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동식목사

온기를 풍기는 공동체

새벽지기1 2019. 6. 1. 09:16


새벽에 기도할 때마다 살아있는 공동체를 간구합니다.

살아있음은 따스함입니다.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음이 살아있음입니다.



살아있음은 모두에게 희망이 됩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 공동체도 있습니다.

그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파르르함’입니다.

 분명히 살아있는데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첫 번째 공동체는 가정입니다.

가정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의 깊은 맛을 경험합니다.

가정이 따스하면 삶이 활기찹니다.

따스한 가정의 특성은 서로가 존중하고, 이해하고, 기다려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하지만 냉랭한 가정은 사람은 있으나 관계는 없고, 만남은 있으나 대화는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함께 한 문을 통과해 들어오지만 서로 다른 방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다른 방에서 나와서 한 문을 통해 나갑니다.

그렇기에 따스함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토요일 신문(한겨레)에 25세 자매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 전교 1등을 했지만 고3 수능 한 달을 앞두고 가출을 해서

지금은 안마시술소에서 일을 하고 있는 자매입니다.

어머니는 교사이고 아버지는 고위 공무원이었지만, 딸의 가출을 막지 않고 찾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온갖 잡다한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서 대부분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결된 곳이 집장촌이었고, 그 곳에서 자신이 배려를 받고 있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집장촌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성노동자”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글을 끝까지 읽으면서 참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한 자매의 일생에 큰 변화가 냉랭한 가정에서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가정이 존재하는 한 언제든지 이러한 현실은 주어질 것입니다.


자매는 자신 있게 자신의 일을 말하지만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성을 사고파는 것을 일반 노동과 똑같이 취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을 사고파는 일은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행음의 모습을 책망하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것을 사람의 추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자매를 책망하기 이전에 따스한 가정의 소중함을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가정의 붕괴는 뉴스조차 되지 않습니다.

각 드라마를 보면서 이혼과 재혼이 자연스럽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드라마를 타고 흘러나옵니다.

결혼은 잠시 쾌락을 즐기는 도구로 변질되고, 아이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이혼한 엄마가 아빠에게 가고 싶다는 아이를 때려서 죽이고, 시체를 유기까지 하였습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럴 수 있냐고 하겠지만 대단한 뉴스거리도 되지 않고 있습니다.

점점 악함의 도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가정이 붕괴되면 사회도 곧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가정의 따스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열풍을 보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과 같은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상실감을 가진 이들이 교회를 통해 따스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을 교회에 보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대학생들 중 86% 이상이 교회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로 내려갈수록 이 수치는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이 시대는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교회에 있음을 모릅니다.

오히려 교회를 욕합니다. 물론 교회가 욕먹을 일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교회가 이 시대의 소망입니다.

교회마저 무너지면 이 사회는 더욱 악해질 것입니다.


혹자는 이 소리를 비웃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교회가 대안임을 철회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는 위기의 시대에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하고,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더욱 따스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가 살아있음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자들이 먼저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이들이 할 수 있습니다.

말의 잔치가 아니라 삶의 잔치를 베풀어야 합니다.

우선 우리 교회가 그러한 공동체로 세워지기를 오늘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