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설교

종말에는 더더욱 세상에 충성하라. (마25:14-30)

새벽지기1 2017. 6. 8. 07:12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25:14-30)

종말에 교회에 충성하라?

예수님이 신자가 종말을 대비하는 자세에 관해 세 가지 비유를 들어 쉽게 설명하는 중이다. 본문은 두 번째로 신자들이 익숙히 알고 있는 달란트 비유다.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하여 주일학교교사, 성가대원, 중보기도자, 전도자, 봉사자 등의 직분을 맡아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잘 섬기면 종말에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는다고 배워왔다.

틀린 해석은 아니나 너무 제한적인 이해다. 기독교인들 스스로 예수를 믿는 신앙의 의미를 아주 편협하고도 배타적으로 변질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세 비유 모두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과 악한 종을 대조하고 있다. 만약 악한 종이 단지 성경적 지식이 얕고 영적 분별력이 모자라는 열등 신자를 뜻한다면 종말에 교회에 더욱 충성하라는 기존의 가르침이 타당성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 세 비유의 악한 종 모두가 명목적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따르지만 사실상 불신자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아주 간단하다. 그들은 천국잔치에 참여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구원 밖으로 내쳤다. 그들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평가했던 하나님 보시기에는 불신자가 분명하다.

비유에서 주인이 타국으로 여행하면서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겼는데(14절) 예수님이 AD 33년경에 부활 후 승천하신 것을 상징한다. 주인이 여행에서 돌아와선 종들과 맡겼던 달란트에 대해 계산을 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여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는 모습이다.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은 불시에 일어난다. 신자들이 자신의 영성을 특별히 뛰어난 상태로 유지해야만 할 특정한 시기가 없다. 평소의 삶의 자세와 방식이 항상 종말을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달란트 비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의 모든 세대의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내용이다. 또 그래서 어떻게 정말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지, 인간 실존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과연 본문이 구체적으로 그러한지 살펴보자.

사람에게 우열은 없다.

비유에 세 사람이 등장하지만 다섯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똑같이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받았듯이(21,23절) 두 종류의 종을 대조하고 있다. 또 다섯, 둘, 하나 달란트를 받았다고 해서 사람의 성품과 자질과 능력은 물론 도덕성과 영성에서 우열(愚劣)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기 서로 다른 고유의 재능을 가졌다는 점을 알기 쉽게 숫자로 표현한 것뿐이다.

지난주의 열 처녀 비유에서 슬기 있는 처녀와 미련한 처녀가 각각 다섯 명씩이라고 해서 그 숫자적 비율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인간은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오직 두 종류뿐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대조하려고 숫자를 동원한 것뿐인데 본 비유도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다섯, 둘 달란트 받은 자가 각기 다섯과 두 달란트의 이익을 내었다고 해서 충성하는 정도와 세기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둘 다 받은 만큼 응분의 열매를 맺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특기와 장점을 살려서 성실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 다 작은 일에 충성했다는 칭찬을 들었지(21,23절) 더 잘했다 더 못했다는 구분이 없다.    

따라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그 재능이 가장 열등하다는 의미는 추호도 없다. 도리어 한 인간이 갖추어야 할 근본에서 부족한 것이 없도록 다 받았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 최소 단위의 숫자인 일로 표현한 것이다.

문제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특별히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살인, 도적, 간음, 거짓 증거는 물론 이웃의 물건을 탐한 적도 없다. 십계명을 하나도 위반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거기다 주인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기까지 했다.(25절)

도리어 주인이 취리하는 자에게 주어서 변리(邊利)라도 받게 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야단쳤다.(27절) 이는 하나님의 공동체인 이스라엘 백성들끼리는 돈을 꾸어주어도 이자는 받지 말라는 율법의 금지규정(신15:6)을 어긴 셈이다. 비유에서 주인은 하나님을 뜻하는데 당신이 만드신 법을 스스로 어긴 셈이다. 이 종이 악한 종으로 정죄되는 근거는 과연 무엇인가?  

왜 악한 종인가?

본문의 종들은 단순 노예가 아닌 한 집안의 청지기다. 주인의 재산을 대신 맡아서 장사했는데 필요하다면 사고파는 것도 자신의 재량으로 시행했다. 심지어 주인이 자신의 인감도장도 맡겼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눅16:1-13)에서 차용증서를 종이 제 멋대로 새로 만들어 줄 수 있었던 까닭이다. 벤허 영화에는 청지지가 타국에 가서 무역한 내역을 보고하자 주인이 너로 인해 내 재산이 날로 불어간다고 칭찬하고 진심으로 감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종이 잘못해서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직하게 회계를 하고 그 과정을 정확히 설명하면 주인이 손해를 감수하고 다음에 또 장사를 맡긴다.

