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설교

휴거되지 않을까 결코 염려하지 말라. (마24:40-43)

새벽지기1 2017. 4. 8. 09:06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0-43)


불필요한 삽입구(?)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감람산 강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지난주까지 살펴본 종말의 시기와 징조에 대한 가르침이 전반이다. 대규모의 배도가 있고 마지막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대환난을 일으키지만 하나님이 그 기간을 감하여 줄 것이다. 그 후에 예수님이 큰 영광중에 재림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상에 완성시킬 것이다. 신자들로선 종말의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징조들을 잘 살피면 그 시기는 짐작할 수 있다.  

오늘부터 살펴볼 후반부에서 주님은 종말에 대해 신자가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를 몇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 설명한 것에 근거하여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뜻하듯이 사실은 후반은 42절부터 시작된다. 내용적으로 전반부에 속하는 40-41절을 함께 살펴보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제자들이 종말의 시기와 징조에 대해 궁금해 하자 예수님은 충분히 납득이 되도록 설명해주었다. 특별히 시기에 대해선 성자 하나님이신 당신도 모른다고 했다. 노아 홍수로 모두가 멸망당할 때까지 아무도 몰랐던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면 문맥의 흐름 상 곧바로 42절의 “깨어 있으라.”로 이어져야 자연스러울 것 같다. 언뜻 보면 40-41절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족 같은 삽입구로 보인다.

예수님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천지는 없어져도 당신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고 직접 확인까지 했다.(35절)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반드시 그런 표현과 그런 순서대로 해야만 했다. 이 두 절은 절대 군더더기가 아니다. 감람산 강화의 전반과 후반을 연결시키는 결정적인 고리 역할을 한다. 사실상 전반부의 최종 결론에 해당된다.

따라서 예수님이 후반에 가르칠 신자가 종말을 대하는 믿음과 자세는 이 두 절에서 강조하는 내용에 기초해야 한다. 예수님의 종말을 대비하는 자세에 대한 첫 말씀이 무엇인가? “깨어 있으라.” 그렇게 깨어 있어야 할 이유와 근거가 바로 40-41절이다. 나아가 깨어 있는 모습 자체가 어떠해야 할지까지 설명해주는 구절이다.

노아의 가장 큰 절망

신자는 자기 세대의 영적조류를 민감하게 관찰하여 성경말씀과 대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노아 때에 노아 외에는 다 멸망당하기까지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엄밀히 말해 노아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계시를 받고 믿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을 뿐 언제 홍수가 임할지 전혀 몰랐다. 종말을 대비해 깨어 있는 것이 그 징조와 시기를 분별해야 한다는 의미로만 해석 적용하면 많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노아는 120년이나 묵묵히 방주를 지었다.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굳건하고 신실한 믿음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다. 다른 한편 자포자기의 심정도 수시로 들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내가 혹시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과 실망이 닥칠 때마다 기도하면 성령께서 다시 확신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여태껏 보지 못한 굵은 빗방울이 세차게 뿌려질 때 비로소 심판의 날이 닥쳤음을 알았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방주가 완성되자마자 홍수가 내린 것이 아니다. 방주를 다 짓고 모든 동물을 암수 한 쌍씩 들여보내고도 7일이 지나서야 비가 내렸다.(창7:10) 동물이 방주에 들어가는 중에나 다 들어간 후에 비가 올 징조가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저같이 겁이 많은 자라면 “아차! 노아의 말이 정말일지도 모르겠다. 밑져야 본전이니까!”라며 비겁하게 사람들 모르게 코끼리 뒤에 살짝 숨어들어갔을 것이다.  

틀림없이 많은 사람이 모여 동물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문이 닫힌 후에도 며칠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되어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햇볕만 쨍쨍하니까 역사상 최고의 코미디를 보았다고 크게 조롱하며 돌아갔을 것이다. 노아와 그 가족만 완전 바보 내지 미친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노아 스스로도 최고 큰 실망에 빠져 있을 때에 홍수가 닥쳤을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도 동일한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신자들이 세상에서 완전히 바보가 되어 있을 때에 주님은 불시에 오실 것이다.

종말주의자와 동일한 신자들

신자들이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당부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자꾸 시기와 징조에만 초점을 맞추려 든다. 그래서 종말에 대한 징조가 어느 정도 분별되면 어떻게 적용하는가? 마치 말기 암 환자가 인생을 정리하는 모습처럼 행동한다. 주위에 잘못하고 상처를 준 사람을 찾아가 사죄하고 반면에 자기에게 그렇게 한 사람은 용서해준다. 자식들에게도 미리 종말에 대해 대비하라고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에 전무케 한다. 완전히 세상을 이별하는 심정으로 목욕재계하며 종말을 기다린다.

