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11:13)
히브리서 저자는 역대의 신앙 용사를 기록하여「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그네라는 것은 보통 우리가 말하는 여행하는 자가 아니고 순례자라는 의미입니다. 또 베드로 전서 2장 11절에는 믿는 자들을 향하여 사도 베드로가 부르짖은 말씀『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과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마땅히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구절에도 나그네라는 말씀이 있는 바, 이 역시 분명하게 순례자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순례자는 보통 유랑자나 방랑자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목적이 있는 여행자이며 특히 거룩한 목적,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성지를 순례하는 여행자입니다. 우리 기독교도 중에는 팔레스틴 성지를 중심 하여 순례하는 자가 많고 회회교에서는 메카 성지를 향하여 순례하는 자가 많은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마치 순례자와 같은데 순례자가 거룩한 땅을 순례하는 것처럼 믿는 사람은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자로서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읽어보면 성경 중에서 제일 먼저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고향과 친척, 그리고 고국을 떠나 멀리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땅을 향하여 나아간 자는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내가 지시하는 땅을 향하여 가라』하므로 아브라함은 조금도 서슴지 않고 알지 못하는 세계를 정처 없이 하나님을 믿고 일생을 천막 생활로 유리 생활을 했으니 과연 그의 생애는 순례자의 생활이요, 모든 순례자의 역사의 첫 페이지는 장식하였습니다.
성경을 기초로 하는 기독교의 역사는 다시 말하면 순례자의 역사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모세의 40 년간의 미디안 광야 생활을 찾아보게 되는데, 모세는 애굽 궁전에서 바로 공주의 아들로 40 년간을 호화롭게 자라났지만 어떤 날 일터에 나가 애굽 사람이 자기의 동족 이스라엘 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여 애굽 사람을 죽인 후 황막한 미디안 광야로 도피하여 나그네의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도 하나의 순례자의 생활이었습니다. 그 후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이스라엘 민족을 영솔(領率)하여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 가나안 복지를 바라보며 장막 생활로 광야에서 방황하였으니 이는 곧 민족 전체의 거족적 순례의 생활이라 하겠습니다.
그 후 여러 선지자들도 집을 떠나 믿음으로 순례자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과 이세벨을 피하여 멀리 호렙산까지 순례의 길을 걸었고, 신약 시대에 와서는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광야에서 외치는 생활을 하던 세례 요한의 일생은 순례자의 생애였습니다.
성자 되시는 주님도 나사렛에서 자라나 복음을 외치기 시작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의 3년간의 전도 생활은『여우도 굴이 있고 공주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스스로 증거 하신 것과 같이 그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외로운 순례자의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믿음으로 집을 떠나 거룩한 생활을 한 순례자의 생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聖)안토니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나고 많은 재산을 차지한 청년이었지만 어떤 때 이 청년이 성경 가운데서 한 부자 청년이 예수께 나와『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네가 외려 한 가지 부족함이 있으니 가서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자 청년이 재물이 많은 고로 안색이 변하고 근심하며 돌아갔다는 기사를 읽고, 이 성경 말씀이 꼭 자기에게 하는 듯이 생각되었습니다.
성경의 청년은 얼굴을 붉히고 돌아갔으나『나는 성경 말씀대로, 주님의 명하신 대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자기의 재산을 누이에게 좀 나누어 준 다음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후 자기는 공동 묘지인 굴속에 가서 살며 성경 읽기와 기도하기에 힘쓰다가 마침내 아프리카 광야에 유리하며 성자의 생활을 보내었으니 세상에서 믿음으로 성지에 가려는 생각에서 순례자의 생활을 한 첫 순례자입니다.
주후 4세기와 5세기 이후 가족과 친척을 떠나 광야에서, 산상에서 혹은 높은 기둥 위에서 지내면서 온전히 일생을 믿음으로 지낸 수도사(修道士)의 수는 몇 만 명이 될 터인데 이런 수도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명한 교부들과 믿음의 용사들은 믿음 때문에 친척과 고국을 떠나 나그네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일대의 위인 콘스탄티노불의 대 설교가 크리소스톰은 황태후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콘스탄티노불에서 쫓겨나 만족(蠻族)이 사는 이역(異域)에서 순례의 생활을 하였고, 아다나시어스는 기독교 역사를 보면 정통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하여 다섯 번이나 추방을 당하여 만지(蠻地)로, 광야로 순례생활을 하였습니다.
종교 개혁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순례자는 더욱 많아졌습니다.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 같은 이도 여러 가지 핍박을 받아 이 동네에서 저 동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유리하면서 종교개혁 운동을 하며 순례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17세기에 있어서 영국 교회가 로마 교회로 기울어지는 경향과 신앙의 자유를 구속하는 영국 국교를 상대로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투쟁하던 청교도들도 핍박을 피하여 먼저 화란으로 향하였고 후에 1620년 103 명이『메이 플라워』호(號)로 북미주 플리마우드(Plymouth)에 도착하여 순례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며, 진젠돌프 백장이 세운 모라비안파 교회는 순례자의 교회였고, 19 세기이래 동양, 아프리카, 남양 군도에 흩어진 선교사들도 역시 순례자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에서도 혼란한 과도기로 인하여 이북에서 부득이하여 오랫동안 살던 정든 고향과 집과 친척을 떠나 원치 않는 여행을 하여 이남으로 내려오는 교우들이 나그네의 생활을 할 때 어려 가지 고통과 환난이 많지만, 긴 교회 역사상으로 보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모세와 엘리야의 생활의 계승임을 생각하여 수고와 궁핍이 심하지만 오히려 감사의 눈물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상과 같이 기독교 역사는 긴 순례자의 역사일뿐더러 또한 우리 신자는 신령한 의미에서 누구나 다 순례자입니다.
