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景職牧師說敎全集(6)
우리 교회에서는 창립 二十五주년을 맞아 그 기념 사업의 하나로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 전집을 엮어서 세상에 내어놓기로 하였다.
비록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가 주로 영락교회라는 개교회의 강단에서 외쳐진 것이기는 하지만, 구리는 결코 그것이 개교회의 교인들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그의 설교가 영락교회의 강단을 통하여서 우리 교계는 물론 나아가서는 사회와 국가에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때로는 맑고 줄기찬 샘물이 되어서 혼탁한 이 사회를 밝히기도 했고, 때로는 굳건한 반석이 되어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부드러운 손길이 되어서 상처받은 영혼들의 위로와 구원이 되기도 했고, 또 때로는 하늘을 향하는 울부짖음이 되어서 겨레의 아픔과 슬픔을 하나님께 호소하기도 했다.
교회가 세워지고 四 반세기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겨레 위에는 수난과 좌절의 역사가 광폭한 해일(海溢)처럼 덮치고 또 물러가고 물러갔다 다시 덮치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한 목사님의 설교는 폭풍 가운데 서 있는 거목처럼, 사나운 짐승들이 포효하는 광야의 선한 목사처럼 우리 교인들에게 희망과 안도를 안겨 주었고 나아가서는 겨레의 나아갈 길을 밝혀 주시곤 하였다.
이에 영락의 교인들은 그의 생애에 걸친 목회의 노고를 위로하고 은공을 기리는 한편, 이 땅에 오고 오는 세대들에게 넘겨줄 빛나는 유산으로서 이 설교 전집을 내어놓기로 한 것이다.
전집이라고는 하지만 한 목사님께서 이북에서 목회 하실 때의 설교는 전연 그 자료를 구할 수가 없어서 수록하지 못하였으며, 또 이남에 오셔서 하신 설교도 초기의 것은 그 자료가 많이 일실 되었고 더러는 수록되었다 하더라도 교우들이 필기한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서 충실을 기하지 못했음을 매우 유감 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설교 집을 위하여 편집을 맡아서 수고하여 주신 홍현설 박사, 김정준 박사, 한태동 박사, 이종성 박사, 이창로 박사와 직접 실무를 맡아서 수고하신 허영진, 김창걸, 두 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一九七一년 十월 일
영락교회 창립 二十五주년 기념 사업 위원회
출판위원장 김 정 순
머리말
모든 종교는 진리를 말하고 신(神)을 믿는다. 그들의 진리가 다른 모든 진리보다 더 참되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믿는 신은 모든 다른 신보다 더 권능이 있고 지혜가 있고 강하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과 신념에서 모든 종교는 자기들의 진리와 신을 타인에게 알리고 설득하고 때로는 강요한다. 여기에 변증 학이 필요하고, 설교가 필요하고 전도가 필요하게 된다.
종교에 따라 그들의 진리와 신을 취급하는 태도가 다르다. 어떤 종교는 그들의 진리와 신을 묵상하고 영적으로 체험해 보려고 한다. 인도교나 불교나 철학적 신비 종교가 그렇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종교는 그들의 진리와 신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설득시켜서 자기들의 회원이 되도록 노력한다. 이러한 종교에 회회교와 기독교가 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전파하는 종교였다. 세례 요한은 처음부터『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막 一·四)했다. 예수 님은 갈릴리에서『하나님의 복음을 전파』(막 一·十四)했다. 바울도 그의 활동의 처음부터『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장에서 전했다』(행 十三·五). 이와 같이 기독교는 처음부터 신언(神言)을「선포」하고 전하고 설교하는 데 중점을 둔 종교이다. 이러한 전통을 받아 교회는 유능한 설교자를 많이 배출했다. 五세기초에 밀라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하게 한 암브로시우스나, 十八세기에 존 웨슬리와 함께 영국에서 부흥 운동을 하다가 미국에 건너가서 일대 부흥 운동을 전개한 조오지 휘크필드나, 또는 기관포 설교자라고 하는 빌리 그래햄 같은 이는 교회가 낳은 가장 유명한 설교가 이다. 이러한 설교 가는 어떤 웅변가나 수사학자(修辭學者)보다 뛰어난 화술(話術)을 가진 달변 자들이었다.
한국에는 세계를 향하여 자랑할 만한 설교가가 없을까? 한국의 암브로시우스, 한국의 조나단 에드워드, 한국의 필립스 브룩스는 없을까? 그러한 설교자가 있다면 누구일까?
우리 편집인 몇 사람은 이 물음에 대하여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러한 분으로서 한경직 목사님을 택했다. 그가 훌륭한 목회자인 동시에 훌륭한 선교자임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대 설교자를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설교를 직접 듣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이 때까지 하신 수많은 설교 중 약 五00 편을 뽑아 출판하여 우리의 기쁨을 다른 독자들에게까지 나누고자 하여 설교 집을 출간하기로 했다.
내용에 대한 평가는 독자 여러분이 내려주시기를 바란다. 내용 배열에 있어서는 편의상 설교를 한 연대에 따라 열 권으로 나누었다.
바라기는 이 설교 집을 통하여 한경직 목사님과 같은 설교자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나와 주었으면 한다. 이것이 이 설교 집을 출판하는 목적이기 때문에다.
一九七一년 十월 二十七일
편집위원 이 종 성
目 次
刊行辭................................................................................................................ 三
................................................................................................................ 五
Ⅵ-1 ......................................................................................... 一一
Ⅵ-2 .......................................................................................................... 二一
Ⅵ-3 ..................................................................................................... 三五
Ⅵ-4 ....................................................................................... 四八
Ⅵ-5 ............................................................................................................. 五九
Ⅵ-6 ............................................................................................. 六九
Ⅵ-7 ................................................................................................... 八一
Ⅵ-8 ............................................................................................... 九一
Ⅵ-9 ..................................................................................................... 一0一
Ⅵ-10 ............................................................................. 一一0
Ⅵ-11 ......................................................................................................... 一二0
Ⅵ-12 ...................................................................................... 一三三
Ⅵ-13 ................................................................................................ 一四三
Ⅵ-14 ................................................................................................ 一五三
Ⅵ-15 ................................................................................................... 一六五
Ⅵ-16 ........................................................................................... 一七六
Ⅵ-17 .................................................................................. 一八七
Ⅵ-18 ......................................................................................................... 一九九
Ⅵ-19 ............................................................................................................... 二一0
Ⅵ-20 ............................................................................................................. 二二二
Ⅵ-21 ............................................................................ 二三二
Ⅵ-22 ....................................................................................... 二四四
Ⅵ-23 .................................................................................................. 二五三
Ⅵ-24 .................................................................................................... 二六二
Ⅵ-25 ............................................................................................... 二七二
Ⅵ-26 ................................................................................................. 二八一
Ⅵ-27 ....................................................................................................... 二九二
Ⅵ-28 .................................................................................. 三0四
Ⅵ-29 .......................................................................................................... 三一八
Ⅵ-30 ...................................................................................... 三三一
Ⅵ-31 ............................................................................................... 三四一
Ⅵ-32 .................................................................................. 三五0
Ⅵ-33......................................................................................................... 三六四
Ⅵ-34 ............................................................................................... 三七六
Ⅵ-35 .......................................................................................................... 三八八
Ⅵ-36 ....................................................................................... 四00
Ⅵ-37 ............................................................................................... 四0九
Ⅵ-38 ................................................................................................... 四二0
Ⅵ-39 ......................................................................................................... 四三二
Ⅵ-40 .................................................................................................. 四四三
Ⅵ-41 ......................................................................................... 四五五
Ⅵ-1 내게 주신 모든 은혜 (시편 一一六편 一-十九절)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一一六·十二)
아마 여러분 가운데도 이와 같이 느껴본 때가 있을 줄 생각합니다. 시편 一一六편을 누가 썼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아서 그 분은 큰 환난과 슬픔을 당한 분이었습니다. 아마 큼 질병 가운데서 많은 고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건강이 회복되고 나서 환난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너무 감사해서『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이렇게 감탄했습니다. 그는 이런 경험을 통해서 병중에서 나은 것을 감사할뿐더러 다른 모든 은혜도 겸하여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해서 여기『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이 모든 은혜를 생각할 때 그의 가슴은 너무 벅차서 이렇게 탄식을 한 것입니다. 오늘 감사주일 아침에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 벗은 몸으로 이 세상에 와서 지금까지 먹고 입고 살아오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육신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루에 죽을죄를 세 번씩 짓는다고 하는 말이 있거니와 오늘까지 우리가 이렇게 살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총이 함께 하는 까닭입니다. 우선 각각 내게 주신 은혜 가운데 특수한 은혜를 생각하여 보십시다.
예수 님의 비유 가운데 어떤 이에게는 금 닷 냥을 주고, 다른 이에게는 두 냥을 주고, 또 다른 이 에게는 한 냥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도 그렇습니다. 어떤 면에는 두 냥을 받고, 어떤 방면에는 한 냥을 받았지만 사람마다 어떤 분야에는 닷 냥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히 지식 방면에, 또 어떤 이는 물질 방면에, 기술 방면에 특별히 닷 냥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닷 냥의 재능이 있습니다. 문학, 이학, 음악, 혹은 수학에 닷 냥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에 닷 냥의 은혜를 받아서 일생을 살 때에 별로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사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잘 가르치는 은혜, 잘 권면(勸勉)하는 은혜, 지혜의 은혜, 장사를 잘 하는 은혜, 공장을 잘 경영하는 은혜, 건축을 잘 하는 은혜, 각각 받은바 특기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받은 이 특수한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감사합시다. 그리고는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각 방면으로 잠깐 생각해 보십시다. 다윗은 그 감사의 시 一0三편 二절 이하에 이와 같이 노래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恩澤)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矜恤)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
이렇게 자기 영혼을 스스로 깨우쳐 노래했습니다. 여기 특별히「모든」이라는 말에 주의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지어 온 모든 죄악의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모든 질병에서 고침을 받았고 이 천재지변이 많고 전쟁의 공포가 있는 세상에서 지금까지 생이 유지되는 것도 모든 파멸에서 구원을 얻은 까닭입니다. 모든 유혹에서 구원을 받은 까닭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생활도 계속합니다. 사실 인자와 긍휼의 관을 우리에게 씌워 주셨습니다.
모든 은혜를 우리가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시야를 넓혀 자연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도 생각하여 보십시다. 시편 一0四편을 읽으면 특별히 대자연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해와 달과 뭇 별들을 비롯해서 산천초목, 오곡백과, 산해(山海)어류, 맑은 공기, 시원한 물, 말하자면 사람의 육체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모든 기초적인 은혜를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땅에서 먹고, 입고, 잘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이 모든 은혜가 자연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영적 방면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를 베푸셨는가 잠깐 생각해 보세요. 예수 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친히 보혈을 흘리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여 주셨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끊어서 우리의 생명을 이어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늘의 기업을 우리를 위하여 간직하여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통하여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의 위로와 화평(和平)과 지혜와 능력의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귀한 생명의 말씀, 성경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 도고 진리의 푯대가 되는 이 귀한 말씀으로 우리를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교회에 나와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거룩한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서 복음을 만방에 전파하시고 교육사업, 모든 문화사업으로 이 민족과 국가를 축복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방면으로 자녀는 가지신 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주시는 특별한 은혜를 잠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기르시고 입히시고 먹이시는 부모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 또는 가정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 남편 된 사람은 아내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 아내 된 사람은 남편을 통하여 주시는 모든 은혜도 잊지 마십시다. 부모 된 사람들은 자녀를 통하여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기억하십시다 학생들은 학교를 통하여 주시는 모든 은혜, 선생님들을 통하여 내게 주시는 은혜를 기억하십시다 친구를 통하여 어려울 때에 내게 주는 모든 은혜를 기억하십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까닭에 사회를 통하여 내게 주신 그 은혜도 기억해야 합니다. 국가를 통하여 주신 모든 은혜를 기억하십시다. 과거 우리의 조상 님과 선배들을 통하여 내게 주신 모든 은혜, 친척을 통하여 이웃을 통하여 내게 주시는 모든 은혜, 현대 문화를 통하여 주시는 모든 은혜, 자유우방 국가를 통하여 내게 주시는 모든 은혜를 기억하십시다. 또는 시간적으로 금년에 내게 주신 모든 은혜도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다 조금 더 뒤로 물러가서 내가 세상에 나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회상해 부시기를 바랍니다. 노인들은 특별히 어릴 적에 주신 은혜, 젊은 시절에 주신 은혜, 장년, 중년기에 주신 은혜, 이렇게 연로할 때까지 주신 모든 은혜를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늘의 별을 우리가 혹 세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은혜는 우리가 세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편 一三九편 十七절, 十八절을 보면『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 지요. 내가 세려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 소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는 그 수가 모래보다 많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내게 주신 은혜가 이렇게 많은데 우리가 어찌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못합니까? 아마도 그 이유 한 가지는 그 은혜가 너무 많고, 크고 넓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얼른 듣기에는 모순되는 말 같기도 하지만 아마도 사실인 것 같아요. 우리 인간생활에 있어서 그 귀한 햇볕의 감사함을 우리가 얼마나 느낍니까? 공기도 마찬가지일줄 압니다.
흙이, 물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래도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별로 기도 드리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 많아서, 너무 흔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눈이 어두워서 몰론 보지 못하지만 너무 밝은 것도 못 본다고 합니다.「엑스」광선 같은 것은 너무 밝아서 못 봅니다. 우리의 귀는 적은 소리도 못 듣지만 너무 큰 소리도 못 듣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지구 돌아가는 소리를 못 듣는 다고 합니다.
요순시대에 정치를 얼마나 잘하였던지 그 때의 백성들이 국태민안(國泰民安)해서 어려움 없이 농사를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격양가를 부르는데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내가 밭 갈아 밥을 먹고 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는데 임금의 은혜가 내게 무슨 상관인고?』
정치를 너무 잘하니까 그 은혜를 오히려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부잣집 아들들이 부모의 은혜를 더 모른다는 말이 있어요. 이를테면 우리가 다 부잣집 아들딸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은혜를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잣집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효자노릇을 좀 하려고 한다면 부모의 은혜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 감사의 날에 우리 아버지의 크신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깨달을 수 있는 날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크지만, 우리가 그날그날 당하는 환난, 슬픔 가운데서 큰 은혜를 잊어버릴 때가 있어요. 어떤 때는 낙심도 하고 불평도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인간생활에 이따금 밤을 지나갈 수밖에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캄캄한 밤하늘에도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듯이 우리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큰 슬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영원한 소망의 별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아무리 환난의 검은 구름 아래라도 하나님의 은총의 아름다운 무지개는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일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룬다』는 이 약속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모든 것을 통치하셔서 우리의 불행과 환난까지도 다 축복해 주시는 전화위복의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그날그날 당하는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여름철 장마를 지난 때에는 그저 매일 비가 와서 일년 내내 장마만 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년 통계를 보면 그렇지 않아요. 비오는 날 며칠 없고, 해 나는 날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모든 성도들은 환난 중에도 감사하였습니다. 검은 구름 아래서도 그 위에는 햇빛이 있는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그 환난이 변해서 무지개가 될 수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자기가 사자 굴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왕의 조서에 어인(御印)이 찍혔다는 말을 듣고 여전히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문을 열어 놓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실라 도 감옥에서 많은 매를 맞은 그 날 밤에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바울이 나이 많아서 로마 감옥에 갇혀 언제 참형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여러 교인들에게 편지를 할 때에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이 시편을 읽을 때에 느껴지는 것이 자기가 큰 시련을 당하면서도 그 가운데서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 은혜를 감사하고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환난을 당하기 전에 이런 은혜를 깨달았다고 하면 얼마나 더 고맙겠습니까?
이런 얘기가 있어요. 전에 미국에 어떤 부자 목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아들도 각각 교회 일을 맡아봅니다. 어느 주일 날 아침 아버지는 차를 타고 자기 교회로 가고, 아들은 자기 차를 타고 자기 교회로 갔습니다. 날이 다 저물 때에 아버지가 먼저 돌아오고 조금 후에 아들이 돌아오더니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하는 말이『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제가 은혜를 참 많이 받았습니다. 예배를 보고 올 때 어떤 운전 수가 차를 몰고 앞으로 달려오기에 그것을 피하려다가 차가 뒤집어졌지만 저는 그저 핸들만 꼭 잡고 있었더니, 별로 다치지 않았고 차도 상 한데가 없이 이렇게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정말 감사하다』고 하면서 잠시 생각하더니『너만 감사한 것이 아니라 나도 감사하다. 나는 아무런 사고 없이 예배를 보고 돌아왔으니 이거 얼마나 감사하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큰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으면 몰론 감사한 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환난 없이 평범한 가운데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가도 깨닫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분이 감사일 전날 꿈을 꾸었는데 꿈이 천당에 가보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지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구경을 합니다. 그런데 한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서 서로 싸우듯이 큰 소리로 변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천당에도 싸움하는 사람이 있는가 싶어 곁에 가서 그 얘기를 들어보았습니다. 두 노인들이 서로 은혜를 더 많이 받았다고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질이 나빠서 부모에게도 순종치 않고 학교에도 잘 가지 않아서 나중에는 깡패가 되고 도둑놈이 되어서 나쁜 짓을 하고 살인 강도죄를 짓고는 교도소에서 종신징역을 받게 되어서 소망이 없었는데 그 교도소에 어떤 분이 들어와서 성경을 전해주어서 그것을 읽는 가운데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우리 죄인을 구원하려 오셨다는 것을 알고 주님께서 나도 구원하려 오셨다는 깨닫고 회개해서 예수 님을 믿고 천당에 오게 되었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내가 세상에서 갖은 죄를 지었는데 이렇게 죄 사함을 받고 천당에 오게 되었으니 나보다 큰 은혜 받은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요.』라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듣고 있던 다른 노인이 말하기를『그것도 큰 은혜이긴 하지만 내 얘기를 좀 들어보십시오, 나는 어릴 적부터 잘 믿는 가정에 태어나서 유아 세례를 받고 주일학교에도 빠지지 않았고, 열 대여섯 살 났을 때 입교문답을 하고, 주일학교도 가르쳤고, 성가대도 하고 그러다가 집사 책임을 밭았습니다. 그렇게 일하다 보니 또 장로 투표에서 장로로 피택(被擇) 되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작은 죄도 지었지만 남처럼 큰 죄는 짓지 않았고, 교회에 봉사하고, 선교사업을 하고, 봉사사업도 하고, 교육사업도 하면서 일생을 평안히 믿고 편안히 살다가 이 천당까지 왔으니 나보다 더 큰 은혜가 뉘게 있단 말이요?』하고 변론한단 말입니다. 여러분도 어느 분이 더 큰 은혜를 받았는지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이 두 분이 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환난 가운데서 은혜를 받는 것만 큰 은혜인 줄 생각합니다. 혹은 많은 죄를 짓고 회개함으로써 은혜를 받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평범한 가운데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다고 하는 것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꼬!』
앞으로의 생활은 은혜를 보답하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 시편을 기록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봉사의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되겠습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이후에 우리의 생활은 무엇을 하든지 은혜에 대한 보답의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꼬!』
기도하십시다. (一九六三년 十一월 十일)
Ⅵ-2 일체의 비결 (빌립보서 四장 十-二十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四·十一-十三)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 아침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빌릴보 교인들에게 그 예물을 보낸 것에 대해서 감사한 인사와 함께 겸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궁핍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사실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을 배웠노라. 그리해서 비천(卑賤)에 처할 줄도 알고 풍성(豊盛)에 처할 줄도 알아서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시며『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노라』고 자기의 신앙을 간증하셨습니다. 생의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여기 본문에 있는 대로
첫째는 그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한 생활을 하는 비결을 배운 것입니다.
둘째는 그는 비천에 처할 줄 아는 비결을 또한 배웠습니다.
셋째는 그는 또한 풍부한 생활에 처할 줄 아는 비결도 배운 것입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의 생활을 할 줄 아는 비결을 배우면 이것이야말로 큰 보배가 될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六장에서도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에 그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자족한 마음이 있으면 경건(敬虔)에 큰 유익이 되는데 우리 사람이 세상에 올 때에 가지고 온 것이 없고 또 세상에서 갈 때에도 가지고 갈 것이 없다고, 그저 사람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자족한 생활을 하는 이 은혜를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줄 생각합니다. 이 자족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만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이 편지를 쓸 그 때에 헬라의 많은 철학자들 가운데도 이 자족에 대해서 교훈 한 분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 당시에 스토익파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자족을 그들의 윤리의 최고 표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모든 행동의 가장 높은 덕은 이 자족에 이르는 것이라고, 이 철학자들은 가르쳤습니다. 보통 우리 동양식으로 말한다고 하면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는 그런 심경에 있는 것이 가장 귀하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리해서 이 철학자들은 이 자족의 심경에 이르는 길을 간단히 두 가지로 가르쳤습니다.
하나는 모든 욕망을 더는 길입니다. 그들이 늘 하는 말대로 물건을 더 할 것이 아니고 욕망을 덜음으로써 사람은 자족한 생각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늘 가르쳤습니다. 그 말씀은 일리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 십 만원 돈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족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고 백 만원 돈 가진 사람도 항상 부족하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까닭은 한 사람은 돈은 많지마는 그 보다 욕망이 더 큰 까닭이고 그래서 이 사람들은 어떻든지 욕망을 줄이는 것이 이 자족의 생활에 들어가는 첩경이라고 항상 가르쳤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불교의 소위 욕정을 금하여 온전한 자리에 나간다고 하는 교훈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해서 그들은 어떤 물건도 원하지 말고 아무 사람도 원하지 말라.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면 그 지경이야말로 온전한 자족의 지경이라고, 심지어 내 생명에 대한 욕망까지도 버리라고, 그래야 온전한 그 자족의 자리에 이른다고 이들은 가르쳤습니다.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는 대표적 인물이, 말하자면 디오게네스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아주 간단한 생활을 했습니다. 밤에는 무슨 통나무 위에서 잤다고 합니다.
한 번은 아침에 일어나서 통나무 위에 앉아 있노라니 까, 그 때에 큰 세력을 가졌던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하는 이가 유명한 철학자를 찾아보러 왔습니다. 와서 그 대왕이 하는 말이『선생께서 무엇을 원하든지 다 드릴 수 있는데 무엇을 원하는가?』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답이『나는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소. 당신이 내 앞에 서서 햇빛을 가리우니 좀 비켜서 주시기를 바랍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 이르러야 자족의 자리에 이른 것이라고 이 분들이 그르쳤습니다. 또 이 사람들은 자족의 자리에 이르려면 감정을 말살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무엇은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이런 감정 때문에 우리 마음에 자족이 깨지고 안심이 깨지니까 이런 모든 감정을 할 수 있는 대로 말살해서 감정을 초월하는 생활을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가령 쓰던 그릇 같은 것이 깨졌을 때 어떤 부인들은 그것 때문에 마음을 쓴단 말입니다. 아예 마음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그릇 깨진 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큰 그릇이 깨져도 그렇게 생각하고, 혹, 내가 사랑하며 기르던 고양이 같은 것이 그만 다리가 부러져도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말고,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감정을 초월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라고 그들은 가르쳤습니다.
여기 그런 방면으로 힘을 쓴 에피크레터스라는 사람은, 본래 종으로서 이 철학을 연구한 사람인데 그 사람에 대한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이 분이 어떤 자리에 있든지 자족한 마음을 가지고 살며 감정을 초월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초월하나 보자고 하여 그 사람의 다리를 막 비틀었습니다. 그러니 아플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프다는 소리 한 마디도 한 했습니다.
그래도 자꾸 비트니까 이 사람 하는 말이『당신 네 들이 내 다리를 비틀면 아마 내 다리가 부러질 것 같소.』그렇게 말하더랍니다. 아 그래도 이 악한 사람들이 그냥 비틀어서 결국은 다리가 뚝 부러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 아프다고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안하고『그렇게 자꾸 비틀면 부러지겠다고 내가 그러지 않습디까?』그 말만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 생각에는 이렇게 감정을 순전히 초월하는 가운데서 큰 자족의 경지에 이른다고 믿고 이렇게 하려고 애썼고 또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순전히 인간의 의지의 힘으로써 이것을 성취해 보려고 애썼습니다. 사실 인간의 힘으로써 이런 방면에 이르기까지 성취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줄 생각합니다. 몇 사람 안 되는 모양입니다. 또 혹 이런 자리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이 아파도 아픈 줄도 모르게 되어버린다면 그게 목석이지 어디 사람입니까? 사실 우리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은 이 스토익학자들이 사람의 마음을 광야로 만들어 놓고는 이것이 평화라 하고, 이것이 자족이라 말한다고 비평한 것입니다.
여기 사도 바울이『내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족을 배웠노라』고 하였는데 어떤 길을 통해서 자족을 배웠습니까? 욕망을 말살해서 배웠습니까? 감정을 말살해서 배웠습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을 연구해 보면 사도 바울은 욕망을 말살하지 않고, 보다 더 고귀한 욕망을 가지고 그 욕망을 성취함으로 자족을 얻은 것입니다.
빌립보 三장 七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깨닫고, 그리스도를 사실 알고 보니 그 지식이 얼마나 고상한지 그 지식을 알고 그리스도와 서로 동행하고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된 다음부터는 다른 모든 세상의 욕망을 자연히 봄 동산의 눈처럼 쓰러졌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보니,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보지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만족한지, 세상의 욕망은 자연히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자족의 생활에 들어간 비결입니다.
또한 감정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정을 말살해서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보다 더 고귀한 감정을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와 자기가 하나가 되는 그런 사랑의 지경에 들어가게 될 때에 그의 심정은 그냐 말로「삼층천(三層天)」에 올라가게 되는 것이고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참된 만족과 환희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같이 계실 때에 모든 것이 다 없어도 그는 부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리해서 억울하게 매를 마고 밤에 깊은 감옥에 갇혔어도 실라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마음에 항상 만족이 있었습니다. 깊은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으면서 얼마 안 되어 교수대에 오를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어서도 항상 그는 기뻐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큰 지중해 풍파 가운데서도, 모든 사람이 정신을 잃고, 모든 사람이 낙심 천만하게 될 때에도, 오직 사도 바울 만은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리스도의 사자가 그와 함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이와 같은 축복을 받은 선지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박국 三장 十七절 이하를 읽으면 이런 노래를 불렸습니다. 장차 큰 재난이 올 것을 자기가 내다봅니다. 그러나 들어보세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의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사도 바울의 자족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十二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의 가시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내 몸에 가시가 있어서 항상 나를 괴롭힙니다.』 이 가시를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가시가 있어도 족하다고 하였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내 권능은 약한 데서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가시가 있으나 하나님의 권능이 가시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족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둘째로 여기 비천의 생활에 처할 줄 아는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는데 누구나 인생 길을 지나갈 때에 이 비천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생활이 가난할 때, 사업이 실패되는 때, 친구 없이 고독한 때, 역경에 살수밖에 없을 때, 핍박과 비난을 받게 될 때, 몸이 약하고 병석에 눕게 될 때,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나서 큰 슬픔을 당할 때, 이 비천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 때가 누구나 있는 것입니다.
전에 욥 같은 사람은, 본래 풍부한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재산도 많고 자녀도 많고, 지위도 높고, 명성도 있고, 그러나 자기는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갑자기 비천한 자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돈 없어지고, 자식 없어지고, 건강 없어지고, 비참한 자리에 빠졌습니다.
요셉 같은 사람도 본래 팔자가 참 좋은 아이였습니다. 좋은 가정에서 자라나서 철을 모를 때에 그저 귀한 것 없이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고 잘 자랐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심부름 갔다가 오히려 자기 형들한테 미움을 받아서 멀리 종으로 팔려 가게 됐습니다. 남의 집에서 종 사리하게 됐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감옥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비천한 자리에 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종종 이런 자리에 처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리에 한 번도 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북한에 계실 때에는 풍부하게 살던 분이 많이 계신 줄 압니다. 그러나 三八선이 생기고 공산당이 들어오고 이렇게 돼서 피난민의 한 몸이 되어 남한에 와서 비천한 생활을 계속하는 분들도 상당히 많이 계신 줄 압니다. 또 피난민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五년 전 十년 전에 풍부하게 살던 이가 갑자가 어떤 사업의 실패로 말미암아 생활이 가난해지고 비천한 자리에서 헤매는 분들도 없지 않아 계실 줄 압니다.
그리고 또 지금 모든 것이 좀 풍부하다고 하지마는 그것 믿고 자랑하지는 맙시다. 왜냐 하면 사람이 무슨 일을 내일 당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병은 그저 눈썹에서 떨어집니다. 사업의 실패도 하루아침에 됩니다. 하물며 한국과 같이 정치, 경제, 사회, 모든 것이 불안정한 이런 사회, 이런 시대에 사는 우리로서 언제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비천한 자리에 처할 줄 아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비천하여질 때에 오는 특별한 시험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때에 어떤 시험이 오는지 압니까? 비관하는 시험의 옵니다. 세상을 비관하는 낙심의 시험이 옵니다.
자포자기의 시험이 옵니다. 불평과 원망의 시험이 옵니다. 사람을 원망하고 친구를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하고 국가를 원망하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남 잘 사는 것을 시기하는 시험도 들어옵니다. 돈 좀 있는 사람을 모조리 미워하는 시험도 들어옵니다. 타락하기 쉽습니다. 자포자기해서 결국은 타락하기 쉽습니다. 비천할 때에 이와 같은 시험으로써 악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나를 찾아다닌다고 하는 것을 미리 알아서 이런 방면에 오는 시험을 우리가 방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그저 한 마디로 말하면 사도 바울이 여기 말씀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비천한 자리에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예수보다 더 비천한 자리에 떨어질 수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영광은 무궁 무한하십니다. 권세가 무한하십니다. 그런 분이 세상에 떨어졌습니다.
세상에 내려오셔서 종의 형상을 입었습니다. 그의 친히 하신 말씀과 같이『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이 있으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죄 없이 비판을 받고, 죄 없이 오해를 받고, 핍박을 받고, 뺨을 맞고, 침 뱉음을 받고, 말할 수 없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에까지 달리게 됐습니다. 죄 없이 이와 같이 비천한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자리에서 참고 견디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겼습니다. 이 모든 것을 승리했습니다. 마지막에 부활로써 온전히 승리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게 될 때에 우리가 비천한 자리에 있어도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인내의 능력을 받고, 위로의 은혜를 받고, 용서의 은혜를 받고, 풍부한 은혜를 그리스도에게서 받습니다.
여러분, 비천한 자리에 있을 때에, 절대로 그리스도를 떠나지 마세요.『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이겼사오니 그 능력에서 나도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세요.』기도하고, 주님의 능력을 받으면 그 모든 시험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새로운 은혜를 받아서 비천한 자리에서 새 은혜와 새 능력과 새로운 창조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실패함으로 성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병 앓음으로 은혜 받은 사람 많습니다. 늘 하는 말이지마는 성 프랜시스 같은 이도 병 앓음으로 은혜 받기 시작했습니다.
밀튼 같은 사람은 말년에 소경이 되었어요. 그렇게 된 후에 오히려 신령한 눈이 열려서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유명한 시를 썼어요(실락원(失樂園)). 베토벤 같은 사람은 음악가로서 귀머거리가 되었어요. 귀머거리가 되어서 아무 소리도 못 듣게 되니 얼마나 기가 막힐 것입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늘의 음악을 듣고 오히려 유명한 작품을 냈습니다.
비천한 가운데서 은혜를 받아서 새로운 창작의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질병은 물론 원해서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질병 않게 되면, 그 가운데서 은혜 받을 길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나게 되면 우리의 심령이 우선 깨끗해집니다. 왜? 병나게 되면 과거의 죄를 생각하고 다 이것을 회개하는 까닭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더 살찌게 됩니다. 왜? 병나게 되면 더 주님을 생각하게 되고 좀더 주님을 묵상하게 되고, 기도도 많이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병남으로 말미암아 큰 은혜 받아서, 전도 많이 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사실『병상은 제일 좋은 강단이다.』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큰 병 가운데 않으면서 자기 아들에게 권면할 말, 친구가 방문할 때에 권면해 준 말, 그 말은 금보다도 더 귀하고 옥보다도 더 귀합니다. 병중에 있어서 큰 일 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가 알 것은 실패와 슬픔과 고통과 이런 비천한 자리에 있을 때에 들어오는 모든 시험을 주님과 같이 이기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그 자리에서 받으면 그 자리가 큰 축복의 자리로 변화합니다. 언제든지 우리 주님은 이렇게「전화위복」곧 화를 전해서 복을 만드시는 권능 있는 주님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비천에 처하는 비결은 미천한 자리에 있을 때에 주님과 가까이 해서 주님의 은혜를 받고 주님의 능력으로써 그 가운데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셋째로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야 됩니다. 이 비결을 사도 바울은 배웠습니다. 어떤 분은 비천에 처할 줄은 알지마는 풍부해질 때에 처할 줄을 몰라서 실패를 당하는 이가 더러 있습니다. 건강할 때, 평안할 때, 성공할 때, 재정적으로도 모든 것이 잘 돼서 넉넉할 때, 우리가 다 생각하기는 그저 내 생활이 조금만 더 넉넉해지면, 나는 교회 봉사도 좀더 잘 하고 십일조도 꼭 드리고 주일날 예배 시간도 꼭 지켜서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 이렇게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그런 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물질로 받아서 풍부해집니다. 재산이 많아집니다. 꼭 그렇게 하는 이가 얼마나 되는지 압니까? 과히 많지 못할 줄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 압니까? 풍부해질 때에는 비천할 때에 받지 못하던 딴 시험이 들어옵니다. 비천할 때에 모든 시험을 잘 이겼지마는 이 딴 시험이 들어올 땡, 이 시험을 못 이길 때가 있습니다. 어떤 시험이 들어오는지 압니까? 교만의 시험, 성공하면 마음 높아지기 쉬습니다. 돈 많이 모으면 돈 모이는 그 액수보다 욕심은 더 큽니다. 이렇게 되어서 돈을 더 사랑하게 되기 쉽습니다. 인색해지고, 돈 버느라고 분주해서 교회 일을 더 등한히 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그 뿐인 줄 압니까? 모든 것이 넉넉할 때에는 가난할 때에 조금도 안 들어오던 무슨 시험이 들어오는지 압니까? 육신의 정욕에 대한 시험이 들어옵니다. 가난할 때에 경건히 교회를 봉사하던 청년들 가운데 돈 모으고 넉넉해지니까, 이런 육신의 정욕에 빠져서 일생을 망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허영심(虛榮心), 허영의 시험, 이생의 자랑, 명예심, 권리심(權利心) 따위의 시험들이 물밀 듯 들어옵니다. 풍부할 때에 조심해야 됩니다. 풍부할 때 처하는 비결을 우리가 꼭 배워야 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 아닙니다. 풍부할 때에 꼭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풍부할 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깨닫고 꼭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신명기(申命記) 六장 十一절 이하에 보면『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하나님을 잊지 말아라』하는 경고가 있습니다. 배부를 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배부를 때에 그리스도를 잊어버리지 마십시다. 우리 가운데 그런 분은 없습니까? 배고플 때에는 그리스도와 가까이 하더니 배부르게 되니까 그리스도를 멀리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잠언 一장 三十二절에는『미련한 자의 안일(번영이라는 뜻)은 자기를 멸망(滅亡)시키느니라.』오히려 번영함으로 말미암아, 돈 모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망치는 사람은 없습니까? 번영할수록, 풍부할수록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깨달아서 하나님을 잊지 말고, 그리스도를 잊지 말고 주안에서 살아야 되겠습니다. 풍부할수록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봉사의 기회를 주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봉사합시다. 부즉다사(富卽多事)라고, 부하면 분주하다고 하지만 세상일이 아무리 분주해도 교회 일을 게을리 하지 맙시다. 돈 많아지면 십일조 내는 것도 많아져서 아까워진다고 합니다. 사실 은혜 받은 사람은 십일조만 내는 것 아닙니다.
수입이 많게 되어 십일조를 자기가 쓰고도 생활할 수 있게 되면 십 구조까지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잊지 말고, 주안에서 이 길이 봉사의 기회요, 이 길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잊지 말고 더욱 내 책임을 바로 하도록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한 생활을 하는 비결, 비천에 처할 줄 아는 비결, 풍부에 처할 줄 아는 비결, 이 비결을 우리가 꼭 안아야 됩니다. 이 비결은 다른 것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내가 영접하면 언제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마음가운데 모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고 하면 옛날 성으로 비교하면 샘물과 곡식이 많은 성과 같습니다. 옛날에 전쟁할 때에는 아무리 원수가 성을 에워싸고 그 성안에 물과 곡식만 많으면 문제없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원수가 많고 나를 해하려는 악한 마귀의 궤계(詭計)가 많지마는 우리 속에 주님께서 같이 계셔서 내 속에 생명수가 있고 내 속에 생명 양식이 풍부하면 밖의 원수는 문제없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만 꼭 우리 마음속에 모시고 참된 신앙으로 산다면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든지 그 자리에서 자족한 생활과 그 자리에서 행복한 생활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환경이 변해야 나는 행복한 생활을 하겠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다. 여러분께서 그리스도와 같이 계시고 그리스도의 은혜만 받으면,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은혜를 받고 행복 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또『나는 뭐 지금은 불쌍한 사람이야 그러나 이 다음에야 행복한 때가 오겠지.』이렇게 막연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여러분이 어떤 자리에 있든지 지금 이 시간 그리스도를 참으로 내 마음에 영접해서 참된 신앙에 들어오면 이 순간 즉시로 여러분이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 늘 부르는 말과 같이『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입니다.
(一九六三년 十一월 十七일)
Ⅵ-3 작은 일의 날 (스가랴 四장 一-十절)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 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 네가 알리라 하였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 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슥 四·八-十)
이 말씀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가랴를 통하여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바벨론 에서 해방을 맞아서 예루살렘에 돌아와 곧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이 말하자면 피난민들로서 그들의 힘은 매우 미약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황금시대인 솔로몬 왕이 지은 첫째 성전의 역사와는 가히 비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해서 아마 그 때 사람 가운데 이 작은 일을 미미한 일로 멸시하면서 본 이들이 없지 않아 있은 것 같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의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이 성전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계속해서 권면한 말씀이『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지 말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왜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지 말라고 권면 하였습니까?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작은 일들이 모여서 큰 일이 됩니다.
여러분, 자동차 조립하는 공장을 구경할 분이 몇 분이나 되시는지 모르지만 제가 일찍이 그런 큰 공장에 가서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큰 넓은 공장 안에 직공 수백 명이 좌우로 열을 지어 섰습니다. 그 가운데로 자동차 몸체가 천천히 지나갑니다. 그 옆에 선 수백 명 직공은 작은 일 한가지씩만 합니다. 어떤 사람이 부속품 하나를 가져다가 볼이기만 합니다. 그 다음 사람은 나사 못 하나를 갖다가 꽂기만 합니다. 그 다음 사람은 그것을 조여 줍니다. 또 그 다음 사람은 좀더 단단히 조입니다. 수백 명 직공이 작은 일 한 가지씩만 합니다.
그 작은 일들의 모여서 마지막에 보면 큰 자동차가 三분만에 하나씩 되어 나옵니다. 자동차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큰 제트기도 이렇게 되어 나옵니다. 작은 일이 모여서 큰 일이 됩니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서 넓은 태평양 바다를 이룹니다. 작은 티 끝이 모여서 큰 태산을 이룹니다. 진합태산(塵合泰山)이란 말이 거기서 나왔습니다. 한 초, 두 초, 작은 시간이 모여서 한 시간이 되고 그게 하루가 되고 그게 일년이 되고 그게 五十년, 六十년, 七十년이 지나가면 인생 일생이 다해집니다.
작은 개인이 모여서 큰 교회를 이룹니다. 작은 개인이 모여서 큰 나라를 이룹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작은 것이 자라서 큰 것이 됩니다.『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서 새가 깃을 들인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도토리 시에서 싹이 나서 점점 자라면 하늘을 덮을 듯 큰 상수리나무가 되는 것을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물줄기가 점점 모여서 마지막에는 압록강이 되고 또한 두만강이 되는 것입니다. 작은아기가 점점 자라서 큰 사람이 됩니다. 어른이 됩니다. 작은 교회가 점점 자라서 큰 교회가 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으로 시작해서 큰 일을 하십니다. 모세의 작은 지팡이를 통해서 넓은 홍해를 갈랐습니다. 다윗의 손에 있는 작은 물매 돌 하나를 가지고 그 때에 큰 장수 골리앗을 격멸(擊滅) 했습니다. 엘리야가 가멜산 위에 가서 하나님께 비가 내리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니 먼바다에서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올라와 그 구름이 점점 커져서 큰 소낙비가 내려서 三년 六개월 동안이나 메말랐던 온 땅을 적셨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기억하십니까? 꿈에 보니 큰 우상이 있습니다. 금, 은, 동, 철로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키가 큰지 하늘에 닿을 듯 싶습니다. 그랬는데 저 하늘 한편에서 작은 돌 하나가 내려옵니다. 그 돌이 그 우상에 부딪칩니다. 우상이 쓰러졌습니다. 쓰려졌을 뿐더러 가루가 되어서 아주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작은 돌이 커서 온 땅과 하늘에 충만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천국운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지금 인간이 제일 큰 힘은 가장 작은 원자 속에 있는 원자력입니다.
예수 님께서 처음에 천국운동을 갈릴리 근방에서 시작하실 때에, 사실 얼마나 미약했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갈리리 바다에서 고기 잡던 그 어부들 몇 사람, 농촌에 있는 여자들, 혹은 아이들 이런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서『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이요』를 비롯하여 여덟 가지 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 사람을 향해서『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때에 세상의 세력을 잡은 사람의 눈으로 그것을 본다면 얼마나 미미했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 멸시할 줄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가지고 그 때에 큰 도시 로마로 다니면서 몇 사람 모아 놓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파한 다음에는 몇 사람이 개인의 집에 모여서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고 이렇게 작은 교회가 이 도시에도 일어났고, 저 도시에도 일어나고 다 일어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의 형편을 본다면 모이는 수로 보든지 또 모이는 사람의 형편을 보든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요, 또 무식한 사람들이요, 또 종들도 상당히 섞인 모양입니다.
참 미미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에 솔직히 노골적으로 무슨 말을 기록했느냐하면『너희 가운데 잘 난 사람이 많지 않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당시 정치가나 군인들이나 학자의 눈에는 참으로 미미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 불신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문헌에 나타나 있는 믿는 사람의 형편을 본다면 참 멸시하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동방에서 온 새로운 미신을 이 사람들이 믿는 모양이라고. 그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죽은 목수를 숭배하더라고! 교회를 어떤 때에는 장례조합이라고 이렇게 불렀습니다. 왜? 아마 사람이 죽으면 모여서 장례를 늘 잘했던 모양입니다.
멸시했습니다. 미미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운동이 두 세기를 채 지내지 못해 그 떼에 제일 강대한 나라 로마 제국을 영적으로 정복하였습니다. 그 나라를 다스리는, 로마 황제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목수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작은 일의 날을 멸시하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작은 데서 시작해서 큰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왜 작은 일을 멸시하지 않아야 되느냐고 하면, 작은 일을 게을리 함으로써 큰 일이 잘못되는 수가 있습니다.
몸에 작은 상처가 생길 때에 그것을 돌보지 않으면 작은 균들이 그리로 들어옵니다. 작은 균들이 점점 커집니다. 큰 병이 생깁니다. 마지막에는 그로 말미암아 큰 사람이 죽는 수가 있습니다.
몇 달 전에 일본에 큰 사건이 일어난 일이 있지요. 구주 지방의 탄광이 폭발되어서 四백여 명이 몰사하고 요꼬하마(橫浜)와 동경 사이에 열차가 삼중으로 충돌이 되어서 거의 二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잡지를 보니까 그 두 사건의 원인이 어디 있었느냐 하면 작은 못이 빠진 까닭이라고 합니다. 탄광의 경우는 깊은 탄광에서 석탄을 운반해 올려오는 차를 연결하는 쇠사슬에 꽂았던 못 하나가 어떻게 빠져나가서 그것이 뒤로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충돌되어 폭파가 됐다고 합니다.
기차의 경우는 기차 바퀴에 박았던 못이 어떻게 빠져서 바퀴가 하나 떨어져 나갔다고 합니다. 자연히 탈선이 될 수밖에 없었지요. 탈선되면서 열차들이 충돌됐다고 합니다. 작은 못 하나 빠짐으로 말미암아 큰 사고들이 생겼습니다.
서양에서는 아이들한테 가르치는 노래 가운데(세가 그대로 우리 노래로 번역할 수는 없지마는)이런 내용의 노래가 있습니다. 저는 본 일이 있는데 여러분, 다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에 대한 얘기인데 말에는 말 신이 있습니다.(둥그런 것)말에다가 말 신을 신깁니다. 그래야 말이 잘 달릴 수 있지요. 그 말 신을 무엇으로 신기느냐 하면 못을 박아서 신깁니다. 여기에 대한 노래인데 말 신에 못이 하나 빠졌습니다. 그러니까 말 신이 벗겨졌습니다. 말 신이 벗어지니까 그 말이 가다가 거꾸러졌습니다.
말이 거꾸러지니까 그 말 우에 탓 던 기병이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말에 탓 던 기병이 거꾸러지니(전쟁에 나가서 그렇게 되었으니)전쟁에 졌습니다. 그 전쟁에 지게 되니까 그만 나라가 망했다고 하는 노래입니다. 못 하나가 빠져서 마지막에는 전쟁에 지고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을 작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작은 것을 조심할 줄 알아야 됩니다. 작은 죄를 삼갈 줄 알아야 됩니다. 불결한 생각은 아무리 작다고 할지라도 우리 마음에 용납하지 안아야 됩니다. 시기하는 마음, 음란한 마음, 허영심, 원한, 교만, 이와 같은 것은 아무리 작다고 해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말을 작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작은 도둑질이라고 해서 훔쳐서는 안 됩니다. 못 된 싸움이 작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의무가 작다고 작은 의무를 태만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 우리 서울에서 한 민의원 선거 결과를 신문을 통해서 보니 대체로 약 五할 二부가 선거에 참여한 모양입니다. 그것을 보면 四할 이상의 서울 시민이 선거를 안 했습니다. 작은 일입니다. 가서 투표하는 것 작은 일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민주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데 국민이 전부 기권해 버리는 것은 무슨 뜻이냐고 하면『그까짓 것 될 대로 되라』그 태도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나라는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작은 투표 안하고 자기 일만 하므로 나라가 망합니다. 작은 죄로 말미암아 한 개인의 일생이 망할 수 있고, 작은 죄로 말미암아 큰 교회가 손해를 받을 수 있고, 작은 죄들로 말미암아 나라가 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작은 것들을 조심해야 됩니다. 작은 일을 크게 알아서 작은 일을 바로 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작은 일에 충성한 자가 큰 일에도 충성하고,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한 자는 큰 일에도 충성하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비유를 말씀하실 때『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니 내가 큰 일도 맡기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작은 이레 부지런한 사람이 큰 일에도 부지런합니다. 작은 일에 양심적으로 하는 사람이 큰 일에도 양심적으로 합니다. 좋은 생각은 아무리 작아도 어떻든지 우리 마음가운데 품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사랑과, 희락(喜樂)과, 화평(和平)과, 인내와, 진, 선, 미의 모든 생각은 아무리 작아도 항상 우리 마음가운데 품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작은 핑계는 아무리 작을 지라도 어떻든지 우리가 안 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여기 지금 YMCA를 재건하느라고 굉장히 힘을 쓰는 중에 있지마는 저는 이 YMCA일을 늘 볼 때마다 본래 이 YMCA에 기부해서 지어 주었던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실업가 와나메이커(Warnermaker)라고 하는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 사람의 일화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그이가 젊어서 어떤 상점에 가서 물건을 하나 샀는데 사 가지고 와 보니까 자기가 꼭 원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상점에 도루 가지고 가서『이거 내가 꼭 원하는 물건이 아니니 이걸 좀 바꿔주시오』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상점 주인이 대단히 성이 나서『아, 한 번 사간 것을 뭘 다시 가지고 왔는가?』고 하면서 불친절하게 거절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청년이 대단히 섭섭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때에 이 청년은 그것 때문에 반발하지 않고 왜 장사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손님에게 불친절하나? 나는 앞으로 친절하게 장사를 해 보겠다. 어떤 사람이 물건을 샀다가 다시 바꿔 달라고 해도 기쁜 마음으로 친절히 바꿔주겠다 하는 결심을 하고 작은 상점을 경영하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친절본위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사업이 잘되어서 지금 필라델피아나 뉴욕에 가 보아도 굉장한 와나메이커 빌딩이 있고 큰 상점이 그냥 있습니다.
작은 친절을 우리가 힘쓸 줄 알아야됩니다. 선은 아무리 작을지라도 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냉수 한 그릇을 목마른 사람에게 주어도 내 이름으로 주면 절대로 상을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작은 의무를 바로 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내가 전에 어렸을 때에 어떤 신문을 보니 미국의 큰 철도회사 사장이 죽었는데, 본래 사장이 그 회사에 들어갈 때에는 사환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사환으로 들어가서 자기의 맡은 바 책임을 얼마나 잘 했던지 점점 올라가서 마지막에는 그 회사의 사장으로 있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작은 책임을 바로 하는 사람이 큰 책임도 바로 합니다. 여러분은 다 큰 전도사가 될 수 있을지 그건 모르겠어요. 여기 빌리 그래함 목사처럼 한꺼번에 수백 명, 수천 명을 회개시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 하나가 개인적으로 내 친구, 나 아는 사람에게 권면 해서 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는 개인전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역사를 본다면 큰 부흥회를 통해서 그 때의 교회가 발전된 것 아닙니다. 이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개인적으로 권면 해서 이 작은 개인전도를 통해서 마지막에 온 로마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든 것입니다. 작은 의무, 작은 전도를 우리가 힘쓸 때에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 헬라의 스팔타 나라에서는 항상 그 국민들에게 외치던 말이『너희 하나 하나가 벽돌이 되라. 산 벽돌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 때 스팔타 사람들이 벽돌로 성을 쌓고 있었는데 너희 하나 하나가 산 벽돌이 되어서 나라를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은 하나 하나가 민주주의를 비키는 산 벽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교우는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를 기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보키 위해 하나 하나가 벽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땅에 떨어지는 밀 알이 되면 얼마나 많은 수확을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하나 하나가 큰 등불이 될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 하나가 작은 촛불은 다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 하나가 작은 촛불이 되어서 여러분의 사는 그 곳을 밝힌다고 한다면 온 한국이 아마 거의 밝아질 것입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천사같이 말못하고 바울 같이 못하나 네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우리 하나 하나가 개인 개인이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 개인 전도를 통해서 온 민족을 구원하고 온 민족의 대부분이 기독교로 돌아오게 될 때에 자연히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방면에 큰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큰 문제는 아직까지 교회가 많다고는 하지만 서울의 전 인구로 보면 아직도 열 사람에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백 명에 일곱 명 전도입니다. 아이들까지 전부 다해서 백 명에 일곱 사람 정도입니다.
오늘이 본 교회 창립 十八주년 기념일입니다. 十八년 전 그 때는 이 곳이 일본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던 천리교회 서울본부로 지금 구 예배당 자리가(베들레헴) 본전이었다고 합니다. 거기 한 구석에 한 二十명 피난민이 모여서 예배를 그리기를 시작한 날이 바로 오늘인 것입니다. 그 때는 그 베들레헴도 여러 간으로 막았습니다. 맨 뒷방이 좀 넓어서 그 뒷방에서 모였는데 그 곳에는 그 때까지도 그 사람들이 우상같이 뭘 써놓고 만들어 놓았던 나무로 된 제단이 그냥 한편 옆에 있고, 또 사람들이 모일 때 치던 큰북이 그냥 매달려 있었는데 그 다다미방에서 한 二十명이 조그만 난로를 피워 놓고 오들오들 떨면서 예배를 처음으로 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생각하면 매우 미미한 작은 일의 날이었습니다. 북한에 좋은 예배당 다 지어 놓고, 그러나 거기 있을 수 없어서 그것 다 북한에 두고 여기 와서 천리교가 남긴 집에서 예배보는 그 형편을 돌이켜 생각만 해도 참 얼마나 미미한 존재였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작은 일의 날을 멸시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거기 모였단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제단을 중심으로 해서 기도를 힘쓰고, 성경을 읽고, 같이 심장을 하고, 같이 전도를 하고 또 장로는 장로의 책임, 집사는 집사의 책임, 반사는 반사의 책임, 구역 장과 권찰(勸察)은 구역 장과 권찰의 책임, 이렇게 자기 책임을 각각 하는 중 알지 못하는 가운데 十八년 후 오늘에 와서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교회로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오로지 무명 성도들이 각각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자기의 책임을 충성되게 하는 가운데 오늘의 교회로 이룩하게 된 것입니다.
전에 우리 동양의 성현도 어떻게 하면 나라가 잘 될 수 있느냐고 물으니까 얼은 쉽게 대답하는 말이『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은 임금 노릇 잘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 잘하고,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 잘하고, 아들은 아들 노릇 잘하면, 나라가 잘 됩니다.
교회가 잘 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교역자는 교역자 노릇 잘하고, 장로는 장로 노릇 잘하고, 권사는 권사 일 잘 보고, 집사는 집사 일 잘 복, 평신도는 평신도로서 자기의 책임을 다하고 그러면 교회가 부흥됩니다. 작은 일에 각각 충성되게 하는 가운데 큰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작은 교회라고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마 여러분도 대부분 농촌에서 믿다가 여기 오신 분이 많을 줄 알지마는 제 과거를 돌아볼 때에 항상 감사히 생각하는 것은 제가 아주 벽촌에서 태어났는데 제가 날 무렵에 어떤 선교사가 와서 내가 난 바로 그 동네에다가 조그마한 교회를 세웠습니다. 한 오륙십 명밖에 못 모이는 예배당이었습니다. 혹 어떤 때에는 목사가 있고 어떤 때에는 장로가 있었지마는 언제나 독조사(獨牧師 獨助師)는 써 보지를 못했습니다. 목사 한 사람이 그 지방에 네 교회를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한 달에 한 번 박에는 목사 얼굴이나 전도사 얼굴을 못 보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교회가 있었고 거기 교회와 같이 조그마한 학교가 설립되었고, 교회와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그 온 지방에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어려서 우리와 같이 자라나던 어린이들 가운데 지금 목사가 된 사람이 여덟 사람 있습니다.
그 작은 교회에서 말입니다……. 그 중 네 사람은 지금 서울에서 목사 일을 보고 있습니다. 다른 한 사람도 서울 근방에 있습니다. 인간적 견지에서 보면 그 때 조그마한 교회가 없었더라면 아마 이 네 목사가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개척교회의 보고를 들을 때에 三十명 모입니다. 四十명 모입니다. 이런 보고를 들으면 언제나 교회 구실 할꼬! 우리는 항상 이렇게 생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작은 교회라고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교회를 통해서도 큰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 교인 중 한 분이 전에 강원도 어떤 지방에 가서 무슨 일로 한 달 동안 계시다가 오셔서 그 경험을 저에게 말씀하는 가운데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어떤 군(郡)에 가보니까 면(面)이 일곱인데 한 면에만 교회가 있고 아직까지 여섯 면은 아주 산골이고 교회가 없더라고, 이 여섯 면은 아주 캄캄한데 이 사람들한테 도무지 무슨 말을 해도 통할 수 없고, 그저 막걸리나 사 먹어야 말이 통하겠다고……
그러기에 하는 말이 그저 교회 없는 면에 꼭 교회를 세워야 어서 민족이 깨지, 다른 길이 도무지 없다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농촌의 작은 교회라고 멸시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이 작은 교회를 통해서 장차 우리 민족을 구원해 주시고 장차 우리 민족의 장래를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작은 일의 날을 멸시할 자가 누구냐? 우리는 어떠한 작은 책임을 맡았든지, 어떠한 작은 성의든지, 어떠한 작은 친절이든지, 어떠한 작은 친절이든지, 어떠한 작은 의무든지, 이 작은 것을 잘 수행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 창립 十八주년을 맞이해서 十八년 전 영락교회를 회상하면서 우리가 다 이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一九六三년 十二월 一일)
Ⅵ-4 성경은 어떠한 책인가? (디모데 후서 三장 十-十七절)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三·十五-十七)
오늘 十二월 둘째 주일은 세계적으로 지키는 성서주일입니다. 이 날『성경은 어떠한 책인가?』한 번 더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물론 여러분께서 성경이 어떠한 책인 줄 대강 아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한 번 더 우리가 분명히 몇 가지를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모든 책 가운데 가장 많은 공격을 받은 책입니다. 사상적으로, 역사적으로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옛날 셀서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十八세기에 볼테르 같은 사람, 현대의 비판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성경을 공격하였습니다. 또 성경은 많은 박해를 받은 책입니다. 로마제국에서 큰 핍박이 있을 때 항상 성경을 빼앗아서 불살랐습니다. 중세기에는 천주교에서 성경을 박해했습니다. 보통사람이 읽지 못하도록 금했습니다. 근대에는 공산당들이 성경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금도 세계의 어떤 책보다도 제일 많은 방언으로 번역된 책입니다. 현재에 一,二0二방언으로 번역되었다고 합니다. 세계에 이렇게 많은 방언으로 번역된 책은 다시 없습니다. 또 지금도 성경은 세계의 어떤 책보다도 제일 많이 팔리는 책입니다.
요사이 말로 베스트 셀러입니다. 제가 알아보니 작년에 여러 성서공회(聖書公會)를 통해서 팔린 책이 四,八八七,四二八천 권이라고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만 발매된 수가 九,三三五,六六一권이라고 합니다. 세계에 이렇게 많이 판매된 책은 없습니다. 지금도 성경은 어떤 책보다도 제일 많이 읽는 책입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읽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성경은 무적의 책입니다. 十八세기 프랑스의 볼테르 같은 사람은『약 五十년 후에는 이런 책을 읽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혹평하는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五十년 후에는 그 사람이 앉아서 그런 말을 하던 집까지 성서공회가 되어서 성경이 마루에서 천장까지 가득 쌓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디모데 후서 二장 九절에 사도 바울이 기록한 바와 같이『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책은 하늘 아래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독일 무이(無二)한 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로 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인 까닭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후서 一장 二十一절에『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요한 복음 十四장 二十六절에 주님께서『보혜사(保惠師)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책이 많지만 이런 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이런 책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
둘째는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말이 아닙니다.
저의 학생 시절의 신앙 경험을 지금 회고해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제일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거기엔 개인의 전기와,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도 있으며, 시도, 문학도, 편지도 있고 여러 사람들의 말과, 심지어 마귀의 말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가? 하는 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 점점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온 우주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실재와 그 뜻을 나타내실 것만은 사실인 것입니다.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 영원히 침묵하실 리는 없습니다.
자연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느 정도까지 자기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시편 十九편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언어가 없어 들리는 것은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일반적으로 인간의 양심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그 뜻을 나타내십니다. 혹은 세계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 공의를 나타내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구속적인 뜻을 말씀으로써 히브리 백성을 통하여 분명히 나타내신 기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자기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삭에게 그러했고 야곱에게도 그러했습니다. 모세를 특별히 불러서 자기 자신을 나타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속하심으로 구속적인 하나님인 것을 더 분명히 나타냈습니다. 여러 선지자를 통하여 그의 의를 나타내시고, 가의 성품을 더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그 아들을 통하여 친히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요한 복음 一장 十四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 아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친히 인간에게 나타내시고 복을 부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여러 시대에 여러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계시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통하여 창조의 하나님을 나타내시고 출애굽기를 통하여 구속의 하나님을 나타냈습니다. 레위기를 통하여 순결의 하나님을 나타냈습니다. 이렇게 모든 책이 하나님을 나타냈습니다.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도 개인의 전기를 통해서도 모두 하나님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활동,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해서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실 말씀을 다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이 말씀의 중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의 중심은 구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은 장차 오실 구주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신약은 오신 구주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본 교회 이 광혁 장로님께서 신약성서를 한 장에 쓰셨습니다. 그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십니다. 신구약 성경을 다 한 장에 쓴다고 할지라도 그 가운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얼굴과 성품과 말씀과 생활로써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성경은 십자가에서 만민의 죄를 대속 하신 그리스도를 죄와 비참(悲慘)과 사망에서 헤매 이는 인류에게 보여주십니다.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넷째로 성경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시고자 하는 목적 하나입니다. 그리해서 요한 복음 三장 十六절의 말씀과 같이,『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요한 이 예수 님의 편지를 다 써 내려가다가 요한 복음의 끝에 가서,『만일 예수 님의 행하신 일을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하고 二十장 三十一절에는『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주신 목적은 인간을 죄악 가운데서 구속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 성경이 지금까지 많이 읽히고 보급되나요? 이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주 되시는 그리스도를 그려주십니다. 성경의 목적은 인간을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여서 새 사람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고자 하는 데에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 성경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어떤 축복을 받게 됩니까? 물론 여러 가지 고대의 역사와 문화도 배우게 되지만 그러나 제일 튼 축복은 누구든지 읽으면 이 가운데서 구주를 발견해서 죄를 깨닫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악인이 변해서 선한 사람이 됩니다. 음란한 사람은 성결한 사람으로, 거짓된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 됩니다. 살인 강도라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대로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세상에 위대한 서적들이 물론 많이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대학에서는 소위 위대한 책에 대한 과목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동서고금을 통하여 위대한 책들을 골라 통독을 시키는 그런 학교가 생겼다고 합니다. 플라톤이니, 단테니, 혹은 동양의 논어, 맹자, 도덕경 같은 책들을 한 번 읽어보도록 힘을 쓴다고 합니다. 세상에 위대한 책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책을 읽어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알고 구주를 만나서 새 사람이 되는 책은 성경 하나밖에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새 사람이 되었지만 아직 어립니다. 이 어린아이가 자라기 위해서는 도덕의 젖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젖이 필요합니다. 이 성경은 생명의 양식, 도덕의 젖입니다. 성경을 계속해서 읽을 때 심령이 자라고, 건강하고, 힘을 얻습니다. 성경을 읽음으로 모든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슬픈 일을 당할 대에도 위로를 받고, 사업에 실패하고 낙심할 때에도 새로운 용기를 얻고, 성경을 통해서 새로운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은 매일매일 좋은 음식을 먹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 신앙의 유일한 표준입니다. 전통도, 이성도, 어떤 감정도 신앙의 표준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 신앙의 표준입니다. 이단과 사설이 횡횡(橫橫)하는 이러한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앙의 정로(正路)를 밟아갈 수 있는가? 성경을 읽고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행위의 정확한 표준입니다.
성경에는 지고의 윤리가 있습니다. 최고의 도덕적 법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십계명을 비롯해서 산상보훈(山上寶訓)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간이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행해야 할 모든 규례(規例)를 분명하게, 똑똑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이 되게 하고, 생명의 양식이 되고, 신앙의 모든 행위의 표준이 됩니다.
전에 허다벌스 잉그설 이라고 하는 무신론자가 역시 무신론자의 친구 류 월리스 라는 대장에게 기독교를 반대하는 책을 쓰라고 권면 했습니다. 그 권면을 듣고 그런 책을 쓰기 위해서 우선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려고 성역부터 읽어보았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어 가는 가운데 생각이 점점 변했습니다. 나중에는 회개하고 오히려 성경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분이 예수의 생활을 묘사한 그 유명한「벤허」라는 책을 썼던 것입니다.
성경의 감화력은 이렇습니다.
성경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살펴보면 거의가 성경을 읽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전에 프린스턴에 찜 윌슨 박사라는 유명한 구약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프린스턴 대학의 학생들이 성경토론을 하려 왔습니다. 이 늙은 박사는 웃으면서『성경 토론하는 것은 좋은데 그래 도대체 성경을 몇 번이나 읽어봤나 요?』하고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고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박사가 정색을 하면서 하는 말이『나는 적어도 四十년을 밤잠 안 자고 몇 백 번을 읽고 연구해서 믿지 못할 것이 없는데 우선 몇 번 읽고 오라』했다고 합니다. 보통 성경을 읽지도 않고 반대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묵상해 보면 어려운 문제는 성경 자체가 모두 대답해 줍니다.
성경이 우리 사회에 주는 영향은 어떠합니까? 바로 내일 모래 十二월 十일에 세계 인권 선언 일이고 이 주간이 인권 옹호주간입니다. 한국에 있어서 얼마나 적절한 주간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인권 평등의 사상의 원천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이 가는 곳마다 인간의 죄와 무지와 정치적 사회적 모든 구속에서 해방했습니다. 노예제도는 없어졌고, 남존여비의 사상이 타파되었으며 만인평등의 사상이 사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민주주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전에 토마스 헉슬리의 말과 같이 성경은 가난한 자와 피압박자의 대헌장입니다. 인간은 성경 없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유의 대헌장인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성경은 박애와 자선사업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사회에는 병원이 생기고, 고아원이 생기고, 양로원이 생기고, 적십자사 운동이 생기고, 모든 인도주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이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도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는 곳에는 미신을 타파하고 학문의 연구를 권장케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누구나 성경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된 이후에 자연과학도 발전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최고의 문학과, 미술과, 음악과 같은 예술은 성경의 감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실도 우리는 압니다.
성경이 가는 곳이 그 사회의 도덕이 향상됩니다. 이렇게 성경은 국가 사회 도덕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때에 어떤 외국 사절이 와서『영국이 이와 같이 흥왕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니까, 여왕은 책상 위에 놓인 성경책을 가리키면서『저 책이라』고 했다 합니다.
성경은 오래된 책 같지만 항상 새로운 책입니다. 성경 가운데 새로운 진리가 무진장으로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성경 가운데 우리 인류가 찾아내지 못한 진리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十六세기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새로운 진리가 발견되어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고, 十八, 十九세기에는『온 세상에 가서 진리를 전파하라』고 하는 새로운 말씀이 발견되어서 세계 선교운동이 일어났습니다. 二十세기에는『교회는 하나』라고 하는 이 진리가 발견되어서 신 구교를 막론하고 이른바「에큐메니칼」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오래된 책 같지만 항상 새로운 책입니다. 교회는 성경을 중심 하여 부흥합니다.
성경을 상고하는 교회가 성공합니다.
교회는 언제든지 성경을 중심 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의 뜻이 여기 있습니다.
지난주간에 로마에서 제二차 바티칸 회의가 폐회되면서, 미사 때에 라틴어를 쓰지 않고 자기 나라 말을 쓰는 것이 허락되었고, 다른 교파와 결혼하는 것도 허락되었다고 하는 이런 좋은 소식을 듣고 우리가 다 환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성서의 빗 깔만 본 것에 불과합니다. 혼상(婚喪)문제, 마리아 예배문제, 미사문제. 교황 전제정치 문제, 이런 것이 좀더 성경에 가까이 와야 비로소 신구 교회의 합동문제는 선언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중심으로 교회가 돌아와야 합니다.
개인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이웃 사람이나, 감정에, 또는 행동에 너무 따라가지 마세요. 언제나 성경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실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전파하고, 성경대로 살고 죽어야만 합니다.
여러분! 성서주일을 맞이해서 이 몇 가지를 스스로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와 우리 가정에서는 이 귀한 성경을 매일 읽고 있는가 요?』
『주일 예배와 함께 성경공부도 하는가 요?』
『삼일 기도회에 참석해서 성경 공부를 하는가 요?』
『성경 보급에 협력하는가 요?』
기도하십시다. (一九六三년 十二월 八일)
Ⅵ-5 상한 갈대 (마태복음 十二장 九-二十一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마 十二·二十-二十一)
이 말씀은 이사야 四十二장 三절의 인용입니다.
