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스크랩] 韓景職牧師說敎全集(4)

새벽지기1 2017. 1. 28. 18:17
韓景職牧師說敎全集(4)



우리 교회에서는 창립 二十五주년을 맞아 그 기념 사업의 하나로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 전집을 엮어서 세상에 내어놓기로 하였다.
비록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가 주로 영락교회라는 개교회의 강단에서 외쳐진 것이기는 하지만, 구리는 결코 그것이 개교회의 교인들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그의 설교가 영락교회의 강단을 통하여서 우리 교계는 물론 나아가서는 사회와 국가에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때로는 맑고 줄기찬 샘물이 되어서 혼탁한 이 사회를 밝히기도 했고, 때로는 굳건한 반석이 되어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부드러운 손길이 되어서 상처받은 영혼들의 위로와 구원이 되기도 했고, 또 때로는 하늘을 향하는 울부짖음이 되어서 겨레의 아픔과 슬픔을 하나님께 호소하기도 했다.
교회가 세워지고 四 반세기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겨레 위에는 수난과 좌절의 역사가 광폭한 해일(海溢)처럼 덮치고 또 물러가고 물러갔다 다시 덮치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한 목사님의 설교는 폭풍 가운데 서 있는 거목처럼, 사나운 짐승들이 포효하는 광야의 선한 목사처럼 우리 교인들에게 희망과 안도를 안겨 주었고 나아가서는 겨레의 나아갈 길을 밝혀 주시곤 하였다.
이에 영락의 교인들은 그의 생애에 걸친 목회의 노고를 위로하고 은공을 기리는 한편, 이 땅에 오고 오는 세대들에게 넘겨줄 빛나는 유산으로서 이 설교 전집을 내어놓기로 한 것이다.
전집이라고는 하지만 한 목사님께서 이북에서 목회 하실 때의 설교는 전연 그 자료를 구할 수가 없어서 수록하지 못하였으며, 또 이남에 오셔서 하신 설교도 초기의 것은 그 자료가 많이 일실 되었고 더러는 수록되었다 하더라도 교우들이 필기한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서 충실을 기하지 못했음을 매우 유감 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설교 집을 위하여 편집을 맡아서 수고하여 주신 홍현설 박사, 김정준 박사, 한태동 박사, 이종성 박사, 이창로 박사와 직접 실무를 맡아서 수고하신 허영진, 김창걸, 두 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一九七一년 十월 일
영락교회 창립 二十五주년 기념 사업 위원회
출판위원장 김 정 순

머리말

모든 종교는 진리를 말하고 신(神)을 믿는다. 그들의 진리가 다른 모든 진리보다 더 참되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믿는 신은 모든 다른 신보다 더 권능이 있고 지혜가 있고 강하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과 신념에서 모든 종교는 자기들의 진리와 신을 타인에게 알리고 설득하고 때로는 강요한다. 여기에 변증 학이 필요하고, 설교가 필요하고 전도가 필요하게 된다.
종교에 따라 그들의 진리와 신을 취급하는 태도가 다르다. 어떤 종교는 그들의 진리와 신을 묵상하고 영적으로 체험해 보려고 한다. 인도교나 불교나 철학적 신비 종교가 그렇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종교는 그들의 진리와 신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설득시켜서 자기들의 회원이 되도록 노력한다. 이러한 종교에 회회교와 기독교가 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전파하는 종교였다. 세례 요한은 처음부터『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막 一·四)했다. 예수 님은 갈릴리에서『하나님의 복음을 전파』(막 一·十四)했다. 바울도 그의 활동의 처음부터『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장에서 전했다』(행 十三·五). 이와 같이 기독교는 처음부터 신언(神言)을「선포」하고 전하고 설교하는 데 중점을 둔 종교이다. 이러한 전통을 받아 교회는 유능한 설교자를 많이 배출했다. 五세기초에 밀라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하게 한 암브로시우스나, 十八세기에 존 웨슬리와 함께 영국에서 부흥 운동을 하다가 미국에 건너가서 일대 부흥 운동을 전개한 조오지 휘크필드나, 또는 기관 포 설교자라고 하는 빌리 그래햄 같은 이는 교회가 낳은 가장 유명한 설교가 이다. 이러한 설교 가는 어떤 웅변가나 수사학자(修辭學者)보다 뛰어난 화술(話術)을 가진 달변 자들이었다.
한국에는 세계를 향하여 자랑할 만한 설교가가 없을까? 한국의 암브로시우스, 한국의 조나단 에드워드, 한국의 필립스 브룩스는 없을까? 그러한 설교자가 있다면 누구일까?
우리 편집인 몇 사람은 이 물음에 대하여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러한 분으로서 한경직 목사님을 택했다. 그가 훌륭한 목회자인 동시에 훌륭한 선교자임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대 설교자를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설교를 직접 듣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이 때까지 하신 수많은 설교 중 약 五00 편을 뽑아 출판하여 우리의 기쁨을 다른 독자들에게까지 나누고자 하여 설교 집을 출간하기로 했다.
내용에 대한 평가는 독자 여러분이 내려주시기를 바란다. 내용 배열에 있어서는 편의상 설교를 한 연대에 따라 열 권으로 나누었다.
바라기는 이 설교 집을 통하여 한경직 목사님과 같은 설교자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나와 주었으면 한다. 이것이 이 설교 집을 출판하는 목적이기 때문에다.
一九七一년 十월 二十七일
편집위원 이 종 성

目 次
刊行辭................................................................................................................ 三
................................................................................................................ 五

Ⅳ- 1 ...........................................................................................................一一
Ⅳ- 2 .......................................................................................一八
Ⅳ- 3 ...........................................................................................二八
Ⅳ- 4 ..........................................................................................................三六
Ⅳ- 5 ...........................................................................................................四六
Ⅳ- 6 ...................................................................................................五五
Ⅳ- 7 ...................................................................................................六四
Ⅳ- 8 .................................................................................................七二
Ⅳ- 9 .........................................................................................八五
Ⅳ-10 ...........................................................................................................九五
Ⅳ-11 ..............................................................................一0 四
Ⅳ-12 .......................................................................................................一一四
Ⅳ-13 .........................................................................................一二六
Ⅳ-14 ...............................................................................................一三九
Ⅳ-15 ............................................................................................一五0
Ⅳ-16 ..............................................................................................................一六0
Ⅳ-17 .......................................................................................................一六九
Ⅳ-18 ...................................................................................一七九
Ⅳ-19 ..........................................................................................一九0
Ⅳ-20 ...........................................................................................二0 0
Ⅳ-21 .........................................................................................二0 五
Ⅳ-22 ....................................................................................................二一七
Ⅳ-23 ..............................................................................................二二七
Ⅳ-24 ...............................................................................................二三八
Ⅳ-25 ..................................................................................................二四九
Ⅳ-26 ...................................................................................................二六0
Ⅳ-27 .....................................................................................................二六八
Ⅳ-28 ...................................................................................................二七九
Ⅳ-29 ....................................................................................................二八八
Ⅳ-30 .................................................................................................二九六
Ⅳ-31 ......................................................................................................三0 七
Ⅳ-32 .........................................................................................................三一六
Ⅳ-33 ............................................................................................三二七
Ⅳ-34 .................................................................................................三三七
Ⅳ-35 ............................................................................................................三四八
Ⅳ-36 ..............................................................................................三六三
Ⅳ-37 ................................................................................................................三七三
Ⅳ-38 .........................................................................三八三
Ⅳ-39 ...........................................................................................................三九三
Ⅳ-40 .........................................................................................三九九
Ⅳ-41 ............................................................................................四一0
Ⅳ-42 .............................................................................................四二0
Ⅳ-43 ................................................................................................四二九
Ⅳ-44 ................................................................................................................四四一
Ⅳ-45 ..........................................................................................四五一
Ⅳ-46 .............................................................................................四六二
Ⅳ-47 ...............................................................................四七二


Ⅳ-1 여호와의 손 (이사야 四十장 二十一-三十一절)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十二·十八-二十九)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짤라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민 十一·二十三)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번은 어떤 교우가 자기 목사에게 가서 묻기를,『어찌해서 주님께서 가룟 유다 같은 이를 택하였습니까? 그건 이상하지 않습니까?』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는 곧 대답하지 못하고 조금 생각하더니 서서히 대답하는 말이『나는 그것 보다 더 이상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주께서 왜 나 같은 사람을 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누구나 스스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반성할 때에는 오직 자기는 죄 덩어리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실 택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 공통의 경험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부족을 여실히 살펴볼 때에는 과연 예수 님의 제자들이 한 번 말씀한 바와 같이『누가 능히 구원을 얻으리이까?』하면서 탄식할 수밖에 없는 줄 생각합니다. 좀더 양심이 예민하면『나는 쓸데없는 사람이야.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랴.』이렇게 낙심하기도 쉬운 줄 생각합니다. 혹은 자포자기할 수도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히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줄 압니다. 구원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주임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나는 그리스도라. 그리스도 내가 너희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 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고, 그 다음에 다시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 택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손안에 있습니다.『아무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이것은 우리가 분명히 압니다.
어린아이가 어떻게 자랍니까? 살 수 없는 핏덩어리로 세상에 나서 어떻게 자랍니까? 그것도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손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손이 이 핏덩이 같은 것을 거들어주고 젖꼭지에 물려주고 옷을 입히고 목욕해 주고 잘 때에 두드려 주면서 재워주고 모든 것을 다해 주고 보호해 주고……어머니의 선이 있는 까닭으로 장성해 갑니다. 누가 이 어린 아기를 어머니의 손에서 빼앗을 수 있습니까? 어진 어머니는 차라리 자기의 생명을 바칠지언정 자기의 아기를 배놓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어린 심령과 하나님의 관계와 같습니다.
우리의 어린 심령, 아무 힘없는 심령이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완성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손이 계십니다. 아버지의 손이 어린 심령을 붙들어 줍니다. 인도하여 줍니다. 생명수로써 먹입니다. 생명의 양식으로 공급하여줍니다. 원수가 올 때에 막아 줍니다. 시험에 빠지려고 할 때에 이끌어내 줍니다. 아버지의 손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보존하고, 우리의 연약한 심령이 아주 멸망하는 자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하늘 나라까지 능히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다 기억하시지요? 한 번은 예수 님께서 밤에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갔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있다가 물위에 무엇이 보이니까 처음에는 무서워서 요물인 줄 알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후 예수 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 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너무 반가워서『아, 예수 님이면 자도 물위로 걸러가게 해 주세요. 불러 주세요.』하면서 담대히 예수 님을 맞아 물위로 걸어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큰 물결을 보고 두려운 생각이 나서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때에 예수 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여러분, 성구를 자세히 읽어보세요. 예수 님께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를 건졌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체험이올시다.
우리는 어떤 때 이 죄악의 세상에 살 때에 무서운 죄악의 물결에 휩쓸려서 빠져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 때에 하나님의 튼튼한 손이 붙들어 주지 아니하면 아주 멸망할 것밖에 없습니다. 아마 오래 믿으신 분은 이와 같은 경험을 여러 번 당하신 줄 생각합니다. 저도 여러 번 당했습니다.
예레미야를 보면 예레미야가 한 번 어떤 곳에 가니까 토기장이가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듭니다. 이런 그릇도 만들고 저런 그릇도 만듭니다. 어떤 때에는 그만 그릇이 파손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그릇을 버립니까? 아니올시다. 그것은 다시 갔다가 반죽해서 파괴한 것이라도 다시 좋은 그릇을 만듭니다. 토기장이의 손은 진흙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아무 것이나 만들 수 있습니다. 파괴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신령한 토기장이가 되시는 우리 아버지의 손은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고 우리가 아무리 죄악 세상에 살면서 죄악에 부딪혀서 어떤 몸이 깨어진다고 하여도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손을 가지고 그것을 회복시켜서 온전히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좋은 그릇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인격이 한 곳 파손을 당했다고, 여러분의 신앙이 한 곳 깨어졌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아버지의 손에 맡기세요. 아버지께서 다시 회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三十七편 二十四절에는 이런 말씀으로 기록되었습니다.『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여호와께서 그 손으로 붙드시는 고로 어떤 때에는 넘어지지마는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합니다.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손이 붙드시는 까닭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했습니다.『여호와의 손이 짤라졌느냐? 내가 네게 말하는 이 말이 응하는 것을 네가 볼 때가 있으리라.』하나님의 손은 짧지 아니하십니다.
멀리 천왕성, 해왕성의 운행까지도 하나님의 손이 주장하시지마는 반면에 봄 동산에 어린 싹이 나는 것도 하나님의 손이 어루만지는 까닭입니다. 아침 이슬에 장미꽃 봉오리가 점점 벌어져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도 하나님의 손이 또한 붙들어 주시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이 손은 옛날 애굽이나 바벨론이나 바사 같은 큰 나라들의 흥망성쇠만 주장하시는 손이 아닙니다. 나일 강변 갈대 밭 사이에 버림을 받은 어린 핏덩이 모세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그 어린것을 친히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이올시다. 죽지 낳고 살겠다고 멀리 애굽에 갔다가 불행의 불행을 만나서 남편을 읽고 또 아들 형제 다 잃고 외로운 그림자로 돌아서는 나오미의 발길까지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아무리 높거나 아무리 깊을지라도 그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악의 깊은 구렁텅이에 빠졌다고 할지라도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곳까지 미칩니다. 하나님의 손은 四천여 년 전에 아브라함의 생활만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생활만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생활만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二十세기의 이 남한의 이 복잡한 거리거리에 허덕이는 성도의 발길까지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이올시다. 남한의 성도만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풀무와 같은 북한 공산당 정치아래에서 철의 장막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험한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을 또한 붙들어 주시는 손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손을 의지합시다.
제가 오래 전에 당한 경험을 한 가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항상 주저하지마는 오래 전 이야기니까 괜찮은 줄 압니다. 제가 신의주에서 교회 일을 볼 때에 무슨 일이라고 다 말할 필요는 없지마는 한 번은 크게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만 낙심이 나서 일할 마음도 없어지고 용기도 없어졌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나 혼자 있는 방에 들어와서 그저 정신없이 방바닥에 넘어졌습니다. 넘어져 있는데 이상합니다. 지금까지 생각해도 확실히 모르지요, 내가 그 동안 잠깐 장이 들어서 꿈인지 아닌지 모르지마는 이상한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제 자신이 어떤 길을 갑니다. 길이 대단히 험합니다. 또 어떻게 피곤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상 더 갈 수가 없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오른편쪽으로 그만 쓰러졌습니다. 그러니까 난데없이 어떤 큰손이 - 三十년 전에 본 일이지마는 어제 본 일 같아요 - 아마 사람의 손의 十배나 큰손이 오른쪽에 와서 넘어지는 나를 얼른 왼쪽에도 못 넘어지게 붙듭니다. 앞으로 꼬꾸라집니다. 또 두 손이 앞으로 와서 앞으로도 거꾸러지지 못하게 합니다. 그냥 계속해서 그 험한 길을 이 손이 붙들어서 가게 합니다.
그런 내 자신을 보다가 내가 깨어서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읽은 성경이 이상하게도 에스라 七장 九절입니다.『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 에 이르니라.』이것이 에스라의 이야기입니다. 에스라가 멀리 바벨론 에서 포로로 잡혀간 자기의 동포와 같이 정월 초하룻날 예루살렘을 향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먼 광야 길입니다. 원수가 많은 험악한 길입니다. 그런 길인데도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넉 달을 결려서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우리의 천성 행로가 이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를 믿고 주를 따라가는 길도 마치 바벨론 에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는 길처럼 황막한 광야 길입니다. 때때로 험한 준령이 우리의 앞을 막습니다. 장강대야(長江大野)가 우리의 앞을 막습니다. 때때로 함정이 있습니다. 때때로 원수가 복병 하여 우리를 기다립니다. 연약한 우리가 어찌 감히 이 길을 갈 수 있습니까? 이 길을 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선한 손이 우리를 도우심으로 승리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손은 선합니다. 아버지의 손은 만 유의 손입니다. 아버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떠나실 때 아버지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손에 여러분의 심령을 부탁하세요. 살 때에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고, 세상을 떠날 때에도 아버지의 손에 우리의 영혼을 부탁합시다. 우리 사람은 약합니다. 나를 믿다가는 실패합니다. 언제 어질지 모릅니다. 마귀는 우리보다 강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튼튼히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세례 받은 어린 학생들도 있습니다. 새로이 믿는 여러분도 많이 있습니다. 이 앞으로 인생의 험악한 길을 걸어 갈 때에 나는 믿지 말고 아버지를 믿고 그 손에 여러분의 심령을 전적으로 의탁하세요. 그러면 예루살렘에 가기까지 무사히 이룰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一九六0년 七월 十일)

Ⅳ-2 선택의 자유와 그 책임 (신명기 三十장 十五-二十절)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三十·十九)

이 말씀은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四十년 동안 자기 백성을 광야를 통해서 인도한 후에 마지막 모압 평지까지 이르러 멀리 가나안 복지를 건너다보면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그 백성들에게 부치는 마지막 전별의 일절 이올시다.『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사람에게는 이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이 자유가 있으므로 기계가 아니고 참으로 사람입니다. 또 이 자유가 있어야 노예가 아니요, 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빵 한 조각에 모든 자유를 희생하지마는 사람일수록 자유가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매일의 생활은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 옷을 입을까? 생각하는 선택을 의미합니다. 주부가 무슨 만찬을 만들까 하는 것도 선택을 의미합니다. 오늘 누구를 만날까, 무엇을 먼저 할까, 어디를 먼저 갈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매일매일 어떤 일을 당하든지 우리는 둘 가운데 하나 혹은 셋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생활도 역시 그렇습니다. 내가 어떤 학교에 갈까?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학교 같으면 어떤 과 에서 공부를 할까? 무슨 부분을 특별히 배울까? 어떤 취미를 가질까? 이런 모든 것도 선택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청년 시대에 있어서는 더 중대한 선택을 할 일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일생동안 어떤 방면에 헌신할까? 무슨 사업을 할까? 어느 곳에 내 생을 던질까? 또는 결혼 기가 되면 어떤 배우자와 결혼을 할까? 이런 모든 것은 일생에 크게 관계되는 중대한 선택들입니다. 이렇게 우리 매일의 생활과 일생은 항상 선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선택의 자유는 결국 책임도 의미합니다. 어떤 것을 택하든지 그 결과가 반드시 따릅니다. 따라서 일생의 성공과 실패는 이 선택 여하에 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선택을 바로 하면 성공과 행복이 자연히 미치고 선택을 잘 못하면 실패와 불행이 반드시 따라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지금까지 지혜 있는 사람은 선택을 조심하고 지혜 있게 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선택을 경히 여기고 함부로 합니다.
지금도 모세 이야기를 하였지마는 모세는 다 장성한 뒤에 남다른 고민이 그 마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바로의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로 호화롭게 자라고 공부하며 모든 애굽의 문화를 공부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차차 알고 보니 자기는 애굽 사람이 아니고 그 때에 애굽사람들에게 핍박을 받는 피압박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을 가진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내가 그냥 애굽 사람으로 이 궁전에 남아있을 것이냐? 그렇지 아니하면 아무리 압박을 받는 민족일지라도 나는 이스라엘의 형통을 가졌으니 이스라엘 사람으로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며 살 것이냐?』모세는 이 두 가지 갈림길 가운데 하나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자기가 애굽 궁전에 그냥 남아 있으면 물론 호화로운 생활과 평화로운 생활을 할 것을 물론 알지만 그것을 내어 던지고 자기의 민족과 같이 고생과 희생을 택하기로 각오하고 그 형극(荊棘)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결국 이 중대한 선택이 모세로 하여금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만든 것입니다.
그와 반면에 롯 같은 사람의 선택을 아시지요?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서 가나안까지 온 아브라함의 조카올시다. 가나안에 들어와서 삼촌 덕분에 하나님의 축복은 많이 받아서 가축이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들이 서로 싸움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루는 롯을 청해 다가『혈육지간에 이렇게 싸움을 하면 안 되겠으니 우리 앞에 넓은 들도 있고 좋은 골짜기도 있지 아니하냐? 네가 우편으로 가기를 원하면 나는 좌편으로 가겠고, 네가 좌편으로 가기를 원하면 나는 우편으로 갈 터이니 마음대로 택해서 피차에 좀 멀리 우리 자막을 치도록 하자.』그 때에 롯이 눈을 들어보니 저 동남 편으로 소돔과 고모라 뜰에 푸른 풀이 우거졌는데 가축을 먹이기에 매우 좋아 보였습니다. 푸른 풀만 보고 얼른 대답하는 말이『예, 저는 저 소돔과 고모라 성으로 가겠습니다.』순전히 풀만 보고,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 그런 것은 염두에 두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갔습니다.
갔더니 오래지 아니해서 큰 전쟁이 일어나서 여러 왕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습격해서 많은 재산과 왕들과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롯과 그 가족도 전부 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아브라함의 군대가 가서 겨우 빼앗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뿐입니까?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전혀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 악의 양이 차서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유황불로써 멸망시킬 때에 간신히 자기 생명을 구하고 달아나려고 했지만 자기 아내는 그만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푸른 풀만 바라보고 선택한 결과는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의 자유는 그 책임과 결과를 또한 의미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전에 솔로몬이 젊어서 왕이 된 후에 하나님께서 하루 밤은 꿈에 나타나서 이렇게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솔로몬아,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장수의 축복이냐, 부귀의 축복이냐?』솔로몬이 곧 대답하는 말이『오! 하나님 나는 장수도 원하지 아니하고 부귀도 원하지 아니합니다. 내가 이렇게 많은 백성을 어린 몸으로서 다스릴 수밖에 없는 저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하나님께서 그 대답하는 것을 가상히 여기셔서『내가 네게 지혜의 축복을 줄뿐더러 장수와 부귀의 축복도 더하여 주리라.』솔로몬은 지혜를 택했습니다.
그러나 에서 같은 사람은 어떻게 택했는지 아시지요? 에서는 사냥을 좋아합니다. 사냥 가서 종일 산으로 뛰어 다니다가 날이 저물어 갈 때에 집에 돌아오니 피곤하고 배는 고픕니다. 마침 뜰에서 자기 동생 야곱이 가마에다가 붉은 팥죽을 김이 무럭무럭 나게 쑤는데 먹음직합니다. 그래서 시장한 김에『얘, 야곱아, 그 붉은 것이 무엇이지 얼른 나에게 한 그릇 가져 오라.』그러니까 이 깜찍한 야곱이 대답하는 말이,『이거 형님께 올리기는 올리겠는데 형님 나하고 약조합시다. 그 장자의 명분을 저에게 주겠으면 이거 한 그릇 드리겠습니다.』장자의 명분과 팥죽 한 그릇, 그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할 서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에서가 어느 것을 택했는지 다 아시지요?『굶어 죽게 되었는데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슨 상관이냐? 어서 그 붉은 것 한 그릇 갖고 와.』팥죽 한 그릇을 택했습니다. 그저 에서는 그 후에 그런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 구약에 여자에 대한 책이 둘 있는데 하나는 룻이요, 하나는 에스더입니다. 룻을 읽어 본 사람은 다 잘 기억합니다. 나오미라고 하는 이스라엘 여자가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멀리 모압 땅에 살려 갔습니다. 거기 가서 처음 몇 해는 잘 살았습니다. 그만 큰 불행을 만나서 남편이 모압 땅에서 돌아가고 두 아들이 차례차례 다 돌아가고 마지막에는 며느리 둘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외롭게 된 나오미가『이제 나이 많아서 외국에 있어 무엇하랴. 고국에 돌아가서 내 백골이나 묻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베들레헴으로 발길을 향합니다.
그 때에 자부가 모압 여자 둘인데 같이 따라옵니다.『어떻게 어머니 혼자 갈 수 있습니까? 우리도 같이 베들레헴까지 가겠습니다.』그러나 나오미는 열심히 말립니다.『너희들이 나를 따라와서 무슨 소용이 잇느냐? 어서 돌아가라.』그럴 때에 며느리 하나는 크게 통곡을 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룻은 끝까지 고부의 의리를 생각해서 외로운 손으로 고국에 돌아가는 그 어머니를 차마 홀로 보낼 수 없어서 끝까지 따라 갔습니다. 룻은 고부의 의리를 택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룻을 축복했는지 우리는 룻기를 통해서 잘 압니다.
룻은 이와 같은 의리를 지켰는데 예수 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은 여러분도 기억하시지요? 유다 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택함을 받았을 뿐더러 三년 동아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면서 그 슬하에 교훈을 받은 사람이올시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三十냥쭝이냐, 예수그리스도를 팔 것이냐?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사제의 의리, 모든 교육을 받은 그것을 다 내버리고 은 三十 냥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다 는 그저 갈 곳으로 갔습니다. 선택의 자유가 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자유를 찾기를 애씁니다.
그렇지마는 선택의 자유는 책임을 의미합니다. 결과를 의미합니다. 바로 선택할 때에 참된 행복과 참된 생명이 있지마는 우리가 미련하게 잘못 선택하면 불행과 저주를 내가 스스로 자취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가 조심해서 이 선택의 자유를 바로 사용해야 될 것입니다.
이번 주간은 특별히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대한민국 국민 된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중대한 국가적인 문제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을 당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택해서 국회에 보내느냐? 그 택하는 권리가 다 우리에게 부여되었습니다. 우리가 그 선택의 자유를 다 사용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참의원과 민의원이 바로 구성되느냐, 못 되느냐에 따라서 정부가 바른 사람들로서 조직이 되느냐, 못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결국 우리 국민들이 이 선택의 자유를 바로 써서 바른 사람을 선택하느냐, 못 하느냐? 여기에 있습니다.
들어보는 대로 이번에는 억지로 투표하게 할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자유로운 투표가 될 줄 생각합니다. 이번 선거가 잘 되고 잘못 되는 것은 오직 다른 사람을 원망할 것 없고 우리 국민 각자가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묻기를 어떤 사람에게 표를 써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사사로이 묻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물은 것은 없습니다. 각각 자기가 다 살펴서 자기 하나 하나가 국민 된 자격을 꼭 가지고 그 의무를 잘 택해야 될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행사를 할 때에는 적어도 누구든지 우리 대한민국의 국회 의원이 될 사람은 어떤 자격이 있는 사람이어야 되겠다는 그런 마음의 표준은 우리가 다 정해야 할 것입니다.
가령 이번 국회에는 우리가 보내서는 안 될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四·一九혁명 전신에 어긋나는 사람들을 우리가 다시 국회에 보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간다면 四·一九의 고귀한 학생들의 피가 헛된 데로 돌아갑니다. 또 보세요. 우리 대한민국 국회에 사상적 배경이 미 분명한 사람, 조금이라도 좌익의 혐의를 받을 수 있는 사람, 그 정체를 잘 모를 사람, 이런 사람들을 국회에 보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런 때야말로 북한 공산당들은 오열을 애국자의 탈을 쓰고 우리 국회에 내보내기 위하여 갖은 수단을 다 쓸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이것은 분명히 경계해야 됩니다.
또 보세요. 신문에서 보니까 우리 서울에서도 어떤 여성들이 데모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 사생활이 부정해서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축첩 하는 사람, 술고래,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국회에 보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그 사업이 부정해서 투기적 사업, 협잡 성 있는 사업, 또 술장사 혹은 양조장을 직접 경영하든지 돈을 대주어서 경영하는 사업을 해서 돈을 모으는 그런 사람들을 국회에 보내서는 도저히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번 민의원 가운데는 양조장 주인들이 상당히 많이 계셨답니다. 정신 차려서 우리가 꼭 선거를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우리가 보내야 되겠느냐? 제가 말씀 안 드려도 여러분께서 다 아실 줄 압니다. 우선 사상이 건전한 사람, 애국심이 있고 민주주의 사상이 철저한 그런 사람, 올바른 양심적 인물을 우리가 택하도록 힘써야 되겠습니다. 또 고상한 인격과 가 사생활이 정결한 지의 여부를 알아서 깨끗한 사람들을 우리가 골라서 보내야 될 것입니다. 또한 그 사업도 정당하고 우리 국민 경제를 위해서 정당한 사업을 하는 그런 이들을 우리가 살펴보아서 보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정견 발표 때나 그 선전하는 말만 들어보고는 우리가 비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누구나 선거 운동할 때에는 국회의원이 되면 잘 하겠다고 그러지, 잘못하겠다고 할 사람이 하나나 있겠습니까? 다 잘 한다고 그럽니다. 결국은 사람은 지내보아야 압니다. 과거에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했는가? 과거에 사실 그 사람이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어떠한 공헌을 하였느냐? 그런 것을 우리가 살펴서 택해야 할 것입니다.
또 아무리 좋은 사람이지마는 무능하면 국회의원 될 자격이 없습니다. 무능한 사람은 국가의 일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유능하고 어떤 방면에 전문적 지식이 있어서 국가 살림살이에 일부 면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그와 같은 사람을 우리가 국회에 보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더 한다고 하면 국외적으로는 세계 국제 정세를 바로 살필 줄 알고 국내적으로는 세궁민(細窮民)의 경지를 친히 알아주는 분을 골라야 될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한 집안입니다. 국제 정세 여하에 의지해서 어떤 나라든지 동요를 받습니다. 국제 정세를 바로 살필 줄 아는 사람이어야 될 것입니다. 또 한국 내적으로는 우리 국민 가운데 가장 불행한 이들, 가장 가난한 이들, 고아, 미망인들, 피난민들, 농민들, 노동자들, 가장 불우한 환경 가운데 있는 이들을 얼마나 도와줄 수 잇느냐? 그들에 대해서 얼마나 대변자가 되겠느냐? 그들을 위해서 얼마나 봉사할 수 있겠느냐? 이런 국민들을 우리가 보내야 될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이번에도 참의원이나 민의원은 다 신사 숙녀들이 피택(被擇) 받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신문을 보면 국회에서 의논하다가 의견이 좀 다르면 옷을 벗고 서로 목덜미를 잡고 싸움을 하니 국제적 체면을 보아서 이런 깡패 소질이 있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국회에 안 보내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우리 국민들이 잘못 선택하는 까닭으로 이런 사람들이 국회에 들어가 앉게 됩니다. 민족적 체면을 보아서도 신사 숙녀들을 우리가 골라 보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선택은 우선 여기 앉은 우리부터 잘 살펴 바로 택해서 이번 참의원과 민의원이 선출되어 좋은 사람들로서 정부가 조직되어서 우리 제二공화국이 새 나라로 잘 발족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참의원과 민의원 선거보다 더 중요한 선택을 제가 마지막으로 꼭 한 마디 더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 七족을 멸하고 온 가나안 복지 점령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지도자 여호수아가 세겜 이라고 하는 유서 깊은 곳에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 지도자들을 불러다 놓고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오늘 너희들이 너희들의 섬길 자를 택하여라. 너희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느냐? 그렇지 아니하면 가나안 땅에 들어왔으니 이 땅에 있던 여러 가지 우상과 여러 가지 잡신을 섬기겠느냐? 나와 내 가족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노라.』분명히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나와 내 가정이 일생을 통해서 섬길 자를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엘리야가 똑같은 말로 권면 했습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멜 산상에 모아 놓고서 그들에게 하는 말이『너희가 언제까지나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겠느냐? 만일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면 그를 섬길 것이요, 바알이 참 신이면 바알을 섬길 것이 아니냐?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 이 세상에 이 것 저것 많지마는 제일 중요한 것은 이 때에 섬길 자를 택하는 것입니다.
바알이나 가나안 신이란 세상에 붙은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붙은 욕심, 허영, 불의 한 권세, 불의한 돈, 이 세상 적인, 육체적인, 정욕 적인, 이런 데에 속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네가 과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네 일대에 섬길 자로 택하고 그를 섬기겠느냐?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이 세상 길을 가는 동안에 세상의 이 모든 잡신들을 섬기겠느냐? 섬길 자를 택하라!』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섬길 자를 온전히 택했습니까? 금생(今生)과 내생의 우리의 심령을 의탁할 수 있는 섬길 자를 우리는 택했습니까? 여러분도 택하고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택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 선택만 분명히 해서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만 구하게 되면, 자연히 작은 선택들은 여기에 따라 갑니다. 자연히 모든 선택이 바로 됩니다.『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一九六0년 七월 二十四일)

Ⅳ-3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누가복음 十二장 一-十一절)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十二·四-五)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올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올시다.「하나님을 경외하라.」이 말씀은 단순히 주님께서만 가르쳐 주신 교훈이 아닙니다. 온 성경을 통해서 제일 먼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올시다. 신명기(申命記) 十장 十二절에『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여호수아 二十四장 十四절에『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충신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전도서 十二장 十三절에『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이사야 八장 十三절에는,『만 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잠언 一장 七절에는『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리라.』
이 밖에도 온 성경을 통해서 우리 인생들에게 제일 먼저 주시는 말씀은『하나님을 경외하라.』그 말씀이올시다. 사람은 흔히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의 눈이나 귀를 두려워합니다. 사람의 말도 두려워합니다. 가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온 성경 전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우리에게 제일 먼저 가르치십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곧 깨달을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겉만 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마음속까지 보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사람은 사람의 외적 행동만 살피지마는 하나님께서는 그 행동의 배후에 숨은 동기까지 다 살펴보십니다. 사람은 겉만 보는 까닭으로 혹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친히『사람은 외모를 보나 나는 중심을 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은밀한 일까지 살피시고 인간의 모든 비밀을 드러내는 하나님이올시다. 사람의 눈은 우리가 잠깐 동안 속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올시다. 그래서 지금 읽은 본문 가운데도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라.』하셨습니다.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은밀한 곳을 다 보시고 그것을 드려내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시기해서 멀리 애굽으로 요셉을 팔은 후에 자기 아버지 야곱에게 돌아가서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생각하던 중 요셉의 채식 옷을 벗기고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묻혀서 그것을 가지고 집에 들어가서 나이 많은 야곱에게 내밀었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보더니 내 사랑하는 아들을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면서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그 아들들이 아버지를 감쪽같이 속였습니다. 그러나 항상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여러 해 후에 은밀한 가운데 지은 그 죄는 많은 사람 앞에 있는 애굽의 궁중에서 환하게 드러나고야 말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여 간음한 뒤에 자기 죄를 덮기 위해서 그 남편 되는 우리아를 모함하였습니다. 우리아는 자기의 충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밀서를 자기 부하인 요압 대장에게 보내서 그 때 이스라엘 군대가 암몬 사람과 싸울 때인데 이 우리아로 하여금 최전선인 암몬 성 가까이 가서 싸우게 해서 암몬 사람의 칼에 죽게 하라는 이런 부탁을 한 것입니다. 요압은 그 부탁 받은 대로해서 우리아가 죽었습니다. 일시로 사람의 눈을 가리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험악한 죄는 오래지 아니해서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곳을 다 보셨습니다. 사람의 눈은 피하지마는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가룟 유다 가 예수를 몰래 잡아 주기로 약조하고 은 三十 냥을 받을 때에 몰래 받았습니다. 비밀로 받았습니다. 그렇지마는 하나님은 그 모든 은밀한 죄도 드러냈습니다. 오늘날 二천 년을 내려오면서 가룟 유다 가 은 三十 냥쯤 받은 것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죄까지 보시고 드러내시는 하나님인 까닭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죄를 드러내실 뿐더러 모든 죄를 죄대로 형벌 하십니다. 마귀는 항상 두 가지로 시험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니까 안만 죄를 회개해도 용서해 주지 않는다.』고 유혹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는『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암만 죄를 지어도 벌하지 아니하신다.』이렇게 사람을 속이려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인 까닭으로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중심으로 회개하는 자는 용서하여 주시지마는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형별을 내리십니다.
금생에도 형벌을 내리시고 내세에도 형벌을 내리십니다. 어떤 때에는 그 양심을 통하여 물론 먼저 벌하십니다. 어떤 때에는 그 육신에게 독한 병을 주시기도 하고, 모든 사업에 실패도 하게 하고, 어떤 때에는 급한 환난을 그 지방에 내려서 형벌 하십니다. 어떤 때에는 국법을 통해서 형벌 하십니다. 어떤 때에는 어떤 죄는 三, 四대에까지 내려가면서 형벌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형벌 이외에 마지막에 오는 세상에 가서 최후 심판을 통하여 반드시 형벌 하시고야 맙니다. 민수기 三十二장 二十三절에『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아무리 비밀 가운데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그 죄는 항상 그 사람의 집을 따라 다닙니다. 마지막에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것처럼 반드시 그 죄 지은 사람을 만나서 형벌을 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게 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후에 피할 자는 없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목사요 또 초대 프린스턴 대학의 학장으로도 잠깐 있은 조나단 에드워드라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한 번은「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잡힌 죄인」이라고 하는 문제로 설교하셨습니다. 그 설교하는 말 가운데 마치 죄인이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잡힌 것은 어떤 사람이 아주 흉측한 벌레를 손에 잡고 장차 불에 던지려고 하는 것 같은 운명에 있다고 하는 말을 우리에게 남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반드시 벌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육신만 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 영혼까지도 지옥 불에 던져서 형벌 하시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어떻게 세상에서 잠깐 지은 죄 때문에 영혼을 형벌 할 수가 있을까? 그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그러나 이 진리는 보통 성경에 가르친 말씀도 아닙니다. 예수 님 자신이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을 보면 얼마나 확실한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二十五장 三十절에『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태복음 二十五장 四十一절에는『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가복음 九장 四十七-四十八절에는 주님께서 친히『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덕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두려워해야 됩니다. 참으로 두려워할 자는 하나님 한 분밖에 계시지 아니하십니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그러면 사람은 어째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잊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못 보시는 줄 압니다. 전파도 보이지는 아니합니다. 공기도 보이지는 아니합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실체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의 영혼도 보이지는 아니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모세의 신앙을 기록할 때에 이런 말로 기록했습니다.『그는 보이지 않는 자를 보이는 것 같이 하여 살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나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것과 똑같이 그 앞에서 사는 것이 참된 신앙 생활이올시다.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비록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내려다보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언제나 의식하면서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사는 것이 신앙 생활이올시다.『눈을 지으신 자가 어찌 보지 못하겠느냐?』성경이 우리에게 경고하여 주십니다.
우리와 같이 성경을 분명히 배우지 못했던 옛날 사람의 말 가운데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암실 지심이라도 신목여전(暗室之心 神目如電). 어두운 방안의 속이는 마음일지라도 신의 눈이 번개처럼 밝게 본다고 하는 옛날 사람의 경고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시는 것이 제가 방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보는 것보다도 더 분명히 보십니다. 저는 여러분의 외모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외하면서 사는 것이 참된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X광선보다도 더 밝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이는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생활을 하는 이에게 대하여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성경의 말씀과 똑같습니다.『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定罪)하리요.』정죄할 사람이 없습니다. 또 보세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장래에 대하여서도 두려워할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죄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은 항상 장래에 대하여 불안을 가집니다. 오늘은 평안했지마는 내일은 어떻게 되겠느냐? 오늘은 내 죄가 안 드러났지만 내일은 어떻게 되겠느냐? 항상 장래에 대하여 불안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마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죄는 멀리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안심과 화평(和平)이 있습니다. 또 보세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사실 죽는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천당 문을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죄인에게 있어서는 죽음이라는 것은 대 심판과 지옥의 형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항상 조심하는 것이 있다고 하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죄를 멀리 합니다. 하나님의 눈앞에서 내가 어찌 악한 일을 행할 수 있으랴.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눈앞에서 내가 어찌 악한 일을 행할 수 있으랴. 죄를 항상 멀리 합니다. 둘째로는 혹 어떻게 잘못 되어서 죄를 지었으면 회개를 즉시 합니다. 죄를 묻어두지 아니합니다. 그 자리에서 곧 회개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항상 두려워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바라 복 때에는 그렇게 두렵던 얼굴은 엄한 재판장의 얼굴이 아니요, 사랑이 가득한 우리 아버지의 얼굴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서 신앙 생활을 시작했지마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까이 보게 될 때에는, 그 때는 하나님이 두려운 하나님이 아니고 사랑의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사랑이 됩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두려운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나왔지마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죄를 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기뻐하게 되고 우리의 온 마음과 우리의 온 정성 다 바쳐서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의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까지 우리의 신앙이 올라와야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이 천상 천하에 두려워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우리를 축복 받는 눈으로 보시는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죄를 그냥 묻어둘 필요는 없습니다.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으면 이 두려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변해서 나타납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가 다 받기를 원합니다. (一九六0년 八월 七일)

Ⅳ-4 제 이의 기회 (요나 三장 一-十절)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욘 三·一)

여러분께서 아시는 대로 요나에게 이미 첫 번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너는 일어나서 저 큰 성읍(城邑)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처서 외치라. 그 악독(惡毒)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 명령을 순종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우선 니느웨 성은 유대 나라에서 거리가 매우 먼 성입니다. 사막 길을 멀리 가야하고 그 길은 험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 때에 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니느웨 성을 수도로 하는 앗수르는 그들의 원수 되는 나라였습니다. 사실 그들의 북편 나라인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아주 멸망을 당한 것이 사실이올시다. 그래서 니느웨가 복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멸망을 당하는 것이 국가적 견지에서 나으리라고 하는 이와 같은 민족주의적 사상을 가진 것입니다. 요나도 그 시대, 그 나라 백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편협한 민족주의를 가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냥 자기 나라에 있자니 마음은 불안하고 그래서 결국은 그 반대 방향인 서편으로 발길을 돌이켜서 항구 욥바 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욥바에 가면 물론 여러 나라의 배가 와서 기항하고 있는 곳입니다. 아마 제 생각에 이 요나는 어떤 배를 탈까 하여 여러 배에 다니면서 어디 가느냐고 물어본 줄 생각합니다.『이 배는 어디 갑니까?』『아, 이 배는 저 두로에 갑니다.』『그건 안돼.』또 다른 배를 만나서『이 배는 어디로 갑니까?』『이 배는 저 구브로로 갑니다.』『아 그건 좀 괜찮지만 너무 가깝군.』또 다른 배로 가서『이 배는 어디로 가려합니까?『이 배는 저 애굽에 있는 알렉산드리아로 가려합니다.』『그거 조금 멀지마는 그렇게 멀지 않군,』그 다음에 또 다른 배를 만나서『이 배는 어디로 갑니까?』물어보니까『이 배는 먼 스페인 다시스라고 하는 데로 갑니다.』그 때에야『이게 꼭 맞는 배로군, 난 멀리 가기를 원하니까.』그리고서 선가를 내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니느웨로 가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기 원해서 배 밑으로 들어가 어떤 구석에서 잠이 들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시편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내가 주의 길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타고 저 먼 바닷가에 갈지라도 거기 또한 주님께서 계시나이다.』하나님께서 배 가운데도, 바다 위에도 역시 계신 것입니다. 얼마 가지를 못해서 우리가 요나 서를 읽는 대로 지중해의 큰 풍파가 일어났습니다. 멈추지 않습니다. 파도는 더욱 높아갑니다. 모든 선원들은 어찌할 줄 모릅니다. 배는 깨어져 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선적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배에 실었던 모든 물건들을 바다에 던집니다. 여객들은 당황해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각각 믿던 자기 신에게 부르짖으면서 야단이 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보니까 그냥 배 밑창에서 잠만 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모습을 볼 때에 대단히 성이 났던 모양입니다. 가서 그 사람을 깨우면서,『잠자는 자여 이 어찜이뇨, 너도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때 요나가 깨어 보니 배 안이 말이 아닙니다. 풍랑은 그냥 심하고 하니까 그 때 사람들 생각대로『아 이건 필연 어떤 죄인이 우리 배를 타서 이와 같은 풍랑이 이는 거니까 이 죄인을 잡아서 처치할 수밖에 없겠어. 우리 부득이 제비를 뽑자.』제비를 뽑는데 금방 요나가 제비에 뽑혔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사람이 요나를 둘러싸고 묻는 말이『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며,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느 민족에 속하며, 무엇 하는 사람이며, 무엇 하러 가는지 다 자복(自服)하라.』그 때 자복하지 않게 되었습니까?
사실대로 말했습니다.『나는 이스라엘 사람이요. 나는 요나 라고 하는 사람이요. 내 직업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로 가서 전파하라고 하셨지만 나는 거기로 가기가 싫어서 지금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하던 길이올시다.』그렇게 자복을 하니 여러 사람의 말이 그러면 그렇겠지, 긴 이야기 다 할 필요 없겠습니다. 그만 요나는 도망하다가 바다에 던지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셔서 아주 멸망시키지는 아니하시고 큰 물고기를 준비했다가 요나로 하여금 아주 죽는 것은 면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깊은 물 속에서 자기의 가던 길을 통회하고 잘못한 죄악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회개하고 자복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오늘 우리가 읽은 대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해서『너는 이제 일어나서 저 큰 성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라고 외쳐라. 회개하지 아니하면 四十일 이내에 그 온 성이 무너질 것을 경고하여라.』 이 때에는 요나가 서슴지 아니하고 곧 일어나서 아무리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지체하지 아니하고 빨리 그 성에 가서 사흘길이나 되는 성을 두루 다니면서 하나님 말씀 그대로 외친 것입니다.
그 결과는 그렇게 악하던 니느웨 성이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시작해서 서민에게 이르기까지 온 성이 금식을 하며 회개하며 새로운 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쳐서 그 성에 내리려고 하던 재앙이 내리지를 아니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한 번 주님의 명령을 배반했던 요나를 구약 성경 가운데 제일 위대한 전도자로서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구 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실패를 하고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하지마는 그 가운데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때에 제二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의 생활에도 이와 같은 경험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님의 수제자로서 마지막 날 저녁에도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린다고 할지라도, 자기는 생명을 버릴지언정 절대로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대 제사장 앞에 끌려갔습니다. 멀리서 심문 받으시는 것을 봅니다. 혼자서 많은 원수들 사이에 같이 불을 쪼이면서 멀리 그 광경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 약한 틈을 타서 갑자기 어떤 비자가 하는 말이『너도 역시 갈릴리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아니냐?』갑자기 겁이 나서 베드로는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한번만이 아니고 세 번째까지 부인하며 결국은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그 때 닭의 울음을 들었습니다.『네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곧 그 자리를 뛰어 나가서 바깥 어두운 곳에서 통곡을 하며 하나님 앞에 그 죄를 자복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베드로는 매우 약한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힘이 없어졌습니다. 예수 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예수 님을 만나 보기는 하였지마는 아직까지도 용기는 다시 얻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할는지 몰랐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디베랴 바닷가에 다시 나타나서 그 때 베드로를 다시 불렀습니다.『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만일 그때에 주님께서 시몬에게『네가 담대하냐? 네가 믿음이 남보다 나으냐?』라고 물어 보았던들 베드로는 대답할 말이 하나도 없었겠습니다. 그러나『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볼 때에 중심에 더듬어 보지 주를 사랑하는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담대히『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예수 님 말씀이『그러면 족하다. 네가 내 양을 먹여라.』이렇게 베드로에게도 두 번째 예수 님께서 요나의 아들 시몬을 부르시고 그에게 양을 먹일 위대한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베드로에게도 둘째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모른다고 하는 큰 죄를 지은 베드로이지만 회개할 때에 두 번째 기회를 주어서 주를 섬길 수 있고 주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신약 가운데 나타나는 귀한 청년,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 요한 도 이 비슷한 경험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첫 전도 여행을 떠날 때에 젊은 사람으로서 그 두 사람을 여러 가지로 심부름도 하고 시중하기 위해서 바로 바나바의 생질이 되는 마가 요한 이란 젊은 사람을 택해서 같이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구브로라고 하는 섬에 가서 전도를 잘 했습니다. 거기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 더베까지 갔습니다. 거기 가서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이 마가 요한 은 더 따라가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마는 좌우간 바울이 보기에는 못마땅한 일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여행을 떠나게 될 때에 바나바는 다시 이 마가 요한 이 이제 같이 가기를 원하니 데리고 가자고 했지마는 사도 바울은 절대로 거절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다시 데리고 가서 뭘 하겠는가? 다른 사람 신라를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베드로 전서와 후서(後書)를 읽어보면 베드로가 여러 흩어진 열두 지파(支派) 믿는 사람한테 편지할 때에 내 사랑하는 아들 마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마가 요한 이 그 후에 베드로를 따라 다니면서 베드로를 잘 수종(隨從)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서 예수 님의 행적을 자세히 듣고 우리가 읽는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바울의 가장 마지막 편지라고 하는 디모데 후서를 보면 디모데에게 부탁하면서『너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겨울 전에 나에게 오너라.』그러면서『혼자 오지 말고 네가 올 때에는 꼭 마가 요한 을 데리고 오너라. 이 요한 이 우리 주의 일을 하는데 매우 필요한 청년이다.』그것을 보면 마가 요한 도 첫 번에는 실수했지마는 다시 재기한 청년이올시다. 한 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라고 하는 우리 한국의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실수와 실패는 곧 인간이올시다. 그렇지만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제二의 기회를 주십니다.
운동경기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선수가 달리다가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다시 일어나서 경주를 계속하는 사람이 최후의 승리를 얻습니다. 전쟁도 그렇습니다. 첫 번 전투에 패전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二차 대전의 역사를 지금도 여러분께선 생생히 기억하시지마는 연합국 측에서 처음에는 다 패전했습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영국 할 것 없이 독일에게 첫 번 전투에서는 전부 패전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다 쫓겨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다시 유럽을 점령하고 히틀러도 온전히 굴복시킨 것입니다. 태평양전쟁도 역시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일본에게 영국과 미국이 아주 참패를 당했습니다. 진주만이 다 부서지고 말레이시아를 다 빼앗기고 싱가포르를 다 점령당하고 필리핀도 다 점령당하고 마지막에 맥아더도 쫓겨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최후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뿐 아닙니다. 사업도 그렇습니다. 사업도 우리가 실패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마지막에 성공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어 나아갈 때에 나는 원하지 아니하지만 모르는 가운데 유혹이 들기 쉽고 지옥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시험에 드는 것을 아는 대로 곧 뉘우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은혜를 주시고 두 번째 기회를 주어서 그런 사람을 통해서도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를 했거나 시험에 들었을 때 기억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낙심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시험에 들기 전에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조금 지어도 괜찮다면서 더러 시험에 들기를 권면 합니다. 하지마는 정작 시험에 한 번 듭니다. 그 다음에는 마귀의 말이 변합니다.『옳지, 너 죄 지었지? 이젠 소망 없어. 누가 다시 너를 신용 할 테야? 누가 너를 다시 사람으로 볼 태야? 누가 너를 용납 할 테야? 넌 아주 절망이야.』이렇게 마귀가 시험합니다.
죄 지었을 지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둘째 축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탕자가 탕자로서 갖은 죄를 지었습니다. 허랑 방탕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마는 돌아올 때에는 아버지께서 두 손으로 영접해서 환영했습니다. 삭개오 같은 사람이 민족을 배반하고 요즘 말로 부정축재를 하였고 여러 가지 죄를 지었지마는 온전히 회개할 때에 주님께서 영접해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렸던 살인 강도가 죽기 전에 회개할 때에 주님께서는 그 강도를 낙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시험에 들어 한 번 죄 지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은혜를 주시고 두 번째 축복을 반드시 주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한 번 돌아온 다음에는 다시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라고,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하라고 우리에게 권면 했습니다. 만일 요나가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미칠 때에 전에 실패한 것을 다시 돌아보고 용기를 잃었다고 하면, 어떻게 니느웨 전 성을 회개시킬 수가 있었겠습니까? 만일 베드로가 자기가 예수를 세 번씩 모른다고 한 그 참패한 것을 잊어버리지 못하였다고 하면 어떻게 오순절 날 담대히 서서 三천 명을 회개 시켰습니까? 존 웨슬리 같은 사람도 처음으로 미국에 가서 전도하다가 실패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큰 은혜를 받아서 주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우리가 다 잘 압니다. 다만 한 가지 조심할 것은 내가 다시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죄를 다시 짓지 않기 위하여 우리가 물론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자를 다 구원해 주시고 마지막으로『나도 너를 정죄(定罪)하지 아니하니 평안히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면서 한 마디 더 했습니다.『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누구나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빠졌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죄는 짓는 것도 몰론 안 된 일이지만 죄는 짓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더욱 큰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실수를 하였을지라도, 한 번 실패를 하였을지라도 다시 돌아오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는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 메어 주실 것임이라.』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셨지마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 다시 우리를 낫게 해 주시고 싸 메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피가 주홍 같을지라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면 흰 눈과 같이 희게 하여 주시고 흰 양털과 같이 희게 하여 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이든지 실패한 분이 계십니까? 혹 시험에 든 이 계십니까? 낙심하지 마십시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셔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제二의 기회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내일이 바로 해방 十五주년 八월 十五일이올시다. 지금 우리 민족은 국가적으로 제二공화국을 건설하는 중에 있습니다. 슬픈 일이지마는 하나님께서 한 번 우리 민족에게 해방을 주시고 제一 공화국을 건설하는 기회를 주셨지마는 우리는 첫 번 나라를 건설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개인이나 한 정당에게만 책임을 돌리 수는 없습니다. 요컨대 우리 민족 전체가 연대적 책임이 있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 민족에게 제二의 기회를 주십니다『두 번째 너희는 나라를 바로 세워 보아라.』둘째 번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이 두 번째 주시는 기회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렵니까? 전에는 부정을 행하였지만 다시는 부정을 행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전에는 불의를 행하였지만 다시 불의를 행하여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전에는 뇌물을 주고받고 돈을 주고받고 무엇을 했지만, 이 앞으로 그런 일을 다시 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전에는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법을 안 지켰지만 이 앞으로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귀중한 둘째 기회를 주실 때에 우리 민족 전체는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정신을 가지고 이 두 번째 주시는 은혜를 감사히 받고 이 나라를 바로 건설하도록 총진군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一九六0년 八월 十四일)

Ⅳ-5 성도의 모습 (로마서 一장 一-十七절)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각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一·七)

로마에 있어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에게 이와 같은 축복을 하였습니다. 로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여기에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로마에 있던 교인들뿐만 아니고 고린도에 있던 교인들도 고린도 전서와 후서 첫 장에 읽어보면 똑같이 성도라고 하는 말로 불렀습니다. 에베소서에도 그렇게 불렀고, 빌립보서에도 그렇게 불렀고, 골로새 서에도 역시 골러새에 있던 모든 교인들을 성도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성도라고 하는 뜻은 무엇이며 우리가 과연 성도가 되었을진대 성도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 것이냐? 이런 문제를 간단히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아침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성도라고 하는 말은 헬라 원어로 좀더 쉽게 번역한다고 하면「거룩한 이들」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문자 그대로 번역한다고 하면 이렇게 성도라고 즉「거룩한 무리」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성자들」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렇게 성도라고 즉「거룩한 무리」혹은「성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뜻은 무슨 뜻인가? 과연 그 때에 모든 교인들은 그 성품과 생활이 거룩하게 변화가 되었든가?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런고 하니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성도라고 부르기는 불렀지마는 고린도 전서와 후서를 읽어보면 고린도 교회에는 당파를 일으킨 사람도 있고 칠계(七戒)를 범한 사람도 있었고 송사를 한 사람도 있었고 여러 가지로 범죄한 사람들이 그 가운데 사실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을 불구하고 그 때의 교인들을 성도라고 불렀은즉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이미 말씀한 대로 그 뜻은 죄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죄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또는 완전하여졌다고 하는 뜻도 아닙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의미에서 그들을 성도라고 불렸는가?
여러분이 얼른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지은 예배당을 보통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집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집을 지은 돌이나 나무가 다른 집을 지은 돌이나 나무와 다른 것이 있습니까? 사실상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의미에서 이 집을 성전이라고 부르느냐고 하면 이 집은 모든 다른 집과 온전히 구별해서 성별해서 하나님께 바친 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집은 세상 사람에게 속한 집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하는 집입니다. 따라서 이 집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그 목적에 의지해서 사용하는 집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 집을 선전이라고, 거룩한 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성도라고 부르느냐? 거룩한 이들이라고 부르느냐? 그것도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불완전하고 우리가 아직도 때때로 죄를 짓는 것이 사실이지마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거룩 히 구별해서 불러내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불완전한데도 불구하고 실상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께 속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 앞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뜻대로 사용하시고 그의 목적대로 우리를 쓰실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다 거룩한 무리라고, 성도라고 혹은 성자들이라고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 천주교에서는 성도라고 하는 말, 성자라고 하는 말을 좀 다른 의미에서 쓰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교회에서는 옛날부터 이 성도를 좀 국한해서 어떤 특수한 이에게만 성자라고 하는 이름을 주게 되었습니다. 가령 신약의 여러 사도들과 유명한 분들에게 특별히 성자란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래서 성 베드로, 성 바울, 혹은 성 마가, 이런 이름으로 부릅니다. 또는 교회 사상의 유명한 교부들이나 유명한 순교자들에게 특별히 성자의 이름을 준 것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이라 한다 든 가 성 폴리갚이라 한다든지 이런 이름을 특별히 주어서 부릅니다. 또한 그 다음에 교회 역사를 내려오면서 그들의 성품이나 생활이 특별히 다른 사람들보다 거룩한 생활을 한 까닭으로, 특별히 교회 위원회가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과연 그들이 성자라고 이름 불리 우는 사람들을 심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복자라 하는 이름도 주고, 어떤 사람은 성자라 하는 이름도 주어서, 가령 성 프랜시스니, 혹은 성 캐더린이니 하는 이들은 교회에서 특별히 성자라고 하는 이름을 주어서 그런 성호를 가지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풍속이 괜찮은 줄 생각합니다. 그렇지마는 본래 우리 신약에 나타나는 성도라고 하거나 혹은 성자라고 하는 뜻은 어떤 특수한 사람만을 가르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온전히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다 성도, 혹은 성자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앉은 여러분은 다 성도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세인트(Saint)입니다. 성자입니다.
여러분, 성 프랜시스, 혹은 성 캐더린, 성 바나바, 성 바울 하는 것처럼「성」자를 하나 붙이고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보세요. 가령 여기 김순복이라 하는 이가 있다고 하면 성 김순복, 김순이라고 하는 사람은 성 김순이,……이것이 신약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택한 아들과
딸 하나 하나를 성자라고 부르는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 하나가 과연 성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뜻을 고요히 생각할 때에 과연 이와 같이 귀한 이름을 받았은즉 이 이름에 합당한 사람이 되고 이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一장 十五-十六절에 이와 같은 말씀으로 권면하였습니다.『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예수 님께서 모든 오고 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요한 복음 十七장 十七절에『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기록했습니다. 히브리서 十二장 十四절에는『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이와 같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권면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귀한 성도의 이름을 받았으면 그 이름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전에 어떤 경관이 거지 통에 가서 거지들을 전부 조사하는데 제일 먼저 있는 거지를 만나서,『네 이름이 무엇이냐?』물어 보니까 얼른 대답하는 말이『내 이름은 김백억 이올시다.』순경이 그 말을 듣고『김백억 이야, 금백억이 거지 통에서 사나?』아마 아버지는 그 아들을 낳은 다음에 너무 기뻐서 이 다음에 돈 많이 모으고 잘 살라고 이름을 백억으로 지은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이 백억이라고 하는 녀석이 마지막에는 거지 통에서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아름다운, 보배로운, 거룩한, 이름을 부었으면 이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될 것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속도」의 생활을 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러면 성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우리는 성경이 교훈을 통해서, 또한 과거 二천 년 동안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특별히 거의 완전한 자리에 갔다고 하는 여러 정자들의 생활을 통해서, 이 성도의 생활의 모습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대강 짐작해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들의 생활의 첫째 특색은 성경이올시다. 거룩하고 깨끗한 것이올시다. 시편 二十四편에『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 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虛誕)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다시 말하면 손이 청결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뜻이 청결하고 입이 청결합니다.
전에 어떤 성자는 정한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추운 겨울에 얼음 구멍에 그 몸을 던진 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어떠한 성자는 자기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옷을 벗고 가시덤불에 뒹굴어서 자기 몸을 괴롭게 함으로 자기의 마음에 깨끗한 것을 회복한 성자들도 없이 않아 있습니다. 산 물고기는 짠 바닷물에서 살지마는 그 실은 짠물에 배지 아니합니다. 참 성도는 더러운 속세에 살지마는 더러운 물이 그 마음에 배어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에베소서 五장 三절에 사도 바울은 이런 말로 에베소 교인들을 권면하였습니다.『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이것은 성도의 마땅한 말입니다. 성도의 모습의 첫째 특색은 성결함에 있습니다. 그 마음이 성결하고 그 입이 성결하고 그 뜻이 성결하고 그 행실이 성결해서 더러운 세상에 살지마는 그 생활을 깨끗이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성자들의 생활을 살펴볼 때에 둘째 특색으로 나타나는 것은 화평(和平)이올시다. 시편 三十四편에『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詭詐)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화평을 구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도 산상보훈(山上寶訓)에『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모습의 둘째로 뛰어나게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화평입니다. 그 마음속에 화평이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화평이 있고,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화평이 있으며, 그 말이나 성품에 화평이 있고, 그 생활이 화평을 구하는 생활, 이것이 특별히 뛰어나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아니하며 어떠하든지 악을 선으로 이기는 이러한 사실입니다. 분한 마음이 나도 그 마음을 참고 원한을 마음가운데 오래 품지 않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 주는 그 화평의 마음이 곧 성도의 마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전에 성 프랜시스가 자기의 제자들과 같이 어떠한 산간에 살 때에 어느 날 저녁 프린시스가 잠깐 나간 사이에 그 산중에 있던 도둑 몇 사람이 들어와서 그 제자들을 보고 먹던 떡이 있으면 좀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제자들이 대단히 노해서『너희 도둑놈들아, 너희들이 일해서 먹지 아니하고 도둑질 해다 먹다가 마지막에는 우리 선생님의 마른 떡까지 뺏어 먹으려고 너희들이 여기 왔느냐?』단단히 책망해서 쫓아버렸습니다. 프랜시스가 돌아 왔습니다. 제자들이 그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그 보고를 다 듣더니 프랜시스가 오히려 자기 제자들을 책망하면서『도둑이건 도둑이 아니건 배고픈 사람에게 떡을 주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인데 너희들이 왜 떡을 주지 아니했느냐?』떡을 내어주면서『이제 이 떡을 가지고 산에 가서 그 도둑을 찾아서 이 떡을 꼭 먹이고 돌아 오라.』그래서 이 제자들이 밤새도록 찾아다니다가 마침 내에 도둑들을 만나서 그 떡을 다 먹였다고 했습니다. 그 도둑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이 제자들과 같이 프랜시스에게 와서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서 그 가운데는 프랜시스의 유명한 제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화평을 사랑하고 죄를 용서해 주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아서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올시다.
지금 아프리카에 가 있는 슈바이처 박사가 이런 말을 한 번 했습니다. 자기가 본래 자라난 교회에 어떤 잘 믿는 교인이 한 분 계신데 이 분은 아주 귀가 멀어서 설교는 전혀 듣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언제든지 예배당에는 꼭 출석합니다. 한 번은 물어봤다고 합니다.『당신은 설교 한 마디도 듣지 못하면서 뭘 하러 예배당에 늘 옵니까?』『우리 믿는 사람들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그 사도신경에 있는 성도의 교통을 믿는데 내가 비록 설교는 듣지 못하지마는 성도들이 모이는데 같이 가서 성도와 교제를 가지고 함께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마땅히 내가 성도로서 할 것이 아닙니까?』성도의 교통을 중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이 성자들의 생활을 살펴보면 셋째 특색은 무아의 봉사입니다.「내」가 없는 봉사입니다. 말없는 봉사입니다. 지금도 프랜시스 이야기를 했지마는 왜 프랜시스를 성자라고 합니까? 그는 자기가 없는 봉사를 했습니다. 병자를 도와주고 문둥이를 치료해 주고, 김 못 매는 이 있으면 김 매주고, 추수 미쳐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추수해주는 등 자기가 없는 봉사를 했습니다. 하와이에 문둥이들만 사는 섬에 가서 일생을 바친 다미엔을 왜 성자라고 합니까? 자기가 없는 봉사를 했습니다. 아나 二十세기에서 우리 기독교도들 가운데 성자라고 이름을 들은 이는 제가 기억하는 대로는 아마 서양에는 아프리카에 가서 일생 일하는 슈바이처 박사이고 동양에는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난 일본의 하천풍언 목사일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다「내」가 없는 말없는 봉사를 하였습니다. 봉사가 귀하지마는「나」라고 하는 것이 들어가면 봉사의 가치가 없어집니다. 성경의 말씀과 같이 향기로운 기름에 죽은 파리가 빠진 것과 같습니다. 내가 모르는 봉사, 내가 없는 봉사, 이것이 성도의 모습의 특별한 특색인 줄 생각합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아프리카 카메룬에 가서 순회할 때에 어떤 곳에 가 보니까 전부 흑인만 있고 선교사는 지금 두 집밖에 없는데 그 중 한 가족은 안식년으로 미국에 들어갔고 그 흑인만 사는 동네에 미국 여자 선교사 혼자서 병원을 차려놓고 의사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들으니까 본래 그 여자의 아버지가 개척 선교사로 그 곳에 와서 의사 활동을 하다가 열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도 이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딸 하나만 남았습니다. 이 딸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미국에 돌아와서 의학 공부를 하고 자기가 의사가 되어서 아버지의 사업을 계속해서 그 흑인들만 사는 그 곳에서 홀로 그들을 봉사하는 광경을 볼 때에 제 마음 가운데 과연 여기에 성도의 모습이 있구나 하고 큰 감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과거 두 주일 동안에 우리 교회에 큰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본 교회에서 전국 교역자 수양회를 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 산상에 가서 산상 기도를 했습니다. 이 전국 교역자 수양회와 산상 수양회를 통해서 우리 교회 가운데 어떤 장로님들, 몇 분 집사 님들, 몇 분 권사 님들이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밤도 여러 날 남모르게 세웠습니다. 이렇게 남모르는 가운데 봉사하였습니다. 산간의 백합은 사람이 보든지 안 보든지 아름답게 피고 그 향기를 온 골짜기에 채우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활이 이러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든지 못 보든지, 알든지 모르든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며 봉사하는 것이 성도의 생활인 것입니다. (一九六0년 八월 二十一일)

Ⅳ-6 일편단심의 신앙 (빌립보서 一장 十二-二十一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一·二十一)

빌립보서는 특별히 인정이 깊은 서신입니다. 갈라디아서 같은 서신은 그 교회에 이단 사상이 들어와서 그런 사상을 시정하기 위하여 기록된 까닭으로 자못 격분된 가운데 기록한 편지입니다. 그런 자취를 우리가 갈라디아 서신에서 더듬어 알 수 있습니다.
또 지금 우리가 수요일 저녁마다 공부하는 고린도 전서나 후서 같은 서신들은 그 교회에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많아서 그것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기록한 서신으로 그 배후에는 많은 근심과 염려 가운데 기록된 자취를 우리가 또한 더듬어 살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그 일부를 읽은 빌립보서는 그런 자취가 전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운 여러 교회 가운데 특별히 빌립보 교회는 화평한 교회로서 유명합니다. 평안한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처음에 설립하고 계속해서 도와주고 있는 사도 바울을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어디 가든지 그들의 기도가 따라 가고 물질도 또한 따라 가면서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업을 후원하여 준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그만 수감된 이후에 가이사랴에서 二년 동안이나 아무 것도 하는 것 없이 갇혀 있게 되었고, 그 다음에 가이사에게 송사 받기 위하여 로마로 올라오게 되었지만 별로 송사 받는 것도 없이 쇠사슬을 손에다 매고 옥중에 그냥 있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은 것입니다.
이런 소식은 물론 빌립보 교인들에게 들렸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을 위하여 항상 기도라고 특별히 옥중에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에 그들은 기도만 할 수 없었습니다. 헌금도 하고 좋은 예물을 준비해 가지고 특별히 사람을 파송(派送)했습니다. 에바브로 디도라고 하는 좋은 교인 하나를 택해서 먼길, 뱃길, 육로를 다 지나서 로마로 사람을 보내어 사도 바울을 문안하고 사도 바울을 위로해 올리고 또 정성껏 모아 가지고 갔던 예물을 사도 바울에게 드린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예물을 받고 사도 바울의 마음은 심히 감격하였습니다.
우리가 빌립보서를 보면 감격과 감사의 분위기로서 충만합니다. 이렇게 감격과 감사한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게 됩니다. 우리가 이 빌립보 서신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심정을 우리가 살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기쁨이 무엇이었는가, 그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이었는가, 그의 중심에 무엇이 있었는가? 이런 모든 것을 이 빌립보 서신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읽은 말씀을 가만히 보면 먼저 문안이 있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를 드렸고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기도를 하고 그 다음에 자기의 마음을 내 놓습니다. 자기의 사정 이야기를 합니다. 十二절에『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는 말로 시작합니다.『너희들이 내가 감옥에 있으므로 말미암아 걱정하는 줄 안다. 염려하는 줄 안다. 그러나 과히 염려할 것 없다. 왜 그런고 하니 나의 매인 것이 오히려 복음 전파의 진보함이 되었느니라. 그것을 너희들이 알기를 원한다.』그러면서 어떻게 복음이 잘 전파가 되었는지 세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는 내가 이렇게 매임을 당하였지마는 오히려 매임을 당한 것을 통해서 온 시위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시위대에 있는 군일들이 아마 바울의 파수를 본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 사람을 만날 때마다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다른 시위대 사람에게 또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여러 죄수가 많지마는 바울은 특별한 사람이야, 그 사람이 무슨 죄진 것은 없고 말을 들어보니까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로 말미암아 그렇게 고생을 하는데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라고 그래.』이런 말이 온 시위대 사람에게 다 펴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그 후에 교회 역사를 보면 이렇게 펴진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이사의 궁중에 침투해 들어가서 마지막에는 로마 황제의 어머니가 믿게 되었고 마침내는 수 백년 후에 로마 황제까지 그리스도의 발 앞에 무릎을 꿇게 된 사정을 우리가 압니다. 그가 매임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렇게 펴졌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의 형제 가운데 다수가(그 형제는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가 이렇게 매임을 당한 것을 보고 오히려 더 담대한 마음을 가지게 되어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되어서 더 담대해졌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어요. 아마 사도 바울이 이렇게 사슬에 매여서도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는 여기에 감격해서 열심이 낫는지, 혹은 사도 바울이 저렇게 옥에 있어서 자유로 전도도 못하는데 자유로 전도할 수 잇는 그들이 가만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였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마는 하여간 열심히 전도해서 복음이 잘 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아닙니다.『또 너희들 아는 바와 같이 예수를 믿기는 믿으면서도 공연히 교회에서 당파를 짓고 특별히 내게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도 있지 아니하냐? 그런 사람이 로마에도 더러 있어. 그런데 그런 사람은 내가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오히려 기뻐서 이제야 그들이 전도를 많이 해서 그들의 당파를 많이 만들 기회구나 하면서 열심이 나서 또 복음을 전파한다. 또 사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나를 좀 괴롭게 할 줄 생각해. 그러나 그것은 잘못 생각한 거야.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든지 전파되는 것을 그리스도야.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니 나는 그저 기뻐할 것 뿐이야. 이 앞으로는 계속해서 기뻐할 것밖에 다른 것이 없다. 이렇게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여 있지마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가까운 친구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내 반대하는 사람을 통해서도 이렇게 복음이 전파되니 내 마음은 기쁘다. 내가 비록 쇠사슬을 차고앉았지마는 이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기쁘다.』
여기에도 사도 바울의 넓은 마음, 관용 심, 또 여기에서 그의 생각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에 온전히 사로잡혔는지, 그 심정이 어떠한지, 우리가 엿볼 수 있잖아요? 이런 말을 하면서『이렇게 너희들이나를 위해서 기도도 해 주고 그리스도의 힘이 항상 나를 도와줄 줄 안다.』그러면서 계속해서『나의 간절한 기도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이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尊貴)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가슴을 헤치고 자기 가슴속에 깊이 숨은 일편단심을 적나라하게 빌립보 교인들에게 헤쳐 주십니다.
음침한 감방에 사슬을 차고앉은 노 사도의 모습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의 머리는 이미 백발이 되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더 깊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여전히 혁혁합니다. 그의 음성은 여전히 쟁쟁합니다.
이 편지를 받아쓰는 제자에게 쟁쟁한 그 어조로「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불러줍니다.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위하여」계속해서 말합니다.「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왜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게 일을 하려 합니까? 그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되게 하기 위하여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왜 담대 하려고 합니까?「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 위하여」한 마디 더 합니다.「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 위하여」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비록 나이는 많이 늙었지마는, 비록 감옥에 있지마는「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함이라.」계속해서 하는 말이『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무슨 뜻입니까?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말입니다.
첫째 뜻은 이런 줄 압니다.『내게는 사는 목적이 오직 그리스도요, 생의 목적도, 생의 의의도 오직 그리스도다. 오직 그리스도를 내 몸에서 존귀케 하는 것이야. 그러니 내가 죽어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할 수 있으면 그것도 내게 유익함이다.』제일 첫 뜻이 이런 줄 압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두 가지를 힘썼습니다.
첫째는 자기 몸을 성결(聖潔)히 가지도록 했습니다. 온전히 자기의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렸습니다. 문자 그대로 제단 위에 자기 몸 전채를 올려놓았습니다. 그의 생활을 거룩 히 하고 깨끗이 하고 아담하게 하고 화평하게 하고 온전히 사랑의 생활하기를 힘썼습니다. 항상 죄를 멀리 했습니다. 왜?『내가 죄를 지으면 그리스도에게 욕이 가게 돼. 내 몸으로 그리스도를 경배하려고 하면 먼저 내 몸이 성결해야 해.』그래서 그는 항상 육체와 싸웠습니다. 계속해서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달려갈 길을 다 갔습니다. 믿음을 지켰습니다. 어떻든지 자기의 생활을 근엄히 하고 성결히 해서 자기의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를 힘썼습니다.
둘째로 그는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방법은 이 귀한 십자가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그리스도께서는 만민을 죄 가운데서 구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자기 몸을 던진 이 귀한 사실을 내가 어떻게 홀로 가질 수 잇느냐? 이 기쁜 소식을 알려야 되지 않겠느냐? 땅 끝까지 가서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그래서 그는 스페인까지 가기를 원했습니다. 도처에 여행을 했습니다. 바다에 위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유대 사람에 위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방 사람들로 말미암아 위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환난과 고난이 도처에서 기다렸지마는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도처에 다녔습니다. 옥중에 있게 되면 옥중에서 역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왜?『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야.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내 몸에서 존귀하게 하는 것이야. 존귀하게 하는 데는 내 생활을 먼저 성결하게 하고, 둘째로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다. 그러니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도 유익한 일이다.』스데반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음으로 복음이 더 많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 될 줄 안다는 그 뜻인 줄 압니다.
그러나 둘째 뜻은 다른 내용이 포함됩니다.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내게는 죽는 것도 그리스도처럼 죽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내 생의 표준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와 같이 살지 못하면 의미가 없어. 그리스도와 같이 거룩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깨끗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온유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겸손하고, 그러나 그리스도와 같이 담대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의를 위해서 핍박이라도 받고, 그리스도와 같이 살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돼. 이렇게 살지 못하면 내게는 생의 의미가 없어. 무얼 하려고 살아? 그리스도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고 그리스도의 말을 내 말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내 성품으로, 그리스도의 사업을 내 사업으로, 그리스도의 눈으로 나도 같이 보고, 그리스도의 귀로 나도 듣고, 그리스도의 손으로 할 일을 내 손으로 하고, 그리스도의 발로 걸어갈 곳을 내가 걸어가고, 그리스도와 같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갈보리 산상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하는 것, 이것이 내게는 사는 것이야. 그러니 내게는 죽는 것도 유익해. 왜 그런고 하니 그리스도께서 죽었으니 나도 죽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부활했으니 나도 부활할 줄 알아. 그러니 나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 곧 내가 사는 것이야. 그러니 나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그 뜻이 여기 있는 줄 압니다.
셋째 뜻은 이렇게 그리스도처럼 꼭 살려고 하면 여러분도 스스로 깨닫고 저도 깨닫는 바요, 사도 바울이 이미 깨달은 바이지만 내 힘으로는 이렇게 살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다 찾아보세요. 그가 그의 힘으로 이렇게 살았다고 한 편지가 하나라도 있습니까?「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무슨 뜻이지요?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이니,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음이니,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계심으로 말미암음이니,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네게 능력을 주시는 까닭으로 사는 것이니,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떠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열매 맺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의 주시는 생명수를 내가 마시고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셔서 그리스도의 생명 양식을 내가 먹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계시고 나와 동행함으로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는 것은 유익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죽으면 그리스도와 영원히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영원히 같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영원히 동락(同樂)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죽는 것은 유익합니다. 사도 바울의 일편단심은 오직 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여러분, 우리도 이 말을 능히 할 수 있습니까?「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이 말을 능히 할 수 있다면「죽는 것도 유익함이 되느니라」, 이 말도 할 수 있습니다.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면 어떻게 말할 것 같아요? 내게는 사는 것이 무엇이라고 할 것 같아요?「내게는 사는 것이 돈이니」아마 이렇게 말할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내게는 사는 것이 세상의 향락이니」이렇게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 사람들은「내게는 사는 것이 그저 영화 구경하는 것이니」이렇게 말할 것입니다.「내게는 사는 것이 세상 부귀 영화니」이렇게 말할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죽어도 유익함이 되느니라.」란 말은 못할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죽은 다음에야 돈이나 세상의 향락이나 부귀나 무슨 쓸데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이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편단심의 신앙을 가진 사람을 요구하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일편단심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 교역자와 장로들을 요구합니다. 일편단심의 신앙을 가진 권사들을, 남녀 집사들을 요구합니다. 신앙에는 절반은 없습니다. 온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면 신앙이 아닙니다. 일편단심의 자녀를 요구합니다.
오늘 아침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 각 사람에게 주셔서 사도 바울과 같이,『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一九六0년 八월 二十八일)

