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부활주일의 의의 (고린도 전서15:1-28)

새벽지기1 2016. 12. 2. 07:11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1,22)

오늘 이 영광스러운 부활 주일의 아침을 당하여 실로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송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가 서서 예배하는 이 곳은 일찍이 우상을 숭배하고 우리 기독신자를 핍박하던 사교(邪敎)의 중심지였는데 해방을 받아 이처럼 2년째 이 곳에서 우리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게 되며 더욱이 금년은 서양의 신자들과 우리 대한의 신도가 합동하여 예배하게 된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함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과연 성경 말씀과 같이『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 하는 자나 남자나 여자나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 된 것을』(갈3:28)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오늘 이 이른 아침, 이 높은 산 위에 서서 먼 옛날 갈보리 산상의 첫 부활의 아침을 회상할 때에 우리는 자연히『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가 다시 살겠느냐』(옵14:14)하는 의문은 욥기이래 인간의 끊임 없는 문제입니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의 시의 일 절에 이런 귀절이 있습니다.『사람은 그가 아주 죽으려고 지음을 받은 것 같이 생각지를 않는다』(Man thinks he was not made to die)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장생불사를 원하여 승로반(承露盤)에 찬이슬을 받아먹었다는 말도 있고 일대의 영웅 진시황(秦始皇)이 당시 중원을 평정한 후에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방「삼신산」(三神山)에 곧 대한에 동남동녀 5백 인을 보냈다는 전설은 우리가 다 잘 아는 바입니다.


이 부활 주일은 이 인간의 깊은 욕구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 또 확실한 대답입니다. 요한복음 4장 19절에「내가 사니 너희도 또한 살리라」고 하였고 고린도 전서 15장 20-22절에는『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자는 자의 처음 익은 열매가 되셨도다……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리라』, 55절에는『사망아, 네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활주일이야말로 사망과 무덤에 대한 생명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이김을 얻고도 더욱 남음이 있다』고 로마서 8장 37절에 말씀하셨고 또한 요한 1서 3장 2절에 보면『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오직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시인이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나는 모르노라
어디 그 섬이 있는지
넓은 종려나무 가지를 공중에 날리며
그러나 내가 확실히 알기는
가의 사랑과 보호의 범위를 지나
표박(漂泊)치 않을 것을』
I know not where the islands life
Their fronted palms in air
I only know I can not drift
Beyond his love and care. (Whittier)


이 부활 주일이야말로 인간은 다만 피와 살뿐이라는 유물주의적 견해에 대하여 인간은 불멸의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웅변으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부활절은 진리의 최후적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수의 지상 생활을 회상하면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진리를 위한 투쟁의 역사입니다. 『나는 길리요 진리요…』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는 그 가르치신 진리의 수정 같이 맑은 화신(化身)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는「회칠한 무덤」같은 양의 옷을 입었으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의 마음을 품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진영이 항상 대립되어 있습니다. 그들은「박하와 회향과 근채(芹菜)」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에 중한 의와 인과 신은 행치 아니했고 잔과 소반의 거죽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토색과 불의가 가득했습니다. 이 외식과 허위의 화신인 이 무리들은 항상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안식일 문제, 성전 문제 등으로 논난(論難) 하다가 결국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진리는 십자가에 달리고 허위는 일시 개가를 불렀습니다. 진리를 무덤에 깊이 간직하고 허위는 편안히 침상에서 발을 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시는 한, 어찌 이러한 현상이 오래 계속되겠습니까? 부활의 아침은 이윽고 오고야 말았습니다. 돌로 막았던 무덤은 열려지고 진리는 영원히 빛나게 되었습니다. 오,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 진리는 결국 최후의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대한 반도에, 아니 전 세계에 아직도 허위의 사상, 허위의 주의가 팽배하나 필경은 진리가 최후의 승리를 얻으리라는 것을 이 부활절은 전 일류에게 다시 한 번 선언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부활절은 사랑의 구극적(究極的) 승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어 우리 가운데 거하여…』라고 한 성구를『사랑이 육신을 입어 우리 가운데 거하여…』라고 읽어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격화된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그는 갈릴리의 어부들을 사랑하고 가난한 자, 병자, 아이들, 심지어 세리와 죄인들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을 가르치고 어루만지고 병을 고치시고 먹이시고 어떤 때에는 물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어떻게 응수(應酬)되었습니까? 안식일을 범한다고, 모세의 율법을 범한다고, 사탄의 힘을 빈다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연락을 즐긴다고, 성전을 훼방하고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라고, 다시 말하면 순결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시기와 미움으로 응수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를 어떻게 줄일꼬 꾀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시기와 미움은 참 사랑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의 사람이 영원히 무덤 속에 갇혀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은 오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사랑은 길이 떨어지지 아니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면, 부활절의 의의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사망에 대한 생명의 완전한 승리입니다.

둘째로, 허위에 대한 진리의 완전한 승리입니다.

셋째로, 증오에 대한 사랑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은 부활절 아침에 이 산상에 서서 아직도 허위와 증오와 사망에 쌓인 온 세계를 향하여 그리스도가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얻은 이 승리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엄숙히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1947년 부활주일 아침·남산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