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채영삼교수 27

선거철과 교회의 품격

선거철이면, 교회에 오지 않던 손님들이 오기도 한다. 지역 유명 인사들이다. 가장 꼴불견인 것은 광고시간에 그들을 일으켜 세워, 성도들 앞에 인사시키는 것이다. 그것을 자랑으로 하는 태도이다. 우리 교회에 이런 유명인사가 왔으며, 여러분의 담임목사는 이런 유명인사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게도 뿌듯한, 그 누추하고 초라한 태도이다. 어쩌면, 우리 교회에 그런 유명 인사가 온 것이 그리 뿌듯한 성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잘못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며, 잘못 이끌고 또 잘못 따라가는 양 무리이다. 주의 양무리가 그래서는 안 된다. 주님은 한 번도 그렇게 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복음서를 샅샅이 뒤져 읽어보라. 언제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사 무리를 보고 말씀하시되, '오늘은 옥타비아누스씨가 원로회에 추..

강도(强盜)만난 강도사에게

정말 따뜻하고 존경스럽고 모범적인 지역교회 목사님들, 노회들이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간혹, 강도사 인허를 위한 서류 관계 때문에, 지역 노회의 어떤 자들이 강도사들에게 금품을 요구한다는 등의 소문을 듣는다. 헛소문이기를 바라지만, 혹여나 그런 일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류에 도장 받으려고 작은 선물을 들고 찾아 갔는데 '봉투'는 갖고 왔냐는 둥, 창세기에 야곱이 선물로 상대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걸 못 읽었냐는 둥, 신학과 신앙은 물론, 상식도 양심도 팔아버린 자들 이야기이다. 시찰회에서 도장 하나를 쥐고 그런 썩은 짓을 하는 거짓 목자들이야 주께서 심판하시리라고 굳게 믿지만, 문제는 그렇게 시작하기도 전에 상처 받는 목회후보생이다. 어린 마음에 벌써 그렇게 큰 상처를..

깨끗하지 못한 설교

어색한 설교가 있다. 웃기지 않는 개그를 뿌려대는 설교이다. 딱히 그런 개그가 설교할 본문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없는데, 그냥 관심을 집중시키려고 하는 개그이다. 어색한 설교이다. 꼭 하려면, 설교 내용과 관련이 깊은 위트 있는 이야기여야 한다. 서투른 설교도 있다. 헬라어 단어 하나를, 그 단어가 쓰인 문맥을 떠나, 헤쳐 풀어 설명하는 경우이다. 그것은 서투른 것이다. 단어 하나의 의미는 그것이 놓인 원래 문맥이 결정한다. 서투른 헬라어 단어 풀이, 한자 풀이를 설교의 중심으로 삼는 설교는 서투른 설교일 것이다. 무례한 설교도 있다. 목사라고 해서 상식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성도들 중에는 전문가들이 많다. 전문가들 앞에서, 단지 설교단에 서 있다는 이유, 목사라는 이유로 상식을 꿰..

대한민국이 ‘제사장 나라’인가?

가끔씩 대한민국은 '제사장 나라'라고 설교하는 말을 듣는다. 현대에 있어서 한 '국가'가 통째로 '제사장 나라'가 될 수가 없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요, 반성경적인 국가주의적 발상이다. 즉, 현대의 한 '국가'를 교회로서 하나님 백성과 동일시함으로써, '국가 자체'에 신성한 특권과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우상주의의 시작이다. 어쩌면 교회가 스스로를 국가라고 하는 권력과 자신을 일치시킴으로써 변질되는 과정의 시작일 수 있다. 원래 '제사장 나라'는 출애굽기 19장 6절에 있는 말씀이다(바실레이온 히에라튜마, 칠십인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열국 앞에서 '제사장 백성'으로 세웠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이 택함 받았으니까, 대한민국도 택함 받은 백성이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끝나지 않은 위안부 소녀들의 눈물

꽃다운 어린 소녀들, 13세까지 어리고 앳된 아이들을 끌어다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고문을 하고 토막을 내고....어린 소녀들을 저리도 말 못하는 짐승 이하로 취급하는 저 잔학무도(殘虐無道) 한 인간성은, 단지 정죄 받고 심판 받아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차라리 그 민족과 문화 자체가, 복음과 거룩한 영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깨닫게 한다. 일본 사람들에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누가 그들에게, 사람은 단지 무리를 지어 사는 원숭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한다. 일본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회복하도록, 저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저토록 잔혹한 치부와 고통을 끌어안고..