Ⅳ-7 조용하여 일하라 (데살로니가 전서 四장 一-十二절)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조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四·十一)

이 한 절 가운데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그 때 교인들에게 세 가지 권면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조용하기를 힘쓰라. 둘째는 자기 일을 하라. 셋째는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것은 명령입니다.「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아침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조용하기를 힘쓰라. 시편 四十六편 十절에『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잔잔한 호수에 달빛이 바로 비칩니다. 고요한 심경,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심경에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이런 심경으로써야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엘리야도 호렙산 굴 어귀에 가만히 섰을 때에 적고 고요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모세도 조용히 시내산 기슭에서 양을 칠 때에 불붙는 가시덤불과 하나님의 은근한 부르심을 들은 것입니다.
유대 왕 아하스 때에 이스라엘 왕 버가와 아랍 왕 르신이 연합해서 예루살렘을 크게 침략하였습니다. 이 때에 왕 아하스를 비롯해서 모든 백성들의 마음이 산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떨며 흔들렸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아하스 왕에게 준 말씀이 이 말씀이올시다.『너는 삼가며 조용 하라.』이사야 三十장 十五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 늘』하셨습니다.
조용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은혜를 받는 중에 능력을 얻습니다. 마음이 들떠 흥분하고 당황한 사람은 아무 것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조용하여야 무엇을 생각할 수 있고 힘을 얻을 수 있고 내 의무가 무엇인가 바로 깨달아서 그것을 꼭 실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조용하기를 힘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三장에 보면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명령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할지어다.』『조용히 일하여 자기의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아마 그 때에 일은 하지 아니하고 돌아다니면서 남의 양식을 먹던 사람들이 있던 모양입니다. 자기의 일은 하지 아니하고 남의 일에 붙어서 남 일하는 덕에 사는 그런 벌레를 기생충이라고 부릅니다. 일하지 아니하고 남에게 붙어서 그저 사는 사람들을 기생 인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 생활도 나는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남이 일하는 덕에 믿기만 하면, 미안하지마는 기생교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해는 하지 맙시다. 병자들이나 노약(老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 노동이나 정신 노동이나를 성경은 엄히 명령합니다. 꼭 일하고 생활하랍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내실 때에는 이 하늘 아래 다른 사람 말고 꼭 내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내가 찾아서 반드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첫 번 권면과 합해서 생각하면 조용하여 일하라고 하는 명령이 됩니다. 그 때 데살로니가 교회 가운데는 일은 하지 아니하고 조용하지도 아니하고 돌아다니면서 일만 만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이 일을 돌아다니며 만들지 말고 내 일을 내가 하면서 내 양식을 먹으라고 엄히 경계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을뿐더러 하는 사람을 비난하며 오히려 방해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옛날 데살로니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나라, 교회에도 있는 것이고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없이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일은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일을 만들며 일하는 사람을 비난하며 거짓 선전을 일삼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일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고 조용하여 일하라고 하는 말은 일은 하지마는 어떤 때에는 우리가 불평을 하면서 일할 때도 있습니다. 자랑도 하면서 일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태도로 하지 말고 조용히 일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설거지를 하는 것도 좋습니다. 쑹얼쑹얼 하면서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공자(孔子)님 말씀 가운데『인부지이 볼온이면 불역군자호아』(人不知而 不 이면 不亦君子乎아)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화내는 마음이 없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냐?』일을 하되 군자의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라 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하나님께서는 큰 일을 늘 하시지마는 조용히 하십니다. 아침에는 조용히 햇빛을 주십니다. 저녁에는 조용히 이슬을 내립니다. 그래서 풀이 자라고 꽃이 피고 오곡백화가 열리고 아름답게 익습니다. 큰 일을 하면서도 조용히 하라고 하는 말씀이올시다.
또한 조용히 일하라고 하는 말은 좀 생각하면서 일하라고 하는 그 말입니다. 좀 연구를 해서 창의적으로 창작적으로 좋은 방법으로 최선의 길을 택해서 작년이나 금년이나 똑같이 일하지 말고 좀 더 낫게 일하라는 뜻인 줄 생각합니다. 까치는 천년 전이나 오늘이나 똑같이 집을 짓습니다.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지력을 주시고 창조적 능력을 주셨으니 조용히 생각하면서 전보다 더 일을 잘 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또한 조용히 일하라는 뜻은 일하기는 하되 피차에 남과 충돌되지 말면서 일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갈기는 소 같아서 밭은 잘 가는데 자꾸 다른 소를 만나면 싸우는 소가 있습니다. 일은 잘하되 다른 사람과 충돌 안 되면서 다른 사람과 협동하면서 일을 잘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운동 경기를 할 때에 어떤 팀이 이깁니까? 자기 팀 멤버들끼리 잘 협동해서 일하는 팀이 승리를 합니다. 조용히 잘 협조하면서 일하기를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또 조용히 일하라고 하는 말은 꾸준히 일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얼마 일하다가 마음에 맞지 않으면 집어던지지 말고, 꾸준히 인내를 가지고 농부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이 참아가면서 끝까지 일하라고 하는 그 알입니다.
여기 특별히 자기 일을 하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예수 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시몬을 다시 불러 세우면서 주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에 시몬이 그 옆에 선 요한 을 가리키면서『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예수 님이 곧 하시는 말씀이『그에게 대해서는 내가 할 다른 계획이 있지마는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 잇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네게 제일 중요한 것은 우선 네가 나를 따르는 것이니라.』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믿느니, 그것을 비판하는 것보다도 제일 중요한 것은「내가」어떻게 믿느냐? 내가 어떻게 주를 따르느냐? 이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책임을 하느냐? 그것을 보는 것보다도「내가」책임을 어떻게 하느냐? 내 직장에서 내 책임을 하느냐? 내 교회에서 내 책임을 하느냐?
옛날이나 오늘이나 형태는 변했지마는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나라가 잘 되는 법은 옛날 성현의 말 그대로 지금도『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 臣臣 夫夫 子子)의 원리가 그대로 응용되는 것입니다. 임금은 임금 노릇을 잘하고, 국무총리는 국무총리의 일을 잘하고, 장관들은 장관들의 일을 잘하고, 아버지들은 아버지 노릇을 잘하고, 아들들은 아들 노릇을 잘하고, 각각 자기 직장에서 조용히 일을 바로 하고 창작적으로 할 때에 그 나라는 바로 될 것입니다.
네 일을 힘쓰라고 하는 말은 예수 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맏아들처럼 하지 마라는 말입니다.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을 불러서 하는 말이,『아들아 오는 포도 원에 가서 일하라!』『예!』대답은 하였으나 가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지 말고『예!』라고 대답하고 책임을 맡았으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으면, 부름을 받았으면, 그 책임을 바로 하라는 뜻입니다.
셋째는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여기에 육체 노동을 의미하는 줄 압니다. 예수 님께서는 친히 손으로 목수 일을 하시며 제자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바울도 친히 손으로 장막을 치셨습니다. 이와 같은 모범으로서 육체 노동이 얼마나 신성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을 볼 때에 거의 모두가 손으로 할 일입니다. 산에 나무가 없으니 나무를 심어야겠습니다. 손으로 심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천에 모래가 내려와서 덮게 되니 치수(治水)를 해야 되겠습니다. 손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농사도 손으로 할 수밖에 없고 우리의 일용품을 생산하는 모든 것도 우리의 손으로 생산할 수밖에 없고, 도시의 건설을 하는 것도 우리의 손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육체노동을 요구합니다. 사실 정신 노동으로 할 것은 많지 아니합니다. 정신 노동자는 많이 요구되지 아니합니다. 손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 기술이 있는 사람, 숙련한 사람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실직자가 一백 五十만이니 二백만이니 하지마는 사실 자기의 기술이 있고 무엇이나 자기 손으로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실직이 없습니다. 대체로 손으로 일할 줄 모르는 사람 가운데 이 실직자가 많은 것입니다. 이런 면을 생각할 때에 우리가 이 앞으로 우리의 아들과 딸들을 어떻게 교육을 시켜야 되겠느냐?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하였다고 하지마는 살림할 줄 무른다는 불평을 많이 듣습니다. 일을 배워야 합니다. 일할 수 있는 손으로 일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몇 일 전에 신물을 보니까 원남동에 八十四세 된 노인이 그 동리에서「빗자루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지셨다고 합니다. 이 할아버지는 과거 五, 六十년 동안 새벽 일찍 일어나서 근방에 다니면서 길을 깨끗이 쓸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경찰서에서 특별히 감사장을 올린 일이 이지 아니합니까? 우리 한국의 할아버지들이 다 이렇게「빗자루 할아버지」가 되었다고 하면, 우리 나라가 얼마나 더 깨끗해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빗자루 할머니가 되면 뭐 틀린 것 있습니까? 손으로 일하기를 우리가 힘써야 되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보니까 어떤 잘 믿는 이가 풍을 맞아서 신체 하부를 전혀 쓰지 못하는데 그 윗도리는 쓸 수 있으니까 드러누워서 조금도 놀지 아니하고 그물을 뜨는 그 광경을 본 생각이 지금까지 기억됩니다.『네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의 실정을 보면 제일 많은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싸움과 데모입니다. 국회에서도 싸우고 학교에서도 싸우고 은행에서도 싸우고 공장에서도 싸우고 예배당 안에서도 싸웁니다. 또 데모, 심지어 양 마담들이 데모를 한다, 사창들이 데모를 한다. 병원의 환자가 데모를 한다. 전라도에서는 성경학교 학생들이 선교사들한테 가서 데모를 했다. 이러다가는 데모로 이루어진 제二공화국이 데모로 망할까 두렵습니다. 이와 같이 함부로 하는 데모는 대의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면서 한 지나간 四월 혁명에 대한 모독입니다. 생명을 바친 그들의 영령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싸움과 이 데모, 우리 사회에서 어서 그치지 아니하면 우리 나라가 바로 건설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 제일 시급한 것도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질서 유지요, 둘째는 건설입니다. 국민마다 조용한 정신을 가지면 자연히 질서가 회복될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신분에서 자기 일을 바로 하면 자연히 건설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싸움을 그만 두고 데모도 그만두고, 학생은 학교서 공부할 것이요, 직공은 공장에서 일할 것이요, 공무원은 그 관청에서 책임을 다 할 것이요, 누구든지 지기 직장에서 조용히 일해야 질서도 회복되고 건설도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사정도 질서의 회복이 꼭 필요하고 건설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려고 하면 조용히 자기의 책임을 바로 하는 일군이 요구됩니다.
지금은 가을입니다. 추수할 때가 가까워 왔습니다. 신령한 밭은 이미 곡식이 누르렀습니다. 아니 이미 희어졌습니다. 일한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교역자는 교역자로서, 장로들은 장로로서, 집사들은 집사로서, 내 자리에서 각각 자기의 책임을 조용히 바로 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 열심히 일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한 가정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그 집을 도와주고 애쓰는 정경을 볼 때에 참 눈물이 납니다. 이와 같은 교우들을 본받아서 우리 하나 하나가 조용히 일해야 될 것입니다.
국가 부흥의 비결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조용히 일하는 것입니다.
교회 부흥의 비결도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조용히 일하는 것입니다.
(一九六0년 九월 四일)

Ⅳ-8 잃은 보배를 찾자 (누가복음 十五장 一-十)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는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눅 十五·八-九)

오늘 아침 읽은 누가복음 十五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비유 셋이 있습니다. 첫째는 잃은 양의 비유, 둘째는 잃은 돈의 비유, 셋째는 잃은 아들의 비유올시다.
이 세 개의 비유는 공통된 점이 있습니다. 공통된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다고 하는 진리올시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그 사실이올시다.
둘째로는 하나님이 모든 죄인을 잃은 자로 보시고 그들을 찾으신다고 하는 진리입니다. 죄인을 반역자나 범법자로 보는 것보다도 잃은 자로 보시고 잃은 자를 찾으시기를 힘쓴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는 사람이 그의 신을 찾는 종교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이 잃은 사람을 찾는 종교인 것입니다.
셋째는 인간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노력이나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중심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상 몇 가지는 다 기독교의 본질적인 중심의 사상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중심 한 신본주의(神本主義)의 종교인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이 세 가지 비유를 생각할 때에는 이 세 가지가 각각 조금씩 다른 면이 없이 않아 있습니다. 사실 똑같은 것만 그르친다고 하면 세 가지로 비유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 세 가지 비유가 공통적인 중심 되는 지리를 가르치는 동시에 각각 다른 면이 있습니다. 가령 잃은 양의 비유로 말하면 인간을 구원하시는 역사에 있어서 특별히 성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기 위해서 산과 들에 헤매는 모습은 꼭 예수 님께서 잃은 죄인을 찾기 위해서 하늘 나라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거치른 세상에 오시고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리시는 여실한 모습을 이 비유 가운데서 특별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둘째로 잃은 돈의 비유에서는 특별히 성신 님께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곧 교회를 통해서 역사 하시는 모든 그 활동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셋째로 탕자의 비유 혹은 잃은 아들의 비유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으시는 잃은 죄인들, 성신 님께서 또한 찾으시는 잃은 죄인들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될 때에,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기다리고 계시다가 기뻐서 영접하시는 특별히 상위일체 가운데 성부의 기뻐하시는 그 모습, 즐거워 환영하시는 그 모습을 이 비유 가운데서 우리는 찾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세 비유를 다 생각할 수는 없고 이 시간에는 특별히 둘째 비유, 잃은 돈을 찾는 이 비유를 중심해서 생각함으로 하나님께서 오늘 아침 우리에게 각각 말씀하여 주시고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어떤 여자입니다. 아마 가난한 여자 같습니다. 드라크마 열 닢이 있습니다. 어려운 말 내어버리고 전의 변역대로 은전 열 닢을 아주 귀하게 간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 다시 세어 보니까 그 가운데 한 닢이 없어졌습니다. 이 여자는 크게 놀랐습니다. 사방을 살펴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불을 켜고 방을 쓸면서 이 잃은 은전 닢을 찾을 때까지 힘을 써서 결국은 찾고야 말았습니다. 이 은전을 찾게 되니까 이 여자는 너무 기뻐서 인근의 사람들까지 청해서 같이 즐거워하였다는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보면 인간의 영혼을 은전에 비유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은은 옛날에는 황제의 화상이 박히어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영혼을 이 귀한 은전에 비교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영혼 가운데는 심령 위에 천지의 재 주재가 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 박히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심령이야말로 얼마나 귀한 보배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늘의 별이 귀하다. 바다의 진주가 귀하다. 여러 가지 귀한 물건을 많이 말합니다. 그러나 이 우주에 제일 귀한 것은 인간의 영혼이올시다. 예수 님께서는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도 두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물주의적 인간관과 기독교적 인간관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심령이야말로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교훈이요,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인간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은전이 잃어버림을 당하였습니다. 이렇듯 귀한 보배가 어두운 구석 티끌 가운데 묻혔습니다. 옥이 진토에 버림을 당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귀한 인간의 영혼이 잃어버림을 당하였습니다. 티끌 가운데 쌓인 영혼이 많습니다. 무지한 사상의 티끌 정욕의 티끌, 물욕의 티끌, 허영의 티끌 오만과 시기의 티끌 음란과 부정의 티끌 권세욕의 티끌, 이와 같은 부정의 티끌 가운데 그만 잃어버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은전이 아무리 귀하지마는 이렇게 잃어버린 바 되었으니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옥(玉)석(石)의 분간이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아무리 귀하지마는 이렇게 죄악에 묻히고 말았으니 인간의 본래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흐리어지고 말았습니다. 쓸데없게 되었습니다. 무용의 장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귀하게 역할 할 이 귀한 영혼이 아무 소용이 없는 존재로 변하고 말게 되었습니다. 그저 무감각인 대로 그저 무의식 상태로 티끌 에 쌓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더 더러워집니다. 날이 갈수록 더 더러운 것이 더 묻습니다. 사면으로 녹이 습니다. 그 영혼이 점점 썩어지는 자리에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아프면서도 아픈 줄 모르는 중한 환자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전신을 잃고도 정신을 잃은 줄 모르는 정신병자처럼, 자기가 말할 수 없는 죄악에 빠져 있으면서도 죄악에 빠져 있는 것을 알 수 없는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럼으로써 성경에 기록한 대로 배로 하나님을 감고 부끄러움으로 영광을 삼는 사람이 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말대로 죄와 허물로 그 영혼이 아주 죽은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그 귀한 보배, 이 우주에 제일 값 가는 인간의 심령이 이와 같이 가련한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아주 잃어졌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이런 참혹한 형편이 타락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더 찾아볼 수 없는 불쌍한 영혼이 되고만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잃어진 영혼이 오늘날 우리 가정에, 우리 사회에, 우리 민족 가운데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이와 같이 잃어진 은전이 무슨 소망이 있을까요? 그저 보기에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한 가지는 있습니다. 그것은 은전이 이렇게 잃어버림을 당하였지마는 이 은전의 주인이 있습니다. 이 은전의 주인 되는 여자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이와 같은 쓸데없는 심령은 잊어버리지마는 이 은전의 주인 되시는 이 여자는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은전을 생각했습니다.『아, 이것 하나 없어졌다. 어딜 갔을까?『안타까워합니다.』내가 아무래도 이것을 찾아야지.』찾기를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미 말씀하였지마는 여기 여자는 성신께서 같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교회를 가르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는 성신께서 계셔서 성신의 역사를 하시는 기관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성신의 시대입니다. 이와 같이 잃어버리고 버림받은 영혼에 한 가지 소망은 이 영혼의 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역혼의 주인 되시는 성신이 계십니다. 이 영혼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이 여자는 이 잃어버린 돈을 찾기 위해서 일하던 다른 것을 다 그만 두고 잃어버린 돈을 찾기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여자니까 살림하는 여자인지라 여러 가지 바쁜 일도 많은 줄 압니다. 옷을 만들 일도 있겠고, 밥을 지을 일도 있겠고, 거리에 나가는 일도 있겠고,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지마는 이 잃은 돈을 발견하기 위해서 이 여자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이 잃은 돈만 생각하고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 찾기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성신 받은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은 줄 압니다. 자선 사업도 귀한 일입니다. 교육사업도 귀한 일입니다. 사회 개량사업도 귀한 일입니다. 여러 가지로 정치에 참여해서 나라를 세우는 것도 바로 하려고 하는 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성신 받은 교회의 진정한 모습은 먼저 잃은 돈을 찾기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이 잃은 인간의 심령, 잃은 보배를 찾기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세요. 이 여자가 다른 일 다 제쳐놓고 이 잃은 돈을 찾기 위해서 힘을
씁니다. 여기 성경에 보니 등불을 켰다고 그랬습니다. 옛날 유대 사람의 집은 창이 많이 못해서 아마 어두웠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사람의 집도 새로 짓는 집은 문을 많이 내서 밝지마는 촌으로 가든지, 옛날 지은 집을 보면 낮에도 어두워서 불을 켜지 아니하면 구석에는 잘 보이지 아니합니다. 아마 이 여자가 그런 집에 살던 모양입니다. 그래서는 등불을 켜고 구석구석 다니면서 비추어 보면서 이 잃은 돈을 찾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이 등불을 켠다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인지 압니까? 이 여자가 교회라고 하면 이 여자의 등불은 무엇을 가리켰는지 아십니까? 예수 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산 위에 세운 성이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등경(燈 ) 위에 두나니 이것은 온 집안을 비추이기 위함이라.』예수 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신께서 우리를 구원해서 우리 심령에 불을 붙여서 우리로 하여금 빛을 삼은 것은 무슨 목적인지 압니까? 잃은 보배를 찾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빛을 삼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의 등불은 우리 영락교회 하면 영락교회에서 참으로 은혜 받은 여러분 하나 하나를 가리켜서 등불에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 등불은 오늘날의 전등을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 옛날 기름 방 등에 켜던 조그마한 등불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등불이 적지마는 내가 내 빛을 발한다고 하면 내 근방은 비칠 수가 있습니다.
잃은 보배를 찾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교회의 교인 하나 하나가 참 빛이 되어서 자기 있는 곳에서 빛을 비추어서 자기 주위의 어두운 곳을 밝혀야 잃은 보배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보세요. 이렇게 등불을 켤뿐더러 이 여자가 방을 쓸었다고 그랬습니다. 방을 정돈하며 더럽고 어지러운 것을 쓸어내며 방을 깨끗이 했습니다. 이렇게 해야 물론 잃은 돈을 찾을 수 있지 아니합니까? 이 방을 쓴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교회를 깨끗하게 한다고 하는 말인 줄 압니다. 교회가 깨끗해야, 교회가 성결해야, 교회가 화평해야, 교회가 정돈되어야, 잃은 보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너무 어지럽고 너무 깨끗지 못해서 잃은 돈을 찾기는커녕 찾았던 돈도 잃을까 두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신의 빗자루로써 우리 한국교회를 좀더 철저히 쓸어서 한국교회를 좀 깨끗케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등불이 되어서 빛을 비추어야 잃은 보배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가정이 깨끗해야 잃은 보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얼마나 전 주의를 집중해서 이 돈을 찾았나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여자는 그 머리에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염염 자자해서 잃은 돈만 생각합니다. 이 여자의 눈을 상상해 보세요. 이 여자의 눈은 다른 것을 보지 아니합니다. 그저 이편보고 어디 잃은 돈이 없는가? 그 눈은 온전히 잃은 돈을 찾기 위해서 사용이 됩니다. 그 여자의 왼 손을 보세요. 왼 선에는 등불을 켜 가지고 다닙니다. 바른 손을 보세요, 바른 손에는 빗자루를 들고 방을 쓰는 줄 압니다. 발로 돌아다니고 손으로 쓸고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고, 모든 것을 이 잃은 보배를 찾는 데 집중합니다. 이것도 성신이 충만한 교회의 모습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에 여러 직분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그 직분들의 여러 가지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마는 여러 직분들의 가장 첫째 되는 책임, 그들의 전 정력을 모을 데가 어디입니까? 잃은 보배를 찾는데 모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주일학교가 있습니다. 영아부, 유치부, 초등부, 학생부, 청장년부, 여러 주일학교 각 부가 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렇지마는 주일학교에서 모든 주의를 집중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잃은 보배인 인간의 심령을 찾는 데 마땅히 집중해야 됩니다.
우리 교회에 남녀 전도 회가 있고, 청장년 면려회(勉勵會)가 있고, 학생회 면려회가 있고, 그 밖에 여러 작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이 단체들이 할 것이 많습니다. 하지마는 이 모든 단체가 제일 먼저 힘쓰고 집중할 데가 어딥니까? 잃은 보배를 찾는데 집중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물론 고아원, 경로원, 모자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가 있습니다. 이런 자선사업 기관, 교육사업 기관 같은 것도 대단히 필요합니다. 여러 가지 다 해야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관들도 무엇보다도 총력을 집중할 데가 어디입니까? 잃은 보배를 찾지 못하면 기독교 자선사업기관에서 무엇을 합니까? 잃은 보배를 찾을 수 없다고 하면 기독교 교육 기관이 많은 돈을 써서 학교를 설립하고 유지해 무엇을 합니까?
이 여자의 전 정신 모든 정력을 다 잃은 돈을 찾는데 집중시켰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직분, 모든 단체, 성가대, 주일학교, 면려회 자선사업 기관, 학교 할 것 없이 그 근본 목적은 무엇에 있는고 하니 금은보다도 귀한 잃은 인간의 심령을 찾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보지 찾도록 힘을 썼습니다. 얼마 찾다가 아무리 해도 보이지 아니하니까『못 찾겠군!』그만 두지 않았습니다. 찾기까지 꾸준히 노력했습니다. 기간이 얼마 걸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방을 몇 번이나 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촛불을 몇 번이나 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찾기까지 꾸준히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찾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 속담에『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여러분의 친구, 여러분의 이웃 가운데 잃은 심령이 있어서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마 힘쓰는 분들이 더러 계신 줄 압니다. 여러분, 몇 번이나 권해 보았습니까? 그들을 위해서 몇 번이나 간절히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습니까? 몇 번이나 간절히 그를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힘을 썼습니까? 이 여자를 보세요. 찾도록 찾기까지 힘을 썼습니다.
함경도서 오신 교우들 많이 계신데 좀 미안하지마는 전에 어떤 사람들이 팔도 사람들의 성격을 이야기하다가 함경도 사람들의 성격을 평한 것을 보면 이전투구(泥田鬪狗)라는 말로 비평했습니다. 무슨 뜻인고 하니『진흙 밭에 개 싸움하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얼른 들을 때에 함경도 사람을 욕하는 말이라고 들을 수 있지마는 절대로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욕하는 말이 아니고 칭찬하는 말인 줄 생각합니다. 진흙 밭에서 개 싸움하는 것을 보면 그저 이놈들이 둘이 싸움 붙은 다음에는 도무지 멎지 않습니다. 그저 그냥 싸움만 계속합니다. 아마 대부분의 함경도 사람의 성격이 한 가지 무엇을 시작하면 중간에 놓지 아니하고 그냥 끝까지 하는 그 성질이 있는 모양입니다.
한편 우리가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말은 그대로 풀면 머리는 용인데 꼬리는 뱀이란 말입니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일을 벌여놓아 성한 것 같으나 끝은 흐지부지 얼버무린 부진한 현상을 뜻합니다. 시작은 좋게 나왔다가 그 다음에 사그라집니다. 이 여자는 그런 성격이 아닙니다. 찾도록 노력했습니다.
여러분, 석수가 큰 바위를 깨뜨리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석수가 큰 바위를 터뜨려 깨려고 할 때에, 맨 처음에 쇠못을 하나 대고 방망이로 첫 번 땅 때리고 나서 보아야 아무 틈나는 것이 없습니다. 두 번 때려도 마찬가지로 아무 틈나는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 같아서는 못하겠다며 그만 둘 것입니다. 그러나 석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때리고, 두 번 때리고, 세 번 때리고, 네 번 때리고, 마지막에는 금날 때까지 때립니다. 마지막에는 큰 바위가 깨뜨려지고 맙니다.
이 여자가 이와 같은 주의를 가지고 잃은 돈을 찾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보배로운 잃어진 인간의 심령을 찾으려고 하면 이와 같은 정신이 필요합니다. 얼마 애쓰다가 그만 두지 말고, 조금 힘쓰다가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계속해서 힘쓸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十五년 동안을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기도하고 권면하는 가운데 마지막에 자기 아들이 회개하지 않았습니까? 모니카는 이 은전을 찾은 것입니다.
이 은전을 찾으니 이 여자가 제일 먼저 무엇을 했겠습니까? 여기 자세히는 없지마는 은전을 찾고 보니 처음에는 빛이 번쩍번쩍 났었는데 지금은 형편없게 되었습니다. 먼지가 묻고 농이 쓸고 더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아마 제일 먼저 손수건 같은 것으로 빡빡 닦아서 반들반들하게 빛냈습니다. 그리고 보니 황제의 화상이 환하게 빛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성신께서 이와 같이 잃은 보배인 인간의 심령을 찾은 다음에는 제일 먼저 하는 것이 그 심령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닦아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다스 온전히 보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해 주십니다.
그리고는 이 여자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보통 소흘히 간수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주머니에 싸고 잘 간수해서 다시 잃어버리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신께서 인간의 심령을 구원하신 다음에도 온전히 하나님의 품속에, 하나님의 동산에 영원히 간수할 겁니다. 그 앞으로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의 대상이 되어 귀하게 쓰여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전을 찾을 때에 이 여자가 얼마나 기뻐하였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가운데 기쁨이 많지마는 제일 큰 기쁨은 잃은 보배인 인간의 심령을 도로 찾을 때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잃은 보배를 많이 찾지 않으니까, 자주 찾지 못하니까, 기쁨이 적으니까 어떤 교회서는 싸움만 합니다. 좀더 전 정력을 전도에 집중해서 많은 생명을 구원하는데 힘을 썼던들 한국교회가 이와 같이 쓸데없는 일로 싸움하니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렇게 잃은 보배를 찾을 때에 하늘에 있는 천사까지도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여자가 은전을 찾기 위하여 등불을 가지고 땅을 쓸고 사방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이 여자가 혼자서 일한 줄로 알지 마세요. 하늘의 천사들이 이 여자가 활동하는 상황을 구경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영락교회에서 복음을 전도하기 위하여 이런 방면, 저런 방면에 힘쓰는 것을 우리만 아는 줄 알지 마세요. 하늘에 있는 모든 천군 천사들과 먼저 하늘에 간 천만성도들이 우리 영락교회에서 일하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귀한 잃은 보배를 찾을 때에는 우리 마음속에만 기쁨이 있는 줄 압니까? 하늘 나라에 큰 기쁨이 있고 천사들이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고 천만 성도들이 화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느 때에 이러한 보배를 찾지 아니하리 오 마는 이 가을철은 일하는 때요 특별히 잃은 보배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주일학교도 진흥기간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오는 주일을 특별히 간증 주일로 지키는 목적도 여기에 있습니다. 잃은 보배를 찾기 위하여 이와 같은 주일로 특별히 지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잃은 보배가 없습니까? 여러분의 친척 가운데 잃은 보배가 없습니까? 여러분의 이웃 가운데 잃은 보배가 없습니까? 성신께서 여러분을 통해 역사 하셔서 이 기쁜 계절에 잃은 모든 보배를 찾아서 하나님의 곡간에 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잃은 보배를 찾읍시다. (一九六0년 九월 十一일)

Ⅳ-9 아버지께로 돌아오라 ―간증주일― (누가복음 十五장 十一-二十四절)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 十五·十八-二十)

오늘 아침 읽은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유명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하고, 또 어떤 분은 잃은 아들의 비유라고도 하고, 또 다른 분은 두 아들의 비유라고도 말씀합니다.
이 비유는 매우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심오한 종교적 진리를 간단한 이야기를 통해서 가르치는 것이 우리 주님의 교훈 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을 사랑하시는지 그 깊은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며 타락되는 그 모습, 어떻게 그와 같은 가운데서 돌이켜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그 모습,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을 기쁘게 영접해 주시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는 그 여실한 모습을 이 간단한 이야기 가운데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 간단한 비유를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이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난 동기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요즘말로 쉽게 말하면, 이 아들은 자유를 동경한 것 같습니다. 독립 해방을 원한 것 같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아 보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습니다. 자유를 동경하는 마음이 물론 그릇된 마음은 아닙니다. 누구나 자유와 독립과 해방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깊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서의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의로운 길을 떠나서, 하나님이 만드신 생의 법칙, 곧 인륜과 도덕의 법칙을 떠나 서의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와 같은 자유가 과연 있을 수 있는가? 공중에 나는 새가 공기와 공기 가운데서 운행되는 자연 법칙을 떠나서 자유가 있겠는가? 물 속에서 사는 물고기가 그 물과 물 속에서 운행되는 자연 법칙을 떠나서 자유가 있겠는가? 그것을 떠난다고 하면 그것은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자유는 사망을 의미할 것입니다.
제二공화국의 해방을 받았다고 하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하나님의 법에서도, 도덕의 법에서도, 국법에서도 자유를 얻은 줄 아는 모양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분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고 방종입니다. 자유는 풍부한 생명을 가져오나 방종은 사망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진정한 자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 도덕의 법, 국법을 떠나서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는 하나님의 경륜과 법 아래에서만 있는 것입니다. 국민의 자유도 국가의 법률을 지키는 안에서만 향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분간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청년이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서 자유를 행하여 본 결과는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여기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청년이 부모에게서 자기 것으로 오는 재산을 다 청구했습니다. 자유가 있으니까 그 재산을 다 아버지께서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재산을 다 받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자유가 있으니까 물론 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재산을 가지고 허랑 방탕하여 허비하였다고 그랬습니다. 물론 자유가 있으니까 허랑 방탕하게 쓸 수가 있습니다.
여기 재산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영적, 육 적 모든 은사 곧 모든 능력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육 적으로 거기 속한 모든 능력, 건강, 체력 같은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는 거기 속한 모든 능력, 지력, 사고력, 창조력, 감정, 의지입니다. 영적으로는 그의 성품과 거기 속한 모든 능력입니다. 이런 지적, 육 적 , 영적, 모든 은사에서 따라오는 물질이나 지식이나 지위나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산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재산을 가지고 멀리 가서 마음대로 사용하려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먼 나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도 바로 세계가 자유와 독재, 양대 진영으로 갈려 있지마는 영적 세계에도 나라는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선의 나라와 악의 나라입니다. 여기 먼 나라는 사탄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을 떠나면 자연히 사탄의 나라의 영역에서 살게 됩니다. 여기 멀다고 하는 것은 다만 하나님의 영역이 아니란 뜻입니다.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역을 떠날 때에는 그 때부터 벌써 사탄의 영역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 청년이 이와 같은 먼 나라 사탄의 나라로 갔습니다. 거기 가서 허랑 방탕하게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쉽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중심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재물을 사용했습니다. 욕심대로 자기 본능의 순종대로 이렇게 하니 많던 재산은 어느덧 다 없어졌습니다. 이렇게 살련 돈도 그렇거니와 무엇이나 오래 가지 못합니다. 건강도 그렇고, 지위도 그렇고, 권세도 그렇고, 직업도 그렇고, 사업도 그렇고, 오래 가지 못해서 망하는 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향락은 잠깐 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재산을 가지고 마음대로 허랑 방탕하게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뿐입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마지막에는 다 없어지고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그 나라 어떤 백성의 집에 가서 붙어살게 되었습니다. 그 나라 백성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탄의 나라의 백성이니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귀신밖에 무엇이 더 되겠습니까? 귀신같은 사탄의 부하의 집에 가서 거기서 붙어산다고 하는 것을 보니까 종노릇을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돼지 치는 업을 합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기탄 없이 돼지고기를 먹습니다. 또 돼지 치는 사업도 정당한 사업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옛날 유대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돼지고기는 절대로 먹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돼지를 친다고 하는 것은 거기서 더한 모욕은 없습니다. 사람은 돼지 치지 않는 줄 압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손 중 하나인 이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 가서 돼지 치는 사람의 종이 되어서 직접 돼지를 같이 치고 있습니다. 남까지 더럽게 만드는 죄의 장사꾼이 된 모양입니다. 죄는 혼자서는 못 짓습니다. 남까지 돼지우리에 몰아 넣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먹을 것이 아주 없어졌습니다. 그 나라에는 사람 먹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돼지 먹는 것만 있는데 여기 신 역대로는 쥐엄나무 열매라고 그랬고, 구역대로는 팥 껍질이라고 그랬습니다. 사람은 사실 못 먹을 것입니다. 돼지나 먹을 것인데 그것밖에는 없으니까 귀한 부자의 아들이 돼지나 먹는 그런 팥 껍질을 먹으면서 연명하게 되었습니다.
돼지 치면서 돼지가 먹는 것을 먹으면서 죄를 지으며 죄를 먹고 마신다고 하는 그 뜻입니다. 이렇게 먹을지라도 오히려 쥐엄나무 열매도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흉년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나라는 언제나 흉년 드는 나라입니다. 사탄의 나라에는 풍년이 없습니다. 사탄의 나라에 사는 사람은 언제든지 그 영혼이 굶주릴 것뿐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하나님을 떠나서 자유를 찾아온 이 청년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가? 자유를 찾아갔더니 결국은 죄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잘 살 것 같아서 떠나갔더니 결국은 돼지 먹는 팥 껍질밖에는 먹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동무가 많은 것 같더니 이제는 뿔뿔이 다 달아나고 자기 홀로 외로운 나라에 남았습니다. 동무가 있다고 하면 돼지뿐입니다. 큰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이런 먼 나라에 가기는 갔지마는 결국은 절망, 공포, 사망의 위협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는 모든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죄의 종이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매우 외롭습니다. 고독합니다. 살 때에도 외롭고 죽을 때에는 더욱 외로운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절망과 암흑과 고통과 사망에 빠지고 맙니다.
그런데 이렇게 참혹한 상태에 빠졌던 이 청년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습니까? 여기 보니 이 청년이 이렇게 참혹한 형편에 빠져서야 스스로 돌이켰다고 그랬습니다. 물론 이렇게 되기 전에 돌이키면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할 수 있으면 여러분, 이렇게 되기 전에 돌이키십시오. 그러나 이렇게까지 된 다음에라도 돌이키게 된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 돌이킨다는 원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자기 자신에 돌아왔다는 듯입니다. 지금까지는 딴 정신에 미쳐서 살았습니다. 우리 한국말대로 제 정신은 나갔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참혹한 형편이 되고 보니 제 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제 정신이 돌아온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남의 정신에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 정신에 돌아와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무엇이지요? 아버지의 집이올시다.『우리 아버지의 집은 품꾼 먹고 남는데…』
여러분, 하나님아버지를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아버지에게는 모든 것이 풍부합니다. 은혜가 풍부합니다. 사랑이 풍부합니다. 긍휼(矜恤)과 자비가 풍부합니다. 생명이 풍부합니다. 화평과 은혜가 풍부합니다. 풍부한 하나님의 집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니 헐벗었습니다.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종이 되었습니다. 고독합니다. 절망에 빠졌습니다. 암흑에 헤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이와 같은 형편이 됩니다. 세상의 모든 향락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즐겁다고 해도 일시적이요, 돼지 먹는 팥 껍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이제라도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 아버지 앞에 가서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러 달라고는 못하겠지마는 품꾼의 하나라고 불러 주지 않겠느냐?』그런 생각이 났습니다. 사실 이 생각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성신의 감화로 일어난 생각인 줄 압니다.『내가 잘못했다. 내가 이런 자리에서 떠나야 해.』그와 같은 생각은 성신의 감화올시다.
우리도 어떤 때에든지 무슨 일을 하다가 이와 같은 생각이 날 때가 있는데 이것은 성신의 감화이니까 성신의 감화를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대로 꼭 실행해요. 그래서 이 청년은 이와 같은 생각이 날 때에 二十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그 자리에서 곧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자세히 들으세요. 생각만 할 것도 아니고 후회만 할 것도 아니고 결심만 할 것도 아닙니다. 결심할뿐더러, 생각할뿐더러, 후회할뿐더러, 그 자리에서 곧 일어나서 돌아갔습니다. 동작입니다. 행동입니다. 일도양단(一刀兩斷)이란 말이 있지요? 단행입니다. 사실 탕자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면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가 그릇된 줄 알 때에 그 자리에서 곧 일어나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삼손의 이야기를 다 알지요? 삼손이 블레셋 땅에 가서 아름다운 여자 들리라의 무릎에 드러누워서 잠을 잡니다. 제 상상이지마는 한잠 자고 일어나선『이젠 일어나야 되겠군.』그 같이 생각났을 거예요.『아무래도 무릎이 따스한 걸, 조금 더 자야겠군.』또 잡니다. 그러다가는 또 깨어『아무래도 일어나야 되겠는데.』그런 생각났을 줄 알아요. 그래도 또 좀 잠이 들었습니다. 일어날까 말까, 날까 말까, 이렇게 자는 동안에 마지막에는 머리를 다 깎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힘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마지막에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죄 가운데 있는 것을 뻔히 압니다.』내가 안 돼. 내가 이 자리에서 일어나야 돼. 내가 일어나야겠어.』일어날까 하다가는 삼손처럼 다시 털썩 주저 않고 맙니다. 탕자는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탕자가 만일 그렇게 했다고 하면 구원은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그릇된 줄 알고 깨달을 때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돌아갔습니다. 행동, 실행입니다.
여러분, 롯이 소돔 성에서 떠날 때에 돌아다니면서 인사하고 떠났다는 말이 있습니까? 돌아다니며 인사했던들 아마 롯도 그 유황불에 같이 멸망 받았을 겁니다. 인사할 사이도 없습니다. 여기 탕자도 보니까 돼지 주인보고 인사하고 떠났다는 말은 전혀 없어요. 돼지 주인한데 인사할 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내가 오는 주일은 꼭 예배당에 가야 되겠는데, 예수를 꼭 믿어야 되겠는데, 오는 주일에 예배당 가기 전에 토요일 저녁쯤 우리 술친구들을 다 모아놓고 인사를 해야 되겠군.』술친구에게 인사할 필요 없습니다. 돼지 치는 사람들 다시 만나볼 필요 없습니다. 그냥 돌아올 것이지, 돼지우리 다시 봐서 무엇합니까? 냄새나 나지요. 죄는 더럽습니다. 죄에서 돌아올 때에는 단연 일어나서 아예 끊어버리고 그 자리에서 아버지 앞에 돌아 오야 됩니다. 이렇게 탕자는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면서 자기 집이 멀리 보일 때에 혹 조마조마한 마음이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조마조마한 마음이 나기 전에 벌써 멀리서 아버지가 미리 기다리고 계시다가 버선발로 뛰쳐나오면서『아, 네가 이제 오느냐.』고 하면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영국의 어떤 번역된 성경을 보면 입을 맞추어도 많이 맞추었다고 그랬습니다. 아마 여러 번 맞춘 모양입니다. 이것은 반가이 영접하는 뜻입니다.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는 뜻입니다. 사랑의 표현입니다.『네게 과거를 묻지 않노라. 과거의 네 죄를 다 용서한다.』우리가 아무리 과거에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 때에는 하나님께서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입은 옷은 돼지 치던 옷 그대로입니다. 그 더러운 냄새나는 누더기 그대로 입고 왔습니다. 종을 불러서 얼른 옷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과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진정으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고 그 다음에는 새 옷을 입힙니다. 새 마음을 주십니다. 새 성품을 주십니다. 새 행실을 주십니다. 새로운 생활을 주십니다. 어떤 분은 예배당에는 나오지마는 아버지께는 온전히 오지 못해서 아직도 돼지 치는 옷 그대로 입고 오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 안에서도 창피한 일, 냄새나는 일이 더러 생깁니다. 여러분 교회까지 온 바에는 아주 아버지 품속에 오면 좋지 않습니까? 왜 교회에 들아 왔다갔다하면서도 냄새 피웁니까? 온전히 하나님 앞으로 와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곧 반지를 가져 오라 해서 반지를 끼워주었습니다. 이 반지 위에는 흔히 동장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들로 회복해 준다는 표시입니다.『너는 품꾼으로 삼아 달라고 하지마는 그 무슨 말이냐? 너는 내 아들이야.』
보니까 맨발로 다 부르텄습니다. 좋은 신발을 가져다 신겨 주었습니다. 화평의 예비한 복음의 신을 신겨주었습니다. 이 앞으로는 인생 길을 평안하게 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와서 새로운 옷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인생의 험악한 길이라도 평안히 갈 수 있습니다. 그 신을 신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을 봉사하고 인간을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입니까? 이 아버지는 너무 기뻐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하고 온 이웃을 청해놓고 즐거운 잔치를 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후한 잔치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올 때 우리는 후한 잔치를 먹습니다. 이 청년은 후한 잔치를 먹습니다. 온 이웃이 기뻐합니다.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찬양하며 기뻐합니다. 모든 성도들도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는 할렐루야 찬송과 아멘 을 항상 부릅니다.
여러분, 오늘 뜻깊은 간증 주일에 우리 심령을 가만히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이 어떤 자리에 있는가? 내 영혼이 어떤 나라에 있는가?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까? 혹은 아직도 먼 나라에 있습니까? 일어나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께서 돌아오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천군 천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천천만(千千萬) 성도들이 여러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날에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십시다. (一九六0년 九월 十八일)

Ⅳ-10 오직 예수 (마태복음 十七장 一-八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 十七·八)
오늘 아침은 변화산상에서 된 기록을 읽었습니다. 이 기록을 읽을 때에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이 변화산상에서 된 일은 그리스도의 본체의 영광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본체의 영광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그 얼굴이 햇빛같이 빛났고 그의 입으셨던 옷도 역시 광채가 나게 된 것입니다.
또한 둘째로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서로 담화를 하셨는데 특별히 누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의 장차 죽으실 일에 대하여 말씀을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서 어떻게 모세가 하늘 나라에 살아 계시며 엘리야가 지금까지도 살아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을뿐더러 특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율법과 예선서의 완성을 의미하는 그 뜻을 여기에서 간취(看取)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모든 율법, 엘리야의 모든 예언, 그밖에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은 결국 인류의 구원을 위하는 것인데 이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이르러서 완성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와 같은 깊은 뜻을 물론 알지 못하고 그 세 분을 그냥 변화산상에서 모시고 있기를 원해서 이런 말씀을 한 것입니다.『주여 장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주님께서 계시게 하고, 하나는 모세가 계시게 하고, 하나는 엘리야가 계시게 하면 좋겠습니다.』이런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할 때에 돌연히 빛난 구름이 내려 와서 모든 사람을 가리며 그 빛난 구름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직접 들린 것입니다.『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들은 저희 말을 들으라.』그리스도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런 말이 들린 때에 제자들은 너무 두렵고 놀라서 땅에 엎드려져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예수 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실 때에 제자들이 일어나서 눈을 들고 보니 오직 예수 한 분밖에는 다른 이들은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는 모세와 엘리야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오직 예수만 바라보라고 하는 뜻인 줄 생각합니다.「오직 예수」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만 하나님의 참된 계시자입니다. 히브리서 一장 一절을 보면『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예수는 하나님의 최후의 말씀이올시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최후에 그 자신이 친히 하신 그 말씀이올시다. 자기를 예수를 통하여 친히 나타내셨습니다.
요한 복음 一장 一절에는 이렇게 기록된 것을 여러분께서 기억하실 줄 생각합니다.『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그리고 조금 내려가서 十四절에는『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예수 그리스도는 곧 이 말씀이 육신을 입은 분이올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나는 곧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으리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너희가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
오직 예수 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얼굴을 통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고, 예수 님의 음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예수 님의 성품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고, 예수 님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활을 우리가 친히 목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은 그 자체가 진리요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올시다. 몰론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들도 여러 모양으로 부분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다 밤하늘에 별과 같습니다. 아침의 햇빛과 같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후에는 밤의 별들은 나타나지는 아니합니다. 보이지 아니합니다. 오직 예수만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인간의 지혜를 구하려면 세상 사람 가운데 지혜가 많다고 하는 철학자들에게 가서 구하실 것입니다. 혹은 과학적 지식이나 기술을 배우려고 하면 과학자나 기술자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중심에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아시기를 원하십니까? 오직 예수 님께 나올 것입니다. 예수만이 하나님의 참된 완전한 계시자입니다.
둘째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대속(代贖)하신 우리의 구주는 오직 예수뿐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예수를 모든 사람들에게 소개하면서 외친 말씀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말씀은 장차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세상 사람들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지고 고난받으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저려 함이니라.』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써 자기의 목숨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스스로 증거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깊은 사실을 로마서에 이런 말로 우리에게 기록하여 주었습니다.『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대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 되었느니라.』그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 이는 물론 많습니다. 좋은 도덕적 교화를 우리에게 주는 이도 물론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나 지식이나 철학 사상을 소개하여 주는 이도 물론 많습니다. 아름다운 생활로써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는 이도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하십시다. 나를 위하여 대신 죽고 나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 주신 이는 오직 예수뿐입니다. 세상의 지식을 구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죄 사함을 받기를 원하고 내 영혼이 구원을 얻기를 원하면 오직 예수, 우리 주님 앞에 나오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신 구세주인 것입니다.
셋째로 생각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현재에도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현재에도 우리를 도와주시는 이는 오직 예수뿐입니다. 유교에서는 물론 지금까지도 자기의 교주가 되는 공자의 무덤을 자랑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회회교 사람들은 마호멧의 무덤을 물론 자랑합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도 석가의 무덤을 지금까지 자랑합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자랑할 무덤은 없습니다. 무덤이 있다고 하지마는 그 무덤은 빈 무덤 뿐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분부사시면서 계속해서 하신 말씀이『볼지어다 내가 이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이렇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三장 二十절에 보면『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고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마음속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계시겠다고 하는 말씀이올시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영적 체험을 갈라디아서 二장 二十절에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내 자신은 그리스도와 같이 못 박힌 까닭으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속에 살아 계시는 것을 간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체험을 빌빕보서 四장 十三절에는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할 것이 없다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사람의 체험을 이와 같이 솔직히 고백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에게만 사실인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도들의 생활이 그러했습니다. 세기를 통해서 참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셔서 그들과 같이 계시고 그들을 도와주신 것입니다. 마치 예수 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일찍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같이 걸어가시듯이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믿는 성도들과 동행하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약할 때에는 지금도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외로울 때에는 지금도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다. 우리가 병날 때에도 우리에게 권능을 베풀어주십니다. 우리가 시험 당할 때에는 우리고 하여금 바른 길을 찾게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슬픈 일을 당할 때에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십니다. 근심과 걱정에 싸일 때가 있지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곧 우리의 마음속에 기쁨 화평으로 대신하여 주는 것입니다. 이 험악한 인생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참된 친구가 되셔서 언제든지 동행하여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밖에는 다른 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친히 외쳤습니다.『무릇 목마른 자는 네게 와서 마시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목마르지 아니할 터이요 그 속에서 생수가 되어 영생토록 솟아나리라.』 이 메마른 광야 길을 걸어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계속해서 생명수를 공급하여 주시는 소망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말씀 더 드린다고 하면 최후의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인생의 길이 대체로 외롭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길은 더욱 외롭습니다. 여기에는 친구가 쓸데없습니다. 여기에는 부모가 쓸데없습니다. 이 때에는 세상에서 가지던 모든 소망은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도 오직 우리에게 최후의 소망을 주시는 분은 예수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으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예비하리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영접하여 주리라.』
제가 어떤 책을 보니 스위스에 있는 유럽의 제일 높다고 하는 알프스 산 어떤 높은 봉우리에 흰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십자가를 해 세웠다고 합니다. 그 대리석 십자가 위에는「오직 예수」란 글자를 새겼다고 합니다. 그 대리석 십자가를 어떻게 세우게 되었느냐? 일찍이 어떤 분이 자기의 가족을 데리고 스위스에 피서를 왔다고 합니다. 어떤 날 그 분이 자기 사랑하는 딸을 데리고 알프스 어떤 높은 봉우리에 등산을 하였습니다. 높은 산꼭대기를 조심조심해서 올라갔지마는 그만 실수해서 그 사랑하는 딸이 발이 미끄러져서 높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결국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분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한 여름 서늘한 스위스에서 평안히 지내려고 피서 왔다가 이와 같은 참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분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돈이 위로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 분은 지위도 상당한 분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위도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 때에 그이에게 참된 위로를 주신 분은 예수밖에 없는 것을 그 분이 절실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그 산봉우리 위에 큰 대리석으로 십자가를 세우고 구기가 새기기를「오직 예수」우리에게 최후의 소망과 위로를 주실 분은 오직 예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직 예수만 우리는 의지합니다. 돈을 의지하지 마십시다. 세력을 의지하지 마십시다. 친척도 의지하지 마십시다. 오직 예수만 믿고 의지합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봅시다. 베드로처럼 세상 물결을 바라보지 맙시다. 세상의 어떤 것도 바라보지 맙시다. 예수만 바라봅시다. 세상의 다른 것을 따라가지 맙시다. 오직 예수만 따라가십시다. 이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국가도 역시 그런 줄 압니다.
우리는 바로 어제 새 공화국의 수립을 기쁜 마음으로 경축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우리가 경축만 한다고 나라가 금방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흔히 보면 민심은 더욱 해이해지고 사회 질서는 더욱 문란해집니다. 국민의 대부분은 불안과 공포 가운데 싸여서 살고 있습니다. 도처에 분규가 있고, 도처에 사고가 생기고, 무슨 농성 투쟁이니, 데모, 심지어 기차까지 데모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무엇이 또 어느 날 일어나려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각계 각층에 혼란이 그칠 줄을 모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 혼란 가운데 공통되는 것이 한 가지는 있습니다. 그것은 저마다 이 새나라가 되었으니 자기의 권리를 찾자고 하는 사상입니다. 내 권리, 내 이익, 내 그룹을 위해서 투쟁을 합니다. 상이 군인은 상이 군인의 권익을 위해서 흔히 폭력 투쟁을 합니다. 정당은 내 정당, 내 정파를 위해서 흔히 모략 투쟁을 합니다. 국민 전체, 국가 전체의 복리를 위해서 투쟁하는 이는 매우 드뭅니다. 나만 생각합니다.
마음이 좀 변해야 되겠습니다.『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오, 섬기려 오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정신으로 변하여야 새 나라에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밀 알 한 알이 되어서 땅에 떨어지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될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에 오직 예수만이 우리 나라에도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一九六0년 十월 二일)

Ⅳ-11 혼잡한 시대와 성도의 생활 (에베소서 五장 一-二十一절)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五·十五-十七)

지금 우리는 혼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듣습니다. 어떤 분은 이 시대는 데모 만능 시대라 이렇게 말합니다. 시가지 행진은 말할 것도 없고 무슨 연좌 데모니, 농성 데모니, 단식 데모니 해서 이런 것들이 각계 각층에서 일어나면서 그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심지어 비가 안 와도 어떤 사람은 데모를 해야 할 가보다고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하극상의 시대라 이렇게 말합니다.『아래 있는 이들이 위에 있는 이들을 치는 시대라. 혹은 창으로 찌르는 시대라.』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면도 없지 않아 많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선생을 치고, 자녀들이 무모를 치고, 노동자들이 고용주를 치고, 국민들이 공무원을 치고, 아래 있는 사람들이 윗사람을 치는 면이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학생 공포 시대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전에는 민중들이 경관을 무서워하더니 지금은 경관보다 학생들을 더 무서워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전에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면 호랑이라 대답합니다. 지금은 학생이라 대답합니다. 그럴 것이 도처에서 학생들이 하는 일을 보면 전에 하지 않던 일을 여러 가지 합니다. 강제로 이사 진영을 개편하려고 아기도 하고, 어떤 때는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하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일을 지금 학생들이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자유 범람 시대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자유 홍수 시대, 무법 자유 시대입니다. 법 없는 자유시대,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유를 없이 하는 자유까지 씁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대단히 혼란해서 이성을 잃은 것 같습니다. 이런 면을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심지어 교회에서까지 각 방면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혼란한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성도의 생활이 어떠해야 되겠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마는 아직도 천당에서 사는 우리는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다른 사회 사람들과 같이 섞이어 삽니다. 이와 같이 혼란한 시대, 혼란한 사회에 있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의 생활이 어떠하여야 되겠느냐? 깊이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인 줄 압니다.
지금 제가 읽은 말씀을 한 번 더 읽을 때에 자세히 들으세요.『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세 가지를 우리에게 권면하는 줄 압니다. 첫째는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해서 지혜 있게 행하라. 둘째는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껴서 모든 일을 부지런히 하라. 셋째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범사에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서 주의 뜻대로 하라.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 아침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우리가 행하는 것을 조심하지 아니하리 오 마는 이와 같이 혼란한 시대에 걸어가면서 자세히 주의해서 지혜 없는 자 같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자세히 주의해서 모든 것을 잘 살펴서 지혜 있게 하라는 그 말입니다. 예수 님께서도 제자들을 내어 보내면서 너희들을 내어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내어 보내는 것과 같으니 순하기는 비둘기 같이 하되 지혜는 뱀과 같이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같은 권면이올시다. 자세히 주의해서 모든 것을 살펴서 지혜 있게 하여야 되겠습니다.
자세히 주의해서 지혜 있게 하는 사람은 우선 이와 같이 혼란한 시대에 함부로 부화뇌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남이 다 한다고 그냥 따라가면 안 될 것입니다. 옛 속담에 소경 말 원망소리 듣고 따라간다고 하는 말 있지요? 그렇게 하지 말란 말입니다. 남이 데모한다고 우리 믿는 사람들도 같이 데모에 참가하면 안 됩니다. 남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함부로
찍는다고 우리 믿는 사람도 함부로 찍어서는 안 됩니다. 남이 법을 어긴다고 우리 믿는 사람도 같이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죽은 물고기는 밀물 밀리는 대로 떠서 다니지마는 산 물고기는 밀물이 상관없습니다. 흐르는 물이 상관없습니다. 심지어 잉어 같은 것은 폭포수도 기어올라갑니다. 함부로 시대에 부화뇌동할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이런 때에 우리가 조심해서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 어떤 운동이 일어나든지 우리는 항상 경계할 것이 있습니다. 북한에 있는 공산당들은 호시탐탐해서 어떻든지 기회를 얻어서 혼란한 남한의 정정(政情)을 이용해서 자기에게 유익하게 만들고 어떻든지 우리 남한을 혼란 상태에 빠뜨리려고 애쓰는 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 무슨 운동이 일어나든지 자세히 살펴서 그곳에 오열의 운동이 없는가 우리는 경계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운동에 참가할 때에 이 운동이 과연 이적 행동, 마지막에는 적을 이롭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아니할까 자세히 살펴봐야 될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운동을 일으키고 어떠한 성명을 발표하고 어떠한 그룹을 만든다고 할지라도 사실 그 운동이 우리 대한민국 전체에 애국심을 중심으로 한 운동인지, 그런 것을 간판만 걸고 실상은 자기의 사리사욕이나 자기의 어떤 그룹을 위해서 일어나지 않는가 자세히 살펴보고, 우리 믿는 사람들의 태도를 정해야 되겠습니다. 주의해서 지혜 있게 해서 이런 때에 남에게 속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아무리 가 목적은 좋고 어떤 정신은 좋다고 하지마는 그 목적과 정신을 위하여 쓰는 방법이 옳은가 그른가, 어떤 때에는 그 정신은 좋고 목적은 좋지마는 쓰는 수단과 방법이 국민을 해치고 국가를 해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자세히 주의해서 행할 것은 행하고, 피할 것은 피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조급한 문제는 질서 회복이올시다. 치안 확보올시다. 각 방면에서 건설하는 이 건설 문제올시다. 이것을 방해하는 모든 행동과 모든 운동은 결국 이적 행동이 되고 대한민국의 반역자가 됩니다. 깊이 생각해서 우리가 사회 행동을 해야 될 것입니다.
일반 생활에서도 그렇지마는 신앙 생활에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교계도 혼란합니다. 부흥이라고 하는 이름 아래에서 항상 광신주의와 사교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 님의 재림이 어느 날 된다고 해서 무지한 교인들을 모아 놓았다가 그저 흩어지게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때를 타서 나만 잘 믿고 모든 사람을 다 멸시하는 그와 같은 태도를 가지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혼란한 때에 세상과 야합하고 세속주의로 기울어져서 부패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안아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자세히 주의해서 살펴서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지혜 있게 해야 되겠습니다. 언제든지 주님의 말씀을 잊지 맙시다. 나무는 열매를 보아서 압니다. 그 열매가 어떠한가? 그 행동이 어떠한가? 그 동기가 어디 있는가? 항상 이런 것을 살펴서 지혜 있게 해야 될 것이올시다.
둘째는 十六절에『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이렇게 권면합니다. 여기 세월이라고 하는 말은 시간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 시간이라고 하는 말은 시간의 계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기회라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 아끼라고 하는 말은 아낀다고 하는 뜻도 있지마는 속한다고 하는 혹은 구속한다고 하는 이런 의미도 내포했습니다.
그 다음에 때가 악하다고 하는 때는 이 시대를 가리켰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시대가 악하니 너희들은 이런 때에 기회를 잘 포착해서 이런 기회일수록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기회를 잘 이용해서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하라는 그 뜻입니다. 악한 때일수록 혼란한 때일수록 성도들의 할 일이 많습니다. 악한 시대, 혼란한 시대는 그런 시대를 위해서 꼭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낸 것입니다. 악한 시대일수록 빛을 발해야 될 시대입니다. 어두울 때에 빛이 필요합니다. 썩는 것이 많을 때에 소금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혼란하고 악한 세대일수록 믿는 사람들이 그 빛을 발할 시대올시다. 어두운 밤하늘에 무수한 별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세상 역사를 볼 때에도 과연 국가가 어지러울 때에 그러할 때일수록 참된 애국자들이 별과 같이 나타납니다. 교회도 어지럽고 여러 가지 부패한 일이 많을 때에 참된 성도, 참된 성자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참 선지자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두운 시대, 혼란한 시대는 성도가 그 빛을 발할 만한 그러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혼란한 때일수록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디 있든지 그 자리에서 빛을 발해야 되겠습니다.
가령 내가 믿는 학생이거나 어떤 학교에 다이면, 그 곳에서 자세히 살펴서 좋지 못한 행동이나 운동이 있으면, 그런 운동에 가담 안 할뿐더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학생들의 사상을 바로 인도해서 혼란한 가운데 빠지지 않고 오히려 그 학교가 바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학생 운동을 바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 믿는 학생들의 본이올시다.
가령 내가 어떤 군인이며 내가 어떤 부대에 배속되었다고 하면 그 부대에서 군인들이 하는 모든 행동들 가운데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내가 인연을 끊고 관계를 짓지 않는 것에서 그치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그 자리에 있어서 바로 사는 군인으로 지도하도록 빛을 발해야지요. 믿는 직공들은 공장에서 이런 빛을 발해야지요.
우리가 어디 있든지 이와 같은 혼란한 시대를 지나갈수록 우리가 나를 위해서, 우리의 민족을 위해서, 아니 내 신앙을 위해서 내 빛을 발하여 이 사회와 국가를 바로 인도하도록 힘써야 됩니다. 세월을 아껴서 일하라는 말은 그 말입니다. 기회를 포착해서 바른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와 같이 시대가 악하고 혼란할수록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기회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대가 혼란하고 악해질수록 많은 민심이 복음을 받을 만한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대중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됩니다.
또 시대가 악하다는 말은 시대가 점점 악해지는 것은 말세가 되는 증거인데 이 말은 주님의 재림이 가깝다는 의미도 포함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많이 남지 않은 이 기회에 복음을 전파해야 되겠습니다. 시대가 악하니 세월을 아껴서 빛을 발하고 선한 일을 하고 복음을 전파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셋째는『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을 이해하라.』여기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 하는 말은 무슨 뜻인고 하니 이성을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요즘 우리 한국 사회를 보면 소위 기성 층에서도 이성을 잃은 사람이 많습니다. 인텔리로써 하지 않을 일들을 많이 합니다. 이성을 잃지 말고 생각을 하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이해해서 꼭 주님의 뜻대로 하라는 말입니다.
여기 대해서 몰갠 목사는 주님의 뜻을 알아내는데 간단히 세 가지를 말해 주었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꼭 하나님의 뜻대로 한 분이 한 분 계십니다. 그분은 누구냐? 예수 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님을 꼭 표준해서 예수 님 하는 대로만 꼭 하면 자연히 주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무슨 문제 당할 때마다 예수 님께서 이 처지에 있으면 어떻게 했을까? 항상 그 질문을 하면서 우리가 행하면 실수가 적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물론 우리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뜻에 계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해서 성경에 가르치는 모든 진리와 원리대로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성신의 직접 지도입니다. 우리가 복잡한 일을 당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조용히 기도하면서 성령의 지도를 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 대해서 주의시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조용히 성신의 지도를 기다릴 때에는 성신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악한 마귀도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이런 말이 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지도를 받기 위해서 기도할 때에는 언제든지 그 들리는 음성이 예수 님의 정신에 맞는가, 성경의 교훈에 맞는가, 항상 그 표준에 의해서 시험해 봐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성령의 지도를 받는 생활을 하려면 언제든지 꼭 옳은 일을 당할 때에 성령의 지도를 받을 때에 그대로 순종해야 됩니다. 성령이 지도해 주어도 순종 안 하면 점점 성령의 음성이 가늘어집니다. 마지막에는 성령의 감화가 소멸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지도, 이 세 가지 표준을 항상 기억하고 의지해서 우리 믿는 사람은 어떤 경우를 당하든지 주의 뜻을 바로 이해해서 바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여기에 대해서 도움이 될 것은 성경을 보면 죄에 대한 정의가 여러 가지 말로 있는데 서너 가지로 생각할 수 있어요.
가령 여기 요한 一서 三장 四절에는 죄는 불법이라고 그랬는데 그 뜻은 죄는 법을 어긴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법을 어기는 것은 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 도덕의 법, 국가의 법, 법을 어기는 것은 몰론 피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 四장 十七절에 보면『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이와 같이 정의를 내렸습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 그것이 선인 줄 알면 꼭 그대로 행해야지, 하지 아니하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허나 한 가지 더 로마서 十四장 二十三절에 보면『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무엇이나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보통 이 해석은 모든 의심나는 행동은 죄라고 봅니다.『내가 이것을 해야 되겠느냐, 안 해야 되겠느냐? 내가 어디 가야 되겠느냐, 안 가야 되겠느냐?』이런 문제가 일어날 때에 여기 대해서 내게 의심이 있나 없나를 물어볼 수 있습니다. 의심이 없으면 그대로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의심 나는 행동은 하지 맙시다.
대개 여러 사람에게서 편지가 오는데 미국 유학을 가야 되겠습니까, 한 가야 되겠습니까? 내가 어떤 분하고 결혼을 해야 되겠습니까, 안 해야 되겠습니까? 주일날 무슨 일을 해야 되겠습니까, 안 해야 되겠습니까? 이런 것을 많이 물어 봅니다. 물어 보는 것도 좋지마는 그것보다도 이 몇 가지를 생각하면 내가 스스로 해결할 구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할 것이냐? 성경의 교훈에 합당하냐? 성령이 그렇게 지도하느냐? 또 그 다음에 이것이 법을 범하는 것인가, 아닌가? 이것이 또 옳은 것인가, 옳지 않은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의심이 있나, 없나? 이런 몇 가지로써 스스로 시험해 보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가 바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 혼란한 시대에 우리는 이 몇 가지를 기억하십시다.
첫째는 자세히 주의해서 지혜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지혜 있는 자가 되라.
둘째로는 이런 때일수록 세월을 아껴서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의 빛을 발해서 선행을 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되겠습니다.
셋째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항상 주의 뜻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해서 주의 뜻대로만 살아야 되겠습니다. (一九六0년 十월 十六일)

Ⅳ-12 깨어 기도하라 (마태복음 二十六장 三十六-四十六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二十六·四十一)

