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6주, 2024년 6월 30일
우리말 성경 <개역개정판> 고후 8장에는 ‘풍성한 연보’라는 표제가 달렸습니다. 연보(捐補)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려운 이를 돕는 구호금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헌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헌금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겁니다. 그게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긴 합니다. 헌금을 드릴 때는 어려운 이들을 향한 마음도 포함되어 있고, 교회 재정의 상당 부분이 그런 쪽으로 쓰이니까요. 어쨌든지 고후 8장과 9장에 걸쳐서 나오는 연보에 관한 이야기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헌금이 아니라 어려움을 당한 어떤 교회를 위한 구호금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어려움을 당한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
당시 모든 교회의 어머니 교회라 할 예루살렘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그 지역에 극심한 흉년이 반복되어서 지역 전체의 경제 형편이 어려워졌다는 사실입니다. 흉년 이야기는 로마 역사책에도 기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다른 이유는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받아서 예루살렘 교인들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주로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에 관해서 사도행전에 자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교인들이 흩어지니까 교세가 위축되고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와 인연이 있는 교회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돕자는 캠페인을 펼쳤습니다. 마게도냐 지역 교회와 아가야 지역 교회입니다. 마게도냐 지역의 대표 교회는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이고, 아가야 지역의 대표 교회는 고린도 교회입니다. 마게도냐 지역에서는 모금 운동이 정상으로 진행되었으나 고린도 교회에서는 지지부진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뜻밖에도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에 대한 배척 운동이 그 와중에 벌어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바울의 리더십을 부정하게 된 겁니다. 고린도 교회와 바울의 관계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던 상황이라서 모금 운동이 진척되긴 어려웠습니다. 바울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제자인 디도를 고린도에 보냈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말을 전달받은 뒤에 이렇게 편지를 쓰면서 구호금 문제를 다시 언급한 겁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 이야기를 먼저 거론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 앞 구절에 나오는 고후 8:2, 4, 5절을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 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권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기대한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먼저 자신들을 주님께 바치고, 우리에게 바쳤습니다.'
설교 본문 뒤로 이어지는 고후 9:2절 이하를 따르면 구호금 모금은 마게도냐보다 고린도 교회가 먼저 시작했습니다. 일찌감치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일 년 전부터 준비했다는 사실을 마게도냐 교회에 자랑한 적도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이런 열정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다고도 했습니다. 이런 열정이 식어버렸다는 걸 마게도냐 교회가 알면 크게 부끄럽지 않겠냐고도 지적합니다. 이런 말을 들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왜 마게도냐 교회를 거론하면서까지 우리를 닦달하느냐고 불평하는 신자도 있었을 것이며, 성과를 내지 못한 자신들의 태도를 부끄럽게 여기는 신자들도 있었겠지요. 훗날 바울이 모금된 구호금을 들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긴 했습니다. 그 구호금에 고린도 교회에서 모금된 돈이 포함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을 왜 그렇게 강하게 밀어붙이는 걸까요? 사실 인간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바울을 배척하는 움직임이 벌어진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사람들이 바울을 비판한 데서 시작했으니까요. 그들은 바울이 사도의 권위가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과 율법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거론했습니다. 이런 말에 여러 신자가 선동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한다면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못마땅해할 만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구호금 문제를 해결하라고 간곡하면서도 엄중하게 호소합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 지도자였던 예수의 동생 야고보와 이 문제를 약속한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야고보와 바울은 상당히 우호적이었던 것으로(갈 1:19) 보입니다. 아니면 유대 그리스도교와 이방 그리스도교가 이런 일을 계기로 하나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당시 바울의 심정과 생각을 제가 다 알지 못하나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건은 그의 분명한 신학에서 나왔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그의 교회관에서 나온 겁니다. 그의 교회관을 엿볼 수 있는 본문은 고전 12:12-27절입니다. 이를 ‘몸 교회론’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교회를 몸으로 비유했습니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라는 겁니다. ‘한 몸’ 교회론의 핵심은 모든 신자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개별 신자의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잘남과 못남도 없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적으로 하나입니다. 22절과 2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 부족한 지체가 더 귀중하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효율성과 가성비와 생산성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바울의 교회론에서는 약하고 부족한 지체를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바울은 26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이런 ‘한 몸’ 교회론에서 볼 때 지금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이 고통을 받는 중이니까 그 고통을 함께 받는 것이 바울에게는 당연한 겁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열정에서는 세계 교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데, 그 말씀대로 살아내는 데서는 별로 진실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 몸으로서의 교회라는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 말씀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생각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제가 다른 설교에서도 짚은 이야기이지만 교회의 본질을 말할 때 짚지 않을 수 없어서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겠습니다. 세계 대형교회 순위 50위 안에 들어가는 교회가 한국에 25개 내외입니다. 자랑스러워할 만합니다. 그런데 가장 가난한 교회도 한국에 있습니다. 이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교회에서는 말이 안 되는 시츄에이션입니다. 한국 신자들은 여기에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마치 높은 연봉을 받는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처럼 대형교회가 제공하는 온갖 종교적 메리트에 만족해합니다. 가난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 문제를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자책합니다.