개인과 국가, 그리고 부끄러움영화 '동주'를 보고

영화 ‘동주’를 보았다. 토요일인데도 자리가 많이 비어있었다. 흑백에다가 다른 시대 느린 대화 때문이었을까. 참다못한 학생들이 자리를 뜨는 모습도 있었다. 비극적 시대 상황을 공감하기 어려웠던 탓도 있으리라. 영화를 보다가 ‘동주’와 ‘몽규’가 각기 ‘시’(詩)와 ‘총’(銃)으로 대변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혹은 ‘개인’과 ‘국가’로도 대변될 수 있다. 동주는 ‘시적’인 사람이고 ‘개인’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면, ‘몽규’는 ‘총’이 무엇이고 ‘국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사실, 영화의 처음은 이 둘의 대조와 대립으로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이 둘이, 즉, 시와 총이, 개인과 국가가 서로 교차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감옥에서 죽어가기 직전 마지막 심문 앞에서, 동주는 이 슬픈 시대에 시인이 되려 ..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받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종교가 아니라'는, 이 유명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선포 자체는 전혀 흠이 없습니다. 당시 창궐하던 계몽주의적이고 낙관적인 인본주의자들에게 철퇴를 내린 복음 선언입니다. 당시 교회는 인본주의에 물들어, 예수를 선생 정도로, 윤리, 도덕 교사 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세속의 물결이 교회에 넘쳐 들었을 때, 목사님은, 기독교는 윤리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의를 힘입는 은혜의 종교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맞습니다.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이 '율법의 행위'를 배척한 것처럼,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선포는, '인본주의적 기독교'를 배척한 것입니다. 두 분 모두, 그 시대에 교회를 대적한 원수들을 향해 복음의 빛을 비추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가 마주한..

반쪽 신학

‘내 안에 그 목사 있다’는 그 말이 계속 목에 걸린다. 그게 맞는 말인데, 시원치가 않다. 틀린 말이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답이 갖는 신학의 한계 때문이다. 신학을 해도 인성이 부족하고, 인격 없는 신학, 목회가 문제라는 도덕론도 해결 같지가 않다. 양들을 이끌고, 신학을 가르치는 자의 실족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를 인용하는 것,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의 신학으로 돌아가는 것이, 혹시 우리 맘은 편하게 해줄지언정, 그 죽은 소녀에게 해줄 수 있는 책임 있는 설명인지 나는 모르겠다. 안 믿는 사람도 아니고, 초신자도 아닌 분들이 극악한 범죄를 저지를 때 받는 충격을 설명하는 방식이, 그래도 우리는 ‘예수 천..

약자에 대한 배려[출처]

최근 들어 아동학대 피해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불과 5-6년 전에는 1만건 이하였던 것이, 대략 2012년부터 급증하기 시작하여 2014년에는 2배 가까이 증가해 2만 여건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다(보건복지부,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 누리집 참조). 이를 두고 부모 자신이 자신의 부모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그랬다고 하면, 그런 개인적인 이유로는 이렇듯 급증하는 아동 학대 사례를 설명하기 어렵다. 그것이 굳이 2012년 이후에 급증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타당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래도, 사회가 점점 더 각박해지고 있다는 데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경제적 요건이 나빠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정상적인 미래를 꿈꿀 수 없을 때, 그 좌절과 스트레스는 그것을 쏟을만한 약자에게 향하기 ..

‘알라’와 ‘여호와’가 같은 신?

"이슬람·기독교 화평 추구하는 선한 노력? 진리주장으로 한다는 것은 '미혹'이다" 먼저, IVP에서 이런 책이 출판되었다는 점이 유감스럽다. 검증되지 않았고, 무수한 논란이 야기될 법한 논쟁적인 책, "알라"(미로슬라브 볼프)를 기독교선교단체를 표방하는 출판사에서 펴낼 이유는 없다. 이런 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IVP가 출판했을 때 가져오는 혼돈과 파급력 때문이다. 물론, 볼프 교수가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 '정치신학적' 공존을 꾀하려 했다는 그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종교의 공존을 위해, 두 종교가 섬기는 신이 같은 신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불교와 기독교가 공존하기 위해서, 예수와 부처가 사실은 같은 대상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종교가 서로 공존한다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