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식을 물위에 던지라. 대개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11:1)
『양식을 물위에 던지라. 대개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어떤 분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애굽에서는 농사를 할 때에 흔히 봄철에 나일강이 범람하면 그 범람한 물위에 곡식을 던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후에 나일강의 물이 다 잦은 다음에 그 곳에서 곡식이 나서 많은 수확을 거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뜻은, 그렇게 물위에 곡식을 던져서 없어지는 것 같지만 던지면 가을에 많은 수확을 거둔다고 하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 뜻도 여기에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보통은 직접으로 우리가 세상에 살아갈 때에 식물을 던지는 때가 있는 것을 기억하면서 해석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줄 때, 좋은 일을 할 때, 친절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 어떤 사람은 그것을 반가이 받고 감사히 여길 줄 알지만 많은 경우에는 물위에 음식물을 던지는 것처럼 그저 무심하고 감사히 여길 줄 모르고 받는 사람도 세상에는 대단히 많이 있는데, 이 말씀은 우리가 받는 사람이 어떤 태도로 받든지 그것을 상관할 것 없이 내가 좋은 일을 기회 있을 적마다 행한다고 하면 여러 날 후에는, 그것도 지금은 깨달을 수 없지만, 장래에 좋은 결과가 있다는 뜻으로 생각합니다.
아라비아 사람 가운데는 이러한 말이 한 속담처럼 되어 있습니다. 바그다드에 어떤 사람이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하나 왕에게 주었습니다. 왕은 이 아들을 데려다가 길렀는데 이 아이가 점점 자라나서 나이 17, 8세쯤 되어서 강에 목욕을 하려 나갔다가 그만 물이 크게 나서 강에 떠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 이 아이가 죽은 줄 알고 이 왕이 널리 광고하기를 이 아이의 죽은 시체를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많은 상금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이 시체를 찾으려다가 찾지 못하였는데 7일만에 어떤 사람이 그 바그다드에서도 멀리 강에서 내려가서 어떤 산골짜기를 지나가다가 강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서 이 소년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은 시체를 가져오지 않고 산 소년을 데리고 오니까 이 왕이 얼마나 기뻐하겠어요? 그러면서『너 7일 동안이나 물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서 배가 고파서 어떻게 지냈느냐? 무엇을 먹고 살아왔느냐?』물어보니까 이 아이가 하는 말이, 이상하게 바위에 가만히 앉았노라니까 매일 아침저녁으로 떡이 한 덩이씩 떠내려 왔더라고 하면서 그 떡을 먹고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떡을 한 덩이 가지고 왔는데 그 떡 뒤에 보니까 떡을 떠내려보낸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더랍니다. 모하메트 벤 하산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하메드라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여 어떤 점잖은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그 사람에게『어찌해서 그렇게 매일 떡을 한 덩이씩 떠내려보냈는가?』하고 물어보니 이 사람 하는 말이『아, 대왕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나라에 옛날부터 떡을 물위에 던지면 여러 날 후에 다시 찾는다고 하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이 사실 맞는지 안 맞는지 알아보려고 하여 금년 정월 1일부터 오늘까지 아침과 저녁에 한 덩이씩 던졌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왕이 너무 기뻐서『너 때문에 우리 귀한 아들이 살았다』고 하여 많은 상금을 주고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벼슬을 주었다고 하는 사실담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제가 처음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떤 기회를 당하든지 좋은 일을 하면 그 당시는 무슨 기쁨이 없지만 여러 날 후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보은(報恩)의 원리를 가르치는 말씀인 줄 압니다. 이 원리는 옛날부터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가르쳤습니다.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 )이라고, 선을 쌓는 집안에 반드시 여경(餘慶)이 있으며 반드시 양보(陽報)가 있고, 숨어서 덕을 쌓는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갚아질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우주 안에는 보응(報應)의 원리가 어디든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람들은 춥다고 하지만 벌써 봄철이 되어서 꽃이 사방에서 피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서 여러분이 꽃만 볼 뿐 아니라 꽃 위에 날아다니는 벌레, 나비 떼를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저 아름답게 꽃과 벌을 함께 보지만, 나비와 벌이 날아다니는 것은 물론 까닭이 있지 않습니까? 