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마서

로마12-죄 인식의 은총 (로마서3:9-18)

새벽지기1 2018. 10. 23. 07:46


바울은 로마서 서두에서 ‘복음에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의’라고 말했습니다(1:17).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인간의 불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은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를 따지지 않고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심히 피격적인 말을 했습니다(1:18-2:29).

당연히 이 말은 많은 논쟁을 야기했습니다. 만일 바울의 말이 맞다면 - 율법을 가졌든 안 가졌든, 할례를 행했든 안 행했든 동일하게 심판받는다면 - 유대인이라고 해서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유대인을 굳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뽑을 필요가 없는 것이고 굳이 율법을 줄 필요도 없는 것 아니냐, 하는 논쟁이 야기됐습니다.

바울은 이 물음에 대해 “그렇지 않다. 유대인의 나음이 범사에 많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으로서의 특권이 많다고 인정했습니다. 비록 저들이 받은 특권을 제대로 감당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유대인이 받은 특권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옳습니다. 유대인은 세계 열방 중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친서(말씀, 계시)를 세계 열방에게 전하는 일을 위해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파트너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은 매우 특별한 백성입니다. 비록 저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파트너로서의 지위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저들의 역사와 함께 하셨고, 저들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이 유대인의 혈통을 통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특권과 역사적 경험을 한 만족임에 틀림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유대인의 특별함을 말하고 나서 또 묻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3:9) 자, 이게 어떤 물음일까요? 이 물음은 바로 앞에서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매우 특별한 백성’이라는 사실과 관련된 물음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유대인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민족임에 틀림없다면, 그렇다면 유대인은 다른 민족과 달리 뭔가 특별한 자질이 있지 않겠느냐, 인간적으로 뭔가 나은 것이 있지 않겠느냐, 라고 물은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물음에 대해 ‘결코 아니’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였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이 선언은 바울이 로마서1장18절부터 지금까지 했던 말을 축약해서 강조한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구약의 시편과 이사야 선지자의 말들을 길게 인용했습니다(3:10-18). 오래 전에 기록된 시편과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이렇게 인용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다 죄 아래 있다’는 바울의 선언이 자기만의 선언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이 반복해서 말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확정적으로 보여줬습니다.

 

바울은 오래 전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고백을 인용해서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예, 이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이고, 다윗의 진단이고, 바울의 진단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이 진단 앞에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 진단에 해당되지 않는데요?’ ‘하나님, 저 사람은 좀 다르지 않나요?’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오직 인간일 뿐이고, 인간인 한 죄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없는 건 아닙니다. 개중에는 정말 경건하고 의롭게 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차이라는 게 겨우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경건하고 의롭게 산다 하더라도 인간인 한 근본적으로 죄를 짓는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오래 전 노아시대에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것과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창6:5).

초기교회의 대표적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했습니다. “사람은 다 죄인인데 두 가지 형태의 죄인이 있다. 하나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고, 또 하나는 ‘나는 의인입니다’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죄인이 있을 뿐 의인은 없다.” 옳습니다. 인간은 좌우지간 죄인입니다. 인간은 단 하루도 죄 짓지 않고는 못살아요. 공기를 호흡하지 않고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것처럼 죄를 짓지 않고는 하루도 못삽니다. 우리 모두는 너에게 죄를 짓고, 모든 생명에게 죄를 짓고,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서 삽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죄를 짓고, 아내는 남편에게 죄를 짓고, 부모는 자식에게 죄를 짓고, 자식은 부모에게 죄를 지으면서 삽니다. 심지어 경건하고 의롭게 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깊은 어둠과 불의의 늪에 빠집니다. 한 번 세심하게 살펴보십시오. 속 깊은 곳까지 살펴보십시오. 아주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 그 경건함으로 굉장히 많은 죄를 짓습니다. 아주 의롭게 사는 사람이 그 의로움으로 아주 고약한 죄를 짓습니다. 경건한 사람이 짓는 죄가 더 비인간적이고, 의로운 사람이 짓는 죄가 더 잔인무도합니다.

 

바울은 다윗이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었다”고 한 말을 인용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사람은 다 치우쳐 있습니다. 어떤 자들은 좌로 치우쳐서 돈과 명예와 쾌락과 이 세상의 권력에 종노릇하느라 바쁘고, 어떤 자들은 우로 치우쳐서 자기 자신의 의와 덕과 지혜를 갈망하느라 바쁘고, 어떤 자들은 종교에 치우쳐서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자기가 만든 우상을 섬기느라 바쁘고, 어떤 자들은 정치에 치우쳐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바쁩니다.

