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근신하라, 깨어라 (베드로 전서 5:1-11절)

새벽지기1 2016. 12. 28. 06:50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9)

우리 믿는 사람이 어느 때에 근신하지 아니하리요 마는, 어느 때에 깨어 있지 아니하리요 마는, 오늘과 같이 모든 혼란한 시대에서는 더욱 그러해야 될 것을 새삼스러이 느끼게 됩니다.
오늘날처럼 우리 사회와 교계가 사상적으로나 여러 가지 생활 부문에 있어서 혼란한 때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악한 마귀는 이러한 기회를 타서 믿는 사람들의 영혼을 노립니다. 문자 그대로 우는 사자와 같이 두로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는 것입니다. 오늘 이 혼란한 시기에 있어서 특별히 삼가야 할 것 몇 가지와 깨어 있어서 조심할 것 몇 가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씁니다. 시대영합주의(時代迎合主義)를 경계하여야 되겠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세계적 사조, 세계적 풍습을 무조건 맞아들여서 그대로 하자고 하는 생각과 생활의 태도입니다. 이것은 얼른 듣기에는 그릴 듯하지만, 비판이 없는 맹목적 추종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은 우리가 두말할 것 없는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여 나갈 때에 단순히 지금은 세계의 사상이 그러하니, 세계 사람들이 생활 풍습이 그러하니 무조건 그것을 따르자는 생각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만일 그런 사람이 주후 2세기나 3세기에 살았다고 한다면 오늘날 교회 역사상에 큰 이단(異端)으로 나타나는 노스틱주의를 따랐을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주후 4세기초에 살았다고 한다면 아리안 주의 기독관(基督觀)을 따랐을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주후 6세기나 7세기에 살았다면 성화(聖畵)를 숭배하고 성상(聖像)을 숭배하는 사상이 유행되는 그 때이니까 화상숭배자(畵像崇拜者)가 되었을 것입니다.
세기 세기를 다 말할 수 없지만, 만일 그런 사람이 18세기에 살았다고 한다면 합리주의 철학을 그대로 받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19세기에 살았다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흔히 늘 듣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 순수한 신 신학에 살았을 것입니다. 20세기초에 와서야 우리가 흔히 듣는 대로 신 정통 사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조란 뜻은 생각의 물결이라는 뜻입니다.


생각의 물결의 특색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좌편에 가지 않으면 우편이 가는 것이요, 또 하나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신학의 사조라는 것도 사조 자체를 보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좌에 있지 아니하면 우에 있고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다를 바로 알려고 하면 바다의 흔들리는 물결만 보아서는 알지를 못합니다. 바다의 흔들리는 부분은 불과 수십 척에 불과하고 깊이 50척 내지 1백 척을 들어가면 수면은 아무리 바람에 흔들리지만 바다의 속은 흔들리지 아니하고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작은 배는 물결 위에 있는 까닭으로 작은 불결에도 흔들립니다. 50척, 1백 척을 내려갈 수 있는 큰배는 아무리 큰 풍랑이 일어나도 부딪칠 뿐이지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이런 사람의 신앙은 작은 배와 같아서 조그만 시대 사조에도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기 원하는 신앙은 수면의 조그만 풍파에 흔들리는 거루와 같은 신앙이 아니고, 깊은 진리의 바다 속에 깊이 뿌리를 받아서 아무리 풍조(風潮)가 와도 튼튼히 설 수 있는 이런 신앙을 우리는 원합니다.


이와 같은 신앙은 성경에 깊이 뿌리를 받은 신앙이요, 이와 같은 신학 사상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신학의 역사적 주류에(지류나 분류에 틀을 받지 아니하고),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깊은 신학의 주류에 근거를 둔 신학 사상이올시다. 그런고로 에베소 편지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휼(詭譎)과 간사함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를 따라 요동하며 불려 가는 것 같이 하지 아니하게 함이라.』우리 신앙이 모든 교훈의 풍조를 따라 요동하며 불려가지 아니하게 해야겠다고 이와 같이 권면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학 사상에서만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 신자의 생활 부문에 있어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오늘날처럼 세계의 여러 가지 민족, 여러 가지 사람들이 한국에 일시에 들어와서 우리 좁은 땅에서 놀라리만큼 모든 시계 사람을 만나볼 수 있고 그 사람들이 가진 풍속을 이 땅에서 볼 수 있게 되어서 이와 같은 풍습을 무조건으로 맹목적으로 따른 사람이 없지 않는 고로 오늘날의 우리의 생활 상태를 보면 괴이한 것도 많고 혼란한 것도 많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떤 군목에게서 들으니까 그 군목이 초청을 받아서 어떤 군인 회관에 들어가서 어떤 장교의 혼례식을 주례해 주었다 합니다. 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혼례식을 잘 주례해 주었는데 혼례식이 끝나자마자 음악 하던 사람이 조금 전에 좋은 성가를 하더니 갑자기 댄스 음악, 재즈 음악을 하며 방금 결혼한 신랑 신부를 비롯하여 들러리까지 모두 안고 돌아가며 춤을 추더라고 합니다. 신부가 신랑하고 댄스를 하더니 그 다음에는 다른 남자와 댄스를 합니다. 신앙의 아버지는 장로인데 그 광경을 앞에서 가만히 보고 있는데 처음은 얼굴이 붉게 되더니 그 다음에는 얼굴이 새파래지더랍니다. 그러더니 마지막에는 자기 며느리 될 사람이 다른 남자와 댄스를 하는 것을 보고는 벌떡 일어나서』아무리 신식이라도 그것은 못 보겠다』하며 나가더라고 합니다.


