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교회 다녀요?”
아마도 한 번씩은 이러한 대답을 하신 적 있을 것입니다. 타 종교인의 질문에 혹은 이단들의 포교에 우리는 “예수 믿어요”라는 말이 아니라 “교회 다녀요”라고 말합니다. 가장 쉽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다닌다는 정확한 의미를 가지고 하는 말인지가 의심스럽습니다. 교회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교회는 참으로 많은 아픔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영광과 함께 아픔이 공존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광야교회를 거쳐 그리스도 안에서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친히 “내 교회”를 세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삼위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교회는 오직 믿음위에 세워집니다. 그래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됩니다. 동시에 교회를 통하여 생명이 태어납니다. 즉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교회를 어머니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며,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가 됩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교회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생명을 얻고 서로 지체가 되어 진리를 구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모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의 영광을 사모하는 곳이 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전진하는 곳입니다. 날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허락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 11:7-11]
이 말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교회에 왜 모입니까?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보려고 옵니까? 세상의 성공의 비밀을 얻고자 모입니까? 관계를 좀 더 넓히고자 옵니까? 세상에서 하지 못한 권력 욕심을 갖고자 옵니까? 나의 능력을 뽐내기 위하여 옵니까? 무엇을 자랑하고 싶어서 옵니까? 그러한 것들은 교회에 오지 않아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왜 옵니까? 선지자를 보려고 옵니다. 선지자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주는 일입니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옵니다. 굳은 내 영혼에 찔림을 받고자 옵니다. 교회는 세상이 주는 평안을 주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평안을 줍니다. 그것은 바로 죄에 대한 처참한 죽임을 통하여 얻게 됩니다. 그런데 죄 죽임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이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일 때 우리는 진리가 주는 자유를 얻고 자유의 열매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러한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목사의 역할도 있습니다. 우리는 잠시 있다 사라질 안개와 같은 자유와 평안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시는 힘들 수 있겠지만 영원한 자유와 평안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헌신된 봉사가 가능합니다. 눈가림만하는 삶이 아니라 내면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 가능합니다. 교회를 통하여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좋은 말씀 > 신동식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498년과 130년 (0) | 2020.05.15 |
---|---|
구분능선 (0) | 2020.05.14 |
거듭난 마음, 상한심령 (0) | 2020.05.11 |
다시 기도의 자리로 (0) | 2020.05.08 |
목사라는 직분의 고약함 (0) | 2020.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