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동식목사

좀 더 나은 교회를 향하여(2)

새벽지기1 2019. 8. 31. 07:58


좀 더 나은 교회를 향하여(2)

  

한국 교회가 더 나은 모습으로 나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실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서서 첫 번 째인 우상숭배를 보았습니다. 이제 두 번 째로 생각할 것은 음행입니다. 이제 음행은 우리 시대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결혼한 아내를 나두고 이웃집 여인을 탐하는 것이 영웅담처럼 들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상숭배는 영적간음입니다.


한국교회가 더 나은 교회를 향하여 가려면 음행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칼빈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목적이 "하나님이 순수함과 정절을 사랑하므로 우리가 모든 불결함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점은 우리가 육신의 어떤 추악함이나 무절제로 더렵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역시 동일합니다. 불결한 교회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웠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교회의 순결성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음행의 문제에 단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근친상간, 동성행위, 혼전관계, 간음, 불륜등 합법적이고 성경적인 부부관계를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현실은 너무나 다릅니다. 성의 해방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성정치의 해방은 성경의 기준을 허무는 일입니다. 자유연애를 넘어서 자유성행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걸맞게 이혼율이 세계 최대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씁쓸한 성적표입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물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청년들의 성인식도 매우 얕아졌습니다. 그리고 이혼율 역시 높아지고 있습니다.


음행에 있어서 교회의 단호함이 무디어지는 순간 교회는 더 이상 거룩함을 나타낼 수 없고 마침내 잡스러운 곳이 되고 맙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목사를 비롯한 직분자들의 타락에 관대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의 거룩성은 희미해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보고도 자신의 죄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직분자들의 타락을 보면서 무슨 거룩함을 생각하겠습니까? 더구나 평신도라는 말에 속아서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여 직분자의 타락이 아닌 목사의 범죄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직분자들의 타락을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상에서 만나는 일탈은 대부분 직분자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방씩 터트리는 목사들의 범죄가 한 몫 합니다.


사실 성도들이 만나는 지점은 목사를 비롯한 직분자 전체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회복은 목사와 평신도가 아니라 성도와 직분자입니다. 목사역시 직분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더 나은 교회로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적인 음행에 빠지는 이유는 교회가 영적인 음행을 자행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육적 음행이라는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다시금 거룩한 영향력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려면 영적이고 육적인 거룩성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인 음행의 모습을 생각해야 합니다. 영적인 음행의 대표적인 모습은 하나님과 세상에 양다리를 걸친 삶입니다. 하나님과 겸하여 세상을 사랑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번영신앙입니다. 그동안 교회는 사람이 주인이 된 번영신앙에 물들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이 아닌 번영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번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성공은 곧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은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감행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타로 점과 같은 미신을 즐기고 있습니다. 앞선 세대가 숨어 있는 점쟁이를 찾았지만 지금 세대는 쇼핑몰에 진치고 있는 점쟁이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대중매체를 통하여 유통되기도 합니다. 심심풀이로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는 시작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점을 보는 이유는 오직 하나 세상에서 잘 되기 위함입니다. 행복하기 위함입니다. 성공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부질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이 삶의 목적은 아닙니다. 더구나 요행을 통하여 성공을 취득하려고 하는 자세는 사단의 노예로 전락하기에 딱 좋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리스도인들도 아무 생각 없이 걸려들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자신들을 재물삼아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여기고자 하는 부모들의 행태를 무섭게 책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우리 주변에도 널려있습니다. 자녀들이 투기와 투자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을 봅니다. 자녀가 가지고 있는 그 자체의 존엄성보다는 성공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투자하고 후에 그것을 다시 취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미래의 불안한 가정과 사회를 만들어 냅니다.


영적인 음행은 반드시 육적인 음행으로 나타납니다. 영적으로 무디어진 거룩성이 육적인 쾌락을 부추기게 합니다. 죄 죽임에 대하여 무감각해져 있으면 죄와 친구하기를 꺼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죄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를 타락하게 만듭니다. 영적인 음행에 빠져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교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바로 소비자 중심의 교회입니다. 소비자 중심의 교회는 말씀이 삶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욕구가 말씀을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성경을 전하는 설교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말을 듣고 편하게 해주는 변사를 찾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허무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보다 더 나은 교회를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것은 영적인 음행의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육적인 간음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날마다 죄 죽임의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강권적인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보다 더 나은 모습을 가지려면 영적인 투쟁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는 거룩한 향기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할 지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