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마서

로마17-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로마서4:23-5:1)

새벽지기1 2018. 10. 29. 07:26


바울은 이 땅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가득한 인간의 불의를 하나하나 진술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냉혹한 진실을 말했습니다. 율법을 가진 이스라엘조차도 율법을 좇아 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호출해서 아브라함이 할례도 없고 율법도 없을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4:18-22)

이것이 아브라함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한 마디로 실현 불가능한 약속을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됐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 이야기를 정리한 바울은 과거에서 현재로 시점을 급선회시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 이야기가 창세기에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4:23-24)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아브라함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히 과거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고 현재를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왜 율법이나 할례와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지, 의롭다 함을 얻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꺼낸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끊임없이 역사 이야기를 합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끊임없이 제작되고 상영됩니다. 우리가 이처럼 지나간 역사를 호출하는 것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과거를 말하기 위해 역사를 말하는 것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말할 때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습니다. 자고로 현재는 과거와 대화해야 하고, 과거는 현재와 대화해야 합니다. 인간의 삶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서 발전하고 변화합니다. 바울도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보여줬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가 왜 율법이 아니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는지, 왜 율법이 아니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지를 변증하고 설득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복음의 핵심인 예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바울은 예수님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축약했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 정말 짧지요? 복음서를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가 굉장히 많은데 바울은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다 빼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만 말했습니다. 특히 우리의 불의와 우리의 의와 관련지어서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불의 때문에 죽으셨고, 우리의 의를 위해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불의와 의가 무엇이기에, 그것이 얼마나 중차대한 것이기에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또 살아나신단 말인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왜 우리의 불의 때문에 죽으신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과의 관계와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가로막고 왜곡하고 단절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이 창조한 온 생명과 온 세상을 할퀴고 파괴하고 죽음으로 내몰기 때문에, 아름답고 조화롭고 복된 세상을 죄와 죽음이 가득한 아수라장으로 추락시키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꾸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비정상적으로 뒤틀고 음욕으로 불타게 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탐욕, 시기, 살인, 분쟁, 사기, 능욕, 비방, 배신으로 파괴하기 때문에 우리의 불의를 깨끗이 제거하시려고 우리의 불의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왜 우리의 의를 위해 살아나신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고 했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의롭지 않으면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려면 반드시 의로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이시니까,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사랑이실 뿐만 아니라 의이시니까 하나님과 화평하려면 반드시 의로워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의를 위해 살아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관계 문제 때문입니다. 우리의 불의가 모든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고, 우리가 의로워야만 모든 관계가 정상적으로 복원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의와 불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의와 불의를 윤리적 차원, 법적인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 옳고 바른 것을 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의와 불의는 관계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의를 화평과 연결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무슨 말입니까? 의는 화평으로 가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의는 좋은 관계, 화평한 관계라는 말입니다. 앞에서 바울은 불의를 관계의 파국과 연결했습니다.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서 인간의 불의가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넘치게 이야기했습니다. 옳습니다. 불의는 관계를 파괴하고, 의는 관계를 화평케 합니다. 불의는 불화를 낳고, 의는 화평을 낳습니다. 물론 화평하다고 해서 무조건 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강도들이 화평한 것은 결코 의가 아닙니다. 불의한 자들은 결코 화평할 수 없지만 설사 화평하다 하더라도 그 화평은 화평도 아니고 의도 아닙니다. 오직 의의 태양이신 하나님과 화평한 것만이 화평이고 의입니다. 결국 의와 불의는 관계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예수님 이야기의 첫 문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 이 문장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겨냥한 것은 우리의 의입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시고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이 문장이 겨냥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이 두 문장을 연결하면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겨냥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바울이 말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반역하며 살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케 하려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게 하셨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면서까지 하려 했던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우리와의 화평이었습니다. 뭐 대단히 크고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우리와 화평하기 위해서였어요. 하나님은 우리와 화평하기 위해서 그토록 값진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여러분, 화평이 뭐기에, 화평이 뭐기에, 또 우리가 뭐기에, 우리와 화평하기 위해 그토록 값진 희생을 치른 것일까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요3:16). 또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4:16).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와의 화평을 위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근본 속성이 관계 지향적입니다. 사랑은 나와 너 사이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생명선입니다. 사랑이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할 때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홀로 존재하지 않으시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시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유일자가 아니라 삼위로 존재하는 것이고, 삼위 사이에 사랑이 있기에 하나님이 생명이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솔직히 하나님은 삼위로만 존재하셔도 아무런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특히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인격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격적인 존재여야만 인격이신 하나님과 높은 차원의 소통, 넓은 차원의 소통, 깊은 차원의 소통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수준 높은 소통을 하기 위해서 인격을 가진 존재로 만든 것입니다. 옳습니다. 사랑은 소통입니다. 사랑은 관계입니다. 특별히 인격적인 소통, 인격적인 관계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인격적인 소통, 인격적인 관계가 막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선 우리의 경험을 돌아봅시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많이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백이면 백 똑같이 말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과 소통이 안 되는 것 때문에 힘들고, 인간관계가 뒤틀리고 어긋나는 것 때문에 죽을 맛이라고들 말합니다. 정말입니다. 인간관계가 뒤틀리는 것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시달리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의 심장과 영혼을 파괴하는 슬픔과 고통은 거의 다 소통이 막히는데서 오고, 관계가 어긋나고 단절되는데서 옵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시겠습니까? 이기적인 인간, 자기중심적인 인간도 이처럼 슬프고 아픈데 사랑이신 하나님은 어떠시겠습니까? 우리보다 천 배, 만 배 더 안타깝고 답답하고 슬프고 아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관계가 어긋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인격적인 소통이 꽉 막히고 단절되는 끔찍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 원수가 됐습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5:10)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신학자 칼 바르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은 이상 사람은 하나님과 전쟁상태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로마서 강해. 365쪽).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가 됐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소통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적대적인 원수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전쟁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할 뿐이지 실제로는 하나님과 전쟁하며 삽니다. 겉으로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찾는 것 같기도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자기 감정, 자기 경험, 자기 판단, 자기 뜻을 좇아 삽니다. 자기 안에 갇혀 삽니다.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정반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줄줄 외우면서도 말씀이 가리키는 것과는 정반대로 갑니다. 말씀이 가리키는 바를 설명해줘도 꺾지 않습니다. 죽음이 코앞에 닥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인생살이가 힘들고 고단해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자기 명줄을 잡고 있는 높은 사람에게는 굴복해도 하나님에게는 굴복하지 않습니다. 지지리 못난 사람도 자기 안에서만큼은 자기가 왕이라며 똥고집을 부립니다. 하나님을 종이호랑이 대하듯 합니다.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니까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고 거역하며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하나님과 불화하며 전쟁상태로 살아갑니다.

