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요한 1서 2:12-17)

새벽지기1 2017. 5. 22. 12:09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이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리라』(요일 2:15)

사도 요한의 편지의 일절입니다. 아마 에베소에서 이 편지를 쓴 듯합니다.「소자들아」혹은 「자녀들아」라고 말한 것을 보아서 연세가 높은 노년 시대에 쓴 것이 또한 확실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본래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한 어부이었지마는 일찍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의 부름을 받아서 열두 제자 중에 하나가 되었고 또한 더욱이 열두 제자들 가운데도 가장 총애를 받는 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일생을 다 바쳐 일생의 고락을 다 겪은 노사도인 요한 은 그 때에 아마 오직 홀로 남은 열두 사도 가운데 한 분으로서 자기의 사랑하는 믿음의 자녀들에게 여러 가지로 권면하여 내려가다가『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 세상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을 떠나 타락된 세상, 타락된 인간, 타락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 사상, 생활, 문화, 육신과 물질을 중심 하는 보이는 세계의 총체를 의미한 줄 생각합니다. 왜 이와 같은 세상을 사도 요한이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이유를 이 아래에서 설명합니다.


첫째는『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사랑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물리학에 소위『불가입성의 원리』란 원칙에 있지 않습니까? 한 공간을 같은 시간에 두 물체가 점령할 수 없다는 원리올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병에 물을 넣으면 물이 들어가기 전에 먼저 그 속에 있던 공기가 나와야 물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과 공기가 동시에 그 병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세상도 사랑하고 또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에 만일 누가『나는 이 두 것을 같이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것뿐입니다. 전에 유다가 혹 그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나는 세상도 사랑하고 예수님도 사랑하겠다』는 그릇된 생각을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성지 구경을 하는 중에 안내자가 어떤 언덕에 우리들을 인도하더니 그가 하는 말이『바로 저 곳이 전설에 의지하면 유다가 목매어 자살한 곳이라고 합니다.』라고 설명하여 주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유다 는 갈 곳으로 갔느니라 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일시 사도 바울을 따라 다니며 도와주던 데마라고 하는 청년도 혹 이렇게 생각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결국 마지막으로 기록된 것은『데마 는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고』하고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사랑할 수 없다』고 하셨고 또한『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을 보면『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 그런 까닭에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대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말로 기록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첫째로 육신의 정욕에 속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기초로 하는 부패한 욕망과 그 생활 - 음란, 부정, 방탕, 향락주의, 소위 세속주의 - 혹은 육을 중심으로 하는 모든 사상, 물질의 실재만 인정하는 유물주의, 보이는 자연계만 인정하는 자연주의, 또한 이런 사상을 기초로 하는 정치, 경제, 사회, 사상과 또한 이에 따르는 온갖 불의와 횡포 등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육신의 정욕이라는 말은 육을 기초로 하는 모든 문화, 소위 영어로 말하면「센세이셔널 컬쳐」(Sensational Culture)인데 우리말로 감각적 문화라 할까요. 그리고 혹은「싸이언티즘」(Scientism)즉 과학으로만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하는 그릇된 사상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안목의 자랑인데 이것은 눈의 만족만 일삼는 사상과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보이려고 하는 외관 주의, 그러니까 자연히 가식, 외식, 허식, 허영을 일삼는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를 만족시키려고 하는 타락되고 부패한 예술 - 혹은 그림, 혹은 조각, 혹은 연극, 활동사진, 건축, 의복, 화장에 이르기까지 안목의 정욕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도 다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남에게 보이려는 교만한 생각과 그 모든 추잡한 표현, 돈의 자랑, 학식의 자랑, 권세의 자랑, 민족의 자랑, 국가의 자랑, 주택의 자랑, 심지어 의복, 얼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자랑합니다. 이것들은 다 세상으로 좇아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 좇아 온 까닭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것들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노 사도는 계속해서 기록하시기를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중요한 이유가 한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지나갑니다. 잠간입니다. 강물과 같이 흘러갑니다. 새와 같이 날아갑니다. 꽃과 같이 떨어집니다.
이번에 가나는 다녀오는 길에, 한번 더 옛날 로마 제국의 주임이었다고 하는 포럼(Forum)이라는 곳에 가서 그 옛터에 한번 더 서서 묵묵히 옛날 로마를 추억하여 보았습니다. 옛날은 그 곳에 주피터의 신당을 비롯해서 바서리카라고 하는 재판소를 비롯해서 또한 국회의사당 등 당시 전 로마 제국에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가서 서 보면 무너진 돌담, 깨어진 석상, 혹은 부러진 다리, 또는 부러진 칼, 무너진 계단, 다만 이곳 저 곳에 외로이 우뚝 지금까지 남아서 서 있는 대리석 기둥만이 옛날의 잔재를 조금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곳에 가만히 서서 묵상할 때에 온 천하를 호령하는 시저나 어거스트 대제의 옛날 로마의 영광은 어디로 갔는가 생각되었습니다. 그 모든 영광은 성경 말씀대로 지나갔습니다. 물과 같이 흘러갔습니다. 해와 같이 날아갔습니다. 꽃과 같이 떨어졌습니다. 


