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마서

로마11-이스라엘이 언약에 실패했으니 (로마서3:1-8)

새벽지기1 2018. 10. 23. 07:45


성경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것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것까지 정말 폭넓고 다채롭고 광대하고 심오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마 세상에 있는 책 중에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가장 풍부하고 심오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 성경일 것입니다. 특히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심판자시라고,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데 특별히 인간을 통해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삼라만상 중에 오직 인간만을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왜 인간일까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피조물이 있는데 왜 꼭 인간일까요? 왜 인간을 통해 심판하시고, 인간만을 심판하실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 진실은 인간이 단지 세상을 사는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예, 인간은 태양 앞에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춤추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피조물입니다. 몸은 비록 세상 안에서 세상과 함께 살지만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지극히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피조물입니다.

두 번째 진실은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갑질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영광스럽고 존귀한 존재로 대우하는 존중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예,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 갑질이 아닙니다. 하나님 맘대로 인간을 평가하고 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를 심판하신다는 것은 인간을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위대한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고,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할 영광스럽고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은총의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진노로 가득한 무섭고 소름끼치는 종말적 파멸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은총의 사건입니다.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놀랍고 영광스러운 진실이 담겨 있는 은총의 사건이에요. 물론 하나님의 심판에는 파멸의 의미도 담겨 있고, 정화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모든 더러워진 것을 제거하고 깨끗케 하는 파멸과 정화의 의미가 담겨 있어요. 그러나 파멸과 정화의 의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오직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며 삽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삽니다. 매순간순간 공기를 호흡하듯이 그렇게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삽니다. 하나님을 통해 삽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통해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당연히 정의롭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차별 없이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으로서 율법과 성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은 다른 이방 민족과 달리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를 넘어선 자리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유대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깨부숩니다. ‘NO.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가졌다고 해서, 육체에 할례를 했다고 해서 유대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표면적 육신의 할례는 할례가 아닙니다.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함을 얻고,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라야 참 유대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2:25-29). 심지어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이 율법을 지키면 그들의 무할례를 할례로 여긴다고까지 말했습니다(2:26) 유대인들이 듣기에는 너무너무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믿음과 확신을 완전히 깨부수는 말이었습니다.

 

당연히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만일 바울의 말대로 율법을 가졌든 안 가졌든, 할례를 행했든 안 행했든 동일하게 심판을 받는다면, 율법이나 할례나 성전을 가진 것이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심지어 율법 없이도 율법을 행할 수 있다면, 유대인이라고 해서 나을 것이 하나도 없지 않느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나을 것이 하나도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 왜 굳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었으며, 왜 굳이 우리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뽑았단 말이냐, 하는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3장을 이 의문을 묻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3:1) 이 의문에 대하여 바울은 분명하게 답합니다. “여러 모로 많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 실로 놀라운 명예요 특권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3:2).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은 하나님의 계시를 위탁받은 매우 특별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즉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전달하라는 하나님의 특명을 받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북미 간의 비핵화문제를 중재하고 해결하기 위해 북한 김정은 위원장에게 특사를 보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특사는 북한에 가서 자기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자기 뜻과 의지를 전달하면 안 됩니다. 오직 문제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대통령의 뜻과 의지를 충실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것이 특사의 책임이고 특사의 영광입니다.

