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오웬

존 오웬 신학의 현대적 의의와 적용

새벽지기1 2016. 5. 24. 21:56


청교도 신학의 현대적 적용: 존 오웬의 신학사상과 실천목회

1. 퓨리턴 절정기의 갈등구조

한국교회는 잉글랜드 퓨리턴들의 신앙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데, 검소하고 성실하게 살았던 깨끗한 신앙양심의 소유자가 되려는 순수함을 본받고자 함이요, 대부분의 한국 장로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여 같은 신앙을 물려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정통신앙의 핵심을 가늠하는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전 세계 칼빈주의 교회의 표준이 되고 있다. 여기에서 거론된 청교도들의 핵심적인 주제는 16세기 유럽 종교개혁 신학의 구체적 적용이자, 영국교회와 정치와의 관계 속에 얽혀있는 문제들이었다. 교회를 순수하고 청결하게 세우는 일에 관심을 가졌던 그들에게 제일 핵심적인 문제는 정치권력의 시녀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확신하면서 투쟁한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그리고 이런 신앙고백서의 작성에 있어서 각 파의 대표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갈등을 빚고 합의하기 어려운 주제들이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그러나 지도자였던 죤 오웬 (John Owen, 1616-1683)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이런 갈등이 많이 해소되어 나갔다.

퓨리턴 신학의 최대 정점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세부적이며 구체적인 사안을 다루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한 사람의 신학사상을 중심으로 그 시대의 신학의 핵심을 이해하며, 바른 신학의 적용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청교도 신학의 정점을 제시하고 있으며, 가장 탁월한 저술을 많이 발표한 인물은 단연 존 오웬이다. 그는 잉글랜드 퓨리턴 지도자 가운데서 가장 많은 주제를 다룬 근면하고 총명한 신학자로 손꼽히는 바, 17세기 영국 퓨리턴 중에서 새무얼 러터포드, 리챠드 백스터와 토마스 굳윈 등과 동시대 인물로서 대표적인 ‘잉글랜드의 칼빈’이라고 불리어진 목회자이자 신학자였다.

특히 오웬은 타협을 거부하여 고난의 길을 자초한 목회자요, 신학자였다. 독일 히틀러 통치시대에 나치즘은 종교를 가장 배척하고 경멸했다. 히틀러는 자신들의 인기를 위해서 때로는 루터파 지도자들과 헬라 정교회 대표자들을 초대하여 국민들에게 선전하기도 했다. 이를 거부한 사람들은 모두 감옥에서 고생하거나 추방되었다. 히틀러 암살모의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서 서거한 본 훼퍼와 바르멘 선언을 주도한 혐의로 쫒겨난 칼 바르트가 지금까지 절대적으로 높이 추앙을 받는 것은 고난의 길을 가면서도 교회의 신념을 지켰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에서도 주기철 목사와 수많은 순교자들, 출옥 성도들이 존경을 받고 있는데, 그들은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신사참배를 국가에 대한 예의라고 타협하는 시대풍조에서도 신앙의 지조와 순수한 양심을 지키다가 순교하거나 고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2002년에 들어와서 한국 기독교장로회의 갱신운동을 주도하는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선배이자 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인 조선신학교를 세운 지도자들의 신사참배를 뒤늦게나마 회개하자는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오웬의 시대에 영국 퓨리턴 내부에서 신학적 갈등이 빚어진 것은 교회정치제도에 관한 견해 차이가 심각해졌기 때문이요, 후기 퓨리턴이즘의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일어나는 혼란된 정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퓨리턴들이 국가교회 체제와 싸울 때에는 너무나 부패하고 타락한 영국 성공교회의 문제점이 한심하기 이를 데 없어서 국민들의 지지와 열렬한 성원을 받았다. 성공회는 오랜 귀족 사회에 적합한 체제였으며, 이는 평민들과 하층 서민들의 종교가 아니었다. 이점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로마 가톨릭을 배척하게 된 이유와 다를바 없었다.

2. 청교도 정신: 고상한 학문과 청결한 양심

청교도 신학의 절정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다. 여기에 참여한 많은 신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존 오웬이다. 그는 헨리 오웬의 둘째 아들이자, 할아버지 때부터 벌써 명문으로 널리 알려진 신앙인이었고, 외가 쪽 할아버지 루이스 오웬 등은 웨일즈 지방의 퓨리탄들이었다. 할아버지 험프리 오웬에게는 열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가장 막내였던 헨리 오웬을 신앙적으로 잘 양육하여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한 훌륭한 목회자로 성장하게 하였다. 그러한 가문에서 에서 하루에 네 시간 만 잠을 자면서 너무나 열심히 공부하여서 훗날 건강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성경 언어를 망라하여 라틴어와 고전어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고, 학사와 석사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많은 독서와 탐구능력을 길렀다. 곧바로 학위를 받은 후, 대학의 설교자로 부름을 받아서 대학에 남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아마도 리챠드 백스터와 만났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오웬의 2년 선배로서 리챠드 십스(Richard Sibbs)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훗날 절친한 동료가 된 토마스 굳윈과 함께, 오웬은 옥스퍼드 대학교로부터 명예 신학박사 (doctor of divinity) 학위를 수여 받았다.

