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마서

로마18 - 화평과 환난 (로마서5:1-11)

새벽지기1 2018. 11. 7. 07:32


로마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성취한 일은 결국 불의한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케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였던 우리, 하나님과 전쟁상태에 있던 우리, 자기 안에 갇혀 살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케 한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저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게 아닙니다. 이런저런 문제들을 풀어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원수였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케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관계를 화평케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막혔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 전쟁 상태에 있던 관계를 평화 상태로 전환시키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구원이 성취되는 마지막 종말의 날, 여호와의 날에 평화가 성취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사람들이 그들의 칼을 쳐서 삽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사2:3-4)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염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11:6-8) 여러분,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평화의 세계입니까. 바로 이런 평화의 세계를 우리에게 베푸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열망하시는 것은 우리와의 화평입니다. 우리와의 화평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으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언행이 말할 수 없이 불의하고 하나님을 왜곡하고 비틀고 헛된 우상으로 바꾸고 반역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우리와의 화평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셨으니까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아끼는 존재는 우리들이고, 하나님이 가장 열망하시는 것은 우리와의 화평입니다.

물론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소중하게 대하시는 것입니다.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소중한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배로운 것입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옳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사랑입니다. 우리의 저주와 죄책을 짊어진 대속의 죽음이야말로 진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행함에도 불구하고 차마 미워할 수 없고, 차마 돌아설 수 없고, 차마 뿌리칠 수 없고, 차마 외면할 수 없고, 차마 포기할 수 없어서 다 뒤집어쓰신 그것이 사랑이고, 당신과 맘껏 화평의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끌어안으신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이 위대한 사랑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가없는 사랑 때문에 원수였던 우리가 감히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게 됐고, 감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됐습니다.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가 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참된 주체로 서게 됐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화평케 된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향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맘껏 기뻐하고 감사하며 즐거이 향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과 화평케 된 것을 맘껏 기뻐하고 감사하며 즐거이 향유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값지게 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빛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주저 없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예, 여러분께서도 하나님과 화평케 된 것을 맘껏 기뻐하고 감사하며 즐거이 향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화평케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고후5:18).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다른 무엇보다도 화평케 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선교를 아무리 열심히 하고, 구제를 아무리 많이 하고, 예배를 아무리 경건하게 드려도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돌아서고 척지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할 뿐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욕보일 뿐이고, 하나님의 영광에 똥칠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최우선으로 화평해야 합니다. 선교하기 이전에, 구제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예배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과 화평해야 하고, 성도 간에 화평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고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죽음을 정말 값지게 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옹골차게 드러내는 일입니다. 화평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향유해야 할 최상의 축복이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감당해야 할 최상의 책무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향유해야 할 최상의 축복을 말한 다음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서 환난에 대해 말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5:2-3) 자,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서있는 은혜에 들어가면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고 환난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환난이 사라지는 게 아니고 환난과 함께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좀 의아하고 당황스럽지 않습니까? 아니, 하나님과 화평케 됐는데 무슨 환난을 만난단 말이냐, 하나님과 화평케 되면 만사가 평온하고 행복해야 하는 것 아니냐, 만사가 물 흘러가듯 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환난과 함께 산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라고 반문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화평케 되고 은혜 가운데 들어가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다, 만사가 형통하고 평온하고 요지부동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불행 끝 행복 시작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다고 해서 복이 쏟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다고 해서 만사가 형통하거나 평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난을 만나고 격랑에 휩싸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화평하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산다는 뜻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나라 방식으로 산다는 뜻이고, 하나님나라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 방식과 다르게 산다는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평케 되면 환난을 만나고 격랑에 휩싸이게 됩니다.

 

물론 앞에서 말한 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면 제일 먼저 화평케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화평만 주어지는 건 아닙니다. 환난도 겪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구원은 아직 온전히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죄의 종노릇할 때가 많은 불의한 죄인입니다. 우리는 의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의 부활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죽음의 한계 안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생명을 기다려야 합니다. 세상에는 이미 하나님나라가 도래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세상에 죄와 어둠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현실입니다. 구원은 ‘이미’와 ‘아직 아님’의 중간에 있습니다(Already, But Not Yet).

