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스토트

[스크랩] 복음주의의 위대한 유산 존 스토트Ⅰ- 영혼을 살린 설교자 13

새벽지기1 2015. 9. 14. 22:06

 

복음주의의 위대한 유산 존 스토트Ⅰ

영혼을 살린 설교자 13
출처: 교회와신앙
2008년 11월 19일 (수) 00:00:00 권영삼 032kwon@naver.com

   

 

존 스토트(John Robert Walmsley Stott)는 현존하는 탁월한 설교가이자, 복음 전도자이며, 기독교 학자이고, 저술가다. 그는 20세기 후 반에 기독교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세계 복음주의 신앙의 대표적인 목회자로 평가받고 있다. 영국 복음주의 신앙 운동을 주도했으며, 세계복음주의협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를 창설하여 그 시대를 이끈 장본인이다.

그는 평생을 영국 런던의 한 복판에 자리한 올소울스 교회 (All Souls Church)의 설교자로 사역했다. 특히, UCCF(한국의 IVF)와 국제복음주의연맹(IFES․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인 복음주의 학생에 깊이 관여했으며, 세계복음화를 위한 복음주의 선교 운동 로잔회의(Lausanne Congress, 1974)의 산파역을 맡아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을 입안했다. 존 스토트는 설교와 강연을 통해 복음에 대한 충실한 증거를 하였으며, 무엇보다 여러 기독교 교리에 대한 도전에 대해 올바른 응전을 하도록 애썼다.

지난 1999년, 필자는 존 스토트를 만난 기회가 있었다. 동양권에서 최초로 열리게 된 IFES 의 세계총회인 ‘World Assembly 99’ 주강사로 선정돼 내한한 그를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이 대회에서 한국의 영적 성장과 부흥을 격려하며, 지나간 역사와 다가오는 새 천년을 앞두고 이 시대야말로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가장 확고한 복음정신으로 무장할 것을 거듭 강조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한 가지 있다. 그가 새를 좋아한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새를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물었다.

“나는 단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평서문이 아닌 강한 명령문으로 ‘새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영향도 큽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시골의 숲으로 가서 ‘입은 다물고 귀를 크게 열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명령과 아버지의 훈련으로 나는 어릴 때부터 새를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로 다니면서 각 나라의 새를 관찰하고 배웁니다.”

필자가 그를 주목하는 것은 비단 그의 사역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저서『현대 교회와 설교』에서 제시한 ‘다리 놓기’ 설교 이론을 통해 신학도와 목회자들에게 많은 영감과 도전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평생을 그의 사역지에서 성경적인 설교에 헌신해온 설교가이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 전 세계의 격변기에 태어나다
존 스토트의 아버지 아놀드 스토트(Arnold Stott)는 명성이 높은 의사였다. 영국의 전문 의료진이 모여 있는 할리(Harley Street) 가에 진찰실을 두고 있었다. 아놀드 스토트는 교육과 계몽주의 신봉자였으며 인도주의자였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만한 신랄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언어 사용도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과학적 세속주의자요, 세심한 자연주의자였으며, 전문적인 식물학자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이런 영향을 받아 어린 존 스토트는 어린 시절부터 나비 수집에 관심을 가졌고, 조류 관찰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Timothy Dulley Smith, John R. W. Stott, p.47). 아놀드는 의사로서의 특전을 행사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가끔씩 교회에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머니 릴리 홀랜드(Lily Holland)는 정기적으로 자녀들과 함께 교회에 갔다. 그녀는 성실하고 상냥하고 이타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남편과 잘 조화를 이룬 사람이었다. 이 부부는 서로에게 헌신했고 자녀들에게도 헌신했다. 그녀도 역시도 남편처럼 강한 성품을 가진 여인이었으며 원칙에 충실했다. 하지만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 고요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홀랜드 여사는 매우 창의적이었으며 자녀들에게 손수 물건을 만들도록 가르쳤다.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여인이었으며, 그 목소리는 존 스토트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녀는 존 스토트를 데리고 여러 강연에 참석했고, 자녀가 잠자리에 들 때 기도를 가르쳤다. 존 스토트는 10대 중반까지 어머니에 의해 신앙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스토트의 부모가 결혼 초 웨스트 캔팅턴 에디슨 가에 살 당시인 1921년 4월, 존 스토트가 태어났다. 그의 위로는 조안, 로즈메리, 조이 등 세 누이들이 있었다. 그는 외아들로서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반면, 그의 바로 위 누나는 상대적으로 설움을 받고 자랐다. 존 스토트는 태어 난지 한 달 후에 할리가로 이사했다.