거기 여호와의 종 곧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서 메시야의 온유한 성품에 대한 묘사의 일절 입니다. 성경에 갈대에 대한 말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일찍이『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들에 나갔더냐? 바람에 불리는 갈대냐?』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구약에는 종종 갈대 같은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고 하는 말씀이 또 있습니다. 갈대는 약한 것입니다. 약한 것의 한 상징입니다. 갈대 같은 애굽이라고 하는 말도 약한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 뜻입니다.『바람에 불리 우는 갈대더냐?』하는 말씀도 역시 그 의미가 포함 된 줄 생각합니다. 깊은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한 갈대입니다. 약합니다. 우리가「철권」이니 혹은「철각」이니「쇠주먹」이니 혹은「쇠다리」니 이런 말을 쓰지마는 인간의 체력이란 그리 튼튼하지 못합니다. 철석같은 의지라고 하는 말을 우리가 쓰지마는 인간의 의지는 약합니다. 이사야 四十장에 보면,
『땅의 거민 들은 메뚜기 같으니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도 약하다고 하는 뜻일 것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고 하는 말씀도 인생의 무상함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동시에 또 약한 면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우리 동양에 내려오는 초로인생(初露人生)이란 말이 있습니다. 풀에 이슬 같은 인생이라는 이 말도 역시 인생의 무상함과 연약함을 우리에게 여실히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갈대는 이렇게 약하니 상하기 쉽습니다.
모든 바람에 꺾이기 쉽습니다. 짐승이 한 번 지나가도 스쳐서 혹은 밟혀서 상하기사 쉽습니다. 인간이 역시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생의 폭풍우에, 혹은 천재와 지변에, 혹은 전쟁, 혹은 계속되는 혁명, 역경, 기근, 여러 가지 사고 등에 스치고 밟혀서 문자 그대로 육체가 상하고 심령이 깨어집니다. 누구나 상할 갈대입니다. 겉으로는 평온한 것 같지마는 그 속을 사실 알고 보면 어디나 상처가 없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갖은 유혹과 시험이 많은 이러한 세상에서 그 심령이 더럽힐 대로 더럽혔고, 상할 대로 상해서 신음하는 소리, 비명의 소리가 없는 가슴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다 상한 갈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 상한 갈대를 흔히 돌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꺾어 버리고 밟아 버리는 것이 보통이 아닐까 싶습니다. 상한 그릇은 내어버립니다. 병든 짐승은 혼자 죽으라고 내버려둡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매일 보도되는 우리의 사회 실정을 여러분이 보십니다.「적자생존」이니「자연도태」니「약육강식」이니 이런 말을 인류사회에까지 적용하게 끔 된 세상입니다. 생존경쟁에 낙오한 자는 넘어집니다.
상합니다. 죽습니다. 어떤 때에는 감옥에서 썩습니다. 심지어 상이 군이 예비역 대령이 분신자살을 하게 끔 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냉혹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여기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신 것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그 상한 갈대를 회복하여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고쳐 주시기를 힘썼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가 읽은 말씀 가운데서도 그렇게 바리새인들이 반대하는 것을 불구 하시고 손 마른 자를 불쌍히 여겨서 고쳐 주셨습니다. 문둥이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중풍병자를 일으키셨습니다. 소경을 보게 하였습니다. 절름발이를 걷게 만드셨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자의 그 상처를 고쳐주기 위해서 많은 애를 쓰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음 상한 사람을 불러서 상처를 고쳐 주시기를 힘쓰신 것입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시며 마음에 슬픔을 당한 이들을 위로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죄로 상한 인간을 꺾어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케 하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우리 주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 요한 복음 八장에 기록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아십니다. 예수 님께서 성전에서 한번 가르치실 때에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붙잡혀온 여자를 예수 님 앞에 끌고 와서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모세의 법률로 말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예수 님께서는 대답하시지 않으시니 이들은 속히 대답하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간음하다가 붙잡혀온 여자, 문자 그대로 상한 갈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아주 꺾어 버리기를 재촉합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얼마 후에 조용히 머리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되 없는 자 있거든 먼저 돌을 들어 저 여자에게 던지라.』
그리고 다시 머리를 숙여서 땅을 보시고 무슨 글자를 씁니다. 얼마쯤 후에 머리를 들어보니 한 사람 두 사람 슬며시 그 곳에서 다 헤어지고 그 여자만 홀로 섰습니다.『너를 정죄(定罪) 하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느냐?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아니하리니 돌아가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이른 아침 디베랴 바닷가의 일곱 제자에게 예수 님께서 나타나신 기록을 우리가 요한 복음 마지막 장에서 보게 됩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같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돌아올 때에 어떤 분이 나타나서,
『그물을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하는 말을 듣고 그 편으로 던지니 뜻밖에 많은 고기가 잡혀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입니다. 예수 님인 줄 제자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재빨리 언덕으로 혹은 헤엄을 쳐서, 혹은 배를 타고, 예수 님 선 곳으로 갔습니다. 그 때 베드로도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이 잡히실 때 베드로는 면목이 없었습니다. 장담하고 큰 소리쳤지만 그대로 하지 못하고 주님께서 붙잡히는 그 저녁에 정작 예수 님을 부인했습니다. 한 번뿐 아니고 세 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실수를 한 베드로가 예수 님의 얼굴을 대하니 자연히 머리가 숙여지고 풀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할 갈대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이 제자에게 다른 말씀을 묻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용히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믿음을 물었다면, 용기를 물었다면, 대답할 말이 없었겠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물었습니다. 다른 것 다 부족하지만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 마음에 있은 것은 사실입니다. 주님은 제자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아십니다. 이렇게 세 번 묻고『내 양을 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회복해서 귀한 직분을 다시 맡긴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갈대로 종이를 만들어 글을 썼습니다. 혹은 갈대로 피리를 만들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상한 갈대 같은 사람을 꺾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하여서 귀한 진리의 글을 쓰게 만들고 귀한 하늘나라의 노래를 만드셨습니다. 이와 같이 상한 갈대 같은 베드로를 다시 회복해서 오순절 하루아침에 三천 명을 불러서 회개시키는 위대한 사도를 만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상할 대로 상한 어거스틴 같은 청년을 불러 회복시켜서 一천년간의 기독교사상을 지배할 수 있는 위대한 신학자를 만든 것입니다. 진리의 붓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빈궁과 실패와 병과 슬픔과 죄에 상한 인간들을 불러서 죄를 사해 주시고 회복시켜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을 삼고 하나님의 꽃동산에 귀한 꽃을 삼는 것이 우리 주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배하게 되는 것도 오로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다 상한 갈대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있는 말씀도 잠깐 생각하십시다.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좀더 언어의 글자대로 번역하면『연기 나는 삼대를 끄지 아니한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불꽃은 없습니다. 그라나 불티는 아직 남았습니다. 적은 불티만 남았으니 연기만 납니다. 이런 작은 불티를 예수 님께서는 멸하지 않으시고 사랑의 숨결로 불어서, 성령의 바람으로 도와서, 불을 다시 일으키고 큰 빛을 발할 수 있는 등대를 만든다고 하는 뜻입니다. 두 가지 뜻으로 생각할 수 있는 줄 압니다. 하나는 아무리 사람의 눈에는 소망이 없어 보이지만 인간의 그 깊은 속에는 이 작은 불티가 있습니다.
양심이 아주 죽지는 않습니다. 그 마음속 어느 구석에 진(眞) 선(善) 미(美)에 대한 등경(燈 )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작은 불티를 일으켜서 회개케 하시고 새 사람을 만드십니다. 예수 님 당시에 여리고에 살던 사람은 아마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세리 장으로 유명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삭개오를 매국 자로 인정을 했습니다. 유대 사람의 돈을 거둬다가 이방 로마 사람에게 바칩니다. 그것도 여러 가지 불의와 토색(討索)을 행합니다. 탐관오리(貪官汚吏)입니다. 돈만 압니다. 권세에 아부하는 사람입니다.
소망 없게 보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예수 님께서 지나가신다고 하는 말을 듣고 역시 거리에 나왔습니다. 키는 작고 사람은 많아서 볼 수 없습니다. 예수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뽕나무 꼭대기에까지 올라간 것을 보면, 삭개오의 마음에 의를 사모하는 작은 불티가 있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꺼져 가는 등불을 다시 돋우어서 큰 들불이 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아들로 회복시킨 것입니다. 토색한 것을 사 배나 갚아 주고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 주고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회복시킨 것입니다.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원래「이 꺼져 가는 심지」라고 하는 뜻은「작은 믿음」을 의미하는 줄 생각합니다. 작은 불티같은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은 너무 작아서 불을 발하지 못합니다.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남을 위해서 무슨 봉사를 하지 못합니다. 주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지도 못합니다. 또 불티만 있으면 연기만 납니다. 그 연기는 우리 눈만 쓰리게 하여서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이 작은 믿음은 말하자면 그 연기가 많이 있습니다. 의심의 연기가 있고, 근심의 연기가 있고, 불평의 연기가 있고, 그리해서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보통사람은 이런 작은 믿음을 멸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믿음을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작은 불티라도 다시 돋우어서 빛을 발하게 만드십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실 때에 간질병 앓는 아들을 데리고 온 어떤 아버지가 예수 님께 부탁한 말씀을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제 아들이 중병을 앓아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 애를 고쳐 달라고 했더니 고치지 못했습니다. 혹 당신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길 바랍니다.』
예수 님 앞에 나와서,
『아 당신께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면……』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것이 믿음입니까? 반신반의하는 그런 믿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님께서 어떻게 하신 줄 아십니까? 그 말씀을 듣자마자 이내 하시는 말씀이,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는 것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할 때에 그 사람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주여 내가 믿습니다. 내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세요.』반신반의하는 작은 불티같은 믿음을 돋우어서 확실한 믿음을 만드셨습니다. 예수 님께서 이와 같은 일을 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러분, 의심하던 도마의 이야기를 모두 잘 아시지요. 열 한 제자만 있을 때에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에 도마가 외출했다가 돌아왔습니다. 열 제자가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노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도마는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나는 못 믿겠어! 나는 친히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고 그래야 믿지, 난 못 믿겠어』
의심했습니다. 의심하던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주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다시 도마가 있을 때에 나타났습니다. 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너 도마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를 만져보고 내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만져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고 말씀했습니다. 도마가 친히 만져본 후에 엎드려서 하는 말이,
『나의 주님이시여! 나의 하나님이로소이다.』
작은 의심이 나는, 연기 나는 심지 같은 그 믿음을 돋우어서 튼튼한 믿음의 사람 도마를 만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를 예루살렘에서만 하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틴에서만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멀리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여서 오늘날「말토마쳐지」라고 하는 큰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작은 믿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혹 여러분 가운데『나는 도무지 믿음이 너무 작아, 나는 의심도 많아』
이렇게 작은 믿음을 가졌다고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저 주님께 가까이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기도를 좀 더 힘쓰세요. 주님 앞에 좀더 가까이 나오세요. 성경을 좀더 많이 보세요. 그러면 주님께서 작은 믿음, 의심 있는 믿음의 그 불을 돋우셔서 점점 불길을 크게 만드시고 마지막에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빛을 미칠 수 있는 큰 믿음의 등대를 삼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혹 우리가 이런 작은 믿음이라고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 좀 의심한다고, 어떤 사람이 나 믿는 것과 좀 다른 얘기한다고, 어떤 사람이 좀 부족한 습관이 있다고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와 같은 믿음일수록 잘 돋우어서 튼튼한 믿음을 만들고 큰 등대를 만드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일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그 갈대를 회복하시고, 그 희미한 불을 돋우어서 큰 등대를 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이와 같은 정신 가운데서 살지 아니 하리 오 마는 특별히 이와 같은 계절을 맞아서 주님의 이 정신을, 이 성품을 우리도 좀 배워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와 같은 계절에 병난 사람들을 위해서, 그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서, 모든 죄인들을 주님 앞에 구원해 내기 위해서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도 이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쌀을 모으는 것도 이러한 목적이 있는 까닭입니다. 이 계절에 작은 믿음 있는 이들을 북돋워 주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솔선수범해서 상한 갈대, 스치고 밟힌 불쌍한 이들을 함께 붙들어 주어야 되겠습니다.
미국에 유명한 여류 소설가 펄벅 여사가 한국에 대한 소설을 쓰셨지요.
펄벅 여사는「더 리빙 리드(The Living read), 살아 있는 갈대」에서 우리 민족을 갈대로 보았습니다. 갈대로 삼아 있다고 하니 소망은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상한 갈대입니다. 三八선으로, 六·二五로, 거듭되는 혁명으로, 거듭되는 실정으로, 경제파탄으로 상했습니다. 그 상처가 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낙심하고, 어떤 이는 절망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범죄는 더욱 더 격증해 갑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해외로 피하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 상한 갈대를 구할 이가 누구며, 이 꺼져 가는 민족의 혼을 다시 북돋울 이가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님뿐이며 우리 주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님만이 우리 민족을 다시 살려 밝은 빛을 비취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다 주님께 나와서 새 사람이 되어야, 주님의 정신을 가지게 되어야, 제三공화국도 바로 건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一九六三년 十二월 十五일)
Ⅵ-6 크리스마스의 예고 (이사야 九장 一-七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九·六)
구약 전체를 통해서 메시야 곧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이사야서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예언이 가장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가운데서 우리는 메시야의 수난과, 메시야의 황국에 대한 말씀과, 메시야의 탄생에 대해서 우리에게 예언하는 말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가운데 이렇게 그리스도에 대한 구절이 여럿 있지마는 그 가운데서도 제가 보기에는 오늘 아침 읽은 구절이 제일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예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는 이 구절 가운데서 크리스마스에 대한 예고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미 들으신 바와 같이 이 구절가운데 보니, 한 아이가 났다고, 한 아들을 보내신 바 되었다고, 그 어깨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들은 그 다음에 기록하였는데 기묘자(奇妙者)라, 모사(謀士)라,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永存)하신 아버지, 평강(平康)의 왕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이 내용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이 성탄 계절을 맞이하여 우리가 마땅히 깨달아야 할 진리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일 먼저,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이와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이 예언을 한 지 약 七백년 후에 문자 그대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한 아기가 탄생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장성한 사람으로 오실 수도 있은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아기로서 탄생하셨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인간의 경험을 가지시려고 하는 목적이 있은 줄 압니다. 또는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우리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려고 하는 목적도 있은 줄 생각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어른들의 거주만 아니요, 아기들의 구주요, 인간 전체의 구주가 되신다고 하는 뜻도 있을 줄 생각합니다. 하여간 그리스도는 아기로서 탄생하셨습니다. 아기로서 탄생하셨으니 참 사람입니다. 인성의 표시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둘째 구절은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 편으로 보면 아들을 세상에 주셨습니다. 선물로 보냈습니다. 마리아에게서 아기로 낳았으니 참 사람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보내신 바 되었으니 참 신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메시야는 참 사람이요, 또한 참 신으로서 도성인신(道成人神)하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그 어깨는 정사를 메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정사」라고 하는 말은「정부」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의 어깨는 정부를 담당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통치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왕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두 가지 의미에서 왕이 되십니다.
첫째는 신령한 의미에서, 그는 신령한 영의 나라, 천국의 왕입니다. 천국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건설되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도 확보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스리는 나라입니다.『내 나라는 세상 나라가 아니니라』하는 말씀은 영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이 천국은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확보가 되며, 발전이 됩니다. 그러나, 보이는 교회와 전혀 돌일시 될 수는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신령한 교회와 동일시할 수 있는 진리의 왕국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신령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둘째로는, 보편적인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서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또 우주를 다스리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우주의 왕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일월성신을 다스리시고 천왕성 해왕성을 다스리십니다. 인간의 역사를 주재하십니다. 그리해서 세계역사를 천국 완성의 목적을 위해서 인도하시고, 다스리는 중에 계십니다. 그러다가 요한계시록에 보는 바와 같이 최후에는 세상의 나라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만 왕의 왕이 시요, 그 어깨에 정사를 멘 분이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참 사람입니다. 그러나, 참 신이십니다. 만 왕의 왕이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제 그 다음에 계속해서 그 이름들을 열거하였습니다.『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고 일컬음을 받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름 하나 하나가 그리스도의 신분과, 그 인격과, 그 성품과, 그 역사를 우리에게 표시하여 주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그를「기묘자」라고 부르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 뜻은 신비하다고 하는 뜻입니다. 오묘하다고 하는 뜻입니다. 놀랄 만하다고 하는 뜻입니다. 여기 영어 성경에는 그저 알아듣기 쉽게「원더플(Wonderful)」이라고 하는 말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성품,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너무나 초월하고 너무나 오묘해서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고, 우리가 다 설명할 수 없고, 그저 놀랄 만한 분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금강산을 처음으로 가서 바라볼 때에 너무 웅장하고, 너무 장엄해서 그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고『아아 과연 훌륭하다!』이렇게 감탄하는 것과 같습니다.
미국에 가보면 뉴멕시코(New Mexico)와 아리조나(Arizona)사이에 그랜드 캐년(Grand Canyon)이라고 하는 대 협곡이 있습니다. 대 협곡이라고 하는 말은 물론 듣지마는, 정작 가서 척 그 협곡을 한 번 내려다보면 그저 갑자기 一마일 깊이 땅이 파져서 十마일 내지 三十마일 넓이를 볼 수 있습니다. 그저 보는 사람마다 입을 벌리고「아!」하고 감탄합니다. 혹은 우리가 위대한 음악을 들을 때도 그런 감정에 휩쓸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란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직 놀라운 것뿐입니다. 가령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그 사실만을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말씀이 육신을 입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더라.』우리가 이 말씀을 읽기는 읽지만, 우리가 그 깊은 뜻을 다 깨달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육신을 입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이 되시고 인간 가운데도 어린아이가 되어서 탄생함을 입을 수 있고, 탄생을 하시되 어떻게 마구간에 날 수 있습니까? 그 누운 첫 자리가 구유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놀랄 만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 뜻을 다 깨닫지 못합니다.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서 육신을 쓰시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말씀은 우리가 읽기는 읽지마는 다 깨달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이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하신 일을 바라볼 때에 역시 그렇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을 여러분, 바라보십니까? 이렇게 참 신이요, 참 사람이신 이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버림을 받고, 모략을 당하고, 침 뱉음을 입고 매를 맞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면서 죽은 이 사실을 우리가 바라볼 때에 우리가 이 뜻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까? 사흘만에 무덤의 열리며, 부활하심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를 우리가 다 깨달아 알 수 있습니까? 四十일 후에 이 땅을 떠나 하늘로 승천하는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우리가 다 깨달아 알 수 있습니까?
몇 해 전에 감란산 꼭대기에 가보았을 때, 거기에『이 곳에서 바로 승천하셨습니다』라고 돌로 표적을 해 놓은 그런 곳을 보았습니다. 조용히 서서 예수 님의 부활과 승천을 묵상할 때에 묵상을 할 수 있지마는 그 모든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까? 그저 기묘 자입니다. 오묘하고 신비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초월하시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이와 같은 경이의 날입니다. 놀라운 날입니다.
그 다음에 기록한 이름이「모사」라고 하였습니다. 모사라고 하는 문자의 뜻은 무슨 일을 도모하는 선비라고 하는 뜻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사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에는 권모술수(權謀術數)라는 이런 생각이 이내 머리에 들어와서 그렇게 좋게 생각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하지 말고, 좋은 의미로서의 그리스도는 모사입니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혹, 고문(顧問)이라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혹은 상담자라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 영어에는 좋은 말이 있습니다. 카운셀러(Counsellor)라고 하는 뜻입니다. 무슨 일을 잘 의논해서 옳게 지도하는 분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온갖 지혜가 풍성하셔서 어떤 환경, 무슨 일을 당할 때라도 꼭 옳게 보시고, 최선의 길로 우리를 지도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잠언 八장 一절에『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明哲)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했습니다. 이거 지혜는 그리스도를 의미한 말씀입니다. 인생의 행로에는 갈래길이 많고 세상은 변태(變態)무쌍(無雙)하며 종종 우리는 갈 바, 올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때에 우리의 길을 지도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최선의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상담을 할 수 있는 이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여러분,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줄 압니다. 솔로몬이 세상을 떠난 후에 젊은 사람 르호보암이 대를 이어서 왕이 되었습니다. 왕위에 올라간 후에 민간대표 몇 사람들이 와서 호소를 합니다.『이미 가신 선왕께서 좋은 일을 많이 하셨지만 너무 백성들에게 고역을 많이 시키셔서 우리의 짐이 너무 과중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왕께서는 어떻든지 앞으로는 우리의 짐을 좀 적게 지워주시기를 바랍니다.』하는 호소가 들어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 르호보암 왕께서는『사흘 후에 내가 대답할 터이니 사흘만 있다가 다시 오라』고 내 보냈습니다.
그 동안 본래 솔로몬 시대에 재상 노릇하던 늙은 신하들을 불러서『민간 대표들이 와서 이렇게 호소를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 주었으면 좋겠는가?』하고 의논을 했습니다. 그 때에 그 늙은 재상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아 과연 그렇겠다고 하면서『그러니까 이 다음에 그 대표들이 오면 왕께서는 부드러운 말로써 내가 앞으로는 여러 백성에게 짐을 과중하게 절대로 지우지 않겠다고 하시고, 왕께서 이떻든지 백성의 종이 되어서 백성을 잘 섬기세요. 그러면 이 백성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이렇게 좋은 권면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이 왕은 그 이튿날쯤이 되겠지요. 자기하고 같이 자라난 젊은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젊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내가 어떻게 대답을 하면 좋겠는가?』물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젊은 사람들이 대답하는 말이』처음부터 그렇게 백성들한테 약하게 보이면 안 됩니다. 아예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야 됩니다.』그러면서 그저 어떻게 나갈꼬 하니, 민간 대표가 오면『내 새끼손가락이 우리 아버지 허리보다도 더 굵다. 우리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했지만 나는 전갈로 징계한다.』이렇게 대답을 하십시오. 이런 권면을 했습니다. 그러니 르호보암이 젊은 사람이라 그 말에 귀가 솔깃했던 모양입니다. 민간 대표가 온 다음에 꼭 그대로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야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요? 十二지파(支派)가 모여서 이스라엘 나라가 되었는데 十二지파 가운데 十지파가 배반하고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민족이 분열되었습니다. 국토는 양단 되었습니다. 국가는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지혜 있는 의논할 사람이 있어서 그런 분과 의논하고, 그 지혜 있는 이의 권고를 받는 사람이야말로 행복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 가운데서 이런 사람을 찾으면 좋지마는, 우리는 그와 같은 실수 없는 상담 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언제든지, 어떠한 환경에 있든지 항상 옳은 지도를 해주실 분은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하든지 그리스도에게 가서 의논해야 됩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꼭 해주세요.』주님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기도로 아뢰고, 묵상으로 기다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뜻을 찾기 위하여 힘쓰고, 어떻든지 주님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개래야 실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모사로 해서 그의 지도를 항상 받으며 우리가 나이 많아진다고 할지라도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되니 않을 것입니다. 학식이 많다고 해도 거만한 마음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나이 어리다고 해도 혈기로 혹은 담기로 무슨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좋은 모사입니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가든지 꼭 최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르쳐 줄 때 순복(順服) 합시다. 순복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무슨 말이 있어요?『전능하신 하나님이라』이런 이름도 가지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 무소 불능의 권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몰로 술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로 五천 명도 먹일 수 있습니다. 물위로 걸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신약에 나타나는 모든 병든 자를 고친 것은 무슨 심리요법이나 정신요법으로 고친 것입니까? 전능하신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고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리스도는 모든 악의 세력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 보기에는 소망이 없는 사람이라도 능력으로 그런 영혼도 구원해 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전능하시므로 우리 인간의 죄악이라도, 우리의 실수라도 초월 통치를 해서, 그의 뜻을 이루시고 전화위복의 축복을 주실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전능하시므로 우리의 모든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전능하시므로 우리의 모든 짐을 져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전능하시므로 인간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꿔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전능하신 주님을 의지하고 어떠한 환경에서나 절대로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능하신 주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다음에 있는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영존하신 아버지』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계셔서, 아버지 같이 그 자녀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고 하는 뜻입니다. 요한 계시록 一장 八절에『나는 알파와 오메가라(처음과 나중이라).』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영원히 살아 계셔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금생(今生)과 내생에 주 너를 지키리』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히브리 七장 二十四절에『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히브리 十三장에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내가 과연 너희를 보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마음을 지니시고 그 자녀 된 사람을 끝까지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언제든지 우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일을 당하든지 과히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말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존하신 아버지 같으신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름이 하나 더 있습니다.『평강의 왕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나시던 새벽에 천군 천사의 노래의 내용을 기억하시지요?『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죄의 담을 무너뜨리심으로써 먼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회복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죄로 말미암아 늘 불화와 공포가 가득했었는데 그 죄를 다 사하여 주시고 성령을 주심으로 우리 마음에 평화를 회복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담이 있었고, 죄 있는 사람들이 서로 싸워서 가정에 불화가 있었고, 국제간에 불화가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죄의 담을 없이함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회복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평화가 있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회에도 평화가 있게 되었고, 국가와 국가간에 평화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환경 가운데 있든지 온전히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는 우리가 늘 부르는 찬송과 같이
『내 영혼이 은총 입어 모든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천국으로 화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마지막으로『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우리라고 하는 말이 거기 있습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우리에게 라고 한 말을 잊지 맙시다. 이 아기가 우리에게 났습니까? 우리가 이 아기와 상관이 있습니까? 이 아기가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습니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내가 이 아기를 영접합니까? 이 아기가 내 소유가 되었습니까? 옛날 베들레헴 사람들처럼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는 하지마는 저 마구간―마구간 위에서 영접합니까?
성탄계절을 통하여 이 구주를 우리 중심에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메시야,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요, 참 신이시요, 만 왕의 왕이 시요, 기묘자시요, 모사 시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시요, 영존 하신 참 아버지 시요, 평강의 왕이십니다. 크리스마스는 이와 같은 분이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이 성탄 계절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 주님이 나고 우리 안에 이 주님이 과연 오시면, 금생과 내생에 모든 축복은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탄 계절에 이와 같이 축복을 받고 이 축복을 우리 모든 동포들 사이에 나누어 줘야 되겠습니다.
(一九六三년 十二월 二十二일)
Ⅵ-7 성탄의 깊은 뜻 (요한 복음 一장 一-十四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一·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리라.』(요 一·十四)
이 두 구절은 성경에 가장 유명한 구절 가운데 속하는 구절들입니다. 그 뜻이 깊습니다. 무궁무진합니다. 사실 제한된 인간의 이성으로 그 뜻을 다 캐어낼 수 없는 구절들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대로 이 뜻을 잠깐 생각하여 보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들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두 구절가운데 말씀이라고 하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내용을 보아서 이 말씀은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왜 말씀이라고 사도 요한 이 지적하였는가? 그것은 그때에 유대교적 배경도 없었고, 헬라 철학의 사상적 배경도 없어서 그 시대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알리는데 말씀이라고 하는 로고스(Logos)가 제일 적절해서 이런 말을 쓴 줄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런 배경을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는 절 압니다. 가장 간단하게 생각해 보면 왜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하셨나? 두 가지 이유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말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 나와 서서 입을 봉하고 그저 서 있다고 하면 여러분께서 제 속에 있는 생각을 아실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말을 하니까 여러분께서 내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은 생각의 표현입니다.
둘째로 조금 깊이 생각하면 실상 말이 곧 생각입니다. 말은 마음속에서 조용히 하면 그것이 생각입니다. 생각을 남이 알아듣게 하면 그것이 말입니다.
왜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하셨는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가 우리 사람의 생각과 말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생각인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여실히 나타내는 것입니다. 말은 곧 생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실상은 하나님과 하나인 까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가 우리 인간은 일찍부터 하나님을 찾는 동물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종교성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 이 종교성이 있기에 짐승과 다릅니다. 영원히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구약성서 가운데 욥기라고 하는 책은 특별히 인간 심령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는 인간의 생생한 체험의 기록입니다. 욥기 二十三장에 보면 욥이 부르짖기를『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애쓰는 그 깊은 탄식이 여기에 있습니다.
옛날 애굽 어떤 신전 정문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 있었다고 합니다.『나는 현재에도 있고 과거에도 있었고 장래에도 있으리로다. 그러나 아무 육체나 내 얼굴의 수건을 벗겨 본 이는 없느니라.』하나님의 얼굴에 가리워 진 수건을 인간으로서 벗겨본 이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十七장에 보면 헬라 사람들이 많은 우상을 섬기며 많은 신을 섬기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의 단을 쌓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헬라 모든 철학자들과 모든 종교가들의 절망적인 고백입니다. 그 많은 철학과 종교 사상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 안에 계시고 우주를 초월해 계시지마는, 역시 하나님은 이 우주 안에 감추어졌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한국 청년으로서 미국에 가서「순교자」라고 하는 책을 써서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 신문기사를 여러분이 다 읽으셨겠고, 또「순교자」라고 하는 책을 읽어 본 이도 많을 줄 압니다. 그 책이 인기를 끈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아마 六·二五를 배경으로 하고 쓴 까닭이요, 또 한 가지는 그 가운데 인간의 심령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는 이 욥기와 비슷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석한 것은 결국 이 책에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물질문명에 중독 된 현대 인간들의 소위 현대 실존주의의 절망적인 고백을 이 책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마치 내 생각을 내가 말하기 전에 여러분이 찾아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은 말하는 이가 있어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리해서 요한 복음 一장 十八절에 보면『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獨生)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 一장 一절 이하에는『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며 보여주시는 까닭으로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낼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가 누구기에 능히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는가? 거기 대한 대답이 요한 복음 一장 一절에『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태초부저 계셨습니다. 여기「태초」라고 하는 말은 창세기 一장 一절에『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는 그 태초보다 훨씬 초월하는 태초입니다. 창세기 一잘 一절의 태초는 오래 전은 오래 전이지마는 역사상의 한 시점에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했습니다. 여기에 태초라고 하는 말은 그것을 초원해서 그리스도는 영원부터 계시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 신학 상으로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의 교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니『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하였습니다. 신학 상으로 보면 한 하나님이시지마는 그 안에 다른 품격으로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곧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관계로써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같이 계셨습니다.
셋째로 하는 말씀이『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곧 하나님은 하나,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가 있으나 실상은 한 몸 일체를 말합니다. 왜 그리스도만이 이 하나님을 우리 인간에게 나타낼 수 있었겠는가? 그리스도는 이렇게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요, 곧 하나님과 한 분이신 까닭입니다. 물론 이 진리는 인간의 제한된 이성을 초월하는 진리로서 우리가 다 해득하기는 어려운 진리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는가? 하나님을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는가? 一장 十四절이 거기 대한 대답을 우리에게 줍니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이 영원 전부터 계시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지리야말로 천사도 놀랄 만한 진리입니다. 사실입니다. 영원부터 계신 이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신 이 말씀, 아니 곧 하나님이신 이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육신을 입었습니다. 육신 곧 물질,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갈 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는 이 육신, 약하고 썩을 인간이 되셨습니다. 실로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사실입니다.
이 일은 너무 놀라와서 사실 초대교회에서도 이 진리를 그대로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런 이들은 소위「가현론(假現論)」을 주장했습니다.『그리스도께서 입은 육신은 실상 우리 인간의 물질인 육신과는 다르다. 곁 모양만 물질과 같았다』고 이렇게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 은 요한 一서에서 그런 사상이야말로 이단(異端)이라고 배격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사실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었다고, 화육(化肉)이 되셨다고, 화신이 되셨다고, 수육을 하셨다고, 이렇게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신비의 신비요, 오묘(奧妙)의 오묘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기독교사상의 중심이 되는 큰 신비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아멘 하고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 되셔서, 또 참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는 여기 기록하기를『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말씀하였습니다. 여기 거하신다고 하는 그 뜻은 본래 글자의 뜻이 장막을 친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출애굽기를 읽은 분은 다 아십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올 때에 천막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많은 천막 가운데는 큰 천막이 하나 있었는데 이것은 성막(聖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성막 위에는 낮에는 구름이 항상 임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밤에는 구름이 빛으로 변해서 불기둥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성막 위에 임재(臨在)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올 때에 이렇게 하나님께서 장막 가운데 친히 임재 하고 계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주시고 보호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의 한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될 때에 하나님 자신이 육신의 장막을 입으시고 이 인간세상, 광야 같은 세상에 친히 오셨습니다. 같이 주무시고, 같이 일어나시고, 같이 잡수시고, 마시면서, 같이 살았습니다. 이러시면서 병자를 고쳐주시고, 슬픈 자를 위로해 주시고, 죄 있는 자를 사하여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마지막에는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 해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또한 다시 사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떠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마는 가장 간단하게 사도 요한 의 기록을 보면, 세 가지 면을 특별히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는『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고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품,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스도의 생활, 그리스도의 행하신 모든 일은 오직 사랑입니다. 그는 원수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을 압니다.
둘째는『하나님은 빛이시라』고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에게는 털끝만큼도 어두운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주와 인간의 깊은 참된 이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윤리와 도덕, 인간의 갈 옳은 길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빛이신 것을 우리는 보고 깨닫습니다.
셋째는『하나님은 생명』인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 가지 일을 하셨지마는 장례식 거행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언제든지 죽은 자를 만나면 살려 주셨습니다. 또 자기 자신이 부활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죽음이 없으시다 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 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 안에서는 다 산다고, 하나님은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 성탄의 깊은 뜻과 그 정신은 무엇입니까? 가장 간략하게 세 가지로 기억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첫째는 성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 죄악 세상에 오신 사실을 우리가 기억할 것입니다. 전에도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께서 종들을 보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엘리야도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종입니다. 여러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집의 종들을 인간을 위해서 보내서 진리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될 때에, 하나님의「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그 아들이 친히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죄와 고통과 사망에 허덕이는 인류를 구하시려고 친히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을 방문하셨습니다. 성탄의 정신은 친히 오시는 것입니다.
병자에게 약을 보내서 도와주는 것도 좋지마는 그 약을 친히 가지고 가서 치료해 주는 것이 성탄의 정신입니다. 슬픈 자에게 대신 사람을 보내서 위로하는 것도 좋지마는 내가 친해 가서 위로하는 것이 성탄의 정신입니다. 가난한 형제에게 금품을 보내서 도와주는 것도 좋지마는 내가 친히 가서 도와주는 것이 성탄의 정신입니다. 돈을 내서 전도 인을 세워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좋지마는 내가 친히 가서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성탄의 정신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화신, 화육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다만 하나님은 사람이라고만 가르쳐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친히 사랑의 화신이 되셔서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말씀, 그의 생활, 그의 행사는 다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보고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생명을 설명만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자신이 생명의 화신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는 진리에 대해서 단순히 설명만 하지 않았습니다. 친히 말씀하시기를『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말씀했습니다. 가는 진리의 화신입니다. 성탄의 정신은 신령한 의미에서 유지되는 것입니다. 화신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사상이 좋지마는 사상만은 부족합니다. 사랑이 내 몸에서 육을 입어서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왜 일생동안을 아프리카 정글 속에 가서 흑인들의 헌데를 씻어주며 그들의 병을 치료해주는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를 온 세상이 존경합니까? 그의 생활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다시 육을 입었습니다.
정의도 육을 입어야 합니다. 왜 오늘날 미국의 흑인으로서 민권운동의 지도자인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온 세계가 존경하고 그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었습니까? 그의 생활에서 정의가 육을 입었습니다. 정의감만은 부족합니다. 정의감이 육을 입어서 실현이 되어야 합니다. 왜 三·一운동을 일으킨 三十三인 우리 민족 대표를 우리가 존경합니까? 그들의 생활 가운데는 자유와 독립의 정신이 육을 입었습니다. 관념만은 부족합니다. 사상만은 부족합니다. 고상한 관념과 고상한 사상이 육을 입어서 이 사회에서 오늘날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탄의 정신입니다. 관념적 신앙만은 부족합니다. 육을 입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시도 마구간에 먼저 오셨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닌 줄 압니다. 온 세상이 다 마구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마는 이 세상 가운데도 가장 천한 데 먼저 왔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정신입니다. 불쌍한 사람 가운데도 가장 불상한 사람을 먼저, 가난한 사람 가운데도 가장 가난한 사람을 먼저, 불쌍한 사람 가운데도 가장 불쌍한 가장 가난한 사람을 먼저, 병중에 있는 이 가운데도 가장 슬픔이 큰 사람을 먼저, 죄인 가운데도 죄가 큰 사람을 먼저 방문하는 것이 성탄의 정신입니다.
一九六四년의 성탄을 우리가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정신으로 이 성탄을 맞이하려고 합니까? 우리가 성탄의 깊은 뜻을 깨닫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오신 이 사실, 하나님이 친히 인간을 방문하신 이 사실, 육을 입고 오신 이 사실, 마구간을 먼저 방문한 이 사실을 우리가 기억합니까?
우리 개인으로, 우리 가정으로, 우리 각 구역에서, 우리 교회 전체가 금년은 이 성탄의 정신으로 금년의 성탄을 맞이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야 크리스마스에 오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一九六四년 十二월 二十일)
Ⅵ-8 빛 가운데 행하라 (요한 一서 一장 一-十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一·六-七)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 아침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우리가 새해 첫 주일의 날로 이처럼 모였습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피차에 복을 빌고 흔히 소망을 말하고 또는 소원을 말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앞길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입니다. 개인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의 가는 길은 옛날 아브라함이 하란 을 떠나서 가나안을 향해 갈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고 한 것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내일 일을 모릅니다. 금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국제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국내적으로 무슨 일이 생길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우리의 갈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어두운 우주에 빛을 주신 하나님께서 어두운 인생 길에도 빛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빛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여기 요한 一서 一장 七절에 사도 요한 이『빛 가운데 행하라 빛 가운데서 걸어가라』고 우리에게 권면(勸勉) 하십니다. 그 뜻은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햇빛에는 여러 가지 광선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광선은 눈으로 볼 수 있으나 어떤 것은 볼 수 없는 적외선이니 자외선도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도 몇 가지 광선이 있는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진리의 광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의 광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도덕적으로 순결의 광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관선이 있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라』의 뜻은 빛은 밝아서 빛 아래서는 모든 것이 자세히 보입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 아래서는 보통 때는 볼 수 없는 작은 먼지까지도 보입니다. 빛 가운데 행하라고 하는 말은 언제단지 이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 즉 진리와 의와 순결과 사랑의 이 빛 아래에서 나 자신을 살리고, 내가 사는 주위를 살리고, 내가 당면한 문제를 바로 보라고 하는 뜻입니다.
나 자신을 빛 아래에서 바로 보는 목적은 나 자신에 어두운 무엇이 없는가 살피라고 하는 말입니다.『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방금 여러분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진리와 의와 성결(聖潔)과 사랑의 빛 아래에서 내 마음을 살피고 내 말을 살피고 내 행실을 살펴서 이 가운데 어찌 어두운 무엇이 깃 들었으면 이것을 없애라는 말입니다. 죄를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어두움의 세력은 내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는 주의에 있습니다. 내가 사는 환경에 있습니다. 내가 사는 주위에서, 내가 사는 환경에서, 내가 하는 사업, 직장에서 내가 처해 있는 어떤 곳이든지 그 곳에서 이 빛 가운데 모든 것을 살펴서 어두움의 세력, 불의의 세력 불결의 세력, 모든 부정한 세력, 부패의 세력들을 밝히 보고 내가 빛의 아들로서 이것들과 싸우고 이것을 제지하기 위해서 바로 살라는 그 말입니다.『빛 가운데 행하라』고 합니다. 행하라고 하는 것은 전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자신의 생활에도 진보가 있고, 내 환경과 내 사업 및 직장에서도 모든 것을 빛 아래에서 바로 분석해서 모든 불의와 어두운 세력을 정리하면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중퇴하지 말고, 중단하지 말고 타협하지 말고, 끝까지 싸우라는 말입니다.
그리해서 이 땅의 자유를 지키고 이 땅이 어떻든지 정결한 땅이 되게 하고 이 땅에서 참된 민주주의를 수호하라는 말씀입니다. 빛 가운데 행하라는 말은 계속해서 싸우면서 나아가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빛 가운데서 행하며 나아가게 되면, 마치 물위에 햇빛이 비쳐서 물 속에서 해를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혹 우리를 볼 때에 우리 가운데서 햇빛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햇빛 아래에서 즉 하나님의 빛 아래서 내 생활을 살피면서 나 자신을 깨끗케 하고, 내가 사는 그 환경을 깨끗케 하며, 나아갈 때에 예수 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빛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반사하는 빛으로 너희 주위를 밝히면서 살라고 하는 그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겠다고 했습니다. 빛으로 향해서 나아가며 빛 가운데서 걸어가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사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있습니다. 동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천국의 사회가 있습니다. 교제가 있습니다.
동양의 성현도 일찍이 하신 말씀 가운데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빛 가운데서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사귐이 있습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를 본다면 처음에 예수를 믿을 떼에, 내가 교회에 들어가서 예수를 믿게 되면 전에 사귄 친구를 다 잃어버리지 않을까? 외로와 지지 않을까? 이런 염려를 하는 사람도 혹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빛 가운데 행하게 되면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들과 같이 사귐이 있습니다.
세상에도 물론 사귐이 있습니다. 세상의 사귐은 대체로 어떤 권세를 중심 한다든 가, 이익을 중심 한다든 가 혹은 취미를 중심해서 사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당이 생기는 것이고, 그래서 경제단체도 생기는 것이고, 그래서 운동단체도 생기고, 사회단체, 문화단체가 생기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사귐은 권세가 없어지고 이익이 없어지고 취미가 달라지면 다 무너지고 맙니다.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사람들의 사귐은 무너질 때가 없습니다. 영원히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가 또한 이런 사귐에 대해서 생각할 것은 언제든지 죄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나뉘게 합니다. 부부간에 죄가 들어올 대에 부부도 서로 이혼하는 수가 있습니다. 부자간에 죄가 들어올 대에 부자도 서로 불상견(不相見)하게 되는 경우도 없이 않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친구 사이에도 죄가 들어올 때에는 그 친구가 나뉘어지게 됩니다.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사람들의 사귐만이 참으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성도의 교재, 성도의 사귐이 매우 필요합니다. 이것은 피차에 도움이 됩니다. 또 한 가지고 힘을 합해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두운 세력과 싸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도 이런 말을 한 줄로 생각하는데 여기 우리말로는 적절한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지만 영어에 썸바디(,Somebody)라는 말이 있고, 노바디(Nobody)라를 말이 있습니다. 그 섬바디 라고 하는 말은 좀 아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아무개가 우리 동네 썸바디 하면 좀 아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노바디 라는 사람은 누군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되 어떤 교회의 교인이 되었으면 그 교회 안에서 썸바디 가 되어야 합니다. 좀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에 와서 같이 예배를 보지만 다른 사람이 전연 모르는 노바디 가 되면 그것은 성도의 교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와 같은 좀 큰 교회에서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이 성도의 교제를 가지는 게 필요한데 성도의 교제를 가지려고 한다면 여러분께서 여러 단체에 가입해서 함께 활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여러분이 들어오실 때에 주보를 다 받으신 줄 압니다. 여기 각 성경공부반의 장소와 시간을 연령에 따라서 참여할 수 있게 안내해 놓았습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들어가서 같이 성경도 공부하고, 피차에 서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빛 가운데서 행하는 이들에게는 빛의 사귐이 있습니다. 이 사귐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내게도 필요하지만 피차에 사귐을 통해서 힘을 합해 이 세상에서 어두움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데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와 같이 사귀는 생활을 계속하게 되면 우리는 좀더 깨끗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사회의 어떤 사귐은 오히려 사람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더럽게 합니다. 그런 단체도 있습니다. 그런 모임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도의 사귐은 깨끗하게 만듭니다.『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하는 이 말씀은 간단하게 말하여 두 가지 의미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여기의 그리스도의 피라고 하는 말은 십자가의 보혈을 의미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보혈을 흘리고 속죄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그 때에, 다시 말하면 죄를 회개할 때에 과거의 모든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과거의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칭의(稱義)의 교리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의롭다 함을 일컬음 받았다고 하는 그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과거의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았다고 하지마는 그랬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가운데 옛 사람이 아주 죽은 것은 아닙니다. 죄의 잔재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아주 완전히 성결한 자리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성결한 자리에 이르는 것은 매일매일 회개한 다음에 계속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그리스도의 피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보면 피를 항상 생명을 의미했습니다. 우리가 주를 믿고 예수를 내 구주로 받게 되면 예수 님의 새로운 생명이 우리의 심령 가운데 들어와서 옛 사람은 점점 죽어 없어지게 만들고 새 사람은 점점 힘을 얻어서 건강하게 만듭니다. 이것을 성화의 교리라고 합니다. 점점 거룩하여진다는 뜻이 있습니다. 아마 여기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는 뜻은 이 후자의 의미가 더 많은 줄 생각합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말하면 그리스도의 순결한 그 피가 우리의 심령의 혈관 속에 들어와서 모든 더러운 것을 깨끗케 하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며 우리의 성품과 생활을 새롭게 해서 더욱 깨끗한 자리에 이르게 한다고 하는 그 말씀입니다.
예수 님의 말씀 가운데『너희가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고 내 살을 먹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고 하는 뜻은 바로 이 뜻입니다. 예수 님의 생명을 받아서 우리가 점점 깨끗하여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행하고 성도의 교제를 가지고, 이 참된 신앙생활을 계속하면 내 속에 있는 옛 사람은 점점 죽어서 없어지고, 우리의 속 사람은 점점 성결해지고 장성해서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때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 때에 중요한 것이 많다고 하지마는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다 살고 육신이 죽어 마지막으로 관을 덮을 때에 요컨대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속 사람의 인격이 얼마나 고결하게 장성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자리에 있던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을 많이 모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책을 많이 쓴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요컨대 문제는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인격이 얼마나 고결하고 얼마나 장성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과연 미쳤는가 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행하면 그와 같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미 말한 대로 우리의 장래는 금년도 미지의 세계입니다. 알 수 없습니다. 인생행로에는 갈래길이 많습니다. 그러나 간단히 말하면 두 길입니다. 하나는 빛의 길이요, 하나는 어두움의 길입니다. 하나는 주님의 길이요, 하나는 세상의 길입니다. 하나는 질리, 의, 성결(聖潔), 사랑의 길이요, 또 하나는 불의와 허위와 불결과 증오의 길입니다. 하나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요, 하나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여호수아가 자기 백성을 이끌어서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을 다 점령한 다음에 모든 백성의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으로 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나안 복지를 다 점령했는데 당신들이 앞으로 이 땅에 살면서 누구를 섬기며 살겠는지 작정하시오. 여호와를 섬길 분은 여호와를 섬기고, 무슨 다른 신을 섬기기를 원하면 다른 신을 섬기기를 작정하시오.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나와 내 집은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여러분, 신년 벽두에 이와 같은 작정이 있습니까? 나와 내 집은 빛 가운데 걸어가겠습니다. 이 결심이 있으면 다른 것은 염려할 것 없습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조금도 근심할 것 없습니다. 태산과 준령이 앞을 가린다고 할지라도 에스라서에 있는 말씀과 같이 태산이 내 앞에서 평지가 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홍해가 우리 앞을 가리운다고 할지라도 홍해를 마른 땅 과 같이 건너갈 수 있습니다.
시편 四十六편 二절에 기자가 기록하듯이『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생명도 사망도 다 승리로 인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빛 가운데만 걸어갈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서 四十일 四十야를 하나님과 교통하고 뭇 백성들에게 내려올 때에 여러 백성들이 얼굴을 들어서 감히 모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왜?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했습니다. 빛 가운데 오래 있게 될 때에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우리도 신령한 의미에서 빛 가운데 계속해서 걸어가게 되면 우리의 얼굴에서도 우리의 생활에서도, 광채가 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나만 구원할 것이 아니고, 내 가정만 구원할 것이 아니고, 내 친구, 내 민족까지 우리의 작은 빛을 발해서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새해에 우리 민족과 우리 국가가 다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실 축복을 받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축복을 받으십시요』이렇게 이야기한다고 받는 것입니까?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두운 길을 버리고 빛 가운데서 행해야 됩니다. 모든 불의, 모든 허위, 음란과 방탕, 탐욕과 삭, 협잡, 모략, 모든 어두운 길을 버리고 빛 가운데서 행하면 자연히 우리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국민 하나 하나가, 우리 국가의 지도자 하나 하나가 공원이나 국민이나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어두움의 세력을 버리고 항쟁하고, 내 속에 있는 어두운 것을 내 자신이 먼저 깨닫고 나사는 주위에서 어두운 길을 떠나서 빛 가운데 행하면, 금년에 우리 민족은 큰 축복을 받고 금년이 축복의 해가 될 것입니다.
요한 복음 三장 二十절과 二十一절의 말씀을 읽을 때에 들어보세요.『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 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여러분은 이 빛에서 떠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빛으로 오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먼저 빛으로 오십시다.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아직까지 온전히 빛으로 오지 못하신 분이 계십니까? 오늘 이 아침 온전히 빛으로 오십시다. 과거에는 어찌했든지 이 시간부터 어두운 길을 버리고 빛 가운데서 행하십시다. (一九六四년 一월 五일)
Ⅵ-9 아버지의 약속 (사도행전 一장 一-五절, 二장 一-四절)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一·四)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사도들을 모아 놓으시고 주신 말씀입니다.『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무엇입니까? 그 다음절에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요한 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이 아버지의 약속은 이미 들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요한 복음 十四장에 보면 예수 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실 때에 이 말씀을 또 하신 것입니다.『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미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이미 들은바 이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 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문자 그대로 이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락방에 모여서 오직 기도를 힘썼습니다. 믿음과 기도로써 그 약속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리하였더니 과연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 아침 첫 곡식을 드리는 절기에 약속의 성령께서 놀랍게 임재 하셨습니다.
우리 제한된 인간의 이성으로 전능하시고, 무한하시고, 절대이신 하나님께 대해서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깊으신 뜻대로 우리에게 그 자신을 계시하는 것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에 대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하실 때에는 성령으로 일하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오순절에 이 성령께서 임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신 때에 또한 두 가지 상징이 따랐습니다. 하나는 바람이요, 또 하나는 불입니다.『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히브리 말에는 바람이라고 하는 말, 또 숨결이라고 하는 말, 영이라고 하는 말은 다 같은 말입니다. 바람은 소리는 들리지마는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성령이 이러합니다. 자취는 있으나 보이지는 않습니다. 성령은 신비하신 하나님의 영입니다. 또 숨결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숨은 쉬어야 사람이 삽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생명의 영이 그들에게 임재 하신 것입니다.
에스겔 三十七장을 읽어보면 환상 가운데서 에스겔이 어떤 골짜기에 이르니 그 골짜기에는 몹시 마른 뼈가 가득히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렇게 부착을 하였습니다.『에스겔 아 이 마른 뼈를 향하여 예언을 하여라.』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서『생기야 사방에서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붙어라』하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생기라고 하는 말은 숨결이라는 말입니다. 곧 바람을 의미합니다. 이 예언과 같이 생기가 마른 뼈에 임하매 그 뼈는 다시 살아났고 살아나되 아주 강한 군대를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죽은 심령에 하나님의 생명의 영이 임하게 될 때에 우리의 죽은 영은 새로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三장 八절에 예수 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깊은 원리를 말씀하실 때에『바람이 임의로 불 때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말씀하였습니다. 바람은 임의로 붑니다. 성령은 자유자재합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성령은 자유의 영입니다. 성령이 인간 심령에 임하게 될 때에 그 심령은 죄악의 쇠사슬에서 풀려서 해방을 받는 것입니다.
또 여기 보니 급하고 강한 바람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큰 능력을 의미합니다. 큰바람이 불 때에 물결이 요동합니다. 나무가 꺾어집니다. 어떤 때는 집이 무너지고 사태가 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또한 이러합니다. 성령의 바람이 인간의 심령에 불 때, 모든 그릇된 인간적인 사상, 주의, 교만, 불결을 쓸어버리고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순절 이후 로마제국의 역사는 문자 그대로 이 하나님의 바람이 모든 재래의 우상숭배와 사교와 미신과 그릇된 사상과 풍습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기독교 문화의 꽃이 피게 만든 것입니다. 사실 우리 한국 사회에도 이와 같은 청신한 하나님의 바람이 불어야 모든 부정과 불의와 부패의 파생을 일소하고 새로운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참된 혁신운동은 이와 같은 참된 생명의 바람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불은 흔히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가시덤불 가운데서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때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신 것입니다. 엘리야의 제단에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불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의 불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불입니다. 거룩한 불입니다. 불은 뜨겁습니다. 태양은 불의 보올 인 까닭으로 뜨겁습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올 때에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요한 웨슬레가 올더스의 적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그의 가슴이 이상스럽게 뜨거운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성령이 그 심령 위에 임하신 것입니다.『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이 뜨거운 마음은 성령이 임할 때에 생기는 것입니다. 심령의 첫 열매는 사랑입니다. 뜨거운 사랑입니다.
불은 또한 깨끗하게 합니다. 물은 겉을 씻을 수 있지마는 불은 속을 깨끗하게 합니다. 쇠뭉치 속에 쓸데없는 잡물을 깨끗하게 하려고 하면, 불에 집어넣어서 녹여야 합니다. 인간의 예의니 도덕이니 수양이 필요치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도 인간의 외면 생활을 다소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깊이 숨은 탐심, 음욕, 온갖 부정, 교만, 시기, 이와 같은 것을 소멸하는 데는 성령의 불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 깊이 숨은 이 죄악의 뿌리는 오직 성령의 불로만 태울 수 있습니다.
불은 빛을 발합니다. 태양은 불인 까닭으로 빛을 발합니다. 불이 있는 곳에 빛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는 곳에 빛이 있습니다. 참된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모든 성결의 빛이 비취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을 때에만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전에 예레미야 선지자는『나의 중심이 불 붓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탄식한 때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성령 속에는 끌래야 끌 수 없는 불이 붙은 것입니다. 전에 영국의 유명한 부흥가「휫필드」(Whitefield)는 항상 기도하기를『주여,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불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구 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의 생활은 하나님의 불길의 생활이었고 그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불길의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의 심령 속에 이 하나님의 불길이 있어야 합니다. 냉 냉한 신자란 생각할 수 없습니다.『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아서 미지근한 것은 내 입에서 토하여 버리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의 불길, 하나님의 이 의의 불길, 거룩한 불길이 우리 신자의 심령 속에 영원히 불타야 합니다.
우리 동포의 심령을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이 민족을 기아와 빈곤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서, 성령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지도자를 현대의 한국은 요구합니다. 이 불길이 우리 학생들의 심령 속에, 우리 청년들의 심령 속에 우리 동포들의 심령 속에 일어나서 그야말로 요원의 불과 같이 삼천리를 사르게 될 때에야 우리 한국에 새로운 소망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바람은 큰 능력을 의미합니다. 불도 큰 능력을 의미합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실 때에 바람과 불, 이 두 가지가 겸해서 나타났습니다. 이 두 가지가 겸할 때에 그 능력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성령의 능력이 이와 같이 크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해서 예수 님께서『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능력을 얻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바람과 불로 임재 한 결과『그들의 심령 속에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충만했다고 하는 말은 쉽게 말하면 가득 찼다고 하는 말입니다. 절반 찬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그들의 심령 속에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 물그릇에 물이 가득 차면 다른 것을 더 담을 수 있습니까? 어떤 그릇이든 가득 차면 다른 것을 더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이 성령이 가득 차면 죄의 생각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근심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의심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불평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죄가 감히 침노 못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됩니다.
가득 차면 넘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이 성령이 충만해서 은혜가 넘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자연히 전도가 됩니다. 자연히 감화를 받습니다. 나와 접촉하는 사람이 무언중에 무엇을 발견합니다. 성경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여기 보니 모든 사람이 다른 나라의 방언을 말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일시적 현상이지마는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나라 말을 할 수 있어서 누구에게든지 알아들을 수 있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전에 바벨탑을 욕심과 허영심으로 쌓던 사람들은 그 탑을 쌓다가 그만 말이 다 달라지고 서로 의사가 통하지를 못해서 헤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이 날에 충만하게 임하시니 피차에 말을 알아듣게 할 수 있어서 의사가 소통이 되고 서로 양해가 되었고 다 함께 복음을 전파했고 온 교회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경이 충만한 교회는 피차에 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의사가 소통이 됩니다. 양해가 됩니다. 주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을 전파합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에 이와 같은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루에 三천 여명이 회개를 했습니다. 사랑이 충만해서 유무를 상통하고 자기의 있는 것을 아끼지 않고 피차에 봉사를 하였습니다. 기쁨으로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항상 찬송했습니다. 교회가 날로 부흥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 역사에 새 기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의 더러운 역사에 새 생명의 물 줄기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요새 말로는 청신운동(淸新運動)이 일어났습니다.
기억하세요. 오순절은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생활에 놀라게 임재 하신 살입니다. 이 우주를 지으시고 우주를 운행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심령 속에 임재 한 날입니다. 이 능력이 인간의 심령 속에 임재 해서, 인간이 이 능력을 받을 수 있게 한 날입니다. 이 날은 계속됩니다.
또 보세요. 이 오순절의 현상은 성령을 받을 때 사도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도도 물론 받았고 거기에 모였던 모든 사람 전부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남자도 받고, 여자도 받고, 어른도 받고, 아이도 받았습니다. 사실 구약을 보면 구약시대에는 어떤 특수한 계급만 혹은 위대한 지도자든지 선지자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에 예언하기를 이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남종과 여종, 젊은이와 늙은이와 모든 사람에게 부어줄 때가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예언이 오순절의 은혜였습니다. 오순절에는 누구든지 성령을 받았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목사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장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평신도나 새로 믿는 사람이라도 성령을 충만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약속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입니다. 약속은 특별히 이행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대로 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는데 이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러분, 이 성령을 충만히 받지 못하면 이것은 여러분이 구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여러분이 믿지 않는 까닭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약속에 의지해서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시간 성령을 충만히 주십니다.
여러분,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까? 물론 성령의 감화는 다 받은 줄 압니다. 우리가 성령의 감화로써만 예수를 믿습니다. 감화로써만 교회에 나옵니다. 감화는 다 받은 줄로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까?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죄를 소멸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우리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불이 붙습니다. 의를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하나님의 불이 그 심령 속에 붙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내가 어떤 환경에 있든지 환경에 물들지 않고 그 가운데서 사회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셔야 합니다.
이 새해에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또는 온 교회가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내 심령이 부흥하고, 우리 가정이 부흥하고,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한 걸은 더 나가서 우리 민족이 부흥하는 큰 축복의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려면 내가 먼저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一九六四년 一월 十二일)
Ⅵ-10 모으는 자냐, 헤치는 자냐? (누가복음 十一장 十四-二十六절)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눅 十一·二十三)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좀 심각한 말씀인 줄 생각합니다.『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그 뜻은 분명합니다. 주님과 함께 안하고 반대도 안 하는 자는 될 수 없습니다. 모으지도 않고 헤치지도 않는 자는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주립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문자 그대로 사단의 세력을 이 세상에서 물리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세계는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사단이 투쟁하는 마당입니다. 이 우주적 전쟁에 중립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편 아니면 저 편입니다.
이 세계에는 우리가 지금 보는 대로 자유진영이 있고 그 반대되는 노예진영, 즉 공산진영이 있으며 그 중간에 소위 중립진영이 있습니다. 이 세계는 이렇습니다.
역적 도덕적 세계에서는 중립이란 없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진영이요. 하나는 사단의 진영입니다. 중립진영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나라가 많지마는 실상, 큰 나라는 두 나라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요. 또 하나는 사단의 나라입니다. 그 두 나라 사이에 중립국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갈래길이 많다고 하지마는 크게 생각하면 두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의의 길, 하나는 불의의 길, 하나는 선의 길, 하나는 악의 길, 하나는 생명의 길, 하나는 사망의 길입니다.
두 나라 사이에는 끊임없이 투쟁이 있습니다. 여기는 휴전은 없습니다. 이 싸움에는 중립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 신령한 전쟁에 있어서는 방관자는 될 수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 편 아니면 실상은 저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다 점령한 후에 이스라엘의 두목들을 세켐에 모아놓고 그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이『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이거든 아모리 사람의 신이라도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했습니다. 두 신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야 역시 가멜산상에서 모든 백성을 모아 놓고 그들에게 도전하여 하는 말일『너희가 어찌하여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느냐? 만일 여호와가 참으로 하나님이면 그를 섬길 것이요.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섬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적 세계에 중립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편이냐? 그렇지 않으면 사단의 편이냐? 둘 가운데 하나를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애굽 궁중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장성한 후에는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애굽 사람으로 그냥 사느냐 아브라함의 자손인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으로 사느냐?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한번 더 자세히 들어보세요.『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반대하는 자라.』실상은 우리가 주님의 편에 서지 않으면 반대편에 이미 선 사람입니다.『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라.』다시 말하면 누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주님과 같이 모으지는 않지마는 헤치지는 않는 사람이야. 나는 그저 그 가운데 있는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가 분명히 알 것은 그는 이미 헤치는 진영에 선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실상은 반대편에 선 사람이요. 실상은 사단의 편에 선 사람입니다.
구약의 여러 예언서 가운데 아마 제일 적은 예언서가 오바댜 라는 예언서입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께서 오바댜 라고 하는 예언자를 통해서 에돔 성을 책망하시며 하나님의 심판이 이를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지 모르지마는 에돔 사람들은 본래 야곱의 형 되는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손들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과 혈연의 관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의 수도가 되는 예루살렘이 바벨론 사람들에게 멸망을 당할 때에 에돔 사람들은 멀리 서서 방관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오바댜 예언자를 통해서 너희가 이렇게 예루살렘 성이 약탈을 당할 때에 방관만 했은즉 너희들도 약탈하는 자와 같은 자들이라. 네 위에 내릴 심판이 예루살렘보다 더 할 때가 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헤치는 자라고 하는 말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유명한 여 사사 드보라 때에, 가나안 왕 야빈의 장군 시스라 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이스라엘 경지를 침범해 왔습니다. 그 때에 드보라 여 사사는 바락 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유명한 장군과 같이 그들을 대항해서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볼산 에 불러모아 가지고 담대히 싸워서 시스라를 격멸(擊滅) 했습니다.
사사기(士師記) 五장에 보면 드보라의 유명한 승전의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노래를 한참 불러 내려가다가 二十三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거민 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드보라와 바락이 온 이스라엘 민족을 다 모아들일 때에 이 메로스라고 하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구 부름에 응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그 자리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을 거듭거듭 저주하라고 한 것입니다. 나와 같이 모으지 않는 자는 헤치는 자라고 하는 뜻입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의 뜻은 생각으로, 혹은 머리로 나는 예수 님을 위하겠다, 나는 예수 님 편에 서겠다 하는 이런 사람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함께 한다는 말은 나와 함께 행동을 같이한다고 하는 뜻이 원문에 있습니다. 메타라고 하는 말을 썼습니다. 나와 함께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잃은 양을 모으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택한 백성을 모아 영적 추수를 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실지로 모으는 일에 동역해서 함께 일하지 않는 사람은 실상 헤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각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예수 님과 같이 우리의 생각으로만 함께 있을 것이 아니고 실지 행동으로 함께 일하라는 말입니다.
일하지 않으면 결국은 반대편에서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하시면서 그 다음에 유명한 비유의 말씀을 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갔습니까? 물 없는 광야에 이리저리 배회합니다. 쉴 곳을 도무지 찾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전에 있던 그 집이 어떤가 하고서 다시 돌아와서 엿보게 되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잘 수리를 해 놓았고 깨끗이 쓸기는 쓸었는데 아무도 차지한 사람이 아직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귀신이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빈집으로 다시 돌아와 유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님의 결론의 말씀이 나중 형편의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다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무슨 뜻인지 잘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전에 지은 죄를 회개하겠다, 나는 이런 죄도 떠나겠다, 나는 저런 죄도 떠나겠다, 나는 나쁜 습관을 다 고쳐야 되겠다 하여 죄를 떠나고 고치기로 합니다. 나쁜 친구도 다 떠납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주님을 영접해서 주님과 같이 일하지 않습니다. 빈집으로 그냥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되면 마지막에는 더 악한 귀신 일곱이 들어올 염려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연계나 영계에서나 진공상태를 오래 용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물병에 물이 하나 가득한 것을 쏟아보세요. 물이 나올 때 꼴록꼴록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왜 그 소리가 들리는지 압니까? 물병에 물이 가득했었는데 물을 쏟으니까 그 병 속이 진공상태가 됩니다. 비 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밖에 있는 공기가 얼른 그 곳에 들어가 차지하려고 파고 들어가는 소리가 그렇게 납니다.
이 세상에 진공상태가 오래 용납될 수 없습니다. 우리 사람의 심령이 그렇습니다. 사람의 심령에 진공상태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빈집에 흔히 도적이 들기 쉬운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소극적으로 죄를 떠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향하여야 그 신앙생활이 건전한 신앙생활이 됩니다.
단테의「신곡」을 읽어보면 단체가 유명한 시인 붜질 이라고 하는 사람의 인도를 받아서 지옥 구경을 갑니다. 얼마쯤 내림 길로 가다가 보니까 조그만 문이 있는데 그 문 위에는 이 문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소망을 버리라는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지옥 속에는 소망이 없는 모양입니다. 안내자의 뒤를 따라서 그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제일 첫 방에 어떤 무리들이 있는데 그들은 슬픈 눈물을 흘리며 탄식을 하고, 원망을 하고, 근심을 하고, 걱정을 하고, 신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단테가 자기 안내자 붜질 에게 물었습니다.『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입니까?』그 때에 그 안내자가 대답하는 말이『이 사람들은 전에 세상에서 살 때에 소위 중립주의자들인데 하나님을 배반해서 나쁜 일은 별로 한 것이 없지마는 하나님을 위해서 좋은 일은 한 것도 없습니다. 그저 세상에 살 때 꼭 자기만 위해서 산 이기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물론 천국이 이런 사람을 용납할 수 없고 지옥에 부득이 오게 되었는데 지옥에서까지 이런 사람들은 멸시를 받아 이렇게 첫 방에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마 지옥에도 행랑방이 있는 모양입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마는 우리에게 큰 경고를 주를 말씀인 줄 압니다.
제가 이런 말을 이따금 듣습니다. 여러분, 용서하시고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웃자는 생각으로 이런 말도 하는 줄 압니다.
제가 듣는 대로 어떤 사람들은 우리 영락교회에 대해서 말하기를『아 그 영락교회에 가면 어째서 예배보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아느냐?』고 물으니까『그거야 알기 쉽지, 왜 영락교회에 가면 사람이 많으냐고 하면 이 서울 장안에는 이 교회에도 저 교회에도 속하지 않고 그저 빙빙 돌아다니는 떠돌이 교우들이 많은데, 이 교인들은 주일날 아침에 되면 오늘은 어느 예배당에 가볼까 생각하다가 가만 보니까 영락교회로 오는 사람이 많거든, 그러니까 사람 많은 데로 따라 가보자, 그래서 영락교회에 예배하려 오는 사람이 많은 거야.』어떤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은 좀 다른 대답을 했습니다.『그 이유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지요. 왜냐하면 영락교회에 가면 그저 예수 믿기가 제일 쉽지요. 자그마한 교회에 가면 몇 달 되지 않아서 이런 일을 해 주시요, 저런 일을 해 주시요, 부탁이 많은데 영락교회에 가면 몇 해 있어도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하나도 없고, 또 자그마한 교회에 가 보면 연보 할 때에도 특별히 대표자가 외서 연보 좀더 해 주시요, 이러는 데, 영락교회에 가면 그저 연보 주머니 돌아갈 때 십 원 짜리 하나 넣으면 그 다음엔 체면 유지는 잘 된단 말이고. 그러니 이거 해라 저거 해라하는 말없이 그저 공짜로 예수만 믿으려면 영락교회에 가야지요』
여러분,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인지 잘 무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스운 이야기 가운데도 무슨 뜻이 있는 줄 압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신앙생활에는 방관자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세계에는 중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생활에 구경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여럿이 같이 모여서 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교회의 중대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교회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와 같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만 드리고 헤어지는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에 성령을 이 땅에 보내어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이 땅에서 주님의 일을 계속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 교회는 군대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천국의 군대입니다. 십자가의 군대입니다. 이 땅에 남아 있어서 악한 세력과 싸워 승리해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생활에 있어서 떠돌이 교인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입교한다고 하는 것은 군대에 입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해야 됩니다. 교회에는 악마와 죄의 쇠사슬에 얽매인 불쌍한 영혼을 구원해서 해방하는 큰 전도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전도를 힘쓰는 것이고 남녀전도 회를 조직해서 전도를 힘쓰는 것이고, 여러 가지로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큰 영적 해방운동인 전도 프로그램에 어떤 방면으로든지 참여하고 있습니까? 혹은 아직까지 방관만 합니까? 교회에는 교회의 장래와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우리 자녀들을 가르치는 기독교 교육의 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리해서 주님의 날에도 주일학교가 있습니다. 제二부에 성경을 가르치는 반도 있습니다.
