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그는 누군가?(막 4:35-41)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7. 3. 06:16

 성령강림 후 5, 2024년 6월 23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께서 출가 이후 아주 짧았던 공생애를 보내면서 주로 활동한 지역은 갈릴리 호수의 어촌 마을인 가버나움과 사해 인근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예루살렘까지 성지 순례를 다녀온 이야기가 복음서에 나옵니다. 구글 지도에서 확인해보면, 두 곳의 거리는 대략 160여 킬로미터로 천천히 걸으면 일주일 정도 걸립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 살던 몇몇 청년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제자만 해도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입니다.

 

 4:1절에 따르면 예수께서 호숫가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배에 오르셨다고 합니다. 날이 저물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기로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37절에 따르면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나서 배가 난파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 1646미터 높이의 헬몬산에서 내려오는 찬 바람과 갈릴리 호수의 따뜻한 사람이 엉켜서 갈릴리 호수에 종종 돌풍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고물, 그러니까 배 뒤편에서 잠들었습니다. 배가 요동을 쳤을 텐데도 잠에 떨어졌다고 하니, 예수께서 무척 피곤했었나 봅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나하시나이까.'

 

예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향해서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이르셨고, 그 말씀이 끝나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다고 합니다. 약간 이상하게 들리는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 초기 교회에 널리 잘 알려진 이야기로 보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드시는지요? 각자 생각이 다를 겁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당연히 이런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고, 이런 이야기는 영적인 교훈을 주기 위해서 누군가 그럴듯하게 꾸며낸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이 이야기가 뉴스에 나올 수 있는 사실 보도냐 아니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당한 내용은 사실적인 근거가 있고, 어떤 부분은 신앙적인 비약입니다. 가능한 한 이 두 가지를 구분하면 성경을 더 깊이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과 한두 번이 아니라 종종 배를 탔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제자들은 본래 직업이 어부이기도 했고,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상당한 기간 거주하셨으니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에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던 순간을 기억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돌아가신 부모님과 함께 지냈던 순간을 형제들과 함께 이야기하듯이 말입니다. 어릴 때 자다가 배가 아파서 깼는데 엄마나 아빠가 배를 만져주면서 기도하시니까 배가 편안해지고 잠도 잘 잤다는 기억 같은 거 말입니다. 제자들의 돌풍에 대한 기억이나 예수께서 배에서 잠든 일에 대한 기억도 사실에 가깝습니다. 돌풍과 거센 파도로 배가 난파의 위기에 떨어졌을 때 예수께서 기도하셨을 개연성 역시 큽니다. 기도 후에 즉시, 또는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했겠지요.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요.

 

여기까지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상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제자들의 신앙적인 비약이 발생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제압하신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믿음으로의 비약입니다. 이런 신앙적인 비약이 잘못은 아닙니다. 실제로 갈릴리 호수에서 돌풍을 만났을 때는 미처 깨우치지 못한 영적인 깊이를 뒷날 얼마든지 깨우칠 수 있는 거니까요. 중요한 관점은 돌풍과 파도가 잔잔해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훗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경험했기에 그런 고백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는 앞에서부터 읽지 말고 뒤에서부터 읽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빛에서 그의 공생애가 새롭게 조명되고 해석된 문서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의 영적인 경험으로 돌아가서 오늘 이야기를 다시 따라가겠습니다.

 

믿음 없는 제자들

 

