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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韓景職牧師說敎全集(9)

새벽지기1 2017. 1. 28. 18:19
韓景職牧師說敎全集(9)

목 차
간행사..........................................................................................................................三
.........................................................................................................................五
Ⅸ-1 ..........................................................................................................一一
Ⅸ-2 ..................................................................................................................二二
Ⅸ-3 ....................................................................................................三0
Ⅸ-4 ........................................................................................................四0
Ⅸ-5........................................................................................................五一
Ⅸ-6 .................................................................................................................六0
Ⅸ-7..................................................................................................六九
Ⅸ-8 ......................................................................................................八0
Ⅸ-9 ......................................................................................................九0
Ⅸ-10 .................................................................................................九六
Ⅸ-11 ..........................................................................................................一0八
Ⅸ-12 ..............................................................................................一一九
Ⅸ-13 .............................................................................. 一三0
Ⅸ-14 ............................................................................................................... 一四一
Ⅸ-15 ...........................................................................................................一五一
Ⅸ-16 ................................................................................................... 一六0
Ⅸ-17 ........................................................................................................... 一七0
Ⅸ-18 ...................................................................................... 一八一
Ⅸ-19 .......................................................................................... 一八七
Ⅸ-20 ..................................................................................................... 一九六
Ⅸ-21................................................................................................. 二0五
Ⅸ-22 .................................................................................... 二一三
Ⅸ-23 .................................................................................... 二二三
Ⅸ-24 ...................................................................................................... 二三四
Ⅸ-25 ........................................................................................ 二四四
Ⅸ-26 ..................................................................................................... 二五二
Ⅸ-27 ............................................................................................... 二六二
Ⅸ-28 ......................................................................................................... 二七一
Ⅸ-29 ...................................................................................................... 二八二
Ⅸ-30 ................................................................................. 二九0
Ⅸ-31 ................................................................................................三0 一
Ⅸ-32 ......................................................................................................... 三一二
Ⅸ-33............................................................................................................... 三二一
Ⅸ-34 ............................................................................................... 三三0
Ⅸ-35 ............................................................................................... 三四一
Ⅸ-36 ......................................................................................................... 三五二
Ⅸ-37 ...................................................................................................................... 三六一
Ⅸ-38 ......................................................................................... 三七二
Ⅸ-39 .......................................................................................................... 三九六
Ⅸ-40 ........................................................................................................... 四二三
Ⅸ-41 ....................................................................................................... 四五一
Ⅸ-42 ..................................................................................................... 四六三
Ⅸ-43 .................................................................................................................. 四七0
Ⅸ-44 ..................................................................................................四八0
Ⅸ-45............................................................................................................................ 四九三



Ⅸ-1 권위자 바나바 (사도행전 十一장 十九-三十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 十一·二十四)
성경을 읽는 중에 어떤 개인에게 대해서 이렇게 크게 칭찬한 구절은 다른 곳에서 별로 찾아보지 못할 줄 압니다. 그러나 여기 바나바에 대해서는『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바나바는 과연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나바라는 이름은 자기의 본명이 아닙니다. 자기 본래의 이름은 요셉이올시다. 그는 구브로라고 하는 섬에서 태어난 유대 사람이요 레위 지파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예수를 믿은 후에 사도들로부터 바라바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라고 하는 이름은 권위자, 권위의 아들, 또는 권면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이 시간 바나바의 생활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국에도 저명하다 하는 이들은 자기 본 이름 외에 호라고 해서 별명을 가지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런 이름들은 혹 친구가 지어 주는 수도 있지마는 보통은 자기가 짓는 것 같습니다. 그리해서 별로 이 이름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별명들은 다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에게는 이스라엘이라는 특별한 별명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승리자라고 하는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시몬에게 베드로라 하는 별명을 주었습니다. 반석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옛날 한국의 풍속을 보면 남자들은 물론 이름이 다 있지마는 여자들은 특별한 몇 사람 외에는 별로 이름이 없었습니다. 아마 청년들은 잘 모를 것입니다. 흔히 아명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렸을 때는 작은 놈이니 큰 놈이니 곱단 이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었지만 다 장성한 후에는 별로 이름이 없었습니다. 김씨, 이씨, 한씨라고 흔히 부르고 결혼하게 되면 아무개 처라고 한다든지 또 아기를 낳으면 아무개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의 많은 부인들이 이름을 갖게 된 곳이 있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교회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게 되고 이름을 쓰려고 할 때에 이름이 없어서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이 때에 붙여 준 이름이 다 좋아요. 반석이니 진실이니 성도니 신도니 하는 좋은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후에 다른 여자들도 다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여성들은 이름을 가지게 된 것만도 복음이 들어온 덕분이라고 볼 수 가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장성한 사람도 세례 받을 때에 성경의 이름을 주는 풍속이 있습니다. 그것도 뜻은 있어요. 그러나 우리 신교에는 그런 풍속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四장 三十七절에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나바가 어떻게 이와 같은 이름을 받게 되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 족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놓으니라』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초대 교회에서 오순절의 큰 은혜를 받은 후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밭을 팔아서 사도의 발 앞에 놓아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유무상통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이런 일을 한 모양인데 성경을 보면 특별히 바나바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한 사람이 더 있는데 그것은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팔기는 팔았지만 다 바치지 않아 벌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바나바의 이름이 특별히 기록된 것을 보면 확실히는 모르나 바나바가 제일 먼저 이런 일을 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서양에『본이 말한다』하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철저한 신앙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증거가 여기에도 나타납니다.
이분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가난한 이들을 돕는다는 것은 성령의 첫 열매인 사랑이 그 동기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성령이 충만하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착한 사람 바나바가 먼저 교회 안에서 이런 운동을 일으켜서 헌금과 봉사 운동의 격려자가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九장 二十六절에서 二十七절까지에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바울이 회개하기 전에는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울은 철저한 바리새 교인으로서 우리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생각하여 아주 핍박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잡아다가 가두기도 하였습니다.
마지막에는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가지고 다메섹까지 가서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려고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도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길가에서 만나 그 음성을 듣게 되었고 그만 그 자리에서 쓰러져 옛날의 사울은 죽고 새로운 바울로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다메섹에 들어가서 경건한 아나니아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고 며칠 후에 새로운 힘을 얻어 예수 님께서 과연 메시야요 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부활하신 것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에서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곳에 있던 유대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하여 밤중에 다른 형제들의 도움으로 바울은 광주리를 타고 성밖으로 탈출하여 예루살렘으로 도망 오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도망을 왔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二十六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했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간첩이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저 녀석이 교회를 그렇게 핍박하더니 갑자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며 우리 가운데 들어온다고 하니 무슨 심리를 가지고 그러는지 어떻게 알겠느냐 하며 믿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바나바가 나섰습니다. 바나바가 이 사울을 먼저 접촉한 모양입니다. 모든 사정을 다 들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먼저 사울을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이 사람이 다메섹에 가다가 부활한 예수 님을 만났다는 것과 세례를 받은 일과 거기서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 하다가 핍박을 받아서 이리로 도망했다는 얘기를 다 고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과거에는 우리 기독교를 핍박한 사람이지마는 이제는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으니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제서 야 사도들과 예루살렘 성도들이 이 회개한 사울과 성도의 교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바나바의 착한 성품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을 믿어 주는 성품, 전에는 실수했으나, 그것을 용서해 주고 용납해 주는 관용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복음은 어떤 사람이라도 변화시켜서 새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복음의 능력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착한 사람인 바나바는 성경과 믿음이 충만한 가운데서 사도 바울을 용납하여 그로 하여금 장차 큰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바나바의 얘기가 오늘 아침 읽은 성경 본문 말씀 사도행전 十一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이 큰 핍박을 받아서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다음에 여러 성도들이 각처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로, 다른 이들은 또 다른 곳으로, 이렇게 여러 곳으로 흩어져서 그들이 가는 곳마다 예수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다 유대 사람에게만 전도하였습니다. 빌립 외에는 말입니다. 그 때까지 믿은 사람들은 이 복음은 이방 사람까지 구원하는 복음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같은 사도도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은 후에야 고넬료의 집에 가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던 때입니다.
그 때에 구브로와 구레네에서 예수를 믿는 몇 사람이 당시의 큰 교회인 수리아 안디옥 교회로 와서는 유대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헬라 사람, 같은 이방 사람에게도 전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이방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방 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믿고 회개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소문을 예루살렘 교회가 듣고 이방 사람들이 교회로 많이 들어오니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는 것과 그 형편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하여 바나바를 그 곳에 파송하였습니다. 가보니 과연 많은 이방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때에 바나바가 마음이 좁은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런 현상을 보고, 이 사람들이 어제까지도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로 할례도 못 받은 자들인데 갑자기 예수를 믿고 열심히 기독교에 들어오고 있다고 하여 이들을 그대로 교회라고 인정하기는 어려우니 좀 더 두고 보아야겠다는 보고를 예루살렘교회에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큰 은혜를 받은 것을 보고 마음에 기뻐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 것을 기뻐하여 권면(勸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권면할 때에 단 한가지 말을 하였습니다. 『굳은 마음으로 주 예수께 붙어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처럼 예수에게 붙어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할례 받으라는 말도 안 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지키라는 말도 안 했습니다. 그저 굳센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로만 굳게 잡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안디옥의 교회가 더 크게 발전되어 이방사람 중심의 교회가 기독교 역사상 처음 생긴 것입니다.
여기에 바나바의 넓은 마음과 바나바의 착한 성품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닙니다. 바나바는 자기 혼자서 모든 사람을 인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일할 사람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바울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예루살렘에 와서 사도들에게 양해를 얻고 열심히 전도하다가 유대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하기 때문에 가이사랴로 피했다가 자기 고향인 길리기아 다소로 가서 그때까지 약 八, 九년 동안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자기가 친히 먼길을 걸어서 길리기아 다소까지 가서 사울을 데려다가 두 사람이 같이 안디옥 교회를 봉사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역사를 읽어보면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제네바에서 윌리엄 화렐이라는 사람이 종교개혁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자기 혼자는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에 마침 젊은 사람 존 칼빈이 지나가다가 제네바에서 하루를 지낸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칼빈을 권면하여 마침내 그를 제네바에 머물게 함으로써 종교개혁의 큰 역사를 이룰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울과 같이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교회를 봉사하는 가운데 문자 그대로 교회의 촛불이 예루살렘에서 이방 교회 안디옥으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수리아 안디옥이 큰 부흥과 선교의 기지가 되었습니다. 때마침 유대와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어서 많은 사람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듣고 안디옥 교회에서는 많은 선물을 거두어서 사울과 바나바를 시켜 예루살렘으로 보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얼마 후에는 성령의 지도를 받아서 바나바와 사울이 같이 안수를 받고 파송을 받아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 선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을 위대한 지도자로 내세운 이가 바나바입니다. 위대한 지도자 바울 뒤에는 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고 착한 사람 바나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가지 얘기만 더 합시다. 이렇게 바나바와 사울이 같이 다니면서 외지 전도를 한 후에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보고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나바나 바울이 첫번 전도지로 떠날 때에 젊은 사람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안 데리고 가느냐 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마 마가가 크게 후회를 하고 자기 삼촌 바나바에게 와서 전에는 자기가 잘못하였으니 용서하시고 같이 가게 해 달라는 부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바나바는 용서해 주고 데리고 가자고 주장하였고 바울은 거절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바라바와 바울은 성경에 기록한 대로 크게 다투었다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들도 다툴 때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서로 헤어졌습니다. 바울은 다른 청년 실라를 데리고 갈라디아 지방으로 가고 바나바는 생질되는 마가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이에 대해서 누가 옳고 그르다는 것을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편에 다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에서 보면 그는 일을 중심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청년을 데리고 가보아야 일이 잘 안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람을 중심해서 생각한 모양입니다. 젊은 사람이 한번 실수를 했으나 용서해달라고 하니 아주 버리면 되겠느냐, 다시 좋은 길을 열어 주어야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갔는데 그 후에 마가는 바나바를 도와서 여러 곳에서 전도를 했고 바나바는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는지 바나바에 관한 그 이상의 기록은 없습니다.
한편 마가는 베드로를 도와서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전도하다가 베드로로부터 예수 님의 생활에 대한 예기를 자세히 듣고 제일 먼저 마가복음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그 후 사도 바울이 나이 많아서 늙었을 때에 마지막으로 쓴 디모데 후서 四장을 보면 디모데에게 『네가 올 때에 마가를 꼭 데리고 오라』고 하며 마가는 매우 유익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빌레몬에게 한 편지를 보면『나의 동역 자 마가도 너희에게 문안한다』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마가라는 청년은 그 때에 참으로 회개하고 좋은 일꾼이 되어서 사도 바울의 말년에는 그를 잘 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바나바는 바울이 의심을 받을 때에 큰 지도자로 내세운 것처럼 이 청년이 의심을 받을 때에 도와주어서 큰 공헌을 하는 청년이 되게 하였습니다.
바나바는 우리가 아는 대로 천재는 아닙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아닙니다. 아마 두 달란트쯤 받은 보통 인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했고 그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할 줄 몰랐습니다. 그는 담백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권면해서 인재를 일으키고 교회의 화평을 도모하여 사랑과 봉사와 전도의 선구자로서 초대 교회에 위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바나바는 보통 사람이라도 믿음과 성령이 충만해질 때에 착한 사람이 될 수 있고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바나바는 우리 보통 사람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올시다. 우리 보통 사람의 신앙 생활을 크게 격려해주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十三장에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기록할 때에 이런 말을 기록했습니다.『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일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를 생각하며 이른 글을 썼겠습니까? 성경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이 글을 쓸 때에 바나바를 생각하여 썼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바나바는 이렇게 착한 사람입니다. 또 바울에게 가장 큰 감화를 준 사람입니다.
신앙 생활에는 언제나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둘째는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셋째로는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누구나 인생 길을 걸어갈 때에 다른 사람을 돕고 격려해 주며 위로해 주고 권면해주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一九六九년 四월 二十일)


Ⅸ-2 시대의 징조 (예레미야 一장 五-十四절)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가지를 보나이다.』 (렘 一·十一)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렘 一·十三)

때는 유대 말기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청년 예레미야에게 임하였습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레미야는 선지자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한편으로는 파괴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건설하며, 또는 뽑으며 또 심는 사명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두 가지의 이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 하니라. 이르시되『예레미아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네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살구나무라는 말은 본래 깬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일찍 깨는 나무라는 뜻입니다. 그 까닭은 이 나무는 유대 나라에 가장 일찍이 꽃피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의 살구나무와는 조금 다른 나무인데 편도라고도 하는 것 같습니다. 성지에서는 이 나무가 이른 봄 가장 일찍이 꽃을 피웁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성지를 순례할 때에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가는 길에 아름다운 분홍 꽃으로 덮인 두 나무를 보고 안내자에게 무슨 나무인가고 물으니 살구나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 때가 일월 하순인데 벌서 꽃이 피었습니다. 겨울잠에서 제일 먼저 깨는 나무올시다.
한국에는 혹 진달래가 그렇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경에『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는 말 중에 지킨다고 번역한 말의 히브리 원어는『소케드』라는 말인데 역시『깬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깨어서 너희를 지키리라 하는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 이상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일찍 꽃피는 살구나무 가지는 곧 하나님께서 깨어 계시면서 그 백성을 지키신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해서 그 말씀대로 이루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시편 一二一편에『너를 지키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자는 졸지도 아니 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신다고 하는 구절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레미야에게『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깨어있어서 너를 구원하리라』하는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깨어 있습니다. 이것은 죄인에게는 형벌을 의미합니다. 한편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탄의 역사를 파괴하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건설하리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둘째 이상을 하나님께서는 청년 예레미야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시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 기울어졌나이다.』
물이 끊어서 넘게 된 가마를 보았습니다. 옛날 아랍문학에 있어서 끊는 가마는 흔히 전쟁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말씀하시기를『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범인들에게 임하리라』하였습니다. 그 때의 역사적 징조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 끊는 가마는 장차 모든 범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재앙이 북방으로부터 오겠다는 불길한 시대의 징조를 본 것입니다. 이래해서 예레미야는 이 두 가지 시대의 징조를 보았습니다.
첫째는 일찍 꽃피는 살구나무의 징조이고 둘째는 남으로 기울어진 끊는 가마의 징조입니다. 이것은 다만 옛날의 얘기가 아닌 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하여 시대 시대에 적절한 징조를 보여 주십니다.
이 두 가지 이상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적절한 징조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네가 무엇을 보느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볼 것을 마땅히 보면서 삽니까? 우리의 눈이 열리어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사는 이 시대의 징조를 바로 보면서 삽니까?
예레미야가 보았던 둘째 징조 곧 끓는 가마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인 줄 압니다. 북에서 남으로 기울어졌다고 하는 것도 한국 형편에 있어서는 의미가 이상하게 보입니다. 프에볼로호 사건이니, 미국 정찰기 격추 사건이니, 중공과 소련의 국경분쟁 사건이니, 아프리카의 나이제리아 내란, 등등으로 세계는 문자 그대로 끓는 가마올시다.
한국에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도 세상이 물 끓는 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사실 도처에서 끓는 가마의 현상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끓는 가마가 언제 온 세계에 넘칠는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어서 인공위성을 올리고 달세계에 가기를 꿈꾸지마는 지금 세계의 인류들은 끓는 가마 옆에서 전전긍긍하며 떨고 서있는 것도 역시 사실입니다. 불안과 공포 속에 인생의 험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더욱이 남한의 서울에 사는 우리는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 그대로 지금이야말로 어두움이 온 땅을 덮었고 캄캄함이 모든 백성을 덮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비극적인 二十세기 말기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둘째 징조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예레미야가 본 첫째 징조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일찍이 깨어서 꽃핀 살구나무 가지를 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화창한 봄날이올시다. 살구나무 가지만이 아닙니다. 사철나무도 그렇고, 진달래도 그렇고, 복숭아나무, 배나무, 벚나무 모든 나무가 깊이 잠들었던 겨울의 잠에서 깨어서 아름다운 꽃이 피고 새싹이 돋는 때입니다. 만천하에 봄이 왔습니다. 봄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깨는 계절에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하나님은 깨어 계신다는 사실이올시다. 문물을 깨우십니다. 우주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 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십니다. 봄은 반드시 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역설 같지마는 끓는 가마를 통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그는 심판을 통하여 파괴도 하시고 뽑아 버리기도 하시겠지만 그것은 새 것을 건설하고 심으려는 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깨어서 죄인을 벌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백성을 보존키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깨어서 사탄의 세력을 파괴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나라를 건설해서 새 시대의 영광스러운 주님의 날을 맞이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 두 가지 시대의 징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은혜와 심판, 소망과 절망, 절망과 암흑, 환희와 비애를 함께 봅니다. 한편으로 무한한 진보와 평화와 행복의 가능성이 있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전 인류가 멸절(滅絶)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 천당과 지옥의 기로에서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도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잘 때가 아닙니다. 깰 때입니다. 나도 깨고, 남도 깨워야 할 때입니다.
경고합니다.『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고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듯 하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삼손처럼 들릴라의 무릎에서 잘 때가 아닙니다. 정욕의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 욕심과 이기주의의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 이 허영과 세속주의의 잠에서 깨어서 생명의 길을 바로 택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이러한 때일 수록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깨어 기도하여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고 주님께서 경고하십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인생의 길을 바로 걷는 데는 위로부터의 지혜와 능력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기도를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권고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우리의 기도 생활이 어떠합니까? 개인적으로 우리의 기도 생활이 어떠합니까? 우리가 얼마나 새벽기도에 힘씁니까? 삼일기도회는 얼마나 힘씁니까? 기도는 호흡과 같습니다. 기도 없는 곳에 산 신앙은 없습니다. 참 신앙으로야 이러한 시대를 무난히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는 이러한 때일 수록 우리는 깨어서 자기의 책임을 완수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천국의 파수꾼이올시다. 보초병이올시다. 파수꾼이 졸면 천국은 위험해집니다. 천국 사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나 처럼 자기의 직분과 책임을 잊어버리고 큰 풍랑이 일어나는 데도 불구하고 잠자는 사람은 없습니까? 이런 장로, 이런 권사, 이런 집사, 이런 반사, 이런 교인은 없습니까? 기억하세요.
원수는 잠자지 아니합니다. 악한 마귀는 삼킬 자를 찾으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밤낮으로 다닙니다. 간첩은 자지 아니합니다. 공산당들도 자지 아니합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다 깨어 있습니까? 더욱 이와 같은 시기에 중대한 책임을 맡은이들, 군인, 경찰, 공무원, 정치인, 경제인, 들은 때어 있습니까? 국민 하나 하나가 깨어서 자기가 맡은 자리에서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내가 어떤 책임을 맡았든지 그 자리에서 자기의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모일 때는 모여야 하고 시간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넷째는 기회 주실 때에 힘써 일해야 합니다. 왜? 밤이 오면 일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일할 수 없는 밤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환난의 밤이 옵니다. 질병의 밤이 옵니다. 슬픔의 밤이 옵니다. 노년의 밤이 옵니다. 사망의 밤이 이윽고 올 것입니다.
끓는 가마의 밤이 언제 올는지 모릅니다. 세계적인 암흑의 밤이 언제 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밤이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에 우리는 곡식을 거두어서 천국 곡간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밤이 오기 전에 우리는 내 정력, 내 시간, 내 재능, 내 재산을 다 바쳐서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우리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때일 수록 하나님께서 깨어 계시는 것을 기억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의 경륜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최후의 승리는 그에게 만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저희가 환난을 당하나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흉하고 뛰어 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역사의 운전대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역사의 바퀴를 하나님께서 잡고 계십니다. 어떠한 위기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새 시대의 해산의 수고인 것입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입니다.
(一九六九년 三월 二十七일)

Ⅸ-3 가정의 정신적 기초 (마태복음 七장-十五-二十九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니라.』(마 七·二十四)

예수께서는 산상 보훈의 결론으로 집을 짓는 두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집을 짓습니다. 한 사람은 깊이 파고 반석 위에다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모래 위에 그냥 지었습니다.
집의 모습이나 살기에 편리한 점들은 별로 다름이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또 평상시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큰 창수(漲)水)가 나서 집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바람도 심하게 붑니다. 큰 폭풍우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하나는 든든히 서 있었으나 다른 하나는 그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수 님 말씀이 하나는 어리석은 사람이요 하나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천하의 모든 사람은 다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생의 집을 짓는 이들입니다. 두 가지 종류의 터가 있습니다. 반석과 모래의 터입니다. 어떤 이는 반석 위에, 어떤 이는 모래 위에 집을 짓습니다. 평상시에는 차이를 모릅니다. 그러나 생의 위기가 옵니다. 생의 폭풍우가 찾아옵니다. 그러면 한집은 든든히 서 있게 되나 다른 한 집은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반석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교훈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 불변하는 만세반석입니다.
모래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시대적인 사상, 일시적인 풍조, 시시로 변하는 인간의 취미, 정욕, 향락, 물질, 지위, 허영 등을 의미합니다.
생의 집을 어디다 짓습니까? 어떤 기초 위에 생의 집을 짓고 있습니까?
저는 결혼식 주례를 많이 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난주간에도 여섯 번이나 결혼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가정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집입니다. 주례를 할 때마다 이들은 어떤 터 위에 가정을 세우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만세 반석이신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우라고 권면도 합니다. 또 기도합니다. 이번 주간은 가정주간이고 새로 결혼한 이들도 많고 또 결혼할 이도 많은 줄 압니다. 또 우리가 하나 하나는 다 가정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특별히 가정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가정의 정신적 기초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가정의 기원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창세기 一장 二十七절에『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되 일남 일녀를 창조하셨습니다. 가정을 세우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은 창조의 질서에 다라서 생성된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파괴할 수 없습니다. 가정 없는 인간사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런 사회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짐승의 사회지 인간의 사회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남 일녀로 가정을 세우신 것을 기억하십시다. 소위 일부다처주의는 짐승 사회로 전락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둘째로 가정 곧 결혼의 깊은 뜻을 성경에서 찾아 생각하십시다.
창세기 二장 二十三절에『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어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에 한 몸의 원칙이 있습니다. 부부 일신의 원칙이올시다. 다시 말하면 한번 결혼한 후에는 온전한 사랑으로 전 인격이 연합해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한 몸이므로 딴 비밀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 몸은 자연히 동고동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부부의 생활 곧 가정의 생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구약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마태복음 十九장 六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러한즉 이제는 둘이 아니오 한 몸인즉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 님께서는 두 가지 진리를 분명하게 밝혀 주십니다.
하나는, 가정 하나 하나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심으로써 성립함을 상기시킵니다. 우리가 중매를 통하여 결혼을 하였든지 또 요사이 청년들처럼 자유로이 선택하여 가정을 이루었든지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서 내가 다른 인간과 결합해서 한 몸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동양에도 옛날부터 천정배필(天定配匹)이란 말이 있습니다. 배필은 하늘이 정한다는 것입니다. 가정 하나 하나는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한 몸이 되었으니 나눌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죽음 이외에는 한 몸을 나눌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정을 이루는 윤리는 남자나 여자나 이러한 결심을 정신적 과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경시할 수 없고 하나님의 듯에 대한 확고한 결심이 있을 때에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결혼한 후에는 다시 나눌 수 없다고 하는 이 원칙을 마음 가운데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도 칠 계명을 범한 것 이외에는 이혼을 허락지 아니 하셨습니다.
본래 우리 한국 사회에는 이혼이라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외국의 퇴폐(頹廢)한 영향으로 점점 우리 사회에도 이혼율이 증가된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실로 개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문화가 아닙니다. 퇴폐란 세속적 악풍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참으로 행복 되고 하나님께 영광 되는 가정 생활의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다 인간입니다. 고로 개성이 다릅니다. 성품도 다릅니다. 또 다른 환경에서 장성합니다. 처음 결혼했을 때는 애정의 도취로 말미암아 그저 꿈같은 사랑으로 지나갑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납니다. 몇 달이 지나게 되면 점점 남자나 여자나 그 속에 있던 숨은 사람이 나타나게 됩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지요. 그 하이드라는 말은 숨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숨었던 괴팍한 성품도 나타나고 고집도 나타나고 좋지 못한 습관도 나타나고 신경질도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천사인 줄 알고 결혼했더니 몇 달 지나고 보니 천사가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남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본래 결혼한 여자는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자 가운데도 그런 말을 합니다. 내가 본래 알고 결혼한 그 남자는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결혼 생활의 위기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잘 극복하고 우리의 생활이 계속 행복 되고 또 하나님의 일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정으로 끝까지 지킬 수 있겠습니까?
다시 오늘의 본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뿐더러 그대로 행하는 참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의 편지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행함이 있는 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은 어떤 경로를 통하여 오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산상보훈을 읽으시면 여덟 가지 복으로 시작됩니다.
제일 처음에는『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했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의 허물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내 죄를 자복(自服)하고 회개한다는 말입니다.
조금 더 내려가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상의 좁은 문을 의미합니다.
요한 복음 十四장에는 예수 님께서 나를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三장에는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온전히 죄를 회개하고 예수 님을 내 구주로 믿어서 죄 사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내 인격과 성품을 통해서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충만하고 우리 가정에 충만하게 되면 자연히 주님의 말씀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와 절제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기억하십시다.
참 기독교 가정을 이루려고 하면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 위에 가정을 세울 때 이 집을 반석 위에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청년을 보면 꼭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 출석하지마는 등록도 안하고 다니는 이도 있고 또 어떤 이는 등록은 했으나 학습도 안 서고 세례도 못 받고 다니는 이도 많습니다. 그러다가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려고 알아보니 학습은 서야 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학습문답을 하러 옵니다. 사도신경도 외우려 하고 십계명도 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문답해 보면 그것도 다 외우지 못하고 오는 이도 있습니다. 이렇게 학습서고 결혼하면 그의 집이 반석 위에 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만일 우리 가정이 기독교 가정이라고 하면 반드시 가정 제단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일년 내내 가도 집안에서 찬송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기도도 한번 같이 안 하다가 대 심방 때에나 억지로 같이 예배 보는 가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 사람의 속담 가운데 같이 기도하는 부부는 같이 머물고 갈라지지 않는다 하는 속담이 있습니다. 같이 예배보고 같이 기도하는 부부의 가정이 안전합니다. 화평합니다. 또 이런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은 자연히 어려서부터 종교 교육을 바로 받습니다.
알버트 비벨이라는 유명한 목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많은 결혼식을 주례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년에 자기가 주례를 해준 七五0쌍의 부부에게 편지를 다 내면서 이런 질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당신들이 가정 생활을 해나가는 가운데서 가정을 행복 되게 하는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들이 대답하기를, 가정에서 매일 매일 종교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즉 신앙 생활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고 찬송을 부르고 또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피차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라는 대답을 보내 왔답니다.
여러분, 사랑에 대해서 고린도 전서 十三장에 사도 바울이 어떻게 가르쳐 주었습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했습니다.
여기에 특별히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얘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전에 나이 七十五세난 어떤 노인이 종합 진단을 받으려고 어느 종합병원에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병이 하나도 없이 아주 건강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사가 놀라며, 『노인은 어떻게 그렇게 건강이 좋습니까? 어떤 비결이라도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 노인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제가 五十년 전에 내 아내와 결혼을 하였는데 결혼할 때에 우리는 이런 약속을 하였습니다. 가령 우리가 같이 살아가다가 내가 어떤 잘못을 해서 당신이 성나면 당신이 대답하지 말고 참고 얼른 주방으로 나가시오. 또 혹 당신이 실수해서 내가 성나면 나는 대답하지 않고 꾹 참고 얼른 밖으로 산보를 나가겠소 하는 약속을 하였는데 지금 한 五十년쯤 지내고 보니 산보를 참 많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건강한 것 같습니다.』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세요.
사실 반석 위에 가정을 세우시기 원합니까? 가정의 제단을 쌓으세요. 이 가정 주간을 계기로 각각 가정 예배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일전에 제가 어느 자리에서 옛날 신의주에서부터 저를 잘 아는 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이 주례한 가정을 제가 많이 보았는데, 목사님 권면 대로 잘 믿고 잘 사는 가정들은 다 큰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교회도 안 나오고 성경대로 안 하는 가정은 이상하게도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거 이상할 것 있어요 으레 그럴 것이 아닙니까』하고 대답했습니다. 관찰과 경험에 의한 말씀입니다. 제게 주례를 받은 이들이 여기에 있으시면 특별히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에 리빙스톤은 아프리카에 가서 처음 전도를 할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목사고 또 의사였습니다. 그래서 어디 가든지 약을 많이 가지고 다니면서 약을 나누어주어 육신의 병을 고치고 그 다음에 전도를 하곤 했습니다.
한 번은 어떤 흑인이 헐레벌떡 뛰어 오더니『목사님 나의 마음속에는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더러운 마음이 가득한데 이 마음을 고치는 약을 좀 주세요.』그 말을 들은 리빙스톤은 자기 옆에 있던 성경책을 쳐들어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흑인이 눈이 둥그래지면서『그것을 어떻게 먹습니까?』하고 묻습니다. 리빙스톤은『이것은 입으로 먹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먹는 것이니 이것을 갔다가 잘 읽고 이대로 하십시오』하고 권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행복스러운 가정을 만들려고 하면 마음을 고쳐야 합니다. 시기하는 마음, 탐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온갖 더러운 마음을 고쳐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 님을 참으로 내 구주로 믿고 온전히 새 사람이 되어 주님의 말씀대로 다 행하게 되면 자연히 우리 가정에는 악마의 시험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 때 우리의 생활은 경건하여집니다. 성결하여집니다. 화평하여집니다. 하나님을 봉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집을 반석 위에 지으세요.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 위에 세우세요. (一九六九년 五월 四일)


Ⅸ-4 한 어머니의 모습 (잠언 三十一장 十-三十一절)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잠 三十·二十八-二十九)

여기에 자식들에게 사례를 받고 남편에게는 칭찬을 받는 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은 여러 인물들의 초상화를 걸어 놓은 미술관과 비슷합니다.
성경 가운데는 여러 인물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에스더, 룻, 혹은 신약의 베드로, 요한 에게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들의 묘사가 있습니다.
잠언은 특별히 지혜를 가르쳐 주는 책인데 이 책의 맨 마지막 장에는 아주 지혜 있는 한 여인이요 어머니, 곧 현모양처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물론 이 기록은 생활 양식이 다른 옛날 이스라엘의 한 경건한 어머니의 모습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 시대나 환경을 초월하는 현숙한 여성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특별히 어머니 주일로 지키는 날인데 이 한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록을 읽을 때에 제일 먼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느낌은 이 어머니는 과연 어진 어머니였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동양에는 옛부터 현모양처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진 어머니, 어진 아내라는 말인데 어진 어머니가 어진 아내가 되고 어진 아내가 역시 어진 어머니가 된다고 하는 말인 줄 압니다. 사실 이 현모양처는 같이 갑니다.
여기 十절 十一절을 보면『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의 신임을 받는 아내올시다. 가정 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는 피차에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신뢰하고 아내가 남편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가정은 그렇지 아니 합니다. 피차에 의심합니다. 그래서는 심지어 남편이 어떤 날 저녁에 일찍 들어오지 아니하면 아내가 뒷조사를 하러 따라나갑니다. 반면에 아내가 얼른 들어오지 아니하면 남편이 또 뒷조사를 하러 따라 나갑니다. 이렇게 되면 가정이 참 가정이 될 수도 없고 이런 아내가 어진 어머니도 될 수 없습니다. 이 어머니는 남편에게 전적으로 신임을 받는 어머니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신임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도 여기에 설명합니다.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 하느니라』고 十二절에 기록했습니다.
설마 어느 아내가 남편에게 악을 행하랴 하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아내가 진실하여 언제나 정직하게 남편을 대하는 것은 남편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부정직해서 남편을 때때로 속이는 것은 남편에게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종일 골몰하게 일하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는 남편을 웃는 얼굴로 반가이 맞는 것은 남편에게 적은 것이지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피곤해 들어오는 남편을 쓴 오이처럼 보는 것은 남편에게 적은 일이지마는 악을 행하는 일입니다.
남편이 봉급을 적게 받아도 절용 절식해서 빚 없이 살림을 잘해 나가는 것은 남편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봉급은 二만원밖에 못 받는데 쓰기는 三, 四만원 어치를 쓰고, 월급을 받으면 쌀이나 연탄을 살 생각은 아니하고 내 옷감부터 뚝 끊어 오는 것은 남편에게 악을 행하는 일입니다.
어떤 여인은 남편이 돈 관리를 안 맡긴다고 불평한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그런 불평을 하기 전에 내가 왜 남편에게 신용을 못 얻었는가 스스로 반성해 볼 필요도 있는 줄 압니다.
사실 내가 진실하고 정직하게 모든 것을 하는가? 이 어머니는 진실하고 정직해서 남편에게 절대의 신임을 얻은 어머니올시다. 이것이 필요합니다.
이래야 아이들도 바로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권리가 있게 됩니다. 二十三절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그 남편은 그 땅의 장로로 더불어 성문에 앉으며 사람의 아는 바가 되며』했습니다. 옛날에는 성문에 둘러앉아서 정치도 하고 재판도 하고 나라 일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남편은 사회에서 유력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배후에는 이 현숙한 아내의 내조가 크다고 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남편이 사회에 나가서 성공하고 크게 봉사하는 데는 아내의 공헌이 위대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와 그 어진 아내에 대한 유명한 얘기를 여러분은 다 기억할 것입니다. 루터 같은 이도 종교개혁 운동을 해 나갈 때에 한 번은 너무 어려운 일을 당해 낙심이 되어 침대에서 일어나지를 못하고 그냥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에 그의 부인이 검은 상복을 입고 그의 침실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마틴 루터가 깜짝 놀라면서 누가 죽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그 여인은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루터가 성이 나서 하는 말이 그런 외람 된 말이 어디 있느냐고 노했습니다. 그 때에 그 부인이 온순하게 대답하는 말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당신은 왜 낙심합니까?
이렇게 현숙한 아내는 그 남편을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二十八절에는 이런 글귀도 있습니다.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했습니다.
이 여자는 신임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에 칭찬까지 받았습니다. 그저 우리 아내 같은 이가 없어, 진실하고 온순하고 단전하고 부지런하고 믿음이 있고 살림도 잘하고 아이도 잘 기르고 그저 제일이야 하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다 칭찬 받습니까? 미안하지마는, 오늘 같은 날에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내 남편에게 백퍼센트 신임을 받는 아내인가? 또 내가 늘 남편에게 칭찬을 받는 아내인가? 혹은 그 반면에 내가 아직도 남편에게 불신을 받는 아내인가?
물론 오해는 하지 마세요. 남편은 항상 옳고 아내는 그르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어떤 남편은 공연히 아내를 의심하는 남편도 있습니다. 의처증이라고 의심 안 할 아내를 의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공연히 밖에 나가서 언짢은 일을 당하고 아내에게 괴롭게 하는 남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어진 어머니가 되는 부인은 남편에게 신임을 받습니다. 남편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이래야 아이들을 바로 기를 수 있습니다. 이래야 아이들에게 존경을 받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여기에 기록한 어머니의 모습을 우리가 읽어볼 때에 느껴지는 것은 이 어머니는 살림을 잘하는 어머니올시다. 二十一절을 보세요.『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는 아내도 적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또 부지런히 손으로 일한다고 하였습니다.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사람들에게 식물을 나누어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일찍이 새벽에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밤에도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손으로 일했다고 하였습니다. 살림 잘하는 어머니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방과 뜰과 생활 주변을 깨끗이 보존하여 자녀들의 의복과 음식과 학교에 가는 모든 것을 돌아보고 더욱이 남편의 하는 일에 협력하려고 하면 부지런하지 아니하고는 불가능합니다.
이따금 듣노라면 손님은 밖에 세워 놓고 방안에서 방 치우기에 바쁜 어머니들도 있다고 합니다.
또는 아침에 아이들이 먼저 깨서 떠든다고 저것들 때문에 잠도 못 자겠다고 하며 때려서 꼼짝 못하게 해 놓고는 또 자는 어머니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어머니는 흔히 전날 밤에 밤늦도록 영화를 구경하고 왔거나 화투 놀이를 했으므로 자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 묘사된 어머니는 영화 구경을 갈 만한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모여서 화투할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마을을 돌아다닐 겨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손으로 일했다고 하였습니다.『부지런히 손으로 일하고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 원 가꾸며,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손가락을 잡으며,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등 손으로 일하기를 힘썼다는 구절이 많습니다.
내가 들으니 손이 미워진다고 손으로 일하는 것을 꺼려하는 부인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릇을 닦을 때에도 의사가 대수술을 할 대에 쓰는 것처럼 고무 장갑을 끼고 가만가만히 그릇을 씻는다고 합니다.
어진 어머니는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하나님께서 손을 주신 것은 일하라고 주셨습니다. 봉사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공장에서도 손으로라야 물건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뜰을 쓰는 것도 손으로라야 합니다. 그릇을 닦아도 손으로 닦습니다. 모든 일은 손으로라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 주신 것은 봉사하라고 고쳐 주셨습니다.
손으로 하는 일을 천히 여기는 것은 특별히 한국에서는 옛부터 내려오는 습관입니다.
육체의 노동을 천시하는 그릇된 나쁜 사상이올시다.
어진 어머니는 그런 사상을 버려야 합니다. 여기 보니 이 어머니는 손으로 살림만 잘한 것이 아니라 요사이 말로 하면 가내공업도 잘했습니다. 방석도 만들고 옷도 만들고 그래서 어떻든지 생활을 도왔습니다. 밭을 사서 농사도 지은 모양입니다. 무역도 했다고 하였습니다. 굉장한 어머니입니다.
이 어머니는 손으로 일을 잘하고 살림을 잘한 어머니였습니다.
셋째로 이 어머니는 손으로 일만 잘한 것이 아닙니다. 손으로 한 가지 더한 것이 있습니다.
二十절에 보니『그는 간곤(艱困)한 자에게 손을 내밀며』하는 말이 있습니다.
힘써 일해서 자기만 잘 사는 어머니가 아닙니다. 손을 펴서 다른 이를 도와주는 어머니 노릇을 하였습니다. 좋은 이웃이 되었습니다. 부지런히 살림 잘하는 이가 조금 잘못하면 자기 집만 생각하고 남을 돌아보는 것은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힘서 일하여 자기 살림도 잘 할 뿐더러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손을 펴고 손을 내밀어 다른 이들을 붙들어 주는 어머니였습니다. 이런 어머니가 되어야 이 다음에 자식을 바로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어떤 권찰(勸察)님이 한 번은 심방을 갔는데 그 주인댁은 마침 다 어디를 가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 세든 여인에게 예수를 믿느냐고 물었더니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면서, 나도 사실은 좀 믿을 마음에 있었는데 우리 주인집 할머니를 보니까 예수 믿을 마음이 똑 떨어졌어요 하기에 그것 무슨 얘기입니까? 하고 물으니, 내가 그런 욕심쟁이는 처음 봤습니다 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한편 얘기만 듣고는 단언하지 못하겠으나 예수 믿는 어머니가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손을 펴서 다른 사람을 도와줄 줄 아는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이웃이 될 줄 아는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아기들이 세상에 날 때 흔히 손을 꼭 쥐고 난다고 합니다. 나는 보지 못했으나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어떤 이는 인생을 살면서도 쥔 손을 한 번도 펴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것만 꼭 쥐고 있습니다. 손을 펴서 남을 도와줄 줄 아는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남을 돕는 것이 자기를 돕는 것입니다. 예수 님 말씀과 같이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이 많습니다. 남을 도와줌으로써 어려운 가운데 있는 이들을 돌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은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이 됩니다. 그런 집 아이들이 이 다음에 커서 남을 도울 줄 압니다. 자손에게도 큰 축복이 됩니다. 적선지가에 필이여경 (積善之家必而余慶)이라고 했습니다. 다음에 다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올릴 수 있습니다.
넷째로는 二十六절에 보니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 혀로 내 법을 말하며』했습니다. 입을 열면 지혜의 말을 합니다. 그 혀로 어진 사랑의 법을 말합니다.
이 어머니는 입이 고운 어머니올시다. 아 아무개 할머니는 다 좋은데 입이 좀 험해서 하는 얘기가 들립니다.
여기에 이 어머니는 그런 어머니가 아닙니다. 입을 열면 지혜와 인애(仁愛)의 말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말이 아주 곱습니다.
우리 동양에 말을 들어보고 눈동자를 바라보면 사람이 어찌 숨길 수 있으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들어보고 지혜가 있는 사람인지 미련한 사람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말을 들어보고 무식한지 유식한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을 바로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 이 어머니는 말의 모범이 되는 어머니였습니다.
우리 동양의 속담에도 같은 말을 해도 툭해서 다르고 탁해서 다르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에도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권면하지 않았습니까?
야고보는 혀는 불이라고 했습니다. 혀에 자갈을 물리라고 하였습니다. 남편에게 대해서도 꼭 합당한 말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가까우면 가까울 수록 존경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만 보면 어떤 가정에서는 말을 잘못해서 싸움하는 가정도 상당히 많은 모양입니다. 자녀에게 대해서 꼭 합당한 말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가 바른 말을 배웁니다. 부모님들과 어른들에 대해서도 합당한 말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이웃에게 대해서도 합당한 말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전에 신문을 보니 고운 말 쓰기 운동을 어떤 여성 단체에서 한다고 하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대단히 좋은 운동인 줄 압니다. 고운말 쓰는 운동은 가정에서 시작이 되어야 하겠고 어머니들이 먼저 시작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고운 말을 배우겠고 그래야 그들이 자라서도 다 고운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전에 제가 미국에서 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을 때에 그 병원에 입원한 한국 학생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농을 즐겨 해요. 그래서는 미국 사람들과도 농을 잘하다가 좀 듣기 싫은 얘기를 하면 한국말로 욕을 하곤 합니다.
이 놈의 새끼라고 우리말로 합니다. 그랬더니 얼마 안 있어서 미국 사람들도 그 말을 다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만나기만 하면 이 놈의 새끼하고 첫마디를 합니다. 나도 한국 사람인지라 나를 만나도 이 놈의 새끼라고 하곤 합니다. 출어이자 반어이자라는 말이 있지요. 네게서 나간 것이 네게 돌아온다는 말이지요. 어진 어머니는 말을 바로 합니다.
그리고 三十절에 보면 어떻게 이 어머니가 남편에게는 신임을 받고 살림도 잘하며 선한 이웃이 되고 고운 입의 어머니가 되었는가 하는 근본을 설명해 줍니다.
이 어머니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어머니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는 어머니올시다.
이런 성품과 생활은 자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물론 기도도 많이 한 어머니인 줄 압니다. 성경도 항상 읽는 어머니인 줄 압니다. 주일도 잘 지키는 어머니인 줄 압니다. 십일조도 잘하는 어머니인 줄 압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어머니였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오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옛날은 진주보다 귀한 것은 없었습니다. 금강석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늘 아래에 있는 제일 귀한 보배가 무엇인가? 어머니올시다. 어진 어머니가 가정 번영의 근본이요 국가와 사회 번영의 근본이올시다.
역사를 보면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항상 이런 어진 어머니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무멜의 배후에는 어진 한나가 있었습니다. 모세의 배후에 요게벳이 있었습니다. 디모데의 배후에 유니게가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의 배후에 모니카가 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배후에 수산나가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의 유명한 율곡 선생의 배후에 신사임당 같은 어진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제가 어제 기도원에서 늦게 돌아올 때에 어떤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가까스로 차 앞을 지나갑니다. 그 어머니는 초조하게 지나가는데 그 품에 안긴 아기는 머리를 어머니 어깨에 얹고는 잠을 자고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보면서 저 잠자는 아기가 어머니의 사랑을 얼마나 알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머니의 사랑을 얼마나 압니까? 어머니가 자녀들을 옳게 기르기 위하여 얼마나 염려하고 수고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어머니날을 당해서 어머니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남편 없이 외롭게 자녀들을 기르기에 수고하는 어머니들을 기억하십시다.
제 어머니는 제가 열살 날 때에 잃었습니다. 사실 어머니께서 좀 오래 살아 계셔서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자녀들처럼 행복 된 자녀는 없습니다. 왜? 하늘 아래에 제일 큰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인데 어머니의 사랑을 그만큼 많이 받은 것이요 또 조금이라도 어머니의 사랑에 보답할 기회를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보답하는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一九六九년 五월 十一일)


Ⅸ-5 성령과 불의 세례 (사도행전 二장 一·十三절)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三·十一)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우리 주님에 대해 간증한 말씀입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순절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교회 월력(月曆)에 가장 중요한 날은 둘이 있다고 흔히 말합니다.
하나는 부활이요,
하나는 오순절이올시다.
부활절은 교회에 복음을 주었고 오순절은 교회에 능력을 준 것입니다. 부활절에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복음의 내용을 주셨고 오순절에는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써 교회에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어떤 공장에서 예배를 보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공장에 가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공장에 가 보니 모든 기계가 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방은 매우 조용했습니다. 예배를 다 드린 후에 한 작은 스위치를 누를 때에 갑자기 온 방 안에는 큰 소리가 들려왔고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왜? 작은 스위치를 누를 때에 전기의 힘이 그 기계 속에 들어간 까닭입니다.
기계를 정비하는 것이 중요하지마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계를 움직이는 능력입니다.
이렇게 오순절에는 교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오순절 주일로서 성령께서 강림하신 위대한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 시간에 첫 오순절에 되어진 일을 잠깐 회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반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주님께서 언약하신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요한 복음 十四장 十六절에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시리라.』
요한 복음 十六장 七절에는『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했습니다.
이상의 두 말씀은 다락방에서 마지막 저녁에 주신 언약의 말씀이올시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같은 뜻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一장을 읽어보면『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가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 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약속뿐이 아니고 약속을 기다리라는 부탁의 말씀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약속을 그대로 믿고 약속이 나타나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올라올 때에도 자기들끼리는 누가 크냐고 다툰 일도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자지 말고 깨어 기도하라는 부탁을 받았지마는 다 저버린 경험도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잡히실 때에는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예수 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한 제자도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사실을 반성하면서 자기의 죄를 자복(自服)한 줄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비겁하였던 일, 교만, 이기심, 불결 등을 회개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죄를 자복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린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참으로 믿고 순종하는 그런 신앙, 또 자기의 과거를 반성하고 죄를 회개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태도는 성령 임재(臨在)의 전제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 때뿐이 아니고 언제나 그러한 줄 생각합니다. 이런 이에게 성령이 임재하시고 이런 이가 모인 교회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재하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된 일을 우리가 또한 회상하여 보아야겠습니다.『오순절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한 곳에 모였더니 돌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것이 있어 저희 앉은 큰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두 가지의 상징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람 또한 불이라는 상징으로 나타났습니다.
성령이라고 하는 말의 히브리 원어는 바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순결이라고 하는 뜻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바람은 사실 신비합니다. 바람이 불지만 어디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바람은 말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나 우리가 다 느낄 수는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三十七장에 볼 것이면 에스겔이 어떤 골짜기로 인도함을 받아 환상 가운데서 마른 뼈로 가득한 곳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명령합니다. 이 마른 뼈들을 향하여『생기야 사방에서 불어와서 사망을 당한 이에게 와서 살게 하라』고 예언합니다.
여기 생기라는 말은 바람이라는 말입니다. 바람은 숨결을 의미합니다. 곧 생명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함을 입은 것입니다.
바람은 역시 능력도 의미합니다.
바람은 바다에서 물결을 요동케 합니다.
큰바람은 나무를 꺾고 심지어 집을 무너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용에게 말씀하실 때에 회오리바람 가운데서 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함을 입었다고 하는 뜻일 것입니다.
불은 성경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을 우리가 특히 구약 중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불붙는 떨기나무 곁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모세가 그 백성을 시내 광야를 통해서 인도하여 나오게 할 때에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또 엘리야의 제단을 하나님은 불로 받으셨습니다.
불은 빛을 의미합니다. 불은 열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불은 모든 것을 태워서 깨끗하게 하는 순결을 의미합니다.
오순절에 그들은 이렇게 불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다 성령으로 충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올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올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했습니다.
성령은 성결(聖潔)의 영입니다. 성결로써 그들은 충만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입니다. 그들은 진리로써 충만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올시다. 그들은 생명으로 충만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올시다. 그들은 사랑으로 충만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올시다. 그들은 빛으로 충만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올시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충만케 된 것입니다. 무엇이나 충만하면 넘칩니다. 넘쳐흐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매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우선 입으로 넘쳤습니다. 그들은 말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심령이 그리스도로 충만하매 입을 열 때에 자연히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에 모든 사람이 충만한 은혜 가운데서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이 베드로가 단 위에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증거 한 것입니다. 전도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마는 어떤 때에는 교만과 시기와 욕심과 정욕과 같은 것으로 충만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그만 넘쳐흘러서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는 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해야 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전도도 하고 그래야 찬송도 옳게 하고 그래야 감사도 드릴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유무 상통하였습니다. 자진해서 물질을 사도의 발 앞에 바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상부상조하는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마음이 충만하니 손으로 그 사랑이 넘쳤습니다. 재물을 자기 손에 그냥 쥐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이 넘친 까닭입니다.
사랑뿐만 아닙니다. 성령의 다른 열매도 이처럼 넘쳤습니다. 기쁨이 넘쳤습니다. 화평(和平)이 넘쳤습니다. 인내가 넘쳤습니다. 자비, 양선, 충성, 온유(溫柔), 절제, 이러한 덕이 다 넘쳤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록하였습니다.『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도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며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했습니다.
이런 교회는 자연히 부흥됩니다. 장성합니다. 왕성해 집니다. 예배당도 넘칩니다. 넘치는 축복을 받습니다.
오순절은 어떠한 날인지 아십니까?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신 날입니다. 바람과 불로 임재한 날입니다. 제자들은 성령과 불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레미야 二十장 九절을 보면 예레미야가 이런 탄식을 하였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 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의 심령 속에 불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九장 十六절에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니라.』그의 심령 속에도 불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휘드필드라는 목사는 기도하기를『주여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불길이 되게 하소서』라고 했다고 합니다.
감리교를 처음에 창설할 때에 요한 웨슬리가 올리섯게이 교회라는 작은 교회의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이상스럽게 자기의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위대한 하나님의 사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불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붙듯 하라』고 하였습니다. 교육, 지식, 재능, 경험들이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심령 속에 이 거룩한 불이 붙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 사랑의 불길이 붙어야 합니다. 내 안 믿는 민족을 영적으로 구원하고, 육 적으로도 모든 방면으로 돕겠다고 하는 불이 있어야 참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세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령과 불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심령의 제단이 엘리야의 제단으로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불이 임해야 합니다. 우리 심령의 제단에 불이 꺼지면 캄캄하고 어두워서 자기의 갈 길도 바로 못 찾습니다.
불 없는 제단에는 열도 없습니다. 열심히 없습니다. 책임은 맡았으나 감당하지 못합니다. 불 없는 제단은 깨끗지도 못합니다. 사라질 것이 사라지지 아니하고 그냥 있습니다. 더럽습니다. 그 심령의 제단에 하나님의 불이 내려야 합니다. 성령과 불의 세례를 받아야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에는 열두 사도만 이와 같은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열두 사도를 비롯하여 모든 평신도까지,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다락방에 모였던 전부가 이와 같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교역자뿐만이 아닙니다. 장로뿐만이 아닙니다. 온 교회가 다같이 이와 같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주님께서는 자기 입에서 토하여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과 불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받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먼저 주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성령을 주시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의 약속입니다.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내 과거를 반성하면서 회개할 것을 회개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또는 모여서 간절한 기도의 생활을 힘쓰는 이에게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든지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지켜 주십니다. (一九六九년 五월 二十五일)


Ⅸ-6 모험적 신앙 (민수기 十三장 二十五-三十三절)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 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 十三·三十)

여러분께서는 이 이야기를 다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를 받아서 애굽을 나온 후에 시내 광야를 지나오는데 거의 二년이 걸렸습니다. 그 후 바란 광야 가데스라는 곳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이 곳은 가나안 복지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그 곳에서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기 전에 열두 지파의 족장 十二사람을 택해서 먼저 조용히 가나안 복지를 탐지하기 위해서 보냈던 것입니다.
이들이 선발대로 그곳에 들어가 四十일을 지나면서 남으로 북으로 동으로 서로 여러 곳을 자세히 살펴보고 돌아왔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가니 마침 포도가 익었는데 포도가 어떻게나 잘 되었던지 포도 한 송이를 따서 두 사람이 막대기에 끼어 메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밖에도 석류와 무화과와 여러 열매를 따 가지고 돌아온 것입니다. 돌아와서 모세와 여러, 백성들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 때의 소수파의 보고와 다수파의 보고가 엇갈리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우리가 그 땅에 가 보니 과연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에 분명합니다. 여기 있는 포도는 에스겔 골짜기에서 따온 포도인데 얼마나 잘되었는지 보십시오.
그 곳에도 물론 사는 사람이 있고 성곽도 견고하지마는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능히 들어가 쳐서 이길 수가 있을 터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이 땅을 빨리 쳐서 정복하여야 되겠습니다 하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十족장들은 똑 같은 땅을 보고 왔으나 그 보고가 달랐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을 악평하면서, 그 땅은 거미가 삼키는 땅입니다. 또 거기 가 보니 모든 백성들의 신장이 아주 장대합니다. 옛부터 내려오는 거족이라 하는 누빌림의 자손 곧 아낙 자손들이 있는데 모두 대장부요 우리와 비교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습니다. 우리 소견에 그러니 그들의 눈에는 더할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올라가서 그 백성을 쳐야 절대로 이기지 못 합니다 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이렇게 엇갈리는 보고를 들은 그 때의 무리들은 갈렙과 여호수아의 말보다는 열 종장의 말은 신임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애굽을 떠나 여기까지 겨우 왔는데 이제는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오도 가도 못하고 어떻게 한단 말인고 하면서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엇 하러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왔느냐? 고 따졌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가나안에는 못 들어가고 광야에서 살 수는 없으니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지도자를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모세는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여호와께 엎디어 기도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이 믿지 아니하는 것을 보시고 진노하셔서 그 백성을 광야에서 멸하고자 하였지마는 모세가 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로 다시 되돌아 나와서 그 때부터 三十八년이나 광야를 배회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애굽에서 나왔던 장년들은 다 죽었습니다. 새로 난 세대와 가나안 복지로 곧 들어가자고 주장하던 갈렙과 여호수아만 三十八년 후에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은 오고 오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큰 교훈이 되는 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잃을 때에 사십 년간이나 광야에서 허비하였습니다.
가나안 복지를 앞에 두었을 때에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었음을 찾아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모험적 신앙을 가지고 전진하자고 하는 사람과 열 족장들과 같이, 그 사람들과 우리와 비교하면 우리는 메뚜기인데 하는 메뚜기 의식에 사로잡혀 원수에게 질린 사람들과 그 때의 많은 민중들처럼 암흑면만 바라보고 낙심하는 사람들이 그것입니다.
가나안 복지에 들어간 사람은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새 세대가 들어갔습니다.
이 진리는 언제나 같은 줄 압니다.
가나안 복지는 여러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어떤 사업을 경영할 때에 성공하는 것으로도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민족적으로는 남북의 통일과 이 땅에 자유와 번영의 민주국가를 확립하는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는 영적으로 우리 민족을 복음으로 정복해서 이 땅에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온 아시아를 복음으로 정복해서 기독교 아시아를 이루는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또는 교회의 어떤 중요한 사업을 이루는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생각하든지 가나안 복지를 정복하고 쟁취하는 데는 반드시 난관이 있는 것입니다. 아낙 자손이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방해가 있습니다. 견고한 성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열 족장과 같은 이들은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난관을 당할 때에 그것을 과대 평가합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 합니다. 그래서 메뚜기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겸손 이 아닙니다. 이것은 비겁한 마음이올시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가나안 복지를 그들에게 주려고 하신 것이었지만 이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또한 이들은 겁에 질려서 하나님의 권능도 잊어 버렸습니다.
그 백성을 애굽에서 속량해 내시고 많은 난관 가운데서 시내 광야를 지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권능도 잊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밤길을 갈 때에 바위를 보고도 호랑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시지요? 밤에 갈릴리 바다를 지나가던 제자들이 물결이 요동할 때에 겁에 질려서 예수 님께서 물위로 걸어 자기네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요물이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아프리카 밀림 지대를 지나가던 어떤 두 청년이 갑자기 발 뿌리에서 개구리 소리가 나니까 사자소리 인 줄 알고 혼비백산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왜? 겁에 질렸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에 이런 사람들이 성공한 예는 하나도 없습니다.
마틴 루터가 이런 사람이었다고 할 것이면 종교개혁의 위대한 사업을 이루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웜스 국회에 출석하라고 하는 황제의 명령을 받고 가려고 준비할 때에 가까운 친구들은 그렇게 위험한 곳을 어떻게 가겠느냐고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의 대답은, 비록 마귀가 웜스 국회 의사당의 기와 장 같이 많을 지라도 나는 가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이순신 같은 장군이 이런 마음이 있었다고 할 것이면 적은 수를 가지고 많은 왜적을 물리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겁을 집어먹는 사람이 이루어 놓은 일은 도무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강하고 담대 하라고 말합니다. 예수 님께서 도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고, 주님께서 같이 하시니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참된 신앙은 공포심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참된 신앙은 모든 공포심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또 이 때의 많은 무리들처럼 낙심하는 사람은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들은 광명 면에 대한 얘기는 듣지 아니하고 암흑면에 대한 얘기만 듣고 암흑면만 바라본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었지마는, 그런 보고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삼킨다는 말만 귀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잊어버린 것입니다. 무엇 하러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서 거기까지 인도하였나 하는 하나님의 듯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흔히 원망합니다. 이런 이들은 흔히 뒤를 돌아봅니다. 낙심합니다. 낙심한 사람이 성공한 예는 동서고급에 하나도 없습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횡단할 때에 많은 선원들은 반대하였습니다. 낙심해서 원망했습니다. 콜럼버스까지 낙심하였다면 새 대륙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욥이 그 많은 환난 가운데서 낙심하였다면 최후의 큰 축복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낙심한 사람이 성공한 예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광산을 찾아보는 과학자들이 어떤 산에 가보니 거기서 꼭 금이 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이 산을 파면 반드시 금이 나겠으니 파보자고 해서 산을 팠습니다. 그런데 조금 파다가 보니 어떤 사람이 파 보았던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퍽 이나 많이 팠으니 계속해서 좀더 파자고 하면서 옛 광산 하던 자리를 파보았는데 한참 파다 보니 큰 곡괭이가 박혀 있는데 그 자루가 다 썩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니 아주 오래 전에 광부들이 그 곳을 파보았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광부들을 동원하여 계속하여 팠습니다. 그런데 그 곡괭이가 묘하게도 금만 있는 노다지 속에 박혀 있었습니다. 깊이 곡괭이가 박히니 그 광산 하던 사람이 뽑아 내지를 못하고 낙심하여 돌아간 모양입니다. 거기를 계속해서 파니 많은 금이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교훈 하여 주십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피곤해도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했습니다.
주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끝까지 낙심하지 아니하는 이에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복지를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가나안 복지에 들어갔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이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아낙 자손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거대한 아낙 자손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견고하고 높은 성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몇 가지 더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보았습니다. 이 땅을 우리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깊은 뜻임을 그들은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을 알고 또 믿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자손들이 있지마는, 아무리 성곽이 높지마는 하나님의 뜻이 같이 하실 때에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것을 모험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험한 것을 무릅쓰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이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은 겁을 내지 아니합니다.
이런 사람은 공포심을 극복합니다. 이런 사람은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이런 사람은 용감하고 담대해집니다.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이가 가나안 복지를 쟁취하는 것입니다. 모험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할 때에도 여러 가지 난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모험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담대히 대서양을 범선으로 건너서 새 대륙을 발견하고 위대한 아메리카를 건설한 청교도들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보통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험한 것을 무릅쓰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이 혈혈단신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건너가서 탐험하며 복음을 전파한 리빙스톤의 신앙입니다. 험한 것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아무 선교부의 후원도 없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중국 내지(內地)에 담대히 들어가서 내지 선교회를 조직하고 복음을 전파한 허드슨 테일러의 신앙이기도 합니다. 모험적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역시, 홀로 아프리카 정글 속에 들어가서 일생토록 흑인의 병을 고쳐주며 봉사하던 알버트 슈바이처의 신앙이기도 합니다. 험한 것을 무릅쓰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지 아니하는 신앙은 가나안 복지를 쟁취하지 못합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 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이 모험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청년 여러분들, 보람있는 생을 원하면 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앙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언제나 잔잔한 바다는 아닙니다. 때때로 파도가 높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험한 것을 무릅쓰고 나가는 신앙이 참된 신앙인 것입니다. 죽음은 최대의 모험이올시다. 이런 신앙을 가진 이라야 사실 하늘나라에도 가는 것입니다.
지난번 아폴로 九호와 十호의 우주인들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읽어보니, 아폴로 九호를 타고 달을 돌던 우주인들이 달을 돌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그 기도가 땅에까지 방송되었다는 기사를 읽어보았습니다.
이번에 아폴로 十호를 타고 달에 가까이 갔던 우주인 한 사람은 특별히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에게 자기가 평소에 잊지 않고 기억하던 성경 구절을 전해 달라는 방송을 하였다는 기사를 읽어보았습니다. 이들도 이런 신앙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달을 정복하는 데도 이 모험적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영적으로, 육 적으로, 정복해야 될 가나안 복지가 있습니다. 이 가나안 복지를 점령할 수 있는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모험적 신앙이 있는 사람입니다. (一九六九년 六월 一일)


Ⅸ-7 부모의 가장 큰 기쁨 (요한 三서 一-十四절)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요三서 四)