또 우리 교회에서 교육기관을 경영도 합니다. 혹은 초등학교니, 중등학교니, 또는 우리 영락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대광이니, 보성이니, 숭의니 혹은 여자대학이니 신학교니 혹은 초 교파적으로 하는 연세대학이니, 이런 교육기관이 있어서 어떻든지 우리 청년 자녀들에게 옳은 기독교 교육을 하기 위해서 힘쓰는 교육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큰 프로그램을 위해서 직접 간접으로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참여하고 계십니까? 혹은 아직까지 온전히 방관만 하십니까?
우리 교회는 사회의 낙오자들, 병난 사람들, 고독하고 불우한 이들을 구호하고 그들로 하여금 재생을 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사회봉사와 사회사업의 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안에서도 고아원을 경영하고 양로원을 경영하고 모자원을 경영합니다. 혹은 초 교파적으로 세브란스 같은 큰 병원도 경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큰 사회봉사 프로그램에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참요하고 계십니까? 혹은 아직까지 방관만 하십니까?
교회에는 우리 민족의 복리와 민주국가의 확립을 위해서 사상을 선도하며 사회를 개량하며 절제운동, 내핍생활 운동 등 온갖 사회 향상의 운동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추진하기 위해서 우리 교회 안에, 혹은 연합적으로 여러 단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큰 사회 향상운동의 프로그램에 직접 간접으로 혹은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참여하고 계십니까? 혹은 방관만 하십니까?
좀 심한 말씀이지마는 주님의 말씀 그대로를 빌리는 것뿐입니다.『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했습니다.
과거에는 어떠하였든지 이 一九六四년 새해부터는 내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이 제일 큰 우주적 군대에 확실히 입대를 해서 싸움을 싸우고 마땅히 할 의무를 다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쁜 일 안 하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주를 위해서 선한 사업을 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一九六四년 一월 二十六일)
Ⅵ-11 인생의 아침 (시편 九十편 一-十七절)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 九十·十四)
시편 九十편은 모세의 유일한 시, 또는 기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의 멍에에서 해방하여 황막한 시내광야에서 유리하기 이미 四十여 년, 이제는 목적지 가까운 모압 평지에까지 이르렀으나 그가 밤낮 그리던 가나안 복지를 밟아 보지 못할 운명에 처하게 될 때에 산꼭대기에서 멀리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복지를 바라보면서, 또한 돌이켜 자기의 파란 많던 과거의 일평생을 회고하면서 이 시를 지은 줄 생각합니다.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즐거이 같이 떠났던 모든 동지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병든 자기자신의 누구 외에는 다 광야에서 쓰러진 것이 아닌가?『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라고 한 문자 그대로 쓸어갔던 것입니다.
여기에 모세는 우리의 인생을 직시합니다.『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인생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 이다.』신생의 무상, 인생의 순간 성을 직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이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입니다.『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그러므로 그는 인생이란 어떠한 것인가를 직시하면서 세 가지 기도를 계속해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첫째는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우리의 날을 계수 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무상하니, 이런 것을 미리 알고 살게 하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둘째는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일찍이 주님의 인자하심을 베풀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던 일을 다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서 우리가 하던 일을 완성시켜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기도가운데 특별히 둘째 기도『아침에 주의 인자로 만족케 하사』하는 이 말
씀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여기 아침이라고 하는 말은 하루의 아침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아침 곧 일생의 아침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즉 소년, 청년시대부터 주의 인자함을 베풀어 주셔서 평생에 즐겁고 기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젊어서부터 지혜의 마음을 가지고 주의 인자하심을 받아서 비록 짧은 인생일지라도 가치 있고 보람있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인간의 일생을 하루에 비교해 생각하면, 인생의 아침이 있습니다. 인생의 낮이 있습니다. 인생의 저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도 특별히 一년에 한 번씩 청년주일로 기키는 날인데 이 청년주일 아침에 인생의 아침인 이 시대를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청년시대와 아침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침은 하루 가운데 가장 새로운 때입니다. 햇빛이 새롭게 비칩니다. 만물이 새롭습니다. 공기가 새롭고 풀이 새롭고 나무가 새롭고 여름에는 이슬이 맑습니다. 청년 시대는 이렇게 모든 것이 새로운 시대입니다. 마음이 새롭고, 생각이 새롭고, 견해가 새롭습니다. 온 세계를 놀라움의 눈으로 봅니다.
둘째로 아침은 가장 아름다운 때입니다. 아침 햇빛이 비칠 때에 모든 것이 선명하고 아름다워집니다. 온 세계가 미화됩니다. 산이 아름답고, 들이 아름답고, 하늘이 아름답고, 겨울에는 눈이 아름답고, 봄, 여름, 가을에는 아침 꽃이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청년시대 역시 일생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제일 아름다운 때인 줄 생각합니다. 얼굴도 제일 아름답고, 아마 마음도 제일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셋째로 아침에는 노래가 있습니다. 모든 새들이 흔히 아침에 노래를 부릅니다. 새벽에 닭이 웁니다. 꾀꼬리도 아침에 노래를 합니다. 뻐꾹새도 아침에 노래를 합니다. 모든 산새들이 흔히 아침에 노래를 부릅니다. 이렇게 청년시대는 노래의 때입니다. 노래를 잘 부릅니다. 우리 교회 성가대들이 많이 있지마는 아마 소년, 청년 성가대가 노래를 제일 잘 부르는 것 같습니다.
또 제일 많이 웃는 시대입니다. 즐거워하는 시대입니다. 이 때는 그저 바람 부는 것을 보고도 웃는다고 합니다. 즐겁고 노래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기억하십시다.
넷째로 아침은 하루의 제일 중요한 때입니다. 하루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인생의 아침도 제일 중요한 때입니다. 인생의 일생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아침에 무슨 기쁜 나쁜 일이 생기면 종일 모든 일이 틀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침에는 모든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언제든 쌀을 잘 일지 아니하리 오 마는 특별히 아침에는 부인들이 쌀을 잘 일어 밥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침밥 먹다가 돌 깨물면 기분 나빠서 그 날 하루종일 일 잘 안 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아침에 우리가 누구를 만나는 것도 조심해야 됩니다. 아침에 누구 집에 가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아침에 만나서 누구와 말할 때는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침에 어떤 사람의 마음이 한 번 상해지면 그 사람의 하루는 아주 망쳐 버리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청년시대는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시작하는 때입니다. 청년시대에 한 번 잘못해서 일생을 망칠 수 있습니다. 청년시대는 누구를 만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누구와 사귀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안 만날 사람을 만나고 조심 안하고 사귀다가 일생을 망친 여자들을 여러 번 보았고, 일생을 망치는 남자들도 여러 사람 보았습니다.
청년시대는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청년시대는 참 좋은 시대입니다. 즐거워하고 노래할 만한 좋은 시대입니다. 그러나 위험한 시대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됩니다.
인생의 아침에 명심할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아침에 제일 먼저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세요. 아침에 제일 먼저 할 것이 무엇입니까? 세수? 물론 해야지요. 소제도 해야지요, 기도도 해야지요, 할 것 많지요. 그러나 그 전에 할 것이 있는데 무엇인지 압니까? 깨어서 일어나야지요.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아침은 깨어 일어나는 때입니다. 아침이 되어도 자리에서 기지개만 하는 사람들 더러 있는데 그런 가족이 있는 사람은 큰 걱정입니다.
아침에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여기 서양 속담에『이른 새가 벌레를 먹는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름에 보면 땅 속에 있던 벌레들이 밤에는 모두 밖에 나와 있습니다. 아침이 되어도 얼른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찍 날아다니는 새는 날아다니면서 그 벌레들이 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많이 잡아먹고 배가 불러집니다. 해 뜨도록 기다리면 그 벌레들이 다 땅속으로 들어가서 없어지고 맙니다.
아침에 일찍 깨어야 됩니다. 일어나야 됩니다. 전에 야곱도 벧엘에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베개 하였던 돌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동방의 의인 욥도 일찍 일어나서 아침마다 자녀들을 위해서 번제(燔祭)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전에 훌륭한 히스기야 왕도 일찍 일어나서 귀인들과 같이 성전에 올라가 번제와 속죄제(贖罪祭)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예수 님도 일찍 일어나서 조용한 곳에 가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다윗도『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노래한 것을 보니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청년시대는 깰 때입니다. 일어날 때입니다. 전에 요나와 같이 온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파선할 위기에 직면했지마는 자기의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잠만 잔 그와 같은 청년들은 우리 가운데 없습니까? 오늘날 이 땅 위에 풍파가 얼마나 높으며 한국의 배가 얼마나 위태하건만 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잠만 자는 청년들은 없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님께서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시는 동안 잠만 자던 제자들처럼 세상을 모르고 아직 깨지 못한 청년들은 없습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전에 유두고라 하는 청년은 그렇게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졸다가 三층에서 떨어져서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이렇게 교회에는 나오지마는 아직도 졸면서 한국의 실정이 어떠하고 한국의 모든 사정이 얼마나 긴박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무관심과, 이기주의와, 향락과, 정욕과, 허영심과, 사치와 죄악에서 잠자는 청년들은 없습니까?
아침은 깰 때입니다. 청년시대에 깨지 못하면 언제 깰 것입니까? 깨야 합니다.『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오! 한국의 교회여 한국의 청년들이여 깰지어다.』일어나 힘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능력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새 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거룩한 생활로써 새로운 능력을 받아서 일해야 할 때입니다. 인생의 아침에 우리는 깨어야 합니다. 늦잠 자지 맙시다.
그리고 둘째는 깬 다음에는 뭘 할 것입니까? 고요히 생각해서 하루의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에 옛날부터 일일지계는 재어신(一日之計 在於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다는 말입니다. 청년시대는 일생의 설계를 하는 때입니다. 설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일생의 성공과 실패가 달렸습니다. 그러기에 청년시대에는 요새 말로 비전(幻見=환견)이 있어야 합니다. 이상(理想)이 있어야 합니다. 포부(抱負)가 있어야 합니다. 입지(立志)가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공자의 말씀을 들어보아도 어십오이지유학하고 삼십이립(於十五而志有學三十而立)이라고 했습니다. 열 다섯 살 날 때 학에 뜻을 두고 三十에 섰다는 말입니다. 입지란 뜻입니다. 동양의 유명한 철학자 왕양명(王陽明)이 말하기를 입지가 없는 사람은 키가 없는 배와 같고 재갈이 없는 말과 같다고 했습니다. 방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 인생의 봄을 맞아서 일생을 그르치지 않을, 일생의 설계와 꼭 바로 하는 비결이 하나 있는데 무엇인지 압니까?
조물주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는 것입니다. 늘 하는 말이지마는 우리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만들지 못합니다. 내가 나를 지은 사람이 어디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에 이런 그릇도 만들고, 저런 그릇도 만들고, 일정한 목적에 의지해서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지으실 때에도 하나님의 일정한 목적에 의해서 우리를 각각 조금씩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이 조물주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떠한 목적으로 어떻게 만드셨는가 하는 것을 바로 깨달아서 하나님의 그 목적대로 우리가 설계를 하고 그대로 살면 우리의 생활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의 생애를 알지요? 이 사람은 재주 많은 사람입니다. 또 열심 가입니다. 바리새인이었을 때 열심이 너무 많아서 기독교를 핍박했습니다. 예수를 핍박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오기 위해서 저 다메섹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내려가다가 큰 빛을 보면서 예수 님을 만나지 않았습니까?『누구십니까?』『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그 때에 예수 님께서 사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압니까?『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것이 네게 곤란한 일이니라 즉 네게 고생이니라.』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시 채를 뒷발질하니 발뒤축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일정한 목적이 있어서 그 사람을 지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반대로 사도 바울은 사기 채를 뒷발질했습니다. 하나님과 반대로 산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주여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이렇게 물었을 때에 예수 님께서는『내가 장차 너로 하여금 온 세상에 보내서 나를 증거 하는 사도를 삼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때에야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자기를 지으셨는지 그 목적을 발견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대로 살았습니다. 그대로 달음질했습니다.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일생을 통해서 그런 생활을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아침을 당해서 우리가 힘쓸 것이 여러 가지 있지마는 제일 먼저 힘쓸 것은 조물주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고 외쳤습니다.
소년시대, 청년시대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입니다. 여호와가 가까이 계시는 때입니다. 잠언 八장 十七절을 보면『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즉 소년시대에 주를 찾읍시다. 그리하면 반드시 주를 만납니다. 주를 만나 주의 뜻을 우리가 바로 분간해서 주의 뜻대로 살 때 우리의 인생을 바로 살 수 있습니다.
전에 요셉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주를 만나서 주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전에 요시야 왕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주를 찾아서 주를 만나고 그대로 정치를 했습니다. 전에 사무엘이 그런 청년이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소년시대와 천년시대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았습니다. 베드로나, 요한 이나, 야고보나, 디모데나, 디도나 모든 이 위대한 사도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청년시대에 일찍 주를 만나고 주의 뜻을 알아서 꼭 그대로 산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아침은 주를 만날 때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에도『젊었을 때 조물주를 기억하라』고 우리에게 권면 하였습니다. 공자께서도『조문도(朝聞道)면 석가사(夕可死)』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아침에 도를 들었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하다고 하는 뜻입니다.
과연 우리가 인생의 아침에 도를 바로 듣고 인생을 그대로 살면 인생의 저녁에 죽어도 유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아침에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아서 무엇을 위해서 나는 이 세상에 내셨나 하는 내 사명을 먼저 분명히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명을 찾은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그 다음에는 일을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나 성공한 이들을 보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자기의 사명을 찾았고 사명을 찾은 다음에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청년시대는 가장 원기가 왕성한 때입니다. 가장 힘이 많은 때입니다. 이 때에 모든 정력을 집중해서 일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일을 한 사람들의 역사를 보면 인생의 아침에 일찍부터 즉 소년시대, 청년시대부터 일을 했습니다.
헬라의 유명한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같은 사람은 벌써 十七세 때부터 웅변가로서 국가에 봉사했다고 합니다. 시세로(Cicero)같은 사람은 스물 여섯 살 때 벌써 유명한 법률가가 되어서 국가에 대한 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음악가 가운데 모잘트 같은 사람은 여섯 살 때 독일 황제 앞에서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헨델 같은 유명한 사람은 열 살부터 작곡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부흥 목사 가운데 유명한 죠지 횟휠드(George Whitefield)같은 사람은 스물 한 살부터 유명한 부흥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펄죤 같은 사람은 벌써 스무 살에 유명한 런던의 헤븐애플교회의 목사가 된 것입니다. 리빙스톤 같은 사람은 스물 네 살에 벌써 아프리카 지방에 가서 흑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요한 칼빈 같은 사람도 스물 여섯 살에 벌써「기독교강요」를 썼습니다.
소년시대, 청년시대에 일찍이 각성을 해서 하나님을 찾고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사명을 바로 깨닫고 그 즉시로 일에 착수해서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국가에서나 열심히 일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실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반드시 있습니다.
여기 일하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 가운데 어떤 청년들은 혹 이런 생각이 들것입니다. 한국처럼 실업자 사태가 난 우리 사회에서 일 하려야 일 자리가 있어야지. 사실 이것은 현실문제입니다. 물론 강단은 정치나 경제문제를 의논하는 곳은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국가가 잘 되려고 하면 간단히 말해서 두 가지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첫째는 치산, 치수, 치야(治野)가 잘 되어서 산을 바로 다스리고, 하천을 바로 다스리고, 들을 바로 다스려서 모든 식량과 모든 원료를 많이 생산해야 될 것이요. 또 둘째는 도시에는 산업이 발전되어서 생활 필수품을 많이 생산하고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어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는 바로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물론 위정자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한국에서는 번 번히 위정자들이 이런 문제에 실패를 했습니다. 현 정권이 앞으로 얼마나 성공하겠는지 그것은 우리가 두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국민이 좌절해서는 될 수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국민이 자각해서 생의 길을 개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주의해 보셨는지요. 제가 얼마 전에 망우리 고개를 넘어가는데 고개를 넘어 서면 왼편으로 두 산줄기가 있는데 한편 산줄기 위에는 현대식으로 집을 아담하게 잘 지은 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바로 옆의 산줄기에는 아주 옛날 한국 재래식 오막살이 초가집이 그냥 있습니다. 어떻게 되어서 한 줄기에는 이렇게 좋은 집을 짓고 사나 하고 살펴보니까, 그 산줄기를 그냥 두지 않고 전부 개간을 했습니다. 포도를 심고 복숭아를 심고 배를 심고 이렇게 개간할 수 있는 과수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편 오막살이집이 있는데는 그저 소나가 드문드문 난 것이 그대로 있고 저 아래 내려가서 조그마한 마른 밭을 더러 부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몰론 우리가 일자리가 없어서 한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일터로 가야 될 줄 압니다. 사실은 우리 삼천리 강산이 다 황폐한 강산입니다.
일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연히 좁은 서울에 모여서 일자리가 없다고 한탄할 것 없고 일자리 있는 데로 가야 될 줄 압니다. 황폐한 강산이 일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을 창조해야 될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머리를 주셨는데 머리로 생각해서 이 도시에 사는 가운데서도 새로운 일을 창조해야 될 줄 압니다. 이런 때에 사는 우리로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바로 살펴서 일터로 가서 일을 해야 되겠습니다.
골로새 一장 二十九절에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기록했습니다.『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을 깨닫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속에 성령으로 임재 하셔서 내 속에서 역사를 하십니다. 내가 역사 하는 성령과 협력해서 나도 수고하고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편 一一0편 三절에 보면 이런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주의 청년이 주께 대하여 새벽 이슬 같도다.』주님의 권능을 받아서 주님의 백성들이 다 거룩하고 깨끗한 새 옷을 입고 즐겁게 헌신하게 되면, 주의 청년이 새벽 이슬과 같이 빛나는 축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청년은 인생의 아침입니다. 인생의 아침은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우리가 이 때에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깨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것을 꼭 바로 발견해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일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해서 일해야 되겠습니다.
삼천리 강산은 일꾼을 부르고 있습니다. (一九六四년 二월 二일)
Ⅵ-12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역대 상 二十九장 十-十九절)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 되심이니이다.』(대상 二十九·十一)
이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을 찬송한 말씀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다윗의 일생의 염원은 하나님을 위하여 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군인으로서 많은 사람의 피를 흘렸으므로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친히 이 전을 지을 수는 없지마는 전을 짓기 위해서 물자로 많은 준비를 갖추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나무와 여러 가지 보석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소유로 가졌던 금 천 달란트, 은 천 달란트를 친히 바치면서 모든 방백들에게 누구든지 즐거운 마음으로 성전을 짓기 위하여 물질을 바치기 원하는 분은 바치라고 권면 한 것입니다. 이 때에 여러 방백들이 그 말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역시 그들이 가졌던 여러 가지 물질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리해서 금이 五천 달란트에 이르렀고, 은 一만 달란트, 놋 一만 八천 달란트, 철 一만 달란트 그리고 여러 보석이 성전 건축을 위해서 준비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에 다윗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나님께 찬송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 읽은 이 말씀은 바로 다윗이 그 때에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자세히 이 말씀을 읽어보면 여기 찬송이 있고, 감사가 있고, 고백이 있고, 또한 간구(懇求)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 이 내용을 간단히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있나이다.』이런 말로 하나님을 송축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 七장에 있는 천군 천사들의 노래와 비슷합니다. 거기 읽어보면『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尊貴)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 지로다 아멘』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여기「광대하시다」라고 하는 말씀은 크시다 고 하는 뜻입니다. 시편 九十五편 三절에『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 시요 모든 신위에 크신 왕이 시로다』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七十편 四절에『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로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하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크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십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크십니다. 그의 권능은 무소 불능하십니다. 능치 못하신 것이 없습니다. 전능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로 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권능으로써 성도를 부르시고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고 모든 일을 다스려서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축복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무소부지(無所不知)하신 지혜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마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의 은밀한 생각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현재만 보지마는 하나님께서는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지구 위에만 계신 것이 아니고 온 우주에 충만하시고, 아니 우주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십니다. 우리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사로잡혀서 죄수처럼 이 세상에서 살수밖에 없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영원 불변하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은 무한하십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온 궁창(穹蒼)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십니다. 아니 이 온 우주라도 그의 영광을 다 드러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다윗은 찬송합니다.『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시고 천지를 소유하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二十四편 一절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학개 二장 八절에『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 고 하신 말씀과 같이 금은 보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에 보면 토지의 영원방매를 금지했습니다. 토지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하나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권도 주께 속하였나이다.』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대 주재이십니다. 그리해서 계시록 十九장 六절에는『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전능하신 이가 이 우주를 통치하십니다. 역대 하 二十장 六절에는『여호와여 주는……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방나라까지 다스리십니다. 그의 권세와 능력을 막을 자가 따위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를 다스리십니다. 이 하나님이 국가를 다스립니다. 이 하나님이 민족을 다스립니다. 이 하나님이 개인 하나 하나의 생활을 다스립니다.
이렇게 이 하나님은 만 유의 머리가 되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극히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극히 권능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지혜가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가 이과 같은 하나님을 마땅히 경외합니까?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는 몸만 죽이고 더 할 수 없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의 몸을 죽일뿐더러 너희의 영혼을 영원히 지옥 불에 던질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이를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서울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아무나 붙잡고『당신이 하나님을 믿습니까?』하고 물어 보면 아마 거의가 다(혹은 몇 사람, 공상당원 외에는)『예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고 대답할 줄 압니다. 그러나 이렇게 대답은 하지마는 그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존경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봉사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감사도 드리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을 믿기 는 믿는다고 하지마는,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마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떠한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나라의 운명을 정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개인 하나 하나의 생활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을 죽이실 수 있을뿐더러 영혼까지 영원한 지옥 불에 던질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五十七장 十五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지존무상(至尊無上)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다음에는 감사를 나타내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데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많은 물질을 성전 건축을 위해서 드리고 나서『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관데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습니까?』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힘이 있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이 금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감사했습니다. 은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감사했습니다. 재목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감사했습니다. 보석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감사했습니다. 드릴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마음을 위해서 감사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 즐거운 마음을 위해서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힘이 있습니까? 힘이 있으면 그것을 위해서 감사하십시다. 내게 하나님께 바칠 어떤 재능이 있습니까? 그 재능을 위해서 감사합시다. 내가 하나님께 드릴 무슨 물질이 있습니까? 그 물질을 위해서 감사하십시다. 내가 하나님께 드릴 무슨 시간이 있습니까? 그 시간을 위해서 감사하십시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으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오래 전에 우리가 다 피난민으로 내려와서 이 예배당을 짓기 시작할 때에 어떤 주일날 아침 특별히 헌금을 하겠는데 준비하고 오라고 광고를 했습니다. 저는 그 특별 헌금하는 주일날 아침에 일찍 나와서 이 예배당 자리에 있던 언덕 위에 서서 교인들을 만나보고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어떤 젊은 자매 님이 무엇을 보자기에다 싸서 머리에다 이고 옵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까 그것을 풀어 보이는데 다른 게 아니고 이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불은 왜 가지고 오셨는가 고 물어 보니까 이 자매가 하는 말이『이것은 내가 북한에서 내려올 때 제일 좋은 이불로 가지고 온 것인데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 다른 것은 바칠게 없어서 이 이불을 갔다가 바칩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교회 일을 三十년이나 보았지마는 이불 바치는 이는 지금까지 그 분 한 분밖에 못 보았습니다. 하여간 하나님께 무엇을 바칠 것이 있으면 감사한 일입니다. 책을 바칠 수 있으며 그것도 감사하고, 무엇이든지 바칠 수 있으면 감사한 일입니다.
왜 감사한지 압니까?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세요.『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그래서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다고 하면 이것이 다 주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다 하나도 온전히 내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나에게 무슨 지식이 있으면 지식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무슨 재주가 있으면 재주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무슨 물질이 있으면 물질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내 것으로 드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 아들과 딸도 역시 주님께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무엇이든지 드릴 것이 있으면 그것이야말로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모르고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아까워하는 수가 있습니다. 왜? 내 것인 줄 알고 그럽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서 오고 만물이 하나님께 속하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때에는 잊어버립니다.
그 다음에 인간의 현실에 대한 고백의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의 현실을 고백했습니다.『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烈祖)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寓居)하는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우리 인간이라나 나그네라고 하는 현실, 다시 말하면 잠깐 세상에 와서 우거 한다고 하는 이 현실을 깨닫고, 솔직히 하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욥기 七장 六절에『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하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날이 빠른 것을 깨달았습니다. 시편 九十편 十절에『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날이란 날아가는 것처럼 빠른 것을 깨닫고 솔직히 고백을 했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그 서신에『네 생명이 무엇이뇨?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 육신 면으로 볼 때 우리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잠깐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다름이 없다고 하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다고 하는 말은 우리의 열조가 다 이렇게 나그네로 왔다가 돌아간 것처럼 우리도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이 현실을 그대로 깨닫고 하나님 앞에 고백한 것입니다. 이렇게 잠깐 왔다가 돌아가는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드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기억하십시다. 짧은 인생이지만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만은 실상 영원한 의미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여러 가지 할 수 있지마는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만이 영원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세 가지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세 가지 기도를 드렸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시고 만 유를 주재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기억했습니다. 둘째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 서 오고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셋째는 우리 인간이 잠깐 이 세상에 와서 하나님의 청지기 노릇을 하다가 또 돌아간다고 하는 이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이 인생과 우주에 대한 엄숙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인 까닭으로 제일 먼저 자기의 모든 백성들이 이 사실을 깨달아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또 자기 아들 솔로몬이 정성 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율례(律例)를 잘 지키기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정성 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하여 전을 잘 지을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를 한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도 이 세 가지 사실을 먼저 기억하십시다. 첫째로 지극히 높으신 만 유의 주재가 되시는 엄위(嚴威)하신 분인 것을 기억하십시다. 둘째로 우리가 가졌다고 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요, 나는 청지기밖에 아닌 것을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셋째로 우리 인간은 잠깐 동안 이 세상에 나그네로 와서 잠깐 동안 청지기 노릇을 하다가 돌아간다고 하는 사실도 기억하십시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세 가지 기도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우리 온 민족들이 이 엄숙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실을 기억해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 위하여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는 우리 모든 민족들이 정성 된 마음을 가지고 이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를 지켜서, 이 죄 많은 세상 가운데서 성결과 공의와 사랑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 기도해야만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짧은 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는데 하나님의 전을 짓기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내 몸을 바치고 내 마음을 바쳐야 할 것이며, 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헌실 할 수 있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이것만이 잠깐 왔다가 가는 우리 인간의 영원한 생명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一九六四년 二월 九일)
Ⅵ-13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十二장 十-十三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十二·二)
이 말씀과 같은 뜻의 말씀을 이사야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는 앙망(仰望)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앙망하라고 하는 말은 바라보라고 하는 뜻입니다.『땅 끝의 백성들아 나를 바라보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간단한 말씀입니다. 누구나 볼 수는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든지, 사업에 성공을 하고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면, 누구나 구원 얻기가 어려운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만 나를 바라보고 구원을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느 때에 주를 바라보지 아니하리 오 마는 지금은 특별히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렌트 기간을 맞이해서 주님을 바라볼 만한 시기입니다.
먼저 안 볼 것 몇 가지를 생각하십시다.
나 자신을 바라보지 맙시다. 나 자신은 약하고 죄가 많고 유혹과 시험에 들기 쉬운 자신입니다. 나 자신 스스로 구원을 얻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 자신의 과거의 실패도 볼 필요가 없습니다. 낙심하기만 쉽습니다. 과거에 혹 성공했을지라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쓸데없는 교만의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또 다른 이들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도 역시 약합니다. 허물이 많고 실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잘 믿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허물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예수를 믿다가는 낙심하기 쉽고 넘어지기 쉽습니다. 또 다른 사람을 바라보다가는 잘못 하면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아서 내가 또한 시험에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라볼 필요도 없는 줄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세계를 자세히 살펴서 알 것이지마는, 전에 베드로와 같이 물결만 바라보고 예수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면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가기 쉬운 것입니다.『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노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 번 발하시면 천하에 있는 것 망하겠네.』아무리 세계가 요란하다고 하지마는 그것을 바라보고 놀랄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을 바라볼 것입니다. 이제 잠깐 동안 우리 주님의 일생을 생각하면서 간단하게 나마 주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주님의 일생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베들레헴을 바라보게 됩니다. 마구간이 보입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를 우리는 봅니다. 주님께서는 마구간에 나시고 누운 첫 자리가 구유였습니다. 실로 스산한 산실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혹 우리 가운데 나는 한미(寒微)하고 구차한 가정에서 났다. 그래서 지금까지 빈궁한 살림 가운데서 고생만 한다. 이렇게 탄식하는 이가 있습니까? 우리 주님의 이 구유를 바라보시고 그다지 낙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생을 시작할 때에 아마 우리 주님보다는 다소나마 낫게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 주님께서 아직 어릴 때에 어머님의 품에 안겨서 멀리 애굽으로 피난을 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북한에서 남한에 오는 유가 아닙니다. 넓은 광야, 물 없는 사막을 오래 걸어가고 혹은 나귀를 타고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오자마자 피난생활을 맛보았습니다.
우리 교우가운데 六·二五 바로 전날에 아기를 낳아서 그 날로 피난 갔다고 하는 말씀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생활이 이와 비슷했습니다. 우리 교우 중에는 북한에서 남한에 피난 온 이가 많습니다. 우리가 六·二五 때 누구나 여러 곳에서 혹은 제주도까지 가서 피난생활을 맛보았습니다. 아직까지 피난생활의 때는 벗지 못한 이들도 많이 계신 줄 압니다. 우리가 피난에 지칩니까? 예수 님의 피난생활을 바라보십시다.
그 다음에 나사렛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사렛 적은 동네, 마리아의 집에서 어렸을 때에 양부 되는 요셉에게서 목수 일을 배우는 예수 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됩니다. 지금은 입학시기라서 자녀를 입학시키지 못해서 애 타는 부모도 많고 애 타는 어린 학생들도 많은 것을 볼 때 민망합니다. 그러나 그다지 낙심하지 마십시다. 예수께서는 그 당시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다고 하는 말은 없습니다. 어려서 목수 일을 배웠습니다. 기술을 배웠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요셉은 얼마 안되어서 세상을 떠나고 맏아들이었던 예수 님께서 목수 일을 해서 어머님과 어린 동생들을 돌보았다고 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매일 매일 노동을 해서 겨우 연명을 하는 이들도 많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피곤한 가운데 이와 같은 신세를 탄식하는 분도 없지 않아 있기 쉬운 줄 압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간에 나사렛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땀을 흘리며 목수 일을 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십시다.
아마 우리 교우 중에 대부분은 아직까지도 셋방살이를 하는 줄 압니다. 셋방살이는 사실 괴롭습니다. 우선 자유가 없습니다. 언제 집을 내라고 할는지 모릅니다. 그리해서 어떤 때에는 추운 겨울에도 이사를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종종 우리는 이 셋방살이로 지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하십시다.『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이 있으되 머리 둘 곳이 없이』생활한 우리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 우리 가운데 큰 유혹과 시험으로 말미암아 남 모르는 고민을 갖고 이 자리에 오신 이가 계십니까? 예수 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는 광야에서 四十일 동안 금식하는 동안에 심히 주리었습니다. 배가 고플 대에 시험하는 자가 왔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시험했습니다. 나에게 절만하면 세상의 모든 영광을 주겠다고 시험했습니다. 선전에서 뛰어내리기만 하면 하루아침에 명예를 얻게 하겠다고 시험했습니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갖은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 하나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어 나간 예수 님의 모습을 바라보십시다.
몸이 약하고 항상 병으로 고생하시는 이들도 우리 가운데 많은 줄 압니다. 우리의 약한 것을 아시고 우리의 질병을 대신 지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전능하신 우리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 이 거칠고 죄 많고 무정한 세상 가운데서 마음의 상처를 받고 이 자리에 나온 분들도 아마 여러분 계실 줄 생각합니다. 상할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지난주간에도 우리 교우 중에 슬픔을 당한 가정이 여럿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혹은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어버린 이들도 여러분 계십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슬픔 가운데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
혹 우리 중에 이 악한 세상에서 모략을 당하고 중상을 당하고 억울할 비난으로써 상한 마음을 가지고 이 가운데 오신 이들도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님을 바라보십시다. 주님은 죄가 하나도 없건마는 당시 사람들에게 바알세불의 힘을 얻어서 사귀(邪鬼)를 내어쫓는다.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이다. 모세의 율법(律法)을 범하는 사람이다. 성전을 모독하는 사람이다라고 갖은 모략과 중상을 당하면서도 모든 것을 참고 이기신 것입니다.
혹은 우리 중에 어떤 사람에게 냉대와 천시를 받은 경험을 가진 이가 계십니까?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예수 님께서도 이런 대접을 받았습니다. 한 번은 사마리아 동리에 가서 하루 저녁을 지내려고 했지마는 유대사람이라고 해서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배척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분해서 하늘로 불을 내려서 이런 동리는 멸하게 하자고 말했습니다. 예수 님은 오리려 그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아무 말씀이 없이 다른 동리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혹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이 세상은 본래 흐린 세상이요. 죄악의 세상인데 이런 세상에서 나 혼자 맑고 깨끗하게 살려고 하는 생각이 아예 잘못된 생각이 아닌가? 그저 형편대로 바람 부는 대로 부정과 불의라고 이로우면 타협해서 살수밖에 없지 않은가?』이와 같은 유혹을 받는 이가 계십니까? 말할 수 없는 역경 가운데서도 오직 의로운 생활을 꾸준히 해 나가며 모든 불의를 배척하고 부패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정의에 불타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
혹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어떤 형제와 피차에 오해가 있어서『저이가 나에게 인사를 안 하는데 내가 먼저 인사할 필요가 있나?』하는 토라진 기분 가운데 잠긴 이가 계십니까?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친히 자기의 손으로 씻겨 주시는 예수 님을 바라보십시다.
혹 우리 가운데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의 힘으로는 피할 길이 없는 어려운 문제를 당한 이가 있습니까? 십자가를 내일 아침에 맞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면서『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나에게서 떠나게 하여 주시옵소서』기도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혹 여러분 가운데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의 힘으로는 피할 길이 없는 어려운 문제를 당한 이가 있습니까? 십자가를 내일 아침에 맞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면서『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나에게서 떠나게 하여 주시옵소서』기도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혹 여러분 가운데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이가 있습니까? 배은망덕할뿐더러 선을 악으로 갚아주는 사람을 만난 이가 혹 있습니까? 예수 님도 꼭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三년이나 가르쳐 주었던 가룟 유다 가 환도와 뭉치를 가진 무리를 데리고 선두에 서서 예수를 잡으려 왔습니다. 거짓으로 입을 맞췄습니다. 그 때까지도 우리 주님은 그 사람을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의 칼에 배여 떨어진 말고의 귀를 도로 찾아서 고쳐주시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
여러분, 혹 거짓 증거로써 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받는다든지 또는 법정에서 억울한 재판을 받아본 일이 있습니까?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그는 대제사장의 법정에서 거짓 증거로 판결을 받았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거짓 증거로 불의하고 억울할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참으신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여러분, 혹은 억울하게 남에게 모욕을 당하고 멸시를 당해 본 일이 있습니까? 아무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 구인들에게 희롱을 당하였습니다. 침 뱉음을 당하였습니다. 채찍으로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우리 가운데 혹 남의 짐을 지고 수고하여 애쓰며 허덕이며 쓰러지는 이가 있습니까? 자기 십자가가 아인 인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향해서 몇 번이나 쓰러지면서 올라가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봅시다.
혹 우리 가운데 형제가 내게 지은 죄를 잊을 수 없는 분이 계십니까? 분한 마음을 암만해도 풀 수 없는 북이 계십니까? 십자가상에 달리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들을 향해서『아버지여 이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이런 일을 행하오니 이 죄를 그들 머리 위에 돌리시지 마시고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고민을 받습니까? 내 죄는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며 가시 면류관을 쓰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나는 죄가 너무 많아서 구원을 얻을 수 있겠나, 내게야 무슨 소망이 있는가?』낙심하는 이가 있습니까? 살인강도질을 하고 예수 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혔어도 회개하니까『오늘 네가 나와 같이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며 그런 사람도 구원해 주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오십시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
변화산상에서 빛나는 주님의 얼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무덤을 헤치시고 나오시는 영광스러운 얼굴, 온 세상을 초월해서 승천하시는 귀하신 우리 주님의 얼굴,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만국 만민을 다스리시는 저능하신 주님의 얼굴을 우리가 바라보십시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구원을 얻습니다.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가지 죄를 지었습니다. 난데없는 불 뱀이 많이 나와서 백성들을 물어 죽입니다. 이 때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끝에 달아서 그것을 바라보게 하라』
이와 같이 해서 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들어서 놋 뱀을 볼 때에 불 뱀에 물린 사람이라도 죽지 않고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죄로 삼아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게 하였습니다. 그 목적은 누구든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가령 우리가 이 불빛을 본다고 한다면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저 전등이 내 속에 들어와서 안벽에 비치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 눈에 이미 보는 대상이 들어와 그것을 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신령한 눈으로 항상 바라보게 된다면 주님께서 내 마음에 오셔서 내 마음가운데 계시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항상 바라보고 주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고 주님과 동행하게 되면 자연히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우리의 심령은 장성합니다.
봄 동산의 풀이 어떻게 자랍니까? 태양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자랍니다. 어떻게 꽃이 아름답게 핍니까? 햇빛을 보는 가운데서 아름다워집니다. 어떻게 과실나무가 많은 열매를 맺습니까? 햇빛을 보는 가운데서 열매가 맺히고 익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심령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우리 심령이 장성합니다. 우리 심령에 꽃이 핍니다. 우리 심령에 열매가 맺힙니다.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전에 성 프랜시스도 젊었을 때에 성다미안 조그마한 예배당에서 홀로 십자가상 앞에서 기도할 때에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온전히 변해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라비아 교회를 창설한 진젠돌프 백장 같은 사람도 젊었을 때 어떤 미술관에서 예수 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얼굴을 보다가 신령한 주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十九세기 영국의 제일 유명하던 스펄죤 목사도 소년시대에『땅 끝에 있는 백성들아 나를 바라보고 구원을 얻으라』고 하는 말을 듣고 다른 것을 하라면 못하겠지마는 예수를 바라보는 거야 못할 것 있나 하고 언제나 예수를 바라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 새 사람이 되어서 유명한 설교가 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바라봅시다.
튼튼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아야 시험에 안 듭니다. 병날 때에도 예수를 바라봅시다. 낙심하지 마십시다. 기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슬플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성공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실패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학교에 입학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학교에 입학을 못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봅시다.
언제나 예수를 바라봅시다. 살 때도 예수를 바라보고 죽을 때도 예수를 바라봅시다.
(一九六四년 二월 二十三일)
Ⅵ-14 그리스도의 얼굴 (고린도 후서 四장 一-六절)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四·六)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여러분께서 많이 기도해 주심으로 평안히 다녀오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 동부 아시아 기독교대회는 파키스탄에서부터 뉴질랜드에 이르는 동부 아시아에 있는 모든 교회 대표가 四년에 한번씩 대회로 모여서 아시아 교회들이 당면한 교회의 일치문제라든가, 선교문제라든가, 신교 자유문제라든가, 사회문제라든가, 여러 가지 공통한 문제들을 토의하고 의논하는 그런 모임입니다. 이번에 우리 한국에서도 十여명 대표가 같이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태국 방콕 교외에 있는 아름다운 곳에서 모였는데 약 二00명의 대표들이 모였었습니다.
방콕에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교회에서 보낸 최 선교사가 있는 곳인데, 물론 여러 번 만났고 그도 같이 그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성서공회 일과, 여러 집회를 인도하는 일과 또 주일에는 여러 교회에서 설교하는 일로써 매우 바쁘게 선교하는 것을 보고 왔습니다. 여러분께 문안을 전해 드립니다.
방콕은 너무 더워서 참 곤란했는데 한국에 돌아오니까 아직도 좀 추운 것 같습니다. 아마 그 모인 나라 가운데 우리 한국이 제일 추운 나라 같아요. 이 다음에 공산진영에서도 다 참석하게 되면 몽고 같은 나라가 아마 좀더 추울 것 같지만 지금까지는 우리 한국이 제일 추운 나라 같습니다.
앞서 읽은 말씀 가운데 한 구절을 제가 다시 봉독(奉讀) 합니다. 四장 六절입니다.『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두 주일 전에 제가「예수를 바라보자」하는 말씀을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아침 조금 더 가까이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묵상하는 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十九장에 보면 삭개오 라고 하는 세리(稅吏)장(長)이 예수의 얼굴을 보고싶어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 님이 지나가실 때를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수의 얼굴을 보고싶어 하는 분이 많이 계신 줄 압니다. 우리 가운데도 많이 계신 줄 압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의 얼굴이 어떠하셨는지 확실히 알 길이 없습니다. 이태리의 큐링 이라고 하는 곳에 옛날부터 예배당이 있는데 그 곳에 가면 보물로서 보존되어 오는 홀리 슈타우드(Holly Shroud)즉 거룩한 세마 포라고 하는 홑이불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세마 포는 예수 님을 무덤에 장사할 때에 그 유해를 쌌던 세마 포라고 합니다.
그 유해를 싸고 있던 동안에 어떠한 화학작용이 일어났는지는 모르나 그 홑이불 위에 예수 님의 모습이 사진처럼 박혀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예수 님의 귀가 얼마나 크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 전설이 얼마나 확실한지는 믿기가 대단히 어려운 줄 압니다. 제一세기에는 사진 만드는 법을 몰랐습니다. 예수 님을 누가 초상화로 그렸다고 하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조각으로 만들어 보았다고 하는 이도 없습니다.
더욱이 一세기나 二세기에는 기독교 예술가들이 감히 예수의 얼굴을 그려볼 생각도 못했습니다. 첫째는 너무 황공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렇게 하면 혹 둘째 계명에 저촉이 안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 역사를 보면 三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기독교 예술가들이 예수 님의 얼굴을 그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五·六세기에 내려오게 되면 예수 님의 얼굴을 그린 사람들이 많아져서 성화를 예배당 안에 가득히 붙여 놓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교회 안에 이렇게 성화가 너무 많은 것이 좋으냐 좋지 않으냐 이런 굉장한 논쟁이 벌어진 때도 있습니다.
지금도 특별히 동방교회 즉 헬라 정통교회에 가보면 그저 천장으로부터 온 벽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으로 장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 상상화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 성화 가운데 제일 유명한 성화들은 종교개혁 이후에 그려졌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하프만의 유명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얼굴이든지, 혹은 다빈치의 유명한 성만찬 식에 나타나신 주님의 얼굴, 혹은 홀맨 헌트 같은 이의 세계의 빛이라고 하는 그 그림에 나타난 예수 님의 얼굴이 아마 대표적일 것이고 제일 유명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부가 상상화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그다지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줄 압니다. 예수 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너는 나를 보고 믿으나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더 복이 있느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외모를 보는 것보다도 우리의 마음 눈으로 그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가령 요한 복음 一장에 보면 사도 요한 이 주님을 보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윌 가운데 거하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혹은 이렇게도 기록했습니다.『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가 나타내셨느니라.』이것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증언하는 사도 요한 의 말씀입니다.
오늘 아침에 읽었지마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세 제자가 변화산상에 올라갔다가 변화하신 주님의 얼굴을 보고 전하여 준 말 가운데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고 기록한 것을 우리는 읽어보았습니다.
혹은 사도 요한 이 환상 가운데서 계시를 받을 때 주님의 얼굴을 대하고 그 인상을 기록했는데 역시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신 것입니다.
빌립이 한 번은 주께 나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주님이시여, 아버지는 우리에게 보여 주시옵소서. 그저 그렇게 해 주시면 우리의 마음이 만족하겠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빌립아, 네가 이렇게 오래 나와 함께 있으되 네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는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었습니다. 빛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 얼굴을 먼저 바라보아야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신약성서는 주님의 다른 면을 보여주는데 즉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있었습니다.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마리아가 울고, 마르다가 울고, 같이 있던 여러 여자들과 여러 친구들이 울 때, 예수 님께서도 같이 우셨다는 기록을 우리가 읽어봅시다. 주님의 얼굴에는 눈물이 어린것이었습니다. 혹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실 때 감람산을 넘어서 먼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고는 우시면서, 다시 말하면 눈물을 흘리시면서『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너는 모으기를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는 것같이 모으려고 한 적이 몇 번이었더냐!』고 탄식하셨다고 했습니다.
눈물어린 그리스도의 얼굴을 또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실 때 통곡하시며 만민의 죄를 위해서 안타까워하시던 고민과 눈물의 얼굴도 또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 하는 무리들을 민망히 여기시는 그 얼굴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가난한 이들, 배고픈 이들, 헐벗은 이들, 외로운 이들, 죄의 짐을 진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눈물어린 얼굴을 또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주님의 얼굴은 좀더 자세히 보면 가시 면류관 쓰신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경주에 가면 옛날 신라의 왕들이 쓰던 왕관이라 하여 금관들을 진열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국에 가면 영국 역대의 제왕들이 쓰던 금 면류관들을 우리가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님은 만 왕의 왕이 시요, 만주의 주로서 보석과 진주의 금 면류관도 오히려 부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오셨을 때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친히 쓰신 것입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얼굴을 우리가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이광혁 장로님께서도 마태복음을 제일 먼저 그림으로 표하여 쓰실 때,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 님의 얼굴을 나타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날카로운 가시가 그 얼굴을 찌릅니다. 그 얼굴에는 피가 흐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피를 흘리시는 주님의 얼굴을 우리가 신령한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우리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주의 얼굴을 바라보는 중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죄인을 위하여 말할 수 없는 그 연민, 그 긍휼(矜恤), 그 자비를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물론『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궁창(穹蒼)이 그 손으로 만드신 것을 나타내어』보입니다. 그러나 이 굉장한 대 우주도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지를 못합니다. 오직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에만 하나님의 참되고 지극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찬송가의 일 절과 같이『머리와 수족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나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우리가 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에 다시 말하여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 얼굴을 앙망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돌이켜서 나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내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요, 내 죄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리해서 우리는 겸손히 주님께 나와 죄를 회개해야 하며 그 때에 거기에 죄 사함과 구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가운데 구원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계속해서 바라보게 되면 우리의 얼굴도 점점 빛나게 됩니다. 모세가 오랫동안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내려올 때에 그 얼굴이 빛났다고 하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핍박을 받아 돌로 맞아서 마지막에 순교할 때,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빛났다고 하였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 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그의 얼굴까지 빛나게 된 것입니다.
달빛이 어떻게 비취는지 아시지요? 태양 관선에 반사되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영광을 항상 앙망 하게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또한 우리 얼굴에도 어느 정도까지 반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얼굴은 우리 사람의 마음의 거울인데 우리의 마음 눈이 항상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서 우리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화평(和平)과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면, 아마 어느 정도까지 그 빛이 우리 얼굴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린도 후서 三장 十八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우리가 눈데 맨 수건을 벗어 놓고, 또한 여러 가지 색안경을 벗어놓고 적나라한 마음의 눈으로 주님의 얼굴을 거울처럼 바라볼 때에『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해서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어떠한 언약까지 하셨는지 아십니까? 요한 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요한 一서 三장 二절에『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주님께서 장차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되면 우리가 주님과 같이 되겠다고 하는 이 약속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의 책임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요한 복음 十二장에 보면 헬라 사람들이 빌립에게 와서『예수를 좀 보여주시요』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수를 보여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참된 주님의 얼굴을 보고싶어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사람들에게 주님의 얼굴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앞서도 말했지마는 스데반은 그 빛나는 얼굴로써 어느 정도까지 예수 님의 얼굴을 보여준 줄 압니다. 그런 기록은 없지마는 바울이 회개하기 전 예수를 핍박할 때에, 스데반의 그 순교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무의식중에 많은 감화를 받아 회개한 원인이 된 줄로 많은 사람들이 추측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의 얼굴을 통해서라도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얼굴을 보여줄 책임이 있습니다. 내 얼굴이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를 보여줄 수 있을까? 그 거룩하시고 경건하시고, 화평하시고, 온유하신 주님의 얼굴을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라도 보여줄 수 있을까?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초대 교인들의 생활 모습을 세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화평의 모습이 특별히 나타납니다. 둘째는 환난과 핍박가운데서도 항상 기뻐했습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즐겁게 받았습니다. 셋째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떠한 어려운 가운데서도 담대한 소신을 말했습니다. 진리를 전파했습니다.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사랑, 기쁨, 용기 어린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된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 님께 나와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언제든지 신령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으로 화하고, 그 마음이 우리의 생활과 얼굴에까지도 나타날 수 있는 그런 높은 자리에 올라와야 되겠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다 각각 재능을 주셨는데, 우리가 우리의 재능을 통해서 주의 얼굴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술가는 그 예술로써, 음악가는 그 음악으로써, 문필가는 그 문필로써, 사업가는 그 사업으로써, 주의 얼굴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되겠습니다. 마태는 마태복음을 기록함으로, 글을 통해서 주의 얼굴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헨델 같은 사람은 그 유명한 메시야를 작곡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얼굴을 보여주었습니다. 혹은 하프만은 그 유명한 성화를 통해서 주님의 얼굴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번 동부 아시아 기독교대회에 가보니까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그 교인 자신들이 작사를 하고 작곡한 그런 찬송가를 모아서 만든 조그마한 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거기 보니까 중국에서 만든 찬송가가 아마 제일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에서 만든 찬송가도 몇 곡이 있었지만 별로 많지 못했습니다. 모두 셋인가 넷밖엔 없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한국의 믿는 사람들이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서, 음악가는 음악을 통해서, 문필가는 문학을 통해서, 각 방면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쥐신 재능을 통해서 주의 얼굴을 우리 민족뿐만 아니고 온 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좀더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개인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교회 자체가 우리 교회생활을 통해서, 예수 님의 얼굴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전도를 간단하게 말해서 세 가지 방법으로 했습니다.
첫째는 초대교인들의 생활과 활동을 통해서 진도를 했습니다. 그 성결한 생활, 깨끗한 생활, 화평한 생활, 다른 사람을 봉사하는 생활, 이런 생활로써 전도를 했습니다.
둘째는 입술을 통해서 전도를 했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스데반이 공판 정에서 그리스도가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개인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서 개인적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셋째 방법은 교회 자체의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 한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항상 기쁜 마음으로 모이고, 모여서 같이 찬송가를 부르고 떡을 나누어 먹고, 유무상통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화평하고, 사랑했습니다. 이런 교회 자체의 생활로 그 때의 모든 사람들에게『과연 예수를 믿는 이들은 저러하다. 예수를 믿는 사람의 모인 것은 저러하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교회생활을 통해서 예수의 얼굴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본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우리 교회 자체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만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견지에서 과거 十여 년 동안의 한국 교회의 모습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알 수 없습니다. 교회 안의 불화, 분쟁, 분열 등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변형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우리 영락교회는 항상 초대교회의 모습 그대로 사랑과 화평과, 용서와, 유무상통과 피차간의 봉사와, 주안에서 하나 되는 것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로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언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지 아니하리 오 마는 이런 사순절 때에, 특별히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빛나신 그 얼굴, 거룩하신 그 얼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얼굴까지도 그 영광에 화할 수 있으리 만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해서 세상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고 예수 님을 생각하리 만큼, 될 때까지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전체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반영시킬 수 있으리 만큼 우리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지막에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고린도 전서 十三장 十二절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우리가 세상에 육신을 갖고 사는 동안에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항상 희미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얼굴과 얼굴을 친히 대하여 볼 때가 있겠습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기에 요한 계시록 二十二장 四절에 보면『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큰 축복의 하나는 가의 얼굴을 친히 볼 것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의 얼굴도 주님의 얼굴과 같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높은 자리에까지 이 사순절 동안에 올라갈 수 있는 은혜를 우리가 받으십시다. (一九六四년 三월 八일)
Ⅵ-15 사도시대의 전도 (사도행전 二장 三十六-四十七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二·三十六)
이 말씀은 사도 베드로의 오순절 선교의 결론입니다. 오순절의 큰 은혜를 받아서 방언을 말하며 기쁨이 충만하게 될 때에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기 위하여 그 곳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사도 베드로는 열 한 사도와 같이 일어나서 그들에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먼저 이와 같은 현상은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하는 말과 같이 무슨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고 서지자 요엘의 예언대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냈으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마는 이 십자가의 죽음도 결국은 성경의 뜻대로 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가운데서 다시 부활케 하심으로 과연 이 분은 구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과 주가 될 수 있는 것을 증거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구주가 되는 것을 오순절에 확증한 것입니다. 이 설교는 기독교 복음을 전파한 맨 처음의 설교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전파는 이 설교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오늘 특별히 一년에 한 번 전도부 주일로 지키는 날을 맞아 사도시대에는 전도를 어떻게 하였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시간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조용히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간단하게 말하여 세 가지 방법으로 전도를 하였습니다.
첫째는 말로 전도를 하였습니다. 입을 벌려서 말로 예수의 십자가를 증거하고 예수의 부활을 또한 증거 한 것입니다. 앞서도 말하였지마는 사도『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이렇게 사도행전 二장에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뿐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공회 앞에 서게 될 때에 역시 입을 벌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구주가 된다고 하는 것을 증언한 것입니다. 스데반 뿐 아니고 사도 바울도 루스드라회당에 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전도를 할 때, 혹은 아덴에 가서 아레오바고 산상에서 많은 철학자들 앞에서 예수를 증거 할 때에, 혹은 가이사랴에서 베스도와 아그립바왕 앞에 섰을 때도 한결같이 입을 벌려 말을 통해서 예수 님께서 구주가 된다고 하는 것을 증거 한 것입니다.
이런 전도는 일시에 여러 사람에게 전도하는 말씀인 까닭으로 대중전도 혹은 공중전도라고 우리가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한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말로 전도하되 다른 형식의 전도가 있었습니다. 가령 빌립이 가이사랴에 가서 전도한 것을 보면 많은 사람을 모아 놓고 전도한 것보다도 개인 개인을 접촉해서 전도한 것 같습니다.
길 가다가 구스 여왕 간다게의 배부장관이 지나가는 것을 만나서 수레를 같이 타고 가면서 이사야를 해석해 주어 개인으로 전도한 기록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많은 사람 앞에서만 전도한 것 아니고 집집에 다니면서 전도를 했고 또한 거리에 나가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나는 대로 개인으로 전도를 한 것입니다. 말로 한 전도 가운데 공중전도뿐이 아니고 개인전도가 많았습니다.
예수 님의 전도도 이 두 가지 방법을 병용했습니다. 산 위에서 모든 사람에게 산상보훈을 가르친 것은 말하자면 대중에 대한 공중전도입니다. 혹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유를 가르치신 것도 역시 일시에 수천 명에게 한 공중전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저녁은 조용히 니고데모 라고 하는 한 사람을 만나서 전도를 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 하나는 만나서 전도를 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삭개오 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그 한 사람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조용히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정을 읽어보면 대중전도뿐 아니고 이와 같은 개인전도를 통해서 복음이 각처에 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명 전도자가 안디옥에도 먼저 가서 교회를 세웠고, 무명 전도자가 오라에까지 가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생명 책에만 이름이 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개인 개인의 전도를 통해서 복음을 사방으로 전파한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말의 전도를 보충하기 위해서 또한 어떤 이가 글을 쓰기를 시작했습니다. 가령 마가 같은 이는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예수 님의 생활과, 그 교훈을 기록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읽게 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태는 마태복음, 누가는 누가복음, 요한 은 요한 복음을 썼고 또 사도 바울도 여러 교인들에게 이미 가르친 것을 더 분명히 가르치기 위해서 서신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사도시대에 이미 문서전도가 시작된 것을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시대에 보면 말로써 전도를 했는데 공중전도, 개인전도, 문서전도 이 세 가지 방면으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현대에 와서 보면 문화가 발전함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말의 전도를 보충하는 여러 가지 기계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확성기, 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것이 다 우리말의 전도를 도와줍니다.
인도에 있는 말호마교회 같은 데는 一년에 한 번씩 온 교인들이 다 모여서 대회를 여는 풍속이 있는데 한 번에 三, 四만 명이 모인다고 합니다. 전에 확성기 없을 때에는 한 사람이 가운데 서서 크게 설교를 한 마디 하면 멀리 그 말을 들을 만한 곳에 선 사람이 그 말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고 또 전해 주고 이렇게 해서 여러 만 명에게 일시에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확성기가 나온 이후에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라디오를 통해서 얼굴을 보지 못하지마는 일시에 전국에 혹은 세계에까지도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 지금은 멀리 있는 사람에게 얼굴까지 보면서 전도를 할 수 있는 텔레비전도 생기게 된 것입니다.
시대와 환경은 변하였지마는 지금도 이 전도는 우선 말로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중으로 전도해야 되겠고, 문서로 전도를 해야 되겠고 대중으로 전도를 해야 되겠고, 개인 개인이 만나서 또한 말로써 전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몇 가지 방법 가운데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제일 편리한 전도방법이 어느 것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개인전도입니다.
전도하는 것을 전쟁에 비유하면 문서전도나 방송전도 같은 것은, 마치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와 싸워서 그 나라를 점령하고자 할 때, 비행기를 보내서 폭격하는 것, 혹은 군함을 보내서 함포(艦砲)사격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먼저 문서전도나 방송전도를 통해서 기독교 진리로써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기독교 진리를 깨닫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전쟁에서 공군기의 폭격 만으론 온전히 승리를 거두지 못합니다. 폭격을 다 하고, 함포 사격을 다 한 다음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압니까? 육군이 있어야 합니다. 보병이 있어야 합니다. 직접 원수의 영토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점령해야 완전히 전쟁에 승리를 얻습니다. 여러분, 개인전도자는 무엇과 갔느냐고 하면 육군과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 종종 등록하는 이들의 사정을 들어보면 방송을 통해서 진리를 듣고, 혹은 책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어떻게 되어서 우리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까?』물어보면『아무 집사가, 아무 권찰이, 아무 친구가 나보고 오자고 그래서 이제 교회에 왔습니다.』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떤 때는 별로 공부도 못한 이가 대학교수를 인도해 가지고 우리 교회에 나온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문서전도나 방송전도나 대중전도가 필요하지마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효과가 있는 것은 개인 개인으로 하나씩 하나씩 인도하는 개인전도입니다. 사도시대는 하나 하나가 개인전도자였습니다. 안드레가 예수를 만난 다음에는 곧 자기 형 시몬을 예수 님께로 인도해 왔습니다. 빌립이 예수를 만난 다음에는 곧 자기 동향 사람 나다나엘을 예수 님께로 인도해 왔습니다. 그러기에 찬송가에 있는 말씀이 꼭 옳습니다.『천사같이 말못하고 바울 같이 못하나 네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사도시대 교인들은 하나 하나가 개인전도를 할 수 있는 그리스도 신자였습니다.
둘째로는 행위 혹은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말로 하는 전도가 물론 필요하지마는 말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말과 행위가 같아야 됩니다. 어떤 때는 말은 잘하지마는 그 사람의 행위가 말과 같지 않음으로 인해서 아무리 잘 한 말이라고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때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도『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해서 저희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착한 행실은 무언의 전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회개하기 전에 큰 감과를 받은 일이 있다고 하면, 아마 스데반의 순교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그 논리에 의해서 과연 예수 님께서 메시야다 이렇게 깨닫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와 같이 위험한 자리에서 담대하고 용감하고 침착하던 스데반의 모습, 자기를 죽이려고 돌로 치는 그 사람들을 향해서『아버지여 이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이와 같은 일을 하오니 이 사람들의 죄를 그 머리에 돌리지 마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던 그 모습을 잊을 내야 잊을 수 없었을 줄 압니다. 무언의 전도였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四장이나 五장을 읽을 때에 대 제사장과 그 공회원들이 사도들을 불러다 놓고서 왜 이 복음을 전파하지 말라고 했는데 너희들이 그냥 복음을 전하느냐고 힐난했을 때에 이 사람들이 담대히『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것입니까? 사람의 말을 순종할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고 한 것을 읽어봅니다. 공회원들이 본래 생각하기는 이 사람은 다 갈릴리 어부요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사람들로 알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담대히 말하는가 하고 놀랐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다 무언의 전도입니다.
초대교인들의 진실하고 성결하고 실천적인 사랑의 생활은 무언의 전도가 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병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병난 사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에 병이 나아서 깨끗함을 얻은 이런 모든 일도 무언의 전도가 된 것입니다. 혹은 욥바의 다비다와 같은 여자가 다른 사람을 구제하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지어 입히고 일생토록 봉사의 생활을 한 것도 온 욥바 근처에 무언의 전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오늘날도 우리 믿는 사람의 행위와 행동이 무언중에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은 진실하고, 성결하며 사랑과 봉사로써 무언 가운데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참 이와 같은 행위와 행동으로써 무언의 전도를 하는 분이 많이 있는 것을 저는 항상 감사히 생각합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 안에서 여러 부(部)가 다 교회를 봉사하고 전도를 잘 하지마는 아마 이런 방면으로 전도를 많이 하는 부는 상례 부나 봉사 부나 혹은 각 구역을 맡은 권찰 들일 것입니다. 어떤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에 가서 같이 위로해 주고, 같이 눈물을 흘리면 옷을 지어 주고, 모든 수속을 도와주고, 같이 모여서 정성껏 장례식을 치려주고, 산에까지 같이 가소 가 다음에 또 가서 위로하는 이런 모든 것은 무언중에 다 전도가 됩니다.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마련해 주고, 밥 굶는 사람에게 쌀을 마련해 주고, 어려운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피차에 도와서 직업을 알선해 주고, 피차에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은 다 무언 중의 전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자선사업기관들이 하는 일도 다 무언의 전도가 됩니다. 교육사업이나, 의료사업이나, 자선사업이나 이 모든 것도 그 자체를 위해서 하려니와 이것 역시 무언 가운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네팔 같은 나라에는 지금도 선교사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잘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잘 믿는 의사들이 가서 병을 고쳐 주면서 개인으로 전도를 현재 하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잘 믿는 의사가 그의 의료사업을 통해서 복음을 많이 전달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믿는 사람들도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우리의 행위와 행동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 프랜시스의 유명한 이야기를 우리가 항상 기억합니다. 한 번은 제자들을 데리고 아시스 거리를 한 바퀴 빙 돌아오면서 아무라고도 말 안하고 그냥 자기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이 놀라서 물었습니다.『오늘은 왜 시간만 버리고 전도도 하지 않고 그냥 거리만 돌아왔습니까?』 이 때 성 프랜시스는『말로 하는 전도만 전도인줄 알지 말라. 우리의 모습과 우리의 걸어가는 행동 그 자체가 무언의 전도인 것을 너희들이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행위로써 전도를 했습니다.
셋째로는 교회생활을 통하여 전도를 하였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이 다 이 성경 본문을 읽었지마는 그 가운데 제가 몇 절을 다시 읽을 때 그 당시 교회생활이 어떠한 것인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 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이런 몇 구절이 그 때 교회생활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들은 다 사도의 그르침에 순복 하였습니다. 이들은 성도의 교제를 가졌습니다. 이들은 유무를 상통하고 상부상조를 하였습니다. 이들은 항상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이들은 항상 같이 모여서도 이따금 떡을 떼어먹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성찬식, 혹은 친목회를 자주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이 기도를 힘썼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생활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게 되었고, 이렇게 되니 자연히 구원받을 사람이 구름같이 교회로 모여 오게 되었습니다. 교회생활 자체가 복음의 간증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화평과 사랑과 기쁨과 경건의 교회생활, 동고동락하며 성도의 교제가 있는 교회생활은 언제나 큰 전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무엇보다도 화평해야 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이 하나가 되게 한 것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유감이지마는 우리 한국교회는 특별히 이 방면에 실패한 점이 많습니다. 이 방면에 특별히 반성할 필요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이 때의 예루살렘교회가 이와 같은 교회가 되었습니까? 그저 한 마디로 말하면 오순절의 성령을 받음으로써 이와 같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이들이 어떻게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었나 요? 그저 한 마디로 말하면 그들의 믿음과 기도로 말미암아서였습니다. 그들은 다 예수 님께서 자기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나보고 예수의 부활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이 믿음에 의해서 성령을 받기를 기도했습니다. 믿음과 기도는 이 교회로 하여금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게 했습니다. 하나 하나가 성령으로 충만한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를 개인으로도 전파했고, 교회로도 전파했고, 말로도 전파했고, 행위로도 전파했고, 생활로도 전파할 수가 있은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전도는 그리스도의 최후의 지상명령입니다.『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는 것은 예수 님께서 최후로 우리 믿는 사람에게 명령한 말씀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요, 살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개인의 살길도, 민족의 살길도, 오직 복음에 있습니다. 영혼의 구원도 복음을 믿는 데 있고, 이 썩어져 가는 사회를 구할 길도 오직 복음에 있습니다.
반공과 방첩의 표어가 사방에 붙어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표어를 붙이기만 한다고 반드시 반공이 되고 방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민족의 사상이 변화해서 과연 참된 민주주의 사상을 가지게 되고, 참된 인생관을 바로 가지게 될 때에 자연히 반공의 생활을 하고 방첩의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남한에는 큰 전도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열린 문을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세 가지 방면으로 전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먼저 말로 전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실로 전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또한 우리의 교회생활로써 전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一九六四년 四월 五일)
Ⅵ-16 예수와 굶주린 대중 (마태복음 十四장 十三-二十一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 十四·十六)
일 말씀은 예수 님께서 벳새다 들에서 굶주린 대중을 앞에 놓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떡 다섯 덩이와 불고기 두 마리로 五천 명을 먹이신 이적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세례 요한이 순교를 당한 후에 예수 님께서 배를 타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벳새다에 가까운 빈들로 가신 것입니다. 좀 쉬시기 위해서 가신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주님이 가신 것을 찾은 후에 여러 고을에서 모여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에워싸게 되었습니다. 예수 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무리들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 중의 병자를 고쳐주시고 그들을 위해서 천국의 복음을 가르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어느덧 때가 저물게 되었습니다. 빈들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제자들은 마음 가운데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리해서 주님께 나아와서『곳이 빈들이요 때가 이미 저물었는데 이들이 시장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을 여러 마을에 보내서 아무래도 먹을 것을 사먹도록 해야 될 것 같습니다.』이런 진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 님께서 얼른 대답하시는 말씀이『갈 것 없다. 너희가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할 있습니까? 이들을 다 먹이려고 하면 적어도 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도 오리려 부족할 텐데 그렇게 많은 양을 살수도 없고 우리가 돈도 없고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 때 마침 어떤 아이가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안드레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우리에게 있는 것은 이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 님은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명해서 모든 무리들을 떼를 지어서 잔디밭에 앉히게 하셨습니다.
예수 님은 그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축사를 하시고 떼어 나누어주시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는 그것을 가지고 五천 명이 넘는 많은 무리들을 먹이고 오히려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떡이 어떻게 불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먹였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복음서에도 분명히 기록해 주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은 없는 가운데서도 있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능치 못하신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실상 자연계에서 보는 대로 어떻게 밀 알 한 알을 봄에 심으면 그것이 가을에 가서 많은 수확이 되는지 그 신비 자체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하시는 일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예수 님의 행하신 이적은 흔히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셔서 급한 그 요구에 응하시기 위해서요. 둘째는 그 이적을 통해서 보다 더 신령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써 五천 명을 먹이는 이 이적도 이 두 가지 의미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왜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하셨는가?
