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
사도 바울이 오랜 전도 여행을 하다가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해다가 마지막 부탁의 말씀을 하면서 자기 말로 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권면하였습니다. 즉『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하는 말씀으로 권면을 마쳤습니다. 이 말씀이 4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에 이 말씀이 기록되지 않았더라면 모를 뻔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 가운데 잃어버린 말씀이 많이 있는 줄 압니다.
『너희는 주는 사람이 되라.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신 이 말씀은 얼른 납득되지 않습니다. 보통으로는 받는 것을 더 좋아하고 또 복이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받는 때에 우리 마음이 기쁩니다. 또 복이 있는 것 같이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생각하면 주님의 말씀이 사실입니다. 물론 받는 것이 화가 되거나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받을 적이 많습니다. 어린이는 부모가 주는 것으로 자라납니다. 학생 시대도 받는 시대입니다. 할 수 있으면 학교도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가 벌어 공부하면 더 좋습니다. 노인이 되어서는 자식들에게 받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에게서 받을 때에 몇 가지 문제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로, 언제나 우리가 받을 때에 위험이 따름을 알아야 합니다. 경계가 필요합니다. 받는 습관이 생기면 남을 의뢰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부잣집 아들이 장성한 후에 자립생활을 못하는 것은 부모를 의뢰하여 자기의 자영생활(自營生活)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올시다. 우리는 참 부득이한 때에만 받아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 마음이 비루 하여지기 쉽습니다. 주는 사람에게 비루한 마음으로 아첨하고 간사(奸邪)하여지고 우리 인격이 타락하기 쉽습니다.
셋째로, 조심하지 않으면 받지 않을 물건을 받게 됩니다. 관리가 뇌물을 받게 되면 그 인격이 파탄되고 영적 생활이 타락됩니다. 젊은 여자가 생활이 괴롭고 어려울 때에 받지 않을 것을 받음으로 잘못된 길로 나갑니다. 받는 때의 위험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나은 것은
첫째로, 우리가 항상 주려고 힘쓰면 자립자영을 내가 먼저 하여야 남을 줄 수 있으니 분투하고 노력해서 자립생활을 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대로 선한 생활을 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 인격이 고상해집니다. 인격이 저하되는 큰 2대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①나만 위하는 주의, 이기주의, 자기 본위의 생활만 하여 욕심쟁이가 되고 고상한 인격이 못됩니다.②물질주의입니다. 신령한 가치, 의와 사랑, 진리, 대의보다도 물질을 더 사랑하면 인격이 낮아집니다. 내가 희생하고 노력하여 소유욕, 물질 욕을 타파하여 인격을 고상하게 합시다.
셋째로, 내 것을 희생해서 남을 줄 때에 보통 때 알지 못한 최고의 환희를 느낍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실례를 보면 제사장과 레위 사람, 사마리아 사람의 세 사람이 강도 만난 상한 사람에게 취한 태도를 보면, 인사 불성된 사람을 제사장, 레위 사람은 그저 지나갔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잘 도와주었습니다. 그 날 밤에 고요히 잠잘 때에 어떤 사람이 마음에 기쁨을 느꼈겠습니까? 참으로 내 것을 희생해서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최고의 환희를 그 심령 속에 맛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리아 집에 가서 마리아가 비싼 귀한 기름으로 주님의 발에 부을 때 유다는 인색한 마음으로 그 기름을 팔아서 구조하자고 하였지만 마리아밖에는 그 기쁨을 몰랐습니다. 보통으로 항상 주는 생활을 하면 손해가 나니 내가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할 수 없는 것이면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넷째로, 애쓰고 힘써서 주는 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특별하신 축복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활 중에 고상한 인격의 일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재산이 점점 커졌고 조카 롯의 재산도 커졌습니다. 그리고 종들도 각각 점점 늘어서 나중에는 종끼리 서로 다투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브라함이 높은 산에 롯을 데리고 올라가서 산아래 모든 전답(田畓)을 보이며 하는 말이『우리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재미롭지 못한 일이 많으니 해어져서 살면 좋지 않겠느냐. 앞에 보이는 산야 중 마음에 있는 것을 원하는 대로 취하라』하니 롯은 살지고 기름진 소돔과 고모라를 위하게 되고 아브라함은 산골짜기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준 사람이고 롯은 받은 사람입니다. 그 후 누가 복을 받았습니까? 롯이 당한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산골짜기 나쁜 땅을 차지한 아브라함은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일언이 폐지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 잘될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생활원리대로 남에게 주는 생활을 힘써 하면 주님이 축복하십니다. 우리는 운 앞에 돈이라든가 물질을 구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우리가 관리할 수 없는 이 우주가 많은데 이 많은 것을 주님께 구하여 얻어야 하겠습니다. 옛날부터 유명한 사람은 빼앗고 얻은 사람이 아니고 준 사람이올시다. 동양의 공맹(孔孟)은 도덕의 표준을 주고 간 사람이요, 소크라테스는 좋은 철학과 생활의 표준을 주고 간 사람이요, 뉴우톤과 에디슨은 문명의 많은 이기(利器)를 발명해서 주고 간 사람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남을 위해 주고 하는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옛날 성도는 복음 전파에 순교를 당하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주고 간 생활을 하였습니다. 일제시(日帝時)와 해방 후에도 우리 성도 중에서 자기의 생명을 주고 간 이가 많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것은, 우리 교회와 민족이 받는 편이 되지 말고 주는 교회, 주는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현재 우리는 받는 생활을 하지만, 우리가 받을 때에 마음속에 피눈물을 흘리며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 장로교는 초대 교회 때부터 자립자영(自立自營)의 미풍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우리 교회는 받는 경향이 많이 생겼습니다. 줄 수 있는 교회, 줄 수 있는 개인, 줄 수 있는 민족이 되기 위하여 분투노력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곳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1953년 4월 19일·부산 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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