이는 엄밀히 말해 끝까지 게으르고 완악한 인간본성의 찌끼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나아가 종말주의자들과 사실상 같은 모습이다. 종말시기를 단정 짓고 모든 것을 정리하여 따로 공동체 생활을 하는 그들과는 다르다고 반발할 계제가 아니다. 우리는 시기에 대한 정답을 얻지 못한다는 원리만 지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최대한 근사치를 얻어서 여차하면 곧바로 그들처럼 현재의 삶을 정리할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다.

종말과 재림에 대해 강단의 설교는 또 어떠한가? 인생살이의 덧없음과 허무함만 강조한다. 특별히 재물은 사악하며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몰아붙인다. 죄로 타락한 세상이 인간에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애꿎은 돈 때문이라고 한다. 누구라도 나에게 종말의 시기에 대해 설득력 있는 판정을 해주길 바란다.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럴싸한 계시를 받길 원하고 그렇게 되면 언제든 종말주의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재산을 연명할 수 있는 최소한만 남기고 모든 것을 정리해 교회에 헌납한다. 그리고 멀리 오지로 선교를 떠나면서 땅 끝에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하겠다고 한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신자라면 선교에 열심을 내야하고 아주 선한 일이다. 그러나 종말을 대비하는 자세가 이 땅의 삶과 인간관계 모두와 당장 이별하는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자더러 종말이 언제든 닥칠 수 있다는 믿음에 입각하여 영적으로 분발하여 천국을 소망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도 세상을 완전히 정리해선 안 된다. 예수님의 깨어 있으라는 당부도 그런 뜻이 아니다. 다시 40-41절을 보라. 완전히 평상시의 모습이다. 밭을 갈고 맷돌을 돌리고 있다. 이 땅의 삶을 포기는커녕 축소하는 모습도 전혀 없다.  

휴거는 없다(?).

이 구절을 휴거를 설명하는 뜻으로 이해할 근거도 없다. 휴거(Rapture)는 성경에 없는 용어로 일부 교파에서 본문과 데살로니가전서 4:17의 말씀과 연결 해석하여 따로 지어낸 단어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에 이미 죽은 신자들도 부활하여 그 때까지 남아 있던 신자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리어져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럼으로써 신자로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대환난을 피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 말씀을 하게 된 계기를 잘 살펴야 한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주님이 모든 종말의 징조가 이 세대 안에 다 이룰 것이며, 또 너희 중에 인자가 영광중에 다시 오는 것을 볼 자도 있다고 하신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자기들 세대 안에 주님이 다시 오시면 이미 죽은 자는 주님을 보지 못할 것 아닌가 염려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자고 있는 자나 살아 있는 자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데 아무 차별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 그 문맥의 주제다. 데살로니가 전서를 바울이 가장 먼저 저작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심지어 바울 자신도 그렇게 오해했다. 초기저작인 고린도전서에서 여자들더러 종말이 임박했으니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권면했다. 그러다 후기서신에 가면 천국에 예비 된 면류관을 소망하며 살라고 그 논조가 바뀌었다. 지난주에 인용한대로 베드로도 주님의 재림이 더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무도 멸망치 않게 하려고 오래 참으신다고 했다. 사실상 당장 임박한 재림이 없음을 시인하고 종말이 언제든 있을 수 있으니 대비하라고 깨우쳐 준 것이다.  

신자들만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토록 하여 지상 환난을 피하게 해준다는 것은 성경이 일관되게 밝히는 주님의 속성과 어긋난다. 지상에서 무자비하게 진행되는 참혹한 살육전을 공중에서 구경만 할 정도로 냉혹하고 잔인한 주님이 절대 아니다. 대환난의 날을 감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육체가 없기에 택한 신자를 위해 그 기간을 감해 준다고 했다.(마24:22) 택한 자들도 환난 기간 중에 지상에서 고초를 당한다는 뜻이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보낸 주님의 편지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내용도 끝까지 견디라는 것이지 않는가?

공중으로 들리어져 구름 중에 주님을 영접한다는 말씀도 주님이 큰 영광중에 강림하시고 신자들이 그에 참여하는 장엄한 모습을 상징하는 그림 언어다.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본문의 데려감을 당한다는 것도 비유이긴 해도 공중에 들린다고 추정할 근거는 없다.  데려감을 당한 자가 구원을 받은 것이지 영벌을 받은 것인지 분명한 설명이 없다. 주님이 이 땅을 새 땅으로 바꾸기에 오히려 남은 자가 구원 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종말 예언의 최종결론

종말의 시기는 알 수 없다. 배도와 환난의 징조 또한 매 세대마다 항상 있어 왔다. 예수님이 이 세대 안에 다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어느 세대에도 종말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지금 종말에 대해서 신자들이 꼭 기억해주길 바라는 것은 본문 40-41절이 강조하는 내용 오직 하나다. 둘 중 한 사람이 홀연히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비유대로 종말에는 회개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제 2의 기회가 없이 확연히 둘로 나뉜다는 것이다.  