혼란한 세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댄스 하는 풍속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 국에서 온 풍속이니까 아마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의 풍속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이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 기독교적 풍속과 아무상관 없는 풍속입니다. 그 풍속은 옛날 유럽 사람들이 하나님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를 때에 저 북부 유럽 산림(山林)속에서 소가죽을 들러 쓰고 소뿔을 그냥 쓰고 야만으로 살 때에 북을 치면서 불을 피우고 남녀가 안고서 돌아가면서 춤추던 그 만풍(蠻風)이 지금까지 그대로 매려오는 것입니다. 분간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기독교인의 생활의 규범(規範)은 언제든지 이 음란하고 타락하고 사람의 생활을 더럽히게 하는 길로 나가는 데서 완전히 갈라져서 성별(聖別)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믿는 사람의 생활은 첫째는 성경, 둘째는 사랑, 셋째는 절제의 생활이올시다. 사람의 생활을 타락으로 인도하는 모든 풍속과 습관은 우리 믿는 사람에게 합당치 않습니다. 맹목적으로 서양인이 하니 우리도 하자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5천년 동안 동양의 도덕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이올시다. 동양의 근본 도덕은 우리 기독교 도덕과 별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동양의 아름다운 윤리를 그냥 지키고 기독교의 도덕을 지킬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함부로 남이 한다고 만풍(蠻風)을 그냥 따라가지 맙시다. 신학 사상에서나 생활에 있어서나 소위 이 시대의 영합주의(迎合主義)를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는, 이것도 기억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씁니다. 현대적 바리새주의를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리새교인은 예수님 당시에 있어서 율법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지키기를 애쓴 사람입니다. 지금 말로 말하면 성경을 잘 믿는, 전통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님께서 그 사람들을 단단히 책망한 마태복음 23장을 가만히 읽어보면 그 사람들의 정통 신앙이란 것이 얼마나 결함이 있는가를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 님께서 책망하실 때『너희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율법의 더 중요한 것 즉 의와 인과 믿음은 저버렸구나, 하루살이는 걸러 먹으면서 약대는 통으로 삼키는구나』하고 말씀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경을 다 믿는다고 하고 그대로 다 한다고 하지만 성경의 지엽(枝葉)이 되는 작은 약초(藥草)같은 십일조는 빠지지 않고 잘 기키면서 그보다 더 중요한 공의와 자비와 믿음은 잊어버렸어요. 하루살이와 같은 조그만 죄는 짓지 아니하려고 하지만 큰 약대와 같은 죄는 그냥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이 사람들이 회칠한 무덤과 같아서 소반을 깨끗이 씻고 손과 발은 깨끗이 씻지만, 마음은 깨끗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마음속에는 교만과 음란과 시기와 악독(惡毒)이 가득합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잘못 믿으면 이와 같은 현대적 바리새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늘날 우기라 머리로써 성경 그대로 다 믿을 수 있습니다. 정통 신앙 그대로, 칼빈주의 그대로 다 승인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머리로만 승인하고 머리로만 믿는 것, 그것은 부족합니다. 그 심정이 신앙으로 말미암아 변치 않고 교만 그냥 있고 시기 그냥 있고 음란 그냥 있고 악독 그냥 있어서 가는 곳마다 독선주의(獨善主義)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교회 분규를 일으키고 예배당 쟁분(爭紛)을 일삼으며 여러 가지 어지러운 일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도처에 잇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현대의 바리새주의를 경계해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지력적(智力的)으로 승인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 심정으로 믿고 내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서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더 중요한 것을 우리가 더 중요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어제든지 자비와 신앙이 중요한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해서 어디로 가든지 진실과 화평(和平)을 찾아서 교회의 덕을 세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이렇게 우리가 성경을 읽는 가운데도 성경을 곡해해서 잘못 해석해서 여러 가지 그릇된 사상에 빠지는 수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이제 특별히 성경 곡해에 기인한 이단 종파에 대하여 잠깐 이 시간에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이 당파의 이름은 여러 가지인데 우리가 여러 가지를 다 알아야 실수가 없겠습니다. 이 당파는 본래 미국에서 된 까닭으로 본래 이름은 다 영어로 되어 있는데 처음에 일어날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Watch Tower Tract Society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우리 한국말로 흔히「등대사」라고 번역되고,「등대사」라고 하는 이름 밑에서 여러 가지 종교 잡지와 소책자와 전도지를 발행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 당파의 이름을 뭐라고 부르는고 하니 International Bible Student Association이란 발로 부릅니다.「국제 성경 연구회」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름으로도 혹 한국에 소개된 줄 압니다. 그렇지만 특별히 1922년 이후에는 무슨 말로 흔히 불리 우는가 하면 영어로 Jehovah's Witness,「여호와의 간증자(干證者)」라, 이런 이름으로 많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합소를 왕국이라 하기도 합니다.
