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마서

로마15-믿음과 율법 (로마서3:31-4:16)

새벽지기1 2018. 10. 23. 07:48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이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라고 했습니다(1:17). 그리고 곧바로 그 이유를 논증하듯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길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은 불의로 가득하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인간은 불의하며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유대인조차도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했다,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운명이요 인간의 운명이다, 이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라고 세상의 현실과 인간의 실상에 대해 가감 없이 폭로했습니다(1:18-3:20). 이것은 그저 그렇고 그런 폭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 왜 기쁜 소식인지에 대한 배경 설명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 기쁜 소식인 이유는 온 세상이 불의로 가득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건 저기건 세상이 온통 불의뿐인데 불의로 가득한 세상에 참된 의, 완전한 의인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이것이 진짜 기쁜 소식이라는 말을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세상의 현실과 인간의 실상을 가감 없이 폭로한 다음 3장 21절에서 1장 17절에서 했던 복음에 대한 설명을 다시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 복음이라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반복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율법 외에”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의인데 하나님의 의가 율법 밖에서 율법과 상관없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3:22-28).


사실 이 말은 어마어마한 말입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말이고, 세상에서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말입니다. 지난 설교에서도 말씀했습니다만 세상에서는 법이 곧 의입니다. 법이 바로 서야 의가 바로 선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의에 이를 수 있는 길, 사회가 정의사회가 될 수 있는 길은 오직 법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말했습니다. 법으로는 결코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라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말, 상식에 어긋난 말, 아무런 설득력이 없는 말,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궤변 같은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즉각 공격했습니다. 그렇다면 법은 필요 없단 말이오, 믿음만 있으면 되고 법은 없어도 된단 말이오, 라고 여기저기서 공격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바울을 공격한 데는 그럴 만한 배경이 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법이 유명무실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법이 유명무실해지면, 언젠가 법이 무너질 것이고, 법이 무너지면 정의 또한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법이 있는 지금도 세상이 아수라장이고 인간의 불의가 하늘을 찌르는데 법이 무너지면 그야말로 생지옥이 되지 않겠습니까? 통제 불능의 아수라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어느 정도의 사고력만 있으면 충분히 추론해낼 수 있는 생각입니다. 사람들 눈에는 이런 결과가 불 보듯 환히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공격한 것입니다. 정의의 마지막 보루인 법이 무너지는 재앙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충정으로 바울을 공격한 거라고요.

 

그렇다면 저들의 생각과 충정이 과연 옳을까요? 저들은 믿음이 법을 무너뜨릴 거라고 생각하고 법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것이 과연 옳을까요? 저들이 생각한 대로 믿음은 정말 율법을 파기할까요? 믿음으로 의를 얻게 되면 율법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될까요?

이것은 바울 당시에 가장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이 문제로 논쟁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닌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믿음과 율법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천년 전에 이미 이 문제를 명쾌하게 해명했습니다. 바울의 해명은 이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내 말(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을 듣고, 당신 말대로라면 믿음이 율법을 파기하는 것이라고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데,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율법을 파기하기는커녕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3:31)라고 해명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당신들이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믿음과 율법의 관계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는 거예요. 당신들은 믿음이 율법을 파기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율법을 파기하기는커녕 도리어 굳게 세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바울의 생각은 이처럼 정반대였습니다. 사람들은 믿음과 율법이 서로 배치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믿음은 율법을 거부하고, 율법은 믿음을 거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믿음과 율법이 서로를 굳게 세워준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율법으로 인도하고, 율법은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한다고 말했습니다(갈3:24).

 

바울은 이렇게 진실을 말한 한 후에 더 구체적인 해명작업에 돌입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호출해서 믿음과 의의 관계, 믿음과 율법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변증하는 작업에 돌입합니다. 그러면 바울과 함께 아브라함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잘 아는 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은 첫 번째 사람입니다. 첫 번째 유대인, 첫 번째 하나님의 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의롭다 함을 얻었을까요? 이에 대해 바울은 당연히 행위로써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다, 만일 행위로써 의롭다 함을 인정받았다면 아브라함은 자랑해도 무방했을 것이다, 행위로서 의롭다 함을 인정받는다는 것은 정말 훌륭한 일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솔직히 자랑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무엇도 자랑하지 않았다, 아니 자랑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행한 것이 없이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4:1-3).

바울의 이 말은 창세기 15장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위기에서 구출한 다음에 일어났는데, 아브라함이 자기를 돌아보니 한없이 허탈했습니다. 이미 몸은 늙었는데 후사를 이을 자식이 없다는 게 그렇게 허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하나님이 환상 중에 임하여 말씀했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이 말씀을 들은 아브람은 자기 처지를 정직하게 아뢨습니다. “주 여호와여, 내게 뭘 주시려 하시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주께서 내게 자식을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시 말씀했습니다. “그 사람은 네 상속자가 아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아브라함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시더니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저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창15:5).