 

바로 이것이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질병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불화하며 전쟁상태로 살아갑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 모든 고통, 모든 죄악, 모든 슬픔, 모든 재앙, 모든 상처도 다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처참하게 찢긴 세상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심히 안타깝고 답답하고 슬프고 아프실 것입니다. 우리처럼 애간장이 있다면 아마 애간장이 다 녹아 없어졌을 겁니다.

이처럼 처참하게 찢긴 세상을 아프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결국 인간이 되셨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사랑이신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불화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죗값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케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도 오직 하나님과 화평케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과 화평하려면 우리도 의로워야 하니까 하나님과 화평케 하기 위해서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의로운 사람, 법적으로 의로운 사람 만들려고 의롭다 하신 게 아니에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 만들려고 의롭다 하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 만들려고 의롭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편안하고 좋은 관계, 조화롭고 행복한 관계, 어떤 막힘이나 어긋남도 없는 소통을 하며 살라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깊고 완전한 연합과 친교 속에서 살라고, 어떤 망설임이나 주저함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향유하며 살라고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임합니다. 기쁨과 감사가 샘솟습니다. 담대함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훨씬 중요하고 근원적인 혜택은 하나님과 화평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케 되는 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누리는 첫 번째 은총이고 가장 근원적인 복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구원도 헛되고, 영생도 헛되고, 새 하늘과 새 땅도 헛됩니다. 마음의 평안도 헛되고, 기쁨과 감사도 헛되고, 담대함도 헛됩니다. 다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고 세상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오직 인격이신 하나님과 높은 차원의 소통을 하고, 넓은 차원의 소통을 하고, 깊은 차원의 소통을 할 때만 구원이 구원인 것이고, 영생이 영생인 것이고, 새 하늘 새 땅이 새 하늘 새 땅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구원도, 영생도, 새 하늘과 새 땅도 다 관계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복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였던 자가 하나님과 화평한 자로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새로운 신분의 사람이 됐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변화를 가리켜 ‘거듭남’, ‘위에서 남’, ‘성령으로 남’, ‘하나님께로부터 남’(3:3,8)이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예수님이 아래에서 나지 않고 위에서 나신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도 아래에서(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위에서(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

우리는 위에서 났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어머니 몸에서 태어난 몸과 똑같은 몸이지만 믿음으로 거듭난 우리는 이전의 우리가 아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하나님과 화평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은 저의 아버지십니다. 저는 아직도 허물이 많고, 불의가 깊고, 아버지 뜻에 따르지 못할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버지 앞에서 당당한 아들입니다. 아버지 집에 있는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고 향유할 수 있는 아들입니다. 제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제가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제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날 위해 죽으시고 날 위해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의로우신 하나님과 맘 편하게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언제든 아버지께 달려가 기도하고, 속 깊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아프고 슬픈 일들을 토설하고,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찬미하고, 예배하고, 감사하고, 때로는 꾸지람을 듣고, 때로는 격려를 받고, 그래서 또다시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고, 나로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마음껏 향유하는 권세를 누립니다. 전적으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내 불의 때문에 죽고 나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런 엄청난 혜택과 권세를 누리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은 알아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고 해서 부러워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통장에 1억 원이 입금됐다고 하면 다들 눈이 휘둥그레지지만 하나님과의 화평이 주어졌다고 하면 시큰둥합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1억 원이지 하나님과의 화평이 아니라고 코웃음 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과 화평한 것이야말로 복 중의 복입니다. 1억 원이 아니라 1조 원과도 비교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복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화평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영원히 소멸되지 않습니다. 항상 변함없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을 때 이미 우리 앞에 주어졌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맘껏 누릴 수 있도록 제한 없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이 화평을 누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셨으니 맘껏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십시오. 우리는 이 복을 누릴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이 복을 누리십시오. 사실 우리 자신을 보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없습니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 자기를 보면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자기를 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염치도 없고, 하나님께 마구 달려갈 엄두도 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봐야 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나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봐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막힘없는 친교를 할 수 있습니다. 매순간 숨을 쉬듯이 그렇게 편안하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가 하나님나라를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가 복된 세상을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가 진정한 자기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고후6: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