때는 깊은 밤, 고요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홀로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에게 주신 권면의 말씀이올시다. 그러므로 이는 보통의 권면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분석해 보면 세 가지 권면이 포함되었습니다. 첫째는 깨어 있으라. 둘째는 기도하라. 셋째는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라.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관성이 있습니다. 깨어 있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여야 시험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제자들은 이 권면을 깊이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깨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고로 그들은 기도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는 다 시험에 들게 된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에게 큰 전감(前鑑)이 되는 사실인 줄 생각합니다.
여러분, 당시의 환경을 잠깐만 사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님께서는 모든 세상 사람들의 죄악을 홀로 지시고 피땀을 흘리면서 주무시지 않으시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가장 가깝다고 하는 제자들은 이런 권면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잠을 잔 것입니다. 또한 그 때에 원수들은 깨어 있습니다. 그날 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대 제사장들, 서기관들, 그들 도당 가운데 한 사람도 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만은 그냥 잔 것입니다. 수제자라고 일컬음을 받는 베드로까지도 그냥 졸았습니다. 제가 중에 잠을 자지 아니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는 가룟 유다요, 원수의 지경에 가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형편을 돌이켜 생각할 때에 그 때에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민망하셨을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는 어떠합니까? 분명히 아는 것은 하나도 자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있는 주님의 제자라는 이름을 듣는 우리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깊이 생각할 만한 일이올시다.
또한 그날 밤에 주님의 원수들은 자지 않을뿐더러 졸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일하였습니다. 예수를 잡아죽일 모든 모략과 계획을 물샐 틈 없이 준비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를 통해서 예수 님 계신 곳을 확인하는 일, 관속과 무리들을 동원하는 일, 횃불과 무기를 정비하는 일, 예수를 잡은 후에 어떻게 심문할 조건들, 거짓 증인을 미리 맡기는 일, 빌라도 에게 넘겨주어야 사형할 수 있다고 하는 모든 일, 어떠한 증거를 가지고야 정죄(定罪)를 할 수 있다고 하는 모든 모략들을 짜느라고, 그들은 자지 않고 밤새도록 일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잤을 뿐더러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기도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그날 밤을 잠으로 지낸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생각할 때,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외로웠을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원수는 자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일하는데, 오늘날 한국 교계의 지도자들, 교회의 목사, 장로, 집사, 권찰(勸察), 신자들은 얼마나 부지런히 일합니까? 깊이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잠을 잔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기하던 위기는 오고야 말았습니다. 악한 무리들은 예수를 잡으려고 겟세마네 동산 앞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예수는 그들에게 붙잡혀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졸다가 일어난 제자들, 눈을 비비면서 따라오던 제자들은 이런 가운데 어찌할 줄 모르고 허둥지둥하다가 마지막에는 하나씩 둘씩 뿔뿔이 다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목자를 치매 양이 흩어졌다고 하는 말씀과 같이 제자들은 다 이산되어 버렸습니다.
수제자라는 이름을 듣던 베드로조차도 예수 님의 눈이 보이는 그 대 제사장의 아문 뜰 안에서 예수를 세 번씩 모른다고 부인하였고 마지막에는 저주까지 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도하라고 할 때나 깨어 있으라고 할 때에, 개어 있지 아니하고 기도하지 않은 제자들은 다 시험에 들고 말았습니다. 예수 님의 간절한 권면을 무시한 제자들은 결국 이 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늙고 간악한 증경(曾經) 대 제사장이었던 안나스 앞에 서서 심문을 받게 됩니다. 요한 복음 十八장 十九절에 보면 안나스가 제일 먼저 물은 말이 예수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심문하였습니다. 그 때에 예수 님께서 자기 교훈에 대해서는 곧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회당과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가르친 사실을 예수 님의 교훈을 알기 원하면 그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도 알 것이라고 담대히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예수 님께서 제자들에 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석 자들은 다음과 같이 추측합니다. 교훈에 대해서는 물론 대답할 수 있었지마는 그 당시 자기 제자들의 형편이 그러한데 제자들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가룟 유다 는 그 편에 가담했습니다. 뿔뿔이 다 헤어졌습니다. 심지어 수제자라 하는 베드로도 그 심문을 방금 하는 그 때에 마당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제자들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주석 자들은 추측합니다. 예수 님은 일생 동안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당한 일이 없건마는, 이날 밤에, 예수 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에는 아무 말도 못하시고 유구무언으로 그 자리에 서서 처음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였다고 말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시험에 든 제자들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만 옛날 이야기 뿐 아닙니다. 교회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에 대하여 어느 누구라도 감히 비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 부끄러운 일을 당한다고 하시면, 오직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제자들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어떠합니까? 오늘날 한국교계의 소위 지도자들 때문에, 한국신자들 때문에, 한국 교계에서 되는 일 때문에 주님의 얼굴이 붉어지는 일은 없습니까?
그런고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간곡히 권면하십니다.『깨어 있어 기도하여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믿는 사람들이 시험에 들면 우리 주님께 부끄러움이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간절히 권면하십니다.
왜 깨어 있으라고 권면하십니까? 지금도 말했듯이 우리는 자고 있지만 원수는 자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대적, 악한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삼킬 자를 찾을 다닙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등한하거나 방심할 때에 갑자기 우리에게 시험을 던집니다. 베드로도 그날 저녁에 갑자기 시험을 당했습니다. 베드로가 슬그머니 대 제사장 아문에 들어가서 어두컴컴한 밤에 불이나 쪼이면서 예수 님 동정이나 살피겠다는 생각이었지, 갑자기 누가 와서 그에게 갈릴리 사람 아니냐 고 물어보리라 기대했겠습니까? 갑자기 계집종이 나타나서 살펴보더니『너도 갈릴리 사람 아니냐?』그만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세 번씩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왜 깨어 있으라고 합니까? 악한 마귀는 언제든지 우리가 야할 때에 우리에게 시험을 겁니다. 예수 님께서 광양에서 四十일 동안 금식하실 때에 심히 주리셨습니다. 그 때에 나타나서『네가 하나님의 아들 이어든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주릴 때에 먹는 것으로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난할 때에 이 방면으로 들어오는 시험을 경계해야 됩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었다고 미련한 놈이라고 우리가 비웃습니다. 그러나 에서 에게 물어보면 그 사정이 다를 겁니다.
『내가 그 날 종일토록 산에 가서 사냥하여 피곤하고 배가 심히 고팠습니다. 들어와 보니까 동생 야곱이 팥죽을 아주 김이 무럭무럭 나게 잘 쑤어 놓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베고픈 김에 붉은 팥죽 한 그릇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깜찍한 야곱이 팥죽을 줄 테니까 장자의 명문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러는 바람에 지금 배가 고파 죽겠는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에 팥죽이나 갖다 달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되어서 시험에 빠졌습니다.』
아마 에서 에게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왜 깨어 있으라고 합니까? 악한 마귀는 우리의 약한 틈을 타서 우리가 약할 때에 우리에게 시험합니다
깨어 있으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정신을 차리라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 눈을 떴다고 정신차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모두 눈을 떴다고 정신차려서 제 말 다 듣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세계적으로 나타난 통계를 보면 흔히 공장에서 사고가 일어나는데 아침에 시작한 다음부터 두 시간 동안에 사고 나는 비례가 제일 높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 사람들이 깨어서 아침에 오기는 왔지마는 한 두 시간 동안은 채 깨지 못한다고 합니다.
정신차려서 내가 사는 시대와 내가 사는 환경을 자세히 살펴서, 어디 위험한 일이 있고 어떠한 원수가 나를 방해하려고 하는지 자세히 살피면서 조심해서 살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 남한에서 이만큼이라도 평화를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은 우리의 국군 장병들이 자지 않고 살피면서 三八선을 지키는 덕분입니다. 우리의 자유 진영이 이만큼이라도 현상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지마는 전 세계를 통한 레이더망을 통해서 적국이 어떠한 행동을 하는 것, 어디에 어떤 비행기가 떠간다고 하는 것을 일일이 살피는 까닭입니다. 살피며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사람은 다른 데만 살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도 살핍니다. 내 마음이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 나의 약점이 어디에 있는가? 나의 허한 데가 어디에 있는가? 어떤 사람은 정직도 하고 부지런도 하고 열심 도 있고 다 좋습니다. 가러나 전의 삼손처럼 특별히 정욕의 약점이 있어서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자다가 망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어떤 사람은 그런데는 전혀 죄에 빠지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방면에 약점이 있습니다. 혹은 아간 처럼 물질의 약점이 있습니다. 돈 냄새 나면 그만 끌려 들어가서 시험에 빠지고 맙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요나 처럼 자기의 편견과 고집을 가지고 이대로만 나가려고 애쓰다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이러다가 큰 풍랑을 만나서 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큰 곤란을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약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 보기에는 저 사람이야 무슨 시험이 있을까 하지마는 자세히 살펴보면 약점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그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내 약점을 미리 알고 그와 같은 방면에 시험을 받지 아니하도록 미리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그날 저녁에 제자들이 깨어만 있었다고 하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졸은 까닭으로 기도를 못했습니다. 기도는 문자 그대로 우리 성도의 호흡이올시다. 숨결이올시다. 숨쉬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올시다.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기도 생활이 끊어지면 벌써 그 영혼은 죽은 영혼이올시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야 포도나무로부터 오는 생명의 진액(津液)을 받아서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되고 우리들과 연결이 되어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수를 내가 받고 생명 양식을 내가 받아서 우리의 영혼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성신의 지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당할 때 어느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인가에 대해 작정하기 어려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우리가 고요히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지도를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만 내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욕과 악한 마귀를 이기고,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은 결국은 내가 스스로 깨어 있다고 하지마는 조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우리가 사실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양해하고 삽니까? 우리의 원수가 얼마나 많으며, 우리의 원수가 얼마나 자지 않고 일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삽니까? 우리가 사실 이 세계 정세를 그대로 목도하고 삽니까? 물론 우리가 신문지를 통해서 압니다. 대체로 압니다.
우리가 신문지를 볼 때에 주의할 일이 몇 가지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세계 평화가 있다고 하지마는 사실 세계 평화는 아직 없습니다. 우리 한국은 휴전뿐입니다. 온 세계가 냉전은 그대로 계속됩니다. 그런데 금년에 들어서 냉전의 형편이 어떻게 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며 신물을 보십니까? 중앙 아메리카에 작은 나라 하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작지마는 위치로 보아서 대단히 중요한 자리에 있습니다. 그 나라는 금년 중에 지금 현상으로 보아서는 우리 자유 진영에서 아주 떠났습니다. 공산 진영이 아주 되고만 모양입니다. 쿠바라고 하는 나라가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동남아에서도 이상이 생깁니다. 동남아 반도에 아주 중요한 지위에 있는 라오스라고 하는 나라는 얼마 전에 군대 가운데 젊은 장교 몇 사람이 붉은 사상을 가지고 혁명을 일으킨 이후에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지금 중립 정부가 섰다고 하지마는 이 앞으로 상태가 어떻게 될는지 우리가 크게 염려되는 바입니다.
지금 신문지상을 통해서 아프리카 콩고가 얼마나 혼란하여지고, 그 일 때문에 유엔이 몇 번 모이고, 그 일 때문에 세계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배후에 적색 마수가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콩고뿐인 줄 압니까? 온 아프리카 전역을 통해서 이와 같은 마수가 움직이고 있어서 이 앞으로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들의 동향을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아니하면 아니 될 줄 압니다.
우리 한국과 가장 인접한 관계가 있는 일본은 어떻습니까? 지난여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에 와서는 기쁘게 환영을 받았는데 왜 일본에는 오지 못했습니까? 그렇게 안 될 줄 믿지마는 만일 일본이 잘못된 길로 오도가 되어서 가령 중립 노선을 걷는다고 하면 그 영향이 우리 남한에 어떻게 되겠는가? 만일 그렇게 된 단고 하면 미국의 군사 기지를 허락하지 않게 될 터이니 남한 방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겠느냐? 일본의 동향이 어떻게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 남한과 절대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흐루시초프는 자기 자신이 유엔 총회에 나타나서 그 오만한 태도와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다가 결국은 망신만 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돌아간 후에 어떤 폭언을 한 것은 여러분이 기억하실 줄 압니다. 유엔이 중공을 승인하지 않으며 가입시키지 아니하니 이제 극동의 위기가 조성될 것이라 오해하지 맙시다. 물론 자유와 정의가 최후의 승리를 얻습니다. 천리요, 그건 사실이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자유가 이깁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제二차 대전의 경험을 우리는 잊지 아니합니다. 六·二五때도 그 사람들이 서울에 먼저 들어왔습니다. 최후의 승리는 의심이 없다고 하지마는 만일 이 앞으로 세계 위기가 반드시 오고 그렇게 될 때에 이 악한 세력이 일시라도 세계의 많은 부분을 점령한다고 하면, 그 때에 자유 국민과 우리 기독교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이런 모든 정세를 실지로 깨닫고 국가나 교회를 위해서 일한다고 하는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됩니다.
이번 목사 수양회 할 때에 피얼스 박사가 오셔서, 보통 신문에 나타나지 아니하는 사실, 특별히 쿠바에서 된 일을 우리에게 말해 준 적이 있습니다. 서인도 제도에 중국 사람이 상당히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쿠바에도 중국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과히 많지 않았는데 특히 一九四八년 이후로 중공군이 중국 전토(全土)를 점령하면서부터 중국 본토의 피난민들이 쿠바에 와서 사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는 믿는 사람의 수가 많다고 합니다. 자연히 그럴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쿠바가 중공을 승인합니다. 특별히 중공에서 사람을 데려다가 쿠바를 전폭적으로 적화 계획을 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와서는 미리 다 조사해서 누가 카스트로 정부를 지지하며 반대하는지 조사하는데, 제일 먼저 중국 사람부터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국 사람 가운데 이 적색 정부를 지지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모두 색출해서 중국 본토로 보내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중국 본토에서 피난해 갔던 사람들이, 특별히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쿠바의 신자들이 밤낮 자지 않고,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대는 언제, 어느 곳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직면하고 이것을 분명히 깨닫고, 깨어서 여기에 대비하면서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깬 사람은 잠꼬대하는 법이 없습니다. 꿈속에서 잠깐 있는 일, 적은 일 때문에 싸움하지 않습니다. 큰 원수가 있는데 작은 원수를 맺지 않습니다. 깬 사람은 기도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내 가정을 위해서, 내 영혼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기도합니까? 혼자만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모여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구역에는 구역끼리 모여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가정에서는 가족끼리 모여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제일 기도하기 좋은 시간은 새벽입니다. 새벽 기도회에 여러분 가운데 몇 분이나 나오십니까? 새벽 기도회에 참여 못하는 것은 늦잠 때문에 못합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깨어서 기도합시다.
깨어 있는 사람은 자기의 책임을 합니다. 자기의 책임을 우선 감당합니다. 말일 우리가 다 깨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남한에 복음을 전파하는 문을 크게 열어 놓았을 때에, 무엇보다도 이 기회를 이용해서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을 전파합시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때를 당해서 자기 말고 깨라고 간절히 권면하고 격려합니다. 여러분 다 깨어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집에 귀한 아들이 하나 있는데 다른 것은 다 좋아요. 그런데 이 사람의 나쁜 버릇은 늦잠 자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일어나라 해도, 안 일어나고 늦잠을 잡니다. 그래서 한 번은 너무 답답해서 그 이웃에 가서, 좀 불량한 사람이 그 동리에 있는데 그 사람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그거 제가 내일 아침에 깨워 드리지요.』『그렇게 하겠나』『그렇게 하겠습니다.』『그럼, 그렇게 해보게.』
그 이튿날 아침에도 해가 중 낮이 되었는데 안 일어납니다. 그 불량한 사람이 왔습니다.『일어났습니까?』『아직 안 일어났어.』그거 내 깨우리다. 물통 하나 있습니까? 물통을 가지고 우물에 나가더니 찬물을 가득 받아 가지고 들어 와서 문을 활짝 열더니 다짜고짜로 찬물을 얼굴에 쫙 끼얹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곤하게 잠자던 사람이 후닥닥 일어나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여러 번 권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파수꾼을 통해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도 격려하고 안 믿는 사람에게도 경고하며, 여러 번 경고합니다. 깨어서 기도하면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아니하면 저는 무서워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통을 들고 와서 전부 물을 끼얹을지 누가 압니까? 그런데 그 물통은 공산당일지 어떻게 압니까?『개어 있어 기도하라.』
(一九六0년 十월 二十三일)

Ⅳ-13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종교개혁 주일― (로마서 一장 八-十七절)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二·四)

一五一七년 十월 三十一일, 마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캐슬 예배당 정문에 九十五개조의 개혁 문을 붙인 이후로 十월 마지막 주일을 우리 신교에서는 종교 개혁 주일로 지키어옵니다.
十六세기의 종교 개혁은 당시 유럽은 물론 세계적으로 오늘날까지, 다만 신앙생활 뿐 아니고 정치, 경제, 문화, 각 방면에 큰 변혁을 일으키게 만든 것입니다. 이 큰 종교 개혁 운동의 표어는 우리가 지금 읽는 一장 十七절의 말씀이올시다.『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늘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당해서 우리 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여기에 대하여 알만한 몇 가지를 특별히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대로 생각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제一세기에 주님께서 오시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신 후에 온 사도들과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당시 로마 제국에 활포(滑布)되게 된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의 핍박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로마 정권의 핍박이 가혹했지마는, 당시의 믿는 사람들은 담대히 사방에서 복음을 전파해서 주후 三一三년에는 기독교도 온전히 신앙의 자유를 로마 제국에서 얻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몇 해가 되지 아니해서 기독교는 당시 그리스도를 믿는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서 국교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 때부터 전 로마 제국이 신봉하는 유일(唯一)의 종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불행히 로마 제국이 분열되어서, 로마 시를 중심으로 하는 서 로마 제국이 이루어졌고, 콘스탄틴노불을 중심으로 하는 동 로마 제국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정치상 발전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아서, 점점 서 로마 제국의 판도 안에 있는 교회들은 로마의 주교가 다스리게 되었고, 동 로마 제국의 판도 안에 있는 교회들은 점점 콘스탄틴노불에 있는 대주교가 통치하게끔 된 것입니다.
그 후 몇 세기를 내려오면서 그 두 교회 사이에 큰 교리 상 차이는 없지마는 대체로는 교권의 충돌로 말미암아서 동편에 있는 교회와 서편에 있는 교회가 점점 멀어가다가 마지막에 一0五四년에 불행하게도 동 교회와 서 교회가 완전히 분열된 것입니다. 그래서 十一세기부터, 지금으로 말하면 동편 유럽과 중동 지대에 있는 교회를 정통 교회 혹은 헬라 정통 교회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로마 시를 중심으로 하는 다시 말하면 로마 교황이 다스리는 서 로마 제국판도 안에 있는 교회를 로마 카톨릭 교회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본래 카톨릭(Catholic)이라고 하는 말은 라틴말로「일반적」이라고 하는 뜻입니다.「세계적」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따금 쓰는 에큐메니칼이라고 하는 말과 뜻이 대동소이합니다. 그래서 사실 十一세기까지 내려오는 동안은 부분적으로 인도의 말토마 교회라든지, 애굽의 콥틱 교회든지, 혹은 수리아 교회가 분열되었지마는 기독교 전체는 대체로 이 카톨릭 교회라고 하는 이름아래에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十一세기에 동 서 교회가 분열된 까닭으로 그 다음부터는 서편에 있는 교회만을 로마 카톨릭 교회라고 하는 이름으로 역사상에 불리게끔 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유럽은 대체로 이 서 교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는데, 여러 암흑 세기를 지나오면서 불행히 이 서 교회가 많이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신덕(信德)이 없는 사람들이 교황이 되고, 혹은 주교가 되고, 혹은 신부가 되며, 심지어 교직을 매매하게끔 되었고, 여러 가지로 부패해 내려오다가 十六세게 초에 와서는 심지어 사람이 죄 사함을 받는데 속죄 표를 사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이론이 성립되게 되었고 그와 같은 일을 교황청에서 감행하게 즘 된 것입니다.
본래 마틴 루터는 독일 색손이라고 하는 지방에서 광부의 아들로서 가난하게 났는데, 그러나 그 때에 신앙하는 법대로 경건한 가정에서 났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아주 엄격한 신앙 지도를 받았고, 소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서 졸업한 후에는, 그 당시에 흔히 하던 대로 자기의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칠 뜻으로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수도사가 된 얼마 후에, 신부로서 안수를 받으면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가 맡은 과목이 시편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였습니다. 이와 같은 성경 과목을 가르치면서 연구하는 동안에 점점 깨닫게 된 것은 당시 교회의 교훈과 행사가 성경의 교훈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끔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 신부는 마음가운데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 마침 로마 교황이 성 베드로(St, Peter)라는 큰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전 유럽으로 모자라는 돈을 모금하는데 속죄 표를 널리 팔면서 독일 근방에까지 와서 속죄 표를 선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이 청년 루터는 더 침묵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九十五개조의 그릇된 점을 지적하면서 속죄 표 파는 것을 반대했고, 그 당시의 소위 참 회개라고 하는 모든 것에 대한 반대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오직 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으로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죄 사함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인데 속죄 표를 사서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겠느냐 고 반대를 하게끔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처음에 비텐베르크 작은 도회에서 시작이 되었지마는 이 소식이 유럽에 퍼지게 되었고 종교 개혁의 불길은 요원의 불과 같이 온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교황은 자기의 정치적 세력을 이용해서 물론 무력으로 탄압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신교도들도 부득이 핍박을 받다 못해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소위 종교전이 十六시기와 十七세기에 많아졌습니다. 스페인 같은 데서는 종교 재판소에서 신교 사상을 가진 사람을 전부 일일이 심사해서 학살한 수가 얼마나 많은지 부지기수입니다.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도 一五七二년 八월 二十三일, 성 바돌로매 제일 같은 때에는 갑자기 구교도들이 일어나서 신교도들을 七천 명에서 一만에 달하는 생명을 파리에가 학살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三十년 전쟁이 일어나서 오랫동안 끌다가 마지막에 一六四八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에 의해서야 비로소 유럽에서 신교도들이 양심대로 주를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왜 제가 이 말을 여러분에게 그리는고 하니 양심대로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얼마나 고가의 희생이 지불되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신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는 것을 감사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종교 개혁이 있은 후에 천주교 안에서도 자체를 개혁하자는 운동이 일어나서 여러 가지로 부패한 점을 많이 고쳤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지금까지도 구교와 신교 사이에는 그 교훈이나 그 신앙이나 그 예배 상 여러 가지 방면에 다른 점이 많습니다. 우리 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몇 가지를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첫째로 우리 신앙의 제일 중요한 것은 신앙의 표준이올시다. 이 신앙의 표준을 어디에 두느냐? 우리 신교들은 신구약 성경에 둡니다. 신구약 성경은 우리 신앙의 정확 무오 한 법칙으로 우리 신교도들은 다 믿습니다. 그러나 구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구교에서는 신앙과 행위의 표준을 성경과 교회의 유전, 전통, 그것에 둡니다. 그러니까 성경 이외에 다른 것이 많습니다.
우리 신교에서는 누구든지 성신의 감화 가운데라면 양심적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됩니다. 구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권리는 교회에만 있는데 그것은 교황에게 최종적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교에서는 성경 무오 설을 믿지마는 구교에서는 교황 무오 설을 믿습니다. 교황이 신앙이나 도덕에 대하여 무슨 작정을 할 때에는 실수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신조입니다. 결국은 교황의 생각이 그들의 신앙과 행위의 대부분 표준이 됩니다.
또 둘째는 구원의 표준을 어디다 두느냐? 우리 신교들은 성경에 가르친 그대로『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그 신과 하나님의 은혜에 둡니다. 구교에서는 신앙도 인정합니다. 허나 거기에 선한 행위도 하나 더 겸해야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른 듣기에는 좋고 타당한 말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왜 선한 행위를 해야 되는고 하니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선한 행위를 해야 됩니다. 우리 신교에서는 믿는 사람이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은 믿음의 한 열매로 압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자연히 열매로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을 쌓기 위해서 선행을 해야 된다고 이렇게 가르칩니다. 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저 혼자 믿으면 안됩니다. 꼭 천주교회와 교황에게 순복(順服)하면서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셋째로 중보(中保) 문제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 신교에서는 성경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인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 구교에서는 물론 그리스도도 인정하지마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여러 가지 중보가 많습니다. 가령 마리아, 그들은 성경이 없는 말을 많이 믿습니다. 마리아는 원죄가 없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승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보다는 마리아에게 먼저 기도합니다. 마리아 뿐 아닙니다. 베드로, 여러 사도, 여러 성자들까지 다 성상을 해 놓고 그들한테도 기도합니다.
또 그뿐 아닙니다. 산 사람 가운데도 중보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우리 신교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직접 기도하고 하나님께 은혜 받고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부를 통해서입니다. 결국은 교황을 통해서야 복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정치는 어떠해요? 우리 신교에서는 여기 성경에 있는 대로 합니다. 집사를 선정하고 장로를 선정하고 당회(堂會)를 조직하고 이렇게 해서 교회를 다스립니다. 우리 신교 가운데 정치가 좀 다른 교회도 있지마는 과히 틀리지 않고 대체로 그렇습니다. 구교에 가면 절대로 다릅니다. 구 교회에서는 한 사람 중심인 독재 정치입니다. 교황은 베드로 계승자라고 주장합니다. 역사적으로 증명할 것은 없지마는 좌우간 그렇게 믿습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사도 계승자 교황이 대주교를 임명하고, 대주교가 주교를 임명하고, 주교가 그 아래 신부를 임명해서 온 천주교를 다스립니다. 평신도에게는 발언권 하나도 없는 일인 독재 정치입니다. 천주교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심지어 책 한 권도 마음대로 못 봅니다. 교황청에서 만든 금서목록이 있어서 거기에 금하는 책을 보다가는 출교(黜敎) 당합니다. 여러 가지로 제재가 있습니다.
또 보세요, 성경은 어떠한가? 우리 성경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구약 三十九권 신약 二十七권, 꼭 六十六권입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거기에 좀 더 가져다 붙였습니다. 구약 三十九권에다가, 우리 신교의 학자들이 혹 옛날 사정을 연구하기 위해서 참고서로 쓰는 구교 외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슨 바룩이니, 토비야니, 마카비니, 이런 외경들이 여섯 권이 있는데 이것을 더 붙였습니다. 그래서 카톨릭 성경은 六十六권이 아니고 七十二권입니다.
열 가지 계명은 어떤지 아십니까? 그들의 계명도 열 가지는 열 가지입니다. 그러나 읽어 보면 우리가 읽는 열 계명과 다릅니다. 첫째 계명은 같지마는 둘째 계명은 없습니다. 그들의 둘째 계명은 무엇인고 하니『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지 말라.』는 셋째 계명이 이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마지막의 열째 계명은 둘로 나누었습니다. 아홉째 계명을『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이렇게 말들었고, 열째 계명을『네 이웃의 집이나 물건을 탐내지 말라.』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둘째 계명을 빼버렸습니다. 여러분, 둘째 계명이 무엇인지 압니까?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고 하는 계명입니다. 그 계명을 묵살한 것은 의미가 심장 합니다.
성례를 보세요. 우리 신교에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지킵니다. 세례 받고, 성찬식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구교에서는 다섯 개를 더 붙였습니다. 견신례라고, 세례 받은 다음에도 주교가 와서 기름을 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참회례(懺悔禮)라고 죄 지은 다음에 신부한테 와서 자복하고 죄 사람을 받는 것입니다. 말유례(末油禮), 혹은 종유례(終油禮)라고, 사람이 죽어가게 되면 특별히 와서 기름을 부어 주면서 기도하는 기름 붓는 예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혼례식, 임직식, 이것 두 가지도 겸해서 구교에서는 성례가 일곱 가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많아도 좋습니다. 하지마는 성경에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것을 성례라고 안 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 신교대로 두 가지만 가르친 것뿐입니다.
예배는 어떠하냐? 우리 예배는 사도들이 보던 대로 그저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읽습니다. 지금도 예배 보지 않습니까? 구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구교는 예배가 아니고 사실 제사를 늘 드리는데 미사 제라고 합니다. 이 미사 제란 구교에서는 성찬 예식 때에 쓰는 떡과 포도즙을 신부가 한번 종을 치며 기도한 다음에는 그것이 사실상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피로 변한다고 믿습니다. 화체설(化體說)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이것이 사실 예수 님의 몸이 되면 예수 님의 몸을 다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것이 미사 제입니다. 그 때 예배 보는 사람의 죄를 다 용서해 주기 위해서 신부가 기도해서 만든 예수 님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방금 드리는 것입니다. 옛날 제사장들이 양을 드리듯이 하는 것이 미사 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성경의 속죄의 원리를 전복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산상에서 십자가에 그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한번에 우리의 죄를 대속 하였다고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이것은 잊어버리고 주일날 모일 적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예수 님 제사를 다시 자꾸 드립니다. 성경에 근거가 전혀 없는 사람의 상상에서 나오는 행동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 밖에도 그들의 예배를 가보면 여러 가지로 의식적 예배가 있습니다. 바로 예배당에 들어오면 성수를 찌어서 십자가를 드립니다. 또 촛불을 쓰느니 혹은 성상 앞에서 하는 여러 가지 식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아무렇게 해도 좋지마는 분명히 알 것은 천당이 있다고 그랬고 분명히 지옥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우리 신교에서는 단순히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구 교에서는 한 가지 더 첨가합니다. 천당과 지옥 사이에 연옥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좀 잘 믿는 사람은 곧 천당에 가지만 잘못 믿는 사람 가운데 지옥에 채 안갈 사람은 연옥에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연옥에 간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옛날에는 속죄표(贖罪票)를 사라고 굉장히 광고를 했습니다. 성경에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또 사죄의 관념을 보세요. 우리 신교에서는 단순히 성경 그대로 누가 죄를 지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죄를 자복하면,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공로로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 마음에 평화를 주십니다. 천주교에서는 다릅니다. 하나님께 직접 안 가고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 압니까? 신부에게 가서 죄를 자복해야 됩니다. 다 자복한 다음에 신부가 좀 중한 죄는 좀 중한 일을 시킵니다. 경한 죄는 조금 경한 책임을 줍니다. 그 책임을 다 했을 경우에는 신부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신도의 죄를 사해준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여기 잘 믿는 구교도들은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자복을 합니다. 매일 가를 것이 좋고 옳은 것입니다. 잘못 믿는 사람은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자복을 하는 것이 천주교의 법이라고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성경에 없는 법입니다.
또 보세요. 우리 신교의 교회는 단순히 종교 단체입니다. 그러나 천주 교회가 완전히 종교 단체이냐? 그것은 의문입니다. 천주 교회는 정치 단체로 변합니다. 로마에 가 보면 로마 성 안에 바티칸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아무나 침범 못합니다. 교황이 그 나라 왕입니다. 전부를 다스립니다. 그것이 확대되어서 다른 데 나오면 교회가 됩니다. 몸은 하나인데 머리를 둘입니다. 교황도 되고 왕도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알 것은 천주교가 어디 가던지 언제나 정치적 관심이 많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나라로 행세할 때에는 다른 나라와 외교 사절도 교환합니다. 다른 나라와 조약도 맺습니다. 우리 신교야 다른 나라와 조약 맺는 것이 있습니까? 그러기에 여러분이 알 것은 이 천주교회라는 단체는 언제나 신령한 단체만은 아닙니다. 일종의 정치적 단체입니다. 구교를 믿을 때 한 가지 알아야 될 것은 단순히 교회라는 단체에 가입하는 줄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일종의 정치적 단체에 가입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거 보세요. 신앙의 자유를 어떻게 보느냐? 몰론 二十세기에서 구교가 신교를 무력으로 탄압하려는 생각은 안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래도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야 되겠는데 현재 二十세기에서도 구교가 절대 다수인 나라에서는 신교가 핍박을 받는 교회가 많습니다. 가령 스페인에서도 현재 받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갔던 남아메리카 가운데 특별히 콜롬비아에 같은 나라는 특별히 그렇습니다. 그곳은 천주교가 절대 다수이니까 위에 대통령으로부터 순경에 이르기까지 천주교가 정권을 다 잡았습니다. 핍박하려면 얼마든지 핍박합니다. 콜롬비아에 가서 제가 그 소식을 직접 들어보니 과거 二十년 동안에 이와 같은 천주교 나라에서 신앙 때문에 순교를 당한 사람이 一一八사람이라고 합니다. 예배당 六十六곳이 파괴당했다고 합니다. 이 구교 압박으로 학교 폐쇄 당한 곳이 二백 학교나 된다고 합니다.
먼저 번 피얼스 박사도 수양회 때 와서 말했지마는 그 자리에서 직접 앉아서 다 적어 가지고 왔습니다. 목사 수양회 때 한 三백 명 모였는데 그 가운데서 구교도 핍박으로 인하여 감옥에 갔던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니까 六十二사람이나 되었습니다. 자기 예배당 파괴당한 교회가 몇 사람되는지 손들어 보라고 하니까 二十八사람이 들었습니다. 직접 총알에 맞고 매맞은 사람이 몇 사람이냐고 하니까 二十六사람이 손들었습니다. 자기 교인 가운데 순교 당한 그런 교회 목사가 몇 사람이냐고 물어 보니까 二十四사람이 손들었습니다. 이것은 二十세기 현재의 사실입니다. 우리 신교가 이런 것을 알기는 알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과거 四백 년 동안에 어떤 나라는 신교로 내려 왔고 어떤 나라는 대체로 구교로 내려온 까닭으로, 신교가 일반 국가에 주는 문화와 영향과 구교가 일반 국가에 주는 영향을 역사적으로 연구해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북 아메리카에 있는 미국과 캐나다는 대체로 신교들입니다. 남아메리카는 대체로 구교 나라입니다. 남 북 아메리카의 문화의 수준을 비교해 보세요. 유럽을 보면 저 북구와 영국은 다 신교입니다. 이 아래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거의 다 구교입니다. 그 두 나라들은 문화가 어떠한지 여러분께서 연구해 보면 분명히 신교와 구교가 일반 국가와 문화에 주는 영향이 어떤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될 것은 자유를 존 귀히 여기는 이 민주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정치는 신교를 중심한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늘날까지 가만 볼지라도 이 민주주의 제도가 잘 운행되는 나라는 신교가 절대 다수인 나라에 이 제도가 잘 운영됩니다.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에도 민주주의 제도는 가졌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제든지 독재자가 나타나서 항상 어지럽게 됩니다. 구교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볼 때에 우리 한국에 있어서 신교도의 사명이 얼마나 중대하다고 하는 것을 꼭 깨달아 알아야 되겠습니다. 과연 우리 한국이 이 앞으로 자유가 있는 건전한 민주주의로 발전하려고 하면 어떠한 종교가 우리 민족의 머리를 지배해야 되겠는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북에서 오신 분이 많습니다. 우리가 아는 우리 나라의 제일 긴 강을 압록강이라고 합니다. 압록강은 백두산 상봉 천지라고 하는 못에서 발원됩니다. 그 압록강 물이 천지에서 처음 내려 올 때는 물이 맑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신의주에 오래 살았는데 신의주에서 그 강을 보면 더럽기가 한이 없습니다.
왜 종교 개혁이 일어났어요? 천지와 같이 원지에 돌아가서 신약의 본원지에 돌아가서 맑은 순수한 복음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종교 개혁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귀한 유전을 감사히 생각해서 이 유전을 바로 지키도록 우리가 힘써야 되겠습니다.
(一九六0년 十월 三十일)

Ⅳ-14 은혜를 잊지 말라 (누가복음 十七장 十一-二十一절)
『예수 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잇느냐?』(눅 十七·十七)

오늘 아침 읽은 이 말씀은 우리가 평소에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어떠한 작은 촌에 들르시게 되었습니다. 그 촌 어구에서 문둥병 자 열 명을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는 유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마는 사마리아 사람도 한 사람 섞여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유대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는 감정이 좋지 않아서 보통사람들은 그렇게 접촉하기를 꺼려합니다. 그렇지마는 이 문둥이들은 다 같은 불행한 병을 만나서 이러한 불행한 가운데 서로 동정하면서 한 집단이 되어서 쫓겨다니며 사는 신세에 유대 사람 사마리아 사람 할 것 없이 같이 살았던 모양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 님께서 지나가심을 멀리서 보고 소리를 높여서 외칩니다.『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필연 이 사람들은 예수 님에게 대해 이미 들은 소식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면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는 줄 확실히 믿은 모양입니다. 예수 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다만 하시는 말씀이『가서 제사장들에게 네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뜻은 옛날 문둥병 자들이 혹 병이 낫게 되면 낫다고 하는 증명서를 제사장들에게 받아야 다시 일반 사회와 자유로 교제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는 그 말씀 가운데는 메 몸이 곧 나을 것이라고 하는 뜻이 내포된 줄 생각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서슴지 아니하고 곧 그 자리에서 떠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제사장들에게 나아갔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들이 가는 도중에 그 추악한 병이 온전히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을 깨달아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예수 님께 향하여 돌아왔습니다. 다 돌아와서는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수 님에게 사례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때에 예수 님께서 하신 말씀이올시다.『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잇느냐? 이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 밖에는 하나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업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나음을 받았지마는 그 은혜를 깨닫고 돌아와서 감사를 드린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아홉 사람은 은혜를 잊었습니다. 감사를 드리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에 우리 마음가운데 곧 들어오는 생각은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과연 이렇게 은혜를 잊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가 염려하는 것은 이것이 우리 보통 인간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닌가 고 생각이 됩니다. 깊이 생각하면 이것이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이 타락한 인간성의 일면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입니다. 이 문둥이들처럼 물론 우리도 여러 가지 병 가운데 걸리게 될 때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병을 낫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후에 우리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병이 나은 다음에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약조하고 하나님 원한 그대로 꼭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조용히 내 생활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런 말씀이 우연한 말 같지가 아니합니다.
여기 앉으신 여러분은 대부분 三八선을 넘어 오신 분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三八선을 넘어올 때에 안 믿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믿으면서 넘어온 사람은 많은 기도를 하면서 넘어온 줄 생각합니다. 三八선을 넘어올 때에 마음속에 결심한 일도 많고 작정한 일도 많고 문자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원(願)을 하면서 넘어오신 이들도 많이 계십니다. 우리가 위기를 당할 때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원을 맺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잠깐 우리의 생활을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가 三八선을 넘어올 때에 마음 가운데 결심한 하나님과의 약조를 얼마나 그대로 실행하였는가? 우리가 맨 처음에 三八선을 넘어와서는 누구나 다 같이 피난민이었습니다. 다 똑같이 집이 없고 생활의 위협을 받는 내일 어떻게 살는지 알 수 없고, 장래가 어떻게 되려는지 알 수 없는 똑같은 운명가운데 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런 때에 다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어떻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에 안정을 주시기 위해서 간절한 기도했습니다.
그 후에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생활의 안정을 얻었고 물질적으로도 하나님 앞에 축복을 얻은 이가 많이 계신 줄 압니다. 우리가 피난민으로 처음에 왔을 때에 기도하던 그 생각 그 소원대로 얼마나 실행하였습니까?
영국에 유명한 트랜취라고 하는 감독이 있는데 그이가 특별히 예수 님의 이적에 대한 주석을 중심해서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이 분이 이적에 대해서 주석을 써 가다가 이런 구절을 썼습니다.『자기가 살펴보는 대로 모든 은혜 가운데 감사할 줄 아는 은혜는 아마 제일 드문 은혜이라.』이런 말을 기록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이것은 옛날부터 우리 동양에 내려오는 속담과도 과히 틀리는 말이 아닙니다.『원수는 돌에 새기지마는 은혜는 물에 새긴다.』곧 잊어버린다고 하는 말입니다. 언제나 국가의 충신이 바르고 가정에 효자가 드물고 회사에 참된 봉사자가 적고 세상에 참된 신자가 적은 것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웅변으로 증명하여 주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이는 많지마는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것을 기억하는 이는 적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가 특별히 주의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그 아홉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옛날 다윗이 스스로 자기의 영혼을 깨우치며 하는 말이『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여 그 모든 은택(恩澤)을 잊지 말지어다.』자기의 영혼을 스스로 깨우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사실을 주의해 보세요. 이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사람이 은혜를 잊어버렸는데 이상스럽게 전부가 유대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 유대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을 비교해 보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유대 사람이요, 또 은혜를 깨달아 알 만한 사람이 어떤 면으로 보든지 유대사람이올시다. 이 유대 사람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올시다. 모세의 율법을 배운 사람들이올시다. 여러 선지자들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이올시다. 매 안식일에 회장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올시다.
그런데 이 유대인 아홉 사람 전부가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이것도 우연이 아닌 줄 압니다. 우리가 한 가지 마음가운데 꼭 깨달아야 될 것은 은혜를 많이 받는 자가 더 잘 잊어버립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몰론 예외도 있습니다. 부자 집 자녀들과 가난한 집의 자녀들을 비교해 보면 어떤 집 자녀들이 부모의 은혜를 더 잘 하는가? 부모의 혜택을 많이 받은 부자 집 자녀들인가? 그렇지 아니하고 보통 집 자녀들인가? 예외가 있지만 보통으로 하는 말입니다.
옛날 속담에 외아들이 밥투정을 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왜 예수 님께서 말씀하실 대에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시고 주님이 온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이사야 一장 三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안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내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아마 은혜를 받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으레 받을 것이라, 이렇게 생각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세례를 받으라고 외칠 때에 여러 사람이 나아와서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바리새인과 많은 사두개인들은 죄는 자복하지 아니하고 그냥 세례만 받으려고 나아올 때에 세례 요한이 책망하였습니다.『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로 하여금 장차 올 화를 면하라고 하더냐?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스스로 믿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이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가 있는 것이 아니냐?』
오히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믿는 까닭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줄 생각합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 오래 믿은 사람들 특별히 믿는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에 대하여 큰 경고가 되는 말씀이올시다. 또한 누구든지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 어렸을 적부터 많이 받은 사람들, 영적으로, 육 적으로, 물질적으로, 건강상으로, 재능 상으로, 어떤 방법이든지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에게 대하여 전감이 되는 교훈인 것을 우리가 마음가운데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여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다윗과 같이 항상 우리의 심령을 깨우치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또 한 번 이 사살을 기억해 보세요. 이 아홉 사람은 은혜를 받되 보통 은혜를 많이 받은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그야말로 큰 은혜를 받았지마는 그것까지 잊어버렸습니다. 문둥병 환자가 문둥병이 나았다고 하는 것은 생명을 도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우리 보통 생각에 적은 일에는 보통 바로 잊어버리지마는 큰 은혜만은 받은 것을 어떻게 잊어버리랴 하지마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런 큰 은혜도 잊어버렸습니다.
요즘 전기 사정이 좋지 못해서 불이 가는 때가 많습니다. 어떤 친구가 좋은 등을 준비해서 이런 때 여러분께 준다고 말하면 그 은혜를 감사히 받을 것입니다. 그 은혜를 항상 잊지 않을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밝은 햇빛으로 주실 때에 아침마다 해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는 분이 몇 분이나 됩니까?
전에 六·二五때 괴뢰군이 여기 들어온 다음에 우리 교우 몇 분의 도움을 받아서 저도 피난 갔습니다. 한강을 건너서 시흥으로 해서 수원에까지 갔는데 괴뢰군이 들어온 바로 그 날은 아주 맑고 더웠습니다. 많은 피난민들이 수원 거리에서 남으로 남으로 그냥 밀려 내려갑니다. 저도 무리 가운데 섞여서 내려가는데 얼마쯤 내려가다 보니까 어떤 긴 옷을 입은 성공회 선교사들이 두 사람이 서서 큰 물동이에 냉수를 가득 채워 놓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물 한 잔씩 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매우 더운 날 땀을 흘리면서 가던 피난민들이 감사히 그 물을 받아먹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물 한잔 받아먹은 생각이 잊혀지지 않고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 특별한 한국 같은 데는 물의 축복을 받아서 어디 가든지 몇 자만 파면 맑은 냉수를 주시는 이 하나님 앞에 물을 마실 때마다 감사를 드리는 분이 몇이나 됩니까? 저도 사실 그런 경험을 한 다음에는 물을 마실 때도 감사의 기도를 올리느라고 힘을 쓰지마는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중에 하나가 중한 병으로 앓는데 호흡하기가 대단히 괴로울 때에, 어떤 친구가 산소를 한 통 보내서 그 호흡하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하면, 아마 여러분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넉넉한 공기를 주어서 항상 숨쉬며 살면서 숨쉴 때마다 기도를 드립니까? 이것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큰 은혜일수록 우리가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작은 은혜를 우리가 어떤 때 기억하지만 큰 은혜일수록 오히려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옛날 글을 보면 요 임금이 어떻게 정치를 잘하였는지 모든 백성들이 아무 근심 없이 평안히 삽니다. 그 때 백성들이 격양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흙을 치는 노래입니다. 그 격양가의 내용이『경전이식(耕田而食)하고 천장이음(穿井而飮)하니 제은이 어아(帝恩於我)하야 하관언(何關焉)고?』『우리가 밭을 갈아서 밥을 먹고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는데 임금의 은혜가 내게 무슨 상관인고?』이게 격양가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그 때 백성들이 요 임금이 너무 정치를 잘해서 그저 평안해서 잘 사니까 오히려 노래 부르면서 임금의 은혜가 무슨 상관이냐며 그의 은덕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 많은 사람들은 여기 있는 문둥이와 같이 참 죽을죄에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의 은혜를 항상 잊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까?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조심하지 아니하면 이 은혜를 잊어버리기가 쉬운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사실을 이것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세요. 이 아홉 사람을 보면 멀리 예수 님께서 가시는 것을 보고 소리를 높여서『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주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는 잘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응답된 다음에 은혜는 잊어버렸습니다. 명심하십시다. 기도를 열심히 잘 하는 사람도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또 보세요, 이들이 아직 문둥병이 몸에 그냥 있는데 예수 님께서 어서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말이 곧 떨어지자마자 예수 님 말씀 그대로 꼭 믿고 곧 돌아서 간 것을 보니까 이 사람들의 믿음이 어떻습니까? 믿음이 독실합니다. 산을 옮길 수 있는,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음 있는 사람들이 그 믿음의 결과로써 은혜를 받은 다음에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믿음 있는 사람도 은혜를 잊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하든지 아무리 믿음이 진실하다고 하지마는 우리가 이 방면에 주의하지 아니하면 이 아홉 사람 틈에 들기 쉽습니다.『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여 그 모든 은총을 잊지 말지어다.』
자 여러분, 이와 같이 아홉 사람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한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의 찬송을 할 때에 예수 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요?『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아홉은 어디 잇느냐? 이 사마리아 사람 외에는 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업느냐?』여기 보면 놀란 기색이 보입니다. 예수 님은 본래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아시는 예수 님에게 있어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큰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을 볼 때에 놀랐습니다. 인간성이 타락했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타락한 수 있나? 사람의 마음이 목석이 아닐진대 이럴 수야 있겠느냐? 예수 님께서도 대단히 놀라셨습니다. 또 놀란 것뿐 아닙니다. 아홉 사람은 어디 잇느냐?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얻지 못하였느냐? 이것을 보니까 예수 님의 탄식이 그 마음가운데 말할 수 없는 슬픈 기색이 이 말씀 가운데 포함되었습니다. 예수 님의 마음은 매우 섭섭했습니다. 이렇게도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깨닫지를 못할 때에 그 마음이 섭섭합니다.
또 보세요.『아홉은 어디 잇느냐?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얻지 못하였느냐?』이거 보니까 이제라도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돌아와서 은혜를 알고 찬송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이제라고 돌아와서 자기의 은혜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기다리는 모양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님께서 이런 감사를 받아서 유익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 님께서 돌아오기를 원하는 것은 이렇게 은혜를 받은 다음에 감사할 줄 알아야 은혜를 더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 사마리아 사람은 와서 이렇게 감사한다고 할 때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가라 네 마음이 너를 구하였느니라.』본문대로 하면『네 믿음이 너를 제 생명 전체를 온전케 하였느니라.』『네가 네 병만 고친 것이 아니고 네가 이렇게 은혜를 깨닫고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그 믿음은 너의 영혼까지 구원함을 얻었느니라.』사마리아 사람은 이렇게 돌아와서 자기의 영혼까지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왜 돌아와서 감사하기를 기다리는가? 은혜를 더 주기 위해서입니다.
흔히 옛날부터 사대은(四大恩)을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올시다. 우리 육적(肉的) 영적 모든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됩니다. 둘째는 부모의 은혜올시다. 이 세상에 있어서는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고 가르쳐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는 국가의 은혜올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 국가가 없으면 살수가 없고 평화를 누릴 수도 없습니다. 국가를 통해서 오는 모든 은혜를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넷째는 사회의 은혜, 옛날 말대로는 중생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여러 친구들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혜택을 입히는 이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가 많습니다.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각 방면에 이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로마서 一장 二十一절에 보면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한다고 그랬습니다. 안 믿는 사람의 표는 여기 있습니다. 감사할 줄 모릅니다. 믿는 사람의 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이는 감사할 일이 더욱 더 많이 생깁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감사할 일이 점점 적어집니다. 사실 참된 신앙과 헌신의 생활의 배후에는 이와 같은 은혜를 깨닫고 은혜에 대한 감사 감격의 마음이 그 마음속에 충만한 것을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꼭 지키라고 명령했는지 압니까?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구원해냈다고 하는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려고 유월절을 꼭 지키라고 그랬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도 왜 감사절을 지키는지 압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잊지 않고 그 은혜를 감사할 줄 알기 위해서 감사절을 지킵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리 오 마는 특별히 감사절을 기해 한 주간을 감사 주간으로 지키는데 여기 주보에 있는 대로 매일 성경 보면서 우리 가정에서 감사의 예배를 꼭 드립시다. 그 동안 기도해 보지 못한 가정이라도 이 주간에는 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온 가족이 예배를 드립시다. 그래서 오는 주일날 감사절을 당해서 우리가 다 나와서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향하여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우리의 영혼을 스스로 깨울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一九六0년 十一월 六일)

Ⅳ-15 감사한 생활의 비결 ―감사 주일― (고린도 후서 九장 六-十五절)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九·十五)

우리가 언제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감사를 드리지 아니하리 오 마는 특별히 이렇게 일년에 한번씩 한 주일을 정해서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만복의 근원이시는 하나님께서 금년 일년 동안 우리에게 주실 은총을 기억하면서 중심으로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내 개인에게 주신 은혜, 내 가정에 주신 은혜, 우리 교회에 주신 은혜, 또한 우리 교회에 속하는 여러 기관들, 보린 원이나, 경로 원이나, 모자원이나, 기도원이나, 초등학교나, 중 고등학교나, 모든 기관들, 또는 본 교회 전도사업, 개척교회, 태국선교, 이 모든 사업 위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시는 것을 우리는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우리 나라 위에 하나님께서 주신, 금년에 특별히 시정을 새롭게 한 모든 일이나,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를 지켜주신 모든 축복을 기억하고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는 일년 동안 하나님께서 온 세계 교회와 온 세계 나라 위에 축복을 더하여 주시고 평화를 더하여 주신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감사를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우리가 영적 은혜를 감사할뿐더러 우리는 여러 가지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방면에 주신 은총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일년에 한번씩 특별히 한 날을 정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한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이것만은 부족합니다. 우리는 평소의 생활이 감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매일 매일의 생활과 일생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면 그는 언제든지 제일 먼저 문안을 한 후에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그 서신을 읽어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는 권면이 어떻게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범사에 감사하라『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이와 같이 글을 쓸 때에 항상 감사하라고 권면한 이 사도 바울의 생활을 보면 그 생활 자체가 한 감사의 생활이올시다.
그의 마음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감격으로 사무쳤고 따라서 그의 하루의 생활, 한 달의 생활, 일생의 생활이 은혜를 감사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감사한 생활을 할 수 있었는가? 그의 감사한 생활의 원인이 어디서 났는가? 우리는 보통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다 평안하고 환경이 좋으면 물론 감사한 생활을 할 수 있지 않는가? 몰론 일반적으로 이렇게 생각됩니다. 하지마는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좋은 환경이나 평안한 생활로 인해서 감사한 생활을 한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후서 十一장 하반부를 읽어보세요. 거기 보면 사도 바울의 일생을 간단히 기록한 몇 마디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매를 몇 번 맞고, 몇 번이나 감옥에 들어갔고, 몇 번이나 파선을 당하고, 길의 위험함과 산의 위험함과 도적의 위험함과 도회의 위험함과, 유대 사람들에게도 핍박을 받았고, 이방 사람들에게도 핍박을 받았고, 다메섹에서도 그랬고, 에베소에서도 그랬고, 고린도에서도 그랬고, 예루살렘에서도 그랬고, 로마에 가서도 대부분 감옥에 있었고……그의 일생은 핍박과 환난(患難)과 곤고(困苦)의 계속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감사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대부분 생각할 때에 우리 몸이 건강하면 몰론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병들고 몸 약한데 무슨 감사가 있으랴! 흔히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바울의 감사한 생활은 몸이 건강한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후서 十二장을 보면 그가 무슨 병인지는 확실히 말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마는 그의 육체 가운데는 찌르는 가시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가시를 없이하여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마는 그냥 두었다고 그랬습니다.
찌르는 가시를 그냥 가슴에 안고 지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편지할 때에, 그가 무리들에게 전도하게 된 경위도 그가 병이 나서 다른 데 못 가고 거기 유함으로 전도를 했다고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몸 건강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런 감사와 기쁨의 생활이 건강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물론 건강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경우는 이것은 아닙니다.
물론 가정이 화평하고 가정이 평안하면 그거 감사한 일이올시다. 하나님의 축복이올시다. 가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큽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마는 사도 바울의 경우는 이 가정의 안락(安樂)에서 온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는 사도 바울은 문자 그대로 가정의 단락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일생을 독신 생활을 하였습니다. 종일 일하고도 편안히 들어와서 쉴만한 집이라도 일정한 가정이 일생토록 없이 살았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한 대로 바울은 일생토록 나그네로서 이 곳 저 곳 방랑하며 평안(平安)이 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사도 바울의 감사한 생각과 생활이 어디서 생기는가? 그것은 밖에 있지는 아니했습니다.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의 환경이나 그의 건강이나 그의 가정이나 무슨 금전이나 명예나 지위나 성공이나 그런데 있은 것은 아닙니다. 그의 감사한 생활은 그 속 깊은 심령 속에서 우러나왔습니다. 여기 말씀하는 대로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이필난설(以筆難說)이란 말이 있지요? 붓으로 다 쓸 수 없습니다. 이구난설(以口難說입)이란 말이 있지요? 입으로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크고 귀한지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은사를 이 사도 바울은 마음속에 받았습니다. 그 은사가 무슨 은사인지 압니까? 그 은사는 제 생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도 바울이 알게 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 신앙은 그 뿌리요, 감사는 거기서 나는 열매인 것입니다.
로마인서 七장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의 그야말로 세기적 고민이 잠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심각한 도덕적 고민을 느꼈습니다. 그는 양심적인 인물이올시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구약을 배운 사람이올시다. 그는 옳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사람 앞에 뿐만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꼭 옳은 사람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구약은 그르쳐 줍니다.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려고 하면 계명을 지키라. 율법을 지켜라. 양심대로 계명을 지키기를 힘썼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양심적으로 계명을 지키기를 힘쓸 때에 자기가 전에 깨닫지 못하던 자기 육체 속에 다른 힘이 있어서 자기가 아무리 힘쓰고 애쓰지마는 그대로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는 죄의 능력이 또한 있었습니다. 육을 기초로 하는 죄의 능력이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그래서『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긴 탄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스스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뜻을 깨닫고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복을 깨닫게 되고 성령의 축복을 박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는 외칩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은사인 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구속을 받았습니다.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구속과 해방의 기쁨은 언제든지 그로 하여금 이 은혜에 보답하기를 원하게 하는 감사의 생활로 변하게 한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때부터 그리스도는 옛날 승천한 그리스도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만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는 언제나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이 계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은『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오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에 속하던 자기는 죽었습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속에 살아 계시는 것을 항상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대모데 후서 四장에 보면『내가 나를 위해서 변명할 때 내 친구들은 다 나를 떠났다. 한 사람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강한 힘을 주고 주께서 언제든지 나와 같이 계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전도하려 갔습니다. 기회는 큽니다. 죄는 많습니다. 반대하는 유대 사람들은 벌 때와 같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할까? 주님께서 특별히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였다고 그랬습니다.『두려워하지 말아라. 이 도회에 내 백성이 많으니 입을 닫지 말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라.』살아 계신 주님은 언제든지 사도 바울과 같이 한 것입니다.
지중해에서 큰 풍파를 만날 때에도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바울을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릴보 四장 十三절에 있는 대로『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는 역사적 그리스도만이 아닙니다. 현재에 자기와 같이 계셔서 능력을 간단없니 쥐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풍파를 만날 때에도, 핍박을 만날 대에도, 돌에 맞을 때에도, 파선을 당할 때에도, 조금도 두려워할 것은 없었습니다. 언제든지 주님의 능력이 같이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당할 때에 사도 바울은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 이와 같은 신앙이 있습니까?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죄에서 구속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다 해방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계시는 이 새로운 믿음, 참 믿음, 산 믿음을 우리가 다 가졌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순경이나 역경이나, 괴로울 때나 평안할 때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밤이나 낮이나, 언제든지 감사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닌 줄 압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동행한 생활을 하게 되니 자연히 그의 생활은 많은 열매가 맺혔습니다. 우선 마음 속게 성신의 열매를 맺혔습니다. 사랑과 희락(喜樂)과 화평(和平)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良善)과 충성과 온유(溫柔)와 절제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가는 곳마다 죽은 생명을 구원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줍니다. 가는 곳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웁니다.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열매가 맺히게 될 때에 자연히 감사한 마음이 마음가운데 일어납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 가운데도 주를 위해서 무슨 열매든지 열매를 맺히는 사람일수록 감사한 마음이 더 많이 있습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파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은 감사한 마음이 더 많습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한 사람에게 옷을 한 벌이라도 줄 수 있고, 내가 주를 위해서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을 줄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감사한 마음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내가 사실 주의 복음을 전파할 생각으로서 전도 회비를 많지는 않지마는 매달 꼭 내고, 보린원 후원회비를 꼭 내고, 온전히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병자를 방문하고,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사도 바울은 항상 빛나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우리를 위하여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화의 중한 것을 이루는 것을 분명히 알고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조금 환난을 받지마는, 이 세상에서 내가 의를 위해서 핍박(逼迫)을 받지마는, 이 모든 것은 하늘 나라의 큰 영광을 더하게 하는 것이니 얼마나 감사한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다 가고 내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나를 위해서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언제든지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자연히 북받쳐 올라왔습니다.
우리가 다 이 소망이 있습니까? 사실 감사는 믿음의 척도올시다. 감사를 가지고 믿음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도 말씀했지마는 로마서 一장 二十一절에 보면『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 살건만 하나님의 은혜인 줄 모릅니다. 하박국의 말과 같이 그물에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물고기 잡고는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고 그물에 감사합니다. 주의(主義)에 감사를 드립니다. 내 배에 감사를 드립니다. 안 믿는 사람은 감사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믿음이 있게 됩니다. 믿음에 있게 되면 점점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평안할 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믿음이 적을 때는, 괴로울 때는 감사를 못 드리고 무엇이 잘 될 때에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실패할 때는 감사를 잘 못 드립니다. 든든할 때는 감사를 열심히 잘 드립니다. 병날 때에는 불평합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좀 좋은 때에는 감사드리지마는 역경에 가서는 그만 불평이 나옵니다.
점점 정성해서 가령 사도 바울의 믿음의 정도만큼 이르렀다고 하게 되면 평안할 때에도 감사를 드리지마는 불편할 때에도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건강할 때에도 감사를 드리지마는 약할 때에도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성공할 때에도 감사를 드리지마는 실패할 때에도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순경에서도 감사를 드리지마는 역경에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살 때에도 감사를 드리지마는 죽을 때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는 우리 마음의 척도올시다.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앙에 들어가게 될 때에는 문자 그대로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범사에 감사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하늘 나라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만 모인 까닭으로 불평이라고는 없습니다. 하늘 나라에는 불만이 없습니다. 하늘 나라에는 기도도 없습니다. 하늘 나라에는 설교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는 찬송과 감사만이 있습니다.
이 세상 교회에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왜? 기도로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세상 교회에서 예배 볼 때에 성교가 필요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예배 볼 때에는 찬송과 감사밖에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영락교회 이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이 오직 이 찬송과 감사로써 충만하다고 하면 이 자리가 곧 천당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당의 축복을 미리 맛보는 사람이올시다. 참으로 은사를 받아서 언제든지 감사함으로 사는 사람은 이 땅에서 살지마는 하늘 나라의 축복을 미리 받고 천당의 생활을 미리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가 다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一九六0년 十一월 十三일)


Ⅳ-16 거룩한 불 (누가복음 三장 七-十七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눅 三·十六절)

옛날 구약 시대부터 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여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찍이 시내산 기슭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에도 불붙은 떨기나무를 통해서 나타나시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여 주실 때에도 낫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일찍이 엘리야가 가멜산상에서 단을 쌓고 제물을 준비하여 놓고 불로 응답해서 참 신이 되는 것을 알게 하여 달라고 기도할 때에 하늘로서 불이 내려서 온 제물을 깨끗이 살은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도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오순절 아침에 一二0명 문도(門徒)들에게 성신께서 처음으로 강림하실 때에 불같은 혀가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성령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불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의 불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의의 불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진리의 불이올시다.
성령의 세례는 곧 불의 세례를 의미하고 불의 세례는 곧 성령의 세례를 의미합니다.
『그가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불과 성령으로 곧 성령의 불의 세례를 모든 믿는 사람에게 주시겠다고 세례 요한은 예언한 것입니다.
불 세례의 특징은 어떠한 것인지 우리가 몇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불은 무엇보다도 뜨거운 것입니다. 태양은 큰 불덩이인 까닭으로 매우 뜨거워서 먼 곳에 있는 별들에게도 그 열을 온 우주에 방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난로에 불이 있어야 뜨겁지 불이 없으면 다시 차지고 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 속에도 이 거룩한 불이 되시는 성령께서 임하시게 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징조가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가 일찍이 자기가 어떤 저녁 기도회에 참여했을 때에 성령이 그 마음속에 임하게 되니 이상하게 그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고 스스로 기록한 글이 있는 것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품어 주를 섬기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뜨거운 마음은 성신의 열매의 하나올시다. 엘리야가 말하기를『나는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있는 자이니라.』하나님을 위하여 뜨거운 마음이 생기는 것은 성령의 불의 역사인 까닭입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우리의 마음이 냉랭하고 아무 열이 없습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불이 임재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해서 주를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의 사업에 열심으로 봉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지하는 것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또한 불은 아무리 굳은 금속이라고 할지라도 녹일 수 있습니다. 녹여서 물렁물렁하게 하고 부드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아무리 쇠가 굳지마는 쇠를 불에 녹일 수 있습니다. 금과 은이 굳다고 하지마는 불 가운데 녹일 수 있습니다. 먼저 불에 녹여야 그것으로 좋은 기계를 만들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장식품도 만들 수 있고, 좋은 그릇을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의 역사가 우리의 심령에 임재하게 될 떼에 우리의 굳은 마음을 녹여 주는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 고집된 마음, 완고한 생각, 강퍅한 마음을 녹여서 온유하고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불 되시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 임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할지라도 아직까지도 강퍅한 마음을 그냥 품고 다니며 교만한 마음, 완고한 마음, 고집을 그냥 가지고 있으면, 이것은 아직까지는 불 된 성령의 역사가 임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녹여서 부드럽게 해서 우리의 심령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서 새 사람을 만들 수 있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또한 불은 태웁니다. 살 습니다. 불은 여러 가지를 깨끗이 살아버립니다. 쇠를 불에 넣으면 쇠가 녹을뿐더러 그 쇠 가운데 있는 여러 가지 불순물들이 다 불 살아 없어져 버립니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깨끗케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물은 표면이나 깨끗이 씻을 수 있지마는 이렇게 불은 속까지 정결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의나 도덕이나 수양이나 교육이 물론 우리 인격도야와 인격조성에 유익한 바가 없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이 거룩한 불의 세례를 받아야 우리의 마음속 깊은 자리에 있는 온갖 탐욕, 온갖 음욕, 온갖 허영심, 독한 시기와 질투심, 이와 같은 것까지, 다시 말하면 죄악의 뿌리까지 태워버릴 수가 있습니다. 오직 뜨거운 성령의 불로써만 우리 잠재 의식가운데 숨어 있는 모든 죄악의 근본까지 살아서 없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은 이렇게 살아서 우리의 심령을 근본적으로 깨끗케 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불은 빛을 발합니다. 태양은 큰 불 덩어리가 된 까닭으로 온 우주에 광명 한 빛을 방사하고 있습니다. 불이 있는 곳에 빛이 발합니다. 빛이 없이는 그 곳에 불이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였지마는 왜 우리가 빛을 발하지 못합니까? 근본적으로 우리의 심령 속에 이 성령의 불이 임하지 못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꺼진 등불이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이 거룩한 불이 우리 속에 임재할 때에 우리의 성품을 통해서,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사랑의 빛과 생명의 빛, 의의 빛이 사실 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이 성령의 불이 우리 마음속에 임하게 될 때에 그 열매가 되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모든 아름다움 빛의 광선을 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거룩한 불이 임재(臨在)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우리의 주위가 어둡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이 거룩한 불이 임재 한다고 하면 우리가 가는 곳마다 직접 간접으로 유형무형으로 반드시 그리스도의 빛이 어느 모르든지 나타나고야 말 것입니다.
불은 곧 에너지입니다. 불은 곧 그 자체의 능력이 있습니다. 태양의 큰 불 덩어리가 온 우주의 많은 열을 통해서 에너지는 보내고 있습니다. 불이 있는 곳에 능력이 같이 합니다. 기관차에 불을 넣으면 기차가 움직입니다. 불이 있어야 기선이 움직입니다. 기차가 움직이지 못하면 그 속에 불이 없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모양은 있으나 모든 방면으로 볼 때에 믿는 사람과 똑같은 모양이 나기는 나지마는 왜 죄악을 이길 능력이 없습니까? 왜 유혹을 이길 능력이 없습니까? 왜 죄인 줄 알면서도 끊어버릴 능력이 없습니까? 그 속에 거룩한 불이 임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우리교회 안에 이와 같은 단체도 있고 저와 같은 단체도 있고 여러 가지 단체가 있지마는 왜 마땅히 일을 할대로 일을 하지 못합니까? 왜 여러 가지고 책임을 맡기는 맡았지마는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합니까? 이 거룩한 불이 임하지 못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이 불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능력이 나타납니다.
또한 여러분은 잘 아십니다. 불은 그 특성 가운데 하나가 퍼지는 것입니다. 불은 한 곳에서 시작되었으면 그냥 거기만 붙는 것이 아닙니다. 퍼집니다. 그러기에 요원의 불이란 말이 있습니다. 마른 들의 불과 같이 퍼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은 반드시 퍼집니다. 불은 퍼지고 올라가는 것이 그 성품이올시다.
성령의 불을 받은 초대 교회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맨 처음에 一二0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三천 명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三천 명이 五천 명으로 퍼져 나가고 여러 만 명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지마는 사마리아에도 퍼져 나갔습니다. 수리아에도 퍼져 나갔습니다. 마지막에는 온 유럽에 확대되고야 말았습니다.
불은 퍼지는 것이 그 근성이올시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 심령 속에 거룩한 불이 붙는다고 하면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복음이 퍼질 것입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의 불이 임하는 교회라고 하면 그 교회는 반드시 확보되고 퍼질 것입니다. 내 교회가 十년 전이나 十년 후나 그만하게 그 자리에 있는 교회가 많습니까? 그 교회에 거룩한 불이 없습니다. 불은 퍼지는 것이 그 본성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기억하십시다. 불은 최후에 승리를 얻습니다. 베드로 전서 二장 十절에 사도 베드로는 이런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온 우주가 뜨거운 불에 풀어질 날이 있겠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거룩한 불은 마지막에 온전히 소멸시키고 승리를 얻을 때가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불은 악인에게 있어서는 소멸의 불이오, 성도에게 있어서는 승리의 불이올시다.
두 가지 길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았을 때에 위로부터 내려오는 이 거룩한 불을 받아서 내 자신을 깨끗케 하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더러운 그대로 있다가 마지막에 소멸하는 불에 멸망을 당하든지……. 여러분, 어떤 불을 원하십니까? 불은 최후의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승리의 불이 되고 악한 자에게는 소멸의 불이 되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二十장 九절에 이와 같이 고백하였습니다.『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하나님께 대하여 말을 안 하겠다고 생각을 하면 자기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어찌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속에는 불이 탔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로 하여금 예레미야를 만들게 한 것은 그 심령 속이 이 거룩한 불이 붙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九장 十六절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 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도 심령 깊은 곳에도 이 불이 붙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왜? 그 속에 불이 타 올라왔습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불을 던지려 땅에 던지려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부흥가(復興家) 희트필드는 그 평소의 기도가『오, 주여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불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불길, 하나님의 화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존 웨슬리는 그 당시의 모든 청년들을 향해서 부르짖는 말씀이『네 영혼에 하나님의 불을 붙여라.』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불이 붙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빛납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뜨겁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불이 붙고 있습니까? 혹은 우리의 영혼이 캄캄하고 우리의 영혼이 냉랭하고 우리의 영혼이 쓸쓸한 자리에 있습니까?『네 영혼에 하나님의 불을 붙여라.』 이 거룩한 불이 우리의 심령에 붙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심령에 이 거룩한 불이 붙지 아니하면, 여러분, 깊은 속에 무슨 불이 있는지 압니까? 탐심의 불, 음욕의 불, 질투의 불이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거룩한 불이 붙지 아니하면 죄악의 불이 붙습니다.『네 영혼에 하나님의 불을 붙여라.』
우리의 심령 속에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동포를 사랑하고 내 나라를 사랑하는 이 사랑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공의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의를 찾자, 옳은 대로 하자, 옳은 대로 살자는 의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진리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계를 보면 제단이 있습니다. 도처에 예배당을 지어 놓았습니다. 제물도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배당에 가는 사람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제단처럼 불이 아직 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불, 성령의 불이 하나님의 교회 한국의 교회 위에 아직 임하지 못했습니다. 거룩한 불이 제단에는 있어야 합니다.
제단을 아무리 쌓아 놓아야 무엇을 합니까? 제물을 아무리 준비한들 무엇합니까? 위로부터 불이 내리지 아니하면 그 예배가 무슨 쓸데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심령의 제단에 이 거룩한 불이 내렸습니까? 오늘날 우리 영락교회 제단 위에 이 거룩한 불이 내렸습니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원하시는 자에게, 기도하는 자에게 반드시 이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어 주시리라.』
그러면서『너희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아들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더욱 좋은 것 성령으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여러분, 이 거룩한 불을 여러분의 심령의 재단에 받았습니까? 우리의 심령을 스스로 살펴 봅시다. 내 마음에 사랑의 불이 붙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 내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내 동포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내 나라를 바로 살리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안타까운 불이 붙습니까?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구원해 내기 위해서 안타까운 불이 붙습니까? 사랑의 불, 진리의 불이 붙습니까?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 머리 위에 이 성령의 거룩한 불이 내려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一九六0년 十一월 二十일)

Ⅳ-17 여호와? 바알? (열왕기 상 十八장 二十-二十四절)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十八·二十一)

때는 주전 九세기올시다. 북편 이스라엘 나라, 가멜산상에서 된 일을 간단히 읽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왕은 악한 아합, 왕후는 이방 여인 이세벨로서 바알과 아스다롯 우상 숭배에 열중하던 여자였습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많은 핍박 가운데서 신음하던 때였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엘리야 선지자는 혜성과 같이 나타나서 아합 왕에게 그의 모든 악행을 책망하면서 그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이 앞으로 三년六개월 간 하늘이 문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않겠다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 때가 다 차갈 무렵에 엘리야가 왕과 모든 백성을 가멜산에 모아 놓고 바알의 선지자도 四五0명이나 둘러선 그 자리에 홀로 선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는 그 때의 모든 백성들을 향하여 한 말이 이 말입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이 장면은 이스라엘 종교 역사상뿐만 아니고 국가 역사상 가장 중대한 잊을 수 없는 극적인 장면인 줄 생각합니다. 사실 이 때에 이스라엘 민족의 장래의 운명이 이 가멜산상에서 결정이 된 것입니다.
당시 가멜산상에 모인 사람들을 간단히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참 신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 둘째는 거짓 신 바알의 선지자 四五0명, 셋째는 수다한 민중들, 이 편이나 저 편이나 무슨 작정이 없는 머뭇머뭇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자대로 번역하자면 절룩거리는, 한 번은 이 다리로 서고, 다음에는 다른 다리로 서고, 뛰는 모양, 여기 섰다 저기 섰다 하는 그런 형편에 있는 것입니다.
이 때에 엘리야는 이렇게 작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대중을 향해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머뭇머뭇 하려느냐? 확실히 옳은 편에서야 되지 않겠느냐? 얼마나 오래 그렇게 절룩거리겠느냐? 아마 이 사람들은 여호와도 섬기고 바알도 섬길 수 있는 줄 알던 모양입니다. 엘리야의 말씀은 그럴 수가 없다고 분명히 지적합니다. 예수 님도 말씀한 바와 같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바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대에 기록한 바와 같이『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말씀한 것입니다.
스티븐슨의 유명한 소설의 인물처럼 낮에는 지킬 박사로서 선한 생활을 하고 밤에는 하이드맨으로서 깡패 노릇을 오래 계속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 바알의 두 주인을 오래 같이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박쥐처럼 새 틈에 가게 되면 새 노릇을 하고, 짐승 틈에 가면 쥐 노릇을 오래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발은 천국에 들여놓고 한 발은 지옥에 디디고 오래 계속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 은 우리에게 경고했습니다.『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라.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에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가고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 하느냐? 그 뜻은 너희가 얼마나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그 때 그들 가운데는 상당히 오래 이런 생활을 계속한 이들이 있은 모양입니다. 어떤 이들은 三년, 어떤 이들은 五년, 어떤 이들은 十년, 어떤 이들은 청년 시대에도 그러했고, 중년 시대에도 그러했고, 백발이 성성해지는 노년 시대에까지도 작정하지 못한 이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인생의 봄이 다 가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닥쳐왔지마는 아직도 머뭇거리는 분이 있은 것 같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그와 같은 분이 안 계십니까? 교회에 가끔 출석은 합니다. 오랫동안 믿기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 온전한 작정을 못 내리고 머뭇거리는 분이 계십니까? 오래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아직도 학습도 서지 못하고 세례도 못 받은 교우는 없습니까?
『너희가 얼마나 오래 머뭇거리겠느냐?』아마 그 뜻은 하나님의 징계와 경고가 너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런 생활을 계속할 수 잇느냐? 그 뜻도 포함된 줄 믿습니다. 벌써 비가 그친 지가 三년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징계요 하나님의 경고가 분명한데도 너희가 아직까지 그와 같은 머뭇거리는 생활을 계속할 수가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는 우리에게 완전한 회개를 재촉하시기 위해서 직접 간접으로 징계를 하시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경고도 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질병을 통해서, 어떤 때에는 환난을 통해서, 어떤 때에는 천재와 지변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경고를 주십니다. 예수 님께서도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서 열 여덟 사람이 갑자기 몰사한 사건을 들어서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는 말씀이『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멸망하리라.』하셨습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중고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신 교회 월덴시안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처음 설립한 사람은 파티 왈도라 하는 분이올시다. 이 분이 젊었을 때에 어떤 큰 연회에 초청을 받아서 여러 젊은 사람과 같이 마음껏 호화롭게 놉니다. 그런 가운데 갑자기 그 친구 중 하나가 어떠한 병으로 그 자리에 쓰러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광경이 이 청년 왈도에게는 큰 경고가 되었습니다. 온전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경고를 주십니다. 이런 경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계속해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고 책망하십니다. 분명히 우리가 기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오래 참으시지마는 최후에는 홍수의 심판을 내리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크신 긍휼(矜恤)과 자비로써 소돔과 고모라 성의 사람들의 죄악을 오래 참으셨지마는 최종에는 불과 유황의 심판을 내리신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실 때에, 그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우리는 온전한 작정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지금이야말로 은혜주실 때요 오늘이 구원의 날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까지 구원 문제에 있어서 온전히 작정하지 못하고 머뭇머뭇 하는 이가 있으면 오늘 아침 이 시간 하나님께서 기회주실 때에 온전히 작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회가 영원히 다시 안 올지 누가 압니까?
그리고 오늘 아침 특별히 나라를 생각하며 기도하는 주일인데, 깊이 생각해 보면 지금은 이렇게 영적 방면뿐만 아니고 사상적 방면에서도 우리가 여호와를 섬길 것이냐? 바알을 섬길 것이냐? 결단을 분명히 내려야 될 시기입니다.
우리 민족의 사상계를 살펴보거나 세계 인류의 사상계를 살펴보아도 대략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와 민족주의를 확립한 이들입니다. 둘째는 노예와 공산주의에 완전히 사상적으로 노예화한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그 중간에서 머뭇머뭇 작정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유감이지마는 우리 남한에도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더러 있지 아니한가 생각됩니다. 거기에는 또한 이유가 없지 않을 줄 압니다. 과거 十년간에 부패된 이씨 정권이 너무 행정적으로 실패한데 원인이 없지 않아 있는 줄 생각합니다. 또한 四월 혁명 이후에 새로운 정권이 수립되기는 되었지마는 아직까지 질서가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각 방면에 사회가 혼란하고 실직자는 거리에 범람하게 되는 이러한 현상을 당할 때에 여러 사람이 말하자면 환멸을 느끼는 현상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해서 북한의 공산당들은 갖은 기만적 선전 공세를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경제를 원조하겠다, 실직자에게 직업을 주겠다. 한국 특별히 남한에서 전기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하니까 전기를 보내준다, 서신 왕래를 피차 하도록 하자. 문화 교류를 하도록 하자고 그네들은 말합니다. 이와 같은 이 기회를 노려서 기만적 선전에 귀가 솔깃한 그런 이들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아무렇게 해서라도 우선 남북 통일을 해 놓고 볼일이야. 중립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특별히 六·二五의 실제 경험이 없는 어린 청소년 학생들 사이에 이런 사상이 없지 않아 있는 것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세요. 그들이 그렇게 동포애에 불타서, 사실 남한 동포들을 사랑해서, 경제적으로 도와줄 마음이 있다고 하면 왜 애당초 一九四七년에 그렇게 필요한 전기를 끊어버렸습니까? 압록강에서 발전되는 전기는 한국뿐 아니고 만주 일대에 다 쓰고도 남습니다. 왜 끊어버렸습니까? 기억하세요. 그들은 계급은 압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압니다. 그러나 민족은 모릅니다. 그들에게 동포애니, 조국애라고 하는 말은 붙일 수도 없는 말입니다.
남북이 교류해서 실업자를 구제해 주겠다고 하는 말은 실업자가 많은 남한 사람에게 그럴 듯한 말입니다. 또 사실 북한에 가게 되면 직업이 없을 염려는 없습니다. 우리 지금 남한에 실직자가 많지마는 제일 실직자가 많은 것이 대학 졸업자라 합니다. 대학 졸업생들, 신학 졸업생들까지라도 북한에만 간다면 제일 먼저 사동 탄광과 안주 탄광에 모조리 집어넣을 겁니다. 거기서는 데모도 못합니다. 탄광에 들어가서라도 내가 노력으로 내 생활을 개척할 정신이 있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남한에서도 밥 굶지 않을 줄 생각합니다.
문화를 교류하고 서신을 서로 왕래하자고 하는 말이 가족이 분산된 사람과 오래 소식 모르는 가정에게 얼마나 달콤한 이야기입니까?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렇게 인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면 왜 十년 전에 수천 명을 납치해 놓고 十년 동안이나 그렇게 소식을 알게 해 달라고 국제 적십자사를 통해서 암만 교섭했지마는 왜 지금까지 마이동풍의 태도를 가집니까? 속지 마십시다. 이것은 다 침투 작전, 침략, 적화 통일의 야망을 위한 기만선전 뿐입니다. 남한의 자유를 말살하려고 하는 흉계입니다.
특별히 四월 혁명 이후에 새 정부가 수립되어서 이 앞으로는 민주적 자립이 잘 건설될 희망이 보이니까 이런 흉계를 더욱 강하게 하는 겁니다. 六·二五의 남한 무력 침략이 실패한 지 근 十년이 되니 다시 침략의 독아(毒牙)를 내미는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그들은 무신론자들입니다. 우주의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릅니다. 그들은 유물론자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같이 물질로 된 동물인 줄 압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재래의 도덕을 일체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선이 무엇이냐? 그들의 선에 대한 정의는 공산당에 승리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다 선이요, 무엇이든지 공산당에게 해를 주는 것은 악이라고 그럽니다. 배신이니, 기만이니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도 공산당에 유리하면 그들에게는 선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꿈은 공산 독재를 통해서 남한을 정복할뿐더러 세계를 정복해 보자는 것이 그들의 꿈입니다. 그 사회에는 우리가 아는 자유라고 하는 것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신교의 자유는 말할 것 없고, 언론의 자유나, 집회의 자유나, 출판의 자유나, 거주의 자유나, 직업의 자유나, 아무 자유가 없습니다. 그들의 사회는 오직 공포 아래에서 노예와 강제 노동 아래에 구사되는 생활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물론 직업은 다 있습니다. 종의 직업은 다 있습니다.
그들이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를 침략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우선은 침투올시다. 오열을 침투시켜서 공산주의가 좋다고 선전합니다. 그래서 그 침투 작전을 통해서 그 나라 안에서 거기에 찬동하는 사람이 좀 있게 되면 그 다음에는 협상하자고 그럽니다. 협상하게 되면 그 다음에 사로 합작해서 서로 정부를 세우자고 합니다. 합작해서 어물어물 하다가 그 동안 무력을 양성해 가지고는 무력으로 온전히 정복하고 맙니다.
이 방법으로 그들이 중국 전토를 정복하였습니다. 협상하자, 국공 합작하자, 뒤로는 소련서 무기만 가져왔습니다. 어물어물 하는 동안에 무력으로 다 정복하였습니다. 그 방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온전히 적화시켰습니다. 그 방법으로 지금 라오스를 침략하는 중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오열의 침투를 삼가야 됩니다. 이 오열은 각계 각층에 침투해 들어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통일을 원합니다. 특별히 북한에서 온 분이 우리 가운데는 대다수인데 북한에서 온 사람으로서 여러 친척이 거기에 있고 선친의 무덤이 다 거기에 있는데 거기서 온 사람으로서 누가 남북 통일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보다도 남북 통일을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이 한 가지는 있습니다. 이것은 꼭 민주 통일이어야 합니다. 자유가 승리하는 통일이어야 됩니다. 이 민주 통일에 확실한 보장이 없는 통일론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소위 중립 통일론은 첫째로는 한국의 지리적 조건을 자세히 살펴보지 못하는 사람들, 둘째로는 우리 한국 국민의 정도가 어떻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셋째로는 공산주의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잠꼬대뿐입니다. 중립 통일을 해서 과연 남한의 자유가 유지될 것 같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들이 十년 전에 무력으로 六·二五를 통하여 남한을 정복하려고 해 보았습니다. 그 때의 한국 청년들과 우리 우방 자유 十六개국의 백만의 청년들이 그 귀한 피의 값을 지불하고서 우리 남한의 자유가 겨우 보장되었습니다. 이제 이 남한의 자유 확보에 위험을 가져오는 어떠한 사상도 우리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은 사상에 대해서는 생명을 걸어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꼭 자유로 살아 갈 수 있는 노선을 확립해야 합니다. 여호와냐, 바알이냐? 자유냐 노예냐? 우리는 자유를 선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섭니다.
이 때에 힘쓸 것은 몇 가지가 있는 줄 압니다. 제일 먼저 정부와 국민이 일치 단결해서 데모는 그만하고, 이 자유 확보와 민주 건설에 매진해야 됩니다. 정신을 차리고 단결해서 적극적으로 민주 건설에 매진해야 될 것입니다. 둘째는 특별히 정부 당국자들은 과감한 경제 정책을 써서 실직자들에게 직업을 주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셋째는 과감한 사회 정책을 써서 극빈자의 생활을 확립하도록 대책을 수립해야 될 것입니다. 넷째로는 혁명의 뒤처리를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또 적은 범위 내에서 그치고 적극적으로 건설에 총력을 집중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상의 노선을 분명히 해야 우리 민족의 백년, 아니 천년 대계에 그릇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잘하면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민족에게 자유를 주시고 또한 통일을 주실 날이 확실히 올 줄 ale습니다.
언제든지 모사는 재인(謀事 在人)이나 성사는 재천(成事 在天)입니다. 순천자(順天者)라야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마지막에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호와냐, 바알이냐? 자유냐, 노예냐? 우리는 든든히 바로 서서 우리 민족의 자유에 대하여 그릇됨이 없어야 되겠습니다. (一九六0년 十一월 二十七일)