첫째로 굶주린 대중을 먹이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빈들에서 굶주리는 대중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로 하여금 가다가 길가에 쓰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한 것입니다. 주린 자를 먹이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이적까지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문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내실 때에 영혼만 내신 것이 아닙니다. 육신을 먼저 지으셨습니다. 우리 육신은 음식을 먹어야 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시기 전에 사실은 우주를 먼저 지으시고, 모든 식물을 먼저 지으시고, 동물을 먼저 지으시고 오곡백과와 산 해 어 별로 다 준비를 해 놓으신 후에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왜? 우리 사람은 먹어야 사는 것을 아시는 까닭입니다.
그리해서 성경에 보면 어떤 시장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밀밭을 만나서 그 이삭을 비벼 먹으면 그것은 도적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왜? 시장한 사람은 먹을 수 있습니다. 율법이 허락합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시장해서 과실나무를 만나서 그 과실을 따서 먹기만 하면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시장한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따서 주머니에 넣고 가면 그것은 죄가 됩니다.
옛날 율법을 읽어보면 곡식을 거둘 때 전부 다 거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모퉁이 이 곳 저곳에 좀 남겨 놓고 거두라고 했습니다. 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그 이삭을 주워 다가 먹고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감람나무를 털 때 아주 다 털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좀 남겨두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그것을 따서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옛날 나오미와 룻이 멀리 모압 땅에서 돌아와서 베들레헴에 왔는데 자기 땅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 살았어요? 이삭 주워먹고 살았습니다.
배고픈 이가 빵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정당한 기본 권리입니다. 그러기에 성 프랜시스는『가난한 이가 빵을 달라고 하는 것은 자기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하나님께서 먹고살도록 낸 것인데 먹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라는 말입니다. 우리 동양에도 옛날부터 나려오는 말 가운데 천불생무록지인(天不生無祿之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녹 없는 사람을 만들지 않으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 비슷한 사상이 그 가운데 내포된 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굶주린 이들을 먹이는 것은 사회정의입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이기를 거부한다고 하면 그것은 사회정의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굶주린 이들을 먹이는 것은 인도입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할 일입니다.
여러분은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잘 아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불한당을 만났습니다. 돈을 다 빼앗겼습니다. 많은 매를 맞고 넘어져서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었습니다. 그 때 마침 어떤 레위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보고만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에 제사장이 또한 지나갔습니다. 그 역시 물끄러미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유대사람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그 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외국 사람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도와준 이야기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에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거리에 굶주려서 쓰러진 동포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 아닌 미국 사람들이 구호 품을 가지고 오며 잉여 농산물을 보내서 이 굶주리는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이런 때에 한 동포가 된 우리로서 더욱이 레위 사람과 제사장의 지위에 있는 한국의 교회가 이 광경을 보기만 하고 그저 지나간다고 하면 이것은 인도를 무시하는 것이고, 이웃됨을 무시하는 것이고, 정의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굶주리는 이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굶주리는 이에게 먹이는 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할 일입니다.
또 기억하십시다. 굶주린 동포를 우리가 도와주는 것은 사실 주님을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二十五장에 유명한 세 비유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마지막으로 하신 비유가 재 심판의 비유입니다. 면양과 산양의 비유입니다. 인자가 오셔서 모든 사람을 자기 앞에 갈라 세우기를 마치 목자가 면양과 산양을 세우듯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오른쪽 면양 편에 섰을 의인들을 향해서 인자가 하시는 말씀이『내 아버지께로부터 축복을 밭은 너희들은 창세(創世)전부터 너희를 위해서 준비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들이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너희들이 입을 것을 주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의인들은『주여 언제 주님께서 그런 일을 당하셔서 우리가 그런 일을 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니라.』굶주리는 우리 동포를 내가 돕는 것은 주님의 작은 형제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굶주리는 이를 먹이는 것은 우리 주님을 대접하는 것임을 우리가 언제든지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이 명령을 받고『우리가 이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주님 말씀이『그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게 가져오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할 것은 가지고 있는 것을 주님께 가져올 뿐입니다. 주의 명령에 순복 할 것뿐입니다.
오늘날 예수 님은 한국 교회를 향해서도 이 말씀을 하시는 줄 압니다.『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오늘날 한국 교회도 제자들의 말로밖에는 대답할 다른 말이 없습니다.『우리가 무엇으로써 이 무리를 먹일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주님 하시는 말씀이『지금도 좋다 네게 있는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너라. 그리고 가 나머지는 다 네게 맡기라』고 하십니다. 그 나머지는 주님께서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위해서 주님께 바칠 수 있는 것을 정성으로 바친다고 하면 주님께서 이것을 가지시고 이적을 행해서 행하든지 어떻게 하시든지 자기의 백성을 먹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깊이 생각할 것이 또 있습니다.『굶주리는 대중을 도와주는 것은 곧 나를 돕는 것이라』하는 말씀입니다.『굶주리는 대중을 먹여서 살리는 것은 곧 내가 사는 일이니라.』여기 많은 대중이 굶주리는데 몇 사람만 먹을 것이 넉넉하다고 좋은 집 짓고, 좋은 옷 입고, 옛날 부자처럼 그냥 평안히 살아갈 것 같습니까? 동서고금에 그런 사회가 오래 간 예가 없습니다. 폭동이 일든지, 쿠데타가 일어나든지, 데모가 일어나든지, 혁명이 일어나든지, 무엇이든지 일어나고야 맙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를 살펴보면 굶주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은 큰 위기를 내포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은 돈이 있다고 하지마는 집을 잘 지을 생각을 할 때가 아닙니다. 돈 있다고 옷을 아름답게 입고 거리에 활개를 치며 다닐 때도 아닙니다. 돈이 있다고 잔치를 크게 할 때도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 굶주리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쨌든 내 생활을 절약하고 내가 내핍생활을 하고, 내가 아껴서 같이 굶주리는 사람과 나누어 먹으면서 살아야 너도 살고 나도 살 수 있고, 이 위기를 극복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굶주리는 대중을 살리는 것이 곧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마 대략 아시겠지만 우리 본 교회에서는 당회에서 봉사 부와 많이 의논하다가 이와 같이 굶주리는 사람이 많은 이 춘궁기에 한 서너 달만이라도 우선 서울 주변에 있는 굶주리는 동포를 위해서 매일 우리 교회에서 급식을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해서 五十만원 예산을 세워서 이 급식하는 일을 하자고 작정하고 이 목적을 위해서 다음 주일 우리가 헌금을 합니다. 기억하십시다. 예수 님께서 굶주린 대중을 먹이기 위해서 이적까지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이 명령에 순복만 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바치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주님의 능력으로써 우리 민족을 축복해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신령한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이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六장을 읽어보세요. 우리 사회에 육신으로 굶주리는 대중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마는 깊이 생각해 보면 영으로 굶주리는 대중은 더 많이 있습니다. 옛날 아모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양식이 없어서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서 갈 함이 아니요……』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로 말미암아 굶주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은 떡만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영의 굶주림으로 말미암아 영의 먹을 것을 먹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죄를 먹고 마십니다. 향락과 허영만 따라다닙니다. 근심과 염려에 싸입니다. 불평과 싸움을 합니다. 미신과 여러 가지 사교에 미혹됩니다. 사실 영의 굶주림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양식을 먹지 못하므로 죽는 사람이 사회에 얼마나 더 많습니까?
예수 님께서는 영으로 굶주린 이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이 영으로 굶주린 대중을 위해서도 오늘날 우리 교회에『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옛날 제자들처럼 오늘날 우리 교회도 흔히 이렇게 대답합니다.『우리가 어떻게 이 많은 사람에게 먹일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많지 못합니다.』『옳다 너 있는 것을 내게 바쳐라. 네게 지식이 잇느냐? 그 지식을 내게 바쳐라, 네게 시간이 잇느냐? 그 시간을 내게 바쳐라, 네게 물질이 잇느냐? 그걸 내게 바쳐라, 네게 가진 게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지마는 그 있는 것을 나에게 바쳐라!』말씀하십니다.
한국교회가 가난합니다. 한국 교회가 미약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아직도 다 초창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힘이 매우 약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네게 있는 것을 나에게 가져오너라.』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겸손하게 주님 앞에 온전히 바치면 주님께서는 이것을 가지고 굶주리는 대중에게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 먹이고 우리 민족을 영적으로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여기 보니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五천 명을 먹이고도 부스러기가 열 두 광주리에 찼다고 했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사실 생명의 양식은 언제든지 나누어줄수록 더 붓습니다. 남에게 전도할수록 내 믿음이 더 커집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가르칠수록 내 지식이 더 많아집니다. 내가 남을 도와주면 내 힘이 더 커집니다. 내가 일할수록 내가 더 은혜를 크게 받습니다.
우리 교회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고, 전도하고, 일하면 일할수록 우리 교회가 더 은혜를 받습니다.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바쳤지마는 열 두 광주리가 남은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이 달은 전도의 달입니다. 이 주간은 전국적으로 기키는 구호의 주간입니다. 우리 문밖에는 육으로 굶주리는 대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영으로 굶주리는 대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양식과 육신의 양식을 이들에게 줄 책임이 있습니다.
여기 보니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였던 一二0명이 성령을 충만히 받고 은혜를 풍성히 받은 다음에 한 것이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큰 능력을 받아서 베드로를 중심 하여 복음을 전파해서 생명의 양식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하루에 三천 명씩 구원하는 생명의 양식을 먼저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뿐입니까? 유무상통해서 내게 있는 것을 하나님께 바쳐서 베고픈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육신의 양식을 또한 나누어주었습니다. 과연 우리 영락교회가 성신을 받았습니까? 과연 우리 영락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았습니까? 은혜를 받았으면 이 두 가지로 나타날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을 널리 전하여 줍니까? 우리가 내게 있는 것을 바쳐서 굶주린 우리 동포를 먹일 수 있습니까?
이 큰 일을 위해서 각각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네게 있는 것을 바치라고 합니다.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라도 이것이 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인 줄로 알아서 하나님께 정성껏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지고 위대한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바로 오늘이 四월 十九일입니다. 四년 전 우리 젊은 학도들이 이 나라의 자유의 꽃이 피기를 간절히 원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친 그런 날입니다. 어제 저녁에도 우리 교회에서 청년들과 학생들이 모여서 본 교회 안에서 희생한 김치호 군의 추도예배를 드렸는데 저도 참석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써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 十九영령들에게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여야 이들의 비원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로서 이와 같은 때 마땅히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이 굶주린 대중에게 우리는 먹을 것을 주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영으로 굶주린 이 대중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되겠습니다. 이것만이 이들의 비원을 이루어 주고 이 민족과 국가를 옳게 세우는 기간이 될 것입니다.
(一九六四년 四월 十九일)
Ⅵ-17 기독교 가정의 기본원칙 (맡태복음 十九장 三-十二절)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 十九·六)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주간은 특별히 가정주간을 지킵니다. 또 요새는 결혼식도 많이 있습니다. 가정은 개인적으로 안식과 행복의 원천이요, 또 장래 국민이 자라나는 귀중한 곳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볼 때에 국가의 기본 단위로서 가정은 사회의 안정과 질서에 큰 관계가 있습니다. 반면에 이 가정을 위협하는 사상과 세력도 적지 않습니다. 특별히 한국과 같은 전환기에 있는 사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러한 때 가정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분명히 찾아 마음 가운데 명심하는 것은 매우 필요할 줄 생각합니다. 이 시간은 성경이 교훈 하는 대로 기독교 가정의 기본 원칙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일부일처(一夫一妻)주의의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에 일남 일녀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전서 삼(三)장에 감독과 집사의 자격을 열거할 때에「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구절을 삽입하였습니다. 이것은 창조의 질서입니다. 일남 일녀가 모여서 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로 타락된 인간은 정욕의 종이 되어서 어떤 문화나 어떤 사회에서나 소위 문명한 사회, 야만의 사회를 불구하고 대체로 일부다처(一夫多妻)주의를 실행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일처다부(一妻多夫)주의로 전락된 예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고대 헬라나 로마의 이교 사회를 비롯해서 동양의 유교 사회, 불교사회, 중동 일대의 회회교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원시 사회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일부다처주의를 행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모세 오경에 가진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기드온이니 다윗이니 솔로몬 같은 여러 사람들이 일부다처주의를 실행해서 많은 죄악을 범하고 그 화를 입은 역사를 우리가 성경 가운데서 읽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일부일처주의의 원칙을 우리에게 재확인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찾아보면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제국에서 데오도시 황제 때에 비로소 일부일처주의를 국법으로 제정해서 반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제도를 국법으로 제정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인 줄 생각합니다.
오늘날도 만하면 기독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회회교 국가 이외에서는 대체로 일부일처주의 법으로 신봉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개인으로는 어떤 사회나 비밀 리 또는 공연히 일부다처주의를 실행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일부일처주의는 근본적 창조의 질서로서 기독교 가정의 제일 원칙이요. 기독교 가정뿐 아니라 모든 가정의 제일 원칙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하면 먼저 이런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둘째는 부부일신의 원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께서 들은 성경의 교훈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 님께 질문합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막론하고 그 아내를 내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예수 님께서 곧 대답하시는 말씀이『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에 한 몸이 된다고 하는 원칙을 다시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한 몸은 나눌 수 없습니다. 불가분리의 원칙을 다시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사람의 의사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짝을 지어준다고 하는 사실을 또한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즉 이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사람의 일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들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어찌해서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주어서 이혼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까? 예수 님이 곧 대답하시는 말씀이『그것은 너희의 마음이 완악(頑惡) 해서 일시로 허락한 것뿐이지 본래 그런 것은 아니라, 근본 원칙에 의해서 너희는 살아야 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제七계명을 범한 이외에 어떤 이혼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원칙, 불가분리의 원칙, 부부 일신의 원칙을 우리 주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근일에 와서 우리 한국에도 이혼과 가정 파탄의 비극이 해마다 증가하여 갑니다. 一九六二년에 이혼 통계를 보니까 법정에 나타난 수대로만 八,八一0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一九六三년에는 九,三二五건으로 五백여 건이 더 증가되었습니다. 이것은 법정에 나타난 수만을 통계한 것입니다. 법정에 나타나지 않은 수를 합하면 그 통계는 얼마나 더 많을지 알 수 없습니다.
통계에 난 대로만 생각하더라도 근 一만(萬)에 이르는 세대가 一년에 가정이 파탄된다고 하면 그 당사자들의 형편은 어떻게 되겠고 그 가운데 출생한 자녀들의 운명이 얼마나 가련한 지경에 빠지겠습니까? 또한 거기에 미치는 사회의 영향이 어떠하겠습니까?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할 때에 실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면 결국은 그 형벌을 내가 받고, 내 자녀가 받고, 온 사회가 역시 같이 받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동양에도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 일부한원오월비상(一婦恨怨五月飛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며느리의 원망을 품는 것이 오월에 날리는 서릿발과 같다고 하는 뜻입니다. 벌이 있습니다.
셋째는, 성결(聖潔)의 원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가정은 성결해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六장 十八절 이하에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엄하게 교훈 하여 주십니다.『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밖에 있거니와 음행 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히브리서 저자는 十三장 四절에 이렇게 훈계하십니다.『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 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가정이 성결히 보전되기 위해서 일곱 째 계명과 이 모든 교훈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가정이 반드시 성결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통하여 여러 가지 축복을 주시는 가운데 가장 큰 축복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귀한 인간의 새로운 생명이 가정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결한 가정은 결혼 전부터 시작이 됩니다. 몸은 성령의 전인 줄 알아서 몸을 성결히 가질 줄 아는 청년남녀로서만 성결한 결혼이 가능합니다.
결혼 전에 다소 교제는 필요하지마는 자제와 극기의 덕이 있어서 인격적으로 서로 존경하고 사랑할 줄 아는 경건한 남녀로만 성결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요사이 미혼 청년남녀들의 소위 무궤도한 교제는 사회의 풍기를 물란(紊亂)캐 함을 물론이요, 자기 자신들의 일생을 망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특별히 요사이 소위 가족계획이니 산아제한이니 하여서 각종 피임법의 공개는 물론이고 불법적이요 범죄적인 낙태수술을 항다반(恒茶飯)으로 아는 우리 사회에서 학생들과 청년들의 성도덕의 타락은 실로 큰 사회문제요, 도덕문제요, 종교문제입니다.
오늘날 매일 신문 사회면에 나타나는 대로 각종의 비극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현대인의 성도덕의 타락은 현대문화의 기초를 썩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성결한 가정을 이룰 수 없고 또 이미 이룬 가정을 파괴해 버립니다. 가정이 파괴되니 경건한 자녀가 날 수 없고 난대도 바로 자랄 수 없습니다.
사회는 음란음녀(淫亂淫女)의 소굴이 되고 그 소생으로 충만하게 되니 그 사회는 범죄와 혼란의 도가니로 전락하게 됩니다. 결국은 이러한 사회와 나라는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니 만큼 시급히 이런 데서 사회와 국가를 구하기 위하여 경건한 기독교 가정이 요청됩니다. 참된 신앙에 입각한 자제와 극기의 덕이 있고 정조를 생명과 같이 아는 경건한 청년 남녀로서만 성결한 가정을 이룰 수 있고 또한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은 성결히 이루어야 하고 성결히 보전되어야 합니다. 성결이 가정의 기본원칙입니다.
넷째로는, 사람의 원칙입니다.
에베소 五장 二十五절에『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디도서 二장 四절에『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 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상하며 근신하며 순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이런 여러 교훈이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의 생활 원칙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여자를 지으실 때에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지으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옛날 유대 랍비 가운데 한 사람이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고 합니다.『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실 때에 남자의 손뼈로 만들지 않은 것은 남자가 여자를 너무 장난감으로 알까봐 그렇게 안 하셨다. 또 여자를 만드실 때에 발에 있는 뼈로 만들지 않은 것은 남자가 여자를 너무 업신여길까봐 그렇게 안 하셨다. 여자를 만드실 때 남자 머리의 뼈로 만들지 않은 것은 여자가 남자를 너무 업신여기면 그것도 곤란하므로 여자가 남자를 주장 못하게 하기 위해서 머리뼈로는 안 만들었다. 그럼 왜 갈빗대로 만들었는가 요?
갈빗대는 몸의 중심에 있는데 남자와 여자가 꼭 평등하게 서로 살라고 갈빗대로 취해서 만들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갈빗대로 말하면 심장에 제일 가까우니까 남자가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라고 갈빗대로 만드셨다. 또 갈빗대는 팔 아래 있어서 살로 덮여 있는데 팔이 그 갈빗대를 잘 보호해 주고 있는 것처럼 남자가 여자를 잘 보호하라고 갈빗대로 만드셨다.』이렇게 해석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옳은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평등과 사랑의 원리를 의심할 여지가 없이 꼭 옳습니다. 우리 가정에 있어서의 생활의 원칙은 평등과 사랑으로써 뭉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몇 해 전에 제가 어떤 외국선물을 보니 제목에 꾸쉴러브 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대로 번역하면 수풀의 사랑이라 하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수풀 사이에 사는 야만인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무엇인가 알아보니 어떤 남자가 멀리 외국에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데 자기 부인이 비행장까지 마중 나왔어요. 여러 달 동안 떨어져 있다가 자기 부인을 만나니 오죽 반갑겠습니까? 서양 사람들은 반가울 때 흔히 행동으로 표현을 하니까 자기 아내를 포옹하고 인사는 하는데 얼마나 힘차게 안았던지 그만 부인의 갈빗대가 다 부러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직까지도 어떤 사람들은 그저 남녀간의 사랑은 이런 것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미국의 유명한 잡지에 어떤 여자가 글을 썼는데 그 제목이『내가 결혼한 남편은 어디 갔는가?』그런 것이었습니다. 간단히 보면 이 여자가 자기 남편을 잃어버렸나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마는,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렇게 않습니다. 자기가 아무개와 결혼할 때에는 참 성인 군자요 좋은 사람인 줄 알고 결혼했는데, 몇 달 살아보니 본래 보던 남편하고는 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본래 결혼한 남편은 어디 갔는고 하는 탄식입니다. 이런 탄식은 부인들만 하는 것이 아닌 줄 압니다. 혹 어떤 남자들도 그런 글을 쓸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내가 본래 결혼한 아내는 어디 갔는고?』처음에 결혼할 때에는 그저 자기 남편은 다 영웅으로 자기 아내는 다 천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몇 달 동거하고 몇 해 지나게 되면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옛 아담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옛 해와가 나타나게 되면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옛 아담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옛 해와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점점 성질을 알게 됩니다. 점점 까다로운 사람도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환멸을 느끼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그 때가 결혼생활에 있어서 큰 위기입니다.
가정의 기본원칙 가운데 하나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피차에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사랑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성경 가운데 사랑 장인 고린도 전서 十三장을 잘 압니다. 四절 이하에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제일 먼저 무슨 말로 시작합니까?「오래 참고……」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오는지 압니까?「사랑은 온유하며……」친절 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七十五세 난 노인이 의사에게 가서 건강진단을 받았습니다. 나이는 七十五세나 되었지마는 진찰을 해 보니 조금도 병이 없습니다. 아주 건강합니다. 그래서 의사가『참 노인 님, 건강하십니다. 그렇게까지 건강하게 산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노인이 잠깐 생각하더니『비결이 있다고도 할 수 있지요.』『무슨 비결입니까?』그 노인이 천천히 대답했습니다.『제가 지금부터 꼭 五十년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五十년 동안을 나의 아내와 지금까지 화평한 생활을 해오는데 맨 처음 결혼한 후에 내 아내와 무슨 약속을 했는데 우리가 피차에 한 집에서 살 때에는 간혹 성이 날 때도 있겠으니 만일 내가 성이 나면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말고 빨리 주방으로 나가시오. 또 만일 당신이 화가 나면 나는 물 열고 문밖으로 나가서 산책을 하겠습니다. 그런 약속을 하고 지금 五十년을 지나고 생각해 보지 제가 참 산책을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밖에 나가서 산책을 많이 했더니 이처럼 건강해졌습니다. 산책하고 집에 들어오면 집안은 화평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렇게 건강해 졌습니다.』
사랑이 무엇이라고요? 오리 참는 것입니다. 성나는 일이 있어도 또 어떤 때에 분이 나도 부부간에, 오래 참는 것, 참을 줄 아는 그것이 성서적 의미에서 참 사랑입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친절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성서적 교훈입니다. 보통 잘 모르는 낯선 사람을 대할 때에는 아주 친절합니다. 그러나 집안에 들어가서는 친절히 안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제일 가까운 사람, 남편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친절히 안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밖에 나오면 아주 참 친절한 사람 같아 보이는데 집안에 들어가서 혹 그 부인에게 하는 걸 보면 도무지 친절하지 않습니다.
자 여러분, 내놓고 말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먼 사람에게는 친절하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왜 친절히 하지 않는가 말입니다. 또 보세요. 우리가 보통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항상 예의를 갖춥니다. 예절답게 대하고 깍듯이 합니다. 그러나 제일 가까운 사람한테 와서는 무례하게 행할 때가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고린도 전서 十三장에 보면 사랑은『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예의를 왜 안 갖춥니까? 사실은 우리가 어디 가서나『고맙습니다.』『수고 많이 하셨습니다.』이런 말을 많이 하지마는, 그런 말을 많이 할 곳은 가정입니다. 이런 가정이 화평하고 이런 가정이 즐거움이 충만합니다. 가정생활의 기본원칙은 사랑입니다. 성서적 의미의 사랑입니다.
다섯째는, 가장 중요한 가정 제단의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어떤 건축가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우리 한국 건축에는 주택을 짓는데 중심이 없습니다.』서양 사람의 주택을 보면 그 주택의 중심이 있습니다. 화이어 플레이스(fireplace)라고 하여 불 피우는 데가 있는데 그것이 중심이 됩니다. 일본 사람이 집 지을 때에는 도꼬노마(床の間)라고 하는 그림 걸어 놓은 중심이 있는데 그것이 집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주택은 도무지 중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택에도 중심이 있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에 중심이 꼭 있어야 합니다. 가정의 중심은 가정 제단입니다. 우리 가정은 적은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교회 안에는 반드시 제단이 있어야 합니다. 제단 없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제단에 항상 불리 켜져 있어야 합니다. 불 꺼진 제단을 무엇합니까?
우리 가정이 과연 기독교 가정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면 남편과 아내가 예배당에 와서 예배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자기 가정에 가정 제단을 쌓고 같이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같이 기도를 드려서 가정 제단에 불을 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옛날부터 모든 경건한 가정에는 그 주인이 이를테면 그 가정의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이를테면 전도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중심은 제단입니다. 우리 가정에 가족 예배를 드리는 제단이 튼튼하다고 하면 제가 이미 말한 일부일처의 원칙이니, 부부일신의 원칙이니, 성결의 원칙이니, 사랑의 원칙이니 하는 것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가운데 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까지도 이 가정 제단을 쌓지 못한 가정이 있으면 오늘부터 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제가 지난주간에 크리스천 센츄리(Christian Century)라고 하는 잡지를 보니까 작년(一九六三년)에 뉴욕시 안에서 살인사건이 五四九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九十一건이 가정관계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보세요! 五백여 건의 살인사건 가운데 九十一건, 거의 五분의 一이 가정관계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줍니까?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낙원과 지옥의 갈래 길에 언제나 서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이 땅 위에서 지상낙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정이 타락하게 되면 인간의 지옥입니다.
우리는 어떤 가정 만들기 원합니까? 성경의 교훈대로 가정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성경은 이 다섯 가지 원칙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일부일처의 원칙, 부부일신의 원칙, 성결의 원칙, 사랑의 원칙, 제단의 원칙입니다. (一九六四년 五월 三일)
Ⅵ-18 오순절의 뜻 (사도행전 二장 一-十三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행 二·四)
오순절에 된 일입니다. 우리 교회 월력(月曆)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지는 다만 둘이라고 어떤 분은 말하였습니다. 하나는 부활절, 또 하나는 오순절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절에는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복음의 내용이 교회에 주어졌고 오순절에는 성령께서 오심으로 큰 능력이 교회에 왔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교회에 성령께서 오신 일은 실로 큰 일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어떤 공장의 시업(始業)식에 참석하였습니다. 공장 안에 들어가니까 잘 수리하고 기계를 잘 정비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안은 매우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잠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거기 단추와 같은 작은 스위치를 저보고 누르라고 해서 그걸 누르니까 갑자기 소리가 나면서 모든 기계가 돌아가기를 시작했습니다.
스위치를 누를 때 그 기계 속에 동력이 들어간 까닭입니다. 물건을 생산하려고 할 때, 공장의 기계를 정비하는 것도 필요하지마는, 동력이 없이 기계만 가지고는 일을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여러 기관도 있고, 조직도 있고, 모든 것이 다 정비가 되었다고 하지마는 교회에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오순절을 기념하는 주일인데 우리가 초대교회에 돌아가서 어떻게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하였는가 이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기억할 것은 예수 님께서 성령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신 것입니다.
요한 복음 十四장 十六절에 말씀하시기를『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내려가서 十六장 七절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예수 임께서 마지막 저녁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四十일 동안 제자들에게 다 나타나신 후에 바로 승천하시기 전 이런 분부를 하셨습니다.『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 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몇 날이 못 되어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텐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분부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명령을 했습니다.
이 약속과 명령대로 제자들을 비롯하여 그들과 같이한 이들은 꼭 순복 했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주님의 약속대로 순복 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락방에 계속해서 모였습니다.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기도는 단순히 간구의 기도만은 아니었던 줄 생각합니다.
과거 그들의 여러 가지 실패한 것과 여러 가지 잘못된 것과 여러 가지 죄도 고백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약속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열흘 째되는 날, 과연 약속대로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그 믿음, 주님이 분부한대로 순복하는 그 순복, 죄를 회개하면서 간구 하는 그 기도, 주님의 약속이 꼭 이루시리라고 기다리는 그 마음, 이런 모든 것은 성령을 받는 전제조건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준비가 있은 후에 성령께서 약속하신 대로 임하였습니다. 이런 전제조건은 언제나 변치 않는 줄 압니다. 지금도 참된 믿음이 있고, 순복하는 마음이 있고, 회개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과 교회에는 성령께서 충만히 임재 하십니다.
사도행전 二장에서 우리가 읽었지마는 성령께서 임재 하실 때에는 두 가지 상징이 같이 따라옵니다. 하나는 급한 바람소리가 들렸고, 또 하나는 불의 혀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나는 바람, 하나는 불, 이 두 가지가 상징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성경을 보아도 이 신약시대에 한 번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도 성령께서 임재 한 기록은 있지마는 이런 현상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첫 번에 이와 같은 성령이 임한 것은 이런 상징을 통해서 성령의 성품이 어떠한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우리가 바람을 잠깐 생각해보면, 이 바람이라고 하는 것에는 생명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 헬라 말에나 히브리말에는, 바람이라고 하는 말이 영이라는 말, 숨결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원리를 가르치실 때에 바람을 이야기하면서 바람이 불기는 불지마는, 우리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자가 꼭 이러하니라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에스겔 三十七장을 보면 그의 이상 가운데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어떤 골짜기에 가니 마른 뼈들이 가득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하는 말씀이『네가 이 마른 뼈를 향해서 이렇게 예언을 하여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붙어서 살게 하라.』바로 이 말씀 가운데 생기라고 하는 말은 숨결 혹은 바람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에스겔이 그와 같이 예언할 때에 사방에서 생기가 그 마른 뼈 속에 붙어 와서 그 사람들이 다시 부활하여, 일어서게 되었는데, 보니까 큰 군대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도 곧 성령은 생명이요, 성령이 임하는 곳에 중생이 있고, 성령이 임한 곳에 생명이 있다고 하는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또 바람이라고 하는 것은 역시 능력의 상징입니다. 비바람이 아무리 부드럽지마는 엄동설한의 찬 눈을 다 녹여 버립니다. 반면에 급하고 강하게 부는 바람은 바다 물결을 요동케 합니다. 심지어 산을 가르게 할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폭풍우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였다는 욥기의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바람으로 임하였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그 사람들에게 임하였다고 하는 뜻입니다.
또 불같은 혀가 보였다고 하는 뜻도 역시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언제든지 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산 가 가시덤불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실 때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으나 밤에는 그 구름기둥 가운데 불이 보였습니다. 즉 불기둥으로 인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혹은 가멜산상에서 엘리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한 사실도 우리가 기억합니다.
불은 빛을 의미합니다. 불은 순결을 의미합니다. 불은 뜨거운 열을 의미합니다. 그들 위에 성령이 임하게 될 때에, 그들의 마음에 빛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깨끗하여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고 하는 말은,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므로 하나님으로 충만해졌다 고 하는 뜻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므로 그리스도로 충만해졌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이므로 진리로 충만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니 생명으로 충만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사랑으로 충만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해진 것입니다.
여러분, 충만 이라는 뜻은 쉽게 말하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그릇에 물이 가득하면 그 그릇은 별로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빈 그릇이 소리가 많이 납니다. 빈 수레가 소리가 더 많이 납니다. 이 제자들도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기 전에는 쓸데없는 소리가 더러 들렸습니다. 누가 오른편에 앉을 것이냐, 누가 왼편에 앉을 것이냐, 누가 크냐 하고 다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한 그 심령, 성령이 충만한 그 가정, 성령이 충만한 그 교회는 잡음이 들리지 않습니다. 사실 누가 크냐고 불평하는 소리는 말할 것 없고 심지어 어떤 교회서는 싸움하는 소리까지 들립니다. 은혜가 충만치 못해서 그렇습니다. 충만하면 소리가 없습니다.
또 여러분 기억하세요. 어떤 그릇에 무엇이 충만하면 다른 것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을 물리학상으로 불가입성의 원리라고 하지요. 동일한 공간에, 동일한 시간에 두 물체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엇이 가득할 때에는 그것이 좀 나오면 들어갈 수 있지마는 가득하면 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가운데 충만하면 세상의 잡념이나 여러 가지로 불결한 생각이나 교만이나 허영심이나 이런 것들이 들어갈 수 없는 줄 압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은혜가 충만하지 못하므로 종종 잡념이 들어가고 허영심이 들어가고 정욕이 들어가고 불결한 생각이 침노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은혜가 충만하면 잡념이 못 들어갑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이와 같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또 보세요. 무엇이 충만하면 넘쳐서 흐릅니다. 컵에 물이 가득하면 물이 넘칩니다. 이 때에 제자들과 一二0명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니 이와 같은 충만한 은혜가 넘쳐흘렀습니다. 우선 입으로 넘쳐흘렀습니다. 그 속에 그리스도가 가득 하니 자연히 입을 벌리게 될 때에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오순절에 그리스도를 전파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충만하니 자연히 그리스도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우리가 읽은 대로 오순절에 특별한 한 가지 이적이 더 따랐는데 그것은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여러 지방에 흩어져 사는 유대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각각 자기 지방 말들을 다 합니다. 이 때에 성령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그 지방 사람들의 말, 즉 외국 방언을 말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참 이상한 이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마는 사실 깊이 생각하면 그다지 큰 이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각각 그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는 줄 압니다. 그러치 않아요? 가령 성령께서 우리 한국사람에게 말할 때에는 한국말로 지도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미국사람한테 말할 때에도 한국말로 하겠습니까? 영어로 하는 줄 압니다. 중국 사람한테 말할 때에는 중국말로 성령께서 지도하는 줄 압니다. 요컨대 여기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그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게 말하는 것, 이것이 매우 중요한 줄 압니다. 예수 님께서는 깊은 진리로 말씀하셨지마는 언제든지 알아듣게 말씀했습니다.
전에 평양에서 어떤 시골 목사가 가서 서경회를 한 번 해달라는 부탁을 하니까 그 목사가 조금 있다가 대답하는 말이『그 교회에 내 설교를 알아들을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나요?』하고 물어 보더랍니다. 설교는 어려운 술어를 쓰면서 하는 것이 혹 자기 지식의 자랑이 될는지는 모르지마는 남이 알아듣지 못하면 암만 깊은 설교를 해도 쓸데없는 줄 압니다. 성령께서는 다른 이들이 알아듣게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개인으로 전파할 경우에도 그 사람이 알아듣게 말하는 것이 중요한 줄 압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충만하니 자연히 사랑이 넘쳐서 유무상통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성령이 손으로 넘쳤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니 자연히 그 하나님의 사랑이 손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미쳐서 유무 상통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그 때의 교인들 가운데는 베고픈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혹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도 주머니 끈은 풀지 않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는 성령이 충만하게 임한 때 주머니 끈이 다 풀렸습니다. 사랑이 충만하고 넘쳐서 베고픈 사람이 없었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우리 교회에도 이와 같은 성령의 은혜가 충만해서, 우리 교회 가운데 배고픈 사람이 하나도 없고,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 온 한국교회가 이와 같은 사랑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 이것이 넘쳐서 이 땅에 베고픈 사람이 없는 나라가 될 때가, 속히 왔으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힘써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이들은 성령의 사랑이 충만할 뿐 아니라 성령의 다른 열매도 넘쳐흘렀습니다.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모든 열매도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二장 마지막에 이들의 생활 모습을 이런 말로 기록하였습니다.『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모든 은혜가 넘칠 때에 이와 같은 생활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이 예수 님을 소개할 때에 이런 말씀으로 소개했습니다.『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예수 님께서는 성령과 불의 세례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구약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기의 경험을 이런 말로 기록해서 지금까지 남겼습니다.『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예레미야의 마음 가운데는 아무리 침묵할래 야 침묵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불붙는 무엇이 있어서, 답답할 뿐 아니라 그 불이 골수에 사무쳐서 잠잠 할래 야 잠잠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마음속에는 이 하나님의 불이 붙은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휫휠드(Whitefield)라고 하는 분은 기도할 때에 늘 이런 말로 기도를 했습니다.『주여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불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요한 웨슬레 같은 이는 청년들에게 흔히 이런 말을 했습니다.『청년들이여 네 영혼이 하나님의 불로 항상 불타게 하여라.』우리의 심령 속에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해서 이 민족을 구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람의 불길이 붙습니까?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이 사랑의 불길을 던지러 오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에『네가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일어나게 하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본래 은혜를 받았었는데 그 불이 꺼지는 것 같아서 다시 불 일 듯 일으키라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혹은 우리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일할 때에 물론 지식이 필요하고 기술이 필요하고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이 하나님의 불길이 그 심령 속에 붙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남녀전도회가 있고 학생회가 있고, 청년회가 있고, 평신도 회가 있지마는 이런 단체만 조직한다고 무슨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단체 가운데, 단체를 지도하는 사람들의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랑의 불이 붙을 때에만 그 단체, 그 기관이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오순절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구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간절히 구할 것은 이 성령의 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불입니다. 모든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불이 우리 교회에 임하고 나아가서 온 교회에 임하고 이와 같은 불이 三천리를 요원의 불과 같이 붙어서 모든 부정과 불의와 부패를 불살라 버리고 이 땅에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고 정의와 질서와 화평이 이룩되기 위하여,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해야 되겠습니다. (一九六四년 五월 七일)
Ⅵ-19 제 오(五) 계명 (출애굽기 二十장 一-十七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二十·十二)
오늘은 세계적으로 지키는 어머니주일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지난 八일을 어머니날로 지켰습니다. 一년에 하루라도 특별히 어머니를 생각하고 존경하는 일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사실은 매일 어머니를 존경하고 생각하고 높이기 위해서 이런 운동이 일어난 줄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너무 혼란하고 거칠어서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것쯤은 문제도 되지 않고 심지어 자녀가 부모를 구타하는 일이며, 어떤 때에는 죽이기까지 하는 일이 일어나는 이런 세상입니다.
이런 시대에 있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부모에 대한 책임에 있어서 반드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머니주일을 맞아 범위를 좀 넓혀서 이 제五계명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계명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 각 사람에게 친히 깨달을 바를 깨닫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이 계명은 인륜이라기보다는 천륜입니다.
우리는 종종 봉건사상이니 봉건시대의 윤리제도니 이런 말을 듣습니다. 이 세상은 변하는 세상인데 이 시대에 옛날 계명이 현대인의 생리에 혹 맞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청년들도 없지 않아 있는 줄 생각됩니다. 봉건사상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시대가 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옛날이나 오늘이나 동서의 고금을 물론하고 변치 않는 사실도 있고 변치 않는 진리도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또한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자연의 법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물이라고 하는 것은 수소 두 분자와 산소 한 분자가 합할 때에 된다고 하는 이 사실도 변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사랑하며 희생하며 기른다고 하는 이 사실은 아브라함 때나 오늘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에 기초를 둔 도덕의 법칙도 변함은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은 천륜입니다. 이것은 창조의 질서에 근원을 둔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다음에 생각할 것은 이 계명은 모든 도덕의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열 가지 계명을 주실 때에, 두 돌 비에 새겨서 주었다고 하는 말을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읽습니다. 첫 비석에는 첫째 계명으로부터 넷째 계명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사람의 하나님께 향한 모든 의무에 대한 계명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비석에는 다섯째 계명으로부터 열째 계명까지가 있었습니다. 곧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무에 관한 계명이 있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먼저 위로 하나님과 옳은 관계를 맺은 다음은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제일 먼저 이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효도를 하라고 즉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부모와의 관계가 그 첫째인 까닭입니다.
사실 이 계명을 잘 지키면 다른 계명은 자연히 지켜집니다. 부모를 잘 공경하는 효자, 효부가 살인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할 간음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도적질할 수 없습니다. 거짓말할 수도 없습니다. 남의 것을 탐낼 수도 없습니다.
반면에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 불효자와 불 효녀는 살인도 할 수 있고, 간음도 할 수 있고 도적질도 할 수 있고 무슨 죄나 다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모든 도덕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계명입니다.
셋째로 이 계명은 신앙의 첫 열매를 요구하는 계명입니다.
이미 말한 대로 첫째 계명으로 넷째 계명까지를 다 지키는 사람은 물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돈독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신앙이 인간 사이에서 제일 먼저 어떤 열매로 나타나느냐 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효도는 신앙의 첫 열매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여러 믿는 사람들에게 편지할 때에『너희가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조금 더 바꾸어 말하면『너희가 보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하는 말입니다.
우리에겐 참 신앙이 있습니까? 이 신앙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인간 사회에 나타날 때에 제일 먼저 부모에게 나타나는 것인데 이것은 반드시 부모를 공경함으로, 그에게 순복 함으로, 그에게 효도를 다 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신앙은 있노라 하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말이요, 거짓 신앙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먼저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제五계명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강조해서 우리에게 가르쳤고 구약시대에는 이 계명을 거역하는 자들은, 엄벌에 처한 것입니다. 그리해서 출애굽기 二十一장 十七절에 보면『자기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이런 모세의 법이 있었습니다. 二十一장 十五절에는『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줄일지니라.』신명기(申命記) 二十七장 十六절에는『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잠언 三十장 十七절에는『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그 뜻은 죽을 때 바로 못 죽고 죽은 다음에도 묻히지 못해서 그 시체가 날짐승의 밥이 되겠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또한 신약시대에 와서 자녀들을 가르칠 때에『자녀들아,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자명(自明)의 철리(哲理)의 이치라는 말입니다.『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그러면 현대인으로서 이 계명을 어떻게 잘 지킬 수 있겠느냐? 이런 시대에서 어떻게 우리가 이 계명을 바로 지킬 수 있겠느냐? 이것이 우리의 당면문제입니다.
여기 대해서 실제적으로 몇 가지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첫째는 우리가 옳은 길을 걷고 옳은 생활을 해서, 우선 부모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해야 이 계명을 바로 지킬 수 있겠습니다. 죄를 지으면 그 자신이 형벌을 받기 전에 그를 가장 사랑하는 이가 그보다 먼저 형벌을 받습니다. 자녀가 죄는 지으면 그 부모의 마음이 상합니다. 부모가 형벌을 받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도 그런 예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전에 야곱의 아들들이 어린 요셉을 시기해서 그를 먼 곳에 팔고는, 자기 아버지에게 가서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고 거짓말을 해서, 야곱이 근 二十년 동안 밤낮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했습니다. 아들 때문에 그랬습니다. 다윗 같은 사람도 그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고 동생을 죽이며 말할 수 없이 악한 일을 많이 하다가 마지막에는 자기까지 죽게 될 때에 그 아들 때문에 다윗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했습니까? 이것은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도 마땅히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어야 할 아들이나 딸 때문에 남 몰래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가운데는 혹 없습니까? 마땅히 아들로서 혹은 마땅히 딸로서 옳은 일을 걷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죄 없는 부모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자녀들은 없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이제 회개합시다.
첫째 이 계명을 우리가 어기면 다른 계명도 다 어깁니다. 먼저 부모의 마음을 상하지 않고 그릇된 것을 떠나서 옳은 길을 가면 이것이 첫째로 부모를 공경하는 도리입니다.
둘째는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에게는 큰 문제입니다. 물론 부모도 사람이니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사도 바울이 자녀를 가르칠 때에「주안에서……」하는 말을 삽입한 줄 생각합니다.『주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우리 동양 도덕에도 옛날에 그렇게 순종을 가르치면서도 간(諫)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혹 부모가 잘못된 명령을 할 떼에는 효자라도 간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외입니다.
대체로 생각하면 부모 자신은 혹 실수하는 때가 없이 않아 있지마는, 누구든지 자기 자녀들을 바로 지도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므로 원칙으로 말해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교훈은 옳습니다.
해방 이후에 대학이 많아졌습니다. 대학 졸업생도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청년들 가운데 혹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는데 부모가 우리만큼 알아야지. 나는 대학 출신인데……우리 아버지는 옛날 중학교나 졸업했는지……또 우리 어머니는 국민학교나 졸업했는지……난 대학 출신인데……이런 생각한다고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이 날 수 있습니다.
제가 참고로 들은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어떤 유력한 분이 자기의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자기가 소학교 시절에는 자기 부모를 어떻게 생각했냐고 하면『우리 부모 같은 이는 없어, 우리 부모는 무엇이나 다 안다.』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흔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십 여세 나서 중학교에 진학을 해서 생각해 보니까, 뭐 꼭 그렇지는 않더랍니다.『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도 모르는 것이 더러 있더군.』
그 다음에는 이렇게 생각이 되더랍니다. 그 후 공부를 좀더 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갔습니다. 다시 자기 부모를 생각해 보니까『우리 부모는 아는 게 정 없어, 나만 못해.』이런 생각이 나더랍니다. 그러더니 대학을 졸업하고 나올 때에는 부모에 대해서 생각할 때『아이 구 우리 부모는 너무 완고하고 고집스러워서 어디 청년을 이해해 줘야지. 이 시대를 알아야지. 참 답답해!』그런 생각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十년쯤 일하고 三十이 넘어서 그 부모를 다시 생각해 보니 무슨 생각이 나느냐 하면『지금 생각해 보니까 학생 시절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 말씀 가운데 옳은 말이 많던 걸. 어떤 것은 안 들었어.』그런 생각이 나더랍니다.
그리고 여러 해 지나서 나이 五十쯤 되어 부모를 다시 생각해 보니『과연 우리 부모는 참 훌륭했구나. 내 학생시절, 청년시절에 우리 부모의 말을 좀더 잘 들었다면 실수 안 하는 것이 많았을 걸. 사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때엔 내가 미련했어.』이런 생각이 나더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아들이나 아버지나 경험이 조금씩 다를 줄 압니다.
무식하다고 해도 여러분의 자녀보다 나은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경험이 많은 것입니다. 젊은 사람보다 경험이 많습니다. 무슨 판단이든지 경험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보다 사랑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부모는 여러분을 얼마나 더 사랑하는 지 모릅니다. 이 하늘 아래에는 부모만큼 여러분을 사랑하는 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분의 말을 순종 안하고 누구의 말을 순종하겠습니까? 주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부모를 높이고 봉양할 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부모를 높이고 봉양한다고 하는 말도 민주사회에 꼭 맞는 알인지 모르겠습니다. 혹 북한에서는 아버지를 동무라고 부른다고도 합니다. 남한에는 제발 그런 일이 없길 바랍니다. 민주사회라 하니까 어떤 때 보면 부자(父子)의 구별도 없어졌고 장유(長幼)의 서차(序次)도 없어진 것처럼 보일 때가 더러 있습니다.
대통령을 국민들이 모여서 선거를 하니까 학생들은 우리 교장은 우리 학생들이 선거를 하면 좋겠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변하는 수가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자 이런 사고방식으로 그대로 나가다가는 우리 가정에서『아버지도 투표해서 선정하자.』그렇지 아니할까 염려되는 때도 더러 있다는 말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풍속이 변하지마는 창조의 질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아버지는 아버지고 아들은 아들입니다. 어머니는 어머니요, 딸은 딸입니다. 어른은 어른이요, 아이는 아이입니다. 창조의 질서가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존경할 이를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을 봉양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더욱이 부모님이 노쇠해서 자기의 사업을 할 수 없고, 한국 같은 장래에 쓸 것을 축적할 수도 없는 이런 경제사회에 있어서, 장성한 자녀들이 특별히 연로한 부모님들을 봉양할 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입으시는 것, 잡수시는 것, 모든 면으로 그러해야 합니다. 용돈도 좀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리 속담에『아들 주머니에 있는 돈도 내 주머니의 돈만 못하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꼭 사실인 줄 압니다. 아들한테 용돈 달라고 하는 말은 참 하기 어려운 줄 압니다. 용돈 달라는 말하기 전에 미리 좀 넉넉히 드리세요. 여러분, 아기 생일잔치는 잘하면서 부모님 생일을 혹 잊어버리는 분이 없습니까? 자기는 어디 가려면 조금만 바빠도 택시 타고 가면서, 부모님이 어디 가진다면 버스 값이나 드리는 분은 없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양에서 된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모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은 서양에서 매우 드물어요. 그런데 이 가정은 아버지를 모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나이 점점 많으니까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해서 음식 잡수시다가도 음식을 자꾸 흘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한국도 그렇게 되어오지마는 서양에서는 큰상에서 온 가족이 다 앉아서 함께 먹습니다. 이 가정도 그렇게 한 상에서 식사를 하는데 제일 높은데 앉은 할아버지가 음식을 줄줄 흘리니까 이거 참 창피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들과 며느리가 보기가 답답합니다. 그래서 부득이『미안하지만, 할아버지는 딴 곳에서 잡수세요』하고 딴 상에다 잡수시게 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대접하느라고 딴 상에다 드리는 수도 있어요. 하지만 서양에서는 대접이 아닙니다. 그저 주방 한 옆에 조그만 상에다 따로 잡수시게 했는데, 그것도 아마 떠 넣기가 어려우니까 그랬겠지요. 그릇을 들고서 잡숫느라고 하더니 또 그릇을 떨어뜨려서 자꾸 깨뜨립니다. 자 이러니 그 다음에는 며느리가 성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거 원 안 깨지는 그릇이 없겠나 하고 돌아보니까 주방 옆에 고양이 밥 주발이 있는데 그게 나무그릇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걸 씻어서 거기다 밥을 담아 드립니다. 아마 씻기야 잘 씻었겠지요. 그러니까 이 할아버지가 이제는 주방 옆에 앉아서 그 고양이 밥 주발에 갖다 드리는 것을 조금씩 잡숫고 그렇게 지냅니다.
한 번은 그 아들과 며느리가 거리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까 너 댓 살 난 아들아이가 나무목침 같은 것을 하나 갖다 놓고는 주머니칼로 부지런히 가운데를 파냅니다. 그래서야『야 이놈아, 너 뭘 하느냐?』하고 물어보니까『나무그릇 만들어요, 나무그릇.』한단 말입니다.『나무그릇은 만들어서 뭘 하려고 그러느냐?』하고 다시 물어보니까『아버지 늙은 다음에 밥 담아 드려야지요.』여러분 우리가 다 웃으시는데 이것을 꼭 우리가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부모를 잘 공경하지 않으면 이 다음에 우리 자녀가 우리를 잘 공경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동양의 옛 글에도 효순환생효순자 악역환생악역자(孝順還生孝順子 惡逆還生惡役者)라는 말이 있습니다. 효도하고 순한 사람의 그 아들이, 효도하고 순한 아들을 낳고 거스리는 아들은 이 다음에 자기를 거스리는 아들을 낳는다는 말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꼭 부모에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한 달 전에 어떤 감리교 목사님이 제게 와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다가『목사님한테는 특별히 감사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 분 말이『소망의 시간을 늘 그렇게 방송을 해 줘서, 우리 집에서는 이 소망의 시간을 열심히 듣는데 두 번씩이나 듣습니다. 토요일 저녁에도 듣고 주일날 아침에도 듣습니다. 토요일 저녁에도 듣고 주일날 아침에도 듣습니다.』라고 합니다.『그건 왜 두 번씩 듣습니까?』『그런 게 아니라 제가 장모님을 모시고 있는데 그 분이 벌써 몇 해 전부터 소망의 시간을 열심히 들으십니다. 그런데 나이가 점점 많아 가시니까 한 一년 전부터는 귀가 먹어서 좀 적은 소리는 듣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아이 구 이거 소망의 시간도 못 듣고 이젠 뭘 하려고 사노? 자꾸 이렇게 탄식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보다 못한 제 아내가 정 그러시면 내가 소망의 시간을 필기해서 드릴 텐데 그걸 읽어보세요 하고는 매주일 그것을 베낍니다. 할머니가 시력은 다시 밝아지셔서 잘 보시거든요.
그래서 딸이 소망의 시간을 다 베껴서 쓰는데 말하는 것을 다 따라 베낄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대강 베꼈다가 그 이튿날 아침에 또 베낍니다. 이렇게 한 후 다시 정서를 해서 어머니한테 바치고야 주일날 예배당엘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은 너무 민망해서 제가 아내보고 그걸 매 주일 어떻게 합니까? 이따금 이나 하구려 하였더니 아내의 대답하는 말이 이제 뭐 얼마나 더 앉아 계시겠고? 그저 앉아 계시는 동안은 내가 이걸 하려고 합니다. 하는군요. 이래서 저도 소망의 시간을 두 번씩 듣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나이 많은 부모님들 모시기에 좀 피곤한 이가 혹 계십니까? 이제 얼마나 더 앉아 계시겠습니까? 나이 많은 부모님들이 건강하다고 우리 부모님은 백세를 사실 거라고 생각하시지 마십시오. 언제 돌아가실 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옛날 글에도 나무는 조용히 섰고 자 해도 바람이 그치지를 아니하고 아들은 봉양을 하고자 해도 어버이가 기다리지를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저 얼마 못 앉아 계실 테니 어떻든지 살아 계시는 동안에 부모님을 잘 공경해서 이와 같이 거칠고 혼란한 사회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꼭 모범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一九六四년 五월 十일)
Ⅵ-20 주님의 손 (요한 복음 二十장 十九-三十一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작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二十·二十七)
오늘 아침에 읽은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 날 저녁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굳게 닫고 어떤 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그 손을 친히 보이시고 상한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불행히도 제자 중의 하나 도마는 그 때 없었습니다.
그 후에 도마를 만나서 이 이야기를 하니, 도마는 반갑기는 반갑지마는 너무 이상한 일이기 때문에『내가 친히 그 손을 보고 내가 그 옆구리를 만져보기 전에는 나는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후 여드레가 지났습니다. 그 날 저녁 도마 도 같이 있을 때에 주님께서 다시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에 도마를 향해서 친히 하시는 말씀이『네 손을 내밀어서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또한 내밀어서 내 옆구리를 만져 보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도마는 주님의 손을 보고 과연『나의 주님이 시요. 나의 하나님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도 주님의 손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렌트 시간에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또한 그의 손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손은 우리 몸의 가장 중요한 지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손으로 모든 일을 합니다. 예술가는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문필가는 글을 쓰고, 음악가는 악기를 다루고, 장사하는 사람은 상품을 다루고, 농사하는 사람은 농사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손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을 볼 때 그 손은 깨끗한 손이올시다.
이것은 자주 물로 씻는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손을 자주 씻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 당시에 된 일을 보면 손 씻는 문제에 대해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 님 제자들보다도 더 잘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다고 비난한 구절을 우리가 복음서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기억합니다.
빌라도가 죄 없는 줄 알면서도 유대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내어주고는 대야에 물을 떠오라고 해서 손을 씻으면서 하는 말이『이 사람의 피가 내게는 관계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물로 손을 씻는다고 그 손이 깨끗하여졌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그 손은 더러웠습니다. 사실 피가 묻은 것입니다.
손이 깨끗하다고 하는 말은 죄가 묻지 않았다고 하는 말입니다. 손은 마음의 실행기관으로서 선한 일도 손으로 하고 악한 일도 손으로 합니다. 사도행전 十二장 一절에『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 의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손을 들어 요한 의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많은 죄를 손으로 짓습니다. 손으로 남의 것을 훔칩니다. 손으로 뇌물을 주며, 손으로 뇌물을 받습니다. 손으로 거짓 글을 씁니다. 손으로 거짓 도장을 찍습니다. 손으로 사람을 때립니다. 손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손으로 죄를 짓습니다. 죄인을 잡으면 곧 손에 수갑을 채웁니다. 손으로 죄를 짓는 까닭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二十四편 三절 이하에 보면『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가 누군 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虛誕)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하였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야고보서 四장 八절에『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손이 회개하여야 됩니다. 손이 주의 보혈로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손이 거룩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조금도 죄가 묻지 않은 손은 오직 주님의 손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손은 깨끗한 손입니다. 주님의 손을 바라봅시다.
다음에 주님의 손을 보면 그 손은 근로의 손입니다.
부지런히 일한 손입니다. 나사렛에 가보면 그이가 일하였다고 하는 방을 보여줍니다. 신약 외경에는 어떻게 예수 님께서 요셉을 도와서 목수 일을 부지런히 하였으며 어머니를 도와서 먼 우물까지 내려가서 물을 길었다고 하는 기사를 많이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손은 일한 손입니다. 노동한 손입니다. 그는 한 가지 일을 배운 손입니다. 목수 일을 한 손입니다. 사도 바울의 손이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는 장막 치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권면 할 때에『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들에게 모범을 보였노라』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불상 히 여겨서 그 손을 고쳐주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하기 위해서 손을 고쳐주십니다. 성경에 보면『손으로 선한 생업을 하라』고 했습니다. 게으른 손을 책망했습니다.
한국의 재래사상 가운데 좋지 못한 것 중 하나는, 손으로 일하는 것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특별히 공업방면에 종사하는 이들을 천대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이렇게 문화가 퇴보하게끔 만들어 놓았습니다. 주님의 손이 노동한 손이었습니다. 주님의 손으로 말미암아 모든 노동은 신성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번 태국에 갔다 오다가 동경에서 하루를 지냈는데 친구 十여 명이 같이 모여서 저녁을 나눴습니다. 그 때 특별히 동경교회 오 목사님께서 어떤 청년을 나한테 소개하였습니다. 그이는 본래 일본서 대학을 졸업하고 그 부인은 의학을 공부하였는데 우리 한국 사람이 꼭 사업을 해야 된다고 하는 결심을 가지고 벌써 十여 년 전에 자기 부부가 친히 수레를 끌고 다니면서 양돈을 하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 결과 十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큰 회사가 되어서 수천 마리의 양돈을 하고 큰 재산가가 되었고, 언제든지 교회에 중한 일이 있을 때에는 항상 이 분이 제일 먼저 물질을 바치는 이라고 소개하는 말을 듣고 감격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저는 우리 교회에 이런 분이 여러 분 되지마는, 특별히 집사 님 한 분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분을 소개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어떤 집사 한 분은 본래 대학을 졸업했는데, 꼭 사업을 해야 될 줄을 생각해서 저 산골로 들어가 처음에는 조그맣게 염소를 한 두 마리 기르기 시작하여 친히 젖을 짜고 그 젖을 배달하고 이렇게 하여 지금은 염소가 수십 마리 되었는데 특별히 이 집사는 언제든지 첫 새끼를 낳을 때에는 개척 교회에 보내서 이 염소를 보급시킨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접 손으로 일하는 이런 정신이 있어야 황폐한 이 강산을 금수강산으로 재건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에 가장 긴급한 문제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 식량 증산과 산업 진흥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손으로 일하는 사람을 부릅니다. 식량 증산도 손으로 개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산업 진흥도 손으로 기술을 배워서 발전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근로의 손을 부릅니다.
브라질 이민을 말하고, 이번에 태국에 가서도 이민에 대해서 좀 의논하고 돌아왔지마는 이민을 받고자 하는 나라에서도 손으로 일할 사람을 받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손은 근로의 손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주님의 손을 보면 그 손은 봉사의 손입니다.
그는 손으로 문둥이는 어루만지면서 문둥병 자를 깨끗케 하였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을 때 그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열병이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소경의 눈을 손으로 만지면서 그 눈을 밝게 하였습니다. 귀머거리와 벙어리를 만지면서 귀를 밝게 하고, 말을 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손으로 떡을 떼어서 五천 명 이상의 주린 자를 먹였습니다.
그는 손으로 물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를 건져서 배간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손으로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어 주셨습니다. 그는 떨어진 말고의 귀를 주워서 다시 붙여주었습니다. 그는 그의 손을 어린이들에게 얹어서 아이들을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손은 다른 사람을 봉사하는 봉사의 손이었습니다.
모든 손들 가운데 특별히 우리가 어머니의 손을 생각할 때 봉사를 생각합니다. 또한 수술하는 의사의 손, 간호사의 손을 볼 때, 봉사를 우리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떤 손이든지 봉사의 손이 될 수 있습니다. 농부의 손도 그러하고, 의사의 손도 그러하고, 예술가의 손도 그러하고, 음악가의 손도 그러하고, 어떤 사람의 손이든지 사실 나만 위해서 쓰지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게 될 때에 우리의 손은 봉사의 손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모든 봉사가 귀하지마는 손수 할 때 그 봉사가 더 귀합니다. 같은 음식이지마는 손수 지어서 대접할 때 그 음식이 더 맛이 있습니다. 같은 선물이지마는 손수 자기가 무엇을 만들어서 어떤 친구에게 줄 때에 더욱 마음이 감격합니다. 같은 쌀이지마는 내 손으로 털어서 내 손으로 예배당에 가져오고, 내 손으로 다같이 모아서 가난한 형제와 자매를 구제할 때에 그것이 더욱 귀합니다. 같은 봉사지마는 손수 할 때에 더욱 귀합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특별히 여성들 가운데는 손을 곱게 하려고 애쓰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국 여자들은 손톱을 길게 기르기도 하고, 미국 여자들은 손톱을 빨갛게 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일 아름다운 손은 어떤 손인지 아십니까? 봉사하는 손입니다. 미국 어떤 가정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멀리 가 살던 아들딸들이 다 모여서 즐겁게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다가 젊은 사람들 사이에 누구 손이 제일 고우냐 이런 토론을 하였다고 합니다. 맨 처음에는 젊은 사람의 손이 곱 다거니 또는 아기의 손이 곱 다거니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다가 마지막에는 결국 투표해서 정하기로 하고 투표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투표의 결과는 어머니의 손이 제일 아름답다고 나왔습니다. 주름살 많이 잡힌 어머니의 손입니다. 그것은 봉사를 많이 한 손인 까닭인 줄 압니다. 봉사의 손이 제일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생각할 때에는 주님의 말씀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하면 이 봉사는 더욱 아름답습니다.
다음의 주님의 손을 자세히 보면 그 손에 못 자국이 있습니다.
이것이 특별히 다른 손과 다른 점인 줄 압니다. 스코트랜드의 수호성자로 존경을 받는 성 까일스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본래 아덴의 한 왕자로서 태어났지마는 주를 믿은 다음에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깊은 산에 들어가서 수도사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진 하나 즉 어렸을 적부터 자기가 사랑하던 암사슴 하나만은 자기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에 가서 다닐 때도 이 암사슴과 같이 다니고 또 암사슴의 젖을 짜서 먹고 초근목피로써 생활하면서 산에서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그 때에 마침 불란서의 어떤 왕이 사냥을 하기 위해서 깊은 산 속에 들어갔는데 한 골자기에 가보니 먼 곳 바위아래 사슴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이 사슴을 향하여 활을 겨누어 쏘았습니다. 그 때 성 까일스가 조용히 묵상기도를 하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얼른 눈을 더 보니까 화상이 자기의 사랑하는 암사슴을 향하여 옵니다. 이 성자는 이것을 막기 위해서 자기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화살이 성자의 손을 뚫고 나가면서 사슴을 맞혔습니다. 사슴이 맞긴 맞았지마는 손을 뚫고 지나간 살이라 힘이 없어서 사슴은 별로 상하지 않았습니다.
불란서 왕이 이런 것도 모르고 사슴이 죽었거니 하고 사슴을 얻기 위해서 헐레벌떡 뛰어왔습니다. 와보니 난데없이 어떤 성자가 손을 들고 있는데 그 손에서는 피가 흘렀습니다. 이 광경을 본 불란서 왕은 주님의 손이 연상되어서 그 자리에 꿇어앉아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의 손은 다른 사람의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게 위하여 상한 손입니다. 그 손에 못 자국이 생긴 손입니다. 그 손에 상처가 생긴 손입니다. 주님의 이 손을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도마가 이 손을 바라보고 이 못 자국을 만져보고 예수 님 앞에 꿇어앉아서 하는 말이『과연 내 주님이시요. 내 하나님입니다.』하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 가운데 아직도 예수 님이 어떠한 분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분이 계시면 성령의 감화로써 주님의 이 피 흘리는 손을 바라보고 과연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인 것을 깨닫고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도마가 특별히 예수 님의 손을 보기 원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오늘날 세상에도 주님의 손을 보기 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주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이 어떠한가, 주님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손을 보기 원합니다.
오늘날 주의 손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습니까? 주를 믿는 우리의 손으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의 손을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손이 과연 깨끗합니까? 우리의 손이 과연 부지런히 일하는 손입니까? 우리의 손이 과연 봉사하는 손입니까? 우리의 손이 다른 사람을 봉사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상처받은 손입니까? 희생의 자취가 있습니까?
한국의 현실이 주님의 손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부패한 사회가 깨끗한 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황폐한 강산이 근로의 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빈곤과 기근에 주린 대중이 봉사의 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죄악에 휩쓸려서 멸망으로 들어가는 많은 생명들이 피 흘리는 구속의 손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주님의 손을 보여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손을 주님께 드려야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옛날 이 세상에 계실 때와 같이 오늘날도 주님의 일을 계속하기 원합니다. 오늘 주님이 쓸 수 있는 손은 우리의 손밖에 다른 손이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네 손을 내게 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손을 주님께 바쳤습니까? 우리의 손이 온전히 회개했습니까? 제가 금년 권찰회가 첫 번 모였을 때에 여러 권찰 님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현실, 특별히 서울 주변의 사정을 들어보면 사실 베고프고 헐벗은 동포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집단자살이라고 하는 끔찍한 일도 저지르는 우리 동포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선 내 구역 구역마다 잘 살펴서 우리 믿는 교구 가운데 말은 안 하지마는 사실 굶주리는 가정이 있으면 이것을 알아서 먼저 그 구역에 있는 여러분들이 힘을 합해 그들을 구호하도록 힘쓰고 그들의 힘이 미치지 못할 때에는 교회에 알려서 같이 구호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사람만 돌보지 말고 구역마다 안 믿는 사람으로서 사실 가난해서 밥 굶는 사람이 있으면 그 구역에서 힘을 모아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도와주고, 그 구역에서 힘이 부족하면 교회에 알려서 돕게 하면 적어도 서울 안에 우리 교회의 구역이 一三0구역이니 一三0여 세대는 도와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이런 일을 시작한 구역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을 바라보고, 우리 손을 주님께 드려서 우리 하나 하나가 주의 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중요한 책임을 맡을 장고를 택하려고 합니다. 주의 손이 될 수 있는 장로들을 택해야 되겠습니다. (一九六四년 三월 十五일)
Ⅵ-21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신명기 三十장 十一-二十절)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三十·十九)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자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임종하기 얼마 전에 자기가 四十년 동안 인도하던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최후로 전하여 준 말씀입니다.『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요사이 한간에서 들리는 말 가운데 제일 많이 들리는 말은 못 살겠다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쌀이 없어서 못 살겠다. 집이 없어서 못 살겠다. 직업이 없어서 못 살겠다. 한 마디로 말하면 돈이 없어서 못 살겠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너무 많아서 못살겠다 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도둑놈이 너무 많아서 못 살겠다. 깡패들이 너무 많아서 못 살겠다. 협잡꾼이 너무 많아서 못 살겠다. 탐관오리들이 너무 많아서 못 살겠다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어떤 정당에서 선거 때에『못 살겠다 갈아보자』이런 표어를 내걸었습니다. 아마 오늘날은 갈아보아도 못 살겠다 그러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하는 말을 잠깐 잊고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읍시다.『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어떤 개인이나 어떤 민족의 앞에는 언제든지 두 길이 있습니다. 살 수 있는 생명의 길과 망하는 길, 두 길이 있습니다.『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소하십니다. 생명을 택하면 살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하여」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는「생존을 위하여」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적자생존(適者生存), 생존경쟁(生存競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 죽지 않고 생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 우리 민족이 어떻게 죽지 않고 생존할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어떤 이들은 생존할 수 없어서 자살하는 이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살기 위하여」라고 하는 말은 생존의 뜻만이 아닙니다. 좀 더 깊은 뜻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사는 것처럼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이런 뜻입니다. 전에 탕자가 이방에 가서 남의 돼지를 쳐주면서도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존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생불여사(生不如死)라는 말이 있지요. 사는 게 죽는 것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이렇던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와서 새 옷을 갈아입고 손에 금가락지를 끼고 여러 부모, 친척, 형제들과 같이 상에 앉아서 기쁘게 참여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사는 것처럼 살게 되었습니다.『사람이 사는 것처럼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풍성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도덕적으로 고귀하고 옳게 살기 위해서, 문화적으로 빛나게 살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번영하고 화평하게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살기 위하여」라는 말은 아마 좀더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영원히 살기 위해서」란 뜻입니다. 사람이란 간단한 육체의 일생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시편 一0三편에 보면『일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절만은 아닙니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가지 이르며』라고 읊었습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이것은 이 세상의 생만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르친 것입니다.
