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2기 생애: 옥스퍼드 시절: 1651년(35세)-1660년(44세)
오웬은 35세(1651년)에 옥스퍼드의 그리스도 교회 대학에서 학장으로서의 업무를 시작했다. 강의와 설교이외에 업무도 무척이나 많았다. 1652년에는 부총장으로 임명되었다. 크롬웰의 특별한 신임덕분이었다. 그러나 오웬은 1657년(41세) 크롬웰이 왕이 되려고 하는 움직임에 반대했다. 개인적인 친분관계보다는 자신의 신학적, 정치적 소신을 더 중시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49년부터 1956년까지 약 17년간의 오웬과 크롬웰 사이의 따뜻한 우정의 관계는 끝나고 오웬은 옥스퍼드의 부총장직을 사임했다. 이후 크롬웰이 1958년 죽을 때까지 개인적 접촉이 없었다. 1660년(44세)에는 찰스 2세의 왕정복고로 인해 학장직까지 사임했다. 약 10년간의 오웬의 옥스퍼드 대학의 교육자로서의 기간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오웬은 이 기간동안 알미니안주의에 물들어 있던 옥스퍼드를 청교도적 분위기의 학교로 개혁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오웬은 이 기간동안 엄청난 격무 속에서도 11권이나 되는 저서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이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저서로는 다음과 같은 3권의 책이 있다. 「죄죽임에 대하여(On the Mortification of Sin)」(1656), (2)「하나님과의 교제(On Communion with God 」(1657),(3) 「유혹의 본질(Of the Nature and Power of Temptation)」 (1658). 특히 「죄죽임」과 「유혹의 본질」과 같은 저서들은 먼저 옥스퍼드의 십대 학생들에게 먼저 설교되었던 것들이 나중에 출판된 것이다. 참으로 놀랍다. 당시 십대들에게 그런 설교를 하고, 십대들이 그런 설교를 이해하고 있다니! 우리 시대 중고등부에 설교되는 내용들과 비교해보라. 아니 신학생들에게 설교되는 내용들과 비교해보라. 이러한 하나의 단면만 가지고도 청교도 시대와 우리 시대의 영적 수준의 격차를 짐작할 수 있다.
3. 제3기: 옥스퍼드 은퇴이후 임종까지:1661년(45세)-1883년(67세)
목회자서의 삶
1660년 이후 23년 동안 오웬의 삶은 크게 목회자, 회중파 교회의 지도자, 저술가로서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1660-1662년에는 스태드햄프턴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매주일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662년-1667년 동안은 여기저기 거처를 옮기면서 살았다. 1667년 관용에 대한 청원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판단하여 정부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또한 1669-1670년 리차드 백스터와 함께 비순응주의자들의 연합에 대한 토론을 하기도 했다. 1672년에는 관용이 베풀어진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왕에게 감사의 글을 쓰기도 했다. 오웬은 40여명의 작은 교회를 목회하다 1673년 조셉 카릴이 죽고 난후, 약 136명 정도의 성도들이 있던 교회와 합쳤다. 교회를 합친후 57세(1673)에서 67세(1683)까지 약 10년 동안 3명의 부목사들의 도움을 차례로 받으면서 목회했다. 이 기간중 설교했던 많은 내용 가운데 소수만이 인쇄되어 지금 그의 전집에 남아 있다. 오웬의 설교들이 유실되지 않고 모두 지금까지 남아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남아있는 오웬의 글이 신학적으로 아주 깊이가 있으면서도 언제나 목회적이었던 것은 이처럼 박해와 어려움가운데서도 신실하게 목회지를 이탈하지 않고 목회자로서의 삶을 산 덕분이라 할 수 있다.
