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2주, 2024년 6월 2일
정통 교회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만, 안식교회는 주일 전날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토요일이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토요일 휴일 제도가 도입되기 전에는 안식교회 신자들이 직장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토요일에 교회에 오려면 결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식교회의 정식 명칭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입니다.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크게 틀린 건 아닙니다. 본래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그 이후 상당히 오랫동안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모두 유대교 전통에 따라서 토요일을 거룩한 날로 지켰습니다. 교회가 주일에 예배드리게 된 건 로마 문명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역사적 계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로마가 유대인의 안식일 모임을 못 하게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태양신을 섬기는 날인 일요일(sunday)을 휴일로 제정한 것입니다. 기독교가 로마 문명에 적응하려면 토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게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부활이 안식일 지난 다음 날이라는 교회 전통도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일요일 예배가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를 잡은 겁니다. 안식교회는 이런 세속 문명과의 타협을 잘못이라고 판단하고 다시 안식일 예배로 돌아간 겁니다. 어느 쪽이 옳은가요? 주일을 지키는 정통 교회인가요, 토요일을 지키는 안식교회인가요?
저는 이 문제가 옳고 그름이라는 범주에 속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각각의 전통이 나름으로 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교회가 주장하듯이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구약부터 내려온 성경의 중요한 전통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유대교 안에 머물지 않고 세계 종교가 되면서 일요일을 안식일로 받아들인 전통도 소중합니다. 이제는 토요일도 휴일이 되었으니까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일요일 예배는 2천 년 동안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되었으니까 그걸 바꿀만한 불가피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한 그대로 유지하는 게 옳습니다.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가 아니라 안식일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더 중요합니다.
밀밭에서
오늘 설교 본문에서 안식일의 본질에 관한 분명한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이야기가 본문에 나옵니다. 첫째는 막 2:23-28절입니다. 안식일에 예수 일행이 밀밭 사이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림 같은 장면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몇몇 여성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겠지요. 바리새인들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 장면에서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랐습니다. 밀 이삭을 손으로 비벼서 입에 넣었겠지요. 저도 어렸을 때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밀이나 벼 이삭을 불에 올리면 뻥튀기가 됩니다. 이런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안식일에는 노동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불을 피우지도 못합니다. 음식을 만들지도 못합니다. 여행을 다니지도 못합니다. 대략 1㎞ 이상은 걷지 못합니다. 안식일인 토요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면서 회당에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도 전통을 고수하는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아주 엄격하게 지킵니다.
안식일(the Sabbath)은 십계명을 다루는 출 20:1-17절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출 20:8-11절까지가 십계명 중에서 네 번째인 안식일 규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쉬셨기에 사람도 일곱째 날인 토요일에 쉬어야 한다는 겁니다. 십계명의 다른 버전인 신명기(신 5:1-20)는 안식일을 출애굽 사건과 연결해서 설명합니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창조 영성이 안식일의 토대이고, 신명기에 따르면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이 안식일의 토대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자신들을 해방하셨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기억했습니다. 안식일은 인간 구원과 인간 해방의 영적 근원이었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최선을 다한 유대인들의 노력은 박수를 받을만합니다.
