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적 승리
사악한 인간의 모습에서 선명하게 그리고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타자에 대한 조롱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과시하면서 자신보다 가지지 못한 이들을 짓누릅니다.
추악하고 탐욕스러운 모습을 가진 사악한 이들은 타자에 대하여 끊임없이 조롱합니다. 얼마전 한 기업 사장의 초등학생 자녀가 회사 운전기사에게 행한 조롱은 사악한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야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롱은 타자에 대한 무시에서 시작합니다. 무시는 타자에 대한 비아냥입니다. 가진 것은 쥐뿔도 없으면서 버티고 있다는 비웃음입니다. 그렇기에 무시는 가진 자에게는 즐거움과 웃음거리이지만 당하는 자에게는 말 할 수 없는 충격이며 서러움입니다.
그러나 조롱은 무시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모욕으로 발전합니다. 모욕을 받으면 자신이 끝까지 붙잡고 있는 믿음이나 소망 그리고 확신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멍하니 하늘만 처다보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면서 가장 슬픈 것은 이러한 모욕감을 받을 때입니다. 모욕을 받으면 분노를 터뜨리고 급기야 싸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직장에 사표를 내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너 죽고 나 죽자고 하는 심리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분노사회를 만들어 내는 기저가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분노에는 이러한 모욕감이 쌓여있습니다.
이렇듯 사악한 심성은 타자를 분노케 하는데 뛰어난 재능을 발휘합니다. 우리는 종종 얄미운 사람에 대하여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얄미운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은 타자를 무시하고, 모욕감이 들게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잘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현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교하고 꼬집어 내어 비웃는 것입니다. 이들은 부모를 잘 못 만나서 그랬다느니. 공부를 못해서 그랬다느니. 그리고 급기야는 외모적 비하도 서슴치 않습니다.
모욕감을 주고자 하는 자는 타자의 인격과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받을 상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더 그러한 심리를 이용합니다. 그래서 타자를 아주 비참하게 만들어 버려서 더욱 대들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조롱은 무시와 모욕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조롱은 타자로 하여금 절망의 자리로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인식하게 합니다. 자신이 믿고 있던 것들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며 지금까지 속고 있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그래서 처절하게 절망의 자리로 이끌어 갑니다. 이 상태에 이르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집니다.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처절하게 자신을 비하하는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슬픈 일은 없습니다.
조롱은 이렇게 사람으로 하여금 절망의 자리로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인지 모릅니다. 절망의 상태에 이른 인간을 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비참하고 처절합니다. 이 상태가 되면 더 이상 대들 힘도 없어집니다. 망연자실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상태입니다. 이처럼 사악한 심령을 가진 이들은 아주 철저하게 이 일을 수행합니다.
우리는 이런 존재를 짐승의 표를 가진 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타자를 무참하게 짓밟는 자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오직 자신의 이득만 생각하지 이웃의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을 보지 않습니다. 참으로 잔인하고 폭력적인 존재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힘을 통하여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 군처럼 기세가 등등합니다.
그러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장은 이긴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최종적 승리는 남아 있습니다. 야구 경기에서 9회 말 투아웃(Two out)까지 승리를 알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직 마지막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롱과 모독과 절망에 빠트리게 하는 자들의 모략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위기가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 유다 왕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침략 앞에서 이러한 조롱과 모독과 절망으로 이끄는 비열함 앞에 옷을 찢고 통곡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려움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정직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토하여 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결정을 기다렸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제국의 왕으로 등극하여 주변 나라들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히스기야를 조롱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앗수르의 패착이었습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 승리는 히스기야에게 주어졌습니다.
조롱하는 세상 앞에 서는 것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도망칠 이유는 없습니다.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물론 지금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 승리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 승리의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최종적 승리를 약속 받은 자답게 사악한 세상과 대적할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한것은 십자가의 예수님이 불의한 세상을 전복 시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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