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웬에 대한 평가
존 오웬은 우리에게 그리 친숙한 인물은 아니다. 오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존 오웬은 결코 무시되거나 잊혀서는 안되는 교회사의 인물이다. 왜 그런가? 먼저 존 오웬의 인물됨과 사상에 대한 몇 사람의 증언을 들어보면 금방 그 이유를 알수 있다. 회중교회주의자였던 암브로즈 반즈는 오웬을 “영국의 칼빈‘이라 불렀고, 영국성공회의 안토니 우드는 ’독립파(회중파)의 대들보와 족장‘이라 불렀다. 또한 20세기 회중주의자였던 에릭 러틀리는 ”가장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라고 불렀으며, 1965년 베너오브트루스사에서 복간한 존 오웬 전집 16권의 표지날개에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고 말했다. 오웬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전기를 저술했던 피터툰은 오웬을 “영국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개신교 신학자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오웬 당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여러 사람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적어도 오웬은 17세기 영국 청교도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다. 영국 청교도의 황태자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오웬의 인물됨을 영국 청교도의 중심인물로만 한정지어서는 안된다. 존 오웬은 17세기 영국만이 아니라 유럽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개혁신학자였다. 17세기 유럽 신학계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인물로 불러 손색이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존 오웬은 교회사 전체를 통해서 볼 때도 어거스틴, 루터와 칼빈 등을 잇는 위대한 영적 거인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이다.
20세기의 주도적 신학자 제임스 팩커가 오웬에게서 받은 영향
존 오웬의 영향력은 오웬이 살던 당대에만 미쳤던 것이 아니라 20세기에까지 미쳤다. 20세기 영국의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르네쌍스의 선두주자중의 하나이며, 20세기 복음주의의 탁월한 지도자중의 하나인 제임스 팩커의 삶과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이 바로 존 오웬이었다. 팩커는 신앙적인 혼란에 빠져있던 옥스퍼드 대학시절 도서관 사서를 하다가 존 오웬의 전집을 발견하게 된다. 이후 존 오웬의 전집을 읽으면서 완전히 새로운 신앙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후 팩커는 20세기의 마지막 청교도로서 약 40여년 동안 청교도를 연구하면서, 청교도 연구를 바탕으로 한 개혁신학의 대중화에 매진해오고 있다. 팩커는 자신이 오웬에게서 받은 영향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 있는 죽음의 죽음을 읽었다. 이 책은 1953년 나에게 대속에 대한 끊임없는 성경의 증언은 제한속죄라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그리하여 나는 원래 철저한 칼빈주의자였지만 더욱 철저한 칼빈주의자가 되었다. 또 오웬의 ‘성령론’은 나로 하여금 중생과 회심을 이야기하는 방법에 대해 현재 내가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이해를 주었다. 또 ‘복음적 교회의 본질’, ‘영적 은사에 대한 설교’, ‘배교의 본질’등은 지역교회 생활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나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다른 어떤 책들보다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신학교 교수가 된 어느 친구는 1950년대에 항상 나를 오웬주의자라고 부르곤 했다. 나는 그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
오웬의 생애 구분
이제 오웬의 생애로 눈을 돌려보기로 하자. 오웬은 67년간(1616-1683)의 지상 생애를 살았다. 우리는 오웬의 생애를 크게 3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제1기는 출생(1616)에서부터 옥스퍼드 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1650)로서 교육을 마치고 목회자와 크롬웰 군대의 군목으로 지내던 시기다. 제2기는 35세에 옥스퍼드 대학의 학장으로 취임(1651)후부터 44세에 왕정복고로 대학의 학장을 퇴임(1660)하기 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육자로서의 약10년의 기간이다. 그리고 마지막 제3기는 옥스퍼드 학장직을 물러나 추방기간을 보내다가 신교 자유령 이후 런던의 교회에서 목회자로서, 회중파 교회의 지도자로서, 위대한 저서들을 양산했던 저술가로서의 시기다.
