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대한민족아, 깨어라 (요한계시록 3:14-22)

새벽지기1 2016. 12. 14. 08:33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라오디게아 교회는 불냉(不冷), 불열(不熱),의 교회로서 주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환영하되 아직 문 밖에 모시고 문을 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중심의 문을 열기 위하여 밖에서 두드리십니다.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관계는 개인도 그러하고 가정도 그러하고 교회도 그러하고 민족도 그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대한 민족 전체와 그리스도 곧 기독교와의 관계를 논하고자 합니다. 기독교는 이조 말기에 대한에 들어왔습니다. 이조는 창업 직후에는 세종대왕 같은 영주를 중심 하여 한글을 창제하는 등 문화의 창조가 있었으나 점차로 유교의 문약(文弱)과 당쟁의 가열, 그 적폐와 죄악 때문에 장차 무너질 운명애 직면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 죽은 나무 그루터기에서 새 가지가 나올 준비로서 기독교를 반도에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대한의 문을 두드리기는 약 70년 전이었습니다. 문을 두드린 지 이미 70년이지만 아직도 대한 민족 전체로 보면 그리스도는 겨우 마당에나 들어오신 셈이요, 아직 문 밖에 계시다고 아는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속하여 문을 두드리는 것이 지금 대한 민족의 영적 현실이 아닙니까?


이렇게 기독교는 아직 문 밖에 있으나 과거 50년간에 대한을 위하여 공헌한 바 적지 아니합니다.
첫째, 불교는 이미 고려조 이후 부패하여 생명을 잃은 지 오래고 유교는 다만 형식과 인습만 남아 의지할 데 없는 대중은 미신에 빠지고 사신 우상의 종이 되어 참 종교의 내원(來援)을 대망 하던 중, 기독교는 참 신을 보여주고 구원의 도를 가르쳐 개인으로 영원한 생명과 소망을 가지게 하고 민족적으로는 망국의 절망적인 비애 중에서 위안을 얻고 사회적 부활의 희망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실로 기독교는 우리 민족의 가장 암담한 과거 50년 역사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유일한 위안과 소망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부인하지 못할 역사적 사실입니다.


둘째로, 기독교는 문화적으로 20세기 신문명 곧 과학문명의 소개자요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문화의 수준이 제일 높은 영미(英美)에서 온 선교사들은 들어오면서 교회를 세울뿐더러 반드시 학교를 세웠습니다. 재래의 우리 나라 서당에서는 오직 한문만 가르치던 때에 교회 학교에서는 수학이니 이과(理科)니 과학적 지식을 보급시켰습니다. 벌써 50년 전에 서울에서는 배재학당(培材學堂), 이화학당(梨花學堂)을 설립해서 이승만(李承晩) 박사 같은 이를 교육시켰고 평양에는 숭실(崇實)이니 숭의(崇義)같은 학교를 세워 조만식(曺晩植) 선생 같은 이를 양성하였습니다. 기독교를 떠나서 우리는 신문화의 소개자와 선구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셋째로, 한가지 잊어서는 안될 것은 기독교는 외래 문화의 정수를 소개할뿐더러 대한의 고유한 문화를 보존하고 발양(發揚)하기에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과거 대한의 유교 선배들은 한문에 중독 되어 한글을 언문이라고 해서 우부우부(愚夫愚婦)의 글로 천히 여겼습니다. 기독교가 한글의 가치를 먼저 발견하고 성경과 찬송가를 한글로 발행하여 일반적으로 보급시켰고 한글로 시를 쓰고 소설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는 특별한 일례에 불과하나 다른 문화 방면에도 기독교는 대한 고유의 장점과 미풍양속을 보존하기에 노력하였습니다.


넷째로, 기독교는 대한에 있어서 사회 운동과 사회 사업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농촌 운동도 교회에서 먼저 했고 소비조합 운동도 기독교 청년들이 먼저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 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지 못한 것은 오직 왜정의 탄압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중에서라도 위생 시설, 자선 사업은 거의 기독교의 독점이었습니다. 병원, 나병원(癩病院), 요양원, 고아원, 양로원 등이 거의 기독교의 사업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가장 불행하고 가난한 자에게 먼저 복리를 가져오기 위하여 노력한 것입니다.