또한 이번에 헬라에도 갔었는데 그 곳에 가서 아덴의 중심지가 되는 아크로포리스라고 하는 아덴의 모든 문화와 정치의 상징이 되는 그 두던 위에, 그 날 비가 와서 비를 맞으면서 올라가 보았습니다. 사방에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지었던 폐허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아직도 소위 판데안이라고 하는 신전의 일부이었던 기둥들이 서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비록 2천 년의 풍우를 지니고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 곳에 가만히 서서 옛날 문학과 예술의 본향이라고 하던 가장 화려하고 가장 찬란하다고 하던 패래크래스의 옛 아덴은 오늘 어디로 갔는가? 가만히 돌이켜 생각할 때에 마음 가운데 처량한 느낌을 금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 때에 자연히 이사야의 말씀이 이 사람의 염두에 들어왔습니다.『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있느니라.』 저는 그때에 또한 오늘 읽은 이 본문의 말씀도 마음 가운데 생각났습니다.『이 세상도 가고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과 같이 나자갑니다. 세상과 같이 흘러갑니다. 세상과 같이 날아갑니다. 세상과 같이 낡아 썩어지고 없어집니다.
우주의 영원한 실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고, 모든 다른 것은 그림자뿐입니다. 인간 생활의 영원한 부분은 오직 실제이신 이의 뜻을 행하는데 있다는 것을 통절(痛切)히 느끼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라고 사도 요한 은 우리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설교를 들으실 때에 여러분들 중에 오해하는 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교훈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아주 이 세상의 국가나 사회를 돌아보지 말고 무관심하게 내어버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요새 말로 소위 세상 도피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수도사들처럼 가정도 버리고, 사회도 버리고, 나라도 버리고, 오직 깊은 산골에 들어가 어떤 굴속에 들어가서 일생을 지내라고 하는 그 말이 아닙니다. 요새 어떤 사람처럼 소위 입신이라고 해서 무아몽(無我夢) 중에서 세상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믿으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날 소위 어떤 사람처럼 천년 세계에 들어간다고 해서 가장집물(家藏什物)을 다 팔아다 넣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모여 앉아서 듣는 말대로 하루에 보리 밥 세끼만 먹고 있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님의 기도를 들어보세요. 요한 복음 17장 15절 이하에 있는 예수님의 기도의 몇 절을 제가 읽을 때에 분명히 들어보세요.『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라고 하셨습니다.「저희」는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 님께서 아버지께 구하신 것은 이 믿는 자들을 세상에서 다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고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기를 위하여 빌었습니다. 악한 세상에서 데려가라는 말이 아니고 악한 세상에 있으면서도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여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한 것이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믿는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이 세상은 악하지마는 이 세상에 가서 이런 악한 세상 가운데서라도 거룩함을 얻어서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사도 요한 의 교훈도 같은 교훈이올시다. 이 세상을 떠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그런즉 이 세상에 있으나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세상 가운데서 거룩한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정체에 무관심 하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는 정치가는 되지 말아야 됩니다.
정치가는 정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정치가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공무원이 되지 맙시다. 관청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공무원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군인 때문에 국가가 염려됩니다. 군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군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경관이 되지 말고 경찰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사는 경관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과학자가 되지 말고 세상 가운데서 과학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과학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교육자가 되지 말고, 사업가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교육가, 행하는 학생, 행하는 실업가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가정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현모양처 주부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장로, 세상을 사랑하는 집사, 세상을 사랑하는 교인들 때문에 오늘날 교회는 여러 가지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소위 속화된 목사, 속화된 장로, 속회된 집사, 속화된 교인, 속회된 교회 이것이 교회입니까?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내 가슴을 더듬어 내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세상을 아직도 속으로 사랑하는가? 스스로 시험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세상이 그 속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가득해서 교회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참으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세상을 사랑하는가? 몇 가지로 시험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시간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시간은 생명과 같다고 하는 것인데 이 가장 귀하다고 하는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는가? 세상을 위해 바치는가? 예를 들어 말하면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은 하루 24시간 가운데 가장 귀한 시간인데 이 아침에 일어나는 첫 시간을 내가 하나님께 바치는가. 세상을 위해 바치는가 시험해 봅시다.
그리고 물질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이 물질을 우리가 다 필요하게 여기는데 이 물질로써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쓰고 있는지 시험해 봅시다.
옛날부터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농사를 하되 첫 이삭은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제일 먼저 십일조로써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오늘날 미국 교회의 소식을 들으니까 십일조 운동이 굉장해서 미국 교회 가운데 십일조 하는 사람이 많아 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에 대해서 당신네 교회에 십일조 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라고 물어보면 저는 부끄러워서 대답을 못 합니다. 사실 모릅니다. 영어 속담가운데「돈이 말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암만 말로 떠들지마는 사람이 돈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 있는지 안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온 세계의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다 십일조를 드리는데 우리 한국 교회 교인만은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번 새해부터 십일조를 작정하신 분들은 몇 명이나 되십니까?
그리고 또한 정성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이 교회에 대해서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얼마마한 정성이 있습니까? 주의 집에 대하여 내가 얼마나 염려합니까? 교회의 살림을 내 살림처럼 염려합니까? 주의 집을 내 집처럼 염려합니까?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내가 얼마만한 정성이 있으며 얼마마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각자가 시험해 보십시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시험해 보는 방식이 많이 있는 줄 압니다.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람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토록 거하느니라』말씀 했습니다. (1958년 2월 9일)