Ⅳ-18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 ―영락교회 창립 十五 주년 기념 예배―
(사도행전 二장 一-四, 三十七-四十七절)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二·四十二)

오늘 아침은 본 교회 창립 十五주년 기념 예배로 우리가 모였습니다. 一九四五년 十二월 二일, 약 二十여 명의 신앙 동지가 베다니 전도 교회라는 이름 아래에서 그 때에 천리교(天理敎) 신전으로 쓰던, 현재 베들레헴으로 개장한 그 집 한 모퉁이에 모여서 예배한 것이 어제인 듯 기억에 새롭지마는 벌써 十五년이란 긴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간 걸어온 자취를 잠깐만 회고할 때에도 실로 감회가 깊습니다. 과거 十五년 간 우리 민족은 가장 혼란한 참담한 시대를 지내왔습니다. 三八선이 국토를 양단 했고 六·二五의 참변, 三년이나 계속되는 전쟁을 지내왔고 그 밖에 가지가지의 불의의 사정이 접종한 가열한 체험을 우리가 같이 겪어 왔습니다. 기러한 와중에서 하나님께서 본 교회를 세우시고 복잡하고 혼란한 사회에서 이 때까지 길러주시고 지켜주셔서 오늘 제 十五주년 기념 주일을 맞이하게 될 때에 실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격한 것밖에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세세 에 드립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생각이나 기대를 초월하십니다. 우리가 이 교회를 창립할 때에는 三八선이 이렇게 오래 계속될 줄은 생각지 못했고 따라서 피난민이 이처럼 북한에서 남한으로 많이 내려올 줄도 알지 못했고 물론 이와 같은 예배당을 지을 계획도 그 때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다 이렇게 친히 이루어 주신 것뿐입니다. 사람의 지혜나 예지를 초월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하신 것을 우리는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죄악을 초월 통치하시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은 인간의 불행과 재난을 초월하시는 사실을 다시금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공산당들은 우리의 국토를 양단하고 무고한 신자들을 협박해서 북한의 성도들은 많은 수가 정든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피난민의 운명을 당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건마는 긍휼이 풍부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이곳에 광야의 반석 같이 이 교회를 세워 주시고 눈물 골짜기에서 샘터가 되게 하셨습니다.
성경 말씀처럼『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富饒)함이여, 그의 판단을 측량하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이는 만 군의 주께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세세 에 있으리로다. 아멘.』
창립 기념일을 축하합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교회의 생일이올시다. 우리 교회가 난 날이요. 우리가 다 생일을 축하합니다. 우리가 다 자녀를 기르지마는 아이들은 생일을 당하면 흔히 부모에게 무엇을 청구하는 풍속이 있습니다. 새 옷을 해달라고, 새 가방을 사달라고 한다든지, 좋은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든지 합니다.
캐나다 토론토 시에 가며 거기에 피플스 춰취(People's Church, 대중의 교회라고 번역합니다)라고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가 특별히 알려지게 된 것은 이 교회는 교인수가 약 三천 명 모이는 교회인데 이 한 교회에서 세계 각지에 선교사들을 약 三五0명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교회 목사는 오·제이·스미스(O. J. Smith) 라고 하는 목사인데 이 분이 지금은 연로하셔서 몇 해 전 은퇴하시고 자기 아들이 그 교회의 목사가 되어서 자기 아버지를 계대(繼代)해서 시무하고 있는 그런 교회입니다. 이 스미스 목사는 저도 만나본 일이 있지마는 참 은혜가 많은 분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그의 저서 한 권을 읽는 가운데서 자기가 어떻게 은혜 받은 이야기를 간단히 쓴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그것은 여러 해 전에 자기가 젊은 교역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할 때에 어떤 자가 생일날, 특별히 생일날의 염원으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의 제목은 한마디로 말하면『하니님이시여, 그저 조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면서『나는 세상의 돈도 요구하지 아니합니다. 무슨 명예를 요구하지 아니합니다. 세상의 향락은 멀리한 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내가 한 가지 소원이 꼭 있는데 이 소원은 이 사람이 비록 부족하지마는 아버지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이와 같이 간절한 기도를 드리면서 그는 어떻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먼저 두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 님의 말씀과 같이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도록 작정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나로 하여금 옛날 에녹과 같이 언제든지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루만 말고 이틀만 말로 일생토록, 몇 시간만 말고, 매분 매초, 언제든지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슬퍼하실 만한 일은 어떻든지 생각이라도 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성결하고 옳은 생활로 나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나로 하여금 일부분만 하나님께 바치지 말고 내가 갖고 있는 대로 백 퍼센트, 제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의 생활을 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그 때부터 그런 결심을 하고 그대로 꼭 살도록 애를 썼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 그 목사의 생일에 드린 기도가 지금 보면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과연 일생토록 실수 없이 경건한 목회를 하고 그를 통해서 그 교회가 많은 은혜를 받아서 열매를 많이 맺은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우리 교회의 창립 十五주년 생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한 가지 염원을 세우고 여러분과 같이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 영락교회를 축복해 주셔서 이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기원입니다.
자 여러분, 옛날 교회를 보든지, 오늘날 교회를 보든지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기를 하지마는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을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에 나타나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가령 에베소 교회에 살아 계신 주님께서 편지를 보낼 때에『너희들의 여러 가지 잘하는 것도 있지마는 내가 보니 너희는 처음 사랑을 저버렸느니라. 너희가 어떻든지 처음 사랑을 회복해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게서 등대를 옮기리라.』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혹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할 때에 이런 말로 하였습니다.『너희들 생각에는 우리는 부유하다, 우리는 부족한 것이 없다, 우리는 배부르다, 우리는 모든 것이 넉넉하다, 이와 같이 생각하지마는 실상은 너희가 가난하고 너희가 굶주리고 너희가 헐벗었느니라. 너희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고 그렇게 미지근해 있으니 너희들이 회개하지 아니하고 새롭게 뜨거운 열심을 내지 아니하면 내 입에서 너희들을 부득이 토할 수밖에 없다.』그런 경고를 받은 교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교회를 어떠한 교회입니까?
여러분, 아이를 많이 길러 보신 분은 알지마는 아이들이 七, 八형제라고 해도 특별히 부모의 마음에 꼭 드는 아들과 딸이 있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교회,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이것으로 오늘 우리 교회 창립 十五주년, 교회 생일의 염원을 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앞으로 이런 교회가 꼭 되기 위해서 각자가 노력합시다.
가장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교회가 되려고 하면 이 교회의 교인 되는 하나 하나가 지금 스미스 목사의 기도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꼭 드는 교회가 어디 있을까? 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제 생각에 들어오는 교회는 오순절 날 一二0 명이 모였던 그 교회인데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온 교회가 은혜 받은 그 초대 교회가 제 마음 가운데 들어 왔습니다. 사실 보니까 이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교회올시다. 그런데 이 교회의 특색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이 교회 교인들은 다 합심해서 열흘 동안이나 간절히 기도한 결과로 교인 하나 하나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사도만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평 교인들도 같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남자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자도 같이 받았습니다. 노인들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청년들도 같이 받았습니다. 그 자리에 아이들이 있었다고 하면 아이들도 받았을 줄 생각합니다. 하나 하나가 똑같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은 것은 어떠한 특수한 계급의 특권이 아닙니다. 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소하신 선물이올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절히 항상 합심해서 기도하십시다. 우리 영락교회 교인은 한 사람도 거듭 나지 못한 사람이 없고 누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거듭 나고 성결하고 능력 있는 교인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도록 노력합시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는 교인 전체가 성령이 충만합니다.
둘째로는 이 교회를 보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가정에 모여서도 혹은 성전에 모여서도 항상 기쁨으로 떡을 떼어먹으며 성도의 교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고 그랬습니다. 이것을 보니 이 교회야말로 사랑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제일 첫 열매는 사랑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신인 까닭으로, 하나님은 사랑인 까닭으로 성령을 받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제일 먼저 나타나는 열매는 사랑입니다. 여러 가지 은사가 많지마는 제일 귀한 은사는 사랑입니다. 믿음이 반드시 있어야 되겠고 소망도 반드시 있어야 되겠지마는 그 가운데도 제일 큰 것은 사랑입니다. 이 초대 교회는 성령의 첫 열매, 모든 은사의 제일 큰 은사, 믿음과 소망 가운데서도 제일 되는 사랑의 은사를 받아서 사랑이 충만했습니다.
오늘 우리 영락교회도 이와 같은 사랑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 기도합시다. 그 때에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성령의 축복을 받아서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이 어떻게 아름답든지 전에 있던 말로는 별로 기록할 수가 없어서「코이노니아」라고 하는, 헬라 말 중에 특별히 새로운 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성도의 교제, 특별히 성도들이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가운데서 하는 교제를 코이노니아 라고 하는 새로운 말을 써서 묘사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하십시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합니다. 죄를 용서합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가리어 줍니다. 그런 까닭으로 사랑이 있는 곳에 화평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단결이 있습니다. 오늘 이 기쁘고 즐거운 우리 교회의 생일을 당해서 우리 영락교회 교인들로서 한 사람이라도 형제 형제간이나 가매 자매간에 어떤 오해가 있든지 어떤 담을 쌓아 둔 것이 있다고 하면 오늘을 계기로 해서 온전히 헐어버리고 성령의 첫 열매, 사랑의 충만한 이 교회를 만드는데 협력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도행전 四장 三十二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고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믿는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있는 것을 서로 공용하는데 어느 누구라도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것이 아니면 누구 것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여러분 다 말씀하십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 내게 속하지 아니하고 실상은 하나님께 속하는데 나는 다만 맡아서 쓰는 청지기뿐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 깨닫습니까? 신구약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청지기의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소유하십니다.
우리 인간의 영혼까지 하나님께 속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합니다. 사람이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잠깐 세상에 와서 사는 동안데 하나님의 것을 빌어 가지고 쓰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잠깐 맡아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관리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무엇이 있든지 내 뜻대로 쓰면 아니 됩니다. 좋은 청지기는 언제든지 주인의
뜻대로 그 물건을 처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받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써야 되고 이 다음에 하나님께 가서 총결산할 때 심판할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은혜 받은 초대 교회는 이 원리를 분명히 깨달아서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자기 있는 것을 가지고 서로 봉사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재주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지식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기능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시간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재물이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실상은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일시 동안 맡아서 쓰는 것뿐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써야 되겠고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위해서 봉사하는데 반드시 써야 되겠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가 되려고 한다면, 그 교회에 속한 모든 교인들이 이 원리를 분명히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오늘가지 이 원리를 분명히 깨닫는 사람은 물질에 대해서는 제일 먼저 十분의 一을 하나님께 바쳐서 십일조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피얼스 박사와 같이 여러분이 왔지마는 빌 존스라고 하는 실업가도 한 사람 따라 왔었습니다. 이 분이 세계에 다니면서 특별히 실업가나 정계에 유명한 분이나 이런 이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이 분의 목적이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반도 호텔에서 여러분을 다 청해서 한번 전도를 했습니다. 이 분의 간증하는 말을 간단히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이 분은 본래 믿는 가정에서 자라나서 주일학교에 좀 다녔지마는 사업 계로 나가면서부터 주를 멀리했습니다. 여러 가지 죄악에 빠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 가지로 가정에 풍파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점점 자기 부인과 애정이 멀어져서 가정이 파탄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어떤 가까이 잘 믿는 친구의 충고를 받아서 다시 믿음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자기의 아내도 같이 회개하고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의 가정은 새로운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의 사업은 전보다 더욱 축복 받아서 더 잘 됩니다. 처음에는 십일조를 시작했지마는 지금은 十분의 八을 다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 바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 수입이 매달 二十만 달러나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가 되려고 하면 누구든지 자기 재물을 자기 것으로 알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알아서 꼭 하나님의 뜻대로 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때 교회를 보면 이렇게 봉사할 때에도 요구가 심한 곳에 먼저 봉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 과부가 제일 불쌍하니까 제일 먼저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도 경로 원도 경영하고 보린 원도 경영하고 모자원도 경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나 사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이들을 먼저 도와주는 교회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래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넷째로는 이 때 一二0 문도 들은 하나 하나가 다 전도 인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다 전도하는 교회였습니다. 베드로 혼자서 물론 첫 날은 연설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개인 전도는 하나 하나가 다했습니다. 스데반은 본래 집사였지마는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했습니다. 빌립보도 본래는 집사이지마는 사방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밖에 하나 하나 다 무명으로 사방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함으로 안디옥에도 교회가 설립되었고, 다메섹에도 교회가 설립되었고, 로마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다 그 이름은 우리가 모릅니다. 하나 하나가 다 전도 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가 되려고 하면 우리 하나 하나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내가 개인으로 전도할뿐더러 힘을 합해서 같이 복음을 전파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내가 남자면 남전도회에 가입해야 되겠고, 여자면 여전도회에 가입해야 되겠고, 내 친히 몸으로 같이 전도하기 위해서 노방 전도 대에도 가입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꼭 맞는 교회가 되려고 하면 우리 교인은 누구든지 전도의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 중 어느 단체에든지 한 단체에는 다 가입해야 되겠습니다.
지금 三十여 개 처 개척 교회가 있다고 자랑할 것은 못 됩니다. 저 태국에 선교사 한 사람 모낸 것, 그것 자랑할 것이 조금도 못됩니다. 지금도 깨닫습니까? 다른 교회에서 한 교회에서 三五0명의 외지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의 생활이 나은 줄 압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아도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못하는 것을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우리 기도합시다. 우리 교회 장로들은 열 한 사도들이 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교회 권사 님들이나 남녀 집사들은 옛날 옛날의 일곱 집사, 스데반이나 빌립이 왜 못되겠습니까?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우리 교회 청년들은 옛날 디모데나 실라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세요. 모든 여신도들은 옛날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가 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一九六0년 十二월 四일)

Ⅳ-19 성경을 상고하는 교회 (디모데 후서 三장 一-十七절)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행 十七·十一-十二)

지난주일 창립 十五주년 기념 주일을 당해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라는 문제 아래에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연상하면서 특별히 세 가지 점을 우리가 생각했습니다. 그 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 선한 청지기로서 서로 봉사한 교회입니다.
오늘 이 성서 주일을 당해서 한 가지 더 생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가 되려고 하면 성경을 상고하는 교회가 되어야 될 줄 생각합니다.
베뢰아 교회는 특별히 一세기에 있어서 이방에 있는 교회들 가운데 이 점으로 모범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였다고 하는 말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이와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사람이 많아져서 그 교회가 크게 부흥한 것입니다. 오늘부터 교회도 이 성경을 상고하였던 베뢰아 교회를 본받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도서가 범람한 시대입니다. 어디 가든지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이 많은 책 가운데 아직도 가장 많은 사람이 간절히 사모하는 책이 어떤 책이겠는가? 두 말할 것도 없이 성경인 줄 압니다. 가장 만은 사람이 날마다 상고하는 책이 성경인 것입니다. 지금도 성경은 가장 많은 사람이 읽는 책이올시다.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올시다.
가장 많은 방언으로 세계 각 민족, 각 종족의 방언으로 번역된 책이요, 또한 번역되는 중에 있는 책입니다. 각계 각층이 이 성경을 애독합니다. 남녀의 구별이 없고 노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분야의 차별도 없습니다. 빈부귀천의 구별도 없습니다. 또한 어느 때나 읽는 책입니다. 기쁠 때에도 읽고 슬플 때에도 읽습니다. 젊었을 때에도 늙었을 때에도 읽습니다. 살 때에도 읽고 죽을 때에도 읽는 책입니다.
성경을 어찌하여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애독하느냐? 그것은 물론 중대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올시다. 우리는 이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침묵을 지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선 그가 지으신 대 자연계를 통하여 항상 말씀하십니다.
시편 十九편을 기록한 저자가 노래한 바와 같이『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상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여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양심을 통하여 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지적하십니다. 도덕의 근본 원칙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역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천학자의 지역을 통해서 그의 존재와 그의 능력이 어떠한 것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뿐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복잡다단한 듯 하지마는 변태부상한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도 역기 말씀하십니다. 역사를 통해서 그의 공의를 나타내시고 그의 섭리를 나타내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신학 상으로 자연 계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연 계시로써 말씀하신 것만은 아닙니다. 흔히 신학 상으로 말하는 대로 특별 계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옛날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렀습니다.』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내가 보여줄 땅으로 나아가라.』언약과 같이 부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특별히 하나님을 나타내시고 자기의 성품과 자기의 뜻을 그에게 보여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또한 이삭에게도 특별히 나타내셨습니다. 여러 가지 결점과 죄가 있지마는 야곱 같은 사람에게 대하여서도 특별한 의미에서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지구상의 여러 종족 가운데서 특별히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자손을 택해서, 그들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성품과 그의 뜻을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모세를 보내시고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은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에서 발견하는 어떤 개인의 전기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단순히 그들의 생활을 알기 위해서 우리에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기록하여 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생활을 통해서 이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특별히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그 一장 一절에 기록한 대로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一장 十四절에 있는 대로『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다가, 마지막에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그 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눈으로 분명히 하나님을 보고 알 수 있게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을 기록한 책이 곧 항상 읽는 신구약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구약 성경은 보통 세상 사람들이 쓴 책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방금 읽었지마는 디모데 후서 三장 十六절에 말씀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 성경이 기록되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감동 혹은 영감이라고 한 말은 하나님께서 친히 숨을 쉬셨다 하는 그런 문자 적 어의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숨결이 통하는 책입니다. 우리 사람이 말할 때에 숨결을 통해서 말하지 않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때에 숨결을 통해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이 성경은 하나님의 숨결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신 그 말씀이 이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 말씀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을 알고 깨닫기 위해서 성경을 공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은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혹 간단하게 몇 가지로 이 말씀이 가장 중요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간추려서 우리에게 지시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가령 어떤 분은 말하기를 이 신구약 성경을 가장 간단하게 말한다고 하면, 네 마디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첫째 이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하나님을 우리에게 말씀하는 책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신령하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전능하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우주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한 마디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로는 이 성경은 우리 인간에 대하여 말씀하신 책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지음을 받고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고, 사람이 어떻게 자유를 가지게 되었고 사람이 어떻게 죄를 범하게 되었고 사람이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비참한 자리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셋째 말씀은 이와 같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주를 보내주시고 그 구주 되시는 예수께서 어떻게 나시고 어떻게 자라시도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재림하였다는 구주에 대한 말씀을 하는 책이라고 합니다.
넷째로는 이 성경은 이렇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를 사하여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천국의 축복을 주시는 그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책이라고 말씀한 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간단히 말하면 이 책 가운데서 첫째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둘째로 내 자신을 만납니다. 셋째로 구주를 만납니다. 넷째로 영생을 얻습니다.
또 어떤 분은 이렇게 간단히 말했습니다.『하나님께서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말씀해주는 마디가 네 마디가 있다.
첫째는 내가 너희를 지었노라.
둘째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
셋째는 내가 너희를 수속하였노라.
넷째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집을 준비하였노라.』
또 이 네 마디 말씀을 간추려서 한 마디로 한다고 하면『우리가 이 성경 가운데서는 오직 한 분의 얼굴을 만날 수가 있는데 그 얼굴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니라.』이렇게 말한 이도 있습니다. 신구약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 죄인인 인간들에게 구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책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는 어떠하냐? 성경은 이 관계를 여러 가지 비유로써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첫째로 이 성경이야말로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했습니다.『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니라.』우리 인간의 영혼은 이 말씀이 아니면 살수 없는, 이 성경이야말로 우리의 생명 양식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 다른 글에는 이 성경이야말로 우리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로 믿으려고 할 때에는 이 성경을 읽어야 바로 믿고, 바로 행동하려고 할 때에도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신구약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곳에는 성경을 좌우에 날선 검이 되어서 우리의 신혼 골수를 쪼게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내 자신을 여실히 봅니다. 내 속에 숨은 죄악까지 분명히 깨달아 알려고 하면,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또한 어떤 데는 성경을 볼이라고 기록한 데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의 모든 더러운 죄악을 살아 버리려고 하면 이 성경을 읽어야 살아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곳에서는 성경은 성신의 검이라고 기록한 데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악한 마귀의 모든 시험을 쳐서 부수고 이기려고 하면, 모든 시험을 극복하려고 하면, 성경을 읽어야 모든 시험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성경을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지혜와 영생을 가져오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이와 같이 사도 요한 은 二十장 三十一절에 기록한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 인간 심령의 깊은 요구를 다 만족히 채워 줍니다. 철학자의 깊은 욕구가 무엇입니까? 지혜입니까? 그러면 참 지혜를 이 페이지 가운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정치가의 깊은 욕망이 무엇입니까?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세계 평화입니까? 그 비결을 이 책 가운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교육가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위대한 인격을 양성하는데 있습니까? 그 비결은 온전히 이 책 가운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독한 자가 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참된 친구를 발견합니다. 어두움에 헤매는 자가 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참된 빛을 찾습니다. 길을 잃어버린 자가 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찾게 됩니다. 영으로 굶주린 자가 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생명의 양식과 생명수를 찾게 됩니다. 슬픈 자가 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그 심령에 위로를 받고, 병든 자가 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건강의 비결을 여기서 발견하고, 실패한 자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성공의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되고, 낙심한 사람이 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새로운 소망을 얻게 됩니다. 나약한 자가 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새로운 담력을 얻게 되고,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이나 오늘이나 동양이나 서양을 물론 하고 모든 성도들은 이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기를 항상 즐거워했습니다. 이 말씀은 꿀과 같이 달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이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성경을 모르고 예수를 믿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열심이 좋지마는 지식이 없는 열심은 오히려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방금 어제 아침에도 서울 장안에서 어떤 개인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모든 사회의 빈축을 사는 난동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 심히 민망한 감정가운데서 우리 사회를 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근심하시고 모든 사람들의 빈축을 사는 이와 같은 행동이 어디서 일어나느냐고 하면 성경을 모르고 믿는 까닭에서입니다.
열심은 있으나 지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가 되려고 하면 성경을 상고해야 되겠습니다. 성경을 공부해야 되겠습니다. 성경으로 생각하고, 성경으로 말하고, 성경으로 살고, 성경으로 죽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과연 이 앞으로 사람이 살 만한 사회가 되고 우리 국가가 과연 민주주의 국가로서 건전한 발전을 이루려고 하면, 우리 민족의 사상이 성경으로 화해야 되겠고 우리 민족들의 생활이 성경의 표준에 맞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날이 오게 하려고 하면 우리 먼저 예수를 믿고 사람들이 내가 이 성경을 연구하고, 이 성경대로 말하며, 내가 이 성경대로 살고, 내가 이 성경을 전파하여야 이과 같은 축복을 우리가 받을 것입니다.
오늘 이 성서 주일을 당해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직도 성경을 매일 읽지 못하시는 분이 있으면, 오늘부터 작정하시고 매일 성경을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저 베뢰아 사람들이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날마다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 가운데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서 반드시 예배를 드리지마는 주일날 와서 성경 공부를 안 하시는 분은 이 성서 주일을 비롯해서 성경도 반드시 공부하시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공부해야 내가 이 진리를 배웁니다. 성경을 상고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 노력하십시다. (一九六0년 十二월 十一일)

Ⅳ-20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누가복음 二장 一-十四절)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제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二·十-十一)

예수 님의 탄생을 제일 먼저 선포한 이는 주의 사자, 곧 천사입니다. 그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이들은 베들레헴 근처에서 양을 치던 미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때는 고요한 밤이었습니다.『무서워 말라.』이는 천사의 말의 첫 마디입니다. 목자들은 주의 영광이 두루 비칠 때에 무서워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때의 목자들뿐만 아니었습니다. 언제든지 죄 많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가까이 나타날 때에는 다 두려워한 것이 사실입니다. 시내산 기슭 떨기나무 불꽃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모세는 두려워서 얼굴을 가리운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성전에서 하나님의 보좌와 영광을 직면하게 될 때에『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 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옛날과 같이 이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두려워하지 말라.』크리스마스가 인류에게 주는 첫 메시지는『무서워하지 말라.』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으로는 죄로 말미암아 오는 내심의 불안과 밖으로는 로마 제국주의 아래에서 또는 악한 헤롯왕의 정권 아래에서 언제나 공포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첫 크리스마스 새벽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자를 통하여『무서워하지 말라.』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세계 인류는 무서운 죄악 가운데서 떨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불안과 공포 가운데 쌓여 있습니다. 十억에 가까운 많은 사람들이 철의 장막 배후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자유 세계의 국민들도 도처에서 일어나는 혼란과 쿠데타와 혁명, 점점 높아만가는 원자탄 유도탄의 그림자 아래에서 허덕이는 모습은 옛 폼페이의 전야를 상상하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一九六0년 크리스마스 새벽에 주의 사자는 한 번 더 말씀하십니다.『무서워하지 말라.』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우주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의 바퀴를 쥐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그는 그 백성을 잊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그 약속을 저버리지 아니합니다. 약속하신 대로 그는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는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흉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들으세요.『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좋은 소식이라는 말은 성경에 있는 대로「유앙겔리온」즉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말로 바꾸어 말하면「좋은 뉴스」란 말입니다. 크리스마스는 큰 기쁨의 뉴스가 전하여진 날입니다.
전에 아테네에 살던 사람들은 항상 새 것을 듣기 좋아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다 뉴스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라디오를 듣고 텔레비전을 보고 들으며 신문을 사서 읽습니다. 그런데 이 뉴스 가운데는 큰 뉴스도 있고 작은 것도 있으며, 좋은 뉴스도 있고 좋지 못한 것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또한 어떤 뉴스는 크기는 하지마는 나쁜 뉴스가 있고 또한 어떤 뉴스는 그렇게 크지는 못하지만 좋은 뉴스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떤 뉴스는 한 사람에게는 크고 좋은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것도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령 지난 一九四五년에 일본이 항복하였다고 하는 뉴스는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크고 또한 기쁘고 즐거운 뉴스였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에게 있어서는 크기는 하지만 그렇게 좋은 뉴스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우주가 생긴 이후 이 인류가 지구에 살게 된 이후에 지금까지 제일 큰 뉴스, 제일 좋은 뉴스가 무엇인지 생각하여 보셨습니까? 전 인류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가 무엇인지 생각하여 보셨습니까? 자세히 들으세요. 첫 크리스마스 새벽에는 이 우주의 최대의 가장 기쁜 뉴스가 전하여졌습니다. 이 뉴스는 온 백성에게 미칠 전 인류를 위하여 준 뉴스입니다.
여러분, 그 내용을 알기 원하십니까? 들어보세요. 누가복음 二장 十一절에 주의 사자는 계속하여 말합니다.『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고다 그리스도 주시니라.』요한 복음 三장 十六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천지의 대 주재되시는 하나님이 온 세계 인류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독생자를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보내신 이 사실, 얼마나 큰 사건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이 우주의 최대 뉴스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크리스마스는 이 최대의 뉴스가 전하여진 아침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최대의 뉴스를 들었습니까? 이 가장 큰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까? 작은 뉴스는 항상 듣지마는 이 최대의 뉴스를 듣지 못한 분은 우리 가운데 없습니까? 다른 뉴스를 아무리 들었다고 하지마는 이 최대의 뉴스를 듣지 못하였으면 그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아니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보시려고 크리스마스 새벽에 잠을 자지 아니하시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까? 바람에 불리는 갈대입니까?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까?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려고 하면 궁궐에 가서 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였습니다. 옳습니다. 여러분은 이 우주의 최대의 가장 기쁜 뉴스를 들으려고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하늘의 보좌를 내어놓으시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마구간에 나셔서 구유에 첫 자리를 정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마음 상한 자를 고치시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해방을 주시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심원의 날을 전파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시되 사랑을 주어 그 죄를 대신하여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여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굶주린 자에게는 생명의 만나를 주시고 목마른 자에게는 영생의 물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불안과 공포와 애통과 사망에 헤매 이는 전 인류에게 자유와 평화와 행복과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소식을 들었습니까? 이 복음을 분명히 듣고 깨달으십니까? 이 우주의 최대의 뉴스를 분명히 듣고 이대로 믿습니까? 그러면 족합니다. 옛날 성현의 말씀에『조문도면 석사라도 가이니라(朝聞道, 夕死, 可而.)』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여러분께서 오늘 이 새벽 시간에 이 우주 최대의 뉴스인 기쁜 복음을 분명히 듣고 이대로 믿는다고 하면 오늘 저녁에 죽어도 유감이 없습니다. 왜? 그에게는 이미 죽음이 없습니다. 사망에서 나와서 생명으로 옮겨갔습니다. 그야말로 이미 불멸의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오! 귀 있어 들을 자는 들을지어다.』 (一九六0년 十二월 二十五일·새벽)

Ⅳ-21 만능의 생활의 비결 (빌립보서 四장 四-十三절)

『내가 비천에 처할 줄고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四·十二-十三)

오늘 아침은 주님의 날이면서 또 새해의 아침입니다. 우리는 다 새해에 새로운 축복을 기원합니다.
一九六0년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과거에 속합니다. 성공이건 실패이건, 기쁨이건 슬픔이건 이미 역사에 속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새해는, 一九六一년은 윌 앞에 있습니다. 미지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이 해에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무슨 일을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무슨 일이나 어떻게 당하는 것이 실상은 더 중요합니다. 이미 읽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체험을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내가 비천(卑賤)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우리가 무슨 일을 당하든지 그것을 바로 당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면 무슨 일을 당하는 것을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신년에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생활의 비결을 배운다고 하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구역대로는『내가 능치 못한 것이 없느니라.』오늘 아침 이 말씀을 묵상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각 사람 심령 위에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물론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세상의 어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기의 권력을 과신하고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같은 사람, 한 번은 자기 궁전 지붕에 올라가서 화려하게 건설된 바벨론 성중을 돌아보면서 스스로 하는 말이『내 권세로, 내 권능으로 이 모든 성을 다 지었노라!』교만한 말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 말은 오래 못 갑니다. 그런 말 한 지 며칠 후에 기록한 대로 그 느부갓네살 왕은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의 정신은 잃어버리고 짐승의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사람 사는데 살지 않고 들에 나가서 들 나귀와 같이 살며 소처럼 풀을 먹도 오래 산간에서 살아서 마지막에는 머리털이 독수리 털처럼 되었고 손톱이 새 발톱처럼 되었다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자기의 권력을 과신하고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흔히 그렇게 끝을 마칩니다.
우리가 사는 세대에서는 독일의 히틀러 같은 사람, 나치스 운동을 일으켜서 독일의 권세를 잡고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점점 마음이 커져서 교만하여져서 마지막에는 프랑스를 침략한다, 네덜란드를 침략한다. 전 유럽을 침략하기를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세계를 향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줄 알고 제二차 대전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 말로는 불 구렁텅이에서 자살하는 비참한 최후를 가진 것도 우리 기억에 생생합니다.
오늘날 세계의 어떤 사람도 권력을 과신하고 유엔에 와서 구두 짝으로 책상을 두드리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교만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만한 사람의 최후가 어떻게 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 입니다.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줄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은 그런 교만한 사람의 말과는 온전히 뜻이 다릅니다.
또 사도 바울의 이 말은 어떤 그릇된 사상에 사로잡혀서 인간만능론(人間萬能論)을 주장하는 의미도 아닙니다. 대 철학 파 중 스토익학파에서는 특별히 주장하기를 인간의 심령 속에는 우주의 혼이 있는 부분이 있어서 모든 환경을 정복할 수 있는 내재력(內在力)이 풍부히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사상은 많습니다. 유물론적, 인본주의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우리 인간은 지력이 있고 우리 인간은 지력을 통해서 과학을 연구함으로 말미암아 이 우주 안에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주장은 한 가지를 잊어버리고 하는 주장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부패하였다고 하는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악이 있다고 하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교만한 자기 기만의 말을 하는 공상에 지나지 못합니다.
여기 사도 바울이『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이 말은 절대로 자기 스스로를 믿는 말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은 오직 할 수 없는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람의 능력을 과신하는 그런 사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것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보지 아니합니다. 자기도 보지 아니합니다. 오직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겸손히 하는 말입니다. 나는 비록 부족하고 약하지마는 내가 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내가 주안에 있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주님의 능력이 나를 뒷받침해 줄 때에는 나의 능력을 힘입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겸손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또 이 말씀은 성경을 우리처럼 읽고 이론적으로 하는 말도 아닙니다. 자기가 주안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하는 이 노사도가 지금도 감옥 가운데서, 언제 무슨 일이 있을는지 알지 못하면서 기다리는 가운데서 자기가 친히 당하는 체험을 여기에 기록한 것뿐입니다.
고린도 후서 十一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어떠한 일을 당하고 그 일을 어떻게 겪었는지 그 경험을 기록한 데가 있습니다.『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四十에 하나 감한(三十九개입니다)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笞杖)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분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에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니라.』사도 바울이 이런 모든 경험을 통하여 주님께서 자기에게 간단없이 능력을 주실 때에 이 모든 것도 능히 다 할 수 있었다고 하는 말은 여기에 자기의 신앙의 간증으로서 우리에게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문자 그대로 그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킨 사람으로서 자기의 체험을 하는 말입니다.『내가 지내보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는 내가 하지 못할 일이 없더라.』견디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여기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은 분명히 말하면 무슨 뜻입니까? 이런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본문에 기록한 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내게 오는 은혜를 받을 때에는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자족의 생활이 가능하다 하는 뜻이 있는 줄 압니다. 여기에 기록한 대로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배부른 것과 배고픈 것과 풍부와 궁핍에 처할 줄도 아는 비결을 자기가 배웠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할 때든지, 이남에 있든지 이북에 있든지,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자족의 은혜를 배워서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와 찬송의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그 말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비결을 배웠습니까?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자족을 배우고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또 이 말씀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시련과 핍박을 이길 수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지금 읽은 말씀과 같이 매도 여러 번 맞았습니다. 여러 번 죽을뻔 도 하였습니다. 유대 사람에게도 핍박을 받고 헬라 사람에게도 핍박을 받고 여러 거지로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다.
그렇지마는 주안에서 능력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는 이과 같이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困苦)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赤身)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아서 어떠한 외적, 곤란이라고 할지라도 이길 수 있다고 하는 그 말을 여기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 안으로 솟아나는 모든 유혹과 시험도 주안에 있을 때에는 이길 수 있다고 하는 그 말입니다.
로마서 七장을 보면 어떤 의미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그가 보니 그는 옳게 하려고 하는데 그 육신의 다른 죄의 법이 있어서 그가 원하는 것을 못하게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자주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마음 가운데는 간단없는 내적 투쟁이 있었습니다. 항상 충돌이 있었습니다. 충돌이 매우 심각해서 한 번은『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권세에서 나를 구원하랴.』한탄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결론한 말을 보면『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 모든 것을 이긴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은혜를 받았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아직까지도 내적 투쟁으로 말미암아 고민 가운데 있는 이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능력을 받을 때에 능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고약한 성질도 있는 줄 압니다. 나쁜 습관도 있은 줄 압니다. 고약한 성질, 나쁜 습관, 다 주님의 능력 아래서 이긴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을 할 때에 여러 편견에서 해방을 받았다고 하는 뜻도 포함된 줄 압니다. 바울은 본래 편협한 종파 바리새 종파였습니다. 매우 덕이 적고 완고(頑固)와 고집이 있고 성경은 문자주의로 해석하고 독선주의와 배타주의가 충만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한번 주님의 부름을 받아서 회개하고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그런 모든 독선주의, 배타주의, 다 없어지고 그는 사랑과 관용과 관대(寬大)와 자비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히브리라고 하는 그 좁은 테두리 안에만 살던 사람이 그것을 타파해서 그것을 세계적 기독교 운동으로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더 자기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주시는 가운데 이것을 했습니다.
또 주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자기의 사명을 다 할 수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는 복음 전파가 일생의 사명이었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메섹에서도 전파할 수박에 없었고 혹은 예루살렘, 이방 각지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또 그는 각계 각층의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어떤 때는 여자들에게, 어떤 때는 아이들에게, 어떤 때는 학자들에게, 아덴에 가서는 철학자들에게, 어떤 때는 아그립바 왕에게, 어떤 때에는 벨릭스과 베스도에게, 각계각층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어떤 때는 거리에서, 어떤 때는 집에서, 어떤 때는 산에서, 어떤 때는 감옥에서까지 전파했습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주님께서 그와 같이 계셔서 그에게 능력을 주실 때에 능하지 못하신 것이 없이 어디 가나 자기의 책임을 다할 수 있었다고 하는 그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든지 내가 맡은 책임을 다 합니까? 다 할 수 있습니까? 주안에서 능력을 받을 때에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다.
이 비결이 어디 있어요? 단순히 한 마디입니다.『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는 내 안에 있으라. 내가 네 안에 있으리라.』『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힐 수 없느니라.』사도 바울은 문자 그대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었습니다. 그러므로 간단없이 나무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즙을 섭취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간단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신령한 은혜를 받지마는 특별히 은혜 받는 것을 도와주는 방법이 몇 가지 있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주었습니다. 한 가지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주님께로부터 직접 은혜를 받습니다. 또 한 가지는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이 말
씀을 읽는 가운데 우리가 은혜를 받습니다. 또 한 가지는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회에 참석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접촉해서 우리가 은혜 받는 것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성례입니다.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 참여하는 가운데 특별한 은혜를, 그 모든 방법을 통해서 우리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심령이 그리스도와 항상 접촉하게 될 때에는 자연히 우리 마음속에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가 되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우리 마음가운데에 가득히 있을 때에는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당하든지 성령의 열매로서 대하게 될 때에 과연 그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꼭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에는 심히 어려운 일, 위기를 당하면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 모든 제자들을 전도하려 보내면서『너 어떤 사람에게 가 전도할 때에, 어떤 관헌에게 잡혀갈 때에 조금도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 마라. 그 때에 무슨 말 할 것을 하나님께서 네게 가르쳐 주리라.』지혜를 주신다고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에 큰 전도의 문은 열렸지만 여러 가지 난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신령한 가운데 특별히 나타나서 힘을 주었다고 그랬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도하다가 순교할 수밖에 없을 때에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변했다고 그랬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스데반이 눈을 들어보니 멀리 하늘에 하나님의 보좌가 보였고 그 옆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어서서 그를 내려다보는 광경이 마음 눈에 보입니다.
전에 이그나시우스라고 하는 안디옥의 유명한 감독은 그 때 로마에서 크게 핍박할 때에 안디옥에서 붙잡혀서 멀리 로마까지 끌리어갔습니다. 로마까지 가서 지금도 남아 있는 그 굉장한 원형극장 그 속에 이그나시우스 감독을 세우고 여러 날 주린 사자를 갑자기 놓아주었습니다. 사자가 입을 벌리고 달려들 때에 이그나시우스는 두 손을 먼저 사자에게 내밀면서 하는 말이『내가 이제야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그런 힘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위기를 당할 때에 우리가 정말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생각할 때에 한 가지 생각되는 것은 이렇게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데 요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 무위의 인사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여러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게 능력 주는 자 안에서 그 안에 있을 때에만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큰 믿음이 있는 사람만 큰 일을 할 수 있고 적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적은 일만 할 수 있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스룹바벨이 큰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앞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스룹바벨이 어떻게 외쳤습니까?『큰산아, 네가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는 네가 평지가 되리라.』평지가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이와 같은 생활, 만능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가만히 보면 교회 안에도 그렇고 교회밖에도 그렇고 패배주의자가 상당히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할 수 없다. 공산당은 자꾸 강해만 가는 것 같고 남한은 혼란만 해지고 이거 큰일 나지 않았나, 할 수 없다.』
여러분, 전에 다윗이 골리앗이 와서 이스라엘 사람을 위협할 때에 어린 사람으로 싸우러 나가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다 말리지 않았습니까?『아, 네가 무엇을 하려고 나왔느냐.』책망하기도 하고 말리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 다윗은『내가 사자와 곰과 싸워서 이겼는데 저 할례 받지 못한 불레셋 사람이 무엇이냐? 그들은 검을 믿고 가지의 힘을 믿지마는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천도를 무시하는 이 사람들이 무엇입니까?
자유는 생의 법칙입니다. 언제든지 자유가 이깁니다.『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새해에 이 말씀을 여러분의 생의 표어로 삼고 과거에는 패배의 생활을 했지마는 금년부터는 승리의 생활을 합시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지으실 때에는 다 목적이 있어서 지었습니다. 해를 지으실 때에 빛을 비취라고 지었습니다. 나무를 만들 때에 열매를 맺으라고 지었습니다. 사람을 지으실 때에야 할 일이 있어서, 목적이 있어서 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라하면『나야 무슨 힘이 있어야 하지. 못해 못해.』왜 못합니까? 믿지 않는 까닭으로 못합니다.『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곡식이 누르러서 거의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안 믿는 세계가 우리 믿는 십자가 군병을 부르고 있습니다. 황폐한 한국이 일군을 부르고 있습니다. 교회가 봉사할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국가가 참으로 나라를 위해서 싸울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패배주의자가 되지 마세요. 주안에서 만능의 인물이 되십시다.
청교도 시대에 가장 유명한 지도자 크롬웰이 있었습니다. 영국 역사 가운데서 빛나는 거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의 생활 가운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던 맏아들이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큰 슬픔을 당했습니다. 모든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합니다. 크게 낙심했습니다. 그러던 중 성경을 읽다가 빌립보서 四장을 읽기 시작해서『내가 풍부한데 처할 줄도 알고 내가 비천한데 처할 줄도 알고……』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하기를『나도 이런 비결을 배웠으면 얼마나 좋겠나.』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절을 읽어 내려갑니다.
十三절에 와서『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을 읽게 될 때에는 크롬웰이 갑자기 일어나면서『사도 바울의 그리스도는 오늘날 나의 그리스도가 아니냐?』외쳤습니다.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는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을 때에 위로부터 간단없이 오는 능력을 받을 때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일에서, 그 환경에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 승리하느냐, 실패하느냐, 그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주를 의지하는 가운데 만능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이 축복을 우리가 다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一九六一년 一월 一일)

Ⅳ-22 봉사생활의 비결 (마가복음 二장 一-十二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이 지붕을 뜯어 구명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막 二·三-四)

오늘 아침 읽은 말씀은 다 아는 사실이올시다. 예수 님께서 가버나움 동리에서 가르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문 앞까지 용신 할 수 없으리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서 그의 말씀을 듣던 중이었습니다. 그 때에 네 사람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메고 예수 님 앞에 나오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지마는 정작 와보니까 사람이 너무 많이 둘러서서 도저히 예수 님 가까이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길이 없어서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에 구멍을 뚫었다고 그랬습니다. 물론 한국의 집 제도로서는 이런 일이 불가능합니다마는 그 때 유대 사람의 집 제도는 흔히 지붕을 평평하게 만들고 지붕으로 올라가는 구름다리가 집밖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붕에 올라가기가 쉽고 구멍을 내기도 쉽습니다. 그렇게 해서 줄에 달아서 그 중풍병자를 예수 님 앞에 내려보냈습니다.
여기 기록한 말씀을 보니까,『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님께서 저희의 믿음, 여기「저희」는 중풍병자가 아니고 그를 메고 온 사람, 그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이 중풍병자에게 축복하시고 그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에 이 네 사람의 믿음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중풍 병 환자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들의 믿음을 통해서 봉사 생활의 비결을 또한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이들의 믿음은 단순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철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로 믿은 줄 생각합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 님께서 이 중풍병자를 고칠 만한 능력이 있는 것을 꼭 믿었습니다. 추호도 의심하지 않은 줄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만난(萬難)을 배제하고 그를 네 사람이 메고 이처럼 온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지 않았습니다. 바람에 밀리는 물결과 같지 않았습니다. 비록 믿음의 내용이 단순하나 의심이 없는 참된 믿음은 봉사 생활의 첫째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이 중풍병자를 돕게 한 첫째 조건이었습니다.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 님께서는 지금도 육신의 병, 심령의 병, 사회의 병, 국가의 병을 다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철저한 신앙이 오늘날 중풍병자와 같은 많은 불쌍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봉사 생활의 첫 단계가 될 것입니다.
둘째는 이들의 믿음에는 사랑과 동정심이 따랐습니다. 이들은 예수 님의 능력을 믿었을 뿐더러 이 중풍 병자를 볼 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괴로움을 불구하고 그를 메고 먼길로 온 것입니다. 자리에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그들로 하여금 이 불쌍한 환자에게 봉사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봉사 생활의 둘째 조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 하는 당시의 대중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마태는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유명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잘 기억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어떤 사람이 험한 산골짜기에서 불한당을 만나서 많은 매를 맞고 모든 소유는 빼앗기고 중상을 입어 인사불성이 되어서 길가에 쓰러졌습니다.
마침 레위 사람이 지나갔지마는 그는 그를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제사장이 그 뒤를 이어 지나갔지마는 그도 그 넘어진 사람을 보기만 하고 다른 편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있었을는지는 모르지마는 하나님의 사랑은 정녕(丁寧)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요, 상한 사람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사람은 아마 당시에 신학적으로 비판해서 그 믿음이 꼭 옳은지 알 수 없지마는 이 사람은 단순히 사마리아의 사상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요, 그렇지만 이 사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 그로 하여금 그 자리에 멈추게 하였고 상한 사람을 자세히 살피게 만들었고 자기의 옷을 찢어서 상처를 쳐 매주고 자기의 기름을 부어서 상처를 유화롭게 하고 자기의 탓 던 나귀를 태워서 주막까지 가도록 만든 것입니다. 환난 중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 마음은 봉사의 중요한 조건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청년 시대에 배를 좀 탓 습니다. 한 번은 뉴올리언스 시에 우연히 가서 흑노(黑奴)시장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흑노 들의 한 가족이 여기 저기로 팔려 가는 그 비참한 광경을 목도한 것입니다. 그 때에 그는 동정심은 결국 아브라함 링컨으로 하여금 흑노 해방의 구주를 만든 것입니다.
동정이라고 하는 뜻은 같이 느낀다고 하는 뜻입니다. 남이 배고플 때에 내가 배고픈 것처럼 느끼는 느낌이올시다. 남이 추울 때에 내가 추운 것처럼 느끼는 그 감정, 다른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내가 당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지는 그 마음, 동정심, 이것 없이 봉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추운 겨울에 방공호에 사는 우리 동포들, 거리에 집 없이 배회하는 불구자들, 병자들, 고아들을 어떤 눈으로 봅니까?
셋째는 이들의 믿음에는 협동 정신이 있었습니다. 넷이 같이 한 중풍병자는 메고 왔습니다. 이들이 아무리 믿음과 사랑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 협조하는 정신이 없었던들 이 병자를 예수 님께로 같이 메고 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봉사 생활에는 이 협조 정신이야말로 필요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한 병자를 넷이 메고 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줄 생각합니다.
우선 그 사람들 가운데는 키가 큰 사람도 있겠고 혹은 키가 작은 사람들도 있었을 터인데 키가 큰 사람이나 작은 사람이나 똑같이 들어야 평평하게 병자를 메고 오려고 하면 키 큰 사람은 좀 낮게 들어야 되고 키 작은 사람은 존 높이 들어야 될 것입니다. 키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피차에 양보하는 가운데서 그 협조는 이루어졌을 줄 생각합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네 사람이 들것을 메고 갈 때에 발걸음이 맞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갈 때 발걸음이 안 맞는다는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리가 길겠고 어떤 사람은 다리가 좀 짧을 터인데 다리가 긴 사람은 좀 짧은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다리가 짧은 사람은 좀 빨리 걸어가고 이렇게 해서 발걸음을 맞추어서 메고 왔습니다.
피차에 양보하고 양해해서 협동하는 이 정신이 없이는 우리가 어떤 방면에든지 봉사할 수가 없습니다. 나와 조금 다르지마는 피차에 양보하고 절장보단(折長補短)해서 협조할 줄을 알아야 우리가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같이 봉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봉사나 사회에 대한 봉사도 이러하고 국가나 세계에 대한 봉사도 똑같은 원리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좋은 성가대는 통해서 합창을 들었지마는 합창을 들을 때마다 늘 마음 가운데 생각되는 것은 그들이 같은 음으로 노래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여자는 고음으로 노래 부릅니다. 소프라노가 있습니다. 어떤 여자는 낮은 음으로 부릅니다. 알토가 있습니다. 어떤 남자는 좀 높이 부릅니다. 테너가 있습니다. 어떤 남자는 좀 낮게 부릅니다. 버스가 있습니다. 목소리가 다 다릅니다. 그러나 이 다른 목소리들이 다 합해서 조화되어 노래를 부를 때에 위대한 하모니를 이루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코러스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은 다 각각 키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고, 이렇게 낸 것이 의의가 있습니다. 다르다고 싸우라고 낸 것이 아닙니다. 다른 가운데서 피차의 장점을 살려서 협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봉사하고 이 사회를 봉사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봉사 생활을 하려고 하면 이 협조 정신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책을 보니 페르시아라는 나라에는 이상한 새가 있어서 이 새는 날개가 하나씩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혼자서는 날지 못해요. 그런데 이상한 건 수놈의 바른 편에는 갈고리 같은 것이 하나 생겼다고 합니다. 암놈은 윈 편에 고리 같은 것이 하나 생겼다고 합니다. 그 수놈과 암놈을 걸고서 둘이 날아 갈 때는 썩 잘 날아갑니다. 세상에 혼자 하지 못할 일이 많습니다. 아무리 위대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혼자서만은 할 수 없습니다. 독불 장구이란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협조해야 봉사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넷째는 이들의 신앙에는 견인성(堅忍性)이라고 할까, 혹은 지구성(持久性)이 있습니다. 이들은 멀리서 중풍병자를 메고 오기는 왔지마는 와서 보니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예수 님 앞에 가까이 도저히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네 사람이『에, 할 수 없구만』하고 돌아서 간 것이 아닙니다. 문으로 들어갈 수 없으면 다른 길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연구해야지, 아무래도 길은 있습니다. 한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열어 보았습니다. 낙심하고 그만 두지 않았습니다.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 지붕 위에 올라가서 옛날은 시멘트가 아니고 흙으로 했으니까, 뜯기가 좀 쉽기는 쉬었지마는 남의 지붕 뜯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줄 생각합니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떨어지기도 하겠고 대단히 미안한 일인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네 사람에게는 꼭 한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이 중풍병자를 고쳐 주기 위해서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데 이제 들어갈 길이 없다고 우리가 그만 두겠느냐? 끝까지 예수 님 앞으로 나가자! 그만 두지 않았습니다. 계속했습니다. 끝까지 관철하는 이 성품이 필요합니다. 영어에 큇(qui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얼 하다가 안 되면 큇 한다면(그만 둔다고 하는 뜻입니다)그런 사람이 성공하는 법 없습니다.
어떤 좋은 일을 할지라도 우리가 하여 나아갈 때는 난관이 반드시 가로 박힐 때가 있습니다. 요컨대 이와 같은 난관을 당할 대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극복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여기에 봉사생활의 선공이 잇느냐, 없느냐가 달린 것입니다. 불퇴전(不退轉), 물러가지 아니하고, 백절불굴의, 백 번 찍어도 넘어가지 아니하는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나아가는 이런 것이 결국은 이들로 하여금 이 중풍병자를 참으로 도와줄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에디슨이 백열등을 처음 발명할 때에 이렇게 해보아도 안되고 저렇게 해 보아도 안 되고 마지막에는 열흘 동안을 자기 집에 도무지 돌아가지 아니하고 실험실에서 자고 먹으면서 계속해서 마지막에 성골하고야 말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컬럼버스가 맨 처음에 인도로 향해서 간다고 대서양을 향해서 나간 때에 한 달쯤 후에는 선원 전부가 배반하려고 했습니다.『아무리 가야 보이지도 않는 것을 뭐 하려고 가느냐? 돌아가자.』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컬럼버스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그들을 격려해서 나아간 것입니다. 그 결과만이 그로 하여금 새로운 대륙을 발견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네 사람의 믿음에는 단순하지마는 철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랑과 동정이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들이 서로 협조할 줄 알았습니다. 이런 이들이 견인성과 지구성을 가지고 끝까지 나아갔습니다. 이렇게 한 결과는 그들이 환자를 예수 님 앞에 갖다 놓고야 말았습니다. 병 고치려고 하는 목적인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이 환자를 보시고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네 죄를 사함이 되었다고, 죄를 다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언제든지 불행의 근본을 깊이 살피시고 그 근원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세상 사람은 불행의 원인을 흔히 외부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혹은 환경이나 혹은 물질이 있고 없는 데서 찾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은 그 깊은 속에 있는 것입니다. 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 님께서는 죄를 사해 주셔서 근본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병까지 고쳐주었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되는 것은 이 네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중풍병자를 위해서 한 것이 없습니다. 할 수도 없고 친히 고칠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이들이 한 것은 중풍병자를 예수 님 앞에 갖다 놓은 것뿐입니다. 실상 죄를 사해주시고 병을 고쳐 주신 분은 예수 님이십니다.
오늘날 주를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한다고 애쓰지마는 사실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을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은 정성을 다해서 그리스도 앞에 갖다 놓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께서 실지로 축복을 하실 것입니다. 내가 축복까지 할 능력이 없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모든 환자를 주님 앞에 갖다 놓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올시다.
여러분, 영적 안목으로 볼 때에 우리 한국은 문자 그대로 중풍병자올시다. 절반은 아주 못쓰게 되었습니다. 절반이래야 겨우 움직일 정도로 한심한 형편입니다. 이 중풍병자와 같은 이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갔다 놓는 것이 오늘날 우리 믿는 사람들의 할 일이올시다. 이 중풍병자 같은 우리 민족을 그리스도 앞에까지 메다 놓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다 믿는 분인데 이런 환자를 주님께 메고 오는데 현재 한 몫 하고 있습니까? 혹은 아직까지 구경꾼으로만 있습니까? 이렇게 중한 환자를 앞에 놓고 예수 님 앞에 꼭 메다 놓아야 죄 사람을 받고 병도 고쳐서 건강한 사람으로 중생을 하겠는데 이 위대한 일에 여러분도 한 몫 메었습니까? 아직도 구경만 하고 있습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어떻게 하면 한 몫 멜 수 있습니까? 주일학교 한 반을 잘 맡아서 매 주일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도 한 몫 메는 일이올시다. 성가대를 맡아서 매 주일 충성스럽게 책임을 잘하는 것도 한 몫 메는 일입니다. 한 구역을 맡아서 구역에 있는 여러 교우들을 잘 돌보는 것도 한 몫 메는 것입니다. 보린 원이나 경로 원의 후원회에 들어서 다 같이 이 귀한 기관을 운영해 나가는데 협조하는 것도 한 몫 메는 것이올시다. 남 전도 회나 여전도회에 들어서 같이 재정적으로 전도하는 데 협조하는 것도 한 몫 메는 것이올시다. 그 밖에 장년 면려회(勉勵會)나 청년 면려회나 다른 면려회에 가담해서 주를 위해서 여러 가지 운동도 하고 봉사도 하는데 참여하는 것도 한 몫 메는 것이올시다.
그런데 금년 새해에 한 몫 메는 다른 방면을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금년은 특별히 개인 전도의 해로 작정하고 우리 하나 하나가 개인 전도를 통해서 한 몫 메는 운동을 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금년에 작년까지는 한 몫 메지 못했지마는 이 개인전도 운동에는 누구든지 한 몫 멜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이렇게 멜 수 있는 분은 오늘 아침에 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앞으로 二월초부터 부활주일 때까지 한 주일에, 남자이면 하루 저녁, 여자이면 한 오후, 온전히 전도를 위해서 시간으로 바칠 수 있는 분은 따로 모여서 개인전도 단을 조직하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 깊이 생각하시고 이 금년 새해에는 우리가 구경꾼 노릇만 하지 맙시다. 이 중풍 병 환자를 그리스도에게 모시고 오는데 아무 구석에서도 한 몫 메어서 이 귀한 사명을 우리가 다 같이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잊지 맙시다.
먼저 철저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믿지 않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협조 정신이 필요합니다. 넷째는 끝까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정력, 충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一九六一년 一월 八일)

Ⅳ-23 승리적 생활의 비결 (다니엘 一장 八-十六절)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단 一·八)

오늘 아침은 구약에 있는 다니엘서 가운데서 몇 절을 봉독(奉讀)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지혜와 학문이 많은 학자요, 장래의 인류의 역사를 미리 본 위대한 예언자요, 바벨론과 바사의 양조를 거쳐서 섬긴 탁월한 정치가요, 그러나 원수들이 아무 틈이나 허물을 찾을 수 없었던 고결한 생활을 한 인격자로서 역사상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산 그 시대나 그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며 그 배경이 남달리 좋아서가 아닌 것입니다. 그가 나기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한 상류 계급의 가정에서 난 것은 틀림없지마는 그는 어릴 때에 벌써 바벨론 사람들의 포로가 되어서 멀리 딴 나라에 잡혀가게 되었고 그 가정과 부모는 아나 그 후 예루살렘 성이 아주 파괴될 때에 필연 같이 화를 입은 모양이올시다.
이렇게 그는 어렸을 적부터 원수의 나라에서 포로의 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그런 역경 가운데서 그는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자기를 해치려는, 모략하는 사람도 다 이기고 마지막에는 문자 그대로 사자들까지 이기면서 그런 인물이 되었고 또한 그런 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생활을 한 그 승리 적 생활의 비결이 어디 있었던가? 제 생각에는 그런 생활의 비결은 설명하여 주는 구절이 다니엘서 가운데 특별히 두 줄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 한 절은 우리가 읽은 말씀 가운데 있는 一장 八절이올시다.『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자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환관장(宦官長)에게 구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 다니엘이 비록 소년 시대이지마는 뜻을 정하였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뜻을 정한 결의, 즉 그의 결심이 여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니엘서 六장 十절에 나타나는 줄 생각합니다.『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御印)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에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여기 다니엘의 기도의 생활과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다니엘의 청년 시절의 결심을 보여주고 또 하나는 다니엘이 일생을 통하여 지킨 기도 생활의 일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먼저 다니엘의 결심이 어떠한 것을 생각하십시다.
다니엘은 어려서 바벨론 궁중에 잡혀갔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아마 인물도 준수하고 재주도 있어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여러 포로로 잡아온 소년들 가운데서 특별히 네 사람을 택해서 훈련을 시켜서 장차 자기의 일군을 삼으려고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다니엘에게 큰 문제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왕은 이 소년을 잘 훈련시키기 위해서 소년들의 먹을 음식까지 지정하여 준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왕이 먹는 진미가 있고 왕이 마시는 포도주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보통 소년 같으면 이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옛날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그 안에서 장성해 나온 다니엘에게는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우선 모세의 율법에 의지하면 고기 가운데 정한 먹을 수 있는 기고가 있고 부정한 멱을 수 없는 고기가 있습니다. 생선 가운데도 먹을 수 있는 생선이 있고 먹을 수 없는 생선이 있습니다. 또한 그 때는 다 우상을 숭배하던 때라 으레히 고기 같은 것은 먼저 우상에게 드린 후에 나누어 먹는 풍속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술로 말할지라도 제주로 그 인부는 붓는 풍속이 있었고, 또한 술은 자기 몸에 유익이 없는 것을 다니엘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에게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내 몸을 더럽히지 아니할까? 생각하다가 마지막에 여기에 기록한 대로 뜻을 정하고 자기의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자기는 다른 음식을 먹지 아니하고 채식만 하고 물만 마시기로 결심을 하고 이와 같이 환관장에게 말한 것입니다. 환관장은 그 말을 들을 때에 대단히 염려했습니다.『물론 당신 생각에는 좋지마는 내게는 대단히 곤란한 것이 왕이 당시의 음식을 이렇게 지정해 주었는데 이 음식대로 먹지 아니하고 채식만 먹다가 조금이라도 건강에 손해를 받아서 왕이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면 내 목이 위태해. 그러니까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크게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달래면서 적어도 열흘 이상 실험해 보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채식만 먹고 물만 마시고 다른 사람들은 왕이 보낸 음식대로 그냥 먹고 그 후에 우리의 건강을 비교해 보아서 그 다음에 판단하기를 바란다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서 그렇게 다 실험해 본 결과는 채식을 먹는 다니엘이나 그 세 친구의 건강이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좋아졌다고 여기에 기록한 것을 우리가 읽었습니다.
보통 청년 같으면 이와 같은 환경 가운데서 이런 결심을 하는 것보다도 아마 이제야 우리가 바벨론에 왔으니까 바벨론에 온 후에는 여기의 풍속대로 살아야 될 것이 아닌가? 로마에 가면 로마 사람처럼 살라고 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음식의 구애를 방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아마 보통 청년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게 신앙 생활에 얼마나 관계되어서 이것으로 방해되겠는가 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는 대로 우선 먹어가면서 차차 형편을 보아서 작정하지, 아마 이런 태도를 가지는 청년이 대부분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소년 시절부터 그런 청년은 아니었습니다. 조금도 자기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해서 자기의 몸을 더럽힐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이는 젊지마는 이미 뜻을 정하였습니다. 내가 먹는 이것으로 내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뜻을 확실히 정했습니다. 결의하였습니다. 결단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니엘은 역경이 닥쳐왔지만 청년시대에 결심을 하고 자기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다니엘로 하여금 모든 환경 가운데서 승리의 생활을 하게 한 첩경이었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도 이와 같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러 번 결단을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멜산상에 모아놓고 하신 말씀이『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참 신이면 그를 섬길 것이며 바알이 참 신이면 그를 섬길 것이라고 결단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승리 적 생활은 여호와, 바알 사이의 결단으로 시작됩니다.
이 더러운 세상 가운데서, 이 속세에서 같이 내 몸을 더럽히며 살겠느냐? 비록 속세에 살지마는 깨끗이 내 몸을 보존하겠느냐? 결단으로 우리의 신앙 생활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도『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하느니라.』말씀하였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서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서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바람에 밀려서 요동하는 물결 같은 마음,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지고 무슨 승리 적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결단의 생활로 우리의 신앙 생활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정결케 하라.』결심한 마음이 성결한 마음입니다. 이와 같은 결단을 할 수 있는 대로 젊었을 때에, 청년 시대에 해야 일생을 바로 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결단을 새해에 하게 되면 그 해를 내내 바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 생활을 시작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여 나아가는 가운데도 이 같은 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전도를 해야 될 줄 압니다. 우리가 전도를 해야겠다고 말을 하면서도 꼭 하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내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꼭 살 테야.』『성경에 가르치는 대로 십일조를 드릴 테야.』『아무래도 내가 십일조를 드리기는 드리겠어.』『드리겠어, 드리겠어.』하면서도 결심은 못합니다.『내가 아무래도 철저한 절제 생활을 해야 돼. 안 믿으면 모르지만 믿는 내가 되어서 깨끗한 생활을 꼭 해야 될 테야.』말을 하면서도 결단을 못합니다.
신앙생활에는 이 결심이 필요합니다. 한 번 사람이 마음을 정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할 때에는 모든 복잡한 생각이 들어와서 번민(煩悶)과 고통으로 매일 매일 지나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 마음을 정하게 되면 마음은 편합니다.
전에 모압 여자 룻이 자기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갈 것이냐, 모압에 그냥 남아 있을 것이냐를 작정하기 전에는 마음가운데 많은 번민을 가진 줄 압니다. 그러나 한 번 작정을 한 후에는 그 다음에는 마음이 편안하여졌습니다.
나오미가 그냥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동서 되는 오르바는 한 때 따라 나오다가 나오미의 권면을 듣고 도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나를 여기 머물러 있으라고 다시 권면해 주지 마세요. 나는 어머니가 가는 곳에 내가 가겠고, 어머니 머무는 곳에 나도 머물겠고, 어머니가 섬기는 신을 내가 섬기겠고, 어머니가 사는 곳에 내가 살겠고, 어머니가 죽는 곳에 내가 죽겠습니다.』결단한 마음, 마음이 평안합니다.
한 번 이와 같은 결심을 한 다음에는 새로운 용기가 납니다. 마음을 정하기 전에는 여러 가지 생각 가운데서 정력이 분산됩니다. 어떤 큰 목적을 위하여 마음을 정하게 된 마음에는 모든 정력이 거기로 집중되어서 새로운 힘이 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이와 같은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힘을 주어서 모든 것을 돌파할 수 있고 이길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반드시 내리어 주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생활은 이와 같은 결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이 새해에 내 몸을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하면 우리가 금년 일년 동안 승리 적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도 다니엘의 기도의 생활을 생각해 보세요. 다니엘이 자기 집에 돌아와서 자기 집 한방에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이 열렸는데 그 창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하루 세 번씩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의 생활에는 열린 창이 있었습니다. 우리 사람의 심령의 방에도 이렇게 열린 창이 있어야 합니다. 이 열린 창으로 햇빛이 들어 왔고 신선한 공기가 들어 왔습니다. 다니엘의 이 열린 창을 통해서 하늘의 햇빛이 그 심령을 비추어 주었고 열린 창을 통해서 대기와 이 우주에 차 있는 새로운 공기를 그 심령이 호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심령에도 하늘과 통하는 열린 창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결심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결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결심만은 부족합니다. 왜? 사람의 의지는 약합니다. 사람이 먼저 결심을 하겠지마는 이 결심은 기도로 뒷받침하지 아니하면 이 결심이 오래 가지 못해서 봄눈 녹듯이 스러지기 쉽습니다. 결심이 먼저 필요하고 그 결심을 뒷받침해 줄 기도의 생활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다니엘의 생활을 잠깐만 회고해 보세요. 다니엘이 어떻게 그 많은 지혜를 가지고 위험한 외국의 주정에서 오랫동안 느부갓네살 왕, 벨사살 왕, 왕조가 바뀐 후에 바사의 다리오 왕, 여러 왕들을 섬길 수가 있었습니까? 이 모든 지혜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입니다. 여러 이야기를 다할 수는 없지마는 여러분이 다니엘 서를 읽어보면 그 시대가 어떤 시대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느부갓네살 왕이 어떤 날 아침에 잠에서 깼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용안이 대단히 불안해졌습니다. 바벨론의 모든 유명한 박사들을 다 불러 들이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 모였습니다.
이 왕이 하는 말이『내가 어제 저녁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너희들이 꿈을 꼭 해석해야 돼. 만일 이 꿈을 바로 해석하지 못하면, 너희들의 몸을 쪼갤 것이요, 너희들의 집을 거름더미로 삼을 테야.』그러니까 박사들이 송구해서『무슨 꿈을 꾸었습니까? 그 꿈을 말씀해 주세요.』『아, 내가 그 꿈을 알면 야, 그 꿈을 잊어버렸어. 그 꿈을 알아내고 해석하란 말이야!』자 이러 던 때입니다.
지금은 아마 아무리 세력 있는 독재자라도 그런 말을 안 하겠지요. 옛날은 그렇든 때입니다. 그러니까 박사나 박사 할아버지라도 어떻게 합니까? 큰일 났습니다. 벌벌 떱니다. 또 옛날에는 왕이 이렇게 말했건 저렇게 말했건 그 나라 법은 한번 입에 말로 던진 후에는 변함이 없는 모양입니다. 해석을 못하니까 그들을 다 내어다가 베어 죽이라고 했습니다. 시위 대장이 냅다 몰아 내갑니다. 어떻게 합니까?
그런 가운데 다니엘이 그런 소식을 듣고 간절히(그 때 다니엘은 박사 측에 못 들던 때입니다)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그 느부갓네살 왕의 꾼 꿈을 보여 주었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왕에게 들어가서 그 잊어버린 꿈 이야기를 다시 해주었습니다.
큰 우상을 보았다고 그랬습니다. 머리는 금으로 되고 가슴은 동으로 되고 그 다음에는 무슨 철로 된 우상입니다. 공중에서 돌이 하나 내려오더니 그 큰 우상을 한 번 치니까 전부 부스러져서 우상은 없어지고 온 세계에 돌이 점점 퍼져서 가득해졌다는 그런 꿈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잊어버린 꿈을 다 다시 이야기 해주면서 그걸 해석까지 해준 다음에야 느부갓네살 왕이 기뻐서 다니엘을 칭찬해주고 또 다른 애매하게 죽을 박사들을 다 죽이지 말라고 하고 살렸습니다.
이렇던 시대에 왕 하나님 아니고 여러 왕을 계대해서 八十이 넘도록 재상 노릇을 한다는 것은 여간한 지혜를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요, 여간한 용기와 담력이 아니면 전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지혜, 이 용기, 이 담력, 이 모든 것이 어디서 왔느냐? 이 인내, 매일 매일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서 위로 내려오는 지혜를 받았고 용기를 얻었고 근신하는 것을 배웠고 모든 것을 배운 줄 생각합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일정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아마 아침, 저녁 또 한 번은 낮인가 봅니다. 또 기도하는 일정한 장소가 있었습니다. 자기 집의 한 방인데 예루살렘을 향하는 창이 있는 방이었습니다. 또 일정한 방향이 있었습니다. 꼭 서편을 향해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꿇어앉아서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꼭 규칙적 생활을 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이 시간은 도무지 어기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아마 여기 앉은 우리보다 몇십 배, 몇 백 배 분주한 줄 생각합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책임을 가지고도 분주하다고 하는데 그 때 바벨론 천지가 一二0도나 되는 총리 노릇을 하려고 하면 얼마나 분주했겠습니까? 그런 분주한 가운데서도 이 기도하는 시간을 절대로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는 조금 분주하면 기도하는 시간 어기고, 조금 분주하면 가정 예배도 그만 두고, 조금 더 분주하면 주일 예배도 다 그만 둡니다. 마틴 루터가 한 번은『이거 오늘은 너무 분주해서. 일할 것이 너무 많으니까 적어도 세 시간은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해야겠군!』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분주하면 분주할수록 기도를 더 해야 됩니다.
또 이것을 보세요. 다니엘이 기도하는 시간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가. 여기 六장에 읽어보면 조서에 어인이 찍힌 줄을 알고도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다고 그랬습니다. 그 조서가 어떤 조서인지 압니까? 그 조서는 다니엘을 시기하는 방백들이 만들어서 꾸민 것입니다. 무엇인고 하니, 한 달 동안 다른 신에게 절대로 기도하지 못하고 왕에게만 드리게 하고 누구든지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자 굴에 넣게 하라고 하는 조서입니다. 그 조서가 자기를 모함하려고 만든 줄을 다 알았습니다. 그렇게 조서에 어인이 찍힌 줄 알고도 여전히 자기 방에 들어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이렇게 하면 사자 굴에 들어갈 줄 알면서도 그 기도하는 시간을 지켰습니다.
자, 이런 때 기도 시간을 지킨 것을 보니까 다른 때야 생각할 것 없습니다. 이만큼 다니엘은 자기의 기도하는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고 지켰습니다. 규칙적 생활을 꼭 하였습니다. 이렇게 다니엘이 먼저 결심하고 그 결심의 뒷받침으로 매일 시간을 정하고 하루에 세 번씩 간절히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위로부터 내려오는 새로운 능력을 얻은 결과는, 일생을 통하여 어떠한 환경에서나 어떠한 처지에서나 모든 것을 이기를 승리의 생활이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규칙적 신앙 생활이 필요합니다. 예배 시간을 꼭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 개인의 기도 시간도 꼭 정하고 그 시간대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 읽는 것도 매일 정하고 그대로 읽는 것이 유익합니다. 우리 가정 기도회를 보는 것도 한 번 시간을 정하고는 암만 분주해도 그 시간을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결심과 기도, 이 두 가지가 있으면 우리가 어떠한 일을 당할지라도 승리의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새해를 당해서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뜻을 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새해를 당해서 우리가 기도의 사람이 되고 이 기도의 시간을 분명히 정해서 규칙적으로 이 시간을 지키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이 어지럽고 험악한 세상 가운데서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一九六一년 一월 十五일)