회중파교회의 지도자
옥스퍼드의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오웬은 회중파 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회중파 교회의 목회자들을 직접대화와 서신을 통해서 도왔다. 비록 장로파 교회보다 수는 적었지만 회중파 교회가 지탱될 수 있었던 것은 오웬같은 훌륭한 지도자의 영향이 컸었다고 볼 수 있다. 1662년 대추방이후 오웬은 그동안의 정치적 지위와 공직시 맺어놓았던 인간관계로 인해 감옥에 가거나 하는 극단적 핍박을 받지는 않았다. 다른 동시대의 유명한 청교도였던 백스터와 번연은 감옥에도 갔고, 경제적으로도 어렸웠다는 점과 크게 대조된다. 또한 오웬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이러한 입장에 있으면서 오웬은 어려움에 처한 동료들을 위한 노력을 많이 했다. 특히 오웬은 번연의 석방을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1676년 번연이 출소했을 때, 번연의 천로역정을 출판업자에게 소개해주어 발간되도록 도왔다. 오늘날 우리에게 청교도 문헌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로 알려져 있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의 탄생 뒤에는 이처럼 오웬의 숨은 공헌이 있었다. 번연은 학력이나 신분으로 볼 때 오웬과는 전혀 비교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오웬은 참으로 번연의 설교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한 번은 찰스 2세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 나의 모든 학식과 번연의 설교를 기꺼이 바꿀 용의가 있습니다.” 오웬의 이 말을 통해서 우리는 당대 존 번연의 설교가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엿볼 수 있는 반면 또한 오웬의 겸손과 오웬의 신학은 결코 상아탑 신학이 아니라 성도들의 영적 유익을 위한 교회적, 목회적 신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국 최고의 신학 저술가와 경건작가
오웬은 1660년 이후 교직생활과 정치적인 생활에서 물러난 후 목회를 하면서 시간적인 여유를 이전보다 더 많이 가질 수가 있게 되었다. 23년간의 그의 마지막 생애동안 17세기 유럽 개신교의 가장 위대한 신학작품이라 불리는 중요한 저작들이 생산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아마도 계속적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직무를 감당했다면 오늘날 오웬이 남긴 중요한 저서들이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웬 만이 아니라 1662년의 대추방 이후에 실제적으로 청교도의 가장 중요한 문헌들이 쏟아져 나오다시피 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절대다수의 청교도 문헌들이 바로 이 대추방 이후에 쓰여진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오웬과 추방된 동료들은 고통스러운 긴 기간을 보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 기간은 후시대에 큰 영향을 미칠 중요한 저작들이 생산된 기간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 에드워즈의 생애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에드워즈의 마지막 생애 말년 7년동안 예기치 않은 교회의 해고사건으로 인해서 인디안 지역의 선교사로서 생활하는 동안 노댐프턴 교회의 정규적인 설교와 목회사역에서 벗어난 에드워즈가 에드워즈 생애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걸작 4권을 쓰게되었다. 만일 에드워즈에게도 이러한 기간이 없었다면 오늘날 에드워즈의 가장 중요한 4권의 작품, 아니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4권의 신학작품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로이드 존스 또한 질병으로 68세에 자신의 정규적인 웨스트민스트 교회의 설교사역을 스스로 마감한 후 이후 약 13년 동안의 생애말년에 로마서 강해와 에베소서 강해라는 강해 설교의 걸작을 만들 수가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랍다. 오웬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기간이 교회적으로 가장 풍성한 열매를 남기는 기간이 된 것이다. 존 오웬이 마지막 23년의 기간동안 쓴 수많은 저서들을 장르별로 혹은 주제별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존 오웬의 저작들은 그의 전집에 (1)교리적인 책 (2)실제적인 책 (3)논쟁적인 책 (4)성경 강해의 크게 4부분으로 나누어져 수록되어 있다.
교리적 저서
먼저 이 시기의 교리적인 중요한 작품으로 삼위일체론에 대해 Vindication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1669), 성령론에 대해 Discourse on the Holy Spirit (1674),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Prayer (1682), 구원론에 대해 The Reason of Faith (1677),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1677), The Ways and Means of Understanding the Mind of God (1678), 기독론에 대해 Christologia, or the Person of Christ (1679), Meditations on the Glory of Christ, part 1 (1684), Meditations on the Glory of Christ, part 2 (1691) 같은 뛰어난 저작들이 있다. 이중에서도 특히 성령론은 존 오웬이 오웬 이전의 누구보다도 더 방대하고 체계적으로 저술한 작품으로서 아주 중요한 저술이다.
실천적 저서들
또한 이 시기의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저술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on Indwelling Sin (1668), Exposition of the 130th Psalm (1668), on the Nature of Apostasy (1676), on Spiritual-mindedness (1681), Of the Dominion of Sin and Grace (1688)
성경강해서
또한 성경강해서로서는 히브리서에 대한 4권의 철저한 주석이 있다.
