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설교

마지막 심판의 기준 (마25:31-46)

새벽지기1 2017. 6. 15. 07:03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31-46)


마지막 때에 심판을 모면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본문의 작은 자 비유로서 세상의 종말과 당신의 재림에 관한 감람산 강화를 마감하고 있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영광중에 천사들과 함께 강림하시어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로 구분할 것이다.(31, 32절)

그 심판의 기준은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했느냐?”로 삼으신다고 한다. 그 작은 자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고, 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일 때 영접하고, 병이 들었을 때에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가 보았는지 아닌지 나눈다고 한다.

이 비유를 접하는 신자로선 참으로 당혹될 수밖에 없다. 이곳 엘에이의 코리아타운에만 해도 신호등에 차가 서면 홈리스들이 다가와서 구걸한다. 주리고 헐벗은 지극히 작은 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지가 멀쩡한데 왜 저라나 싶다. 돈을 주고 싶어도 술과 마약을 살 텐데라는 핑계를 대고는 매번 외면하기 일쑤다. 확대해서 적용하면 아무리 북한 정권이 싫고 밉지만 굶주린 동포들마저 수수방관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에도 게을리 한다.

그래서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과연 내 같은 자가 마지막 심판에서 무사할까 의심스럽다. 간혹 신자라도 선행과 구제에 힘을 쓰지 않으면 심판을 모면할 수 없다는 설교마저 듣게 되니 더 곤혹스럽다. 이런 의심과 혼동이 생기는 이유는 감람산 강화 전체와 성경에 일관된 진리에 근거하지 않고 이 비유 하나만 따로 떼어서 그것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본문은 상당히 길기 때문에 본문 안에서만도 그 전후관계를 잘 따져봐야 한다. 또 그렇게 따지며 문자적 해석만 제대로 해도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우선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세 비유 모두에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과 악한 종을 대조하고 있기에 이 둘을 제대로 비교 분석해야만 온전한 의미를 알 수 있다.

양과 염소의 비교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양과 염소 둘 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잘 대해주었다거나 아니면 핍박했다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판주인 임금이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더구나 양은 임금에게도 잘해 준 적이 없다고 자백만 했는데도 임금이 오히려 작은 자에게 잘했다고 칭찬했다. 염소도 임금에게 얼마나 잘 대우해 주었느냐고 따지기만 했는데 임금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잘못했다고 판결을 내렸다.  

양은 겸손하고 염소는 그렇지 못했다는 뜻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의 예절과 태도가 구원과 심판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나아가 임금은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가 될 수 없다. 신하가 임금을 먹이고 입힐 필요가 없고 그 반대로 임금이 신하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

이 비유에서 임금은 영광중에 강림하실 예수님을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서 수난을 받을 때에 도운 자 또한 아니다. 열두 제자 중에 가룟 유다는 스승을 배반해서 팔았다. 도리어 감옥에 갇히게 한 것이다. 수제자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 부인했고 나머지 열 제자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가기 바빴다.

그렇다고 예수님 당신께서 스스로를 겸손히 낮추어서 사람들이 당신께 잘하든 못하든 전혀 개의치 않으니 불쌍한 이웃을 구제하는 데만 힘쓰라는 뜻도 아니다. 반드시 기억할 것은 이 비유가 행위 구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하고 비천하고 소외된 자들의 구원을 우선시하는 해방신학을 변호하는 근거 구절도 아니다. 역으로 말해 십자가 복음의 절대성, 유일성, 완전성을 부인 내지 퇴색하는 구실이 결코 될 수 없다.  

십계명의 첫 네 계명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라고 강조한다. 예수님의 모든 행위와 말씀은 당신의 완벽한 의도와 순서에 따라 이뤄진다. 이 작은 자 비유에 바로 이어서 저자 마태는 무슨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가? 마리아가 옥합을 깨어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는데, 주님이 그녀를 칭찬한 후에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나 나는 항상 함께 하지 않는다고 했다.(마26:11) 가난한 자들이 항상 함께 있다는 것은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사람으로 가난을 벗어나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은 혹시라도 이 작은 자 비유를 선행과 구제에만 초점을 모아 해석해선 안 된다고 미리 못 박은 것이다.