교회는 오랫동안 배를 교회 공동체에 대한 비유로 생각했습니다. 교회에는 오늘 갈릴리 호수를 지나던 배가 돌풍과 거센 파도를 만났듯이 실제적인 어려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근본적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게 당시에는 언어도단이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앞에서 제자들이 엄청 당혹스러워했고,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정했으며, 대다수 제자는 뿔뿔이 흩어졌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뒤로 로마 제국으로부터 받은 박해와 유대교로부터 받은 냉대는 교회를 난파선의 운명에 떨어지게 했습니다. 이런 실존적인 위기에 떨어진 제자들과 당시 교인들은 우리가 죽을 지경이 된 운명을 그분께서 돌보지 않으신다.’라고 하소연하고 싶었겠지요. 그들은 답을 40절에서 찾았습니다. 돌풍과 파도가 잔잔해지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왜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무서워하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마음이 뜨끔했을 겁니다. 그들은 비슷한 말씀을 종종 들었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도 산을 옮길 수 있다거나( 17:6)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18:8)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난파 직전의 제자들만이 아니라 훗날 교회 공동체에 들어온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영적인 죽비 소리로 들렸을 겁니다. 그들도 세상 사람들처럼 크고 작은 어려움을 무서워하고, 걱정하면서 살았을 테니까요? 오늘 우리는 어떨까요?

 

믿음이 있다면 인생살이를 전혀 무서워하지도 않고, 걱정하지도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일까요? 원칙적으로만 말하면 맞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엄마나 아빠 곁에만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무서워하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어린아이의 원초적 신뢰를 모두 잃어버려서 걱정을 머리에 얹고 삽니다. 없는 걱정까지 끌어올 지경입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지 여기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삶의 방향성만은 분명하게 압니다. 인생살이의 중간에 시행착오가 생겨도, 내 믿음이 왜 이렇게 약한지 모르겠다는 순간이 있어도 방향성만 분명하면 괜찮습니다. 한밤중 비바람 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등대 불빛을 보는 거니까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삶을 완성하지는 못했으나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해서 달려간다( 3:12-14)고 했습니다. 이런 확고한 방향성은 삶의 조건이 다른 이들보다 잘 갖춰진다고 해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방향성마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사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다른 이들에 비해서 어렵게 사는데도 자기 연민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분들 말입니다. 그분들의 삶이 저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삶의 방향성이 분명해지는 데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 경험입니다. 절대적인 능력을 경험할 때만 상대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해가 솟으면 임시로 어둠을 밝혔던 초나 등불이 필요 없듯이, 그리고 노예에서 해방되면 더는 주인의 눈치를 안 봐도 되듯이 말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나선 사람처럼 예수 제자로서의 길을 구도적으로 걸어간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 마지막 구절인 41절을 그들의 심정으로 읽어보십시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예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를 평면(형식)적으로만 알았습니다. 나사렛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동네 사람으로만 알았습니다. 요셉의 아들이며, 그의 형제들을 자신들이 안다고 여겼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는 성전 마당에서 난동을 부린 인물입니다.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에게 예수는 신성을 모독한 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예수는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자였습니다. 자기들의 세상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고 파악할 수도 없는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대목에서도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5:8)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라는 존재는 똑같은데 그에 대한 경험은 이렇게 완전히 달랐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는 누군가요? 우리는 그를 얼마나 강렬하게 경험했을까요? 그런 질문을 실제로 해본 적이 있나요? 그런 질문은 목사나 신학자에게나 해당하지 자기는 그냥 설명만 들으면 되나요? 사과를 직접 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이의 설명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건 아닐까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삶을 평면적으로만 경험하면서 삽니다. 그러다 보니 이해타산에 밝고, 인정욕구에 너무 예민합니다. 세상이 제공하는 재미와 오락에만 심취합니다. 물론 우리에게 재미와 오락도 필요합니다만 거기에 과몰입하기에 삶이 겉모양으로는 화려해도 내면에서는 건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신비와 존재론적 깊이는 없거나 줄어들고 대신 인간적인 욕망만 과대 포장됩니다. 삶의 존재론적 깊이가 무엇인지를 저의 경험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616일 우리 교회 주보 표지 그림에 괭이밥꽃을 올렸습니다. 제가 괭이밥꽃을 찍을 때의 느낌이 황홀했습니다. 삶의 새로운 깊이로 들어간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괭이밥꽃은 너무 작아서 눈여겨봐야만 눈에 들어옵니다. 노란 꽃잎이 다섯 장입니다. 바람도 없는데 자꾸 흔들리는 겁니다. 조용하게 살고 싶은데 한 늙은이가 나타나서 왜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몸짓일까요? 사실은 제가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제 발밑으로 아주 미세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가 생각났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작은 세계를 통해서 세계의 신비를 재미있게 묘사한 작품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는 바람이 늘 중요한 메타포로 등장합니다. 강한 바람도 있고 약한 바람도 있습니다. 뜨거운 바람도 있고 찬 바람도 있습니다. 지구에만 있는 바람 현상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괭이밥꽃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그 순간에 대한 특별한 경험은 부자가 아니라도 가능하고, 더 나아가서 그런 경험은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로 번 5억 원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 경험으로 밥이 나오냐 술이 나오냐, 하고 따져 묻는 분이 있다면 그분과는 이런 대화를 나눌 수는 없겠지요.

