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현대인과 기도 (살전5:17, 행1:14,엡3:14-19, 눅18:1-8)

새벽지기1 2016. 12. 16. 06:54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눅18:1)

이는 기도에 대한 우리 주님의 교훈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소위 지식층의 사람들은 기도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 하면, 모 중학교 교원의 말로 알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말하기를『우리 어머니는 참 한심해. 아이들이 병나면 약이면 그만이지 무슨 기도를 하시느라고 그러는지 몰라』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수의 소위 인텔리 층에서 기도를 이렇게 봅니다. 원시 시대에는 기도가 필요했으나 지금은 과학이 모든 인간의 욕구에 응하는데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잇느냐, 그것은 일종의 미신에 불과한 것이며 원시 시대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개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사회와 인류를 위하여 공헌한 위대한 인격자들의 생활을 보면 세 가지 길로 무슨 일이나 성취하였습니다.
첫째, 그들은 생각 곧 연구합니다. 과학의 발전 등은 모두 이 생각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일을 합니다. 연구하고 기계를 제작하며 생각하고 시(詩)를 지으며 그림을 그리고 다리를 놓고 집을 짓습니다. 셋째로는 기도합니다. 생각하고 일하는 한 편 그 사업을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 항상 간절한 기도를 합니다.


런데 어떤 일들은 첫째와 둘째면 다 된 줄 알고 기도가 필요치 않다고 합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대체 우리 내심의 평화라는 것은 생각과 일로는 얻기가 불가능합니다. 육신도 건강이 약하여진 후에는 생각과 일로는 회복하기가 불가능합니다. 너무 생각하고 일했기 때문에 약해진 것이 아닙니까? 이런 때에는 차라리 쉬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 내심의 약점이 또한 그러하여 기도가 필요합니다. 육신으로 잘 생각하게 하고 잘 일하게 하는 능력은 오직 기도로부터 옵니다.
또 이런 생각, 일, 그리고 기도의 관계를 비유로 말하자면 생각과 일은 가지요, 기도는 뿌리에 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제자들에게 우선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하라고 하셨고, 사도 발울도 전도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아라비아에서 기도하였습니다. 비행기가 높이 뜨려면 먼저 지상에서 잘 수리하여야 하며 오케스트라가 좋은 음악을 연주하려면 먼저 각 악기의 음률을 조절해 놓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생각과 일을 성취하는 요소는 곧 기도입니다.


렁크 박사는「신앙에서의 복귀」(The Return to Religion)라는 책에서『신자는 인격의 조화가 있어서 위기를 극복하는 능이 있고 일을 더 잘한다』고 했습니다. 과연 지언(至言)입니다. 현대인에게 기도가 필요치 않은 것이 아니라, 현대인일수록 기도는 절대 필요하며 복잡한 사회일수록 인간생활에 내적 능력이 필요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볼 때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도의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기도를 절실하게 느끼지 않습니다. 이는 생활에 고상한 표준이 없는 까닭입니다. 만약 고상한 이상을 가지고 위대한 사업에 헌신한다면 기도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별로 고등 수학의 필요가 느껴지지 않겠지만, 한강철교를 가설하려는 위대한 사업을 계획하는 기사에게는 고등 수학의 필요가 느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생각도 조금 하고, 일도 조금 하고, 기도는 안하고 사는 사람이 많은 모양인데 이런 이들에게서 위대한 일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큰 각성을 가지고 할 일이 너무 많고 클 때에는 기도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느헤미야가 고국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워싱턴이 미국의 독립을 위하여 힘써 기도하였으며 이순신(李舜臣) 역시 조국의 안녕(安寧)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입니다. 오늘 대한의 사태가 위기에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 사람으로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민족 의식과 조국 흥륭(興隆)에 대한 관심이 적은 사람, 애국심이 부족한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참 애국자라면 신, 불신을 불문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둘째로 절실히 기도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함은 위기를 당해 보지 못한 까닭입니다. 속담에『죽을 때는 누구나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신문 보도에 의하면 2차 대전 때 전범자로서 사형 선고를 받은 독일 나치스 지도자 열 한 사람 중 한 사람 외에는 전부 그 집행을 앞둔 마지막 날 저녁에 고요히 앉아 성경을 읽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깊이 생각할 이야기라고 느껴집니다.


다음은 기도에 대한 응답 여부를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구하라 또한 주실 것이요, 찾아보아라 또한 만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또한 열어주실 것이다』하셨으나,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다 응답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오해를 버려야 합니다. 무엇에게 빌든지, 무엇을 빌든지 응답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신사에나 목석에 빌어도 응답되겠습니까? 참 하나님께도 정욕으로 빌든지 불 신앙으로 빌 때 응답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참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대로 빌 때에 비로소, 우리에게 가장 적당하게 응답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정도가 부족하여 뜻을 완전히 분별치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제일 적당하게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이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은 자연 법칙에 어그러지지 않느냐? 이것은 현대인이 공통으로 가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은 반드시 자연 법칙을 어긴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청천일(晴天日)은 일기가 맑음이 자연 법칙이요, 우천일(雨天日)은 비가 옴이 자연 법칙입니다. 잠수함이 물 속에 들어감도 자연 법칙이요, 물 속에서 나옴도 자연 법칙입니다. 기도는 자연 법칙을 통하여 응답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기도함으로써 병을 낫게 하는 치병 문제 혹은 신유(神癒)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고(故) 한석진(韓錫晉)목사는 병들었을 때 목사 청하기를 무당 청하듯 하지 말라고 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를 청하여 기도로 도와주기를 원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약을 안 쓰고 병 고치려는 교우가 혹간 있는 모양인데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대저 치병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믿음으로만 고치자』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약으로만 고치자』하는 것입니다. 물론 약도 쓰고 기도해야 합니다. 약을 쓴다 해도 기도함으로 은혜를 받아야 나을 병이 많은 것입니다. 또 기도로 병이 나음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영국의 해드필드(Hadfield)박사의「힘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Power)이라는 책에는 많은 신유(神癒)의 실증(實證)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의 움직임을 사실로 알게 됩니다.
철학적으로 유신론(有神論)을 믿으면 기도는 인간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감사, 고백, 간구(懇求), 영교(靈交), 이 모든 것이 곧 기도입니다. 사무엘서에도 있는 바와 같이 기도 안 함은 곧 죄입니다. 오늘날 대한 사람으로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것은 기도를 생각과 일의 대신으로 삼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도로써 간구 하는 동시에 생각하며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밤이 맞도록 기도하고 해지도록 일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항상 기도하라!


기도하는 청년, 기도하는 학생, 기도하는 사업가, 기도하는 정치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작고(作故)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연합국이 독일을 반격하려 분란서 서해안에 상륙할 때에 밤을 새워가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연합국의 승리의 배후에는 이러한 기도를 비롯하여 많은 기독신자의 열렬한 기도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1947년 월일미상·베다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