구제와 선행에 관해 성경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진리는 무엇인가?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가장 중요한 강령이라는 것이다.(마22:34-40) 그 두 계명은 똑같은 비중과 중요성을 갖는 것이지 어느 한쪽으로 경도되어선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염소의 실체

예수님이 감람산 강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주님이 헤롯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철저히 파괴되고 예루살렘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종말과 재림의 시기와 징조에 대해 질문했고 주님이 대답한 것이 감람산 강화다.

또 그전에 종말, 특별히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고난 주간 둘째 날에 주님이 맨 먼저 작심하고 찾아가서 행한 일이 바로 부정과 불법이 만연한 성전을 청소한 것이었다. 그 후에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같은 유대종교 지도자들을 일곱 번이나 질책했다.

이런 전후 문맥에 비추어 보면 지금 이 비유에서 염소가 심판주인 임금을 향해 자기들이 열심히 섬겼다고 항의하는 의미는 이것이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율법과 성전제사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의 종교체계에 순응했다는 것이다. 모세오경과 장로들의 유전과 관습을 성실히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거기다 그들은 선행과 구제에도 사실은 열심이었다. 성전 미문에 나면서 앉은뱅이를 베드로가 고쳐주었다.(행3:1-10) 그 걸인이 왜 하필이면 성전의 미문에 앉아 있었겠는가? 성전에 기도하고 제사 드리러 들락거리는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적선을 잘해주었기 때문이다. 최고로 돈을 잘 버는 황금 길목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에게 영생의 길을 물으러 온 부자 청년 관원도 어려서부터 이웃 구제를 많이 했다고 자부했지 않는가? 반면에 유대 대중들은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내 코가 석 자인지라 길거리 홈리스를 던져 줄 돈이 없어서라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율법의 문자적 규정에 너무 묶였다는 것이다. 안식일에는 정말로 아무 노동도 하지 않으려고 병든 자마저 버려두었다. 거기다 문자적 규정을 자기들의 게으름과 허물과 심지어 죄악을 변호하기 위해 교묘하게 악용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듯이 시체를 만지지 말라고 하니까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자에게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성경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참 뜻에 대해선 무지했다. 그 뜻을 알아도 자기들을 높이는 일에만 우선적으로 적용하거나 그 일에 방해가 되면 모른 척 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어긴 적이 없고 또 율법을 구체적으로 보완하기 위해 자기들이 만든 규정을 철저히 준행하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줄 착각했다. 바울도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한 것이 하나님을 쫓는 열심히 지나쳤기 때문이라고 실토했다. 율법에 문자적으로도 완전한 자가 되려고 노력했다는 뜻이다.

그런 자들일수록 마지막 심판 때에 임금에게 도덕적으로 특별히 종교적 경건에서 하자가 없다고 격렬히 항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놀랍게도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41절)고 선포했다.

예수님이 고난주간의 첫 사역이자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일이라면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신을 따르는 백성들이 반드시 깨달아야 할 첫 째 가는 당신의 뜻이다. 그 뜻은 헤롯 대신에 유대인들의 실질적 왕인 대제사장이 아무리 사람들의 존경과 칭찬을 한 몸에 받아도 사탄의 졸개이자 대리인이라고 판결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겉으로 선하고 의로워 보이는 종교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지 않고 형식과 외식으로 흐르면 하나님의 저주를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와 목회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진리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양들

여전히 석연치 않는 부분이 남았다. 양은 지극히 작은 자를 잘 대우했다는 사실을 스스로는 몰랐거나 인정하지 않았다. 거기다 임금에게 잘한 적이 없다고까지 말했다. 단순히 겸손한 척 한 것이 아님이 분명할진대 대체 그는 어떤 모습의 신자이며 또 무슨 일을 행했는가?

예수님 당시 로마를 무력으로 대적해야 한다는 열혈당원들은 유대 종교체제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럼 유대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율법을 어겼다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선고 받은 자들이나, 나면서 불구자 같은 비천한 자들이 함께 모여 서로 사랑했다는 뜻인가? 그럼 다시 해방신학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셈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아주 간단히 알 수 있다. 심판을 받을 염소는 유대 종교지도자들 같은 자다. 그럼 구원을 얻는 양들은 그들의 행태와 정반대의 사람이다. 즉, 인간이 만든 종교를 따르지 않는 자들이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준행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하는 자들이다. 기독교 체계와 지역개별 교회를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신자들이 연합해서 교제하고 교육과 훈련을 받아 동역하라는 것은 성경에 명시된 하나님의 뜻이다.

