강퍅하던 마음도 부드러워집니다. 감정이 순화됩니다. 시기하고 교만스럽고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던 감정도 스스로 봄 동산의 눈처럼 녹아 버립니다. 그 심령이 겸손하고 온유하여집니다.
그러므로 이 슬픔의 밀물이 들어올 때에 믿음의 배를 띄어 천국을 향하여 돛을 다는 이가 많습니다. 이 눈물의 렌즈를 통해서 멀리 계신 듯한 하나님의 얼굴을 분명히 보고, 천당을 분명히 보고,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서 구원을 얻는 심령이 많습니다. 우리 중에 슬픔을 당하는 이가 있습니까? 그러면 이 때야말로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눈물을 허비하지 맙시다. 공연히 눈물을 흘리지 맙시다. 이 눈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 눈물이 축복의 눈물로 변합니다.
그 밖에도 우리의 경험에 있어서 특수한 체험, 혹은 실패라고 한다든 가 혹은 고독, 환난, 그 반면에 큰 성공이라고 한다든 가 특별한 축복, 이런 특수한 체험을 당할 때는 언제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기회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패를 통해서 오히려 자기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만나고 중생해서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을 우리가 얼마든지 봅니다. 큰 환난을 통해서, 자기의 고독한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 위로를 받고 새로운 생활을 하며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의 생활도 우리가 얼마든지 봅니다. 또는 그와 반대로 큰 성공을 한 후에, 남달리 축복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 것을 깨달아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 때에 더욱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도 우리는 종종 봅니다. 이런 특수한 경험을 하시는 이가 우리 가운데 계십니까? 기억하십시다. 이 때야말로 하나님을 만날 때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있습니다.
여기 누가복음 四장에 보면 예수 님께서 나사렛에 가셔서 성경 가운데 이사야 六十一장 一절 이하를 읽으셨습니다.『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는 보내 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 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마지막에『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심이라』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해가 전개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역사적으로 보면 제一세기야말로 큰 복된 해입니다. 복된 시대입니다. 예수 님이 오신 그 시대입니다. 열두 사도가 전도를 한 그 시대입니다. 오순절의 성령이 임한 그 시대입니다. 사도 바울이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한 은혜의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은 그 시대입니다. 우리 교회 역사를 보아서 이와 같은 시대를 종종 봅니다. 二, 三세기가 다 그러했고, 아마 十六세기는 종교개혁의 의미가 깊은 그러한 시대입니다. 특별히 十八세기에 영국을 비롯해서 큰 은혜의 해가 임해서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二十세기도 그 은혜의 해는 계속되는 줄 압니다. 사실 우리 남한에 있어서는 우리가 당하는 이 시대는 은혜의 시대입니다. 얼마든지 전도를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 갈급 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시대에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고 내가 또한 구원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민족적으로 그런 것과 같이 개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어떤 때에는 성령으로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불 일 듯 일어나게 하고 교회를 스스로 찾게 하는 그런 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분은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을 때에『어떻게 나오셨습니까?』물어보면『뭐 내게 전도한 이 없어요. 다만 믿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나왔습니다.』이렇게 간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은혜의 해가 여러분에게 임할 때에, 우리 민족적으로 임할 때에 우리는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꼭 만나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지금은 은혜 주실 때요, 오늘은 구원의 날이라』하면서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헤롯왕은 가장 위대한 선지자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 못하였습니다. 빌라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그 말씀을 듣고도 회개 못하였습니다. 베스도, 벨릭스, 아그립바 왕 같은 이는 가장 위대한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도 하나님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 마음이 강퍅해서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였습니다. 가까이 계시건만 부르지 않았습니다. 만날 만한 때가 되고 만나게 되었건만 찾지 아니하였습니다.
은혜의 기회란 우리가 붙잡아야 합니다. 만날 만한 때에 우리가 찾아야 됩니다. 가까이 계실 때에 우리가 불러야 합니다. 여러분, 열 처녀의 비유를 아시지요?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등과 기름을 준비하였다가 신랑이 올 때에 혼인 잔치에 들어갔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가 늦어졌습니다. 혼인 잔치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문은 벌써 닫혔습니다. 아무리 문을 열어 달라고 두드리건마는 열리지 아니합니다. 애석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법칙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에 우리가 들어가지 아니하면 문은 닫힙니다. 닫힌 후에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회를 놓치지 아니해야 됩니다.
여러분! 이런 얘기 들었어요? 사단이 자기 부하를 다 모아놓고 어떻게 하면 이 많은 사람을 꾀어서 지옥으로 인도하고 구원을 못 얻게 할까 의논을 하였습니다. 어떤 악귀가 척 일어서면서 하는 말이『저는 허락만 하시면 세상에 나가서 성경이라는 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전파하겠습니다.』하였습니다.『아! 그것 참 그럴 듯하다.』또 다른 악귀가 일어서서『저는 세상에 가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무신론을 전파하겠습니다.』하였습니다.『그것 좋은 방법이로군,』 또 다른 놈이 일어서더니 하는 말이『나는 세상에 가서 천당과 지옥이 없다고 선전하겠습니다.』하였습니다. 가만히 듣더니『그것도 그럴 듯하단 말이야』하고 사단은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또 다른 놈이 일어서더니『나는 그저 그런 이야기는 한하고 예수는 믿기 는 믿되 차차 믿으라고 전파하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사단의 말이『이 네 가지 방법이 다 좋은데 어디 어느 방법이 제일 효과가 있나 시험을 해 보자. 너희들이 一년 동안 나가서 그 방법대로 힘써 보아라』하고 세상에 내어보냈습니다. 一년만에 다 다시 모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一등 상을 탔는고 하니 넷째 놈이 一등 상을 탔다고 합니다.
만날 만한 때에 만나야 됩니다. 가까이 계실 때에 불러야 됩니다. 내일로 연기하지 마십시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직까지 온전히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지금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여러분의 기회입니다.
또 마지막으로 말씀 드리는 것은 꼭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분명한 길 세 가지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둘째는 기도를 힘써야 합니다. 항상 기도를 힘쓰면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주일 예배와 집회에 참여하여야 됩니다.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날 수 잇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다 합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며칠 후에 부흥 사경회(査經)(會)를 하려는데 이 부흥 사경 회는 이 세 가지를 다 합한 것입니다. 이 사경회 때에는 성경 공부도하고 기도도 힘쓰고 예배도 드리고, 세 가지 다 합니다.
여러분, 참 하나님을 만나고, 여러분의 친척이 하나님을 만나고 여러분의 친구가 하나님을 만나기를 꼭 원합니까? 이번 부흥 사경 회에 一년에 한 번씩 하나님께서 이 기회를 주실 때에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다. 꼭 하나님을 만나고 이 축복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一九六三년 五월 十九일)


Ⅴ-25 신앙생활과 정성 (요한 복음 十二장 一-八)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막 十二·四十三)

오늘 아침에 읽은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올시다. 예루살렘 동편, 감람산 동편 기슭에 깃들이고 있는 작은 베다니라고 하는 마을에서 예수 님을 위해서 잔치를 한 것입니다. 거기는 마르다도 와서 일을 보고 나사로도 같이 참여하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그 날 저녁에 베다니 에 있는 그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 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은 것입니다. 향기가 온 방안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 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 는 여기에 대해서 불평을 말하였습니다.『저 향유는 값이 대단히 비싸니 판다고 하면 삼 백 데나리온이나 받을 텐데 그 많은 돈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지 아니하고 왜 허비하는가』하고. 그 때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가 하루에 받을 수 있는 삯이올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저를 가만히 두라. 그리해서 나의 장사할 날을 준비하게 하라. 가난한 사람들은 너희들과 항상 이 앞으로도 있겠지만 나는 너희와 항상 같이 있을 것은 아니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 님은 마리아의 정성을 물리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옥합(玉盒)에는 향유라기보다는 마리아의 예수 님에 대한「지극한 정성」이 가득히 있는 줄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베다니 마리아의 정성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우리가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가복음 十二장을 읽어보면, 예수 님께서 성전 뜰에서 한 번은 연보 궤에 가까이 앉으셔서 여러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연보 하는 것을 보셨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많은 연보를 드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적게 드린 줄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 어떤 가난한 과부가 오더니 적은 돈, 엽전 두 닢을 던졌다고 했습니다. 그저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옛날 동전 두 푼쯤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적은 돈을 드릴 땡 이 과부는 물론 남이 볼까 두려워하면서 드린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특별히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과부가 드린 연보를 보았느냐? 내 생각에 이 과부는 어떤 사람들보다도 제일 많은 연보를 드린 줄로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 유여(有餘)한 가운데서 드렸지만 이 과부는 자기의 연명할 것을 드렸느니라.』
주님은 헌금의 양을 보시지 아니하시고 그 정성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울에는 정성이 무겁습니다. 이 정성이 주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우리 동양에도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지성은 감천』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감동시킨다고 하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정성, 그런 생활이 참된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문자 그대로 지성의, 지극한 정성의 생활이올시다. 신앙 생활에는 이 정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찾아보면 이런 말로 권면 한 말이 종종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너희가 진심으로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달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반면에 성경을 읽어보면 정성 없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책망을 한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가운데『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느니라』책망하셨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이런 말씀으로 책망하셨습니다.
『만 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이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희생의 제물은 병신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흠 있는 것으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한 말라기 시대에 와서는 병신, 병든 짐승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가져왔던 모양입니다.
주님께서도 또한 말씀하셨습니다.『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신앙생활에는 이 정성이 필요합니다. 가령 기도를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기도는 단순히 묵상이 아닙니다. 명상도 아닙니다. 다만 자성도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쓸 것을 간구 하는 가장 거룩한 일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천사가 금 향로에 향을 가득히 담아 하나님께 드리는 장면이 보이는데 이것은 성도의 기도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향로에 성단 불을 담아 땅에 던지니 지상에 지진과 뇌성이 일어나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곧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하고 또한 상달한 후에는 그 응답이 지상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하며 어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하지 못합니까? 정성 없는 기도는 천언(千言) 만언(萬言)으로 기도를 할지라도 하나님께 상달하지 못합니다.
예수 님께서 비유를 들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여러 가지 말로 자기가 잘하는 일을 쭉 벌려 놓으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위를 보지도 못하면서 오직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주님 말씀이『이 세리의 간단한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어서 의롭다 함을 얻고 바리새인의 기도는 상달되지 못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정성을 다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남에게 보이려고 길가에서나 회당에 가서 길게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공연히 중언부언해서 기도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를 드릴지라도 정성을 다해서 드리라고 하는 말씀이올시다.
또한 우리가 복음서의 기록을 읽어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정성의 간구(懇求)는 반드시 응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의 딸이 병났을 때에 그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 님께 와서 간구 한 이야기를 다 기억하십니다.『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었지만, 처음에는 주님께서 들은 척 만 척하셨습니다.『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노라』고 말씀했습니다. 가까이 와서 그래도 그냥 간청을 하니까 주님께서 멸시하는 말을 하셨습니다.『아들에게 줄 떡을 개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 말을 듣고도 이내 하는 말이,『그렇습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개라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아니합니까?』 이 때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여인이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지어다.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네 딸을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간절한 정성 어린 간구를 주님께서는 언제나 응답하셨습니다.
가버나움의 어떤 집에서 그르치실 때에 많은 사람이 둘러쌌습니다. 그 때에 어떤 반신불수 된 사람을 네 사람이 메고서 예수 님 앞에 데려오기는 왔지마는 무리로 둘러싸여서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지붕 꼭대기로 올라가서 그 곳을 헤치고 반신불수를 달아매어서 예수 님 앞에 놓은 얘기를 여러분 다 아십니다. 예수 님께서 그 반신불수의 믿음보다도 메고 온 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반신불수를 고쳐 주셨습니다. 정성 있는 간구를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물리치지 아니하셨습니다.
불의 한 법관의 비유를 들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이 불의 한 법관이 가난한 과부가 와서 신원 해 달라고 할 때 처음에는 듣지 아니했지마는 그냥 계속해서 간구 할 때에 이 간구를 들어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물며 하나님께서 너희의 간절한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겠느냐』하고 기도할 때에 정성을 다해서 기도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전에도 말씀했지만,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와 같이 十년을 계속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신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개혁자 존 녹스의 기도가 있습니다.『오, 하나님이시여, 우리 나라 이 스코틀랜드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그렇지 못할진대 내 생명을 불러 가시옵소서.』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이의 기도, 정성 어린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새벽 기도회를 힘쓰는 것도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하는 뜻입니다. 이것은 기도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주의 역사를 할 때에 우리가 정성을 다해서 해야 될 것입니다. 목사만 주의 역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도 주의 역사를 하는 것이고, 집사도 주의 역사를 하는 것이고, 모든 평신도들도 믿는 그 날부터 주의 일을 할 책임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이방의 사도가 되는 직분을 받은 후에 얼마나 큰 정성을 가지고 그 사도직을 감당하였는지 기억하시지요. 빌립보 一장 二十절에는 이런 말이 기록되었습니다.『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 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그 때에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 물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만일 너희들이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쳐서 드린다고 하면, 나는 죽어서 내 피로써 그 위에 부어서라도 너희와 같이 기뻐하겠다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정성의 기도를 보시고 그를 통해서 많은 생명을 구워하고 초대 이방 교회에 기초 석을 놓게 된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만일 우리 영락교회의 목사를 비롯해서 모든 당회원 이나 제직원 들이나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정성을 가지고 내가 맡은 바 책임을 다 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얼마나 축복을 더하시겠는가, 잠깐 상상해 보셔도 알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가령 주일학교 반사가 재가 한 주일에 몇 시간을 가르친다고 할지라도 정성을 다해서 기도를 하고 정성을 다해서 준비하고 가르친다고 하면 얼마나 효과가 더 있겠는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권찰 직분도 그렇고, 성가대 직분도 그렇고, 모든 직분이 다 그렇습니다.
제가 이번에 칠레에 가서 목사 수양회 때에 우리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하라고 하기에 이 얘기를 하다가 우리 상례 부에서 하는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어떤 가정에 상례가 난다고 하면, 상례부원들이 가서 먼저 예배를 보아 드리고, 그들이 수의를 만들고, 그들이 상복을 만들고, 그들이 관을 준비해 오고, 묘지까지 모신다고 하는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한국 교회가 그와 같이 정성을 가지고 슬픈 일을 당한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가 하면서 모두들 큰 감동을 받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정성이 같이 할 때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찬송도 정성을 들여서 부를 때 감동이 있습니다. 음식도 정성 들여서 만들어야 그 음식이 맛이 있습니다. 헌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헌금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 정성으로 드려야 열납(閱納)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이 자녀를 드릴 때에는 맏아들을 하나님께 먼저 드렸습니다. 목식을 드릴 때에는 첫 이삭을 먼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열매를 드릴 때에도 첫 열매를 먼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소나 양을 드릴 때에도 첫 새끼를 흔히 드렸습니다.
제가 들으니 우리 교회 집사 가운데도 어떤 한 분은 산양 목장을 하는데 문자 그대로 산양의 첫 새끼를 낳을 때마다 전도 회에 바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성이올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정성 어린 예물을 통해서 큰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예수 님께서 들에서 많은 사람을 가르칠 때에 해는 점점 저물어 오고, 음식을 살 곳은 멀고, 많은 백성들이 주리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을까 하고 예수 님과 제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때에 한 소년이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바쳤지요. 이것이 적지마는 그 어린 마음의 정성은 태산 같은 줄 생각합니다. 예수 님께서는 그 정성 어린 물건을 받아서 축복해서 오 천 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을 먹였다고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헌금에도 정성이 같이 할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십니다. 김포 가도로 나가는 곳에 새로이 기독교 선명회에서 고아를 위하여 병원을 잘 지어 놓았지마는 몇 해 전에는 대구 동산병원 안에 역시 고아를 위해서 병원을 지었습니다. 그 때에 병원 낙성식에 피얼스 박사께서 오셔서 하시는 말씀 가운데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미국 사람들은 돈이 많아서, 큰 부자가 헌금을 많이 해서 이렇게 지은 줄 아십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내가 이 병원을 지으려 할 때에 꼭 필요하다고 라디오 방송을 몇 번했는데 그 다음에 내가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어떤 부인이 돈 五十 불을 편지 속에 넣어 보내면서「나는 항상 병중에 사는 반신불수가 된 사람인데 내가 라디오를 통해서 당신의 음성을 듣고 어떻게든지 그 병원을 도와줄 마음이 간절하지만 다른 돈이 업은즉 이 라디오를 팔아서 그 값 五十불을 보냅니다.」이런 정성 어린 헌금이 모여서 이 병원이 되었습니다.』
헌금하는 이 가운데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부득이해서 하는 이, 둘째 기쁨으로 하긴 하지마는 힘껏은 안 하는 이, 셋째는 기쁨으로 하고 정성껏 힘있는 대로 하는 이.
우리 믿는 사람은 만사에 성의의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일이 바로 됩니다. 그래야 성공합니다. 정성을 가지고 제품을 만들어야 그 제품이 바로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들으니까 일을 허술하게 하는 것을 가리켜『처삼촌의 벌초하듯 한다』고 그럽디다. 처삼촌의 벌초하듯이 주의 일 하는 이는 없습니까? 처삼촌의 벌초하듯 모든 일을 보는 이는 없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정성을 가지고 하는 그 일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옛 글에『성자는 천지도야요 성지 자는 인지도』 란 말이 있습니다. 정성 되게 하는 것이 하늘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정성이 없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一九六三년 六월 二일)


Ⅴ-26 착한 이웃 (누가복음 十장 二十五-三十七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十·三十六-三十七)

한 율법사가 예수 님께 와서 질문을 하였습니다.『영생을 얻으려면 내가 무엇을 하여야 되겠습니까?』그 때에 예수 님께서는 곧 율법사에게 반문을 하셨습니다.『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었느냐?』그는 곧 대답하기를『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하였습니다. 예수 님께서『네 말이 옳도다 그와 같이 하면 네가 살리라.』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율법사는 자기의 옳은 것을 보이기 위해서 다시 이웃에 대한 정의를 물었습니다.『그러면 누가 내 이웃이 되겠습니까?』그 때에 흔히 유대 사람들은 이웃이란 같은 유대 사람 만이고 외국 사람은 원수로 생각했습니다. 예수 님께서 이 질문에의 대답으로서 우리가 잘 아는「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이웃은 누구이며 참 이웃의 모습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아침 이 유명한「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회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심령에게 친히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매우 험합니다. 몇 해 전에 저는 직접 그 길을 내려가 보았습니다. 골짜기가 깊고 그 전 지역이 황막한 광야로서 인가가 전혀 없습니다. 중간 지점에 사마리아 사람의 여관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여관이 하나 있었다고 하지마는, 제가 가 볼 때에는 그 여관도 다 무너지고 다만 그 길을 수비하게 위해서 군인 몇 사람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거기에는 강도가 흔히 나타나는 곳입니다. 옛날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험한 길입니다. 이 사람이 그런 길을 걸어가다가 불행히 강도를 만났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의 행로는 말하자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과 비슷하게 험악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습니다. 우리를 해치려는 강도의 무리가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 그대로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이 있습니다.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이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의 매일 같이 무슨 살인 사건이니, 강도 사건이니, 절도 사건이니, 사기 사건이니, 유괴 사건이니, 부정 사건이니, 온갖 죄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통 사고니, 무슨 폭발 사고니, 화재니, 그 외에도 천재지변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 인생의 행로입니다. 험악합니다. 전에 야곱이 요셉의 인도로 멀리 애굽에 내려가서 애굽의 바로 왕을 처음으로 대하게 될 때에 바로가 야곱에게『연세가 어떻게 되셨는가?』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 때에 야곱은 나이 많은 분이올시다. 대답하기를『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一三0년이올시다.』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이『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문자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월이 매우 험악한 세월이요,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이 매우 험악한 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런 험악한 길을 걸어가다가 강도들을 만나서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옷까지 벗기 우고 많이 매를 맞아서 거의 죽게 된 것을 버리고 갔다고 하였습니다. 험악한 무리를 만나서 이렇게 불행하게도 쓸려졌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행로에도 쓸러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 죄로 이런 참혹한 형편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로 말미암아 이렇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문자 그대로 강도를 만나서 쓰러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절도를 만나 쓰러지는 사람, 강도를 만나서 쓰러지는 사람, 병을 만나 쓰러지는 사람, 친구의 죄로 쓰러지는 사람, 혹은 애인의 죄로 쓰러지는 사람, 여러 가지로 자기 죄 이외에 이유로서 쓰러지는 사람을 우리는 인생 행로에서 많이 발견합니다. 그 밖에도 혹은 전쟁으로, 혹은 혁명으로, 혹은 무슨 사고로, 천재지변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리해서 우리 사회에는 고아도 많고, 과부도 많고, 무의무탁한 노인도 많고, 창기도 많고, 불구자도 많고, 걸인도 많고, 행려병자도 많고,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온전히 파탄을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 이 여리고 길로 내려가다가 쓰러진 이 사람은 매를 너무 많이 맞고 너무 상해서 자기 혼자는 도저히 희생할 길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도와주어야만 할 형편이었습니다. 이것과 꼭 같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인생행로에 여러 가지로 이렇게 쓰려진 사람이 많은데 이 사람들 가운데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도와주어야만 회생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이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다른 지나가는 사람이 혹 있었습니다. 가령 제사장 한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여기 보는 대로 이 제사장은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서 넘어진 사람을 보기만 하고 피하여 다른 길로 지나갔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조금 있다가 레위 사람(성전에서 여러 가지 다른 일을 보는)이 우연히 이 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역시 이 넘어진 사람을 보고 피해서 다른 길로 지나갔습니다. 물론 이 사람이 이렇게 이 불쌍한 사람을 보고 그저 지나갈 때에 자기의 양심이 편안했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양심을 좀 잠자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핑계하는 생각을 많이 한 줄 압니다.
가령『내 길이 오죽 바빠야지. 내가 예루살렘에 가서 달포나 있으면서 성전에서 내가 봉사를 하고 방금 여리고에 있는 내 집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빨리 가야지.』혹은『이 사람이 도적을 만나 이렇게 되었는데 그 도적이 멀리 안 가고 아직 가까이 있을 수 있으니 이 곳에서 어물어물하다간 나까지 도적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하겠나. 우선 아무래도 내 생명부터 보존해야지.』아마 이런 핑계도 더러 했을 줄 생각해요. 혹은『뭐 잠깐 들여다봐도 아무래도 죽을 사람이로구먼. 그러니 죽을 사람을 위해서 괜히 내 귀중한 시간을 허비할 것 뭐 있나.』아마 이런 핑계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나간 줄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는 레위 사람이 지나가다가는 꼭 같이 핑계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 가지 핑계를 더 한 줄 압니다.『앞에 보니까 제사장이 그저 지나가는데 나냐 뭐.』그 핑계 하나를 더 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지나간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핑계를 한다고 자기의 책임이 온전히 회피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야말로 매일 성경을 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율법사가 여기에 대답한 바와 같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제일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읽고 또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고 이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목적은 一개월 동안 친히 하나님의 성전에서 거룩한 제사의 생사를 행하고, 레위 사람도 성전에서 자기의 맡은 책임을 방금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지나가고 레위 사람이 지나가는 그 길에 이렇게 인사불성이 된 사람이 넘어져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된 일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제사장을 통해서 혹은 레위 사람을 통해서 이 사람을 도와주자고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 그냥 지나간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오늘날의 말로 말하면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목사와 장로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범위를 넓혀 말한다고 하면 우리 모든 믿는 재직들과 우리 믿는 평신도들은 다 레위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와 같이 험악한 시대의 인생 행로에서 넘어져 스러지는 사람이 많은 이 길을 우리 제사장 된 사람들, 래위 사람들도 지나가게 되는데 우리는 이 쓰러진 사람을 보고 어떻게 지나갑니까? 오늘 우리가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혹 여기 있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과 같이 여러 가지 핑계만 하면서 할 수 있는 대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이와 같은 시대, 이와 같은 사회에서 쓰러진 사람들이 많은 인생의 행로를 내가 믿는 사람으로서 지나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혹 우리를 통해서 이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경륜이 있을 터인데 내가 이 경륜을 얼마나 이룹니까?
『뭐 가난한 사람은 나라도 못 구하는데.』『뭐 사람이 구원 얻고 못 얻는 것은 아무래도 예정이 있을 텐데!』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가 그저 멀리 보기만 하고 지나가는 때는 없습니까? 혹은 평신도들은 한 가지 핑계 더하지 않습니까?『목사, 장로들도 그저 지나가는데…』핑계한다고 우리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二十五장의 산양과 면양의 비유를 여러분 회상해 보세요. 왼편 산양의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님께서 책망하면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내가 주릴 때에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지 아니했고, 내가 헐벗을 때에 너희들이 나를 입히지 아니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너희들이 찾아보지 아니했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너희들이 와서 방문하지 아니했고,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들이 나를 대접하지 아니했다.』이들이 하는 말이『언제 그런 일들을 당해서 우리가 하지 아니했습니까?』라고 할 때에 주님께서 다시 하시는 말씀이『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도 이렇게 그저 지나간 후에 우연히 유대 사람도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그 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그 곳을 지나가다가 인사불성이 되어서 넘어진 이 사람을 보고는 불쌍히 여기고 가까이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가까이 갔다」고 하는 말은 참 귀한 말인 줄 압니다. 왜 그런고 하니 어떤 때는 우리가 불쌍히 보기만 하고 가까이 가기를 싫어하는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가지고 다니던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발라 주었습니다.
자기 옷을 찢어서 상처를 싸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탔던 나귀에 그 사람을 태워 가지고 여관까지 와서 하루 저녁을 같이 유하면서 그 사람을 도와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갈 길이 바빠서 그 이튿날 떠나면서, 그러나 돈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이 돈을 가지고 이 사람을 계속해서 치료해 주기를 바랍니다. 만일 부족하면 내가 돌아올 때에 다시 갚겠습니다.』정성껏 철저히 이 사람을 도와주어서 어떻든지 죽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마리아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기억하시지요. 유대 사람의 눈에는 사마리아 사람은 다 이단들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 혈통도 좀 섞였지만 외국 사람과 혼합종이라고 해서 아주 멸시를 하고 흔히 개라고 불렀습니다. 이 강도를 만나 넘어진 사람이 누구라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짐작컨대 유대 사람 같습니다.
아마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 사람이 그렇게 넘어진 것을 보고『당신 네 들이 우리를 늘 멸시하는 데, 또 당신 네 제사장도 그저 지나갔는데 내가 당신 도와줄 게 뭐 있소?』이런 생각을 가지고 그저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마리아 사람은 그런 생각은 전혀 없는 모양입니다. 이 사람이 유대 사람이건 사마리아 사람이건, 이런 불행할 일을 당했는데 이 사람이 인간이니 인간으로서 인간애를 발휘해서 이 사람을 도와준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착한 이웃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또 이웃의 옳은 관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곧『이웃이란 옆집 사람만이 아니고 민족이나 국경이나 종교의 구별이 없이 모든 인간이 다 이웃이니, 모든 인간에게 착한 이웃이 되어라. 누구든지, 어떠한 사람이든지 불행한 중에 있으면 어떻든지 착한 이웃으로 도와주도록 힘을 쓰라.』
이 넓은 이웃의 관념이야말로 온 세계가 한 집안이 된 오늘날에 있어서 얼마나 적절한 교훈인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벌써 예수 님께서는 二천 년 전에 이웃이란 어떤 것이며 착한 이웃이 어떤 사람이라고 이렇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교훈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요새 신문지상을 볼 때에 여러 가지 불행한 뉴스 가운데 하나는 미국 남방에서 소위 인종 차별 문제로 심각히 대립되어 있는 현상을 볼 때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 참 민망한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은, 미국사람이 다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또 미국 남방 사람이라고 다 흑인을 그렇게 학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남방 사람 가운데도 지극히 적은 수가, 또 그 많은 지방 가운데 몇 곳에서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오래 성경을 읽고 기독교의 감화를 받은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도 아직까지 이런 일을 감행합니다. 착한 이웃은 어떠하다고 二천 년 전에 예수 님께서 분명히 가르쳐 주셨지마는 우리가 아직까지도 배우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기억하십시다. 첫째 되는 계명은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는『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계명입니다. 세계의 모든 사람이 다 우리의 이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절실한 문제가 많은 가운데, 하나님은 온 세계가 한 집안 같이 된 오늘에 있어서 모든 사람을 내 이웃으로 아는 이 착한 이웃, 선린 사상의 보급이야말로 얼마나 적절한 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선린 운동」이 반드시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또 특별히 우리 한국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운동이 필요하지마는 이「선린 운동」이 반드시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여기 세계적으로 기아 해방 운동 같은 것을 일으키는 것도 다 이 선린 사상에서 일어나는 운동입니다. 본래 우리 한국에서 보면 농촌에서 우리가 살 때에는 다 참 착한 이웃으로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함으로 말미암아 산업 혁명이 점점 우리 한국에도 들어옴으로 인구가 도회로 집중이 됩니다. 도회 생활에서는 앞뒷집 사람을 서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선린 운동」이 도회에서 더 필요합니다.
얼마 전에 권찰회(勸察會) 때 어떤 구역장(區域長)되시는 집사 님이 좋은 말씀을 하는 데서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다른 말씀이 아니고 우리가 어떻든지 전도를 하는데 우선 우리 가까운 데 있는 사람부터 먼저 전도를 하자고 하면서 내 앞집에 사는 사람에게 전도하고 그 다음에는 내 뒷집에 사는 사람에게 전도를 하고 그 다음에는 내 오른편쪽에 사는 집에 가서 전도하고 그 다음에는 내 왼편쪽에 사는 집사람에게 가서 전도를 하고, 이렇게 한 집에서 네 집씩 전도를 하자는 제창을 해요. 얼마나 좋은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만 다 전도하면 뭐 一년에 현재의 四배가되리만큼 우리 서울에 기독교인이 생기겠다는 말입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그 말씀에 한 가지 더 붙여서 말씀 드리는 것은, 전도만 할뿐더러 착한 이웃의 책임을 하자는 말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 있으면 전도를 합시다. 전도에 그치지 말고 그 사람이 밥이나 굶지 않나, 그것도 알아보자는 말입니다. 뒷집에 사는 사람이 큰 환난을 당했는데 전혀 돌아보는 사람이 없이 고독하게 그 환난을 당하지 않는가, 그것도 살펴보다는 말입니다. 내 옆집에 사는 어떤 사람이 무슨 일로 슬픈 일을 당했는데 그 슬픔을 혼자 당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것도 살펴보자는 말입니다. 착한 이웃이 되자, 그 말씀이올시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할 수 있으면 경제적으로, 모든 방면으로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주고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을 피차에 도와서 착한 이웃으로 사는 운동을 일으키자 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사실 내 앞집에 어떤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면 그게 내 책임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 옆집에 사는 사람이 무슨 큰 어려운 일을 당해서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고 낙심하고 절망해서 음독자살을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면 그게 내 책임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될 것입니다. 어떻든지 내 이웃에 있는 사람의 형편을 우리가 알고 각 방면으로 도와줄 수 있는 대로 피차에 도와주는 착한 선린 운동을 우리가 일으켜야 되겠습니다. 각 구역에서 이런 운동을 일으켜야 되겠습니다. 우리 교회 안의 여러 단체도 이런 운동을 일으켜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각 동리에 돌아가서 내가 사는 그 동리에도 꼭 이런 운동을 일으켜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오늘날과 같이 심한 불경기 시대, 쌀값은 비싸고 물가는 점점 높아가고,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이 시대를 우리 동포가 서로 협력해서 착한 이웃이 되어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늘 잊지 마십시다. 이웃은 단순히 옆에 사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온 세계 사람이 내 이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외국 사람들에게 친절히 하고 외국 사람에게 착한 이웃이 될 줄을 꼭 알아야 되겠습니다. 제 마음 가운데 항상 답답하게 들리는 말 가운데 하나는 외국 사람이 물건을 사자고 하면 오히려 더 비싸게 받는다고 하는 얘기가 많습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외국 사람은 우리 나라에 와서 나그네입니다. 손님이올시다. 여러분, 신구약 성경을 읽어보세요. 언제든지 나그네 된 사람, 손님을 잘 대접하라고 그랬습니다. 손님에
대해서 착한 이웃이 될 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一九六三년 六월 十六일)