이 말씀은 사도 요한 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 一, 二, 三서는 사도 요한 이 매우 나이 많을 때에 기록한 서신입니다. 이 모든 서신을 통해서 우리는 요한 의 믿음의 아버지로서의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三서는 가이오 라고 하는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에게 보낸 사사로운 편지올시다. 여기에서 그는 믿음의 아버지로서의 심정을 그대로 나타낸 것입니다.
오늘은 세계적으로 지키는 어린이 주일 또는 꽃 주일이라고 합니다. 아마 그것은 어린이는 꽃과 같이 예쁘다는 뜻인 줄 압니다. 또 어린이 주일을 유월 둘째 주일로 지키는 것도 뜻이 있는 줄 압니다.
특별히 이 때는 꽃 가운데도 제일 아름다운 장미가 피는 때입니다. 이렇게 어린이들은 가장 아름다운 꽃들이올시다. 따라서 부모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했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부모로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부모의 심정도 일반인 줄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이 부모들에게 가져오는 기쁨은 사실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선 어린이들의 예쁜 얼굴을 통해서 부모들에게 많은 기쁨을 가져옵니다. 아마 꽃이 아름답다고 하지마는 어린이들의 얼굴보다 더 아름답지 못할 것입니다. 특별히 어머니의 생각으로는 자기 아기보다 더 예쁜 것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다 꽃과 같이 아름답습니다. 사실은 어린이들도 가만히 보면 더 예쁜 아기도 있고 그렇지 못한 아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어머니에게는 다 예쁩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기를 낳고서는 찾아간 손님에게 안겨 주면서 우리아기 좀 보세요, 그럽니다. 그런 경우에 그 아기를 보고 참 잘도 생겼다고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기 얼굴을 쳐다보니 그렇게 잘 생기지 못했단 말입니다. 그래서『아기는 과연 아기 군』이라고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아기가 다 예쁩니다. 특별히 아기가 몇 달되어서 웃기를 시작하면 웃는 아기 얼굴처럼 예뿐 것이 천하 어디에 있습니까. 또 어린애가 조금 더 커서 뒤집게 되면 그것도 예쁘고 혹 배 밀기를 하면 그것도 예쁘고 벌렁벌렁 기어다니게 되면 그것도 예쁩니다. 어린이들의 동작은 다 부모들에게 기쁨을 가져옵니다. 그러다가, 엄마 아빠라는 아기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더 예뻐집니까. 그래서 어머니들이 하는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아이들이 말 몇 마디 하게 되면 벌써 다른 이들에게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애는 못하는 말이 없다고 합니다. 사실이야 그렇지 않겠지마는 어머니들이 그렇게 자랑을 합니다.
그래서 아기가 가정에 있으면 온 가정에 웃음의 꽃이 핍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아기가 백일만 되면 백일 잔치를 해 주고 돌이 되면 돌잔치를 해 주고 정성껏 기릅니다.
저는 경험은 없으나 제가 들으니 아기 젖먹이는 재미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또 아기 업고 다니는 재미도 대단하답니다.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에 어떤 교회 목사님이 광고하기를, 분주하니 예배당 올 때에 아기를 업고 오지 말라는 광고를 했다고 합니다. 그 광고를 듣고 아기 어머니들이 불평이 대단했다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아기 업고 예배당 오지 말라는 광고는 하지 않고 아기 업고 오는 이들은 다 딴 방으로 가라고 광고를 합니다.
제가 이따금 예배를 볼 때 한 가지 좋은 것은 그 방이 아주 명랑합니다. 가만 보면 어머니들이 강대 상은 별로 안 보고 아기얼굴만 보려고 합니다. 아기 얼리는 어머니, 싸 가지고 온 과자를 먹이는 할머니, 아이들이 문턱에 올라가면 끌어내리는 어머니, 하여간 좀 분주하기는 하지만 그 방에 얼굴을 찡그리고 앉은 어머니는 없습니다. 아주 명랑합니다. 어린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아기가 점점 커서 유치원에 가게되면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쁩니까? 혹 유치원에 가서 무슨 그림을 그려 가지고 오면 그 그림이 얼마나 잘 그렸는지, 자기 아들 그림 잘 그린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혹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게 되면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쁩니까? 그러다가 혹 상장 같은 것이라도 타 가지고 오면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기쁩니까?
신문에 보면 치마 바람이란 말이 더러 나옵니다.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그저 어린이들이 너무 예뻐서 아이들을 위해서는 갈 데 안 갈데 없이 분주히 돌아다니니까 자연히 치마 바람이 날것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에는 치마 바람도 괜찮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어린 아기들이 아기 때부터 국민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그 가정에 가져오는 모든 기쁨을 돈으로 환산한다고 할 것이면 부모들이 그 아기를 위해서 쓴 모든 돈, 부모들이 아기를 위해서 고생한 그 모든 고생을 돈으로 환산하면 아마 아기 편이 더 많을 거라 생각됩니다.
사실 여러 부모님들이 아이를 위해서 수고한다고 하지만 무료 봉사한다고 생각지 마세요. 사실은 값 받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어린이들이 가정의 화평(和平)도 가져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부부간에 싸움을 하고 앉아 있다가도 유치원에 갔다오는 아이가 엄마 아빠하고 들어오게 되면 성났던 것도 봄 동산의 눈처럼 사라집니다. 그리고는 다시 어린아이를 가운데 놓고 싱글벙글 웃습니다.
내가 들으니까 어떤 가정에서 부부간 싸움을 굉장히 하고는, 나는 이런 집에서 못 살겠어 하며 보따리를 싸 가지고 그 부인이 문밖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나가려고 하는데 댓 살 난 어린애가 놀다가 뛰어 들어왔습니다. 들어오다 보니 어머니가 보따리를 싸 가지고 나갑니다. 이 아기는 어머니의 두 손을 꼭 잡고 엄마 못 가, 나하고 같이 살자 하며 매달리니 그만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어린이들이 이혼 방지하는 데는 가정법원 판사보다 나은 줄 압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혼 많이 하는 나라의 통계를 보면 아기 없는 가정의 이혼율이 아기 있는 가정의 이혼율보다 퍽 높습니다. 그게 무엇을 증명합니까? 어린이들이 단연 이혼도 방지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도 큰 기쁨을 가져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에도 큰 기쁨을 가져옵니다. 대학쯤 졸업하게 되면 더 큰 기쁨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취직을 하게 되면 더 큰 기쁨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결혼까지 하게 되면 더 큰 기쁨을 가져옵니다.
어린이들이 부모에게 많은 기쁨을 가져옵니다. 이 어린이들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낳은 기쁨을 가져오는데 그 가운데 제일 큰 기쁨이 무엇입니까? 사도 요한 이 하신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세요.
여러 가지 다른 말을 듣는 것도 기쁨을 가져오지마는 자기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을 들을 때에 제일 기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부모도 그렇고 육신의 부모도 그렇습니다. 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하는 뜻은 쉽게 말하면 참된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는 뜻일 겁니다. 죄를 회개하고 죄를 멀리합니다. 복음의 진리대로 삽니다.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그 뜻을 순종합니다. 그 계명을 지킵니다. 범사에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생활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의 생활은 성결하고 겸손하고 진실하고 근면하고 충성되고 범사에 절제가 있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합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이런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합니다. 적극적으로 교회를 봉사합니다. 복음을 전파합니다. 교육에 힘을 씁니다. 모든 봉사를 합니다.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정성껏 일합니다. 이에서 더 큰 기쁨이 부모에게 있겠습니까?
몇 주일 전에 어떤 자매 님이 제게 봉투 하나를 줍니다. 그래서 이게 무엇입니까? 물으니까 웃으면서 우리 아이가 이번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는데 이번 첫 달 봉급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교회에 바치겠다고 합니다 하면서 그 봉투를 저에게 줍니다.
제가 그 봉투를 받으면서 그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어떻게 기뻐하는지, 참 큰 기쁨을 어머니가 체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몇 해 전에 편지를 하나 받았는데 뜯어보니 그 속에 돈이 좀 있어요. 누구에게서 왔는고 하니 전주 예수병원에 있는 간호원에게서 왔는데, 그 아기는 본래 우리 보건 원에서 자라난 간호원입니다. 여기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곳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원이 되어 자기가 받은 첫 달 봉급을 보낸 것입니다.
그 편지 사연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첫 달 봉급을 본 교회에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해서 이 걸 목사님께 보내니 이것을 교회에서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그 편지를 받을 때에 믿음의 부모로서 얼마나 기쁜지 이런 아이 하나만 기른 것도 보건 원 세운 보람이 있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애가 이렇게 믿음이 좋더니 후에 목사 부인이 됐습니다. 둘 다 미국에 가 있는데 자기 남편은 미국 교회에서 일을 보고 자기는 병원에서 간호원 일을 본다고 합니다.
『내 자녀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고 사도 요함은 말했습니다. 믿는 부모로서의 제일 큰 기쁨, 전도자로서의 제일 큰 기쁨이 무엇입니까? 내 아들이, 내 딸이, 내가 전도해서 믿는 사람이, 혹은 집사가 되고 혹은 권사가 되고 혹은 장로로 장립(將立)을 받고 혹은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서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왜 이것이 제일 큰 기쁨입니까? 이것은 우선 기도의 응답이올시다.
사무엘이 사사가 될 때에 한나가 얼마나 기뻐했을 겁니까? 왜? 한나의 기도가 이루어졌습니다. 방탕하던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유명한 신학자가 될 때에 그 어머니 모니카가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왜? 십 오 년 동안 기도하던 그 기도가 응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교육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가정교육 주일학교 교육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들을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고, 기도를 가르치는 것이고, 항상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교육의 열매가 맺혔습니까?
또 이것은 부모로서 수고한 보람이올시다.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고임을 받는 자녀가 되기 위해서 부모가 기울인 수고의 보람이 결국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의 계승을 의미합니다. 내가 살았을 때는 내가 십자가의 깃발을 들고 예수 님을 따라 갑니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서 이 깃발을 놓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깃발을 놓을지라도 내 아들, 내 딸 내가 선도한 그 청년이 이 깃발을 대신 잡고 주를 따라가는 것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큰 기쁨이 있습니까?
그것뿐입니까? 이것이야말로 하늘 나라의 영원한 기쁨을 의미합니다. 왜? 하늘나라에 가서도 온 가족이 같이 모일 것이 분명합니다.
나만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 아니고 내 아들과 내 딸과 같이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을 생각 할 때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이 구절을 이렇게 읽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치 아니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슬픔이 없도다.』
부모로서의 가장 큰 슬픔이 무엇일까요? 믿는 부모로서의 가장 큰 슬픔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다윗의 일생을 잘 알지요. 다윗의 일생에서 가장 큰 슬픔의 장면이 언제입니까? 자기 아들 압살롬이 자기를 반역하고 역적 행동을 하다가 결국 죽을 때에 다윗이『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네 대신 죽었으면 좋을 뻔하였구나』하며 대성통곡을 하지 않았습니까?
진리에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부모에게 가장 큰 슬픔을 가져옵니다.
제가 해방 후 이곳에 넘어와서 한 이삼년 됐을 때입니다. 여기서 과히 멀지 않은 시골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 교회에 장로 한 분이 계신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맏아들은 지금 무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장로가 웃으면서 아주 기쁨으로 대답하는 말이 내 아들은 서울 가서 벼슬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 말을 듣고 속으로는 이 장로가 장로이긴 하나 아직까지 옛날 고루한 사상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후에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한번 신문을 펴보니 그 아들 이름이 나옵니다. 어떤 사건과 관련이 되어서 교도소에 들어갔습니다. 결국은 중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상할까 생각만 해도 내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무리 벼슬을 하고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고 아무리 돈을 잘 번다고 할지라도 진리에 행하지 않는 아들은 결국 부모에게 가장 큰 슬픔을 가져옵니다.
그러기에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감사할 줄 모르는 자녀는 독사의 이빨보다 더 날카롭게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아들과 딸 때문에 마음 상하는 부모가 얼마나 많습니까? 왜 이것이 가장 큰 슬픔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나 부모에게나 배은망덕의 자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행하지 아니하고 옳은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을 그 믿는 가정에 있어서는 신앙의 대가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지금 십자가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있지마는 내가 이 깃발을 놓을 수밖에 없을 때에 이 깃발을 들사람이 없습니다.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고 하면 부모에게 영원한 슬픔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가서도 온 가족이 다 모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마는 그 심령이 얼마나 외롭습니까?
우리 가운데는 젊은 자녀들도 많이 있는 줄 압니다. 이와 같은 때에 내 자신을 스스로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어떠한 자녀인가? 내가 과연 내 부모님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 자녀인가? 혹은 그렇지 못한가? 내가 언제나 부모에게 웃음을 가져다주는 자녀인가? 혹은 내 부모로 하여금 때때로 눈물을 뿌리게 하는 자녀인가? 만일 참으로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자녀가 되었다고 할 것이면 이에서 더 행복 된 사람이 없습니다. 이에서 더 감사한 일이 없습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특별히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이 있다고 하면 현재에 옳은 생활을 한다고 너무 교만하지 말 것입니다. 『스스로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항상 겸손한 마음을 품고 더욱 힘써 옳은 길을 걷고 주의 일을 봉하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기억하세요. 이러한 이는 부모에게 가장 큰 슬픔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또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교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압니까? 불효삼천에 무후이대(不孝三千 蕪後而大)라고 합니다. 불효되는 것이 삼천 가지가 있는데 후손 없는 것이 제일 큰 것이라 합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압니까? 불효삼천에 무신이대 (不孝三千 蕪信而大)라, 불효되는 것 삼천 가지가 있는데 믿음 없는 것이 제일 큰 것이라 합니다. 이런 이가 한 분이라도 있다고 하면 속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에 행하는 것만이 내게도 제일 큰 행복이 됩니다. 진리의 길은 좁으나 결국은 생명의 길이요, 세상의 길은 넓어 보이나 결국은 사망의 길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다리지 마시고 이제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위해서 우선 돌이켜야 합니다. 내 교회를 위해서도 돌이켜야 합니다. 내 나라를 위해서도 돌이켜야 합니다. 금생(今生)을 위해서도 돌이켜야 합니다. 내생을 위해서도 돌이켜야 합니다.
또 부모님들에게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떠한 자녀들입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다 진리에 행하는 자녀들입니까? 혹은 그렇지 못한 자녀를 가진 부모들도 계십니까? 진리에 행하는 자녀를 가진 부모야말로 가장 큰 기쁨의 소유자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 무엇 불편한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참된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면 거기서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감사하세요. 그리고 더욱 기도하세요. 더욱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기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그렇지 못한 자녀를 가진 부모님들이 혹 계십니까? 이러한 부모에게 대해서 저는 중심으로 동정을 가집니다. 이러한 부모님들을 위해서 저는 항상 기도를 드립니다. 그 상심이 어떠할 것을 저는 넉넉히 짐작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기도하시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내가 들으니 전에 잘 믿는 어머니 두 분이 자기 아들이 회개 아니하고 죄악 가운데 사니까 약속을 하고 매일 모여서 항상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十五년을 계속하는 중에 한 어머니 아들이 회개를 하였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겠어요. 그런데 한 어머니 아들은 그냥 회개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어머니가 왜 당신의 기도는 이루어 주고 내 기도는 이루어 주지 않습니까? 하고 하나님께 불평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 떠난 다음에 그 아들이 회개했다고 합니다. 낙심하지 마시고 계속해서 기도하시고 계속해서 힘쓰시기 바랍니다.
오늘 꽃 주일을 당해서 부모님들은 가장 큰 기쁨을 가지는 부모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 자녀들은 가장 큰 기쁨을 부모들에게 줄 수 있는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길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一九六九년 六월 八일)


Ⅸ-8 변함없는 그리스도 (히브리서 十三장 一-九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十三·八)

요사이 많이 들리는 말 가운데 하나는 변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서울의 모습이 변했습니다. 고층 건물을 보고 고속도로를 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여자들의 모습도 변했습니다. 그 치마를 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인심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저 눈감으면 코 베 갈 세상이라고 하는 말도 들립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변함이 많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변합니다. 二十세기 중에도 세계 지도가 몇 번이나 변했습니다. 국경이 변하고 정권도 변했습니다. 인물도 변합니다. 옛 지도자는 어느덧 지나가고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인간 자신도 항상 변합니다. 얼굴도 변하고 말도 변하고 사상도 변하고 풍속도 변하고 유행도 변하고 또 인심은 조석변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현대를 급변하는 세대라고 말합니다. 그리해서 혁명시대라고 합니다. 사실 현대는 전 세계를 통해서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 급격한 변천이 있는 시대입니다. 이 변함이 많은 세대에 사는 현대인으로서 우리가 꼭 배워야 할 성서적 진리가 몇 가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로 모든 것이 변하는 듯하지마는 범사에 근본적인 것은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변치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올시다. 삼위일체의 한 분이올시다. 하나님은 변하지 아니합니다.
야고보서 一장 十七절에『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은 변치 아니합니다. 그리스도는 변치 아니합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죄인의 구주입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교회의 머리가 됩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선지자의 직분, 대제사장의 직분, 왕의 직분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영원토록 길이시오, 진리 시오, 생명이올시다. 그는 영원토록 생명의 양식이올시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의 십자가는 영원토록 죄인을 구속합니다. 그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아니합니다. 그의 능력도 변치 아니합니다. 그의 말씀도 변치 아니합니다. 그의 약속도 변치 아니합니다. 그의 교훈도 변치 아니합니다. 그의 나라도 변치 아니합니다. 영원토록 변치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믿을 만합니다. 그리스도는 의지할 만합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우리의 영혼을 맡길 만합니다. 현재와 장래, 금생과 내생에 의탁할 만합니다. 우리는 이 변태무상한 세상에서 변함이 없는 만세반석이신 그리스도의 터 위에 생의 근거를 두고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동해 바다의 파도는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은 고금이 동일합니다. 왜? 반석으로 된 까닭입니다. 그리스도는 만세반석이올시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우주 곧 대자연도 그 외부 현상은 때를 따라서 변합니다. 조석이 변합니다. 춘하추동이 변합니다. 그 모습도 빛깔도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대우주를 지으실 때에 그 속에 두신 기본 원칙, 곧 자연의 법칙은 변치 아니합니다. 아침이 변해서 저녁이 됩니다. 그러나 해가 서편으로 뜨는 것을 누가 보았습니까? 그런 법은 없습니다. 자연법칙은 변치 아니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 인간이 빙 빙 도는 공과 같은 이 지구 위에 안전히 집을 짓고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연법칙이 한번 변한다고 해 보세요. 온 우주가 혼돈해 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이 성립됩니다. 자연법칙이 변치 않기에 과학이 성립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주선을 날려서 우주를 탐색 할 수 있습니다.
삼라만상이 변하나 하나님의 법은 변치 아니 합니다. 이 변치 아니하는 하나님의 법 위에 인생의 기초를 두고 살 때에 우리의 생명이 안전할 것입니다.
시대와 사회를 따라서 도덕의 관념이나 그 가치관이 다소 변합니다. 그것은 사실인 줄 압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하나님께서 본래 내신 기본원칙 곧 도덕적 법칙은 변치 아니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하는 도덕의 근본 원칙은 변치 아니합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꼭 그대로 됩니다.
미가서 六장 八절에『사람아 주께서 선하심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했습니다. 공의, 인자, 겸손의 생활은 언제나 변치 아니하는 윤리의 생활이올시다. 아무리 변하는 세상이라고 해도 변치 아니하는 하나님의 복음 위에서 살게 될 때에 우리는 언제나 어느 사회에서나 옳게 사는 것입니다. 또 인간 자체에 대해서도 물론 변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변해서 어른이 됩니다. 청년이 변해서 노인이 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은 변치 아니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본능은 변치 아니합니다. 옛날 사람이나 오늘의 사람이나 인간의 본능은 마찬가지입니다. 또 인간에 대한 창조의 질서도 변치 아니합니다. 언제나 남자는 남자요 여자는 여자입니다.
변한다고 해서 남자가 여자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가 남자로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혹 옷은 그렇게 입고 다니는 사람이 더러 있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사람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의 질서는 변하지 아니합니다.
또 인간 일생에 당하는 중요한 사실도 변치 아니합니다. 생, 노, 병, 사, 나는 것, 늙는 것, 병나는 것, 죽는 것 등은 변한 없이 누구에게나 옵니다.
좋은 약이 많다고 하니 죽지 않으리라 생각하지 마세요. 죽을 때가 한 번 옵니다. 그것은 변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깊은 욕구도 변치 아니합니다. 인간은 죄를 범하였습니다. 인간은 죄인이올시다. 인간은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구주가 필요합니다. 변치 아니하시는 생명의 주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와야 잠깐 동안의 인생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성경이 변하는 문제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변하되 옳게 변할 수도 있습니다. 회개하라 하는 말씀을 성경에서 종종 찾아봅니다. 그것은 무슨 말입니까? 옳게 변하라는 말입니다. 중생 하라, 거듭나라 하는 교훈을 찾아봅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도 옳게 변하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十二장 二절에『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해서 변화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옳게 변하라는 말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옳게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장차 만물을 새롭게 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모든 것을 옳게 변하게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 나라가 장차 주의 나라가 될 때가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세상의 나라도 다 변하게 하여 새로운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하는 뜻입니다.
요한 계시록 마지막 장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입니까? 장차 온 우주가 옳게 변해서 새로운 우주가 되겠다 하는 뜻입니다. 성경은 변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변하라고 합니까? 옳게 변하라고 합니다. 제멋대로 변하면 안 됩니다.
제가 해방 후 처음으로 미국에 가서 본 인상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제가 본래 미국에서 공부하고 나온 지 약 二十년만에 전쟁 이후 처음으로 가 보았습니다. 가보니 우리가 학생으로 공부하던 때와는 변한 게 많았습니다. 잘 변한 것도 많았습니다. 고층 건물도 더 많이 지었고, 고속 도로도 더 많이 닦아 놓고, 우리 한국에는 아직 없던 형광등도 만들어 놓고 한국에 없던 텔레비전도 집집이 거의 다 달았고 옳게 변한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옳지 못하게 변한 것도 더러 있었습니다.
여자들도 담배 피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졌는지요. 우리가 학생 시대에는 담배 피는 여자가 별로 없었는데 한 二十년 후에 가 보니 담배 피는 여자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아무리 봐야 옳게 변한 것 같지 않아요. 이혼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아졌는지 몰라요. 옳게 변한 것 같지 않습니다. 요사이 가 보면 히피족이라 해서 젊은 사람들이 머리도 깍지 아니하고 수염도 깍지 아니하고 맨발로 다녀서 얼른 보면 거지같아요. 암만 보아도 옳게 변한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사회도 옳게 변하는 것이 있어요. 우리 사회도 점점 공업화되어 공업이 발달되는 것은 옳게 변하는 것이지요. 근대화가 되는 것도 옳게 변하는 것이지요. 여러 가지로 생활이 개선되고 향상되는 모든 것은 옳게 변하는 거지요.
그러나 옳지 못하게 변하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깡패가 얼마나 더 많아졌어요? 가짜 약품이니, 가짜 식품이니, 가짜 박사니, 가짜가 얼마나 많아졌습니까? 범죄율이 얼마나 자꾸 올라갑니까? 한국에도 이혼율이 상당히 올라간다고 합니다. 이거 옳게 변하는 것일까요? 잘못 변하는 것입니다.
스티븐슨의 유명한 작품『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가운데는 두 가지 성품이 있는데 하나는 지킬 박사요, 하나는 하이드라고 합니다. 지킬박사는 아주 덕망이 높은 과학자요, 하이드는 아주 악한데 이 두 성품이 인간의 마음속에 같이 있다고 합니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점점 지킬 박사로 변해 가느냐 또는 하이드와 같은 악한 사람으로 변해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문하에서 배웠지마는 하나는 하루에 삼천 명씩 회개시켜 새 사람을 만드는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되었고 하나는 결국 예수를 팔아먹고 자살로 최후를 마치는 유다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가 무엇으로 변해 가느냐, 우리가 베드로로 변해 가느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이란 항상 고정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항상 변하는 도중에 있습니다.
요컨대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방향으로 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옳은 방향으로 변합니까? 베드로의 방향으로 변합니까? 혹 유다의 방향으로 변합니까? 천당의 후보자로 변합니까? 혹은 지옥의 후보자로 변합니까?
특별히 청년 시대에 옳게 변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생을 옳게 살며 옳은 생활, 옳은 일을 하며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성경을 읽어보세요. 『네 나이 어림으로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말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결(淨潔)의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봉사하되 화평과 덕으로 봉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회에 나가서 성결(聖潔)과 정직과 근면과 봉사와 희생의 정신으로 온 사회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옳게 변해야 합니다. 옳게 변하려고 할 것이면 그리스도를 내 마음속에 영접해야 합니다.
또 우리 사회도 옳게 변해야 합니다. 우리 정계도 옳게 변해야 됩니다. 우리 정치도 옳게 변해야 됩니다. 우리 문화도 옳게 변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부패와 부정을 막는 사회 정화 운동이 필요합니다. 온 국민이 다같이 살 수 있는 경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농민이나 노동자들 같은 혜택을 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회 정의 운동이 필요합니다.
불우한 동포를 돕기 위한 온갖 사회 봉사 운동이 필요합니다.
대한 민국을 해치려는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철저한 반공사상과 방첩 운동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가 좀더 명랑하고 좀더 깨끗하고 좀더 질서 있고 좀더 화평하고 인간이 살만한 사회로 변하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여기 특별히 우리 믿는 사람의 사명이 있습니다. 사회적 사명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디가나 모든 방면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서 이 사회를 밝게 하여야 될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 사회를 명랑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이 四十쯤 지나면 누구나 그 육신이 원치 아니하는 방면으로 변해집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얼굴에는 점점 주름이 생기고, 머리에는 서릿발이 내리기 시작하고, 등이 점점 굽어지기 시작합니다. 나이가 들면 변하기 쉽습니다. 암만 보아야 북망산 후보생에 알맞게 변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을 읽으셨습니까?『겉 사람은 후패(朽敗)하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비록 이렇게 변하지마는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롭게 변화돼야 합니다. 인생의 황혼에 속 사람이 옳게 변해야 됩니다. 잘못하면 늙어가면서 속 사람까지 잘못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노인유욕(老人有慾)이라고 늙으면 욕심이 많아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옛 글에도 계기재득(戒己在得)이라고, 늙어서는 얻는 데에 경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전노 되기 쉬워요. 젊었을 때는 좋은 일에 돈 쓰기 쉬워도 점점 늙어가면서 인색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늙어가면서 완고(頑固)만 해지고 고집쟁이만 되기 쉽습니다. 늙어갈수록 옳게 변해야 합니다. 옛날부터 동양에 내려오는 말 가운데 보고덕부(報高德富)라고, 보다 높아지고 덕이 부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대로 하면 은혜와 진리가 점점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고 하면 성경의 말씀과 같이『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敬虔)을 더하고 경건에 형제 화목을 더하고 형제 화목에 사랑을 더해서』점점 장성해지고 속 사람이 완숙해져야 합니다.
이렇게 변화하려면 성경의 교훈과 같이『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아야』합니다.
예수는 어떤 분입니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아니하시는 만세반석이올시다. 만세 반석이신 그리스도의 터 위에 굳게 서서 언제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노사도 요한 이 기록한 요한 一서 三장 二절을 읽어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했습니다. 우리가 그 곧 그리스도와 같아질 때가 오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一九六九년 七월 二十九일)


Ⅸ-9 가이사집의 성도들 (빌립보서 四장 十-二十三절)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빌 四·二十二)

빌립보서는 바울의 옥중서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편지올시다. 모든 권면(勸勉)을 마친 후에 마지막 문안을 하는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는데 특별히 가이사집에 있는 몇 성도들도 너희들에게 문안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성도들이라고 하는 말은 천주교에서 중세기 이래로 사용해 온 것과 같은 특별한 성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 성도라는 말은 모든 믿는 사람을 의미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성별(聖別)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가이사집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가이사라고 하는 말은 그 때 로마 황제의 칭호입니다. 또 가이사집이라는 말은 개인의 집을 말한 것이 아니라 궁중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 황제의 궁정에서 일하는 궁내 대신을 비롯해서 비서, 궁녀, 시위대장관, 군인 등을 포함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주목할 것은, 이 때에 벌써 로마 제국 황제의 궁중에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올시다.
그 때의 황제가 누구였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그 때의 황제는 네로였습니다. 로마 역사상 가장 악한 제왕이라고 말합니다. 그이가 얼마나 포악하였는지 그는 자기 어머니를 죽이고 자기 아들도 죽이고 자기 아내까지 죽인 사람이올시다. 악마의 화신 그대로였습니다.
로마 성을 자기 손으로 불 놓고 그 책임을 믿는 사람들에게 전가하기 위해서 많은 기독교도들을 학살한 왕입니다. 학살을 하되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인 것입니다. 더러는 십자가에 못박고 더러는 사자 굴에 내어 던져서, 혹은 옷에다 골탈 칠을 해서 기둥에 비 끌어매고 불을 질러서 죽인 가장 잔인한 제왕입니다. 그러니 당시 궁중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이 포악하고 잔인했습니다. 공포와 불안에 쌓인 궁중입니다. 반면에 음란과 사치와 방탕과 온갖 죄악의 구렁텅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서도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시위대 군인들 가운데 혹은 비서들 가운데 혹은 궁녀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시간에 가이사집의 성도들을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오는 큰 느낌은 이런 죄악의 소굴에도 성도들이 있었던 것을 보니 신앙 생활은 어떤 환경에서나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항간에『요사이 관청에 있으면 신앙 생활 못해』하는 말이 들립니다. 혹은『요새 장사꾼으로서는 신앙 생활하기 힘들어』하는 말들이 들립니다. 여러분 가이사집의 성도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런 거슬리는 환경 가운데서 신앙 생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전에도 어려웠고 지금도 어렵고 장래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서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경건한 생활을 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다녀온 어떤 분의 말 가운데, 그 곳에서 북한에서 유학 온 청년 몇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자기를 조용히 보자고 하더니 자기 포켓에서 조그마한 책을 하나 꺼내 보이면서 이것이 무슨 책인지 아세요? 이것은 우리 한국말로 된 신약성서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 청년입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북한에 그리스도를 믿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북한에도 그리스도를 잘 믿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가이사집의 성도들입니다. 예수 님께서 신앙 생활은 쉬운 것이라 말씀하신 적은 절대로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이기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받으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우리가 사방으로 욱여 싸임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함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기록했습니다. 『내가 비천(卑賤)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너무 가난해서 못 믿겠다. 나는 너무 고독해서 못 믿겠다. 혹은 나는 우리 부모가 믿지 않으니까 믿기 어렵다. 혹은 내 남편이 믿지 않으니 못 믿겠다. 혹은 내가 받드는 사장님이 믿지 않으니 내가 믿기 어렵다라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여러분 가운데 혹 있습니까? 이 가이사집에서 예수를 믿던 성도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이 가이사집의 성도들을 생각할 때 들어오는 생각은 참 신앙은 모든 환경을 극복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빌립보서는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기록했습니다. 감옥은 고독한 곳입니다. 감옥은 침울한 곳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안에서도『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환경을 극복하였습니다. 빌립보서 一장 十二절 이하를 보면,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알기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남이 되었다』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감옥이라는 환경을 극복한 분이올시다. 이렇게 전도함으로써 가이사집의 성도들이 생긴 모양입니다.
바벨론에 잡혀간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하고, 그와 같은 이교의 궁중에서 양심적 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환경을 극복하고 양심적 신앙 생활을 계속한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불신 사회에서 살게 될 때에 언제나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점점 세상을 따라가면서 마지막에는 세상에 물들어 맛 잃은 소금이 될 수가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 가능성을 그런 가운데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점점 세상을 변화하게 해서 복음 화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을 가진 사도 바울의 신앙 생활이었습니다. 이것이 가이사집 성도들의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 후의 역사를 보면 여러 가지 핍박과 환난을 불구하고 이 가이사집 성도의 수는 점점 많아 갔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콘스탄틴 황제 때는 황제도 믿게 되고 그 어머니도 믿게 되어 온 가족이 다 믿고 마지막에는 로마 전국을 영적으로 정복한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환경을 극복합니다. 보통 집에 들어 가보면 한란계라는 것이 있지요. 그것 무엇 하는 겁니까? 한란계는 방안의 온도가 더운지 찬지를 얼른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사이 현대식으로 새로 지은 집에 가보면 한란계가 하나 더 있지요. 제온기(制溫器)라는 것이 있지요. 이 제온기라는 것은 온도를 내가 원하는 대로 놓으면 방안의 온도가 변해서 그 제온기의 온도만큼 됩니다. 냉난방이 자동으로 제온기를 따라 변하게 됩니다. 여러분 압니까? 믿는 사람들 가운데 두 가지 종류의 믿는 사람이 있어요. 한 사람은 한란계 비슷합니다. 자기 주위 환경의 온도에 따라서 같이 변하고 맙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제온기와 같은 신자가 있습니다. 어디 가든지 자기가 표준 한 그 표준대로 다른 사람을 따라오게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신자입니까? 제온기와 같은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 젊은 남녀들이 새로 학습을 썼습니다. 제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마는 아마 여기 특별히 여자들 가운데 이 다음에 출가할 때에 혹 믿지 아니하는 가정으로 출가하는 여자들이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령 어떤 여자가 믿지 아니하는 가정에 출가를 한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교회도 나오고 또 교회 봉사도 하느라고 애쓰다가 몇 해 지나 보면 점점 믿음이 식어져서 믿지 아니하는 가정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믿지 않고 맙니다. 그러나 어떤 여자는 꼭 같이 믿지 아니하는 가정 출가를 하였는데 그 가정에 출가해서 끝까지 신앙을 지킬뿐더러 남편도 회개시키고 시어머니도 회개시키고 또 시아버지까지 교회로 인도하고 온 가정을 다 복음 화하는 그런 여자들도 있음을 많이 보았습니다. 참 신앙은 환경을 극복합니다.
첫째는 참으로 중생 한 믿음이올시다.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거듭난 믿음, 새 사람이 된 믿음이올시다.
둘째는 이렇게 중생 한 후에도 계속해서 기도를 힘쓰고 성경 읽기를 힘쓰고 예배에 출석하고 성례에 참여하고 봉사와 전도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는 믿음이올시다. 그리해서 간단없이 새로운 힘과 은혜를 받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올시다.
셋째로는 행함이 따르는, 신행일치(信行一致)의 믿음이올시다. 그리해서 어디 가든지 성경과 건실(健實)과 근면과 단정함으로써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적 생활을 하는 신자입니다.
넷째는 언제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믿음이올시다. 언제나 그리스도와 동행하면서 새로운 은혜를 받는 믿음이올시다. 이런 믿음은 어디에 갖다 놓든지 모든 환경을 극복합니다. 오늘 학습을 서는 여러분들 특별히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혹 여러분 중에 불우하고 고독한 환경 가운데서 신앙 생활을 하며 때때로 낙심하는 이들이 있습니까? 가이사집의 성도들을 기억하시고 새로운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쉬운 환경이 아닙니다. 중생의 은혜와 또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산 믿음이올시다. 먼저 온전히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고 산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환경이든지 그 환경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결 가는 대로 떠다닙니다. 그러나 산 고기는 비록 쏟아지는 폭포수라도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산 믿음은 환경을 극복합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사회는 포악과 무도가 가득하고 음란과 방탕(放蕩)이 가득 찬 세상, 허영, 사치, 부정, 온갖 죄악이 가득한 말하자면 한 큰 가이사의 집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의 신앙을 지킬 뿐더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을 이기며 이런 세상을 변화시켜 새 세상을 만드는 사명이 오늘날 믿는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명을 다 하려면 옛날 가이사집의 성도들이 가졌던 신앙과 같은 신앙을 우리가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기도원에 가면 연못 둘이 있지 않습니까? 연못의 연꽃이 아주 아름답게 잘 피었습니다. 그러나 그 연꽃의 줄기를 보면 그 줄기는 더러운 진흙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꽃은 어떻게 아름답고 깨끗한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비록 이 더러운 세상에 산다고 하지마는, 우리 몸은 이와 같은 환경에 있다고 하지마는, 우리의 심령만은 연꽃과 같이 아름답고 청아한 향기를 품는 심령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이사집의 성도들을 기억해서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 있든지 낙심하지 말고 그 환경 가운데서 환경을 극복하고 내 신앙 생활을 할 뿐더러 온 환경을 변화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게 하는 큰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一九六九년 七월 六일)


Ⅸ-10 명랑한 생활의 비결 ( 빌립보서 四장 一-九절)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四·四)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의 여러 서신 중에서도 주옥같이 귀한 서신이올시다. 기쁨의 서신이란 말도 있습니다. 여기에『기뻐하라』는 말이 여러 번 나타납니다. 『기쁨으로 항상 간구(懇求)하노라.』『내가 기뻐하고』『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같이 기뻐하라.』『종말로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본서의 대지는 내가 기뻐하니 너희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의 심령은 기쁨으로 충만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사도 바울의 형편을 회상해 볼 때에 그가 이와 같은 서신을 섰다고 하는 것은 놀랄 만한 일입니다.
우선 그는 그 때에 나이 많은 노인이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흔히 웃기를 잘합니다. 그러나 노년 시대에도 이런 기분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 그는 로마의 감옥에 있었습니다. 한 손에는 쇠사슬을 차고 앉아있었습니다. 침울한 감방이올시다. 수감 생활은 또한 고독을 의미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 때에 그는 문자 그대로 사망의 그늘 속에 앉았던 것입니다. 언제 네로의 칼날이 그의 목에 임할는지 모르는 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심령은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 심령은 명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명랑한 서신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비결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오늘 아침 이 명랑한 생활의 비결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했습니다. 『주안에서』라는 말씀을 먼저 주목하십니다. 三장 一절에도『주안에서 기뻐하라.』 四장 四절에도『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했습니다. 바울의 서신을 보면『주안에서』혹은『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주안에 서라』,『주안에 갇힌 내가 너희에게 권면하노니』,『주안에서 증거하노니』,『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자녀들아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했습니다. 『주안에서 강건하여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문자 그대로 주안에서 산 것입니다. 그는 두 차원에서 살았습니다. 육신은 로마 감옥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심령은 주안에 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권면하노니, 하고 말했습니다. 그 육신은 감방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은 갇히지 않았습니다. 그 영은 주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것을 주안에서 행한 것입니다. 그의 생각도, 말도, 행동도, 편지를 써도, 전도를 해도 주안에서 한 것입니다. 그의 인격 전체 곧 지, 정, 의의 생활이라 주안에서 행하여진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히 연합한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二장 二十절에는 그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했습니다.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十五장 四절에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항상 주안에 있을 것입니다.
주안에서 사는 생활의 특색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몇 가지가 있는 줄 압니다.
우선 주 안에 사는 사람은 생의 목적이 다릅니다. 물론 전과 같이 의식주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전과 같이 공부하던 사람 공부하고, 사업하던 사람은 사업도 합니다. 그러나 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오직 나를 위하여 산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를 위해서 삽니다. 같은 사업을 하지마는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합니다. 같은 일을 하지만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합니다.『살던지 죽던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노라』고 사도 바울은 고백하였습니다. 생의 제일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게 됩니다.
또한 주안에서 사는 사람은 새로운 신령한 양식을 먹고삽니다. 예수 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는 자는 생명이 없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내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안에서 사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간단없이 생명의 양식을 먹고 생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를 얻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인내를 배웁니다. 주님으로부터 은혜와 진리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는 생의 열매가 물론 다릅니다.
육체대로 사는 사람은 자연히 육체의 열매를 맺습니다. 갈라디아 五장 十九절 이하에 기록한 대로 육체의 열매는 현저합니다.『음행과 더러운 것과 토색(討索)하는 것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내는 것과 당을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사는 이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사랑과 기쁨과 화평(和平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모든 아름다운 덕을 맺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그 심령이 항상 명랑합니다. 왜? 천국이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말씀한 그대로 이런 이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핍박을 받아서 풀무 속에 던짐을 받은 이야기는 여러분이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실상은 세 사람만 풀무 속에 넣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네 사람이 풀무 속에서 걸어 다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주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다. 환난 때도 같이 계시고 실패 때에도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지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늘 부르는 찬송의 한 절과 같이『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입니다.
이런 분들은 항상 하나님 안에서 삽니다. 그러므로 명랑합니다. 여기에 명랑한 생활의 비결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약을 보면 주안에 있던 그들은 핍박 중에도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감옥에서도 기뻐서 찬송을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재산의 손실을 보고도 감사하고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六장 十절에『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주안에만 명랑한 생활이 가능합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하였습니다. 여기『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다시 말하면 명랑한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가르쳐 줍니다.
성경에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마땅히 지킬 여러 가지 명령이 있습니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회개의 의무가 있습니다.『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했습니다. 성결한 생활을 하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서로 사랑하라』했습니다. 사랑의 의무가 있습니다. 『서로 봉사하라』했으니 봉사 할 의무가 있습니다. 『깨어 기도하라』했으니 기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했으니 전파할 의무가 있습니다.
여기에는『항상 기뻐하라』했으니 항상 기뻐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다른 여러 가지 명령을 복종하기를 힘쓰는 것처럼 이 명령도 복종하기를 힘써서 명랑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여야 될 것입니다. 이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지옥 맨 밑바닥에 많은 사람이 있는 광경이 나타납니다. 이 사람들은 무슨 죄를 짓고 왔느냐고 물으니까 다른 죄가 아니라 믿기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명랑한 생활을 못하고 늘 우울한 생활을 한 죄를 지은 까닭으로 여기에 왔다고 합니다.
명랑한 생활을 못하는 것은 죄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여야 합니다. 옳게 살 뿐더러 명랑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왜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였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성경의 말씀대로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良藥) 이라고 하였습니다. 명랑한 마음은 좋은 약입니다. 몸에 유익합니다. 명랑한 마음을 가지면 소화도 잘되고 혈액 순환도 잘 된다고 합니다. 병이 저절로 낫는다고 합니다. 현대 의학계의 말을 들어보면 병 가운데 六할 내지 七할의 원인은 심리적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명랑하지 못한 마음을 가진 육체 가운데 많은 병이 생깁니다.
근심과 걱정, 공포심, 의심, 증오심, 분노라는 마음, 시기와 질투 같은 명랑하지 못한 마음 가운데 육체의 병이 생깁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명랑한 마음을 가져야 힘을 얻어서 일을 잘합니다. 『주의 즐거움이 너희에게 능력이 되느니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명랑한 마음은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직공이 명랑한 마음을 가질 때에 일을 잘합니다. 주부가 명랑한 마음을 가질 때에 살림을 잘합니다. 학생이 명랑한 마음을 가질 때에 공부를 잘합니다. 선생이 명랑한 마음을 가질 때에 가르치기를 잘합니다. 군인들이 명랑한 마음을 가질 때에 국방을 잘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명랑한 마음을 가질 때에 전도도 잘 하는 것입니다. 봉사도 잘하는 것입니다. 명랑한 마음에는 마귀가 가까이 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시험을 못한다고 합니다.
왜? 햇빛 아래는 미균(黴菌)이 죽습니다. 명랑하지 않는 마음 가운데 시험과 유혹이 들어옵니다. 명랑한 생활에는 시험과 유혹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이렇게 다시 권면하는 것을 보니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의미입니다. 명랑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의미입니다.
내가 스스로 기뻐할 뿐더러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기쁨을 나눌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향기를 품는 백합화와 같이 어디로 가나 명랑한 분위기를 조성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二十세기를 혹은 우주 시대 혹은 원자 시대라고 하지마는 오늘날 세계 인류는 문자 그대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한국의 형편은 더욱 심합니다. 三八선은 그냥 있습니다. 빈곤이 그냥 있습니다. 부정과 부패도 그냥 있습니다. 각종 범죄율은 자꾸 올라만 갑니다.
요사이는 삼선개헌 문제로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사회는 더욱 어수선해집니다.
웃을 일이 별로 없습니다. 이런 사회이므로 백합화와 같이 어디를 가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 할 수 있는 명랑한 그리스도인들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밝아야 합니다. 명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본문이 있는 성경을 전부 한번 읽어보세요.『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懇求)로 너희 쓸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드 지각에 뛰어나는 하나님의 평강(平康)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그리스도인은 물론 먼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죄를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부족합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명랑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옳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가서 명랑하게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역사를 보면 고대 로마 사회는 그 헬라의 찬란한 문화와 로마의 권세와 영광에도 불구하고 매우 침울하였습니다. 대다수의 민중은 허탈감, 좌절감, 절망감에 휩쓸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그 역경과 핍박 중에서도 기쁨과 소망이 충만한 명랑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로마 제국을 정복한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세계 정세와 오늘의 한국 사회의 정세도 이와 비슷합니다. 과학은 발전되었다고 하지마는 인간은 침울한 상태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주안에서 기쁨과 소망으로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말의 근본 뜻은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물론 신앙 생활의 엄숙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과 비참(悲慘)과 사망을 볼 때에 예레이야와 같이 눈물을 흘릴 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것들을 정복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통하여 그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명랑한 종교입니다. 불교나 유교처럼 울상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쁨과 찬송의 종교입니다. 할렐루야의 종교입니다.
인도에 가서 선교하던 어떤 선교사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인도에는 건조기가 있는데 어느 해 건조기에 어떤 촌락에 있는 교인 하나가 와서, 큰일 났습니다. 우리 동네의 우물이 말랐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려면 아직도 서너 달이 있어야 할텐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선교사가 가서 보니 우물이 정말 말랐습니다. 선교사는 우물을 좀더 깊이 파봅시다. 온 동네가 힘을 모아 우물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을 파도 물이 안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반석이 나옵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반석을 깨뜨리고 계속하여 파게 했더니 이레 되는 날에 반석 아래서 생수가 솟아났습니다.
세상의 환경, 물질 혹은 사람에게서 오는 기쁨은 다 건조기와 같습니다. 마를 때가 있습니다. 주안에서 오는 기쁨은 깊은 데서 나는 생수입니다.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목마른지 아니 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우리 믿는 사람들은 주님이 약속하신 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충만히 마셔서 어떤 환경에서든지 명랑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一九六九年 七월 十三일)


Ⅸ-11 향상하는 생활 (이사야 四十장 二十六 - 三十一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四十· 三十일)

인간은 어디나 올라가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길러 본 이들은 잘 압니다. 아이들이 벌렁벌렁 기어다니게 되면, 벌써 책상에도 올라가려고 하고, 의자에도 올라가려고 하고, 문턱에까지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 아이들이 점점 커서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면 백운대에 올라가려고 하고, 조금 더 크면 설악산에 올라가려고 하고, 한라산까지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알프스산 꼭대기에도 올라가 보는 것이고 히말라야산 꼭대기에도 올라가는 것입니다. 기차 타고 여행하기보다는 비행기 타고 여행하기를 더욱 좋아합니다. 아마 그 까닭은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 지금은 우주인들이 달을 향해서 올라가는 중에 있습니다. 한국 사람 중에도 벌써 달 여행을 신청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을 봐도 인간은 누구나 올라가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올라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성품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간은 모든 방면에 향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것은 영적 방면에서 향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 가운데서 향상하는 생활의 비결을 잠깐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여호와를 앙망(仰望)하는 자는』이라는 글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여호와』라는 말씀은 물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혹은 주님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앙망』이라는 말은 앙모한다 혹은 대망 한다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모시고 기다린다는 뜻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평소에 무엇을 앙망 합니까? 물론 학생들은 지식을 앙망 한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정치가는 정권을, 관리는 보다 더 높은 지위를, 혹 어떤 이들은 좋은 집이나 옷 같은 것도 앙망 하는 이가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 영혼이 항상 앙망 할 대상은 되지 못합니다. 인간 영혼의 최고의 앙망 대상은, 또한 항상 앙망 할 만한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풀과 나무가 하늘을 향하는 것과 같이, 꽃이 언제나 태양을 향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혼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여 위로 앙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의심 없이 의지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죄의 회개와 고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직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기도와 묵상의 시간이 요구됩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앙망 하는 자는『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힘을 얻겠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 앞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困憊)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인간의 힘은 피곤해 지고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힘은 근본적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 영락교회 교역자 가운데 지 목사님이 전에 이북에 있을 때에 씨름을 해서 황소를 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힘이 아마 세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지금은 아마 황소 탈 것 같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힘은 나이 많아 갈수록 약해집니다.
인간의 체력은 이와 같이 제한이 되었지마는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자연계에 다른 힘들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그리해서 인간들은 다른 힘들을 이용해서 내 부족한 체력을 보충하면서 살아갑니다. 다시 말하면 옛부터 사람들은 바람의 힘을 빌어 썼습니다.
바람의 힘으로 배도 띄우고 펌프질도 하고, 수력이라는 물의 힘을 빌어서 물방아도 찧고, 화력이라는 불의 힘을 써서 밥도 짓고 수증기도 만들어 살았습니다.
현대 사람들은 전력을 발견하여 사용합니다. 원자력을 발견하여 사용합니다. 아마 아직도 우리 인간이 발견하지 못한 힘들이 자연계에 있는 줄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방면에 있어서도 인간의 힘, 정신력, 의지력은 미약합니다.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신령한 힘을 역시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과학을 통하여 자연계의 새 힘이 인간에게 오는 것처럼 참된 신앙을 통해서 신령한 하나님의 권능이 인간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을 말씀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일찍이 술의 종이요, 정욕의 종이요, 죄의 종이었지마는 믿은 후에 새로운 힘을 얻어서 새로운 생활을 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계속하여 읽어보면 셋째로『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옛날에는 공중에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이 독수리밖에 없었습니다. 비행기가 없을 때이니까요. 아마 이사야가 금년쯤에 이런 말씀을 쓴다고 할 것이면 이렇게 썼을 것 같아요.
『여호와를 앙망 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아폴로 十一호가 불을 뿜으며 공중으로 올라감 같을 것이요.』다시 말하면 여호와를 앙하여 새 힘을 얻는 사람은 그의 심령에 위로 올라가는 힘이 생긴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공중에 돌을 던져 보세요. 얼마 후에 돌은 다시 땅에 떨어지지요. 비행기도 가솔린이 다 없어지게 되면 땅으로 내려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 압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지구라는 것은 인력이 있어서 아래로 잡아당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물체가 자꾸 땅에 와서 붙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생활은 이 세상에서는 육신을 근거로 하고 삽니다. 이 육신이 항상 우리의 영적 생활을 끌어 아래로 잡아당깁니다.
육을 근거로 한 정욕, 물욕, 권세욕, 명예욕 같은 것이 올라가려고 하는 우리 심령을 자꾸 아래로 끌어내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앙망 하는 참된 신앙이 있는 이에게는 독수리에게 날개가 있는 것처럼, 아폴로 十一호에 연료와 불을 준 것처럼 새 힘을 주어서 끌어내리는 힘을 극복하고 올라갈 수 있는 산 심령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정욕의 힘을 이기고 성결한 생활로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돈만을 사랑하려 하는 힘을 이기고 의의 생활로 올라갑니다. 임시적 권세보다는 양심의 생활로 올라갑니다. 내 명예를 생각하는 것보다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합니다. 이러한 고상한 생활, 고귀한 생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생활, 사랑과 화평의 높은 차원으로 우리의 심령이 올라 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받으려고 하는 것보다는 주려는 정신으로 얻는 것보다도, 봉사하려는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높은 십자가의 정신이 움직이는 그 차원으로 우리의 심령을 올라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여러분 다 등산해 보신 분은 아시지마는 우리가 높이 올라 갈수록 우리의 시야가 넓어집니다. 낮은 곳에 있을수록 시야가 좁아집니다.
정중지와(井中之蛙)란 말이 있지요. 우물 속의 개구리라는 말입니다. 우물 속의 개구리는 그 속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하늘이 동전 닢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며 사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기껏 보아야 자기 자신만 봅니다. 가족도 심지어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겨우 본 대야 자기 가족이나 봅니다. 아주 낮은 곳에 사는 까닭입니다.
공산당들은 자기 계급만 봅니다. 그래서 계급 투쟁을 하라고 고조합니다. 전에 히틀러는 자기 민족만 보았습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시야가 넓어집니다. 더욱 높이 올라가면 세계를 한번에 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주인들이 달에 가서 찍은 지구의 사진을 다 보셨지요? 그 우주인들은 지구를 한꺼번에 보았습니다. 한꺼번에 보니 우리가 사는 지구가 얼마나 커 보이겠습니까?
사실은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한 작은 공입니다. 그 위에 三十五억이 넘는 사람들이 복잡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작은 공 위에서 사는 사람들이 계급이니 민족이니 국경이니 흑인이니 백인이니 하면서 싸우며 삽니다. 사실 우주인의 눈으로 세계를 보면 그렇게 살 세계가 아닙니다. 우주인들이 달에 남기고 오기 위해서 가지고 간 기념 판에 새긴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전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유성 지구에서 여기 왔노라.』시야가 좁아서 싸움을 합니다.
시야가 넓은 그리스도인들은 싸우면 아니 됩니다. 어디를 가나 평화의 생활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三장 二十八절에는『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다 하나인데 무슨 싸움이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七장 二十六절에는『인류의 모든 종족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라고 하였으니 다 한 형제가 아닙니까?
주를 앙망 해서 새 힘을 얻고 올라가는 생활을 하는 참 그리스도인의 시야가 얼마나 넓은지 여러분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주인의 시야보다 더 넓습니다. 다시 말하면 온 우주를 손바닥처럼 보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만사와 만물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으로 편협하고 고집불통의 인간이 있다고 할 것이면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참 에큐메니칼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또 우리가 높이 올라갈수록 모든 것을 바로 봅니다. 그것은 높이 올라갈수록 바른 배경에서, 바른 관점에서, 바른 관계에서 모든 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도 이 곳 저 곳에 二十 여 층 짜리 건물이 섭니다. 거리에서 그 건물을 쳐다보면 굉장히 높아 보이지요. 그러나 남산에 올라가서 한번 보세요. 과히 높지 않습니다. 비행기 타고 한번 내려다보세요. 형편없습니다.
모든 것을 바른 것과 비교해서 볼 때, 대소 고하의 관계를 비교해 볼 때, 무슨 일이나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한국 사정도 우리가 바로 보려고 하면 외국에 나가서 세계 물정을 알고 한국을 다시 보아야 한국의 당면한 문제를 좀 더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四장 十七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했습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이 우리가 세상에서 받는 환난과 하늘 나라에서 받을 그 영광과를 비교해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세상에서 받는 환난은 잠깐이요. 하늘에서 받을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세상에서 받는 환난은 사실 경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얻을 영광은 아주 중합니다. 영원의 견지에서 현재에 당하는 나의 체험을 봅니다. 이것은 그와 반대로 다른 경험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시 죄악을 통하여 얻는 향락과 영원한 세계에서 받을 그 축복과 비교해 볼 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멸의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은 영원히 계속되는 까닭입니다. 이런 시야에서 볼 때에만 우리가 모든 것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옳게 살려고 하면 영원한 견지에서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기도회에서 창세기를 읽는 중인데 그 마지막 부분에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이 형들의 시기를 받아서 억울하게 애굽에 팔려 갔습니다. 거기 가서도 옳게 살려고 애쓰다가 유혹까지 겪었지만 반대로 잡혀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애굽의 총리대신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 후에 큰 기근이 오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형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애굽까지 내려왔습니다. 그 긴 얘기를 다 할 것은 없고 마지막에 요셉은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다 나타냅니다. 내가『요셉이올시다』그러니까 형들이 부들부들 떱니다. 왜? 자기들의 한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에 요셉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여러 형님들, 형님들이 나를 팔았다고 과히 근심하지 마세요. 사실 내가 알기는 나를 애굽에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이 곳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큰 기근이 있을 것을 아시고 우리 가족을 기근에서 건지기 위해서 나를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요셉이 어떤 견지에서 자기의 경험을 보았습니까? 영원한 하나님의 견지에서 자기가 지나온 쓰고 단 경험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보니 원한도 잊어버릴 수 있고 형들의 죄도 쾌히 용서할 수 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을 가진 이들의 사고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경험, 고난이나 안락(安樂)이나 빈궁이나 풍부함이나, 성공이나 실패나 슬픔이나 기쁨이나 죽음까지도 영원한 견지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런 영혼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평화와 진리와 사랑의 차원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 역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올라가는 역사라고 볼 수 있지요. 우선 지적으로 많이 올라갑니다. 과학적 지식과 기술면에서도 굉장히 올라가는 역사입니다. 경제면에 있어서도 아직 요원한 바가 많지마는 그래도 점점 올라가는 형편에 있습니다. 생활의 수준도 점점 올라가는 형편에 있습니다.
그러나 윤리적인 면은 어떠합니까? 종종 지적한 바이지만 우리가 사는 二十세기는 과거의 어느 세기보다도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기였습니다. 우리는 도덕적 파탄의 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과학의 지식과 기술이 올라가는 것처럼 인간의 윤리면 과 도덕 면을 올라가는 자리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인간이 당면한 제일 큰 문제입니다.
또 영적 방면에서 보면 어떠합니까? 역시 같은 문제에 당면하게 됩니다. 요사이 한국에는 근대화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쓰여집니다. 그런데 요사이 한국에서 되는 실정을 보면 최신식 기계를 도입 해다 가 공장을 최신식으로 지어 놓고 낙성식 할 때는 돼지 대가리 놓고 고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굉장한 근대화지요? 그러나 영적 형편은 아직 이런 자리에 있습니다. 텔레비전 사다 놓고 최신식 양옥에서 사는 주부가 집에 오는 액운을 면하기 위해서 불공을 드리다가 중들에게 금품을 다 네다바이 당했다는 얘기도 우리가 종종 듣습니다.
서울 장안에도 고층건물은 여기 저기에 올라간다고 하지마는 아직도 골목 골목에 들어가 보면 굿하는 사람들, 경 읽는 사람들, 손금 보는 사람들, 당책(唐冊)보는 사람들, 점(占)장이 들이 우글우글 합니다. 귀신이 가득합니다.
물질 면으로 올라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도덕적인 면, 영적 방면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진리와 생명의 길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 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활 수준이 올라가는 것처럼 여러분의 영혼이 올라가는 중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방향은 어떻습니까? 올라갑니까? 내려갑니까?
한 사람이라도 아직까지 영혼의 방향이 위로 향하지 못했으면 이 시간에 방향을 바로 잡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 하는 자라야 새 힘을 얻고 향상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一九六九년 七월 二十일)


Ⅸ-12 인간의 특권과 책임 (시편 八편 一-九절)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八·五)

이 시편은 다윗의 시올시다. 다윗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하늘을 보고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달과 별을 볼 때에 다시 떠오르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는가? 하는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폴로 十一호에 대한 감격과 흥분으로 들떠 있습니다. 지난 약 두 주일처럼 전세계 인류가 달과 별을 바라본 때는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특별히 달을 많이 바라본 줄 생각합니다.
요사이 신문지상이나 거리에 다니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천문학자가 된 듯한 감이 있습니다. 항간에는 달 위에 사람이 올라갔다 왔다느니 또 다음에 달에 갈 때는 지프차도 가지고 간다느니 하는 말들이 오갑니다. 이 우주에는 저런 달이 천 개가 넘는다 고 하는 말도 들립니다. 항성으로 말하면 억이 넘는 수가 있고 또 지구의 몇 배가되는 별들도 많다고 하는 말들을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주고받습니다.
우주 시대에 사는 실감이 듭니다. 그리고 또 특별히 신문이나 거리에서 얘기하는 화제는 사람에 대한 것인가 봅니다. 사람의 재주가 많기는 많다고도 하고 또 어떤 신문은 인간의 힘은 무한하다고 썼고 인간의 지성은 만능이라고도 하며 어떤 이는 자유진영 만세, 루나 十五호는 떨어졌대 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고요히 성경을 상고해서 정확한 우주관과 인생관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할 줄 압니다.
특별히 이 시간은 인간에 관한 성경의 교훈을 중심해서, 인간의 특권이 무엇이며 그 책임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 본문 五절을 읽어보면『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저』는 인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고 했는데 여기『천사』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엘로힘』이라고 하는 말인데 그것은 하나님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 보면 대부분 하나님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저를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그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이 있습니다. 인간으로 창조함을 받은 그 자체가 아주 큰 인간의 특권입니다. 예로부터 인간에 대해서 그릇된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을 너무 높이 보는 견해입니다. 인간이 신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범신론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천도교에서 인내천(人乃天)이라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는데 다 이런 종류에 속하는 사상입니다. 이것도 인간을 너무 높이 보는 견해 가운데서 하나로서 인간을 그릇되게 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을 너무 낮게 보는 그릇된 견해가 있습니다. 소위 유물론적 견해요 완전히 물질적 견지에서 인간을 보는 견해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아메바와 인간의 차이는 아메바는 단세포 동물이요 인간은 복 세포 동물인데 불과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없어집니다. 이것은 인간을 너무 낮게 보는 그릇된 견해입니다.
인간이 처음으로 달에 착륙한 일은 인간 역사상에 새로운 기원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이 무한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지성이 만능인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때라고 해서 인간을 너무 높이 보는 그릇된 견해에 빠지면 아니 될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진리 그대로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스스로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스스로 있는 자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붙드심을 입어서 존재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피조물이므로 제한이 있습니다. 지력에도 제한이 있고 체력에도 제한이 있고 의지력에도 제한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시대라고 인간에 대한 과대망상증에 빠지면 아니 됩니다. 성경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체가 얼마나 큰 특권인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서 본문에는 또 다시『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우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든 피조물 가운데 우리 인간에게만 하나님께서 영화롭고 고귀한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성경을 상고해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一장 二十七절에 보면『하나님이 곧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의 관을 씌워주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영화의 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존귀의 관입니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이런 관을 씌워준 일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만 이런 관을 씌워준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뜻일까요? 몇 가지로 생각할 수 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불멸의 영혼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멸의 영혼을 주셨으니 우리는 참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영혼은 불멸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은 인격적 존재로서 지, 정, 의 (智情意)의 생활이 가능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교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이런 빛나는 관이 없습니다. 아무리 우주가 크다고 하지마는 이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은 더욱 위대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이런 불멸의 영혼으로써 관을 씌워 주신 것입니다.
또한 둘째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빛나는 이성의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무엇을 생각할 수 있고, 무슨 이치를 미루어 추리할 수 있고, 무엇을 연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이성을 통하여 창조적인 활동을 합니다. 예술 방면이나 음악 방면이나 문학 방면이나 특별히 과학 방면 등 모든 방면에서 창조적 활동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텔레비전도 만들 수 있고 제트기도 만들 수 있고 우주선도 만들 수 있고 달나라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만 이 빛나는 이성의 관을 씌워 주신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이런 관이 없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심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칸트의 유명한 말과 같이, 하늘에는 별이 있고 인간의 가슴속에는 도덕적 의식 곧 양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고려 말기에 살았던 유명한 정 포은 선생의 시조를 우리가 다 기억합니다.『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라는 말로 시작해서 마지막에는『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라고 했습니다.
생명보다 의리를 존중히 여기는 이런 양심의 관도 하나님께서 씌워 주셨습니다. 두문동 七十二인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들이『우리는 과거도 싫고 부귀 영화도 싫소. 우리는 우리의 지조를 지키겠소. 세상의 금전이나 지위나 권세나 무엇보다도 내 양심을 지키겠소』라고 한 것은 빛나는 양심의 관을 씌워 준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후에 한 가지 특권을 더 주셨습니다. 그것은 六절에 있습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이니 지구는 말할 것도 없고 달도 포함되고 화성도 포함되고 모든 우주가 다 포함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인간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시겠다고 하였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두겠다고 하였습니다. 만물의 영장이 되어서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특권을 우리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인간으로 지음을 받은 그 자체가 아주 큰 특권이요 그 위에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큰 특권을 인간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특권을 받은 인간으로서 그 책임은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자명합니다.
첫째는 불멸의 영혼이 있으니 참된 종교적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을 의무가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영혼을 구원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본분입니다.
짐승은 배만 부르면 만족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배가 부르다고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인간은 그 속에 불멸의 영혼이 있는 까닭입니다. 짐승에게는 종교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종교가 있습니다. 왜? 인간에게 영혼이 있는 까닭입니다. 또 우리 인간은 참된 종교를 찾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라고 해서 다 옳은 길이 아닙니다. 참으로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찾아서 그를 좇으며 그를 통해서 영생을 얻을 책임이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빛나는 이성의 관을 씌워 주셨으므로 각 방면에서 창조적 생활을 할 의무가 있습니다. 창조적 생활이라고 하여 하나님처럼 없는 데서 창조할 수는 업습니다. 그러나 있는 자료를 가지고 이성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몇 주일 전부터 예배당 뒤쪽에 있는 성화를 다 보신 줄 압니다. 저 성화는 우리 교회 이 광혁 장로님이 그렸는데, 그 천 자체, 먹 자체로 보면 몇 푼 어치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성화를 그려 놓으니 얼마나 크고 새로운 가치가 창조되었습니까? 이것이 우리 인간의 책임이올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모든 만물을 주셨는데 이것을 가지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창조적 생활을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이와 같은 이성의 관을 씌워 주신 까닭입니다.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 곳에서, 내가 헌신하는 그 자리에서 창조의 생활을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선생은 교단에서 창조의 생활을 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공무원은 관청에서, 심지어 주부는 가정에서, 음악가는 음악으로, 예술가는 예술로써, 과학자는 과학계에서 새로운 가치를 간단없이 창조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달만 정복하는데 만족할 것이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앞으로는 화성도 정복하여야 되겠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인간이 다스릴 수 있는 자리로 날마다 날마다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간단없는 창조적 생활을 할 의무가 우리 인간에게 부여된 것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 인간에게 빛나는 양심의 관을 씌워 주셨은즉 양심적 생활을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양심을 속여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양심을 거슬려도 안되겠습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기록하여 주신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있는 그곳에서 양심적 생활을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그 상점에서, 공무원은 그 관청에서, 학생은 그 학교에서, 군인은 그 군대에서, 정치인은 정계에서,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양심적 생활을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돈으로 양심을 팔아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정욕으로 팔아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어떤 권세욕으로 양심을 팔아서도 아니 되겠습니다. 어떤 명예욕으로 양심을 팔아서도 아니 되겠습니다.
인간이면 양심을 지킬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는 하나님께서 그가 친히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셨은즉 만물을 바로 다스리고 바로 볼 책임이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만물을 우리에게 맡겼다고 해서 함부로 자연을 대하면 아니 되겠습니다. 자연을 학대해서는 아니 됩니다.
금수도 학대해서는 아니 됩니다. 어별(魚鼈)도 학대해서는 아니 됩니다.
모든 천연자원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연계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은즉 범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이것들을 다스리고 이것들을 사용할 청지기의 책임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된 것입니다. 앞으로는 달에 대한 지식도 더 많아질 것입니다. 이 지식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될 것입니다. 달에서 혹 무슨 보물을 가져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책임이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연계에 있는 모든 자원, 금 , 은, 동, 철, 석유를 비롯해서 전기력(電氣力), 원자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곧 세계 인류의 자유와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바로 쓸 책임이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 밖에 인간이 발견하는 새로운 모든 것들, 새로운 발명품들, 라디오, 텔레비전 또는 컴퓨터 등 모든 것들을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쓸 책임이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큰 책임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성취했다고 하지마는 실상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 一장 十七절에『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써 내려오나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이 받은 어떤 선물이든지 위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三七편 첫 절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 하시면 파수꾼의 경성(警醒)함이 허사로다.』
물론 사람이 집을 짓고 사람이 성을 지키지마는 하나님께서 돕지 아니하면 인간의 하는 일은 성공을 못합니다.
제가 신문을 보니 이번에 인간이 처음으로 달에 착륙할 때에 처음으로 달에 착륙한 암스트롱씨의 어머니가 이것을 텔레비전으로 보다가 먼저 엄숙히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옳은 인간의 태도입니다. 우리 인간이 무엇을 성취하였다고 교만한 생각을 품으면 아니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으로써 이루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께 축복 받는 인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한 인간입니다. 인간으로 지음을 받은 이 자체가 얼마나 큰 특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위에 우리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특권을 깊이 생각해서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인간다운 인간의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인간 이하의 생활로 전락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나 내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씌워 주셨지만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되어서 이 영광스러운 면류관이 다 변모된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이 변모된 면류관을 다시 회복하고 참된 인간이 되고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뜻하신 그 온전한 인간 그대로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그를 따르고 그를 순종하고 그를 본받을 때에만 온전히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외치셨습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하셨습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배워야 될 것입니다. (一九六九년 七월 二十七일)


Ⅸ-13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는 능력 (고린도 후서 十二장 九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二十·九)