다섯째, 기독교는 과거 반세기 동안에 사회적으로 도덕적 중생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조 말경 있어서 유교의 도덕적 타락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극단의 형식주의에 흘러 효도라면 부모 생전에는 어떻게 대접하였던지 사후에 삼상(三喪)을 잘하는 제사주의로 화했고 한 편 불효삼천(不孝三千)이나 무후위대(無後爲大)라 하여 축첩을 장려했으며 남존여비의 봉건 사상을 고조하여 부녀의 모든 활동을 막았고 반상(班常)의 구별로 계급 차별이 심하였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와서 유교의 폐를 시정하고 성도덕의 정화를 부르짖어 가정의 신성을 회복하고 여자를 해방하여 남자와 같은 교육과 활동의 기회를 주었고 반상의 차별이 없이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였습니다.


여섯째, 더욱이 기독교는 국가적 견지에서 보면 애국 운동의 중심 세력이 되었습니다. 3·1운동 당시의 기독교의 역할이 어떠하였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국 부흥 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의 대다수가 신자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도산(島山)선생, 남강(南崗)선생을 비롯하여 이승만(李承晩)박사, 김구(金九)주석, 김규식(金奎植)박사, 그 외에 국가를 위하여 순국한 허다한 애국지사의 수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일곱째로는 과거 50년 역사에 있어서 오직 기독교만이 지금 많이 듣고 말하는 소위 민주주의사상의 교육자였습니다. 개인의 생명, 인격, 권리에 대한 존중 사상, 인간의 자유 사상과 인간의 평등 사상은 오직 기독교만이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이 사상이 성경이 가르치는 인생에 대한 근본 견지인 까닭입니다. 또 왜정이 기독교를 압박한 이유도 사상적으로 기독교는 일본 제국주의와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까닭입니다.


여덟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이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칠뿐더러 모든 신교 특히 장로교회는 민주주의 정치의 실행자였습니다. 장로교회는 문자 그대로 민주주의 정치를 각 지교회(支敎會), 노회(老會)와 총회에서 실행하여 왔습니다. 지교회에서 장로, 집사를 서거하는 것, 목사를 청빈(請賓)하는 것, 그리고 노회에서 모든 정치는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이 1776년 독립 선언을 한 후에 헌법과 모든 정치를 민주주의로 한 것은 그들이 이미 각자 교회에서 그러한 훈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금일 대한에 있어서 민주주의 정치훈련을 받은 이는 기독교 신자밖에 없습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아직 문 밖에 서 있는 기독교가 이상과 같은 위대한 공헌을 하였거든 이 기독교를 우리 민족이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장래에 얼마나 더 큰 공헌을 하겠습니까? 과거 대한의 50년 역사를 정관(靜觀)하면 하나님께서 벌써 1945년에는 해방이 있을 줄은 아시고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이 날에 대비하기 위하여 기독교를 보내신 것이 분명하거든 어찌하여 우리 신자는 아직 이 사명을 확실히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대한 민족 전체는 아직도 미지근하여 기독교를 문 밖에 세워 둡니까?『경찰서 열을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하나 세우는 것이 낫다』는 김구 주석의 말씀은 얼마나 타당한 말씀입니까?


지금 대한 민족은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 때야말로 민족 존망지추(存亡之秋)의 시기입니다.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한다고 하면서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반인 기독교를 떠나서 어떻게 되며 민주주의의 정치를 한다고 하면서 기독교를 떠나서 어떻게 잘 실행되겠습니까? 민주주의는 국민의 각성과 도덕적 향상이 없으면 불가능한데 기독교를 떠나서 어디서 이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유물론적, 독재적 사상의 기초 위에 민주주의 대한이 건설될 듯싶습니까?