I. 제1기 오웬의 생애: 1616-1650(35세까지)
오웬이 출생한 17세기 영국의 정치적 상황
오웬은 1616년 영국에서 출생했다. 영국의 17세기는 프랑스 대혁명, 러시아 대혁명과 함께 세계사의 3대 혁명으로 불리는 영국 혁명을 겪었던 정치적으로 가장 격동의 파란만장한 세기였다. 1642-46년의 왕당파와 의회파의 내전이 의회파의 승리로 끝나면서 1649년 찰스1세가 처형당하고 영국은 절대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다. 그러나 공화국은 기틀을 잡지 못하고 다시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689년의 명예혁명으로 입헌군주국이 되어 이후의 서구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게 되었다. 존 오웬은 평생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청교도 혁명의 성공과 올리버 크롬웰과의 친분으로 옥스퍼드대학의 부총장이 되는 등 공적 삶의 한가운데 있다가 또한 왕조복구로 인한 혁명의 실패로 1662년 청교도 대추방령이 내려졌을 때 2,000여명의 다른 청교도 목사와 같이 박해의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오웬이 살던 17세기의 영국은 특히 정치와 종교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정치적인 소용돌이는 곧 종교적인 소용돌이를 의미했다. 정치적인 격변과 종교적인 격변이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었다.
청교도 운동의 마지막 3세대
정치적으로 영국 혁명의 시대였던 17세기는 종교적으로 위대한 청교도의 시대이기도 했다. 청교도 시대의 근원은 헨리 8세가 카토릭으로부터 영국교회를 분리하고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삼는 종교개혁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직접적인 청교도 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시대(15558-1603)중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청교도 운동은 청교도 혁명의 시작으로 왕정폐지와 더불어 영국 국교회를 폐지하고, 의회를 청교도가 장악했던 1640-1660년의 공화국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가 1662년 청교도 대추방이 이루어지면서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후 청교도 운동은 국교회 밖의 비국교도라는 이름으로 그 사상과 영향은 이후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존 오웬은 튜더왕조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기간에 있었던 전반기 청교도 운동의 발아기(1558-1603)를 지나 스튜어트 왕조 초기(1603-1662)의 후반기 청교도 운동의 개화기에 태어나서 청교도 운동의 절정기에 활동하고 청교도 운동의 완성자로 살다갔다. 청교도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크게 3세대로 구분해 볼 수 있다.(에롤 헐스 89) 1세대 청교도는 엘리자베스 치하(1558-1603)에서 활동했던 청교도들로서 리챠드 그린함, 리차드 로저스, 로랜스 칼더톤, 월리함 퍼킨스, 에드워즈 더링(1540-1576), 존 도드(1550-1645), 아더 힐더샘(1563-1631), 존 로저스(1566-1636), 등을 들수 있다. 2세대 청교도들은 17세기의 전반부에 활동하다가 1662년 대추방전에 죽은 사람들이다. 이 기간동안 가장 중요한 사건은 웨스트민스트회의(1643-47)로서 청교도 신학의 액기스를 모아놓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과 대. 소요리문답을 만들어낸 시대다.
2세대 청교도들은 이 웨스트민스트 회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사람들로서 로버트 볼턴(1572-1631), 월리암 구지(1575-1653), 리차드 십스(1577-1635), 제레미아 버로우(1599-1646), 등을 들 수 있다. 청교도 3세대들은 1662년 대추방 이후까지 활동했던 사람들로서 청교도 시대의 마지막 주자들이자 대부분 전집을 남기고 죽은 저술 세대들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토마스 굳윈(1600-1679), 월리암 브릿지(1600-1670), 헨리 제시(1601-1663), 존 오웬(1616-1683), 리차드 백스터(1615-1691), 존 번연(1628-1688), 존 플라벨(1627-1691), 한스드 크놀즈(1599-1691), 헨리 제시( 토마스 맨톤(1620-1677), 토마스 왓슨(?1620-?1686), 스테반 차르녹(1628-1680), 존 호웨(1630-1705)등을 들 수 있다. 