고린도 후서 二十장에는 사도 바울이 자기 경험에 대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자기가 받은 바 신령한 체험과 환상과 계시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의 육체의 가시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마는 가시처럼 찌르는 육체의 고통을 의미하는 줄 생각합니다. 아마 어떤 고질적인 질병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없이 하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에 보니 주님께 기도했다고 하였습니다. 또 이 기도는 예수 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기도의 회수도 세 차례였고 기도의 내용도 비슷합니다.
예수 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떠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를 없이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응답도 같습니다.
예수 님께 대해서 잔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잔을 마실 수박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큰 능력을 주셔서 능히 그 고난을 견딜 수 있게 만드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대답도 거의 같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며 족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계속하여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오늘 이 말씀을 중심해서 묵상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내 능력』즉, 주의 능력이올시다. 그리스도의 능력이올시다. 하나님의 능력이올시다.
둘째로 하나님의 능력은『약한데서』온전하여 집니다. 약한데서라는 말은 인간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인간이 약할 때에, 인간이 약함을 스스로 깨닫게 될 때에, 다시 말하면 여러 가지 가시와 같은 고통이나 질병이나 슬픔이나 고독이나 환난 같은 것들로 말미암아서 인간이 약하여지고 그 약함을 깨닫게 될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은 온전히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 자체는 언제나 온전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 능력이 인간 가운데서 온전히 나타나지를 못합니다.
셋째로 오히려 인간이 약할 때에, 그 약한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될 때에 주의 능력이『온전히 나타난다』고 하는 뜻일 것입니다.
토기장이의 능력과 기술은 흙이 부드럽고 연할 때에 온전히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흙이 굳을 때에는 토기장이의 기술이 나타나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대장장이가 쇠로 무엇을 만들 때에 그 쇠가 뜨거워서 부드러워져야만 대장장이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쇠가 단단할 때에는 그 능력이 나타날 가능성이 없습니다.
넷째로 육체의 가시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이 심령에 상처를 입을 때에, 상한 갈대처럼 약하여 질 때에,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난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고통의 가시로 말미암아 인간이 약하여 질 때에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고 그 심령은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마치 탕자가 멀리 외국에 갔다가 흉년을 만나 극도의 궁핍에 빠지고 고독하게 될 때에 아버지의 집이 생각난 것처럼 인간의 심령도 아마 이러한 것 같습니다. 그뿐만 아니고 인간의 심령이 약하여 질 때에는 자연히 그 마음이 또한 겸손해 집니다.
이사야 五十七장 十五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존 무상하여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케 하려 함이니라.』 겸손할 때에 그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것입니다. 또 인간이 여러 가지 가시로 약하여 질 때에,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며 참 믿음을 얻게 됩니다. 참 믿음을 통해서 주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고 인간이 약해질 때에, 자기 힘이 부족한 것을 깨닫게 될 때에 더욱 기도도 힘씁니다. 이런 모든 상태는 주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날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맙시다.
가시 혹은 고통 자체가 좋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선이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이는 이런 가시들로 말미암아서 낙심하고 더 타락하는 이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이 가시는 주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는 기회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검은 구름이 좋지는 아니합니다. 그러나 이 구름이 있어야 七색이 영롱한 아름다운 무지개가 나타납니다. 검은 구름을 통하여 태양의 찬란한 빛이 온전히 나타나는 것처럼 인간의 약한 데를 통해서 주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계속해서 기록했습니다『나는 오히려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느니라.』왜 그러합니까? 그리스도의 능력이 이런 때에 내게 머무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나는 약한 것들, 능욕과 궁핍과 고난을 당하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약할 때에 곧 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강하여지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모양의 가시가 있습니다. 질병도 있고, 사업의 실패도 있고, 궁핍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질병의 가시는 누구나 이따금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 프랜시스를 다 기억합니다. 그가 어떤 분인지 압니까? 그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본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으며, 부족한 것을 모르고 자라난 사람임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그 당시의 부잣집 아들들처럼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큰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 중병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변해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약한 가운데서 주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서 방탕 자였던 청년의 변하여 성자가 된 것입니다.
병 가운데서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 큰 일을 한 사람은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많이 있습니다.
주의 능력이 약한 가운데 온전히 나타나는 까닭입니다. 밀턴은 유명한 문학가이지만 특별히 그가 실명된 후에 더욱 위대한 작품, 실락원(失樂園)을 썼다고 하는 것은 유명한 얘기입니다.
베토벤 같은 이도 본래 천재적인 음악가입니다. 그러나 그의 귀가 멀고 듣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오히려 전 보다 더 위대한 작곡을 했다는 것 또한 너무도 유명한 얘기입니다.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난 헬렌켈라 같은 여사는 어렸을 적부터 소경이요 벙어리요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가장 유명한 여성 중 하나로 살았다고 하는 유명한 얘기도 우리는 잘 압니다.
여러분 가운데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혹 불구자로 항상 비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낙심하지 마세요.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에게 내 자신을 맡기세요. 주의 능력이 약한 가운데서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가시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강해지는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고독의 가시가 있습니다.
특별히 三八선으로 말미암아 고독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이 남한에 많습니다. 그러나 이 고독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능이 얼마나 크게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도 찾아 볼 수 있고 성도의 경험에서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셉을 잘 아시지요. 어린 소년으로 부모 슬하에서 달고 쓴 것을 모르고 살던 사람이 갑자기 애굽의 종으로 팔려 나갔습니다. 얼마나 고독할 것입니까? 얼마나 슬플 것입니까? 그러나 그런 까닭으로 오히려 요셉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런 까닭으로 어떤 시련이라도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환난 가운데도 낙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 약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전능이 온전히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생활을 여러분이 잘 압니다. 호화로운 애굽 궁중에서 살던 청년입니다. 그러나 부득이 정치적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 가서 고독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독한 양치는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부름을 받아서 마침내 뛰어난 지도자가 되었다는 얘기를 우리가 다 잘 압니다. 고독한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는 것을 기억합니다.
다니엘 역시 그렇습니다. 젊은 몸으로 바벨론에 잡혀가서 얼마나 외로웠을 것입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 오히려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런 중에 더 큰 일을 한 것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제일 많이 읽는 책이 아마 요한 계시록이요. 장례식과 추도예배 같은 때에 많이 읽습니다.
요한 이 어떤 때에 이 책을 썼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다 압니다. 밧모섬에 유배 가서 외로이 낮아 있을 때에 하늘의 비전을 본 것입니다.
중고 시대의 유명한 이태리의 문호 단테라고 하는 사람은 요한 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는 플로렌스의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고 처음에는 정치적 지도자로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만 정당이 서로 충돌하는 중에 패배를 해서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타향에 유리하며 고독한 망명 생활을 오래 하였습니다. 그 때에 그는 하늘과 천당과 지옥의 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오늘날도 많이 애독하라는 신곡이라는 것입니다. 고독한 가운데 주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났습니다.
지금도 신약 다음에 많이 읽힌다는 천로역정(天路歷程)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청교도 가운데 존 버년이라는 사람이 지었는데 이 사람이 분주히 활동할 때는 이런 책을 못썼습니다. 그 때에 허락 없이 전도한다고 감옥에 잡혀가서 二十년 동안이나 옥중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신령한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와 만나는 가운데서 천로역정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약할 때에, 고독할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일하는 방면도 역시 그렇습니다.
제가 옛날에 신학을 마치고 제일 먼저 간 교회가 신의주 제 二교회입니다. 가니까 교인들이 한 四五0명쯤 모이는 자그마한 교회인데 유급 전도사가 없고 제가 혼자 전도사 일을 봅니다. 그 곳에 명예 전도사 한 분이 계셔서 열심히 심방도 하고 전도하여 그 교회가 그만큼 부흥되었습니다. 그 분의 이름이 최 반식 전도사인데 아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 교회 강학주 장로님의 조모님이올시다. 그 분과 함께 제가 심방을 하고 다녔는데 그 분과 다니며 그 분의 내력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가 二十八세에 과부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세상이 아득해 지고 꼭 죽어야만 될 줄 알았는데 그 때에 누가 와서 예수를 믿으라 해서 예수를 믿고 다시 일어나서 온전히 주님께 몸바치고 지금까지 주의 은혜로 살아오며 모든 것이 너무 감사해서 정성으로 교회를 봉사하고 있노라 는 얘기였습니다.
약한 가운데서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얼마 전에 장례를 지낸 손사라 권사 님은 二十二세에 딸 하나 데리고 홀로 되었다고 합니다.
주를 믿고 그 가운데서 은혜를 받아서 그 외로운 가운데서 일생토록 주님을 섬겼습니다.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난 차성숙 권사 님을 여러분이 잘 압니다. 이 분은 몇 살 때인지 모르지만 남편에게 버림을 받아서 일생을 고독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주님을 알게 되고 어디가나 교회를 정성껏 봉사하여 다른 외로운 사람,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 항상 봉사하는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로 가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런 약한 가운데 있는 이들을 통해서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슬픔의 가시가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은 슬픔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인간은 얼마 살다가 세상을 떠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 슬픔을 통해서도 주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지금도 미국의 흑백 인종 문제로 남북 전쟁이라는 큰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흑노(黑奴)를 해방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흑노 해방 운동을 일으킨 배후에는 유명한 책이 한 권 있습니다.
그 책이름을 영어로 엉클 톰스 캐빈(Uncle Tom's Cabin)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톰 아저씨의 오막살이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 소설은 스토우라는 부인이 썼는데 이 부인은 자기 아버지도 라이먼 리쳐라고 하는 유명한 목사요, 자기 오빠는 아버지보다 더 유명한 헨리 워드 리쳐 목사입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어떻게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 말씀 드리죠?
이 부인은 결혼해서 단란(團欒)한 가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귀한 딸을 하나 낳았습니다. 딸이 잘 자라나고 이 부인은 딸을 참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딸이 얼마 자라다가 그만 죽었습니다.
이 부인의 마음이 얼마나 섭섭했는지 얼마나 딸 생각에 살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자기 마음이 그렇게 아픈 것을 생각하다가 이 세상에는 나와 같이 슬픔을 당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노예들의 형편을 보았습니다. 흑인의 어머니는 딸이 죽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팔려 감으로써 가족끼리 사방으로 흩어져 생이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에 스토우 부인은 나는 내 딸이 죽어서 이렇게 슬픈데 살아서 자기 아들딸을 이별해야 하는 흑인 어머니들의 가슴은 얼마나 아프겠는가? 하는 것을 소설에 그대로 묘사했습니다.
그 책이 출간되어 많은 사람이 읽게 될 때에 그야말로 미국 사람의 양심을 찔렀습니다.
흑노는 반드시 해방되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약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이루어서 인류 해방과 자유의 큰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스위스 같은 나라에 가면 유명한 알프스 산이 있고 그 산에는 여러 등산 코스가 있습니다. 그 코스 가운데 하나를 얼마쯤 올라가면 한쪽 높은 산봉우리에 흰 대리석 십자가가 하나 있는데 그 십자가 위에는『오직 예수』라는 글자가 새겨 있다고 합니다.
그 대리석 십자가의 얘기가 이러합니다. 한 큰 실업가가 알프스에 놀러 왔다가 딸과 같이 산봉우리를 오르게 되었는데 그만 딸이 실족하여 절벽에 떨어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딸은 외동딸이었습니다. 그 실업가는 큰 부자였습니다. 무남독녀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인하여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세상에는 나와 같이 슬픔을 당하는 이도 많고 외로운 이도 많으니 이들을 위하여 자선사업을 하자고 생각하고 자기 돈을 다 바쳤습니다. 그리고는 그 대리석 십자가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이는『오직 예수』한 분뿐이라고 하는 뜻에서입니다.
주의 능력은 약한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져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는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저의 오랜 목회 경험 가운데서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아들과 딸들을 보면 부모가 살았을 때는 그렇게 열심히 믿지 아니하고 부모의 속을 썩힙니다. 그러다가 어버이가 세상을 떠납니다. 큰 슬픔을 당하게 됩니다. 그 때에는 잊었던 아들과 딸들이 깨달아서, 내 믿음의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고 얼마나 믿음의 생활을 원했는데 내가 이 앞으로 어머니의 믿음을 계승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고는 새 사람이 됩니다. 약한 가운데서, 슬픔 가운데서 주님의 은혜를 받아서 오히려 부모보다 더 크게 주를 봉사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실패와 궁핍 가운데서도 주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런 고통의 가시를 가슴에 품고 사는 이들이 상당히 있을 줄 압니다.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원망하지 마세요. 자포자기하지 마세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하는 족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으면 그 가시야말로 큰 축복의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능력은 약한데서 온전히 나타납니다. 큰 은혜를 받을 기회입니다.
여러분 진주가 어떻게 해서 되는지 알지요? 진주 패라는 조개가 있습니다. 그 조개가 바다 속으로 기어다닐 때에 모래알이 속에 들어가게 된답니다. 지금은 인공적으로 모래알을 넣어 주지요. 그러면 그 부드러운 살 속에 모래가 들어가니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러나 이 조개는 즙을 짜서 이 모래알을 감싸고 감싸서 一년, 二년, 四년, 五년 동안 감싸면 마지막에는 진주가 됩니다.
이 고통의 가시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주안에서 옳게 받으면 이것이야말로 진주와 같은 믿음, 진주와 같은 은혜, 진주와 같은 보배로운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네가 약할 때에 강하니라.』왜? 우리가 약할 때에는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우리 안에서 역사 할 수가 있는 까닭입니다. (一九六九년 八월 三일)


Ⅸ-14 한 혈통으로 (사도행전 十七장 二十二-三十七절)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행 十七·二十六)

사도 바울의 유명한 아덴 설교의 일 절이올시다. 여기에 인류의 모든 족속이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계에는 여러 가지 족속들이 살고 있습니다. 황인종도 있고 백인종도 있고 흑인종 또는 홍인종이 있습니다. 황인종 가운데도 여러 가지 족속이 있고 백인종도 그렇고 흑인종도 그렇고 홍인종 가운데도 그렇습니다.
한국은 단일 민족 국가입니다. 그러나 어떤 나라는 한 나라 가운데도 여러 종족이 같이 살고 있습니다.
필리핀 같은 나라, 미얀마 같은 나라, 미국 같은 나라 등 여러 나라가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종족이 있는 까닭으로 이따금 여러 가지 종족간의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미국 사회에 있어서 흑백간의 인종 문제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얼마 전에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에서도 민족 폭동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나라에 있는 중국 사람들과 본토민 사이의 충돌이었습니다.
얼마 전 아프리카의 케냐라는 나라에서는 경제 방면의 한 흑인 지도자가 암살을 당하였습니다. 이것도 그 나라 안의 부족간의 알력인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중공과 소련은 다같이 공산당 이념을 가진 나라이지만 매우 긴장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인종 문제라고 해석하게 됩니다.
한국과 일본은 매우 가까운 이웃인데 이 한일 문제도 결국은 인종 문제입니다. 또한 재일 교포들이 일본에서 항상 곤란한 문제에 봉착하는데 그것도 역시 인종 문제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신문지상에 났던 혼혈아를 수송하는 문제를 다룬 기사를 여러분도 보셨을 것입니다. 홀트 양자 회라는 단체는 한국에 있는 혼혈 아동들을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에 보내서 양자를 삼게 하는 것으로 그 전체 사업을 삼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고아들은 한국에서 잘 기를 수 있는데 왜 혼혈아만은 외국으로 가야만 합니까? 그것도 한마디로 하면 한국 사회가 아직도 이런 어린이들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도 인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세계 정세를 보면 과학의 발전으로 교통망, 통신망이 세계적으로 편리하게 되어서 세계의 모든 종족들이 가까이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온 세계가 하나의 작은 집안이 된 것입니다. 그에 따라 세계의 종족 문제가 날로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적 상황 아래에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분명히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사실입니다. 성경 창세기는 어떻게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였으며 인류의 모든 종족이 어떻게 나왔는가 하는 사실을 분명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한 혈통으로 만드셨으니 실상은 한 종족입니다.
동양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사해동포(四海同胞)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년 전 백림에서 모였던 세계 복음화 대회의 표어가『한 족속 한 복음 한 직무』이었습니다. 온 세계 인류가 한 족속이라는 것을 알고 이 모든 족속을 구원할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임인 것과 온 세계 인류에게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의 직무와 사명인 것을 기억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이 인류의 일치성과 연대성 혹은 연결성을 성경의 교훈대로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세계 인류의 일치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계 인류는 한 조상 아담의 후손으로 실상은 한 종족입니다. 기후와 환경에 따라서 얼굴의 모습과 피부와 키의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지마는 실상 다 한 혈통으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보면 어떤 민족이나 소위 민족적 우월감,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 삽니다. 이것은 백인만이 아닙니다. 황인 도 그러하고 흑인도 그러합니다.
제가 어떤 책자를 보니 아프리카의 하렌 파크라고 하는 흑인 부족이 하나 있는데 이 사람들은 흑인 가운데도 키도 작고 가장 원시적인 사람들이긴 하나 그 사람들과 얘기해 보면 자기네가 세계에서 제일 먼저 지음을 받았고 제일 일등 되는 종족이라고 자랑한다고 합니다. 이 부족만이 아닙니다.
세계 민족이 다 이와 같은 우월감을 가지고 삽니다. 우리 한국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일본 사람은 왜놈이라고 불렀고 중국 사람은 되놈이라고 불렀고 서양 사람은 양비자 혹은 양코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께서는 이런 얘기를 들었을 겝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진흙으로 빚어서 불에다 구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진흙으로 빚어서 불 속에 넣어 굽는데 넣고 나서 조금 후에 꺼내니 좀 덜 익어서 설었습니다. 그래서는 다시 진흙으로 빚어서 불에다 넣었습니다. 이번에는 좀 오랫동안 두었습니다. 그리고 꺼내보니 너무 새까맣게 타 버렸습니다. 이것은 너무 익었구나 하고는 다시 진흙을 빚어서 불에 넣었다가 적당한 시간에 꺼내니 꼭 알맞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설익은 것은 백인종이 되었고, 너무 익은 것은 흑인종이 되었고, 꼭 알맞게 익은 것은 황인종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얘기를 누가 지어내었겠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황인종이 지어냈습니다.
우리 한국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속담 가운데 사람마다 저 잘난 재미에 산다고 하는 속담이 있습니다. 민족마다 저 잘난 재미에 삽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 민족간에나 우수한 사람도 있고 열등한 사람도 있습니다.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민족적 편견을 버리고 우리는 평등한 대우와 친절을 베풀도록 힘써야 될 것입니다.
특별히 후진 민족일수록 그 지리적 역사적 원인이 있으므로 적극 원조해서 같이 발전하도록 노력하여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새 시대, 우주 시대에 사는 우리 마음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히틀러의 나치 사상과 같은 편협한 민족주의 사상을 지양하고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아래서의 건전한 민족주의 사상을 함양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시초부터 종족을 초월했습니다. 오순절에 천하 각국에서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했으나 대부분이 유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성경을 읽어보면 그 가운데는 그레데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들도 와서 복음을 듣고 회개한 것 같습니다. 얼마 오래지 않아서 로마 사람 고넬료가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얼마 후에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동역 자들을 가만히 보면 디모데와 같은 충성된 사람도 절반은 유대 사람이고 절반은 헬라 사람이었습니다. 디도와 누가는 완전한 헬라 종족입니다. 실라와 마가는 유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다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七장 九절을 읽어보면『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종족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에 있는 교회의 모습이올시다. 또한 이것이 지상에 있는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는 민족적 화해의 선봉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인류의 연대성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기억할 것은 인류의 연대성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인류는 혈통으로 연결이 될 뿐만 아니라. 사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실제 생활에도 피차에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지난겨울에 홍콩 감기 혹은 모택동 감기라 하는 감기가 온 세계를 휩쓸어서 수많은 사람이 고생 한 것을 여러분이 기억합니다. 세계 一차대전 후에는 서반아 감기가 온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그 때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학교도 이 감기로 인하여 휴교를 했고 공장도 문을 닫았던 것입니다. 많은 생명도 희생되었습니다. 이렇게 전 인류는 건강으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주인들이 달나라에 갔다 돌아온 후에 철저한 검역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행여나 달에서 지구에 없는 미균(黴菌)이 묻어 오면 전 인류에게 화가 미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일전에 어떤 신문 기사를 보니 인도의 한 정치가가 지금 핵무기를 준비한 모든 나라의 보유량을 조사하고 하는 말이 전세계의 인류의 각 사람에게 약 一00톤씩 돌아가게 되는 계산이 나왔다고 보고했습니다.
세계 인구 한 사람 앞에 벌써 원자탄 수소탄을 약 一00톤씩 배급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핵무기 시대인 만큼 전 인류가 같이 살고 같이 죽을 운명에 직면하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월남 전쟁과 중동의 충돌은 전 세계 인류에게 불안과 공포를 가져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반면에, 일전에 미국 과학자들이 달을 정복하고 달에 다녀오는 것을 모든 인류가 기뻐하며 희망을 가지는 것은 이런 모든 것을 통해서 세계의 화평(和平)이 오기를 바라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이 연대성 혹은 인간 생활의 영적 방면에도 있습니다. 도덕적 방면에도 역시 있습니다. 옛날 아간 이라는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전 이스라엘 군대가 패전하였다는 얘기는 구약에 있는 유명한 얘기입니다.
죄를 지으면 자기만 징역 살면 되는 줄 아는 이가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경찰과 재판소와 교도소의 경비는 누가 내는 것입니까? 그이와 상관없는 일반 국민들이 부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자기의 친척과 이웃과 사회와 궁극적으로 온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죄라고 하는 것은 나만 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 사회, 나라, 궁극적으로 전 인류에게 화를 가져오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반면에 소돔성에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하나님께서 그 성 전체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 한 사람의 덕과 영향력이 이만큼 위대한 것입니다.
엘리사가 병들어 죽게 될 때에 당시의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요아스가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兵車)와 마병(馬兵)이요』라는 말을 하면서 통곡하였습니다. 엘리사가 무슨 병거를 타고 싸웠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엘리사와 같은 한 사람의 영향력이 이스라엘 전 국민에게 이만한 국방의 힘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이러한 연결성과 관련해서 깊이 생각할 몇 가지점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 우리 하나 하나가 이 세상에 산다고 하는 것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세계 인류의 하나로서 산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나 하나의 일거 일동은 나 개인뿐이 아니고 나의 이웃, 내 나라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 인류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매일 매일의 생활은 씨를 뿌리는 것과 마찬가지 일입니다. 선한 씨를 뿌릴 수도 있습니다. 복의 씨를 뿌릴 수도 있고 화의 씨를 뿌릴 수도 있습니다.
나의 존재가 전 인류 사회에 플러스가 될 수도 있고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 전 인류는 연결된 생활을 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을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바로 해야 합니다. 옳게 하여야 합니다. 작은 일과 큰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옳게 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상호부조의 적극적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상호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동정으로 만 할 것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의 공동적 책임이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웃이 잘 살아야 나도 잘 살수 있습니다. 고아나 무의무탁한 노인들이나 수재를 당한 우리 국민들을 구제해 주는 것은 곧 나를 도와주는 일입니다. 굶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에 나만 돈 있다고 나 혼자만 배불리 먹고 잘 살겠다는 망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전 인간의 생활은 서로 연결이 되어서 나눌래 야 나눌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는 복음 전파 혹 전도의 적극적 원인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 이웃이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면 그만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내 자손도 같이 축복을 받습니다. 반면에 내 이웃이 죄악 가운데 그냥 있어서 죄를 지으면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죄의 결과를 그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내 자손까지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 하나가 우리 사회에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집안에 열병환자가 하나 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를 치료해 주고 구원해 주는 것이 곧 나를 도와주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에티오피아에 선교사를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태국에도 선교사를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전도의 사명은 세계적입니다. 복음 전도의 구역은 세계적입니다. 왜? 세계가 하나의 좁은 집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三십장 十九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했습니다.
요한 복음 四十장 六절에 우리 주님은『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참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나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확실히 이 길을 택하였습니까?
우리 가운데 아직까지 한 분이라도 이 길을 온전히 택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민족과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 인류를 위해서 이 시간 옳은 길을 택하시기를 바랍니다. (一九六九년 八월 十일)


Ⅸ-15 참 제자의 도 (요한 복음 八장 三十-四十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八·三十一 - 三十二)

이 말씀은 예수 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올시다. 그러므로 지금도 예수를 믿는 이들에게 적절한 교훈이올시다. 이미 믿는 이들에게 참 제자가 되는 길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참 제자가 되는 길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더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자가 되는 길의 첫 단계는 예수 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니 많은 사람이 믿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제자로서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꼭 알아야 할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말씀, 자신 곧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 성령에 대한 말씀, 인간의 생명과 사망에 대한 말씀, 인간의 죄와 구속에 대한 말씀, 인간이 세상에 살 때에 마땅히 지킬 도덕의 교훈, 인간의 영혼과 내세에 대한 말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필요한 교훈을 주님께서는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먼저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 믿어야 합니다. 지력으로 옳다고 시인하고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교훈을 듣고 믿는 것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첫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성경을 읽을 때에 주님의 교훈 그대로 받아들입니까? 믿습니까?
그러나 둘째 단계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고 하셨습니다.
거한다는 말은 산다고 하는 뜻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살면 참 내 제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요한 二서 九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나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여야 아버지와 아들을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그 말씀을 믿지 않고 그 말씀 가운데서 살면, 곧 그대로 행하면 참 내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옛날 동양의 성현도 인(仁)을 인지안택(人之安宅)이라 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인은 사람의 평안한 집이라 하는 얘기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집을 삼고 우리가 언제든지 그 교훈 안에서 살면 참 내 제자, 곧 예수 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주의 말씀에 거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말씀이 성경에 있으니 우선 성경을 읽고 성경을 배우고 성경을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잘 몰라서 잘못된 길로 나가는 교우들도 종종 있는 것을 봅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 반에 들어가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고, 집에서 통신과를 통해서 공부하는 것도 필요하고, 할 수 있으면 성경 학원에 나와서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선 주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분명히 파악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거하려면 배울뿐더러 그 배운 말씀을 묵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 一편 二절에『복 있는 자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 一一九편 一四八절에는『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옛날에 참된 신앙을 하던 사람의 모습을 우리는 여기서 봅니다. 일찍이 밤에 깨어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십니까? 주의 말씀을 묵상하는 데는 성경을 암송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번 산상 기도회 때에 성경 암송 대회가 전기 후기에 걸쳐 두 번 있었는데 아주 은혜 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특별히 한 서너 분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열 서너 장을 암송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암송하는 것도 보통 암송이 아니라 청산유수와 같이 잘 외었습니다. 주의 말씀을 항상 묵상하여 주의 말씀이 우리 마음을 항상 채우면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지고, 우리의 마음이 화평해 집니다. 우리의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없어집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의 말씀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실제 생활에서 그 말씀에 순종하고 시행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순종하면서 배우라고 하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했습니다. 실행하면서 그를 좇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산상에서 귀한 교훈을 주신 후에 결론으로『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사람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의 말씀 가운데서 살게 될 때에 그 말씀을 먼저 배우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면서 살 때에 참 내 제자, 예수 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주님께서 말씀하십시다. 이렇게 주의 말씀 안에 사는 이는 진리를 알겠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진리라는 말은 흔히 두 가지 뜻을 나타냅니다.
첫째는 주님의 말이 곧 진리올시다.
둘째는 주님 자신, 곧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그래서『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 은 예수 님께 대하여 기도할 때에『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 가운데서 살 때에 주님과 주님의 말씀은 과연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안다고 하는 말은 그 범위가 넓습니다. 다시 말하면 안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달을 아는 가고 물으면 누구나 달을 안다고 할 것입니다. 달은 둥급니다. 달은 밤에 밝게 보입니다. 그러나 달이 얼마나 크며 지구에서 얼마나 멀며 달을 구성한 성분이 무엇인지 아는 가고 물으면 아마 거의 다 자세히는 모를 것입니다. 사실 지금 세상에 사는 이들 가운데 달을 제일 잘 아는 이가 누구일까요? 아마 얼마 전에 아폴로 十一호를 타고 달에 가서 걸어다니다가 돌아온 그이들이 제일 잘 알 것입니다. 왜? 달에 실제로 가서 보고 돌아 왔기 때문이지요. 실지로 체험했기 때문이지요. 달에서 살았으니까요.
그런 의미로 주님의 말씀에 사는 자가 주님을 알고 주님의 말씀을 안다고 하는 뜻입니다. 사람을 안다고 하는 말로 여러 가지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은 우리가 이름만 알고 어떤 사람은 얼굴만 압니다. 그러나 그이의 성품과 사상과 그이가 믿을 만한 가 하는 신용 여부까지도 아는가 하고 물어보면 흔히 그것은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지내보지를 않아서 자세히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결국 어떤 사람을 참으로 알려면 그 사람과 실제로 접촉해서, 체험을 해보아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 가운데 살면 이 말씀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같이 동행하면서 살게 되면 주님이 과연 진리인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참 지식은 언제나 체험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우리 찬송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지요.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자기의 체험을 통하여 받은 증거가 많을 때 예수를 바로 믿을 수 있습니다.
시편 三十四편 八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니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맛보라는 말입니다. 수박이 단지 안 단지 알려고 할 때 제일 쉬운 방법이 무엇입니까? 물론 보아서도 알 수 있고 만져 보아서도 조금은 알 수 있으나 잘 알려면 먹어 보는 것이 제일입니다.
체험을 해서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대로 행해 보아야 그 말씀이 진리인 줄을 알게 됩니다. 예수 님과 같이 동행해 보아야 예수 님께서 진리이신 것을 압니다.
말씀에 살아야 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도 제가 이런 얘기를 한 것 같지마는, 서양의 어떤 여자가 늘 성경을 읽으며 성경에 줄을 치고는 어떤 구절에는 영어 자로 P자와 T자를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가 물었다고 합니다.『그것이 무슨 뜻입니까?』그는 대답하기를 T자는 영어로 트라이(try)라는 뜻이고 P자는 프르브(prove)라고 하는 뜻이라고 하였답니다. 트라이라는 말은 내가 해 보았다는 말이고 프르브라는 말은 해보니 그대로 되더라는 말이라고 했답니다. 그런 사람이 사실 주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넷째로 이런 사람에게는 큰 축복이 따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이렇게 알게 되면 진리가 우리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하는 말입니다.
모든 진리는 인간을 구속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진리인 주의 말씀과 진리인 주님께서는 인간을 여러 가지 구속 가운데서 해방시켜 자유를 줍니다.
구약을 읽어보면 어떻게 진리가 이스라엘 민족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구속에서 자유를 주었는가 하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약에 와서는 진리이신 주님께서 이 모든 자유의 기초가 되는 정신적인 자유를 주신다는 사실을 또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인 그리스도와 진리인 그 말씀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면 진리인 그리스도는 그런 사람들에게 몇 가지 자유를 줍니다.
첫째는 모든 공포심리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자유를 줍니다. 몇 주일 전에 소련에서 영국으로 탈출해 온 소련의 작가 쿠즈네쵸프라는 사람은, 소련에서 왜 탈출해 나왔는가 하는 질문에 한마디로 그 나라에서는 숨을 더 쉴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는 기사를 우리가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 그 나라 백성이 얼마나 구속과 공포 가운데서 사는가 하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슬픈 일은 소위 자유 세계에 살면서도 항상 공포심에 사로잡혀 사는 이가 상당히 많다는 사실입니다. 자유 진영에 살면서도 여러 가지 공포와 근심과 걱정으로 인하여 심지어는 노이로제까지 걸리는 이를 우리는 봅니다. 그러나 주를 체험적으로 아는 이에게는 공포심이 없어집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실 때에 공포심은 떠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송을 부릅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와 동행하게 될 때에는 다시 말해서, 진리를 알 때에는 진리가 우리를 이런 공포 속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둘째로 우리가 참으로 진리인 그리스도를 알 때에는 여러 가지 무지와 미신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를 줍니다. 과학을 배워서 근대화는 되어 간다고 하면서도 아직 이 땅에는 무지와 미신의 종이 많습니다.
대학을 졸업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궁합 안 보고는 약혼 못하는 줄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날자 안 받고는 결혼식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현대식 공장을 지어 놓고도 돼지 대가리 놓고 제사 지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 미신에 젖어 노예가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참 진리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런 데서 해방해서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해서 자유를 주십니다. 주님 말씀대로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올시다. 다른 자유는 다 있지마는 죄의 종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정욕의 종 된 사람, 돈의 종이 된 사람, 술의 종들, 도박의 종들, 화투의 종들, 심지어 아편의 종들, 도벽의 종들, 그밖에 악한 여러 가지 습관의 종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고린도 후서 三장 七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주님께서 계시는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를 이와 같은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틀 전에 우리 八·一五의 해방을 경축했습니다. 二十四년 전에 우리가 일제의 압박에서 정치적으로 해방이 된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십니까? 우리 민족 가운데는 아직까지도 이 죄의 쇠사슬에 얽매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정과 부패의 종 된 사람들 때문에 우리 나라의 발전은 부진하고 온갖 사회의 문제가 일어나서 사회가 명랑하지 못하고 항상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정과 부패와 온갖 죄악의 쇠사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실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입니다. 八·一五의 해방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런 정신적인 자유를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참 제자가 되는 길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둘째는 듣고 믿을 뿐더러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셋째는 그렇게 되어 주님과 그 말씀이 진리인 것을 알게 되고 그 때에 진리가 온갖 구속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정신적인 자유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 하나가 다 이와 같은 의미의 참 자유를 얻었습니까?
(一九六九년 八월 十七일)


Ⅸ-16 신앙 생활의 진수 (미가 六장 六-八절)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六·八)

미가 六장 六절과 八절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갈까?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여기에 하나님께 나가는 이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하는 이의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번제(燔祭)를 잘 드리면 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또 동물 가운데 있는 많은 기름을 드리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혹은 몸의 열매인 맏아들을 드려야 죄를 속량 받는 줄 오해하는 이들도 많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기에 선지자 미가의 말씀이 있습니다.『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 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여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했습니다.
동양의 성현도 물유본말(物有本末)하고 사유종시(事有終始)란 말을 하였습니다. 물(物)에 본(本)과 말(末)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도 본과 말이 있습니다. 근간(根幹)과 지엽(枝葉)이 있습니다. 핵심(核心)과 외곽(外廓)이 있습니다. 진수(眞髓)와 外型(외형)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의 진수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여기에 있는 구절을 통하여 분명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종교의 의식보다도 그 의식을 행하는 이들의 마음과 생활을 더 중하게 여깁니다. 그리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사야 一장 十三절 이하에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可憎)히 여기는 바요 월삭(月朔)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저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니라. 이는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이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어떤 의식보다도 예배를 드리는 이들의 마음과 생활을 보시는 분이올시다.
둘째로 예물을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 자체보다도 예물을 드리는 이의 마음과 생활을 보시는 것입니다.
산상 보훈에서 우리 주님도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한 번은 주님께서 연보 궤에 앉아서 여러 사람이 연보 드리는 것을 보시다가 두 엽전을 드리는 과부의 정성을 보시고 이 과부가 실상은 제일 많이 드렸다고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생활을 보십니다.
셋째로 기독교는 이러한 윤리적 종교입니다. 세상에는 윤리가 없는 종교도 있습니다. 모든 우상숭배 종교가 그러합니다. 일본의 신도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신사 참배만 하면 무슨 짓을 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윤리적 신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에게 옳은 윤리 생활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 생활의 진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공의를 행하며』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의를 요구하십니다.
시편 一0三편 六절에는『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제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 도다』했습니다.
스바냐 三장 五절에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 하시고 아침마다 간단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 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대 헬라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공의를 두 가지 종류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분배의 공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각 사람에게 그 공적과 기능과 노력에 의지해서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것이 공의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보상의 공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형벌을 줄 때에 꼭 공평하게 하는 것이 공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十三장 七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바칠 이에게 마땅히 바치고,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하였습니다. 넓은 의미에게서 보면 공의는 각 사람에게 마땅히 줄 것을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의는 모든 대인 관계에 있어서 절대로 필요합니다. 가정에는 부모와 자식간에서 우선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스승과 제자간에도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장유(壯幼)관계에도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친구 사이에도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가운데는 장사하는 이들도 많이 계신 줄 압니다.
상거래에 있어서도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상품에 합당한 가격을 받는 것이 공의입니다. 지나치게 받으면 불의한 일입니다. 또 상품만큼의 가격을 지불하는 것이 공의입니다. 합당한 가격을 지불치 않으려는 것은 불의입니다.
노사(勞使)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에 있어서 공의가 필요합니다. 자본주는 노동자에게 적당한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산업이 발달되고 생산이 증진되는 것은 감사한 일이기는 하나 요사이 신문지상에 보면 우리 사회의 현실은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 되어 간다고 합니다. 공의의 임금을 자본주가 지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업사회에 공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남의 일을 할 때 그 임금만큼의 일을 충성되게 하는 것이 공의입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 이 공의를 특별히 기억해야 합니다. 공무원, 경관들, 판검사들은 기억하십시다. 법 아래에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똑같은 대우를 받습니까? 여당과 야당이 같은 대우를 받습니까? 법 아래에서 국회의원과 평민이 같은 대우를 받습니까? 같이 받아야 사회가 명랑해집니다. 이래야 사회가 평화로와 집니다. 부정 부패란 말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결국은 공의가 돈에 의지해서 흩어진다는 말이 아닙니까?
특별히 법을 잡은 사람들은 공의를 행해야 합니다. 예수 님께서 산상 보훈에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시다가 의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른 자와 같이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으로는 누구나 의를 행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목마를 때에 물을 구하는 것처럼, 시장할 때에 먹을 것을 구하는 것처럼 간절히 공의를 행하기를 원합니까? 그런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그런 사회와 그런 민족과 그런 나라가 복을 받는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익보다도 의를 먼저 구합니까? 내 권익보다도 의를 먼저 구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첫째로 공의입니다.
둘째로 인자를 사랑하며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공의를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공의를 초월해서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인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입어서 사는 인간이 까닭입니다.
시편 一0三편 八절에『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했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불교에서도 특별히 자비(慈悲)를 많이 말합니다.
유교에서도 인(仁)이라는 자비의 사상을 말합니다. 특별히 맹자 같은 이는『불인인지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자비를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비에 대한 사상은 모든 종교에 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는 이것이 사상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교훈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구체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리해서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죄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십자가상에서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자비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 四장 三十二절에 이렇게 권면합니다.『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했습니다.
인자에는 두 가지 면이 늘 있습니다.
첫째로 인자한 사람은 남의 죄를 용서합니다. 언제나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 받은 것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슨 죄를 지을 때에도 그 죄를 용서해 주는 이가 인자한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불우한 이를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는 일입니다. 나도 불쌍할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으니 내가 불행한 이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에서 항상 사는 것이 인자를 사랑하는 사람의 생활입니다.
인생 행로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험한 길과 같아서 길가에 쓰러진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아도 많고 과부도 많고 걸인도 많고 무의무탁한 자도 많고 병자들도 많고 돈 없는 실직자도 많고 생의 패배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 행로를 걸어 갈 때에 이들을 어떻게 보면서 걸어갑니까? 인자를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런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힘있는 대로 돕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올시다.
셋째는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상은 이 말씀이 가장 중요한 교훈이올시다. 그것은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이상의 두 가지 생활의 기초가 되는 까닭입니다.
야고보 三장 六절에서 야고보 장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五十七장 十五절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여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 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케 하려 함이라』했습니다.
어떤 이가 한 번은 유명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에게 와서『신앙으로 들어가는 첫 걸음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대답하는 말이,『겸손(謙遜)이올시다.』다시 묻기를 『둘째 걸음은 무엇 일가요?』다시 대답하기를『그것도 겸손이올시다.』다시 묻습니다. 『셋째 걸음은 무엇일까요?』다시 대답합니다.『셋째 걸음도 겸손입니다.』왜 이렇게 큰 종교개혁자가 겸손을 강조했는지 아십니까? 사실 겸손 이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사람의 견지에서 보면 선한 사람도 많고 또 성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 아래서 심판을 받을 때에는 누구나 죄인이올시다.
자기의 의로써 구원을 얻을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선언하였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먼저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겸손히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회개와 신앙을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동행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겸손한 이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 하나님과 동행하십니까? 혹 여러분 가운데 이런 생각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처럼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고 도둑질도 안하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내가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또 연보도 열심히 합니다. 돈도 많이 냅니다. 좌우간 저 아무 장로나 아무 집사보다는 내가 더 잘 믿지요.』하는 분 안 계십니까? 여러분, 옛날에도 이렇게 믿는 이가 더러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이 그렇게 믿었지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심령과는 동행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옛날의 세리처럼,『나를 불쌍히 여기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밖에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나를 버리지 마세요. 주님께서 나를 버리시면 나는 일분 일초라도 옳은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겸손한 심령과 하나님은 동행하십니다.
어떤 이는 지식이 좀 있다고 지식의 교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돈이 좀 있다고 돈의 교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자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세력이 좀 있다고 교만해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식도 잠깐이요, 돈도 잠깐이요, 세무십년영(勢蕪十年榮)이라고 세력도 잠깐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사람만이 세세토록 있는 것입니다.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님 앞에서 내 생활을 반성해 보세요? 그리고 내 죄를 겸손히 솔직하게 고백하고 내 교만도 고백하고 십자가를 붙들고 이제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시작하기 바랍니다. 이 길만이 참 영생의 길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잘 믿기 위하여 애쓰는 이들도 있는 줄 압니다. 어떻게 하면 좀 잘 믿을 수 있을까 해서 산 기도를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집회마다 따라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전도사 혹은 어떤 권사를 따라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방언이나 입신을 해보았으면 좋겠다고 은근히 사모하는 이들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들으세요.『사람아 주께서 선하심이 무엇을 네게 보이셨나니』했습니다. 어떻게 잘 믿을 수 있나 하는 방법을 주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잘 믿는 길은 사람이 창안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니 오직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했습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진수올시다. (一九六九년 八월 二十四일)


Ⅸ-17 양심의 소리 (요한 복음 八장 一-十一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八·七)

이 말씀은 여러분께서 잘 아는 유명한 얘기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칠 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자를 하나 끌고 와서 예수 님께 질문을 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거하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저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님께서, 그 여자를 용서하라고 할 것이면 예수는 모세의 법을 범한다고 고소할 수 있습니다. 또 돌로 쳐라 할 것이면 예수는 사랑이 없고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이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고 또 그 때의 로마법에도 유대 사람은 누구를 죽일 수가 없었음으로 로마법에 저촉된다고 고발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에 예수는 그 뜻을 아시고 곧 대답하시지 아니 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잠깐 머리를 숙이시고 땅을 보시더니 땅에 무슨 글자를 쓰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얼른 대답하라고 성화같이 재촉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예수 님께서는 머리를 조용히 드시고 조용한 어조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들어 쳐라.』
그리고는 다시 머리를 숙이고 땅을 보셨다고 하였습니다. 한참 있다가 머리를 들고 보니 한 사람 두 사람 슬며시 다 떠나가고 그 여자 홀로 남았습니다. 예수 님은『너를 정죄(定罪)하던 자들이 다 어디 있느냐?』『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이 사람들이 어떻게 되어서 슬며시 다 돌아가게 되었다고 했습니까? 九절을 읽어보세요.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이들이 돌아간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는 귀합니다. 이 시간 양심의 소리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특별히 주신 선물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성이요 하나는 양심입니다. 이성의 역할은 머리를 통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이치를 추리하고 새로운 것은 착안하여 모든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양심의 역할은 간단히 말해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배에서 쓰는 나침반(羅針盤)의 역할을 합니다. 배속에는 나침반이 있어서 배의 방향을 가리켜 줍니다. 마찬가지로 양심이라고 하는 것도 사람의 가슴속에서 도덕 생활의 방향을 가리켜 줍니다. 옳고 그른 것, 선하고 악한 것, 의와 불의를 분명하게 가리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二장 五十절에 보면 양심은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양심은 마음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양심은 마음의 눈이라고 말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도 산상 보훈에 말씀하시기를『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지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눈은 마음의 눈 곧 양심을 가리킨 것이 분명합니다. 양심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이 있는 지성소올시다.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지성소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양심의 역할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학교로 말하면 스승의 역할을 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줄 뿐더러 옳은 대로 하면 우리를 칭찬해 주고 그릇된 길로 가면 우리를 책망해 줍니다. 채찍질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말은 그런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 해서 양심의 지도대로 할 때에는 우리의 마음이 기쁘고 평안합니다. 그러나 그대로 하지 아니할 때에는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불안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 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핍박을 받아 공회에 잡혀가서 많은 굴욕과 매를 맞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왜? 매는 맞았으나 양심은 그들을 칭찬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三十냥의 돈을 받고 자기 주님인 예수 님을 팔았습니다. 유다가 그 돈을 가지고 집을 잘 짓고 안일하게 살았습니까? 그 돈을 도로 갖다가 성전 뜰에 던지고 마지막에는 목을 매어 자살하였습니다. 왜? 양심의 채찍을 맞은 것입니다.
사실 양심의 채찍을 안 맞는 분이 별로 없는 줄 압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제일 먼저 양심의 법정에서 정죄를 받습니다. 혹 세상의 법정은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법정은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의 소리는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양심의 소리에 반드시 순복(順服)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생활을 돌아보든지 사회의 현상을 돌아보면 사실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해서 우리는 저 사람은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 세상은 양심이 다 썩어진 세상입니다. 이런 말도 들립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욕심의 소리가 너무 커서 양심의 세밀한 소리는 듣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는 전화를 받다가 옆에서 라디오나 다른 것의 큰 소리가 나면 전화 소리가 안 들리지요, 큰 소리 대문에 멀리서 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이것과 조금은 비슷합니다.
다윗 왕도 궁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을 돌아보고 스스로 기뻐했습니다. 그때 어떤 여자의 목욕하는 광경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볼 때에 그의 마음에는 정욕의 불이 붙었습니다. 당시 왕의 권세는 못할 일이 없을 때입니다. 곧 그 여자를 불러다가 추행을 감행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자기의 충복, 우리야의 아내인 바세바였습니다. 그 여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야를 암몬 사람과의 전쟁터에 보내라는 밀서를 이스라엘의 사령관인 요압에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되어 그는 죽었습니다. 좋은 왕이었으나 이런 일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도 태연히 있었습니다. 그 동안에 양심의 소리는 몇 번이나 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왜? 정욕의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에 하나님의 사자 나단이 찾아와서 다윗에게 아룁니다. 『어떤 성에 한 부자와 한 가난한 사람이 사는데 부잣집에는 양도 많고 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가난한 사람의 집에는 조그마한 암 양의 새끼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가난한 사람은 이 양을 자기 딸처럼 사랑했습니다. 같이 먹고 같이 자고 아주 귀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이 부자는 가난한 자의 암 양을 빼앗아 잡아서 자기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임금님은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윗은 노해서 그런 사람이 내 나라에 있을 수가 잇느냐 당장 죽여 마땅하다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에 나단은 손가락으로 왕을 가리킵니다. 『대왕이 바로 그 사람이올시다. 하나님께서 대왕을 사랑해서 온 이스라엘 백성을 다 맡기고 이 나라를 다 맡기고 모든 영광을 다 주셨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야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았습니까.』
그 때에 다윗은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정욕의 소리가 너무 커서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정욕뿐이 아닙니다. 모든 욕심이 그렇습니다. 물욕도 그렇습니다.
옛부터 우리 동양에는 황금이 흑사심(黃金黑士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른 금이 선비의 마음을 새까맣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양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누구나 말합니다. 우리 대한 민국에 제일 큰 원수가 둘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공산당이요 하나는 부정 부패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 부정 부패를 없이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정부에서도 항상 애씁니다. 그러나 그것은 없어지지 않고 그냥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고위층에 올라갈 수록 단수가 높다는 말입니다. 나는 유도에만 단수가 있는 줄 알았더니 뇌물에도 단수가 있는 모양입니다.
며칠 전에 신문에서 의사 시험을 치르는 고시 과장이 어떤 사람이 七十만원의 뇌물을 보낸 것에 분개해서 그 뇌물을 검찰 국에 보내면서 고소를 했다고 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만일 우리 대한 민국의 관리가 이 고시 과장처럼 양심의 소리를 들을 줄 알면 한국 사회는 하루아침에 명랑해 질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강한 욕심을 경계하여 합니다. 정욕뿐이 아닙니다. 물욕뿐이 아닙니다. 권세욕이 그렇고 명예욕이 그렇고 온갖 욕심이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양심의 소리가 가슴에 있지만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순복(順服)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렇게 양심의 소리의 경고가 있지마는 계속해서 순복지 아니하며 듣지 아니하며 성경 디모데전서 四장 二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이 양심이 화인을 맞습니다.
옛날에는 사람의 몸에 화인을 찍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종을 가지고 있으면 그 종의 몸에다 자기 이름을 화인 찍었습니다. 그 화인을 치 면 살이 익어서 뜸장 처럼 되고 그렇게 되면 감각이 둔해져서 더운 것을 모릅니다.
양심의 소리를 계속해서 듣지 아니하면 양심이 무디어져서 그 다음에는 양심의 소리가 분명해 지지 아니 합니다. 얼마 전에 들으니 어떤 타락한 교인이 이렇게 얘기하더랍니다. 처음에 술집과 댄스홀에 갈 때는 가슴이 두근거리더니 몇 번 가니 괜찮더라고. 양심이 화인을 맞았습니다. 그러기에 도둑질도 처음에 할 때는 가슴이 두군 거리지마는 몇 번하게 되면 그런 느낌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기는 여러 번 들으나 거절하면 그 후에는 들리지를 아니 합니다. 그뿐인 줄 압니까? 그런 상태가 점점 오래가면 양심의 괴로움이 없어질 뿐더러 오히려 그 악을 청하는 것이 잘 하는 것으로 알게 됩니다. 그런 단계가 옵니다.
전에 바리새인과 사두개 교인들이 예수를 미워하고 예수를 핍박하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그들은 양심의 가책이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잘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마지막에는 양심이 왜곡되고 전도(顚倒)가 됩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회개하기 전에 그의 양심은 왜곡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옥에 잡아 가두는 것이 잘 하는 일인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릇된 사상과 편견으로 그 양심이 왜곡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사를 읽을 때에 놀랄 만한 일은 불란서에서 성 바오로의 날에 갑자기 구교도들이 일어나서 신교도 수천 명을 학살한 사실입니다.
그 때의 구교도들은 양심의 가책을 별로 안 받았으며 잘 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예수를 믿되 바로 잘 믿어야 합니다. 그릇된 사상과 편견으로 양심이 왜곡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차대전 때에 유대인 六백만을 학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뿐더러 잘 하는 것으로 히틀러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공산당의 양심입니다. 이들은 게릴라를 남한으로 보내서 무도한 양민을 학살하고 민족 상쟁(相爭)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은 뿐더러 잘 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거꾸로 되었습니다. 흰 게 검게 되고 검은 것이 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아닙니다. 짐승만도 못하게 됩니다. 마음속의 나침반이 없어졌습니다. 이런 사람은 파멸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대 양심이올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신 이 대 양심의 화신이올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와서 그리스도와 접촉할 때에 양심의 소리를 언제나 듣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처음에는 양심의 소리를 도무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 나와서 예수 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은 돌을 덜어서 저 여자를 치라는 말을 들을 때에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삭개오의 얘기를 다 알지요? 삭개오는 세리 장이요 큰 부자입니다. 요사이 말로 하면 탐관오리입니다. 부정 공무원, 모리배, 축재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양심의 가책이 없었습니다. 태연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갔다가 예수 님을 만나게 되어 뜻밖에 자기 집으로 오시겠다고 합니다. 자기 집에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예수 님을 자기 집에 영접하자마자『선생님 내가 내 재산을 팔아서 절반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겠습니다. 또 내가 토색(討索)한 것은 四배나 갚아 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영접하고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양심의 소리를 듣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도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는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비뚤어진 소리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매색으로 가는데 갑자기 길가에 빛을 비추어 부활하신 예수 님이 나타났습니다.『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불렀습니다. 이 때에 꿇어앉아 하는 말이『누구십니까?』『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예수 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부터 사을이 변해서 바울이 되고 새로운 양심을 가진 사도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九장 十四절에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양심을 깨끗케 한다고 기록했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이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케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께 나와서 주님을 대면하고 주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보혈로써 죄 씻음을 받으면서 새 사람이 되고 그 때부터 맑은 양심을 가질 뿐더러 양심의 소리를 언제나 분명히 듣게 됩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간단히 하지요 제가 전에 신의주 제이 교회에서 봉사할 때에 저녁 예배를 필하고 집에 오니 어떤 청년이 와서 나를 보자고 했습니다. 들어온 후에 사정 얘기를 들으니 이러합니다. 『내가 내 처남의 재봉틀을 몇 해 동안 그냥 썼는데 이제 돌려보내야겠습니다.』『어떻게 된 거냐?』하니『내가 믿기 전, 몇 해 전에 어떤 상점에서 연말 대매출을 할 때에 처남과 같이 가서 물건을 샀는데 처남도 경품권 하나를 받고 나도 하나 받았습니다. 그런데 처남이『그것 다 매부가 간수하시구려 하면서 주기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번호가 어느 것이 자기 것이고 어느 것이 처남 것인지는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제비를 뽑았더니 처남의 번호로 재봉틀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가 타다가 썼습니다. 처남은 번호도 알지 못했으니까요. 그 후에 재봉틀이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처남이 묻기에 내 번호로 나와서 내가 가졌다고 대답하고 내가 쓰고 있었습니다.』이 청년이 예수를 만나게 되니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참된 행복은 양심이 평안히 있을 때뿐입니다.
전에 한자(韓子)라는 사람은 가난해서 바구니에 밥을 먹고 바가지로 물을 떠먹고 팔을 굽히고 잔다고 할지라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양심이 평안한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도『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것은 양심의 평안을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서 산다고 할지라도 양심이 괴로우면 그 곳에 행복은 없습니다.
양심의 소리는 누구나 들어야 합니다. 언제나 들어야 합니다. 어디서나 들어야 합니다. 어떤 방면에서나 들어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요사이 우리 사회를 보면 개헌 문제로 토론이 굉장한 모양입니다. 아마 우리 국민은 이 문제를 투표할 수밖에 없어요. 맑은 양심으로 투표를 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은 양심을 떠나서 있을 수 없습니다. 디모데 전서 一장 十九절에『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양심을 떠나면 그 믿음은 파산합니다. 그리스도에게 나오세요. 양심의 소리를 들으세요. (一九六九년 九월 七일)


Ⅸ-18 자기 몸을 주신 그리스도 (갈라디아서 二장 十五-二十一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二·二十)
본문 말씀은 좀 복잡합니다. 또한 모순되는 듯도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읽을 수록 은혜가 풍성합니다. 이 한 구절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그의 깊은 영적 체험을 공개합니다.
그는『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습니다.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옛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참 신앙 생활은 죄에 속하는 옛 사람의 죽음으로 시작이 됩니다.
바울의 신앙 생활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하는 뜻은 이제 옛 사람인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며 따라서 지금 나는 옛 사람 대신 그리스도를 나의 마음에 모시고 사는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도『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새 사람이 된 나는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올시다. 특별히 이 시간 이 구절을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구절에서 버렸다고 하는 말을 주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일찍이『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동양 사람들은 공자를 다 존경합니다. 공자께서 동양 사람에게 도덕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다 존경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서양 사람들에게 철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워싱턴을 다 존경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미국 사람들에게 자유를 준 까닭입니다.
그리스도는 전 인류에게 도덕을 주었습니다. 철학을 주었습니다.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기 몸 곧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에베소 五장 二十五절에『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권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희생한 것 같은 사랑으로 남편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에베소 五장 二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生畜)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그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랑하는 이에게 물질을 줄 수가 있습니다. 지식을 줄 수도 있습니다. 시간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보다 더 귀한 그 자신을,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찬의 뜻이기도 합니다.『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성찬의 예식입니다.
특별히 이 구절 가운데 주목할 글 자 두 개가 있습니다.『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일인칭 대명사 나라는 말이 두 번 있습니다.
세례 문답할 때 흔히 묻기를 왜 예수 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까? 하고 물어 보면 흔히 대답하기를 만민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대답합니다. 물론 옳은 대답이올시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아는 것은 부족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나 개인과의 관계를 다 압니까?
전에 성 프랜시스가 젊어서 성 다미엔 이란 조그마한 성당에 가서 홀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 제단 위에는 작은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기도할 때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 때부터 프랜시스는 나를 위해서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주신 주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자기 몸을 온전히 주님께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모라비아 교회의 창립자요 우리 신교 선교 운동의 선구자가 된 진젠돌프의 경험이 또한 그렇습니다.
그는 어떤 박물관에서 그림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구석에 가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성화가 걸려 있습니다. 성화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그 그림을 바라보는 가운데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신 주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 그도 역시 자기의 온 몸과 마음을 이 주님께 바친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가 四一六장을 오늘 아침에 불렀습니다.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버리신 그 사랑 고마워.
내 머리 주 앞에 조아려 하는 말
내 무엇 주님께 바치리까.
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주신 주님을 깨닫게 될 때에는 이 몸을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로마 교외에 나가면 쿼바디스라고 하는 작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 대한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쿼바디스란 말은『어디로 가십니까?』하는 뜻입니다.
로마에 큰 핍박이 있을 때에 베드로가 로마 성을 빠져 나와서 멀리 교외까지 나왔습니다. 나오다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예수 님께서 마주 오십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예수 님이 대답합니다.『나는 로마에 들어가서 성도들과 같이 고난을 받으려고 한다.』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주님께서 어찌 다시 고난을 받으시겠습니까 내가 돌아가 받겠습니다』하고는 로마로 다시 돌아가서 순교하였다는 얘기입니다.
모든 순교자는 문자 그대로 그 몸을 바쳤습니다. 그 생명을 바쳤습니다.
六·二五 때 본 교회 김응락 장로님도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김창화 선생 같은 이도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다 순교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자보다도 로마서 十二장 一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위해서 그 몸을 주신 그리스도는 우리 하나 하나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기를 요구합니다. 먼저 헌신의 생활을 요구합니다. 이런 전적인 헌신의 생활을 하는 이는 물론 몸에 속하는 모든 것도 필요할 때에는 즐거이 하나님께 바칩니다. 재능이 필요하면 재능을 바칩니다. 시간이 필요하면 시간을 바칩니다. 물질이 필요하면 물질을 바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 님께서 연보 궤 옆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연보 하는 것을 보셨다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과부의 연보 하는 것을 특별히 칭찬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헌금을 보시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그 몸을 주신 그리스도의 못 자국이 있는 그 피 묻은 손에 드리는 예물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과거 二十五년간에 받은 바의 만가지 은혜를 생각하면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그 몸까지 주신 그리스도의 손에 드리는 예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할 만한 예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一九六九년 十월 五일)


Ⅸ-19 깊은 밤에 기도와 찬송 (사도행전 十六장 十九 - 三十四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十六·二十五)

바울과 실라의 빌립보 전도의 일화가 사도행전 十六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점을 친다고 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고쳐 준 일이 있습니다. 주인은 그것을 감사히 생각하는 것보다도 그 여자를 통해서 자기에게 들어오던 수입이 없어지는 것이 분해서 바울과 실라를 관원에게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는『이 사람들은 온 성을 요란케 하는 사람들이고 우리 로마 사람들이 받을 수 없는 풍속을 전하는 사람들이라』고 송사 했습니다.
그 때에 관원들은 사정을 잘 알아보지도 아니하고 그냥 많은 매를 때리라고 명령하고 매를 친 후에 깊은 감옥에 가두고 발을 착고(着固)에 채워 두었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을 바울과 실라가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바울과 실라는 그 날 밤중쯤 되어서 성경에 있는 대로 기도를 드리고 또 하나님을 찬미하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 혼란 가운데서 간수는 결국 회개하고 온 가정이 주를 믿게 되었고 바울과 실라도 석방되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이 일화를 생각하면서『깊은 밤에 기도와 찬송』이라는 말씀을 잠깐 묵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바울과 실라가 찬송과 기도를 드린 때는 매우 깊은 밤이었습니다. 또 그들이 처한 환경도 말하자면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고, 착고에 발이 채워져 있고, 억울한 매를 많이 맞았으니 마음도 답답할 것이고 몸도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그들은 기도와 찬송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루에는 낮도 있고 밤도 있습니다. 인간 생활에도 낮같은 때가 있고 밤 같은 어두운 때가 있는 것입니다. 평안도 때가 있습니다. 무사할 때가 있습니다. 봄 동산과 같은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옛 글귀와 같이,『천하는 태평춘(天下太平春)이요 사방은 무일사(四方蕪一事)라.』이런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밤과 같은 때가 또 있습니다. 어두운 때가 옵니다. 위기, 역경, 비상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갈 수밖에 없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환난의 밤, 질병의 밤, 실패의 밤, 슬픔의 밤, 사망의 밤도 올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깊은 밤에 바울과 실라와 같이 기도와 찬송으로 깊고 어두운 밤을 변화시켜 승리의 새 아침이 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신앙의 위대한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믿음이 없는 이는 이런 때에 흔히 낙심합니다. 실망합니다. 타락합니다. 자학하고 자멸하는 이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러한 깊은 밤이 올 대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마땅히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기 바울과 실라와 같이 우선 기도를 힘써야 합니다.
야고보 장로도 야고보서 五장 十三절 이하에『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난의 밤이 올 때에 기도해야 합니다.『병든 자가 있느냐 교회의 장로를 청하여 기도할 것이니라』했습니다.
환난의 밤이 올 때에 특별히 기도를 힘써야 합니다.
시편 一一六편에서 몇 절을 읽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부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했습니다.
환난의 밤이 올 대에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五十편 十五절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환난의 밤에 그를 부르면 건져 주시겠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깊은 밤, 십자가를 내일 아침에 둔 가장 캄캄한 깊은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로 승리하시고 새로운 힘으로 십자가를 대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에 처자와 우 양을 많이 데리고 가나안을 향해서 돌아옵니다. 거의 요단강 가에까지 왔는데 자기 형 에서가 四00명을 거느리고 자기를 마중 온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이 왔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한 일이 있으니까 겁이 났습니다. 말하자면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경우입니다. 그래서 그날 밤 자기는 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얍복강 여울 옆에서 밤새도록 어떤 분을 만나서 씨름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기도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야곱이 깊은 밤에 기도를 통해서 마지막에는 승리를 하였습니다. 야곱의 이름이 변해서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승리자라고 하는 뜻입니다.
깊은 환난의 밤에 기도로써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요나도 적은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가라고 하는 니스웨로는 가지 아니하고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가는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 길이 평안할 리가 있습니까? 큰 풍파가 일어났습니다. 결국은 바다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물고기 배속가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범죄와 실패의 깊은 밤에 요나가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기도를 했습니다. 회개의 기도를 했습니다. 결과는 그런 사람이 변해서 위대한 선지자 요나, 모든 니느웨 사람을 회개시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자가 된 것입니다.
유혹과 시험의 밤은 기도만이 승리합니다. 다니엘, 느헤미야 같은 애국자들이 깊은 민족적 밤에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였다고 하는 얘기를 우리가 구약 가운데서 읽어봅니다.
국가적 위기를 당할 때에도 먼저 힘쓸 것은 기도입니다. 역경의 밤, 고통의 밤, 슬픔의 밤을 당하는 이가 있습니까? 우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때야말로 특별히 기도를 힘쓸 때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를 힘쓰면 아무리 캄캄한 밤이라고 할지라도 하늘의 별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는 멀리 있는 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때에는 기도가 변해서 찬송으로 바뀌어 질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둘째로 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찬송이었습니다. 아무리 캄캄한 밤에도 기도하는 이는 마지막에 찬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기도는 찬송으로 마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은혜를 받게 되면 자연히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밤이 아무리 캄캄해도 어둡고 괴로워도 찬송은 부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로마서 五장 三절 이하에『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그래서 우리는 소망 중에 즐거워한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 중에서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슬픔의 캄캄한 밤에도 기도하는 이는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음성과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도다.』『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불꽃 가운데서도 타지 아니할 것이요, 강을 건널 때에도 침몰치 않을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이들은 캄캄한 밤에도 주의 음성을 듣고 오히려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벌써 오래 전 일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미국에서 마치고 폐가 약해져서 미국 서 남방 뉴멕시코주의 알바버치라고 하는 작은 도시에 있는 장로교 요양원에 가서 한 二년 동안 치료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동안에 한 번은 거기에 와서 오래 치료하던 환자 한 분이 세상을 떠나서 저녁에 추도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저도 참석했는데, 그 추도 예배의 다른 순서는 다 잊어버렸지마는 그 예배 도중에 고인의 젊은 부인이 조가를 직접 부르던 모습을 지금까지도 잊혀지지를 않습니다. 찬송가를 독창하였는데 그 독창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때에 세상 떠난 이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폐가 약해져서 그 요양원에 치료하러 오게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사귀어 그 장래에 가정을 이루기로 서로 약속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이처럼 병으로 공부를 못하게 되니 대학을 졸업한 그 여자는 멀리 버지니아주에서 그 곳까지 와서 병원 원장의 서기 일을 보면서 그 환자의 치료비를 도와주면서 사랑하는 이를 간호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달 후에 불행히도 그 남자의 병이 중해져서 의사는 얼마 살지 못하겠다고 최후의 선언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자는 목사에게 찾아가서, 자기는 일생을 이 남자와 같이 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의 병이 악화되어 며칠밖에 살 수 없다고 하니 이 남자의 성이라도 인계 받을 수 있도록 결혼식을 좀 해 달라고 청구했다는 것입니다.
미국 풍속에 의하면 남녀가 결혼하는 경우에는 남자의 성을 여자가 받아서 아무개 부인이라 불리 우는 법이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처음에 좀 주저했지마는 부탁이 간절하고 또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므로 결국 허락을 했습니다. 마침내 남자는 침대에 누워 있고 여자는 신부로 단장을 잘 하고 병실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그 여자는 병원에서 계속 일하면서 이 남자를 극진히 간호했습니다. 그 정성에 의해선 지 결혼식을 한 후에 그 남자는 거의 八년을 더 살았습니다. 침대에 누운 채로 八년을 더 산 것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여자는『내가 지금까지는 한 남성을 위해서 내 온 몸과 마음을 바치며 봉사해 왔지마는 이제는 이 병원에 들어오는 모든 환자를 위해서 내 일생을 바치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또 사실 그대로 했습니다.
그 후에 이 분이 병원을 위해서 어떻게 열심이었던지 그 병원의 총무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일을 봅니다. 온 병원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이 부인을 특별히 방문하기 위해서 알바버그에 내렸던 일이 있습니다. 또 제가 지난 三월에도 미국 남방을 여행할 때에 전화로 이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왔습니다.
거의 八十이 됐는데 지금까지 일하고 있습니다. 그 부인의 일생을 보면 문자 그대로 깊은 밤에 기도와 찬송과 봉사의 생활을 계속해온 분인 것입니다.
여러분, 밤의 노래 소리는 특별히 아름답게 들리지 않습니까? 가을밤의 기러기 소리가 얼마나 더 아름답게 들립니까? 여름밤의 두견새 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들립니까? 장량(張良)의 옥통소의 소리는 강동자제(江東子弟) 八천명의 간담을 녹였다고 합니다.
옛날 우리 동양의 사화는 너무나 유명한 얘기지요. 캄캄한 밤에 부르는 찬송은 다른 이들에게 큰 감화를 줍니다. 큰 환난의 밤에도 믿음으로 위로를 받아서 늘 화평과 즐거움과 신앙과 봉사의 생활을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큰 감화를 주고 무언의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사실 그런 이들이 많은 줄 압니다. 六·二五 때에 혹은 다른 때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버렸습니다. 혹은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신앙으로써 찬송과 기도를 계속하면서 꾸준히 자기의 책임을 감당하고 여러 가지로 봉사를 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밤에 기도와 찬송의 생활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에게 축복이 될뿐더러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밤에 찬송은 특별히 아름답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깊은 밤중에 억울한 가운데서 기도와 찬송을 불렀더니 그 결과로 큰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긴 얘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마는 이 결과로 간수가 회개하고 온 가족이 회개하였습니다. 아마 다른 죄수들도 회개한 죄수가 있을 줄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때에 부르는 기도와 찬송은 하늘에까지 미칩니다.
깊은 밤중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드리는 기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 찬송은 하늘에까지 미칩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헛되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지각에 뛰어나는 하나님의 은총이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부르는 찬송가의 일 절과 같이 훗날이 춥고 어둡고 찬송을 끊지 마세요.
아무리 날이 춥고 어둡다고 하지마는 찬송을 끊어서는 아니 됩니다. 계속해서 감사와 찬송의 생활을 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문자 그대로 환난과 고통의 밤을 지나가는 이들도 적지 않은 줄 생각합니다. 기억하십시다. 이럴 때일 수록 기도와 찬송을 끊지 마셔야 합니다. 더 열심히 불러야 합니다. 밤은 늘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내일의 아침이 옵니다. 그렇게 캄캄하던 욥의 밤도 결국은 지나갔습니다. 더 큰 축복을 받은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밤이 왔다고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새벽 전이 제일 어둡다고 합니다. 나의 당하는 밤이 매우 캄캄하면 캄캄할수록 벌서 그 밤이 거의 지나가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기도와 찬송으로 승리의 생활을 하는 것이 참된 신자의 모습이올시다.
(一九六九년 十월 十二일)


Ⅸ-20 폭풍우 중에 감사 (사도행전 二十七장 三十三-四十四절)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먹기를 시작하매』(행 二十七·三十五)

여기에 있는『축사』라는 말은『감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떡을 떼어먹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한 죄수의 몸으로 배를 타고 로마에 가다가 지중해에서 유라굴로라는 큰 태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十四일 간을 해와 별을 못 보고 풍랑에 이리 저리 밀려가는 동안에 선장이나 선원이나 여객이나 군인 할 것 없이 모두 정신을 잃고 문자 그대로 빈사 상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대에 정신을 차리고 모든 사람을 격려한 이는 오직 사도 바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는 十四일 되는 날 아침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안심하세요. 당신 네 들의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배만 잃게 될 것입니다. 어제 저녁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이렇게 분명히 내게 말씀해 주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음식을 먹으라고 권면 하면서 떡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 떡을 떼어서 나누어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떡을 받아먹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폭풍우 중에 감사를 드렸고 폭풍우 중에 연회를 가진 것입니다.
인생이 살아가는 항로에는 때대로 폭풍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환난의 폭풍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재난의 폭풍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실패의 폭풍우가 있습니다. 어려운 질병의 폭풍우도 있습니다. 큰 슬픔의 폭풍우를 만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도 사도 바울 처럼 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 할 수 없이 어려운 때에도 감사를 드린 분입니다.
여러분이 잘 기억하시거니와 그가 빌립보에서 전도를 하다가 억울하게 붙잡혀 매를 많이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혀서도 자기 친구 실라와 같이 어두운 밤에 기도와 찬송을 드렸다고 하는 기록을 사도행전에서 찾아봅니다. 폭풍우 가운데서도 감사와 기도를 드린 분입니다.
다니엘 六장 十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御印)이 찍힌 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밤에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을 열고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본래 유대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소년 시절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비록 외지에 잡혀갔지마는 그의 뛰어난 지혜와 총명으로 그 나라의 고관으로 승진케 되었고 그 후 바벨론이 망하고 바사 조로 바뀐 이후에도 계속해서 바사 조정에 등용이 된 것입니다.
다리오 왕 때에는 세 총리 가운데 하나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 세 사람 가운데도 모든 것이 탁월하여 제일인자로 하려는 왕의 의도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의도를 안 그의 정적은 한 모략을 꾸몄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앞으로 三十일간 왕 외에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지기로 작정하는 조서를 내리라고 왕을 꾀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왕은 그 배후에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을 모르고 그 조서에 어인을 찍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왕이 그 조서에 어인을 찍은 줄 알고도 여전히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와 감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때에는 누구든지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를 드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니엘도 문자 그대로 극심한 폭풍우 가운데서 감사를 드린 사람이올시다.
인간의 역사와 현 사회를 가만히 살펴보면 대략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은혜를 거의 잊어버리고 전혀 감사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흔히 배은망덕이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이런 무리들은 옛날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一장 三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도다』했습니다. 소나 나귀만도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가운데 압살롬은 자기 아버지의 자리를 탐내서 반역을 일으키고, 아버지를 궁중에서 쫓아낸 후에 그 궁(宮)에 들어가서 갖은 추행을 다 감행했습니다. 그러다가 물론 마지막에는 패해서 죽은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배은망덕하는 젊은 사람들을 봅니다.
누가복음 十五장에 나타난 예수 님의 비유 가운데 탕자의 비유도 역시 그런 것입니다. 이 탕자의 심리를 보세요. 자기 아버지에게 가서, 그에게 줄 분 깃을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분 깃을 나누어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그것을 다 팔아 먼 나라고 갔다고 하였습니다. 왜? 아버지가 상관할 수 없는 곳에 가서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 재산으로 허랑 방탕하며 음란하며 도박하며 갖은 추한 행동을 계속하다가 결국 재산을 다 탕진해 버렸습니다.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전에 내가 이북에서 들으니까, 어떤 부잣집 아이가 자기 동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합니다. 자기네 큰집을 가리키면서,『이제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만 죽으면 저 집이 다 내 것 돼.』이런 생각을 가진 이는 지금도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신문에는 아버지를 때린다는 기사도 나고, 자녀들이 부모를 쫓아내었다는 소리도 더러 나고, 심지어 부모를 죽인다고 하는 이야기가 보도되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배은망덕하는 무리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활이란 종으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횡으로는 내 이웃, 내 사회, 내 나라, 한 걸음 더 나가서는 모든 우방국가, 전 세계 인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깊이 생각하면, 우리가 하루의 생활을 평화롭게 산다는 것은 종으로 우리의 선조, 선열, 부모의 은혜와 횡으로 우리 이웃, 사회, 나라, 우방국가, 전 세계 인류의 은혜가 다 모여서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아폴로 十一호가 달을 향해서 가는 중입니다. 이 분들이 달에 무사히 다녀오기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이 많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의 성공만을 위해서 하는 기도만은 아닙니다. 그들이 달에 가서 달의 형편을 탐험하고 돌아오는 일은 전 인류에게 혜택이 미치는 일인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버스를 타고 다니시고 비행기를 타고 다니고, 집에서 라디오를 듣고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이 모든 문화적 혜택의 배후에는 우리가 얼굴도 모르는 수없이 많은 과학자들의 은혜가 모여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런 면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사는 이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나라의 은혜, 이웃의 은혜, 온 세계 사람들의 은혜, 이런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런 생활이야말로 인간 이하의 생활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은혜를 다소 알기는 하나 너무 얕은 감사의 생활을 하는 이들이 없지 않아 많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쉽게 말하면 맑은 날은 감사하고 흐린 날은 불평하고, 건강할 때는 감사하고 병날 때는 불평하고, 장사가 잘되고 사업이 잘되면 감사하고 잘 안될 때는 불평하고, 아이가 학교에 입학이 잘되면 감사하고 잘 안되면 불평하고, 취직이 잘 되면 감사하고 취직이 안 되면 불평하고, 다른 사람이 선물을 잘 주면 감사하고 열 번 주다가 한 번 안주면 불평하고, 기분 좋을 때는 감사하고 기분 나쁠 때는 욕하고 하는 것입니다. 어린애들을 보면, 초콜릿을 주면 감사하고 너무 많이 먹어 배아플까봐 조금 주면 눈을 흘깁니다. 그런 사람들은 없습니까?
제가 전에 어떤 책을 보니 어떤 지방에 가서 선교하던 선교사가 어떤 아프리카 토인 부락을 지나다가 깜짝 놀랄 일을 당했다고 합니다. 가만 보니 그 부락의 한 토인이 자기 옆에 늘 모시고 다니던 우상을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볼기를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가 놀라서 어떻게 당신이 섬기던 우상을 매달아 놓고 볼기를 칠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토인이 대답하는 말이, 내가 이 우상을 十년이나 섬겼는데 복은 하나도 주지 않고 화만 주니 이런 우상을 어떻게 섬기겠느냐고 말합니다. 이런 종교 사상을 가진 이들이 지금도 상당히 많은 줄 압니다.
전에 들으니 어떤 집에서 어느 부인이 몇 주일 동안 교회에 잘 나오더니 갑자기 안 나오기에 그 교회 권사님이 가서 물었다고 합니다.『왜 잘 나오시다가 안 나오십니까?『나는 이제 안 나가렵니다. 글쎄, 지난 주일날 문을 걸고 교회 다녀오니 도둑놈이 와서 모두 다 가져갔습니다. 그때 집도 못 봐주는 하나님을 무엇 하러 섬기겠습니까?』이런 유치한 종교 사상을 가진 이가 지금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감사하지만 얕은 생활을 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이 있는 줄 압니다.
그 반면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교훈대로 모든 일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을 만듭니다. 기독교 신앙이 꼭 지혜 있게 만든다고 보증하기 어렵지요. 꼭 지식이 많은 사람을 만든다고 보증하기도 어렵겠지요. 돈을 잘 버는 사람으로 만든다고 보기도 어렵겠지요. 그러나 누구든지 참된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면 그이는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은 이 우주에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 우주의 창조자 시오 섭리자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그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이 우주 안의 모든 것, 일월성신, 산천초목, 오곡백과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은혜로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까지, 지식이나 재능이나 물질이나, 시간이나 아니 내 자신까지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저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기 위해서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주셨다는 것을 또 알게 됩니다. 십자가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올시다. 우리와 같이 계시는 하나님이올시다. 곧 우리와 항상 같이 계셔서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주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우리와 동행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약할 때에 붙들어 주시고 쓰러지려고 할 때에 도와주시고 우리가 슬픔을 당할 때에 위로를 더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인생 길을 다 간 후에는 우리의 심령을 에녹과 같이 영원한 하늘나라에 영접하신다는 것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이는 자연히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을 읽어보세요. 여러 사도들과 초대 신자들은 감옥에서도 감사를 했고 매를 맞고도 감사를 드렸고 재산의 손해를 받고도 감사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교회사를 읽어보세요. 많은 순교자들이 순교하면서도 감사를 드리며 죽었습니다.
외적 세계 혹은 환경은 안경의 빛깔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검은 안경을 쓰면 모든 것이 검게 보입니다. 그러나 분홍 안경을 쓰면 모든 것이 분홍빛으로 보입니다. 믿음의 안경을 쓰고 보면 모든 일에 감사할 것이 있습니다. 검은 구름에도 햇빛이 비치면 아름답고 무지개가 나타납니다. 근심의 안개, 슬픔의 구름에도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면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 프랜시스의 태양의 노래를 기억하시지요. 그 노래의 내용을 보면, 그는 햇빛을 위해서 감사 드립니다. 달을 위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별을 위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산천의 초목을 위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오곡백과를 위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산해어별(山海魚鼈)을 위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형제자매를 위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에 드린 감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죽음을 위하여 감사를 드렸습니다. 죽음을 자기의 자매라고 부르면서 이 죽음을 주시니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죽음도 주안에서의 죽음은 감사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된 신앙은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 가슴을 채워 줍니다.
사실 감사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로마서를 읽어보면 믿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을 때에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뿐 아닙니다. 감사한 마음은 믿음의 척도입니다. 믿음이 있을 수록 감사한 마음이 더 많아집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그렇게 많은 추수를 했을지라도 하나님께 대해서 감사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가난한 과부는 그 가난한 가운데서도 너무 감사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습니다. 감사는 믿음의 척도입니다.
옛날 로마의 유명한 문호 시세로는『감사한 마음은 최고의 덕일 뿐 아니라 모든 덕의 어머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한 이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한 이가 남을 해치는 언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한 이는 어떤 직장에서든지 그 자리에서 충성을 다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한 이가 교회에 나와서도 봉사를 제일 잘 합니다. 전도도 제일 잘 합니다. 헌금도 제일 정성껏 합니다. 국가를 위해서도 충성을 다합니다.
두 가지 종류의 시내가 있습니다. 한 종류의 시내는 빗물이 모여서 흐르는 시내입니다. 비가 오면 물이 많이 내려갑니다. 그러나 가물면 물이 없습니다. 다른 한 시내는 높은 알프스산 꼭대기에 수없이 쌓인 눈, 빙하 같은 것을 근원으로 해서 내려오는 시내입니다. 이런 시내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는 법이 없습니다. 왜? 그 근원이 높은 산봉우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마음은 이러한 시내와 같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심령 속에는 높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생명의 물을 근원으로 해서 언제나 감사와 기쁨이 충만히 넘치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이와 같은 은혜를 받는 사람은 어디가나 기쁨과 화평으로 충만케 되고 봉사를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충만한 은혜를 주시기 원합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 사랑의 충만한 은혜 능력의 충만한 은혜를, 감사의 충만한 은혜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원컨대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의 가슴, 가슴마다, 아니 우리 온 교회에 감사의 충만한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一九六九년 十一월 十六일)


