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마서

로마13 - 복음 공동체인 교회의 초석 (로마서3:10-21)

새벽지기1 2018. 10. 23. 07:47


성경은 아름다운 인류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을 기술한 책이 아닙니다. 개개인의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한 종교적 지혜를 기술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나라를 건설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줄기차게 하나님나라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세상을 만들어가야 하는지를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세상을 만들어가고 계시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 성경만큼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책도 없을 것이고, 성경만큼 장구한 역사를 담고 있는 책도 없을 겁니다. 성경에는 정말 장구한 역사 속 인물들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인물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인간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야기를 기술한 책이 아닙니다. 인간이 다스리는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과 관련된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그 이야기의 줄거리가 온통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부터가 그렇습니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창조 이후의 이야기도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부패한 죄인이 되었으며 죽음살이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구원 이야기 역시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인간과 세상을 죽음살이로부터 해방시켜내시고 생멸살이를 하게 하셨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항상 인간입니다. 인간이 빠진 하나님 이야기는 없어요. 하나님의 이야기에는 항상 인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로마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나라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나라의 복음 외에 다른 것에는 일체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나라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나라 복음을 말하면서 제일 먼저 인간의 불의함에 대해 말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와 에덴동산 이야기를 한 후 곧바로 인간의 타락했다는 이야기,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해 죽음살이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 것처럼, 바울도 로마서에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언적으로 말한 후 곧바로 인간의 불의함에 대해 말합니다.

인간은 불의하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바울의 진단이고 선언입니다. 또 바울은 시편과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빠르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롬3:10-18)고 인간의 실상을 가감 없이 폭로합니다. 모든 인간이 죽음살이를 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왜 그러는 걸까요? 그냥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말하면 될 텐데 왜 굳이 인간의 불의함을 그토록 신랄하게 고발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인간의 불의함을 아는 것이 모든 앎의 진정한 출발이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헬라의 아폴론 신전의 현관 기둥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고대 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 철학의 시작이요 앎의 시작이라고 설파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소크라테스보다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자신의 불의함을 알아야 한다, 자기의 모든 행위가 오직 죄악으로 가득할 뿐이고 죽음살이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앎의 시작이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으로 들어가는 토대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말하면서 제일 먼저 인간의 불의함을 고발한 것입니다. 열심히 죽음살이 하고 있는 인간의 적폐를 가감 없이 까발린 것입니다. 흔히 지난 박근혜 정부에만 적폐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큰 오산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의 삶에도 적폐가 쌓여 있습니다. 적폐인줄도 모르는 적폐가 산덩이처럼 쌓여 있습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이 적폐를 알아야 합니다. 특히 자기 삶 속에 쌓인 적폐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앎이 시작되고, 하나님나라 복음을 듣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여러분, 사람은 자기가 심히 불의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자기 지식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불의한 존재인지를 모르면 자기 지식으로 죽음살이를 합니다. 의사는 의학 지식으로 환자의 주머니를 털고, 판사는 법률 지식으로 강자의 죄악을 세탁해주고, 과학자는 자기가 개발한 첨단 지식으로 부패한 자본과 결탁하고, 교수는 자기 전공 지식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공무원은 지역 개발 정보를 이용해 땅 투기를 하고, 그리스도인은 성경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예, 어쩔 수 없어요. 사람은 자기를 모르면, 자기가 얼마나 불의한 존재인지를 모르면 자기 지식으로 죽음살이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더 많이, 더 가열차게 자기를 죽이고 다른 사람을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기를 모르는데 무슨 수로 생명살이를 하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박사학위를 천만 개 가져도 자기를 모르면 생명살이를 할 수 없어요. 자기를 알아야, 자기가 얼마나 불의한 존재인지를 알아야 비로소 생명살이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믿는 은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합니다. 율법은 본래 생명살이의 표본으로 하나님이 준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삶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나라 백성이 살아야 할 생명살이다, 라고 삶의 표본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의 기능을 새롭게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준 것은 죄를 깨달아 알게 하려고 그런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율법을 좇아 살 능력이 그들 안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하려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어떤 변명이나 핑계를 할 수 없게 하려고 그런 것이라는 해석합니다(3:19-20).

