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마서

로마19 - 인간의 운명, 아담과 예수 (로마서5:12-21)

새벽지기1 2018. 11. 26. 07:33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운명은 자기가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개인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선택하고 행하는 것이 곧 자기 운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사람은 운명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운명을 만들어가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부자가 되는 운명이 따로 있고 가난뱅이가 되는 운명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노력하기에 따라서 부자가 될 수도 있고 가난뱅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지 부자가 되는 운명이 따로 있고 가난뱅이가 되는 운명이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보다 큰 틀에서 인간이라는 종(種)의 운명은 좀 다릅니다. 개인의 운명은 어느 정도 개개인이 만들어갈 수 있지만 인간이라는 종의 운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는 종의 운명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이나 선택으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개인의 자질이 아무리 선하고 훌륭하다 하더라도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인간이라는 종의 운명을 바꾸거나 넘어서지는 못합니다. 인간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개를 생각해봅시다. 어떤 개가 훌륭한 조련사를 만나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그 개가 개의 운명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개는 아무리 뛰어나도 개일 뿐입니다. 사람도 그래요. 어떤 사람이 좋은 부모를 만나 탁월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해봅시다. 정말 최고의 교육을 받고 최상의 노력을 다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인간이라는 종의 운명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절대 넘어서지 못합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라는 종의 운명을 갖고 태어납니다. 죄인이라는 운명, 죽어야 하는 운명, 이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운명인데요, 죽었다 깨어나도 이 운명을 바꾸거나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종의 운명은 과연 누가 어떻게 정했을까요?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이 물음에 대한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인간이라는 종의 운명은 아담과 예수, 이 두 사람에 의해 결정됐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을 직접 들어봅시다. 바울은 로마서 1장부터 줄기차게 모든 인간이 불의하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5장에 와서는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운명이 죄인으로 추락했고 사망에 사로잡히게 됐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5:12)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5:15)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하였다.”(5:17)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되었다.”(5:19)

한 마디로 모든 인간의 운명은 아담 한 사람에 의해 결정됐다는 말입니다. 개개인의 혈통, 국적, 성격, 출신 성분, 능력, 교육과 상관없이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 의해 인간이라는 종(種) 전체의 운명이 결정됐다는 말입니다. 아담 한 사람에 의해서 모든 인간이 죄를 지으며 살아야 하는 운명, 죽음이 왕 노릇하는 세상을 살아야 하는 운명에 갇히게 됐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는 이것을 원죄라고 말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죄를 물려받아서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 원죄를 말하는 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부모의 죄를 물려받는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최초의 인간 아담과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개개인의 운명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아담의 운명과 하나라는 것입니다. 아담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이고, 아담의 운명이 곧 너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의 운명은 사실상 하나입니다. 삼성 이재용 부회장의 운명이나 서울역 노숙자의 운명이나 겉으로 보면 엄청나게 다른 것 같지요? 그러나 깊이의 차원에서 보면 하나도 다르지 않아요. 두 사람 다 똑같은 죄인이고, 두 사람 다 똑같이 죽습니다. 두 사람 다 똑같은 죄인이고, 두 사람 다 똑같이 죽는다는 면에서 두 사람의 운명은 눈곱만큼도 다르지 않아요. 아담 이래로 수없이 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사람마다 천차만별의 삶을 살았지만 그들 모두의 운명은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손오공이 제아무리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듯이 개개인이 제아무리 뛰어봤자 인간이라는 종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모든 인간의 운명은 첫 사람 아담에 의해 결정적으로 확정됐어요. 아담으로 인해서 모든 인간은 죄를 지으며 살아야 하는 운명, 죽음이 왕 노릇하는 세상을 살아야 하는 운명에 갇히게 됐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역사가 아무리 바뀌어도 이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온 것입니다. 모두가 아담의 운명에 갇혀 있기 때문에, 죽었다 깨어나도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예수가 온 것입니다. 아담의 운명을 넘어선 새로운 운명을 열기 위해서 예수가 온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5:15)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5:17)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5:18)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9)