Ⅸ-21 영적 생활의 결산 (마태복음 二十五장 十四 - 三十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새.』(마 二十五·九)

달란트의 비유는 주인의 종들과 회계하는 이야기입니다. 곧 결산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덧 一九六九년도 다 저물어서 이 해도 며칠 남지 아니 했습니다. 옛날부터 광음은 여류(光陰如流)라고 하는 말이 있지마는 우리는 특별히 이런 세모를 당해서 세월이 빠른 것을 새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연말은 여러 가지로 바쁜 시기인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연말은 결산하는 시기입니다. 상점에서도 결산을 하고 회상서도 결산하기에 바쁜 때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영적 생활의 결산을 한번 해보는 것도 필요한 줄 압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 이 달란트의 비유를 중심해서 영적 생활의 결산이라는 문제를 생각하면서 성경의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달란트 비유를 가만히 생각할 때에 우리가 깊이 느끼게 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인간은 누구든지 장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요 특별히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한 장사하는 사람이라 하는 진리를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또 세상은 한 시장입니다. 장사하는 데는 물론 본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다 남의 돈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이올시다. 내 본전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본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서 본전을 다 각각 주셨습니다.
이 달란트 비유를 보면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었는데 이것은 꽤 큰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혹 한 달란트를 각각 주어 본전이 다 다르게 주었습니다. 이것도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선천적으로 하나님께 받은 바 그 재능이 다 다릅니다. 질도 다르고 양도 다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 참 성령을 받지마는 각각 받은 은사도 다릅니다. 혹 우리가 사회에서 가지는 직업도 각각 다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사나 재능이나 직분을 맡긴 것은 그 목적이 이것을 가지고 장사를 잘 해서 이익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열매를 많이 맺으라는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본전을 가지고 장사하는 장사꾼입니다.
여기에 보니 오랜 후에 그 주인이 와서 종들과 회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남의 본전을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은 주인 앞에 와서 회계할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결산을 해야 할 때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대로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나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겼는데 내가 장사를 잘해서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열 달란트를 받으세요. 주인이 기뻐서 칭찬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더 큰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고 칭찬과 상을 주었습니다.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도 역시 두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그리고는 네 달란트를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이 기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면서 꼭 같은 말로 많은 것으로 맡기겠다고 하시면서 잔치에 참여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들어왔습니다. 이 종이 와서 하는 말이 제가 아는 대로 주인은 대단히 인색한 분이어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또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분인 줄 내가 알아 두려운 마음이 나서 이것을 땅에 묻었다가 한 달란트를 그냥 손해 안 보고 가져왔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노해서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 있는 것을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고 저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으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결산을 합니다.
이 결산에 대해서 우리가 꼭 배워야 할 진리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다섯 달란트 받은 이는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이는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다시 말하면 본전을 많이 받은 이는 더 많이 남길 책임이 있습니다. 열매 많이 받은 이는 열매 많이 맺을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다른 이보다 더 큰 재능, 은사, 직분을 받았다고 할 것이면 그 만큼 더 일할 책임이 있습니다. 많이 준 자에게는 적게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많은 것을 받았다고 하면 그것을 가지고 자랑하지 말고 내 책임이 얼마나 중대하다고 하는 것을 알아서 자기의 직분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둘째로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그만큼 남겨 가지고 와서 보고할 때나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남겨 가지고 와서 보고할 때나 주인은 똑같이 칭찬하고 똑같은 상을 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이익의 양보다도 그 충성을 보십니다. 이익의 총량보다도 그가 받은 바의 본전을 가지고 얼마나 충성을 다했는가를 보십니다.
사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힘써 장사해서 한 달란트만 더 남겨 가지고 왔던들 똑같은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적은 은사나 재능을 받은 이가 있으면 적게 받았다고 불평하지 말고 적게 받은 그것 가지고 충성스럽게 장사할 것뿐입니다. 그러면 똑같은 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 리빙스톤이 그 곳에 가서 얼마나 큰 일을 하였습니까? 마지막에 외딴 곳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리빙스톤이 아프리카에서 일할 때에 열심히 그를 도왔던 흑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분이 자기 친구들을 모아 가지고 리빙스톤의 시체를 항구가 있는 곳까지 수천 리를 걸어서 운반하여 영국으로 가져다 온 영국이 그 유해를 맞아 마지막에 유명한 웨스터민스터 예배당에 장례를 지냈습니다. 그 때에 시종 리빙스톤을 따라다니면서 그를 도왔던 웨인 우라잇이라는 그 키가 작은 흑인이 런던까지 따라와서 그의 장례를 지냈습니다. 그 때에 물론 모든 영국 사람들이 리빙스톤을 존경하고 그를 추모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리빙스톤만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리빙스톤을 따라서 종시 충성되게 리빙스톤과 일생을 같이한 그 흑인 동역 자를 역시 크게 존경하고 찬양했다고 합니다. 왜? 리빙스톤은 그가 받은 바의 재능에 충성을 다한 사람이올시다. 이 흑인 일꾼은 자기가 받은 바 은사에 대해서 역시 똑같은 충성을 다한 사람이올시다.
셋째로, 제일 큰 죄는 본전을 묻어 둔 죄 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이의 죄가 이것입니다. 장사하라는 본전을 묻어 두면 안 됩니다. 즉 재능을 묻어 두면 안 됩니다. 은사를 묻어 두면 아니 됩니다. 직분을 묻어 두면 아니 됩니다. 일하라고 맡기는 것입니다. 일해야 됩니다. 은사를 묻어두는 것은 큰 죄입니다.
넷째로, 묻어 두는 본전은 결국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이 주인이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종에게 주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견지에서 보면, 뭐 그렇게 야속하게 한 달란트까지 아주 빼앗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자연의 법칙입니다.
육체는 팔과 다리를 쓰지 아니하면 결국 그 팔과 다리는 약해집니다. 음악가가 계속해서 악기를 쓰지 아니하면 그 손재주는 점점 없어지고 맙니다. 묻어 두는 은사 묻어 두는 재능은 결국 없어지고 맙니다. 빼앗깁니다. 받은 바 재능, 받은 바 은사, 받은 바 직분도 충성되게 쓰지 아니하면 결국 빼앗기고 맙니다.
다섯째는 빼앗길 뿐더러 큰 형벌을 받습니다.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 운 곳에 내어쫓고 그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대단히 엄숙한 진리올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니 우리가 직면해야 합니다. 이상의 원칙을 기억하면서 내 자신의 일년 생활을 회고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다 본전을 받은 한 장사하는 사람이올시다. 우리가 그 받은 바 본전을 가지고 얼마나 부지런하게 충성되게 장사를 했습니까?
첫째는 기도 생활을 회고해 보세요. 호흡과 같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 생활이 금년 일년은 어떠했습니까? 또는 성경 연구 생활을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얼마나 열심히 읽으며 생활했습니까?
가령 넷째 계명을 생각해 보세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주일을 얼마나 거룩하게 지켰습니까? 혹은 전도 생활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 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불렀는데 우리가 이 방면에서 어떤 어부 노릇을 했습니까? 혹은 봉사 방면을 생각해 보세요. 교회 안에서 하는 봉사, 구역 안에서 하는 봉사, 내 직장 안에서 하는 봉사, 사회 봉사 등에 내가 얼마나 충성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여러 가지 직분을 맡은이도 있는 줄 압니다. 여러 가지 특별한 책임을 맡은이도 있는 줄 압니다. 여기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충성되게 내 책임을 감당했는가? 혹은 물질의 청지기로서 어떠한 청지기 노릇을 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물질의 양의 차이는 다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받았든 저게 받았든 여기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청지기로서 하나님께 드릴 것을 드리며 봉사할 것을 봉사했는가 행각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것은 얼마나 내가 일년 동안에 내 자신 안에 이익을 남겼는가? 다시 말하면 얼마나 나의 심령이 영적으로 장성했는가?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열매를 얼마나 맺었는가?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했는데 이런 방면에 내 성품이 얼마나 장성했는가? 얼마나 더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으로 장성했는가? 반성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 결산하는 사람들 흔히 흑자라는 말을 합니다. 반면에 적자라는 말도 합니다. 흑 어떤 이들은 겨우 수지나 맞았다 합니다. 어떻습니까? 적자입니까? 수지가 상반합니까? 흑자입니까? 과거 일년 동안의 내 신앙 생활이 진보했습니까? 그저 답보 하는 중에 있습니까? 혹은 퇴보한 이는 없습니까?
데마와 같이 세상을 사랑해서 데살로니가로 가는 사람은 없습니까?
탕자와 같이 일년 동안에 집을 떠난 사람은 없습니까? 잃은 양은 없습니까?
전에 다윗 왕처럼 숨은 죄를 지은 사람은 없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漫忽)이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했습니다.
전도서 十一장 九절에 이렇게 경고합니다.『청년들이여 네 젊은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길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에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할 날이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물론 자유가 있습니다. 상인은 상점에서, 직공은 공장에서, 공무원은 관청에서, 국회 의원은 국회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에 심판하실 줄 알라 하는 것입니다.
일직이 미국에 다니엘 웹스터라고 하는 유명한 정치가가 있었습니다. 그 분에게 어떤 분이 찾아가서 이런 질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 왔던 모든 생각 가운데 가장 엄숙한 생각은 무엇입니까? 그이가 얼른 대답하는 말이, 나의 지금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가 있으리라 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대가 있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연말에 아주 중요한 것 한 가지 있습니다. 그건 모든 것을 청산하는 겁니다. 죄로 해를 넘기지 맙시다. 한 분이라도 양심에 꺼리기는 죄가 있으면 해를 넘기지 말고 청산합시다. 우리가 연말에 꼭 생각해야 할 것은 끝을 올바로 맺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까지 생명의 구주를 만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오늘 이 마지막 주일에, 오늘을 넘기지 말고 마지막 부르심을 들으시고 주님께 오시기를 바랍니다.
(一九六九년 十二월 二十八일)


Ⅸ-22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한 복음 十九장 九-十七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十五·九)

주보에도 있지마는 다음 수요일부터 우리는 사순절을 맞게 됩니다. 부활주일 전 四十일 동안을 옛날부터 사순절이라고 해서 특별히 우리가 예수 님을 생각하고 그의 최후의 지상 생활을 바라보는 기간을 사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최후 교훈을 우리가 되새겨 보면서 은혜 받는 그런 때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주님의 말씀 가운데서 특별히 요한 복음 十五장 九절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예수 님께서 마지막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세 부분의 구별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란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라고 했습니다. 나의 사랑 곧 주님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다음에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권면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아버지의 사랑을 잠깐 생각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아들 예수께 대한 사랑은 유한한 인간의 생각으로 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교훈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무시무종(無始無終)하십니다. 처음이 없고 마지막이 없습니다. 시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의 사랑이올시다. 인간의 사랑은 시시 때때로 변하지마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랑으로 필연 그 아들 예수 님을 사랑하신 줄 생각합니다. 영원하신 사랑으로, 무한하신 사랑으로, 불변의 사랑으로, 그 아들 예수를 사랑하신 줄 믿습니다.
둘째로 이런 사랑을 받은 아들 예수는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친히 말씀하신 그대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그 영원하신 사랑으로, 그 무한하신 사랑으로, 그 불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만세 전에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혹은 로마서 八장에 이런 말씀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困苦)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赤身)이나 위험이나 칼이랴.』하나님의 우리 주님을 통한 그 무한하신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올시다.
또한 이렇게도 기록하였습니다.『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변치 아니하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셨습니까? 그것은 대략 서너 가지 방면으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먼저 그리스도는 하늘의 보좌를 내어놓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후에 인간의 모든 경험에 동참하시면서 인간을 봉사하신 것입니다. 그는 일직이 공적인 생활을 하시기 전에 가정에서 목수의 일을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근로 생활에 동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금식을 하시는 가운데 심히 주리셨다고 합니다. 인간의 기근에 동참하신 주님이올시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인간의 빈곤에 동참한 주님이올시다.
나사로가 죽은 후에 많은 여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같이 우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는 자로 같이 우시며 인간의 모든 슬픔에 동참하신 주님이올시다. 그의 생활은 무엇보다도 제자들의 발을 씻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인간의 더러운 발을 씻으신 것이올시다. 그의 전 생애는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여기에서 그친 것은 아닙니다. 그의 결정은 골고다에서 마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산상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의 최후를 마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인간의 사망의 고통에 동참하시고 인간의 모든 짐을 대신 지시고 죄의 책임에 동참하셔서 최후로 자기의 목숨을 바치신 것이올시다.
만민의 죄악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흘리신 것입니다. 친히 그가 말씀하신 그대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는 그 목숨을 버리면서 그의 크신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그는 그의 원수를 위해서까지 그의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향해서『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이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사랑은 원수에게까지 미친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는 두 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가운데로 선이 하나 내려오고 옆으로 또 하나의 선이 가로지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의 수직선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하늘로부터 땅 끝까지 미친 그 깊은 사랑의 표현으로 우리가 믿습니다. 또 십자가의 횡선은 전 인류를 다 안으려고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팔로 생각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와 같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권면하는 말씀이 있습니다.『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너희도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 했습니다.
그 전에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十三장에 보면『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는 말,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말, 이상과 같은 교훈은 너무 많이 들었으므로 거저 심상히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순절을 맞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랑의 만 분지 일 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까 를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인간의 모든 생활의 슬픔, 고통, 환난, 죽음에까지 모든 생활에 동참하셨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어느 정도까지 이 인간의 슬픔과 고통에까지 동참합니까?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해서 그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육체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 생활의 어떤 면에 희생했습니까? 시간의 희생입니까? 정력의 희생입니까? 물질의 희생입니까?
그리스도는 원수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에 있어서 사실 모든 원한을 풀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심정 가운데서 신앙 생활을 하십니까? 우리가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신자간에도 담을 쌓고 그냥 헐지 않는 일은 없습니까?
제가 이번에 약 한 달 가량 미국을 여행하면서 미국 사회의 여러 가지 실정을 가까이 살필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령 미국 사회에도 여러 가지로 우리 한국 사회에서처럼 어려운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월남 문제 같은 것도 매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미국 국민 가운데는 월남 전쟁을 반대하는 이가 많아서 정부 당국의 입장이 대단히 곤란합니다.
또 인종 문제는 한국에는 없는 문제지만 대단히 중대 문제입니다. 흑백의 민족 문제, 흑인 가운데서 흑인의 민권 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 아주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습니다.
또 머리도 깍지 아니하고 수염도 깍지 않는 과거의 문화 생활을 부정하는 히피족들이 상당히 늘어나는 모양입니다.
또 캠퍼스도 전처럼은 아직도 조용하지를 않습니다. 학생들 가운데서 여러 가지 문제가 이 대학 저 대학에서 일어납니다.
이런 문제가 많지마는 가만히 보면 그래도 안정된 무엇이 있습니다. 요새 미국에서 새로 쓰이는 말이 있는데 한국말로 번역하면『조용한 대다수』라고나 할는지 소위 싸이렌트 매조리티(Silent Majority)라고 그렇게 떠드는 사람이 많지마는 실상은 조용한 대다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대다수의 조용한 국민은 떠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조용한 사람으로 부지런히 일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거저 상부상조하는 사람들입니다. 떠드는 사람들이 더러는 있기는 하지마는 조용히 정직히, 부지런히 일하고 진실 된 생활을 하고 상부상조하는 그런 수가 많으니 근본적으로 그 사회는 안정이 된단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는 사회의 저력, 밑에 있는 힘이요, 안정 세력입니다.
그런데 이 안정 세력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교회가 있습니다. 안정 세력에는 교회가 있어서 이들을 가만히 볼 것이면 주일이면 으레 교회에 나가서 예배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어떻든지 진실히 살아 보려고 애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최근의 문공부 통계를 보니까 우리 남한의 개신교 수가 三백만이 조금 넘는다고 합니다. 천주교인의 수가 약 七五 만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개신교의 수가 남한 인구의 일 활이 되는 셈입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이 앞으로 안정된 사회, 건전한 민주 국가로 발전하려고 할 것이면 이 신교를 믿는 수가 인구의 약 五할은 되어야, 그 때에는 한국 안에 일어나는 사회 문제와 모든 문제가 자연히 해결될 줄 압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번에 미국을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전도 운동이요, 둘째로는 사랑의 운동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어떻든지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상부상조할 줄 아는 사랑의 운동이 필요합니다.
제가 바로 지난주간에 유진 오레곤이란 지방엘 가서 홀트 양자회 이사회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제가 한국에 나와 있는 홀트 양자회의 이사장이란 직책을 가지고 있으므로 본부 이사회에 꼭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번에 가서 참석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홀트씨에 대해서는 말씀을 조금 들으신 분도 계시겠지마는 아마 잘 모르는 분도 계실 겁니다. 이번에 내가 홀트씨의 집도 방문했고 그 사정을 더욱 자세히 알고 왔는데 홀트씨는 별로 큰 교육을 받은 분이 아닙니다. 八학년까지 공부했다고 하니까 우리의 학제로 말하자면 중학교 二학년 정도까지 마친 분입니다. 그리고는 촌에서 농사하던 분입니다. 커서 진실하게 열심히 일해서 넉넉히 사는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六·二五사변 때에 한 분이 와서 유진이란 곳에서 피얼스 박사가 한국 사정을 얘기한다고 하니 같이 구경가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듣고 자기 부인과 딸들을 데리고 가서 피얼스 박사의 얘기도 듣고 사진도 보여 주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한국 고아의 사정이 매우 딱한 것을 알게 되자 돌아오는 길에 부부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에 피얼스 박사가『당신 네가 도우려면 한 달에 十불씩 우리 선명회에 보내 주면 이것을 받아 가지고 고아 한 사람을 기를 수 잇소』하는 말을 듣고 곧 그들도 고아 두 사람을 도와주어야겠다고 한 달에 二十불씩 내고 고아 두 사람을 돕겠다고 신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면서, 자기 부인과 아이들과 종종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만 해 가지고 될까?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고 성경에 말씀했는데 우리가 고아를 이렇게 도와서 될 것인가? 어떤 때 좀더 고아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한국에 나올 생각이 났습니다. 한번 나와서 부산, 대구, 서울을 다니며 고아원의 실정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생각하기를 내가 두 아이만 돕는 것으로 될 수가 있나. 우리 집이 상당히 넓은데 고아들을 좀 데려다가 길렀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고 자기네 아이가 여섯이나 되는데, 아래층도 좀 수리하고 집을 손질하면 아직도 여덟 아이는 더 기를 수 있겠다고 생각이 됐습니다. 그래서 집을 수리하며 한국에 나와 고아 여덟을 데려가려고 신청을 했습니다. 자기가 직접 기르려고. 그런데 미국에는 양자는 두 아이 밖에는 더 기를 수 없는 법이 있어서 그 법을 고치려고 국회의원과 교섭을 해서, 그러니까 국회에서는 몇 달 안에 법을 고쳐 주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나와 고아 여덟을 데려다가 자가 아이 여섯과 같이 기르기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니 이 광경을 보고 그들 아는 이들, 교회 교우들, 친척들이 감동을 받아서 우리도 한국 고아를 데려다 기르겠다고 해서 다른 가정에도 보내는 일을 하기에 이르러 소위 홀트 아답션 프로그램 (Holt Adaption Program)-홀트 양자회라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홀트 씨는 아이들을 빨리 받아들여 기르기 위해서 한국에 와서 고아원 하나를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홍제동에 세웠다가 일산으로 옮겼는데 현재도 있어요. 거기에는 언제나 버려진 아이들을 우선 받아서 기르는데 늘 五, 六백 명의 고아가 있습니다. 홀트씨는 몇 해 동안 친히 고아원에 나와 일하다가 바깥에서 일하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국 고아를 위해서 생명을 바쳤어요. 그러나 그 부인과 친구들이 계속해서 이 일을 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지금까지 이 홀트 양자회를 통해서 미국과 서서와 여러 나라에 한국 고아를 양자로 보낸 수가 작년까지 五천 명이 넘었어요. 五천명을 좋은 가정에 들어보내서 잘 자라게 했습니다.
여러분, 이번 이사회에 내가 가서 가만히 보니 이사들이 약 二十명되는데 자기네 집에도 아이들이 있지만 한국 고아를 두 셋씩 데려다 기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가 없지요. 한국 사람인 나로서는 깊이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외국 사람들이 이렇게 한국의 고아들을 데려다 기르는데 왜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할 수가 없겠는가? 생각이 듭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떻든지 사회 안에서 사랑의 운동의 선구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一九七0년 二월 二十五일)


Ⅸ-23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용서 ( 태복음 十八장 二十一 - 三十五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十八·二十二)

『주여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하고 베드로가 예수 님께 물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교의 랍비들이 세 번까지 용서해 주라고 교훈 하였습니다. 여기의『일곱 번까지 하리이까?』라고 물은 것은 그 배가 더됩니다. 베드로는 그만하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넉넉한 줄로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얼른 대답하는 말씀이『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무자비한 종의 비유인 一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를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어떤 임금에게 종들이 많이 있는데 그 종 가운데 하난가 一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여기 한 달란트는 지금의 돈으로 약 一000불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一만 달란트면 一천만 불 가량 됩니다. 그것을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三十억 원이 될 것입니다. 굉장한 빚을 졌습니다. 이 빚을 갚으라고 하나 이 종은 갚을 길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임금이 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그 종이 간절히 빌었습니다. 좀 참아 주시기를 바란다고 빌었습니다. 그러니까 임금이 불쌍히 여겨서 그 많은 빚을 그저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탕감을 받은 이 종이 나오다가 자기에게 빚을 진 동관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동관은 백 데나리온을 빚져 있었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미화로 약 二十불 됩니다. 우리 한국 돈으로는 약 六천 원쯤 됩니다. 그는 빚진 동관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동관은 내게 지금은 돈이 없으니 조금 참아 주면 내가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 동관을 옥에다가 집어넣었습니다.
그 후에 그 소식을 임금이 들었습니다. 임금은 노해서 그 종을 다시 불러서,『이 악한 종아 네가 그렇게 많은 빚을 내게 젓는 데도 네가 빌기에 불쌍히 여겨 네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너도 네게 빚진 사람에게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고 하면서 그 종을 다시 옥중에 넣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었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이 시간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용서에 대한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귀중한 교훈을 몇 가지 우리에게 주십니다.
첫째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다른 형제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여기서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一만 달란트를 빚진 종은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왜 다른 형제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나에게 죄를 지을 때에도 용서해 줄 당연한 의무가 있습니다. 왜 일흔 번씩 일곱 번, 다시 말하면 무제한으로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은 죄는 그야말로 一만 달란트, 三十억 원에 해당하는 죄였습니다. 이것을 무제한으로 용서함 받았으니 또 우리도 남의 죄를 무제한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는 죄인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뿐만이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다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한국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사람이 하루를 살 때에도 죽을 죄 한 번은 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법을 다 어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율법의 요구대로 우리에게 갚아 주신다면 구원 얻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一만 달란트의 무제한의 죄 사람을 받았으니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무제한의 용서를 해 줄 의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지은 죄를 생각하면 실상은 백 데나리온, 六천 원에 불과합니다. 나는 한량없는 죄 사함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는데 다른 형제가 내게 짓는 죄는 기껏해야 백 데나리온에 불과합니다. 이런 적은 죄를 우리가 용서해 주지 아니하면 우리도 여기에 나타나는 무자비한 종, 즉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하는 종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먼저 이렇게 다른 형제의 죄를 사하여 주는 것은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당연한 의무라고 하는 것이 이 비유를 통한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둘째 이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내 죄를 용서함 받는 데 필수조건이 된다는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내가 용서를 받는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인이 빚을 탕감해 주었던 종을 다시 불러다가 그 빚을 다 갚기까지 옥졸에게 붙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님께서 결론으로 하신 말씀이『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엄숙하고 무서운 교훈입니다. 그 주님께서는 산상보훈에서도 꼭 이대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해 주지 아니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해 주시지 아니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심지어 주기도문을 가르칠 때에도 죄 사함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는 조문에는 이런 교훈을 비추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야고보 二장 十三절에는『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고 하였고 산상보훈의 여덟 가지 복을 가르쳐 주실 때에는 예수 님께서 친히『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 사함을 받기 원합니까? 그러면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해 줄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부득이 한 일입니다. 불가불 꼭 해야 할 일입니다. 왜? 그래야 내 죄를 사함 받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 비유를 생각할 대에 배울 진리가 또 한 가지가 있는 줄 압니다.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되 속히 용서해 주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는 용서를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오래 가기가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즉 우리가 남을 미워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을 오래 품게 되면 그만큼 내 자신에게 큰 손해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 신의주에서 전도사로 처음 교회 일을 볼 때에 박산읍 교회에서 시무 하시던 김 진근 목사님이 한 번 우리 교회에 오셔서 삼일기도회 저녁에 말씀을 하시고 그 후에 저와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이야기 가운데 지금까지 제가 잊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가 목사가 되기 위해서 평북 노회에서 목사 시취(試取)를 받던 이야기였습니다. 지금은 시취 위원이 따로 있어서 조용히 하지마는 그 때는 노회 석상에서 여러 명이 물어 보아서 합격해야 목사 안수를 하던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와 다른 젊은이 한 사람과 같이 시취를 했는데 앞에 세워 놓고는 여러 사람이 이것저것을 다 물었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대답을 무던히 잘한 줄 알았고 공기를 보니 통과될 것 같더니 마지막에 선천에 있던 어떤 선교사 한 분이 일어나서 하는 말이『내 생각에는 아직 이 두 형제가 목사 될 자격이 없는 줄 생각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선교사의 발언권이 아주 강하던 때인지라 그가 그 말을 하자 공기가 싹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한 노회 기간 보류하기로 동의, 재청해서 가결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목사 시험에 낙제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을 내오려니 자기의 마음속에 선교사에 대한 분한 마음이 들어갔답니다. 그 날 저녁에 자려고 하니 잠이 잘 안 오더래요. 그래 잠을 못 자고 다음날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기도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선교사와 자기 사이에 어떤 혐오가 있던 것도 아닌데 선교사가 그렇게 말한 것은 사실 나에게 부족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내가 오해를 했구나 하고는 그 분한 마음을 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평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이튿날 함께 시험보다 낙제한 그 청년을 만났답니다. 만나 보니 그이는 아직까지도 분한 마음이 그냥 있더랍니다.『그 못된 선교사 그 놈!』하면서 욕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몇 달을 가도 그 분은 분을 풀지 못하더니 반년 후에 다시 시험을 쳐서 두 분이 다 목사가 되기는 됐는데 그 사람은 그 후에도 계속 선교사에 대해서 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몇 해 후에 그 분은 교회 일을 보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남에게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 미운 마음을 늘 가지고 있으면 우리 속에 은혜가 없어집니다. 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 속에 성령께서 오래 계실 수가 없습니다. 내가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현대 심리학과 의학이 발달된 요즈음에 있어서는 이런 분한 마음, 시기하는 마음을 오래 품으면 심적 또는 육체적으로 갖는 손해가 있다는 것이 밝혀져 있습니다.
스텐리 존스 박사의 저서를 보면 그런 실례를 많이 열거했습니다. 가령 어떤 젊은 여자가 하나 있는데 그는 무엇을 먹기만 하면 도로 토하고 맙니다. 의사가 아무리 위를 검사해 보아야 아무 병도 없었습니다. 심리적으로 그 여자를 분석해 보니 그 속에 자기 시어머니에 대한 미운 마음이 가득해서 결국은 육체적으로 그런 고장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젊은 여자가 갑자기 오른 손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의사들이 아무리 진찰을 해 보아야 아무 병도 없었습니다. 심리적으로 진단을 해 보니 자기 어머니에 대한 증오감으로 인해서 그 손으로 어머니를 때릴 마음이 가득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해소시킨 다음에는 곧 팔을 쓰게 되었답니다.
한국에서도 우유를 많이 먹기 시작하지마는 성난 소에게서 짜 낸 우유를 먹으면 해롭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몇 해 전에 미국에서 어떤 농장에 가보니 젖 짜는 방을 아름답게 꾸미고 거기에 음악을 틀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성이 난 어머니가 아기들에게 젖먹이는 것을 본 일이 있지요? 그거 아마 좋지 않을 것입니다. 성난 기분 가운데서 나오는 젖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심리적 상태가 육체에 직접 영향을 줍니다. 한국에는 전부터 이런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사촌이 밭을 사면 배를 앓는다.』어려서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심리학을 배우고 생각해 보니 꼭 그렇겠어요. 사촌은 밭을 샀는데 나는 못 샀다는 시기하는 마음이 가득할 것 같으면 위액이 제대로 분비되지 못할 것입니다. 자연히 소화불량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배가 아프게 되겠지요.
사실 위궤양이니 하는 병은 육체적 원인보다도 마음의 불안에서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곧 용서해 주지 아니하고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은 내 자신에게 큰 손해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 골로새 三장 十三절에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에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했습니다.
분한 마음을 오래 품고 있으면 내가 손해를 받습니다. 연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 분이라도 이런 기분 가운데 계시는 이가 혹 있으면 이 시간에 다 용서하시고 풀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넷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고귀한 인격에까지 장성하기 위해서 우리 형제의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에베소 四장 十五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귀한 인격과 생활이, 특별히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동네를 지나가시다가 날이 저물어 그 제자들과 함께 동네에 잠깐 머문 일이 있지요.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들이 유대 사람인 줄 알고 유숙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때에 야고보와 요한 이 예수 님에게 무어라고 말하였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선생님,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불을 내리어 이 동네를 멸망하게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요한 과 야고보가 나쁜 사람이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요사이 우리가 예수를 따른다고 하지마는 이런 일을 당할 때에 같은 생각이 얼른 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오히려 그들을 책망하시고 조용히 다른 동네로 가셨습니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한 번은 예수 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선생님, 모세의 법대로 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은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오기가 등등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님께서 어떻게 하신 것을 다 아시지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저 여인을 쳐라』하셨습니다. 그 말씀 하나로써 그 여자를 구원하시고 그 여자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 님의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하였지요. 예수 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디베랴 바다에서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그 때에 예수 님이 하신 말씀이 뭡니까?『네가 담대하다고 뽐내드니 그게 무슨 짓이냐?』고 이야기 하셨습니까? 아닙니다.『요한 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며 사랑을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양을 치라』고 하시며 베드로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같이 못 박힌 살인 강도가『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라고 회개할 때에『네가 오늘날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시며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기를 십자가에서 못박는 이들을 위해서 하신 기도가 뭡니까?『아버지여, 이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꺾는 도끼에 향수를 뿌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향수를 뿌리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좀 더 그리스도를 본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약의 모든 인물 가운데 가장 예수와 같은 인물은 요셉이라고 합니다. 왜? 요셉이 자기 형들의 죄를 용서해 준 까닭입니다.
서반아에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가 하는 일이요.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은 인간들이 하는 일이요. 악을 선으로 갚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四장 三十二절에『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옛날부터『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는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가 손해보고 천대받은 것은 잊어버리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가족간에도, 친척간에도, 친구간에도, 적은 일로 혐의를 품고 살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우리 신앙 생활에 암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스펄존 목사는 일찍이 이렇게 외쳤습니다.『용서하라. 잊어버리라. 미친개를 파묻을 때에 꼬리를 내 놓지 말아라』무슨 말인고 하니 혐의를 아주 없애라는 말입니다.
어떤 분이 아브라함 링컨을 평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마음은 바다 같이 넓으나 남의 혐의를 둘 방은 없었다.』모든 혐의를 아주 잊어버릴 수 있는 그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힘써야 할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힘써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의 개인적 생활에 있어서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이고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이올시다.
(一九六九년 十一월 三十일)


Ⅸ-24 그리스도의 성품 (마태복음 十二장 九 - 二十一절)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 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十二·二十)

이 말씀은 이사야 四十二장 一절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인용한 것입니다. 성경의 어느 구절보다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잘 표현하는 성구인 줄 생각합니다. 특별히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 한다고 하는 말씀은 가장 적절한 표현인 줄 생각합니다. 바로 마태복음 十一장 마지막 부분에는 예수 님께서 친히『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十장 一절에『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溫柔)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생각할 때에는 온유와 관용의 성품을 생각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二장 二十三절에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할 대에 이런 구절로 표현을 하였습니다.『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했습니다. 다 그리스도의 성품의 온유한 면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올시다.
그리스도는 약한 이가 아닙니다. 그는 강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이십니다. 이 크리스마스 계절에 특별히 그리스도의 이러한 성품을 묵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이 구절 가운데 묘사된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고 꺼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에서 인간을 한 갈래로 봅니다. 생각하면 사실 인간은 한 갈대와 같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약한 것입니다. 또한 상한 갈대입니다. 인간은 죄로 상한 갈대입니다. 또는 세상의 풍파로, 혹은 슬픔과 고통, 혹은 고독, 혹은 실패로써 상처를 지니고 사는 것이 인간 생활의 현실인 것입니다.
여기 꺼져 가는 심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이 심지라고 하는 말을 요사이 청년들은 잘 모를 것입니다. 전기가 있기 전 옛날에는 우리 방을 밝히기 위하여 작은 등잔불을 켰습니다. 나이 많은 이들은 다 잘 알 것입니다. 조그마한 컵 같은 것에다가 피마자 기름을 넣고 그 속에는 조그마한 노끈을 넣었습니다. 그 노끈으로 기름이 배어 올라가게 하고 그 끝에다가 불을 붙였습니다. 그러면 작은 빛이 방안을 비추어 줍니다. 그 등잔 속에 넣는 노끈을 심지라고 합니다.
여기, 꺼져 가는 심지로 묘사된 인간을 상상해 보세요. 인간은 한 심지와 비슷합니다. 그 끝에 불이 켜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성의 불, 양심의 불, 영혼의 불이 켜 있습니다. 비록 육체는 보잘것없는 물질이지마는 그 맨 위에는 하늘의 불이 켜 있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심히 미약합니다. 심히 희미합니다. 어떤 불은 거의 꺼져서 연기만 납니다. 그러나 아주 꺼진 것은 아닙니다. 심히 미약한 불입니다. 이것도 역시 인간의 한 모습이올시다. 상한 갈대, 꺼져 가는 심지, 이 것이 인간의 한 모습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성품은 인자하셔서 이 상한 갈대를 아주 꺽지 아니하십니다. 세상의 무지한 사람들은 이런 갈대를 짓밟습니다. 혹은 꺾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성품은 그렇지 아니 합니다. 옛날에는 갈대로 피리를 만들어서 부는 풍속이 있었던 것입니다. 혹은 갈대를 깎아서 붓을 만들어 글을 썼던 풍속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파상(破傷)된 인격을 고쳐서 하늘의 음악을 발할 수 있는 유용한 인간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천국의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귀한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꺼져 가는 심지를 주님은 아주 끄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성품은 인자하셔서 꺼져 가는 이성, 꺼져 가는 인간의 양심, 죽어 가는 인간의 심령을 다시 살려서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출 수 있는 등대로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이 목적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러분 요한 복음 八장을 읽어보세요. 거기 보면 예수 님께서 한 번은 성전에서 많은 사람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어떤 젊은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예수 님께 질문을 합니다.『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자인데, 모세의 율법대로 하면 저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하고 질문했습니다. 실 날 같은 생명이 땅에서 소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어떻게 하신 것을 여러분은 다 기억하십니다. 다른 말씀 안 하시고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조금 계시다가 머리를 드시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는 먼저 돌을 들어 저 여자를 쳐라.』그리고는 다시 머리를 숙이셨습니다. 한참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슬며시 다 나가고 여자 하나만 남았습니다.『사람들이 다 어디 갔느냐? 너를 정죄(定罪)하는 사람이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돌아가서는 다시 죄를 범하지 말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자 그대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셨습니다.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 하시고 죽어 가는 심령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누가복음 十七장을 여러분은 읽어 보세여. 거기 보면 예수 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여리고성을 지나가시다가 길가에 한 큰 뽕나무 위에 어떤 조그마한 사람이 올라가서 예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이름을 다 기억하시지요? 그는 삭개오입니다. 여리고성의 세리 장입니다. 부자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때에 그는 자기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 파는 민족 반역자요, 매국노요, 호색을 많이 한 탐관오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의 가슴속에도 깊이 잠긴 실 날 같은 양심의 불을 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꺼져 가는 불을 다시 일으키기 원하십니다.『삭개오야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지 못했던 태도를 가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서 되어진 이야기를 더 길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 하셨습니다. 다시 그 불을 일으켜서 양심 있는 관리의 하나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삼았고 귀한 인간으로서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요한 복음 二十一장을 읽어 보셨지요? 거기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일곱 제자에게 예수 님이 나타나신 기록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여섯 다른 제자들이 바다에서 고기를 낚다가 동틀 때에 보니 예수 님이 바닷가에서 서 계셨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말할 것 없고 감사하고 기쁜 가운데서 제자들이 빨리 헤엄쳐 나오고 배를 타고 바닷가로 나옵니다. 그 때에 베드로 역시 나와서 예수 님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매우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 님을 대할 면목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바와 같이 베드로는 일찍이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린다고 할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노라고 약속까지 했지마는 사실 대제사장의 뜰 안에서 위기를 당할 때에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한 번만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세 번씩 부인했고 부인만 한 것도 아닙니다. 맹세가지 했습니다. 예수를 대할 면목과 용기가 없었습니다. 부끄러움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심령은 문자 그대로 상한 심령이올시다. 그 신앙은 꺼져 가는 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하신 말씀을 여러분이 기억합니다. 베드로를 향해서 물었습니다. 용기를 묻지 않았습니다. 네가 얼마나 담대하냐고 물었으면 베드로는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 님의 물음은,『요한 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불은 다 꺼졌지만 그의 가슴에 사랑의 불은 그냥 있었습니다. 꺼져 가는 심지 같았지만 그 사랑의 불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에 베드로는 곧 대답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주님 말씀하시기를『내 양을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상한 갈대 같은 베드로, 꺼져 가는 심지 같은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서 하루에 三천명이나 회개시키는 큰 등불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하시는 일이올시다. 옛날만 아니고 역사를 통하여 지금까지 하시는 주님의 일입니다. 어제만 아니고 오늘도 하시는 주님의 일입니다. 상한 갈대가 되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불이 희미하다고 절망 할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 나오면 주님께서 새로운 불을 일으켜 주십니다. 주의 눈은 인자하셔서 항상 최악의 경우에서도 최선을 보십니다.
일곱 귀신이 들였던 막달라 마리아에서도 거룩한 하나님의 딸을 보신 것입니다. 그 일곱 귀신을 제해 버리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딸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일 때에 후원을 했고 예수 믿는 사람이 있는 곳마다 따라 다니며 핍박하던 그 악독한 사울의 속에서 장차 이방의 사도 바울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해서 다메섹으로 내려가던 길에 바울을 부른 것입니다. 최악의 환경에서도 최선을 항상 보시고 찾으시는 주님이올시다.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한 번은 여리고 거리를 지나갑니다. 사람들이 어떤 구석을 눈을 들어 힐끔 보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지나갑니다. 예수 님께서 가보니 거기에는 죽은 개가 한 마리 있습니다. 예수 님은 그 죽은 개를 보시고 돌아서며 하시는 말씀이 그 이발이 진주같이 아름답구나 라는 말을 하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죽은 개 가운데서도 진주를 발견하시는 주님이올시다. 주님의 귀는 인자하셔서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모든 인간의 아우성을 들으십니다. 예수 님께서 여리고 성에 가까이 왔을 때에 어떤 소경이 뒤에 따라 오면서『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제자들은 시끄러우니 조용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은 그 음성을 들으시고 그를 데려다 그의 눈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믿음이 있긴 있으나 담대하지 못해서 감히 병 고쳐 달라는 말은 못하고 조용히 뒤로 와서 예수 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혈루(血漏)병 걸린 여인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담대한 신앙이 아닙니다. 약한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은 그 신앙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 병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손은 인자하셔서 인간의 더러운 것도 만져주신 손이올시다. 어떤 문둥병 자들은 와서 어루만져 달라고 하였습니다. 문둥병 자를 손으로 어루만진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 님께서는 그런 병자도 어루만졌다고 했습니다. 소경의 눈을 어루만지어 고쳐 주었습니다. 귀머거리의 귀를 어루만지며 고쳐 주었습니다. 다 예수 님의 성품의 한 면이올시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상을 보면 고층 건물은 올라가고 고가도로는 건설된다고 하지마는 어떻게 사회상이 거칠어 가는지 모릅니다. 택시 운전사가 사람을 치고는 그대로 달아난다는 이야기, 심지어 어떤 택시 운전자는 사람을 치어 택시에 싣고서는 사람 없는 산골짜기에 내다 버리고 갔다는 이야기, 버스 차장이 사람을 밀쳐 떨어뜨려 죽게 한 이야기, 전화 한 통을 받아도 불친절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들립니까. 이런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이 얼마나 아쉬운지 알 수 없습니다.
특별히, 크리스마스 계절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먼저 배워야겠습니다. 성품은 물론 선천적 요소가 없지 아니하나 성품 구성의 대부분은 평소의 생각과 습관의 소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성격화했는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는가, 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했습니다. 멍에를 멘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품을 배우려고 할 것이면 언제나 그리스도를 묵상할 수밖에 없고 그리스도를 항상 모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언제나 언행을 조심해서 남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속담에 툭해서 다르고 탁해서 다르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같이 사람을 보아도 업수이 여기는 말이 있고 백안시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찬 눈으로 볼 수 있고 흰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우려고 하는 이는 혈기의 죄를 삼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죄가 여러 가지 많지만 간단히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합니다. 하나는 육체의 죄요 하나는 혈기의 죄입니다. 육체의 죄라는 말은 술에 취한다든지 음란 방탕 같은 것들입니다. 혈기에 관한 죄란 교만과 시기와 질투와 분노 같은 죄들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을 때에 제일 먼저 고치는 것은 육체의 죄입니다. 우선 회개하면 술도 안 마시고 음란한 곳도 안 가고 해서 육체의 죄가 깨끗해집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혈기의 죄까지 없애야 합니다. 교만, 시기, 질투, 분노 같은 것을 다 고쳐야 합니다.
누가복음 十五장에 보면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있지요. 두 아들 형제가 있는데 둘째 아들 탕자는 육체에 관한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허랑 방탕했습니다. 그러다가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니까 아버지가 그 죄를 다 용서하고 너무 기뻐서 송아지를 잡고 이웃을 청해서 잔치를 벌여 그 아들을 영접합니다. 그 때에 밭에 나가서 일하던 큰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육체의 죄는 안 지었습니다. 밖에서 돌아오니 풍류소리가 들려서 무슨 소리냐고 종에게 물어 보니,『당신의 동생이 멀리서 돌아왔는데 아버지께서 기뻐서 잔치를 차렸습니다.』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맏아들은,『나는 안 들어가겠다.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를 모시고 일만 했는데 염소 새끼 하나 잡아서 놀라고 하지도 않더니 아버지의 가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그 녀석을 맞아 잔치를 벌여! 나는 안 들어갈 테다』하며 노기를 품었습니다. 이 아들은 혈기의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상했겠으며 동생의 마음이 얼마나 상했겠으며 그 자리에 왔던 여러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가정에 큰 불안을 가져왔습니다.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육체의 죄를 먼저 회개해야지요. 그러나 혈기의 죄까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예수 님과 같이 상한 갈대를 싸매 주는 것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인생 행로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같이 험해서 우리가 가는 길 좌우에 쓰러진 사람이 많습니다. 상한 갈대가 많습니다. 꺼져 가는 심지가 많습니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건강 적으로 모든 방면으로 이렇게 상해서 쓰러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레위 사람, 제사장처럼 그저 지나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처럼, 곧 예수 님처럼 그들을 붙들어 싸매 주는 것을 우리가 꼭 배워야겠습니다.
특별히 성탄 계절에 예수 님의 성품을 우리가 배워야겠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이 성탄절에는 한 사람 돕는 운동을 하자고 하는 말을 다 들은 줄 압니다. 어떻든지 우리가 이 성탄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받아서 우리 사회 안에서 아직까지 죄악 가운데 있는, 모든 방면에서 쓰러져 있는 이들을 하나씩이라도 붙들어 주는 일을 해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발휘하면 우리 사회가 좀더 명랑해 질 줄 압니다. (一九六九년 十二월 二十一일)


Ⅸ-25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베드로 전서 一장 十三-二十五절)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벧전 一·十九)

청교도의 유명한 문학자 존 밀턴이 일찍이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인간의 위대성은 두 가지 사실에 나타났으니 첫째는 그 영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음이요, 둘째는 그 영의 구속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진 사실이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우리가 구속을 받은 것은 세상에 귀하다는 금이나 은으로 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된 것입니다.
피는 귀합니다. 피는 보배롭습니다.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고로 옛날부터 피를 먹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창세기 九장 三-四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무릇 산 동물은 너희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지니라.』
짐승의 피도 귀하거든 인간의 피야 얼마나 더 귀하겠습니까? 인간의 피가 귀할진대 하물며 그리스도의 피가 얼마나 더 귀할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를 하나님의 피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二十장 二十八절에『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가장 귀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가장 보배롭습니다.
이 사순절에 그리스도의 피를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보혈과 우리 믿는 자의 관계를 특별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가 죄에서 구속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옛날엔 염소나 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속죄제로 대신 드려서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한 대로 염소와 송아지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전을 이루 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고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 九장 十二절에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가 죽을 것을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피로 우리 죄를 속하여 주신 것입니다.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던 전날 밤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처음 난 것이 죽는 재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날 밤에 이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리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그 인방(引枋)에 발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사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속을 입은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떼어주시며 하시는 말씀이 받아먹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라 고 말씀하신 후에 계속하여 잔을 잡으시고 축사하신 후에 주시며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다 이것을 받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농가에서 닭을 칩니다. 마침 닭들이 마당에 나가서 놉니다. 그 때에 한 독수리가 내려와서 닭을 움킵니다. 그러니까 농부가 달려나옵니다. 그러자 독수리는 날아 올라갔는데 내려와서 움켜쥐었던 암탉 한 마리는 쓰러졌습니다. 최후의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그 암탉을 들고 보니 그 날개 아래 병아리가 몇 마리 있습니다. 병아리의 머리 위에는 피가 묻었습니다. 그러나 피는 묻었지만 병아리는 한 마리도 죽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암탉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병아리는 살았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듯이 모은다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보혈을 흘리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사함을 받고 살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사도 요한 은 요한一서 一장 七절 하반 절에『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지금 말씀 드린 대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는 그리스도의 보혈은 계속해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샌디피케이션(sanctification), 성화의 교리라고 합니다.
예수 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을 때 베드로의 차례가 오자 그는 너무 황송해서『내 발은 절대로 못 씻습니다.』하고 거절을 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내가 네 받을 씻기지 아니하면 너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를 씻기시는 깊은 뜻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옛날 모세의 율법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뿌려서 더럽혀진 육체를 깨끗케 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육체 속은 피가 순환하면서 깨끗케 만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영을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九장 十四절에는『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양심을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해집니다.
요한 계시록 七장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큰 보좌를 중심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이 몸에는 흰옷을 입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선 모습이 보입니다. 이 때에 요한 은 물어 보았습니다.『이들이 다 어디서 왔습니까?』천사가 대답합니다.『이들은 다 큰 환난 가운데서 나온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한 벗은 꿈을 꾸는데, 일생에 자기가 한 모든 일이 적힌 책이 있는데 그 옆에 바로 악한 마귀가 서서 한 장 한 장 뒤적이며『네가 아무 때, 이런 죄를 지었지. 아무 때는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지 하고 꼭꼭 지적을 합니다. 마틴 루터는 얼마나 겁이 나는 지요.』그 때에 마틴 루터는 요한 一서 一장 七절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하고 이 성경 구절을 외칠 때는 마귀는 잠잠히 달아났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끗함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가 승리를 거둡니다. 요한 계시록 十二장 十一절에『어린양의 피로 승리를 얻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시며 죽었습니다. 얼른 보면 실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으로 승리를 한 것입니다. 피로써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악의 세력을 멸하였습니다.
六·二五때에 붉은 적도들을 물리치고 남한에 자유를 확보한 것은 문자 그대로 피로써 얻은 것입니다. 한국의 청년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UN의 청년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피로써 승리를 하였습니다.
우리 육체의 피부가 상하게 되면 많은 세균이 침입합니다. 그러나 혈액 속에는 백혈구가 있어서 싸워서 승리함으로 생명이 계속 유지되는 것입니다. 피로 승리를 거둠으로써 우리가 삽니다. 창세기 四장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니, 네 아우의 피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였느니라.』피의 호소하는 소리가 큽니다. 하늘에까지 상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의 호소를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해 주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종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믿습니다. 남북이 통일 될 줄을 믿고, 통일이 될 때에는 기독교 나라가 될 것을 믿습니다. 왜냐 하면 북한과 이 남한에 많은 순교자의 피가 흐른 까닭입니다.
저는 이 앞으로도 영락교회가 큰 일을 하고 큰 축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뜰에 순교자 김 응낙 장로의 피가 흐른 까닭입니다. 피의 호소력이 강합니다. 피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신령한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마셔야 합니다. 피는 곧 생명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 님을 영접함으로써만 피를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영적으로 마셨다고 할 것이면 우리의 생활은 거룩해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생각, 말, 행동이 거룩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받았으면 우리도 우리의 피를 남에게 줄줄 알아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피를 주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피를 요구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수술할 때 수혈을 해야 합니다. 수술 안 해도 아주 약할 때는 피를 주어야 합니다.
내가 들으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피를 바치는 헌혈 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사히 생각했습니다. 우리 장로교 여자 기독교 대학의 학생들도 지난가을에 이미 피를 바쳤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감격했습니다.
사실 미국 같은 나라에는 자진해서 피를 바치는 사람이 많아서 혈액 은행에는 피가 가득하고 미국 내에서 쓰고도 남아서 세계 각국으로 거저 보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은 이렇게 피를 바치는 사람이 없어서 부득이 피를 살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파는 피를 살만큼 한국의 정도가 낮습니다.
우리 기독 청년들이 솔선해서 내 피를 거저 약한 사람을 위해서 바치는 헌혈 운동을 대대적으로 해서, 우리 영락교회뿐만이 아니고 온 한국의 기독 청년들이 피를 자진해 바쳐서 우리 나라에도 피가 혈액 은행에 넉넉해서 쓰고도 남고 다른 나라에까지 보낼 수 있는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一九七ㅇ년을 당해서, 영락교회의 창립 二十五 주년을 당해서, 특히 이 사순절을 당해서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우리 가정에서 내 아이들만 기르지 말고 고아들까지도 받아서 기르는 이런 운동, 내 피로 나만 살지 말고, 좀 바쳐서 남을 살리는 헌혈 운동이 일어나서 온 우리 한국에 퍼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 정신적으로도 피를 주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일찍이 말했습니다. 『나는 매일 죽노라』고 매일 순교자 노릇을 해야 합니다. 매일 피를 흘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내 정력을 바치고 내 시간을 바쳐서 내 물질도 희생하는, 피를 주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이 생활을 우리가 해야만 할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피를 주는 생활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이 사순절에 우리가 다 주께 나와서 내가 먼저 깨끗함을 받고 내가 먼저 살아서 승리 적 생활을 하면서 나의 피를 다른 사람에게 주고 정신적으로도 피를 주면서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올시다. (一九七0년 二월 二十二일)


Ⅸ-26 파수군과 그 사명 (에스겔 三장 十六 - 二十一절)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 三·十七)

이 말씀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예언자 에스겔에게 주신 말씀이올시다. 옛날은 도시마다 성이 둘러 있었습니다. 그 성 위에는 망대가 있습니다. 그 망대 위에는 파수꾼이 늘 있었던 것입니다.
파수꾼의 사명은 간단히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임금의 명령을 받아서 백성을 깨우치는 일입니다.
또 하나는 원수의 침투나 공격이 가까이 올 때에 그 위험을 경고하는 일입니다. 현대에도 파수꾼이 있습니다. 군대에도 보초병이 있고 화재를 살피는 소방대가 있고 거리를 순찰하는 경관들이 있고 상점에 야경들이 있습니다.
사실 현대의 국가들은 비행기나 레이더망을 통해서 二十四시간 그 국경을 파수하는 것입니다.
파수꾼은 꼭 필요합니다. 대다수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사회와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했습니다. 옛날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파수꾼을 세운 것이 아닙니다. 시대 시대를 따라서 하나님은 파수꾼을 세웁니다.
오늘의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는 오늘의 우리 민족과 사회의 파수꾼으로 하나님께서 세웠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이 시간 파수꾼과 그 사명을 잠깐 상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부디 하나 하나가 보다 더 나은 파수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우리 믿는 사람은 진리의 파수꾼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진리를 선포하고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우리를 세운 것입니다.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그들을 깨우치라. 하나님께서 언제나 인간들에게 마땅히 깨우칠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 인생, 죄, 구원, 천당, 지옥 등 깊은 진리로 깨우치기 위해서 우리를 파수꾼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 천지는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우주는 무시무종(無始無終)한 것이 아닙니다. 지음을 받은 때가 있습니다.
인생이 어디로 오며 어디로 가는가, 무엇 하러 왔는가? 이러한 우주와 인생의 깊은 문제를 가르쳐주기 위하여 파수꾼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죄의 싻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狹窄)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와 같은 구원의 진리로 깨우치기 위해서 우리를 파수꾼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定罪)를 받으리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두리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 이러한 인생의 깊은 진리를, 구원의 깊은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파수꾼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너는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진리로 깨우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선포하며, 진리를 수호하는 파수군인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이올시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의 파수꾼으로, 자유를 선포하며 수호하는 자유의 파수꾼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갈라디아 一장 五절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 캐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모든 자유의 근본 자유가 되는 영적 자유를 의미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본래 죄를 많이 짓고 죄의 종이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의 멍에를 벗고 영적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귀한 자유의 복음을 선포해야 되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자유의 파수꾼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영적 자유의 선포 자요, 수호자인 것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다른 모든 자유에 대해서도 파수꾼이 되는 것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三·一 절이올시다. 지금부터 五十一년 전에 우리 선열들이 일제의 압박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부른 날입니다.
이 중대한 민족적 자유 운동에 있어서 당시의 기독교 교인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세는 지금에 와서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 믿는 사람이 정치적 자유의 파수꾼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원수는 우리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호시탐탐 엿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좌익 공산당의 위협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편에도 이런 원수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언제나 자유의 남용 곧 방종한 생활과 일반 사회의 도덕적 부패는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이 모든 사실을 깨우쳐서 이 자유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겠고 파수꾼으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회 정의의 파수꾼으로 세운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모스 예언자를 통해서『오직 공법을 물같이 흐르게 하고 정의를 하수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공의는 나라를 흥하게 하며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했습니다. 잠언을 통하여 일찍이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은 이 사회 정의의 파수꾼들이었습니다. 현재 미국 교회의 동향 가운데 하나는 특별히 흑백 인종간의 정의, 노사 간(勞使間), 노동자와 자본가들의 사이, 빈부간, 가난한 사람과 부한 사람과의 사이에 정의를 특별히 강조해서 요새 특별히 사회적 행동, 소시얼 액션(social action)이란 말이 많이 교계에 돌아다닙니다.
미국 같은 사회에서도 사회 정의의 파수꾼이 필요하거든 하물며 한국 사회에서야 얼마나 더 필요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과거 六十년대에 우리 한국의 경제가 다소 발전된 것을 우리가 감사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되는 것은 빈부의 격차가 더욱 심하여 간다는 사실입니다.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이란 말을 종종 듣습니다. 부한 사람은 더 부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진다는 말씀이요,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너무 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사회 정의의 파수꾼으로서 이러한 현실을 경고하며 시정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디서나 사회 정의의 파수군의 역할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넷째는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평화의 파수꾼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산상보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했습니다.
히브리 저자는 十二장 十四절에 이렇게 권면합니다.『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야고보 장로는 야고보서 三장 十八절에『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五장 十九절에『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 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평을 가져오게 하며 수호하는 평화의 파수꾼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를 가나 평화와 파수꾼의 사명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도 가장 필요한 것이 화평입니다. 옛날부터 가화만사성(家和萬事宬)이라고 집이 화평할 때에 일만 일이 이루어진다는 글귀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이 이 화평입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국내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이 이 화평입니다. 화평과 단결로서야 무슨 일을 건설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이렇게 남북통일을 다 염원하고 있지마는 어떻든지 우리는 이 남북 통일도 화평적으로 이룰 수 있기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할 것입니다.
국제간에 있어서도 가장 필요한 것이 이 화평입니다. 七十년대에 세계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이 평화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평화의 파수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파수꾼의 사명을 잘 감당하려고 하면 그 자세가 어떠하여야 하는가 몇 가지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파수꾼은 귀가 밝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들으면 거짓 파수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성경의 교훈대로 치우치지 아니해야 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아야 됩니다.
너무 지적 방면으로 치우쳐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너무 사회적 방면으로 치우쳐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너무 감정적 방면으로 치우쳐서 광신주의(狂信主義)로 나가도 아니 될 것입니다.
파수꾼은 귀가 밝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전파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경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고 바로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파수꾼은 눈이 밝아야 합니다. 사위(四圍)의 정세를 바로 살펴야 되겠습니다. 위험 신호를 바로 보아야 될 것입니다. 간첩의 준동(蠢動)을 탐색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시대의 징조를 분별할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소경이 파수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옳은 파수꾼이 되려고 할 것이면 눈이 밝아서 모든 정세를 바로 보고 바로 판단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파수꾼은 졸지 아니해야 합니다. 파수꾼은 아무리 귀가 밝고, 눈이 밝다고 할지라도 졸게 되면 무엇합니까. 파수꾼이 졸음으로 말미암아 패한 군대가 많습니다. 야경이 졸음으로 말미암아 도둑 맞은 집이 많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대한항공에서 이북에 납북된 까닭은 파수꾼이 졸은 까닭입니다.
왜 철저히 살피지 못합니까? 파수꾼이 졸은 까닭입니다.
대한 민국의 파수꾼이 졸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졸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경고합니다.『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느니라.』
대적 마귀는 졸지 아니합니다. 간첩들은 졸지 아니합니다.
파수꾼들이 졸아서 될 것입니까?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옳게 입고 옳게 말하고 옳게 행동하여 내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파수꾼은 졸면 아니 됩니다.
그리고 넷째는 파수꾼은 외쳐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벙어리 파수꾼이란 말이 있습니다.
벙어리 개 같은 파수꾼, 개는 짖어야지 짖지 못하는 개, 그것 무얼 합니까.
파수꾼은 외치기 위해서, 급한 일이 있을 때 외치기 위해서 세우는 것이지 벙어리 파수꾼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진리를 위해서 외쳐야 되겠습니다. 자유를 위해서도 외쳐야 되겠습니다. 공의를 위해서도 외쳐야 되겠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외쳐야 되겠습니다.
복음을 외쳐야 되겠습니다. 큰 목소리로 우리 백성을 깨우쳐야 되겠습니다. 파수꾼은 외쳐야 됩니다. 벙어리 파수꾼이 무얼 합니까. 벙어리 파수꾼이 되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파수꾼은 충성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폼페이 시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들으셨겠지요.
이태리 중부에 있는 폼페이 시는 옛날에 인구가 조밀한 큰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주후 一세기에 갑자기 그 옆에 있던 비스우스 화산이 폭발이 되면서 화산재가 산더미처럼 전 도시를 하루아침에 덮어서 전 시가 일조에 전멸 당했습니다.
오랫동안 재 속에 파묻혀 있었던 것을 몇 십 년 전에 발굴했어요. 저는 그 발굴한 곳을 가서 보았습니다. 그걸 발굴할 때 놀라운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파묻혀 죽은 사람들은 그 화산재에 파묻혀 죽을 때의 행동 그대로 죽었습니다.
달아나다 죽은 사람, 엎드려 죽은 사람, 자다가 죽은 사람 등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폼페이시 성밖에 한 파수꾼, 로마의 군인이올시다. 이 파수꾼은 한 손에 창을 잡은 그대로 서서 죽은 모습이 나왔단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 파수꾼은 자기 자리에 그냥 서서 죽을 때까지 자기 의무를 다했습니다.
파수꾼은 충성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진리의 파수꾼으로서, 자유의 파수꾼으로서, 사회 정의의 파수꾼으로서, 평화의 파수꾼으로서 충성된 파수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민족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읽을 적에 들어보세요.
『내가 너를 대한 민국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三·一절 아침에 우리는 三·一정신을 체 받아서 우리 민족 사이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여 그대로 깨우쳐서 충성된 파수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一九七0년 三월 一일)


Ⅸ-27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호세아 十四장 一-9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네가 불의 함을 인하여 엎드려졌느니라.』(호 十四·一)