유대인이 그렇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특사로 선택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친서(말씀, 계시)를 온 세상 열방에게 전달하라는 특명을 받은 하나님의 특사입니다. 정의용 청와대 정책실장이 문재인 대통령 특사로 선택받은 것이 무척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일인 것처럼 유대인이 하나님의 특사로 선택받은 것 또한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대통령 특사로 선택받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명예요 영광이요 특권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 받은 여러 특권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유대인은 하나님께 받은 이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특권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으면 받은 율법대로 살아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온 세상에 드러내야 하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복의 근원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는커녕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했다고 비판했습니다(2:23-24).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사답게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율법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육체의 할례를 받고, 율법을 소유하기는 했지만 율법을 따라 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됐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고 조롱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에 똥칠을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3절에서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믿지 아니했다”는 말은 “신실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언약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유일무이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민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참고해야 합니다. 다 아는 것처럼 언약은 언약의 양쪽 당사자가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맹세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쪽 당사자가 맹세한 약속을 깰 경우 상대방은 맹세한 것을 지킬 의무가 없어지는 것이 통례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도 그런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행하기로 약속했고(출19:8),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이요 세계의 제사장 나라로 삼기로 약속했습니다(출19:6).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언약의 한 쪽 당사자인 유대인이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온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약속해놓고는 약속한 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언약의 한 쪽 당사자가 언약을 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언약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언약의 한 쪽 당사자가 언약을 깰 경우 상대방은 맹세한 것을 지킬 의무가 없어지는 것이 통례인데, 지금 언약의 한 쪽 당사자인 이스라엘이 언약을 깼으니 어떤 의문이 야기되겠습니까? 당연히 이 언약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 원천무효가 되는 것 아니냐 하는 의문이 야기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으니까 하나님도 언약에 신실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언약이 원천무효가 되는 것이고, 결국은 하나님의 미쁘심(신실하심)까지도 무너지는 것 아니겠느냐 하는 의문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v.3).


바울은 이 의문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십니다(미쁘시다, 신실하시다).”(v.4)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스라엘의 신실함 여부에 영향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신실하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흔들리거나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실 인간의 예대로 하면 하나님이 신실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실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신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쪽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이것은 그냥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에 신실하셨습니다. 다윗을 부르신 하나님은 다윗이 밧세바와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또 하나님께 대적하는 이스라엘에게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말씀하셨고, 바벨론의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오게 하시고, 마지막에는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언약에 신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야, 너는 창녀 하나를 만나 그녀와 결혼하여라. 그리고 그 창녀에게서 자식을 낳아라.”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이스라엘 전체가 사창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라 전체가 하나님에게 부정을 저지른 창녀들의 소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호1:2)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거듭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린아이였을 적 나는 그를 사랑했다. 내 아들아, 하고 큰소리로 그를 불러냈다.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그러나 다른 자들이 부르자 그는 나를 버리고 가버렸다. 그는 인기 좋은 음란한 신들을 숭배하고, 갖고 놀기 좋은 신들로 종교놀음을 벌였다. 그래도 나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에브라임의 길을 인도해주었다. 압제받던 그를 구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도움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유모차를 밀어주고, 아기처럼 번쩍 들어 뺨을 부비고, 허리 굼혀 젖을 주던 일을 알아주지 않았다. 이제 그는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앗시리아한데 가고 싶어 한다. 내게 돌아올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성들이 위험한 곳이 되었다. 살인사건이 급증하고, 개선의 노력은 번번이 무산되었다. 내 백성은 나를 저버리는 일에 필사적이다. 바알 신에게 달려가 도와 달라고 기도하지만 그 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단념하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단념하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망하도록 놔두며, 가련한 스보임처럼 황폐해지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느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견딜 수 없다. 내 온몸이 거부한다. 아무리 미워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겠느냐? 나는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며, 지금 여기 너희 가운데 있다.”(호11:1-9)


예, 하나님은 그러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신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변함없이 신실하셨습니다. 아니, 저들의 신실하지 않음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고 확증됐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의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시고 성취하십니다. 바울은 가는 곳곳마다 이 메시지를 쉬지 않고 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해괴한 주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하면 이스라엘의 신실하지 않음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확증한 셈이다. 비록 우리가 행한 것이 악역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악역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났다면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드러내는데 일익을 담당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우리가 조그만 상이라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 주연급 게런티(guarantee)는 아니라도 최소한 조연급 게런티는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 그리고 우리가 더 많은 악을 행할수록 하나님의 선하심이 더 많이 드러나고 확증된다고 하니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더 많은 악을 행하자’고 주장했습니다(3:5-8).

