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동식목사

그만해도 족하다

새벽지기1 2019. 5. 14. 06:51


그만해도 족하다 

 

오늘은 새벽 말씀을 보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세월을 멋지게 목회한 모세에게 가나안 입성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모세가 가나안 입구에서 보았던 가나안은 아름답고 보기에 좋았다.

모세의 마음도 그곳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그리고 가나안의 고난과 영광을 아들이 아닌 여호수아에게 넘기셨다.

하나님의 마음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 장면이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 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하고 그를 담대케 하며 그를 강경케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로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신3:24-28]

 

이 말씀 앞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모세에게 “그만해도 족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담대케 하고 강경케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가 가나안의 일군이 될 것임을 확실하게 선언하신 것이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서운 할 수 있고, 아쉬 울 수 있다.


어떻게 40년을 견뎌왔는가?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영광을 보지 말라니 억울하지 않는가?

하지만 모세는 순종하였다.

눈앞에서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에게 그 영광이 돌려지지 않아도 감사했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릴 줄 아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일군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것은 사단의 시험에 놀아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동안의 수고를 아신다.

그리고 그에 걸 맞는 영광도 아신다.

그래서 “그만해도 좋다.”고 말할 때 가장 좋을 때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에 이르기 때문이다.

신원하교수가 쓴 책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에서 믿음의 선배들은 탐욕이 7가지 죄 가운데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 탐욕은 죽음에 이르는 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만 아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 양심도 탐욕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알고 있다.

새벽 예배 후에 청년부 지체들이 선물한 알랭드 보통의『불안』을 읽었다.

그 가운데 한 구절이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문학과 과학에 세습제를 적용하면 이 두 분야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생각하며 혼자 웃음을 짓곤 한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정부에도 적용시켜본다. 세습적인 통치자는 세습적인 작가만큼이나 모습적이다.”

토마스 페인이 『인간의 권리』에서 한 말이다.


나폴레옹도 토마스 페인이 견해에 동조하면서 말하기를

“세습 귀족은 나라의 저주요, 바보요, 세습 멍청이들이다.”고 하였다.

실제로 나폴레옹의 정부의 고위 관료 다수가 비천한 신부이었다.

이렇게 역사는 발전하였다.

불의를 바로 잡고 정의를 드러내려는 것이 양심의 역할이었다.


이러한 것은 성경이 가르쳐준 지혜이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지혜가 너무나 절실한 시대가 되었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신이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아주 사악한 독설이다.

그런데 이러한 독설들이 행동으로 나타나서 교회를 죽이고 사람을 죽이고 있다.


우리 시대에 모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모세 가문의 사람이 아닌 여호수아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사람이 아무리 그 길을 계획 할지라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다.

탐욕의 열매는 사악한 열매를 먹게 된다.

탐욕은 부자의 관계도 끊는 참혹함을 가져온다.

탐욕이 하나님의 말씀도 무시하게 만든다.

탐욕은 아버지의 죽음도 외면하게 만든다.

잔인한 불효가 탐욕에서 나온다.

그것은 가장 큰 죄악이다.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잠19:26]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의 등불이 흑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잠20:20]


그만해도 족한 삶을 받아 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명을 마치면 손을 놓을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쉬움이 아니라 격려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우리 모두 이러한 시간을 위하여 잘 준비했으면 한다.

우리에게는 비판보다 분별력이 더욱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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