Exposition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vol 1 (1668)
Exposition of the Hebrews, vol 2 (1674)
Exposition of the Hebrews, vol 3 (1680)
Exposition of the Hebrews, vol 4 (1684)
논쟁적 저서들
또한 수많은 논쟁적인 저술들이 있다. 이것은 오웬이 살았던 시대가 특히 진리에 대한 공격이 심한 시기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어느 시대나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외부의 박해라기 보다는 교회내부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거짓 가르침, 잘못된 교리, 이단의 문제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뿐만아니라 신약 서신서의 저자들 대부분이 바로 이러한 교회내의 이단적 가르침과 투쟁했다는 점은. 교회의 싸움은 곧 진리의 싸움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초대교회의 어거스틴, 종교개혁기의 루터와 칼빈, 청교도 시대의 존 오웬, 18세기 미국 교회의 조나단 에드워즈, 19세기의 스펄전, 20세기의 로이드 존스 이 모든 영적 거인들 중 자신의 생애에 진리에 대한 싸움, 믿음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들은 모두 다 용감한 진리의 전사들이었다. 오웬이 당대 잘못된 이단 사조와 불건전한 가르침에 대항하여 논쟁적인 성격을 가지고 쓴 글들을 연도별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A Primer for Children (1660)
Theologoumena Pantodapa (1661)
Animadversions on Fiat Lux (1662)
A Discourse on Liturgies l662)
Vindication of the Animadversions (1664)
Indulgence God Toleration Considered (1667)
A Peace-offering, or Plea for Indulgence (1667)
Brief Instruction in the Worship of God: a Catechism (1667)
Tenth and Innocence Vindicated (1669)
On the Divine Institution of the Lord's Day (1671)
On Evangelical Love (1672)
Vindication of the Work on Communion (1674)
How we may Bring our Hearts to Bear Reproof (1674)
The Church of Rome no Safe Guide (1679)
On Union among Protestants (1680)
Vindication of the Nonconformists (1680)
Defence of the Vindication (1681)
Inquiry into Evangelical Churches (1681)
Humble Testimony (1681)
The Chamber of Imagery (1682)
An Account of the Protestant Religion (1663)
True Nature of a Gospel Church (1689)
임종과 소천
오웬은 생애 말년의 23년 기간을 이처럼 신실한 목회자로, 회중파 교회의 지도자로, 위대한 저술가로 활동하다가 1683년 67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나라로 갔다. 존 오웬은 67년의 삶은 오웬 당대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이후에도 오늘날까지 그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남아있다.
존 오웬의 한계와 우리가 배울점
존 오웬은 17세기 혹은 교회사 전체로 볼 때 가장 위대한 신학자에 속한다. 그러나 역시 17세기라는 시대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존 오웬의 한계는 곧 17세기의 신학이 가지는 한계이기도 했다. 존 오웬의 전기작가인 피터툰은 존 오웬의 신학이 가지는 한계를 4가지로 지적한다. 첫째, 존 오웬의 방법론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교육에 기초하고 있는데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오웬이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 당대 사람들처럼 아주 길고 자세하게 다룬다. 셋째, 히브리서의 저자 문제 등에 있어서 바울을 주장하는 등 오늘날 취하고 있지 않은 입장들을 취한다. 넷째, 구약 해석에 있어서 오늘날 사용하지 않는 해석법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정부의 의무( 즉 영국 의회등)를 구약시대의 왕으로부터 직접 취해서 온다. 피터 툰의 이러한 지적처럼 때로 자기가 살던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 앞으로 올 세대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시대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론 이런 점에서 존 오웬은 시대의 아들임에 분명하다. 오웬이 사용하는 성경해석방식이나 학문적 태도, 문체등은 분명 17세기 영국적 상황이라는 한계가 있다. 특히 오웬은 17세기 청교도 저자들중에서도 가장 만연체에 속하는 글들을 쓴 작가로서 유명하다. 때로 존 오웬은 종종 주제에서 벗어나는 논의들을 할 때도 많다. 그러나 오늘 21세기의 관점으로만 이것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오늘 21세기의 신학도 마찬가지로 시대의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신학도 전 시대의 신학과 비교해보면 약점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웬의 약점은 역으로 오웬의 장점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우리 시대의 약점을 치료해주는 교정제가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오웬과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성경연구의 깊이다. 오웬의 저서들을 읽어보면 하나의 주제에 대해 이토록 성경을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는가?하는 경이로움을 감출 수 없다. 마치 하나의 주제를 연구하는 자세는 산의 뿌리까지 파내려가서라도 금을 캐내려고하는 광부를 연상케 한다. 오웬에 비하면 오늘 대다수의 우리들의 성경연구는 자세는 너무나 가벼움을 느낀다.
존 파이퍼의 존 오웬 배우기
오웬에게는 시대를 초월해서 우리가 깊이 배울 점이 많이 있다. 현재 미국 복음주의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존 파이퍼는 존 오웬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거룩함’이라고 말한다. 파이퍼는 오웬이 거룩을 추구한 방법으로부터 4가지를 배우고자 한다.
첫째, 오웬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자신을 겸비하게 했다.
둘째, 오웬의 거룩한 삶은 성경공부와 신학공부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목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성경공부와 신학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수단이기도 하다. 즉 거룩한 삶은 바른 지식의 목적일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지식을 얻는 수단이기도 하다.
셋째, 오웬은 열정적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개인적 교제를 추구했다.
넷째, 오웬은 자신이 경험한 진리만을 공적으로 가르치기를 원했다. 그래서 오웬은 자신의 삶과 설교가 일치했다.