존 오웬은 이러한 청교도 3세대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동시대에 태어난 리챠드 백스터와 존 번연과 함께 청교도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청교도들 중 우리에게 전집을 남긴 저술가들의 대부분이 제 3기에 활동했다는 것은 청교도적 사상의 완성이 바로 3세대에 와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또는 이러한 청교도 운동에 있어서 크게 2번의 전환점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1580년대에 시작된 교회정치 개혁운동으로서의 청교도 운동이 한계에 부딪히고, 청교도에 대한 국교회의 핍박이 거세지면서 1590년 대부터 17세기 초기 30여년 동안 청교도 운동은 ‘율법주의적 청교도’운동, 혹은 안식일 준수, 개인경건, 윤리적 실천, 가장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종교’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1640년대 혁명의 시기를 전후해서 ‘복음주의적 청교도 영성’을 띠는 시기로 돌아섰다. 즉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연합과 교제를 감정적으로 뜨겁게 추구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즉 청교의 시작이 교회의 제도나 조직에 대한 정치적 개혁의 성향을 띠다가 개인과 가정의 윤리적 변화중심의 성향으로 바뀌어졌고, 다시 정치적인 격변과 불안정한 삶 속에서 개인의 감정적 위로와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감정적, 정서적 열정과 사랑을 강조하는 보다 체험적인 경향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에 의한다면 청교도 1기의 전환기에 활동한 사람들이 청교도 1세대들이고, 청교도 2기에 활동한 사람들은 주로 2기와 3기 청교도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청교도 운동은 퍼킨스로 대변되는 1세대부터 종교개혁신학과 개인적 구원의 체험이 결합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러한 2번의 변화를 겪으면서 청교도 신학은 더욱 지성과 감정이 종합된, 개인윤리와 교회윤리와 교회윤리가 결합된 종합적인 면을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철저한 개혁신학에 바탕을 두면서도 철저한 개인의 감정과 실천을 강조하는 점에 있다 하겠다. 존 오웬은 청교도 시대의 후반, 제3세대, 청교도 제2기 변화까지를 모두 경험하고 이 모든 것을 가장 완전하게 결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존 오웬에게서는 철저한 개혁신학과 철저한 체험적 신앙이 잘 결합되어 있다,
선배들의 어깨를 딛고 거인된 사람들
존 오웬이 청교도 시대의 후기에 태어나 청교도 신학을 완성했다는 것은 교부신학의 완성자 어거스틴이 니케아공의회 이후에 태어난 교부시대의 마지막에 태어났다는 것, 종교개혁 신학의 완성자 칼빈이 루터와 쯔빙글리의 뒤를 이어 종교개혁 2세대라는 것 등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새로운 운동과 사상의 총정리는 운동의 첫단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앞선 세대가 씨를 뿌려놓으면 그 다음세대에 가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또한 18세기 미국 최고의 청교도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가 영국 청교들의 미국 이주 약100년후, 약 3세대에 태어난 인물이라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은 16세기 개혁신학, 17세기 청교도 신학과 더불어 18세기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경험철학에 대한 이해와 18세기 시작된 부흥의 경험 등이 모두 어우려져서 종합적이며 창조적으로 완성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국교회는 이제 선교 100주년을 넘어섰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지난 100년 이상의 기간을 지나오면서 한국교회는 수적으로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영적 성숙은 아주 어린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설교와 신학도 아주 미숙한 상태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도 성도들의 영적인 삶의 수준과 신학과 설교의 성숙이 이루어질 때가 되었다. 물론 시간이 지난다고 자동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침체하면 깊은 영적인 진리들이 다시 땅에 뭍혀 버리고 만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제 신학과 설교의 깊이에 있어서 1-2세대와는 다른 3-4세대의 깊이를 가질 때가 되었다. 한국교회 개혁신학의 예를 들면 제1세대의 박형룡에 이어 제2세대의 박윤선을 거쳐 이제 3세대 신학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교회 100년이 지난 지금 세계신학계에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신학자들도 생겨나고, 세계의 유명 출판사에서 그들의 박사학위 논문이 인쇄되는 인물들도 생겨나고 있다. 설교의 깊이도 마찬가지다. 해방이후 한국의 대형교회를 일구어내었던 1세대와 그 이후 70-80년대의 도시화, 아파트화, 강남화의 분위기를 타고 대형교회를 이루어 지금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는 세대를 이어 설교의 깊이에 있어 영향력을 드러낼 3-4세대의 설교자들이 나올만한 시대가 되었다.