민주주의의 근본 정신은 자유입니다.『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생명보다도 자유를 사랑하는 민족에게 독립이 있지 자유보다도 자기의 이권과 먹을 것부터 찾는 민족에게 독립이 있을 듯 싶습니까?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아직까지 그리스도를 문 밖에 세워두는 우리 민족의 사회 상태가 어떠합니까? 그 사상이 얼마나 혼돈하여 그 질서가 얼마나 문란합니까? 저 영남사건(嶺南事件)의 잔인 무도한 참상을 보세요. 우리 민족에게 이러한 포악성과 잔인성이 있었던가요? 스스로 전율(戰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민족이나 사상이 악화되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동포를 모르는 사상이 그 머리를 지배하게 되면 이렇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폭동을 어떤 정당에서는「조국독립을 위한 궐기」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거짓 지도자가 장안 거리를 활보하는 모양입니다.


여러분, 기독교가 아니면 대한 민족은 서로 싸워서 망하고 말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때야말로 대한에 참 애국지사가 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가 신앙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 때는 민족을 살리기 위하여 생명을 내걸고 전도할 때입니다. 대한 민족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아직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오, 대한 민족이여! 깨어나십시오, 그리스도로 하여금 더 오래 문 밖에서 두드리게 하지 말고 우리의 중심의 문을 열어 놓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다. 남자나 여자나 선생이나 학생이나 노동자나 농민이나 다 구주를 영접하십시다!
어떤 지도자들은『글세, 다 믿으면 좋기는 하겠지만…』하고 말합니다. 이런 미지근한 태도는 쓸데가 없습니다.
기독교가 과연 대한을 살릴 유일한 진리인 줄 알면 뜨겁게 환영할 것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으로 구원을 얻은 자가 없고 무엇에나 미지근한 태도로 성공한 자가 없습니다. 대한의 교회야말로 뜨거운 마음으로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미지근한 소위를 버리고 뜨겁게 믿고 전도할 때입니다.


오늘 기독교에 대하여 편견과 반감을 가진 무리는 두 가지 종류입니다. 하나는 우상 숭배적 사교(邪敎) 중심의 일본 문화의 감화를 받는 계급인데 이들은 기독교가 진리인 줄 알면서도 일본문화의 잔재가 아직도 머리에 남아 있어서 교회에 나오기를 싫어합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는 이렇게 종교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유물주의자들이니 이들은 육신 생활에 눈이 어두워서 모든 정신 방면을 잊어버리는,「배로 하나님을 삼는 자」들입니다. 영적으로 얼마나 가련한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새 대한의 적(敵)인 것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우리 신자는 이 두 가지 대적 곧 일본 신도문화(神道文化)의 잔재와 유물주의 사상과 생명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께서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입니다. 한 구비를 도니 시온산 성에 건설된 아름다운 예루살렘 전경이 안하(眼下)에 전개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성전, 궁궐, 시가, 주택,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 금성(金城)이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크게 소리를 내어 우시면서 탄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너희 자녀 모으기를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여러 번 하려 하되 너희가 원치 아니하니 이제라고 너희가 평안한 일을 알았다면 다행하려니와 오직 네 눈에 숨겼으니 날리 장차 이를지라. 네 원수도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에워싸고 또 너와 그 가운데 있는 자식을 땅에 내어 던지며 돌 하나도 돌 위에 첩 놓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하시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이라』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에서 특별히 두 가지를 주의하여야 합니다. 그것은『평화에 속하는 일을 알았다면!』하는 말과『권고하시는 날을 알지 못함이라』입니다. 즉 평화로 인도하는 길을 보여주었으나 그 권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돌 하나도 돌 위에 첩 놓이지 아니하는 멸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민족은 어찌 하려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기독교를 통하여 평화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대한은 이 길을 따르려고 합니까, 배반하려 합니까? 지금이야말로 권고의 날이올시다. 이 권고를 들으려고 하십니까, 배척하려 하십니까?
대한 민족아 깨어라! 마음의 문을 열어라! 그리고 주를 영접하여라!
(1947년 월일미상·베다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