바울은 인간의 실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나열합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3:13-14) 여기에 나열된 죄는 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눈으로 짓는 죄나 귀로 듣는 죄는 없고 입으로 짓는 죄, 즉 말로 짓는 죄만 나열해놓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눈으로도 죄를 짓고, 귀로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입으로 짓는 죄가 훨씬 많고, 입으로 짓는 죄가 눈으로 짓는 죄나 귀로 듣는 죄보다 훨씬 무시무시하고 지독하고 잔인하고 파괴적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야고보 사도는 “혀는 곧 (모든 것을 태우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약3:6)라고 단정하고,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3:7-8)고 경고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로 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을 미혹에 빠뜨리기도 하고, 진실을 거짓으로 뒤집기도 하고, 가짜 뉴스를 퍼뜨려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발은 어떨까요?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고, 그러기에 그들의 앞에는 파멸과 고생의 길이 있을 뿐 평강의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한 것인데 원문은 이렇습니다.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59:7-8) 여기서 발은 인간의 행위 전체, 생활 전체를 의미한다고 봐도 됩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한 말은 인간의 행동, 인간의 생활이 피 흘리는데 빠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선을 행하는 데는 더디고 피 흘리는 데는 빠르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인간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3:18) 예, 인간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두려워하고, 자연은 두려워하고, 호랑이는 두려워하고, 역사는 두려워하기는 하는데 정작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한없는 인자를 베푸시고 용납하시며 길이 참으시니까 하나님을 아주 우습게 여기고 멸시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필요할 때는 꺼내 쓰고, 필요치 않을 때는 호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바울이 폭로하는 인간의 실상이 정말 그러하다고 동의되십니까, 아니면 인간에 대해 너무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혹평했다고 생각되십니까? 인간 안에는 긍정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은 보지 않고 지나치게 부정적인 것만을 자학적으로 말했다고 생각되십니까? 당연히 바울도 인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문화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대한 에너지와 숭고한 능력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경탄에 경탄을 거듭해도 부족할 만큼 창조적이고 숭고하고 아름다운 에너지와 능력이 인간 안에 풍부하게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도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바울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부정적인 말만 줄기차게 반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렇게 부정적인 말, 혹평하는 말, 인간의 자존심을 짓누르는 말만 늘어놓았을까요? 좋은 말, 격려가 되는 말, 긍정적인 말은 한 마디도 안 하고, 맨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도 없고, 말과 행동이 다 죄악 투성이’라고 혹평한 것일까요?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만 사실은 이 물음이 잘못된 물음입니다. 바울은 인간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눈곱만큼의 혹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아무 것도 미화하지 않고, 아무 것도 곡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 그 자체를 정직하게 말한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인간의 차원에서 인간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인간의 차원에서 인간을 말했다면, 바울도 인간의 위대함과 숭고함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감사하며 칭송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긍정적인 말, 희망적인 말, 격려가 되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인간 앞에서 인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지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단지 인간이기에 인간인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선 존재일 때,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존재일 때 비로소 인간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존재일 때,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을 향해 사는 존재일 때 비로소 하나님이 태초에 디자인한 본래의 인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 그런 차원에서 인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의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차원, 법적인 차원, 양심의 차원에서 의인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몽땅 불의하고 무가치하다는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본 사람은 다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라고 고백했고, 욥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욥9:2-3)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고백했고, 초대교회 최고의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렇게 고백했고,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뱅도 그렇게 고백했고, 20세기 최고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도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무릇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자는 예외 없이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에덴동산 이야기가 말하는 것도 결국 이것입니다. 인간이 누구냐,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 즉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존재인데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등지며 사는 존재로 추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비참한 죽음살이를 할 수밖에 없는 심히 불의하고 무가치한 존재가 됐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체라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아무리 숭고해보이고 아무리 깨끗해보여도 출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인간은 너 나 할 것 없이 불의하고 무가치합니다. 매우 가슴 아프고 슬프지만 이것이 인간의 실체예요. 그리스도인은 이 실체에 눈을 떠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불의하다는 것, 인간에게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자기 안에 모든 인간적 기만의 원형이 놓여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뼈에 사무치도록 자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 신앙 안에서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고,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지지 않게 될 것이고, 죄의 종노릇하는 자들에게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증언할 수 있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갈망하며 그분 앞에 엎드리게 될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사람의 실체를 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의 교만은 절대 꺾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실체를 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끝없이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집니다. 사람의 실체를 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절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사람의 실체를 바로 알아야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사람의 실체를 바로 아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갈증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이 놀라운 비밀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5:20)고 표현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면 은혜를 더욱 넘치게 하기 위해 죄를 더 많이 지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해괴한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바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전혀 아닙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은 죄의 실상을 더 깊이, 더 많이 인식할수록 은혜를 더 깊이, 더 풍부하게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죄를 아는 것이 은혜를 아는 길이고, 죄를 아는 것이 인간과 하나님을 아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자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자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자기 죄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 안의 죄, 세상 안의 죄가 얼마나 뿌리 깊고 끈질긴지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자의 가장 현저한 특징입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진실인데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죄를 알고, 죄를 아는 것만큼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죄를 아는 것만큼 거룩해집니다. 자기의 죄를 보지 못한 자는 절대로 변화하지 않아요. 눈곱만큼도 변화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의 죄를 본 자만 변화합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보고 아는 것이 모든 복의 시작이고, 모든 은혜의 시작이고, 모든 변화의 시작입니다. 자기의 죄를 보고 아는 것이야말로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자기의 죄를 보고 아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