 

그는 누군가?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고 제자들이 서로 말하면서 심히 두려워했다는 저 구절에 나오는 그 두려움은 공포가 아니라 절대적인 대상에 대한 지극한 외경입니다.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의 표현으로 누미누제’(거룩한 두려움) 경험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갈릴리 호수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쓰는 저자는 단순히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졌다는 사실을 신기해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라는 인물은 다 파악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놀라워하는 겁니다. 복음서는 그 사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예수는 로고스로 태초에 존재하셨다고,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예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예수는 부활의 첫 열매라고, 예수는 세상 마지막 때 다시 오실 분이라고,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고, 그리스도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고후 4:6) 말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난파선 위에서 일어난 제자들의 이런 경험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그가 누구인지를 재판정에 선 증인처럼 증언할 수 있을까요? 사는 게 바빠서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긴 합니다. 사는 게 바빠서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저런 경험의 실체가 무언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게 더 근본적인 이유일 겁니다. 그것은 사실상의 종교 경험이 없는 겁니다. 교회에 오랜 다닌 분들도 종교 경험이 없을 수 있습니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교회 생활을 모범적으로 오래 한 분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의 하나는 교회에 대한 주인 의식입니다. 교회를 자신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그런 분들은 종교 경험이 없어도 교회 생활을 다이나믹하게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교인들과 끈끈한 인간관계를 교회 생활의 동기로 삼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일도 필요하기는 하나 종교 경험 자체는 아닙니다. 나름으로 역사의식이 있다고 자부하는 교인들은 여러 가지 교회 개혁에 매달립니다. 다 좋은 것이기는 하나 종교 경험 자체는 아닙니다. 난파 위기에 처한 배 위에서 그는 누군가?’라고 서로 말하면서 두려워하던 제자들의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의 원초적 경험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가 누군가라는 질문은 의심한다는 게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알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입니다. 보십시오. 인간은 누군가요?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모를까요? 이성은 무엇이고, 감정은 무엇이며, 자아는 무엇일까요? 왜 사람과 나무는 각각 있는데, 사람이면서 나무인 존재는 없을까요? ‘나무 사람은 왜 없나요? 어떤 학자는(짐 홀트)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라는 책을 썼고, 어떤 학자는(마르쿠스 가브리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세상은 어떻게 다른가요? 우리의 궁극적인 미래는 무엇일까요? 왜 부자인데도 행복하지 않기도 하고, 가난한데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아는 건 부분적이고 궁극적인 실체는 전혀 모릅니다. 나름 전문가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학교나 세상에서 배운 몇 가지 삶의 노하우’(방법론)에만 매달려서 삽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삶의 패턴에 익숙해져서 예수가 누군지를 질문하지 않습니다. 질문할 용기가 없습니다. 무조건 믿으라는 말만 입에 달고 삽니다. 믿음의 내용이 없거나 아주 빈약한데 도대체 무엇을 믿으라는 건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교리문답 외우기 수준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예수라는 존재 자체를 구원의 깊이에서 놀라워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매 순간 새롭게 만나고 새롭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인생이 가장 궁극적인 깊이로 들어갈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를 통한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보다 더 궁극적인 삶의 깊이가 어디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