전에 YMCA의 위대한 지도자로 계시던 월남 이상재 선생의 남기신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연세가 상당히 놓으셨을 때 어떤 청년이 가서 묻기를『지금 신문에 보니까 일본의 아무 수상은 一00세를 능히 살 수 있고 장담을 하고, 영국의 어떤 사람은 一二0세를 능히 살 수 있다고 호언 장담을 하는데 선생님은 얼마나 사시려고 합니까?』
이때 그 선생님이 곧 대답하는 말이『그건 다 사람이 어떻게 사는 법을 몰라서 그래. 나는 영원히 살 테요』하는 것이 없습니다. 『영원히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하였는데 생명의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 제가 몇 구절을 다시 봅니다.『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여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宣言)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생명의 길이 어디 있습니까?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찾고 그의 명령을 순종하며 그를 사랑하고 그의 규례와 법도를 지켜서 그의 뜻대로 사는 그 길이 한 마디로 말하면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므로「생명을 택하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을 택해서 섬기라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전 인류와 우리 민족과 또 우리 개인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참 생명의 길이 되시는 참 신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반면에 거짓 신과 우상들이 있습니다. 무신론적 사상, 유물론적 사상, 인본주의적 사상, 참 하나님과 반대되는 우상들이 있습니다. 내가 참 하나님을 택해서 이 하나님을 섬기겠느냐? 거짓 신과 우상을 택해서 그것을 섬기며 그것을 따라 가겠느냐? 전 인류의 앞에 두 길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 두 길이 놓여 잇습니다.
우리가 어느 길을 택하겠느냐? 성경 말씀은『살기 위해서 생명의 길이 되시는 하나님을 택하여 그의 백성이 되고 그를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이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택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영적 방면입니다.
둘째로 정치적 방면에 있어서 두 가지 길이 있는 줄 압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습니다. 자유로 인도하는 길이 있고, 노예로 인도하는 길이 있습니다. 자유로 인도하는 길은 생명의 길이요, 노예로 인도하는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의 앞에도, 세계 인류의 앞에도, 이 정치적 견지에서 볼 때에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참된 자유로 인도하는 민주주의냐? 그렇지 않고 이간을 노예로 삼으러 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독재주의냐? 하는 것입니다. 우익이나 좌익의 분별이 여기에는 없습니다. 독재주의는 언제든지 인류를 구속하는 것입니다. 신문에 보니까 얼마 전에 서울대학생들이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그 민족적 민주주의의 뜻이 무엇인지 저는 사실을 모릅니다. 아마 그 말한 사람들은 알겠지마는 우리 사회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꼭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어쨌든 민주주의란 말 위에 그런 형용사를 붙일 필요가 무엇입니까? 거기에 사상적으로 석연치 않은 게 있습니다. 그런 불투명한 사상을 가지고 우리 민족이나 국가를 지도할 수 없습니다. 그 형식이 어떠하다는 것은 이렇게도 생각하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마는, 근본적으로 그런 불투명한 사상계통을 장사 지내는 것은 잘할 일인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자유를 택하고 앞으로 자유를 계속 수호하려고 하면, 항상 몇 가지 기억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우리는 법과 질서를 존중하고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무법 한 행동이 아닙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질서를 무시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법과 질서 아래에서만 참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민이나 위정(爲政)당국(當局)을 막론하고 우리가 자유를 수호하려고 하면, 언제든지 법과 질서를 존중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 국민 가운데도 아직도 이 이상이 투철하지 못해서 실수를 많이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염려를 많이 하는 것은,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입니다.
군인 법원 침입사건이니, 학생 린치사건이니, 학원 침입사건이니, 이런 모든 것들은 권력을 배경으로 하는 사람들의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크게 국가를 위해서 염려가 됩니다.
또 언제나 자유의 적은 부패와 부정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부패와 부정이 있는 곳이 자유의 꽃이 피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요새 우리 사회 각방면에서 요구하는 것과 같이 과감하고 뿌리를 뽑아내는 시책을 속히 쓰지 않으면 안 될 사태를 우리가 당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자유의 백성이 되려면 이 법과 이성과 양심에 의지한 생활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태를 만나든지, 어떤 사건을 처리하든지, 이 법을 존중히 여기고 이성을 살려서 냉철히 모든 것을 헤아릴 줄 알고 양심에 비추어서 옳은 생활을 해야 합니다. 감정에 휩쓸리거나 군중심리에 요동해서 떠들게 되고 무질서하게 되면, 결국은 자유가 유지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우리는 자유를 택하고 자유를 수호해야 되겠습니다.
셋째로 도덕적 방면에 있어서도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물론 보편적 의미로 말하면 언제든지 선은 생의 길이요, 악은 사망의 길입니다. 의는 생명의 길이요, 불의는 사망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진리를 우리 한국 실정에 비추어서, 범위를 조금 생각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는 진실과 근면의 길이 있고, 반면에 허위와 나태의 길이 있습니다. 진실과 근면은 생명의 길이요, 허위와 나태는 사망의 길입니다. 개인에게나 민족에게나 특별히 어떤 도덕적 약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이 허위와 나태의 약점이 있는 듯 싶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사실 가짜가 너무나 많습니다. 일전에 신물을 보니까 가짜 마이신을 만들어 팔은 사람도 있습니다. 약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생명에 관계되는 것인데 가짜 약을 만들어 팔아서 그 약을 환자가 쓰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데 이런 일을 감행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가짜 학생, 가짜 형사, 가짜 의사, 가짜 박사, 아마 가짜 목사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 최근 어떤 잡지에 기고를 하였는데, 우리 한국은 지금 진실성이 다 없어졌고 우리 사회가 와해되어 간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사실입니다. 말의 진실이 없으니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고,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으니 무슨 일을 할 수 없고, 경영할 수 없고, 시행할 수 없습니다. 공사(工事)에 진실이 없으니 매일 도로 포장공사는 하지마는 一년이 못 돼서 구멍이 뚫어지고 맙니다. 건축공사에 진실이 없으니 집은 높이 지었는데 무너져서 十여명이 압사하는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제품에 진실이 없으니 국산을 애용하려는 사람들이 국산을 쓸 때마다 실망을 합니다. 허위와 나태는 사람의 길입니다. 살기 위해서 진실과 근면을 택해야 합니다.
지금도 유명하지마는 미국에 콜게이트(Colgate)회사가 있습니다. 비누를 만들고 치약을 만들고 하는 큰 회사인데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회사를 처음 설립한 사람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그이가 뉴욕 어떤 촌에서 살았는데 아마 十七, 八세쯤 나서 자기 촌을 떠나 뉴욕으로 나왔습니다. 그 앞에는 조그만 강이 하나 있는데 그 강을 건너 나룻배에서 어떤 노인을 만나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너 어디 가느냐?』물었습니다.『저 뉴욕에 가요.『뉴욕에 뭘 하려 가느냐?』『나도 뉴욕 가서 뭘 좀 해보려고 갑니다.』『그래 너 그것 참 좋은 생각이라. 그런데 뉴욕엘 가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느냐?』『지금은 모르겠어요, 그전에 우리 삼촌 네 집에서 비누 만드는 걸 좀 배웠는데 가서 비누나 좀 만들어 보면 어떨 가 합니다.』『대단히 놓은 생각이다. 내 생각은 앞으로 뉴욕이나 온 미국에 비누 잘 만드는 유명한 회사가 생길 줄 꼭 아는데 혹 네가 이 다음에 그런 사람이 될지 아느냐? 그저 내가 부탁하는 것 비누를 만들 때에 진실하게 만들어라. 한 근의 비누를 만들려면 한 근 되리 만큼 재료를 써라. 남 속이지 말고. 저울대 속이지 말아라. 그리고 돈을 얼마나 벌었든지 꼭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라.』
이렇게 말한 노인은 강가에 앉아서 그 아이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 후에 이 아이가 뉴욕에서 어떤 비누 만드는 조그만 공장에 가서 일하기 시작했고 일을 하는데 이 노인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꼭 그대로 했습니다. 노인의 말이 인연이 되어서 과연 그 방면에 이 청년이 성공을 했습니다. 제품에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근면이 있어야 합니다. 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진실과 근면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로 우리가 경제생활을 말할 때, 물론 여러 가지 면으로 생각할 수 있지마는 여기에도 제가 보기에 꼭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면이 있지마는 저 보기에는 국산을 애용하는 길과 외래품을 애용하는 길, 그 두 길이 있습니다.
국산을 애용하는 길은 생명의 길이요, 외래품을 애용하는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이미 말했지마는 국산품을 만드는 사람은 진실하게 만들기를 힘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으로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국산품이 가령 외래품보다 처음에는 좀 못하다고 해도 국산품을 쓸 각오를 가지고 그것을 써야 할 줄 압니다. 왜? 이렇게 하면 국산품이 점점 잘 만들어져 나올 줄 압니다. 좀더 잘 만들려고 힘쓸 줄 압니다. 우리 기술도 점점 발전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산업이 일반적으로 발전될 것입니다. 요새 보면 공장을 지었는데 굴뚝에 연기는 안 납니다. 그런 공장이 다 돌아갈 수 있는 줄 압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우리 사회의 제일 큰 문제인 취직난이 해소될 것입니다. 일자리가 많아질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면 우리 한국사회에 큰 암이 되는 밀수도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우리 돈이 외국에 나가지 않고 우리 한국사회에 피와 같이 항상 순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국민이 다 잘 살게 될 줄 압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 국민이 이런 각오가 없이 지금 좀 낫다고, 지금 좀 보기 좋다고 외래품만 그냥 계속해서 사고, 이것만 팔고 이것만 쓴다고 하면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외래품은 그 대가가 어떤 사람의 손을 통하든지 외국으로 다 나가고 맙니다. 돈이 다 외국으로 나가고 맙니다. 이 땅에는 점점 외화가 줄어듭니다. 마지막에는 물이 점점 줄어드는 웅덩이의 고기새끼처럼 다 말라죽고 맙니다.
이게 사망의 길입니다. 우리가 경제면으로 볼 때에 어떻든지 국산품을 애용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또 우리의 역사가 四천년이니 五천년이니 하면서, 민족적 긍지도 좀 생각해야 괴겠습니다. 요새 거리에서 보는 대로 무슨 독일 빵집이니, 뉴욕 제과점이니, 파리 양장점이니, 아스토리아 호텔이니 이렇게 자꾸 서양식만 따라 쓰다가는 아마 성도 이런 모양으로 창씨(創氏) 할는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내 것이 귀한 줄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리 한국사람들은 적어도 앞으로 몇십 년 동안은 커피나 홍차를 안 마셔야 될 줄 압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한국에서 생산을 못합니다. 특별히 커피 같은 것은 열대지방 아니면 생산을 못합니다. 우리의 경제가 매우 좋아진 다음에는 모르지마는 당분간은 구수한 보리차가 제일인 줄 압니다. 또 좋은 인삼차도 있습니다. 생강차도 있고, 요새 들으니까 무슨 하부차도 있다고 합니다. 왜 외래품만 자꾸 모방합니까? 좀 잔소리 같지마는 우리가 꼭 여기 재해서 각오가 있어야 생존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섯째는 실제 소비 면에 있어서도 이 두 가지 길이 있는 줄 압니다. 하나는 검소(儉素)와 절제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사치와 낭비의 길입니다. 검소(儉素)와 절제의 길은 생명의 길이요, 사치와 낭비의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하여 검소 와 절제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아직도 알 수 없는 일은 이렇게 쌀이 없어서 외국의 양곡을 갖다가 빌어먹으면서도 왜 한국에서 나는 귀한 쌀을 여러 만석 썩혀서 술을 만들어서 마서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외지를 보니까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담배를 피우면 암에 관계가 있다고 하는 과학적인 발견을 한 후로부터 그 영향을 받아서 단연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어떤 담배회사는 큰 손해를 보게 되었고, 그렇게 되니까 그런 회사가 많은 주에서는 세금이 줄어져 이 예산 집행에 큰 곤란을 당한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담배를 상당히 많이 끊은 모양입니다. 꼭 같은 뉴스가 한국에도 다 전파가 되었건마는 담배 피우는 사람들 가운데 이 이야기를 듣고 단연 했다고 하는 사람을 아직 한 사람도 못 만나봤습니다. 참 한심하단 말입니다.
한국처럼 양극단의 대립이 심한 나라는 없는 것 같습니다. 누더기로도 몸뚱이를 채 가리우지 못하는 얻어먹는 형제들이 거리에 많이 있는가 하면, 파리나 뉴욕엘 가도 거기 귀부인들이 감히 비교도 못할 만큼 화려하게 차리고 걸어다니는 한국 부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들으니까 어떤 분이 파리에 아서 양장하는 범을 배워 가지고 와서 파리 식으로 양장을 한다고 하니까 그저 사업이 잘 된다고 합니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좀 미안하지만 사실이니까 여러분에게 대신 전해 주는 것뿐입니다. 내가 한 집에 심방을 했을 때 어떤 분이 저에게 솔직히 이야기하는데『영락교회를 가긴 갑니다. 한데 그 영락교회에 가보면 너무 사치한 분들이 많아서 이거 눈꼴이 사나와 다니기가 힘이 듭니다.』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깊이 들을 필요가 있는 말인 줄 생각합니다. 살기 위해서 검소 와 절제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 생활에 있어서도 두 가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상부상조와 협동단결의 길이 있고, 파멸과 분쟁과 분열의 길이 있습니다. 상부상조와 협동단결의 길은 생명의 길이요, 파벌과 분쟁과 분열의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해방 이후에 우리 사회의 각계 각층에서 얼마나 분쟁을 하고 얼마나 분열을 했습니까? 그런데 우리 교회도 한몫 잘 끼었습니다. 그렇게 한 결과 오늘날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 무엇입니까? 황폐한 강산뿐입니다. 살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우리가 앞으로 상부상조할 줄 알고 협동단결 할 방법을 꼭 배워야 하겠습니다.
살기 위하여 하나님을 택해야 하겠습니다. 살기 위하여 자유를 택해야 하겠습니다. 살기 위하여 진실을 택해야 하겠습니다. 삭기 위하여 검소 와 절제를 택해야 하겠습니다. 살기 위하여 국산품을 애용해야 하겠습니다. 살기 위하여 상부상조하고 협동단결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먼저 이 방면에 솔선 수범해야 이 민족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一九六四년 五월 三十一일)
Ⅵ-22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열왕기 상 十九장 九-十四절)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볼 가운데로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 十九·十二)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가 호렙산에서 얻은 경험입니다. 호렙산은 이스라엘 민족, 종교 역사상 아마 가장 유서가 깊은 곳입니다. 일찍이 모세가 불붙는 가시덤불 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곳도 이 산 기슭이요, 또는 모세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광야로 인도해 내온 후에 열 가지 계명을 비롯해서 모든 율법을 받은 곳도 역시 이 호렙산 꼭대기였습니다. 이런 산에 엘리야가 왔습니다.
그는 얼마 전에 가멜산 위에서 여러 바알 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항쟁하여 큰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 이 승리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종교에 대한 모든 문제는 해결된 줄 생각했지마는 꼭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은 크게 노해서 엘리야를 잡아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해서 엘리야는 부득이 광야로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히 피곤해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고대한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떡과 물을 마시고 새 힘을 얻어서 四十주야를 걸어 마지막에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른 것입니다. 이 때에 엘리야의 모습은 가멜산 위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 심신은 매우 피곤하여졌습니다. 외롭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엘리야의 모습을 또한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홀로 호렙산 골짜기에 있는 굴을 집으로 정하고 그 곳에 유하는 중입니다.
한 번은 그의 앞에 강한 바람이 붑니다.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급한 바람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는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땅이 갈라지고 지축을 흔드는 큰 지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여호와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큰불이 붙었습니다. 혹은 뇌성벽력이 등반하는 번개 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지나간 후에 고요한 중에 세미한 소리 즉 고요하고 적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 때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을 곧 깨달아서 얼굴을 가리우고 굴에서 나와서 신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섰다고 했습니다.『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네가 심히 외롭게 생각하면서 너 혼자밖에 남은 이가 없다고 하지마는, 실상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七천명을 내가 남겨두었노라. 너는 결코 외롭지 아니하다. 하나님 편에 선 사람에게는 실패가 없는 것이니라. 너는 발길을 돌이켜서 광야 길을 가서 네 일터로 다시 돌아가 엘리사를 만나서 기름을 부어 네 후계자를 삼고 이스라엘과 아랍나라를 위해서 네가 마땅히 할 일을 하라』고 하는 자세한 지시를 주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 음성을 들은 후에 새 힘을 얻어서 다기 일터로 돌아갔습니다. 바람, 불, 지진, 이런 것들 후에, 세미 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바람」,「지진」,「불」이런 것들은 자연계에 있어서 큰 세력의 상징입니다. 이들은 우리 인간에게 큰 경이감, 혹은 공포심을 가지게 합니다. 대자연의 위력에 억압 감을 느끼게 되고 반면에 인간의 무력감을 또한 체험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같이 계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이 일어날 때에 오히려 세미 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도 때때로 바람이 일어납니다. 지진도 있습니다.
인간 역사에도 때때로 불이 붙습니다. 사상과 주의의, 큰바람이 우리 사회를 휩쓸 때도 있습니다. 지진과 같은 큰 전쟁이 이 땅을 뒤집어 흔들 때도 있습니다. 혹은 혁명이 불과 같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역사의 거센 물결이 이 세계를 뒤덮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과히 놀랄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때야말로 세미 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세미 한 음성으로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二十七장 十四절을 보면 거기에 사도 바울이 로마를 향해서 배를 타고 갈 때에 지중해의 유라굴로 라는 데서 큰 풍파가 일어났습니다. 열 나흘 동안이나 해와 달을 볼 수 없고 거센 물결에 밀려서 방향 없이 표류해 갑니다. 모든 사람들은 정신을 잃었습니다. 꼭 줄을 줄만 생각했습니다. 공포에 싸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때에 오직 사도 바울 만은 그런 환경가운데서 하나님의 세미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반드시 가이사 앞에 설 것이요. 이 배에 있는 사람들을 네 손에 부칠 것이니라.』오직 사도 바울이 혼자 정신을 차리고 모든 사람을 격려하면서 우리가 한 사람도 생명을 잃을 사람은 없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음식을 먹으라고 권한 것입니다.
인간의 힘을 믿지 말고,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조용한 가운데 큰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역사의 파도가 높을수록 우리는 조용하고 적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는 우리가 이 엘리야의 경험을 볼 때에 생각되는 진리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계에 물론 바람이 이따금 붑니다. 지진도 이따금 일어납니다. 불로 이따금 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요, 하나님께서는 보통으로는 조용한 가운데 모든 큰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신 하나님입니다. 큰 권능의 소유자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은 그 능력을 사람처럼 과시하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조용히 모든 별들이 그 궤도를 돌아갑니다. 조용히 우리가 사는 기구도 자전과 공정을 계속합니다. 아침해가 조용히 동편 하늘에 뜨고 저녁달이 조용히 밤하늘을 비추어 줍니다. 춘하추동도 조용한 가운데 스스로 바뀝니다. 저녁 이슬도 조용히 풀잎 위에 내립니다. 조용한 가운데 풀이 자라고 꽃이 피고 곡식이 익으며 과실이 맺힙니다. 다 하나님의 조용한 역사입니다.
이것은 자연계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 역사에 있어서 큰 일을 하실 때에도, 역시 하나짐께서는 조용한 가운데 그 일을 하십니다. 조용한 가운데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어서 가나안 땅을 향하게 하고, 이렇게 해서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선민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조용한 가운데서 나일강 변의 어린 아기 모세를 구원해 주시고 아기가 애굽 궁중에서 남 몰래 장성하고 배우게 한 것입니다.
조용한 중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신 것입니다. 조용한 중에 하나님께서 바울을 바나바를 택하시고 그 머리에 안수를 하셨으며, 그들이 조용히 안디옥을 떠나 복음 전도를 시작하게 될 때에 온 세계에 선교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강권을 쓰지 않으십니다. 오직 사랑과 자비로 긍휼(矜恤)로써 죄인들의 마음을 조용히 감화시켜서 새 사람을 만드십니다.
재주는 비상하나 방탕하던 청년 어거스틴의 마음을 조용한 가운데 감화시키고 세미 한 음성으로 책을 펴 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용히 성경을 읽은 마르틴 루터의 마음속에『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진리를 분명하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 자비, 긍휼의 방법은 약한 듯하지마는 사실은 강합니다.
어린이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동화 가운데 햇빛과 바람이 서로 누가 더 힘이 센가 내기해 본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햇빛과 바람이 서로 힘이 세다 고 자랑을 합니다. 마침 어떤 사람이 외투를 입고 길을 지나갑니다. 그 때에 바람이 하는 말이『누가 저 사람의 외투를 벗길 것 같으냐? 네 힘이냐, 내 힘이냐?』먼저 바람이 벗겨 보기로 하였습니다. 갑자기 돌개바람을 일으켜서 외투를 벗기려고 합니다. 거의 벗겨질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저 이 사람이 외투를 단단히 잡고 안 놓습니다. 힘껏 바람이 불었지만 끝내는 못 벗겼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됐습니까? 햇빛이 따뜻한 양기를 길가는 사람에게 비쳤습니다. 한참 가더니 이 사람이『아 날 참 덥다!』하더니 외투를 훌떡 벗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조용한 가운데서 오직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써 사람을 변화시키는 큰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민족이 당하는 공통한 과제는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 바른 민주주의의 터전을 확립할 수 있겠나? 어떻게 하면 우리 삼천만 민족이 이 땅에서, 자유와 평화와 질서가 있는 가운데, 다같이 잘 살 수 있는 번영의 나라를 세울 수 있겠나? 물론 이와 같은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법이 필요합니다. 질서를 유지할 경찰이 필요합니다. 우리 국가를 방위할 군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가능한 줄 압니까? 아닙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조용한 가운데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조용한 가운데 하나님의 복음을 통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이 감화되고 순화되고 성결해지고 온유해지고 정직해지고 새로워지는 이 역사가 필요합니다.
이 역사가 없이 단순히 표면에 나타나는 강한 힘으로 이와 같은 나라를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조용한 역사가 우리 민족 가운데 나타나, 우리 민족의 대부분이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된다고 하면 자연히 부패도 갈 것이요, 불법도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요, 자연히 자유로운 사회가 될 것이요, 우리의 희망하는 아름다운 나라도 이룰 수 있습니다. 복음이신 이 하나님의 사랑은 총칼보다도 강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잊지 않아야 될 줄 압니다.
이사야의 경험을 생각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세미 한 음성이었습니다.
이사야 四十二장 一절 이하에 장차 올 메시야의 모습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거기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세미 한 음성입니다.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혹은 이사야 五十三장 七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운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 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조용한 모습입니다.
그의 일생의 모습은 한 세미 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세미 하게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는 조용한 가운데 애굽에 피난했습니다. 그는 조용히 나사렛 촌에서 장성했습니다. 그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조용한 가운데 갈릴리 바다 근처를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사실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도 조용한 가운데 된 것입니다. 또한 조용한 어떤 새벽에 부활이라는 큰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활의 전체는 세미 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큰 힘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 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한 번은 사마리아 지경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날이 저물어서 어떤 사마리아 촌에 잠깐 들러서 그 저녁을 지내려고 교섭해 보니 이 사람들이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유대사람이라고 해서 그 날 저녁 그 동리에서 자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 때에 예수 님의 제자가운데 요한 과 야고 보는 크게 노해서『주님이시여 이런 법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아예 이런 동네는 불을 내리도록 합시다.』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요한 과 야고보를 오히려 책망하시고 조용히 다른 촌으로 가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조용한 음성을 통해서 인간의 심령을 부르십니다.『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려 함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서 구원하려 왔노라.』『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수고하고 무거운 집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는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내가 온 것은 너희가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기 위함이니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그 속에서 영생의 강이 흐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호렙산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큰바람이 붑니다. 어떤 때에는 지진이 일어납니다. 어떤 때에는 불이 붙습니다. 이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 나오는 것은 이 교회 안에서,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이 세미 한 음성을 듣기 원해서입니다.
역사의 파도가 높은 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네 할 짓이 무엇인 줄 네가 깨닫느냐, 너와 같이 할 七천명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나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나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듣고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회개하지 못하였습니까?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아직까지 내 일생의 갈 길을 바로 정하지 못하였습니까? 분명히 정하여야 하겠습니다 조용한 가운데 세미 한 음성으로 우리 인류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一九六四년 六월 七일)
Ⅵ-23 이사야의 예배 (이사야 六장 一-八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는 보내소서.』(사 六·八)
청년 예언자 이사야의 대답입니다. 때는 웃시야 왕의 죽던 해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이스라엘의 제왕의 한 사람으로서 재위 五十二년간, 밖으로는 국위가 선양되었고 안으로는 국민이 평화롭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불행하게도 죄로 말미암아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고 필경은 그 병으로 죽게 된 것입니다.
때 마침 북방에서는 심상치 않은 국제적 움직임이 있은 것입니다. 국제정세는 험악해지는데 위대한 왕은 갔으니 국가의 장래는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청년 애국자 이사야의 가슴에는 이것이 중대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그는 무거운 가슴을 안고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조용히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이사야 六장에 있는 큰 환상을 본 것입니다.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그 날 신령한 눈으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본 것입니다. 그의 옷자락은 성전을 가득한 것을 목도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셔 섯는 스랍 들을 보았습니다. 스랍 이라고 하는 것은 불같이 빛나는 이들이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각각 여섯 날개가 있어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둘로는 발을 가리웠습니다. 여기에는 경애와 겸허(謙虛)의 뜻이 있는 줄 압니다.
그리고 둘로는 날아가면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 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唱和)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했다고…』하였습니다. 성전에서 예배할 때에 이사야는 신령한 눈으로 이와 같은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웃시야 왕은 죽었습니다. 세상 왕은 죽습니다. 지나갑니다. 시대는 변합니다. 세상 만사는 무상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때에 이사야는 예배하는 가운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변천과 무상도 초월하는 영원하시고, 불변하시고, 거룩하시고, 전능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만 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성전에서 예배할 때에 보통 사람들처럼 다만 제단만 본 것이 아닙니다. 촛대만 본 것이 아닙니다. 떡 상만 본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의 옷만을 본 것도 아닙니다. 그의 신령한 눈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어떤 이들은 예배당에 와서 예배는 드리지마는 다만 강대 상만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다만 천장만 바라봅니다. 혹은 성가대의 노래만 듣습니다. 이것들만은 부족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령한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십니다. 빛나고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거룩하시고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만 군의 주가 되십니다. 그는 마왕의 왕이십니다. 그는 온 우주를 다스리십니다. 그는 모든 국가도 통치하십니다.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십니다. 아니 우리 하나 하나의 운명을 지배하십니다. 인간의 법 위에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그는 공의로 역사를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맷돌이 비록 천천히 돌아가지마는 매우 보드랍게 가루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심판의 주입니다. 하나 하나의 전 생활을 심판하십니다.
그는 또한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이 죄 많은 인간들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앞에 지금 모였습니다.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연기가 온 집에 충만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집안에 충만히 임재 해 계십니다.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 옷자락이 온 집안에 충만해서 누구나 그 옷자락을 만질 수 있습니다. 이 곳은 거룩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지금 봅니까?
이사야는 성전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때에 그는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그는 갑자기 공포심에 휩쓸리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가는 떨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주 대하게 될 때에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은 이 경외 심입니다.
잠언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호수아도 자기가 인도해서 가나안 복지를 점령한 후에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권면 하는 말씀이『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로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서 저자는 전도서를 다 기록한 후에 이런 말씀으로 결론을 맺었습니다.『일의 결국은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도『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때에 자연히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죄가 있는 까닭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공포심과 두려움에 싸이게 되어 곧 자기의 죄를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가운데 살면서 만 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습니다.』자기의 죄를 자백한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할 때 그는 즉각적으로 자기의 부정, 곧 자기의 죄를 깨닫고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전 인간의 죄를 느끼면서 모든 인가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더러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제일 먼저 할 것은 죄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할 때에 제일 먼저 할 것은 죄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할 때에 제일 먼저『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죄를 고백할 때에 그 기도를 들으셨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였습니다.
욥 같은 이도 그렇게 신앙이 좋았지마는 큰 환난을 당할 때에 여러 가지 변론을 많이 하다가 정작 하나님과 대면한 후에야 이런 말씀을 한 것입니다.『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 끝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도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 때에 자기의 죄를 깨닫고 티 끝과 재 가운데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듣기만 하고 하나님을 아직까지도 그 심령에 친히 대면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죄를 회개하지 않은 이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대면하게 될 때에는 누구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합니다. 베드로도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 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질 때에, 물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그물이 찢어질 지역이 될 때에야 비로소, 예수는 보통사람이 아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무릎 앞에 꿇어 엎드려『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죄를 고백했습니다.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마는 자고새가 남의 알을 품고 있는 것처럼 죄를 그냥 품고 있는 것은, 아직도 사실 하나님을 대면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이사야가 그의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큰 공포에 싸여서 자기의 죄를 자백할 때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죄를 자백하자마자 스랍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 있던 펄펄 불 붙는 숯을 갖다가 그의 입술에 대면서 하는 말이『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고백하자마자 죄 사함을 받았고 악이 제거함을 입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악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죄가 있습니다. 이 악이 제거함을 받고 이 죄가 사함을 받을 때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의해 보세요. 이사야가 죄를 자백할 때에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자백하는 그 즉시로 죄를 사하여 주었습니다. 다윗도 무서운 죄를 짓고 그냥 품고 있었지마는 하나님의 선지자 나단이 나타나서 죄를 가리켜 줄 때에 깨닫고『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자백하자마자 나단이『하나님께서도 네 죄를 사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요한 이 기록한 요한 一서 一장 九절에 있는 말씀과 꼭 같은 뜻입니다.『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고 의로우셔서 자백하는 즉시로 죄는 용서하여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죄 사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의 무슨 공력(功力)을 보고 죄를 사하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 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보고,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곧 그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오직 회개만이 죄 사함을 받는 조건인 것입니다.
또 숯불로 그 입술을 살랐습니다. 불은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실 뿐 아니라 온전히 깨끗케 하여 주셨다고 하는 뜻이 여기 포함된 줄 압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一장 十八절에 있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우리 죄가 아무리 진홍같이 붉지마는 참으로 죄를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흰눈과 같이 깨끗케 하시고 온전한 새 사람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는 말씀이십니다. 우리가 다 이 죄 사함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과연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였습니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우리라고 하는 말이 있는 것을 보니 삼위일체간에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위해서 일꾼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고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은 이사야는 그의 귀가 밝아졌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하나님은 그 일꾼을 부르십니다. 그 음성을 듣는 분이 몇 분이나 됩니까? 그것은 요컨대 몇 분이나 사실 하나님을 대면하고 죄를 고백하고 죄 사람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 이 나라에서, 이 사회에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에 언제나 일꾼을 부르십니다. 이사야는 그 음성을 듣고『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며 자기의 몸을 하나님 앞에 바쳤습니다.
천국에서는 징병제도를 쓰지 않는 줄 압니다. 이 세상 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있으면 청년을 강제고 징용을 해다 가 군대를 조직해서 나라 일을 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언제든지 자원해서 즐겁게 몸을 드리는 사람들에게 사명을 맡겨서 하늘나라를 건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한국의 밭을 내려다보시면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며 일꾼을 부르십니다.
지금은 밀보리가 잘 익은 때입니다. 한국의 신령한 밭을 바라보세요. 문자 그대로 희어져서 추수할 때가 되었습니다.『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하신 주님의 음성이 우리 귀에 다시금 들려옵니다. 이 굶주리고 피곤하고 절망에 빠진 민족을 영적으로 사상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구원할 일꾼을 부르시는 중입니다. 이 민족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참된 전도자를 부르십니다. 이 민족의 자유를 위해서 참된 정치인들을 부르십니다. 이 민족의 경제생활을 위해서 참된 경제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 땅의 농촌을 도울 일꾼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 나라 살림을 바로 하기 위해서 진실한 공무원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각계 각층에서 썩어 가는 부정과 부패를 일소하기 위해서 참된 애국자를 각 방면에서, 하나님께서는 부르고 계십니다. 이 땅에 수없이 많은 고아들, 불량소년들, 윤락여성들을 위해서 참된 봉사자를 부르고 있습니다. 학원을 위해서 참된 교육가, 공장을 위해서 진실한 직공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이 음성을 듣습니까?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려 나왔습니다. 우리가 다만 강대 상만 바라봅니까? 과연 우리의 신령한 눈이 열려서 빛나고 높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봅니까? 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 것을 깨달아서 과연 내 죄를 자백합니까? 그리고 그의 약속대로 우리가 다 우리의 죄 사함을 받았습니까? 그러면 이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할 일 많은 황폐한 강산에 참된 일꾼을 부르시는 이 부름에 우리가 몇 사람이나 듣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라건대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 하나 하나의 신령한 눈을 열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이 부름을 듣고 우리의 사명을 바로 찾아서 이 땅, 이 시대에 나의 할 일 곧 하나님이 뜻하시는 그 일을 우리 하나 하나가 꼭 해야 되겠습니다. (一九六四년 六월 二十一일)
Ⅵ-24 이슬 같은 은혜 (호세아 十四장 一-九절)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호 十四·五)
하나님께서 일찍이 선지자 호세아를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호세아는 위대한 예언자일 뿐 아니라 실로 다정다감한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농촌의 출신으로서 이슬, 백합화, 백향목(柏香木), 감람나무, 포도나무와 같은 자연계와 매우 친근한 생활을 한 분이요, 따라서 평범한 자연계의 현상 가운데서 깊은 종교적 진리를 발견한 분입니다. 이와 같은 예언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약속을 하셨습니다.『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라.』
동양에서는 흔히 초로인생(草露人生)이라고 해서 이슬에서 인간의 무상과 순간성과 그 소극적인 면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호세아 뿐 아니고 성경은 대체로 이슬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모든 은혜와 축복의 면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창세기 二十七장 二十八절을 보면 이삭이 자기 아들 야곱을 축복할 때『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슬을 주기 원한다고 하는 축복의 말씀이었습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나를 내려주실 때, 이와 같은 말씀으로 기록하였습니다.『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변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 한 것이 있는지라.』만나가 이슬과 함께 저녁에 내린 것입니다.
모세가 비스가산 위에서 최후로 가나안 복지를 바라다보면서 지은 노래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라.』하나님의 말씀을 맺히는 이슬에 비유한 것입니다. 시편 一一0편 三절에『주의 청년이 주께 대하여 새벽 이슬 같도다』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 헌신한 청년들의 경건한 모습을 아침 햇빛에 빛나는 이슬의 영광에 비유한 것입니다.
혹은 一三三편 一절 이하에는『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형제가 화목해서 사는 그 크신 축복을 흡족히 내리는 헐몬산의 이슬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사야 二十六장 十九절에는『티 끝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슬이 만물을 소성(蘇醒)캐 하는 그 은혜를 상기해서 이런 말씀을 기록한 줄로 생각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라 하는 이 말씀은 이상의 모든 의미를 포함한 줄 생각합니다.
사실 성지에는 비가 봄과 가을에만 오고 여름에는 오지 않습니다. 이 오랜 여름 가뭄에 곡식과 초목을 살리는 것은 저녁마다 흡족히 내리는 이 이슬입니다. 이슬의 본성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곡식과 나무를 새롭게 합니다. 시들었던 화초밭과 시들었던 곡초(穀草)를 다시 소생하게 합니다. 장성하게 합니다. 번성하게 합니다. 꽃을 피웁니다.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은사가 인간 심령에 미치는 그 결과가 또한 이러한 것입니다.
그리해서 여기 본문을 읽어보면 내가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슬이 되어서 저가 백합화같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백합화는 옛날부터 순결과 아름다움의 상징이요. 또한 사실 선결과 미의 극치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산상보훈에 말씀하실 때에『들에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슬이 내려야 백합이 잘 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심령을 순결하게 만들고 아름답게 만들고 향기를 풍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심령을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건마는 우리 인간은 여러 가지 욕심과 정욕과 교만과 시기와 위선과 같은 죄로 말미암아서 본래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변모가 되었고 추하여지고 시들고 메마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이슬 같은 축복을 우리 심령이 다시 받게 될 때에, 우리의 심령이 백합화같이 아름답게 피고 순결하게 되고 향기를 발하게 된다고 하는 그 뜻입니다.
계속해서 기록한 말씀을 읽어보면『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요. 그 가지가 사방에 퍼지게 하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레바논 백향목은 큰 교목입니다. 튼튼한 나무입니다. 높이 자라는 나무입니다. 가지가 사방에 퍼집니다. 그런 까닭으로 뿌리를 깊이 박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는 것이 레바논의 백향목 입니다. 이렇게 레바논의 백향목은 튼튼한 것과 견고한 것과 늠름한 모습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심령이 또한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심령이 하나님의 이슬과 같은 은혜를 받게 될 때에 그 인격이 고상히 자라고 그 품성은 원만하며 그 심지는 견고하여 세상 풍조가 아무리 높아도 넘어지지 않고, 권력에 아부하지 않으며 언제나 공의와 사랑에 굳게 서서 공명 정대한 생활을 하며 만인의 사표가 되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심령의 은사를 흡족히 받을 때에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튼튼히 서고 가지가 사방에 퍼질 것입니다.
또한 그는 계속해서 기록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 감람나무를 본 이가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사실 이 감람나무는 나무 자체는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나무가 별로 크지도 못하고 잎사귀가 별로 넓지도 못합니다. 자하문밖에 가면 많이 보는 자두나무 비슷한 그런 나무입니다.
여기에 감람나무와 같이 아름답다고 하는 뜻은 감람나무의 바깥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열매는 의미한 줄 압니다. 나무는 그렇지마는 좋은 열매가 맺힙니다. 그 열매가 어떻게 귀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열매는 향기가 있습니다. 그 감람나무 기름은 맛있는 좋은 식료품이 됩니다. 감람나무 기름은 또한 사람이 상처를 입었을 때 그것을 회복시켜 주는 좋은 약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감람나무 기름을 등잔에 담아서 불을 켤 때 어두운 방을 밝혀 주는 빛을 공급하는 것이 이 감람나무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이슬 같은 축복을 받게 될 때에, 이와 같은 축복이 우리에게 있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많은 열매를 맺히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굶주린 심령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고 상처 입은 심령을 회복해 줄 수 있으며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할 수 있는 감람나무 열매 같은 열매를 맺힐 수 있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받을 때에 누구든지 이와 같은 열매를 맺힐 수 있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고 약속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말씀 더 있습니다.『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라.』백향목의 이야기가 한 번 더 나옵니다. 백향목은 그 글자 뜻대로 향나무입니다. 특별히 향기가 풍기는 나무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에 특별히 백향목으로 지은 것은 언제든지 성전 안에 들어갈 때에 향기가 차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꽃 가운데 백합은 특별히 향기를 풍기는 나무입니다. 향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백향목이 우리 방안에 있을 때에, 온 방안을 새롭게 하고 향기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 받은 심령이 또한 이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언중에 은연(隱然)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심령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감화력을 의미한 줄 생각합니다.
옛날 우리 동양 사람의 글귀에도 악한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은 마치 포어지실(鮑魚之室 )에 들어간 것과 같다 하는 글귀가 있습니다. 생선 많은 방안에 들어가면 생선 비린내가 납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과 같이 있게 되는 것은 마치 지란지실(芝蘭之室)에 들어간 것과 같다 하는 말도 있습니다. 지간은 난초를 의미합니다. 좋은 향기가 나는 난초가 있는 방안에 들어가면 온 방안이 향기로 가득해서 자연히 향기에 도취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을 때에는, 우리의 심령이 향기를 피우게 되고, 우리의 생활이 향기를 풍기게 되고,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무언의 감화를 줄 수 있는 높은 자리에까지 우리의 신앙이 올라가야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슬이 어떤 곳에 많이 내리는지 압니까? 언제 많이 내리는지 압니까? 어떻게 내리는지 아십니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이슬을 별로 보지를 못합니다. 저는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슬을 잘 압니다. 여름에 이슬이 많이 내릴 때라고 길바닥에 이슬이 있습니까? 바위 위에 이슬이 있습니까? 별로 없습니다. 아무리 이슬이 많이 내리는 저녁이라고 해도 바닥이나 바윗돌 같은 데는 이슬이 못 내립니다.
하나님은 물론 모든 사람에게 다 은혜를 내러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길바닥 같거나 혹은 우리의 마음이 바윗돌처럼 굳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의 비유에 돌작밭에 떨어진 씨가 열매를 못 맺힌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내립니다.
강퍅한 마음이나 나만 옳다고 하는 독선적인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내릴 수 없습니다. 내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그 심령 위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내립니다.
또 여러분, 이슬이 어떤 데 많이 내리는지 압니까? 산꼭대기입니까? 깊은 골짜기입니까? 산골짜기에 많이 내립니다. 산꼭대기에는 이슬이 별로 많이 안 내립니다. 깊은 골짜기에 가 보면 거기는 산꼭대기보다는 이슬이 더 많이 내립니다. 아마 신령한 은혜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은혜는 겸손한 심령 위에 많이 내립니다. 교만한 심령 위에 은혜가 내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산상보훈에 주님께서 제일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천국의 은혜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내립니다.『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애통하는 심령에 은혜가 내립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겸손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또 여러분, 이슬은 낫에는 내리지 못합니다. 이렇게 볕이 내리쬐는 낫에 내리지 못합니다. 이슬은 저녁에 내립니다. 밤에 어두울 때에 더 많이 내립니다. 인간생활에는 낫과 같은 때도 있지마는 밤과 같은 때도 있습니다. 어두울 때가 있습니다. 환난의 밤, 고통의 밤, 눈물의 밤, 고독의 밤이 있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이 특별히 은혜를 많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어두운 밤과 같은 때를 무사히 헤치고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전화위복(轉禍爲福)을 허락해 주셔서 어두운 밤이 오히려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두운 밤과 같은 때를 지나가게 되면 이 때야 말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에게 은혜 주실 때인 것을 기억하고 은혜를 받기 위해서 내 마음을 준비해야 될 것입니다.
또 이슬은 고요한 가운데, 소리 없이, 온 산야에 내립니다 여러분, 이슬 내리는 소리 들어본 사람 있습니까? 이슬 내리는 소리는 없습니다. 사실 바람 부는 저녁에는 이슬이 내리지 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고요한 가운데 조용히 기다리는 심령에 흡족히 내립니다. 그러므로 고요한 시간에 조용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모세가 궁중에 있을 때보다도 멀리 미디안 광야에 가서 조용히 양을 치며 홀로 묵상할 대에 시내산 기슭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도 고요히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묵상하며 기도할 때에 하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고요한 가운데 우리의 마음속에 내리시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이슬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슬은 어디나 있습니다. 공기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이슬이 있습니다. 적당한 조건이 성립만 되면 이슬은 곧 나타납니다. 그리해서 시들은 풀잎을 소성 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우리의 호흡보다도 더 가깝습니다. 우리의 수족보다도 더 가깝습니다. 다만 우리의 심령이 준비만 되면 그 즉시로 그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것은 특별히 무슨 은혜를 받기 위해서 여기 저기 따라다닐 것은 아닙니다. 여기 저기 방황할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디 있든지 그 자리에서 내 심령을 준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도록 힘써야 될 것입니다.
낮에는 곡식과 화초가 뜨거운 햇볕에 시듭니다. 거의 마릅니다. 그렇지마는 저녁이 되면 이슬을 받아서 시들었던 곡식이 다시 고개를 듭니다. 소성 하게 됩니다. 새롭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점점 장성합니다. 이런 가운데 꽃이 핍니다. 이런 가운데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인간도 종일 이 괴로운 세상에 나가서 사업을 하며 내 책임을 다할 때에 자연히 피곤해집니다. 곤비(困憊)해 집니다. 우리의 심령이 약해지고 더러워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녁에 우리가 이슬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면 우리의 심령은 다시 새로워지고, 우리의 심령은 다시 소성 하게 되고, 우리의 심령은 다시 피곤을 풀게 되고 새로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기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목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선경을 읽을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를 보면, 문자 그대로 우리 모든 민족이 불안과 공포와 빈곤의 사회적 분위기 가운데 싸여서 그 심령은 시들고, 그 심령은 매 말랐고, 그 심령은 매우 피곤하여졌습니다. 무엇으로써 이 절망에 빠진 우리의 민족혼이 다시 소성 함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서 이슬같이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민족이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 불안한 공포에 쌓인 사회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그 심령이 평강(平康)을 얻고, 그 심령이 튼튼해지고, 모든 것을 싸워 이기며 나아갈 수 있는 원기를 회복해야 될 것입니다.』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에게 이슬 같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주시기를 우리가 기도하고 또 우리 하나 하나가 이와 같은 은혜를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一九六四년 六월 二十八일)
Ⅵ-25 천국은 너희 안에 (누가복음 十七장 十一-二十一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十七·二十一)
주님의 말씀입니다. 한 번은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나와서『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당시에 바리새인과 일반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은 세상 나라 곧 정치적 의미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오면 당시에 이스라엘을 압박하던 로마정권을 전복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할 줄로 생각한 이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는 하늘에 큰 징조가 있고 땅에도 큰 지변이 생기며 큰 권세와 능력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 줄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대체로 그 시기도 임박한 줄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 하고 그 시기를 물어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들의 여러 가지 오해를 풀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는 세상의 나라가 아니므로 눈으로 볼 수 있는 부슨 징조나 천재지변 혹은 보이는 세상 권세로 임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 지역에 임할 것이 아니고 꼭 예루살렘에만 임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가 아닙니다. 신령한 나라입니다. 영적 왕국입니다. 따라서 보이게 임하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 신령한 중에 임하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지역에 임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심령 속 즉 마음속에 임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주님께서 여기에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 천국의 내재성을 우리가 잠깐 묵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들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보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성소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천국의 영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의 마음에 오시고 계셔서 보좌를 정하시고 다스리실 때에 우리의 마음에는 천국이 이미 임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五十七장 十五절에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십니다.『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라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蘇醒)캐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 캐 하려 함이라.』하나님께서 통회하는 마음과 겸손한 마음에 함께 오셔서 계시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주님께서도 요한 복음 十五장에서 제자들에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의 생각과 상상과 감정과 뜻과 그 밖의 모든 것을 다스리실 때에는 천국이 이미 우리 마음 가운데 임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친히 약속하셨습니다.『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약속을 리빙스톤과 같이 문자 그대로 믿는 이에게는 언제나 천국이 그 속에 임재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성령께서 오순절에 임하실 때에 一二0명 신도들에게 각각 천국이 임하신 것입니다. 전에 초대교회 시대에 안디옥교회에서 순교를 한 익나티오스는 디오호르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 트래쟌(Trajian)이 어찌해서 그런 별명을 가지게 되었느냐고 물어 볼 때에 그는 곧 대답하기를『내 마음에는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디오호르스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를 모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먼저 신령한 가운데 천국이 우리 마음속에 임재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일찍이 어떤 열심 있는 청년 사회 개혁가에게 이와 같은 권면을 하였습니다.『세상을 위하여 너무 피땀을 흘리지 말고 네 자신을 위하여 땀을 흘려라. 세상을 보다 더 낫게 만들려고 하면 네 자신부터 낫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천국을 네 마음속에 먼저 모시기 전에는 세상을 천국 화하지는 못할 것이다.』우리가 과연 이 세상을 천국 화하려고 한다면 내 마음속에 먼저 천국이 임재 하여야 된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 마음속에 임재 하는 것임을 볼 수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느낄 수는 있습니다. 남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하는 이 말씀을『너희 가운데 있느니라.』이렇게 번역한 성경도 혹 있습니다. 그 원어의 뜻은 그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엔토스(entos)라고 하는 말은 안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고 가운데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천국은 너희 중에 있느니라』고 하는 말은 믿는 사람들 가운데 천국이 있다고 하는 뜻이 됩니다. 이것도 역시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믿음으로 모인 두 세 사람 가운데 같이 계셔서 그들을 다스릴 때에 천국은 거기에 이미 임재 한 것입니다. 곧 천국은 성도 가운데 임하십니다. 성도가 모인 교회, 성도가 모인 가정에 임하십니다. 요한계시록 一장을 보면 주님께서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신 환상이 보였습니다. 일곱 금 촛대는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바울이 회개하기 전에 다메섹을 향하여 가다가, 길가에서 신령한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 님을 만났을 때, 예수 님께서 바울에게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그 때 사울은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곧 예수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교회 가운데 계시는 까닭입니다.
이렇게 천국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가정과 교회와 성도 중에 임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주인입니다. 그리스도가 그 왕입니다. 그리스도가 그 머리입니다. 그가 교회를 다스려야 하고 교회는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의 뜻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 안에 임재 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임재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에 임하면 거기에는 특색이 있습니다.
로마서 十四장 十七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이라.』그 때에는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 가운데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하여 토론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는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규칙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 과 즐거움으로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의라고 하는 것은 옳다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불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부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패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의입니다. 그릇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속에 임하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도 옳은 관계를 맺게 되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옳은 관계를 맺게 되며 모든 것이 의 그것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첫째 특색은 의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당연한 결과가 평강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의가 행하여지는 마음에는 평강 이 있습니다. 평화가 있습니다. 평안 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평화가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평화가 있습니다. 그의 마음 가운데는 근심과 염려가 있을 수 없습니다. 장래에 대한 공포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산간에 호수처럼 잔잔한 마음일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마음씨일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색은 의요, 그 다음에 오는 것은 평화입니다. 마음의 평화, 가정의 평화, 교회의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 할 때에 이런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셋째는 즐거움입니다. 옳고 평화로운 성도의 교제가 있는 곳이 자연히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옳은 관계를 가지게 될 때 즉 하나님을 향해서도 부끄러움이 없고 사람을 향해서도 부끄러움이 없게 될 때에, 그 마음에는 오직 즐거움이 깃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과 실라 같은 이는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방에 깊이 갇혀 있을 때에도 기쁜 마음이 충만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한 것입니다. 이 경험은 사도들만 아니고 역사를 통해서 모든 성도들과 모든 순교자들의 공통한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속에 임하게 될 때에는 의와 평강과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二차 대전시 교회가 각처에서 핍박을 받을 때, 한국에는 주기철 목사 같은 이가 났고 독일에는 본회퍼 목사 같은 이가 났습니다. 어려운 역경과 순교의 환경 가운데서도 그들의 생활에는 언제든지 평화와 즐거운 마음이 깃 들어 있었습니다.
천국이 임할 때에 우리의 마음,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에도 의와 평강과 즐거움이 오는 것입니다. 이 평화와 즐거움은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환경을 초월합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인』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천국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임하였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임하였습니까? 우리 교회에 임하였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여 어떤 마음에 천국이 임합니까?
여러분, 세례 요한이 일을 시작할 때에,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처음으로 전파하시기를 시작할 때에 다 같이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기억하십니까?『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고 외쳤습니다. 죄를 회개하는 마음에 천국이 임합니다.
요한 복음 三장에 보면 어떤 날 저녁에 당시에 고관으로 있던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친히 그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온전히 변해서 새 사람이 될 때에 천국이 임합니다.
예수 님께서 귀한 산상보훈을 가르치실 때에 처음 시작한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기억합니까?『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해야 천국을 소유합니다. 마태복음 十八장에 보면『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하고 제자들이 물어 볼 때에, 예수 님께서 하시는 말씀이『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순진한 믿음이 없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三장 二十절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불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가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주님께서 우리 마음 문밖에 서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가 그 두드리는 음성을 듣고 자원해서 마음 문을 열어 예수 님을 영접하면, 예수 님께서 내 마음속에 오셔서 내 마음에 보좌를 정하시고 나의 생각과 감정과 뜻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 때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에 임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까? 남편은 남편의 뜻대로 하려 하고, 아내는 아내의 뜻대로 하려 하고, 아들은 아들의 뜻대로 하려는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남편의 뜻도 아니고, 아내의 뜻도 아니고, 아들의 뜻도 아니고, 딸의 뜻도 아니고 누구나 주님의 뜻대로 순종할 때에 그 가정에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요한 웨슬레가 임종시에 남긴 말 가운데 한 마디는『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신 이 사실이다』고 한 것입니다. 귀한 거이 여러 가지가 있지마는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주님께서 오셔서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천국이 우리 마음에 임하시면 이 슬픔 많고 죄악 많은 세상에서도 하늘의 축복인 의와 평강과 즐거움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마는 일생을 아프리카 흑암(黑暗)대륙에 가서 홀로 복음을 전파한 리빙스톤은 기도하다가 혼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일기를 보면 그 마지막 장에 이런 글귀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나의 예수, 나의 왕, 나의 생명, 나의 전체시여, 나는 다시 한 번 내 전 생애를 당신께 드리나이다.』이와 같은 신앙이 있는 마음에 천국은 임재 하십니다.
(一九六四년 八월 九일)
Ⅵ-26 신앙심과 동포애 (로마서 九장 一-十三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九·一-三)
우리는 바로 어제 열 아홉 번째 광복절을 맞이했습니다. 과거 十九년간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길 다시 말하면 三八선, 六·二五, 四·一九, 五·一六, 최근 六·三사건 등을 회고할 때에 실로 감개무량합니다. 민족의 장래를 전망할 때에 또한 인중도원(人重道遠)의 감, 즉 짐은 무겁고 길은 먼 느낌이 솟아오릅니다. 아직도 허다한 난관을 돌파하여야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과 자유와 번영의 민주 건국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시대, 이러한 땅에 사는 우리 믿는 사람들의 각오와 사명이 과연 무엇일까 에 대하여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一절부터 三절을 다시 봉독(奉讀)합니다.『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이 글을 쓰신 분은 사도 바울 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 성구 가운데서 그의 신앙을 찾아봅니다. 그가 어떠한 신앙을 가졌는지를 찾아봅시다. 그리고 이 글귀 가운데서 그의 애국심을 또한 살필 수 있습니다.
먼저「그리스도 안에서…」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혹은『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하노니…』하는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말을 했습니다.
참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민의 구주가 된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첫 단계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부족합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대속(代贖)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사실을 믿는 것도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이 거기에만 그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생활이란 영적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생활입니다. 성령 안에서 생각하며 말하며 행하는 생활입니다. 예수 님 자신도 이 점을 강조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 복음 十五장에『너희는 내 안에 있으라. 나도 너희 안에 있으리니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가 없으리라.』또는『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다 이루어 주시리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는『이것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五장 十七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빌립보서에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또는『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곧 그리스도안에서)내가 능치 못한 것이 없느니라.』이렇게도 외친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두 차원의 세계에서 삽니다. 하나는 현실 세계 즉 시간과 공간의 차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부족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동시에 영적 세계 곧 그리스도안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차원에서도 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영적 차원에서 사는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어떤 이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귀로 듣고만 삽니다. 혹은 머리로 생각해서 그럴 것이라, 이지적으로 인정만 하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것은 다 필요하지마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적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그리스도의 입술로 말을 하고, 그리스도의 수족으로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일 필요합니다. 우리는 먼저 이 말씀 가운데서 사도 바울의 신앙생활의 내용을 봅니다.
다음 二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 한다.』 이 말씀은 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영적 차원인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도 바울은 근심과 고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주 안에 사는 우리에게 딴 근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 하고 기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큰 근심이 그치지 않는 고통이 또한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도 바울은 비록 영적 차원에 살면서 무한한 기쁨과 평화를 느끼지마는, 어떤 그릇된 신비주의자들과 같이 현실 세계를 잊어버린 분은 아닙니다.
높은 차원의 세계에서 살지마는 이 현실 세계를 또한 내려다봅니다. 제일 먼저 자기와 가장 가까운 골육지친(骨肉之親)인 자기 민족을 내려다봅니다. 자기 민족을 내려다보니 기가 막혔습니다. 근심이 생겼습니다. 고통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의 민족이 본래 어떤 민족입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받은 민족입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그들은 통해서 났습니다. 아니, 육신으로 말하면 매시야 되는 그리스도도 그 사람들을 통해서 났습니다. 열 두 사도가 다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민족이 메시야가 오셨건마는 메시야를 보지 못합니다. 메시야를 알지 못합니다. 메시야를 맞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맹목적으로 눈을 가리우고 그리스도를 핍박합니다. 사실 그리스도를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몸 되는 교회를 그들이 핍박합니다. 이방의 전도를 방해합니다. 도처에서 그리스도를 핍박합니다. 이렇게 죄의 양(量)을 이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문자 그대로 금생과 내생에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골육지친인 자기 민족이 이러한 암흑의 길로 나가는 것을 바라볼 때에 그의 마음에는 큰 근심이 생겼습니다. 그 마음속에 일어나는 고통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참 신앙이 있는 이에게는 이런 근심은 있습니다. 이런 고통은 면할 수 없습니다.
전에 느헤미야 같은 이는 위대한 신앙 가였습니다. 물론 주안에서 큰 즐거움을 가진 분입니다. 그는 파사 궁중의 고관으로 있었습니다. 평안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은 어떤 분이 와서 고국 예루살렘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거기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파가 되었고, 예루살렘의 성문이 다 불 살음을 당했다고 하는 비참한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는 통곡했습니다. 금식하며 밤잠을 자기 못하고 기도했습니다. 그에게도 근심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기록한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런 문구를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슬프다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이 번뇌 하도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하였도다.』슬픔이 있었습니다. 근심이 있었습니다. 고통이 있었습니다. 눈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연 사도 바울이 가졌던 참된 신앙을 마음 가운데 가졌습니까?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삽니까?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의 눈으로 우리 민족을 내려다봅니까?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한국의 현실을 직시(直視)합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가슴에 무엇이 있습니까? 먼저 영적 견지에서 우리 한국의 현실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서 이미 八十년 전에 선교사를 보내서 복음을 전파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축복을 주어서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은 것을 감사합니다.
지금 듣건 대는 신구교도 합해서 우리 남한에 약 一五0만의 기독교도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 남한의 인구가 三천 만이나 된다고 하는데 거기 비교하면 一五0만이 다 참된 기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二十분의 一밖에 안됩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직까지도 이 한국의 三천만 동포가 생명의 주를 모르고 산다는 뜻입니다. 소망이 없이 이 세상에 살고, 소망이 없이 이 세상을 떠나갑니다.
우리가 사실 천당과 지옥의 존재를 압니까? 우리가 사실 우리 인간의 영적인 운명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성경을 통해서 믿습니까? 그러면 날로 소망 없이 이 세상을 떠나는 이 동족을 우리가 어떤 눈으로 봅니까? 우리 마음에 근심이 없습니까? 우리 마음에 고통이 그칩니까? 더욱이 내 사랑하는 친척이 아직까지도 이런 생활을 하는 것을 볼 때에 우리의 마음이 안심합니까?
또 한국의 현실을 직시하세요. 해방 이후에 적어도 우리 한국은 특별한 은혜 가운데서, 온전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얼마든지 민주 건국의 기회는 있습니다. 자유우방의 막대한 원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이 혼란, 이 빈곤, 이 불안, 이 혁명, 이 데모, 이 계엄령 같은 것이 계속됩니까? 대한민국을 좀 먹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혹은 공산당, 혹은 모리배, 혹은 부패한 정치가, 혹은 부패한 군인들, 혹은 부패한 공무원들,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하면 무엇인지 압니까? 우리의 죄악입니다. 대한민국의 각계 각층,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을 좀 먹는 것은 결국 우리 인간의 죄입니다.
어떻게 이 죄를 소멸할 수 있습니까? 천사가 말하기를『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민족의 대부분이 이 예수를 모르고 삽니다. 예수 님께 나오지를 않습니다. 살길이 있어도, 살길을 찾지 않고, 멸망의 길로 나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사실 민족을 위한 이 안타까운 심정과 고통과 근심은 신앙의 척도인 줄 압니다. 우리가 참된 신앙에 들어갈수록, 우리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달아 알수록, 우리가 영적 세계를 분명히 볼수록, 내가 내 민족을 더 사랑할수록 이 근심과 고통은 더하여집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과연 여러분께서 깊은 신앙 가운데 우리 민족을 살필 때에 우리 민족의 심령을 위해서, 우리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마음에 근심과 고통이 머뭅니까? 만일 이런 것이 없다고 하면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반성해 보십시다.
사도 바울의 신앙은 큰 근심을 가져왔고 큰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 근심과 고통은 다만 근심과 고통에 멎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三절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다시 말하면 내가 내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사양치 않겠다는 사도 바울의 회생정신의 표현이요, 정의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 구절을 오해하지 맙시다. 사도 바울이 원한다고 그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여러분, 로마서 八장 마지막 절을 보면『내가 확신(確信)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하신 이 말씀은 다만 내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나로서는 어떠한 희생이라고 하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각오가 있습니까? 모세도 이 비슷한말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짓고 큰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을 때에, 이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이 백성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지 않으시려면, 내 이름을 생명 책에서 도말 하여 주시옵소서.』
같은 정신을 나타낸 애국자 모세를 볼 수 있습니다. 또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종교개혁자 죤 낙스(John Knox)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하나님이시여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습니다. 기브 미 스코틀랜드 오 아일 다이(Give me Scotland or I'll die.)』다 같은 정신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참 신앙 가이며 참 애국자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만 하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실행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먼저 유대 사람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돌에 맞아가면서도 전도를 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항상 기도했습니다. 골육지친으로 이루어진 예루살렘교회가 큰 기근을 당할 때, 이방교회에서 연보를 거두어서 그들을 구호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큰 핍박을 받고 죽으리라고 하는 경고를 무릅쓰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다가 그 경고대로 그 사람들에게 붙잡혔습니다. 붙잡혀서 오랫동안 옥고를 당했습니다. 마지막에 순교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는 이와 같은 결심과 희생의 정신으로 살고 또 죽었습니다.
우리에게 참 신앙이 있습니까? 우리가 참 신앙의 견지에서 우리 민족을 봅니까? 그리고 우리에게도 고통이 있습니까? 거기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내게 이와 같은 고통이 있은 즉 이 민족을 영적으로 구원하기 위해서, 어떠한 희생이라도 하겠다는 정신과 결의가 있습니까? 이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님도 위대한 애국자입니다. 먼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여러 문도 들을 전도하려 내보내면서 이방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제일 먼저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양의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三년 동안 계속해서 예루살렘과 유대지방에 다니며 전도하시다가 그래도 이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면서『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派送)된 다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슬픈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습니다.
그 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십니까?『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먼저 자기 민족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애국심은 어디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 가운데도 위대한 애국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 애국심을 순화하고 정화하고 또 뿌리를 깊이 박습니다. 애국심이 잘못되면 배타주의로 변하기도 쉽고, 민족지상주의로도 변하기 쉽고, 국가지상주의로도 전락하기도 쉽습니다. 혹은 파쇼주의, 혹은 독재주의로 애국심이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이 타락을 막으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민족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진리 아래서 나라를 사랑하는 건전한 애국심을 가지고 우리 민족을 지도해야 합니다.
또 기독교 애국심은 어떤 시대, 어떤 나라에서든지 민족의 제일 큰 원수가 죄라고 하는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 님 당시에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때의 이스라엘 민족의 제일 큰 원수가 로마 사람인 줄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의 제일 큰, 원수는 너희 속에 있는 죄라고 하시며 먼저 이 죄를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애국심은 언제든지 먼저 죄를 회개하게 하는 이 복음전파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애국심이 거기에 그치는 것만은 아닙니다. 기독교 애국심은 또한 그 민족을 역사적 현실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역사에 참여할 수밖에 없고 사회운동에 참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으로 자유와 사회정의의 실현에 노력할 수밖에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헌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애국자들이 어떠한 사회에 있든지, 어떠한 정권이나 어떠한 정당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입장에서 냉철하게 비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바로 할 때에 격려하고 협력해 주며, 그릇된 길로 나갈 때에 경고하며 부득이 하면 항거하여서라도 자기 나라를 바로 세우도록 힘씁니다. 이것이 기독교 애국자의 할 일입니다. 이것이 모든 예언자들이 국가에 대하여 드린 봉사의 길인 것입니다.
제일 귀한 것은 참 신앙을 가지고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게 될 때에 우리에게 근심이 들어옵니다. 세상 근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근심이 들어옵니다.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근심이 들어옵니다. 이 근심이 그치지 않을 뿐 아니라 나도 내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고 하는 희생정신에까지 미칠 때에 이것이 참 신앙생활이 됩니다. 내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 시간을 희생하고, 내 재주를 희생하고, 내 물질을 희생하고, 부득이 하면 생명까지라도 희생하고자 하는 이 정신이 참 신앙이요, 이것이 참 애국자의 신앙입니다. (一九六四년 八월 十六일)
Ⅵ-27 내 몸의 가시 (고린도 후서 十二장 一-十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 十二·九)
바울은 모든 사도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사도입니다. 오늘 아침 읽은 이 말씀 가운데도 있었지마는 그는 많은 은혜를 받은 분입니다. 큰 계시를 보았습니다. 그는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사람으로서는 감히 들을 수 없는 말을 듣는 신령한 체험도 얻은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스스로 고백하는 말씀을 보면, 이런 분이라도 그의 육체에 가시가 있어서 이것은 사탄의 사자처럼 항상 자기를 찌르고 괴롭힌다고 한 것입니다. 이 가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마는 하여간 끊임없이 큰 고통을 주는 어떠한 고질의 질병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많은 고통과 고난을 받으면서 주를 봉사한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종종 알지 못하는 동포들로부터 편지를 받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들을 보면 물론 가지각색이지마는 보통으로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당면해서 해결의 길을 찾기 위해서 의논해 오는 것들입니다. 어떤 분은『불치의 병이 있는데 암만해도 고칠 길이 없으니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합니까?』하고 물어옵니다. 어떤 분은 六·二五때에 부상해서 또는 다른 어떤 사고로 그만 불구자가 되었는데『일생동안 불구의 몸으로 내가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어떤 분은『사업에 실패하고 나아갈 길이 아득한데 어떻게 길을 열 수 없겠습니까?』하고 의논합니다. 또 재주는 많이 있지마는 학교에서 공부할 학비가 없어서 곤란하다는 사정을 편지해 오는 학생도 많이 있습니다. 혹은 어떤 분은 사랑하는 남편이나 사랑하는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서 심히 외롭고 슬픈 사정을 호소하는 편지도 종종 받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는 그 몸에 가시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각계 각층에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마 이 시간,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 가운데도 몸의 가시와 같은 남 모르는 고통을 당하고 계신 교우들이 더러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육체에 있는 이 가시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문제를 성경이 교훈 하는 대로 잠깐 생각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습니까? 여러분께서 읽어 본 대로 사도 바울은 우선 이 문제를 자기 혼자 해결하려고 힘쓰지는 않았습니다. 기록된 대로 이 문제를 주님께로 가지고 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한 번만 드린 것이 아니고 세 번씩 드렸다고 하는 것을 보니 간절히 기도한 모양입니다.
『내 살을 찌르고, 나를 아프게 하는 가시가 내게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것을 없애 주시기를 바랍니다.』이와 같이 주님께 자기 가시에 대한 모든 문제를 솔직히 고백하고 이것을 없애 달라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해결의 길인 줄 압니다.