그러나 종이 아무리 재물 운영의 전권을 받았어도 그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다. 종이 장사를 잘해서 큰 이익을 내어도 원래 주인의 재산이고 장사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주인이 마련해주었다. 또 종이 자신의 판단 착오로 손해를 보아도 주인이 감수해준다. 종으로선 주인에게 오직 감사와 존경을 돌릴 수밖에 없다.

다섯과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그렇게 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아예 장사를 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가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알았기 때문인데(24절), 아주 포악하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나태한 행동에 대해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시인하기에 앞서 주인 탓부터 먼저 했다.

또 심지 않은 데서 거둔다고 했다(26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이익을 본다는 것이다. 요행수로 복권당첨을 바란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이들을 사기, 강압, 착취하여 부당 이득을 취한다는 것이다. 헤치지 않은 데서 모은다고도 했다. 추수 때에 곡식을 타작마당에 벌려놓고 키질하는 모습에 빗댄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고리대금 같은 불로소득만 올리는 구두쇠라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주인이 차라리 이자를 받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일종의 반어법을 동원해 야단친 것이다. “네가 주인인 나를 그렇게 밖에 이해 못했다 치자. 그럼 최소한 네가 생각한 대로는 행동했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 종의 수준에 맞춘 질책이다. 그 동안 이자를 받았어도 한 달란트는 충분히 남겼을 것이라는 뜻이다. 결국 이 종은 주인을 불공평하고 무자비하며 원리원칙도 없는 사람으로 인식했다. 불법부정을 예사로 저지르면서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주었다 뺏어가는 조폭두목쯤으로 여겼다.

두려워서 땅에 묻은 까닭은 도적이 벽을 뚫고도 들어왔고 은행 금고도 없던 때라 아무도 모르는 곳에 파묻는 것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 한 달란트 받자마자 땅에 묻은 것은 중간에 한 번도 점검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주인의 것을 잘 보관해준 것이 아니다. 이익이 나든 손해를 보든 아예 장사를 시도도 해보지 않고 받은 그대로 돌려준 것이다.

한 달란트는 노동자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인데 6,000 데나리온에 해당된다. 노동자가 약 20년간의 임금을 하나도 소비하지 않고 모은 엄청난 금액이다. 그렇다고 예수 믿은 후에 하나님께 받은 현실적 축복을 뜻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2:4-11에서 설명한 은사도 아니다. 우선 비유이긴 해도 그 사용한 단어가 다르다. 달란트는 돈의 단위로 사용되다 차츰 재능(才能)이라는 의미로 바뀌었다. 은사(恩賜)는 영어로 gift 혹은 charisma인데 성령이 각 신자에게 당신의 뜻대로 나눠주는 것이다. 신자더러 교회의 덕을 세우고 연약한 성도들을 위로하여 함께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라고 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여서 은사를 받은 자들만 따로 모아서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불신자인 악한 종도 분명히 한 달란트를 받았다. 따라서 예수 믿은 후에 받는 방언, 신유, 영분별, 믿음, 능력의 은사일 수 없다.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자신만의 강점이자 다른 사람과 다른 점들이다.

한 달란트를 받았는데 받은 그대로 돌려주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태어난 상태 그대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다는 것이다. 욥의 모태에서 적신으로 났으니 적신으로 돌아간다는 고백(욥1:21)과는 다르다. 생명을 주신 이도 앗아가는 이도 하나님이기에 그분의 절대 주권 앞에 순전한 겸손의 태도를 보인 것이 아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에 전혀 발전과 성숙이 없었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그저 놀고먹기만 했다는 것이다. 달란트를 주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신자를 넘어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써 반드시 행해야 할 바 최소한의 것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악한 종인가?

예수님이 “악하고 게으른 종”(26절)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참으로 의미심장하지 않는가? 게을러서 악한 것이 아니라 원래 악한 자이기에 게을러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또 원래 악하다는 뜻은 무엇인가? 강도 살인 간음하는 자가 아니다. 주인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는 자다. 재림하실 예수님, 창조주요 구원주요 심판주 되시는 삼위 하나님을 굳은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그저 무섭기만 하여 조그만 잘못만 해도 무조건 벌부터 주는 하나님으로 말이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자다. 기분 내키는 대로 세상만사를 주무르는 절대적 독재자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존경심도 생기지 않으며 공포심만 생기는 하나님이다. 어쨌든 그 비위를 맞추려 모든 정성과 열심을 갖다 바쳐서 제발 나에 대한 분노만 거두어달라고 빌어야 한다. 나를 싫어하는 측면을 조금이라도 진정시켜서 화액을 모면해야 한다. 혹시라도 그 바친 것에 조금이라도 예쁜 구석이 있으면 약간의 보너스를 기대한다.