Ⅴ-27 회개와 신앙 (마가복음 一장 一-十五절)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一·十五)

세례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 님께서 유대 지방으로부터 갈릴리에 돌아오셔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실 때에 하신 말씀이올시다.
이 말씀은 매우 간단하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그 가운데 네 가지 점을 말씀하신 것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때가 왔고, 둘째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셋째는 회개하고, 넷째는 복음을 믿으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믿음의 순례를 하게 하셨습니다. 때가 찰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때가 찰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택한 백성들에게 전파하셨습니다. 때가 찰 대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때가 찰 때에 그 복음이 온 천하에 확포(擴布)케 하신 것입니다.
그 때에 이 복음이 우리 한국에도 미치게 된 것입니다. 때가 찰 때에 하나님께서 이 영락교회도 이 곳에 세워 주셨습니다. 때가 찰 때에 여기 앉은 여러분 하나 하나를 불러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아직까지 구원을 받지 못한 분이 있으면 당신들이 알 것은 당신들이 구원의 때가 이제 찼습니다. 구원을 얻을 기회는 이 때입니다. 때가 찼다고 하는 말은 그런 뜻입니다.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예수 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택한 자를 불러 구원해서 그들 가운데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목적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신 이후로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워졌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먼저 성경 가운데 특별히 세 구절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요한 복음 十八장 三十六절에 예수 님께서 빌라도에게 대답하실 때에『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근본적으로 하늘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 누가복음 十七장 二十절에 보면 주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니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주님과 같이 이 세상에 임재 해서 그를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신령하게 임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로마서 十四장 十七절을 보면『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는 의와 평강과 기쁨이 우리 마음속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본래 하늘에 있지만 주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신령한 심령 가운데 임재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불완전하지마는 하나님의 나라의 보이는 부분은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하늘의 식민지」라고 말씀한 데도 있습니다. 교회는 말하자면 하늘 나라의 식민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임한 것은 아닙니다. 이 앞으로 온전히 임할 때가 있겠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기 위해서 항상 기도하라고 주기도문에 가르쳐 주셨습니다.『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역사적인 어떤 날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해 온전히 임할 때가 있겠는데 그 때가 바로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주님께서 오셨던 까닭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서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세요. 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예수 님께서 두 가지 조건을 분명하게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첫째는『회개하라.』둘째는『복음을 믿으라.』
왜 먼저 회개하라고 하였습니까? 요한 一서 一장 八절에 사도 요한 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말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게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세상에 죄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아시는 예수 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十五장 十九절에『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이와 같은 흉악한 죄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의 나라요 평강의 나라요 기쁨의 나라인데 흉악한 이런 죄를 가지고 어떻게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첫째로 요구하는 것이「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약대 털옷을 입고 모든 사람들에게 외친 말씀은『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한 것입니다.
여기 보는 대로 우리 주님께서 갈릴리에 나타나셔서 역시 부르짖은 말씀이『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 모든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마지막 결론을 지은 말씀이『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이 아덴의 아래오바고 산상에서 많은 철학자들에게 설교를 하고 결론 지은 말씀도 역시『이제는 하나님께서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여 회개하게 하셨다』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회개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회개는 무엇입니까? 회개는 어떻게 합니까?
회개에는 먼저 지적 요소가 있습니다. 머리로 깨달아 아는 요소가 있습니다. 나 자신을 하나님께서 보시는 대로 바로 보고 그 속에 죄가 얼마나 많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깨닫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다윗 같은 사람도 그렇게 무서운 간음죄와 살인죄를 짓고도 태연자약하게 맨 처음에는 그냔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서 비유를 들어 말하면서『우리 동네에 큰 부자 집이 있고 가난한 집이 있습니다. 부자 집에는 소와 양이 많습니다. 가난한 집에는 어린 암 양 새끼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 집에 손님이 오니 이 가난한 집의 어린 암 양을 빼앗아다가 그걸 잡아서 자기 손님을 대접했으니 이런 사람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다윗 왕이 노해서『그런 사람을 그냥 이 땅 위에 둘 수 있겠느냐?』하고 말했습니다. 나단이 하는 말이『당신이 그 사람이올시다.』 이 말을 들은 다음에야 자기 죄를 깨달았습니다.
요나는 선지자의 명색이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할 때에 자기의 의견에 맞지 아니한다고 명령을 거스르고 반대로 다시스로 향하여 배를 타고 갑니다. 배 밑창에 들어가서 평안히 코를 골며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풍랑(風浪)을 일으키시고 제비를 뽑아서 바다에 던지게 하시고 물고기 속에 들어가서야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를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의 죄를 모르니까 하나님도 모르시는 줄 알고,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자기의 죄를 그냥 안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신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그대로 나 자신을 보고 죄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눈의 티는 보기 쉬워도 내 눈 속의 들보는 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죄를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탕자가 먼 나라에 가서 허랑 방탕하며 죄를 지을 때에 죄인 줄 몰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씩 모른다고 하면서 그냥 앉아 있다가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야 자기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먼저 내 죄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첫걸음이올시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여기에 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정적 요소가 있습니다. 감정의 요소가 있습니다. 내가 사실 내 죄를 깨들으면 이 죄 때문에 자연히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기에 참된 회개에는 눈물이 따릅니다. 베드로가 자기의 죄를 깨닫고 밖에 나가서 통곡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세리가 성전에 와서 기도할 때에 자기의 가슴을 쳤다고 그랬습니다. 어떤 죄 많은 여인이 예수 님 앞에 나와서 눈물로 예수 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었다고 했습니다.
벌써 十여 년 전에 제가 대구에서 어떤 미국 부흥 사와 같이 부흥회를 인도할 때에 한국 사람도 많이 오고 미국 군인들도 많이 왔습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죄를 통회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어떤 미군 장교 한 사람이, 키가 크고 아주 건장한 사람인데 그저 눈물을 흘리면서『나의 이 죄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부르짖는 모습을 본 것을 지금까지 잊을 수 없습니다. 참된 회개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죄를 통회합니다.
성 프랜시스 같은 이는 다른 사람 보기에는 성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이가 하나님 앞에 앉아서 기도할 때에는 항상 자기의 부족한 것을 생각하고 너무 눈물을 흘리며 울어서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된 때가 종종 있었다고 전기에 기록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회개는 죄를 먼저 깨닫고 뉘우칠뿐더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의지적 요소가 있습니다. 의지적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죄를 미워하고 죄를 끊어버리고 죄에서 갈라서야 합니다. 베드로가 자기의 죄를 깨달은 다음에는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곧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탕자가 자기의 죄를 깨달은 다음에 그냥 먼 나라에서 돼지를 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곳을 떠나서 아버지를 향해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삭개오가 자기의 죄를 회개할 때에 토색(討索)한 것은 사 배나 갚아주고 자기의 재산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했습니다. 회개에는 이 죄를 끊어 버리는, 단절해 버리는 의지적 결단력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기 전에 남몰래 어떤 좋지 못한 여자와 불미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던 분이 예수를 믿고 보니 그것이 큰 죄악인 것을 깨달아서 그 여자와 관계를 아주 끊어 버리고 청산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랜 후에, 이 여자와 전연 관계를 안하고 있던 차에 한 번은 거리를 지나가다가 이 여자와 마주쳤습니다. 이 때에 이 남자는 여자를 척 보고 몇 해 전에 관계를 가졌던 그 여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얼른 가던 방향을 돌이켜서 다른 곳으로 갑니다. 이 여자가 남자를 부르며 따라와 하는 말이『여보, 당신이 나를 모르겠습니까? 여보, 당신이 나를……』그러면서 따라옵니다. 한참 가다가 이 남자가 다시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고 하는 말이『당신은 전에 있던 그 사람인지 모르겠지마는 나는 전에 있던 내가 아닙니다.』그리고는 달음질을 쳤습니다.
죄를 깨달아 알뿐더러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을 뉘우치고 아프게 눈물로 회개할뿐더러 온전히 끊어버리는 것,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회개해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복음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복음의 뜻은 무엇입니까?「마태복음」「마가복음」하는데 그 듯은 무엇입니까?.「복음」이라고 하는 글자의 뜻은「유양겔리온」「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요샛말로는「굿 뉴스,」「좋은 뉴스」하고 하는 뜻입니다. 마가가 전한 좋은「뉴스」마태가 전한 좋은「뉴스」좋은 소식입니다. 이 마가가 전한 뉴스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 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태가 전한 뉴스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 복음도 그렇고, 누가복음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복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님이올시다. 복음은 예수 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 님은 복음의 주일이올시다. 복음을 믿으라고 하는 말은 예수 님을 믿으라고 하는 뜻입니다. 예수 님의 교훈을 머리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 님의 권능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님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계시자」임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님께서 과연 상위일체의 하나로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님께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 내 죄를 속량해 주신 구주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믿는다」고 하는 말은 머리로 안다고 하는 뜻만이 아닙니다.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이 예수 님을 온전히 내 구주로 알고 그에게 내 생명 전체를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의지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 마음 문을 열어놓고 영원히 살아 계시는 예수 님을 영접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내 속에 있던 온갖 더러운 모든 죄를 온전히 뉘우쳐 회개해서 없이 해 버리고 그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속에 영접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렇게「회개와 믿음」이 두 가지는 구원의 절대 필요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수레에 바퀴가 하나만 있으면 넘어집니다. 마치 비행기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두 날개가 다 있어야 비행기가 공중으로 떠올라갑니다.
마찬가지로 이「죄에 대한 참된 회개」와「예수 님에 대한 참된 믿음」의 두 가지가 있어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교회에 이따금 나오지마는 죄를 온전히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저 입으로만 예수를 믿는다고 말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참된 회개와 참된 믿음이 있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참으로 회개하고 믿음이 있는 이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선경에 보면『세례를 받으라』고 그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세례는 회개와 믿음으로「죄 씻음을 받는 표」입니다. 천국 입문의 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을 보면 세례를 경히 여기는 것 같습니다. 예수 님의 태도는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예수 님은 자리에게는 죄가 없지마는 만민의 죄를 대신해서 자기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분부하실 때에』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 죄 사함을 얻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들읍시다.『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우리 가운데 아직까지 한 분이라도 온전히 구원에 이르지 못한 이가 있습니까? 때가 찼어요. 당신의 기회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어요. 곧 열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세요.
자, 여러분! 이 말씀은 분명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권면으로 하는 말씀이 아니고 명령으로 하는 말씀이올시다.『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명령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순종치 않는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이것은 분명해서 오래할 것도 없고 깨닫기가 어렵지도 아니합니다.
이 다음에 주님의 심판 앞에 가 설 때에『나는 이 구원의 도리를 분명히 몰라서 회개도 못하고 믿지도 못했습니다.』이렇게 핑계 못할 것입니다.
또『영락교회 한 목사가 이 진리를 분명히 말해 주지 않아서 나는 이 진리를 몰랐습니다.』이렇게도 핑계 못할 것입니다. 왜? 내가 방금 분명히 말씀해 드린 것이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고 그렇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구원을 얻고 못 얻는 것은 당신의 책임이올시다. 회개와 믿음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다. 내일은 내일에 속합니다. 내일이 우리에게 있을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현재뿐입니다. 이 시간, 회개하고 복음을 믿읍시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 교회는 거의 매주간 장례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가장 엄숙한 시간, 그런 자리에 임할 때마다 항상 제 마음 가운데 스며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연 인생이 얼마나 무상한가? 과연 인간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잠깐인가? 그러나 이런 느낌 뿐만은 아닙니다. 혹 어떤 때에는 이런 장소에 임해서도 혹 고인을 생각할 때에 이 분이 과연 구원을 얻었는가? 이런 소름끼치는 생각이 스며들 때도 있습니다. 구원을 얻을 때는 지금이올시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一九六三년 六월 二十三일)


Ⅴ-28 위기에 처한 성도의 생활 (로마서 十三장 八-十四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十三·十一-十二)

『너희가 이 시기를 아나니……』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기를 알아야 합니다.
성서적 견지에서 볼 때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기는 문자 그대로 말세입니다. 시대의 모든 징조가 이것을 지적합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주님의 오실 날이 가까웠습니다. 주님의 날이 올 때에 큰 환난과 재앙이 먼저 온다는 것을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후서 三장 十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물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들어 나리로다.』
새벽 전이 제일 어둡습니다. 이 말세적 위기에 대한 경고는 모두 사도들과 요한 계시록의 전 책이 우리에게 엄숙히 주는 교훈입니다. 또한 세계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에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위기입니다. 十九세기이래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소외「유토피아」사상은 칸 마르크스나 엥겔스 같은 예언자를 만나고 레닌이나 스탈린 같은 제사장들의 지도하에 소위 과학적 공산주의사회를 실현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인간을 노예화한 지상의 지옥을 만들고 만 것입니다. 또는 인류의 향상과 행복의 꿈의 원천이 되는 과학은 원자탄, 수소탄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인류 전멸의 위기를 조성하게된 것입니다. 자유 진영과 노예 진영의 심각한 대립은 일촉즉발의 분화구 산상에 전 인류를 올려놓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절박한 위기가 일류 역사상 언제 또 있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국내 정세를 살펴볼지라도 역시 위기입니다. 혁명정부가 「二·二七선서」를 휴지로 만든 이래 정계는 돌연한 혼란에 빠지고 국민은 실망과 환멸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경제는 파탄되고 심각한 식량 난, 미증유의 불가고, 천재와 지변은 계속되고, 각종의 범죄와 사회악의 대두로 말미암아 오늘날 우리 민족은 문자 그대로 불안과 공포와 절망의 도가지 속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어떤 모로 보든지 우리가 사는 이 시기는 위기입니다. 이 위기에 처한 성도의 생활이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여기 읽은 성경의 교훈을 통해서 몇 가지 깨닫기를 바랍니다.
제일 먼저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이 시기는 자다가 마땅히 깰 대이니……』깨라고 경고합니다. 또는 이러한 때일수록『모든 어려운 것을 벗어 버리라』고 권면을 하십니다. 또는 광명(光明)한 갑옷, 곧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고 간곡히 권면 하십니다.
먼저 깨라고 하는 권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五장 六절에『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이런 위기 가운데서 자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까지 자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운전 수가 충암(衝岩)절벽(絶壁)의 험로(險路)를 지나갈 때에 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장이 암초가 많고 파도가 높은 바다를 향해서 나아갈 때에 졸면 그 배가 어떻게 될 것입니까?
우리가 지나가는 시대는 이보다 더 위험한 시대입니다. 드로아에서 사도 바울이 밤에 예배를 볼 때에 유두고라고 하는 청년은 문턱에 앉아서 졸다가 그만 상층 문턱 위보다도 더 위험한 자리라고 하는 것을 각성해야 될 것입니다.
「깨라」라고 하는 말은「근신하라」고 하는 뜻입니다.「사방을 살펴 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속지 말라」고 하는 뜻입니다.「시험에 들지 말라」고 하는 뜻도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五장 八절에『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사도는 베드로 후서 二장 一절에『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를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위하는 자들이라』하고 기록했습니다. 거짓 스승, 이단과 사교에 속지 말고 믿음의 바른 길을 옳게 걸어가라고 하는 말입니다.「깨라」고 하는 말은「깨어서 기도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하시기를『깨어 열심히 기도하여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말씀하신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사사 사무엘은 일찍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내가 어찌 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음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할 수가 있겠느냐.』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자기가 기도하지 아니하는 것을 큰 범죄로 생각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민족적 대 수난기에 처해서 우리 믿는 사람은 문자 그대로 민족의 제사장이 되어서 이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민족 각자 하나 하나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며, 또 하나님께서 징계의 채찍을 이 민족의 머리 위에서 거두어 주시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서 위대한 지도자 모세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같이 신임을 받을 수 있는 귀한 지도자들을 보내서 이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살기 위하여 기도할 수밖에 없고, 내 민족과 내 나라가 살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는 말씀이올시다.
그리고「깨라」고 하는 말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자기의 의무를 수행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전에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았지마는 그 사명일 잊어버리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잠만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와 같은 사자가 없습니까? 책임을 맡기는 맡았지마는 무슨 책임을 맡았는지도 알지 못하고 잠자는 이는 없습니까? 집사의 책임을 맡기는 맡았지마는 무슨 책임을 맡았는지도 알지 못하고 잠자는 이는 없습니까? 집사의 책임을 맡고 권찰의 책임을 맡고 반사의 책임을 맡았지마는, 잠자는 이는 없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파수꾼의 책임을 맡았지마는 잠자는 이는 없습니까? 우리가 잠자면 이 민족과 국가를 누가 파수할 것입니까?
여러분, 요즈음 신문지상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소위「四대 의혹 사건」의 처리를 놓고 여론이 분분한 가운데 있습니다. 과연 민주주의가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잇느냐 업느냐, 이 민족이 과연 정의와 법 아래에서의 만인평등의 정치를 할 수 잇느냐 업느냐, 이런 정치적 분위기 하에서 공명선거는 가능할 것이며 민정 이양이 사실 민정에 이양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이름만의 이양이 될 것인가?
이와 같은 심각한 문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식량난으로 굶주리는 대중을 우리가 앞에 놓고 잠을 자고 있으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주인인 우리는 이런 정세 하에서 깨어서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모든 하는 일을 감시하며, 내가 어떤 직장에 있든지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아니하면 이 민족과 국가를 바로 건질 수가 없지 않겠는가, 염려해야 할 때가 아닙니까?
어떤 이들은 잠자다가 꿈꾸면서 걸어다니는 사람도 더러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다가 잠자게 되면 큰일입니다. 꿈꾸다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행히 그런 사람은 적지마는, 정신적 견지에서 볼 때 자면서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걸어다니기는 하지마는 그의 영적 형편을 보면 아직도 잠에서 깨지 못하고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어떤 시대에 사는지 도 모르고, 가장으로서의 책임도 잊어버리며, 주부로서의 직책을 망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책임이 있건마는 그것도 모르고 자면서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깨라」고, 지금은 잠잘 때가 아니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제가 전에 어떤 병중에 계신 자매 님을 심방 했더니, 그 자매 님의 하시는 말씀이『나는 그저 그 동안 믿기 는 믿었지마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번 이 병에서 낫기만 하면 그저 모든 일을 열심히 하려고 꼭 작정했습니다.』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한두 번이 아니고 종종 듣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 대단히 감사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는 너무 늦게 깨어납니다. 깨기는 깨었는데 너무 늦게 깨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날 소망이 없는 분들도 많습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 하나 하나에게 말씀을 하십니다.『지금은 자다가 마땅히 깰 때라.』연기하지 말고 오늘 아침 이 시간에 깨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어두운 일을 벗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세 가지 실례를 들어서 말씀하였습니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려, 쟁투하거나 시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은 다 어두운 데 속하는 것인데 이런 어두운 옷을 벗어버리라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절제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특별히 먹는 데 절제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얼마나 적절한 교훈입니까? 쌀을 절약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쌀이 부족해도 사실 쌀을 절약할 줄 아는 이 얼마나 됩니까? 쌀이야 모자라든 말든 술을 만들어 먹어야 합니까?
절제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방면에 절제하려고 하면 소위 관혼상제 대사 때에 특별히 모은 연회를 절제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서는 약혼식을 하든지, 추도식을 하든지, 그 밖의 무슨 식이나 간소하고 절제하라고 규칙을 작정해서 발표했는데, 여러분 몇 분이나 그대로 꼭 순종하십니까? 성경에 보면 저희들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변화해서 새 마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하라고 했는데 이 세상을 따라가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없습니까?
여기 술 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떤 청년은 이런 구절을 보고 분개해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아, 성경에는 술 취하지 말라고만 했는데, 왜 교회에서는 아주 마시지 말라고 합니까?』이런 분개를 국가를 위해서 한다고 하면 누구나 다 애국자가 될 것입니다. 성경 구절을 따져 말하자고 하면 잠언 二十三장 三十一절에 보니『포도주를 보지도 말라』고 그랬습니다. 그런 구절도 있기는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주초 문제를 들고 나오면서 이것이 구원 문제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구원 문제라기보다도 절제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민족과 같은 처지에 있어서 내 나라에 먹을 것이 없어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동냥을 해 오면서 그래도 절제는 못하겠어요? 이런 어두운 것들을 벗어버리라고 경고합니다.
또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홀트 고아원」에 가 보신 분이 몇 분이나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몇 번 가보니까 그저 언제든지 어린 아기들이 四, 五백 명 있습니다. 이것은 뭐「홀트 고아원」뿐만이 아닙니다. 영아원에 가 보면 이런 불쌍한 아기들이 많아요. 그런데 이 아기들이 어떤 아기들인지 아십니까? 대부분 기아입니다. 버림을 받은 사생아들입니다.
오늘처럼 한국 사회에 사생아가 많은 때는 유사 이래에 처음으로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청년 남녀들처럼 성도덕이 타락한 새대는 일찍이 없었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이 얼마나 통탄할 사회 현상입니까?
더욱이 산아제한이라 하니까 그저 아무렇게나 놀다가 마지막에 낙태만 해버리면 그만인 줄 아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 가는 모양입니다. 우리 한국에 옛날부터 내려오던 미풍양속 가운데 하나인 정조 관념이 현대 여성가운데서 점점 약화되는 현상입니다. 생명이 얼마나 존중 하다고 하는 이 성경의 교훈도 별로 영향을 못 주는 모양입니다. 이런 청년들의 성생활의 문란(紊亂)은 결국 인격의 파탄을 가져오고, 가정의 파탄을 가져오며, 사회에 혼란을 가져오고, 각종 범죄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소돔과 고모라 성이 유황불로 멸망했는지 아십니까? 음란의 죄로 그런 멸망을 당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올시다. 옛날 사람이나 오늘날 사람이나 이 계명을 범하면 대개 합당한 보응(報應)을 반드시 받고야 맙니다.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어두운 것을 벗어 버려야 되겠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성남성녀들이 과연 성도다운 생활을 해서 빛을 비추어야 되겠습니다.
또 쟁투하거나 시기하지 말고, 화평과 단결을 힘쓰라고 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신문에 정계에 대한 만화를 그렸는데, 거리에 사람들이 많은 것을 그려 놓고는 그 아래에다『왔다 갔다, 갔다 왔다』이렇게 썼단 말입니다. 그것이 정계의 현상입니다. 이합집산(離合集散), 변태(變態)무쌍(無雙) 합니다. 그저 왔다 갔다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어떻든지 좀 뭉쳐서 한 큰 정당으로 이 민중을 지도해 주었으면 얼마나 감사할 것입니까? 정치 얘기만 아닙니다. 우리 한국의 교회가 분열되지 않고 크게 뭉쳐 주었으면, 사회에 얼마나 더 큰 소망을 주었겠습니까? 쟁투하거나 시기하지 맙시다.
그리고 셋째로는「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고 그랬습니다. 제가 전에 아프리카 어떤 나라에 가니까 거리에 나가면 아직도 단정히 옷을 입지 못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나 예배당에 가 보니까 그 교회에 나온 흑인들은 전부 다 옷을 아주 단정히 입고 왔어요. 그것을 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옷을 입을 줄 안다는 감사한 생각이었어요. 사실 옷이 귀합니다. 모든 동물가운데 옷 입고 다니는 동물은 사람밖에 없지 않습니까? 옷을 보고 사람을 압니다. 옷을 보고 군인을 알고, 학생을 알며 점잖은 사람을 알고, 천한 사람을 압니다.
요한 계시록 三장에 보면 거기 주님께서 라오디아 교회 사자에게 쓰는 말씀 가운데『너희가 부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마는 실상은 너희가 가난하고 곤고(困苦)하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 라오디아 교회 교인들 가운데 예배당에 나오기는 나오지만 벌거벗고 나온 사람들이 더러 있었던 모양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마땅히 성도가 입을 옷대로 바로 입지 못하고, 성도의 깨끗한 행실을 가지지 못하고, 예배당에만 나온다고 하는 그 말입니다. 오늘날은 이런 사람이 없습니까? 옷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옷을 입고 다닙니까? 그리스도를 옷 입듯 하라고 하는 말을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생활로써 우리 전체를 덮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제 제가 골로새 三장 十二절 이하를 읽을 때에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구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 평화, 기쁨, 찬송, 감사의 생활을 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옷을 입어야 합니다. 주일날만 입지 말고 다른 날도 입읍시다. 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옷을 어디서나 입어야 합니다. 예배당에 올 때 물론 이런 옷 입고와야 하겠지만 가정에서도 입어야 합니다. 관청에서도 입어야 합니다. 상점에서도 입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배당에 올 때에만 이런 좋은 옷을 입고 집안에 들어가서는 벗어놓은 이들이 더러 있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예수 님의 옷을 가정에서도 입어야 합니다. 이 옷을 우리는 어떤 계절에나 입어야 합니다. 겨울에도 입고, 여름에도 입어야 합니다. 또 이 옷은 누구에게나 맞습니다. 남자에게도 맞고, 여자에게도 맞고, 어른에게도 맞고, 아이에게도 맞습니다.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입니다. 누구든지, 어디서나, 어느 때에나, 항상 광명의 갑옷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여 이런 사람이 사회에 나아가게 되면 자연히 빛이 됩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 옷은 광명의 갑옷인 까닭입니다. 이런 옷을 입고야 어린양의 잔치에 참여합니다. 이 옷을 입고야 하늘 나라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때는 위기입니다. 졸지 말고 깨라고 경고합니다. 모든 어두운 것을 벗어 버려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광명의 옷을 입되 이 시간에 입기를 바랍니다.
오늘 제가 읽은 이 로마서 十三장 하반부는 특별히 우리 교회사에 가장 유명한 교부 어거스틴이 젊어서 죄악과 싸우면서 믿을까 말까 분투할 때에 이 성경 말씀을 읽는 가운데 은혜를 받아서 온전히 변화한 동기가 되어준 말씀입니다. 어두운 것을 온전히 벗어버림으로써 광명한 옷을 입은 성 어거스틴은 천여 년 동안 기독교 사상을 지배한 위대한 교부가 된 것입니다.
누가 이런 옷을 입지 아니 하리요 마는, 제가 바라는 것은 우리 청년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직까지 이 옷을 입지 못하였으면 오늘 아침 이 시간부터 어두운 것을 벗어버리고 이 옷을 입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一九六三년 六월 三十일)


