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마서

로마16-믿음과 율법(2) (로마서4:13-24)

새벽지기1 2018. 10. 23. 07:49


바울은 율법 밖에서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가 곧 복음이라고 했습니다(3:21-22). 사람들은 바울의 이 복음을 듣고 즉각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율법은 아무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율법이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율법이 무너지면 의 또한 무너지게 된다, 의가 무너지면 세상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라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이의 제기에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호출해서 믿음은 율법을 파기하지 않는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반박했습니다(3:31). 당신들은 믿음과 율법이 서로 대립한다고 생각하고 믿음이 율법을 파기한다고 염려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을 보라,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율법으로냐,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후에 할례를 받았고, 모세 때에 가서야 비로소 율법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믿음이 율법을 파기한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헛된 주장이다, 오히려 믿음이 율법을 필요로 하고 믿음이 율법을 굳게 세운다, 라고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반박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율법, 언약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4:13) 여기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상속자’라고 했으니까 당연히 ‘세상’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창세기는 ‘여호와’가 아브라함이 받을 지극히 큰 상급(very great reward)이라고 했습니다(창15:1). ‘여호와가 상급이다?’ 아브라함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주 여호와여! 내게 무엇을 주시려 하시나이까?” 대화가 완전히 어긋났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당신이 아브라함이 받을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은 ‘뭘 줄 것이냐’고 물은 걸 보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많이 일어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대화가 어긋나는 경우가 많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재대로 알아듣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엉뚱하게 잘못 듣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범주에서, 인간의 관점에서, 자기 유리한대로 이해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제대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말씀을 바꿔 말한 것입니다. 창세기는 ‘여호와’가 아브라함이 받을 상급이라고 했는데 바울은 ‘세상’이 상급이라고 바꿔 말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여호와’를 ‘세상’으로 바꿔 말한 데는 그만한 배경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신 일이 뭡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창조이고 또 하나는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보시기에 좋은 세계, 한없이 다채롭고 아름답고 조화롭고 영광스럽고 오묘하기 그지없는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답고 다채로운 세계를 창조하신 후 가장 위대하고 영묘한 피조물인 사람에게 말씀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1:28).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계명이요 근원 계명입니다. 이 근원 계명 속에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사람에게 위임하셨다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고 복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진실, 세상을 이용해서 사람이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사람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충만케 하고 복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깊은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세상을 상급(복)으로 주셨다는 말입니다. 아름답고 복된 세상을 상급으로 주시고, 아름답고 복된 세상으로 잘 관리하고 경영하여 충만하게 하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예, 바로 이것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이유이고 목적이고 뜻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산산조각 깨어지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반역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며 하나님을 부정하고 돌아섰습니다. 그 결과 최상의 상급이었던 세상이 망가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한없이 좋았던 세계, 더없이 다채롭고 아름답고 조화롭고 영광스럽고 오묘하기 그지없던 세계가 완전히 뒤틀려버렸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의 종노릇하고 죽음에 잡아먹히는 비극적 운명에 갇히게 됐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데에는 바로 이런 비극적 현실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맨 처음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2-3)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이 말씀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듣고 적용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아브라함을 세상에서 창대케 하려고 부른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도 세상에서 창대하게 하시려고 불렀다고 생각합니다. 1등만 알아주는 세상에서 1등 하게 하려고 불렀다고 생각합니다.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하시려고 불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복을 주려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비극적 운명에 갇힌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복을 주려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비극적 운명에 갇힌 세상에서 구출해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려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직 세상을 복 되게 하려고 불렀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하려고,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게 함으로써 세상 전체를 복되게 하려고 불렀습니다. 맨 처음 아담에게 주었던 복을 다시 주려고, 맨 처음 아담이 섰던 자리에 다시 세우려고 불렀습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그 영광스럽고 복된 자리에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다시 세우려고 불렀습니다. 완전히 깨어지고 뒤틀린 세상을 다시금 아름답고 조화롭고 복된 세상으로 회복시키려고 불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지요. 세상에서 복을 누리라고 부른 게 아니라 세상을 복되게 하려고 불렀습니다.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세상에서 복을 누리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세상을 복되게 하려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진짜 이유이자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 여호와가 너의 상급’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세상 안에 있는 것들을 하나님의 상급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니까,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합당하게 보응하는 것을 상급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이 아니니까 그런 잘못된 생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 ‘나 여호와가 너의 상급’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가 너의 상급’이라는 말씀을 문자대로만 읽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읽으면 바울의 말과 어긋납니다. 바울의 말이 틀린 게 됩니다. ‘여호와가 너의 상급’이라는 말씀은 ‘세상에 속한 것이 너의 상급’이 아니고 ‘세상이 너의 상급’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읽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읽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가 상급’이라고 했던 창세기 말씀을 ‘세상이 상급’이라고 과감하게 바꿔 말한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 속한 것이 상급’이라는 말과 ‘세상이 상급’이라는 말은 그 말이 그 말 같아 보입니다. 깊이 고찰하지 않으면 둘 다 비슷해 보여요. 그러나 이 둘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이 너의 상급’이라는 말과 ‘세상이 너의 상급’이라는 말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에요. ‘세상에 속한 것이 너의 상급’이라는 말은 ‘세상에서 복을 누린다’는 말이고, ‘세상이 너의 상급’이라는 말은 ‘세상을 복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속한 것이 너의 상급’이라는 말은 인간의 차원에 속한 것이고, ‘세상이 너의 상급’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차원에 속한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이 너의 상급’이라는 말은 율법의 차원에 속한 것이고, ‘세상이 너의 상급’이라는 말은 믿음의 차원에 속한 것입니다. 비슷한 듯 보이지만 전혀 달라요.