따라서 깨어 있으라는 뜻도 종말의 징조를 분별하여 그 시기를 짐작하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그 때에 내 믿음의 상태를 더 굳건히 하고 도덕적 종교적으로 평소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경건하고 심오해지라는 것이 아니다. 종말이 다가올수록 믿음도 비례해서 강해지라는 뜻이 아니다.

주님께서 모든 세대에 다시 올 수 있기에 더 강하게 깨어 있어야 할 특정 세대나 시기가 따로 없다. 또 회개할 제 2의 기회가 없기에 데려감을 당할 자, 남겨둠을 당할 자는 이미 확연히 정해져 있다. 자기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 확신하여서 그곳에 거(居)하는 일만 남았다. 꾸준하게 구원 받은 자답게 살고 있느냐가 관건일 뿐이다.

밭을 경작하는 자는 남자다. 맷돌을 가는 자는 여자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든 인류를 통칭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오직 두 종류로 이미 나눠져 있다는 것이다. 또 함께 밭을 갈고 맷돌을 돌리려면 가족, 친척, 친구, 가까운 이웃이어야 한다. 인간 사회에 통용되는 권력, 재물, 지성, 명예는 물론 심지어 항상 가깝게 지내며 서로 돕고 사랑하는 사이라도 심판과 구원에 단 한 치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쳇말로 마누라 치맛자락만 잡고 있으면 천국 갈 수 있겠지 기대하거나,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교회에 나간다는 것만큼 헛되고 헛된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구원과 심판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의로 덧입혀졌느냐 아니냐만 그 기준이 된다. 예수님의 보혈의 필터를 통과했느냐 아니냐만 보신다. 하나님은 그 외의 어떤 것도 전혀 고려하지 않으신다. 이는 참으로 심각하고 두려운 말씀이다. 종말의 때에 회개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도 더 이상 베풀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족속이 통곡하게 되는 것이다.(마24:30) 노아의 때에 사람들이 지상 최대의 코미디라고 비웃었지만 사실은 역사상 최고의 비극이 된다. 무엇보다 그들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반면에 끝까지 견딘 신자는 하늘로부터 천사들의 장엄한 나팔 소리가 들리게 된다. 예수님의 찬란한 영광에 동참한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져 신령한 육신으로 변모된다. 그곳에선 노아 때의 사람들과 달리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다. 질투 시기는 당연히 없어지고 가까운 사람이 지옥으로 데려감을 당한 사실에 대해 더 이상 슬픔과 연민을 느낄 수 없다. 주님의 품 안에서 진짜로 완전한 사랑으로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하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종말에는 더더욱 밭을 갈라.

예수님이 지금 종말을 대비하는 자세로 처음으로 즉,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말씀은 “깨어 있으라.”다. 밭을 갈고 맷돌을 돌리고 있어야, 그것도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그래야 한다. 노아는 마지막 7일 간 방주 안에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방주를 지을 때보다 더 바쁘게 일을 했을 것이다. 그 수많은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며 돌보아야 했다. 본문처럼 밭을 갈고 맷돌을 갈고 있었다.

예수 안에 있는 신자는 이미 구원의 방주에 타고 있다. 언제 종말이 닥쳐도 두려울 것 하나 없다. 더 이상 심판이 없다. 알기 쉽게 말해 하나님께 따로 더 잘 보일 필요가 없다. 종말을 더 경건하게 대비할 이유도 없다.

유독 종말과 재림을 강조하는 신자일수록 평소에 신자답지 못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이 이미 보장되어 있음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된 것이다. 예수님이 막상 다시 올 때에 평소의 내 모습을 보이기 부끄러운 것이다. 물론 우리 중에 부끄럽지 않을 자 단 한 명도 없다. 그런 점을 안타깝게 여기며 조금이라도 나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님 안에서 진정으로 겸손한 것과 실제로 부족하기만 한 것은 전혀 다르다.

외출한 선생의 비유를 다시 들면, 선생이 내준 숙제를 다 풀고 자율학습을 성실히 하고 있는 학생은 선생이 언제 돌아와도 전혀 두렵지 않다. 나아가 언제 돌아올지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어차피 7교시 후 하교시간은 정해져 있고 그 때에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신자도 자신에게 천국의 영광과 돌아갈 본향이 이미 보장 되어 있음을 알기에 종말이 언제일지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신자답게 살고 있으면 그만이다.  