존 스토트가 태어난 1921년 전후의 10년은 세계사적으로 상당히 격변기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75년에 걸친 자유민주주의가 무너지면서 소련이 생겨났다. 1918년 제1차 대전이 종결되었고, 1919년에는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파시스트 당을 만들었다. 1920년에는 미국 주도의 국제연맹이 창설되었고, 1921년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영국 역시도 많은 격변을 겪는데, 1920 영국 공산당이 창당되고, 1924년에는 노동당 정부가 세워졌다. 전후 경제 불황이 닥치고 26년 총파업이 일어났다. 조금씩 종교적 세속화의 과정이 일어나면서 자유주의 사상을 필두로 전통적인 종교 관념을 침식해 들어갔다. 1930년대는 독립된 교회들이 모여 현대적 의미에서의 영국 국교회가 생겨났다. 결론적으로, 1920년대는 현대로 들어서는 하나의 출발점이었는데 그 중요한 시기에 존 스토트는 안정되고 행복한 가정에서 아동기를 보냈다.

 

새를 관찰한 오클레이 홀 시절
존 스토트는 어린 시절부터 소아과 의사가 되고 싶어 했지만, 아버지가 반대했다. 존 스토트는 1929년 만 여덟 살 반이 되던 해 글로스터셔에 있는 오클레이 홀에 진학했다. 이 과정은 그의 아버지가 다닌 사립학교 럭비에 가기 위한 예비과정이었다. 이 학교는 런던에서 160km 떨어져 있었고, 따라서 그는 어린 시절을 예비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다.

어린 시절의 기숙사 생활은 다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잘 적응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오클레이 홀은 특히 기독교적인 기초 위에 세워진 학교였다. 학교 예배당에서 들리는 예배 외에도, 하루 일과는 빅 스쿨에서의 아침 기도로 시작해서 저녁기도로 끝이 났다.

존 스토트가 기독교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친구 제라드 어빈을 통해서다. 제라드 어빈은 학교에서 30km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계로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존 스토트는 주말에 친구 집을 방문하기 좋아했고, 어빈에게서 기도와 무릎 꿇는 방법 등 신앙의 행위들을 배웠다.

오클레이 홀에서 존 스토트는 새의 관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고, 노트를 기록했으며 글과 책을 남겼다. 이 습관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오클레이 홀 학교 주위는 전원적인 곳이어서 자연과 새들을 관찰하기에 적절했다. 존 스토트는 1930년 8-9월 사이에 40개 정도의 새 관찰 목록을 기록했다.

 

럭비-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한 장소
그 후, 존 스토트는 럭비 학교에 진학했다. 럭비에서 존 스토트는 학생회장으로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 시절은 평생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감지한 시기였다. 존 스토트는 럭비 학교에 간 이후 첫 번째 학기를 제외하고 여전히 새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서 자연사학회 조류학 부문의 시험을 보고 회원이 되면서 새에 대한 관찰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자신과 두 명의 친구가 주축이 되어서 지역 사회에 선행을 행하기 위해서 ABC학회를 설립하였다. 이 학회는 사회로 복귀하려는 부랑자들을 목욕시켜주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회심을 하기 전에도 존 스토트는 이렇게 그 안에 사회적 양심이 있었다. 그것은 그 부모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정정당당한 경기 태도를 매우 중시 여겼으며 세상이 그 기준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때는 매우 격분했다.

1936년 대량 실업이 발생하면서 존 스토트는 노동자 계층과 더 많은 접촉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 존 스토트를 계속해서 기쁨을 준 것은 음악이었다. 그는 럭비 채플과 학교에서 인기 있는 바리톤 독창자였으며,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연주했다. 음악이 존 스토트의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존 스토트는 언제나 함께 했던 새외에도 방학동안 많은 것을 즐겼다. 테니스와 롤러 스케이트와 수영을 즐겼다. 그는 또한 방학이면 부모들과 함께 낚시도 즐겼다. 존 스토트는 37년까지 새에 대한 관찰을 계속했다. 럭비 학교생활 37년쯤에는 캠브리지에 입학할 정도의 자격을 갖출 만큼 학업에도 열심이었다.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생명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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