Ⅴ-29 하나님의 자녀 (요한 一서 三장 一-八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三·二-三)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이 시간,『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말씀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보편적으로, 넓은 의미로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자녀라,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지음을 받았다 하는 뜻으로,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하는 뜻으로 우리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말씀하는 이「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뜻은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특수한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 복음 一장 十二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서 난 자들이라.』
다시 말하면, 우리 성경에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하는 말은 아무나 가리킨 말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를 믿는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으로 다시 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지 못한 이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본문 중 一절에 보면『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요한 복음 八장 四十四절에 보면, 주님께서 당시에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 가운데『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그렇게 말했습니다. 듣기 좀 어려운 말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못되었으면 아직도 마귀의 자녀올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문제를 생각할 때에 먼저 깊이 나 자신을 살펴서 내가 과연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내 구주로 받들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무가 무엇입니까? 이런 몇 가지 점을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원수 되었던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크신 사랑을 베풀어서 독생자를 주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 해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원수 되었던 우리를 천지를 지으신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만 왕의 왕 하나님의 아들과 딸을 삼으셨습니다.
가령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 특권을 좀 기억할 수 있겠는지요? 옛날 우리 한국에는 임금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어떤 임금께서 우리 나라 백성 가운데 가장 천한 사람, 특별히 죄 많이 지은 젊은 남녀를 사람으로써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궁중으로 불러들여서 입양을 하고 왕의 아들과 딸을 삼았다고 한다면 그 젊은 왕자와 공주가 된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임금님의 얼굴을 쳐다볼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 생각이 많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이미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죄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람이요, 사실 그리스도를 못박은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 주실 뿐더러 우리를 종으로 삼아 주셔도 감사하겠거늘 하나님의 아들과 딸을 삼아주셨습니다. 아들과 딸의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제 생각에는 천사보다 더 높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천사는 하나님 앞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자이니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으면 천사 위에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의 그 지위, 그 영광, 그 특권이 얼마나 크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압니까? 만일 우리가 이것을 깨달아 안다고 하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감격한 마음이 많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과 딸은 지위만 그렇게 높은 것이 아닙니다, 상속자입니다. 후사(後嗣) 자입니다. 영원히 하늘의 기업을 이을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그 특권을 먼저 기억해야 됩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소망이 어떠한지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기 보니 장차 어떻게 될 것이 아직 나타나지는 아니했지마는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는 우리도 그와 같이 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아직도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 앞으로 어떤 하루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때가 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사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시기에 우리가 믿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지,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왜? 우리처럼 더럽고 우리처럼 부족한 것이 그리스도와 같이 될 때가 있어요? 그러나 여기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지금 불완전하지마는, 우리가 지금 부족하지마는, 우리가 사실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하면, 우리의 신령한 현관 속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죽음이 없는 불멸의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을 때에는 그 때부터 우리 마음속에 거룩한 성품을 새로 유전으로 받았습니다. 옛날 예사 사람의 유전은 우리가 버리고, 죄 지은 아담 혈통의 유전을 우리가 다 버리고, 하나님의 새 유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성결하심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풍부한 성품이 새로운 유전으로 우리 마음가운데 와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아직 다 나타나지 아니했지마는 이 앞으로 완성될 때가 있습니다. 마치 봄 동산에 자라나는 꽃나무와 같습니다.
그 꽃나무가 처음에 풀밭에서 싹이 돋을 때야 다란 풀이나 꽃나무나 뭐 별로 다른 것 있습니까? 그저 다 비슷하지요. 그러나 그 꽃나무가 자라면 마지막에는 아름다운 꽃이 핍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이렇게 아름다운 꽃으로 필 때가 있습니다. 마치 초생달은 아주 작고 빛이 희미하지만 이것이 점점 커져서 보름달이 될 때가 있다는 그 말입니다.
구름 속에 있는 잔 빗방울이 그대로 있을 때, 무슨 빛이 납니까? 그러나 햇빛을 받을 때에는 청, 황, 적…七색의 무지개가 될 수 있어요. 우리 믿는 자의 소망이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하나님의 딸로서의 우리의 장래가 이와 같이 아름답고 이와 같이 위대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현재 의무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현재 의무가 무엇일까요? 이런 특권이 있고, 이런 소망이 있고,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현재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달이 되었으면,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대해서 동양에서 오랫동안 늘 힘써서 가르쳐 온 효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효자와 효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젊은 사람들, 여기 말하지마는 우리 부모에게 대해서 효도하는 첫 길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것은 우선 부모님의 마음 상하는 일을 안 하는 것이 효도의 첫 길입니다.
제 경험 가운데도 벌써 여러 가정에서 부모 된 사람이 자녀 때문에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왜? 그 아들과 딸이 있기는 있는데 아들과 딸이 죄를 짓습니다. 옳은 길을 가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 아버지의 좋은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하면, 우리가 제일 조심할 것이 무엇입니까? 죄를 짓지 아니해야 됩니다. 사실 요한 一서에 보면『하나님께로 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아무 죄도 안 짓는다는 말은 아니고, 계속해서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도 이 죄악 세상에서 살 때에 잠깐 잘못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어떤 것이 죄인 줄 뻔히 알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고 하면 제일 먼저 죄를 짓지 않아야 됩니다. 죄를 멀리 해야 됩니다.
또 그 다음에 효자가 되는 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래 우리 동양도덕에서 가르쳐 내려오는「양지」를 해야 됩니다. 뜻을 잘 받들어야 됩니다.『언제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라』는 뜻입니다. 제가 들으니 옛날 효자들이나 양반 가정의 자녀들은 아침저녁으로 꼭 부모에게 가서 문안을 드렸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풍속이 거의 다 없어졌지요. 아마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첫 길은 항상 부모님께 가까이 있을 것이요, 편지도 자주하고, 자주 문안하고, 안부를 항상 물어보고, 부모 가까이 에 있는 것일 거예요. 아마 그 비슷하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대해서도 효자 노릇을 하려고 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가까이 하는 것일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로, 묵상으로, 예배에 참석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뿐더러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언제든지 어디 있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고 함으로.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는 항상 하신 말씀이『내가 세상에 온 것은 내 뜻대로 이루려고 온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고, 또 우리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하면, 항상 부지런해서 부모님이 기뻐하는 일을 많이 해야지요. 좋은 사업을 많이 해야지요. 아마 그와 비슷할 것 같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좋은 효자가 되려고 하면 주의 일을 많이 해야지요. 아무리 잘난 아들과 딸이 있다고 할지라도 게을러서 일하지 않는 자녀를 두었으면, 그것이야말로 민망한 노릇이지요. 부지런해서 주의 일을 열심히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또 그리고 자식은 아무래도 부모를 닮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하면, 부모를 닮아야 합니다. 부모의 성품을 닮아야지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고 화평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떻든지 사랑과 화평의 성품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닮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도 산상보훈에 말씀하실 때에『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겠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좋은 아들과 딸이 되려고 하면 믿는 형제와 형제, 자매와 자매, 동포와 동포 사이에 사랑과 화평의 생활을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귀하고 훌륭한 아들과 딸이 되려고 하면 혹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에 그 징계를 바로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잠언 三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며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사랑하는 이들을 채찍질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시기를『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지 아니하신다고 할 것이면 우리는 사생 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 참 다들은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이 징계를 받을 때에 기쁜 마음으로 받을 줄 알아야 참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될 것입니다. 제가 옛날 어떤 친구를 한 번 찾아가 보니까 책상에다 시계를 놓기는 놓았는데 엎어놓았어요. 그래서 시간을 보려면 제켜서 보고 다시 엎어놓는단 말입니다. 그것을 보고 내가 이상해서『그 시계를 왜 엎어놓았습니까?』하고 물어 보았어요. 그랬더니 그이가 얼른 대답하는 말이『그거 이상합니다. 이놈의 시계는 꼭 엎어놓아야 바로 갑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엎어놓을 때가 있어요 왜? 바로 가라고. 징계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말씀하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좋은 아들과 딸이 되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전적으로 그를 의지할 것입니다. 효자가 자기 아버지의 말씀을 의심할 수 있습니까? 효자가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까? 사실 세상의 부모는 요새 보니까 더러 아들과 딸을 내다 버립디다. 하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과 딸을 끝까지 그 손에 쥐고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성 프랜시스가 처음에 은혜를 받아서 그저 주님의 일만 하고, 옷도 해주면 가난한 사람에게 갖다주고 이렇게 되니까 자기 아버지는 크게 낙심하였습니다. 자기 아버지는 큰 부자요 포목상 주인이었는데 이 애가 커서 자기의 사업을 계 대할까 생각했는데 사업을 할 생각은 안하고 돌아다니면서 기도하고 주의 일만 하고 도무지 자기가 하라고 하는 일은 안 한단 말입니다. 책망해도 쓸 데 없고 때려도 쓸 데 없어요. 마지막에는 성이 나서『이놈, 내 아들 된 것을 아주 파면해 버리겠다』고 호적에서 빼어버리고 그 때 법관에게 가서 그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법관도 할 수 없이『이제는 아무개 아들이 아니라』고 호적에서 빼도록 선언을 했습니다. 그 때에 성 프랜시스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자기 입었던 옷까지 다 벗어서는 자기 옆에 계신 아버지에게 갖다 놓으면서『아버지, 이것 받으세요. 이 앞으로는 내 아버지는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부모는 혹 우리를 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성 프랜시스를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하면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모든 근심과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
더 길게 말할 시간이 없습니다. 여기 앉은 여러분이나 여기 선 저나 이렇게 다 부족하지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과 그 위신, 그 지위, 그 영광, 그 품성을 잊지 마십시다. 또 우리가 이렇게 부족하지마는 장래에 완성될 때가 있는 것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마십시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살 때에 어떻든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지 말고, 하나님을 항상 기쁘시게 하면서 사랑과 화평의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징계를 받을 때에도 기쁨으로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一九六三년 七월 七일)


Ⅴ-30 건전한 신앙생활 (골로새 二장 六-十二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二·六-七)

고린도 전서 十六장 十三절 한 절을 더 봅니다.『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믿음에 굳게 서서 강건한 신앙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나무로 말하면 뿌리를 깊이 박고, 집으로 말하면 기초를 튼튼히 닦아서 흔들리지 아니하는 강건한 신앙을 가지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이 시간 건전한 신앙생활이 어떠한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건전한 신앙에는 세 가지 요소가 구비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지적 요소,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정적 요소,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의지적인 요소, 행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 신앙의 내용은 아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시편 四十六편 十절에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 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혹은 이사야 四十장 二十八절 이하를 보면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않으시며 명철(明哲)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요한 복음 十七장 三절에는 우리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영생은 다른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이신 참 하나님을 우리가 알고 그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우리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건전 하려고 하면 이 지적인 요소가 건전해야 됩니다.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바른 종교적 지식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말씀인 성경을 주셨습니다. 성경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물론 성경은 큰 책이어서 처음에 믿는 이가 갑자기 성경을 다 연구하기가 어렸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처음 믿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수원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바른 지식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 앞이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신조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아침 예배마다 사도신경을 외웁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간단한 신조이지마는 그 가운데 우리 믿는 사람들이 무엇을 믿는지, 꼭 알아야 될 지식의 내용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제일 먼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어떠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말씀이 거기 있습니다.『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하고는 죽 내려가면서 예수는 어떠한 분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기록해서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성신을 믿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성부, 성자, 성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몸 된 거룩한 공회 곧 교회를 믿습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죄 사함을 얻는 것을 믿습니다. 몸의 부활과 영생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최소한도의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우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사도들이 믿는 신조를 간추려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무엇을 믿는지 그 신앙의 내용을 우리가 알아야 되고, 또 왜 믿는지 그 이유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반대자를 만날 때에 우리가 대답할 수가 있고, 반면에 여러 가지 미신과 사교와 그릇된 종교 사상에 유혹되지를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반드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반드시 매일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매일 읽는 것은 마치 우리가 매일 음식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 영혼의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여러분, 매일 성경을 적어도 한 장이라도 읽습니까?
그것이 첫째 필요합니다. 건전한 신앙의 기초를 닦으려면 그것이 첫째입니다. 아직 여기에 미치지 못했으면 먼저 이것부터 시작하세요.
그러나 이것만은 부족합니다. 정적 요소가 있습니다. 감정으로 느끼는 요소가 있습니다. 곧 신앙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아는 것도, 어떤 사람이 어떤 분이라고 들어서 알 수 있어요. 그것은 머리로 아는 지식이요. 우리가 그 사람을 직접 만나서 면담을 해보고 서로 이야기를 하고 교제를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우리가 체험으로 그를 압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라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들어서 머리로 먼저 알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심령이 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 하나님과 접촉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인카운트」라고 합니다. 이「인카운트」가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가 젊었을 대에 성전에서 홀로 기도하다가 말하자면 하나님을 영적으로 만났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길을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만났습니다. 혹은 성 프랜시스가, 성 다미엔이 작은 예배당 앞에서 홀로 기도하다가 거기서 그 심령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만났습니다. 사람마다 그 체험은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 의미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머리로써 아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영적으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과 면대를 해야 합니다. 만나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이와 같은 체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사도 요한 은『우리가 사귀는 것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과 그 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 생활에서 기도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이런 자리에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보면『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하였습니다. 기도를 우리 육신의 생활에 비교해 보면 호흡하는 것과 같아서 영적 세계와 교통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이 기도에 대해서, 우리가 꼭 기도를 바로 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 님께서 표준 기도를 하나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주 기도올시다. 그 기도가 간단하지마는,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꼭 그 기도대로만 항상 계속하면 아마 만족하실 것 같아요. 거기 보면 제일 먼저 아버지에 대한 기도가 있습니다.
『이름을 거룩하게 해 주세요. 나라이 임하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 이룩해 주세요.』
우리가 기도할 때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위해서 먼저 기도합니까?
그 다음에 우리의 필요한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일용할 양식, 죄 사함 ale는 것,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에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어요. 마지막으로 그 은혜를 찬송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처음에 믿을 대에 내가 기도한 줄 알지 못하면 주 기도를 잘 외워서 뜻을 철저히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이것을 외우면 우리가 이 주 기도를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하여간 우리가 이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대면하며 그에게서 사죄와 위로를 받으며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며 기도를 통해서 성신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아침에도 해야 되고 저녁에도 해야 되고 식사랄 때에도 해야 되고, 무시로 기도는 해야 됩니다. 기도를 해야 능력을 받아서 모든 유혹과 시험을 이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호흡 없는 육신생활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호흡 안하고 산다고 하면 그것은 산 사람이 아니고 죽은 사람이올시다. 우리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기는 한다고 하면서도 사실 기도하는 시간이 없으면 그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분명히 아세요. 기도해야 됩니다. 개인으로도 기도를 힘쓰고, 모여서도 기도를 힘쓰고, 가정에서 기도를 해야 되겠고, 그런 까닭으로 할 수 있으면 새벽 기도회에 나오기를 힘쓰고, 삼일 기도회에 빠지지 아니해야 되겠고, 언제든지 우리가 반드시 기도를 힘써야 되겠습니다. 기도가 없이 건전한 신앙생활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면에 나 자신을 반성해 보십시다.
그 다음에 우리의 손과 발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실천 실행하는 면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여기 본문을 볼지라도『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맞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행하라」고 하는 말은「걸어가라」고 하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쳤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말씀하기를『목숨이 없으면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에게 경고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과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이 하나님과 접촉을 하고, 이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내 생활에 일대 변혁을 가져와야 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우리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최저한도의 생활 기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열 가지 계명이올시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 기준이올시다. 최저한도의 생활 기준입니다. 거기 보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라, 무엇을 하지 말아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계명으로부터 넷째 계명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의무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다섯째 계명으로부터 열째 계명까지는 우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떠한 도덕적인 생활을 해야 될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면 제일 먼저 열 가지 계명을 꼭 배워서 이것부터 시작하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그것만은 부족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을 기초로 해서 점점 사랑과 성결과 진실과 겸손과 인내와 용기와 절제의 생활로 날마다 날마다 진보하여야 될 것입니다. 내가 사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과 접촉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주를 봉사하고 선한 사업을 하고 이 세상에 살 때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모든 일을 하도록 힘을 쓸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건전한 신앙은 이 세 가지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많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해야 됩니다. 우리의 영적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수시로 우리가 기도를 힘써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손과 발로 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건전한 신앙은 이 세 가지가 구비된 신앙이올시다. 하나만 너무 힘쓰고 다른 것을 게을리 하면 건전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마치 머리만 크고 다른 부분이 발육되지 아니한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람을「기형아」라고 합니다. 머리로 알기만 하고 기도의 체험이 없고 실행이 없는 사람은 머리만 큰 기형아입니다. 반대로 머리로 아는 것은 없고 행하는 것도 없고 단순히 기도만 힘쓰는 사람이라 하면 그 사람은 심장만 큰 사람입니다. 심장도 너무 크면 병납니다. 아는 것도 부족하고 체험도 부족하고 단순히 행하는 것만 힘쓰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손과 발만 큰 사람이올시다. 그 사람은 병신이올시다. 건전한 신앙은 이 세 가지 요소가 구비되어야 합니다. 내 신앙생활이 과연 건전한 생활인가, 혹은 기형적인 생활인가, 변태적인 생활인가를 이 표준에 의지해서 이 시간에 반성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힘쓰는 데에도 항상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 가지를 힘쓰는 가운데도 유혹이 있고 시험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됩니다. 가령 우리 신앙 생활의 지적 요소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 어떤 분이 성경을 연구하고 철학을 연구하고 신학을 연구한다고 해요. 그것은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그 방면을 연구하는 가운데 조심하지 아니하면 지식의 교만의 시험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나는 다 안다. 다른 사람은 무식하게 믿더라』지식은 교만을 가져오기 쉽습니다. 전에 바리새인처럼 우리는 율볍을 제일 잘 아는 사람들이라고 할 때 여기에 소위 정통주의가 들어오기 쉽습니다. 혹은 이와 반대로 이성적 방면의 신앙을 너무 고조하다가 잘못되면 그릇된 합리주의, 이성에 맞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기 어렵다고 하는 이런 사상, 혹은 자연주의 사상에 중독 되어서 그만 아주 신앙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연구할 때에도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를 겸해서 연구하고 항상 실천실행을 겸해서 연구해야지, 그 한 가지만 치중하다가는 이와 같은 시험에 빠질 염려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조심해야 합니다. 또는 우리 신앙의 체험이 귀하고 기도 생활이 심히 귀하지만, 이 기도 생활에도 유혹과 시험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미리 경계해야 됩니다.
여러분, 잘 아시지요? 예수 님께서 광야에서 四十일 동안 기도하실 때에 누가 먼저 찾아왔습니까? 천사보다도 사단이 먼저 찾아왔습니다. 기도할 때에 사단이 찾아와서 예수 님을 시험했습니다. 예수 님께서도 기도하실 때에 사단이 찾아왔거든 우리가 기도할 때에 사단이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지 않을 것입니까? 기도하다가 시험에 드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잘못된 길로 나가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여러 가지 그릇된 신비주의, 광신주의, 심지어 여러 가지 형태의 사교에 빠지는 사람이 없지 않아 더러 있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권면(勸勉)을 하실 때에 은밀한 가운데 기도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홀로 하나님과 접촉하라고 하였습니다. 옛날도 그렇고 오늘날도 그렇지만,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가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광고하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더 위험한 자리에 들어갑니다. 전에 바리새인들은 심지어 길거리에서 기도했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을 보라고… 요새 어떤 사람은 특별히 산에 들어가기도 하면서 나는 산에 들어가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알리면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시험에 들면 안 됩니다. 기도하다가 정신을 잃어도 안 됩니다. 정신 차리고 기도해야 됩니다.
무슨 기도하노라 하다가 이상한 것을 보았다 하는 사람도 더러 있고, 무슨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 하는 사람도 더러 있고, 방언을 한다 하는 사람도 더러 있고, 예언을 한다 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 모양이고, 예수 님이 몇 해 후에는 꼭 오신다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 모양입니다. 옛날도 있었고 오늘도 있고 언제나 그런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경계해야 됩니다. 이상한 얘기를 한다고 함부로 따라가면 안 됩니다. 언제나 기도는 자기의 교회를 중심으로 모여서 기도할 것입니다. 산에서 기도한다고 하는 이를 이리저리 따라다니다가 신앙의 길을 잘못 드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기도를 힘쓸 것이지마는, 이상한 것을 보기를 기대할 것은 아닙니다.
예수 님께서 당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이 음란하고 패역(悖逆)한 세대가 이적을 구한다』고 책망을 했습니다. 광신주의를 삼가야 합니다. 기도하다가 미치지 맙시다. 성경을 읽으며 기도를 할 것이요, 사랑의 생활을 실천하면서 기도할 것이요, 은밀히, 남이 기도하는 줄 모르게 기도 생활을 할 것이요, 모일 경우에는 자기 교회에 모여서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하는 데 시험이 있는 것을 미리 알아서 경계해야 됩니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 기도한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서 종종 탈선하는 행동이 일어나서 교계를 어지럽게 하고, 교회의 위신을 사회에 떨어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기도를 힘쓰되, 성경 적으로 기도를 힘써야 되겠습니다. 정신을 분명히 차리고 기도해야 됩니다. 시험에 들까 조심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 실행 적 방면에 있어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물론 선행이 필요합니다. 교회 봉사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도 없는 선행, 기도 없는 교회봉사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또 이와 같이 선행과 이런 방면에만 너무 치중해서 다른 방면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소위 사회복음주의 사상이라고, 지금은 별로 그런 말을 쓰지 않지만 十九세기 말엽까지는 많이 들었습니다. 사회만 잘 봉사하고 선한 행실만 하면 그만이다, 믿는 것은 아무렇게 믿어도 괜찮다고 하는 그릇된 사상에 빠져 들어가기 쉽습니다. 옳게 알고, 옳게 기도하고, 옳게 행하고, 좋은 일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이 선행에 대해서도 우리가 항상 기억할 것은 은밀한 가운데 하라고 했습니다. 네 오른손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선행과 봉사 방면에도 다른 방면에 은혜가 부족하면『나는 남보다 낫다. 나는 좋은 일을 더 많이 한다.』이와 같은 교만의 시험에 빠져서 타락하는 수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건전 하려고 하면 이 세 가지 요소를 구비해야 됩니다. 세 가지 요소를 꼭 같이 힘써야 합니다. 경경을 매일 읽고, 기도를 매일 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교회를 봉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것입니다. 어느 한 곳에 치우쳐서는 아니 됩니다. 불편불위(不偏不僞 )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신앙 생활을 하도록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언제나 자기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신앙생활을 할 때에 실수가 없습니다.
기도도 그렇고, 전도도 그렇고, 모든 선한 사업도 그렇습니다. 신앙의 기형아가 되지 마십시다. 병적 신앙을 가지지 마십시다. 변태적 신앙에 빠지지 맙시다. 길을 잃은 양이 되지 마십시다. 건전한 신앙을 가지도록 우리가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一九六三년 七월 十四일)