Ⅳ-24 창조적 생활의 비결 (고린도 후서 六장 一-十절)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六·九-十)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구역; 병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갈 四·十三)

이 말씀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한 가운데 한 구절이올시다. 아마 사도 바울이 몸이 약해서 혹은 병이 나서 여행을 할 수 없는 까닭으로 처음에는 갈라디아 지방을 그저 지나가려고 생각했지마는 아마 그 곳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래서 잠깐 머무는 동안에 복음을 전파해서 갈라디아 교회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몸이 연약해서 부득이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그런 때에라도 이와 같은 큰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생활을 보면 어떠한 처지와 환경에서든지 이와 같이 그 처지와 환경 가운데서 적당한 열매를 맺은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에 고린도 후서에서 읽은 바와 같이 그의 생활은 남 보기에는 근심하는 자 같지마는 항상 기뻐하는 생활이요, 남 보기에는 가난한 자 같지마는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는 생활이요, 남 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런 생활을 보통 쉽게 말하면 사도 바울은 어떤 곳에서든지 창조적 생활을 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창조」라고 하는 말은 창세기 一장에서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듯이 없는 가운데서 있는 것으로 창조한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자료를 가지고 새 가치를 창조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바위가 산에 있을 때는 그 가치가 별로 없지마는 석공이 그 바위를 깨어서 이렇게 좋은 성전을 지으면 그 돌에 새로운 가치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쇠뭉치가 그냥 땅 속에 묻혀 있을 때에는 가치가 없지마는 그것을 캐어 내어다가 연단을 시켜서 만일 시계의 태엽을 만든다고 하면, 그 쇠에는 새로운 가치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에게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 창조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올시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창작이나 창조라고 하는 말을 종종 씁니다. 가령 예술제라면 언제든지 새로운 창작품이라고 이런 말을 씁니다. 여러 가지로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새로운 조작을 구성을 하고 새로운 건축을 하게 될 대에, 우리는 그것을 창작적 작품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없는 데서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자료를 가지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고 하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음악계에서도 새로운 음악을 창작합니다. 새로운 곡을 창작하는 것입니다 문학 방면에서도 새로운 문학의 작품 혹은 시나 혹은 소설이나 혹은 희곡이나, 여러 가지 작품을 내는 것이 사실이올시다. 사상 면에서는 더욱 이런 것을 우리가 항상 보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새로운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 새로운 작품과 새로운 발명품이 우리 시장에 범람하는 것을 봅니다. 나일론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플라스틱 제품에 이르기까지 혹은 텔레비전에서 시작해서 원자탄이나 수소탄이나 유도탄에 이르기까지 매일 새 것이 과학자의 머리를 통해서 공장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료를 가지고 역시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지력과 통찰력과 상상력을 통해서 매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술이나 과학 방면뿐만이 아니고 모든 방면이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짐승과 다르다는 것은 짐승은 새 것을 만들 수 없지만 인간은 언제든지 새 것을 구상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지력이 있는 까닭입니다.
또한 이것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영적 방면에도 또한 그런 것입니다. 위대한 예술가일수록 변변치 못한 자료를 가지고 더욱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을 고요히 묵상해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인간의 영적 방면에 있어서 위대한 작품을 낸 예술가라는 것을 우리는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항상「십자가, 십자가」하고 찬송가를 부르지마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십자가로 말하면 본래 가장 추악한 죄인을 사형에 처하는 아주 추악한 그런 형기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 한 번 못 박히셔서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이후에는 그 흉악한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는 대속하는 대속의 표가 되었고 인류의 소망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부끄러운 십자가를 변해서 영광의 십자가로 만드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가만히 생각할 때에 얼마나 큰 새로운 가치의 창조인지 말로 다할 수 없는 줄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추하게 생각하는 십자가로 하여금 인간의 모든 소망을 빛나게 하여 주는 아름다운 영광의 십자가로 만드신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그분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시는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옛날이나 오늘이나 각 방면에서 이와 같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십니다. 완고하고 편협하고 독선적이요, 무자비한 바리새인 사울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불러서 사람을 변화시켜 사랑과 화평의 사도가 되게 하였고 이런 사람을 통해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였으니 이 얼마나 큰 가치의 새로운 창조이십니까? 과연 예수 그리스도만 이와 같은 영예의 창작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뿐이 아닙니다. 돈만 알던, 이기주의자요, 자기의 민족도 모르던 민족반역자인 삭개오 같은 사람을 불러내어서 자기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모든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데 쓰게 하였고 자기가 토색(討索)한 것은 四배나 갚아주는 사람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또한 얼마나 큰 가치의 창조인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님의 생활을 보면 이 영적 방면에서 언제든지 새로운 작품을 만드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자, 일곱 귀신이 들려서 정신없고 미치고 부끄러운 줄 모르던 이런 여자를 변하게 해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딸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봉사할 수 있게 만든 그 기적을 생각할 때에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가치의 창조인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만 그와 같이 한 것이 아닙니다. 세기를 통해서 복음이 가는 곳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가 있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후서 五장 十七절에 사도 바울이 스스로 간증하는 말이『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새로운 작품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그리스도 안에서는 온전히 새로운 작품,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어서 전에는 아무리 더러워졌었으나 이제는 깨끗하게 되었고 전에는 아무리 이기주의적이었으나 이제는 오직 사랑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을 만든 것입니다.
이 새 사람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가치 창조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복음 전파야말로 최고의 가치를 창조하는 활동이라고 또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우리도 주안에서 새로운 이와 같은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면 우리도 주안에서 역시 이와 같은 창조적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말씀을 기록하는 사도 바울의 생활에서 여실히 우리에게 그 증거를 나타내어 보인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잘 기억하는 사실이지마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에 어떠한 사귀(邪鬼) 들린 여자, 정신없는 여자를 불쌍히 여겨서 고쳐주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그 여자를 고쳐준 까닭으로 그 여자아이가 점을 친다고 해서 오래 수입이 있던 그 주인의 증오를 받아서 여러 사람을 충동해서 오리려 사도 바울과 실라를 잡아끌고 관원에게 가서 무고하게 많은 매를 맞히고 수고를 시키고 마지막에는 빌립보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고 만 것이 아닙니까? 아마 보통 사람 같으면 그날 저녁에 바울과 실라가 마음속에는 그저 분한 마음만 가득했겠고 온 몸이 결리고 아픈 생각밖에는 다른 생각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읽는 대로 바울과 실라는 그날 밤이 깊을 때에 오히려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때마침 큰 지진이 있었고 그 후에 그 감옥의 간수가 회개를 하게 되었고 빌립보 교회는 처음에는 여자들만 있었지마는 아주 유력한 한 분 교인이 생기게 되었고 이래서 점점 기초가 튼튼해졌고 사도 바울의 모든 전도여행 때에도 항상 물질로도 도와주는 귀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또한 이 교회에 사도 바울이 귀한 빌립보서라고 하는 편지를 써서 오늘날까지 우리가 그 편지를 읽고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해 보세요.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매맞고 감옥에 갇히고 이런 환경 가운데서 산수를 회개하게 만들었고 빌립보 교회의 기초를 튼튼히 닦게 되었고 빌립보서를 써서 세기를 통해서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기칠 수 있는 그야말로 창조적 생활을 하였다 하는 그 말이올시다. 이것은 이 한 가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전 생애를 통해서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물론 자유로운 몸을 가지고 밖에 나와서 활동할 마음이 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년에 여러 해 동안 감옥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감옥의 생활을 한 까닭으로 그의 생활은 무의미한 것이었습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감옥의 생활을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는 귀중한 신약의 옥중 서신이 되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니, 에베소서니, 골로새서니, 혹 디모데 전후서, 빌레몬서, 이와 같은 것은 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 가운데 갇혀서 이 불멸의 저서를 남기게 되었고 이것이 그 당시의 사람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창조적 생활을 감옥 가운데서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의 생활만이 아닙니다. 과연 누구든지 신앙을 가지고 창조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주안에서 산다고 하면 가능한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어떠한 입장에서든지 이와 같이 열매 맺는 생활을 한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존 번연의 생활을 회고하면, 영국에서 청교도들을 핍박하게 될 때에 오히려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고 이 존 번연을 감옥에 집어넣고 억울하게 十二년 동안이나 썩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존 번연은 거기서 썩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은혜를 받고 우리가 아는 서로역정이라고 하는 성경 다음에 많은 사람이 읽는다고 하는 불멸의 저서를 써서 감옥 가운데서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서 위대한 창조적 생활을 한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우리 교회에서도 잠깐 와서 이야기했지마는, 지금 일본에 와서 선교사로 있는 사람 가운데 디 세이저(De Shazer)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二차 대전 때에 미국에서 제일 먼저 동경에 와서 폭격하고는 이 두리를 소장이 지휘한 그 폭격기대로 와서 싸운 한 대원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동경에서 폭격하고는 저 중경으로 가다가 중경까지 채 가지 못하고 남경 부근에서 부득이 낙하산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일본 사람한테 잡혔습니다. 근 四년 동안 중국 여러 감옥, 마지막에는 일본 감옥에 와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감옥 생활은 헛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감옥에 사는 동안 성경을 읽게 되었고 성경을 읽는 가운데 온전히 회개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간증하는 대로 전에 유년 주일학교에는 좀 다녔지만 장성해서는 전혀 교회에 나가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죄를 많이 짓던 사람입니다. 그 감옥에서 죄를 회개하고 그리고는 제二차 대전에 끝나자 포로 교환에서 나와 결심한 것은 내가 본국에 돌아가서 신학을 마치도 다시 일본에 와서 일본 사람에게 그가 처음에는 폭탄을 내려 던졌지마는 이번에는 복음을 전파해서 구제를 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로 꼭 실행했습니다. 해방된 다음 미국에 돌아가서 공부했습니다. 그 다음에 일본의 선교사로 나왔습니다. 선교사로 나와 전도하는 동안 제일 먼저 믿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일본 폭격기대를 영도해서 진주만을 一九四二년에 먼저 폭격한 그 폭격기의 대장으로 있던 후지다(藤田) 대위입니다. 그 사람 역시 예수를 믿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있게 될 때에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우리가 창조적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에는 역경이나 실패가 문제가 아니요, 질병도 문제가 아니요, 시험을 받는 것도 문제가 아니요.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요컨대 이와 같은 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위대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요셉의 생활을 잘 기억합니다. 그의 생활을 잠깐 회고해 보세요. 까닭 없이 형제들에게서 시기를 받았습니다. 까닭 없이 저 깊은 우물 속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까닭 없이 종으로 팔려서 멀리 고독하게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애굽에 갓서 오랫동안 종으로 수고하게 되었습니다. 그 또한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 결과는 오히려 억울하게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형제의 시기, 미움, 우물에 던짐을 받는 사실, 먼 나라에 종으로 팔려 가는 설움과 고독, 오랫동안 남의 집에서 종노릇하는 그 억울한 고통, 그런 가운데서도 시험을 받으니까 오히려 더 억울하게 감옥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 모든 서러운 사정, 이것이 요셉이 받은「자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준 한 자료입니다.『너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해보아라.』
요셉은 그런 모든 것을 다 가지고서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을 애굽의 총리 대신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가족들을 기근 가운데서 구원해 내고 모든 애굽 국민들을 七년 동안 가무는 동안에 기근 가운데서 구원해 낸, 말하자면 애국의 구주가 된 것입니다.
얼마 전에 대광(大光) 학교에서 미술 전람회를 하는데 가서 한 번 구경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좋은 작품들이 있어요. 그 가운데 특별히 제 흥미를 끈 것은 어떤 학생들이 만든 공예품이었는데 목수들이 쓰다 내버린 나무 조각으로 공예품 하나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어떤 학생은 철공소에서 공인들이 쓰다 내버린 쇠 조각으로 공예품 하나를 그럴 듯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이와 같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사람 보기에는 변변치 않은 것, 사람 보기에는 쓸모가 없다고 하는 것, 사람 보기에는 그렇게 자랑할 것이 없는 것, 그런 것들을 가지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오직 우리가 주안에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과일 나무, 혹은 사과나 복숭아나무를 기르는 사람은 누구나 겨울에는 전부 가지를 전정 해주지 않습니까? 다 잘라 줍니다 만일 이 나무들이 우리처럼 감각이 있다고 하면 그 전정을 받을 때 대단히 아플 것입니다. 이 나무가 전정을 받을 때 아프게 그렇게 많은 가지를 잘라내지마는 그 대신 나무가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불평하지 아니해요. 그 대신 쓸데없는 가지로 정력을 보내지 아니하고 모든 정력을 다 열매에 보냅니다. 그래서 사과 알이 커집니다. 그래서 복숭아 알이 커집니다.
사실 전정 하는 목적은 열매를 크고 아름답게 잘 맺기 위해서 해줍니다. 아마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전정을 더러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환난도 보내시고 질병도 보내시고 시험도 보내시고 이와 같이 전정을 해주십니다. 이렇게 하는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하시는 줄 압니다.
언제든지 창조적 생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이지마는 진주가 어떻게 되는지 아시지요? 진주도 별것이 아닙니다. 진주 속에는 모래알이 있다고 합니다. 겉만 그렇게 아름답지 속에는 모래가 있다고 합니다. 진주 패라고 하는 조개 속에 어떻게 모래알이 들어갑니다. 지금은 인공적으로 넣어준다고 합니다. 그 보드라운 조갯살에 깔깔한 모래알이 들어갔으니까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러니까 이 조개가 그 깔깔한 것을 이기기 위해서 생명의 즙을 내서 그 모래알을 싸주고 또 싸주고 또 싸주고……. 여러 해 싸주면 점점 큽니다. 그것이 진주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 모래알과 같이 사도 바울이 말한 육체의 가시와 같이 깔깔하고 아픈 것을 던져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싸고 또 싸서 우리의 영혼이 진주와 같이 아름다운 영혼을 만들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하시는 줄 생각합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다. 주안에서 모든 것이 창조의 자료입니다. 주안에서는 모든 것이 창조의 기회입니다. 서양 속담에「필요는 혹은 곤 고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는 속담이 있습니다. 요새 직업이 없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직업이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직업을 만들도록 힘을 쓸 때가 된 것입니다.
제가 어떤 책을 보니까 지금 폐 염도 잘 고치는 페니실린도 본래 곰팡이 가운데서 처음에 발견하고 적출 해 냈다고 합니다. 아무리 곰팡이 같은 죄악 세상에 사는 사람도 주님께 나오면 귀한 약품이 되어서 다른 사람의 병까지 고쳐줄 수 있는 새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상한 갈대를 고쳐서 아름다운 초적(草笛)피리를 만들어서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을 내게 하는 권능이 우리 주님께는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처 입은 몸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 주님 앞에 나와서 내 생명을 맡긴다고 하면 주님께서는 그 상한 생명, 그 상한 생황을 변화해서 하늘의 음악을 나타낼 수 있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를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던지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주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우리도 창조의 생활을 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작년은 어떠했던지 이 새해야말로 창조의 해를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도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의 생활을 하십시다.
(一九六一년 一월 二十二일)


Ⅳ-25 사람을 낚는 어부 (마태복음 四장 十二-二十五절)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四·十九)

이 말씀은 예수 님께서 갈리리 바닷가로 지나가시다가 마침 그물을 바다에 던지는 시몬과 그 동생 안드레를 만나서 부르신 말씀입니다.『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물론 우리가 요한 복음에서 읽는 바와 같이 이들은 일찍이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습니다. 이 때에 온전히 주와 동역자(同役者)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시몬과 안드레는 주를 따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좀더 가다가 요한 과 야고보를 만나서 역시 주님께서는 같은 말씀으로 부르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도 그 말씀을 듣고 곧 예수를 좋은 것입니다.
여기에 주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나를 따라 오너라.』여기에 주님께서 부르신 목적이 있습니다.『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신앙 생활은 주님의 부름을 듣고 주님을 따르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 온전히 들어 온 사람은 그 하나 하나가 자기만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또한 되는 것입니다.
먼저, 부름의 내용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주를 따라 오라고 부르실 때에 시문과 안들에는 그물을 버리고 같이 고기를 잡던 다른 어부들도 버리고 문자 그대로 예수를 좋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이와 같은 부름을 받게 될 때에 아버지와 배와 그물과 같이 일하던 사람들을 다 버리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신앙 생활은 단순히 예수를 멀리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예수를 멀리서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시 예수를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 생활은 온전히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몬과 안드레가 전에 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좋은 것과 같이 예수를 알지 못할 때에 우리가 가졌던 사상, 예수를 알지 못할 때에 우리가 형성하였던 우리의 습관, 예수를 알지 못할 때에 죄 가운데서 사귀었던 친구들까지도 온전히 떠나서 예수를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신앙 생활은 먼저 성별로써 시작됩니다. 거룩히 갈라서야 되는 것입니다. 죄악에서 온전히 떠남으로써만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의미는 제일 먼저 죄악의 세계와 갈라진다고 하는 성별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나를 따르라고 할 때에 이들은 문자 그대로 예수의 뒤를 따라서 동행한 것입니다. 예수 님이 가는 곳에 이들도 가고 예수 님이 머무는 곳에 이들도 머물었습니다. 예수 님이 쉬는 곳에 이들도 쉬었고 예수 님이 일어날 대에 이들도 일어났습니다. 예수 님과 일거일동을 같이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가버나움에도 같이 갔습니다. 벳바게에도 같이 갔습니다. 배를 타고 갈릴리바다에도 같이 갔습니다. 거라사 땅에도 같이 갔습니다. 마지막에 예루살렘에도 같이 가고 다락방에도 같이 올라갔고 겟세마네 동산에도 같이 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오늘날 신앙 생활도 문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예수를 우리 마음 가운데 모시고 우리가 길을 갈 때에도 주님과 동행하고 일을 할 때에도 주님과 동행하고 음식을 먹을 때에도 신령한 가운데서 주님과 같이 먹고 가정에 있을 때에나 직장에 있을 대에나 언제든지 우리의 심령이 주님을 떠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안할 때에도 주님과 동행하고 괴로울 때에도 주님과 동행하며, 기쁠 때에도 주님과 동행하고 슬플 때에도 주님과 동행하며, 잘 때에도 주님과 같이 하고 깰 때에도 주님과 같이 하며, 살 때에도 주님과 같이 살고 죽을 때도 주님과 같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옛날 에녹이 일생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고 승천하였다고 하는 바와 같이 문자 그대로 이와 같은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그리스도와 동행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사실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승천을 의미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입니다.
셋째로,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예수와 동행하면서 예수의 모습을 자세히 보는 것입니다. 예수 님의 웃는 것도 보았고 예수 님의 우시는 것도 보았고 예수 님의 말씀도 들었고 예수 님의 모든 생활을 자세히 살피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 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예수 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생활을 같이 하는 가운데서 예수를 배웠습니다. 예수 님의 마음을 배웠고 예수 님의 성품을 배웠고 예수의 생활을 배웠고 예수 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 것을 배웠습니다.
예수 님께서 어떻게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을 배웠고 어떻게 병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고쳐주신 것을 배웠고 어떻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것을 배웠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 듣는 것을 배웠고 어떻게 핍박을 받는 것도 배웠고 마지막에는 어떻게 십자가를 지는 것도 배웠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도 배웠습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용서를 배우고 그리스도의 담대한 것을 배우고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것을 배우고 죽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예수 님께서는 옛날도 부르시고 오늘날도 우리를 이와 같이 부르십니다. 우리가 이 부름을 들었습니까? 우리가 이 부름을 듣고 이대로 순종합니까? 우리가 사실 모든 죄악과 성별 되었습니까? 우리가 사실 그리스도와 언제나 동행합니까? 구리가 사실 그리스도를 배웠습니까?『나를 따라 오너라.』
이 주님의 말씀은 세기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우리의 고막을 울립니다.『나를 따라 오너라.』
신앙생활은 단순히 아는 것만은 아닙니다. 단순히 예수를 보는 것만은 아닙니다. 실지로 마음으로 생활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 부름을 우리가 먼저 들읍시다. 옛날 사도들과 같이 이 부름을 우리가 온전히 들었으면 사람을 낚는 어부가 우리도 될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어부를 만들어서 이 죄악의 바다에 쓰려져 가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는 이렇게 불렀습니다.
여기에 예수 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그물로 생각하십니다. 이 세상을 바다로 생각하십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생각하십니다. 바다는 넓고 깊고 험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도 넓고 얼마나 험한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바다는 어떤 때에는 잔잔하지마는 때때로 풍파가 심하고 파도가 높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도 때때로 풍파와 파도가 높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이 세상을 고해라고, 괴로운 바다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죄악의 물결, 죄악의 바다 가운데서 쓰려져 가는 뭇 영을 복음을 통해서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을 낚는 어부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 부름을 들었으며 우리가 과연 이 부름에 순종하며 우리가 과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다른 것은 다 순복 하되 이 명령만은 순종하지 아니합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불렀습니다. 우리 하나 하나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를 어부라고 하였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바다에서 물고기 잡는 사람에게서 영적 어부가 배울 것이 더러 있는 줄 생각합니다. 이 어부들은 한 가지 방법으로만 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잡습니다. 어떤 때는 낚시로 잡고 어떤 때는 그물로 잡고, 어떤 책을 보니까 저 남극 부근에 가서 고래 사냥을 하는 사람들은 큰 갈고리와 같은 낚시를 쏴서 잡습니다. 여러 가지고 고기 잡는 방법이 많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어부로서 이 신령한 의미에서 사람을 낚아 내는, 전도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는 줄 압니다. 옛날부터 개인전도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건 낚시질과 비슷합니다. 문서 전도가 있고 방송 전도가 있고 영화 전도가 있고, 미국과 같은 데서는 텔레비전을 통해서도 많은 전도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여러 가지 새로운 방법이 있어서 이 새로운 방법을 우리가 사용해서 사람을 낚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특별히 한 가지 여러분과 같이 잠깐 생각하려는 방법이 있습니다. 모든 전도 방법 가운데 우리 교회에서 제일 먼저 쓰여진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압니까? 어떤 전도 방법은 누구나 할 수는 없습니다. 대중 전도 같은 것은 그런 방면에 은사를 받은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문서 전도 같은 것도 그 방면의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 방법보다도 큰 수확을 가져온 방법이 있는데 무엇인지 압니까?
개인전도 방법입니다. 이것은 제일 처음에 쓴 방법입니다. 안드레가 예수를 만난 다음에 제일 먼저 자기의 형 시몬을 전도해서 예수 님께로 인도해 왔습니다. 안드레가 개인 전도자로 첫째 사람입니다. 빌립이 예수를 만난 다음에 이어서 한 것이 자기의 친구 나다나델을 만나서 그를 예수 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아마 개인 전도를 둘째가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여러 사람에게 대중 전도도 하셨지마는 예수 님도 때때로 개인 전도를 하셨습니다. 디모데에게 하신 말씀은 개인 전도입니다. 사마리아 여자에게 하신 말씀도 개인 전도입니다. 삭개오의 집에 가서 한 것도 개인 전도입니다. 이 전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입만 안 붙었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 못하는 이들도 개인 전도를 더 잘하니까 그것도 말이 안 됩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또 사실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교회의 발전한 모든 형편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떠한 방법보다도 개인 전도를 통해서 복음이 제일 많이 확보된 것이 사실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있을 때에 믿는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수리아로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멀리 지중해를 건너서 로마에도 갔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수리아에도 설립하고 로마에도 설립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보면 이와 같은 무명 개인 전도자들의 전도로 말미암아 복음이 제일 많이 전파되고 제일 많은 사람이 구언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영락교회에서 금년을 개인 전도의 해로 작정해서 누구든지 금년 동안에 한 사람씩 인도하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만일 그대로 꼭 한다고 하면 영락교회와 같은 교회가 명년에 하나 더 생기겠습니다. 예수 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불렀습니다. 우리가 이 명령에 순종하십니까?
이 개인전도는 이미도 말씀드렸지만 낚시질과 비슷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 하나씩 건져내는 것이니까. 낚시질을 해 본 이들이 계실 줄 압니다. 저도 잘 못하지만 더러 해 보았습니다. 낚시질하는 사람을 가만히 보면 낚시터를 잘 살펴서 정합니다. 고기가 잘 모일 만한 곳에 자리를 정합니다. 또 물이 잔잔해서 고기가 미끼를 잘 물 만한 곳에 자리를 정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개인 전도를 할 때에도 아무 가정이나 들어가서 전도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아는 범위 안에서 안 믿는 가정을 가만히 생각해 봐서 꼭 전도를 받을 만한 그런 가정을 정해 놓고, 그리고 그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고 특별히 그 가정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그 후에 전도를 하면 개인 전도의 효과가 더 많이 있을 줄 생각합니다.
또 낚시질하는 사람을 보면 미끼도 아주 조심해서 택합니다. 고기에 따라서 미끼도 다르다고 합니다. 너무 큰 고기를 조그마한 미끼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미끼가 꼭 그 고기에 적당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 개인 전도도 그래요. 같은 복음을 전파하지만 학생에게 할 말이 따로 있고 노인에게 할 말이 따로 있고 장사하는 사람에게 할 말이 따로 있고 부인에게 할 말이 따로 있고 남자들에게 할 말이 따로 있습니다. 잘 생각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얻어야 될 줄 압니다.
그 다음에 낚시질하는 사람이 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한 번 던진 다음에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오래 기다립니다. 곧 고기가 물지 않아도 그냥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단히 필요한 줄 압니다. 우리가 그저 다른 사람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한 두 번 말해서 안 믿으면『에이 그 사람 안 믿을 모양이군!』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지 말고 전의 모니카와 같이 자기 아들 어거스틴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기도할 때에 十五년간이나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우리도 끝까지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 개인 전도에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또 보세요. 이 낚시질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름에는 대단히 뜨겁고 겨울에는 춥습니다. 한강에 나가보면 그렇게 추운데도 얼음 구멍을 뚫고 얼음 위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 들으니까 낫에만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니고 밤새도록 그렇게 앉아 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전도하는 것도,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내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고생을 각오해야 될 수밖에 없겠고 여름에 더울 때도 찾아볼 수밖에 없겠고……어떻든 우리도 고생을 각오해야 됩니다.
그러나 개인 전도는 반드시 열매가 있는 방법입니다. 어떤 분은 혹 말씀합니다.『난 다른 전도하겠는데 그것은 어떻게 할지 몰라서 못하겠다.』전도하는 방법을 배우는 방법이 있어요. 부인들이 바느질을 어떻게 배웁니까? 그저 바느질하면 됩니다. 바느질을 안 하면서 배우려면 백년 가야 못 배웁니다. 아무리 바느질 잘하는 사람이 옆에 앉아 있어도 그저 앉아서는 못 배웁니다. 내가 바느질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글씨 쓰는 것을 배우려고 하면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아무리 옆에 앉아있다고 할지라도 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친히 손을 들어 써야 됩니다. 전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전도하는 방법이 무엇이오? 그저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저 시작해 보십시오. 전도하는 가운데서 전도하는 방법을 배우고 경험을 배우고 기회를 배우고 힘을 얻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영혼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은 단순히 남만 위하는 줄로 생각하지 맙시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역시 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을 외향인(外向人)과 내향인(內向人)으로 구별합니다. 내향 인이란 무슨 생각이나 배운 것을 항상 마음 가운데 가만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흔히 우울증에 걸립니다. 번민(煩悶)에 걸립니다. 심하게 되면 정신 이상에 걸리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외향 인이 건전한 사람입니다.
내가 배울 뿐만 아니고 배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줄 아는 사람, 내 믿음을 다른 사람과 나눈 줄 아는 사람이 건전한 사람입니다. 사실 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도할 수 있으리만큼 되지 않았다면 내 자신이 아직도 건전한 신앙이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또 사실 우리가 큰 신앙의 기쁨은 이 전도를 통해서 얻습니다. 낚시질 이야기를 했지만 그렇게 오래 기다리다가 큰 고기를 낚아 내게 되면 얼마나 기쁩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낚시질에 미친다고도 합니다. 그렇게 낚시질에 미쳐서는 곤란하겠지만 사실 우리 신앙 생활 가운데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 내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보스턴의 어떤 건물에 들어가면 담 벽에 이 방에서 본래 킴볼이라고 하는 한 무명 교인이 전도를 할 때에 어떤 구두 방 앞을 지나가다가 그 구두 방 안의 어떤 젊은 양화 직공에게 전도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아무래도 전도하여야겠다는 이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가서 이들에게 전도했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 분이 그 후에 디 에리 무디라고 하는, 수 천명 수 만 명을 구원해 내는 위대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실 내가 전도한 사람이 세례를 받고 내가 전도한 사람이 혹 집사가 되고 내가 전도한 사람이 혹 장로가 되는 기쁨에서 더 큰 기쁨이 없을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서도 여러 가지 기쁨이 있겠지만 제일 큰 기쁨은 내가 전도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구원을 얻어서 천당에서 만나게 될 때의 기쁨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 하늘 나라에 가서 생명의 면류관을 다 받겠지마는 면류관에서 비치는 그 별의 수가, 진주의 수가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했습니다.
전도를 게을리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소흘이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를 게을리 하는 것은 신자의 태도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전도를 게을리 하는 것은 영혼의 가치를 경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금년에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 십 시오.
다니엘 十二장 三절에『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말씀했습니다. 지위가 귀하지마는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닙니다. 권세가 귀하지마는 권세가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돈이 있어야 살지마는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한 사람이 별과 같이 비칠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별과 같이 비치는 사람이 됩시다. (一九六一년 一월 二十九일)


Ⅳ-26 청년아 일어나라 (누가복음 七장 十一-二十三절)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 七·十四)

오늘 면려(勉勵)주일을 당해서 주님의 이 말씀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성경 가운데 예수 님께서 죽은 자를 다지 살리신 기사가 세 곳 있습니다.
첫째는 여기 있는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다시 살리신 이적, 또는 야이로의 어린 딸을 다시 살리신 이적, 또는 베다니의 나사로 라고 하는 청년을 다시 사리신 이적, 그렇게 세 번 적혀 있습니다.
다른 모든 이적과 같이 예수 님의 이 부활에 대한 이적도 두 가지 뜻이 포함된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주님의 사랑과 동정심의 표시입니다. 유가족들을 동정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가운데서 그 청년들을 다시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둘째는 이보다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신령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런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의 근본이 되시어서 우리 모든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신다고 하는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와 같은 부활의 이적을 행하신 줄 생각합니다.
또한 성경에 보면 예수 님께서 세 가지 다른 종류의 청년들에게 일어나라고 외치셨습니다. 첫째는 죽은 청년에게,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에게, 베다니의 죽은 청년 나사로 에게 일어나라고 외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인 줄 생각합니다. 둘째는 병든 청년들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네 친구가 메고 온 중풍병자를 향해서 일어나라고 하셔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베데스타 못 가에서 三十八년 된 중한 환자를 일어나서 상을 가지고 가라고 하시면서 그를 역시 병 가운데서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인 줄 생각합니다. 셋째는 자는 청년들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는 밤을 세워 기도할 때에 제자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해서 잠을 잤습니다. 이 장자는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일어나라고 또한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영적 견지에서 볼 때에 지금도 이 세 가지 종류의 죽은 청년들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주님의 말씀 가운데 죽은 자들은 장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죽은 자들이라고 하는 말은 영적으로 죽은 자를 가리킨 것입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생명의 근본 되시는 하나님도 모르고 그 아들을 모르는 사람은 그는 육으로 살았지마는 영은 죽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이런 이들에게 청년아 일어나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으로 죽은 청년들을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병든 청년들이 많이 있습니다. 육체는 건강하지마는 그 심령에 병이 들었습니다. 하나님도 알고 예수도 아노라고 하지마는 그 심령에 아직까지도 어떠한 고질이 있어서, 얽매이기 쉬운 죄, 악한 죄의 뿌리를 뽑지 못하는 까닭으로 부용지물이 되어 있는 청년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삭개오 처럼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마는 죄로 말미암아 천국에서는 멀어졌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지금도 이와 같은 청년을 향해서 일어나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지금도 잠자는 청년이 많이 있습니다. 이 청년들은 죽은 것은 아닙니다. 특별한 병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잠자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대적 각성이 없습니다. 자기가 사는 시대가 어떠한 시대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어떠한 환경에서 사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따라서 자기의 사명이 무엇이고 자기의 책임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 쓸데없는 잠만 자는 무용지물이 된 청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이와 같은 청년들을 향하여 일찍이 제자들을 깨우치듯이『청년들아 일어나라!』외치시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청년들, 심령에 병든 청년들, 일할 것은 많은데 잠자는 청년들을 향하여 지금도 주님께서는 청년들아 일어나라고 외치십니다. 우리가 이 음성을 듣습니까? 왜 주님께서 이와 같이 일어나라고 외치십니까?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 동산에 할 일리 많습니다.『아들아, 포도 원에 가서 일하라.』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 아버지의 포도 동산에 할 일이 많습니다. 이 삼천리 무궁화 동산에 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곡식이 이미 익어서 희어졌습니다. 지금이 곧 거둘 때인 까닭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이 동산에 원수도 많이 들어 왔습니다. 이들은 동산을 노략질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동산을 황폐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적지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원수들과 싸울 군인이 필요합니다. 십자군이 반드시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 원수들과 싸울 십자군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들아 일어나서 일하고 싸우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동산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먼저 복음의 전선을 돌아보세요. 사실 문자 그대로 곡식이 이미 익어서 희어졌습니다. 우리 민족의 심령 상태는 공허합니다. 비었습니다. 말하자면 빈집과 같이 되었습니다. 불교, 유교, 재래의 종교는 이미 지나간 종교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영적 기갈을 채우게 위해서 생명의 말씀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기회를 노려서 온갖 미신, 거짓된 철학, 사교, 사이비 종파도 도량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습니다.
떡을 구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돌을 줄 수가 없습니다. 생선을 구하는 사람에게 뱀을 줄 수가 없습니다. 참된 복음을 전파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금년을 본 교회에서는 특별히 개인 전도의 해로 정하고 복음을 전파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청년아 일어나라!』예수 님께서 외치십니다. 청년은 청년들이 일어나서 구원해야 되겠습니다. 죽은 가운데 있는 청년들, 병든 청년들을 구해내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습니다.
또한 이 동산에서 사상 전선을 고요히 살펴보십니까? 四·一九혁명으로 우리 국민의 자유가 전에 보다 더 많아진 것은 실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죄도 자유의 기회를 더 얻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깡패도 자유를 더 얻었습니다. 사창들도 자유를 더 얻었습니다. 그리고 공산당들도 자유를 더 얻었습니다.
얼마 전에 신물을 보니까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는 공산당 간부들을 모아 놓고 하는 말 가운데『우리 공산당은 이제는 전쟁을 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가 전쟁하지 아니하고도 다른 방법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까닭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른 방법이란 두말할 것 없이 침투 작전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가만히 살펴보니 공산당들아 달콤한, 소위 중립 통일, 평화통일의 사탕 마른, 겉은 희고 속은 새빨간 마취약으로 우리 민족을 취하게 하는 중입니다. 아무 딴 생각 없는 사람들도 단지 통일을 갈망하는 가운데서 이와 같은 사상에 도취되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빛과 어두움 사이에 중립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유와 노예 사이에 중립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다만 중립의 이름 아래에서 한국에 있는 유엔군을 이 남한에서 몰아낸 후에 다시 한 번 침략을 해보려고 하는 모략밖에는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내 들으니까 남한 어떤 지방에는 우리가 꼭 중립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하면서 심지어 유엔에 청원하자는 운동을 하면서 연판 장을 돌린다고 하는 말도 들립니다. 사실 중립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 자신은, 지금은 공산당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통일을 위해서는 이래도 저래도 좋다고 하는 저의가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무엇이라고 하는 것을 확실히 아는 우리는 그런 태도는 가질 수 없습니다. 통일이 필요하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와 진리에 대한 확보입니다. 통일은 반드시 자유의 확보 아래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사상을 선도하기 위해서 우리 기독 청년들이 총궐기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바로 이 때인 것입니다.『청년아 일어나라!』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외치십니다.
또 우리 사회의 실정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우리 사회에서 각계 각층에서 하는 일을 보면 각각 자기의 권익만 주장하고 국가 전체의 이익을 잊어버립니다. 심지어 어린 코 묻은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원들도 자기의 권익을 옹호한다고 해서 농성 투쟁을 합니다. 노조들은 자기의 권익을 위해서 투쟁을 합니다. 공무원은 공무원 자신의 권익을 위해서 투쟁합니다. 버스의 차주들은 자기의 권익을 위해서 또 투쟁을 합니다.
국민들이 전부 이런 정신으로 움직이면 어떻게 우리 나라가 유지될 수 있습니까? 이런 자기 중심주의,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을 먼저 두는 사상, 공보다도 사를 먼저 앞세우는 사상 대신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을 가진 청년들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면 우리 국가를 유지하거나 건설할 수 없겠습니다.
미국의 새 대통령 케네디가 그 취임 연설에서 마지막으로 미국 국민들에게 부르짖는 말씀이『이 앞으로 여러분은 나라가 여러분을 위하여 무엇을 하겠는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를 물으라.』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도 그렇습니다. 우리 국민이 나라에 무엇을 하여 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내가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나라를 위하여 무슨 공헌을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생각하고 이와 같이 노력해야 우리의 나라는 유지되고 건설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멸사봉공의 정신을 넣어줄 자가 누구입니까? 십자가를 따르는 우리 청년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학생사이에 새 생활 운동이 일어나고 국회 의원들 사이에 청빈(淸貧)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다 국가를 위해서 경하로운 일입니다. 이러한 때에 빛과 소금으로 자처하는 우리 기독 청년만 어찌하여 잠잠하고 있습니까? 낮술은 그만 두고 밤술이나 먹자고 하는 절주(節酒) 운동, 고급 요리 집에 가서 술을 마시지 말고 대포 집에 가서 술을 마시자고 하는 대포 운동, 양담배를 빨지 말고 국산 담배는 먹자고 하는 절연 운동도 애국 운동으로 자긍(自矜)하는 이때, 왜 철저한 금주 단연(斷煙)의 기치를 높이 들고 사회 혁신의 봉화를 기독 청년들이 일으키지 못합니까?『청년아 일어나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부르짖습니다. 이 사회는 십자군의 궐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안 믿는 학생들이 심지어 댄스 홀, 바, 카바레 같은 데를 찾아가서 이래서야 되겠는가고 외치는 이러한 때에 죄인을 구원하는 복음을 가진 기독 청년들은 왜 잠잠하고 있습니까 듣는 대로 종로 뒷거리, 도동, 양동, 이태원 근방의 저녁거리에는 사창, 양 마담들이 우굴우굴하고 그 죄악의 함정에 끌려 들어가는 산송장들로 길이 메었다고 하는데 왜 오늘날의 기독 청년들은 그런데 가서 옛날 휘크필드나 월리암 부드처럼 생명의 복음을 외치지 못합니까?『청년들아 일어나라!』오늘 면려 주일을 당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외치십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우리 한국 민족 반만년 역사상에 있어서 제일 위대한 시대가 어느 때였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때는 삼국 시대요. 삼국 시대 중에서도 고구려 광개토 대왕시대입니다. 만주에 가서 사시던 분은 광개토 대왕의 기념비가 一천 五백년이 지난 오늘에 웅장하게 선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 광개토 대왕은 十八세 나서 왕이 되어 三十九세에 별세했습니다. 그러나 十八세 난 제왕이 약 二十년 동안에 저 남북 만주를 다 점령하고 남으로는 백제까지 내려 와서 진번군을 침범하고 문자 그대로 전 동아를 한 손에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곧 젊은 청년 제왕인 광개토 대왕입니다.
여러분, 광개토 대왕 시대의 연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연호는 영락(永樂)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영락 시대라고 합니다. 광개토 대왕을 영락 대왕이라고도 합니다. 이 한국 역사상에 있어서 영락 시대야말로 가장 강하던 시대요. 가장 위대하던 시대요. 가장 웅비하던 시대입니다. 여기 앉은 영락교회 청년들은 이 말씀을 뜻 있게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청년들아 일어나라.』 이 동산에 할 일이 많습니다.『청년들아 일어나라.』 이 동산에 원수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어나는 청년들을 통해서 자기의 경륜을 이 땅에서 이루시고 온 동아와 세계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것입니다.『일어나라 청년들이여!』
(一九六一년 二월 五일)

Ⅳ-27 신앙생활의 표준 (마태복음 五장 三十八-四十八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五·四十八)

우리 신앙생활의 최고 표준이 무엇인가. 생각하여 보셨습니까? 여기에 우리 주님의 대답이 있습니다.『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한 번은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 님께 와서『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물어 보았습니다. 예수 님께서 대답하시는 말씀이『네가 계명을 알지 아니하느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이 모든 계명을 지키면 네가 살수 있느니라.』 이 때 이 부자 청년이 하는 말이『그것은 제가 어렸을 적부터 잘 지켰는데 오히려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그 때에 예수 님께서 대답하시는 말씀이『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댄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후에 나를 좇으라.』예수 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사상은 구약에서도 똑 같이 가르치십니다. 창세기 十七장 一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는 말씀이『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를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신명기(申命記)十八장 十三절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 하라.』
사도 바울도 같은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에베소서 四장 十三절에『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골로새서 一장 二十八절에는『우리가 가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이 전도와 목회의 목적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야고보 장로는 모든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권면 하는 가운데『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온전하고 구비한 사람이 되라고 권면 했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와 같고 우리 사람은 그 손에 있는 진흙과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그릇을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찌그러진 그릇이나 불완전한 그릇을 만들기는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위대한 예술가는 온전한 작품을 만들기 전에 만족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가상 위대한 예술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부족하고 죄 않고 연약하지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온전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불렀습니다.
물론 이 온전(穩)全)이라고 하는 뜻을 오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절대적 의미에서 하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전지전능하십니다. 그 성결(聖潔)과 사랑이 무한하시고 무궁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의미에서 온전한 사람이 될 수는 물론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온전한 것과 같이 사람은 사람으로서 온전 하자는 말입니다.
촛불이 태양 빛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촛불로서 온전한 촛불이 될 수는 있습니다. 작은 앉은뱅이 꽃이 장미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 꽃으로서 온전한 꽃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우리에게 권면 합니다. 우리 신앙 생활의 최고 목표를 이「온전」에 두라고 우리에게 권면 합니다.
우리 사람의 육체로 말하면 二十년쯤, 오래 큰대야 二十五, 六세쯤 되면 더 크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의 속에 있는 도덕적 능력은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클 수 있습니다. 사람의 속에 있는 심령은 키와 같이 멎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온전한 사람이 이르기까지 장성하라고 우리에게 권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현재가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부족하다고 낙심할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이 위대한 표준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와 같은 자리로 인도할 수 있으니 우리의 온갖 노력을 다해서 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힘을 쓰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일찍이 부르짖었습니다.『내가 이미 이루었다 함이 아니라. 그러나 오직 한 가지 일을 행하는데, 그것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하노라.』푯대를 향해서 우리는 달음질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최고 표준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를 향해서 우리도 달음질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달음질하는데는 특별히 네 가지 방면으로 우리가 힘을 써야 될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성결의 방면에서 우리가 계속해서 장성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을 때에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보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우리의 생활이 갑자기 변해서 온전히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해야 된다는 것은 계속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생 하였다고 하지마는 아직도 중생 한 처음에는 어린 아기입니다. 어린 아기가 장성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매일 매일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다시 살아서 계속해서 장성해서 점점 거룩한 자리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대하여는 특별히 죄를 멀리 하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행실로 죄를 범하는 것은 물론 말로나 생각으로도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혹은 스스로 의식할 수 있는 의식면만 아니고 속에 깊이 있는 잠재 의식 속에까지도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항상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악한 것은 모양이라고 버리고 어떻든지 죄를 멀리 하도록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 가서 몇 공부하다 온 청년이 한 번 찾아와서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한 번은 자기가 자동차를 운전해서 어떤 높은 산에 있는 휴양지에 갔다가 그만 너무 피곤했던지 잘못 되어서 자동차가 전복되었습니다. 부상을 당해서 그 즉시로 이 사람은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다른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자기 차데 태워서 어떤 병원에 입원시켜서 사흘 만에야 자기 의식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 병원에서 몇 주일 동안 치료하는데 온전히 나아서 건강을 회복하고 공부를 계속해서 다 마치고 본국에 돌아 왔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이 청년이 전에 받지 못하였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떻든지 자기는 이 앞으로 꼭 옳은 신앙 생활을 하려고 애쓴다는 그런 말을 하면서『나는 행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저 마음으로도 내 생각으로도 죄 안 짓고, 꿈에라도 죄 안 짓게 해 달라고 항상 기도합니다.』그만큼 우리가 죄를 멀리 하도록 힘써야 되겠습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연약합니다. 이 세상에는 유혹이 많습니다. 때때로 죄를 짓습니다. 내 본의는 아니지마는 깨닫지 못할 때 언제 죄를 범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그런 경우가 되면 우리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옛날 베드로가 자기의 뜻은 아니지마는 예수를 세 번씩 모른다고 죄를 지었지마는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자기의 죄를 깨달은 때는 그 자리에서 곧 떠나 밖으로 나가 크게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인수무과(人誰無過)리요, 사람이 누가 허물이 없겠습니까? 허물을 씻고 고치면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라고 죄를 도무지 안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으면 곧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떠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점점 성결한 자리로 향상하도록 힘을 써야 마지막에 온전한 자리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는 사랑의 방면에서 장성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사람은 다 누구나 이기주의자입니다. 자기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생활을 바라보는 가운데 점점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가 배우게 됩니다.
처음에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했지만 점점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되겠습니다. 처음에는 나와 가까운 사람만 사랑했지마는 나와 먼 사람들도 점점 사랑하는 것을 우리가 배워야 되겠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유익하게 하는 사람만 사랑했지마는 나에게 손해를 주는 사람도 점점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되겠습니다.
처음에는 내 친구들만 사랑했지마는 점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예수 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 박는 원수를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였는가 하는 그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가 배워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점점 장성해야 됩니다.
늘 하는 말이지마는, 사랑이란 말은 우리 한국말로는 한 마디 말밖에 없지마는 본래 이 신약이 기록될 때의 헬라 말 가운데 세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적인 남녀간의 본능적인 사랑을 에로스라고 흔히 하였습니다. 친구와 친구 사이의 우정을 필리아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희생적인 십자가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아가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에로스에서 필리아로 장성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부족합니다. 필리아에서 아가패의 사랑으로 장성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께서 읽은 주님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햇빛과 비를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에게 같이 주는 큰사랑을 본받아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같이 우리도 자비로써 모든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그 지경에까지 올라가도록 간단 간단없이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셋째로는 우리가 각 방면으로 우리의 신덕(信德)을 구비해서 장성하도록 힘을 써야 됩니다. 성결의 방면 뿐 아니고, 사랑의 방면 뿐 아니고, 각 방면으로 우리의 신덕이 구비해서 원만한 인격을 이루도록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점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쳤습니다.『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는 더하고 인내에 경건(敬虔)을 더하고 경건에 형제 화목을 더하고 형제 화목에 사랑을 더하라.』
이 여덟 가지,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화목과 사랑은 음악으로 말하면 마치 여덟 음계와 같다고 합니다. 좋은 음악을 이루자고 하면 여덟 음계가 다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몇 음만 있고 몇이 없다고 하면 원만한 음악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점점 장성해서 온전한 지경에 이르려고 하면 이 여덟 가지 신덕을 다 구비해야 그와 같은 자리에 이를 것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넷째로는 우리가 온전 이라고 하는 이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면서 특별히 기억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책임을 맡았든지 어떠한 의무를 맡았든지 온전을 기하도록 힘쓰는 이 정신입니다. 제가 어떤 잡지를 보니까 독일 베를린에 있는 미국 군인의 이야기를 썼는데 그들의 표어가「완전」이라고 합니다.『우리 베를린에 있는 군인은 완전해야 되겠다. 그래서 옷도 결점이 없이 온전히 입고 모자도 똑바로 쓰고 행진을 할 때에도 하나 실수 없이 똑바로 해나가고 모든 것에 온전한 태세를 갖추어 거지고 이 베를린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 원수들과 싸우는 우리 십자군들도 온전이 라고 하는 표어를 가지고 내 생활을 바로 잡고 내 실제 생활을 인도해서 언제든지 온전한 임전 태세를 갖추고 사는 것이 우리 십자군의 생활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十六세기의 제일 유명한 예술가, 건축가요, 화가요, 조각가인 미켈란젤로를 한 번은 어떤 친구가 찾아가 보니까 꽃을 꽂기 위해서 자그마한 함을 하나 만드는데 아주 정력을 다해서 시간을 많이 들이면서 만들고 있습니다. 구경하던 그 친구가 작은 꽃 함 하나 만들면서 그렇게 시간을 많이 보낼 게 뭐 있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위대한 예술가가 대답하는 말이『그렇지 않다. 나사렛의 목수가 만일 이 꽃 함을 만든다고 하면 불완전하게 만들 줄 아는가? 허술하게 만들 줄 아는가? 나도 이 꽃 함을 온전하게 만들겠다.』 이 정신이 그로 하여금 그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를 만든 줄 압니다.『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존하라.』
이와 같이 위대한 표준을 향해서 나아가는 우리가 어떠한 자리에서 어떠한 책임을 맡았든지 우리도 언제든지 그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겠다고 하는 이 정신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나사렛의 목수가 작은 함을 만들지라도 불완전하게 만들 것 같습니까? 우리 중 공장에서 일하는 직공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 공장에서 어떤 제품을 만들든지 온전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중 관청에서 일하는 공무원이 있습니까? 공무원으로서 내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는 정신을 가지고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공무원만 아닙니다. 군인은 군대에서 그러해야 되고, 교원은 학교에서 그러해야 되고,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그 자리에서 교회의 직분 된 사람은, 목사는 목사로서, 장로는 장로로서, 집사는 집사로서, 평신도는 평신도로서 내 맡은 책임을 온전히 바로 감당하는 정신을 가지고 우리가 감당해야 되겠습니다.
지금 부산에 계신 채필근 목사님이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옛날 그 이가 함경북도 경흥 지방에서 캐나다에서 온 선교사들과 같이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전도하려 다닐 때에, 그 때는 구두가 별로 없고 다 짚신을 신고 다닐 때인데, 신이 떨어져서 짚신을 한 켤레 샀습니다. 본래 짚신이 그렇게 보기 좋은 것은 없어요. 그러나 하루 저녁에 몇 켤레나 삼은 신인지 헐렁헐렁하고 형편없단 말이요. 그것을 한 켤레 사서 이렇게 들고 보는 중에 함께 다니던 선교사가 그 짚신을 가만히 보더니『그 사람이 짚신을 삼지 않고 자기를 삼았오.』하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을 삼고 계십니까? 우리가 무슨 책임을 맡았든지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는가에 따라서 결국은 내 인격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우리가 그 점을 마음 가운데 항상 기억합니까? 우리가 무슨 일을 함부로 하게 되면 결국은 내 자신을 함부로 건설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무슨 일을 맡았든지 잘 하는 것,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더 잘 할 수 있으면 더 잘 해야 합니다. 더 잘 하는 것도 부족합니다. 가장 잘 할 수 있으면 가장 잘 해야 됩니다. 이것이 완전에 올라가는 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어떤 깊은 산골에 사는 농부가 산에 나무하려 갔다가 독수리 알을 하나 얻어서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마침 봄이어서 독수리 알을 병아리 깨우는 닭의 품속에 함께 넣어 놓았습니다. 얼마쯤 있다가 병아리와 독수리 새끼를 까놓았습니다. 병아리가 크는 틈에서 이 독수리 새끼도 점점 큽니다. 병아리 날개가 점점 크는 것을 따라서 이 독수리 새끼의 날개도 점점 큽니다. 병아리는 날개가 있어도 날아다니지 아니하니까 이 독수리 새끼도 그냥 걸어만 다닙니다.
그러다가 어떤 날 낮에 큰어미 독수리가 그 마당 위에 와서 빙빙 돕니다. 병아리들은 무서워서 다 사방으로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독수리 새끼는 이상하게도 무서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 빙빙 도는 독수리를 자꾸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바라보는 가운데 이상한 충동이 올라오면서 자기도 날아볼 생각이 점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날아보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날개가 힘이 있어야지요. 몇 번 푸덕푸덕하지만 날 수는 없었습니다. 큰 독수리는 빙빙 한참 돌더니 도로 면 데로 가 벼렸습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이 독수리 새끼는 나도 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날개를 너울구리면서 날아가는 것을 자꾸 연습합니다. 매일 매일 조금 더 날고 또 좀 더 납니다. 그러다가 열흘쯤 후에 큰 어미독수리가 다시 와서 빙빙 돕니다. 그 다음에는 나도 저렇게 날아보겠다고 날아올라 갑니다. 점점 잘아 올라가니까 큰 독수리는 점점 날아서 내려옵니다. 거의 가까이 오는데 그 다음에는 어린 독수리가 힘이 다해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그 때에 큰 독수리가 큰 날개를 가지고 내려와서 어린 독수리를 날개에 업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갔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의 경험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독수리 새끼가 병아리 가운데 사는 것처럼 이 죄악 세상 가운데 살지마는 우리는 장차 올라가려고 하는 이 하나님의 큰 경륜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이미 된 것입니다. 우리도 날아 올라가기 위해서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최대의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성결하기 위해서 사랑하기 위해서, 각 방면으로 덕을 구비하기 위해서 노력합시다 물론 우리의 노력으로는 되지 아니합니다. 결국 우리의 노력은 실패할 것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노력을 거듭할 때에 우리의 힘이 부족할 때는 하나님께서 큰 날개로서 은혜의 날개로써 우리를 업어서 마지막에 신령한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 은『형제들아 만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게 되면 우리도 그와 같은 줄을 아나니 그것은 우리가 그를 친히 보겠음이라.』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우리의 이 높은 이상에 다 도달하지 못할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노력하면 하나님의 은혜로써 이 이상에 도달될 때가 있습니다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영원토록 살 생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一九六一년 二월 十二일)

Ⅳ-28 하나님의 어린 양 (요한 복음 一장 二十九-四十二절)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一·三十六)

이 말씀은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세례 요한이 예수 님께 대한 증거의 말씀입니다.
예수 님을 상징하는 이름은 성경에 허다하게 많이 있습니다.「선한 목자」라고 한 곳도 있고「생명의 양식」,「포도나무」또는「반석」,「길」,「문」,「빛」,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 것을 우리가 발견합니다. 그렇지마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려 오신 세례 요한은 다른 어떤 이름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적절한 의미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다른 이름으로 알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알아야될 필요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세례 요한이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면서 외친 말씀이『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어찌해서 먼저 이런 이름으로 예수를 지적하셨는지 그 몇 가지를 오늘 아침에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어린양이란 이름은 그의 성품을 우리에게 연상시켜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짐승들 가운데 가장 순진하고 무사기합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합니다. 예수 님의 성품이 그러합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 우에 임하였다고 말씀하였고 또한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지적하는 것은 그의 흠 없고 점 없는 수정같이 맑은, 생수 같이 깨끗한 순결한 성품을 우리에게 물론 연상하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다른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짐승 가운데 양은 가장 온유한 짐승인 줄 생각합니다. 양 가운데도 어린양은 특별히 더 온유하고 겸손한 짐승으로 생각이 됩니다. 예수를 어린양으로 지적하는 말을 듣게 될 때에 우리는 자연히 주님의 음성을 회상하게 되는 것입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이사야가 메시야의 성품을 묘사할 때에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고 등불도 끄지 아니한다고 하는 말씀도 연상됩니다. 사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아이들을 사랑하시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시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아니하시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온유와 겸손으로 대한 태도는 우리로 하여금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에 어린양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 또한 사실인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상의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지마는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이라고 말씀한 그 중심은 여기에 있지 않는 줄 생각합니다. 이 말씀의 중요한 사상은 그의 성품의 묘사가 아니고 그의 일생의 사업의 상징인 줄 생각합니다. 세례 요한은 레위 지파에 속합니다. 아론의 후손입니다. 제사장의 아들입니다. 누구보다도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누구보다도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잘 통달한 선지자입니다. 이와 같은 선지자가 메시야의 길을 분지하기 위하여 먼저 나타나 예수께서 나타나는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이라고 지적한 배후에는 과거의 모든 선지자들의 교훈이 그의 머리에, 배후에 있는 줄 생각합니다.
수난의 메시야의 모습을 제일 분명히 묘사하는 이사야 五十三장, 그 가운데서도 七저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 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이와 같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줄 생각합니다.
또한 이 말씀을 하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는 줄 생각합니다. 세례 요한에게 이르기까지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처음에는 성막(聖幕)에서, 그 다음에는 성전에서 매일 아침에도 제사 드리고 저녁에도 제사를 드렸는데, 아침에나 저녁에나 어린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안식일을 당하면 그 수를 배로 늘여서 아침과 저녁으로 두 마리씩 어린양을 희생의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어린양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또한 유대사람들은 모든 명절 가운데도 제일 큰 절기가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 받은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 절기에는 본래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구원을 얻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반드시 유월절 양을 잡아서 이 날을 기념하는 풍속이 있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어린양이라고 말씀한 그 사상의 배후에는 이런 모든 메시야에 대한 예언과 모든 제사의 제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즉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서의 어린양이라고 우리에게 지적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 특별히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 혹 기억하십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자기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 이삭과 같이 모리야 산으로 올라갈 때에 이삭에게 나무를 지우고 자기는 불을 가지고 높은 산을 향해서 올라갑니다. 도중에 이삭이 자기 아버지에게 묻습니다.『아버지, 제사할 나무는 우리가 준비하여 가지고 하며 제사에 쓸 불도 준비하여 가지고 가지마는 제사에 쓸 양은 어디 있습니까?』이런 질문을 들을 때에 아브라함이 곧 은혜 가운데서 대답하는 말이『아들아 그 양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여 주실 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 후에 하나님께서 그 양을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말씀은 그 뜻입니다. 이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여 주신 양입니다.『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독생자를 하나님께서 어린양으로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보니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여기 세상이라고 하는 말은 온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이방 사람들만 아닙니다. 옛날 있던 사람들만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만 아닙니다. 온 세상, 동서고금, 전 세계를 가리킨 말입니다. 이 어린양은 동서고금 온 세상, 전 인류의 죄를 진 어린양이라고 우리에게 지적하여 주십니다.
전의 어린양은 한 사람의 죄를 대속하게 위해서 그 생명을 희생했습니다. 어떤 어린양은 두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그 생명을 희생하였습니다. 또 어떤 어린양은 이스라엘의 전 민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희생을 드린 어린양도 있습니다. 그렇지마는「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 전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어서 그 죄를 대속하는 어린양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세상 죄를「지고 가는」어린양이라고 그랬습니다.「지고 간다」고 하는 이 말에도 배후에 사상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특별히 一년에 큰 속죄 일이 있었습니다. 이 날에는 특별히 대제사장이 염소 둘을 택해서 하나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의 죄를 대속해서 하나님께 번제로 잡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는 대제사장이 그 위에 손을 얹고 자기와 자기의 온 민족의 죄를 자복한 후에 그 염소는 번제로 드리지 아니하고 아사셀에 속하는 염소라고 해서 그 염소를 멀리 사람 없는 광야로 내어 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지고 멀리 사람 없는 광야로 아주 가버렸습니다.
세상 죄를 질뿐더러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하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감당해서 자기가 희생한 어린양이 될뿐더러 인류의 모든 죄를 자기 등에 혼자 지고 멀리 다른 곳에 가서 죄의 짐을 없이 하였다고 하는 뜻이 이 가운데 있는 줄 생각합니다.『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인류, 옛날 사람뿐만 아니고 지금에 있는 우리뿐만 아니고 장차 이 세상에 날 사람까지도 온 세상 전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속죄하시고 그 죄를 아주 없이하여 주신 어린양과 같은 분입니다. 우리가 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물론 이 깊은 진리는 인간의 옅은 이성으로써 다 설명하기 힘듭니다. 좁으라운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저는 꼭 이대로 믿습니다. 그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믿을 만한 증거가 많습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 먼저 우리에게 소개해 주시는 세례 요한이 이와 같이 증거 한 까닭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먼저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세례 요한이야말로 정직하고 강직한 인물입니다. 바른 말 하다가 자기의 생명을 헤롯에게 빼앗긴 강직하고 정직한 인물입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해 주십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三장 十四절에 말씀하시기를『모세가 광야에서 벰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서 그 구리 뱀을 보는 사람마다 뱀에 물려 죽어 가는 사람들이 살아났습니다. 이것처럼『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무슨 뜻입니까? 십자가를 가리킨 것입니다.
요한 복음 十二장 二十四절에는 자기가 친히 이렇게 말씀했습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여기 한 알의 밀은 누구를 가리켰습니까? 예수를 가리켰습니다.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스스로 증언했습니다. 마가복음 十장 四十절에는 모든 제자들에게 피차에 봉사를 배우라고 권면 하시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씀으로 결론 맺었습니다.『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인자가 오셨다고 스스로 증언했습니다.
예수 님 자신의 증언만 아닙니다. 모든 사도들은 이와 같이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꼭 이와 같이 믿고 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五장 七절에 친히 기록하시기를『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그리스도를 유월절 양이라고 직접 사도 바울도 말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十五장 三절에는『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傳) 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기록되었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제일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는 이와 같이 증언했습니다. 베드로 전서 一장 十八-十九절에『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노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그리스도의 보배로우신 피로 산 것입니다.
예수 님의 품에 안겼다고 하는 사도 요한 은 어떻게 증언했습니까? 요한 一서 一장 七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 사도의 증언을 다 말씀했습니다.
더 말씀할 필요도 없이 한 마디 더 하면 천사들도 이와 같이 증언했습니다. 요한 계시록 五장 十一-十二절에『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萬萬)이요 천천(千千)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 하도다 하더라.』라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오늘 아침 우리 눈을 들어서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는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보라」고 하는 말은 깨달으라고 하는 말이며 믿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믿었는지 모르지마는 이 시간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대속 하신 어린양으로 믿으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잡지를 보니까 미국 남방의 어떤 목사가 이 뜻을 분명히 가르쳐 주기 위해서 강대(講臺)에 십자가를 크게 하나 만들어 놓고는 어린양을 잡아다 십자가에 못박으며 이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해야 깨달아 알겠습니까? 그렇게 보지 않고 믿는 이는 복이 더 많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어린양으로 믿는 사람에게 어떠한 축복이 있습니까? 요한 계시록 七장 九절 이하를 읽어보세요. 사도 요한 이 신령한 가운데 바라보니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그 보좌 옆에는 어린양이 섰다고 그랬습니다. 그 어린양을 둘러싼 각 방언, 작 족속, 각 나라, 수 없는 사람들이 둘러서서 몸에는 흰옷을 입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과 그 어린양을 찬송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 이 물었습니다.『이 사람들이 다 어떤 사람들인가』천사가 대답합니다.『이 사람들은 다 어린양의 피로 그 몸을 씻었느니라.』
요한 계시록 十三장 八절에는 어린양의 생명 책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사람이라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 책에 녹명(錄名) 되었습니까? 十四장 一절에는 어린양의 이름이 그 이마에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어린양의 이름이 우리 이마에 있습니까? 十五장 三절에는 구원받은 사람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른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린양의 노래를 부릅니까? 十九장 九절에는 장차 어린양의 큰 혼인 잔치가 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이 혼인 잔치에 참여할 만한 흰 예복이 준비되었습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누구든지 이 어린양을 바라보고 그를 믿고 내 구주인 것을 확실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 고백하는 그 사람은 모든 죄의 씻음을 받고 흰 예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아니하리 오 마는 이제부터 부활주일 때까지는 특별히 사순절 기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는 때입니다. 우리가 이 때에 어린양 되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그 앞에 나와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모든 죄 사함을 받고 마지막에 큰 부활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一九六一년 二월 十九일)

Ⅵ-29 마치려는 결심 (사도행전 二十장 十七-二十八절)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二十·二十三-二十四)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밀레도 라고 하는 성에 들려서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자기 마음속의 깊은 생각을 흉금을 열어 놓고 그들에게 말할 때에 이와 같은 말씀이 포함되었습니다.『나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사실 올라가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주 모르는 것도 아니다. 성령이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은 각 성에서 환난과 결박이 나를 기다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마는『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바 그 사명을 마치기 위해서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아니하노라.』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신앙 생활의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달려갈 길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는 받은 바 사명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달려갈 길을 마치고 자기의 받은 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아니하고 생명을 통해서 그 사명을 마치려고 하는 결심을 가진 것입니다.
여러 해 후에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장차 순교의 날이 점점 가까워 오는 것을 예감하면서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최후 편지를 쓸 때에 디모데 후서 四장 七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었으니』사도 바울은 자기의 달려갈 길을 분명히 보고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 달려갈 길을 마치려고 하는 결심을 가지고 일생을 달음질하는 사람과 같이 산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달려갈 길을 마치었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신앙 생활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의 길에 나선 사람은 자기의 달려갈 길과 사명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달려갈 길을 다 마치려고 하는 견고한 결심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그 달려갈 길을 다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생활이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입니다.
요한 복음 四장 三十四절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수가성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먹을 것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시장하실 터인데 잡수라고 권면 하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나는 내가 먹을 양식이 따로 있다.』계속해서 이르시되『나의 양식은 나의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그의 일을 온전히 이룬다고 하는 말은 원어에는 마친다고 하는 말입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서 행하여 나를 보내 사 나로 하여금 하게 하신 그 일을,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마치는 것이다. 양식은 매일 먹어야 되는 것과 같이 나는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양식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도 이 세상에서 다 사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실 때에 최후로 남긴 말씀이 요한 복음 十九장 三十절에 기록되었습니다.『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십자가상에서)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이 말씀도 다 마치었다 하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 일을 하시기 위해서 밤이나 낮이나 노력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 교훈도 하셨습니다. 이적도 행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핍박도 받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까지 달리셔서 자기의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주신 그 일을 마치려고 하는 결심을 가지고 일생을 노력하시고 마지막에 문자 그대로 인류를 구속하는 위대한 사업을 다 마치시고 이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내려오는 속담 가운데「시작이 절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이 매우 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치는 것은 시작하는 것보다 더 귀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귀합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을 이루는 것은 더 귀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좋은 일을 시작하는 것이 귀합니다. 그러나 이 시작한 일을 온전히 마치는 것은 더 귀합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시작하는 것이 매우 귀합니다. 그러나 시작한 이 주님의 일을 마치는 것은 더 귀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마치 경주자가 달음박질 마당에서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경주 자는 마지막 모든 코스를 다 달음질해서 그 경주를 마쳐야 한다고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마치 경주 자들이 마라톤 코스를 향해서 떠나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라톤 경주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시작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끝까지 그 코스를 다 마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경주 장에서도 시작하는 사람은 많지마는 끝까지 마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또한 의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보면 달리는 사람에게 주시는 권면이 많습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계속해서 달음질하라고 했습니다. 뒤에 있는 죄, 실패한 것을 기억하지 말고 잊어버리고 뒤에 어떠한 생활을 했던지 앞만 보고 달음질하라고 하는 권면이 있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회개하기 전 자기가 잘못한 죄를 항상 돌아보았던들 그 경주에 큰 장애가 되었을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도 전에 자기가 지은 죄를 그냥 돌아보았던들 자기가 앞으로 달리는데 큰 장애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습니다. 뒤에 있는 실패, 뒤에 있는 성공까지도 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또 우리가 성경에 보면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오직 달음박질 마당에 달리라고 그랬습니다. 여기에 무겁다고 하는 것은 경주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것은 분명히 죄인 것이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죄가 아닌 것이 분명히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명한 죄와 죄 아닌 사이에 소위 회색 지대가 있습니다. 도덕적 견지에서 죄 되는 경우도 있고 되 안 되는 경우고 있는 회색 지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회식 지대에 있는 어떠한 일, 무슨 오락이나 습관이나 사업이나 이런 방면은 무거운 것이 되어서 우리의 경주를 장해하는 것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 벗어버리고 경주하라고 권면 하는 말씀입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하는 말씀은 사람을 따라서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를 믿고 모든 죄는 다 회개했지마는 아직까지도 사람을 따라 온전히 회개하지 못한 죄가 더러 있습니다. 그것까지 온전히 회개하고 달음질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내로써 달음질하라고 그랬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달음질하는 마당은 마치 장애물 경주와 같아서 여러 가지 우리의 경주를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유혹과 위협과 핍박과 여러 가지 장해되는 것이 있습니다. 길이 험합니다. 그러므로 인내로써 달음질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달음질을 할 때에 경주자의 모범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달음질하라고 우리에게 권면 하신 것입니다. 시작이 귀합니다. 그러나 마치는 것은 얼마나 더 귀한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을 집을 짓는데 비유해서 가르친 데도 있습니다. 집을 짓기 시작하는 것이 귀하기는 하지마는 마치는 것은 더 귀합니다. 예수 님께서도 어떤 사람이 망대를 짓기 시작했다가 그 망대를 다 마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산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룹바벨의 지도 아래 바사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마자 그 다음해부터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했습니다. 큰 열심을 가지고 전심전력해서 성전 짓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로 그 근방에 있던 사람들은 성전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여러 가지로 방해하려 하였습니다. 바사 황제에게 여러 무고의 편지를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바사 궁전으로부터 이 성전 공사를 정지하라는 명령이 내리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안타깝게 짓던 성전 공사가 十五년 동안이나 중지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후에 하나님의 사자 학개가 나타나서 마땅히 우리가 시작한 이 성전을 마쳐야 되겠다고 부르짖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일어나서 이것을 마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집도 짓기를 시작하는 것도 귀하지마는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이것을 마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신앙생활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창세기 十二장 五절을 읽어보면 이와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아브라함이 모든 사람과, 같이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 땅을 가려고 거기를 떠났습니다. 그리고『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마침내 마지막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장망성 같은 이 세상을 떠나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천성을 향해서 떠나는 것, 매우 필요합니다. 시작하는 것,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귀한 것은 마지막에 온전히 천성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과 같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광야를 지나가는 동안에 이런 죄를 짓고 저런 죄를 짓고 하나씩 둘씩 쓰러지고 마지막에 가나안 땅으로, 장년으로 나왔다 들어간 사람은 둘 밖에 없다고 하는 기록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향해서 떠나는 것이 귀하지마는 그 보다 더 귀한 것은 온전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전쟁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전쟁을 다 원하지 아니하지마는 일단 시작된 다음에는 끝까지 싸워서 승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서 보셨을 줄 믿습니다. 맥아더 장군에게 자유 군인의 훈장 수여식 때 그의 연설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자유를 보존하는 무기는 둘이 있다. 하나는 팬이요 하나는 검이다. 팬은 평화 때에 필요하다. 그러나 전쟁이 나면 검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 한 번 검을 뺀 다음에는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패전의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하며『한국 전쟁의 실책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을 원하지 아니하지마는 전쟁이 일단 난 다음에는 최후 승리를 얻을 때까지 싸워야지 최후 승리를 얻지 못하고 휴전된 까닭에 아직까지 남북 통일도 되지 못하고, 반면에 중공으로 하여금 오늘로 말하면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군사 국가로 장성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을 탄식하면서 말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마땅히 싸울 면이 있습니다. 안목의 정욕과 싸울 수밖에 없고, 육신의 정욕을 향해서도 싸울 수밖에 없고, 모든 내 신앙을 방해하는 세력과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에 온전한 승리를 얻어야 우리가 온전히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시종 여일 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과 나중이 하나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 적으로 생각할 때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인 줄 분명히 알고 어떠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였으니 이 일을 온전히 마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락교회로서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운데 그중 하나는 기도원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벌써 六년 전에 우리가 十주년 기념식 때 하나님께 향해서 우리가 교육관을 짓고 기도원을 짓겠다고 약조한 일입니다. 六년이란 세월이 흘러왔지마는 아직까지도 우리가 이 약조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금년에는 이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마쳐야 되겠습니다.
또한 이 진리는 우리 민족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민족은 민주주의 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시작일 뿐입니다. 남북이 통일되지 못하였고 자유로써 북한을 해방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남한에 있는 우리들은 온전한 민주국가를 남북한을 통해서 이룰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마치기 위해서 싸우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으로나 교회로나 민족적으로나 좋은 일을 시작해야 할뿐더러 그 일을 마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一九六一년 二월 二十六일)

Ⅳ-30 새 시대와 새 사람 (고린도 후서 五장 十一-二十一절)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五·十七)