그러나, 당시 대학의 행정자들을 지배하고 있던 대주교 윌리엄 로드 (William Laud) 가 로마 가톨릭에서 내려온 온갖 미신적인 장식과 가톨릭적인 의식을 강요하면서, 거기에다가 새로운 수리를 하면서 온갖 장식을 고치고, 새 동상을 세우자는 고압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퓨리턴들의 분위기는 반발하여는 기운이 감돌자, 젊은 오웬은 가장 앞장서서 이러한 정치 목사의 행태에 비판을 가하고 강력히 거부하는 운동을 전개한 나머지, 학교의 설교목사직과 강사직에서 쫒겨 나고 말았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로부터 퓨리턴들은 ‘신성의 특권’과 ‘고상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 행동이라거나, 마땅히 거부해야할 인간의 명령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부해 오고 있었다. 화형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리들리(Ridley)와 라티머 (Latimer) 목사를 높이 추앙해 왔던 것이다. 대주교 로드는 상하 구조의 국가체제를 따르는 ‘고교회’ (High church)주의자였다.

3. 교회의 정치체제와 칼빈주의 신학

오웬은 당시에 새롭게 전개되는 정치적인 양상을 매우 주의 깊게 간여하고, 때로는 고언을 아끼지 않았던 의회파의 개혁진영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따라서 그의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서 마치 귀족처럼 누릴 수 있는 종교적 특권과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는 모든 특전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오웬은 기본적으로 장로교회 제도를 지지하는 목회자였지만, 논쟁이 있을 때마다 점점 회중교회 제도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당시 국가교회체제로 묶어놓으려는 성공회의 입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상을 모아서 「목사들과 지도자들의 의무」라는 책으로 펴냈다.

오웬이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1646년 의회에서 설교하게 되면서 부터다. 이날 오웬은 자신의 회중교회적인 의지를 강하게 선포하였다. 오웬의 이날 설교는 이미 자신의 교회정치관을 잘 드러낸 저술 「교회정치에 대한 사상들」(Thoughts on Church Government)속에 포함되어 출간되었다. 1646년까지 에섹지방의 포드햄에서 살면서 결혼도 하고, 후에 열한 명의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에섹지방의 코게살 장로교회에서 청빙을 받았지만 회중교회를 개척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리챠드 백스터와 존 호른 (John Horne) 같은 탁월한 지도자들이 존 오웬과의 갈등을 생각해 보자. 코게샬 (Coggeshall)에서 회중교회 목회를 하던 1648년, 오웬은 백스터와 논쟁을 하게 되는 데, 그의 저술이 상당히 반율법주의 경향을 담고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아주 흔하게 벌어지던 논쟁이 바로 반율법주의 논쟁이다. 오웬은 salus electorum, sanguis Jesu을 발표하였다.