Ⅴ-31 백설의 복음 (이사야 一장 二-六, 十六-二十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저의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一·十八)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주홍은 매우 붉은 빛이올시다. 피 빛같이 붉다고 하는 뜻입니다. 죄는 우리의 심령을 피 빛처럼 붉게 또는 더럽게 물들입니다. 사람보기에는 깨끗하게 할 소망이 없습니다. 무엇으로 씻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죄인도 하나님께 돌아와서 회개하고 구주 예수를 믿으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아서 백설과 같이 희어집니다. 그리해서 계시록에 나타나는 모든 성도는 눈 같이 흰옷을 입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백설과 같이 흰옷을 입은 성도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온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올시다. 아무리 주홍 같이 붉은 죄인이라도 백설과 같이 되겠다고 하는 이 기쁜 소식이 성경에 있습니다. 오늘 아침 이 백설의 복음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금년 여름에 비가 많이 왔습니다. 만일 겨울 같으면 이 물방울들이 다 눈송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왜 겨울에는 눈송이가 됩니까? 그것은 물론 추운 까닭이지요. 추우면 왜 눈송이가 됩니까? 그것은 물의 성질이 그런 탓이지요. 왜 물의 성질이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까닭이올시다. 다시 말하면 눈도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데가 있어서 백설도 지으신 줄 생각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과학자들은 우리에게 말하여 줍니다. 겨울에 눈이 대지에 덮이는 것은 마치 솜이불을 땅 위에 덮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상합니다. 눈 자체는 차지마는 이 찬 눈이 땅 위에 덮임으로 그 아래는 오히려 더워진다고 합니다. 그리해서 눈 위에는 매우 추운 일기 가운데서도 눈 아래는 과히 온도가 내러가지 않아서 땅 속에 있는 많은 식물의 생명이 추운 겨울에도 보존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알래스카에 사는 에스키모 사람들이 눈으로 집을 짓고 사는 것을 보면 아무리 눈 담일지라도 속은 더워지는 모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눈은 땅속을 비옥하게 만듭니다.
이 사실은 우리 옛날 노인들도 경험으로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에 옛날 노인들이 종종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명년에는 풍년 지겠다』고 하는 말씀을 종종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눈을 주신 것도 꼭 눈이 필요하여 주신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눈의 사명은 이런 물질적인 방면에만 있는 것이 아닌 줄 생각합니다. 오히려 영적 방면에 있어서 그러한 줄 생각합니다. 백설의 영적 사명이 있습니다. 욥기 三十八장 二十二절에 하나님께서 폭풍우 중에 나타나셔서 욥에게 말씀하실 때에『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눈으로 된 곳간 속에 들어가 본 이 계십니까? 지금 무더운 때에 들어가면 서늘해서 좋을 것 같습니다. 눈 곳간 속에 들어가 보았느냐는 말은 네가 눈의 신비를 다 깨달았느냐는 뜻일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눈송이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기적이올시다. 눈송이 하나 하나가 수학적으로, 기하학적으로 완전한 구조를 가진 결정체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수백 수천의 다른 고안이 있고 또한 종류가 있습니다. 눈송이 하나 하나가 우주의 법치성(法治性), 통일성, 예술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눈송이 하나 하나가 우주의 배후에는 지혜와 영광과 능력의 창조주가 계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눈송이를 대할 때에 돌연히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작은 것까지 세밀하고 아름답고 정교하게 지으시고 이것을 보호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백설의 미의 극치는 물론 그 흰빛에 있는 줄 생각합니다. 겨울이 되어서 풀은 마르고 나뭇잎은 다 떨어져 대지는 황량(荒凉)하게 되고 만물이 소조할 때에 어느덧 흰 눈은 온 땅을 덮어서 은세계로 변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겨울에 설경(雪景)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설경을 겨울에 즐길 수 있습니다. 이 설경은 물론 아래서 볼 때에도 아름답지마는, 혹 우리 가운데 비행기 위에서 높은 산상의 설경을 보신 분들이 많을 줄 아는데, 위에서 보면 더욱 아름다운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제 경험으로는 알프스 산맥 위의 웅장한 설경을 본 적이 있고, 남미 안데스 산맥 위의 설경을 본 기억도 있고 럭키 산맥 위의 설경을 구경한 적도 있습니다.
제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언제 우리 백두산 위의 설경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위에서 이 웅장한 설경을 볼 때에 그야말로 이 땅은 땅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어 영원한 세계를 우리가 목견(目見)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백설로써 겨울에 대지를 덮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위대한 뜻이 계신 줄 생각합니다. 아마 이 세상에 제일 흰 것은 눈이겠습니다. 흰 눈은 순결과 의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천사는 언제나 흰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사도 요한 에게 나타난 우리 주님과 오 머리털이 눈 같이 희다고 기록해서 남겨 놓았습니다. 하늘의 보좌에 둘러서서『할렐루야 할렐루야』영원토록 찬송을 부르는 二十四장로들과 성남성녀들은 흰옷을 입었다고 요한 계시록에 또한 기록하여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들은 눈 같이 흰 성결한 사람이 되어라, 눈 같이 흰 성결한 생활을 하여라, 하늘 나라는 눈 같이 흰 세계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여러분 잘 아시지요? 세계의 제일 높은 산 위에는 어디나 흰 눈이 덮여 있습니다. 사실 평지는 눈이 별로 많이 안 오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익을 때에 눈 오는 가운데 무엇을 했다 하는 이야기는 아마 한 번밖에 나오지 아니합니다. 우나야라고 하는 사람이 눈 올 때에 함정에 들어가 사자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외에는 제 기억 가운데는 눈 올 때에 무슨 전쟁을 했다든지 눈이 많이 와서 어떻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별로 없습니다. 그 까닭은 성지에는 눈이 별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지에 가서도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성지 북편에 높은 헐몬산이 있습니다. 그 헐몬산 위에는 언제나 눈이 있어서 언제나 그 아름다운 백색의 관(冠)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제일 높은 산을 왜「백두산」이라고 합니까? 우리말로「흰머리 산」이라고 합니까? 눈이 있는 까닭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왜 후지산을 제일 아름다운 산이라고 항상 흠모하며 그 산을 바라보며 노래를 합니까? 후지산 꼭대기에 흰 눈이 덮인 까닭입니다. 아메리카의 럭키 산이 그렇고, 남미의 안데스 산이 그렇고, 유럽의 알프스 산이 그렇고, 또 세계에서 제일 높다고 하는 히말라야 산이 그러합니다.
흰 눈으로 덮였습니다. 만일 흰 눈으로 덮이지 아니하고 새까만 무엇으로 덮였다고 하면 그거 별로 볼 모양이 없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높은 산꼭대기마다 흰 눈으로 덮었습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위를 바라보고 위를 바라볼 때에는 영원한 성결의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아마 이렇게 한 것 같습니다.『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눈을 들어 산을 볼 때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와 같이 하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죄 사함을 받고 흰눈과 같이 순결한 마음, 깨끗한 마음, 깨끗한 사람, 깨끗한 생활을 하라고 우리에게 은연한 가운데 이 높은 산봉우리 봉우리마다 우리에게 권면하여 주는 말씀을 우리가 듣습니까?.
그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도 요한 이 요한 一서 一장 八절과 九절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라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세상에는 죄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죄는 옛날 진화되기 전에 있던 버릇이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아직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저 실수하는 것이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죄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단순히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내 죄를 깨닫고 죄가 부끄러운 것을 알아서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가서 죄를 고백하고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보혈을 흘리신 예수 님 앞에 그 죄를 내놓으면 약속하신 대로 우리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사하여 주실 뿐더러 흰눈과 같이 우리의 심령을 희게 하여 주시겠다고 여기에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본래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올시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할 수 없이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만일 그 사람들이 죄를 그대로 갚는다고 할 것이면 도무지 용서를 받을 수가 없는 그런 민족이었습니다. 사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죄를 지었다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오너라, 나와 같이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이 붉다고 하지마는 죄를 회개하고 그 죄에서 돌아서면 내가 네 죄를 용서해 주고 너희로 하여금 흰 눈보다 더 아름다운 민족을 만들겠다』고.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에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우선 쌀이 모자랍니다. 어떤 때는 물도 모자랍니다. 옷감도 부족합니다.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제일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맑은 사람이 부족합니다. 맑은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정계에도, 관청에도, 군대에도, 상점에도, 공장에도 맑은 사람이 요구됩니다. 가정에도, 사회사업 기관에도 맑은 사람이 요구됩니다. 맑은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사이 들으면『누굴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저 그 놈이 그 놈인데……』하는 말을 합니다.
『너희 죄가 비록 주홍 같을지라도 흰 눈과 같이 될 것이요.』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주홍 같이 더러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그를 믿고 회개할 때에 새로운 심령으로 창조해서 아름답고 깨끗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이 흔히 백의민족이라고, 흰 옷 입고 다니는 것을 자랑삼아 말했습니다. 물론 여름에 흰옷이 좋습니다. 그러나 흰옷으로 무슨 쓸데가 있습니까? 흰 마음의 민족,「백심(白心)의 민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백인종들은 얼굴빛이 희다고 자랑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얼굴빛만 희면 무엇합니까?「백 심령」이 되어야 하지요. 마음이 흰자가 되어야 하지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온 세계가 요구하는 것은, 이 맑은, 순결한 사람입니다. 위대한 사상, 맑은 마음, 이런 이들을 요구합니다. 일찍이 다윗은 이와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淨)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하나님께서만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백설의 복음을 받아서 백설 같은 축복을 받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一九六三년 七월 二十一)


Ⅴ-32 환난의 날과 기도 마태복음 十八장 一-八)

『환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五十·十五)

인생이 있는 곳에 환난이 있습니다. 생(生)이 있는 곳에 고(苦)가 따릅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생로병사의 인생 사고(四苦)란 말이 있습니다. 환난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입니다. 빈부귀천과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특별히 환난의 날이 있습니다. 욥은 본래 유복한 분이었지만, 뜻밖에 환난의 날이 왔던 것입니다.
요셉 같은 젊은 사람도 본래 유복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자라나던 중 뜻밖에 환난의 날이 그의 앞에 임했던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이 환난의 날은 예고 없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병은 눈썹에서 떨어진다고 하는 속담이 있습니다. 슬픈 일도 그렇고, 실패도 그렇게 예고 없이 우리 앞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를 볼 때에도 꼭 그런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가서 바로 에게 핍박을 받을 때도 환난의 날은 예고가 없었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잡혀가서 七년간 포로 생활을 하던 그 때야말로 역시 환난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 민족의 역사 속에도 환난의 날이 종종 있었습니다. 고구려 때의 수양제가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노해 오던 때, 고려 시대에는 몽고가 침략해 오던 때, 이조 때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二十세기에 들어와서 三十六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일본의 압박을 받았고, 해방은 되었지만 三八선이 생겼고, 공산당이 북한을 침략했고, 따라서 六·二五가 일어났고, 그 후에도 남한에는 거듭되는 혁명과 불안한 정국과, 더욱이 근래에 거듭되는 흉작과 자주 일어나는 천재지변, 이런 모든 것이 우리 민족을 환난의 날로 몰고 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환난의 날에 우리가 어떻게 할 것입니까?
먼저 안 할 것 몇 가지를 말씀 드립니다. 첫째로 불평과 불만을 말하지 말 것입니다. 어떤 개인이나 사회를 원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둘째로는 낙심이나 자포자기하지 말 것입니다. 셋째로는 반항하거나 오히려 더 극악(極惡)을 초래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은 사는 길이 아니고 오히려 멸망으로 나가는 길인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환난에 우리가 어떻게 하라고 하는 것을 이 본문 가운데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십니다.『환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환난 날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부른다」고 하는 말은「찾으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큰 환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부르고 찾았습니다. 성 프랜시스도 중대한 병에 걸렸을 때 이윽고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유명한 과학자요 위대한 종교가였던 파스칼 같은 이도 중상을 입고 병상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마침내 그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로욜라의 생활이 역시 그렇습니다. 요나가 탄 배가 큰 풍파가 일어날 때에 그 선장이 잠자고 있는 요나 에게 와서『잠자는 자여! 어찜이뇨?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재촉을 하였습니다. 환난의 날에 하나님을 부르고 찾아야 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환난의 날이야말로 하나님을 찾고 또 만날 만한 때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습니다.
환난의 날에 낙심치 말고, 자포자기하지 말고, 반항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부르고 찾아 만나는 가운데 살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환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고 하는 말은 한 걸음 더 나가서「기도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잡혀갔을 때에 오래 잊어버렸던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다니엘이, 에스겔이 많은 백성들과 같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환난의 날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사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않는 증거입니다. 형제도 이웃도 잘 사랑하지 못하는 증거입니다. 보통 때에도 그러하겠거든 더욱이 환난 날에 기도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큰 죄일는지, 말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고 간절히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환난 날 기도할 때에 죄를 회개하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여호와의 팔이 짧아서 능치 못한 것이 아니고 그 귀가 둔해서 너희 기도를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죄가 하나님과 너희의 사이를 막아서 너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하지 못한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경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기도할 때에도 자기의 죄와 열조의 죄를 회개하고 자복 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다니엘도 그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누구든지 환난 날에 기도할 때에 자기의 죄를 살펴서 그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간절히 기도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예수 님께서도 눅가복음 十八장에서 하신 말씀처럼, 불쌍한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불의한 재판관에게 가서 계속해서 구하고 또 구할 때에 불의한 재판관도 마지막에는 그 소원을 들어주었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택한 자들이 간절히 계속해서 기도할 때에 이루어 주시지 않겠느냐고,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계속해서 간절히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궈면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우리의 민족을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고 이 무지와 빈곤과 혼란 가운데서 구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 하리요 마는, 오늘날과 같은 환난의 날을 당해서 우리가 더욱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너를 건지리니……』하나님께서 건져주겠다고 여기에 약속하십니다. 바울이 일찍이 로마로 첫 길을 떠나갔을 때에 지중해에서 큰 풍랑이 일었습니다. 열 나흘 동안 해와 달을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 때에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어떤 저녁에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두려워 말라. 네가 정녕 가이사 앞에 설 것이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네 손에 맡긴다』하였습니다. 그대로 다 이루어지고 만 것입니다. 사무엘이 미스바의 청년 사사로서 자기의 백성을 인도할 때에 블레셋 사람, 그 강적들이 대도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크게 공포심을 가졌습니다. 사무엘은 미스바의 모든 사람들을 모아놓고 어린 양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燔祭)를 드리며 죄를 회개하고 간절히 백성들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큰 폭풍우가 일어나게 해서 블레셋 사람들의 대오가 혼란하게 되었고 이 기회를 타서 이스라엘 군인들이 나아가서 습격할 때에 이 사람들이 쫓겨서 멀리 변경 밖으로 달아나게 되었습니다.
그 변경 밖에다「에벤에셀」이라 하는 비석을 세웠으니『곧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와주셨다』하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환난 날에 구하는 자들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적은 옛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 二차 대전 때에 불란서가 독일 나치스 군대에게 패해버리고 영국에서 도와주려고 건너갔던 三十만 대군이 자기들만으로 불가능한지라 영국으로 건너오기 위해서 해협으로 도망할 때에 히틀러는 베를린에서『도망하는 영국 군인들을 아주 전멸시켜 버리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태연히 있었습니다. 그 때에 왕 죠오지 六세가 온 영국에『어떻게 하든지 영국 군대를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기도의 날을 선포하고 전 국민이 그 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상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날 독인 편에는 큰 폭풍우가 일어서 비행기 한 대도 뜰 수가 없었고 너무 비가 많이 와서 탱크 한 대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국 편에는 그 도보 해협이 어떻게 잔잔하고 고요한지 거울 같이 맑아서 수천의 배가 二十九만의 영국 군대를 무사히 영국까지 옮기게 된 것입니다. 그 일 후에 영국 군대를 비롯해서 온 영국 국민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하나님의 말씀이올시다.
이것은 또한 신령한 면에서도 그런 줄 압니다. 十八세기 초엽에 유럽에 있던 신교의 정세를 보면 대단히 암담하였습니다. 천주교의 핍박은 여전히 심했습니다. 그러나 신교도들은 작은 신학 문제로 분쟁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교회는 분열로 침체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전도니 세계 선교니 하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암흑한 때였습니다. 이 때에 진젠돌프라고 하는 젊은 백작이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믿음이 독실한 이로 은혜를 받아서 자기의 토지를 개방하고 천주교의 핍박에 쫓겨오는 피난민들을 자기 토지에 정착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수백 명이 모이게 되어 이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그만 교회를 하나 세웠습니다. 진젠돌프는 이 작은 교회의 목사가 되어 피난민들과 한 가지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이 핍박이 그치고 신교도들 가운데 분쟁이 그쳐서 어떻든지 교회가 부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달라』고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一七一四년 八월 十四일 예배를 보고 성찬식을 할 때에 큰 은혜가 내렸습니다. 하나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몸을 바치게 되었고, 이렇게 되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모라비아 교회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교회가 五, 六백 명의 피난민들이 모여서 조직되었지만, 은혜를 받은 백여 년 동안에 근 백여 명의 선교사를 세계 각국으로 파송하게 된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요한웨슬레 같은 사람이「모라비아」교회 때문에 자기도 은혜를 받고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해서 영국에는 웨슬레 운동이 일어나고 계속해서 피틀리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서 미국에까지 미치게 되어 十八세기 중엽부터 신교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十九세기는 부흥을 받은 교회가 온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선교의 세기가 된 것입니다. 베른흩이라고 하는 조그만 교회에서 피난민들이 모여 간절히 기도한 결과는 은혜를 받게 되었고 이 은혜가 세계에 퍼지게 되었고, 이 은혜가 온 세계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교회 역사와 세계역사에 큰 영향을 주게 된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난 날에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죄를 회개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이 환난이 변해서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진젠돌프와 이 피난민 몇 사람들이 환난 가운데서 기도한 그 기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계의 수억의 생명을 구원하는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대로 꼭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환난의 날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적으로 볼 때에도 민족적, 국가적으로 볼 때에도 환난의 날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환난의 날을 어떻게 지내려고 합니까? 우리가 낙심하고 자포자기하고 혹은 반항할 것입니까? 이 때야말로 하나님을 찾을 때입니다. 우리 한국의 교회도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며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이 환난 중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수 있는 교회가 되고 국가가 될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五, 六백 명밖에 모이지 않던 피난민 교회가 선교사 백 명을 외국에 보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할 때, 五, 六천 명이 모이는 우리 영락교회는 그 비율대로 한다면 선교사 천 명을 보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와 같은 때에 우리 교회가 모두 합심해서 기도함으로써 은혜를 받아 한국 국민 전체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내고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아시아와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얼마나 영광이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다니엘의 역사를 잘 아십니다.
그이는 큰 환난 날에 산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불탈 때 자기 집도 불타고 부모도 다 피살당했습니다. 이 외로운 젊은이는 외국으로 멀리 잡혀갔습니다. 외국 궁전에서 살수밖에 없던 다니엘이야말로 환난 날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불평을 하려면 얼마든지 불평을 할 수 있고 낙심을 하려면 얼마든지 낙심을 할 수 있고, 악하게 되려면 얼마든지 악하게 될 수가 있는 환경에 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환난의 날에 오직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외국 궁전에 가서 사는 몸이지만 금주를 하고, 우상의 제물로 쓴 고기를 먹지 않고, 율법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이와 같은 청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영광을 받았습니까?
외국 궁전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위대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도 다니엘과 같은 청년이 있는 줄 압니다. 이북에서 부모를 다 잃어버리고, 혹은 三八선을 넘어올 때 부모를 여의고 홀로 이 곳에 피난 와서 고아원을 전전하며 자라나면서도 하나님을 찾고 경건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점점 공부할 기회도 얻고 취직도 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모범 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건져 주십니다. 오늘날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이 변하여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一九六三년 八월 四일)