그러기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도 ‘이미’와 ‘아직 아님’이라는 중간기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노력해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하기에 힘쓰고, 믿음에 집중하고,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아직 아님’이라는 구원의 현실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암만 날고 겨도 소용없어요. 암만 날고 겨도 ‘이미’와 ‘아직 아님’이라는 구원의 현실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 밖에 있는 죄의 세력과 싸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세력과도 싸우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누구도 예외 없이 ‘이미’와 ‘아직 아님’이라는 구원의 현실을 견뎌내며 환난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달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죄와 어둠과 죽음의 세력이 깨끗이 제거된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이미 성취된 확실성 안에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한 세상의 혼란 한복판에서, 인간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든 죄와 어둠의 한복판에서 믿는 것입니다(칼 바르트. 로마서. 373쪽). 그러니 어찌 환난이 없겠습니까? 어찌 갈등이 없겠습니까? 어찌 아픔이 없겠습니까?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는 구원 속에 환난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이 겪는 환난은 구원받은 것과 구원받지 못한 것이 대립하고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갈등이요 격랑, 철저하게 새로운 것의 출현에 대한 옛 것의 저항으로 인해 야기되는 갈등이요 격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테드 제닝스. 무법적 정의. 136쪽).

당연히 바울도 환난을 겪었습니다. 경제적인 곤궁을 겪었고, 육신의 약함에 시달렸고(고후7:5), 사망의 권세에 짓눌렸고(고후4:12), 밖으로는 다툼에 시달렸고 안으로는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고후7:5). 칼 바르트는 바울의 이런 현실을 보면서 “이 모든 것에 의해 환난과 충격에 빠져 있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누리는 하나님의 화평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런 것은 믿음의 치부가 아니다....하나님의 화평 안에는 한숨, 불평, 약함이 있다. ... 하나님의 화평 안에도 고난, 침몰, 황량함, 찢겨짐이 있다.”고 말했습니다(로마서. 372쪽).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해도 환난과 충격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해도 깊은 한숨을 내뱉을 수 있고, 황량함과 찢겨짐에 가슴아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해도 영혼이 신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너무 쉽게 판단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과 화평해도, 믿음이 깊어도 깊은 한숨을 내뱉을 수 있고, 황량함과 찢겨짐에 가슴아파할 수 있고, 영혼이 신음할 수 있습니다. 온 몸으로 슬퍼하며 탄식할 수 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야겠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자,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간 자는 구원받지 못한 것들로 둘러싸인 세상의 한복판을 걸어갈 때 슬퍼하고 아파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현실에 절망하며 신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숨을 내뱉고, 황량함과 찢겨짐에 슬퍼하고 신음하는 가운데 인내를 배웁니다. 이런저런 환난을 겪어내면서 인내를 배웁니다. 여러분, 환난 없이 어떻게 인내를 배우겠습니까? 한숨, 불평, 약함, 고난, 침몰, 황량함, 찢겨짐 없이 어떻게 인내를 배우겠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조금 힘들면 도망치고, 조금 불편하면 갈라서고, 조금 의견이 다르면 싸우고 돌아서는데, 그래서야 어떻게 인내를 배우겠습니까? 만사가 형통하고 물 흐르듯 하는 곳에서 어떻게 인내를 배우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환난을 통해서만 인내를 배웁니다. 환난을 만나야 깨어지고, 환난을 만나야 제정신을 차리고, 환난을 만나야 겸손해지고, 환난을 만나야 믿음이 깊어지고, 환난을 만나야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인내를 통해서만 우리의 믿음이 연단을 받아 단단해지고 굳건해지고 정금과 같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과 모순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그 약속을 향하여, 하나님의 약속과 모순되는 현실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인내입니다.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슬퍼하고 아파하면서도, 때로는 만만치 않은 현실 앞에 절망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그 약속을 향하여, 하나님의 약속과 모순되는 현실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인내입니다. 여러분, 이런 인내 없이 어떻게 믿음이 단련되겠습니까? 이런 인내 없이 어떻게 인격이 단련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인내를 통해서만 단련됩니다. 우리가 인내할 때 인내하는 과정에서 믿음이 단단해지고 굳건해지고 정금과 같이 됩니다.