오웬은 일찍이 당대의 소장학자로서 네델란드에서 벌어진 논쟁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1642년 「알미니안주의의 해부」(The Display of Arminianism)을 작성하여 런던에서 다음 해에 출간하여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을 세우고 알미니안주의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주력하였다. 페어팍스와의 친교를 갖게 되었는데, 개혁파들이 클로체스터 지역을 포위하고 있을 때였다. 오웬은 급하게 편지를 보내서 절대로 종교가 다르다고해서 핍박을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1648년 챨스 1세 국왕이 의회파에 의해서 살인자요, 폭군이라는 선고를 받고 처형된 바로 그 다음 날, 의회에서 설교자로 초빙을 받아 매우 인상깊은 설교로 감동을 주었다. 예레미야 15장 19-20절을 본문으로 하여,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의해서 격려를 받는 의로운 열정” (Righteous Zeal Encouraged by Divine Protection)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전날의 사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은 채, 남용과 과용과 불법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정의를 선포한 것이다. 특히 종교의 잘못이나 실수는 사회의 안정을 해치지 않는 한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세상의 권세와 국가의 권력이 종교의 영역을 침범하여서는 안된다는 신념이 담겨있다. 물론 세상을 어지럽히고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세속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 마땅하다. 이러한 원칙론은 일찍이 스위스 북부 쮜리히의 종교개혁자 쯔빙글리에게서도 발견되는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설교가 계기가 되어서 올리버 크롬웰과 만나게 되었고,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의회정치를 거부하여 크롬웰과 전투를 할 때에 군목을 참가하여 설교하였다. 아일랜드 전투에도 역시 크롬웰을 지지하여 함께 동행하였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서 1651년 의회파가 승리한 후에 하원의 투표에 의해서 장로교회 지도자였던 레이놀즈 박사를 제치고 옥스퍼드 대학교의 ‘그리스도의 교회’ (Christ's church) 교수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오웬의 탁월한 행정력은 눈부신 업적을 남겨놓았으니, 최고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대학을 맡기고 경건과 신앙심의 고취는 물론, 일반 교육수준을 크게 높이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많은 인재들이 큰 감동을 받고 배출되었다. 1652년 부총장이 되었고, 다음해 영국해군이 화란의 함대를 무찌르고 드리는 추수감사 예배시에 의회에서 설교하였다. 1658년까지 이 영향력있는 자리에서 많은 설교와 저술을 발표하였다. 그는 종교 자유와 관용을 강조하였다. 유대인들을 다루는 일에 관한 회의에도 참가하였고, 신학적으로는 삼위일체를 왜곡한 쏘씨니언주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론이 만족설을 약화시키는 입장에 서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배척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크롬웰에게 백성의 보호자 (protercorship)라는 이름의 대관식을 수여하는 일에 반대하여 청교도 주류 진영을 떠나고 만다. 1658년 사보이에서 독립교회 지도자들의 모임을 주선하고, 신앙고백서를 따로 작성하고 오웬이 서문을 썼다.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의 죽음으로 인해서 오웬의 생애는 급작스런 변화를 겪게 되는데, 부총장의 자리는 다시 레이놀즈 박사로 교체되었다. 신대륙 뉴잉글랜드에서 장로교회가 회중교회를 핍박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를 격렬하게 항의하였고, 하바드대학교의 총장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에도 이를 지적하면서 거부하였다. 더구나 오웬의 철저한 비타협적 자세와 다른 독립주의자들의 입장으로 인해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당대 잉글랜드에서 교회를 장악하고 있던 인물들은 거의 다 칼빈주의자들이었고, 그들은 장로교회 제도를 바꾸게 하거나 근본적으로 수정하도록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훗날 챨스 2세가 다시 등장하게 되자, 청교도들이 다시 박해를 받게 되는 어려운 상황이 재현되자, 1673년 리챠드 백스터의 제안으로 장로교회와 독립교회가 연합하자는 운동에 오웬은 적극 찬성하였다. 백스터는 그동안 오웬의 비타협적 독립교회 제도에 철저히 반대하여 오던 지도자였다. 오웬은 가톨릭식으로 상하관계가 형성되는 교회의 교구제도에 극렬히 반대하였다. 한 교구 내에는 그 지역을 담당하는 하나의 교회만을 세우되, 이를 노회 단위로 모이게 하는 일에도 반대한 것이다. 이에 관한 많은 설교 원고와 강좌 원고가 남아있다. 개신교 진영의 교회들이 연합하는 일은 매우 절실하였던 과제였고 공적인 일에 항상 관여하여 왔던 그는 즉각적으로 환영하며 참여하였다. 하지만, 1571년 의회는 비국교도들에게 관용을 허용치 않는다고 발표하여 고난과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오웬 신학의 현대적 적용

철저한 비타협적 원칙논자였던 오웬의 학문과 지도력과 분석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특히 그가 국교도들과 장로교회로부터 동시에 배척을 당하면서도 종교의 이름으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시의 어려움을 감당하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는 훗날에 옥스퍼드 대학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감시를 당하였다. 통일된 소속 교단에 익숙한 한국교회에게는 회중교회의 관습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듯 하다. 주일성수에 관한 오웬의 글은 리챠드 백스터나 다른 청교도들의 글에 찬동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는 평안과 안식의 하루라고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교회의 뜰 안에서 이러한 축복을 누리도록 철책을 쳐 놓은 규정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규정을 지키듯이 억매여서는 안 되며, 육체적인 의무 조항을 준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강조하였다.

오웬은 정치와 실천의 영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지도자였다. 이러한 영향력의 확대가 오늘날에도 절실히 필요하다. 좀더 한국교회의 목소리를 전세계를 향해서 제시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한국인들의 정서와 정치의식을 반영하는 한국 교회와 정부와의 관계, 그리고 미국에서 오랜 전통 속에서 형성된 정치와 종교의 분리안은 때때로 많은 갈등과 충돌을 빚게 하고 있다. 그동안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된 것들은 진화론에 대한 기독교 학교의 강의, 낙태, 동성연애, 공립학교에서 기독교 신자인 학생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일, 노방전도의 자유에 대한 제재조치 등등인 바,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공적인 행사장에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다.

내용출처 : 김재성교수 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교수.

서울대대학원(문학석사), 미국 칼빈신학대학원(신학석사),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