자, 이와 같은「등대사」니「국제 성경 연구회」니 「여호와의 간증자」니 하는 이런 사람들이 미국의 도처에 돌아다니면 전도지 같은 것도 나누어주고 요새 보면 한국에도 이런 사람들이 특별히 믿는 집집마다 다니면서 이것이 옳다고 선전을 하는 모양입니다. 이 종파의 기원은 1872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차알스 럿셀(Charles Russel)이라 하는 사람이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종파의 이름을 Russelites라고도 부릅니다. 이 럿셀이란 사람은 원래 공부도 별로 하지 못하고 물론 신학은 하지 아니한 사람인데 자기가 특별한 독자적 견지에서 성경을 해석해서 가르친다 하니 많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나 하고, 좀 새롭게 성경을 해석하는데 들어보자고 하여 여러 사람이 모이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생활에 대해서 길게 말씀 드릴 필요는 없어도, 한동안은 많은 사람이 따라다니기도 했지만 그 후에 많은 사람이 물러갔습니다. 그것은 가정 가운데서 부인과 싸움이 나고 이 부인이 남편의 생활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해서 이혼 소송을 하고, 이것이 법정의 큰 문제가 되며 이런 문제로 말미암아 이 당파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루더포오드(Rutherford)라는 사람이 계대(繼代)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변호사도 좀 하고 관사도 좀 했는데 그래서 흔히「판사 루더포오드」란 말로 알려졌습니다. 제가 약 20년 전에 미국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에 그의 강의를 듣고 그 얼굴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소책자를 많이 쓰고 전도를 하였습니다. 1942년에 죽은 다음에는 그 당파의 부회장으로 있던 노르(N. H. Knort)란 사람이 계대를 해서 이 당파를 조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여호와의 간증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제일 중요한 종지(宗旨)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사람들이 제일 강조하는 것은 영어로 말하면 데오크라시(Theocracy) 곧 신정(神政)이라고 하는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신다고 하는 그 사상을 제일 강조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하나님께서 모두 다스리시고 그리고 다음은 사단이 배반해서 사단이 다스리게 되었고, 그런 까닭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그 예수 님께서 첫 번 오셔서는 일을 다 이루지 못하고 이제 다시 오셨다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예수의 재림이 이미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 님께서 1914년에 이 세상에 오셔서 왕이 되었고 그 다음 1918년에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말 인지요?
1922년부터는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간 이 그리스도께서 모두 충성된 사람을 보내어 여호와의 간증자가 되어서 이제는 그리스도가 통치하니 이 아래로 다 들어와야 산다고 허무한 선전을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 선전하는 사람은 심지어 무슨 말까지 하는고 하니『아! 이제 그리스도께서 다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데 금년 내로 38선이 모두 없어지고 통일될 터이니 아무 염려 말고 그저 우리와 함께 성경 연구만 잘하면 복을 받을 터이니 오너라.』이렇게 선전하면서 민심을 현혹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종지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먼저 그 신관이 기독교와 다릅니다. 우리 기독교는 성경의 분명한 교훈에 의지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를 부인합니다. 소위 일위일신론을 주장합니다. 일찍이 소시너스라는 사람이 18세기에 Unitarianism을 주장하여 삼위일체를 부인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삼위일체를 부인하므로 자연히 그리스도의 신성도 부인합니다. 이 사람들의 기독 관은 실로 가소롭습니다.
주후 4세기 니케야 회의 때 큰 문제로 되었던 것이 아리안 사상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본성이 하나님의 본성과 같으냐, 같지 않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리안 사상이요, 같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교훈인데 아리안 이단이 새로운 이름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 당파는 성신의 인격성을 부인합니다. 성경에 보면 성신은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서 성부, 성자와 같이 인격성을 분명히 대명사로 표시했습니다. 이 사람의 말은, 성신은 한 바람과 같아서 한 신 뿐이고 인격은 없다고 인격성을 부인합니다. 여기 다시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부인합니다. 이미 말씀한 바와 같이 말세론(末世論)을 왜곡해서 민심을 현혹시킵니다.


