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청교도의 신앙 (고린도 후서6:14-7:1)

새벽지기1 2016. 12. 6. 22:17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6:17-7:1)

오늘 이 본문을 기초로 해서 청교도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생각하려 합니다. 이렇게 더러운 것을 온전히 버리고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생활을 이루겠다는 것은 사도 시대 이후의 모든 경건한 신도들의 한결같은 염원이요 노력이었습니다. 물론 일반 교계가 부패하여진 시기에도 이름은 다르나 목적은 이와 같은 운동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일어났으니 교회사(敎會史)를 보면 중고 시대(中古時代)에 교회가 침체하여졌을 때에도 조용한 곳을 찾아 자기의 생활을 깨끗이 하려고 애쓴 수도원 제도가 발전되었고, 또 특히「카다리」(Cathari-결백이라는 뜻)란 일종의 교파가 일어난 것이나 루터, 쯔빙글리, 칼빈의 종교 개혁도 다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 말한 이 모든 것이 청교도 아닌 것은 아니나, 교회 역사상 청교도라 함은 17세기 중엽 영국 제임스 1세로부터 차알스 2세까지 거의 1세기 동안 영국 안에서 당시 로마 교회로 기울어지는 경향과 영국 국교를 상대로 한 순수한 신앙을 위하여 투쟁한 교도들과 또 이들 중에서 핍박을 피하여 미 대륙에 이주하여 뉴우잉글랜드 주에 세우고 미국을 건설한 교도들의 총칭입니다. 영국의 종교 개혁은 독일이나 스위스의 그것과는 그 성질이 달라서 16세기 헨리 8세 때에 로마 교황과 관계를 끊고 영국 국교를 설립했으며 왕이 교회의 수장(首長)이 되고 캔터베리 대감독이 교회를 지도하였으나, 로마교의 잔재 즉 제사의 복장이나 예배의 의식 같은 것은 그냥 답습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일과 제네바의 개혁을 아는 자 중에는 이에 불만을 품고 이 잔재를 일소하고 순수한 기독교의 확립을 원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시 국교의 의식주의와 복잡한 성례, 감독 정치 등을 반대했기 때문에 많은 핍박을 받았으니 북미주에 이주하여 새 나라를 건설한 이들도 이들 청교도들이었고 크롬웰을 중심으로 한 국내 혁명도 이들의 손을 통하여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 청교도들이 가졌던 신앙과 생활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오늘 위기에 처하여 있는 대한 교계를 돌아보며 이를 생각함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첫째, 그들의 특색은 신앙의 기초를 성경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즉 그들의 신앙은 성경 중심이었으니 성경을 무엇보다도 존중했고 애독했습니다. 1611년 제임스 1세가 54인의 학자들을 명하여 영어로 번역케 한 신구약성경을 그 후 3년만에 완성해서 이를 흠정역(James Version)이라고 하는 바, 이를 애독한 청교도들은 생활과 도덕의 표준을 여기서 찾았고 교회와 국가의 정치적 표준도 여기서 얻었던 것입니다. 유명한 역사가 그린은 말하기를『영국인은 오직 한 책만 읽는 인민이 되었는데 그 책은 곧 성경이다』라고 할만큼 그들은 성경을 애독하였습니다.


둘째로, 그들의 신학 사상은 단순하였으니 사도 바울, 어거스틴, 칼빈을 통하여 전하여진 칼빈주의가 그들의 신학 사상이었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였으므로 인간이 자력으로는 자기를 구원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인간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으로, 그의 사랑과 자비로 인하여, 십자가의 주를 우리가 공손히 믿는 데서 구원을 얻는다는 단순한 신학 사상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들의 예배도 하나님 중심의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의식주의를 배제하고 마음에 우러나오는 대로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정신적 신령한 예배를 엄숙하게 보았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예배가 엄격하였던지 뉴우잉글랜드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 졸든 가 웃든 가 하면 벌을 주는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또 이러한 신앙을 가진 그들은 안식일을 지극히 엄수하였으니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레 중 하루를 하나님께 그려 이 날을 하나님의 날로 지켜 성전에 나아가 예배를 복 예배를 본 후에는 전도와 위문(慰問)에 힘썼으며 경마(競馬)나 연극 같은 오락을 금지하였고 또 노동하는 것을 금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덕 생활도 아주 엄격하였으니 하나님의 뜻은 그들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문제를 작정할 때에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할까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문제여서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떠한 희생도 아끼지 않고 이를 감행하며 인간의 권위에 대항한 것이 그들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들의 염원은 하나님의 뜻이 가정에, 사회에, 국가와 정치에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활은 자연히 질박검소(質朴儉素)하였고 근면 정직하였고 충성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절제 생활을 하여 술과 경마와 연극 같은 오락과 향락을 버렸으니 세상과 타협이 없는 건전하고 깨끗한 생활, 세상에 물들지 않는 생황이 그들의 윤리 사상의 근본 원리였던 것입니다.