옳습니다. 율법은 하나님나라 백성이 살아야 할 삶의 표본임에 틀림없지만 율법의 현실적인 쓰임새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죄를 알게 하는데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살 능력이 없다는 것,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데 율법의 현실적인 쓰임새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야 할 삶의 지침으로 준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너희는 불의한 족속’이다, ‘너희는 나의 율법을 좇아 살라고 부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나의 율법을 좇아 살 수 없는 불의한 족속’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해 준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율법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진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것이 인간이 알아야 할 첫 번째 진실입니다. 나를 포함해서 모든 인간은 불의하다는 것,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살 능력이 전혀 없는 불의한 죄인이라는 것이 인간이 알아야 할 첫 번째 진실이고 첫 번째 지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나를 포함해 모든 인간은 불의하다는 이 진실을 아는 것이 참된 지식의 출발이고, 참된 은혜의 출발이고, 하나님의 의만을 붙잡는 참된 믿음의 출발이고, 참된 변화의 출발이고, 참된 인간됨의 출발입니다. 이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인간은 현재의 상태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모든 인간은 지금 죄의 종노릇하고 있고, 자기의 종노릇하고 있고,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고, 왜곡된 자유의 종노릇하고 있는데 이런 상태에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근본 문제, 삶의 근본 문제가 하나도 풀리지 않습니다. 인간이 불의한 죄인이라는 첫 번째 진실, 첫 번째 지식을 알아야만 비로소 풀리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1장 17절에서 말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저는 이 짧은 문장이야말로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나라 복음의 정수를 담아낸 최고의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인간이 불의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뼛속까지 죄인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자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로서 1장 17절 말씀이 천둥소리처럼 들려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옳습니다. 주님!! 옳습니다. 주님!! 제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밖에 없습니다!!”라고 굴복하게 되고, 온 몸으로 이 말씀을 붙잡게 됩니다.


만일 인간의 불의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들어도 무슨 말인지를 알 수가 없고, 아무리 크게 말해도 공허한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불의한 죄인이고 나 또한 죄의 종노릇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비로소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정말입니다. 하나님나라 복음은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들리지 않습니다. 크게 말하고 지혜롭게 설명한다고 해서 들리지 않습니다. IQ가 높고 공부를 잘 한다고 해서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 복음은 인간이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들립니다. 그것도 인간의 위대함이나 탁월함을 알아서는 들리지 않고 오직 인간의 부패함과 불의함을 알아야 들립니다. 인간은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들립니다. 바울이 1장 18절부터 인간의 불의에 대하여 줄기차게 말한 것도 이것을 알아야만 17절 말씀의 복음이 들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나라 복음은 인간의 선함이나, 인간의 종교성이나, 인간의 능력이나, 인간의 믿음이나, 인간의 이상이나, 인간의 희망에 기초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랑이나, 인간의 긍지에 기초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나라 복음은 오직 인간의 불의함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불의한 죄인이라는 차가운 진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떨까요? 교회는 과연 어디에 기초하고 있을까요? 잘 아시는 대로 교회는 하나님나라 복음을 믿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죽은 후에 천국에 가고자 하는 자들의 모임도 아니고, 신에 대해 관심을 갖고 탐구하는 자들의 모임도 아니고, 세상살이에 흥미를 잃은 자들의 모임도 아니고, 도덕적인 이상사회를 이루겠다는 야무진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의 모임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가 이미 시작됐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나라 복음을 믿는 자들의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디에 기초하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나라 복음이 인간은 죄인이라는 차가운 진실에 기초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나라 복음 공동체인 교회 또한 인간은 죄인이라는 차가운 진실에 기초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은 죄인이라는 차가운 진실에 눈을 떠야 하나님나라 복음이 제대로 들리는 것처럼, 인간은 불의한 죄인이라는 차가운 진실에 기초해야 교회가 진정한 주님의 교회, 진정한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공동체로 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그렇습니다. 교회는 모름지기 인간은 불의한 죄인이라는 차가운 진실 위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나라 복음 공동체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교회는 하나님나라와 아무 상관없는, 그저 인간들이 종교놀음을 하는 곳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와 기독교를 동일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기독교이고 기독교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와 기독교는 동일체가 아닙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동일체처럼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동일체가 아닙니다. 교회와 기독교는 좀 다릅니다. 교회는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들의 모임인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려고 애쓰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행하심에 기초하고 있는 반면, 기독교는 인간의 범주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인간의 범주에서 구원을 이해하고 행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중심인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중심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공동체인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라고 말하는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교회와 기독교는 이렇게 달라요. 비슷한 듯 다릅니다. 결국 기독교는 뭐냐, 교회가 부패하여 제도화되고 정치화되고 종교화되고 인간화된 것이 기독교입니다. 교회는 교회인데 교회의 핵심 본질이 빠지거나 왜곡된 것이 기독교입니다.