참으로 간교하고 해괴망측한 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죄와 은혜에 대해서도 그랬습니다. 바울이 율법에 대해 말하면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5:20)고 말하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한지 아십니까? “아이고, 잘됐네. 할렐루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하니 은혜를 더하기 위해 죄를 더 많이 지어야겠군.”(롬6:1)이라고 떠들어댔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판 가롯 유다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말합니까?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지 않았으면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졌겠느냐, 가롯 유다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큰일을 했으니 상을 줘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만든 선악과 때문에 아담이 타락했으니까 선악과를 만든 하나님에게 인류 타락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그런 주장에 현혹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논리로 보면 앞뒤가 맞으니까 혹하고 넘어갑니다.

 

인간이 그래요. 인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단세포적이고, 일차원적이고, 수평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려 듭니다. 자기 이해와 논리의 범주 안에서 하나님을 추론하고 이해하고 규정하려 듭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자들도 거의 대부분 하나님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인간적인 범주에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논리를 넘어서서 일하시는데, 하늘이 땅과 다른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른데 하나님을 인간적인 논리의 틀 안에서 일하시는 분으로 왜곡시키고 축소시키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은폐성을 감당할 능력이 없으니까 아예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호주머니에 갖고 다닙니다.

 

인간은 항상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통해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호주머니에 갖고 다녔습니다. 제가 60평생을 살면서 가장 처절하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부패하고 추악하다는 것, 인간에게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인간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다는 것,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처절하게 깨달았습니다(렘17:9). 제가 스무 살 때 예수님을 만나고 이 사실을 발견했는데 40년을 예수님과 함께 살아오면서 온 몸으로 절규하면서 더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절망했습니다. 어떻게든지 괜찮은 사람이 되어보려고 발버둥을 해봤고, 어떻게든지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쳐봤는데 끝내 절망하고야 말았습니다. 나에 대해서도, 너에 대해서도, 모든 인간에 대해서도 끝내 절망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런데 절망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에게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이 깨달음과 인간에 대한 처절한 절망은 지금 저를 또 다른 곳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내가 붙잡고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자비뿐이라는 것,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는 것,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도무지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통해 사는 길은 말씀과 기도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간 부족했던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고백합니다. 기도의 자리가 그리스도인이 서야 할 마지막 자리라고. 믿음의 사람이 서야 할 마지막 자리는 기도의 자리라고. 예, 제가 인간에 대한, 저에 대한 처절한 절망 속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내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 내가 서야 할 자리는 바로 기도의 자리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주님이 저를 그렇게 이끌어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께서도 날마다 믿음의 사람이 서야 할 마지막 자리,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절망해야 합니다. 절망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해 절망, 나 자신에 대해 처절하게 절망해야 합니다. 이 절망 위에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고, 믿음의 사람이 서야 할 마지막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해, 자신에 대해 처절하게 절망해야만 진정으로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하며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절망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용납, 절망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사랑은 진정한 용납이 아니고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에게 깊이 절망한 후에 하는 사랑이라야 진짜 사랑입니다. 어떤 기대를 갖고 사랑했다면 그 사랑은 참된 사랑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사랑에 미치지 못합니다. 오직 철저히 절망한 후에 하는 사랑이라야 진정한 사랑,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사랑일 수 있습니다. 오직 절망한 후에 하는 용납이라야 진정한 용납일 수 있습니다.


물론 절망은 너무도 힘든 고통의 과정입니다. 세상에 절망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절망 위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고, 진정으로 서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용납할 수 있고, 진정으로 서로를 용서하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교회로 모이게 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망해야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고, 진정으로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교회로 모이게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절망에 이르게 하기 위해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절한 절망을 통해 종말론적 희망을 꽃피우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종말론적 희망(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말이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사실 절망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몸서리치는 절망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빛으로 나아가는 희망의 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 절망을 경험하고 절망에 이르러야 합니다. 목사에 대해 절망하고, 성도에 대해 절망하고, 인간에 대해 절망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모든 헛된 신화와 이상을 내려놓고 절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절망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 하나님나라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이 서야 할 마지막 자리인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절망이 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