문제는 안식일 율법이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 정신은 놓치고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현상입니다. 그걸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율법을 전문적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시대와 이어지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이 율법주의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돌담장 옆에 서 있다가 담장이 무너져서 깔렸다고 합시다. 일단 그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살아있으면 돌을 치워서 구해내야 하나 죽었으면 돌을 치우지 못하고 다음 날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율법이라는 조문에 갇혀서 사는 겁니다. 그런 율법주의에 길든 바리새인들이 볼 때 예수 제자들의 행동은 기본도 모르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예수께서는 삼상 21:1절 이하에 나오는 다윗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율법이 절대적인 규범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신 다음에 안식일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경구를 남기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안식일은 일종의 그릇과 같습니다. 그릇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음식이 중요한 거지요. 물론 가능한 한 깨끗한 그릇에 밥을 담아야 한다는 원칙은 옳습니다. 그릇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세부적인 규칙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깨끗한 그릇이 없을 수 있습니다. 깨끗한 그릇을 이미 다 사용했거나 미처 준비를 못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밥을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건 그릇의 존재 이유를 모르는 겁니다. 당장 배고픈 사람에게는 더러운 그릇에라도 밥을 담아서 줘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거는 그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적당하게 타이르는 방식으로 그 상황을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남의 밭에 있는 밀 이삭을 잘라 먹으면 되겠냐고, 아무리 허기가 졌어도 조금 참았다가 끼니를 해결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이 민망할 만한 말씀만 하신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선의로 예수께 의견을 물었다면 제자들을 나무랐을지도 모릅니다. 예수의 약점을 잡으려는 그들의 속셈을 이미 아셨기에 에두르지 않고 정면으로 안식일의 본질을 언급한 겁니다. 다음 단락을 보면 그 맥락을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회당 안에서
막 3:1-6절에는 회당에서 벌어진 사건이 나옵니다. 밀밭에서 벌어진 작은 소동이 끝나고 일행이 곧장 회당 안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회당에 한쪽 손이 불구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2절에 따르면 바리새인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께서 그 사람의 장애를 고치는지를 주목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이 그대로 표현되었습니다. 상대방이 실수하고 약점이 잡히는 순간을 노리는 게 인간의 악한 본성입니다. 보통 때는 인격적인 사람들도 어느 순간에 이렇게 변할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예수께서 극히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공연히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할 일도 많고요. 큰일을 위해서는 작은 다툼은 피하는 게 지혜로운 겁니다. 회당에 들어왔으니까 시편 찬송을 부르고 기도한 뒤에 회당을 나가서 가던 길을 가면 됩니다. 장애인을 못 본 척했다고 해서 시비를 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예수께서는 그 장애인을 회당 한가운데로 불러 세웁니다. 바리새인들은 물론이고 제자들도 긴장했을 겁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4절입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안식이라는 율법에 갇혀서 살던 사람은 상상해보지 못한 질문입니다. 선과 악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살리는 일과 죽이는 일이 어떻게 다른지도 압니다. 당연히 선하게 살고 생명을 구하면서 살기 위해서라도 안식일 규정은 빈틈없이 지켜야 합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비롯한 율법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위반하는 방식으로도 선을 행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해괴한 논리로 들렸을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잠잠’했다고 합니다. 기분이 나빴겠지요. 섣불리 대답하기도 어려웠고요. 5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완악하다는 사실을 아시면,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하는 심정으로 돌아가도 되는데, 예수께서는 자신을 그들의 먹잇감으로 던지는 것처럼 행동하십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보란 듯이 팔 장애인을 고치셨습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돌이킬 수 없는 선까지 나아가신 겁니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행동입니다.
6절에 따르면 이런 소동이 벌어진 뒤에 그 현장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이 밖으로 나가서 헤롯당 사람들과 함께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고대 유대인 사회에는 여러 분파가 있었습니다. 서기관, 제사장, 열심당, 헤롯당, 바리새파, 사두개파 등등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지금 의기투합한 헤롯당은 로마 총독을 거부하고 지역 영주라 할 헤롯 안티파스를 옹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평소에 진보적인 바리새인들과 보수적인 헤롯당은 서로 통하는 게 별로 없습니다만 악한 일을 도모하는 일에서 서로 손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에 머지않아 예수께서는 산헤드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빌라도 총독에게 인계되어 로마법에 따라 십자가 처형을 당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운명이 위험에 떨어질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안식일 문제에서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금 더 멀리 내다보고 점차 세력을 얻은 다음에 세상을 크게 바꾸려면 굳이 그들과 충돌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안식의 새로운 차원
안식일 문제는 단순히 종교 형식이 아니라 생명을 얻느냐, 못 얻느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는 게, 즉 구원에 직결된다고 보았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첫 번 밀밭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둘째 회당 이야기에서는 생명을 살리는 일과 죽이는 일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 문제는 단순히 사람의 도덕성이나 됨됨이나 지성에 관계된 게 아니라 생명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관계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의 기원이 창조와 출애굽이라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창조는 생명을 얻는 일이고, 출애굽은 자유를 얻는 일입니다. 생명과 자유보다 우리의 삶에서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말은 곧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고, 인간의 자유를 확장하는 일에 마음을 모은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에는 노동을 멈춰야 합니다. 노동을 멈추면 가장 큰 혜택을 보는 집단은 평소에 노동으로 혹사당하는 이들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들과 소작농들이겠지요. 노예 주인들은 노예들을 하루라도 일을 더 시키려 했고, 지주들은 소작농들이 쉬지 않고 일해야만 겨우 먹고 살 정도로 토지세를 많이 거두려고 하겠지요. 그런 질서를 강제라도 끊어내라는 게 안식일 제도의 본질입니다.