 

저는 말씀샘교회 7년을 보내면서 뼈아픈 진실을 발견했습니다. 말씀샘교회가 그동안 교회가 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샘교회가 하나님의 공동체이기보다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였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교회이기보다는 성도들의 생각과 결정이 지배하는 교회였다는 뼈아픈 진실을 발견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말씀샘교회가 만일 참된 하나님나라 복음 공동체였다면 마땅히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자랑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일에 교회의 최우선 선위를 두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 받는 것을 자랑하기보다는 민주적인 교회 운영을 자랑했습니다. 민주적인 교회운영이라는 원칙만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며 그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했습니다. 또 성도 수는 적지만 다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서로를 추켜세우며 서로에게 만족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다르다며 남모르는 긍지를 느꼈습니다.


이것은 말씀샘교회가 하나님의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생각이 지배하는 공동체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꿔 말하겠습니다. 말씀샘교회는 안타깝게도 우리는 불의한 죄인이라는 차가운 진실 위에 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괜찮은 목사와 성도들이라는 환상 위에 섰습니다. 그래서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생각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된 거였습니다. 물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그래도 건강한 교회의 길을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말씀샘교회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였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경험과 생각이 지배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참으로 뼈아픈 발견이었습니다. 지금껏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경악스러울 정도로 뒤늦은 발견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했습니다. 너무도 뼈아픈 이 진실을 지금이라도 보게 된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저는 말씀샘교회의 진실을 발견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샘교회가 명실공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나라 복음 공동체로 거듭나게 해주옵소서!! 성도들의 경험과 생각이 지배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교회로 거듭나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기도를 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하고 또 기억할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인간이 불의한 죄인이라는 차가운 진실 위에서만 설 수 있다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기고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역설적인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바리새인과 같은 의인들이 모여야 훌륭한 교회가 설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바리새인과 같은 의인들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지 않으시고 세리와 같은 죄인들 위에 세우십니다. 괜찮은 사람들, 콧대가 높은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교회를 세우지 않으시고 무너진 사람들, 콧대가 납작해진 사람들을 통해 세우십니다. 인간에 대한 희망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지 않으시고 인간에 대한 절망 위에 세우십니다.


그래서일까요? 하나님은 말씀샘교회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셨습니다. 우리는 괜찮은 목사요 괜찮은 성도라는 환상과 오만을 깨뜨려주셨습니다. 말씀샘교회가 하나님의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였다는 뼈아픈 진실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교회의 토대인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말씀샘교회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진정한 교회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믿습니다. 말씀샘교회를 순전한 하나님나라 복음 공동체로 세우기 위한 은혜의 표징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앞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일에 목회의 최우선 순위를 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불의한 죄인이라는 차가운 진실 위에 교회의 초석을 놓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만을 바라보고 기대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서 일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