이상 말한 것은 역사적으로 고찰한 기독교 중심 생활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반면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중심을 떠나서 좌우 곁길로 나가는 사조가 있습니다.
첫째로 신 신학의 사조(Modernism)가 이것입니다. 이 사상은 과학적 분위기에 쌓인 현대인에게 기독교를 이해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실 사상적으로 세상과 타협한 신학인바 이 사상은 자연주의와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합리주의가 그 골자로서 근본적으로 불신(不信)의 태도에서 나오는 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고대 교회로부터 나타난 것인데 시대가 감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을 뿐이니 이 2세기의 노스틱주의, 4세기의 아리우수주의, 그 후에는 펠라기우수주의, 종교 개혁 이후에는 예수는 인간 즉 위대한 인간이라는 소시니안주의, 19세기에 이르러 특히 독일 류빙겐 대학을 중심으로 현재주의 사상, 신 신학으로 우리 교회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상은 우리 믿는 사람의 신앙적 태도를 회의(懷疑)하게 하여 신앙을 무력하게 합니다. 스트라우스(strauss) 같은 이는 성경을 과학적 견지에서 보면 예수 님의 생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신화(神話)라고 주장하여 교계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결국 그의 말로는 유물론자, 무신론자로 전락되어 죽었고 이 사상의 지배를 받은 독일 교회는 아주 무력한 교회가 되어 생기를 잃어 결국 비스마르크, 히틀러에게 좌우되는 교회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내가 미국의 프린스톤에 있을 때 신 신학을 가르치는 모 신학교에서 온 어떤 신학생에게 왜 프린스톤으로 왔느냐고 물었더니『거기 있으니까 목사 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없어지게 되므로 아주 없어지기 전에 왔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 되려고 신학교에 간 학생에게 목사 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이 곧 신 신학의 영향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신앙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야 성령이 임하는 것이지, 불신하는 태도로, 불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얼른 생각하기에 그 시대 그 시대의 사상과 타협하여 가면서 전도하면 신자가 많이 생길 것 같지만, 타협해서 얻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죄와 싸우는 회개하는 사람을 많이 얻을 것이며 죄를 책망하지 않으면 귀로 듣기는 좋을지 모르나 회개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이와 반면에 극우사조(極右思潮)라 할까, 소위 극단적 영파(靈派)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이성(理性)의 요소를 전혀 무시하고 극단적인 감정에 흘러 광신(狂信) 내지 미신에 빠지는 사상입니다. 이들은 오직「자기만 의롭다」는 자홀(自惚)에 빠져 기성교회(旣成敎會)를 부인하며 또 극단적 문자주의(文字主義)에 빠져 성경의 근본 정신을 망각하여 사소한 문제로 교회의 분열을 꾀하며 교회의 분해 작용을 촉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대(古代)의 몬타너스, 도나터스주의가 그러하며, 종교 개혁 이후에 재세례파(再洗禮派), 칠일 안식일과(七日 安息日派), 소위 평북 철산(鐵山)의 새 주파(主派) 들이 곧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상이 있어 교회를 잠식(蠶食)한다는 것도 분명히 알아 경계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보세요, 오늘의 대한 교계와 전 세계의 교계를 영적 안목으로 볼 때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양대 강적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유물주의 사상(唯物主義思想)입니다. 공산주의라는 말을 타고 사회 정의와 무산자 해방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인간의 최대 본능인 물욕에 호소하여 인간을 동물로 환원케 하며 하나님도 모르고 유물론적 견지에서 인간 생명을 보아 테러, 방축(放逐), 약탈(掠奪) 등을 일삼고 기독교를 박멸하려는 자로 이는 소련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또 하나는 속세주의(俗世主義)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과 세상 것과 타협하려고 하여 이 세속 생활과 같은 오락과 향락을 마음껏 누리고 또 예수도 믿어 구원을 얻으려 합니다. 술도 먹고 담배도 태우고 투전도 하고 극장에도 가고 이혼(離婚)도 하고 주일날에 오락도 하고 자유연애도 하는 등 그야말로 넓은 길로 가면서 예수를 믿자고 하는 자들인 바, 이는 소위 기독교 국이라는 미국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늘 대한교회는 이 양대 강적을 정복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이를 정복하고 이 부패케 하는 사조를 밀어 내버리려면 물 탄 피계죽 같은 소위 신 신학적인 미온적 신앙이나 감정에 치우친 맹목적인 미신적 신앙을 가지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을 기초로 한 건전하고 열렬한 청교도들이 가졌던 이 복음주의 신앙이 아니면 아니 됩니다.
나는 이 때야말로 이런 신앙과 생활을 결심하는 이들의 대동단결로 십자군(十字軍)을 조직할 때하고 생각합니다. (1947년 4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