Ⅴ-33 나무와 그 열매 (마태복음 七장 十五-二十九절)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 七·十七-十九)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 아침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주간 우리 교회에서 산상 기도회로 기도원에 모였습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도 이번 기도회에 참여하신 분이 여러 분 계실 줄 생각합니다.
여러분, 기도원에 가셔서 제일 많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세요. 별 것 아닙니다. 아마 나무를 제일 많이 보았을 겝니다. 여름에 우리가 산으로 가는 것은 나무가 있는 까닭입니다.
이번 기도회에 참여하면서 사방에 우거진 나무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가를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나무를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나무로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들고, 종이를 만들고, 불을 피우고, 그 열매를 먹소,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나무에 대한 기록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창세기 一장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는, 나무를 창조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다음 에덴 동산에 대한 기록을 보면,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여러 가지 나무를 에덴 동안에 나게 하시고 그 가운데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 마지막인 요한 계시록 二十二장에 보면 거기 새 예루살렘에 대한 모사가 있는데, 중앙에 생명 강이 흐르고 그 좌우에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열 두 가지의 열매가 매 달 열리고 그 잎사귀는 만국을 소성(蘇醒)케 하더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특별히 잘 나오는 나무의 종류가 몇 가지 있습니다.
가령 솔로몬의 성전을 지을 때 사용된 레바논의 백향목, 이 나무는 지금도 많이 있고 유명합니다.
사실 레바논 나라의 국기에는 이 백향목이 그려져 있습니다. 혹은 예수 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무리들이 호산나를 부르며 흔들던 종려나무, 특별히 그 곳에는 종려 교회가 있어서 옛부터 지금까지 유명합니다. 혹은 감람나무, 포도나무, 꽃은 없지만 매우 단 열매를 우리들에게 주는 무화과나무…
성경에 보면 이런 나무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귀한 교훈을 주십니다. 가령 시편 九十八편 十二절 이하를 보면『의인의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 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전에서 흥왕 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함을 나타내리로다.』
하나님을 잘 공경하는 의인들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고,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라고, 이와 같이 노래 불렀습니다. 가령 시편 一二八편에 보면 이런 노래가 적혀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제 아내는 결실 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하나님을 잘 공경하는 기독교 가정의 축복을 이런 말로 묘사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사야 五장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한 포도나무에 비교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내가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너희가 들 포도를 맺으니 이게 웬 일이냐. 어떻게 변질이 되었느냐』고 책망하는 말씀을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 十五장에 보면,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니』라고 자기를 포도나무에 비유해서 깊은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렇게 성경은 나무를 비유해서 여러 가지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데 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교훈은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외칠 때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이제 도끼를 나무 뿌리에 놓았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반드시 찍히리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마지막 주간에 예수 님께서 베다니 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잎이 무성한 무화과를 발견하고 거기에 먹을 것이 있는가 하고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가보니 열매는 없었습니다.『지금 이후로 네가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저주를 하셨습니다. 저녁 때 가보니 과연 그 무화과는 말랐습니다.
이렇게 예수 님께서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영원히 벌을 받겠다고 하는 생생한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열매를 맺느냐 하는 비결도 가르쳐 줍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 가운데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못된 열매를 맺는다』고, 그런 까닭으로 너희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하면 먼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그르쳐 주십니다. 로마인서 二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우리는 돌 감람나무인데 참 감람나무인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물론 좋은 나무가 아니지만 참 감람나무인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하면 온전히 회개하고 중생해서 먼저 참 그리스도인, 새 사람이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단순히 사람에게 나타나는 행실만 개선하려고 하는 도의 교육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수양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중심에 성령의 역사가 있어서 새 사람으로 변화가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시냇가에 심겨져야 열매를 계속해서 맺을 것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오늘 아침에도 읽었지만,『복 있는 자는 악한 자의 의논대로 하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씀을 해 내려가다가,『이런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 한국 같은 나라는 비가 잘 오니까 별 문제가 없지만, 성지에는 비가 그렇게 많이 오지 아니합니다. 그런고로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요단강 가에만 나무가 무성한 것을 볼 수 있고 다른 먼 곳에는 누런빛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요단강 가에 심겨진 나무는 시냇가에 심겨졌으므로 간단없이 수분을 섭취하므로 언제나 잎이 청청 하고 열매는 계속해서 맺을 수 있습니다. 애굽에 가 보면 역사 나일강 변에 있는 나무가 청청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좋은 나무가 괴었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열매 맺는 나무가 되려고 하면 시냇가에 심겨져서, 다시 말하면 생명수의 근본이 되시는 그리스도와 계속 접촉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내가 내 안에 있으니 네가 내 안에 있으리라』하신 말씀과 같이 간단없이 그리스도와 접촉하며 동행할 때에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 十五장에는『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깨끗 게 하시느니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깨끗 게 한다」는 말은 「베어버린다」는 뜻이 있습니다.「전정 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좋은 열매를 많이 맺게 하기 위해서 전정을 하여 주는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서 어떤 것을, 내게는 귀하게도 여겨지지만, 잘라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환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 환난과 고통을 잘 참고 견뎌야 계속해서 열매를 더 많이 맺을 수 있다고 하는 그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육체가 가시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더 많이 맺을 수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억울하게 十二년 동안이나 오히려 감옥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그 가운데서 위대한「천로역정」이라고 하는 책을 써서 실지 전도하는 것보다 몇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열매를 더 많이 맺으려고 하면 때때로 당하는 환난이나 고통을 잘 싸워 이길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를 한 큰 하나님의 동산으로 비교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자리에 앉으신 여러분 하나 하나는 이 동산에 심겨진 과실나무올시다. 감람나무올시다. 혹은 무화과나무올시다. 우리가 과연 이 동산에 심기웠은즉, 좋은 열매를 맺습니까? 내가 과연 온전히 회개하고 중생 하여서 참된 감람나무가 되었습니까? 시냇가에 내 심령이 심겨져서 계속해서 열매를 맺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맺어야 될 열매가 무엇입니까? 물론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 줄 압니다. 갈라디아서 二十二장 二十一절 이하를 보면, 성령의 열매를 아홉 가지로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五장 九절에 보면,『빛의 열매는 모든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세 가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저 우리가 기억하기 쉽게 이 열매를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품성과 같은 품성의 열매, 온유, 겸손, 인재, 관용, 이런 품성의 열매.
둘째는 그리스도의 행실과 같은 행실의 열매, 순결, 진실, 이런 모든 행실의 열매.
셋째는 그리스도의 하신 일과 같은 일의 열매, 곧 사업의 열매, 사랑과 봉사의 열매, 간단히 말하면 이 세 가지 열매가 맺혀야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품성과 같은 아름다운 성경의 열매, 그리스도의 행실과 같은 성결한 행실의 열매,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유익한 사업을 우리도 계속해서 이 범사로 통한 열매… 그런데 이 마지막 일에 대한 열매는 제가 다시 생각해 보니, 오늘날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는 특별히 네 가지 방법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전도를 통한 생명의 열매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아십니다. 포도나무는 무엇을 맺습니까? 포도를 맺습니다. 감람나무는 무엇을 맺습니까? 감람나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맺어야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을 맺어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 나로 말미암아 또 다른 그리스도인이 하나 이상 생겨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열매입니다.
여러분!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 나로 말미암아, 내가 복음을 전파해서 그리스도인이 몇 사람이나 더 있게 되었는가를,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 사람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나도 없으면 아직도 그이는 열매를 못 맺었습니다. 이런 기회에 열매를 맺어야 되겠습니다.
둘째는 현실과 같은 한국 사회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우리는 국가의 일원이 되어서 애국의 열매를 맺어야 되겠습니다. 더욱이 오늘은 앞으로 제三 공화국을 건설할 단계에 있습니다.
민주 한국을 위협하는 것은 북한에 있는 공산당, 좌익 독재자들만은 아닙니다. 좌익은 아니고 우익이라고 할지라도 독재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이런 사람들은 민주 한국의 원수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 하나가 내가 국민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책임이 무엇인지 깨달아서 이런 때에 내 책임을 바로 해서 이 땅에 과연 하나님의 뜻을 맡는 자유와 평화가 있는 국가를 건설해야 되겠습니다.
셋째는 이와 같은 한국 현실에 있어서 우리 믿는 사람은 절제의 열매를 맺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한국 민족은 지금 먹을 것이 부족합니다. 굶주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에는 굶주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제해야 되겠습니다. 쓸데없는 것은 마시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쓸데없는 것을 피우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을 절제할 줄 알아야 좋은 열매를 맺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겠습니다.
넷째는 내 생활을 이렇게 절제해서, 우리가 아끼고 아껴서 이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봉사의 열매, 가난한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진정한 사랑과 봉사의 열매를 맺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에도 우리가 과연 참 감람나무로 되었다고 하면, 이 네 가지 열매를 실제 생활에서 맺어야 될 줄 압니다.
전도를 통한 생명의 열매, 애국의 열매, 절제의 열매, 민보(民洑)상조(相助)의 열매를 맺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사사기 九장을 보면 거기 우스운 얘기가 있습니다. 요담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리심산에 올라가서 세겜 사람들에게 연설한 것 가운데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한 번은 나무들이 다 모여서 우리도 왕을 택하지 하는 의논이 일어났습니다.
인간에게 왕이 있는 것처럼, 짐승 가운데 사자가 왕이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 나무 가운데도 왕을 택하자는 의논이 생겼습니다. 그리해서 이들이 의논한 결과 감람나무가 참 좋은 나무니, 왕이 될 만한 자격이 있은 즉, 그 감람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청원을 했습니다. 감람나무가 가만히 듣더니,『그게 무슨 알입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즐거워하는 기름을 내는 것은 그만 두고 공연히 남의 위에 올라가서 흔들거리며 요동하겠습니까? 난 그거 싫습니다.』그만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곰곰이 생각해서 무화과나무가 자격이 있으니 가서 간청해 보자고 하고 그 나무에게로 갔습니다. 무화과나무가 가만히 듣고 있더니,
『아, 내가 내는 열매로 말하면 어떻게 단지, 사람이 먹기 좋아하고 영양 있는 열매 내는 것이 내 책임인데 이 일을 그만두고 괜히 남의 위에 올라가서 흔들흔들하란 말이요? 난 그거 싫소.』
한 마디로 사양한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 또 의논하다가 포도나무가 참 좋은 나무니, 거기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권해 보자고 포도나무에게로 갔습니다. 그러나 포도나무 역시 한 마디로 거절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모두 거절을 당하고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에게 가서 그럼 당신이 왕이 되어 달라고 간청하니, 첫 마디에『아! 그거 참 좋소. 내가 왕이 되리다』하고 나섰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열매 맺는 비결이 어디 있어요?
내가 어디 있는지, 내 근본을 깨달아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은혜를 가지고 내가 맡은 일에 그리스도의 뜻대로 충성을 다할 때에 그 가운데서 열매가 자연히 맺혀지는 것입니다.
선생은 학교에서 열매를 맺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주부는 가정에서 열매를 맺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직공은 공장에서, 공무원은 관청에서, 군인은 군대에서 자기의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공연히 남의 위에 올라가서 요동하려고 하지 맙시다.
각각 자기 직장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할 때에 좋은 열매를 맺음으로써 하나님께도 영광 돌리고 우리 나라도 잘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님의 비유를 기억하시지요.
어떤 사람이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三년이나 되어 열매를 구해도 맺히지 아니합니다. 주인이 노해서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농부가 하는 말이『一년만 참아 주세요. 금년에 내가 푹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금년까지 안 맺히면 그 다음에 찍으셔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는 받았지만 여러 해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인내에도 제한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또 몇 해 전에는 열매를 잘 맺었지만 오늘에 와서는 전처럼 맺지 못하는 분은 없습니까? 그것은 그 나무가 시들어 가는 증거입니다. 생명수를 멀리 하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는 하나님께서 열매 맺기 위해서 이 하나님의 동산이 심어 놓은 과실나무올시다.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一九六三년 八월 十一일)


Ⅴ-34 인간과 그 시력 (고린도 후서 四장 七-十八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四·十八)

인간의 오관 중 눈은 가장 보배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면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옛부터 내려오는 말 중에「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 교육에서 시청각 교육에 치중하는 것도 이 까닭입니다. 우리가 단조롭게 라디오로 듣는 것보다는 텔레비전으로 보기까지 한다면 더 구체적으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말을 살펴보면 다른 감각에 대해서도 덧붙여서본다고 하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맛본다」「만져본다」등과 같이「본다」는 말을 덧붙여 쓴 것을 보면 아마도 보아야 더 분명하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인간의 시력」이라는 문제 하게 성경의 교훈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인간 생활은 그 시력 여하에 큰 관계가 있습니다. 그 까닭은 바로 볼 줄 알아야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와가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한 까닭으로 따서 먹었다고 했습니다. 외양만 보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창세기 十三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이 분가할 수밖에 없을 때에, 아브라함이 롯을 향해서 하는 말이『우리 앞에 넓은 벌이 있어 네가 동으로 가면 내가 서로 가겠고, 네가 서로 가면 나는 동으로 갈 터인데, 마음대로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롯이 눈을 들어 동편이 있는 요단 들을 바라보매 물이 많고 푸른 풀이 무성하니 그 곳을 택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푸른 풀과 물이 많은 것만 보고 그 곳에「소돔」과「고모라」성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소돔」과「고모라」성이 얼마나 악하였는지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에 큰 낭패를 본 사실을 우리가 압니다. 붉은 팥죽만 보고 장자의 명분의 가치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에 백인들이 아프리카를 처음으로 탐험할 때, 아프리카 어떤 섬에 가니 흑인들이 조개를 까면서 구슬 같은 것을 획획 집어던집니다. 이 백인이 가서 보니 그 구슬이 전부 진주였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간 장난감 하나를 흑인에게 주며 이 구슬을 모아 달라고 하니 얼른 한 주머니를 모아 왔답니다.
그것을 가지고 유럽에 가서 팔아서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아간 같은 사람은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에 의복과 금은이 탐나서 그것을 도둑질해서 감추었습니다. 그랬다가 자기 자신과 온 가족이 멸망을 당할뿐더러 온 민족에게 손해를 가져온 것입니다. 금은이 귀한 것만 보았고, 죄의 값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를 판 제자 역시 은 三十량만 보았고, 자기가「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바로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무엇을 바로 보고 바로 보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 인간 일생의 흥망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무엇을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얼른 듣기에는 모순된 말 같지만, 그러나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물질 가운데도 보이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물을 한 컵 떠 왔다고 하면 얼른 보기는 아주 맑고 정결한 물 같이 보이지만, 그 물 한 방울을 떠서 현미경으로 들어야보면 그 물 가운데 여러 가지 조그만 벌레들이 있습니다. 미균(黴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보이지 아니하는 물질을 보기 시작하기 전에는 위생을 할 줄 몰랐습니다. 물질 가운데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미균을 볼 줄 알면서부터 차츰 의학이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이 보통 물질은 다 보입니다. 그러나 이 물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는 보이지 아니합니다. 전자와 양자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기 전에는 이 물질의 속에 내재한 힘을 사람들이 사용할 줄 몰랐습니다. 보이지 않는 물질을 볼 줄 알 때부터 원자를 사용하게 되었고 원자탄까지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가까이 있는 것은 잘 보지만 먼 데 있는 것은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 데 있는 것을 내다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한국만 보면 안 됩니다. 아시아도 보고, 유럽도 보고, 전 세계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구 위에 산다고 땅 위만 보면 안 됩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눈으로 불 수 없는 광범한 세계를 신령한 눈으로 볼 줄 알아야 우리가 바로 사 f수 있을 것입니다.
한말에 대원군은 사실 그 인물로 볼 때에는 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멀리 보지 못했습니다. 세계 정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하고 쇄국정책을 씀으로써 쇠망하여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듣건 대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일본「동조」내각의「동조」를 비롯한 당시의 내각이 한 사람도 미국을 구경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무모한 일을 감행했습니다.
나만 보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도 보아야 합니다. 국내만 보면 안됩니다. 외국도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든지 겉은 자 f보이지만 그 속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겉만 보지 말고 그 속까지 보아야 합니다.
속담에『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있지요. 밖의 빛깔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속까지 보아야 합니다.
전데 어떤 아이가 들에 가서 놀다가 알록달록한 비둘기 알 같은 것을 하나 주워왔습니다. 알이 예쁜지라 며칠 두고 보았더니 거기서 독사가 나왔다고 합니다. 겉만 보면 안 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제가 들으니 한말에 매국노로 이름 높던 이완용 같은 사람도 겉은 아주 미끈하게 잘 생겼다고 합니다.
우리가 결혼 상대자를 찾을 때에도 겉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속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서양속담에『미인은 가죽만큼 두껍다』는 말이 있습니다. 겉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속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또 현재는 보이지만 장래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래까지도 미리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까 어떤 청년이 한 여자를 사랑하는데 그 여자에게 선물을 줄 것이 없어서 어떤 아파트에 가서 강도질을 해서 보석 반지를 빼앗아다가 그 여자에게 갖다 주고 인천 해수욕장에 아울러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에는 감옥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현재만 보면 안 됩니다. 내가 이 일을 하면 장래가 어떻게 될 줄도 미리 알아야 합니다. 일제 말기에 일본인들이 홍콩, 싱가폴, 말레이와 필리핀을 점령하게 되니까 이제는 온 세계가 일본의 천지가 되나 보다 하고 크게 감동을 받은 한국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 옷을 입고, 일본식 음식을 먹고, 심지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는 동방(東方)요배(遙拜)도 하고, 현재만 보았습니다.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때까지 소급할 필요도 없지요. 지난 이승만 정권 때 三·一五선거가 있은 다음 그 때에 승리한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현재만 보았습니다. 장차 올 四·一九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승리했다고 즐거워할 것이 아닙니다.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을 미리 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정계에 관계한 사람들은 장래의 역사를 미리 보고 내 행동을 조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번 가을에도 우리가 선거를 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이 선거를 앞으로 어떻게 봅니까? 과연 이번에 공명정대한 선거가 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다음에 올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미리 내다보고 우리가 선거를 바로 해야 되겠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가장 귀중한 진리를 여기 가르쳐 줍니다.
물질적 세계는 육안으로 보이지만 영적 세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도 겉 사람은 육안으로 보이지만 속 사람은 보이지 아니합니다. 속 사람, 그 영혼의 가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보이지만, 온 우주를 창조하신 천지의 대 주재 하나님 아버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로 볼 줄 알아야 우리가 삽니다. 세상 나라는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육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볼 수 없는 나라를 바로 볼 줄 알아야 우리가 삽니다.
전에 엘리사가 도단 성에 있을 때에 아람 군대가 와서 도단 성을 둘렀습니다. 엘리사의 종이 두려워서 크게 염려합니다. 그 때 엘리사가 하는 말이『과히 두려워하지 말라. 나하고 같이 있는 이가 이 아람 군대보다 더 많으니라.』『그게 무슨 말입니까?』종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 엘리사가 기도를 해서 그 종의 눈을 열게 하니, 종이 도단 성을 돌아보매 불 말과 불 수레가 온 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영광, 하늘 나라의 권세, 하늘의 신비를 우리가 볼 줄 알아야 이 세상 나라 일도 바로 합니다.
현세는 보이지만 내세를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내세를 미리 보고 살아야 바로 삽니다. 천당과 지옥이 육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미리 보아야 이 다음에 여러분이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대 심판 자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리 볼 줄 알아야 이 다음에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을 영원함이라.』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바로 보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조건 몇 가지를 말합니다. 요한 복음 三장 三절에 예수 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너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하셨습니다.
거듭 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산상보훈」의 말씀과 같이「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거듭 나서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과 그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못해요? 일월성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건만 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해요? 마음이 더러운 까닭입니다. 거듭 나지 않은 까닭입니다. 죄악이 눈을 흐리게 했습니다.
거듭 나야 합니다. 여러분! 온전히 죄를 회개하고 성경으로 거듭 났어요? 이것이 첫째입니다.
둘째는 이사야 四十장 九절에 보니『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여, 너는 놓은 산에 오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야 시야가 넓어져서 모든 것을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고상한 영적 수준에 올라야 그리스도의 도덕적 수준에서 모든 것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결과 의와 진신과 양심과 공명정대의 수준에 올라가게 될 때에 모든 것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전에 사도 바울이 회개하기 전에는 자기 육체의 모든 것이 굉장히 커 모였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베나민의 지파인데, 내가 누구만 못한가?
그러나 그가 한 번 예수를 만나고 거듭 난 후에는 전에 높고 크고 귀하게 보이던 모든 것이 분토(糞土)와 같이 되었습니다.
내가 과연 거듭 나서 내 생활이 그리스도의 도덕적 수준에 올라와 삽니까?
우리가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정직과 양심보다는 돈과 조그만 유익을 먼저 보게 됩니까? 성결과 고상한 인격보다도 정욕을 먼저 따라가게 됩니까? 내가 아직도 의리나 신의나 양심보다도 세상의 지위나 권력 같은 것을 먼저 보게 됩니까?
여러분의 영적 수준이 얼마나 높습니까?
어떤 도덕적인 수준에서 여러분이 살아갑니까? 높이 올라가야 합니다.
셋째로 히브리서 一장 七절에 보면『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한 증거처럼 아는 것은 믿음뿐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모세의 믿음을 설명할 때에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이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 같이 모든 곤난을 참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아니하는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알고 경외하면서 육신의 이 명령을 거절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육안으로는 가나안 복지가 보이지 않았으나, 멀리 믿음의 눈으로 미리 바라보고 나아간 것입니다.
믿음으로야 하나님을 봅니다. 믿음으로라야 천당에 갑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우리가 모든 것을 바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발 뿌리만 보지 말고 멀리까지를 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의 정세를 돌아볼 적에 왜 정국이 이토록 혼란합니까? 왜 사회에 죄악의 물결이 더욱 더 많아집니까?
사람들이 보이는 것만 돌아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돌아볼 줄 모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릅니다. 현재 눈앞의 영달만 보고 장래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생활을 올바로 해서 이런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一九六三년 八월 十八일)


Ⅴ-35 여호와의 눈 (잠언 十五장 一-十三절)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 十五·三)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언 五장 二十一절에는『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앞에 있나니 그가 그 모든 길을 평탄케 하시느니라.』욥기 三十四장 二十一절에는『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느니라.』시편 九十四편 九절에는『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종종『여호와께서 보시매 좋았더라』하는 구절과『여호와께서 보시매 악하였더라』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이 우리 인간을 보십니다. 감찰하십니다. 주목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이『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 하리라.』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흔히 자기가 자기 자신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인간은 거울(鏡)을 발명하였습니다. 옛날 동판이나 철판을 갈아서 거울로 사용하였습니다. 현대는 유리로 거울을 더 많이 만듭니다. 문명할수록 거울이 더 커지는 모양입니다. 미국에 가서 여관에 들어 보면 그저 방마다 문짝 같은 거울을 달아 놓은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 현대 문명은 거울의 문명이라고 합니다. 아마 그 이유는 사람마다 자기 얼굴을 보기를 좋아하고 또 보통 자기가 잘 생긴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보나, 이런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해서 할 수 있는 대로 잘 보이기 위해서 얼굴도 단장하고 좋은 옷도 입으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칭찬을 하면 기뻐하고 다른 사람이 비난하는 말을 듣게 되면 분노합니다.
그리해서 정부 당국자들도 여론을 때때로 조사합니다. 또는 국민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나 알기 위해서 정보원을 각처로 파송 합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 데 있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무리 나 스스로 잘난 줄 생각하고 아무리 세상 사람들에게 일시 칭찬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는 사람이면 오래 가지 못합니다.
옛날 바벨론 왕 벨사살은 자기 자신도 자기를 높이 보았고 모든 신하들과 국민들이 그를 역시 높이 보았습니다. 큰 나라의 제왕이요, 금은 보옥(寶玉)이 많습니다. 지위가 높습니다.
하루 저녁은 천여 명의 귀객들을 초청하고 큰 연회를 배설하였습니다. 술과 많은 음식을 만들고 예루살렘 선전에서 쓰던 그릇까지 가져다가 술을 마시며 굉장한 잔치를 배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담 벽에 이상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쓰는데『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뜻은「메네」는「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함이요,「데겔」은 왕이「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보였다」함입니다.
그 날 저녁으로 메데, 파사 연합군이 들어와서 바벨론 이라고 하는 나라는 멸망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굉장히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요컨대는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서 얼마나 중량이 잇느냐? 하나님 보시기에 그 사람을 어떻게 보시는가?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누구나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사람을 관찰하시는 여호와의 눈은 어떠한 눈입니까? 여호와는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역대 하 十六장 九절에는『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어디나 있습니다. 높은 데가 없고 깊은 데가 없습니다. 먼데가 없고 가까운 곳이 없습니다. 이 지구, 이 우주, 어디나 어느 거석이나 다 꼭 같이 하나님의 눈앞에 놓여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나 감찰하시고 언제든지 살피는 눈입니다. 졸며 쉬지 않는다고 하는 시편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졸 때도 있고 잘 때도 있으나 하나님의 눈은 졸거나 잘 때가 없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아침이나 저녁이나, 어두우나 밝으나, 흐릴 때나 개일 때나, 우리가 잘 때나 깰 때나, 일할 때나 쉴 때나, 언제든지 계속적으로 우리를 살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현재만 봅니다. 하나님의 눈은 과거도 현재와 같이 보시고 미래도 현재와 같이 보십니다. 그러기에 시편 一三九편에 있는 말씀과 같이『모태에서 내 형체가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나를 보셨습니다』그 뿐만 아닙니다. 이 다음에 우리가 죽을 것도 주의 눈은 미리 현재와 같이 보십니다.
이 주의 눈은 인간 생활의 모든 방면을 살피십니다. 사적 생활, 공적 생활, 사회 생활, 문화 생활, 직장 생활, 정치 생활, 모든 인간의 활동 상황을 살피십니다. 인간의 역사와 모든 하는 일을 살피십니다. 정치도 살피고, 선거도 살피십니다. 이 눈은 三·一五 선거를 살폈습니다. 지난 十월 十五일 선거도 살피셨습니다. 이 눈은 외면만 보는 눈은 아닙니다. 내면까지 꿰뚫어서 엑스광선처럼 보시는 누입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기름 부어서 장차 이스라엘 왕을 삼으라고 하는 명을 받고 베들레헴에 갔을 때에 키가 크고 용모가 잘 생긴 이세의 맏아들 엘리압이 왔습니다. 사무엘이 척 보니 아주 잘 생겼습니다.『아! 이 사람이 필연 왕이 될 모양이다.』기름 부을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사무엘 에게 속삭이는 말씀은『외모와 신장을 보지 말아라. 나는 이미 이 사람을 버렸노라.』하나님이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른데,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마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 사람의 행동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 행동의 배후에 숨은 동기를 보십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그 욕망, 그 사람, 그 야심, 그 상상, 그 심리의 증상, 요샛말로「콤플렉스 옵세션」(Complex Obsession)까지, 프로이드의 현대 심리학이 발전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벌써 우리 마음속 깊은 자리를 보고 계십니다.
에스겔 八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어떤 곳으로 인도했는데 보니까 큰 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벽에 조그만 구멍이 하나 있습니다. 그 구멍을 아무리 들여다보아야 잘 안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그 벽을 헐어라!』그 구멍을 크게 만들고 헐었습니다. 그 다음에 보니까 또 큰문이 닫혔습니다.『그 문을 열어라』그 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보니까 방이 하나 있는데 그 방 속에는 온갖 더러운 벌레와 더러운 짐승들과 그 방의 벽에는 모든 우상을 그려 놓았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이스라엘 장로 七十 명이 그 우상들에게 분향을 하고 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하시는 말씀이『너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일을 아느냐? 이 사람들이 입술로는 나를 섬기노라 하지마는 실상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는 더러운 것들이 많고, 실상은 우상을 섬기며 이 사람들이 내가 이것을 보지 못하는 줄 알지만 그러나 나는 이것을 보노라.』
사람의 마음을 담으로 쌓아 놓고 문으로 꼭 닫은 다음에 내 속을 누가 알겠는가 합니다. 사실이지요! 사람은 모르지요!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은 모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눈은 피할 수 없습니다. 숨길 수 없습니다. 여호와 앞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시편 기자가 一三九편에 부르짖은 바와 같이『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눈으로 하나님께서 악인을 감찰하십니다. 이런 눈으로 노아 때에 모든 사람들의 악한 생각과 행동을 감찰하시고 꼭 그대로 보응 하였습니다. 이런 눈으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감찰하시고 그대로 보응 했습니다. 이런 눈으로 아합과 이세벨을 감찰하시고 그대로 갚았습니다. 이런 눈으로 압살롬을 보시고 그대로 갚았습니다. 이것은 성경 역사만이 아닙니다.
세계 역사가 역시 그렇습니다. 이런 눈으로 무솔리니는 보았고, 이런 눈으로 히틀러를 보았고, 하나님께서 감찰하신 대로 보응 했습니다. 이런 눈으로 지금까지도 작은 무솔리니, 작은 히틀러를 감찰하시고, 또 보응 하십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일동일행은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안전에서 한다고 하는 이 사실이올시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나는 은밀한 가운데 죄를 짓지마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짓는 것입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은밀한 방안에서 죄는 지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 후에 깨달았고 시편 五十一편에 고백한 대로『주님이 시요, 내가 주님의 목전에서 이 악한 일을 하였나이다.』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짓든지 하나님의 목전에서 짓습니다. 아간이 의복과 금은을 감출 때에 은밀히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전에서 그 일을 했습니다. 유다가 은 三十량을 받을 때에 은밀히 대제사장과 단 둘이 그 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전에서 받았습니다. 작은 죄나 큰 죄나 하나님의 목전에서 행하는 악한 일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안이나 밖이나 꼭 같이 보시는 하나님인 까닭으로 우리의 악한 생각을 악한 생동과 같이 미워하십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음욕을 품으면 벌써 너희가 마음속에 간음을 행하였느니라』하였습니다.『마음가운데 누구를 미워하면 네 속에 이미 살인을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죄를 미워하시지마는 특별히 외식하는 이를 미워했습니다.『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곁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모든 죄가 가증하지마는 외식하는 죄는 두 가지 죄가 겸했습니다. 더러운 속에 있는 죄, 그것을 가리우는 거짓 죄… 그러기에 성경은『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깨끗이 할지어다.』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그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목도하십니다. 여호와의 이 눈은 공의의 눈일뿐더러 사람의 눈이요, 자비와 긍휼의 눈이요, 아버지의 눈도 되십니다.
어린 아기 모세가 나일강 변 갈대밭에 버림을 받고 외롭게 울 때에 하나님의 눈은 그 아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를 보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무고하게 압박을 받으며 말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눈이 이스라엘 백성의 곤고 한 것, 그 슬프고 억울한 것을 내려다보셨습니다. 그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나오미와 룻, 외로운 두 과부가 모압을 떠나서 베들레헴을 향해서 옵니다.
그 외로운 모습, 도와줄 사람이 없는 그 불쌍한 여인들, 하나님의 눈이 보셨습니다. 그리고 가들을 도우셨습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겨서 멀리 광야(曠野)길을 갈 때에 피곤하였습니다. 더 걸을 수 없었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다가는 피곤해서 앉아서 잠이 들었습니다. 외로운 광야 길에 피곤(疲困)히 잠든 하나님의 사자를 하나님께서는 보셨습니다. 다른 이는 볼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먹을 것과 물을 주어서 새로운 원기를 회복하게 만드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나다나엘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이미 보았다.』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마 나다나엘이 조용하고 은밀한 가운데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하던 모양입니다. 은밀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하나님은 보십니다.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은 군문(軍門)에 있는 백부장 이올시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은밀히 기도를 하고 남모르게 다른 사람을 도와줍니다. 자선사업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눈이 고넬료를 보셨습니다. 기도하는 모습과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모습을 하나님의 눈이 보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청해서 온 가정을 처음으로 구원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행하며 그를 진심으로 의지하는 이를 찾아서 그를 보호해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필요한 모든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외로운 사정을 보십니다. 우리의 배고픈 사정도 보십니다. 우리의 억울한 경지도 보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십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살펴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눈은 선한 사람을 감찰하시고 그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눈이올시다.
몇 해 전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 갔는데 옛날 천여 년 전에 지은 오랜 예배당이 있어서 구경하러 갔습니다. 거기 헬라 정통교회에 들어가면 천주교와 좀 다른 것은 천주교는 예배당 안에 마리아의 성상과 성화를 만들어 놓았지만 그러나 이 헬라 정통교회에서는 성상은 아주 폐지했습니다. 주후 八세기에 아주 폐지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화만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들어가면 천장과 담으로 여러 가지 옛날의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예배당에 들어가면 이 강대, 저 아치 맨 위에 무슨 그림이 있는고 하니 큰 눈(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그 눈입니다. 그 눈이 나를 내려다봅니다. 아마 그 뜻은 이 예배당에 들어오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눈이 너를 보신다 하는 그 뜻을 알리기 위해서 그려 붙인 모양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그 예배당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배당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십니다. 이 하나님의 눈은 성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가든지, 온 세계에 이 하나님의 눈을 피할 데가 없습니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옛날 이런 사상을 좀 깨달았던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고서에 무슨 말이 있는고 하니「신목여전」(神目如電)이란 말이 있습니다. 신의 눈이 번갯불과 같다는 말입니다. 제일 밝은 것이 번갯불 아닙니까? 하나님의 눈이 번갯불과 같이 밝게 우리들을 살피십니다.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살피시고 나를 보십니다. 내 생각과 내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거슬리는 것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눈이 여러분 하나 하나를 지금 보시고 여러분의 양심에 말씀해 주십니까? 사도 요한 은 말씀하셨습니다.『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스스로 속이지 맙시다.『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한 가운데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하나님께서 몰라서 자백하란 말 아닙니다.」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볼지어다 지금은 구원의 때요, 오늘은 구원의 날이로다.』지금 이 시간 구원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직까지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자백하지 아니하고 자고새가 알을 품고 있듯 그냥 죄를 마음 가운데 품고 있는 이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죄를 보고 계십니다. 이 시간 그 죄를 자백하고 내놓아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一九六三년 八월 二十五일)