 

그리고 연단 속에서 소망이 뚜렷해집니다. 환난 속에서 인내를 배우고, 인내 속에서 연단을 받을 때 비로소 소망이 뚜렷해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망은 내일은 잘 될 거야, 올해보다는 내년이 나을 거야, 참고 기다리면 쨍하고 해 뜰 날이 올 거야, 같은 유의 것이 아닙니다. 막연하게 낙관적인 기대감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실현될 것을 기대하면서 그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있는 자는 인내합니다. 소망이 앞에 있으니까, 너무도 분명한 소망이 앞에 있으니까 그 소망에 당도할 때까지 인내합니다.

최근에 중국 작가 위화(余華)가 쓴 [인생]이라는 소설을 읽었습니다. 주인공 푸구이가 살아온 슬프고도 험한 인생을 회고하는 것으로 구성된 소설인데, 주인공이 젊었을 때 시내에 나갔다가 장개석의 국민당 군에게 잡혀 2년 가까이를 전쟁터에서 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운 좋게도 살아남아 모택동의 홍군(해방군)을 맞게 되고 운 좋게도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주인공은 집으로 돌아갈 때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집 생각이 너무나 간절했어. 남은 생을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울다가 웃다가 하며 미친 듯이 남쪽으로 달려갔다네.”(105쪽) 예, 돌아갈 집이 있고 만나야 할 가족이 있기 때문에 미친 듯이 먼 길을 달려간 것입니다. 만일 돌아갈 집이 없고 만나야 할 가족이 없었다면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려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데 어디로 가며, 소망이 없는데 무슨 힘으로 달려가며, 소망이 없는데 무슨 수로 인내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소망이 있어야만 어디로 가야 할지가 분명해지고, 소망이 있어야만 인내할 수 있는 힘이 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패턴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면 제일 먼저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고, 하나님과 화평한 자는 환난을 겪게 되고, 환난을 겪는 가운데 인내를 배우게 되고, 인내하는 가운데 연단을 받아 믿음이 단단해지고, 연단 받는 가운데 소망이 뚜렷해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환난이 즐거울 수는 없습니다. 모든 환난은 가시로 찔리듯 아픕니다. 심히 무겁고 고통스럽습니다. 깊은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환난이라는 아픔과 고통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즐거워하면서도 환난 앞에서 비틀거리며 신음하고, 환난 속에서 비틀거리고 신음하면서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즐거워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항상 이 둘이 함께 있습니다. 화평과 환난이 함께 있고, 기쁨과 슬픔이 함께 있고, 밝음과 어둠이 함께 있습니다. 밝음만 있고 어둠이 없는 것도 믿음이 건강하지 못한 것이고, 어둠만 있고 밝음이 없는 것도 믿음이 건강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이 함께 하는 믿음,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믿음이 건강한 믿음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즐거워한다’는 말을 3번 반복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5:2,3,11). 예, 이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화평과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진짜 간증이고 진짜 자랑입니다. 하나님 믿었더니 만사가 형통하더라, 그래서 날마다 행복해, 좋아 죽겠어가 아니라, 하나님 믿었더니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게 되더라, 때로 힘들고 고통스럽고 비틀거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즐거워하게 되더라, 이것이 우리의 간증이 돼야 하고,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 돼야 하고, 이것이 우리의 실력이 돼야 합니다. 이것이 참 신앙이고 참 기독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