요한 번연의「천로역정」(天路歷程)은 영어로 말하면 The Pilgrim's Progress인 바 그대로 번역하면「순례자의 진로」라는 말입니다. 기독도가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하여 나가는 도중에 웅덩이와 높은 산과 기타 여러 가지 괴로운 일과 시험을 많이 당하나 끝가지 싸우며 믿음으로 나갔다는 기록입니다.
참으로 신령한 의미에 있어서 우리 기독교인은 이 죄악 세상을 떠나 진리의 세계로 한 걸은 한 걸음 나가는 순례자의 생활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담대히 알지 못하는 땅을 향하여 나간 것과 같이 이런 생활을 계대(繼代)해서 살아 나가는 것이 우리 기독신도의 생활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지금 순례자의 길을 떠났습니까? 아직까지 장망성에서 유랑하는 방랑자입니까? 순례자의 생활과 방랑자의 생활은 다른 것입니다. 2세기의 유명한 변증론자(辨證論者) 저스틴은 사마리아에서 난 헬라인으로 인간의 깊은 뜻을 탐구하기 위하여 당시의 사조인 스토아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피타고라스의 철학에 유랑하였으나 아무런 만족도 얻지 못하고 마침내는 어떤 날 산책하다가 해안에서 한 노신사를 만나 인생의 깊은 문제를 서로 말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다는 것과 독생자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어떻게 관계된다는 것을 전도 받은 후 성경을 깊이 연구하다가 크게 깨달음을 얻게 되어 예수를 믿고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전날 많이 배워 두었던 철학을 기초로 하여 기독교 진리는 변증했습니다. 그는 전날에는 영적 방랑자였으나 한 번 노인을 만나 전도 받은 후에는 믿음의 순례자가 되어 목적 있는 여행, 곧 각처에서 전도하다가 로마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대 변증서를 말커스 아우렐리우스에게, 그리고 소 변증서를 원로원(元老院)에 바쳤습니다.
이와 같이 방랑자의 생활과 순례자의 생활은 차이가 있습니다. 어거스틴도 34세 나서 회개하기까지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방랑자였습니다. 그는 라틴 문학과 시세로를 탐독하였고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연구하였고 8년이나 마니교에 따라다니면서 이리저리, 이것저것에 유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족을 얻지 못하다가 마침내 암브로우스를 만나서야 깨달은 바가 있었고 또 그의 모친의 기도의 힘으로 순례자가 도어 일정한 목표를 가지고 나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믿는 자는 누구나 다 순례자입니다.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진리의 거룩한 순례의 길에 여러분은 나섰습니까? 장망성의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울타리 안에 유랑하며 방랑하는 한심한 영혼, 유랑자가 아닙니까? 떠났으면 놋의 아내와 같이 뒤를 보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애굽을 돌아보지 말고, 오직 앞과 위를 바라보고 나가고 또 나가야 합니다. 파도가 아무리 높아도 그냥 배를 저어 나가야 합니다. 산이 아무리 높으나 그냥 위를 향하여 올라가야 됩니다. 오. 순례자의 장도(壯途)여! 축복의 희망봉이여!
그러나 아직 장망성에서 유랑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성신의 감화를 허락하셔서 장망성을 떠나는 중생의 시간이 되기를 빌어 마지않습니다. 물론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해 나가는 진리의 순례의 길은 여러 가지 핍박과 괴로움이 있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재미있고 축복 받는 길인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콜럼버스가 알지 못하는 땅을 향하여 그냥 서편으로 서편으로 나가다가 종려나무 가지를 보고 기뻐하며 대륙을 발견한 그 기쁨은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기쁨이야말로 괴로움을 이기고 나가지 않았던들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희망봉을 향하여 떠나지 않는 자에게는 이런 기쁨이 올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순례자의 축복이 어떤가를 말씀 드리려 합니다. 아브라함은 일생을 이 같이 나간 결과로 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믿음의 자손은 하늘의 별과 땅의 모래와 같이 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차지하게 되었고 후손에 와서는 다윗 계통에서 인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신 것입니다. 미국을 건설한 청교도들도 받은 바 고통이 심했지만 그들의 자손들은 오늘날 큰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과연『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순례자에게는『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천성을 향하여 나가는 우리에게는 영생의 축복이 있으며 아름다운 내 본향이 있습니다.
『자금 이후로 주를 높이다가 죽은 자에게 복이 있으리라』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旅路)에 피곤한 영에게 영원한 안식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례자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장망성을 떠나 순례자의 길에 오르게 하여 주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1947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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