Ⅴ-36 하나님의 동역자 (고린도 전서 三장 一-九절)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 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三·九)

고린도 교회는 본래 사도 바울이 설립하였습니다. 그 후에 아볼로라고 하는 이가 가서 그들의 신앙을 도와주었습니다. 불행히 이 교회에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파당이 생겼습니다. 어떤 이는「바울」파라, 어떤 이는「아볼로」파라, 이런 당파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면서 이런 당파심을 버리고 주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이런 말씀으로 권면합니다.『바울은 누구며 아볼로는 누구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면서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을 좀 도와서 일하는 하나님의 동역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였습니다.
고린도 후서 六장 一절에 보면 같은 사상으로 또한 권면한 말씀이 있습니다.『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주의 일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는 지금도 합니다. 전도는 단순히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또 지금도 심방을 하고 권면을 하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것은 다 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생명이 인간의 심령 속에서 자라나게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입니다. 지금의 교역자들, 지금의 우리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도와서 함께 일하는, 말하자면 동역 자들 혹은 봉사자들입니다. 그런데 조금 깊이 생각하면 전도만 그런 게 아닙니다. 농사를 짓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실상은 하나님과 동역 하는 것입니다. 인간 혼자서 도모하는 일이 사실 없습니다.
시편 一二七편 一절의 말씀을 하마 여러분 기억하시지요.『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 함이 허사로다.』의미 신장한 말씀이올시다. 혹 얼른 읽고는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하나님께서 무슨 집을 지으시나? 집이야 사람이 짓지!』물론 집이야 사람이 짓지요. 사람이 설계하고 사람이 자료를 구비하고 사람이 터를 닦고 사람이 집을 세우지요. 그러나 제 나이 과히 많지 않지만, 제 경험에도 이 성경의 말씀이 얼마나 꼭 들어맞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해방 전에 이북에 있을 때에 어떤 이들은 만주에 가고 혹은 북지(北支)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다가 신의주 근방에 큰 고루거각(高樓巨閣)을 짓는 사람들을 여러 명 보았습니다.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공산당이 들어왔습니다. 거기다가 고루거각을 수고스럽게 지어놓고도 지금 그 곳에서 사는 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집을 짓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문자 그대로 헛됩니다. 집을 짓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 하는 일인 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 함이 허사로다.』
전쟁도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과 동역 하는 일입니다. 제二차 대전을 회고해 보시지요. 그 때에 독일이 매우 강국이었습니다. 일본도 강국이었습니다. 그들은 준비를 잘하였습니다. 꼭 자기네 보기에 적당한 때에 문자 그대로 전격 전을 했습니다. 압도적으로 처음에 승리를 하였습니다. 독일도 그랬고, 일본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저 한 마디로 그 편에 하나님께서 동역 하시지 아니하신 까닭입니다.
우리가 六·二五도 회상합니다. 북한 괴뢰군들이 전쟁 준비를 잘 하였습니다. 꼭 적당한 날, 남한에서 쉬는 주일 날 아침에 문자 그대로 전격 전을 개시해서 크게 승리했습니다. 사흘 안으로 서울이 떨어졌습니다. 한 달 안으로 남한이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그 후에 다 패배해 돌아갔습니다. 왜? 그저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동역 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여러분, 유엔군이 역사상 처음으로 어떤 개체의 나라를 위해서 출전했었는데 어떻게 정식으로 한국에 파병이 되었는지 그 내용을 잘 아시지요. 안전 보장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야 되는데 이사회 가운데 소련의 대표가 있습니다. 한 사람만 거부하면 결의는 부결되는 고로 일은 틀려지고 맙니다. 그러나 마침 그 때에 다른 일에 불평을 가지고 소련 대표들이 안전 보장 이사회에 출석하지 않던 때입니다. 그러므로 정식으로 가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이 결국은 군사적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이것이 누가 한 일입니까? 그저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다 역사 하시는 일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싸움은 사람이 하지마는 승부는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하나님이 범사에 동역 하셔야 합니다.
또 기억하세요.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교회 일이나 사회 일이나, 개인의 일이나 단체 일이나 하나님과 동역 해야 그 일이 성공됩니다. 개인의 무슨 사업을 경영하는 것도 물론 사람의 머리로 생각하고, 사람이 설계를 하고, 사람이 시작을 하고, 무슨 사업이나 사람이 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역 해야 그 사업이 성공합니다.
제가 일전에 어떤 책을 보니 어떤 사람이 자기 신앙생황에 대한 간증을 했는데 그는 미국에서 음식점을 하나 경영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요리법을 잘 공부하고 그런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적당한 곳에서 개업은 했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고객이 도무지 오지를 않더랍니다. 거리에 지나가는 많은 사람 가운데 배고픈 사람도 많을 텐데 자기 집에 들어와서 점심 사 먹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주인은 초조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이유일까? 이 사람이 곰곰히 생각하다가『이거 내가 여러 가지 내 머리로 애써서 하지마는,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적구나. 내가 이 일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밖에 없다.』이렇게 생각하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를『제가 이 음식점을 시작했는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저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간절히 지시해 주시기를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성령의 감화 가운데서 일어나는 생각이『그저 어떤 고객이 오든지 네 아들이나 딸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처럼 그만한 정성을 가지고 음식을 실속 있고 맛있게 만들고 사랑으로 대접을 하라.』이런 생각이 마음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의 지도인 줄 믿고 꼭 그렇게 실행을 했더니 누구나 한 번 온 사람이면 꼭 다시 찾아옵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니까 그 음식점에 음식 먹으러 오는 사람이 줄을 지어 들어올 정도로 번창하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변 하나님께 감사를 하면서『제가 이렇게 축복을 많이 받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또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성령의 감화 가운데서 무슨 생각이 났는고 하니『그저 어떤 사람이든지 네 집에 오는 사람은 음식만 잘 대접할 것이 아니라 신령한 양식도 공급하기를 힘쓰라. 그저 여러 사람의 사정을 아는 대로 도와주고 봉사할 수 있는 대로 봉사하라.』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는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모든 고객을 대합니다. 한 번은 자기 집에 단골로 점심 식사하러 오는 어떤 판사가 들어올 때 보니까 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음식을 갖다 놓아도 무슨 생각에 깊이 잠겨서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그래 이 주인이 가서『아, 판사 님! 무슨 근심이 있으십니까? 왜 이렇게 음식을 못 잡수시지요?』물었더니 그의 대답이『이거 대단히 어려운 이혼 소송 사건이 하나 들어왔는데 이 사람들이 이혼을 하면 그 아들과 딸의 장래가 어떻게 됩니까? 이 기막힌 사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이 얼른 대답하기를『그저 해결하는 쉬운 방법이 제게는 하나가 있습니다.』『아! 그래 그것이 무슨 방법이요?』『그저 기도를 하십시오.「예수 님께서 이런 사건을 맡았다고 하면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하고 기도를 해보십시오.』 이 말을 들은 판사가 깊이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음식을 대강 먹더니, 그 이튿날 점심때가 되어서는 이 분이 얼굴에 화기가 충만해서 들어옵니다. 이 주인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아, 내가 당산 말씀한 대로 하니까 그대로 됩디다. 내가 어렸을 적에 예배당엘 더러 다녀보았지만 뭐 별로 기도를 못했었는데 이번에 그 가족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가운데 생각나는 대로 꼭 그들에게 솔직히 말했지요. 그랬더니 무사하게 해결이 다 되었지요.』
사실 재판도 공정하고 바르게 하려고 하면 하나님과 동역 해야 됩니다. 우리 나라에도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의논하면서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있는 법관들이 좀 더 많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무슨 사업이나 하나님과 동역 해야 성공합니다. 병을 치료하는 것도 그래요. 미국의 저명한 외과 의사 가운데 민게이 박사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이 분이 늘 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수술은 사람이 하지마는 병은 하나님이 고치신다.』물론 약도 사람이 주고, 수술도 사람이 하지요. 그러나 고치는 것은 하나님께서만 고치십니다.
이 분은 늘 수술하기 전에 꼭 기도를 하는데 어떻게 되어서 기도를 하게 되었느냐고 물어 보니까 지기의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하더랍니다. 그는 본래 캐나다의 어떤 가난한 농촌에서 자라면서 참 가까스로 고학을 해서 의학을 공부하고 이제 외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어렸을 적에야 물론 주일학교에 다녔지만 대학에 다니는 동안 교회에 가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의사가 된 다음에도 교회에 가는 것은 거의 다 잊어버렸습니다. 기도도 오래 안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멀리 있는 자기 동생에게서 장거리 전화가 왔습니다.
『아! 형님, 빨리 오셔야 되겠습니다. 어머니가 밭에서 일하시다가 황소에게 받혀서 중상을 입었습니다. 인사불성이 되었는데 여기 가까운데 있는 의사를 청해서 보이니까 그 이상 수술 못하겠다고 하며 살 희망이 없다고 그럽니다. 그러니 빨리 형님이 오셔야 되겠다고 형님을 부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사가 급히 비행기 세를 내서 간호원과 보조하는 의사를 데리고 특별기로 달려갔습니다. 자기 집이 워낙 시골이라 비행장에서 내려서도 여러 시간을 또 자동차로 달려서 집에 도착 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연로하신 어머니가 황소에 받혀서 중상을 입었는데 갈비뼈가 여러 개 상한 채 인사불성이 되어 누워 있었습니다.
수술을 해야 되겠습니다. 얼른 수술 준비를 하고 자기가 수술을 하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손이 자꾸 떨립니다. 아마 너무 흥분되어서 그렇겠지요. 자기가 의학을 했다고 하면 이런 때 어머니를 위해서 의술을 발휘해야 하겠는데 수술을 하려고 하니까 손이 떨려서 집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진정이 안 됩니다. 그 때에 전에 어렸을 적에 기도하던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시작하지 못하고 그 주방 의자에 앉아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얼마쯤 기도한 다음에는 마음이 진정되었습니다. 손이 떨리는 것도 다 멎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시간 걸리는 어려운 수술을 다 마치고 그 어머니가 위험한 가운데서 소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 분이 자기 신앙을 회복하고 어느 때 무슨 수술을 하든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서야 하는 그런 습관이 자기에게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 해야 됩니다. 사람의 할 부분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동역 해 주셔야 병이 낫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나, 상점에서 장사를 하는 것이나,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것이나, 관청에서 공무원 노릇 하는 것이나, 군대에서 군인 노릇 하는 것이나, 전쟁터에 나아가서 전쟁을 하는 것이나, 무엇이나 하나님과 동역 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정치도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에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그저 정치가는 권모술수에 능해야지 저렇게 너무 단순한 사람이 어떻게 정치가가 될 수 있나?』라고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더욱이 군사 혁명 이후에는 구 정치가들에게 대해서는 무슨『때가 묻었으니』『썩었으니』이런 말이 많이 돌아가고 그 다음에 또 혁명한 지 한 二년쯤 되니까『아, 새 정치가들한테도 때가 상당히 묻은 모양이야.』합니다. 아마도 요새 정치계에서 되는 일을 보고 너무 한심해서 그랬겠지요. 어떤 신문에는 심지어『이전투구(泥田鬪狗)와 같다』고 썼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진흙 밭의 개싸움』이라고, 요새 우리 한국의 정치가들의 모습이 말이 아닙니다. 이런 현상은 사실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정치는 우리 인간들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귀중한 일입니다. 왜? 한 민족, 한 국가의 운명이 정치를 바로 하고 바로 못하는 데 큰 원인이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이 정계에 나가는 사람이야말로 고상한 인격을 소유하고 덕과 신의와 의리와 도덕적 품성을 가지고 사리사욕이 없고 선공후사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나의 부족한 것을 스스로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할 줄 알아야 참된 정치가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 사울 왕은 젊어서 하나님과 동역 할 때에는 정치를 잘했습니다. 그러나 늙어가면서 마음이 교만하여지고 시기의 마음이 그 총명의 마음을 가리게 될 때에 그만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다윗도 젊었을 때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동역 할 때에는 실수가 없더니 그 후에 하나님을 멀리 하게 될 때에 많은 실수와 따라서 많은 곤난을 겪은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동역 할 때에는 실수가 없더니 그 후에 하나님을 멀리 하게 될 때에 많은 실수와 따라서 많은 곤난을 겪은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동역 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실 위대한 정치가는 하나님과 동역 했습니다.
우리는 영국의 글래드스톤이나 미국의 링컨 같은 사람을 기억합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과 같이 일하고 역사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있는 것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해야 됩니다. 우리 민족이 축복 받는 민족이 되려고 하면 이와 같은 정치인들을 보내 달라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동역 한다고 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내가 할 것을, 다시 말하면 인간의 책임을 인간이 해야 됩니다. 씨 뿌리는 것은 농부가 뿌려야 합니다. 김매는 것도 농부가 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곡식을 거저 심어 주고 잘 길러 줄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과 동역 하는 사람은 먼저 내 할 책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 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법을 바로 깨달아서 하나님의 법대로 해야 합니다. 내 법대로, 내 고집대로 할 것이 아니라, 자연계를 지으시고 자연계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자연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이 자연 법칙을 바로 깨달아서 그대로 할 때에만 과학적으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건강에도 건강에 대한 법칙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건강의 법칙을 바로 배워서 그대로 지켜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경제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경제계에 운영되는 법칙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배워서 이대로 해야 국가 경제가 바로 지도될 것입니다. 그저 국가의 권력으로 아무 것이나 될 줄 알아서는 아니 됩니다. 더욱이 인간 상호 관계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도덕의 법칙을 우리에게 제정해 주셨습니다. 사랑과 공의와 진실과 의리와 청결(淸潔)과 겸허(謙虛)와 인내의 법칙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도덕의 법을 떠나서 무슨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법을 깨달아서 이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역 하는 일입니다. 마음대로 최고 회의에서 법을 제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고 무슨 법을 제정하면 그이들은 불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이올시다. 하나님의 법을 바로 깨달아서 하나님의 법에 맞도록 국법도 제정할 줄 알아야 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바로 깨달아서 그 때 그 때 꼭 할 일을 바로 해야 합니다. 이것은 항상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가정이 축복을 받는 가정이 되려고 할지라도 우리 가정이 하나님과 동역 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과 동역 하는 가정이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미 말한 대로 첫째는 남편은 남편의 책임을 꼭 하고 아내는 아내의 책임을 꼭 가정에서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정을 안 이루었으면 모르지만, 일단 결혼을 했으면 남편은 남편의 책임을 하고 아내는 아내 노릇을 가정에서 해야 됩니다. 남편 있는 부인이 남편 없는 여자들처럼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책임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는 책임을 다하되 하나님의 법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법대로 해야 됩니다.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법을 분명히 주었습니다. 남편들은『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해서 자기 몸을 주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남편이 그 법을 지켜야 합니다.『아내들아,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법을 주었습니다. 그 법을 지켜야 합니다. 부부는 한 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한 몸에 거짓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피차에 믿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내도 남편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꼭 피차에 신임해야 됩니다. 또 피차에 진실해야 됩니다. 의처증을 가지는 것은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부증(疑夫症)을 가져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어야 합니다.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다섯째는 무슨 일을 당하든지 내 뜻대로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고 해야 됩니다. 왜 부부간에도 싸움이 나는지 압니까? 남편은 남편의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부인은 부인의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싸움이 붙는단 알입니다. 남편의 뜻대로 하려고 하지도 말고 아내의 뜻대로 하지도 말고 주님의 뜻대로 하려고 해야 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서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꼭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됩니다. 그러면 화평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역 해야 축복을 받는 가정이 됩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에 삽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우주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역 하면 문자 그대로 푸른 하늘의 뭇 별들이 우리를 도와줍니다. 우리의 하는 일을 협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거슬러 행하면 산천초목 금수들이라고 우리를 대항합니다. 망합니다. 그러기에 옛날 분들도『순천 자는 흥하고 역천(逆天)자는 망한다』고 하는 말을 남긴 것입니다. 여러분, 이조 五백 년 역사를 기억하시지요. 일시적으로 권모술수로 큰 권세를 잡았던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계도로 말미암아 결국은 자기 자신을 망치고 일족이 멸망을 당한 예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기억하세요. 무슨 일을 당하든지 우리가 이 일에 하나님과 동역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나님이 동역 할 수 없는 일은 아예 하지 말아야 됩니다. 이것은 역천의 길이요, 반란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옳다고 아니하실 일은, 동역 안 하실 일은 아무리 황금이 들어와도 세력이 높아져도 하지 말아야 됩니다. 이것은 멸망의 길입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개인의 일이나, 국가의 일이나, 무슨 일이나, 하나님과 동역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우리가 배워서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됩니다. (一九六三년 九월 八일)


Ⅴ-37 너희도 거룩하라 (베드로 전서 一장 十三-二十五절)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一·十五-十六)