유대지도자들이 저지른 잘못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배하거나 이웃을 사랑할 때에 오직 외모만 갖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손끝도 꼼짝하지 않은 것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참 뜻은 외면하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마저 그 외모만 보고 순종한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에 대입하여 쉽게 설명하면 교회 안의 재물이 많고 명예가 높으며 권력을 쥔 자들을, 그것도 헌금을 많이 했다는 이유만으로 교회의 장로나 안수집사로 임명해 우대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마저 외모로 판단했다. 나사렛 시골 출신에다 정식 랍비 교육도 받지 않은 자로 세리나 어부 같이 별 볼일 없는 자들을 제자로 삼았다. 예수가 만나서 교제하는 이들도 죄인, 창녀, 문둥병자, 나면서 앉은뱅이, 귀신 들린 자들이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거룩한 율법을 지키려면 절대 저럴 수는 없다고 여긴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천하의 이단으로 보았고 심지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부하라고 매도했다.

성경이 참 흥미롭지 않은가?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의 부하라고 심판을 받을 자들이(41절)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심판주인 그분을 거꾸로 사탄의 부하로 몰았으니  말이다. 사실은 성경이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신성과 능력이 위대한 것이다. 그분의 가르치는 권세는 서기관과 바리새인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의 무지함, 어리석음, 철두철미 완악함, 교만함, 죄로 타락함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기에 성경이 오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됐다는 의미

바울은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를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라고 정의했다.(고후5:17) 그 구체적 의미를 그 앞의 15, 16절에서 밝혀 놓았다. 먼저 자기는 예수를 육체로 알았던 자라고 고백했다. 감히 대제사장을 거역하고 거룩한 성전에서 난동을 부리다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하나님에게 불경한 정도를 넘어서 하나님을 대적했기에 예수를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지목했고, 또 그를 무너뜨리는 것을 자신의 필생의 소명으로 삼았다.

그러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만나서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신자들을 당신과 동격화 시켰다. 바울은 삼일 간 봉사가 되어 완전히 흑암 가운데서 자신의 죽음을 맛보았다. 예수님의 은혜로 다시 빛 가운데로 나오게 되자 그동안 예수를 외모로 판단했고 율법을 문자적으로 준수하려 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던 일인지 깨달았다. 하나님을 거역하다 못해 그분 앞에 가장 큰 죄임을 절감했다.

예수님은 그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준 후에 성령으로 하늘의 참 생명을 부어주었다. 이전의 사울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이제부턴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선언한 것이다. 현실의 조건과 지위와 신분으로 사람을 비교 판단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세상의 가진 것에 따라서 다른 이의 영향을 받거나 그에 비례해서 반응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대신에 이젠 나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겠다고 헌신했으며 심지어 자기 안에 사는 이가 바로 예수라고 선포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이미 되어있다. 그 의미는 겉으로 보이는 다른 이의 모습이 절대 그 사람의 실체가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경건하고 종교적으로 심오한 것으로 그 사람의 가치나 하나님 앞에 신자다움을 결정짓는 요소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다른 모든 이를 오직 그 안에 예수를 보배로 지녔는지 아닌지, 또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지 아닌지, 정말 실제로 예수에 의해서 살고 죽는지 만으로 판단하게 된 자가 신자다.

본 비유에서 양들이 임금을 잘 섬긴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경배와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염소와 달리 교회의 직분과 세상의 외적 조건에 비례해서 다른 사람에게 반응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나님 또한 그분의 외모로만 판단하지 않는 자다. 하나님의 실체를 보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외적 모양 즉, 내 눈에 보이는 대로의 환경과 여건으로 그분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무 까닭 없는 고난과 실패와 연단을 주시더라도 심지어 사방이 완전히 막힌 구덩이에 몰아넣더라도 그분의 나를 향한 사랑과 긍휼과 권능에 추호의 마이너스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자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께 내가 바친 것에 비례해서 그분이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음을 알게 된 자다. 물론 내가 바친 그 정성과 열심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단지 그렇게 바쳤다는 그 이유만으로 하늘 문을 여시고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인간답게 만들어 주라.