다른 것이 아니고 아주 맛있는 꿀이 꽃 깊은 속에 간직되어 있지 않아요? 봉접(蜂蝶)이 꽃을 다라 다니는 것은 그 청밀(淸蜜)을 빨아먹기 위해서 따라다닙니다. 말하자면 꽃은 아름답게 핀 다음에 그저 벌과 나비가 와서는 꿀을 다 빨아먹고 꽃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는 것 같이 얼른 생각될 수 있지요. 그렇지만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가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그런 것도 아니지요. 물론 봉접(蜂蝶)이 의식적으로 꽃에게 무슨 좋은 것을 주는 것은 없지만 자연히 봉접이 날개를 치며 돌아다니는 가운데서 꽃 가운데 있는 화분이 우(右)에서 좌(左)로 가고 좌(左)에서 우(右)로 오고 그렇게 해서 꽃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무심중에 꽃이 청밀(淸蜜)을 봉접에게 주면 봉접은 무심중에 꽃에게 또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이렇게 보은의 원리를 우리가 자연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물과 식물의 모든 관계를 가만히 보면 꼭 그 원리에 의해서 서로 협동해서 동물이 식물을 도와주고 식물은 동물을 도와주어서 이 우주에, 이 자연계에 질서를 유지해 나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 사회에도 우리가 어떤 때에 꼭 얼른 발견할 수 없지만 이 보은의 원리가 반드시 움직이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특별히 옛날부터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이 보은의 원리를 우리 아이들에게 이야기로 늘 잘 가르쳤습니다. 여러분,『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흥부라는 농부가 있는데 자기 집 처마 끝에 제비가 새끼를 치고는 어떻게 되어 그 제비 다리가 상했습니다. 그래서 이 좋은 마음 가진 흥부는 거저 무심중에 그 제비의 다리 부러진 것을 잘 싸매 주어서 낫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제비가 하루는 박씨를 하나 물어왔기에 심었더니 박 나무가 자라나서 큰 박이 여러 개게 열렸는데 바가지를 만들어 쓰려고 그 박을 깨뜨리니까 그 속에서 금덩이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꼭 금덩이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원리를 가르치는 말이란 말입니다.
그 반대로 놀부가 한 일을 여러분 아시지요? 제비의 성한 다리를 일부러 꺾어 주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싸매 주었어요. 박씨를 하나 물어오기는 왔지요. 또 그것을 심으니까 박이 잘 되기는 됐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박을 깨니 아주 더러운 것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인간 사회에는 이 보은의 원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 옛날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말입니다.
서양에는 그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우리 이야기만 좀 못합니다. 그것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개미가 한 번은 나무에 올라가 나뭇잎 위에 뱅뱅 다니는데 바람이 불어서 나뭇잎이 강속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나뭇잎이 떠내려가는데 이 개미가 나뭇잎 위에 앉은 채로 자꾸 떠내려갑니다. 그냥 바다로 가면 먹을 것도 없이 그 속에서 죽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상스럽게 비둘기가 한 마리 날아가다가 그 나뭇잎을 물어다가 뭍에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미가 살았단 말이지요, 그 후에 한 번은 비둘기가 어느 나무에 앉았는데 아마 콩밭을 바라보고 있었겠지요. 마침 포수(砲手)가 비둘기를 잡으려고 조준(照準)을 세워서 방금 방아쇠를 당기는데 무엇이 발꿈치를 따끔 문단 말입니다. 그래서 총알이 빗나갔습니다. 그래 비둘기는 날아갔는데 무엇이 물었나 하고 내려다보니 개미 한 마리가 발꿈치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 개미는 아마 비둘기가 구원해 준 개미인 모양입니다.
자연계뿐만 아니고, 우리 인간 사회 뿐만 아니고, 미물과 동물뿐만 아니고, 인간의 역사에도 보은의 원리가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하나님을 공경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복을 수천 대 자손에까지 축복하여 주시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는 자에게는 벌을 주시고 화(禍)가 삼사 대까지 이른다는 말씀은, 이 원리가 인간 역사에까지 움직인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말씀이올시다.