우리도 이런 가시의 문제를 당할 때에 혼자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와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일을 당할 때에 오히려 기도하는 힘을 잃고 단지 혼자서 근심하고 염려하고 걱정만 합니다. 그러다가 점점 더 비관하게 되고, 몸도 더 약해지고, 일도 더 안 되고 해서, 나중에는 큰 고통을 받는 처지에 빠지는 수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근심하고 걱정하는 생활을 계속하면 오리려 이것 때문에 더 큰 병이 날 수도 있고 더 큰 실패가 올 수도 있습니다. 또 너무 심하면 정신에 이상이 생길 수고 있고, 극도의 염세주의에 빠지고 비관하게 되어 심지어는 자살하는 경우도 혹 있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이 가시의 문제는 혼자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혼자 해결하려고 힘쓰는 것도 아니고, 주저앉아서 원망만 합니다. 반항을 합니다. 왜 다른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없는데 꼭 내게 이 고통이 왔나? 왜 하필 내게 이런 슬픔이 왔나? 왜 하필 나만 이렇게 외로운 생활을 해야 되나? 사람을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하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전에 제가 신의주에서 결로 원을 경영할 때에 어떤 불쌍한 할머니 한 분을 우리 경로 원에서 모셔다가 사시게 했는데 할머니는 중년에 그만 눈이 어두워진 분이었습니다. 한 번은 가서 위로의 말씀을 드리는데 이 할머니가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하나님께서 사랑이라면 왜 꼭 내 눈을 멀게 했겠습니까?』이런 태도입니다. 그저 원망만 합니다. 이렇게 원망하고 반항하는 태도가 계속되면 그 사람은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결국 이렇게 나아가다가는 자포자기(自暴自棄)하게 되고 모든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만 생기고 잘해 주는 사람에게 오히려 악하게 대하고 나중에는 흉악한 죄악에 빠지기까지 하는 사람도 종종 있습니다. 이 가시가 아프니까 공연히 남을 괴롭게 합니다.
속담에『병신 속 고운 데 없다』하는 말이 그 이유 같습니다. 자기 몸이 괴로우니까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합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에게 보복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가시의 문제를 해결하는 법이 아닙니다.
네게 어떠한 가시가 있어서 큰 고통이 오고 괴로움이 올 때에, 제일 먼저 할 것은 이 문제를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충분히 쏟아 놓는 것입니다.『내가 이런 사정을 당합니다. 내가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하고 주님 앞에 온전히 다 고해야 됩니다. 그것이 해결의 비결입니다.
야고보 장로도『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잇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응답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특별히 주님을 부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혼자 해결하려고 애 쓰지 말고 주님 앞에 나와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두 가지 길로써 주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첫째 길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그 가시를 없애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서로 합치되는 때에는 그 가시를 없애 주십니다. 마치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문둥이가 와서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호소할 때, 그 병을 고쳐주신 것처럼, 또 열 두 해나 혈루증(血漏症)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와서 옷자락을 만질 때에, 그 병을 고쳐주신 것처럼,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고 우리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우리의 원하는 대로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읽었지마는 사도 바울의 경우가 이런 경우입니다.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하였는데 그 가시를 없애 주시지를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기도는 예수 님이 드린 기도와 비슷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라고 하는 큰 고난의 잔을 앞에 놓고 인간 예수는『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여 주시옵소서』하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한 번만 기도한 것이 아니고 세 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그 고난의 잔을 떠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기도는 하나님께서 아주 응답하시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 님에게 큰 힘을 주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 큰 능력을 더하셔서 십자가의 고통이라도 능히 견딜 수 있는 새로운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가 역시 그러합니다. 가시는 없애 주시지 않으셨지마는 기록된 대로『내 은혜가 네게 족(足)하도다』하시며 그 가시를 능히 견딜 만한 족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 후서 六장 十절에 자기의 경험을 기록하기를『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가시가 있을지라도 그 고통을 이기고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하는 족한 은혜를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것입니다.
찬송가 三四八장을 여러분이 다 기억하실 줄 압니다. 둘째 절에 보면 이런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극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 하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어려운 일 당한 때에도 족한 은혜를 주시고, 나는 심히 고단할지라도 내 앞의 반석에서 새로운 생명수를 주시는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가운데 유명한 사람들이 많지마는 제일 이름이 높은 이는「존 번연」일 것입니다. 이 분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핍박을 받아서 투옥되었습니다. 활동적인 이 분이 수감되어서 가만히 감방에 앉아 있으니까 답답하고 민망한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이상한 음성이 들려 왔다고 합니다.『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하는 세 차례의 똑 같은 음성이었습니다.
그 때에야 그는『아 내가 감옥에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네게 족한 은혜를 주시는구나』하는 깨달음을 얻고 다시는 원망도 낙심도 않고 오히려 기쁨을 가지고 옥중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족한 은혜를 주십니다. 고통도 견딜 수 있고, 슬픔도 참을 수 있고, 고독도 견딜 수 있고, 실패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五장에는『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환난 가운데도 즐거워할 수 있는 족한 은혜를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만 주시는 것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내 능력은 약한 가운데서 온전하여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뜻은 가시가 있을지라도 이것을 잘 참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실 뿐 아니라, 오히려 가시로 말미암아 주님의 능력이 그 생활에서 온전히 이루어져서, 하나님이 그를 쓸 만한 그릇이 되게 하고, 자기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축복이 되게 하는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 뜻입니다.
물론 주의 능력은 언제나 온전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우리 인간이 가시로 말미암아 약해질 때에 주님의 역사가, 온전히 그 능력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토기장이가 물론 잘 이겨진 진흙을 가지고는 얼마든지 좋은 토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자라 할지라도 딴딴한 흙을 가지고는 토기를 만들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술과 능력이 있는 철공장이라 해도 딴딴한 쇠를 가지고는 기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 쇠가 불에 들어가서 물려진 다음에야 대장장이가 원하는 대로 그릇도 만들 수 있고, 기계도 만들 수 있으며, 그의 모든 기술과 능력이 그 쇠를 통해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때에는 우리 사람의 신령이 너무 굳고 너무 딴딴합니다. 아무리 주의 능력이 크지마는 이와 같은 심령을 가지고는 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심령 가운데 혹 가시가 박히게 됩니다. 고통이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 굳은 심령이 부드러워지고 겸손하여지고 온유하여지고 좀더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좀더 기도를 하게 되고, 좀더 남의 사정을 알게 되고, 좀 더 주님을 사모하는 심령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때에만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서, 그 심령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들 수 있고 사랑과 믿음과 기쁨과 인내와 자비와 긍휼(矜恤)이 충만한 그릇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많은 사람에게 축복을 줄 수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번연의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는 감옥에서 어려운 생활을 잘 이겨 나가는 은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 오히려 주님의 은혜를 더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신앙생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천로역정」(天路歷程)이라는 유명한 책을 써서 자기가 말로 전도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청교도였던 죤 밀튼 같은 분은 아주 유명한 분입니다. 그는 선천적으로 문필에 재주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 중년에 실명이 되어 눈을 못 보게 되었습니다. 본래 신앙이 독실한 분이었으므로 실명이 될 때에도 이것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실명이 된 다음에도 혹 보게 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기도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밀튼은 실명한 가운데서도 평안한 마음으로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는 은혜를 먼저 받았습니다. 그 은혜 가운데서 계속해서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더 큰 은혜를 받아서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만고 불후의 대작인「실락원(失樂園)」이라는 유명한 책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가시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가시 자체가 선한 것도 아닙니다. 가시는 사단의 사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것을 통해서 주님이 온전히 나타날 수 있고, 또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큰 축복이 나타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검은 구름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검은 구름이 없으면 빛나는 무지개를 볼 수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무지개와 같은 주님의 빛을 반사시키기 위해서 우리 생활의 면에 검은 구름을 허락할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새 예루살렘은 모든 것을 아주 아름답게 꾸몄는데 그 문들은 전부 진주로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그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기억하십니까? 진주는 본래 바다 속에 사는 진주 패라고 하는 전복, 조개 가운데서 생깁니다. 그 가운데서 어떻게 되는지 압니까? 조개가 바다 밑으로 기어다니다가 어떻게 잘못 되어서 깔깔한 모래알이 그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연한 살에 모래알이 들어가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진주 패는 이 고통 가운데서 말하자면 생명의 즙을 짜서 그 모래알을 둘러싸고 싸고 또 쌉니다. 한 달, 두 달, 一년, 二년 여러 해를 지나게 되면, 큰 진주가 되어서 제왕의 면류관을 장식하고, 천국의 문을 장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로 하여금 많은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진주 문을 삼기 위해서 어떤 가시를 허락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 학생시절에 어떤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전에 어떤 유력한 가정에 귀한 따님이 하나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 마치고 성년이 되어서 역시 유력한 어떤 집의 좋은 남자와 약혼을 하고 결혼 날까지 다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결혼하기 약 一주일 전에 갑자기 이 여자가 병에 걸렸습니다. 아주 중한 열병입니다. 전신 모르고 않습니다. 않는 동안에 결혼 날짜가 다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한 달 이상 중하게 앓고 겨우 생명을 보존해서 살아났습니다. 살아나고 보니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일어나 앉아서 머리를 빗으려고 거울 앞에 가서 자기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얼굴이 전혀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앓았던 병은 소위 마마라고 하는 천연두였던 것입니다. 그 어여쁘던 얼굴이 북한에서 흔히 쓰는 말대로 졸박 졸박 얽었는데 도무지 자기자신조차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머리를 채 빗지도 못하고 그냥 자리에 쓰러져 눕고 말았습니다.
며칠 후입니다. 병이 좀 낫다는 말을 듣고 자기와 약혼한 남자가 찾아온다고 합니다. 이전 같으면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얼굴을 가지고 약혼한 남자를 어떻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참 기가 막힙니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찾아온 남자를 맞아들여서 마주 앉았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한 번 곁눈으로 힐끗 보더니 금방 얼굴빛이 달라집니다. 그리고는 잠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다가 훌쩍 달아나고 맙니다. 그리고 나서는 도무지 일불거래(一不去來)입니다. 얼마 후 본래 중매했던 노파가 다시 오더니 머뭇거리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마지막에 하는 말이『저 집에서 파혼하잡니다.』 이 한 마디를 남기고 훌쩍 가버렸습니다. 그 여자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 얼마쯤 있더니 바로 그 남자가 자기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와 다시 약혼을 한다는 소문이 들여옵니다. 이윽고 아무 날로 결혼 날짜를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들립니다.
이 소식을 들을 때 이 여자는 너무나 원통해서 이불을 쓰고 집안에 들어 누웠습니다. 밥도 못 먹고 고생을 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도 이불을 쓰고 가만히 누워서 바로 내일이 그 결혼식 날이라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하고 분하기만 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그만『아무도 원치 않는 이까짓 몸이 살아서는 무엇 하 노?』하고 생각한 끝에 결국 자살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못 보는 사이에 자기 집을 빠져 나왔습니다. 어스름저녁인데 천천히 걸어서 멀지 않은 강가로 나갔습니다. 높은 벼랑 위에 앉아서 달빛 아래 흐르는 푸른 강물을 내려다보며 자기 신세를 생각하니 기가 막힙니다. 그만 서러움에 복받쳐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기진맥진해서 앉았는데 이상스럽게도 그 날 저녁 따라 멀리서 이상한 노래 소리가 들여왔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여서 듣기를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듣지 못하던 노래 소리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어떤 노래 소리인가 하고서, 노래 소리 나는 곳으로 점점 찾아가 보았습니다. 좁은 오솔길을 지나서 송림 사이를 한참 지나가 보니까, 조그마한 집이 한 채 있는데 그 집에 사람이 가득히 모여서 합창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게 아니고 조그만 농촌 예배당이었습니다. 때마침 부흥회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밖에서 서성거리라니까 웬 사람이 나오더니 친절한 태도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자기는 그다지 들어갈 마음도 없는데 억지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무슨 설교를 하고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무르지마는 하여튼 이 여자가 그 날 저녁에 처음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고, 자기는 아무 소망이 없었는데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소망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결국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후부터 이 여자의 생활은 달라졌습니다. 깨끗이 세수를 하고 옷을 단정히 차려 입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부모에게 고부를 더 하겠다고 청을 했습니다. 넉넉한 집안인지라 부모들은 딸의 소원대로 공부를 더 시켰습니다. 마침내 이 여자는 지금으로 말하면 여자신학교를 마치고 어떤 교회에 여전도사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서 자기의 전심 전력을 다 했습니다. 이 분은 자기를 원하는 남자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데 주님만이 자기의 신랑이 되어 주셨다고 생각하여 주님의 신부로서 정성껏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받들겠다는 결심 아래, 힘껏 전도하고 기도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했던 것입니다.
받은 월급을 다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산도 전부 다 써가면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특별히 불구자를 불쌍히 여기고 불행한 사람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이렇게 몇 해 동안 교회 일을 보았더니 그 교회에서『우리 전도사님 얼굴은 예수 님의 얼굴과 같다』하는 말이 돌게 되었습니다.『우리 전도사님 얼굴은 어떻게나 은혜가 충만한지 모르겠어! 그 오목조목한 자리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고 그 올통볼통한 데는 주님의 영광이 반사되는 것 같단 말이야.』이런 말이 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밉고 고운 것은 보기 탓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금강산에 있는 만물상을 가보신 분이 계십니까? 만물상은 미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우리 중에 가시를 가지고 있는 이가 많습니다. 이 가시를 혼자 가슴에 두지 말고 주님께 내어놓으세요. 기도하세요. 은혜 받으세요. 그러면 오히려 이 가시로 말미암아 더 축복을 받습니다. (一九六四년 八월 二十三일)
Ⅵ-28 공포심을 극복하는 비결 (이사야 十二장 一-六절)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十二·二)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하나님을 의뢰할 때에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오늘 이 시간, 두려운 마음, 공포심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공포심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본능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목적은 유익한 것으로서 첫째는 마땅히 두려워할 이를 두려워할 줄 알고, 둘째는 인간의 생명을 위험한 곳에서 보존하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로 타락된 후에는 이런 본능까지 변태가 되어서 마땅히 두려워할 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반대로 안 두려워할 것들을 많이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아무 근거가 없는 공포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이 공포심은 우리 인간생활에서 행복을 탈취해 가는 한, 저주가 되고 만 것입니다.
공포심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사람에 딸 다릅니다.
어떤 이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산 사람도 두려워하고 죽은 사람은 좀더 두려워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사람이 적게 모인 가운데서도 이야기를 잘하지마는 사람이 많은 가운데 내다 세우면 그만 입이 열리지를 않아서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남자를 특히 두려워하는 여자도 혹 있고, 여자를 특별히 두려워하는 남자도 혹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이들은 결혼생활 하기에 대단히 곤란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빛깔을 두려워합니다. 특별히 검은 빛깔을 두려워하는 이가 있어요. 혹은 붉은 빛깔을 두려워하는 분도 있고, 또 어떤 분은 소리를 두려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큰 소리, 우뢰(雨雷)같은 소리를 대단히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제가 전에 미국에서 입원해 있을 때, 어떤 날 오후에 갑자가 내 옆방에 입원해 있던 젊은 미국여자가 제 방으로 뛰어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얼굴을 보니까 상기가 되어 있어요.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물으니까, 그 날 오후에 벼락이 떨어졌는데 그 벼락 소리가 너무 무서워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 외에 상상적으로 두려워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튼튼하지마는 요 다음에 병 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지금은 취직하고 있지마는 요 다음에 실직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지금은 생활이 안전하지마는 요 다음에 빈궁해질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요 다음에 고독해질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젊어서는 괜찮은데 나이 많아 늙은 다음에 어떻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늘은 괜찮은데 내일 어떻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지금은 튼튼한 몸으로 잘 살면서도 항상 죽을까봐 두려워하는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에 어떤 젊은 여자가 심장이 뛰며 가슴이 항상 아프다고 심장 전문의사에게 가서 진찰을 해봤습니다. 전문의가 아무리 지단해도 심장에 이상이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여자가 어떻게 되어서 심장이 뛰고 가슴이 아파서 고통을 당할까 하고서는 심리분석 하는 학자에게 그 여자를 좀 알아보라고 맡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세히 사정을 알아보니 그 여자는 두 번째 결혼한 여자인데 볼래 어떤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매우 행복한 생활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남편이 갑자기 병이 나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슬픔을 당하고 몇 해 있다가 참 다행히 다른 좋은 남자를 다시 만사서 결혼하고 지금은 매우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는데, 이 여자의 생각에 이 남편이 또 죽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항상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공포심 때문에 결국은 이 여자의 심장이 뛰고 가슴에 고통을 일으켰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때에는 오해에 기인한 공포심도 많습니다. 밤에 예수 님께서 갈리리 바다 물위로 제자들에게 오실 때에, 제자들은 예수 님이 오시는 것을 모르고 무슨 요물이라고 해서, 크게 무서워서 고함을 지른 이야기를 우리가 복음서에서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때에는 우리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나,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오해를 해서 크게 무서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없는데 그저 무서운 생각 때문에 늘 마음 가운데 겁을 품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없이 않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는 모르나 그 잠재의식 가운데 어떤 공포심이 있습니다. 흔히 어렸을 적에 놀랐다든지, 어렸을 적에 어떤 무서운 사람에게 고생을 당했다든지, 이런 사람이 장성해서 그 일은 잊어버렸는데, 잠재의식 가운데 이런 무서운 생각이 나서, 항상 그 사람을 괴롭게 하는 심리적 현상을 가질 때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 편지 받은 분이 혹 계실 줄 알아요. 저는 소위 행운의 편지라 하는 것도 종종 박습니다. 이 행운의 편지라고 하는 건 아무 쓸데없는 편지로서 무슨 소식을 전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쓸데없는 편지인데 이 행운의 편지가 빙빙 자꾸 돌아갑니다. 왜 돌아가는지 압니까? 그 행운의 편지를 보면 이 편지 받는 당신은 큰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복을 꼭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받느냐 하면, 이 편지를 이대로 다시 써서 당신이 잘 아는 친구 열 사람이나, 혹은 열 두 사람에게 꼭 보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무슨 말이 있는지 압니까? 만일 그렇게 안 하면 당신은 큰 저주를 받습니다. 큰 화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주받는다고 하는 말이 무서워서 아무 편지할 일도 없는데 공연히 그대로 베껴서 시간을 쓰고, 종이를 쓰고, 우표 값을 써가며 여러 친구에게 보냅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에게서도 이런 편지를 한 번 받은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편지를 받으면 그저 휴지통에 던지고 다시 돌지 않게 하세요. 쓸데없습니다. 순전히 사람의 공포심을 이용해서 쓸데없는 짓들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긴 다니지마는, 아직도 날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결혼식(結婚式)할 때 날 받습니까? 그것도 일종의 공포심입니다. 무서워서 길한 날도 있고 불길한 날도 있다고 하는데 불길한 날 결혼식 했다가 다음에 잘못 될까봐 무서워합니다. 미국에 가면 여관 같은데 흔히 十三호실이 없습니다. 여기 어떤 여관에 四호실이 없습니다. 우리 서울에도 어떤 큰 병원에 가보니까 四층이 없습니다. 三층 다음에 五층입니다. 그거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미국 사람들은 十三이라고 하는 수가 불길하다 하는 미신이 있어서, 한국 사람은 四자라고 하는 건 줄을 사(死)자로 통하는 것이라 해서 그걸 다 무서워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미신에 사로 잡혀서 공포심 가운데 사는 사람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우리 마음 가운데 공포심이 항상 있으니 행복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공포심에 사로잡히면 그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고양이 앞에 쥐를 구경한 분 계십니까? 저는 정말 보았습니다. 여러분, 그 쥐라고 하는 놈이 뒷다리가 길어서 발리 걸어서 빨리 달음질합니다. 뒤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쥐가 고양이를 한 번 본 다음엔 빨리 달아납니까? 빨리 달아나면 살겠는데 못 달아나요. 부들부들 떨면서 그저 천천히 기어갑니다. 그러니까 잡혀 죽지요.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고양이에게 잡히기 전에 공포심에 휩쓸려서 신경이 마비되었고, 근육이 제대로 놀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움직이지는 못합니다. 여러분, 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공포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공연히 밤에 길 가다가 바윗돌을 보고도『아이고 저게 호랑이가 아닌가?』나무 한 그루를 보고도『아이고 저기 도깨비가 나왔다』하고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볼 것을 바로 못 보고, 생각을 바로 못하고, 신경이 마비되고, 근육이 마비되어서 활동을 제대로 못합니다. 그러기에 서커스단에서 줄 타는 사람들이 한창 줄을 잘 타다가도 어떻게 아래를 잠깐 내려다보고 무서운 마음이 생기게 되면 떨어진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강에 나가서 헤엄을 잘 치자가도 무서운 마음이 생기게 되면 그만 빠지고 맙니다. 군인들이 전쟁에 나가서 전쟁을 잘하다가도 무서운 마음이 나게 되면 패전을 하고 맙니다. 이렇게 공포심이 주는 영향이 대단합니다.
우리가 출애굽기나 민수기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를 받아서 애굽에서 나와 여러 해 수고를 하면서 광야를 다 지나, 마지막에 가데스라는 곳에 도달했습니다. 거기서 진격만 하면 가나안 땅입니다. 모세는 본래 그렇게 할 작정으로 거기서 진격할 태세를 갖추면서 그 준비로 열 구 지파에서 한 사람씩 대표를 뽑아서 가나안 복지를 정탐하려 보냈습니다. 열 두 사람이 몇 달 동안 가서 정탐을 하고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가 보니까 참 토지가 좋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곳입니다. 이 포도를 보세요. 포도 한 송이를 둘이 메고 왔습니다. 참 좋습니다. 어서 진격합시다.』 이 말은 갈렙과 여호수아의 말입니다. 그런데 열 지파 대표들은 무슨 말을 했습니까?『가 보니까 땅은 좋긴 좋습니다. 한데 거기 사는 아낙 자손들은 키가 구 척이요, 모두 건장한 장사들인데 그 사람과 우리를 비교해 보니까 우리는 메뚜기만도 못합니다. 그러니 땅은 암만 좋지마는 메뚜기만도 못한 우리 같은 것들이 어떻게 그 곳에 가서 점령한단 말입니까?』이렇게 겁부터 먹고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전부 공포심에 사여서 통곡을 하면서 이젠 돌아가자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광야에서 三十八년 동안을 방황하다가 그 겁쟁이들이 다 죽고 새 세대가 일어나서야 겁 없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과 함께 가나안 땅을 정복해 이기에 된 것입니다. 공포심이 三十八년 동안을 지체하게 만들었습니다. 공포심이 이렇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욥기 三장 二十五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면 그대로 되기 쉽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는데 항상 실패할까봐 무서운 마음으로 사업을 하면, 그 사람은 흔히 실패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무서우니까 생각도 바로 못하고 일도 잘못한다는 말입니다. 같은 간호원들이 같은 병원에서 같은 전염병 환자를 대하지마는 어떤 사람이 전염이 잘되는지 압니까? 병 옮을까봐 무서워하는 간호원이 영락없이 전염됩니다. 왜냐하면 무서워하면 몸의 저항력이 약해집니다.
조도 이태 동안을 폐병으로 입원해 보았지마는 같은 폐병환자 중에서도 특별히 죽을까봐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흔히 죽을까봐 무서워하는 사람은 죽습니다. 무서워하니까 저항력이 약해집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서반아 왕 가운데 페르디난드 五세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이 어떤 점쟁이에게『왕께서는 마드리갈 이라고 하는 곳에 아예 가지 마세요. 그 마드리갈 에서 왕이 장차 죽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왕의 별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무서워서 자기의 좋은 궁전을 지어놓고도 二十一년 동안 거기를 못 갔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서반아 지방을 여행하다가 어떤 조그만 촌락에서 하룻밤 자면서 그만 병이 났습니다. 왕은 이 지방이 어떤 지방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이 곳은 마드갈레 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마드리갈 과 비슷했습니다. 사실은 마드리갈은 아니고 비슷한 이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왕은『아이고 나는 죽겠구나!』하더니 며칠 안 되어서 죽었다고 합니다. 병이 죽인 것이 아닙니다. 공포심이 죽였다는 말입니다.
공포심이 사람의 마음을 엄습하게 되면 신경이 쇠약해지고, 혈압은 높아지고, 위액 분비가 잘 안 되어서 소화도 안 되고, 심장이 뛰고, 당뇨병이 생기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실상은 세균에 의한 병보다도 이 공포심이 원인이 되어서 병 나는 이가 더 많고, 죽는 사람도 더 많다고 합니다. 이렇게 공포심이 우리 인간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그러면 공포심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마음을 들여다보면 공포심을 안 가진 이가 별로 없습니다. 이 공포심을 어떻게 해야 극복합니까? 미국의 카네기라는 사람의 저서를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공포심이나, 근심을 없애는 방법이 있다고 하면서『첫째는 무서워하는 것, 또는 근심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나씩 하나씩 책에 기록을 해 보라. 그러면 실상 그 가운데 대부분은 근거가 없는 공포라고 하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둘째로 나머지 공포심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할 수 있는 것들을 기록해 보라. 셋째로 그 중에 무엇을 먼저 하는 것을 작정하라. 넷째로는 그 공포심을 이기기 위해서 작정한 대로 행하라. 그러면 그 어떤 공포심이든지 대체로 이길 수 있다.』이런 말을 했어요. 물론 이런 것도 다소 도움이 될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비결은 우리의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하나님을 의지하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예수 님께서도 누가복음 十二장 六절 이하에서 같은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 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그 뜻은 하나님은 참새 하나 떨어지는 것도 다 보시며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는 하나님이 신데 이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가 있으니 이 하나님을 믿고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그 말씀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한 번은 제자들과 같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십니다. 예수 님은 배 한쪽에서 주무십니다. 마침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물결이 배에 들어옵니다. 제자들은 큰 공포에 싸여서 예수 님을 깨웁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주님은 모르시냐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 님은 조용히 일어나서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너희가 왜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인간의 생사가 하나님께 있으므로 아무리 풍파가 높을 지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되는 일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을 때에 공포심은 자연히 없어진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모세가 애굽 왕 바로의 위협 아래서 무서워 도망을 쳐서 미디안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 곳에 오래 있는 동안에 한 번은 시내산 가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전에 도망을 쳐 나왔던 그 애굽으로 담대히 돌아가서 자기를 죽이려고 위협하던 애굽 왕 바로 앞에 용감히 서서 민족을 구원한 여사를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모세로 하여금 공포심을 극복하고 담대하게 했습니까?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도단성에 있을 때에 한 번은 밤에 아름군대가 와서 갑자기 공격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 광경을 본 엘리사의 종이 크게 두려워합니다. 그 때에 엘리사의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압니까?『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그러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종의 눈이 밝아져서 보니까 불 말과 불 병거(兵車)가 도단성을 둘렀더라 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아무리 위험한 곳이 섰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게 될 대에는 천군 천사가 다 우리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믿음으로 충만하면 공포심은 자연히 쫓겨 나갑니다. 시편 二十七편을 들어보세요.『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또 四十六편에는『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이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 이런 신앙을 가지세요.
기독청년 면려회 운동을 시작한 미국의 롤링 박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아침에 깨면 제일 먼저『나는 믿습니다.』하는 말을 세 번 외운다고 합니다.『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그 뜻은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 목적은 자기 마음속에 잠재의식에까지 믿음이 충만케 되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나서 그렇게 좀 해 보세요. 성경 말씀을 먼저 외워 보세요. 시편 二十三편을 외워 보세요. 二十七편을 외워 보세요. 모든 공포심이 자연히 없어집니다.
우리가 사 복음을 읽고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사 복음에 나타나는 생활에 착실히 다른 것 하나가 있습니다. 사 복음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생활을 보면, 예수 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면서 여러 가지 진리를 배우기는 배우지마는 공포심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어날 때 무서워했고 예수 님이 붙잡히실 때, 뿔뿔이 다 헤어졌습니다. 수 제자 베드로 같은 사람가지 그 대제사장 집 문에까지 따라간 것은 좋지마는, 그 곳이 가서『너도 갈릴리 사람이지?』하고 어떤 계집종이 물을 때,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예수 님이 부활하신 날도 남은 제자들이 어떤 방에 모여서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무서워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즉 공포심이 없어졌습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었지만 이제는 몇 천명이 모인 가운데서 예수는 과연 메시야라고 담대히 증거 했습니다. 공포심이 없어졌습니다. 대제사장과 그 일당이 사도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위협 공갈을 했지마는 그들은『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것이냐? 사람의 말을 순종할 것이냐? 너희 스스로가 판단해 보라』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명령을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매맞고 나오면서도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고, 또 다시 그 자리에 가서 복음을 여전히 전파했습니다. 공포심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된 셈입니까?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복음시대의 사도와 사도행전 시대의 사도, 그 중간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열흘 동안의 기도가 있었고, 오순절에 성령이 그들 마음가운데 강림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임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들의 마음가운데는 공포심이 없어졌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에게 아직까지도 왜 전도를 못하느냐고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무서워서 전도를 못합니다. 사람을 만나서 말하기가 무섭단 말입니다. 입이 안 열려요.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내가 오순절 후의 제자들의 신앙생활을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 하십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어떤 말씀보다도 자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야곱에게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모세에게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다윗, 다니엘, 모든 선지자들에게도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또 예수 님께서 오셔서 시몬에게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야고보에게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바울에게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모든 제자들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 이렇게 권면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공포심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에『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一·七)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 인간생활의 행복을 빼앗고 우리 인간생활에 큰 방해가 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죄, 하나는 공포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는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실 뿐 아니라 공포심 가운데서 해방해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믿고 주를 의지하고, 성령을 충만히 받을 때에는 공포심까지 없어집니다.
요한 웨슬레의 전기를 보면 그가 젊었을 때, 큰 은혜를 받기 전에 미국에 전도하려 갔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실패하고 돌아가는 뱃길에 대서양에서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아주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큰 공포에 싸였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니까, 그 가운데 모라비아 교회에서 이 곳에 전도하려 왔다가 돌아가는 선교사가 몇 사람 있는데 이 사람들만은 아주 태연합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가 그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았습니다.『당신 네 들은 이런 가운데서도 무섭지 않습니까』그 때에 그 중 하나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우리는 그리스도를 압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환경을 당하든지 두려운 마음이 없습니다.』그러면서 그 청년이 웨슬레에게 물었습니다.『당신은 그리스도를 압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압니까?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가운데 영접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가운데 계셔서 성령과 힘과 능력을 주십니까? 그리스도에게는 공포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二十세기에 사는 현대인의 양상을 보면 과학문명이 발전되었고, 예술이 발전되었고, 모든 방면에 큰 진보와 발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처럼 불안과 공포에 쌓인 이런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인간의 四대 자유를 주정할 때에, 한가지는 공포에서의 자유를 부르짖었습니다. 몰론 공포 없는 세계를 만들면 그것은 더 좋습니다. 그러나 그건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시대, 어떤 환경에 살든지 공포심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는 분명한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해서 내 마음속에 어떠한 공포심이 있든지, 이 시간 온전히 주님 앞에 내 놓으세요. 믿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충만히 채우세요. 성령을 충만히 받으세요. 기도를 힘쓰세요. 새벽 기도를 힘쓰세요. 가정에서 기도를 힘쓰세요. 구역에서도 기도를 힘쓰세요. 이 가을부터 기도를 힘쓰세요. 그리해서 성령이 충만한 생활을 할 때에 공포심은 스스로 없어집니다. (一九六四년 九월 六일)
Ⅵ-29 다윗의 간증 (시편 三十四편 一-二十二절)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三十四·八)
시편의 대부분이 그 시를 쓴 사람들의 신앙 간증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三十四편은 특별히 그러한 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신앙에 대한 간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음식이 맛이 있는지 없는지 알려고 하면 맛을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과연 선하신 지, 맛을 보아서 알아보라고 하는 말과, 그에게 피하는 이는 복을 받는다고 하는 말은, 내가 하나님을 체험으로 맛을 보아 알아보니 과연 그는 선하시고 자비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 시요.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을 받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시 三十四편 전편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다윗의 신앙 간증을 잠깐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먼저 이 말씀을 생각하십시다. 맛을 보아서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선하심을 알아보는 것은 몇 가지 있습니다.
이성의 길이 있습니다. 추리의 길이 있습니다. 이치를 미루어서 무엇을 아는 길이 있습니다. 옛날 헬라 사람 알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다가 갑자기 뛰어 나오면서『나는 깨달았다. 나는 깨달았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했습니다. 목욕탕에 들어가서 몸을 물에 잠겨 보면 몸이 가벼워집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는 왜 가벼워지며 또 얼마나 가벼워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알키메데스가 목욕을 하면서 그것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이성적으로 추리를 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이치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즉 물 속에 들어가면 몸의 용적 만한 물의 중량만큼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추리를 통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아이작 뉴톤 같은 이도 과수원에 앉아서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자세히 살피다가 지구에서는 모든 것을 잡아당기는 인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은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성을 통해서 무엇을 아는 예입니다. 그러나 그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으로는, 직감 혹은 직각 곧 느낌으로 깨닫는 길이 있습니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줄 아는 것은 무슨 이치를 생각해 보고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 해와 저녁 노을이 아름다운 줄 아는 것은 누가 설명해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꽃을 보고나 음악을 듣거나, 위대한 문학이나 시를 읽거나, 혹은 위대한 조각품을 볼 때, 아름답다고 느끼고 놀라움을 나타내게 되는 것은 이성으로 생각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직감입니다. 예술적 방면의 모든 지식은 흔히 이런 직감적 경로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됩니다.
또 다른 길은 우리가 많이 쓰는 길인데 권위입니다. 이 권위를 통해서 믿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각방면에 전문가가 있습니다. 나는 깨닫지 못하지만 그 전문가의 말을 듣고 신용함으로 우리가 압니다. 지금은 어린아이들이라도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고 지구가 태양을 도는 줄을 다 압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코페르니크스가 이 세상에 나타나서 주장하기 전에는, 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은 지구가 태양을 도는 줄 다 압니다. 어떻게 압니까? 여러분이 생각해서 알아냈습니까? 아닙니다. 직감으로 압니까? 아닙니다. 무엇으로 압니까? 권위의 말을 믿음으로 즉 천문학자의 말을 믿음으로 압니다. 그들의 말을 신용합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모든 교과서를 읽고 지식을 배울 때에는 다 이런 여러 가지 경로를 이용해서 배웁니다.
다른 또 하나의 길은 매우 중요한 방법인데 실험을 통해서 아는 길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콘 같은 분은 이 방법의 시조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 三백년 동안의 위대한 과학의 발전은 모두 이 길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학설이나 진리가 과연 옳은지 알려면 그대로 실험을 해보고 그 결과를 보아서 귀납적으로 그 이론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지로 해보는 것이 새 지식을 아는 방법입니다.
여기 맛보아 안다는 말은 이치를 미루어서 안다고 하는 말도 아니고, 직감적으로 안다고 하는 말도 아니고, 본인의 말을 듣고 안다고 하는 말도 아니고, 실지로 해보라는 말입니다. 실지로 해보아서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보라는 말입니다.
종교적 진리를 아는 데도 이 몇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아는 데도 대략 다음의 네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성의 길입니다. 우리가 대 우주를 살펴볼 때에 복잡하고 무질서한 것 같지마는 자세히 과학자의 눈을 가지고 살펴보면 그렇게 않습니다. 일정한 법칙이 있고, 일정한 구조가 있고 일정한 조직이 있고, 따라서 질서가 있고, 고안이 있습니다. 이처럼 기계보다도 더 정밀한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가? 아무래도 이런 우주를 계획하고 고안한 대 우주의 창조자가 계시지 않겠는가? 철학자들은 이런 이성의 추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틀 같은 사람도 이 우주에는 움직이는 큰 힘들이 많은데 아무래도 이것들은 처음에 움직인 이가 계시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길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직감의 길도 있습니다. 가령 시편 十九편 一절을 읽어보면『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穹蒼)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연구를 통해서 생각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늘을 바라볼 때에 자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직감할 것입니다. 대 우주를 바라볼 때에 거기 하나님의 손의 자취가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직감적으로 우주의 창조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같은 사람은 군이 이지마는 이런 직감의 은혜가 있었던 사람 같습니다. 그가 한 번은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애굽을 정복하려 가기 위해서 지중해를 건너갑니다. 마침 바다는 잔잔하고 달은 밝은 밤인데 많은 군인들이 갑판 위에 올라와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폴레옹이 조용히 뒤로 다니면서 이 군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나? 살펴봅니다. 한편 구석에 가 보니까 어떤 군인 둘이 앉아서 열심히 변론을 합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한 사람은 하나님이 있다고 하고, 한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서로 다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무신론자요. 하나는 유신론자입니다. 나폴레옹이 뒤에서 가만히 듣다가 그만 성미가 급해서 불쑥 한 마디를 했습니다.『여보! 변론만 하지 말고, 눈을 들어 하늘을 좀 바라보시요.』두 사람이 깜짝 놀라서 하늘을 쳐다보니 명랑한 달빛이 아름답게 비치고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면서 그들을 내려다봅니다. 그 때에 나폴레옹이 두 사람에게 말했습니다.『저걸 보고도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모르겠소?』직감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만도 아닙니다. 또한 권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한 종교가의 간증을 듣고 우리가 하나님을 압니다. 아브라함은 위대한 종교가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친히 받은 이요, 하나님과 동행한 이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간증을 해줍니다. 과연 하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종교가입니다. 이런 모세가 우리에게 간증을 해줍니다. 엘리야는 위대한 종교가입니다. 이런 엘리야가 자기의 체험을 우리에게 간증을 해줍니다. 사도들은 다 위대한 종교가입니다. 이런 이들이 자기의 체험을 통해서 과연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라고 간증을 해 줍니다. 우리가 그 간증을 안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런 종교적 권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지를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을 아는 데도 한 가지 중요한 길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시험해 보는 길입니다. 이치로 미루어서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고, 직감만 믿는 것이 아니고, 남의 말만 듣고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실지로 하나님을 만나보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참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맛보아 아는 길입니다.『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 보라』고 하는 말은 이 말입니다. 이것은 가장 분명히 아는 길입니다. 체험적으로 아는 길입니다.
지금은 가을이라 시장에 나가면 여러 가지 과실이 많습니다. 아주 아름답게 보이는 사과도 많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과를 하나 놓고 이 사과가 어떤 사과인가 알아보기로 했다고 합시다. 그 사과를 아는 데에도 네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성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저 사과는 어떤 종류이고, 지금은 가을이니까 사과가 익을 때이고, 그러니까 필경 이 사과는 맛이 있을 거다.』이렇게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 수 있습니다.
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저 사과는 보기에 참 먹음직하다. 참 맛이 있어 보인다.』이것은 직감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또 남의 말을 듣고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과와 꼭 같은 사과를 먹어 본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내가 먹어보니 참 맛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사 가십 시요.』이것은 권위를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사과가 어떤 사과인지 내가 꼭 알려고 하면 어떤 것이 제일 빠른 길이겠습니까? 먹어보는 것이 제일 빠른 길입니다. 내가 먹어보면 아주 알기 쉽습니다. 수박도 쪼개서 먹어보는 것이 제일입니다. 다윗은 우리에게『너희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하나님인가를 알려면 맛을 보고, 먹어보고 실지로 체험해 보고, 기도해 보아서 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간증합니다.『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여기 三十四편 전편에 내가 이렇게 맛보아 알아보니 과연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은 복을 받더라고 하는 그의 신앙에 대한 간증입니다. 이제 몇 절을 제가 읽어드립니다.『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四절입니다.『이 곤고(困苦)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六절 말씀입니다. 여기 보니『남(他)이 구해보니…』이런 이야기는 없습니다.『내가 간구 하매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내 두려움을 없이하여 주셨느니라.』『내가 곤고 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니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내 두려움을 없이하여 주셨다』고 하는 자기 체험의 간증입니다. 사실 그는 이런 체험을 다 얻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시기를 받아서 몇 번이나 죽을 뻔했습니까? 한 번은 그가 거문고를 탈 때 갑자기 창을 던졌습니다. 사울 왕이 죽이려고 해서 그의 낮을 피해서 블레셋 땅으로 망명한 때도 있었습니다. 엔게디 굴과 광야 여러 곳으로 도피해서 큰 환난 중에 여러 해를 살았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내 생명을 구원해 주세요. 내 생명을 보호해 주세요.』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보호해 주시고 두려움을 없애 주시고 모든 환난 가운데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는 이것을 간증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모세의 간증인 줄 압니다. 이것 역시 요셉의 간증인 줄 압니다. 이것 역시 엘리야의 간증인 줄 압니다. 이것 역시 바울의 간증인 줄 압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사자의 입에서 나를 건져내셨느니라.』이것이 또한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여기 앉은 여러분의 간증이 아닙니까? 혹은 三八선을 넘어 올 때 六·二五를 통해서, 혹은 천재지변을 통해서, 혹은 큰 질병 가운데 있은 때,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구원해 내 까닭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아직도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다음에는 또 이런 간증도 했습니다.『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九절 말씀입니다.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간증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부족함이 없는 축복을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의미는 어떤 세상의 물질의 부족이 없다든지 무슨 곤란한 일이 없다고 하는 뜻은 아닌 줄 압니다.
그것은 이 말을 한 다윗 자신도 궁핍한 생활도 많이 했고, 위험한 생활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께서 족한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 그 뜻입니다. 바울의 말과 같이 자기 몸의 가시는 그냥 있습니다. 가시가 그냥 아픕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족한 은혜를 주실 대에 그 가시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또 참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운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두시는 동안에는 그의 마음에 언제든지 부족함이 없는 참된 화평과 즐거움과 만족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어느 시편보다도 시편 二十三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뜻을 더 분명하게 간증했습니다.『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여기 푸른 풀밭에 눕고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한다고 하는 말은 조금도 곤란한 일이 없다고 하는 말이 아니요. 어떠한 환경 가운데 있든지 주님께 의지하는 그 심령은 언제나 생명의 양식이 부족하지 않고, 심령의 상처를 입도 회복해 주시고, 아무리 아득한 길도 인도해 주시고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에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그 말입니다. 왜? 주님께서 같이 하시는 까닭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도 족한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 뜻인 줄 생각합니다.
제가 몇 해 전부터 얼굴은 모르지만 어떤 적은 시골 교회에 있는 청년과 편지 거래를 가끔 해왔는데 며칠 전에 이런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제 이 편지의 일 절을 읽어 그리겠습니다. 여기에 이 청년의 신앙 간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목사님, 힘써 주의 전에 일하는 자는 모두가 복 받는다구요. 이것은 한 목사님의 경험으로도 모두 그렇더라고 하셨지요. 목사님, 이 일에 또 한 사람의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자기 자신을 가리킨 말입니다)재작년 편지하셨을 때에 목사님은 자도 앞으로 직장이 생기고 우리 교회도 번영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지요. 저는 그 후 목사님의 이 말씀을 모두 진실로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참 많은 애를 쓰다가 어떤 곳에 직장을 얻었습니다. 봉급은 박해요. 四천 원 이하 三천 七, 八백원 받는 이런 직장을 얻었어요. 그 후에 그 교회에서 집사의 직임(職任)을 받고 또 회계 집사의 직분을 받았는데 교회를 다시 지어야 될 수밖에 없는 까닭으로 그 박봉을 받아서 아껴 가면서 교회를 지었습니다.』이런 이야기와 함께 자기 가정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간증도 있었습니다.
오늘은 저의 조모님의 제삿날입니다. 이 때까지 주일날 형식적으로 교회를 다니시면서 가정에서는 제사를 지내시던 저의 부친이 七十五세의 노령에 모든 구습을 버리고 오늘은 제사를 추도식으로 거행했습니다. 이제는 저의 아버지가 온전히 주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 기쁨을 저는 금하지 못합니다. 물론 저의 어머니는 금년에 권찰로서 수고를 또 하십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나이 많으신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안타깝고 답답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 지옥도 천당도 보는 제가 저의 아버지를 뵈올 때, 그 심경은 가히 짐작하시겠지요. 저는 저의 아버지가 온전히 믿기 전까지는 제 자신의 믿음이 아무 것도 아님을 늘 명심하고 집사의 자격도 아무 것도 아님을 자인해왔습니다. 그러나 七十五세의 아버지께서 그 구습을 버리고 제사를 금하시고 주의 자녀 되시기를 바라기는 사실 어려웠습니다. 몇 번이나 애원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하나님께서 이러한 마음의 큰 축복을 저의 가정과 제게 주셨습니다. 너무나 감사해서 이렇게 한 목사님께 편지를 올립니다. 다만 한 가지 제가 경제적으로 원하는 것은 교회 부근에 집을 지어 주의 보내신 사자와 찬양대와 주일학교 반사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손님을 치르는 일입니다. 그 때에야 저의 신앙이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한 목사님께 편지를 올리겠습니다. 교회 짓는 바로 앞에 상점도 할 수 있는 터가 있어서 이미 교섭중입니다. 대지 값까지 모두 四만원 정도면 상점과 집을 지울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저축하고 있는 계돈이 十一월이면 끝나는데 二만 三천 원입니다. 그러면 몇 년 이내에 되리라고 생각도 합니다. 저녁에는 쑥을 캐서 또는 풋나물로 죽을 끓여 먹어도 저는 이미 주님 안에서 사랑을 느끼고 삶의 보람을 찾고 있습니다.
로마서 十二장 十三절,『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하는 이 말씀은 저의 가정의 목표입니다. 언제쯤이나 제가 주안에서 온전하여져서 주님의 뜻을 따라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을 지요. 한 목사님 저를 위해서 계속하여 기도하여 주세요.』
여러분이 들으신 대로 이 청년의 생활을 보면 매우 어렵습니다. 적은 봉급을 가지고 애써서 십일조를 드리고 예배당 건축 헌금을 하고, 회계 집사로서 목사의 봉급까지 책임지고 꾸려나가려니 자기의 생활은 무한한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족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음은 또 다윗의 간증의 계속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도 사실 자기중심의 간증인 줄 압니다. 다윗이 죄를 지었습니다.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충심으로 통회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죄를 사해 주시고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내가 지내보니 하나님께서는 사실 죄를 회개하는 사람은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오늘은 간증주일입니다. 다른 분의 간증을 하나 더 여러분께 소개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편지를 받았는데 대구교도소에 있는 죄수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사형을 선고받은 사형수입니다. 이 사형수가 자기의 신앙을 간증하기 위해서 이런 긴 편지를 복사해서 보냈는데 제가 몇 절만 읽겠습니다.『저는 온 세상이 좇고 있는 죄악과 향락을 찾아서 헤매었던 끝에 오늘에 사형이란 형을 받고 현재 대구교도소에 수감 중이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저에게 부닥쳐오는 괴로움과 불안은 저의 필설로 다 형언할 수 없습니다. 그 무시무시하던 죽음의 공포 앞에서 사선을 방황하던 제가 지금 그리스도를 저의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또한 이 은혜를 받을 만한 아무 의도 없고 영영 죽을 수밖에 없는 저를 하나님은 자비의 은혜로 이끌어 주셔서 지금까지 영 육간에 보호하심을 받는 것을 생각할 때에,「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 님에게 진정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에서 저주받은 자의 한 사람이었던 저는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을 신앙하기 전까지는 마음속에 잠시도 평안을 얻지 못하는 자이었으나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섭리로써 저의 감방에「승리의 생활」이란 책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가 보내준 책인지도 알 수 없으나 책명 그대로 이길 수 있는 생활이란 호기심에서 읽어보았습니다. 이 때에 저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불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최후의 승리로써 끝까지 읽어갈 때에 마음에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아마 그때 성신 님께서 저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신 줄 믿습니다. 이 때에 저는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지 않으면 우리의 매사가 죄악의 행위일 수밖에 없으며 또 하나님 외에는 우리 인간을 구원할 자가 없다는 것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어떠한 죄든지 용서함을 받을 수 있으며 또 영원한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을 만 분의 一이라도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하고 인내하는 마음으로 매일 계속적으로 몇 장씩 읽고 기도를 올릴 수 있는 마음의 참 평안을 찾고 가질 수 있으며, 죄악 속에서 허덕이던 저를 건져 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은 저와 항상 동행하신다는 것과 또 하나님은 저를 부리시거나 떠나지 않을 것을 확신합니다.』
나머지 내용도 거의 다 비슷한말입니다. 무슨 되인지는 알 수 없지마는 사형수로서 복역하면서『승리의 생활』을 읽고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오히려 마음의 평안을 얻고 하나님께서 죄 사하시는 확신을 얻었다고 신앙을 간증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속담에「수박 겉 핥기」란 말처럼 어떤 분은 예수를 믿지마는 수박 겉만 핥는 것처럼, 실지로 체험이 없는 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충심으로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세요.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읽으세요. 여러분도 다윗과 같은 간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一九六四년 九월 十三일)
Ⅵ-30 원한을 극복하는 비결 (골로새서 三장 五-十七절)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三·十三)
여기 혐의(嫌疑)란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도 믿는 사람 가운데 혹 혐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므로 피차에 용납해서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하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누구나 일시적으로 본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마음에 품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증오심도 역시 그렇습니다. 분한 생각과 증오심을 마음에 품게 되면 이것을 흔히 혐의라 하고 혹은 원한이라 하는 말을 쓰게 됩니다. 원한 가운데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줄 압니다. 하나는 사실에 기인한 원한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배신적 언행이나, 악의에 의해서 상처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명예 상이나 재산상에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리해서 우리는 종종 누구 때문에 못 살게 되었다고 하는 말을 항간에서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원한 이외에 소위 가상적 원한도 있습니다. 그것은 오해에 기인한 원한입니다. 상대자에게 아무 책임이 없건만 오해를 해서 공연한 사람을 미워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심지어 잘못은 실상 자기에게 있는데(과도한 욕심이나 시기 때문에)자기에게 있는 실수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는 경우가 없이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심리학적으로 후영적(後影的)심리작용이라고 하는 말을 쓰는 것 같습니다.
어떤 종류의 원한이든지 이 원한은 신앙생활에 큰 위협이 됩니다. 형제에 대해서 혐의를 가지게 되면 제일 먼저 기도생활이 말라버립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나 자신과 다른 형제와 영원한 삼각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 자신과 다른 형제와 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하면 하나님과 옳은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 산상보훈에서『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불을 드리라』고 우리에게 권면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 마음 가운데 어떤 형제에 대하여 원한을 가지게 되면 자연히 우리 마음이 기쁨이 떠나갑니다. 참된 신앙의 한 가지 특색은 기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보면 항상 기뻐하라고 했고, 주안에서 즐거워하라고 했으며,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 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기쁨이 떠나는 것은 성령이 떠나가는 증거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가 마음속에 어떤 이에 대해서 혐의를 계속해서 가지게 되면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자신에게 큰 참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성난 어머니의 젖은 아기에게 해롭다고 합니다.
제가 몇 해 전에 미국의 어떤 큰 농장을 시찰하려 가보니 소젖을 짜는 방안에 음악시설을 해서 젖을 짜는 동안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것을 구경했습니다. 사실인지 모르지마는 설명하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소도 마음이 즐거워야 젖을 잘 낸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음식이 위(胃)에서 소화가 잘 되다가도 무슨 일로 성을 내게 되면 그 소화작용이 중지되는 것을 우리가 다 체험하는 것입니다.
보통 화병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원한을 품는 중에 생기를 병입니다. 이런 병이 심하게 되면 심지어 심장마비가 될 수도 있고, 혹은 뇌일혈이 되어서 죽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입니다. 원한은 우리 육체 속에 있는 암과 같습니다. 그 가운데 독이 있습니다. 나 자신을 썩이고 나 자신을 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무슨 일이나 조심해야겠지만 이와 같은 혐의, 이와 같은 원한을 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해소하고 없애고 극복하도록 힘을 써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원한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이제 성경에 의해서 한 두 가지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예수 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스스로 피를 흘리시면서 도『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문자 그대로 원수의 죄라도 사하여 주시고 그들을 위해서 빌 은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이와 같은 큰 원수를 만나는 이들은 적은 줄 생각합니다.
예수 님께서는 이와 같은 큰 죄도 용서하여 주셨는데 우리는 적은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까?『주께서 너희 죄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우리에게 권면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 형제가 내게 짓는 한 두 가지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까?
주님의 교훈을 분명히 생각해 보세요. 베드로가 한 번은 주님께 나아와서『주님이시여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까지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할 수 있습니까?』이렇게 물어볼 때에 주님은 곧 대답하시기를『일곱 번뿐 아리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그 유명한 비유의 말씀을 하여 주셨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한 종이 있는데 그가 임금에게 그 때의 돈으로 一만 달란트 라는 거액의 빚을 졌습니다. 一만 달란트 면 아마 지금으로 一억 원이 넘을 것입니다. 이 종에게 임금은 엄명을 했습니다. 그 때의 풍속대로 네 자신을 팔고 네 처자를 팔아서도 이 돈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종이 임금 앞에 무릎을 꿇고『좀 참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어떻든지 갚겠습니다.』하여 용서하여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임금이 불쌍히 여겨서 그 많은 돈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이 종은 기쁜 마음으로 임금의 앞을 떠나서 자기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대권 문밖에 나서다가 자기에게 적은 돈 一백 데나리온을 빛 진 동관 하나를 만났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한 천 원쯤 되는 빛입니다. 탕감을 받은 이 종이 자기의 동관의 목을 잡고 하는 말이『네가 내게 진 빛을 내라』고 했습니다. 그 동관 역시 좀 참아달라고 간절히 구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그 돈을 다 갚기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대단히 노해서 이 탕감 받은 종을 다시 불러다가『내가 네게 많은 돈을 탕감하여 주었는데 너도 네게 빛 진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하시면서 다시 이 종을 가두고 모든 돈을 받을 때까지 형벌을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결론으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주님은 우리가 우리 형제의 죄를 용서하여야 우리도 죄 사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여러 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마가복음 十一장 二十五절에도『서서 기도할 때에 아문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고 하셨고, 주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도『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먼저 우리 형제의 죄를 사해주고 이 기도를 드리라고 하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무조건 사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의 말씀과 같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형제의 죄를 사하여 줄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모든 혐의, 모든 악의, 모든 원한을 묻어 버리고 형제의 죄를 사해 주어야 우리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저녁에 인도의 목사가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시겠지만, 인도의 어떤 신자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본래 매우 불량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온전히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같이 불량하게 놀던 그의 옛 친구들이 와서 이 청년을 희롱하고『네가 갑자기 얼마나 변했느냐?』고 하면서 여러 가지로 괴롭혔습니다.
한 번은 이 사람이 밭에 나가 추수를 할 때, 많은 무리가 밀려 와서는 희롱을 하고 욕하고 때리고 마지막에는 칼로 손가락 몇을 잘랐습니다. 그리고서 추수하던 것을 다 빼앗아 가지고 달아났다고 합니다. 처음에 이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한 이가 그 참혹한 형편을 보고 이것까지야 어떻게 참을 수 있는가? 믿는 사람이라고 이런 경우엔 고소를 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때 이 회개한 청년의 말이『내가 성경을 바로 읽는다고 하면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못 박는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주셨는데 내가 어떻게 이 사람들을 향해서 고소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주께서 너희 죄를 용서하심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먼저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섭리와 초월적 통치의 능력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죄악이라도 초월 통치하셔서 선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과 섭리가 계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五十장을 읽어보세요. 거기는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에게 와서 전에 자기들이 요셉에게 지은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나고 장사를 다 치른 후에 요셉이 자기들에게 원수를 갚지 않을까 겁이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내 세워서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는 자기 자신들이 와서 용서를 해달라고 다시 구한 것입니다.
요셉은 이 말을 듣고 너무 기가 막혀서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느니라.』그 형들은 요셉을 해치려고 했지마는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죄악도 초월 통치를 해서 만민을 구원할 섭리가 계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 신자는 남에게 손해를 당하고 상처를 입을 때에 언제나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첫째는 이런 일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되는 일이라 하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허락하시는 것은 이런 것이라도 초월 통치를 하셔서 마지막에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게 하시고 선을 이루시기 위한 큰 섭리가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처를 입을 때에 할 일은 오직 이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어떤 처지에 있든지 옳은 생활을 하고,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줄뿐입니다. 로마서 八장 二十八절에도 이와 같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셋째는 이 때야 말로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장성할 수 있는 기회인 줄 알고 원수도 사랑하고 악을 선으로 갚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제 산상보훈 가운데서 몇 절을 읽을 때에 여러분은 다시 하 번 자세히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 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여기 주님께서 우리에게 권면 하는 말씀은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만 진정으로 다른 사람과 다른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좀더 온전한 자리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좀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인격의 최고수준에 올라가기 위해서 나를 해치는 사람이라도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고 선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 했습니다. 사실 원수를 갚는 최선의 방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속담에도 미운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주라고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지난 十九세기에 미국의 유명한 선교가요 목사였던 헨리 워드 비쳐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목사는 설교도 잘하는 훌륭한 목사인 동시에, 어떤 사람에게든지 심지어 자기를 훼방하고 비난하는 사람에게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선을 행한 것으로 소문이 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돌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비쳐 목사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하면 먼저 뒷발로 한 번 차라 그래야 도움을 받는다』서반아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이요.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적이요.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이니라.』마지막 말은 하나님께서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사도들이 많은 핍박을 받았지마는 조금이라도 원한을 품은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사도 방울은 친히『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 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자녀의 참된 모습입니다. 우리 한국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속담에『은혜는 물에 세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다 타락한 인간성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원한을 품기 쉽습니다. 안 품는 사람이 사실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원한의 죄는 자연히 가까운 사이에 품게 됩니다. 나하고 접촉하는 사람 사이에 품게 됩니다. 그러니까 가까운 이웃 사이에, 친구 사이에 동사자 간에, 친척들 간에, 심지어 가족간에…… 고부간에, 형제간에, 자매간에도 미운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원한의 죄라고 하는 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 사이를 이간시키고 평화가 반드시 있어야 될 가까운 우정을 깨뜨려 버리고 평화를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원한을 우리가 극복해야 합니다. 내가 내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도 반드시 없애 버려야 됩니다. 그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주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을 사죄 해 주었습니다. 인간의 죄악이라도 초원 통치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고 용서해 주십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다 도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을 배워야 됩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 향수를 뿌린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왔는지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이제 우리 조용히 머리 숙여서 一분 동안 묵상 기도할 때에 내 마음을 살피면서 어떤 사람에게 대하여 무슨 일로든지 혐의를 품은 것이 있으면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놓고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후에 저와 같이 주 기도를 하십시다. 머리 숙여서 묵도하십시다. (一九六四년 九월 二十일)
Ⅵ-31 하나님의 큰 가족 (에베소서 二장 十一-二十二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二·十九)
사도 바울이 모든 이방 신도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전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간에 간격이 있었지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장벽이 헐리고 이제는 누구든지 오직 성도들과 같이 동일한 시민이 되었고, 하나님의 권속, 곧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十월 첫 주일은 흔히 전세계 성찬주일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날은 전세계 각 교회에서 일제히 성찬식을 거행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본 교회에서도 오늘 오후 한 시에 특별히 성찬식을 거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큰 가족을 연상하게 됩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하나님의 가족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여러분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물론 그 분명한 수는 하나님밖에는 모르실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통계를 보면 전세계에 신구교도의 모든 종파를 합해서 八억에 달하는 기독교도의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 수는 세계의 어떤 종교의 신도의 수보다도 많은 수입니다. 또한 그 분포된 지역을 보면 문자 그대로 세계의 각처, 오대양 육대주 어느 곳에나 없는 곳이 없습니다. 저 북빙양(北氷洋) 지대를 비롯해서 남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자유진영을 비롯해서 철의 장막 배후에까지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들이 없는 곳이 이제는 별로 없다고 합니다.
이들은 여러 종족에 속합니다. 얼굴 빛깔도 같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누르고, 어떤 이들은 희고, 어떤 이들은 검으며, 어떤 이들은 붉습니다. 그들의 먹는 음식도 같지 않고, 음식을 먹는 법도 같지 않습니다. 지금은 양복을 많이 입지마는 아직까지도 의복 입는 것도 대체로 같지 않습니다. 발도 물론 다릅니다.
미국에 레코드를 통해서 전도하는 단체가 있는데 지금까지 三,一0九 방언으로 레코드를 만들어서 세계 각처에 보냈다고 합니다. 실상 방언은 그 보다도 더 많은 줄 생각합니다. 그들이 쓰는 글도 다릅니다. 같은 성경이지마는 다른 글로 읽습니다. 그들이 짓는 예배당의 모양이나 그 건축 재료도 각각 다릅니다. 예배당에 와서 앉아서 예배하는 모양도 각각 다른 줄 생각합니다. 이렇게 세계에 널려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생각해보면 다른 것이 많습니다 그들의 신조도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에베소 四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공통된 것이 또한 있습니다 몸이 하나입니다. 이들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몸 된 한 교회에 속합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입니다. 성령도 하나입니다. 한 성령을 모시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소망도 하나입니다. 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주도 하나입니다. 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믿음도 하나입니다. 한 믿음을 중심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세례도 하나입니다. 다 같이 성부 성자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도 한 분입니다. 전능하신 한 하나님을 공경합니다. 아버지도 한 분이십니다. 한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에 널려 있는 하나님의 큰 가족은 다른 것도 많지마는 근본적인 것은 같습니다. 한 아버지의 자녀요, 한 권속이 된 것입니다. 지금은 물론 각처에 다 흩어져 있지마는 성경을 보면 이들이 다 모일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七장 九절에 보면 묵시 가운데서 사도 요한 이 이러한 광경을 보았습니다.『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송을 드리는 광경을 본 것입니다. 이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렇게 수다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한 가족은 때때로 모여서 한 상에서 음식을 나누는 풍속이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가족들도 장소를 따라서 때때로 같이 모여서 음식을 나누는 풍속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교회에서는 성찬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찬식의 기원과 그 뜻을 다 분명히 아십니까? 성찬식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내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하는 뜻이 있습니다.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내가 너희들은 위해서 십자가에 당한 그 고난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하는 뜻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뜻만은 아닙니다. 요한 복음 六장 五十三절 이하에 보면 주님께서 또한 친히 이러한 말씀으로 그르쳐 주셨습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몸은 참된 생명의 양식이요. 자기가 십자가에서 흘린 그 피는 참된 음료이므로 이 양식과 음료를 먹고 마셔야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 신령한 의미에서 주님의 생명을 우리 속에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직접 우리 심령 속에 새롭게 받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 뿐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의 몸과 피를 받음으로 우리는 주와 하나가 되고, 그뿐 아니라 우리 모든 교우가 주님의 한 몸과 한 피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교우들은 주안에서 문자 그대로 한 피를 받아 형제와 자매가 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큰 가족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뜻이 이 성찬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계시록 十九장 九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목이 있도다.』앞으로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있을 텐데 이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과연 복이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 끝 날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큰 하늘의 잔치가 베풀어질 텐데 여기에 청함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복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참여하는 이 성찬의 잔치는 장차 올 큰 하늘나라의 잔치의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찬식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선포하는 것이요. 또한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하늘의 잔치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미리 선포하는 깊은 의미도 이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의미가 심장하고 또한 우리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에게만 부여된 특권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성찬식에 참여하는 데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왜 세례를 꼭 받을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마는 세례를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까닭입니다. 혹 어떤 이들은 세례를 좀 경히 여겨서 그저 예수를 믿었으면 그만이지 세례를 꼭 받을 필요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수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도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자기는 죄가 없을지라도 만민의 대표로서 친히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시면서 이런 말씀으로 친히 분부하셨습니다.『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혹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도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면 세례의 깊은 뜻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죄 사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二장 三十八절에 보면『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 죄 사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계속해서『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가 세례 요한의 세례와 다른 점입니다. 세례 요한은 단순히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지마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회개하면서 세례를 받을 때에는 성령을 같이 받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을 때에 죄 사함을 받고 약속하신 성령을 같이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깊은 뜻이 더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十二장 十三절에 보면『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 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다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됩니다. 그것은 곧 보이는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중생 함을 얻을 때에 온전히 그리스도의 교회의 하나가 되고 신령한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실 때에도『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물과 성령이라고 하였는데 물이라고 하는 말은 세례를 가리킨 것입니다. 세례와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성례 즉 거룩한 예식은 오직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세례요, 또 하나는 성찬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은혜를 더 받고 장성하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이 성찬식에 참여한 사람은 도무지 열 한 제자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잡히시던 밤에 주님께서 이 성찬식을 비로소 세우실 때에 가룟 유다 는 딴 마음을 가지고 미리 퇴장했습니다. 오직 충성된 열 한 제자와 같이 예수 님께서 이 성례 식을 비로소 거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와서 보면 온 세계 각처에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이 거룩한 성찬식에 참여하는 사람이 수억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열 한 제자가 이와 같이 세례를 받고 성찬을 받은 후에 그 복음의 밝은 빛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한 까닭입니다. 오순절에 전파를 했습니다.
오순절에 전파함을 받고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한 사람들이 또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이 복음의 빛을 전파했습니다. 자기 이웃에게 전파하고, 다음 세대에 전파하고, 세대는 또 다른 세대에 전파하고, 한 민족이 또 다른 민족에게 전파하고, 이와 같이 되어서 오늘날에 와서는 온 세계 각 나라, 각 족속, 각 백성들에게 이 복음의 빛이 비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큰 권속들을 생각하고 우리도 그 권속 가운데 한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하면서 이 거룩한 예식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만이 우리의 할 의무는 아닙니다. 우리도 거저 받았으니 이 밝은 빛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꼭 가져야 될 거룩한 예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례를 통해서 온전히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찬을 통해서 생명 양식과 생명의 음료수를 친히 마시고 우리가 장성하여 한 걸음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一九六四년 十월 四일)
Ⅵ-32 열등감을 극복하는 비결 (고린도 전서 一장 十八-三十一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一·二十七)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당시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솔직히 자기가 보는 대로 그들의 형편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구절을 읽을 때에 만일 사도 바울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있는 교인들을 내려다보신다면 현재의 한국 교인들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좀더 범위를 좁혀서 우리 영락교회에 모여서 예배하는 교우들을 내려다보신다면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 생각으로는 지금도 전과 같이 여기 있는 이 비슷한 말씀으로 기록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아마 지금도 우리 사회 가운데서 믿는 사람들을 보면 특별히 지혜 있는 자가 많다고 할 수 없고, 능한 자가 많다고 할 수도 없고, 문벌 좋은 이가 많다고 하기 어려운 줄 생각합니다.
지혜가 부족한 사람들, 능하지 못한 사람들, 문벌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조금 잘못하면 열등감에 사로잡히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이 열등감에 대해서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미 읽은 말씀을 한 후에 계속해서 二十七절 이하에『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擇)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성경과 역사를 보면 사실 이대로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당시에 미련하게 보이던 갈릴리 어부들을 택하사 헬라의 철학자들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약한 약소민족이요, 천시를 당한 식민지 백성들을 택하사 마지막에는 강한 로마의 제왕들이 무릎을 꿇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일을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요. 또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가을에 저는 특별한 이름 있는 주일 이외에는 건전한 신앙생활에 장애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문제에 대해서 계속해서 설교를 해왔습니다. 그래서「유혹을 이기는 비결」혹은 「공포심을 극복하는 비결」혹은「원한을 극복하는 비결」이런 문제에 대해서 이미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은 열등감을 극복하는 비결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누구나 나는 부족하다 하는 느낌이 다 있을 줄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건전한 자기 성찰인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이 도가 지나쳐서 항상『나는 부족하다. 나는 모자란다. 나는 할 수 없다』하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것은 일종의 병적 심리상태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열등감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말하면 인훼리오리티 컴풀렉스(Inferiority Complex)라고 합니다.
사람이 이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기에 대한 자신력을 전혀 잃고 무능하고 무력하게 되어서 인격상 또는 생활상 불행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런 이들은 흔히 자기의 할 일을 하지 못합니다. 씨름을 하기도 전에 누울 자리부터 봅니다. 마땅히 해야 될 경우에 할 말을 하지 못합니다. 겁이 나고 도에 넘치는 역병에 걸려서 정당한 사교생활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교회에 출석은 하지마는 교회를 봉사하거나 전도는 하지 못합니다. 사회에 나가서 일한다고 하지마는 부정과 불의에 항거할 용기가 없습니다. 그대로 나가면 결국은 그 일생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반면에 이런 이들이 자기의 그 열등감을 보충하기 위해서 다른 방면으로 도에 지나치는 일을 하는 수도 있습니다. 가령 어떤 여자가 이런 열등감에 사로잡힌다고 하면 도에 지나치는 화장을 한다든 가 의복을, 또 별스럽게 입고 사치하게만 차리려고 애를 씁니다. 미국 같은 데를 가보면 흑인들이 많이 있는데 흔히 흑인 여자들이 너무 화장을 도에 지나치게 합니다.
