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칼빈의5대교리

견인 교리와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 / 조엘 비키

새벽지기1 2016. 6. 22. 12:29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복음에 대한 모든 기쁜 반응이 구원적 반응은 아니라고 경고하셨다. 돌짝 밭의 마음을 가진 청중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난이 오면 곧 시들고 만다.

 

또한 성경은 사울과 아히도벨과 가룟 유다와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처럼 한때 주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이 실족하고 마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 사람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없었던 것이다(요일2:19).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대한 다양한 강도의 확신이나 느낌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구원적 믿음은 결핍되어 있었다. 절대 선택받은 신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이것이 히6:4-6에 대한 전통적이고도 일반적인 해석이다).

 

오웬은 이러한 경우에 적용되는 삼단논법을 제공한다.

1. 택자는 절대로 떨어져 나갈 수 없다.

2. 어떤 신앙고백자들은 떨어져 나간다.

3. 그러므로 그러한 고백자들은 선택받은 신자들이 아니다.

 

한 설교자가 회중에게 그릇된 고백의 위험에 대해 너무나 자주 경고하였다. 그러자 어떤 교인들은 ‘그 설교자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가 상실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교인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성도의 견인 교리를 반대하는 것인가?’ 설교자가 말했다. ‘천만에요, 제가 반대하는 것은 죄인의 견인입니다.’

 

그 누구도 성도의 견인 교리에 편승해서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항상 거룩을 추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룩이 없이는 그 누구도 주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히12:14).

 

여기에는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계속 죄 가운데 거하면서도 입심 좋게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지절거린다. 그러나 견인의 열매들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보증을 주장할 수 없다. 바울과 같이 우리는 믿음이 파선되는 위험을 조심해야 한다(고전9:26,27, 10:12)). 존 대그, “인간이 한번 회심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의 과정이 어떠하든지 무조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지독하게 비열하고도 치명적인 왜곡이 아닐 수 없다.”

 

견인은 우리가 한번 그리스도를 고백하기만 하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번 구원을 받으면 우리가 얼마나 죄악된 삶을 사는지에 관계없이 항상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율법폐기론주의와 같다. 존 머리, “신자가 구원 이후에 행해지는 죄와 불신앙에 관계없이 구원을 보장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개념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와 믿음과 거룩 등과 같이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을 제외한 채 죄인의 칭의가 하나님의 구원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불완전한 개념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견해는 ‘믿음이 공허한 상태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며 신자에게는 삶의 법칙으로서의 율법이 필요하지 않다’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율법폐기론의 본질이다.

 

교리적인 율법폐기론도 비성경적이지만, 실제적인 율법폐기론 또는 은혜를 주장하면서도 무법하게 사는 것은 더욱 나쁜 것이다(롬6:1,2). 실제적인 율법폐기론자들은 스스로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들의 악한 열매들로 그들의 그릇됨을 증명한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

 

성도의 견인의 외적인 표지를 나타내는 교회에도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없는 위선자가 있다. <벨직 신앙고백서>는 참된 표지를 이렇게 말한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고도 참된 구주로 영접하는 것.

2 죄를 피하는 것.

3 의를 따르는 것.

4 참되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5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것.

6 육체와 육체의 행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

7 연약을 이겨내는 것.

8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죽음과 고난과 순종 안에서 피난처를 구하는 것.

 

교회에서는 경건하게 보이지만 사실상 진리를 떠난 데마와 같은 사람도 있다. 그들은 구원에 관하여 그리스도와 전혀 참되게 연합되어 있지 않았음을 드러낸다(딤후4:10).

 

죄는 참된 신자의 영혼을 천국에서 끌어내리지는 못하더라도 신자의 영혼에서 천국을 끌어내릴 것이다. 스펄전,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지키실 것이라는 사실은 영광스러운 진리이다. 그러나 죄가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언어도단적인 생각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불손종하면서 보증과 확신을 즐길 수 없다. 존 길,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끝까지 보존될 것을 믿으면서도 마치 보전되지 않을 것처럼 죄를 탐닉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연약과 용서를 위해 갈보리 십자가로 항상 피해야 할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여전히 중대한 문제이다.

 

웨스트민스터 종교 회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안소니 버기스, “둔감하고 게으르며 태만한 생활보다 당신의 영혼을 더 어둡게 만드는 것은 없다.” 만일 보증은 확고하게 남아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순종은 머뭇거린다면, 그 신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위대한 특권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영적으로 게으르고 나태한 자가 될 뿐이다.

 

배교는 분명히 보증을 파괴한다. 의심과 두려움은 새로운 보증을 추구하도록 자극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새롭게 경주하도록 만드는 자기 점검과 회개와 믿음의 행위를 사용한다. 토마스 슈라이너와 아델 케인데이, “주님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려 하면서 보증과 확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경주의 중간 지점에서 달리기를 그만 두면서도 심판에게 그들이 여전히 경주 결과에 대한 상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묻는 사람과 같다. 우리의 믿음의 보증은 우리가 상을 받기 위해 끝까지 인내하면서 경주를 계속할 때 비로소 강해지는 것이다.”

 

타락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성경 본문들은 성도의 배교를 확증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오히려 그 말씀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언약의 계시 안에서 인내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배교를 막고 위험한 악의 무리로부터 지키시기 위해 심각한 권고를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를 통해 죄의 고속도로로부터 우리를 지키시고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배교와 타락에 대해 경고하신다. 만일 우리가 선을 넘어서 죄에 빠진다면, 우리가 배교의 고속도로를 달리기 전에 하나님의 부성적인 시선과 징계하시는 손이 우리를 회개와 용서로 이끄실 것이다.

 

제임스 러셀 로웰의 찬송시,

“잘 보이지 않는 뒤에 계시고

어둠 가운데 서 계시지만

하나님은 위에서 자신의 백성을 모두 다 지켜보고 계신다.”

 

커트 다니엘, “개혁주의 견인 교리는 거듭난 영혼이 인생의 시험을 통과하며 인내하고 믿고 회개하게 되는 교리이다. 그는 미끄러지고 타락하며, 때로는 나쁜 습관을 키우고, 의심과 싸우지만,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처음 시작했던 것처럼 -- 계속해서 인내하게 된다. 모든 신자들이 미끄러지고 죄에 빠질 수도 있지만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가 처음 회심할 때처럼 지금도 믿음과 회개를 주시며, 천국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믿음과 회개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

 

- 조엘 비키, 『칼빈주의』, pp 224-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