 

성경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오고간 이 대화를 기술한 후 곧바로 아무 설명 없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6)라고 매우 담백하게 서술했습니다. 여러분, 좀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보통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말을 바울이 처음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세기 저자가 그 말을 했습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게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더욱이 창세기 저자는 아무런 설명 없이 그냥 담백하게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다’라고만 기술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를 믿었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가 아브라함의 상급이라는 말씀, 아브라함의 몸에서 태어날 자가 그의 상속자가 될 것이고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라는 말씀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이 믿을 만한 말이라고 여겨집니까? 당시에 아브라함의 처지가 어땠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는 본래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불임 부부였습니다. 거기다가 이미 늙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후손을 기대할 수 없는 암울한 처지였습니다. 그런 처지에 있는 아브라함이 ‘네 몸에서 태어날 자가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고,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라는 하나님 말씀을 믿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눈앞의 현실이 하늘과 땅처럼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허황되기 그지없어 보이는 일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믿었습니다. 왜 믿었는지, 어떻게 믿을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어요.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믿은 건 아니었을 겁니다. 실오라기 하나라도 붙잡아보자는 심정으로 믿은 것도 아니었을 거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믿은 것도 아니었을 거고, 잠깐 정신이 돌아서 믿은 것도 아니었을 겁니다. 아무튼 믿었습니다.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지만 좌우지간 믿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본래 이래요. 이유나 배경이 없어요. 왜 믿었는지, 어떻게 해서 믿었는지를 말할 수가 없어요. 아브라함을 직접 불러서 ‘왜 믿었습니까?’라고 물어보십시오. 아마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할 겁니다. 그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요. 어떻게 하다 보니 내가 믿고 있습디다.’ 정도로 얼버무리는 게 고작일 겁니다. 성경이 담백하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사실만 기술한 것도 정녕 그래서일 겁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는 말 외에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으니까, 어떤 설명도 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고 담백하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사실만 기술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행위와 사람의 행위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반면 사람의 행위는 눈에 보입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설명이 거의 불가능한 반면 사람의 행위는 설명이 거의 가능합니다. 완벽한 설명까지는 아니라 해도 어느 정도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왜 꽃단장을 하는지, 왜 몸이 아픈지, 왜 말다툼을 하는지, 왜 이 사람을 좋아하는지, 어느 정도는 설명이 가능해요. 그러나 하나님의 행위는 설명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창조만 해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창조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하지만 창조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사실 외에는 어떤 설명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브람을 부른 것은 어떨까요?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은 왜 오직 한 사람 아브람을 불렀을까요? 그것은 아브람도 알지 못하고 창세기 저자도 알지 못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은 것도 마찬가지예요. 아브라함이 왜 여호와를 믿었을까요? 어떻게 여호와를 믿었을까요? 당연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할 수가 있었을 겁니다. 이래서 믿었다, 저래서 믿었다, 라고 어느 정도는 설명할 수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게 한 거니까 어떤 설명도 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납득하기 어려운 기적이고, 설명하기 어려운 은혜입니다.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기적이고,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은혜입니다. 물론 성경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아브라함이 믿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믿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믿게 하셨기에 아브라함이 믿은 겁니다. 정말이에요. 아브라함이 믿었지만 하나님이 믿게 하신 것이고, 하나님이 믿게 하셨지만 아브라함이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믿음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다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신 것은 오직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할례나 율법은 의롭다 함을 얻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언제 할례를 받았습니까? 창세기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후에 창세기 17장에 가서야 할례를 받았습니다. 율법은 언제 주어졌나요? 율법은 아브라함이 죽은 후 무려 400년이 지나서야 주어졌습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아브라함의 후손을 이끌고 홍해를 건넌 후에 율법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할례나 율법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는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 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고, 율법 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유대인인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로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4:10)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4:13)

진실로 그렇습니다. 먼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고, 그 후에 할례와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서 할례를 받지 않았어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자손을 의롭다 하기 위해 율법을 주지 않았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언약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래도 할례를 명했을까요? 그래도 율법을 주셨을까요? 당연히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명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모세에게 율법을 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들에게 할례를 명하시고 율법을 주신 것은 저들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언약의 자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음과 율법의 관계를 정리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면 율법 같은 건 더 이상 필요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율법은 서로 배치되기 때문에 믿음은 율법을 거부하고, 율법은 믿음을 거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믿음과 율법은 서로를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은 율법을 필요로 하고, 율법은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압니다.

만일 믿음에 율법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믿음으로 얻는 것이 의인데 믿음에 율법이 없으면 의의 내용 또한 없는 것 아닙니까? 의의 내용이 없으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모짝 허사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믿음에는 반드시 율법이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율법에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율법은 있는데 믿음이 없으면 율법을 좇아 살 수 있을까요? 당연히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좇아 살려면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에 율법이 있을 때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일 수 있는 것이고, 율법에 믿음이 있을 때 그 율법이 참된 율법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과 율법의 진정한 관계입니다. 믿음은 율법을 부정하지 않고, 율법은 믿음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믿음은 율법을 필요로 하고, 율법은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뒤집어서 말하겠습니다.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은 믿음이고, 믿음을 굳게 세우는 것은 율법입니다.

물론 믿음은 율법을 굳게 세우기 전에 우리를 율법의 매임과 율법의 강제에서 해방합니다. 더 이상 율법의 멍에를 지지 않도록 해방합니다. 그러나 해방하는 것으로 끝내지는 않아요. 믿음은 반드시 율법을 굳게 세우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일차적으로는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해방시키지만, 이차적으로는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상태에서 율법을 행하게 합니다. 율법에 매여서 율법을 행하게 하는 게 아니라 율법에서 해방된 자유의 상태에서 율법을 행하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이고 하나님의 의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한 마디로 정리하겠습니다. 율법 밖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