여기서 바울은 예수를 말할 때마다 아담과 대조해가며 말했습니다. 아담은 계약을 지키지 못했으나 예수는 계약을 지켰다(v.18). 아담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으나 예수는 순종했다(v.19). 아담 안에서는 사망이 왕 노릇하지만 예수 안에서는 생명이 왕 노릇한다(v.17). 아담 안에서는 죄가 왕 노릇하지만 예수 안에서는 은혜가 왕 노릇한다(v.21).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운명을 열었다는 말입니다. 아담의 운명에 갇혀 있던 인간에게 새로운 운명을 열었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인간은 손오공이 날고 겨도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듯이 아담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운명을 넘어서는 새로운 운명을 활짝 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4절에서 첫 사람 아담을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궁극적 실재가 아니라 오실 자를 보여주는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모형은 실재가 아닙니다. 자동차 모형이 자동차는 아니잖아요. 모형은 실재를 닮은 표상이고, 실재가 올 때까지 실재를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모형이라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이 계획한 인간의 최종적 실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담이 가짜라거나 미숙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렇게 오해하면 안 됩니다. 아담은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위대하고 우아하고 탁월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할 수 있는 최상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파트너로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하고 아담은 인간의 최종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최종적인 실체는 누구일까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담의 최종적 실체, 종말론적 실체라고 말합니다. 예수가 ‘마지막 아담’이라고 말합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전15:45) 옳습니다. 예수가 마지막 아담입니다. 예수가 최후의 인간이고 궁극적 인간이고 종말론적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최후의 인간, 궁극적 인간, 종말론적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새로운 인류의 대표자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왜 오셨습니까? 첫 사람 아담의 운명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새로운 운명을 살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넘어서지 못한 아담의 운명을 넘어서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으로써 아담의 운명을 넘어섰습니다.

 

팩트 체크를 하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 죄인으로 살다가 죄인으로 죽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죄인으로 죽었고, 싯다르타도 죄인으로 죽었고, 마호메트도 죄인으로 죽었고, 공자도 죄인으로 죽었고, 노자도 죄인으로 죽었고, 알렉산더 대왕도 죄인으로 죽었고, 칭기즈칸도 죄인으로 죽었고, 세종대왕도 죄인으로 죽었고, 이순신도 죄인으로 죽었고, 우리의 할아버지 · 어머니 · 삼촌 · 누나도 다 죄인으로 죽었습니다. 저들은 하나같이 아담의 운명에 갇혀 살다가 아담의 운명을 따라 죽었습니다. 아담의 운명이 모든 사람의 운명이 됐다는 역사적 증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담의 운명에 갇혀 살다가 아담의 운명을 따라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순종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했습니다. 아담의 운명과는 차원이 다른 운명을 살았고 지금도 아담과는 차원이 다른 운명을 살고 있습니다. 이 예수가 바로 새로운 인류의 대표자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인류의 대표자로서 모든 사람을 자기 운명에 초대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요11:25-26)

 