파이퍼가 오웬의 거룩추구로부터 추출해낸 4가지 사실은 모두 우리의 경건 생활에 있어서 소중한 것들임에 틀림 없다. 특히 파이퍼가 지적한 두 번째 내용은 아주 새롭다. 우리는 흔히 신학공부의 목적이 거룩해 지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잊어 버린채 지적인 충족만을 위해 공부하기가 쉽다. 또한 신학지식을 더 많이 얻기 위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까를 생각하기가 쉽다. 그래서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에서 신학정보 사냥꾼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지식, 신학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히 책을 읽고, 정보획득을 통해서만 취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건한 삶,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자체가 가장 중요한 성경공부의 방법, 신학공부의 방법도 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우리는 목회자요 설교자로서 흔히 이런 체험을 하게 된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려고 열심히 추구하는 동안에는 성경의 모든 내용이 다 이해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경건 생활에 게을리 하며, 거룩한 삶에 실패할 때 성경의 어떤 구절도 열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의 삶 자체가 바로 하나님을 깊이 아는 삶이었고, 거룩을 추구하는 삶이었기 때문에 거룩을 추구하는 삶 없이 성경은 닫힌 책이 되는 것이다.
존 오웬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존 오웬을 깊이 알기 위해서는 먼저 존 오웬의 전기를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나온 존 오웬의 전기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18세기(1720-21)에 나온 두 개의 조그만 전기는 주로 ‘비국교도적인 존 오웬’의 관점에서 기록했다. 이것은 주로 왕정복고 이후 존 오웬의 저술과 설교와 목회사역의 관점에서 존 오웬을 본 것이다. 국가와 크롬웰 통치기간동안의 국가와 교회의 정치문제에 관여한 오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단지 오웬을 탁월한 칼빈주의 신학자요, 신학적, 경건적, 성경적 저술가로서만 부각시킨 것이다. 둘째, 1820년에 회중파교회 목회자인 윌리엄 옴(1787-1830)에 의한 최초의 종합적인 존 오웬 전기가 쓰여졌다. 그러나 로버트 할데인의 복음주의 칼빈주의에 깊에 영향받아 오웬의 신학과 기본적으로는 동의하지만 비판적인 시각을 많이 가지고 있다. 또한 존 오웬의 스타일과 문체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가장 위대한 경건주의 작가가 1649-1660년사이에 독립파의 그늘진 활동에 깊이 관여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했다. 따라서 오웬의 이러한 참여를 부정하거나 최소하시키려고 했다. 또한 오웬의 자료를 주제별 분류없이 그냥 모아 놓았다는 약점이 있다. 셋째, 1850년에 쓰여진 앤드루 톰슨의 전기가 있다. 이 톰슨의 전기는 굴드가 편집한 존 오웬 전집16권(1850-53)의 1권에 실려있다. 간결하고 읽기 쉽게 쓰여져있고, 비국교도적인 존 오웬, 신학자로서의 존 오웬을 비평없이 아주 잘 그려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넷째, 1904년 31살 때 제임스 모펫이 쓴 전기(1904)는 아주 존 오웬에 대해 비평적이다. 다섯째, 1971년 피터 툰의 오웬에 대한 결정판 전기가 나왔다. 툰의 전기는 존 오웬을 종합적으로 묘사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전기로서, 오웬을 목회자, 군목, 교육자, 교회정치가, 정치가. 신학자로서 종합적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피터 툰은 오웬의 인간적인 모습에 대한 것은 남아있는 자료의 부족으로 거의 불가능하다고 고백한다.
오웬의 수없이 많은 책들중에서 어떤 책부터 보면 좋은가? 이에 대해서는 20세기에 존 오웬에 대해 가장 정통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패커의 독서목록이 도움을 준다. 팩커는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 바로 존 오웬이라고 말한다. 팩커는 오웬을 알기 위해 우선적으로 읽어야 할 필독서로 다음의 9권의 추천한다.
1.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1657)
2.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1684, 1691)
3. 성령론(1674)
4.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해야 하는 원인과 방법과 수단(1678)
5. 보혜사이신 성령의 사역(1693)
6. 죄와 유혹
7. 영적 지식(1681)
8. 시편 130(1668)
9. 복음적 교회의 진정한 본질(1689)
이 중에서 4, 5, 9번을 제외한 오웬의 책들이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요약본들이다. 요약본은 읽기 쉽다는 장점은 있지만 요약자들이 오웬의 원본에서 축약할 때, 임의적으로 축약했기 때문에 항목을 나누는데 있어서 배열이 많지 않는 곳이 아주 많이 있다. 그래서 요약본만 가지고 오웬의 글을 읽을 때, 오웬의 저서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구조와 논리를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도 그나마 방대하고 난해한 오웬의 저서를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크게 고마워해야 하리라! 앞으로 오웬의 저서들이 실력있는 번역자들에 의해 정확하게 완역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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