이 말씀은 특별히 구약에 있는 말씀을 베드로가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구약 여러 곳에 있지마는 특별히 레위기에는 여러 번 반복되는 말씀이올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올시다. 전 성경이 이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이사야 六장에 이사야가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본 환상 가운데 스랍들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내용은 오늘 아침 우리가 찬송가 四장에서 부른 말씀과 같이『거룩하다 거룩하다 만 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 하도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약성경 제일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읽어 볼 때에 거기 하늘 나라의 광경을 보여주는 장면 중 요한계시록 四장 八절에 네 생물의 노래가 있습니다.『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이렇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올시다.
우리는 그 뜻을 다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짐작컨대 이 두 가지 뜻이 포함된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초월하신 하나님이올시다. 하나님은 우주와 인간에 내재하시지마는 또는 초월하신 신이올시다 무한하시고 절대이시며 전능하시며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이올시다. 피조물과 인간과의 구별이 있는 하나님이올시다. 그러나 또는 도덕적인 의미도 있는 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순결 무흠(無欠) 하신 하나님이올시다. 하나님의 공의는 온전한 공의올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의 흠 없는 사랑이올시다. 그의 자비와 긍휼(矜恤)과 그의 공의와 사랑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십니다.
이와 같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공경하는 그의 모든 백성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지어다.』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읽었지만 시편 二十四편에 보면『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 고. 그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虛誕)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곧 거룩해야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거룩한 생활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해야 이런 거룩한 생활에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먼저 우리가 구약에 보면 모세 五경 가운데 한 책인 레위기에는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이 어떻게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구체적 교훈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남자는 八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성인 된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또는 이 백성은 음식을 먹되 정결한 음식만 먹으라고 했습니다. 불결한 음식을 금했습니다. 가령 짐승 가운데도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만 먹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물 가운데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만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새들 가운데 독수리나 매 같이 육식하는 새를 먹을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곤충 가운데는 메뚜기 등속 이외에 다른 것은 먹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의식적인 이런 규례(規例)를 오늘날 이 시대에서 그대로 다 지킬 것은 아니지마는, 깨끗한 음식을 먹으라고 하는 그 교훈 자체는 귀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요새처럼 호열자가 유행하는 우리 한국에 있어서는 이런 교훈을 우리가 똑똑히 배우는 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육체의 생활에 있어서도 청결하게 사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여러 가지 결례의 법이 있습니다. 부인들이 아기를 해산한 후에는 처음에는 부정하니까 남자인 경우에는 三十三일 후에 결례를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여자인 경우에는 六十六일 후에 결례를 받아야 성회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문둥병에 관한 여러 가지 규례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 모든 위생적으로 가능한 규례를 작정한 것을 우리가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것만은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정결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열 가지 계명과 온갖 다른 율례(律例)를 가르친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一년에 하루씩 매년 그 때의 역서로 七월 七일은 대속죄일로 정해서 그 날만은 대제사장이 모든 백성들의 죄를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하는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먼저 수송아지를 잡아서 자기 죄를 속량하고 그 다음에 수 염소를 잡아서 모든 민족의 죄를 속량 하고, 한 염소 위에는 대제사장이 그 머리에 손을 얹고 모든 백성의 죄를 자복한 후에 멀리 광야 무인지경으로 보내서 백성의 죄가 멀리 옮겨졌다고 하는 표정을 삼은 것입니다. 이렇게 대제사장이 그 백성들을 깨끗케 하기 위해서 一년에 한 번씩 큰 제사 이외에도 개인으로서 성결한 생활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다른 제도의 제사가 있었는데 혹은 번제(燔祭), 소제(素祭), 화목제(和睦祭), 속죄제(贖罪祭), 속건제(贖愆祭) 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하면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이 거룩한 생활을 도와주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이와 같은 규율이 생겼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약시대에 보면 이 모든 것을 그대로 의식적인 부분까지 답습할 것은 아닙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 보면 이 성결한 생활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좀 더 신령하게 가르쳐 줍니다. 사실 구약의 모든 제도는 장차 올 실제의 그림자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기억하십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모든 사람에게 설교를 한 후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아서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와서『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물어 보았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대답하는 말은『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고 권면 했습니다. 여기 보면「세례를 받으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고 죄를 씻고 깨끗함을 얻으라고,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히브리 九장 十二절과 十三절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써 영원한 속죄를 이루 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신 까닭입니다.『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다시 말하면, 참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 하게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기의 피를 흘려서 단번에 만민의 죄를 대속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앞으로는 누구단지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공로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다시 제사를 반복할 필요는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 속죄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찬식이 여러 제사를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다시 짐승으로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신 것을 항상 기념하는 성찬식에 우리가 참여하는 특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서 오늘날 주를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거룩한 생활을 할 길이 있습니까? 로마서 十二장 첫 절에 사도 바울은 이 점에 대하여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사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영적 예배니라.』옛날 사람들처럼 짐승을 잡아서 번제를 그릴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너희들의 몸으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라. 오늘날 믿는 사람들의 거룩한 생활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받을 만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다른 제물과 갈라놓습니다. 무흠(無欠)한 양을 다른 것과 갈라놓습니다. 성결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마음과 몸은 이 세상의 속된 것에서 갈라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산 제사를 드리라고 하고 그 다음에 이어 하신 말씀이『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속된 것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도 요한 은『너희들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에 있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아버지의 사랑에서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고린도 후서 六장 十四절 아래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명예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이 말은 옛날의 수도사들처럼 이 사회를 떠나서 깊은 산곡에 가서 묵상만 하고 독경하고 따로 은밀한 생활을 해서 도피하는 생활을 하라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시거니와 그리스도의 생활을 보면 항상 사회에 섞였습니다. 죄인들과 교제했습니다. 얼마나 했든지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비난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그리스도의 생각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 가운데에는 그 사람과 갈라진 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자기에게 이끈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과 같이 군대에 있습니다. 관청에 있습니다. 상점에 있습니다 사업을 같이 합니다. 모든 것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그 생활 가운데 있어서 안 믿는 사람과 갈라진 데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죽은 물고기를 짠 짠물이 듭니다. 민물 위에 떠다닙니다. 그러나 산 잉어는 내리는 폭포라도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죄악 많은 속된 세상에 살지마는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속된 것을 버리고 성결된 생활을 하라고 하는 그 뜻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산 제사를 드리라고 했는데 산 제사는 문자 그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리는 전적인 헌신적 생활을 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것은 다 거룩합니다. 제물은 거룩합니다. 이 집을「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이 집을 하나님께 드린 까닭입니다. 선전에서 쓰던 기물을「성기」라고 했는데 그 그릇이 다른 것 아닙니다. 그릇을 하나님께 드린 까닭입니다. 제단은 거룩합니다. 제단은 하나님께 드린 까닭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때에 자연히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기억할 것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오직 그 목적에만 의지해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딴 목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 됩니다. 성물(聖物)에 대한 모독이 됩니다. 전에 벨사살 왕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쓰던 거룩한 기물을 가져다가 술을 부어 먹었습니다. 이것은 성기에 대한 모독이올시다. 아마 그래서인지 그 날 저녁에 벨사살이 멸망을 당했습니다. 선경에 보면, 언제나 거룩한 것을 속되게 사용할 때에는 하나님의 형벌이 따랐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 말은 우리의 있는 재주나, 우리의 있는 지식이나, 우리에게 있는 물질이나, 우리에게 있는 금전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 뜻은 내게 있는 재주나, 네게 있는 지식이나, 내게 있는 물질이나, 내게 있는 권세나, 내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꼭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내 몸을 제물로 드린 이 제물에 대한 모욕입니다. 훼방입니다. 하나님의 형벌이 미칠까 두렵습니다. 거룩한 생활을 하려고 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은혜를 받았든지 그 은혜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됩니다. 그 때에야 거룩하게 됩니다.
음악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때에 거룩한 음악이 됩니다. 예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때에 거룩한 예술이 됩니다. 거룩한 제사를 드리라고 하는 말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서 꼭 하나님의 뜻대로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쓰라고 하는 말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는데 제물 위에는 하나님이 임재(臨在) 하십니다. 뭘 하려고 제단에 제물을 드립니까? 하나님께서 거기 임재 하시는 까닭입니다. 어찌해서 어떤 무엇 때문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엘리야의 제단에 드렸던 모든 제물을 불살랐습니까?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는 증거입니다. 제물 위에는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같이 계십니다. 거룩한 물건 위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같이 하십니다. 어떤 것이나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면 그것이 거룩한 것이 됩니다.
이 집도 하나님이 임재 하시므로「성전」이라고 우리가 말합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전 가운데는 특별히「성소」와「지성소」가 있었는데 왜 이런 이름이 생기게 되었는고 하니,「성소」와「지성소」에는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임재 하여 계신 까닭입니다.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임재 해서 계신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해서 성경에 보면,『너희 몸은 성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 몸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 하실 때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왜?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렇게 될 때에는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지성소」가 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성전」이며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지성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임재 해서 계시는「지성소」가 되어야 합니다. 지성소에 더러운 생각이 들어오게 되면「지성소」를 모독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지성소라고 하는 것을 항상 우리가 마음가운데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의 생활은 거룩합니다.
우리 가정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실 때에 우리의 가정은 거룩한 가정이 됩니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실 때에 우리의 교회는 거룩한 교회가 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실 때에 우리의 마음은「지성소」가 되고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지어다.』우리가 이렇게 거룩한 생활을 하여야, 하나님 앞에 산 제사를 드리는 생활을 해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성결한 생활을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아니하고, 그 마음속에 불결한 마음을 풍어서 하나님을 떠나시게 하게 되면 하나님께 수치가 돌아갑니다.
아닌게 아니라 오늘날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때에는 제직 까지 된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좋지 않는 풍문이 돌아가서 하나님께 대하여 수치를 가져오고, 교회에 대하여 수치를 가져오는 일이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거룩해야 이 부패한 사회를 건질 수 있습니다. 속된 것을 따라가면서 사회는 건지지 못합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부패한 사회를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에스겔의 환상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 동문 밖 문지방에서 샘물이 나오더니 그 샘물이 점점 커져서는 광야로 흘러가고 마지막에는 죽음의 바다 사해에까지 흘러가서 사해가 소생해서 물고기가 많아지는 환상이 나타났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사해」처럼 썩어졌습니다. 썩어진 사회에 생수를, 거룩한 물을 부어 주어야 이 사회가 살겠습니다. 우리가 왜 거룩해야 되겠는고 하니, 우리가 거룩해야 거룩한 곳에 살 수 있습니다. 하늘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올시다. 우리가 거룩해야 이 거룩한 곳에 영원히 가서 살수가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지어다.』 (一九六三년 九월 二十九일)

Ⅴ-38 내 것이 아닌 내 몸 (고린도 전서 六장 十-二十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六·十九-二十)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은즉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일절 이올시다. 고린도는 당시 매우 음란한 도회였습니다.
그런 곳에 사는 믿는 사람들에게『특별히 음란의 죄를 삼가 하라』고 사도 바울이 간절히 권하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왜 성결한 생활을 해야 하는지의 이유를 그는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모든 죄가 몸밖에 있지만 음행은 죄가 자기 몸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둘째는 우리의 몸을 성령의 전이라고.
셋째는 너희 몸은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특별히 마지막 조건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너희 몸은 너희 것이 아니라. 그런고로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너희는 너희 사유재산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얼른 듣기에는 모순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씀이 꼭 사실입니다.
보통으로는 이렇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 반대로 내 몸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얼른 생각하면 그렇지요. 그러니 내 몸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입고, 마음대로 놀고, 마음대로 자고, 마음대로 깨고, 마음대로 내 자유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자연히 그 생활은 자기 중심주의가 됩니다. 이기주의가 됩니다. 극단의 개인주의에 빠집니다. 향락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내 몸은 내 것이니 내 생활이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국가에 어떠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여기 성경의 말씀은『너희가 너희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불행하게도 금년 여름에는 호열자까지 우리 한국에 침노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주사를 맞고 음식을 주의해 먹으라고 합니다.
만일 여기 어떤 사람이 있어서『내 몸은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할 터인데 누가 주사를 맞으라고 하고 음식을 주의해 먹으라고 하는가』하고 되는대로, 자기 멋대로 그냥 삽니다. 그러다가 그만 호열자에 걸렸습니다. 아마 걸린 다음에도『내 몸은 매 것인데 죽든지 살든지 누가 생각할 것이 있는가』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아마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관청에서 의사가 와서 진찰해 보고 호열자가 분명하다면 그 사람을 그 집에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강제로 데려다가 어떤 병원에 수용할 것입니다. 또 그 집은 아마 새끼줄로 다 둘러막아서 교통 차단을 할 것입니다. 아마 그 때에야 이 사람이『아하, 이거 내 몸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구나』하고 느낄 것입니다. 사회와도 관계가 있다고 깨달을 것입니다.
중·고등학생들이 점점 자라가면서 무슨 생각을 갖게 되는고 하니,『나는 한 사람으로 되어간다. 나는 내 것인 고로 이제부터는 내 뜻대로 모든 일을 해 나가야 한다.』이런 생각이 들어갑니다. 물론 개성의 발달을 위해서 이런 생각이 지나가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남자가 二十여 세가 되면 그는 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을 받고서야『아하, 이거 내 몸이 국가에도 무슨 관계가 있구나.』깨닫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합시다. 나라고 하는 것이 순전히 나의 것이 아니올시다. 보모와 사회와 국가의 것이요, 결혼을 했으면 남편은 아내의 것이요, 아내는 남편의 것입니다.
한 걸은 더 나가서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기 말씀에 보면 우리 몸은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무슨 뜻입니까? 우선 보편적으로 생각할 때에도 내 몸은 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습니다. 그건 무슨 말인고 하니, 나 자신이 나 자신만큼 되는 데는 대가가 지불되었습니다. 그 대가를 내가 지불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지불합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은 결국 값으로 산 것이 됩니다.
여기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한 좋은 청년이 있어요. 대학을 마치고 좋은 직장에 취직을 했어요.
자, 여러분! 이 청년이 이만한 사람이 되기까지는 그만한 대가가 지불되었습니다.
우선 부모들이 값을 많이 냈습니다. 어린 그를 기르기 위해서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먹이고 입히고 여러 가지 학비를 조달하느라고 많은 값을 지불했습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이 그 학생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도 세웠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또 그 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이 교과서도 써 주었습니다. 이렇게 여기 나 자신이 어떤 자리에 이르렀든지 그 자신이 되기까지는 많은 사람이 그를 위해서 그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자기가 아닌 남이 지불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자기 자신은 값으로 산 바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내가 무엇을 잘해서 이렇게 되었으니 내 몸은 내 것이다.』이런 생각을 하지 맙시다. 나 한 사람을 위해서 많은 사람의 희생의 대가가 지불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회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얼마 수에 선거를 하려고 합니다. 이 선거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특권이라고 하는 여러분은 좀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일제 시대에 이런 선거를 꿈이나 꿀 수 있었습니까?
오늘날 선거할 수 있는 우리의 이 특권을 가지기 위해서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대가가 지불되었는가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바로 이틀 전에 저 멀리 헤이그로부터 이 준 열사의 유해를 이 곳까지 모셔다가 수유리(水楡里)에 안장을 했습니다. 왜 그런 일을 했습니까? 벌써 그이는 우리가 나기도 전에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대가고 지불했습니다. 우리가 남산 공원에 올라가 보면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왜 그 분의 동상을 거기다 세웠습니까? 벌써 반세기 전에 우리의 민족이 자유 독립의 민족이 되기 위해서 자기 생명으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오늘날 해방된 이후에 이 남한에 대한민국이 성립된 그 배후에는 얼마나 많은 값이 지불되었는지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三·一운동 때 三十三인을 비롯해서 많은 희생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더욱이 해방된 다음에도 북한 공산당들이 이 나라를 없애려고 침노해 올 때에 수많은 우리 청년들이 생명의 값을 지불했습니다.
우리 청년 뿐 아닙니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자유 우방의 청년들이 이 나라의 자유 독립을 위해서 많은 값을 지불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오늘날 선거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선거권을 가진 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많은 값을 지불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거를 바로 해야겠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땅에 자유와 민주정치가 영원히 보존되기 위해서 투표도 바로 해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윌 몸은 우리 것이 아닌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 큰 이유를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류를 마음 가운데 두고 이 글을 쓴 줄 생각합니다.
『너희가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바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죄인인 고로 사망의 값을 받아야 할 터인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값을 주고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속량 하셨다고 하는 그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기록한 대로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었다고 하는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생명으로, 자기의 보혈로 값을 주고 우리를 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것이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그럼 누구의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입니다. 내 재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재산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깨닫고 삽니까?
그러면 그 결론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몸으로, 나 자신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몸으로, 나 자신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나를 내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것으로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나 자신을 사용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간단히 우리가 서너 가지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성결한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거룩하십니다. 주님의 손으로는 거룩해야 되겠습니다. 이 음란하고 패역한 사회에 있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일반인들의 기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신문지상에서 보시듯이 영국 사회에서 큰 추문 사건의 보도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그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영국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사회는 그보다 더한 사회입니다. 우리 사회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야 큰 문제로도 보지 않습니다. 먼저 음란하고 패역한 사회에 있어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결한 생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한 걸음 더 올라가서 고귀한 생활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사회와 민족을 위해서 봉사와 사랑의 정신으로 살아야 되겠습니다.
저의와 자유를 위해서 분투하는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사리사욕을 위해서 금욕이나 권력에 아부하지 말고 언제든지 대의에 공헌하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비겁한 마음을 버리고 민족의 자유와 민주국가의 번영을 위해서 담대히 싸울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하나님의 소유물은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되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봉사해야 되겠습니다.
게으른 생활, 나태한 생활, 불의 한 생활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끄러운 일입니다.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있고,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모든 책임을 충성되게 감당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봉사의 생활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성례 주일이올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신 이 일을 특별히 생각하는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가지의 보배로운 피를 흘려서 우리를 샀습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것이요, 국가의 것이요, 그러므로 우리 동포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은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一九六三년 十월 六일)


Ⅴ-39 세 개의 법정 (고린도 전서 三장 十八절-四장 五절_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는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는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四·三-四)

여기 판단이라고 하는 말씀이 세 번 나옵니다. 처음에는『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우리가 다 다른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습니다. 그 다음에는』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느니라』내가 나를 판단할 때도 있고 판단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우리가 다 주님께 판단을 받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 종류의 판단을 여기에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에게 받는 판단, 내가 나는 판단하는 판단(그것은 양심의 판단),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시는 판단이올시다.
우리 나라도 그렇고 세계 문명 각국이 거의 그렇지마는 재판하는 데 흔히 삼심(三審)제도가 있습니다. 지방 법원이 있고 그 위에 고등 법원이 있고 대법원이 있는 것처럼 조금 깊이 생각하면 우리를 판단하는 법정이 셋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법정이올시다. 또 하나는 양심의 법정이올시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법정이올시다. 이 세 가지 간단히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각 사람에게 깨들을 바를 말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이 인간의 법정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십시다. 누구나 이 인간의 법정에서 항상 판단 혹은 심판을 받습니다. 혹은 잘한다, 혹은 못한다. 칭찬 혹은 비난을 받습니다.
또 누구나 이 법정의 판단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내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가? 내 하는 일이 비난을 받는가?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게 되면 기뻐하고, 비난을 받게 되면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그리해서 보통 우리는 이 인간의 법정에서 좋은 판단을 받기 위해서 힘을 씁니다.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조심하고, 사람 보는데서 선행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기 일을 자랑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외식하면서 아첨까지도 하고, 선전까지도 하는 것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선거가 있을 때 잘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법정에서 받는 이 판단에 대해서 기억할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법정의 판결은, 제가 이미 설명한 세 가지 법정의 판결 가운데서 제일 정확하지 못합니다. 흔히 인간은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까닭입니다. 열 길 물의 깊이는 알 수 있어도, 한 길 사람의 속은 알기 어렵습니다. 그리해서 이 인간의 법정이란 종종 속습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영색으로써 아첨을 하고 자랑하게 되면 좌우간 일시는 속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전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심(叛心)을 속에 품고 인심을 도둑하기 위해서 모든 백성을 만날 때에 아주 겸손히 대하고, 친절하게 하고, 모든 송사를 그저 유익하게 판결해 주고 이렇게 거짓으로 자기를 나타낼 때에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청년들이 압살롬을 따랐습니다. 잘하는 줄 알고…. 그러다가 마지막에 반역이 일어났고, 마지막에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하나님의 판단이 내릴 때에 압살롬과 같이 멸망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또 이 인간의 법정은 그 법정 자체가 인간들의 구성이기 때문에 편견과 지방 심과 당파심과 여러 가지 죄악에 빠져서 판단을 그릇 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해서 옛날 헬라 법정에서는 소크라테스 같은 유명하고 귀한 철학자에게 독배를 내리 우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빌라도의 법정은 살인 강도는 놓아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 자체의 결함이 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 셋째는 이 인간의 법정은 그저 인간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변합니다. 인심은 조석 변으로, 사람에게 대해서 판단을 할 때에도 어떤 때에는 칭찬하고 어떤 때에는 비난하고 언제 그 마음이 변할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여기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인간의 법정의 판단에 대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어떤 판단을 받든지 이것은 매우 작은 일입니다. 과히 큰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칭찬을 받아도 과히 기뻐하지 마십시다. 좋은 판결을 받으려고 과히 신경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나 자신이 오히려 그렇게 하다가는 여러 가지 외식과 위선과 아첨에 빠질 염려가 있습니다. 또 반면에 이 법정에서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과히 섭섭히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위에 있는 법정에서 우리가 어떤 판결을 받는가 그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법정 판단에서 가급적 독립 생활을 하고 인간의 의견과 비평의 종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주위에서 오는 여러 가지 좋은 의견은 배울 것이고 다른 사람이 나의 허물을 지적할 때에는 그것을 고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이란 작은 일인데 그보다 더 큰 일을 위의 법정에서 어떤 판단을 받는가 하는 것임을 우리가 기억하고 인간의 법정의 판단에 대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위에 있는 법정, 양심의 법정에 대해서 잠깐 생각하십시다. 우리는 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비판을 받습니다. 내가 나에게 판단을 받습니다. 곧 양심이 우리를 판단하여 줍니다. 보통으로 이 법정의 판단은 이미 말한 인간의 법정의 판단보다는 실수가 좀 적습니다. 그것은 양심은 우리 속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속이지 못합니다. 요한 복음 八장에 나타나는 기록을 우리는 잘 기억합니다. 예수 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가르치실 때에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자를 바리새인들이 끌고 와서 예수 님께 질문을 합니다.『이런 여자는 모세의 법에 의지하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때에 주님께서는 얼른 대답지 아니하시고 조금 계시다가 조용히 그 사람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은 먼저 돌을 들어 이 여자에게 던지라.』그리고는 다시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땅을 보면서 무슨 글씨를 쓰고 계셨습니다. 그 동안에 이렇게 아우성을 치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한 사람 두 사람 다 그곳을 떠나고 여자 혼자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일 사람들을 이 성전 뜰에서 쫓아내었습니까? 누가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이들은 단순히 자기 양심에게 판단을 받고 양심의 가책에 못 이겨 그 곳을 떠난 것뿐입니다. 양심의 판단이 있습니다. 이 양심의 판단은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양심의 법정의 판단에 대해서도 기억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법정의 판단도 항상 정확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양심이 타락되고 왜곡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남 침은 언제든지 남쪽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마는, 그 옆에 큰 쇠뭉치가 가까이 오게 되면 쇠뭉치 있는 데로 그 바늘이 기울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양심의 바늘도 본래 옳은 것을 지향하게 만들어졌건마는 강한 물질의 욕심이 가까이 오게 될 때에 그 영향을 받아서 양심이 왜곡되는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옛날부터 우리 한국에 내려오는 말 가운데『황금은 흑사심』이란 말이 있습니다. 누런 그이 선비의 마음을 새까맣게 만든다고, 그 마음은 양심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강한 물욕뿐이 아닙니다. 강한 권세욕, 강한 정욕, 간한 지위욕(地位慾), 강한 명예욕, 어떤 욕망이든지 강하게 부딪칠 때에 이 양심의 바늘이 잘못 가리키고, 심지어 왜곡이 되고, 전도(顚倒)가 될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상을 우리가 주목해 볼 때에 이 사실을 우리는 목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양심이 이렇게 귀하지마는 우리가 양심의 명령을 한 번 거역하고, 두 번 거역하고, 세 번 거역하고, 계속해서 양심의 명령을 여러 번 거역하면 그 다음에 양심이 둔해져서 판단을 내리지 않고, 무슨 말도 하지 아니하고, 잠잠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화인 맞은 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단단해져서 찬 것이 와도 찬 줄을 모르고 더운 것이 닿아도 더울 줄을 모르게 되는 이런 양심이 되고 맙니다.
그리해서 옛날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아마 그들의 양심에는 거리낌이 없이 그 악한 일을 했을 것입니다. 여기 히틀러나 아이히만 같은 사람들이 유대사람 육六백만을 학살할 때에 자기 양심에 가책을 강하게 받았던들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혹은 전도가 되어서 양심의 가책이 없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독재자들이 악한 일을 할 때에, 모든 과격분자들이 악한 일을 할 때에 그들의 양심이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양심의 가책이 없이 불의 한 일을 자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양심의 판단에 대해서도 기억할 것이 한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양심이 언제든지 우리에게 부결의 판결을 내려 이것을 하지 말아라 할 때에는 언제든지 우리가 절대로 순복 해야 됩니다. 양심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거슬러 하면 아니 됩니다. 언제나 부결의 판단에 있어서는 양심의 판단이 옳습니다. 그러나 양심이 이런 말도 안하고 저런 말도 안하고, 묵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우리가 조심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의 하는 말을 들어보면『내 양심은 괜찮으니 하겠다』고 말합니다. 심히 위험한 말입니다. 그 양심이 화인 맞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양심이 왜곡되고 전도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양심이 가만히 있거나 묵인하는 이와 같은 경우를 당하게 될 때에는 세밀히 살필뿐더러 양심의 판단을 기다리지 말고 한 걸음 올라가서 위의 판단, 주님의 판단을 기다려서 우리가 무슨 일을 작정할 때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주님의 공판정(公判廷)에 대해서 잠깐 생각하십시다. 하나님의 법정이 있습니다. 이 우주의 공의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공판정이 있습니다. 이것은 최고 법정이올시다. 이 법정의 판결은 정확무오(正確無誤)합니다. 하나님은 겉만 보지 아니하시고 속까지 보시는 까닭입니다.『사람은 외모로 판단하나, 나는 중심을 보노라.』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행동만 보고 판단하나, 하나님께서는 그 동기까지 보시고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조용한 눈이 언제든지 우리를 감시하고 우리를 판단하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의 법정에서 하는 말만 듣고 살다가는 잘못 살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의 이야기를 잘 아십니다. 다윗 왕이 밧세바와 간음을 했습니다. 그 죄를 가리기 위해서 자기에게는 충복이며 밧세바에게는 남편이 되는 우리야를 전장 최전선에 내보내서 억울하게 죽게 만들었습니다. 살인죄까지 범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니 인간의 법정에서는 아무도 이렇다 저렇다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 그 다음에도 태연자약하게 그냥 있었던 것을 보니 그 때에 다윗의 양심이 이 점에 있어서 화인을 맞아서 이렇다 저렇다 양심의 강한 가책을 받지 않은 것이 또 사실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어요? 하나님의 사람 나단을 다윗에게 보냈습니다.
『내가 오늘 대왕에게 하나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 동네에 두 집이 있습니다. 한 집은 큰 부자요 다른 한 집은 대단히 가난한 집이올시다. 이 부자 집에는 소도 많고 약대도 많고 양도 많고 재산도 수없이 많습니다. 이 가난한 집에는 재산이라고는 도무지 없고 어린 양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가난한 사람이 어린 양 하나를 극진히 사랑합니다. 그저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삽니다. 그런데 이 부잣집에 한 번은 손님이 왔습니다. 이 부자가 자기네 많은 재산은 그냥 뒤두고 가난한 사람의 어린 양 하나 있던 것을 빼앗아다가 이 양을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다윗이 노해서『이런 사람이 우리 나라에 있을 수가 있겠는가? 당장 형벌을 해야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나단이 손으로 다윗을 가리키면서『당신이 그 사람이올시다.』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판단이요, 이것은 주님의 판단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야 다윗이『제가 과연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을 한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판단을 이 세상에도 내리시고 개인 개인에게도 내리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이 말씀을 통해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판단을 우리에게 내려 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내 양심이 분명히 가르쳐 주지 않을 때에 성경을 보면,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고, 간음은 간음이라고 하고, 불의는 불의라고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가 옳게 살도록 힘을 써야 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재에만 이렇게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다음에 큰 판단이 있다고 하는 것을, 최후 판단이 있다고 하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제가 이제 요한계시록 二十장 十一절 이하를 읽을 때에 들어만 보세요.『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無論大小)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으니 곧 생명 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 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이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지 생명 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이 최후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 날에 가서는 우리가 무슨 굉장히 기록된 것, 무슨 사진 난 것,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비 세워준 것, 이 따위들은 다 쓸데가 없습니다. 마지막 불에 다 타버릴 것입니다.
인간 법정의 판결은 쓱 데가 없습니다. 양심의 법정의 판결 받은 것도 문제가 안 됩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서『착하고 진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큰 일로 맡기리라. 들어와 너를 위하여 준비한 상을 받아라.』 이 말씀을 우리가 듣게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의 전적 생활, 사, 언, 행,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있어서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교인으로서 또는 국민으로서나, 모든 일을 주의 법정에서 옳은 판결을 받도록 행해야겠습니다. 우리가 국가에 대하여 국민의 의무를 하는 것도 주의 법정 아래 옳은 판결을 받으리만큼,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되겠습니다. 이번에 선거를 할 때에 투표를 하는 것도 주의 눈앞에서 투표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소흘히 투표를 할 수 없습니다. 태만히 투표를 할 수 없습니다. 기권해서는 절대로 아니 됩니다.
우리는 각 후보자들의 인격과 사상과 신용의 정도와 학식과 역량과 그들의 과거와 현재의 사상과 생활을 자세히 살펴서 신중히 하나님 앞에서 옳은 판단 아래서 투표를 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감시하시는 것을 깨닫고 온 우주의 공의, 인간의 역사의 공의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공판 정에서 옳은 생활을 하도록 우리가 힘써야 될 것입니다. (一九六三년 十월 十三일)