아프리카의 가나 같은 나라에 가 보니까 거기 흑인 여자들이 옷을 입었는데 별스럽게 울긋불긋한 옷들을 전부 입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열등감에 사로잡혔는데 이것을 다른 면으로 보충을 하려니까 이런 화장이나 이런 의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어떤 남편이 자기 부인보다 좀 못하다는 열등감이 있다고 하면 흔히 자기 아내에 대해서 더 괴롭게 굽니다. 그저 자기 아내를 꼼짝 못하게 지배하려고 달려 붙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열등감을 어떻게 해서든지 보충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흔히 도에 지나치는 대접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합니다.
보통 사람은 섭섭해하지 않을 것도 이런 이들은 나무라기를 잘합니다. 혹 어떤 사람이 그저 무심중에 인사를 좀 잘못해도『아 저 사람이 나를 업신여겨서 인사를 안 하느냐?』하고 대단히 섭섭해합니다. 또 어떤 때에는 이런 이들이 도에 지나치는 자기 자랑도 해봅니다.
하여간 이것은 병적인 심리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런 이들이 가정에 있으면 가정이 불화하기 쉽고, 이런 이들이 교회에 많이 있으면, 교회가 불화와 불평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미덕이지마는 이 열등감이라고 하는 것은 병적 심리상태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꼭 극복해야 신앙생활도 바로 하고, 모든 다른 사업도 바로 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이 열등감에 사로잡히기 매우 쉽습니다. 이 열등가을 극복하는 길이 어디 있는가 몇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자신을 잘 살펴서 이런 병적 열등감에 사로잡혔는가 알아봐야 합니다.
또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 알아볼 것입니다. 원인을 알면 그것을 우리가 고칠 수 있습니다. 먼저 이성을 통해서 이 열등감을 시정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열등감을 가진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어렸을 적에 부모에게 좋은 가정교육을 받지 못하고 부모가 못한다고만 윽박질러서 이런 열등감이 마음에 깃들인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가정에서 아이들을 기를 때에 잘못한다고만 자꾸 육박아 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아이 마음가운데『난 그저 못난 놈이야』하는 생각이 늘 들게 됩니다.
또는 학교에서 선생이 버릇이 좋지 못하다 거니, 공부를 잘못한다 거니 하고 자꾸 못한다고만 눌려주고 욕해 주면 그만 아이가 마음에 깊은 상처가 나서 일생토록 열등감 가운데 사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학교 선생들은 이런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밖에는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없는 데도 오해 때문에 혹은 그릇된 가치판단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처럼 상당한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난 젊어서 교육받을 기회를 잃어서 남처럼 대학을 졸업 못했어. 그러니까 난 남보다 못해.』이런 생각을 자꾸 하면 결국 열등감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사실 오해입니다.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반드시 열등한 것은 아닙니다. 또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반드시 사업에 성공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습해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아브라함 링컨 같은 이는 학교에 몇 달밖에 못 다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미국의 제일 유명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인도의 라빈그라나드 타골 같은 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인이요, 시인입니다. 그러나 이 분은 대학에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요사이 듣는 말로는 젊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돈이 없어서 대학을 그만 못 가게 된 것이 남부끄러워서 교회에 못 나온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되겠습니까?
또 어떤 학생은 부모가 학교를 보내 쥐서 시험도 치르고 합격도 했는데 소위 일류학교에 입학 못하고 이류나 삼류 학교에 들어갔다고 해서 부끄러워서 마크도 못 달고 큰 거리로도 못 다니고 친구를 만나면 피해 다인 일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것 때문에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말입니다. 오해와 그릇된 판단에 의해서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또 특별히 생활이 빈궁한 이들이 가난하니까 옷도 다른 사람처럼 입지 못하고 해서 스스로 마음이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도 사실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요단강에서 외칠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나와서 죄를 자복 하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약대 털옷이라고 무슨 모직 옷이 아닙니다. 변변치 못한 옷입니다.
예수 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님은 가장 가난하였습니다. 주후 四세기 사람인 성 안토니오 같은 이는 본래 부자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그 말씀 그대로 살기 위해서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자기는 가죽으로 옷 한 벌을 해 입고 광야지대에 나가서 일생을 굴속에서 살았습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얼마나 안토니오의 모양이 험했던지 그를 짐승으로 오인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번은 알렉산드리아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에 온 알렉산드리아 성 사람이 그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열등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사느냐, 얼마나 진실히 살고 얼마나 옳게 살고 얼마나 봉사를 하느냐? 여기에 우등과 열등이 있지, 돈 많고 없는데 우등과 열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 말씀입니다. 지위가 높고, 지위가 낮고, 벼슬을 하고, 벼슬을 못하고, 여기에 우등과 열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해서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맙시다.
몸에 병이 있거나 특별히 불구자가 된 이들 가운데『나는 일생 병이 있고 나는 북구자가 되었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이들이 혹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이유는 안 됩니다. 바로 지난 금요일에 세브란스 의 수족 부에서 아침 기도회를 인도해 달라고 해서 갔다 왔는데 거기 가 보니까 토리 박사 기념 채플이 있었습니다. 이 토리 박사는 본래 그 유명한 미국의 부흥사인 토리 박사의 아들인데 이 분이 중국에 선교사로 갔다가 제二차 대전 때에 그만 부상해서 팔을 하나 잃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六·二五사변이 일어나 다리 없는 사람, 팔 없는 사람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 나와서 세브란스 병원을 중심해서 의 수족 부를 설치하고 많은 청년들에게 다리를 해 주고 팔을 해 주었습니다. 지금 그 이는 귀국했지만 현재 그 책임자로 있는 선교사도 두 손이 다 없는 분입니다. 두 손이 다 없는 분인데 한국에 나와서 많은 손 없고 발 없는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헬렌 켈러 같은 여자는 소경이니 눈도 보지 못하고, 귀머거리니 귀도 듣지 못하고, 벙어리니 말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여자지마는 세계의 가장 유명한 여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몸이 약하다고 불구자가 되었다고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자포자기하면 안 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사업하다가 실패한 다음에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이가 혹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 이유가 안 됩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마는 우리 교회 고한규 장로님은 참 위대한 장로입니다. 그가 한 번은 자기의 회고담을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가 사업에 실패해서 많은 사람에게 빚을 졌던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신의주 제二교회에서 봉사할 때에 그 곳에 참 위대한 장로님으로 김기범 장로님이라고 계셨습니다. 언젠가 이 기범 장로님과 하루 저녁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일생 사업을 한 사람인데 일생에 세 번 크게 실패를 해서 한 푼도 없는 신세가 되었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다시 일어나서 회복하여 이 만큼 살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사업하다가 누구나 실패할 수 있습니다. 실패했다고 절대로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부인들 중에는 미안한 말이지마는 얼굴에 허물이 있든지 또 얼굴이 잘못 생겼으면 아주 열등감에 쉽게 사로잡히는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책을 보니까 어떤 분이 세계에서 가장 큰 일을 많이 한 여자들을 전부 조사를 하고 그들의 얼굴이 잘 생겼나, 못 생겼나를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큰 사업을 한 여자들 가운데는 못 생긴 여자들이 더 많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얼굴에 허물이 좀 있다든지 해서 열등감에 사로 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또 과거에 큰 실수를 하고 죄를 지었다고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도 없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얼마나 교회를 핍박하고, 얼마나 큰 죄를 지었습니까? 그러나 회개한 다음에는 다시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습니다. 내 과거 때문에도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말했지마는 열등이냐? 우등이냐? 열이냐? 우냐? 하는 그 문제는 이런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요컨대 내가 어떤 환경에 있든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생활을 하느냐? 얼마나 진실하고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봉사의 생활을 하느냐? 얼마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생활을 하느냐? 얼마나 이 사회를 위해서 유익한 일을 하느냐?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공이나 실패에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먼저 내 자신을 살펴서 이 원인을 시정할 것입니다.
둘째로는 예수 안에 자기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을 볼 때 예수 님께서 보시는 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나 자신은 하나이지만 실상은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이 보는 나 자신.
둘째는 내가 보는 나 자신.
셋째는 예수 님께서 보시는 나 자신, 이렇게 자신은 하나이지만 다 다르게 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살다가는 기뻐할 때도 있지만, 울 때도 많고, 섭섭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때에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칭찬해 주지만, 어떤 때에는 우리를 욕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남은 우리를 바로 보지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보나, 여기에 너무 관심을 가질게 아닙니다. 또 내가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데도 너무 관심을 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나는 날 모르는 죄가 있고, 내 속에 허물이 있고, 부끄러운 것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을 보는 것만으로 나를 생각하다가는 낙심하기 쉽습니다. 자포자기 하기 쉽습니다. 예수 님께서 나 자신을 어떻게 보시나 그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찾아봐야 합니다.
예수 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은 시몬 베드로를 부를 때에 뭐라고 말씀하였습니까?『내가 장차 너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님은 우리를 보실 때에 우리의 과거를 보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재도 보지 않습니다. 장차 주안에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겠나 하는 우리의 미래를 봅니다.
그래서 갈릴리 어부 시몬을 볼 때에 단순히 고기만 잡는 시몬으로 안 보았습니다. 장차 사람을 낚을 베드로를 보았습니다. 내가 네 이름을 반석 즉 베드로라고 하겠다고 하시며 장래의 베드로를 보았습니다. 예수 님께서 세관에 앉아서 세를 받던 레위 마태를 볼 때에, 거기 앉아서 세금만 받는 레위를 보지 않았습니다. 장차 이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내 안에 살게 될 때에 어떤 사람이 되겠나 하는 장래의 마태를 본 것입니다. 삭개오도 그렇게 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보실 때에 우리의 미래를 봅니다. 과거가 문제 아닙니다. 현재도 문제 아닙니다. 우리가 온전히 예수 님 안에 들어오게 될 때에 이 사람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미래를 봅니다. 주안에서 나 자신의 미래상을 발견하고 그 미래상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四장 十三절에『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 때에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저 보지 않았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자기 자신을 보았습니다 자기 혼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三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내가 네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내가 이 백성을 애굽의 압박에서 구원할 작정이다. 내가 네게 명하노니 네가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서 내 백성을 구원하라.』그 때에 모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압니까?『내가 누구관데, 내가 무엇이기에 바로 에게 돌아가서 내 백성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이것은 모세가 스스로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열등감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압니까?『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그 다음부터 모세는 자기 혼자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동행하는 자기자신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담대히 애굽으로 돌아가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나 자신의 미래상을 발견하고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예레미야 一장을 읽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릅니다.『내가 모태로부터 너를 택했다. 내가 너를 열국의 선지자로 세웠노라.』그 말을 들을 때 예레미야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압니까?『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 알지 못하나이다.』이것이 열등감 아닙니까? 나 혼자서는 말도 할 줄 모르고, 나이도 어린데 내가 이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비로소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기 자신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용기를 얻어서 자기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나 자신의 미래상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 몸을 바치고 하나님 안에 있게 될 때에는 나 자신으로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열등감은 자연히 사라져 없어집니다.
온전한 신앙은 열등감을 소멸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온전할 때 열등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와 보시니 간질병 않는 어린애를 데리고 온 아버지가 예수 님 앞에 나와 축수(祝手)합니다.『주님이시여 내가 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주님의 제자들한테 좀 고쳐달라고 하니까 못 고쳤습니다. 선생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 아이를 좀 불쌍히 여겨 주세요.』그 때에 예수 님께서 뭐라고 대답했는지 여러분 아십니까?『할 수 있거든 이 무슨 알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한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꼭 옳은 일이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한 것이 없습니다.
참 신앙은 열등감을 내어쫓습니다. 요한 복음 一장 十三절에『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 님의 제자가 되어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됩니다. 세상의 왕의 자녀들도 열등이라고 말할 수 없거든 하나님의 자녀로 열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다 우수합니다. 지금도 미국에 인종문제가 굉장히 얼어나지마는 어떤 백인이 흑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왜 당신은 솔직히 흑인을 열등민족이라고, 열등이라고 용인하니 않는가?』물으니까 독실한 그리스도인인 그 흑인은 조용히 이렇게 말했습니다.『내 얼굴은 비록 검다고 하지마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께 충성된 아들이 되기 위해서도 열등이라고 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습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산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을 폐하려 하시나니.』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참된 신앙에 들어와서 기도를 통해서, 묵상을 통해서,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위로부터 새 힘을 얻을 때에는 나 혼자 할 수 없는 일도 할 수 있고, 능력이 충만한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인물이 될 수 있고, 창조적인 사업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이와 같은 은혜를 받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내 가정에서도 내 책임을 감당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자포자기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죄악이 많은 세상에서 이 죄악 세상을 구원할 복음은 오직 이 기독교의 진리밖에 없는데 복음을 담대히 전파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번에 오래간만에 국정감사를 해봤습니다. 그 국정감사가 철저한 감사는 아닙니다. 자타가 그것을 다 공인합니다. 그러나 그만한 감사를 통해서 아직도 우리 정부 각 부처에 얼마나 많은 부정과 부패가 있습니까? 우리가 이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하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떤 부처에 있든지, 또 사회의 어떤 분야에 있든지, 불의와 부정과 부패에 항거해서 용감히 싸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어제 신문에 동경 올림픽에 대한 큰 뉴스가 났었습니다. 북한 여자 선수 신금단 이가 여기 남한에 있는 자기 아버지를 동경에서 만나는 이야기가 대서 특필되었습니다. 여러분 十四년 동안이나 기다리다가, 어떤 신문은 十분 만나 보았다고 하고 어떤 신문은 十五분 만나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참 한국의 슬픔이요, 二十세기의 비극입니다. 이런 천륜과 인륜을 부정하는 사상과 제도가 이 땅에 오래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악한 사상과 싸워 이겨서 이 땅을 다시 통일하는데 선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一九六四년 十월 十一일)
Ⅵ-33 지식의 근본 (잠언 一장 一-十五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一·七)
이 교육주간에 우리는 특별히 청소년들과 학생들을 생각합니다. 구약성서 가운데 특별히 청소년 교육을 목적해서 쓴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이름은 잠언(箴言)입니다. 이 잠언은 구약성서 가운데 지혜 문학에 속하는 책으로서 그 표어는 지금 제가 읽은 이 말씀입니다.『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니라.』잠언 九장 十절에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여기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경외한다는 뜻은 단순히 두려워한다고 하는 뜻만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존경의 의미가 있고, 의지하고 감사하며 사랑한다는 뜻이 포함된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는 말은 결국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도 하였고 또는 지식의 근본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이 두 가지 말은 온전히 뜻을 달리해서 사용하지마는 옛날에는 지혜라고 하는 말은, 그 뜻의 범위가 지금보다는 매우 넓게 사용되었습니다. 모든 존재 곧 자연과 인생을 이해하고 설명하며 옳은 생활에 대한 노력의 총칭 곧 종교적, 철학적, 윤리적, 과학적 모든 지식의 총칭을 지혜라고 하는 말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학에서 최고 학위를 줄 때에는 어떠한 방면의 학문을 연구하였든지 흔히 철학박사의 학위를 줍니다. 그 철학이라고 하는 말의 근본 뜻은 지혜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직까지 지혜라고 하는 말은 학계에서는 고전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근본이니라. 혹은 지식의 근본이니라 할 때의 그 근본이라고 하는 말의 뜻도 우리가 분명히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 히브리 원어에 레쉬드라고 하는 말인데 주석 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이 말은 세 가지 뜻이 내포되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시작 혹은 첫 단계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모든 지식의 시작이니라 하는 말이 됩니다. 사실 모든 영어 선경은 제가 찾아보는 대로 다 이것을 시작이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즉 비기닝(Beginning)이라는 말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둘째로 이 말은 기초 혹은 근본이 된다고 하는 뜻이 내포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해서 우리 한국 성경을 번역할 때에는 우리 한국 사람들의 생각에 들어오기 쉽게 하기 위해서 근본이라고 하는 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셋째로 이렇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가 지식의 시작이요, 또 근본이 되는 것인즉 이 지식은 가장 선한 지식이요, 가장 중요한 지식이라고 하는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에 이 세 가지 방면으로 해석해서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친히 말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종교적, 철학적, 윤리적, 과학적 모든 지식의 근본입니다. 지식을 배우는데 무엇부터 먼저 배워야 되겠는가? 지식의 시작이 있습니다. 물유목말(物有木末)하고 사유종시(事有終始)인데 지식에도 시작이 있어 이 시작을 먼저 배워라 한다는 것이 그 뜻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지식의 시작이 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를 먼저 어린이들에게 가르쳐 주라고 하는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교훈은 신구약 전체가 역시 강조해서 주시는 교훈입니다. 신명기 六장 四절 이하를 읽을 때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 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예수 님께서는 이 말씀이야말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으로 먼저 우리가 순종할 말씀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계속해서 이 말씀에 대해서 권면 하는 말씀을 읽어보면『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핼 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네 마음에 새길뿐더러, 네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되 언제든지 집에 앉았을 때나, 길을 걸어갈 때나, 누웠을 대나, 일어날 때나, 이 말씀을 강론해서 입으로 가르치며 입으로 가르칠뿐더러, 요새 말로 시청각 방법을 이용해서 손목에 이것을 써서 매어 달아 주어 기호를 삼게 하고 미간에 붙여 주어서 얼굴을 바라볼 때, 처다 볼 수 있게 하고 네 집 문설주에도 기록해 두어서 아이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할 때에도 이것을 보고 깨닫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는 모든 지식의 시작인즉 아이들에게 지식을 가르칠 때, 이 시작부터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산상보훈 에서 주님께서도『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하고 역시 같은 뜻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렸을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를 우리 자녀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쳐 주어야 되겠습니다. 봄 밭에 잡초의 씨가 떨어지기 전에 진리의 씨를 옥토에 뿌려 주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렸을 때에 선경을 먼저 가르쳐주고 다른 말보다도 기도를 먼저 가르쳐주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법을 가르쳐주고 성결(聖潔)히 생활하는 모든 일체를 우리 가정과 교회에서 반드시 가르쳐 주어야 될 것입니다. 중년이나 노년시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를 배워서 새 사람이 되고 구원을 얻는 것도 감사한 일이지마는, 어렸을 적에 이 말씀을 재워서 일생을 선한 열매를 맺으면 얼마나 더 귀한 일인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모든 지식의 시장인즉 시작을 먼저 가르쳐 줄 것을 우리는 기억하십시다.
둘째로 여호와를 경외함은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입니다.
지식의 기초라고 하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지식을 한 집으로 보면 집에는 기초가 있는데 모든 지식의 기초가 될 만한 지식이 무슨 지식이겠습니까? 종교적, 철학적, 윤리적, 과학적 모든 지식의 기초가 될 만한 지식이 어떤 지식이겠습니까? 여기 말씀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가 그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어찌해서 그렇습니까? 간단하게 생각하더라도 곧 그 뜻을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지식의 대상이 많지마는 가장 간단하게 말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둘째는 우리 인간 자체에 대한 지식.
셋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 자연계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다른 모든 지식의 기초가 된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내 자신을 바로 알 수 있고, 우리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계도 바로 알 수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고,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꼭 바로 알아야 나 자신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상사를 보면, 인간을 바로 보지를 못하고 바로 알지를 못했습니다. 인간을 너무 높이 보아서 인간을 신으로 본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소위 범신론적 인간관(汎神論的 人間觀)입니다.
인간이 곧 신이라고 볼 때에 인간은 우상화합니다. 일본의 신도주의(神道主義), 한국의 천도교(天道敎)를 비롯한 모든 인본주의 사상과, 그 밖의 인간을 우상화해서 숭배하는 모든 주의와 사상은 인간을 너무 높이 보는데서 인간을 신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범신론적 견지에서 참 한 분이신 하나님을 모르니까 인간을 너무 높이 보아서 그릇된 사상에 빠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야 인간을 바로 봅니다.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은 인간을 너무 낮게 보았습니다. 무신론적(無神論的) 유물론적(唯物論的) 인간관이 그것입니다. 무신론적 견지와 유물론적 견지에서 인간을 볼 때에 인간의 영혼의 존재는 자연히 없어집니다. 결국 인간은 물질로 된 육체뿐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에 인간이나 짐승이나 차이는 아주 가까워집니다. 인간은 조금 더 진화된 동물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인간을 낮게 보게 될 때에, 유물론적 인간관계에 기초한 윤리사상이 생기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일종의 동물인즉 동물로 취급해도 관계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짐승으로 본다고 하면 짐승은 사람에게 유익할 때에는, 쓰다듬어 주고 잘 먹이고 기르지마는 사람에게 쓸데없을 때에는 얼마든지 죽여 부려도 괜찮은 것처럼 유물론적 윤리생활과 윤리관이 마음 가운데 들어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하게 되고 인간도 짐승처럼 어떤 정권에 유일할 때에는, 잘 쓰다듬어 주고, 어떤 정권에 해가 될 줄로 생각하게 될 때에는 마음대로 죽여 부려도 괜찮다 하는 윤리사상에 빠지게 됩니다.
이렇게 인간을 너무 낮게 보게 될 때에 다시 말하면 무신론적 견지와, 유물론적 견지에서 낮게 보게 될 때에, 역시 유물론적 사회사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인간은 짐승에 불과한 것인즉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사상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독재사상과 전체주의 사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간을 이렇게 바로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모든 험악한 윤리사상과 사회제도가 일어나게 되고, 그 결과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이 처참한 학살과 숙청과 피에 물들인 사회를 조성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참 창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 인간을 바로 봅니다. 인간은 불멸의 영혼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인간을 바로 알고, 바로 볼 때에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게 되고. 자유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천부의 권리요, 인간은 누구든지 박애와 평등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근본사상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런 사상에 기초해서 민주사회가 또한 이 땅위에 나타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기초가 됩니까?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인간을 바로 압니다. 인간에 대한 지식을 바로 압니다. 그 뿐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자연도 바로 압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사람을 한 신으로 본 것처럼 대체로 자연계도 신으로 보았습니다.(옛날에 특별히 그러했고 오늘날도 이 사상이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범신론적 견해로써 자연을 보았습니다. 일월성신 금수초목이 다 신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해도 숭배하고 달고 숭배하고 나무도 숭배하고 돌도 숭배했습니다. 거기에 다 귀신이 붙은 줄 알았습니다. 영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모든 자연계를 한 신으로 보게 될 때에, 그 가운데서 과학이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바로 알 때에, 이 자연계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고, 이 피조물은 단순히 물질뿐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때에, 자연계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되었고,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때부터 자연과학이 발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자연계도 바로 보지 못합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하세요. 이 과학의 발전에 전제조건 가운데 가자 중요한 것은 우주의 통일성과 일정한 법칙에 의지한 조직성에 대한 신념입니다. 물질의 성질은 어디나 같다. 지구에 있든지, 달에 있든지, 금성에 있든지 자연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온 우주에서 같이 운영된다 하는 신념이 없었다면 과학이 발전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주선을 우주에 발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념이 본래 어디서 왔습니까? 이것은 유일한 하나님을 알고, 유일한 하나님이 온 세계를 지으셨다고 하는 것을 알고, 이 유일한 하나님이 온 세계를 유일한 자연의 법칙으로 다스린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이 신념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다신론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신념이 일어나겠습니까? 무신론과 유물론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신념이 일어나겠습니까? 유물론이나 무신론적 견지에서 보면, 이 우주는 우연히 된 것뿐이고, 우주는 목적이 없고, 맹목적인 냉혹한 존재뿐입니다. 통일과 조직을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기초가 됩니까?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인간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온 자연계를 압니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입니다.
여러 가지 지식이 다 중요하고 필요하지마는 이것은 가장 중요한 지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二十세기는 과학의 세기로서 각 방면에 지식이 증대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인간생활에 큰 변혁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우주선이 지구를 돌고 있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전세계의 소식을 전하고 있으며, 제트 여객기는 지구를 축소한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우리 인간에게 행복을 더할는지 의문입니다.
지식은 이와 같이 확대되어 가지마는, 이 세계가 전보다 좀더 선하여진 징조를 볼 수 없습니다. 지식은 많아지지마는 오히려 죄악도 그만큼 더 많아진다고 하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흉악한 범죄율은 상승하고만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지식이 확대되고 많아진다고 해서 이 세계가 좀더 평화로운 세계로 변하는 그 징조는 볼 수 없습니다. 지식은 이와 같이 확대되고 과학은 발달되지마는, 반면에 불안과 공포는 우리 인간의 마음가운데 점점 더 많아집니다.
요새 우리가 들었지마는 중공에서도 핵무기의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평화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오히려 불안과 공포를 더하게 하는 것입니까? 한국, 일본 같은 데는 며칠 안 되어서 죽음의 재가 날아올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지식이 많아진다고 불안과 공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과학적 지식 자체는 인간을 선하게는 못합니다. 과학적 지식과 기술은 불같아서 바로 쓰면 유익하지만 잘못 쓰면 인류에게 큰 참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이 제일 중요한 지식입니까? 이것만이 과학적 지식을 바로 쓸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까닭입니다. 모든 지식을 바로 쓸 수 있게 하는 지식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이 지식이 가장 중요한 이유를 한 가지만 더 설명하겠습니다. 이 지식관(觀)이 인간의 가장 귀한 부분을 도와주고 결국은 구원합니다. 다른 모든 지식이 대단히 귀하지마는 이 모든 지식은 우리 인간의 육체를 도와주는 것뿐입니다. 건강을 증진하고 좀더 평안히 살게 하고 좀더 편리하게 살게 합니다.
그라나 여러분은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인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육체는 아닙니다. 영혼입니다. 우리 육체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영원하지는 못합니다. 시간적입니다. 무상합니다. 언제나 썩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 때에 손이 이렇게 귀하지만, 이 손도 언젠가 썩을 날이 있습니다. 여러 자매 님들 미안한 말이지마는 여러분의 얼굴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지마는 그 아름다운 얼굴도 언젠가는 썩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이 속에 있는 영혼입니다. 영혼은 불멸합니다. 영혼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이 불멸의 영혼은 구원할 수 있는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육주일을 맞아서 사랑하는 여러 학생들과 사랑하는 여러 청소년들은 특별히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은 모든 지식의 시작이니 이것을 먼저 배우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은 모든 지식의 기초가 되는 것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는, 가장 중요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 지식의 기초 위에 모든 다른 지식의 전당을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예술, 문리, 화학 각 방면에서 지식을 배우세요.
그러나 이 지식의 전당을 어떤 기초 위에서 배우느냐가 문제입니다. 철저한 신앙의 기초 위에서 이 지식의 전당을 지어야 합니다. 학문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산상보훈을 다 기억하시지요. 예수 님께서 산상에서 모든 진리를 다 그르쳐 주신 다음에 마지막에 무슨 말씀으로 결론을 맺었습니까? 집 짓는 사람의 비유로 결론을 맺었습니다.『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지혜 있는 사람이 집을 반석 위에 짓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 말을 듣기는 듣지마는 그대로 행치 않는 사람은 집을 지을 때 모래 위에 짓는 사람과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이나,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처음에는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바람이 불고 비가 나리고 창수가 날 때에는,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넘어질 때가 없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식의 전당을 짓기를 힘씁니다. 학문의 전당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현대문명을 창조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컨대 어떤 기초 위에 이 학문의 전당을 짓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현대문명을 아무리 건설한다고 하지마는 이 모래 위에 지은 학문의 전당은 오래지 않아서 바벨탑과 같이 무너질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학문의 전당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위에 튼튼한 신앙의 기초 위에 지을 때에만 현대문명도 유지되겠고, 우리 개인 하나 하나의 생활도 비가와도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니라.』 (一九六四년 十월 十八일)
Ⅵ-34 한국 청년의 결단 (마태복음 十九장 十三-二十二절)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쫓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쫓을지니라.』(왕상 十八·二十一)
이 주간은 YMCA 창립기념 주간으로서 특별히 기독청년들의 각성과 단결을 추구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읽은 말씀은 한 청년이 주님께 나아와서 주님과 대담(對談)한 기록입니다. 그 질문한 내용으로 보아서 이 청년은 범상한 청년이 아닙니다.『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행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영생의 문제를 물은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네가 계명들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청년은 다시 물었습니다.『어떤 계명을 의미합니까?』예수 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모든 계명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 때에 이 청년이 대답하였습니다.『주님이시여 그 모든 계명은 제가 이미 다 어렸을 적부터 지켰습니다.』 이 청년은 양심적으로 이 계명을 진실 되게 지키기를 힘쓴 것이 사실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만일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댄 네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와서 나를 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때에 그는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생각도 좋고 뜻도 좋았지마는 결단력이 부족했습니다.
주후 四세기에 애굽의 한 청년이 이 성경 말씀을 듣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주님의 이 말씀은 꼭 자기에게 하는 것으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부모에게서 상당한 재산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가족이라고는 자기의 손아래 여동생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는 예수 님 당시에 재물이 많은 까닭으로 근심하며 돌아간 사람의 전철(前轍)을 다시 밟지 않기로 생각하고 주님의 명령하신 대로 꼭 실행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재산의 대부분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적은 재산만 남겨서 자기의 여동생의 생활비로 준 다음, 자기는 성경에『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한 교훈과『항상 기도하라』고 한 교훈대로 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으며, 기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애굽 광야에 나가서 손수 곡식을 심어서 거두어 먹고, 남는 시간은 오직 기도와 묵상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교회 역사상 유명한 성 안토니오 입니다. 수도사들의 아버지로 존경을 받는 분입니다. 현대 청년들도 꼭 안토니오를 모방하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결단을 배워야 되겠습니다. 청년들이 아무리 성품도 좋고, 학식도 있고, 재주도 있다고 하지마는, 결단력이 없으면 무슨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 역사적 시점에 사는 우리 한국 청년들은 반드시 결단할 몇 가지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이따금 교회에 출석하지마는 신앙의 결단이 없이 우왕좌왕하면서 교회에 출입하는 청년들도 적지 않은 모양입니다. 엘리야 당시에 모든 국민들이 대부분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입으로는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멜산에 모아놓고 엘리야가 그들을 향해서 솔직히 하는 말이『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만일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섬기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섬기라』고 결단을 재촉하였습니다.
여호수아도 자기와 같이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 복지를 정복한 이스라엘 청년들을 벧엘에 모아 놓고 그들에게 전도한 말씀이 있습니다.『우리가 지금 이 가나안 땅을 대부분 다 점령 했은즉 이제는 너희들이 장차 섬길 신을 작정하라. 오직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노라.』신앙에 대한 철저한 결단을 요구한 것입니다.
구약에 여자의 이름으로 된 책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룻기 입니다. 이 룻기는 넉 장밖에 없는데 읽어보시지 못한 청년들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 라고 하는 여자가 큰 흉년이 들어서 그 곳에서 살 수 없게 되니 동편으로 요단강을 건너서 이방 땅 모압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거느리고 그 곳에 간 것입니다. 그 곳에서 十여 년 동안 잘 사는 가운데 두 자부를 맞았습니다. 자연히 모압 땅의 여자를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큰 불행이 이 나오미에게 중첩되어서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설상(雪霜)에 가상(加霜)으로 두 아들마저 차례 차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에는 이역(異域)에서 외로운 몸이 더 머무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백골이라도 고향에 가서 묻히겠다고 하는 생각으로 간단한 보따리를 싸들고 고향을 향해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모압 여자인 두 며느리가 나오미의 뒤를 따라옵니다. 나오미는 돌아서서 이 두 자부들에게『나를 더 따라올 필요가 없다. 이제는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간곡히 권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자부 오르바는 크게 통곡을 하고 돌아서서 자기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자부 룻은 계속해서 따라옵니다. 나오미는『돌아가라. 나를 따라와야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어서 돌아가 다시 결혼하고 잘 살라』고 강권했습니다.
그 때에 룻이 자기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한 말을 성경에 기록한 대로 읽어봅니다.『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이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여기에 우리는 젊은 여자의 가슴에 숨은 결단의 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세계에 중립은 없습니다. 하나님이면 하나님, 바알이면 바알, 그리스도의 편이면 그리스도의 편, 벨리알의 편이면 벨리알의 편, 천국의 백성이면 천국의 백성, 악마의 나라에 속하면 거기 속하는 것뿐입니다. 중립이 없습니다. 두 사이의 분명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 님께서 이적을 행하시고, 굶주린 자를 많이 먹일 때에, 수다한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왔습니다.
이 때에 예수 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 일인가를 경고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히 물러갔습니다. 이 때에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서『너희도 가려느냐, 너희도 가려느냐?』물었습니다. 베드로가 곧 대답했습니다.『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니 우리가 뉘께로 가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 믿고 살았사옵니다.』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결단적 신앙의 표시를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한 번은 여호와를 배반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서『무릇 여호와께 속한 자는 다 내게로 나오라』고 외친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과연 여호와께 속합니까?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 편에서는 단호한 결심이 있습니까?
둘째는 이 역사적 시점에서 사상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모세가 어렸을 때에는 애굽 궁중에서 천진난만하게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장성해서 청년이 된 후에는 중대한 기로에 서서, 번민(煩悶)과 오뇌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민족을 노예에서 해방하는 자유의 편에 서느냐, 혹은 자기 민족을 노예화하는 애굽 편에 서느냐 하는 이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작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윽고 그는 자유를 택하고 자유를 위해서 투쟁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청년들이 다 그렇지마는 특별히 이 시점에 사는 한국 청년들은 三八선을 경계로 해서 자유냐, 혹은 노예냐의 분기점에 서게 된 것입니다.『나는 자유를 택하노라』하는 분명한 사상의 결단이 요구되는 오늘입니다.
금년 올림픽에서 헝가리의 세 청년들이 고국을 떠나서 자유진영으로 망명했다는 소식을 우리가 신문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자유에 대한 결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거 수주간 동안에 세계적으로 큰 사건들이 몇 가지 일어났습니다. 소련에서 후르시초프가 실각을 하고 새 지도자들이 나온 모양입니다. 十여 년 동안 정권을 잃었던 영국의 노동당이 다시 선거에 승리해서 새로운 내각이 성립되었습니다. 중공에서 핵을 실험한 것이 또한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실들이 장래의 세계 정세의 무슨 변동을 의미하지 않을까 하는 구구한 억측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 제 개인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흥분할 것이 없는 줄 알지마는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계기로 해서 우리 한국에서는 새삼스럽게 남북통일에 대한 이야기도 상당히 떠도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통일을 우리 한국 민족으로서 누가 원치 않겠습니까? 특별히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도 북한에서 피난하여 온 동포들이야말로 근 二十년 동안 이 통일을 위해서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통일문제에 대해서 제일 중요한 점은 어떤 통일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세 가지 통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붉은 통일.
하나는 자유 통일.
또 하나는 중립 통일이 있습니다.
북한 공산당이 붉은 통일을 하기 위해서 十여 년 전에 六·二五사변을 일으키고 그 결과로 이 땅에서 수백만의 청년이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 남한에서도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희생한 것입니다. 붉은 통일을 요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유 통일입니다. 자유의 승리로써 자유민주주의가 보장되는 통일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다 원합니다. 물론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유엔에서는 유엔 감사 아래 남북한 총 자유선거를 하자는 것을 주장하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대로 되면 두 말할 것이 없는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형식의 통일이 빨리 오지 않으니 혹 다른 방법의 통일이 없을까 하는 생각으로 자연히 중립 종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형제들이 아마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할 만한 심리상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가 중립을 하자는 견지에서 우리 한국을 생각해 볼 때에,
첫째는 지리적 조건이 대단히 불리합니다. 우리 한국이 저 아프리카에 있으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저 중동지대에 있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이 극동에 있습니다. 우리 북편에는 강 하나 사이에 두고 소련과 중공이 있습니다. 남한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진영의 중요한 나라인 미국은 태평양 건너에 있습니다. 외국 군대를 이 땅에서 철수한다고 해도 소련이나 중공은 강 하나 건너가면 그만입니다. 미국은 태평양을 건너가야 됩니다. 그런 지리적 조건에 놓여 있다고 하는 현실을 우리가 바로 보아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자유진영의 국가는 한 번 국제조약을 맺었으면 신사적으로 그 조약대로 실천합니다. 그러나 공산진영의 국가는 조약을 맺긴 맺지마는 그대로 실천한 예가 없습니다. 바깥으로 조약을 맺고 뒤로 암암리에 침투작전을 계속해 합니다. 또 언제든지 자기에게 유익하면 의용군의 형식으로 폐기할는지도 모릅니다. 월남사태를 보세요.
통일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귀해서 중립화 통일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마는, 이와 같은 일을 함부로 하다가는 결국 오늘날 라오스와 같이 우리 국내에 큰 혼란이 오고, 다시 민족상잔(民族相殘)의 피 흘리는 참극이 얼어나기 쉽고 결국은 자유를 이 땅에서 빼앗기지 않을까 크게 염려가 됩니다.
아무렇게 되든 통일은 해야 된다 하는 말은 우리가 종종 듣습니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처럼 위험한 생각은 없습니다. 아무렇게 되든 통일은 해야 된다니 무슨 알입니까? 이 남한이 공산화하고 이 남한에 자유가 없어질지라도 통일을 하자는 말입니까? 자유가 없는 통일은 우리 남한 국민에게 있어서는 죽는 통일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되든지 자유가 확보되는 통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통일은 이미 말했지마는 유엔의 공정한 감시 아래에서 남북한을 통한 자유선거로 가능한 것입니다.
사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한국의 이렇게 혼란한 형편을 보고, 공산당들이 이길 자신을 얻어서 그대로 하자 할 때가 오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 남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기에 한국 기독청년들의 사명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사상에 대한 철저한 각오를 가지고 우리의 청년들에게 자유에 대한 계몽을 해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공산주의 사회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 보지 못한 三十세 이하의 청년들에게 철저히 계몽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때가 올 것을 예상하고 남한의 민주진영이 단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한국의 청년들은 이 시점에 있어서 사사에 대한 철저한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유를 무시한 어떠한 통일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기독 청년들은 실제 생활에 있어서 몇 가지 결단을 내릴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결한 생활의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남녀간의 성생활에 있어 그렇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소위 근대화한다는 미명 아래에서 선진국가들의 좋은 미풍양속은 배우지 않고 세기말적 퇴폐(頹廢)한 풍습을 영화, 텔레비전, 에로 소설 같은 것을 통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청년남녀들의 성도덕의 타락은 역사에 예가 없을 만큼 한심한 형편입니다. 이런 음란한 세대에 있어서 내가 과연 내 생활을 바르게 하고, 다른 청년들을 인도하려고 하면, 여기에 대한 철저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전에 요셉과 같이 어떠한 환경에서, 어떠한 사람에게 어떠한 유혹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이 악한 일을 감행할 수 있느냐고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경제생활의 결단입니다. 다니엘이 청년시대에 바벨론 에 잡혀갔을 때에 바벨론 왕이 그들을 사랑해서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으라고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다니엘과 같이 있던 청년들의 신앙 양심에 비취 볼 때, 그 음식을 먹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단호히 거절한 이야기를 우리가 압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있어서, 신앙적 견지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인 견지, 도덕적인 견지 사회적인 견지, 가정의 평화적 견지 등 모든 견지에서 볼 때에 주초(酒草)하고 하는 것은 백해무익합니다. 백 번 해롭고, 한 가지 이로운 것도 없습니다. 오늘날 농촌에 가서 일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건대 농촌의 제일 큰 문제는 농한기만 되면 성행하는 술과 도박이라고 합니다. 농사를 암만 잘하면 무얼 합니까? 암만 쌀값을 높이 받으면 무얼 합니까? 술과 도박으로 다 허비하고 맙니다.
서울 같은 도시생활에도 혁명 이후에 제일 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석구석마다 심지어 예배당 근처까지 대포 집이 생겼습니다. 절제생활에 대한 결단을 내리기 전에는 사회의 지도자 노릇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진실한 생활의 결단입니다. 우리 민족의 민족적 결함이 많지마는 특별히 이 점이 제일 크지 않은가 저는 항상 느껴집니다. 말, 행동, 글, 상품 등 모든 것이 진실이 부족해서 어디 가든지 처음에는 환영은 받다가 마지막에는 배척을 받습니다. 정직한 사람을 구하기가 힘듭니다. 돈 맡길 사람을 구하기 힘듭니다. 돈을 맡아서 꼭 바로 쓸 사람을 구하기 힘듭니다.
또 돈주면 무슨 일이나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기에 모든 부패와 부정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모두 돈에 움직이지 않는 국회의원들, 돈에 움직이지 않는 공무원들이 되어야 이 나라가 바로 섭니다.
이번 올림픽대회에서 우리편이 큰 참패를 해서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하는 사람이 많지마는 제가 보건대 여기에도 진실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진실한 선택, 진실한 훈련이 부족했습니다.
경기에 요행은 없습니다. 진실한 훈련, 진실한 매니지먼트(management)등이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올림픽에 간다 하니까 너도 가자, 나도 가자 하는 태도로 나섰던 것 갔습니다.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입니다. 미쁘신 하나님이십니다. 진실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내가 진실치 않을 때 하나님이 지으신 온 우주가 나를 반격합니다. 서지 못합니다. 진실한 생활에 대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 역사적 시점에 서 있는 한국 청년들은 결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분명히 하나님 편에서는 신앙의 결단이 필요합니다.『자유가 아니면 내게 죽음을 달라』고 외친 페트릭 헨리와 같은 철저한 사상을 가진 자유의 청년, 실제 생활에 있어서 성결하고 절제가 있고 정직한 청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결단이야말로 천년 제군의 일생의 운명을 작정할 것입니다. 이런 결단성 있는 청년들이야말로 장래 우리 민족의 운명도 작정할 것입니다.
우유부단(優柔不斷)한 인물이 무슨 일을 성공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내일로 미루지 맙시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이런 모든 면에 있어서 머뭇머뭇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시간 이 순간에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이 예배당을 나가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一九六四년 十월 二十五일)
Ⅵ-35 감사와 전도 (마가복음 一장 三十五-四十五절)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막 一·四十五)
오늘 아침 마가복음 一장 마지막 부분을 봉독(奉讀)하였습니다. 거기에 우리 주님께서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찍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또는 주님께서 여러 마을로 다니면서 전도한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나와서 고침을 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 문둥병자가 예수께 나와서 꿇어 엎드려서 간구 하여 하는 말이『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한 것을 보니 이 문둥병 자는 주님께 대해서 확실한 신앙이 있은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 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민망히 여기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는 곧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정신요법이 아니고, 무슨 안찰 요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즉시로 나음을 받은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이 문둥병 자와 비슷합니다. 불치의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믿음을 가지고 깨끗하여지기 위해서 간절히 구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깨끗케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이 점에 대해서 길게 생각하고자 않습니다. 이렇게 고쳐 주신 후에 주님께서는 그 문둥이에게 엄히 경계해서 보내시면서 아무에게도 이 말을 하지 말고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대로 드릴 것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는 제사장이 지금으로 말하면 공의를 겸한 때입니다. 문둥병자가 병이 나은 후에 제사장에게 가서 그 몸을 보이고 병났다고 하는 증서를 받아야 일반 사회에 자유로 출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와 같은 증명서를 받으려고 하면, 모세의 명한 대로 가서 제물을 드려야 하고 결례를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문둥병자가 그대로 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부탁한 다른 말은 그대로 순종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여기 보니까 그가 나아가서 여러 사람에게 전파해서 널리 퍼지게 하였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문둥이는 주님께 대한 신앙이 확실한 사람인데 여러 사람에게 이 이적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하고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왜 여러 사람에게 전파했는가 생각해 보면, 이유는 한 가지인줄 압니다. 너무 기쁘고 너무 감사해서 입을 봉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七장에 보면 이와 비슷한 사실이 또 하나 기록되었습니다.
한 번은 귀먹고 말이 어눌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예수 님께서 그 귀를 어루만지시고, 그 혀를 어루만지시며「에바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리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 때에 막혔던 귀가 열리고, 붙었던 혀가 떨어져, 말을 잘 들을 수 있게 되었고, 말을 분명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도 주님께서 엄히 부탁하시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경계할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였더라』하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어째서 이 부탁을 그대로 듣지 않았겠습니까? 한 마디로 너무 기쁘고 너무 감사해서 그 기쁜 소식을 다란 사람에게 전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와 전도는 같이 갑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깨달아서 내 마음이 자연히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파하게 됩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감사와 전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각 심령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신약성서를 읽어보면 위대한 전도자들이 많지마는 아마 그 가운데도 누구보다도 전도를 제일 많이 한 이는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그는 아시아를 비롯해서 전 유럽에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많은 환난과 핍박을 무릅쓰고 꾸준히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런 생활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가를 우리는 그의 서신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 一장 十五절에 이런 말씀을 친히 기록하였습니다.『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죄인의 괴수인 자기까지 예수 님께서 구원하여 주신데 대한 무한한 감사의 지정(至情)이 그의 마음속에 언제나 충만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장에 이런 말씀도 기록했습니다.『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毁謗)자(者)요 핍박(逼迫)자(者)요 포행(暴行)자(者)이었노라』 훼방자, 핍박자, 포행자였던 자기를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뿐더러 직분까지 맡기신 것을 생각 할 때에 그 감격, 그 감사의 생각이, 그의 가슴 가운데 언제나 충만했던 것입니다. 이런 감사의 마음은 그로 하여금 어디 가든지 복음을 전파하게끔 구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역사를 읽어보면 물론 위대한 전도자가 거의 하늘의 별 떼처럼 무수히 일어났습니다. 그 여러 사람 가운데도 특별히 우리 신교 역사상에 세계 선교운동을 일으키며 자기 스스로 실천한 모라비아교회의 창립자요, 또 그 교회의 목사였던 진첸돌프라고 하는 이를 기억하게 됩니다.
이 분은 본래 귀족의 아들입니다. 백작의 벼슬을 가진 분입니다. 자연히 재산도 많은 분입니다. 그러나 이 분은 자기의 지위도 버리고 재산도 다 바쳐서 오직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한 분입니다.
그 때에는 불행히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에 큰 충돌이 있어서 구교도의 압박을 받은 불쌍한 신교도 피난민들이 갈 데가 없어서 그에게로 찾아올 때, 이 분은 그들을 영접해서 자기의 소유한 토지를 주고, 그들을 위해서 집을 지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같이 모여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또한 예배당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렇게 되어서 한 五, 六백 명되는 교회에서, 멀리 아프리카를 비롯해서 웨스트 인디아와 저 북방 그린란드까지 백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보통으로 평균 네 세대, 다섯 세대에서 선교사 한 사람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진첸돌프 자신이, 이 경험을 이야기함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 할머니에게서 독일 경건주의의 감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그가 젊었을 때 어떤 박물관에 들어가서 여러 미술품을 구경할 때, 한편에 가보니까 그 때의 유명한 화가 스턴벅(Sternburg)이라고 하는 분이 그린 명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을 그린 그림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을 유심히 볼 때에 은혜를 받아서 주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그처럼 고생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혈을 흘리셨다고 하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되어서, 그 그림 앞에 조용히 섰는 동안에 주님께서 은연한 가운데『나는 너를 위해서 내 몸을 주었건마는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하는 음성이 그 심령 속에 들렸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자기의 몸을 바치고 자기의 가진 것 전부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 감격과 그 감사한 마음 가운데서 온 천하에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며칠 전에 신문지상을 통해서 미국에 있는 흑인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라고 하는 분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다 들으신 줄 압니다. 아프리카 흑인 가운데서도 위대한 기독교인이 여러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물론 마틴 루터 킹 같은 사람이요. 한편 지난 세기의 저 十九세기 아프리카 흑인 중에 제일 유명하다고 생각되는 분은 나이제리아의 사도라는 이름을 얻게 된 삼우엘 애드자이 크라우드(그 실제 이름은 애드자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나이제리아는 그 때까지 영국의 식민지였지 마는 지금은 독립국가입니다. 아프리카 신생국 중에 제일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이 애드자이의 큰 공로가 있다고 합니다. 十九세 초엽인 그 때에는 해적들이 아프리카네 가서 흑인들을 강제로 납치 해다 가 저 웨스트 인디아라고 하는 섬에 데려가서는 여러 나라에 종으로 팔던 그런 악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애드자이가 사는 동네에도 이와 같은 해적의 무리가 와서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조리 강제로 납치 해다 가 배에 싣고서는 종으로 팔려고 대서양을 건너 웨스트 인디아 섬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영국 군함이 그 해적선을 발견하고 추격해서 해적을 다 붙잡고, 노예로 팔아 버리려던 흑인들을 다시 서 아프리카로 싣고 가서 다 놓아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열 네 살 된 이 어린아이도 시에라 레욘 이라고 하는 서 아프리카에 내렸는데 마침 거기서 어떤 선교사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의 자초지경 이야기를 다 들은 선교사는 그를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고 마침 그 곳에 세워져 있는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를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이야 거기서 공부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 또 공부를 아주 잘 했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선교사가 그를 영국까지 보내서 공부를 계속해서 시켰습니다. 이 학생이 영국서 공부를 다한 다음에는, 자기의 생활을 돌아보니 참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바다 가운데 노예로 잡혀가서 팔려 갈 신세에 있던 것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또한 대학까지 졸업하게 된 것을 생각하니 참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그래서 자기 고양으로 돌아가서 자기 동족들에게 이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겠다고 하는 결심으로 가지고, 一八四三년에 청년으로서 다시 자기 고국인 흑암(黑暗) 대륙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서는 일생토록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전도, 교육, 문화, 사회 각 방면에 많은 공헌을 해서 나이제리아의 사도라고 하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생활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역시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러니 이 귀한 복음을 내 민족에게 전파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감사한 마음이 그로 하여금 위대한 전도자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일년이 한 번씩 감사주일을 지킵니다. 한국교회에서 감사주일을 제정하게 된 동기는 둘이 있습니다.
첫째는 一년에 한 번씩 一년 동안 받은 바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밖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우리 한국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해서 우리가 다 이렇게 구원을 얻었으니 이 은혜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은혜를 감사하고 생각하고, 이 은혜를 감사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감사예배를 드릴뿐더러 감사헌금을 해서 이 감사헌금을 온전히 다른 나라에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업을 위해서 쓰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해방되기 전까지는 우리 장로교 전국 교회가 감사헌금을 전부 모두 어서 중국 산동(山東)에 있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 비로 사용했습니다.
감사와 전도! 이 두 가지가 본래 한국교회에서 감사일을 제정한 근본 동기입니다. 감사일을 통해서 외국 선교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전통을 다시 살려야 되겠습니다. 지금은 한국교회에서 감사헌금이라고 하지마는, 순전히 전도 비를 위해서 쓰지 않고 경상비와 여러 가지 다른 일을 위해서 쓰고 극히 적은 부분만을 전도 비에 쓰는 그런 풍속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본래의 근본에 돌아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구약을 읽어보면 그 때 사람들은 감사일을 두 번 지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은 감사일과 큰 감사일 둘이었습니다. 적은 감사일은 오순절이라고도 하고, 맥추절 이라고도 하는데 그것 무슨 감사일이냐 하면, 밀보리를 다 거둔 다음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일이었습니다. 이 때는 적은 절기로 하루만 지켰습니다. 그 다음 그 때의 달력으로는 七월이요, 지금 달력은 十월인 가을에 모든 곡식과 실과를 다 거두고 나서 감사절기를 한 번 더 지켰습니다. 그걸 초막절 이라고 했는데 이 초막절은 하루만 지킨 것이 아닙니다. 한 주일을 지켰습니다. 성회로 모였습니다. 초막을 짓고, 광야에서도 우리를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추억하면서 감사한 성회를 열면서 감사일을 지켰습니다.
여러분은 금년 우리 영락교회에서의 감사일을 다음 주일 하루만 기키는 것이 아니고, 한 주일동안,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 지키던 법대로 한 주일을 성회로 모이면서 감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감사일을 지낼 때에는 흔히 멀리 갔던 아들도 모이고, 딸도 모이고, 다 함께 모여서 감사일을 지키는 그런 풍속이 있습니다. 이 즐거운 절기는 다 가족이 모이는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성회로 모일 때에 온 교회가 모이도록 힘써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을 더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한 하나님을 공경하고 한 주를 믿으면서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마는, 교파가 다르므로 별로 교재가 없던 다른 교파의 대표될 만한 분도 청해서 같이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복음을 전파하기로 우리 교회에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도 말씀 드렸지마는 오늘 저녁부터 시작해서 우리 한국의 주요한 교파의 대표 될만한 인물들이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저녁 전파하게 되겠습니다. 아마 이런 모임은 제 생각 같아서는 우리 한국교회 역사상에 처음 되는 모임 같습니다.
또 다음 주일에 우리가 감사헌금을 할 텐데 이 헌금의 용도는 벌써 우리가 금년의 예산을 통과시킬 때에 미리 작정했습니다. 금년부터는 우리 교회의 감사헌금은 순전히 전도사업만 위해서 쓰기로 했습니다. 다른 비용에는 안 쓸 것입니다. 순전히 외국전도와 국내전도 등 전도사업을 위해서 쓰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이 감사와 전도에 참여하실 수 있도록 들어오실 때, 감사헌금 봉투도 드린 것이고, 또 그 밖에 초청장도 하나씩 다 드렸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드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친구들을 초청해서 와서 같이 즐기고 같이 전도하는데 협력할 수 있기 위해서 여러분께 드린 것입니다.
살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민족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아야 옳게 삽니다. 바르게 삽니다. 가치가 있게 삽니다. 영원히 삽니다. 우리 민족도 그리스도를 알아야 꼭 살겠습니다. 부패와 부정을 막을 수 있겠습니다. 사회악을 제거할 수 있겠습니다. 인보상조(隣保相助)하여 이 혼란한 때를 같이 살아 갈 수 있겠습니다. 또 오늘날 우리 민족적 화제가 된 통일도 옳은 통일을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주에도 말했지마는 통일이라고 해서 다 좋은 통일이 아닙니다. 죽는 통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그리스도를 알아야 자유와 평화가 확보되고, 정의가 확보되는, 사는 통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전파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압니까? 성서적 방법이 무엇인지 압니까? 사도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범적 방법이 무엇인지 압니까? 요한 복음 一장 마지막 절을 읽으십시오. 거기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 님을 처음으로 만난 다음에, 제일 먼저 누구를 예수 님께 데리고 왔습니까? 자기 제자 요한 과 안드레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요한 과 안드레가 예수를 만난 다음에, 안드레는 또 누구를 데리고 왔는지 압니까? 자기 형 시몬을 전도해서 예수 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요한 과 안드레가 합해서 또 한 동리에 살던 사람 빌립을 예수 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선생은 자기 제자를, 동생은 자기형을, 동향 사람은, 자기 친구를, 이렇게 개인 개인이 가까운 이들을 먼저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성서적 전도방법이요.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구원의 역사를 마치시고, 승천을 하셨습니다. 거기서 천사 장 가브리엘을 만났다고 합니다. 가브리엘이 예수 님을 만나자, 크게 치하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물었다고 합니다.『그렇게 큰 구원의 사업을 다 이루었는데, 이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여야 하겠는데, 무슨 방법을 가르치고 올라왔습니까?』그러니까 예수 님께서 대답하는 말씀이『내가 열 두 제자를 택해서 가르치고 그 열두 제자에게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고 내가 부탁을 하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던 가브리엘이『참 잘 되었는데 그러나 그 사람들이 만일 주님의 부탁을 잘 받지 않고 부탁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무슨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하고 또 물었다고 합니다. 예수 님 말씀이『그들이 내 부탁을 그대로 순종 안 하면 다른 방법은 없다』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이 지금까지 전파된 것은 주를 먼저 안 사람이 자기의 가까운 사람에게 한 사람씩, 두 사람씩, 주님의 부탁 받은 대로 전함으로써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二천년을 내려오게 되었고, 이렇게 전파가 되어서, 지금은 세계 三十억 가운데 근 十억의 교도가 생기게 된 것이고, 이런 방법으로 한국교회도 발전된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운동은 어떻게 생각하면, 운동경기 가운데 릴레이경기와 같습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가지고 전도하며 뛰다가 어떤 사람에게 전해 주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고 이렇게 되어서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됩니다. 지금은 우리가 뛸 차례입니다. 우리가 뛰지 않고 우리가 이 복음을 가지고 활동하지 않으면 이 복음이 더 계속해서 전파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감사일은 한 주일 동안을 성화로 모이겠는데, 우리가 저녁마다 같이 기쁨으로 모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십시다. 문둥이 열 사람을 고쳐 주셨는데 한 사람만 와서 감사를 드리고 아홉 사람은 오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여러분이 기억하십니다. 그 축에 들지 맙시다. 또 올 때에 어떻든지 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에게 전파해서, 한 사람씩 인도해 가지고 와서 과연 문자 그대로 금년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충심으로 감사하고 많은 신령한 곡식을 거두어서 하나님 앞에 감사 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一九六四년 十一월 一일)
Ⅵ-36 베다니 마리아의 감사 (요한복음 十二장 一-十一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十二·三)
예루살렘성에서 동편으로 감람산 고개를 넘어 약 五리쯤 가면 그 산 바로 동편에 적은 마음이 깃들이고 있습니다. 이 마을을 베다니 라고 합니다. 이 마을은 전에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한 작은 마을입니다.
그러나 이 곳은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만큼 유명하여졌습니다. 그것은 약 二천년 전에 그 마을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두 자매가 살았고 또 주님께서 종종 이 마을을 방문하신 까닭입니다.
지금은 그 곳에 마르다 의 기념 예배당이 아름답게 서 있습니다. 바로 그 예배당 뒤에는 그들이 살던 집이 있었다고 하는 유적을 또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十장을 읽어보면 예수 님께서 한 번 이 가정에 들렸을 때에, 마르다가 음식 준비와 모든 수종에 대단히 바빴고, 마리아는 주님의 발아래 앉아서 마르다가 자기를 돕지 않는다고 불평을 할만큼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었다고 하는 기록을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 十一장에 보면 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어린 남동생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사로 입니다. 불행하게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을 때에 이 남동생이 병 들어서 중태에 빠지고 결국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지마는 오시지는 않습니다. 결국 장사를 지냈습니다. 나흘째가 되었습니다. 이 때에야 주님께서 제자들과 같이 오셨습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장사한 굴속에 있는 무덤을 찾으시고,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칠 때에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가 얼굴에 수건을 감은 채로 일어나서 살아 나온 위대한 기적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요한 복음 十二장에는 그 동리에서 주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이야기와 마리아가 어떻게 기름을 부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 복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二十六장에도 기록되었고, 마가복음 十四장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이 세 기록을 함께 놓고 보면, 그 때의 광경을 우리가 좀더 자세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연회 장소는 마르다 의 집은 아니고 문둥이 시몬의 집입니다. 아마도 이 시몬은 문둥이었는데 예수 님께서 그 병을 고쳐주신 모양입니다. 감사한 나머지 예수 님을 청해서 잔치를 베푼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르다 도 여기 와서 수종을 들었고, 나사로도 있었고, 또 마리아도 있었던 것을 보니 아마 두 집에서 서로 잔치를 하려고 하다가, 결국 이 시몬의 집에 양보를 하고 그 집에서 같이 주님을 위해서 잔치를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 때에 마리아는 지극히 귀한 향유가 담긴 옥합(玉盒)을 깨뜨리고 예수 님 머리와 그 발에 그 기름을 부어드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랑과 감사의 잔치를 볼 수 있고, 마리아의 감사의 표현을 또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감사주일을 맞아서 마리아의 감사를 잠깐 묵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감사의 동기를 잠깐 생각하고, 그 다음은 감사의 표현을 생각하고, 그 후에는 감사의 결과를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감사의 동기를 먼저 간단히 말하면 두 가지인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믿음으로 오는 감사입니다. 마리아는 예수 님을 만났습니다. 친히 대면하는 특권을 가진 것입니다. 그의 발 앞에 가까이 앉아서 주님의 진리를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권능, 이적을 친히 보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마리아는 깨달았습니다. 과연 예수는 모든 선지자들이 오리라고 예언하고, 우리의 모든 조상들이 기대하던 메시야 인 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사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예수 님을 중심 해서 큰 변론이 있었습니다. 한 편에서는 과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요, 메시야 라고 믿고 그렇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의 사람들은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반항을 하고 반대를 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 님을 친히 보고, 그 얼굴을 보며, 그 교훈을 듣고, 그 모든 행하는 일을 목도하게 될 때에, 과연 예수는 오래 기다리던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교훈을 통해서 그는 진리를 깨닫고, 그를 통해서 그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 예수는 그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한 복음에 예수 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사랑하시더라고 직접 기록된 것을 우리가 읽어볼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발견했습니다. 주님은 그의 기쁨이요, 그의 소망이요, 그의 생명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께서 자기 마을에 오시게 될 때, 물론 감사한 마음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동기가 있는 줄 압니다. 그것은 이미 말씀드렸지마는 자기가 스스로 받은 은혜뿐 아니고, 자기 가정이 받은 은혜입니다. 마르다 도 그와 같은 은혜를 받았고, 나사로도 그와 같은 은혜를 받았는데, 나사로는 한 가지 은혜를 더 받았습니다. 그것은 중한 병으로 앓다가 아주 죽어서 무덤에 장사한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고 소망이 아주 없었는데 예수 님의 권능으로써 부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자매는 죽은 가운데서 다시 동생을 만났습니다. 찾았습니다. 그 동생이 그 때 같이 앉았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이 얼마나 감사할 것입니까! 내가 받은 신령한 은혜, 온 가정이 받은 신령한 은혜, 특별히 자기 남동생이 받은 영 육의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한 마음이 자연히 온 가슴에 채우고도 남았던 것입니다.
둘째로 이와 같은 감사를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주님께서 오신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아마 마리아는 여러 가지로 생각한 줄 압니다. 나의 구주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고, 나의 기쁨이 되시고, 나의 소망이 되시는 이 주님을 내가 어떻게 영접할까? 이런 주님을 어떻게 높일까? 물론 마리아만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은 줄 압니다. 마르다 도 그런 생각을 한 줄 압니다. 마르다 는 아마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을 위해서 좀도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까 하는 데게 생각이 이울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이 날도 여기 와서 매우 수종들 기에 바빴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마르다 는 예수 님 오시는 소식을 듣고, 멀리 예루살렘 성까지 걸어 들어가서 맛있는 반찬을 많이 사오고 정성껏, 밤새도록 혹은 종일토록 찬을 준비한 줄 생각합니다. 여자로서 자연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단순히 거기에만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마리아도 물론 그런 생각이 간절했을 줄 압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생각은 거기에만 만족을 느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상으로 주님을 기쁘게 할 것이 무엇이겠나? 그 이상으로 주님을 높일 어떤 방법이 있겠나? 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곰곰이 생각하는 가운데서『아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부터 가장 높은 이에게 기름을 부어주는 풍속이 있지 않은가. 지금도 가장 귀한 손님에게는 무리에 기름을 부어주는 풍속이 있지 않은가. 특별히 가장 높은 왕을 세울 때, 기름을 부어주고 대제사장을 세울 때, 기름을 부어 주고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어주었는데, 우리 주님으로 말하면 왕보다도 더 높고 선지자보다도 더 높고 대제사장보다도 더 놓은즉 우리 주님을 높을 방법은 기름을 주어주는 그 이상의 방법이 없겠다.』하는 생각이 그의 머리가운데 스며든 것 같습니다.
그리해서 곧 향기로운 기름을 준비하기를 시작한 줄 압니다. 그 때 보통으로 쓰던 기름을 올리브 기름이라고 하는 감람나무 기름을 썼습니다. 감람나무 기름은 물론 좋은 기름이요, 유대지방에 많이 있는 기름입니다. 음식 할 때에도 그런 기름을 썼고, 왕을 세울 때에도 그런 기름을 쓴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름은 그렇게 값이 비싼 것은 아닙니다. 흔한 까닭입니다. 그런 기름에 마리아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기름이 없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보다 어 좋은 기름이 그 때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드라고 하는 기름인데 이스라엘 나라에서 생산되지 못하고, 저 아라비아나 인도 같은 곳에서 들어오는 기름이었습니다. 이것은 감람나무에서 짜는 것이 아니고 장미꽃 수선화 꽃 등 백 가지 혹은 천 가지의 꽃들을 모아서 기름을 짜고 아주 옥합에다 밀폐해서 수입되는 값이 매우 비싼 기름이었습니다.
그 때 유다 는 그 기름을 평가하기를『아 저것을 팔았으면 三백 데나리온이나 받겠는데 왜 허비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유다 는 경제에 밝은 사람입니다. 아마 유다의 평가가 옳은 줄 압니다. 그러니 이 기름은 三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값비싼 기름입니다.
여러분, 그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압니까? 그 때에 일하는 사람이 하루종일 일하고 받는 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三백 데나리온이면 三백일 동안 일해야 벌 만한 돈입니다.
마리아가 만일 그 때에 바느질을 해서 그 돈을 벌었다고 하면, 아마 一년 내내 일한 돈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쉰 두 날은 안식일이므로 그 날은 일을 못했을 테니까, 一년 동안 일해서 모은 돈으로 살 만한 이런 비싼 기름인 것입니다. 이 비싼 기름을 마련해 가지고 와서는 그 때 풍속대로 예수 님께서 음식을 잡수신 다음에 그 머리에다 옥합(玉盒)을 깨뜨려서 기름을 부어드렸습니다. 보통은 머리에만 기름을 붓는 법인데 여기 보면 예수 님 발에까지 부었다고 합니다. 아마 그것을 보니까 마리아의 생각에 머리에만 부어드리는 것 좀 아쉬워서 그저 전신에 부어드린다는 그런 생각으로 머리에서 발까지 부어드린 것 같습니다.
또 발에까지 부어드리고도 아직도 좀 아쉬운 생각이 있어서, 자기의 무리를 풀어서 그 발을 씻었다고 하였습니다. 여자의 머리는 생명과 같이 귀합니다. 자기 생명 전체를 바쳤습니다. 일편단심의 감사입니다. 아니 전심전력 자기 생명 전체를 감사의 예물로 주님의 발 앞에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베다니 마리아의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셋째로는 감사를 나타낸 결과는 무엇이었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다를 중심으로 해서 몇 제자들에게 오해를 사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공관복음에 보면 다른 몇몇 제자들도 여기에 동조했던 것 같습니다. 유다 가 곧 하는 말이『아 저렇게 값비싼 기름을 허비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저걸 팔면 三백 데나리온이나 받겠고, 그것을 가졌으면 가난한 사람을 많이 구제하겠는데 저것을 왜 낭비하는가?』하고 비난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 복음의 기사를 보면 그 이야기를 할 때에는 가룟 유다 에게 딴 생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팔아서 三백 데나리온을 자기 주머니에 넣고 자기가 대신 쓰게 되면 아마 그 가운데 얼마는 좀 사사롭게도 쓸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좌우간 비난을 받았습니다. 저걸 왜 낭비하느냐고…….
물론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은 예수 님도 깊이 알 수 없고, 마리아의 심정도 깊이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보고 단순히 낭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시장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속인의 심리입니다. 연작(燕雀)이 대붕(大鵬)의 심리를 알 이치가 없습니다. 제비나 참새가 공중에 나는 큰 붕새의 뜻을 알 이치가 없습니다. 이들의 가치 표준은 오직 데나리온에 있었습니다.
「三백 데나리온」요새 말로 하면「달러」혹은「원」에 있었습니다. 이 표준에서 보면 물론 이것은 낭비입니다. 이 표준에서 보면 성 프랜시스의 생활도 낭비입니다. 성 안토니오의 생활도 낭비입니다. 슈바이처의 생활도 낭비입니다. 허비(虛費)입니다. 이런 가치관을 예수 님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어떤 때 들어보면 가난한 이들이 아직도 많은데, 왜 돈을 많이 들여서 예배당을 짓는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삽니다. 예배가 필요합니다. 왜 전도하는 데에 그렇게 돈을 많이 쓸 필요가 잇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명이 귀합니다. 사실은 교회가 서야 모든 봉사의 원천이 생깁니다. 정신이 일어납니다. 주를 위해서 아낄 젓은 없습니다. 주를 위하여 너무 귀한 것도 없습니다. 주를 위 하여는 우리의 최선을 바쳐야 합니다. 아니 우리의 생명 전체를 바쳐도 오리려 주를 위해서는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마리아의 심정을 이해하셨습니다. 이해하실 뿐더러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대로 예수 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고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니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모든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충심을 보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보통으로 우리가 생각 못하는 것도 아셨습니다. 좋은 일을 하였다고 그랬습니다. 그 좋은 일은 무슨 일입니까? 이미 말하였지마는 예수 님은 과연 만 왕의 왕이요, 대제사장이요, 선지자입니다. 만 왕의 왕으로서 나귀를 타고 입성을 했습니다. 로마 병정들은 예수를 희롱하고 홍포(紅袍)를 입히고 예수를 괴롭히느라고 가시 면류관을 씌웠지마는 이것도 다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예수는 참 만 왕의 왕이라는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홍포를 입었고, 그러므로 가시 면류관을 쓴 것입니다.