그 뿐 아니라, 이들은 현대의 모든 교회를 다 부인합니다. 교회라는 것은 다 사단의 집이고 다 쓸데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무교회주의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교회라고 아니합니다. 그들은 모여서 성경 연구를 하지 교회는 없다 합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 자체를 부인합니다. 또 이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가서 국가도 부인합니다. 말하자면 무정부주의자입니다. 투표도 하지 않습니다. 납세도 잘 하지 않습니다. 전쟁에도 안 나간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은 미국 같은 사회에서도 많이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상을 가르치면서도 그들의 주장은 우리는 꼭 성경에 의거해서 가르친다 하면서 그럴 듯한 성경만 꼭 뽑아서 여기에 대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믿는 사람들에게 와서 유혹합니다.
이「여호와의 간증자」에 대해서 연구가 깊은 프린스톤 신학교의 어떤 교수는「이 사람들은 성경을 억지로 종합해 놓더니 요새 와서는 성경을 억지로 번역했다」고 말했습니다. 요새 그 사람들이 새로 성경을 번역했는데 많은 학자들이 번역한 표준 성경과 완전히 다르게 자기 생각과 비하게 성경을 새로 번역했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 가지 알 것은 성경은 대단히 큰 책입니다. 이 가운데는 역사도 있고 시, 문학도 있고 여러 가지 형태의 문자가 포함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한 자 한 자만 빼면 별의별 말이 다 있습니다. 또 그것을 억지로 모아만 놓으면 무슨 이야기나 성경만 가지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성경 구절을 모아놓고 읽으라고 했습니다.
마태 27장 5절『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어라.』
누가 10장 37절『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요한 13장 27절『네 할 일을 속히 하라』
성경 구절을 내용에서 뽑아놓고 모아서 무엇이 옳다고 하려 할 것이면 무슨 말이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곡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바로 해석하려고 하면 성경의 배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씌어진 그 때의 역사, 그 때의 풍속, 그 때의 정치, 그 때의 사상을 모두 충분히 알아 가지고 그 다음에 성경을 전체적으로 공부하여야 됩니다. 그런 까닭으로 신학교에서 4년을 공부한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신학의 근본적 수양이 없는 사람이 성경 구절을 함부로 뽑아서 무엇을 만들려고 하면 심히 위험합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 성경을 바로 연구하고 바로 깨달아야 하겠는데 오늘날 한국에서는 그와 같은 경향이 점점 적어집니다. 본래 한국 교회는 사경(査經)하는 풍속이 있어서 사경회라 하면 문자 그대로 성경을 사술 하고 공부하는 회인데 오늘날 보면 성경을 공부하는 회가 점점 변해서 일시적 감정을 흥분시키는 부흥회밖에는 되지 아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여러 교회에서 하는 것을 보면 성경을 잘 가르칠 목사를 청하지 않고 병 잘 고친다는 권사, 성경이 조직적인 연구가 없는 장로를 청해서 사경회를 하는 교회가 있음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할 것은, 물론 잘 가르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잘못 가르칠 염려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런 집회에 한 달 계속해서 다니며 한 달이나 잠도 안 잔다고 하더니 정신 이상이 생겼다는 부인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산에 가서 따로 모여서 기도한다고 하면서 밤새도록 소리치며 춤을 춘다는 말도 들립니다.


시대 영합주의를 경계하여야 됩니다. 현대적 바리새주의를 경계해야 됩니다. 성경 곡해 자를 경계하여 특별히「여호와의 간증자」라고 하는, 기독교의 중심 진리를 부인하는 이단 사상을 경계해야 되겠습니다. 함부로 영파(靈派)라고 부르며 함부로 떠드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됩니다.『깨어라, 근신하라, 너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으려 다니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서서 이 원수를 대적하라.』이와 같이 가르쳤습니다.
(1953년 5월 16일·부산 영락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