집주인이 도적이 언제 올지 미리 안다면 도적이 뚫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43절) 이스라엘은 흙으로 만든 집이라 도적이 얇고 부실한 벽을 뚫고 침입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언제 어디로 침입할지 미리 알려주는 바보 같은 도적은 없다. 주인은 언제 올지 결코 알 수 없다. 예수님의 43절의 말씀이 언뜻 주인이 미리 그 순간을 알고 대비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라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 반대의 뜻이다.

그럼 주인이 그런 도적을 대비하는 방법은 둘 뿐이다. 첫째는 밤새도록 자지 않고 집 주위를 돌며 경비를 서거나, 집안에 불을 훤히 켜놓고 철야 하듯이 주인이 자지 않고 있음을 도적이 보고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종말을 대비하는 자가 누구인가? 바로 산 속에 자기들만의 방주를 지어놓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종말주의자들이다. 또 앞에서 말했듯이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서 징조를 분별하다 그 시기의 최대 근사치를 얻기만 하면 곧바로 세상을 다 정리하고 교회에 모여 기도와 말씀으로 지내려는 신자들이다. 작금 종말에 대비해 깨어 있으라는 의미를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이다.    

둘째 방안은 도적이 뚫을 만한 얇고 부실한 벽이 없도록 집 자체를 튼튼히 만드는 것이다. 모든 벽을 두껍고도 튼튼하게 만들면 된다. 계속 밤에 깨어 있지 않아도 된다. 평소 방식대로 먹고 일하다 안심하고 누워 자면 된다. 예수님의 품 안에서 신자가 구원을 얻었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세상에서 바보가 되라.

종말에 대비해 깨어 있으라고 하면 신자들은 가장 먼저 요한계시록 세미나부터 참석하려 든다. 여전히 종말의 징조와 시기에 대해 더 정확히 알아서 미리 내 삶에 적용하겠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계시록을 더 깊이 안다고 해서 더 잘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평소에 집을 튼튼히 만들라고 한다.

계시록은 신자에게 겁주는 책이 아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적이고도 완전한 승리를 강조하는 책이다. 예수님을 찬양하는 책이다. 따라서 평소에 예수님을 진정으로 감사, 찬양, 경배하며 그분의 가르침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계시록을 가장 잘 해석하여 적용하는 모습이다. 거기다 계시록의 모든 예언들은 사전에 제대로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전히 실현된 후에야 비로소 어떤 내용인지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신자는 천국과 지옥을 갔다 온 간증집회에 몰려다닐 필요도 없다. 지옥 형벌이 두려워서 믿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천국 보상만 바라고 믿는 믿음도 온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바울은 삼층천까지 올라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을 보고 비밀의 계시를 받았다. 그럼에도 오직 십자가 복음 외에는 가르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런 것을 섣불리 알면 시험에 빠지거나 영적으로 아주 교만해지거나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이곳에서 깨어있지 못하면 종말의 징조가 짙어져도 깨어있지 못한다. 깨어 있는 것이 교회 중심 혹은 기독교 종교 중심을 뜻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 예수 중심으로 사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신자가 깨어 있는 것은 반드시 두 가지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

우선 나는 벌써 예수 안에 들어와 있기에 이미 깨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 깨어있지 못하는 주위의 미혹한 영혼들을 깨우는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들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죽었던 생명을 살려내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통해 십자가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전하고 있어야 한다.

또 그 이전에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내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부터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한다. 따로 공동체를 새롭게 조직해서 종말에 대해 가르치고 휴거를 대비할 필요가 없다. 자기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서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고 그분의 사랑과 권능을 받아 누리면 된다.

깨어있다는 것은 자신이 이미 휴거된 신분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휴거만 간절히 기다리거나, 혹시 내가 휴거되지 않으면 어쩌지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미 구원의 방주를 타고 있다. 신자는 그래서 알기 쉽게 말해 노아처럼 세상에서 바보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호사하고 풍성한 것들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또 그런 것들로 사람들을 우대하지 않기에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조롱과 멸시를 받고 있어야 한다.  

신자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신자의 속에는 우주의 주인이자 참 생명 되시는 예수님이 실제로 보배로 임재해 있다. 신자가 하기에 따라 그 빛은 밖으로 비춰 나온다. 일단 비춰 나오는 그 빛을 신자가 도무지 막을 수 없다. 그 빛을 보는 자는 그분의 영광 앞에 무릎 꿇게 된다. 신자가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자신을 죽이고 남을 살리는 일을 할 때에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난다. 당신의 영광은 그분께서 세우시고야 만다. 신자 또한 겨우 나 같은 자가 이런 큰 영광을 맛보고 주위에 실현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쓰임 받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최고의 영광으로 여기게 된다. 그것이 바로 신자가 종말을 대비해서 깨어 있다는 올바른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