받은 한 달란트를 숨긴 이유는 오직 하나다. 혹시라도 장사에 실패하여 벌을 받으면 큰일 난다 싶었기 때문이다. 다섯과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도 실패할 것을 염려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주인에게서 완전한 자유재량 권리를 받았고 혹시 손해를 보더라도 감수해주는 자비로운 주인임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해주신다.(요일1:9)

예수님이 이 땅에 오기전의 모든 종교는, 물론 유대교를 포함하여, 심지어 오늘날의 일부 개신교는 잘하면 상주고 잘못하면 벌주는 기복신앙만 가르친다. 본 비유의 악한 종에 해당한다. 또 행위 구원을 옳다고 믿는 자들이기도 하다. 안식일에 조금이라도 노동하면 하나님께 큰 벌을 받는다고 믿기에 죽어가는 자도 외면한 반면에 구덩이에 빠진 자기 가축은 건져내는 자들이다. 인간이 만든 종교만 무성하고 그 안에 예수님의 참 생명이 빠진 자들이다. 
 
거기다 자신은 평생을 두고 나쁜 짓 하지 않았고 남에게 손해나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바로 악한 종이다. 사람들로부터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자라는 평판을 받는다. 이 비유의 종처럼 십계명을 어긴 적이 없기에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호화스런 사치를 누릴 큰 욕심은 없고 그저 내 가족끼리 안락하게 지낼 수 있는 따뜻한 보금자리와 일용할 양식만 있는 평범한 삶이 자기 인생의 가장 큰 목표와 소망인 자다. 또 그런 목표로 살았기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다고 자부한다.

그 결과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진술이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고안해 낸 종교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간주한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며 그가 자기를 대신해서 죽었다고 하면 아예 콧방귀만 뀐다. 그분의 피로 덧입혀져야 천국 갈 수 있다고 하면 그런 불공평하고 예수쟁이만 편애하는 하나님이라면 믿지 않겠다고 반발한다. 대신에 착한 자가 천국 가고 나쁜 자가 지옥가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자기는 평균 이상으로 선하고 의롭다고 자랑하는 꼴인데 그것이 바로 극도의 교만이자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에 대해선 전혀 인식이 없다.      

달란트 비유의 핵심 주제

예수님이 지금 이 달란트 비유에서 강조하는 핵심 주제가 종말에 교회에 충성하면 보상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다. 학생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학생도 아니듯이 신자가 교회에 충성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신자가 아니다.

본 비유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르게 지으셨다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가장 적합하고 유익하고 완전한 재능을 이미 주셨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재능을 주셨다는 것은 또 각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과 계획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각 사람을 그분이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처음부터 각기 다른 인생의 로드맵(road map)을 디자인하셔서 지금 바로 그렇게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상의 60억 인구 중에 그 사람 단 한 명만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상대하시고 당신의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로 다스린다는 것이다. 또 그에 적합하고도 충만한 은혜와 사랑을 지금 현재 베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자는 하나님에 대한 이런 인식이 전혀 없는 자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중요한 뜻 중의 하나가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한 인간들의 오해와 무지를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독생하신 아들 안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나타내셨다.(요1:18)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으시고 우리 죄과를 동에서 서가 먼 것같이 옮기셨다. 동과 서는 영원토록 만나지 못한다.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자식 같이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시103:10-13)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대신에 진리와 공의를 베푸시는 분이다.(사42:3)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간의 죄를 철저하게 저주하셨다. 바로 그분의 공의다. 십자가에서 부활하심으로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그 사랑 앞에 겸비하게 엎드리면 철저한 사랑으로 품어주셨는데 그것이 당신의 진리다. 하나님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올바르게 알게 된 신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는 것이다.(사43:21)  

이 비유에서 주인이 타국으로 여행을 떠났다는 의미가 예수님 승천 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 금령을 주신 뜻과 동일하다. 낙원의 모든 과실은 다 마음껏 먹어도 되었다.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아름답고 거룩하고 풍성하게 다르시라는 자유재량권을 받았다. 선악과만 먹지 말라는 것은 낙원의 소유권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인간에게 전적인 운영권을 맡긴 뜻과 목적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초 인간 아담은 죄에 빠져 하나님을 등졌다. 하나님을 곡해한 후에 제일 먼저 보인 반응이 무엇이었나? 하나님이 붙여준 이브가 부추기는 바람에 선악과를 먹게 되었다고 대꾸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했고 사실은 이브를 붙여준 하나님 당신의 잘못이 아니냐고 따진 것이다.

