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의 위대한 유산 존 스토트Ⅱ | ||||
영혼을 살린 설교자 13 | ||||
출처: 교회와신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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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는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과 그가 다닌 학교의 종교교육 덕분에 하나님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결정적으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이룬 것은 1938년, 그가 16세가 되던 해였다.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선배 존 브리저였다. 존 브리저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는 이 모임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마음 밖에서 문을 두드리심을 깨달았다. 그리고 주님께 완전한 통제권을 드리면서 자신을 인도해 달라고 간청하게 되었다. 존 스토트는 이 회심 사건이 자신의 삶의 방향과 질을 바꾸어 놓았다고 고백했다. 이때부터 그는 성경을 새로운 관점에서 읽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확실한 성경관을 갖고 성경적 설교를 하는 기초가 되었다.
전쟁을 거부한 비폭력 평화주의자 럭비학교 재학시절, 전쟁이 발발했다. 그 당시, 존 스토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전쟁에 나가 싸우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느꼈다. 다른 젊은이들이 징집서약을 하면서 군대에 지원했지만 그는 지원하지 않았다. 그 대신, 국교회 목사로 안수받기로 결단했다. 당시 규정에 따르면, 안수 후보생들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서 법정에 출두하지 않고도 군 복무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 규정은 본인이 사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규정이다. 존 스토트는 이 규정을 사용하여 징집서약을 거부했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들의 이런 결정으로 인해, 존 스토트와 아버지는 상당기간 동안 불편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들이 입대하지 않는 것을 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첫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신실하기 위해, 둘째는 전후에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들의 군 복무가 면제되듯이 성직 수임 후보자들은 전후 영혼의 질병 치유를 위해 군 복무를 피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군 입대를 거부하면 평화주의자가 되는 것인가?’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원치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철저한 비폭력 평화주의를 추구했다.
성경 중심, 전도 중심, 기도 중심으로의 체질 변화 존 스토트는 안수 받은 지 이주 후 베레가의 성 베드로 교회에서 첫 교구 설교를 한다. 1956넌 중반부터는 존 스토트 스타트의 설교 중 하나를 요약해서 정기적으로 싣기 시작했다. 그는 대체로 긴 설교를 하였다. 이 무렵 그는 책을 저술하는 것을 시작했으며 출판 사역의 중요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1947년 언 쇼우 스미스는 병으로 목회를 그만두게 되었고 1950년 3월 그는 세상을 떠났다. 올 소울즈 교회는 왕실 소유였으므로 6월 12일 국광으로부터 담임목사 승인을 받고 9월 26일 정식으로 그는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는 소울즈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헌신하였는데, 이 무렵부터 그는 복음 전도에 정력을 쏟았다. 그는 자신의 교구를 넘어 더 넓은 사역지를 내다보고 있었다. 1950년, 그의 친구 모리스 우드는 헤럴드 우드의 성베드로 교회에서 선교대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의 지병으로 인해 존 스토트에게 선교대회 주말모임을 인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존 스토트는 만사를 제쳐놓고 이 일에 헌신했다. 이때부터 올소울즈 교회는 복음이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다음해 11월에는 런던 시내에 있는 한 교구가 다른 교구를 대상으로 회중선교를 시도하였다. 그 무렵, 존 스토트는 빌리 그래함을 만나면서 전도에 열정을 쏟게 된다. 빌리 그래함이 주축이 된 헤링게이 전도집회 중 존 스토트는 복음주의동맹위원회 회원으로서 전도집회의 실행위원으로 섬겼다. 그는 헤링게이 집회 때 빌리 그래함에게 쏟아진 비난에 대해서 변호하는 글을 쓸 만큼 그의 사역을 후원하고 지지했다. 이처럼 존 스토트가 담임목사가 된 첫 십년 동안은 해마다 복음주의 지도자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올 소울즈 담임목사로서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올 소울즈 교회는 그의 담임기간 동안, 제도나 조직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교회로 만들어 갔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반 위에서 기도 중심, 문서 중심, 설교 중심의 교회로 체질을 변화시켰다.
대학생 선교대회 강사 존 스토트에게 이 캠브리지 선교대회는 향후 그가 참여한 수많은 학생 선교대회의 기본 틀이 되었다. 이후 그는 25년 넘게 정기적으로 영국과 북미,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세계 곳곳에 있는 대학에 가서 선교대회 강사로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복음주의자’ 이 논쟁에서 존 스토트는 빌리 그래함을 근본주의자로 몰아붙이는 사람들이 가진 근본주의의 정의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근본주의가 성경적인 모든 비평을 거부하고 기계적 영감을 주장하며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보는 부정적인 견해로 정의한다면, 빌리 그래함은 결코 근본주의자가 아님을 밝혔다. 그리고 빌리 그래함이야말로 복음주의자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권위를 인정하며, 교회에 대한 성경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자임을 강조했다. 결국 그가 말하려는 핵심은 복음주의자들이 지성을 억압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앞에 겸손히 지성을 굴복시키는 자들이라고 변호했다. 이를 볼 때 존 스토트는 복음주의자 이면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노선을 걷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탁월한 신앙 저술가 그곳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가 좋아하는 새를 관찰 할 수 있는 전원이었다. 존 스토트가 은근한 자연주의자이자, 경이로운 창조질서를 바랄 볼 줄 아는 관조자의 눈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즐겼던 자연의 삶과 훅시즈의 삶 때문이다. ‘은자의 집’으로 불리는 이 집에서 존 스토트는 1990년까지 침실 겸 서재로 사용하면서 독서와 집필에 몰두했다. 지금까지 훅시즈에서 쓴 초기의 책들 중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기독교의 기본진리』다. 이 책은 1950년대 세계 곳곳에서 열린 대학선교 대회의 설교들이 기초가 된 내용이다. 존 스토트는 자신보다 20년 연상인 마틴 로이드 존즈 박사와 함께 IVF와 학생 전도사역에 동료이자 동반자로 헌신했다. 복음주의적 연합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따듯한 우정과 존경을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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