제가 잘 아는 어떤 원로목사님이 자기의 경험담을 말씀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옛날에 아주 유명한 명당 자리를 잘 잡는 풍수였다 합니다. 그래서 함경도니 경기도니 전라도니 할 것 없이 다니면서 일생 동안 풍수 놀음을 해서 잘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자기 외아들을 불러놓고 하는 말이『이 다음에 내가 죽은 후에는 저 선반 위에 있는 풍수에 관한 책들을 불살라 없애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아들이 이상해서『아버지, 그 책을 왜 없애겠습니까?』물으니 아버지 말씀이『내가 그 책을 가지고 아직까지 밥을 벌어먹었다. 그렇지만 내가 너희한테야 사실을 얘기해야 하지 않겠니? 그 무슨 뫼 자리를 잘 잡아서 자손이 다음에 복을 받는 것으로 아예 너는 믿지 말아라. 아예 쓸데없는 책이니 저것을 내다가 불살라 버려라』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다시『그럼 아버지, 어떻게 하여야 우리 자손들이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으니『그저 너는 좋은 일을 많이 하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꽃씨를 내 손에 쥐고 다니면서 내 가는 길옆에 꽃씨를 뿌리면 이 다음 여러 날 후에 내가 지나간 길옆에 그 꽃씨가 자라서 아름다운 꽃이 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고 냉랭하다고 원망하지 말고 이런 세상일수록 내가 먼저 친절하게 다른 사람에게 하고, 내가 먼저 선행을 하고, 내가 먼저 이런 사회일수록 살 만한 사회를 만득이 위해서 힘쓰자는 말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얘, 너는 누구를 대하든지 친절히 하고 겸손히 하고 신사적 행동을 언제나 잊지 말아라. 만나는 사람이 신사가 되어서 그 사람에게 신사적 행동을 취하란 말이 아니야. 내가 신사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너는 신사 노릇을 해야 돼.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신사적 행동을 하고 좋은 일을 하여라』이렇게 엄명한 말이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이 다음에 어떤 큰 일을 또는 어떤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좋은 일을 할 만한 기회가 있으면 이것을 연기하지 맙시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좋은 일이면 내가 그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곧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제가 옛날 신의주(新義州)에 있을 때 보린원(保隣院)을 위해서 여러 분을 만나 본 일이 있습니다. 여러 분을 찾아뵐 때에 어떤 분은 첫 마디로 대답하고 기부하신 이도 있지만, 어떤 분은 자꾸 연기만 합니다. 으레 할 만한 돈도 있고 기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아, 그것 참 좋은 일입니다. 내가 할 마음도 있는데 그렇지만 아직도 힘이 조금 부족하니 이 다음에 많이 모아 가지고 그 때에 목사님을 잘 도와드리겠으니 종 참아주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참을 수 있지만 그 후에는 다시 그런 기회가 별로 오지 않습니다. 내가 사는 현재가 완전히 내게 속하지, 장래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좋은 일이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곧 시작할 것이지, 이 다음으로 절대로 미루지 말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선한 일에 대해서만 말했습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는 선한 일 가운데 제일 선한 일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올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어떤 때에는 물위에 떡을 뿌리는 것 같아서 아무 반응이 없고 무심하고 감사하는 마음 없고 잘 듣지 않는 그런 사람을 많이 만나지만, 그러나 우리가 물위에 심령의 양식을 그냥 계속해서 뿌리면 여러 날 후에 반드시 거둘 때가 있는 것입니다.