옛날 예언자 호세아가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 부르짖은 말씀입니다. 구약에는 돌아오라는 말이 종종 있습니다.『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 하였으니 너는 돌아 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 이사야 四十四장 二十二절의 말씀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네 하나님께로 나 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이사야 五十五장 七 절이올시다.『그런즉 내게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말라기 三장 七절이올시다.
신약에는 회개하라, 오라는 말씀이 종종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처음으로 전파할 말씀이『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주님께서도 복음을 전파하실 때에 첫 말씀이『때가 차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오순절 날『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어라』했고 또 오라 고 하는 말씀도 종종 했음을 봅니다.
주님께서도『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오라』하셨습니다. 신약의 맨 마지막장 계시록 二十二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올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이 생명수를 받으라.』돌아 오라, 회개하라, 오라, 이 말씀들은 다 비슷한말들입니다. 사실상 그 뜻은 같습니다.
이 시간 이 돌아오라고 하는 말씀을 중심으로 잠깐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들은 인간의 영적 상태들을 상기시킵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를 멀리 떠나서 잃어진 양과 같이 멀리 산 곡에서 헤맵니다. 그것은 이리나 사자와 같은 악한 원수 마귀가 들끓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올시다. 고독과 공포에서 떱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심령이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인간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와 같습니다. 먼 나라에서 헤맵니다. 허탕방탕한 가운데서 재산은 다 탕진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땅에는 흉년이 들었습니다. 남의 집에서 돼지를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 엄 열매도 적어서 배를 채울 수 없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양식이 풍부한데, 품 군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궁핍과 죄책감에 눌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의 영적 상태가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는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가 지적한 대로 현대인을 따라 다니는 회색 그림자가 셋 있습니다. 공허감, 죄책감, 공포감, 하나 더 첨가할 수 있는 줄 압니다. 고독감입니다.
아무리 현대인이 과학은 발전시켰고 지식과 기술은 많아졌고 외적 생활에는 큰 변화를 가져왔지마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심령은 공허감, 죄책감, 공포감, 고독감, 이런 것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동포 가운데는 브라질이나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나는 그 심정을 잘 이해합니다. 그래서 이민을 반대하지 아니 합니다. 남한은 아무래도 너무 좁고 해외로 발전하는 것이 좋은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착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외국에 나가야 꼭 행복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또 외국이라고 다 편안한 곳도 아닙니다. 내가 이번에 미국을 여행할 때에 피츠버어그에 있는 우리 아들네 집에 잠깐 들렸습니다. 잠깐 있는 동안에 우리 아들이 봉사하는 그 교회에 장례식이 세 번이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큰 회사에서 일보는 사람인데 회사에서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또 한 사람은 자기 집에서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또 한 사람은 부인이 간호원인데 야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지하실에 넘어져 죽어 있었습니다.
작년에 제가 미국의 남방을 여행할 때 어떤 교회에 가서 목사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교회에 어떤 가족이 있어 아들이 대학에 가고 부부가 집에서 삽니다. 어느 날 새벽 三시에 전화가 와서 전화를 받으니 경찰이 전화를 했는데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당신의 아들이 다른 대학생들과 집으로 돌아오다가 자동차 사고로 셋이 다 죽었으니 빨리 오라는 연락이었습니다. 당황한 어머니는 옆에서 자는 남편을 깨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질 않습니다. 한참 깨워도 안 일어나니까 자세히 본즉 남편이 또한 죽어 있었습니다. 아마 심장마비나 그런 이유로 자다가 죽은 것 같았습니다. 하루 밤에 둘이 세상 떠난 것입니다. 환난, 슬픔, 죽음은 어디나 있습니다.
미국에 가면 미국 신문을 자연히 보게 됩니다. 미국 신문을 보게 되면 그 사회에도 살인 사건이니, 강도 사건이니, 뭐 이런 사건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워싱턴 같은 데는 깡패가 너무 많아서 해만 지면 거리를 지나갈 수 없다고 합니다. 외국에 간다고 꼭 행복이 있는 건 아닙니다. 어디 있든지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와서 참된 신앙 생활을 하고 주와 같이 살 때에 참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찬송의 일 절과 같이『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라.』어디 있던지 내 주 예수를 모시게 될 때에 그 가정, 그 심령에 평안(平安)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나님께서는 부르십니다. 돌아 오라, 돌아 오라, 내게로 돌아 오라. 어떤 때에는 우리의 양심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십니다.『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구유를 아는데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소 같은 짐승도 자기 주인을 아는데 인간으로서 자기의 창조주를 모르겠느냐? 인간이 짐승만도 못해서야 어떻게 되겠느냐? 양심에 가책이 업느냐? 하나님은 양심을 통해서 인간을 부르십니다.
어떤 때는 이성(理性)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여 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흰눈같이 되리라.』변론하자고, 이성으로 생각하며 토론하자고하십니다. 돌아와야만 깨끗이 씻음을 받고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세기를 통해서 하나님은 많은 종들을 보내서,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인간을 부르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죄지은 인간들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셔서 멀리 떠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으로 부르십니다. 그의 행동을 통하여 부르십니다. 그의 이적을 통하여 부르십니다. 그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인을 부르십니다. 그의 피 묻은 손을 벌려서 죄인들아 여호와께 돌아 오라, 내가 너희 모든 죄를 속량 하였노라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죄의 짐을 무겁게 진자들아 돌아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멀리 떠난 심령이 있습니까?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누구나 생명을 구합니다.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길을 잘 못 든 이가 많습니다.
해방 전, 제가 신의주에 살 때, 한 번은 평양엘 갔다가 신의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한 작은 역, 아마 맹중리 인 듯 싶습니다. 한 부인이 올라오더니 제 옆에 앉습니다. 한참 가더니 제게 묻습니다.『이 차가 평양에 가지요?』나는 깜짝 놀라서 아닙니다.『이 차는 신의주 갑니다.』하니까『아이 구 머니 난 평양을 가는데』그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음 정거장에 내려서 다음 차를 타라고 말했습니다. 가기는 평양을 가는데 신의주 차를 탄 사람은 없습니까?
생명과 행복은 구하면서도 실상은 사망과 불행의 기차를 탄 사람은 없습니까? 미국에 다녀 본 이들은 리버사이드 교회를 아실 것입니다. 허드슨 강변에 있는 유명한 교회입니다. 작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화스틱 목사라는 유명한 목사가 계셨습니다. 한 번은 이 분이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가는데 버스를 잘못 탔다가 큰 고생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교회에 돌아와서 무슨 설교를 했는고 하니 『버스 잘못 타지 마시오』였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버스 잘못 탄 이는 없습니까? 생명과 행복을 가져오거니 하고 탔지만 실상 여러분이 탄 버스는 사망과 파멸로 인도하는 버스는 아닙니까?
이번에 이북으로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이들의 말을 신문에서 보니까, 어떤 분은 서울로 가거니 하고 있다가 내려보니 이북이더라고 했습니다. 실상은 이북으로 가는 비행긴데 서울 가거니 하고 앉아 있는 분은 안 계십니까? 좀더 솔직히 말해서 실상은 지옥으로 가는 비행기인데 천당으로 가거니 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어떤 집사가 갑자기 열심히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나 하고 어떤 분이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물어 보니까, 이 분이 대답하는 말이『내가 며칠 전에 꿈을 꾸니까 내가 지옥에 갔수다레』하는 것이었습니다. 꿈에 지옥에 가보고야 정신이 바짝 들었답니다. 꿈에 지옥 가보기가 잘 되었지요. 정말 지옥에 갔더라면 어떻게 될 뻔했지요.
우리가 비행기를 바로 탔습니까? 버스를 바로 탔습니까? 지금 내가 가는 길이 과연 생명의 길을, 구원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성경은 속지 말라고 교훈 합니다.『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나니 사람이 심은 것이 무엇이던지 그대로 거두리라.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 말미암아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거두리라』했습니다. 스스로 속지 아니해야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세히 살피라고 경고합니다. 고리도 후서 十三장 五절에『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했습니다. 우리가 다 믿음에 있습니까? 내가 사실 신앙의 옳은 길을 걷고 있습니까? 내가 사실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그 길로 가고 있습니까? 내가 생명의 길을 갑니까? 사망의 길을 갑니까? 내가 믿어도 바른 신앙의 노선을 걷고 있습니까? 우리가 교회를 받든다고 해도 옳게 받들고 있습니까? 살피고, 확증하고, 살피면서 옳은 신앙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조금이라도 나의 가는 길에 방향이 잘 못 되었으면 우리는 곧 방향을 전환해야 됩니다. 돌아오세요. 하나님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말씀만 더 생각하십시다. 이사야 五十五장 六절에『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 할 때에 그를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권면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언제나 만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견지에서 보면 특별히 만날 만한 때가 있습니다. 한 주일이면 이 거룩한 주일날은 특별히 주님을 만날 만한 날입니다. 한 같은 주일일지라도 특별히 이렇게 예배하는 시간은 특별히 하나님을 만날 만한 시간입니다. 인간의 일생을 보면 청소년기는 특별히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八장 七절에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規例)를 알지 못 하도다.』학과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꼭 돌아올 때를 알아서 꼭 그 때에는 돌아옵니다.
여러분 지금은 봄입니다. 제비와 두루미가 돌아오는 때입니다. 지금은 특별히 렌트 기간이올시다. 이 사순절은, 이 때야말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시절입니다. 여러분은 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십니까?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우리는 여호와를 만나야 합니다.
사도 요한 은 이렇게 권합니다.『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너희가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어라.』 이 사순절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탕자가 비록 먼 나라에 가서 죄는 많이 지었으나 그 탕자가 돌아올 때에 그 아버지가 얼마나 열광적으로 환영한 것을 기억하세요. 두 팔을 벌려서 영접하였습니다. 몸에는 새 옷을 입혀서 환영하였습니다. 발에는 새 신을 신겼습니다.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모든 죄를 사하여 주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는 죄인을 이렇게 영접하십니다. 새 옷을 입히십니다. 새 신을 신겨 주십니다.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서 자기 아들이란 표를 해 주십니다.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하늘에 큰 기쁨의 잔치가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 오라』고 오늘도 권고하십니다.
(一九七0년 三월 八일)


Ⅸ-28 위대의 새 표준 ( 마가복음 十장 三十五-四十五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十·三十三 - 四十四)
오늘 아침 읽은 성경 교훈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의 일입니다.
그 때에 주님의 마음속에는 멀리 십자가가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올라가는 도중에도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세 되면 악한 자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될 것과 그러나 사흘 후에 부활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상하게도 그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어떤 정치적 의미의 왕국을 몽상하면서 제자들은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다른 복음에 보면 이런 때에 한 번은 세베대의 아들 요한 과 야고보 형제가 자기 어머니와 같이 예수께 왔습니다. 조용히 그들이 예수 님께 말합니다.『선생님 우리의 원하는 것을 꼭 이루어 주시기 바랍니다.』예수 님의 말씀은『너희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그들은 『주님의 영광 중에서 우리 중 하나는 주님 우편에 앉게 해 주시고 하나는 주님 좌편에 앉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런 질문을 받으실 때의 우리 주님의 심중의 고독감과 고민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들이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구나. 너희가 내가 장차 마실 잔을 마시며 내가 장차 받을 세례를 능히 받을 수 있겠느냐』했습니다. 예수 님은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이 뜻을 알지도 못하고 그들은 대답합니다.『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다시 하시는 말씀이『과연 너희가 장차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고 내가 받을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 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고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던지 그들에게 줄 것이다.』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조용한 가운데 이런 말이 오고간 줄 압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어디 비밀이 있습니까? 이야기가 다른 제자들에게도 들렸습니다. 열 제자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야고보와 요한 에 대해서 분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는 좌편에 앉고 다른 하나는 우편에 안겠다고? 요새 말로 조용히 가서 사바 사바 한데 대해 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났다고 복음에 보면 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님은 제자들을 다 모아 놓으시고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 크다고 하는 사람들 말이지요 ― 권세를 부리는 줄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여러분, 자세히 살펴보세요. 제자들은 크고자 해서 높은 자리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크고자 하면 높은 자리를 구하지 말고 공손히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며『인자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그 생명을 대물로 주기 위하여 왔노라』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위대한 것에 대한 새로운 표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크다고 하는 위대성의 새로운 관념을 여기서 깨닫게 됩니다.
오늘 아침 이 위대함의 새 표준, 주님께서 주신 새 표준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이 위대함에 대한 옛 표준을 생각해 보십시다. 제자들은 위대함에 대한 옛 표준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위대해지려면 높은 지위와 권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그때의 제자들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 때의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의 온 유럽 지역을 다스리던 왕이, 가이사라고도 하고 그 이름을 어거스트라고도 하는데 그는 그냥 황제라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어거스트 대제(大帝)라고 불렀습니다. 큰 황제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라틴말로 八월을 어거스트라고 하는데 그 왕의 이름이 같은 어거스트니까 八월을 적은 달로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七월이 크니까 八월은 작은 것이 상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거스트를 작게 할 수 없다고 해서 二월에서 하루를 떼어다 三十一일을 만들어 七월도 크고, 八월도 크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트는 크다는 관념에서 역서(曆書)까지 고쳤단 말입니다.
또 그 때 팔레스틴 지방을 다스리던 왕은 헤롯왕인데 헤롯왕도 거저 왕이라 하지 아니하고 헤롯 대왕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二천년 전, 로마 시대에만 이런 위대함의 표준을 삼아 살아 온 것만은 아닙니다. 역사를 통해서 어느 시대나 다 이러했습니다. 우리 구한국 시대를 보아도 그러했습니다. 나이 좀 많은 이는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른들이 학생들에게 늘 하는 말이『너 글 잘 읽어라. 글 잘 읽어서, 과거(科擧)봐야 돼. 과거해서 벼슬을 해야 돼. 그리고 높은 벼슬은 해. 그래야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법이니까. 큰 권력을 가져! 그래야 크게 돼.』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과거보려고 굉장히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한국 사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위 현대인들도 그 대부분이 아직까지도 이 위대함에 대한 이런 표준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청에서는 계장보다 과정이 큽니다. 과장보다도 국장이 더 큽니다. 국장보다는 장관이 더 큽니다. 그래서 저마다 장관 되기를 원합니다. 회사에서는 계장보다 과장이 큽니다. 과장보다 전무가 큽니다. 전무보다는 사장이 더 큽니다. 저마다 사장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이 옛 표준으로는 돈만 많으면 사람도 큰 줄로 생각합니다. 집이 크면 사람도 큰 줄로 압니다.
이런 표준으로 보면 우리 사회에서 제일 큰 인물이 누굴 까요. 아마 제일 높은 고층건물을 지은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도 고층 건물을 짓기 경쟁을 하는 모양입니다. 이 표준대로 보면 二十세기의 최고의 큰이는 누구입니까? 아마 제일 먼저 히틀러 그리고 스탈린과 무솔리니 등을 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현대인까지 이런 옛 사상을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예수 님께서는 이런 옛 표준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근본적으로 뒤집어엎었습니다. 높은 자리에서 금력과 권력으로 권세를 뿌리는 자가 큰 것이 아니고, 오히려 종과 같이 다른 사람을 봉사하는 그 이가 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겸손해서 다른 사람을 많이 섬길수록 더욱 위대하다는 말입니다. 제일 많이 섬기는 이가 제일 위대하다고 합니다.
예수 님께서는 위대함에 대한 새로운 표준을 선포했습니다. 마태복음 十八장에 보면 제자들 가운데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예수 님께서 조그만 어린아이를 불러 가운데 세워 놓으시고 하시는 말씀이『너희가 돌이켜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는 크니라』하셨습니다. 낮추는 자가 크다는 말씀입니다.
요한 복음 十三장 三절 이하를 읽을 때에 자세히 들으세요.『저녁을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했습니다. 주의해 들으세요. 예수 님께서 모든 것을 자기에게 맡기신 것을 아셨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권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큰 권세를 다 자기에게 맡기신 것을 주님께서 다 아셨단 말입니다. 또 하나님께로 오셨다가 하나님께 가실 것을 기억하셨고 또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높은 지위를 아셨단 말입니다. 이것을 다 아시면서 도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대야에 물을 담아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가장 큰 권세,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시고, 그러나 하신 일은 가장 낮은 종의 일, 제자들의 가장 더러운 발을 씻는 봉사를 하셨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이렇게 위대함의 새 표준을 자신의 행동으로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위대(偉大)의 새 표준을 보여 주셨고 그 다음에는 그의 말씀대로 그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의 생명 전체를 희생해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봉사한 것입니다.
이렇게 참 위대한 생활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위대함의 새 표준을 생활로써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깊은 진리를 깨닫고 삽니까? 이 위대함에 대한 옛 표준 곧 높은 자리와 권세가 크다고 하는 사상, 또 위대함에 대한 새 표준을 겸손히 남을 봉사하는 것이라 한 것입니다.
이 두 표준을 비교해서 잠깐 생각해 보세요. 우선 그 동기를 생각해 보세요. 옛 표준의 동기는 어떠합니까. 그 속에는 높으려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곧 교만이 있습니다. 그 속에는 무엇을 얻으려는 생각이 있습니다. 얻으려는 이기주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함에 대한 새 표준의 배후에 있는 동기는 무엇일까요. 그 속에는 나를 낮추려는 생각이 있습니다. 겸손입니다. 또 얻으려는 생각이 아니라 남에게 무엇을 주고자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곧 이타주의(利他主義)입니다.
또 이 표준들이 사회에 주는 영향이 어떨까 생각해 보세요. 옛 표준, 크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제자들이 서로 다툰 것처럼 싸움이 있을 것입니다. 저마다 높으려 하고 권세를 잡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래서 우리 사회에 분쟁이 많은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마는 어떤 교회에서는 이따금 분쟁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옛 표준에서 사는 제직들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반면에 새 표준으로 크고자 하는 이가 많은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회는 화평할 것입니다. 그 사회는 모든 방면에 빨리 발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협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상한 인격과 도덕적 생활은 봉사로써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새 표준이 참된 위대함의 표준이올시다.
이것은 개인뿐만이 아닙니다. 단체 혹은 회사, 국가, 심지어 교회까지도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어떠한 단체가 위대합니까? 저명한 인사가 있어서 위대합니까? 회원수가 많아서 위대합니까? 아닙니다. 요는 그 단체가 얼마나 사회를 봉사하는가, 봉사를 제일 많이 하는 단체가 위대한 단체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키와니스클럽이니 라이온즈 클럽이니, 우리 교회 안에서도 무슨 사니 무슨 회니 단체가 많습니다. 요컨대 어느 단체가 가장 위대한 단체입니까? 그것은 제일 많이 봉사하는 단체일 것입니다.
단체가 봉사하지 아니하고 다른데 힘을 쓰게 되면 사회를 분열시키는 파당 적 존재밖에 되지 못합니다. 이건 큰 상사나 회사도 그렇습니다. 어떤 상사나 회사가 위대합니까? 자본이 많아서 위대합니까? 무엇을 많이 만들어서 위대합니까? 아닙니다. 상사와 회사가 얼마나 그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가에 달렸습니다. 이는 정당도 그렇습니다. 어느 정당이 가중 위대합니까? 당원 수가 많은 전당입니까? 세력을 얻은 정당입니까?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봉사로 사회에 공헌하는가? 거기에 정당의 위대성이 결정됩니다.
나라도 그래요. 어떤 나라가 아닙니다. 얼마나 그 나라가 온 세계를 위하여 봉사하는가에 따라서 위대한 나라가 결정됩니다.
역사를 보면 옛날 이스라엘 나라는 지금도 매우 작은 나라이지마는 옛날도 매우 작은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나라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나라가 옛날에 정신적으로 세계 인류를 가장 크게 봉사했습니다. 기독교가 발생한 나라입니다. 전에 아테네 같은 나라는 매우 작은 나라였지만 위대한 나라로 인정들을 합니다. 왜? 비록 작지만 문화적으로 가장 큰 봉사를 세계적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도 작은 나라입니다. 작다고 위대한 나라가 못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부터 사실 세계 인류를 봉사하는 나라가 될 수 있으면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면을 생각할 때 우리 아시아의 나라로서는 우리 한국이 신교에 있어서는 첫째 되는 나라 같은데, 온 교회가 참으로 부흥해서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로 다 인도하고 나아가서 온 아시아 지방에, 아시아 나라들에 복음을 전파해서 영적으로 봉사한다고 하면 우리 나라가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위대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교회 말이 났으니 말입니다만 교회도 역시 이 표준으로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위대성이 어디 있습니까? 교인이 많은데 있는 것 아닙니다. 아름다운 예배당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요컨대 그 교회가 얼마나 봉사를 하는가? 영적 봉사인 전도를 하는가? 그 밖에 여러 방면으로 이 사회를 봉사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자선 사업, 교육사업, 모든 방면으로 봉사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봉사를 하는 교회가 위대한 교회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 전서 四장 十절 이하를 가만히 읽어보면 거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각각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를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로 서로 봉사하라』
다시 말하면 봉사를 하되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지 말고 하나님께 돌리라는 것입니다.
저는 三년 전, 백림(伯林)에서 열린 세계 전도 대회에 참석했을 때 들은 빌리 그래함의 얘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도 들으신 분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 이런 간단한 얘기입니다.
어떤 호숫가에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그 때 기러기들이 공중에서 날아와서 호숫가에 앉아 물을 먹고는 공중으로 다시 날아 올라갑니다. 개구리들 가운데 하나가 무슨 생각이 났는고 하니『나도 저 기러기처럼 공중에 날아 봤으면』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는 기러기에게『얘 기러기야, 나도 너처럼 공중엘 오르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날 좀 도와줄 수 없겠니?』『어떻게 도와주면 좋겠나.』『저기 막대기가 하나 있는데 저 막대기 한쪽 끝을 네가 입으로 물고 올라가고 나는 다른 쪽 끝을 입으로 물면 네가 공중에 올라갈 때 나도 공중으로 올라갈 것이 아냐, 그렇게 해 줄 수 있겠니?』『그러지』그래서 기러기 한 놈이 막대기 한 끝을 물고 한 끝은 개구리가 물었습니다. 기러기가 날아 올라가니 개구리도 올라갑니다. 호숫가를 한바퀴 빙빙 날아서 도니까 아래에 있는 수많은 개구리가 부러워서『저 개구리는 공중을 날아올랐구나, 누가 저런 생각을 해냈노.』개구리들이 칭찬을 합니다. 개구리가 물고 공중을 날아다니다 칭찬을 하니까『내가 했지』하고 자랑스럽게 대답을 하고 싶었습니다.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자 어떻게 됐겠습니까? 공중에서 떨어졌습니다. 허리가 부러졌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지요. 아무리 내가 봉사를 잘해도『내가 했지』 이렇게 자랑하게 되면 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릴 것입니다. 그러기에 산상보훈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는 말입니다.
오해하지 맙시다. 좋은 일을 알도록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알게 할 때도 있을 겁니다.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높은 자리를 봉사의 기회로 알라는 말입니다. 돈도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돈을 벌었으면 그 돈으로 봉사를 하라는 말입니다. 여기 시내의 대학 학장이 내게 하는 말이 실제로 공과는 택하지 아니하고 경영학과를 많이 택한다고 그럽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대학생들의 말이 공과를 해야 이 다음에 공장에서 일꾼이나 될 것이지만 경영학을 하면 이 다음에 사장이 된다고 한답니다. 새 시대에 새 대학생이건만 그 머리는 아직 옛 머리입니다. 그런 머리가 새로워 져야 우리 나라가 바로 섭니다. 가장 위대한 봉사를 하여야 크다고 하는 것을 한국의 젊은이들은 아직도 모릅니다.
크고자 하는 것이 결코 잘못된 욕망은 아닙니다. 다만 참된 의미에서 위대한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적은 재능, 적은 돈, 적은 지식, 낮은 지위에서도 남을 봉사하는 이는 많은 재능, 많은 돈, 많은 지식, 높은 지위에서 봉사할 줄 모르는 이보다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는 가장 큰 봉사를 한 까닭에 위대한 인물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 안에는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방면으로 봉사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축복하시는 줄 압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이 위대함의 교훈을 깨달아서 이 원리대로 다 살면 우리 교회와 우리 사회가 얼마나 큰 축복을 받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한번 이 세상에 왔다가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얼마나 이익을 주고 가는가 혹은 손해를 주고 가는가, 우리는 주고 가는 봉사의 위대한 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一九七0년 三월 十五일)


Ⅸ-29 예수를 영접하라 (마태복음 二十一장 一 - 十一절)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二十一·四)
다음 주일이 바로 부활 주일이올시다.
오늘 흔히 종려주일(棕 主日)로 지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주님께서는 흔히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에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시곤 했으나 이 날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서 입성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례적인 행동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약 스가랴 九장 九절을 기억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이 예언은 장차 올 메시야의 모습에 대한 묘사입니다.
예수 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것은 이 예언을 응하게 하신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입니다. 구주입니다.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무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옷을 길에 펴며 호산나를 불러서 영접한 것입니다.
호산나란 말의 근본 뜻은『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말입니다. 그러나 보통 우리 한국에서 이런 때에 부르는 만세와 비슷한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종려 주일은 예수 님을 영접한 주일입니다. 예수를 왕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갈릴리에서 절기로 올라온 이들도 예수 님을 영접하였습니다. 본래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도 많이 나와서 예수 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앞서 가는 이들, 뒤에서 따르는 이들이 다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남녀노소, 어린아이들까지 다 호산나를 부르며 예수를 영접한 날입니다.
오늘은 종려 주일인데 우리도 예수를 영접하십시다. 한국은 추워서 종려나무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우리는 예수를 영접해야 되겠습니다.
사실 제일 귀한 것은 마음에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우리 마음에 영접하면 우선 우리의 마음의 깨끗해집니다.
전에 어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농을 하면서 어떤 청년을 향해서 하는 말이『저 녀석은 꼭 쓰레기통 같아』고 말하며 웃습니다. 쓰레기통은 가만히 두면 괜찮지만 뒤적거리면 냄새가 납니다. 그 사람은 가만히 두면 괜찮지만 입만 벌리면 더러운 이야기만 나온다는 것입니다.
미안한 말이나 인간의 마음은 대체로 이 쓰레기통 같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十五장 十八절에 주님께서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들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과 훼방이라. 이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지적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읽었지마는『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 고, 곧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마음이 깨끗해집니까?
주님께서도 산상보훈에 말씀하시기를『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마음이 청결해서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까? 머리에는 위대한 사상을 가지고 가슴엔 깨끗한 마음을 품는 것 이상의 귀한 일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여야 마음이 깨끗해 질 수 있습니까?
마틴 루터가 어느 날 아침에 세수 대야에 물을 떠서 손을 씻었습니다. 한 번 씻고 두 번 씻고 그냥 자꾸 씻습니다. 옆에 있는 친구가 이상히 생각해서『왜 손을 자꾸 씻는가?』고 물으니 루터가 대답하는 말이『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내 마음은 깨끗이 할 수가 없구려』 하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예수 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베드로에게 오니 베드로는 너무 황송해서 제 발은 못 씻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씻지 아니하면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씻어 주어야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주님을 영접할 때에, 주님이 우리 마음을 씻어 주어야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 지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우리의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평화 캐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에 평화를 주려고 하십니다.
몇 해 전에 내가 케니아의 나이로비에 갔을 때 동물원을 구경했습니다. 세상에 그런 동물원은 하나 밖에 없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에도 동물원이 많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동물원은 각각의 짐승들을 울안에 넣고 가두어 두는데 이 나이로비의 동물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서울만큼 넓은 곳에 울타리 철책을 둘러치고 그 속에 여러 가지 동물이 자연 그대로 모여 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동차를 타고 문을 꼭 닫고서 그 사이로 왔다 갔다 하면서 구경을 하는데 사자도 옆에 앉은 것을 구경할 수 있고 호랑이도 옆에 있는 채 구경할 수가 있습니다. 이리가 사슴을 따라가서 잡아먹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동물의 생태를 그대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동물을 구경하다가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이 이 동물원과 비슷하지나 않을까? 여러 가지 욕심과 욕망이 우리 마음속에서 서로 싸웁니다.
어떤 청년이 자기 친구에게 하는 말이『내 마음에는 늘 내란이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늘 마음속에 분열이 있어 싸운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옆의 친구가 하는 말이 『내란쯤, 내 속에는 세계대전이 있다』고 했습니다. 욕망이 와글와글 끓어서 내심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그런 뜻일 겁니다.
이상한 것은 도시의 기계 문명이 발전할수록 사람이 많이 도시에 모여서 갈수록 사람의 마음이 복잡해지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른 욕망들이 서로 싸워서 거기에 고통이 있고, 거기에 갈등이 있고 온갖 오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현대인이 더욱 신경 쇠약이 되는 것이고, 현대 사람이 세기를 통하여 어느 때보다도 노이로제 환자가 많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를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의 화평(和平)을 얻어야 합니다. 주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할 때에 화평이 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우리 마음에 주님을 영접하면 즐거움이 충만하게 됩니다.
요한 복음 十五장 十一절에『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예수 님의 기쁨이 우리 속에 있어서 우리에게 언제나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옛날부터 군자지낙(君子之樂)과 소인지낙(小人之樂)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군자가 가지는 즐거움과 소인이 가지는 즐거움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소인이 가지는 즐거움은 더럽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소위 세속적인 향락이나 즐거움은 저열할 뿐더러 오래 가지도 못합니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기쁨은 고결한 동시에 영원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러한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옥에 있으면서도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어 천당 종 치네』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는 참된 생명을 얻습니다.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 자체에 영원한 생명은 없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 은 요한 一서 五장 十二절에 이와 같이 잘라서 말했습니다.『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아들은 예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에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했습니다. 영원히 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불멸의 생명을 얻습니다.『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길이 살겠네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길이 살겠네』하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려면 몇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먼저 내 마음속을 열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三장 二十절에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고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예수 님께서는 우리 마음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 성경 구절을 묘사한 풀만 헌트란 화가의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굳게 잠긴 문밖에 서서 두드리는 예수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어떤 분이 그 그림을 구경하다가 그 그림을 그린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썩 잘 그렸는데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기 문은 있는데 문에 손잡이가 없습니다.
화가가 웃으며 하는 말이 참 자세히도 보셨군요. 그것은 제가 빠뜨린 것이 아닙니다. 일부러 그리지 않았습니다. 왜요? 마음 문에는 밖에 손잡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 문은 밖에서 여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마음의 문은 안에서 나만이 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마음 문을 열고 예수를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지금도 마음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마음 문을 열지 아니하면 그 책임이 내게 있는 것입니다. 적은 고집, 편견, 교만, 적은 지식을 가지고 마음 문을 그냥 닫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를 영접하려면 마음 방이 비어야 하겠습니다. 방에 손님이 가득하면 물론 예수를 영접할 곳이 없을 것입니다. 교만, 허영, 탐심, 시기, 증오, 음란, 방탕 등이 가득하면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를 영접하려고 하면 이런 것들을, 이런 손님을 몰아 내야할 것입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도 산상보훈에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실 때에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야 합니다. 비어야 합니다. 모든 죄악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님을 영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영접하려면 우리 중심에 영접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영접하되 재래식 우리 한국의 집으로, 말하자면 행랑방 같은 데다 예수 님을 모시는 이가 있습니다. 만 왕의 왕 예수 님을 이렇게 모실 수는 없습니다. 중심에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심에 예수를 영접하는 이가 구원을 받습니다.
종려 주일은 예수를 영접해야 되고 나라도 예수를 영접해야 되고, 온 세계가 예수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여기 앉은 우리 하나 하나가 먼저 예수를 영접해야 합니다.
이 종려주일에 예수를 영접하십시다. 내 마음이 깨끗하여지고, 내 마음에 화평이 가득하며 내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고 내 마음에 참 생명을 얻음으로써 새로운 세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一九七0년 三월 二十二일)

Ⅸ-30 내가 살므로 너희도 살리라 ―부활절 아침 예배― (고린도 전서 十五장 一-十一절)

『조금 있으면 세상이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十四·十九)

이 간단한 말씀은 부활절 메시지를 가장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부활절 아침에 우리 주님은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내가 살았다는 말씀이올시다.
둘째는 너희도 살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살았으므로 믿는 너희도 살리라는 말씀이올시다. 내가 살았으므로 너희도 살리라.
이 부활절 아침에 주님의 간단한 말씀을 우리가 잠깐 묵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내가 살았으므로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아침 읽은 성경 말씀은 여러분이 들은 성경말씀 대로, 사도 바울이 고리도 전서 十五장에 기록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으나 성경대로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는 부활하셨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그 종교의 교주의 탄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 주님의 탄강(誕降)일 만이 아니라 부활절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그 교조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을 잘 장식하고 경배합니다. 우리 기독교에도 무덤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덤은 열린 무덤이요. 빈 무덤이올시다.
여러분 성지에 가 보세요. 저는 가 봤습니다. 빈 무덤뿐입니다. 왜? 예수 님께서는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합니다. 만일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았다고 하면 세상에 기독교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없었을 것입니다.
왜? 여러분은 그 때의 형편을 복음서를 잘 읽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동산 밖에서 악한 무리에게 잡힐 때에 모든 제자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오직 베드로 하나만이 몰래 예수의 뒤를 따라가다가 대제사장 아문 뜰까지 들어가기는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불행히도 대제사장의 종을 만나서『네가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고 물을 때에 떨려서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와 버렸습니다.
예수 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제자들은 겁에 질려서 어떤 방에 모여 문을 굳게 닫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두어 제자는 멀리 촌으로 피해갔던 모양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제자들은 낙심천만이었습니다. 혼비백산의 참혹한 모양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이 어떻게 새로운 용기를 얻었습니까? 예수를 못박은 원수들이 들끓는 예루살렘에서 새롭게 복음을 전파할 용기가 어디서 생겼습니까? 어떻게 예수 님의 부활을 증거 할 수가 있었습니까? 어디서 이 용기가 회복되었습니까?
거기에 대한 설명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부활한 예수를 만난 까닭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十五장에 기록한 대로 게바에게 그는 나타나 보였습니다. 그 후 열두 제자에게도 나타나 보였습니다. 오백여 신도에게 일시에 나타나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쓰던 그 때까지 살아 있다고 그랬습니다.
예수 님을 본 사람들의 태반이 살이 있었습니다. 예수 님은 확실히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의심하지 맙시다.
기독교와 교회 자체의 존재가 예수 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안식일이 변해서 어떻게 주일이 됐습니까?
제자들은 다 유대 사람입니다. 그들은 오래도록 구약대로 살았습니다. 열 가지 계명대로 이래 중 마지막은 안식일로 지키며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이들이 어떻게 이래 중 첫날인 일요일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까? 그 대답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대답은 예수 님께서 이래 중 첫날, 오늘날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첫날에 부활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이래 중 첫날을 주일, 주의 날이라고 부르게끔 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래 중 첫날인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이 주일 자체가 예수 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 님은 확실히 부활하셨습니다. 의심하지 맙시다.
여기 신구약 성경이 있습니다. 이 성경은 신약과 구약,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신약은 구약보다 양은 적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이 성경의 중심은 신약입니다. 기독교의 중심 진리가 신약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약을 구약보다 더 자주 읽는 것입니다.
이 신약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중심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만일 예수 님께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신약은 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신약전서 자체가 예수 님의 부활을 우리에게 증명해 줍니다.
예수는 과연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였습니다. 의심하지 맙시다.
이 밖에도 우리가 부활을 믿는 이유는 많지마는 시간이 없어서 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사실입니다. 물론 부활과 같은 사실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초자연적 사실입니다. 우리가 다 이해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도마 같은 제자도 처음에는 의심했습니다. 더욱이 자연계만을, 물질 세계만을 치중해서 공부하는 과학 교육을 받은 현대인에게 이런 진리가 얼른 납득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의 말씀을 기억하세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올시다 우리 신앙의 제一조가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입니다. 전능하셔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으로서는 죽은 자를 부활케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요새 신문에 보니 우리 한국에도 달에서 가져온 조그만 돌이 도착된 모양입니다. 여러분 공중에 뜬 둥그런 달을 늘 보시지요. 그 달도 별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큰 돌덩이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무겁겠어요. 그런데 그것이 떨어지지 아니하고 늘 공중에 그냥 있습니다.
그걸 이해할 수 있어요? 아마 이해하기가 어렵지요. 뭐 달만 볼 필요가 없지요. 우리 지구는 어떻습니까? 지질학자의 얘기를 들으면 지구 속에는 뜨거운 불, 용암(溶岩)이 있다고 합니다. 겉은 전부 돌입니다. 돌과 물로 된 공(ball)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공중에 둥둥 떠 있습니까? 여러분 이걸 다 이해할 수 있어요?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 가운데서 되는 일입니다. 부활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면서 지금도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마태복음 마지막장 마지막 절을 기억하십니까? 거기에 주님께서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께서 항상 같이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만 계신 것이 아니고 우리와도 같이 계십니다.
엠마오 길의 두 제자와 동행하신 것처럼 지금도 인생 행로를 걷는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여기에 항상 이란 말은 모든 날이란 뜻이 있습니다. 기쁜 날이나 슬픈 날이나, 튼튼한 날이나 병든 날이나, 분주한 날이나 외로운 날이나, 사는 날이나 죽는 날이나, 우리 주님은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살아 계시는 우리 주님은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가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 부활절 아침에 주님의 첫 마디 말씀을 기억하세요.
『내가 살므로 내가 살았다. 내가 영원히 살았다. 영원히 내가 너희들과 같이 하겠다.』
자, 그 다음엔 둘째 말씀을 우리가 잠깐 생각합시다.
너희도 살리라. 내가 살았으므로 믿는 너희도 살리라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부활하리라. 너희도 영원히 살리라.
욥기 十四장 十四절에『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리이까?』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주님의 대답이『너희도 살리라』대답합니다. 몸도 살고 영혼도 살리라.
그러므로 사도신경 마지막 신조가『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몸도 다시 삽니다. 부활합니다. 왜? 내가 살았으므로, 예수 님이 부활하셨으므로 우리도 부활 할 때가 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씀하시기를『예수의 부활은 모든 잠자는 자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지적했습니다.
예수 님도 분명히 요한 복음 五장 八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를 기이 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十五장 五十一절에『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오』했습니다. 죽어 있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죽은 자들이 다시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했습니다.
몸도 다시 살겠다고 했습니다. 이 육신의 부활을 들을 때에는 물론 여러분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의문이 떠 올라올 줄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을 것인가? 여러 가지로 문제가 일어날 겁니다.
그러나 그런 염려는 과히 하지 마세요. 여러분 모태에 있는 아기의 모습을 본 이가 있습니까? 저는 본 일이 있습니다. 미국 어떤 병원에서 한 달된 아기를 끄집어내서 병에 넣어 둔 것을 보았어요. 한심합니다. 눈이 있습니까? 코가 있습니까? 그런 핏덩어리가 발육이 돼서 이목구비가 있는 사람이 됩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여기 앉은 여러분도 그런 때가 한 번 있었어요. 그걸 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게 어떻게 그런 일이 생깁니까? 거저 한 마디로 말해서 신비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현재의 이 몸도 이루어 주신 것뿐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 들이 예수께 나와서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여자가 일곱 남자와 살다가 죽었는데 부활할 때에는 어느 남자의 아내가 될 것입니까?
예수께서 이 말씀에 대답하면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권능도 모르므로 크게 오해 하였도다』했습니다.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권능도 몰라서 이런 생각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작은 꽃씨가 어떻게 변해서 저렇게 아름다운 꽃이 됩니까? 그것도 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신비합니다.
제가 며칠 전 기도원의 연못가에 잠시 섰는데 노랑나비 둘이 날아옵니다. 사람은 춥다고 해도 봄이 온 것이 분명해요. 추한 벌레가 변해서 어떻게 저런 아름다운 나비가 됐을까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비한 일입니다. 거저 하나님의 권능 가운데 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은 우리 영혼, 육신과 정신까지 곧 인격 전체를 구원하실 때가 올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너희도 살리라는 말은 이 다음 부활 때까지 기다려서 살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부터 살리라는 말입니다.
지금부터 영원히 살리라는 말입니다. 요한 복음 三장 十六절을 여러분이 다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했습니다. 이 다음에 영생 얻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는 즉시로 영생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지금 얻겠다는 말입니다. 영생의 뜻을 확실히 파악하여야 됩니다.
물론 영생의 뜻은 글자 그대로 길이 산다는 시간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이 우주에 영원히 사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곧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이란 뜻입니다.
길이 살 뿐더러 하나님의 생명, 참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생은 죽음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시작이 됩니다. 참으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람은 그 때부터 이미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런 사람에게는 실상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도 말씀하시기를『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했습니다. 과거입니다. 또『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했습니다. 이것도 과거입니다.
그리고 예수 님이 또 말씀하시기를『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니라』했습니다. 영생을 얻었단 말입니다.
이 영생을 얻은 이는 사실 죽음이 관계없습니다. 죽음이란 모든 인간 관계는 끊으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언제나 우리가 살아 있습니다.
지난 十九세기에 미국에 유명한 부흥 사 무디 라고 하는 사람이 한 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어느 날 여러분들이 이 사람 무디가 죽었다는 신문의 기사를 읽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절대로 믿지 마십시오. 그 때에 나는 지금보다 더 잘 살 것입니다. 그 때에는 이 흙으로 된 장막 집을 벗어 놓고 썩지 아니하는 집, 곧 죄가 더럽힐 수 없는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살 것입니다. 내가 육신으로는 一八三七 년에 났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는 一八五六 년에 새로 났습니다. 육신으로 난 것은 아마 죽겠지요. 그러나 성령으로 난 것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한 목사도 이미 나이 七十이 가까웠으니 아마 오래지 아니해서 한 목사 죽었다는 소문을 여러분이 들을 것입니다.
미리 말합니다. 그런 말 조금도 믿지 마세요. 나는 그 때야 말로 주님과 같이 더욱 빛나게 영원히 살 것입니다.
지난 부활 주일을 같이 여기서 예배를 드린 이 가운데 一00 명이 훨씬 넘는 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슬픔을 당한 이들도 아마 계신 줄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부활절 아침에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으세요.『내가 살았으므로 너희도 살리라.』그들이 살아 있습니다.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일생에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지마는 중요한 일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생과 사, 사는 것과 죽는 일입니다. 옳게 사는 것과 옳게 죽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죽음을 준비하고 살아야 옳게 살고 삶을 준비하고 죽어야 옳게 죽습니다. 여러분 다 죽음을 준비하고 사십니까?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그와 동행하는 생활은 옳게 살고 옳게 죽는 것입니다. 내가 살았으므로 너희도 살리라. 그것이 곧 영생의 길입니다.
아직도 우리 가운데 온전히 주님을 내 주로 영접 지 못한 이가 계십니까? 이 부활절 아침에 온전히 주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거저 六十년이나 七十년 살다가 없어지기 위해서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영원한 불멸의 존재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내가 살았으므로 너희도 살리라.』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一九七0년 三월 二十九일)


Ⅸ-31 도마의 의심과 신앙 (요한 복음 二十장 十九-二十九절)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二五·二十八)

오늘 아침은 이 도마의 의심과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에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도마의 의심을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먼저 도마의 태도를 자세히 보십시다.
열 제자들의 증거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기만 해서도 믿을 수 없노라고 말했습니다. 꼭 내 손으로 만져 보고야 믿겠다고, 다시 말하면 체험해 보고야 예수 님의 부활을 믿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현대인의 사고 방식과 매우 근사한 바가 있습니다. 특별히 과학자의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도마의 의심은 현대인을 대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이런 태도에서 우리는 도마의 인품을 짐작 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어떤 이는 이성보다도 감정이 풍부한 이가 있습니다. 이런 이는 무슨 말을 듣고 감동만 받으면 깊이 생각하지 아니 하고 곧 따라갑니다. 이런 이들은 비교적 신앙에 쉽게 들어옵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은 잘못되면 미신과 사교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도마는 이런 사람은 아닙니다. 감정보다도 이성의 인물입니다. 무엇에나 이성으로 생각하여 보고 믿는 분입니다.
이런 분은 얼른 신앙에 들어오기가 어렵지마는 한번 들어오면 든든히 섭니다.
이런 의미에서 도마는 현대 지성인의 대표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부활이란 사실이 이성으로 얼른 이해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마의 중심을 알아야 합니다. 도마는 예수를 사랑하던 제자였습니다.
요한 복음 十一장 十六절을 보면『우리도 같이 가서 죽자.』이런 말을 도마가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님께서 요단강 저편에 계실 때에 베다니 마을 마리아로부터 자기 오빠의 병이 매우 중하니 빨리 와서 병을 고쳐 달라는 말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차비 합니다.
그 때에 예수 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사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직감한 도마는 그렇게 위험한 곳이니 우리도 같이 가서 죽자고 외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도마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초자연적 사실이므로 그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상습적인 회의주의자의 의심이 아니고 믿기를 원하나 의심할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정직한 의심이었습니다.
테니슨은 일찍이 말하기를『정직한 의심에 믿음이 더 많다』고 했습니다. 도마의 의심은 이러한 의심이었습니다.
이제는 도마의 신앙을 생각하십시다. 이렇게 의심하던 도마가 어떻게 예수 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까?
여러분 이미 읽은 말씀을 다시 한번 자세히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보니『여드fp를 지나서...』란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곧 다음 주일 저녁입니다.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였는데 도마 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 전 주일은 도마가 없었는데 이번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서 도마에게 특별히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넣어서 내 옆구리를 만져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 님을 직면하고 예수 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때 도마는 꿇어앉아서『내 주시요. 내 하나님이 십니다.』이렇게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도마의 신앙 고백은 지성인일지라도 과학적 태도를 가진 분이라고 하더라도 참된 신앙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하는 증거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몇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모인 곳에, 다 같이 모인 곳에 도마 도 와서 그 의심을 풀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제자들이 모인 곳에 부활하신 예수 님이 오신 사실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에 주님께서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상황 아래서 도마가 주님을 대면하게 될 때에 모든 의심은 자연히 해소가 된 것입니다. 이 사실들은 우리에게 항구적인 교훈을 줍니다.
첫째는 누구든지 신앙문제에 있어서 의심이 있으면 다른데 먼저 가지 말고 성도가 모이는 교회에 먼저 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보다도, 무슨 산에 가는 것보다도, 무슨 책을 보는 것보다도, 성도가 모이는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둘째는 참 신앙을 가지는 성도가 모이는 교회는 지금도 주님께서 항상 같이 임재(臨在)하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약속을 지키십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셋째는 이와 같이 성도의 모임 가운데서 우리의 심령이 부활하신 주님을 직면하게 될 때에는 무슨 의심이든지 자연히 해소가 됩니다.
사실 정직한 의심이 있는 이에게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특별한 증거를 보여 주십니다. 혹은 찬송을 통해서 혹은 기도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혹은 설교를 통해서 성령의 체험과 중생을 통해서 의심을 해소시켜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 七十三편을 기억하시는 분이 몇 분이나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 보는 七十三편을 기록한 시인이 큰 의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볼 때 악한 사람이 더 잘 살고 의인이 핍박을 받는 광경을 보고 이 시인은 하나님의 공의와 섭리를 크게 의심해서 고민했습니다. 시편을 계속 읽어보면 그러다가 이 시인은 성소에 들어가서 예배할 때에 모든 것을 깨닫고 의심이 소멸되었습니다. 성소에서 예배할 때에 의심을 풀은 것입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이 다 믿음이 있기에 이 자리에 나온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혹 의심을 품고 나오신 이가 계십니까? 그러면 이 성소 안에서 의심을 풀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무슨 의심이 있으면 주님 앞에 다 내어놓으시고 주님 앞에서 여러분의 의심을 한번 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정직한 의심을 가진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의심 가운데는 그렇지 못한 의심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의심이 있습니다. 가령 유행성 의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二十세기는 의심의 세기라, 과거의 종교나 도덕이나 사상이나 전통은 모두 한 번은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세상에 살게 되니 남이 의심하니 거저 나도 따라가는 유행성 의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과 같은고 하니 유행성 홍콩감기에 걸린 사람과 마찬가지요 다른 사람이 감기 들린다고 나도 감기 들릴 필요야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그런 의심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어서 해소해 버려야 하겠지요.
또 다른 말이 없어서 이런 말을 쓰는데 의심 가운데는 허영 적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요새 어떤 청년들은 지성이라고 하는 말을 혹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지성인은 의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즉 나도 지성이니까 아무래도 의심을 좀 가져야지! 그것이 지성인의 표니까, 하고 오해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올시다.
참 지성인은 처음에 의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성을 통해서 보다도 깊은 신앙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파스칼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뉴우톤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상습적으로 항상 의심을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따금 신문을 읽는 줄 압니다. 어떤 분은 의처증이 있답니다. 자기 아내를 의심합니다. 어떤 아내는 의부증(疑夫症)이 있어서 자기 남편을 자주 의심합니다. 그것은 곤란합니다.
어떤 사람은 문을 한번 걸고도 다시 만져 봅니다. 바로 걸렸는지 의심이 나서요. 어떤 이는 一00원어치 물건을 사고 영수증을 달라고 합니다. 또 달라고 할까 봐서, 의심이 나서 말입니다.
이것은 병적입니다. 어떤 이는 성경을 항상 읽으면서도 의심합니다. 이건 병적입니다. 이런 이는 신경과 의사에게 보이는 것도 좋고 이런 이는 주님께 솔직히 죄를 사함을 받고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의심은 그것이 의심이기는 하지만 지적 원인이 아니고 도덕적 원인에 기인하는 의심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마음속에 저지른 숨은 죄가 있어도 성경의 진리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성경이 다 옳으면 양심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예수 님의 말씀이『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이는 마음을 청결케 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너희 마음을 깨끗케 하라』고 야고보는 외쳤습니다. 실상은 숨은 죄가 있어서 교회에 나오기는 나오지마는 여러 가지 의심을 가지는 이가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여야 이런 의심은 자연히 해소됩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의심 이외에 정직한 의심이 많이 있습니다. 자 이런 정직한 의심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할 것입니까? 간단하게 세 가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 인간의 제한성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것이 다 제한이 됐는데 우리 이성도 제한이 됐습니다. 어디까지만 생각할 수 있고 그 이상은 생각 못합니다.
무궁대란 말을 우리가 하지마는 무궁대의 관념은 모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우주에는 큰 신비가 있어서 이 모든 신비를 좁은 이 성으로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다 깨달아 알 수 없다고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 로마서 十一장 三十三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 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하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주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음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영원히 있으리로다. 아멘.』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 깨달아 알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링컨의 유명한 말 가운데『이성으로 깨달아 알 수 있는 건, 알 수 있으니까 그대로 행하고, 깨달아 알 수 없는 건 믿음으로 받아서 그대로 행하면 살 때도 바로 살고 죽을 때도 바로 죽을 수 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옳은 태도입니다. 신비에 대한 바른 태도입니다.
둘째는 여러 가지 의심이 일어날 때에, 그러면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서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전에 미국에 호레이스 굳스내리란 유명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대학생 시절에는 무신론자로 자처했습니다.『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지도 못하겠어.』이런 의심 가운데서 그 이는 무엇을 생각했느냐 하면『내가 무엇을 믿을 수 있나?』가만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 이 우주에 계신 것은 분명히 모르겠지마는 이 세상에 의와 불의가 있는 것은 사실이거든요. 그러면 나는 꼭 의를 행하겠다. 어디서나 꼭 의만을 행하겠다고 결심하고 의의 길을 따라갔다고 합니다.
결국엔 하나님도 믿게 되고 목사가 됐습니다. 여러 가지 의심이 날 때, 밑바닥에 들어가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거기 진실히 믿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데카르트란 불란서의 유명한 철학자가 있는데 이 분의 인식론을 보면 그가 안다는 모든 것을 의심했습니다. 우리는 오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을 아는데 이 오관이란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 속에서 생각하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다는 것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지 않아요.『나는 존재한다. 내가 생각하기 때문이다.』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자기 자신을 깨닫고 우주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은 마치 캄캄한 밤에 작은 등불을 가지고 길을 걸어가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등불이 적으니 내 주위에 대여섯 자밖엔 안 비추입니다. 그러나 그 대여섯 자 만 되는 그 등불 안에서 길을 바로 가세요. 그러면 그 등불이 다시 다섯 자를 비추어 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점점 옳은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내가 확실히 믿는 것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셋째로 중요한 것은 믿되 일하면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여러 가지로 심방도 하면서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복음을 읽어보면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외칠 때에 예수 님께서 오시니 세례 요한이 무어라고 간증했습니까.『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예수 님께서 메시야가 되는 것을 확실히 믿고 간증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압니까? 세례 요한이 잡혀 옥에 갇혔습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갇혀 있게 됐습니다. 여러 가지 궁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예수 님이 과연 메시야인가 의심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제자를 보내서 예수 님에게 묻지 않았습니까?『장차 오시겠다고 한 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릴 것입니까?』의심이 생겼습니다. 일 안하고 가만히 앉은 가운데서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말했습니다. 『의심은 영적 소화불량에서 오는 영적 상태다.』여러분 가운데는 그런 의심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까? 사실 분주한 사람은 그런 의심을 가질 겨를이 없습니다.
사실 저도 학생 시절에는 의심이 상당히 많더니 실지로 교회를 봉사하게 되니 의심할 겨를이 없습니다. 일하면서 믿어야 의심이 해소됩니다. 여러분께서 설교를 듣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들을뿐더러 그 대로 나가서 행해야 합니다. 그런 이는 의심이 없어요.
도마에 대해서 우스운 이야기를 다 잘 아시지요. 이건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마가 그 후에 의심이 생겼습니다. 다시 의심이 생겼단 말입니다. 의심을 풀어야 되겠는데 어떻게 풀까? 아 믿음이 많은 베드로한테 가 보자. 베드로한테 가보니 전도하는데 분주해서 만나 이야기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바울한테 가보니 더 분주하게 전도하고 있습니다. 도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돌아오다 무슨 생각이 났어요. 베드로도 잘 믿고 바울도 잘 믿어서 열심히 전도하는데 왜 나는 의심하며 돌아다닐까? 나도 가서 일하여야 되겠다. 그래서 저 인도로 갔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인도로 가서 전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인도에는 지금까지 말토마 교회라고 성 도마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의 무덤이 인도 마드라 시에 있습니다. 일하는 가운데 의심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큰 신앙가도 일시적으로는 의심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이도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한 적이 있습니다.
루터 같은 이도 일시적으로 낙심하고 의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 이런 이들은 모두 의심을 통해서 보다 더 큰 신앙에 들어갔습니다.
의심이 나는 것은 도마와 같이 더 큰 신앙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나 의심을 오래 품을 것은 아닙니다. 의심은 기계에 모래와 같습니다. 눈에 티와 같습니다. 밭에 가라지 와 같습니다. 의심하는 환자는 병이 잘 안 낫습니다. 부부가 서로 의심하면 화평하지 못합니다. 의심하는 군대는 승리를 거두지 못합니다. 의심하는 기도는 응답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 베드로에게 적게 믿는 자여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예수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한 것을 믿고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야고보 장로는『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했습니다.
기도할 때 의심하지 맙시다. 사도신경을 의심하지 맙시다. 성경의 교훈을 의심하지 맙시다.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때가 오는 것을 의심하지 맙시다. 세상 끝날 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같이 있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맙시다. 예수는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을 의심하지 맙시다.
기독교 신앙은 어제나 오늘만의 신앙이 아닙니다. 영원한 진리에 대한 신앙입니다.
(一九七0년 四월 十二일)


Ⅸ-32 재난과 그 교훈 (누가복음 十三장 一-九절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十三·四-五)

신약 가운데 히브리서는 이런 말로 시작이 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옛날뿐 아니고 지금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씀하십니다. 자연계를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해와 달과 물, 별들을 통해서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춘하추동,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 등의 사철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비참한 사건들, 곧 재난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재난과 그 재난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재난은 언제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 님 당시에도 실로암 못 가에 지었던 망대가 무너져서 十八명이 치어 죽은 비참한 재난이 있었습니다.
일전에 서울에서 일어난 아파트 도괴 사건은 실로 우리 민족이 경험한 가장 비참한 사고 중에 하나로서 우리 국민이 다 같이 슬퍼하며 또 배워야할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비참한 재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크게 말씀한 것입니다. 단순한 진리 몇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꼭 배워야 할 진리들입니다. 그러면 이 아파트 도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자연 법칙을 무시하고 지은 집은 무너집니다.
아주 단순한 말씀이올시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질 우주를 지으시고 거기 운용될 법칙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자연 법칙이라고 합니다. 시멘트가 성석(成石)이 되려고 하면, 돌로 굳어지려고 하면 일정한 법칙이 있는 것입니다. 가령 시멘트 가루가 얼마에 모래 몇 부분, 굵은 자갈은 몇 부분, 물은 얼마, 온도는 몇도, 이상과 같은 꼭 합당한 법칙 아래에서만 시멘트란 것이 굳어져서 돌이 됩니다.
더욱이 철조(鐵造) 콘크리트 집이면 철근의 양도 들어가리만큼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자연법칙은 하나님이 정한 것인데 인간이 변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집은 무너집니다.
와우 아파트의 건축가들은 이 자연 법칙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은 집이 무너졌습니다.
집뿐이 아닙니다. 도로를 포장하는 데도 자연 법칙이 있는데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다리를 놓는 데도 그렇습니다. 어떤 공사에도 그렇습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데도 그렇습니다. 자연 법칙 대로 순종해야 사고가 나지 않습니다. 건축뿐이 아니고 농사를 짖는 데도 농작물에 관한 법칙을 알아서 그대로 농사를 지어야 많은 수확을 거둡니다.
자연 법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자연 법칙은 속이지 못합니다. 자연 법칙을 속이면 손해는 내가 받습니다.
이것을 잘 배워서 순종하는 길만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그렇지 않은 길은 다 패망의 길입니다.
이것이 아파트 도괴의 재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첫마디인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도덕의 법칙을 무시하고 지은 집은 다 무너집니다.
물질 세계에 자연 법칙이 있는 것처럼 인간 사회에는 도덕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 법칙을 지키지 아니하고 집을 지으면 그 집은 무너집니다.
왜 와우 아파트가 무너졌습니까? 첫째는 자연 법칙을 무시하고 지은 까닭입니다. 그들이 자연 법칙을 몰라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는 관계된 시 직원이나 건축업자들의 부정 부패가 있지 않느냐고 누구나 추측합니다.
곧 탐욕에 기인한 부정 부패, 그리고 노동자들의 불성실한 시공은 결국 무너지는 집을 지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기 관계되었던 모든 이들이 좀더 양심적으로 일을 하였던들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곧 이들은 자연 법칙을 어겼을 뿐더러 도덕 법칙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은 집은 무너졌습니다.
가만히 오늘의 우리 사회 현상을 살펴보면 자연 법칙의 존재는 믿지마는 이 도덕 법칙의 존재는 믿지 않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맙시다. 사람의 심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성령으로 심는 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거두고, 육신으로 심는 자는 육신으로 말미암아 썩을 것을 거둔다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도덕의 법칙을 어기고 짓는 집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오늘이 바로 四·一九 十주년 기념일입니다. 도덕의 법칙을 무시한 정당은 무너졌습니다. 도덕의 법칙을 무시하고 부정 선거를 감행한 정권은 무너졌습니다. 망했습니다.
이 도덕의 법칙도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도덕의 법칙도 변하지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이 법칙대로 집을 지어야 그 집이 무너지지 아니합니다. 이 법칙대로 사업을 하여야 그 사업이 항구합니다. 이 법칙대로 나라 일도 해야 우리 나라가 바로 될 것입니다. 이 법칙대로 우리 하나 하나가 바로 살아야 한 세상을 바로 삽니다.
그것이 아마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올시다.
셋째는 이 비참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올시다.
한 사회에 사는 이들은 인간 생활의 연대성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후에는 뜻을 더 분명히 알 수 있을 줄 압니다.
한 사회에 사는 이들은 인간 생활의 연대성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읽을 때에 자세히 들으세요.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 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예수 님께서 그렇지 않다고, 죄가 더 있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사건에 참화를 입은 우리 동포들이 서울에 사는 다른 동포들보다 죄가 더 있어서 이런 일을 당한 겁니까? 아닙니다. 예수 님께서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들이, 이렇게 무죄한 이들이 이런 참화를 당했습니까? 물론 우리가 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고 한 마디로 말하면 그들이 우리도 역시 그렇습니다 만, 불성실한 건축업자들과 한 사회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 국가, 한 사회 안에 같이 사는 사람들은 피차에 연결이 되어서 공동 운명을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위생에 부주의해서 전염병이 걸리게 되면 위생을 아는 사람에게도 이 전염병이 퍼져서 생명을 잃는 때가 많습니다.
한 집에서 불을 잘 간수하지 아니해서 불을 일으키게 되면 불 간수를 잘한 이웃집에까지 불어 연소하여서 무죄한 사람들이 손해를 봅니다.
꼭 같이 한 사람의 죄의 결과가 다른 무죄한 사람들에게도 화를 가져옵니다. 왜? 한 사회에 사는 까닭입니다.
이것이 아파트의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적 연대성은 죄뿐 만은 아니고 선의 영향도 온 사회에 미치는 것도 사실입니다.
소돔성에 의인 열 사람이 있었다면 그 성이 멸망하지 않았으리란 말은 이런 진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한 사회에서의 인간 생활은 이렇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억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먼저 건강히 바로 살 뿐더러 다른 모든 이들도 건강히 바로 살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리 옳게 산다고 하지만 다른 이들이 옳게 살지 않는다면 결국 그 해가 내게 미치기 때문입니다.
내 집만 잘 짓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같이 잘 짓고 살 수 있는 나라를 건설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아무리 나는 내 집을 잘 짓고 산다고 하지마는 옆에 판자 집이 많은데 거기서 불이 나면 내 집도 불타게 됩니다.
이기적 자기 중심의 개인주의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한 사회의 일원으로 사는 까닭입니다. 공통한 운명을 지니고 삽니다.
그러므로 나만 예수를 믿고 옳게 살 것이 아닙니다. 어떻든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다 같이 옳게 살도록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딸들만 교육을 잘 시키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다른 집 아이들도 똑같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 교육 사업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회 봉사를 해야 됩니다. 고아를 돌아보아야 됩니다. 불량소년들을 돌아보아야 됩니다. 윤락여성들을 돌아보아야 됩니다. 과부들을 돌아보아야 됩니다. 사회봉사를 하여야 됩니다.
왜냐하면 다 같이 살지 못하면 나 혼자만 잘 살 수 없기 까닭입니다.
조금 깊이 생각하면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입니다. 내가 범죄 하면 나만 화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 때문에 다른 무죄한 사람이 화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인간 생활의 연대성을 기억해서 같이 옳게 사는 사회를 세우기에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친히 주신 재난에 대한 교훈을 우리가 받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너무 심한 말입니까? 물론 심한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 교훈을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분명히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 경고를 민족적으로 분명히 들어야 하겠습니다.
슬프게도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주님의 이 교훈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 경고를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회개를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말씀을 하신 지 약 四十년 후, 주후 七十년에 이스라엘 나라 예루살렘 전체가 아주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교훈은 과장이 없습니다. 꼭 사실대로 말씀하십니다. 이 경고를 깊이 들어야 우리가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짓는 집은 무너집니다. 도덕의 법칙을 무시하고 짓는 집은 무너집니다. 사회의 연대성을 무시하는 집은 무너집니다. 이 경고를 분명히 들어야겠습니다.
나라는 문자 그대로 한 집입니다. 우리가 민족적으로 이러한 경고를 듣지 아니하면 나라 전체가 이처럼 무너지는 것입니다. 망하는 것입니다.
이 경고는 건축업자나 시 직원만 들을 말이 아닙니다. 모든 정치가, 이 나라의 모든 국회의원, 국무 위원들, 모든 공무원, 군인들, 실업인들, 교육가들, 문학가들, 아니 국민 전체가 분명히 듣고 명심해서 과거의 잘못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권면(勸勉)은 개인적으로 우리 하나 하나, 개인적으로 분명히 들어야 합니다.
너희도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누구나 다 죄인이올시다. 내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을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은 한 번 죽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붙드는 길뿐입니다.
우리가 다 빈 손 들고 나아가 십자가를 붙들었습니까? 이 아파트 사건을 보세요. 죽음이란 예고 없이 옵니다. 우리는 언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죽음에 대한 준비를 분명히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 준비의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내 구주로 믿는 길뿐입니다.
오늘 아침 예배하는 여러 교우들은 다 이와 같은 준비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이러한 확실한 준비가 없으면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일이 확실히 있을는지 모릅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때요, 오늘이 구원의 날입니다.
이 교회를 나가기 전에 온전히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一九七0년 四월 十九일)


Ⅸ-33 능력의 원천 (스가랴 四장 六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四·六)

옛날 스가랴 선지를 통하여 스룹바벨에게 주신 말씀이올시다. 지금부터 약 二천五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된 일입니다.
옛날 유대 나라가 망한 뒤에 바벨론에 잡혀가서 약 七十년을 있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방을 받아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선발대로 약 五만 명이 스룹바벨의 영도 아래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해방의 큰 기쁨과 감격 가운데서 제일 먼저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하였습니다. 생활 문제가 있었습니다. 주택 문제, 식량문제가 있습니다. 자재(資材) 문제도 있었습니다.
더욱이 원수의 방해가 심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성전공사는 자연히 중지가 되고 五十년 동안이나 계속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에 대해서 수룹바벨과 그 때의 모든 백성은 큰 낙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 때에 선지자 스가랴에게 한 이상이 보였습니다. 순금 등대가 보였습니다. 그 등대 위에는 순금 등잔과 불이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좌 우편에는 두 큰 감람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감람나무에서 감람 기름이 끊임없이 흘러 들어가니 그 등대의 불은 꺼지지 아니하고 길이 빛났던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순금 등대는 교회의 상징이올시다. 이스라엘 교회, 나라의 상징이올시다. 아무리 난관과 원수가 많다고 하지마는 이스라엘 교회는 재건되어서 밝은 빛을 나타내리라고 하는 이상입니다.
왜? 사람의 힘, 능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신이 하시는 까닭입니다. 교회의 능력의 원천은 곧 하나님의 신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스룹바벨과 모든 백성은 용기를 얻어서 성전 공사를 다시 시작해서 이것을 완성하였습니다. 결국은 교회를 재건하여 길이 밝은 빛을 온 세계에 비친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말씀『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하는 이 말씀은 등대의 빛이 비치는 일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교훈의 일은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사람의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잠깐 묵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이 말씀이 얼마나 사실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교회의 설립, 교회의 보존, 교회의 확충은 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뿐입니다.
교회가 처음에 어떻게 탄생되었습니까? 오순절 날 성령이 다락방에 모였던 一二0 명에게 임재 하심으로써 처음에 교회가 탄생된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예루살렘성은 새로 탄생된 교회를 물론 미워하였습니다. 박해하였습니다. 위선적인 바리새인들, 세속적인 사두개인들 완강한 로마 제국, 모두 다 적대 행위를 취한 것입니다.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죽이기도 했습니다.
실로 이리 가운데 어린양이 앉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 양 같은 교회가 자라고 자라서 마지막에는 모든 원수를 이기고 로마 제국까지 영적으로 정복해서 세계 역사에 방향을 변경케 하였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역사는 세기를 통한 교회의 전 역사이기도 합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만족들이 온 유럽을 점령할 때에 교회는 실로 큰 위기에 봉착하였던 것입니다. 혹은 회회교도가 근동 일대와 북아프리카 일대를 석권할 뿐더러 서반아까지 점령하게 될 때에, 교회의 운명은 실로 풍전등화의 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교회는 이 모든 원수를 극복하고 기독교 문화를 창조한 것입니다. 이렇게 중고 유럽 역사를 장식하였습니다. 어떻게,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되었습니다.
十八, 十九세기간에는 자연과학의 발흥과 같이 교회는 자연주의, 합리주의, 세속주의 등, 새로운 원수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세기간에 유럽과 미국에 큰 부흥 운동이 일어나서 전 세계에, 외국 선교 운동을 벌여서 세계 각 처에 신생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한국에도 복음이 들어오게 되었고 한국에도 교회가 서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성령의 역사로 된 것입니다.
二十세기에 접어들어 교회는 새로이 유물론적, 무신론적 공산주의의 대두로 큰 박해 중에 있는 교회들이 많게 되었습니다. 철의 장막 속에서 신음하는 교회들이 많게 되었습니다. 많은 순교자가 피를 흘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오래지 아니해서 교회는 이 원수도 극복하고 승리 할 날이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반드시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같이 하심으로써 교회는 영원히 빛을 발한 것입니다. 교회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교회의 능력의 원천은 마르지 아니합니다.
왜? 하나님의 신은 영원히 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개인의 구원을, 또 개인의 모든 일을 생각할 때에도 꼭 이 말씀대로 입니다.
우리 하나 하나는 한 작은 등대입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사람에게 다소 힘이 있습니다. 체력이 있습니다. 지력이 있습니다. 의지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힘으로 내 영혼을 스스로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또 빛을 발할 수도 없습니다.
우선 구원과 중생을 내 힘으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은 내가 육신으로 세상에 온 것도 내 힘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거듭 나는 것도 내 힘으로 못합니다. 영적 중생, 새로 거듭나는 것도 예수 님의 말씀과 같이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 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자가 다 이러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서 새로 거듭나는 이 자체가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로써만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성장이 역시 그렇습니다. 영적 성장이 역시 그렇습니다. 바울의 말과 같이『나는 심었고 아불로는 물 주었으나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말씀하셨습니다.
곡식이 자라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농부는 거름을 주고 김을 매지마는 자라게 하지는 못합니다. 나무가 장성하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자라게 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이 점점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는 것입니다. 곧 성령의 역사로만 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열매 맺는 것을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농부가 나무를 심을 수 있습니다. 거름을 줍니다. 그러나 열매는 맺게 못합니다. 믿음의 열매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믿음으로 맺는 모든 열매는 성령의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열매로서 우리 마음과 성품에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도 아니 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 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해 나갈 때, 유혹과 시험을 이기는 것도 승리의 생활을 하는 것도 결국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갈 때에 안과 밖으로 유혹을 받습니다. 교만, 탐심, 정욕, 허영심, 분노, 증오심 이런 모든 유혹과 시험을 간단없이 받습니다. 내 의지력으로 이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만 이기는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신으로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사실, 주의 모든 일, 복음을 전파하며, 주를 봉사하며, 주를 위한 모든 인들은 인간의 지혜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도들을 보세요. 그러기에 三년 동안이나 예수 님의 교훈을 받았지마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에야 사실, 담대히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은 것입니다. 옳게 봉사할 수 있은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해서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내 신으로 된다고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능력의 원천이 성령에 있는 것입니다.
큰산아 네가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같이 있을 때에 어떤 어려운 일에도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사회 혁신도 역시 그렇습니다. 해방 이후에 사회 혁신을 위해서 우리 민족은 크게 몸부림친 것입니다. 그래서 四ㆍ一九 학생 혁명도 일어났습니다. 五ㆍ一六 군사 혁명도 일어났습니다. 근년에는 소위 제二경제 운동이란 말을 이따금 듣습니다. 교육 헌장도 만들었습니다. 시민헌장도 만들었습니다. 의례 준칙도 제정했습니다. 각 방면으로 노력을 합니다.
인간의 힘들, 정치력이나, 경제력이나, 지력이나, 과학의 힘으로 인간 사회의 외부의 변화는 가능한 것입니다. 변하는 서울의 모습을 보세요. 인간은 외부 생활의 근대화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내적 생활의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외적 혁명은 가능하나 내적 정신적 혁명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사회 제도를 고칠 수 있습니다. 조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기구를 다시 조직할 수 있습니다. 개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마음의 개혁은 불가능합니다.
인간 자체의 해결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 자체의 개혁 곧 인간의 영적 정신적 개혁은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하셨습니다. 사회의 혁신의 원천도 하나님의 신에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밝은 빛을 온 세계에 비출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가 있을 것입니까? 오직 성령의 움직임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개인으로나 교회로나 사회로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등대가 될 수 없습니다.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을 충만히 받는 일입니다. 이 은혜는 오직 회개와 신앙과 기도를 통해서만 오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주를 믿어야 됩니다. 기도를 힘써야 됩니다.
이 대가를 지불하지 아니하고 거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다 그렇게 신앙 생활을 하십니까? 그리고 반면에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아니해야 됩니다. 성령의 감화를 소멸하지 않아야 됩니다. 성령께서 간단없이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릴 때가 있습니다. 우습게 알지 말고 소멸하지 말아야 됩니다.
성령의 지도와 감화에 순복해야 합니다. 물론 성령을 훼방해서는 아니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여러분이 다 기억하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했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에 권능이 옵니다. 권능이 임할 때에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이 되어서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봄철입니다. 따뜻한 양기가 온 땅에 임하니 풀은 자라고 꽃은 핍니다. 이렇게 성령이 우리 마음에 임하실 때, 우리 가정에 임하실 때, 우리 교회에 임하실 때, 우리 사회에 임하실 때, 과연 새로운 생명이 장성하고 꽃은 피어 아름다운 꽃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기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내 자신이, 내 가정에, 내 교회에, 내 나라,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전도대회에 성령의 충만한 대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빛을 비추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아니합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一九七0년 四월 二十六일)