경건한 목사 가정에서 성장한 오웬
오웬은 4남 1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오웬의 아버지는 옥스퍼드를 졸업했고, 옥스퍼드에서 5마일 떨어진 스태드함에서 목회를 했던 목사였다. 따라서 오웬은 어린시절 목사관에서 청교적인 분위기속에서 즉 매일의 가정예배, 엄격한 주일 준수, 개인적 내적 신앙의 추구,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에 대한 존중함등으로 양육받았다. 오웬은 그의 저서속에서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고 있지 않지만 단 하나 그의 아버지에 대한 간단한 언급을 이렇게 남긴바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내 아버지의 돌봄 속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평생토록 비국교도였고, 주님의 포도원에서 아주 수고를 많이 했다.” 우리는 짧막한 이 한마디를 통해서 오웬의 신앙과 신학이 어릴 때 가정과 교회에서 배운 것으로부터 형성되었음을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평생 오웬이 추구했던 모든 신학적 주제는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들이었다. 단지 더 깊고 철저하게 오웬이 발전시킨 것들이 많이 있을 뿐이었다. 18세기 영적 거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아버지도 하바드 석사까지 나온 목사였고, 에드워즈의 할아버지는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가장 훌륭하고 유명한 목사였다. 또한 19세기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비국교도 목사였다. 물론 어릴 때 목회자의 집에서 자라야만 후에 훌륭한 목회자와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웬, 에드워즈, 스펄전 등은 목회자의 가정에서 자라남으로써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참으로 좋은 가정 환경에서 자랐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녀의 신앙생활에 가장 좋은 환경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경건한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녀에게 물려줄 유산 중에 신앙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좋은 학군을 찾아다니는 크리스찬 학부모, 외국에 조기 교육을 보내기까지 극성인 크리스찬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가장 좋은 교육환경이 바로 자신의 신앙과 신앙적인 가정분위기라는 것을 깊이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학창시절 무섭게 공부한 오웬:1628년(12세)-1637년(19세)
오웬은 12살에(1628년) 1340년 설립된 옥스퍼드의 퀸즈 대학에 입학하여, 16살에 문학사학위(B.A.)를 마쳤다. 이 당시 공부한 과목들은 문법, 수사학, 논리학, 수학, 그리스어, 음악 등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3년간 개인교수를 통하여 그리스어, 대수, 천문학, 자연철학, 형이상학, 도덕철학, 히브리어등을 배우고 19살에(1635년) 문학석사학위(M.A.)를 받았다. 오웬은 이 기간동안 거의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무섭게 공부했다. 오웬은 지식에 대한 왕성한 배움의 의욕을 가지고 이러한 고대언어와 문학과 철학에 대한 기초를 튼튼히 쌓았다. 오웬이 10대때 이렇게 충분히 연마한 지식은 후에 오웬의 여러 저작들에서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그리고 오웬은 예비목사로 안수를 받은후 신학사(B.D)학위를 위해 7년간의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광범위하게 영국과 대륙의 저자들을 읽을 기회를 가졌고, 개신교내의 은혜와 예정에 대한 논쟁만이 아니라 카토릭과 개신교 사이의 모든 논쟁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했다. 그러나 한편 너무 열심히 공부를 해서 이것이 건강을 약화시켰다. 말년에 오웬은 너무 건강이 좋지 않자 젊을 때 공부를 좀 희생하더라도 건강을 지켰어야 했다고 후회를 하기도 했다. 후회할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한 오웬! 너무나 공부를 안해서 건강한 우리!
개인가정교사와 가정 목사:1637(21세)-1642(26세)
1630년대의 퀸즈대학은 전혀 청교도 분위기가 아니었고, 그리고 1636년 국교도 의식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극에 달하자 청교도적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던 오웬은 옥스퍼드에 더 이상 있지 못하고 고심 끝에 1637런던의 한 근교에 있는 부유한 가정에서 처음에는 로버트 경의 집에서 후에는 러브레스 경의 집에서 가정 목사를 하면서 자녀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를 하면서 신학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나 1642년 왕과 의회와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모든 사람들은 어느 한 편에 소속되어야 했다. 러브레스 경이 왕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존 오웬은 의회를 지지하는 입장이어서 이 집에서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오웬은 기도하면서 인도를 구하던 중 친척집이 있는 런던으로 오게 되었다.
