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컬럼3

형통을 이루는 두 가지 기초

새벽지기1 2020. 10. 8. 06:50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 풀리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애를 써도 꼬이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팔자”라는 말로 그 사람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의 사랑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크고 높으신 사랑이신데 “팔자의 낙인”을 찍어 사람들을 이 땅에 보내실 리가 없습니다.

스티븐 코비의 『원칙 중심의 리더십』 에 보면 “책임 전가는 상대방에게 나에 대한 통제권을 양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남의 탓, 하나님 탓, 팔자 탓 등의 책임 전가를 해 놓고 이제 상대방에게 있다는 증거나 만들어 내는 것이 고작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보지 못하고, 모든 책임을 외부로 전가하면서 책임전가를 한 그 대상에게 휘둘리게 되는 것입니다. 있지도 않은 팔자 탓하고, 팔자에 휘둘리고 결국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에 중동의 맹주인 발락왕은 당대의 최고 무당 발람에게 복채를 주면서 이스라엘을 저주할 것을 부탁합니다. 그렇지만 무당 발람의 입에서는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해할 사술이 없고 그리스도의 신부를 해할 복술이 없도다." 민수기 23장 23절 말씀입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아무리 나쁜 상황에서도 그 말씀을 행하면 그 삶을 좋은 소식, 복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가는 과정은 형통합니다. 열한 지파가 스스로 다윗을 추대하며 무릎을 꿇습니다. 그때 다윗의 나이는 삼십 세입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산지 한 십여 년 남짓 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그의 삶은 점점 좋은 소식으로 바뀝니다. 달라스 월라드가 말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니 아름다움과 힘과 지혜와 영광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어서 다윗에게 맡기신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까지 주십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부스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셨고, 그것으로 다윗은 예루살렘 성을 점령했습니다. 이후로 예루살렘은 세계의 중심인 시온 성이 됩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사무엘하 5:10)

다윗의 형통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두로 왕 히람은 다윗에게 사자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어 다윗의 궁을 지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형통을 우리 모두가 누리기를 원하시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사야 62장 5, 6절 말씀입니다.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 지기가 될 것이나,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람들을 이끌고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사람들, 즉 영적 리더들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행할 때 히람 왕을 보내서 다윗의 집을 지어주듯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형통의 길을 성경의 첫 장 창세기에서 가장 먼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만물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만물 중에 두 가지를 지정하셔서 하나님의 복을 채워놓으셨습니다. 이 두 가지가 형통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됩니다.

창세기 1장 27절, 2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면 하나님의 복도 상실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다는 것은 예수님은 나의 구주시며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믿음은 알고 느끼고 행동에 옮기는 것, 곧 지·정·의를 통하여서 형성됩니다. 예배는 이 지·정·의를 강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프로그램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많이 알고 많이 느끼고, 성주주일과 십일조를 하면서 행동으로 옮기는 의가 강화되어 갑니다. 지·정·의 세 개의 영역이 건강할 때 인격이 형성되고 그것은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하는 믿음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복을 담아놓은 것은 안식일입니다. 창세기 2장 3절.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 모든 창조하시고 만드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창조의 목적은 창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원한 안식입니다. 사람들은 일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6일 동안 일하기 위해서 주일 날 푹 쉬자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과의 안식에 들어가야지만 창조가 완성됩니다. '주일에 하나님과 평안히 안식하기 위해서 6일 동안 열심히 일하자.'가 옳은 생각입니다.

하나님과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바삐 움직이면서도 늘 불행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부여하신 복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안식은 곧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질 때 하나님의 형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을 닮게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불안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즐기지 말고 하나님 자체를 즐기십시오. 그리할 때 내게 일어나는 고난과 어려운 일들은 내 그릇을 훨씬 더 크게 하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그 결속을 더 굳건하게 해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