Ⅸ-34 하늘과 땅의 큰 기쁨 (누가복음 十五장 一-十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十五·七)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누가복음 十五장에는 주옥같이 귀한 비유 셋이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 혹은 은전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 혹은 탕자의 비유, 이 세 가지 비유가 이 한 장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동기를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누가十五장 첫 구절과 둘째 구절에 기록한 대로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 님 앞에 나아와서 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당시의 의인을 자처하던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은 예수 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예수 님께서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시고 그들과 같이 음식을 먹는다고 불평한 것입니다.
또 그 불평은 사실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 사실 그들을 가까이 하셨고 그들과 같이 음식을 잡수시고 그들 가운데 하나를 불러서 제자를 삼으셨고, 사실 마태가 그 중의 한 사람이올시다. 삭개오 같은 사람의 집에도 들어가 주무시고, 잡수시고, 그를 회개시킨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세 가지 비유를 일괄적으로 생각하면서 주님의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물론 이 세 가지 비유가 강조하는 점에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비유는 다 같이 몇 가지 뚜렷한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가령 이 세 가지 비유가 다 잃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와 같이 잃어진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하나님께서 이런 잃어진 인간을 다시 찾으실 때에 하늘과 땅과 두루 기쁨이 있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세 가지 방면으로 이 세 가지 비유를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아침에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잃어진 인간의 모습, 혹은 죄인으로서 잃어진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이 세 가지 비유에서 찾아봅니다.
여기 세 가지 유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양과 같이 잃어진 인간이 있습니다. 잃어진 은전과 같이 잃어진 인간이 있습니다. 탕자와 같이 잃어진 인간도 있습니다.
자 먼저 이 양이 어떻게 잃어졌는가 생각하십시다. 양은 본능적으로 사는 한 짐승입니다. 그러니 먼 앞길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양이 앞만 바라보고 앞에 보이는 풀만 바라보고 먹으며 따라가다가 잃어졌습니다. 좌우를 살피지 않고, 말하자면 부주의하고 무 원리한 가운데서 길을 잃은 것입니다.
그 결과는 이 양은 목자를 떠나게 되었고 동무가 되는 양과 갈라지게 되었고 좋은 풀을 따라가는 줄 알았는데 황폐한 광야로 나가게 되었고 험한 골짜기에 들어가게 되었고, 원수 이리가 많은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큰 곤경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잃어지는 인간도 있습니다. 부주의, 무원칙 가운데서 조심하지 아니하고 거저 본능대로 먹을 것을 따라가고 돈을 따라가고 세상 향락만 따라가고, 욕심만 따라가고 정욕만 따라 가다가 알지 목하는 가운데 큰 죄에 빠지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는 인간들이 상당히 많이 있는 것입니다. 양과 같이 잃어지는 인간들이 많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은전과 같이 잃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세히 들으세요, 은전과 같이 잃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은전은 어떻게 잃어질까요? 그것은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은전은 무거우니까 떨어졌고 둥글어서 굴러나게 되었고 생명이 없으니 얼마동안 구르다가 떨어진 그 곳에 그냥 있게 되었고 얼마 후 먼지가 앉게 되니 아주 묻히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잃어지는 인간은 없을까요? 거저, 온전히 환경의 지배를 받아서 바람 부는 대로 끌려가서, 남이 술 먹으니 나도 술 먹고, 남이 도박하니 나도 도박하고, 남이 댄스 홀에 가니 나도 댄스 홀에 가고, 남이 뇌물 받으니 나도 뇌물 받고, 남이 협잡하니 나도 협잡하고, 거저 이렇게 아주 내 생각, 내 의지는 버리고 이성과 양심도 아주 버리고 무의식 가운데 남만, 따라가다가 큰 죄에 빠지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무의식중에 환경의 지배 가운데 빠지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탕자와 같이 잃어집니다. 탕자는 잃어진 양이나 잃어진 은전과는 다릅니다. 부주의가 아닙니다. 탕자가 잃어지게 된 것은 무의식 중이 아닙니다. 환경이 아닙니다.
이 탕자는 의식적으로 아버지를 반항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반항했습니다. 그리고 그릇된 자기의 자유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담대히 아버지에게 가서 자기의 분 깃을 나누어 받은 다음에는 아예 그것을 다 팔아 가지고 아버지가 못 볼 때에 아주 먼 나라로 갔습니다. 거기서 자유를 얻는 그대로, 마음대로 허랑 방탕 하는 생활을 합니다. 자연히 그런 생활은 오래는 못 갑니다.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들었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습니다. 남의 집에 되지를 치게 됐습니다. 돼지에게 줄 물도 넉넉지 않습니다.
이렇게 잃어지는 죄를 범하는 인간들도 상당히 많은 줄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반항합니다. 하나님께서 내신 도덕의 법칙을 무시합니다. 자연의 법칙도 무시합니다. 자유대로 살자, 내 마음대로 살자 면서 행동합니다.
자유를 방종으로 오인합니다. 잘못 생각합니다. 이렇게 삶으로써 큰 죄에 빠지고 큰 궁핍에 빠지고 큰 난관에 봉착하는 사람이 특별히 젊은 사람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비유에 있어서 죄 가운데 잃어진 인간에 대해 세 가지 모습을 봅니다.
양과 같이 잃어지는 사람, 동전과 같이 잃어지는 사람, 탕자와 같이 배반하는 사람, 이런 말씀을 들을 때 내 현재의 모습이 어떤가 반성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잃은 양과 같은 생활을 하지 않는가? 내가 잃은 은전과 같은 생활을 하지 않나? 나의 현재 생활이 탕자의 간 길이 아닌가?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는 이 세 가지 비유는 잃어진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렇게 잃어지고 범죄한 인간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여기도 세 가지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목자와 같이 찾습니다. 여인과 같이 찾습니다. 아버지와 같이 찾습니다.
먼저 목자가 잃은 양을 찾듯이 하나님께서 잃은 인간을 찾습니다. 비록 양 한 마리라도 목자에게는 아주 귀한 존재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헤맵니다. 산과 들을 헤맵니다.
험한 골짜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장강대하(長江大河)가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 갑니다. 부릅니다. 돌아오라고 부릅니다.
양은 그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부릅니다. 이것이 죄지은 인간을 찾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특별히 성자 되시는 예수의 모습을 우리는 여기서 찾아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잃어진 인간을 찾으시기 위해서 하늘의 보좌를 내어놓으시고 험한 광야 같은 이 세상에 친히 임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리와 죄인을 찾으십니다. 가까이 하십니다.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그들의 죄를 완전히 사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시고 속죄하기 위해서 자기가 죽습니다. 잃은 인간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선한 목자와도 같이 잃은 인간을 찾습니다.
현대는 공산주의 같은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자유 사회에서도 인간을 천시하는 경향입니다. 인간소외(人間疎外)라는 말도 많습니다. 인간을 천시하는 풍조가 점점 높아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 하나의 생명도 천하보다 귀하게 생각해서 그 죄인을 구하기 위하여 애쓰십니다.
모든 희생을 이끼지 아니 하십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듯이 인간을 찾습니다.
또 여인이 잃은 돈을, 은전 하나를 찾듯이 잃은 인간을 찾으십니다. 잃어진 돈처럼 죄 가운데 비록 인간이 빠졌을지라도, 또한 빠진 줄도 모르는 인간이지마는 하나님은 이렇게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을 잊지 않습니다.
왜? 인간은 아무리 죄를 지었을지라도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지극한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잃어진 동전 같은 죄인을 찾습니다. 여기는 특별히 삼위일체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성령의 역사 하는 모습을 우리가 봅니다.
이 여인이 잃은 은전을 찾기 위해서 등불을 켜고 방을 쓸면서 찾기까지 찾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죄 가운데 빠지고, 죄에 빠진 줄도 모르고 무의식 가운데 있는 죄인을 다시 찾기 위해서 그 양심에 밝은 빛을 비추어 줍니다.
이 여자가 방을 쓸며 소란을 피우고 먼지를 일으키는 것처럼 마음에 불안도 일으켜 주시고 고통도 일으켜 주시고 어떤 때에는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환난과 풍파를 당하게 합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죄인의 마음 가운데 역사해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인이 잃은 은전을 찾듯이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죄인을 찾아서 구원하십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아버지가 탕자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아직 상거(相距)가 먼데 벌써 알고, 자기 아들인 줄 알고,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죄인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십니다. 기다리고 기다리시다가 돌아오기 시작만 하면 아무리 멀다고 할지라도 달려나가서 영접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로 말미암아 잃어진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들은 거의 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산에 들어가 묵상을 하고 고행주의로 혹은 여러 곳으로 여행합니다. 그것은 다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죄인을 찾습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에 이와 같이 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먼저 찾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먼저 부를 것입니다. 죄인을 찾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한 것입니다. 죄인을 찾으시기 위해서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죄인을 찾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낸 것입니다. 죄인을 찾으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죄인을 찾으시기 위해서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죄인을 찾으시기 위해서 세기를 통하여 교회의 일꾼들을 세우시고 선교사를 사방에 보내시고 죄인을 찾으시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주시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하나님께서 잃어진 죄인을 찾으시기 위해서 애쓰십니다.
어떤 때는 양심에 호소합니다. 어떤 때는 성령을 통하여 이성에 호소합니다. 어떤 때에는 환난과 재난을 통하여 부르십니다. 깨우치기 위해서 고통을 주십니다. 실패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잃어진 인간을 찾으시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쓰십니다.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이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한 일입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는데, 우리가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입니까?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잃은 양처럼, 혹은 잃은 은전처럼? 혹은 탕자처럼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가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지체하지 마시고 돌아오시기를 부탁합니다.
이렇게 돌아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하늘에 큰 환영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에 큰 기쁨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다시 읽을 때에 자세히 들으세요.『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또 十절에『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여러분! 우선 하늘에 큰 기쁨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기뻐하십니다. 성자 되시는 어린양 예수께서 기뻐하십니다. 성령께서 기뻐하십니다. 모든 천군 천사가 기뻐서 큰 합창을 하십니다.
그 뿐인 줄 아십니까? 이미 구원을 받은 천천만(千千萬) 성도들이 호응해서 큰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욥기 三十八장 八절에 보면『하나님께서 땅에 기초를 놓으실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잃어졌던 인간을 다시 찾아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할 때에 일, 월, 성, 신 (日月星辰)아니, 온 우주가 환영의 합창을 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땅에서도 큰 기쁨이 있습니다. 양이 목자의 품에 다시 안기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니 탕자의 마음속에 얼마나 큰 기쁨이 있겠습니까.
구스 내시가 빌립에게 전도를 받아서 세례를 받은 후에는 기쁨으로 수레를 타고 길을 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는 나의 남은 인생 행로를 기쁨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빌립보 간수가 바울에게 전도를 받아서 회개한 후에는 온 가족이 기쁨에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부인은 잘 믿는데 남편이 오래 믿지 아니하다가 남편이 믿게 되면 그 집안이 얼마나 기쁨에 충만하게 되는지 그런 가정을 종종 보았습니다.
부모가 잘 믿는데 아들이 안 믿다가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면 그 집안이 어떻게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또 전도를 받아서 믿는 이에게도 축복이 되지마는 전도한 이의 기쁨은 얼마나 될 것입니까.
데살로니가 전서 二장 十九절을 읽을 때에 들어보세요. 사도 바울이 기록하였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고 했습니다.『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할 때에 언제나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에 주께서 믿는 사람들을 축복하시니 온 교회에 기쁨이 충만해서 언제나 하나님께 찬송하였다고 했습니다.
세상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 얼마 후에는 하나님 나라에 가서 다 모이게 됩니다. 미안한 말이지마는 우리가 一OO년쯤 후에는 다 하늘 나라에서 볼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 다시 만날 터인데 그 때에 전도해서 믿고 구원 얻은 이를 만날 때, 우리의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전도는 하늘과 땅에서 금생과 내생에 큰 기쁨을 가져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우리가 좀 수고롭지만 복음을 전파하면 기쁨으로 단을 거둘 때가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전도 대회를 통해서 하늘의 기쁨이 충만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땅에도 기쁨이 충만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기쁨이 충만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도 기쁨이 충만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려면 한가지 꼭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전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 드렸지마는 이번 전도 대회를 앞두고 우리가 꼭 한 두분 지목하여 기도를 하고 이번 전도 대회에 하나님께로 꼭 인도하도록 힘써서 전도하면 하늘과 땅에 이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은 인간입니다. 이 귀한 인간이 죄인으로 전락해서 잃어졌습니다.
이런 인간을 다시 찾아서 쓸 만한 인간을 다시 만들고 정신 혁명을 해서 새 사람을 만들면 이런 운동보다 더 보배로운 운동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운동을 통해서 오는 기쁨이야말로 제일 큰 기쁨입니다. (一九七0년 五월 三일)


Ⅸ-35 나오미와 룻의 가정 ―어머니 주일― (룻기 一장 十五-二十二절)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도록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님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一ㆍ十六)

지난주간은 가정주간으로 지켰습니다. 오늘을 흔히 어머니 주일로 지킵니다. 구약가운데서 사사기와 사무엘서 사이에 한 적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이름을 룻기라고 합니다. 사사기와 사무엘 서는 다 전쟁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 중간에 참으로 인정 미담의 하나인 룻기가 있습니다. 마치 가시밭 사이에 한 송이 백합화와도 같습니다.
그 책의 내용을 먼저 간단히 소개합니다.
사사들이 치리 하던 때입니다. 지금부터 약 三천八백여 년 전, 유대 지방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그 때의 사회는 혼란하고 불안하던 때입니다.
그런 때에 베들레헴이란 동네에 한 가족이 살았습니다. 남편, 아내, 두 아들의 단란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 곳에서 양식을 얻을 길이 없어서, 그 가족이 그 곳을 떠나 동편으로 요단강을 건너서 모압 이라고 하는 나라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가서 몇 해는 잘 살았지마는 불행히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두 아들이 있으니 그 모압 지방에서 자부를 취하여 아들과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몇 해 후, 십 년이 채 될까 말까 하여 아들이 그만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자연히 과부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와 두 모압 자부가 그들입니다. 이 비극의 주인공인 시어머니의 이름을 나오미라고 합니다. 또 두 자부의 이름을 하나는 룻 또 하나는 오르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가운이 기울게 되니 시어머니 나오미는 자연히 슬프고 외로운 가운데 고향이 그리워졌습니다.
이제 무슨 소망이 있는가, 고향에 돌아가서 내 백골이나 묻히자는 생각 가운데, 고향으로 떠나게 됐습니다.
아마도 작은 보따리를 챙겨 떠나게 됐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방 며느리인 두 여자도 같이 떠납니다. 『어머니 어떻게 혼자 가시겠습니까? 우리도 가겠습니다』고 하며 얼마쯤 이 셋이 서편을 향해서 걸어오다가 요단강 변에 이르렀습니다. 요단강은 유대와 모압 땅의 경계입니다. 거기에 이르러 나오미는 간절히 두 자부에게 권유합니다. 그 말씀을 제가 한번 더 자세히 읽을 때에 들어보세요.
나오미는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 높여 울며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 중엔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잇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 던 지 오늘밤에 남편을 두어서 생산한다고 하자 너희가 어찌 그들을 인하여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않느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이렇게 간절히 권했습니다. 아마 이 말씀 가운데 여러분이 알아듣기 어렵고 이상한 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태 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있느냐』하는 말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는 먼저 형이 죽은 날에는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형을 위하여 아들을 낳아 주는 풍습이 있던 때입니다.
그 뜻을 의미합니다. 하여간 이렇게 간절히 돌아가라고 권하니 그 두 자부 가운데 오르바는 크게 울고 시어머니와 입을 맞추고 자기 어머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니까 나오미는 다른 자부 룻에게 계속하여 권면합니다. 네 동서가 지금 돌아가지 않았느냐 너도 어서 돌아가라고 권합니다. 그 때에 룻이 대답합니다.『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니이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더 권해야 쓸데가 없어서 권하기를 그만 두고 나오미와 자부 룻이 요단강을 건너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가 바로 보리 추수를 할 때입니다. 우리 한국에도 보리 추수할 때가 거의 가까워 옵니다. 아마도 어떤 작은 방을 얻어서 고부간에 같이 살면서 룻이 이삭을 주워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합니다. 이삭 줍는단 말을 여기 청년들은 혹 모르기 쉬울 거예요. 무슨 뜻인고 하니 갈 을 다한 다음에 떨어진 이삭이 있으면 그것을 줍는단 말입니다.
오늘이 어머니 주일인데 나오미와 룻의 가정을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외적으로 볼 때에 불행한 가정입니다. 참으로 불우한 가정입니다. 두 과부의 가정이올시다. 고독한 가정, 눈물의 가정이올시다. 또한 가난한 가정입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볼 때에는 이 가정이 보통 가정은 아닙니다. 그것은 고부간에 맺힌 그 인정과 사랑에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나오미의 말을 이미 들었습니다.
『내 딸들아 너희는 돌아가라. 네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라, 가서 결혼하고 너희 고향에서 장래를 위하여 잘 살라』고 간절히 권합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 시어머니 되는 나오미는 자기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자부들의 생각만을 합니다. 그들의 행복만을 생각하고 간절히 강권합니다.
그러나 룻의 말을 들어보세요. 『나로 하여금 돌아가라고 하지 마세요. 어머니가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고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고 어머니 죽는 곳에서 나도 죽어 그 곳에 장사되기를 나도 원합니다. 죽는 것 외에 내가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나를 벌하시기를 원합니다.』
자부된 룻은 자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아니하고 시어머니 생각만 한단 말입니다. 그 깊은 사랑 그 맺힌 인정, 룻의 일편단심은 시어머니를 위해서 희생하려고 합니다.
요단강이 문제 아닙니다. 외국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죽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를 가던지 시어머니를 봉사하고 생사를 같이 하려는 철석같은 결심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동서고금에 고부의 관계라는 것,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라는 것이 일반적으로는 이렇지 않습니다.
스탠리 존스 박사의 저서 가운데서 본 듯 합니다. 어떤 젊은 부인이 갑자기 음식을 먹기만 하면 자꾸 토합니다. 의사에게 가서 아무리 진단해 보아야 아무 병도 없습니다. 그 다음엔 필연적으로 심리적 관계라고 생각해서 자세히 알아보니 며칠 전에 딴 곳에서 살던 시어머니가 그 곳을 떠나서 자기네와 함께 살면 좋겠다는 편지를 받았더랍니다.
아마 이 부인은 시어머니가 온다는 말만 듣고도 구역질이 났던 모양입니다. 이런 며느리도 있습니다.
제가 신의주 있을 때에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 아무 권찰은 심방도 잘하고 교회 봉사도 잘 하는데 그 며느리 가풍이 사납데, 그래서 첫 며느리는 쫓겨갔는데 둘째로 온 며느리가 견디어 낼는지 모르겠어.
이런 고부간도 있는데 어떻게 나오미와 룻은 이토록 정이 깊어졌습니까? 나오미가 좋은 시어머니가 되어서 그렇습니까? 혹은 룻이 좋은 며느리가 되어서 그렇습니까?
물론 둘 다 좋은 분이기에 그렇지요. 그러나 차례를 정하자고 하면 먼저 나오미를 칭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시어머니가 있으니 이런 며느리가 잇게 된 것이 아닙니까?
오늘 어머니 주일에 시어머니 되시는 분들은 나오미와 같은 시어머니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며느리 되시는 분들은 다 룻과 같은 며느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오미가 룻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며느리의 사정을 얼마나 알아주었습니까? 거저 며느리의 최선을 항상 생각하고 도우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런 시어머니들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또 며느리 되는 룻이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얼마나 시어머니를 존경했습니까. 늙은 시어머니의 그 고독한 정을 얼마나 잘 살폈습니까.
이런 며느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을 삼사 형제씩 낳은 것은 좋지마는 낳는 대로 시어머니에게만 떠맡기지 맙시다. 나이 많으면 오금이 아픈 사정도 좀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아이들에게만 사다 주지 말고 시어머니께도 사다 대접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이는 늙어도 입맛은 변치 않습니다.
좋은 새 옷감이 나오게 되면 나만 먼저 사다 입지 말고 늙은 시어머님에게도 좋은 옷감을 사다가 좋은 옷을 해 올리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늙어도 새 옷들은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룻이 이렇게 끝까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게 된 것은 사랑과 인정뿐이 아니고 한 가지 요소가 더 있습니다.
곧 그의 관념이올시다. 결혼은 부부일신을 의미합니다. 남편은 부모를 보양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만일 죽으면 그 며느리가 남편의 책임을 지는 것이 의리요 마땅히 할 일입니다.
룻의 중심에는 이런 의리 관념이 있는 것입니다. 고로 룻은 외로운 어머니를 떠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동양에는 유명한 진 효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진나라 땅에 어떤 여자가 출가를 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 남편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먼 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가면서 하는 말이 내가 먼 나라에, 위험한 곳엘 가는데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은즉 내 늙은 어머니를 잘 공양해 주시오 하고 부탁합니다.
이 젊은 부인은 약속을 했습니다. 그 후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친정 식구들이 와서 너 그렇게 기다릴 것이 뭐냐 어서 집에 돌아왔다가 다시 시집을 가라고 합니다.
그 때에 이 여자가 하는 말이 남편 대신에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것은 의(義)요, 남편과 약속을 지키는 것은 신(信), 믿을 신자, 사람이 의리와 신의를 버리면 사람이라고 할 것이 뭡니까? 부모님이 정 그러시다 면 나는 이 자리에서 죽겠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는 더 권면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젊은 여자가 나이 많은 시어머니를 종신토록 잘 모셨다고 합니다.
그 뒤에 나라에 알리는 바가 되어서 천자가 큰 효부의 표창을 했다고 합니다.
고부간에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부부간에도 의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전에도 이런 얘기를 한 줄로 알지마는 미국에 있을 때 폐가 약하여 알바벌드란 요양원에 二년 동안 있을 때에 어떤 젊은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 원장의 비서인데 그이의 얘기를 듣고 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분은 원래 대학을 졸업하면서 어떤 남자와 약혼이 되었어요. 그 남자는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동안에 폐가 약해졌어요. 그러니까 공부를 못하고 알바벌드 요양원에 왔습니다.
그러자 약혼한 이 여자는 약혼자를 따라 멀리서 저 버지아란 곳에서 살았는데 알바버드까지 와서 원장의 비서로 취직하여 남편의 병을 보살펴 주었습니다. 오래 애썼으나 낫지를 않습니다.
그 때는 지금처럼 좋은 약이 없던 때입니다. 아무리 보아야 세상에 살 희망이 안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그 곳 목사에게 가서 내가 병석에 있는 환자와 결혼할 터이니 주례를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목사가 처음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나 간절히 원하므로 죽어 가는 환자와 이 여자가 병원의 한방에서 결혼하여 부부가 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정성껏 간호했지마는 그 후 얼마 안돼서 남편이 죽었습니다.
이 부인이 하는 말이 내가 그이와 한번 약속을 했는데 그 남자의 성이라도 계승하려고 결혼했노라고, 미국의 풍속은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와 결혼하면 여자는 남편의 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 뜻입니다. 미세스 벤디벤트라는 유명한 여자입니다.
지금까지 그 병원에서 총무로 일하고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의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가정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 의입니다. 일생의 고락을 함께 하겠노라 는 서약을 헌신처럼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의가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도 이 의가 있어야 합니다. 자녀로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의입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싶지 않으면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합니다. 부자간, 고부간, 우리 가정에 의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이 가정이 이렇게 사랑과 의로 뭉치게 된 또 다른 원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나오미와 룻의 신앙입니다
룻의 말을 들어보세요.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만일 내가 죽음 외에 어머니를 떠날 것이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합니다.』
모압 백성은 원래 그모스라는 우상을 섬기는 백성입니다. 룻도 물론 이런 우상을 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룻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까? 그것은 나오미에게서 전도를 받은 까닭입니다. 나오미는 이미 룻의 마음속에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굳게 심어 놓았습니다.
따라서 그 고부간은 신앙으로 뭉친 가정이 되었습니다. 신앙으로 하나가 된 가정입니다.
여러분, 마음으로 대답해 보세요. 여러 시어머니들 가운데 며느리를 전도해서 믿게 한 분들이 몇 분이나 됩니까?
어떤 권찰님이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갔는데 그 가정의 시어머니는 잘 믿는데 자부는 예배당엘 나오지 않아요. 마침 시어머니는 없고 예배당엘 안 나오는데 자부만 있으니까 자부더러 예배당에 나오라고 권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자부가 얼른 대답하는 말이 『아니 요, 우리 시어머니가 나가는 교회는 안 나가요』하더랍니다. 물론 그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참 신앙의 시금석은 가족에게까지 전도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여러 시어머님들, 며느리에게 전도할 수 있습니까?
여러 자부 님들, 시어머니에게 전도할 수 있습니까?
여러 믿는 아내들이여 믿지 않는 남편에게 전도할 수 있습니까?
믿는 남편들이여, 믿지 아니하는 아내에게 전도할 수 있습니까?
믿는 자녀 여러분! 믿지 않는 부모님들이 감화 받으리 만큼 신앙 생활을 바로 합니까?
참 신앙은 가족들에게 참으로 전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말한 대로 나오미와 룻의 가정은 불우한 가정이요, 가난한 가정이요, 고독한 가정입니다. 그러나 이 가정에는 사랑과 의와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환난과 모든 슬픔 그리고 고독도 이기고 돌파해 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 책을 다 읽어보면 하나님은 이 가정을 다른 방면으로 크게 축복했습니다.
룻은 나오미의 친족이 되는 보아스라고 하는 분과 결국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사이에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 아들이 바로 다윗 왕의 조부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고 하니 룻은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할머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기대 이상의 축복을 이런 가정에 하나님께서 더하신 것입니다.
나물을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찐 송아지를 잡아먹으면서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가정은 집이 아닙니다. 집이 큰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크거나 작거나 그 가정에 참된 사랑 의리, 신앙이 있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어떠한 슬픔 어떠한 역경이 닥쳐와도 능히 돌파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맙시다. 변한다고 하니까 무엇이나 변하는 줄로 생각하는 이들이 혹 있는 것 같습니다.
외적 생활, 형식적인 윤리 사상은 혹시 변할 수가 있지마는 가정의 근본적인 기초는 변하지 아니합니다.
사랑, 의리, 믿음은 영원한 우리 가정의 정신적인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一九七0년 五월 十일)


Ⅸ-36 먼저 정신 혁명 ( 마태복음 三장 一-十二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三ㆍ二)

현대에 제일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는 혁명이란 말입니다. 본래 이 말은 정치적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곧 옛 정권을 정복하고 새 정권을 세 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점차로 이 말이 다른 방면에도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가령 산업 혁명이니 문화 혁명이니 과학혁명이니 하는 말을 쓰게 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정신 혁명이라고 사용하게끔 된 것입니다.
이 말의 근본 뜻은 묵은 것을 깨뜨리고 새 것을 세운다고 하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급격한, 또한 전적인 변화를 의미한 것입니다. 정신 방면에서 이 급격한, 전적 변화를 성경은 다음 몇 가지 말로 교훈 하여 주십니다.
첫째는 회개라는 말이올시다. 지금도 읽었지마는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에 제일 먼저 외친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고 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때가 가까웠고,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을 돌이킴을 의미합니다. 곧 과거의 죄악의 생활에서 온전히 돌이켜 새 마음을 가지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 말로는 마음의 혁명 또는 정신 혁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한 성경 가운데서 전적 변화를 지적하는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중생이란 말입니다.
요한 복음 三장 三절에 예수 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를 하실 때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중생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 단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 예수 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면 새로 나야 한다고, 곧 급격한, 전적인 변화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역시 현대 말로는 정신적인, 전적 혁명을 해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또한 셋째로는 성경을 읽어보면 전적인 급격한 변화를 부활이란 말로도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배소 二장 五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하게 하셨다고, 혹은 골로새 三장 一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이것은 영적 부활을 의미합니다. 이전 것은 아주 죽고 새로 다시 사는 것, 또 새 것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도 역시 현대 말로 정신 혁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는 넷째로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고린도 후서 五장 十七절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은 에배소 五장 二十四절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여기에도 온전히 변화해서 새 사람이 되라, 새 마음을 가지라. 역시 현대어로 정신적인 혁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이러한 온전한 변화 곧 혁명을 요구합니다. 세례 요한이 이 정신 혁명의 선구자였고, 우리 주님이 정신 혁명의 선구자요, 사도 바울이 이 정신혁명의 선구자였던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정신 혁명에 대한 교훈을 잠깐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왜 제일 먼저 회개하라고 하였습니까? 왜 제일 먼저 정신적인 혁명을 부르짖은 것입니까? 그것은 천국이 가까운 까닭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천국이 있는 까닭이라고 천국에 들어가려니 아무래도 회개해야 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 혹은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예수 님의 전 교훈이 이 천국에 관한 진리를 중심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우주에는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아니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물질 가운데도 보이는 물질과 보이지 않는 물질이 있습니다. 생물 가운데도 보이는 생물과 안 보이는 생물이 있습니다.
천국은 신령한 나라이므로 보이지는 아니합니다. 그러나 확실히 있습니다. 확실히 있을뿐더러 이 천국은 영원합니다. 사실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 영원합니다. 세상 나라는 보이지마는 사실 보이는 세상 나라는 잠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는 아니 하나 사실은 영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천국의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인간은 이 최고의 목표를 위해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천국은 주님께서 오심으로써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성경에 세례 요한과, 우리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어떤 때에는 중생하고 거듭나라.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 정신 혁명을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깨끗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나라는 불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롭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불의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 졌습니다. 말이 더러워졌고 생각이 더러워졌습니다. 행실이 더러워졌습니다.. 그 심령이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 빠졌습니다. 따라서 그 마음은 온갖 죄책감, 공포감, 공허감으로 차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회개의 길입니다. 중생의 길입니다. 영적 부활의 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길입니다. 현대 말로 말해서 정신 혁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왜 정신 혁명을 해야 합니까? 이 七十년대에 우리 나라의 현실을 직시할 때에 우리는 그 절실한 요구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는 六十년대에 학생 혁명이 있었습니다. 군사 혁명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비교적 정치는 안정되었고 경제는 대체로 순조로이, 좀 기형적인데도 있지마는 발전되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의 말대로 한강변의 기적을 꿈꿀 만큼 되어 가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순조로운 발전을 저해하는 암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부정과 부패올시다. 아파트를 짓기는 짓지마는 몇 달이 안 가서 무너집니다. 인명의 피해를 가져옵니다. 고속도로를 만들기는 만들지마는 한 겨울이 지나면 가운데가 갈라집니다.
한편에 고루 거각(巨閣)의 의리의리한 도둑 촌이 건설되는가 하면 사방 변두리에는 빈민굴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정신혁명이올시다.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회개하여야 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영적으로 부활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새 마음, 새 정신을 가지고 정치도 하고 실업도 경영하고 여러 가지 봉사도 맡아서 하여야 될 것입니다.
한국의 실정을 직시할 때에 우리는 먼저 정신 혁명을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七十년대에 있어서 세계의 현실을 직시할 때에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가 늘 말하는 대로 이 七十년대는 문자 그대로 우주시대입니다. 그렇습니다. 원자 시대입니다. 그렇습니다. 달나라에 사람이 내왕하게 되었습니다. 인공위성이 어지럽게 지구를 돌고 있습니다. 원자력으로 발전을 합니다. 원자력으로 배까지 운항하는 중에 있습니다.
이렇게 七十년대는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능력이 부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용할 수 있는 인간 자신은 어떠합니까? 인간 자신에 어떠한 변화가 있습니까? 슬프게도 옛날 시인의 인간에 대한 솔직한 묘사가 로마서 三장에 있습니다. 현대인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저주와 악독(惡毒)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고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이런 인간의 손에 과학으로 오는 엄청난 능력, 파괴력가지 포함하는 힘이 그 손에 있게 되었으니 이거 얼마나 위험합니까?
이런 七十년대에 가장 시급한 혁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신적 혁명입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인간은 거듭나야 합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부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손으로 새로 지으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十八세기말 불란서에 큰 정치적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임금을 죽이고 대신들을 죽이고 또 정권 때문에 서로 죽여서 큰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이러는 동안에 불란서 인구는 크게 감소되고 국토는 크게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대의 영국을 보면 사회는 몹시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에는 다행히 요한 웨슬리 같은 이가 일어나서 그를 중심 한 큰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남녀 상하를 불구하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일대 정신 혁명으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한 사람의 피 흘림도 없이 사회에서는 부정과 부패가 시정되었고 감옥 제도도 개선이 되며 노예는 해방이 되었고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은 향상이 되어서 건전한 민주사회로 발전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주는 산 교훈입니다. 한국에 요구되는 혁명은 이제 하나밖에 없습니다. 곧 정신적 혁명입니다. 새 사람이 되는 운동입니다.
바로 지난 주일에 미국에서 오신 어떤 손님 가운데 의자에 앉아서만 사는 그러면서도 세계를 일주하는 분이 여기 와서 우리와 같이 예배에 참석을 했고 예배 후에 저는 잠시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 분을 일찍이 소아마비 병으로 하체가 마비되어서 의자에 앉아서 사는데 그가 몇 해 전에 예수 님을 알게 되고 그를 온전히 구주로 삼은 다음부터는 새 사람이 되었노라고 간증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 간증을 로마에 들렸을 때는 로마 교황에게도 했노라고 그러면서 자기가 항상 외는 성경 구절이 있는데 외우겠노라고 하며 외는 성경 절은 갈라디아 二장 二十절이었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기억하십니까? 제가 읽을 때에 들어보세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그는 이것을 외울 때 자기 가슴을 가리켰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고.『이제 내가 육신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에서 사는 것이라』했습니다.
그는 비록 부자유한 몸이지마는 기쁨이 충만해서 본국에서는 사업도 잘하고 세계를 여행하며 가는 곳마다 자기의 신앙을 간증합니다.
그 사람을 만나 본 후에 내게 들어온 감상은 이러했습니다. 저렇게 마비된 실업인도 주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서 저렇게 기쁘고 참 모범 되게 살거든 하물며 마비 안 된 건강한 실업인 들이 다 주를 믿어서 새 사람이 되면 얼마나 그들도 행복 되며 우리 사회가 명랑해지겠는가? 개인으로도 사회로도 먼저 할 것은 정신 혁명입니다. 회개 운동입니다. 중생 운동입니다. 영적 부활 운동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먼저 누구로부터 시작할 것입니까? 각각 나로부터 시작해야 할 운동입니다.
성경에 보면 양 무리도, 양의 우리 안에 있는 양도 있고 밖에서 잃어진 양이 있습니다. 인간의 두 그룹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지혜 있는 처녀들이 있고 미련한 처녀들이 있습니다. 면양 편에 서있는 의인들이 있고 산양 편에 서 있는 불의 한 이들이 있습니다. 빛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두움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고 마귀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 두 그룹 가운데 어느 그룹에 속하는가, 한 분이라도 아직까지 어두움에 속하는 이가 있습니까? 그러면 내가 먼저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내가 먼저 영적으로 부활해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히 진지하게 내 죄를 자복하고 내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면 성령께서 이 역사를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내 자신의 중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대부분이 빛 가운데 있는 줄로 압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줄 압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제일 먼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정신 혁명 운동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았으니 다른 사람도 구원하여야 할 것이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신 혁명의 십자군에 입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요새 신문에 보면 병역 기피자를 굉장히 색출해 냈어요. 우리 하나님 나라의 병역 기피자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만일 정신 혁명에 입대했다고 할 것이면 먼저 어디서 시작할 것입니까? 먼저 가까운 데서 시작하여야 합니다. 내 가족 가운데 아직도 주를 모르는 자가 있으면 거기서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내 친척 가운데, 그 다음엔 내 친구 가운데, 그 다음에는 나와 같은 직장 가운데, 먼저 가까운 데서 시작하여야 되겠습니다.
먼저 내 자신이 정식 혁명을 하고 이 정신 혁명의 십자군에 입대를 하고 다음에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저 이 정신 혁명 운동을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一九七0년 五월 二十四일)


Ⅸ-37 산 믿음 (마가복음 二장 一-十二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二·五)

가버나움에서 된 일입니다. 아마 베드로의 집에서 된 일인 줄 압니다. 예수 님께서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시매 많은 사람들이 구름 모이듯 몰려와서 문 앞에도 용신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여 졌습니다.
그 때에 마침 어떤 사람들 넷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메고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문으로는 도저히 들어올 길이 없습니다. 생각하다 못해서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유대 사람들의 집 짓는 법은 우리와 조금 달라서 그 곳은 비가 적게 오는 관계로 지붕을 평평하게 만듭니다. 지붕 위에 많이 올라가 사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평평한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중풍 병자를 달아매어 내려서 예수 님 앞에 갔다 놓았습니다. 예수 님께서 아무런 꾸지람도 하지 아니하시고 성경에 있는 대로 환자를 메고 온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환자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병까지 온전히 고쳐 주신 것입니다.
오늘아침 특별히 생각하려는 것은 저희의 믿음, 이 중풍 병자를 메고 온 이들의 믿음을 잠깐 묵상하고자 합니다.
야고보는 일직이 말씀하시기를 영혼이 없으면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 가운데는 죽은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믿음은 산 믿음이올시다.
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서 생생한 산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저희들의 믿음을 잠깐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그들의 믿음을 생각할 때에 그들의 믿음의 내용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님께 대해서, 예수 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 곧 구주인 줄로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들은 예수 님은 능력이 많아서 능히 어떤 병도 고칠 수 있고, 예수 님은 사랑이 많아서 모든 환자를 불쌍히 여겨서 영접하시는 줄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비교적 그 신앙의 내용은 이렇게 단순한 것인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믿음을 예수 님께서 축복하여 주신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닙니다. 그 내용은 단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내용이 오늘 아침에 우리가 읽었지마는 사도신경에 다 요약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우리는 그의 아들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믿습니다. 거룩한 공회 곧 교회를 믿습니다. 성도의 교통 곧 교제를 믿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는 것을 믿고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그 전체가 말하자면 간단합니다.
이 사도신경 가운데도 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약간 설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성신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으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러나 사흘만에 다시 사셨으며 승천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그이는 반드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고 말씀하신 것이올시다. 그러므로 누구나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반드시 신학자가 되어야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새로 믿는 이도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새로 믿는 이도 예수를 이 만큼만 알면 전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생각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이와 같이 단순했지마는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그들의 예수 님께 대한 믿음은 확실했다는 사실입니다. 철저하였습니다. 조금도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그 많은 수고를 하면서, 멀리서 중풍병자를 메고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단순하나 철저했습니다.
믿음의 장인 히브리 十一장을 보면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장차 바라는 것을 실상처럼 생각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생각하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조금 내려가 보면 모세의 믿음을 설명할 때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모든 것을 참았다고 고 했습니다. 모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시지마는 보는 것 같이 곡 느껴졌습니다. 이 하나님을 꼭 의지하고 만난(萬難)을 이기면서 자기 민족을 보이는 바로 왕 앞에서 구원해 낸 것입니다.
이렇게 중풍 병자를 메고 온 그들은 예수 께서 이 병자를 그에게 데리고 가기만 하면 고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의심 없이 믿은 것이올시다.
한 번은 어떤 소경이 예수 께 와서 보게 해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예수 님께서 오히려 반문을 하십니다.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줄 네가 믿느냐 할 때에『예 내가 믿습니다.』예수 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네 믿음대로 되어라.』
이것이 산 믿음입니다. 지금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아니하십니다. 예수께 나오면 어떤 죄인이라도 지금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너희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다면 능히 산을 옮길 수 있다』고. 겨자씨 한 알처럼 믿음이 비록 작고 단순할지라도 그 믿음이 산 믿음이라면 그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이올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에 디모데 후서 一장 十二절에『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하노라.』 이 확신이 필요합니다. 산 믿음이란 의심 없는 철저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의 찬송가 가운데『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내가 밝히 알 도다』 혹은 옛날 번역대로『내가 확실히 아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를 확실히 알고 철저히 믿는 믿음이 산 믿음으로서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에 대한 이들의 산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사랑과 동정심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예수 님인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중풍병 환자가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불행 가운데 있습니다. 이를 볼 때에 이들은 불상한 마음이 불같이 일어난 것입니다.
신앙을 통해서 위로 옳은 관계를 맺은 이는 아래로 사람과 옳은 관계를 맺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자비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일찍이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하였습니다. 혹은 예루살렘 성을 감람산에서 내려다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며 탄식을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이는 이런 그리스도의 눈으로 모든 사람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가난한 이들, 외로운 이들, 병난 사람들, 사회에 버림받은 사람들, 죄인들, 이런 눈, 이런 마음이 결국은 알버트 슈바이처 같은 사람을 고국을 떠나서 멀리 아프리카에 가서 그 밀림지대에서 일생을 바쳐 흑인의 병을 고쳐 주게끔 만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눈, 이와 같은 마음이 윌리엄 케리와 같은 사람을 움직여서 제일 먼저 인도로 가서 일생을 그 곳에서 갖은 고생을 무릅쓰고 복음을 증거 하게 한 것입니다.
몇 해전 제가 미국을 여행할 때에 어떤 사람을 만나서 얘기하는 가운데 피얼스 박사의 얘기가 나옵니다.
그 분의 말이 이 피얼스 박사는 한국을 위해서 마음이 깨어진 사람이라고, 부로큰 하아트 맨(Broken hearth man)이라고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많이 기억하실 줄 압니다. 바로 六·二五 나기 서너 달 전에 서울에서 큰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다 六·二五가 났습니다. 그러자 종군 기자가 되어서 한국에 다시 나와서 피난민의 그 참혹한 형편과 전쟁 고아들과 전쟁 미망인들과 그 모든 폐허 가운데서 허덕이는 한국의 사정을 실제로 목도한 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 그의 마음은 문자 그대로 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한국을 위하여 여러분의 마음이 깨어져 본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가족끼리도 마음놓고 말할 수가 없는 전혀 자유가 없는 북한 동포를 향해서 마음이 깨어져 본 일이 있습니까? 고아들과 무의무탁한 노인들과 미망인들을 보고 마음이 깨어져 본 일이 있습니까? 우리 사회 안에 소위 부정과 부패와 아파트 붕괴 사전 등등, 이런 것들로 인하여 마음이 깨어져 본 일이 있습니까?
우리가 사실 예수 님을 알고 그의 눈으로 우리의 현실을 본다고 하면 실로 우리 마음이 깨어질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닐 줄 압니다.
산 믿음을 가진 이는 예수 님의 눈으로 모든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아직도 주님을 모르고 죄악 가운데 허덕이는 동포를 볼 때에 자연히 마음이 깨어질 것입니다.
넷째로 이런 마음은 항상 상심 중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행동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같이 메고 예수 님께 왔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마음은 봉사와 협력의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예수 님께 데려 오기 위해서 문자 그대로 어깨를 들이대었습니다. 메고 왔습니다. 헌신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메고 오기 위해서 발걸음을 하나씩 하나씩 맞춘 것입니다. 협력했습니다.
산 믿음은 이렇게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는 지적하였습니다.
너희가 입을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내버려둔다고 하면 너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는 지적하였습니다.
피얼스 박사의 믿음도 한국을 위해서 마음만 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一九五一년에 와인홀날릭이란 곳에서 피얼스 박사를 다시 만났을 때 저를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나는 이 앞으로 한국의 고아들과 이런 이들을 위해서 사업을 일으킵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명회가 조직되었고 고아 구호 사업을 시작하게된 것이고 지금까지 수만 명의 고아를 보호하는 중에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모자들을 도와주고 많은 의료 사업을 시작해서 많은 문둥이를 고쳐주고 많은 고아들을 치료하는 중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 처음 가니 사방에 우상이 가득합니다.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단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볼 때에 마음이 안타까워졌습니다. 마음이 깨어졌습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분격해서 거리를 헤매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파하고 마지막에는 아레오바고 산에 가서 많은 무리를 모아 놓고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사회에 온갖 죄악을 보고 마음이 깨어진다고 하면 우리 민족의 정신 혁명을 위해서 담대히 복음을 전파할 것입니다.
이 정신 혁명 운동에 협력할 것입니다. 이 민족적 갱신을 위해서 같이 어깨를 들여 댈 것입니다. 협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렇게 가버나움의 환자를 메고 왔지마는 정작 메고 와 보니 문밖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예수 님 앞으로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낙심하고 이젠 할 수 없구먼 하고 돌아갔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생각했습니다. 연구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지붕이라도 뚫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험적 행동입니다. 이들의 견인력, 독창성, 만 난을 돌파하는 용기가 여기 있습니다. 한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찾았습니다. 목적을 관찰하기까지 꾸준히 노력하였습니다. 계속해서 노력하였습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속담 가운데 열 번 찍어서 넘어지지 않는 나무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석수가 바위를 깨뜨릴 때에 망치로 한번 처서 안되면 그만 둡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치고, 두 번 치고 세 번 치고, 깨어질 때까지 계속 치는 것입니다. 결국은 큰 바위라도 깨어져 나갑니다.
전도에도 이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한번 가고, 두 번 가고, 세 번 가고, 열 번 가고, 한번 권하고, 두 번 권하고, 세 번 권하고 열 번까지라도 권할 수 있는 전도에 이런 지구력 있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을 때에 한번 빙 둘러보고 보이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못 찾겠다고 돌아왔습니까? 아닙니다. 찾을 때까지 산과 들을 헤매었습니다. 밤과 낮을 불구하고 찾아 다녔습니다. 마지막에는 찾고야 만 것입니다.
산 믿음은 이런 전도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이번에 대구 집회를 가만히 볼 때에 특별히 감사한 바가 많습니다. 연합 집회니까 여러 교회에서 전도하기 위해서 아주 힘을 씁니다. 특별히 그 가운데 한 교회, 대구 남산교회, 四~五00 명밖에는 모이지 못하는 교회인데 온 교우가 열심히 전도를 하는데 나흘 저녁에 통계를 보니 八00여 명을 그 교회 교인들이 인도를 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사람 이상의 노력을 했습니다.
거기 백 장로라는 분이 저를 초대해서 많은 음식 대접을 받았는데 그는 매우 바쁜 의사입니다. 그 분 자신이 다섯 사람을 인도했다고 그럽니다. 내가 그 후 조 목사님을 만나서 어떻게 해서 당신 네 교회는 그렇게 전도 집회에 전도를 많이 했느냐고 물어보니『우리는 전도집회 하기 열흘 전에 권찰회를 열고 세 사람 이상씩 전도하기로 약속을 했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이상으로 결과가 됐다고 합니다. 여섯 집회를 다 합하면 아마 이 교회에서는 一천여 명 이상 현재 모이는 교인의 二배 이상의 새 신자를 얻은 모양입니다. 이와 같은 정신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중풍병자를 예수 님 앞에 달아 내리니 예수 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단순하나 철저한 그 믿음, 환자를 불쌍히 여기는 그 믿음, 행동으로 옮겨 끝까지 관철하고자 하는 그 믿음을 보시고 먼저 그 환자의 죄를 용서해서 영혼을 구원해 주시고 다음에는 병을 고쳐서 육신까지 고치신 것이올시다.
여러분, 어떻게 보면 우리 한국은 한 중풍병자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중한 병으로 신음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환자를 주님 앞으로 인도만 하면 능히 고침을 받을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이 일은 한 두 사람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모든 믿는 사람의 힘을 합력 해야 할 것입니다. 협력이 필요합니다.
예수 님께서는 먼저 죄를 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정신 혁명을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정신적 축복만 아닙니다. 모든 다른 방면의 축복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몇 주일 전에 제가 말씀 드린 대로 十八세기에 영국에 요한 웨슬리 란 사람을 중심으로 온 영국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더니 정신적으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해 주셨을 뿐더러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모든 방면으로 크신 축복을 더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큰 목적으로 七十년대 정신 혁명의 전도 대회를 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산 믿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이 일을 위해서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협력해야 되겠습니다. 이 정신 혁명 대열에 참가해야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구체적으로 할 것 세 가지만 부탁합니다.
첫째는 이 정신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 서울 전도대회를 위해서 하루에 적어도 두 번 이상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할 수 있으면 새벽 기도에 나와서 한 번은 기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번 대구 집회도 보니까 제일교회가 가득 모입니다. 一천여 명이 모입니다. 아주 열심히 기도를 하니까 열매도 많았습니다.
둘째로는 二十五년 이래의 특별한 모임이므로 내 자신이 꼭 매일 적어도 저녁 예배는 참석하도록 힘을 쓰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이번 기회에 정신 혁명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서 적어도 한 사람 이상씩 인도해서 저녁 예배에 같이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과연 산 믿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 영락 교회가 二十五년간이나 장성했으니 이제는 열매를 맺을 때입니다. 정신 혁명의 새로운 기풍을 일으킬만한 영락교회로 장성한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一九七0년 六월 七일)


Ⅸ-38 과학 시대와 정신 혁명 (고린도 후서 五장 十七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五·十七)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온전히 그리스도께 몸과 마음을 바치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요 새롭게 지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가 하나님의 지음을 받아서 우리의 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성이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새로 지어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전 것은 온전히 지나가고 새 것이 됩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져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새 사람이 되는 비결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 받으신 순서지 에 있는 대로 이 시간에는 신앙 강좌로서 큰 제목을 七十년대의 크리스천, 혹은 기독인 이란 제목 아래서 몇 가지를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七十년대의 그리스도인의 자세」라 생각하는 것이 더 분명할 줄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급 一九七0년, 七十년대에 살고 있습니다. 시대는 나날이 변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변하여지는 七十년대의 상황 아래에서 우리가 옳은 생활을 하고 이런 시대에서 우리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사회를 봉사하며 사회 안에서 빛과 소금의 직책을 다하려고 하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몇 가지 있고 반드시 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는 것입니다.
전에 제네바에서 존 칼빈 선생이 교회를 인도할 때에, 그 때에는 주일날만 성경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칼빈 선생이 주일날 이외에도 성경을 항상 계속해서 가르쳤습니다. 성경 진리와 그 시대의 신앙과의 관계에 대해서 항상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이 있게 되었는고 하니 제네바에 있는 교인들은 그 모든 성경에 관한 지식과 일반 상식이 당시의 구교의 주교나 신부보다도 낫다고 하는 말이 돌아갔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시대에 살면서 신앙과 진리에 관해서는 물론이고 일반상식에 대해서도 일반 모든 다른 동포들보다 뛰어나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은 특별히 과학 혁명과 정신 혁명이란 제목 아래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우주 시대라 말합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사람이 우주를 여행하는 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주를 바라보고 연구하는 시대입니다. 혹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원자 시대라고도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인간이 물질을 분석할 줄을 알아서 원자까지 분해해서 그 핵의 힘을 이용하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원자력으로 전기를 발전시키기도 하고 또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원자탄도 만들게 된 까닭입니다.
혹은 어떤 이는 이 시대를 컴퓨터 시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옛날 같으면 동양에서 기껏해야 주산을 가지고 계산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자를 이용해서 사람의 머리로는 얼른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컴퓨터라는 전자 계산기를 통해서 계산하는 까닭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우리가 사는 시대를 말하지마는 결국은 한 가지 말입니다. 어떻게 우주 시대가 되었느냐, 어떻게 원자 시대가 되었느냐, 어떻게 컴퓨터 시대가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과학의 발전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시대는 과학 시대입니다. 과학 혁명 시대입니다.
혁명이라고 하는 말은 급격한 변천을 의미합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서 우리 생활은 급격한 많은 변천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대에 사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과학에 대한 이해를 옳게 가져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그래야 이런 시대에서 복음을 바로 전파하고, 이런 시대에서 우리가 사회를 바로 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특별히 이런 면을 생각해서 七0년대에 사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과학 시대를 살게 되는데 여기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줄 생각해서 이 문제를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문제는 과학에 대한 공부가 전혀 없는 분들에게는 얼른 이해하기가 어려운 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식으로 반드시 알아야 할 문제들을 생각하고자 하니 주의 깊게 들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 먼저 잠깐 생각할 것은 과학이 인간의 생활에 얼마나 큰 변천을 가져왔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잘 목도하는 것입니다.
가령 교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세요. 과학이 발전되지 못했을 때는 어디 가려고 하면 거의 걸어갔습니다. 조금 잘 사는 사람이래야 말 타고 갔습니다. 조금 더 잘 사하는 사람은 마차를 타고 갔습니다. 혹은 부자들은 교자 타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다닙니까? 자동차를 타고 얼마나 빨리 다닙니까. 기차도 타고 비행기도 타고, 비행기 가운데도 이제는 좀 멀리 가려고 하면 제트기를 타고 갑니다.
오래지 않아서 보통 사람도 우주선을 탈 날이 올 것입니다.
말하자면 과학을 통해서 교통에 혁명이 왔습니다. 교통혁명이올시다. 큰 변천을 가져왔습니다.
그것뿐일까요. 통신에 대해 보세요. 옛날은 누구에게 편지를 전하려고 하면 다른 길이 없었어요. 우편 제도가 없었으니까 그저 편지를 써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 편지를 갔다가 올리는 그 길밖에는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약 가운데서 고린도 전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이런 편지들을 사도 바울이 여러 교회에 보냈는데 거의 다 어떻게 보낸 줄 압니까? 우편으로 붙인 줄 압니까? 친 편에 다 보냈습니다.
그 곳에 가기까지 아마 한달 여 허비한 데도 여러 곳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세요 지금 편지를 붙이려면 비행기로 붙이면 얼마나 빨리 갑니까? 그러나 그뿐입니까. 전보가 있지 않습니까. 전에는 서울 가까운데 나 전화했지만 지금은 미국에 척 불러도 서울 안에서 하는 것처럼 가까이 드립니다.
이제는 인공 위성을 통해서 이용하게 되니까 전에 보다 퍽 편리하게 됐습니다. 참, 통신 혁명이 됐습니다.
뭐 그것뿐이 아닙니다. 가령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보통으로 말하는 대로 매스컴 시대라, 매스 커뮤니케이션 시대라 말합니다.
그것은 옛날은 한 사람이 여러 사람에게 말하려면 거저 목소리가 커야 많은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十七세기에 영국에서 제일 유명한 설교가 스펄존 같은 분은 매주일 약 六천명의 교인을 한 예배당에 모아 놓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확성기가 있어서 한 줄로 압니까. 육성으로 했습니다.
본래 그 분은 음성이 좋았습니다. 사실 지금 이렇게 확성기가 있기에 말이지 제가 이렇게 나지막한 소리로 하는 이 말을 확성기가 없이 한다면 저 끝에서 들릴 것 같습니까? 안 들릴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방안뿐입니까. 라디오란 것이 있어서 전국에 일시에 말할 수도 있고 세계적으로 연결하기만 하면 여러 천만 명에게 한꺼번에 말할 수 있는 이런 시대가 된 것이 아닙니까.
뭐 음성만 듣는 시대입니까. 텔레비전에서는 말하는 이의 얼굴까지 보는 시대가 아닙니까. 우리 나라에는 아직 컬러 텔레비전이 안 들어왔습니다. 그 천연색 텔레비전이 아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천연색 텔레비전이다 나옵니다. 옷은 무슨 빛깔을 입었는지 모두 다 보입니다. 입술에 새빨갛게 바른 것 그대로 다 나옵니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매스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또 그뿐인가요. 지금 사는 시대를 대량 생산 시대라고 그러치 않습니까.
전에는 천을 짠대야 집안에 베틀을 놓고 거저 여자 한 분이, 폭 넓이도 얼마 안돼는 것을 짰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렇게 짭디까? 여러분 방직회사에 가 봤지요. 얼마나 넓게 짜며 사람은 옆에 가만 서 있기만 합니다. 직공들은 옆에 서서 구경합니다. 누가 짜는고 하니 기계가 저 혼자 짭니다. 그래서 이 방직 기계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이후 영국에서 소위 산업 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산업으로 크게 변천이 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과학으로 인해서 인간 생활이 큰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한 가지 결과는 뭡니까. 세계에 먼 곳이 없게 됐어요. 지금은 급한 일이 있어서 꼭 가야할 일이 있으면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서 거저 二十四 시간 이내에 세계 어디나 갈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평양엔 아직 못 가지요. 하지만 어디나 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제 주일날, 우리 교회서 二부 예배를 보고 이 아래층에 내려가서 미국에서 온 손님들을 잠깐 만났는데 어제 아마 四十명 온 것 같아요. 미국에서 온 사람이 많은 건 말할 것도 없고요, 홍콩에서도 손님이 왔지요. 대만에서도 오고 비율빈에서도 손님이 왔습니다. 내가 얼른 인사해도 네 나라 사람이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를 같이 봤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이 二十년, 三十년 전에 있을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까? 지금은 이렇게 먼 곳 가까운 곳이 없어지게 되었어요. 세계가 한 집안이 됐습니다. 전에는 큰 강만 하나 있어도 아주 멀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이 있습니까. 격강천리(隔江千里)라고, 강 하나만 있으면 천리만큼 멀다고 했습니다. 사실 배 없으면 못 가니까 만리지요.
그러나 지금은 강이 문제입니까. 비행기 타고 다니는데.
전에는 큰 산맥만 하나 있어도 그것이 국경이 됐습니다. 만주와 우리 나라와 국경이 된 것은 백두산이 가운데 있고 두만강 압록강이 있어서 국경이 됐습니다.
지금은 높은 산, 그게 문제입니까? 제가 역사책을 보니 알프스 산을 넘어 다닌 사람이 얼마 안됩니다.
역사상으로 알프스 산을 넘은 대장들이 몇 사람 있지요. 군대들을 데리고 넘은 카르 타고의 유명한 한니발 장군 같은 분들, 그 다음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를 정복한 일이 있지요.
옛날에는 알프스 산 넘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알프스 산이 문제입니까? 이렇게 약한 사람도 비행기 타고 알프스산 꼭대기 위로 대여섯 번 넘어 다녀 보았습니다.
거 알프스 산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 이만큼 우리 인간 생활에 변천을 가져옵니다.
또 이 과학 시대의 생활에 한 가지 현상은 자연히 상업과 공업이 발전되니까, 농촌에서 사람들이 도시로 계속해서 집중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잘 압니다. 서울이 五백만이 넘었습니다. 대구도 내가 이번에 내려가 보니까 백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부산이 一百 二十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대도시로 사람들이 집중이 됩니다. 이런 모든 문제는 인간 생활의 변천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여러 가지 문제도 가져온 것입니다.
이렇게 과학이 여러 가지 면으로 인간 생활에 큰 변혁을 가져오게 되니 자연히 학생들도 무슨 인문 계통보다는 자연 계통을 많이 배우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아마 한국의 대학도 공과대학 들어가기가 더 어려운 모양입니다. 옛날에는 인문 계통에 공부하는 이들이 많더니, 지금은 과학을 배워야만 된다고 하면서 물리니 화학이니 무슨 전기학이니 원자 학이니 해서 거저 과학에 대해서 젊은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려고 애쓰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한국적인 사정에서 좋은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과학이 큰 영향을 주니 과학에 대한 오해를 가지는 사람도 점점 많게 되었습니다.
가령, 이렇게 과학이 여러 가지 면에서 인간 생활에 큰 변혁을 가져오니 어떤 사람은 무슨 말을 더러 하게 되는고 하니『아 지금은 과학 시대야. 과학만능이야. 과학이면 못할 것 없어』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게 됐습니다.
자, 여러분 그건 너무 도에 지나치는 생각이요, 과학에 중독이 된 사상입니다. 과학이 여러 가지로 하는 것이 많지마는 과학은 만능은 아닙니다.
또 과학을 치중하는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과학적으로 실증할 수 없는 진리는 믿을 수 없어, 진리라고 할 것이면 실험실에서 증명할 수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심지어는 무슨 얘기까지 나오게 되는 고 하니 전에 후루시초프 같은 사람은 『아 우리 소련 사람들이 인공위성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서 빙빙 돌아다녀 봐도 하나님을 못보고 내려왔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 이런 소리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됐습니다. 망원경을 끼고 아무리 하늘을 쳐다봐야 하나님은 안 보이니 하나님 계신지 안 계신지 알 것 뭐 있나.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또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고 살아야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소위 과학으로 말미암아 중독 된 사람들입니다.
과학만 잘 발전시키면 사람은 잘 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十九세기 말엽에 이런 사상이 팽대(膨大)해서 소위 유토피아 사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유토피아란 말은 이상향(理想鄕)이란 뜻입니다. 거저 과학이 발전돼서 세상이 변하게 되면 세상은 유토피아가 된다고 합니다. 싸움 안하고 살고, 돈 없어도 살고, 돈 없이 공부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공상적 사회주의가 이후에 사실상 공산주의를 낳았습니다. 이런 사상이 생기게 됩니다. 자 그러니 여러분, 과학이 아주 필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중독이 되어서, 바른 면을, 보다 더 중요한 면을 잃어버리는 시대에 우리가 살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 사는 우리로서는 과학과 신앙과의 관계를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자, 먼저 과학의 제한성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과학은 만능이 아니고 과학에도 제한이 있습니다. 제한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과학이란 것은 우주에 있어서 물질을 연구해서 물질 하나 하나의 성품을 연구하고 알아내고 그 물질에 운용되는 소위 자연법칙을 발견해 내고 물질 사이에 운행되는 법칙을 깨달아서 그 법칙과 지식을 가지고 인간 생활에 필요한 새 것을 만들어 내서 우리 인간들에게 혜택을 주는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가령 이 우주 전체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으며 이 물질 전체의 뜻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겼으며 무슨 목적으로 존재하며 이 우주의 궁극적 운명이 어떻게 되었나? 하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과학이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그건 과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과학의 영역은 물질 자체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가령 천문학 할 것이면 별 하나 하나의 형편을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습니다. 그 별이 얼마나 큰지 알려 줄 수 있습니다. 우리 지구와 얼마나 먼지 알려 줄 수 있습니다. 그 별이 얼마나 빨리 궤도를 돌아가는지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습니다. 그 별이 자전도 하고 공전도 하는지 이런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별들이 어떻게 되어서 있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과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이것은 종교의 영역입니다. 신앙의 영역입니다.
성경은 이런 우주의 전체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창세기 一장 一절에『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다』라고 우리에게 교훈 하여 주시는 것이올시다.
우주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과학이 인간에 대한 많은 지식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가령 과학적으로 인간을 연구하는 사람은 우선 생리학적으로 인간을 연구합니다. 그래서 우리 육체 안의 모든 기관이 어떠하고, 혈액이 어떻게 순환하고 간장은 무슨 역할을 하고, 폐장은 무슨 역할을 하고, 세포 조직이 어떻게 되었고, 신경 계통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 모든 것을 다 분석하고 해부해서는 우리에게 과학이 보고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 전체입니까?
인간이 어디서 왔으며 무엇 하러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인간이 단순히 육신뿐인지, 이 속에 영원한 불멸의 영혼이 있는지? 이런 문제에 대해서 과학이 무슨 말을 합니까? 아니올시다. 과학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함구합니다. 입을 다뭅니다. 우리는 그 문제를 모릅니다. 그것은 종교와 신앙의 영역입니다. 과학의 영역은 아닙니다.
이렇게 과학은 그 영역이 제한돼 있습니다. 주후 六세기와 七세기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영국 본토에 전파될 때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지요.
그 때 영국 남방에 조그만 나라들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나라, 아마 노오던불리아란 나라 같습니다. 이 나라에 어떤 기독교 선교사가 가서 전도를 합니다.
왕에게 가서 예수를 믿으라고 권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왕이 가만 들어보니 좋은 말이 많은데 자기 혼자 결정할 수가 없어서 하루 저녁은 모든 그 나라의 유력한 인물과 대신들을 초청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 이거 기독교를 전파하는 선교사가 들어와서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를 믿으면 좋다고 하는데 당신 네 들의 생각은 어떻소? 우리 나라에서 이 종교를 받을 것인지 안 받을 것인지, 토론을 합니다. 밤새도록 토론을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런 얘기를 저런 사람은 저런 얘기를 합니다. 결론이 잘 안 납니다.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불찬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밤이 깊어 가는데 밖에는 비가 옵니다. 소나기가 아주 심하게 옵니다. 캄캄합니다. 방안만 불을 켜 놓아서 아주 밝은데, 여름이니까 문을 열어 놨습니다.
어떤 새가 한 마리 밖에서 날아 들어옵니다. 그 밝은 방을 날아 건너가서는 저편에 문이 열렸는데 그리로 날아 나가 버렸습니다.
그 일이 있은 다음에 늙은 대신 하나가 일어나서 천천히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제 이 새를 보셨지요. 새가 바깥 캄캄한 곳에 있다가 잠깐 밝은 방안에 날아들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시 캄캄한 밖으로 나갔습니다. 자 한편 생각하면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지 않을 까요. 우리가 과거를 모릅니다. 어디서 왔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이라고 하는 밝은 세상에 잠깐 왔습니다. 그러나 얼마 살다가 캄캄한 죽음 속으로 날아갑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들이 전파하는 새 종교인 기독교라고 하는 것이 인간이 과연 어디서 왔으며 또 이 세상에서 떠나갈 때에 어디로 가는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고 하면, 다시 말하면 인생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내 생각으로는 이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대신들도 다 찬성을 했습니다. 『아 들어보니까, 이 새 종교는 그것을 분명히 성경에서 가르쳐 주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여러 나라 가운데서 노오덤불리아란 나라가 제일 먼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는 일화가 교회사에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인생의 깊은 문제에 대해 과학은 무슨 말을 못합니다. 이것은 과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의 영역입니다. 종교의 영역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많아서 전에도 제가 얘기를 한 줄 알지마는 그래도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싶어요.
우선 이 우주에서 되는 모든 일은 제一원인과 제二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가령 비가 어떻게 오느냐? 를 살펴보십시다.
과학자에게 설명하라고 하면 얼른 잘 설명합니다.
비가 왜 옵니까? 비는 달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저 태평양 바다나 강 위에 있던 물들이 따뜻한 햇빛을 받게 되면 수증기가 돼서 다 올라갑니다. 수증기는 가벼우니까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공중에 올라가서는 구름이 됩니다. 빙빙 떠돌아다니다가 찬바람을 만나게 되면 그 수증기가 다시 응고되고 작은 빗방울이 되지요. 그래서 빗방울은 무거우니까 다시 아래로 떨어지게 되지요. 그렇게 해서 비가 옵니다. 과학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 그런데 어떤 학생이 어렸을 때부터 잘 믿는 가정에서 자라났다고 합시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슨 말을 들어 왔는고 하니 비는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비는 하나님께서 주시고 이슬도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늘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학 시간에 선생님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아,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더니 괜한 말이로구먼 주일학교 선생님이 잘못 가르쳤구먼, 아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닌데 뭐 하나님께서 비를 주다니.』이렇게 어떤 학생이 놀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놀랄 일은 아닙니다. 과학은 제二원인을 설명해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제一원인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경은 어떻게 가르쳐 줍니까.
비는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주신다고 가르치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물을 내신 것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물의 성질을 누가 냈습니까. 보통 온도에는 물이요, 좀 뜨거우면 수증기요, 좀더 추워지면 얼음이요, 이렇게 얼음의 성질을 만든 분이 누구입니까.
그것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 지구에 대기의 온도가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 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건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一원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학교에서 과학 선생이 비가 어떻게 온다고 설명하는 것은 제二원인을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 성경이 가르쳐 주는 것은 모든 사물의 제一원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과학적 대답도 옳고 성경의 대답도 옳습니다.
하나는 과학적 대답이요, 하나는 종교적 대답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든 사물에 대해서 제一원인과 제二원인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과학에 대해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과학이 이렇게 인간 생활에 대해서 큰 영향을 주는데 그래도 과학은 인간의 외부 생활에 변천은 가져오지만 인간의 내부 생활의 변천은 과학 자체가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산다고 그 사람이 갑자기 마음이 변해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집에서 가난하게 살던 가정이 큰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고 그 집이 화평하게 됩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가만히 보면 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오히려 큰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 불화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자 그래서 여러분 이런 무서운 얘기를 듣지 않았어요. 몇 해 전 외지에서 본 얘깁니다.
뉴욕에서 한 번은 이발업자 대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도 그런 줄 알지마는 이발업자 조합이 큰 호텔에 모여서 대회를 엽니다. 대회를 하는 중에 이발업자가 미국 사회를 위해서 어떤 공헌을 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연구해 내었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 저 뉴욕의 가난한 사람들과 깡패 많은 빈민굴, 그런데 가서 아주 오래 머리를 못 깎은 사람, 어지러운 사람을 데려다가 이발을 잘 해주자』고 했습니다. 모두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들 해서 아주 어지러운 사람, 길가에서 제집도 없어서 바깥에서 잠자는 사람을 하나 데려다가 먼저 사진을 찍었습니다. 머리가 밤송이 같고 거저 얼굴이 쥐, 고양이 같고, 의복이 너절하고, 뭐 형편 있습니까. 먼저 그 사진을 한 장 찍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발을 했습니다. 잘 머리를 깎고 기름을 바르고 얼굴에는 분을 바르고 그렇게 해놓으니 의복이 너절해 못쓰겠단 말입니다. 그래서 옷도 한 벌 해 주자고 해서 좋은 새 양복을 사다가 입혔단 말입니다.
그리고 세워 놓으니 신사가 됐단 말이요. 얼굴이 번뜻하고 아 멋진 신사가 됐습니다. 그래서 다시 사진을 찍었습니다.
두 사진을 한꺼번에 놓고는 자 이것 보라고, 우리 이발 업자들이 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얼마나 큰 공헌을 하는가. 이렇게 너절한 사람을 변해서 이렇게 신사를 만드는 것이 이발 업자의 공헌이 아니냐고 큰 소리쳤습니다.
그렇게 하고는 무슨 생각을 했는고 하니『이만한 사람을 도로 그 빈민굴 속으로 돌아가서 살라고 할 수는 없으니 직업을 하나 얻어 줍시다. 이만하면 이 사람이 자기 일을 하며 살 것 아니겠소.』그래서 직업을 구하는데 마침 호텔에서 엘리베이터(승강기) 운전할 사람이 필요한 것을 알고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므로 이 사람을 시키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섭을 해서 얻어 주었습니다. 그러고서는 돈을 그 사람한테 넉넉히 주면서『이 돈을 가지고 어디든지 하숙집에 가서 잘 자고 내일 아침 九시에 오시오. 그러면 당신이 여기에 취직을 해서 승강기 운전하는 사람으로 일하게 될 것이고 좋은 사람이 될 터이니 그렇게 하시오.』 그는 감사하다고 하면서 돈을 받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九시가 되어서 이 사람이 오기를 아무리 기다려도 이 사람이 오지를 않았습니다. 아 十시가 되어도 안 옵니다. 이거 이상하다. 十二시가 되어도 안온단 말입니다. 아 이상하다. 어떻게 됐나 찾아봅시다. 여러 사람이 본래 살던 그 마을에 가서 찾습니다. 오후 三-四시쯤 해서 두루 찾다가 어느 거리에서 새 양복을 입고 구석에 쿨쿨 잠자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흔들어 깨워 봤습니다. 어제 왔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술이 잔뜩 취해 가지고 아무리 깨워도 깨어나질 않았습니다.
거 뭐, 얘기 더할 것 없지요. 이 사람은 양복 좋은 것 입고 이발 잘하고 아주 돈까지 가지게 되니 돌아가서는 나쁜 친구들과 밤새도록 술 먹고 도박하고 돈다 잃으니까 잘 데가 없어서 바깥에서 잠잤단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과학이 알겠습니까? 과학이 이 사람 이발해 줄 수 있습니다. 수염을 깎아 줄 수 있습니다. 좋은 양복을 입혀 줄 수 있습니다. 분까지 발라 줄 수 있고 보기에는 번듯한 신사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그렇게 해서 새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람이 먼저 마음이 변해서 새 사람이 되었던들 다시 그런 대로 안 들어갔을 것입니다.
자, 여러분 과학의 제한이 여기 있어요. 과학이 이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지만 기껏해야 사람의 외부의 생활의 변천만 가져왔지 속은 어떻게 할 재간이 없단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사람의 속이 변해서 새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오늘 아침 여러분이 들으신 성경의 말씀『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낸 것은 새 사람을 만들려고 속으로 맘이 변해서 술 먹고 어지럽게 굴던 사람이, 술 먹을 마음이 없어지고 음란하던 사람이, 음란한 마음이 없어지고 속을 변해서 새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예수 님을 보낸 것입니다.
예수 님께 한번 나아와서 온전히 그 마음을 바친 사람이 전적으로 변해서 새 사람이 된 것을 여러분이 많이 보신 줄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과학만 배워서는 부족해요.
경제 발전도 그렇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말할 기회가 있겠지마는 우리 한국이 경제 발전을 위해서 많이 애를 쓰지요.
경제발전을 반드시 해야지요. 그러나 경제 발전만 해서 한국이 바로 사는 줄 생각합니까? 정신혁명이 필요합니다.
정신 혁명은 신앙으로 온단 말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돼야 새 생활을 할 수 있고 새 가정을 이룰 수 있고 새 사회, 새 나라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사는 二十세기의 전 인류가 당면하는 문제가 많은데 그 가운데도 한 마디로 말해서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인지 여러분, 생각해 봤습니까?
저는 몇 해 전부터 많이 생각해 봤고 지금도 가장 심각히 생각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오히려 과학에 의해서 전 인류가 위협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과학이 발전돼서 우리 인간에게는 전에 없던 새 지식이 많아졌고 전에 사용 못하던 새 힘이 그 손에 잡히게 됐고 전에 없던 새 무기가 사람의 손에 잡히게 됐습니다.
가령 옛날에도 전쟁은 있었지요. 그 때는 싸워야 기껏 해서 창 가지고 싸움하고 칼 가지고 활 가지고 싸움을 했어요. 그러니까 싸움을 했대 야 사람이 몇 안 죽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인간의 손에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二차 대전 마지막에 히로시마에 원자탄 하나가 떨어질 때 二十만의 일본 사람이 일시에 몰살했습니다.
지금 미국에다 만들어 놓은 원자탄과 수소탄, 소련에 만들어 놓은 원자탄, 수소탄, 또 영국, 불란서, 이제는 중공에까지 이렇게 많은 무기가 쌓여 있는데, 이 앞으로 어떤 사람이 이런 무기를 함부로 쓰게 되면 이 앞에 전세계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나 큰 문제입니다.
요컨대 무엇인고 하니, 과학의 발전으로서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무기, 참으로 위험한 것이 많이 있게 되었는데 이것을 사용할 사람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악한 사람이 二十세기에는 더 많다는 것입니다.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마는 우리가 다 二十세기에 살지마는 세계의 역사를 내가 읽는 대로 二十세기처럼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계가 없었습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一차 대전에 얼마나 사람이 죽었습니까? 一九一八년 공산당 혁명이 일어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모릅니다.
나치한테 많은 사람이 죽고 나치에게 유대 사람은, 이건 전쟁에 죽은 것이 아니고, 유대 사람이란 명목 아래서 六백만 명이 가스 챠넬에서 학살을 당했습니다. 이런 일은 전에는 없었습니다. 세계 역사에 없었어요. 다른 민족이라고 六백만 명을 한꺼번에 죽였습니다. 二十세기에 말입니다. 二차 대전에 동서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一九四八년에 전 중국이 공산당에게 점령되면서 중국 안에 있던 교육받은 사람, 재산 있던 사람, 믿는 사람들이 몇 천만 명이 죽었는지 하나님만 아십니다.
최근에 북경에 있다 나온 어떤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요 몇 해 안에 중공 안에서 문화혁명이 있을 때에 북경 안에서만, 아마 一백만 명은 죽었을 것이랍니다. 이런 무서운 세상에 삽니다.
지금 방금 북한에서는 밤낮 연구하는 것이 뭡니까? 어떻게 하면 남한을 무력으로 정복해 볼까? 하는 것입니다. 틈만 찾아서 괴롭히려고 듭니다.
이렇게 인간에게 말할 수 없는, 무서운 무기가 손에 잡히게 됐는데 사람의 마음은 순해지지 못하고 악한 그대로 있단 말입니다.
옛날 굴속에 살던 야만의 그 마음, 욕심, 물욕, 정욕, 권세욕, 지배욕, 허영심, 시기, 질투의 죄악이 사람의 마음에 그냥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二十세기의 가장 큰 딜레마는 어떻게 되려는 건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선하게 못 만듭니다. 오직 이런 인간을 파멸에서 구원할 이는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이런 인간의 마음을 선하게 만들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복음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보다 이 시기는 정신 혁명이 가장 필요한 시기입니다.
내 이런 얘기는 언젠가 했을 것입니다.
전에 어떤 과학자가 사람을 만들기 원해서 사방으로 다니며 연구를 해서 사람의 손으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버튼만 누르면 사람이 움직이게 만들어 놓고는 여러 친구들과, 유명한 과학자들, 정치가들, 이 과학자의 친구들을 다 초청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마 축사도 했겠지요. 여러 가지로 예식을 한 다음에 버튼을 눌렀어요. 아 그러니까 사람 만들어 놓은 것이 우물우물합니다. 눈을 번쩍 떱니다. 눈을 굴립니다. 아,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앉습니다. 일어나 섭니다. 보니까 키가 九척이요 또 얼굴을 잘 만들어서 얼굴이 미남으로 생기고 아주 든든한 사람이 됐습니다.
그런데 인공 인간이 어정어정 기어 나옵니다. 과학자와 그의 부인이 서있는 곳까지 어정어정 오더니 손을 번쩍 들어서 다짜고짜로 과학자 부인의 머리를 내려칩니다. 단번에 쓰러져 죽었습니다. 아 그러더니 과학자를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그러니 정치가니 과학자의 친구니 모두가 혼비백산이 돼서 사방으로 도망합니다.
그런데 이 과학자가 사람을 만들기는 만들었는데 한 가지만은 실패를 했다고 그럽니다.
뭔고 하니 그 속에 양심을 못 넣어 주었답니다.
이것은 우스운 얘기지마는 현대 문화의 풍자입니다.
현대 문화가 모든 인간의 외부적인 것은 다 만들지마는 인간 속의 양심은 못 넣어 준다는 말입니다.
과학은 새 사람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우리 한국이 앞으로 계속해서 발전하려고 하면, 통일도 잘 하려고 하면 세 가지 전선에서 승리를 얻어야 합니다.
첫째는 반공 전선입니다. 철저히 공산주의를 막아내야 합니다. 이건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모든 방면으로 반공전선입니다.
둘째는 무엇입니까? 경제 전선입니다.
빈곤에서 우리가 벗어나야 됩니다. 빈곤한 농민들, 빈곤한 노동자들도 다같이 참 문화 생활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높이기 위해서 우리가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과학도 공부하고 경제 발전도 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범죄 하는 사람, 부정과 부패, 이것이 구축이 되어야 합니다.
이 정신적인 방면이 세워지지 않으면 아무리 반공을 잘하려고 해도, 아무리 경제 건설을 하려고 해도, 내부가 썩어서 부정과 부패와 죄악이 많아지면 결국은 나라는 속으로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七十년대에 있어서는 정신 혁명 운동이 가장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온 사회의 지도자들이 이 정신 혁명에 대해서는 누구를 바라보는지 압니까? 우리를 바라봅니다.
믿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사명이 이 七十년대에 사는 크리스천의 사명이요, 우리 민족을 영적으로 구원해서 정신 혁명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내가 먼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적극적으로 한 사람 두 사람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파해서 그 사람들을 새 사람을 만드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새 사람 만드는 운동을 해야 됩니다. 이렇게 되면 점점 우리 사회에 정신 혁명의 기풍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직장에 있던지 가정에 있던지 참 빛 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돼서 우리 사회에 정신적 혁명을 일으켜서 도덕적으로 중생하고 명랑한 사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七十년대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一九七0년대에 이 나라 이 땅에서 살게 한 것은 바로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를 살게 하신 것 아닙니까?
여러분, 이 책임을 다하시렵니까? 그렇게 하려면 오늘 이 성경 본문을 잊지 맙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一九七0년 六월 九일·서울 전도대회)


