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히3:12)
강(江)이 흐르는 것을 가만히 볼진대 일망무제의 평야를 잔잔히 흐를 때도 있고, 혹은 여울과 급각도(急角度)의 굴곡을 지나게 되어 약간의 파란을 일게 되는 때도 있고, 갑자기 폭포가 되어 수십 척 수백 척 되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 옥쇄(玉碎)하는 장관도 볼 수 있습니다. 전자를 평상시라 하면 후자는 위기라 할 수 있으니, 인간 역사를 또한 이에 비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민족의 역사나 어떤 개인의 생애를 보나, 평온한 시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위기란 흔히 무엇이 변할 때 혹은 변할 수밖에 없는 때를 이름이니, 변할 때 바로 변하면 좋으려니와 잘못 변하면 화를 미치게 되는 것이므로 왈 위기라 합니다. 위기야말로 천 년 같은 하루입니다. 하루의 생활이 천 년의 운명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민족이나를 막론하고 위대한 역사를 이루려면 이러한 위기를 잘 돌파하여야 합니다. 천성을 향하여 달음질하는 우리 기독도의 생활에도 이따금 이런 위기가 오는 수 있으니 이럴 때에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 떨어질까 염려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 생활에서의 위기는 두 가지 방면으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 자신이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변함에 따라 오는 것이 있고, 또 환경이 변함으로 오는 것이 있습니다. 혹 특수한 사람은 별로 변하지 않는 환경에서 나고 살고 죽으나 흔히는 다 일변하는 환경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자를 가리켜 선천적(先天的), 생래적(生來的), 주관적(主觀的)위기라고 한다면, 후자를 가리켜 후천적(後天的), 객관적(客觀的)위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자 즉 인간 자신이 변함으로써 생기는 위기 중에 제일 심한 위기는 아동 신앙에서 성년 신앙으로 넘어서는 연령으로서 말하자면 15세로 25세까지의 시기라 하겠습니다. 이 때로 말하면 키가 크고 성대가 변하게 되고 수염이 나게 되어 신체가 완전한 성인으로 변하며 또 본능적 욕망이 변하여지며 좀 더 나아가 심리가 변하여지면 사상이 변하여져서 그의 인생관과 우주관이 급격히 달라지게 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고린도 전서 13장 11절에 말하기를『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아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하였습니다.
과연 이 때로 말하면 독실하던 신앙도 아주 변하게 될 수 있고 혹은 아주 잃기도 쉽습니다. 유년 주일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교회에 출석하는 열이 점점 식어지게 되고 중학교 四, 五학년쯤 되면 제법 이론을 캐면서 배교(背敎)하고 마는 이도 있게 됩니다.
종교심리학자 프래트 씨는 이 중간기의 특색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폭풍우 시대라 하여 모든 것이 정함이 없고 극도의 환희와 비애를 거듭하는 생활 속에 있으며 장년들은 상상도 못할 큰 이상을 그려보기도 하며 혹은 실패하여 환멸의 비애를 느끼기도 하며 넘치는 감격에 어찌할 줄 모르며 정욕의 시련에 들어가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천사와 악마를 한 몸에 지니고 씨름하는 시기이며
둘째로, 반항 시대라 하여 유년기에는 부모와 교사의 교훈과 명령에 맹종하여 왔지만 장성함에 따라 이지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동시에 개성을 선언하여 모든 권위 즉 부모에 대하여, 학교에 대하여, 국가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반항의 기치를 들게 되는 시기이며
셋째로, 의심 시대 혹은 번민(煩悶) 시대라 하여 어릴 때에 가졌던 인생관, 우주관이 불완전한 것을 깨들으나 새로운 견해를 가지기까지 모든 것을 의심하며 회의주의로 변하는 경향이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제임스씨가 말한 바와 같이, 육신이 자란 후에는 영이 자라느라고 번민이 일어나서 성경도 의심하며 부모의 신앙까지도 의심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 자체에, 특히 청년기에 위기가 쉽게 닥쳐오는데 이것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 것입니까? 청년 각자는 먼저 위기에 처하여 있음을 인식하여 박빙(薄氷)을 밟는 것 같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이 위기에 대한 충분한 마음의 준비를 하여야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고상한 이상과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헌신할 것입니다. 고상한 이상이라면 인생의 최고 가치인 완전한 인격일 것인 바,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요 또한 이렇게 찾은 분명한 것은 의심치 말고 확실히 붙잡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를 당한 청년을 자제로 가지고 있는 부형들은 이러한 청년들을 책망만 하지 말고 청년기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청년을 좀 더 신임할 것이요, 권위로 억압하려는 것보다는 이지적으로 모든 것을 해명하게 해야 하며 무한한 사랑과 인내로 청년들의 전도를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환경이 변함으로써 오는 위기인데 신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브라함도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공경하였으나 애굽에 가서는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환경의 변천은 위기를 초래하기 쉽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는 신앙의 전선(前線)이 바뀌는 까닭입니다. 나폴레옹이 육전(陸戰)에는 승리했으나 해전에 실패한 것 같이, 사람의 환경에 따라 닥치는 시험도 다른 것입니다.