21세기 현대사회에서도 저는 이 안식일 제도가 더 분명하게 정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옛날보다 노동 시간은 많이 줄긴 했습니다. 일요일만이 아니라 토요일도 대개는 쉽니다. 금요일까지 쉬는 회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노동의 강도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현대인들은 자본의 횡포 앞에서 쉬는 것 자체를 두려워합니다. 쉬라고 법적인 장치를 마련해도 쉬지 못합니다. 돈이 연결되어 있어서 특근과 잔업을 감수합니다. 이런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어떻게 안식일 전통의 본질을 사회 제도로 정착시킬지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여기서 다른 차원의 더 근본적인 질문이 가능합니다. 사람이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인생 전체를 즐겁게 놀면서 보내기만 하면 그것으로 행복한 인생이 보장됩니까? 자연과학이 인간의 노동해방에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빨래와 청소와 설거지와 자동차 조립과 땅 파는 일을 모두 기계가 합니다. 인공지능이 더 발전하면 모든 노동은 기계에 맡겨두고 우리 인간은 먹고 마시며 놀러 다닐 수 있겠지요. 모두가 꿈에 그리는 공주와 왕자 대우를 받는 삶입니다. 요즘 전망이 좋은 바닷가에는 방안에 풀장이 있는 호텔이 있다고 합니다. 숙박비가 엄청납니다. 그래도 그런 데서 즐기려고 큰돈을 지출하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인생을 ‘엔조이’ 하려는 사람들을 비판하려는 게 아닙니다. 쉬는 것도 경쟁하듯이 하는 이 세태에서 안식일이 가리키는 참된 쉼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을 뿐입니다.
히브리어 ‘사바트’는 번역이 어려운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어와 영어와 독일어 성경을 비롯한 대부분 성경은 발음대로 ‘사바트’로 표기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그 뜻을 풀어서 안식일(安息日)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마 중국 성경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안식일은 편안할 안(安)과 숨 쉴 식(息)을 쓴 단어입니다. 한자로만 본다면 안식일은 편안하게 숨을 쉬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영혼의 안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편안하게 숨을 쉬듯이 편안하게 생명을 누린다고 보면 됩니다. 이런 삶 자체가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 점에서 호흡이 가빠지는 삶에 익숙해져서 가만히 편안하게 숨을 쉬는 거 자체가 불안한 겁니다. 매 순간 자극을 받아야만 합니다. 크고 작은 국내외 뉴스를 전하는 사람들도 ‘어그로’를 일삼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인생살이에서 부딪치는 온갖 일들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이 잠시도 쉬지 못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만족이 안 되니까 더 자극적인 일들을 찾아다닙니다. 나름으로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현재인들은 바쁘게 살기는 하는데, 쉼은 없습니다. 가진 건 많은데 자유는 없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말씀에 이어서 오늘 설교 본문 막 2:28절에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안식의 새로운 차원이 예수님을 통해서 열렸다는 뜻입니다. 밀밭 이야기의 마태복음 병행구가 시작하기 바로 직전 문장인 마 11:28-30절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 쉼을 얻는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인간 삶을 옥죄는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킵니다.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을 가리킵니다. 세상이 말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성취해야 한다는 강요와 유혹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의 깊이로 한 걸음 더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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