오늘 一九六二년 새해 첫 주일 아침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만근 수년 새 시대란 말을 우리가 점점 자주 듣게 됩니다.『우리는 새 시대에 산다.』『우리가 사는 시대는 새 시대가 되었다.』이런 말을 혹은 말로, 혹은 글로 자주 듣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의미는 물론 사람을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에 들어가서는 아마 다음의 몇 가지 요소를 내포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는 새 시대를 말하는 사람들은 흔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과학 혁명의 시대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는 줄 생각합니다. 사실 一八세기를 흔히「산업 혁명의 시대」라고 우리가 말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二十세기는「과학 혁명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줄 생각합니다. 그 뜻은 특별히 이 二十세기에 와서 모든 방면의 과학 발전은 인류 생활의 큰 변혁을 가져왔다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또 그것은 사실인 줄 생각합니다. 가령「통신」하더라도 옛날에 무슨 소식을 전하려고 하면 들을 써서 사람에게 말을 태워서 보내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신이 생기고 전화가 생기고 지금은 텔레타이프가 생겨서 원하기만 하면 우리 지구 어떤 구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고 아마 三十분 이내에 온 세계에 그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이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연 괄목상대(刮目相對)할 만한 그런 시대로 변한 것이 사실이올시다.
이것은 통신 방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역시 교통 방면도 그렇지 아니합니까? 옛날에는 빨리 간대야 말을 타고 재촉하는 길밖에는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동차가 있고 기차가 있고, 기선이 있고, 비행기가 있고, 제트기가 있고 아마 얼마 후에는 로케트를 타고 다니는 때가 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지금은 꼭 가야 될 일이 있다고 하면 아마 거의 二十四시간 이내에 세계 어느 곳이든지 갈 수 있을 만큼 교통이 발단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소위「메스 커뮤니케이션」(mass communication)시대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무슨 소식을 많은 사람들에게 일시에 전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가령 우리가 라디오를 통해서, 혹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세계적으로 중계 방송을 한다고 하면 여러 천만 명, 여러 백만 명에게 일시에 내가 원하는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그런 시대입니다. 이것은 좋은 방면의 선전을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방면의 선전을 할 수도 있는, 하여간 일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대량 생산은 말할 것도 없지만 지금은 소위「오토메이션」이라고 하여 점점 자동 기계가 발전이 되어서 기계가 기계를 운전하는 그런 시대로 점점 변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진 여러 나라에 가 보면 어떤 상점에는 사람이 없지만 돈만 넣으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는 모든 것이 기계화 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과학의 공헌은 세계 인류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각 방면에 큰 변혁을 가져온 것이 사실입니다. 五十년 전 시대와 五十년 후인 二十세기 중엽이 온전히 달라져서, 그런 의미에서 새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 새 시대의 또 한 가지 특색은 온 세계가 한 집단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일우(世界一宇)시대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큰 산맥 혹은 큰 강 혹은 큰 바다가 민족과 민족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을 자연적으로 막아버렸습니다. 그래서 큰 산맥이 가운데 있으면 자연히 산맥 이편에도 한 나라가 있고 저 편에는 딴 나라가 있어서 산맥 이 편의 나라와 저 편의 나라가 볼로 피차에 연락과 교섭이 없이 각각 독자적으로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아왔습니다. 큰 바다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제 말한 대로 교통과 통신과 모든 방면의 발전으로 말미암아서 이 천연 국경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먼 나라가 없습니다. 지금은 국경이 없습니다. 모든 나라가 다 가까운 이웃이 되었습니다. 서로 연락하고 서로 접촉하게끔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二十세기에 와서 전에 없던 새로운 현상이 또 하나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온 세계 여러 민족들과 국가들이 서로 연락되어서 그야말로 이제는 세계 역사가 발족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한국의 역사 하면 다른 나라와 관계없이 한국 역사만 내려쓸 수 있었습니다. 혹은 일본의 역사 하면 다른 나라와 전연 관계없이 일본의 역사만 내려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한국에 十여 년 전에 六·二五가 일어났지만 우리 한국 사람만이 전쟁에 관련되었습니까?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十六 개국에서 군대가 이 땅에 와서 싸웠고 그밖에 많은 나라에서 원조 물자를 보내고 각 방면으로 협력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은 한국 땅에 전쟁이 일어났을지라도 단순히 한국 역사만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세계 역사가 같이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이 형편은 한국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방금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어 있는 콩고 같은 나라를 생각해 보세요. 저 아프리카 중심 지대 그 흑인 나라를 100여 년 전만 하더라고 그 흑인들은 자기네들끼리 싸우고 혹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세계에 아무 관련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자기네들끼리 싸우다가 말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콩고의 흑인들 가운데서 그 추장들 가운데서, 그 지도자들 가운데서 의견이 틀려져서 서로 분쟁이 일어나게 될 때에 온 세계 나라가 거기에 관련을 가지게 됩니다.
라오스 문제가 또한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월남 문제가 또한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은 어떤 한 민족이나 어떤 한 나라나 혼자서 살 수 없는 그런 시대를 당했습니다. 서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세계 역사 가운데서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유엔의 역사」가 이 앞으로는 점점 크게 씌어질 단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은 두 가지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는 유엔의 지도 아래의 세계 평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온 세계가 유엔 기구의 지도 아래에서 평화를 잘 유지하면 온 세계는 발전과 번영의 기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면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떻데 되어서 세계 평화가 유지 못 되면 온 세계가 참혹한 전쟁에 다 같이 휩쓸려 들어가서 멸망을 받을 가능성도 또한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우리 세계 인류 앞에 전개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목도할 수 있습니다.
또 그리고 특별히 二十세기 중엽에 와서 한 가지 일어나는 현상은 도시로 집중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도시 집중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 十九세기까지는 어느 나라든지 인구의 대부분이 농촌과 어촌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二十세기의 고개를 넘어와서 二十세기 전반기를 지나서부터 는, 특별한 현상인데 어떤 나라에 가든지 인구가 도시로 집중이 됩니다. 그것은 멀리까지 가 볼 필요 없이 남한에서 되는 현상을 보아도 우리가 목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남한은 三八선으로 인해서 좀더 기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서울의 인구가 요사의 듣는 대로 二五0만을 넘어서 거의 二백 六, 七0만에 가깝다고 하는 말을 우리가 듣고 있습니다. 아마 세계 제二차 대전 때 서울 인구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六, 七0만에 불과하였습니다. 二백만이 더 집중되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부산에 내려가 들으니까 부산의 인구가 一二0만이라고 합니다. 일제 시대에는 三十만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 현상은 우리 한국만이 아니고 세계적으로 같은 현상입니다. 바다 건너 일본으로 말한다면 동경이라고 하는 대도시 안에는 거의 一천만의 인구가 집중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뉴욕이나 런던에 九백만이라는 많은 사람의 수가 집중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 현상을 볼지라도 몇 도회를 집중해서 인구가 모이고 또 모이고 있습니다. 과한 문명과 가계 문명과 산업문명이 발달될수록 인구가 도회로 집중될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언하기를『이 앞으로 五十년 이내에 세계 인구는 대부분이 도회에서 살리라.』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자, 여러분, 이 현상에 대하여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우리 앞에 전개됩니다.
하나는 우리가 도회에 모여 살게 되면 그것은 문화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고 생활 수준의 향상을 의미하는 것이고 좀더 모든 생활이 편리하고 모든 좋은 일을 많은 사람이 다 빨리 배울 수 있는 그런 좋은 기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이렇게 인구가 한 곳에 집중될수록 더욱 생존 경쟁이 격렬하여질 것이 사실입니다. 사회 도덕이 부패하여지기 쉽습니다. 또 특별히「매스 히스테리아」라고, 무슨 조그만 일만 생기면 많은 사람이 군중 심리에 움직여서 혹은 소란을 일으키고 혹은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각 나라를 불구하고 다 도시로 집중하여 살게 되면 전쟁이 안 나면 모르지만 원자 전쟁이 나면 다 고스란히 함께 죽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새 시대의 현상을 보면 계속해서 각 방면으로 발전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 시대를 뉴 프론티어(new frontier)시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각각 모든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는 시대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우주의 비밀을 탐색하기 위해서 우리 인류가 가장 머리 좋은 사람을 동원해서 힘쓰는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주선을 발사합니다.
아마 오래지 아니해서 달나라에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그 후에는 금성 같은 별에도 혹 갈 수 있지 아니할까 생각합니다. 이 우주의 비밀을 탐색하려는 꾸준한 노력이 계속하는 소위 우주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우주를 탐색하는 반면에 이 물질 가운데 있는 그 속 깊이도, 물질의 내부도 탐색해서 원자를 연구하고 그 원자의 힘을 알게 되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사는 시대를「원자 시대 」라고 말하게끔 되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지금 여러 잡지나 책을 보면 지질학자들은 지구의 내부를 탐색하기 위해서 가진 애를 씁니다. 지구 속 깊이 들어가 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 가솔린도 발견해서 쓰고, 금, 은, 동, 철을 발견해 쓰고, 여러 가지로 많이 하지만 이 속 깊이 들어가 연구해 보려고 지질학자들은 힘을 씁니다. 또 바다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바다 속 깊이 들어가서 사진을 찍어오고 그 안의 자세한 지도를 그려내 오고, 어떻든지 해양학자들은 바다 속을 깊이 탐색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전의 사람들이 쓴 것만 보지 않고 우리 인류가 스스로 역사를 쓸 수 없던 그런 시대에 돌아가서 인류의 역사가 어떠했는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각 방면으로 탐색을 합니다. 소위 고고학이라고 하는 학문이 역사 과학 가운데는 점점 발전하게 되는 것을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는 심리학자들은 우리 사람이 무엇인가, 사람의 심리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사람의 심리의 깊은 속을 찾아보기 위해서 각방면으로 새로운 연구를 계속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 결과는 우리의 지식과 우리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점점 확대하여 갑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 인간들이 원자 에너지를 이용합니다. 원자 에너지를 가지고 잠수함을 타고 다닙니다. 혹은 어떤 도회에서는 벌써 원자 에너지를 가지고 전기 불을 켠다고 합니다. 이 원자 에너지를 가지고 원자탄을 만들어 혹은 핵무기를 만들어 쌓고 있는 것을 우리는 신문을 통해서 자세히 읽고 있습니다.
자! 이 모든 현상이 과연 귀한 현상이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간단히 생각해 보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새로이 발견된 지식과 이 에너지를 인류의 복리를 위해서 사용하면 온 인류의 생활은 향상되고 번영되고 또 더 큰 축복을 받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이렇게 탐색하여 얻은 인류의 지식과 에너지는 잘못 쓰게 되면 이것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가 오히려 파멸을 당할 가능성이 우리 눈앞에 뚜렷이 나나나게끔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새 시대는 한 편에는 광명이 보입니다. 그러나 다른 편에는 암흑의 구름이 덮이고 있습니다. 한 편에서는 소망의 빛이 비추입니다. 다른 편에는 절망의 검은 구름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한 편에는 생명이 보이나, 다른 한 편에는 사망이 우리 인류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세계 인류는 명암(明暗) 양 세계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불안과 공포에 싸여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이 새 시대의, 二十세기의 인류들은 생과 사의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서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새 시대를 바로 정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새 시대! 이 새 시대에 따르는 세기적 고민의 해결의 열쇠가 어디 있는가? 문제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이것을 바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과학 문명이 되입니까? 아닙니다.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옛날 시대로 돌아가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문제의 초점은 과학 발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자체에 있습니다. 시대는 변하였는데 인간은 옛 사람 그대로입니다 문제의 초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과학 문명의 혜택으로 생활의 양식은 변하였지만 사람은 옛 사람 그대로입니다. 비행기는 타고 다니지만 아직 그 속 사람은 케이브맨(cave ma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복은 입고 수염은 깎고 다이지만 그 속은 아직까지도 부쉬맨(bush ma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풀 사이에 사는 야만 그대로입니다.
욕심은 그대로 있고, 야심도 그대로 있고, 음란한 마음도 그대로 있고, 시기와 교만도 그대로 있고, 편협하고, 잔인하고, 우둔하고, 미련하고, 겉모양은 변했다고 하지만 그 속은 아직도 굴속에 살던 그대로입니다. 이런 케이브 맨이 말하자면 지금은 기관총을 쏘고 제트기를 조종하고 원자탄을 운반하게끔 되었습니다. 보세요! 유대 사람 六00만이라는 많은 사람을 학살하고도 죄가 없다고 하는 아이히만의 마음을 들여다 보십시오. 자, 이것이 새 시대를 당한 二十세기의 고민입니다.
한국의 고민도 요컨대 이 세계적 고민을 축소한 데 불과합니다. 한국에도 새 시대가 왔습니다. 과학문명이 수입되었습니다. 八·一五해방이 됨으로 새 시대가 되었습니다. 적어도 남한에는 독립이 되었고 자유가 있게 되었고 민주주의 시대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국민은 옛 사람 그대로입니다. 새로 받은 특권과 자유를 바로 쓰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치가는 집권을 바로 쓰지 못하였습니다. 국민은 자유를 바로 쓰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四·一九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五·一六혁명이 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문제의 초점은 국민 자체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젊은 혁명 지도자들이 인간을 개조하여야 되겠다고 부르짖는 것은 절대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요컨대 초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인간 개조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정치혁명이 인간을 개조할 수 있겠느냐? 많은 법률을 제정해서 인간 기조를 할 수 있겠느냐? 극형에 처해서 인간을 개조할 수 있겠느냐? 국민운동으로 국민을 개조할 수 있겠느냐? 무슨 과학의 기술로써 인간을 개조할 수 있겠느냐? 교육으로 인간을 개조할 수 있겠느냐? 물론 교육으로 개선은 가능하지만 개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요컨대 이간이 인간 자신을 개조할 수 있겠느냐? 솔직히 대답하면 개조할 수 없습니다. 속담의 말과 같이 식칼에 제 자루를 깎을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의 말과 같이『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습니까?』사람을 다시 만드는 것, 인간의 개조는 사람을 본래 지으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 죄로 더러워진 인간을 개조하기 위하여 보내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이것은 사도 바울의 체험으로 간증하는 말입니다. 이론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악독한 사람으로 살기가 등등해서 사람을 죽이려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사랑의 사도로 변하였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까닭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입니다. 삭개오의 생활이 그러했고, 막달라 마리아의 생활이 그러했고, 성 어거스틴의 생활이 그러했고, 성 프랜시스의 생활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은혜를 받고 체험을 얻은 분은 수두룩히 많은 줄 생각합니다.
새 시대는 새 사람을 요구합니다. 이 새 시대는 새로운 인간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어디 가서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이 새해 아침에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돌아와서 모든 죄를 자복하고 온전히 주님 앞에 몸과 마음을 바쳐서 우리가 주안에 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크신 능력으로 우리의 심령을 어루만져서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십니다. 새 욕망을 주십니다. 새 즐거움을 주십니다. 새 사람이 되는 축복을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드리는 것은 一九六二년 새해에 온전히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십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드려서 금년 일년 동안 주안에서 우리가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에게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게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一九六二년 一월 七일)

Ⅳ-31 순례자의 행로 (시편 八十四편 一-十二절)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시 八十四·六)

오늘 아침 시편 八十四편을 읽었습니다. 이 시는 시편 중에서도 진주라고 하는 별명이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중심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었습니다. 시온 산상에 세워진 성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서 살든지 국내는 물론 국외에 사는 분이라도 一년 몇 번씩 특별히 유월절이나 오순절이나 장막절 같은 절기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시온산 성전에서 예배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절기를 손꼽아 기다리다가 때가 되면 멀리 시온을 향해서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좀 넉넉한 이는 나귀나 약대 같은 것을 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대부분 걸어서 시온산을 향하여 나아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순례자들이 얼마나 성전을 사모하며 그 성전 애모(愛慕)의 지성이 얼마나 크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시편 몇 편을 읽는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八十四편은 그런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만 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 지요. 내 영혼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 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리고서는 五, 六, 七절에는 이와 같은 성전을 향해서 가는 순례자들에 대한 노래가 있습니다.『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나아가 시온에게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성전을 향해서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얼마나 성전을 사모하는 그 지성을 우리가 이 시를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온을 향해서 올라가는 옛날 순례자들의 행로는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하는 우리의 신앙 생활과 유사한 점이 많은 줄 생각합니다. 먼저 이 길이야말로 축복의 길입니다. 주께 힘을 얻고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를 복이 있습니다. 사살 그 때에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줄 생각합니다. 주께서 힘을 주셔야 떠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건강도 있어야 그런 길을 갈 수 있고 여비도 있어야 그런 길을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어야 다시 말하면 시온을 사모하는, 곧 시온을 향하여 떠나려고 하는 그 마음이 간절해야 이런 길을 떠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구비되어야 순례의 길을 떠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믿는 사람들의 영적 순례의 길도 이러한 점이 있을 줄 생각합니다. 주님께 힘을 얻어야 이런 길을 떠날 수 있습니다. 이 죄악의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은 내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주님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불렀노라.』성령의 감화가 없이 죄를 회개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이 예수 님께서 나의 구주가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힘을 얻어야 이 귀한 시온을 향한 순례의 길을 떠날 수가 있습니다. 천성을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 죄악의 세상을 끊어버리고 의와 성결(聖潔)의 생활, 진과 선과 미의 생활을 동경하는 간곡한 심정,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이 순례의 길을 떠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 힘을 얻어서 과연 이 순례의 길을 떠나셨습니까? 과연 언제든지 여러분이 마음속에 이 시온의 대로가 있습니까? 그리고 이 시온의 대로를 날마다 날마다 걸어갑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과연 옛날의 순례자들과 같이 축복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리고 이 순례의 길, 시온을 향하는 길은 평탄한 길만은 아닙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할 수밖에 없는 때도 있습니다. 더욱이 팔레스타인은 산이 많습니다. 따라서 험한 골짜기도 많습니다. 더욱이 비가 적은 곳이므로 메마른 곳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순례자들은 종종 이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곡이 되게』한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옛날 히브리말이므로 그 뜻을 확실히 알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눈물이 변해서 샘물이 된다고 하는 뜻이거나 혹 어떤 주석 가의 해석하는 말과 같이 순례자들이 이런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는 많은 눈물과 같이 곳곳에 깊이 샘을 파서 순례자들이 한 번 지나간 곳은 샘물이 많아졌다고 하는 뜻 같이 생각이 됩니다.
천성을 향하는 영적 순례자의 행로에는 때때로 눈물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골짜기를 지나갈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온전히 시온을 향해서 나아가는 순례자들에게는 눈물 골짜기에서도 생명 샘을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메마른 광야를 지나가던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반석을 깨뜨려서 생수를 주신 것과 같이 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가는 오늘날의 순례자들에게도 생수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와 능력과 안심을 주신다고 하는 뜻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있는 많은 인물들을 통해서 또한 역대 교회사에 나타나는 인물들을 통해서 이 말씀이 얼마나 사실인 것을 잘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사도 바울의 생활을 잘 압니다. 사도 바울의 순례의 길을 보면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문자 그대로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의 가는 곳마다 핍박이 있었습니다. 매도 맞았습니다. 어떤 때는 죽은 줄 알고 내버림도 당했습니다. 파선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더욱이 까닭 없이 오랫동안 감옥의 생활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기억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에도 그 곳에서「이른 비」의「은택(恩澤)」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고, 음침한 감방에서 오늘까지 수많은 성도들이 복과 같이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가 에베소서를 볼 수 있고, 빌립보서를 읽을 수 있고, 골로새서를 읽을 수 있고, 혹은 디모데 전후서니, 디도서니, 빌레몬서를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침울한 감방 가운데서도 오히려 감옥밖에 있는 그 때의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기록할 수가 있었습니다.『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양선 함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웠나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사람의 지각에 뛰어나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과연 사도 바울은 눈물의 골짜기 가운데서도 생명 샘물을 찾았고 위로 내려오는 이른 비와 은택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많은 사람의 생활을 생각할 수 있지마는 존 번연(John Bunyan)의 생활을 기억할 줄 생각합니다. 그이는 젊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자유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영국 국교에서 세력을 잡아 가지고 누구든지 자유로 전도를 못하게 하던 때입니다. 그 죄로써 잡아 갇히어서 젊은 사람으로 억울하게 十二년 동안이나 감방생활을 하였습니다. 청년으로서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눈물 골짜기에도 생명 샘물을 찾았습니다. 위로 내려오는 이른 비의 은택을 입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아마 자기가 밖에 있어서 일생 전도한 것보다도 효과가 더 큰 천로역정(天路歷程)이라고 하는 귀한 책을 쓸 수가 있은 것입니다. 눈물 골짜기에서 생명 샘을 발견했습니다.
구약을 읽을 때 항상 재미있게 읽는 요셉의 생활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 사람 역시 소년 시대부터 원하지 아니하는 눈물의 골짜기를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제들의 시기를 받았고 죄 없이 우물 속에 던짐도 받았고 죄 없이 종으로 팔리어서 멀리 이국으로 내려갑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잡혀 내려가는 그 길이야말로 한 걸음이 눈물의 걸음이 아니었습니까?
이와 같이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갔습니다. 오랜 종노릇도 했습니다. 오히려 모든 시험을 이긴 결과로 감방에까지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가운데서도 생명수를 발견했습니다. 그런 길을 통해서 오히려 전 애굽 사람을 기근 가운데서 건져냈고 자기 아버지와 모든 형제들과 야곱의 일족을 구원해 낼 수가 있은 것입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를 가지고 시온을 향해서 걸어가는 순례자의 길에 눈물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이 눈물 골짜기에도 하나님께서 생명 샘을 주시고 이른 비의 은택을 주시는 이 사실입니다. 한 편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은 문자 그대로 눈물의 골짜기입니다. 천재와 지변이 있습니다. 지진이 있습니다. 폭풍우가 붑니다. 바다에는 풍랑이 일어납니다. 겨울에는 눈사태가 납니다. 요즘 페루에서 된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줄 압니다. 교통 사고가 많습니다. 때때로 전쟁도 일어납니다. 질병이 많습니다. 사망이 오는 것입니다. 이 눈물의 골짜기를 우리는 다 통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시온을 향하여 나아가는 이에게는 그 곳으로 샘이 되게 하고 이른 비의 은택이 있다고 하는 이 사실입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과 안심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사람에게 스스로 자기의 은혜를 간증하였습니다.『내가 비천(卑賤)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우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참으로 시온의 대로가 우리 마음 가운데 있습니까? 그러면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에도 땅에서는 생수의 샘물을 우리에게 주시고 하늘로서는 이른 비의 은택을 우리에게 내리실 것입니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이렇게 또 노래를 부릅니다. 눈물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골짜기를 지나는 중에 순례자들은 힘을 얻고 더 얻습니다.
욥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많은 슬픔과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골짜기를 지나는 중에 힘을 더 얻었습니다. 높은 파도를 누가 환영하겠습니까? 그러나 수부는 이런 파도를 통하여 힘을 얻고 더 얻습니다. 누가 환난과 시험을 영접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순례자는 이런 시련을 통하여 힘을 얻고 더 얻는 것도 또한 공통한 경험입니다. 순례자 여러분,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에 낙심하지 마십시다. 과히 탄식하지 마십시다.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것도 다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우리가 지나가는 눈물골짜기를 통해서 우리는 힘을 얻고 더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순례자로 하여금 힘을 얻고 더 얻기를 원하십니다. 강력한 순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백전노장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때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특별히 환난과 핍박 가운데 있는 모든 신자에게 이런 말씀으로 기록했습니다.『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은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여라.』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올시다.
그리고 마지막 절을 들어보세요.『나아가 시온에서 각기 하나님 앞에 나타나리이다.』
이렇게 눈물 골짜기를 통하여 새 힘을 얻고 얻어서 계속해서 나아가면 마지막에는 시온에 이르게 됩니다. 태산을 넘고 험곡(險谷)을 지나며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면, 넘어지지 아니하고 전진을 계속하면, 마침내 시온에 이릅니다. 하늘의 영광이 빛나는 시온에 이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항상 임재하시는 성전이 있습니다.『각기 하나님 앞에 나타나리이다.』거기서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친히 주의 얼굴을 면접할 것입니다. 영광의 보좌 앞에 마침내 서게 될 것입니다.
아! 축복의 순례자를 마침내 평생에 사모하던 목적지인 시온성에 이를 것입니다. 거기는 다시 눈물의 골짜기가 없습니다. 거기는 다시 이별이 없습니다. 거기는 다시 억울한 일을 당할 일이 없습니다. 거기는 다시 질병과 사망이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한대로『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며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 하나 하나는 영적 순례자입니다. 우리 하나 하나는 반드시 순례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죄악으로 충만한 장망성을 떠나서 천성을 향하는 순례자의 길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아직까지 이 길을 떠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부터 온전히 죄악을 끊어버리고 하늘 길을 향해서 길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마음에 시온의 대로』를 두고 날마다 날마다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눈물 골짜기를 혹 통과할 때 낙심하지 마십시다. 그곳에서 주님의 주시는 생수를 마시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십시다 그리고 힘을 얻고 또 얻어서 굳센 순례자가 되십시다. 그리고 나아가서 시온에까지 이르러야 되겠습니다. 이 순례의 길도 마지막이 제일 중요합니다. 마지막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게바와 같이 마지막에 다른 길로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유다와 같이 마지막에 예수를 팔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영광의 빛나는 시온에 이르러서 주님의 얼굴을 친히 뵈올 때까지 우리는 순례자의 길을 멈추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이 축복의 순례자가 되십시다. (一九六二 一월 二十一일)

Ⅵ-32 하나님의 약속 (히브리서 十三장 一-十七절)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十三·五)
오늘 아침 읽은 이 말씀은 귀한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신명기 三十一장 六절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호수아 一장 五절에도 하나님께서 친히 이 말씀으로 여호수아에게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二十八장 十五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꿈 가운데 어린 야곱에게 나타나서 이 말씀으로 야곱에게 역시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二十八장 二十절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오고 오는 모든 제자들에게 같으신 말씀을 역시 약속하였습니다.『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여기에 주의할 것은 이 약속은 모든 택한 백성, 하나님에게 속하는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올시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특별히 위험한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을 때에 이와 같은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약속을 지키십니다. 옛날에도 지키셨고 오늘에도 지키십니다.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여호수아를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떠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들과 같이 하셔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복지로 들어갈 수 있게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야곱에게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 야곱을 인도해서 멀리 하란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도와주셨습니다. 야곱의 일생을 역시 인도하시고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약속하신 대로 제자들과 오고 오는 모든 그의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같이 계셔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세의 생활을 생각해 보면 모세는 난지 석 달만에 나일강 강변에 버림을 받았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것은 물론 부모들에게도 할 수 없이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떠나지 아니하셨습니다. 어린 아기 모세를 하나님께서 같이 하셔서 애굽 궁중으로 인도해서 평안히 자랄 수 있게 하여 주시고 따라서 애굽 궁중에서 당시의 최고 문화를 배우고 모든 학문을 닦아서 장차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일할 준비를 충분히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았으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약속하신 대로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가 요셉의 생활을 생각해도 역시 그렇습니다. 요셉은 자기 형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종으로 팔리움을 받았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역시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떠나지 아니하셨습니다. 끝까지 같이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요셉을 축복하여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 가서 전도를 하다가 그 때에 거기 사는 유대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아서 올에 맞아서 죽은 줄 알고 그 악한 사람들이 바울을 성밖에 내어버렸습니다. 사람들에게 내던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그대로 떠나지 아니 하셨습니다. 다시 사도 바울이 회생해서 성으로 들어가서 믿는 자들을 굳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에도 그 악한 유대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끌려서 관청에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억울하게 매를 맞았습니다. 마지막에는 형무소까지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실라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감옥 가운데서 바울과 실라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은혜를 받아서 그곳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감사의 찬송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시고 큰 기적을 나타내서 지진이 일어나게 하여 바울과 실라를 석방할뿐더러 그 빌립보 교회에서 장차 기둥과 같이 일할 간수 한 사람을 회개시켜서 그리스도의 종을 삼으신 것입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올시다. 사람들은 우리를 버릴 수 있으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되는 일을 가만히 보면 우리가 혹 돈이 많다던 가 이와 같은 때에는 친구도 많고 따라오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 그 돈이 한 번 다 없어집니다. 옛날 글에 있는 말씀과 같이 돈이 넉넉할 때에는 노상 행인이 다 와서 친척 같이 굴더니 일조에 말이 줄고 금전이 없어지니까 친척이 변해서 노상의 행인이 됩니다. 세상의 물정은 이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사람은 이렇게 버릴 수 있으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넉넉할 때에도 같이 계시고 우리가 빈궁할 때, 가난할 때에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는 떠나기 아니하십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혹 권세 자리에 있고 높은 지위에 있을 때에는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도 많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 그 자리에서 떨어집니다. 세력이 다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보통 많은 사람들은 다 우리를 버립니다. 우리를 떠나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때에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혹 우리가 명망이 있을 때에는 찾아 오는 사람도 많고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관계로 혐의를 받습니다. 오해를 받습니다. 죄는 없지마는 어떻게 되어서 감옥에까지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혹 이렇게 명예가 땅에 떨어지게 될 때에는 사람들은 흔히 우리를 버립니다. 찾아오는 사람도 적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말해주려고 하는 사람도 별로히 많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때에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감옥에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무슨 일을 크게 성공할 때에는 문전성시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일조에 실패할 때에는 사람들은 우리를 떠나갑니다.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이 과히 많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공할 때에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흔히 필요할 때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혹 돈이 다 없어진다던가, 혹 병이 난다든지, 혹 나이 많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든지, 이렇게 더 이용 가치가 없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흔히 떠나갑니다. 저버립니다. 마치 옷을 오래 입다가 다 낡아서 못 입게 되면 벗어 내어버리는 것처럼, 우리가 구두를 신고 다니다가 다 낡아서 못 신게 되면 버리는 것처럼 친구도 내버리고 친척도 내버리고 흔히 이렇게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마지막에 아무런 일을 할 수 없는 그런 경우를 당했을지라도, 아무리 병들어 있어서, 아무리 늙어서 할 수 없을지라도 세상 사람은 혹 버리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저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지금도 잊히지 아니합니다. 서울이나 부산에도 화재가 많지마는 벌써 여러 해 전에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에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신의주 채소 거리에 큰 화재가 일어나서 백여 점포가 하루아침에, 특별히 정월초하루 명절날 아침에 전부 불타버렸습니다. 조사해 보니까 그 불은 그저 난 것이 아니고 방화하였습니다. 어떤 여자가 불질렀습니다.
그 때부터 十여 년 전에 어떤 촌에서 가난한 청년 부부 두 사람이 농촌에서 소작을 해서는 암만 살래야 늘 밥만 굶게 되니까, 어떻게 신의주 도회지로 들어가서 벌이를 해보자고 이사해 왔습니다. 그 채소 거리에 조그마한 방을 얻었습니다. 남자는 지게를 지고 바께 나가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여자는 그 집에서 조그마한 가게를 만들어 놓고 콩나물과 두부도 팔고 채소와 과일을 파는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안 먹고 안 쓰고 새벽에 일어나고 늦게 자고 그저 아득바득 살시 위해 十여 년 동안을 고생을 하면서 이 여자는 장사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점점 장사가 잘 되어서 한 十년쯤 되니까 돈을 상당히 모으게 되었습니다. 이제 좋은 집을 다른 데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 남자는 가만 보니까 돈도 좀 있게 되니 의복도 잘 입을 생각이 나게 되고 가구도 좀 살 생각이 나게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가만 집에 와 보니까 옷도 잘 못 입고 화장도 잘 할 줄 모르고 밤낮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만 하는 이런 여자 그런 자기 여편네를 볼 생각이 점점 적어진단 말이요. 의복도 깨끗이 입고 화장도 잘할 이런 여자 얼굴만 자꾸 바라다 모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남자가 딴 여자 하나를 얻었습니다. 자기 아내가 아득바득 번 돈을 가지고 딴 여자를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남편을 책망도 해보고 달래도 보고 별의별 수단을 다해서 남편을 돌이키려고 많은 애를 쓴 줄 압니다. 그러나 이 남편이 돌이키지 아니합니다.
그 섣달 그믐날 밤인데 이날 밤은 꼭 돌아와 달라고 간절히 눈물로 호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일은 정월 초하루이고 오늘이 섣달 그믐날이니까, 그 날 저녁이야 집에 돌아와 자겠지 하고 밤새도록 기다렸다고 합니다. 열 시, 자정이 되어도 안 돌아옵니다. 이 여자가 너무 분하고 너무 화가 나서『이런 세상을 살아서 뭣해! 아예 이놈의 집에다가 불이나 놓고 나도 불타 죽겠다.』하고 문을 닫아걸고 불을 놓았습니다. 세상은 이런 세상입니다.
흔히 필요할 때에는 찾지마는 필요 없을 때에는 내버리는 세상입니다. 요새 가만 보니까 부모가 자기 아이를 버리는 부모도 상당히 많은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불광동에 있는 홀트 영아원에 가보니까 전부 내다 버린 어린 아기만 四, 五백 명이 거기 있습니다. 부모가 내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홀트 씨 같은 이가 있어서 어린 아기를 잘 보양해 기릅니다. 거기서 깊이 느낀 것이 부모는 이 아이들을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들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고 홀트 씨의 마음을 감화 감동시켜서 이런 좋은 일을 해서 이 아이들을 기르는구나!
혼례식장에서 신랑과 신부가 철석같이 어떠한 환경에서나 어떻게 시대가 변하든지 참된 사랑을 가지고 피차에 사랑하겠노라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몇 해가 되지 못해서 그 약속을 다 잊어버립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신랑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의 신부가 되는 우리 믿는 사람을 어떤 때에든지 저버리지 아니합니다. 떠나지 아니합니다.『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친구가 우리를 버릴 수 있지마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혹 친척이 우리를 버리거나 혹 부모도 나를 버릴 수 있지마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믿는 자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혹 남편도 나를 버릴 수 있지마는 우리 신랑이 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사실 인생의 최후 길에는 누구나 다 우리를 버리게 됩니다. 세상을 떠나는 길은 외로운 길입니다. 같이 갈 동무는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도 떠날 수밖에 없고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이사야 四十三장에 있는 말씀을 읽을 때에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아(이스라엘은 택한 백성이올시다)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올시다. 더욱이 감사한 것은 우리는 혹 하나님을 저버리나 하나님은 우리를 저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베드로의 생활을 잘 압니다. 베드로는 본의는 아니지마는 예수 님께서 붙잡히게 되고 대제사장 아문에서 심문을 받게 될 때에 대제사장 아문까지 따라간 열심이 있는 것은 좋지만 그만 거기 가서 예수를 세 번씩 모른다고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를 저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베드로를 버리지 아니했습니다. 십자가가 다 지나간 후에 부활하신 후에 디배랴 바다에서 베드로와 일곱 제자가 고기를 잡을 그 기회에 주님께서 어떠한 아침에 나타났습니다.『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사랑을 물었습니다. 다른 것은 묻지 아니했습니다.
『예! 제가 주를 사랑합니다. 제가 주를 사랑하는 것은 주님께서 아십니다.』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내 어린양을 먹이라!』이렇게 세 번 말씀하시면서 베드로를 회복시켰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버린 적이 있지마는 예수 님은 베드로를 버리지 아니했습니다.
우리가 요나의 이야기를 잘 압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 것을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기 위해서 욥바에 가서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을 저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저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큰 풍파를 일으킨 것도 하나님의 사랑의 풍파였습니다. 바닷물에 내던짐을 당하게 한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고생을 당하게 한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더 깊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잊지 아니하였습니다. 요나로 하여금 위대한 선지자가 되도록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생활도 잘 압니다. 다윗은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가지로 마음이 온전하고 좋은 사람으로서 성경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다윗도 실수했습니다.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저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나단을 보냈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택한 백성을 하나님께서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에 여러분은 악한 마귀의 시험하는 말을 들어서는 아니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렇다고 택함을 받은 사람은 암만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말인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택함을 받은 사람도 혹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으나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택함을 입은 사람은 죄를 깨닫는 대로 꼭 회개합니다. 죄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냥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은 그 행동 자체가 택함을 입니 못했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다 장로교 교인이니까 말합니다. 칼빈 신학의 유명한 다섯 가지 조목이 있습니다.
一, 모든 사람은 다 원죄로 말미암아 부패하여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二, 그리하여 다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서 구원할 사람을 택하 였다.
三, 이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서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사를 드리게 만들었다.
四, 하나님께서 불하항력의 성령을 택한 사람의 마음속에 보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만든다(성령의 감화입니다.)
五, 그런 까닭으로 택함을 받은 이 성도는 영원히 보존되며 반드시 하나님께서 버리지 아 니 하시고 구원을 해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에 마음에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어떻게 내가 택함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성신의 감화가 없이 예수를 주라고 할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님께서 내게 구주가 되는 것을 깨닫고 예수를 믿을 마음이 생기고 예배당에 나올 마음이 생긴 그 사실이 벌써 내가 택함을 받은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八장에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내가 확신(確信)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자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끓을 수 없으리라.』그러므로 우리도 담대히 말하십시다.『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온 세상 다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아니 버리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존 웨슬리(John Wesley)가 임종시에 최후로 남긴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상을 떠나게 되어서 모든 사람이 다 모였습니다. 눈감고 거의 세상을 떠나갑니다. 그러다가 눈을 번쩍 뜨더니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제일 귀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신 일이올시다.』이것이 존 웨슬리가 세상을 떠날 때에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계신 것을 체험하는 최후의 설교였습니다. (一九六二년 一월 二十六일)

Ⅳ-33 청년시대와 신앙생활 (전도서 十一장 九절-十二장 八절)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 十二·一)

오늘은 우리 총회로써 특별히「면려(勉勵)주일」혹은「청년주일」로 지키는 주일이올시다. 모든 청년들에게 이 전도서를 기록한 저자가 이런 말씀으로 권면하였습니다.『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오늘 이 말씀을 중심해서「청년 시대와 신앙생활」의 관계를 생각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五十五장 六절에 읽어보면『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가 있습니다. 가까이 계실 때가 있습니다. 청년 시대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청년 시대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기억해야 될 것이올시다. 이 청년 시대를 흔히「인생의 봄」이라고 해서 청춘이라고 하는 말로도 우리가 부릅니다. 봄에는 나무 가지가 연하여집니다. 밈이 돕니다. 새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청년 시대에는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고 새로운 생명을 사모하는 그러한 때입니다. 예수 님께로 나아와서 새 생명과 진리를 찾을 만한 때입니다.
또 이 청년 시대의 마음 밭을 다 옥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길가와 같이 굳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무슨 과거의 좋지 못한 습관이나 인습으로 말미암아 굳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편견과 고집의 돌덩이도 별러 없습니다. 세상 재리(財利)의 욕심, 모든 허영에 대한 욕심의 가시덤불도 아직 성하지 아니한 때입니다. 양심은 비교적 순결하고 이상은 높습니다. 말하자면 포근포근한 옥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옥토에 진리의 씨가 떨어지면 잘 싹이 나고 그 싹이 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년 시대에 진리의 씨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 청년 시대는 특별히 인간의 영혼이 해탈하는 시대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비약을 고하는 시대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우리 사람의 육체는 二十세가 조금 지나면 그 육체의 장성은 끝이 납니다. 혹 오래 자라는 이는 스물 댓 나기까지 키가 자라지만 보통으로 그 전에 키가 자라는 것은 그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자라기를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영은 계속해서 장성하기를 힘씁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런 시대에는 까닭 모를 번민과 수심과 오뇌 속에서 소위 폭풍우 시대를 지나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자세히 살펴보면 실상은 인간의 영이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인 것입니다. 그러다가 창조주를 찾아서 인생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될 때에 자기의 인생과 귀하신 목적을 하나님께 바치게 될 때에 그의 가슴속에는 큰 환희와 만족과 안심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지하면 신자의 대부분이 이 소년 시대와 청년 시대에 입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역사를 보아도 요셉도 일찍이 하나님께 몸을 바친 사람이올시다. 사무엘이 역시 그렇습니다. 다윗이 역시 그렇습니다. 다니엘이 역시 그렇습니다. 이사야니 모든 선지자들이 대부분 소년 시대와 청년시대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 그 몸과 마음을 바친 사람들이올시다.
그것은 성경의 역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전 역사를 통해서 다 그러합니다. 유명한 교부 오리겐이든지, 폴리캅이든지, 암브로스든지, 유명한 성자 성 프랜시스든지 혹은 유명한 종교 개혁가 루터니, 칼빈이니, 혹은 유명한 전도자 무디니, 스펄전이니 이런 모든 사람들이 소년시대, 청년시대에 하나님을 찾아 만나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몸과 마음을 바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젊은 시대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우리가 찾아야 하겠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러서 그를 만나고 그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일 먼저 기억할 것은 이 청년 시대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라고 하는 이 사실이올시다.
둘째는, 이 청년 시대는 일생의 분기점이 됩니다. 일생의 분수령이 됩니다. 그러므로 꼭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입니다. 일생의 방향을 잡는 때입니다. 방향을 바로 잡으려고 하면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만나야 될 것입니다.
백두산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분수령이올시다. 백두산 산상에 떨어지는 물방울은 조금만 서 편으로 떨어지면 압록강수가 되어서 멀리 황해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러나 조금만 동편으로 떨어지면 그 빗방울이 두만강수가 되어서 동편으로 흐르고 흘러서 마지막에는 동해 바다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두 물방울이 처음에는 매우 가까운 지척간에 떨어지지마는 그 방향이 다른 까닭으로 한 시간만 지나면 그 거리가 멀어지고 하루만 지나면 수백 리 떨어지고 며칠이 지나면 수천 리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빗방울이 분수령에 떨어지게 되는 까닭입니다.
이렇게 청년 시대는 우리 인간 일생에 분수령이 됩니다. 어떠한 방향으로 가느냐, 그 방향을 정하는 시대입니다. 청년 시대는 일생의 분기점이 됩니다. 어떠한 길로 가느냐? 그 길을 정하는 때입니다. 청년 시대에 방향을 옳게 잡으면 일생을 옳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년 시대에 방향을 그릇 잡으면 일생을 그르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청년 시대는 일생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의 불기점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갈림길이 많다고 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의의 길과 불의의 길, 선의 길과 악의 길, 넓은 길과 좁은 길, 한 길은 천국으로 향하는 길, 한 길은 지옥으로 향하는 일인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행로에는 두 큰 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길을 바로 잡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 시대에 하나님을 찾아서 만나고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시편 一편을 여러분께서 다 기억하실 줄 생각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이 사람의 행하는 모든 일이)다 형통하리로다.』복 있는 자의 가는 길이 이와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악인은 그렇지 아니하니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인생의 앞길에는 이 두 갈림길이 있는 것입니다. 복 있는 자가 가는 길, 바람결에 날리는 겨와 같은 악한 자가 가는 길, 이 두 길이 있습니다. 이 두 길은 인생의 몸인 소년시대, 청년시대에 갈리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우리의 방향을 바로 잡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우리 주님을 찾아야 될 것입니다.
역대 하 三十四장 三절에 보면 유명한 왕 요시야 왕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요시야 왕은 본래 여덟 살에 왕이 되었습니다.『오히려 어렸을 때 곧 위에 있은 지 八년에 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고 그 十二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케 하여 그 산당(山堂)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만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매』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이 요시야 왕이 얼마나 일찍이 하나님을 찾아 만났는가 생각하여 보세요. 여덟 살에 왕이 되어서 위에 오른지 八년에 조상의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했다고 합니다. 그것 보니까 열 여섯 살 혹 열 일곱 살 때에 하나님을 온전히 찾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十二년에, 二十에 유대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아세라 목상, 아로새긴 우상, 모든 부어만든 우상, 이런 것들을 다 제하여 버리고 예루살렘과 유다를 깨끗이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보면 예루살렘 선전을 수리하고 모든 정치를 개혁하는 큰 공헌을 젊은 왕이 역사상에 남긴 것을 우리가 구약을 통해서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 그 길을 바로 정하였습니다.
디모데도 역시 어렸을 때에 그 방향을 바로 정하였습니다. 따라서 일생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존 웨슬리같은 사람도 어렸을 적부터 그 방향을 바로 잡았습니다. 일생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봄에 좋은 곡식을 뿌려야 가을에 좋은 열매를 추수합니다. 봄에 가라지는 뿌리면 가라지 밖에 추수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년 시대는 꼭 하나님을 찾고 기억할 때입니다. 일생의 분기점이요 일생의 분수령이 되는 까닭이올시다.
셋째로, 이 청년 시대는 일할 시기입니다. 왜 청년시대에 하나님을 기억해야 될 고 하니 이 시대야말로 일할 시기인 까닭입니다. 사람을 따라서 혹은 중년기, 노년기에도 큰 일을 시작하기도 하고 수행하기도 하지마는 대부분의 유명한 사람들의 역사를 보면 이런 이들이 청년 시대에 큰 일을 이미 시작했고 또 일생을 통해서 계속하여 한 것입니다.
十八세기의 유명한 부흥사 조지 휘트필드라고 하는 사람은 벌써 스물 한 살 때에 노방 전도로 유명하게 되어서 각 처 광산으로 다니면서 광부들에게 밖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영국의 유명한 선교자 스펄전이라고 하는 사람은 열 일곱 살 때에 회개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해서 벌써 二十七세 때에는 런던에 큰「메트로폴리탄 태버나클」(Metropolitan Tabernacle)이라고 하는 예배당을 지어놓고 그 예배당의 목사로 있은 것입니다. 유명한 미국의 부흥사 디 엘 무디는 스무 살 떼에 YMCA 간사로 있으면서 누구보다도 전도를 열심으로 하더니 그 후에 과연 위대한 부흥사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 같은 유명한 선교사는 스물 세 살에 비로소 혈혈단신으로 흑암(黑暗)의 대륙 아프리카를 향하여 나아간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를 처음에 세웠다는 존 칼빈은 스물 일곱 살에 종교 개혁 시대에 가장 유명한 책, 아마 지금까지도 가장 유명한 신학서「기독교 요강」을 저술해서 출판하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스물 일곱 살에 캐슬 교회의 문 밖에다 종교 개혁 九十五개조를 걸어 놓고 그 때 세력이 하늘에 날아가는 새도 능히 떨어뜨린다고 하는 로마 교황을 대적해서 큰 개혁의 외침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조지 월리암스는 스물 세 잘 때에 지금 세계적으로 퍼져서 청년 운동의 선구자가 되어 있는 YMCA를 조직하고 청년 운동을 시작한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것은 교회 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름 방면의 일도 역시 그렇습니다. 유명한 역사의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생활을 여러분, 읽어보세요. 카테지의 유명한 한니발 같은 사람은 스물 여섯 살에 카테지의 군사령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대제는 스물 세 살에 왕이 되어서 서른 세 살에 죽었는데 그 약 十년간에 전 유럽을 점령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지중해를 건너서 애굽을 점령하고 인도까지 진군을 한 것입니다. 컬럼버스는 스물 여덟 살에 벌써 인도에 가려고 하는 모든 준비를 하여 놓고 온 유럽을 다니면서 자기를 후원할 자를 찾아다니게 되었습니다.
먼데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 할 것 없습니다 우리 한국 역사상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볼 수 있는 고구려 시대의 광개토 대왕(廣開土大王)-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도 합니다-은 열 여덟 살에 왕이 되어서 서른 아홉 살에 붕(崩)했는데 二十대에 벌써 남북 만주를 다 점령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이 청년 시대에 벌써 큰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신약을 보면 우리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처음부터 청년 중심 운동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갓 三十살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三十세에 역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 님의 제자 열 둘이 전부 三十세 내외입니다. 사도 바울도 젊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 운동은 근본적으로 청년 세대의 운동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청년 시대에 조물주를 기억하여야 되겠어요? 일하기 위해서. 청년 시대는 열혈(熱血) 시대입니다. 일하기에 제일 좋습니다. 청년 시대는 일편단심의 시대입니다. 무슨 일을 위해서 집중하기 쉬운 것입니다. 재작년에 우리 한국에서 四·一九학생 혁명이 있었고 작년에 五·一六 군사 혁명이 있었습니다. 물론 청년들의 하는 일이라 혹 무리가 없지 않아 있을 수 있지마는 청년의 운동이므로 소망이 많은 줄 생각합니다.
청년 시대는 일할 만한 시대입니다. 청년 시대에 우리 교회 안에서도 봉사와 전도와 모든 방면에 일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청년 시대는 일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하는 것을 잊지 아니해야 되겠습니다. 한 가지 계속해서 여러 청년들에게 특별히 말씀하고 싶은 것은 이 청년 시대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내 지나갑니다.
여러분이 전도서 十二장을 죽 읽어보면 기대한 경고가 굉장합니다.『너는 청년 때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이렇게 시작하고는 二절에 보면『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그러면서 三절에 보세요.『그런 날에는(인생의 황혼이 오게 되면)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손을 가리켰습니다. 나이 많으면 손이 떱니다)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아마 이것은 척추를 가리킨 것 같습니다)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맷돌은 아마 이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창들도 내다보는 자들이 어두워질 것이며(창은 눈을 가리킨 것 같습니다)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이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겠는데 길거리 문들이 닫히고 맷돌 소리가 적어지겠다고 하는 것 보니까 귀먹겠다고 하는 소리입니다)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공연히 나이 많으면 새벽에 일어납니다) 음악 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아마 성대가 다 쇠하여 지겠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높은 곳을 무서워 못 올라갑니다.) 길에서도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이것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배꽃이 피겠다는 말이요. 머리가 하얗게 되겠다는 알입니다.)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힘이 없으니까 메뚜기 한 마리가 등에 올라앉아도 대단히 무겁겠단 말이요!) 원욕(願慾)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 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이렇게 되기 전에 조물주를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제가 어떤 교우에게 들으니까, 우리 교회에 약 二, 三년 안 나오다가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본 어떤 분이 우리 교우를 만나서『내가 영락교회에 二, 三년 안 나가다가 이번에 나가보니까 변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르더랍니다. 그래서『무엇이 변하였습니까?』하고 물어보니까, 첫째는 『남녀교우가 다 섞어 앉았고요.』그것은 아마 二, 三년 전에 우리가 섞여 앉은 것 같습니다.『둘째는 설교하는 한 목사의 머리가 더 희어졌더군요.』그 분이 아마 무던히 바라본 모양입니다.
이상합니다. 그저 그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음식을 먹는데 지금은 왜 흰 머리카락이 나오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느덧 지나갑니다. 이 청년 시대가 늘 있을 줄 생각하지 마세요. 저도 三十년 전에는 젊은 사람 측에 들었습니다. 어떻게 빨리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여기 전도자는 간절히 권면합니다.『너는 젊었을 때 너의 조물주를 기억하라.』고……
오늘 면려 주일을 당해서 여러 청년들에게 특별히 부탁합니다. 젊었을 때에 먼저 창조주를 찾고 그를 기억합니다. 젊었을 때에 우리 일생의 방향을 바로 정하십시다. 젊었을 때에 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일하십시다. (一九六二년 二월 四일)

Ⅳ-34 노년기와 신앙생활 (디도서 二장 一-十四절)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딤 二·二)
몇 주일 전에 제가「청년 시대와 신앙 생활」이란 문제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다음부터 제 마음 가운데 들어온 생각은「노년 시대의 신앙 생활」이라는 문제로도 설교를 하여야 되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까닭은 가만히 보면 우리 가운데 물론 청년이 대부분이지마는 노인 님들도 이제는 상당히 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가 처음으로 해방 후에 설립되었을 때에는 대부분 청년들뿐이었습니다. 혹 중년도 물론 섞였지만 대부분 청년들뿐이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노인 님들은 이북에서 많이 내려오지 못했으므로 청년들이 거의 다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해방된 지 十七년쯤 되고 보니 아마 청년들이 점점 늙어 가는 모양입니다. 이제는 상당히 노년들이 우리 가운데 섞여 앉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가 필요한 줄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저도 거울을 보면 점점 머리에 배꽃이 많아지는데 제가 이 설교가 이 설교가 대단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선교자가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서 설교를 준비하지마는 특별히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에 제 자신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노년 시대와 신앙 생활」이라 하는 문제로 우리가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 청년들은 이 설교를 들을 것 없다라고 만 생각지 말고 잠을 자지는 마세요. 왜 그런고 하니 그저 지금 청년 시대라고 하지마는 잠깐 노인들이 됩니다. 잠깐 노인 시대가 옵니다. 또 그뿐만 아니고 사실 노년 시대에 축복을 받는 노인들이 되려고 하면 젊어서부터 잘 준비를 하고 잘 믿고 옳은 길을 걸어야 될 것이올시다.
먼저 이 시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 노년 시대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청년은 물론 인생의 아침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년은 인생의 저녁이올시다. 석양이올시다. 청년은 인생의 봄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노년은 인생의 가을이올시다. 아침이 중요하지마는 저녁도 중요합니다. 아침에 무슨 일을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마는 저녁에 바로 마치는 것이 아마 더 중요하지요. 봄에 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을에 추수를 잘 하는 것도 아마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실 봄에 뿌리는 것은 가을에 추수를 잘하려고 뿌리는 것입니다. 시종이 여일 하여야 된다는 말을 우리가 늘 듣습니다. 시작도 잘 하려니와 마침을 바로 하여야 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내가 부음이 되고 세상을 떠날 기약이 가까운지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양의 유명한 채근담에도『인생을 보는데는 그 전반생을 보지 말고 후반생(後半生)을 보아라.』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 후반생이 실상은 전반생보다 더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달음박질 마당에서 경주를 할 때에도 시작도 잘 하려니와 마지막 끝까지 마치기를 잘 해야 상을 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노년 시대에 어떻게 살며 어떻게 믿으며 어떻게 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천당을 준비하는 시기가 이 때입니다. 그러므로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아무 할머니는 곱게 늙는다.』이런 말을 더러 듣습니다. 그런 말이 돌아가는 것을 보니까 어떤 할머니는 밉게 늙는 모양이올시다. 사실 늙을 바에야 곱게 늙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면 곱게 늙을 수 있을까? 곱게 늙는 방법을 네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기야 곱게 늙기 위해서 머리에 물도 들이고 옷도 깨끗이 입고 여러 가지로 수고 많이 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제 성경의 교훈과 우리 경험을 의지해서 몇 가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청년 시대에 영광이 있는 것과 같이 노년 시대에도 영광이 있습니다. 청년 시대에 유혹과 시험이 있는 것과 같이 노년 시대에도 유혹과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편지할 때에『늙은 남자로는 절제하여 경건하며 근신하며(삼가라는 말입니다)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늙은 여자로는 이렇게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 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려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들에게 특별히 권면 하였습니다. 늙은 남자들은 나이 많다고 함부로 하지 말고 절제하라고, 경건 하라고, 근신하라고, 삼가라고 하였습니다. 늙은 여자들도 이와 같이 행실이 참소 하지 말며(없는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술의 종이 되지 말며 - 아마 요즘 썼더라면 화투의 종이 되지 말며 라고 한마디 붙였을는지 모르겠습니다 - 담배의 종이 되지 말며, 근신하며 조심하며 삼갈 것이 노년시대에도 있습니다. 경계할 것이 노년 시대에도 있습니다.
제가 먼저 이 노년 시대의 경계할 몇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늙어지면 흔히 나이 많은 재세 하고 말도 삼가지 아니하고, 행실도 삼가지 아니하고, 옷 입는 것도 삼가지 아니하고, 시험지에다가는『내 나이 금년 六十이올시다』이렇게 쓰기도 하고, 삼가지 않기가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보니 근신하라고 하였습니다. 삼갈 것이 있습니다. 늙을 때에 오는 시험이 따로 있습니다. 늙을 때에 오는 유혹이 따로 있습니다. 삼갈 것이 몇 가지나 되나 생각해 써보니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다 이야기할 수는 없고 추려서 세 가지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맹목적 보수주의, 다시 말하면 그릇된 보수주의를 삼가야 합니다. 노년 시대는 흔히 뒤를 돌아보기 쉬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그저 무슨 일을 당하면『전에는 안 그랬는데!』그런 이야기를 잘 합니다.『우리 젊었을 때는 안 그랬는데!』『새 법 내지 말고 옛 법 버리지 말라는 말이 제일이야!』이런 이야기 잘 합니다. 그것 다 뒤를 돌아다보는 말입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십시다. 옛것 중에 보수할 것이 있습니다. 참 진리를 보수해야지요. 미풍양속을 보수해야지요. 그러나 덮어놓고 보수만 하자고 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아직도 저 충청도, 전라도 지방에 가보면 상투 틀고 갓 쓰고 다니는 노인 님들 상당히 볼 수 있습니다. 철저한 보수주의올시다. 옛날 할아버지 하는 대로 꼭 하니까 효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시대에 와서 그렇게 하는 것은 옳은 보수주의 같이 아니합니다.
전에 이북에 어떤 목사님은 젊었을 적부터 누가 가져다 올렸는지 집에서 마련했는지 모르지만 개 가죽자리를 늘 깔고 앉았었다고 합니다. 나이 많아서 늙을 때까지 개가죽 자리만 깔고 앉아 계시니까 다른 사람들이 개가죽 자리 목사라고 했다고 합니다. 전에 하는 대로 하느라고!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새 것을 덮어놓고 이단시해서는 되지 아니합니다. 옛날 신약 가운데서 찾아보는 바리새주의가 이런 종류의 맹목적 보수주의올시다. 그 때에 새 시대가 왔고 새 선지자가 나타났고 새 메시야가 와서 부르짖었지마는 덮어놓고 반대했습니다. 덮어놓고 핍박했습니다. 십자가에까지 못박았습니다. 새 것을 배울 줄 몰랐습니다. 요사이도 정통 보수란 말로 간판을 삼아서 행세를 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맹목적 보수주의를 나이 많아 갈 때에 삼가야 됩니다.
둘째로, 완고(頑固)와 고집을 삼가야 합니다. 늙어가면서 몸이 굳어진다고 합니다. 마음도 굳어지기 쉽습니다.
며칠 전에 신문에 굉장히 떠든 사실을 알지요? 평택 어느 곳에 예순 여덟 살 난 할머니가 여든 한 살 난 영감을 죽이려고 술에 약을 타 주전자에 넣어놓았습니다. 기회가 있으면 이것을 영감에게 먹여 죽이려고 했는데, 영감이 먹기 전에 며느리가 모르고 자기 남편에게 가져갔습니다. 아들이 먹고 죽었습니다. 사위가 먹고 또 죽었습니다. 조카가 먹고 죽었습니다. 또 며느리도 멋모르고 한 잔 먹은 모양이요. 며느리는 중태에 빠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어디 잇느냐? 그것을 신문 기자들이 자세히 알아보고 설명하기를 이 여든 한 살 된 노인이 어떻게 완고하고 고집스러운지 도무지 온 집안이 화평할 수 없고 아들과 함께 살수도 없고 노친네하고도 같이 살수 없고 이 노인 때문에 온 집안이 살 수 없단 말이요. 그래서 이 할머니가『에이 이까짓 영감 죽여버려야 되겠다.』그런데 여러분, 잘못 듣지는 마십시다. 이 할아버지만 고집쟁이 영감이 아닙니다. 이 할머니가 예순 여덟 살까지 같이 살다가 예순 여덟 살 나서 왜 이런 짓을 하게 되었습니까? 아마 그 동안에 할머니도 고집쟁이가 된 모양입니다. 두 고집쟁이가 함께 할 재간이 있나! 삼가야 합니다. 나이 많아지면서 이러한 완고와 고집의 큰 시험이 들어오는데 이것을 항상 삼가야 합니다.
제가 전에 이북에 있을 때 어떤 큰 교회(누구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유명한 목사님에게 대해서 젊은 사람들의 돌아가는 말 들어보니까『그 목사는 다 좋은데 너무 고집이 세서』이런 말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몇 해 후에 미국에서 공부하는 때에 들어보니까 그 교회에서 큰 싸움이 났습니다. 이런 이야기 종종 듣지요. 어떤 교회는『아무 장로 때문에 그 장로 너무 고집이 세서…….아, 그 교회야 목사가 가서 三년을 견디자? 못 견디어.』여러분, 목사나 장로 이야기만 하니까 집사나 평신도는 고집 없는 줄 생각지 마시오.
이런 이야기 너무 많이 들어서 다하지 못합니다. 나이 많아지면서 이런 시험이 꼭 들어오는데 우리가 이것을 미리 알고 조심해야 됩니다. 고집과 완고로 말미암아 가정에 비극이 일어나고 교회에 비극이 일어나고, 어떤 때는 국가에 비극도 일어납니다. 四·一九혁명은 한 노인의 고집 때문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저도 함께 포함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욕심이올시다. 나이 점점 많아가면서 정욕이나 허영에 대한 욕심은 줍니다. 과히 많지 않아요. 아주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도 조심 하십시오. 그러나 이 욕심의 시험은 점점 많아집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 어떤 때는 권세, 어떤 때는 감투 욕심…….
어떤 책에 이렇게 기록했어요. 영어로 기록한 것을 제가 우리 나라 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어요『사람이 四十이 넘어가면 몸은 뚱뚱하여지고 배는 점점 나오고 욕심은 커간다.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四十지난 분들 자세히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대부분 그렇게 됩니다. 전에 들으니 어떤 목사는 아주 좋은 목사입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집장사하느라고 거간과 같이 집 보러 다니기에 심방 못한다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이북에 있을 때 이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어떤 교역자에 대해서『그 아무 목사는 참 좋은 목사인데 요사이 가만 보니까 돈이 속에 들어가서……』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여러분 이 말도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장로도 그렇고 집사에게도 이런 시험이 들어옵니다.
서양 속담에『한 발을 무덤에 들여놓고 사람의 욕심이 제일 많아진다.』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아마 그런 모양이올시다. 그래서 청년 시대에는 헌금도 잘 하고 공공(公共)한 사업에도 잘 바치다가 점점 나이 많아 지면서는 주머니 끈을 단단히 맵니다. 이런 시험이 들어옵니다. 조심할 데 대해서는 그만큼 이야기합시다.
그 다음에 여기에『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라.』고 권면 했습니다. 특별히 노년 시대에 삼갈 것이 세 가지를 말했는데 이제 힘쓸 것 세 가지를 말씀하겠습니다.
첫째는, 창조적 생활을 계속해서 힘써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나이 많으면 은퇴하지요. 일을 바꿀 수는 있지마는 나이 많다고 아무 것도 안 해서는 안 됩니다. 또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면 건강을 주시는 대로, 일을 할 수 있으면 일을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모세 같은 이는 나이 八十세에 자기 민족을 구원하는 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一二0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심명기 三十四장 七절에 보면 그 때까지『눈이 흐리지 아니했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기록했습니다.
전에 갈렙은 여든 다섯 살에 여호수아에게 와서 하는 말이,『내가 여든 다섯 살이지마는 아직까지 기력이 젊었을 때와 별로 다름이 없으니 내게 아낙 자손들(키가 큰 거족)이 사는 저 산지를 맡겨주세요. 그러면 내가 가서 산지를 점령하겠어요.』그대로 했습니다. 그 사람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힘 주시는 대로 일을 계속해야 됩니다.
또 부득이 우리 한국 같은 나라에서 은퇴할 수밖에 없지마는 다른 방면을 찾아서 하나님께서 힘 주시는 대로 창조적 생활을 하여야 됩니다. 특별히 노년 시대에 교회를 돕고 심방을 하든가 전도를 하든가 하는 모교회의 일을 제일 자유롭고 제일 능률 있게 할 만한 시대입니다.
작년에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하였지만 스탠리 존스(Dr. Stanley Junes)박사는 七十이 되었을 때에(그 나라 법에는 七十이면 은퇴합니다)자기 선교 부에 편지를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내가 금년 七十이니까 부득이 선교사로는 은퇴합니다. 그러나 내가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로서는 도무지 은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냥 나 혼자 이 앞으로 사방으로 다니면서 전도하겠습니다.』이런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사실 그이가 지금 일흔 댓 되었습니다. 그러나 온 세계에 다니면서 지금까지도 복음을 전파합니다.
빌레몬 편지를 보면 바울이 이런 편지를 했습니다. 나이 많은 바울은 옥중에 갇혀서 있을 때에 낳은 아들 오네시모에 대하여『내가 네게 부탁한다.』고,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때에 오네시모라고 하는 어떤 젊은 사람이 역시 옥에 들어왔는데 그 사람에게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하고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빌레몬이라고 하는 사람의 종이란 알이요. 그래서 오네시모를 도로 주인에게 돌려보내면서 한 편지가 이 빌레몬 편지입니다. 나이 많은 가운데서 아들을 낳았다고!
여러분, 전에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나이 많아서 실지 아들을 못 낳을지언정 신령한 아들을 많이 나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이 많아서 좋은 아들을 바울은 낳았습니다. 시편 九十二평 十二-十四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柏香木) 같이 발육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며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나리로다.』의인은 늙어도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나이 많아도 배우는 것은 계속해야 됩니다. 학구적 생활은 계속해야 됩니다. 계속해서 새 것을 배우고, 새 시대를 이해하고, 새 청년들을 이해하고, 어떻든지 새로운 시대에 낙오되지 않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의학상으로 보면 나이 많다고 머리가 반드시 둔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보통은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를「둔하다」이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사실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같은 이는 나이 많을 때에 새 악기를 배워서 음악을 했다고 합니다. 고대의 유명한 정치가 케코 같은 사람은 여든 다섯 살에 헬라 말을 배웠다고 합니다. 여기 이탈리아의 문예부흥시대의 유명한 학자 피토락 같은 사람은 일흔 살 때에 라틴어를 처음으로 배웠다고 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 김성무 권사 님은 환갑 지나서 신학을 졸업했습니다. 우리 교회 김성준 장로님은 환갑 지난 지 四, 五년 되었는데 금년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나이 많을지라도 계속해서 새 것을 배워야 됩니다. 여러 청년들과 접촉해야 됩니다. 청년들의 꿈과 이상에 감화를 받아야 됩니다. 나이 많아도 계속하여 배우세요.
셋째로, 제일 중요한 것이 물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 점점 많아 가면 육체도 쇠약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런 말씀으로 권면 했습니다.『겉 사람은 부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롭도록 힘쓰라.』고 이렇게 하려고 하면 특별히 여기에 대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시편 七十一편 九절에 보면『나를 늙을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떠나지 마소서.』이렇게 우리도 기도하십시다. 의로운 길을 가야 합니다. 잠언 十六장 三十一절에『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의로운 길로 가도록 힘써야 됩니다. 너무 염려하지 맙시다.
이사야 四十六장 四절에 이런 약속이 있습니다.『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백발이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품어주시고 보호해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이 많아진다고 너무 염려하지 맙시다.
인도의 유명한 시성 타골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나는 점점 나이 많아 감으로 내가 젓는 노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제는 돛대를 높이 달고 바람을 의지하노라.』그래야 됩니다. 나이 점점 많아 감으로 내 육체가 쇠약해져간다고 한탄하지 말고, 내 노력을 너무 의심하지 말고, 믿음의 돛대를 높이 달고 하나님께서 바람을 주시는 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것입니다.
육신의 눈이 어두워질 때에 신령한 눈이 밝아집니다. 하늘 나라를 보도록 힘써야 됩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 이 젊었을 때에 게시를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이 많을 때에 밧모 섬에 가서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될 때에 하늘 나라의 영광이 그 눈앞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축복은 누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다 허락한 축복입니다. 기억하세요. 나뭇잎은 떨어질 때에 제일 아름답습니다. 과실은 가을에 다 익을 때에 제일 아름답습니다. 곡식도 거두게 될 때에 제일 아름답습니다. 햇빛도 서산낙조가 제일 아름답습니다. 노년 시대는 인격과 믿음이 완숙하고 아름다워질 때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고, 진실하고, 원만하고, 이해성이 많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기를 때입니다. (一九六二년 二월 二十五일)

Ⅳ-35 회개와 사죄 (요한 一서 一장 一-十절)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기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一·八-九)