본문 비유에서 양과 염소 둘 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을 스스로는 언급하지 않았다. 염소는 교회와 세상에서 지위 높은 사람들만 쫓아다니느라 그 쪽에는 아예 관심도 없었기에 당연하다. 양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은 구제를 은밀히 행한 것이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선행을 베풀었다. 그러니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그들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것이다.(마6:2-4) 단순히 자기 이름을 안 내고 자랑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선행을 했다는 차원도 넘어선다. 다른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그 사람에게 없으면 안 되는 꼭 필요한 것으로 도와주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지극히 작은 자, 그것도 한 사람이라고 강조했음에 주목해야 한다. 한 명에게만 선을 베풀면 구원해준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도움을 받는 자가 한 인간이다. 한 인간으로써 인간답게 되는데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 그것이 없으면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결핍과 부족을 보거든 최소한 그런 것만은 같은 인간으로써 채워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주리고, 목마르고, 벗었고, 나그네 되었고, 병들었고, 옥에 갇힌 것 모두가 정상적 인간이 되기에 많이 부족한 모습이다. 법적으로 따져 최저 생계비도 못 버는 자들을 위해서 서로 가진 것을 나누는 책임을 가지라는 것이다. 더 추가하여 풍요와 사치로 채워주라는 의미는 전혀 없다.

이 비유에서 임금은 교회나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무 궁핍함이 없는 그들에게 더 보태어 주는 것은 그들로부터 반대급부를 바라는 목적뿐이다. 하나님에게 바쳐서 복을 받겠다는 것도 동일한 뜻이다. 하나님에게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그분에게 인간이 무엇을 더 보태어줄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들이 복을 받으려 바치는 그런 제물에 그분은 배가 부르고 질리다 못해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한탄하지 않았는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났을 때에 주님은 예수 믿는 신자를 당신과 동격화 시켰다. 이 비유에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 즉, 세상에서 최소한도 갖추지 못하여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모든 자들을 당신과 동격화 시켰다. 당신께서 이 땅에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으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까닭이다.

마지막 심판의 기준?

결국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무엇인가? 인간으로써 최소한의 행할 바 기본 도리대로 살았는지 여부를 보시겠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을 외모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주 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지었음을 확신하고 그들의 기본적 필요를 채워주었느냐를 따지겠다는 것이다.  

선행과 구제를 얼마나 많이 성실히 행했느냐를 보신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잘했는지 보신다고 했다. 다른 이가 도무지 한 인간으로 서기에도 결격 사유가 많으면 그것을 채워서 최소한의 한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모든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에 최소한으로 행할 바라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전혀 인간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 때에 인간을 처음 지을 때에 부여하신 당신의 목적대로 살았는지를 보신다. 그것이 바로 다른 이를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것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그 일을 위해서다. 예수를 믿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서 새롭게 산다는 즉, 믿음의 본질도 바로 그것이다.  

바울의 회심 체험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한 죄인의 더럽고 추한 심령에 완전히 꽂혀서 새 생명을 부어주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은 물론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게 된다. 예수가 없는 사람 그 자체가 바로 거짓이요 껍데기요 참 인간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실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뿐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내주한 신자만이 그 일이 가능하다.  

예수님이 마지막 때에 구원하는 자는 헤롯 성전처럼 아무리 화려하고 경건해도 그 안에 예수가 없고 인간 중심의 종교에 넘어가지 않는 자들이다. 인간 사회에서 가진 것 때문에 열등하게 취급받는 자들을 예수님처럼 찾아가서 사랑하는 자들이다. 자기 주변의 한 인간으로서조차 부족한 작은 자를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자다.

지극히 작은 자는 외모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자들이다. 겉으로 그럴싸한 외모가 전혀 없는 자를 어떻게 외모로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예 외모를 보지 않고, 아니 볼 수 있는 외모도 없으니 필연적으로 외모를 보지 않고 섬겨야만 하지 않겠는가?

물론 당장 저부터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만큼 구제와 선행에 결코 능하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다른 이를 외모로 인해 무시 내지 홀대하지 않는 자를 마지막 때에 주님이 찾으실 것만은 확실하다. 요컨대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감란산 강화의 결론은 신자가 평생을 두고 항상 다른 이를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며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종말을 올바르게 예비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