본문의 악한 종도 한 달란트를 숨긴 이유를 무서운 주인 때문이라고 핑계 되었지 않는가? 차라리 한 달란트를 맡기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 아닌가라는 뜻이다. 주인에게 달란트를 받아놓고도 그 사실을 잊고 살았다. 한마디로 주인을 잊은 것이다. 주인이 없는 것처럼 살았다. 주인이 없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모든 인간이 짓는 죄의 본질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을 지워버리고 자신이 세상과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마음대로 하려는 것이다. 이 땅의 운영권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소유권까지 하나님께서 빼앗으려는 것이다.

종말을 예비하는 모습의 본질

예수님이 본 비유에서 가르치는 신자가 종말을 예비해야 하는 모습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알라는 것이다. 그분은 모든 인간을 한 명의 예외 없이 인간 본연의 최소한도로 갖춰야할 근본은 완벽하게 다 갖추게 해주셨다. 어떤 이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완전하지 않은 자는 없다.

그분은 그래서 모든 인간더러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하는지 제대로 알라고 요구하신다. 이 세상에 한갓 물질로 우연히 내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원숭이의 후손이자 조금 고급한 동물로서 먹고 마시는 것에 부족함 없이 살다가 죽는 것으로는 절대로 만족해선 안 되며 그럴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예수를 모르는 이방인들의 삶의 목표일뿐이다. 신자인 너희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먹고 마시는 것의 많고 적음에 결코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네가 지금 이 장소, 이 시간, 이 모습으로 서있는 것이 하나님 그분의 절대적이고 완벽한 필연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지금과는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의 나로 서있을 수는 결코 없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 안에 내가 있지 않으면 절대로 온전한 내가 아니라는 분명한 인식 하에 모든 삶이 영위되어져야 한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지금 신자더러 한 번뿐이고 짧은 이 인생을 결코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어디인지 전혀 모르는 불신자처럼 살지 말라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아무리 열심히 최선을 다해 큰 업적을 쌓아도 그 업적은 자기 외부를 치장한 것에 불과하다. 자신의 내부는 오히려 더욱 갈급해지고 공허해진다. 자기 인생의 출발부터 우연과 물질 위에 근거하므로 절대로 참된 의미와 가치를 느낄 수 없다. 불행하게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진리 아니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신자는 다르다. 하나님이 나만의 너무나 풍성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청사진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 자다. 또 그 청사진을 이룰 수 있는 재능과 은사를 그분은 우리에게 이미 다 주셨다. 그렇게 세상에서 따로 불러내시려고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고 나에게 새 생명을 부어주셨다.

세상에서 신자가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 그분의 몫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신자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삶을 살 때만이 성공이다. 세상에서 뒤처지고 심지어 핍박받아 순교한다고 해도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을 보는 기쁨과 가치와 만족은 결코 세상이 줄 수 없다. 실제로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어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면 그 삶에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풍성히 누릴 수 있다.

한 번 생각해보라. 우주의 주인이자 통치자이신 하나님이 나를 일대일로 알고 계신다. 또 그 계획을 이룰 수 있는 재능을 다 받았고 성령이 그 계획 가운데로 이끌고 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신나고 기쁜 일인가? 아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인생인가?

이 비유는 종말을 행동으로 준비하는 모습에 관한 보충설명이다. 그런데 교회에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라고는 일언반구도 말씀하지 않았다. 교회에 충성하면 종말에 보상해준다고 하지 않았다. 기독교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신자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과 심판의 계획안에 단 한 줄도 들어가 있지 않다.

하나님은 오직 이 땅을 당신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리는 일에 충성하라고 하신다. 그리하여 불신자로 당신의 사랑을 보게 만들라고 한다. 쉽게 말해 종말이 다가올수록 세상 사람들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종말을 예비하는 참된 자세라는 것이다. 몇 번 강조하지만 신자는 자기 의와 공로 하나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의로 용서 받은 죄인일 뿐이다. 먹을 것을 발견했지만 여전히 거지다. 신자들끼리만 교회에 충성하여 종말을 대비하는 것은 거지가 먹을 발견하고도 동료 거지한테 그 장소를 가르쳐주지 않고 독식하려는 심보밖에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