오늘은 금년 렌트(사순절)기간의 첫 주일입니다. 또 우리가 어제 국가적으로 노동절을 다 지켰는데 특별히 근로 대중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주일이올시다. 또한 본 교회로서는 교육 주일로 특별히 기키면서, 우리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을 좀더 바른 교육을 시킬 수 있는가 생각하며 기도하는 주일이올시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 을 통하여 말씀하신 그 말씀에 의지해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요한 은 요한 복음 만 쓰지 아니하였습니다. 요한 一, 二, 三서를 쓰고 또한 요한 계시록까지 쓰신 분입니다. 지금 우리가 요한 一서 一장을 읽었습니다. 거기 보면 잠깐 문안이 있은 후에 사도 요한 이 우리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가장 간단한 이를테면 정의를 우리에게 줍니다. 신앙 생활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및 그 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것이요 또한 그와 사귄 이들이 피차에 서로 사귀는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알아듣기 쉽게 어떤 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역시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곧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빛이므로 털끝만큼도 어두운 것이 그에게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태양에도 흑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흑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과 사귀었다 하고 어두운데 행하면 그 사람은 단순히 거짓말하는 사람이라고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 뜻은 빛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는 그릇된 것이나 거짓이 없습니다. 또한 이런 것들을 용납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빛은 지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시며 모르시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올시다.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그이 앞에는 조금도 감추인 것이 없이 적나라하게 나타날 것뿐입니다. 빛은 역시 순결을 의미합니다. 불결한 것이나 더러운 것이 있을 수 없고 용납될 수도 없다고 하는 말씀이올시다.
그러면 이와 같이 빛 되시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사귀려고 하면 어떠한 기초 위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사귈 수 있겠느냐? 여기에 대한 사도 요한 의 대답은 우리가 내 죄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며 죄를 고백하는 가운데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사귈 수 있다고 하는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오직 죄를 회개하는 그 마당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과 사귈 수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회개와 사죄」라고 하는 제목 아래서 회개란 것이 어떤 것인지 이런 점을 생각해서 하나님께 이제 우리 각 사람에게 친히 말씀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회개 가운데는 간단히 말하면 새 가지 요소나 혹 세 가지 계단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계단이올시다. 먼저 죄를 깨달아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여기 있는 말씀과 같이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 있는 것을 가리우지 말고 가리울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여실히 자백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세례 요한이 특별히 지적한 바와 같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입술로만 자복하는 것이 아니고 참된 자백이어야 합니다. 회개는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에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할 수만 있으면 내 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주었다고 하면 그 손해난 것을 보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 단계를 생각해 보세요. 내 죄를 깨닫고 내 죄를 알아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여기 요한 一서 一장 八절에는 이 진리를 부정적 형식으로 우리에게 기록하였습니다.『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진리가 없습니다. 아마 옛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모양입니다.
오늘날도 죄가 없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순히 무지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율법도 모르고 자기 자신의 생활도 몰라서『나야 무슨 죄가 있나』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깊은 죄악에 빠져서 죄를 먹고 마시면서도 소경이 되어서 길을 못 보는 것처럼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사특(邪慝)한 지혜로써 죄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후 二-三 세기에 교회를 소란하게 하던 소위 영지주의자(노스티시즘<Gnosticism>이라 합니다)들은 주장하기를,『사람이란 영과 육이 합해서 사람이 되었는데 육은 물질이요, 영은 선하지마는 물질은 악해, 그러니까 내가 죄를 지었지마는 이것은 육신이 지었어! 이것은 육신의 책임이지 내 책임은 아니다.』이렇게 되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요사이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지은 후에 여러 가지 다른 데로 책임을 돌립니다. 어떤 때는 이것을 유전의 책임이다, 나는 유전이 나빠서 이런 죄를 짓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기는 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환경의 책임이라고 합니다.『내 처지가, 그저 내 입장이 내 죄를 짓게 말들었어! 나에게야 책임이 있나!』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에다 돌립니다. 국가에다 돌립니다.『나 사는 사회가 나를 꼭 이렇게 만들었다! 사회가 책임이 있고 국가가 책임이 있지 나는 죄 없다』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신문지상에도 굉장히 떠들어 잘 알지마는 유대 사람 六백만이나 학살한 아이히만 같은 사람, 이스라엘 법정에 서서 당당히 주장했습니다.『내가 죽이기는 죽였지만 그야 내 책임인가? 나찌스의 책임이지. 나야 죄가 있나? 죄 없다』고 이렇게 사람들은 사특한 지혜를 써서 죄를 짓고도 죄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것으로써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창세기 三장에 보면 아담이 죄를 지었습니다. 금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서『아담아, 어찌하여 네가 이 금과를 먹었느냐?』곧 대답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주신 그 여자가 그것을 나에게 주므로 내가 먹었습니다. 여자를 만나서『어찌하여 네가 그 금과를 주었느냐?』여자에게 책임을 추궁했습니다. 여자는 이내 대답하는 말이『그것 제가 그렇게 했나요? 뱀이 나를 꾀어서 그렇게 말들었지요.』저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죄라고 하는 것이 별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이 진화되기 전에 가졌던 습성이다. 그것이 무슨 죄가 되나?』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주후 四세기 어거스틴 때에 영국의 신학자 펠라기오(Pelagius)라고 하는 사람은『사람이 자기가 짓는 죄는 있지마는 원죄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 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자기네가 율법을 잘 지키고 의식을 온전히 지킨 까닭으로 자기들에게는 죄가 없는 줄 생각했습니다. 독선주의에 빠져서 남의 죄는 보고 자기의 죄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그릇된 신비주의자들 가운데, 혹은 사교 도들 가운데『나는 벌써 온전한 사람이 되었는데 무슨 죄가 있나?』그래서 어떤 사람은『나는 예수다! 나는 새 주다.』혹은 자기는 무슨 감람나무라고 하여 죄 없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내가 이북에서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런 그릇된 신비주의에 젖어서,『우리는 다 온전히 중생하고 이제는 온전해졌고 죄 하나도 없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남녀 신도가 다 한 방에서 동숙해도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합니다.『누구든지 되 없다고 하면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속이는 것 뿐이라.』고 남이 속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손바닥 같이 분명히 내려다보십니다.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은 마치 매에 쫓긴 꿩이, 쫓기다 못해서 숲 속에 머리를 박고서 몸통과 깃은 다 내어놓고서 조 혼자 숨은 줄 알고, 자기는 숨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속이는 것뿐입니다.
진리가 그 속에 없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무서운 죄를 짓고도 맨 처음에는 죄 없다 생각하고 평안히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서 비유를 베풀어서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죄를 지적할 때에야 죄를 깨달았습니다.『제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내 죄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무서운 죄를 짓고도 죄 없는 줄 알고 그냥 앉아 있는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먼저 내가 내 죄를 깨달아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먼저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 아는 그 점이 회개의 첫 발걸음이올시다.
영국의 유명한 선교가 스펄전(Spurgeon)목사는 일찍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우리가 어떤 때에 나는 참 죄인이다. 나는 참 나쁘다, 나는 악하다,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기억하여라! 당신은 그것보다 더 악하다고 하는 사실을.』사실 우리가 어떤 때에는 나는 죄인이다라고 내 죄를 깨닫고 부끄럽게 알고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을 보실 때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보다 더 악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미국의 초대 역사의 유명한 인물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라고 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 초대 학장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이의 설교 가운데「흉악한 벌레 같은 죄인」이란 말을 썼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후에 비평했습니다.「아 그 너무 과한 말을 썼다.」고.
그러나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 앞에는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날 적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사상을 다 알고 있습니다. 손바닥 같이 현재와 같이 보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우리가 앉았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려다보실 때에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생각, 모든 상상, 모든 공상, 모든 망상, 야심, 음욕, 허영심, 공명심, 교만, 시기, 욕심, 이것이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타날 터이니 사람처럼 흉악한 벌레가 어디 있겠어요? 흉악한 벌레 이상으로 흉악한 것이 우리 인간인 것이올시다.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빛이신 까닭에, 진리이신 까닭에 언제든지 진리의 기초 위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과 사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더러운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 된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이대로 고백할 때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과 사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나니라.』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더 중하고 덜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흉악한 벌레와 같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될 것입니다.
둘째는 이 죄를 자백하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불 의한 것을 깨끗하게 씻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더러운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의 한 가지 버릇은 언제든지 죄를 가리려고 합니다. 죄를 숨기려고 합니다. 죄를 숨기기 위해서 또 다른 죄를 짓습니다. 언제든지 얼굴에는 분을 바르려고 합니다. 우리의 생활에 횟물 칠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당시 바리새 교인들을 항해서『이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아!』책망했습니다. 항상 가리려고 합니다.
사도 요한 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가리려고 해도 가릴 수 없는, 즉 죄를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라고, 고백하라고 숨기지 말라고 합니다. 만일 자기의 병을 완전히 고치기를 원하는 환자가 자기가 신임하는 의사에게 가서 조금도 숨김없이 내게는 이런 느낌이 있고 어디가 아프고 내 속에 어떤 곳이 약한 것 같다고 솔직히 다 내어놓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이 죄를 자백하여야 하나님께서 그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다 예배하려 예배당에 나왔지마는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만날 만한 자리에서 우리가 예배를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님이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유명한 비유를 다 기억하시지요? 그 때에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그 태도와 그 내용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한 내용을 보면『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討索)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이렇게만 기도했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섰습니다. 기도의 내용을 보아도 죄의 자백은 하나도 없습니다. 못했습니다. 자기 자랑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죄 사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사귀지 못했습니다. 성전 뜰만 밟았습니다. 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까?
그러나 세리의 태도와 기도의 내용을 보십시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부르짖는 말이『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멀리서 감히 눈도 못 들고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세리는 죄인으로 섰습니다. 세리는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고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죄를 자백하여야 됩니다. 죄를 자백하는 사람은 이렇게 언제나 겸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겸손하고 사람 앞에서도 겸손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도 말하자면 이 죄의 고백과 같이 세례를 받습니다.『나는 아무래도 죄인이므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야 돼! 그러니까 세례를 받아야 돼!』
『나는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세례 받을 필요야 뭐 있나!』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직도 그는 의인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섰습니다. 의인으로 나와 섰으니까 물론 죄의 용서를 받을 것도 없지요.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도 우리의 행동으로서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태도입니다.
『나는 죄인이므로 내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어! 십자가의 보혈로만 구원을 얻어! 나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의 살과 주님의 피 공로로만 내가 구원을 얻어! 그러니까 내가 한 번이라도 어떻든지 성찬에 참여하여야 되지 않겠는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도 우리 행동으로서의 고백이올시다. 죄를 고백하여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나의 있는 대로 다 내어놓아야, 고백을 하여야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사도 요한 은 여기서 설명하지 않지마는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통해서 분명히 가르친 진리를 한 가지만 더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입술로만 죄는 자복하는 것은 부족합니다. 눈물을 흘릴지라도 눈물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눈물의 열매가 맺어야 합니다. 열매는 어디서 나타납니까? 내가 과연 죄를 지었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내 죄를 사실 자백하면 그 죄에서 떠날 것입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떠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씩 부인하고 자기가 죄 지은 줄 안 다음에 곧 회개한 것이 분명합니다. 무엇으로 분명합니까? 그 자리를 곧 떠났습니다. 떠나서 애통하면서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참 회개는 죄의 자리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완전히 떠났다고 하는 것은 내 죄로 말미암아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혔으면, 할 수만 있으면 그것을 보상합니다. 참 회개에는 보상이 따라 갑니다.
우리는 삭개오가 완전히 회개한 줄 분명히 압니다. 삭개오는 예수 님 앞에서『아이고 내가 죄 많이 지었습니다. 나는 죄인이올시다.』이렇게만 자백한 것이 아닙니다.『주여 보시옵소서! 내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주겠습니다. 내 재산 가운데 불의 한 재산 많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토색한 것은 구약의 율법대로 四배나 갚겠습니다.』참 회개에는 보상이 따릅니다.
구약의 율법을 보면 구약 시대의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 그 죄의 사함을 받으려면 두 가지를 하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보상할 수 있는 대로 보상을 하고, 둘째는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속건 제를 그려서 죄 사함을 받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二十二장 첫 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가령 다른 사람의 양을 한 마리를 도적질하여 왔다고 하면 그 죄 사함을 받으려면 네 마리를 갚아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속건 제를 드릴 때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만일 소를 한 마리 훔쳐왔으면 다섯 마리를 갚아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속건 제를 드려야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토지나 포도 원이나 여러 가지를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으면 그 손해 끼친 것을 돌려줄 것은 물론 다섯 배를 첨가해서 갚아준 다음에 예물을 가지고 와서 속건 제를 드려야 죄 사함을 받을 것입니다.
이 원리는 옛날과 오늘날일지라도 변하지 아니합니다. 내가 참으로 입으로 고백하고 할 수만 있으면 나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이 손해를 받았으면 그 죄에 대한 보상을 하여야 우리가 참 회개하는 것이요 그래야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을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가 디 엘 무디라고 하는 사람이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가 어떤 곳에서 부흥회를 가졌는데 하루 저녁 설교를 마치고 자기 집에 돌아왔습니다. 어떤 청년이 찾아와서 자기를 보기를 원해요. 어떻게 찾아왔느냐고 물어보니 그 청년은『저는 어떤 회사에서 회계 일을 보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 재무를 보는 가운데 제가 큰 시험에 들어서 주인의 돈 一,五00 달러를 훔쳤습니다. 오늘 저녁 말씀 듣고 내가 꼭 이 죄를 회개하여야 되겠는데 一,五00달러를 훔쳐서 얼마는 쓰고 지금은 남은 것이 九五0달러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있으면 제가 다 가져다 올리겠는데 九五0달러밖에 없으니 이건 가져다 올릴 수가 없고, 그래서 제 생각은 이것을 가지고 좀 몰래 장사를 해서 이를 남겨서 一,五00달러가 다 된 다음에 이것을 완전히 주인에게 갚으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이렇게 의논합니다.
그 때 무디 선생 하는 말이『그저 그 생각도 할 수 있기는 있지마는 내 생각에는 그 도적질한 돈으로 장사를 해야 그 장사가 잘 안 될 것 같애! 그러니까 그 남은 것이라도 갚을 수 있는 대로 우선 갚아 드리세요. 그러면 아마 그 주인이 용서해 줄 것입니다.』그러니까 그이 하는 말이『아, 저는 부끄러워서 감히 갈 수 없으니 무디 선생님 저와 같이 가 주십시요.』
그래서 이튿날 그이와 같이 회사 주인을 찾았다고 합니다. 가서 무디 선생은 먼저 들어가서 그 사정 이야기를 다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 듣더니 그 주인이『아, 나는 그이가 그런 일 한 것을 전연 몰랐었다』고『그러나 이번에 그이가 회개하는 말을 들을 때에 참 내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며『뭐 그 九五0달러 있으면 그냥 가져오면 내가 다 용서해 주겠다.』그 다음에 그 청년을 청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셋이 같이 앉아 기도를 하고 온전히 주인은 그 청년을 용서해 주고 그 다음부터 그 청년은 옳은 신앙 생활을 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참 회개에는 할 수만 있으면 보상이 따릅니다. 제 교역 생활에 있어서도 이북에 있을 때에 또는 이남에 있을 때에 여러 청년들이 와서 자기가 이와 같이 남의 것, 남의 물건 안 가질 것을 가졌다고 저에게 와서 자복을 하면서 도로 돌려준 경우가 많습니다. 안 가질 돈을 썼다가서 그 돈을 도로 찾아준 예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관청의 공무원으로 있는데 다른 사람이 다 받으니까는 뇌물을 다 같이 받았다가 그 후에 양심이 너무 무거워서 다시 돌려주려고 하니까는 그 사람을 찾을 수도 없고 그러니 내가 이 돈을 연보를 하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이런 문제를 가지고 와서 의논한 청년들도 있습니다. 참 회개에는 할 수만 있으면 보상하는 것이 참 회개의 열매입니다. 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에 어떤 여자가 어려서 남의 집에 식모 노릇을 합니다. 아마 그 때 그 주인집이 안 믿는 집이었던 모양입니다. 술을 두 병 훔쳤습니다. 그 후 이 여자는 장성해서 출가하여 아들 딸 낳고 잘 삽니다. 또 그 후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죄를 다 자복하고 옳은 생활을 꼭 하려고 하는데 항상 이 여자의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언제나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그 술 병 둘이 떡 나타나곤 합니다. 하나님께 고백은 하였지만 그 술 병 둘은 그냥 있거든요. 아,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생각하다 못해서 목사와 의논을 하고서 그거 별 수 없으니 그런 경우에는 그 술 두 병 아주 갖다 주라고. 아, 가져다주려니 그 주인집
할아버지 할머니 다 세상을 떠나고 없단 말이요. 그 자손들만 사는 집에 가서 그런 이야기를 다 하고 술 두 병을 도로 갖다 주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야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이렇게 보상할 수 있는 경우면 보상하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심히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에 마음이 무거운 것은 어떤 죄는 보상하려야 보상할 수 없는 죄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이 명예를 훼손한 다음에 그 명예를 어떻게 다시 온전히 회복해 줄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바로 몇 달 전에 어떤 여자 청년이 예배 필한 다음에 저를 보자고 했습니다. 그 여자의 사정을 들으니까 어떤 회사에 근무하는 여자입니다. 그의 집은 잘 믿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그 회사에 책임자로 있는 사람이 큰 시험에 빠졌습니다. 이 여자를 그르쳤습니다. 마음 가운데 무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그가 아무래도 이 자리에 꼭 떠나고 새로운 생활을 하여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말했습니다. 곧 그 자리를 떠나도록 기도를 하고 그 상대자도 내가 만나고 그 사람에게 꼭 회개하도록 권면을 했습니다.
톨스토이의 유명한「부활」이라고 하는 소설을 기억하실 줄 압니다. 청년 귀족이 자기의 정욕을 만족하게 하기 위해서 철없는 여자를 그르쳤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 여자는 그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타락하고 타락해서 윤락 여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큰 죄에 빠지고 또 빠졌습니다.
그 후에 이 청년이 알고 보니 몇 해 전에 자기가 그르친 여자올시다. 이 여자를 다시 회복해서 좋은 여자를 만들기 위해서 이 청년이 온갖 수고를 다 합니다. 그러나 일생을 그르친 그것을 다시 보상해 줄 서 있어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멀리해야 됩니다. 어떤 죄는 아무리 내가 보상하려고 해도 보상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일생을 그르쳐 준 죄를 무엇으로 보상합니까?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 가서 전도한 동기 가운데 하나는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내가 이 보상의 하나로서, 백인의 하나로서 나아가서 이 사람들을 참으로 봉사해 보겠다는 그 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가 개인으로 보상할 수 없으니 사회적으로 봉사하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의 죄를 깊이 참회하는 가운데 자기의 일생을 어떤 공공 사업이나 자선 사업이나 문둥병 자를 위하여, 걸인들을 위해서 일생을 바쳐서 참회의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회개에는 이 보상이 따릅니다. 먼저 죄를 깨닫고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이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남겨진 손해를 할 수 있는 대로 보상할 때 그것이 참 회개입니다. 그는「미쁘셔서」약속대로 지킵니다. 예수 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이에게 약속대로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시편 三十二편을 기록한 저자는 이런 자기의 체험을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토설(吐說)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衰)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그리고 끝에『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참 기쁨이 올 것입니다. (一九六二년 三월 十一일)

Ⅵ-36 성도의 유일한 자랑 (갈라디아서 六장-十八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六·十四)

자랑한다는 것은 아마 우리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인 듯합니다. 전에 헬라 사람들은 그들의 철학과 그들의 예술을 자랑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그들의 권세와 그들의 질서를 자랑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그들의 혈통과 그들의 율법을 자랑한 것입니다. 당시에 사도 바울을 반대하던 거짓 선지자들은 특별히 할례를 자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방인들도 할례까지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사실 바울도 육신으로 그 때 사람들처럼 자랑하고자 하면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배냐민의 지파였습니다. 난 지 八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당시의 제일 유명한 선생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습니다. 율법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 못하지 아니하는 학자였습니다. 헬라의 학식과 지식으로만 할지라도 보통 유대 사람이 따를 수 없는 세계문화에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말도 잘하는 웅변가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육신을 따라서 자랑하고자 할진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올시다. 그러나,『나에게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예수를 알게 되고 그 십자가를 깨닫게 된 후에는 이런 모든 육식에 관한 것, 한갓 분토로 밖에 보이지를 아니한 것입니다. 지금 그의 자랑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었습니다.
근 二천년을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십자가가 한 장식품처럼 되었습니다. 예배당 종각 위에도 물론 십자가가 있고, 어떤 예배당에는 창문에도 십자가가 있고, 담에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국기에도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어떤 단체나 학교에서는 그 학교나 단체의 깃발에도 십자가를 그렸고, 심지어 무슨 뺏지나 목걸이나 심지어 시계 줄에도 십자가를 메어 달고 다닙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십자가를 자랑하려고 한다면 뭐 이상스럽게 들리지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이 말씀을 할 때는 사정이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지금처럼 장식품으로서의 십자가는 생각도 못할 때입니다. 그 때 사람들이 안 십자가는 추악한 죄수를 사형에 처하는 형틀이었습니다. 죄수 가운데도 가장 흉악한 죄를 지은 죄수, 그것도 노예 계급 가운데 죄를 지을 때, 식민지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만, 십자가의 형벌을 한 것입니다. 그 때는 추악한 사형 형구(刑具) 밖에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고로 그 때에는 이 십자가는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 되었고 헬라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처럼 보일 것밖에는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노라.』왜? 그 나무가 특별하고 아름다워서? 물론 아닙니다. 예수 님이 못 박힌 십자가는 피 묻은 나무일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이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노라고 외쳤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들이 잘 압니다.
간단히 말하면, 지금부터 근 二천년 전 기원 三十년경 어떤 봄날 아침에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를 흘리시며 죽으신 까닭이올시다. 이 예수의 죽으신 십자가가 왜 이렇게 사도 바울에게는 유일한 자랑거리가 되었습니까?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로마서를, 아니 모든 서신을 썼습니다.
예수는 볼래 죄가 없었습니다. 일점(一點)의 흠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면 죄 없는 이 예수가 어찌하여 십자가에 달려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까? 이것이 곧 십자가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써놓은 것이 신약전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보통 죽음이 아니올시다. 주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셨습니다.『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 인간을 그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인간에게는 특별히 이성을 주시고 양심을 주시고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유를 바로 쓰지를 못하였습니다. 그 자유를 잘못 써서 죄를 범하였습니다. 타락하였습니다. 온 인간성이 부패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 속에 있건마는, 그 양심에 있건마는, 또한 그 지으신 만물에 능력이 보이건마는 창조주를 알려고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며 오히려 그 마음이 허망하여지고 온갖 우상을 섬기게 되었고 그 정성이 타락해서 온갖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이 범죄한 인간을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신데 공의의 하나님이 범죄 한 인간을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이는 말합니다.『공의고 무어고 무조건 용서해주면 되지 아니하겠는가?』이렇게 말할 수도 물론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보면 사실 이러한 전례가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자기의 동생을 죽이고 멀리 자기 아버지의 얼굴을 피해서 애굽으로 달아났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자기 동생을 죽인 아들 압살롬을 용서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대신들이 간청을 합니다.『어떻게 아들을 그냥 외국에 내어버려 둘 수 있습니까? 데려 와야 되지 않겠습니까?』자기 부인까지 와서 간청을 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무조건 용서하고 다시 국내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조금도 회개한 빛이 없었고 마음이 변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무조건 용서해서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살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압살롬은 백성의 마음을 도적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간계로써 백성들을 자기에게 돌리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마지막에는 불량배들을 전부 규합해서 난을 일으켰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자기 아버지를 쫓아냈습니다. 갖은 위협을 다 했습니다. 다윗은 쫓겨났습니다.
그 긴 이야기는 다할 수 없지마는 결국 다윗이 그를 그렇게 무조건 용서해준 결과는 그 자신도 압살롬 자신도 아주 망하게 말들었습니다. 공의를 무시한 용서는 받는 자손에게만 아니라 용서하는 이에게도 손해가 되었고 국가의 질서만 파괴를 당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이렇게 죄인을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 둘째 가능성은 꼭 공의에 의지해서 죄인을 벌하는 것입니다.「죄인을 벌하는」이것은 물론 정당한 법 이론이올시다.『죄의 값은 사망인데 마땅히 줄을 죄를 지은 사람은 죽여야지.』하나님의 법정에는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다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꼭 이 법 이론대로 말하면 모든 인류는 전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이 여기 미칠 때에,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실 뿐더러 사랑의 하나님이 신데,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것을 감행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말하자면, 우주의 법정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동시에 또한 죄인의 죄를 용서해서 그 죄인을 죽이지 아니하고 구원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십자가의 신비가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는 십자가의 지혜가 있습니다. 능력을 초월하는 십자가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독생자를 사랑으로 보내셔서 만민의 죄를 위하여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만민의 죄를 사하여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시며 또 그의 사랑을 나타내시며 죄인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죄인으로 하여금 구원받을 길을 크게 열어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五장 八절에 말씀하였습니다.『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람을 확증하였느니라.』그 조금 전에 三장 二十六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곧 이 때에 자기의 외로움을 나타 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를 외롭다 하려 하심이니라.』십자가 가운데는 죄인을 벌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가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자기도 외롭다 함을 얻게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도 의롭다 함을 얻게 만드시는 길을 열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만민의 죄를 대속하는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노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린 그리스도의 보혈은 만민의 죄를 씻어서 깨끗하게 했습니다. 누구나 십자가 앞에 나아와 죄를 애통하며 회개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사도 요한 은 외쳤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전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거두어서 묻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리 우기 전에 귀한 병을 준비했다가 예수 님 옆구리에서 흐르는 그 피를 그 병 가운데 담은 그 병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 어떤 섬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 섬에서는 이 귀한 그리스도의 피를 잘 보관하기 위해서 그 병을 잘 지킬 수 있는 기사(騎士)로서, 기사단을 조직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기사단의 단장은 그 섬의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건대 때때로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 그 병의 뚜껑을 열면 그리스도의 보혈을 담은 그 병 가운데서 이상한 빛이 비치어서 모든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고, 따라서 그 빛의 비추임을 얻은 사람은 새로운 신령한 힘을 얻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혈은 능히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전설이 대단히 아름답고 좋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잘못된 생각인 줄 압니다. 그것은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바라보면 오히려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더러운 마음을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찬송가에 늘 부르는 말씀과 같이『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인간 양심에 때와 같이 묻은 더러운 죄를 씻어 주는 죽음이올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직 십자가를 자랑하였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 십자가는 화목하게 하는 십자가올시다. 죄라고 하는 것은 항상 사람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갈라지게 만듭니다. 부가간에도 죄가 들어오게 되면 멀어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에덴을 떠났습니다. 유다가 죄를 범한 다음에는 예수를 떠났습니다. 죄는 멀게 하고 죄는 우리로 하여금 원수가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담이 막히고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의 담이 없어질 때에 하나님과 인간은 다시 가까워 저서 화해하게 되었고 화목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五장 十절에 말씀하였습니다.『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삶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수 된 것을 멸하고 화목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사실 그 십자가의 수직선은 높은 하늘에서부터 땅 끝까지 미쳐서 죄는 사함이 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십자가의 횡선은 인간과 인간이 다시 화목하게 되고 인간 사이에 참된 화평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그러나 오지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결단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제가 들으니 독일의 어떤 예배당 위에는 조그마한 어린양을 돌에다 겨 놓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배후에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 예배당 지붕이 좀 상해서 고치기 위해서 일군들이 올라가서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만 일을 하다가 일군 가운데 하나가 발을 헛디디어서 그 높은 지붕에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떨어진다는 것이 어린양의 위에 떨어져서 그 양이 치어 죽었습니다. 그 대시 그 일군은 살았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께서 어린양과 같이 우리 대신 묵음으로 우리 인간의 죄 사람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모세가 한 번은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서 죽는 사람이 많은 때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높이 장대 끝에 달아서 누구든지 그 구리 뱀을 바라보는 사람은 비록 불 뱀에 물렸지마는 죽지 않고 살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구리 뱀과 같이 높이 십자가에 매달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가운데 바라보는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옛날로부터 오늘날까지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오직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가운데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사실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도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가운데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 프랜시스 같은 이도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신령한 은혜를 받고 죄 사함을 받는 체험을 얻은 것입니다.
모라비아 교회를 처음에 설립하고 온 세계, 우리 신교도 가운데 제일 먼저 세계 선교의 봉화를 든 진젠도로프 같은 사람도 자기가 젊은 사람으로서 어떤 미술관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린 모습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큰 은혜를 받고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바치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금 도덕 재무장회로 전락이 되어서 좀 섭섭하지마는 옥스퍼드 운동이라고 처음에 많은 좋은 일을 한 운동이 있습니다. 이 운동을 처음에 일으킨 프랭크 북만, 그 사람도 십자가를 신령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자기의 교만을 깨닫고 온전히 죄 사람을 얻고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을 우리가 다 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렌트 기간에 특별히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십자가를 묵상하십시다. 이 십자가를 우리도 자랑하십시다. 이 죄 많은 세상에 우리가 높이 들 것은 이 십자가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암흑한 세상에 광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이 불안한 공포의 세상 가운데서 마음의 안심과 평화를 얻을 곳은 오직 십자가 앞에 나아갈 것밖에 다른 데가 없습니다. 사실 이 사람의 세계에서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는 것은 오직 십자가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 환난과 고통과 죄악과 절망에서 헤매 이는 모든 인류에게 우리 위에 십자가를 높이 들어서 모든 인류들로 하여금 이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재생의 길이 있습니다. 여기에 새 사람 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험악하고 나의 과거가 아무리 추악하지마는 십자가 앞에 나오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존 밀턴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인간의 영혼이 존귀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까닭이요.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까닭이다.』
우리는 이 렌트 기간을 통해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하며 십자가를 높이 들고 자랑하며 십자가를 전파해서 많은 생명을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년은 우리 총회 五十주년 되는 희년(禧年)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이 희년을 당해서 총회에서 여러 가지 경영을 하는 가운데 한 가지 운동은 금년에는 우리 하나 하나가 배가 운동에 참가해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구원하도록 하자는 운동입니다. 할 수 있으면 부활 주일 전에 우리가 한 사람씩 구원하도록 힘을 쓰십시다. (一九六二년 三월 二十五일)

Ⅳ-37 만유의 주 (마태복음 七장 十五-二十九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七·二十一)

당시 사람들이 예수 님께 나아와서 흔히「주여 주여」불렀습니다. 여기 예수 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너희들이 이렇게 나에게 와서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을 상고하여 보면 예수 님의 이름이 말하자면 다섯 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제일 먼저는「예수」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났을 때에도『장차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이는 장차 그 백성을 그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라고 하는 말의 뜻은 구원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구약에는 여호수아라고 흔히 발음을 했지마는 신약당시에 와서는 예수라고 흔히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그리스도」라고 불렸습니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그 근본 글자의 뜻은 기름을 부었다고 하는 뜻인데 히브리말에 메시야라는 말을 헬라말로 그리스도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말은 이름이라기보다도 그 직분의 이름입니다. 예수는 메시야의 직분을 가진 분이올시다. 그러나 메시야는 여러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한 분 밖에 없으니까 이 그리스도는 결국 예수를 가리키는 한 고유 명사로 화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약에 보면 그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한 데도 종종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 님을「인자」라고 한 데도 있습니다. 인자(人子)라는 말의 근본 뜻은 그 한문자의 뜻대로 사람이 아들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 인자라고 하는 말은 구약에는 본래 다니엘에 나타나는 말이고 구약 외경에 여러 번 나타나는 말인데, 이 인자도 역시 메시야를 의미해서 사용하게끔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님께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실 때에는 흔히 다른 말보다도 이 인자라고 하는 말을 쓰셨습니다. 아마 그것은 인자라고 하는 그 말이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고 하는 뜻이 포함된 것이요, 또한 어떤 글자보다도 예수 님 생각하는 메시야 사상에 맡는 표현이 있는 까닭으로 이 말을 흔히 쓰시지 않았는가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 종종 말씀하실 때에 늘 자기를 가르쳐서 인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인자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오지 아니하고 오히려 섬기러 왔다』고……
그러나 예수 님만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도 행전에 보면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매 인자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이들도 예수 님을 인자라고 말씀한 때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다음에 예수 님을 부를 때에 쓰신 말 가운데 하나는「하나님의 아들」이올시다. 이것은 예수 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위로 올라오실 때에도 하늘로서 들린 음성이「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에서 신앙을 고백할 때에『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시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표시된 데가 많은 것을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네 가지 다른 이름으로 예수 님을 불렸을 뿐더러 아마 그 때에 예수 님을 직접 만나서 제일 많이 쓴말은 무슨 말이냐고 하면「주(主)」라고 하는 말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구약을 읽어보면 구약에는 하나님을 흔히 주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우리 번역은 여호와라고 번역해서 그냥 여호와라 하고 있지마는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기가 두려워서, 너무나 황송해서 여호와라고 읽지를 아니하고「주」라고 읽은 것입니다.「아도나이(Adonai 주)」라고 하는 말을 썼습니다.
영어 성경에도 옛날 번역에는 여호와를 전부「주」라고 번역했습니다. 또 구약 당시에 이방 사람들이 여러 가지 사신과 우상을 섬길 때에는 자기네들이 섬기는 신을 향해서도「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여기 구약에 나타나는 바알이라고 하는 말도 그 뜻은 결국 주라고 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예수 님 앞에 나와서 예수 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병 고치려 나온 사람들도『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를 어루만져 주시옵소서.』라고 불렀습니다. 예수 님 제자들도 항상 예수 님 앞에 나와서 무엇을 구할 때에, 무엇을 의논할 때에 항상 주라고 불렀습니다.『주여,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그르쳐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예수 님께서 탄생하실 때에 목자들에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릴 때에 『오늘날 다윗 성에 한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그리스도 주시니라.』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을 충만히 받은 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그 첫 오순절 설교 마지막 결론을 맺을 때에도 이와 같은 결론을 맺었습니다.『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느니라.』
그리고 베드로가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서 그 가정에 모인 여러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만 유의 주」라고 모든 것의 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十七장 十四절을 보면 거기에 사도 요한 은 예수 그리스도는『만주의 주요 만 왕의 왕』이라고 증거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도마가 처음에 예수 님의 부활을 의심하였다가 예수 님께서 다시 나타나서 친히 손의 못 자국을 보여 주시고 옆구리를 어루만져 볼 수 있게 하시면서『이제는 네가 나를 믿으라!』고 하실 때에 도마가 사실 친히 보고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이 주라고 하는 말씀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 님을 이와 같이 주라고 불렀을 뿐더러 예수 님 자신도 그렇게 부른 때가 있었습니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는데 그 뜻은「주」라고 하는 뜻입니다. 요한 복음 十三장 十三절에는『너희가 나를 선생이라고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즉 예수께서 과연 우리의 주가 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자 여러분! 우리가 신약을 가만히 읽어보면 여러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와서 말할 때에만 주라고 부른 것이 아니고 예수를 주라고 하는 것은 초대 신자들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최초의 신조가『예수는 주』라고 하는 간단한 신조였습니다.
로마서 十장 九절에 이렇게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 다음에 十三절에는『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고린도 전서 十二장 三절에는 사도 바울이 또한『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느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를 주라고 하는 것은 성령의 감화가 없으면 할 수 없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八장 五-六절을 보면 이 세상에 신이라 하는 것도 많고 주라고 하는 것도 많지마는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 천지만물을 만드신 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안다며 우리에게는 오직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을 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는 주라고 우리의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그 때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데 제일 먼저 그들의 신앙을 고백한 최초의 신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주라고, 예수를 내 주로 받아들이는 그 사람은 사실 예수 님의 제자요, 그리스도인이므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탠리 존스 박사(Dr. Stanley Jones)가 우리 교회에 와서, 아마 한 일년 전에 말씀하실 대에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서로 인사할 때 이렇게 손가락 셋을 내밀어서 피차 인사를 하자고 했습니다.『Jesus is Lord』그 뜻은『예수는 주시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주라고 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몇 가지 뜻이 있을 줄 압니다.
첫째는 주라고 하는 뜻은 높이는 뜻이올시다. 가장 높이는 뜻입니다. 빌립보서 二장 五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이와 같이 시작해서는『그는 본래 하나님과 본체이지마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자기 몸을 낮추사)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그리고 계속해서『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낮추시고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예수 님을 높여서 가장 높은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이름이 곧 주라고 하는 이름이올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주로 시인하게 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주라고 하는 말은 예수를 높이는 뜻입니다.
또한 빌립보서 一장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전에와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고자 하노라.』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과연 예수를 주로 삼는다고 하면 우리는 항상 그를 높이고 그를 존귀하게 하여야 되겠습니다.
둘째로는 이 주라고 하는 뜻은 그 글자 본래의 뜻이 주인이라 하는 뜻이 있습니다. 혹은 주권자, 권세를 잡은 자 혹은 소유자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내 주로 받는다고 하면 예수 님을 내 주권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내 처지에 있어서는 절대의 순복과 충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든지 주로 섬긴다고 하면 나는 그의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항상 예수 님을 주라고 불렸습니다. 주라고 부른 반면에 자기는 무엇으로 불렀습니까? 항상 자기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갈라디아서 六장 十七절에 자기는 항상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고 다닌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이라고 하는 말은 화인(火印)을 찍은 흔적이라는 말입니다. 옛날 그 당시 노예제도가 성행할 때에는 종들을 도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의 소유권을 확인하기 위해서 종의 등에다, 어떤 때는 이마에다가 주인의 이름을 새겨서 화인을 찍습니다. 그러면 어디 가든지 종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숨길 수 없습니다. 언제든지 이 사람은 누구의 종이라고 하는 것을 확인하게 하기 위해서 주인의 화인을 쳤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이 여기에 하는 말은『내 몸에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름의 화인을 쳤다.』며 언제든지 그리스도의 종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본래 옛날 종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 없는 것입니다. 주의 뜻이 자기의 뜻입니다. 주인이 가라고 하면 가고, 서라고 하면 섰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예수를 자기의 주로 삼은 다음부터는 언제든지 자기의 뜻이 없고 자기의 생각이 없고 주님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서라고 하면 서고 절대 순복 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한다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에게 순복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를 주라고 하는 뜻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이미 말했지마는 구약 시대는 항상 하나님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신들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주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은 예수 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도마가 고백한 바와 같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참으로 주를 믿는 사람들은 주님께 찬양을 드리고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주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기 주여 주여 하는 말을 예배 드릴 때에도 주여 주여 우리가 말합니다. 주를 하나님으로 우리가 공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예수는 우리의 주라고 하는 것은 모든 초대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첫째로 한 신앙 고백입니다.
이 기초적 신조를 오늘날에 와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길게 사도신경을 외우지마는 사도신경을 외우기 전에 먼저 예수를 내 주로 받아들여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내 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 언제든지 예수를 가장 높일 것입니다. 언제든지 예수 님의 말씀에 절대로 순복할 것입니다. 언제든지 예수 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힘을 쓸 것입니다.
여러분! 고요히 생각해 보세요. 내가 과연 내 마음속에 예수 님을 내 주로 영접했는가? 내 마음의 주가 예수 님입니까? 내 마음의 생각과 상상과 모든 생활을 주님께서 다스리십니까? 한 걸음 나아가서 내 몸에 우리 주님을 내 주로 영접을 했습니까? 성경에 보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몸을 다스리십니까? 아직도 정욕이 혹은 탐심이 우리의 몸을 다스리십니까? 주님께서 내 육체의 주가 되었습니까?
혹은 이렇게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재능을 다 주셨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내 재능의 주가 되셨습니까? 내가 받은 모든 재능을 우리 주님께서 사실 다스립니까? 혹은 내 자신이 다스리고 내 욕심이 다스립니까?
과연 내가 예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가졌든지 가진 바 물질의 주를 삼았습니까? 돈주머니를 내가 주장합니까, 주님께서 주장합니까? 나의 있는 모든 소유를 주님께서 다스리십니까, 혹은 내가 다스립니까? 예수는 주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님을 나의 생활의 주로 영접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주를 영접하면 주님의 말씀대로 순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면서 어찌하여 내 말을 순종치 아니하느냐?』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옛날 주님 앞에 나와서 주여 주여 말은 하지마는 순종하지 아니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주여 주여 하는 뜻을 우리가 분명히 압니까? 이 렌트 기간을 통해서 과연 내가 내 생활에 예수 님을 내 주로 모셨는가, 스스로 반성합시다. 내가 아직까지도 믿기는 믿는다고 하지마는, 여러 해 믿었다고 하지마는 사실 아직까지 예수 님으로 내 전 생활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이런 생활을 하였다고 하면 오늘 아침 우리가 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님을 우리 중심에 영접해서 주로 하여금 온전히 내 생활을 다스릴 수 있도록, 이와 같은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一九六二년 四월 一일)

Ⅳ-38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로마서 八장 三十六-三十九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八·三十八-三十九)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一장에서부터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서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기독교의 중심 진리를 의논하다가 맨 마지막으로 기록할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에 사무칩니다. 따뜻한 햇빛, 반짝이는 별들, 시원한 공기, 봄 동산의 아름다운 꽃들, 노래하는 새, 여름의 녹음 방초, 가을의 오곡백과,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표현하여 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그 지으신 우주에 그의 사랑이 충만합니다. 그러나 이 시긴 이 광범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 생각할 수는 없고 다만 본문에 있는 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잠깐 생각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 』독생자를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물론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 님의 탄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종의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마구간에 나시고 구유에 첫 자리를 정하여 누우셨습니다. 이 모든 것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천한 사람들까지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탄생하시자 며칠이 못되어서 멀리 애굽으로 피난을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 가운데에서도 우리 주님은 모든 피난민까지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시는 구주인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장성하였습니다. 어머니를 도와서 물을 긷고 요셉 아버지를 도와서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이 가운데도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노동이 얼마나 신성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농민들과 노동자의 구주가 되신다고 하는 점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요단강에서 다른 사람과 같이 역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 가운데에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죄가 없으시지마는 모든 죄인을 대표해서 만민의 구주가 되신다고 하는 표가 여기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십니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의 교훈 가운데에 물론 하나님의 사랑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 구원하려 왔노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의 여러 가지 자비하신 일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주린 자를 먹이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고, 병난 자를 고쳐주고, 죽은 자를 다시 살려주고,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즐거워하는 자와 같이 즐거워하신 것입니다.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잠깐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모든 사랑 가운데서도 사랑의 절정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극치가 여기서 나타났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랑은 봉사를 의미하고 사랑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그 뿐이 아닙니다. 죄 없고 일점의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五장 七-八절에 기록한 바와 같이,『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흑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선한 사람을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위해서 죄 없는 이가 자기의 생명을 바치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은 죄인뿐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원수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곧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의 길을 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 우주를 통해서도 나타나지마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떻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믿는 사람 하나하나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을 잠깐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도 읽었지마는 八장 二十九-三十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그 무소 부재하시는 미리 아시는 예지에 의지해서 구원받을 자를 미리 정하셨습니다. 믿을 자를 미리 아시고 정하셨습니다. 정하신 그들을 성령을 보내서 우리의 마음을 감화시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끔 불러내었습니다. 불러낸 다음에는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주시고 모든 죄를 다 말소해 주시고 의롭다 함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의롭다 함을 허락하여 주신 이후에는 온전히 거듭나는 축복을 주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로 삼아서 영화롭게 하여 금생과 내생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하나 하나를 이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줄에 말하자면 얽매인 바가 되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린애가 어머니 품속에 온전히 안기듯, 병아리가 암탉의 날개 아래 온전히 품기 듯이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사람에 안기어서, 사랑에 품기 어서 우리가 구원을 얻고 주안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 님은 포도나무 되시고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가 되어서 나무와 가지가 하나가 되어서, 주와 연결해서, 사랑의 줄에 얽매여서 주와 하나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를 하나도 빼앗기지 아니 하겠다고,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의 생명을 더해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한 번 구원한 후에 빼앗기지 아니하고 끝까지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 있는 결론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이것이 사도 바울의 결론이올시다.
자, 그 한 마디 한 마디를 잠깐 생각해 보세요. 사망일지라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믿는 자를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와병에 인사절』(臥病人事切)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한 번 병으로 누으면 인사가 끊어진다고, 하물며 죽을 때에 인사절이올시다. 세상 인사는 죽을 때에 다 끊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망은 나누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망은 이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망을 직면하게 될 때에 피차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이 사망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육체를 떠나는 것은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방금 죽으려고 하는 회개한 강도에게『오늘날 네가 나와 같이 낙원에 있으리라.』말씀하였습니다.
우리 교우 중에 잘 믿는 어떤 자매 한 분이 장사 차로 멀리 갔다가 그만 임 산기가 되어서 그곳에서 해산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일이 있습니다. 이 분이 잘 믿는 분으로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스스로 깨달은 다음에는 같이 갔던 자기 남편을 위로하면서『나는 이제 오래지 아니해서 주님 계신 데로 갈 터인데 나는 위해서 조금도 염려하지 마세요.』라고 오히려 남편을 위로하면서『내가 그 십일조를 드리던 것이 어디 있는데 그것을 교회에 가져다 드리고 또 여전도 회비를 내가 어디에 마련해 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꼭 여전도회에 가져다 바쳐 주세요.』
그리고서 이 부인의 어린애가 일곱이 있었습니다. 여섯이 딸이고 하나가 아들입니다. 일곱 살쯤 된 아들이었는데, 그 남편보고 이 아들은 잘 길러서 이 다음에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하고 또 자기 육체는 세상 떠난 다음에 영락교회 묘지에(강원도 외지에서 별세)좀 불편하지만 옮겨서 꼭 묻어 달라고 그런 유언을 하고 고이 잠자듯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사망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고 찬송을 부릅니다.『요단강 건너가 떠나리』이렇게 안 부릅니다. 왜 그런고 하니 믿는 사람에게는 사망도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을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간 성도를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사망도 끊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한 말이「생명이나」입니다. 생명도 즉 사는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산다는 것은 환난과 재앙을 의미하고 유혹과 시험을 의미하고 때때로 빈궁과 질병을 의미하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흔히 인생을 사고(四苦)라고 해서 생로병사(生老病死) 네 가지를 말합니다. 이 사고를 보면 사실 죽는 것은 하나 밖에 없고, 세 가지, 나는 것, 늙는 것, 병나는 것, 이것은 다 살았을 때 당하는 고통이올시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도 살기가 아마 힘든 모양이요. 그러기에 수즉다욕(壽則多辱)이라는 말도 있어요. 오래 사는 것이 좋지마는 오래 살면 욕되는 일이 많다 하는 말입니다. 세상이 괴롭고 세상에 욕되는 일이 많다 그런 말이올시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당할 수 있는 어떠한 경험이라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것은 없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 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귀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다음에 한 말이「천사나」,「권세 자들이나」또 몇 마디 건너가서는「능력이나」입니다. 이것은 다 같은 뜻을 의미한 줄 생각합니다. 여기 이 해석에 대해서는 주석자의 의견이 꼭 같지 않습니다.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능력이나 이것은 좋은 영적 존재로 해석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물론 이 천사들이나 천군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려고 할 것도 아니고 또 끊을 수도 물론 없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아마 보통은 여기 천사라고 하는 말은 타락한 천사를 가리킨 것이며 권세 자들이라고 한 것은 악한 권세를 가리킨 것이라고 흔히 해석합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물론 이 세력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려고 애씁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사실 악한 마귀가 우리를 삼키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악마는 이미 광야에서 우리 주님에게 패배를 당한 원수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로써 온전히 참패를 당한 원수입니다.
물론 지금도 이 영적 악한 세력이 여러 유혹으로 이끌고 시험을 하는 것이 사실이지마는 과히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주는 승리자입니다. 그 지팡이와 그 막대기가 항상 우리를 안위해 주시는 까닭이올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四장 九절에 기록하였습니다.『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다시 일어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현재 일이나」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현재에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은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재 무슨 일을 당하고 계십니까? 아마 그것은 각각 다를 것입니다. 혁명 후에 실직을 당한 이, 사업에 실패를 당한 이, 입학은 했으나 학비가 곤란해서 지금 당장 어려운 가운데 있는 이, 공부는 하고 싶은데도 그만 입학 시험에 낙제를 해서 곤란한 지경에 있는 학생들이 아마 이 가운데 계시는 줄 압니다.
어떤 가정에는 질고 가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는 병은 없는데 아이들이 말을 잘 안 듣습니다. 어떤 분은 고독하고 어떤 분은 생활이 빈궁합니다. 어떤 가정에는 슬픈 일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현재 당하는 경험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여러분이 방금 어떤 경험을 당하든지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해결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아니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 다음에는「장래 일이나」라고 썼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에게는 장래처럼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압니까? 오늘날 한국처럼 교통 사고가 많고 공산당 많고 원자탄 많고 또 三八선까지 있는 이런 한국에 살 때에 사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내가 확신하노니 장래에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는 없습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다 주님의 경륜 가운데서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권면 하였습니다.『내일 일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고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고 내일 일은 하나님의 사랑에 맡길 것뿐입니다.
그 다음에는「높음이나 깊음이나」입니다. 이것은 대공간의 신비를 의미할 줄 압니다. 대공간은 항상 옛날이나 오늘이나 우리에게 삼엄한 기분을 주고 어떤 때는 공포의 대상이 됩니다. 사실 지금은 인간이 전에 보다 더 높이 올라가고 더 깊이 들어갑니다. 비행기나 우주선을 타고 높이 올라갑니다. 잠항정(潛航艇) 타고 태평양 깊은 물 속으로 다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주가 넓다고 하지마는 주님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내가 어디로 가서 주의 낯을 피하리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며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주께서 또한 거기 계시 리이다.』(시편 一三九편). 우리가 천왕성, 해왕성에 간다고 할지라도 조금도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는 없습니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외친 말씀이『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끊을 수 없다.』하였습니다. 요즘 인간이 지은 것 가운데 아마 원자탄, 수소탄이 제일 무서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원자탄이나 수소탄보다도 더 크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원자탄, 수소탄보다 더 뜨겁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믿는 자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찬송가의 한 절과 같이『온 세상 다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예수 님께서는 버리지 아니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주시고 생명까지 버리신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실 리가 없습니다. 그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특별히 이 랜트 기간에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는 어떠한 환경,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이 사랑을 믿는 가운데서 승리 적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一九六二년 四월 八일)

Ⅳ-39 부활의 권능 (마태복음 二十八장 一-二十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三·十)

우리가 부활 주일 예배로 이 시간에 모였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 기독교의 중심 되는 진리요 또한 역사적 사실이올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에 이렇게 고린도 전서 十五장에 기록하였습니다.『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 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 사.』그 후에 어떻게 주님께서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열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五백 여 교인들에게 나타나시고 사도들에게 나타나시고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마지막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자기에게도 나타났다고 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부활의 능력이 나타난 날이올시다. 우리 주님은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일찍이 주님께서 말씀하였습니다.『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만에 다시 일으키리라.』거기 성전은 자기 육체를 가르친 말씀이올시다. 삼일만에 부활사기겠다고 하는 말씀이올시다. 요나의 이적밖에는 너희들에게 다른 이적을 보일 것이 없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요나가 깊은 바다속 물고기 배속에 있다가 다시 나온 것처럼 부활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나는 내 생명을 버릴 수도 있고 취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주는 과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한 후에, 자기가 어떻게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제사들에게 고난을 받으시겠다고 하시며 계속해서 또 사흘만에 부활하시겠다고 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변화산상에서 변화해서 그 얼굴을 세 제자에게 보여주신 후에 산에서 내려오면서『내가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기 전에는 이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부활하실 것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또는 친히『내가 부활해서 먼저 갈릴리에 가겠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또는 친히『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부활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부활의 그 능력이 나타나신 날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이 우주와 인간의 역사를 다스리시고 예수께서 과연 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매 예수를 적대시하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 들,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반역자 유다의 협력을 얻어서 예수를 비밀한 가운데 체포하였습니다. 불의(不義)한 재판을 공회에서 하고 그 다음에 빌라도에게 이 예수를 넘긴 이후에, 일변 빌라도에게 이 사람을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 위협을 하고, 일변 민의(民意)를 조작을 하고 데모를 일으켜서 결국은 빌라도로 하여금 원하지는 아니하지마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끔 허락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올라가는 것을 볼 때에는 그들은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이제는 그들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충만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못 박힐 때에는 너무 기뻐서 그야말로 수무족도(手舞足蹈)를 하면서 희롱까지 하였습니다.『네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 이어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그러면 믿겠노라.』는 이런 말까지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님께서 운명하신 후에는 그야말로 개가를 부르면서 개선가를 부르면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서 이 사람들은 평안히 그날 저녁에 잠을 잤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불의는 승리를 얻은 것 같습니다. 선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악은 개가를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상아계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이 세상에 이와 같은 현상이 어찌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부활의 능력이」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의 줄에 오래 매여 있을 수는 없는 분입니다. 사망의 줄을 끊어버리셨습니다. 사망을 이기었습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온 인류들에게 과연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이 우주를 주장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다스리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우리에게 선포하신 것입니다.「부활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또 보세요. 예수 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당한 후에 제자들의 형편은 어떠하였습니까? 제자들은 그야말로 환멸에 빠졌습니다.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상심 가운데 빠졌습니다. 사실 뿔뿔이 해어졌습니다.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 지신도 나약해져서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씩 부인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그 얼굴을 모니 슬픈 빛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 사람이 우리 백성을 구원할 줄 알았더니……』탄식을 하면서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아마 한적한 곳으로 피하여 가던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 님의 제자들과 모든 그를 좇던 이들은 그 때에 환멸과 상심과 실망과 슬픔과 나약과 비겁(卑怯)과 탄식에 빠진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현상이 어찌 오래 계속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부활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부활하셔서 이렇게 상심하고 실망하고 낙심하고 슬픈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나 보여주었습니다 못 자국과 상한 허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위로해 주시며 음식까지 같이 잡수셨습니다. 그들의 슬픔은 기쁨으로, 실망은 소망으로, 나약과 비겁은 새로운 용기로, 탄식은 할렐루야 찬송으로 변하였습니다. 온 세계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부활 주일 아침에 나타났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몇 시간 후에는 성경의 시간대로 여섯 시에서 아홉 시까지, 오늘날 우리가 쓰는 시계대로 말하면,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하늘과 땅이 캄캄하여졌다고 그랬습니다. 암흑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온 세상이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암흑이 승리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현상이 어찌 오래 계속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부활의 아침이 광명의 아침이 오게된 것입니다. 이렇게 암흑은 광명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부활 주일 아침에는 우리 주님의「부활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망은 생명으로 변하였습니다. 절망은 소망으로 변하였습니다. 암흑은 광명으로 변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 님은 한 번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사신 줄 알지 마세요. 예수 님은 신령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그 교회에 경험을 보면 여러 번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살아난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아는 것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북한에 가 보세요. 거기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십자가에 못 박힌 가운데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신문에 매일 연재되는「죽음의 세월」이라는 제목 아래서 이북에 납치된 여러 인사들의 생활 기를 여러분 지금 읽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종교적 지도자들의 모든 생활 형편도 종종 나오는 것을 봅니다.
그들이 그들에게서 그와 같은 모욕을 받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기도를 올리고 그런 압박 가운데서도「반역자야 물러가라」이런 고함을 지르면서 싸우는 그 경우를 볼 때 눈물 없이 읽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때에 이들이 만포(滿浦)에서 평양(平壤)까지 오다가 어떤 농가에 가서 자게 되었는데 그 늙은 농가의 할머니가 이들이 목사인 것을 알고 자기 집에 몇 마리 없던 닭을 잡아서 잘 대접을 하면서 나도 예수 믿는 이라고 그런 고백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여러분 보신 줄 압니다. 지금 북한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십자가에 못 박힌 가운데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런 현상이 오래 갈 수 있습니까? 반드시 그리스도의「부활의 능력」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북한에서 다시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부활의 능력」이 나타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부활의 능력」은 우리 각 사람의 심령 속에서도 움직입니다. 죽은 심령이 많이 있습니다. 죄악 가운데 아주 얽매여서 죽은 심령들이 많이 있습니다. 죽은 믿음도 있습니다. 죽은 사랑도 있습니다. 죽은 소망도 있습니다.「부활의 능력」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죽은 심령과 죽은 믿음과 죽은 소망과 죽은 사랑을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이 부할 주일 아침에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에게 더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부활의 능력은 우리에게 이 다음에 영원한 생명의 존재를 확실히 우리에게 말하여 줍니다.
또 이 부활 주일은 장차 모든 육체가 부활할 날도 반드시 있으리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은 부활의 능력이 나타난 날입니다. 이「부활의 능력」이 북한과 중공과 온 세계에 다시 나타날 날이 속히 이르기를 우리는 기도하십시다. 또 우리 심령 속에 부활의 능력이 움직여서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하여 또한 기도하십시다. (一九六二년 四월 二十二일·부활주일)

Ⅳ-40 신령과 진리의 예배 (요한 복음 一장 十三-二十六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四·二十四)

여기 신령이라고 하는 말은 실상은 영이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영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또 진정이라고 하는 말은 구역에는 진리로 번역했는데 그 진리라고 번역하는 것이 본문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하는 법을 그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 총회 창립 五十 주년 기념 성회의 마지막 모이는 날인데 그 마지막 예배는 오후 두 시에 모이겠습니다. 또 오늘은 五월 둘째 주일로써 세계적으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예배하는 어머니 주일인데 그 어머니 주일에 대한 선교나 특별 순서를 오늘 저녁 예배에 가지려고 합니다. 이 시간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은혜 받고자 합니다.
수가성 가까이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불멸의 진리 두 가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자신만이 영생토록 솟아나는 생수를 주실 수 있는 그 사실을 그르쳐 주었습니다. 둘째는 지금 읽은 이 말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예배하는 자는 누구든지 영과 진리로 예배하여야 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 님과 말씀하여 나아가는 중 예수 님이 자기의 과거를 말씀하는 것을 보고, 즉『네가 전에 남편이 다섯이 있었는데 지금 봉공(捧供) 하는 남편은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하는 과거의 죄와 생활을 다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는 보통 사람이 아니고 선지자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제가 보니 선생은 과연 선지자올시다.』
그리고 물어본 말은,『우리 사마리아 사람은 이 그리심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된다고 합니다.(그리심 산은 바로 야곱의 우물에서 바라보이는 앞산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하여야 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어디서 예배하는 것이 옳습니까?』그 때의 종교가들이 많이 토론하던 문제를 물어보았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 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친히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본문을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영이라는 것. 둘째 예배하는 자가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 셋째,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진리로 예배하여야 된다는 것, 이 세 가지 점을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게 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인가, 그것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첫째로 요한 一서 一장 五절에 하나님은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어두움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었다 하며 예배한다 하면서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둘째로, 요한 一서 四장 八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귀었다 하고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산상보훈과 주님의 여러 교훈을 보면 하나님은 아버지라고 가르쳤습니다. 주기도 에도『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고……』아버지로 부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더욱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 님께서는 여기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한 가지 더 분명히 가르쳐줍니다.『하나님은「영」이시니라.』그러면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한 뜻은 무슨 뜻입니까? 먼저 소극적으로,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살과 뼈가 있는 육체를 가진 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육신의 손으로 만질 수 없습니다 물질이 아니므로 저울에 다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二十四장 三十九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라고 하나님은 우리처럼 살과 뼈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 一장 十八절에 말씀하시기를『본래 하나님을 본 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육안으로 본 이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천사로 나타나실 때에 그 독생자를 본 사람은 많습니다. 하나님 본체를 우리 육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영이신 까닭입니다.
어제 저녁에 피얼스 박사도 잠깐 그런 말씀을 했지마는 이런 진리를 모르고 이 세상에는 망령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소련 흐루시초프도 그런 말을 일찍 했고 여기 일전에도 신문을 보니까 티토프라는 우주 비행을 한 소련 사람이 시애틀에 와서 신문 기자들과 회견할 때에,『내가 이 지구 위에 올라가서 지구를 몇 바퀴 돌아보았지마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더라.』
참 어제 피얼스 박사 말씀처럼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무식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나 똑같이 하늘에 올라가서 우주 여행을 하고 내려온 글렌 중령은 어떻게 말하였습니까?『내가 우주 여행을 하면서 우주의 찬란한 것을 구경하고 지구 위에서 이 공간에나 꼭 같은 자연법칙이 운행되어서 우주 여행을 완전히 마치고 돌아올 수 있는 것을 볼 때에 과연 하나님이 계시더라!』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또 적극적으로「하나님은 영이라」하는 말씀은 하나님은 마음이라 하는 말씀이올시다. 우리 사람의 마음은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도 어느 정도까지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신 까닭으로 시간을 초월합니다. 언제나 계십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이심으로 공간을 초월합니다. 일시에 어디나 계십니다. 무한하십니다. 공간을 초월하시는 존재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이요,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고 무소부지(無所不知)하시며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신 하나님이올시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이와 같은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가 예배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사랑이시며 하나님은 영이올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올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분명히 알고 예배할 줄을 알아야 될 것이올시다.
자, 그 다음 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영으로 예배하여라」이렇게 주님께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사람에게도 영이 있습니다. 영혼이 있으며 심령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으로 예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 영으로 예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므로 인간의 영으로만 하나님과 접촉할 수 있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一장 九절에 사도 바울은 기록하기를『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언제나 하나님을 섬길 때에 자기의 영으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우리도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영은 공간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리심 산에도 계시고 예루살렘에도 계시고 어디나 계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기억할 때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해야 된다.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된다 하는 것은 우스운 어린아이들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니까 어디든지 예배당을 짓고 영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물론이올시다. 또 영은 시간을 초월합니다. 언제나 예배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앙생활을 도와주기 위해서 구약 시대부터 이레에 하루를 특별히 정해서 그 날은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열 가지 계명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주어서 우리가 그 계명을 지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도와주기 위해서 그런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 것은 주일날만 하나님 앞에 와서 예배하고 다른 날은 예배 한하는 줄 알면 큰 잘못이올시다. 주님의 날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생활을 하여야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영이심으로 영으로 예배하라 하는 것은 실상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의식을 초월합니다.
사실 구약 시대에는 옛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 양을 잡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수송아지를 잡아서 드렸습니다. 혹은 비둘기로써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단번에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를 드린 다음부터는, 우리가 다시 어떤 양을 잡거나 소를 잡거나 이런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과 마음으로 예수를 내 구주로 믿고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또 오늘알 천주교와 같이, 혹은 성공회도 그 비슷한 점이 있지마는, 반드시 특수한 의복을 입고 특수한 제사를 통해서 예배를 드린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중심으로, 단순할지라도 단순한 의식을 통해서, 중심으로 영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셋째로,『진리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몇 가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한 참된 개념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라 그 뜻입니다. 지리라고 하는 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인지 똑바로 깨닫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라. 그래야 예배를 바로 드릴 것 아닙니까? 자, 하나님은 어떠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제가 이미 말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이 몇 가지를 똑바로 알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와서 예배를 드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지마는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가지고 잘못 알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모든 우상을 왜 숭배합니까? 하나님 숭배하느라고 우상을 하나님으로 압니다.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혹은 해를 숭배하고 달을 숭배하고 나무를 숭배하고 무슨 뱀을 숭배하고, 이 자연물을 왜 숭배합니까? 하나님을 바로 몰라서 이런 자연계를 숭배합니다.
왜 일본 사람들이 천황(天皇)을 신이라고 숭배했고 옛날 로마 사람들이 황제를 신이라고 숭배했습니까? 오늘날 혹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도 그릇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천도교 믿는 사람은 인내천(人乃天)이라고 사람이 곧 하늘이다.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범신론적 견해(汎神論的 見解)라고, 하나님을 이 우주 안에만 개재한다고 이렇게 잘못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위 자연 신교론(自然 神敎論)이라고『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는 했지만 자연 법칙에 맞추어 놓고는 그 다음부터는 상관 안 한다.』이런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숭배하는 사람이 오늘날도 많습니다. 진리로 숭배하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인지 똑바로 알고 숭배하라는 그 말입니다.
둘째는 신약에 보면 진리는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곧 진리입니다. 요한 복음 十四장 六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느니라.』예수 님이 진리올시다. 하나님 아버지를 바로 예배하려고 하면 예수 님을 통하여 예배하여야 됩니다. 예수 님의 교훈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예수 님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수 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그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아들로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아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바로 예배할 수 있고 하늘 나라에 갈 수가 있습니다.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는 말은 예수를 통해서 예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진리로 예배한다고 하는 말은 오늘날 우리 개역(改譯)성서에 그 뜻도 있습니다. 그것은 만가지 해석뿐입니다. 무엇인고 하니「진정」으로 예배하라는 그 뜻도 있습니다.『참으로 예배하라.』무슨 말인고 하니 예배한다 하면서도 참으로 예배 안 하기 쉽단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입으로는 찬송합시다. 노래 부르면서 속은 엉뚱한 데 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찬송 어떻게 불렸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기도합시다. 아니까 다 머리 숙이고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분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따라 하지 아니하고 딴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둘기 나무에 앉아서도 콩밭에만 마음이 있다는 격으로 혹은 장사하는 에에만 마음이 있습니다. 흥정하고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 여러분 이 설교는 듣지마는 제 음성이 아무리 크게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딴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옛 글에도『심부 자연이면 청이불문』이라고 마음이 없으면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 그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내 아들아, 네 마음을 달라.』마음을 바치라 그 말입니다.
이사야 二十九장 十三절에 하나님께서 그 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 났나니……』진정으로 예배하라는 말입니다.
한 가지 더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성경 말씀 읽는 것만 아니라 우리 생활 전체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十二장 一절을 읽을 때에, 여러분 자세히 들어보세요.『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여기 몸이라고 하는 말은 육신만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 전체를 가리켰습니다.『네 자신 전체를 산 제사로 드려라 이는 너희의 합리적 예배니라.』그랬습니다.
우리 전체 생활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되겠다는 그 말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다음절에 보니,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어서, 우리가 변화하여서 우리의 매일의 생활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거룩한 예배의 생활을 해라하는 그 말이올시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형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마는 중심으로 우리의 생활이 따라가지 아니하면 아무 쓸데가 없는 것은 제가 구구히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십니다. 예수 님 당시에 이 사마리아 여인으로 말할지라도 그리심 산에 매년 올라가서 제사 드린 줄 압니다. 그러나 그 생활은 남편을 다섯씩이나 갈아 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예수 님 당시에 바리새인이 열심히 제사 드렸습니다. 열심으로 여러 가지를 하느라고 하였습니다. 열심으로 안식일에 회당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을 보면 교만과 외식으로 가득히 찼습니다. 사실 그들이 예수를 죽였습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가 아닌 예배를 쓸데없습니다.
여러분이 주일날 여기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무리 예배당 뜰을 밟는다고 할지라도 영과 진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지 아니하면, 여러분의 생활이 변화해서, 여러분의 매일의 생활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이 예배를 받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보세요. 영과 진리로 참으로 예배를 드리면 어떤 은혜를 받습니까? 이사야 六장을 보세요.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에 하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물론 신령한 눈으로 보았습니다. 높고 높은 보좌를 보았습니다.
지금도 사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은 어떤 곳에 가서 예배를 보든지 하늘의 영광을 그 신령한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이사야가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에 그 다음에 본 것은 자기 자신에 직면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보니 죄인이올시다. 입술이 더러운 죄인이올시다.『아 나는 죄인이올시다.』죄를 자복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는 사람이 사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죄를 자복합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고 기쁨으로 돌아갑니다.
한 가지 더 이르셨습니다. 이사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내가 누구를 보내고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 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 주시옵소서.』자시의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이 시대 이 땅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은 그저 여기서 예배하고 선교나 듣고 가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시대 이 땅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사명을 깨닫고 돌아갑니다. 오늘 아침에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를 예배하는 자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一九六二년 五월 十三일)

Ⅳ-41 죄의 고백과 그 축복 (시편 三十二편 一-十一절)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三十二·五)

이미 읽은 시편 제三十二편의 이 시는 옛날 다윗 왕이 지낸 내적 경험을 묘사한 시올시다. 그래서 그 머리에 다윗의 마스길이라 하는 그런 제목이 있습니다.「마스길」이라 하는 뜻은 교훈 하는 시라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는 사무엘 하 十一장과 十二장과 같이 읽을 만한 시입니다. 사무엘 하 十一장을 읽으면 거기에 다윗이 어떻게 범죄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은 어렸을 적부터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이올시다. 좋은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그의 생활 가운데는 심히 검은 페이지가 역시 있는 것입니다.
요압 대장을 위시해서 자기의 심복들이 암몬 사람을 쳐 물리치기 위해서 전장에 나갔던 때입니다. 자기는 홀로 예루살렘에 머물러서 어떤 한가한 날 아마 낮잠을 쉬고 저녁에 자기 궁전에 올라가서 화려한 도시 예루살렘 성을 사방으로 내려다보았습니다. 우연히 어떤 여자의 목욕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불같이 일어나는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범죄를 하였습니다. 그 후에 알고 보니 그 여자는 자기의 심복 우리아의 처 밧세바이었습니다.
그 후에 임신하였다고 하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다윗 왕은 이 죄를 감추기 위해서 방금 자기를 위해서 전장에 나가서 싸우는 자기의 심복 우리아를 예루살렘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싸움하기에 수고하였는데 집에서 며칠 쉬어서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아라고 하는 사람은 어떻게 충성된 사람이었는지『나의 전우가 지금 야영을 하면서 들에 있는데 제가 왕명을 받들어 예루살렘에 잠깐 돌아왔거니와 어떻게 집에 가서 평안히 쉴 수가 있습니까?』집에는 전연 돌아가지 아니하고 행랑방에서 이틀 저녁을 자고 돌아갑니다.
다윗 왕은 자기의 계교(計巧)가 맞지 않을 때에 매우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 보다 더 무서운 죄를, 무서운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충성된 신하 우리아의 손에 밀서를 하나 써서 요압 대장에게 보냈습니다. 그것은 다른 내용이 아니고 암몬 사람과 싸울 때 이 우리아를 최전선에 내보내라는 것입니다. 요압 대장은 무슨 영문인지는 몰랐지만 그대로 했습니다.
최전선에 나가서 싸우다가 이 우리아는 죽었습니다. 그 이후에 다윗은 그저 아무 일 없는 듯이 태연히 그냥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뭐 과히 염려할 것 없습니다. 죄는 무사히 감추어 놓았습니다. 말할 사람이 다 없게 되었습니다. 평안히 그냥 남아 있습니다. 약 一년이 남짓해서 하나님의 사자 나단이 나타났습니다. 나타나서 우리가 다 아는 유명한 암 양(羊)의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떤 동네에 큰 부자가 하나 있고 매우 가난한 집이 한 집 있는데 이 부자의 집에는 소도 맑고 양도 많고 재산이 풍부하지마는 이 가나난 사람의 집에는 아무 다른 것 없고 조그만 암 양 하나 뿐이어서 이 가난한 사람은 이 암 양을 극진히 사랑해서 그저 같이 먹고 같이 자고 자기 딸처럼 길렀습니다. 그런데 그 동리 부자 집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 때에 그 부자는 자기 집에 있는 여러 양도 소도 많지만 그것은 그냥 두어두고 이 가난한 집의 암 양을 취해 다가 자기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다윗 왕이 이 말을 들을 때에 분이 났습니다.『그런 사람이 어떤 동네에 잇느냐? 그런 사람을 그냥 줄 수 없다 벌할 수밖에 없다.』고 호통을 했습니다. 그 때에 나단이 조용히 다윗 왕을 손가락으로 가리 치며 하는 말이『대왕,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올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목동으로 일으키셔서 사울의 온 집을 당신에게 맡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손에 맡기고 높은 위에 앉게 하고 모든 축복을 각 방면으로 더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해서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하십니까?』그 때에 다윗이 얼굴이 아마 불빛이 된 줄 압니다.『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습니다!』그 때에야 자복했습니다.
다윗 왕이 이와 같이 무서운 죄를 짓고도 그 죄를 가리우고 이을 때에 어떠한 경험을 가졌던가. 그 말씀은 여기 오늘 아침에 읽은 三절과 四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내가 토설(吐說)치 아니할 떼에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그 때에 그는 사람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도 하나님께 대해서도 백방으로 자기 죄를 가리우기를 힘썼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아도 죽였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하나님 앞에까지 가리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핑계를 자기 마음 가운데 생각하여 본 줄 압니다. 환경을 원망한 줄 생각합니다.『아, 그 때에 그만 환경이 꼭 그렇게 되어서 내가 유혹에 빠지게 되어서……. 부디 목욕은 그 때 왜 했나?』환경을 아마 원망한 줄 생각합니다.
『아 또, 자기는 군인인데, 제왕인데, 이런 자리에서 그런 시험을 만날 때에 남자로서 뭐 으레 그런 시험에 들 수 있지 않을까?』여러 가지 핑계로써 죄를 가리어보려고 애쓴 줄 생각합니다.『아 왕의 체면도 있지 않느냐? 왕의 체면도 아무래도 세워야 되지 않겠나? 내가 사실은 우리아를 얼마나 생각했나? 일부러 불러들여서 어떻게 이 허물을 감추려고 애썼느냐? 아, 그 녀석이 충신은 충신인데 너무 고지식해서 죽었지! 또 하기야 실상은 내가 죽였나, 암몬 사람이 죽였지.』아마 이렇게도 생각해 본 줄 압니다.
여러 가지로 이 사실을 합리화하고 핑계를 해서 자기 자신까지도 속여 보려고 많은 생각도 한 줄 압니다. 그리고 물론 이렇게 죄 지은 다음에도 으레 하나님 앞에 나가서 제사를 드리는 일이나 예배를 드리는 모든 절차는 아주 전에 보다 더 부지런히 한 줄 생각합니다. 기도할 때 으레 머리도 숙이고 속은 기도가 막혔겠지만 입술로는 기도도 열심히 했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주 태연히 점잖은 제왕이올시다. 그러나 실상 그 때 형편은 어떠했어요. 여기 三절과 四절에 기록한 대로입니다. 종일 신음했다고 했습니다. 어떤 번역에는 종일「부르짖었다」고,「뼈가 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너무 아프면 뼈가 저리다고 하는 말 쓰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 생명의 진액이 말라서 마치 여름 가물에 마르는 것처럼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뜨거운 여름에 오래 가물면 모든 것이 마르고 부스러집니다. 그 심정, 그 다급한 심정, 초조한 마음, 애 타는 심정, 그저 가슴이 탈탈한 그 심정을 이런 말로써 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통이 종일 계속되었고 그런 고통이 낮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밤에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왜? 자기는 암만 이 죄를 가리려고 애쓰지만 가리어지지 않습니다. 자기는 암만 이 죄를 잊어버리려고 하지만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이 죄를 잊어버리겠다 하고 저녁에 누워서 눈을 감으면 시편 五十一편에 고백한 말씀과 같이『내 죄가 내 앞에 있나이다.』자기의 범한 그 흉악한 죄가 눈앞에 환하게 나타났습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고 가릴래야 가릴 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성령은 떠난 지 이미 오랬습니다. 따라서 즐거움도 떠난 지 오랬습니다. 그 대신 불안과 공포가 그의 마음에 사무쳤습니다. 그저 항상 무엇이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밤에 자려고 하면 잠이 들자마자 꿈자리가 사납습니다. 그 우리아가 자리를 죽이려고 칼을 들고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지도 모릅니다. 자려고 하면 흉몽(凶夢)으로 잘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여기 기록한 대로 하나님의 손이 자기를 눌렸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모양으로 눌렀는지 알 수 없지만 육신도 누르고 마음도 누른 줄 압니다. 그래서 몸도 쇠약해지고 정신도 쇠약해졌습니다. 이런 고통이 밤낮 계속합니다. 아마 이대로 그냥 지나갔으면 정신 이상이 생겼을는지 모릅니다. 이런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서 계속해서 고민하다가 여러 가지 신경쇠약과 히스테리와 마지막에는 정신병에 걸리는 사람도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생활을 하다가 나단의 솔직한 책망을 듣고 자기의 죄를 확실히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내가 여호와 앞에 범죄 하였나이다!』
자기 자신에게, 자기 양심에게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을 했습니다. 자아 기만의 장막을 온전히 벗어 놓았습니다. 죄는 합리화하려고 더 힘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죄는 잘못한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죄는 단순히 자기 혼자와의 관계가 아닙니다.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남달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올시다. 이 은혜와 사랑을 저버린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깨끗한 심령을 더럽게 만들었습니다. 부패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솔직히 죄인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단 앞에도 사람 앞에도 솔직히 자기의 죄인 됨을 고백하였습니다.『내가 과연 죄를 지었습니다 어떠한 형벌이든지 받겠습니다.』겸손히 자복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험악한 죄에도 불구 하시고 그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 죄의 결과가 그 가정에 미치지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죄인이라고 어떠한 죄는 지었을지라도 온전히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는 그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아무리 탕자라도 많은 재산을 허비하고 허랑 방탕하고 음란한 생활을 한 탕자가 돌아올 때에도 죄를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 그 아버지는 새 옷을 입혀주었고 손에는 금가락지를 도로 끼워 주었고 반가이 영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사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심지어 살인 강도라고 십자가에서 못 박혔을 때에 자기의 죄를 회개할 때에 우리 주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용서해 주시면서『오늘날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용서하시게 될 때에 다윗의 마음가운데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여호와의 주야로 누르는 손이 없어졌습니다. 압박감이 없어졌습니다. 무거운 짐이 벗겨졌습니다. 숨을 자유로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심령이 해방을 받게 된 것입니다. 불안과 공포와 초조 대신에 안심과 화평이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무섭더니 이제는 사랑의 아버지로서 다시금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잠도 편히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픈 머리도 거뜬하게 되었습니다 악몽에서 온전히 깨어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이와 같은 사죄의 축복을 받고 감사한 가운데서 지은 노래가 여기 三十二장 一-二절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복이 있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 시편 三十二편을 끝까지 읽어보면 자기가 이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이 있습니다.『그런 까닭으로 무릇 경건한 자들은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하라.』회개의 기도를 하라고 하는 말입니다.『너희들이 어떠한 허물이 있든지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드리라』고. 그와 같이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우리들을 축복하여 주시리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내려가서 九절에 보면『너희는 그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무지한 말, 무지한 노새는 주인의 채찍을 맞고도 그냥 고칠 줄을 모릅니다. 우리에게 그런 말처럼, 노새처럼 그냥 죄 가운데 있지 말고 더 형벌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채찍이 내리기 전에 회개하라고, 모든 사람을 향하여 경고의 말씀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미도 말했지만 다윗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다윗은 어렸을 적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큰 범죄를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도 큰 유혹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전감(前鑑)이 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믿었든지, 우리가 얼마나 신앙 생활을 하였든지 항상 조심하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됩니다. 또 우리가 어떻게 하여서 시험에 들었다고 하면 우리가 이 죄를 가리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이 죄를 덮으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곧 그 자리에서 깨달아 아는 대로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솔직히 자복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죄는 값이 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를 범한 다음에 값이 없는 줄 스스로 속지 맙시다. 물론 무신론자들은 죄를 부인합니다.
지금부터 약 三十년 전에 전 세계적으로 극단의 자유주의 사상이 팽배해질 때에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죄를 경히 여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에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심리학자 프로이드를 비롯해서 많은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심리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육체의 모든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기 시작하는 가운데, 그들이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은 많은 육체의 질병과 여러 가지 정신적 이상이 어떤 때에는 자기도 모르는 내적 분열과 내적 충돌에 의해서 여러 가지 육체의 질병과 여러 가지 심리적 고장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내적 분열, 내적 충돌은 결국은 어디서 원인이 되는 줄 압니까? 속에 죄가 깊이 묻혀 있을 때에, 결국은 속에는 분열이 생기고 내적 충돌이 생깁니다.
어떤 때에는 자기 자신도 잊어버려서 그 죄를 잊어버리지마는 사람의 심령 깊은 속에는 죄를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고통이 생깁니다. 번민이 생깁니다. 오뇌가 생깁니다. 유명한 소설 도스토예프스키의「죄와 벌」을 읽어보십시오. 미국의 유명한 소설, 호오돈(Hawthorne Nathaniel)이 지은「주흥 글씨」(The Scarlet Letter)라고 하는 소설을 읽어보세요. 혹은 우리 한국의 소설 가운데 춘원(春園)선생의 세조대왕(世祖大王)을 읽어보세요.
죄에는 값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다음에 우리가 피할 수 없습니다. 값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지은 다음에는 솔직히 하나님 앞과 또한 부득이 어떠한 경우에는 사람 앞에서라고 온전히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 은 요한 一서 一장 九절에 이와 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우리가 어떤 허물이 있을지라도 솔직히 하나님 앞에 자복하면 하나님은 미쁘고 의로우셔서 십자가의 공로를 보시고 우리 죄는 사해 주시고 우리 심령을 다시 깨끗하게 하여주실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은혜가 우리 각 사람에게 허락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一九六二년 五월 二十일)

Ⅳ-42 크고 첫째 되는 계명 (마가복음 十二장 二十八-三十七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것이요.』(막 十二·三十)