 

성경을 봅시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상급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통해 이루실 큰 나라’라고 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얻게 될 복’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나님나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하나님나라’라는 말에 혹해서 하나님나라를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하늘 저 끝 어딘가에 있는 신비한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다시금 다채롭고 아름답고 조화롭고 영광스럽게 회복된 세상이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회복된 세상을 가리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 전체를 쭉 연결해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상급이 새 하늘과 새 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담이 맨 처음에 받았던 복에 다시 참여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세상을 아름답고 선하게 다스리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세움 받았던 것처럼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영광스럽고 복된 그 자리에 다시 세움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신 세상, 새롭게 하시고 복되게 하신 세상을 상급으로 선물 받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세상 밖에 있는 어떤 영적인 세계가 하나님의 상급이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오직 세상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상속 또한 세상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가리켜 ‘세상의 상속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를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 여호와가 너의 상급’이라고 말씀하신 후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한 것을 15장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를 통해 그 약속을 이루시겠다며 언약식을 거행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현실은 하나님의 언약과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몸에서는 자식이 태어날 수 없었거든요. 아브라함의 몸에서 상속자가 태어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실현 불가능한 일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실현 불가능한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4:18-21)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고, 믿을 수 없는 중에 믿었습니다. 실현 가능한 것을 믿은 게 아니라 실현 불가능한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실현 가능한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직 실현 불가능한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를 둘러싼 현실과 모순될 뿐만 아니라 애당초 우리의 실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만 꼽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모든 생명이 죽는 필멸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죄를 먹고 사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여전히 죄와 어둠이 득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현실과 어긋납니다. 우리의 현실과 모순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가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의 현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다 어긋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실력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눈앞의 현실과 어긋나고 모순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눈앞의 현실보다 더 근원적인 현실, 더 참된 현실, 더 실제적인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 현실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누가 그 일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누가 그 일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습니까?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자기가 이룰 것이라고 믿었습니까? 언젠가 때가 되면 자기 후손들이 이룰 것이라고 믿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이 행하시고 이루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실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실력으로는 세계를 창조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실력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오직 하나님의 실력으로만 실현 가능합니다.

 

결국 성경이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 말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는 일,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되는 일은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이것이 아브라함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출중했다. 믿음이 출중해서 하나님의 큰 복을 받았다. 그러니 우리도 큰 믿음을 가져서 하나님의 복을 받자.’ 이것은 아브라함 이야기를 완전히 곡해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목사들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모델로 제시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설교하는데 그것은 아브라함 이야기를 완전히 오독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메시지를 증언하기 위해 등장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최종적으로 실행한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왜 동정녀에게서 태어났을까요? 특이한 방식으로 태어나야 신비한 아우라가 생길 것 같아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말한 메시지를 다시 전하기 위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자는 인간의 실력으로 오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실력으로 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일,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 받게 되는 일, 세상을 복되게 하는 일, 세상을 구원하고 재창조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실력,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짧게 정리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4:13-14)

바울은 줄기차게 율법은 안 되고 믿음으로만 된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율법은 안 되고 믿음으로만 된다고 할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이 실현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실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이 인간의 실력으로 실현 가능한 일이라면 당연히 율법으로 된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실력으로는 도대체 실현불가능하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언약의 상속자가 될 수 없다고 목이 터지라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절대 진실이니까 쉼 없이 줄기차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말 속에는 율법은 인간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는 반면 믿음은 하나님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고, 또 율법은 세계 내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는 반면 믿음은 세계 너머의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근원 진실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인간의 행위와 세계 내적인 것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율법에 속한 것으로는 하나님의 언약을 상속받을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옳습니다. 그것이 능력이든지, 신앙심이든지, 경건이든지, 선함이든지, 사랑이든지 좌우간 율법에 속한 것으로는 하나님의 언약을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에 속한 것으로는 하나님의 행위에 속한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이 행한 것에 참여할 수 있고, 하나님이 약속한 복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오직 은혜로만 하나님이 행한 것에 참여할 수 있고, 하나님이 약속한 복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했습니다.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4:16) 예, 하나님의 상급(상속)은 보상이 아닌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