그런 면에서 아담과 예수는 인류의 두 대표자입니다. 아담과 예수가 인류의 두 대표자라는 말은 모든 인간의 운명이 개개인의 행위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아담과 예수의 행위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 아담의 운명을 살게 되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 예수의 운명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담 때문에 왜 내가 죄인이 되어야 하느냐, 왜 내가 죽어야 하느냐, 너무 억울하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행위나 선택과 상관없이 아담 안에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죄인이 되었고 죽음이 왕 노릇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어요. 이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우리의 행위나 선택과 상관없이 예수 안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의인이 되었고 생명이 왕 노릇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은 완전치 못하지요. 그러나 아담의 운명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담의 운명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운명을 선물 받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잘한 것도 없이 예수 안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새로운 운명을 선물 받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우리 모두가 죄인 된 것처럼 예수 안에서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역사적 증거입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에게는 하나의 운명이 아니라 두 가지 운명이 주어진 셈입니다. 아담의 운명과 예수의 운명, 이 두 가지 운명이 주어진 셈입니다. 아담의 운명은 불순종의 길 · 불의의 길 · 왕 된 주체의 길 ·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고, 예수의 운명은 순종의 길 · 의의 길 · 종 된 주체의 길 · 생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아담과 똑같이 불순종의 길 · 불의의 길 · 왕 된 주체의 길 · 죽음의 길을 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과 똑같이 순종의 길 · 의의 길 · 종 된 주체의 길 · 생명의 길을 갑니다. 물론 아직은 완전치 않지요. 그러나 종국에는 그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자의 운명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아담의 운명에서 예수의 운명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의 운명에서 예수의 운명으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정한 인간의 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가야 할 이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길을 갈 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절대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의 운명을 짊어진 자요 아담의 길을 걸어온 자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뼛속 깊이 죄인이라는 것, 운명적으로 죽음살이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 다들 아닌 것처럼 하고 살지만 사실은 다 똥 묻은 개라는 것, 이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운명이라는 것, 누구도 이 운명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고 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판단하고 원망하고 정죄하는 아담의 길 · 죽음의 길을 넘어설 수 있고,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고 받아주고 사랑하며 동행하는 예수의 길 · 생명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의 운명을 짊어진 자요 아담의 길을 걸어온 자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인식하고 기억할 때만 예수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이 사실을 망각한 채 삽니다. 예배 시간에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에 머리를 끄덕이지만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 망각합니다. 나도 죄인이고 너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삽니다. 나도 죽고 너도 죽는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삽니다. 도드라지게 나쁜 짓하는 몇몇 사람만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나머지 인간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삽니다. 설사 모두가 나쁜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 남편만은, 우리 아내만은, 우리 자식만은, 우리 교회 목사님만은 괜찮은 사람일거라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며 삽니다. 그래서 다들 실망하고 상처입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네가 이럴 줄은 정말 몰랐다’고 땅을 치며 통곡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면서 새롭게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자, 누가 어떤 짓을 하든 실망하거나 원망하지 말자, 모든 인간은 뼛속 깊이 죄인이니까, 운명적으로 죽음살이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까, 다들 아닌 것처럼 하고 살지만 사실은 다 똥 묻은 개와 같으니까, 죄를 짓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누구도 이 운명을 넘어서지 못하니까 누가 어떤 짓을 하든 책망하지 말고 이해하고 받아주자, 아직 아담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자, 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사실 죄인이 죄인에게 무슨 판단을 하며 무슨 책망을 하겠습니까? 살다 보면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사람도 있고,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는 사람도 있지만, 저도 누군가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고, 누군가의 울화통을 치밀어 오르게 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힘들어도 참고 한 마디 하고 싶어도 입을 닫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똥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랄 수는 없는 법이잖아요. 솔직히 저에게는 누구를 판단하거나 정죄할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어떤 짓을 하든 책망하지 않고 이해하고 받아주려고 합니다. 오직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려고 합니다. 마음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그러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의 길입니다. 이것이 아담의 운명을 넘어서는 길이고, 예수의 운명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봅시다. 예수님이 아담의 운명에 갇혀서 옴짝달싹 못하고, 날마다 죄를 지으며 죽음살이 하는 인간들을 정죄하고 내쳤습니까? 아닙니다. 저들의 운명을 품고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아담의 운명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저들을 품고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고, 약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품어주셨습니다. 이렇게 아담의 운명을 품어냄으로써 아담의 운명을 넘어섰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운명에 참여하려면 먼저 아담의 운명을 깊이 자각해야 하고, 아담의 운명을 품어내야 합니다. 아담의 운명을 품어내지 않으면 절대 아담의 운명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오직 아담의 운명을 품어내야만 아담의 운명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아담의 운명을 품어내야만 예수의 운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담의 운명과 예수의 운명이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의 운명과 예수의 운명은 동일선상에 있습니다. 즉 아담의 운명을 관통하며 넘어가는 곳에 예수의 운명이 있는 것이지 아담의 운명과 다른 곳에 예수의 운명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운명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아담의 운명을 관통해야 합니다. 아담의 운명을 품어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는 것, 누가 어떤 짓을 하든 실망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것, 모든 인간은 뼛속 깊이 죄인이고 운명적으로 죽음살이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누가 어떤 짓을 하든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아담의 운명을 품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우리도 예수의 운명에 참여하려면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아담의 운명을 품어내는 길을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담의 운명을 품어냄으로써 아담의 운명을 넘어가는 이 복된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한 인간의 길이고 구원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