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신 31:20)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자유와 번영이 약속된 땅으로 들어갑니다. 물론 그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홍해를 건너야 하고, 광야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단련시킨 후에 요단강을 앞에 두고 지난 40여년 동안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를 데려가십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눈으로는 보았지만 발로는 밟을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 31장은 이러한 배경 가운데 선포된 모세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설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경고는 이스라엘을 위한 사랑의 최고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이 가야하는 여정에 대한 영적지도(Spiritual Map)이기 때문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주어졌다고 해서 저절로 젖과 꿀을 향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배교를 보았습니다. 고생한 지난 세월을 보상하려는 듯 먹고 배부르고 살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이집트와 광야의 삶과는 온전히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가난하고 헐벗었던 지난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요로움과 안락함이 주어졌습니다. 땅에서 누리는 풍요와 평안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이지만 동시에 풍요와 평안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을 멸시하는 배교의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젓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스라엘은 배불리 먹었고 살이 쪘습니다. 이 말은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권력의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기득권을 다 누렸습니다. 그렇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은 조금씩 하나님의 뜻과 멀어졌습니다. 가나안을 내어 쫓으라는 명령에 불순종하였습니다. 자신의 풍요로움과 평안한 삶을 위하여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적인 건강함이 아니라 육적인 살이 뒤룩뒤룩 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조금씩 하나님을 멸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시적점이 되었습니다. 젓과 꿀이 흐르는 자리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한국교회에서 보고 있습니다. 먹고 배부르고 살찐 티를 여실히 보여준 일련의 일들이 한국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들이 버젓이 교회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살찌고 배부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명령 때문에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죄와 싸우기 위하여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버렸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가장 증오하는 것이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높이는 일에 대하여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사람들은 철저하게 자신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자신의 무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사람을 높이는 일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불신자를 추모예배라는 형식을 빌어서 찬양을 하였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불신자를 위한 추모예배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말한다면 지옥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어떻게 예배를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예배를 교회에서 펼쳤습니다. 누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주일학교를 잠시 다녔고, 교회 건축에 헌금을 하였다고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는 것은 참으로 무지몽매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여야 할 곳에서 불신자를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바알을 숭배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는 개인의 취향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판단은 역사에 맡겨야 합니다. 한 개인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갖는 것은 자유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지탄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배는 다릅니다. 누구든지 위대한 업적을 가졌다고 하여도 사람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불신자는 더더욱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번 일들을 보면서 한국 교회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음을 봅니다. 비성경적인 행태들은 교회 전체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한국 교회가 너무 배불렀고 살찌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면전에서 멸시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신 31:17-18)
가장 무서운 형벌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다가 멸망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재앙이며 환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무지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두 번 다시 이러한 불의한 일들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성도들은 교회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흉학하여도 교회가 바로 서 있으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들이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소명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며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한국 교회의 소망은 성도들의 신앙 고백적 삶에 달려있습니다. 조국이 사는 것도 한국 교회의 거룩함에 달려있습니다. 이 사실을 항시 기억하여야 합니다.
올해가 벌써 종교개혁 496주년이 되었습니다. 개혁의 정신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에게입니다. 사람들의 전통에서 성경의 가르침으로입니다. 사람의 방법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교회는 무너집니다. 다시금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경성(awake)하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한국 교회를 향하여 얼굴을 숨기시지 않도록 거룩함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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