오랜 기간의 고민 끝에 예기치 않게 찾아온 회심(1942년: 26세)
오웬은 21살 때부터 26살 때까지 5년동안 비록 청교도적인 삶과 예배에 헌신하고는 있었지만 1642년 말 이전에는 분명히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중생한 사람인지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청교도 목사들이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살피며 확인하라고 강조했던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마침내 오웬이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놀라운 회심의 날이 찾아왔다. 오웬의 회심사건은 전혀 예기치 않게 일어났다. 런던에 오고 난 후 오웬은 어느날 자기의 사촌과 함께 런던의 유명한 장로교 목사 에드먼드 켈러미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 그러나 마침 켈러미 목사는 설교를 하지 않았고, 무명의 설교자가 설교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촌은 급히 다른 교회로 갔으나 오웬은 그대로 머물렀다. 설교자가 선택한 본문은 마8:26절로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두려워하느냐?‘였다. 이 설교를 듣는중 오웬은 놀랍게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20세대 초반의 5년간의 고투 끝에 얻은 회심은 오웬의 신학을 아주 경험적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오웬의 신학이 사변적으로 흐르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거룩과 성도들의 거룩을 추구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구원에 대한 깊은 확신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다. 회심은 성도로서의 경험적 입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어떻게 회심했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앞으로의 신앙방향에 많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본다. 회심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후 성도로서의 삶 자체도 가볍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심을 깊이 있게 경험한 사람은 성도로서의 삶 자체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오웬의 이러한 회심체험은 30년 후에 오웬의 ’성령론‘이라는 대작으로 열매를 맺게된다. 전혀 예기치 않은 설교자로부터 설교를 듣다가 회심을 경험한 오웬의 이러한 회심 경험은 200년 후의 스펄젼의 회심경험과 가장 비슷하다. 스펄젼 또한 오랜 기간동안 죄의 문제로 고민하다 17세 때 어느 교회에 갔다가 사45:22절을 본문으로 한 무명의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회심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방문은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할 때 오는 수가 많은 법이다. 회심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해서라는 사실을 이것보다 더 잘보여주는 것은 없다.
알미니안 주의를 논박하는 첫번째 저서출간(1642년: 26세)
오웬은 26살 때인 1642년 3월 ‘알미니안주의 정체를 폭로함’이라는 첫 저서를 출간함으로써 주목받는 학자로서의 삶을 했다. 알미니우스 논쟁은 1610년 화란에서 알미니우스의 ‘Remonstrance항론(1610)'이 출간된 이후 1618년의 도르트회의를 통한 칼빈주의 5대 교리 확정에서 절정에 올랐고, 영국이 이러한 알미니안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알미니안주의 공격과 방어가 오웬 시대의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오웬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기본적으로 알미나안 논쟁에 있어서 다섯 가지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인간의 의지가 죄에 대해 자유로운가 아니면 속박되어 있는가? 2.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받을 소수의 사람들을 미리 예정하셨는가? 3.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인가? 소수의 사람만을 위한 것인가? 4.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저항할 수 있는가? 없는가?
5.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안전한가? 아니면 탈락될 수도 있는가? 이것은 구원론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에 대한 질문들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달라지게 된다. 물론 이러한 구원에 대한 이해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주권,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성령의 역할, 인간의 본성 등의 전반적인 모든 내용이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오웬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러한 5가지 알미니안 논쟁 중에서 주로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문제에 집중했다. 오웬은 이 문제에 대해 화란에서 일어난 광범위한 논쟁기록을 읽고 성경을 연구한 후 인간의 의지는 죄에 속박되어 있으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으로 즉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만 된다는 정통 칼빈주의 진리를 확실하게 변호했다. 피터 툰은 존 오웬의 이 논문이 비록 대작은 아니지만 분명하고도 자세하고 칼빈주의의 은혜교리를 옹호한 중요한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오웬은 평생동안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를 굳게 믿었고 또한 변호했다.
목회사역과 결혼 1643년(27살)-1649년(33살) 6년 정도의 초기목회
오웬은 27살인 1643년 6월 16일 에섹스의 포드햄이라는 조그만 교구에서 목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오웬은 28살(1644)에 매리 룰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했다. 이후 31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면서 11자녀를 낳았다. 이중 10명의 자녀들이 모두 어릴 때 죽었고, 한 명의 딸만 제대로 장성했다가 오웬보다 먼저 죽었다. 오웬은 약 30년의 결혼생활동안 평균 3년마다 1명씩의 가족들이 죽는 경험을 해야 했다. 그리고 부인과 모든 자식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오웬의 삶과 저술들이 깊은 신학적 깊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천적이며 목회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오웬이 살았던 시대자체의 고통과 혼란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고난이 신학자를 만든다’고 갈파한 루터의 말처럼 시대적인 환경만이 아니라 오웬 자신의 개인적 삶의 역경과 고난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목회자로서의 오웬의 모습은 1644년 목회기간 중에 ‘목회자와 성도의 의무’라는 책을 썼으며 또한 교인들을 위해 1645년 교리문답서를 쓰기도 한 것에서 엿볼 수 있다. 특히 ‘목회자와 성도의 구별된 의무’라는 책에서 오웬은 온건한 장로교정치 제도를 옹호하고 있었다. 감독주의의 독재와 회중주의의 민주는 둘 다 양극단이라고 보았다. 이는 오웬의 생애에서 중요한 내용인데 이후 오웬은 회중주의 정치관의 대변자로서 활약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웬은 1646년에 포드햄의 근처에 있는 코게셀레 있는 피터 교회의 청빙을 받아 목회지를 옮겼다. 이곳은 오바댜 세드윅이 사역하다가 성바울 교회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공백중이었는데 이웃마을에 설교를 잘하는 젊은이에 대한 소식을 듣고 존 오웬을 청빙했던 것이다.
