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국원교수

[기독교문화 변혁, 핵심 읽기] (23) 세계화와 다문화 시대

새벽지기1 2016. 9. 20. 07:50


교회, 사회 통합과 조화의 주체로 서야

 

  
 ▲ 신국원 교수 

캐나다의 토론토는 다중문화정책을 내세운 대표적인 도시입니다. 공식언어도 영어와 불어 두 가지를 사용합니다. 시내 곳곳에 작은 이태리와 남미 지역이며 차이나 타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 거리도 있습니다. 월드컵이 벌어지면 저마다 고국 유니폼을 입고 국기를 나부끼며 거리를 질주하는 풍경이 연출되곤 합니다. 나라 전체가 붉은 셔츠를 입고 한 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외치는 우리와 엄청 다른 모습입니다.


세계화 (globalization)

하지만 이제는 단일민족을 자부하던 우리나라도 다문화를 넘어서 다인종 사회를 향해 가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외국인이 이미 인구의 2%인 100만 명을 넘어섰고 2050년에는 9~10%까지 올라가 더 이상 단일 민족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토론토에선 버스나 전차 속에서 5개 언어를 듣는 것은 보통입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만 주말이면 안산행 지하철 4호선에서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민자로 이루어진 미국 같은 나라와 한국을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동방의 ‘은둔국’(hermit nation)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대한민국은 경제는 물론 정치사회적 영향력에 있어 결코 변두리가 아닙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전세계의 주목 대상입니다. 무엇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여 국제 사회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도 다민족 다문화 사회로 변하는 것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세계화로 지구가 하나의 마을이 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시에 지역주의와 파편화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발하고 있다는 역설도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의 국가 안에 여러 인종과 문화가 혼합되지만 정치와 사회제도는 다양성을 반영하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화정체성의 갈등

세계화된 지구촌은 외견상으로 서로 비슷해져 갑니다. 특히 대중문화는 세계 어디나 일색이어서 모두가 같은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 것처럼 보입니다. 날로 발달하는 첨단 과학과 기술로 모든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세계는 곧 하나의 마을로 통합될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 보면 다양성과 차이들이 끊임 없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프리드만(Friedman)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세계화는 덫인가, 기회인가?>에서 잘 지적했듯, 세계화는 커뮤니케이션과 경제 영역에서만 현실일 수 있습니다. 민족과 인종, 전통과 종교를 중심으로 문화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욕구는 오히려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헌팅톤(Samuel Huntington)이 예고했던 <문명의 충돌>은 9·11 사태 이후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전쟁이나 테러가 아니더라도 소규모의 긴장과 마찰이 거의 모든 사회에서 심화 일로에 있습니다. 이른바 ‘문화 전쟁’이 그것입니다. 오늘의 상황은 바로 이 점에서 이제껏 인류 역사가 겪은 다원주의와 매우 다릅니다. 그것은 상황입니다. 피터 버거(Peter Berger)의 말처럼 ‘설득력의 구조’(plausibility structure)가 완전히 붕괴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믿음의 유형이나 행위의 유형이 전혀 없는” 상황입니다. 이로 인해 그 누구도 정통일 수 없는 <이단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오늘의 사회와 문화는 극심한 파편화로 인해 날로 갈등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이웃사랑과 문화통합

  
 ▲ 일러스트=강인춘 
 

우리 시대는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가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주장한 것처럼 “전체성과 절대에 대한 의심”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익집단들 간에 끊임 없는 불화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계층과 이념 간의 마찰을 중재할 중립적 기구나 보편적 기준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국가 기구마저 편향성을 의심 받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강부자,” “고소영” 같은 냉소적 유행어를 앞세운 비판에 직면했던 상황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이것이 오늘날 공권력에 대한 존중이나 신뢰가 사라진 근본 원인입니다. 따라서 이해가 충돌될 경우에는 극단적인 저항도 서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일부에서 생각하듯 민족성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에 익숙하지 못해 질서의식이 약한 탓만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물론 아닙니다. 유엔을 비롯한 WTO, IMF, G20 등 모든 국제기구에 대한 불신과 불만 역시 팽배합니다. 이것이 9·11같은 테러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다문화사회의 최선은 백화만발(百花滿發)의 조화일 것입니다. 하지만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위험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세계화 추세로 인해 다문화와 심지어 다인종 상황을 피할 수 없다면 그에 걸맞은 시민의식과 문화적 태도를 계발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기독교는 어디서나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 벽을 헐고 차이를 극복하는 일을 통해 사회 통합과 조화에 적극 기여했습니다. 교회가 세계화와 다문화사회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진지하게 씨름해야 합니다. 오늘날 선교지는 땅끝 저편이 아니라 바로 길 건너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국원 교수  ekd@kid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