몇 년 전부터 이중직 목사에 관한 문제가 한국교회에 불거졌습니다. 교회에서 받는 사례비로 생활할 수 없는 목사들이 평일에 돈벌이에 나서는 것을 교회법으로 허용하느냐 마냐, 하는 문제가 총회에서도 논의되었습니다. 허용 여부를 떠나서 그런 현상은 이미 광범위하게 자리를 잡긴 했습니다. 자본금 없이 몸만 건강하면 가능한 택배기사나 대리기사를 많이 하고, 학원 강사와 목수 일도 하고, 카페를 운영하기도 합니다. 이중직에 관해서 의견이 서로 나뉩니다. 바울도 자비량 선교사였으니까, 또는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으니까 교회 형편에 따라서 이중직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중직으로는 목회에 전념하기 어려우니까 허용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학생들과 젊은 목회자들에게 가장 모범적인 멘토 목회자로 인정받는 아무개 원로 목사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구설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분의 주장에 따르면 목사는 먹고사는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목회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먹고사는 문제에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 위치에서 목회했기에 그런 말을 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저는 목사가 개인의 형편에 따라서 이중직을 선택할 수는 있으나 교회법으로 허용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오늘 설교 주제와 연관해서 하나만 말씀드리면, ‘한 몸’ 교회론이 해체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5천 명 모이는 대도시 교회와 이십 명 모이는 시골교회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미자립교회 문제는 곧 부자 교회 자신의 문제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마음을 먹지 않는다는 말은 모든 교회가 ‘한 몸’이라는 성경 말씀을 허투루 듣는다는 뜻이겠지요. 개신교 신자 중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이들이 많은데, 뭘 모르고 그러는 겁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한 몸’ 교회론을 완벽하게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루터교회 전통을 이어받는 독일 교회도 비슷합니다. 독일 교회(Landeskirche)에 속한 목사들은 우리나라의 교사처럼 일종의 주(州) 정부 공무원입니다. 따라서 모든 목사가 비슷한 사례비를 받습니다. 건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한국교회가 진화론의 메커니즘인 무한 경쟁을 토대로 하여 경제적 이익을 최대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사기업체처럼 교회의 보편성과 단일성을, 즉 ‘한 몸’ 교회론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은 교회가 성경의 정신을 외면하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포획되었다는 뜻이겠지요.
남음도 없고 모자람도 없는
바울은 자신의 목회적 업적을 보이려고 지금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호금 모금에 박차를 가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명예나 업적 같은 데에서는 벗어난 사람입니다. 롬 14:8절에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구호금을 재촉하는 일은 사실 서로 불편합니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고, 바울에게는 자기 호소에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뒤로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8절을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나는 이 말을 명령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열성을 말함으로써, 여러분의 사랑도 진실하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권위적으로 명령하는 게 아닙니다. 설득하고 호소하는 겁니다.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이 구호금 모금에 ‘넘치도록’ 동참했다는 사실을 고린도 교회에 거론한 이유 역시 경쟁심을 유발하려는 게 아니라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사랑이 있었기에 마게도냐 지역 교회보다 먼저 구호금 모금에도 앞장섰습니다. 바울은 그 사랑이 아직도 진실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의 이런 말에 호응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을 믿고 같은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도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의 본질에 더 적극적이고, 어떤 사람은 현실을 살핍니다. 현실을 살피는 사람의 마음을 바울이 이렇게 대변합니다. 13-14절을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그 대신에 여러분을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형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넉넉한 살림이 그들의 궁핍을 채워주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때에, 그들이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평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넉넉하지 않은데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재정을 쓰느냐고, 우리가 힘들어질 때를 대비해서 돈을 비축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고린도 교회에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디도를 통해서 이런 상황을 전해 들었을지 모릅니다. 바울은 교사가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듯이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여러분의 생활이 넉넉할 때 그들의 궁핍을 채워주면, 여러분이 궁핍해지고 그들이 넉넉해질 때 그들이 여러분을 도와준다고 말입니다. 남는 쪽을 모자란 쪽으로 흘려보냄으로써 ‘평형’을 이루는 게 구호금 모금의 근본 목표라고 말입니다. ‘공평한 세상’을 향한 비전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비전을 구약성경의 한 예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15절이 가리키는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라는 문장은 출 16:18절의 인용입니다. 출 16장은 만나 이야기입니다.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생활하던 고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40년 동안 굶어 죽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광야에 나가서 가족 숫자대로 하루 치 만나를 거두었습니다. 만나는 입맛을 돋우지는 못하나 그런대로 생존은 가능하게 해주는 식물의 씨앗입니다. 아침에 나가서 많이 거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사람도 부족함이 없이 각자가 먹을 만큼 거두었다고 합니다. ‘남음도 없고 부족함도 없는 세상!’이라니,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이보다 더 리얼하게 표현한 문장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이런 문장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현실에서 인간 본성은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합니다. 평생 쓰고도 남을 정도로 돈을 벌었어도 소유를 향한 욕망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그게 자본주의 현실이기에 무조건 비판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요. 남음도 없고 부족함도 없는 세상을 거부하면 하나님께서 억지로라도 그런 세상으로 우리를 이끄실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와 눅 12:13-21절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 비유’가 이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무한정의 소유에 매달리다가 부지불식간 죽음을 만난다는 겁니다.
남음도 없고 모자람도 없는 공평한 세상을 향한 열망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라고 말했듯이 사랑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지가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의 삶을 사랑할 줄 아는 능력 말입니다. 사랑의 능력은 존재의 기쁨이고, 삶의 신비에 대한 외경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원초적인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최소한 일용할 양식만 주어진다면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러니까 남음도 없고 모자람도 없는 공평한 세상을 희망하고 기다리면서 각자의 일상을 생명 충만하게 살아낼 것입니다. 아멘.
'좋은 말씀 > 정용섭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시아 대망 (렘 23:1-6) / 정용섭목사 (0) | 2024.08.02 |
---|---|
선지자 ‘너머’ (막 6:14-29) / 정용섭목사 (0) | 2024.07.16 |
그는 누군가?(막 4:35-41) / 정용섭목사 (0) | 2024.07.03 |
사람의 외모와 중심 (삼상 16:1-13) / 정용섭목사 (0) | 2024.06.17 |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고후 4:13-5:1) / 정용섭목사 (0) | 2024.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