지난 一월호『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이런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폴란드의 비행사 로맨 털 스키라는 사람이 제2차 대전 전에 불란서 비행학교에 있었는데 나치스 정권이 갑자기 강해지면서 오스트라리아를 합병하게 되었습니다. 조국 폴란드도 위험하게 되었으니 불란서에 그대로 있을 것이 아니라 조국에 돌아가서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애국심을 가지고 자기가 소유하는 비행기를 타고 폴란드로 가는 도중에 비행기 기관에 고장이 생겨서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에 잠깐 착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행기 수선을 끝마치고 유숙하는 호텔에서 비행장으로 나가려고 호텔 문을 나서는데 어떤 사람이 뒤에서 털 스키를 밀었습니다. 그는 넘어졌습니다. 그가 성이 나서 보니 민 사람도 돌아다보는데 공포에 가득 찬 얼굴이었습니다. 갑자기 털 스키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저 사람이 필시 유대인인데 나치스의 게스타포(비밀경찰)에게 쫓겨다니는 사람일 것이다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왜 미는가 물으니 말은 하지 않고 손으로 뒤를 가리키는데 누가 쫓아온다는 표시였습니다. 자기의 생각이 틀리지 않은 것을 알고 즉시 그 사람을 자기 있는 방에 데리고 들어가서 물어보니 자기의 추측과 같았습니다. 그 사람은 유대인으로 나치스 게스타포의 유대인 추방에 쫓기어서 다니다 이 털 스키가 호텔에서 나갈 때에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침대 밑에 모포에 말아서 숨겨 놓았습니다. 얼마 아니 되어 나치스 경찰이 그 방에 들어가서 조사하게 되었으나 무사하게 되었습니다. 털 스키는 이 사람에게 자기를 폴란드로 가는데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보니 제발 그렇게 하여 달라고 애원하여 같이 비행장에 나갔습니다. 경찰의 조사와 감시가 심하였고 그 비행기에는 털 스키 혼자 탑승하게 되었는 고로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전송하는 체하다가 출발 직전에 갑자기 이 유대인을 태우고 떠났습니다. 비행기는 폴란드를 향하여 가고 있었으나 문제가 또 생겼습니다. 가솔린이 떨어져서 부득이하여 국경 가까이 에서 불시착(不時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유대인은 그 곳에서 폴란드로 가게하고 가솔린을 보충해서 바르샤와에 도착하니 경찰이 와서 조사를 하면서『그거 이상하다 반드시 두 사람이 탔겠는데』하면서 그저 가 벼렸습니다.
그 유대인은 무사히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 후 나치스 독일은 마침내 폴란드로 물밀 듯 쳐들어가서 폴란드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털 스키도 불란서로 망명하여 불란서 비행대에서 독일 군과 싸웠으나 불란서도 함락되어 영국으로 가서 폴란드 비행단장으로 영국 공군과 같이 독일 군과 싸우게 되어 참 잘 싸웠습니다. 항상 선전(善戰)하여 아주 유명하여져서 매일 신문에도 인기 비행사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루는 싸우는 중에 잘 싸웠지만 많은 적에게 포위를 당하여 부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파라슈트로 겨우 생명만은 보존되었으나 뇌(腦)가 상하였습니다.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어 여러 날 치료를 받다가 하루는 누운 채 눈을 뜨게 되어 치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 의사도 이 털 스키를 마주 보다가 하는 말이『아, 당신 나를 모르겠소?』하며 물어보았습니다. 조금 생각하다가『낮이 익은데요, 언제 비행기 같이 타지 않았소?』하고 대답하였습니다.『내가 오스트리아 수도에서 당신에게 구원받은 사람이요』라고 하면서 그 후의 경과를 말하는데, 이 사람도 무사히 폴란드에 갔으나 나치스가 폴란드에 침략하여 불란서로 갔다가 또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이 사람은 의사로서 특히 뇌수술을 잘하는 유명한 사람인데 스코틀랜드 육군 병원에서 근무하는 중 신문에서 이 털 스키의 전공(戰功)을 늘 보며 마음으로 축복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전투 중에 털 스키의 머리가 부상을 당하여 생명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병원에서 나올 수 없는 신세였으나 이 때야말로 자기가 은혜를 갚을 때라고 생각하고 특별히 자원해서 털 스키가 입원한 병원에 와서 친히 뇌수술을 하여 치료했던 것입니다.
『양식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우리가 어떤 때 낙망할 만하고 어려운 경우를 당합니다. 그런 때에라도 주님의 마을을 가지고 씨를 뿌리면 하나님이 적당한 때에 거두실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성경의 말씀과 같이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다 거둘 때가 있습니다. 부지런히 선한 일을 하고 남을 도와주되 교회의 믿는 자들에게 먼저 할 것이올시다. (1953년 월일미상·부산 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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