Ⅸ-39 기독교 우주관 (시편 一 - 十四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十九ㆍ一-四)

이 시간은 七十년대에 사는 크리스천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하고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七十년대에 처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생각합니다.
어제 아침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과학 시대요 과학을 통해서 많은 방면에 큰 변혁이 왔으므로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 여기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과학의 발전은 매우 필요하고 과학의 발전으로 많은 인간 생활에 혁명이 일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어제 아침 우리가 생각한 것과 같이 과학 혁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과학도 그 영역에 제한이 있는 것입니다. 과학은 우리의 외부 생활에는 큰 변천을 가져올 수 있지마는 인간의 속, 인간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二十세기의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에게 전에 없었던 지식과 엄청난 힘, 그 가운데는 파괴력을 가진 무기까지 손에 잡히게 되었는데, 이 엄청난 힘을 바로 쓸 줄 아는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밖에는 없는 것을 우리가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학 혁명만으로는 부족하고 정신적 혁명이 꼭 인간에게 있어야 하겠고 또 이러한 혁명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에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 우주관이올시다.
오늘 아침 읽은 시편 十九편 一절 이하는 우리 성경에서도 유명한 성귀(聖句)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穹蒼)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우주관을 우리는 봅니다. 이 시를 기록한 다윗이 하늘을 보고 궁창을 볼 때에 이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이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이 지혜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유감 된 것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들 가운데는 이것을 분명히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제 시편 四十편 一절을 읽을 때에 들으시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중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무신론자는 二十세기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편을 기록한 옛날에도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옛날 시대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옛날에도 어리석은 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를 더러 부인한 자들이 있었지마는 그 수는 매우 적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二十세기에 와서는 이와 같은 자들의 수가 많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의 수가 많아질뿐더러 이런 무신론적 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사상이 일어나서 세계 인구의 약 三분지一을 관할하면서 이런 무신론을 적극적으로 전파할뿐더러 소위철의 장막 배후에서는 믿는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북한의 사회 사정이 어떻게 된 것, 교회 사정이 어떻게 된 것을 여러분이 자세히 아십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이렇게 내어놓고 하나님께 찬송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중공에서도 몇 해전 소위 문화 혁명이 있은 후에는 내어놓고 공중으로 예배하는 곳은 한 곳도 없어졌다고 합니다.
지금 이와 같은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왜 믿으며 어찌하여 기독교 우주관이 진리인지 이것을 우리가 확실히 내 자신이 깨달을 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 만큼의 준비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七十년대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공산주의 사회에만 있는 줄로 알지 맙시다. 소위 우리 민주주의 사회에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성한 나라라는 미국에서도「아메리카 무신론자 연맹」이라는 것까지 있습니다. 또 우리 남한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저 사람은 하나님을 믿겠지 그렇지마는 사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로서는 하나님이 계시겠거니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계신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을 보고 압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사실로 계시는 것을 알면 부정과 부패한 행동을 계속할 수 있을 것입니까?
사실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제가 지금 말하는 것처럼 여러분이 분명히 알면 이런 하나님 앞에서 계속 죄악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적질하는 사람들, 음란한 사람들, 뇌물을 주고받는 사람들, 모든 부정 부패를 행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모릅니다. 믿지 않습니다.
혹 예배당에 출입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소위 프랙티칼 에이티이즘(practical atheism)이라고 합니다. 실제적 무신론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사실 하나님께서 계신 줄 알면 자연히 마음이 변해집니다. 정신 혁명이 저절로 됩니다.
옛날 우리 동양의 성현도 신목여전(神目如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이 번갯불처럼 밝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번갯불처럼 밝아서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을 알면 그냥 죄를 지을 것 같습니까? 죄 못 짓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정신 혁명이 제대로 되려면 누구나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이 우주를 만드시고, 이 우주를 지배하시고 내 일생을 다스리시고 나를 천당에 보낼 수도 있고 지옥에 보낼 수도 있는 하나님을 분명히 알아야 정신 혁명이 됩니다. 그래야 마음이 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남한과 같은 민주사회에서도 아주 중요한 것은 우리 아이들에게까지 라도 하나님께서 계셔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므로,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신 줄을 다 아는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는지 그 이유를 내가 먼저 우리 마음에 한번 정돈하기 위해서, 또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우리의 신앙을 전파할 수 있고 변호할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믿는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아느냐? 우리가 하나님뿐 아니고 무엇이던지 어떻게 아느냐? 우리가 지식에 이르는 경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아는 길은 간단히 말해서 네 가지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첫째는 이성의 길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생각하고 이치를 미루어서 아는 길, 이성의 길이올시다.
유명한 이야기를 여러분 다 들었지요, 전에 뉴우톤이란 사람이 사과나무 아래 앉아 있는데 바람이 한번 지나가니 사과가 우수수하고 땅에 떨어집니다. 보통 사람은 흔히 보통으로 보아 넘기지요.
하지만 이 사람은 과학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저놈의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옆으로도 안가고 위로도 안가고 왜 아래로 떨어질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생각하는 힘 그것을 이성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의 결론은 뭐였습니까? 그것은 필경 땅이 잡아당기는 힘이 있는 모양이로군. 지금은 상식으로 모두 아는 이야기지만 그 때 그가 처음으로 인력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소위 지구의 인력, 소위 만유인력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머리로 생각하고 알았습니다.
둘째 길이 또 있습니다. 생각 안하고 직접 아는 길이 또 있습니다.
곧 느끼고 깨닫는 길이 있습니다. 이 것은 직감 혹은 직각이라고 합니다.
가령 여기 꽃이 있습니다. 꽃이 아름답지요. 아름다운 줄 어떻게 압니까? 머리로 한참 생각해서 압니까? 아니요, 보면 얼른 압니다. 그렇게 오는 지식이 있습니다. 척 보면 압니다.
아름다운 경치를 한참 생각해 보고야 압니까? 아니오, 척 보면 알아요. 이렇게 직감으로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척 보아도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척 보아도 멀리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직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는 것이 많습니다. 예술적 지식은, (가령 음악 같은 것) 예술적인 모든 지식은, 직감을 통해서 우리가 압니다. 그게 둘째 길입니다.
셋째 길은 실험을 해 보아서 압니다. 사람을 제일 잘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합니까? 사람은 지내봐야 알지 라고 말합니다. 지내본다는 것이 뭡니까? 오래 두고 교제해 보고, 실험해 봤다는 말입니다. 현대 학생들의 말을 빌리면 실험실이 있어요. 어떤 이론이 옳으냐 그르냐를 알려면 실험해 보는 것입니다. 실험해서 많은 지식을 얻습니다.
실험, 혹은 체험의 두 길이 있습니다.
한 가지 길이 더 있습니다. 믿음의 길입니다. 믿어서 압니다.
가령, 여러분이 지금쯤은 지구가 둥근 줄 다 알지요. 지구를 한번 돌아보았습니까? 혹 도신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지구가 둥근지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을 믿어서 압니다. 믿을 만한 과학자의 말을 믿어서 압니다.
여기, 교과서가 있지요. 아이들이 교과서를 통해서 많은 지식을 얻는데 그 지식이 모두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각 방면의 전문가, 권위자들이 실험해 보고, 생각해 보고, 느껴본 후에 이것을 옳다고, 그것을 써 놓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다 깨닫지 못하지 마는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니 옳겠지 하고 믿어서 압니다.
사실은 이 믿어서 아는 지식이 제일 많습니다.
자, 먼저 그걸 생각합시다. 우리가 무엇을 아는 데는 이 네 가지를 통해서 압니다. 이성, 직감, 실험, 믿음, 이 네 가지 길을 통해서 압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압니까? 이 하나님을 아는 데도 이 네 가지 길을 다 통해서 압니다.
먼저, 이성의 견지에서 이 우주를 살펴봅시다. 이제 뉴우톤이 우주의 여러 현상을 보고 깊이 생각한 것처럼, 우리도 이 하늘과 달과 별과 이 모든 것을 보고 자연히 우리도 머리로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자, 이 모든 것 하늘과 달과 별과 산천초목이 어떻게 되었겠나? 이 것들의 원인이 어떻게 됐겠나? 자연히 우리는 머리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분명히, 과학을 공부하여 알게 되는 것은 모든 것이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는데 이 우주라고 하는 것은 결과가 분명한데 그 원인은 어떻게 되었겠나? 자연히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원인을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창세기 一장 一절에『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하나님께서 이 모든 우주를 지으셔서 이 우주가 있게 되었다고 분명히 설명해 줍니다.
이것이 기독교 우주관입니다.
이 우주를 보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계시기에 이 우주를 지었습니다. 자, 여러분, 이것이 그렇지 않다고 반대하려고 하면 반대할 수 있는 이론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어떻게 반대할 수 있는고 하니 이 우주라고 하는 것은 거저 우연히 됐다. 지은 것이 아니고 우연히 됐다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불가지론이요 불가사이론 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우주란 것은 옛날부터 이렇게 내려왔다, 무시무정(無時無定)하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대로 돼 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 기독교 우주관에 반대되는 이론은 이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이론을 우리가 한 가지씩 잠깐씩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가령 거저 됐다, 우연히 됐다고 말하는 이론은 우리가 머리가 있는 인간으로서는 받아들이기가 힘든 이론입니다.
아, 이렇게 조직과 질서가 있는 우주가 거저 저절로 됐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연히 됐다는 것은 믿기가 어렵단 말입니다. 따라갈 사람이 매우 적을 것입니다.
또 알 수 없다는 것도 말 할 것 없어요. 모르겠다는 사람보고 무슨 얘길 하겠어요. 그건 말할 것도 없고.
그러나 이 우주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냥 그대로 내려왔다, 무시 무정하다고 하는 이론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아봐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것을 범신론적 우주관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힌두교에도 얘기하는 것이요 흔히 인도를 중심 하는 사상가들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실 이 우주가 옛날부터 무시 무정해 왔겠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이 이론에 대해서는 현대과학이 부정합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이 지구를 잘 연구해보고 우주를 연구해 보면 이 우주가 무시 무정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가령 이 지구가 영원 전부터 이런 지구로 내려오지 않았단 말입니다.
학문 가운데 지질학이란 학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대학에서 다 공부를 했는데, 그건 우리 인간이 나타나기 전의 지구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그 건 아주 취미가 많습니다. 그걸 어떻게 연구하는고 하니 지층 속에 나타나는 화석과 같은 것을 자세히 조사해서 어떤 지층이 몇 천만년 전에 생긴 것을 압니다. 가령 조개 같은 것이 땅에 나타난 것을 알 수 있고 언제부터 물고기가 나타난 것을 알 수 있고 언제부터 새가 지구에 나타난 것을 알 수 있고, 언제부터 말이나 소 같은 것이 나타난 것을 알 수 있고 맨 마지막 시대에 와서야 사람이 지구에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一장에 말한 것과 거의 같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지구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처럼 영원부터 오늘까지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지구가 생긴 때가 있습니다. 풀과 나무가 생긴 때가 있고 어패류(魚貝類)가 생긴 때가 있습니다. 척추동물이 나타난 때가 있고 맨 마지막 때에 인간이 지구 위에 나타났습니다.
사실, 우라늄이란 이상한 물체가 있는데 그것은 방사(放射)를 합니다. 그래서 그 방사하는 속도를 측량을 해서 어떤 지층에 우라늄이 있으면 그들이 얼마나 방사됐나, 그것을 보아서 지층의 연대가 얼마나 됐나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렇게 연구해 본 결과 사실, 천문학자들은 지구의 연령을 대체로 계산해 대략 三三억 五천만년이라고 계산합니다.
우주의 연령을 약 一백억 년으로 추산합니다. 그러니 말이요, 우주는 무시 무정하다는 범신론적 우주론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입니다.
성경 말대로 지구를 지은이가 반드시 있는 것처럼, 이 우주를 지으신 이가 계신데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결과가 있고 원인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원인은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주장을 하면 어떤 천박한 사람들 중에는 반대하는 이가 있습니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의 원인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원인으로 됐다고 하겠습니까? 그건 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한 절대의 하나님이올시다. 무한 절대의 배후에 무슨 원인이 있다면 역시 무한절대의 하나님 그분이 원인일 것뿐입니다.
여기에 수학, 고등수학을 공부하신 이가 계실 줄 압니다만 수학을 공부해 보면 무궁대(무한대)라는 관념이 있습니다. 그건 무엇인고 하니 가령 둘에서 하나를 제하면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를 영으로 제하면 그게 얼마나 되는지 압니까? 그걸 무궁대라고 합니다. 너무 커서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이 무궁대에 가서는 하나를 영으로 제하나 열을 영으로 제하나 백을 영으로 제하나 천을 영으로 제하나 마찬가지입니다. 다 무궁대입니다.
무한 절대의 하나님 배후의 어떤 분을 묻는 이는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한 가운데 묻는 것뿐입니다.
자, 그래서 여러분, 이 우주를 이성적으로 가만히 생각할 때에 이 우주를 지으신 이가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치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뭐 이런 얘기를 하려면 한정이 없지마는 그 밖에 이런 면을 말하지 않습니까?
이 우주를 가만히 보면 이 우주에는 꼭 조직과 질서가 있는 것을 지적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밤하늘을 쳐다보면 별들이 너무 너무 많아서 되는대로 흩어져 있는 것 같지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망원경을 통해서 천문학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별 하나 하나가 조직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 지구 하면 일정한 속도로 자전을 하고 일정한 속도로 태양을 싸고돌면서 공전을 합니다. 그 궤도가 일정합니다.
또 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지구를 싸고도는데 일정한 거리에서 일정한 속도로 우리 지구를 싸고도는데 뺑뺑 돕니다.
그 다음 태양계라고 하는 것은 태양에 붙은 수성, 금성, 목성, 여러 별들과 함께 역시 다른 해를 두고 돕니다. 다른 성좌를 두고 돕니다.
이런 북극계니 태양계들이 모여서 소위 성좌를 이룹니다. 이런 성좌들이 다 모여서 대 우주를 형성합니다. 얼른 보면 복잡하고 되는대로 된 것 같지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꼭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우주가 별이 많고 복잡하지마는 우주의 교통 사고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령 이 지구를 생각해 보세요. 二十四 시간의 하루는 언제나 二十四 시간의 하루지 어떤 날은 三十 시간쯤 되고 어떤 날은 다섯 시간 되는 때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꼭 일정한 법칙에 의지해서 일정한 속도로 일정한 궤도를 선회합니다.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지금은 대우주를 한꺼번에 볼뿐더러 이 우주를 구성한 조그만 물질을 분석해 봅니다.
먼저 분자로 구분해 봅니다. 분자를 원자로 분석해 봅니다. 그 다음에 원자 속까지 들여다봅니다. 원자 속을 보면 그 속에서 핵이라는 핵, 양자라고 하지요, 핵에는 전자라고 하는 것이 그 속에서 뱅뱅 돕니다.
다시 말하면 원자 하나 하나가 조그만 우주입니다. 그 속에도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여러분 시계가 다 있지마는 시계의 뒤쪽을 열어 보면 큰 바퀴도 있고 작은 바퀴가 있어 자기네끼리 뱅뱅 돌아가는 것처럼 이 우주가 뱅뱅 돌면서 그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우주가 거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시계를 보고 시계를 얻은 다음에 이 시계는 저절로 되었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내 전에도 그런 얘기를 한번 했지요. 제네바에 가보면 제네바 호숫가에 큰 시계 하나를 만들어 놨어요. 둥글게 꽃으로 심어서, 푸른 잔디에다 꽃으로 글자를 一, 二, 三, 四로 써 놓았습니다. 그 위로 긴바늘과 작은 바늘이 천천히 돌아갑니다.
어떤 사람이 이 시계를 구경하고 와서『서서라고 하는 나라는 참 좋아, 알프스산도 좋고 제네바 호수도 좋은데 시계가 저절로 돼서 돌아가더라.』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것입니까. 요새 아이들이 말하는 대로 머리가 조금 돌았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사실 이런 우주를 보면서 조금 있다가도 말하겠지마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사람은 조금 돈 사람이지요.
뭐, 이런 얘기를 하자면 한이 없지요. 이 자연계의 모든 것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일정한 목적에 의지한 고안이 있습니다.
여기 꽃 한 송이도 고안이 있어요. 새란 놈을 가만히 보아도 꼭 고안이 있어요. 나비란 놈을 가만히 보아도 고안이 있어요. 사람들이 고안한다는 것 다 빌어다 합니다. 거저 다 하나님이 해 놓은 것을 빌어다 합니다.
꽃이 있으면 흔히 벌과 나비가 오지요. 왜 벌과 나비가 있습니까? 보기 좋으라고, 아니요. 꽃 속에는 꿀이 있으니까 꿀 파먹으러 옵니다.
그러나 꽃은 거저 꿀을 주는 줄 압니까? 아닙니다. 그 놈들이 와서 날개를 펼치고 돌아가는 바람에 웅(雄)과 자(雌)의 그 꽃 수염 가운데 꽃가루를 묻혀서 왔다 갔다 해서 열매를 맺게 하지요. 세상에 벌과 나비가 서로 협동해서 살게끔 만들었어요. 그것이 다 거저 됐다고 저절로 됐다고 할 수 있어요.
아주 이상합니다. 이 자연계의 금수 동물과 식물들이 어떻게 협동하며 살게 만들었는지. 동물들은 풀과 열매를 따서 먹고살지요. 사람까지도.
그러나 거저 먹고 받기만 하는 줄 압니까? 아니요. 도로 주는 것도 있습니다. 동물의 배설물은 초목의 비료가 됩니다.
여기 조금 더 깊이 말하자고 하면 사람이 숨쉴 때 무엇이 필요합니까? 동물도 다 그러하지요. 산소가 필요합니다.
나무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탄소가 필요하지요. 사람이 내쉬는 숨, 그 숨결 가운데 탄산가스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무는 그 탄소를 섭취하고 산소를 대신 내 줍니다. 나무는 동물이 필요한 산소를 주고 동물은 나무가 필요한 탄소를 내어 주면서 서로 협동하고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런 것이 다 거저 됐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뭐 이런 말을 하려고 하면 시간이 한정 없으니까 더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다시 말하면 많은 지식이 우리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오는데 우리가 이 우주를 보고 우주의 모든 것을 가만히 살펴봐서 생각하면 반드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자, 우리 둘째 길을 잠깐 생각하십시다. 직감의 길을 생각하지요. 제가 이미 말씀 드렸어요. 어떤 지식은 직각 적으로 압니다. 모든 예술에 관한 지식은 직각 적으로 알게 됩니다.
우리가 머리로 생각해서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직각 적으로 알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 서반아에 우나무너라고 하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 분은 철학자이지만 그이가 스스로 간증하기를『나는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머리로 생각하기보다도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직각 적으로 깨닫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영국에 유명한 테니슨 같은 이의 유명한 시에『내게는 하나님의 숨결보다도 더 가깝다. 내 손과 발보다도 더 가깝다.』거저 느껴져서 아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의 체험이란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머리로 생각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아는 분도 계시지마는 참 성령을 충만히 받음으로 직감적으로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 요한 웨슬리라고 감리교를 세운 유명한 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올렌스 벤치란 곳에서 몇 사람이 모여 예배를 보는 가운데 갑자기 자기 마음이 뜨거웠다고 합니다.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을 설교하는 사람이 대표로 읽는데 그것을 듣는 가운데 갑자기 자기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때부터 요한 웨슬리는 새 사람이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우리가 직각 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얘기를 늘 하지만 나폴레옹 같은 사람은 군인이라도 이런 느낌을 가진 분입니다.
그가 한 번은 군대를 거느리고 지중해를 건너서 애굽으로 정복하러 가든 때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침 달이 밝은 밤이었습니다. 물결이 잔잔해서 배의 군인들이 모두 갑판에 나와서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앉았기도 하고, 이렇게 달밤을 잘 즐깁니다.
나폴레옹은 언제나 군중을 잘 살피는 인물이요, 보통 군인의 옷을 입고 군인들 사이를 다니면서『이놈들이 무슨 얘기를 하나 보자』하고 그들의 얘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어떤 곳에 가니까 어떤 군인들이 앉아서 열심히 토론을 합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한 군인은 하나님이 있다느니 한 군인은 하나님이 없다느니 서로 변론을 한단 말입니다. 하나는 유신론자요. 하나는 무신론자입니다. 아 그래서 나폴레옹이 이 사람들 아주 큰 토론을 한다고 뒤에 가서 가만히 듣습니다. 한참 이 사람들끼리 열이 나서 토론을 합니다. 참 듣다가 나폴레옹이 갑자기『당신 네 들 토론할 것 없이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시오. 아 그 나폴레옹이 우렁찬 목소리로 이런 얘기를 하게 되니 정신없이 다 하늘을 쳐다봅니다. 마침 달이 밝고 별이 총총하고 그 아름다운 지중해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 때에 나폴레옹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향하여 가리키면서『하나님께서 안 계시면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됐겠소. 이 걸 보고도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알지 못하겠소』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군인들이 토론을 그만두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직감적 요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머리로 생각해서 하나님께 계시리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가 기도하고 내가 묵상을 하는 가운데 성령을 내가 직접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직접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그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떤 사람이 어떤 이론으로 반대를 하던지 문제가 아닙니다. 왜, 그가 의뢰한 자를 그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셋째로 지내 갑시다.
셋째로 지식을 얻는 길은 실험의 길이라고 그랬습니다.
여기 과학이 실험을 통해서 많이 발전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대학을 가나 자연과학 계통의 실험이 굉장히 큽니다. 실험을 해 보고 압니다.
나토리움이라고 하는 것은 희고 반들반들한 것입니다. 염소는 노랗고 독한 기체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나토리움과 염소가 우리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이것을 합해서 우리 인간에게 아주 필요한 것이 된다고 말한다면 아주 납득하기 힘들 겁니다. 그러나 나토리움이 있는 곳에다 염소를 통과시켜서 나토리움과 염소를 한데 합해 놓으면 무엇이 되는지 압니까? 소금이 됩니다.
소금 맛보면 나토리움맛도 아니고 염소 맛도 아닙니다. 다릅니다. 짭니다. 우리 사람에게 꼭 필요한 물질이 됩니다.
어떻게 알아요. 실험해 보면 꼭 그렇게 되거든요.
예수 님도 이렇게 말씀했지요. 나무가 좋은지 나쁜지 알려면 나무의 열매를 보고 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수박이 단지 안 단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압니까? 먹어 보면 압니다. 그게 실험의 방법이올시다. 먹어 보면 제일 잘 압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분명히 모르겠다고 하는데 사실 그런 사람은 아직도 실지로 하나님을 믿어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믿어 보면 압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기도 전에 기도하면 응답이 될는지 안 될는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사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는 것을 압니다.
기도해 보란 말이요.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기도 전에 의심부터 합니다. 성경을 읽고 그대로 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전에 우리가 프린스톤 신학교에 다닐 때 구약성서 과 교수 가운데 딕 윌슨 박사라는 유명한 구약의 권위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성질이 좀 별납니다.
밤 十시부터 새벽 三시까지 공부하는 습관이 있어요.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평생, 조용할 때 공부하느라고 그랬겠지요. 열 시부터 새벽 三시까지 四十여 년을 공부합니다. 그래서 이 선생은 새벽 기도회에는 못 나옵니다.
사실 일찍이 가르치는 시간이 없어요. 늘 늦게 일어나니까요. 세 시까지 공부하고 자니까 일찍은 못 일어나지요.
제가 갔을 때, 나이가 많아서 학교에도 별로 나오지 않고 자기 서재의 안락 의자에 앉아서 늘 흔들흔들하면서 앉아 계시면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이 서재에 따라가서 공부했습니다.
그런 선생인데, 한번은 프린스톤 대학의 젊은 사람들이 이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윌슨 박사님 우리가 박사님에게 성경에 대해서 의심나는 것이 몇 가지 있어서 좀 물으려 왔습니다.』『아, 그래 무슨 의심이 있는가?』그러면서 넌지시 이걸 물어 봤습니다.
『그런데 자네들 성경에 의심이 난다고 하는데 성경을 한 두 번쯤 읽어보았나?』하고 물어 봤습니다.『성경을 볼 시간이 있나요. 성경을 보지 못했습니다.』『한번은 보았나?』 『한 번도 못 봤어요.』자 그러니까 윌슨 박사가 눈을 부릅뜨면서『이 사람들아 내가 머리는 남자들 보다 못할는지는 모르지마는 내가 四十년 동안 밤 열 시부터 세 시까지 四十년 동안을 공부했는데 내가 공부한 결과는 믿을 만한데 자네가 한번도 안 보고 와서는 의심난다고 질문한다고 하니 가서 두어 번 읽고 그 다음에 와서 물으라고. 그 다음엔 토론이 될 거야』고 했습니다.
여기 가만히 보면, 성경이 의심난다는 사람들 흔히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선 성경을 읽어보시고 그대로 해보세요. 그러면 성경이 옳은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전에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전에 미국의 어떤 할머니가 성경을 늘 잘 읽는데 그 할머니의 성경을 보니까 성경에 새빨갛게 줄을 쳐 놓고는 영어 자로 T자하고 P자, 많이 써넣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할머니 이 T와 P는 무슨 표시지요』하고 물으니『아, 그건 내 암호인데 그건 다 뜻이 있어요. T라고 하는 건 트라이(try)인데, 읽고 그대로 해 보았단 말이요. P라는 건 프르우프 (proof)읽고 해보니 그대로 되더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을 그대로 실행해 보시란 말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진리인 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어떻게 아느냐? 내가 믿어 보니, 제가 이제 七十이 가까워 오니 이런 말해도 거만하다고 하지는 않겠지요. 이 부족한 사람도 근 七十년 동안 믿어 보니 과연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과연 기독교적 신앙 생활이 가장 기쁘고 가장 행복스럽고 이 세상에 다시없는 축복인 것을 체험으로 압니다.
여러분도 믿어 보세요. 특별히 젊은 사람들, 내 말이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 체험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무슨 말이 있는고 하니 시편 三十四편 八절에 『와서 주를 맛보아 알지어다』했습니다. 주를 맛보아 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도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그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를 사실 영접해서 내 입에 맛을 보는 것처럼 내 것을 만들어요. 예수 님을 사실, 내 마음에 영접하고 꼭 신앙 생활을 해요. 그러면 과연 주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것을 알게 됩니다.
자 그러면 넷째로 넘어갑시다.
많은 지식이 신앙을 통해서 옵니다. 믿을 만한 권위자, 전문가의 말을 믿음으로 많은 지식이 옵니다.
내가 이미 말한 대로 우리가 안다는 것이 사실 내가 연구해서 아는 지식은 많지 못합니다. 내가 직감적으로 안다는 지식도 많지 못합니다. 내가 체험해 보고 안다는 지식도 그렇게 많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지식은 어떻게 오는지 압니까? 대부분의 지식은 믿을 만한 분의 말을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학교에는 교과서를 읽으면서 그 교과서를 쓴 사람을 믿어서 새로운 지식을 많이 얻습니다.
우리 신앙에도 교과서가 있습니다. 그 교과서가 무엇인지 압니까? 이 성경책입니다. 이 성경책은 종교의 믿을 만한 사람들이, 다시 말하면 선지자들 사도들 예언자들이 자기가 생각하고 안 지식 자기네가 직감적으로 안 지식, 자기네가 체험적으로 안 지식을 여기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들의 말을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 모든 종교적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믿음으로 얻는 지식 가운데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어요. 그것은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을 믿어야지요. 함부로 믿어선 안 됩니다.
그런데 이 권위라고 하는 것은 방면이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의학계의 권위요, 어떤 사람은 법학 계의 권위요, 각각 권위가 다릅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일어나면 그 방면의 권위에게 가서 문의해야 됩니다.
가령 어떤 아이가 앓습니다. 그 아이는 누구한테 가서 봐 달라고 해야 되겠습니까? 의사한테 가야지요. 그런데 어떤 어머니가 뒷집에 유명한 법학 박사가 있다고 박사님이니까 뭐든지 알겠지 하고 고쳐 달라고 하면 바로 되는 일입니까? 그런데 대학생들이나 청년들 가운데 이런 식의 일을 하는 이들이 더러 있어요.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종교계의 권위에게 가서 물어봐야지 종교계의 권위에게는 가서 물어보지 아니하고 다른 방면의 박사에게 가서 의논하고 그 사람들의 말을, 혹 종교 문제에 관해서 말하면 아무개 박사의 말을 들으니까 하고 권위를 잘못 따라 다니는 젊은 사람들이 더러 있단 말입니다.
그런 실수를 안 해야 됩니다.
사도들은 종교계의 권위입니다. 선지자들은 종교계의 권위입니다. 오늘날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도 이 방면에 제일 많이 공부도 하고 생각도 하고 체험도 하고 경험이 있는 여러분 교회의 목사님들한테 찾아가야 합니다.
자, 여러분 시간이 너무 많이 가서 제가 그칠 수바께 없습니다.
마지막에 무신론자들에 대해서 한 두 마디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사실 생각해 보면 어리석습니다.
무엇이 있다고 논증하기에는 증거가 하나만 있어도 되지마는 없다고 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우리 한국에 갈매기가 있나 없나 토론한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은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없다고 하거든요.
있다고 하는 사람은 인천에 내려가서 바닷가에 갈매기 발자국 하나만 보고 있다고 하면 증명이 돼요. 하지만 한국에 갈매기가 없다고 하려고 해 보세요. 인천에 가서 다 살펴보고 없다고 해도 진 남포에 있는지, 용암 포에 있는지, 마산에 있는지 알아요? 다시 말하면 한국 전도를 다니기 전에는 한국에 갈매기 없다는 말은 성립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런 우주에 하나님이 없다고 한단 말이요. 우주에 하나님이 없다고 증명하려면 지구는 말할 것도 없고 저 별도 다 다니고 우주를 다 다녀보기 전에는 없다는 증명을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걸 보니 한 마디로 말해서 뭡니까?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또 이 무신론이라고 하는 관념은 부정적 관념이올시다. 관념 가운데는 두 가지 관념이 있는데 긍정적 관념과 부정적 관념이 있습니다.
가령, 빛은 긍정적 관념이올시다. 어두운 것은 부정적 관념이올시다. 참은 긍정적 관념이올시다. 거짓된 것은 부정적 관념입니다.
여러분, 왜 어둡다는 관념이 생겼는지 압니까? 빛이 있기 때문에 생깁니다. 왜 거짓되다는 관념이 생기는지 압니까? 참이 있으니까 생겼습니다.
왜 무신론적 관념이 생긴 줄 압니까?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런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신론이란 관념이 있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분명히 증명해 줍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신론자들은 환자라고 했습니다. 병자들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태양 빛이 혁혁하지마는 도무지 앞 못보는 소경들에게야 태양 빛이 보입니까?
결국은 이렇게 이지로 생각하든지 직감으로 생각하든지 실험을 해 보든지, 권위의 말을 들어보던지 분명한데 왜 하나님이 계시면 두렵단 말입니다. 병이 나서 이런 입장을 결국 가지는 것입니다.
이야기 하나만 하고 그만 두렵니다.
아마 우리 교회 교우들은 이 말을 전에 들었을 것입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사하라 사막을 지나갑니다. 약대를 타고 지나갑니다. 날이 저물어서 오아시스라고 샘이 있는데 천막을 치고 하룻밤을 자게 됐습니다. 약대를 바깥에 매어 놓고 여행하는 사람과 약대를 몰고 온 사람과 함께 자게 됐습니다.
자려고 천막에 들어갔습니다. 약대를 몰고 온 사람이 자기 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기도를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다한 다음에『자네, 이제 뭘 했나?』『나 기도했네『아 누구한테 했는가?』,『아 하나님한테 했지.』『자네 하나님 보았나?』무엇이라고 대답했겠습니까?『보지 못했어』고『하나님 음성 들어보았나?』『못 들어보았네』『하나님 만wu 보았나?』『못 만져 보았네』『아 그럼 자네, 하나님 있는 줄 어떻게 아나? 그거 미련한 일 아닌가?』아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단 말입니다.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냥 그 날 밤을 잤어요. 그 다음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둘이 천막을 헤치고 나왔습니다. 나오자마자 그 여행하던 사람이『아하 간밤에 약대란 놈이 끈이 풀어져 우리 천막을 몇 번 돌았구만』그런 단 말이요. 그 말을 듣고는 약대 주인이『당신이 약대가 밤에 도는 것을 보았소?』『아니 나는 그걸 보지는 못했오.』『아 그럼 발자국 소리는 들었오?』『아, 난 그것도 못 들었오.』『그럼 만져 보았소?』『아니 못 만져 보았오.』그러니까 『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어떻게 몇 바퀴 돌았다는 것을 아오?』하니까『하하, 이런 사람 모래밭에 발자국을 봐. 이 모래 밭에 발자국이 빙 돈 것을 보니 분명하지 않나』그러니까 이 사람이 하늘을 가리키면서 그 때 마침 동방으로 아침 햇빛이 떠올라서 사방으로 아름답게 된 경치를 가리키면서『여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발자취가 아닙니까.』그 말에는 대답을 못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 대자연의 모든 현상이 하나님의 발자국입니다.
내가 처음에 말을 시작할 때에 이런 말을 했지마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가 많지마는 실상은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삽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계셔서 우리 모든 것을 내려다보시는 줄 분명히 알면 죄를 짓지 아니할 것입니다.
죄 가운데 여러 가지 죄가 많지마는 믿지 않는 죄입니다. 왜 어떤 죄를 지었던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으면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작은 죄라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속지 말라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심은 것은 그대로 거둡니다.
우리 동양의 어른들도 많은 경험에 의해서 순천 자는 흥하고 역천(逆天)자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분명히 계신데 본체만체하고 이런 아들이 있다면 이게 무슨 아들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계신 줄 안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사실 이 하나님께 영광도 안 돌리고, 이 하나님께 예배도 안하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도 안하고 살면 무슨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제일 큰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데도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가 큰 죄입니다.
그러기에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정죄(定罪)가운데 있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스스로 속지 맙시다.
가멜산에서 엘리야가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두 사이에서 머뭇하느냐? 만일 바알이 참 하나님이면 바알을 섬길 것이요,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여호와를 섬길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 압시다.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의심하는 분이 있으면 결단을 내리세요. 엄위(嚴威)하신 하나님 앞에 불신의 죄를 자백하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며 죄 사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一九七0년 六월 十일, 서울 전도대회)


Ⅸ-40 기독교 인생관 (창세기 一장 二十六-二十八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현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一ㆍ二十六)

이 시간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신앙 강좌 시간이올시다. 총 제목은 七十년대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겠는가 하는 제목 아래서 우리가 몇 가지를 생각합니다.
제일 첫 시간은 문자 그대로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과학 시대이어서 인간의 모든 생활이 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혁명을 가져오는 그러한 시대에 살게 되었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해서 이런 면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과학이 여러 방면으로 우리 인간에게 여러 가지 좋은 것을 가져왔지마는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과학은 만능이 아니고 그 영역에 제한이 있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함을 말했습니다.
특별히 과학이 인간에게 가져온다고 하는 변화는 외부적 생활의 변화이지 결코 인간의 깊은 속 그 심령에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복음을 통한 정신 혁명을 통해서 인간의 속이 변할 수 있는 점을 생각한 것입니다.
과학 시대일수록 정신 혁명이 필요한 것은 이제 인간이 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전에 없었던 지식과 전에 없던 힘, 그 가운데는 인간 자체를 파괴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무기까지 가지게 된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능력과 지식을 바로 쓸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운동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오직 복음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우리는 계속해서 이 七十년대에 특별히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적 사상이 팽대(膨大)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말했습니다.
소위 공산당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이 우주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우주의 창조주 우주의 섭리 자이신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약간의 무신론자가 있었지마는 오늘의 시대처럼 무신론자가 많은 때가 없고 오늘날처럼 무신론을 공공연히 선전한 때가 없고 오늘날처럼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핍박하고 학살하는 때가 없었습니다.
북한의 사정을 생각할 때, 모든 철의 장막 배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정경을 생각할 때, 우리는 실로 격분을 견디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때야말로 우리가 참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어찌하여 우리가 믿으며 믿지 않을 수가 없느냐? 이런 점을 지적 방면으로 모든 방면으로 우리가 분명히 알고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할 때인 것입니다.
공산당들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소위 자유 진영에 사는 이들 가운데도 하나님을 부인하며 사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죄인 줄 알면서도 죄를 계속해서 짓는 사람들은 결국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 남한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 사람이 죄인 줄 알면서도 양심을 거슬려 죄의 생활을 합니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혁명은 이미 하나님을 아는 데서 오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연히 옷깃을 바로 할 것이요. 적은 일이나 큰 일이나 양심을 거슬려서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 혁명을 일으키는 이러한 때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리 남한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분명히 알려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는 그 생활의 결국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게 할 책임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제 시간은 이런 기독교 우주관에 대해서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아침, 셋째로 기독교 인생관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우리 장로교는 본래 제네바에서 요한 칼빈 선생이 세웠던 유명한,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우리 신교의 책「기독교 요강」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첫 장 첫 절에 무슨 말이 있느냐 하면『우리 인간이 세상에서 알아야 할 지식이 많지마는 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지식은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요 둘째는 사람에 대한 지식이니라.』이런 말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잠깐 생각했습니다.
오늘 아침은 사람에 대한 지식을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 七十년대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필요한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야말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유물론자들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짐승으로 봅니다.
유물론자가 아닌 사람들도 사람을 기계로, 생산의 한 도구로 봅니다. 인간 소외란 말이 그때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컴퓨터의 한 구멍으로 봅니다. 인격을 무시합니다. 이러한 시대인 만큼 우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인생관이 무엇인가? 이것을 분명히 알고 이것을 우리 모든 동포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정신 혁명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바로 이해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가 사는 二十세기에 인생에 대한 문제, 사람이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 하려 왔으며 인생은 어디로 가는가? 인간이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는 신학과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지는 때문입니다.
지금도 말했지마는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 여기에 의지해서 도덕 사상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한 짐승으로 볼 때에는 사람을 짐승으로 취급하게 됩니다. 짐승이라고 하는 것은 필요할 때에 먹이고 기르고 쓰다듬어 주지마는 필요하지 않을 때는 마음대로 죽여버리는 것이 짐슴에 대한 대우입니다.
오늘 날, 어떤 사람들은 사람을 국가의 한 도구로 생각해서 국가와 자기의 정치적 목적에 필요 할 때에는 먹이고 쓰다듬어 주지마는 자기의 정치적 목적에 불필요할 때에는 몇 백만이고 천만이고 죽여버리기 때문입니다.
인간관에 의지해서 윤리 사상이 지배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현대에 아주 중요합니다.
또한 인간관에 의해서 사회 사상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회를 조직해서 살겠느냐? 인간을 근본적으로, 짐승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사회 구조로 동물원으로 만들어 놓으면 제일인 줄 생각합니다.
여러분, 동물원엘 가 보셨지요, 동물원에 사는 동물들 괜찮습니다. 먹을 때 먹고 잘 때도 있고 잘 살수 있지요. 그러나 동물원에 사는 짐승들 뭘 한가지가 없습니까? 자유 한가지가 없습니다.
인간을 근본적으로 짐승으로 보는 유물론적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 조직을 보면 이렇습니다.
일 시킬 때 일시키고, 먹일 때 먹이고, 일만 하면 굶어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뭐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짐승 취급입니다.
자 이런 까닭에 인간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아주 필요합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인간에 대한 두 가지 그릇된 극단적 견해가 있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한 가지 견해는 인간을 너무 높이 봅니다. 인간을 신(神)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본 시대 살아 본 사람은 일본 사람들이 천황을 신이라고 했던 사실을 압니다.
우리 한국에도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천도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인내천(人乃天)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범신론적 인간관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을 너무 높이 보는 그릇된 견해입니다.
시편 八편을 읽을 때 여러분께서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시되 천사 보다 조금 못하게 내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인간을 높이 보는 견해를 배격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천사가 아닙니다. 사람은 신이 아닙니다. 그릇된 견해입니다. 사람을 신으로 숭모합니다. 북한 같은 데는 김일성이가 거의 신의 대접을 받습니다. 중공에는 거의 모택동이가 그런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이 참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면 사람을 신으로 섬기게 됩니다.
그릇된 견해를 배격해야 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견해, 극단적으로 사람을 낮추어 보는 견해는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유물론적 인간관에서는 사람과 아메바의 차이는 사람은 복 세포 동물이고 아메바는 단세포 동물이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 사람과 벌레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만물을 다스리는 영물로 지으셨다고, 사람을 너무 낮추어 보는 견해를 배격하는 교훈이올시다.
이 밖에도 제가 일찍이 말했지마는 현대에는 사람을 꼭 동물로는 보지 않지마는 사람을 한 기계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또 현대 공업이 발전되면서 사람이 거저 거의 기계 노릇 하는 현상을 더러 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데드로이트란 곳에 가서 거기 큰 포오트(Ford)자동차 공장에 구경을 갔습니다.
자동차 만드는 공장에 가보면 우선 부분품을 만드는 공장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큰 건물을 지어 놓고는 부분품을 갖다가 맞추는 소위 아셈블리 홀이 있습니다.
거기 가 보면 가운데는 레일이 있어서 맨 처음에는 거저 자동차의 몸 둥이 만 척 갔다 놓은 것이 슬슬 들어오고 그 다음에 그 옆에 사람이 하나 섰다가 바퀴를 갖다 넣는 사람, 그 다음엔 한 사람이 나사를 구멍에 궤고 또 한사람은 그 옆에 섰다가 나사를 한바퀴 돌립니다. 또 한 사람은 그 옆에 두 바퀴 돌리는 사람, 그 옆에는 세 바퀴 돌리는 사람, 가만 보니까 하루 종일 서서 나사 못 하나씩만 꽂고 죄고 있단 말이요, 종일 나사못만 죄고 또 하고 또 하고, 나사못 한 번 죄고, 그 다음 사람이 또 한 번 죄고 종일 그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계지 사람이랄 것 뭐 있겠어요.
지금 공업화됨에 따라서 인간이 그런 취급을 자연 받게 됩니다. 그래서 점점 원치는 않지마는 인간을 기계로 보는 사상이 들어오게 되었고 인간을 한 생산의 도구로 보는 사상이 점점 민주주의 사회에도 들어오게 됐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자, 여러분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관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다 아시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한번 분명히 이 것을 알기 위해서 이번에 이 문제를 가지고 강좌를 가지는 것입니다.
첫째는 시편 八편을 읽었고 창세기 一장을 제가 읽었습니다. 또 二장에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피조물이다. 인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은 자재(自在)한 존재, 스스로 있게 된 존재가 아닙니다.
어제도 제가 말씀 드렸지마는, 이 지구 위에 사람이 없던 때가 있습니다. 일정한 역사적 시간에 지음을 받음으로써 이 땅에 인간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자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이 어떻게 오게 된 것입니까? 여러분의 부모로 말미암아 오게됐지요. 여러분의 부모는 어떻게 오게 됐습니까? 여러분의 조부모, 자꾸 이렇게 올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마지막에는 결국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았으므로 우리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세상에 스스로 난 줄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오고 싶어서 여기 비행기 표를 사듯 표를 사 가지고 이 세상에 왔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지음을 받아서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해서 이 세상에 나게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재자가 아니고 자존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게 되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인간은 이렇게 피조물인즉 피조물에 대해서,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은 제한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피조물은 무한한 피조물은 없습니다. 피조물은 제한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도 제한이 있습니다. 키가 크는 것도 열 여덟쯤에 한참 클 때는 하늘이라도 찌를 듯 자꾸 크지요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얼마 크다가는 스톱하고 맙니다.
뭐 九척 장신이 있고 거인이 간혹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제한이 있습니다. 키가 제한이 있습니다.
요새 의학이 발달되어서 보통으로 좀 오래 산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수명도 제한이 있습니다.
옛날 유명한 중국 시에 두보의 시에 인생 칠십은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한 말은 지금도 맞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한 해에 세상을 떠나는 분이 작년에도 아마 백 이삼십 명됩니다. 가만히 그 분들의 연령을 살펴보면 거저 五十-七十사이에 가장 많이 갑니다. 여러분 거저 스스로 속일 필요 없습니다. 환갑 지나신 분은 이제 내 때가 가까웠다 고 알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제한이 있습니다. 그것 뿐 입니까? 우리 인간의 육체라고 하는 것을 무엇에나 제한이 있습니다. 전에는 항우는 기운이 세서 역발산 기개세(力拔山氣蓋世)란 말이 있지요. 산을 뽑는다는 것은 다 과장한 것이지요. 사람이 산을 어떻게 뽑는다는 말이요. 체력이란 제한이 있어요. 시력도 제한이 있어요. 먼 것도 못보고 가까워도 못 봅니다. 듣는 것도 제한이 있어요. 너무 적은 소리도 못 듣고 너무 큰 소리도 못 듣는다고 합니다.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는 너무 커서 못 듣는다고 해요. 못 듣는 것, 거 괜찮아요 제한이 있어요.
인간 만능이니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과대망상증입니다.
인간 만능이 아닙니다. 이 걸 알고 살아야 공연히 교만하지 않고 실수하지 아니합니다. 괜히 뱁새가 황새걸음 하다가는 다리만 찢어집니다.
제한 있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자, 또 인간은 이렇게 피조물이니,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의 목적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만든 이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 여러분 여기 마이크 둘이 있지요. 이거 누가 지었어요. 사람이 지었습니다. 마이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마이크 자체에 있는 것입니까? 이것을 만든 사람에게 있습니까? 사람에게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사람에게 있어요.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으심으로써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즉 우리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 목적이 뉘게 있습니까? 내게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있습니까? 세상에 어떤 사람들은 거저 내게 있는 줄 압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하고, 내 먹을 대로 먹고, 놀고픈 대로 놀고 내 멋대로 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잘못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요리문답에 제일 첫째 문답이 무엇인지 여러분이 알지요.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여러분 다 잘 믿는 분이니까 요리문답의 첫 답을 다 알겠지요.
아는 이 한번 다 손들어 봅시다. 모르는 이는 손들지 마시오. 아는 이, 요리문답 첫 문제 대답을 아는 이만 손들어 봅시다.
아하, 손 내리시오. 못 드는 분이 많단 말이요. 요리문답 첫째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요리 문답을 다시 가르쳐야 되겠습니다.
사람의 둘째, 셋째 말고 첫 째되는 목적이 무엇이냐 성경대로 거기 대답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있어요. 그 목적이 뭔지 아세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하나님과 교제를 하면서 큰 즐거움을 하나님도 가지고 우리도 가지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므로 인간이 세상에 사는 최고의 목적도 내 향락이 아닙니다. 내 부귀 영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 그 목적으로 삽니까? 물론 직업은 여러 가지로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최고의 목적은 내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실수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인간은 피조물인즉 피조물 자체에 있어서 최대의 행복이 무엇인지 압니까?
자, 이 마이크가 피조물인데 이 마이크의 최대 행복은 무엇일까요. 마이크 노릇 잘하는데 있지요. 소리가 잘 안 들리거나 하면 그건 틀렸단 말입니다. 마이크 노릇 잘 하는데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를 지었습니다. 지을 때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목적,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둘째 목적이 있어요 무엇인고 하니 이 사람은 이런 일을 해서 내게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겠다, 저 사람은 저렇게 해서 내게 영광 돌리게 하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제二의 목적은 각각 다르단 말이오.
그래서 어떻게 했는지 압니까?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소위 달란트라고, 각각 재능을 다르게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림을 잘 그립니다. 어떤 사람은 이자윤 집사 님처럼 노래를 잘 부릅니다. 아 어떤 사람은 글씨를 잘 씁니다. 또 어떤 사람은 손재주가 있어서 만들기를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수학을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히 정치에 머리가 있습니다. 경제에 머리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경영에 머리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능을 다르게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히 남을 잘 가르칩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히 남을 잘 위로해 줍니다. 심방을 잘합니다. 재능을 각각 다르게 주었단 말입니다.
인간 하나 하나의 최대 행복이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무슨 일을 통해서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게 지으셨나? 이걸 자세히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재능이 무엇인가 잘 살펴서 이걸 살려서 직업도 내 재능에 맞게 택하고 교회에서 일하는 것도 내 재능에 맞는 직분을 택하고 이렇게 되어서 하나님께서 각각 우리를 지을 때 주신 재능을 잘 살려서 一00퍼센트 활용을 하는데 인간의 최대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헬라에 두 가지 윤리 사상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최대 행복이 어디 잇느냐? 쾌락에 있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 학파에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이란 것은 자아의 실현에 있다는 그런 것입니다.
실상은 그 두 가지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재능을 꼭 발견해서 잘 실현하는 사람은 자연히 쾌락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기쁘고 제일 행복 된 사람이 누구인지 압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재능을 바로 찾아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원하고 이루고자 하는 그 일을 찾아서 그 일을 잘하는 사람, 그 사람은 세상에 제일 행복 되고 세상에 난 보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다 그렇게 삽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두어두는 동안은 내가 아무리 나이 많아도 나를 통해서 꼭 내가 아니면 하지 못할 일이 세상에 있는 까닭에 세상에 살려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세상에 사는 사람은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려고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꼭 알아서 그걸 그대로 하고 사는 사람이 최대의 행복 자 입니다.
또 그 사람이 세상을 다 살고 사도 바울처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의의 면류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렇게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의의 면류관이 그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사도 바울 같은 이도 처음에는 그 것을 바로 못 찾았어요. 그래서 오히려 기독교를 박해했지요.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붙잡아서 돌이켰단 말입니다.『너 이게 네 길이 아니 야.』그 다음에 바른 길에 들어서지 않았어요. 얼마나 큰 열매를 맺었습니까.
아직까지도 참된 신앙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기의 바른 길을 찾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걸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최대로 행복한 사람이 되고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이 되고 가장 큰 유익을 사회와 국가에 주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이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아직까지 이것을 분명히 못 찾으신 이는 꼭 찾아서 앞으로는 이렇게 살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지나갑시다.
자, 그래서 우리가 처음에 생각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지음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였어요.
둘째로 창세기에 무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되 우리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사람을 지으실 때에 돌이나 나무처럼 안 지었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했습니다.
자 여기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저는 언제나 누구든지 보통으로 알아들을 수 있게, 이해할 수 있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 줄 알아서 간단히 세 가지로 설명하겠습니다.
인간은 다른 동식물보다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는 것은 세 가지 점에서 짐승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무엇인지 아세요? 첫째는 어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이성이란 것이 있어요. 무엇을 생각하고 연구해 내는 사고력이 있어요.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창조성이 있어요. 하나님처럼 없는 데서 있는 데로 창조는 못해요. 그러나 하나님이 만든 물건을 가지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는 힘, 이 창조성, 창조력이 인간에게 있어요.
여기 내다보면 우리 뜰에 높은 은행나무가 있어요. 우리 뜰의 보배는 은행나문 줄 압니다.
아마 五00-六00년 된 은행나무인데 이 은행나무 위에는 언제나 까치집을 지어요. 내가 저 집에 사는지 十五, 六년 된 것 같은데 매해 까치집을 또 짓고 짓는데 까치는 작년에 지은 것이나 십 년 전에 지은 집이나 똑같이 지어요. 내 생각으로는 천년 전에도 까치는 집을 저렇게 지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우리 사람은 집을 그렇게 짓습니까?
뭐 요새 가만히 보니까, 작년에 집을 지은 것과 금년에 지은 집이 달라요. 요새는 너무 집을 잘 짓고는 도둑 촌이란 말이 들리도록 너무 잘 짓는 사람도 있는 모양입니다.
하여간 우리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머리로 생각을 하고 연구를 해서 전보다 더 잘 만들고 보다 더 잘하고 집도 보다 더 잘 짓고, 이렇게 해서 과학이 발전이 되고 문화가 발전이 되어서 오늘날과 같은 우주 시대가 되게 되었고 또 통신과 교통이 모든 방면에 편리하게 만들었단 말이요. 이것이 다 무엇을 통하여 왔습니까? 인간에게는 이 창조성이 있단 말입니다. 인간의 창조성을 살려서 간단없이 있는 자료를 가지고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인간이요. 그것이 사람과 짐승이 다른 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개를 잡아서 해부해 보고 사람을 해부해 보고 개와 사람이 다른 것이 없다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실, 생리학적으로 보면 그 모습만 다르지 뭐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달라요.
그러기에 이것 보세요. 이간이 인간으로 살려면 하나님이 주신 창조력을 살려서 무슨 일이나 연구를 하고 살려서 보다 더 잘하는 것, 이것이 인간으로서의 생활임을 기억해야 됩니다.
거저 옛날에도 이렇게 살았다고 오늘도 이렇게 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주 작은 예를 들면 다른 나라는 안 그런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왜 그런지 요, 다른 나라에서는 장사할 때 거리에 상점에 물건을 진열해 놓고서 장사를 잘 하는데 우리 한국의 거리를 보면 장사하는 사람들이 왜 물건을 자꾸 길바닥으로 내 놓는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이거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일입니다. 지금의 때가 어떠한 땝니까? 세계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시골 구석구석까지 거저 한국학이라고 해서 한국을 연구하러 오는 사람이 많은데 거저 할아버지들이 했던 대로 침을 그냥 내뱉고, 물도 그냥 쏟아버리고 거리는 그냥 어지럽히고 해서 되겠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방면에도 꼭 모법이 되어야 합니다. 창조성을 살려서 전에는 몰라서 그러했지마는 이제는 생활도 개선해야 합니다.
내 늘 하는 말이지만 대접을 받으러 갔을 때에는 그 자리에서는 미안해서 말못했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우리 한국에서 손님 대접하는 것 보면 음식을 너무 많이 차립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여러 나라에 가서 대접을 받아보았지마는 우리 한국 사람들처럼 손님 청해 놓고 한꺼번에 많이 차리는 민족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얼른 보면 한국 사람들이 마음이 후해서 그렇게 한다고 하겠지만, 사실 그런 면이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까?
많이 한꺼번에 차려 놓았다가 한패가 먹고 나간 다음에 그 걸 다시 들여와서 또 먹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그 사람들 먹을 만큼 차려 놓고 그 사람들 먹고 나면 새 손님 청하고 새 것으로 다시 차려다 대접하면 그 얼마나 알뜰하고 좋아요.
이것 좀 미안하지마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생활 개선도 해야 되겠어요. 창조성을 살려서 과거에는 그렇게 살았지마는 좀더 깨끗하고 좀더 경제 되고 좀더 알뜰하고 좀더 정돈되게 살아야 하겠어요. 언제나 넓은 세계에 갔다와서 서울을 보면 서울의 거리는 외국처럼 정돈이 안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정돈이 안 되는 것 이상한 일입니다.
어떤 집에 가보면 걸레질은 잘해 놓았는데 걸레 조각, 한 조각은 방바닥에 그냥 놓아두었단 말입니다.
정돈을 못해요. 그러기에 정돈과 청결(淸潔)이 같이 돼야 합니다. 청결도 하고 정돈도 하고 두 가지가 같이 돼야 합니다.
이것은 딴 얘기가 되어서 미안합니다. 창조성이 있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란 말입니다.
또 둘째는 우리와 짐승이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八장을 여러분이 다 아시지요 예수 님이 성전 뜰에서 가르치는데 어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어떤 여자를 대리고 와서 세워 놨습니다.
예수 님께 질문합니다. 저 여자로 말하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입니다. 모세 율법에 의지하건대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다고 할 것이요 돌로 쳐라 하면 예수 님이 사랑이 없다고 할겁니다.
책잡으려고 이런 케이스를 가져왔단 말입니다. 그 때 예수 님께서 얼른 대답지 아니하고 땅을 보고 잠시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얼른 대답하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좀 있다가 얼굴을 서서히 들고서 그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지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은 먼저 돌을 들어서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그리고는 다시 머리를 내리시고 무슨 글을 쓰십니다. 한참 있다가 하나씩 하나씩 슬며시 나가고 여자혼자 남았단 말입니다.
자, 여러분, 무엇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쫓아냈습니까?
양심의 가책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과 짐승이 다른 점이란 말입니다.
짐승 사회에서 이런 현상을 봅니까?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 너무 부끄러워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다 가 자살하지 않았어요.
유다 만이 아닙니다. 요 몇 달 전 어떤 여자가 자살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개나 돼지가 자살했다는 말을 들어보았습니까?
이것이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입니다. 사람은 양심이 있단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양심은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 마음속에 새겨 주셨단 말입니다.
거저 그래서 무슨 일을 잘못한 다음에는 가슴이 두근두근 합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까닭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한 조각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단 말입니다.
정 포은 선생 같은 이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고려말에 모든 세력은 이성계와 이방원 등 이씨 가문으로 다 옮겨가고만 때, 누구의 힘으로 그 세력을 막을 재간이 있겠어요. 고려조는 망한 것이 분명하단 말입니다. 그러나 정몽주, 정 포은 선생은 그의 시조에서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죽어도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수 있으랴 했습니다.
그 절개 이것이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이 양심을 버리면 짐승의 레벨로 떨어집니다.
의리와 절개를 버리게 되면 동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유명한 말, 그의 무덤 비석에다 이런 말을 새겼다고 합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인간의 가슴에는 양심이 있다.』그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증거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것 보세요. 우리가 사람으로 살려고 하면 언제나 양심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양심을 거역해서는 아니 됩니다. 양심을 져버려서는 아니 됩니다. 하물며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 양심을 져버리면 그 믿음이 어떻게 되겠다고 그랬습니까? 파손 당하겠다고 그랬습니다.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배의 나침반과 같지 않습니까. 배의 나침반이 잘못될 것 같으면 배가 어느 곳에 가서 암초에 부딪쳐서 깨어질지 모릅니다.
우리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는 사람이 양심, 나침반을 버리게 되면 언제나 파선할는지 모르게 됩니다.
둘째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는 양심, 도덕심이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어요. 겉으로 보면 육신뿐이지만 속에는 영혼이 있어요.
여러분이 아시거니와 유물론자들은 영혼을 부인합니다. 발전기는 전기가 날 때는 번쩍번쩍하다가 발전기가 서게 되면 전기가 없어지는 것처럼 사람을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 영혼이 있다가 사람이 죽으면 다시없어지고 무슨 영혼이 있나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내가 전에도 이런 얘기 종종 했습니다마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불란서에 유명한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가 쓴 책 가운데 인식론이란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인간이 안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되나? 하는 것을 연구했습니다.
결국은 무엇인고 하니 사람이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오관(五官)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뭔고 하니 귀로 들어서 알고, 눈으로 보아서 알고, 혀로 맛보아서 알고(짜고 단지), 코를 통해서 냄새를 맡아서 알고, 피부를 통해서 찬지 더운지 여러 가지를 압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뭘 안다고 하는 것은 오관을 통해서 머리에 들어옴으로써 무엇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사실 아닙니까? 가령 여러분이 여기 마이크가 잇는 줄 압니까? 어떻게 압니까?
어떻게 아는고 하니 저 전기 불빛 태양 광선이 여기 와서 마이크에 부딪칩니다. 그 광선이 반사되어 우리 눈으로 들어옵니다. 동공으로 들어와요. 그리고 동공 뒤에 안벽이라고 있는데 안벽에 거꾸로 비추어 줍니다. 그 다음에는 시신경이라는 이상한 힘줄이 있어서 시신경을 통해서 뇌 세포에 보고가 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뇌 세포에 보고 된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자체가 어떤지, 그 사실 그대로를 아는 것인지 의문이 됩니다. 거저 시신경의 보고를 통해서 아는 것뿐입니다. 시신경이 잘못 되면 잘못 압니다. 그러기에 눈이 잘못 되면 잘못 압니다. 물건은 하나인 데 둘로 보는 이들이 있지 않아요?
색맹이라고 해서 하얀 것을 검게 보는 사람도 있지 않아요.
근본적으로 빛이 없다고 하면 여기 마이크가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겠어요? 우리가 오관을 통해서 무엇을 아는데 오관을 통해서 바깥에 있는 것을 아는데, 이것을 안다는 것은 사실은 확실하지 못해요. 우리가 바로 아는지 잘못 아는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아무리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있어요.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어요. 이것은 의심이 난다. 저것은 의심이 안 난다. 그러나 그 생각 자체는 의심할 재간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바깥에서부터 오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은 확실치 않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내 속에 생각만은 확실하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 속에 생각을 하면서 이것은 옳은 것 같고 저것은 잘못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것이 있음이 분명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분의 유명한 말이 있지요.『나는 있는 게 확실하다. 자아(自我)가 있는 게 확실하다. 왜 그런고 하니 나는 생각하는 까닭이다』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 속에는 나라고 하는 것, 자아라고 하는 것이 다 있습니다. 이것이 생각도 지도하고 모든 것을 경영해요. 이것이 성경의 용어로 하면 영혼입니다.
이것은 바깥에 있는 무엇보다도 제일 확실해서 의심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확실히 있습니다.
그런데 물론, 문제는 여기 있지요. 그럼 사람이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됩니까? 유물론자들은 죽은 다음엔 영혼이 없어지고 말지 뭐가 있나? 합니다. 거기 대해서는 우리 교회서 내가 종종 말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이 과학적 세대에 사는 우리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과학자들이 철칙으로 믿는 물질불멸론 (物質不滅論)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무엇인고 하니 이 우주에 물질이 여러 가지 종류인데 형태는 항상 변하마지는 물질 자체는 그냥 우주에 있어서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다고 하는 원칙입니다.
우주에 있어서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다고 하는 원칙입니다.
가령 부인들은 잘 알지요. 가마에다 물을 넣고 불을 때면 한참 후에 물이 다 없어진단 말입니다. 아 이거 물이 다 없어 졌구먼 하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물이 없어진 것입니까? 물이 수증기가 되어서 공기 가운데 포함돼 있는 것입니다.
도로 다 잡아넣으면 물이 다시 됩니다. 이걸 무엇이라고 그래요 물리적 변화라고 그럽니다.
그러나 질까지 변하는 것이 있어요. 내가 늘 그런 예를 드리지마는 여기 가령 촛불이 있다고 합시다. 큰 촛불에 불을 켜 놓았습니다. 밤새도록 켜놓으면 초가 다 없어집니다. 아하 초가 다 없어졌구먼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 초가 없어진 겁니까? 초속에 있던 탄소가 합해서 탄산가스가 되어 공기 속에 있단 말입니다. 그걸 다 모아 놓으면 초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걸 무슨 변화라고 그래요, 화학적 변화라고 그럽니다.
우리 어떤 사람은 나이 거의 七十이 되어 오니까 오래지 않아서 한 목사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것입니다. 놀라지 마세요. 으레 그런 일이 있는 것입니다.
죽게 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봅니다. 죽게 되면 三, 四일 후에 내다가 파묻을 거예요.
내가 바라기는 영낙동산에 파묻어 주기 바랍니다. 파묻으면 한 十년, 二十년 후에 파 보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다 썩어서 그러면 이 육체는 다 썩어져 없어졌겠군 하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썩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화학적 변화를 일으켰다는 말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살이 되고 가죽이 되었던 물질 자체도 형태는 변하였지마는 실상, 아주 없어지는 것은 절대로 압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란 죽을 때엔 그 육체가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물질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 이 육체로 형태는 변하나 그 자체는 그냥 보존되는 이러한 우주에서 인간에 있어서 가장 분명한 것은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정신, 우리의 이 마음, 이 것만은 우리가 죽을 때에 아주 없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없어진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이 불멸하는 것과 같이 인간의 영혼도 불멸합니다. 죽은 후에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 문제는 무엇입니까? 영혼이 그냥 없어지지 아니하고 남아 있다면 죽은 후의 영혼의 형편이 어떠하겠습니까? 가령, 영혼이 어떤 곳에 가겠는가 그것이 문제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구약을 읽으면 엘리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우상을 많이 섬기던 시대에 살면서 하나님을 믿고 담대히 그 신앙을 증거 하면서 일생을 옳은 일을 위해 산 선지자입니다.
또 그 때에 선지자를 핍박하던 이세벨이라는 악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아합 부인되는 이세벨이 있었습니다. 또한 악한 왕인 아합이 있었습니다. 항상 엘리야를 대적한 그런 왕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엘리야는 죽지 아니하고 승천하였다고 했습니다. 엘리야의 영혼은 그냥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세벨이나 아합 왕도 그 후에 죽었겠지요.
그러면 엘리야의 그 남아 있는 영혼과 아합이나 이세벨의 남아 있는 그 영혼이 같은 곳에서 같은 형편 가운데 있을 것 같습니까?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신약을 읽어보면 세례 요한 같은 분이 있습니다. 일생을 의롭게 산 위대한 참 선지자입니다. 또한 그 때에 헤롯왕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의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서 산 음란한 왕이올시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이런 음란한 왕의 생활을 책망한 까닭에 결국은 헤롯왕에게 목 베임을 받아서 순교했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이렇게 죽었으나 그 영혼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헤롯왕도 그 후에 죽고 그 영혼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의 영혼과 악한 헤롯왕의 영혼이 같은 곳에 가서 같은 형편에 있을 것 같습니까?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여 주는 것같이 천국과 지옥이 반드시 있습니다. 스스로 속지 마세요. 천당과 지옥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모든 영혼이 같은 곳에, 같은 형편에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이란 비록 물질로 된 육체를 가지고 살지만 모든 다른 물질적 존재와는 온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그것보다도 인간에게는 가장 귀한 불멸의 영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인간이 가장 귀한 존재인데 불행하게도 인간은 타락되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입니다. 우리 동양 철학자들은 두 가지 인간성에 대해 학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선설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성품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는 인간의 성악설을 주장한 이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악하다. 그리해서 성선설, 성악설은 우리 동양철학에 있어서 항상 대립되는 학설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 점을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본래 지음을 받았을 때에는 그 성품이 선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과 하와가 처음에 지음을 받고 타락하기 전에는 성품이 선했습니다. 의로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인간이 한번 죄를 짓고 타락한 후에는 인가의 성품이 부패해서 그만 악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성선설과 성악설은 일면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장 분명하게 인간의 성품에 대하여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되어서 인간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형편을 살펴볼 때나, 또는 내 자신을 스스로 살펴볼 때나, 우리 인간은 아주 부패하였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일찍이 말씀하시기를『마음은 만물보다 악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 님께서도 밖으로부터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곧 인간의 부패한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곧 그것은 음란과 도둑질과 여러 가지 죄악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좋은 음식이 썩으면 더욱 냄새가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본래는 선했지마는 이렇게 부패하여졌으므로 아주 추악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점점 부패하게 되면 참으로 짐승보다 더욱 악하게 타락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사는 二十세기로 말하면 과학의 세기라, 문명의 세기라고들 말합니다. 참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기술이 얼마나 발달이 됐는지 인간이 달나라에까지 내왕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면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二十세기야말로 가장 악한 세기란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과거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二十세기야말로 가장 무섭게 인류의 피를 흘린 세기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一九一四년부터 一九一八년까지 있었던 제一차 세계대전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후에 독일에서는 나치 운동이 일어났고 이태리에서는 파시스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독일에서는 나치 운동 때문에 무죄한 유대 사람 六백만 명이 가스 챔버에서 학살을 당했습니다. 동양에서는 일본 군국주의가 일어나서 만주를 비롯해서 중국 본토와 아시아 제국에서 많은 무죄한 피를 흘렸습니다.
제二차 대전이 벌어졌습니다. 아직도 이 피 흘리는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六ㆍ二五동란이 일어났습니다. 월남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계속이 됩니다.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기는 二十세기입니다. 그런데 가장 문명했다는 세기가 곧 이렇습니다.
인간이 타락했다는 사실은 이론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고 다만 우리가 二十세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실을 직시하면 곧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과연 타락하였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머리가 발달할수록 악한 생각은 더욱 발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현 세기는 한편으로는 모든 과학의 혜택을 잘 이용하면 바로 혜택을 입을 수 있기도 하나 반면에 잘못하면 원자탄과 수소탄 전쟁으로 전 인류가 멸망할 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지니고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 타락한 인간은 어떻게 하면 구원할 수 잇느냐 하는 것이 二十세기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정치적 혁명, 문화적 혁명, 사회적 혁명, 경제적 혁명, 모든 혁명을 다했는데 이제 남은 것 하나는 정신적 혁명입니다. 어떻게 하면 정신을 바로 잡아서 이 인간이 좀 더 선해지고 좀 더 의로와 지고, 좀 더 깨끗해지고 좀 더 화평하게 살 수 있는 인간이 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타락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의롭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밖에는 우리를 이 죄악에서 건져낼 이는 없습니다.
여러분, 시간 관계로 더 길게 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복음을 온 천하에 전파하도록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 인류를 이와 같이 심히 캄캄한 가운데서 구원해 낼 광명은 오직 복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구원받은 우리는 이 복음을 전파해야 될 것입니다. 오로지 복음만이 인류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一九七0년 六월 十一일·서울 전도대회)