경제적 환경이 변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위기를 만나기 쉽습니다. 부(富)할 때 게으름과 교만과 정욕과 방탕(放蕩)이 마침내 일신 일가를 망치며 국가 사회에 덕이 못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과 같이, 이에 못지 않게 부하다가 갑자기 가난해질 때에 여러 가지 어려운 시험이 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차해지면 생활에 대한 불평 불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근심과 염려로 지내게 되며 사소한 일에도 열등감을 가지게 되어 남이 나를 업신여기지 않는가 생각하는 등 참으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가련한 정경을 이루는 수가 많습니다.
가난하던 이가 갑자기 부하여져도 역시 그에 따르는 시험이 있어 고귀한 인생을 그르치는 수가 많습니다. 비천함에 처할 줄도 알고 풍비 함에 처할 줄도 아는(빌 4:12) 신앙이 되어야만 비로소 세련된 신앙이라 할 것입니다.
사회적 환경이 바뀔 때에도 역시 큰 시험을 만나게 됩니다. 농촌에서 지내던 청년이 갑자기 도회지에 오게 되면 누가 나를 알아주는 이도 없고, 고향에서 받던 많은 감시의 눈도 없어져 유혹의 마수에 걸리기 쉬워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좋은 신앙의 청년이 군인으로 가서 신앙이 타락됨은 이런 까닭입니다.
정치적 환경이 바뀔 때에 또한 위기를 당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권리 없던 이가 사회제도의 변천으로 인하여 권리를 갖게 되면 새로운 시험에 봉착하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근일 계속하여 신문지상에 보도되는 모모 국장, 모모 과장의 독직 사건, 사기 사언 등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혹 여기까지는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명예에 급급하며 교만하여지며 뇌물을 받고서야 일을 해 주거나 정치가의 호색은 남이 다 아는 일이라 하여 술에 취하며 음란에 빠지는 등 새로운 시험을 받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해방 이후 정치적 환경이 변함에 따라 사회 질서가 극도로 문란해진 감이 있는데 그 한 가지 이유는 일제 시대에 피압박 민족으로 있을 때에는 강제에 못 이겨 복종하고 자발적으로 해 보지 못하다가 갑자기 자유민이 되고 보니 새로운 시험을 만나게 되어 법을 존중하지 아니하며 경찰을 무시하며 세금을 납부하지 아니하며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불이행하는 등 진정한 자유 국민으로서의 도덕과 자제심(自制心)과 자발적 봉사와 근면이 부족한 까닭입니다. 이러한 환경의 대변동기는 또한 신앙의 대 시련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이 서울과 같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복잡한 곳은 신앙의 심판정(審判廷)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자신의 변화로 일으킨 위기, 환경의 변화로 일으킨 위기, 이 모든 것을 돌파하고 극복하는 신앙이야말로 참된 신앙입니다.
옛날 요셉은 부모의 슬하에 있을 때에도,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 있을 때에도, 누명을 쓰고 옥중에 갇혀 있을 때에도, 바로의 꿈을 해몽하여 대신(大臣)으로 있을 때에도, 환경의 여하를 불문에 붙이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참된 신앙을 가지고 한결같이 매진하였던 것입니다. 이 비결이 어디 있었습니까?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 받았을 때에『내가 어찌 감히 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得罪)하리요』하고 죄를 멀리 하고 하나님과 동행함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사도 바울도 빌립보 4장 13절에『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할 것이 없다』고 말하여 그 굳은 신앙을 토로(吐露)하였습니다.
모세는 믿음 가운데서 났으며 믿음으로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하고 천대받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이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낫게 여기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재물보다 더욱 중히 여겨 임금의 노를 무서워 아니하고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믿음으로 참았다고 히브리 11장 23절 이하에 말합니다. 참으로 자아(自我)도 변하고 환경도 변하고 시대도 변하지만, 주는 영원히 변치 아니하십니다.
끝으로, 시편 139편 7절로 8절을 읽을 때에 자세히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내 앞뒤에 두루 계시고 손을 내 위에 안찰하시나이다.
내가 어디로 가서 주의 신을 피하여 내가 어디고 도망하여 주의 날을 피하리이까
내 자리를 음부에 펼지라도 또한 거기 계시리이다.』 (월일미상·베다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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