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동식목사

교회를 붙잡는 희망

새벽지기1 2020. 10. 29. 06:38

교회를 붙잡는 희망

 

프랑스의 개신교를 위그노라고 부릅니다. 로마 카톨릭을 부정하고 성경적인 신앙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가슴 아픈 고난을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16세기에 시작하여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핍박을 견뎌야 했습니다. 이들의 순교는 참으로 끔찍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정치와 종교가 결탁하여 만들어낸 결과들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프랑스 위그노를 숙청한 처절한 살인의 역사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바돌로메 학살 사건입니다. 나바르의 앙리 왕자와 프랑스의 마고 공주의 결혼식을 앞두고 벌어진 끔찍한 사건으로 위그노들은 1만2천 명 정도가 학살당하였습니다. 로마 카톨릭을 지지하였던 프랑스 정치의 비열함을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칼뱅의 제자로 유럽 개혁교회를 이끌었던 베자를 격노케 하였습니다. 그의 선생인 칼뱅은 소극적 저항을 가르쳤지만 베자는 바돌로메 사건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수정합니다. 소극적 저항이 아니라 적극적 저항을 말하였습니다. 그 만큼 바돌로메의 대학살은 참으로 끔찍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매우 힘들게 이어졌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끔찍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성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칼뱅의 사촌인 올리베땅을 통하여 발간된 성경은 위그노들의 신앙을 붙잡아 주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에 남아 있든지 혹은 망명을 하였든지 어느 곳에서나 성경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신앙을 찾아 망명하였던 이들은 각 나라에서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영국으로 넘어간 이들은 산업혁명에 기여를 하였습니다. 스위스로 넘어가 이들은 스위스 시계 제조에 큰 영향을 미치었습니다. 그들은 이들은 가는 곳마다 그 곳에 개혁교회를 세웠습니다.

 

위그노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딴 세상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누구에나 언제든지 찾아 올 수 있는 일들입니다. 교회의 핍박은 늘 존재합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세상은 한 결 같이 교회를 핍박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추방당한 마귀의 발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핍박당함은 역사 속에서 늘 반복되어 왔던 일들입니다.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 시대 교회를 보면 아름다웠던 시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낭만적으로 여길 수 없는 현실이 확실하게 다가왔습니다. 대형교회도 그 생명이 길지 않아 보입니다. 샛강이 조금씩 말라가면 마침내 댐도 마르게 됩니다. 서로 싸우면서 쟁취하였던 교회의 성장은 교회를 향한 부메랑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큰 교회라고 자부심을 가졌던 현실이 부끄러운 모습이 되어 돌아오고 있음을 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끔찍한 사건 가운데 기독교인과 관련된 뉴스가 꼭 끼여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교회가 스스로 자신을 망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교회가 세상의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아픔입니다.

 

사실상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 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였습니다. 어느 영역을 보아도 소망이 없습니다. 온갖 추악함과 거짓과 부패와 행음과 쾌락에 빠져 있습니다. 거기에 각종 상황에 대하여 건전한 토의가 불가능한 진영논리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끔찍한 사회입니까? 사회 속에서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은 매우 희미합니다. 그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에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을 쌓는 일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종 투기가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숨이 막힐 정도로 힘든 상황입니다.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현실을 회복하고 삶의 진정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을 세상으로 보낸 것입니다. 교회가 우리의 숨통을 터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와 성도가 죽어가고 있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세상은 점점 아비규환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대조되고, 대안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그 일은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위하여 애써야 합니다. 적어도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삶의 영역에서도 거듭남의 열매를 보여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할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하여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의 역사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유해무는 “역사는 하나님의 일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터에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바로 우리의 삶이며 신앙입니다. 앞선 선진들이 보여주었던 삶의 빛을 이 시대에 활활 비춰야 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경과 하나님의 약속과 흔들리지 않는 신앙고백을 소유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교회를 붙잡는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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