Ⅴ-40 마음에 숨은 사람 (베드로 전서 三장 一-十二절)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전한 심령에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三·四)

오늘 아침은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주신 교훈을 읽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三장에서 먼저 모든 아내 된 사람들에게 그 행동을 아름답게 하라고 권면 하십니다. 또 모든 남편 된 사람들에게 아내는 더욱 연약한 그릇인 것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잘 도우라고 권면 했습니다. 또 일반 교우들에게는 피차에 불쌍히 여기며 긍휼(矜恤)이 여기고 악을 악으로 갚거나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피차에 복을 빌면서 살라고 권면 하십니다.
특별히 아내 된 사람들에게 권면 하신 것을 우리가 주의해서 보면 혹 믿지 않는 남편이 있을지라도 감화를 받으리만큼 모든 행동을 조심해서 순종하는 것이나 경외하는 것이나 정결한 것에 주의를 다함으로 아름답게 하라고 권면 하셨습니다.『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전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특별히 여자들의 그 단장에 대해서 여기 권면 하셨습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여자들에게는 이 단장이 문제되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이사야 三장 十七절 이하를 읽어보면 거기 이사야 선지자가 옛날 이사야 시대에 예루살렘에 있는 여자들이 어떻게 단장하였는지를 기록한 글귀가 있습니다.『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 합과 호신 부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 주머니와 손거울과 세마 포 옷과 머리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이것을 읽어보면 그 때 이사야 때에도 예루살렘에 살던 여자들이 얼마나 단장을 했는지 우리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도 베드로의 편지가 기록된 신약시대, 헬라와 로마시대에 있어서 여자들이 어떻게 단장하였는가는 성경 외의 일반 문헌 가운데도 종종 나옵니다. 그 어떤 글에 보면 여자들이 머리 단장하는 데에도 얼마나 종류가 많은지 마치 꿀벌 통의 벌처럼 많더라고 한 기록도 있습니다. 또 머리를 염색하는 것이 한국에는 요 근래에 생긴 것 같으나, 헬라와 로마에는 그 당시에 벌써 여자들이 머리를 염색했다고 합니다.
이런 때에 베드로 사도는 모든 믿는 여자들에게 특별히 권면 하였습니다.『외모에 치우치지 말고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전한 심령으로 단장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썩지 아니할 것으로 불변의 단장을 하라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교훈은 먼저 여기 앉으신 우리 부인들에게 적절한 교훈인 줄 생각합니다. 특별히 한국과 같이 가난한 나라에서 부인들이 너무 외모의 단장에 치우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뉴욕이나 파리의 여자들이 한다고 그냥 그대로 받아서 하려는 생각은 하지 맙시다. 우리가 항상 기억할 것은, 이런 것에 치우치는 것도 허영심의 발로입니다. 둘째는 열등감의 소치입니다. 어딘가 부족한 것을 보충하려는 심정의 발로입니다. 둘째는 이런 데 치우치는 사람들이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자도 베드로는『거울 앞에 서서 네 옷차림과 얼굴만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에 숨은 사람이 어떠한가 보라』,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하라고 우리에게 권면 하십니다. 그러나 이 시간 제가 단순히 이 외모의 단장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숨은 사람을 바로 단장하라고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마음에 숨은 사람이 각각 있습니다. 마음에 숨은 사람이 어떠합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스티븐슨이라고 하는 이가 쓴 유명한 소설 가운데「지킬 박사와 하이드」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지킬 박사는 유명한 과학자로서 아주 점잖은 분이올시다. 자선사업도 하는 신사올시다. 그러나 그 박사의 마음속에는 숨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하이드라고 했습니다. 하이드란 말은 영어로 숨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 하이드라는 사람이 그 사람가운데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이 박사로 나타나지만 날이 어두워지면 이 숨은 사람은 하나인데, 겉은 이렇게 점잖은 신사요 박사인데, 그의 마음속에 숨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보통으로 자기 자신도 자기 마음속에 숨은 사람을 모릅니다.
여러분! 다윗의 생활을 한 번 기억해 보십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좋은 아이였습니다. 착실한 목동으로 자라서 훌륭한 군인이 되었습니다. 좋은 정치가로서 칭송을 받던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마음에도 음행하고, 억울하게 우리야를 죽인 숨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 다윗이 젊었을 때에 그의 마음속에 그런 숨은 사람이 있을 줄 생각 못했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생활을 보아도 역시 그렇습니다. 청년 시대에 무엇을 하고 부귀를 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지혜를 많이 받아서 모든 정치와 재판을 지혜를 가지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고 봉헌식을 거행하며 경건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 솔로몬인데 그 후에 보면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위해서 심지어 예루살렘에 우상 숭배하는 신당을 짓기 시작했고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기까지 우상을 숭배한 적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마음에 이런 숨은 사람이 있을 줄 아마 자기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로마의 역대 황제 중에 가장 악하기로 이름난 네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학살했습니다. 전설에 의하건대 시흥(詩興)을 돋우기 위해서 심지어 로마성에 불을 질렀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였고, 자기 아내, 어머니까지도 죽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십니까? 이 사람의 생활의 한 페이지 가운데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맨 처음에 황제가 된 다음에 한 번은 결재 서류가 올라왔는데 어떤 사람이 사형을 보고 받아서 황제의 인준을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때 네로가 탄식하며 말하기를『내가 어떻게 이 사람을 죽이라고 싸인을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내가 글을 몰랐다면 좋지 않았겠느냐!』고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 때에는 자신도 그 후에 역사상에 나타난 흉악한 사람이 있은 것은 몰랐을 것입니다.
제가 몇 주간 전에「세브란스」병원에서 종합 진단을 한 번 해보았습니다. 엑스광선도 여러 번 찍고 혈액 검사도 여러 번 하고 그 밖에도 무슨 검사를 여러 번 했습니다. 물론 귀찮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지만 이런 진단이 필요합니다. 우리 몸에 어떤 때에 병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미리 진단하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혹 병을 치르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숨은 사람이 어떠합니까? 숨은 사람의 건강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빛은 엑스광선보다도 더 빛납니다. 더 밝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나 자신을 내어놓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로 날선 검보다도 더 예리해서 사람의 신혼골수를 쪼갠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一三九편을 저술한 시인은 마지막에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시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옵소서,』
내 속의 악한 행위를 내 스스로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살펴서 이것을 알고 회개할 것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은 질문을 자문자답해 보세요.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사람이 거듭 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과연 내 마음속에 숨은 사람이 거듭 났습니까? 과연 내 마음속에 숨은 옛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온전히 못 박혀 죽고 새 사람으로 변화하였습니까? 과연 내가 과거의 나를 청산하고 새로운 방향을 잡았습니까? 과연 내 속의 숨은 사람이 세상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돈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까? 내 뜻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까? 스스로 물어봅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그 눈으로 내가 나를 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마음에 숨은 사람이 건강을 바로 유지하기 위해서 몇 가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약한 곳을 깨달아서 그 방면을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원수는 언제든지 약한 곳을 뚫고 들어옵니다.
우리 사람의 육체를 볼지라도 병은 그 사람의 약한 부분으로 침투합니다. 어떤 이는 폐(肺)가, 어떤 이는 간장이, 또 어떤 이는 위장이 약합니다. 여기서 내가 나의 약한 부분을 알아서 그 방면에 특별히 주의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숨은 사람도 사람에 따라서 약점이 있습니다. 전에 에서 같은 사람은 식욕에 특별히 약합니다. 전에 아간이나 유다 같은 사람은 특별히 물질에 약했던 것 같습니다. 다윗 같은 사람은 특별히 그 정욕에 약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사람에 따라서 어떤 이는 식욕에, 어떤 이는 물질에, 명예나 권세에, 또 어떤 이는 정욕에 약합니다. 내 안에 숨은 사람의 약점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서 그 방면에 특별히 조심해서 악한 원수의 침투를 막아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작은 죄라도 항상 삼가야 됩니다. 벌써 二, 三십 년 전의 경험입니다만, 옛날 제가 선천 오호동 약수터에 가서 한여름을 지낸 때가 있었는데 밤에 바람이 불고 비가 왔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산보를 가느라고 나가 보니 뜰에 큰 아람 들이 나무가 넘어졌습니다. 아래 기둥도 튼튼하고 위도 튼튼한데 그 부러진 자리를 보니까 좀이 먹었어요. 작은 좀이 큰 나무를 넘어뜨렸습니다.
작은 죄가 큰 사람들을 넘어지게 합니다. 여러분! 몇 주간 전에 이태리의 큰 둑에 물이 넘어서 그 아래에 二, 三천 명이 살던 작은 도시가 七분 도안에 전멸을 당한 비참한 기사를 읽어보셨을 줄 압니다. 저는 외지에서 이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았는데 뚝 이 터진 것이 아닙니다. 그 뚝 옆에 높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 산봉우리가 갑자기 무너져 내려오며 둑에 떨어지자 물이 넘어서 불과 七분 동안에 온 동리가 전멸을 당했습니다. 산봉우리가 떨어진 것을 일순간이었지만, 그것이 떨어지기 전의 그 원인은 몇 백 년 뒤에 가서 찾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아십니다. 아무리 튼튼한 바위라고 풍우에 깎이면서 차츰 작은 틈이 생기게 됩니다. 그 작은 틈에 물방울이 들어가고 겨울이 되면 그 물이 얼어서 틈은 차츰 벌어집니다. 아무리 튼튼한 바위라고 조금씩 금이 납니다. 이렇게 여러 백 년 지나오다가 언젠가는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작은 물방울이 큰산을 무너뜨릴 때가 있습니다. 작은 죄를 용납하지 맙시다. 작은 거짓말이라고 함부로 하지 맙시다. 작은 물건이라고 남의 것을 훔치지 맙시다. 작은 죄를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속담 가운데『바늘 도둑이 변해서 소도둑 된다』는 말은 아주 쉬운 말이지만 깊은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작은 죄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생각과 상상의 죄를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과 상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큰 선물 중의 하나입니다. 이 상상력을 통해서 새로운 비밀을 찾아내고 과학자는 새로운 발명을 하기도 하고 예술이라는 새로운 고안과 창작이 상상을 통해서 다 나옵니다. 창조적 상상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상력이 잘못된 것이면 파괴적 세력이 됩니다.
우리 사람의 생각과 상상 가운데 죄가 들어가기 시작해서 남을 미워하는 생각, 원한, 시기, 음란 등 이런 것들이 들어가서 이것이 상상의 날개를 타고 공중으로 휘돌며 계속해서 상상을 더하게 되면 마지막에는 그 사람의 인격을 아주 파괴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마음가운데 죄를 품는 것은 죄의 알을 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알이라고 하는 것은 품으면 언제든지 까는 법입니다. 사람이 무엇이든지 오래 생각하면 조만간 그대로 결과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생각이나 상상을 언제나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상상 가운데 이런 죄를 용납하지 맙시다. 특히 청년시대에 좋지 않은 상상이 많습니다. 이것은 좋은 점이지만, 위험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바로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약합니다. 시험에 강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보면『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죄는 어디 있든지, 아무리 크든지 작든지 멀리 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를 죄로 인도하는 어떤 환경이 있다고 하면 그 환경을 멀리 합시다. 어떤 거리가 있다면 그 거리를 멀리 합시다. 어떤 책이 있다면 그 책을, 어떤 친우가 있다면 그 친우를 멀리 합시다. 어떤 음악이 있다면 그 음악을, 어떤 그림이 있다면 그 그림도 우리가 멀리 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시험에「항우(項羽)」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시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항상 죄를 멀리 하고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얼굴과 옷 입은 것을 보시지 않습니다. 사람은 항상 옷 입은 것과 얼굴을 보고서 남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숨은 사람을 보고 평가하십니다. 내 마음속에 숨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합니까?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간절히 권면 합니다.
『너희 마음에 숨은 사람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불멸의 단장을 하라.』
『온유하고 겸손하고 진실하고 순결하고 자비하고 모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덕으로써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하라.』 (一九六三년 十월 二十七일)


Ⅴ-41 추수의 원칙 (갈라디아서 六장 一-十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六·七)

여기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남에게 속아서 손해를 보는 것보다도 스스로 속아서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소위 어리석은 자의 낙원에서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입니다. 스스로 속지 말기를 위해서 경고를 하시면서 특별히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라고 우리에게 또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는 줄로 생각하는 이가 있다고 하면 그는 자기를 속이는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겉으로 주여 주여 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거기 진실과 실행이 따라야 합니다.
둘째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는 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이 심은 대로 구두는 추수의 원칙을 적용하실 것입니다. 이 추수의 원칙이 무엇입니까? 지금은 가을이라서 농촌에서는 추수하기에 바쁩니다. 우리가 이 가을 추수의 원칙을 한 번 더 생각해서 분명히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오늘은 학생의 날이올시다. 특별히 학생 시대에 이 원칙을 분명히 배우면 일생에 얼마나 큰 보배가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먼저 자연계에서 이 원칙을 잠깐 생각해 보십시오. 제일 먼저는 심어야 콩을 구둡니다. 심지 않고 거둘 수 없습니다. 봄에 심어야 가을에 구둡니다. 가을에 거둡니다. 또는 종류대로 거둡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두고, 벼를 심어야 가을에 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 양대로 거둡니다.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둡니다. 또는 종자보다는 언제나 많이 거둡니다. 증수(增收)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농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두는 시기에 있어서는 종류에 따라서 다르지마는 때가 되면 거두기는 꼭 거둡니다. 보리 같은 것은 이른 여름에 거둡니다. 그러나 벼는 늦을 가을에야 거둡니다. 그러나 과실나무 같은 것은 여러 해, 어떤 것은 七, 八년 후에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추수의 원칙이 영적, 도덕적 세계에서도 꼭 그대로 운용이 되는 절 압니다. 영적 세계에서 볼 때에 우리 인간은 누구나 한 농부입니다.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면 여름에 김을 매고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농부입니다. 우리 인간의 매일의 생활은 심는 것이고 씨를 뿌리는 것임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하는 것, 우리의 입술로 말하는 것, 우리의 수족으로 행하는 하나 하나가 다 심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대한 거둠이 있습니다. 나의 매일 매일의 사언행(思言行)을 내 성품에서 거둡니다. 차차 내 가정에서도 거둡니다. 내 교회에서 거둡니다. 내 사회에서 거둡니다. 내가 사업하는 데서도 거둡니다. 국민으로서 국가에서도 거둡니다. 매일 매일의 우리의 사언행이 씨 뿌림이 되어서 이것을 오늘 심는 대로 내일 거둡니다. 현재에 심는 것을 미래에 거둡니다.
젊어서 심는 것을 늙어서 구둡니다. 부모 때에 심는 것을 자손 때에 거둡니다. 금세(今世)에 심는 것을 내세에 거둡니다. 이 원칙을 우리가 분명히 알고 내 생각, 내 입술의 말, 내 행동을 조심해서 심어야 될 것입니다. 종류대로 거둘 것입니다. 곡식 가운데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마는, 신령한 세계에서 볼 때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는 줄 압니다. 갈라디아 五장 八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여러 가지 종류가 많지마는, 간단하게 말하면 두 가지 씨를 뿌릴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를 쫓아 뿌리는 씨입니다. 또 하나는 성령을 쫓아 뿌리는 씨입니다. 육체를 쫓아 뿌리는 씨는 정녕 썩어질 것을 거둡니다. 사망을 가져옵니다. 정욕으로 심는 자는 음란과 부패한 것으로 거둡니다. 악을 심는 자는 악으로 거둡니다. 불의를 심는 자는 불의를 거둡니다. 미움을 심는 자는 미움으로 거둘 것입니다. 거짓을 심는 자는 거짓으로 거둡니다. 무자비를 심는 자는 무자비로 거둡니다. 탐심과 허영으로 심는 자는 역시 그런 것으로 거두게 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전에 야곱이 자기 아버지를 속이더니(속여서 복을 받을 때)그 후 여러 해 후에 그 아들들이 야곱을 속였습니다.(요셉을 팔아 먹도 죽었다고). 자기가 아버지를 속이더니 자기가 아들에게 속았습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전에 이세벨이 무고한 포도 동산의 주인 나봇의 피를 흘리더니 여러 해 후에 자기의 피가 이층에서 던짐을 받아서 산산이 땅에 흘려진 것입니다.
이조 역사 가운데서 당쟁(黨爭)사(史)를 주의해 읽어보세요. 어떤 사람들이 작당을 해서 다른 사람을 모함합니다. 그 사람이 피를 흘립니다. 몇 해 후에 또 역시 그들이 모함을 받아서 자기의 피를 흘리고 넘어집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무고한 자기 아내를 다만 공부 못했다는 이유로 내쫓아 버리고, 알뜰한 공부한 여자를 새 아내로 맞아 왔습니다. 세월이 지나갑니다. 모든 것이 바뀝니다. 돈 있던 것도 다 없어졌습니다. 병까지 났습니다. 그런 때에 그 알뜰하게 맞아 왔던 그 아내가 남편도 버리고 아이도 버리고 다른 데로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천대하면 자기가 천대를 받습니다.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 자기 가슴이 아플 때가 옵니다. 남을 속이면 내가 속임을 당합니다.『남잽이 제젭이』라고 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출어이자 반어이자』(出於爾者 反於爾者)라고, 네게서 나올 것이 네게로 도로 돌아간다고 하는 옛사람의 말이 그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어제 신문에 월남에 혁명이 일어나서 고 딘 디엠 대통령과 그의 동생이 자살을 했다고 하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면에, 성령으로 심으면 영생을 거둡니다. 선으로 심으면 선을 거둡니다. 덕으로 심으면 덕을 거둡니다. 의로 심으면 의를 거둡니다. 사랑으로 심으면 사랑을 거둡니다. 친절로 심으면 친절을 거둡니다. 자비로 심어야 자비로 거둡니다. 화평으로 심어야 화평을 거둡니다.
전에 어떤 의사에게 어떤 가난한 여인이 자기의 심히 앓는 아이를 데리고 가서 이 아이 병을 좀 봐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물어보니까 돈은 없다고 합니다. 가만히 보니까 병은 중합니다. 이 부인이 돈은 없지마는 이 아이를 그냥 두면 죽을 수밖에 없으니 어떻게든지 이 아이를 불쌍히 여겨서 고쳐 달라고 간절히 부탁합니다. 그 의사가 불쌍히 여겨서 돈 받지 못하고 약 값 못 받고라도 그 아이를 며칠 동안 정성을 들여서 잘 고쳐 주었습니다. 그 후 며칠 후에 六·二五가 났습니다. 그만 이 의사가 공산당에게 잡혀갔습니다. 꼭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알지 못할 사람이 나서서 그 의사를 위해서 말을 하면서 이 의사는 이북에서 오긴 했지만 참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가난한 사람과 아이들 병을 거저 고쳐 주었다고 말을 합니다. 알고 보니 얼마 전에 자기가 돈 안 받고 병 고쳐준 그 아이의 아버지더라고요. 그래서 살았다고 합니다.
나치스 독일 사람들이 유대 사람을 수백 수천 수만을 학살하던 때입니다. 어떤 비행장의 한 비행조종사가 자기 비행기 속에서 무엇을 만지고 있는데 어떤 젊은 사람이 상기가 되어서 다짜고짜로 비행기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나는 지금 당신이 살려 주지 않으면 죽겠는데 어서 이 비행기를 띄워서 독일 국경 밖으로 좀 데려다 달라』고 간절히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사람이올시다. 이 사람의 뒤를 지금 비밀 경찰대가 추격해 왔던 것입니다. 물론 그 후에 다 잊어버렸지요. 얼마 후에 에二차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 역시 독일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영국으로 가서 연합군의 공군으로 종군하면서 전쟁에 가담해 싸웠습니다. 한 번은 전쟁에 나갔다가 큰 사고가 나서 그만 자기가 탔던 비행기가 떨어지면서 중상을 입었습니다. 뇌를 상해서 도무지 의식이 하나도 없고 중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수술 잘하는 이를 청해서 수술을 하고 두어 주일 후에야 의식을 회복하고 수술해 준 의사를 만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는 가운데 그 의사가 바로 여러 해 전에 자기가 독일 비행장에서 건져준 그 유대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덕으로 심어야 덕으로 거둡니다.『유음덕이면 필유양보』(有陰德必有讓步)라고 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 숨은 덕이 있어야 양보가 있다고. 『적선지가에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고 하는 글귀 역시 그 뜻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성령을 쫓아 심어야 영생을 거둡니다. 또 양에 따라서 거둡니다. 영적 세계에 있어서도 이 원리가 변치 아니합니다. 고린도 후서 九장 六절에도 사도 바울이 헌금하는 이야기를 하다가『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이런 말을 했습니다. 많이 싱어야 많이 거둡니다. 적게 심으면 적게 밖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좋은 씨를 많이 뿌리도록 우리가 사언행에 있어서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또 그리고 언제든지 종자보다는 수확을 많이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도 옥토에 떨어진 씨는 三十배, 六十배, 一00배가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선을 조금이라고 뿌리면 하나님께서는 많이 우리에게 선으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나 아십니까? 악을 조금이라고 뿌리면 그 악도 많이 거두게 됩니다. 그러기에 호세아 八장 七절에 보면『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바람으로 심었더니 회오리바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악도 역시 많이 거두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종류를 심는가 항상 조심해서 바로 심도록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추수하는 시기에 대해서도 이미 말씀 드렸지마는 종류를 따라서 각각 다릅니다. 더욱이 영적 세계에 있어서는 우리 인간으로서 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인간은 시간과 영원을 초월하는 까닭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오한 경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우리 인간이 미리 어떻게 꼭 되리라 언제 거두리라 추측하기는 어렵습니다. 많은 경우에는 그 사람 생전에, 당대에 거두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다른 경우에는 그 후대 자손에게서 거두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최종의 온전한 추수를 내세에 거두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도 말씀 드린 대로 우리 인간이란 이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존재하는 인간인 까닭으로 최후의 내세에 가서야 온전히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요한계시록 十四장 十五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또 다른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 대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땅에 곡식이 다 익어서 마지막 거둘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五장 十절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심는 대로 거둡니다. 반드시 거둡니다. 크고 흰 보좌 앞에 무론 대소하고 나아가서 최후의 심판을 받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유년기, 소년기, 특별히 학생 시대는 장년기와 노년기를 위해서 심는 띠입니다. 여러 학생들, 바로 심습니까? 바른 종자를 심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세는 이 다음 우리 자손의 세대를 위해서 심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심습니까? 금생은 내생을 위해서 심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심습니까? 성령을 쫓아 심어야 합니다. 기도는 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드릴 때에, 그 기도가 열매가 될 때에, 많은 추수를 거둡니다. 감사도 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많은 감사를 드릴 때에 많은 감사로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 헌금도 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보화를 많이 쌓아둘 때에 그 보화로써 축복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모든 봉사와 선행은 성령으로 심는 것입니다. 거둘 때가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 전도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종자올시다. 이 종자를 부리는 것이 곧 전도 사업이올시다. 많이 뿌려야 많은 수확을 거둘 때가 있는 것입니다.
一八六0년 처음에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미국 대륙으로 건너올 때에 그 때에는 고층 건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때에는 미국에 자동차 한 대도 없었습니다. 황폐한 대륙으로 건너와서 추운 겨울에 내렸습니다. 그 겨울을 지내는 동안 많은 사람이 굶어 죽고 얼어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와 감사와 봉사와 전도로 계속해서 심었습니다. 오늘날 그 자손들이 그 추수를 하면서 복을 받는 것을 여러분이 아십니다.
여기 우리 동남아 여러 나라 가운데 제일 부하다고 할 수 있는 나라, 국민 개개인의 소득이 제일 많은 마라는 말레이시아입니다. 그 말레이시아가 어떻게 오늘날 부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벌서 여러 해 전에 이 나라 사람들의 조상들이 그 말레이시아 전 지경에 고무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여러분, 말레이시아에 가 보세요. 자동차를 타고 제가 한 번 남북으로 지나가 보았는데 연변이 전부 고무 밭입니다. 여러 심 년 전에 심은 고무 밭입니다. 그 고무나무에서 고무가 물 흐르듯 그냥 흘러내리니까 그 조상의 덕으로 자손들이 지금 거두어서 잘 살고 있습니다.
한 세대가 바로 심어야 다른 세대가 바로 삽니다. 오늘이 학생의 알이올시다. 여러 해 전 일제 당시에 학생의 의거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래 전 이 학생이 뿌린 의의 씨가 열매를 맺어서 오늘날 공부하는 여러 학생들은 여러분을 압박하는 일본 사람 없이 자유를 누린다고 하는 것을 한 번 더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 하나는 신령한 농부올시다. 우리 매일 매일의 생활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생각도 씨를 뿌리는 것, 말도 씨를 뿌리는 것, 행동 여하가 다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씨에는 두 가지 종류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쫓는 씨가 있고, 육체를 쫓는 씨가 있습니다. 성령의 씨를 뿌려야 우리가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성령의 씨를 뿌리려면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성령을 받으려고 하면 먼저 내가 내 죄를 회개하고 온전히 주님을 내 구주로 삼고 거듭 나는 축복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온전히 거듭 나서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로부터 내 마음에 받게 될 때에, 우리가 성령을 쫓는 아름다운 씨를 뿌리게 될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과거입니다. 과거는 우리가 어떻게 돌이킬 수 없습니다.
과거의 모든 생활을 이 시간에 청산하고 온전히 새 사람이 되어서 미래에는 성령을 쫓는 아름다운 씨를 뿌려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나 개인이 나의 당대에도 옳게 바로 살고 축복을 받고 내 후손도 축복을 받고 하늘 나라에 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一九六三년 十一월 三일)

<한경직 목사 설교집 제5권 끝>

출처 : 그리스도의 제자들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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