Ⅸ-41 청년과 그 선택 (신명기 三十장 十五-二十절)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 三十ㆍ十九)

이 말씀은 나이 많은 모세가 일생토록 자기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면서 광야 四十년을 지나고 세상을 떠날 기약이 가까울 때에 광야에서 태어난 젊은 세대들을 모아 놓고 자기가 죽기 전에 청년들에게 꼭 할 말을 다하고 결론으로 한 말씀입니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네가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생명의 길이 있고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 복 받는 길이 있고 화를 받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귀한 선물 가운데 하나는 자유입니다. 자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를 우리 인간에게서 빼앗을 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고자 할 때에는 언제나 자유를 얻기 위해서 항쟁을 하는 것입니다. 미국이 영국에 반항해서 독립을 얻으려고 독립 전쟁을 일으켰을 때 애국자 가운데 하나인 패트릭 헨리의 유명한 부르짖음을 기억합니다. 다른 말이 아니고『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
옛날이나 오늘이나 인간은 자유를 위해서 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三ㆍ一운동으로 이것을 의미했습니다. 자유 가운데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가령 언론의 자유, 신교의 자유, 결사의 자유, 여행의 자유, 거주의 자유,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도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선택의 자유입니다.
나이가 좀 많은 이는 기억을 하실 것입니다. 六ㆍ二五 사변이 거의 끝나고 휴전 회담을 할 때, 많은 인민군 포로를 어떻게 할 것이냐를 생각할 때, 이북 괴뢰들은 무조건 포로들을 돌려보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와 자유 진영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포로들에게도 선택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 문제 때문에 휴전 회담이 일년이상 끌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포로들에게 이북에 가고 싶은 사람은 가게하고 이남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은 남을 수 있도록 선택의 자유를 주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북 포로 가운데 자유를 얻어서 남한에 자유롭게 살게 된 청년들이 많게 되었습니다.
선택의 자유는 매우 귀합니다. 이 선택의 자유가 이렇게 귀한데 선택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 뒤에 책임을 다한다는 것을 의식합니다. 선택이 아주 귀한데 더욱 귀한 것은 선택을 바로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가운데서 혹은 인류 역사 가운데서 어떤 청년은 선택을 바로 해서 성공을 했고 어떤 청년들은 선택을 바로 하지 못해서 패망하는 예를 많이 보는 것입니다. 다른 얘기를 할 것 없이 여러 학생들은 에서 의 얘기를 다 들었을 것입니다.
에서는 사냥을 좋아합니다. 종일 사냥하기 위해서 산과 들로 뛰어 다니다가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피곤하고 배고플 것 아닙니까? 그 때에 마침 야곱이 뜰에서 팥죽을 쑤며 앉아 있었습니다. 에서는 배가 고프니까 동생보고『얘, 야곱아, 그 붉은 것 좀 주려무나』팥죽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생 야곱은 깜찍한 사람이올시다. 그 기회를 이용해서 얼른 대답하는 말이『예. 형님께 올리기는 올리겠는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내게 주세요.』장자의 명분이란 말은 옛날 유대 나라의 풍속으로는 여러 가지 특권이 많았습니다. 가령 재산을 나눌 때에도 맏아들은 둘째 아들보다 곱을 상속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그냥 가지고 있겠느냐 팥죽 한 그릇에 그것을 포기할 것이냐, 팥죽 한 그릇과 장자의 명분을 놓고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얘기를 다 아시지요. 허기에 찬 에서는 깊은 생각 없이 그까짓 장자의 명분이 뭐냐 어서 팥죽이나 가져오너라. 그리고 장자의 명분은 너 가져라. 그래서 팥죽 한 그릇을 받고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은 어리석은 선택을 한 에서는 지금까지 그 기록이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이제 다른 청년의 이야기를 해 봅니다. 여러분이 다 잘 아는 다니엘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바벨론으로 잡혀간 청년의 하나입니다. 바벨론 사람은 장래를 생각해서 잡아온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주 준수한 청년 몇 사람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잘 훈련시켜 자기 나라에서 앞으로 쓰려는 방침이었습니다. 다니엘이 그중 하나로 뽑혔습니다. 좋은 집에 유하게 하고 왕이 특별히 좋은 음식으로 먹이라고, 술은 어떤 술을 주고, 고기는 어떤 고기를 먹이고 왕이 먹는 진미를 다 주라고 명령해서 특별한 대우를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엇인고 하니 다니엘은 어려서부터 술 먹지 말라는 교훈을 받은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고기 가운데 먹는 고기도 있고 안 먹는 고기도 있는데 물론 소나 양의 고기는 먹었지마는 우상에 제사했던 고기는 전혀 먹지 말라는 교훈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서는 소나 양을 잡으면 으레 우상에게 제사한 다음에야 그 고기를 먹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왕이 먹으라는 대로 하게되면 술을 먹어야 하고 자기 양심에 거리끼는 우상에게 제사했던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이 거기서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술과 우상의 제물을 아니 먹느냐, 먹느냐, 먹으려고 하니 자기 양심에 괴롭습니다. 먹어야 되겠느냐 안 먹어야 되겠느냐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다 잘 아시지요. 다니엘은 안 먹는 쪽을 택했습니다. 나는 술을 안 마시겠습니다. 나는 고기를 안 먹겠습니다. 채소와 물만 먹겠습니다.
결국 이런 선택이 다니엘로 하여금 역사에 남는 그런 인물이 되게 한 것입니다.
여러 학생들,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 살 때에도 무엇을 마시느냐 무엇을 먹느냐에 대하여 선택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먹느냐 안 먹느냐, 마시느냐 안 마시느냐, 담배를 피느냐 안 피느냐,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봅시다. 롯이라는 청년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아브라함의 조카올시다. 아브라함이나 룻이 다 양이 많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롯 사이는 괜찮은데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 사이에는 자기 양을 먹이겠다고 목장을 두고 다툽니다. 서로 먹이겠다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불렀습니다. 우리 서로 골육지간인데 네 목자와 내 목자가 싸워서야 되겠느냐? 네가 서편으로 가면 나는 동편으로 갈 테니 네 마음대로, 네 보기에 좋은 데를 택하라고 하니 젊은 사람이 자기보고 먼저 택하라고 하니, 기뻐서 저 유대 동방을 보니 거기 푸른 풀이 장성했는데 아주 양 먹이기가 좋겠단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는 어디에 속했는고 하니 그 당시 죄악이 극심했던 소돔과 고모라 근처였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기 푸른 풀이 많으니 나는 이리로 가겠어요 하고 롯이 푸른 풀만 보고 소돔과 고모라 가 얼마나 악한지는 안보고 그 곳을 택하여 갔습니다. 갔다가 어찌 되었는지 아시지요. 소돔과 고모라 가 재앙을 받아 망할 때에 롯이 거의 죽을 뻔하고 겨우 살아났고 재산은 다 없이 하고 하나 있던 아내는 소금 기둥을 만들어 놓고 단신으로 죽지 않고 살아났어요.
이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는 생각지 아니하고 이익만 생각하고 물질만 택해서 그런 방면으로 선택을 했다가 망하는 젊은 사람들은 롯 만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많습니다. 물질 방면에 꼭 옳은 선택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롯이 있는 반면에 모세와 같은 청년이 있음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모세는 본래 유대 사람의 가정에서 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기구한 운명으로 애굽 궁중에서 자랐고 애굽 공주의 아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호화스럽게 잘 입고 잘 먹고 잘 공부하며 커서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청년이 된 다음부터 모세의 마음은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자기가 애굽 사람의 궁중에서 잘 먹고 잘 지내지마는 실상은 자기가 애굽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당시의 모세의 동족인 유대 사람은 애굽 사람에게 압박을 받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받았습니다. 내가 그냥 이 애굽 궁중의 공주의 아들로 남아 있을 것인가, 그러자니 양심이 괴롭습니다. 민족적 양심이 고통을 줍니다. 그러면 내가 이것을 다 떨쳐버리고 유대 청년으로서 이들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이들을 위해서 싸워야 하겠느냐? 그렇게 하자니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모릅니다. 사실 난관이 많습니다. 위협을 느낀 것입니다.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양심은 불안하지마는 애굽 궁중에 그냥 살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그냥 계속할 것이냐? 비록 괴로움이 많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내 양심대로 내 민족과 같이 운명을 함께 할 것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압니다. 모세의 선택을 잘 압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된 데에는 이러한 선택을 한 까닭입니다. 이런 선택을 못했더라면 우리는 모세의 이름을 알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선택을 바로 해야 합니다. 특별히 청년들에게 있어서 이 선택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청년 시대는 일생을 놓고 볼 때 말하자면 분 깃 점에 있는 까닭입니다. 사실은 내가 청년으로서 이 앞에 일생토록 어떤 방면의 공부를 하고 어떤 방면에서 일하겠느냐 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낸 것은 나를 통해서 꼭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있음인데 그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각각 모든 사람에게 재능을 맡겼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재능은 무엇인가? 잘 살펴서 공부할 과(科)를 택하고 앞으로 일할 길을 바로 택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자기에게 맞지 않는 직업을 택한 사람은 성공 못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여기 앉은 여러 학생들을 아직 결혼 안 했습니다. 이 다음에 가정을 이룰 때에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선택을 한번 잘못해서 결혼을 잘못하면 일생을 불행하게 사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선택을 바로 해야 합니다.
미국의 속담 가운데 <비유티 이즈 스킨 디프> (beauty is skin deep)즉 아름다운 미인이란 피부두께 만큼 깊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얼굴이 아름답다, 얼굴이 예쁘다는 것은 거저 그 가죽만큼 아름답다는 말이요, 가죽 베껴 놓으면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얼굴만 반반하고 번듯하다고 얼른 결혼하지 말란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잘 살펴서 그 사람의 배후와 가정과 그 사람의 성품과 교양과 모든 것을 잘 살펴서 결혼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청년 시대에 있어서 특별히 선택 문제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다 중요하지마는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 견지에서 내가 어떤 길을 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산상보훈에 볼 것 같으면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라. 좁은 길, 험한 길로 가라. 넓은 길로 가지 말라. 좁은 길이 험해서 처음에는 가기 힘든 것 같지마는 실상은 생명의 길이라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이 얼른 보기에는 쉬운 길 같아서 가는 사람이 많지마는 결국은 사망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인생의 앞길에는 이 두 가지 길이 있고 두 가지 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시는 길이 있고, 반대로 세상이 가르쳐 주는 길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길 가운데 어떤 길을 택하느냐? 그것이 가장 귀합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 사람을 가멜산상에 모으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가 왜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느냐, 바알이 참 신이면 바알을 쫓을 것이요. 여호와가 참 신이면 여호와를 쫓으라』고 했습니다. 어떤 학생들, 청년들은 이따금 예배당에는 출입하지마는 이 두 길 사이에서 확실히 작정하지 못하고 머뭇머뭇하면서 지나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흔히 저절로 넓은 길로 가게 됩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전에 미국에서 된 일인데 어떤 두 사람이 가까운 친구입니다. 언제나 함께 다니고 함께 먹기도 하고 함께 자기도 하며 아주 가까이 지냅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에 좋지 못한 길을 가면서 안 갈 때도 가고 죄도 많이 짓고 지내는 두 젊은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주일 저녁 둘이 좋지 못한 노름하는 곳, 댄스 홀 같은 데를 가던 모양인데 지나다가 마침 예배당 앞을 지나게 됐습니다. 그 날 저녁의 설교 계시 판에「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 지금 방금 죄를 지으러 가는데 기분이 언짢아졌습니다. 한 친구는 놀러갈 마음이 없다고 합니다. 가자 거니 말자 거니 하다가 둘이 끝내 갈라졌습니다. 한 청년은 그대로 놀려가고 한 청년은 집으로 돌아오는 체 하다가 아무래도 마음이 불안해서 도대체 목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나 보자 하고 혼자서 예배당엘 들어갔답니다. 맨 뒤에 앉아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긴 얘기할 것 없고 이 청년은 예배당에 들어와서 온전히 회개하고 몸을 예수 님께 온전히 바치고 변화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이라고 그럽니다. 그 후 그는 열심히 공부하고 정치 방면으로 나가서 끝내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통령 취임을 합니다. 모든 신문이 대통령 취임 기사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 때에 미국에 유명한 교도소에 어떤 늙은 죄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취임했다는 신문보도를 보면서 홀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합니다.
스스로 하는 말이『이 사람이 三十년 전에는 내 친구였는데 그 어느 때 나와 갈라지고는 별로 만나 보지 못했는데 이제 이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나는 일생을 교도소에서 죄로 말미암아 감옥 생활 중에 죽게 되었으니 이런 분한 일이 어디 잇느냐』면서 눈물을 흘리더라고 합니다. 이 대통령이 누군 고 하니 클리블랜드 대통령이라고 프린스톤대학 출신입니다.
인생의 갈림길이 많다고는 하지마는 간단히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좁은 길입니다. 신앙생활은 얼른 보면 좁은 문이요 좁은 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려면 회개의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얼른 보기에는 좁은 길입니다. 왜냐, 그리스도를 따라가려고 하면 나를 이겨야 합니다.『나를 이기고 따라 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앙 생활이 얼른 보기에는 좁은 길입니다. 왜? 신앙생활은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먹을 것도, 먹을 줄 알지만 먹지 않아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마실 것도 해로우면 안 마시는 절제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길은 참으로 좁은 길인 듯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려면 때로는 핍박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마지막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은 넓습니다. 왜? 이 길은 극기가 필요 없습니다. 절제가 필요 없습니다. 거기는 회개가 필요 없습니다. 거기는 세상 사람들이 다 가는 길이니까 핍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의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청년 시대는 인생의 분 깃 점입니다. 어느 길을 택하여야 하겠는가,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야 합니다.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마는 우리 나라의 제일 큰 백두산에는 우리 나라에서 제일 큰 호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라고 합니다. 거기서 두 강이 흘러내립니다. 하나는 압록강인데 서편으로 흘러서 황해로 내려갑니다. 또 다른 하나는 두만강인데 동편을 흘러서 동해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보세요 백두산 꼭대기 천지 속에 떨어지는 물방울은 조금만 서편으로 기울어지면 압록강으로 흘러가게 되고 조금만 동편으로 기울어지게 되면 두만강으로 해서 동해로 들어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천지라는 같은 못에 있었으나 며칠 후에는 수 천리 멀리 있습니다. 왜? 방향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 一九七0년 六월 十四일 오후 三시에 여러 귀한 청년 남녀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참으로 하나 하나가 흑발 홍안이올시다. 검은머리요 붉은 얼굴들이올시다. 다 아름다운 청년들이올시다. 다 같습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각각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이 약 三十년 후에 이 자리에 모인다고 하면 그 때 아마 같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지나보니 같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혹은 선지자로서 세계적으로 공헌하고 크게 일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분도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것이 어찌해서 그렇게 되느냐, 젊었을 때에 내가 갈 길을 옳게 선택하느냐 못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가 七十년대를 전망하며 삽니다. 우리는 七十년대가 평화롭기를 원합니다. 평화로운 가운데 남북이 통일되기를 원합니다. 세계가 평화롭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七十년대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장래를 우리가 모릅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멀지 않아 세상을 떠나면 그 뿐입니다. 그러나 여기 앉은 여러 학생들은 앞으로 五十년 내지 六十년 살 사람들이요, 장래에 무슨 일을 당할지 사실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성령의 교훈에 의지하여 또한 내가 七十년을 산 사람으로서 경험에 의하여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그것은 七十년대에 무슨 일을 당하든지, 평화가 오든지, 혹 전쟁이 오든지 여러분이 온전히 생활의 방향을 바로 택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로 삼고 주안에서 살면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내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무슨 일을 당하든지 여러분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따라간다고 할 것이면 무슨 역경을 당하든지 다 극복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동해서 선을 이룹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청년, 학생들이 연합 예배로 이 곳에 모인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 하나 하나를 사랑해서 금생과 내생에 영원한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모임을 주신 줄 믿습니다.
내가 부탁합니다. 이미 온전히 방향을 정하고 내 죄를 회개하고 예수 님을 온전히 내 구주로 받아들인 분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확실치 못한 분들은 이 시간 온전한 선택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一九七0년 六월 十四일·七十년대 정신혁명 서울 전도대회, 청년을 위한 연합집회)


Ⅸ-42 가장 고귀한 생활 (히브리서 十一장 一-七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五·二十四)

창세기 五장에는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족보들은 일정한 규범에 의지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가령 셋은 一O五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八0七년을 지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九一二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했습니다.
이렇게 아무개는 아무를 낳았고 아무를 낳은 후에 몇 년을 지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몇 세를 향수하고 죽었다고 꼭 일정한 규범에 의지해서 기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에 대해서는 꼭 같이 써 내려오다가 다만 마지막에 죽었더라 하는 말이 없고 지금 읽은 二十四절의 말씀이 첨가되었습니다.
에녹은 노아 전 시대에 산 사람이올시다. 이 시대는 아주 악한 시대였습니다. 결국 노아 때에 심판을 받은 패역(悖逆)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여러 시간 넓은 길을 걷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닌 줄 생각합니다. 이것은 때로는 저항을 의미하며 투쟁을 의미하며 용기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그는 죄악이 관영(貫盈)한 시대에서도 가장 고귀한 생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 비결이 무엇인지 오늘 아침에 이 문제를 중심해서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은 히브리 十一장을 읽었거니와 히브리 저자는 한마디로 에녹의 생활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에녹이 믿음으로 그렇게 살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여기는 태도가 믿음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을 증거와 같이 확실히 여기는 마음 그것이 믿음입니다.
모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은 것같이 그 안에서 사는 마음, 그것이 믿음입니다. 에녹은 이렇게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분명히 의식하였습니다.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첫 걸음인 줄 생각합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높이 앉으신 하나님의 비전(vision)을 볼 때에 부르짖은 말씀을 여러분이 기억할 것입니다.『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로 만 군의 여호와를 뵈었음이로다.』인간이 하나님을 직면하게 될 때에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자복(自服)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회개는 방향을 돌이킴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에녹도 회개하고 방향을 돌이킴으로써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동행하려면 방향이 같아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내가 가는 길의 방향을 하나님의 가는 방향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회개하기 전에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질을 쳤지마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한번 만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방향으로 전향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코자 하는 이는 곧 온전한 회개, 방향을 전환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세상 길로 가던 방향을 돌이켜야 합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신 혁명을 의미합니다. 결단을 의미합니다.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둘이 같이 길을 걸으려면 뜻이 같아야 합니다. 뜻이 다르면 오래 동행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에녹은 언제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사람의 뜻대로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하고 순종한 줄 생각합니다. 내 욕심대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내 정욕대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내 교만대로가 아니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에 순복(順服)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뜻이 아니고 언제나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의 뜻에 종순(從順)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사람의 뜻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기 위하여 자기 생명까지 희생한 것입니다. 이 순복 만이 하나님과 언제나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비결은 먼저 믿음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뜻과 같게 해서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에녹은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그는 악한 시대에서 그런 고귀한 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극기, 절제를 의미할 뿐 더러 때로는 핍박을 받았을 것이요, 곤란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면에 많은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의 축복이 무엇일까? 우선 그는 고독하지 않았습니다. 긴 여행을 해 본 이는 누구나 체험하는 대로 홀로 여행하려면 고독을 느낍니다. 인간 일생은 긴 여행인데 하나님과 동행하지 아니하면 언제나 고독감을 면치 못합니다. 특별히 병들 때 슬픈 일을 당할 때는 더욱 외로워집니다. 살 때도 그렇거니와 죽을 때의 그 심령의 고독은 무엇이라 형언키 곤란할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일수록 이 고독감은 더 심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고독해서 병도 나고, 고독해서 신경도 쇠약해지고, 심지어는 노이로제까지 들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셨고 제자들에게 그와 같이 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와 같이 갈 터이요, 쉼을 주리라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고 또한 그대로 하신 것입니다. 인간 심령에 있는 이 깊은 고독감은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에녹에게는 안식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 행로는 결코 늘 평탄치는 못합니다. 때로는 태산 준령, 험곡(險)谷)이 있습니다. 장강(長江)대하(大河)가 앞을 막을 때가 있습니다. 또한 길가에는 많은 원수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가는 길은 밤길과 같아서 앞을 미리 보지 못합니다.
이 七十년대가 사실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올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행로를 걷는 이들은 언제나 불안감, 공포감에 싸여서 걷게 됩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만이 불안감이 해소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렇게 외쳤습니다.『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 하시도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주께서 동행하실 때에 불안감은 없어집니다.
이사야 四十三장 一-二절을 읽어보세요. 거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동행하는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 않을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찬송을 종종 부릅니다.『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에게는 불안감이 해소됩니다.
그 뿐 아닙니다. 에녹에게는 즐거움이 충만했습니다. 시편 十六편 十一절에『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다윗이 노래하였습니다.
요한 복음 十五장 十一절에『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이에게는 주님의 기쁨이 충만합니다. 사도 바울은 백발노인으로서 감옥에 있으면서 당시 빌립보 교우들에게 편지할 때에『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 하 노니 기뻐하라』고 외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와 동행한 까닭입니다.
또한 애녹의 생활에는 전진과 향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 인격은 장성합니다. 믿음에 덕이 더하여집니다. 덕에 지식이 더하여 집니다. 지식에 절제가 더 하여 집니다. 절제에 인내가 더하여 집니다. 인내에 경건(敬虔)이 더하여 집니다. 그 위에 형제 우애와 사랑이 더 가하여 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더욱 고귀한 생활로 향상하는 것입니다. 그의 모습은 점점 주의 모습으로 변합니다. 본래에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건한 이는 하나님께서 거저 하늘로 대려 가십니다.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던지 안 하십니다.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던지 안 하던지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곳, 주님의 계신 곳, 천군 천사가 있는 곳, 모든 승리한 성도가 계신 곳으로 하나님이 데려가십니다.
또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의 받는 축복은 사람의 형언하는 말로는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는 이 땅위에 살지마는 하늘의 기쁨을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이에게는 사실 죽음은 없습니다. 때가 될 때에 하나님께서 거저 데려가시는 것뿐입니다.
인생은 한 길가는 나그네입니다. 인생의 길은 외롭고 험합니다. 여러분, 동행자가 있습니까? 아무리 가족이 가까워도 항상 동행하지는 못합니다. 갈라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친구가 가깝다가도 항상 동행자는 못 되고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헤어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항상, 아니 영원히 동행할 수 있는 이는 주님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세요. 한 걸음 ,한 걸음을 주님과 동행하세요.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세요. 이런 생활은 가장 고귀하고, 가장 의롭고, 가장 행복하고 가장 안정하고, 사실 하나님 나라의 생활입니다.
에녹만 하나님과 동행한 분이 아닙니다. 모세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엘리야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모든 선지자들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모든 사도들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아니 세기를 통해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참된 회개와 순복, 이 축복이 우리에게 오늘 아침 같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一九七0년 六월 二十一일)


Ⅸ-43 복의 근원 (창세기 十二장 一-九)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十二ㆍ二)

아득한 옛날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처음에는 명령이 있습니다. 너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가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다음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 복을 주고 네 이름을 창대(昌大)캐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지니라 했습니다. 여기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여기 보니 본 고향을 떠나라고 그랬습니다.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람은 보통 자기 살던 곳에 살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옛날 사람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현대인은 어디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나 옛날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특별히 동양 사람에게 있어서는 고향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순복(順服)하였습니다. 갈대아 우르, 오랫동안 조상이 전해내려 오면서 살던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입니다. 하란으로 이사해 갔습니다.
거기에 얼마 있다가 다시 하나님의 지시하는 땅으로, 히브리 저자의 말대로 사실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 해전에 제가 성지를 순례할 때에 한 번은 헤보론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큰 모스크 회회교의 성당 안에 들어가서 구경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성당 안에 들어가면 그 마루 밑바닥에 큰 구멍이 하나 뚫려 있습니다.
그리고 내려다보면 그 성당을 지은 아래 큰 동굴이 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막벨라 굴이올시다. 일찍이 아브라함이 햇 사람에게 사라를 장례하기 위해서 산 굴이올시다.
거기에 아브라함이 묻혔고 사라가 묻혔고 이삭이 묻혔고 야곱이 묻힌 곳입니다.
내가 가던 날도 바로 요르단 나라의 왕 훗세인 왕이 와서 참배를 하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곳에는 유대 사람은 물론 전세계의 흩어져 있는 기독교인들과 회회교인들, 아랍 사람들, 사실 세계 모든 민족의 순례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왜? 거기에 아브라함의 유해가 있는 까닭입니다.
놀랄 만한 일은, 옛날 약 四천년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이 오늘날에 와서 그대로 응하게 된 것입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그의 믿음의 자손은 문자 그대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의 이름이 창대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많은 무리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복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의 자손 가운데서 모세가 났습니다. 선지자들이 났습니다. 마지막에는 만민의 구주가 되시는 메시야께서 나신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만민에게 복의 원천이 된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 복의 원천이 되는 아브라함의 생활을 잠깐 돌이켜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그의 생활은 먼저 하나님의 부름을 듣고 거기에 순종한 생활이었습니다. 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할 때에 비록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마는 그 명령에 순종해서 떠나간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죄악 세상에서의 성별을 의미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이외에 무엇을 섬기면 그것은 다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돈이 혹 우상이 될 수도 있고, 지위 같은 것도 혹 우상이 될 수도 있고, 향락이나 정욕 같은 것도 혹 우상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복의 원천을 만들기 위해서 제일 먼저 모든 우상을 섬기는 죄악 세상에서 온전히 떠나라고 명령하셨고 또 아브라함은 거기에 순종했습니다.
요사이 세속에 들어가야 된다는 운동이 있습니다. 그것도 좋은 운동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세상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정신적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먼저 온전한 회개와 중생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사실 복의 원천이 되는 생활의 첫 걸음이올시다. 천성을 향해 가는 기독교도가 되려면 먼저 장망성을 떠나야 합니다. 죄악의 쇠사슬에서는 자유를 벗어나야 합니다.
바울 이후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존경을 받는 어거스틴의 생활을 잘 아시는 분이 여러분 가운데 많이 있을 줄 압니다. 그는 본래 천재였습니다. 문학에 재주가 있었습니다. 또는 그는 부자 집에 난 사람이올시다. 젊어서 온 세상을 다 여행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름을 높이 날릴 수 있었으나 그의 생활은 방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한번 밀란이란 곳에 가서 어떤 동산에 조용히 앉았을 때에 성경책을 펴서 읽으라는 이상한 음성이 들려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옆에 있는 성경을 펴 보았습니다.
성경을 펴 보니 이런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로마서 十三장 十二절로 十三절까지를 읽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 말씀을 읽는 대로 어두운 옛 사람의 일을 떠난 것입니다. 그는 빛의 갑옷을 입은 것입니다.
이렇게 어거스틴이 복의 원천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부름은, 곧 옛 생활을 떠나라는 부름은 일찍 들을수록 좋은 일입니다. 소년, 청년 시대일수록 좋습니다. 이번 전도대회의 결신 자의 三분지 二가 청년들이란 말을 듣고 감사히 생각하였습니다.
소년 시절에, 젊었을 때에 이 부름을 듣고 옛 생활에서 온전히 떠나서 성별 된 생활을 하는 것은 복의 근본이 되는 생활의 첫 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아브라함의 생활을 추억해 보면 그는 일생토록 순례자의 생활을 계속하였고 그러나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순례자는 보통 여행자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순례자란 일정한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여행하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은 성경에 기록한 대로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언제나 바라보면서 그는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하란으로 가서 얼마 있다가 다시 그 곳을 떠났습니다. 세겜으로 갑니다. 벧엘로 갑니다. 혹 애굽으로도 갑니다. 브엘세바에 다시 왔습니다. 헤브론 등지로 일생을 유랑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그대로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이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는 곳마다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옛 사람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으면 이 아브라함의 생활에서 배울 것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살 때, 물론 이 사회에 봉사하고 국가를 위해서 혹은 세계 평화를 위해서 모든 책임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의 생의 목표는 현세에 끝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사나 미래를 바라보면서 살고, 현세를 봉사하면서도 영세를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순례자의 생활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언제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제단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위로부터 내리는 새로운 힘을 얻어서 날마다 세상에 사나 세상을 이기면서 승리 적 생활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우리가 다 복의 원천이 되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세상에 사나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는 순례자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나 어디서든지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이북에서나 이남에서나 농촌에서나 도시에서나 어떤 직장에서나 제단을 그 곳에서 쌍을 줄 알아야 합니다.
변하는 환경과 변하는 시대에서, 어디서나 변치 아니하는 제단을 쌓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의 생활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동행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의 근원이 되는 생활의 둘째 걸음인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생각할 때에는 모리아 산상에서 그의 외아들 이삭을 번제(燔祭)로 드리려고 하던 그 사실을 기억 할 것입니다.
그 얘기는 다 잘 기억하실 터이니까 여기서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는 줄 생각합니다. 그 분이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한 이 사실은 현대인에게 적지 않은 의혹을, 혹 의문을 가져다주는 것도 사실이올시다.
우선 윤리적 견지에서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아버지에게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할 수가 있겠느냐고 의문을 품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같으면 그런 명령은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당시에는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우상숭배의 종교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몰록 이란 우상숭배자는 언제나 자기의 자식을 번제로 드리던 때입니다. 그런고로 당시의 종교적 윤리적 사상의 환경에서는 이런 명령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라도 하나님을 위하여 내 놓을 수 있는 신앙을 나타내기 위해서 아마 이런 명령이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라도 하나님을 위해서는 내 놓을 수 있는 신앙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런 명령은 불가피한 줄 생각합니다.
셋째로 이런 명령을 내려서 아브라함이 신앙을 나타내는 그 즉시로 그 일을 막으므로,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을 원치 않는 하나님인 것을 다시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곧 아브라함은 이삭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들입니다. 독자입니다. 또 만득자(晩得子)입니다. 언약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를 심히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들도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리아 산상에서 아브라함의 이 사랑을 시험하여 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후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하리라.
하나님의 뜻이면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이라도, 독자라도 드리는 신앙, 가장 사랑하는 무엇이라도 하나님을 위해서는 희생하려고 하는 신앙, 이것이 모리아 제단의 정신이요, 아브라함의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이러한 신앙을 가진 이에게 복을 주시고 이런 이를 통해서 만민에게 복을 더하여 주시는 복의 원천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예수 님도 일찍이 이렇게 말씀한 때가 있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그 다음에 무슨 말씀이 있는지 압니까?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오해하지는 마세요. 부모를 미워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 뜻은 세상의 누구보다 더, 아니 내 목숨보다도 주를 더 사랑해야 예수 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것이 모든 순교자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이 모든 참된 성도의 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복의 근원이 된 하나님의 자녀의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네가 복의 근원이 될지라.』하나님께서는 이런 이를 통해서 모든 다른 사람들까지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이런 이의 기도를 사회와 국가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존 낙스의 기도가 그 때의 스코틀랜드를 구원했다는 말은 우리가 다 기억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런 이들은 어디서나 다른 이들을 봉사합니다. 인생 행로에 외로운 이들, 쓰러진 이들, 이런 이들로 말미암아 일으킴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나서 인생 행로를 걸을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어디서나 복음을 전파합니다. 죄악에 묻힌 생명이 이런 이로 말미암아 구주를 만나게 됩니다. 사실 이런 이들은 백합화와 비슷합니다. 혹은 난초와 비슷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그 향기가 온 사회에 퍼지게 됩니다. 무언의 감화가 있습니다.
이런 이들이 많으면 자연히 사회가 정화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사회와 국가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것입니다. 필요불가결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엘리사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왕이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병거(兵車)와 마병(馬兵)이시어 하고 이렇게 부르짖으며 통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엘리사가 무슨 마병이 되어서 전장에 나가 싸웠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사 같은 참된 하나님의 종의 존재가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十八세기 영국의 유명한 전도자 조지 휘트필드라는 분이 세상을 떠난 다음 장례식을 할 때에 어떤 목사가 기도할 때에 역시 이 글귀를 인용하였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병거요 이스라엘의 마병이 되시는, 이 하나님의 사자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고.
우리가 이렇게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께 경배하게 된 것은 우리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사람이라도 이렇게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처럼 부족한 사람을 통해서도 복의 근원이 되어서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더해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될지라. 다시 말하면 복의 근원이 되어라 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옛 생활에서 온전히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첫 걸음입니다. 둘째는 이 세상에 살지마는 이 세상에 속해서는 아니 됩니다. 어디가나 제단을 쌓으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마음과 성품과 정성을 다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했습니다.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니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신앙을 축복하시고 이런 신앙을 가진 이를 복의 원천으로 삼아서 모든 다른 사람들까지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一九七0년 七월 五일)


Ⅸ-44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 전서 十장 十一 - 十三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十ㆍ十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형제들이 꼭 알기를 간절히 바랐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왔을 때 그들은 구름과 물의 세례를 받았다고 하겠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은 세례를 받은 것과 비슷합니다. 구름 기둥 아래에서 항상 지도를 받은 것입니다. 다같이 신령한 음식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받은 것입니다. 다같이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하였습니다. 반석에서 내어 주신 생수를 마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나온 그분들이 가나안 복지에는 채 들어가지 못하고 그들의 대부분은 광야에서 쓰러졌습니다. 어떻게? 시험에 들어서, 어떤 이들은 우상을 숭배하다가, 어떤 이들은 간음을 행하다가, 그만 三천명이나 죽었단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구리 뱀에게 물려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멸망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모세가 그 때의 교인들에게 이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앙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경고가 됩니다.
우리도 말하자면 장망성을 떠나서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러나 아직 가나안 복지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광야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권하시기를,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권면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고 어제나 또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매우 적절한 권면인 줄 생각합니다.
제가 근 四十년의 목회 생활의 경험에 의지해서 생각할 때에 아주 적절한 권면입니다. 처음에 예수를 믿으려고 나오고 세례까지 받았지마는 중간에 시험에 들어서 쓰러진 사람들을 나 자신 많이 보았습니다.
오늘 이 경고를 잠깐 생활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왜 조심하라 하십니까? 성경에 보면 조심하라, 깨어 있어라 합니다. 조심하라는 권면이 종종 있는데 왜 그런 권면을 합니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五장 八절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느니라.』
우리의 대적이 있어요. 악한 마귀가 있어요. 이 악마를 우는 사자라 했습니다.
현대의 아담, 현대의 하와가 다 악마에게 삼킴을 받아서 시험에 들어서 쓰러진 것입니다.
여기 사자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아프리카의 케냐란 나라의 수도는 나이로비인데 거기에 가보면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동물원이 있습니다.
넓이는 아마 한국만큼이 될 것이고 울타리를 치고 각종 짐승을 한데 넣어 서로 섞여 살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자도 있고 호랑이도 있고 사슴도 있습니다. 사자와 호랑이가 이렇게 우글우글 하는데 어떻게 사슴이 사나? 그래서 제가 안내자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 때에 안내자가 사슴은 뛰기를 빨리 뛰니까 염려 없다고 했습니다. 사자가 사슴을 보아도 못 따라가 잡는 답니다. 그러나 때로는 잡아먹힌다고 합니다. 사자란 놈이 수풀 속에 가만히 숨어 있을 때 그만 모르고 갑자기 덮칠 때 잡아먹힌답니다.
우리가 시험을 받아 넘어지는 것도 악마에게 갑자기 덮침을 받는 것입니다. 시험은 예고 없이 옵니다. 시험은 항상 속에서 듭니다.
신문에 보면 종종 간첩선이 이북에서 이남으로 내려옵니다. 간첩선이 내려올 때 배에다 북괴 기를 높이 달고 간첩선이라고 달고 내려옵니까? 대한민국 기를 달고 대한 민국 옷을 입고 가장을 하고 몰래 침투합니다.
악한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것도 이렇게 속입니다. 그를 따라가면, 죄악의 길을 따라가면 아주 복을 받고 재미나는 일이 많은 것처럼 속입니다.
속아서 쓰러지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기에 성경에 조심하라,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서양에는 트로이 성의 함락에 대한 옛날부터 내려오는 시가 있습니다.
옛날에 트로이 성은 아주 튼튼하고,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래 어떤 원수든지 그 성을 훼파(毁破)해서 점령한 원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어떤 일이 있었는고 하니 이 성이 바닷가에 건축이 돼 있는데 한번은 아침에 나가보니 바닷가 모래 위에 이상한 말이 척 서 있단 말입니다. 가서 보니 아주 아름답게 보이는 말입니다. 그 때 사람들은 말이 바다 속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였는지 경사라고 그 말을 여럿이 메어다가 는 트로이 성 어디에다 둔 모양입니다.
그 날 밤에 어떻게 됐는지 압니까? 그 말은 사람이 만들어 칠을 잘한 말인데, 그 말의 배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압니까? 요새 말로 소위 간첩들이 몇 놈 엎디어 있었습니다.
그 간첩들이 밤에, 남들이 다 잘 때 배속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나와서 성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고 그 기회에 원수가 밀물처럼 들어가서 트로이 성을 점령했다는 옛날 얘깁니다.
시험에 빠지는 것이 이렇습니다. 속아서입니다.
혹 신문에 보면 어떤 도둑놈은 남이 잘 때 들어와서 마취제를 뿌려 놓고 다 가져갔다고 합니다. 자다가 우리의 영혼이 다 도적 맞을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으면 속으로 좋아 안 합니다. 왜? 우리 같은 사람에게, 나야 어떻기래,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혹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전에 베드로도 그렇게 생각했었지요. 예수 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내가 이제 잡히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너희들이 다 흩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얼른 나서며 하는 말이『모든 사람이 주를 모른다고 할지라도 저는 절대로 져버리지 않겠습니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몇 시간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 님이 정말 잡혔습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압니까? 시험에 장사가 없어요. 누구나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람은 약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같은 이도 시험에 빠진 일이 있지 않아요. 심지어 모세 같은 이도 시험에 빠진 일이 있지 않습니까? 기드온 같은 이도 시험에 빠진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하라고 하는 경고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경고입니다.
교역자에게도 필요합니다. 장로에게도 필요합니다. 평신도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오래 믿은 이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오래 믿었다고 너무 자신하지 마세요.
조심하세요.
새로 믿는 이에게 이 말은 필요합니다. 누구나 조심해야 됩니다.
자 그 다음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조심해야 하나? 어떤 방면을 조심해야 합니까?
그러면 이제 제가 몇 가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사람마다 약점이 있는데 그 약점은 다 다릅니다. 내 약점을 미리 찾아서 그 방면에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가령 우리 육체를 보면 어떤 분은 폐장이 약하고 어떤 분은 심장이 약하고, 어떤 분은 간장이 약하지요. 그러면 내가 미리 알아서 그 약한 부분에 특별히 조심해서 생활을 해야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생각할 때에 사람마다 도덕적 약점이 있어요. 그것이 각각 다릅니다.
성경을 보면 에서 같은 사람은 먹는 데 약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노아 같은 이는 그렇게 신앙이 좋아서 방주를 지은 분이지만 마시는 데 약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술 한 잔 간단히 마시고 아주 창피한 꼴을 보았습니다.
오늘날도 어떤 분은 먹고 마시는데 약점이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있을 거예요. 이 같은 약점은 미리 아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런 분들은 절제하고 조심해야 됩니다.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또 성경에 보면 아간 같은 사람은 금과 은을 탐내서 시험에 들었습니다. 롯과 같은 사람은 양치는 목자인데 푸른 풀을 탐해서 시험에 들었습니다. 유다 같은 사람은 결국 은 三十냥을 받고 주님을 팔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 마디로 말하면 물질에, 돈에 약점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도 이 방면에 특별히 약점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돈 문제에만 들어가면 친구도 없고 교회도 없고 저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따라갑니다.
그래서 무슨 얘기가 돌아가는고 하니 아무개는 다른 것은 회개했는데 돈주머니만은 회개 못했다고 합니다.
그 방면에 약점이 있는 이는 그것도 내가 미리 알고 그 방면을 통해서 악마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또 성경에 보세요. 다윗 왕이나 솔로몬 같은 이는 얼마나 용기가 있고 지혜도 있는 위대한 왕이었어요. 그러나 그들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정욕 방면, 그래서 이 정욕방면의 시험에 빠짐으로 말미암아 아주 부끄러운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오늘날도 어떤 이들은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이 방면이 약해서 이 방면에 시험이 들어 자기 자신도 망치고 교회에도 큰 욕을 돌리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신약도 읽어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열심 있는 이요, 교회 잘 나오는 이요, 연보도 열심히 하는 이였습니다. 그러나 약점이 있었습니다.
진실 되지 못하고, 거짓말하는, 거짓된 약점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다른 것은 다 좋고, 재주도 있는데 정직치 못해서, 아무 데도 쓰지 못할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각각 약점이 다릅니다. 내 약점과 남의 약점이 달라요.
꼭 내 약점을 미리 발견해 가지고 그 방면에 조심해서 악마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다. 사탄이 언제나 약점을 공격합니다. 약한 데를 찌릅니다. 쇠사슬이 아무리 길지마는 그 가운데 고리 하나가 약해서 고리 하나가 끊어지면 그 쇠사슬은 쓸모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약점을 미리 알아 조심해야 합니다.
플라톤의 제자 가운데 프로필로스란 제자가 있었는데 이 분은 바다에 뱃놀이를 아주 좋아합니다. 한 번은 친구들과 같이 뱃놀이를 나갔다가 큰 폭풍우를 만나서 죽을 뻔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시는 바다에 안 나가기로 맹세를 했습니다.
맹세만 한 줄 압니까. 자기 집이 바닷가에 있었는데 바다로 향한 큰 창문을 아예 나무 판자로 막아버렸어요. 바다를 안 보겠다고 말입니다.
왜? 이건 유혹의 창이요, 그것을 그대로 두었다가 바다 가 잔잔할 때 바다에 나갈 마음이 생기면 안되겠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유혹의 창이 있어요. 시험의 창이 있어요. 약점이 있습니다. 그걸 막을 수 있어야 됩니다.
자, 그 다음에 둘째로는 조심할 때, 약점만 조심할뿐더러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노라면 약할 때가 있어요. 이 약할 때에 조심하여야 됩니다.
가령 에서의 이야기를 했지만 에서는 특별히 종일 사냥하고 배고픈 때 죽을 보았단 말입니다. 약할 때란 말입니다. 배고플 때, 약할 때에 시험에 들었어요.
예수 님께서 四十일 四十야를 금식하실 때 악한 마귀가 나타나서 제일 먼저 무엇을 시험했는지 아십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 든 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습니다. 먹는 시험을 했습니다. 배고픈 때, 시장한 때 먹는 것을 통해서 악마가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배고플 때, 특별히 가난할 때, 또는 사업에 실패한 때, 이 같은 때가 약한 때인데 악한 마귀가 이 때를 이용해서 시험하기 쉬운데 미리 알고 특별히 조심해야 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가령 분이 난 때가 있습니다. 무슨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분할 때, 아주 위험한 때입니다. 아주 약한 때입니다.
신문에 종종 보지요. 하사가 상관을 쏴 죽이고 자살하기도 하고, 혹은 잡혀가기도 합니다.
왜 무서운 죄를 저질렀습니까? 분이 나서, 아마 무슨 꾸지람을 받고 분이 나서, 참지 못해서 일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분이 날 때는 시험받기 쉬운 때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보면 분을 내어도 해가 질 때까지 분을 품지 말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어떤 때는 분이 날 때도 있고 마음에 분한 생각이 가득할 때가 있습니다. 아주 약한 때입니다. 시험받은 때입니다. 조심해야 됩니다. 죄 안 짓도록 해야 합니다.
뭐 약할 때가 많습니다. 집안에 있을 때보다 객지에 나가면 약한 때입니다. 객지에 나가서 무슨 행상 하다가 죄짓는 사람을 더러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청년들이 가정을 떠나 군대에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죄에 빠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집을 떠나서 다른데 가서 사는 것이 아주 약한 때인 것을 미리 알아야 합니다. 혹은 외롭고 고독한 때도 매우 약한 때입니다. 시험받기 쉽습니다.
어떤 분은 너무 한가해서, 너무 한가한 때가 약한 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 왕 같은 이는 너무 한가해서, 어느 한가한 오후에 큰 시험에 빠졌습니다. 요새도 한가한 사람들이 시험에 간혹 빠집니다.
약한 때를 미리 알아서 조심해야 합니다. 대체로 보아서 젊었을 때에는 정욕의 시험을 많이 당합니다. 그러므로 동양의 옛 성현들은 옛날부터 젊었을 때는 계지재색(戒之在色)이라 색에 조심하라 했습니다. 나이 점점 많아 가면 욕심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노욕(老慾)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옛 성현들이 계지재득(戒之在得)이라고 해서 얻으려고 하는 것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약한 때를 알아서 조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약한 곳을 알아서 조심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약한 때를 알아 조심하라는 것이요, 셋째는 무엇이든지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는 그런 곳에서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유혹으로 인도하는 곳에서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친구가 있어야지요. 그러나 친구 가운데는 우리를 유혹으로 끄는 친구가 있어요. 그런 경우에는 그 친구를 멀리 해야 합니다.
음악은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는 음악도 있습니다. 그런 음악은 피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구경을 좋아하지요. 그러나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는 구경이 있습니다. 그런 구경은 피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따금 오락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는 오락이 있습니다. 그런 오락은 피할 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한국적인 이런 상황하에서는 밖으로부터 외래 풍속들이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이런 가운데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많이 있습니다. 퇴폐(頹廢)한 만풍(蠻風)이 많이 있습니다. 거저 밖에서 들어오는 풍속이라고 다 받아들이다가는 큰일 납니다. 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요새도 가만히 보니 댄스다 뭐다 해 가지고 거저 외국에서도 이러니 우리도 하자 합니다.
내가 요새 들으니 서울 거리에서 히피처럼 머리도 안 깎고 다니는 청년들이 있다고 합니다. 마리화나라는 대마 잎을 빠는 사람도 더러 있답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온 것은 아닙니다. 서양에서 왔다고 다 좋은 것 아닙니다. 절대로 기독교와 상관이 없는 만풍입니다. 조심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장을 써내려 가다가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했습니다.
어떤 것은 그 자체는 도덕적으로 악이 아니나 유익이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 많고 우리를 유혹으로 이끄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 것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극진히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는 모든 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선한 싸움을 싸우라』했습니다.
여기 낚시질 해본 사람은 잘 아시지요? 낚시를 물에 던지면 낚시 가까이 뱅뱅 도는 고기들이 늘 있습니다. 흔히 어떤 고기가 먼저 물리는지 압니까. 낚시 가까이 뱅뱅 도는 놈이 먼저 물립니다. 시험으로 인도하는 줄 알면서도 그런 것에 뱅뱅 돌기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는 모든 것에서 피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이제, 시간이 다가서 더 길게 말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이 시험 문제에 대해서 무슨 적극적인 대책이 있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있습니다. 몸이 약하면 백 병이 침입합니다. 그러나 몸이 건강하면 다른 병균이 별로 침 노를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 정말 든든하면, 그런 사람에게는 시험이 많지 않습니다. 약하면 백 가지 시험이 침노합니다.
요컨대 어떻게 하여야 튼튼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간단히 말하면 몇 가지가 있지요. 첫째는 온전한 회개와 중생입니다. 먼저 거듭나야지요.
둘째는 건전한 신앙 생활을 매일 해야지요. 매일 기도를 힘써야 하고 매일 주님의 말씀을 읽어야 하고 언제나 양심에 순복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동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어요. 어떤 시험이든지 시험은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싸움이 필요합니다. 十三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시험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서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깊이 들으셨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당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아니하십니다.
또 시험을 당할 때에 피할 길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떤 시험이든지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 이길 수 있는 시험만 허락합니까? 어떤 시험을 당하든지 사실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이 확신과 같이 싸워야 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예수 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중에 예루살렘에서 잡히실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걸 보고 베드로가 얼른 하는 말이『선생님 멀리 하세요 선생님의 몸에 그것이 가까이 하면 됩니까』했습니다. 그 때 예수 님께서 자기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시험에 대한 태도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시험일 때에는 단호히 전격적으로 물리쳤습니다. 이것이 필요합니다. 예수 님께서 자기 자신이 그러할뿐더러 이렇게 교훈 하셨습니다.
『너희 눈이 만일 너희를 범죄 캐 하거든 빼어버려라. 한 눈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 가지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낫다. 만일 너희 손이 너희를 범죄 캐 하거든 손을 찍어버려라 한 손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단호하게 싸워서 이기란 말입니다. 시험은 이길 수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이는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길 수 있는 확신을 가지고 어떤 유혹이 들어오던지 선한 싸움을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켜서 의의 면류관을 받아야 합니다 (一九七0년 七월 十八일)


Ⅸ-45 겸 손 (베드로 전서 五장 一 ~ 十一절)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五ㆍ五)

여기에 간단한 세 가지 권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다 서로 겸손으로서 허리를 동이라. 둘째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이올시다.
먼저 첫째 권면을 생각하십시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겸손에 대한 권면이 많습니다. 야고보 四장 十절에도『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잠언 十六장 十九절『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은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 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했고 미가서 六장 八절에는『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냐?』했습니다.
우리 주님도 산상보훈에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실 때에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했고 마태복음 十一장 二十八절에는『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했습니다.
누가복음 四장 十一절에도『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했고,
사도 바울도 로마서 十二장 三절에, 로마는 十一장까지는 교리편이요 十二장 이후는 기독교 윤리편입니다. 여기에 제일 먼저 있는 말씀이 이 말씀이올시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겸손한 생각을 품으란 말입니다.『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했습니다.
혹은 에베소 四장 첫 절에, 에베소서는 三장까지가 기독교 교리편이고 四장부터는 기독교 윤리에 대한 교훈인데,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함과 온유로 하고』했습니다.
주목하여 기억하십시다.
성경은 겸손을 제일 먼저 가르쳐 주십니다. 성경은 겸손을 최고의 덕으로 가르쳐 줍니다.
우리 동양에는 옛날부터 삼덕(三德)을 말합니다. 지, 인, 용(知ㆍ仁ㆍ勇), 지혜, 어진 것, 용기입니다. 겸손이란 말은 별로 없습니다.
여기 서양, 특별히 헬라의 윤리사상을 보면 이 셋에다 하나를 더 가합니다. 절제를 가합니다. 사덕(四德)을 말합니다. 그러나 겸손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제일 먼저 겸손을 가장 귀한 덕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가르치신 것만 아니고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겸손을 보여 주셨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에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친히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겸손의 도, 종의 도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예수 님의 성육신의 지상 생활 전체가, 다시 말하면 예수 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지상 생활 전체가 겸손에 대한 산 교훈입니다.
빌립보 五장 二절 이하를 읽을 때에 들어보세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했습니다.
예수 님은 자기를 비어서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낮추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겸손을 친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겸손을 최고의 덕으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둘째 교훈을 생각하십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옛날 파사의 재상 하만이 교만해서 유대사람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인사를 잘 안 한다고 그 삶과 그 사람의 가족뿐 아니라 온 유대사람을 학살하려는 음모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자기가 모르드개를 매어 달려든 기둥에 매어 달려 죽은 얘기를 에스더에서 여러분이 다 읽어보았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됐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다니엘을 보면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교만해서 자기 궁전 높은 꼭대기에 올라 가 궁중을 내려다보며 내 능력의 지혜로 이 모든 성을 건설한 것이 아니냐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 말을 한지 얼마 안 되어서 느브갓네살 왕의 정신이 나갔습니다. 미쳤습니다. 들로 나가서 소처럼 풀을 먹고 그 머리털이 독수리 머리털처럼 되었다 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어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전에 벨사살 왕이 교만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쓰던 거룩한 기명을 내다가 술을 마셨습니다. 천여 명의 고관대작들을 모아다가 연회를 합니다. 먹고 마십니다. 그 날 저녁으로 메데와 파사의 연합군이 들어와서 벨사살 왕은 죽고 온 나라는 망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리됐다고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사도행전 十二장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거기 처음에 보면 그 때의 왕 헤롯이 요한 의 형 야고보를 칼로 죽였단 말입니다. 마지막에 보면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거짓 영광을 받은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보면 무슨 얘기가 있는지 압니까? 주님의 사자가 치니 『충 먹어 죽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왜 그렇게 됐습니까.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지금부터 약 백년 전에 독일에 니이체라는 사람, 초인간(超人間)의 사상을 선전하면서 기독교 사상은 노예 도덕이라고 기독교는 노예 종교라고 비웃었습니다. 후에 어떻게 됐는지 압니까? 니이체도 후에 정신이 빠져서 미쳐서 죽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바로 최근 二十세기에 들어와서 독일의 히틀러 같은 사람은 바로 니이체의 사상을 정치에 인용해서 독일 민족만은 초인간적 민족이라고 주장하며 유대 사람 六백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어떻게 됐는지 여러분이 다 잘 아십니다.
왜 그렇게 되었어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적게 교만한 자를 적게 대적하시고 크게 교만한 자는 크게 대적하십니다. 반드시 대적의 결과를 받을 때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아닙니다. 사실 교만한 자는 사람들도 대적합니다. 그러므로 잠언 十六장 十八절에는『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 잽이니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개인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습니다. 사실 교만은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만 죄의 어머니입니다.
교만함으로써 많은 다른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반드시 망합니다.
셋째의 교훈을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렇습니다. 낮은 곳에 물이 모입니다. 겸손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겸손한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모입니다.
낮은 골짜기에 이슬이 많이 내립니다. 바람 많이 부는 산꼭대기에 이슬이 내리지 못합니다. 겸손한 마음에 은혜의 이슬이 내립니다.
병은 비어야 기름을 넣을 수가 있습니다. 겸손한 빈 마음 에라 야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부어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五十七장 十五절에서 이런 말씀을 우리가 읽어봅니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蘇醒)캐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 캐 하려 함이라』했습니다.
겸손한 자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같이 해서 그 마음을 소성 캐 하십니다.
우리가 구약을 읽으면 위대한 인물이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도 제일 위대한 인물이 누굴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마도 모세일 것입니다.
모세는 아주 겸손하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신약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구일까요 혹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아마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그는 겸손했습니다. 자기는 죄인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교만한 자의 기도는 물리치십니다.
그래서 바리새교인이 성전에 들어가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한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겸손한 과학자가 새로운 진리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아이자크 뉴우톤의 유명한 얘기를 여러분이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가 이 우주에 대한 진리, 우주의 진리에 대한 나의 지식이란 저 바닷가에서 자갈돌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바다의 신비에 대한 지식을 가진 것보다 더 적을 거라고, 혹 비슷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는 겸손합니다.
그러므로 유명한 교부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뿌리요, 어머니요, 기초이다.』
유명한 교부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 생활에는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
어떤 늙은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지식이 너무 적어서 성경을 그저 그대로 읽었다. 그러다가 대학과 신학에 가서, 철학을 배우고 비교 종교학을 배우고 성경 비판 학을 배우게 될 때에 지식이 너무 많아져서 성경을 그대로 못 믿었다. 그러다가 지금 와서는 내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아서 이제는 거저 성경 그대로 믿는다.』
전엔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 자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병원을 처음으로 지을 때 손수 일을 하면서 병원을 지었습니다. 그 옆에 흑인 청년이 하나 거저 서 있습니다.
거저 서 있을 것이 아니라 나하고 같이 일하자고 했습니다. 그 때 이 흑인이『나는 그런 일 안 합니다. 나는 공부한 사람인데 그런 일은 안 합니다. 일은 공부 안 한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하는 말이 나도 학생 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소 그러나 공부를 많이 한 다음에는 아무 일이나 다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여자는 대학 출신이기 때문에 소제하기도 싫어하고 그릇 씻기도 싫어한다는 얘기가 혹 들립니다
사실 어떤 분야 대학 출신인 까닭에 취직 못하는 이가 더러 있습니다. 대학 출신으로 막일이야 할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나 하실 수 있으리 만큼 공부를 더 하시오. 공부를 많이 할수록 겸손해집니다.
열매 하나도 없는 가라지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서 있습니다. 열매 많은 벼이삭은 고개를 숙입니다.
고개가 숙여지리만큼 공부를 더해야 합니다.
단테의 신곡 가운데 단테가 한번은 연옥에 가서 구경을 합니다. 한 구석에 가보니 여러 사람들이 뒷등에다 무거운 돌을 가득 지고 서 있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았습니다. 『아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무거운 돌을 지고 서 있습니까?』그 대답하는 말은『저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에 너무 교만해서 허리를 굽혀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낙원에 올라가는 문은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겠기에 그 연습을 하느라고 저 모양입니다.』
거, 미리 허리 좀 굽히는 것을 배웠다면 얼마나 좋을 법했습니까.
사실 어떤 분은 너무 교만해서 예수를 못 믿는 분도 있습니다.
아, 예배당에 가보니까 여자들도 오고 무식한 자들도 오고 아이들도 모이는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델 가서 앉았단 말이오. 박사들과 장관들이 혹 모였다면 또 모르지만 합니다.
교만해서 남의 공로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니, 내 공로로 구원을 얻어야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한 이의 특색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소극적으로 보면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무슨 일을 하고도 자랑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겸손한 사람은 너무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습니다.
넷째로 겸손한 사람은 불평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나 사람에게 대해서난 불평을 안 합니다.
적극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순복을 잘 합니다. 겸손한 학생이 학교 규칙을 잘 지킵니다. 겸손한 교인이 교회의 법을 지킵니다.
겸손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어디를 가나 봉사합니다. 종이 됩니다.
겸손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합니다. 이만하면 이것도 감사하지, 거저 감사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남이 알아주던 몰라주던지 거저 마음이 늘 평안합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색이 어떤지 압니까? 거저 이와 정반대입니다.
겸손의 첫걸음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것은 내 교만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교만합니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속담에『제 잘난 재미에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만합니다.
이걸 깨닫고『나는 교만합니다. 이 죄를 사해 주세요』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직면해서 나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전에 욥이 의인이지만 큰 환난 당할 때에 불평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직면해서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는 내가 잘못한 것이 많습니다 고 통회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예배하다가 높고 높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환상 가운데 직면하게 될 때, 제일 먼저 나온 말이 무엇인지 압니까?
『화로다 나여, 나는 입술이 더러운 죄인인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음이라』고 죄를 회개했습니다.
바울이 회개하기 이전에 다메섹으로 내려갈 때에는 아주 교만한 젊은이였습니다. 다메섹을 거의 가서 환상가운데 예수 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꿇어 엎디었습니다.『내가 무엇을 하오리까?』
그 다음부터는 겸손해졌습니다. 기억하십시다. 교만은 만 죄의 근본이요, 죄의 어머니올시다. 겸손은 모든 덕의, 만 덕의 어머니요, 근본이올시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으로 우리의 허리를 동여야 합니다. (一九七0년 七월 二十六일)

<한경직 목사 설교집 제9권 끝>

출처 : 그리스도의 제자들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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