유명한 의회 초청 설교자
장기의회는 1643년 2월부터 매월 마지막 수요일을 금식의 날로 정해서 기도와 설교를 듣는날로 정해놓고 매월 규칙적으로 지켜오고 있었다. 이날은 의회만이 아니라 전 지역에서 지키도록 명령되었다. 금식의 날은 종교적인 목적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하원에서 설교된 설교들은 인쇄되어 의회 지도자들의 홍보 매채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것은 찰스 왕에 비해 의회파의 입장을 더 분명하게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금식의 날은 7년 동안 지속되었다. 1646년 4월 금식의 날 오웬은 하원의 초청으로 처음 의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이때 오웬의 나이 30살이었다. 오웬은 이 설교로 인해 크게 인정을 받게 되고 이후 14년간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된다. 또한 오웬은 1648년 패어팩스 장군의 군대에서 설교를 함으로써 고위층 인사들과 많은 교분을 가질 기회를 얻게 되었다. 특히 올리버 크롬웰과의 만남과 우정은 오웬의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33살때인 1649년 1월 30일 수요일, 찰스 1세의 처형 다음날 의회에서 설교를 했고, 4월에 또 의회에서 설교를 했다. 오웬은 이 설교로 크롬웰과의 관계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올리버 크롬웰의 군목생활, 의회 담당 설교자:1649.7-1651.3 약 1년 6개월 정도
올리버 크롬웰과 존 오웬이 처음 만난 날은 아마 1949년 4월 20일, 런던에 있는 페어팩스 장군의 집에서 였을 것이다. 오웬이 크롬웰과의 직접 만남이 시작된 일화는 다음과 같다. 오웬이 패어팩스 장군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려고 그의 집에 기다리고 있던 중, 크롬웰과 그의 부하들이 나타났다. 크롬웰이 전날의 설교자를 알아보고 먼저 이렇게 말했다.
크롬웰; “선생, 당신과 꼭 친해지고 싶군요”
오웬: “그것은 제게 영광입니다.”
크롬웰: “우리는 조만간 곧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웬에게 자신이 곧 아일랜드 정복하려 갈 것인데 군목으로 동참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오웬이 자신의 목회사역 때문에 당장에 답변하지는 않았다. 이후 크롬웰은 자기 동생을 오웬의 목회지로 보내어 오웬을 설득했고, 주변의 목회자들도 오웬에게 갈 것을 권유했다.
이후 오웬은 1649년 6월 7일 런던에서 수평파 진압 성공을 위한 감사의 날에 당대 최고의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토마스 굳윈과 같이 설교했다. 그리고 1949년 7월 2일 아일랜드로 가는 종군목사 인허를 의회로부터 받았다. 크롬웰 군대가 6개월 정도 아일랜드에 머무는 동안 존 오웬은 트리니티 대학과 더블린 대학과 관련된 일을 했고, 시간을 내서 1648년 자신이 쓴 ‘죽음의 죽음’이라는 책에 대해 리차드 백스터가 반박한 글에 대한 반박의 글인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스도가 지불한 값과 그리스도가 얻은 결과’에 대한 소책자를 써서 런던으로 돌아온 다음 출판했다. 1650년 2월에는 의회에서 설교를 했고 이후 의회의 공식 설교자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주일 오후 설교를 맡았다. 이로써 우리가 구분한 오웬의 제1기 생애는 끝나고 본격적인 공적 생애로 돌입하게 된다.
('목회 2000'에 실린 글입니다.)
'좋은 말씀 > 존 오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도의 견인의 의미 / 존 오웬 (0) | 2016.05.28 |
---|---|
존 오웬의 생애와 사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2) / 백금산목사 (0) | 2016.05.27 |
존 오웬 신학의 현대적 의의와 적용 (0) | 2016.05.24 |
존 오웬과 그리도의 연합 / 윤종훈 (0) | 2016.05.23 |
습성적인 탐욕에 대한 고찰 / 존 오웬 (0) | 2016.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