여러분은 압니까? 만 왕의 왕은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마리아는 자기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였지마는 그 일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 왕의 왕이 되시는 상징으로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참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 뿐입니까?『저가 기름을 부음으로 말미암아 내 장례를 예비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만 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온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이 대제사장은 자기 자신이 희생물이 되고, 자기 자신의 피를 흘려서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하였습니다.
우리는 무슨 감사를 드리기를 원합니까? 마리아의 감사를 생각하십시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든지, 우리가 전도를 하든지, 우리가 물질을 드리든지 참 사랑과 참 정성의 표현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베다니 마리아의 감사를 드리십시다. (一九六四년 十一월 八일)
Ⅵ-37 요단강이 넘칠 때 (예레미야 十二장 一-六절)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漲溢)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렘 十二·五)
먼 옛날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아마 이 말씀은 예레미야가 젊었을 때 그의 예언자적 생활의 초기시대에 받은 말씀인 줄 생각합니다. 예레미야 十一장을 보면 그의 고향 아나돗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대적해서 그를 비난하고 핍박하고, 모함을 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젊은 예언자 예레미야는 크게 상심했습니다. 그리해서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쟁론을 하려고 합니다.『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인데 악한 자의 길이 이렇게 형통하고 패역(悖逆)한 자의 안락(安樂)이 이러할 수가 있겠습니까?』이런 불평의 호소를 한 것입니다.
이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곧 제가 읽은 이 말씀입니다. 다시 들어 보십시요.『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 한 중에서는(요단강이 넘칠 때에는)어찌하겠느냐?』좀 이상한 대답입니다.
사실 예레미야의 불평에 대한 해답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대답하신 뜻은 대략 이렇습니다. 네가 그 만한 것으로 벌써 상심하느냐? 그건 걸어가는 사람들과 경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일로 말미암아 네가 벌써 피곤해지면 장래에 사람보다 빠른 말과 경주할 때가 올텐데 그 때에는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네가 평탄한 땅만 갈 줄 아느냐? 요단강이 넘치는 때가 있을 텐데 그런 곳도 건너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때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은 그만한 것을 가지도 네가 상심하고 의심이 나서 되겠느냐? 앞으로 더 큰 위기가 올 때에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니 그런 의심에 사로잡히지 말고, 불평하지도 말고, 담대하고 용기를 내며 분발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이 시간에 음미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단강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여기에 우선 보행자가 말과 경주한다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주의해 볼 것은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교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은 산책이 아닙니다. 경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신앙생활은 교회 산책이 아닙니다. 달음박질하는 것입니다. 백 미터나 二백 미터의 단거리 경주도 아닙니다. 마라톤입니다. 코스가 깁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三장 十二절 이하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달음박질한다는 말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달리는 경주입니다.
히브리 저자는 十二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바울 선생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五장 七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달음질을 잘하더니」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신앙생활을 잘 하더니」하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후서 四장 七절에『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고 하여 자기자신은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하였습니다. 산책하던 것을 마쳤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이렇게 경주합니다.
경주할 때에는 우리 신체의 모든 기관이 다 최대의 박력을 냅니다. 힘을 냅니다. 눈은 앞을 바라봅니다. 다리만 뛰는 것이 아닙니다. 손도 휘적거리면서 후원을 합니다. 심장도 빨리 뜁니다. 숨도 빨리 쉽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주도 그런 줄 압니다. 우리의 눈으로 항상 예수를 바라봐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귀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심장으로는 예수 님을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손과 발로는, 예수 님의 뜻을 행해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인격 전체 즉 지, 정, 의지,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달음질하는 신앙의 코스를 바로 경주해야 될 것입니다.
경주에는 언제든지 목표가 분명해야 됩니다. 예수 님을 꼭 목표로 삼고 주만 따라가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을 없애라고 했습니다. 꼭 죄는 아니나 방해되는 것을 다 없애라고 했습니다. 더욱이 얽매이기 쉬운 죄들을 다 벗어버리고 오직 예수 님만 바라보고 달음질을 하라고 하였고 이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일날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보고, 해가 화창하게 잘 비치면 오늘은 예배당에 한 번 가볼까 하고 슬금슬금 예배당에 오고, 주일날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보고 날이 흐리거나 혹은 빗방울이라도 더러 떨어지면 오늘은 날도 흐리고 비도 올 것 같고 집에서 낮잠이나 자야 되겠군 하는 식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경주입니다.
二절을 보면『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보행자만 경주하는 것이 아니고 말과 경주할 때도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말은 사람보다 본래 빨리 뛰는 짐승입니다. 마병(馬兵)과도 경주를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아에게 있어서는 네가 네 고향 사람들인 그 시골 아나돗 사람들이 반대한다고 해서, 상심하느냐 그건 보행자와 경주하는 것과 같다. 앞으로 네가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아느냐? 예루살렘에서 왕들과 방백들과 여러 악한 무리들과 항쟁할 때가 올 것이다. 하는 뜻입니다. 말과 경쟁할 때가 있습니다. 이 적은 경주에 피곤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복지로 쳐들어갈 때, 처음에는 아말렉 사람들 및 아모리 사람들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키가 비슷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가나안 땅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만 있은 것이 아닙니다. 아낙 자손이라고 키가 이스라엘 사람보다 얼마나 더 컸는지 키가 구 척이나 되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에 비교하면 마치 메뚜기처럼 보였지만 그런 자손들과도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자손을 갈렙이 쳐 이긴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이 온전히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이런 저런 어려운 일이 있지마는 우리는 항상 그 보다 더 어려운 시련과 위기가 올 것도 기대하고 정신을 차리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에베소 六장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甲胄)를 취하라.』
그런데 네 힘만으로는 할 수 없으니!『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懇求)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네 신앙의 경주를 하라고 권면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五장 八절 이하에『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악마 자신과 대적해서 싸우는 경주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고『아 나는 그 동안 너무 환난과 재난을 많이 당하고 시험도 많아서 내 심령이 피곤하다.』이렇게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정신 차립시다. 그보다 더 큰 시련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단단히 부탁을 합니다.『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하여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 담대 하라.』우리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단단히 권면 했습니다.『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먼저 세상을 이기었노라.』사실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말과 경주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신론자들, 유물론자들, 공산당들, 세속주의자들, 이 음란과 방탕의 세대와 항쟁하여야 하며 내 신앙의 경주를 할 이런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은 요단의 창일(漲溢)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하셨습니다.
『요단강이 넘칠 때 너희가 어찌하겠느냐?』그건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신앙의 코스는 평안한 따 만이 아니 요. 때로는 요단강이 넘치는 곳도 우리가 지나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갖은 고생을 다 하다가 모압 평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멀리 가나안 복지가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앞에는 큰 난관이 가로막혔습니다. 그것은 무엇인지 압니까? 요단강이올시다. 험한 요단강, 검푸른 요단강, 노한 소용돌이치는 넘치는 요단강이 그 앞에 가로막았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일생의 생활은 이와 비슷한 줄 압니다 광야와 같은 메마른 세상에서 갖은 곤란과 궁핍과 유혹과 싸우면서 신앙의 경주를 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제일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넘치는 요단강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위험합니다. 거센 물결이 소용돌이칩니다. 공포의 요단강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됩니다. 그게 무엇인지 압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죽음입니다.『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이런 찬송과 같이 요단강을 건너가야 가나안 복지에 들어갑니다. 요단강을 건너가야 우리 주님을 만납니다. 요단강을 건너가야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갑니다. 먼저 간 친구들을 만납니다. 요단강이 넘치는 이 때를 우리가 당합니다. 누구나 다 이 요단강을 건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 대한 준비를 해야 되겠습니다. 지금은 세상 떠나신 고환규 장로님은 흔히『나도 이젠 죽을 때를 분비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 장로임뿐 아닙니다. 누구나 죽을 준비를 해야 됩니다. 나이 젊다고 등한히 할 수 없습니다. 젊은 사람들도 갑자기 요단강을 건너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 하나 하나가 다 당면하는 문제입니다.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또 이 요단강은 누구나 홀로 건널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사랑하는 부모, 내 사랑하는 친척, 내 사랑하는 친구들이 우리와 같이 힘껏 따라옵니다. 그러나 요단강 가에 와서는 다 떨어집니다. 요단강만을 나 홀로 건널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때에『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신앙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떠나고 나 홀로 요단강을 건너게 될 때에,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신앙이 있습니까? 스스로 살펴보십시다.
이 강을 건널 시기는 누구나 모릅니다. 사람이 저 멀리 천왕성 해왕성의 거리를 측정해서 알 수는 있지마는 자기 죽을 날은 모릅니다.『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라.』여러분은 이 약속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이 과연 구속을 얻었습니까? 여러분이 과연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소유물이 되었습니까? 그러면 요단강을 건너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여러분이 다 이와 같은 확신을 가졌습니까?『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과연 여러분의 모든 죄가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씻음을 받았습니까? 요단강을 건널 준비가 되었습니까? 죽을 준비를 했습니까? 우리가 과연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했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두려울 수 없습니다. 사람의 권세가 두려울 수 없습니다. 죽을 준비가 된 사람처럼 담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을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옳을 것입니다. 사선을 넘어서 살아야 바로 삽니다. 요단강을 건얼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의 신앙뿐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러합니다.
본문은 개인생활뿐 아니고 우리 민족 전체의 생활에도 적절한 교훈을 주는 줄 압니다.
우리 민족이 해방을 받은 후에 지금까지의 생활은 옛날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생활과 비슷합니다. 혼란, 곤핍(困乏), 방황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 앞에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 전의 큰 난관인 검푸른 요단강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남북통일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강을 바로 건너가면 우리 남북한 민족이 다 같이 살 수 있고,. 만일 우리가 이 강을 바로 건너가지 못하면, 다 망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우리는 꼭 자유가 승리하는 통일을 가져와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여호수아와 갈렙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담대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새 세대의 각성과 궐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해방 이후에 공부 많이 하신 분들도 계신 줄 압니다. 혹 집도 지으신 분도 계신 줄 압니다. 돈도 좀 모으신 분도 계신 줄 압니다.
무슨 지위도 얻으신 분도 계신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자랑하지 마십시요. 우리가 이 앞에 가로놓인 요단강을 바로 건너가지 못하면, 여러분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숙청을 당하고 망할 수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 앞에 어떠한 위기가 오는지 여러분 분명히 보십니까? 이 옳은 통일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참으로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희생할 가을인 줄 압니다.
여러분은 지혜가 있습니까? 지혜를 짜내세요. 여러분은 지식이 있습니까? 지식을 내 놓으십시오. 여러분은 돈이 있습니까? 돈을 바치십시오. 여러분은 지위가 있습니까? 지위를 바치십시오. 여러분은 시간이 있습니까? 시간을 내 놓으십시오. 여러분은 청춘이 있습니까? 청춘을 바치십시오. 그리해서 이 요단강을 꼭 바로 건너가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세 가지 방안이 있는 줄 압니다.
첫째로 요단강을 건널 수밖에 없는 이런 때를 당해서, 사실 자유를 믿고 민주주의를 믿는 우익 진영이라고 하면, 누구나 대동단결 할 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정파나 지연이나 이런 것들을 초월해서 단결하여야 될 것입니다.
둘째로는 정치를 바로 하고 경제정책을 바로 해서, 있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을 도와줄 줄 알고 이 자유 사회를 굶는 사람 헐벗은 사람이 없이 살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어제 신물을 보니까 로마교황 바오로 六세가 세계의 빈민들을 위해서 자기의 왕관을 제공했다는 소식이 게재되어 있었습니다. 꼴 바로 깨달은 줄 생각합니다. 우리 자유진영의 모든 교회 모든 교직자, 모든 장로, 모든 집사, 아니 모든 자본가들, 모든 교육가들, 모든 정치가들, 그리고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에서 이 정신을 꼭 배워야 할 줄 압니다.
더욱이 한국 같은 사회에서는 우리가 어떻든지 인보상조(隣保相助)해서 다 같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전에는 남북통일이 바로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특별히 정치방면에 있는 사람들, 경제계 방면에 있는 사람들, 재산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 지식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대 각성, 대 분기, 대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남북통일이 바로 안 됩니다.
또 셋째로는 사상적으로 철저한 계몽이 시급합니다. 공산주의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문명하게 우리의 젊은 학생들에게 알려줘야 할 것입니다.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해서 어떤 이가 북한으로 갔다고 하는 소식도 여러분이 듣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우리가 이 계몽을 바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칠 수밖에 없는 때인 줄 압니다.
『요단강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요단강이 넘칠 때가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다 닥쳐옵니다. 우리가 넘치는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삽니까? 무엇 무엇해도 이것이 제일 시급합니다.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해야 합니다.
(一九六四년 十一월 十五일)
Ⅵ-38 겨울 전에 오라 (디모데 후서 四장 九-二十二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 四·九)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딤후 四·二十一)
이 때에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었고 이 편지를 받은 디모데는 에베소에 있었습니다. 여기에 그는 자기가 겪은 경험을 나누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부탁했습니다.『너는 어서 속이 내게로 오라.』또『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이렇게 간곡히 부탁하는 이유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 기록한 대로 우선 로마에 일꾼이 부족합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자기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동역 자들은 다른 일이 있어서 다른 데로 자기가 보냈습니다. 누가만 로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와서 도와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또 그 뿐만 아닙니다. 겨울이 장차 오게 되는데 쓸쓸하고 냉냉(冷冷) 한 감방에서는 밤마다 날이 점점 차집니다. 자기의 외투가 멀리 드로아 가보의 집에 있는데 그것도 가지고 왔으면 합니다. 또 몇 권의 책도 두고 왔는데 그 책도 가지고 오기를 원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이 다 원인이 아닌 것은 아니지마는 그보다도 더 간절한 대로 이유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여기 기록한 대로 자기의 최후가 임박한 것을 예감한 까닭입니다.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워진 것을』그는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즉 순교를 하기 전에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를 보고 싶었고 또 최후로 친히 만나서 부탁할 말씀도 있은 줄 압니다.
거듭해서 오라고 하면서 특별히 겨울 전에 오라고 재촉했습니다. 그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때는 지중해를 겨울에 항해할 수 없었습니다. 가을에 배가 떠나지 않으면 겨울을 지나서 적어도 넉 달 후에야, 다시 배가 지중해를 항해할 수 있은 것입니다. 그리해서 만일 디모데가 가을에 오지 못하면 四, 五개월 후에야 로마에 오게 될 텐데, 그 동안에 자기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겨울 전에 오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데모데가 이 부탁을 받고 만사를 제쳐놓고 곧 가을에 배를 타고 로마에 와서, 사도 바울의 최후 순교할 때에 같이 있어서 최후 봉사를 했는지 혹은 그렇지 못해서 여러 가지 얽매이는 일에, 하루 이틀 지체한 까닭으로 그만 마지막 배를 놓치고 부득이 몇 달 후 다음 해 봄에 로마에 와서 보니, 사랑하는 선생 사도 바울은 순교를 당해서 쓸쓸한 무덤 가에서 그를 대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디모데에게 있어서는 천추(千秋)의 한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디모데가 그 전에 와서 사도 바울을 뵈올 줄로 생각합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사도 바울의 최후의 이 말씀을 우리가 오늘 아침 생각하고자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이 말씀은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이라기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인간을 향하여 주신 말씀으로 생각됩니다.『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지금은 늦은 가을입니다. 여러분은 겨울 준비에 바쁘실 줄 압니다. 김장도 담가야 하고, 연탄도 들여야 하고, 창도 발라야 합니다. 그러나 그 외에 인생의 겨울을 위하여 준비할 일이 또 있습니다.
전도서 三장을 읽어보면 기회가 지나기 전에 오라고 하는 말입니다. 기회가 지나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전도서 三장을 읽어보면 천하 만사에 기한이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항해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항해할 수 없는 때도 있습니다. 여행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여행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일할 수 없는 때도 옵니다. 공부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공부할 수 없는 때도 옵니다. 씨를 뿌릴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추수할 때가 있습니다. 추수할 수 없는 때오 있습니다. 인간생활의 성공과 실패는 이 기회를 바로 포착하여 할 일을 하느냐 못하느냐, 여기에 달렸습니다.
봄은 씨를 뿌릴 때입니다. 씨를 잘 뿌리면 그 해에 많은 수확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씨 뿌릴 때에, 기회를 잃고 뿌리지 못하면, 그 해 농사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유년과 소년시대는 공부할 때입니다.
그 때에 공부를 잘하고 학문과 기술을 닦으면 일생에 성공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생은 실패로 돌아가기 쉽습니다.
마태복음 二十五장을 읽어보면 거기 세 가지 비유가 있는데, 물론 우리 신앙생활에 여러 면의 깊은 진리를 가르쳐 주지마는 세 가지 비유가 다 이런 면도 가르쳐 줍니다. 가령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주인이 먼 곳에 여행가면서 종 셋을 불러 하나에게는 다섯 달란트, 또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 또 다른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내가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에 이것을 가지고 장사를 잘하라고 분부했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셈을 하려고 할 때에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각각 곱이나 남겨 가지고 와서『주인이시여 나에게 다섯 달란트를 주었는데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 주었는데 두 달란트 더 남겼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주인이 기뻐서 하는 말씀이『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니, 내가 큰 일을 네게 맡기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장사라고 기회를 주었건만 장사하지 않고 그냥 땅에 묻어 두었다가 한 달란트 그대로 갖다가 주인에게 바쳤습니다. 주인이 크게 노해서『악하고 게으른 종아!』책망하면서, 한 달란트 주었던 것마저 빼앗고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좇았습니다. 왜? 두 종은 장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사를 잘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그 기회에 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산양과 면양의 비유도 이 면을 가르쳐 줍니다. 이 다음에 인자가 다시 오셔서 천하 만국을 다 앞에 놓고 목자가 산양과 면양을 가라 놓듯이 온 세상 사람들을 좌 우편으로 갈라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오른편 즉 양편에 있는 의인들을 향해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만세 전부터 내 아버지께 축복을 받을 너희들은 너희를 위해서 준비한 복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왜?『내가 주일 때에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들이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너희들이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너희들이 찾아보았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너희들이 와서 나를 돌아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의인들이 물었습니다.『주여 언제 우리가 그런 일을 했습니까?』그 때에 인자가 대답하셨습니다.『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이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이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할 만한 기회가 있을 때에 좋은 일을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병든 사람을 심방 했습니다. 그러나 왼편 즉 산양 편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뭐라고 말씀했습니까?『저주받은 너희들아,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준비한 영영 한 불 가운데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왜?『내가 주일 때에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헐벗을 때에 너희들이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않을 때에 와서 돌아보지 않았고, 감옥에 있을 때 찾아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들도『주여 언제 우리가 주님이 그렇게 된 형편을 알았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인자의 말씀이『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들은 좋은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었건마는 그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말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도 이 면을 가르칩니다.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기회가 있을 때에 기름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신랑이 더디 올지라도 기름의 준비가 넉넉하니까 염려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들불을 준비했지마는 기회 있을 때에 기름을 충분히 준비 못했다가 신랑이 왔습니다. 문은 닫혔습니다. 손님은 다 들어갔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문을 열어달라고 아무리 두드려야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기름을 준비할 기회에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신랑을 맞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천하 만사에 다 기회가 있습니다. 이 기회는 지나갑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마땅히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앞서도 말했지마는 우리 가운데 학생들도 많이 있는 줄 아는데 학생 때는 꼭 공부할 때입니다.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공부 잘하기를 바랍니다. 그 때를 놓치면 앞으로 공부하기가 힘듭니다. 세월이 빨리 갑니다.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겨울 전에 공부하십시오. 우리 가운데 젊은 남자와 여자들도 많습니다. 부모를 모신 자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자녀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부모님들 살아 계실 때에 부모님들을 잘 공경하고, 부모님들에게 효도를 극진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님들은 항상 계시지 않습니다. 겨울이 옵니다. 세상을 떠납니다. 그 다음엔 암만 부모에게 효도할래 야 효도할 기회는 다시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부모가 살았을 때에 말 안 듣고 속 썩히다가 정작 부모가 세상을 떠나니 관 옆에 앉아서 대성통곡하는 아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기회는 지나갔습니다.
또 여러분은 가정생활에서도 이 진리를 기억하십시오. 이 가정에도 겨울이 옵니다. 부부간이라고 하는 것은 二十년 三十년 늘 같이 동거하니까 피차에 귀한 줄을 모릅니다. 으레 아내라는 것은 있는 것이거니 하고, 남편은 으레 있는 것이거니 합니다. 남편은 일하다가 집에 돌아가면 아내라는 것이 으레 있는 것이고, 또 아내는 저녁때에 으레 남편이라는 것이 돌아오는 것이니까 생각합니다.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정에도 겨울이 오기 쉽습니다. 메일 저녁 돌아오던 남편이 안 돌아오는 때가 혹 있을 것입니다. 일을 다 보고 집에 돌아오면, 으레 기쁨으로 맞아주던 그 아내의 얼굴이 안 보일 때가 있을 것입니다. 피차에 서로 귀한 줄 알고, 서로 아끼고, 서로 도와주고, 겨울이 오기 전에 사랑하고, 피차에 정성을 다해서 단란한 생활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회할 날이 옵니다. 어떤 남편은 자기 아내가 살았을 때에는 그저 되는대로 대접하고 그저 쓴 소리, 잔소리 마음대로 하고, 속 썩이고 그러다가 정작 아내가 아이를 다섯 여섯 놓고 세상을 떠나 그 관 옆에 앉아 보니 기가 막힙니다. 자기 아내의 관 옆에 앉아서 죄를 잡고하며 통곡하는 남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기회는 늦었습니다. 이미 겨울이 왔습니다. 그 전에 부부간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깊은 관계이며 얼마나 큰 축복인 것을 깨달아서 피차에 아끼고 귀하게 여릴 뿐만 아니라 서로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가정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주를 봉사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주를 봉사하는 것도 언제나 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일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언제나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겨울이 옵니다. 오늘 성가대가 참 잘했지마는 성가대원 노릇도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많이 든 다음엔 자격이 없어지고 능력이 없어집니다.
심방을 하는 것도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하는 것도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를 봉사할 수 있을 때에 감사히 생각해서 정성을 다해서 봉사하십시오, 봉사할 수 없는 겨울이 옵니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봉사뿐 아닙니다. 어떤 봉사든지 그렇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그 기회에 정성껏 좋은 일을 하십시오.
우리 인생행로는 일방도로입니다. 한 번 지나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못합니다. 겨울이 옵니다. 기회 있을 때에 좋은 일을 많이 하십시오. 기회 있을 때에 화목하시기 바랍니다. 혹 어떤 친구와 오해가 있습니까? 오래 품지 마십시오. 혹 그 오해를 풀 수 없는 겨울이 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감사할 사람에게 기회 놓치자 말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왜? 그것도 겨울이 옵니다. 어떤 때에는 암만 감사하려고 해야 그 분은 이미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겨울이 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하시는 교훈을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겨울 전에 추수를 해야 됩니다. 예수 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느니라.』곡식이 무르익어서 희어졌다고 말씀했습니다. 한국의 영적 밭이 이렇습니다. 혁명을 두 번이나 겪었습니다. 그러나 국정쇄신도 별로 찾아보기 힘듭니다. 요새도 무슨 지리산 대 도벌사건이 연일 연 야 신문지를 채우고 있습니다. 기가 막히는 사정입니다. 우리 민족은 지금 그저 환멸과 절망에 사여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음이 다 허탄(虛誕)하여졌습니다. 의지할 데도 없고 소망을 둘 데도 없습니다. 갈팡질팡 헤매 이는 무리입니다. 우리 민족의 심령은 지금 비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구주를 기다립니다.
예수 님께서 오셔서 친히 말씀하시기를『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 때가 찼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습니다. 복음을 기다립니다. 구주를 기다립니다. 우리 삼천만을 하나님께서 인도할 때는 바로 이 때입니다. 그러므로 전국 복음 화 운동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영적 추수기에 있어서 나는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구경꾼이 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가을에 놀 수 없습니다. 구경할 수 없습니다. 추수의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내가 무엇을 할 수 있나? 내가 이 신령한 추수를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나?』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일꾼을 부릅니다. 너는 어서 속히 오라고 부릅니다. 겨울 전에 오라고 부릅니다. 겨울 전에 와서 이 추수를 하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이 음성을 듣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이 때에 우리 모든 국민 하나 하나에게 산 교훈을 주시는 줄 압니다. 그것은『겨울 전에 통일 준비를 바로 하라』하는 교훈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했지마는 통일 준비를 꼭 할 때입니다. 국제정세는 급변합니다. 언제 어떻게 변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준비를 꼭 바로 할 때입니다. 겨울 전에 해야 되겠습니다. 잘못되기 전에 다시 말하면 겨울 전에 기회 있을 때, 이 준비를 꼭 바로 해야 되겠습니다.
사상적으로 철저한 계몽을 하고, 공산주의의 실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서 그 사람들이 거짓 선전에 우리 젊은 사람들이 속지 않도록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사실 내가 자유를 사랑하고 사실 내가 민주주의를 그대로 믿는다고 하면, 모든 적은 것을 버리고 단결해야 될 때입니다. 군인이든지, 공무원이든지, 국민이든지 오직 하가가 되고, 자본주든지, 노동자든지 오직 하나가 되고 상부상조해서, 우리 국민이 같이 살 수 있는 사회를 이루도록 최선을 다할 때입니다.
각 방면으로 실력을 배양해야 되겠습니다. 겨울은 옵니다. 겨울 전에 이 준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떤 직장에 있든지, 어떤 분야에 있든지 그 분야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이것을 꼭 바로 찾아서 내 책임을 해야 될 것입니다. 겨울 전에 통일에 대한 준비를 해야되겠습니다
그리고 물론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 하나의 심령에 말씀해 주십니다.『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겨울 전에, 기회 지가기 전에 어서 오라』고.
여러분은 다 예배당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배당에 나왔다고 다 꼭 주님께 나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과연 내가 주님 앞에 왔습니까?『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과연 내 심령이 주님께 왔습니까? 과연 내가 내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돌아와서 세상은 뒤로 두고 주님을 향해서 왔습니까? 주님을 내 구주로 삼습니까? 모든 죄를 청산합니까? 주님 앞에 왔습니까? 회개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씩 모른다고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닭이 울 때에 그 음성을 듣고 곧 회개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회개할 기회에 꼭 회개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 가 큰 죄를 짓기로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가룟 유다 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마지막 저녁을 잡수시고서 여러 제자들을 향해서『너희 가운데 하나가 장차 나를 팔고자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다른 제자들을 들으라고 한 말씀이 아닙니다. 유다 에게 회개를 재촉하는 말씀입니다.
그 때에 그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 꿇어앉아서 죄를 고백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강퍅한 유다 는 그 회개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듣기 싫으니까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결국 멸망하고야 말았습니다. 주님께 오는 것도 기회가 있습니다. 겨울 전에 와야 합니다.
전에 어떤 임금이 자기를 배반한 어떤 성에 군대를 데리고 와서 다시 점령한 후에, 그 날 저녁에 자기가 유하는 집 꼭대기에다 큰 촛불을 켜놓고 온 성 사람들에게 반포하기를 누구든지 이 촛불이 꺼지기 전에 나에게 와서 항복하고 죄를 자복(自服) 하는 사람은 과거에 배반을 했어도 다 용서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촛불이 꺼진 다음에는 기회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촛불이 켜져 있는 동안에 많은 사람이 와서 다 죄를 회개하고 자복 하고 특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지체했습니다. 오기는 왔습니다. 그런데 불이 꺼졌습니다. 따라서 그 다음에는 한 사람도 용서를 해주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촛불이 꺼지기 전에, 즉 겨울이 오기 전에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 언제가 그런 때입니까? 지금입니다. 성경에 보면 항상 지금과 오늘을 중하게 가르쳤습니다.『너희가 오늘 그 음성을 들으면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지금은 은혜 주실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오늘 이 음성을 듣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맙시다. 지금은 은혜 주실 때입니다. 지금이 주님께 올 때입니다.
지금 이 시각이 여러분의 심령 하나 하나에게는 영원한 시각입니다.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시각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온전히 주님 앞에 나오지 못한 분이 계시면 이 시간 오십시오. 이 시간 온전히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나와서 주님의 제자가 되십시오.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주님께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一九六四년 十一월 二十二일)
Ⅵ-39 하늘의 악대 (역대 하 五장 一-六, 十一-十四절)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불고 제금(提琴)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대하 五·十三)
오늘 아침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오늘이 창립 제 十九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연수는 十九년에 불과하지마는 우리가 지나온 경험으로 보면 十九세기를 지난 듯한 느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 험난한 시대에서 과거 十九년간에 본 교회를 보호해 주시고 자라게 해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 그 크신 은총과 긍휼(矜恤)에 대해서 무엇으로 다 감사를 드릴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읽은 이 말씀은 솔로몬이 성전을 다 건축하고 법궤(法櫃)를 지성소에 처음으로 안치하던 때에 예배하는 모습을 묘사한 구절입니다.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약성서를 읽어보면 옛날 솔로몬 성전을 중심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에는 여러 가지 악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지금 말로는 관현악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그 악대의 인원수가 四천명이라고 한 구절을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배할 때에 악대의 역할이 얼마나 컸다고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보다 더 큰 악대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욥기 三十八장 七절을 읽어보면『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였다』하는 구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시적 표현이지마는 그윽이 생각해보면 모든 별들 하나 하나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사실 뭇별의 존재의 근본적인 목적이 여기에 있는 줄 압니다. 조물주 하나님을 찬송하는 데 있는 줄 압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에 이 대우주를 한 큰 악대로 볼 수 있습니다. 별 하나 하나가 각각 찬송을 부르는 악기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악대를 한 번 상상해 보고자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교회는 한 큰 악대와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에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신도 하나 하나는 손에 악기를 든 악대의 대원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교회의 존재의 근본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데 있는 줄 압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 창립을 기념하며 생각하는 이 날에, 악대로서의 교회를 한 번 상상해 보며 악대로서의 교회의 사명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우리에게 새로운 축복을 하나님께서 더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때에 몇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악대는 하나이나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구약시대를 보아도 비파가 있었고, 나팔이 있었고, 소고가 있었고, 여러 가지 악기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악기는 각각 자기의 소리를 냅니다. 북은 북소리를 내고, 비파는 비파의 소리를 내고, 각각 다른 소리를 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하나입니다. 다 같은 교회에 속하는 교우들입니다. 그러나 교우 하나 하나가 받은바 악기는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성령은 하나이나 은사는 각각 다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각각 자기가 받은바 악기를 가지고 연주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어떤 이들은 노래를 부릅니다. 어떤 이들은 그르치기를 잘합니다. 어떤 이들은 심방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전도를 합니다.
어떤 이들은 특별히 물질방면으로 교회를 봉사합니다. 각각 그 봉사하는 길과 발하는 소리가 다릅니다.
위대한 음악을 이루는 데는 여러 가지 악기가 필요하고, 그 악기가 각각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비파 소리가 아름답다고 하지마는, 비파 하나만 가지고 관현악대의 웅장한 음악을 창조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이올린 소리가 아름답다고 하지마는 바이올린 하나 가지고는 큰 음악을 이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여러 신도들이 각각 자기가 받은 은혜대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봉사하는 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十二장에서『교회는 몸과 같고 우리 하나는 지체와 같다』고 하시면서『지체는 각기 다르고 책임이 다르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다 눈이라고 하면 무엇으로 들을 수 잇느냐, 다 손이라고 하면 무엇으로 걸어다닐 수 잇느냐?』고 하시며 지체가 다른 것이 필요하고 또 다른 일을 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런 가운데서 온 몸의 역할을 한다는 원리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기는 꼭 같이 귀합니다. 큰 음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악기도 필요하지마는 적은 악기도 필요합니다. 꼭 같이 귀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 안에 있어서도 신도 하나 하나가 꼭 같이 귀합니다. 받은 바 은혜가 다르지마는 더 큰 은혜가 없고 더 적은 은혜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고 하나님 앞에서 큰 할렐루야 곡 같은 것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적은 악기, 큰 악기 꼭 같이 귀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큰 악기를 맡았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내가 적은 악기를 맡았다고 후회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맡은바 악기를 가지고 충성스럽고, 아름답고, 부지런하게, 귀한 연주를 할 것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기억할 것은 악대는 언제나 한 지휘자 아래서 움직여야 합니다.
여러 악기가 동시에 소리를 내지마는 한 지휘자 아래서 한 곡을 연주하게 될 때에야 소음이 아니고 화음인 아름다운 멜로디를 낼 수 있습니다. 여러 악기가 제멋대로 소리를 낸다고 하면 그것은 분주한 소리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교회도 꼭 그렇습니다. 큰 악대와 같은 이 교회는 오직 한 사람의 지휘자 아래서 움직여야 됩니다. 그 지휘자가 누군지 압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몇 해 전에 제가 어떤 교회의 장로 장립식(將立式)에 갔더니, 장로를 권면 하는 순서에 어떤 분이 나오셔서 장로에게 이렇게 권면을 합니다.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 줄 압니까?『교회의 주인이 장로입니까? 목사입니까? 교회의 주인은 목사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어떤 데에서는 장로들이 자기가 교회의 주인인 줄 알고 마음대로 목사를 내고 들이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일이요, 교회의 주인은 목사인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 말을 듣고 저는 마음가운데 불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까닭은 목사는 목사가 주인인줄 알고 장로는 장로가 주인인 줄 아니, 각각 이런 생각을 가지고 교회를 지도하려고 하면 결국은 싸움밖엔 될 것이 없습니다. 사실 한국교회에 이런 예가 종종 있었습니다.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목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고 그리스도입니다. 목사나 장로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오직 무슨 일을 당하든지 겸손히 그리스도의 뜻을 바로 찾아서 거기에 순복 할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든지 한 지휘자인 그리스도 아래서 한 곡을 부를 줄 알아야 합니다. 똑 같은 곡을 부를 줄 알아야 합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마는 사실 어떤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다 이렇게 모였는데 한편에서는 찬송가 一장을 부르면 저편에서는 四백장을 부르는 식으로 서로 싸우면서 부른 예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악대는 한 지휘자인 그리스도 아래서 언제든지 같은 곡을 동시에 불러야 합니다. 이런 곡을 부를 수 있는 한국교회의 시대가 빨리 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부르는 음악은 여러 가지 곡이 있습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생각하면 세 가곡으로 총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곡이요, 둘째는 소망의 곡이요, 셋째는 사랑의 곡입니다. 먼저 교회라고 하는 악대는 믿음의 곡을 잘 연주해야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로다』이건 믿음의 곡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 하시는 도다.』『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이건 믿음의 곡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 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이런 믿음의 곡입니다.『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 하시리로다. 우리는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이런 믿음의 곡입니다.
교회는 언제든지 이 흑암과 불안과 공포에 허덕이는 가련한 인간들에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갈 길을 몰라 헤매 이는 이 인류들에게 참으로 길이 시요, 진리 시요, 생명이신 구주를 전파해야 합니다. 믿음의 곡을 연주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소망의 곡을 연주해야 합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주로 좇아 나는 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 시요 나의 구원이 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3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딸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로다.』이런 믿음의 곡입니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이런 소망의 곡입니다.
이 교회는 언제든지 이 환멸과 절망의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 二十세기에 사는 인류에게 소망의 곡을 들여 줘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그 많은 지혜, 그 발단한 과학으로도, 또 그 많은 정치가, 그 많은 철학자, 그 많은 교육자, 그 많은 경제인, 예술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을의 세계는 시시각각으로 멸망을 향하여 줄달음을 치고 있습니다.
와트(Watt)의 유명한 그림과 같이 인간의 소망의 줄은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 줄은 그리스도뿐입니다. 이 소망의 곡을 분명하게 전 인류에게 들려 줄 수밖에 없는 때입니다.
셋째는 교회는 언제든지 사랑의 곡을 연주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스도는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사랑하는 자들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상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을 사랑이시라.』사랑의 곡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교회는 이 북빙양(北氷洋)같이 냉냉(冷冷)한 세계 사하라사막같이 쓸쓸한 사회에서 사랑의 곡을 전하여야 되겠습니다.
본 교회에서 보린원이니 경로원이니 모자원이니 하는 기관을 설립하는 것도 그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급식소를 경영하는 것도 그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특별히 크리스마스 계절을 당해서 이 사랑의 곡을 연주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유다 역사를 읽어보면 유다 왕 여호사밧 왕 때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의 거민 들이 다 유다의 원수들입니다. 연합군을 조직해 가지고 국경을 침범해 들어왔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이들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신앙이 독실한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군대를 동원해서 원수를 쳐 물리치기 위해서 내보낼 때에 군대만 보내지 않았습니다. 군대보다 먼저 노래하는 자들에게 거룩한 옷을 입혀서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며 적진을 향해서 돌진하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상하게도 적진 가운데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며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기를 시작해서, 자기들끼리 서로 살육하여 스스로 다 패퇴하여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에도 문자 그대로 모압 자손 같고, 암몬 자손 같고, 세일 자손 같은 많은 원수들이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공산당이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세속주의가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소매치기부대가 많아졌습니다. 인간 송충이라는 도벌부대가 많아진 모양입니다. 탐관오리 부대가 많이 침투했습니다.
여러 원수들이 이 땅으로 지금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정부가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군대가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경관들이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하십시다
이와 같은 때에 하늘의 악대인 우리 교회가 앞장서서 전국을 복음 화시키며 자유수호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면. 이 모든 원수들은 자멸될 기회가 머지않아 올 것입니다. 이 위대한 하늘의 악대가 먼저 전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 모든 일에 먼저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벌써 반세기가 지났습니다만 一九一二년에 「타이태닉(Titanic)호」라는 유명한 여객선이 대서양을 건너던 중입니다. 그 때에는 제일 크게 건조한 배요, 아주 호화롭게 만든 호화선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유명한 배가 처음으로 대서양을 횡단하게 되니 유럽과 아메리카의 저명한 인사들이 이 베에 많이 탔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배가 대서양을 건너오다가 빙산에 부딪쳤습니다. 깨여졌습니다. 침몰하기를 시작합니다. 구명정 몇 개를 싣고 가던 것을 내려서 먼저 어린이들과 부녀자들을 할 수 있는 대로 구호를 했습니다. 그러나 여객의 대다수는 구할 길이 없습니다. 배는 점점 갈아 앉습니다. 그렇게 되니 그 여객선에 탔던 여러 승객들은 정신을 잃고 불안과 공포 가운데서 갑판에 나와서 아우성을 칩니다.
그 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압니까? 그 배에 타고 있던 악대가 정복을 입고 각자 악기를 들고 갑판 가운데 나섰습니다. 그 아우성 치는 가운데서 꼼짝하지 않고 지도자의 지휘를 따라서 모든 악기가 울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분주하던 갑판이 조용해졌다고 합니다. 한 곡 두 곡 위대한 곡을 계속해서 연주합니다.
그러나 배는 점점 갈아 앉습니다. 마지막에 연주한 곡이 무슨 곡인지 압니까? 우리가 잘 아는 五0二장 찬송입니다.『내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그리고 마지막 순간이 가까웠습니다. 마지막 절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야곱이 잠 깨여 일어난 후 돌 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 마지막 절을 부를 때에는 점점 침몰해 들어가던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일어나면서 공포도 잊어버리고, 불안도 잊어버리고 하늘을 향해서 승리의 기쁜 얼굴로써『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라고 합창을 하면서 마지막을 승리로써 마쳤다 하는 기록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있어서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저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사상에 침륜(沈淪)되는 인간에게 영원한 소망과 생명과 용기와 능력을 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十九년 전에 이 곳에 이 교회를 세워주신 것도 이 목적을 위해서 세워주신 줄 압니다. 우리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은 이런 방면으로 힘을 쓰라고 애쓴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너무 미약하고 너무 부족했습니다.
우리가 이 앞일을 생각해 볼 때에, 앞에 얼마나 더 험한 물결과 험한 세계가 닥쳐올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때에 이러한 땅에서 우리 영락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전보다 좀 잘해야 되겠습니다. 좀더 위대한 음악을 이 사망으로 들어가는 민중들에게 들려 줘야 되겠습니다.
그리해서 이 민중을 영적으로 구원하고 정치, 경제, 문화, 각 방면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입해 줘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책임이 무엇인지 압니까? 이 큰 악대의 한 대원이 된 우리 하나 하나가 내가 받은 악기가 무엇인가를 꼭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받은 이 악기를 가지고 내가 사용하는가? 아니면 구석에 묻어 두고 마는가? 내가 받은 악기로써 하나님을 위해서 찬송을 하며 연주하는가? 내가 받은 은혜를 가지고 사실 봉사하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기억하십시다. 내가 받은 악기를 가지고 연주하되 오직 한 지휘자 그리스도 아래에서 한 곡조를 일시에 일치하게 연주하는가? 우리 가운데 이와 같은 큰 악대의 음악은 더러 듣지마는 이런 악대에 입대하지 않은 분이 혹 있습니까? 그런 분이 있으면 오늘 입대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一九六四년 十二월 六일)
Ⅵ-40 성경을 아는가? (디모데 후서 三장 十-十七절)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을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三·十五-十七)
오늘 十二월 둘째 주일은 세계적으로 지키는 성서주일입니다.
이 날 성경은 어떠한 책인가를 한 번 더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물론 여러분께서 성경이 어떠한 책인 줄은 대강 아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한 번 더, 우리가 분명히 이 시간에 몇 가지를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모든 책 가운데 가장 많은 공격을 받은 책입니다. 사상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옛날 셀레우스(Celeus)라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十八세기의 볼태르(Boltair)같은 사람과 현재 파괴적 비판자에게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공격을 하였습니다.
또 성경은 가장 박해를 많이 받은 책입니다. 로마제국에서 큰 핍박이 있을 때에, 항상 성경을 빼앗아서는 불살랐습니다. 중세기에는 천주교회에서 성경을 박해했습니다. 즉 일반이 읽지 못하게 금했습니다. 현대에는 공산당들이 성경을 박해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지금도 성경은 세계의 어떤 책보다도 제일 많은 방언으로 번역된 책입니다. 제가 알아보니 현재 一천二백二十三 방언으로 번역이 되었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방언으로 번역된 책은 다시없습니다. 또 성경은 지금도 세계의 어떤 책보다도 제일 많이 팔리는 책입니다. 요새 말로 베스트 셀라(best seller)입니다.
작년에 여러 성서공회를 통해서 판매된 부수가 아마 쪽 복음까지 포함해서 四천九백八十七만七천四백二十八권이라고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만 반포된 수가 九三三만五천六백六十一권이라고 합니다. 거의 一천만 권에 가깝습니다. 세계에 이렇게 많이 반포되는 책은 없습니다. 지금도 성경은 어떤 책보다도 제일 많이 읽는 책입니다. 학생도 읽고, 청년들도 읽고, 노인들도 읽고, 남자 여자, 학자, 정치가, 과학자,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읽는 책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성경은 무적의 책입니다. 대적이 없는 책입니다.
十八세기 불란서 자유사상가 볼테르 같은 사람은 그 때부터 약 五十년 후에는 이런 책을 익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혹평을 하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五十년 후에는 그이가 앉아서 그 이야기를 했던 그 집이 바로 성서공회가 되어서 마루에서 천장까지 성경으로 가득 쌓이게 되었다고 하는 유명한 이야기는 우리가 다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데모데 후서 二장 九절에 사도 바울이 기록한 바와 같이『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메이지 아니 할』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메이지 않습니다. 이런 책은 온 세계의 하늘 아래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유일무이한 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이 성경은 여러분이 방금 들으신 대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입니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디모데 후서 三장 十六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후서 一장 二十一절에『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만한 것임이니라』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선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한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요한 복음 十四장 二十六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보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가르치시고 성령이 생각나게 하신 대로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책이 많지마는 이런 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이런 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근원이 하나님께로 서 났습니다.
둘째로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말이 아닙니다. 제가 학생시절의 신앙 경험을 회고해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말이 제일 이해하기가 곤란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개인의 전기도 있고,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도 있고, 문학도 있고, 편지들도 있고, 여러 사람의 말들이 가득 있고, 심지어 마귀의 말도 있습니다.
어찌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가? 그런 의심이 항상 들었습니다.
그후에 점점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온 우주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그 자신의 실재와 그 뜻을 나타낼 것만은 사실일 것입니다.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 영원히 침묵하실 것은 아닙니다. 사실 자연계를 통해서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이 자기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시편 十九편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궁창(穹蒼)이 그 손으로 지은 것을 나타내어 보입니다.
날은 날에게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합니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일반적으로 인간의 양심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그 뜻을 나타내십니다. 혹은 세계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공의를 나타내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구속적인 활동과 그 말씀으로써 히브리 백성을 통하여 자기를 분명하게 나타낸 기록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그에게 그 자신을 나타냈습니다. 이삭에게도 그러했습니다. 야곱에게도 그러했습니다. 모세를 특별히 불러서 그에게 그 자신을 나타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속하심으로 구속적인 하나님인 것을 더 분명히 나타냈습니다.
여러 선지자를 통해서 그의 고의를 나타내시고, 사랑을 나타내시고, 그의 성품을 더 분명히 나타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그 아들을 통하여 친히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주셨습니다. 요한 복음 一장 十四저에는『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동색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아들을 통해서 친히 자기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시고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여러 시대, 여러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계시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통하여 창조의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출애굽기를 통하여 구속의 하나님을 나타냈습니다. 레위기를 통하여 성결(聖潔)의 하나님을 나타냈습니다. 이렇게 모든 책이 하나님을 나타냈습니다. 구약의 역사도 하나님을 나타냈습니다. 개인의 전기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나타냈습니다.
그리해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활동, 하나님의 모습을 정면 적으로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결국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실 말씀을 다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전체적으로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이 말씀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이 성경의 중심은 구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은 장차 오실 구주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신약성서는 이미 오신 구주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본 교회 이광혁 장로님께서 신약성서를 한 장에 그림으로 쓰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십니다. 신구약성서를 한 장에 쓴다고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의 얼굴과 성품과 말씀을 생활로써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성경은 십자가에서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그리스도를 죄와 비참(悲慘)과 슬픔과 사망에 헤매 이는 인류에게 보여주십니다.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넷째로 성경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오직 하나님입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고자 하는 목적입니다. 그리해서 요한 복음 三장 十六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전기를 거의 다 써 내러가다가 요한 복음 二十장 三十一절에 이런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예수 님의 기록을 다 쓰려고 하면 이 세계가 오히려 다 두지 못하겠지마는『오직 이것을 기록한 것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하나님께서 이 성경 말씀을 주신 목적을 가장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입니다. 인간을 죄악 가운데서 구속해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 성경을 이렇게 지금까지 많이 읽고 많이 보급됩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인류에게 구주 되시는 그리스도를 보여주십니다. 선경의 목적은 인간을 죄악 가운데서 구속해서 새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고 저 하는 데 있는 까닭입니다.
먼저 개인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우리가 이 성경을 읽으면 어떠한 축복을 받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 고대 역사와 고대 문화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성경을 읽으면 이 가운데서 구주를 발견해서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됩니다. 악한 사람이 변해서 선한 사람이 됩니다. 음란한 사람이 변해서 성결한 사람이 됩니다. 거짓된 사람이 변해서 진실한 사람이 됩니다. 살인강도라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대로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세상에 물론 위대한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사이 미국 대학에서는 소위 위대한 책에 대한 과목이 있습니다.
동서고금의 위대한 책들을 통독시키는 과목이 특별히 생겼다고 합니다. 플라톤이니 아리스토틀이니 칸트니 혹은 동양의 논어니 맹자니 도덕경이니 이런 모든 위대한 책들을 한 번 읽어보도록 많은 힘을 쓴다고 합니다. 세상에 위대한 책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책을 읽어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알고 구주를 만나서 새 사람이 되는 책은 성경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에 성경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새 사람이 되었지마는 아직 어립니다. 이 어린아이가 자라야 합니다. 자라기 위해서는 젖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젖이 필요합니다. 이 성경은 도의 적입니다. 생명의 양식입니다.
성경을 계속해서 읽을 때에 심령이 자라고 건강하고 힘을 얻습니다. 성경을 읽음으로 모든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슬픈 일을 당할 때에도 위로를 받고, 사업에 실패하고 낙심할 때에도 새로운 용기를 얻고, 성경을 통해서 약할 때에도 새로운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은 매일 매일 좋은 음식을 먹는 사람과 같습니다. 강건하고 튼튼히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 신앙에 유일한 표준입니다. 전통이 신앙의 표준이 아닙니다. 이성이 신앙의 표준이 아닙니다. 이단과 사설이 횡행하는 이러한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앙의 정로(正路)를 밟아갈 수 있는가? 성경을 읽고 그대로 믿으면 신앙의 정로를 밟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섯째로 성경은 행위의 정확 무오(無誤)한 표준입니다. 성경 가운데에는 지고의 윤리가 있습니다. 성경은 최고의 도덕적 법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열 가지 계명을 비롯해서 산상보훈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간이 인간으로서 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해야 될 모든 규례를 분명하고 똑똑하게 가르쳐 줍니다. 행위의 정확 무오 한 표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 우리에게 양식이 됩니다. 우리 신앙의 표준이 됩니다.
전에 라볼드 잉그솔이라고 하는 무신론자가 역시 그 때에는 믿지 않던 친구 류 월리스(Lew Wallace)라고 하는 장군에게 기독교를 반대하는 책을 쓰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그 권면을 듣고 그런 책을 쓰기 위해서 붓을 잡게 되었는데, 반대하는 책을 쓰려니까 부득이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단 말입니다. 알려고 하니까 부득이 성경을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생각이 점점 변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회개하고 오히려 성경의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리해서 그분이 결국 무슨 책을 썼는지 압니까? 한국에서도 영화로 상영되어 우리가 다 본「벤 허」라고 하는 유명한 소설을 썼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생활을 묘사하는 그런 책을 썼습니다. 선경의 감화력이 이렇습니다. 성경을 반대하고 성경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내용을 알아보면 열이면 열 모두가 성경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전에 프린스톤에 잭 윌슨 박사라고 하는 유명한 구약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프린스톤대학 학생 몇 명이 와서 그 윌슨 박사에게 우리는 구약의 이것도 믿을 수 없고 저것도 믿을 수 없는데 토론 좀 하려고 왔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늙은 박사가 그 말을 듣더니 웃으면서 토론하는 것도 좋은데 성경을 토론하겠다니 성경을 몇 번이나 읽어보았는가 고 물어보았습니다. 학생들은 성경을 한 번도 못 읽어보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박사가 나는 적어도 四十년을 밤잠 안 자면서 몇 백 번을 읽고 연구했어도 믿지 못할 것이 없는데 우선 몇 번 읽고 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보통 성경을 읽지 않고 반대합니다. 우선 몇 번 읽어보세요. 그러면 문제는 성경 자체가 여러분에게 대답해 드릴 것입니다.
바로 내일 모래 十二월 十일이 세계 인권 선언일 입니다. 바로 이 주간이 인권옹호주간입니다. 한국에 있어서 얼마나 적절한 주간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인권이니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사상의 원천이 어딘지 기억하십니까? 그것은 성경입니다. 성경이 가는 곳마다 인간을 죄에서 해방했습니다. 무지에서 해방했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모든 구속에서 해방했습니다. 노예제도도 없어졌습니다. 계급도 타파되었습니다. 남존여비사상이 물러갔습니다. 만인평등의 사상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 원천이 성경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전에 토마스 훅실러는『성경은 가난한 자와 피압박자의 대헌장이다. 인간은 성경이 없이는 살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자유의 대헌장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은 모든 박애와 자선사업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사회에서 병원이 먼저 생기고, 고아원이 생기고, 양로원이 생기고, 적십자운동이 생기고 심지어 동물에까지 친절히 하자고 하는 모든 인도주의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이 문화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을 우리가 다 기억합니다. 성경이 가는 곳에는 지적으로 인간을 해방했습니다. 미신을 타파했습니다. 학문의 연구를 권장케 했습니다. 종교개혁으로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이후에 자연과학고 발전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최고의 문학과 최고의 예술과 최고의 음악은, 성경의 감화 가운데서 되었다고 하는 것도 우리가 기억합니다.
성경이 가는 곳에 그 사회도덕이 자연히 향상됩니다. 자연히 일류가 살 만한 사회가 됩니다. 범죄를 하는 사람이 적어집니다. 이렇게 성경은 국가 흥망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 영국 빅토리아 여왕 때에 어떤 외국사절이 와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다가 영국이 이와 같이 나라가 흥왕 하게 된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니까, 책상에 있는 한 책을 가리키면서 저 책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책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오랜 책 같지마는 항상 새로운 책입니다. 성경 가운데 새로운 진리가 무진장으로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성경 가운데 우리 인류가 찾아내지 못한 진리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十六세기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진리가 발견되어서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十八세기, 十九세기에는 온 세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는 이 진리가 새롭게 발견되어서 세계선교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성경 가운데서 발견되어서 신 구교를 막론하고 이른바 에큐메니칼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오랜 책 같지마는 항상 새로운 책입니다. 교회는 성경을 중심 해야 부흥합니다. 성경을 상고하는 교회가 발전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성경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의 뜻이 여기 있습니다. 중세기 전통의 구각(舊殼)을 탈피해서 성경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온 것이 종교개혁의 운동이었습니다.
지난 주가에 로마에서 제二차 바티칸회의가 폐회되면서 미사 때에 라틴말을 쓰지 않고 자기 나라 말을 쓸 수 있는 것을 허락하고, 혹은 다른 교파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허락했다는 등의 좋은 소식을 듣고 우리가 다 환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좀 더 성서에 가까이 와야 하겠습니다. 성상문제, 마리아 예배문제, 미사문제, 교황 독재정치 문제, 이런 모든 것들이 좀더 성경에 가까이 와야 신 구교회의 합동문제는 토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교회가 돌아와야 합니다. 개인도 그렇습니다. 개인의 신앙도 언제든지 성경을 중심 해야 됩니다. 이성을 너무 따라가지 마십시오. 감격에 너무 따라가지 마십시오. 행동에만 너무 따라가지 마십시오. 언제나 성경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실수가 없습니다.
경경을 읽고,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목상하고, 성경을 전파하고, 성경대로 살고, 성경대로 죽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서주일을 맞이해서 이 몇 가지를 스스로 물어보세요.
첫째는 우리 가정에서 이렇게 귀한 성경을 매일 읽는가요? 내가 이 성경을 매일 읽는가요?
둘째로는 주일에 나와서 예배 드리지마는 성경 공부도 하는가요?
셋째는 삼일기도회에 참석해서 공부하는가요?
넷째는 성경 보급에 협력하는가요? (一九六四년 十二월 十三일)
Ⅵ-41 빠른 세월 가는 인생 (시편 九十편 一-十七절)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九十·十)
시편 九十편 十절의 하 반절에『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 신속히 간다는 말입니까?
세월이 신속히 간다고 하는 뜻입니다. 세월이 빠릅니다. 무엇이 날아갑니까? 우리가 알아간다는 말입니다. 인생이 날아간다는 말입니다. 빨리 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든 이런 생각이 없으리요 마는 특별히 이렇게 한 해가 다 저물어 가고 마지막 주일로 모이게 될 때에 세월이 빠르다고 하는 느낌을 더욱 새삼스럽게 가지게 됩니다. 세월이 빠른 것은 우리 인생이 속히 간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어제 사무실에서 물어보니 금년에 본 교회 안에서 세상을 떠는 우리 교우들의 수가 일 백 한 명이라고 합니다. 일 백 한 명의 우리 교우들이 금년 一년 동안에 교회의 교적을 떠나서 천국의 국적으로 옮겼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현실입니다. 빠른 세월 가는 인생입니다. 오늘 이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九十편은 모든 시 가운데에서도 가장 위대한 시 중의 하나입니다. 모세의 기도, 혹은 모세의 인생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제목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성의 순간 성입니다. 그 시상이 웅대하고 문장이 미려하고 의미가 심장 하였습니다.
어떤 주석 가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이 시는 아름다운 종교시이나 봄날 하늘 높이 즐겁게 부르는 종달새의 노래가 아니라 그보다는 쓸쓸한 가을날 나뭇가지에 외로이 앉아 우는 라빈의 몇 마리의 노래일 것이다.(라빈은 새의 이름이다) 고요한 밤저녁에 외롭게 우는 두견의 노래를 연상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엄숙한 면을 가르치는 노래입니다.
이 시편 九十편 一절로 十절까지는 인생의 이런 면을 묘사하는 내용입니다.
三절에 보니『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이런 글귀가 있습니다.『인생들아 너희는 돌아가라 하셨사오니…』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돌아가는 인생입니다. 그 육체는 티끌에서 났습니다. 티끌로 돌아가는 게 인생입니다. 백골로 돌아갑니다. 진토로 돌아갑니다.
五절에 보면『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홍수처럼 쓸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 뜻은 갑자기 많은 생명이 일시에 가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재지변, 혹은 큰 사고, 큰 전쟁을 당할 때, 우리가 친히 목도하는 인간의 현상입니다. 홍수처럼 쓸어갑니다. 일전에 신물을 보니 우리 서울에서도 매三十분에 한 사람씩 죽는다고 합니다. 전세계적으로 보면 매분 홍수처럼 쓸어 가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제가 처음으로 뉴욕엘 갔을 때, 이층 부스를 한 번 타고 구경을 했습니다. 거기는 이층 버스가 있는데 왜 이층 버스를 탔느냐 하면 이층에 올라가 타야 높아서 내려다보면서 구경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이층 버스를 타고 한 바퀴 도는데 아마 타운스퀘어 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한 곳에 가니 아주 넓은 마당인데 사람이 수천 명, 수만 명 들끓고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만일 백년 후에 다시 이 자리에 와서 선다고 하면 오늘날 여기서 움직이던 이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본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五절에 보니『잠깐 자는 것 같고』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인생 일장이 한 잠 잠깐 자고 깨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잠깐 자고 깬다는 것은 꿈과 같다는 말입니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말을 우리가 종종 듣습니다.
六절에는『아침에 돋는 풀 같습니다.』이런 구절이 있습니다.『아침에는 자라가다 저녁에는 배인바 되어 마르나이다.』이런 뜻입니다. 예언자 이사야 도 四十장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나 오직 여호와의 말씀은 세 세에 있느니라.』인생을 잠깐 있다 마르는 풀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九절에 보면 심지어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여러분, 인식간이라고 하는 말뜻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보통 읽으면 그 뜻을 모르고 읽습니다. 일신간이란 무슨 뜻입니까? 다른 뜻이 아닙니다. 숨 한 번 쉴 사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영어성경에는 하품 한 번 하는 사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품 한 번 하는 것이 얼마나 깁니까? 하품 한 번 하는 잠깐 사이에 우리의 평생이 지나간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저 잠깐이라는 말입니다. 순간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 마지막에 후―하고 숨 한 번 내 쉬면 그만입니다. 그게 인생이란 말입니다. 무상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十절에 보니『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하는 글귀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글귀를 읽을 때에 자연히 인생 칠십은 고래희(古來稀)라고 하는 유명한 동양의 시인 두보(杜甫)의 명구를 연상하게 됩니다. 동서양의 철인의 말이 어떻게 그렇게 부합되는지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보통 七十 살면 잘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많이 가지마는 사실 제 경험으로 보더라도, 보통 六十 이상 七十 내외에서 많이 갑니다. 주보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벌써 환갑 지나면 날이 저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갈 길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연수의 자랑은 어떻다고 했습니까?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동양에도 수즉다욕(壽則多辱)이란 말이 있습니다. 조금 오래 살면 욕되는 일이 많다고 하는 뜻입니다.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수고에는 내적 수고가 있습니다. 죄와 그 고민을 의미합니다.『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은밀한 죄를 얼굴 빛 가운데 두셨나이다.』이런 심각한 글귀도 있습니다. 잠깐 되는 세상을 살지마는 죄와 그 고통이 심합니다.
또 외적 수고가 있습니다. 환난과 재난이 많은 세상입니다. 질병과 사망이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슬픔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좀 오래 살면 얼굴에 주름살이 잡히는데 그 주름살마다 눈물이 흐른 자취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인간의 모습을 어떻게 묘사했습니까? 인간은 잠깐 되는 것이요. 또 수고와 슬픔이 많은 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이 육신 면으로 보는 인생의 현실입니다. 세월은 빠른데 인생도 또한 빨리 갑니다.
이러한 인생의 현실을 직면하게 될 때, 우리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여기 중요한 기도 둘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十二절에 있습니다.『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 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우리 날의 수를 헬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 날의 수가 정해 있습니다. 사람마다 이 세상에 와서 몇 해, 몇 달, 몇 날 살 수 있는 날의 수가 정해 있는데 이것을 미리 헤서 알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을 날이 있는 것을 기억하게 해 달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것이 지혜의 마음입니다. 우리 날의 수를 헤 일 줄 아는 것이 지혜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다 잘 아시지요? 어떤 곳에 부자가 있는데 그 해에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곡간이 좁아서 쌓을 수 없습니다. 곡간을 더 크게 지었습니다. 많은 곡식을 곡간에 쌓았습니다. 마음이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자신과 자문자답을 합니다.『내 영혼아 여러 해 쓸 것을 많이 쌓아 주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이렇게 아주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무슨 말씀을 했습니까?『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내가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왜 어리석습니까? 자기 날을 헤 일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습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자기 날의 수가 한정된 것을 모릅니다. 그저 세상에 늘 살 줄 압니다. 그래서 욕심도 많이 부리고 시기를 하고, 질투를 하고, 싸움을 하고 어떤 때는 살인강도질도 합니다.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자기의 날이 한정되어 있는 것을 모릅니다. 지혜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날을 계수 한다고 하는 말은 결국 하루하루를 허비하지 않고 귀중히 쓴다고 하는 뜻이 있는 줄 압니다.
성경에 보면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가 악하다고도 했습니다. 서양 속담에 시간은 돈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보다 더 귀합니다. 시간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한 시간을 낭비하면 한 시간의 생명이 그저 없어집니다. 돈은 잃어버렸다가 혹 다시 찾을 수 있지마는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생명은 다시 찾을 길이 없습니다. 시간이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해서 한 시간 한 시간을 바로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부지런 하라고 권면 합니다.『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
우리의 날을 계수 한다고 하는 말은 그 날에 할 일을 꼭 그 날에 한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혜의 마음입니다.
우리 날에 끝이 있는 것을 알고 제한된 것을 알아서 하루하루, 아니 한 시간 한 시간을 귀하게 바로 쓸 줄 알고 내 책임을 다할 줄 아는 것이 지혜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지혜를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육신의 일생은 이렇게 잠깐이니 이 세상만을 위해서 살면 안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내세를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니라』고 가르쳐 줍니다.『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 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 이다.』 대대로 우리 영혼의 거처 가 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큰 지혜의 마음입니다.
이 순간적인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처럼 미련하고 가련한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시는 예수를 모르고 사는 것처럼 한심한 일은 없습니다. 지혜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十四절에 기도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여기 아침이라고 하는 말은 하루의 아침이 아니고 인생의 아침을 가리킨 것입니다. 인생을 하루로 보면 아침이 있고, 낮이 있고, 저녁이 있습니다. 소년시대 청년시대는 아침입니다. 중년시대는 낮입니다. 노년시대는 저녁, 황혼의 때입니다. 여기서는 인생의 아침 즉 소년시대에 주의 인자를 받아서 주님을 섬기는 도를 깨닫고 옳은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전도서 十二장 一절에『너는 청년의 때…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청년시대에 은혜를 받아서 옳은 길을 가게 하여 달라고 시도하였습니다. 젊은 시대에 옳은 길을 걷기 시작하면 평생에 즐겁고 기쁜 생활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인생이 잠깐이요, 수고와 슬픔이 많지마는 젊을 때부터 참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인생의 아침에 바른 길을 택해야 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어떤 책을 보니 스위스의 어떤 노인이 약 八十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강건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八十년을 사는 동안에 자기의 시간을 어떻게 썼나 한 번 조사해 봤다고 합니다. 그랬더니(확실한 조사인지 모르지만) 二十六년간은 침상에서 누워만 있었습니다. 아마 잠을 넉넉히 잔 모양입니다.
또 二十一년간은 일만 했습니다. 六년 동안은 음식 먹는데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음식도 굉장히 많이 잡수신 모양입니다. 또 다른 六년 동안은 불쾌하고 노한 중에 지냈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한 모양입니다. 五년 동안은 다른 사람이 시간 안 지키기 때문에 남을 기다리느라고 허비(虛費)를 했다고 합니다. 사실 시간을 안 지키는 것은 큰 골치입니다. 남 때문에 허비한 시간이 五년 동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二二八일 동안 수염 깎는 데 허비했다고 하였습니다. 또 二十六일은 아이들을 욕하는 데 허비했다고 하였습니다. 손자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또 十八일 동안은 넥타이 매는 데 허비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모으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모양입니다.
또 八十일 동안은 코 푸는 데 허비했다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시간이 가는 모양입니다. 열 이틀 동안은 담배 불 붙이는 데 허비됐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담배 피운 시간은 그보다 더 길 것입니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데만 열 이틀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저 기쁨과 웃음으로 지낸 시간을 잘 계산해 보니 마흔 여섯 시간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날을 어떻게 계수 하십니까? 여러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십니까?
주후(主後) 七세기초에 복음이 처음으로 영국에 전파될 때의 이야기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 때에 영국은 적은 나라 여섯으로 나뉘어 있던 때입니다. 그 나라 가운데 노듬브리아(Northumbria)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곳에 에드워드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어떤 전도자가 그 왕에게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왕이 자기 혼자는 암만 생각해야 확실히 알 수 없어서 하루 저녁은 연회를 베풀고 모든 신하를 다 초청해서 저녁을 잘 대접한 후에 이 문제를 꺼냈습니다.『어떤 이가 와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예수를 ale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 하는 것을 토론해보자』고. 그러니까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어떤 늙은 재상이 일어나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이렇게 가끔 저녁에 불을 켜고 연회를 하게 될 때, 밖은 어둡고 마침 비가 오고 바람마저 불게 되면, 참새란 놈이 창으로 날아 들어와서는 이 밝은 방안을 한 번 휙 돌고 저편 창문으로 도로 나가는 그런 경우를 보지 않았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우리 인생이 그 참새와 비슷합니다. 이 밝은 세상에 잠깐 와서 사는데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고 마지막에 어디로 가는지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새로 들어온 종교가 우리 인생의 이 깊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하면 우리는 이 종교를 믿어야 될 줄 압니다.』이렇게 말할 때에 모든 신하들이 다 옳게 여겨서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인생의 이 깊은 뜻을 해결해 주는 종교입니다. 순간적인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주는 종교입니다. 인생이 비록 잠깐이나 이 동안에 영원한 거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생활의 최고목표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요. 인간 지혜의 최고의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날을 계수 하는 지혜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의 하루하루 아니 한 시간 한 시간을 천금같이 아끼면서, 바로 사용하고 위로는 하나님을 봉사하고, 아래로는 모든 사람 즉 민족과 국가를 봉사하면서 사는 것이 참된 지혜 있는 생활인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인생의 아침에, 일찍 젊었을 때, 이 진리를 깨닫고 이대로 나아가면, 비록 수고가 많고 슬픔이 많은 이 세상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만족히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 九十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이 참된 진리의 길을 찾지 못한 이가 있습니까?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오늘 이 시간에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一九六四년 十二월 二十七일)
<한경직 목사 설교집 제6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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