기독교를 한 말로 표현한다고 하면, 사랑의 종교올시다. 이 사랑은 두 가지 계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요. 둘째는 이웃을 사랑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을 첫째 되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이 계명에 대해서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 말씀은 본래 구약 신명기 六장 四-九절 가운데 있는, 옛날 히브리 사람들이 쉐마(Shema)라고 해서 아침과 저녁으로 외우는 유명한 구절 가운데 첫 부분이올시다. 예수 님께서 이 계명을 가리키셔서 마태복음에 보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계명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계명은 모든 계명의 기초가 됩니다. 다른 모든 계명이 이 계명으로부터 시작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계명은 모든 계명을 포함하는 계명이올시다. 다시 말하면 이 계명 한 가지를 잘 지키면 다른 계명도 자연히 지키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계명은 제일 먼저 순종하여야 될 계명이올시다. 따라서 이 계명은 가장 중요한 예명이요, 주님의 말씀과 같이 문자 그대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올시다. 오늘 이 시간, 이 계명의 뜻, 혹은 그 내용을 먼저 잠깐 생각하고. 셋째로는 왜 이 계명을 지키기를 힘써야 되겠는가 그 이유를 잠깐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그「사랑하라」고 하는 말씀을 우리가 주의하여야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을 존경합니다. 경외합니다. 으레 하나님을 먼저 경외하여야 됩니다. 그러나 경외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받은 것을 감사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감사만 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도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다 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다 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하면서 자기를 사랑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마치 우리가 우리의 보모를 공경할 때에 우리가 우리의 부모를 존경하여야 됩니다. 혹은 부모의 은혜를 감사히도 생각합니다. 부모가 쓸 것을 여러 가지로 보양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 하면서도 부모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부모님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얼마마한 사랑을 요구하셨습니까? 계명에 보니『너희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대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말은 설명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우리의 내면 생활전부를 통해서 외면으로만 사랑하지 말고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목숨을 다 해서 사랑하라고, 혹 어떤 성경에는 우리 혼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 생명 전체를, 우리 애정 전체를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또는 뜻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뜻하는 것, 생각하는 것, 우리 모든 지력, 우리 모든 지식, 우리 모든 지혜, 우리 모든 목적하는 바 그 심리 전체를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또 힘을 다해서 나에게 무슨 능력이 있으면 육체의 능력이든지, 심령의 능력이든지, 무슨 힘이 있으면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심령 전체를 드려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영과 육 전체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인격 전부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일부분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고. 머리로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고. 혹은 감정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고. 외부의 생활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고. 지정의(知情意)인격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랑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되 지성으로 제일 먼저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남편이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몸을 주신 것처럼 네 아내를 사랑하라고.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되 하나님보다 더 사상할 수는 없습니다. 아내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여야 되겠습니다.
또 우리가 부모를 극진히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부모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다 사랑합니다. 자녀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나라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라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생명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하는 말은 네 생명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 이것이 이 계명의 내용이올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전체적인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지상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영원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자, 그 다음에는,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의 모습은 어떠할까! 아마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도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이의 생활의 모습이 어떠할까?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사실 세상에 누구든지 꼭 이대로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는 아마 없습니다. 어떻든지 이런 표준을 세워 가지고 이렇게 사랑하려고 애쓰는 이의 모습이 어떠할까?
첫째로 그런 이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자명(自明)의 이치올시다. 요한 一서 二장 十五절에『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여기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이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극진히 사랑하려고 애쓰는 기는 우선 소극적으로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다음 적극적 면으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이는 주의 계명과 교훈을 지키기를 힘쓸 것입니다. 요한 복음 十司장 十五절에 우리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十四장 二十三절에『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모든 다른 계명과 하나님의 모든 교훈, 우리 주님의 교훈을 그대로 지키기를 힘쓸 것입니다.
요한 一서 四장 二十절에『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애쓴다면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도록 힘쓸 것입니다. 하물며 친척, 하물며 가족이겠습니까?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도록 힘쓸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면 항상 하나님을 사모하고 앙망(仰望)할 것입니다. 시편 四十二편 一절을 읽으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渴急)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할 것입니다. 시편 八十四편 二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하나님의 궁정을 사모해서 내 육체와 정신이 쇠약하여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라고 하면 이렇게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을 사모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라고 하면 즐거이 하나님의 일을 봉사할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성막을 지으려고 할 때에 모든 백성들에게 선포하기를 이제 하나님의 명령에 의지해서 우리가 성막을 지을 터인데 여기에는 실도 필요하고 천도 필요하고 나무도 필요하고 금, 은, 동, 철 모든 보석이 다 필요하니 백성에게 가지 것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바치기 원하는 사람은 자원해서 가져오라고 선포를 했습니다.
그때에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했는지 우리가 알기를 원합니까? 그저 모든 사람들이 자원해서 실을 가져오고 천을 가져오고 나무를 가져오고 금, 은, 동, 철을 가져오고 보석을 가져와서 너무 많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모세가 이제는 더 가져오지 말라고, 넉넉하니 그만두라고 선포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우리가 즐거이 하나님을 봉사할 것입니다.
에스라 때에 저 바벨론에 포로로 갔던 백성을 다시 예루살렘에 데리고 올라와서 성전을 다시 지을 때에, 백성들에게 누구든지 자원해서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서 일하라고 할 때에, 많은 사람이 자원해서 나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였습니다. 즐거이 봉사했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옥합(玉盒)을 깨뜨려서 값진 기름으로 주님의 머리에 붓고 또 발에 부어주었습니다. 왜 그런 일을 하였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는 아끼는 것이 없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오늘날도 주님의 성전을 사모하고 주님의 모든 일,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할 것입니다. 내 자신도 바치고 내 재주고 바치고 내 물질도 바치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바치어서 주를 위해 봉사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물론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할 것입니다. 옛날 사도들이 핍박을 받으면서 매를 맞으면서 심문을 받으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한 까닭입니다.
이번에 버어마에 가서 같이 교역자 수양회를 인도할 때에 홍콩에서 일하는 모르켄(David E. Morken)박사라고 하는 분도 같이 와서 수양회를 인도했는데 그이가 그 때 여러 목사들한테 강연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저 오스트레일리아에 어떤 젊은 여자가 있었는데 이 여자가 불행히 소녀 때에 중한 병을 만나서 그만 처음에 두 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그 다음에는 불행히 이 병이 손으로 올라와서 부득이 두 팔을 자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여자가 생명을 구했는데 팔도 없고 두 다리도 없고 그저 드러누워서만 살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여자가 이와 같은 가운데서 믿음이 더욱 독실해지고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남의 봉사만 받고 사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팔을 자르고 조금 남은 데에다가 만년필을 붙들어 매고 글쓰기를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자르고 남은 데 붙들어 매고 글을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글쓰기를 배운 다음에는 이 분이 드러누워서도 편지를 쓰는데, 자기가 전에 안면이 좀 있는 이들 가운데 별로 믿음이 없고 교회에 잘 나오지 아니하는 이런 친구들에게 간절하게 자기의 믿음을 증거하고 전도하는 편지를 쓰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가만히 드러누워서 편지를 일년에도 여러 백장 수 천장을 씁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누워서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하면 어떤 방면으로든지 하나님을 봉사하고 기쁜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을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여야 되겠는가? 그 이유는 제가 설명할 필요 없습니다. 시간도 별로 많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그가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는 지으시고, 그가 우리를 사랑해서 죄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가 우리를 사랑해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가 우리를 사랑해서 하늘에 우리를 위해서 새 나라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또 그뿐 아닙니다. 과연 하나님만 영원히 사랑 할만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다가는 결국은 세상의 사랑은 마지막에 눈물로 끝나는 것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세상의 영광을 우리가 사랑합니까? 그 영광도 지나갑니다. 세상의 물질을 우리가 사랑합니까? 그 물질도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을 우리가 사랑합니까? 그 사람도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영원히 계시고 하나님만 영원히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사람도 바로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이웃도 바로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가족도 사랑합니다. 친구도 바로 사랑합니다. 물질까지도 우리가 바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주님께서 아시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 편지하신 것 중 예베소 교회에 보내신 말씀이 있습니다.『내가 네 행위를 안다. 내가 네 수고를 안다. 내가 네 인내를 안다. 그러나 내가 네게 책망할 것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예베소 교회가 다른 여러 가지 일을 다 하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책망했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아니해야 됩니다. 부부간에도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아니해야 됩니다. 친구 사이에도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아니해야 됩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과 상대하는 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아니해야 되겠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니 너희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一九六二년 五월 二十七일)

Ⅳ-43 둘째 되는 큰 계명 (요한 一서 四장 七-二十一절)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十二·三十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교훈은 본래 구약 레위기 十九장 十八절에 있습니다. 두 주일 전에「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그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둘째로 우리에게 교훈 하시는 말씀이 레위기 十九장 十八절에 있는 이 말씀,『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말씀이올시다. 하나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가르친 계명이올시다. 둘째는 우리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대한 의무를 가르쳐 주신 계명이올시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두 가지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곧 신앙과 도덕, 이 두 가지는 언제나 같이 가야 되는 것이올시다. 이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의 같은 점은 두 계명이 다 하나님의 명령이올시다. 또한 두 계명이 다 같이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금 다른 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표준에 있어서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첫째 계명은, 너희 마음과 목숨과 성품과 힘을 다하라. 다시 말하면 네 자신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사랑하되 그 표준은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그 점이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오늘 이 크고 둘째 되는 계명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 마음속에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十장에 기록한 대로 구리가 읽어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 님께 와서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 이어 반문한 말씀이『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배웠느냐?』그는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올시다. 그는 이 두 가지 계명으로 대답하였습니다.『첫째는 마음과 목숨과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예수 님 대답이네 말이 옳도다, 그대로 행하면 네가 살리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이 율법사가 계속해서 묻는 말이,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원해서 계속해서 묻는 말이『그러면 누가 내 이웃이오니까?』 이 점을 물어보았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유명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서 거기 대한 해답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중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유대 사람이올시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대단히 험한 길이고 인가가 별로 없는 그러한 지대입니다. 얼마쯤 내러 가다가서 강도 무리를 만났습니다. 매를 맞고 돈을 다 빼앗기고 옷을 찢기고 인사불성이 되어서 길가에 넘어졌습니다.
마침 그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여리고로 내려가던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기는 보았지마는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에 역시 성전에서 일을 흔히 보는 례위 사람 하나가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례위 사람도 역시 불한당 만난 이 사람을 보기만 하고 그저 지나갔습니다.
그 후에 우연히 지나간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사람이 흔히 상종도 잘 하지 아니하는, 유대 사람이 흔히 멸시하는 이방인, 거의 이방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지나가다가 이 불한 당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자기가 타고 가던 짐승에서 내려서, 그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자기의 옷을 찌어서 상처를 싸매어 주고, 자기가 탓 던 짐승에 그 사람을 태워서 주막까지 와서, 하루 저녁을 같이 자면서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떠날 때에 돈 얼마를 주인에게 주면서 하는 말이『내가 돌아올 때 부족하면 갚을 터이니 이 사람을 잘 치료해 주기를 바란다.』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이 주막을 떠났습니다.
예수 님께서 이 율법사에게 물으시는 말씀이『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이 불한당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겠느냐?』율법사가 할 말이 있습니까?『자비를 베푼 그 사람이올시다.』다시 말하면 사마리아 사람이올시다.
여기 계명이『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때 흔히 바리새인들은 이웃은 물론 내 가까이 사는 사람들, 내 동리 사람들, 이웃의 범위가 널 대야 같은 동족들, 유대인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 같은 혹은 헬라 사람 같은 사람, 이방 사람들은 원수라고 생각하던 때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님께서 그 때에 율법사에게 가르쳐 주신 말씀은 이웃이라고 하는 것은 국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우연이나 여러 가지 관계로 나와 가까이 접촉하게 되는 이는 다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친척이나 친구나 한 동리에 사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상점에서 만나는 사람, 공장에서 만나는 사람, 학교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 교회에서 접촉하는 사람, 누구든지 접촉하게 되는 사람은 다 우리의 이웃입니다.
여기에는 인종의 차별도 없고, 국경도 없고, 더욱이 오늘날과 같이 통신이 발전되고 교통의 모든 기구가 발단된 오늘날에 있어서 세계가 다 한 이웃이 된 이러한 때에 예수 님의 이 교훈이 얼마나 적절한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웃은 민족도 초월하고 국경도 초월하고 계급도 초월하고 누구든지 우리와 접촉하게 되는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웃이 됩니다. 자! 여기에 이 계명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네 이웃이면 사랑하라는 말이올시다. 여기 어떠한 이웃은 사랑하고, 어떠한 이웃은 사랑하지 말라는 말 아닙니다. 이웃이면 누구든지 사랑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유대 사람이나 사마리아 사람이나 그것을 분별할 여유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접촉하게 되는 사람은 사랑하라. 이 뜻은 내 이웃이라면 유식하든지 또 무식할지라도 사랑하란 말입니다. 이 뜻은 내 이웃이 혹 부자든지 혹은 가난할지라도 사랑하란 말입니다. 어떤 때는 혹 부한 이웃을 사랑하기 쉽지마는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 반대될 때도 있습니다. 부자 이웃을 사랑하기가 대단히 어렵고 오히려 가난한 이웃이 사랑하기 쉬울 때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성공할 때만 그 이웃을 사랑하란 말 아닙니다. 그 이웃이 어떤 사업에 실패할 때에도 사랑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그 이웃이 내게 채권자가 될 때만 사랑하란 말이 아닙니다. 또 이웃이 내게 채무자가 될 떼에도 사랑하란 말입니다. 어떤 때에는 나의 채권자도 사랑하기가 어려운 때 많아요. 그러나 어떤 때에는 내 채무자를 더 사랑하기 어려운 때도 많아요. 채권자가 되든지 채무자가 되든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그 말입니다.
혹은 어떤 때는 내 이웃이 나의 하는 사업에 경쟁자가 될 때가 있을 수도 있는 줄 압니다. 특별히 이웃에게 그런 줄 알아요. 나의 하는 사업에 경쟁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어떤 때는 나에게 유익을 주는 이웃은 사랑하기 쉽지마는 손해 주는 이웃은 사랑하기 어려운 줄 알아요. 그러나 손해 주는 사람이라도 이웃을 사랑하란 그 말입니다. 사실 이웃은 선하든지 악하든지 사랑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 님 말씀대로 하면 원수라도 사랑하라고 하는 그 말이올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되 그 표준은 무엇인가?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우리가 잠깐 알아듣기 쉽게 생각해 보려고 하면 우리가 우리 몸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것을 생각해 보면 이 계명의 뜻을 알아듣기 쉽습니다.
우선 소극적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다 우리 자신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우리 자신은 무엇 잘못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항상 양해해 주고 항상 용서하여 줍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안 했을지라도『그거야 하기 싫어서 안 했나? 그저 부득이해서, 그 때에는 너무 피곤해서 못했지.』혹 어떤 때 안 할 말을 하고도,『아, 그거야 뭐 하고 싶어서 말했나, 거야 상대방이 먼저 잘못하니까 그런 말이 나왔지!』그저 내 자신에 대해서는 항상 늘 양해해주고 항상 용서해줍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말은 네 이웃에 대해서도, 네 이웃이 잘못해도, 네 이웃이 무슨 실수가 있을지라도 항상 양해해주고 네 자신에 대해서 용서해 주는 것만큼 용서해 주어라 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또 항상 우리는 내 자신에 대해서는 늘 잘못할지라도 노하기를 더디 합니다. 또 어떤 때는 노하는 때가 혹 있다고 할지라도 그 노가 오래 가지 아니합니다. 어떤 때는 무엇을 잘못하고 사실 내가 내 자신을 책망할 때가 있지요.『내가 못된 놈이야. 내가 잘못했어!』이렇게 내 자신에 대해서 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노함은 오래 가지 아니합니다.
잠깐 동안 있다가 그 노함은 곧 풀립니다.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말은 내 이웃에 대하여 노할 일이 있을지라도 할 수 있는 대로 조를 더디 하고, 혹 노하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노를 오래 품지 말라고 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그러기에 성경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내 이웃에 대한 분한 마음을 내 마음가운데 풀지 아니하고 오래 두면 내가 손해를 받고 내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근 三十년 전에 청년 전도사로 신의주 제二교회에서 일 볼 때에 여기 우리 가운데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곽산(郭山)에 김진근 목사님이라고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한 번 신의주에 들어오셔서 저하고 조용히 함께 이야기할 때에 자기 경험담을 이야기해 준 그 말씀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습니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고 그 김 목사님이 그 때 신학을 다 마치고 노회(老會)에서 이제 목사 장립(將立)을 받기 위해서 시취(試取)를 하는데 그 때 노회에서 시취하는 법은 시취 위원이 따로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노회 앞에서 아무나 이 사람도 묻고 저 사람도 묻고 그저 물어서 대답을 잘해야 그 다음에는 목사 장립을 시키던 때라고 합니다. 그저 그렇게 시취를 자기와 어떤 다른 분하고 두 분이 받았습니다. 아 그래서 묻는 말을 자기 생각에는 무던히 애써 다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여러 목사님들의 태도를 보니까 한국 목사들의 태도는 아 그저 뭐 목사 장립 할만하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분위기가 거의 그저 될 듯하더니 아 마지막에 어떤 선교사 하나가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고 하니『거 나 보기에는 이 사람들이 아직까지 목사 장립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줄 생각합니다.』하면서 반대를 합니다.
아 그러니까 그 때는 특별히 선교사의 발언은 대단히 소중히 생각하던 때인데 여러 한국 목사 장로들이 대체로 다 될 줄 이렇게 공기가 돌아가더니, 아, 이 선교사의 말 한 마디에 공기가 갑자기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는『한 노회 기간 동안 연기하기를 동의합니다.』『재청합니다.』이렇게 되니까 그만 목사 장립을 못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고 이제 자기 숙소로 가만히 돌아오게 되니까 자기 마음속에 분한 생각이 났단 말입니다.『아니 선교사로 와서 복음이나 전할 것이지 남의 목사 장립하는 데까지 참견할 것이 무엇 있나?』분한 생각이 들어간단 말입니다.
그러나 얼마 수에 그날 저녁 이 일을 가만히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생각을 해보니까,『그 목사와 자기와 무슨 사혐(私嫌)은 조금도 없는데 그 선교사가 그와 같이 말을 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는 경험 많은 선교사인데 내가 아직까지도 좀 부족한 점이 있기에 한 동안 기다리라고 하겠지. 그것이 무슨 나를 미워한다 든 가 다른 생각으로 그런 것이 아닐 것 아닌가.』
이렇게 말하자면 양해가 되었고, 그리고『그 선교사가 내게 불리한 말을 했지마는 나는 이 노한 마음 분한 마음을 오래 품지 않겠다.』하고 그것을 양해를 했단 말입니다. 그랬는데 그 때 똑같은 일을 당한 다른 한 분은 그 양해가 도무지 되지 않았습니다. 한 달 후에 만났는데도 그 때도 아직까지 분한 마음을 품고,『에이! 그 선교사, 그놈!』아, 그저 그 분한 마음을 풀지 못하고 그냥 오래 가지고 있더라고 말했습니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 없지마는 하여간 그 후에 그 다른 분은 결국은 교회 일을 보지 않게 되었더랍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좌우간 우리가 무슨 일로 분한 마음이 들어오든지 이 분한 마음을 풀지 아니하고 오래 두면 손해는 결국 내가 본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서 떠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결국 내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 태도입니다. 내가 내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죽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도 용서해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하면 내가 다른 사람도 용서해야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시기하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언제든지 시기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부족한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시기는 현미경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 물 같은 것도 보통 눈으로 보면 맑지마는 현미경으로는 암만 맑은 물이라고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는 더러운 벌레도 많고 그 외에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이 많습니다. 시기의 눈으로 사람을 보면 암만 좋은 사람이라도 여러 가지 결점이 많이 나타난다 하는 그 말입니다.
그 대신 사랑은 망원경으로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방금 저 사람이 좀 부족한 것이 있지마는 이 앞에는 대단히 좋은 사람으로 될 것이다. 이렇게 항상 사람은 멀리서 보아야 합니다. 내가 내 자신을 사랑으로 본다고 하면 내가 다른 이웃도 사랑으로 보아라 하는 그 말이올시다.
이것은 소극적으로 하는 말이지마는 적극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우선 우리 자신을 얼마나 귀하게 여깁니까?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이내 물 가져다 마시고 추우면 이내 외투 가져다 입히고 더우면 부채질해주고 피곤하면 이내 자리에 뉘어서 쉬게 하고 병나면 이애 약 가져다 먹이고, 혹 다른 사람에게 오해받으면 변명하느라고 분주히 돌아다닙니다.
자,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가 그러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고 하는 말은 내 자신을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내 이웃도 소중히 여겨라 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다시 말하면 내 자신을 보호하고 보양하고 평안하게 하고 건강하게 하고 대접받게 하는 것처럼 내 이웃도 보호하고 보양하고 평안하게 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내 이웃의 명예나 생명이나 재산을 보존하고 보호하도록 최선을 다하라 하는 그 말이올시다.
우리가 이렇게 이 계명을 생각할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생각은, 누가 이 계명을 능히 지킬 수 있겠는가? 아마 이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성경의 교훈을 그대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제 자신이 이 계명을 지킬 수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것은 교역자의 책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가르치는 것이 제 책임인 줄 알아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능히 이렇게 살 수 있을까, 표준이 너무 높지 아니한가 하는 그런 기분이 다 있는 줄 생각합니다.
혹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여 보셨습니까? 그 표준을 좀 낮출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누구나 실행할 수 있게 그 표준을 얼마쯤 낮춘다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까? 자, 가령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너희 짐에서 먹이는 고양이만큼 사랑해라. 자, 그렇게 표준을 좀 낮추어 말했다고 하면 여러분 그대로 다 실행할 것 같습니까? 아마 그렇게 표준을 낮춘다고 할지라도 그대로 실행하는 이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어떤 부인들 보면 고양이를 굉장히 사랑합니다. 그만큼 이웃을 사랑했으면 다른 사람에게 성자라고 하는 말을 듣겠단 말입니다. 또 어떤 자기 집에서 기르는 개를 사랑하는 것 보면 굉장히 사랑한단 날입니다. 이웃을 사실 우리가 기르는 개만큼이라도 사랑한다고 하면 아마 그 사람 남에게『아, 그 사람 참 보통 사람 아니라.』고 칭찬 받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런 계명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다 누구든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킴으로써 구원 얻으리라고 한다면 구원을 얻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복음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도리를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구원 얻는 것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행함으로 얻는 것은 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과연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 구원을 얻은 사람의 생활의 최고의 표준은 이것입니다.『내 이웃을 사랑하되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왜 그런고 하니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의 하나님이올시다. 우리는 이 사랑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 우리 생활의 특색이 아무래도 사랑으로 나타나야 될 줄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현대 전 인류가 당면하는 최대의 문제들이 어떤 것인가 혹 생각해 보았습니까? 물론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남북을 통일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남한을 재건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물론 세계적으로 볼 때에 라오스 문제도 큰 문제입니다. 혹은 베를린 문제도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서 이 二十세기의 현대 문명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세계 인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세계 인류와 현대 문명을 보존하는 방법이 어디에 있는가? 이런 문제는 온 세계 사람들이 당면하는 제일 큰 문제입니다.
이런 시대에 있어서 여러분 또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많겠지마는 특별히 이런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전 인류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일까를 여러분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마 여러 가지 말씀이 있겠지마는 그 가운데 하나는 이 계명인 줄 생각합니다.『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여라.』
우리 인류가 내 이웃의 생명을 내 생명과 같이 귀한 줄 알고 내 이웃을 도와주기를 내 자신과 같이 도와줄 줄 아는 이와 같은 자리에 이르기 전에는 결국은 이 현대의 문명과 세계 인류를 보존할 길이 어디 있습니까?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전 세계 문제를 생각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닌 줄 압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서 당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지마는 이 모든 문제를 생각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오늘날 한국의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다른 말씀도 많겠지마는 이 말씀이 적어도 그 가운데 가장 귀한 말씀 가운데 하나일 줄 생각합니다.
『너희들이 어떻든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을 우리들이 먼저 배우고 우리들이 먼저 행할 것입니다. (一九六二년 六월 十일)

Ⅳ-44 영혼의 닻 (히브리서 六장 十三-二十절)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히 六·十九)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다고 하였습니다. 옛날부터 이 세상을 바다에 비유해서 생각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한 고해 같은 세상이라고 괴로운 바다 같은 세상이라고 이런 글을 읽을 수도 있고 이런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 인생이란 이 풍파 높은 바다에서 한 일엽편주(一葉片舟)에 지나지 못합니다. 한 조가 작은 배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망망한 바다에 한 조각배와 같은 것이 인생의 일면이올시다.
베에는 꼭 있어야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닻입니다. 큰 파도가 일어날 때에 이 닻이 깊은 바다 밑에 박혀있어야 배가 밀리지 아니하고 파선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고해와 같은 세상을 지나가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꼭 이어야 할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소망이올시다. 소망은 닻과 같다고. 그래서 예산부터 닻은 소망의 한 상징으로 사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올시다. 오늘 이 시간, 이 영혼의 닻을 생각해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배마다 닻이 있습니다. 작은 배는 작은 닻, 큰배를 큰 닻이 있습니다. 물론 한강에 떠 있는 노름 배 같은 것은 닻이 없을 줄 생각합니다. 사실 인생은 노름 배는 아닙니다. 아무리 작다고 할지라도 작아도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배라고 한다면 거기는 반드시 닻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바다를 건너야 하는 배입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다 소망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매일 일하고 사는 것은 소망이 있기에 그러합니다. 학생은 소망으로 공부를 합니다. 농부는 소망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상인은 소망으로 상업을 경영합니다. 실업가는 소망으로 공장을 경영합니다. 부모는 소망을 가지고 자녀를 기릅니다. 사실 모든 활동, 모든 사업의 배후에는 이 소망이 잠재합니다. 모든 노력의 배후에는 이 소망이 있습니다. 특별히 어려울지라도 인내하여 무슨 일을 계속하는 그 배후에는 반드시 소망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국민이 경제 五개년 계획을 세우며 혹은 화폐를 개혁하며 여러 가지 곤란을 당할지라도 참는 것은 이렇게 함으로 조국을 건설하려고 하는 소망이 없으면 사람이 일하지 아니합니다. 일할 의욕을 잃습니다. 사람이 소망이 없으면 노력을 하지 아니합니다. 계속하지 아니합니다. 더욱 사람이 소망이 없으면 무슨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그냥 인내하지 아니합니다. 더욱 사람이 소망이 없으면 희생을 제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화폐 개혁 이야기를 잠깐 하였지마는 긴급 금융 조치법안이 발표된 이후에 신문에 보는 대로 항간에서 염려하는 것은 이렇게 하면 개인의 기업 열, 개인의 사업을 하려고 하는 의욕을 손상하지 아니할까 염려가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민주주의 근본 이념은 개인의 독창력을 살리고 개인의 활동할 능력을 백 퍼센트 열어주어서 각각 개인이 자기의 최대의 봉사를 하게 될 때에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모든 것이 건전한 기초 위에 설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여간 이 문제는 경제인에게 맡기고 단순히 제가 이 자리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사람이란 어떤 소망이 없으면 노력하지 아니하고 더욱이 희생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주 소망이 없어지면 살지를 못합니다. 자살이란 절망한 사람들이 최후로 취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닻과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닻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물론 실지 배의 닻 가운데에는 크고 작은 종류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질에 있어서는 별로 다를 것이 없을 줄 생각합니다. 다 튼튼한 쇠로 말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신적인 닻에 있어서는 크고 작을뿐 아니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학생의 소망은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인격을 함양하고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농부의 소망은 곡식을 많이 얻는 것입니다. 상인들의 소망은 이익을 많이 얻는 것입니다. 산업가의 소망은 많은 물건을 생산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예술가들의 소망은 좋고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여 내는 데 있을 것입니다. 음악가들의 소망은 보다 더 아름다운 음악을 창작하는 것일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소망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것을 발명하는 데게 있을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소망이 다릅니다. 어떤 이들은 무슨 지위나 권세 자리를 소망하고 노력합니다. 어떤 이들은 특별히 명예를 많이 생각하는 이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큰 소망, 작은 소망, 이런 소망, 저런 소망, 소망 가운데는 여러 가지 소망이 있는 것이 사실이올시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는 소망이 여러 가지 종류이지만 이 모든 세상의 소망은 공통한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이런 모든 세상의 소망은 이대로 이룰 수 있고 이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소망한다고 이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제 관찰이 잘못이 아닐진대 그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아마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공부한다고 다 학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장사한다고 다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손해를 보는 수가 있습니다. 지위를 구한다고 다 그 자리를 얻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인간이 가지는 이 세상의 소망은 실망이 오는 것이고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 여러 가지 소망이 많습니다. 수포로 돌아가는 소망이 많이 있습니다. 안개처럼 사라지는 소망이 많이 있습니다. 꿈에 멎는 소망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 생활에 한숨과 눈물이 내포되는 것입니다.
또 이런 모든 인간적인 소망에 있어서는 설사 이런 소망들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우리가 본래 기대하던 것처럼 만족은 없습니다. 바로 여기 어떤 청년 실업가가 새로 사업을 하면서 그가 꼭 이 사업에 성공을 하고 돈을 많이 벌겠다며 열심으로 자기 자지 아니하고 일하고 생각하며 많은 수고를 합니다. 그런 가운데 성공 못하는 이들도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래도 성공한 이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그저 사업만 성공하고 돈만 모으면 천하를 얻을 것처럼 생각되지마는 정작 사업에 성공해 놓고 보면 또는 돈도 모아놓고 보면 기대하던 것처럼 만족은 없습니다. 오히려 돈이 많으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가 많이 닥칩니다. 시기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돈을 내라고 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여러 가지 변태 무쌍(無雙)한 사회는 항상 공포를 가져옵니다. 설사 사업에 성공하고 돈을 모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환멸의 비애를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요사이 웬만한 젊은 사람은 다 사진기 하나씩 가지고 다닙니다. 아마 그 사진기 가운데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마는 아마 이스트맨 코닥(Eastman Kodak)이 제일 많을 것입니다. 이 이스트맨 이라고 하는 사람이 미국인으로서 제일 먼저 손 사진기를 만든 사람이올시다. 필름도 제일 먼저 만든 사람이올시다. 로체스터 뉴욕(Rochester New York)에 가 보면 이스트맨 코닥회사(Eastman Kodak Company)가 한 들판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돈을 몇 억을 모은 모양이요.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이 이렇게 크게 성공하고 돈도 많이 모았지마는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결국은 인생의 환멸을 느껴서 마지막에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의 소망이라고 하는 것, 바라볼 때 굉장한 것 같지마는 결국 얻어 놓고 보면 여기에도 참 만족은 없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그래요. 우리가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하고『내가 어떻든지 이번에 꼭 석사가 되고 박사가 꼭 되어야지. 박사 학위를 내가 받을 테야.』열심으로 공부하고 굉장히 노력합니다. 그런다고 다 박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이들 가운데 더러 박사가 됩니다. 그러나 혹 박사가 된다고 할지라도 정작 박사가 되고 보면, 그것 뭐 별 것 아닙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에도 박사 된 이가 더러 계신 줄 알지만 정작 되어 놓고 보면 별 게 아닙니다. 혹 관청에 있는 이들은 아마 이런 생각 자연히 있을 것 같아요. 혹 과장쯤 되는 사람이면 그 국장 한번 되어 보면 좋겠다고, 국장쯤 된 사람은『아이고 나 장관 한 번 되어 보면 좋겠다』고 합니다. 굉장히 소망을 두고 힘씁니다. 아나 그런 생각 누구나 다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국장이 되어 보면 그것 뭐 별 것 아닙니다. 오히려 한국 같은 데서는 장관 됨으로 말미암아 큰 화를 입는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여기 어떤 젊은 사람들 결혼 기에 있어서 어떤 이상에 맞는 상대자를 구했다고 하면『내가 이분하고 꼭 결혼했으면 좋겠다』고…….물론 이렇게도 생각합니다.『아, 내가 이 남자하고 결혼했으면 좋겠다.『아 내가 이 여자와 꼭 결혼했으면 좋겠다.』그저『결혼하면 참 행복이 있을 테다.』간절히 원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다 결혼이 되는 것도 아니고 혹 결혼이 된다고 할지라도 보통 경험을 보면 결혼한 후에 몇 달 지내보면 또 그것도 별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이 세상에는 천사는 없습니다. 지내보면 그게 그것이란 말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상에서 가지는 소망은 우리가 설사 그것을 성취한다고 해도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만족은 찾지 못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공통한 경험이올시다. 마치 바다 물 속에 들여다보이는 해초와 같아요. 물 속으로 들여다볼 때에는 그 바다 물 속 해초가 아주 아름답게 보입니다. 참 아름다워요. 아름다운 정치입니다. 그러나 정작 들어가서 해초를 움켜쥐어서 꺼내보면 그것 별 것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성취한다고 하는 소망은 흔히 마지막에 환멸의 비애로 종막을 거두는 것이 보통 경험이올시다.
또 이 모든 세상 소망은 설사 우리가 이 세상의 소망을 성취해서 어느 정도의 기쁨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순간적입니다. 잠깐뿐입니다. 세상의 소망은 쇠할 때가 있습니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집니다. 떨어집니다. 마지막에는 썩어집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덧 흰 서리 가 우리 머리 가에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우리가 숨결을 내 쉴 수밖에 없게 되면, 백만장자면 무엇하며 박사면 무엇하며 대통령이면 무엇합니까? 이 세상의 소망은 설사 그대로 성취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아침 안개처럼 잠깐 있다가 사라져 없어집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소망은 절망의식은 재로 화하고 말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참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썩는 소망, 죽는 소망이 무슨 소망입니까? 그러므로 이것들은 사실 영혼의 닻은 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망은 영혼의 닻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하여 줍니다.『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아서 기다릴지니라. 우리들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이니라.』
불멸의 영혼의 닻이 어디 있습니까? 참 영혼의 닻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시편 六十二편 五이하를 읽을 때에 자세히 들으시기를 바랍니다.『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좋아 나는 도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이것은 공상적으로 어떤 이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많은 표현에 의지해서 생생한 체험, 피 어린 체험에 의지해서 우리에게 솔직히 고백하는 말씀이올시다.『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 도다. 오직 주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하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七十一편 五절에는『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 시요.』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의 참 소망이 되십니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만 우리 불멸의 영혼의 닻이 되십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一장 二十七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 보여주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광의 소망이올시다. 왜? 그리스도는 부활과 생명이 되셔서 그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사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셔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까닭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시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소망을 두는 사람은 어떠한 풍파가 있을지라도 요동하지 아니합니다. 왜? 하나님은 움직이지 아니하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시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十三장 五절에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 약속을 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十장 二十八절에는 우리 주님께서 친히 약속을 하였습니다.『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혼의 닻으로 삼는 이는 어떠한 실패, 어떠한 타락, 어떠한 환난, 어떠한 슬픔이 있을지라도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그 배가 밀려가지 아니합니다. 암초에 부딪치지 아니합니다. 파선하지 아니합니다. 요사이 신물을 보면 우리 사회상이 더 암담하여지는 것 같습니다. 한 번 보니까 하루에 자살 사건이 일곱 번이나 일어났고, 그것은 알고 나타나는 것만 그렇지, 사실 모르는 것은 그 보다도 수가 더 많을 줄 생각합니다. 한강에는 목욕하느라고 다이빙(diving 뛰어들기)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살 다이빙이 너무 많아서 특별히 경비원을 배치해 둔다는 신문 보도도 우리가 지금 읽고 있습니다. 실로 비통한 사회 실정이올시다.
한국이란 좁은 바다에 사실 풍파가 너무 심합니다. 三八선의 풍파가 있습니다. 六·二五 사변 三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그 냉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학생 혁명의 파도가 높았습니다. 머지 않아 군사 혁명의 파도가 또한 높았습니다. 또 화폐 개혁도 상당한 풍파 같습니다. 이렇게 풍파가 높은 바다에 닻이 없는 배를 타고 다니는 우리 동포들이 너무 많습니다. 영혼의 닻이 없는 배를 가지고 이 풍파 높은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이 세파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가 파선을 당하는 가련한 인생이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여러 가지 자살의 이유가 있지요. 실직이 하나요. 사업 실패가 그 둘째요, 혹은 실연 혹은 신병,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컨대 한 마디로 말하면 소망의 닻이 없는 까닭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아무리 사업에 실패했어도, 아무리 실직을 했어도, 아무리 병이 났어도, 아무리 실연을 했어도, 소망이 그 영혼에 있는 사람, 영혼에 닻이 있는 사람은 자살하지 아니합니다. 왜? 영혼의 닻인 하나님을 의지하는 까닭입니다.
아무리 동해 바다의 파도가 높다고 하지마는 금강산 一만 二천 봉과 같이 움직이지 아니하는 튼튼한 영혼의 반석을 의지하는 영혼의 닻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절망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절망이란 말은 없습니다. 이 영원불멸의 영혼의 닻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 이 닻을 붙잡았습니까? 내가 과연 이 닻을 붙잡았다고 하면 이 예배당 문 밖에 닻 없는 작은 배를 타고 노도광풍에 시달리는 가련한 우리 민족에게 이 영혼의 닻을 전파하여야 되겠습니다. (一九六二년 六월 十七일)

Ⅳ-45 하나님의 승리적 사랑 (창세기 五十장 十五-二十一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날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五十·二十)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 二十절의 말씀은 요셉이 그 형들에게 한 말입니다. 인간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이 시간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요셉의 생활은 참 소설 같습니다. 그는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또 그 꿈 때문에 비싼 대가를 지불할 수박에 없었습니다. 멀리 외국에 팔려가게 되었고, 거기서 오래 종노릇도 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곳에서 무서운 유혹을 이겼건마는 오리려 더 화를 입어서 감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이런 어려운 일을 말할 수 없이 많이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애굽의 총리 대신으로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사실 요셉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대로 비천한 데 처할 줄도 알고 풍부한 데 처할 줄도 아는 사람이올시다. 구약의 모든 인물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과 가장 비슷한 이가 요셉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예수 님께서 은 三十 냥쭝에 팔리신 것과 같이 요셉은 은 二十 냥쭝에 팔리었습니다. 예수 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것과 같이 요셉은 광야 같은 애굽에서 어려운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것보다도 예수 님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모든 원수들의 죄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요셉도 자기를 죽이기로 모함했던 자기 형들의 죄를 용서한 것이올시다.
오늘 읽는 이 본문의 배경은 설명 안 할지라도 여러분은 대략 짐작하실 줄 압니다. 요셉이 이렇게 형들의 죄를 다 용서해주고 자기 아버지를 멀리 가나안에서 모셔 오고 형들과 모든 가족들을 애굽 땅으로 다 모셔다가 아주 기름진 고센 땅에 거주해서 편안히 살게 말들었습니다. 그 후 야곱도 여러 해를 평안히 살다가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야곱의 유언에 의지해서 그의 유해를 멀리 헤브론으로 옮겨서 거기 자기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이 묻힌 막벨라 굴에 장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요셉과 그 모든 형제들이 올라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애굽의 고관들과 애굽의 기병대가 보호를 해서 먼길에 평안히 안장을 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안장을 하고 돌아온 형제들은 다시 요셉에 대해서 의심이 났습니다.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준 것은 우리 아버지께서 계시니까 우리 아버지의 얼굴을 보아서 용서해 주었지마는 이제는 아버지도 세상 떠나서 장사했는데 이제 혹 우리 원수를 갚지 않을 까고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요셉에게 보내서 전하는 말이,『당신의 아버지 야곱이 살았을 때에 특별히 단신에게 이런 말을 부탁합니다. 다른 말이 아니고「너의 형들이 여러 가지 허물과 죄가 있지마는 나를 보아서 내가 간 다음에도 죄를 다 용서해 주라」고, 이런 말을 특별히 부탁했는데 이 형들의 죄를 꼭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이런 말을 사람을 보내 청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니 죄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의심나게 하고 항상 두려운 마음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죄지은 사람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달아난다고 합니다. 또 이것을 보니 남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마는 죄 사함을 받은 다음에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믿기 는 아마 더 어려운 모양입니다.
요셉이 자기에게 사람을 보내서 자기 형들이 이런 말을 부탁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요셉은 아마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여기 성경을 보니 그저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는 벌써 용서해 준지 오래인데 지금도 자기를 의심하는 그 심경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민망했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후에 자기 형들을 통해서 요셉이 이와 같이 간곡히 말합니다.『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소서!』간곡히 위로한 것입니다.
자 여러분, 요셉이 자기 형들에게 말씀한 가운데 특별히 두 가지 말씀을 잠깐 기억하고 지나가면 좋겠습니다.
처음에 한 말씀이『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아마 그 뜻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원수를 갚겠습니까? 그 말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셉은『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 그대로 믿는 사람이올시다. 요셉이 마음 가운데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계셔서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자시요, 하나님의 맷돌이 천천히 돌아가지마는 다 공의대로 갚을 때가 있는 것을 요셉은 꼭 믿었습니다.『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할 것이요, 내가 할 일은 아니요. 이것은 다 하나님께 맡길 것이요, 나는 내 형들의 죄를 용서하겠다.』다시 말하면 요셉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기 원수를 갚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먼저 이것을 배워야 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남을 벌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보복 행위는 매우 위험합니다. 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꼭 바로 보복할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잘못 보복할 수도 있고 항상 도에 지나쳐서 보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보복 행위라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역시 다시 보복 행위를 가져옵니다. 내게도 가져옵니다.
세상은 항상 변태 무쌍 합니다. 내가 오늘날 세력을 잡았다고 하지마는 내일 그 세력이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물며 자기도 하나님의 신판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양 보복을 한다고 하는 것은 심히 위험한 일입니다. 늘 삼가야 됩니다. 개인적 보복, 정치적 보복, 국가적 보복도 꼭 마찬가지로 우리가 항상 삼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 관대한 마음과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의지하는 이 신앙을 배워야 될 것이올시다.
둘째로 하신 말씀이 오늘 이 시간에 중심이 됩니다.『당신들은 나를 해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사……』
그 형들은 요셉을 해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멀리 애굽에 팔았지요. 그러나 그 후에 모든 된 일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 선으로 바꾸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요셉이 이와 같이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용서하게 된 둘째 동기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가 당한 모든 억울한 일을 통하여 자기를 축복하신 사실을 기억하였습니다. 자기가 당한 모든 불행을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이것들을 마치 쇠사슬처럼 연락을 해서 마지막에는 자기에게 큰 축복을 해서 애굽의 총리 대신의 높은 자리로 올리게 하셨고, 자기만 축복한 것이 아니고 자기를 통해서 자기 아버지 야곱과 모든 형들과 자기 일족을 다 기근 가운데서 구원하게 만드셨고, 그것만 아니고 큰 기근 가운데서 수 없는 애굽 사람을 건질 수 있는 큰 축복을 하나님께서는 이룩하신 것을 기억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모략과 죄악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수 없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도 초월해서 이 모든 것을 말하자면 다스려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승리 적 사랑이올시다. 인간의 죄악이라도 능히 승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올시다.
전에 바사 궁전에 에스더가 왕후로 있을 때에 된 일을 여러분은 다 기억하실 줄 압니다. 그때에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하만이라고 하는 재상이 저 문간지기인 모르드개라고 하는 유대 사람을 미워해서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하는 생각을 먼저 했고, 그 다음에는 모르드개가 유대 종족이라고 하는 것을 알자 유대 사람 일족을 전부 바사 제국 아래에서 전멸시킬 모함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함으로 왕의 인가까지 얻어서 왕의 조서에 어인 까지 찍고 그 조서를 모든 지방에까지 내어보냈던 것까지 사실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모든 인간의 무서운 모략과 이것을 다 쇠사슬과 같이 엮어서 마지막에는 오히려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모르드게는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고 오히려 이런 모함을 하던 하만이 자기가 세운 五十척이나 높은 기둥 위에 달려서 죽게 된 사실을 우리는 지금까지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능(罪能)을 초월 통치해서 자기의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이것은 어느 사람의 경우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미워했습니다. 사두개인들 역시 합작을 했습니다. 모든 제사장들이 예수를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모략을 하고 모함을 했습니다. 가룟 유다를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체포하고 거짓 재판을 하고 빌라도의 공판 정에 넘겨주었고 빌라도 역시 무책임한 책벌(責罰)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억울하게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든 것입니다.
얼른 보면 인간의 죄능이 이겼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를 통해서 만민을 구속하셨고 십자가는 승리의 표가 되었고 십자가는 만민의 소망의 표가 되었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제사장들과 그 때 유대 사람은 영원히 역사적으로 심판을 받게 되고야 만 것입니다. 그후 사실 주후 七十년에 이들과 그 일족이 멸망을 당한 사실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인간의 죄능이 때때로 대단히 크고 인간의 모함이 무섭고 어려운 것 같지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기지는 못합니다.
전에 사도 바울이 억울하게 로마 감옥에서 오래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 기회를 이용해서 불멸의 옥중 서신을 기록하게 해서 지금까지도 수 없는 성도들을 축복하여 주시는 것이 사실이올시다. 인간의 죄악이 아무리 크지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악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여러 가지 고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고도 역시 그렇습니다. 혹은 천재, 혹은 지변, 혹은 질병, 혹은 빈궁, 온갖 불행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도 초월 통치해서 축복으로 전환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올시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어디 가서 예배당을 짓든지 성 패트릭 기념 예배당을 짓습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성자입니다. 전 아일랜드 사람들이 성자로 모시는 그 패트릭이올시다.
여러분, 젊은 시대의 그의 역사를 읽어보면, 그이가 불행히 아마 요셉과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열 대여섯에 나서 아일랜드 해적들에게(그는 본래 영국 사람입니다)붙잡혀 갔습니다.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는 여러 해 동안 그 아일랜드에 가서 종노릇을 했습니다. 그 종노릇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에 패트릭이 거기서 우연히 석방을 받게 되었고 다시 와서는 공부를 계속했고 공부를 한 다음에는 다시 아일랜드에 돌아가서 전역을 미신에 얽매었던 그 무지한 백성들을 온전히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서 지금까지 아일랜드의 성자가 된 것입니다.
지금 일본에 나와서 활동하는 여러 선교사 가운데 특별히 드 세이저(Jacob De Shazer)라고 하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이 선교사는 본래 미 공군 폭격 부대의 일원으로 미국 비행기가 일본 동경을 제일 먼저 폭격한 그 두리틀(Doolittle)비행기에 같이 타고 동경을 폭격한 사람입니다. 그 비행기가 저 중경(重慶)으로 달아나다가 그만 채 가지 못하고 이 사람이 탄 비행기는 고장이 나서 저 상해(上海)방면에 떨어졌습니다. 다행히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서 죽지는 아니하고 일본 관헌들에게 잡혔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근 三, 四년 동안 상해, 대련(大連) 혹은 북경(北京) 그 다음에 일본에까지 여러 감옥으로 전전하면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당하고 일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그는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은혜를 받았습니다.『일본 사람들이 왜 이렇게 포악할까? 이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는 까닭이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까닭이다. 내가 이 사람들에게 성경을 주고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다.』그런 결심을 하였습니다. 포로에서 석방되자 곧 미국에 돌아가서 공부를 해 가지고 일본에 나와서 다시 전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도 그 사랑으로 통치를 해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이와 같은 말을 하려고 하면 한량이 없습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파스칼(Pascal, Blaise)이라고 하는 분은 본래 유명한 자연 과학자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한 번은 말을 타고 가다가 다리에서 떨어져서 죽을 뻔하고 중상을 입고 치료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읽는 그야말로 불멸의 저서「파스칼의 명상록」을 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재난을 변해서 축복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맙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지어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까지도 이용해서 축복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지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가 죄 지으면 그 되의 형벌을 우리가 받습니다. 또 그렇다고 하나님이 죄를 짓게 하시는 것도 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아, 유다 가 예수를 팔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고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만민의 구주가 되었는데 그 유가가 죄 지은 것이 무엇이냐?』이런 소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유다 가 죄짓지 않은 것 아닙니다. 유다 는 하나님 명령으로 죄 지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습니다. 자기가 죄 지었으므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는 이렇다고 해서 인간고 자체가 축복이란 말도 아닙니다. 인간고라고 하는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화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하는 말도 아닙니다. 사랑은 이와 같은 화라도 전환시켜서 축복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는 그 말입니다. 인간의 죄악과 재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일시로 파괴합니다. 그러나 아주 파괴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파괴한 조각을 모아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올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는 아주 파선이란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어떤 때 파탄이 되어서 조각 조각으로 날 때가 있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조각을 다시 모아서 더 좋은 배를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승리 적 사랑이올시다.
그런데 여기에 있어서 한 가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꼭 이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이 사랑의 역사에 우리가 협력을 해야 됩니다. 자, 요셉의 경우를 보세요. 요셉이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에 얼마나 협력을 하였습니까? 요셉은 그와 같이 불행한 일을 당할지라도 그러한 억울한 일을 당하여서도 절대로 낙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원수 갚을 생각을 가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어떠한 처지를 당하든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자리에서 옳은 생활을 했고 그 자리에서 최선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만일 요셉이 그렇지 아니하고 종으로 잡혀가서 불만과 불평이 가득하고 낙심하고 자포자기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생활을 하였던들 요셉은 아주 영원히 종으로 살다가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써 우리의 깨어진 생활도 다시 축복하기 위해서 많은 은혜를 베풀지마는 우리가 거기 협력할 줄 모르면 하나님의 사랑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서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든지 이 어지러운 세상가운데서 살 때에 어떠한 불행이나 어떠한 곤란이나 어떠한 재난을 당하든지 낙심해서는 아니 됩니다. 불평을 가져서는 아니 됩니다. 자포자기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 처지에서 하나님의 승리 적 사랑을 믿고 의지하면, 어떤 처지에서든지 양심 적 생활을 하고 옳은 생활을 하고 보복할 생각을 하지 말고 그 처지에서 최선의 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현재는 모든 불행일지라도 큰 축복으로 전환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이 하나님의 승리 적 사랑이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한나라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또는 온 세계의 역사의 움직임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한 줄로 생각합니다. 가령 우리가 민족적으로 三八선이 오래 열리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으로 우리가 불평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것으로 불만을 토하고 이것으로 낙심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우리 민족을 축복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또는 이 견지에서 볼 때에 우리가 세계의 장래에 대해서는 과히 낙심할 것은 없는 줄 압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항상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승리 적 사랑입니다. (一九六二년 七월 一일)

Ⅳ-46 진주보다 귀한 지혜 (잠언 三장 十一-二十六절)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희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잠 三·十五)

옛날 히브리 사람으로서 온전한 학문을 배우려고 하면 세 가지를 배웠습니다.
첫째는 율법(律法), 둘째는 예언(豫言), 셋째는 지혜(智慧)입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율법이 있고 예언서가 있고 또 지혜문학이 있는 것이올시다. 구약의 책들 가운데 특별히 잠언이나 욥기나 전도서 같은 것은 이 지혜문학에 속하는 책입니다. 또 외경 가운데 솔로몬의 지혜라고 하는 유명한 책도 있습니다. 지혜를 논하게 되면 자연히 헬라 철학을 연상하게 됩니다. 철학은 본래「필로소피」라고 지혜를 사랑한다고 하는 뜻의 학문입니다. 그러나 헬라 사람은 이 철학을 통해서 우주와 인생의 근본 의미를 탐색하는 명상적 방면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민족인 까닭으로 실제 생활에 있어서 지혜의 의미를 더욱 탐구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성경이 교훈 하여 주는 이 지혜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가 이 지혜문학을 읽을 때에 제일 인상이 깊어지는 것은 옛날 히브리 사람들이 얼마나 이 지혜를 귀하게 여겼는가 하는 그것입니다. 이미 읽었지마는 잠언 三장 十三절 이하를 읽으면『지혜를 얻는 자와 명철(名哲)을 얻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正金) 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사실 지혜는 돈보다 더 귀합니다. 미련한 부자는 오히려 돈으로 말미암아 패가망신하는 경구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윗 대에 아비가일의 남편 되는 나발이라고 하는 사람은 돈 많은 부자였지마는 미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혜 있는 자기 아내 아비가일이 아니었다면 다윗에게 큰 참화를 입을 뻔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 말을 듣고 놀라서 죽기는 마찬가지로 죽었습니다.
지혜는 권세보다 귀합니다. 권세 자리에 오르는 것만 좋은 일이 아닙니다. 권세를 잡은 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우리 동양에는 걸(桀)임금이나 주(紂)임금 같은 미련한 임금을 비롯해서 서양에는 혹은 내로 황제, 근대의 히틀러나 무솔리니에 미치기까지 미련한 권력가들은 자신을 망칠뿐더러 온 백성을 망친 예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혜는 권세보다 귀합니다. 지혜는 지식보다 귀합니다. 지식이 있다고 다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련한 박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실 아편 장이 가 된 의학박사도 여러 사람 있다고 합니다. 사실 술주정뱅이가 되어서 길거리에 넘어져 죽는 철학 박사에 대한 이야기도 이 사람 자신이 친히 들었습니다.
지식이 좋기는 좋지마는 미련한 지식, 미련한 사람에게 지식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실 지혜는 과학보다 귀합니다. 현대 인류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과학이 주는 모든 지식, 모든 기술, 모든 능력, 곧 현대 과학무기, 원자력 같은 것을 인류에게 유익하게 쓸 만한 지혜가 우리 인류에게 잇느냐, 업느냐, 이 문제입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바로 쓸 수 있는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것을 바로 쓸 수 있는 정치가가 필요합니다. 권세 자리에 오르는 것만 재간이 아닙니다. 권세를 바로 쓸 줄 아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 정치를 해야 됩니다. 모든 경제 원칙을 바로 알아서 바로 사용할 줄 아는 지혜 있는 경제인들이 국가의 경제를 바로 지도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경제가 가 필요합니다. 좋지 못한 풍속은 우리 한국에 항상 재빨리 들어와서 요사이 신문지를 보니 우리 한국에도 소위「뷰티 콘테스트」라고 해서 무슨 미인 경연대회라나, 그저 쉽게 말하면 얼굴내기 대회올시다. 그런 것을 종종 하는 모양이고 어떤 여자는 얼굴을 자랑하기 위해서 태평양까지 건너가는 여자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물론 얼굴이 아름다우면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귀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귀한 것은 지혜 있는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얼굴이 암만 아름답지마는 미련한 여자는 문자 그대로 돼지 코에 금 고리올시다. 요사이 좋지 못한 풍속이 하도 많이 들어 와서 항간에 듣건댄 아이들을 수두룩하니 낳아놓은 어머니들도 밤에는 춤추러 돌아다니는 여자들이 종종 생긴다고 합니다. 아이 낳을 줄만 알고 아이 기를 줄 모르는 미련한 어머니의 수가 점점 많아가서 큰 걱정이올시다. 지혜 있는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지혜 있는 선생이 학교에 필요합니다. 지혜 있는 지도자가 사회에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지혜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지혜를 구하셔요. 성경을 보면 미련한 자의 모습이 어떠하며 지혜로운 자의 모습이 어떠하다고 세밀히 기록한 구절이 많습니다. 제가 이제 그 대표적인 구절만 몇 구절 인용할 때에 여러분 잠깐 들어보세요. 시편 五十三편 一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물고기가 물이 없다고 하는 것처럼, 공중에 나는 새가 공기가 없다고 하는 것처럼, 아들이 되어서 아버지가 없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더러 있습니다.
모든 무신론자(無神論者)들은 다만 한 마디로 말하면 미련한 자들입니다. 잠언 十五장 五절에『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잠언 十四장 九절에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죄를 심상히 여긴다고 하는 말은 죄를 심상히 여겨서 죄와 희롱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죄를 가지고 장난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죄를 가지고 불장난하듯 장난하는 사람 있습니까? 분명히 아세요. 그런 사람은 미련한 자들입니다.
잠언 二十장 三절에『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榮光)이어 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가는 곳마다 싸움을 일으키고 싸움 잘 붙이는 사람은 미련한 자올시다. 틀림 없이 미련한 자입니다.
예레미야 十七장 十一절에는『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불의 한 방법으로 돈을 모아서 자고새가 자기가 낳지 아니한 남의 새 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불의 한 재산을 품고 있습니까? 분명히 알 것은 그 재산은 떠나갈 때가 있을 것이요 미련한 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누가복음 十一장 三十九절 이하를 보면 예수 님께서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을 향해서 이런 말씀으로 책망하였습니다.『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 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겉치레만 하고 속치레를 할 줄 모르는 사람, 겉만 깨끗이 하고 마음이 깨끗이 하지 아니한 사람, 모든 외식하는 사람을 미련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산상보훈 마지막에 예수 님께서『너희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지마는 내 교훈대로 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마치 집을 짓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마태복은 二十五장에 예수 님께서 열 처녀의 비유를 가르치실 때에 그 중 다섯 처녀는 등을 준비하였지마는 기름을 준비하지 아니한 여자는 미련한 처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등잔은 있지마는 성신의 충만한 은혜가 없는 사람은 미련한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을 향해서 하는 말이『너희가 마음으로 시작하였다가 할례로 끝을 맺으려고 하느냐, 너희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믿음으로써 의를 얻는 복음주의를 떠나서 다시 의식적인 천주교로 돌아가는 사람들, 여러 가지 비 진리인 사교로 전락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미련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여야 됩니다.
누가복음 十二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곳에 부자가 있어서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농사는 잘 되었는데 그의 곡간이 적으니 어떻게 할까. 굉장히 넓게 짓고 곡식을 곡간에 가득 쌓아놓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하는 말이『내 영혼아, 기뻐하고 즐거워해라. 먹고 마셔라. 오래 쓸 것을 준비하여 두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였습니까?『이 미련한 자여, 오늘 저녁에 내가 네 영혼을 부를 터인데 네 쌓아둔 것이 뉘 것이 될 줄 아느냐?』돈만 알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세상 재물만 알고 장래를 위하여 준비 못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미련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자의 모습을 생각할까요? 그것은 일일이 인용할 필요 없는 줄 압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제 말한 그 모든 어리석은 자의 정반대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압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아버지의 훈계를 존중히 여깁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죄를 희롱하지 아니합니다. 다툼을 피하고 평화를 항상 수립하기 위해서 애씁니다. 외식하지 아니하고 마음을 깨끗이 합니다. 주여 주여 입으로만 부르지 아니하고 실지로 행합니다. 등불만 예비할뿐더러 기름까지 준비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복음 진리에 든든히 섭니다. 그리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 세상만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오는 세상을 위해서 준비하면서 삽니다.
여러분, 잠깐 동안 여러분의 생활과 이 미련한 자의 모습, 지혜 있는 자의 길을 비교해서 내 생활을 스스로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미련한 자의 길을 걸었습니까? 혹 우리 가운데 몇 분이라도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미련한 자의 길을 걸었습니까?
그러면 이제 지혜를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욥은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상당히 애썼습니다. 욥기 二十八장 十二절 이하를 제가 읽을 때 이 지혜 탐구에 대한 욥의 말씀을 들어보세요.『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明哲)의 곳은 어디인고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 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치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귀한 수마노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겠고 황금이나 유리라도 비교할 수 없고 정금 장식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산호나 수정으로도 말할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홍보석보다 귀하구나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측량하지 못하리니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려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두루 보시며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되어 그 분량을 정하시며 비를 위하여 명령하시고 우뢰(雨雷)의 번개를 위하여 길을 정하였음이라. 그 때에 지혜를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궁구(窮究)하셨고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상천하지(上天下地)에 지혜를 구할 수 없더니 지혜는 하나님께만 있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라. 잠언 九장 十절에 말씀하였습니다.『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올시다. 우리가 지혜를 얻기를 원합니까?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세요. 그러면 돈도 바로 쓸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시간도 바로 쓸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어요. 권세가 있으면 이것도 바로 쓸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을 거 야요. 지식도 바로 쓸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어요.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세요.
둘째로, 고린도 전서 一장 二十四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二장 三절에는『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느니라.』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지혜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지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의 교훈을 믿고 그대로 행하면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 있는 건축가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지혜입니다.
셋째로는 디모데 후서 三장 十五절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 지혜 있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을 읽으세요. 야고보서 一장 五절에『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지혜가 부족합니까? 하나님께 구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겠습니다. 성경은 지혜와 지식의 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지혜를 생각할 때에 이 세상에 사특(邪慝)한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분간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 속하는 사특한 지혜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三장 十五절에 이러한 지혜는 세상(世上)적이요 정욕(情慾)적이요 마귀(魔鬼)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지혜가 있습니다. 이런 지혜를 가지고 남 속일 장난하다가 흔히 감옥 속에 들어가 앉습니다. 사특한 세상 지혜를 멀리해야 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입니다. 야고보서 三장 十七절에『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矜恤)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위로 난 지혜를 우리는 얻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편지할 때에『그런즉 너희는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며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런고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도록 하라.』세상이 악하니 우리에게 지혜가 꼭 있어야 되겠습니다.
예수 님께서도 제자들로 하여금 온 동리에 보내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으로 지혜는 뱀과 같이 하고 순하기는 비둘기 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된 것은 지혜를 구한 까닭입니다. 이 위로부터 내리는 지혜를 받아야 이 사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끄러움이 없도록 살고 모든 사람에게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一九六二년 七월 二十二일)

Ⅳ-47 최악의 시대에 최선의 생활 (디모데 후서 三장 一-五, 十-十七절)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의 와전한 자라.』(창六·九)

창세기 六장에서 제가 몇 절을 먼저 봉독(奉讀)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貫盈)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六畜)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노아는 의인이요 당세(當世)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敗壞)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 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창세기 六장에 기록된 노아 때의 형편을 그대로 봉독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니『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피괴하였더라.』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에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이런 문구로써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니 그 시대가 얼마나 죄악이 관영하고 악하게 된 시대였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이런 말씀도 기록되었습니다.『오직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이런 말이 삽입되었습니다.『또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의 완전한 자라, 하나님과 동행하였고……』이런 문구도 기록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노아는 이와 같이 죄악이 관영한 최악의 시대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의인의 생활, 최선의 생활을 하였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아침 문제를「최악의 시대에 최선의 생활」이렇게 정하였습니다.
노아는 과연 최악의 시대에서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최선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과 일반 육축을 홍수로 멸하기까지 된 그 시대가 얼마나 악하였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그와 같은 시대에 그와 같은 환경에 살았지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의인의 생활, 온전한 사람의 생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 쉽게 말하면 최선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생활은 노아뿐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十一장에 기록된 모든 신앙의 용사들의 생활을 우리가 생각해 볼 때에 이들은 다 이와 비슷한 생활을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겨의 이분들은 그 시대가 선해서 의로운 생활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 시대는 죄악이 많고 악하지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최선의 생활을 한 사람들이올시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되는 아브라함을 기억할 때도 역시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이 산 시대는 영적으로 아주 캄캄한, 암흑한 시대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간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가장 암흑한 시대에서 광명 한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요셉의 생활을 잠깐 돌이켜 생각해 볼 때에도 역시 그러합니다. 그 환경이 선해서 그런 생활을 한 이는 아닙니다. 종으로 외국에 팔려간 생활, 노예 생활, 감옥의 생활, 이런 모든 것은 말하자면 젊은 사람들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환경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최선의 생활을 한 분이올시다.
우리가 모세의 생활을 돌이켜 생각할 때에도 역시 그렇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로 보아서는 죄악의 시대 가운데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정에서 아들을 낳으면 나일강에 던지는 악한 법률이 공공연히 시행되던 때에 난 사람이올시다. 까닭 없이 압박을 받고 노예 생활을 하며 벽돌을 구우며 말하자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말살정책(抹殺政策)을 쓰던 애굽의 시대에 나고 장성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와 같은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자기 민족을 오히려 이런 때에 구원하고 위대한 사업을 이룩하여서 최악의 시대에서 최선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세만 아닙니다. 모든 선지자들의 생활을 생각할 때에 그랬습니다.
가령 예레미야의 생활을 기억해 보세요. 그는 자기 나라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암흑한 시대, 눈물의 시대에 산 사람이올시다. 망국의 비애를 문자 그대로 맞은 눈물의 사자올시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이 가장 암흑한 시기, 최악의 경로, 그 시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자기 민족을 인도하고 민족을 위로해주는 귀한 최선의 생활을 한 분이었습니다.
에스겔이나 다니엘의 생활을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들은 포로 가운데에 산 분들이었습니다. 자기 백성과 같이 이국에서 포로의 생활을 합니다. 그야말로 그 때는 눈물의 시기였습니다. 거문고를 버드나무 가지에 걸고 우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이든지 다니엘은 그와 같은 죄악시대에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자기 민족을 위로하며, 자기 민족 가운데서 새로운 생명운동(生命運動)을 일으킨 최선의 생활을 한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一세기를 돌아다볼 때에 어떻게 보시는지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가만히 돌이켜 생각하면 제一세기야말로 무서운 세기였습니다. 오직 자기 민족을 사랑해서 요단강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던 의인 세례 요한을 목 배인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언약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시대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던 스데반을 예루살렘 성밖에서 돌로 쳐서 죽인 시대입니다. 예수 님의 제자 가운데 하나 야고보를 목베어 죽인 시대입니다. 로마 정부에는 가장 악한 황제라고 불리우는 네로가 지위에 올라앉았던 시대입니다. 팔레스틴으로 말하면 돈만 아는 빌라도 혹은 데스도 벨릭스가 총독 자리에 앉았던 시대입니다. 말하자면 무서운 시대요. 암흑의 시대요, 최악의 시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때에 여러 사도들이 살았습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살면서 여러 사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여 최선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최악의 시대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최선의 생활을 하는 그것입니다. 최악의 시대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최선의 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 생활이올시다. 오해를 하지 맙시다. 최부(最富)의 생활이란 말이 아닙니다. 돈 많이 모으고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최고의 생활이란 말도 아닙니다. 반드시 높은 지위를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최안(最安)의 생활이란 말도 아닙니다. 반드시 안일(安逸)한 생활을 의미하는 말도 아닙니다. 최선의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 이와 같이 최악의 시대에 살면서도 최선의 생활을 잠깐 생각해 보면 몇 가지 특색을 또한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들은 퇴폐한 세상에 살지마는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정결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 살지마는 죄악에는 물들지 아니하는 정결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들 생활의 공통된 특색이었습니다. 양심이 마비된 사회에 살지마는 이들은 양심에 살았습니다.
동양의 옛 글에도 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서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는 글귀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이런 말이 적합할는지 모르지마는 하여간 세상이 아무리 패괴하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정결한 생활을 한 것이 이들의 생활의 특색이었습니다. 요셉의 생활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종의 생활을 하면서 그 당시에 얼마나 부패한 그 사회 가운데서 얼마나 성결한 생활을 하였습니까? 다니엘의 생활이 그랬고 에스겔의 생활이 다 그러한 것입니다.
둘째로는, 이들의 생활의 공통된 특색은 이들이 죄악이 관영한 사회에 살면서 물론 죄는 미워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백성은 사랑하였습니다. 죄를 책망하였지만 죄에는 참예하지 아니했지마는 그 사람들은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를 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과 봉사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죄악 가운데 모든 사람이 빠졌다고 정죄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 사람들의 영혼과 그 사람들의 생활을 가엾게 여겨서 참아 이기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민망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도와주며 어떻게든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전 정력을 바친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생활을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그가 얼마나 그 당시에 죄악을 책망하였습니까? 왕들의 죄악을 책망했고, 당시 백성들의 죄악을 책망하였고, 제사장들의 죄악을 책망하였고, 일반 백성들의 음란과 사치와 여러 가지 불의와 거짓과 여러 가지 우상 숭배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얼마나 백성들은 사랑해서 그들과 같이 울며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며 그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서 애썼는가는 우리는 생각만 해도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도 사랑과 봉사의 생활을 한 것이 그들의 특색이었습니다. 또한 그뿐만 아닙니다.
셋째로는, 이분들은 죄악의 시대에 산 까닭으로 언제든지 그들은 역경에 서게 되었습니다. 언제든지 거스리는 물결에서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난관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마음이 상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오히려 그 마음속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하고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환경으로서 어려운 일이 많으나 그의 마음 가운데는 즐거움이 있었고 만족이 있었고 그의 심령의 깊은 속에는 언제든지 생명 샘이 솟아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함은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하는 줄 우리가 아는 까닭이라고 그는 감옥에 앉아서 장차 순교 당할 것을 예감하면서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글을 쓸 때에,『항상 즐거워하라. 주안에서 즐거워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즐거워하라. 너희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버리라.』주께서 너희들을 권고하신다고 항상 즐거워하라고 격려를 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당시에 여러 가지로 핍박을 받는 모든 흩어진 성도들에게 편지하기를 베드로 전서 一장에 이런 글귀를 썼습니다.『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이런 글귀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들이 역경 가운데 살므로 말미암아 자연히 여러 가지 난관을 돌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믿음이 눌림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언제든지 그 심령 속에는 자유가 있었고 화평이 있었고 즐거움이 있었고 감사와 만족이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유다 말기에 산 하박국 예언자는 이런 노래를, 그 당시 어려운 가운데서 장차 그의 민족이 멸망을 당할 고비를 내다보면서도 이러한 노래를 지은 것입니다. 하박국 三장 十七절 이하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 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이것이 그들의 내적 심령의 생활이올시다. 겉으로 여러 가지 난관이 있으나 그 마음속에는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했던 것입니다.
넷째는, 이들의 생활을 다른 사람이 보면 그야말로 미미한 생활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지내놓고 보면 이들이야말로 새 역사를 창조하는 창조적 생활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생활을 우리가 돌이켜 생각해 볼 때에 그이가 갈대아 우르와 하란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친척을 버리고 고향을 버리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땅으로 나아갈 때에 고독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일생토록 막 아래서 살며 나그네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四, 五천 년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에 아득한 그 옛날에 아브라함처럼 창조적 생활을 한 이가 어디 또 있습니까? 창조적 생활을 하였습니다. 요셉의 생활이 그렇고, 모세의 생활이 그렇고, 모든 선지자들의 생활이 그렇고, 여러 사도들의 생활이 그러하였습니다.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 이 이곳 저곳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한 일이 세상 사람의 눈에 크게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혹 바울과 바나바가 구브로에 가서 전도를 하고 혹은 그 후에 고린도나 아덴이나 이런 지방에 가서 전도를 하는 것이 당시 세상 사람의 눈에 크게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신문이 있다고 하면 신문에 그 기사가 날 이가 만무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二十세기를 돌이켜 생각해 본다고 하면 제一세기에 있어서 장차 오는 유럽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큰 생명의 운동, 창조적 생활을 한 이가 누구였습니까? 제一세기에 산 황제들이었습니까? 제一세기에 산 정치가들이었습니까? 제一세기에 산 군인들이었습니까? 제一세기에 산 철학가들이었습니까? 누구였습니까? 오직 사도들이었습니다.
가장 위대한 장차 오고 오는 유럽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생명 운동의 창조적 생활은 이들이 하였습니다. 혹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여 보았습니까? 이 二十세기 중엽에 있어서 한국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운동 가운데 장차 우리 한국 민족에게 오고 오는 세대에 가장 영향을 줄 생명 운동은 무엇입니까? 이 앞으로 역사가 판단하려니와 우리가 분명히 믿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이 복음 운동, 생명 운도 이야말로 장차 이 민족의 장래에 가장 큰 영향을 줄 위대한 운동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 보기에는 미미한 운동 같지마는 이 곳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저 곳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젊은 사람 하나 하나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기독교 교육을 주는 것이야말로, 장차 우리 민족이 과연 자유의 민족이 되고 과연 자립하는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이 동남아에 있어서 위대한 민족이 될 수 잇느냐, 그렇지 못한 민족이 될 수밖에 없느냐는 이 운명은, 결국 우리 기독교 운동이 이 땅에서 승리하느냐, 쇠퇴하느냐? 거기에 달린 것이 아닙니까? 이 여러 사도들과 같이 선지자들은 세상 사람 보기에도 미미한 생활을 한 것 같지마는 실상은 새 역사의 창조적 생활을 한 분들입니다.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살기는 살지마는 언제나 순례자로서「한 나그네」라고 말하면서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 살기는 살지마는 시민권은 언제나 하늘에 두고 살았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생활은 이 세상에만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의미를 가진 생활이었습니다. 이들의 생활은 사실 영원한 생활의 준비인 생활을 이 세상에서 한 것입니다.
『인생 七十은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인생은 이 세상에 오래 산대야 七十, 八十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지내놓고 보면 잠깐입니다.『인생의 사후 길 노소 없이 뫼로 가』무덤으로 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 사람이 세상에 살 때에 잠깐 되는 이 세상만 위해서 사느냐, 영원한 의미가 있는 영생을 준비하는 생활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 최악의 시대에서 최선의 생활을 한 사람들, 잠깐 되는 이 세상만 위해서 살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하늘 나라의 의미가 있는 생활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어떠한 시대인가? 물론 그것은 이 앞으로 역사가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껏 생각하면 최악의 시대 가운데 하나일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二十세기에 접어들자마자 전에 없던 세계적 큰 전쟁이 두 번씩 일어나서 말할 수 없는 많은 피가 이 땅을 적시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아주 끝난 것이 아닙니다. 냉전과 열전은 계속해서 도처에 일어나는 중에 있습니다. 무신론적 유물론(無神論的 唯物論)을 그 배경으로 하는 악한 공산당은 점점 창궐(猖獗)하는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전에 없던 원자탄, 수소탄은 산더미처럼 쌓여지게 되어서 오늘날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불안과 공포에 떠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한 편 우리도 역시 최악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가 생각이 됩니다. 오늘 성경 말씀 가운데 여러분이 읽었지마는 t하도 바울은 디모데 후서 三장에 이런 말로 경고를 하였습니다.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그리고 얼마나 죄악이 관영한 시대가 오겠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예고하였습니다. 얼마나 죄악이 관영한 시대가 오겠다고 하는 것을 경고하면서, 우리에게 부탁하는 말씀이『너희들은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너는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고, 이 시대가 이와 같이 최악의 시대가 올 터인 까닭으로 너희들은 마음을 지키고 확실히 믿음 우에 거해 최선의 생활을 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신앙생활이란 별것이 아닙니다. 최악의 시대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최선의 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 생활이올시다. 최선의 생활은 무엇을 의미하지요? 죄악이 관영(貫盈)한 이 세상에 살지라도 물들지 아니하는 성결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죄악을 책망하면서도 사람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여러 가지 역경 가운데서도 기쁨과 감사의 생활을 의미합니다. 남이 보기에는 미미한 생활 같지마는 실상은 새 역사의 창조적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만 위해 살지 아니하고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며 사는,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고 사는 새 생활이올시다.
최악의 시대에 최선의 생활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받아야 하겠습니다.
(一九六二년 七월 二十九일)
<한경직 목사 설교집 제4권 끝>











출처 : 그리스도의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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